충성된 자를 사랑하심
2020년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설교기간 | 2020년 01월 13일 – 01월 15일
편집내용 | 녹취 원본
출 력 일 | 2020년 7월 24일
목 차
1. 충성된 자를 대면하심(민 12:6-8상) 2020.01.13. 새해말씀사경회 새벽1 1
2. 충성된 자와 함께하심(시 101:6) 2020.01.14. 새해말씀사경회 새벽2 5
3. 충성된 자에게 상 주심(마 25:22-23) 2020.01.15. 새해말씀사경회 새벽3 9
충성된 자를 사랑하심 (2020.01.13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1)
1. 충성된 자를 대면하심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거늘”(민 12:6-8상)
녹취자 : 김세나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습니다. 이 당시는 묵시적으로 중혼이 허락되던 시대였으니까, 그것이 당시 문맥에서 보면 큰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이 구스 여자는 아마도 흑인이었을 것이라 학자들은 봅니다. 그렇게 된 상황에서 이제까지 모세를 돕던 미리암과 아론, 두 사람은 모두 한 형제들이었습니다. 긴 세월을 이 모세를 도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탈출하게 하였는데 이 두 사람이 모세를 비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는가? 우리와도 말씀하지 않으셨던가? 이러면서 모세의 리더십에 대하여 반기를 든 것입니다. 모세 입장에서 보면 매우 기분 나쁜 일이었고 매우 어려운 일을 당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니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사람도 한 성깔 하는 인물인데 많은 시련과 그리고 광야의 고난의 시기를 지나면서 이제 그 인격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평화로운 인격이 되었는가 보여줍니다. 미리암과 아론, 자기에게 반기를 들었던 이 사람들이 올바르기 때문에 온유하였던 것이 아니라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고 잘못된 일이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는 온유한 품성을 유지하면서 이 일을 처리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모세가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과 얼마나 놀라운 평화를 누리며 살았는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에게 근거 없는 비난을 받거나 혹은 무례한 행동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가장 좋은 방법은 상대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렇게 마음이 격동된 사람은 말로써 설득해서 이성적인 그 무엇을 갖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잠시 무례한 일을 겪거나 경우에 어긋난 일을 겪었다고 해서 그때마다 우리는 마치 전사가 된 것처럼 모든 사람과 싸움질을 하면서 그렇게 살 수는 없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이 터졌습니다. 모세의 지도력에 도전하면서 우리나 모세나 동급이다, 하나님이 왜 모세에게만 말씀하셨는가? 우리에게도 말씀하지 않았는가. 그러니 모세가 비록 지도자의 위치에 있다고 하더라도 별것 아니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모세의 입장에 있어서는 아주 화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온유한 모습으로, 다른 모든 사람보다 뛰어난 평화로움으로 이 사태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계기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모세와 아론과 미라암, 세 사람은 회막으로 나아오라고 하셨습니다. 이 회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이는 곳이었고, 하나님 앞에 모여 기도하는 장소이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아론과 미리암을) 그 앞으로 나아오라고 부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의 요지는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였다”입니다. 미리암과 아론 모두 그러한 점에서 선지자의 역할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7절을 덧붙이십니다.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거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미리암이나 아론에게 환상으로 하나님을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혹은 꿈으로 그에게 당신의 뜻을 전달해 주기도 하셨지만, 모세는 그들과는 완전히 수준이 다른 그러한 하나님과의 교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를(와는)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 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항상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에 의해서 환상으로 주어지는 예언, 혹은 꿈으로 전달되는 하나님의 뜻은 애매모호해서 해석을 필요로 하였습니다. 그것을 만약에 제대로 해석하면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통로가 되지만 제대로 전달(해석)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통로가 못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세와는 교통의 격이 달랐습니다.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였으니 모세에게 주시는 계시에는 해석이 필요 없을 정도의 분명함이 있었습니다. 더욱이 여호와의 형상을 보기까지 하였다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정확하게 여호와의 형상을 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보이는 형체가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하나님을 알되 다른 모든 사람들의 아는 것과는 다른 그러한 친밀한 지식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결정적으로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선지자들에게는 꿈과 환상을 보여 주었지만 모세와는 당신이 대면하여 말한 사이라고 하였습니다. 대면하여 말한다는 것은 얼굴과 얼굴을 마주대고 말하는 것인데 하나님에게 얼굴이 있을 리 없으니 이것은 하나님과의 말할 수 없는 친밀함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모세에게 전달되고 그 뜻이 모세에게 이해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왜 많은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는데 그들에게 하나님이 무엇인가 말씀하실 때에는 왜 꿈과 환상으로 가르쳐 주시고, 모세와는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신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겠습니까? 그것에 대해서 7절에 아주 간결하게 나옵니다.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 눈길을 끄는 것은 “충성”이라는 단어입니다. 모세가 지성적으로 아주 뛰어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이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애굽에서 모든 학문에 능하였기 때문에 하나님도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모세가 하나님과 이렇게 친밀한 교제를 나누며 계시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외적인 자격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그 마음과 생활에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충성이었습니다.
충성은 한 나라에 충성한다고 하였을 때 그 나라를 다스리는 왕에 대한 사랑과 공경심이 아주 극도로 넘쳐서 자기를 버려서라도 그 나라가 올바르고 부강하게 되어야 (한다는) 일념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충성의 동기는 당연히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삶으로 나타나고 하나님이 맡기신 직무에 대해서도 나타난 것이 충성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이 모세를 보실 때에는 그냥 잠시 있다 사라지는 지도자이기 이전에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였고, 공경하는 자였고, 그분을 위해 충성을 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미리암이나 아론이나 다른 사람들은 놀았습니까? 그랬을 리 있겠습니까? 많은 고난을 함께 겪으며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탈출시키는데 함께 협력하였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은 모두 게으르고 악하였고 모세만 충성스러웠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섬겼지만 모세의 중심이 하나님에게 열납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섬기되 사람을 보고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고 섬긴 것이었습니다. 동기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최선을 다해서 충성하였던 것입니다. 자신을 버려서라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기를 바라던 사람이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섬기면서 많은 시련을 만날 수도 있고 혹은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충성스러운 사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사람 때문에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그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누가 비난 받는 것이 좋은 사람이 있겠으며 모욕을 받는 것을 칭찬 받는 것보다 기뻐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좋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고 사람들이 자기에게 좋은 이야기를 하면 자기를 인정해 주는 것이라 생각하고 좋아하지만 비난하고 욕할 때에는 한편으로는 그 사람이 미운 생각도 들고 한편으로는 ‘저 사람이 나에 대해서 정말 몰라주는 구나’ 하는 섭섭함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충성스러운 사람은 그러한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자기를 세우셨다는 사실을 믿고 그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 때문에 충성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모세는 하나님 앞에 충성된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잠깐 동안 해프닝이 있었지만 하나님이 이 일을 중대하게 다루십니다. 하나님은 대적하는 미리암과 아론을 향해 진노하셨고, 하나님이 진노하고 떠나시자 그들은 하얗게 변하는 나병에 걸렸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겪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큰 진노를 사서 벌을 받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충격적인 이 일이 있고 나서야 교만하였던 아론은 모세에게 “내 주여 우리가 어리석은 일을 하여 죄를 지었으나 청하건데 그 벌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소서”라고 간절히 용서를 빌었습니다. 성경은 표현하기를 그가 살이 반이나 썩어 모태로부터 죽어서 나온 자 같이 되지 않게 해 달라고 빌었다고 하니 그때 나병에 든 상황이 얼마나 심각하였는지를 보여줍니다.
결국 이 사건은 하나님이 모세의 편을 들어주심으로 종료됩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편들어 주신 이유는 오직 하나였습니다.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충성. 충성스러운 사람들과 하나님이 당신의 친밀함을 보여주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많은 일을 겪으면서도 하나님 앞에 변함없이 충성스러운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충성스러운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습니다. 충성스러운 사람들이 기도의 세계를 열어 주시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충성스러운 사람들이 결국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사면을 두루 살피시며 충성스러운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충성스럽게 살면서 이루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뜻을 보며 안타까워하며 매달리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기도의 응답을 내리시고 충성스러운 사람들을 통해서 될 수 없었던 일들을 이루어지도록 만드십니다.
또 하나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그는 내 온 집에”라고 하신 표현입니다. 하나님을 믿었고, 교회를 섬기지만 그냥 자기 좋아하는 일에만 관심을 갖고 하나님의 집 전체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도 그랬고 그때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집에 한두 가지 일에 충성한 것이 아니라 온 집에 충성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집에 모든 것이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는 통로가 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작은 일부터 큰 일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집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마음을 들였고(쏟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온 집에 충성하였던 것입니다.
요즘처럼 이기적인 생각을 가지고 교회로부터 혜택을 받기는 원하지만 자신은 교회를 위해서 섬기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때에 우리에게 주는 아주 큰 경고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 당신에게 온전히 충성하는 사람들에게 당신 자신의 친밀함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집에 온 마음을 다해 충성하는 사람들의 편을 들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모세처럼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충성스러운 삶을 살아서 하나님이 친밀히 여겨 주시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에 감동이 되고,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섬길 때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많은 열매를 걷게 해 주시기를(거둘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결국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나의 온 집에 충성하였음이라.” 인정을 받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 충성된 자와 함께하심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살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따르리로다”(시 101:6)
녹취자 : 김세나
아마도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이 시를 쓴 것 같습니다. 그는 어찌하든지 자신의 통치를 통해서 하나님의 인자와 공의가 널리 실현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가장 완전한 길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를 고민하면서 노래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하는 나라를 만들어 가기 위해서 통치자로서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될 것인가 노래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배교자들과 사악한 자들과 이웃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들, 즉 자신이 만들고자 하는 인자와 정의가 가득한 나라에 대치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을 멀리하기로 다짐합니다. 그러면서 어떤 사람과 함께 이 나라를 세워갈 것인가 오늘 6절에서 노래합니다.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살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따르리로다.”라고 노래합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충성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이 자기를 향해 바라시는 마음이기도 하였습니다. 자신은 이 땅을 다스려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힘쓰고 있는데(있고) 하나님은 그러한 나라를 만들 영감을 말씀을 통해서 주셨습니다. 즉, (다윗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깨달았기 때문에 자기가 통치하는 이 나라가 어떠한 사회가 되어야 할지 알았던 것을 뜻합니다. 당연히 한 나라를 이루어 가기 위해서는 모든 백성을 사랑하고 돌봐야 하지만 일을 하는 것은(하기 위해서는) 충성된 자를 살펴서 일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고자 하는 사람들,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이스라엘을 사랑하여 충성할 수 있는 사람들을 원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왕국에 충성스러운 사람인 동시에 하나님께 충성스러운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윗이 이 두 가지에 있어서 서로 모순된 삶을 살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그리고) 위대한 이스라엘의 역사에 하나님이 함께 하셨던 사람으로 기록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충성하는 그 마음으로 자신의 그 왕국을 하나님의 집인 것처럼 충성스럽게 다스렸습니다.
(충성된) 사람과 시인은 함께 살게 하리라고 말합니다. 신하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은 왕이 주는 얼마 안 되는 돈이나 토지가 아닙니다. 그의 총애를 받고 그와 함께 사는 처지에 이르게 되는 것, 그것은 굉장한 것입니다. 왕이 자신을 신하로 보지 않고 한 가족으로 여겨 주는 것, 그래서 왕이 자신을 단순히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가족처럼 생각하고 함께 살아 주는 것, 이것은 신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영광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로 당신의 온 집에 충성스럽게 일하는 이 다윗을 당신과 함께 살게 하시는 영적인 은혜를 주셨습니다. (다윗은) 어디에 가든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의 충성된 마음을 헤아리셔서 그와 특별히 함께 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리고 자신을 돌보지 않으며 충성스럽게 살아 마음에 은혜가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간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과 어떻게 함께해 주셨다고 하는 간증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충성스럽게 살아서 우리 하나님과 늘 함께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따르리로다. 무슨 뜻입니까? 완전하다고 하는 개념은 하나님 앞에서 사용하는 개념입니다. 노아를 가리켜서 당대에 완전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에게도 왜 결함이 없었겠습니까. 다만, 하나님을 향하는 사랑과 충성스러움이 하나님 보시기에 충분하였기 때문에 (그가) 약점들을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은 당시에 어그러진 인생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과 비교할 때 그를 완전한 자라고 불러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따르리로다.” 다윗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윗은) 이 나라가 정의와 인자로 가득한 나라가 되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데, 그 일을 위해서 완전한 길에 행하는 사람과 함께 이 길을 걷겠다고 하는 뜻입니다.
완전한 길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도대로 살고자 한 사람의 길입니다. 다시 말해서 완전한 길은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말씀을 붙들고 온전한 삶을 살 것이니, 그 삶은 곧 충성된 삶을 사는 사람과 같은 삶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단지 자기의 정치적인 야망에 동참하고 내 편이 되어서 나의 꼬봉 노릇하는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은 확고하게 하나님 편에 섰고, 하나님을 무엇보다 사랑하고 그분이 주신 소명을 따라서 이 왕국을 다스릴 것이니 이 길을 함께 동참하고 걸어가기 위해서는 그 사람도 하나님을 사랑해서 하나님 앞에 완전한 길을 걸으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과 함께하겠다고 말합니다. 생각은 조금씩 다르고 판단하는 바가 같지 않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끊임없이 부정한 길을 버리고 완전한 길을 걷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당연히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를 위해서이고, 나라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실은 그 나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다윗이 자신의 신하를 고를 때처럼 하나님은 당신을 따라오며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따르리로다.” 전쟁의 문맥을 보여줍니다. 왕이 그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그 중요한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왕이 그 전쟁에 참여했으니 국가에서 기울일 수 있는 모든 것을 기울여 그 전투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왕은 이제 그 앞에 섰고 왕이면서도 이번 전쟁에서 자신을 버려 나라를 구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때 왕의 명령에 돌격할 때 왕을 바로 가까이에서 뒤따르며 적진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은 아무나 그 자리에 설 수 있었겠습니까? 아닙니다. 이제까지 왕과 함께 왕을 위해 그리고 왕과 더불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며 살아왔던 사람들이 왕 가까이에 서서 함께 적을 섬멸하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그 왕을 모셔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이러한 방식으로 사용하셨습니다. 함께 전쟁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다윗은)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경험하였습니다.
이러한 것처럼 오늘도 하나님은 완전한 길에 행하는 사람은 당신을 따르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안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준비된 사람을 사용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준비할 때도 함께 동행하며 은혜를 주시고 당신에게 충성스러운 마음을 갖게 하셔서 한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준비시키십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나 그 하나님을 매일매일 마음속에 느끼며 하나님의 말씀의 온전한 길을 따라 걸어가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선택하셔서 당신의 위대한 일에 함께하게 하십니다. 주님은 이렇게 하심으로써 충성스럽게 당신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을 섬기며 살 수 있는 인생의 의미를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안에서 가장 영광스럽고 빛나는 믿음의 지위를 얻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세상) 사람이 보기에는 그저 교회에 미친 사람처럼 보이고 보람도 없는 일을 위해서 자기를 소비하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중에 너그러운 사람들이라고 해야 취미 생활에 몰두하는 사람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집에 충성할 때 적어도 우리는 이 모든 세계와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충성스럽게 살아가는 우리와 하나님이 함께하셔서 나의 삶이 하나님의 삶이 되게 하셨고, 하나님이 펼치고자 하시는 뜻을 이루며 사는 것이 이 세상에서 나의 기쁨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세상에서 자기 욕심을 따라 먹고 마시며 만족을 누리고 또 이런저런 죄를 지으면서 허탄하게 보낸 모든 날들은 아무것도 우리에게 남기는 것이 없습니다. 허무하고 허탄한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남기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불붙는 마음을 가지고 산 삶(은 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지극히 충성하게 하셔서 나를 위해 생명까지 버리심으로 구원하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에 깊은 감화를 받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을 위해서 자신의 인생은 오직 하나, 하나님께 충성스럽게 사는 것뿐이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홀로 외롭게 버려지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으십니다. 그렇게 충성스러운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당신이 행하실 위대한 일들을 미리 알려주시고 사람들이 알지 못하던 새로운 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려고 하실 때 제일 먼저 그들에게 소원을 주셔서 하나님의 마음을 나누어 갖고 하나님을 섬기게 만드십니다. (충성된 사람은) 이러한 일들이 이제껏 이루어지지 않고 방치되었으니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까 생각하면서 그 모든 잘못된 것이 나 때문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면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어루만지듯이 망가진 교회의 부분과 이 사회의 망가진 곳들을 고쳐 나가면서 살아갈 때, 그는 땅에서 섬기고 있으나 그 마음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곳에 가든지 마음이 평안합니다. 주님이 주신 평안함이 그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시련이 올 때나 평탄할 때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결국 함께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행복한 삶을 살아갑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행복하기를 원하시면 충성된 사람들이 되십시오. 하나님의 일에 자신을 드려 하나님을 섬기는 보람을 느끼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도 무위도식 하면서 인생을 살지 마십시오. 그 길은 하나님이 주신 길이 아니며 거기에는 결코 행복이 있을 수 없으며 만약에 행복하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을 멀리 떠난 채 느끼는 자기만의 착각일 뿐입니다. 잠시 즐거운 시간이 지나고 나면 슬픈 시간이 올 것이고 잠시 좋은 시간이 지나고 나면 나쁜 시간이 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때) 비로소 하나님 앞에 돌아가기 전까지는 우리가 얼마나 외로운 사람인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함께 살기를 열망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내가 하나님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합당한 사람이 되고 이 쓰레기 같은 나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것을 보람으로 삼으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셔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앞에 설 때마다 내가 얼마나 불완전한 인간인지를 깨닫기 때문에 기도가 그치지 않습니다. “주여 나를 온전하게 하옵소서. 나의 걸어가는 인생의 길이 하나님 보실 때에 착하게 하옵소서. 주님의 말씀으로 나에게 완전한 길을 보이소서. 내가 순종하여 따르겠나이다.”라는 고백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온 마음을 다해 이렇게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며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3. 충성된 자에게 상 주심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 할지어다 하고”(마 25:22-23)
녹취자 : 김세나
구약에 이렇게 강조되었던 하나님 앞에 충성하는 사상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도 그대로 반복됩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보여주기 위한 것 중 하나가 (사람인)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충성스럽게 살아야 할 것인가 보여주신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집에 충성하였고, 예수 그리스도는 온 인류를 위해서 하나님께 충성하셨으니 자기를 십자가에서 버려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는 충성에 대한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많다는 것은 그분의 관심사였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유명한 충성에 관한 비유가 이 달란트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자기 종들을 불러서 자기 소유를 맡겼습니다. 아무렇게나 제비뽑기해서 준 것이 아니라 각각 가지고 있는 재능, 혹은 능력대로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습니다. 이렇게 분배해주고 떠났습니다. 종들은 각각 그것을(받은 달란트를) 가지고 남기도록 주인의 당부를 받았습니다. 다섯 달란트 맡은 자와 두 달란트 맡은 자는 그것을 가지고 장사를 해서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 맡은 자는 두 달란트를 남기었습니다. 한 달란트 맡은 사람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렇게 하지 않고 가서 땅을 파고 주인의 돈을 묻어 두었습니다. 오랜 후에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결산을 하였습니다. 그때 다섯 달란트를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가지고 와서 “주인이여 내게 이만큼 주셨는데 내가 또 이만큼을 남겼나이다.”라고 했더니 주인이 칭찬해 주었습니다. 두 달란트 받은 사람도 두 달란트를 남겨 가지고 왔습니다. 놀라운 것은(놀랍게도 주인이) 글자 하나 다르지 않은 말씀으로 똑같이 칭찬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부분을 설교할 때 다섯 달란트 맡은 사람보다는 두 달란트 맡은 사람이 훨씬 설교할 때 은혜롭습니다. 왜냐하면 우선 나 자신이 다섯 달란트를 맡은 사람처럼 탁월한 특징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는 면에서 두 달란트 맡은 사람이 더욱 공감이 가기도 하지만 두 달란트 맡은 사람은 다섯 달란트 맡은 사람과 한 달란트 맡은 사람 사이에 끼어서 얼마든지 이렇게 못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위에를(다섯 달란트 받은 자를) 보면서 ‘아니 같이 종살이 했던 사람인데 얼마나 많이 신뢰하였으면 다섯 달란트나 맡기고 지금 자기에게는 겨우 두 달란트를 맡겼을까.’ 하면서 마음 상하고, 열등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위에와(다섯 달란트 받은 자와) 자기는 세 달란트나 차이가 나고 아래와는(한 달란트 받은 자와는) 한 달란트 밖에 차이가 안 나니 나는 제(이) 수준으로 주인이 보는가 보다라고 얼마든지 부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고 노력하지 않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두 달란트 맡긴 자는 (다섯 달란트 받은 자와) 똑같이 장사를 해서 두 달란트를 남겼고 주인 앞에 그것을 내놓았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결국 하나님께서 달란트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 비유와 우리가 조금 안 맞는 것이 있다면 이 종들에게는 떠나면서 달란트를 맡기고 돌아와서 달란트를 계산하였습니다. 얼핏 보면 태어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달란트를 주시고 (우리가) 죽은 다음에 달란트를 계산하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만나는 모든 기회를 달란트로 해석해야 합니다. 태어날 때 각자 다르게 태어난 것도 물론 있지만 살아가면서 우리들이 선을 행할 기회가 주어지면 그 역시 달란트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 봉사하면서 누군가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것, 역시 달란트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그 사람을 섬겨서 그를 곤궁에서 면하게 하는 것,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 내가 없으면 잘 안 될 일을 내가 나서서 함으로 잘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때(잘 되게 할 때) 이 모든 것들이 달란트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웃과 교회와 이 세상이 여러분들을 필요로 할 때 만약에 여러분들이 충성스러운 사람이라면 그러한 기회가 주어질 때 아주 기쁘게 생각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최선을 다 할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조금밖에 섬기지 않았는데 그 섬김을 통해 그 일이 점점 커져서 많은 사람들이 맨 처음 시작했던 그 일로 인해 신앙의 유익을 받게 됩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래서 이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달란트가 되는 것입니다. 남들에게는 없는 물질, 남들에게는 부족한 건강, 남들에게는 없는 지혜, 재능, 그리고 남들에게는 없는 그 무엇을 가지고 있을 때 그것은 모두 기회이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주시는 달란트입니다. 하나님은 미리 모든 것을 정해 놓으셨지만 (시간이 흘러가면서 상황이 전개되고-삭제) 그때그때 마다 우리에게 봉사할 수 있는 위치에 남겨두십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달란트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요즘에는 전도에 젊은이들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나이 먹은 사람들이 갈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참 슬픈 말입니다. 젊은 사람들이 다 나와서 열심히 전도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전도하시던 분들이 옛날에는 다 젊은 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젊은 분들은 옛날에 젊은 분들처럼 살지 않는다고 하는 약간의 투덜거림이 있습니다.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 사람들은 각자 그 사람들의 인생을 살고, 나이가 들어도 하나님이 이 자리에 세워주신 것이 나에게는 달란트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남길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든지 간에 자신은 그 일에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께 돌려드릴 것을 남겨준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이제 주인이 어떤 평가를 했습니까. 여기에서 우리는 충성스러운 사람들에게 상을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첫째, 주인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종에게 말한 칭찬은 세 가지입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였습니다. 제일 먼저 받은 칭찬은 잘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영어 성경으로는 well-done, 잘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달란트 맡은 종에 의해서 이루어진 많은 일들이 일 스스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잘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잘된 것입니다.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통치자들이 다스리면 좋은 나라가 됩니다. 핵심은 잘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잘 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이 주인이 다섯 달란트 맡은 종이나, 두 달란트 맡은 종이나 동일하게 주신 칭찬입니다. 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잘하는 것과 못 하는 것 사이에는 얼마나 많은 차이가 있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예화) 교회 공사를 하면 실내 장식을 합니다. 그때 계산을 잘못하거나 착오를 일으켜 잘못 시공하면 세 배의 돈이 들어갑니다. (첫 번째) 잘못 시공한 것(자체가), 결국 날린 돈입니다. 두 번째 그것을 뜯어내는데 돈과 인력이 들어갑니다. 마지막 세 번째 (처음과) 똑같은 것을 하는데 또 돈이 들어갑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하나 잘못하면 세 배의 돈을 들여 겨우 원상 복구를 합니다. 그만큼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교육관을 공사하면서 4층을 제가 디자인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돈을 아껴서 직접 공사를 하자 해서 인부들을 불러다가 제가 디자인한 대로 치수를 재어서 시공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나쁘지 않았습니다. 하얗게 벽과 천장을 칠하는데 특히 벽 쪽에 하는 그 칠이 VP라는 칠이었습니다. 제 머릿속에서 이것을 칠해 놓으면 정말 예쁘겠다고 생각하며 칠하는 사람을 불렀는데 잘하는 사람을 물어보니까 2만원을 달라고 했습니다. 야, 이게 돈이 얼마인가. 부담스럽게 생각하였는데 6천원에 해 주겠다고 하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처음부터 어떻게 그렇게 싸게 할 수 있을까 했지만, 시골 사람이니까 저렴하게 해 주는가 보다 하고 (그 사람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제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페인트칠을 하였습니다. 칠을 한 것을 가서 보니까 칠한 모든 면에 공기 바람 때문에 모두 너덜너덜 붙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VP칠이라는 것이 마치 비닐을 코팅하듯이 탁 벽에 붙어서 광채가 안 나는데 어떻게 이렇게 붓질 한 번에 수없는 물방울이 생겨나는가. 시간이 지나면서 물방울이 터지면서 그 벽에 구멍이 뻥뻥 나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이후) 다시 한 번 (칠을) 해 보라고 해서 두 번을 더 칠했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똑같아서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느냐 했더니 원래 이 칠은 이렇게 되는 것 아니냐고 말하며 샘플까지 보여 줬습니다. 그때 그 기술자가 하는 말이 재밌습니다. “목사님, 뭘 그렇게 까다롭게 생각하십니까? 다 이렇게 칠해서 모든 사람이 쓰고 사는 건데 여기만 특별한 것을 주문하십니까?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못합니다. 최선을 다 했습니다.” 그러고는 휙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냥 쓰고 말았습니다. 그때 생각한 것은 뭐냐 하면 ‘아, 돈 14000원 싼 맛에 사람을 불러다가 이것을 이렇게 망가뜨렸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입니까? 돈이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은 전혀 잘 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잘 할 수 있는데 못한 사람이 아니라 절대 내가 요구하는 칠을 할 수 없는 수준의 사람이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을 맡기셨을 때 그 일이 잘되기를 바라시지 않겠습니까. ‘잘’이라는 말을 생각하면서 한번 이 문제를 떠올려 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사명이 우리의 삶의 자리 곳곳에 있습니다. 저는 설교를 준비하고, 어떤 사람들은 마당을 쓸고, 어떤 사람들은 심방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가르치고, 어떤 사람은 아이들과 놀아 줍니다. 그 모든 행위에 ‘잘’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또한 ‘잘못’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잘’이라는 것은 결국 그 일을 맡겨 주셨을 때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 잘하였을 때 그것이 하나님 앞에 잘하였도다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예화) 전에 전도사로 있던 교회에서 잠깐 있었습니다. 그 교회에서 저는 청년부 담당이었는데, 유치부실에 갔었습니다. 유치원이 있고 그 유치원 선생님들이 유치부를 운영하는데 성탄절 장식을 하라고 했더니 정말 잘 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그림을 정교하게 그리고 만들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까만 삼각 모자 쓰고 빗자루를 타고 다니는 것을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빗자루 타고 다니는 요정을 그린 것이었습니다. 저게 뭐냐고 타박할 위치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내려와서 조용히 이야기 하였지만, 그러한 것은 잘 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 오신 성탄절에 그림을 못 그리겠으면 ‘기쁘다 구주 오셨네’ 글자를 써 놓고 내려올 것이지, 거기에 (성탄절과 상관없는 장식을) 아주 정교하게 만들었습니다. 밀랍 인형 비슷하게 했는데, 왜 어둠속에 빗자루 타고 내려오는 요정을 거기에다가 그려 놓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무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는 얼마나 수고가 들어갔습니까. 잘했다고 하였지만 결과적으로는 잘한 것이 아니게 되어 버렸습니다. 구역장이나 순장이나 심방을 가서 그냥 가만히 앉아서 억울하고 힘들어서 하는 이야기에 그냥 귀를 기울여 눈물만 흘려줘도 괜찮을 텐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해 사람 속을 뒤집어 놓아서 그 다음주부터 교회를 안 나오겠다고 만든다고 한다면 그것은 잘 못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 주위에는 잘못하는 일로 넘쳐 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교회의 부흥을 저해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잘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제일 먼저 이 주인은 ‘잘하였다’고 칭찬하였습니다. 이게 예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당신은 평생 잘하시며 사셨습니다. 설교, 심방, 교육, 상담, 봉사, 헌신, 모든 면에 있어서 ‘잘하였도다’라는 아버지의 인정을 받으며 사신 분이셨습니다. 여러분들도 하는 것마다 잘하는 여러분들 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는 “착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희랍어 성경에 ‘아가도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단어는 good이라는 단어입니다. 단순히 ‘좋아’라는 의미가 아니라 이것은 사람에 대한 평가입니다. 앞선 ‘잘하였도다’는 일에 대한 평가이고, ‘착하다’라는 것은 그의 성품에 대한 평가입니다. ‘착하다’라고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사랑의 질서에 온전히 순복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좋아하고 원하는 것을 이기심으로 찾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을 받아들이고, 그 선을 따라 모든 만물을 적도에 맞게끔 사랑합니다. 자신이 그러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착하다’의 의미입니다.
우리 어른들이 아이들을 보고 정말 착하다, 이렇게 타이를 때는 두 가지 경우입니다. 자기 말을 들었으면 좋겠어서 격려 차원에서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자기가 의도한 대로 모든 것을 잘하였을 때 어른들은 그 아이를 착하다고 칭찬합니다.
(예화) 초등학교 4학년 쯤 무슨 일이었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 같은 집에 세들어 사는 모든 어른들이 아이들만 두고 나갔습니다. 무슨 서커스를 보러 가셨는지, 영화를 보러 가셨는지 반상회 모임이 있어서 가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꽤 오랜 시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중에서 제일 학년이 높았습니다. 애들이 다 ‘형, 형’ 그러니까 아이들을 다 모아 불렀습니다. 아이들이 마루에 앉아 만화책도 보고 종이짝 던지며 장난도 치고 도중에 불렀습니다. 애들이 쭉 모였습니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한 6-7명 되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 장난치며 시간만 보내며 말고 착한 일을 하자. 모두 걸레 빨아서 외출하신 부모님을 위해 너희 집들을 청소한다.”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정리를 아주 좋아했습니다. 하나하나 제자리에 놓고 아주 빡빡 걸레로 닦고 보기 싫은 것들은 장소 이동도 하고 이불까지 다 깔아 놓았습니다. 그 다음날 아주 난리가 났었습니다. 온 동네 아주머니들이 활짝 웃으면서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러면서 “남준아, 너는 어쩌면 그렇게 착하니?” 무슨 뜻입니까? 자기 의도대로, 아니면 의도는 했지만 바라지도 않을 정도로 한 것이었습니다(제가 동네 아주머니들의 의도대로 혹은 의도한 정도를 넘어서 청소를 해놓은 것입니다). 돌아오면 여성들은 스트레스가 무엇입니까? 애들이 방 안을 어지럽혀 놓은 것 아닙니까? (그런데) 깨끗하게 청소하고 엄마, 아빠 주무실 이불까지 각지게 개고 베개까지 꺼내어 그림같이 만들어 놓았으니 얼마나 좋으셨겠습니까.
착하다. 주인의 마음을 알고 그 주인의 마음을 그대로 구현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섬김을 통해서 입증된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착하다’고 하는 칭찬을 받는 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미친 듯이 열심히 주님의 일은 하는데 그 옆에 함께 손잡고 일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다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손에 칼이 달렸고 입에 화살이 달렸는지 열심은 인정할 수 있는데 같이 놔두면 누군가는 실족하고 마음에 고통을 당해 그 부서를 떠나거나 심지어는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착하지 않은 것입니다. 사람들이 일은 잘하면 착할 수가 없고 착한 사람은 일을 못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신앙의 이상은 둘 다 하는데 모순이 없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충성된 종아”라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주인이 “충성된 종아.” 이 ‘충성된 종아.’ 이미 자기의 모든 것을 이 사람에게 맡길 수도 있다는 인정이 들어간 것입니다.
(예화) 18년 전에 열린교회 빌딩을 어느 펌프 만드는 회사가 소유하고 있었고 그 사장님이 아주 열렬하게 사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번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 그 분은 그 회사 대표, 저는 교회의 대표 자격으로 만나 계약을 하고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목사님, 거기에는 충성스러운 사람이 있습니까?” “그럼요. 우리는 많이 있습니다.” “목사님, 저는 돈 때문이 아니라 사람 때문에 사업을 못 해 먹겠습니다.” “왜요?” “우리 건물 1층, 3층을 보십시오.” 2002년도에 이 건물을 인수하였습니다. 당시 사장님을 대리해서 일을 보는 분이 계셨습니다. 1층과 2층을 900만원 월세를 주고 살고 있었답니다. 그 당시 꽤 많이 받은 것입니다. 두 층을 모두 사용한 세입자를 만나기가 쉽지가 않은데 세입자가 어느 날 사장에게 나간다고 하였습니다. 더 사용하지 왜 나가냐고 했더니, 더러워서 안 쓰고 나간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런가 봤더니 (세입자가) 900만원 월세를 따박따박 내고도 장사가 잘 된다는 소리가 들리니까 직원이 사장 허락도 안 받고 가서 (세입자에게) 다음 달부터 1700만원을 내라고 요구를 한 것이었습니다. 주인 의도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러니까 몇 번 언쟁이 오고 간 다음에는 ‘더럽고 치사해서 이 건물은 찾아오지도 않는다’ 생각하고 떠났습니다. 사장이 나타난 다음에는 이미 상황이 끝난 이후였습니다. 그리고 900만원씩 잘 나오던 두 층이 텅텅 빈 채로 몇 년째 계속되던 거였습니다. 그러다가 우리가 인수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충성스럽다고 하는 것은 이 안에 이미 지혜롭다고 하는 것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잘 이해하는 지혜와 일로 잘 수행하는 지혜가 합쳐져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이 동력이 될 때 바로 충성스럽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고 매일매일 눈물로 기도하지만, 그것 이외에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은 충성스럽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충성스럽다고 하는 것은 결국 그 마음이 자신의 삶과 사역을 통해서 펼쳐진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충성스러운 사람입니다. 그러니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일하면서 주위에 충성스러운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고 하는 것을 압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자꾸 찾는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충성스러운 사람들입니까? 그 주인에게 “충성스러운 사람이 있으면 어떻습니까?” 물어 보았더니, “목사님, 그냥 간이라도 절반 떼어 줄 수 있죠.” 겉으로 보면 직원들의 월급을 십만 원 단위로 고민하고 짜게 준다고 하고 줄다리기를 하기도 하지만 충성스러운 사람에게는 돈뿐 아니라 그의 생명이 위태롭다고 하면 옆 침대에 누워서 간의 절반을 절제해서 줄 용의도 있다, 신앙인이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 사업가가 그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이 충성스러운 사람이 필요한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충성은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모든 가치의 기준과 생각이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좋아하실까,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 가장 이익이 될까,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인가, 여기에 집중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그것을 위해 기꺼이 포기하는 마음이 충성된 마음입니다. 그것을 사람들이 다 알아줍니까? 알아줄 수 없습니다. 종종 하도 알아주지 않으니까 자기가 얼마나 충성스럽게 살면서 희생을 많이 하였는지 말하는데 잠언 말씀에 “너희 잘한 일을 스스로 말하지 말며 다른 사람으로 말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자신이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 충성스러운 사람들은 자기가 충성스럽게 섬긴 것을 잊어버립니다. 왜 입니까?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너무 커서 받은 은혜만 기억나고 자기가 하나님 앞에 뭘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고 잘한 것을 떠올린다 할지라도 그것은 모두 그렇게 할 수 있는 열정과 기회를 주신 하나님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상대방에게 한 좋은 일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사랑은 그렇게 우리의 공로를 잊어버리게 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더군다나 자기가 이만큼 잘하였다고 하는 것을 내세우면서 그것을 오랫동안 마음에 품어서 그만큼 하지 못한 사람들을 마치 적수를 보듯이 생각하고 미움의 감정까지 들고 나 혼자만 손해를 보는 감정까지 드는 것은 신앙에서 빗나가도 한참 빗나간 것입니다. 변함없이 우리는 모든 것을 보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 충성된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주인은 이러한 사람에게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기쁨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무위도식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늘의 신령한 기쁨, 하나님께 칭찬 받는 기쁨, 하나님이 나를 인정해 주시고, 나를 사용해 주신다는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사람들 중에는 무위도식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사람 앞에 살았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죽은 삶입니다. 즐거움이 넘친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삶입니까. 예전에는 종으로서의 즐거움 밖에 없었는데 이번에는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분은 종이지만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해서 주인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많은 일들에 대한 열망을 갖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연약한 신자가 은혜를 받고 하나님 나라 전체가 이루어지는 즐거움에 참여하는 것과 유사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인정을 받았으니 이 종을 바라보는 주인의 눈빛은 얼마나 그윽하였겠습니까. 충성스럽게 살아서 주님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작은 것에 충성하는) 사람에게 더 많은 것을 맡기십니다. 한번에 어마어마한 일을 맡기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작은 것에 충성하는 것을 보고 그 다음, 그 다음, 그 다음, 하나님은 더 맡겨주시는 분이십니다. 더 많은 일을 할 때 하나님을 위해서 섬기고 봉사한다면 그때 하나님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정도가 점점 더 많아지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충성스럽게 살아서 이렇게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고 일평생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 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