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 피하라
(2014년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설교기간|2015년 1월 12일-16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 2월 4일
목 차
1. 주께 피할 때(시 31:1) 2015.1.12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1
2. 주를 의지함(시 31:14) 2015.1.13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5
3. 나의 앞 날 주의 손에(시 31:15-16) 2015.1.14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8
4. 예비하신 은혜(시 31:19) 2015.1.15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11
5. 숨기시는 하나님(시 31:20) 2015.1.16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14
2015.01.12. 새해말씀사경회 첫째날 새벽
주께 피할 때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로 영원히 부끄럽게 마시고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시 31:1)
녹취자: 김세나
다윗의 시라고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언제 이 시기를 기록하였는지 시점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악한 사람들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는 그 속에서 시인이 하나님께로 피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후반부의 내용으로 볼 때 아마도 이 시는 목동 시절에서의 시라기 보다는 임금이 된 이후에 많은 사건을 겪으면서 쓴 시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시편 31편 첫 절에서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로 영원히 부끄럽게 마시고 주의 의로 나를 건지조서”라고 고백합니다. 시인이 악인들로부터 고통을 받는 상황에서 그가 어떠한 식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총론적인 결심을 이야기 하고, 2절부터 이제 자신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고백하며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미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록해 나가면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이유로 삼고 있습니다.
우선 제일 먼저 살펴 볼 것은 이것입니다. 시인이 “내가 주께로 피하오니”라고 말합니다. 고통의 문제에 있어서 우리들이 그 이해가 단선적이어서는 안 되는 이유를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정의를 세우는 일 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떻게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야 할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지혜를 담고 있습니다. 시인은 제일 먼저 자신이 “주께 피한다.”고 고백합니다. 시인은 여기에서뿐만 아니라 여러 곳에서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피할 바위이시요 산성이시요”라는 노래를 많이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고난을 당하는 많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잠시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 버리고 교만하게 살 때에는 주님을 의지하지 않는 마음을 가질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종종 고통과 시련을 통해서 당신의 자녀들을 당신의 품으로 피하도록 만드셔서 거기에서 망가진 당신의 자녀들을 고치시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수립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1절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교훈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시련과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께 피하도록 그렇게 지정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간에 우리 주님께 피하는 사람들이 되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두 번째는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옵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하나님께 당신께 피하는 자를 선대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정말 도움이 필요할 때 돕는 친구가 친구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당신밖에 의지할 데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당신의 품으로 피할 때 그가 이전에 어떻게 살았든지 그가 하나님을 어떻게 멀리 떠나서 불순종 하였든지, 또한 그가 처한 어려움과 상황이 아무리 심각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당신에게 피하는 사람들을 수치스럽게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수치라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많은 원수들은 이 시인을 향하여 수시로 저주하였습니다. “쟤는 여호와께 도움을 받지 못할걸?” “저 사람은 아무리 저렇게 해도 하나님께 불쌍히 여기지 못할 거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악인의 기대를 따라 전개되는 것이 곧 수치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시인은 하나님이 그렇게 당신께 피하는 사람들을 선대해 주셔서 그로 하여금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게 해 주실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일생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거짓과 가식이 아니었다면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함으로 하나님께로 나아가서 주님이 우리를 거절하시거나 수치스럽게 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진실한 회개를 조롱하시거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우리의 심령의 결단을 하나님이 책망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경험은 우리가 진실한 마음으로 돌아가서 하나님 앞에 잘 살겠다고 결심하면 그 속에서 이미 하나님의 칭찬과 격려가 느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품으로 피하는 당신의 자녀들을 수치스럽게 하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언제나 주님은 당신께 피하는 모든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당신의 품에서 선대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이러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모두 우리의 가식과 겉모습을 보여 주어도 주님께는 우리의 중심을 쏟아놓고 하나님 앞에 솔직해질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의 한계, 우리가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당신의 자녀로서 어떠한 심성을 가지고 이 세상에 창조되었는지 모두 아시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지경까지 주님은 우리를 이해하시고 주님은 당신께 피하는 당신의 자녀들을 부끄럽게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내가 하나님께 피하면 하나님은 나를 수치스럽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마음과 믿음을 굳게 가지고 주님께 피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는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마르틴 루터에게 종교개혁의 감화를 끼쳐준 유명한 구절입니다. 이 구절의 의미를 몰랐을 때 마르틴 루터는 이 구절을 읽고 하나님 앞에 탄식하며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주님은 어찌하여 복음 속에 당신의 칼을 두셨습니까?” 로마서 3장을 읽으면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루터는 일평생 로마 가톨릭 아래에서 교육을 받고 신앙생활을 해 오면서 그 의가 죄인들을 향하여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가리킨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주어졌는데 결국 그 복음이 나타내는 것이 죄인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정의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복음에까지 칼을 두셨나이다.”라고 하며 탄식하였습니다. 그리고 맨 처음에는 시편 31편을 읽으며 절망하였지만, 그러나 이 속에서 주의 공의가 무엇인지 발견하면서 종교개혁에 이르는 반전을 경험하게 됩니다.
저는 이 번역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쓰여진 히브리 단어가 ‘쩨데크’혹은 ‘쩨다카’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의’입니다. ‘공의’라고 번역을 하려면 ‘미쉬파트’라는 히브리어가 단어가 나와야 합니다. ‘미쉬파트’는 ‘샤파트’라는 ‘심판하다’라는 말의 명사입니다. 그래서 ‘공의’가 되고, 분사가 되면 ‘쇼패트’가 되어서 ‘사사’라는 말로 번역됩니다. 이것은 ‘주의 공의’라기보다는 “주님의 의로써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번역되어야 합니다. 마르틴 루터가 여기에서 발견한 것은 여기에서 말하는 ‘째데크’는 하나님의 심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 있는 의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시편 31편에 보면 시인이 두 가지를 하나님 앞에 호소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이러한 시련과 환란을 당하면서 자기를 성찰해 보니까 자신에게 허물과 죄가 많다는 것을 고하면서 용서를 비는 한편, 그러나 악인들이 자신에게 행하는 그 행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악하고 나빴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을 심판하고 자기 자신을 건져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시인에게도 잘못한 점이 있고 죄가 있는데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시인의 편을 들고 악한 자들을 멸해 주셔야 하는데, 그 근거를 주의 의에서 찾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인가 하면, 하나님께서는 완전하게 의로우신 분이시고 나는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죄를 지은 사람인데 나의 의로 하나님께서 건져 주신다면 자격이 모자랍니다. 그런데 주님의 의로 자기를 건져주시기에는 충분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시인이 불의할지라도 이 시인에게 당신의 의로움을 덧입혀서 그를 의로운 자로 만드셔서 구원해 주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쉽게 이야기 하면 은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설명하겠습니다. 시인이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잘못하였기 때문에 시련과 고통을 당하게 된 측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인의 의만을 가지고 생각하자면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악인을 심판하고 이 시인을 두둔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시인이 “주님의 의로 나를 구원해 주옵소서.”라고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시인이 비록 하나님 앞에 받아들일만한 충분한 의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당신과 언약을 맺은 시인을 끝까지 보호하고 구하고 건지신다면 하나님의 의가 됩니다. 하나님 자신이 이 시인은 그렇게 하나님이 대우해 주실 정도로 충분히 신실하거나 완전하지 못하다 할지라도 하나님 자신이 변함없고 신실하시기 때문에 그것을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관계에서 입증하셔야 하는데 그것을 입증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그 언약적 의로우심에 호소하면서 바로 나의 의가 아니라 그 주님의 의로 자기를 구원해 달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발견하면서 마르틴 루터가 엄청난 감화를 받습니다. 그것이 바로 비텐베르그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의 경험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고난을 당하거나 시련을 당할 때 수없는 원수들에게 에워 쌓입니다. 그러면서 수없는 자책감들이 밀려오게 됩니다. “너는 하나님께 도움을 받지 못한다. 네가 그렇게 잘못하고도 어려움을 만났다고 주님께 호소할 수 있느냐? 너는 결코 주님의 긍휼을 입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면서 수많은 양심의 송사와 율법의 정죄들이 들어옵니다. 그 때 이 시인의 기도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의 의가 아니라 주님의 의로 나를 구원해 주옵소서.”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시인이 아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천 년 전에도 자신의 의가 아니라 주님의 의로 언약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그 정당하심을 발견하였다면 우리는 이 사람들과는 비교될 수 없는 구원의 계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위한 한 의를 이루셨고 우리는 그 의 때문에 구원을 받는 것인데 그 의는 율법에서 난, 율법을 지킴으로 성취하게 된 의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자기의 아들을 대속제물로 주셔서 당신 자신이 스스로 율법을 성취함으로 우리를 위해 획득하신 의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의지한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렇게 주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시고 우리에게 부여하시고 전가하신 그 의를 의지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나님 앞에 옳다고 인정함을 받은 사람이 복이 있고 바로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들과 더불어 교통하시며 새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 번째는 “주님의 의를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자신을 고통과 시련 속에서 이렇게 대우해주시는 하나님을 부르고 있는 호칭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여”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바로 시편 31편 1절에 담긴 마지막 세 번째 부분을 입증하고 있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여호와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계시된 이름이 아니고 오직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시된 이름이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라고 부를 때 이스라엘만이 그렇게 부를 수 있는 특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바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있는 은혜의 언약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의 품으로 피할 수 있도록 당신 자신을 은신처로 제공하시고, 믿음을 가지고 당신의 품으로 피하는 모든 사람들을 선대하시며 불의한 죄인들이 당신의 품에 피할 때 그들의 불의가 아니라 당신의 의로써 그들을 영접하심으로써 구원하고 건져주시는 그 하나님이시라는 보증을 이 ‘여호와’라는 호칭이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이 언약의 하나님으로서 이 시인에 의해서 ‘여호와’라고 불리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으셨던 것처럼 오늘 또한 우리가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유일하고 충분한 중보자가 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해서 주님 앞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어 주시고 그들을 수치스럽게 대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은 불의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그 의를 전가시켜 우리를 영접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과 의를 깊이 의지함으로써 우리 하나님을 믿고 따라갈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이 시인처럼 고통과 시련에 처한 여러분이 당신의 품에 피하도록 당신께 돌아오도록 오늘도 요청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이 주님의 품에서 시련과 고통의 때를 이기고 극복할 수 있는 지혜와 사랑과 힘을 공급받는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2015.01.13. 새해말씀사경회 둘째날 새벽
주를 의지함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시 31:14)
녹취자: 김세나
언제 쓴 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시인이 큰 고통을 당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대적들에 의해서 에워 쌓인 상태였습니다. 판단하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그러나 극단적인 시인이 고통을 당하고, 특히 20절 이하에 내려가 보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면서 시인이 고통 받는 것을 보면서 저는 이 시가 목동 시절에 지어진 시라기 보다는 왕이 된 후에 특히 압살롬의 반역이 있고 난 바로 그 때에 쓰여진 시가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2절부터 13절까지를 두루 살펴보면 이 시인은 사중적인 어려움에 처해 있었습니다. 우선 4절에 보면 시인은 악인들의 음모에 에워 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나를 위해 비밀스럽게 친 그물에서 빼내소서” 그물은 원래 새를 잡을 때나 고기를 잡을 때 사용하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을 생포할 때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은 시인이 그 당시에 당하였던 음모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단순하고 정직하게 살기 때문에 그러한 음모를 잘 모릅니다. 그러나 어둠의 자식들은 자신들이 살아온 삶이 그러한 음모의 연속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음모에 아주 뛰어납니다. 이 시인은 그러한 음모로 인하여 깊이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시인이 꿈꾸지도 못할 때 압살롬의 반역은 일어났고 그것은 이미 짧게는 3년, 길게는 그 이상의 세월을 두고 천천히 이루어진 음모의 결과였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9절에 보면 이 시인은 육체뿐만 아니라 심적으로, 심적으로 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 엄청난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근심 때문에 쇠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이 시인은 내적으로 큰 고통을 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근심과 염려, 두려움과 걱정 때문에 그의 심령은 쇠약해져만 갔고 그래서 자신의 정신과 영혼을 강하게 해 줄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세 번째로 그 시련과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 외모까지도 변하여서 사랑하던 사람들이 알아 볼 수 없는 외로운 처지가 되었습니다. “내가 모든 대적들 때문에 욕을 당하고 이웃에게는 심하게 당하니” 하였습니다. 아마도 어쩌면 반역을 겪고 왕궁을 떠날 때 시므이 같은 사람이 흙을 던지며 자신을 저주하였던 그러한 광경을 염두에 두고 이 시를 썼는지 모릅니다. 그의 외모는 친구도 깜짝 놀라도록 몰라보게 수척하고 쇠약해진 모습이었고 길에서 보는 사람들이 다윗과 함께 있으면 욕을 당할까봐 피하는 그러한 외로운 신세가 되었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네 번째로 13절에 보면 악인들을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시인의 생명까지 빼앗겠다고 덤벼들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시인이 죽임을 당해 비참하게 죽는 것이 악인들의 마지막 소원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속에서 다윗은 일평생 전쟁으로 잔뼈가 굵어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쩌면 이 악인들보다도 더 악하게 악에 대응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일들을 포기하고 하나님 앞에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능력이 없어서 시인이 그 일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이 시인의 관심사가 악인과 그렇게 싸워서 비열한 방법으로 이기는 것이 시인의 관심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무엇 때문이었겠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기에게 일어난 이 모든 일들이 악인들을 통해서 일어난 것이고 한 때는 자신과 생명적인 연합을 이루며 나라를 세우고 함께 살았던 한 때는 사랑하던 가족과 같은 부하와 동료들에 의해 일어난 반역이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이 시인을 이렇게 고통스럽게 한 장본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인은 그 사람들을 제거하고 그들이 자신에게 악을 행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악을 악으로 갚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이 모든 시련과 고통, 심지어는 자신의 생명까지 노리는 장본인이었습니다만, 그러나 시인은 더 큰 하나님의 섭리를 보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에 의해서 사용되고 있는 그러한 소재들일 뿐이고, 궁극적으로는 그의 인생에 일어난 가슴 아프고 쓰라린 배신과 끔찍한 환란을 통해서 해 주시고 싶은 말씀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왕이 되어 번영을 이루며 근심과 걱정이 없는 시절이 지나면서 그의 마음은 부패하기 시작하였고, 이 뼈저린 시련의 고통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배신은 하나님이 이 사건들을 사용하여 시인을 하나님 앞에 다시 세우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시인은 음모에 시달리게 되었고 심적으로 견디기 힘든 고통에 직면하게 되었고, 심지어는 육체적인 외모의 변화를 가져와서 그 수척한 모습을 보고 다가와서 사람들이 얼굴을 몰라볼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바닥까지 내려갔는데도 악인들은 만족하지 않았고 수시로 이 시인의 생명을 노리며 완전히 이 사람의 존재를 세상에서 지워 버리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강하였고 시인은 약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악한 사람들의 이 시인을 없애려는 다양한 시도 앞에서 악을 악으로 갚는 대신 하나님이 이 모든 고통을 주시는 의미를 생각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이 시인을 당신께로 돌아오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말합니다. “그러하여도 나는 주님을 의지합니다.”라고 말입니다. 예전에는 의지하지 않았다는 이야기 입니까? 그렇습니다. 어찌 주님을 일체 의지하지 않던 때가 있었습니까만 인간의 부패한 본성은 성공할 때 끊임없이 독립하고자 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뜻을 좇아서 하나님께 순종하기보다 자기의 생각에 순종하며 살고 싶어 하는 존재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시인을 긍휼히 여기셔서 이 사람을 통해서 더 큰 계시를 이 땅에 남기시고 또 하나 더 큰 신앙의 모본을 남기시기 위해서 시인을 사랑하셨지만 시인의 인생 전체를 흔드시는 고통스러운 사건에 직면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결국 이 시인이 왕도 아니고, 전쟁터에서 승승장구하던 장군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닌 심지어는 하늘의 영광과 온 땅에 가득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노래하던 위대한 시인, 영성가도 아닌 그저 쫓기고 고통 받는 한 마리의 어린 양이 되어서 우리 주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시인이 하나님 앞에 보여준 당시의 상황이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하는 것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은 왜 그렇게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의지하며 살게 하시기 위해서 시련도 때로는 고난도 주시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는 고난을 당하고 시련을 당할 때 주님께 피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언제나 당신께 피하는 사람들을 선대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시인이 주님을 의지할 수 있었던 것은 어떠한 믿음 때문이었는데 그 믿음을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이 시인의 고백은 시편 전편에 묻어있는 아주 보편적인 고백입니다. 그러나 형태는 보편적이어도 그 속에 담겨진 시인의 심정은 결코 그렇게 일반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내 하나님이시다.” 하였습니다. 이 ‘주’는 결국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인생의 주권자가 되신다는 고백입니다. 그 주님이 능력이 많으시고 온 땅과 만물 위에 탁월한 권능을 가지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이 시인이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시인이 보여준 믿음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우리를 미워하는 대적들을 만나고 사람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인생의 앞길을 가로막는 시련과 시험을 만나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악인들의 숫자나 우리 앞에 놓여있는 이러한 시련의 높이나 크기 같은 것들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는 큰일도 큰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가 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바가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바와 일치를 이루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링컨이 남북 전쟁을 하던 시절에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우리의 적군이 얼마나 많은 수인가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가 입니다.” 저도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을 기뻐하시는가? 우리가 정말 우리 주님의 편에 서 있는가? 이것이 문제이지 다른 것이 문제는 아닙니다. 이 시인은 이렇게 쓰라린 시련 속에서 악인들에게 에워싸여 고통을 당하면서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토대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시인은 왕이 된 후에도 수시로 하나님께 엎드려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나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라고 기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의존으로 돌아오도록 하나님이 시인을 다시 불러 주셨고 그래서 이 시인은 악인들의 비난과 악인들의 그 욕설과 그 모든 비방 속에서도 다시 하나님의 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인은 그러한 주님의 주권 아래 자신의 인생의 모든 앞날을 맡기고 동행하기로 결정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이 시인처럼 주님을 의지하며 주님과 동행함으로 이 모든 시련들을 잘 이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2015.01.14. 새해말씀사경회 셋째날 새벽
나의 앞날 주의 손에
“나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들과 나를 핍박하는 자들의 손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추시고 주의 사랑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소서”(시 31:15-16)
녹취자: 김세나
시인이 악인에게 에워 쌓여 고통을 받을 때 주님을 의지하겠다고 어제 말하였습니다. 오늘 바로 그 뒤에 보니까 주님에 대한 의존이 당장 눈앞에 있는 현재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고백하기를 “나의 앞날이 주님의 손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악인에게 고통을 받는 가운데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을 배웠고, 하나님을 의존하는 신앙의 마음은 그의 남은 모든 일생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고 싶은 믿음을 만들었습니다.
결국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수많은 삶의 사태들을 겪기 마련이고 그렇게 수많은 삶의 사태들을 겪으면서 살아가는 그 사람의 삶 속에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는 것도 있지만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이 눈앞에 사태로 벌어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이러한 부분들을 우리들이 충분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을 생각하기를 하나님을 믿고 믿음으로 살면 삶의 모든 것들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삶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러한지는 우리가 천국에 가봐야 알겠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모든 일들을 우리 마음과 우리의 뜻대로 되게끔 그러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의 진정한 복락은 이 세상의 사물들의 질서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의 진정한 복락이 하나님과의 관계, 그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삶의 사태들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조차도, 그 되지 않는 상황을 사용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서 살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우리의 일생에서 일어나는 많은 사건들을 보면 평탄하고 우리 마음먹은 대로 모든 일이 될 때 주님을 깊이 만나고 하나님 앞에 우리의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 지혜를 갖기 보다는 오히려 나의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고 때로는 시련을 당하고, 악한 사람들에게 고통을 받으면서 오히려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야 할 인간의 본분, 그리고 시련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야 하는가 훨씬 더 많이 배우게 됩니다. 결국 신앙의 요체는 우리가 어떠한 삶의 사태에 있든지 간에 눈에 보이는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사태 때문에 안정감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삶의 다양한 사태들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평강, 사랑, 은혜, 이러한 것들을 가지고 일생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의 요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앞날을 주님의 손에 부탁하면서도 원수들과 핍박하는 자들의 손에서 자기를 건져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습니다. 단순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만을 위해서 시인이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모든 일의 정리, 삶의 사태가 전개 될 때마다 이 시인은 하나님이 하늘에서 원하시는 질서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렇게 시인이 인생의 위기 속에서 자신의 앞날은 주님의 손에 있고, 자기를 에워싸고 있는 원수들과 핍박하는 자들의 손에서 구해달라고 주님 앞에 호소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질서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기도는 일생을 살면서 평상시에 이 시인이 하나님을 굳게 의지하고 주님 앞에서 살아가는 그러한 어떠한 절실한 신앙, 하나님을 바라고 의지하는 믿음, 이것이 없이는 이러한 기도가 어떤 커다란 힘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인은 하나님 앞에 이렇게 고백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추시고”
하나님이 당신이 사랑하는 백성에게 얼굴을 대면하실 때에는 은총을 주시기 위해서 대면하시는 것이고, 악인에게 그 얼굴을 대면하실 때에는 그를 징벌하기 위해서 대면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대면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사람들에게는 은총이요 복이지만, 하나님을 거슬러 사는 사람들에게는 재앙이요 커다란 심판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인이 일생동안 살아오는 동안에 하나님이 이렇게 수시로 시인을 인정하여 위기와 고통의 때마다 건져 주셨기 때문에 이 시인은 오늘도 그러한 신앙의 경험을 의존해서 주님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춰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습니다. 또한 시편 다른 곳에서는 주의 얼굴빛을 비추어 달라고 기도합니다. 결국 이것은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거룩하심과 영광스러운 임재를 자기의 백성들에게 나타내실 때 항상 진리의 빛으로 나타내 보여 주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 가져야 할 또렷한 생각은 언제나 어떠한 신비하고 초월적인 경험이라 할지라도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가 우리에게 계시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잊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어떠한 신비한 경험과 초월적인 은혜의 체험 속에서도 언제나 지성은 명료하게 빛나고 이성은 추론을 그치지 않고, 오성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소유합니다. 이 속에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아는 명료한 인식 속에서 불타는 사랑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시인은 그렇게 핍박받고 고통 받는 시련의 때에 이 세상에 대한 많은 즐거움들을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처처에 악인이 횡횡하고 원수들과 핍박하는 자들이 자신을 에워쌌을 때 이 시인의 마음속에서는 정말 하나님을 의지하고 주님 앞에서 살고자하는 소원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추시고”라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시인은 이 시련과 환란을 통해서 자신의 정체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형통하고 모든 것이 자기 마음대로 될 때에는 자신이 바로 이스라엘의 주권자처럼 느껴지고 임금처럼 느껴졌지만 시련을 당하고 보니 자신은 하나님의 종일뿐이라고 다시 한 번 깨닫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와 같은 함미한 사람을 그렇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신 것은 바로 이스라엘에 이루실 하나님의 위대한 뜻들을 성취하라고 당신을 섬기는 종으로 불러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시련 속에서, 핍박 속에서 배우는 겸손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덕목은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겸비하게 낮아진 마음에 하나님은 말씀을 보내시고 사람들을 향해 겸비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통한 은혜를 입게 하십니다. 마치 요셉이나 느헤미야 같은 사람이 그러하였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로 가득 차 있고, 결국 신앙의 눈으로 봐야지만 그 모든 신비들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으며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이 세상에서 전개되는 우리의 삶의 성공과 실패에 일희일비 하는 삶이 된다면 그것은 정말 하나님의 자녀들이 살아야 할 삶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러한 삶을 영위해 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고난 받는 자기의 자녀들에게 얼굴빛을 비춰 주시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이 시인처럼 고난을 받고 있다면 이렇게 주님을 깊이 의존해서 그 시련 속에서 주님을 깊이 만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마지막은 시인은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해 주옵소서”라고 노래합니다. 형통하고 모든 것이 자기의 뜻대로 잘 되어서 교만해졌을 때에는 주님의 사랑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주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의 마음 안에서 불타오르는 것입니다. 시인은 친구도 얼굴을 돌렸고 자신에게 도움을 주던 사람도 떠났고,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던 사람들이 발뒤꿈치를 들고 원수로 변하였습니다. 사면을 돌아보아도 의지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을 주님의 손에 맡겼습니다. 운명에 맡긴다는 의미가 아니라 선하신 하나님, 가장 좋은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인생을 맡겼습니다. 이 이야기는 어린아이처럼 우리 주님의 손을 붙들고 주님의 손을 의지하며 살겠다고 하는 시인의 결심과 마음을 보여줍니다. 그 원수들과 자기를 핍박하는 자들의 손에서 자기를 건져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며 이 인생의 가장 곤고한 시련의 시기를 지났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 의지할 수 있는 분은 우리 주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품으로 피하고 시련 때에 당신의 얼굴의 빛을 구하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렇게 당신의 자비를 우리에게 보여주셔서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주님의 종으로 살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우십니다. 좋으신 하나님이 만약에 여러분을 곤고하게 살도록 내버려 두셨다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어떤 삶의 태도를 바꾸게 하시기 위하여 시련과 고통을 주시겠습니까? 주님은 오늘도 여러분이 주님의 참 사랑 안으로 돌아와서 이 믿음으로 살도록 기대하고 계십니다.
2015.01.15. 새해말씀사경회 넷째날 새벽
예비하신 은혜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시 31:19)
녹취자: 김세나
이어서 다윗은 다시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악인들을 향해 올렸던 기도를 거두고, 자신 속으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자신이 인생에서 가장 극심한 시련과 고통을 시기에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야 할지 스스로 다짐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악인에 대한 호소를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과 함께 그러한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참는 자신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적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은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였습니다. 여기에서 주님을 두려워한다고 하는 것은 무서워서 떤다는 의미라기보다 높으신 주님을 향한 경외심을 가리킵니다. 신약시대에 복음에 대한 믿음이 강조되었다면 그래서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이 강조되었다면, 구약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가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의무였습니다. 온 땅과 만물 위에 높으신 하나님의 위엄 때문에 두려워하는 마음과 그러면서도 그렇게 높으신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고 계시다고 하는 마음 때문에 끌리는 것, 이것이 바로 구약에서 가르치는 경외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또한 경건이기도 합니다.
시인은 이렇게 하나님 앞에 주를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있었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말씀 속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뿐만 아니라 자신이 살아온 신앙의 경험들을 통해서 이 시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이 은혜를 예비하시는 분임을 깊이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자신이 바로 그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기를 원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고통을 받을 때 가장 중요한 특징은 자신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우연처럼 보이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섭리의 시각에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의 탁월한 신앙은 그의 인생 중 여러 곳에서 드러났습니다. 그 중 한번이 바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그의 왕권을 위협받게 하셔서 그것도 사랑하는 아들에게서 반역을 당하여 황망히 벗은 발로 예루살렘에서 도망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부하들은 하나님이 택하신 왕권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법궤를 가지고 피난을 가자고 간청하였으나 다윗은 그들을 타이르면서 말하기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다시 돌아와 법궤를 볼 것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인생을 주님의 손에 부탁하였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그렇게 사랑하던 백성들에게 미움을 받고 모욕을 받을 때에도 그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을 통해서 자신을 꾸짖으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특징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에 대한 사소한 미움이나 다툼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 시인은 하나님 앞에 이러한 고백을 합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해서 쌓아두신 은혜” 그 두려워하는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사람인가를 이렇게 말합니다.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라고 말입니다. 이 시인은 예수님이 오시기 약 천 년 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놀라울 정도로 발전된 복음의 계시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시편 23편 같은 글은 복음주의자의 시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풍성한 복음의 내용들을 담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 이 장면만 하여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두려워하는 자들을 위해서 은혜를 예비하셨는데 정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시련과 환란을 만날 때 하나님께 피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처럼 그 분을 의지하고 그 분께 피하는 사람들입니다.
시인은 그렇게 악인들을 통해서 고난을 당하는 동안에 그들과 다투고 악을 악으로 갚는 대신 어린아이처럼 주님의 품으로 피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삶의 현실을 도피하는 비겁함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현실을 무시하는 이상주의자의 도피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싸워야 할 때와 잠잠해야 할 때, 용서해야 할 때와 정죄해야 할 때, 그리고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할 때와 자신이 상황을 개선해야 할 때를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시인은 바로 큰 고통의 시간을 지나면서 한편으로는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돌아보게 되었고, 그래서 하나님께로 피할 때 주님이 당신의 품으로 피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예비하신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맛보았습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악인들이 진심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도움을 얻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악인의 이러한 기대는 빗나갔고 시인은 오히려 시련 속에서 어린아이처럼 주님을 더욱 의존함으로 그러한 고난이 오지 않았더라면 결코 맛볼 수 없었던 하나님의 크고 비밀스러운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끔찍한 전쟁이 일어났을 때 주옥같은 찬송가들이 아주 많이 나왔습니다. 마치 꽃들이 가시에 찔리고 혹은 벌레들의 침입을 받을 때 더 많은 향기를 토해내는 것처럼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그 분의 자녀들도 그러하였습니다. 시인은 그 깊은 시련과 고통 속에서 오히려 평안하였더라면 모르고 지나갔을 자신의 죄와 허물을 발견하게 되었고 악인들에게는 그러한 의도가 전혀 없었지만 시인은 자기가 당하는 고난의 때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주 앞에 더욱 온전한 사람이 되는 기회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러한 모든 과정을 통해서 얻게 된 유익을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예비하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시인도 미처 예비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에게 일어난 일은 매우 나쁜 일이었지만, 그러나 그 나쁜 일을 통해서 그는 좋은 일만 만났더라면 결코 알 수 없었을 크고 비밀스러운 은혜의 세계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하나님은 다윗의 인생에서 가장 혹독한 시련의 때에 그 어느 누구에게도 쉽게 펼쳐 보여 주시지 않았던 비밀스러운 하나님의 은혜를 시인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 비밀스러운 은혜의 세계를 경험하면서 그는 이제껏 만나지 못하였던 하나님을 만났고 이제껏 자신의 마음에 비춰지지 못했던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새로운 빛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왕권을 되찾는 것 같은 것들은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큰 은혜를 그는 망명 생활 중에 경험하였고 그리고 그것은 다윗이 일생동안 하나님 앞에 변화된 사람으로 살아가는 큰 힘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시련과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눈앞에 있는 이익에 집착하고 삶의 상황들을 자기 원하는 대로 만들기 위해서 분투하고 애쓰지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러한 깊은 시련 속에서 우리를 보호하고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그 시련 속에서 하나님 밖에 의지할 분이 없다는 사실을 뼈 속 깊이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 피하도록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경건했을 때 늘 하나님 앞에 “하나님 나는 궁핍하고 비천하오니 나를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라는 옛날의 기도를 시련 속에서 다시 올렸을 때 하나님은 마음에 큰 기쁨을 느끼셨고 그렇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이 시인의 마음속에 전달되었기 때문에 거기에서 오는 하늘 위로가 이 땅의 시련이 주는 고통을 능히 극복하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신앙은 이 세상에서 흩어졌던 모든 관심사에서 자신에게로 돌아와 하나님을 대면하고 그 분께 자신의 모든 인생의 주권이 있다는 것을 믿으며 그 뿐께만 도움을 구하며 간청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의 자녀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시련 속에서라도 순전한 믿음을 가지고 당신을 향하여 살기를 바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종종 우리의 지혜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지혜를 가지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해 품으신 당신의 경륜을 이루어 가십니다. 망가진 나를 고치시기 위하여 때로는 나빠 보이는 시련을 주셔서 이 세상에서 육체의 평안함 보다 훨씬 더 소중한 하나님 앞에 건강한 영혼으로 살 수 있도록 우리를 변화시켜 주십니다. 주님은 오늘도 여러분에게 이러한 은혜를 주고 싶어 하십니다. 시련을 만나도 주님 앞에 피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자기를 의존하는 사람들이고, 그렇게 시련을 대하는 동안 마음속에는 수많은 갈등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많은 사람들을 미워하고 하나님 앞에 죄를 짓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이 세상에 코 박고 살던 자신의 삶에서 은혜의 세계로 비상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높은 곳에서 자신의 삶을 내려다보며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인생 중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의 의미를 관주하고 종종 자신의 인생을 남의 인생인 것처럼 내려다 볼 수 있는 삶의 지혜는 너무나 필요합니다.
주님은 그 어두운 인생의 밤길에서 떨며 울고 있는 당신의 자녀들의 음성을 기억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분이 우리의 선한 목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 이렇게 피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형통하고 평안할 때에는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던 크고 놀라운 은혜의 비밀들을 주님께서 보여 주시고 그래서 결국 내게 고난당한 것이 유익이었다고 고백하도록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신앙은 이렇게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그 분을 어린 아이처럼 의지하면서 사노라면 자신의 인생에서 만나는 나쁘고 악한 모든 일이 결국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선한 것으로 바뀔 것이라는 사실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당신의 품으로 피하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되십니다. 거기에서 쉼과 용기를 얻는 그 하나님의 은혜의 비밀스러운 세계를 경험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숨기시는 하나님
“주께서 저희를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말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시 31:20)
녹취자: 김세나
주께 피하는 사람들을 위해 예비하신 은혜가 크다고 시인이 말하였는데,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구절에서 그 큰 은혜가 어떠한 것인가에 대하여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시인이 바로 악인들이 고통을 받을 때 하나님 앞에서 경험한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첫 번째, 하나님은 시인을 숨기신다는 것입니다. 숨긴다는 것은 사람들이 발견할 수 없도록 감추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시인은 자신이 시련을 당하고 고통을 당할 때 대적들이 자기를 해하지 못하도록 감추시는 것을 하나님께 피할 때 받는 복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일생동안에 수없는 삶의 고비를 지났습니다. 기름 부음을 받지 않고 아버지 집에 평범한 목동으로 살았더라면 그렇지 않았을 텐데, 하나님 앞에 기름부음을 받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도록 구별되었습니다. 이때부터 그의 삶은 끊임없는 긴장과 추격의 연속이었습니다. 왕이 된 후에도 나라를 잘 다스리고자 노력하였지만 결국 그는 범죄 하여 하나님 앞에 징계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수많은 대적들이 원수가 되었고 그래서 시인을 모함하고 생명을 위협하였습니다. 수없이 죽을 고비를 맞이하였지만 그때마다 하나님은 이 시인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이 시인을 감추어 악한 자들에게 발견되지 않도록 보호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시인이 하나님께로 피할 때 얻은 감추어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고난을 당하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는 매우 신비스럽고 무엇 하나 단선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들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모두 이해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는 불가능합니다. 또한 그러한 현실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 중 누가 믿음으로 살고 누가 그렇게 살지 않는지 구별하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 하나는 있습니다. 그것은 고난을 받을 때 우리 하나님께 피하는 사람들은 결코 손해를 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은 그 많은 신앙의 경험을 통해서 고난을 받을 때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며 주님께 피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이 시인을 감추어 주셔서 하나님 앞에 보호받도록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주님께 피하면 주님은 여러분을 감추어 주십니다. 원수의 눈을 가려 여러분을 볼 수 없게 해 주시고 그래서 악인의 시도를 헛되게 만드시고 여러분이 생각하지 못하였던 방법으로 하나님은 여러분을 보호하십니다. 시련을 당할 때 하나님께 피해본 사람들은 하나님의 섭리가 얼마나 놀라운가를 깨닫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시련을 당할 때 기대감이 있습니다. “아, 이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은 나를 다시 한 번 좋게 하시려고 하는 구나. 이 시련을 통해 하나님은 어떤 지식의 빛을 어떤 사랑의 색깔을 나에게 보여 주실까?” 하는 기대의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우리 주님께 피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두 번째로는 이 시인이 하나님께로 피할 때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여기에서 ‘꾀’ 라고 하는 것은 의논, 계획, 구상을 가리킵니다. 때로는 이 시인의 안위를 위협하는 적들의 지혜가 시인보다 훨씬 뛰어났습니다. 정치적으로 난관에 빠지기도 하고 고통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건한 자녀들은 하나님을 닮아 단순성이 있습니다. 겉과 속이 투명하고 감추어진 것이 별로 없다는 의미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자녀들은 거짓말 하지 않습니다. 정직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에게 거짓말은 정신분열을 겪는 것 같은 혼란과 고통을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악인들에게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사는 사람들은 이리 앞에 놓인 한 마리 어린양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꾀를 만들어내고 그리고 그것들은 이 시인을 낚아채기 위한 그물처럼 시인의 인생 가는 곳마다 널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시인을 보호하셨습니다. 압살롬의 반역만 하여도 그는 3년이 넘는 세월동안 면밀 주도하게 반역을 준비하였습니다. 세바의 반란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은 계획되었고 시인은 그것을 몰랐습니다. 꼭 성공할 것 같았지만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것은 시인을 둘러싼 모든 일들이 그들이 계획한 대로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방식으로 당신의 자녀들을 보호하고 지키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마지막에는 멸망한다는 공통된 결론에 도달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믿음으로 당신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을 보호하십니다. 특히 시련과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품으로 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시고 악인의 방법과 똑같이 맞섰더라면 결코 얻을 수 없었을, 맛볼 수 없었을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악인에게 알몸으로 드러나 있고 아무도 돕는 자 없는 것처럼 표적이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보호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모든 꾀로부터 벗어나기를, 마치 새가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하나님은 그렇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시련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당신의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하심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시련 속에서 당신을 의지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이처럼 그들의 기대를 뛰어넘는 놀라운 은총을 베푸십니다. 그래서 악인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십니다. 여러분은 결코 어떤 사람이 여러분의 인생을 시련의 구덩이에 몰아넣었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하나님의 대리자가 되어서 그들을 응징하겠다는 마음을 가져서도 안 됩니다. 만약 여러분이 진정으로 복수를 꿈꾼다면 그것은 그 시련 속에서 여러분의 영혼이 망가지는 것입니다. 오히려 악을 악으로 갚는 대신 악인을 선대하고 여러분에게 시련과 고통이 올 때마다 하나님 앞에 감사의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시험을 당할 때 제일 무서운 것은 육체가 괴롭힘을 당하고 가졌던 것을 잃어버리고 심지어 그 시험 때문에 사람이 죽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이제껏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았던 그 경건한 사람이 그의 영혼과 마음이 파괴되는 것입니다. 시인은 고통을 받을 때 우리 하나님께로 피하였고 그러자 하나님은 시인을 숨기셨을 뿐만 아니라 보호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모든 꾀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셨던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이렇게 하나님께로 피할 때 시인이 얻은 은혜는 다툼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시인이 압살롬에게 반역을 당하여 황망히 망명의 길에 오를 때 잃어버린 왕궁이나 두고 가는 재산보다 더 가슴 아픈 것은 그가 일생동안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올 때 백성들 앞에서 쌓아왔던 그의 좋은 평판이 무너지는 것이었습니다. 대적들은 하나님이 그를 버리셨다고 선전하였고, 그리고 그가 왕이 된 것이 자신의 탐욕으로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사울의 집안을 파괴하고 왕위에 오른 것이라 퍼뜨렸습니다. 악하고 나쁜 소문은 광범위하게 퍼졌고 그래서 일생동안 하나님의 종으로 이스라엘을 위해 살아온 이 시인의 명예에 먹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시인은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이 잠잠한 것 같이 자기의 시대를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신앙으로 그 폭풍과 같은 환란의 한 가운데를 지났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우리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를 굳게 믿었습니다.
시련을 당할 때 시인은 단 한 번도 자신이 하나님처럼 절대적으로 죄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속에서 악인의 징벌과 하나님의 공의의 실현을 기도하면서도 항상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일어난 모든 사태들을 통해서 자신의 허물과 죄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자기를 돌아보며 회개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시인은 살아왔기 때문에 고난과 시련을 많이 당하면 당할수록 하나님의 품으로 피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하였고, 또한 그것을 자신의 삶 속에 적용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시인은 결국 그렇게 하나님께 피할 때 자신은 하나님만 바라보았지만 그 모든 다툼에서 벗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언약적 사랑으로 시인을 선택하고 사랑하셨을 뿐만 아니라 보호하고 인도하셔서 인생의 말년에 다다르면 다다를수록 자신이 의지할 분이 하나님 한분이시라는 사실을 더욱 깊이 깨달았습니다. 혼란스러운 인생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신실하심을 의심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믿음이 없이 자기중심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보였고 주님의 공의가 땅에 떨어지는 것 같았고 악인이 번성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으며 그 분의 인자하심 속에서 사는 이 시인은 하나님이 그러한 분이 아니시라는 사실을 주님의 날개 그늘의 품 안에서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을 주님의 손에 맡기고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자신 뿐 아니라 악한 자들에게까지 이루어지기를 하나님 앞에 간구하며 살았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당신의 품으로 피하는 이 시인을 선대해 주셨고 모든 삶이 평탄하고 모자라는 것이 없었을 때에는 결코 체험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그 크고 놀라운 은혜의 세계 속으로 이 시인을 데려 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시련과 어려움을 만날 때 우리 주님의 날개 그늘 아래로 피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분은 능력이 많으시기 때문에 힘이 모자라서 여러분을 지키지 못하실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당신께 피하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고 은밀한 곳에서 그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주님과 함께 이기며 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빕니다.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