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사람의 영향력
(2011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11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눈물로 보낸 사람(행9:39) 2011.10.17 가을말씀사경회 새벽 1
2. 선한 증거를 가짐(딤전3:7) 2011.10.18 가을말씀사경회 새벽 5
3. 깨끗한 양심과 믿음의 비밀(딤전3:9) 2011.10.19 가을말씀사경회 새벽 10
4. 착함, 복음적 교리의 본질(빌1:5-6) 2011.10.20 가을말씀사경회 새벽 15
5. 착한 사람과 초자연적 덕(행11:24) 2011.10.21 가을말씀사경회 새벽 20
착한 사람의 영향력 1 (2011.10.17. 가을말씀사경회새벽)
1.눈물로 보낸 사람
베드로가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가서 이르매 저희가 데리고 다락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행 9:39)
녹취자 : 김세나
오늘 여기에 보면 도르가라고 하는 사람이 등장을 합니다. 이 여 제자라고 되어 있는데 이 사람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알 수 있는 정보가 없으니까, 남편이 있었던 여자인지 아니면 있었다가 잃은 여자인지, 원래부터 독신이어서 예수를 믿은 여자인지 언제 회심을 했는지 자세한 정보가 없습니다. 여 제자가 있고 이 사람이 과부를 섬겼다는 이야기를 볼 때, 아마 이 일이 일어날 때에는 확실히 독신이었던 여자가 아니었을까 조심스럽게 추측을 해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고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선행과 그리고 구제하는 일 때문이었습니다. 선행과 구제하는 일로 많은 사람에게 알려졌고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 여자의 착한 행실로 말미암아서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병이 들어서 죽었습니다. 역시 이 여자가 병도 노환이었는지 젊은 나이에 병이들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병이 들어서 죽으니까 당시 관습을 따라 시체를 깨끗이 씻어서 다락방에 눕혔습니다. 이 때 교인들이 베드로가 거기에서 가까운 동네에 있는 것을 알고 속히 좀 와달라고 초청을 했습니다. 이 사람들에게 과연 이 도르가를 살릴 수 있는 능력이 베드로에게 있으니 베드로를 불러서 이 여자를 다시 한 번 살리자는 신앙심으로 한 것인지 아니면 이 도르가가 죽은 그 자체가 여기에 있는 교인들에게 너무나 충격적인 일이었는지 그래서 단순히 영적인 지도자 베드로를 부른 것인지, 그것도 우리는 쉽게 단정을 내릴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어쨌든 큰 어려움을 당하고 슬픔에 가득찼을 때 영적인 지도자의 도움이 필요했다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의 길에 항상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 그 함께 하시는 방식이 하나님의 교회의 영적인 지도자들과 관계를 맺고 함께 인생을 살아가게 하심으로 이렇게 황망하게 시련을 당하거나 슬픔을 당할 때 하나님이 주의 종들을 통해서 위로와 용기와 힘을 공급해 주시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결국 시체가 눕혀져 있는 다락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다락이 얼마나 큰지는 모르지만, 많은 과부들이 거기에 와서 함께 이 도르가라는 여자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울면서 베드로의 곁에 서서 이 도르가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도르가를 이 과부들이 눈물로 보내었던 것입니다. 한 사람이 죽었을 때 흘리는 눈물의 의미가 많이 있겠지만, 일반적인 의미로 본다면 그 눈물의 의미는 사랑일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동안 함께 있고 관계를 맺어온 마음의 버릇이고, 아직 마음 속에 관계를 맺고 사랑하는 버릇은 남았는데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외부적인 힘에 의해서 강력하게 끊어지고 나니까 마음에는 아직 사랑을 끊지 못했는데 사랑할 대상이 사라지고 나니까 그 때에 오는 슬픔의 표현이 바로 눈물인 것입니다. 이 여자들, 특별히 오늘 성경에 모든 과부들이라고 되어 있는 이 사람들이 도르가가 죽었을 때에 이렇게 베드로 곁에 서서 눈물로 이 여자를 전송했던 이유는 이 과부들의 마음 속에 도르가를 향한 깊은 사랑과 그리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보면 도르가가 살아있을 때 이 과부들이 도르가로 말미암아 얼마나 많은 위로와 용기와 위안을 얻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예전에 자기를 위해 살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통로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 마음에 가득찬 자기 사랑과 그리고 마음에 가득찬 자기만을 위하는 이욕스러운 사랑은 언제나 진실한 신앙생활의 커다란 방해가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고 감화를 주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목표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따라 걸어가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본문을 보면서 우리는 한번 생각합니다. 과연 우리가 우리의 일생을 마름하고 이 세사을 떠날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우리 곁에 서서 울어줄까 라고 말입니다. 이 도르가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면서 많은 과부들에게 사랑을 베풀었고 그를 잃은 상실감에 이 많은 사람들이 도르가 곁에 서서 눈물로 이 여자를 전송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서 예전과는 다른 인식을 갖고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많은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복을 누리게 하고 우리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는 것, 다시 말해서 이타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정말 제대로 만나고 그 사랑의 감화를 받았다는 아주 중요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이 도르가 곁에서 울던 과부들이 베드로에게 무엇인가 보여 주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도르가가 자신들을 위해서 만들어준 속옷과 겉옷이었습니다. 이를 미루어 보아서 이 도르가라는 여자가 옷을 잘 만드는 그러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여자였다는 것이 분명해 집니다. 이 사람이 그것을 생업으로 삼고 틈틈이 속옷과 겉옷을 지어서 이 베드로 곁에 서서 눈물을 흘리던 모든 과부들을 섬겼는지 아니면 그냥 옷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공급해 주었는지 그것과 상관없이 이 도르가는 자신의 물질과 시간, 기술을 바쳐서 잘 지은 옷으로 가난하고 오갈 곳 없는 이 과부들의 입을 의복의 문제를 해결해 주었던 것입니다. 아주 많은 사람이 이 혜택을 입었던 것 같고, 그래서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인 사람들이 여러 과부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당시에 가장 사회적인 인정과 혜택을 받지 못하던 부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고아와 과부가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오죽 했으면 당시 교회에서는 과부의 명부를 만들고 자격 기준을 정하고 사회에서 돌봐주지 못하니까 교회에서 그런 사람들을 돌봐주던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이 여자들이 도르가가 만들어준 속옷과 겉옷을 보이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광경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도르가는 일평생 살면서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이웃을 섬기는 일에 갚았고 그래서 그가 산을 옮기는 믿음을 가졌다는 이야기도 없고, 놀라운 은사를 발휘했다는 기록도 나오지 않지만, 큰 기적으로 병을 고치고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두드러진 복음 전파를 이루었던 사람들 못지않게 이 여자는 자신의 삶으로 자기가 믿는 신앙이 참되고 올바른 사랑의 복음이라는 사실을 입증하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착한 삶이 있었기 때문에 사도들과 복음의 열정에 불타는 일꾼들이 외치는 그 복음은 증거를 가지고 사람들의 마음에 실어 날라졌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면서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나 복음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삶에 대한 진실한 성찰이 결핍된 채 무엇엔가 쫓기든 교회생활을 하고 자기 자신의 성공과 부를 위해서 신앙을 활용하려고 하는 그런 세속적인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의 전하는 복음에 부합하는 삶,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여자와 아이들과 각색 병든 자들과 많은 불쌍한 사람들이 애워싸 예수 그리스도의 입술에서 쏟아지는 말씀을 들었던 이유는 예수님이 살아가신 삶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삶은 가난하고 병들고 연약한 자들을 향한 긍휼이 넘치는 삶이었고, 그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았던 그 삶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파한 그 복음이 참되다는 것을 입증하는 큰 능력의 도장이 찍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세상에 영향력을 주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전하는 그 말씀 자체를 우리들이 누리고 우리 자신이 그 말씀을 따라 살면서 복음과 일치를 이룬 인격, 복음과 합치를 이룬 삶이 얼마나 조화로운 삶이고 아름다운 삶인가 하는 것을 입증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어설픈 도덕주의를 부르짖는 사람들의 일천한 내용을 봅니다. 마치 우리가 착하게 살고 도덕적인 생활을 하면 그 자체로 이 세상이 변화될 것 같은 구호들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의 체험에 비춰 볼 때 무엇보다도 성경말씀에 비춰볼 때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것이 사실이었다면 아마 예수님께서는 12제자로 사도로 파송하실 때에 착하게 살라고 가르쳐주신 것 이외에 다른 말씀을 안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도로 파송하시면서 권능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실질적으로 죄의 비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건져낼 수 있는 영적인 권능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러한 영적인 큰 권능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하여 질 뿐 아니라 동시에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간절한 주님 사랑의 마음으로 인격화된 복음을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착한 삶은 도덕적인 결단을 내린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착한 사람이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리고 착한 사람은 착한 사람에게로부터 나오는 것이니 하나님의 참된 사랑과 그리고 우리를 이 세상에 창조하신 그 목적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화를 받는 것 이외에는 본질상 악한 우리를 착한 사람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훨씬 더 많이 은혜의 수단에 참여하고 간절히 기도할 것입니다. 진리의 빛을 더 많이 필요로 하게 될 것입니다. 착한 삶을 살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그러한 능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이 도르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름난 전도자도 아니었고 큰 재산을 가진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큰 능력을 가진 그리스도인도 할 수 없는 깊은 감화를 그 동네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끼쳤습니다. 그것은 바로 착한 삶이었고, 선한 생활이었고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불쌍한 과부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신자의 마음이 그 일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어제 이 본문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구나, 우리의 인생의 성공의 여부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성취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영광을 받는 우리 살아 생전에 입증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죽은 후에 우리의 일생을 통해서 혜택을 받았던 많은 사람들이 우리는 떠났으나 우리가 행한 사랑이 그들에게 여전히 남아서 이렇게 도르가처럼 인정을 받는 것이 우리의 삶의 진정한 평가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눈물로 도르가를 보내야 했던 것은 이들의 마음 속에 도르가로부터 받은 하나님의 깊은 복음의 빛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과 함께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전하는 복음대로 살아가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을 때 그 때 우리는 깊은 감화와 은혜를 받으면서 감동을 줄 수 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 같은 때에는 그리스도인이 정말 착해졌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 때에는 사람들이 거칠어질 것이라고 성경은 미리 예언하였습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이 사회에서 너무나 거칠게 살아왔고 그리고 치열하게 사람들과 다투면서 살았기 때문에 사실은 웬만큼 은혜를 받고 자기가 변화되고 깨뜨려지지 않는다면 그렇게 세상에서 형성된 자신을 이 세상에게 그대로 보여주게 되는 것입니다. 지어먹은 마음은 삼일을 안가고 의식적으로 행하는 일들은 언제나 남에게 보이기 위한 일이 되기 쉽습니다. 마치 악인이 쌓은 악에서 악이 저절로 나오듯이 선한 사람의 마음 속에 쌓은 선한 하나님의 은혜의 축적 때문에 변화된 우리의 성향 때문에 선한 것이 나와서 우리들이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이 얼마나 좋은 분이신가 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을 때 그 때 우리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복음이 참되다는 사실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많은 성도들이 믿음으로 산다는 추상적인 이야기만 하지 말고 정말 착한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항상 그리스도께서 어떠한 착한 행실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생명을 누리게 하셨는지 하나님이신 그 분이 사랑 때문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슬픔과 모든 비참의 죄 없으면서도 어떻게 동참하셨는지를 깨달으면서 우리가 그런 착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에게는 오늘 같은 시대에는 너무나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시대를 보면 정말 홍보의 시대입니다. 짧은 몇 마디의 말로 촌촌살인의 효과를 갖는 치열한 광고 업계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에 비하면 그리스도의 교회가 전하는 복음의 홍보 방식은 미련하고 어눌해 보입니다. 그러나 삶과 결탁된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람들에게 변명할 수 없는 강한 마음의 찔림은 줍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살아계셔서 우리들이 도르가처럼 주위의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말씀을 계속 들으면서 기도의 끈을 놓지 마십시오. 하나님, 착하게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사람들의 눈에 착하게 보이다가 하나님의 눈에 악하게 보이는 그런 종류의 착함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착하게 살아감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우리로 말미암아 혜택을 누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원들을 사람들에게 흘려보낼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착한 사람의 영향력 2 (2011.10.18. 가을말씀사경회새벽)
2.선한 증거를 가짐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딤전 3:7)
녹취자 : 김세나
아마 사도바울이 이 편지를 쓸 때까지만 해도 교회의 일꾼을 어떻게 세워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기준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뚜렷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물론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들이 일곱 집사들을 세울 때, 그리고 그 이전에 가룟 유다를 대신해서 예수님의 열두 제자의 수를 채울 때에도 보면 그 사람들이 어떠한 자격을 갖추어야지만 혹은 사도로, 혹은 집사로, 교회에서 세워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 아주 나름대로의 분명한 기준을 제시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세월이 흐르고 복음은 더 넓게 전파되고 그리고 유대인을 넘어서 이방인들에게까지 두루두루 복음이 전파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속에서 아주 일치하게 교회의 일꾼에 대해서 통일되게 정하지 못하였던 것은 아마 피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라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이제 사도바울이 목회하고 있는 디모데에게 이러한 기준들을 아주 상세히 가르쳐 줌으로써 한편으로는 이미 목회의 선배의 경험을 반영하고, 또 한편으로는 이제 디모데가 목회하고 있는 그 현장에서 일꾼들을 잘못 세워서 교회의 어려움을 당하지 않도록 길을 가르쳐 주게 되었고 처음에야 이 편지가 성경인줄 까지는 몰랐겠고, 그저 권위있는 사도의 한 서신이라고 생각을 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이제 이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성경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적절한 충고였다고 생각이 듭니다.
사실 우리가 읽은 이 부분은 교회의 감독을 세우는 일에 대한 규정입니다. 감독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목사를 어느 측면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감독, 혹은 장로 혹은 목사 등등 다양한 표현이 성경에 등장하는데 이것은 이제 교회를 하나님의 법의 질서대로 운영되도록 돌아본다고 하는 기능에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옛날에는 지금처럼 이렇게 동네마다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그 기본적인 교회의 단위는 가정 교회였고, 그리고 이제 한 지역을 목회자가 담당하면서 그 많은 가정 교회들을 전체적으로 돌아보는 그런 종류의 교회였습니다. 그런 것들을 생각한다면 아마 목사는 감독으로서의 기능이 훨씬 더 강했을 것이라 생각이 됩니다. 칼빈만 하더라도 만 오천 명 정도의 회중을 돌아보았고 세 교회를 목회했다고 합니다. 물론 거기에는 사역을 돕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세 교회를 돌아가면서 설교하면서 중심의 교회가 있었지만, 그 세 교회가 만 오천 명 정도의 회중을 담고 있었다고 합니다. 한 교회도 아니고 세 교회를 그렇게 목회하려니 심방하랴, 그 다음에 행정을 하랴, 또 시와 싸우랴. 자유주의자들과 논쟁을 하랴, 보통 고단한 삶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암튼 감독은 그런 직분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감독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어떤 사람이 이런 자격이 있느냐 이야기 할 때 굉장히 많은 부분을 외적인 윤리적인 삶을 기준들을 제시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은 사람들이 각기 소명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개인적인 소명을 가지고 신학교에 입문을 합니다. 이렇게 개인적인 소명을 가지고 신학교에 입문을 하게 되면, 개인적인 소명을 받고 신학교에 입문하게 되는데 그렇게 하면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자가 되는 모든 것들을 자기 개인적인 소명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누가 신학교를 가도록 물론 교회에서 추천서를 써 주지만 우리같이 좀 엄격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간다고 하니까 형식으로 써 주고 그 다음에는 자신이 그 모든 절차들을 감당하고 누가 검증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아주 분명하게 원래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한 그런 뜻이 아니다라고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당시라고 해서 복음 사역자가 되는데 주님을 만난 분명한 체험이 없다든지 아니면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일에 열의가 없다든지 아니면 영혼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나 교회에 대한 사랑이 없이 이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내면적이기 때문에 누군가에 의해서 쉽게 확인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보면 어떻게 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된다. 서너 명의 아내의 남편은 될 수 없습니다. 절제해야 한다. 근신해야 한다. 아담해야 한다. 나그네를 대접하고 가르치기를 잘 해야 한다는 이런 이야기들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이중 몇 가지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것은 사실은 감독자에게 필요한 덕목이라기보다는 성도들에게 해당되는 덕목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초대 교회는 하나님의 일꾼을 세울 때 그 일을 얼마나 잘 할 수 있느냐를 보는 대신에 그 사람이 정말 진실로 내적으로 변화를 받아서 진짜 그리스도인인 사람이냐 하는 것에 일차적인 초점을 두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사람들을 깨닫게 하고, 구원얻은 사람들로 하나님께 돌아와서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였기 때문에 잘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두 가지입니다. 한편으로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이었던 적이 있는 사람,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속까지 깊이 파고들어 그 사람을 변화시켜서 그 사람이 복음의 열정, 영혼에 대한 사랑, 그리스도께대한 헌신 그런 것들을 내적으로 지니고 있어야 했고,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고 두 번째 또 한 가지는 무엇이냐 하면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충분히 정말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이 입증이 되고 그것이 삶을 통해서 충분히 구현이 되어서 그 사람의 행하는 모든 외적인 삶들이 그가 고백하고 있는 신앙과 일치하는지를 확인하고 교회의 일꾼으로 세웠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초대교회에서 사람을 세운 원리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이었겠습니까. 오늘날의 교회보다는 복음의 능력과 성령의 은사가 가득 넘쳤을 교회가 이렇게 일꾼들을 세움에 있어 감독 뿐만 아니라 그 뒤에 나오는 집사들을 세울 때도 이와 같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한 기준들을 적용해서 엄격하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을 구별하려고 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겠습니까. 그 때에도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어느 시대든지 종교적인 경험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되고 기적을 보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아서 마음이 뜨거워져서 열열하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있었고 또한 사람마다 성향이 다르기 때문에 많이 느껴도 조금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조금 느껴도 아주 많이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그 여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물론 그가 받은 변화가 정말 놀라운 변화이기는 하지만, 그의 성향으로 보면 어떤 것을 체험하고는 그것을 사람들에게 발표하지 않고 배길 수 없는 성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당시 이런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고 그리고 거기에는 분명히 참되지 않은 신자들도 있었기 때문에 성경은 여러 곳에서 믿음을 버린 사람들, 배교한 사람들 그리고 믿는 사람 같은 외형을 지니고 종교적인 흥분에 들떴으나 사실은 일시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이요,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 아닌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셨는데 그 비유 속에서 나오는 길가에 떨어진 씨앗과 같은 사람, 그리고 돌짝밭에 떨어진 것 같은 사람, 또한 가시덤불에 씨가 떨어진 것 같은 사람, 이런 사람들을 더 많이 말씀하셨던 이유는 예수님 자신의 생애에서도 이미 이런 사람들을 많이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사람들을 분별이 없이 교회의 일꾼으로 세우려고 할 때 그 때에 나타나게 될 많은 부작용들, 교회와 그리스도에 대한 잘못된 평판들을 고려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엄중하게 가려 일꾼으로 세웠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항상 이 문제를 생각할 때에는 항상 신행이 일치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만나고 변화된 사람일 뿐 아니라 오랜 기간 동안 자신의 삶의 변화가 사람들에게 심지어는 불신자들에게까지 입증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이 많은 자격들, 이런 저런 일을 하지 않고 이러이러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이것은 성경에서 아주 명백하게 본래 이런 사람을 찾으라는 것인지, 아니면 예수 믿고 변화된 다음에 이런 사람을 찾으라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 하나는 그 두 가지를 그렇게 구별할 수 있는 것의 성질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구타도 하고 돈도 사랑하고 다퉜고 집안도 잘 못 다스리고 자녀들도 방종하게 굴었지만 예수를 믿고 은혜를 받고 변화를 받은 다음에 아주 뚜렷하게 변해서 이렇게 술을 즐기지 않고 다투지도 않고 가정을 아주 잘 다스리고 돈을 사랑하지 않고 이렇게 되었다면 훌륭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왜냐하면 방종하게 그렇게 예수 믿기 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은혜를 받았어도 얼마든지 그 옛날의 악으로 돌아갈 수 있는 성향들이 남아있기 때문에 그것이 온전한 성향이 되어서 거룩한 삶을 살기 때문에 그가 충분히 과거의 악습들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상당한 근거를 가진 후에야 이런 교회의 직분을 맡을 수 있게 하여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새로 입교한 자도 하지 말라. 무슨 뜻입니까. 과거의 이러한 행실을 가져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불신자였다 하더라도 새로 입교한지 얼마 안 된 사람은 그 행실의 증거만을 보고 교회의 중요한 직분을 맡기지 말라는 그러한 뜻입니다. 왜냐하면 비록 그가 외인으로 있을 때 사람들에게 좋은 증거를 얻었다고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심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된 것임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시간을 아주 깊이 고려하였던 것입니다.
(예화) 언젠가 제가 아는 목사님이 전화가 왔습니다. 자기 교회 온지 얼마 안 되는 어떠어떠한 장로가 있는데 이번에 투표할 때 장로로 세우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누구냐 했더니, 헌신되어 있고 교회를 사랑하고 착하고 뭐, 말씀의 변화를 받고. 그래서 몇 년이나 되셨습니까. 2년이 되었답니다. 그래서 조금 더 두고 보십시오. 아, 이 사람은 틀림없습니다. 틀림없어도 더 두고 봤다가 세운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한 5년 두고 보시죠, 그랬습니다. 그러고 나서 한 일년 반쯤 흘렀을 때 다시 연락이 왔습니다. 그때 충고 정말 고맙습니다. 교회를 다 뒤집어 놨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인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그랬습니다. 그 교회에서는 그 교회에서 증거를 받고 교회의 일꾼이 되었으니 새로운 교회에게는 새로 입교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새로운 교회에서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과 믿음과 헌신과 이런 것들을 입증받아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왜 오늘 이 말씀을 드리냐 하면, 교회의 일꾼을 세울 때 어떻게 보면 유치해 보일 정도로 아주 시시콜콜하게 전부다 기준을 정해서 절대로 이런 사람을 세우지 말라. 무슨 뜻입니까. 특별히 도덕적으로 책망할 것이 없고, 가정생활을 잘 하고 헌금도 잘 하고 전도도 잘 하고 그리고 기도도 많이 하고 은혜의 경험도 있고 목회자에게 잘 복종하고 교회의 질서를 잘 따르고 그래도 집에서 아내를 패고 아이들을 발길로 차는 인간은 교회의 일꾼으로 세우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아깝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아주 예민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겠습니까. 아까도 똑같이 질문했지만 지금 경험하는 거나 옛날에 경험하는 거나 똑같았습니다. 왜, 교회의 욕을 먹이고 그리스도께 욕을 돌리는 자칭 신자라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못된 행실로 교회를 어지럽히고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욕 먹이고 난 후에 개인적으로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자기는 마음 속에 그 죄를 씻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미친 그 기독교에 대한 나쁜 평판들은 자기가 은밀한 곳에서 회개를 한 순간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도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한번 사람들에게 교회가 끼친 이 잘못된 인상은 쉽게 교정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그렇게 지워지지 않은 것이 그리스도인이 행한 잘못을 쉽게 용서하지 않는 세상 사람들의 강퍅함으로 하나님 앞에 책망을 받게 될지 아니면 그것을 행한 사람이 사람을 실족한 것으로 책망을 받게 될지 그것은 두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쨌든 사실이 그러하기 때문에 교회에서 일꾼을 세울 때에는 깊이 고민하고 이러한 선한 증거를 가진 사람들을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받은 자라야 할지니 그랬는데 이 외인은 교회에 있는 그리스도인들뿐 만 아니라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교회 밖에 있는 교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선한 평판을 얻은 사람이어야 한다고 자격을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화) 종종 있는 일이고 이번에 도가니라고 하는 영화에 나왔다고 하지만, 교회에 헌금도 많이 하고 아주 유력하게 섬기는 장로님이나 이런 분들이 법정에 휘말리거나 아니면 고소를 당하거나 해서 안 좋은 일이지만 법정에 서게 될 일이 있습니다. 그러면 양심이 있는 교회라면 그냥 조용히 기다리면서 법의 판단을 지켜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설령 그런 것 속에 억울해 보이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조용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엎드려서 기도하면서 그를 위해 하나님께서 빌면 하나님이 섭리 속에서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주신다고 하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플랜 카드를 들고 교회에다가 플랜 카드를 걸고 우리는 장로님의 결백을 믿습니다. 제가 직접 본 일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법원 근처까지 플랜 카드를 들고 따라 가서 우리 장로님은 죄가 없습니다. 그런데 판결이 났는데 아주 심각한 유죄 판결이 났습니다. 그러면 그게 결국 교회까지도 욕을 먹이는 것입니다. 어떻게 검찰이 있고 경찰이 있고 그 다음에 법원이 있는데 교인이라는 이유, 한 교회 다닌다는 이유 때문에 그가 무엇을 행했는지 법적인 증거를 가지고 있는 사람보다 우리가 더 잘 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마음으로야 여러 가지 많은 생각들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겸손히 하나님께 빌고 주께 은혜를 빌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사회에서 불법을 퇴치하기 위해서 그렇게 벌린 운동이라든가 그런 경우는 다릅니다. 언젠가 우리가 작년에도 김영길 총장님 만나서, 우리 교회에 와서 많이 간증도 하시고 그랬지만, 그 분이 송사에 휘말리면서 학교 재단의 관계의 일로 수많은 소송을 받고 결국은 자신이 학교에게 소송을 제기하는 사람들에 의해 고소를 당했고, 그래서 결국 그것을 변호하기 위해서, 그러면 개인이 그런 소송 비용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교수가. 학교 돈을 썼는데 그것이 실정법 상으로 횡령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학생들이 와서 위해서 기도하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중에 결국 풀려나고 그 분이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기 인생에 있어서 스승의 날에 교도소에 학생들이 와서 그 스승의 노래가 최고의 선물이었다고 말입니다.
무엇인가 옳은 것을 위해서 투쟁하고 애쓰는 것이 명백한 경우에는 우리들이 생각이 달라질 수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인간의 과실이라고 하는 것이 상대방의 과실과 병합되어 있기 때문에 쉽게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보면서 이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가 얼마나 어리석고 그 무지한 사람들의 집단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이러한 모든 것들을 초대 교회에서도 알고 있었고 문제가 되었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일꾼이 되는데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인정을 받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일꾼을 세우는 일에 있어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전에 살아왔던 그리스도인의 삶의 진실성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으로 한 시대를 살아간다라고 하는 것은 정말 자기 안에 있는 비밀한 신앙 때문에 구속을 받으면서 이 세상에서 만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모본을 보이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여 데려가지 아니하고 여기다가 그냥 버려두신 남겨두셔서 하나님을 섬기고 주님을 복음을 선파하게 하신 그 뜻을 깊이 가슴에 새기고 살라고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기 전에는 우리의 욕심과 마음에 솟구치는 욕망대로 이웃을 대하고 살았지만, 예수 믿은 후에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나의 섬김의 대상이라고 생각을 하고 가장 미천한 사람들의 얼굴에서도 예수의 형상을 읽고 섬길수 있는 마음과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만약에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 사람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인정하게 된다면 아마 사람들을 그렇게 쉽게 함부로 대하고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평판을 떨어뜨리는 그러한 지각없는 일들은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전에는 우리의 마음대로 근신하는 것 없이 내 마음이 원하는 대로 하고, 내 마음이 바라지 않는 대로 안 행하면서 살았지만,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후에는 이제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믿음으로 매일 매일 살아서 그래서 교회 안에서 뿐 아니라 이웃들에게 은혜로운 증거를 남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믿은 다음에 이 세상에 남겨주신 그 뜻을 이루면서 사는 것입니다. 빛이라고 하는 것을 아주 특별한 경우,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 작렬하게 타오르고 산화하는 그런 불꽃과 같은 것만 생각하지 말고 있는 모습 그대로 살아있는 그대로 존재하고 사람과 관계를 맺어가는 그 자체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성품과 그리스도의 진리를 나타내 보여주는 그런 사람이 되도록 그렇게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착한 사람의 영향력 3 (2011.10.19. 가을말씀사경회새벽)
3.깨끗한 양심과 믿음의 비밀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딤전 3:7)
녹취자 : 김세나
이와 같이 라고 하는 말이 나오고 그 앞에는 감독들의 자격에 관한 이야기가, 그 뒤에는 집사의 자격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면 비록 감독은 목회자로서 교회를 전체 돌보는 영적인 지도자이고, 집사는 평신도로서 목회자를 도와서 구제와 전도에 힘쓰는 사람이었지만, 일꾼을 세우는 원리와 자격이 유사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윤리적인 자격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단정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이 말은 신실한 삶을 요구했다는 뜻입니다. 술에 인박이지 아니하고, 이 때도 습성화된 음주벽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일꾼에서 제외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러운 일을 탐하지 아니하고. 이것은 깨끗하게 사업을 한다든지, 깨끗하게 돈을 버는 생계의 수단에 있어서도 믿음이 적용되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실제로 역사를 보니까 1700년대 중반 1800년대 초까지 미국을 기준으로 본다면, 어느 정도냐 하면 한 사람이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겠습니다 라고 그럴 때 교회는 그를 받아주고 그리고 교회 잘 출석하는 것을 보아서 나중에 세례를 주게 되는데, 세례를 주기 전까지는 문제가 없는데, 세례를 줄 때는 그야말로 샅샅이 조사를 했습니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사람을 보내서 그 사람이 살고 있는 동네에 가서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봤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괜찮은 사람인가. 그래서 평판이 안 좋으면 세례를 안 줬다고 합니다.
그러한 것들은 우리들이 어떻게 생각할 수 있느냐 하면 미국을 기준으로 18세기까지,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어떻게 하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일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신자로서 고백되어 받아들여지는 조건이 다시 말해서 그가 정말 신자로 교회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격렬한 회심을 체험했다는 간증 가지고는 교회에서 믿어주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확인하면서 굉장히 충격이었습니다. 그랬다는 이야기를 사실 초대 교회사에서는 읽은 기억이 나는데 미국에 건너간 청교도들이 그렇게 이미 나라를 세우고도 한동안 그렇게까지 했다라고 하는 것은 저에게 굉장히 충격이었습니다. 건너가서 최초에는 그 신앙과 모든 것들이 뛰어났습니다. 그 사람들이 1620년에 메이플라워를 타고 갔습니다. 초창기 함께 타고 갔던 그리스도인 가운데 프린스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 분이 목회자였습니다. 아니, 프린스라는 목사님이 있었는데 그 사람 할아버지가 플라워를 타고 간 청교도였습니다. 뭐라 그랬냐 하면 메이플라워를 타고 와서 7년 동안 단 한 번도 욕하는 것이나 사람을 뒤에서 헐뜯는 것이나 사람들이 눈에 띄게 죄를 짓는 것이 본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들의 삶이 얼마나 신실했는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처음에 사람들이 건너갔을 때에는 토착 원주민들과도 참 잘 지냈습니다. 나중에 이제 인디언들이 변심한 것이 아니라 건너간 사람들이 변심하면서 이제 출애굽의 컨텍스트를 자신의 아메리카 개척사에 투영하면서 이 사람들이 가나안 원주민 취급을 하였고 살육이 벌여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아는 미국이 된 것입니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로 그러한 역사의 명암이 교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관심은 야,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 할아버지가 허튼 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7년 동안이나 뒤에서 욕하거나 이웃을 헐뜯는 것이나 그런 것을 본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미 에드워즈가 등장했을 때에는 이미 그런 신앙이 상당히 쇠퇴하고 있었던 그 때였습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그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개인적으로 예수를 믿고 감격하고, 온 세상이 나를 버려도 나는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하는 그런 식으로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전부다 미국에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나서 이후에 생겨난 형태이고 영국도 마찬가지입니다. 18세기 이후에 생겨난 형태입니다. 전설적인 설교자 조지 휫필드나 그 다음에 요한 웨슬레, 찰스 웨슬레 이런 사람들의 선교 운동, 이런 헌신적인 선교 운동에 힘입어서 미국이 엄청나게 복음화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화라고 하는 것이 예전과는 다른 복음화의 의미를 가져온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의 의미를 교회와 가정과 사회와 이 모든 광범위한 지평 속에서 자기의 위치로 돌아가는 그런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이제 다분히 개인주의적인 신앙의 양태들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것들을 평가하느냐 하는 것들은 이 시간에 다룰 성질의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서 기독교는 아주 심하게 윤리적인 근육이 약화되었는데, 이런 윤리적인 근육이 약화된 것에는 우리의 지식의 근육이 약화된 것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여러 가지 윤리적 자격의 이야기들을 했지만 오늘 우리가 읽은 구절은 바로 윤리적인 자격을 가능하게 하는 본질적이고 내면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규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 깨끗한 양심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 그러면 더러운 양심이 있다는 것인가. 이런 것들을 생각하려면 여러분들은 어느 정도 사고의 훈련이 되었으니까 이런 생각들을 할 수 있으실 것입니다. 아름다운 영혼을 위하여 아름다운 영혼에 관하여, 혹은 아름다운 영혼에 관하여 라고 이야기 했는데 추한 영혼도 있다는 것입니까.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물리적으로 아름다움과 추함을 이야기 할 때는 더러운 것이 묻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추하다. 아름답다. 혹은 더러운 양심, 깨끗한 양심, 이런 것들은 결국 영혼이나 양심이 본래의 기능을 가지고 있으면 아름다운 영혼, 깨끗한 양심 이런 표현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고, 그 본래의 영혼이나 양심의 쓰임새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으면 그러면 추루한 영혼, 혹은 불결한 양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무슨 영혼에서 냄새가 나는 사람이겠습니까. 영혼은 물질이 아니니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없는 것이고, 사람의 얼굴이 예쁘다고 하면 어떤 것입니까. 사람의 얼굴이 예쁘다. 미인이 미인이 아닌 사람보다 예뻐 보이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얼굴이 더 크기 때문입니까. 얼굴이 더 넓적하기 때문입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아니면 살이 더 푸짐해서 그럽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균형과 조화입니다. 코가 눈이 있는 쪽으로 많이 가지 않고 코 제자리에 있고 입이 귀 있는 쪽에 가지 않고 제자리에 있고 얼굴 전체를 안배하여 눈, 코, 입, 귀 제자리에 있을 때 1, 2 mm 차이가 얼굴이 예쁘다 안 예쁘다, 잘 생겼다, 못 생겼다, 후덕하다 덕이 없어 보인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팔이 다리 쪽으로 너무 길게 가 있으면 원숭이처럼 보이지 않겠습니까. 가슴은 가슴의 자리에, 다리는 다리의 자리에, 그 다음에 다리는 너무 짧고 팔은 너무 길면 그야말로 엉거주춤하고 있으면 유인원 같을 것 아닙니까. 그러한 모든 비율들이 제대로 딱 맞을 때 그 사람을 우리가 아름답다고 이야기 합니다. 얼굴은 그림처럼 예쁜데, 팔 길이가 절반 밖에 안 되고 만약에 상체와 하체 사이가 3:1 정도라고 하면 누가 그 사람을 가리켜서 미인이라고 하겠습니까. 똑같이 영혼이라고 하는 것도 영혼이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영혼의 다양한 기능들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서 영혼이 원래의 할 일, 우리의 육체를 이끌며 하나님과 세계와 사람을 알고 올바르게 우리를 이끌 수 있는 성질을 잘 가지고 있으면 그것이 바로 아름다운 영혼이라는 것입니다. 양심도 영혼의 다양한 기능 중 하나입니다. 이 양심의 기능은 선하고 악한 것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그 선하고 악한 일의 크기에 따라서 그것과 어울리는 가책과 기쁨을 느끼는 것이 양심의 기능입니다.
(예화) 어젠가, 그제 어쨌든 강의를 하고 오는데 양재대로 쪽에 은행이 수없이 매달렸습니다. 은행은 막대기로 툭툭 쳐서 따는데 아주 씩씩하게 생긴 아줌마 둘이서 은행을 따는데 줄로 휙 하고 던져서 가지에 걸려서 옆에서 확 댕기니까 막 은행이 훅훅 떨어지는 것입니다. 제가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자기들 것인가. 자기 꺼 아닙니다. 그것은 명백한 도둑질입니다. 그것 진짜 걸리면 경찰서 갑니다. 그런데 바케스를 가지고 담습니다. 아니, 먹고 싶으면 슈퍼에 가서 몇 알 사서 먹지 자기 것도 아니고 공공의 것인데, 그러면 그럴 것입니다. 떨어지면 아까운데 아니 그러면 그것이 자기가 왜 아깝습니까. 자기 것도 아닌데. 어쩌면 그렇게 나라를 사랑합니까. 대조가 되는 것입니다. 미국 애들을 보면 가로수의 사과 나무에 사과가 두두둑 떨어지니까 아이들이 그것을 주웠습니다. 나무 아래에 그대로 쌓아놓고 간다고 합니다. 왜 안 가져가냐 하니까 쳐다보면서 아저씨 저것은 우리꺼 아니에요. 관념이 분명합니다. 어떻게 주인만 없으면 그게 자기 꺼라고 생각을 하고 그 아줌마는 오늘도 따고 있을 것입니다. 너무 마음이 상했습니다. 떨어져서 어떻게 되든지 안 되든지 그것을 왜 따느냐고. 전문적이었습니다. 줄을 확 던져서 후루루룩 당기니까 나뭇가지 부러지지 않고 떨어집니다. 이 이야기 듣고 하지 마십시오. 제가 오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명찰을 붙이고 그 일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그러고 했으면 좋겠습니다. 다니는지 안 다니는지 모르겠지만 그게 무슨 창피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것들이 전부다 양심이 말하자면 깨끗한 양심을 갖지 못한 것입니다.
영혼이 진리를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니까 그런 것쯤 아무려면 어떠랴 하는 그러한 추루한 마음을 가지고 추루한 양심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선한 일을 하고 이웃의 이익을 위해서 이바지 하고 그 사람들이 무엇인가 우리로 말미암아 섬김을 받고 하는 것, 참 훌륭한 봉사입니다. 너무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의 가치는 깨끗한 양심의 가치보다 뛰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섬겨서 그 사람들에게 이익을 남기고 그들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깨끗한 양심을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더 중요합니다. 왜 더 중요한지 말씀 드리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그들을 위해서 뭔가 이바지할 때 그것을 더 좋아할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가 양심을 거슬려서 행한 잘못들을 받은 바 혜택과 이익이 워낙 크면 그런 것 쯤 별것 아니게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 물질로 혹은 노동으로 봉사하고 이익을 안겨 주는 것은 그러한 것을 이익을 안겨주고 하는 것은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보다 더 온전하지 못한 동기로도 그렇게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고 뭔가 이익을 안겨주고 더욱이 그렇게 해서 많은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 명성이 올라가고 하는 것은 깨끗한 양심을 지키면서 사는 것과는 다른 동기에서도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면에서 한 사람이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다른 외적인 선행보다 훨씬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좋은 시금석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어떠한 일을 할 때에는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이익이 되느냐 하는 것도 관계가 있지만, 하고 있는 행위 그 자체를 가지고 평가를 하는 것입니다. 마이클 셀던이라고 하는 하버드 대학의 정의를 가르치는 교수가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기관차를 몰고 가는데 갈림길이 나왔는데 기차가 브레이크가 망가졌습니다. 그래서 쏜살같이 달리는데 내버려두면 왼쪽 길로 가게 되어 있는데 거기에서는 7명에서 10명 가까이 일을 하고 있어서 그쪽으로 달려갔다가는 다수의 인명을 빼앗아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오른쪽으로 핸들을 틀면 한명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할 것이냐 하고 질문을 했습니다. 갔던 길로 계속 가야 합니까. 아니면 핸들을 틀어서 사람이 적은대로 가야 합니까. 왜 대답을 못 합니까. 가는 길로 가면 10명이 죽어야 하는데, 이쪽으로 핸들을 틀면 한명만 일하고 있습니다. 아니 두 명이라고 합시다. 그러면 A입니까 B입니까. B입니다. 대답을 하니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차가 지나가는 길 위에 다리가 있는데 지나가다가 보이는데 거기에 이쪽으로 가면 10명 가까이 죽고, 이쪽으로 가면 두 명이 죽는데 한명만 죽이고도 기차를 멈추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것입니다. 다리 위에서 배가 불룩 나온 남자가 햄버거를 먹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만 밀면 그 사람이 기차가는 길에 딱 떨어지면 워낙 덩치가 커서 기차가 딱 멈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두 명 있는 대로 기차가 가게 둬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햄버거 먹는 사람을 확 밀어서 철로에 떨어뜨려서 그래서 두 명을 구해야 겠습니까. A입니까, B입니까.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얼마만큼 이익을 주느냐 만이 아니라 우리의 양심이 어떤 행위는 그 자체가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우리에게 증언을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영혼의 올바른 기능, 올바른 판단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자신이 참으로 변화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아주 훌륭한 증거가 깨끗한 양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어도 매 순간 하나님 앞에서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양심의 목소리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음성이 되는 것입니다. 양심은 우리를 고소하는 기능을 합니다. 독재 국가나 법이 법대로 안 서 있는 국가에서는 죄없는 국민을 잡아다가 고문을 하고 두들겨 패서 없는 죄도 자백을 받아내서 그래서 고통을 주고 제거하거나 죽여 버려서 자신들의 정권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커다란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국가에서는 검찰이 정확하게 죄를 찝어 내고 이 사람이 이러한 죄를 지었다고 고발합니다. 마찬가지로 양심이 한편으로 잘못되면 내가 뭘 잘못했냐고 우기고, 한편으로 찌그러들면 내가 가책 받을 일이 아닌데도 가책을 받고 괴로워합니다. 우울증이나 이런 증상이 와서 내가 왜 이럴까 아무 문제가 없는데 그렇게 하면서 가책을 받고 괴로워합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것들은 영혼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지 않다 라고 하는 증거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 일꾼으로 뽑아 놓았는데 이러한 깨끗한 양심을 가진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지르고 교회의 평판을 떨어뜨립니다. 이런 것은 매우 수치스러운 일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경은 믿음의 비밀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데 믿음의 비밀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믿음은 미스테리온이라고 하는데 미스테리가 거기에서 나온 말입니다. 무엇이냐 하면 아무나 알 수 있는 것은 비밀이 아닙니다. 아무나 알 수 있으면 비밀이 아니라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비밀이 아닙니다.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하면 비밀이 아닙니다. 비밀이라고 하는 것은 특정한 사람에게만 알려져 있고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는 것이 비밀입니다. 그래서 이 비밀은 결국 뭐가 비밀이냐 하면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전에는 그렇게 양심이 없고 제멋대로 살던 사람이 어떻게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사물을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올바르게 살 수 있게 되었느냐. 믿음으로 말미암아 무슨 일이 그의 마음 속에 일어났는데, 그게 도대체 무엇인지는 자신도 잘 모르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믿음의 비밀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면 한번 이 믿음의 비밀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은혜를 받고 진리에 눈을 뜨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분의 가슴 저미는 사랑을 받고 그 앞에 내가 깨뜨려지고 그 앞에서 예전의 나를 버리고 십자가를 붙들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그 사랑을 기뻐하고 진리로 인하여 마음의 눈이 떠지고 그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예배를 새롭게 드리게 되는 이 모든 것들이 다 신비이고 비밀입니다. 그러면 이 두 가지는 짝을 이룹니다. 믿음이 신비를 가졌으면 신의 비밀을 가졌으면 영혼이 진실하게 변화된 것이고, 그러면 제일 먼저 기능이 온전해 지는 것이 양심의 기능입니다. 거꾸로 이야기해서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신앙의 많은 비밀을 가졌는데 깨끗한 양심이 없는 것은 무엇입니까. 둘 중의 하나가 거짓말입니다. 양심이 깨끗하다는 말이 거짓이든지 신앙의 비밀을 가졌다는 것이 거짓이든지, 대게 후자의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마음에는 수많은 정동의 요소들과 만나고 수시로 우리의 마음이 정동합니다. 불과 짧은 시간 안에도 우리는 기쁜 일을 만나서 웃기도 하고 감동적인 일을 만나서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또 어떤 때에는 우리의 마음이 분노하기도 합니다.
(예화) 저는 가끔 신문의 광고를 하면서 마음이 울컥 해질 때가 있습니다. 6월 달에 보훈처에서 광고를 냈는데, 그 광고를 보면서 가슴이 한동안 먹먹했습니다. 형제가 있었는데 6,25에 참전 했습니다. 각기 다른 시기에, 그러다가 함께 근무하기도 하고 헤어지기도 하다가 결국 둘다 죽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수십 년 세월이 흐른 다음에 유해를 찾아서 유해를 만나게 해주었습니다. 그것을 그림으로 그 형, 동생이 군복을 입고 그 전쟁에서 뛰어가면서 뜨겁게 만나는 그 장면, 이야기를 하면서도 눈물이 납니다. 그 형제가 전쟁터에서 헤어지고 수십년 만에 만납니다. 대목이 이런 것이 아닌데, 이런 광고를 보면서도 우리가 정동을 느낍니다. 그러니까 그게 우리의 영혼이 주님을 만나서 정말 변화된 정동도 있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일반적인 차원의 어떤 것을 보면서 우리들이 눈물도 흘리고 감동도 받고 사랑도 받고 출렁 거립니다. 그것을 우리들은 분별되지 않고 거의 같은 것으로 느껴집니다. 그것은 거의 비밀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 모든 사람들이 대부분 가지고 있는 것이니까 비밀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들이 아무리 엄정한 잣대를 가지고 우리가 주님을 만난 것이 진정으로 주님을 만난 것인가 우리의 영혼에 일어난 변화가 참된 신앙의 변화인가를 올바르게 말하자면 확증한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꼭 필요한 일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이런 생각을 훨씬 더 많이 합니다. 변화 받았다고 해서, 신앙의 비밀을 가졌다고 해서 영혼이 아름다워졌다고 해서 그래도 인간인데, 어떻게 그렇게 깨끗한 양심으로 살 수 있겠어. 이렇게 자기를 굉장히 두둔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한 태도는 올바른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우리가 생각하는 이 믿음의 비밀이 정말 순수한 비밀인가 이렇게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보다 더 근본적인 우리의 영혼의 변화,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삶에서 깨끗한 양심으로 입증되는 삶, 이런 것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평양에서 대부흥이 일어났을 때 제일 먼저 사람들이 회복되었던 것이 양심이었다고 합니다. 쌀가게마다 포스터를 붙였습니다. 나는 여기에서 쌀 장사를 5년을 했는데 3년 전 서부터 되박을 속였습니다. 내가 정말 회개했으니 우리 집에서 쌀 사간 사람들은 오셔서 그 동안 나한테 떼어 먹혔던 것들을 받아 가시기 바랍니다. 1800년대 캐나다에서 부흥이 일어날 때에는 술집 골목에 종종 그런 간판을 써 붙였답니다. 이 술집이 오늘부로 폐업합니다. 어젯밤 주인이 부흥회에서 회심하였습니다. 그 동안 이용하신 고객께 사죄드립니다. 주인 올림, 이렇게. 실제 역사입니다.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산다면 그것이 얼마나 이 세상에 큰 영향을 미칠 줄 알았기 때문에 주님의 일꾼들을 이렇게 세웠던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착한 사람의 영향력 4 (2011.10.20. 가을말씀사경회새벽)
4.착함, 복음적 교리의 본질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5-6)
녹취자 : 김세나
아마도 사도바울의 마음 가운데 가장 기쁨이 되었던 교회 중 한 교회가 빌립보 교회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영혼들을 돌보다 보면 그 사람을 생각하면 부담이 되는 사람도 있고, 근심이 되는 사람도 있고, 괴로운 사람도 있는데 또 생각하면 정말 기쁘고 위로가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복음 안에서 잘 성장하고 믿음으로 자라고 있을 때 그런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빌립보 교회가 사도바울에게 그러한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이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마다 감사할 뿐 아니라 기쁨으로 이들을 위해서 기도했다고 여기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기쁨의 이유를 하나 이야기 하는데,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교제한다는 이야기는 희랍어로 코이노니아인데, 교제라는 뜻이 일차적인 뜻이고, 또 다른 의미로 나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주석가들은 여기에서 사도바울이 이 단어를 쓴 이유가 이 빌립보 교회가 세워진 이후로부터 아버지와 같은 사도바울의 선교사역을 위해서 물질적으로 늘 헌신해서 함께 참여해 준 것에 대해서 감사하면서 이 단어를 사용했을 것이다라고 봅니다. 실제로 뒤에 보면 이제 다른 많은 교회들이 돕지 못할 때 이 빌립보 교회가 헌신적으로 사도바울의 선교사역을 후원했던 것을 증거를 본문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아주 부자인 교회이면서도 별로 헌신하지 않았던 그 고린도교회 같은 경우와는 아주 대조되고, 오히려 마게도니아 교회와 같이 신실하게 성도들을 섬기고 선교 사역에 헌신했던 교회라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코이노니아, 즉 섬김이 복음에서부터 출발했고, 복음에 관한 것이고, 복음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들이 먼저 복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고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에 감격하게 되니까 사도바울을 비롯한 일행들이 이 복음사역을 위해서 애쓰고 힘쓰게 될 때에 기꺼이 그들을 돕고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났고 그래서 그들이 비록 사도바울과 함께 모든 교인들이 동행하지 못해도 그 일을 위해 많이 애쓰고 섬김으로써 함께 그 일에 헌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각기 다른 성향을 가지고 각기 다른 은사를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은 후에도 우리들은 다양한 그릇이 되어서 주님의 교회를 섬기고 세계 선교를 위해 수종 들게 됩니다. 우리는 꼭 우리나라의 민족성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이렇게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은 대단하고 중요하게 생각하고, 남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일들은 좀 깔보거나 무시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좀 깔보거나 헐뜯거나 아니면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좋은 태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다른 해석을 가져다줍니다. 사랑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 앞에 자신 나름대로 부름을 받아 하고 있는 일들의 중요성과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그 중 어떤 일들은 성경의 진리와 건전한 신학, 그리고 역사에 대한 올바른 통찰을 가지고 지켜볼 때 바람직하지 않고, 그리고 심지어는 교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 그러한 일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많은 일들은 단지 자신이 거기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고 개입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 때문에 오히려 무시하고 그리고 외면하고 헐뜯고 이러한 일들이 있는데, 이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는 그런 말씀입니다. 빌립보 교회 교인들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사도바울과 그 일행의 복음사역에 대한 깊은 신뢰심과 존경심들이 작용했겠지만 자신들이 비록 동행하여 복음을 전파하지 못해도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그 일을 위해서 물질적으로 헌신하고 기도로 섬겼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것은 어느 인간이나 사람의 이름을 높이고 그를 추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복음의 증거라는 대의를 위해서 그들이 그렇게 한 것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바울이었고, 빌립보 교회는 빌립보 교회였지만, 그러나 이제 이들이 하나의 목적에 묶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바로 그 일, 그것이었던 것입니다.
이 빌립보는 당시에 아주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로마로부터는 너무나 멀리 떨어진 곳이었기 때문에 이제 아시아 쪽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로마로부터 멀리 떨어져있는 변방의 사람들은 로마가 어떠한 영광을 가진 제국의 도시였다는 것을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로마제국이 이 빌립보시를 아주 모범적인 케이스로 선택을 해서 많은 투자를 해서 로마와 아주 흡사하게 만들어서 그래서 빌립보를 보는 사람들은 로마의 맛을 본 것처럼, 쉽게 이야기 하면 빌립보를 로마의 맛보기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맛보기를 아십니까. 옛날에 엿장수가 가위를 흔들면서 나타났습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새카맣게 모입니다. 그러면 그 가위로 끌처럼 생긴 것을 툭툭툭툭 쳐서 엿을 조그맣게 잘라서 아이들에게 공짜로 줍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여기에 있는 큰 엿이 이렇게 맛있는 것이란다. 맛을 보아라. 가서 고물을 가지고 오면 이것을 많이 준단다. 그것을 아이들이 한쪽씩 먹고 눈이 완전히 뒤집힙니다. 애들이 가서 형이 아직 보고 있는 책, 할머니가 아직 신고 다니는 고무신, 개 밥그릇, 수없이 가져다가 엿장수에게 주고 엿을 먹고, 그리고 저녁에는 여기 저기에서 얻어터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것은 실화입니다. 실화. 눈물 뚝뚝 흘리고, 참 그런 것입니다. 그런 것이 바로 맛보기입니다. 맛보기. 그 도시가 로마라고 하는 위대한 제국의 그 수도의 맛보기였던 것처럼 사도바울은 빌립보 교회 교인들이 하늘나라의 맛보기가 되게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도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향해서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 말이 희랍어 본문에서는 굉장히 어려운 본문입니다. 복음에 합당하게 정치를 하라. 복음에 합당하게 나라의 일을 이루어 가라는 그러한 뜻입니다. 그러니까 빌립보에 사는 교인들은 건물이나 이런 것들을 비슷하게 한다고 해서 로마의 맛보기로 사는 것이 아니라 로마에 사는 로마 시민처럼 그렇게 거기에 로마 시민에 어울리는 행동거지를 하면서 살아야지만 그래야지만 로마 시민다운 사람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로마인 이야기에 보면 로마가 한창 전성기였을 때는 굶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매일 아침마다 어마어마한 양의 빵을 만들어서 마차로 가지고 가서 굶주리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그 빵을 하나씩 주어서 배고픔을 면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어떻게 이 제국의 도시에, 황제가 사는 성에 어디선가 굶주리는 시민이 있다는 것이 말이 되냐. 궁중의 수치다. 그러면서 막 나눠주는 것입니다. 한번 이렇게 보면 정말 그 시대, 지금으로부터 약 2천 년 전에 로마제국이 들어섰을 때 사람들이 정말 눈이 휘둥그레졌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온 도시가 전부 이제 포장이 되고 어마어마한 우리말로 하면 고속도로 같은 것들이 로마를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그 광경들, 그 화려한 집들을 보면서 거의 사람들이 아마 조선시대 사람들이 중국에 가서 자금성을 보는 것처럼 그렇게 충격적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엄청난 문명을 가지고 있는 도시 제국의 한복판에서 사람들이 로마인답게 행동해야 했던 것처럼 너희 빌립보 교회는 하늘나라의 맛보기로 하나님의 나라인데, 원래 하나님의 나라인데 이 세상에 지부를 세운 것입니다. 여기에서 빌립보 교인들을 보노라면 이들이 원래 소속했던 하늘나라는 얼마나 아름다울까. 그것을 보게 해주는 것이 이 빌립보 교회의 사명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빌립보 교회 교인들이 그 시대에 태어나서 누구나 죄인으로 살아가는데 변하여서 하늘나라의 맛보기가 되기까지 그렇게 다른 사람들이 되어서 다른 삶을 보여주고 다른 인생을 살아서 많은 사람들에게 땅에 있으나 하늘에 속한 나라, 이 땅의 로마에 소속되어 있으나 그리스도께 통치를 받는 모습을 교회적으로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는가. 복음 때문이었습니다. 복음이 그 모든 지혜의 핵심이었던 것입니다. 그 복음 안에 하나님이 누구이시고 인간이 누구인고 그리고 어떻게 인간이 죄인으로 태어나서 하나님께 구원을 받았는지 구원받은 인간은 어떻게 믿음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야 하는지 모든 것을 보여주는 일들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 빌립보 교회 교인들을 그러한 복음으로 깊이 변화시켰다면 이 빌립보 교인들이 이러한 복음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서 어떠한 마음을 가졌겠습니까. 선교의 역사를 보면 교회가 가장 뜨겁게 선교하는 길은 교회가 복음의 감격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교회가 복음의 감격에 사로잡히는 일 없이는 결코 선교의 뜨거운 열정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혹시 그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아주 본질적으로 선교하는 것이 아니라 비본질적으로 선교하는 것이 됩니다. 선교의 본질의 복음을 가지고 선교하는 것이 아니라 좀 다른 종류의 선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의 경우를 보더라도 조나단 에드워즈에 의해서 1차 대각성 운동이 일어나서야 비로소 미국인들의 가슴 속에 선교에 대해서 꿈틀거리는 말하자면 비전이 선교하고자 하는 커다란 의욕들이 고취되었던 것입니다. 수많은 헌신자들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한국의 경우에는 이제 평양 대부흥, 1907년 평양 대부흥 이후에 선교의 불이 붙어서 국내로 제주도로 그리고 일본으로 만주로 선교를 하러 가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이 이야기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이렇게 복음으로 복음을 위해, 복음에 관해서, 복음에서, 이 복음이 동기가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 선교사역에 물질적으로 헌신하며 기도로 동참했던 이 빌립보 교회의 헌신에 대해서 이런 이야기를 갑자기 합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르실줄 우리가 확신하노라. 사도는 이들이 시작한 이 일을 착한 일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착한 일이라고 하는 것이 희랍어 성경에 보면 선한 행실, 혹은 선한 행위라고 나옵니다. 선함에 대해서는 여러분들이 여러 차례 설교를 듣고 저의 설명을 들었을 것입니다. 이 선함이라는 것, 선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목적에 부합하면 선한 것입니다. 그것을 착하다고 부릅니다. 그래서 사도가 여기에서 착한 행실이라고 부르는 것은 원래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목적, 하나님이 그 사람들을 복음으로 구원하여 다시 신앙 안에서 참다운 인생의 목적을 따라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이 되게 하시려는 구속의 의도와 일치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인간이 죄가 들어온 다음부터는 원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목적대로 살아갈 수도 없고 또 그렇게 쓰여질 수도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목적있게 창조하셨으니 사람도 목적이 있게끔 창조되었고 사실은 인간은 단순히 목적이 있게끔 창조된 것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만물을 다스려서 본래 하나님이 세계 전체를 창조하신 목적대로 그렇게 사용되도록 부르신 것입니다.
(예화) 음악회를 할 때 보면 수십 명의 단원들이 맨 이쪽에 아주 그 바이올린부터 시작해서 저쪽 끝 콘트라베이스까지 수많은 악기들을 가지고 연주를 합니다.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 대게 이제 음이 구별되면서 악기 연주를 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한 사람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연주가 시작되지 않습니다. 누구입니까. 피아니스트? 아닙니다. 지휘자가 등장을 해서 인사를 하고 지휘봉을 높이 들고 움직이기까지는 연주하지 않습니다. 움직이면서 온갖 가락이 나옵니다. 모든 사람들은 연주를 하면서 옆의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 뒷사람이 잘 연주를 하나 감시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지휘자 한 사람의 손을 보면서 연주하기 시작합니다. 각 악기들을 조직해서 하나의 음으로 만들어서 확 울려 퍼지게 만들어서 아주 아름답고 장엄한 교향곡이 나오게 만들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바로 그런 존재로 창조가 된 것입니다. 바로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만들어놓으신 하나하나가 그렇게 쓰임새 있게끔 각자 역할을 하게끔 모두 조직해서 그래서 하나님 앞에 울려 퍼지는 교향곡과 같은 것이 되도록 인간이 그렇게 부름을 받았던 것입니다. 들판을 가로지르는 바람, 하늘에 흐르는 구름, 소리내어 흐르는 시냇물들, 힘차게 밀려와 해변에 부딪히는 파도소리, 새 소리, 그리고 그 많은 수많은 피조물들의 소리들과 그 아름다운 빛깔들을 모두 함께 지휘하며 창조주 하나님 한분께 영광을 돌리도록, 그렇게 그러한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게 바로 모든 인간과 모든 창조 만물이 존재하는 이유이고, 그것이 바로 선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만물들이 하나님을 송축하고 그 분이 살아계시고 이 세상에 창조하고 다스리는 것을 잘 보여줄 수 있도록 인간은 모든 피조물들을 움직이는 말하자면 임금처럼, 아니면 임금의 명을 받아서 그 모든 것들을 잘 돌보는 그러한 훌륭한 일꾼으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인간 자신이 죄를 짓고 오히려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고 싶어 했던 것이 바로 악입니다. 그렇게 악하게 되어서 하나님을 멀리 떠났기 때문에 인간은 고통을 받고 죄가 들어와서 고통을 받고 온갖 괴로운 증상들이 인간의 육체에, 자연에,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에 대한 최고의 치료책이 복음이었습니다. 복음의 빛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과 이 세계가 원래 지어졌던 목적이 무엇인가 깨닫도록 만들어 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복음을 교회마다 복음을 가지고 세상을 고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게 바로 착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빌립보 교회가 사도바울을 통해 복음을 받고 변화 받은 다음에 그 복음을 위해 일하게 된 그것은 이 세계 전체를 하나님이 원래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으로 돌려놓는 아주 선한 일이었습니다. 착한 일이었습니다. 결국 복음의 본질 그 자체가 결국은 선함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복음을 받고 변화 받은 사람들이 지향해야 할 삶이 바로 그 선함으로 인간과 모든 만물들을 돌아가게 하는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변화받은 사람들의 소명입니다. 그러니까 이 착하게 산다는 것, 하나님이 본래 창조 목적에 맞게끔 착하게 산다는 것, 그래서 자신들의 모든 삶과 섬김이 교회와 이 세계를 창조의 본래 목적에 맞도록 돌아가게 한다는 것은 아주 웅장하게 교회의 지도자 한 두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 하나하나의 삶들이 그 하나의 목적을 향해 달려가고 묶어지는 그러한 종류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자신들의 선교사역을 돕고 섬기고 헌신했던 빌립보 교인들의 이 일을 착한 일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복음 안에서의 교제의 본질은 이 착함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변화 받고 주님을 사랑하게 된 사람들은 이기주의자 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 혼자 예수를 믿음으로 행복하게 하는 것이 구원의 가치가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만물들까지 원래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그 목적에 맞게끔 돌아가야지만 자신도 행복할 수 있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착한 사람들이라 부르고, 그러한 삶을 착한 삶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셨는데 우리는 얼마나 착한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우리의 살아온 인생, 이웃들을 위한 섬김, 교회에서의 봉사,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맺는 관계,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물질들을 사용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을 통해서 우리가 정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런 삶을 살 수 있었습니까.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본래 그 목적으로 살도록 이바지할 수 있었습니까. 우리 깊이 돌아보면서 우리가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에 이 착한 일들이 우리로 말미암아 계속 되도록, 그래서 더 많은 사람이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본래의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오도록 이바지하는 삶이 사는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인생의 의미이고 가치인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5.착한 사람과 초자연적 덕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행 11:24)
녹취자 : 김세나
스데반의 순교는 가슴 아픈 일이었고 적지 않은 큰 충격을 예루살렘 교회에 안겨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스데반의 순교 사건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명령이 놀랍게 성취됩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을 받은 후에 제자들이 사마리아와 온 땅에까지 흩어져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증인이 될 것이라고 하는 예수님의 그 예고적인 말씀이 성취된 것이었습니다. 그 핍박을 통해서 헌신된 예수님의 제자들이 핍박을 피하여 예루살렘 밖으로 흩어졌고 흩어진 사람들은 거기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이 핍박을 두려워한 많은 유대인들이 이제 헬라인들이 아닌 유대인들에게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중 어떤 사람들은 담대하게 헬라인에게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큰 은혜를 주셔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고 많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잠시 스데반의 순교를 통해 큰 핍박을 받은 예루살렘 교회의 선교가 주춤하는 듯 했는데 이렇게 다수의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고 있고 특히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더니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서 열매가 맺혀지고 있다는 소식이 예루살렘에 보고되었습니다. 그러자 예루살렘 교회는 그렇게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을 굳게 붙들어주어야 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어도 핍박이 워낙 무서운 때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쉽게 신앙을 버리거나 부패할 염려가 있었기 때문에, 낙심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사람을 보내어 그들을 견고하게 붙들어줄 목회를 해야 되겠다는 결정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보냄을 받은 사람이 바로 바나바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라는 이름은 원래 바르는 아람어로 아들이라는 뜻이고, 나바는 위로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의 이름이 뜻이 위로의 아들 혹은 권위하는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바나바가 이렇게 이 일에 적합한 사람으로 뽑힌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사실 이 바나바는 바울이 사도행전 역사에 등장하기 전부터 예루살렘 교회에 이미 유명 인사였고, 그리고 사도들을 도와서 열심히 복음을 전파하는 일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상의 이유가 아마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 바나바가 가지고 있는 몇 가지 특성들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바나바를 결국 파송하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지시를 받고 교회에 의해 파송된 바나바는 이 곳에 와서 사역을 했고, 짧은 기간 동안에 사역에 아주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면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그랬습니다. 단순히 사람을 모은 것이 아니라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고 하는 것은 진실한 회심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또 다른 지체들로 붙어있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얼마 전 스데반이 순교하고 서슬이 시퍼런 로마의 칼날의 핍박 아래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의 무리에 더해지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특이한 선교적인 부흥이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예루살렘 교회가 바로 이 일을 위해서 바나바를 파송한 것은 아주 탁월한 결정이었다라고 하는 것이 입증이 된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모든 사역에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하나님의 전적인 간섭과 축복, 미리 행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있는 역사가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의 사역에 있어서 바람직한 성공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 홀로 일하지 아니하시고, 당신의 백성들을 데리고 그 백성과 함께 역사하고 일하십니다. 그래서 당신의 나라와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쓰여지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역사는 하나님이 주관하신 역사이지만, 그 구원의 위대한 역사들을 점들로 연결하시는데 그 점들이 바로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사람이 하나님께 쓰임 받느냐에 따라서 당시의 그 역사는 아주 현저하게 달라지는 것입니다.
오늘 새벽에 아파트 문을 열고 나오는데 카다피가 피투성이가 되어서 죽은 모습이 나오고, 42년간의 독재정치가 끝났다는 큰 헤드타이틀이 붙어있는 것을 그냥 보고 왔습니다. 우리는 자세하게 중동의 정치를 모르지만, 왜 저렇게 인생의 최후를 마칠까라는 궁금한 생각이 사담 후세인이 죽었을 때나, 혹은 카다피가 죽었을 때나 유사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츠카라고 하는 역사가는 한 시대의 특성은 그 시대의 지도자의 우연적 성격과 관련된다고 말했습니다. 그 정도로 사람이 역사를 이어가는 중요한 변수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사도행전 9장에서 사울이 회심했을 때, 그 보고가 예루살렘 교회까지 들어갔습니다만,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은 그 교회를 끔찍이 박해하는데 압장 섰던 사도바울의 회심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그 사람의 신실한 회심을 보증해준 사람이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정말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는 회심이었고, 그가 정말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보증해 주었기 때문에 사울이 이 사도들에 의해 받아 들여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바나바는 하나님이 사울을 쓰시려는 줄 알고 그 자기 자신이 스스로 겸손하게 바울의 동역자 내지는 비서가 되어서 그래서 하나님이 쓰시려고 하는 사람이 쓰임 받도록 그에게 역사의 자리를 내어주고 자신은 그를 수종하는 사람이 된 인물이었습니다. 저는 여러해 전에 이 부분을 읽으면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정말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의 형편과 비교했습니다. 오늘날은 누구도 바나바가 되기를 자처하는 사람은 없고, 바울과 같은 사람이 되기를 자처하고 그리고 뒤에 물러서서 누구를 위해 봉사함으로 그를 하나님의 쓰심에 합당하도록 섬기는 사람보다는 주역을 하든지 집어 치우든지 자기가 주동이 되든지, 아니면 헐뜯던지 이렇게 하는 풍조들이 우리에게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때에는 바나바가 더욱도 그리운 인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 바나바의 파송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돌아온 많은 사람들이 굳세게 되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바나바가 그들을 권면하였을 때 더 많은 다른 무리들이 예수께로 돌아오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겠습니까.
오늘 성경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라. 저가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여 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그랬습니다. 착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인격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착하다고 하는 뜻이 하나님의 선과 관련된 뜻이라는 점에서 인격은 자연적인 것이고, 성령과 믿음은 초자연적인 것이라고 획일적으로 분류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연적으로 선한 사람도 있지만,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선하게 된 사람들은 성령의 역사로 중생하고 그리고 믿음과 회개로 하나님께 돌아온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영적인 역사가 그의 무의식과 의식 속에 작용하여 그의 인격을 변화시키고 마음의 성향을 바꿔 놓는 아주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성경이 의미하는 진정한 착한 사람, 사람 보기에만 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보기에도 착한 사람이 되는 가장 중요한 비결입니다. 그래서 엄밀하게 말하면 진짜 하나님이 거듭나게 하시고 회심시켜 주신 사람 이외에는 누구도 선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우리를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는 놀라운 은혜를 베푸시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선한 사람이 되는데, 그렇게 거듭나게 회심한 사람 이외에는 모두 다 죄인이라면 그들 중에는 선한 사람이 없습니까. 혹은 그들은 모두다 똑같이 악한 사람입니까라는 질문이 나옵니다. 여기에는 이렇게 답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이제 선하다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창조의 목적을 이루는데 올바르게 이바지하면 그것은 선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을 알고 그 하나님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아니하고도 얼핏 볼 때에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선한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창조의 목적에 가까이 다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성경에서도 부모를 공경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유교에서도 부모를 공경하도록 강력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부모에게 불효하면 아예 인간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을 정도로 가르칩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묘지 옆에 초막집을 짓고 그 아들이 삼년 동안을 무덤을 지켰습니다. 그러면 성경이 유교로부터 배운 것입니까. 아니면 유교가 성경으로부터 배운 것이겠습니까. 이렇게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사상은 인디언들에게도 있고, 그리고 어느 시대 어느 나라 사람들에게나 보편적으로 있는 선함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2차적인 선, 혹은 상대적인 선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희미하게나마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의지와 뜻이 인간의 본성 속에 사람들의 경험 속에, 역사 속에 심지어는 자연 속에 남아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그들을 가르쳐 주시지 않아도 기본적으로 선악을 판단할 수 있는 희미한 빛들이 어느 정도는 남아 있어서 그것들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의 자연적인 계시가 되어서 그것들을 올바르게 인식한 사람들은 덕을 행함에 있어서 예수를 믿고 성경을 진리로 받아들인 사람과 어느 부분에서는 흡사한 덕을 지닐 수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2차적인 선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성경 계시를 알고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목적을 알고 행하는 것을 1차적으로 부르시는 것과 대조되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놓고 보면 이 착하다라고 하는 것이 이렇게 인간의 자연 본성과 거듭난 본성 사이에 걸쳐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바나바는 예수 믿기 전에도 불신자들 사이에 착하다고 인정받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또 예수를 믿고 난 후에는 그 착함이 2차적인 착함이 아니라 1차적인 착함이 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구속과 하나님의 창조를 올바르게 알게 되었고 거기에 자신을 기꺼이 복종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바나바가 착한 사람이라고 할 때에는 이러한 그림이 모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잘 믿은 사람으로서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 선하다고 인정받을 만한 인격이 한편으로는 자연적으로 한편으로는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이 사람의 본성 속에 심기어 지고 자라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비록 하나님의 놀라운 계시, 우리 속에 간직하고 있는 경건에 관한 비밀들, 성경의 계시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초자연적인 사실들은 잘 몰라도 사람이 착하다 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 속에 있는 기본적인 도덕의 의식 기준이 있기 때문에 누구나 사람들과 만나고 관계를 맺으면서 그 사람이 착한 사람인지 악한 사람인지 혹은 착해도 그저 흔히 볼 수 있는 착함인지 아니면 매우 탁월한 착함인지 이런 것을 사람들은 인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착하게 사는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매우 중요한 본분이라고 하는 것을 누차에 걸쳐서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교회의 일꾼을 세울 때에도 착한 사람이라는 것이 아주 중요한 조건이었습니다. 특히 일곱 집사를 세울 때에는 바로 이것이 매우 중요한 조건이 되었고, 이것이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는 훨씬 더 구체화 되어서 외인들에게 선하다는 증거까지 필요로 하는 직분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감독, 혹은 집사를 세움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선하다고 하는 증거를 요구하는 이것은 사실 일꾼을 세움에 있어서 사실 세상의 판단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기보다는 개인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변화 받은 신앙의 열매를 객관적인 방식으로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나바는 바로 그러한 점에 있어서 통과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나바의 착한 인격이 있었기 때문에 이곳에 내려가서 많은 사람들을 굳게 세우는 이 일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바나바가 착한 사람이었다는 사실과 함께 그가 가지고 있는 초자연적인 덕성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착한 사람이라는 것이 자연적인 이 사람의 인성, 성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면, 이 착한 성품은 많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었을 것이고, 이 착한 성품 때문에 바나바는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지배하고 예루살렘으로부터 파송되었다는 이유로 권위를 부리고, 사람들을 자신의 발 아래 두려고 하는 주관하는 자의 태도로 사역을 하지 않고 그야말로 권위자가 되어서 돌보고 위로하고 이끌고 섬기고 예수님이 무릎을 꿇어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던 정신으로 사람들을 돌보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방금 회심한 따끈따끈한 이방인들에게 아주 특이한 것으로 느껴졌을 것이고, 그리고 이방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헬라인들을 향해 교만하고 거만한 사람들이 바로 유대인이라고 하는 인상을 지워버리게 하는데 아주 크게 이바지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의 섬김과 사역을 통해 많은 무리가 주께 돌아오게 되는데는 이 사람의 지니고 있는 초자연적인 덕이 그와 함께 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것이었습니다. 성령이 함께 하셨습니다. 만약에 성령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바나바의 착한 인격으로 사람들에게 도덕적인 감화를 끼칠 수 있었을지는 모릅니다.
최근에 우울하고 괴로운 소식이 많았지만, 또한 어떠한 자장면을 배달하는 그 사람이 그렇게 헌신적으로 구제를 하고 죽었다는 소식도 듣고, 그리고 선한 그런 것들을 봅니다. 그 소식이 전해지고 나서 많은 구호단체의 기부금이 매우 늘어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저도 그것을 보면서 저도 마음이 교회에 꽂혀서 헌금하고 그렇게 살았지만, 그러한 점에서 조금은 소극적이었구나 반성을 하고 실천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하나의 도덕적인 감화입니다. 거기에 그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에게 놀라운 초자연적인 덕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성령과 믿음의 충만함이었습니다. 만약에 그에게 단순히 착한 인격만 있었더라면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어도 하나님께로 진실하게 돌아오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령이 그와 함께 하시고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착한 인격과 성품은 사람들의 마음의 문을 열게 하는데 이바지하였고 그리고 열려진 그의 마음 속으로 전해지는 복음이 그 사람들 마음속으로 들어가 그들을 변화시키는 것은 성령이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성령은 사람의 착한 인격으로는 믿게 할 수 없는 어리석어 보이는 복음의 진리를 믿게 만들어 줍니다. 성령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성령은 예수를 믿을 때 이전에 자기를 사랑하던 사람을 바꿔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성령은 새로운 감각을 사람들 마음 속에 넣어 주어서 예전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영적인 아름다움과 선함을 발견하고 그리고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마음을 만들어 줍니다. 이렇게 인간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커다란 성령의 역사가 그 사람 속에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사람은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본이 되는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 믿음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을 잘 믿는 이 사람 바나바와 하나님은 함께 동행하셨습니다. 믿음은 성령의 산물이지만, 믿고자 하는 성향이 있는 사람 속에 마음이 성령이 머무시기에 가장 좋은 환경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믿고 그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기꺼이 따르고자 하는 신앙의 성향이 있는 그 사람의 마음이 성령이 거하시기에 가장 좋은 환경이라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의심하고 불신앙하려고 하고 하나님의 지시에 불순종하려고 하는 사람의 마음은 성령이 계시기에 적합한 환경이 아닙니다. 그랬기 때문에 바나바의 착한 인격은 사람들에게 감화를 주었고 마음의 문을 열게 하고 복음의 경계심을 놓도록 만들어 주었고 그의 충만한 성령 충만한 인격과 충만한 믿음은 초자연적인 덕이 되어서 사람들에게 단순한 착한 인격으로는 가져다 줄 수 없는 놀라운 복음의 변화, 영적인 변화를 사람들에게 가져다줌으로써 그들이 진실하게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항상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야 된다고 생각하지 않고, 이것이든지 저것이든지 둘중 하나만을 가지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덕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윤리운동을 하거나 도덕을 추구하는 사람은 성령과 충만한 믿음에 대해서는 말로는 필요성을 이야기 하지만, 언제나 도덕주의적인 강조에 덧붙여지는 양념밖에 안 됩니다. 그리고 인간이 도덕적으로 살고 윤리적으로 살아야 된다고 아주 심하게 강조를 합니다. 그렇게 하고 보면 인간이 주님을 의지하지 않아도 양심만 발동하고 제대로 살면, 충분히 창조의 목적을 지향하는 선함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예화) 어느 여 전도사님 한 분이 벌써 20년 전 이야기입니다. 도덕을 아주 강조하는 교회에서 사역을 하시던 전도사님이었습니다. 그 분을 개인적으로 알게 되어서 이야기 하는데 그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얼마나 도덕적으로 살았는지 온 교인들에게 존경을 받는 장로님이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 분의 직업이 세무 서장이었답니다. 당시 세무 서장은 다 부자였습니다. 하도 부정을 많이 해서 부자였습니다. 지금 보다 훨씬 부정직한 사회였기 때문에 그러니까 벌써 은퇴하셨으니까 그 분이 현직에 계셨을 때는 30-40년 전 이야기이니까, 그 때는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말하자면 부패입니다. 특히 관료들이 공무원들이 월급이 너무나도 박했기 때문에 그러한 부패를 촉진시킨 면도 있었습니다. 신앙 없고 그런 사람들이 그런 자리에 오르면, 저도 세무 서장을 지냈던 몇 사람을 알고 있는데 정말 부자입니다. 부자. 이 분이 일평생 세무 공무원으로 있다가 세무 서장까지 하고 정년퇴직을 했는데, 18평에 사신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냥 곧이곧대로 세무 공무원 생활을 하고 일체 뇌물 없이 살았더니, 그 때에 18평이면 세무 공무원으로서 대단한 거였습니다. 18평 아파트. 제 생애 아파트가 11평 아파트인데, 그 아파트 당첨 되고서 잠을 못 잤습니다. 11평, 믿어지십니까. 방 두 개에 연탄보일러 때는 거였는데, 11평. 나중에 1500만원 받고 팔았는데, 그게 나중에 7억까지 올라가더랍니다. 그래서 18평은 지금으로 따지는 감각에 35평은 되는 감각이었습니다. 그 때 당시 30평은 별종들이 사는 곳이었으니까 말입니다. 너무너무 존경을 받았는데, 그 분이 노환이 들어서 아팠는데 심방을 가고 돌봤는데 이 여 전도사님이 상당히 은혜를 많이 받으시고 체험이 있으신 분입니다. 그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 분이 청렴하게 일생을 사셨고 좋은 분이라는 것은 자기도 인정하더랍니다. 그러나 영적인 지도자로서 목회자로서 그 사람의 심령이 살아있다는 것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도덕적일 뿐. 그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살아있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도덕적인 것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살아있다는 것. 주님을 향한 은혜와 사랑의 감격, 매일 매일 자신의 삶 속에 찾아 오셔서 교제 해 주시는 하나님과의 교통, 그 분께로부터 오는 사랑과 은혜, 믿음, 소망, 사랑 이런 것들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들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추어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사람들 보기에 착한 인격은 있고 부정을 행치 않는 도덕적인 올곧음은 있지만, 그것만 있으면 성령도 믿음도 그것은 모두 신비주의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극단적인 도덕주의, 그것도 아니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윤리와 도덕에는 아무 상관이 없이 개인의 체험에 사로잡히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주관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예화) 1980 몇 년도인지 잊어 버렸습니다. 여의도에서 엑스플로어라는 집회를 할 때였습니다. 거기를 갔습니다. 집회를 했는데, 집회가 밤에 늦게 끝났던 기억이 납니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었습니다. 여의도 광장에서 집에를 와야 하는데 그 때 통금은 해제되었는지 모르겠는데, 앞에 버스가 지나가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라고 말하지는 않겠는데, 교회 버스가 텅 빈 것입니다. 그래서 집에까지 바래다 달라는 것이 아니라 전철 타는 곳까지, 어차피 나가니까 같이 좀 타자고 두들기는데 안 열어줍니다. 조금아까 뜨겁게 회개한 사람들이고, 불 받은 사람들입니다. 절대 안 열어줍니다. 저기까지만 타고가자, 그리고 버스가 텅 비었습니다. 저기까지만 타고 가자 그랬더니 손을 흔드는 것입니다. 그게 안 된다는 것인지 잘 가라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는 여의도 광장이 전체 쓰레기 더미였습니다. 그 장소에서 가톨릭이 바로 거기에서 100만 명이 미사를 했습니다. 100만 명 미사가 성찬이 40분에 끝났는데 100만 명이 움직이고 나서 신문에 나왔습니다. 개신교 모인 자리와 천주교 모인 자리가 났는데 천주교 사람들 100만 명이 모여서 성찬을 하고 흩어졌는데 신문 하나 안 남았습니다. 청소부가 여의도 광장을 청소할 필요 없이 깨끗하게 일어났습니다. 개신교에서 엑스플로어 집회를 하고 갔는데 나중에는 사람 사서 청소를 했을 것입니다. 일어나서 보니까 쓰레기 천지입니다. 상관없습니다. 불 받았는데 그 까짓 쓰레기 좀 버린다고 해서 무슨 상관이 있겠어? 믿음 충만해졌는데 오물 좀 던져놓고 간들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왜 이렇게 우리는 하나는 버리고 둘중 하나를 택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성경적인 사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바나바를 보십시오. 선한 인격을 가졌을 뿐 아니라 성령과 믿음이 충만했기 때문에 예루살렘 교회 파송을 받아서 이곳에 내려와서 많은 사람들을 굳게 붙들어주고,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전도되어서 그리스도 예수께 붙어있는 놀라운 복음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여러분들이 둘 중의 하나를 버리고 한쪽으로 가는 사람들 되지 말고 둘 다를 취해서 사람들에게도 칭찬을 받고 그리고 그 사람들의 심령에도 변화를 일으키는 도구가 되어 바나바와 같이 인격적인 감화와 영적인 감화를 함께 가져다주는 주님의 은혜로운 사역의 도구가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착한 사람의 영향력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