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하나님을 찾을 때
(2012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12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지금은 하나님을 찾을 때1 (2012.07.15 주일오전설교)
지금은 하나님을 찾을 때 2 (2012.07.22 주일오전설교)
지금은 하나님을 찾을 때 3 (2012.07.29 주일오전설교)
1. 찾는 자의 하나님(잠8:17) 2012.7.15 주일오전 1
2. 말씀으로 살리심(시119:81) 2012.7.22 주일오전 10
지금은 하나님을 찾을 때 4 (2012.08.05 주일오전설교)
3. 영혼을 강하게 하실 때(시138:3) 2012.7.29 주일오전 17
4. 통촉하시는 하나님(시5:1) 2012.8.5 주일오전 24
5. 가까이 하시는 하나님(시145:18) 2012.8.12 주일오전 31
지금은 하나님을 찾을 때 39
지금은 하나님을 찾을 때1 (2012.07.15 주일오전설교)
지금은 하나님을 찾을 때 2 (2012.07.22 주일오전설교)
지금은 하나님을 찾을 때 3 (2012.07.29 주일오전설교)
지금은 하나님을 찾을 때 4 (2012.08.05 주일오전설교)
지금은 하나님을 찾을 때 5 (2012.08.12 주일오전설교)
1.찾는 자의 하나님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잠8:17)
I. 본문해설
II. 지혜이신 그리스도
A. 하나님의 경륜의 핵심: 구원
B. 구원 경륜의 핵심: 그리스도
C. 그리스도는 지혜의 빛
1. 고통받는 인간의 삶
–인간의 고통은 원치 않는 질서
–고통의 반응은 본능적 몸부림
–벗어나지 못하고 허우적거림
2. 그리스도와 인생의 지혜
–하나님의 그 사랑을 알게 하심
–세계의 창조목적을 알게 하심
–구원의 신적계획을 알게 하심
3. 문제는 세상에, 해답은 하늘에
III. 찾는 자를 만나주심
A. “내가 사랑할 것이며”
- 강조어법: אֲ֭נִי אֵהָ֑ב
- 나를 사랑하는 자들을: h אֹהֲבַ֣י
–지혜: 판단능력-하나님을 아는데서 비롯됨(잠9:10 지혜와 명철)
- 탁월한 지혜는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획득됨.
영원에 대한 인식에서 멀어짐으로써 우둔해짐
–사랑: 영원을 경험하는 길
B. “나를 만날 것이며”
- (뜻밖에)발견하다: יִמְצָאֻֽנְנִי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빛 같이 어김없나니”(호6:3)
필연과 우연
–필연은 하나님 의지하게 하나 우연은 하나님께 매달리 게 함
- “나를 찾는 자들”: מְשַׁחֲרַ֗י
-“새벽 기다리다”→부지런히 찾다
IV.하나님을 찾으라
- 마음을 다해 찾게 하시는 하나님
–시련과 고난으로 마음 움직이심
–상황을 해석함으로써 부르심 앎
–하나님 없이 방황하려는 자에게
V.결론
2.말씀으로 살리심
“나의 영혼이 주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하오나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 ”(시119:81)
I. 본문해설
II. 구원을 사모하는 영혼
A. 영혼의 참된 행복 1. 하나님의 생명을 누림
2 거룩한 삶의 원리를 따름
B. 사모하기에 피곤한 영혼
1. 시인이 말하는 “구원”의 상태
2. 영혼이 피곤한 이유
–고통받는 상태 때문에
–본성과 다른 갈망 때문에
III. 하나님의 말씀을 바람
A. 구원을 갈망하기까지
- 자기 힘으로 고통의 원인을 제거함
- 결과에 실망하고 자신을 불신함
–비참의 결과를 양심으로 인식함
B. 하나님의 성품을 생각함
- 하나님의 자비를 생각함
–하나님의 용서를 생각함
–하나님의 능력 생각함을
C. 하나님의 말씀을 바람
- 바람:“소망을 그에게 둠”
- 낙심과 거짓된 낙관을 버림
- 사랑과 참된 소망을 가짐:믿음
IV.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라
- 좋으신 하나님이 말씀으로 부르심
–인간의 마음에 말씀하시는 하나님
–하나님 버린 그 마음에 역사하심
V.결론
3.영혼을 강하게 하실 때
“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 내 영혼에 힘을 주어 나를 강하게 하셨나이다”(시138:3)
I. 본문해설
II. 간구하게 하신 하나님
- 특별한 간구가 필요할 때
– 평안 속에 독립하려는 인간
– “신앙생활”은 “의지생활”
- 이성보다 계시 신뢰 → 신의지
- 주없이 살 수 없음을 알라
III. 간구하게 하시는 지혜
A. 간구에 응답해 주심
- 하나님 약속을 신뢰하게 하심
- 하나님 사랑을 구체적으로 알게 됨
–우리를 당신께 묶으시는 하나님
B. 영혼에 힘을 주시는 하나님
1. 인생은 힘을 필요로 함
–육체의 힘 vs 영혼의 힘
–전인에 힘을 주시는 하나님
2. 기도는 영혼의 실천임
–기도는 영혼의 움직임
–간구할 때 영혼을 강하게 하심
–내뱉음(죄, 욕망) + 들이쉼(은혜, 생명)
–작은 간구부터 시작함: 계곡다리
IV. 결론: 너는 내 것이라(사 43:1)
4.통촉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 (시5:1)
I. 본문해설
II. 고통받는 신자의 믿음
A.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
1. 당신의 자녀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심
- 시인의 처지: 악인들, 외로움
- 사람이 하나님께 나가도록 도움
- 누구도 함께 가지 못하는 길 있음
- 당신 앞에 홀로 서게 하심
2. 신자의 모든 고통은 하나님 앞에 들림(출3:7)
- 사랑이 자녀들의 소리를 듣게 함
-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시는 성령님(롬8:26)
3. 우리의 경험이 증명함
- 우리가 그렇게 고통의 가시밭길을 걸어왔음
- 악한 상황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냈음
- 연약함이 능력을, 고독이 사랑을 버림받음이 선택을
B. 통촉하시는 하나님
1. “헤아리소서”(בִּ֣ינָה)
- ‘통촉하다’ ‘이해하다’ ‘판단하다’의 뜻임
- 하나님의 판단을 구함
- 고통받는 신자의 가장 큰 위로: 하나님의 아심
2. ‘나의 심정을’(הֲגִֽיגִי)
- ‘묵상’ ‘작은소리’ ‘중얼거림’
- 고통받는 영혼의 혼란스러운 상태
- 자신도 자기를 다 알지 못함
- 하나님께서 자신의 심적 상태를 이해해주시길 간청함
- 하나님의 말씀은 혼란한 우리 자신을 분명하게 보여줌
(히4:12)
3. 기도할 때 기도를 인도하시는 하나님
III. 결론: 유일한 소망이신 하나님
5.가까이 하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시145:18)
I. 본문해설
II. 여호와 하나님
A. 하나님의 두 이름
B. 언약의 하나님
III. 간구하는 자에게 가까이 하심
A. 간구의 보상: “가까이 하심”
- 간구에 대한 보상은 응답 이상임
–응답은 꽃, 가까이함은 열매
–외적변화와 내적쇄신
B. 가장 큰 행복
- 하나님께 가까이함(시73:28)
-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
–땅에서 사모할 자는 하늘의 주
C. 시편에서 “가까이하심”의 뜻
1. 언약적 친밀함(시34:18 마음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 위로하심)
2. 언약적 선택(시65:4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 있나이다)
3. 언약적 보호(시69:18 내 영혼에게 가까이하사 구원하시며
내 원수로 말미암아 나를 속량하소서)
IV. 진실하게 간구하라
A. “진실하게 간구한다”는 의미
1. 마음에서 길어 올린 기도
2. 허위와 가식이 없는 기도
3. 주의 뜻에 합치하려는 기도
4. 절대의존의 마음으로부터 기도
B. 응답 이상의 것을 주심
V. 결론
지금은 하나님을 찾을 때 39
지금은 하나님을 찾을 때1 (2012.07.15 주일오전설교)
지금은 하나님을 찾을 때 2 (2012.07.22 주일오전설교)
지금은 하나님을 찾을 때 3 (2012.07.29 주일오전설교)
지금은 하나님을 찾을 때 4 (2012.08.05 주일오전설교)
지금은 하나님을 찾을 때 5 (2012.08.12 주일오전설교)
1.찾는 자의 하나님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 8:17)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잠언 8장은 구약의 계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장입니다. 왜냐하면 이 잠언 전체가 하나님 앞에서 지혜로운 삶에 대해서 다루는데 이 8장에서는 지혜를 의인화해서 지혜가 말하기도 하고, 지혜를 나눠주기도 하고, 사랑하기도 하는 존재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구약학자들은 이 잠언 8장은 기독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장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말씀 혹은 하나님의 지혜라고 언급되는 신약 성경의 증언들이 이 바로 잠언 8장에 한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나오는 이 모든 인간을 지혜롭게 살게 하시는 그 지혜가 사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을 하게 됩니다.
II. 지혜이신 그리스도
A. 하나님의 경륜의 핵심: 구원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지혜로 묘사됩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지혜는 복음에서 구체화 되고 있죠. 그러면 무엇 때문에 이 지혜이신 그리스도가 성경에서 그렇게 중요하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당사자로 묘사되고 있을까요?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셨고, 한쪽은 창조된 세계이고 한쪽은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하나님은 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세계와 관계를 맺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자연의 모든 사물들도 관련을 맺고 계시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셔서 인간과 영적인 관계를 맺으심으로서 그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셨고, 하나님은 당신을 그 인간에게 알리셨습니다. 그리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마음에 맞게끔 이 세상을 통치하고 다스리고 가꿈으로써 하나님의 이 세계를 지으신 목적을 성취해 나가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의 핵심은 구원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하나님의 창조의 계획들이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타락해서 망가져 버렸고, 그리고 하나님은 구원을 통해서 바로 이 창조의 원래의 목적을 회복시키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의 인간들이 죄를 짓고 타락하게 내버려 두신 것은 하나님이 이 구원의 경륜을 통하여 하나님의 찬란한 지혜와 속성을 보여주셔서 오히려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받으실 수 없는 더 큰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B. 구원 경륜의 핵심: 그리스도
그러므로 구원 경륜의 핵심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인간이 타락하자마자 구원의 길이 주어졌고 그 모든 제사와 용서 그리고 구약에 일어난 모든 구원의 사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었고,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직접 사람의 몸으로 오셔서 이 모든 구원의 약속을 따라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로 죽고 부활하셨습니다.
C. 그리스도는 지혜의 빛
이후에 신약의 시대에는 이 구원 경륜의 핵심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 사랑과 공의를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훌륭한 도구가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지혜의 빛이십니다.
1. 고통 받는 인간의 삶
우리는 흔히 이 세상에서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이 너무나 현실적이고, 그리고 너무나 개별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신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다, 그 분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고 다시 살아나셨다’ 라고 하는 이러한 복음의 교리들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너무나 멀리 있는 내용들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인간들을 바라보십시오.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오고 난 이후부터 이 세상은 고통의 바다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들의 삶은 고통을 받고, 또 고통을 받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고통 받지 않는 사람은 언젠가 다가올지도 모르는 고통 때문에 현재의 행복을 위태롭게 느끼니 이 역시 고통스러운 세상의 고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이 느끼는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원하지 않는 질서 속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는 것을 고통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고통을 받을 때에 본능적으로 몸부림치며 그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라면 인간이 동물과 다를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작은 짐승이라도 괴롭고 고통스러우면 아픔을 느끼고 거기에서 자신을 보호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것은 동물도 하는 일입니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고통을 받을 때 그 고통의 의미를 생각합니다. 그 고통을 통해서 나의 눈에 보이는 이 현실의 바깥에 그 무엇이 있어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끊임없이 흘러가는 이 변전하는 세상을 일관성 있게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어떠한 사실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는 것, 이것은 동물이 할 수 없는 일이고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2. 그리스도와 인생의 지혜
그러면 현실적으로 고통 받고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이 인간의 삶이 그리스도가 지혜의 빛이라는 것과 무슨 연관이 있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인생의 지혜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사람들 눈에 세계는 보이지만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시간은 영원으로부터 왔지만 시간은 느끼지만 영원은 느끼지 못합니다. 모든 육체의 주인은 영혼이건만 육체는 느끼지만 육체를 움직이고 있는 영혼은 발견하지 못합니다. 자, 이렇게 눈에 보이고 시간적이고 가시적인 것들은 인간이 이성을 가지고는 알 수 없는 바깥에 있는 초월적인 세계와 연관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세계는 우리의 이성으로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것을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죗값을 모두 치루셨습니다. 고난당하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만 그러나 그가 왜 죽으셨는지는 그의 죽음을 해석하는 성경의 가르침을 통하여 이해됩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고 다시 사신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깨닫게 되는 그 순간 내가 죄인이라는 것,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 하나님이 이 세계를 우리를 위하여 창조하셨고, 우리는 당신을 위해 지으셨으며, 우리는 죄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멀리 떠났기 때문에 우리들이 이렇게 고통을 받고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3. 문제는 세상에, 해답은 하늘에
많은 사람들은 인간 세상의 고통의 문제를 눈에 보이는 것들로 접근을 합니다. 인간의 육체의 질병이 고통의 근원이고 그것은 의학에 의해서 해결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인간의 모든 고통은 현실에 대한 불만이고 결핍이기 때문에 자원을 통해서 이것들을 채워주고 공급할 때에 인간은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눈에 보이는 문제를 눈에 보이는 것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문제는 이 세상에 있지만 대부분 이 문제의 궁극적인 해답은 이 세상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기 때문입니다. 감기에 걸리면 콧물이 쏟아집니다. 콧구멍을 휴지로 틀어막는다고 감기가 나을 일이 없습니다. 온 몸에 열이 나고 신열이 나고 오열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오한이 나게 됩니다. 그 사람을 차가운 물주머니나 얼음주머니로 열을 식힌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이 되는 것은 아니죠. 문제의 근원은 바로 바이러스에 있습니다. 적절히 쉬고, 의약품을 투입하고 주사를 맞아서 정확한 진단을 따라서 그 바이러스를 제거하면 물주머니를 올리거나 혹은 코를 틀어막을 필요도 없이 우리 온 몸은 정상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돈이 없어서 나는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돈을 벌면 행복해 질 것이라고 생각해서 막상 돈을 벌어보면 돈보다도 더 커다란 문제가 자신의 인생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오히려 가난하고 고통 받을 때에는 그저 돈 때문에 싸웠지만 부부가 돈 많이 벌고 부유해진 다음에는 돈 가지고 해결될 수 없는 문제 때문에 갈등을 일으키는 것을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처럼 인간의 문제는 끊임없이, 끊임없이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우리들에게 나타나지만 그것들을 이 세상에 있는 자원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 모든 문제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해 전에 ‘Passion of christ’라는 영화가 나왔습니다. 멜깁슨이라는 사람이 그 영화를 제작 감독을 했죠. 저는 일부러 안 봤습니다. 그런데 잠깐 잠깐 그 화면에 보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의 고난을 그렇게 리얼하게 묘사할 수가 없었습니다. 의외로 누가 볼까 라고 생각하던 그 영화가 대박이 터져서 어마어마한 미국인이 영화관에 가서 바로 그 영화를 관람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본 사람들의 공통적인 이야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이 아주 리얼하게 묘사했는데, 왜 그런 고난을 당해야 되는지는 대답이 거기에 안 나옵니다. 뭐 아주 깊은 뜻이 제작자에게 있었는지는 모릅니다. 그리고 또 만약에 그 대답까지 제시했더라면 영화가 대박이 안 났을지 수도 있겠죠. 그리고 사람들은 궁금해 하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인터넷 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그 끔찍한 고난을 생생하게 보았는데 우리들이 이미 알고 있는 기독교의 교리인데 왜 예수님이 저렇게 비참하게 죽으셔야 되느냐? 그래서 미국의 목사님 한 분이 책을 섰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던 154가지의 이유인가 뭐 이렇게 해 가지고 어쨌든 썼습니다. 그리고 그 책이 또 대박이 났습니다. 그래서 몇 백 만부가 팔렸답니다. 결국 문제는 이 세상에 있지만 문제에 대한 해결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궁극적으로 죄의 문제이고, 죄의 문제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 그리고 마지막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사건은 우리의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가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그리고 바로 그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여기에서 중요한 한 중간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우리들이 매일매일 만나는 일상의 괴로움과 시련과 고통을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해결하는 지혜를 찾지 말고 바로 이러한 우리의 실제적인 인생의 문제에 대한 답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있다는 사실들을 깨닫게 됩니다. 그 분만이 우리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또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용서하고 사랑하며 우리의 인생의 길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을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III. 찾는 자를 만나주심
A. “내가 사랑할 것이며”
그러므로 오늘 이 지혜자가 8장 17절에서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라”고 한 이것은 신약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우리의 인생의 문제를 어떻게 그리스도를 통해서 해결할 수 있을지 그 자세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찾는 자를 만나주시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히브리 성경에는 그렇게 되어 있지 않고 “나를 간절히 찾는 자들을 내가 사랑할 것이며”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부분이 “내가 사랑할 것이며” 라고 하는 이 부분이 강조 어법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화자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지혜인 나 자신이 나를 사랑하는 자들을 내가 사랑해 줄 것이며 라고 합니다.
성경은 복음을 하나님의 지혜라고 부릅니다. 왜 복음이 하나님의 지혜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지혜를 추구했습니다. 왜 그렇게 지혜를 추구했을까요? 그것은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참다운 길이 무엇인가를 묻기 위한 질문이요, 대답이었던 것입니다. 돈이 많으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돈이 많고도 불행한 사람이 아주 많습니다. 또 지위가 높으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불안정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태어나고 병들고 죽고 늙어가고 시련을 만나고, 고통을 당하는 이 모든 과정을 통해서 인간이 끊임없이 그것에 의해서 행복해지고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하는 이러한 요동치는 삶으로서는 인간이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오래전에 삶은 요동치고 변해요. 변하는 이 삶을 일관성이 있는 삶이라고 설명해 주기 위한 그 무엇이 필요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지혜였습니다.
비유를 하자면 지혜는 이런 것입니다. 사람들이 출렁거리는 물이 있습니다. 딱딱한 얼음이 있습니다. 구름처럼 올라가는 수증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집에 들어갈 때 느끼는 축축한 기운이 있습니다. 지혜가 없는 사람, 판단력이 없는 사람들은 이 모든 것들을 다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죠. 그리고 왜 집안에 얼음 한 덩어리를 갖다 놓았는데 집안이 이렇게 눅눅해 질까? 라고 생각하겠죠. 그리고 아마 얼음을 갖다놓고 외출한 후에 돌아왔는데 그것이 물로 변했을 때에는 깜짝 놀랄 것이고, 며칠 있다 그 물이 사라진 것을 보면 더 충격을 받겠죠. 이것은 바로 그렇게 출렁거리는 액체 상태, 얼음인 고체상체, 수증기가 된 기체상태 이 사실 사이에 연관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깥에서 보면 이것은 수소 두 분자와 산소 한 분자의 장난입니다. 그것이 바깥의 상황에 따라서 얼음으로도 변하고, 물로도 변하고, 수증기로도 변하고 그리고 물이 사라졌지만 사라진 게 아니라 지금은 기체 형태로 존재를 합니다. 이런 것들을 우리들이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말하자면 사람들이 찾고 싶었던 지혜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바로 그 지혜라는 것입니다. 왜? 너희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가난으로, 무지로, 인간관계가 깨어지고 병들고 하는 것 때문에 불행하고 괴로워해서 의학으로, 물질로, 그리고 서로 인간끼리 서로를 존중함으로, 교육으로 이런 인생의 불행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하지만 그것이 궁극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 너희의 죄가 문제의 원인이고 하나님의 은총이 그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이라고 하는 것을 한 번에 보여주기 때문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바로 그 지혜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가난하고 병들어 가는 사람들에게만 복음이 아니라 돈 많고 정신적으로 고달파하는 사람들에게도 구원의 길입니다. 못 생기고 견적 많이 나오게 생긴 그런 사람들에게만 복음이 아니라 여러분처럼 잘생기고 그리고 정말 흠잡을 데 없이 훌륭한 외모와 젊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복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가장 현실과 상관없어 보이는 하나님의 복음이 사실은 가장 현실적으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고 라고 합니다.
원래 이 지혜는 판단 능력입니다. 그런데 잠언 9장 10절은 이 지혜가 하나님을 아는데서 비롯된다고 말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와 명철이라고 단언적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탁월한 인생의 지혜는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획득됩니다. 이 지혜는 판단의 능력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가방 끈이 긴 사람이 지혜가 뛰어난 게 아닙니다. 가방끈이 길고 공부를 많이 했어도 그거는 지식의 나부랭이들입니다. 이 지식을 구슬이라고 한다면 지혜는 이것을 꿰는 실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이것을 꿰는 실이 없다면 파편적인 지식들로 꽉 찬 사람이 될 뿐입니다. 그 지식이 그를 행복하게 하지 못해요. 오히려 그런 지식이 적어도 확실하게 꼭 필요한 지식들을 엮어낼 수 있는 지혜가 있으면 그는 비교적 지식이 모자라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지혜는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게 해 주는 지혜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이 세계가 우리와 함께 있고, 인간들이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며 그리고 우리의 이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진 우리의 존재는 육체는 잠시 후에 사라지는 존재이고, 우리의 영혼만 남고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인간 존재 전체가 회복되어서 영원히 살 불멸의 존재라고 하는 인식을 갖는 것은 시간 속에서만 아는 것으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이 인간의 어리석음은 어디에서 비롯되냐면 시간에 대한 착각에서 비롯됩니다. 즉, 잠시 있을 것인데 영원히 있을 것처럼 생각하고 그리고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인데 그것이 궁극적인 목적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살아갈 때 거기에서 인간의 모든 불행들이 야기됩니다. 그래서 잠깐 동안 있다가 사라지는 것에 몰두하여 즐거움에 빠지게 되면 더 커다란 낭패를 만나게 되고, 영원하지는 않아도 꽤 오래 남는 것들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살면 그 사람의 삶은 훨씬 복된 사람이 됩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여러분 어른들 가운데도 게임 같은데 빠져 있는 분들이 계시더라고요. 심방 가보면 남편이 그래서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거 중독입니다. 그거 하면 안 돼요. 어떤 사람들은 뭐 심심하니까 머리를 식히기 위해서, 머리를 식히는 게 아니라 머리에 열이 나더라고. 그렇게 하면서 그 소중한 인간의 시간을 그런 식으로 낭비합니다. 잡기에 빠지면, 잡기에 빠지는 거는 그 지혜로운 삶이 안 됩니다. 그러고 보면 특히 우리나라 이 조선시대 같은 때에도 보면 신하들이 적극적으로 왕에게 말리는 것이 잡기입니다. 잡기. 그러니까 왕이 오락을 즐기는 것은 왕에게 절대로 부합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을 생각하면 참 이해할 수 없죠. 그죠? 심지어 역사 기록에 보면 왕이 그렇게 숙종 같은 경우에 고양이를 그렇게 좋아했습니다. 고양이, 개 이런 걸 이렇게 좋아하던 임금들이 있었습니다. 끊임없이 신하들이 왕에게 간청을 드렸습니다. 그런가 하지 마시라고. 그 왕에게 할 말은 곧 죽는 한이 있더라도 꼭 하는 사람들이었거든요. 간원들이 “하지 마십시오.” 왜 그랬냐 하면 왕은 그런 잡기로부터 멀어져서 고요한 가운데 높은 하늘의 이치를 생각하면서 그러면서 도를 닦는 사람처럼 살아가야지만 이 나라를 흐트러지지 않는 평정한 마음으로 하늘의 이치를 따라서 인간을 온전하게 다스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종교인입니다. 종교라고 하는 것은 마음을 우러러서 남들이 보지 못하는 세계를 보면서 살아가는 사람이야. 그런 사람들이 오락과 잡기에 빠져서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이거입니다. 건강을 위해서 테니스를 한다든지, 뭐 축구를 한다든지 그런 건 괜찮습니다. 그러나 그런 오락에 병적으로 빠져서 거기에 몰두하는 그 사람 속에서 모든 영적인 이 자질들이 다 파괴됩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도 절대로 그거 시키면 안 돼요. 보십시오. 왜 그러냐 하면 그는 막 하다가 지고 나면 Game over 라고 나오고 끝납니다.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다 쏟아 붓고 막 했던 그것이 아무것도 안 갖다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얘기하겠죠. 그러면 무슨 거기에서 게임 머니가 나옵니다. 돈이 나옵니다. 그것은 더 나쁜 것입니다.
보십시오. 우리들이 눈앞에 이익을 위해 장사할 때 속이고 그리고 다른 사람을 등쳐먹고 다른 사람들에게 손해를 입혀서 더 내게 유익을 준다고 하는 것은 아주 짧은 시간 동안만 소중해 보이는 것을 위해서 투자합니다. 그런데 비록 그가 신앙이 없어도 좀 먼 관점에서 보는 것입니다. 가족들의 행복, 우리나라의 번영, 우리 사회의 건강함 뭐 이런 거를 생각하면서 뭔가를 결정한다고 생각을 해 보세요. 훨씬 훌륭한 사람이 됩니다. 욕망에 의해서 좌우되지 않는 사람, 그런데 그보다 더 길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게 뭐죠? 영혼의 관점에서 생각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말을 남깁니다. “인간은 진리의 빛을 받지 아니하면 결국 육체와 영혼 중 육체만을 편파적으로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런데 언젠가는 이 육체가 사라져 버리고 나면 육체에 대한 사랑은 결국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없는 것들을 사랑하던 사랑이었다. 그 없는 것들을 향한 사랑이 악입니다. 악, 그러니까 하나님만이 언제나 계시고 영원히 계신 분이시니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탁월한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만 탁월한 지혜를 얻을 수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짐으로써 인간이 우둔해지고 미련해진다고 하는 것은 틀림이 없는 사실인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또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셔서 자신의 뜻을 더 잘 보여줄 것이니 지혜롭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더 사랑받고 더 지혜로워 질 것이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계속 고통 가운데 헤매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많은 문제들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를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를 믿게 되고 나서 처음 깨달은 사실은 무엇이었죠? 놀랍게도 나의 인생의 문제가 나의 고민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고민과는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2000년 전에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안에 답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지혜를 간절히 사모하고 여러분이 어떤 처지에 있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사랑하는 사람들은 결코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나빠 보이는 그 일도 결국은 사랑이 그것을 변화시켜 좋은 일로 만들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B. “나를 만날 것이며”
마지막으로 성경은 “나를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며” 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만날 것이며”라고 하는 이 단어는 히브리어로 “맞자”라는 단어인데 발견하는 것을 가리키고, 만나는 것을 가리키는데 뜻밖에 만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호세아서 6장 3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빛과 같이 어김이 없으시나니”라고 말입니다. 옛날의 번역을 따르면 그의 나타나시는 새벽빛 같이 일정하니 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 주시기로 작정하시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당신 안에 이루어진 작정을 실제로 자기를 간절히 찾는 사람들에게 실현시켜 주심으로써 우리들에게 당신을 간절히 찾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교육시키십니다. 여러분이 언젠가는 인생의 문제에 직면했을 때에 미끄러지고 낙심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고, 침륜에 빠진 적도 있었겠지만 어떤 때에는 시련에 시련이 겹쳤는데도 예수님 붙들고 믿음으로 몸부림쳐본 적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간절히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만남을 주시는 놀라운 경험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 삶의 현장, 아무 곳에도 안 계신 곳이 없으신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 계셔서 당신을 간절히 찾는 자들에게 나타나시고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남녀노소나 지위의 높고 낮음과 상관이 없고, 신앙의 경력이 오래된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차별이 없이 어린 아이라도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하나님께 매달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놀랍게 만나주시고 당신의 위대한 사랑을 그들의 마음속에 체험하여 최고의 행복을 누리게 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1년에 한 번씩 여름 수련회를 하고 또 회심집회를 합니다. 그때마다 저는 비록 초등학교 어린 학생들인데도 이미 하나님을 간절히 만나고 싶어서 나아오는 아이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해요. 그리고 하나님은 그 아이들에게 정말 은혜를 주십니다. 이제 아이들이 설교를 들은 다음에 기도를 해주는데 선생님들과 함께 제가 기도를 해주는데 하나씩 머리에 손을 얹고 혹은 안고 기도를 해줬습니다. 그런데 불을 좀 껐으니까 어둑어둑해서 잘 안보입니다. “하나님 이 아이에게 은혜를 주십시오. 회심하지 않았다면 이 아이를 회심시켜 주시고, 회심했다면 하나님 더 사랑하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조금 있다가 또 기도를 하고, 몇 사람 해주다가 또 기도를 하고, 기도를 하고, 이상하게 이게 기도를 이렇게 하는데 머리통이 어디서 많이 만져본 머리통입니다. 똑같은 애가 기도 받고 뒤에 있다가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고, 이게 한번 기도 받는 거 같고 안 되겠는 거야. 그러니까 나중에 얘는 기도 받았는데. 기도 받고는 저 옆에 있다가 친구 뒤에. 목사님 여기로 움직이겠다. 그 뒤에 가서 기도해 줬는데. 머리를 만져보니까 많이 만져본 머리입니다. 얼마나 사모했으면.
몇 년 전에 사경회가 아니라 4,5,6학년 학생들을 데리고 설교를, 3, 4, 5, 6학년 학생을 데리고 설교를 했는데. 4학년짜리 초등학생 하나가 집에 가서 그러더래요. 엄마가 “회심집회 어땠니?” 그러니까 “엄마 회심집회 너무 좋았어. 그런데 단점이 하나 있었어.” “왜” 그러니까 “우리 목사님 설교가 너무 짧았어.” 76분 설교였습니다. 70분 설교였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마음입니다. 제가 신학교에 오기 전에도 교회에서 주일학교 봉사할 때 보면 그 고난 주간에 아이들이 유치부 애들부터 초등학교 다니는 애들까지 교회 지하실에 와서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이 한 7~8살, 초등학교 한 1학년쯤 안 돼 보이는 아이들, 예수님의 십자가 지신 이야기를 하면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고사리 같은 손을 붙들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아주 하나님이 그렇게 어린 아이들을 아주 뚜렷하게 만나주셔요. 그때 어느 교회의 여집사님이 문을 열고 애들 기도하는 모습을 보다가 울고 갔대요. 왜냐하면 나는 쟤네들만도 못하다. 당연하지. 못하지. 누가 어른이 간절히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요. 하나님은 누구든지 당신을 간절히 찾는 사람을 만나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돈이 없는 사람이 그렇게 당신을 찾으면 물질을 주시고, 병든 사람이 그렇게 찾으면 건강을 주시고, 그리고 회심하지 못한 사람이 그렇게 간절히 찾으면 주님이 믿음을 주시죠. 그리고 능력이 없는 사람이 찾으면 능력을 주시고 죄 있는 사람이 그렇게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용서해 주십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이 당신을 찾는 자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IV. 하나님을 찾으라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그저 일상적으로 예배당에 나오고 그저 종교적인 의무를 마지못해서 수행하는 것은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 시간에 나아와서 의무감으로 나아오긴 나아왔는데 그냥 견디지 못해서 힘들어하면서 예배 끝나는 시간을 기다리는 태도는 하나님 찾는 거 아닙니다. 밀려오는 졸음을 눈을 치뜨면서 견디는 거는 예배에 참석하는 것일 순 있지만 하나님을 찾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를 해도 마음을 쏟아 붓지 않는 것은 그저 기도의 의무에 참여할 뿐이지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찾는 것이 아닙니다.
차가 과속이 위험한 이유는 부딪치면 큰 충격이 있기 때문에 위험한 것만은 아닙니다. 어차피 한 80km정도로만 달리면 그 충격이 12층에서 차가 땅바닥으로 떨어지는 것하고 똑같은 정도의 충격입니다. 사실은 80km로 부딪치든지, 90km로 부딪치든지, 혹은 100km로 부딪치든지, 120km로 부딪치든지 거의 비슷비슷합니다. 어차피 거의 죽습니다. 그런데 위험한 이유는 한 30km쯤으로 천천히 달리면 전방이 다 보입니다. 그런데 속도를 한 80km로 올리면 보이는 시야가 좁아지면서 옆은 막 지나가는 줄무늬처럼 보입니다. 한 110km 쯤 밟으면 더 좁아집니다. 경주용 자동차들이 340km쯤 달리는데, 그러면 점으로 보인답니다. 아무것도 안 보이고 점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가까운 곳도 안 보이고 멀리 전방이 점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V. 결론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흔들흔들하면서 하면 다 보입니다. 세상도 보이고, 인간도 보이고, 근심 걱정도 보이고, 저 멀리 예수님도 보입니다. 그런데 간절한 신앙의 몸부림으로 달려가면 좁아집니다. 마지막에는 세상과 나는 간곳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는 단계에 까지 가게 됩니다. 그때에 들리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심령을 찢는 것이고, 그때 울리는 기도는 우리의 심령 속에서 솟아오르는 폭포수와 같습니다. 그때에 하나님 앞에 내리는 결단은 우리의 인생을 움직이기에 충분한 은혜의 결단입니다. 그래서 일상적으로 하던 일들을 계속 하는 습관적인 생활 말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에, 우리의 예배에, 우리의 섬김에 우리의 마음을 싣고 나 같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셨다는 사실, 내가 그 은혜를 입었고 그래서 내가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주님 의지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절실하게 느끼며 하나님 앞에 매달릴 때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헤아릴 수 없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지 않겠습니까? 주님이 바로 이런 놀라운 일들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도 여러분에게 이런 은혜를 주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이시니 그분께 간절히 매달려 주님을 찾고 고통스러운 인생의 문제에서 벗어나 주님을 앙망하며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말씀으로 살리심
“나의 영혼이 주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하오나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시 119:81)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시편 119편은 하나님 말씀의 영광의 장이라고 불리는 부분입니다. 시인은 시편 119편에서 자신의 영혼이 곤고할 때에 하나님이 말씀으로 어떻게 건지셨는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더욱이 고난과 시련이 어떻게 시인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까이 이끌어 고난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하던 자신을 고난을 당한 후에는 주의 율례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도 시인은 악인들에게 에워싸여 고통을 받던 어느 시기를 회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시인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영적인 위험에서 벗어났는지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II. 구원을 사모하는 영혼
A. 영혼의 참된 행복
본문은 먼저 구원을 사모하는 시인의 영혼을 보여줍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의 영혼이 주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하오나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 여기에서 시인은 영혼의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영혼은 본래 하나님을 가장 닮게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 분 안에서만 안식과 위로를 얻을 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인류 역사에 나타났던 영혼과 신에 대한 모든 그리움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무지와 편견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이방 종교들을 만들어 내고, 또 자신이 온 영원한 세계와 자신이 사후에 돌아갈 영원한 세계를 그리워하면서 만들었던 모든 영원과 관련된 문화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비록 인간의 편견과 무지에 의해 혼탁하게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의 영원 안에 심어놓으신 참된 행복을 그리워하는 성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이 악인이든, 선인이든 공통된 것이 있는데 그것은 그가 누구이든지 행복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혼의 참된 행복은 바로 하나님의 생명을 충만히 누리는데 있습니다. 이 생명의 기운이 충만함으로 인간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지으신 목적에 합당하게 살며 모든 사람들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헌신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이 만든 모든 물건들에는 사물의 제작의 원리가 있고, 작용의 규칙이 있듯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영혼에도 원리가 있고 거룩한 삶의 법칙이 있습니다. 이것을 따라 살면서 영혼이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으로 충만하여져 행복한 상태가 되는 것이 영혼이 참으로 도달하고 싶어 하는 상태입니다.
B. 사모하기에 피곤한 영혼
그런데 오늘 시인의 영혼은 그렇지 못합니다. “나의 영혼이 주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하게 되었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사모하기에 피곤하게 된 영혼이 갈망하던 구원의 상태는 어떤 것이었을까요? 물론 시인은 악인들에게 에워싸여 있어서 그들의 압제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한 관심사였습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주의 법을 따르지 아니하는 교만한 자들이 나를 해하려고 웅덩이를 팠나이다. 그들이 나를 세상에서 거의 멸하였으나 나는 주의 법도를 버리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니 시인이 정말 구원의 상태라고 생각하는 것은 모든 대적들로 말미암는 고통과 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라 시인의 영혼이 고갈의 상태에서 벗어나 충만한 생명으로 가득차지 않으면, 대적들이 모두 파멸되어 죽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구원일 수가 없을 것입니다. 마치 삼손이 블레셋 군사들 일 천명을 당나귀의 턱뼈로 때려죽이고, 마지막에는 자신도 주저앉아서 하나님 앞에 목이 갈하여 이제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이 다시 쳐들어오면 죽임을 당하게 되었노라고 고백을 했던 것과 같이 그런 모든 연약한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까지를 포함한 것이 구원의 상태였습니다.
여러 달 동안 비가 오지 않아서 온 국민이 걱정을 했고, 교회도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어느 날 하늘이 열리고, 단비가 쏟아지기 시작하더니 죽어가던 이파리들이 생생하게 다시 활기차게 생기를 얻고, 거의 죽어가던 채소들도 싱싱하게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잠깐씩 일이 있어서 밖에 나오기는 했지만 한주동안 기도원에서 지냈습니다. 그런데 비가 오고 나니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계곡에 맑은 물이 흐르며, 온 산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가 납니다. 물이 흐르니까 온 산에 산천초목들이 생기를 얻습니다. 시인은 바로 이러한 상태를 간절히 사모하였습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시련 당하고, 고난당하지 않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의 생명이 여러분의 심령 속에 충만하게 되기까지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자신의 영혼이 피곤하여졌다고 고백을 합니다. 물론 영혼이 피곤한 이유는 악인들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영혼이 피곤한 것, 히브리어 성경에는 연약해 졌다고 나오는데 구원을 간절히 갈망하며 힘을 쓰다 보니까 연약해졌습니다. 연약해진 이유는 인간의 육적인 본성과는 다른 갈망을 유지하는데 들어가는 에너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웅덩이에 빠진 사람이 줄을 붙들었는데, 그 줄을 굳게 붙들고 올라오려고 하다가 기력이 진하여 힘이 빠져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시련과 고난이 오고, 역경이 닥칠 때 낙심하고 좌절하고 세상을 원망하고 사람들을 미워하고, 비관하고 심지어는 하나님께 원망을 하는 일은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셔도 저절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육적인 본성을 따르는 반응입니다. 그러나 시련 속에서 그 시련을 해석하고 고통 속에서 의미를 찾으면서 하나님을 향해 소망을 갖는 것은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도우심이 없이는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것을 끊임없이 유지하려고 할 때에 이 속에서 많은 에너지가 들어갑니다. 그러면서 시인이 하나님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한 영혼이 되기까지 갈망을 유지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오늘날 여러분이 처해있는 처지가 정말 여러분이 원하는 처지가 아니고 고통스럽고 힘들다면 여기에서 벗어나 영혼의 참된 안식이 있는 상태를 그리워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인처럼 간절히 갈망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영혼이 주님의 구원을 피곤하여지기까지 간절히 갈망하며 주님을 바라고 있습니까? 정말 여러분은 영혼이 지쳐 피곤하기까지 주님의 은혜를 갈망한 적이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주님을 만나 그 분으로부터 참된 사랑과 진리로 말미암는 안식을 얻을 때까지는 진정으로 쉼을 느끼지 못합니다. 신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의 문제를 그 영혼과 마음으로부터 해결하는 것입니다.
III. 하나님의 말씀을 바람
A. 구원을 갈망하기까지
구원을 사모하는 영혼과 함께 이 성경 구절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는 시인의 영혼의 바람을 보여줍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 히브리 성경에는 “나는 주의 말씀에 희망을 두었나이다”라고 나옵니다. 이런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하기까지 시인은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과정을 거쳤을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가난한 마음으로 나의 구원이 오직 주님께 있사오니 나를 도와달라고 눈물로 하나님 앞에 간구하기까지 먼저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져 미끄러지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힘으로 고통의 원인을 제거하고자 애를 쓸 것입니다. 우리의 고통과 괴로움 속에는 원인이 있고, 눈에 보이는 원인들은 대게 사람과 자원의 결핍, 사물의 질서의 혼돈에서 발견되고 거기에는 그렇게 만든 원인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자기의 힘으로 고통의 원인을 제거해 보기 위해 힘쓰고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가 준비한 자원을 그 일을 위해 허비하기도 합니다. 또 다른 사람의 자원과 도움을 받아서 원인을 제거해 보려고 힘쓰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언제나 실망스럽고, 더 큰 좌절에 빠지며 마지막에는 자신을 불신하게 됩니다. 이때에 자신을 불신하는 것만큼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고, 자기를 불신하는 것만큼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 안에 비로소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나 자신을 지지하는 죄 된 마음과 나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거룩한 마음이 분리됩니다. 그리고 모든 비참한 결과가 자신의 잘못 때문에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양심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성품을 생각하게 됩니다. 자신의 힘으로 고통의 원인을 궁극적으로 제거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결과는 매우 실망스러웠고, 그리고 자신은 이 모든 것들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기 때문에 땅의 것들에 실망한 마음은 하늘의 것들에 소망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생을 살다가 어렵고 힘든 일이 일어나는 것이 반드시 재앙이 아닙니다. 그것을 통해서 땅에 단단히 붙어 있는 우리의 마음을 뜯어내어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도록 만들어 주시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B. 하나님의 성품을 생각함
어떤 교인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나쁜 일을 많이 해도 거의 걸리지 않았는데, 예수 믿고 나니까 잘 하다가 가끔 못된 짓 하는데 그때 뭔가 법칙을 어겨보려고 그러면 정확하게 걸리게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며 관심의 표현입니다. 그 비참한 결과를 양심으로 인식하게 될 때에 어떤 고백을 하게 되냐면 “하나님이 잘못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잘못했습니다” 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옳으시고 나는 언제나 잘못되었습니다” 라고 고백을 하게 되고 그때에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이 자신의 비참한 결과에 대하여 진노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어서 하나님이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됩니다. 과거에 많은 기억들이 떠오를 것이고, 자신이 예전에도 하나님을 멀리 떠나 불순종의 길을 갔을 때에 이렇게 비참한 결과를 양심으로 인식하고 후회하던 경험들을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이때 그는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회개하게 될 것이고, 이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의 안에 있는 용서하시는 성품을 생각하면서 이 시인처럼 하나님 앞에 나아갈 용기를 얻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떠나고 불순종하고 죄를 지어서 영혼의 깊은 침체가 올 때에, 급기야 시련과 고통이 계속될 때에 우리 마음에 자존감도 현저히 사라지게 됩니다. “나 같은 인간이 하나님께 과연 가치 있는 존재일까? 하나님이 당신께 순종한 착한 사람들이나 예쁘다고 하시지 나 같은 인간이 하나님께 관심이나 끌 수 있을까?” 이렇게 자존감이 현저히 낮아지게 될 때에 시인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런 자존감을 현저히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가 항상 상기하여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값 주고 사시기 위해서 어떠한 희생을 지불하셨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때에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 같은 사람 하나, 하나를 구원하여 살리시기 위해 자기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어 우리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의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잘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두 바가지의 피를 부어 구원하시고, 우리같이 미끄러진 사람들에게는 한 숟가락의 피를 흘려주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동일하게 십자가에서 자기를 버려 피 흘려 우리를 구원하신 큰 대가를 지불하신 것입니다.
한 20년 전의 일입니다. 아직 학교에서 교수 생활을 하고 있었을 때였는데, 어느 학생이 찾아왔습니다. 밤에는 신학 공부를 하고 낮에는 큰 사업을 하는 학생이었는데 “교수님, 외국에 나갔다가 교수님 생각이 나서 선물을 사왔습니다.” 그래서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뭐 있냐?” 그랬더니 “교수님 위해 산 게 아니라 나 자신이 이렇게 하는 것이 좋아서 사왔습니다.” 그러고 놓고 가요. 그래서 고맙다고 그러고 받았어요. 열어 보니까 볼펜이에요. 볼펜 잘 쓰지도 않거든요. 서랍에다가 휙 던져서 집어넣고 새카맣게 잊어버렸어요. 몇 달이 지나서 어느 잡지 하나를 열었는데 어디서 많이 본 볼펜이 나와 있었어요. 내가 받은 볼펜하고 똑같은 볼펜인데, 정가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20년 전에 그 볼펜이 17만 원짜리 볼펜이었습니다. 170불이었으니까 한 20만원된 볼펜이었습니다. 다시 서랍을 열었습니다. 꺼내고 보니까 느낌이 그때 그 볼펜이 아니에요. 그래서 아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가 내가 귀하게 여기는 사람한테 선물을 한 걸로 기억을 해요. 값을 알고 나면 달라지는 것입니다.
C. 하나님의 말씀을 바람
항상 그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난 나의 구원을 위해 아무것도 한 것이 없지만 나 같은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자기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으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만약에 이 세상에 죄인이 나 한사람밖에 없어도 하나님 아버지는 자기의 외아들을 보내어 자기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게 하셨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나는 하나님을 배신하고 버려도 주님은 나를 버리실 수 없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용서를 기억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당신의 큰 능력으로 나를 비천한 상태에서 건져 능히 건져내실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굳게 믿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게 됩니다.
히브리 성경에는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라는 이 대목이 “주의 말씀에 나의 소망을 두나이다”라고 나옵니다. 바란다는 것은 소망을 그 분께 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다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그 분을 향한 전적인 신뢰와 소망을 가리킵니다. 낙심과 거짓된 낙관은 은혜에서 미끄러진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양쪽의 오류입니다. 근거 없이 낙심하고 절망해서 미끄러지는 것과 거짓된 낙관을 믿으면서 자신을 반성하려고 하지 않는 이 두 가지 태도는 떨어지는 방향은 왼쪽과 오른쪽 다르지만 떨어지는 곳은 똑같이 밑바닥을 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종종 우리가 하나님 이외에 헛된 것에 소망을 둘까봐 우리의 마음을 때로는 때리시고, 혹은 물 부어 씻기시기까지 하시며 이 거짓된 낙관과 무분별한 낙심에서부터 벗어나 하나님의 사랑과 참된 소망을 갖도록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위기, 인생의 어떤 시련 속에 처해있든지 간에 두 가지 사실만을 굳게 붙들고 살아간다면 반드시 헤어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여러분에게 여러 차례 증거 하였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자체가 선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어떤 식으로든지 나쁜 일을 행하실 수 없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쁜 일을 행하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사실은 그 하나님이 선이시기 때문에 그런 느낌이 우리에게 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됩니다.
여러분 모두 어렸을 때에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혹은 잘못된 일을 해서 매 맞은 기억이 날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어렸을 때에 부주의하여 말썽을 부리거나 혹은 마음이 올바르지 못하여 부모님의 지갑에 손을 대었다고 칩시다. 그때에 부모님이 “애 자식이 어떻게 자라든지 내가 뭔 상관이 있으랴” 그리고 내버려두었다면 그 징계 없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선한 것이었겠지만 사실은 그 부모의 악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색을 하고 여러분의 종아리에 피가 나도록 매질을 할 때에 그 세기와 분노의 크기만큼 부모님이 여러분을 향해 가지고 있는 선한 기대,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참으로 부주의해서 말썽을 부린 여러분을 때리는 것은 여러분의 부모가 마음을 풀기 위해서 복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이 아이의 부주의한 기질이 고쳐져서 신중하고 믿음직스러운 인간이 되겠느냐는 것이며, 여러분의 부도덕한 것들로 인하여 매를 때릴 때에는 여러분이 잘못한 것에 대해서 보복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돌이켜 선한 사람이 되라고 여러분을 나빠 보이는 것으로서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은 언제나 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거스르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나쁜 것을 주시는 것처럼 느껴질지라도 그것은 오히려 그를 돌이켜 선한 길로 인도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 시련이 닥치고 고난이 오고 모든 일들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고 영혼까지 침체에 들게 되면 바로 이 가장 중요한 사실 하나가 우리에게 의심거리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말 계실까? 하나님은 정말 나를 사랑하실까? 하나님은 인간을 차별대우 하시지 않는가? 나 같은 인간은 주님을 섬기는 것도 없고 주님의 마음만 아프게 해드렸는데 나 같은 인간에게 주님이 눈길이나 주시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주님도 당신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들은 사랑하시지만 나 같은 인간은 관심 밖이실 거야라고 생각합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좋으신 하나님이 여러분을 위해 행했던 좋은 일들을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IV.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라
제 생애에 수없는 성찬식에 참여했지만, 가장 감격스러운 성찬식은 아마 저의 아들이 첫 번째 유아 세례를 받으며 참여한 그 성찬식이었을 것입니다. 아이가 돌쯤 되어서 세례를 받았고, 저는 그 아이를 품에 안고 성찬에 참여했습니다. 그때 기둥 뒤에 서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과연 나는 남을 위하여 나의 아들을 죽는 데까지 내어 줄 수 있을까? 우리 아이가 아프리카에서 선교하다가 이 아이가 순교를 하였다는 소식이 들려온다면 나의 마음은 어떨까? 그런데 주님은 바로 이보다 더 소중한 당신의 아들을 우리를 위해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보내사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죽게 하셨구나” 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에 깊은 마음에 찔림이 왔습니다.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라는 사실 언제나 기억하고 우리의 삶의 시련과 역경, 혹은 우리의 죄로 말미암는 영혼의 침체로도 덮을 수 없는 사실이 바로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다.
(찬양) 좋으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
좋으신 분, 그래서 우리가 고백할 때에 ‘하나님은 언제나 좋으시고 나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라고 고백을 합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당신을 멀리 떠난 사람들을 언제나 당신의 말씀으로 불러 다시 살게 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라고 간절히 부르고 계십니다. 좋으신 하나님은 당신의 좋으심을 우리의 눈으로 보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으로 먼저 맛보아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정말 우리를 부르실 때에 우리의 지성에 말을 건네시고 우리의 마음에 대화를 시작하심으로서 당신의 말씀을 우리의 마음에 넣어주심으로 우리를 하나님을 멀리 떠났던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나아오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좋으신 하나님은 이처럼 말씀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이고, 인간의 마음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에 시련과 역경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그래서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고치지 않고 시련과 위기 속에서 우리를 건지시면 그 망가진 마음으로 또 한 번 망가진 삶을 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먼저 고쳐 새롭게 하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버린 마음의 고통을 알게 하시고 그 마음에 커다란 상처가 바로 우리의 모든 불순종하는 삶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직시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망가진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의 포도주를 부어 우리를 고쳐 새 마음을 갖게 하시고, 그리고 우리의 더러운 마음을 할례 받아 구별되게 하셔서 하나님을 향해 다시 살게 해 주시는 위대하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지금도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이 근심, 저 염려 인생의 이런 위기와 저런 시련 속에서 이제는 아무런 희망이 없는 것처럼 좌절하고 낙심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여러분 눈을 들어 보십시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그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고 구원하셨고, 오늘도 여러분에게 은혜를 주셔서 하나님을 향해 살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 이처럼 비극에 이르게 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부르시는 하나님은 오늘도 여러분의 마음속에 찾아오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버린 그 마음을 고쳐주시기 위해 오늘도 말씀을 보내사 흑암에 앉아있는 여러분의 마음을 움직이는 하나님이십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모두 하나님 앞에 올바르고, 구김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보십시오. 사람이 흑암의 그늘에 앉음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고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불순종한 죄악의 사슬에 매이는 것은 지존자를 멸시하였기 때문입니다.
V. 결론
우리들은 모든 문제들을 항상 표면적으로만 해결하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하시고 싶어 하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마음에 찾아오셔서 선하신 하나님은 여러분의 마음에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은 세밀한 음성처럼 다가올 수도 있고, 찬란한 불빛처럼 다가올 수도 있고, 여러분을 찌르는 칼처럼 다가올 수도 있고, 두드리는 방망이와 같이 다가 올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역사하시든지 간에 하나님은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을 당신의 품으로 다시 부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당신의 선함을 당신의 말씀을 통하여 보이시는 분이시니 여러분이 다시 한 번 하나님을 갈망하기를 바랍니다. 복잡다단한 여러분의 삶 속에서 마음을 잠시 거두기 바랍니다. 마음껏 풀어놓았던 여러분의 마음을 다시 한 번 거두시기 바랍니다. 조용히 무릎을 꿇고 전능하신 하나님 한 분으로 마음을 가득 채우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잠시 여러분의 마음을 비워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주목하기 바랍니다. 어리석음과 탐욕, 그리고 모든 분노를 물리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을 접고, 주님이 여러분에게 베푸셨던 자비와 크신 사랑과 용서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살아온 날들은 거짓되고 불신실했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신실하게 여러분을 인도하신 것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주님을 굳게 붙들고 의지하며 믿음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주의 영혼에, 하나님께서는 영혼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사모하며 갈망하는 시인을 시련의 골짜기와 모든 고난의 늪에서 건져 내셨습니다. 그리고 시인에게는 고난당한 이 모든 날들이 하나님 앞에 더 크게 복을 받는 하나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하나님은 당신을 버린 우리의 마음에 역사하사 우리를 근원적으로 고쳐 다시 당신의 품에서 안식을 누리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모든 희망이 주님이 선하신 분이심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오늘도 여러분을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아가 여러분의 마음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이 참된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오는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빕니다.
3.영혼을 강하게 하실 때
“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 내 영혼에 힘을 주어 나를 강하게 하셨나이다”(시 138:3)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본문은 위대한 믿음의 사람, 다윗의 시입니다. 다윗은 이 시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에 자신이 직면해야 했던 모든 어려움 속에서 승리한 경험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대해 주셨는지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II. 간구하게 하신 하나님
본문을 통해서 발견하게 되는 첫 번째 사실은 하나님은 종종 당신의 자녀들로 하여금 간절히 기도하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간구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일생의 모든 날들 중에 하나님을 덜 의지해야 될 날들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고, 기도하지 않아도 괜찮은 때가 있을 수 있다고도 고백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에게는 기도가 필요하고, 주님을 의지해야 되는 것은 철따라 무슨 행사처럼 하여야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특별히 간구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매우 특별히 하나님 앞에 간구하지 않을 수 없도록 그렇게 하시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은혜는 받으면 받을수록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우리는 교만해지고, 평안하면 평안할수록 하나님 없이도 넉넉히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가장 불쾌하게 생각하는 삶은 씩씩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의지하지 않고도 씩씩하게 살아가는 삶이야 말로도 하나님을 버린 삶이고 하나님과 관계없는 삶입니다.
신약 시대에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종교생활을 가리켜서 신앙생활이라고 합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어찌 믿는 것만이 모두이겠습니까? 믿는 생활도 있고, 아는 생활도 있고, 실천하는 생활도 있고, 사랑하는 생활도 있고 모든 생활들이 하나님 앞에 다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가는 삶인데 굳이 신약 시대에 신앙생활을 가장 중요한 우리의 종교생활의 특성으로 내세우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바로 이 신약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십자가에서 우리의 구속을 이루신 이후에는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의지하는 모든 우리의 신앙생활이 바로 하나님 의지하는 생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은 의지 생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합니다. 이성의 논리보다는 계시를 신뢰하는데 이성은 인간에게 속했고, 계시는 하나님께 속했으니 계시를 신뢰하는 사람마다 모든 계시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순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의 믿음이 어디에까지 왔고, 우리의 영혼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우리의 믿음 생활, 우리의 신앙생활이 어떻게 되어가는 것인지를 알게 되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고, 하나님께 우리의 온 마음이 기대어 있을 때에는 기도도 잘됩니다. 매 예배 시간에 선포되는 말씀은 마치 자기만을 위해 준비하신 말씀 같고, 매순간 하나님께 올리는 찬송은 마치 자기만을 위해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찬송가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에 있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주는 유익입니다. 여러분이 많은 성경을 배우고, 또 교리를 깨달아 안다고 할지라도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며 많은 지식이 있는 것보다는 지식이 적어도 올바른 지식을 굳게 붙들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생활이 훨씬 복된 사람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여러분이 당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해 보십시오. 시련과 어려움을 만나고, 곤고한 영혼으로 여러분에게 끊임없이 환란이 일어나고 있다면 바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간절히 매달리지 않으면 안 될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인 우리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여 삶으로써 가장 행복하고 또 바로 거기서 하나님께 가장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매순간 주님을 의지하며 살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언젠가 여러분은 인생의 매우 곤고한 때를 지날 시기가 있었을 것입니다. 마음을 쏟아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던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그렇게 하나님 앞에 매달리기 전까지는 여러분의 인생의 문제가 이런 저런 괴로운 것이고, 이런 저런 힘든 것이었다고 고백하면서 살았었지요? 그렇지만 정작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고, 주님 의지하면서 살게 되었을 때에는 바로 그렇게 하나님 앞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는 어려움을 주신 것이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었다고 하나님 찬송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우리가 주 없이 살 수 없는 피조물이라는 것을 오늘도 우리에게 생각나게 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 한번 마음의 눈을 들어 주님을 우러러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 지금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려야 할 때라는 증거를 하나님이 얼마나 다양하게 보여주셨는지를 생각하고 아버지 앞에 다시 한 번 매달려 기도로 나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III. 간구하게 하시는 지혜
두 번째 보여주는 것은 당신의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간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 내 영혼에 힘을 주사 나를 강하게 하셨나이다”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전지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뿐만 아니라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와 인간에 대하여 모르는 것이 없으신 분입니다. 이미 일어난 일은 물론이거니와 아직 일어나지 않고 일어나야 할 일들도 알고 계시고, 그리고 우리가 전적으로 자유로운 존재지만 우리와 의지와 생각이 어디로 움직일지 조차도 모두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간구하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마치 주무시는 하나님을 깨우듯이 알지 못하는 주님께 우리의 모든 형편을 고하여 알게 해 드리듯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도록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당신이 모르시는 무엇을 깨닫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그렇게 기도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또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도 이미 알고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알고 계실 뿐 아니라 그렇게 해 주실 능력까지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능력을 가지시고 계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모든 게 된 게 아닙니까? 모두 알고 계시고, 모두 행하실 수 있고,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주실 수 있는 실제적인 능력을 가지고 계신 주님이면 그렇게 하시면 될 것 아닙니까? 그런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 질문 한 번 해 보고 싶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엇을 간절히 구하면 주님은 주시지요. 오늘 선교 갈 사람들이 이렇게 확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선교 하겠습니다? 우리가 무엇이 필요하고 우리가 간절히 구하면 하나님이 주시죠? 예. 두 번째 질문은 그렇게 하나님이 주신 것을 우리가 항상 하나님을 위하여 사용합니까? 그렇지 않죠.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지혜를 구하며 일 천 번의 번제를 거룩한 하나님께 올렸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역사에서 그렇게 간절히 일천 번의 제사를 드리며 무엇인가를 간구하는 왕은 보신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구하는 내용이 바로 이 세상의 영광과 번영이 아니었습니다. 놀라운 지혜였습니다. 이 지혜를 주셔서 하나님이 맡기신 양떼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하고 다스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크게 기뻐하시며 이스라엘 역사 어느 왕도 받은 적이 없는 큰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항상 그 지혜를 하나님을 위해 사용한 것은 아니었죠. 주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마음을 주관하고 있는 동안에는 그 지혜를 하나님 위해서 쏟고, 마음에 하나님 사랑과 은혜가 사라진 때에는 그 지혜를 가장 나쁘게 사용하여 하나님의 명예를 더럽혔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놀라운 지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생각했습니다. 나라가 번영하려면 이웃 나라들과 전쟁이 없어야 한다. 그리고 이웃의 많은 나라들과 혼인을 해서 그 왕의 딸들을 아내로 맞았습니다. 외교적으로는 성공적인 결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종교적으로는 이 여자들이 시집을 오면서 온갖 이방 종교를 가지고 들어와서 이스라엘을 부패시키는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아마 지혜가 없더라면 결코 못했을 일인데, 그 지혜를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사용하지 않았더니 그런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A. 간구에 응답해 주심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기의 자녀들이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응답을 해 주심으로써 당신이 우리들에게 주신 약속을 신뢰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구하고, 구할 때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응답해 주시면 우리는 불현 듯 멀리 계신 것으로 느껴졌던 하나님이 아주 가까이 계시고 하나님이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그 모든 사람들 중에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하던 마음이 변하여 하나님이 나 한 사람을 알고 구체적으로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묶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시인이 다른 곳에서 고백한 것처럼 “여호와께서 나의 기도를 들으심으로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한 것과 같이 이 기도 응답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사랑에 굳게 묶이게 됩니다. 예전에는 주님의 몽둥이가 두렵고 주님의 징계가 무서워서 순종했지만 이렇게 기도의 응답을 받고난 후에는 주님의 사랑에 매여서 주님께 순종하게 되고 주님 사랑하게 되고 주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모든 것을 알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간구할 때까지 기다리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칼빈이 고백한 바와 같이 모든 좋은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과 우리에게 우리의 인생의 모든 주권을 하나님 홀로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게 하시고, 하나님은 그런 기도를 응답해 주심으로 우리를 점점 더 하나님의 사랑에 굳게 묶으시는 것입니다.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이 하나님 사랑하는 사람이고, 의지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 의지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시인이 무슨 잘못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시련을 주셨다는 이야기는 오늘 우리의 본문으로서는 추측할 수 없습니다. 그랬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건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 시인은 매우 어려운 일을 만났고,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리지 않을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인은 그렇게 간절히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응답을 경험했고, 그것 때문에 그는 다시 주님의 사랑에 굳게 묶여 주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바라며 살 소망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여러분이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간절히 간구할 때에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자기의 자녀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자기의 자녀들의 울부짖는 기도, 마음을 다하여 쏟아 붓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대부분 자녀를 길러 보았을 것입니다. 아이들이 골목에서 놀고 여러분이 집안에 있어도 골목에서 나는 자기 아이들의 울음소리에 대하여 엄마들은 아주 민감한 감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웅성거리는 아이들의 함성 속에서도 자기 아이의 흐느끼는 울음소리를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마 자기의 자녀가 울부짖는 소리를 듣는다면 그 어머니는 자기가 하던 일을 멈추고 당장 달려가 그 아이의 눈물을 씻겨줄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자기의 사랑하는 아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 여러분은 그런 사랑스러운 자녀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에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알게 하시기 위하여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을 때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기도할 때에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 오신 것처럼 느껴지고, 기도하지 않을 때에는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에게 눈길이나 주실까 라고 생각했던 거리감들은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매달릴 때에 하나님이 가장 가까이 계셔서 여러분을 지키고 계시다는 사실이 믿어지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한번 여러분 자신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가정과 사회, 그리고 여러분의 영혼의 형편을 돌아보며 지금 주님이 간구하게 하시는 때인지를 한번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시는 주님이심을 믿고 이 응답하시는 하나님께 매달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B. 영혼에 힘을 주시는 하나님
1. 인생은 힘을 필요로 함
두 번째는 영혼의 힘을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게 하는 것은 무한한 에너지입니다. 그리고 그 에너지가 없이는 우리는 단 하루도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죠. 우리의 육체는 그래서 육체의 힘을 필요로 합니다. 몸에 질병이라도 있고, 우리의 몸의 기운이 모두 빠져 나가고 나면 우리의 육체를 어떻게 움직일 힘이 없습니다. 정신이 우리에게 일어나라고 명령해도 우리의 몸은 말을 듣지 않습니다. 마음으로는 이 의무, 저 할 일을 하여야 한다고 우리의 몸에게 촉구하지만 우리의 몸은 우리의 정신의 요구에 부흥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일을 행하지 못합니다. 이때에 육체는 원기와 힘을 필요로 합니다. 한편으로는 피곤한 몸을 잠시 쉬게 하여 육체의 모든 이 기관들이 좀 쉬게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처음에 고단하게 일하다가 잠시 쉬면 쉬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아픕니다. 왜냐하면 긴장했던 몸이 긴장이 풀어지면서 여태까지 밀렸던 그런 쌓였던 피로들이 온통 몸을 엄습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좀 더 쉬고 나면 이 피로가 가시기 시작하고 우리의 육체에는 어떤 힘들이 다시 생기기 시작합니다. 좋은 음식을 많이 먹고, 원기를 회복하고, 적절한 치료를 받으면서 우리의 몸의 질서를 제대로 돌려놓으면 이 안에서 다시 힘이 솟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정신이 우리에게 명령할 때에 몸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똑같이 우리의 영혼도 그러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한편으로는 쉼을 얻으면서 고단하게 우리의 몸과 마음을 애태웠던 이 세상의 다양한 표상으로부터 벗어나서 그래서 잠잠히 침묵하며 하나님을 바라보노라면 우리의 마음이 이 물질 세계에 의해 흔들리던 욕망과 출렁거리는 것들이 잠시 멈추게 되고 그리고 보이는 사물 뒤에 있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탐욕과 어리석음과 욕심, 그리고 분노 이런 것들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사라지기 시작할 때에 우리의 영혼에는 쉼이 찾아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쉬게 되는 영혼에 하나님의 말씀을 불어넣어놓고,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말씀을 통해 공급해 주실 때에 영혼에는 새로운 생명이 주입되고 그리고 이 영혼의 원기들이 회복하게 됩니다. 이때 영혼은 육체를 지도할 수 있는 능력을 회복하게 되고, 그래서 우리의 육체를 때로는 꾸짖고 타이르며 통솔하면서 우리의 육체의 삶이 영혼의 삶을 삼켜버리는 부조화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줄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의 영혼과 육체에 전 힘을 주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생명은 우리 자신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생명입니다. 그 분의 생명이 우리의 심령 속에 가득할 때에 영혼은 원기와 힘을 얻게 됩니다. 고난과 역경 속에서는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하게 되고, 그리고 시련과 어려움 속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가야할 길이 어딘지를 분별하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에 어찌 무게가 없겠으며 하나님을 향하여 살도록 되어 있는 인간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났을 때에 어찌 우리의 인생에 견디기 힘든 무게가 없겠습니까? 그 중량감을 견디다 못해서 사람들은 자살하고 그리고 이 세상을 등집니다. 분노를 표출해 보기도 하고, 탐욕을 부려도 보지만 이런 모든 즐거움과 탐욕들은 우리의 인생의 진통제이지 영원한 치료제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이 세상사에 따라서 일희일비하는 인생을 산다면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요동칠 것이고, 우리의 삶은 결코 행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영혼과 육체에 아울러 힘을 주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이 시인으로 하여금 간구하지 않으면 안 될 위기를 주신 것은 바로 이렇게 기도하게 하셔서 영혼의 힘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지혜였습니다.
2. 기도는 영혼의 실천임
기도는 영혼의 실천입니다. 기도는 영혼의 움직임입니다. 영혼의 간절한 기도는 영혼의 활발한 움직임입니다. 이렇게 간절히 간구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자의 영혼을 흔들어 강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 깊이 자기의 영혼의 숨을 토해 놓을 때 욕망과 죄들은 쏟아져 나가기 시작하고,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나아오는 은혜를 향하여 들이킬 때 하나님의 은혜와 영적인 생명은 신자의 심령 속에 충만하게 되기에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영혼의 호흡에 비교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가장 활발하게 호흡하며, 하나님 앞에 간구하게 될 때에 우리의 영혼은 고통스러우면서도 활발하게 움직이게 되고, 이렇게 고통스럽게 활발하게 움직이면서 우리는 우리의 영혼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없도록 얽어 매였던 모든 죄와 욕망, 불결, 그리고 모든 사치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깨달았던 사람이 어느 한 순간에 아무것도 모르는 부랑무식한 신자가 되는 일들은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열렬하게 기도하던 신자가 어느 날 갑자기 아무런 기도도 드릴 수 없게 되는 일들은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일은 종종 우리를 교만하게 할 수 있지만 기도를 배우는 일은 결코 우리를 교만하게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모자라는 존재이고, 그리고 이 기도를 통하여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로서, 기도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서 기도를 지속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왜 교회당에서는 간절한 기도, 마음을 쏟아 붓는 간절한 기도가 사라져 가고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교회 전체적으로 그러하고 그리고 사람 사람마다도 그러한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찾고 간절히 매달려야 할 이 열렬한 우리의 종교가 마치 마음의 수양이나 닦는 것 같은 종교로 변질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마음속에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매달리기에는 너무나 복잡하게 나뉘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 세상 사회에 대한 다양한 염려와 근심들, 눈 뜨는 순간부터 잠자리에 드는 순간까지 자신의 안락과 편안함을 위하여, 더 나은 삶을 위하여 고민하는 우리의 모든 정신 쓰는 것들이 우리의 기도의 세계를 좀먹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많은 허영과 부패하고 사치스러운 생각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고 자신의 영혼을 단장하게 하는 것보다 오히려 자신의 치장이나 혹은 최근에 유행하고 있는 그러한 장신구에 더 많이 마음을 쏟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세속적임을 보여주는 것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끊임없이 즐거움을 찾아서, 더 큰 즐거움을 찾아서, 기회를 발견하려고 애쓰는 우리의 끊임없는 삶은 영혼의 방황의 다름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의 문제가 아무리 많더라도 하나님의 주권아래 있고 그 분의 능력 아래에 있지 않겠습니까? 그 분이 우리를 도와주셔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어디에 있겠으며, 그 분이 우리에게 능력을 주셔서 고칠 수 없는 상황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이 모든 것들을 준비하고 하실 수 있지만 우리가 그것을 간구하여 간절한 소원을 품고 매달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춤추는 화염하는 기도,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는 우리의 간절한 부르짖음과 기도, 그래서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능력, 이것들이 왜 우리의 것이 아니겠습니까? 언제나 하나님께서는 이 불을 우리에게 주시고 싶어 하고, 당신의 다 죽어가는 교회들을 살리고 싶어 하시는 위대한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일들을 위하여 간구하는 당신의 종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들은 다수가 아닐지라도 어느 한 곳에서 주의 얼굴을 구하며 아버지 앞에 매달릴 때에 하나님은 부흥에 위대한 염원을 주시고, 오늘 지금 작게 타오르고 있는 그들의 기도의 불길들을 하늘을 향하여 충천하는 화염과 같이 만드시고, 이 사람들의 기도를 합하여 하나님은 이 땅의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실패를 운명처럼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하나님 앞에 기도로 도전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약하나 주님은 강하시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마음을 쏟으면 주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것이라고 하는 신앙, 그리고 이 신앙을 붙들고 사는 사람과 하나님은 함께 하실 것이라고 하는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한 번에 여러분이 충천하는 화염과 같은 기도가 여러분의 심령 속에서 타 올라 하늘로 올라가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기도의 세계를 지금 가지고 있는 분들은 감사하며 더더욱 기도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기도할 수 없는 사람들은 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기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주 작은 것부터 시작합니다.
활활 타오르는 거대한 불길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추운 겨울 불을 땔 때, 우리는 작은 바짝 마른 잎들을 모으기 시작하고 그 위에 작은 나무 가지들을 얹습니다. 그리고 불을 붙입니다. 불이 붙기 시작하면 더 큰 나무를, 더 큰 나무를, 더 큰 나무를 얹으며 나중엔 등걸 같은 나무를 얹어도 활활 타오르는 맹렬한 불길이 됩니다.
IV. 결론: 너는 내 것이라(사 43:1)
여러분의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비록 작은 모닥불을 태우는 것 같은 작은 기도이지만, 그 기도에서부터 하나님이 영혼을 강하게 하시는 기도로 발전시켜 주십니다. 간절히 기도할 때에는 영혼을 강하게 하려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 제목이 있어서 기도합니다. 근데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응답해 주실 뿐만 아니라 기도하는 그 과정을 통하여서 잠들었던, 연약해졌던, 쇠약해졌던 우리의 속사람을 힘차게 만들어 주셔서 하나님 앞에 영혼의 원기를 회복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이렇게 여러분의 나약해진 영혼에 큰 힘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매달리게 하시고 주님의 은혜에 사로잡히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43장 1절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사랑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이스라엘아 너는 내 것이니라”
(찬양)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서 응답해 주실 뿐 아니라 영혼의 힘까지 주시는 하나님을 체험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4.통촉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시 5:1)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시편 5편은 표제에서 가리키는 바와 같이 다윗의 시입니다. 명백히 탄원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시이고, 어느 시기에 쓰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시인은 이 5편 속에서 곤고하고 시련을 당했던 날에 하나님께 도움을 받아 구출되었던 자신의 경험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 시는 마음을 하나님 앞에 쏟으며 주를 바라보는 시인의 신앙심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슨 이유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이 시인은 고통을 받고 있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악인들에게 에워 쌓여 있었고, 그리고 외톨이가 된 고독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처지에서 하나님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이 속에서 이 시인은 1절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옵소서”라고 말입니다.
II. 고통 받는 신자의 믿음
A.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
고통 받을 때에 시인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통 받는 신자의 믿음 두 가지를 1절에서 보여주고 있는데 하나는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과 그리고 통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1. 당신의 자녀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심
먼저 그는 악인들에게 에워싸여 고통을 받는 처지에서 당신의 자녀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굳게 붙들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데 사람은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누군가를 따뜻하게 격려하고 위로하고 힘을 줄 때에 쓰러졌던 사람들이 일어나 하나님께 나아갈 용기와 힘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일에 누구도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만드셔서 이처럼 여러분이 서로에게 도움을 주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도록 경륜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매우 중요하고, 그래서 교회의 가장 커다란 사명 가운데 하나는 연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위로하고 붙들어 주어 하나님 앞에 나아가도록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을 처음 믿고 초창기에는 말씀의 깊이도 별로 없고 아는 바도 없었지만 교회 나가면 그 나이 드신 권사님이나 혹은 청년들 누구든지 그렇게 자기 간증들을 많이 했습니다. 어려움에 내가 처했을 때마다 사람들은 자신도 그런 어려움에 처했고 그때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를 도와 주셨는지를 간증해 준 것이 어린 마음에 커다란 위로가 되었습니다. “저 사람들도 하나님이 도와 주셨으니 나도 이 어려움 속에서 주님을 의지하면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실 것이다”라는 신앙심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도록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시점까지만 도움을 줄 수 있고 마지막에는 누구도 함께 가지 못하는 길이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지체들과 그리고 나의 사랑하는 가족들조차도, 심지어는 나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조차도 내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그 마지막 길에는 함께 갈 수 없는 길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 앞에 홀로 세우게 하시는 방법이며 바로 이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이 외에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의지하던 마음을 모두 버리고 하나님 한 분 만이 나의 구원의 소망이시며 그리고 나를 붙들어 주시는 유일하신 구원자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게 됩니다. 키에르케고르가 고백했던 바와 같이 신앙은 사람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는 것입니다. 그 앞에서 우리는 절대적으로 외롭지만 또 바로 그렇게 하나님 앞에 홀로 서게 될 때에 하나님이 무한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에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그 사랑으로 충분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2. 신자의 모든 고통은 하나님 앞에 들림(출3:7)
어머니들에게는 자기의 자녀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듣는 아주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멀리서도 자기의 자녀의 울부짖는 소리나 웃음소리는 어머니의 귀에는 또렷이 들립니다. 사랑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에만 하나님이 우리의 소리를 들으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자녀의 고통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 들리는 소리이기도 합니다. 출애굽기 3장 7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의 치하에서 고생을 하고 있었고, 감독자들은 그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며 벽돌을 만들기를 재촉하였고, 그 일로 인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은 정말로 크게 하나님 마음에 들렸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당신의 자녀들의 소리를 듣게 해 주는 것입니다. 심지어 로마서 8장 26절에는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할지 알지 못할 때조차도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신자의 모든 고통은 하나님 앞에 들리는 소리입니다.
더욱이 오늘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소서”라고 하였을 때에 이 말이라고 하는 히브리 단어는 소리를 내어 공기를 울려서 퍼지는 인간의 언어의 발화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작용하고 있는 생각의 움직임까지도 포함합니다. 이 ‘아마르’라는 단어가 제일 먼저 사용된 것이 창세기 1장이고,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라고 할 때에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이 단어로 묘사가 되었습니다. 인간이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사람의 언어를 배워 사람의 언어로 발화하셨을 리가 없죠. 그러니까 여기에서 나의 말에 귀를 기울여달라고 하는 이 시인의 기도는 언어를 토해 올리는 하나님 앞에 말 뿐만이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모든 형성되지 않은, 언어화 되지 않은 모든 영혼과 지성의 생각까지 에라도 주님이 귀를 기울여 달라고 이 시인이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의 작은 신음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시고 그의 고통에도 당신의 귀를 기울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아직 들리지 않는 우리의 심정의 언어까지라도 주님의 귀에는 들리게 되는 것이니 우리의 경험이 바로 그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그렇게 고통의 가시밭길을 걸어왔고, 그렇게 걸어왔던 모든 길에 우리가 때로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고 기도하기 전부터도 하나님은 우리가 고통 받고 신음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고 우리가 알 때에나 모를 때에나 당신이 우리에게 시험을 당할 때마다 피할 길을 주시고, 혹은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넘어지되 아주 쓰러져 짓밟히지 아니하고 원수의 발아래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하나님이 주셨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가 자랑할 것이 있다면 부득불 약한 것을 자랑하겠노라고 한 것은 약한 것이 자랑스럽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약한 그 곳에서 강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를 둘러싼 상황은 매우 악하고 험난하였으나 오히려 그 속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선하심을 보여주시는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우리가 약하지 않았더라면 주님의 능력을 의지했을 리가 없을 텐데 우리가 약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게 되었고, 우리가 외롭지 않았더라면 주님의 사랑을 그리워하지 않았을 텐데 우리들이 외톨이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더욱 갈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버림받지 않았더라면 주님의 선택이 고귀한줄 몰랐겠지만 이렇게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외톨이가 된 것 같은 처지가 되었기에 하나님이 나를 불러주시고, 선택해 주신 것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이요, 은혜인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3. 우리의 경험이 증명함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의 모든 신음소리에 언제나 귀를 기울이시고 생각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가 이 시인처럼 하나님께 갈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의 말에 귀를 기울여 달라고 하나님 앞에 호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중심을 하나님 앞에 쏟아놓으며 나의 마음을 헤아리고 나의 마음을 기억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호소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없으셔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구하지 않고 주님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가 당신의 모든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우리의 고통스러운 형편에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날까지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련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분의 도우심을 입고 나면 하나님 앞에 우리의 마음을 쏟으며 기도하고 난 다음에는 비로소 내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기 전부터 하나님께서는 나를 지켜보셨고, 그리고 나의 모든 말에 귀를 기울이시며 나와 함께 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때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느껴졌지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부르짖기 전부터 계속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우리들이 너무나 오랜 세월동안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방탕하게 살았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회개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으며 나의 말에 귀를 기울여 달라고 하나님 앞에 호소하는 대신 구차하게 인간에게 호소하고 사람의 방목과 술수로 여러분의 고통과 괴로움을 면해보고자 오히려 불신앙을 택한 적이 얼마나 많은지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좋으신 하나님, 언제나 당신의 자녀들을 향하여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 여러분의 작은 신음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사 도와주기를 원하시는 그 하나님 앞에 나의 말에 귀를 기울여달라고 중심을 쏟으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신 적이 언제입니까? 언제나 하나님의 보좌에까지 이르는 힘 있고 위대한 기도, 그리고 하늘까지 충천하는 화염과 같은 불붙는 기도는 언제나 요란스러운 목소리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중심을 하나님 앞에 쏟아놓는 간절한 기도, 나의 작은 신음에도 귀를 기울여달라고 세상도 없고 나도 없이 하나님 한분만을 앙망하고 바라는 간절한 마음 쏟으면서 충천하는 화염과 같은 기도는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다시 한 번 구차하게 사람을 의지하고 눈에 보이는 상황에 매달리면서 하나님을 더 근심시켜드리는 사람들이 되지 말고, 당신의 자녀들의 소리에 언제나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분의 도움을 힘입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통촉하시는 하나님
1. “헤아리소서”(בִּ֣ינָה)
고통 받을 때 이 시인의 믿음이 또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통촉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옵소서”라고 말입니다. 헤아려 달라는 이 기도는 “비나”라고 하는 히브리 단어의 번역인데, 이것은 “빈”이라고 하는 동사에 간청하는 “아”가 붙은 형태입니다. 그래서 제발 나를 통촉해 달라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뒤에 나온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라는 번역으로 미루어 볼 때 과거 성경에 나왔던 통촉하소서라고 하는 번역은 아주 탁월한 번역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빈”이라고 하는 이 히브리 동사는 오성으로 모든 사물을 직관하여 통찰하는 이해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바로 이렇게 우리 모두를 통촉하고 이해하고 판단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여야 합니다.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자기의 마음을 헤아려 달라고 간절히 호소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심령의 깊은 곳까지라도 모르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것을 호소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지만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기 전까지는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다고 하는 것을 우리 자신이 느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우리를 아신다고 하는 그 사실은 고통 받는 신자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위로입니다. 인간은 알아도 아는 대로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알아도 우리에게 위로가 되지 않을 때가 있지만, 하나님은 아실뿐만 아니라 아시는 모든 것을 행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의 형편을 아신다고 하는 것은 곧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이요, 우리를 도와주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언젠가 설교 준비를 하다가 구약 역사에 관한 내용들을 확인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가에서 이스라엘 역사책 한 권을 꺼냈습니다. 돌아가신 김희보 교수님이 쓰신 책이었고, 그 분에게서 제가 배웠던 책이었습니다. 정말 열심히 아주 재미있게 공부를 했는데 펴보니까 책에 가득 나의 필기가 기록이 되어 있었습니다. 눈에 끌리는 낙서가 하나 있었습니다. 펴보니까 책 위단에다가 한 문장을 써 놓았는데 같은 문장이 여러 책의 페이지에 똑같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히브리어로 작문을 해서 썼는데 그 내용은 “하나님은 나의 마음을 아신다”라고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고 책 곳곳에 그 낙서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아련하게 그 당시에 처해 있었던 한 25년 전의 상황이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나는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어려움을 다 겪으면서 살았습니다. 가난과 고통, 육체의 연약함과 정신적인 괴로움까지 모든 것을 겪으면서 살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하나님이 신학교에서 가르치라는 소명은 주셨는데 이상하게 공부할 시간은 주시지 않았습니다. 해도 해도 끝없는 교회의 일은 허리까지 빠지는 것 같았고, 그리고 교회에 가면 영혼을 제대로 섬기지 못한다는 가책 때문에 눈물이 나고 학교에 오면 공부하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에 눈물이 났습니다. 아침마다 채플실에 들어가 마음을 쏟으며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합니다. 준비할 필요도 없이 한 순간에 울음이 터져 나오고 그리고 마음을 다 쏟으며 눈물로 하나님 앞에 나의 처한 모든 형편과 처지는 아뢰었습니다. 사람에게는 결코 말하지 않았던 나의 처지, 구차한 나의 형편까지도 그 분 앞에서는 부끄러움이 없이 모두 쏟아놓을 수 있었습니다. 한 30분 동안 그렇게 매일 쏟아놓고 나면 항상 나에게 찾아오는 위로는 꼭 같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마음을 아신다. 주님은 나의 갈 길을 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텅 빈 채플실을 혼자 빠져나오면서 그러면서 언제나 부르던 노래가 있었습니다.
(찬양) 주께서 내길 예비하시네 주께서 내길 예비하시네
오늘 하루 하루를 주를 위해 살리라 주께서 내길 예비하시네
나는 나의 가는 길을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나의 걸어온 길뿐만 아니라 지금 내가 걷고 있는 길, 앞으로 내 앞에 펼쳐질 모든 길까지 아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 마음에 가장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나의 인생이 주님의 수중에 있고, 그리고 나의 인생의 모든 날들이 아버지의 손 안에 있다는 사실, 그래서 주님이 나를 지명하여 불렀고,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그리고 너의 인생은 날 위하여 섬기기 위하여 주어진 인생이라는 주님의 말씀과 약속을 굳게 붙들며 매일매일 이렇게 슬프고 마음 아프지만 주님의 인도를 따라가노라면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길로 나의 인생을 인도하실 것이라는 확신 하나는 그 무엇으로도 떼어 놓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2. ‘나의 심정을’(הֲגִֽיגִי)
고통 받는 신자의 가장 큰 위로는 하나님이 나를 아시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나의 심정을 헤아리신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하기기”라고 하는 이 단어는 번역하기 매우 어려운 단어입니다. KJV 성경에서는 이것을 묵상이라고 번역을 했고, NIV 성경에서는 이것을 한숨소리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두 번역 다 그리 좋은 번역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원래 이 “하기기”라고 하는 단어는 사람이 넋이 빠져서 혼자 중얼중얼 거리는 소리는 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신도 정신이 모두 나가고 혼란스러운 가운데 자기도 의미를 알지 못하며 중얼거리고 있는 그러한 작은 소리들을 뜻합니다. 고통 받는 영혼이 정신적으로 얼마나 혼란스러운 상태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시인의 마음속에는 수많은 생각이 오고가고 그 중의 어떤 것들은 완전하게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무엇이라고 자신도 파악할 수 없는 복잡한 심경들이 자신의 마음속에 녹았고, 자신도 자기를 다 알지 못하는 모순된 속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이 시인은 이렇게 자신도 다 알지 못하는 자신의 마음의 움직임, 혼란스러운 작용까지라도 하나님께 헤아려 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심적인 상태를 당신의 무한한 능력으로 직관하여 이해해 주시고, 거기에 합당하도록 자기를 도와주시기를 간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시험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을 때 우리가 우리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은 별로 쓸모가 없을 적이 많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고통 받는 영혼이 혼란하고 어지러운 마음의 상태를 우리 자신이 들여다보는 그 마음 자체가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들여다보고 있기 때문에 거기서 어떤 정답을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밤새도록 근심하고 걱정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깨어서 잠시 하나님 앞에 마음을 모으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우리의 심령의 평강을 되찾는 일에 훨씬 더 큰 도움을 주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인 것입니다. 오히려 이렇게 고통 속에서 혼란스러워진 우리의 심적인 상태를 헤아리게 하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자의식이 아니라 우리의 바깥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비췸으로 말미암아 가능해 집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에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어서 좌우에 날선 검과 같이 심령과 관절과 골수를 쪼개기까지 밝히 드러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들이 혼란스럽고 고통 받을 때마다 우리가 우리를 고통스럽게 했던 원인들을 찾아내고 거기에서 문제의 답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이 고통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의도와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고통을 받고 혼란스러워질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되 당신의 선하심을 따라 당신의 말씀으로 우리를 건지신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우리의 마음을 모으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 속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음성이 들어있음을 깨닫고 그 말씀 앞에서 혼란스러운 자신을 다스려 보려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스스로는 도저히 발견하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게 만들어 주시고, 그리하여 혼란스러워진 상태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3. 기도할 때 기도를 인도하시는 하나님
참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어려움 속에서 일단 하나님 앞에 말씀의 은혜를 받고 간절히 기도하게 되면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기도할 때에 우리가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를 아주 정확하게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기도 속에서 우리의 기도를 우리가 바라는 기도대로가 아니라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우리의 기도를 이끌어 가셔서 그래서 우리의 모든 어려움들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기도 속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종종 이 세상의 근심과 염려, 혼란 때문에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기로 마음을 먹고 간절히 기도를 시작을 했는데 의외로 하나님이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을 발견하고 그것을 위해서 기도 하다가 돌아간 적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속으로 우리의 심령을 쏟아 하나님 앞에 실제로 기도하기 전까지는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오늘 시인을 보십시오. 고통을 받고 있었지만 자신도 자신의 마음에 오가는 모든 생각들과 모든 것들을 다 알 수 없었습니다. 넋이 나간 상태에서 중얼거리고 혼자 주절거리는 자신의 소리는 마음의 표현이기는 했지만 이 시인 자신도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혼란 속에 있었습니다. 그때에 그는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며 자신의 심사를 통촉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왕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총 이외에는 아무 희망이 없는 것처럼 거룩한 보좌 앞에 엎드러져 아버지께 간절히 기도하며 주의 은혜와 도움을 구했던 것입니다. 이게 바로 이 시인이 고통 받는 위기 속에서 자신이 구원을 받은 비결이었던 것입니다.
III. 결론: 유일한 소망이신 하나님
우리의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우리의 짧지 않은 우리의 인생살이 걸어오는 동안에도 오늘날의 어려움은 예전에도 있었고, 또 그 이전에도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를 홀로 두시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희망이 되어 주셨기 때문에 우리들이 잠시 넘어지기는 했지만 원수에 의하여 아주 짓밟히지는 않았고, 잠시 미끄러지기는 했으나 거기서 완전히 엎드러져 멸망당하지는 않고 쓰러진 그곳에서 다시 일어났고, 넘어진 그곳에서 다시 세움을 받아 주님을 의지하며 일생의 길을 걸어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과거에 그러했다면 지금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 앞에 고통을 받고 괴로움을 받을 때 사람에게 호소하는 것은 때때로 우리를 매우 구차하게 만들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우리를 점점 더 깊은 절망의 수렁으로 데려갑니다. 그러나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그 하나님의 통촉하심을 바라고 아버지 앞에 마음을 쏟아놓는 사람들은 얼마나 복된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비록 자신의 인생의 길이 막힌 것 같아도 바로 거기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뵈올 수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응답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시고 자신의 자녀들의 울부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모아 간절히 기도하고 이 수련회에서 주님을 만나기를 사모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새롭게 여러분의 인생을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어느 한 순간 나의 살아온 모든 몸부림들이 하나님 없는 몸부림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여러분의 신음하는 소리에까지 기울이시는 좋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를 다짐할 때에 하나님은 감추었던 당신의 놀라운 은총을 여러분에게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5.가까이 하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시 145:18)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시편 145편은 다윗이 지은 찬송시입니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라고 시작되는 이 145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하신 위대한 은총의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고,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어 나간다는 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행하신 은혜로운 일들을 찬송하면서 시인은 이스라엘 백성들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은혜와 자비, 용서하시는 사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넘어지는 모든 자들을 붙드시며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고,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신다고 말함으로써 기도에 있어서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의 백성들에게 은총을 베푸시는 지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II. 여호와 하나님
A. 하나님의 두 이름
본문은 특별히 간구하는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 하나님이 은총을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축복을 말하기에 앞서서 먼저 그는 이러한 은총을 베푸시는 분이 여호와시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하고 있는데 성경에는 하나님에 관한 많은 존함들이 등장하고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성함 두 가지는 ‘여호와’와 ‘하나님’이라는 존칭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똑같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의미상으로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 엘로힘이라는 말이 모든 세상의 만물들을 창조하신 위대하신 하나님, 그리고 모든 인간들을 통치하고 다스리사 모든 신들 위에 뛰어나게 계시는 능력과 위엄 그리고 권능의 하나님임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여호와라고 하는 이 이름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계시해 주신 이름입니다. 이 여호와라는 이름은 하나님이라는 하나님의 존함보다 더욱 거룩하고 하나님께 고유한 이름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매우 두려워하였습니다.
B. 언약의 하나님
모세는 출애굽기 6장에서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자기를 계시하셨지만 아직 여호와로는 계시하지 않으셨고, 자기 시대에 계시하셨다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면 출애굽기 이전에 나오는 여호와라는 많은 존함은 어떻게 된 것일까? 학자들은 아마도 하나님의 성함이 여호와로 계시된 것이 출애굽기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모세의 언급은 사실이고, 그 이전에 여호와라는 이름이 나오는 것은 경건하고 고백적인 의도를 가지고 후대에 사람들이 하나님이라는 이름의 일부를 여호와로 바꾸어서 넣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아무튼 이처럼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존함은 언약의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특별한 언약을 맺고 그들에게 아버지가 되시고 또 하나님이 되셔서 그 백성들에게 독점적인 사랑과 자비, 은혜와 용서를 베푸심으로써 그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의 운명 공동체를 형성하며 살아가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묶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놀라운 은혜는 하나님과 기도하는 언약 백성들 사이에 있는 아주 깊은 가족관계와 같은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III. 간구하는 자에게 가까이 하심
이렇게 시인은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있는 언약 관계를 기초로 주님이 당신에게 간구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우해 주시는 지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 도다”라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 앞에 시인이 간절히 기도할 때에 그 간구에 대한 보상이 바로 하나님이 가까이 하시는 것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A. 간구의 보상: “가까이 하심”
우리는 흔히 간절한 기도의 최고의 보상은 응답이라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간절히 기도할 때에 우리는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제목들이 있고, 이 제목들을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때에 우리의 기쁨은 충만하게 되고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나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신앙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시인은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것 그 이상의 놀라운 보상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가까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우리의 간절한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나무에 핀 아름다운 꽃이라면 하나님이 가까이 하시는 것은 그 꽃이 지고 맺은 열매입니다. 실과가 달리는 나무의 꽃은 아름답기는 하지만 사람들은 열매를 얻기 위해서 궁극적으로 나무를 심는 것이고, 꽃이 피는 것도 그 열매를 맺기 위한 과정이지 아름다운 꽃을 보기 위해서 실과에 나무를 심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간절히 기도할 때에 응답은 꽃이지만 가까이 하심은 바로 우리의 기도의 아름다운 열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우리가 안타깝게 하나님 앞에 매달릴 때에 우리에게는 변화되지 않으면 안 되는 어려운 환경들이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그 경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고, 질병에 걸린 사람들이 하나님의 치료의 은혜를 구하는 것은 질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우리를 훈련하시는 하나님의 도구이기는 하지만 그것들이 영원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의 기도를 들으셔서 물질을 주셨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또 다시 궁핍해질 수 있고, 오늘 고침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후일 병들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많은 환경들을 움직이고 혹은 우리의 육체를 고쳐서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과 함께 이보다도 더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하시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데려가시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와 가까이 하시는 것입니다. 간절한 기도로 우리의 외적인 환경이 변화되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내적으로 쇄신시키셔서 그래서 우리를 하나님 앞에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B. 가장 큰 행복
여기에서 우리는 성도에게 허락된 가장 큰 행복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시인은 시편 또 다른 시편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겠습니까? 땅에서는 주님밖에는 내가 사모할 분이 없나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라고 노래하였습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서 누리는 모든 행복, 아니 인간뿐만 아니라 작은 피조물들까지도 누리는 어떠한 만족과 행복감은 모두 하나님의 진정한 행복을 본 딴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계시면서 서로 함께 사랑하고 가까이 하심으로써 완전한 행복을 누리셨고, 하나님은 인간에게만 영혼을 주셔서 이런 하나님과 교제를 누리며 하나님의 행복에 동참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는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함께 교제를 나누며 살아가는 그 모든 삶이 바로 이 세상에서 인간들이 행복하게 성도의 교제를 나누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또 구원받지 못한 성도라고 할지라도 어느 정도는 그의 영혼 안에 하나님의 형상의 흔적들이 남아있기 때문에 그것으로서 하나님과 관계가 없으면서도 이 세상에서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이치들을 터득하게 되고,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의 세상도 지옥같이 무질서하지는 않고 어느 정도의 질서를 누리며 살아가는 세계가 된 것입니다.
인간이 이처럼 만복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야 말로 모든 행복의 근원입니다. 만약에 우리의 행복이 보이는 이 세상의 조건에 달린 것이라면 이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니 우리가 오늘은 행복해도 오늘 행복한 그것 때문에 그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 내일은 또한 불안해질 것이고, 또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지 못하다면 누리고 있지 못한 이유 때문에 불안하고 염려할 것이니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 없는 인간의 행복은 언제나 완전한 행복이 되지를 못합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의 모든 비극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만이 누리고 계신 진정한 행복을 올바르게 본받지 않고 잘못되게 본받으려고 하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비극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자기의 수입에 어울리지 않게 과도하게 낭비하고 사는 것을 사치스럽다고 말합니다. 마땅히 자기가 누릴 수 있는 영광 이상의 것을 누리기 위해서 이 땅의 물질을 과도하게 소비하는 것,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사치, 혹은 낭비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왜 많은 사람들이 절제하지 못하고 분수에 지나치게 사치하려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이것은 바로 모든 것을 넉넉히 가지고 계셔서 그것들을 모든 사람들에게 넉넉히 주시면서도 끊임없이 모자라는 것이 없으신 하나님의 풍족하심을 그릇된 방법으로 본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또 어떤 사람들은 교만합니다. 그래서 분수 이상으로 자기를 스스로 높이고 자만하여 죄에 빠지게 되는데 이 또한 하나님의 지극히 높으심과 존귀하심을 스스로 잘못 본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온 땅과 만물위에 높으시고 모든 인간 위에 뛰어나셔서 경배를 받으시는 것처럼 자신도 그렇게 되고 싶고 그래서 다른 사람이 자신을 높여주지 않으니까 자기가 스스로 자신을 높이다가 죄에 빠져 버리게 되는 것이 교만의 형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종종 우리는 성격이 까칠 해서 다른 사람들을 아주 표독하게 비판하고 다른 사람들을 깊이 정죄하는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렇게 신자나 불신자를 막론하고 남을 정죄하고 남에게 남의 허물들을 정죄하는 그것은 바로 모든 인간의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본받는 것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그렇게 모든 죄를 심판하고 다스릴 권리를 주신 적이 없는데 그렇게 사람들을 정죄하는 것은 하나님의 지극히 높으심을 본받는 것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치와 그리고 방탕은 또 무엇입니까? 방탕은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기 마음껏 사는 것이 방탕이니 이는 온 땅과 만물위에 지극히 높으셔서 당신의 뜻을 홀로 충만히 이루시는 하나님을 잘못된 방법으로 본받는 것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은 하나님을 알든지 모르든지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순종하고 하나님을 따를 때에는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만나고, 불순종하고 악을 행할 때에는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고, 덕스럽고 진정으로 행복해질 때에는 하나님을 올바로 본받는 것이고, 하나님을 올바로 본받지를 않고 그릇되이 본받을 때에는 그로 말미암아 인간이 악해지는 것이니 어찌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서 존재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시인이 고백한 것처럼 땅에서는 사모할 자가 하늘의 주님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우리의 모든 행복은 바로 그 분과의 관계로부터 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하나님이 모든 인간들을 통치하고 대우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대우해 주도록 자비와 사랑을 베풀도록 우리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내 이웃에게 행하는 선한 일과 자비로운 행동이 곧 자신에게 대한 행동이고 사람들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과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가장 큰 행복이 이 땅에서 그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이라고 노래를 하였던 것입니다.
C. 시편에서 “가까이하심”의 뜻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까이 하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시편에서 하나님이 우리와 가까이 하신다는 것은 크게 세 가지 의미로 제시됩니다.
첫째는 언약적 친밀함입니다. 시편 34편 18절에서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하나님은 위로하신다”고 말입니다. 이 가까이함이라고 하는 것은 친밀함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는 사랑에서 비롯되는 친밀함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의 육체를 비롯한 만물과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고, 또 인간의 영혼과 같은 방법으로 계시는 하나님도 아니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 가장 가까이 모든 피조물들보다 가장 가까이 계시면서도 가장 가까이 있는 어떤 피조물보다 가까이 계시면서도 우리에게 가장 멀리 있는 어떤 피조물보다도 멀리 계신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당신에게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당신의 친밀함을 누리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시인은 다른 곳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여호와의 친밀함이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있도다”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고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사람들 가까이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친밀함은 언약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위해 대속하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모든 죄로부터 용서하시고 당신과 함께 완전한 사랑의 교제를 누리며 살도록 우리에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던 삶을 버리고 진심으로 회개하여 뉘우쳐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하나님께서는 아주 놀라운 은혜로 우리와 함께 하셔서 당신의 큰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그 친밀함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언젠가는 이런 하나님으로부터의 아름다운 친밀함을 누리던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고난과 시련과 역경이 많이 와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더니 역경으로부터 우리를 구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이런 친밀함을 주셔서 하나님과 멀리 있던 우리를 하나님 가까이로 이끄시고,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었던 많은 거리감들을 폐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말할 수 없는 친밀함을 누리게 하신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환경은 아직 변하지 않았는데도 하나님의 그 큰 사랑과 친밀함, 나 같은 인간을 기억해주시고 친밀하게 대해 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 때문에 감격하였던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모든 것을 풍족히 누리고는 있지만 어디에서도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느낄 수 없어서 소외감 속에서 하나님과 무한한 거리감을 느끼며 살던 때도 있었고, 그때에 여러분은 내게 있는 모든 것을 가져가실 지라도 주님이 나와 가까이 하신다면 나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노래하였던 적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와 가까이 하신다는 첫째 의미입니다.
둘째 의미는 언약적 선택입니다. 시편 65편 4절에서 시인은 말합니다. “주께서 선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가까이 하신다고 하는 그 말은 당신이 선택하셨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는 이 선택,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와 가까이 계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당신이 죄 값을 치루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셨고, 우리를 당신 가까이 두셨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주님을 떠날지라도 주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우리는 주님을 버릴지라도 주님은 우리를 버리신 적이 없기 때문에 떠났다가는 주님께 다시 돌아오고, 멀어졌다가는 주님의 친밀함을 다시 느끼게끔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셋째 의미는 언약적 보호입니다. 시편 69편 18절에서 시인은 말합니다. “내 영혼에게 가까이 하사 구원하시며 내 원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나를 속량하소서”라고 노래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가까이 하신다는 것은 그냥 옆에만 있는 다는 것이 아니라 내 영혼을 엄습하여 해하려고 하는 악한 무리들을 하나님이 나를 대신해 싸워 도말하시고 물리쳐 주사 나를 지켜주신다고 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은 하나님이 가까이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모든 것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과 가까이 하며 사는 이것이 그들에게 가장 커다란 행복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여러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이러한 언약의 친밀함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는 놀라운 은혜가 있습니까? 말씀을 들을 때마다 여러분에게 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그 안에 깃들여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베풀어 주시는 수많은 은총들을 여러분이 느끼며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감격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어떤 어려움과 시련을 만나도 그 분이 나와 함께 하신다고 하는 거룩한 확신이 여러분 마음속에 살아있어서 어디에 있든지 여러분은 두려워하지 않고 충만한 은혜 속에서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을 선택하셨고, 지금도 보호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나보다 더 강한 어떠한 원수와 그리고 대적들을 만난다고 할지라도 나는 하나님 품 안에서 안전하다는 확신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이 가까이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한때는 이런 친밀함과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 모든 것들로부터 멀어져서 여러분이 홀로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나온 것 같은 소외감 속에서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속히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금은 여러분이 하나님을 간절히 찾을 때이고 바로 잃어버린 그 진정한 행복,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가까이 하시는 그 은총을 회복할 때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해 보려고 할 때에 그것은 여러분에게 끊임없는 고통을 가져다 줄 것이고, 만약에 여러분이 하나님 없는 곳에서 행복할 수 있다면 여러분의 영혼에 병든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하나님을 올바로 알고 사랑하고 그 분과 친밀한 은혜 속에서 지내는 것이야 말로 여러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가장 큰 뜻이고, 만약에 여러분이 하나님이 가까이 하시는 사람이라면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비록 높은 지위와 많은 재물, 그리고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지 못하며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여러분은 위대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가까이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가까이 하시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도 모든 것을 가진 사람들이고, 주님이 멀리 하시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어도 사실은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IV. 진실하게 간구하라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지만 무한히 거리감이 느껴지는 이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을까요?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 도다”라고 말합니다.
A. “진실하게 간구한다”는 의미
여기에서 진실하게 간구한다 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다음과 같이 크게 네 가지 사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 마음에서 길어 올린 기도
첫째는 기도할 때에 마음 깊은 곳에서 길어 올려진 기도로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청산유수와 같은 기도를 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납니다. 아마 그것은 하나님과 워낙 친밀한 관계 속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청산유수와 같은 기도가 나오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마음에 진정한 울림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겉만 번지르르한 기도일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지 않은 청산유수와 같은 일 만 마디의 기도보다는 마음으로부터 나왔으나 차마 언어로 옮길 수 없기 때문에 토해놓는 한 마디의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를 하나님은 더 훌륭한 기도로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으로부터 길여 올려지는 이 기도야 말로 진실하게 간구하여 주님을 만나는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여러분은 그 옛날 시골에서 우물을 길어서 물을 먹던 기억이 날 것입니다. 우물은 아주 깊고, 사람의 손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두레박을 사용하였습니다. 그 두레박을 우물 아래로 던져 두레박을 흔들면서 우물에 깊이 빠뜨려 물이 가득 담기게 한 후 천천히, 천천히 길어 올려 그 물을 마시는 것처럼 진정한 하나님께 올리는 진정한 기도는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기도의 두레박을 던져 우리 속에 있는 그 언어를 담아 하나님께 길어 올리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기도라고 하는 수단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에 있는 것들을 먼저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또 기도의 실천을 통해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심으로써 우리의 마음의 망가진 것들을 천천히, 천천히 고치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없는 유창한 기도보다는 오히려 마음에서 우러난 진실한 기도가 하나님 앞에 진실한 기도가 되어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비결이 된다고 합니다.
기도에 관한 주옥과 같은 교훈이 누가복음 18장에 실려 있고 거기에서 우리는 의로운 삶을 살았던 바리새인과 악을 행하였던 세리를 만나게 됩니다. 절대적인 의미에서 본다면 바리새인은 세리보다 의로운 삶을 살았고 도덕적으로 올바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 앞에 청산유수와 같이 기도했고, 하나님께 자신이 어떻게 물질적으로 헌신하고, 어떻게 금식을 하면서 하나님을 섬겼는지를 자랑하듯이 하늘을 향하여 기도하였습니다. 같은 시간에 옆에서 기도하고 있는 세리가 있었습니다. 그가 행한 것이라고는 동족들을 약탈하고 죄를 지은 것밖에 없었고, 그래서 차마 하나님을 향해 얼굴을 들 수도 없었고, 무얼 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요청할 자신감도 없었습니다. 그의 가슴을 두드리는 탄식은 기도를 대신했고, 겨우 토해놓은 말이 “하나님이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올린 이 짧은 기도가 의롭게 살았던 바리새인의 기도보다 하나님 앞에 더욱 받으심직한 기도가 되었고, 바리세인은 의롭다 여김을 받지 못했으나 세리는 의롭다 여김을 받고 내려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음으로부터 길어 올리는 진실한 기도, 자기의 마음에서 하나님을 찾는 간절한 함성에 귀를 기울이며 토해내는 부르짖는 그 기도야말로 하나님 앞에 가장 간절히 아뢸 기도인 것입니다.
2. 허위와 가식이 없는 기도
둘째는 허위와 가식이 없는 기도입니다. 거짓과 허위, 위선이 함께하는 기도는 진실하게 간구하는 기도일 수 없고 그렇게 많이 기도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가까이 해주실 수 없는 기도입니다. 종종 꽤 기도를 하는 사람인데 이상하게 하나님과 가까이 하고 있다는 인격의 특징이 느껴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진실의 문제입니다. 허위와 가식, 위선과 거짓을 벗고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간구하는 것, 이것이야 말로 주님을 만나는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진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당신의 성품을 본받아 진실한 사람들과 교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의 지위와 재물의 여하, 지식의 많고 적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이 없어도 진실하고 하나님 앞에 꾸밈이 없이 당신께 가까이 나아오는 모든 사람들을 가까이 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허위와 꾸밈, 가식과 위선을 벗고 주님께 매달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3. 주의 뜻에 합치하려는 기도
셋째는 주의 뜻에 자신을 합치 시키려는 기도가 진실하게 간구합니다. 이 진실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솔직한 것을 진실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이렇게 불순종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죄를 지었습니다. 이렇게 나쁜 짓을 했습니다. 지금도 이러한, 이러한 일들을 행하고 있어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상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가장 더러운 기도입니다. 솔직해 진다고 할지라도 무엇인가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진리에 합치시키려고 하는 진지한 의도가 없다면 이것은 하나님을 깔보는 기도이고, 하나님 앞에 솔직한 것은 회개가 없이 하나님 앞에 솔직한 것은 배째라식의 기도이고 교만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더 큰 반역이고, 이런 기도는 안하는 것보다 하는 것이 주님의 진노를 부르기에 쉽습니다.
하나님은 진리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 자신에게 모순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진실해 지실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은 진리인 자신에게 충실하사 당신 자신이 진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진리는 우리 안에 있지 않습니다. 진리는 우리 바깥에 있고,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으로 그 진리에 합치될 때에 우리는 진실한 사람이 되지만 떨어져 나오면 또 다시 허위와 가식에 가득 찬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우리의 형편을 아뢸 때에는 하나님의 진리에 합치하고자 하는 노력이 있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진실 그 자체가 진리에 부합된 마음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진실하게 하나님 앞에 살려고 몸부림치는 사람의 기도는 주님을 만나기에 적합한 기도입니다.
4. 절대의존의 마음으로부터 기도
마지막으로 넷째는 절대 의존의 마음으로 하는 기도가 바로 진실하게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지만 우리 자신의 힘으로 진리에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그 진리로 돌아가게 하시고, 그래서 절대 의존의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실하게 하나님 앞에 간구한다는 것입니다.
B. 응답 이상의 것을 주심
하나님은 응답 이상의 것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셔서 우리를 그 모든 어려움에서 건지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가까이 가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이 꽃이라면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가까이 계신 것은 열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간절히 기도하는 진실하게 간구하는 자에게 응답의 아름다운 꽃을 주실 뿐만 아니라 또한 가까이 하시는 열매까지 주셔서 우리로 하나님 안에 있는 진정한 행복을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V. 결론
여러분은 이렇게 진실하게 간구하는 사람들입니까? 여러분이 이렇게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처해 있는 상황과 환경의 어려움을 인해서는 눈물을 흘리지만 하나님을 찾는 마음으로는 눈물을 흘리지는 않고 있는 것이 여러분의 사정 아닙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기도는 정말 마음에서 길어 올려지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허위와 가식이 없이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고백할 뿐만 아니라 주님의 뜻에 합치하고자 하는 간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할 것이고, 나 혼자 힘으로 할 수 없는 이 모든 어려움 속에서 주의 은혜로 건져 달라고 하는 의존의 마음이 있는 기도를 회복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간절한 기도, 우리의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간절한 부르짖음과 울부짖음, 우리의 마음을 찢어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이 간절한 기도로 아버지 앞에 매달려 본 적이 언제입니까? 그래서 여러분 은혜는 사라지고 근심은 충만하게 되었고, 하나님을 향한 아름다운 기도는 두려움으로 변했고 그 찬송은 여러분에게 한숨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언제까지 하나님을 멀리 떠나 머뭇머뭇 거리며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비굴한 삶을 사시렵니까? 그래서 하나님도 잃어버리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도 잃어버리는 불쌍한 사람이 되렵니까? 하나님을 섬기기가 싫어서 죄의 종노릇하며 사는 삶을 언제까지 계속할 것이며 여러분은 도대체 언제쯤에야 가까이 계시는 주님께 매달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지금은 여러분이 하나님을 간절히 찾을 때입니다. 이 세상의 번영과 여러분의 육체의 넉넉함을 위하여 애쓰는 것의 1/10이라도 굶주리고 방황하는 여러분의 영혼을 위해 투자하지 않으시렵니까? 여러분의 영혼의 깊은 신음 소리에 여러분이 귀를 기울여 주지 않는다면 어찌 하겠습니까? 여러분의 가장 큰 의무는 여러분의 영혼을 올바르게 사랑하는 것이고 그리고 올바르게 하나님의 그 은혜를 간절히 구합니다.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고 다시 한 번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당신께 가까이 하려는 사람들에게 가까이 오시고 주님을 찾는 자들에게 나타나시는 하나님이시니 그렇게 주님 앞에 매달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하나님을 찾을 때 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