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강이 주장하는 삶
(2014년 수요예배)
설교기간|2014년 12월 17일-2015년 02월 18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8년 3월 28일
목 차
1. 평강이 주장하는 마음(골 3:15) 2014.12.17 수요예배 1
2. 그리스도의 평강과 감사(골 3:15) 2014.12.24 수요예배 10
3. 감사로 찬양하는 길(골 3:16) 2015.01.21 수요예배 18
4. 말씀이 거하는 삶(골 3:16) 2015.2.18 수요예배 27
평강이 주장하는 삶 (1) 2014. 12. 17 수요예배
< 평강이 주장하는 마음 >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골 3:15)
I. 본문해설
- 1장과 2장에서 유장한 교리 제시함
- 3장과 4장에서 신자의 실천적인 삶
- 위엣 것을 찾는 신령한 삶을 추구함
II. 평강이 주장하는 마음
A. 그리스도의 평강
- eirene kristu 평강의 저자이심
- 주를 통한 하나님과 인간간의 안녕
- 세상적인 평화와 그리스도의 평강
- 환경에 흔들리지 않는 은혜의 능력
B. 평강에 주장된 삶
- "마음 안에 평강이 통치하게 하라"
- "통치한다"는 것은 힘으로 다스림
- 나라에 여러 일 발생하나 질서 잡힘
- 많은 일 겪고 정동 있으나 평강 회복
III. 한 몸으로 부름받음
- 의학적 설명인 혈압과 혈관 벽의 힘
- 나의 평강이 미치는 공동체적 영향
- 하나님의 은혜를 통한 공동체 평강
- 개개인의 평강으로 갈등을 흡수함
IV. 적용과 결론
평강이 주장하는 삶 (2) 2014. 12. 24 수요예배
< 그리스도의 평강과 감사 >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골 3:15)
I. 본문해설
- 그리스도의 평강에 의해 주장된 삶
- 삶의 사태들에 어찌 정동이 없을까
- 그것이 주장해서는 아무 행복 없음
II. 그리스도의 평강과 감사
A. 평강과 삶에 대한 해석
- 하나님과 평화는 욕망 벗어나게 함
- 삶의 평정 통해서 객관적 용시가능
- 변전하는 삶 너머 있는 가치를 따름
- 삶에 대한 욕망 중심적 해석을 버림
B. 평강과 감사하는 자됨
- 자기 애호하는 일에 대한 감사 아님
-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 수중에 있음
- 주 뜻 이루며 사는 길 일희일비 않음
- 변하는 사물질서와 불변하는 주님
III. 감사하는 자가 되라
- be thankful "유카리스토이"
- 존재에 대한 명령 성품의 변화 요구
-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성품 변화
- 자신이 주인 아닌 주 계획안에 있음
- 실패하지 않는 하나님 사랑을 보며
IV. 적용과 결론
-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과 화목한 삶
-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함을
- 주 뜻 이루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평강이 주장하는 삶 (3) 2015. 01. 21 수요예배
< 감사로 찬양하는 길 >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골 3:16)
I. 본문해설
- 평강이 주장하는 마음의 중요성
- 실제로 마음의 평강 누리는 방법
- 신적경륜의 이해로 살기 어려움
- 세상과 다른 질적 차이의 삶 선택
- 불만-용납-용서-사랑을 더함
- 하나님의 섭리와 세상의 유한함
II. 감사로 찬양하는 길
- 개인의 문제 뿐 아닌 공동체 소명
A. 말씀이 거함
- 그리스도의 '말씀' 혹은 '일'임
- 예수께서 가르친 말씀과 하신 일
- 그리스도의 낮아짐과 섬김 묵상
- 말씀과 예수정신 품은 공동체됨
- 올바른 공동체 기도: 상황+말씀
- 풍성함: 말씀의 분량+감화크기
B. 지혜로 가르침
- 신령한 지혜와 본성적 지혜 구별
- 가르침과 권면함 nutheduntes
- "정신을 제자리에 갖다 둠" 지혜
- 지식의 축척 함께 진리의 각성임
- 이런 지혜와 지식의 작용을 피차
C. 찬양으로 감사함
- 시와 찬송,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 감정의 승화와 미끄러짐의 방지
- 한시각 아닌 또 다른 시각으로 봄
- 하나님의 불견적을 선을 바라봄
- 십자가 이후로 덤으로 사는 인생
III. 적용과 결론
- 영혼의 시선으로 하나님 응시함
- 소망을 주님께 두고 만사를 맡김
- 주 날개 그늘아래 얼굴 빛 구하라
평강이 주장하는 삶 (4) 2015. 2. 18 수요예배
<말씀이 거하는 삶 >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골 3:16상)
I. 본문해설
- 안정이 없는 우리의 인생을 생각함
-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 삶도 그러함
- 불완전한 세상과 온전치 않는 자신
- 교회 밖에서 또한 교회 안에서 겪음
- “불만, 용납, 용서” 언급함 (3:13)
II. 마음의 평강의 중요성
- 영혼의 경향성이 마음에서 작용함
- 마음 안에서 은혜와 인간 의지 만남
- 평정한 마음의 중요성
a. 명정한 지성: 믿음도 발생 가능함
b. 조율된 감정: 합당하게끔 정동됨
c. 순종적 의지: 지성의 판단을 따름
- 마음지킴이 요구되는 것도 이 때문임
- 어떻게 평강이 주장한 상태가 될까
III. 말씀이 거하는 삶
A. 그리스도의 말씀
- “ho logos christu” = the Word 4:3 “주의말씀” (1:25,살후3:1)
- 예수계서 한 말씀들이라기 보다는
- “그리스도의 일, 말씀이신 성자”
-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폰소돈, 아보트
B. 풍성히 거하게 함
1. “거함”
- “거하다” enoikeo, (=en + oikos)
- “~안에 살다”, 혹은 “내주하다”
- 말씀이신 그리스도가 함께 거하심
- 성령께서 신자 안에서 내주 하신다
2. “너희안에”
- “너희안에” en hymin
- 공동체 “교회안에” + 개인적으로
- 골로새서 맥락은 전자에 중심이 있음
3. “풍성히 거하게”
- “풍성하게” plousisos, richly
- 말씀이신 그리스도 내 주의 방식임
- 하나님은 은사: 하나님의 공급(딤전6)
-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성령을 부으심” (딤전3:6)
- 그리스도 중심 성령 충만한 삶 중요
IV. 적용과 결론
- 인생의 길이는 시간의 길이가 아님
- 너무 많은 시간을 요동치는 마음으로 보냄
- 정욕, 근심, 번민과 불안으로 낭비
- 모두 마음에 그리스도가 떠났기 때문
- 그리스도를 묵상, 성령 충만하라
십자가에 감춰진 은혜 1 (2015.10.19 가을말씀사경회 새벽)
1. 평강이 주장하는 마음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 3:15)
녹취자: 정유선
Ⅰ.본문해설
평강이 주장하는 삶(2014.12.17 수요예배1)
골로새서에서 사도 바울은 1장과 2장에서 우주적인 기독론을 제시하며 유장한 기독교의 교리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모든 서신에서 사도가 늘 그러하듯이 역시 교리에 대한 설교가 끝난 후에는 3장과 4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실천적인 삶에 대한 교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부분은 바로 3장에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위의 것을 바라보며 경건하게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질서롭게 나타나야 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몇 주간에 걸쳐서 이제 3장 15절 이하의 구절과 앞에 있는 구절을 논리적인 순서를 따라서 설교할 터인데 오늘은 15절에 나오는 상반절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라는 구절을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사도는 그리스도인이 이처럼 우주와 만물을 회복시키는 위대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 속에 있다는 사실을 이미 1장과 2장에서 진술하였습니다. 이렇게 되고 나면 이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존재는 단순히 이 세상에서 잠시 있다 사라지는 의미 없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의 육체는 비록 잠시 이 세상에 태어났다 들풀처럼 사라져 가고 육체는 죽음에 삼킨바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가 된 그리스도인들은 매일 매일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의 삶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루실 위대한 구원의 계획, 또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침투해 들어온 위대한 하나님의 나라, 그 나라를 실현하면서 이 세상에 구원의 역사가 전개될 때 그의 삶은 우주적인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 같은 사람을 구원해주신 구원의 은혜와 위대하고 비밀스러운 경륜 안에서 자신의 이 삶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생각하면서 몸은 이 지상에 살아도 정신과 영혼이 하늘에 잇대어 사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바로 뚜벅뚜벅 자신의 인생의 길을 걸어가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존재의 울림이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는 이 세상에 살면서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끊임없는 삶의 사태들을 만나고 온갖 일들을 겪습니다. 그때 흔들림이 없는 하늘의 비밀스러운 경륜을 이해하면서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신자의 삶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평강의 삶입니다. 특별히 평강에 의해서 주장되는 마음이 없이는 신자라고 해서 별다른 삶을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Ⅱ. 평강이 주장하는 마음
A. 그리스도의 평강
그러면 이 평강에 대해서 성경이 오늘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제일 먼저 이것에 대해서 성경은 그리스도의 평강이라고 말합니다. ‘에이레네 크리스투’,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의 한 평강’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가 바로 이 평강의 저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에이레네’는 자주 설명드리지만 성경에 나오는 ‘샬롬’이라는 단어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샬롬은 아주 총체적인 것이었습니다. 단순히 정신과 영혼만의 평화가 아닙니다. 육체의 상태도, 하나님과의 관계도, 인간과의 관계도, 심지어는 이 자연세계의 만물과의 관계까지도 포괄하는 의미에서의 화목입니다. 여기서 평강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평화 혹은 화목이라고도 번역될 수 있는 단어이지만 가장 좋은 단어 중의 하나는 안녕이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우리말의 한계이지만 사실 이 ‘에이레네’라고 하는 이 단어 그리고 히브리어에서 ‘샬롬’이라고 하는 단어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기본으로 하고 하나님과의 평화로운 상태가 이웃들 속에서 평화로 구현되었고 그런 평화로운 하나님과 이웃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의 이 모든 만물들을 인간이 선량한 관리자로서 피조물들을 관리해감으로써 피조물과의 사이좋은 관계도 형성되었고 정신과 영혼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물질과 그의 육체 모든 것까지 아울러 안녕한 상태,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으로서 자신의 인생의 목표와 하나님이 이 세계와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에 이바지하면서 사는 데에 방해를 받지 않는 그런 평화로운 상태를 가리켜서 ‘에이레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평강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모든 평화가 불가능하던 인간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평화를 얻게 되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이 바로 이렇게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고 그 은혜를 통해 사람과 화목을 구현하고 피조물과도 화목한 사이를 이루어가서 모든 것이 안녕한 상태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안녕한 상태는 반드시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오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도 어느 정도는 우리에게 안녕을 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철저하게 국가가 치안을 관리해서 도둑이나 강도나 혹은 폭력의 위험 없이 살 수 있다면 우리의 생활은 어느 정도 안녕한 세상이 될 수 있겠지요. 그런 것 보면 우리나라는 어떤 의미에서 세계적으로 치안이 아주 잘 된 나라입니다. 언제 한번 요하네스버그라고 하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있는 어느 호텔의 사진을 보니까 호텔 로비에 이렇게 써 있었습니다. “밤중에는 밖에 나가지 마십시오. 총에 맞으실 수 있습니다.” 얼마나 무섭습니까? 이번에도 목사님들 만나서 얘기를 들어보니까 거기에 사는 한인들은 한 번씩 강도한테 털리지 않은 사람이 없답니다. 그런 것에 비하면 우리는 총 맞을 염려도 없이 다니니 얼마나 좋은 세상이고, 밤중에 워킹을 하기 위해서 개울가를 따라서 청계산으로 걸으면 젊은 여성들이 아무 두려움 없이 이어폰을 꽂고 운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우리나라는 이런 면에서 참 안전한 나라구나.” 그뿐만이 아닙니다. 적절한 음식을 제공해주고 이렇게 추운 날에는 따뜻한 의복이 있고 편안한 실내 환경이 있으면 우리의 육체는 어느 정도 안녕한 상태가 되지 않겠습니까? 가족들이 함께 모여살고 형제간들이 있어도 경제적으로 넉넉하고 갈등의 요인이 없으면 어느 정도 안녕이 있잖습니까?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자원들도 어느 정도는 우리에게 평강을 줍니다. 그런데 그것은 완전하고 흔들림이 없는 그런 평화가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언젠가 한번 설교 중에 그런 말씀을 드렸지요? 전 세계 어느 나라나 로또 같은 복권이 있습니다. 그런데 각 나라마다 그 복권에 거액이 당첨된 사람들을 추적하는 프로그램이 텔레비전에서 안한 나라가 없을 정도로 거의 대부분의 나라들이 했습니다. 그런데 피부색깔, 나라와 상관없이 공통점이 있습니다. 벼락부자가 된 사람들은 모두 불행해진다는 것. 왜? 너무 평화롭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늘 지게로 똥 퍼다가 뿌리면서 호박을 기르던 그 밭이 아주 싸구려여서 자식들이 쳐다보지 않을 때는 화목했는데 신도시 개발에 들어가면서 몇 백 억의 보상금이 나오기 시작하니까 평강이 깨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세상에 있는 자원도 어느 정도는 우리에게 평강을 가져다줍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오는 그 평강과는 같지를 않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또 우리가 마음 깊이 순수하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인생은 우리 마음대로 안 되는 거라고 늘 말씀을 드렸지요? 그래서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야 됩니다.
엄밀하게 우리들이 성경으로 돌아가서 생각해보면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예전에는 나 혼자 살던 사람이 이제는 예수 의존해서 내 하고 싶은 것을 그분의 후원을 받으면서 하는 그런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는 의미는 보다 깊은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서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해보려고 했던 나를 포기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주실 때 참으로 내게 살기를 원하셨던 그 삶이 나에게도 기쁨이 되는 삶을 사는 것이 진정한 신자의 성숙한 삶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간절히 열렬히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은 너무너무 필요하고 오늘날같이 기도가 부족하고 기도에 게으른 때에는 이러한 강조가 너무너무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면서 기도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기도하는 것,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안에서 행복해지려는 사람의 기도와 하나님 바깥에 있는 사람의 기도는 얼마나 차이가 날까요?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의 기도가 항상 우리의 언어의 기도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일치되어서 기도와 기도자, 예배와 예배자 이것을 구별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헌제자가 하나님 앞에 바쳐진 사람일 때 헌제물이 하나님 앞에 의미 있듯이 기도자가 하나님이 받으심직 한 사람일 때 기도는 의미가 있는 것이고 예배자로서 하나님 앞에 올바를 때 그 예배가 하나님이 열납하실만 한 예배가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도 부분적으로는 우리의 죄와 잘못 때문에, 부분적으로는 우리는 죄가 없어도 죄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이 세상의 불완전함 때문에, 또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불완전한 신앙과 불완전한 인간성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시련을 당하거나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런 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우리는 일생을 삽니다. 그때에 그런 다양한 삶의 사태들을 만나고 우리가 원하지 않는 환경 속에서 고통을 받을 때 그래도 그 삶을 하나님 앞에서 계속 해나갈 수 있는 그 힘이 어디서 오는지를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이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옵니다. 그 은혜는 바로 하나님이 당신과 평화를 누리는 사람에게, 또 당신과 평화를 누리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면 평강에 주장된 삶입니다.
B. 평강에 주장된 삶
그래서 오늘 성경이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다시 말하면 희랍어 성경대로 읽는다면 “마음 안에 그 평강이 통치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통치가 무엇입니까? 통치는 힘으로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 힘이 무력을 직접 행사하는 힘이 아니라도 그 힘을 통치 받는 사람들이 인정해서 고분고분 말을 듣는 것입니다. 그것이 통치입니다. 또 반드시 그런 통치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 내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어떤 사람이 나의 생사를 주관하거나 나에게 커다란 물질적인 이익을 줄 수 있을 정도의 권력은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를 워낙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도 나를 사랑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지요? 때로는 내가 이렇게 하면 많은 돈을 얻을 수 있는데도 내 사랑하는 사람이 그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기꺼이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때로는 큰 권력을 가지고 나의 생명을 혹은 나의 지위를 빼앗아갈 수 있는 사람인데도 그 사람 말을 안 듣고 오히려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나를 죽이거나 혹은 내 지위를 빼앗아가거나 보태줄 아무 권력이 없는 사람인데도 그 사람의 말을 듣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지요? 권력에 의한 통치보다는 사랑에 의해서 통치를 받는 것이지요. 그것이 이런 통치든지 저런 통치든지 간에 통치라고 하는 것은 어쨌든 힘을 행사해서 그를 굴복시키고 그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의도대로 질서가 잡히는 것이 통치입니다. 그것이 통치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바로 그렇게 평강이 통치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너희 마음을 그리스도의 그 평강이 통치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나라를 생각해보십시오. 아무리 훌륭한 나라도 완전한 나라는 없습니다. 저는 일본을 평생 2번 아니면 3번을 간 것 같습니다. 별로 그렇게 가고 싶은 욕구가 없었습니다. 집회를 해달라고 와서 그래서 한 번 갔습니다. 갔다가 금방 왔습니다. 3일 만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가기 전에 일본은 질서 있는 나라이고 마치 우리사람이 일본 사람의 질서의식에 대면 아주 불량소년 같은 나라인 것처럼 그렇게 오래 들었습니다. 그런데 가니까 거기도 안 그런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공항에서 내려서 밤중에 집회 장소까지 한 6시간을 차를 타고 갔습니다. 시골길을 차가 달리는데 차가 그냥 수시로 추월을 하면서 곡예 운전을 해서 그 봉고를 밤중에 타고 가는 나를 불안하게 하는 것입니다. 중앙선을 넘나들면서 그 산길에서.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아니, 일본이 질서 있는 나라라더니 왜 이런 차들이 길거리에 밤중에 많이 돌아다니나?” 아무리 훌륭한 나라라고 하더라도 그 질서를 질서대로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느리게 마련입니다. 여러분도 무단횡단도 가끔 하시고 신호위반도 하시고 길거리에 쓰레기도 버릴 때가 있잖습니까? 그래도 나라가 확고한 공권력을 가지고 있으면 작은 것들은 문제가 안 됩니다. 왜? 커다란 이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삶의 질서 자체를 전면적으로 파괴하지는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신자가 되었지만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을 겪습니다. 그러면 그때마다 우리의 마음에는 정동이 일어납니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사랑의 정동이 일어나서 기쁘고 즐겁지만 원하지 않는 불행한 일을 당하거나 내가 원하지 않는 질서를 강요당하는 상황이 되면 고통의 정동이 일어납니다. 때로는 혐오의 정동이 일어나서 누군가를 미워하게 되고 괴로워하게 됩니다. 그것은 아무리 높은 수준에 있는 영적인 세계를 가진 사람이라도 아마 누가 그것을 피할 수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훌륭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도 섭섭한 것은 섭섭한 것이고 아픈 것은 아픈 것이고 즐거운 것은 즐거운 것이고 괴로운 것은 괴로운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이 미숙할수록 이렇게 괴로운 일이나 혹은 고통스러운 일 하나를 만나면 인생 전체가 요동을 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똑같이 파도가 쳐도 조그만 배에 그저 한 세 사람이 타고 간신히 여기만 왔다갔다 하는 그런 배를 탔는데 한 2~3미터 파도가 치면 뒤집어질 듯이 배가 날뛰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한 3000톤, 5000톤 배가 띄워져있다면 배가 흔들리기야 흔들리지만 곧 쪼개져 물속에 곤두발질 칠 것처럼 그러진 않잖습니까? 그것이 신앙의 성숙입니다. 누군들 괴롭지 않겠고 누군들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시간이 좋지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있는 시간이 즐겁고 행복한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밥을 먹어도 나를 좋아하고 사랑하고 내가 만나서 기쁜 사람하고 먹으면 위로가 되고 며칠 동안 기력이 없다가도 밥 한 끼를 먹고 맘껏 웃고 나면 병원에 가서 누워서 링거 한 대 맞은 것보다 훨씬 힘이 납니다. 그러나 내가 기쁘지 않은 사람하고 밥을 먹으면 반드시 돌아올 때 약국에 들러서 약을 사먹어야 됩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누가 그것을 피할 수가 있겠습니까? 강아지도 식구 중에서 예뻐하고 쓰다듬어주는 사람이 있고 못돼서 뭐라고 깽깽거리면 발길로 차버리는 사람이 있으면 발길로 차는 식구가 들어와도 개집 속에 숨어서 나오지도 않고 으르렁거립니다. 그런데 예뻐해주면 그냥 달려와서 뺨에다 혓바닥을 대며 핥고 끙끙 대고 어쩔 줄 몰라 해 하고 매달리잖습니까? 그런 미물도 그런데 영혼을 가진 인간이 왜 안 그렇겠습니까? 그런데 이런저런 많은 일을 겪고 때로는 그중에 어떤 일은 내가 원하는 삶의 사태가 아닙니다. 그리고 거기서 여러 가지 정동들을 겪습니다. 때로는 마음이 상하고 흔들리고 괴롭습니다.
그런데 평강에 주장된 삶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것이 있어도 잠시 침잠합니다. 조용히 눈을 감고 묵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를 붙들어주옵소서.” 혹은 기도의 내용이 없어도 뭔 상관이 있습니까? “오 주여, 나를 도와주옵소서. 내 마음을 하나님이 붙잡아 주옵소서.” 그러고 아주 짧게 간절히 기도하면 놀라운 평강이 밀려옵니다. 그리고 요동치던 바다가 잔잔해지는 것처럼 그런 평강이 찾아옵니다. 여러분, 바닷가를 여행해보신 적이 있지요? 오후에 도착했는데 막 널뛰듯이 파도가 치는 겁니다. “이거 어마어마하구나.” 멀리 보면 바다에 거품이 하얗게 이빨을 드러내듯이 바다가 하얀 거품들이 보입니다. 그러면 파도가 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문이 흔들리는 가운데 불안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는데 아침에 찬란한 햇살을 받으며 숙소의 창문을 활짝 열었더니 바다가 잔잔해 진겁니다. 그런 경험이 있지요?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평강에 의해 주장되는 마음을 갖는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다가 슬픈 일을 만나면 슬퍼하십시오. 화나는 일을 만나면 화나는 마음이 들어도 너무 죄책감을 갖지 마십시오. 그것이 불완전한 인간입니다. 그리고 내가 원하지 않는 삶의 사태 속에 들어갈 때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그냥 그것을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을 하십시오. 그런데 문제는 그 고통, 그 괴로움, 그 미움, 그것이 자기의 마음을 주장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파도칠 수는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이니까. 그렇지만 거기에 마음이 함몰되어서 그래서 불평이 마음 깊이 원망으로 발전한다든지 못마땅한 것이 깊은 미움으로 진전한다든지 혹은 불안이 깊이 내려가서 뼛속 깊이 스며들어서 감사한 마음을 말려버린다든지 그렇게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평강의 복원력입니다. 언젠가 한번 조선공학을 하는 사람한테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배중에서 제일 많이 흔들리는 배가 함정이랍니다. 군인들이 타고 다니는 좁고 빠른 배, 그것은 엄청나게 흔들린답니다. 그래서 해군이 되었는데도 결국은 체질적으로 도저히 함정 근무를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적응을 해나가는 사람이 더 많겠지요. 그런데 그분 얘기에 의하면 흔들리지 않는 배일수록 복원력이 없답니다. 그래서 여객선 같은 것들은 배를 펑퍼짐하게 해서 잘 흔들리지 않는 대신 한번 세월호 처럼 무게중심을 잃고 쓰러지면 복원이 안 된답니다. 그런데 전투함정이나 이런 것들은 조금만 파도가 쳐도 쉼 없이 흔들린답니다. 그 대신 웬만하면 절대로 뒤집어지지 않는답니다. 우리가 인간이니까 연약한 인간이니까 우리가 끊임없이 온전함을 추구하고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려고 애를 쓰지만 그러나 그렇지 못할 때도 있으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신과 이 마음의 크기가 무한정 크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찬송가도 있잖습니까?
(찬양)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종종 신앙생활하다 보면 정말 열심히 했던 사람, 말씀에 은혜도 깊이 받았던 사람, 신학적인 지식도 상당했던 사람이 깊이 미끄러져서 저 사람이 정말 신자였을까 할 정도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신앙적인 관계가 깨지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그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복원력을 상실한 것입니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도 상쾌하고 희망에 차질 않고 어젯밤에 잠들 때 베갯잇을 적시며 잠들게 했던 인생의 곤고한 일이 아침에 그대로 똑같은 무게로 떠오릅니다. 눈을 떴는데도 일어날 기운이 없습니다. 그래도 어떻게 합니까? 그리스도인이니 기도를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새벽에, 이른 아침에 거기가 어디이든지 간에 기도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 찬송을 부릅니다. 그리고 성경을 한 장 읽습니다. 그러면 서서히 우리의 눈을 흐리게 만들었던 희미한 광경들이 또렷해지면서 내가 어디에 와있는지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평강이 들어옵니다. 그러면서 내 안에서 들끓던 많은 것들이 잠잠해지는 경험을 합니다. 그것이 바로 평강의 복원력입니다.
어차피 우리의 삶은 수많은 사태들을 만나게 돼있고 우리 모두 가슴이 터질 듯 한 기쁨과 행복만을 경험하며 살기를 원하지만 우리의 삶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죄와 불순종 때문에, 세상의 불완전함 때문에 끊임없이 시련을 당하고 혹은 우리가 원하지 않는 어려움을 만납니다. 또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 속에서 그런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단련하시면서 우리를 당신 원하시는 대로 빚어 가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삶이 그렇게 만사형통하는 것처럼 똑바로 고속도로를 가는 것처럼 형통한 인생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불평할 수 없습니다. 왜? 그 대부분의 일들이 우리에게 필요해서 일어나는 일들이니까요. 그러면 마음에 늘 출렁거림이 있게 마련이고 때로는 고통도 있게 마련입니다. 내가 싫은 상황도 만날 때가 있고 그럽니다. 그런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왜? 자신에게 그러한 평강을 주실 분은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그 평강이 우리에게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평강은 그냥 단지 소극적으로 고통과 괴로움이 없는 편안한 상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사태들을 파도라고 한다면 그 파도에 잠깐 흔들릴지언정 끊임없이 복원되면서 가는 내 인생의 항로에 지장을 받지 않도록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도 내가 싫을 때가 있는데 누가 나를 다 좋다고 그러겠습니까? 사람마다 생각이 다른데 누가 내가 가는 길을 다 좋다고 하겠으며 또 그것이 우리에게 꼭 필요하겠습니까?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인생의 외로움은 꼭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는 오묘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눈에는 나빠 보이는 것들도 사용하셔서 우리의 인생을 좋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승리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평강에 대한 복원력이 있는 사람, 괴로워도 잠시 묵상하며 주님을 의지할 때 다시 평강이 밀려오는 사람, 시련과 역경 속에서 아파하고 눈물을 흘려도 주님과의 평강을 회복하고 나면 그 눈물도 감사의 조건이 되는 사람, 이런 사람이 바로 승리하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Ⅲ. 한 몸으로 부름 받음
그런데 오늘 성경은 우리의 마음이 평강에 의해서 주장되는 삶을 살아야 할 이유를 이야기하면서 공동체를 언급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런데 평강을 위해 부름을 받은 거다” 그 얘기입니다. 여기에는 아주 심오한 뜻이 있습니다. 너희가 평강을 위해 부름을 받았다, 무슨 뜻일까요? 순서는 이것입니다. 제일 먼저 그리스도 예수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그래서 그리스도의 평강에 의해 주장됩니다. 그래서 나도 슬픈 일을 만나 그때는 마음이 괴롭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평강을 경험하면서 복원됩니다. 내가 너무너무 회피하고 싶은 싫은 상황도 만납니다. 그런데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그리스도의 평강이 다시 회복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러고 나면 내게 일어난 고통, 슬픔, 눈물, 불평 이 많은 것들이 변해서 결국은 하나님이 나에게 선한 길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나의 인생을 말할 수 없는 지혜 속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이끄시기 위해서 이 시련과 고통도 주시는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내 안에 이런 모든 괴로움과 시련들이 십자가가 되어서 그래서 그 십자가를 짊어지는 삶을 살면서 예수의 고난을 묵상하고, 그러면서 우리가 싫어했던 많은 일들을 통해서 어린아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품으로 파고들고 그분을 꼭 붙드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마음속에 그 주님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가운데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평강 속에서 살게 됩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평강의 삶을 살아야 할 이유가 뭐냐 하면 바로 그 평강을 위해서 우리 모두가 하나의 교회로서 한 몸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에 의해서 다스려지면서 복원된 평강의 힘으로 다시 하나님 앞에 평정을 찾게 돼 그럴 때 -이것은 다음에 설교할 것이지만- 그 때에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의 복음의 원리라고 하는 것은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자신 속에서 그리스도의 평강에 의해 다스려지는 사람은 그런 사람이 이 세상의 불신자들을 만납니다. 평화가 없습니다. 그래서 가장 훌륭한 선교는 평강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 믿고 얼마나 돈을 많이 벌 수 있는지 소위 이야기하는 정상주의라고 하잖습니까? 그것은 복음 아닙니다. 예수 믿어서 누구는 공부를 너무 잘해서 미국의 어느 일류대학을 들어가서 엘리트 코스를 거쳐서 일류의사가 됐다, 누구는 예수를 잘 믿었더니 작은 사업이 번창해서 어마어마한 그룹을 일구었다, 누구누구는 신앙생활 하기 전에는 별 볼일 없었는데 신앙생활 하고 나니까 끊임없이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셔서 최고의 음악가가 되었다, 진실해도 최고의 음악가 안 되는 사람 많고 정말 하나님 사랑하는데도 미국의 일류대학에 유학 못가는 사람 많습니다. 그것은 복음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통해서 존재의 울림을 느끼지 않습니다. 존재의 울림은 어떤 직업인으로서 어떤 기능인으로서 성공함으로써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성공한 삶을 살 때에 그것이 존재의 울림이 되는 것입니다. 공부를 잘해서 승승장구하는 의사가 되고 법관이 되고 사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벌고 그것은 인간 승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존재의 울림이 아닙니다. 어떻게 저렇게 괴로운 인생길을 지나면서 저 무거운 짐을 지고 살면서 저런 끊임없는 고통과 갈등 속에 살면서 저렇게 평화로울 수 있을까, 나에게는 없는데 저 사람에게는 있구나, 그런 데서 존재의 울림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면 불신자들에게 그런 존재의 울림을 들려주면서 하나님과의 평강으로 돌아오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또 교회 안에서도 모든 사람이 다 만족스럽고 은혜 충만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또 은혜 충만한 삶을 살아도 끊임없이 시련과 어려움들을 만납니다. 나와 마찬가지로 저 사람도 마음이 늘 출렁거립니다. 어떤 때는 불안하고 고통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염려를 많이 하는데 그 사람하고 마주앉아서 대화를 하고나면 마음에 평강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나보다도 더한 시련의 길을 걸어가면서도 저 사람은 저렇게 사는데, 아 그렇구나, 이건 아무것도 아니구나. 주님이 붙들어주실 거야. 아멘.” 그것을 서로서로가 서로를 향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누군가 물질이 부족해서 오늘 굶주립니다. 그러면 육체가 안녕한 상태가 아닙니다. 도움을 줍니다. 그래서 그를 육체를 안녕한 상태로 만듭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결국은 평강을 위하는 일이고 이것을 위해서 우리 모두가 하나의 몸으로, 나만 평강을 누리면 괜찮다가 아니라 나 때문에 더 많은 불신자들이 더 많은 지체들이 가장 불안하고 주님과의 평강이 깨진 지체들이 그 평강을 누리는데 티끌만큼이라도 이바지하면서 살게 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몸으로 불러주신 이유입니다. 그러니 교회 속에서 분쟁을 일으키고 그런 평화를 끊임없이 깨뜨려서 사람들의 마음에 고통을 주고 분열을 일으키고 그 평강을 훼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잘못하고 있는 사람인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주님이 그를 한 몸으로 평강을 위해서 불러주신 목적에 이바지하는 삶을 살고 있는 중이 아닙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향해서 이런 말을 합니다.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무슨 의미일까요? 끊임없는 괴로움과 시련과 고통 속에서 사망을 경험합니다. 그 사망은 육체적인 사망이 아닙니다. 고통을 향한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 많이 받아도 고통이 쾌락이 되는 법은 없습니다. 고통은 영원히 고통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아도 칼로 몸을 찌르면 아프듯이 인간과 정신과 고통의 괴로움도 은혜를 받는다 할지라도 고통으로 남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통해서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자신의 죄와 불순종들을 발견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자신들이 그렇게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하면서 자신들의 죄와 불순종에 대해서 죽을 때 불의에 대해서 죽을 때 그때 한 몸으로 부름을 받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영적으로 살아나는 것을 경험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불러주셔서 한 교회 신자로 삼으신 이유입니다.
이것은 의학적으로 설명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에 뭔가 나쁜 것이 들어오거나 질서가 깨어져서 우리의 몸에 결함이 생겨도 다른 지체가 탄탄하면 문제가 해결이 됩니다. 예를 들자면 안 그랬었는데 혈압이 아주 높아지는 것입니다. 그럼 매우 위험해집니다. 왜냐하면 심장이 콱콱하고 피를 펌프질해서 내보내는 압력이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압력이 적절해야지만 온몸을 돌지 압력이 너무 약하면 다 못 돕니다. 그러면 몸에 마비현상이 옵니다. 그런데 만약에 너무 세면 이것이 확 밀면서 어딘가 약한 데가 터지는 것입니다. 심장이 그런 식으로 기능한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혈관 벽이 아주 튼튼합니다. 태생 자체가. 그러면 혈압이 높아도 혈관이 튼튼하게 이깁니다. 별로 문제가 안됩니다. 그런데 혈압이 조금 높은데 혈관이 매우 부실합니다. 그러면 어딘가 터지면서 나오는 겁니다. 뇌로 올라가면 뇌출혈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평강을 누리면서 살아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렇지 않을 때가 많은 것처럼 교회도 그럽니다. 그런데 한 지체가 그런 평강을 잃어버렸을 때 다른 지체들이 그 평강으로 모든 것을 감싸고 받아들일 때 그때 교회전체가 평강을 누리는 일에 어려움이 안생기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평강이 개개인의 평강이 없는 것이 결국은 교회 전체가 그리스도의 평강을 누리지 못하는 불행한 사태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 한 사람 한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평강을 통해서 이 갈등을 쭉 흡수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겁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평강에 의해서 우리의 마음이 주장되지 않을 때 우리의 삶은 얼마나 불행하겠습니까? 불신자의 삶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끊임없이 불안하고 쫓기고 어려움 속에서도 의지할 대상조차 찾지 못하는 그런 불행한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나잖습니까?
Ⅳ. 적용과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안에 있는 평강의 크기는 어느 정도입니까? 끊임없이 시련도 만나고 고통도 당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간절히 의지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고통도 만나고 괴로움도, 시련도 만나지만 그것이 여러분의 마음을 주장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미운 사람도 있고 고통스러운 상황도 있지만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나 미움이 뿌리를 내려 여러분의 마음을 주장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여러분의 마음은 그리스도 예수만이 주장하셔서 그 평강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바로 그 일을 위해 한 몸으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평강을 누리면서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평강이 주장하는 삶(2014.12.24. 수요예배2)
2. 그리스도의 평강과 감사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 3:15)
녹취자: 김세나
Ⅰ. 본문해설
우리는 지난주에 그리스도의 평강에 의해 주장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을 통해서 배우게 되었습니다. 인간이라는 것이 연약한 존재이고, 또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눈에 보이는 수많은 감각, 심지어는 마음속의 상상을 통해서도 다양한 정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단순한 약점만이 아니라 또 그러한 인간의 정동이 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세상에 주신 인간에게 부여하신 창조 목적을 따라 살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학문, 예술, 음악, 모든 인류의 생활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지식의 세계와 표현의 세계, 호기심과 많은 탐구들 가운데 인간의 죄의 본성에 오염되어 섞여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비록 타락하지 않았더라도 끊임없는 정동 속에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이루어 가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어떠한 삶의 사태들을 만날 때 어떻게 우리 인간에게 마음의 움직임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 누가 싫고, 괴로운 상황을 맞이하고 싶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저마다 반갑고 기뻐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고 즐겁고 유쾌한 상황에 처하고 싶지, 보기 싫은 사람과 마주하고 처하고 싶지 않은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이 세상에 살아가는 다양한 삶의 사태에서 우리가 만나는 수많은 삶 속에서 생겨나는 정동에 우리가 자신을 맡기고 그것이 우리를 주장하게 해서는 우리의 삶에 진정한 행복이 가능하겠습니까? 일 년을 살아오면서 여러분은 얼마나 환경이 주는 기쁨과 쾌락 속에서 살았습니까? 일 년 365일 동안 그러한 날들은 매우 적은 날들이었을 것입니다. 은혜 안에 있는 성도들은 은혜 안에 있기 때문에 좋고 나쁜 많은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 앞에 그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고 해석한 결과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산 날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냉정하게 보면 우리의 삶 속에서 보면 끊임없는 시련과 고통, 마주하기 싫은 매일 매일의 상황들이 언제나 전개됩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렇게 다양한 삶의 사태들 앞에서 우리의 마음이 영향을 받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주장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살펴볼 말씀은 그 평강에 관한 교훈의 말씀을 준 후에 마지막에 사도바울이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을 보탭니다.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는 뜻입니다. 이 감사는 그리스도의 평강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평강과 감사가 어떻게 밀접한 관계에 있겠습니까?
Ⅱ. 그리스도의 평강과 감사
A. 평강과 삶에 대한 해석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평강과 삶에 대한 해석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의 평화가 이루어져서 마음의 평정을 찾게 되면 그것이 바로 삶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가져다주고, 그 삶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욕망에 사로 잡혔더라면 감사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가능해 집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는 언제나 성령으로 말미암아 옵니다. 그 하나님과의 평화는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이 정신적이고 영적인 평화만이 아니라 물질과 우리의 육체의 평안함 까지 포함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 평강의 중심은 우리의 정신과 영혼에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이 편지를 쓸 때에도 감옥에 갇혀서 고난을 받고 있었습니다. 빌립보서도 역시 감옥에서 쓴 편지인데 ‘기뻐하라.’는 이야기를 수 없이 되풀이합니다. 그러한 모든 것들은 육체의 좋은 상태에서 나온 것만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박해를 받아 많이 매 맞고 육체가 고통을 겪었어도 그들의 영혼은 한없는 기쁨 속에서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기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는 것을 인해 그들은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완벽한 정신과 영혼의 평강이 우리의 육체의 결핍에도 불구하고 영향을 받지 않고 드러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이 ‘샬롬’이라고 하는 것이 육체와 정신 모든 것을 포함하지만, 그 우선적인 의미는 하나님과의 평화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 ‘샬롬’은 관계적인 용어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평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의 평화, 그리고 자연세계와 관계에서의 조화, 자신의 마음 안에서의 영혼과 육체의 조화, 이 모든 관계 속에서 가장 안정적인 자리를 찾은 것이 바로 평강입니다. 이 평강이 바로 하나님과의 평화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과의 평화가 이루어지게 되면 그 속에서 안식을 얻으면서 신자는 욕망으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욕망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면 그 다음에 그 마음에 평정이 오고, 그 평정한 상태에서 자기 자신의 삶을 객관적으로 응시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나게 됩니다. 우리가 욕망에 사로잡힌 때에는 그것을 소유하지 못하는 것이 커다란 고통이 되지만, 그 욕망을 우리들이 죽이고 나면 잃어버리거나 양보하거나 빼앗기는 것이 우리의 삶에 평정한 상태를 흔들지 못합니다. 그것입니다.
(예화) 10여년도 더 된 일입니다. 경기도 어느 교회 집회를 갔었습니다. 어느 장로님이 점심을 대접하였습니다. 담임목사님과 대화를 나누었던 이야기입니다. “장로님, 그 땅 어떻게 되었어요?”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니까 저는 밥만 먹으며 듣고 있었습니다. 장로님이 입을 열면서, “목사님, 제가 기도 많이 하면서 마음을 비웠습니다. 그랬더니 평화가 왔습니다. 몇 달 동안 정말 힘들었습니다.” 무슨 소리인가 들어보았더니, 자동차 공업사를 하고 있던 분이었습니다. 꽤 큰 땅을 시로부터 아주 오래전 20여 년 전에 대여 비슷하게 얻어서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제 시에서 그것을 사든지 아니면 비워주든지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시에서 부르는 가격과 실제 땅 값은 차이가 많이 날 테니 그 분에게 있어서는 대박이 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돈이 36억 원 정도였으니 적은 액수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왜 욕심이 없었겠습니까? 어떻게든 돈을 끌어다가 땅을 매입하려고 하는데, 처음에는 너무 기뻤는데 몇 달 지나면서 괴로움이 계속 밀려오더랍니다. 기도도 할 수 없고 너무나도 큰 번민이 밀려오더랍니다. 사연이야 뭔지 모르겠지만 기도를 많이 한 후에 마음을 접고 공장을 다른 곳으로 형편에 맞는 곳으로 옮기기로 하고 땅을 포기하겠다는 서류를 내고 났더니 마음에 평강이 왔다고 합니다.
우리는 오늘날 이 세상에서 끊임없이 “큰 욕망을 품어라. 도전해라. 반드시 성공해라.” 이러한 도전들을 많이 받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면서 우리들을 격려합니다. 물론 우리가 신령한 면에서는 그러한 분명하고 투철한 인생에 대한 목표 의식, 오늘 내가 왜 있는지, 내가 여기에 없어서는 안 될 어떠한 이유를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서 사는 그 자세는 정말 하나님을 만난 사람의 제대로 된 삶의 모습입니다. 그것이 신앙의 깊이이고 크기입니다. 그렇지만 지금 말씀 드리는 것은 뭐냐 하면 항상 하나님이 동기가 되어서 하나님 때문에 자기 이기심을 버리고 하나님 때문에 품게 된 신령한 욕망, 거룩한 열망은 결코 우리를 평강을 잃어버리고 불안에 떨게끔 만들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높아보여도 그렇습니다.
한번은 황성주 박사를 만나 대화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마음을 품고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몸이 이기적인 욕망 때문에 오는 스트레스인지 신령한 목표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인지를 안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령한 목적을 가지고 이타적인 이유로 스트레스를 받으면 오히려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저는 의학자가 아니니까 그 분의 의견이 얼마나 과학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는가는 모르겠습니다. 예방의학자가 그렇다니까 상당부분 받아들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분 책을 읽으면서 무릎을 친 적이 있습니다. 언젠가 한번 팔복을 읽다가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막 애통을 하면 그 자체가 스트레스 일 텐데 이게 무슨 암에 걸리든지 괴로워하지 않겠나 했더니 그것이 아니라 몸이 그것을 감지한다는 것입니다.
거룩하고 신령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목표가 도전받고 어려울 때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기도하고 간절하고 어떠한 압박이 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하나님과의 평강을 깨뜨리지 않습니다. 기도가 끝나고 나면 언제나 두려움보다는 더 커다란 평강이 밀려옵니다. 문제는 뭐냐 하면 이기적인 욕심입니다. 이것들이 삶의 평정을 흔들고 평강한 상태를 자꾸 파괴합니다. 그것에 사로잡히게 되면서 자신의 인생을 객관적으로 볼 수 없게 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가볍게 읽을 때에는 우리가 성경을 읽지만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정말 제대로 읽을 때 성경에 의해서 우리가 읽혀집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으로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우리가 객관적으로 우리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하나님과의 평화를 통해서 욕망에서 벗어나고 마음의 평정을 찾게 되면 막 변하는 삶을 따라서 출렁거리는 대신 그 삶 너머에 있는 가치의 빛을 가지고 우리 자신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 대한 욕망 중심적인 해석을 버리게 됩니다.
여러분 주위에서 항상 불안하고 힘들 때마다 생각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마음에 놀라운 평정의 상태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사람, 그들 대부분은 욕심이 없거나 욕심이 아주 적습니다. 그래야 그것이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평강과 감사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평강과 감사하는 자가 되는 것은 떼어 놓을 수 없는 연관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범사에 감사하라.” 할 때 그 것은 내가 애호하는 일에 대한 감사가 아닙니다. 정말 자기 마음대로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의외로 감사가 적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모든 일을 할 수 있지만 자기가 자기를 위해서 모든 일을 해도 항상 자신에게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마음대로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이 대게 성질이 아주 나쁩니다. 그것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도 하실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인간의 비위를 맞추는 일입니다. 인간이 하고 싶다는 대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해주신다고 칩시다. 인간이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과연 인간이 일관성 있게 하나님에게 이런 이런 것을 해달라고 요구해서 궁극적으로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 앞에 행복해질 수 있는 그러한 요구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 있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 안에 있는 욕망을 신학에서는 그것을 규정된 능력과 절대적인 능력이라고 말하지만 절대적인 의미에서는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자신이 어떠한 이유 때문에 안 하십니다. 왜 입니까? 하나님 자신의 도덕적인 성품 때문에 그러한 일들은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면 인간이 마지막에 원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처럼 되고 싶다는 것입니다. 실질적으로 하나님을 자신의 아래에 두고 싶은 것입니다. 그 인간의 욕망을 하나님께서 만족시켜 주실 수 있겠습니까? 에덴동산 안에 모든 것이 다 있었고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는데 하나님 보다 높은 자가 되고자 할 때 하나님이 그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에 있는 평강이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들을 성취하고 얻어냄으로써 평강을 누리고자 할 때는 그 평강은 불과 몇 분과 몇 시간 동안의 평강이지, 그것은 평강이라기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얻은 데서 오는 성취감입니다. 그러한 것이 우리의 삶 속에서 얼마나 일어나야지만 평강한 상태 속에서 우리가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이기적인 마음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희생을 강요해야 합니다. 심지어 하나님께도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통해서 진정한 평강에 도달할 수 있겠습니까? 욕망이 많은 사람은 감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삶에 대한 만족도도 결국 많은 것을 누림으로써 어느 정도는 만족도가 늘어나겠지만 욕망이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욕망이 계속 팽창되면 아무리 많은 물질적인 이득들을 제공해 주어도 그것 때문에 편하다는 느낌을 못 갖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크리스마스 휴가를 받아서 계획을 세웠습니다. “우리 양평쯤에 가서 친구에게 콘도를 빌려서 형님네 차타고 함께 가서 놀다 오자.” 형제들이 함께 가서 놀 계획을 다 짜서 가슴이 들떠 있는데 우연히 아파트 옆집에 사는 사람과 엘리베이터에서 만났습니다. “이번 크리스마스 휴가 안 가세요?” “양평에 가서 좋은 콘도에 가서 쉬려고 합니다.” “소박하시네요. 우리는 하와이에 가서 일주일 쉬었다 오기로 했습니다.” 갑자기 자기 휴가 계획이 너무 후져보여서 이것을 꼭 가야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사람을 안 만났으면 얼마나 행복했겠습니까? 그 꿈에 부풀어서 장을 보고 오는 길인데 하필이면 그 여자를 만나서 같은 날 하와이 간다고 하니까 갑자기 이것을 꼭 가야 하나 생각이 듭니다. 인간이 그렇습니다.
시편 1편이 우리에게 무엇이라 말합니까? “복 있는 사람은” 하면서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는 자로다.” 삶의 진정한 행복을 그러한 변절하는 사물들에서 느끼지 말고 혹시 그러한 것에서 느낀다 하더라도 그 이면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자기 같은 인간에게 이러한 쉼을 주시는 하나님, 이러한 하나님을 알고 찬송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과 평강을 누리는데 이바지하는 계기가 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말로만 감사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의 사태들을 욕망에 붙들려 사는 삶과 다른 시선으로 우리의 인생을 해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몰랐더라면 하나님의 은혜가 내 안에 없었더라면 내 삶이 뿌리 채 흔들렸을 것 같은 고통스러운 일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과의 평강이 나의 마음과 삶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 그게 뭐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일까?’ 그렇게 생각을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 또 그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우리가 생각하는 사물의 질서, 가치의 순서,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제시하는 질서에 가까이 다가갑니다. 그런데 우리가 은혜에서 멀어지면 가치들이 순서가 뒤바뀌고 질서가 엉클어집니다. 그래서 너무 중요한 일에 대해서는 아무렇게나 내 팽개치고, 아무래도 괜찮은 사소한 일에는 목숨을 겁니다. 그러니 결국 그러한 사람이 열심히 살면 살수록 하나님 나라에 방해가 됩니다. 제발 그러한 사람은 열정이 없었으면 좋겠는데 이러한 사람들이 열정이 굉장히 큽니다.
B. 평강과 감사하는 자됨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평강 가운데 살면 감사가 절로 나옵니다. 감사한 일이 일어나지 않아서 감사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 평강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평강한 마음의 상태가 되면 삶에 대한 다른 해석이 생겨납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나는 하나님의 수중에 있고 내가 주님과 평강을 누리고 주님께 순종하며 살아가는 동안 결국 나는 약하지만 하나님은 나를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실 것이다. 지금은 내 마음 원하는 대로 안 되고 내가 원하는 상황이 아니지만 이것도 하나님이 무지한 나를 일깨워서 당신의 뜻을 이루며 살게 하시는 한 과정일 것이다. 그래서 마주치는 삶의 사태 하나하나에 오늘 웃고 내일 울고 모래는 분노하고 글피는 좌절하는 삶을 살아서는 우리가 아무리 뜨거워 보이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어떻게 하늘나라를 그 마음에 소유한 사람일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평화입니다. 평화. 평강. 오늘 내 인생을 마감할지라도 주님이 “얘야, 오늘 밤에 내가 네 영혼을 데려가겠다. 정말 힘들고 어려운 인생을 살았구나.” 하여도 두려움이 없이 주님의 통보를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그 평강한 상태. 그것이 바로 감사하는 길입니다. 그래서 다시 말씀드리지만 좋은 일이 많이 안 일어났기 때문에 감사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평강을 잃어버린 마음이기 때문에 좋은 일이 많이 생겨도 영혼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감사의 찬송이 불가능합니다.
평강한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마음의 상태는 언제나 하나님을 신실하시다고 느낍니다. 왜 입니까? 끊임없이 삶의 상태는 변절해도 그것은 하나의 양상일 뿐입니다. 우리가 일생동안 돈을 벌어야 먹고 삽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이 70살이 넘어서 철들기 시작하면서 자기가 쓴 돈과 번 돈을 매일 적었답니다. 그랬더니 170억을 벌어서 169억, 거의 다 썼답니다. 돈을 벌어야 먹고 삽니다. 어떤 때는 힘들게 날품을 팔고 지게를 져야 먹고 살 때도 있었겠지만 사업을 해서 돈을 막 벌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때는 노동을 하며 먹고 살지만 사무를 보며 먹고 살수도 있고 장사를 하며 먹고 살수도 있고 교수가 되어서 사람들을 가르쳐서 월급을 받을 수도 있고 다양하게 돈을 벌며 사람들이 살아갑니다. 그것이 인생의 최종적인 목표이겠습니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어느 가수가 이야기했습니다. 스물 몇 살까지 20억을 벌고 싶었답니다. 그런데 벌고 나니까 재미 하나 없고 허무했다고 합니다. 뭔들 안 그렇겠습니까? 무엇인들 안 그렇겠습니까? 그것은 삶의 양상입니다. 수시로 바뀔 수 있고 바뀌어도 괜찮은 삶의 양상이 내 마음대로에서 오는 평화는 내 마음대로 하지 않는 그 순간 한꺼번에 유리그릇처럼 깨지고 맙니다. 신앙의 유익은 내가 능력이 없어서 이제 하나님을 이용해서 내 마음대로 인생을 사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예전에는 변화무쌍한 삶의 사태들 앞에 희노애락을 느끼면서 살던 사람이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삶의 양상의 노예가 되지 않고 자유를 갖는 것이 신앙을 가져야 할 이유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심지어 살고 죽는 것까지 라도 우리의 인간 존재의 양상이라고 여길 수 있는 그 차원까지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깊은 사람들은 죽음과 삶의 구분이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일이 풀리지 않기 때문에 감사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평강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감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가 평강에 대하여 길게 이야기한 후에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간단하게 보태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평강과 감사가 그렇게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Ⅲ. 감사하는 자가 되라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하였습니다. ‘유카리스토’라는 희랍어 단어입니다. 무슨 의미인가 하면 어떤 하나의 이유를 대면서 그것에 대하여 감사하라는 것이 아니라 성품 자체가 감사를 잘 하는 성품을 변하였기 때문에 무슨 일을 만나든지 그 일에 대하여 감사로 해석하면서 하나님 앞에 살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떠한 행위에 대한 명령이라기보다는 존재와 성품에 대한 명령입니다.
같이 만나는 목사 한 분이 있는데 그 분 특기는 한숨을 자주 쉬는 것입니다. 우리도 한숨 쉬는데, 그 분은 아주 깊이 쉽니다. 그래서 제가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나도 한숨을 안 쉬는 것은 아니지만 별로 안 좋다고 하면서 습관 되니까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옆에 있는 사람에게는 좋은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회의를 하다가 깊이 ‘후-’ 하면서 한숨을 쉬면 “가망이 없다는 뜻이구나.” 보고를 열심히 하였는데 ‘후-’하면 “내가 한심한 사람이구나.” 생각할 것 아닙니까? 하나의 메시지입니다.
주님이 어떤 하나에 대해서 감사하라는 것이 아니라 성품 자체가 감사하는 그러한 사람이 되라, 그러면 아주 작은 일에도 감사하고 축복하고 긍정적으로 말하고 기쁨을 표현하고, 그렇게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것도 보면 하나님을 향해 감사하는 사람들이 사람을 향해서도 감사를 잘 합니다. 사람에게 감사가 인색한 사람이 하나님께도 감사가 인색합니다. 결국 그리스도의 평강에 의해 지배받는 내면의 세계의 깊이만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신자의 삶의 성품의 변화가 이루어집니다. 자신이 자신의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 자기가 주님의 계획안에 있다는 사실을 봅니다. 자신은 늘 실패하고 완전하지 않지만 그 실패까지도 선하게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완전하신 사랑을 봅니다. 지난 주일 저는 ‘헤세드’가 실패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가르쳐 드렸습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실패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 우리들이 행한 잘못된 것들조차도 사용해서 마지막에 결국에는 좋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선하심을 보면서 하나님께 깊이 감사할 때 우리는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신앙은 그런 때를 위한 것입니다. 흔들리는 때, 좌절하는 때, 쓰라리게 가슴 아픈 때, 그리고 정말 그리워하는 사람들을 볼 수 없을 때, 극복해야 할 엄중한 현실이 자신 앞에 있지만 그것을 극복할 내적 자원이 부족할 때, 그 때 바로 거기에서 신앙을 가진 사람과 갖지 않은 사람 사이에 놀라운 차이가 거기에서 발견됩니다.
미국 사람들이 무슨 일로 한국에 왔다가 인천에서 오는 길에 교통사고가 나면서 몇 사람은 죽고 몇 사람은 심하게 다쳤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제가 방문했던 신학교 교수였습니다. 교통사고가 났는데 한 마디로 온 몸이 아작이 났습니다. 그래서 거의 말하자면 사망 가까이까지 갔습니다. 의식불명과 뇌사 상태가 되었습니다.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사모님에 대해서 들려주는 사람이 가슴 뭉클한 감동이었습니다. 남편이 그렇게 엄청난 중상을 입어서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 식물상태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건강하던 남편이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그 비보가 날아 왔을 때 어떻겠습니까? 사람들이 막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우는데 사모님이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십니다. 큰 비극이지만 여기에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을 것입니다. 진정들 하십시오.” 하면서 그 사람들을 다 평안을 주고, 그 때 제가 방문을 하였는데 사고가 나고 6개월쯤 지났는데도 아직 못 깨어났다고 들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자세히 듣고 오면서 ‘이것이 신앙의 힘이구나. 하나님의 평화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구나.’
여러분이 나의 마음의 평강이 깨지고 평강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하나님 앞에 말씀해 보십시오. 여러분 자신이 정말 그것이 하나님과의 평강을 누리지 못하게 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일인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대부분 그 일이 정말 신령한 시각에서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에 누가 되는 어마어마한 일이기 때문에 여러분이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욕망입니다. 그것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서 모든 삶의 다양한 사태들을 초월하여 환경을 능가하면서 우리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평강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평강을 굳게 붙들면서 우리는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생명의 견고함을 유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를 생각합니다. 아마 우리의 삶이 아무리 변화무쌍하고 시련과 고난으로 얼룩졌다 하더라도 예수님과는 비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일평생 그 분은 고단한 노역의 삶을 사셨고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에워싸여 일평생 고난을 받으면서 사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내어 주셨건만 십자가에 못 박힐 때에는 누구도 당신의 고난에 동참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무엇도 그분의 평강을 앗아 갈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생명의 견고함으로 자신이 당하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며 감사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통해 본받아야 할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여러분의 마음을 어루만지셔서 당신의 평강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교회와 사랑하는 지체들이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평강이 없었더라면 극복할 수 없는 삶의 현실들을 극복하고 예수 닮으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개인의 마음과 영혼에 진정한 평강이 없이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은 교회를 위한 평강이 가능하겠습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평강을 위해 한 몸으로 부름을 받았다.”고 말입니다. 교회 안의 평강뿐만 아니라 교회 바깥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섬김으로 평강을 주기 위해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니 자신이 누리지 못하는 평강을 위해서 어떻게 수고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겠습니까?
Ⅳ. 적용과 결론
한해를 보내면서 여러분이 이제껏 내 마음의 평화가 없는 것은 상황이 내 마음대로 안 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던 믿음 없는 사고방식들을 내려놓고 그 평강을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어떠한 삶의 처지에서든지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여러분 되십시오. 오늘도 예배 끝나고 기도하면서 집에 조용히 돌아가면서 한 해를 돌아보며 생각해 보십시오. 생각만 바꾸면 살아온 삶의 모든 과정이 가슴 시릴 정도로 하나님 앞에 과분한 사랑과 대접을 받은 그러한 감사의 제목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생각을 하면 정말 감사해서 눈물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이렇게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 속에서 살 때, 그 때 존재의 울림이 이 세상 사람들에게 들리게 하셨습니다. 돈이나 지위나 명예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평강 때문에 말입니다. 거기에서 모든 관용이 나오고, 거기에서 모든 감사가 나오고, 거기에서 주님이 주신 은혜에 대한 감격이 나옵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삶을 살아서 한 해를 주님께 영광 돌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평강이 주장하는 삶(2015.01.21 수요예배3)
3. 감사로 찬양하는 길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 3:16)
녹취자: 김명진
I. 본문해설
그리스도인의 삶은 평강의 삶입니다. ‘에이레네’라고 되어있는 샬롬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샬롬을 이룸으로써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자기를 통해서 모든 사람들이 사람들 사이에 샬롬을 이루고, 또 그 사람들이 하나님과 사이에 샬롬을 이루게 하기 위해서 살아있는 것입니다. 어디 그 샬롬이 사람들 사이에만 샬롬이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창조의 세계를 향해서도 샬롬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생태계가 인간 때문에 고통 받지 않도록, 그렇게 돌보고 가꾸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로 우리를 불러주신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샬롬도 이미 주셨지만 현재적으로 누려야 하는 것이고, 사람들과의 샬롬은 이게 마치 저울에 올려놓은 물건과 같아서 수시로 균형이 깨지면서 샬롬이 위협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이기심, 교만함, 영혼의 무관심 이런 것들 때문에 자꾸 샬롬이 깨지는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의 자녀가 깨뜨려지기 쉬운 샬롬을 유지하고 확산할 수 있도록 이바지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땅에 있는 모든 만물을 샬롬하게 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너무 가혹하게 학대해서 만든 동물 식품을 할 수 있으면 줄이거나 그 문제를 의식하면서 불매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 모든 것들을 펼쳐 나가기 위해서는 신자 자신의 마음이 샬롬 속에 있어야 합니다. 마음이 평화로우면 새들이 와서 소리를 하면 노래한다고 느껴지고, 마음이 우울하고 괴로우면 새들이 운다고 느낍니다. 마음이 평화롭고 감사하면 지는 저녁노을의 붉은 태양이 정말 아름답고 무지개처럼 보이지만 마음이 비참하고 괴로울 때는 하늘이 피를 토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뭉크의 『절규』라는 작품이 그것입니다. 원래의 제목이 “끼악”입니다.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뭉크가 친구와 해변을 걸어가다가 갑자기 붉은 노을이 지면서 말할 수 없는 비명 소리를 듣습니다. 그 비명이 무엇이냐면, 아무것도 의지할 수 없는, 근거가 잘린 채 우주 공간에 던져져 버린 외로운 실존의 비명소리입니다. 그날따라 하늘이 소리를 질렀겠습니까? 뭉크가 너무 외롭고 불안하니까 비명 소리가 들린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이 그 해변에 서 있었으면 아마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여러분 같았으면 그 해변에서 그런 찬송을 불렀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마음이 그렇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마음을 자기 스스로 다스릴 수 없습니다. 나는 이미 내 마음을 충분히 다스린다고 할 사람이 있으면 나오라고 하십시오. 어디 그런 사람이 있는지 나와 보라고 하십시오. 없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평강을 누리는 길이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더욱이 골로새서 3장에 보면 그리스도인이 누구냐면 하나님의 경륜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 하나님의 경륜은 비밀로 감추어져 있던 것인데 그리스도를 통해서 신약의 성도들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그 경륜이 무엇이냐면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인들을 구원하고, 구원받은 죄인들을 한 교회로 만들어 그들로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고, 이 세계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으로 나아가는 것, 그 경륜이고, 그 놀라운 경륜의 빛 아래서 오늘날 우리가 먹고, 마시고, 숨 쉬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섬기는 모든 것들이 우주적인 의미를 가지고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경륜을 깨닫고 사는 사람들에게 사람 사는 사람들의 삶은 이 세상에 있는 정신들의 삶과 다른 삶입니다. 이 세상의 정신은 자기를 주인으로 삼고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의 기준으로 삼고 사는 정신이고, 이 그리스도의 교회, 하늘의 비밀스러운 경륜을 아는 정신은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고 자신은 이 하나님의 창조하신 위대한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고 잠시 풀잎의 이슬처럼 태어났다가 사라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두 정신 사이에 끊임없는 충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 그때에 신자는 세상과 다른 질적인 삶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삶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상의 정신이 교회에도 침투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툼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그 앞 절에 보면 “만일 너희가 누가 누군가에게 불만이 있다면 그것을 용납 하거라.”라고 했습니다. 죄를 용납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 불만이 있으면 용납하거라. 그 불만 때문에 너희에게 죄를 지었으면 용서 하거라.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으니 너희는 사랑을 더하거라. 그것이 바로 불만, 용납, 용서를 통해서 이루어진 모든 교회의 치료가 완성되는 것이다. 비유를 하자면 불만하고 용납하고 용서하는 것이 수술을 하는 것이라면 수술을 해서 잘못된 부분을 다 도려냅니다. 그 다음은 꿰매야지, 꿰매지 않고 내버려 두면 상처가 깊지 않으면 죽지는 않겠지만, 팔이든지 다리든지 수술을 해 놓고 그것을 내버려 두면 북어 갈라놓은 것 벌어지면서 아물 것 아닙니까. 그것은 불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꿰매야 합니다. 꿰매는 것도 잘 꿰매야 합니다. 그것을 잘 꿰매면 살이 잘 달라붙는데 그것을 마치 옛날 시골에서 커다란 이불 꿰매듯이 날라 가면 땀 사이사이에서 살이 뒤집힙니다. 마치 게으른 며느리가 이불을 꿰맨 것처럼 그렇게 됩니다. 그것을 묶어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오늘 이야기는 “그리스도의 평강이 주장하게 하라”했습니다. 지난번에도 설교 하면서 말씀드렸습니다.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얇은 막처럼 되어있습니다. 진짜 막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비유를 하자면 막과 같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7〜8년 전에 묵상을 하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여기는 물질적인 감각 세계입니다. 막이 있고 막 아래는 정신세계입니다. 물질적인 감각의 세계가 수많은 사물들에 대한 인상을 실어 나릅니다. 실어 나르면서 막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좋은 그림이 들어오면 기쁨의 막이 울리는 것입니다. 가슴 아픈 이야기를 들으면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의 울림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면 슬픔, 아픔, 분노 같은 것이 울리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너무 감정이 요동이 칩니다. 기쁜 일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슬프고 괴로운 일은 막 요동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항상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막을 울리고 정신세계에 들어간 것들이 기억이라는 밑창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라는 것이 다른 모든 피조물과 구분되는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정신의 창조적 능력, 즉 상상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은 10년 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래서 어제까지 슬프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조용히 생각하면서 아버지가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망각의 밑바탕까지 내려갔던 기억이 상상을 통해서 다시 스물스물 올라와서 저 수면 위에 있는 막을 탕 때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버지가 지금 돌아가신 것처럼 그 아픔이 다시 반복이 되면서 눈물이 쏟아지면서 그리움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목사님, 지금 말씀하시고자 하는 요지가 무엇입니까? 평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상도 하지 말고 기억도 잊어버려야 되겠네요?” 아니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회상하는 능력, 상상이 되는 것, 이런 것들은 인간이 막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옛날의 기억들이 우리들에게 슬프고 아픈 기억들을 주지 않는 다면 반성이 가능하겠습니까? 만약 과거에 대한 기쁨이 솟아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즐거운 사랑의 추억이라는 것이 존재하겠습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밑바탕에서 올라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런 속에서 무엇이든지 끊임없는 겪음 속에서 희로애락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마음에 순간순간 사라져가는 것들이어야지 그것이 우리 마음의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왜요? 목사님, 기쁜 것이 있으면 좋지 않습니까?” 물론 그 기쁨이 신령하고 진리의 빛 안에서 아름다운 것이면 괜찮습니다. 그런 것들은 영혼에 해로울 것이 없는 기쁨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육적이고 감각적인 행복이라면 그런 것들을 많이 느끼고 들떠있으면서 인간은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려운 일 생겼을 때는 기도 많이 하다가 응답을 받고 나면 미끄러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연약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II. 감사로 찬양하는 길
그래서 오늘 사도는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의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늘 흔들리고 희로애락을 느끼지만 그것은 언제나 잠시이고, 오뚝이처럼 톡 치면 막 흔들리다가 다시 똑바로 서는 것처럼 마지막에 주장하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평강이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사도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렇게 그리스도의 평강이 주장하는 사람이 그 위에 보태어야 하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감사로 찬양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사도가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개인에게 주는 사도의 명령이 아니라 공동체에게 주는 것입니다. 감사로 찬양하는 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소명입니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감사로 찬양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 어찌해야 할까?
A. 말씀이 거함
그것이 오늘 성경에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은 “너희 안에 말씀이 거하고”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 앞에 무엇이라고 했냐면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고”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이라고도 번역이 되지만 그리스도의 일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말씀과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행하신 일의 의미가 그들 가운데 풍성하게 거할 때, 그때에 하나님 앞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 그분이 하신 말씀이 우리에게 커다란 감화를 주고, 그분이 이 세상에서 하신 일,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십자가에 죽으심, 그리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죽기까지 복종하면서 사셨던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 받으시는 생애, 그 모든 섬김의 그 과거를 회상하면서 우리가 묵상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 그 고난의 의미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이외의 나머지 것들이 너무 시시하고 하찮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향하여 그 하나님의 말씀을 품은 공동체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올바른 공동체의 기도는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 그분이 자신들에게 주신 말씀을 기억하면서 그 상황을 해석하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며 사는 사람들, 평탄하고 좋은 일만 만났으면 좋겠는데 우리의 인생이 그렇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고난이 있고 시련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 인생에 분투하는 목표가 없다면 나와 다투는 사람도 없을 것이고, 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경쟁해야 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고, 또 싸워야 하는 대상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삶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명의 덩어리입니다. 소명의 공동체입니다. 오늘 집에 가서 당장 해보십시오. 무언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뜻을 하나 정해 보십시오. 그리고 손을 꼭 쥐고
(찬양)
주님의 뜻대로 나 함께 살리라
그러고 내일 아침을 눈을 떠 보십시오. 눈을 뜨자마자 그것을 하지 못하게 하는 수많은 것들이 덤벼드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바깥의 핍박,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해해주지 못하는 몰이해, 자신 속에서 선한 것을 싫어하는 게으름과 나태함, 수많은 것들이 보입니다. 그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그래서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정말 아프지 않고 오래오래 살고 싶으면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뜻을 세우지도 말고, 나쁜 사람도 좋고, 좋은 사람도 좋고,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가늘고 길게, 그러면 됩니다. 제가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까? 외국에 117세 된 할머니의 장수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했더니 첫 마디가 남의 일에 참견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은 남의 일에 참견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직업이고 소명입니다. 그렇게 길게 오래 살면 뭐가 그리 좋겠습니까? 중국에 있는 그 할아버지처럼 19세기, 20세기, 21세기까지 살았다고 하는데 아직도 살아있다고 합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한다.”라고 했는데 풍성하다는 것은 말씀의 분량, 감화의 크기, 이 두 가지를 합쳐서 풍성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번에 사경회가 풍성했습니다.”라고 할 때는 깨알같이 정보만 많이 받아 적었다는 뜻이 아니라 감동을 많이 받아서 “내가 그렇게 살아야지” 하는 감동이 생긴 것입니다. 그것만 있고 지식이 없으면 안 됩니다. 그 두 개가 같이 있는 것이 말씀의 풍성함입니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합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만을 가지고는 우리가 매일 감사하며 살 수 없습니다. 기쁜 일도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며칠 지나면 별로 기쁜 것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풍성한 은혜를 누릴 때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B. 지혜로 가르침
두 번째는 지혜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지혜에는 신령한 지혜와 본성적 지혜가 있습니다. 본성적 지혜는 요령 같은 것입니다. 신령한 지혜는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달은 하늘의 지혜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고 권면하고”라고 했습니다. 신앙에 절대 우위가 있어서 새카만 하수이기 때문에 늘 가르쳐주어야 하는 관계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오늘은 이 사람이 저 사람을 지혜롭게 하고 내일은 저 사람이 이 사람을 지혜롭게 하는데 무엇을 통해서 하느냐면 가르침을 통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눈길을 끄는 것이 ‘권면하고’라는 단어입니다. 희랍어로 ‘누드툰테스’라는 단어입니다. ‘누스’는 인간의 정신이고 ‘드툰테스’는 ‘티데미’라고 해서 희랍어의 ‘갖다 놓다’는 단어와 합친 것입니다. 정신을 제자리에 갖다 놓는 것, 그것이 권면입니다. 왜 그럽니까? 우리가 욕망에 들뜨거나 분노하게 되거나 혹은 하나님의 말씀의 이해의 빛이 떨어지거나, 그렇게 해보면 정신이 제 자리에 있지 않아서 판단력이 없는 것입니다.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어디를 보면 호텔을 크게 짓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지 않습니까? “어, 웬 호텔? 저기다 하면 안 될 텐데” 그리고 얼마 있다가 보면 망해서 팔렸습니다. 우리 같은 초보자 눈에도 “어? 저거 안 될 텐데” 어느 날 가게를 부수면서 새로운 집이 들어섭니다. 무슨 업종이 들어섭니다. 그런데 길 지나면서 “저건 정말 아닌데, 저 가게가 왜 들어 왔지? 장사 안 될 텐데” 그러고 몇 달이 지나면 또 때려 부숩니다. 다른 사람이 온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보이는 데 그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너무 하고 싶으니까 정신이 딴 데로 갑니다. 사람들이 삼성에서 자동차를 한다고 할 때 “안 될 텐데 그것을 왜 하지?” 그런데 그 현명한 최고의 경영가가 나중에 그랬다고 합니다. 막 화를 내면서 “어느 놈이 나한테 자동차 하면 된다고 했어” 그러면서 자기 개인 돈 2조원 몰아넣고 끝냈습니다. 일평생 기업을 경영하면서 잔뼈가 굵어온 사람들도 그런데 평범한 사람들은 말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정신이 수시로 외출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제자리에 갖다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맨 처음에 가서 회심한 교회, 목사님이 새벽예배에 나오셔서 찬송을 부르는데 저 쪽에 있는 교인이 방석을 깔고 자꾸 좌측으로 이동을 하는 것입니다. 나이 먹은 할아버지 목사님인데 “저 자매가 왜 그러지?” 그러고 좌석을 정지를 했습니다. 대개 새벽기도 끝나고 그냥 가면 되는데 찬송을 불렀습니다. 찬송이 “우리 맘은 연약하여 범죄 하기 쉬우니 하나님이 받으시고 천국 인을 치소서” 자매가 갑자기 쓰러지면서 교회 바닥을 주먹으로 치면서 대성통곡을 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새벽기도가 끝나고 “목사님,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목사님이 “뭐냐?”, 새벽기도에 와 보니까, 그것이 정확하게 40년 전인데 40년 전에 5천 원짜리가 제일 큰돈이었습니다. 만 원짜리가 있었는지 모르겠는데 없었을 것입니다. 수표가 돌아다닐 때였습니다. 5천 원짜리가 교회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 자매가 풀빵을 파는데 하루 종일 팔아도 8백 원도 못 버는데 그것이 떨어진 것입니다. 지금 같으면 50만 원짜리가 수표가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걸 가지고 가서 쌀을 사서 아이들과 먹을 생각을 하니까 눈이 번 한 것입니다. 그 새벽에 뚝방 길을 걸어서 나올 정도면 그 믿음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하겠습니까? 그런데 정신이 잠깐 딴 데로 간 것입니다. 올 때 까지는 제자리에 있었는데 율곡 할아버지를 본 순간에 정신이 딴 데로 간 것입니다. 그러면서 옆으로 계속 이동해서 방석으로 딱 깔고 앉은 것입니다. 깔고 앉으니까 아무도 보지 못하니까 완전범죄입니다. 새벽기도 끝나면 챙겨서 가려고 했는데 하필 찬송이 “우리 맘은 연약하여 범죄 하기 쉬우니”였습니다. 지금 나는 웃으면서 이야기 하지만 지금도 40년 전의 풍광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릿합니다. 그 집에 제가 심방도 갔었습니다. 무지하게 가난했고 뚝방에 판잣집을 얹어서 살았는데 딸내미가 참 예뻤습니다. 그 딸이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연극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제자리에 갖다 놓는 것이 필요합니다. 무엇이 갖다 놓아 주냐면 하나님의 지혜가 비칠 때 “아니야” 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이번에도 현직판사가 조폭 비슷한 사람에게 2억을 받았습니다. 1억 이상 받으면 10년 이상 징역입니다. 인생을 망친 것입니다. 어떻게 판사인데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것을 받으면 되지 않습니다. 변호사가 받았다고 하면 모르지만 판사는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신이 딴 데로 출장을 간 것입니다. 신자도 정신이 그렇게 수시로 출장을 가기 때문에 ‘누드툰테스’가 필요합니다. 정신을 제자리에 갖다 놓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오늘은 이 사람이 저 사람에게 가르쳐 주어 지혜롭게 하고, 내일은 저 사람이 이 사람을 가르쳐 주어 지혜롭게 하면서 서로 그 지혜를 교통하면서 살아갈 때 감사한 마음이 생깁니다.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이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 믿는 사람이 받는 최고의 유익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똑같이 때로는 넘어지고, 왜 욕심이 없겠습니까? 욕심이 생겨서 쓰러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자매처럼 찬송 한 절 부르면서 정신이 제 자리로 돌아옵니다. 통곡을 하면서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를 받아 주셔서 다시 하나님 앞에 살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감사한 마음이 생겨납니다. 왜냐하면 정신이 위치이동을 하게 되면 허욕이 생기고, 교만이 생기고, 감사할 줄을 모릅니다. 그런데 제자리로 돌아오면 감사한 마음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처지에 만족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C. 찬양으로 감사함
마지막 세 번째는 찬양으로 감사한다고 나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시인은 미리 잘 쓰여 진 찬송이고 여기 나오는 찬송은 즉흥적으로 부르는 것이고 신령한 노래는 뭔가 예언의 성격이 담긴 노래라고 해석을 하는데 그런지 아닌지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확실한 것 하나는 시, 찬송, 신령한 노래, 모든 것들은 신자들이 마음속에 우러나와서 하나님을 기뻐하며 노래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찬송 받으시는 것을 좋아하십니까? “오, 하나님, 주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은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좋아하실까? “주님은 선하시고 인자하신 분이십니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데 넌 나를 인정해 주는 구나.” 그래서 그러실까요? 이유가 무엇이냐면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신 것인데 그렇게 하나님을 찬양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이유는 그런 찬양 속에서 우리의 거룩한 감정이 승화됩니다. 그래서 미끄러짐을 방지해 줍니다. 십자가 찬송을 부르면서 강도질 하러 간 것 본 적 있습니까? 강도를 하다가 십자가 찬송이 나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끕니다. 왜냐하면 영업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양심의 불을 끄고 이것을 해야 하는 데 그것이 되겠습니까? 방해가 됩니다.
그래서 찬양의 유익은 감정을 승화시켜 줍니다. 마음이 착 가라앉아서 아침에 일어났는데 왠지 너무 슬픕니다. 그리고 하늘 아래 나 혼자인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때 가만히 있으면 계속 소용돌이를 타면서 밑으로 내려갑니다. “나는 정말 버림 받은 인간이구나. 사랑하는 사람들도 모두 나를 떠났구나. 나 같은 인간을 누가 쳐다보랴, 그래, 나는 형편없어. 그리고 나는 정말 외로운 인간이야.”하고 밑으로 내려갑니다. 그게 반복이 되고 반복이 되고 반복이 되어서 이 속에서 고착화 되면 우울증이 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절대 성령의 음성일 수 없는 것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처음에는 너무 비감한 마음이 들고 외롭습니다. 아무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때 마음을 다스리면서 조용히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찬양)
인생 살다가 죽음이 꿈같으나 정녕 내 꿈은 참되리라
눈물 흘림을 며칠 더 당하고 행할 길을 다가다가
예수공로 의지하여 항상 빛을 보도다
찬양을 하면 그 외로움이 승화가 되는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맞아, 내게는 마지막 순간까지 떠나지 않는 분이 주님밖에 없구나.” 그러면서 어린아이처럼 그분의 품으로 파고들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꽉 찰 때 그리움이 되고, 눈물이 되고,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그렇게 말합니다. “울고 싶은 사람에게 더 없이 좋은 환경은 외로움이랍니다.” 울려고 하는데 누가 와서 자꾸 밥 먹으러 가자고 놀러가자고 하면 얼마나 짜증이 나겠습니까? 혼자 있어야 하는데. 하나님 앞에 마음을 확 쏟아 놓는 것입니다. 타락하는 외로움의 감정과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외로움의 감정은 종이 한 장 차이도 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두 마음이 아니라 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어느 방향으로 인도되느냐는 종이 한 장 차이 밖에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마음 깊은 곳에서 부르는 하나님을 향한 찬양입니다. 그래서 저는 노래를 부르는 것 보다는 듣는 것을 좋아 합니다. 왜냐하면 노래를 부르면 괴로워서 들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너무 못 부르니까. 제가 중학교 때 파바로티의 노래를 들으면서 열등감에 사로잡혀서 ‘나는 왜 똑같은 인간으로 태어나서 이렇게 노래를 못 부르는가.’ 생각했습니다. 음악을 듣고 성경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기도를 합니다. 그러면 미친 듯이 흐르던 감정이들 잡히면서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찬양이 가지고 있는 놀라운 위력입니다.
우리 인간의 삶에서 만나는 많은 사태들은 대부분 하나의 시각에서 바라봅니다. 자기 행복이라는 시각에서 바라보니까 저 사람한테 슬픈 것은 나한테도 슬프고 다른 사람도 슬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또 다른 시각으로 삶의 사태를 보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불변하는 하나님의 선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제가 열린교회를 하고 제일 많이 강조한 것이 있습니다. 어떠한 시련 속에서도 두 가지만을 명심하라. 그러면 헤어 나올 수 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다. 어떤 처지에서도 주님은 좋으신 하나님입니다. 심지어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에도 그것이 미워서 당신의 분을 풀고자 당신의 자녀들에게 보복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참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것 입니다. 그래서 내가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이 나를 기억하시는 동안에는 내 인생에 일어난 어떤 나쁜 일도 나를 나쁜 곳으로 데려가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 자신이 선한 분이시기 때문에 그가 가진 의지는 선한 의지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불변하시도록 선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그 확신입니다. 그것을 선하게 보이는 환경 속에서만 그 선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볼 때 도저히 선해 보이지 않는, 속에 근심, 밖에 걱정, 저녁에 눈을 감으면 아침에 이 세상에서 다시 뜨고 싶지 않은, 그런 마음이 드는 그 환경에 에워싸여 있는 그 속에서 하나님은 정말 좋으신 하나님이시고, 당신의 약속을 스스로 파기하지 않는 분이시고 우리에게 계시한 당신의 그 성품의 빛을 따라서 당신의 그 성품을 시행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는 것,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헤어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교훈하실 때에도, 책망하실 때에도, 바르게 하실 때에도, 의로 교육하실 때에도, 낙심한 우리를 위로하고 힘주실 때에도 언제나 말씀으로 하십니다. “아닙니다. 가끔 환경으로도 하십니다.” 환경으로 하시는 이유는 환경을 움직이지 않고는 주님의 말씀을 들을 마음의 문이 열리지 않으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마음을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깡통으로 된 물건이 뚜껑이 열리지 않으면 툭툭 부딪쳐서 열어봅니다. 하나님이 그래서 하시는 것이지 우리가 환난을 만나고 기쁜 일을 만나다고해도 그 자체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속에서 받은 인상을 가지고 그 어려움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몰랐을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니까 하나님이 이전부터 외치듯이 말씀하시고 속삭이듯이 말씀하셨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 지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두 가지 확신을 꼭 붙들고 있으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헤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그 두려움이 변하여 기도가 되게 하시고 한숨이 변하여 찬송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감사할 수 없는 조건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하는 삶, 끊임없이 정신을 제 자리에 갖다놓고 마음을 바꾸면서 모든 사람들이 낙심할 수밖에 없는 그 자리에서 고양된 영혼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다른 사람들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은혜를 주십니다. 배를 타고 항해를 할 때 요동치는 폭풍을 만나 본 적이 있습니까? 죽을 것 같이 폭풍이 일어나고 배가 뒤집힐 것 같은데 그렇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말씀으로 나를 인도하실 것을 신뢰하면서 어린아이처럼 그분에게 소망을 두고 그분의 손을 꼭 붙들 때 하나님께서는 그 시련 속에서 이 세상사람 누구도 알 수 없는 비밀스러운 평강과 기쁨을 주시고, 주님의 아름다움과 선하심에 취하다 보면 어느 날 눈을 떠 보니까 간밤에 폭풍처럼 요동하던 바다의 물결이 잔잔해 지고, 악인은 사라지고 그리고 그 바다를 항해하는 것이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시련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평강에 의해 주장되는 감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신이 제 자리로 돌아오면 보이지 않던 감사의 조건들이 수없이 떠오릅니다. 우리의 삶은 결국 십자가 이후로 덤으로 사는 인생입니다. 오늘도 병원에 심방을 갔다 왔는데 중환자실에서 아파하는 많은 사람들을 보면 병실 밖에서 복도를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 모두 기적처럼 보입니다. 어떻게 저렇게 질병과 상관없이 살 수 있을까? 그리고 눈이 아프고 어디가 아파서 붕대를 감고 멀쩡히 걸어 다니는 사람들은 축복 받은 사람입니다. 정신이 어디에 가 있느냐에 따라서 슬퍼할 이유가 찬송의 제목이 되는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참된 소망은 예수님 밖에 없고 이 세상에 여러분을 끝까지 버리지 않는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영혼의 시선을 하나님께 두고 그분만을 응시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어떠한 처지에 있던지 주님의 날개 그늘아래 피하며 주님의 얼굴빛을 구하는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4. 말씀이 거하는 삶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 3:16上)
녹취자: 김명진
I. 본문해설
우리의 인생은 참 안정이 없습니다. 늘 불안하고 무엇엔가 쫒기는 것 같고 혼란스러운 시간들을 지낼 때가 많습니다. 이 세상 불신자들의 삶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의 삶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이 세상이 불완전하기 때문이고 그 불완전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이 온전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늘 흔들리고 어려움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교회 밖에서 또 교회 안에서 이런 많은 삶의 상황들을 겪으면서 믿음으로 잘 헤쳐 나가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평강이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굳센 정신으로 살아갈 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할 때도 많이 있는 것입니다. 사실이 이러하든 저러하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우리의 삶에 있어서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욱이 그 마음의 평강이 우리의 삶에 얼마나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것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쓰라리고 아픈 사람에게 지저귀는 새 소리는 우는 것처럼 들리지만 기쁜 일이 있고 신나는 일이 있는 사람에게는 노래하는 소리처럼 들립니다.
II. 마음의 평강의 중요성
이처럼 마음이라는 것은 우리 영혼의 경향성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실체는 아니고 하나의 기능이지만 그 마음이 결국은 마음 안에서 영적이고, 신령하고, 정신의 세계에 속하는 것과 영적이고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것들이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은 많은 광경들을 보고, 우리의 귀는 소리를 듣고, 우리의 입으로는 맛을 보고, 살갗으로는 감촉을 느끼고, 코로서는 냄새를 맡습니다. 그런 하나하나의 모든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오는 사물에 대한 정보들은 우리의 마음에 온갖 감정들을 불러일으킵니다.
고요한 마음에 어두움이 확 드리워지게 되면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캄캄함 속에서 마음은 불안해 지기 시작됩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피냄새가 나면 죽음을 생각하게 되고 귀에 으스스한 소리가 들리면 위험이 다가온 것 같은 커다란 두려움이 우리의 마음을 엄습하고 식은땀이 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마음 안에서 외부에서 들어오는 수많은 작용들이 만나고 우리의 마음속에서 출렁이는 정동들을 겪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단지 바깥에서만 일방적으로 어떤 정보를 공급받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데도 보이는 것보다도 더 생생하게 마음이 느낄 수 있고, 만져지지 않는데도 만지고 있는 것보다도 더 생생하게 우리의 가슴이 뛰게 할 수 있습니다.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정신의 능력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상상력이라고 하는 창조적인 기능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마음 안에서는 한편에서는 밖에서 들어오는 감각기관들을 통한 정보들이 출렁거리고 한편에서는 마음 안에서 스스로 생산해 낸 상상력에 의해서 출렁거립니다. 여기에 하나님은 당신의 신령한 은혜의 세계들을 마음에 접촉하게 하셔서 바깥에서는 어떤 육체적인 정보가 들어오지 않는데도 그 속에서 성령의 은혜를 감지며 우리의 마음은 또다시 출렁거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은 한시도 가만히 있는 적이 없고 끊임없이 출렁거리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바다가 미친 듯이 뛰놀아 절벽을 후려치며 어마어마한 거품을 내면서 물보라로 부서지고 어떤 때는 잔잔하게 느껴지지만 흔들리지 않는 때가 단 한순간도 없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은 그렇게 늘 출렁거리기 마련입니다. 바로 그렇게 출렁거리는 마음 안에서 우리는 생각하고, 느끼고, 무엇인가를 결정하면서 우리의 삶을 항해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에 대한 지식 없이는 인간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늘 출렁거리고 요동치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의 평정을 잃어버리기가 쉽습니다. 성공과 기쁨으로 출렁거리는 마음을 싫어하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너무 출렁거리면 교만해집니다. 슬프고, 가슴 아프고, 쓰라리게 마음이 출렁거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출렁거림 속에서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서 평강을 누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평강은 하나님과의 평화, 사람들과의 평화를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것이고, 우리의 표현으로 한다면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 하나님과의 평화, 그 속에서 누리게 되는 마음의 평정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잘못된 출렁거림에 의해서 출렁거리지 않고 평정한 상태가 되어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늘의 신령한 기쁨, 진리의 아름다움 때문에 출렁거리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평정의 마음을 깨뜨리지 않습니다. 문제가 되는 마음의 출렁거림은 대부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서 오는 출렁거림입니다. 이런 것을 얻었기 때문에 출렁거리고 잃어버렸기 때문에 출렁거리는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마음의 평강을 잃어버리게 되고 이렇게 마음의 평강을 잃어버리게 되면 마음의 평정의 상태가 깨져버리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없습니다. 호수가 바람한 점 없이 잔잔하면 그 위에 비친 호수 주위의 풍광이 물에 비친 것이 실물인지 혹은 물위에 있는 것이 실물인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아주 명료하게 비칩니다. 그러나 돌멩이 몇 개 던지고 파문을 일으키면 그 그림은 일그러지기 시작하고, 그리고 바람이라도 몹시 불어서 호수의 수면에 큰 물결이 치기 시작하면 단 한조각의 영상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왜 평정한 마음이 그렇게 중요한 가,
A. 명정한 지성: 믿음도 발생 가능함
첫째는 평정한 마음에서 명정한 지성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우리의 믿음도 지성의 작용에 속합니다. 그래서 믿음도 요동치듯 이 세상 것들에 대해서 출렁거리는 마음에서는 믿음이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생길 때는 놀라울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는 지성의 현상이 일어납니다. 놀라울 정도로 집중하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정욕과도 비슷합니다. 사람이 정욕에 빠지게 되면 그 한 가지 일에 대해서 비상하게 집중하게 되듯이 신앙도 그런 것입니다. 그 속에서 믿음이 생겨납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사리분별을 정확하게 하면서 원인과 결과를 추론하는 추론의 작용들도 명정한 지성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B. 조율된 감정: 합당하게끔 정동됨
두 번째는 조율된 감정이 가능해집니다. 감정이 나쁜 것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감정의 능력 안에서 하나님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의 아름다움도 보게 되고, 주님의 선하심에 대해서 감격할 수 있는 마음의 변화까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감정의 상태가 조율이 잘 안 되면 별로 예쁘지도 않은 것을 아주 마음이 끌려서 아름답게 생각을 하거나, 또는 반대로 너무 아름다운 것인데 그것을 무시해서 도저히 이 마음이 움직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가치와는 상관없이, 질서와는 상관이 없이 마음이 욕망으로 출렁거리면서 인간의 삶이 잘못된 결정들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C. 순종적 의지: 지성의 판단을 따름
그뿐만이 아닙니다. 명정한 마음의 중요성은 순종적인 의지의 측면에서도 너무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지성이 올바르게 판단을 하고, 판단한 것만큼 감정이 느끼고, 감정이 느낀 것만큼 의지가 그것을 결정하고 행할 수 있을 때에 그 모든 것들이 조화로운 하나님의 자녀, 나아가서는 인간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진리의 밝은 빛이 지성을 비추고 그래서 그 진리의 아름다움을 감정이 자각하고 기뻐하며 의지가 그 진리에 합당한 것을 행하기를 순종하면 그것이 가장 아름다운 삶입니다. 우리가 기독교 신앙에서 경건의 실천을 그렇게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세 가지의 기능이 조화롭게 우리의 마음속에 작용하는 것은 어제 했다고 오늘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늘 했다고 내일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경건한 습관은 그것이 형성되기가 매우 긴 시간이 걸리고 어렵지만 그것이 무너지는 것은 아주 쉽습니다. 왜냐하면 경건하게 살고 경건을 실천하는 것 자체가 우리의 거듭난 본성에 어울리지 거듭나기 전 옛 본성에 어울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은혜에서 멀어져서 죄의 지배를 받게 되고 옛 본성이 우리 안에서 우세하게 되면 매일 기도하고, 말씀에 은혜를 받고, 주님의 계명에 순종하며 사는 것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무거운, 숨이 콱콱 막히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급기야는 누가 이 계명을 이행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랴하는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지킴이 요구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 마음의 주도권에 대해서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주장한다고도 설명하고 한편으로는 우리가 마음의 주도권이 있다고도 말합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잠언 4장 24절 같은데서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도 네 마음을 지키라” 마음을 지키라는 그 무수한 명령을 우리에게 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피동적이라고만 내버려 두고 우리 자신을 방임해 버리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일생을 살면서 어떤 일을 주님께 맡긴다고 하는 것과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맡긴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때로는 잠잠히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하나님이 하시는 위대한 역사를 바라봐야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널 때 250만~300만 가까운 사람들이 홍해 앞에 길이 막혀 두려워 떨고 있었고 뒤에서는 바로가 보낸 병거들이 달음질쳐 오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상황에서 보탤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결국은 하나님이 홍해를 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마른땅을 밟듯이 바다 밑바닥을 밟아 건너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섭리 속에서 인간이 아무 것도 보탤 일 없이 하나님이 그 일을 하시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어떤 경우에도 항상 우리를 제외해 놓고 우리는 잠잠히 내가 하는 일을 보라고 말씀하시면서 완전히 피동적으로 어떤 물건의 자리를 옮겨 놓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의 마음을 물건 다루듯이 그렇게 비인격적으로 다루시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자신의 마음이 행사한 것에 대해서는 자신이 그 책임을 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 마음의 평강이 그렇게 중요한 이유는 그 마음의 평강이 없이는 우리가 믿는 대로 지혜롭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III. 말씀이 거하는 삶
A. 그리스도의 말씀
오늘 사도는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를 주장하게 하는 삶의 비결을 16절 상반 절에서 매우 중요한 한 가지를 총론적으로 말한 후에 16절 하반 절부터 17절까지 상세하게 구체적인 것을 언급해 가고 있습니다. 그 상반 절을 오늘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을 주장하게 하는 길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얼핏 보면 오해할 여지가 없어 보이는 쉬운 성경구절입니다. 그렇지만 좀 더 면밀한 관찰을 필요로 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제일 먼저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하라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를 주장하는 삶의 비결이다”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무엇일까요?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길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그 많은 예수님의 말씀을 뜻하는 것이겠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리스도의 말씀”이라는 구절이 단수로 나옵니다. ‘그리스도의 그 한 말씀’이라고 나옵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말씀, ‘로고스’라는 것은 예수님이 하신 수많은 설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요한복음 1장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혹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세계가 창조되었고 말씀 없이는 지은바 된 것이 없다”고 할 때의 ‘그 말씀’(the Word)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한데 ‘로고스’라고 되어있는 이 하나의 단어가 이 골로새서, 특히 사도바울 서신에서 우세합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후서의 용례를 찾아보면 하나는 일입니다. 단수로 ‘로고스’라고 나오면 하나님의 경륜을 가리킬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 예가 1장 25절, 4장 3절, 이런 곳에서 쓰였고 데살로니가 후서 3장 1절에서도 그런 의미로 사용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공과하고 있는 그리스도와 남은 고난을 할 때도 경륜이라는 말을 했는데 그것을 가리킵니다. 그때는 항상 단수로 사용이 됩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대표적인 로고스 단수의 용례는 예수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the Word of Christ'와 동격입니다. “그 말씀, 곧 그리스도, 혹은 그리스도 곧 그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석가들은 이것을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으로 해석하고 싶어 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할 때의 이것은 예수님이 하신 수많은 설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에서 했던 그 의미에서 제 2위격인 말씀, 곧 성자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뒤에 있는 말과 놀라운 조화를 이루게 됩니다. 즉, “그리스도, 곧 하나님이 말씀이, 혹은 그 말씀이신 그리스도가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시며”라고 해석이 되는 것입니다.
B. 풍성히 거하게 함
1. “거함”
그러면 풍성히 거한다는 것은 무슨 뜻 입니까? 여기에서 ‘거한다’라는 단어는 ‘안에’라는 ‘엔’이라는 단어와 ‘오이코’라는 ‘살다’라는 단어가 합쳐진 것입니다. ‘오이코노미아’, 가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안에 살다’ 혹은 ‘내주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말씀이신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방식에 대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잠깐 방문하셨다가 떠나가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한 가족이 같은 집에서 늘 생활하며 삶의 모든 것들을 나누듯이 그런 방식으로 예수님이 거하시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의 삶을 주장하는 비결이라고 사도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성령께서 신자 안에 내주하신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왜냐하면 2천년 전에 나이 삼십 대 되시는 예수님이 물리적으로 우리 속에 들어올 수는 없으니까 예수님이 우리 속에 계신다는 것은 영적으로 계시는 것이고 성령은 바로 그 그리스도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가장 우선 적인 사명은 당신이 제 3위격으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성령의 주된 역할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믿게 만들고, 예수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기억하고 회상하게 만들고, 예수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정신을 불어 넣는 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또 그렇게 하실 수 있는 실재적인, 정신적이고 영적인 힘을 주시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2. “너희안에”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바로 이렇게 그리스도가 너희 안에 거하시게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너희’는 누구일까요? 다르게 번역할 여지가 없습니다. ‘너희 안’입니다. ‘너희 안’은 무엇일까요? 이렇게 사람들이 모여 있는 무리들 속을 말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우리 각 사람 각 사람의 영혼 속을 이야기 하는 것일까요? 우리 사도바울은 여기에 대해서 명확하게 선을 긋지는 않습니다. 아마 둘 다를 내포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골로새서의 맥락을 놓고 보면 사도바울은 우주적인 기독론을 개진하고 있습니다. 여러 번 설교시간에 말했기 때문에 이것에 대해서 더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우주적인 기독론을 진술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너희 안에’라는 것은 ‘개개인의 영혼 안에’라는 것을 배척하고 있지는 않지만 우선적인 의미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영적인 연합을 이루어 예수의 몸이 되었을 때 그 하나인 몸 전체가 예수의 성령으로, 주의 영으로 가득 차있는 그 상태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 그것도 우리가 실제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는 개인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그런 성령의 충만함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도 우리가 그리스도의 교회에 접붙여져 영적인 한 몸을 이루게 되었고 성령이 바로 그렇게 그리스도와 교회에 부어져 우리는 거기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질문하고 싶어질 것입니다. “하나의 교회 인이 모두 충만하거나 모두 고갈 되거나 하겠네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함께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져 있으면서도 어떤 사람은 성령의 충만함을, 어떤 사람은 고갈을 경험하면서 그러면서 그리스도의 지체로 함께 살아갑니다. 이유는 무엇입니까? 만약, 그리스도의 교회 전체를 통해서 모든 사람이 똑같이 성령의 충만한 상태를 받는다고 하면 과연 사람들이 정말 전심으로 그렇게 자신의 삶의 성화를 위해서 노력하게 되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성화시키고 훈육시키는 하나님의 공의와도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함께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져 한 몸을 이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많이 순종하고 더 많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 언약의 원리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은 충만함을 누리고 배반하고 하나님께 거역하고 불순종하며 사는 사람들은 역시 여전히 그리스도의 생명에 잇대어 있으면서도 고갈된 삶을 살아감으로써 자신의 삶에 대해 반성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다시 하나님과의 생명적인 돌이키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감사와 회개, 후회와 눈물, 감격과 기쁨, 이런 것들이 함께 교차하면서 그리스도의 몸 전체가 성화의 길을 밟아가는 것입니다.
C. “풍성히 거하게”
풍성히 거한다는 것은 ‘플루시오스’라고 하는 단어인데, 'richly혹은 'abundantly'라는 뜻입니다. “풍성하게, 많이, 풍부하게, 부유하게, 넘치도록”이런 뜻입니다. 이것은 모든 신자 안에 그리스도는 내주해 계시지만 “풍성히”라는 말은 내주하는 방식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내주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 아무리 망가진 삶을 살아가고 있고 고갈된 사람 속에도 성령님은 계시고 성령이 내주하고 계시지만 어떤 방식으로 내주하고 계시느냐,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풍성하게 계셔서 그래서 마치 자기가 자기 인생을 사는 것 같지 않고 예수님이 오셔서 자기를 주장하셔서 예수님이 살고 싶은 삶을 사는 것 같은, 그래서 자신은 흐르는 물에 자신을 맡겨 마치 흘러가는 느낌, 사실은 아니지만 그런 느낌을 받을 때도 있는 것 같은,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은 거의 주님이 자신 안에 계시지 않은 것 같은, 극단적인 절망과 영혼의 빈곤을 경험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풍성하게 거하는 것과 정반대되는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이 ‘플루시오스’라는 단어는 디모데 전서 6장 같은 데서는 하나님이 당신의 영적인 은사를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넉넉하게 공급해 준다고 할 때 바로 이 ‘풍성히’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런가하면 디모데 전서 3장 6절에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는 방식을 묘사할 때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결국 이것은 우리가 평강이 주장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단지 욕망을 버리고 욕심을 버리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불교에서 추구하는 영성일지 모르지만 기독교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욕망도 없는 철저한 자기 비움의 상태, 그래서 스토아 학파들의 학자들이 추구했던 것처럼 돌멩이 같은 존재가 되어서 무엇에도 정동되지 않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 목표는 아닙니다. 오히려 기독교는 그보다 훨씬 더 적극적인,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그 인격으로 그리스도의 인격, 우리를 위해 자기를 버리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그 십자가 구속을 이루신 그분의 인격으로 우리 안에 아주 풍부하게 살아계셔서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 하는 그 영적인 충만함 가운데에 우리는 이 세상이나 혹은 자신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로 인해서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평강을 갖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은혜 충만하고 성령 충만할 때 상처를 이야기 하는 것 보았습니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그렇게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그게 인생에 무슨 문제가 될 수 있겠습니까? 잊어버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의 인생을 흔들어버릴 정도로 무게감을 가지고 다가올 때는 은혜에서 멀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가 충만할 때는 자신이 상처를 받은 기억도 하나님 앞에 오히려 상처보다도 큰 사랑이 밀려들어오는 하나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그렇게 상처받고 고통 받았던 날들로 인하여 “주님이 내게 베풀어 주신 은혜가 더 크도다.” 라고 고백을 하게 됩니다. 은혜가 떨어지게 되면 이것이 심각하게 작용을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저는 제일 듣기 싫은 말 중의 하나가 힐링입니다.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힐링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이야기 하는 힐링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을 너무 조잡하고 나약한 존재로 만듭니다. 걸어가는 것 자체가 수없는 상처를 받아서 그래서 결국은 망가질 수밖에 없는 존재이고, 그래서 그것을 누가 외부로부터 치유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묘사하는 것은, 그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 지 않을 수 없는 연약한 존재라고 말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성경은 인간을 아주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피조물로 묘사합니다. 그래서 그런 식으로 만약 우리가 힐링이 된다면 그런 개념 자체가 인간을 너무 우습게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백번 양보해서 사실이라고 합시다. 어차피 우리 인생은 살아가면서 그런 세상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수없이 삶의 사태들을 만나서 찢기고 고통 받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도 책을 읽다가 왔는데 일본 사람이 쓴 이야기입니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아버지와 살았다고 합니다. 아버지와 사이가 무척 좋았는가봅니다. 그래서 엄마한테 사랑을 못 받아도 괜찮다, 아버지와의 관계만 좋으면 인생에 문제가 없다고 글을 썼을 정도였습니다. 저는 그렇게 동의 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그렇게 써 있었습니다. 요리라는 것을 몰랐는데 요리하는 것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해서 아버지를 대접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학원에 다닐 때였는데, 하루는 카레를 한 번 해보고 싶었다고 합니다. 레토르트 식품이라고 봉지를 찢으면 카레가 다 되어 있는 것이 나와서 밥에 부으면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카레가루를 사서 후라이팬에 볶아서 정식으로 요리를 한 것입니다. 3시간에 걸쳐서 카레 요리를 해서 아버지 앞에 갔다가 놨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오셨을 때 ‘짠’ 하고 보여드린 것입니다. 자기가 생각해도 굉장히 맛있더랍니다. 아버지가 정말 좋아하시겠지 생각했는데 한 숟가락 뜨고 나서 굉장히 좋지 않은 표정을 하면서 “다음부터는 이런 것 하지 말아라.”라고 했답니다. 그러고 나서는 모든 요리에 자신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요리 십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에 우연히 아버지에게 너무 상처가 되어서 “아버지, 그때 제가 그렇게 애써서 카레를 해드렸는데 왜 그러셨어요?”, “아니야. 너무 맛있었다. 내가 먹어본 카레 중에서 그렇게 맛있는 카레가 없었단다.”, “그런데 왜 그러셨어요?”, “네가 공부하는 것도 너무 힘든데 그런데 힘 빼지 말라고 내가 너를 생각해서 그런 것이란다.” 똑같은 이야기를 아버지는 아들을 너무 사랑하는 마음에서 했고, 아들은 그것에 의해 자존감이 짓밟히면서 다시는 요리할 엄두를 내지 못 낼 정도로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것이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무슨 뜻이냐면 아버지에게 커다란 상처를 받아서 요리를 못하게 되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그렇게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 “정말 맛있지만, 그것은 괄호 속에 들어있고 네 시간이 많이 낭비되니까 내 마음이 편치 않구나. 아들아, 다음부터는 나한테 이렇게까지 네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이야기를 했는데 그게 어마어마한 상처가 된 것입니다. 사실이 아닌 것으로 상처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들이 스스로 생각하는 수많은 우리를 얽어매는 이 많은 것들이라는 것이 사실은 얼마나 팩트일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관계에서 심각한 오해가 있어서 다투다가 이야기 하다 보면 그것이 오해일 때도 있습니다. 그것을 자기가 끌어안고 일평생을 살면서 어마어마한 상처라고 생각하고 살아가고 자신은 그런 것에 의해서 짓밟힐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고 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인간관과는 다른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보다는 훨씬 나은 품질의 인간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사실도 아닌 수많은 일들로 인해서 우리의 마음이 평강이 흔들리면서 고통을 받습니다. 그러면서 낭비되는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십년 전의 일입니다. 어느 신학교에 집회를 갔는데 그 중에 한 교수님, 저보다 약간 후배인데, 동료 입니다. 저를 매우 좋지 않게 생각하는 눈빛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즉시, ‘아, 내가 오늘 교수들을 강력하게 비판하는 내용이 내 설교 속에 들어 있었는데 거기에서 마음이 상해서 나를 쳐다보지도 않는구나.’ 그리고 몇 년이 흘렀는데 수시로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그 친구 나에 대해서 매우 안 좋게 생각하고 있었지. 나도 너 별로다.’그렇게 생각하면서 지냈습니다. 우연히 5〜6년의 세월이 지나서 만났는데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있지도 않은 사실 때문에. 그 사람은 그날 내 설교에는 은혜를 받았는데 장이 좋지 않아서 인상을 썼을 수도 있고, 나 아닌 다른 일로 마음이 상해서 인상이 구겨서 내가 한 말에 대꾸도 하지 않았을 수도 있는데, ‘내가 왜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리스도 안의 한 형제를, 적극적으로 그 사람을 저주한 것은 아니지만 왜 계속해서 좋지 않게 생각하면서 5〜6년의 세월을 보냈을까?’ 차라리 당당하게 편지를 써서 “당신 나에 대해서 기분 나쁜 것이 있냐?” 차라리 그렇게 하고 “나 그런 것 아니다.” ‘그렇게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생각했습니다. ‘나에 대해서 나쁘게 생각한다는 나의 판단, 그것이 과연 얼마나 사실일까? 혹은 내가 과거의 어떤 기억 때문에 내 마음의 평강을 수시로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고 하는 이 많은 것들이 얼마나 정확한 사실의 기초 위에 놓여 있는가. 어쩌면 나는 나 스스로 어떤 일을 하고 싶지 않아서 핑계를 대면서 그러면서 내 마음의 평강이 흐트러진 그 상태 그 자체를 나 자신은 즐기는 것이 아닐까?’ 이런 수많은 생각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살아오는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정말 평화롭다. 정말 오늘만 같아라.” 그렇게 평화로운 날들이 우리의 인생에서 얼마나 될까요? 앞으로는 있을까요? 우리를 어디에 갔다가 놓으면 그런 마음의 상태가 될까요? 그러나 불행이도 이 세상은 환경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그런 상태로 데려다 줄 수 있는 곳은 없습니다. 그러면 성경 속에 나오는 그런 놀라운 평강을 누렸던 사람들의 삶, 죽음을 눈앞에 두었던 베드로가 감옥 속에서 단잠을 고이 잘 수 있었던 그 평화, 그리고 사도바울이 옥문이 열려 도망친 줄 알고 두려워 떨고 있던 간수에게 오히려 위로의 말을 해줄 수 있었던 그런 놀라운 평강은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진리를 우리들이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의 묘미입니다.
사도는 오늘 그리스도의 평강이 주장하는 삶의 중요한 비결이 그리스도의 인격이,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분을 친밀하게 느끼면 우리의 삶에 고난이 오거나 우리가 원하지 않는 고통이 올 때에 그분이 우리를 위해 당하신 고난을 생각하며 극복하고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자기를 죽이는 병사들의 사죄를 위해 아버지 하나님께 탄원하셨던 그 모습을 보면서 원수를 용서하고 그렇게 흔들림이 없이 살아가는 것, 거기에 그리스도의 평강이 주장하는 삶의 비결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IV. 적용과 결론
인생의 길이는 시간의 길이가 아닙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80, 90, 100세의 인생을 살았더라도 그 대부분의 인생의 시간을 망설이고, 불안해하고, 요동치는 마음으로 허비하며 살았다면 그리스도를 충만히 모시고 40년의 인생을 산 사람보다도 오히려 더 짧은 인생을 산 것이 아닐까요? 너무나 많은 시간을 정욕, 근심, 번민, 불안, 의심, 회의, 이런 것들로 수없는 시간을 낭비하고 그 속에서 우리의 뼈를 썩이며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매일 매일의 삶이 허덕거리며 짊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무거운 짐들처럼만 느껴지는 이것이 정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허락받은 기쁨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모두 오늘 말씀에 의하면 한 가지 요인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가 우리의 마음에서 떠나버리자 우리의 마음은 평강을 잃어버렸고, 그러면서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의 마음의 중심에 계시지 않으니까 이 세상이 나 자신이 중심이 되어 끊임없이 출렁거리는 인생을 살면서 마음이 요동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이 그렇게 그리스도를 묵상하기를 권했고 심지어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를 깊이 묵상하는 것보다 다른 것을 더 많이 생각하는 것이 신성모독이라고까지 존 오웬 목사님이 말했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래서 경건의 비결은 매순간 그리스도의 사역과 인격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이 닥치고 고통스러울 때
(찬양)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그렇게 고백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기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그 위대한 승리를 기념하면서, 이 기쁨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그렇게 자신을 그리스도에 대한 묵상으로 가득 채우며 그분과 함께 동행 하는 사람들에게는 평강이 있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주님 앞에 온전히 맡기고 생사, 형통과 형통하지 않은 것, 비난과 칭찬, 존경과 모욕, 물질적인 넉넉함과 가난함, 사람들의 평판의 높음과 낮음, 이런 것들에 얽매이지 않고, 그것과는 상관없이 자기의 마음속에서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사람들만이 보일 수 있는 독특한 평강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그 사람은 살아있는 그 자체 속에 존재의 울림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험한 일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당신이 우리 안에 함께 계셔서 당신 때문에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함으로 당신 때문에 우리가 온전해지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존재의 울림이 있는 삶이 가능해지도록 그리스도의 평강 안에서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