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울림 3장
녹취자 : 김세나
제 3장 거룩한 나라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오해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때문에 이 세상에서 형통하고 편안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이는 우리가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잘못 배웠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편안한 삶을 살기를 원하는 것이 잘못된 소원일 수는 없습니다. 예전에 우리의 힘으로 이러한 일들을 이루면서 살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이러한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기독교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예전에 우리가 하나님 없이 살 때 살았던 가치간과 인생관을 가지고 단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의 고백만을 추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고백이 인생과 삶에 대한 견해를 바꿔 놓고 당연히 행복에 관한 생각도 변화 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날 번영주의를 부르짖는 교회들을 만나게 됩니다. 행복을 추구하는 신자가 오히려 헝클어지는 삶을 사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지식과 사상이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온전하지 않은 사상은 혼란스러운 생각과 이율배반적인 실천들을 낳습니다. 무엇보다도 거기에는 참된 경건이 없습니다. 신자에게는 삶을 영위하는 신앙의 원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원리를 굳게 붙들고 사는 것 없이는 누구도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그 원리는 복음을 통해 성경 속에서 우리에게 제시되었습니다. 이 원리에서 벗어난 신자의 삶은 혼란에 빠지고 맙니다. 마치 선로를 이탈한 기차는 강력한 동력을 가지고 있으면 가지고 있을수록 더 큰 사고를 일으키는 것과 같습니다. 신자에게는 신앙의 뜨거움만이 아니라 이 모든 질서에 대한 인식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지식을 통해서 획득할 수 있습니다. 질서에 대한 인식이 없이는 선하고 행복한 삶이 불가능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단지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영적으로는 그리스도께 접붙여진바 된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일부가 된 사람들입니다. 지성적으로는 예전에 알지 못하였던 진리를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세계와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알게된 사람입니다. 이후에는 그가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하나님이 자기를 사람으로 만드신 뜻을 구현하며 살아야 하는가 하는 사명에 대한 이해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야말로 자신 안에 일어난 혁명적인 변화를 경험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대한 가지고 있던 관점이 무너지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롭게 수립된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이 분명히 보여 줍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인정하는데 있습니다. 주되심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삶과 세계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우리의 삶의 가치와 모든 보람을 그 주되심 앞에 복종하며 그 주인의 의도에 맞는 사람이 되고 그 의도에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 편지가 쓰여진 로마시대에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받고 순교하였습니다. 당시 로마는 다양한 민족들을 통합하기 위해 종교적으로 너그러운 포용정책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이 박해를 받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바로 황제의 숭배사상을 거절하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로마는 여러 나라를 통합하기 위해 두 가지 중요한 조건을 요구했습니다. 하나는 조세에 대한 요구였고, 다른 하나는 황제 숭배 사상이었습니다. 황제 숭배 사상은 종교라기보다는 다양한 이민족들로 구성된 로마를 정신적으로 통일하기 위한 하나의 사상적인 방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황제 숭배 사상은 종교의 모습을 가지고 다가왔습니다. 이 로마는 바로 이러한 황제 숭배가 그들의 종교를 함께 병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많은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이러한 로마의 정책을 수용하였기 때문에 박해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럴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이미 그리스도께 자신의 인생과 모든 것이 바쳐졌기 때문에 로마의 황제를 위해 바칠 것이 자신들에게는 남아있지 않다고 하는 고백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의 인생이 모두 주께 바쳐졌기 때문에 이미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라고 하는 고백이 그들에게는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자의 정체 : 거룩한 나라
신자의 세 번째 정체성은 거룩한 나라입니다. 우리말 성경에 “거룩한 나라”라고 번역된 구절은 헬라어 성경 “eqnoV agioV”(에쓰노스 하기오스)입니다. ‘종교적인’, ‘종교적으로 구별된’이란 의미를 단어인 ‘ἁγος(하고스)’에서 유래한 것이 “agioV”(하기오스)입니다. 그래서 이 단어가 신약성경에서 “agioV”(하기오스)로 나타나는데 이것의 의미는 “거룩한”이란 의미입니다. 또한 여기에 나오는 ‘나라’라고 번역된 “eqnoV”(에쓰노스)는 하나의 종족으로 이루어진 규모가 큰 무리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종족 개념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eqnoV”(애쓰노스)라고 하는 희랍어 단어를 남성 명사 단수로 쓰면 선택받은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키고 여성 복수는 “τα εθνηθ”(타 에쓰네)라고 정관사를 붙여서 복수로 사용하면 “이방 나라들”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물론 “eqnoV”(에쓰노스)의 의미는 확장되어 같은 핏줄이 아니라도 하나의 왕이나 동일한 문화, 공통의 전통들을 가진 공통분몬에 속하는 사람들의 연합까지를 가리키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헬라인 헬라인대로 유대인들은 유대인대로 한 “eqnoV”(에쓰노스)가 됩니다. 로마안에는 수많은 종족들이 모여 살았고 이스라엘을 제외한 이방인들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두 “eqnh”(에스네)라고 불렀습니다.
“거룩함”의 의미
성경은 우리를 “거룩한 나라”라고 불러줍니다. 다시 말해서 ‘거룩한 종족들’, 혹은 ‘거룩한 족속들’이라 불러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자주 등장하는 “거룩한”이라고 하는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이 단어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오늘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대하여 이해하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면 본문에 나오는 이 거룩함의 의미는 무슨 뜻이겠습니까. 이것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크게 두 개의 범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께 바쳐진 구별
첫째, 이것은 ‘구별됨’을 의미합니다. 거룩함은 ‘거룩하지 않은 것들과 나뉘어져 분리된 것, 구분된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그들이 거룩한 성에 들어가 사람들에게 보이니라.” 여기에 쓰인 “거룩한”이란 구절은 모두 히브리어 “ךושׁ”(카도쉬)라는 말인데 이것을 희랍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이것은 ‘구별됨’을 의미합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미 하나님께로 바쳐짐으로써 바쳐지지 않은 것과는 구별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손님이 많은 식당에 갈 때에는 항상 예약을 합니다. 일단 식당 주인이 식탁위에 ‘예약석’이란 표시를 해 두면 그 식당에 많은 사람이 와서 기다리고 있어도 다른 사람은 앉을 수 있습니다. 그 자리는 이미 예약한 사람에게 바쳐졌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 혹은 어떤 것이 하나님께 바쳐져서 다른 사람은 그것을 점유할 수 없게 된 상태가 바로 거룩함의 상태입니다. 신앙은 우리 자신을 하나님을 위해 떼어놓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을 향해 구별하는 것입니다. 많은 날들 중 주일을 하나님 섬기기 위한 날로 떼어 놓습니다. 많은 물질 중 하나님께 바칠 헌금으로 떼어 놓습니다. 많은 시간들 중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것에 의해서 떼어 놓습니다. 이렇게 됨으로써 그렇게 구별된 날과 물질, 시간은 거룩한 시간이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구별된 특별한 거룩한 시간 때문에 나머지 모든 날들도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제 서제에 있는 동양철학서나 혹은 불경을 보고 놀랍니다. 어떤 사람들은 저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 책중 어느 것에도 저의 주인은 없습니다. 저의 모든 사상은 그리스도께 바쳐졌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상은 이미 그리스도께 바쳐진 사상입니다. 세상 사람들로 이 세계를 관찰하며 진리의 조각을 발견하지만 그 진리는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그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부분적인 소유를 잘못 짝짓고 질서를 지워 전체적인 사상을 오류가 있는 사상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인 우리의 임무는 그것을 다시 해체해서 하나님을 보여주는 사상으로 짝을 맞추고 제자리로 돌려놓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진리는 하나님께만 바쳐진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거룩함의 개념은 자주 오해를 낳습니다. 흔히 우리는 거룩하게 살아야 하는 성도가 된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거룩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미 선점하셨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에 의해 선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바쳐진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도베드로는 로마의 흩어진 성도들에게 이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들이 이미 하나님에 의해 구별된 거룩한 백성들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만일 그 무엇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선점된 사람들에게 소유권을 주장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올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거룩함을 침범하는 것에 대해서 반응하시는데 이것이 바로 신학적으로 의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는 당신의 거룩함을 침범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는 거룩하고 구별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넘치는 위로가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사는 자신들이 유익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함을 침범하며 사는 사람들에게 이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은 두려움을 가져다줍니다. 왜냐하면 그 하나님의 의가 바로 경건치 않고 거룩함을 침범하는 사람들에게 심판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과의 관계
둘째로 ‘거룩하다’는 것은 주님과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합니다. “여호와 군대 장관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여호수아 5장 15절) “누구든지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린도전서 3:17)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본래적인 거룩함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이 세상과 구별되신 분이기 때문에 거룩하신 분이고 이 세상과 비할 수 없는 영광스러움 가운데 계시기 때문에 그 분은 이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거룩한 분이십니다. 이에 비해 인간도 거룩한 존재일 수 있는데 이것은 바로 원천적인 거룩하신 하나님을 덕 입으므로써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크게 두 가지의 의미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주님과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첫째로 존재적인 초월성입니다. 하나님은 온 땅과 만물위에 높으신 존재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티끌과 같은 존재일 뿐이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높고 위대하신 분이신지 깨닫고 나면 자신이 티끌과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말씀의 계시를 모르는 사람들이 할지라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위대한 자연 앞에서 자신이 하잘 것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인간의 본성적인 경험입니다. 만년설로 뒤 덮힌 웅장한 산맥 위에 우뚝 설 때에 우리는 그 산맥을 바라보면서 우리 자신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 넓고 끝없이 드넓은 우주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정말 티끌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당나라의 시인 중 진자앙이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등유주대가」라는 자신의 시 속에서 이러한 사실을 노래하였습니다.
前不見古人(전불견고인) 後不見來者(후불견래자)
念天地之悠悠(염천지지유유) 獨愴然而涕下(독창연이체하)
앞에서는 뒤에 오는 사람을 볼 수 없고 뒤에서는 오는 사람을 볼 수 없구나
천지의 아득함을 생각하니 홀로 외로워 눈물만이 흐르는 구나
이 시는 결국 마음속에 품은 큰 뜻을 펼치지 못하는 시인의 외로움을 드러낸다고 하지만 결국 이것은 인간이라면 한 번 쯤은 마주하게 되는 우주의 광대함과 그 안에서의 인간의 초라함과 외로움을 동시에 느끼게 만들어 줍니다. 무안한 우주 공간에 떠 있는 별들에 관해 들려주는 다큐멘터리의 이야기만 들어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드넓은 우주의 공간 앞에 우리의 존재가 얼마나 하찮은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만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아닌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엎드릴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과 우리 자신 사이의 무한한 존재의 격차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경험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출발은 이러한 무한하고 완전하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시작됩니다.
둘째로는 도덕적인 완전성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 온 땅과 만물위에 높으신 분일 뿐 아니라 또한 도덕적으로 완전하신 분이시라는 사실과 관련됩니다. 하나님의 성품 중에는 인간에게 전혀 없는 성품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원성, 불변성, 완전성과 같은 것입니다. 인간은 시간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지만 하나님은 불변하는 존재이시며 인간의 육체는 시간 속에 태어났다 사라지지만 하나님은 그 시간을 초월하십니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지만 하나님은 무안히 완전하신 존재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인간 속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하나님의 존재의 성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품 중에는 인간에게도 그와 유사한 것들이 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는 서로를 사랑하십니다. 이 완전한 사랑은 하나님뿐 이십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도 사랑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 사랑을 본 떠 하나님을 사랑하기도 하고 아내로서 남편을, 남편으로서 아내를, 이웃으로서 또 다른 이웃들을 사랑하기도 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 사이는 좁힐 수 없는 무안한 완전성의 격차가 있기 마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완전성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우리는 스스로를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 분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성품을 발견하면서 우리는 정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불결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 분의 사랑을 경험하기 전까지는 우리는 제법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의 완전한 사랑을 만나며 우리 사랑은 그 사랑에 비교할 수 없는 불결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예전에 우리가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나 주님을 만나고 난 후에는 우리가 결코 그렇게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그 의로우심 앞에 우리의 의는 지푸라기와 같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비유를 하자면 이러한 것입니다. 친목계로 모인 모임에서 노래를 한 곡 하려고 하는데 앞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 루치아노 파바로티, 호세 까레라스, 플라시도 도밍고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이 노래가 끝나고 사회자가 무대로 올라오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입도 뻥긋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격차를 무한하게 확장시켜 보십시오. 하나님의 완전하심 앞에서 우리는 불결한 죄인임을 깨닫고 우리가 행한 어떠한 선하고 좋은 것도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서 그것은 결함 투성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완전하심 앞에 우리가 불결한 죄인임을 깨닫게 되는 반응이 통절한 회개이고, 그리고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입니다. 이 회개와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의 은총을 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결국 신앙은 하나님의 존재적인 초월성과 도덕적 완전성에 대한 우리의 경건한 반응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깊이는 거룩하심을 체험한 깊이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거룩한 성품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 성품이 실제로 삶 속에서 어떻게 시행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이것을 통해서 얻게 되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신약적인 용어로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입니다. 이것은 진공 중에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사람과 이 세상, 내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좀 더 어려운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란 하나님의 속성과 속성의 시행 방식에 대한 앎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 곧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이 지식이야말로 우리의 삶의 방식을 결정합니다.
그렇다면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일이 나의 뜻대로 이루어질 때에는 하나님에 대해 배우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인생이 우리의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 때로는 고통을 당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게 됩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맞닥뜨려 우리의 불결함을 발견하고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갖게 될 때 이 지식이 자라게 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경건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관련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해 정동을 느끼고 있습니까. 다시 말해서 실제적으로 하나님이 이러한 거룩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에 대해서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지고 감동을 받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이 사랑에 대해서 마음 깊이 감동을 느낀 것이 언제입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나를 사랑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감동을 받고 그 사랑 때문에 눈물을 흘려 본 적이 언제입니까. 우리가 드리는 예배 속에 이러한 은혜의 정동이 있습니까. 개인적으로 말씀을 읽는 생활 속에서 이러한 거룩한 감화가 있습니까. 성도들과의 교제 속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놀라운 깨달음이 있는지 묻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가 이 세상에 들려주는 존재의 울림이 무엇입니까. 바로 마음속에 이러한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으로 말미암아 감동을 받은 그 모습이 바로 존재의 울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온 땅과 만물 위에 높고 뛰어나신 하나님 앞에서 겸손을 배움으로써 이러한 존재의 울림을 들려줍니다. 도덕적으로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함으로써 이 존재의 울림을 들려줍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힘입어 사는 것이 인격화될 때 거기에서 누구도 들려줄 수 없는 독특한 존재의 울림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아무리 교회에서 봉사를 많이 하고 신앙서적을 읽고 그리고 성경에 관한 지식이 풍부하다고 할지라도 존재의 울림이 없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냥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 종교인들 중 하나일 뿐이라고 여겨지도록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가 기독교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배웠다고 할지라도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지 않는 한 그는 결코 이러한 존재의 울림을 들려줄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종종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오해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이런저런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사명이 있으니 그 사명을 따라서 우리가 무엇인가를 하면서 살아야겠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존재 자체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거룩한 존재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와 그 복음 때문에 영적으로 변화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위에 사상과 지식을 더하여 확고한 신학의 체계를 가진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존재가 변화된 사람들에게는 존재의 울림이 있습니다. 그렇게 변화된 자신의 신앙을 따라 독특한 인생간과 세계관을 따라 살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끊임없이 경험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사상으로 질서가 잡히고 삶이 그 질서와 맞물려 있게 하십시오. 무엇을 향하며 살든지 확고한 신념과 사상 속에서 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 사람이 바로 존재의 울림을 이 세상에 들려 줄 수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세상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과 감화를 끼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정체를 설명할 수 없지만 그 존재의 울림을 들려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높은 지위 때문에 그러한 울림을 듣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말하는 큰일을 행했기 때문에 감동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부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러한 감화를 우리들이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그들은 부자도 아니고 그렇게 이 세상에서 영광을 누리고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에게는 없는 그 무엇이 그들에게 있음을 발견합니다. 누가 보아도 인생의 시련의 때를 지나는 사람들인데 너무도 꿋꿋하게 하나님을 부르며 살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그들을 통해 존재의 울림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그 울림을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다. 신앙의 힘은 저렇게 위대하다.”라고 말입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나라 : 거룩함의 소명, 공동체의 독특한 특징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체성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거룩한 나라”라는 정체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살아갈 뿐만 아니라 또한 이 거룩함의 소명이 공동체의 특징이 되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신이 몸담은 이 지역의 작은 교회, 이 한 시대의 교회, 전 세계의 보편교회의 존재의 울림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교회의 영적인 번영과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을 위해 꼭 필요한 관심사입니다. 교회의 영적인 상태는 단순히 이적을 행하고 이 세상의 복을 받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영적인 상태는 바로 사랑으로 완성되는 거룩함입니다. 교회에 많은 성도들이 자신들이 기쁘게 받아들였던 복음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때문에 이 세상과 구별되는 것입니다. 온 땅과 만물위에 높으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미천하고 불결한 자신을 받아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을 유지하며 사는 것입니다. 예전에 체험 했을 뿐 아니라 현재적으로 체험하며 살아야 합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넘쳐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령의 은혜의 체험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바로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하늘나라의 위대한 거룩함을 체험하게 해 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보이는 이 세상의 질서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거룩한 가치를 따라 살게 해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오늘날 교회는 이렇게 거룩함을 회복하는 것이 관심사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팎에서 들려오는 외침을 들어 보십시오. 교회 밖에서 교회의 도덕적인 개선을 요구하고 이 교회 안에서는 또한 온전하지 않은 신자들의 삶을 보며 반성이 일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으로 이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단체들을 개선하는 그러한 운동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문제들에 대한 답은 교회가 거룩함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정말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신앙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마음으로 자신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고 얼마나 마음 아파하실까. 하나님께서 기대하신 교회는 우리가 실제로 보여주고 있는 교회의 모습과 얼마나 다른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영광은 이 세상에 박수를 받는데 있지 않습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교회를 칭송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그 교회를 인정하지 않으면 그것은 참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의 관심은 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받는 인정이 아니라 교회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인정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주권이 드러나는 일들에 헌신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교회가 부름 받은 공동체로서 거룩한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명은 신자 개개인의 삶 속에서 실제로 적용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이러한 교회가 될 수 있도록 마음을 다하여 기도하여야 합니다. 교회가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치면 기도 많이 한 사람을 불러다 세미나를 엽니다. 전도를 해야 될 필요성을 성경적으로 강조하면 전도에 성공한 사람을 불러다 간증을 듣고 감동받는 자신을 대견스러워 합니다. 이것은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교회가 허울뿐인 대리만족 속에서 사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이 직접 우리에게 원하시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시고 직접 그 삶을 살아내셨던 것처럼 또한 당신의 은혜를 받은 우리들이 그 지식 안에서 그러한 존재들이 되고 그러한 삶을 살아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이 어두운 세상에서 거룩한 존재의 울림을 들려주게 되는 것입니다. 불신자의 눈에 비친 초대교회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에게는 뚜렷한 삶의 방식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닌 제3의 족속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불신자들의 눈에 비친 초대교회 그리스도인의 모습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그리스도께서 기대하시는 이 모습과는 얼마나 거리가 먼 모습입니까.
네 가지가 필요함
결국 존재의 울림이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주되심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시급한 문제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그 구원의 뜻에 부합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기 위해서는 매일 매일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며 성령의 은혜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복음의 진리와 지성적으로 친숙해 질 뿐 아니라 우리의 의지가 은혜의 영향력 속에서 그분께 기꺼이 순종하고 살아가고자 하는 소원으로 넘쳐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초월적인 체험을 하고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할지라도 매일 그 은혜에 거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떻게 존재의 울림을 들려줄 수 있겠습니까. 사단의 세력과 죄로 물든 세상, 우리 안에 남아있는 여전한 죄에 대한 영향력이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것입니다. 신앙의 물러남은 이런 저런 죄를 짓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주되심 앞에 대한 자신의 관점과 태도가 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주인삼은 삶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야말로 신자의 타락입니다. 죄는 제일 먼저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와서 우리의 생각을 속이고 우리를 그 질서로부터 이탈시킵니다. 생각을 지키지 못하면 마음을 지킬 수 없고 마음을 지킬 수 없으면 우리의 신앙을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실제 삶 속에서 거룩한 존재의 울림이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소한 다음 네 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의 찬란한 빛입니다. 부름 받은 하나님의 자녀라 할지라도 매일 매일 진리의 찬란한 빛이 마음에 비추지 않는다면 그의 입술의 고백과 삶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 진리의 말씀에 매일 매일 마음이 영향을 받으며 뼈속 깊이 그 진리의 영향력이 배이게 해야 합니다. 이 모든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받아들이는 통로는 바로 인간의 지성입니다. 주님을 잘 믿는 믿음과 그 진리의 말씀을 토대로 하나님의 교훈들을 이해하는 이성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것들이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찬란한 빛이 되고 그 빛 안에서 매일 매일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의 욕망보다도 하나님의 뜻이 자신의 의지를 움직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로는 자기성찰입니다. 이러한 찬란한 진리의 빛 앞에서 자신을 비추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찬란한 빛의 가치는 그 진리의 빛이 남을 비추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비추는데 있습니다. 진리가 아니었더라면 깨달을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고 그렇게 진리에 합당하지 않은 자신을 깨뜨리고 그 자신과 결별하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것으로 가는 첫 번째 걸음이 자기성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 자신의 모든 성품, 그리고 자신의 행동들을 관찰하며 그 속에서 자신의 존재와 그리고 자신의 사람됨과 성품들을 성찰합니다. 그리고 어떠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것인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자신의 삶이 존재의 울림을 들려주지 못하는지를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앞에서 성찰하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는 마음을 쏟는 기도입니다. 아무리 찬란한 빛이 있어도 단지 그 빛이 자신의 잘못을 발견하게 하고 그것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존재의 울림으로 이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통해 자신의 결함을 보는 것과 그것을 미워하고 하나님의 뜻을 좇는 순종은 별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찬란한 빛이 단지 우리의 마음과 삶을 비출 뿐 아니라 그 빛 안에서 드러난 나쁜 것들에 대해 슬퍼하는 마음을 품고 좋은 것들에 대해서 더욱 사랑하는 마음을 품도록 우리는 열렬히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형식적인 기도는 우리의 생각 속에서 나와 우리의 생각에까지만 영향을 미칠 뿐이지만 그러나 마음을 다해 드리는 기도는 마음으로부터 나와 우리의 정신을 변화시키고 우리의 마음의 틀들을 바꿔 놓습니다. 마음으로 쏟는 기도는 그 간절한 기도가 피의 펌프질이 되어 우리의 마음 갈피갈피 있었던 악과 죄를 버리게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좇도록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많은 하나님의 말씀의 찬란한 빛을 받을 뿐 아니라, 자신을 성찰할 뿐 아니라 그 위에 깨달은 바를 가지고 주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사모하는 그러한 심령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마음 중심을 모두 쏟아놓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사람이 되기를 간절한 기도 속에서 갈망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넷째로 의로운 삶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희생이 없이 이 어두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산다는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떠한 사람들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쉬운 길이 있다고 가르친다면 그것은 모두 거짓입니다. 우리는 그 길을 따라가지 말아야 합니다. 진정한 신앙생활의 지름길은 없습니다. 더욱이 한 사람이 진정으로 거듭난 신자라면 그는 이미 빛나는 진리와 뜨거운 은혜,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이 이끄시는 기도를 통해서 자신이 행복해진다는 사실을 경험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현재적으로 이러한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더 이상 열렬히 기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받았지만 그것은 과거에 받았던 빛이고 지금은 그 진리의 빛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때로는 지성적으로만 엔조이할 뿐 자기자신의 마음속에 그것이 일치된 삶으로 쏟아내어지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신앙의 고백과 삶의 분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는 정말로 의로운 삶을 위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꽉 차고 그 진리대로 사는 삶이 너무나 행복하기 때문에 이제는 그 진리의 삶을 구현하기 위해 나의 모든 것을 희생해도 좋다는 강한 결단과 용기가 우리의 마음속에서 솟아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은혜 없이 메마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일이겠습니까. 결국 우리의 고백은 허울뿐인 고백이 되어 버리고 우리의 삶은 우리의 고백과 일치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말로는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고 행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말하지만 우리 자신이 그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행복하지도 않고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즐거워하지도 않습니다. 결국은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삶과는 거리가 먼 형식적인 신앙생활일 뿐입니다. 이것은 존재의 울림을 들려주는 삶이 아닙니다. 이러한 생각을 해 보십시오. 어느 한 나라에 신하가 있었습니다. 이 신하가 몰래 적국의 왕에게 가서 절하고 자신의 큰 보물을 바쳤습니다. 결국 발각이 되었고 왕은 진노하였습니다. 자기가 사랑하였던 한 신하가 못된 짓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왕은 신하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너를 그렇게 사랑했거늘 어떻게 우리의 적국의 왕에게 가서 절하고 보물을 바칠 수 있었느냐?”말입니다. 그 때에 이 신하가 이렇게 대답하였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요즘 기분이 좀 그래서 그냥 한번 해 본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저는 왕에게만 충성된 신하입니다. 곧 왕께 돌아 갈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됩니다.” 정치적으로 어떠한 결과가 임하겠습니까.
우리의 정체성은 그 분께 부름을 받은 거룩한 나라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과 세상 사이를 오갈 수 없습니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허락이 된다면 우리의 신앙의 정절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한 나라로 불러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