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3.27.교역자특강 3
자, 그 다음에 43쪽입니다. 여기에서 목차를 보시면 삼위가 함께 세우신 교회가 나오죠. 그렇게 하고 삼위가 함께 하시는 교회라고 나오고, 그 다음에 시작되는 신자의 삶이 삼위일체와의 교제라고 해서 영생이 지난번에 영생에 관한 이야기를 했죠. 영생의 시작, 성도의 사랑, 그 다음에 사랑의 근거 그 다음에 사랑의 목적 그 다음에 아가페와 까리따스, 그 다음의 미완성의 교회. 분량이 상당히 많아요. 내가 생각해도 진짜 많네요. 찰떡같이 잘 소화해서 잘 가르치세요. 우선 첫 번째를 보겠습니다.
여기에서 이제 요문제와 관련해서 염두해 두어야 할 교리적 이해가 있어요. 그것이 뭐냐 하면, 삼위하나님이 계신데, 이 하나님이 이제 그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은 관계를 맺으시기 때문에 드러나는 거야. 왜냐 하면, 삼위하나님 안에서 관계를 맺으신다는 이야기는 지난시간에 했잖아요. 그런데 이것은 우리 눈에 보이는게 아니잖아요. 영원속에서 하나님 자신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관계를 통해서 삼위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알게 되는 거죠. 관계라는 것은 결국 피조물들과의 관계에요. 우선 자연만물들과의 관계도 되고, 그리고 인관과의 관계를 통해서 더 잘 드러나는 거죠. 그래서 이제 이번 사경회때 이야기 하겠지만, 인간과의 관계를 통해서 잘 드러나는 것이 바로 교회에요. 교회. 이 교회를 통해서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계시고 모든 인간들 구원받은 인간들과의 관계, 이 모든 것들이 결국은 교회라고 하는 하나의 범주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번에 사경회때 나오는 교회의 아름다움과 성도의 행복이라고 하는 그것이 그러한 문제들을 다루게 되어요. 그러면 이러한 관계를 통해서 삼위 하나님이 관계를 맺으시는데, 이 가운데 우리가 염두해 두어야 할 것이 뭐냐 하면, 어느 한 위가 이렇게 피조물과 관계를 맺을 때, 이 피조물과 관계를 맺는 것은 항상 어느 한 위가 있어요. 어느 한 위가 피조물과 이렇게 주도적으로 관계를 맺는데, 나머지 두 위가 배제되지 않는다는 것. 그런데 이것은 무엇과 관련되었는가 하면 삼위일체론에서 우리들이 아버지가 그리고 아들을 낳으시고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영이 나오시잖아요. 그렇죠. 그때에 이것이 마치 하나님의 하나의 신적 실체가 있는데 여기에서 이렇게 떨어져 나와서 이게 아들이 되고, 여기에서 이렇게 떨어져 나와서 이렇게 해서 성령이 되고 이렇게 이렇게 되는 것처럼 이해를 하면 안된다 이거죠. 이렇게 놓고 이렇게 놓고 성부, 성자, 성령이 계신데, 이것은 실체가 동일하다. 즉 동일한데 이것은 신적 본질이다. 이렇게 설명하면 안돼요. 이렇게 되면 희랍에서 만신전이라고 있잖아. 만신전. 그러면 만신전 같은데 보면 수없이 많은 신들을 저기 두고 있잖아. 그 사람들 조차도 신의 본성은 동일하다고 보는 거야. 무슨 이야기인지 알죠.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삼위일체론에서 교정해야 할 것이 뭐냐 하면, 셋으로 이렇게 떨어져 있는데 그래야지만 인격적인 교류가 가능해지니까 일체라는 말은 이 본질만 일체라고 말하면 된다고 이렇게 설명하면 안된다. 그러면 뭐냐. 이것은 삼신론이 되는 거야. 지난주에 이야기 했듯이 만약에 신적본질이 따로 있다고 한다면 사신론이 되는 거야. 이러한 식으로 설명하면 안된다는 거야. 그래서 헤르만 바빙크 같은 경우는 뭐냐 하면, 성부, 성자, 성령이 이렇게 삼위로 존재하는 방식 그 자체가 하나님의 존재의 특성이라 보는 거야. 그래서 이제 이레네우스나 성도들은 어려울지 모르겠는데, 이것은 사실은 삼위일체론과 연관되어있는 거야. 이것을 다 구역원들에게 가르쳐야 된다고 생각하지 말고, 참고로 알아두라 이거야. 이러한 기회가 아니면 직접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없으니까. 이레나이우스 같은 사람들은 어떻게 설명했는가 하면, 사람 속에 생각이 있잖아요. 생각이 이렇게 있는데 언젠가 우리가 삼위일체에 대해 해야 하지 않나? 생각이 있는데, 여기에서 이렇게 발화되잖아. 생각이 말이 된다 이거지. 그래서 이것을 성부, 이것을 성자 이러한 관계로 봐야 된다는 거야. 로고스라는 의미가 바로 그러한 의미다. 그래서 결국은 이 두 가지가 사실은 떨어져있지만 떨어져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이 삼위일체를 설명하는 것은 신미학적 모델이라고 부르는 거야. 신미학적 모델이라고 부르는 거야. 이렇게 말하면 안된다. 그래서 이제 자, 그것은 그렇다고 치고 그러면 결국 무슨 일에 관여하든지 한 위가 관여해도 나머지 위가 배제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창조 같은 경우, 성부가 우선적으로 관위하게 되죠. 성자, 성령도 함께 참여하게 되는 거죠. 구속에서는 아들이, 이때에도 성부와 성령이 관여하게 되는 거죠. 구속의 적용이라고 하는 믿음에 있어서는 어떻게 되죠? 영이죠. 그리고 성부와 성자가 여전히 관여하게 되는 거죠. 이렇게 해서 다른 두 위가 절대로 배제되지 않는 가운데 제가 늘 이야기하는 삼각형 이론이 나오는 거죠. 그렇게 생각을 해야 한다 이거죠. 그런데 이제 이렇게 되는데, 역시 그러면 어떻게 되죠? 창조에 있어서도 우리들이 세 가지 전치사를 이야기 했잖아요. 성부에 의해서, 그 다음에 성자를 통해서, 그 다음에 성령 안에서. 이렇게 됐잖아요. 이렇게. 그러면 똑같이 그러면 여기에서 이게 만약에 창조 세계라고 그러자. 창조 세계. 그 다음에 그리고 구속자가 진전되어서 교회라고 설정을 해보자. 교회. 교회. 이 교회는 결국은 뭐지? 재창조된 세계, 재창조 세계로 가는 이행이에요. 이행. 그러니까 당연히 이렇게 창조에 있어서 삼위가 관위했으면 당연히 이 세상을 창조하시는대도 삼위가 관위하실 것이고, 당연히 교회를 창조하시는 것도 삼위가 함께 관위하시는 것이 되는 거죠. 그래서 이제 이 교회도 역시 똑같이 하나님에 의해서 성자를 통해서 성령 안에서 이제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이루시는데 교회를 이루시는 것 만 삼위가 하시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이루심 이것만 삼위의 관여지. 관여가 이루심만이 아니라 교회와의 교통이죠. 교통. 그 다음에 교회뿐만 아니라 성도들 간의 교통, 이것도 역시 삼위가 개입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되게? 맨 처음에 영원 전에 삼위 하나님의 사랑으로 교통하시고, 그 다음에 그 하나님이 창조를 통하여 세계와 관계를 맺으시고 그 다음에 다시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관계를 맺으시고, 구속이 들어오죠. 그러면 이러한 이야기가 되는 거죠. 하나님이 창조세계나 교회와 관계를 맺으신 것은 이러한 영원 안에서 삼위의 교통을 흉내낸 거라잖아. 그러면 이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도들간의 교통도 역시 삼위 하나님의 교통의 모상을 본뜨고 있다. 그러면 이렇게 교회가 순결해지기를 원하고 사랑으로 가득차기를 원하고 이렇게 되어 가는 것은 결국은 뭐예요? 이러한 식으로 교통을 세상으로까지 확대되어 가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신적인 계획이라는 거야. 무슨 이야기인지 알죠?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확장해 나아가는 거야. 맨 뒤에 가서 나오는게 선교가 사랑의 확장이다. 그것이 선교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이것이 성경적인 관념입니다. 성경적인 성장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의미의 성장이에요. 그러한 정도를 염두해 두면 앞부분이 이해가 잘 되리라 봅니다.
우선 삼위가 함께 세우신 교회, 구원하시는 성부, 사랑이에요, 사랑. 읽어보죠.
<본문>
1. 구원하시는 성부 : 사랑
첫째로, 구원하시는 성부의 사랑입니다. 교회는 인간의 경험에 의하여 만들어진 단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세우신 기관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두 기관이 있으니, 가정과 교회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국가, 국가 문제가 나오는데 국가는 하나님이 자발적으로 직접 세우셨다기 보다는 인간의 불신앙에 대한 반응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죠. 그래서 호세아에서 나오죠. 내가 진노함으로 왕으로 주었고, 분노함으로 폐하였노라. 국가가 이렇게 국가라고 하는 제도 그 자체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에요. 이스라엘이 신정국가 시절에도 국가의 형태가 나오잖아요. 그 국가 자체가 나중에 종교개혁자들의 율법과 복음관을 가지고 공부를 하면 이해가 잘되는데, 우리의 외적으로 그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하나님의 법을 우리가 육체를 통해서 바깥으로 이렇게 행사하잖아.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 내가 주님을 너무나도 사랑하면 봉사도 하고 전도도 하고, 육체의 도움 없이 못하잖아. 죽은 다음에 전도 못해. 그렇게 하잖아. 그렇게 육체의 도움을 받고, 또 예를 들면 그것은 안 되는데 그것은 악한 거지 내릴 때, 그 마음이 판단을 내릴 때, 그것이 몸에 영향을 미쳐서 악한 행동을 안하게 하고 불법한 행동을 그치게 하잖아. 그게 육체가 하는 거잖아. 그렇게 교회는 그 교회는 그의 영혼이고 국가는 그 몸이 된다. 국회에서 한 설교가 바로 그 이야기야. 그게 바로 종교개혁자들의 교회와 국가의 관계라는 거야. 그러한 국가의 형태가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 아니에요. 처음부터 그것은 있는 거예요. 그런데 두 개가 완전한 일치를 이루어졌는데, 일치가 이제 나중에 와서 나뉘어 지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왕정 제도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셨던 거예요. 세상의 나라와 틀린 점이 뭐냐 하면 그렇게 창, 칼을 가지고 국권으로 통치하는 커다란 주관자가 없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통치를 공동 생활 속에서 이루어 가는 것, 이것이 바로 신정국가의 이상이거든. 그래서 왕의 보위가 없는 것 자체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드러내는 한 표가 되었던 거야.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기 한거지. 그것이 문제가 되는 거야. 그 다음에.
<본문>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의 몸이라고 불리지만, 이는 인간을 구원하고자 계획하시는 성부 하나님을 통해서 그 설립이 계획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부 하나님께서 공의로운 심판에 따라 이미 사망에 넘겨진 인간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것은 그분의 ‘사랑’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부 하나님의 사랑에 의하여 세워지기로 계획된 기관입니다.
교회를 향한 성부 하나님의 사랑은 교회를 구성하는 지체들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을 토대로 이루어집니다. 당신께서 창조하셨으나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여,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참된 행복과 안식으로부터 멀어져 고통하는 인간들을 향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2. 희생하시는 성자 : 은혜
둘째로, 희생하시는 성자의 은혜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그러니까 여기에서 창조의 경우에 잘 들어보세요. 잘들어야 해요. 창조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는 것과 구속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통하여라고 하는 것은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그리스도의 mediatorship, 중보자직의 문제에요. 그래서 창조에 있어서 중보자가 이르는 방식과 구속에 있어서 중보자가 되시는 방식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주어지는 거예요. 또 세계의 완성에 있어서 진정한 의미에서는 완성이라는 말이 없지만, 그러나 이제 타락한 세계의 부패한 상태가 종식된다는 의미에서 완성을 이야기 할 수 있거든요. 완성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중보자직은 또 다른 의미를 가지고 다가오는 거예요. 본질에 있어서는 일치하지만, 그러나 그 밖에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거죠. 창조에 있어서 그리스도가 중보자라고 하는 것은 구속에 있어서 중보자가 되신다는 이러한 의미가 아니라 친히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창조사역에 직접, 당사자가 되시는 거죠. 그게 바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으니, 아까 이레나이우스의 생각처럼 하나님은 창조에 대한 생각이 있었고 그 다음에 창조의 생각 자체가 말로 발화된 것이라 생각을 하는 거야. 그러면 결국 생각과 말의 차이는 거의 없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창조하신 거예요. 이레나이우스가 하나님이 두 손으로 세계를 창조하셨는데, 성부, 성자와 성령이시다 한 것도 단순한 도구적 기능으로서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과 떨어질 수 없는 것임을 말하는 것이에요. 예를 들면 두손이 있고 생각만 없으면 도자기를 빚을 수 있겠어요? 빚을 수 없어요. 창조물들이 나오기 위해서는 생각과 조선이 필요하듯이 그러한 의미에서 말한 거예요. 이해되죠? 구속에 있어서 중보자직은 그렇게 아버지의 권위로 그렇게 아버지 당사자처럼, 당사자와 함께 창조하신 것이 아니에요. 그러면 뭐예요? 그게 바로 희생이에요. 인간들의 죄를 지시고 죽으시는 그 희생. 이것이 구속에 있어서 중보의 특징이요. 희생하시는 성자의 은혜다 얘기에요. 좀 더 해보죠. 읽어봐요.
<본문>
스스로 그 죄에 대해여 대가를 치를 수 없는 인간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속죄의 희생을 감당하신 분은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이미 창세전에 이루어진 구원 계획을 따라 성자는 성부의 뜻에 순종하여 친히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 오셨습니다(빌 2:6-11).
성자는 자원하시는 희생으로써, 죄의 속박으로 말미암아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갈 수 없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의 지상 생애는 죄인들을 위한 성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하나님이신 자신의 희생을 통하여 나타났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구원 받은 신자들의 영적인 연합입니다. 바로 이러한 연합인 교회가 다시 삼위 하나님과 사랑의 교통을 누리게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는 아무 공로 없는 죄인들을 구원하셨고 이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제물로 주셨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 3:25).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을 대신하여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심으로써 하나님 아버지와 구원받을 자기의 백성들 사이에 화목을 이루신 것입니다(요일 4:10).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실이나 공로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희생의 공로로 이 일을 이루셨습니다.(딛 3:5).
3. 믿게 하시는 성령 : 교통
셋째로, 믿게 하시는 성령의 교통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따라 계획된 인간 구원을 위하여 성자께서 희생의 속죄를 통하여 이 일을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자의 희생하시는 구원사역을, 믿음을 통하여 신자들 안에 적용하여 실제로 구원받게 하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고전12:!3, 엡2:19). 성령 하나님은 죄인의 마음에 감화를 주셔서 성자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성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고, 믿음으로 그 공로를 받아들이게 하시며, 그들로 하여금 성부와 성자를 사랑하게 만드십니다. 또한 그렇게 신자가 된 사람들 안에 계실뿐 아니라 교회 안에 계셔서 그들을 하나의 교회로 연합되게 하십니다. 교회는 이렇게 성령의 역사 안에서 구원 받고 하나로 연합된 무리들의 영적인 연합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이후로도 신자 안에 계시고 교회 안에 계셔서 그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고, 은혜를 주셔서 선한 의지로써 하나님을 섬기게 하십니다.
<김남준 목사님>
나는 이것을 준비할 때, 교회라는 것이 이렇게 아름답구나. 그런데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 했는데, 아마 어느 정도의 철학적 사유가 필요해요. 그때에 그 아름다운 것들이, 제가 아마 아우구스티누스와 에드워즈를 몰랐더라면 이 교회론이 이렇게 아름답게 지금처럼 빛이 나갈 수가 없어요. 사실은 사람이 말이 많아질 때가 언제냐. 강성경 전도사, 언제 말이 많아져? 아니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야.
(대답) 좋은 것을 말하고 싶을 때.
아, 그렇지. 술취했을 때도 그래요. 말이 많아져. 좋은 것을 말고 싶을 때뿐만 아니라 또 말이 많아질 때가 있어. 열받을 때 말이 많아져. 그런데 좋은 것을 봤을 때가 말이 많아져. 그런데 교회론이 분량이 매우 작아. 조직신학에서 교회론이 분량이 굉장히 작아. 이 이야기가 무슨 얘기인가 하면, 아름다움을 많이 못 본거야. 이게 오늘날 뿐 아니라 개신교신학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일종의 약점이야. 그래서 그 나는 이 교회론을 제대로 하려면, 모든 것이 그렇겠지만 고대 교부서부터 차례대로 다 봐야해. 삼위일체론도 보면 오늘날은 대게 2세기 변증가들부터 탁 시작을 하거든. 그것 아니고 사도로부터 가고, 성경에도 나와있지만 클레멘트나 이러한 속사도 교구부터 시작을 해야 해요. 폴리캅이나. 거기에는 완성되고 뚜렷한 형태로 나오지는 않아. 그렇지만 그 존재의 씨들이 쫙 뿌려져 있어요. 그 제자들로 내려오면 이레나이우스나 이러한 사람들 아니야. 이그나티우스 이러한 사람들 거쳐서 그 다음에 속사도 교구 이후에 고대 교구들 거기 쭉 보면서 추적해 나가는 거야. 아주 아름다운 형태들을 보게 되는 거야. 이제 그러한 것들을 아주 아름답게 묘사한 사람이 아무구스티누스야. 그리고 토툴리안 같은 경우도 이레나이우스나 토툴리안 같은 경우는 할 수만 있으면 그들을 중요한 작품만이라도 읽는 것이 좋아요. 아주 교회에 대한 보편교회에 대한 아름다움, 그것에 대한 찬탄과 그 수천년의 시간이 흘렀는데도 읽으면 사랑이 아주 그렇게 보편교회에 대한 사랑이 절절히 절절히 느껴지는 거예요. 거기에 이렇게 안디옥 교회, 로마교회 그런 교회는 없어.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써의 보편 교회에 대한 이방인이나 자유인이나 모든 교회가 가슴이 절절히 느껴질 정도의 이러한 사랑, 아름다움을 보니까 그 사랑을 느끼는 거야. 그러니까 말이 많아지는 거야. 교회론은 굉장히 길어요, 분량이. 복음서를 설교하든, 시편을 설교하든, 무엇을 설교하든지 간에 주석을 하든지 간에 보편교회에 대한 것, 뜨거운 사랑이에요. 그 제가 한번 그 총신에 가서 대표기도를 할 기회가 있었어요. 홈커밍대회가서 천만원 냈더니 기도를 시켜주더라고요. 기도를 하고 왔는데, 온지 얼마 안되어서 교회사 교수에게 전화가 왔어요. 아, 기도에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그 기도가 뭐였었는가 하면, 히폴리투스를 읽으면서 내가 감동을 받았어요. 그래서 이제 그대로 따라한 것은 아니지만, 히폴리투스가 느꼈던 교회에 대한 생각을 가슴에 품고 기도를 했거든요, 굉장히 웅장하게 언젠가 기회가 있으면 들려줄께요. 아주 웅장하게, 그것을 히폴리투스는 갈라져 나간 사람이잖아. 아마 복권이 안되었을거야. 열교자 취급을 받았었는데, 반대로 찢겨져 나갔는데 찢어져 나간 것 자체가 뭐냐 하면 참다운 보편교회를 찾기 위한 몸부림이에요. 종교개혁자들이 갈라져 나온 것을 그러한 시각으로 봐야 해요. 그들은 열교자라고 부르지만, 그러한 교회에 대한 마음. 절절하게 그리는 거예요. 이러한 것들의 실체가 무엇이냐 하면 성령님이에요. 성령님. 그래서 설명을 하자면, 이렇게 되잖아. 이렇게 교회가 있는데 이 교회와 삼위 하나님이 관계를 맺으시는 거야, 이렇게. 조나단 에드워즈가 왜 교리를 배워야 하나에서 다섯 번째가 뭐냐 하면, 재밌으니까. 그게 교리를 배워야 하는 이유였어요. 얼마나 재미있어요? 이런 거 하라고 태어난거야. 이런 거 하라고 하나님이 머리를 위에다가 달아서 내보내신 거지. 이게 디자인 때문에 이런게 아니란 말이야. 이게 실내 장식이 아니란 말이야. 그래서 이제 이렇게 하나님이 하시는데 성자를 통해서 그리고 성부에 의해서 성령 안에서 어쨌든 성부, 성자, 성령님의 관여 하심으로 교회를 이루시잖아. 그런데 잘 생각해봐요. 성부, 성자, 성령 삼위가 계시지만, 이게 교회를 구속하실 때에는 이러한 형태가 되실지 모르지만, 구속이 교회와의 연합 속에서 실행 될 때에는 자리가 바뀌는 거야. 이렇게. 주도적인 역할들을 하시는 거죠. 아버지의 사랑 때문에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속, 아버지의 사랑 때문에 그 다음에 그리스도의 그 다음에 속죄하심, 구속의 공로 때문에 이 것 안에서 성령이 어떻게 관여 하시는가 하면, 여기에 있는 수많은 인생들이 있잖아. 교회학교에서 말이지 이러한 것을 잘 정리해서 아이들 용으로 만들어 가지고 가르쳐야 해. 보다 풍부한 그림으로 아이들 가슴속에 다가서도록 교회론을 가르쳐야 된단 말이지. 그게 교회를 사랑하는 비결이에요. 이렇게 되잖아요. 잘 생각해 봐요. 이 사람들이 원래 여기있던 사람들이 아니라, 한 때 너희는 외인이요 이방인이요 약속이 있었던 외인이었던 자라. 그런데 이들을 불러들이신 방식이 무엇이냐 하면, 보이지 않는 이러한 교회 속에서 하나님의 예정하심대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 사람들을 믿게 하셨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이 사람들이 교회 속으로 들어오게 되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믿음의 시작도 성령을 말미암아서 시작이 되고 그 다음에 그 사람들이 그렇게 된 사람들이 이러한 식으로 그리스도께 모두 개인적으로 결합되어 있잖아. 이것도 사실은 교회와 하나님 사이에 맺어진 이러한 영적인 연합, 이러한 연합 때문에 이러한 연합이 이루어진 거죠. 성도 개개인이 그리스도께 접붙여지는 것은 늘 이야기 했지만, 머리이신 예수께 자기가 최초로 접붙여진다기 보다는 교회의 몸의 일부가 됨으로써 그리스도께 접붙여 지는 거잖아. 이것도 최초, 최초의 믿음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생겨나고, 교회와 하나님과의 원리적인 연합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고 그 연합이 구체적으로 실행되는 개별적인 연합도 성령을 통해 이루어지고 그 다음에 이루어진 연합속에서 사람들이 사랑의 교통을 누리는 것도 성령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거죠. 그래서 지난 시간에 우리 양연식 목사가 질문을 했잖아요. 성부와 성자가 서로 사랑하신다는 이야기는 나오는데, 성령이 사랑하신다는 이야기는 안나옵니까. 성령이 이 사랑 자체야. 그러니까 특별히 성령이 성부를 사랑하시고, 성자가 성령을 사랑하신다는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는 거야.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사랑 그 안에 계신 거야. 이게 바로 아우구스티누스가 신미학적 모델로 이야기했던 이해, 지성이죠. 이해와 그 다음에 사랑과 그 다음에 의지, 이렇게 설명한 모델이 바로 그거야. 그 다음에 사랑하는 자, 사랑받는 자, 사랑 자체 이러한 방식으로 이야기 하지. 아는 자, 알려진 자, 앎 자체 이러한 식으로 묘사하게 되는 거지. 신미학적이고 사회학적인 모델이에요. 그래서 이것이 만약에 성부라면 이것은 성자고 성령이고 이러한 식으로 되는 거지. 이것 두 개가 나뉘어 질수가 없잖아. 왜냐 하면 이해하지 않고 사랑할 수 없고 사랑의 욕구가 없는데 거기에 의지가 있을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설명이 되는 거야.
(질문) 어거스틴이요, 신미학적 유비로서 기억, 이해, 의지를 이야기 하는데요. 어떻게 구분이 되는지 이해와 사랑과 의지하면 지, 정, 의가 들어가는데.
여러 가지로 설명을 한다고,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가지로. 예를 들면 사랑하는 자, 사랑받는 자, 사랑 자체로 이러한 식으로 되고. 기억, 이해, 의지 되잖아. 기억하니까 이해를 하는 거지. 예를 들면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러한 질문을 하잖아. 행복하다는 것을 내가 안다 이거야. 니가 그것을 가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그것을 행복이라는 것을 아냐. 행복에 대한 기억이 있기 때문이 아니옵나이까. 진리를 발견했을 때 아하 하는 것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 아니냐. 이해는 기억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거죠. 그럼 그 다음에 이해를 하고 무엇을 이해하는데서 욕망이 생겨나고 그것들을 어떻게 행하고자 하는 욕구가 생겨나잖아. 의지라고 하잖아. 이해하지 않는데서 욕구가 생겨나겠냐는 거야. 그러니까 그 아우구스티누스가 하나의 확장된 것만을 갔다가 이야기 했다고 말하면 안되고 다양하게 이야기를 해요. 이렇게이렇게도 이야기하고 이렇게이렇게도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사랑하는 자, 사랑받는 자, 사랑 자체 이러한 시각으로 여러 가지 analogy를 이야기 하는데, 여러 가지가 다 똑같아요. 떼어놓을 수 없는 이 속에서의 신미학적 작용들을 보는 거야. 좀 더 설명을 하자면, 우리들이 이렇게 생각하면 되는 거야. 우리들이 여기에 이렇게 있으면 그 다음에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사물들을 보면서 이렇게 보면 이 관계는 이렇게 보이잖아요. 가시적이에요. 이 사물을 하나님이 관계 맺고 있으시다는 것이 보이잖아요. 하나님과 관계 맺고 있는 것이 보여 안보여? 아까도 누가 이야기 했잖아. 하나님이 은혜를 많이 주셔서 그렇게 보이잖아. 이러한 사물들과 하나님과이 맺고 계시는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은 어떤 성품을 가지고 계신 분이시구나. 그리고 하나님의 A라는 성품은 어떤 식으로 시행이 되는 구나. 이것을 알게 되잖아. 이것을 뭐라고 했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요체라고 이야기 했잖아. 그러면 그러한 하나님은 어디냐 거슬러 올라가면 이것을 모르는 거야. 무슨 이야기인지 알죠? 이 하나님을 직접 이러한 성품을 비추게 하신 그 하나님의 존재는 무엇이냐라고 할 때에는 이것은 모르는거라 이거죠. 그래서 지난 시간에 존재의 유비에 대해서도 이야기 했잖아. 어려워요. 이 문제가. 이렇게 되잖아. 똑같이. 잘 들어봐요. 이렇게 보는 거예요. 여기에 이렇게 사물들이 있다고 보자. 여기에 내가 있어. 전부다가 나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야. 그런데 내가 관계를 맺어. 그러면 나의 영혼이 어떠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 없어? 알 수 있잖아요. 성향이라든가, 예를 들면 고기를 보는데 막 군침이 돈다든가 아, 내 안에는 고기를 좋아하는 성향이 있었구나. 등등의 그러한 이야기 할 때 있지, 뭐라 그러는가 하면, 제가요 사실 제가 몰랐는데요, 언어를 해보니까요 제가 굉장히 언어를 잘하는 소질이 있는 것 같았어요. 지난번에 방송에 들으니까 조혜련이라는 개그우먼이 6개월만에 일본말로 방송, 코메디를 했다고 하는데 그러한 것이 나에게 있는가봐요. 어쨌든 가시적으로 드러나잖아요. 그러면 니 영혼은 뭐냐 라고 할 때 역시 모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마스트리히티나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단순성, simplicity tas야. 하나님의 단순성을 가장 많이 흉내낸 존재가 인간의 영혼이다라고 보는 거야. 이러한 맥락에서 칼빈이 인간이 자기 자신을 아는 것만큼 하나님을 안다,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만 자기 자신을 안다고 이야기한 바가 바로 이것 때문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을 모르는 것은 자신에 대한 무지를 동반하게 되어요. 그래서 자신이, 그런데 자신을 관찰함으로써 하나님을 안다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에요. 오늘날의 그 대신 굉장히 종교적이게 되는 거죠. 심리학을 많이 하게 되면, 심리학 자체가 종교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종교적이어 져요. 그래서 내면의 세계를 계속 들여다 보면, 종교화 된다고 복음주의의 동향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에 설명했잖아요. 이것이에요. 하나의 모델이 아니라 여러개를 사용하는데 이야기하는 것은 다 똑같은 것이다.
그 다음에 이제 넘어가요. 더 할 이야기는 있는데 넘어가요. 넘어가고. 삼위가 함께 하시는 교회 이렇게 되잖아요. 그래서 이제 양 목사가 앞부분만 읽어보면 좋을 것 같은데.
<본문>
B. 삼위가 함께 하시는 예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이처럼 성부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 그리고 성령의 교통 안에서 세워졌기에 하나님께 있어서 교회는 말할 수 없어 사랑스러운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다는 것은 곧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하나님의 사랑이 개인적인 것인 줄로만 알았던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랑의 경험조차 이미 공동체 안에서의 체험입니다. 자신이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만났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은 공동체적인 사랑으로 경험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을 비롯한 수많은 가르침들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마6:9) 이러한 가르침은 사도 바울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롬1:7, 고전1:3, 고후 1:2).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개인적으로 아무리 깊이 경험하였다 할지라도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지체들과 함께 경험하지 않았다면 그가 경험한 것은 결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온전한 경험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삼위 하나님은 다시 세 가지 방식으로 교회와 함께 하십니다.
<김남준 목사님>
이게 굉장히 중요한 문제에요. 이게 뭐냐 하면 복음서를 특히 읽어보면, 서신서도 마찬가지입니다만 특히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우리에 대해서 사용하실 때에 두 가지 방식으로 말씀하시는데, 당신과 우리를 하나로 묶으시면서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실 때가 있어요. 예를 들면 주기도문 같은 것, 우리에게 주옵시고 이렇게 예수님께서 가르치잖아요. 또 하나는 뭐냐 하면 우리를 2인칭으로 지칭하실 때가 있어요. 그때 항상 복수에요. 너희의. 하나의 동아리로 보시는 거예요. 그것이에요. 예수님의 이러한 그 이세상에 하나님과 관련된 당신과 관련된 신자들을 공동체적으로 바라보시는 이 안목은 구약에 기반을 둔 거예요. 구약에 기반을 두었는데, 구약 자체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창조의 계획 자체에 기반을 둔 거예요. 그게 뭐죠?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의 커다란 body를 보시고, 창조하셨어요. 이번에 그것 한번 읽어봐. 마크 데버하고 제임스페커, 십자가를 아는 지식을 했었거든요. 번역이 지금 약간 문제가 있어서 나보고 추천서 써달라고 하는데, 전부 번역을 고쳐줬어요. 뒤에 보면 해제를 내가 썼어요. 그거에서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가 나와요. 동방교회의 속죄관과 서방교회의 속죄관이 어떻게 다른지, 아주 중요한 문제에요. 그것을 꼭 읽어보세요. 그 책을 한권씩 사면 좋을 것 같아요. 쉬운 책은 아닌데 그래도 한번 읽어서 패커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는 부분이에요. 고난주간에 읽으면 좋을 거예요.
그래서 이제 잘들어봐요.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국가의 형태가 거의 없었잖아요. 왕, 이렇게 체제로 이루어진 것은, 천부장, 백부장 이러한 것들도 있었지만, 그러나 국가 체제라 보기에는 어렵잖아요. 그러면서도 하나의 공동체적 성격을 강력하게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이 뭐냐 하면, 뭘까. 그렇게 거기에는 중대한 잡족들까지 들어가잖아. 그것을 말하자면 단일민족이기 때문에 강력한 unity가 있었다고 이야기 하면 안되는 거야. 그 구약에서. 그러면 그렇게 다양한 백성들을 하나로 묶어주던 힘이 어디 있었던 것 같아? 응? 굉장히 중요한데, 부흥에서 다 이야기 했는데. 언약안에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라고 하는데, 언약안에 있는 하나님의 관계인데 그 이스라엘에 대한 배교자들이 역사에 보면 속출하잖아. 그래서 이스라엘에게서 갈려져 나가잖아. 그러한 상황들은 설명이 안되잖아. 결국 뭐냐 하면, 객관적으로는 언약안에 있는 관계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주관적으로는 그 백성들이 함께 같은 곳에서 위대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험하는 거야.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unity의 factical한 source예요. 그래서 교회가 진정으로 하나되는 강력한 비결이 뭐냐 하면, 동시에 프로그램을 만들고, 교회 로고를 만들고, 집집마다 문패를 똑같은 것을 붙이고, 심지어 수련회 가서 유니폼을 똑같은 것을 입힌다고 해서 하나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나님을 경험함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같은 동일한 백성이라고 하는 강력한 그것에 들어가요. 그래서 우리가 개인적으로 은혜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여러분들이 사역을 하다보면 함께 모였을 때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부흥이 있어야지만 교회 공동체성이 아주 아름답게 나타나는 거야. 그래서 이제 그 다음에 성도의 계획안에서 나오는데, 에드워즈는 한번 읽어보자.
<본문>
조나단 에드워즈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세상은 대단히 큰 노력으로써 하나님의 교회와 참 신앙을 전복시키고자 끊임없이 폭력적인 박해를 가져왔다. 그리고 교회와 참 신앙을 전복시키고자 끊임없이 폭력적인 박해를 가해왔다. 그리고 교회와 기독교는 파멸 가까이까지 가기도 하였고, 육천년의 대부분의 시기들을 통하여 거의 삼켜지기도 하였지만, 아직도 건재하고 있다. 이것은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능력을 명확히 보여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교회의 역사를 숙고한다면, 그것은 지금까지 존재해 온 어떠한 것들보다도 더욱 기적적이고 경이로운 것임을 알 수 있다. 지구상에 교회와 같은 방식으로 존재해 온 다른 것은 없다.
<김남준 목사님>
그 육천년이라고 하는데, 옛날에 지구창조 4천년을 믿었기 때문에 6천년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거예요. 자, 넘어가겠습니다. 그래서 성부의 계획안에서, 교회는 있고 어떻게 되었죠?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시니까. 자 곽혜정 전도사 그리스도의 삼중적 머리되심이 뭐죠? 머리되심의 삼중적 국면이 뭐라고? 박숙현 뭐야? 새가족 공부에서 다 가르치잖아. 유기체적 통치, 유기체적 섬김, 유기체적 생명. 생명이 제일 먼저고, 유기체적 생명, 유기체적 통치, 유기체적 섬김. 이렇게 되는 거야. 잘했어요. 그렇게 해서 성자의 통치안에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 성자의 통치안에 있다. 그래서 누구든지 잘들어봐요. 성령을 많이 받으면, 예수를 사랑하게 되는거야. 성령을 사랑하게 되는게 아니라, 예수를 사랑하게 되는 거야. 성령은 목표 자체가 당신이 그러한 식으로 사랑을 받는게 목표가 아니야. 예수를 사랑하게 되는 것, 그래서 그리스도의 통치에 누가 한국 교회 유명한 목사님께서 “옛날에는 성부 하나님도 충분히 공경했고, 예수도 사랑했으니까 성령님 소외당하고 계십니다. 균형잡기 위해서 성령을 열심히 사랑합시다.” 이러한 해설에서 오는 웃긴 것이 되는 거야.
그래서 성령을 많이 받으면 결국 그리스도의 통치에 온전히 복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거야. 그래서 사도행전에 보면 순종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성령도 그러하니라. 우리도 예수님의 증인이고 그 다음에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셨는데, 순종하니까 성령을 받았다는 것도 되지만, 성령이 오셔서 순종하는 사람들 안에 있는 성령님도 예수님을 증거하시는 분이시다. 그렇게 해서 다시 두 가지만 나오죠. 48페이지에 넘어가면 둘째 단락에 이중적으로 머리가 되시느니라. 어떤 의미에서 섬김은 통치안에 넣을 수 있는 것이야. 그래서 이중적으로 머리가 되십니다. 그래서 어떻게? 생명을 주시는 구주가 되심으로 머리가 되십니다. 그 다음에, 통치를 하심으로써 머리가 되십니다. 성령의 위로. 그것 한번 읽어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본문>
성부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성자 하나님은 은혜이시며, 성령 하나님은 위로이십니다. 성령께서는 영원히 신자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그들 안에 거하시어 그들로 삼위 하나님과 교통하게 하시며 그들의 위로가 되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니리”(요14:16)
<김남준 목사님>
여기에서 보는 중보자이고, 혜는 은혜혜자인데, Helper에요. 사는 Teacher예요. 이렇게 되죠. 우리가 만든거예요. 아직은 국어 사전에 안나와요. 그 다음에.
<본문>
“그리사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행9:31)
물론 교회를 향하여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위로만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인간들의 마음에 진리이신 그리스도가 믿어지게 하십니다. 죄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감화되게 하여 그리스도께 돌아오게 하고, 이미 믿은 신자들의 마음을 쇄신하시는 것 역시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또한 성령님은 우리가 자기 깨어짐을 통해 거룩해지도록 하시고, 교회에 은사와 능력을 주셔서 교회의 존재목적을 이루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도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사랑하게 도우십니다.
신자들의 영혼을 아름답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격려하시어 선한 일에 힘쓰게 하심으로써 창조와 구속의 목적을 성취하게 하시는 일, 교회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고 진리를 깨달을 수 있도록 죄인들의 어두운 영혼을 계명하시고 지성을 조명하시는 일, 신자들의 마음을 감화하셔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하시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가치 있는 일을 기쁨으로 감당하게 하시는 일도 성령의 사역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이게 영어로 consolation인데, 이것을 성령의 역할로 아주 우등하게 부각시킨 사람이 누구였는가 하면, 청교도들이에요. 청교도들은 굉장히 불안정한 시대에 있었잖아요. 여기에 나오는 거예요. 자기를 사용하셔서 구속 목적을 성취하게 하시는 것,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것, 지성을 조명하시는 것, 이러한 모든 것들이 전부다 다 위로로 이렇게 수렴된다고 보는 거야. 그래서 이제 청교도 작품에 consolation이라는 주제가 굉장히 많이 나와요. 그러고 보니까 그거 한번 하면 좋겠네요. 위로. 이번에 저기 <싫증>이 지금 대박으로 갈 그러한 위기에 있다고 보고를 받았는데요. 일주일만에 2만부를 찍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교보같은 데에는 깔지도 않았는데, 어저께 나한테 기쁜 보고를 하는데 그래서 생명의 말씀사에 가서 서고에 들어가서 설교 시리즈를 다 조사하고 갔어요. 그 다음에 가장 열열히 내고 싶은 책이 <개념없는 그대에게>. 위로. 위로가 되잖아요. 힘들었는데 위로가 됩니다. 성령님의 위로죠. 그 다음에 넘어가겠습니다. 신자의 삶, 이것을 어떻게 보냐 하면, 잘 보세요. 이제 이렇게 코스를 만들어서 제가 꿈꾸고 있는 것이 여러분들이 잘 따라와 줘야 하는데, 이제 좀 성경공부, 교리공부반을 잘 만들어서 고급반을 넘어가면 이렇게 교회론 특강, 삼위일체론 특강 이러한 식으로 해서 이러한 것이 얼마나 재미있겠어. 이렇게 하면서 삼위일체론과 교회론을 같이 배워가야 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에요. 삼위일체론을 신론속에서 삼위일체를 막 다루잖아. 사면으로 계속 가는 거야. 그럴 수 밖에 없는 거야. 그렇게 하면 안되고, 가르침 그 자체를 교회론을 설명하면서 삼위일체론으로 연결지어야 해. 그래서 항상 삼위일체론을 이야기 할 때는 신론속에서만 다루지 말고 이것을 세계와의 관계속에서 다루어야 되는데, 이게 이제 교회와의 관계속에서 삼위일체론을 다루어 가면, 이 삼위일체론이 아주 practical한 교리가 되는 거야. 생각해 보세요. 엘리뇨 현상이 일어나서 쓰나미가 밀려온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뭐냐하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가 나에게는 더 중요한 거야. 쓰나미 밀려와봐야 나에게는 육체밖에 안죽지만, 하나님의 존재가 어떠한 분이신가. 성품이 어떠한 분이신가는 오늘 살아가는 나의 삶 하고 직결되는 거죠. 그러한 점에서 이것을 파악하는 거예요. 그래서 20세기가 신론의 시대로 들어가는 거예요. 80년대는 교회론과 성령론. 그러다가 이제 2000년대에 와서 교회론과 성령론 하다가 신론의 시대로 들어오게 된 거예요. 화려하게 삼위일체가 부활하는 거야. 그래서 굉장히 아름다워.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고. 정말로. 여기에는 이제 서론적으로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 뭐냐 하면, 이거예요. 구원의 삼위일체적 의미는 뭐냐. 구원의 삼위일체적 의미는 결국 인간이라는게 있잖아. 여기에 하나님이 계시고. 인간이라는게 있으면 인간의 삶의 모양이 어떠하든지 결국은 세가지로밖에 설명이 안되는거야. 배향, 전향, 정향, 이게 결국 aversio. 요게 바로 뭐라 그랬죠? 회심이에요. 회심. 회심은 무엇과 무엇으로 이루어진다? 정확하게 이야기해야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죄에 대한 회개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이 두가지로 이루어지죠. 이것이 회심을 이루는 거야. 그 다음에 정향의 삶이에요. 정향의 본질은 뭐죠? 목회의 두가지 목표가 뭐라고 했죠? 그렇지. conversio의 보존이에요. 그러면 이제 무슨 이야기가 나오냐 하면, 결국은 이렇게 전향하게 하는 것은 뭐가 작용해야지 되는 거야? 이게 힘이 없이는 안되는 거야. physical한 작용이라고 하잖아. physical operation 이라고 보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힘적이라고 번역을 해요. 물리적이라고 하는데, 힘적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은혜의 힘이야. 은혜의 힘. 은혜가 conversio시켜서 돌아오게 하는데, 그다음에 어떻게 되는가 하면 정향의 삶을 사는게 문제야. 더 어려운 거야. 사실은. 회심을 일으키는 목회도 어렵지만 그것을 보전하게 하는 것은 더 어려운거야. 더 어려운거야. 왜냐하면 인간이 끊임없이 마음이 찢어지면서 변하는데, 그것을 탐구해내면서 그것을 해야되니까 끊임없는 2가지가 필요한 거야. 끊임없는 지식의 빛과 끊임없는 은혜의 열, 이 두가지가 작용이 되어 쏟아부어질 때 이 정향이 유지되는 거죠. 이 신자안에서, 구원받았다고 하더라도 이 신자안에 있는 이 은혜가 상실 될 때에 죄의 힘은 어마어마한 파괴의 힘을 가지고 다시 배향하는 삶으로 돌아가려고 하잖아. 정향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힘을 요구하는 거란 말이야. 여기서도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보게 되는 거예요. 이러한 것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러한 정향의 삶을 계속 살아가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러한 인간의 삶이 결국에는 둘 중의 하나인데, 이렇게해서 이러한 인간들이 여기에 배향하던 인간들이, 여기 A야. 배향하던 인간들이 돌아오게 되요. 어떻게 해서? B를 통해서 전향을 통해서 돌아오게 되는 거야. 정향을 삶을살아. 이게 C. 그래서 한쪽을 향해 계속 걸어가게 되는 거야. 계속 정향의 삶을 살도록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걸어가는 거야. 그러면 과연 이러한 식으로 정향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이것이 얼마나 자기들 안에는 이러한 삶을 계속하게 하는 힘적 원천이 없는 거예요. 힘적 원천이 없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이러한 것들을 정향의 삶을 유지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로운 방법이 뭐냐 하면, 이렇게 된 사람들이 결국에는 하나의 교회를 이루게 하셔서 그래서 하나님이 이 교회들을 이렇게 삼위 하나님과 교통하게 하심으로써 그래서 실제적인 힘과 능력을 계속해서 이들에게 부어 주심으로써 정향의 삶을 살게 하는 거야. 이것을 나는 무엇으로 보았는가 하면, 삼위일체와의 교제. Societas cum Trinitate, 삼위와의 교제 이것이 구원의 삼위일체적 의미에요. 그래서 삼위일체 관점에서 보면 구원의 의미가 뭐냐, 죄이서부터 구원을 받아서 해방된거다라고 보는 것은 인간론적 관점이에요. 그런데 구원론적 관점에서 보면 이것을 얘기했잖아. 이 그림이 더 잘 보여서 아니면, 이 그림이 잘 보여. 이쪽에서 본거잖아. 이렇게 본거잖아. 그런데 이 그림은 틀림이 없잖아. 뭔지는 잘 모르겠는거야. 그런데 이것은 이쪽에서 본 거야. 뭔지 잘 알겠는거야. 나무토막 그려놓은 것이구나. 그러면 뭐냐 하면, 이것은 한면만 보여, 그런데 이것은 세면이 보이니까 아 이게 뭐구나 잘 알겠는거야. 이해 되죠? 그러면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아까 이야기 했던 것처럼, 우리의 구원이라고 하는 것, 나무토막을 구원이라고 치자. 이것을 이렇게 한쪽에서만 보지 말고, 인간론적인 의미에서 그리고 신론적인 삼위일체적인 의미에서 교회론적인 의미에서, 기독론적인 의미에서 이렇게 보자. 교회론적인 의미에서 구원론적인 의미에서 그 다음에 기독론적인 의미에서 신론적인 의미에서 이렇게 바라볼 때에 아 우리의 구원이 야 정말 그러한 거구나. 야 정말 아름답다 드러나게 되는 거죠. 사람들이 그런 것 있잖아요. 인간론적인 구원론을 극단화 시키니까, 구원의 문제점이 나타나는 거야. 아, 목사님, 그러면 한번 구원받은 것을 하나님이 취소할 수 있습니까. 아, 그래요. 끝까지 죄를 지으면 어떻게 되요? 구원을 받을 수 밖에 없지. 그러면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되었구나. 하나님도 우리를 어쩔 수 없구나 이상하고 희귀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거예요. 인간론적인 관점에서 그러한 거죠. 그러나 다양한 관점에서 보게 되면 이러한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결국은 인간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교회론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 지는 거야. 신론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분 속으로 들어가는 거야. 마태복음 28장에 보면 이러한 말씀 나오죠. 아버지와 아들과 누구의 이름으로 성령의 이름으로가 나오잖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3자인데, εἰς ὄνομα라고 나오잖아. 그런데 이게 단수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3자인데, 어느 하나의 이름이라는 거야. τὸ. 이동이잖아. 이러한 속으로 들어가는 거야. 하나의 이름이에요. 삼위일체를 가리키는 아주 중요한 프로텍스트가 뭐냐 하면, 하나에요. 하나의 이름속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러면 결국 구원론의 의미에요. 이것에 결국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의 몸인데, 신론적인 입장에서 보면 이렇게 신자가 된다고 하는 것은,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삼위 하나님과의 교제의 시작이야. 그리고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며 살아간다고 하는 것 자체가 삼위와의 교제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거죠. 더 진전시켜 볼까. 삼위 안에서 구원받은 신자가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삼위 하나님을 흉내내는 거야. 그분 가신 것을 따라가는 거야. 이 안에서 성도들이 연합을 이루며 살아가는 것 그것 자체가 삼위하나님안에 있는 교통을 본받는 거야. 이러한식으로 신론적으로 아주 풍부한 부분이 나오는 거야. 그러니까 삼위일체론 없이는 교회론이 설명이 안되는 거야. 그러니까 아주 건조하고 가서 가서 한번 확인해봐. 교의학에서 기독론이 제일 짧아. 대부분 다 성례에 집중되어 있어. 이러한 것에 집중되어 있지 않고, 청교도들의 작품들도 똑같이 이러한 한계들을 가지고 있는 거야. 깊이 안들어갑니다. 깊이 고민해야 할 것들이에요. 그래서 학문의 질이라는 것 자체가 이게 insight에 의해서 결정되는 거야. 그렇게 해서 막 퍼져가는 거야. 이러한 이야기는 너무 내 자랑이 될까봐서 걱정이 되는데, 여러분은 나에게 저기 스틸마투트 예수 설명 들었죠? 강의 들었죠? 안들었어요? 여기해 했나? 영국에 가서 했는데 내가 주장한 학설은 소수설입니다. 그렇게 비슷하게 주장하는 사람도 거의 난 못봤어요. 나는 핍박설은 절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할례의 표식이 어디있는지 알죠? 바울이 너희들은 그 고추의 지금 흔적이 있다고 자랑하냐? 나는 등대기에 있다. 그러한 식으로 말했을지 없다 이거예요. 나 채찍 맞은 거 봐라. 등대기에 있다. 사도바울은 그렇게 말하지 말고 나는 고추에도 있고 등대기에도 있다고 이야기해야 하잖아. 나는 그러한 가능성은 문학은 조금만 알아도 그러한 가능성은 없단 말이죠. 그것을 천천히 설명을 했어요. 거기에 누가 왔었는가 하면 영국 런던의 신약학 교수가 와있어요. 끝나서 나를 만나자고 해요. 어디서 찾아냈냐고 해요. 나는 찾은 것 아니다. 성경을 읽고 사유해서 그리고 로마시대의 노예에 대한 자료를 보면서 스티그마티제이션을 보았다. 그러면서 목사님, Ph.D 논문감입니다. 자기가 딱 그것을 듣는 순간 필이 딱 오드래요. 그것을 전기에서 논문 어디 발표했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했다고 우리 교회에서. 설교시간에. 완성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탁월한 Ph.D라는 거예요. 자기는 듣는 순간에 전개가 된다는 거예요. 형상 이론으로서. 그래서 설득이 되었습니까. 충분이 되었습니다. 충분히 설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학을 하는데 있어서 이 신앙의 체험은 무지하게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엊그제 독일에 갔을 때, 정경화 부부 만났잖아. 이야기하지 마라. 너 여기도 기도 많이 하고 이 교회가면 너는 열린교회 교인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고 여기 있는 동안에 그 교회에 가서 열심히 교회를 섬기고 그리스도의 몸을 위하여 봉사해라. 3년동안 열린교회 잊어버려도 좋으니까 여기있는 동안 열심히 섬기도록 해라.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몸을 사랑하며 살도록 해라.
그래서 결국 성화의 삶은 삼위 하나님을 흉내내는 거예요. 그것은 거룩한 거예요. 그런데 이게 Societas 교제가 없이는 이럴 수 없는 힘이나 자원들이 교회의 형식적인 제도나 사람들의 마음이나 죄인들 속에서는 나오지가 않는다 이거야. 나올 수가 없는 거란 이야기야.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삼위일체와의 교통 이것이 결국에는 시작되는 것이 이게 전향, 회심이고 그것들을 계속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이게 결국에는 conversio의 보존이란 말이에요. 회심을 보존하는 것이야 목회하는데 있어서. 그것은 결국에는 하나님과의 연합속에서 살아가는 삶이라는 것이야. 그래서 객관적으로는 언약이 있고, 주관적으로는 그 언약을 보존하는 은혜가 있는 거야. 그렇게 하면서 이것이 실재를 이루며 살아가게 해 줄 때, 하나님과의 Societas없이는 불가능한 거야. 아름답잖아. 나는 막 펑펑 울정도로 감격을 했었던 부분이야, 이 부분이. 완전히 새로운 교회론의 지평을 보는 그러한 거야. 이게 사실은 교부들에게 있어서 끊임없이 흘려 내려오던 위에 세워지는 모든 교회론의 자양분이었다고 밑에 깔려진 부분이. 이러한 것들을 다 잘라내 버리고 거기에다가 세우려 하니까 그렇게 교회론이 건조한 거야. 20세기 책들의 교회론을 봐봐요. 뭐. 스펄전이 이야기 한 것처럼 특별한 흠은 찾아 낼 수 없지만 그러나 왠지 가슴에 다가오는 거야. 이것을 우리 삶속에서 막 녹여내면서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거야. 이게 진짜 교회의 신학, 사랑의 신학이에요. 그게 바로 50페이지에 나오는 A부분을 이야기한 거야. 그래서 이제 구조를 보면 이렇게 되잖아. 삼위와의 교제의 시각이라 이야기라 나오잖아. 이 전도사님 한번 읽어보세요.
<본문>
우리는 구원받은 신자들이 누리는 행복이 영생이라고 말합니다. 이 영행의 실재가 바로 삼위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영생은 단지 죽지 않고 오래도록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 곧 영원한 생명의 참된 의미는 그 반대인 영사를 생각하면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육체에 있어서 죽음은 소멸이나 멸절을 통해 비존재가 되는 것일 수 있어서는 그런 종류의 죽음이 없다는 사실을 보십시오. 인간의 영혼은 불멸하도록 창조되었고, 이는 신자의 경우이든 불신자의 경우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영혼은 불멸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육체는 소멸되고 멸절되지만, 후에는 모두 새로운 형상을 되찾게 될 것입니다. 그런 데 우리는 구원받지 못한 영혼이나 지옥에 던져진 영혼들을 단지 존재한다는 이유 때문에 영생의 상태에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영생의 의미는 이것이니 곧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김남준 목사님>
그곳 줄치세요.
<본문>
삼위 하나님과의 교통속에서 무한한 하늘 지원을 공급받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생은 하나님과 파멸될 수 없는 생명적인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요약하여 말하자면 신자는 중생과 함께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교회의 지체가 되는 것과 함께 영원히 계속될 삼위 하나님과의 교제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거기서 사랑과 은혜, 그리고 위로를 공급받으며 자신의 창조와 구원의 목적을, 교회를 통하여 지체들과 함께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그 다음에 성도의 사랑이 나오는데, 이제 그 영생의 시작이 삼위와의 교제의 시작이고 영생의 삶의 지속이 삼위와의 교제의 계속이라고 본다면 그러면 이제 교회는 성도의 사랑, 이제 안으로 들어가는 거야. 교회 내부로, 여기서부터 어떻게 되는 거죠? 이렇게 생각하면 되요. 이태까지 이야기 한 것은 이것을 이야기하는 거야. 그렇죠. 지금은 이제 이 안으로 들어가서 이것을 이야기하는 거야. 관점 이동을 하는 거야. 그렇게 볼 때에 뭐냐 하면 성도의 관계라고 하는 것은 성도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삼위간의 교제의 모상이다 이거죠. 그래서 성도의 사랑 자체가 사랑 자체가 성도가 예를 들어서 은혜를 많이 받아서 이 사람이 사랑을 느끼고 있다고 치자 이거야. 잘들어봐요. 사랑을 느끼고 있다고 쳐요. 그러면 이 사랑의 특징 자체가 뭐냐 하면, 그 포괄성을 갖는 거예요. 그래서 이 사랑이 있으면 이 사랑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해요. 그 다음에 또 교회를 사랑하게 하고, 그 다음에 이러한 사랑의 연합과 교통을 이 세상도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이렇게 삼중의 방향으로 사랑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뭐냐 하면 이 자체를 두 가지로 이야기했는데, amore라고 하잖아. 사랑인데, amore societatis , 그 다음에 amore privatus 결핍된 그러한 뜻인데 이것을 나는 이제 뭐라 했는가 하면, 사회적 사랑, 사적 사랑이라고 카톨릭에서 번역을 하거든. 나는 그렇게 안보고 자체가 사회라기 보다는 교통이라고 보는 거야. 나는 그래서 교통애라고 부르고 그 다음에 이것을 단절애라고 부르는 거야. 단절애. 그래서 이것은 뭐냐 하면, 사랑이 있는데, 잘들어봐요. 사랑이 있는데, 이 사람이 결국은 그 다른 사람들과 교통하게 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과 교통하게 하고 있어요. 하나님과 교통하게 하는 사랑으로서 다른 사람들과 교통하게 될 때에는 이것이 계속 흐르고 이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또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거든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 이게 교통애가 아니라 단절애가 되게 되면 내가 아무리 먼데 있는 사람을 사랑해도 이것이 사랑이 이렇게 멎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와서 멎는 거야. 그래서 사실은 확장이 안되는 거야. 그러한 의미에서 이것을 단절애라고 부르는 거지. 단절애의 대표적인게 에로스의 사랑이잖아. 예를 들어서 사랑에 빠졌다고 하면, 누리고 싶지 뭐 수많은 사람하고 같이 있고 싶지 않잖아. 예를 들자면. 그러한 식으로 사적인 사랑은 단절애에요. 이게 확장되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에서 사랑하는 자, 진정한 사랑에 들어가게 되면 자기 자신이 없어지는 거예요. 자기 자신의 참된 만족은 이 신적 사랑을 이렇게 유통하도록, 흐르도록 만들어 주는 통로가 되는 것 자체로 충분히 자신이 만족을 하게 되는 거야. 그게 결국은 성도의 하나님에 대한 만족의 사랑이론을 그러한 식으로 표현하면, 하나님만으로 만족합니다가 무슨 뜻인가 하면 나는 없고 당신의 사랑을 이렇게 흘려보내고 당신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이러한 도구가 되는 것 자체로 충분히 만족합니다. 그것이 신론적인 표현이 하나님만으로 만족합니다. 이러한 표현이에요. 무슨 이야기인지 알죠? 재밌잖아요. 이러한 식으로 설명이 되는 거야.
그래서 여기에서 이제 아가페 까리따스의 개념이 나오거든요. B번을 보겠습니다.
<본문>
이렇게 영생이 시작된 성도의 사랑은 삼위 하나님의 교제의 모상입니다. 그리고 아가페의 사랑인 사랑인 삼위 하나님의 사랑은 신자들의 공동체 안에서 지순의 사랑 즉,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이 삼위 간에 교통하는 사랑의 모상인 교회에 참여한 신자들의 개인적인 구원의 경험을 통하여 까리따스를 소유하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신자들이 이러한 개인적인 구원 경험을 통해서 공동체를 향한 사랑을 체험함으로써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을 알아가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자의 공동생활이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삶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국 누구도 이러한 공동체적인 사랑의 앎의 성숙이 없다면 온전한 신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교리적 사실을 이해함에 있어서 다음 사항들이 숙고 되어야 합니다.
<김남준 목사님>
이제 그렇게 결국은 사랑을 통해서 사랑이 그 자체가 지식을 알아가는 과정이고 그 다음에 사랑을 통해서 그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알아가는 과정이에요. 무슨 뜻이냐 하면 이야기 하면 긴데, 여기에 보면 아까 그러한 이야기 했잖아요. 결국은 하나님의 속성이 있고, 속성이 시행되는 방식이 있는데, 방식이 있는데 이 두가지에 대한 앎이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아는 것이다. 말씀드렸잖아요. 잘 봐요.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하나님의 속성이 있고 그 속성이 시행되는데 사실 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구획이 나눠져서 사랑, 공의, 의, 거룩함 이러한 식으로 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어떻게 말하자면 하나님이 인간들과 관계를 맺으실 때 공의의 측면도 나타나고 그 다음에 또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측면도 나타나고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이러한 모든 다양한 하나님의 속성들, 속성들이 인간과 관계를 맺을 때, 각각 다른 효과들이 나타나겠죠. 공의로움의 하나님의 속성이 시행이 될 때 극단적인 심판을 받고 고난을 받으며 하나님을 잘 섬겼던 사람들은 하나님이 보상을 해줄 것 아니야. 이러한 식으로 각각 다르게 나타날 것 아니야. 그런데 사랑은 이 모든 것들 속에 무슨 성품이든지 간에 인간과 하나님이 관계를 맺을 때 모든 속성이 나타남 속에 배여있는 것이란 거야. 사랑 자체가. 그래서 뭐냐 하면 하나님이 극단적으로 심판하는 것도 하나님의 사랑의 나타남이라는 거야. 나타남이야. 그래서 개인의 삶속에 나타나잖아. 하나님이 우리가 잘못하면 막 때리시잖아. 때리시고 어루만져. 이러잖아. 때리실 때 아프고 몸이 터지고 피가나고 그러는데 그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이 되어요. 그러면 반대로 용서하실 때에는 없겠네. 때리실 때 사랑이 피와 함께 나타나니까 용서할 때에는 날라가겠는가. 용서할 때에는 용서하시는 그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베어나와서 자기가 경험하고 있는 하나님의 속성 안에서 가장 강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 같은 그러한 인상을 신자들이 갖는다는 거야.
문제는 그것을 인식하느냐 못하느냐. 세계와 맺으신 하나님의 관계 자체가 사랑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
<질문> 아까 설명하실 때 성령님의 사랑 그 자체로 말씀하셨잖아요. 그러면 그 성부와 성자에서 나오는 것은 알 것 같은데요, 삼위간의 교제라 할 때 사랑의 교제할 때 성부와 성자, 성령하고 두 분이 성령하고 사랑하고 교제할 때.
<김남준 목사님>
두분이라고 자꾸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아까 이야기한 대로 지금 우리는 이렇게 있잖아. 페르소나라고 할 때 인격이라고 할 때, 이렇게 이렇게 생각하면 안된다 이거야.
<질문>
본질적으로 뭐가 근거가 되는가요. 그것도 사랑 자체인가요? 삼위간의 그 사랑이 존재할 때 그때는 본질적으로 성령을 대상으로 하는가, 뭐가 근거가 되는가요. 사랑 그자체가 성령님이라고 말하면, 그 교제할 때 성부와 성자와 교제하는 것 자체가 사랑이라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러면 그 대상이 본질적으로 성령이 될 때에는 그것도 그자체가 사랑이 되는 것입니까.
<김남준 목사님>
그렇죠. 성령님은 삼위중 한분으로서 아버지와 성령께 사랑을 받으시면서도 동시에 사랑자체 이시죠. 대게 종교개혁자들은 그러한 설명까지 안가요. 창조세계 안에서 보는 거지 그러한 위로 올라가지 않아요. 설명을 해보는 거죠. 그래서 그렇게 보면 안된다 이거죠. 아까 이야기 했듯이 예를 들자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알 때까지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 우리를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반응할 수 없게 되잖아. 그러면 예를 들면 강윤석 목사가 95년도에 회심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고 하면 그 전에는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으셨겠어? 계속 사랑했는데 회심하니까 나에게 계속되었던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었던 것이지. 그래서 이제 결국은 이렇게 생각하면 되는 거야.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선택한 자들을 사랑하는 거야. 그래서 그 야곱과 에서 이야기 할 때 하나님이 이는 미워하시고 저는 사랑하셨다 하잖아. 그러면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던 사랑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결국 선택의 문제와 관련이 되잖아. 그것을 아느냐, 모르느냐는 별개의 문제이지. 그렇게 해서 이제 이게 전개가 되는 거예요. 다 못하겠다. 절반만 해야 되겠다. 그 다음에 51페이지로 가게 되면 사랑의 근거 그랬거든요. 여기에 보면 서로의 아름다움을 보기 때문에 결국은 사랑한다는 거죠. 거기에서부터 시작해서 다 못하겠다. 1번정도까지만 하면 중간 안될까? 1번 정도까지만 하면 중간 될 것 같은데, 뒤에는 좀 쉬워요. 1번 자 그 다음사람 읽어봐요. 사랑의 근거.
<본문>
첫째로, 지체로서 성도들의 서로를 향한 사랑의 근거입니다. 사랑은 한 대상을 목표로 정하고 그것을 끊임없이 즐거워하려는 영혼과 마음의 작용입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사랑의 동기는 언제나 아름다움입니다. 인간의 영혼이 사물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면 그것을 목표로 정하게 되고 그것을 계속해서 즐거워하려는 애착을 갖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과 정신의 작용이 사랑인 것입니다.
성도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께 접붙여져서 그의 몸의 지체가 된 사람들입니다. 성도는 진리를 통하여 삼위 하나님의 아름다우심, 곧 신미를 봄으로써 그분을 사랑하게 됩니다. 또한 진리를 통하여 교회 안에 있는 삼위의 교제의 모상을 발견함으로써 복음 안에서 드러난 영속되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성도는 교회를 사랑하게 됩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를 이루는 신자 각 사람의 영혼의 아름다움 안에서 하나님의 아름의 아름다움과 그들의 연합의 질서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성도들은 서로 사랑하게 됩니다. 이 사랑은 모두 하나님의 아가페를 경험하는 데서 비롯된 까리따스, 곧 지순의 사랑이며 이 사랑의 교통적 성격 때문에 교회와 성도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러한 교리적 사실들을 이해할 때 다음 사항을 숙고해야 합니다.
<김남준 목사님>
여기에서 이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있는데, 이번 사경회때에도 거론이 될 텐데요. 음 이렇게 놓고 뭐가 나오는가 하면, 이정도만 할께요. 이게 뭐냐 하면, (아슬레 티브하 우 티카레브 ..... 아 베투브 베티카) 이렇게 다오거든요. 당신이 선택하시고 당신이 가까이오게 하신 사람의 행복이여. 나오고 우리는 배부를 것입니다. 뭐냐 하면 베투브 베테카라고 하잖아요. 여기에서 나오는 투브가 당신의 집이고, 투브가 토브에요. 선이잖아. 히브리에서 미라는 뜻으로 같이 쓰여요. 그래서 선과 미는 하나에요. 그래서 뭐냐 하면 야, 그 여자 참 예쁘다 할 때 그 뭐 8등신이고, 조각처럼 깎아내고 외모를 보고 예쁘다 하는 것은 헬라적 개념이고 여자로서 딱 적합한 것, 아이 잘 낳고 그 다음에 남편에게 가사 일을 잘 돕고 그러한 것이 아름다움이에요. 선과 미가 일치를 이루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선하심이다 할 때 이것을 이렇게 표시해요. 하나님을 이제 이렇게 이렇게 윤리적인 관점에서 보면 선이 되지만 미학적 관점에서 보면 최고 가치가 미가 되는 거예요. 종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성이 되는 거야. 그 다음에 인식론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진이 되는 거야. 진, 선, 미, 성 이 모든 것이 정상의 하나의 개념이에요. 이게 아름다운 자체가 선함이라는 거죠. 이문제도 부분적으로는 다 설명을 했는데 여러분들이 다 기억을 할 리가 있겠어요? 그죠. 그래서 사실은 많이 이야기 한 것은 다 알고 있는 것 같아서 이야기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이제 그것도 별로 이렇게 힘도 안나고 말한 거라서, 처음 말할 때 힘이 나죠. 그런데 이제 이런게 뭐냐 하면 이렇게 되는 거죠. 그 사랑이 있는데 첫째,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사랑의 대상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혹은 유익을 주기 때문에, 여기에서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good이에요. 에드워즈가 잘 쓰는 표현인데 외관적 아름다움이에요. 진짜 아름다운 것일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는 거예요. 이러한 유익, 이러한 유익들이 있기 때문에 사랑하게 되는 것, 이러한 것들을 목적애라 하는 거예요. 그 다음에 그게 아니라 이것은 개체의 문제잖아. 개체가 아니라 사랑하는 주체 자체가 성향이 사랑이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흘러나오는 것 때문에 사랑하게 되는 것을 가리켜서 우리가 박애라고 하는 거예요. 이러한 사랑이 두 개로 나뉘어 진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는 하나로 통합되는 거죠. 어떻게 통합되는지 굉장히 중요해요. 잘들어보세요. 성도들에게 잘 설명을 해야 해요. 어떻게 이것이 통합이 되는가 하면 이러한 식으로 되는 거예요. 목적애는 대상이 갖고 있는 아름다움때문이잖아요. 그림을 그리면 이렇게 되잖아요. 여기에 사람이 있는데, 이러한 인간이 있다고 치자 이거야. 그런데 대머리는 벗겨지고 배는 툭 튀어나오고, 다리는 연아와는 정반대로 정말 짧고, 이렇게 되었다 말이야. 한 마디로 이야기해서 못생겼어요. 그런데 이 사람속에 잘 보면 이 사람속에 사랑이 있는데, 이 사랑이 조금 있을 때 그리고 많이 있다 그러면 조금 있을 때에는 외관에 의해서 파악을 해. 되게 못생겼네. 추 이렇게 판단하는 거야. 결국은 뭐냐 하면 사랑을 덜 느끼게 되는 거죠. 조금 사랑해. 그런데 이제 사랑이 아주 많아졌어요. 은혜를 받아서 되게 사랑이 많아졌어요. 이 사람을 쭉 보는 거예요. 이렇게 보는데 전에는 외관을 이렇게 보는 거예요. 외관이 아니더라도 단점이 이렇게 보이는 거야. 그래서 적게 사랑하게 되는 거야. 그런데 이 양반이 은혜를 받아서 아주 사랑이 많아졌어요.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이 사람속의 영혼이 보이는 거야. 이 사람속의 영혼을 보니까, 뭐냐 하면 아주 외관이 이럴만한 단점이 있는데도 이 사람의 정신과 영혼이 아주 아름답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거야. 그래서 결국 뭐냐 하면 박애하게 되는 거야. 아주 많이 사랑하게 되는 거야. 이제 그것은 뭐냐 하면 객관적으로 이 사람이 갖고 있는 좋은 점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이럴 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 이럴 때는 더 많이 보게 해주는 거야. 무슨 이야기인지 알죠? 그러한 점에서 이 목적애와 박애애는 통일을 이루는 거야. 이것을 칼빈이 형상이론으로 설명을 하는 거야. imago Dei를 보게 해준다 이거야. imago Dei 때문에 가장 비참해 보이는 인간도 외관이나 단점에 메이지 않고 그 사람이 갖고 있는 imago Dei를 보게 해주는데, 이것을 보게 하는 것이 성령과 진리가 하시는데, 이 사람의 사랑의 속성을 통해서 하신다는 거야. 사랑의 성품을 통해서 하시게 되는 거야. 그러면 어떻게 되요? 박애가 많은 사람일수록 어떻게 보면 이러한 이 사람 안에 있는 이 아름다움을 많이 보게 만들어 주는 거야. 그래서 우리가 은혜를 많이 받으면 성도들을 사랑하게 하는데, 그 사랑이 뭐냐 하면, 얘전에 안보였던 이 영혼의 아름다움을 보게 만들어 주는 거야. 지난번 1교구 할 때 보면 남편이 영혼으로 보이는 거잖아. 그러니까 이러한 단점과 결점에도 불구하고 남편을 사랑하게 만들어 주는 거야. 그래서 이렇게 다애하게 만드는 거야. 도덕적 통치에 들어가서 이 부분을 상사하게 설명한 부분이 있거든, 꼼꼼하게 정리해가지고 책속에다가 기록을 해놔. 여기까지만 해야 하겠다.
<질문> 이해가 가는데요. 이해가 있었는데, 어느 정도 이해가 풀렸는데요 성경이 타락한 인간을 향하여 이야기 할 때에는 전적인 부패를 이야기하고 전적인 투항을 이야기 하는데, 남아있을 수 없다라고 한다면, 없는 것을 있는 척 하며 사랑하라는 것인가 라고 하는.
<김남준 목사님>
남아있죠. 하나님의 형상은 잔존하고 있죠. 그 희미한 것 만이나마 사랑하는 것. 그 발가락이 닮았다 못 읽어봤어? 너무너무 사랑하니까 아무것도 닮은 것이 없는데, 발가락이 닮았구나 이놈 내 자식이구나. 사랑이 그렇게 만드는 거야.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하잖아. 하나님의 사랑이 무한하니까 지극히 작은 것도 무한하게 보이는 거죠. 임목사를 많이 사랑하는 사람들은 단점이 많이 있어도 그대가 가지고 있는 객관적인 장점은 분량이 있을 거잖아. 그게 사랑의 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많아 보이는 거고. 사랑의 분량이 없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없는 것처럼 보이는 거지. 하나님은 무한한 사랑이시니까 당신 자신의 형상을 그 안에서 우리가 보는 것보다는 훨씬 더 많은 것들을 보면서 우리를 그 눈물겹게 사랑하시는 것이지. 구속의 드라마를 전개해나가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란 말이지.
<질문> 하나님의 사랑은 이해가 되는데, 사람들이 그...
<김남준 목사님>
그러니까 뭐냐 하면, 우리 그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부음바 되었으니, 이렇게 보어지는 것은 아가페 사랑인데, 그것이 이렇게 부음바 되었으니 나타나는 것이 caritas의 사랑으로 나타난다고 하는 것, 이것이 caritas 이론인데, 그러니 결국에는 뭐냐 하면 이 agape는 삼위 자신 안에서의 교통을 포함하는 우리 자신을 향하여 발현되는 사랑이지만, 인간의 사랑은 삼위 자신안의 교통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통하고 인간과 교통하기 위한 사랑이잖아. 그러면 이러한 하나님의 거의 없는 희미하게 남은 흔적을 이 무한한 사랑 때문에 이것을 굉장히 크게 보시는 것, 이러한 작용이 caritas의 사랑안에 있다는 거야. 그래서 이 사랑이 신비라는 거야. 이 사랑이 신비인 거야.
<질문>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는 관점, 내재하는 죄로 인해서 모든 것들이 파괴되어서 그 안에 있는 것들로 사랑하기 보다는 그 관점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이것에 대한 문제점이...
<김남준 목사님>
중생의, 중생의 의가 뭐라 그랬나? 중생의 존재론적인 의와 무슨 의가 있다고 했지? 이신론적인 의. 이신론적인 의가 뭐지?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신미를 보게 해주는 거야. 그것을 얹어 주는 거지. 찬송가에도 보면, 천국과 지옥도 나는 몰랐네.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께서 눈을 뜨게 해주니까, 보이잖아. 똑같이 인간안에 있는 잔존하는 하나님의 형상이 하나님의 사랑이 확 부어지면 굉장히 크게 보여주시는데, 그러한데 주의할 것은 무엇인가 하면, 그 자체가 그 인간에서 자가 발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라 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없는 휴머니즘에는 빠지지 않는 거야. 그것은 불가능한 거야. 성격적으로 불가능한 거야. 원래 사랑은 하나밖에 없는 거야.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는 왜곡된 세계관에 의하여 하나님이 잘못 해석되어서 수많은 종교가 생겨나듯이 이것이 개소리하는 사랑이 많아도 그것은 다 개소리이고, 사랑은 하나밖에 없다는 거야. 이렇게 보자. 이렇게 생각해 보면 되지. 여기에 딸기가 있잖아. 이렇게 보는 것과 빨간 안경쓰고 보는 것과, 파란 안경 쓰고 보는 것과 그 다음에 또 난시환자들이 쓰는 보고 보는 것과 볼록렌즈, 오목렌즈로 들여다보면 온갖 것이 다 틀리게 보이는 거지. 그리고 각기 자기 사랑을 이야기 하고, 그것으로서 건너편에 있는 세계를 재투사하려고 하는 거야. 봐. 여기에 여기에 이러한 물체가 있잖아. 객관적으로 이러한 물체가 그런데 이렇게 이 인간이 이렇게 이렇게 오목렌즈로 들여다 봤어. 인간이 이렇게 보일 것 아냐. 어? 맞잖아. 아닌가? 반대인가? 반대이구나. 볼록렌즈로 봤다 이거야. 볼록렌즈. 이것이 이렇게 보일거 아냐. 여기에는 이것도 있고 이것도 있고 이것도 있고 이렇게 다양한 것들이 있잖아. 다양한 것들이 있다고 치고, 이것을 여기까지는 현실세계야. 이것은 자기의 본색이야. 그리고 이것을 가지고 들어가는 거야. 그리고 이게 이것보다 크다고 주장하는 거야. 그게 바로 우리가 이야기하는 무슨 뭐, 사랑을 이야기 할 때 다 영원의 개념이 들어가는 거야. 나라를 사랑하면 애국자에게는 나라가 무한한 가치요, 그 다음에 최고의 존재인 것처럼 보이는 거야. 한용운 시인의 님의 침묵에서 님은 나라잖아. 그러한 식으로 보세요. 영원하게 나는 죽어도 나는 영원하다. 이념을 통해서 죽든 뭘 위해서 죽든, 모두다 인간의 참된 휴머니티를 짚밟고 억합하는 거란 말야. 이러한 잘못된 사랑에서 해방시켜 주는 것이 하나님의 참된 사랑이기 때문에 기독교야 말로 참된 휴머니즘이다라고 하는 설명이 이와 관련되는 거야.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되죠?
그럼 보겠어요. 뒤에 쭉 넘어가서 1번까지만 해요. 1번까지. 그래서 결국은, 그냥 넘어가겠어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성도. 그게 뭐냐 하면 사랑의 근거, 하나님 때문에 성도를 사랑하게 되는 거야. 하나님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면 돼, 이중적이지 하나님 때문에 받은 사랑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시니까 사랑하게 되기도 하지만 그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성도들안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게 만들었기 때문에 사랑하죠. 그래서 남을 사랑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일방적인 보답의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안돼. 하나님은 그렇게 안하신단 말이야. 그래서 그 사랑을 받은 사람만이 성도간의 아름다움을 알게 만들어 주는 것이에요. 그 다음에 두 번째가 뭐죠? 마지막으로, 성도와 교제하시는 하나님 거기까지만 하겠습니다. 54페이지 위에 첫 단락까지만 인도를 해요. 너무 양이 많아서 작은 과는 한번에 나가지 이것은 너무 양이 많아서 두 번에 가요. 한번에 다 못할 것 같아요. 이러한 식으로 문제를 여러분들이 천천히 풀어보고 그리고 사유를 넓혀가기를 바랍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여러분들, 정말로 이번에 사경회를 잘 들으세요. 그러면 7번을 설교할 것이거든, 어젯밤 1시되서야 겨우 다 끝났는데, 7번을 설교 할 텐데 그 설교되는 것들을 잘 메모를 하면서 들으면서 이것하고 잘 결합을 시켜요. 여러분들이 훨씬 더 이해가 잘 될 꺼예요. 질문 있으면 한번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