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울림 2장
녹취자 : 김세나
제 2장 왕 같은 제사장
인간은 누구든지 자기의 존재의 근원을 설명하고 싶어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만 이 세계와 자신이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무엇을 하며 살든지 세계와 인간, 자기 자신에 대한 지식 없이는 안정된 삶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가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의 즐거움과 일상적인 삶에 몰두하느라 이러한 고민을 잊어버리기는 합니다. 그러나 결국 매일 부딪히는 현실적인 삶에 대한 삶의 지혜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토대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두 가지 해석
신자의 정체성의 두 번째는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고 번역된 이 구절은 헬라어 성경에서 “basileion ierateuma”(바실레이온 히에라튜마)라고 나옵니다. 이 구절은 ‘왕의 제사장’, 혹은 ‘왕과 같은 제사장’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basileioV’(바실레오스)라고 하는 형용사가 ‘왕과 관련된’, ‘왕의’, ‘왕과 같은’ 이란 의미를 지닌 사실을 생각하면 이 구절은 ‘왕의 제사장’ 혹은 ‘왕에 속한 제사장’, ‘왕과 같은 제사장’이 됩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말하는 ‘왕’은 하나님이나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우리는 결코 왕과 동일시 될 수 있는 존재들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널리 받아들여지는 해석은 ‘basileioV’(바실레오스)’를 ‘왕 같은’ 혹은 ‘왕적인’ 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왕과 같은 제사장들’이란 의미가 됩니다. 그러한 점에서 우리말 성경이 올바르게 번역되었다고 생각 됩니다.
마르틴 루터는 이 구절에서 종교개혁의 횃불을 높이 드높여 들었던 중요한 교리를 발견하기도 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른바 “만인 제사장직의 교리”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전에는 가톨릭교회의 사제들만이 제사장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마르틴 루터는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토대로 해석할 때 구원받은 모든 신자들이 하나님 앞에 제사장이 되었다는 교리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인간은 누구의 공로의 중보 없이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의를 힘입어 모든 신자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하는 교리입니다. 이러한 마르틴 루터의 새로운 해석은 당시 종교개혁 시대의 상황과 맞물려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에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루터가 만인 제사장 교리를 내세웠던 역사적인 배경은 따로 있습니다. 로마 가톨릭은 교회의 하나 됨을 말하였지만 실상 교회는 두 계급으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하나는 가르치고 명령하는 교회와 또 하나는 가르침을 받고 순종하는 교회였습니다. 전자는 사제들로 이루어진 교회이고, 후자는 평신도들로 이루어진 교회였습니다. 교회에 대한 이러한 잘못된 이해는 결국 교회에 대한 이분법적이고 계급적인 이해를 가져왔습니다. 사제가 하는 일은 거룩하고 신령하며 평신도들이 하고 있는 일은 그렇지 못하다고 하는 이원론적인 생각을 가지고 왔습니다. 사제는 평신도들보다 훨씬 하나님과 가까이 있고 거룩한 계급의 사람들이며 평신도들은 그 아래에 있다고 본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은 지금까지도 가톨릭의 성례에 남아 있습니다. 개신교에서는 성찬 예식을 거행할 때 성찬에 사용되는 표지인 떡과 포도주를 직접 성도들에게 다가가서 나누어지지만, 가톨릭에서는 사제가 그것을 들고 있고 평신도들이 나아와 그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절대로 자기 손으로는 잔을 들고 마시거나 떡을 손으로 짚을 수 없습니다. 평신도는 거룩한 성체에 손을 댈 수 없고 사제만이 그 일을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평신도들의 입에 그 떡과 포도주를 넣어주는 것이 그들이 방식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이러한 가톨릭의 사제 계급의 제도를 다음과 같이 새롭게 해석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휘장은 찢어졌다. 모든 중보의 직을 취하셨다. 그러므로 이제는 제사장의 도움 없이 그리스도 한 분을 의지하는 신앙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해석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마르틴 루터가 새롭게 발견한 만인 제사장의 교리는 교회 안의 직분을 두는 제도나 질서가 필요 없다는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말씀과 성례에 관한한 모든 신자들은 성직자들과 동등한 유익을 누리고 있으며 또한 누구의 공로도 힘 입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제사장 나라의 은유
칼빈을 비롯한 많은 종교개혁자들은 베드로전서 2장 9절의 이 표현, 곧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는 표현이 구약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출애굽기 19장 6절에 나오는 “제사장의 나라”라는 그 표현이 뿌리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2장 9절의 “왕 같은 제사장들”은 출애굽기 19장 6절에 나오는 “제사장의 나라”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본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의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출애굽기 19장 6절) 이 본문을 바탕으로 우리는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제사장의 나라로 삼아 주신다는 약속의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 약속이 신약의 영적인 이스라엘에게 계승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사장의 나라”라는 구약의 표현이 어떤 의미인지 파악하는 것은 본문에 나오는 “왕 같은 제사장들”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구약에 나타난 “제사장 나라”라는 표현은 크게 다음 세 가지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민족적 선택
첫째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특별한 민족으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이 점에서는 제사장이 누구인지를 생각해 보면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타락 후 죄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에게 영적인 사망이 이르게 되었습니다. 인간에게는 어떠한 능력과 선함으로도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타락하였지만 세계를 창조하고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의 계획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타락하자마자 메시아를 통한 구원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은총을 주셨는데 그것은 바로 제사제도였습니다. 메시아에 대한 약속과 제사제도의 수여는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제사장의 직무는 바로 여기에서 등장하게 됩니다. 제사장의 중요한 직무는 죄로 말미암아 불결해진 인간들이 제사를 통해서 거룩하신 하나님과 만나게 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일들을 위해 제사장들이 부름을 받은 것처럼 이스라엘은 이 세상 온 나라를 향해 제사장의 나라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나라의 섬김을 통해 온 세상이 하나님과 거룩한 교제를 회복하는 것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특별한 민족으로 선택하신 이유였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이러한 사명을 계승한 사람들이고 구체적이고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 사명을 계승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의 중재자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중재자의 역할을 맡기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제사장의 나라로서 이방인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전파하도록 부르셨습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도록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 이방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구원을 얻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이러한 신학적인 고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전을 정결케 하신 사건에도 잘 나타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어 쫓으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이 말씀은 이사야 56장 7절에 나오는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56장 7절의 히브리어 본문을 직접 해석해 보면 이렇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집은 모든 백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모든 백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란 표현입니다. “모든 백성들”은 복수로서 이스라엘 백성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그 날에 수없이 많은 족속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게 되는 집이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과연 이러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셨을 때 어떠한 일이 일어났습니까. 모든 믿는 자들이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사도행전 2장에서 여러 가지 방언으로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말할 때 이미 예고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전망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없이 모든 백성들을 위한 애끓는 기도로 가득 채우게 만들었습니다. 부흥이 일어나는 곳에는 언제든지 이 세상 사람들을 향해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한 가족과 이웃을 향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들은 마치 많은 백성들이 구원받지 못한 상태가 자신이 구원받지 못한 상태인 것처럼 눈물로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눈물을 흘리고 가슴을 찢으며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이유도 바로 이렇게 구원을 위한 열망을 하나님이 교회에 주셨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교회의 중재적인 역할을 통해 복음이 전해지게 하셨고 하나님의 진리가 알려지게 하셨고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알리셨던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교회를 통해 이 세상이 그리스도께 돌아온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성경이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고 하는 표현이 내포하고 있는 바입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아끼시는 족속
셋째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특별히 아끼시는 족속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남다른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을 하나님의 은총의 최고의 표현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다른 민족에게는 주시지 않은 하나님을 아는 특별한 지식이 계시로서 주어졌고 그들은 역사 속에서 이 지식을 보존하였던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호세아 4장 6절)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의 최대의 표현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제사장 되지 못하게 하는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되었던 중요한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지식을 버린 것입니다. 이 지식은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사장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한 것은 그들이 지식을 버렸기 때문이고 그 지식을 버린 것은 하나님이 시키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스스로 버린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특별히 중재자로 세우신 제사장 나라로 살아가게 하는 독특한 핵심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의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다른 모든 나라의 백성들과 구별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제사장으로 삼아주신 것은 바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제사장 삼아주신 표로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른 민족에게 주시지 않은 하나님에 대한 특별한 지식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정보로서의 지식이 아닙니다. 이것은 곧 이스라엘 백성이 받는 하나님의 사랑이었고 하나님에 대한 앎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과 사랑의 일치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따라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민족에게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삶의 양식이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방 나라 사람들과 구별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도덕적인 삶을 내포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높은 윤리의 기준을 가지고 하나님을 공경하며 살았고 그리하여 그들은 모든 지식에 있어서, 윤리에 있어서 이 세상 나라의 백성들과 구별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명은 바로 신약의 그리스도의 교회에 의해 그대로 계승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신학적인 사실은 진리의 절대성을 부인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하나님과 절대 가치를 부인하는 시대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절대적인 가치를 확신하며 그 유일신 문화를 이루며 살아가야 할 우리들에게 적지 않은 도전을 줍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아무리 세상과 소통할지라도 거룩함이 없이는 세상에 올바른 영향을 미칠 수 없습니다. 만약 교회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 곧 신약시대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전환된 이 지식이 없다면 세상과 소통할지라도 교회는 세상을 받아들이는 통로가 될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지지만, 우리 안에 하나님을 향한 불타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아는 지식으로 교회가 가득차고 그리스도인들이 그 지식을 따라 거룩한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이 세상과 구별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 보여 주어야 할 경건한 삶입니다. 단지 모양 뿐 아니라 능력 자체가 깃들여 있는 경건한 삶을 보여주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만드는 것이 신약교회의 사명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그리스도 교회의 존재의 울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교회가 그렇지 않다면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어떠한 존재의 울림도 들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 사람들에게 느끼는 존재의 울림이 훨씬 더 크게 될 것이고 그러면 세상이 교회를 본 받는 대신 교회가 세상을 본 받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면서도 경건의 비밀을 모른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슴속에 불붙는 복음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이성적으로 설득된 이 세상의 사상에 넘어지고 맙니다.
최근 화란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선교사로 활동하던 분으로부터 질문을 받았습니다. “이토록 놀라운 개혁교회의 유산을 받은 우리나라가 이렇게 자유주의가 된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다시 한 번 개혁교회가 영향력을 회복하는 길이 무엇이겠습니까?”라고 말입니다. 저는 이렇게 답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유럽교회가 자유주의화 된 것이 계몽주의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계몽주의가 전통적인 신앙에 훼손을 가져 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 계몽주의 이전에 이미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영적으로 약해진 교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어서는 저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화란을 비롯한 유럽의 교회가 다시 옛날의 영향력을 회복하고 새롭게 태어나는 비결은 거룩한 부흥입니다. 부흥을 통해서 교회가 영적인 능력을 회복하고 다시 한번 과거의 찬란한 신학의 유산을 자신의 온 마음과 삶 속에 체험하며 살아간다면 교회가 회복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약의 왕 같은 제사장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이렇게 왕 같은 제사장들로 부름 받았습니다. 교회는 영적인 이스라엘이며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 나라와 하나님 사이에 중재자가 되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중재자가 되었습니다. 교회는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복음을 통해서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아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약의 교회의 성도들은 함께 모여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구원받지 못한 나라와 민족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여야 합니다. 자신들에게 주신 많은 하늘의 신령한 자원과 이 땅의 자원들을 사용하여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일에 헌신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제사장일 뿐만 아니라 또는 왕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이나 그리스도와 같이 왕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궁극적인 의미에서 왕은 하나님과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마지막 날에 왕이신 하나님과 더불어 어느 정도 그 통치와 심판에 참여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신약의 성도들을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이방인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통치와 심판은 승리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정도 이 통치와 심판에 있어서 하나님이 맛보시는 승리의 기쁨들을 맛보게 될 것이고 그 모든 하나님을 거스르던 민족과 나라들은 그리스도와 하나님께 복종할 때 어느 정도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우리의 발 아래도 굴복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을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본문에서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표현은 크게 다음 세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의 왕이심
첫째로 하나님께서 만물 위에 뛰어난 통치 주이심을 보여줍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다스리시는 통치주이시며 그 통치를 실현해 나가는 하나님의 도구인교회의 유일한 주인이심을 보여줍니다. 왕국에서는 왕을 중심으로 모든 질서들이 세워집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왕국에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 분께 순종하는 백성들이라면 우리의 소원은 무엇이겠습니까. 왕이 가지고 있는 선한 통치이념이 나라 구석구석에까지 실현되고 모든 백성들이 거기에 복종하고 그 통치 아래서 행복을 누리는 것일 겁니다. 그리고 이러한 선한 왕의 통치가 불행한 이웃 나라에까지 확장되도록 그 나라를 정복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의 소원은 이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나님의 경륜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감격을 바로 그 경륜을 위에 헌신하는 삶에 동기로 삼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세상이 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대치할 수 없는 소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순히 주일에 교회에 나와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인일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의 마음 속에서 기쁨과 소망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의 통치와 영광이 교회 속에서 온전히 실현되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바로 아직까지도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을 위해 우리들이 말씀으로 헌신하고 있는 바이고 아직 회심하지 못한 형식적인 그리스도인 신자들을 위해서 우리들이 눈물로 기도하는 이유입니다. 어디 이러한 소망이 교회 안에서만 이겠습니까. 교회를 넘어서 이 세상을 바라봅니다. 아직까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곤고한 사람들을 봅니다. 하나님 없는 저들의 행복이 결국 불행의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우리들은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그들이 맛보지 못한 진리를 맛보았고 그들이 보지 못한 하나님의 나라의 행복을 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참된 진리의 행복을 그들도 누리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시키셨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도 그 사랑을 힘 입어 모든 것을 희생하며 이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의 삶입니다.
존재의 울림은 바로 이렇게 사명을 따라 가는 신자의 삶 속에서 인격 속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행사나 거대한 구호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각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은혜와 그 구원의 비밀을 알고 그것에 의해서 자신의 삶의 가치관과 인생관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뼈 속 깊이 이 복음의 가치와 의미가 새겨져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지신 십자가의 은혜의 의미와 공로를 생각하며 이 복음을 온 땅에 전파하기 위해 자신에게 주신 모든 은혜를 사용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는 것이 그들의 진정한 기쁨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에 감화를 받은 그리스도의 교회 공동체의 표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위한 봉사의 공동체
둘째로 이것은 교회가 왕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봉사의 공동체임을 보여줍니다. 교회는 왕이신 하나님께로 반역을 꾀한 세상이 다시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에 복종하도록 돕는 역할이 주어졌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왕이라고 고백하고 그 분의 뜻이라면 무엇인지 복종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슴 벅찬 사람들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모두 이러한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진실한 신자가 되어야 하고 현재적으로 그 십자가의 은혜를 누리고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모든 헌신과 사랑의 총화를 이루면서 한 시대를 향한 교회의 영적인 영향력은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 무엇보다도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을 이룰 사명으로 사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을 구원하고 완성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이 이 땅에 이루어짐에 있어서 하나님은 교회를 사용하도록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일에서 자신의 인생의 가치를 발견하고 사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섬기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세상과 교회 자신을 위해 섬기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할 때 이것은 하나님께 예배하고 그를 경배하고 그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위하여 부름을 받았다라고 할 때 이것은 바로 이 세상의 구원, 그리고 이 세상에서 정의와 사랑이 실현되는 것을 위해 교회가 이바지 해야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교회의 최고의 사명이지만 그러나 단지 교회의 복음의 전파만이 아니라 이 세상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든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이 이 세계에 주신 뜻에 부합하며 살도록 교회는 일반은총의 차원에서도 그들을 돕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는 자신을 위해서 봉사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공동체들은 서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섬기고 그들을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 아래 믿음 생활하도록 도움으로 말미암아 교회 자신이 온전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나타나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와 지식이 필요합니다. 이 말씀을 섬겨서 모든 사람들을 온전한 신자로 세우고 이 모든 신자들이 하나님의 현재적인 은혜 아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순종함으로 살아가도록 돕는 일이 필요합니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을 우리는 주시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경륜에 저항하는 일들을 보며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마음 아파하며 섬겨야 합니다. 무지한 사람들에게 이 복음과 진리의 빛을 전파하기 위하여 선교사를 파송하여야 하고 사회가 올바른 가치관을 따라 정의가 이루어져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로 대우 받도록 이바지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끊임없이 개혁되도록 우리는 진리와 사랑으로서 용기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섬겨야 하고 이 세상도 그렇게 되도록 우리는 이바지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신자를 통해 세상이 구원 받게 하심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신자를 통해 이 세상이 구원받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홀로 감당하시기에 어려운 일이라고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구원의 경륜을 이 세상에 이룸에 있어서는 먼저 믿은 신자들이 함께 참여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사적인 지위를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하나님의 귀하고 거룩한 이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쓰임을 받았습니다. 모든 나라의 백성들을 하나님이 사랑하셨지만 하나님은 그 위대한 일을 구원의 경륜을 펼침에 있어서 다른 나라가 아닌 이스라엘을 사용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선지자는 하나님의 율법이 예루살렘에서 나온다고 노래하기도 하였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왕과 제사장을 겸하여 맡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울왕은 제사장 직을 넘보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함께 겸하여 맡을 수 없는 이 직분이 신약 시대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됩니다. 왕과 제사장 뿐 아니라 선지자 직 까지도 그 분의 한 인격 안으로 통합되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우리들은 그리스도에게 주어졌던 것 같은 무한한 방식이 아닌 한정적인 방식으로 우리는 그의 삼직에 참여합니다.
결국 완전한 왕이신 그리스도께 접붙여짐으로 우리는 어느 정도 이 세상을 판단하고 또 심판하는 일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짐으로 우리는 그 분이 가지고 계시는 완전한 제사장 직에 참여함으로 우리의 공로로 그들을 용서하고 죄를 사할 수 없지만 우리의 섬김으로 그들을 그리스도께 나아가도록 중재하도록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의 제사장직을 한정적으로 승계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께 접붙여짐으로써 우리는 그의 제사장직에 참여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무지한 백성들을 가르쳐 그들을 하나님의 뜻으로 돌아오게 하셨던 것처럼 우리는 또한 그분께로부터 수여받은 복음의 대 위임 령을 따라서 사명을 감당함으로 많은 백성들을 복음의 빛 가운데로 돌아오게 합니다. 결국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이 누구이고 인간이 누구이고 세계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도록 부르신 유일한 지식의 통로입니다. 그리고 그 지식은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교회의 사명은 이 계시에 대한 지식을 풍성히 함으로써 그 지식을 순수하게 보존하고 또 그 지식을 이 세상을 향해 전파함으로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잃어버린 이 세상의 민족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가지고 그들이 회개하고 신앙으로 그리스도께 돌아오도록 눈물로 기도할 수 있는 공동체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베드로전서 3장 15절)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의 핍박으로 가득 찬 시대에서도 소망의 기쁨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단지 믿음으로 그렇게 살 뿐만 아니라 누군가가 왜 그러한 소망을 갖게 되었는가 물었을 때 대답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그들은 복음을 믿은 것으로만 만족하지 않고 자신들이 복음을 믿은 사실에 대해 변증할 수 있어야 하고 진리와 사상의 체계를 습득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지성 속에서 논리화 되어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게 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소망의 삶을 사는 이유를 말할 수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결국 신자의 존재의 울림은 이러한 윤리적인 삶과 깊이 있는 사상의 체계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신자의 탁월한 지위
그리스도인은 구원받는 순간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탁월한 신분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직분은 바로 왕 같은 제사장들입니다. 신자는 바로 왕 같은 제사장들로서 이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경륜의 성취에 이바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천사도 살펴보기를 흠모할만한 값진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모든 삶을 이러한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과의 연관 속에서 살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위대한 일들은 실제 우리의 아주 사소한 삶과 밀접한 관련을 갖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내와 남편이 가정을 바르게 세우는 일은 이 위대한 경륜을 이루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성도들이 교회에서 지체들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바로 이러한 경륜을 따라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것입니다. 직장에서 정직하게 섬기고 또한 이웃 사람들과 함께 평화롭게 살아가는 이 시민으로서의 삶은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을 이루는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되는 매우 중요한 요소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이러한 사소한 삶은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과 관계를 맺기에는 너무나 세상적인 삶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결국 이 모든 작은 일들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은 공동체임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향한 이 위대한 존재의 울림은 이렇게 모든 시민들과 함께하는 사소한 삶을 통해 들리는 것이지, 아무도 없는 허공을 통해서 들리는 천둥소리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한 세기에 몇 명 나올 것 같지 않은 소수의 인물들이 이 세상에 들려줄 그 위대한 울림과 우리 한 사람의 울림이 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그렇게 위대한 울림이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은 웅장하고 큰 울림으로,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그 보다는 작고 반경이 좁은 그 지역에서만 울림을 들려줄지 모릅니다. 결국 이 모든 울림의 크기는 달라도 같은 종류의 울림이 들려 올 때 이 세상 나라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세상의 뛰어난 권세를 가진 정치가도 아니었습니다. 그 분은 이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는 종교지도자도 아니었습니다. 그 분이 맨 처음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단지 랍비요 기껏해야 선지자로 여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 전체는 존재의 울림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베세다 광야에서 떡과 물고기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먹이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그 기적이 울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울림을 들을 사람들이 기껏해야 생각한 것은 예수님을 임금 삼아서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의 해방을 꿈꿔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정치적인 소망을 품는 것이 바로 그 사람들이 보여준 반응이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다른 것들을 보고 들었습니다. 먼 길을 따라와 허기지고 힘이 없는 사람들은 이러한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자신들을 불쌍히 여기는 예수님의 마음을 보았습니다. 팔복산에서 울려 퍼지는 선포를 통해 아무 기적이 없이도 그들은 그 분의 인격 안에서 흘러 나오는 존재의 울림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예수님께로부터 떡과 물고기를 받아먹었기 때문에 느낀 그러한 울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존재의 울림은 모든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그랬다면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박해를 받으셨겠습니까. 이러한 예수님이 들려주는 존재의 울림을 들으면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 분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존재의 울림을 들려주실 때 그들은 회개하고 돌이키거나 혹은 그리스도를 박해하던지 태도를 분명히 해야 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핍박받고 있는 교회에 이 편지를 썼을 때에도 이미 신앙의 박해 때문에 변절자가 속출하였던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존재의 울림이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 사람들에게 깊은 영혼의 자각을 갖게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게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더 많은 경우에는 그러한 존재의 울림을 들려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것 때문에 미움을 받고 그것 때문에 박해를 받습니다.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믿지 않은 자들에게 부딪히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셨던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으면 본받을수록 우리는 믿지 않으려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여전히 부딪히는 돌이요 걸려 넘어지는 바위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 사이에서 어중간한 신자로 살아야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그러한 사람들이 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고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것이 그러한 뜻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그러한 삶으로서 고난을 피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맛을 잃어버린 소금의 결국이 무엇이었습니까. 결국 길가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히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놓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 사람들이 누리는 행복을 누리게 하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늘의 행복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하시기 위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빛들로 나타나고 소금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 빛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그 소금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그리스도인이 빛으로 소금으로 살 때 핍박을 받지만 그는 행복한 사람일 수 밖에 없습니다. 만약 우리 중 누군가가 이 세상으로부터 받는 박해를 두려워해서, 혹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잃어버릴 것들에 대한 아쉬움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만약에 어중간한 신자로 살기를 원한다면 그는 세상으로부터도 버림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로부터도 버림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앞에서도 행복하지 않을 것이고 이 세상 사상 안에서도 행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 어찌 하나님의 자녀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은혜를 누리며 살라
우리는 종종 이 세상에서 커다란 시련을 당하기도 합니다. 믿지 않는 이 세상의 현실을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그러한 연약함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나 우리는 아주 어린 아이와 같고 그리고 이 세상의 현실은 삼킬 듯이 밀려오는 쓰나미처럼 그렇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으로 이 세상에 저항하며 사는 것이 바로 부딪히는 파도 앞에서 모래로 집을 짓는 어린아이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리의 가치는 그 진리를 따라 사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에 항상 진리가 이기고 항상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대우를 받는다면 이 세상에서는 이미 그러한 구원이 완전히 실현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비관해서는 안 됩니다. 비록 잠시 진리가 패하는 것 같다고 할지라도 결국 패배한 진리는 승리한 거짓보다 위대하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거짓을 따라서 승승장구하는 일은 진리를 따라 패배하고 죽는 것보다 부끄러운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신약성경을 살펴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은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죽음을 각오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가 발견한 하늘나라의 가치가 너무나 높고 고귀하기 때문에 언제든지 그 가치를 위해서 기꺼이 죽을 수 있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그러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현재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살아가는 성도들로서 하나님께로부터 약속받은 특권을 현재적으로 누리며 살아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우리들이 이 사명을 따라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겐 주 밖에 없네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찬양을 부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리를 따라 잠시 핍박을 받을 때 우리는 이러한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부르면서도 우리는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승리를 확신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궁극적으로 승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진리 편에서 서 있는 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전에는 주님을 모르고 이 세상에서 방황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때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몰랐기 때문에 환경을 탓하며 핍절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이 주시는 참된 사랑과 위로를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복음 때문에 박해를 당하지만 우리는 이 세상이 하나님보다 크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히 압니다. 잠시 악이 승리하지만 선이 이길 것이라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래서 잠시 번성하는 악인들은 들판의 뱀 풀과 같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번성할 것을 굳게 믿습니다. 우리의 존재가 이 세상을 향해 울려 퍼지게 합시다. 그래서 이 존재의 선포를 통해 불신앙의 세계에서 임하는 영적인 전투에서 승리하는 사람들이 됩시다. 이 전투는 영적인 전투입니다. 이것은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이 영적인 전투는 우리의 육체의 힘이나 세상의 자원으로 이길 수 있는 전투가 아닙니다. 오로지 이 전쟁에서 이기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성령의 위대한 능력이 복음과 함께 할 때 우리는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승리할 것을 굳게 믿습니다. 이 영적인 전투에서 승리를 확신하며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 하나님과 함께하며 헌신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사명의 자리에서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사시면서 받았던 고난과 사명을 묵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이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자신을 모두 소진하여 헌신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또한 그렇게 헌신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깊은 만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지식과 은혜의 세계에 대한 비밀들을 현재적으로 체험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날마다 이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현재적인 삶 속에서 이 복음으로 말미암는 존재의 울림을 들려 줄 수 있도록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이 존재의 울림을 들려 줄 수 있다면 우리는 승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존재의 울림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그리스도께서 죄인인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여기에 진정한 행복으로 이르는 길이 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존재의 울림을 통해서 선포되는 이 위대한 선포가 복음의 아름다운 말의 선포와 함께할 때 거기에 성령의 능력이 깃들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의 많은 곤고한 사람들이 손을 내밀며 우리에게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 진리를 좋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디서든지 이 진리가 선포되는 곳에는 이 하나님의 진리를 떠났기 때문에 곤고하게 사는 사람들이 자신의 구원을 호소하며 도움의 손을 내밀 것입니다.
바다 건너 이국의 땅에까지 이 존재의 울림을 들려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교사들을 파송합니다. 복음을 들고 이방 사람들에게로 나아가 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당장 이 존재의 울림을 이 모든 세상에 들려줄 수 없을지 모르지만 내 옆에 있는 사랑하는 가족들과 교회의 지체들, 그리고 내 주위에 있는 이웃들에게는 들려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불행한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에게 참 행복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되십시다. 무엇도 확신할 수 없는 불안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진리에 대한 거룩한 확신을 보여줍시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삶이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의 삶보다 얼마나 행복한지를 보여줍시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들이 이 세상을 향해 들려주어야 할 존재의 울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