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를 구하시는 하나님 4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예수님(막11:12-14)
“이튿날 저희가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 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예수께서 나무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예수님께서 이적을 통해서 당신의 뜻과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드러내주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이적 가운데 이 이적은 부정적인 의미에서 저주를 하심으로 이적을 보이셨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합니다. 이렇게 상대를 저주함으로서 그 이적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뭔가를 보여주시고자 했던 것이 이 마가복음 11장에 나오는 무화과사건이 유일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베다니에서 나오실 때는 바로 고난 주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건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찬송소리를 들으며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신 그 다음날 일어난 일입니다. 이 사건은 요일로 보자면 월요일이고 계절로 보자면 4월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매우 시장하셨다고 오늘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다니에서 나오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매우 시장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잠시 후에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서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실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진정한 구원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많은 능력과 그리고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죽은 자들이 살아나고 병든 자들이 일어났습니다. 귀신들린 자들이 나가서 온전하게 되고 그들의 놀라운 삶을 고치고 인생을 고치고 육체를 고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주리시며 시장하시니 인간의 결핍에 자신을 복종시키셨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하신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 오셨지만 결국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은 아들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제물로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드려져야 했던 것을 아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연약함을 그대로 지니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능력이 없거나 힘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인간으로서 맛볼 수 있는 모든 슬픔과 고통을 모두 맛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스스로 인간이 지니고 있는 연약함을 그대로 자처하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온 천하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어졌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도 그리스도 없이는 만들어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이 세상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당신을 십자가에서 기다리고 있는 고난의 주간에 들어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시장하셨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지으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결핍에 자기를 복종시키신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실 이 세상에 있는 죄인들을 깊이 이해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죄인들이 느끼고 고통 받으며 살아가는 모든 결핍을 자신도 체험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우리 인간들이 경험하는 모든 인간의 육체의 나약함과 인간의 육체의 모든 한계를 그대로 경험하심으로 말미암아서 후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실 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 범죄한 그 인간의 비참한 형편과 함께 그렇게 죄 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간들, 그리고 그 인간들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연약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인지를 깨닫게 되셨던 것입니다.
세상에 계실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실 때 예수 그리스도 자신도 그렇게 매일매일 하나님께로부터 베풀어지는 육신의 양식을 필요로 하는 삶 속에 사시기를 스스로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뒤에는 말씀 한마디로 무화과가 저주받고 말라버리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바로 그 앞에는 한조각의 떡이 없어서 배고프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천사들도 우리의 약함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늘에 있는 천군과 천사들이라도 인간들 세계 속에 깃들어있는 하나님 없이 살수 없는 그 인간의 나약함, 인간의 연약함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배고픔과 춥고 고달픈 육신의 모든 한계를 체험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인간들이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 없이 살수 없는 성도들인지를 그리스도 예수로 하여금 깊이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 중보기도를 한다고 말할 때 그 사람의 아픔을 깊이 느끼면서 그 사람의 고통을 깊이 공감하면서 기도하는 중보기도는 그렇지 못한 기도보다 훨씬 더 능력이 있고 위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서로 지켜야 할 형편을 알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야고보서에 보면 고통을 당하거나 병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교회에 있는 장로들을 청하여 오라고 한 것으로 보아서 또한 성도들에게는 자신 속에 있는 고통과 아픔을 지체들에게 말하고 목회자에게 알려주어야 할 의무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경건했던 믿음의 사람, 로버트 멕체인 목사는 그래서 토요일이면 늘 심방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 상식으로는 토요일은 조용히 책상에 앉아서 말씀을 준비해야지 돌아다니면 안 되는데 그 사람은 토요일이면 늘 심방을 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설교준비는 다른 날하고 토요일 날 병들고 약하고 슬퍼하고 고통 하는 자들을 심방하다보면 정말 직업적으로고 아니라 그 영혼들이 너무나 불쌍해서 그 영혼들을 품에 안고 젖을 물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야 할 간절한 마음이 생겨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 모든 것들을 깊이 느끼면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기도할 때는 파괴적이고 놀라운 중보기도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기도는 깊이 들어가고 싶다고 해서 깊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연약한 부분을 깊이 깨닫게 하실 때 그때 우리가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잡히시던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 오르셔서 우리를 위해서 요한복음 17장에 그 위대한 대제사장의 기도를 간절히 드릴 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은 눈물과 피와 사랑과 고통과 불로 녹아내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왜 그러시겠습니까? 우리와 같이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시고 우리와 똑같이 한결같이 고통을 당하시고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육체의 약함을 그대로 복종되시는 분이었기 때문에 우리를 모두 아는 그분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실 때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왕자로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계신 한 형제로서 하나님 앞에 전도하며 기도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적의 사건 앞에 예수께서 시장하신 모습을 성경이 담고 있는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얼마나 우리의 고통과 아픔을 이해하기 위해서 낮아지셨는가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참된 사랑을 우리가 깨닫지 못하면 그 어떤 건강한 영적인 삶도 있을 수 없고 우리의 올바른 신앙생활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을 깊이 이해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또한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의를 위해서 자신의 하나님으로서 그 인간의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모든 것들을 오히려 포기하시고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지신 것을 보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낮아지셔서 우리의 모든 연약한 것들을 모두 체험하셔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으니 우리로 또한 그 예수 그리스도처럼 이 세상을 살아갈 때 그렇게 형제를 향해 그리스도를 향해 낮아질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무화과나무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멀리서 예수님은 잎사귀가 있는 무화과나무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시장하셨기 때문에 그 무화과 잎에 뭐가 있나 하고 가까이 다가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어떻게 거기 뭐가 있는지 없는지 그것도 모를까?’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서 배고프면 뭘 먹어야한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이 아니라 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가야 하며 하나님이 그 백성들에게 진정으로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오늘 기억해야 합니다. 멀리 있는 잎사귀가 있는 무화과나무를 보시면서 가까이 다가가셨지만 잎사귀 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이는 무화과 때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무화과 때가 아직 안되었으니까 무화과 열매를 맺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 나무에게 영원토록 사람이 너에게서 열매를 따먹을 수 없을 것이라고 저주하셨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배우게 됩니까? 우선, 주님이 이 사건을 말씀하신 것이 예루살렘 입성과 뒤에 성전을 정결케 하는 사건과 함께 나온다는 점에서 이것은 개인에게 주시는 말씀이라기보다는 이스라엘 전체를 향한 경고라는 사실을 우리는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두 가지 과목이 자주 거론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무화과이고, 또 다른 하나는 포도나무입니다. 이사야에서는 이스라엘을 이 두 나무로 비유한 풍부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이사야서 5장은 이스라엘 백성은 포도원이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포도원인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은 무화과나무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 무화과나무를 향한 저주는 곧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국가적인 저주라고 하여도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전체를 한 교회로 보고 그 교회를 향해 예수께서 저주하신 장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 이것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첫 번째 진리는 이것입니다. 본질적인 변화는 반드시 열매를 통해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잎사귀밖에 없는 무화과나무는 잎이 있으면 반드시 열매가 있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었습니다. 반드시 잎이 있으면 열매가 있어야 할 이 나무가 잎만 있고 열매가 없는 것을 보시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본질적으로 변화되지 않기 때문에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그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본질적인 변화는 반드시 열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화단에 나무가 몇 개 있었는데 화분에 담았습니다. 그 중에 죽은 나무를 전부 갖다가 저 구석에 보이지 않게 치웠습니다. 나무 화분이니 쏟아버릴 수는 없고 안 보이는 곳에 갖다났습니다. 그런데 비가 몇 번 온 뒤에 가보니까 버려진 화분에서 다시 싹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물을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나무가 살아있는 것은 그 나무의 뿌리를 굳이 볼 필요가 없습니다. 자라나고 있는 그 모습을 보면 그 나무가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신앙의 본질적인 변화는 반드시 열매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열매를 맺으려고 애를 써서가 아니라 늘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붙어있는 생명의 상태를 유지함으로 말미암아서 열매를 맺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생활의 신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이 사건은 단지 열매를 맺지 않았다는 사실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본질적인 변화를 촉구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많은 형식이 있었습니다. 날마다 사람들은 성경을 읽고 또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절기마다 사람들은 대회로 모이고 또 절기로 모였습니다. 안식일마다 사람들은 모였습니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죄사했습니다. 수많은 제사장들이 성전을 드나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열매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포도나무로 심으실 때 하나님이 원하셨던 것은 의와 신의 열매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이 세상 백성들과는 다른 의로운 삶을 살아가고 이 세상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는 구별되는 분명하게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의를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다운 특징을 드러내면서 살아가는 삶을 하나님께서는 원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백성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신뢰하며 의뢰하는 믿음 속에서 살아가기를 하나님께서는 간절히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언제든지 이 신앙생활을 종교생활로 바꾸려고 하고 영적인 삶을 교회생활로 바꾸려고 하는 경향이 언제나 있어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이 사건을 보면서 본질적인 변화는 반드시 열매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것을 말씀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잎사귀만 매달렸기 때문에 무화과나무를 책망하신 것이 아니라 잎사귀와 함께 반드시 있어야 할 열매 없음을 책망하고 계십니다. 인간에게는 어떤 종교적인 심리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 앞에서 본질적인 의무를 감당하면서 하나님과 생명적인 관계 속에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못할 때 사람들은 흔히 그런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을 겉모습을 가지고 사람들은 바꾸고 싶은 경우가 많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그러면 종교적인 위선, 사람들에게 그럴싸하게 보이는 교회생활과 신앙생활, 이런 것들을 통해서 스스로 본질적인 변화를 통해서 열매 맺지 못하는 것을 자랑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잎사귀가 없으면 열매가 없는 것이 금방 드러납니다. 잎사귀가 무화과나무 자신을 뒤덮었습니다. 그래서 열매가 있는지 없는지를 감추어버렸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그때 우리의 모든 풍부한 신앙생활은 우리의 풍부한 교회 생활은 하나님 앞에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열매를 맺으면서 우리는 그 풍성한 교회생활, 늘 교회에 출석하고 남보다 뛰어난 열심히 늘 교회를 섬기고 언제나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는 닉네임이 따라다니는 그런 사람의 삶, 그런 사람의 삶을 통해서 열매가 드러날 때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제일 나쁜 것은 자기가 그리스도인인 것을 감추는 것입니다. 그것은 처음서부터 열매 맺기를 포기한 삶입니다. 지금 이 나무는 잎사귀 때문에 책망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잎사귀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될까요? 앙상한 나무에 열매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 죽은 나무입니다. 때가 4월입니다. 이제 잎사귀를 내어야 할 때입니다. 모든 과목들이 잎을 내고 그렇게 푸른빛을 띠는 그때입니다. 그때에 잎사귀조차도 없으면 그 나무는 죽은 나무입니다. 지금 주님은 잎사귀를 책망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본질로 돌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잎사귀 때문이 아니라 열매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끔 모든 것들에서 좀 쉬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쉬고 싶을 때 쉬면 늘어나는 것은 부패와 게으름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는 우리의 열심 없는 교회생활, 우리가 모든 사람들이 보기에 정말 열심히 있는 우리의 종교생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열매를 맺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질적인 변화를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변화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주일날 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하나님 앞에 가서 우리에게 아무런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본질적으로 변화되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어떤 삶을 살게 하시는지를 오늘 우리가 알지 아니하면 우리가 평생 예배를 드리는 것이 하나님 앞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비난하셨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런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셨습니다. 십일조를 하나님 앞에 드렸습니다. 그들의 종교적인 열심은 탁월할 정도여서 감히 웬만한 사람이 쫓아갈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너희의가 서기관보다 낫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갈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서기관들보다 나은 그 의가 어떻게 획득되어집니까? 변화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리스도께서 이처럼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나약함과 그리고 모든 비참함에 자기를 굴복시키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속하신 사실을 깨달아 알고 우리의 심령이 진정한 변화를 경험할 때 그때 우리는 서기관보다 나은 의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교회를 많이 다녀도 소용이 없습니다. 정말 우리의 본질이 하나님 앞에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설교하면서 보면 모든 교회가 다 그렇겠습니다만, 우리 교회를 포함해서 모든 교회의 교인들, 또한 저를 포함해서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렇습니다. 교회에 오는 것도 참아주고, 헌금하는 것도 참아주고, 봉사하는 것도 참아주는데 끝까지 못 참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바꾸려고 하는 것은 못 참습니다. 그만큼 변화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께서는 마른 무화과나무 앞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본질이 변화되지 않으면 너희의 그 풍성한 종교적인 생활이 사람들은 보면서 감탄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기억해야 할 것이 하나님께서 이처럼 본질적인 변화를 깊이 갈망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의 풍성한 잎사귀와 같은 교회생활을 돌아보면서 이것들이 나의 신앙생활에 정말 무엇을 가져다주는 것인가를 본질적으로 다시 반성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반성을 통해서 우리는 그것들 때문에 우리가 변화를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의 간절한 변화를 그리워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얼마나 형식적으로 살았는가 하는 것을 생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룰 드리러 나오는 태도가 시장을 보러 가는 태도와는 달라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가 이 예배에 나왔을 때 우리가 언제부터 꿈꾸었습니까. 그리고 어떤 갈망으로 어떻게 하나님 앞에 예배드려질 그 순간을 꿈꾸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에 나왔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이런 의식을 우리 속에서 끊임없이 되살려야 합니다. 매일매일 되풀이되는 우리의 교회생활과 신앙생활의 습관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생명이 깃들어있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그 풍성한 종교적인 수많은 행사에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그들이 안식일마다 모이는 회당에 수많은 무리들에 하나님께서는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문제는 그 백성들이 진정으로 변화되어서 본질이 바뀌어서 열매 맺는 삶을 살게 되는 이런 일들을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하나님의 참된 말씀으로 말미암아 변화되고 나면 놀라운 열매들이 맺혀지게 됩니다. 그 비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변화를 받고 나면 본질적으로 변화되고 나면 그것은 마치 무엇과 같은가 하면 피가 흐르지 않던 발에 피가 흐르는 것과 같습니다. 감각이 살아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가끔 들에 나무를 심거나 혹은 꽃꽂이를 하는 장면을 보셨을 것입니다. 식목일날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잘라서 개나리 같은 것으로 꽃꽂이를 합니다. 잘라서 갖다 꽃아 놓으면 피게 됩니다. 개나리가 피면 그 개나리를 쳐서 때로는 잎이 달리고 꽃이 달려도 상관없습니다. 그것을 죽 밭에다 꽃아 놓으면 이른 아침에 심어놓으면 점심시간에 해가 내려쬡니다. 그러면 거기에 매달렸던 이파리가 다 죽는 것 같습니다. 다 마릅니다. 그러다 하루나 이틀이 지나면 다시 이파리가 생생하게 살아납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뿌리가 내리기시작하면서 그 안에 생명이 돋아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본질적인 변화도 이와 같습니다. 여러분, 우리 주위를 보고 또 우리 자신을 경험해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영혼이 하나님 앞에 놀라운 변화를 받고 나면 그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고 해서 열매를 못 맺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고 본질이 바뀌고 나면 혼란 자체가 바꾸어집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와 붙어서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접붙여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그 진액을 먹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것을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언제나 느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그 진액을 먹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변화를 받고 부분적으로 바뀌고 나면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생명의 수액을 먹지 않고는 살수가 없습니다. 변화 받지 못하고 본질적으로 변화가 없을 때는 그런 것이 없이도 얼마든지 잘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사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없이 살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너무나 잘 아십니다. 특히 거듭났고 변화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교회의 놀라운 구속의 은혜를 맛보았던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생명의 진액을 먹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깊이 예수님께서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우리 자신의 신앙생활에 대한 태도를 완전히 바꿀 때까지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일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변화되고 나면 이제는 세상에 있는 돈이나 명예나 물질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먹어도, 먹어도 목마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루신 이 놀라운 사실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사람답게 변화되고 나면 그 다음에는 매일매일 예수 그리스도께로 오는 그 생명의 양식을 먹고 싶어 합니다. 왜? 그것이 변화된 자신의 본질을 얘기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병이 들면 세상에 없는 것 해다 주어도 안 먹습니다. 먹지 않습니다. 어렸을 때 몸살이 나서 며칠 앓고 나면 그때야 소고기국을 끓여줍니다. 맛이 하나도 없습니다. 잘 먹고 싶을 때 그때도 끓여주면 좋을 텐데 건강할 때는 일절 없다가 몸이 아파서 동리에 다라니에 이고 온 아줌마를 할머니를 불러서 그것도 외상으로 고기를 사서 끓여줍니다. 그때는 맛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본질적으로 우리의 영혼이 병들고 나면 모든 것이 다 시시합니다. 예배를 드려도 재미가 하나도 없습니다. 오늘도 가서 어떻게 한 시간을 견디나. 오늘은 왜 그렇게 찬송을 많이 하나. 아니 오늘은 왜 기도를 두 시간씩이나 하나. 오늘은 제발 우리 목사님이 열 받지 말아야 한 시간 안에 끝날 건데. 이런 생각하면서 교회를 나옵니다. 그러나 변화를 받고 나면 이 속에서 변화된 본질을 유지하면서 살아가고 싶어 하는 그 영혼의 갈망들이 영혼에 간절한 요구들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거기 은혜의 물에 담기고 싶어 합니다. 마시고 싶어 하고 먹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한 주일에 한 번씩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면서 은혜를 받는 것 가지고는 도저히 갈증을 채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수요일까지 나오고, 그래도 채워지지 않아서 금요일 날 나오고, 그것도 채워지지 않으니까 새벽에 나오고, 그것도 채워지지 않아서 책을 읽고, 그것도 채워지지 않아서 기도하고 수시로 하나님 앞에 나와서 간구합니다. 이런 영적인 필요들이 계속해서 생겨납니다. 이것은 영혼에 본질의 변화를 유지하도록 만들어줍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나무가 밑으로부터 온도가 맞고 나무가 지하에서 끊임없이 물을 빨아들이는데 그 열매를 맺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람이 아니라 그 나무가 연구대상입니다. 끊임없이 생명의 수액을 먹으면서 반드시 열매를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온도가 맞고 기온이 맞고 그리고 끊임없이 물을 빨아들이고 있는 나무에게 제발 열매 맺지 말라고 애원하는 것은 쓸데없는 것입니다. 나무 자신도 어찌할 수 없습니다. 할 수 없이 열매가 맺혀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께서 지적하고 싶으셨던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잘못되어있는 이 관계를 예수님께서는 지적하고 싶어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면 우리의 본질적인 변화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본질적으로 하나님 앞에 변화되지 않으면 그러면 우리는 아무 열매도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는 끊임없이 말씀을 통해서 목회자들을 통해서 또 주위에 있는 지체들을 통해서 열매 맺는 삶을 살라고 경고하기도 하고 권면하기도 하고 또 어떻게 열매 맺는 삶을 가르쳐주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불현 듯 인생의 막이 내리고 그리고 내 인생과 의미를(?)하고 여러분들이 바구니를 들고 하나님 앞에 갔을 때 죄와 탐욕과 저주받을 이 세상의 육신의 열매가 가득한 것을 여러분 손에 들고 있는 이 사실을 여러분 자신이 깨달아 안다면 하나님 앞에 아마 소스라치게 놀랄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열매 맺지 못한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정해주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내가 가르친 학생이 목회하고 있는 교회에 제가 설교를 하러 갔습니다. 6년 정도 지나면서 100명 정도 모이는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그것도 동기들 가운데 예가 없을 정도로 빨리 성장한 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물어봤습니다. 첫해에 얼마나 모이던가 하고 물었더니 한 30명 될까 말까 모이고, 그 다음에 얼마나 모이더냐. 한 40명 정도 모이고, 그 다음에 얼마나 모이던가. 계속해서 안 늘어났다고 합니다. 안 늘어날 때 그 목회자가 얼마나 안타까워했는지 기도하면서 매달리니까 3-4년 정도 되니까 한 50명 정도 되더랍니다. 5년 지나면서 한 6-7-명 정도, 그러면서 6년이 되어오면서 100여명 정도로 늘어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 이사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어봤습니다. 사람은 그렇게 늘어나는데 정말 목회자의 양심으로 볼 때 변화된 영혼의 수치는 어떻겠나. 물어보니까 목사님, 그게 참 너무나 힘이 듭니다. 정말 사람들은 모이는데 자기가 보기에도 100-120명 모여도 자기가 보기에도 목회자의 양심으로 저 사람은 예수를 정말 만난 사람이다. 볼 수 있는 사람이 열댓 가정도 안 된다고 했습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변화된 사람들은 야단을 치고 뭐라고 말해도 죽어도 하나님의 교회를 떠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고백합니다. 그 사람들이 충성하고 그 사람들이 봉사해서 그래서 이번에 큰 교회로 옮겼습니다. 우리 교회에 한 세배 이상은 되어 보이는 그런 교회입니다. 결국 공통된 모든 목회자들의 고뇌는 사람들이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다른 곳에도 가지 않으시고 오직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백성들에게 정말 참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누가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참된 복음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자신이 복음이었는데 그리고 우리는 말로 하지만 그분은 말로만 하신 것이 아니라 정말 이적과 표적을 통해서 드러내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가끔 모여서 이야기를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찾아가셔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시고 이적으로 그 복음을 확증하시고 그리고 그 하나님의 놀라운 하늘나라의 비밀들을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너무나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광경을 보시면서 일평생을 사셨고 이제는 그의 공생애가 마무리되는 고난주간의 시점까지 오시게 되었습니다. 그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본질적으로 변화되지 않은 이 무화과나무를 기다리고 있는 심판대에서 경고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간에도 우리가 그렇게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실 때 그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정말 그 모든 종교생활이 풍성하던 사람들은 오히려 멀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인과 세리와 같은 사람들은 훨씬 더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에 가까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것은 바로 이렇게 숨겨놓고 은밀하게 짓는 죄, 그리고 종교적인 껍질 속에서 인간이 짓는 모든 죄는 오히려 하나님 앞에 소망이 없습니다. 오히려 공개적인 죄인들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양심을 가책을 받고 있습니다. 자기가 잘못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변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전하셨을 때 죄인과 세리들이 오히려 마음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께 다가왔습니다. 그들이 의지하고 믿을 것이 없었습니다. 정말 자신들의 죄를 용서해주고 그리고 망가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쳐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그 구원의 역사가 아니면 자기에게 진정한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죄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죄 때문에 어찌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마땅히 영혼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할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풍성한 종교생활도 자기 자신들의 영혼의 모든 그 염려와 자신의 영혼들을 향하여 가져야 할 그 모든 관심들을 잃어버렸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무엇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까? 여러분이 생각할 때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은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본질적인 변화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변화 받지 못한 사람이 변화 받은 사람을 좇아가면서 산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본질이 하나님 앞에 변화될 때 우리는 물 흘러가는 것 같이 하나님의 거룩한 생명들을 우리의 삶을 통해 드러낼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본질적으로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열매를 맺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열매를 구하러 다니는,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구하러 다닌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열매를 맺기를 원한다면 열매 없이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어떤 삶인지를 하나님 앞에 깊이 깨닫고 무화과나무보다 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본질적으로 변화되도록 우리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 깊이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음에도 열매가 없는 우리의 삶을 보면서 슬퍼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우리가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가 끊임없이 교회에 나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이 많은 이파리들이 주님의 관심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여러분들을 영혼이 하나님 앞에 본질적으로 변화되어서 하나님만을 기뻐하고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을 깊이 느끼고 거기서부터 쏟아져 나오는 진액을 먹으면서 살아가는 그런 삶이되기를 하나님께서 너무나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진노하셔서 메마른 이 나무를 보면서 제자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 있는 믿음이 가져다주는 놀라운 것들을 목격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믿음이라는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열매 맺지 않은 이 나무가 내가 저주하면 반드시 말라서 많은 사람들에게 경고거리가 되리라고 하는 그 확신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도록 주님이 부르신 나무들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부르셔서 그래서 여러분들을 이제 이 열린 교회로 옮겨 심으셨습니다. 때를 따라서 햇빛을 주시고, 때룰 따라서 물을 주시고, 때를 따라 가지를 쳐주시고, 때를 따라 해충을 잡아주십니다. 비료를 주시고 주위를 두루 파서 많은 결실을 하도록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열매를 맺고 본질적으로 변화됨을 유지하기 위해서 여러분들에게 베풀어주셨던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를 기억해보십시오. 알지 못하는 우리를 하나님이 깨닫게 해주시고 그리고 우리는 고칠 수 없는 것들을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고치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책망하고 교훈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의 가지를 쳐주셨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내리시는 은혜의 비를 부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자라가도록 만들어주십니다.
여러분, 농부이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우리에게 안 주신 것이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수많은 변화의 때를 잃어버리고 살아오지 않습니까? 교회에 나간다는 사실, 그리고 내가 다니라고 명하신 교회에서 떠나지 않고 다닌다는 그런 이유, 그리고 작은 것들을 하나님 앞에 섬기고 있다는 이런 이유 등등의 이 모든 일들로 우리의 마음이 부요해지고 그리고 본질적으로 변화되기를 싫어하고 그날 하루하루 때우듯이 직장에 가서 출근부 도장 찍고 월급 받아가는 사람들처럼 우리가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퇴근시간만 기다리면서 한 시간에 얼마짜리 계산하고 있는 아르바이트 학생들처럼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르바이트 하고 있는 사람이 도장을 찍습니까. 의무가 있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시간만 가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하든지 시간만 가기를, 시간당 이천 원이니까. 시간 가기를 기다립니다. 이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소중한 변화의 기회들을 수없이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인생이 촛불처럼 타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영혼이 진정으로 변화되고 본질적으로 변화된 삶이 되어서 열매 맺는 것이 하나님께 급한 일입니까, 우리에게 급한 일입니까? 너무 심각합니까? 우리에게 너무나 급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변화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늘 변화해도 수시로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내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만약에 이 세상에 있는 물질이나 명예에 대한 그런 집중된 마음만큼만 우리가 우리의 영혼에 대해서 잠시만이라도 지속적으로 마음을 기울인다면 그러면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복된 사람들로 보일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사업을 하는 사람들, 뭔가 커다란 일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쓰는 말이 “칠전팔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7번 쓰러져도 8번 일어나면 결국은 이기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괄목할만한 업적을 이룸에 있어서 정말 입지전적인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하나 있는데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인간승리라고 불러질 수 있는 그런 것들을 쟁취하기 위해서 애쓰고 노력하는 것만큼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한하게 제공해주시는 영혼의 변화, 본질적인 변화로 열매 맺는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신 수많은 변화들을 그렇게 간절히 목마르며 잡으려고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잠시 떠올랐다가는 곧 흩어지고 잠시 떠올랐다가는 곧 잊어지는 이런 속에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지는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늘 이 무화과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주리시면서 까지 그렇게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복음을 우리에게 전하시고 오늘도 우리 가운데 계셔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를 가르치시고 깨닫게 하시는 그 이유를 성경은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가서 너희는 열매를 맺기 위해서 심은 내 백성이니라.” 하나님의 포도원에서, 하나님의 무화과과수원에서 너희는 풍성한 열매로 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기쁘게 해달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도 우리 주위에 두루 파고 거름을 주고 물을 주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이렇게 변화를 갈망하며 열매를 맺는 데로 나아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