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는 자를 만나주심
(2016년 주일오전설교)
설교기간|2016년 6월 12일 - 10월 09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7년 1월 7일
목 차
1. 마음으로 돌아오라(마 6:6) 2016.6.12 주일오전설교 1
2. 주의 얼굴을 찾을 때(대하 7:14) 2016.6.19 주일오전설교 10
3. 은혜의 보좌로 나아감(히 4:15-16) 2016.6.26 주일오전설교 18
4. 간절히 원하는 것1(마 6:10-11) 2016.7.3 주일오전설교 25
5. 간절히 원하는 것2(히 6:12) 2016.7.10 주일오전설교 33
6.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마 9:27-29) 2016.7.17 주일오전설교 41
7.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라(잠 8:17) 2016.7.24 주일오전설교 48
8. 말씀을 기다리는 사람들(행 10:33) 2016.8.7 주일오전설교 57
9. 귀 기울이시는 하나님(시 77:1-15) 2016.8.14 주일오전설교 66
10. 환난 속에 영광 받으심(시 91:15) 2016.9.4 주일오전설교 74
11. 사랑하는 자를 높이심(시 91:14) 2016.9.11 주일오전설교 82
12. 깨끗함을 받으라(마 8:1-3) 2016.9.18 주일오전설교 91
13.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믿음(마 8:5-10) 2016.9.25 주일오전설교 99
14. 하나님을 갈망하라(시 42:1-2) 2016.10.02 주일오전설교 106
15. 하나님을 소망할 때(시 42:3-5) 2016.10.09 주일오전설교 113
찾는 자를 만나주심 1 (2016.6.12 주일오전설교)
마음으로 돌아오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6)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오늘날 우리는 매우 마음의 여유가 없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깊은 밤잠에 드는 시간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무엇을 해야 하고, 또 무엇을 하기 위해서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고 하고 하는 대부분의 많은 일들은 영적이고 정신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그냥 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생활하는 이런 일상적인 일들입니다. 이런 속에서 우리는 점점 더 분주하게 살아가지만 사실은 나의 마음으로 내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닌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데서 오는 삶의 공허함과 견딜 수 없는 인간의 마음의 팍팍함은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일주일에 한번 교회에 나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지만 정말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갈망 속에 주님을 찾는 마음으로 교회에 나오는 적이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기도에 관한 교훈입니다. 그런데 이 교훈은 6장에서 외식하는 자들을 경고하시는 가르침 속에 담겨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는 팔복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늘 우리에게 외식하지 말도록 가르치시면서 기도에 대해 교훈을 주신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왜냐하면 기도만큼 진실을 요구하는 마음의 행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그리스도인이 마음을 다 드려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며 기도할 수 있다면 그는 아주 훌륭한 영혼의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기도에 관한 교훈에 이어서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를 마음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자, 우리가 어디에서 하나님을 만납니까? 그리고 어디에서 그 분의 은혜를 받습니까? 어디에서 그의 진리를 깨닫고 기쁨을 얻고 죄에 얽매였던 우리들이 해방을 경험하는 곳이 어디입니까? 깊은 골짜기입니까? 높은 산입니까? 아니면 바다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직 그렇게 우리가 주님을 만나고 은혜를 경험하고 자유를 느끼는 곳은 바로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마음의 중요성을 아주 빈번하게 강조하고 있고, 어떻게 보면 우리 그리스도인의 또 다른 이름은 그 마음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잠언 4장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지킬만한 무엇보다 너희의 마음을 지키라고 말입니다.
II. 마음으로 부르심
A. 외식하는 자들
오늘날 우리들이 건조하고 퍽퍽한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이유는 우리의 마음이 비어있기 때문입니다. 시련과 고난과 역경이 오고, 어떤 시련이 와도 우리의 마음이 주님으로 가득차고 은혜로 충만할 때에는 우리들이 그 모든 것들을 이겼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의 마음은 이렇게 퍽퍽하고 그리고 건조하기 짝이 없는 생명이 없는 마음이 되기 쉬운 것일까요? 오늘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두 종류의 사람을 상정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외식하는 자들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기도의 습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침에 한번, 정오에 한번, 그리고 오후에 한번 하루에 세 번씩 시간을 정하여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훌륭한 습관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받쳐주지 못하니까 이런 기도의 훌륭한 습관에 아주 세속적인 욕망이 파고들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종교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그들을 본받는 경건을 자랑하는 사람들에게서 이런 문제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즉, 마음으로 하나님을 간절히 갈망하는 마음이 없으니까 기도할 때에 그들의 시선을 사람으로 채우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정해진 시간에 손을 들고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길 어구에서 그렇게 기도함으로써 사람들이 자신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좋은 평가를 내려주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기도가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외식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기도의 진수에 대한 설명을 하시기 전에 외식을 경고하셨던 것입니다.
‘히포크리트’(hypocrite)’라고 하는 영어의 이 말은 희랍어로 ‘휘포크리시스’에서 옵니다. 그리고 원래 이것은 연극배우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연극배우는 어떤 사람의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훌륭하게 연기를 합니다. 그러나 실제 그의 삶이 아닙니다. 작가가 써준 삶입니다. 단에 내려오면 무대와는 전혀 다른 자기의 진짜 삶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휘포크리시스’입니다.
무엇인가 자신의 안에 있는 것과 자신의 밖에 보이는 것이 일치를 이룰 때 우리는 이것을 진실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진실은 반드시 선한 것이어야 합니다. 심정이 아주 악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악한 마음을 그대로 드러나서 정확하게 악을 저지르는 것을 보고 우리는 진실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진실은 따라서 단순히 자기의 마음에 충실한 것을 진실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진실을 이야기할 때에는 반드시 자기를 넘어서는 어떤 기준인 진리를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있는 그대로를 표명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죄도 고백했고 나쁜 행동도 고백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것에 만족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런 자신이 변화되어 진리에 합당하기를 원합니다. 그럴 때 그의 부끄러운 고백조차도 진실한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진리가 있다면 반드시 도덕이 있을 것이고, 그리고 그 진리와 도덕은 하나의 지점으로 수렴하게 될 것입니다.
도대체 그 진리의 근거는 무엇일가요? 어떤 일은 행해도 되고 어떤 일은 행하지 말아야 한다는 도덕의 근원은 무엇일까요? 결국 그 모든 것들을 거슬러 올라가서 하나의 지점으로 수렴하게 되는데 결국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선과 악을 정하셨고, 어떤 것을 진리라고 우리에게 제시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기준을 따를 때에 마음의 평안과 행복을 느끼고 악인이라도 진리를 부인하는 사람이라도 그 진리대로 행할 때에는 마음에 위로를 얻는 것입니다. 외식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진실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서 있으며, 그 하나님은 자신의 마음과 삶과 그리고 나의 생각의 밑동까지도 모두 헤아리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 분의 시선에서 내가 피할 수 없다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이 마음이 외식하는 자들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기도의 세계를 지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움직입니다.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지 않는 사람은 기도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외식하는 자들이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에 기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만나는 거룩한 기도조차도 사람들에게 평판을 얻는 기회로 삼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높임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주님께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그 영혼의 곤고함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B. 진실한 자들
이에 비해서 주님은 우리가 그러한 잘못된 종교인들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그렇지만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이 사람들은 진실한 사람들입니다. 적어도 진실을 찾고 진실해지고자 몸부림치는 사람들입니다. 완전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뵈옵고자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로부터 버림을 받고 고립되어도 오직 하나님을 대면하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들을 자기의 골방으로 부르십니다. 골방은 어떤 방입니까? 사람들이 흔히 찾지 않는 방입니다. 그리고 은밀하게 감추어진 방입니다. 그래서 사람들 눈에 띄지 않습니다. 그런 곳으로 들어가서 기도하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 오직 너희의 마음속에 하나님만 가득 차게 하라는 의미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동방의 교부 요한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이 구절을 해설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하늘의 왕궁에 들어가듯이 그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친다. 왕궁은 조용하다.” 그렇습니다. 왕이 계신 그 궁전의 특징은 고요함입니다. 왕 이외에 누구도 거기서 소란하게 하거나 혹은 고함을 지를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매우 불경한 죄입니다. 천상의 왕이신 우리 하나님께 기도할 때 우리는 그 분의 왕궁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분의 거룩한 궁전으로 들어갈 때 일체의 고요함, 그것이 그 왕궁의 특징입니다. 거기서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왕이신 그 분을 뵈옵기 위해 걸음을 옮긴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사면을 두리번거리며 왕궁의 풍경이나 왕궁의 보물들을 찾지 않을 것입니다. 왕궁에 들어가 왕의 존전으로 나아가는 모든 사람은 그 마음이 왕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고, 떨리는 두려움과 그리고 억제할 수 없는 기대감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떨면서 발걸음을 옮기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과는 얼마나 거리가 먼 묘사입니다. 정말 우리에게 그런 시간들이 있습니까? 이른 아침 눈을 뜨자마자 하루 일과에 대한 빡빡한 생각들, 부딪히며 살아가는 우리의 일터, 그리고 조금 남는 시간에는 또 우리는 오락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리고 남는 시간에는 생각의 스위치를 끄고 그저 편안하게 쉬고 싶어 하면서 우리의 마음은 갈 길을 잃습니다. 그리고 그 어디서도 우리의 영혼은 이상하게 쉼을 얻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루 중 일정한 시간을 우리의 마음을 이 세상의 감각적인 사물들에서 떼어놓는 것입니다. 누구도 이런 시간 없이는 하나님을 뵈옵는 기도생활에서 성장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역사를 보면 기도의 사람들은 고독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고독을 즐거워한 이유는 혼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홀로 있는 조용한 시간에 하나님을 온전히 대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연애하십니까? 연애 해보셨습니까? 정말 남녀가 사랑할 때에는 둘이만 있는 것이 아니면 같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연애의 감정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은 그런 시간을 원합니다. 아무도 없이 주님과 홀로 하는 고요한 시간, 세상의 성공과 번영, 육체의 쾌락과 즐거움에 대한 기대, 모든 소란한 것들을 멀리 물리치고 아무의 시선도 닿지 않는 골방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문을 닫습니다. 바깥에서 그 문을 두드리는 유혹과 이 세상 번뇌가 많이 소란케 해도 우리는 마음을 주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지극히 고요한 시간에 땅을 바라보고 살았던 우리의 영혼의 시선을 듭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높이 들어 주를 우러러 봅니다.
(찬양)
주님을 송축하리 내 입술 주를 찬양 나의 눈 보기 원하네
주님 얼굴 주님의 음성 듣기를 주님을 만져보기를 전심으로 원합니다 주여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이 이렇게 하나님 한분을 간절히 갈망하는 가운데 세상의 번뇌와 더러운 욕망들을 떨쳐내고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그 뜻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이 마음은 하나님과 연애하는 마음입니다. 기도의 가장 적합한 마음은 하나님과 연애하는 마음입니다. 기도가 어려운 것은 우리 흔히 변명하는 것처럼 너무 바쁘거나 힘들거나 몸이 아프기 때문이 아닙니다. 기도가 힘든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이 내 마음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언어를 만들어내는 공장과 같습니다. 그래서 글 한줄 써 본 적이 없는 사람들도 연애를 하면 문학소년, 문학소녀가 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끊임없는 영혼의 움직임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 수많은 언어들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흐트러지고 더럽혀진 우리의 마음은 걸레와 같지 않습니까? 우리는 결코 걸레를 들어서 밥을 차리기 전 밥상을 닦는 법은 없습니다. 그런 걸레와 같은 더러운 마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는 안정이 없고 주님을 믿어도 주님 때문에 느끼는 깊은 감격과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을 볼 때 어떻게 느낄까요? 정말 행복한 사람으로 느낄까요? 자기는 모르는 무언가를 사랑하고 그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에 행복하고 평안하고 격동치는 삶을 살아도 마치 그것이 남의 삶인 것처럼 침잠하고 고요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의 여유를 가진 사람들일까요?
며칠 전에 책을 읽었는데 그 책 속에는 세계적으로 아주 유명한 의학자의 간증이 실려 있었습니다. 자신은 과학자로서 교육을 받아왔고 그렇기 때문에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없는 것은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신이라고 하는 존재는 과학적으로 입증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신론자의 삶을 택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고 아주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 계기는 학문이 아니라 아주 평범한 한 그리스도인과의 만남이었다고 했습니다. 의사로서 환자들을 돌보고 있었는데 그 병동에는 절망적인 상태에 처해 있어서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환자가 많았답니다. 이 사람이 밑은 환자 중에서 심장에 문제가 있어서 더 이상 손쓸 수가 없이 그냥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어느 부인이 있었다고 합니다. 죽음을 앞에 두고 있는데 그 부인은 항상 마음의 평화와 기쁨이 넘치는 모습이었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우연히 자신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는데 자기가 살아온 이야기를 해주더랍니다. 그리고 자신이 지금 죽음 앞에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자기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녀의 마지막 고백은 “그래서 저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삽니다.” 그런데 그 다음 그녀가 던진 마지막 질문이 최고의 지성인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인생 전체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 질문은 결코 이 의사를 무시하거나 도전하는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 저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살아갑니다. 선생님은 무엇을 믿으세요?” “선생님은 무엇을 믿으세요?” 그런데 그 짧은 한 마디의 질문에 자신의 삶의 밑바탕이 모두 뒤흔들리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는 얼굴이 붉어지고 너무 자신이 아주 쪼그라드는 작은 존재가 되어서 자기가 여기 서 있는 것이 말할 수 없이 창피해서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었던 심정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그는 좋으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보십시오. 어디서 일어나는 일입니까? 하나님을 어디서 만나고 남에게 없는 평화를 어디서 경험하고, 남이 알지 못하는 은혜의 세계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이 모든 일들이 인간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우리의 거짓된 정신보다 훨씬 정직합니다. 굶주리면 배고프다고 소리치고, 목마르면 목마르다고 외치고,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을 만나고 싶으면 주님을 뵈옵고 싶다고 몸부림칩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거짓됩니다. 참과 거짓이 늘 섞여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영혼의 이런 울부짖음을 듣고 또 한편으로는 우리의 마음에 욕심과 헛된 생각으로 이런 부르짖음을 지워버리고 눌러버립니다. 그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몸은 교회에 나오나 그는 껍데기일 뿐이고 마음은 세상입니다. 입으로는 주님을 부르지만 마음속에는 주님이 없습니다. 진리를 찾지만 그는 진리를 누리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휘포크리시스’, 위선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찾는 마음의 진실함, 자신의 마음에서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 속에서 그 진리를 깨닫고 주님 앞에 나아가려고 하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은 말했습니다. “오직 이런 불길한 우리의 마음이 순결해지는 길은 오직 지혜에 대한 사랑뿐이다.” 정말 하나님의 참된 지혜를 알고 싶고 하나님의 그 참된 지혜를 사랑하는 순결한 정신이 우리의 이 더러운 마음을 깨끗케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를 장황하게 설명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 고개를 끄떡거려줍니다. 그러나 사실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안한 것입니다. 그가 진짜 고백해야 될 것은 무엇입니까? 이런 많은 것들이 나로 하여금 기도를 방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나를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옛날 지금보다 더 시련에 넘치고 가난하고 궁핍하고 마음의 고통을 받고 육신이 질병에 시달리고 이러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나 그것을 뛰어넘는 주님의 은혜가 내 마음을 적셨습니다. 그 사랑이 내 마음을 일깨웠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찬양)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인도 하소서
이렇게 마음으로 주님을 간절히 찾아 만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III. 기도 들으시는 아버지
주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못되고 불완전하고 폭력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그런 아버지가 아닙니다. 때로는 어머니 같은 섬세함으로 아버지 같은 능력으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우리도 알지 못한 우리의 마음 깊은 곳까지 헤아리시는 완전한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왜 사람을 지으셨을까요? 그 분에게 사람이 필요했다면 하나님이실 수가 없고 필요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쓸데없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사랑하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우리 목사님 중 한분이 최근에 아이를 낳았습니다. 물론 사모님이 낳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제 깨달은 바가 많은 모양입니다. 그리고는 저한테 이야기했습니다. 책을 읽었는데 ‘영원 전에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사랑하셨다 그게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이다.’ 라는 이야기를 듣고 감동을 받았답니다. 내가 설교 속에서 수없이 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자식을 낳아보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알겠습니까?” 그러니까 “네” 그랬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야기했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낳기 전부터 자식을 사랑합니다. 이해됩니까? 자식을 아직 결혼을 해서 아직 아이를 안 낳았습니다. 그런데도 부모는 이미 없는 그 자식을 사랑합니다. 자식이 태어났을 때 없는 사랑이 확 생겨난 게 아니라 원래 그런 사랑이 있었는데 자식이 생겨나니까 자연스럽게 그 사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런 사랑이었습니다. 사람이 생겨나니까 이것들을 사랑해야 되겠지 오늘부터 사랑하기로 하자 그러고 하나님이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원래 사랑이셨습니다. 그래서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지도자 모세와 함께 감격하였던 사실이 무엇인지 아세요? 이 세상에 많은 민족이 있지만 기도할 때에 우리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나님이 가까이 해주신 족속이 있었더냐 그게 감격의 이유였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세상 살아가면서 뭔가 뜻대로 안되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권력을 가진 사람을 생각하게 됩니다. 시장을 내가 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면 장관이나 도지사를 내가 알고 있다면 그만두고 구청의 공무원이라도 담당자라도 내가 알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은 하늘의 왕을 알고 계신 사람들입니다. 평범한 사람은 대통령을 만날 수도 없습니다. 여러 다리를 거쳐도 될까 말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오직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힘입어 누구든지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주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은 가장 멀리서 부르짖는 가장 연약한 당신의 자녀의 기도 소리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신앙의 기쁨은 바로 이 기도의 기쁨을 깨달아 가는 과정입니다. 모르는 사람들은 아무리 말을 해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는 사람들은 모두 압니다.
(찬양)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칼빈 선생은 자기의 책 속에서 성경에 비추어볼 때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는 두 가지 방편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방편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이 그런 신령한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두 방편은 곧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입니다. 즉, 신령한 하나님의 은혜가 언제든지 우리의 영혼에 부어질 수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도구로 해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이해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하는 이러한 마음의 작용을 사용해서 우리의 영혼에 커다란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성례는 세례와 성찬으로 이루어지는데 그 의미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 의미를 이해한 사람들에게는 들리는 언어가 없어도 그렇게 죄인이 와서 눈물을 흘리며 세례를 받고 구원받은 자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되새기며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그 행위 자체가 말씀의 행위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거룩한 성령의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것입니다. 왜 기도는 안 될까? 사실 우리가 대부분 하나님 앞에 초월적이고 충만한 은혜를 받은 경험은 사실은 기도 속에서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그런 은혜를 받지만 그 은혜가 우리의 마음에 역동적으로 역사해서 우리를 회개하게 만들고 결단하게 만들고 죄를 버리고 의를 좇게 만들고, 주님을 위해 기꺼이 희생의 길을 걸어가게 하는 놀라운 결단들은 대부분 기도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왜 기도를 은혜의 수단에 넣지 않았을까요?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는 말씀과 성례와 같은 은혜의 수단이 아니라 기도는 경건 그 자체이다.” 더 이해하기 쉬운 말로 말하자면 말씀과 성례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수단이지만 기도는 그 자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가장 연약한 그리스도인이 무릎을 꿇고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찾을 때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 간절하고 깊은 기도 속에서 모든 것은 바뀝니다. 그가 죄인이었다면 용서 받을 것이고, 그가 악을 행했다면 돌이킬 것이고, 그가 시련과 고난 속에서 믿음을 지켰다면 상급을 받을 것입니다. 거기서 그는 이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 넘치는 자비와 하늘의 은택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 누구도 알 수 없는 거룩한 용기와 은혜의 결단, 그리고 시련과 고난의 골짜기를 지날 수 있는 용기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기도는 하늘 자원을 공급받는 통로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어떻게 하든지 여러분을 기도할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주일날 예배에 나와도, 이런 저런 일로 봉사를 해도 그것은 자신의 왕국에 결정적인 해를 끼치지 못합니다. 예배를 드려도 마음은 떠났습니다. 그의 마음에 아무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설교, 예배, 그리고 예배의 순서, 찬양, 모든 것입니다. 마귀는 이런 모든 것들을 양해합니다. 마음 중심만 하나님으로 불타지 않는다면 모두 양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반대로 가장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한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진실의 파장이 일기 시작할 때 냉담하던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불붙고 식었던 그의 심령에 주님의 은혜가 역사하기 시작할 때 그는 얼마나 두려워하겠습니까? 주님은 때로는 흩어진 우리의 마음을 다시 모으고 당신을 향하게 하시기 위하여 때로는 시련도 주십니다. 때로는 우리의 마음을 때리셔서 세상 사랑을 끊게도 하시고, 기도하지 않으면서 살았던 자신의 교만을 뉘우칠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 자기 뜻대로 되지 않게끔 하나님이 막으십니다. 사람들은 이것이 자신의 인생을 방해하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어떡하든지 우리의 마음을 돌이켜 당신 안에서 행복하게 살고자 우리의 마음을 고치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기도 속에서 고쳐집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좋으신 분입니다. 그래서 말할 수 없는 사랑으로 여러분을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시는 분이시니 이 주님을 기도 속에서 만나기를 바랍니다.
IV. 적용과 결론
기도에 관해서 아무리 인용해도 싫증이 나지 않는 한 가지 아름다운 비유를 들고 이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옛날 시골에서는 펌프도 없고 수도도 없었던 시절에 공동 우물이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이 모두 힘을 합쳐서 언젠가 깊이 파놓은 우물은 마을 사람들에게 물을 공급하는 중요한 원천입니다. 한 여름 뜨거운 햇볕 아래 타는 듯한 목마름으로 동네 어구에 있는 우물가로 달려갑니다. 그리고는 두레박을 던집니다. 깊은 우물에 철썩하고 두레박이 떨어지는 소리가 납니다. 그냥 길어 올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줄을 흔듭니다. 두레박을 쓰러뜨리기 위함입니다. 기울어져서 물이 들어가게 만들고 물이 어느 정도 잠기면 두레박은 무거워서 가라앉습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들어 올려 봅니다. 그리고는 끈을 다시 놓아서 무거운 두레박이 다시 자신의 무게에 의해 물속으로 첨벙 들어가게 만듭니다. 그리고 이제 완전히 물이 한가득 길어졌다고 생각될 때 우리는 들어 올립니다. 물속에 있을 때는 가벼웠던 두레박이 물 위로 나오면서 제법 무게가 느껴집니다. 그리고 들어 올립니다. 땅 속에는 아주 시원한 물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물을 길어 올려 이마에 흐르는 땀을 씻을 새도 없이 퍼마시며 옷섶을 모두 적시게 됩니다. 그리고는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육체의 기갈을 해소하게 됩니다. 정신은 쇠락해지고 새로운 힘이 솟기 시작합니다.
정말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정말 우리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절절하게 필요한 영혼의 필요가 무엇일까요? 이렇게 생수와 같은 주님과의 만남이 아닐까요? 여러분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생의 많은 문제들, 여러분이 문제라고 생각하고 무거운 십자가로 생각하고 있는 많은 일상의 어려움들이 결국 종류는 많지만 하나가 없기 때문에 여러분의 인생의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주님의 생명, 예수의 생명, 하나님의 사랑, 그 은혜, 생명의 은혜가 우리에게 모자라기 때문 아닙니까? 이 생명을 충만하게 받아 누린다면 우리는 이 세상의 시련과 고난을 비웃으며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설교 듣고 그냥 가지 마시고 오늘 한번 심각하게 자신의 영혼을 돌아보고 결심해 보십시오. 한 주간 동안 30분, 아니면 20분이라도 시간을 내어서 조용히 하나님을 묵상하십시오. 그리고 마음에 없는 소리를 내지 말고 느릿느릿해도 어눌해도 상관없으니 저 마음 깊은 곳에서 언어를 두레박으로 물을 뜨듯이 진심으로 길어 올리십시오. 그것이 때로는 언어가 안 되서 탄식소리나 한숨소리여도 괜찮습니다. 주님 앞에 드리는 탄식과 한숨, 그리고 아버지의 이름을 간절히 부르며 여러분의 진심을 토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처음에는 아주 가냘픈 기도처럼 들리지만 반복할 때 이 기도는 샘솟는 것 같은 풍부한 언어를 동반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기도가 처음에는 작은 물방울처럼 그렇게 느껴지지만 나중에는 그것들이 퍼올려지면서 샘솟듯이 터치는 기도가 될 것입니다. 그 기도의 힘으로 은밀히 주님을 만나고 기쁨과 생명의 삶을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찾는 자를 만나주심 2 (2016.6.19 주일오전설교)
주의 얼굴을 찾을 때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대하 7:14)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솔로몬이 성전 낙성식을 하고 얼마간 시간이 흐른 후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밤중에 주신 말씀입니다. 열왕기 상하도 역사를 다루고 있고, 역대기 상하도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열왕기 상하는 왕들의 역사를 다루고 있고, 역대기 상하는 왕궁에 초점을 맞추어서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역대기상에서는 다윗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고, 역대기하에서는 솔로몬과 남왕국 유다의 열왕들의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성전의 완공을 알리는 낙성식은 이제 7월 8일부터 15일까지 이루어졌고, 이때에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송하고 예물을 올렸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장막절 혹은 수장절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제 낙성식이었는데 그 후에 15일부터 22일까지 다시 한 일주일간의 절기가 이루어져 있는데 이때가 바로 장막절 혹은 수장절이라고 부르는 축제였습니다. 신명기 16장 13절에 의하면 바로 이때에 타작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산을 모두 거두어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는 그러한 절기로 지켜졌습니다.
주님은 이제 이 기쁘고 영광스러운 성대한 명절이 끝난 후 어느 시점에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당신의 말씀을 전달하십니다. 바로 그 말씀이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7장 14절의 말씀입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라고 말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불리워진 내 백성”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든 열방 가운데 그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항상 따라다니는 인상이 있었는데 그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택하고 지명하여 불러내신 백성들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할 때마다 모든 열방의 백성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었고,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때마다 그 이름으로 빼어내신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서 언급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1장부터 9장까지 나오는 족보로 시작되는 이 성경의 이유이기도 하고, 또 이것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II. 이스라엘의 정체성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을 타락한 이 세상에서 실현하기 위해 부름 받은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나라는 물리적으로 보면 매우 작은 나라였고, 백성들의 크기도 얼마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온 인류에게 알리기에 충분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시고, 그들의 역사를 기록하시고, 조상을 택하시고, 그들과 동행하심으로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성취해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하나님의 구원의 성취의 역사가 구약에 기록되어 있고, 그것들은 바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하나님이 이 세상의 인간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하나님이 이 세계를 왜 창조하셨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지식의 원천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명을 오늘날 신약의 교회가 계승하고 있다고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정체성이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이 세상에 보여주어 모든 인류를 하나님이 원래 이 세상을 창조하신 그 목적을 따라 살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명백히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삶은 하나님의 영광과 직결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지식을 가지고 뚜렷한 사상으로 그리고 그 윤리를 가지고 살아나가지 않으면 어떻게 보면 이 세상은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본인이 그것을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어차피 선교적인 존재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여러 해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한 10주에 걸쳐서 천지창조 목적에 대해서 설교를 했습니다. 아마 여태까지 설교되었던 많은 시리즈들 중에서 성도들에게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시리즈들 중의 하나였을 것입니다. 그 후의 일이었습니다. 유치부에 다니던 아이가 자라서 초등학생이 되었고 입학을 했습니다. 그리고 함께 짝이 된 친구에게 전도를 했답니다. ‘야, 너 나 따라서 교회에 가자’ 그랬더니 옆에 있는 아이가 ‘내가 8살이 되도록 교회를 안다녔는데 내가 왜 네 말을 듣고 교회를 가야되냐?’ 그랬더니 이 아이 하는 말이 ‘네가 교회 가야 되는 이유는 너와 나는 모두 천지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야.’ 열린 교회 유치부 출신 학생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로 그런 목적을 위해 창조하셨습니다. 자, 세상이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입니까? 사람들이 지금 어디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까? 미칠 듯이 전개되는 매일 매일의 바쁜 삶과 치열한 경쟁의 삶, 목적이 무엇입니까?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요? 매일매일 삶의 목표는 있지만 그 목표를 따라 살면 우리는 어디로 인도받는 생활이 될까요? 바로 이것을 이 세상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름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켜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던 우리의 인생과 하나님의 이름은 결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행복과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받으시는 영광은 떼어 놓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싫든지 좋든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살도록 주님이 이 세상에서 불러내어 주신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들인 것입니다.
자,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가장 우울하고 가장 두려운 미래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자, 세월은 흐를 것이고 언젠가 너희들은 이런 일을 만나게 될 것이다. 내가 하늘의 문을 닫고 일체의 비를 내리지 않는 때가 올 것이다. 농사를 의존하며 살던 백성에게 비가 오지 않는 가뭄은 곧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목축을 하지만 풀들이 돋아나지 않으면 짐승들은 생존할 수 없습니다. 하늘의 비는 그처럼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호세아서 10장은 하나님의 의가 온 땅에 가득하게 되는 것을 바로 의가 비처럼 내린다고 표현했습니다. 비는 바로 가물어서 생명이 시들어가는 모든 세계에 대한 환희의 기쁨이고 송가입니다. 그런 비가 멈춥니다. 이것은 그 땅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와 고통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땅에 많은 소산을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메뚜기 떼가 날라듭니다. 우리나라는 사실 그러한 메뚜기의 피해를 보는 때가 그리 흔치 않습니다. 몇 해 전에 아주 이상 기온으로 메뚜기 떼가 엄청나게 번식을 하면서 커다란 피해가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과 중동, 미국, 이런 나라들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오래전에 한번 중동을 휩쓸고 갔던 메뚜기의 대란에서 그 메뚜기들이 10cm가 넘어 12cm가량 되는 메뚜기였다고 하니까 우리들이 볼 때에는 그것은 메뚜기가 아니라 새같이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이상 기온으로 어마어마한 알을 까고, 그리고 그것들이 마치 구름처럼 몰려다니면서 농작물을 씹어 먹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발달한 문명을 가지고 있는데도 그것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뭐 살충제를 뿌려서 가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때에 이런 어마어마한 메뚜기의 습격을 받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어날까요? 하나님이 그 땅을 진노하셨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에 들고 있는 것이 전염병입니다. 우리는 종종 아주 번창했던 제국인데 이상하게 밖으로부터의 어떤 침략의 흔적도 없이 역사 속에서 사라져 버린 민족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잉카의 마야 문명 그리고 캄보디아의 시엠립에 있는 크메르 제국의 위대한 문명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도 어마어마한 제국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일체의 외부로부터 공격을 받은 흔적이 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그런 나라들이 요동에도 많이 있었습니다. 학자들은 공통적으로 결론을 내리기를 이것은 90%이상 전염병이다. 그 속에서 평민들로부터 왕궁에 이르는 모든 사람들이 죽어가 버린 것입니다. 메이플라워를 타고 1620년에 청교도들이 미국을 건너가기 전 이미 오래 전에 한 80년인가 전에 먼저 건너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두 죽습니다. 역시 전염병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의학이 발달된 때에도 우리들이 사스나 메르스 같은 것으로 이렇게 어마어마한 공포를 느꼈다면 그보다 더 심각한 질병으로 죽어 넘어가는 그런 흑사병이나 콜레라, 이런 질병들을 보면서 그들이 느꼈을 그 공포와 두려움은 여러분이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 가지 경우 모두 인력을 막을 수 없는 재난입니다.
III. 주의 얼굴을 찾으라
A. 악한 길에서 떠남
이러한 어려움이 생겨날 때 그때 너희들은 지금 내가 하는 말을 기억하라 그러면서 말씀하십니다. 그 결론은 뭐냐 하면 그때에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간절히 찾으라는 것입니다. 주의 얼굴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찾으라는 것입니까? 그리고 그 찾는 길이 무엇일까요?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첫 번째는 악한 길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길이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 성경으로 ‘데레크’이고 그리고 그것은 진짜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길입니다. 큰 길이냐 작은 길이냐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꾸준히 사람들이 다니고 통행하는 길입니다. 이것이 상징적으로 사용될 때에는 너무나 익숙해지고 성향이 된 그러한 습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삶의 방식을 의미합니다. 그 삶의 방식이 악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고 기뻐하시는 길이 아니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라고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셔서 갈 길을 잃어버린 인류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그 길이 아닌 다른 길을 걸어가고 있는 그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히브리말로 ‘슈브’, 이것은 그야말로 계획을 세우고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예기치 못한 어려움을 만나면서 방향을 다시 회귀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귀향하고 회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탕자가 집을 버리고 자기 욕망을 따라 인생의 꿈을 찾아서 먼 곳으로 갔다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난 후에 내 아버지의 집에는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생각하며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던 그런 것을 가리켜서 ‘슈브’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들은 번영 속에 불순종했고 그리고 번영 속에서 그들은 하나님 앞에 범죄 했습니다. 악한 길을 걸어갔고 그리고 곤고한 날이 찾아옵니다. 하늘의 문이 닫혀 더 이상 비가 내리지 않고 기근을 만나고 그리고 거두어 들인 수확들은 메뚜기들이 먹어버리고 저항할 수 없는 그런 심각한 전염병들이 온 나라에 유행하며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갈 때 그때에 악한 길에서 돌이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간절히 찾을 때 제일 먼저 해야 될 것은 우리가 불순종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악한 길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거기에서 돌이켜 서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스스로 낮춤
두 번째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스스로 낮추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 ‘웨이카네우’라고 되어 있는 이 단어는 ‘항복하다’, ‘굴복하다’, 혹은 ‘엎드리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기고만장하고 전쟁을 합니다. 그러다가 싸움을 시작하고 전세가 불리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피바다가 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저항해야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무기를 내려놓고 싸움을 포기합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 왕이 굴복하여 절하고 모든 신하들도 자기를 이긴 적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굴복합니다. 어떠한 가혹한 명령이라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항복입니다. 이게 굴복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를 낮추는 비하입니다. 번영할 때 자기를 믿었습니다. 성공하고 승승장구할 때 하나님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재난과 큰 시련을 만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를 돌아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떠난 번영, 하나님을 떠난 성공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깊이 자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자기가 이제껏 살아온 것이 주님의 은혜고 주님의 도움 없이 살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자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번영과 성공을 꿈꿉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당신이 우리를 구원하신 소명을 따라 살아주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성공하고 번영하게 하심으로서만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시련과 역경을 만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깊이 깨닫고 우리가 하나님 없이 아무것도 아닌 사실을 깨닫게 만들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들 위에 뛰어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시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을 받아야만 행복한 분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순종하라고 말씀하시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이 받을 수 있는 이익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분께 온전히 순종할 때 가장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기 때문에 우리를 향한 사랑 때문에 우리에게 순종하고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모든 만물위에 뛰어나 독립하심으로 아름답고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처럼 독립하려고 할 때 하나님 앞에 죄짓고 악을 행하고 불결한 존재들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언제 아름다웠습니까? 이 세상에서는 실패하고 가진 것이 없었어도 우리의 마음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때 그리고 주님이 나의 인생의 모든 궁극적인 목적이고, 내 인생의 모든 주인이시고 나의 모든 것의 동기가 된다는 사실을 고백할 때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을 때 그때 우리의 영혼은 가장 아름다웠습니다. 그때 우리는 겸비했고 낮았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도움을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무엇을 명령하시든지 그 명령에 기꺼이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의 영혼은 아름다웠고 어디에 계시든지 우리는 그 주님을 뵈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을 우리 주님을 만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역경을 만나면 그 역경 속에서 주님을 만나고 우리의 죄를 회개했고 형통하게 하시면 나같이 미천한 인간에게 그렇게 큰 복을 주시는 우리 하나님을 찬송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디서든지 주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이 낮아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향해 흐르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교만한 사람들의 마음을 떠나 겸비한 사람들의 마음으로 흘러가 그들이 겸손한 동안에 그들의 마음에 고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가 이렇게 겸비한 마음으로 우리 주님을 찾기를 원하십니다. 낮아지고 또 낮아져 주님께 겸비한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C. 간절히 기도함
세 번째는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며”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를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바카쉬’라고 하는 이 히브리어 단어는 무언가 간절한 열망을 가지고 찾는 것을 의미합니다. 심히 목마른 사슴이 물을 찾는 것처럼 매우 중요한 물건을 잃어버린 사람이 그 물건을 찾는 것처럼, 더 실감나게는 어린 아이를 잃어버린 어미가 그 자식을 찾는 것처럼 그렇게 간절히 목적을 가지고 수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마음을 다해 주님을 찾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얼굴을”이라고 묘사하실 때 이것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얼굴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형상을 가지신 분이 아니기 때문에 얼굴과 머리, 팔, 다리가 있으신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얼굴이라고 묘사하시는 이유는 바로 어린 아이 같은 우리의 지성의 수준에 맞추어서 당신을 설명하기 위해 눈높이 교육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그 얼굴은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이 얼굴 혹은 얼굴빛은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주님을 만나고 있다고 해서 하나님이 어딘가 그 자리를 비우고 우리에게 찾아오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언제나 어느 곳에나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종종 특별한 장소와 특별한 시간에서 우리를 특별하게 만나주심으로써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배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축복입니다. 팔복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의 것임이요”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애통하는 자들에게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요”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청결한 자들에게는 복을 주시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직접 뵈옵는 복입니다. 이것은 팔복 중에서 최고의 복이고 그 모든 복들의 진수입니다.
바로 성경에서 얼굴빛은 혹은 그 얼굴은 바로 이처럼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을 가리키고 이것은 바로 우리의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불쌍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시련을 당하고 있는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가엾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가난한 사람들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불쌍한 사람은 가엾은 사람은 누구일까요? 자신의 인생의 어떠한 위기 속에서도 주님을 뵈올 수 없는 사람, 주님을 만날 수 없는 사람이 아니고 누구이겠습니까?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우리가 주님의 얼굴을 뵈올 수 있고 우리가 기도할 수 있다면 그것은 시련이 아닙니다. 오히려 exciting 한 기회입니다. 하나님이 이 시련을 통해 어떻게 우리를 만나주실까? 그리고 이 난관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실까? 기대가 됩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이외에 얻을 것도 없고 잃어버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기도 속에서 주님을 뵈올 수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고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악 간에 우리가 당신 앞에 서기를 원하시고 우리가 인생의 어떠한 지점에 서 있든지 이것이 제일 먼저입니다. 이 세상의 대적들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의 인생의 난관과 시련이 얼마나 극심한지 이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는 이 모든 것들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간절한 기도 속에서 그렇게 주님을 뵈옵고 언제든지 주님이 내편에 계시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셔서 이 모든 위대한 역사를 우리의 삶 속에서 이루실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리고성을 생각해 보십시오. 광야에서 초막집에서만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어마어마한 여리고성 앞에 마주 했을 때 그들이 무엇을 느꼈을까요? 과연 그것을 짓밟아 점령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나 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최고의 믿음에 도달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고 계셨습니다. 묵묵히 주님의 명령을 따라 그 여리고성을 돌았습니다. 창이나 칼, 돌멩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그 여리고성을 무너뜨렸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그들이 하나님 앞에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우리의 간절한 마음의 진정한 표현은 절실한 기도입니다. 의미가 없는 언어의 나열로 시간을 채우지 말고 깊은 곳에서 우물을 긷듯이 마음 깊은 곳에서 언어를 길어 올리십시오. 그래서 단 한 마디의 기도라도 마음 깊은 곳에서 진심을 토하십시오. 하나님을 만나야 되겠다는 간절한 소원에 붙잡히십시오. 주님을 만나지 않으면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낫겠다는 마음으로 주님을 간절히 찾을 때 하나님은 만나주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IV. 고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은 바로 이스라엘을 고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먼저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이 무한한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어떤 때든지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죄의 용서를 빌면 하나님이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보복의 끝이 아니라 사랑의 시작이고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고 은혜입니다. 주님은 부모처럼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때로는 자식이 올바른 길을 걸어가지 않기 때문에 회초리를 내리치고 때로는 그를 때립니다. 그리고 심하게 책망합니다. 준엄하게 그들을 나무랍니다. 그러나 부모는 아이를 향한 그 사랑을 끊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운명처럼 부모의 마음속에 아로 새겨져 그 자식을 향한 사랑을 떼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자식에게 버림을 받아도 부모는 자식을 버리는 법이 없고, 자식이 부모를 모른다고 하여도 부모는 자식을 모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너는 내가 낳았고 내가 지명하였고 내가 불러서 내 자식이 되었노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이런 깊은 시련과 고난 속에서 자신이 의존하던 모든 것들을 버리고 난 후에야 비로소 자기에게 하나님이 없으면 자신의 인생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들을 의지하였던 것들을 진심으로 회개하고 주님 앞에 나아오게 됩니다.
(찬양)
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 흘려주시니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께로 옵니다.
그러면서 도저히 주님을 멀리 떠나 불순종하고 죄를 지은 나와 그 거룩하신 하나님 사이에 메울 수 없는 간격을 발견하게 되고,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의 품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때에 우리는 바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분이 그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지고 죽으신 그 대속의 공로 때문에 누구든지 믿음으로 당신께 나아오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 손을 벌리고 부르고 계시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21살 때 회심을 했고, 전도하는 사람 없이 긴 방황 끝에 스스로 걸어서 예배당에 갔습니다. 아주 작은 예배당 불과 한 20명이 예배드리고 있는 그 예배당에 들어가 무릎을 꿇었을 때 뻐걱거리고 들려오는 그 풍금 소리가 주는 그 평안을 잊을 길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지독한 반역과 무신론에 빠져있던 제가 그 어디에서도 평안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철학자들과 사상가들의 변론 속에서도 그런 얻은 적이 없었던 놀라운 평안은 교회에서 주어졌습니다. 이제껏 내 힘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던 인생이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인생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주님 앞에 깊이 무릎을 꿇고 내 인생을 받아달라고 간절히 빌었을 때 주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공로 없지만 그 분이 나를 위해 죽으신 그 십자가의 희생의 공로 때문에 하나님이 받아주신다는 사실이 믿어졌을 때 나는 더 이상 이 세상에 매인 노예가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이렇게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망가졌기 때문에 곤고하게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 어둠 속에 진리의 빛 없이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그들을 용서해 주셔서 다시 십자가를 통해 당신께 나아오고 당신의 생명과 사랑 안에 살기를 원하시니 이 품으로 돌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땅을 고쳐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막혔던 하늘이 열리고 비가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죽었던 만물들이 소생하기 시작하고 짐승들이 먹을 것을 찾는 푸른 풀밭을 만나게 됩니다. 모든 재앙들이 사라지고 다시 풍족함이 오고 질병들이 사라져 죽어가던 많은 사람들이 새 생명의 소생을 받게 됩니다. 땅을 고친다는 말씀은 단순한 육신의 재앙으로부터의 구원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영적인 관계 곧 당신과의 깨어진 관계 속에서 다시 살도록 회복시키시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샬롬”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도 인사할 때 마지막 인사가 “샬롬”입니다. 하나님과의 완전한 평화 때문에 모든 사람들과 평화를 누리고 심지어는 짐승과 이 땅에 있는 초목까지도 그런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는 사람 때문에 행복한 상태를 누리며 사는 것 이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땅을 고치신다는 의미입니다.
V. 적용과 결론
역경과 시련을 만나십니까? 어쩌면 그것은 여러분을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일 수 있습니다. 악한 길에서 떠나라고 스스로를 낮추라고 그리고 당신을 간절히 찾으며 기도하라고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시련과 역경을 만나든지 간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은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만큼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회개하고 당신께 돌아오는 모든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당신의 품으로 돌아갈 때 하나님은 망가진 모든 것들을 고쳐주시고 우리의 육신을 고치고 우리의 환경을 고치고 우리의 영혼을 치료하셔서 다시금 하나님과의 완전한 평화 속에서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과 완전한 평화 속에서 살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니 여러분이 바로 그런 복의 근원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우리 주님께로 돌아와 평화를 누리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주님을 간절히 찾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빕니다.
찾는 자를 만나주심 3 (2016.6.26 주일오전설교)
은혜의 보좌로 나아감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5-16)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히브리서는 핍박을 받고 있는 성도들을 위해서 기록된 서신입니다. 저자가 누구인지 논란이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히브리서의 저자를 사도 바울로 생각합니다. 아무튼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이 들어있는 히브리서의 맥락은 안식을 약속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해서 광야를 방황했던 것은 안식의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였습니다. 가나안땅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 것이라는 기대 속에 그 긴 세월을 여행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 신약 시대의 백성들의 갈 곳은 어디일까요? 그곳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차지했던 지구상에 있는 어느 한 땅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히브리서가 기록하듯이 본향을 찾는 나그네들이고 그 낙원에서 누릴 우리의 모든 행복을 이미 그리스도 예수 안에 누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중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해 놓고 많은 사람들은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그 약속을 받았지만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그들의 불순종 때문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도 그런 약속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마치 가나안 땅을 찾아가는 이스라엘 백성과 같아서 그들처럼 불순종하고 불신앙하지 말고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고 의지하며 그 길을 가도록 부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II. 대제사장이신 예수님
A. 연약함을 동정함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에는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은 대제사장 중에서 뽑힌 사람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관계하실 때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이스라엘 전체를 위해 중보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입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제사장들 위에 뛰어나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을 뵈올 수 있는 특권을 가졌고 그리고 이스라엘 전체의 죄를 속함을 받도록 제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옛날의 구약의 대제사장이 이스라엘 전체를 하나님 앞에 죄를 용서받게 하여 하나님과 다시 교제할 수 있게 해 주었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에게 대제사장이신 예수가 계시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이 세상에 살아가고 이런 저런 시련을 부딪치고 역경을 만날 때 우리의 믿음이 약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치 우리 홀로 이 세상에 던져진 것 같은 외로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바로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의 대제사장은 끊임없이 죽는 사람들이이었으나 이제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로 우리에게 오신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항상 함께 있는 분이시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승천하시며 남기신 마지막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 분은 항상 있는 분일 뿐만 아니라 큰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혈육 속에 태어나서 인간의 혈육과 함께 죽어가는 구약의 대제사장들과는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구약의 대제사장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중보의 제사를 드림으로 잠시 그들의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과 교통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그리스도는 대제사장들이 들였던 제사와는 다른 매우 특별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것은 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영원히 그 죄에서 용서받게 하기 위하여 짐승을 잡아 죽인 제물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제물로 주님 앞에 드리는 헌제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B. 시험을 받으심
죽으시기 위해서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야 했고 비록 죄는 없으신 분이시지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사시는 동안에 인간이 겪는 모든 시험을 겪으셨습니다. 배고픔과 가난함, 고통과 불편함, 보고 싶은 것과 그리운 것, 그리고 인간으로부터 받는 배신과 모든 모욕까지도 일체의 고통을 경험하셨습니다. 죽으시기 위해서는 사람의 몸을 입으셔야 했고, 참 사람의 몸을 입으셨기 때문에 그 분은 이 세상에서 죄 있는 우리 인간들이 당하는 모든 희로애락의 슬픔을 다 경험하셨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 인간이 누구인지를 깊이 체험하셨고,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는 하늘에 계실 때뿐만 아니라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을 때에 더욱 뼈저리게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보여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주님은 시험당하는 우리들을 볼 때 한없이 긍휼히 여기시기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고통을 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라보며 안타까워하시는 것처럼 그렇게 가슴 절절한 사랑으로 우리를 지켜보셨던 것입니다. 그 분이 당신 자신의 몸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헌제물로 드렸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아닌 죄인이 그리고 흠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이 세상의 짐승들을 잡아들인 제사가 하나님의 아들이 흠 없는 자신의 몸을 자기 아버지께 드린 제사와 동등한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것입니까?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참 대제사장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당신 자신의 몸을 우리 모두를 위한 화목제물로 드리셨습니다. 우리가 죄 없을 때 범죄하고 하나님 앞에 타락했기 때문에 이런 우리의 죄를 속하고 용서받기 위해서는 그렇게 똑같이 흠 없고 정결한 사람의 몸이 제물로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이 요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이렇게 당신 자신을 제물로 드리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으셨고, 그 몸이 제물로 바쳐지기까지 인간 세상에 사시면서 그 분은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그 연약한 육신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죄는 없지만 연약한 육신을 지고 이 세상에 오셔서 멸시와 욕, 천대와 모욕, 핍박과 고난, 시련과 고통을 모두 겪으시면서 당신 자신이 잠시 후에 대속의 죽음으로 섬겨야 할 우리 인간들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사람의 몸으로 친히 체험하셨던 것입니다.
(찬양)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신앙의 타락은 큰 죄를 짓고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어그러진 길을 가는 것만이 타락이 아닙니다. 맨 처음 십자가의 사랑을 알고 그것을 통해 하늘에 계신 그 하나님이 어떻게 나를 사랑하셨는지를 깊이 체험하면서 깨달았던 십자가의 은혜, 이것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향한 염려, 그리고 이 세상을 향한 고민과 걱정,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15살 어린 나이에 교회 가는 주일에 논둑에 엎드려 피나게 통곡을 하기까지 어린 저는 ‘인생이 무엇일까?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실까?’ 그리고 기도도 드려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누군가 나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하나님이신 그 분이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오셔서 멸시와 욕을 당하셨는지, 그리고 그 분이 십자가에서 그런 참혹한 죽음을 당하신 것이 무슨 이유 때문인지를 깨닫기 전까지는 그냥 하나님은 하늘에 계셨고 나는 이 땅에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분이 바로 대제사장으로 아무 희망이 없는 나 같은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거기서 피 흘려 자신의 생명을 쏟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그때에 하나님이 그렇게 가까이 계신지는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냐고 반문하고 아주 포악하게 하나님이 있다고 한들 당신은 나와 상관이 없다고 선을 그었던 그때 사실은 가장 가까이 하나님이 계셨고 어거스틴이 고백했던 것처럼 나에게 내가 가까이 있는 것보다 하나님이 내게 더 가까이 계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죄악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의 무기력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은혜의 감격을 상실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어차피 우리 인생은 잘 될 때도 있고 안될 때도 있습니다. 시련을 만날 때도 있고 어차피 우리의 인생은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인생의 그 모든 여건을 초월하여 계시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 언제나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시고 거기 계셔서 언제나 우리를 지키시는 그 거룩하신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III. 보좌 앞에 나아감
A. 긍휼을 받음
그러면서 성경은 우리에게 보좌 앞으로 나아갈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서 못 박아 그 피로 우리를 속죄해 주신 이유이고, 우리가 어떠한 인생의 시련과 역경을 만나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이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오늘 성경은 보좌 앞에 나아가는 것을 크게 세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긍휼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무슨 뜻입니까? ‘그러므로’가 무슨 뜻입니까? 예수께서도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우리의 연약함을 경험하셨고, 그래서 우리를 더욱 사랑하시는 분이시니 그러니까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기 위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주님을 믿기 전에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속죄의 피를 흘려 우리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이고 그렇게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우리 때문에 죽으신 것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실제로 믿은 다음에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섬기시며 죄가, 인간의 연약함이 하나님 아닌 인간이 어떻게 우리를 괴롭히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고귀한 인간들이 고통을 겪는 것을 친히 보셨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우리들의 슬픔과 고통을 모두 겪으셨기 때문입니다.
제 나이 서른아홉 살이 되던 가을이었습니다. 평안하게 분에 넘치는 대우를 받으며 교수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하나님이 어느 날 밤새도록 기도하게 하셨고, 그러면서 주님이 마태복음 9장 35절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셨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시며 목자 잃은 양같이 고생하고 유리하는 것이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파서 자기의 제자들을 세상에 파송하셨다는 기록이었습니다. 한 3일을 거의 꼬박 밤을 새우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난 후에 저는 더 이상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역할 명분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제 마음에 깊이 사무친 것은 내가 훌륭한 목사가 되겠다든지 아주 큰 교회를 만들겠다든지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세상에 들려오는 그 수없는 울부짖음 소리, 신음하는 소리들이 저의 마음을 가득 채웠고, 3일 밤 동안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파하며 흘리는 그 눈물이 사실은 나의 눈물이 아니라 우리 주님의 눈물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 유일한 희망은 바로 하나님이 그들을 얼마나 긍휼히 여기시는지를 알게 하는 것, 그래서 주님의 그 사랑을 받게 하는 것뿐이라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열린 교회를 세웠습니다.
예수님의 시절에도 기적을 보고 그 순결한 설교를 듣고 하나님의 아들의 삶을 목격한 사람들도 주님을 믿었다가는 불순종하고 주님을 배반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오늘날 우리같이 연약한 인간들이 복음을 전할 때에 얼마나 더 어려운 일이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분명한 사실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한없이 긍휼히 여기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죄 없고 흠 없고 아무 잘못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하신 사랑의 하나님이 그 아들을 십자가에서 그렇게 흉하게 매달아 죽이신 것은 결국 그 끔직한 십자가의 죽음이 주는 고통의 깊이만큼 우리들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그렇게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에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끔찍한 죽음을 당하게 하시면서 까지 우리를 사랑하셨고 그래서 우리를 위한 구원의 길을 아들을 통해 열어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바로 이 십자가 자체가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받을 수 있다는 징표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못 박혀 죽으셨을 때에 우리 모두가 깨닫기를 바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얘들아 너희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의심하지 말거라 하나님 아버지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이 주님의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을 발견하는 여러분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은혜를 받음
두 번째는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나아갈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희랍어 성경에는 ‘필요한 때에’ 즉, ‘필요한 때에 도울 은혜를 발견하기 위해’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님의 은혜가 필요하지 않은 때라는 그런 인생의 때가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매우 특별히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던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필요한 때에 우리는 우리를 도와주실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한 10년, 12년 훨씬 더 전의 일이었습니다. 하여튼 무슨 이유 때문인지 며칠 동안 저의 영혼은 아주 깊이 상심해 있었고 그리고 고통 받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마음속 깊이 낙심이 되고 힘이 들었습니다. 그때 마침 미주에서 저를 초청하여 목회자들에게 말씀을 전하게 한 시간이었습니다. 비행기 타고 가면서 계속 하나님께 빌었습니다. ‘주님, 주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무슨 매우 비극적이고 힘든 어떤 사건이 일어났던 것은 아닌데 하여튼 의식 속에서 수없이 양심의 송사가 들렸고 그리고 왜 그런지 나는 목회자로서 정말 희망이 없다는 생각이 밀려오면서 온 몸의 힘이 하나도 없이 먹을 수도 없고 마실 수도 없었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계속 빌었습니다. 그러나 별로 나아지지를 않았습니다. 도착을 해서 그 다음날 새벽부터 말씀을 전하게 되어 있는데 밤에 한숨도 자지 못한 채 비행기를 타고 온 처지였는데도 숙소에서 주님께 간절히 빌었습니다. 무슨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서 예정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많은 목회자들이 모이지 않았지만 제가 설교하는 것 같지를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한없는 은혜와 눈물을 부어주셨습니다. 모인 목회자들이 눈물바다가 되었습니다. 한동안 설교를 끝내고 그리고 강단에 엎드려서 기도하는 동안 하나님이 이제껏 아끼셨던 은혜를 부어주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찬양)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사단의 궤계와 송사가 모두 물러가고 기도를 끝내고 나왔을 때에는 아침 햇살이 활짝 퍼지며 주님의 영광이 마음에 밀려왔습니다. 이 은혜는 하나님 사랑의 감화입니다. 우리에게는 이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상황과 여건이 더 크고 중대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기고 극복할 수 있는 정신과 영혼의 힘이 모자라기 때문인 것입니다. 고갈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고갈된 우리의 심령에 은혜를 부어주시고 이 모든 것을 이길 수 있게 만들어 주시는 정신과 영혼의 힘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감화입니다. 이 은혜로 넘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잠시 기도해도 응답이 없을 수 있습니다. 저처럼 말입니다. 지금도 저는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간절히 눈물로 빌었는데도 하나님이 안주시던 은혜를 한 이틀 지난 후 하필이면 그 새벽의 시간에 말씀을 전할 때 부어주셨을까? 종종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를 연기하십니다. 우리가 충분히 당신을 갈망하게 하시려고 말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받는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C. 담대히 나아감
마지막 세 번째는 담대해지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말입니다. 인생의 가장 큰 숙제는 죄인인 인간이 어떻게 흠 없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유일한 답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 자신의 의와 공로로 주님 앞에 나아가려고 했던 모든 교만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파괴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립니다. 결국은 자신의 힘으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깊이 터득한 후 그 십자가 앞에서 자기의 의와 자기의 사랑하던 모든 것들을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끝없는 양심의 송사와 율법의 정죄 그리고 죄의 집요한 유혹과 그 기억들을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을 그때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아갑니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무능하고 무력한 인간인지를 고백하면서 자신의 유일한 희망이 자기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밖에 없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가 주는 구원의 의미에 집중합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는 시작됩니다.
(찬양)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보혈을 지나 아버지 품으로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한걸음씩 나가네
거기서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어린 아이처럼 의지합니다. 그 보혈의 능력으로 나의 이 끊임없는 양심의 송사에서 나를 건져주시고 죄의 기억들에서 나를 해방시켜 주시며 그리고 너는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사단의 모든 울부짖음 속에서 나를 보호해 달라고 주님께 매달립니다. 거기서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주님 앞에 서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것이 우리의 능력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그 한없는 십자가 사랑과 은혜 안에 있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은 오늘도 우리 자신의 능력과 공로가 아니라 당신의 아들의 십자가 보혈로 말미암아 당신께 나오도록 부르시는 분임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기도에서 우리들이 걷히는 것이 있을 때마다 우리는 주님 앞에 기억해야 합니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깨끗이 씻겨진 하나님의 자녀다. 그리고 하나님 나를 사랑하시고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다.’라고 말입니다. 이때 이 모든 것을 뿌리치며 주님의 품으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됩니다.
IV. 적용과 결론
우리가 열렬한 기도가 없는 이유는 이렇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경험이 모자라기 때문이고 그리고 무력해지기 때문입니다. 고요히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찢어진 휘장을 지납니다. 그리고 저기 있는 거룩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까지는 우리들이 감히 걸어갈 수 없는 거룩한 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십자가에서 죽은 그 표 보좌에 이르는 새롭고 산 길을 내었고, 우리는 인간의 의의 신발을 모두 벗어버리고 그 보혈을 밟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의지합니다. 소리치던 양심의 송사와 율법의 정죄도 휘장 뒤에서 사라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직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잘한 모든 것을 잊고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그것을 생각하며 믿음으로 그 핏 길을 걸어 보좌 앞에 나아갑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린 아이처럼 그 은혜의 보좌 앞에 엎드려 지존하신 하나님께 용서와 은혜를 빕니다. 그 아들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의 보혈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는 은혜의 보좌에서 일어나셔서 핏 길에 엎드려 우리의 죄를 고백하며 용서를 비는 우리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열렬히 기도하십시오. 그것이 어려울 때마다 모든 것을 뿌리치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을 믿는 여러분 들이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빕니다.
찾는 자를 만나주심 4 (2016.7.3 주일오전설교)
간절히 원하는 것 1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히 6:10-11)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이 편지는 히브리인으로서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이 편지는 사도 바울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설이 유력하기는 하지만 반론도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 편지를 누가 썼는지는 하나님이 아신다고 까지 말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편지는 역사상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용기와 힘을 주었고 특히 복음의 진수가 무엇인지를 맛보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 편지는 사도 바울의 서신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친절한 인사말이 빠져있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 편지가 개인적인 서신이라기보다는 진리의 어떤 내용들을 교인들에게 깨닫기 원해서 쓴 그래서 함께 돌려보기를 기대했던 설교 편지였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아무튼 오늘 이 편지가 쓰여질 때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의 치하에서 박해와 환란을 당하고 있었고 이미 어떤 변화들의 조짐이 보였습니다. 감격하던 복음에서 떠나기 시작했고, 율법으로 돌아가려는 시도들이 있었습니다. 뜨거운 열심으로 함께 모이던 사람들이 흩어지기 시작했고, 예전에 그 뜨거운 열정으로 모이지 않던 때였습니다. 이러한 때에 사도는 인내함으로써 그리스도 예수께 꼭 붙어있도록 강력하게 권면하였고 불씨와 같이 남아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시 한 번 구원의 도리와 신앙의 의무에 대해 상기시켜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앞에는 배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은혜를 많이 받은 것처럼 보이고 하늘의 신령한 은혜의 빛을, 진리의 맛을 본 것 같은데 미끄러져 배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경고한 후에 우리가 어떻게 믿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II. 기억하시는 하나님
그러면서 제일 먼저 기억하시는 하나님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시기 때문에 너희들이 성도를 섬긴 것과 또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불의한 자들의 악을 기억하시는 것처럼 신실한 자들의 섬김을 기억하신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너희 행위와 섬긴 것은 다른 두 가지 사실이 아니라 동격입니다. 너의 행위, 곧 섬김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 섬김의 동기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사랑했기 때문에 성도들을 섬기고 그 일을 위해서 많은 고난을 당했던 것, 영혼들을 목양하기 위해서 자신의 눈물과 땀과 피를 흘리고 그들을 위해 진실하게 수고할 때 당한 모든 고통과 눈물을 기억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 은혜를 안 모든 사람들은 이렇게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영혼들을 섬기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도리인 것입니다. 예전에도 성도들을 섬겼고 지금도 성도들을 섬기고 있는 그 동기는 바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 때문이었고, 그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사로잡았기 때문에 내가 이미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이 있기 때문에 섬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저는 지난 주간에 여러분이 기도해 주셔서 태국 치앙마이에서 우리 교단의 선교사들이 한 가족까지 합해서 한 200여명 모여서 집회를 했습니다. 3일 동안 함께 머물며 새벽과 저녁 시간에 말씀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이 참 많은 은혜를 주셨고, 여러분이 기도 해주시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낮에 쉬는 시간에 앞에 있는 한 1600m정도 되는 산을 올라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차를 타고 한 1500m 쯤 올라갔을 때 그만 가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궁금하지도 않냐? 꼭대기에 뭐가 있는지 올라가보자” 자기네들은 오래 살았지만 여기까지밖에 안 올라왔답니다. 그래서 “더 올라가 보자” 산꼭대기까지 올라갔는데 너무 아름답습니다. 그 다음날 한 번 더 가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차가 이렇게 다니기가 불편할 정도로 좁은 길로 변합니다. “산을 넘어가보자” 아우 거기는 간 적이 없다고 “궁금하지 않냐? 넘어가보자.” 그리고 산을 넘어서 정말 힘든 시골길을 지나서 갔습니다. 1600m에서 1400m 이하로 내려가고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보니까 갈 수는 있는데 길이 매우 험하니까 다시 돌아서 나가라고 했습니다. 그 1600m 산을 넘어서 다시 200m 골짜기로, 골짜기로 들어갔는데 한 30 가구 그 밀림에 모여서 동네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거기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오래전에 이미 그 1600m 밀림에 올라서 거기서 그 풀섶을 헤치고 그 한 30여 가구 사는 동네에 가서 복음을 전해서 거기에 십자가를 세우고 교회를 이룩한 것입니다. 가슴이 숙연해졌습니다. 우리가 짚차를 타고 올라와도 이렇게 장시간 힘든 길을 올라오는데 그 당시에 최근이었다면 오토바이, 그렇지 않으면 달구지, 그렇지 않으면 풀섶을 헤치면서 걸어서 올라왔을 것입니다. 틀림없이 선교사가 세운 교회입니다. 그리고 거기는 몽족이라고 하는 산간 소수 민족들이 사는 곳입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무엇이 그 밀림을 헤치고 사람의 발길도 닿기 힘든 이곳까지 와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고 누군가가 피 흘리고 땀을 흘려 그리스도의 교회를 여기 세우게 하였을까?
(찬양)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네. 주를 보낸 하나님 사랑
그 사랑이 나를 살게 하네. 갈보리의 구속의 사랑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그 선교사들의 마음에 불을 질러 그 사랑에 사로 잡혀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죽음을 무릅쓰고 그 밀림까지 들어와 복음을 전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말을 하는지에 관심을 가지시는 분이 아닙니다. 삶으로 아멘을 말하라, 삶으로 우리의 행위와 곧 우리가 성도를 섬긴 것을 입증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지금도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주님 한분께로부터 받은 사랑 때문에 어느 한 구석에서 눈물을 흘리며 영혼을 섬기고 있는 사람들, 예전에도 기억하셨고 지금도 기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으로 위로를 삼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III. 소망의 풍성함
A. 소망의 풍성함이란
그러면서 사도는 우리가 이렇게 주님을 섬기며 살아야 할 실제적인 이유가 소망의 풍성함에 있다고 제시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소망의 풍성함이란 무엇일까요? 자, 성도의 소망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성도의 소망의 정체는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입어 그 분과 그 분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영광의 소망은 하나님의 나라에 있습니다. 구약의 언어로 설명하자면 아무 희망이 없이 바로의 치하에서 노예 살이를 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애굽을 탈출합니다. 광야에서 많은 고생을 하고 고난을 당하지만 그들에게는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가나안에 들어가서 그들은 안식을 누렸습니다. 육체의 안식과 그리고 영혼의 안식이었습니다.
똑같이 하나님은 신약의 성도들인 우리를 죄악 된 세상에서 마귀에게 사로잡혀서 살던 노예인 우리들을 건져내셨습니다.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를 건져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셨습니다.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시련과 고난을 당하며 우리는 분투하는 믿음의 삶을 삽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침내 모든 우리의 인생의 길을 이기고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하늘나라는 미래에만 가는 나라가 아니라 지금 그 나라를 우리 속에 침투시켜 우리가 이미 그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며 살게 하셨던 것입니다. 예전에 하나님을 모르고 불신자 있던 시절에는 시련과 역경이 우리를 삼키면 우리는 주저앉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 순간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오고 구원의 사랑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고난과 시련 속에서 우리는 기도합니다. 그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공급받습니다. 죄가 있어서 곤고할 때에 우리는 아무 희망이 없었으나 이제 그 십자가의 은혜를 힘입어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경험합니다. 시련과 역경 속에 우리의 영혼이 곤고할 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녹여 사랑으로 우리를 충만하게 채웁니다. 그 소망은 우리에게 현실이 되고 현실적으로 누리는 소망 때문에 우리는 장차 들어갈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에 대한 더 큰 꿈을 꾸게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물을 것입니다. “왜 그런 놀라운 소망, 성도들로 하여금 그 모든 시련과 역경을 이기고 믿음으로 살게 했던 그 놀라운 생명의 소망이 우리에게는 부족하거나 없습니까?”라고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사도바울이 핍박을 받고 있는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께만 붙어 있으라고, 믿음의 주여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라고 촉구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성화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그 믿음으로 살고 그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려고 분투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시련과 역경을 이길 수 있는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 영광이 우리의 마음속에 풍성해지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 소망으로 시련을 이기면서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빕니다.
B. 부지런함을 나타냄
그러면서 사도는 부지런히 살도록 그 부지런함을 나타내도록 우리에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이야기하는 동일한 부지런함이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 의미입니다. 우선 첫째는 이 편지를 받고 있는 어떤 사람은 뜨거운 마음으로 열심히 믿음을 따라서 하나님을 섬기며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앙은 고백하지만 열심이 식어서 그렇게 부지런히 살지는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탁월한 부지런함으로 하나님 앞에 사는 그 사람들처럼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부지런해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각기 여러 모양으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고 부지런함의 정도도 다르지만 그것들은 모두 예수를 중심으로 하는 하모니를 이루어야 한다는 의미에서의 동일한 부지런함입니다. 생애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그리고 놀라운 회심을 체험하며 구원을 경험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거룩한 생활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출발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 붙잡힌 적이 있는 사람들이 또한 그것을 붙잡으려고 달려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만약에 치열한 열심으로 어떤 목표를 가지고 살지 않는다면 그의 구원의 은혜는 보전되기 어렵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이 왜 간절히 능력을 구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신앙의 고백은 우리가 힘이 없고 부족할 때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능력을 주신다고 배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모든 것을 참고 인내하고 견딜 수 있는 힘이 부족하면 은혜를 구하라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왜 열렬히 은혜를 구하지 않습니까? 왜 치열하게 하나님 앞에 능력을 구하지 않습니까? 목표가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너는 오늘 인생을 끝내고 죽어야 되겠다.”라고 말씀하실 때 “조금 더 살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말씀드릴 수 있는 하나님을 위한 가슴 뛰는 사연의 목표가 있습니까? 마치 살기 싫지만 애들 때문에 할 수 없이 사는 부부처럼 그렇게 신앙 생활하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힘이 있습니까? 아무리 많은 설교, 좋은 교재, 쾌적한 환경, 모든 것을 갖춘 교육시설, 그리고 첨단의 프로그램들을 동원한 교육의 제도가 있으면 무엇 합니까? 그들은 모두 도구에 불과합니다. 만약 삶의 목표가 없다면 하나님 앞에 변화되고 새로운 삶을 살아야 되겠다라고 하는 의지적인 결단이 없다면 이 모든 것들은 다 쓸데없는 것입니다. 환자를 살리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이 없는 의사에게 있는 탁월한 의료 기술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죽을 수도 없고 살 수도 없는 삶의 목표가 있습니까? 지금 주님이 여러분을 부르시면 마지막 유언을 남기라고 하신다면 마지막으로 남길 유언이 무엇입니까? 한번 오늘 저녁에 집에 가서 조용히 유서를 한번 써보십시오. OMF 선교사들의 전통이 있습니다. 선교지에 도착하면 그날 밤 등잔 밑에서 유서를 씁니다. 마지막 유언을 남겨봅니다. 내가 왜 사나, 사는 이유가 죽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뭐든지 소원이 있으면 얘기해 보라 할 때에 주님께 말씀드릴 소원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것은 항구적인 영원한 가치가 있는 소원입니까? 살아야 할 삶의 이유와 목표가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야 할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배에 목숨을 겁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습니다. 마치 밭에서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자신의 모든 재산을 팔아서 그 밭을 사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가슴 뛰는 목표, 그것을 이루기 전까지는 눈을 감을 수 없는 그 어떤 목표가 우리에게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장난처럼 살 수 없습니다.
왜 여러분을 구원하셨을까요? 왜 하필이면 이 시대에 태어나게 해서 하나님이 왜 그 수많은 교회 중에서 이 교회로 보내시고 나 같은 사람을 만나게 하셨을까요? 우연일까요? 괜히 일어난 일일까요? 의미가 없을까요? 아닙니다. 은혜를 받으면 뭐합니까? 목표가 없는데 그 은혜가 어떻게 보존이 될까요? 더욱 여러분 주위에서 열렬하고 뜨거운 기도의 은혜를 간직하고 눈물이 있는 삶을 사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불타는 삶의 목표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 가장 쓰레기 같은 인생은 무위도식하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도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 어떤 부를 누리고 무엇을 꿈을 찾아 살든지 여러분이 무위도식하며 하나님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인생은 쓰레기입니다.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사실은 죽은 것입니다. 주님은 여러분을 모두 내려다보시고 그리고 여러분의 중심이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어느 한 구석에서 주님을 섬기며 살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허랑방탕한 마음으로 그냥 교회를 다니고 있는지 하나님은 아십니다.
여러분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입니까? 그리고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은혜를 구하고 하늘의 자원과 이 땅에 있는 자원을 하나님 주시지 않으면 안 되는 어떤 삶의 이유와 목적이 있는지 묻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임무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서 있는 그 사명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교회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그리고 가정에서 여러분이 서 있는 그 자리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없는 그런 절실한 삶의 목적이 있습니까? 이런 목적이 있을 때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하늘의 자원도 이 땅의 자원도 그 사명을 이루는데 쓰여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이 없다면 하늘의 자원은 유지되지 못할 것이고, 땅의 자원은 육체의 정욕을 위하는데 사용되고 말 것입니다.
오늘 핍박을 받고 있는 성도들에게 사도는 소원을 이야기합니다. ‘너희들이 주님을 위해 부지런한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그 어느 한 곳에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그 선교사가 누구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생각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땅 아래서 안락한 삶을 즐길 때 주님을 사랑하는 어떤 사람은 밀림을 헤치고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 말도 통하지 않는 산 속에 있는 그 소수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갔겠지만 십자가는 남아있습니다. 부지런히 무위도식하지 말고 섬기며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그래서 소망의 풍성함을 누리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IV. 기도와 열렬한 삶
마지막으로 여기에서 우리는 기도와 열렬한 삶의 관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가 부지런한 삶을 나타내는 것이다.” 사도는 박해와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에게 간절한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열렬히 기도하게 만들었고,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열렬히 살았던 것처럼 또한 이 편지를 받는 그리스도인들도 낙심하거나 흔들리지 않고 치열하게 살기를 기대하였을 것입니다. 이 성경을 기록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할지라도 어쨌든 그 마음속에 불타고 있는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만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이 편지를 받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치열하게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하늘나라에 그 아름다운 소망은 세상 속에서 치열하게 살아갈 수 있는 현실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기도의 뜨거운 은혜를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십시오. 한 주간동안 기도하셨나요? 무릎을 꿇으셨습니까? 그리고 눈물이 있었습니까? 가슴에 맺히는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시지 않으면 나 같은 인간은 아무 희망이 없다는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 같은 목마름이 있었습니까? 그러한 간절한 기도의 은혜를 간직하며 사는 모든 사람들치고 무위도식하는 사람 없습니다. 뜨거운 기도로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한 사람이 치열하게 살고 치열한 전투적인 삶을 살다가 온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대중 기도할 때 집에서나 가정에서나 또 교구의 작은 모임에서나 구역에서나, 심지어 예배 시간에 대표기도를 할 때에도 항상 하지 말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깊은 패배의 정서에 베인 기도입니다. 마치 일주일동안 이 세상에서 다 실패만 하고 죄만 짓다 온 사람처럼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실이 아니거나 사실이라면 그런 사람은 기도하지 말아야 하고, 사실이 아니라면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자기는 이렇게 신실하게 회개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과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비참한 마음이라면 “내가 공적인 기도를 할 수 있는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고 내려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연약하고 부족하고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시달리며 사는 연약한 죄인이지만 그래도 그 기도 속에서 치열하게 분투하며 살아온 그 무엇이 느껴져야 됩니다. 삶의 고정된 목표가 있고 그 목표를 위해서 마음을 쏟았던 사람들은 기도에 간절함이 있고 그런 기도의 간절함 때문에 승리하며 살아가고자 하는 욕구가 더욱 증진되는 것입니다. 열렬한 기도의 은혜가 좋아하는 환경이 있습니다. 그 좋아하는 환경 안에 있을 때에는 이 기도의 은혜가 오래도록 잘 보존이 됩니다. 그런데 그런 환경이 아닐 때에는 보존이 안 됩니다. 그게 어떤 환경인가? 첫째는 하나님께 고정된 마음입니다. 잘 살수도 있고 못 살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명을 완수했을 수도 있고 하긴 했는데 만족스럽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하나님께 고정된 사람, 성공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을 향하여 눈을 든 사람, 주님을 앙망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 이런 사람들의 마음이 기도의 은혜가 생존하기에 아주 좋은 환경입니다. 그리고 치열하게 역동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간증, 그리고 주님이 내편이시라는 믿음,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이렇게 상을 주시는 분이시라고 하는 체험이 살아있는 마음, 그 안에서 기도의 은혜는 잘 보존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치열한 삶과 열렬한 기도는 마치 수레를 움직이는 두 바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잠시 머물 이 세상이 지나가고 나면 우리가 이르게 될 하나님의 나라의 영원한 안식과 무한한 위로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믿음의 달려갈 길을 달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V. 적용과 결론
어차피 우리의 인생은 우리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모든 여건에도 불구하고 꺾을 수 없는 우리의 삶의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길 따라 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나의 가는 그 길에 동의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나의 그 삶에 감동을 받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나를 싫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세상에 있는 사람에게 사랑을 받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아닙니다. 더욱이 진리를 굳게 붙들고 신앙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지 설탕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렇게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고유한 소명을 붙들고 믿음으로 분투하며 살아간다면 세상에서는 오해를 받고 또 외톨이가 될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여러분이 진리 편에 서 있는 한 하나님은 항상 여러분 가까이 계십니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는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하늘의 은혜와 능력을 받습니다. 칼과 죽음의 박해가 현실화되고 있던 이때에 많은 변절자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그들은 육신을 사랑할 위험에 놓여있었습니다. 예수의 복음이 흐려지고 치열한 열심으로 모이려고 하는 뜨거운 마음들이 식어가고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의 피가 사라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때 사도는 이렇게 공평하신 하나님을 상기시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하나님 한분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임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한번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셨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를 다 드리시며 그렇게 연약한 육신으로 사람들을 섬기고 이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던 그리스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천상의 소망이 이 땅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의 소망이 예수님 마음에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꽃처럼 사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차피 우리의 인생은 잠시 태어났다가 들풀에 맺힌 이슬처럼 사라지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의 가치는 우리가 무엇을 추구하고 살았느냐 하는데 있는 것이지 우리가 무엇을 얼마나 누리고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오늘 말씀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에는 간절히 바라시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부지런히 소망을 품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오늘 여러분의 마음에 간절히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는 여러분이 이것을 발견하기를 원합니다. 거기에서 인생의 목적을 다시 한 번 되찾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잠시 있다 사라질 썩은 것들을 추구하며 살기보다는 오히려 이런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랑을 품고 주님 앞에서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찾는 자를 만나주심 5 (2016.7.10 주일오전설교)
간절히 원하는 것 2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히 6:12)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성도가 미래의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풍성한 소망 가운데 사는 것은 그가 성화되는 정도에 달린 것입니다. 아무리 생애적인 감격 속에서 예수님을 만났어도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고는 이런 소망의 풍성함을 유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참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오래전에 예수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충만한 은혜 생활을 하면 2000년 전에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그리스도, 우리가 회심하였을 때에 감격했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오늘 우리의 마음속에 재현됩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의 은혜가 마치 오늘 우리 앞에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시는 것처럼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현재적인 십자가의 경험 안에서 모든 신자의 아름다운 삶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마음으로 우리 성도들이 하늘나라의 가치를 따라 살아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감격은 곧 미래의 우리들이 들어갈 하나님의 나라의 풍성한 소망이 우리의 마음에 불타도록 만들어 줍니다. 오늘 성경은 지난주에 이어서 주님이 우리에게 간절히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소망의 풍성함 속에서 시련과 고난을 이기고 믿음의 삶을 살았던 한 인물로서 아브라함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13절 이하에는 아브라함에 대한 긴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II. 믿음을 본받는 생활
그러면 우리 성도들을 향해서 주님이 간절히 원하시는 바가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그런 선조들의 믿음을 본받는 생활입니다. 우리는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을 하거나 심지어는 글을 쓸 때에도 어떤 본보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그림을 잘 그린 사람을 본받아 그리려고 애를 쓰고. 또 조각을 어떤 사람이 한 훌륭한 작품에 감명을 받으며 자신도 그런 작품을 만들어 보려고 애를 쓰는 가운데 훌륭한 예술 작품이 탄생하게 됩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어린 자녀들이 훌륭한 인생을 살게 되기를 원한다면 세 가지 해야 할 일이 있는데 첫째는 신앙을 갖게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들이 흠모하는 위인들의 전기를 읽게 하십시오. 그리고 세 번째는 여러분이 아이가 살아야 할 훌륭한 삶의 모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보고 믿음 생활을 하라고 말하면서 훌륭한 믿음의 위인들과 증인들에 대해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을 잊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그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으라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살았더니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모든 복을 누리는 사람이 되었던 것처럼 그렇게 너희는 믿음을 본받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A. 게으르지 않음
그리고 그 생활을 크게 세 가지로 제시합니다. 첫째는 게으르지 않는 것입니다. 게으름이라고 하는 것은 마땅히 하여야 할 의무를 회피하거나 태만히 하는 마음과 정신의 안일함을 가리킵니다. 이 게으름이 육체에 속한 것이라면 이 게으른 삶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영혼이 하나님에게 싫증이 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게으름은 그릇된 자기 사랑인데 왜냐하면 무엇인가를 부지런히 하기 위해서는 많은 희생과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게으른 삶을 사는 이유는 우리 성품이 나태하기 때문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소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인가 이루어야 할 분명한 목표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태만하고 게으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배만 생각해 봐도 그렇습니다. 오늘 들어오시면서 예배에 관한 많은 표어가 붙어 있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러 나아올 때에 이 예배에서 우리 주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겠다, 이 예배를 통해서 내가 주님을 만나고 오늘 하루, 일주일을 살아갈 힘을 공급 받아야 되겠다는 목표에 불타는 사람은 그렇게 태만하게 민방위 교육 받는 것처럼 예배드릴 수 없습니다. 모든 태만은 목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냥 하루하루 살아갈 뿐이고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어떤 분명한 목표가 있어서라기보다는 그저 늘 해오는 일이고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참된 회심은 잃어버렸던 인생의 분명한 목표로 돌아가게 만들고, 올바른 목표를 가지고 있으면 그 목표가 이루어지지 못했을 때에 아쉽고 섭섭한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마음속에 뜨거운 열망의 불꽃이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게으르지 않는 것, 이것은 바로 무위도식하지 않는 삶입니다.
한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마땅히 서 있어야 할 부르심의 자리가 어디입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오늘 이렇게 예배를 통해 주님을 만나고 은혜를 주신다면 그 자원을 어디에다가 쓰시겠습니까? 어떤 분들은 생각할지 모릅니다. 저 무위도식이라는 이야기 한동안 안하시더니 요즘 왜 다시 포문을 열고 계속할까? 그리고 언제까지 계속할까? 여러분 가운데 무위도식하는 사람이 없을 때까지 계속할 것입니다. 왜 노십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말할 것입니다. “목사님 제가 얼마나 바쁘게 한 주간을 보내는데 논다고 말씀하십니까?” 그러나 성경적으로는 마땅히 해야 할 일에 목표를 가지고 살지 않는 모든 것이 노는 것입니다. ‘일락을 좋아하는 자는 죽은 자라’고 할 때에 그 일락은 그냥 쾌락을 좇는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해 부르심의 불타는 목표가 없이 살아가는 바쁘고 고단한 모든 삶을 총칭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목표가 무엇입니까? 왜 여러분을 사람으로 지으셨을까요? 그리고 그 사람들 중에 왜 여러분을 구원하셨을까요?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우리를 위한 속죄의 제물이 되시기 위해서도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야 했지만 또한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도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 분이 보여주신 삶은 부지런한 삶이었습니다.
여러분은 복음서의 기록 속에서 태만한 예수님의 삶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게으르고 나태한 사람에게는 정욕이 친구이고 하나님을 향해 거룩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부지런하게 살아가지 않을 수 없는 마음의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위도식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에게 주신 인생인데 우리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서 구원하신 단 한번밖에 없는 인생이 아닙니까? 회심하기 전 그 긴 시간들, 보석같이 소중한 시간들을 우리 주님 몰랐기 때문에 우리의 삶의 목표가 없었고 목표가 있었어도 그것은 빗나간 목표였습니다. 그런 목표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붓고 어리석지 그지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주님을 몰랐기 때문에 그렇게 산 시간도 너무 아깝고 억울한데 이제는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고, 우리가 왜 사람으로 태어났는지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주님이 왜 우리를 구원하셔서 그리스도의 교회에 한 지체로 삼으시고 우리 각자 각자를 왜 그리스도의 교회의 한 모퉁이에 두셨는지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게으르지 않도록 열심을 품고 주님을 섬기도록 요청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에게 무엇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그렇게 살아야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고 우리도 행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치열하게 섬기고 불타는 인생의 목표를 가지고 늘 그 일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초개처럼 불사르며 살았던 모든 사람들이 마지막 눈을 감을 때 “우리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나는 참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냥 추상적으로 무위도식하지 말라 이런 이야기만 듣지 말고 돈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고 누구에게 받을 칭찬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거 말고 ‘하나님 한분 앞에서 이 일을 하면 하나님이 좋아하시고 나는 좀 힘들겠지만 다른 사람은 행복해지겠구나.’ 그런 의미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찾고, 그 일을 자신의 매우 중요한 일로 여기고 그 일을 마음에 품으십시오. 그리고 봉사하십시오. 왜 놉니까? 주일날 예배드리는 3200명 혹은 3300명 되는 청장년들 가운데 절반 이상은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습니다. 남이 깨끗이 닦아놓은 예배당의 통로를 밟고 들어와서 예배를 드리고 어지럽히고 가면 다른 사람이 섬기면서 깨끗이 치워놓은 예배당에 와서 그 다음 주일날 섬김을 받습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고 뚜벅뚜벅 걸어 나가면서 어느 한 구석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있나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이 한편의 설교를 여러분에게 하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이 쓴 책을 저는 읽었고, 가깝게는 연구하고 자료를 찾는 일에 봉사하는 직원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그러면서 저는 성장해 왔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만난 많은 사람들이 쓴 신앙의 책들과 많은 지식들이 있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고 여러분보다 훨씬 무지했던 사람이 여러분을 가르치는 자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지나가면서 심심해서 켜보는 아이폰 혹은 스마트폰에 열린 교회 어플을 보면서 ‘그냥 들어오는 거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설교를 하고 밤늦게까지 설교를 가공하고, 그리고 그것을 편집하고, 자막을 달고, 옮기고, 그것을 녹취하고, 녹취한 것을 다시 정서하고, 교정한 것을 다시 출판하고, 출판한 것을 배포하고, 그것을 여러분에게 가르치는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어린 손길들이 엮어지고 이어져서 여러분에게 혜택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묻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기여하셨습니까? 일주일에 한번 와서 얼마간 헌금하는 것 모든 사람이 다 하는 일입니다. 그것으로 생색을 내셔서는 안 됩니다. 혹시 그 금액이 매우 많더라도 그것이 여러분의 마음을 모두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섬기십시오. 어느 곳에서든지 여기가 물러설 수 없는 나의 자리라 생각하고 목표가 주어졌을 때 게으르지 않을 이유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무위도식한다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들으며 살겠습니까? 저 같으면 빗자루라도 들고 30분 일찍 와서 골목이라고 쓸겠습니까? 아무나 붙들고 내가 섬기기를 원하니 나에게 무위도식하지 않고 살고 싶으니 나에게 섬길 일을 주십시오. 넘치도록 많은 일들이 교회와 교회 밖에 존재합니다.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히 사는 것이 여러분을 향한 주님의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일생을 사시며 게으르지 않으시고 잠자는 시간을 쪼개시고 식사하는 시간을 거르시면서 그러며 병들고 약하고 무지하고 고통 받는 자들을 섬기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생애에서 티끌만큼도 게으름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런 주님의 부지런한 섬김으로 여러분이 은덕을 입었으니 이제 주님의 그 십자가의 사랑에 깊이 감동을 받고 주님을 위해 게으르지 않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믿음
두 번째는 믿음의 생활입니다. 이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선하신 하나님께 대한 인격적인 신뢰입니다. 그 선하신 인격을 굳게 믿음으로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어떠한 처지에서도 주님이 자신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주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열매는 실제로 순종하는 생활입니다. 그리고 그 분께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데서 오는 평안과 행복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종종 우리를 비난하는 사람도 만나고 칭찬하는 사람도 만납니다. 아무도 그런 사람이 없다면 그 사람은 존재감이 없는 사람입니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내가 걸어가는 인생길 내가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삶의 태도에 대해 목표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그 모든 것들에 삶이 뿌리째 뒤흔들리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이외에 우리가 얻을 것도 없고 잃어버릴 것도 없고 우리가 변명해야 할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구름 같고, 아침에 퍼지는 햇살에 흔들리는 풀잎 끝에 매달린 이슬과 같습니다. 언제 우리의 일생이 끝날지 우리의 삶이 막을 내릴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 때문에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매일매일 그 분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절대 안 해 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미래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선지자가 있지 않느냐고 말하는데 성경 기록을 찾아보십시오. 선지자가 미래에 될 일에 대해서 예언한 것이 그의 모든 가르침의 몇 분의 일쯤 될까요? 혹시 보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아주 적은 파편적인 일부분이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미래는 비밀로 남아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만약에 미래에 대해서 하나님이 보여주신다면 믿음이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미래에 일어날 일이 성공적이고 행복한 것이라면 이미 그것이 결정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더 의지할 필요가 없습니다. 불행하고 우울한 것이면 이미 그렇게 결정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기 때문에 그 분을 의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은 주셨지만 미래에 이루어질 위대한 하나님의 나라의 전망은 주셨지만 그래서 소망을 품고 살게 하셨지만 그렇지만 내일 다음 주, 그 다음 달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비밀에 부치셨습니다.
저는 30년 전에는 그 10년 후인 20년 전이 궁금했고, 20년 전에는 10년 후가 너무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10년 전에는 10년 후에 내가 어디에 있을까? 그리고 어떤 모습으로 있을까? 그것이 매우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그냥 막연히 예측할 뿐이지 아무것도 알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10년 전에 궁금해 했던 오늘이 바로 이 모습일 줄은 저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10년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궁금하지만 모르고, 이 세상을 떠나는 많은 사람들이 죽기 일주일 전에도 자신의 사망의 날짜를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안개 속을 지나는 것처럼 모든 것이 불명확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 때문에 두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주님을 우리들이 믿고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손녀를 데리고 놉니다. 내가 이제 안아줍니다. 좋아합니다. 막 웃습니다. 공중으로 던져버립니다. 그래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할아버지가 자기를 공중으로 던진 다음에 떨어뜨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두 번만 떨어뜨리면 절대 안하려고 할 것입니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습니다. 던지고 안고 그리고 하늘 높이 흔들어도 꺄르르, 꺄르르 웃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는 할아버지를 온전히 신뢰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공중에 던지는 것 같아도 자기를 꼭 붙들고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티끌만큼도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책상 모서리 끝에 세워놓고 오라고 부릅니다. 처음엔 주저하지만 안깁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 학습이 된 다음에는 얘가 겁 없이 허공에서 몸을 던집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받아줄 것을 믿고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우리에게 하나님이 없다면 그 분을 향한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얼마나 불쌍할까요? 다른 사람들처럼 운명을 신봉하거나 혹은 점집을 찾아다니며 미래에 내 인생이 어떻게 될지 궁금증을 풀고 불안감을 해소하게 될 것입니다. 평소 같았으면 결코 존경하지 않았을 그 이상하게 차려 입은 교양 없는 점쟁이 앞에서 반말지거리를 들으면서도 머리를 조아리고 있지 않을까요? 이 모든 것은 속박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우리에게 해방을 가져다줍니다. 왜냐하면 좋으신 주님이 우리에게 선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그냥 아무거나 자기 좋은 대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대한 신뢰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다”라고 말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 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라고 말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는 기라성 같은 믿음의 위인들이 수없이 등장합니다. 그 중에서 유독 아브라함에 대해서 아주 긴 분량을 할애해서 그 믿음을 칭찬합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아브라함이 만약에 이런 믿음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오늘 아브라함에 대해서 기릴 이유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방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태어나 우상이나 섬기다가 그저 티끌처럼 사라졌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죽었으나 지금도 말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믿음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라고 말씀하셨고, 하나님은 당신보다 더 큰 분이 없기 때문에 당신 자신을 가리켜 맹세하시기를 내가 너를 복주고 많은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거기가 어디인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어린 아이처럼 의지하며 평생에 자신의 살과 뼈처럼 결탁되었던 아비 친척 그리고 고국을 떠나 알지 못하는 그 약속의 땅을 향해 여행을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무엇이 이것을 가능하게 했을까요? 믿음입니다. 어린 아이처럼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 그것이 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약속의 첫걸음을 디뎠을 때 항상 활짝 길이 열려서 가마를 타고 포장된 도로를 걸어가는 것 같은 왕의 행차였습니까? 아닙니다. 많은 역경과 시련의 길이 앞에 펼쳐졌고, 그래서 그는 일생을 사는 동안 이방인들의 땅에서 나그네로라 일컬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한 번도 자기가 떠나온 고향을 그리워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더 나은 본향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찬양)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인도 하소서
어린아이같이 그 분의 손을 꼭 잡고 어디든지 그 분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 분은 여러분을 결코 버리지 아니하시고 악으로 이끌지 않는 분이시니 그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C. 오래 참음
마지막 세 번째는 오래 참음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고 말입니다. 믿음은 종교의 자판기에 넣는 동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믿음이라고 하는 심리 행위를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 속에 담겨진 그 사람의 사람됨, 믿음을 가진 그 사람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신자의 인격 안에서의 믿음은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음은 반드시 행위를 낳게 되어 있습니다. 엄마가 아이를 가졌을 때 아이가 속에서 생명을 가지고 성장하는 한 그는 반드시 태어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안에 있는 이 믿음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고 우리의 심령을 주께 바치게 하는 믿음이라면 그것은 반드시 행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는 믿음이 한번밖에 없는 믿음이라면 그 믿음이 우리 안에서 계속 불러 일으켜지는 것은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 안에 이러한 믿음을 불러일으키실 때 하나님은 아무것도 없이 우리의 믿음이 불러 일으켜지도록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고 교제를 통하여 이런 믿음을 불러일으키십니다. 하나님께 이런 은혜의 수단들을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믿음을 불러일으키실 때 우리의 마음은 뜨거워지고 하나님을 온전히 어린 아이처럼 의지하며 살고자 하는 결단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랑의 또 다른 측면입니다. 신뢰하지 않는 것은 사랑일 수 없고 사랑하면 반드시 의지하게 되어 있습니다.
많은 시련 앞에서 이 믿음은 견딤을 통해서 성장하게 되고 그러한 견디는 것이 가능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사랑이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다이아몬드라면 그 다이아몬드에는 여러 면들이 있는데 그 면들 중 중요한 세 면이 있습니다. 그게 긍휼, 자비, 오래 참음입니다. 두 사람이 서로 사랑을 하는데 갈등이 생깁니다. 그리고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때에 “됐어. 이제 그만 끝내.”라고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사랑하지 않거나 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만약에 그 사람이 돈을 목표로 또 다른 사람에게 접근했다면 그렇게 말하기 매우 쉬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관계에서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때로는 약자입니다. 왜냐하면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관계를 유지하는 데서 겪는 고통을 견디는 것이 그 사람을 잃어버리고 홀로 있는 괴로움을 겪는 것보다는 훨씬 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약자처럼 사셨습니다. 근본 하나님의 본체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고 하나님이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되심을 인간의 연약한 육체 아래 감추셨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을 어린아이처럼 의지하며 우리를 향한 큰 사랑 때문에 인간이 핍박하면 핍박을 당하셨고, 괴롭히면 괴로움을 겪으셨고, 그리고 모욕과 멸시를 받으면 기꺼이 당하시면서 까지 우리 인간을 버리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당신이 그렇게 종처럼 섬기셨던 당신의 생애 마지막에 당신 자신을 화목 제물로 온전히 주심으로 우리를 위한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의 생애는 오래 참음의 생애였습니다.
무위도식하는 사람들은 사랑하는 목표가 없기 때문에 오래 참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여기서 싫증나면 저리로, 이 일에서 싫증이 나면 또 다른 곳으로 자기의 즐거움을 따라 끊임없이 옮겨갈 뿐입니다. 괴로운 고통, 의미 있는 목표가 없다면 그 어찌 살아있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오래 참으셨습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며 제가 무신론자로 살았던 때를 회상했습니다. 정말 그렇게 내가 누구인지 세상이 무엇인지 신이 존재하는지를 물으며 논둑에서 통곡을 하고 무신론자로 전향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되는 한 7년 동안의 기간이긴 했지만 표독스럽게 주님을 모욕하며 인생을 살았습니다. 세상에 생각 없는 인간들은 종교를 가진 인간들이고 그 종교인들 중에서 제일 역겹고 미련한 인간들이 예수쟁이들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무신론자이면서도 담배를 피우며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읽으면서 말이 안 되는 부분을 찾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비교적 열심히 교회를 다니는 사람도 서너 시간 나를 만나서 대화를 하면 매우 슬픈 기색으로 돌아가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아침에도 그 지난날을 생각하며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렇게 표독스럽게 주님을 모욕하고 그리고 주님께 반항하던 인간이었는데 주님이 그 악한 불신앙의 결과대로 즉시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한 바와 같이 하나님은 하늘에서 빙긋이 웃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네가 그렇게 표독스럽게 모욕하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나의 그릇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섭리 속에 저는 굴복하고 주님께로 돌아오게 되었으니 이는 주님이 저를 향해 오래 참으시는 그 자비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저 같은 사람에게만 오래 참으셨겠습니까? 저같이 죄인 중의 괴수와 같은 사람에게 오래 참으셨다면 여러분을 향해서는 주님이 얼마나 오래 참으셨겠습니까? 주님은 하나님의 그 큰 사랑과 넓은 은혜, 그리고 주님의 가슴 저미는 사랑을 알지 못할 때에도 오래 참으십니다. 오늘 여러분이 무위도식하고 삶의 분명한 목표가 없고 그렇게 살아도 하나님은 참으십니다. 당신 앞에 충성스러운 삶을 살았던 믿음의 위인들 중 무위도식하지 않았던 사람이 거의 없고,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들을 변화시켜서 불꽃처럼 당신을 섬기는 주의 종이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름 석 자가 주님의 마음의 보석 같은 그리움이 되었다면 그래서 그 사랑 때문에 우리가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면, 이제 그렇게 큰 구원을 받은 우리의 마음속에 이젠 주님을 향해 우리의 마음에 빛나는 그 무엇을 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그것이 아니면 우리의 인생의 가치를 발견할 수 없고 그것을 위해서 살지 않고는 베길 수 없게 하는 그 어떤 가슴의 불을 품고 사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거룩한 신앙의 목표와 가치를 소유하고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주님을 섬기면서 사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III. 적용과 결론
사도와 그의 동역자들을 통해 보여주신 주님의 소원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게으르지 않고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오래 참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가 같은 소망을 품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부지런하게 살 뿐만 아니라 나태하게 사는 모든 지체들을 바라보며 안타까워하고 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참 사랑 속으로 돌아오도록 절실하게 바라는 그런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게으르지 말고 믿음으로 오래 참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살아야 할 삶의 분명한 목표를 갖고 주님을 간절히 찾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찾는 자를 만나주심 6 (2016.7.17 주일오전설교)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새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맹인들이 그에게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마 9:27-29)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산상수훈이 끝난 이후 8장부터 병자를 고친 기록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기적의 치료는 하나님의 이적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그 이적 속에 담겨있는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들어있는 이 문맥에는 중풍병자를 고치시고 혈루병 걸린 자를 치료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맹인들의 눈을 뜨게 하시고 벙어리들을 다시 말하게 하시는 기적적인 치유의 기록들이 담겨있습니다. 이것은 이 기적을 바라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이 이미 임하였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이적적인 역사 표면 아래에 깔려 있는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맹인이었던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어제나 주님을 만나는 그 날 눈먼 자가 된 사람들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아주 오래전에 어쩌면 태어나면서부터 앞을 볼 수 없었던 이 맹인들이 예수님의 능력으로 눈을 뜨고 다시 세상을 보게 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이것은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하였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볼 수 있도록 주님이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바로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였구나,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고 인간을 비참에서 건져내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이 나타내는 시간이 되었구나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온 나라입니다. 그래서 자신들도 바로 그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를 받으며 하나님의 귀한 능력으로 고침을 받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는 수혜자가 될 것이라는 신앙을 갖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산상수훈이 끝난 후 수많은 병 고침의 기적적인 장면들 나타나지만 항상 거기에는 그 하나님의 은혜로 온 그 나라를 받아들이는 인간의 한 반응이 등장합니다. 그것이 바로 faith 믿음입니다.
II. 믿음을 기뻐하심
예수그리스도께서 바로 이 두 맹인의 믿음을 기뻐하셨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곳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고 이들이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맹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내가 능히 이 일을 할 줄을 믿느냐” 대답했습니다. “주여 그러하외이다.” 구약 성경에서는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구약만 알아서는 파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전체적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진실한 경외를 요구하지만 그 경외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그 하나님을 경외하게 됐는지에 대한 명료한 설명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약 성경만을 주셨다면 아마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런 확고한 개신교의 구원 신앙을 갖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성경에 와서는 아주 명료하게 나타납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예수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그의 지상 생애를 통하여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셨고,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이심을 나타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그 큰 능력과 권능은 바로 이 세상의 인간들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자비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받는다는 것,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 속죄의 사역을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구원을 얻는다는 것, 그렇게 구원을 얻은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미래의 약속으로 주어질 뿐 아니라 믿는 그 순간 하나님의 통치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놀라운 기적들을 행하신 것입니다.
A. 메시아에 대해
자, 그러면 도대체 이 맹인이 우리 주님을 기쁘시게 했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을까요? 성경은 오늘 아주 명료하게 세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메시아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모든 사람들에게 섞여 있으면서 예수께서 충분히 자신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소리를 지으며 이르기를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외쳤습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특히 다윗 왕국이 세워진 이후 소위 신자 사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상입니다. 그것은 바로 다윗의 자손 중에서 메시야가 나와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의로 통치할 것이라고 하는 약속이었습니다. 이것을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세상의 다윗 왕국이 영원히 번영하는 나라가 될 것이라는 육적인 약속으로 오해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말씀을 이스라엘에게 주셨을 때에는 구약에서 육적인 이스라엘 왕국이라는 껍질이 깨어지고 신약 시대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루어질 것인데 그 교회를 바로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그리스도가 영적으로 통치하셔서 이제는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닌 하나님에게 속한 나라로서 번영할 것임을 예고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들을 포함해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기다리고는 있었지만 그 사람이 와서 신약의 구속주가 되어서 우리가 아는 그리스도가 되실 것이라는 사상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신이 아닌 아주 탁월한 인간이 이 세상에 와서 그래서 용기와 지혜로 이스라엘 나라를 다시 아주 강력한 지상 왕국으로 재건하여 식민지 지배를 받던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해 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다스리는 나라가 되면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입으며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분명히 이 두 맹인이 가지고 있었던 믿음은 오늘 우리가 믿는 신약의 구속 주에 대한 신앙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자신들을 다스려 주실 메시야라는 사실을 굳게 믿었습니다. 비록 모자라는 지식이었으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런 권세를 가지고 계시고 자신들이 오랜 세월동안 아니면 일생동안 운명처럼 지고 살았던 앞을 보지 못하는 이 비참한 상태에서 눈을 뜨게 해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메시야의 신앙으로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쳤습니다. 나사렛의 한 목수의 아들이 아니라 다윗의 자손으로 자신들을 구원해 줄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에 주님의 마음을 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 한번 보십시오. 만약에 이 어리석은 맹인들이 그렇게 불완전한 지식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구원을 기대하며 자신의 눈먼 것을 고쳐달라고 주님의 이름을 불렀을 때에 예수님이 기뻐하셨다면 보다 더 분명한 복음의 지식을 가진 우리들에게 주님이 기대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 분이 구주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전에는 내가 나를 주인으로 삼고 나의 가르침을 따라서 인생길을 살아갔는데 어느 한 순간에 그것이 비참한 인생의 원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나 자신에게 종노릇하지 않기로 다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 전체를 그리스도의 주되심 앞에 내려놓습니다. “나는 내 인생을 살아가지만 나를 스스로 지도하고 나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주여 내가 당신을 의지합니다. 나를 이끌어 주옵소서. 내가 당신을 믿고 순종으로 따르겠습니다. 아멘.” 이게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인생에 있어서 모든 갈등과 고민은 바로 그렇게 주님 앞에 자기를 내려놓는 과거와 사실은 그렇게 살지 않으려고 변심하는 자신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그 분이 우리의 메시야라고 하는 신앙입니다. 그 분이 우리를 구해주셨고 우리를 구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죄 없는 당신의 몸을 못 박으셨으며 지금도 우리를 삶의 어떠한 도탄에서도 건져내실 수 있다고 하는 이 구원 신앙에 대한 믿음, 여러분이 이것을 가지실 때에 주님이 그 믿음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B. 긍휼함에 대해
두 번째는 긍휼함을 믿은 신앙이었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말은 누가 하는 말입니까? 거지들이 동냥을 얻을 때에 즐겨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Have a pity on me.’ ‘나에 대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주시옵소서’ 어렸을 때 기억이 또렷이 납니다. 장애인들을 국가가 보호해 줄 능력이 없었습니다. 어렸을 때 제일 무서웠던 기억은 전쟁 통에 팔과 다리를 잃어버린 상이군인들이 동네에 와서 행패를 부리는 모습이었습니다. 손에 갈고리를 한 사람들 그리고 목발을 짚은 사람들이 와서 돈을 달라고 요구하고 수틀리면 가게의 유리창을 부수고 간판을 발로 차고 그랬습니다. 무서웠습니다. 더욱이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은 그 모든 장애를 가진 사람들 중에서 제일 멸시를 받았습니다. 아주 또렷이 기억이 납니다. 그런 상이군인들이 와서 행패를 부리면 무서워서 돈을 주었는데 맹인이 와서 구걸을 합니다. 대게 아침 시간에 많이 옵니다. 밤새도록 배고프다가 한 10시쯤 되면 와서 도와 달라고 그럽니다. 아주 또렷이 기억이 납니다. 안된다고 타박을 하면 힘없이 돌아가는 그 뒤에다가 굵은 소금을 뿌리면서 재수 없다고 그러던 기억들이 또렷합니다.
여러분 중에 아무도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없을 것입니다. 한번 본문 속으로 들어가서 이 두 사람의 맹인들이 일생동안 받았을 천대와 멸시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것을 경험하며 살았습니다. 지금 오늘 그리스도 예수께 나아와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라고 간절히 호소하고 있는 그것은 역설적으로 ‘주여 우리는 일생동안 눈먼 자로 살았지만 아무도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는 사람이 없었나이다’ 라는 고백입니다. 거기에서 오는 철저한 소외와 멸시, 그 경험이 두 사람들을 단단히 묶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긍휼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는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예수그리스도는 나를 긍휼히 여길 것이다 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렇게 힘들고 긴 인생을 살아오는 동안 나의 잘못된 인간성에 대해서 지적질하고 그리고 내 앞에 와서 자기를 자랑하고 나를 이용한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 내 이름 석 자 그 자체를 가슴이 무너질 정도로 불쌍히 여겼던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전 별로 없습니다. 제 기억이 그럽니다. 그래서 전 하늘나라에 가도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 별로 없습니다. 어거스틴하고 우리 할머니 정도나 만나고 싶을까? 지상에서 별로 좋은 기억이 없는데 뭘 거기 가서 또 만나서 그 기억을 재현을 하겠습니까? 상한 갈대처럼 꺼져가는 등불의 심지처럼 불쌍히 여겨주는 이 없이 그냥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한번 가슴 깊이 손을 얹고 여러분이 살아오면서 그냥 여러분이 여러분이라는 이유 때문에 한없이 불쌍히 여겨준 사람, 이름 석 자가 가엾음이 되었던 사람 그렇게 여겨줬던 사람이 여러분 누가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부모로부터도 그런 가엾이 여김을 받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또 반대로 우리는 누구를 그렇게 여긴 적이 있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있을 것입니다. 많지는 않지만 그 사람이 내게 무엇을 했든지 때로는 어떻게 내 기대에 어긋났던지 혹은 어떻게 내 마음을 아프게 했든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운명처럼 사랑에 매여 그 사랑이 아가페의 사랑이든 혹은 에로스의 사랑이든지 간에 그 이름 석 자가 헤어질 수 없는 마음의 그리움이 되어 나 자신을 다 불사르게 내어줘도 ‘그가 평안하고 행복할 수 있다면 충분합니다.’ 라고 가슴이 먹먹할 정도로 불쌍히 여긴 사람 얼마나 될까요?
(찬양)
이 곳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임하셨네
주의 얼굴 구할 때 역사 하소서
대부분의 많은 사람은 자기를 그렇게 불쌍히 여긴 사람도 없고 자신도 그렇게 불쌍히 여기는 사람도 없이 인생을 끝냅니다. 자 여러분 지난주에 말씀드렸습니다. 무엇이 9시간, 10시간 걸어서 혹은 수레를 타고 계곡을 지나고 산을 넘어야 갈 수 있는 그 1500~1600m 의 깊은 산 속에 찾아가서 그들과 함께 살고 복음을 전하고 교회가 세워지게 했을까? 우리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바로 이 사랑을 발견한 사람들입니다. 이 긍휼이 무어냐 그러면 사랑입니다. 그러면 사랑하고 긍휼하고 뭐가 다르냐? 다른 게 아니라 이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다이아몬드가 있습니다. 다이아몬드는 세 가지 조건이 좌우합니다. clear, cut, carat 투명하고, 잘 깎고, 세 번째로 얼마나 크냐에 의해서 좌우 됩니다. 면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의 다이아몬드는 여러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 면을 가지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세 가지 면이 자비, 오래 참음, 긍휼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께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서느냐에 의해서 하나님 사랑의 특성이 자비로, 오래 참음으로, 긍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자비는 슬픔 섞인 사랑입니다. 너무 사랑하면 항상 그 사랑에는 슬픔이 동반합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사랑할 때 슬퍼진 경험이 없는 사람은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그게 자비입니다. 오래 참음은 반역을 하고 그 사랑을 배반한 사람들이 언제나 경험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한 면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인생의 마지막 길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이렇게 말합니다. 핍박자요 포행자인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나에게 직분을 맡기셨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일체의 오래 참으심으로 내게 보여주신 사랑 때문이었다고 말입니다. 긍휼은 바로 죄로 말미암아 비참해진 상태에 대한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자, 예를 들어봅시다. 여러분이 자녀가 있습니다. 정말 못된 짓을 했습니다. 그래서 하여튼 돌아오기만 하면 혼을 내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초등학생 정도 됩니다. 그래서 집에 들어온 녀석을 몽둥이를 들고 ‘너 이놈의 자식, 너 이런 짓을 했지’ 그러고 막 때리려고 했는데 얘가 도망을 쳤습니다. 그러다가 문에 이 쇠에 딱 부딪혀서 이게 확 찢어지면서 피가 낭자하게 흐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때 그 아이를 보면서 도망치더니 싸다 그렇게 말할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순간적으로 그 애가 잘못한 것, 그리고 그 애가 도망친 것, 그리고 부모를 속인 것, 모두 잊어버립니다. 왜냐하면 피가 낭자하게 흐르면서 앞의 티셔츠를 다 적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얘가 잘했냐, 잘못했냐 하는 모든 생각이 다 끊어져 버리고 아 얼마나 아플까? 큰일 났구나 그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긍휼입니다. 그게 사랑이 가진 한 면입니다.
그런데 저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나서 그렇게 사랑 받고 싶지만 우리를 향해서 이렇게 눈물이 흐를 정도로 내가 왜 이렇게 비참해졌는지에 대한 이유를 찾으려고 하지 않고 나의 비참해진 이 상태 때문에 정말 가엾게 여기는 사람을 우리는 얼마나 만났을까? 그런데 우리 주님이 바로 이런 긍휼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사시는 동안 예수님이 웃으셨다는 기록은 별로 안 나옵니다. 그런데 우셨다는 기록은 세 번이나 나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어떤 주석가는 말했습니다. 왜 안 웃으셨을까? 웃을 일이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이 못 마땅해서가 아니라 구원받지 못한 체 살아가는 인류에 대한 슬픔이 압도하였기 때문에 어떠한 좋은 일도 예수님을 웃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애 전체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신 생애였습니다. 아무도 우리를 그렇게 가엾이 여긴 사람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조금 잘못해서 넘어지면 와서 구둣발로 밟아버리고 땅속에 묻어버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넘어진 자들을 일으켜 세우시고 꺼져가는 심지의 불꽃을 끄지 않으시고 꺾어진 상한 갈대를 부러뜨리지 않는 주님이십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이 사랑을 경험했기 때문에 그 분의 품을 떠날 수가 없었고, 그 분께 의지하며 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 맹인들이 예수님을 많이 만나고 깊은 교제를 가졌던 사람들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어디에선가 풍문처럼 예수의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매우 적은 크기의 정보에 불과했지만 그러나 그들은 그 정보에 자신의 온 마음을 걸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이외에는 다른 곳에 인생의 희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주님이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실 것이라는 믿음, 그 믿음이 오늘 예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믿음 가지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빕니다.
C. 능력에 대해
마지막으로 능력을 믿는 신앙이었습니다. 그렇게 나아오는 맹인들에게 예수님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능히 이 일을 할 줄을 믿느냐 그들이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 말고도 기적을 일으키는 것을 본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것, 그리고 일생을 눈먼 채 산 그런 사람의 눈을 뜨게 되는 것을 본 적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맹인들은 자신이 모든 마음의 기대를 예수님께 모으고 거기에 걸었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일상적으로 우리가 밖에 나가서 쬐는 햇빛은 특히 겨울에 그렇게 따갑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커다란 돋보기로 한번 모아보십시오. 종이를 불붙일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합니다. 우리의 마음의 다양한 생각들은 힘이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한분이신 예수그리스도께 모아져 온전한 영혼의 응시가 될 때 거기에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변화의 능력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도 자기와 같이 눈이 먼 채로 운명처럼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 중에 고침을 받는 광경을 본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경험을 의지하는 대신 자신의 믿음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바로 이 일들을 이미 행하셨고 지금도 행하고 계시며 지금도 우리가 그 분 앞에 나아가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멸시하고 버리고 소외시켰지만 그 분은 우리를 큰 슬픔으로 불쌍히 여기시며 고쳐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께 자신의 인생을 던졌습니다.
유한한 인간의 힘으로는 어려운 일과 쉬운 일들이 층차에 따라 존재합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에게는 쉬운 일도 없고 어려운 일도 없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고자 마음먹으시느냐 그 하나 이외에는 아무것도 문제가 아닙니다. 이 사람들은 인생의 가장 큰 문제가 소경된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오랜 세월동안 맹인으로 살아가는데 익숙해졌고, 한때는 그것을 운명처럼 받아들였지만 예수를 만나자 그 운명에 묶여 사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리고는 마음속에서 완전히 새로운 삶을 향한 기대가 용솟음쳤습니다. 그래 내가 소경이 되어 앞을 보지 못하는 이것은 나의 운명이고 이것 때문에 사람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내 인생의 몫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 분이 긍휼과 사랑으로 눈물이 가득 찬 마음으로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중풍병자를 일으키시고 절름발이를 다시 살아나게 하시는 새 삶을 살게 하시는 위대한 능력을 보았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그 분께 의탁하며 새로운 삶을 기대했습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여러분 중 대부분의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을 나는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인생을 살고 계십니다. 행복하지 않죠? 여러분은 너무나 오랫동안 그런 삶에 익숙해져 왔기 때문에 또 다른 삶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상당부분 접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여러분에게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여러분의 삶의 상황이 아무리 절망적이고 운명처럼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일평생을 소경으로 살아온 것처럼 무겁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도 주님이 고치셨습니다. 자, 그들의 눈이 뜨여지고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되었을 때 그들 앞에 펼쳐진 인생은 과거의 그것과는 얼마나 다른 인생일까요? 눈을 가득 채우며 들어오는 신비로운 세상, 형형색색 찬란한 빛깔들, 얼마나 놀라웠을까요? 가슴속에서는 정동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예전에는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느낄 수 없고 들리는 소리로서 겨우겨우 만지는 감촉으로서 마음의 흔들림을 느꼈을 뿐인데 이제는 눈으로 보면서 생생한 빛깔이 그들의 마음에 다양한 정동들을 일으켰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살고 있는 인생 말고 또 다른 인생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말입니다. 오늘 이 맹인 두 사람은 자신들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자신들의 문제는 예수를 못 만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그 분의 위대한 능력을 굳게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은 이미 입증이 되었고 그 분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떤 것에서도 그들의 희망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그 분의 위대한 능력을 굳게 믿으며 그 분을 의지했을 때 주님이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III. 적용과 결론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을 간절히 찾는 자들을 만나 주십니다. 만약에 이 사람들에게 앞을 보지 못하는 불행이 없었더라면 그들은 육체로 눈 뜬 사람으로, 영혼으로는 영원히 눈을 감은 채 많은 죄인들처럼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고 끝났을 것입니다. 성경에도 기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멸시받고 사람들에게 짓밟히는 정말 이 부끄러운 자신의 육신의 상태가 이들에게는 예수님을 만날 기회가 되었습니다. 우리들이 직면하는 삶의 많은 문제들은 우리가 주님을 찾을 기회이고 바로 그 문제들을 통해 하나님이 당신의 위대한 사랑과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오랫동안 예수님을 믿으면서 인생을 살아왔지만 어려움 속에서 주님을 간절히 찾았습니다.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주님을 찾았습니다. 물론 어려웠던 모든 때에 주님을 만난 것은 아닙니다. 어렵고 그 어려움이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믿음으로 승화했을 때 우리는 주님을 만났고 그래서 우리의 인생에 그런 어려움과 고통을 주신 우리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힘이 아닌 주님의 힘을 깊이 의지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바로 그렇게 여러분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고 주님을 찾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찾는 자를 만나주심 7 (2016.7.24 주일오전설교)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라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 8:17)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잠언은 지혜의 글입니다. 그래서 잠언은 읽으면 인생을 지혜롭게 하는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사람을 슬기롭게 하는 지혜가 성경 중 어디 잠언에만 있겠습니다마는 특별히 잠언은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종교로부터 자연적으로 지혜롭게 살아가는 본성에 관한 이해까지 폭넓게 지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아마도 성경 중 가장 실천적인 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잠언은 대부분 솔로몬이 지은 지혜의 말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작품은 아닙니다. 성경은 지혜자들의 집단이 있었고, 아굴 혹은 르무엘과 같은 사람들의 지혜의 말들이 이 속에 포함되어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언 1장 1절은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 10장 1절은 솔로몬의 잠언이라 선언함으로써 결국은 솔로몬에 의해서 이 모든 잠언이 편집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잠언이 다루는 중요한 주제는 지혜입니다. 인간이 지혜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고생을 덜합니다. 그리고 적은 수고로 많은 이익을 거둡니다. 또 도덕적으로도 지혜로운 사람은 선과 악을 올바르게 분별하고 후회할만한 인생의 일들을 남기지 않습니다. 이런 모든 지혜의 근본이 사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데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전도서 12장 13절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그것이 바로 모든 지혜의 근본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힘주어 말합니다. 즉, 참다운 인생의 행복은 한 사람이 거룩한 하나님을 깊이 경외하는 가운데 그 분의 말씀을 따르는 모든 삶의 규칙들을 받아들일 때 거기에 인생의 지혜가 있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이 잠언 8장은 매우 유명한 장입니다. 그래서 이 8장에서는 바로 지혜를 다루고 있습니다. 특이한 것은 이 지혜를 객관적으로 인간이 찾는 어떤 지혜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가 의인화되어서 지혜 자신이 마치 사람인 것처럼 하나님이신 것처럼 인간에게 말을 걸고 자신에 대해서 진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구약 학자들은 이 잠언 8장의 특이한 형태를 주시하면서 아마도 이것은 이제 인류의 지혜로 이 세상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특별한 장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가 바로 이 온 인류의 지혜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것이 잠언 8장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인간의 지혜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성경 전체에서 강조하고 있고, 특히 이 잠언에서 우리에게 아주 친절하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많은 책들 중 아마 불신자가 읽어도 공감하는 내용이 가장 많이 들어있는 성경책이 아마도 잠언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잠언을 반복해서 읽고 묵상하는 사람들은 삶의 지혜를 얻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II. 그의 사랑을 입는 자
자, 그러면 오늘 성경은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에게 지혜를 주실까요?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즉, 지혜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입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사랑을 입는 자들,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런 놀라운 지혜를 입는다는 것입니다. 제가 예수를 믿고 회심하기 전에 인생을 살기 가장 어렵다고 느꼈던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근거입니다. 내가 왜 살아야 하는가? 내가 왜 사람으로 태어났는가? 그리고 이 세상은 왜 존재하는가? 그리고 정말 신이라는 존재는 있는가? 선악에 살 때에 그 결과가 정말 나에게 어떤 보상으로서 주어지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의 현상을 주목해 보면 결코 그런 도덕 법칙이 정확하게 적용되는 것 같지를 않습니다. 이런 고민은 이미 시편 73편에서 경건한 시인도 경험했던 고민이었습니다. 자기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는데 매일매일 하나님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잘못을 꾸짖으시고 야단치십니다. 회개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경외하는 나도 이렇게 매일 매일 하나님께 야단을 맞으니 불법을 행하는 악한 사람들은 얼마나 고통을 받으며 살아갈까 하고 세상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완전히 예상에 벗어나간 추측이었습니다. 잘 살고 그리고 번영하고 죽을 때는 비참하게 죽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죽을 때에도 웃으며 죽고 꽃상여에 싸여서 많은 사람들의 환송을 받으며 이 세상을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 이 시인은 실족했습니다. 아이 나도 막 살아버릴걸 하고 후회를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런 고민은 시인만 했던 고민이 아니라 우리도 하는 고민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가 바로 그 사랑의 증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최고의 선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식입니다. 그리고 지혜입니다. 왜냐하면 이 지식과 지혜는 우리로 하여금 인생의 불행과 고통을 피하게 만들고 시련과 어려움이 올 때에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면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에 우리의 인생이 갑자기 어떤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던 것은 아닙니다. 가난하던 사람은 여전히 가난했고, 힘겨운 삶을 살던 사람은 대부분 여전히 힘겨웠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을 때 우리에게 예전에는 전혀 몰랐던 새로운 자원이 주어졌습니다. 그 중의 놀라운 것 중 하나가 뭐냐 하면 지혜, 그리고 사랑입니다.
A. 하나님을 사랑함
그러면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에게 이런 놀라운 지혜를 주시는가? 오늘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바로 이런 지혜를 주신다고 가르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바로 이 지혜를 주시는데 그래서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을 것이며 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나는 하나님이기도 하지만 그리스도이기도 하고 또 잠언 8장의 문맥에서 말하자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 지혜에 의해서 사랑을 입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혜는 하나님, 인간, 이 세상 모든 만물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반드시 지혜를 사랑하게 되어 있고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마지막에 결국은 하나님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만지거나 혹은 볼을 부빌 수 있는 육체를 가진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우리는 지성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을 우리의 지성의 말을 건네시고 알아듣지 못하는 우리의 귀에 알아듣도록 이해시키심으로써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젊었을 때는 아이들이 자랐지만 아이들이 얼마나 귀여운지도 잘 모르고 또 귀엽기는 했지만 왜 아이들이 이렇게 귀여운가에 대해서 무슨 철학적인 생각들을 별로 안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노년에 접어들고 인생의 경험도 쌓이고 그리고 우리는 또 죽음에 훨씬 가까이 다가가게 됩니다. 그럴수록 어린 아이들이 아주 귀여워 보이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은 젊음에 대해서 별로 이야기 안 합니다. 젊은 사람들은 젊음에 대해서 별로 이야기를 안 합니다. 젊음에서 멀어진 사람들이 자꾸 젊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제가 손녀를 키우면서 같이 살면서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아이를 기르면서도 아이들이 왜 귀여운지 잘 몰랐는데 손녀와 함께 살면서 느낀 것은 뭐냐 하면 아이가 언제든지 귀엽습니다. 태어났을 때도 귀엽고, 아마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다닐 때도 여전히 귀여울 것입니다. 그런데 애가 말문이 트이기 시작하면서부터 할아버지와 대화를 하기 시작할 때 너무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언제나 사랑하시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하고 하나님에게 말을 건네고 하나님의 말길을 내가 알아듣기 시작할 때 그때 하나님은 얼마나 우리를 기뻐하실까? 어떻게 보면 그 잠깐 나누는 대화의 즐거움을 통해서 이 아이를 기르는 함께 살아가는 힘들고 어려운 모든 일들을 잊어버리게 만들어 줄 정도로 그 기쁨이 큽니다. 그러면 우리가 거듭나고 어린 아이처럼 기저귀를 차고 버둥거리며 하늘을 쳐다보고 있을 때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겠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우리가 그 분의 지혜를 통해서 깨닫고 그 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서 우리의 마음을 그분께 표현하고 그 분의 마음이 우리에게 전달될 때에 그때에 하나님의 기쁨이 얼마나 클까? 그래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지식적으로 몰랐을 때에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을 경험한 사람은 없습니다. 언제나 그 기쁨과 놀라운 사랑의 경험은 지식과 함께 다가오게 됩니다. 그 지식을 통해서 우리의 인생의 지혜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며칠 전 한국에 이름난 대기업의 회장이 성매매 하는 장면이 전국에 생중계되다시피 방송이 되어서 나라를 온통 뒤집어 놓았습니다. 저도 그 영상을 보았습니다. 무슨 의도에서 그런 것들이 촬영이 되었고, 다 죽어가고 있는 사람의 명예를 실추시키기 위해서 그런 영상이 유포되는지 누구의 어떤 사람들의 이익이 거기에 관여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매우 복잡한 사정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 하나를 느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한 인간의 이 세상에서의 철저한 소외감, 천문학적인 액수의 재산을 가지고 있지만 저 사람은 정말 소외 되었구나. 외롭구나. 그리고 그것은 손가락 하나로 수십만 명의 사람을 일사분란하게 움직일 수 있는 황제보다 더 큰 권력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은 해결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김 정은씨가 130~140kg 이렇게 나간다고 합니다. 전문가들은 분석하기를 언제 살해당할지도 모르는 죽음에 대한 위협들이 폭식을 하게 만드는 것이랍니다. 그렇게 살아갑니다. 스탈린이라는 사람은 얼마나 웃기는 사람입니까? 수많은 사람들을 피로 숙청하고 권좌에 올랐습니다. 아무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비밀리에 다른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요새와 같은 피난처를 지었습니다. 수많은 미로들로 이루어진 방이었습니다. 거기에서 죽었습니다. 심장마비에 걸렸는데 의사가 그 사람이 있는 방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나 미로로 만들어 놓고 그리고 자기 있는 곳을 한두 사람 이외에는 아무에게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이게 바로 소외된 인간이 가는 마지막 길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소외입니다. 그 몸을 판 여자들에게 500만 원짜리 봉투를 건네주는 장면이 녹화된 것을 보면서 이렇게 분노하거나 이런 게 아니라 한 인간에 대한 한없는 연민이 가슴에서 솟았습니다. 아, 정말 얼마나 우리 인간은 가엾은 존재인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실 그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외롭습니다. 왜냐하면 진리로부터 소외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도 기억합니다. 건강도 나쁘고, 가진 것도 없고, 사회에서 실패하고 꿈은 컸지만 가야할 길이 무엇인지 모르던 그런 별 볼일 없는 젊은이였던 저에게 끊임없이 생을 등지고자 하는 비관 속에 살던 저에게 예수님을 만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느끼던 가슴깊이 차오르던 그 희열, 그것은 뭐냐 하면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나는 이제 혼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찬양)
주 내 안에 늘 계시고 나는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 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그렇게 집착하던 내 인생의 중요한 것들 알고 보니까 버려도 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잃어버려서는 안 되고 반드시 소유해야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몰랐습니다.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이 지혜를 주시니까 그렇게 혼란스럽던 이 모든 세상이 질서정연해 보였고, 그리고 심지어 이 세상에 있는 추악하고 더러운 인간의 악까지도 사실은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이바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니까 외롭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정말 내게 필요한 것은 세상이 줄 수도 없고 빼앗아 갈 수도 없습니다. 그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니까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그리고 어두운 인생의 참된 지혜의 빛을 주셔서 잃어버려도 좋은 것과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 잠시 있다 지나가는 것과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삶의 안정감이 생기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의 가장 커다란 숙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에서 멀어질 때 우리의 영혼은 어두움에 잠기고 우리의 정신에는 흑암이 깃들기 시작하며 혼란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햇빛이 밝은 때에는 시력이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차이가 나지만 캄캄한 동굴 속에 들어가면 시력이 좋은 사람이나 나쁜 사람이나 어차피 앞을 못 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눈을 밝게 하는 것은 올바른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함으로 삶의 지혜를 갖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삶 전체를 아우른 고백
그런데 이 사랑은 삶 전체를 아우르는 고백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감정으로서의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삶 전체가 동반된 고백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홀로 살던 한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부부가 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나 아무개는 이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이 남자의 아내가 되기로 다짐합니다 라고 할 때에는 결혼이라고 하는 미래의 남편과의 관계에 의해서 이제껏 살아왔던 삶이 완전히 재편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내를 향해서 남편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언제나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삶을 재편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학교의 교수로 있었을 때 일입니다. 학교 소유주가 하루는 저를 불러서 제안을 했습니다. “김 교수님 한 2~3년 동안 학교에서 모든 지원을 해 줄 테니 외국에 가서 공부를 하고 오십시오. 공부를 하는 게 별로 마음에 안 들면 그냥 전 세계를 여행하면서 문물을 익히고 영어를 배우고 그렇게 자신을 발전시키고 돌아오십시오.” 그 당시까지 마음에 간절히 품었던 소원이 한번 속박 없이 외국에 나아가서 좀 마음껏 공부해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 제안을 듣고 너무 감사하고 황송했습니다. 오면서 그랬습니다. 좀 일찍 제안을 하지 왜냐하면 개척교회를 세운지 꼭 1년 되었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모이는 사람은 5~60명밖에 안 모입니다. 마음 독하게 먹으면 다른 사람보고 하라고 그러고 이 절호의 기회에 내가 가지 돌아와서 다시 개척해도 안 될 거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1년 뒤에 학교를 사직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개척한 것이 저의 삶을 재편했기 때문에 그때 아이를 낳은 엄마의 심정을 느꼈습니다. 아이를 낳기 전까지는 자유롭습니다. 아이를 낳으면 여기 갈 수도 없고 딱 묶인 것입니다. 그거를 보는데 결국은 점잖게 사양했지만 이제껏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그 황홀한 제안을 사양한 것을 후회해 본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를 낳아놓으면 엄마가 어쩔 수 없이 아이의 곁을 지켜야 하는 엄마인 것처럼 우리의 인생도 우리가 선택한 어떤 것에 의해서 재편되는 것입니다. 그게 진정한 삶을 아우르는 사랑의 고백입니다.
우리는 오늘 성경을 통해서 그렇게 우리의 삶 전체를 아우르며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자기를 의지하는 자, 자기를 찾는 자, 자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자, 당신을 모두 의지하면서 당신께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특별한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진리에 대한 사랑 없이는 누구도 진리의 사랑을 받는다고 느낄 수 없고 진리에 대한 깊은 사랑이 있는 그 마음 안에서만 소외가 없는 것입니다. 정말 주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가득 찼을 때 세상 모두로부터 버림받는 것이 두렵습니까? 두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의 가장 무서운 문제는 소외입니다. 외로움입니다. 내가 소외되었다고 느낄 때 그때에 많은 재산도 사회적인 높은 지위도 모든 사람을 뒤흔들 수 있는 권력도 그 소외를 해소시켜 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리만이 그 모든 사람을 함께 품고 진리 안에서 그 소외를 이기며 살 수 있도록 사랑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버림을 받아도 주님을 사랑하는 때, 주님의 사랑을 받는 때에 우리는 외롭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과 함께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빕니다.
III. 그가 만나 주시는 자
A. 하나님을 찾는 자
그러면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을 만나주실까요? 그가 만나주시는 자가 누구일까요?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하나님을 찾는 자, 그 사람이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찾는다는 것은 절대적인 의미에서 찾는 것입니다. 즉, 그냥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그래서 그냥 한번 불러보는 그런 종류의 찾음이 아닙니다. 자신의 생사가 걸린 것처럼, 자신의 현재와 미래의 중요한 행복이 거기에 매달린 것처럼 그것이 없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그 어떤 절실함으로 그것을 찾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찾음이야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가끔 우리는 무엇인가를 잃어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내가 그것을 간절히 애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휴대하면 편리한 편의도구가 아닙니다. 그 하나님이 안계시다면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의 가치와 목표와 의미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없이 하나님이 계실 수는 있지만 하나님 없이 우리가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과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찾는 마음입니다.
B. 간절한 마음으로 찾음
그래서 시편에서 시인이 이러한 집착을 노래하기를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같이 제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합니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팔레스타인에 가을이 오면 사슴들이 교미기입니다. 발정한 사슴들이 암컷을 찾아 나서고 교미를 하기 위해서 때로는 큰 뿔을 맞부딪히며 사슴끼리 혈투를 벌입니다. 그러다가 목마름이 엄습합니다. 그러면 물을 찾아 나섭니다. 사막에 물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신기루가 보이기 시작하고 사슴들은 미친 듯이 질주하기 시작합니다. 물이 있어서 달려가 보면 그것은 신기루였고 이런 일들을 되풀이하다가 눈을 부릅뜨고 본능적으로 앞발로 땅을 파다가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슴들의 시체를 수없이 봐왔던 시인이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물리적인 소외감을 경험하면서 주님을 예배할 수 있는 그때를 그리워하며 경건한 슬픔을 노래한 것이 시편 42편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다는 의미입니다. 아이를 잃어버린 엄마가 수많은 무리들의 틈 사이에서 잃어버린 자녀를 찾는 눈빛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렇게 간절히 주님을 찾는 사람들을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새 계속해서 예배에 대한 캠페인을 듣고 있습니다. 오늘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아무리 예배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본질적인 것은 하나님을 찾는 예배자의 마음 없이는 예배는 결코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신령한 예배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화려한 인테리어나 좋은 성능의 음향기구가 주님을 만나게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불세출의 설교자, 탁월한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을 가진 설교자가 여러분 하나님 만나게 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예배자 자신이 하나님을 찾는 간절한 마음, 그리고 주님 앞에서 버림받은 것과 같은 그런 비천한 마음으로 마치 한 조각의 떡을 위해서 지나가는 행인에게 무릎을 꿇고 자비를 호소하는 걸인과 같이 주님의 은혜를 갈망하며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마음 없이는 예배에 대한 어떤 논의도 우리를 주님 만나는 예배로 데려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는 매우 특별하기 때문에 자다가 일어난 사람, 졸고 있는 사람을 깨워서 생애적인 회심으로 데려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항상 매우 특별하게 일어나는 예외적인 일이지 일반적인 일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았더라면 성경이 그렇게 많은 곳에서 우리 보고 하나님을 찾으라고, 두드리라고 그리고 간절히 하나님께 구하라고 요청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실 수 있는 분이고 자기의 외아들까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주시는 분이시지만 우리들이 마음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찾기를 바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간절히 타올라 그래서 치열한 불꽃처럼 주님을 갈망하는 마음으로 절박해지도록 우리를 기다리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간절히 당신을 찾아야 할지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모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공생애를 사시는 동안 그 분의 관심의 초점은 하나님의 영광이었고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당신 때문에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모든 사람이 알기를 바라셨고, 그래서 그 분의 기도는 언제나 눈물로 얼룩졌고, 탄식과 몸부림으로 배어있는 하나님을 향한 추구였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감동적인 많은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지만 그 이야기는 모두 간절히 주님을 찾았던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주님을 향한 간절한 찾음,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목마른 것같이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간절히 그 분을 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해 보십시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이 용서를 받았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그 큰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만약에 이 여자의 마음속에 또 다른 범죄를 꿈꾸고 있었다면 예수님이 그런 용서의 선언을 베풀어 주셨을까요? 주님을 간절히 갈망하는 마음은 죄 있는 사람은 그 죄를 용서해주고, 지혜가 없으면 그 간절히 주님을 찾는 마음 때문에 하나님이 지혜를 주십니다. 어떤 일을 감당해야 하는데 능력이 모자라면 그런데 그 사람이 간절히 주님을 찾으면 하나님이 그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위대한 일을 마음에 품고 그 일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물질을 가지고 염려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하실 것이라고 우리는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사셨을 때에 그 분의 생애를 이름 짓는다면 간절한 생애였습니다.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었고, 모든 것을 가지고 계셨고 당신 자신에게는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으셨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언제나 눈물을 흘리며 간절한 어떤 소원에 사로잡히셨습니다. 이곳 어두운 세상에 빛이 임하는 것, 당신을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알고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 영원한 생명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이 그 형상 안에서 자기를 통해 하나님과 연합되는 것, 이것이 예수님의 간절한 소원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미지근하게 살아가는 것은 그 자체가 죄입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그런 태만한 마음속에 그런 삶을 계속함으로 우리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기도에 응답을 받고 가슴 벅차하며 눈물을 흘리는 순간이 있기까지는 하나님 앞에 마음을 모으고 애절하게 기도하는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시련과 역경을 이기고 환희의 기쁨이 넘치는 그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온 절실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보십시오. 무엇이 행복일까요? 하나님을 향해 주님을 사랑하고 내가 왜 하나님 앞에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내가 앞으로 10년 20년을 산다면 내 인생은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야 될지에 대한 답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 모든 것을 소유한들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수조원의 돈을, 제가 알기로는 10조 가까운 돈을 소유하고 있는 그 분이 무엇이 모자랐겠습니까? 슬리퍼 하나에 800만 원짜리를 신은 분이 무엇이 모자라겠습니까? 어느 변호사가 쓴 책에 의하면 생일 파티때 손에 들려 있는 포도주는 보통 1200만원에서 2000만원 포도주였다고 합니다. 무엇이 부족한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이 훨씬 행복합니다. 적어도 여러분은 그런 절실한 소외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시련도 있습니다. 역경도 옵니다. 어찌 우리의 인생이 우리의 마음먹은 대로 다 되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시련과 고난은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입니다. 그 시련과 역경이 있기 때문에 시냇물이 소리를 내는 것처럼 흘러갑니다. 다시 반복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러나 우리의 삶을 포기할 정도로 그렇게 절망적인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생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수많은 사건들, 때로는 가슴을 에이는 아픈 사건들을 통해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정말 값진 교훈은
(찬양)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지 않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질 않네
그래서 믿기 때문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믿음의 소망이 굳게 서십시오. 그리고 한번 믿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놓지 마십시오. 회심하기 직전을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을 믿고 어떠한 시련과 어려움을 겪어도 적어도 우리는 삶의 방향이 무엇인지를 몰라서 좌절하고 두렵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이것을 이기며 나아갈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래서 간절히 주님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간절히 당신을 마음으로 찾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시고 우리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하나님은 삶의 시련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간절히 그리스도를 찾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주님을 찾을 때에는 우리 입술과 우리의 눈으로만 찾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가 내가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무위도식하면 안 됩니다. 정말 무위도식하면 안 됩니다. 어디에선가 내가 매일매일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섬김의 자리가 있습니다. 거기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하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증거를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을 통해서 보여주시고, 이 일을 통해서 내가 기뻐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미력한 인간이나마 나를 통해 영광을 받으신다는 긍지를 느낄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를 몰라주어도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이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줄을 그 분이 아시고, 미력이나마 그 분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그 큰 사랑 때문에 아주 티끌같이 적은 일이지만 그것을 붙들고 그것이 자신의 인생의 이유이고 삶의 보람인 것처럼 어린 아이처럼 그 일에 복 주시기를 그것을 통하여 아주 작은 땅 덩어리에서나마 아버지의 뜻이 나를 통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며 사는 착한 성도들이 된다면 그 회장님처럼 소외감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언제나 나와 함께 하셔서 주님이 나를 알고 내가 주님을 아는 것처럼 또한 하나님이 나를 돌보고 지키시려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주님 안에서 선택받은 하나님의 자녀들로 행복하게 살기를 주님을 간절히 찾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찾는 자를 만나주심 8 (2016.8.7 주일오전설교)
말씀을 기다리는 사람들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행 10:33)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들어있는 사도행전 10장은 신약에서 가장 위대한 장 가운데 하나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2장 자체가 위대하기보다는 여기에서 서술하고 있는 역사가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10장은 오순절 성령 강림이후에 유대인들에게만 주시던 성령의 역사가 경계를 넘어 이제 이방인들에게도 꼭 같이 부어지는 역사가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이 위대한 역사에 기도하는 사람 베드로와 기도하는 사람 고넬료를 사용하셔서 이 위대한 일들을 이루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시고 성령이 강림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전개에 대해서 아직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구속의 은혜가 오직 혈통적 유대인들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예루살렘 교회의 가장 중요한 지도자인 베드로를 직접 사용하셔서 그 편견을 깨뜨리고 이방인들에게도 꼭 같이 성령을 부어주심으로써 그리스도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에 이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육적 이스라엘을 넘어서 온 인류와 관계되는 것임을 보여주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II. 말씀하시는 하나님
A. 기도자를 쓰심
여기서 우리는 이 위대한 역사를 이루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 분이 바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미 영원 전에 이렇게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은혜를 혈통적 이스라엘을 뛰어넘어 온 이방인들에게 전파되어 그들을 하나님의 나라 안에 살게 하시려는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매 이 하나님의 계획은 그리스도 예수의 오심과 죽으심으로 실현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께서 죽고 부활하시고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 그 분의 속죄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 놀라운 변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이 하나님의 나라가 모든 이방인들을 끌어안고 인류 전체에게 전파되고 수립될 하나님의 나라임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새로운 말씀 주심이 필요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이 말씀을 주시는 도구로 기도자를 쓰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연결하는 위대한 구속사를 그들에게 모두 보이기 전 먼저 기도하는 이방인인 고넬료와 기도하던 유대인 지도자 베드로를 사용하셔서 이 위대한 역사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기도시간에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시장해서 사람들과 함께 먹고자 음식을 준비하고 있던 바로 그때에 황홀한 중에 하늘이 열렸습니다. 하나의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환상 속에서 보게 되었는데 그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워졌던 이 그릇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발 가진 짐승과 기어 다니는 것,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소리가 들리기를 ‘베드로야 일어나서 잡아먹어라’ 하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것을 볼 때 그 환상 속에 보인 이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새들은 아마 살아있었던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끔찍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중에는 정결한 짐승도 있었지만 율법에서 멀리하라고 가르쳤던 부정한 짐승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대답합니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습니다.” 베드로의 이 말에 대답이 없이 다시 한 번 하늘로부터 소리가 들리기를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고 이런 일이 세 번 있었다고 하니까 먹어라, 먹어라, 먹어라, 그리고 먹지 못하겠습니다. 먹지 않았습니다, 먹지 않았습니다 라는 이야기가 세 번 반복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결국 그것은 하늘로 올라가 버렸습니다. 바로 그때에 하나님이 고넬료에게 천사를 통해 지시하여 보낸 사람들이 시몬 베드로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고넬료와의 만남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것은 결국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향한 모든 의식법들이 철폐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잡아먹으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베드로의 이 편견들이 깨뜨려져야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의식법이 철폐된 것처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완결된 이 복음이 이제는 혈통적 유대인에게만 갇혀있다고 하는 그 모든 유대적인 편견으로부터 벗어나서 이 율법에 의식법들을 철폐시키고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 온 천하에 전파되어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 속으로 들어가는 위대한 역사를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바로 기도하던 고넬료와 기도하던 베드로, 정확하게 말하면 두 사람, 기도의 사람을 사용해서 당신의 위대한 역사를 전개해 가셨던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그리스도께서 잉태하실 때에 요셉은 기도 속에서 천사의 인도를 받으며 하나님 뜻을 깨닫고 마리아를 데려왔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제일 먼저 하신 일은 유대 광야에서 기도하신 일이었습니다. 하늘을 가르고 성령이 임하신 놀라운 구속사의 사건은 예수그리스도가 요단강에서 기도하실 때에 일어났습니다. 제자들을 택하여 가르치고 데리고 다니시다가 이 세상에 사도로 파송하실 때에도 예수님은 그 전날 밤이 맞도록 기도하심으로 구속사의 한 단추를 꿰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고난을 앞두고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가 되기 까기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께서 이제 부활하여 승천하신 후 약속하신 대로 성령을 내려 보내실 때에도 예수님의 제자들은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에 이 위대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 위대한 복음이 이스라엘의 혈통을 넘어 이방인들에게 전개되는 위대한 선교의 역사의 첫 문도 바로 기도를 통해서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구속사에게만 일어나는 사건이 아닙니다. 우리 모든 사람들의 삶에 결정적인 위대한 일들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하나님 앞에 매달려 씨름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역사의 주인공이 되고 자신의 인생의 주인공이 되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지만 그러나 자신의 인생을 남의 기도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결코 자신의 인생의 주체가 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기도를 받는 것이 잘못됐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이 기도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며 전능하신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의지하며 나아가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자신의 삶에 주체성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성경의 시대뿐만 아니라 이후에 선교의 위대한 역사에도 바로 기도자들을 사용하셨습니다. 이런 기도의 사람들을 사용해서 동토의 땅에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에 봄바람이 불게 하셨고, 그리고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가 일어나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있어서 가야할 길을 모르고 어떻게 내 인생을 살아가야 할지 알 수 없을 막막한 중에 간절한 기도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인생의 문을 연 적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바로 하나님이 기도자들을 사용하십니다. 모든 안일한 것을 물리치고 다시 한 번 기도에 힘쓰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말씀을 주심
두 번째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방인들 중에 고넬료와 같이 그런 성령의 역사를 몰라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자신들이 온 마음을 다해 경외해야 할 분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이방인들이 있었습니다. 아주 다수였다고 말할 수 없지만 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이 전파되기 이전에도 그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의 속죄는 몰랐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지만 항상 유대인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들은 그런 하나님과 관계를 가짐에 있어서도 자신들은 2등, 3등의 사람이라는 열등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이 베드로를 깨우치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이 바로 이 온 인류를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게 하심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일들을 하나님이 베드로를 깨닫게 하시고 베드로를 통해서 고넬료를 깨닫게 하심으로 예루살렘 교회가 설득되고 이방인들의 마음속에 소망을 주어 이제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오랫동안 있었던 담장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보혈에 의해 허물어졌음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뜨겁게 사랑하며 인종은 다르고 문화는 달라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형제임을 자각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놀라운 복음의 비밀은 천사에 의해서 직접 가르쳐진 것이 아니라 천사의 인도로 깨달은 사람에게 말씀을 주셔서 양떼를 인도하게 하셨습니다. 사람의 탁월함이 아닌 주님을 의지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당신이 우리들을 직접 다스리고 이끌지 아니하시고 사람들 중 연약한 형제 중 한 사람을 목회자로 세우시고 우리 신앙의 동지들로 세워서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깨우침을 받고 주님의 인도를 따르도록 오늘은 내가 그들을 도우나 내일은 또한 그 사람들에게 내가 도움을 받으면서 온 지체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섬김에 도움을 받으면서 하나님을 모르는 무지에서 깨달음으로, 어리석음에서 지혜로, 하나님을 거스르던 반역에서 순종으로, 불신앙에서 신앙으로, 사랑 없음에서 사랑으로 나아가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의 경륜은 세상의 학문으로 알 수 없는 그러한 초월적인 것들이고 결국은 고넬료와 그 모든 인류 구원의 길이 바로 베드로가 받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기도하던 베드로에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인류 구속의 위대한 비밀을 알려주셨고, 간절히 기도하고 선행으로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던 경건한 고넬료와 그 가족 사람들에게 성령 부으심의 첫 열매가 되도록 기회를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주심으로 이들의 모든 혼란이 물러가고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의 위대한 구원의 계획이 이들의 마음속에 선명하게 아로 새겨지도록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어려운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삶의 가장 큰 고민과 문제가 무엇입니까? 오랫동안 자기의 현실에 코 박고 미친 듯이 자신의 인생을 위해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이 우리에게 완전한 만족을 주었습니까? 물론 어떤 때는 우리들이 우리들의 인생의 문제를 우리 자신의 힘으로 해결해 나아갑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에 주인으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 예수의 손 안에 있지 않다면 우리의 삶의 가치는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시고 시시때때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그래서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고 참된 지혜에 도달합니다.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몰랐던 사람들의 마음을 깨우쳐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으로 각성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예전에 우리의 마음속에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져 버린 구원의 감격으로 돌아가도록 만들어 주시는 분도 우리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 누구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가슴 저미는 사랑을 언제나 말씀으로 보여주십니다. 여러분이 곤고하게 살 때 하나님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만약에 여러분이 부모인데 자식이 깊은 병에 걸리거나 고통을 받으며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할 때 부모인 여러분의 마음에는 얼마나 많은 말들이, 언어들이 끓어오르겠습니까? 하나님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우리 인간의 지성에 건네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느 순간 마음이 곤고해지고 이제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인생의 소망이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하시는 하나님에게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분이 말씀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많은 일꾼들이 예배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예배에 마음을 기울여야 할 이유가 다른데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바로 그런 잘못된 예배 태도 때문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여기에는 조직적으로 침투한 이단들의 역할도 상당히 있었습니다. 예배 시간에 나아와 전혀 예배드릴 마음이 없고, 조롱하듯이 그런 태도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 90%는 이단에서 온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이 불쾌하게 생각하지 말고 그런 태도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 사람들은 실례 아닙니다. 그렇게 예배드리지 말라고 당신 혹시 이단에서 왔냐고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라, 그리고 설교자를 보고 마음을 똑바로 하고 예배를 드리라, 우리 교회에서는 당신처럼 예배를 드리면 이단으로 오해를 받는다 정직하게 이야기 해주어야 합니다. 상처 받아도 괜찮습니다. 그가 신앙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극을 받고 깨달을 것이고 그가 이단이라면 부끄러워서 교회를 떠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본인을 위해서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를 받는 공동체입니다. 지금도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기를 기대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그 바쁜데 1년에 몇 차례씩 시간을 내어 사경회를 하고 그리고 그것을 준비하는 것도 저에게는 보통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여름에는 엄청난 에너지를 들여서 수련회를 떠납니다. 이번에도 많은 청년들이 아마 역대의 수련회 중 가장 많은 청년들이 떠난다고 합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왜 이 바쁜데 3일씩, 4일씩 산속에 모여서 우리들이 함께 생활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른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우리 인생의 현실, 그리고 부지런히 현실에 몰두하여 살아가면서도 때로는 놓치고 마는 우리 인생의 진정한 목표와 의미를 깨닫기 전에는 우리가 진정으로 의미 있는 인생을 살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말씀을 붙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III. 말씀을 기다리는 사람들
A. 순종하는 사람들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있었고 그 밑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고넬료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냈는데 오셨으니 잘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말씀을 기다리는 이 사람들은 먼저 순종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고넬료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셨고, 그리고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청하여 오라고 분부하셨을 때에 고넬료는 자기의 하인들에게 명령했고 주님을 경외하는 하인을 포함한 자신의 수하들은 그 명령에 순종해서 베드로를 모시고 왔습니다. 또 그 식솔들은 지금 모두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종인 베드로로부터 그 무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두 그 말씀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 원래 이방인하고는 유대인이 상종도 안하는데 예루살렘 교회의 위대한 불세출의 지도자, 베드로라고 하는 거목과 같은 영적인 인물이 자신들에게 나타나 한 가족들이 모여 있는 식솔 앞에 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에게는 놀라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위대한 교회의 지도자를 통해 하나님은 고넬료도 깨닫지 못하고 베드로와 예루살렘 교회가 깨닫지 못하는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위대한 비밀 중 한 페이지를 열려 보이셨습니다. 베드로도 고넬료도 그의 수하에 있는 사람들도 그 모든 가족들도 순종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결과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순종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습니다. 이 모든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 앞에서 베드로와 고넬료와 그의 모든 사람들은 한결같이 하나님께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자신의 상식과 자신의 신학으로는 이렇게 이방인들에게도 똑같이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역사가 펼쳐질 것을 알지 못했지만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분부를 따라서 순종하여 유대인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 격식을 깨고 그들 앞에 서 본 후에야 비로소 그리스도 예수의 위대한 구속의 경륜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하나님 앞에 기도했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부어주셨던 것과 꼭 같은 방식으로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하였습니다. 그를 통해서 예루살렘 교회는 설득되었고, 온 교회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의 경륜에 눈을 뜨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말의 사람들이 아니라 순종의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논리가 있고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으려는 사람들보다는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사람들, 주님을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 가셨던 것입니다.
자,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 순간 우리에게 주님의 영을 주셨고 그 영은 순종의 영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순종하고 아버지의 말씀을 따른 은혜의 영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 주님의 마음을 우리가 따라갈 때에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에 적합한 마음이 되고 주님과 우리는 사랑을 충만히 느끼는 그 속에서 주님의 말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들어도 ‘하나님이 한번 의견 제시해 보십시오. 모든 결정은 내가 하겠습니다.’라는 사람들은 은혜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낮추는 사람들, 나의 인생을 주님 의지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살아온 결과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이제 하나님 밖에 의지할 분이 없습니다.’라는 마음으로 주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려고 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말씀을 주십니다.
B. 하나님 앞에 있음
두 번째 하나님 앞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고넬료는 말합니다. “이제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자, 우리 인간 중 하나님 앞에 있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순종하고 그 분을 찬송할 때에도 하나님 앞에 있고 죄 짓고 하나님 앞에 불순종할 때에도 결국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지 못합니다. 무엇을 행하든지 그것은 하나님 앞에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피할 수 없이 언제나 우리 앞에 계십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을 의식하는 인간의 의식은 똑같지 않습니다. 최고의 경건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있다는 의식입니다. 최고의 경건은 자신이 시련을 만나든지 역경을 만나든지 혹은 번영하든지 어느 때에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 그리고 주님이 자신을 지켜보시고 자기는 그 하나님의 임재 앞에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는 것, 그 의식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사람이 보든지 안 보든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 이게 바로 최고의 경건입니다.
그런데 이게 됩니까? 안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그렇게 기도하려고 몸부림치는 이유가 자신을 채찍질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은혜를 받고 자신이 게으름을 뿌리치고 성도들과 함께 사귀고 모임에 참석하고 그렇게 열심히 하나님을 찾으려고 애를 쓰는 이유가 바로 이런 하나님 앞에 있다는 의식 속에 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어 주신다는 그 의식 앞에서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자, 우리가 주님 앞에 붙잡혀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의 성령의 충만함에 사로잡혀 산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모두 하나님은 사람이 사람의 손목을 붙잡는 방식으로 우리를 붙들지 않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그 말씀의 의식에 붙잡혀 산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많이 배웠어도, 성경을 많이 깨달았어도 지금 주님을 떠나면 그 분께 붙잡혀 살지 못합니다. 무지하고 어리석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이 좀 적어도 어린 아이같이 간절한 마음으로
(찬양)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이까
그렇게 간절히 매달리는 사람들, 하나님 앞에 있는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주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C. 말씀을 듣고자 함
마지막 세 번째로 말씀을 받은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합니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의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자, 고넬료와 그 집안의 사람들은 주님을 사랑하고 경외하기는 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는 몰랐습니다. 오늘 이들은 자신의 입맛에 맞는 하나님의 말씀을 원해서 여기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을 듣고 싶어 했습니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인생에 대한 견해를 내려놓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 그것이 무엇이든지 그 말씀에 순응하고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주님 앞에 있었습니다. ‘듣고자’라고 번역된 희랍어 단어 ‘아쿠사이’라는 단어는 그냥 들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기울여서 그 의미가 무엇인지 그것이 자신의 삶에 무슨 의미를 주는지 그 말씀을 행하고자 집중하는 들음의 상태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신앙이 하는 역할입니다. 하나님께 붙어있고자 하는 마음, 나를 버리고 예수를 붙들려는 마음, 나의 상식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따르려고 하는 결단, 이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듣는 것이 바로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보여준다고 마가복음 4장 2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또 이르시되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 무엇을 들을 때에 마음이 귀 기울여지고 집중되고 거기에 심령이 실리는지 그것이 결국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여러분의 인생에 대한 견해를 세상에 귀를 기울이고 따른다면 세상 사람입니다. 주님께 귀를 기울인다면 주님의 사람입니다. 더욱이 성경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자는 곧 주님을 버리는 사람들이라고 누가복음 10장 16절은 말합니다.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한 사람의 신앙의 인격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라고 우리는 단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찰스 스펄전이 목회를 할 때 교회당을 체육관처럼 둥그런 지붕으로 지었답니다. 그래서 그 도시에 와서 사람들이 들여다보면서 저 멀리 보이는 이상한 건축물이 무엇인지 궁금했습니다. “저기 무엇 하는 곳입니까?” 물었을 때에 불신자인 시민들이 이렇게 말했답니다. “저 둥근 지붕이 있는 저 건물은 진리가 선포되는 곳입니다.” 이게 바로 우리를 이 세상 백성과 구분해 놓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완전한 사람이 이미 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나 완전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사실을 믿었고, 그래서 언제나 나의 생각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진리의 가르침을 따라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듣고자 하는 것, 그것이 곧 여러분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오늘날 우리는 지식의 홍수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자라나는 세대들도 옛날처럼 손에 넣기 힘든 책 한권을 손에 넣으면 닳도록 읽고 그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지식이 마치 공기나 물처럼 흔해 빠진 것이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언제나 어디든지 가면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식에 대한 이런 생각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도 똑같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정말 개탄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듣는 하나님의 말씀은 적어도 이 세상에 넘쳐나는 지식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이것은 이 세상의 지식들은 알고 이해하면 우리의 인생을 편리하게 하는 지식일지 모르지만 이 진리의 말씀은 모르면 우리의 인생을 죽음으로 데려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인생의 어두운 길에 빛이 들어오고 참 사랑으로 나아가게 되던 때의 기쁨을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21살에 회심했습니다. 회심을 하고 여러 달 동안 감당할 수 없는 은혜의 감격 속에서 살았습니다. 비록 지식적으로 매우 미약하고 어리석은 상태였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야, 진리가 이렇게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구나.’ 진리라는 말도 익숙해지지 않았지만 ‘예수님이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시는구나.’ 그리고 그 예수님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것, 거기에 인생에 진정한 행복이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여러분도 모두 그랬던 사람들입니다.
한번 여러분이 이곳에 와서 주님을 만나고 은혜를 받았던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을 일깨웠고 죽었던 사람들을 다시 살아나게 만들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기를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이런 믿음을 준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로마서 10장 17절입니다. 자,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주님을 간절히 만나고 싶어 하지만 주님은 언제나 말씀의 다리로 건너와 우리와 만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자 하는 마음, 주님이 그 말씀을 열어주셔서 우리를 이 모든 어리석음에서 일깨우게 해달라고 하는 간절한 기도는 주님을 찾고자 하는 사람의 가장 확실한 표입니다. 그렇게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도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잠시 분주한 일상을 접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십시오.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십시오. 주님의 은혜에 목마른 사람들, 하나님의 사랑에 목마른 사람들이 되어 간절히 주님을 찾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여러분이 이번 수련회에서 그렇게 주님을 깊이 만나고 다시 한 번 하나님 앞에 충만한 삶을 살게 되도록 예수님을 찾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찾는 자를 만나주심 9 (2016.8.14 주일오전설교)
귀 기울이시는 하나님
“[아삽의 시, 인도자를 따라 여두둔의 법칙에 따라 부르는 노래]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나니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내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 (셀라) 주께서 내가 눈을 붙이지 못하게 하시니 내가 괴로워 말할 수 없나이다 내가 옛날 곧 지나간 세월을 생각하였사오며 밤에 부른 노래를 내가 기억하여 내 심령으로, 내가 내 마음으로 간구하기를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그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끝났는가, 그의 약속하심도 영구히 폐하였는가, 하나님이 그가 베푸실 은혜를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가 베푸실 긍휼을 그치셨는가 하였나이다 (셀라) 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잘못이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곧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하며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억하리이다 또 주의 모든 일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행사를 낮은 소리로 되뇌이리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도는 극히 거룩하시오니 하나님과 같이 위대하신 신이 누구오니이까 주는 기이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이시라 민족들 중에 주의 능력을 알리시고 주의 팔로 주의 백성 곧 야곱과 요셉의 자손을 속량하셨나이다 (셀라)”(시77:1-15)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의 환경과 그리고 우리의 마음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의 환경이 어떤 깊은 어려움 속에 빠지게 되면 대부분 우리의 마음도 그 환경에 영향을 받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로만 우리의 삶을 판단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들을 바라보며 사는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시편 77편은 시인이 바로 그 속에서 시련과 절망을 극복한 이야기들을 시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꽤 긴 성경 구절을 읽었습니다마는 여기서는 크게 세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불안하고 근심할 때가 있고, 그때에 시인은 믿음으로 여호와의 일을 기억했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환란 속에서 부르짖었기 때문에 이 모든 시련을 이길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II. 불안하고 근심할 때
제일 먼저 불안하고 근심할 때에 고백입니다. 그는 3절에서 “내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런 고백 속에서 시인의 상태가 어떠하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심령이 상한다’라고 하는 이야기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함께 가지고 있는데 긍정적인 면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그리움, 사랑에 대한 갈망 때문에 마음이 상해서 더 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마음이 상하다’라는 표현입니다. 부정적인 의미 한 가지는 어떤 낙심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서 희망이 끊어지고 절망이 매우 가까이 있는 상태에서 그런 좌절감 때문에 마음이 상해서 낙심하게 만드는 그런 것입니다. 시인은 무슨 일을 만났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커다란 시련과 고통을 경험하면서 근심함으로 불안해하고 있고 “4절에서는 눈을 붙이지 못하게 하시니 내가 괴로워서 말을 할 수가 없나이다” 심령의 깊은 고통이 엄습하게 되면 온 천하에 자신이 홀로 있는 것 같은 상태가 되면서 그러면서 괴로움을 겪게 됩니다.
시인은 이런 고통으로 잠을 이룰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살아온 인생의 날들을 회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옛날 곧 지나간 세월을 생각하였사오며 밤에 부른 노래를 내가 기억하여” 그랬습니다. 그는 지금 처음 불안하고 근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긴 인생을 살아오면서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나는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그 밤에도 부르던 노래가 있었습니다. 즐겁고 유쾌해서 노래를 부른 것이 아니라 견딜 수 없는 깊은 시련과 고통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 슬픈 사연을 노래로 부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창작한 노래인지 구슬픈 노래 가락이 원래 있었던지 그것이 성경에 나오는 구절들이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밤에 부르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저는 우리나라에 민요, 혹은 향토에서 전해 내려오는 모내기를 하거나 뭘 하거나 하면서 부르는 노래를 보면 그렇게 측은할 수 없습니다. 왜 가락이 모두 그렇게 구슬픈지 가사를 잘 들어보면 기뻐서 부르는 노래만이 아니라 이 속에서 울렁거리는 그 영혼의 외롭고 서러운 그런 상태를 노래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흑인들의 영가가 그렇습니다. 무엇인가 노래를 듣고 있으면 막 기쁘고 흥이 나는 것이 아니라 그 노래를 통해서 노래를 부르는 그 흑인들의 설움과 눈물을 쏟아내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 시인은 아마도 그런 노래를 밤에 부른 노래라고 표현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인생의 가장 치열한 밤중에 그는 그런 노래를 불렀습니다. 여러분에게는 그런 인생의 밤이 없습니까? 그리고 그런 인생의 어두운 밤, 이 세상에 아무도 없고 홀로 추운 이 세상의 벌판에 홀로 있는 것 같은 외로운 때에 그 인생의 밤을 여러분은 어떻게 지나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왜 인간을 그렇게 외롭고 불안한 존재로 창조하셨을까요? 엄밀하게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그렇게 불안하고 외롭고 근심하는 존재로 만드시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의 살과 뼈로 또 다른 사람을 만들고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부르게 하시고 이후에 태어날 모든 인류가 그렇게 서로를 사랑하며 살게 하셨습니다. 불안과 외로움, 고통과 그 많은 인생의 밤들은 대부분 우리 스스로 하나님을 멀리 떠났기 때문에 경험하는 어두운 인생의 밤입니다. 문제는 우리 모든 사람들이 이런 인생의 칠흑 같은 어두운 밤을 지난다는 것입니다. 별빛조차 없는 어두운 밤바다에서 뒤웅 치는 파도와 함께 인생의 배를 항해하여야 하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 우리의 마음먹은 대로 되고 그리고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들이 우리의 뜻대로 된다면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이 세상 기쁨으로 언제나 가득 차다면 어거스틴의 표현에 의하면 그런다면 에피큐리우스 학파가 주장하는 쾌락주의가 승리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인생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선조들은 노래했습니다.
(찬양)
고난과 슬픔도 이기게 하옵시고
주 말씀 따라서 용감하게 하소서
그래서 인생의 어두운 밤중에 그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마음으로 간구하였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기도라기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는 불안한 마음의 되뇌임이었습니다. 절망감 속에서 의심은 팽창하기 시작했고 한번 팽창한 의심은 급속도로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이게 바로 시련과 절망 속에서 우리를 무너뜨리는 마귀의 궤계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속에서 서러운 마음이 줄달음치기 시작합니다. ‘주께서 영원히 버리셨을 거야. 다시는 나에게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 거야. 아마 주님의 인자는 영원히 끝나는 거야. 그 분이 나에게 약속하신 것도 결국은 영원히 폐한 것일 거야. 혹시 하나님은 나의 이름 석 자 따위는 잊어버리시고 이제는 베푸실 은혜가 없는 게 아닐까? 내가 죄를 짓고 잘못했기 때문에 진노하셔서 이제는 다시는 나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기로 다짐하신 것일까’ 엄습한 두려움과 그리고 절망감이 밀려들었습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을 때에는 끊임없이 긍정적이고 그리고 희망적인 쪽으로 모든 만물을 해석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일어난 매우 나쁜 일들도 좋은 방향으로 해석을 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 원인이 뭐냐 하면 사랑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하기를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그 얘기가 사랑을 하면 나쁜 짓을 하겠다고 생각을 안 한다는 그게 아니라 해석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내 마음에 사랑이 있으면 어떤 일들을 해석할 때 악의를 가지고 해석하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이 가지고 있는 힘입니다.
(예화) 미국으로 유학 간 어느 학생이 간지 얼마 안 되서 운전이 서툴러서 앞차를 쿵하고 박았답니다. ‘아이쿠, 큰일 났구나.’ 문이 쾅 열리더니 큰 덩치의 흑인이 걸어오더랍니다. 얼굴은 험상궂게 생겨서 인상을 막 쓰면서 ‘듣기만 하던 그 무서운 흑인이구나. 큰일 났다.’ 그래서 한국 같으면 문을 열고 뛰어나가서 ‘정말 죄송합니다. 그랬을 텐데 얼어서 가만히 부인하고 애기하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딱 오더니 인상을 쓰더니 문을 내리라고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무서워서 문을 이렇게 내렸는데 ‘Are you ok?’ ‘안 다쳤습니까?’ 그래서 사랑은 모든 것을 선의로 해석을 합니다.
그 극치를 예수님이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고 그러셨습니까? “하나님 이 사람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잘 모릅니다.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명백한 악인데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랑이 그것을 선의로 해석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가 사라지고 나면 모든 것이 악한 방향으로 해석이 되고, 그것을 움직이는 힘이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에는 어차피 불안과 근심이 밀려오는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고립된 모든 인간이 경험하는 바입니다. 하나님을 놓칠 때 우리는 우리의 삶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에 두려워하며 극단적인 절망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경건한 시인도 겪었던 바입니다. 자, 그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우리는 다 모릅니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은 어떤 커다란 시련이 닥쳤고 그 속에서 시인은 양심의 가책을 받고 속에 근심, 밖에 걱정으로 휘몰리면서 파도에 휩쓸리고 있는 아주 작은 배처럼 위험한 상태를 만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III. 여호와의 일을 기억함
우리에게는 왜 이런 때가 없습니까? 혹시 오늘 이 설교를 들으며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내는 사람들이 여기 있습니까?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도 알지 못하는 우리 주님의 가슴에다가 대고 부르는 밤의 노래를 밤마다 되뇌이는 사람들이 여러분 가운데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때 하여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여호와의 일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잘못이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이것은 태양이 아니라 year, 년입니다. 한 해 두해 할 때 그 해입니다.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들, 지존자의 오른손의 세월들, 곧 여호와가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며 옛적에 행한 기이한 일들을 기억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터닝 포인트가 뭐냐 하면 믿음으로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아, 이것은 나의 잘못이라. 이는 나의 잘못이라. 그렇게 영원히 버리실까? 은혜를 안 베푸실 걸. 인자함도 끝났을 걸. 약속도 사라졌을 걸. 은혜도 잊으셨을 걸. 긍휼이 끊어졌을 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 나의 잘못이라.” 10절에서 확 하는 방향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인생의 모든 일들이 뜻대로 풀리고 마음이 큰 충동에 의해서 죄에 달음질치거나 유혹에 빠질 때가 아니라면 믿음이 있는 사람과 믿음이 없는 사람이 큰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믿음은 바로 이렇게 결정적으로 어려운 인생의 시기, 결정적으로 어려운 인생의 빙점과 같은 때에 필요한 것입니다. 이 시인은 깊은 침체에 빠져 있었고, 상황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시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마음이 이런 근심과 염려로 요동치면서 어두운 밤길을 향하여 달려갈 때 그때 그는 선을 그었습니다. 나의 잘못이라. 아니다. 이는 나의 잘못이다. 그리고는 지존자의 오른손에 해를 생각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세월을 당신의 오른 손에 선택자의 손에 붙들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런 고백을 시인이 다른 곳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나의 시대가 주의 손에 있나이다.”
우리의 인생의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그 모든 처분이 그 분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계획과는 사뭇 다릅니다. 그래서 그 분의 손에 붙들려 있으며 그는 하나님 앞에서 정신을 차렸습니다. 쿵하는 충격과 함께 ‘아니다’라는 신앙의 울림이 들려왔던 것입니다. ‘아, 이는 나의 잘못이다. 무엇이냐면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지고 인자가 그치고 긍휼이 멈추고, 버림받고,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고 하는 이 모든 나의 생각은 나의 잘못이다.’ 그리고는 자기의 현실에 골몰하던 눈을 들어 이스라엘 백성을 이제껏 까지 붙들어 오신 하나님의 역사로 자신의 시선을 옮겼습니다. 그리고 이제껏 까지 자기를 붙들고 인생의 굽이굽이를 지나오게 하신 하나님의 그 큰 능력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아, 그렇구나. 우리의 인생의 모든 거듭되는 세월들은 주님의 오른손에 붙잡혀 있구나.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들을 사랑으로 붙드시는 그 손에 붙들린 해들이었구나.’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랬고, 자신 민족들의 역사가 그랬고, 자기 개인의 역사가 그러했습니다. 젊어서는 ‘어떤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어려운 일이 닥치면 어떻게 하지?’ 근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고 노년에 접어들면서 그런 생각이 듭니다. 야곱의 고백대로 심히 험한 세월을 지나 여기까지 왔는데 설령 어려운 일이 몇 번 더 닥친들 극복하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고 이전에 경험한 것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슬픔이라는 것이 그까짓 게 무엇이 있을까? 고난과 시련이 흘러가도 우리의 인생의 세월이 지나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고, 시련과 역경이 가득차도 우리의 세월은 흘러갔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지나온 인생을 바라보면 결국은 주님의 손에 붙잡혔습니다. 가슴을 에일 것 같이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들이 결국은 오늘의 나로 만들었고 그리고 저녁에 잠이 들면 아침에 눈을 뜨고 싶지 않는 것 같은 인생의 날들도 그 속에서 주님이 우리를 성숙시켜 여기에 도달하게 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위대한 역사를 회상하면서 그는 당신이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이 붙드셨던 것처럼 또한 자신도 붙들어 이제까지 인도하셨다는 사실을 굳게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마음속에서 그 모든 근심과 서러움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는 이 세상의 풍파 속에 요동치던 마음이 평안해지고 오로지 이런 인생의 깊은 시련 속에서 내가 바라보아야 할 분이 우리 주님 한 분뿐이라는 사실에 가슴이 저미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회상해보면 그때에는 아무 희망이 없이 이제는 이 세상의 풍파에 짓이겨져 버리는 것 같았고 심지어는 하나님께도 버림받은 것 같았지만 그런 마른 뼈와 같은 여러분을 하나님이 이 교회에서 주님 만나 회복시키시고 주님의 은혜 아래 살게 하셨던 놀라운 경험들을 여러분은 가지고 계십니다. 그것을 굳게 붙드십시오.
(찬양)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지라
주님을 바라보게 하시기 위해서 흐트러졌던 우리의 마음을 다시 하나님께 묶기 위해서, 흐트러졌던 우리의 심령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다시 붙잡아 내기 위해서 우리의 잘못 때문에 일어난 시련과 역경을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을 기억하는 믿음으로 데려가셨던 것입니다. 불안하고 근심할 때 이제껏 하나님이 여러분을 위해 행하셨던 위대한 일들을 기억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그래서 희망을 갖는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IV. 환난 속에서 부르짖음
마지막 세 번째는 그렇게 여호와의 위대한 일을 기억하고 나니까 기도할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환란 속에 부르짖을 마음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이 시편 77편은 문학 양식으로 보면 두괄식입니다. 그래서 결론을 먼저 말하고 그 결론이 왜 그렇게 났는지를 쭉 서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결론이 깨달은 결론이 이것입니다.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나의 환란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나니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이게 결론입니다.
하나님은 환란 속에서 이 시인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결론은 그 모든 불안한 마음을 잠재우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께서 부르짖으시면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주께 간절히 부르짖으면 우리의 인생의 해들을 붙들고 계신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듣고 거기에 귀를 기울이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해하기 쉽게 여러분에게 예를 들어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오늘도 수련회에 갑니다. 지난주에도 청년들이 가서 얼마나 은혜를 받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았다 그러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참 새로운 인생의 아이디어를 주셨네.’ 그런 것 아닙니다. 은혜를 많이 받으면 몰랐던 지식이 생기는 정도가 아니라 마치 군대에서 훈련병하고 옷하고 해서 훈련소에서 보내면 엄마한테 편지가 옵니다. 그 편지 올 때 안 우는 아들이 없습니다. 그때만큼 늘 철이 들고 살면 이 세상의 모든 엄마들이 행복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첫 줄부터 눈물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엄마의 심정이 고달픈 군 생활 속에서 전해져 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진짜 편지를 읽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말씀의 은혜를 받으면 몰랐던 지식이 새로 생기는 정도가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 마치 엄마 같은 아버지의 절절한 심정이 우리에게 밀려오는 것입니다. 가슴이 막 에이도록 그것이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게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여러분이 막 교리를 공부하고 이것도 좋지만 더 중요한 것이 뭐냐 하면 성경을 막 통독으로 읽은 것 그것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중요하지 않은 게 뭐 있겠습니까? 그런데 진짜 매일매일 살아가는 삶의 실제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은 묵상입니다. 묵상. 그래서 설교든지 성경이든지 아니면 책이든지 그것을 곱씹어보는 것입니다. 뭐냐 하면 지식이 많이 있는데 이상하게 삶과 맞아 떨어지지 않는 것을 경험할 때 있습니다. 그게 결국 뭐냐 하면 이 속에 있는 지식들이 가슴으로 내려오지 않아서 그럽니다. 그러니까 머리에 지식이 가득하고 가슴에 욕망이 가득하면 지식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머릿속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우리 속에 욕망화 하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그것을 만들어 주는 것이 그게 묵상입니다. 묵상은 깔때기입니다.
그래서 묵상한다는 것은 뭐냐 하면 여기에서 읊조린다고 되어 있는데 묵상한다는 것은 뭐냐 하면 그 의미를 계속 생각하면서 자기에게 그것이 어떻게 적용이 되는지를 생각하는 것이 묵상입니다. 남을 생각하면서 저 인간이 얼마나 나쁜 인간일까, 그리고 저 인간이 인생에 왜 저렇게 살까 그것은 묵상이 아닙니다. 묵상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하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세계와 다른 사람에 대해서 하더라도 마지막에 그것이 궁극적으로 자신들에게 쏟아져 들어와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묵상입니다. 그래서 오죽했으면 교회에서 그 묵상집을 만들어서 보급했던 적도 있습니다. 그것을 매일 읽고 한번, 두 번, 세 번 이렇게 읽으면서 묵상하면서 이 속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런 묵상 속에서 말하자면 그런 것들이 힘이 되어서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게끔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런 묵상 속에서 말하자면 새로운 깨달음에 도달하게 되었는데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은 주께 내가 부르짖으면 주님은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신다는 확신이 밀려들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아까 맨 처음에 이야기했던 불안하고 근심할 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자비와 약속과 모든 것들이 끊어진 것 같았던 마음과는 얼마나 다른 마음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주께 부르짖으면 주님이 나에게 귀를 기울이신다’시인이 이런 마음을 갖자 자기에게 닥친 그 환란의 날은 하나님께 부르짖을 기회가 되었고, 그 시련의 괴로운 밤은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볼 수 있는 한 준비이고 위대한 역사를 볼 수 있는 한 준비가 되었던 것입니다. 절망의 밤에 인내로 그는 기도했고, 하나님 이외에 다른 위로를 모두 거절하며 하나님 앞에 이 환란 속에서 갈 길을 찾으며 주님이 이 환란 속에서 자기를 향한 사랑과 자비를 보여 달라고 빌었습니다. 이전에 자신의 인생을 붙들고 모든 해들을 주관했던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이 그때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붙들고 역사했던 그 위대한 역사들이 그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금도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굳게 믿으며 그는 위대한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이 환란의 날에 내가 주께 부르짖으면 주님은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실 것이라 죄가 있으면 용서하실 것이고, 약하면 강하게 하실 것이고, 그리고 내가 아프면 낫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 그래서 나의 인생의 생사 간에 내가 의지하고 바랄분이 우리 한분 하나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게 해주실 것이라고 하는 그 믿음, 그래서 다른 위로 모두 거절하며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그의 도움을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이 너무 사랑하는 자녀들인데도 때로는 특별히 그가 지은 어떤 죄가 있는 게 아닌데도 그를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기시는데도 시련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그런 깊은 시련 속에서 이렇게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스스로의 힘으로 간절히 부르짖으며 외치는 가운데 이 영혼을 강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쓰시려면 영혼이 강한 힘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그 속에서 다듬어지지 않던 사람들이 다듬어지고, 꺾일 줄 모르던 사람들이 꺾어지고, 그 속에서 약할 때에 약해지는 법과 참으로 강할 때에 강해지는 법을 배우게 하셔서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의 쓰심에 합당하신 곳에 두어서 쓰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런 일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위에서 교회에서나 교회 바깥에서나 혹은 역사에서나 하나님이 정말 귀하게 쓰신 평신도들이 있습니다. 주의 종들도 많지만 평신도들도 많고 내가 언젠가 사업하는 평신도를 만나서 외국 사람입니다. 종교 개혁의 역사를 설명하면서 종교개혁이 사람들이 목사들이 일으킨 개혁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평신도들의 목숨을 건 헌신이었습니다. 가만있으면 온갖 부를 부리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데 그 모든 명예를 버리고 재산을 버리고 가족들이 순교하면서도 그 종교개혁을 지지했던 수많은 평신도들, 나라를 잃어버리고 재산을 잃어버리고 죽음을 맞이하고 수백 년 동안 정들었던 고향을 떠나 추방자의 신세가 되고 그렇게 했기 때문에 종교개혁의 위대한 역사가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그런 모든 일에 쓰임을 받았던 사람들 중에 고통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환란을 당하지 않은 사람이 없고, 배신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없고, 슬픔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의 믿음을 연단하시고 강하게 하셔서 그래서 주님의 뜻을 담을 수 있는 그릇들이 되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V. 적용과 결론
늘 말씀드립니다마는 어차피 우리의 인생은 우리 마음대로 안 됩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대로 되면 반드시 불행해질 것입니다. 그렇게 안 됩니다. 그게 감사하고 30년 전 주의 종이 되겠다고 했을 때 난 이런 인생을 꿈꾸지 않았습니다. 꿈꾼 적도 없고 생각도 한 적이 없습니다. 저 시골 교회에서 그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살다가 조용히 죽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뒤웅 치는 역사의 물결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내 손가락을 잘라 피로 쓸 수 있는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버리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큰 환란과 시련을 주실 때에 그것은 그 사람이 뭘 잘못했기 때문에 복수하려고 그런 것을 주시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바로 그 큰 풍랑과 시련 속에서 우리로 하여금 예전에는 못 만났던 하나님을 만나게 하시기 위해서 그 위대한 하나님의 능력을 다시 한 번 신뢰하게 하기 위해서 그래서 그 풍랑 속에서 당신을 찾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런 시련과 역경 속에서 주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위대한 능력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찾는 자를 만나주심 10 (2016.9.4 주일오전설교)
환난 속에 영광 받으심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시 91:15)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이 시편의 저자는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 속에서 고난 받는 언약 백성이 하나님 앞에 올리고 있는 찬송을 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고난을 받을 때에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누리는 특권이 무엇인지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악인들과 대조되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환란과 시련을 당할 때 하나님께 피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이 시인은 매일 맞이하는 불안한 삶의 상황들을 보았고, 그 속에서 특별히 어려운 시련과 환란을 겪으면서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갔습니다. 우리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시인이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도 매일매일 불안한 삶의 상황에 직면하고 시련과 역경을 만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믿음으로 이 모든 삶의 상황을 해석하며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습니다. 어떤 믿음으로 환란을 해석하고 믿음으로 인생을 살아가야 될 것인가, 때로는 우리 인생에 시련과 역경이 와도 그것으로 우리의 인생이 모두 끝나는 것 같은 비극은 맞이하지 말아야 할 것인데 어떤 믿음으로 그렇게 극복하며 살 수 있을까를 우리는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II. 신자가 당하는 환난
먼저 신자가 당하는 환란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왜 이 세상에 살면서 환란을 만나고 고난을 당하게 될까요? 하나님의 자녀들뿐이 아니라 이 세상의 불신자들도 많은 시련과 환란을 당합니다. 성경은 이것을 크게 세 가지로 원인을 제시합니다.
첫째는 신자들의 죄입니다. 죄 때문에 그 죄의 결과로서 시련과 환란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이킴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불완전한 세상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완전하고 아름다운 것이었지만 인간이 타락하고 난 뒤에 이 세상은 불완전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죄가 없지만 이 세상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고통을 당하고 때로는 나의 죄는 아니지만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어느 사람의 죄 때문에 내가 환란을 당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요나 선지자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니느웨로 가라고 하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큰 풍랑을 만나 배의 모든 화물들을 모두 다 잃어버렸고 목숨까지 위태로운 지경이 되었습니다. 만약에 그 배에 요나가 타지 않았더라면 그 배에 탄 사람들은 아마도 평안하게 항해하여 목적지에 도달했을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죄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죄, 이 세상의 불완전함 때문에 우리는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세 번째로 성경이 제시하는 것은 마귀입니다. 마귀가 이 모든 인간들에게 끊임없이 도전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 세상에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방해하기 때문에 우리는 또한 믿음으로 살 때에도 시련과 환란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이 모든 시련과 환란의 원인들이 복합적이어서 그 원인이 무엇이라고 쉽게 단정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환란과 시련을 당할 때에 원인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기보다도 오히려 더 많은 가르침을 다음 사실에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신자가 환란과 시련을 당할 때 그런 커다란 시련과 환란 속에서 자기 인생의 주는 의미를 성찰하고 그래서 이 모든 삶의 상황을 초월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하도록 우리를 이끄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과거의 어떤 잘못에 연연한 나머지 원망의 발목이 잡혀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집요하게 자기가 이런 환란과 역경을 겪는 것이 공정하지 않다고 하며 하나님 앞에 항의를 하고 마음을 곧추 세우고 하나님께 저항하지만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앞에 전개되는 우리의 모든 삶의 상황을 우리가 모두 정확하게 해석하고 내가 왜 이 상황에서 이런 일을 겪어야 되는지 모두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만약에 그것을 모두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신앙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이해할 수 있을 때도 있지만 이해할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해하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모든 삶의 사태를 초월하여 여전히 온 땅과 하늘 위에 이 세계의 모든 일을 주장하고 계신 하나님을 내가 뵈옵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비록 지금 이 순간에는 왜 이런 시련과 역경을 만나야 되는지 하나님의 계획을 모두 이해할 수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계시고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내가 믿는 것입니다. 바로 그 분이 나 같은 인간을 위해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주셨고, 그렇게 가장 소중한 아들까지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이셨으니 나를 위해서 하나님에게는 더 소중한 것이 없다는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시련의 물결이 환란의 폭풍이 몰아치고 인생의 작은 쪽배가 뒤집히는 것 같은 위기의 상황을 만나도 나의 인생이 주님의 장중에 있고 환란과 시련은 내가 잠시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내 인생에 간섭하지만 주님은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내 인생의 주인이시라는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흰 이빨을 드러내는 죽음 앞에서도 신자는 당당할 수 있고, 환란 속에서도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우리가 두렵고 무섭지 않은 이유는 시련과 환란은 우리에게서 하나님을 빼앗아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 신앙을 통해서 환경을 이기고 역경을 이겨낼 수 있는 하늘의 생명과 사랑을 공급받으며 사는 것입니다.
다 모릅니다. 그 중의 어떤 것들은 인생을 더 살고 나면 그때 나에게 왜 그런 환란과 시련이 필요했는지, 왜 하나님은 나를 그렇게 사랑하시면서도 그렇게 고통 받고 아프도록 가혹하게 내 인생을 훈련시키셨는지를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서 우리의 시련과 환란을 통해서 우리의 삶이 평탄했더라면 결코 깨달아 알 수 없을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III. 환난 속에서 영광 받으심
오늘 성경은 하나님이 이러한 환란 속에서 영광을 받으신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환란을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그 환란 속에서 모진 고통을 겪는 가운데 오히려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실 수 있는가 우리는 궁금합니다. 오늘 성경은 환란 속에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세 가지 방법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A. 간구하게 하심으로
첫째는 간구하게 하심으로써 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를 영화롭게 하리라”고 말합니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 학년이 바뀔 때마다 겪는 그런 새로운 느낌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영어 교과서입니다. 중학교 2학년에서 3학년 올라갈 때 교과서를 탁 받아보니까 글씨가 훨씬 작아졌고 문장이 길어졌습니다. 그리고 모르는 단어들이 많이 나옵니다. 이걸 어떻게 배울 수 있을까 두렵습니다. 그리고 고등학교 올라가면 글자가 더 작아지고 문장이 더 복잡하고 길어집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가 얼만큼 실력을 쌓아왔는지를 배우게 되고, 또 자기가 어느 수준에까지 도달했는지를 스스로 파악하게 됩니다.
우리는 시련과 역경을 겪지 않으면 자신의 신앙이 어느 지점에 와 있는지 아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되려면 아마도 하나님이 그의 인생을 아무리 평탄하고 또 아름답게 성공하도록 인도하셔도 끊임없는 자기반성 속에서 진리의 칼로 자신을 벼리며 그러며 자기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어야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고도의 경건에까지 이르지 못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는데도 때로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환란을 당하게 하십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시련을 만나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과 자원으로서는 이 환란과 시련을 극복해 나갈 수 없다는 부족을 느끼게 됩니다. 그 부족한 것이 결국은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입니다.
그렇게 부족한 것을 깊이 느끼면서 하나님께로부터 이런 생명과 사랑이 주어졌기 때문에 내가 이제껏 인생의 많은 시련과 난관들을 극복하며 살았구나 하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처음 환란을 겪고 그 속에서 자신의 힘으로 그 모든 것들을 극복해 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때 신앙은 나 중심에서 바라보던 내 인생에 대한 모든 관측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내 인생을 바라보도록 우리를 인도합니다. 욕망과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랑 때문에 찢어진 정신, 흩어진 마음이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 순간 하나님을 간절히 앙망하게 됩니다. 맨 처음 시작할 때에는 자기 자신이 너무 괴로워서 이 환란과 시련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하나님께 매달렸지만 그렇게 마음을 모아 간절히 기도하는 동안에 우리는 비로소 나 자신에게서부터 떨어져 나와 또 다른 내가 되어서 현실의 나를 바라보는 안목을 갖게 됩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자기 자신을 객관화시켜서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무수히 꾸지람을 받아야 할 내가 사실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나도 실은 그 나와 너무나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왔고, 그래서 결국은 나의 삶은 시련과 역경으로 얼룩졌고,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의 징계나 심판이라기보다는 나의 잘못된 인간의 본성으로 살아온 모든 삶의 결과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게 됩니다.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을 그 모든 환란과 시련 속에서 고통 받으며 자신이 바로 하나님을 잊고 살았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이 모든 시련과 환란들을 극복하며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생명과 힘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게 됩니다. 마음속에 피가 끓고 그리고 심장의 박동이 강력하게 뛰기 시작하며 마치 급류를 타고 흐르는 물처럼 내 마음이 어느 한곳을 향하여 급히 흐르게 됩니다. 내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요동치며 한 곳으로 흘러가기를 원하고 내 속에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오직 그 하나님을 앙망하라고 소리치는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그때 진짜 간구다운 간구를 하나님께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마음의 고통 때문에 그것을 면해 보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매달렸고, 현실을 회피하고 모면하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마음이 줄달음치며 급류가 한곳으로 흘러가듯이 마음을 쏟으며 물같이 흐르는 기도를 드릴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을 거스르는 수많은 것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이런 시련과 환란을 가져다 준 사람을 향한 원망을 그치게 됩니다. 그리고 내게 일어난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한분께 매달리지 않을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광야와 같이 광활한 인생의 대지 위에서 하나님 한분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은 제일 먼저 마음의 모든 우상들이 파괴된 깨어진 성도의 마음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적은 수많은 깃발이 사람이 만든 깃발이 온 땅에 나부끼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가장 영광을 받고 싶어 하는 곳은 한 뼘도 되지 않는 우리 인간의 마음 그 안에서입니다. 거기서 나를 제일로 삼고 살던 그 교만의 깃발을 꺾고 그리고 어린 아이처럼 자신의 인생의 모든 처분이 주님께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며 어린 아이처럼 간구하며 매달리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은 황폐했던 우리의 마음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평탄하고 안일한 삶을 싫어하고 시련과 고통스러운 역경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그런 역경과 시련을 만나게 하시는 것은 제일 먼저 여러분의 마음을 깨끗케 하여 거기서 주님의 깃발을 나부끼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염려와 근심으로 마음을 태우는 대신 하나님께 간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을 모아서 하나님께 간절히 우리를 위해서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은 하나님이 나를 버리실 리가 없다는 확신 속에서 나의 부르짖는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 어머니 같은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주께서 나를 도와 달라고 간절히 간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응답하심으로
두 번째는 응답하심으로써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고 말입니다. 시련과 역경을 당했을 때 우리의 관심은 열심히 기도해서 우리 주님을 깨닫게 해 주어서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에 필요한 것들을 주시는 것이 꿈입니다. 그래서 마치 잠자고 있는 사람을 깨우듯이 주님 앞에 큰 소리로 부르짖기도 하고, 때로는 내가 믿기만 하면 예수님도 무릎 꿇게 하실 수 있다 라는 마음으로 자기의 믿음을 과장하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주님의 응답이 없습니다. 기도의 응답은 먼저 우리 자신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것이지 하나님을 무릎 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만 그 믿음은 심리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주어지지 않았지만 그렇게 간절히 간구하는 자기 깨어짐의 기도 속에서 하나님은 비로소 우리 자신을 반성하도록 촉구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도움만을 바라다가 실망합니다. 믿음은 보이는 현실 너머를 직시하게 만드는 힘입니다. 없는 것도 그 너머에서 있는 것 너머에 있는 없는 것을 있는 것보다도 더 확실하게 바라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이런 시련과 환란이 닥칠 때에 비로소 매일매일 주님을 바라보면서 사는 경건한 삶이 필요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눈앞에 현실에 낙담을 극복하고, 모든 일을 통해 당신의 사랑을 보이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하나님이 환란과 역경 속에서 부르짖는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실 것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만약에 응답이 없으면 그것은 바로 내가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진실로 간절히 찾지 않기 때문이라고 자기를 채찍질하며 주님 앞에 나아가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어떠한 시련과 난관을 만나도 두 가지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인생에 희망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로는 우리가 죄를 지을 때조차도 우리를 깨끗케 하시기 위해서 연단하실지언정 우리를 미워하셔서 복수하시거나 당신이 우리의 죄 때문에 당한 괴로움을 갚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보복하며 괴롭히는 하나님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는 다른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자주 끊어지지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변함없이 계속되어서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한분만을 바라보게 하실 때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이것이니 내가 진실로 하나님께 간구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나의 기도에 응답하실 것이고, 나의 기도에 항상 당신이 원하는 것을 나에게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두드리는 나에게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실 것이며, 구하는 나에게 하나님은 주실 것이고, 혹시 내가 너무나 간절히 옳지 않은 것을 구한다고 할지라도 주님은 나의 한계까지 헤아리시며 가장 좋은 것을 주실 것이라고 하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에 어려운 삶의 상황에서 마음을 쏟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응답하십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마음에 놀라운 평화를 맛보게 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은 이 세상의 시련과 환란의 근심 걱정 보다는 온 땅과 만물위에 높으신 우리 하나님 한분을 깊이 사랑하고 높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은 간절히 간구하는 우리에게 응답해 주심으로 시련과 역경 속에서 주저앉았던 우리의 마음을 일으키시고 낙심과 패배로 얼룩졌던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놀라운 기쁨과 영광을 주시는 것입니다. 응답하심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속에 당신을 가득 채우셔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환란과 시련 속에서 주님께 응답을 확신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C. 건지심으로
마지막 세 번째는 우리를 건지심으로써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들이 환란을 당할 때 내가 그와 함께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그곳에서 신자는 가장 영광스러운 존재가 됩니다. 우리가 받는 영광이 올바른 영광이라면 바로 거기서 우리가 영광을 받는 그곳에서 우리 주님이 높아지시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 주님이 참으로 올바르게 영광을 받으시는 곳에서는 주님을 사랑하고 그 분의 이름에 매여서 사는 우리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또 우리도 그 안에서 영광스러워집니다. 하나님께서는 환란을 당하는 모든 사람을 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환란 속에서 마음을 쏟아 당신께 부르짖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구원을 보여주십니다. 또 환란 속에서 주님의 도움을 받아도 간절히 기도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그것이 주님께로부터 온 도움이라는 사실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작은 환란 속에서도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던 사람들은 바로 그 환란 속에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입니다. 구원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우리가 의지하며 살 분은 오직 우리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아주 오래전이었습니다. 환란을 만났습니다. 정말 너무너무 괴로운 시련이 이어졌습니다. 새벽마다 하나님께 나아가 나에게 무슨 죄가 있는지 물었습니다. 차라리 나에게서 어떤 큰 죄가 발견되고 이 죄 때문에 이 환란이 내게 미쳤습니다. 하나님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라고 펑펑 울 수 있다면 마음이 시원하겠습니다. 그런데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여러 날이 지나가고 기도할 힘조차도 없어지던 어느 때에 놀라운 깨달음이 왔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얘야, 넌 죄 없다. 이런 큰 환란을 당할만한 무거운 죄를 너는 지은 적이 없다. 그러나 너에게 모자라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게 뭡니까? 주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너는 예전에 어린 아이처럼 나를 간절히 의지했다. 그런데 이제 내가 너에게 지식과 재능과 기회를 많이 주었더니 그때처럼 나를 의지하지 않는구나.” 회개가 쏟아지고 진정한 기도가 시작되었는데 내가 하나님을 어린 아이처럼 의지하며 살았던 날과 그렇지 않은 현재가 날카롭게 대조가 되고, 이 세상에 어떤 끔찍한 죄를 지은 것보다도 더 뼈저린 회개의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그리고 그때에 저는 어린 나이였지만 한 가지 중요한 하나님의 성품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찬양)
시시때때로 날 사랑하사 시시때때로 새 생명 주니
영광의 기약이 이르도록 시시때때로 주 만 봅니다.
척추를 수술했는데 의사가 3일 동안 천장만 보고 누워 있으랍니다. 그리고 꼬박 천장을 보고 누웠습니다. 제가 늘 잠을 자는 자세 때문에 스스로를 꾸짖곤 하는데 항상 옆으로 자야지만 편안합니다. 그게 척추에는 너무 안 좋답니다. 똑바로 자야 된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그렇게 자본 적이 없습니다. 3박 4일을 똑바로 천정만 보고 24시간 있었더니 이게 엉치가 까지면서 짓무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누워서 한 가지 평범한 사실을 생각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데 잊고 살았던 사실, 허리를 피고 걸어 다닐 때는 내 힘으로 그렇게 사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꼬박 누워 있으면서 깨닫는 것이 뭐냐 하면 ‘아, 우리의 삶의 순간순간이 기적이었구나. 내 코에 호흡이 멎지 않는 것, 그리고 내가 내 발걸음을 옮겨 내가 원하는 길을 걸을 수 있는 것, 그리고 눈을 뜨고 사물을 보고 생각하고 느끼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구나.’ 이렇게 우리의 인생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우리의 인체의 장기 하나, 하나도 주님을 의존하며 살게 되어 있는데 우리의 마음은 수시로 하나님을 떠납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것이 마음에 깊이 습성이 되도록 배어서 그래서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구원 받아야 될 존재라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어린 아이처럼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일은 인생에 있어서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린 아이처럼 당신을 의존한 마음이 되기를 원하시지만 그러나 우리는 아주 못된 독립 정신으로 자신의 인생의 문제들을 이 세상에 있는 자원으로 해결하며 살아가려고 애를 씁니다. 극복하면 자기의 재능을 찬송하고, 이 세상의 자원을 높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그렇게 살아야 할 사람들이 아닙니다. 내가 살아 숨을 쉬는 것, 그리고 내 마지막 코에 호흡이 바람이 되는 그날까지 나를 붙들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우리의 모든 지체의 건강함이 오직 매일매일 붙들어 주시는 주님의 은혜 때문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비록 내가 시련을 당하고 이 세상에서 환란을 만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곳에서 나를 건지실 수 있는 하나님이고, 어린 아이처럼 당신을 의지하게 하시기 위해서 아들을 주시기까지 사랑한 우리들을 때로는 시련과 역경 속에 남겨두신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의지할 바가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있다는 것을 믿게 하십니다. 그래서 시시 때때로 어린 아이처럼 주님을 바라보며 형통할 때나 시련을 만날 때나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묶여 있기를 기대하시면서 하나님은 우리를 이끄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가진 자원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 자원 안에 있는 일들은 쉬운 일이지만 그 자원을 능가하는 일에는 우리는 어려운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시련과 환란을 만날 때 이스라엘의 시인들은 눈을 들어서 산을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그 산을 누가 만드셨는지를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 한 마디로 그 모든 것들을 창조하셨고 창조된 그것을 누구도 옮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산을 바라보며 나의 도움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모든 시련과 역경 속에서 여러분을 건져내실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은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열렬히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응답을 받으십시오. 기죽지 마십시오. 하나님이외에 우리가 잃어버릴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우리는 다양한 삶의 상황을 만나지만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런 시련과 역경 속에서 마음을 바쳐 간절히 간구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럴 때 시련과 역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영화롭게 하는 길이고, 또 우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이 됩니다.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면 삶에 굽이굽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적이 없었습니다. 그때는 못 깨달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하나님이 나를 당신의 두 손 안에 보호하셨던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함께하신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며 믿음으로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찾는 자를 만나주심 11 (2016.9.11 주일오전설교)
사랑하는 자를 높이심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시 91:14)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은 시련 속에서 시인이 어떻게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도 우리의 인생이 시련 속에서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자기가 주인 된 삶을 포기하고 우리 주님이 주인 된 삶을 살기 위해서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신앙이 어렸을 때에는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것이 다 잘될 것이라고 꿈을 꿉니다. 그런데 막상 신앙생활을 하고 나면 예수 믿은 후에도 시련과 역경, 고난, 고통, 이런 것들이 언제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기 전에만 인생이 내 맘대로 안 된다는 것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된 다음에도 우리는 그것을 배웁니다. 이것이 현실에 대한 솔직한 인정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우리가 그것을 인정하기를 원하십니다. 다만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시련과 역경이 오면 이것은 내 인생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내 인생에 필요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자원을 모두 동원해서 그 시련과 고통을 가져다 준 원인을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의 자원과 능력의 한계 때문에 그렇게 못합니다. 그런 시련과 역경을 당하게 된 데는 반드시 원인이 있고 그것을 제공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미워하고 원망하고 복수심을 품고 그리고 자신의 인생은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젊은이들이 하는 유행어 가운데 ‘이생망’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번 세상에서의 인생은 망했다’ 다음 세상이 올까? 윤회를 믿는 불교에서도 인간이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은 그것은 아주 희귀하게 어마어마한 덕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에게만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러면 어떻게 보면 지금이 가장 좋은 때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렇게 인생을 시련과 고통 속에서 자기 인생이 아닌 것처럼 포기하고 살면 결국은 한 번도 행복한 날이 없이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를 믿는 유익은 이런 시련과 역경 속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련과 역경, 내 인생이 마음대로 안 되는 상황은 언제나 있어도 그것을 헤치며 살아갈 수 있는 하나님의 생명과 능력, 그리고 사랑의 힘을 공급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II. 사랑하는 자를 건지심
A. 하나님을 사랑함
오늘 성경은 제일 먼저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를 건지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여기에서 ‘그’라고 하는 것은 우리 모든 일반 사람을 이야기할 수도 있고 가상적인 사람을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혹은 이 시인 자신을 가리키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련 속에서 이 시인은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많은 시련을 겪었고, 그 경험을 토대로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사는 성도들의 행복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깊은 경험 속에서 우러나온 체험적인 고백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피난처와 요새로 여겼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올무와 전염병에서도 하나님이 건져주실 것을 굳게 믿었고, 또 그렇게 살 힘이 생겨났습니다.
역사에 보면 번창했던 제국이었는데 이유 없이 나라가 망하는 경우를 봅니다. 마야 문명에 마추픽추, 크메르 제국의 앙코르와트, 그리고 발해 같은 것입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역사학자들은 발해가 아마도 백두산의 폭발 때문에 지진의 영향으로 망했을 것이라고 보고 마추픽추와 앙코르와트는 외부에서 침입한 흔적이 없습니다. 이런 경우는 전염병으로 모든 사람이 죽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오늘날 전염병에 대해서 약간의 두려움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게 절망적인 두려움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백신도 많고 치료의 방법이 많으니까 그리고 더욱이 그런 것에 대해서 완전히 무식한 사람은 용감하기 때문에 겁도 안 먹습니다. 사실 여전히 이 전염병은 굉장히 무서운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전염병에서도 자기를 건져주실 것을 굳게 믿었고, 밤의 공포와 화살, 어디서 누가 쏘는지도 모르게 자기를 겨냥하고 있는 그 화살에 맞을 두려움, 밤의 전염병, 이것은 아마 밤중에 유행하는 전염병이라기보다는 절망적인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절망적인 전염병과 재앙들, 이런 것 속에서도 천명이 왼쪽에서 일만 명이 오른쪽에서 엎드려져도 그 재앙이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믿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행복입니다.
그런 속에서 많은 시련과 역경을 지나온 이 시인에 대한 주님의 평가는 ‘그가 나를 사랑하는구나.’였습니다. 시련이 오기 전까지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요새 ‘부산행’이라는 영화가 1200만을 넘었다는 이야기가 들렸습니다. 그리고 터널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본다고 하는데 전 아직 못 봤습니다. 어느 영화 평론가의 글을 읽었더니 그 영화를 감상하는 방법을 이야기했습니다. 그게 무슨 좀비들의 이야기나 혹은 터널에서 사고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런 사고를 둘러싸고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이기심 속에서 살아가는지에 대한 묘사가 오늘날 우리 사회와 너무 공감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관객이 그 영화를 보는 거라는 것입니다. 추석 명절에 어떻게 하든지 두 편을 보려고 하는데 될지 모르겠습니다.
모든 것이 갖춰있고 모든 것이 편안한 때에는 우리가 누군지 모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지를 모릅니다. 아파 보면 내가 주님의 은혜로 살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굶어보면 매일매일 배불리 먹는 것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은혜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시련을 통해서 내가 누구인지 드러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평탄한 때에 우리가 누구인지를 보여주시지를 않고 시련과 역경 속에서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어서 때로는 누추한 나를 내 앞에 들이 미시며 “보아라. 이것이 네 모습이니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많은 사람들도 바로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시련과 역경을 당할 때 그것이 내 인생의 고민의 전부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내 안에 하나님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찬양)
주님 사랑해요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그런데 많은 사람은 이 사실을 모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말했습니다. “너희 안에 여호와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고통이니라” 아무리 많은 물질을 모으고 저장하고 그것으로 자신의 행복을 보장해 보려고 애를 써도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치열하게 계속되는 고통은 하나님이 맨 처음 인간을 창조하실 때 사랑하게 하셨던 바로 그 분을 사랑하지 않는 것, 그것이 인생의 고통입니다.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사랑의 진실성은 시련 속에서 입증됩니다.
한때 유튜브에 엄청난 조회수를 기록하며 문자가 올랐습니다. 그래서 나도 그 얘기를 듣고 한번 봤습니다. 둘이 서로 애인인데 사귀는 것입니다. 여자가 문자를 ‘띡’ 보냈습니다. ‘너 왜 그래?’ 남자가 ‘뭘’ ‘너 모해?’ ‘알바하고 있어.’ ‘너 나한테 이럴 수 있는 거야?’ ‘뭔데?’ ‘너 나한테 숨기는 거 있지.’ ‘아닌데’ ‘거짓말하지 마.’ 그것을 다 찍어서 보냈습니다. 핵심이 뭐냐 하면 잘못해 가지고 고막이 둘 다 나가가지고 귀가 안 들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제 애인한테 털어놓으면 너무 걱정할까봐 친구한테 털어놨는데 친구가 여자 친구에게 그 친구를 통해서 이것이 들어온 것입니다. 그래서 막 야단을 치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굉장히 감동입니다. ‘네가 나한테 빨리 알려야지 내가 수화를 배울 거 아니야.’ 그런데 꽤 길게 계속되는 문자를 읽는데 감동이 되었습니다. 진짜 그 자매가 그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 주위에도 보면 다 결혼하기로 했는데 그런데 형제가 아파, 자매가 깨끗이 파혼하고 돌아서는 것입니다. 반대도 있고. 그것은 조건이 맞으니까 결혼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사랑은 어떻겠습니까? 주님이 나에게 주시는 그 무엇 때문에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이 주님이시기 때문에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자기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신 그 핏빛 사랑 때문에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게 진정한 사랑입니다. 시련을 당할 때에 우리 그리스도인은 생각합니다. 어떻게 이 시련을 극복할 것인가 하는 현실적인 문제와 내가 이 시련 속에서도 변함없이 우리 주님을 붙들고 있는가,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이 나를 사랑하면 이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으며 그 사랑이 없다면 모든 있는 것이 쓸모가 없다는 고백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만나는 시련과 역경은 한번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흔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사랑과 이 세상에 붙어있는 사랑을 떨쳐버리고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미지근한 우리의 마음이 뜨겁게 타올라 우리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도록 우리를 다그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도록 다그치시는 무서운 흔드심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눈물 어린 사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나 같은 인간 없어도 얼마든지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계실 수 있는데 마치 당신에게 내가 필요한 것처럼 그렇게 너는 나를 사랑하라고 너의 사랑이 하나님인 나에게도 매우 특별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에게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변함없이 주님의 사랑을 붙드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하나님이 건지심
하나님이 이런 사람을 건지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 즉 내가 그가 건지리라”고 말입니다. 건진다고 하는 것은 자력으로 헤어 나올 수 있는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는 물속에서 익사중인 사람, 깊은 웅덩이에서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상태에 있는 사람을 외부로부터 오는 도움으로써 그를 거기에서 구출해 주는 것을 건지심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결코 버리시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묻고 싶을 것입니다. 제가 상태가 안 좋아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때는 주님이 날 버리실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 안하셔도 안 버립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기를 안 버린다는 사실을 그 사람은 모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만 하나님이 나를 안 버리시는구나. 그리고 칠흑 같은 인생의 어둠 속에서도 주님이 나를 지키시는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오늘 1절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사는 사람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논산 훈련소에 딱 입대했는데 그 훈련병 들어간 사람 그때 사람 취급도 안했습니다. 장정이라고 부르면서 그러면서 이제 겨우 군복도 못 입고 사복입고 신체검사 기다리는 중인데 같이 들어온 친구는 완전히 살판났습니다. 왜냐하면 거기 내무반장이 우연히 자기 친구를 만난 것입니다. 아니 짝대기 세 개 달린 내무반장 한 사람만 만나도 그렇게 기가 사는데 전능자의 그늘 아래 있는 사람, 지존자의 은혜의 그늘 아래 있는 사람이면 얼마나 행복해야 됩니까? 웃으세요. 항상 이렇게 마음에 이렇게 사람들에게 기쁨을 좀 보여주십시오. 주님이 나 같은 사람과 함께하고 나는 이 세상에서 시련과 역경을 만나고 눈을 뜨면 보고 싶지 않은 현실과 부딪히지만 그러나 나는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는 사람입니다.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사는 사람입니다. 아멘. 아멘.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피난처 삼아 여호와를 의뢰하도록 부름을 받은 성도라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죄 하면 살인, 강도, 간음, 사기, 폭행, 이런 것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가 시편 23편을 설교하면서 여러분에게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것은 씩씩하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불굴의 독립 정신으로 그냥 씩씩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교도소에 갈 죄를 짓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신문에 오르내리지는 않았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주님 사랑하지 않습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회개가 없습니다. 그냥 씩씩하게 살다가 자기 뜻대로 안되면 하나님 원망하고 하는 그 삶이 어떻게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에 사는 성도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예화) 우리 교회도 몇 번 오셔서 설교 하셨는데 종로 내수동에 있는 내수동교회의 박희천 목사님이십니다. 지금은 구순이 다되셨지만 그 분이 제 나이 정도 되셨을 때에 제가 그 교회에서 부교역자로 횟수로 7년을 있었습니다. 주일날 교역자 회의가 오후에 다 끝나면 목사님이 당신 인생 살아온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에게 적절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때로는 그것을 따분해 하는 교역자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저는 그 시간이 참 좋았습니다. 그래서 몇 년 동안 노트에 까맣게 기록을 해두기도 했습니다. 그 중의 한 간증이 생각이 납니다. 젊은 시절에 어린이 사역을 정말 잘하셨습니다. 어느 날 어린이 사역에 눈을 뜨고 열심히 아이들을 전도하고 사역했는데 엄청났습니다. 그래서 삽시간에 그 시골에서 700명이 모였답니다. 그래서 이분이 전국구 강사가 되었습니다. 그 100명도 안보이던 교회에서 700명이 모인다고 하더라 그래서 전국으로 불려 다니신 것입니다. 그때까지도 목사님이 한 달에 한 번씩 교회학교 내려오셔서 첫 주에 유치부, 둘째 주에 유년부 이런 식으로 하셨는데 유치부 애들이 그 연세 많으신 담임 목사님 설교할 때 제일 조용하고 은혜를 받습니다. 한 5분 설교하시는데 아이들이 숨을 죽이고 그 설교를 듣습니다. 청년부는 안 가셨어요. 중등부까지만 오시고 고등부는 안 오시고 그래서 유치부, 유년부, 초등부, 중등부, 이렇게 1,2,3,4주 이렇게 오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해서부터 이 사역이 안 되더랍니다. 힘이 하나도 없고 교사들이 점점 병들고 그 다음에 학생들이 계속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혜를 주셨으니까 착착착착 대처하고 해 보고, 해 보고 하는데 안 되는 것입니다. 어느 날 교회에 와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이 깨닫게 하시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매달렸답니다. ‘주님, 주님이 나에게 이 모든 은혜와 재능을 주셨지만 그동안 나는 내 재능을 믿고 일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고 깊이 회개하고 나니까 다시 사역에 복을 주시더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은 씩씩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씩씩하게 빨리 걷는 사람들이 딴청피우다가 기둥에 한번 부딪히면 중상을 입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천히 걷는 사람들은 조금 다칩니다. 중상입니다. 저는 요리를 좀 합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한 달에 한 번씩 요리를 해서 가족들을 즐겁게 했습니다. 요즘은 너무 바쁘고 그래서 못하기도 하고 하기도 싫고 그랬는데 제가 잘하는 요리가 꽤 여러 종류 되는데 그 중에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요리 중 하나가 수제비입니다. 수제비를 맛있게 하려면 국물 내는 법에 대해서는 제가 너무 길어서 안하고 반죽만 가지고 이야기를 하겠는데 우선 밀가루가 좋아야 합니다. 가격과 상관없이 제일 좋은 밀가루를 사시는 것입니다. 참고해야 할 것은 빵을 만들 때에는 프랑스 밀가루가 좋고, 면이나 국수를 할 때에는 우리 밀가루가 훨씬 좋습니다. 그런데 어쨌든 좋은 밀가루를 사서 거기에다가 적합한 양의 물을 넣고 그리고 양질의 소금을 넣고 그리고 갓 깨를 볶아서 짠 참기름을 한 숟가락 정도 넣으세요. 그리고 그것을 반죽을 하세요. 자매들에게 맡기지 말고 형제들이 팔을 걷고 하세요. 그래서 한 네다섯 명이 먹을 수 있는 요만한 덩어리를 개그 콘서트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텔레비전을 보면서 주무르시든지, 드라마 한편 아니면 9시 뉴스데스크 한편 볼 때까지 주무르시는 것입니다. 더 좋은 방법은 그것을 비닐로 싸고 보자기로 감싸서 그래서 밑에다 놓고 계속 밟으면서 뉴스를 보는 것입니다. 실제로 일본에 가서 우동을 먹어 보면 우리가 우동이라고 먹는 것이 얼마나 엉터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지금은 기계로 많이 한다고 하지만 옛 방식은 이제 밤에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그때 반죽을 해서 반죽을 치대는 방에 철봉 같은 것이 있고 그것을 붙들고 왔다 갔다 하면서 장인들이 새벽까지 자기 반죽을 밟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밀가루 입자 하나하나가 치대어 지면서 짝짝 공간이 없이 달라붙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것이 쫙 치대어져서 딱 달라붙는 것입니다. 빈 공간이 없이 달라붙으면서 이것을 면발을 딱 끊어서 이렇게 들여다보면 공간이 없이 아주 치밀하게 됩니다. 완전히 다른 식감이 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쉽게 하기 위해서 밀가루를 확 펼쳐서 넓은 반죽을 만들어서 그냥 뜯어서 넣는데 맛이 없고 반드시 손으로 그래서 끓는 물로 물을 묻히면서 동일한 두께로 펼치면서 동일한 크기로 떨어뜨려서 동일한 두께, 동일한 크기로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만들어서 계속 던지는데 이제 너무 느리면 물이 끓어서 먼저 들어간 것이 푹 익고 뒤에 것이 덜 익습니다. 그래서 빠른 속도로 손이 안 보이게 해서 순식간에 떼어서 딱 넣고 그렇게 국을 끓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원도에서는 그것을 ‘뜯어국’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제가 왜 이 말씀을 드리냐 하면 하나님은 시련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마음의 초점을 모으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서 시련과 역경이 계속 우리의 마음을 짓밟을 때에 섬기던 우리의 마음의 조직들, 어리석은 생각과 마음의 찌꺼기들이 뭉치고 뭉치면서 그러면서 그것들이 조직이 치밀하게 말하자면 접합되면서, 응축되면서 그러면서 결국은 우리 마음 갈피갈피 사이사이에 찢겼던 스며들어있던 죄악의 찌꺼기들이 빠져나가게 됩니다. 그러면서 거기서 우리의 마음이 깨어지고 물같이 녹고 하나님을 앙망하는 눈물로 가득 차게 되는데 모든 사람이 마음으로 고통을 받는다고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고생 많이 한 사람이 정말 훌륭한 사람이게요? 아닙니다. 고난을 많이 겪었기 때문에 망가진 사람들이 이 세상에 많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그렇게 시련과 고통에 의해서 짓밟히면서 그러면서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려고 힘쓰는,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힘쓰고 자신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의 추이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해석하려고 애쓸 때에 그때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고치시면서 우리를 그 시련 속에서 건져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련이 우리의 인생에 쓸모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거기에 담금질 하시면서 그러면서 우리의 마음을 청결케 하시고 우리를 깨끗케 하십니다. 연단되게 하시고 단단하게 하셔서 하나님 한분을 바라보고 그 언약을 붙들며 살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과연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그 시련의 폭풍 속에서 건지신다는 사실을 믿어지게끔 만드시는 것입니다.
(찬양)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 하소서
시련 속에 있는 여러분이여, 눈을 들어 하나님을 보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시련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주님이 무엇을 말하는지 생각하기 바랍니다. 오히려 그 시련 속에서도 ‘너는 나를 사랑하였구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인정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III. 아는 자를 높여주심
A. 하나님을 아는 자
두 번째는 하나님을 아는 자를 높여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하나님을 아는 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마 구약 성경에서 안다, 알다라는 이 단어만큼 심오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도 흔치 않을 것입니다. ‘야다’라고 하는 이 단어는 과학적으로 어떤 물질의 외관, 크기, 모양, 부피, 성질, 구성요소, 이런 것을 이성적으로 아는 지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경험적인 지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곧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고, 하나님을 경험했다는 의미입니다. 원래 이 ‘야다’라는 단어가 첫 번째 쓰여진 것은 창세기 2장에서인데 ‘선교하다’라는 의미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히브리 지방에서는 여자가 남자를 보고 절대 ‘나는 저 남자를 잘 안다’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기서 성경이 “그가 내 이름을 안즉” 그렇게 말했는데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은 완전 동의어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지만 당신의 이름은 이 땅에 두셨습니다. 온 땅과 하늘위에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이 없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못 봅니다. 그러나 이름은 볼 수 있습니다. 이름은 하나님의 명예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 의해 높아지거나 낮아질 수 없는 분이시지만 인간의 태도에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은 높아지기도 하고 낮아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름을 안다고 하는 것은 주님을 안다는 것입니다. 지식적으로만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그를 알고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종종 시련과 역경이 우리에게 왜 필요한지를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시련과 역경을 통해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게 하시고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게 하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전지하신 주님이 아브라함이 당신을 경외하는 것을 모르셨을 리가 있을까요? 그런데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100세에 난 아들 독자를 이삭을 잡아서 제물로 바치라’ 그리고 진짜 주님의 명령을 따라 그를 죽이고자 하셨을 때에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제야 네가 비로소 나를 경외하는 줄을 알았노라’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꿰뚫어보시는 하나님이시지만 우리의 마음에 있는 하나님의 진실한 사랑이 삶으로 표출되는 것을 기뻐하시고 그것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관심은 이 세상에서의 번영과 성공, 이 세상에서의 쾌락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은 어떻게 이 아이가 주님의 사람이 될 것인가, 어떻게 이 아이가 참 사람다운 사람, 성도다운 성도가 되어서 나의 영광을 이 세상에 드러낼 것인가 이것을 고민하십니다. 그리고 그의 삶 속에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을 생각나게 만들고, 하나님 앞에 살게 만들고,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관계를 깨닫도록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잘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문제가 자원의 부족이라고 생각합니다. 건강의 부족, 생명의 부족, 지식의 부족, 혹은 이런 모든 것들이 인간관계의 부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모든 것들을 우리가 이 세상사는 동안에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돈을 많이 가지고 있어도 그것을 완벽하게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건희 씨가 한 시간에 생명을 주는데 10억이면 그렇게 해줄 수 있다고 할 때에 그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겠습니까? 인생에 있는 자원은 언제나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런 방식으로만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것은 이성적으로 옳지 않고 경험적으로도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뭐냐 하면 우리의 인생의 많은 문제가 일어나지만 그래서 인생의 문제가 일어날 때 지혜롭게 대처하고 그리고 문제들을 분석합니다. 원인이 무엇이고 어디서 이런 문제가 일어났고, 누가 나에게 이런 고통을 제공했는가, 그리고 그것들의 평가를 우리는 기억해야 됩니다. 그 사람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아, 저 사람과는 돈거래를 하면 안 되는 거구나 항상 가슴에 새겨서 줄지언정 빌려주면 안 되고 사업의 파트너가 되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새겨야 됩니다. 그래야지 한번 걸린 덫에 두 번 안 걸릴 거 아닙니까? 여우는 두 번 같은 덫에 안 걸리지만 인간은 일평생 살면서 같은 덫을 들어가서 피 흘리고 나왔다가 또 들어가고 이것을 인생이 일생 사는 동안 반복하는 것이 인간의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을 모두 찾아내서 정리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우리는 이것이 내 인생이 무슨 의미를 주는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연결고리를 우리는 찾아야 합니다. 그것을 찾게 만드는 것이 신앙입니다.
우리는 다 인정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내가 어려움을 당했고, 이 사람이 나에게 고통을 주었다 기억합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나면 미워하거나 원망하거나 하는 기억으로 가득찰 것입니다. 고리를 발견해야 됩니다. 내 인생에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그리고 이 실패가 이 시련이 나에게 주는 인생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것을 하나님과의 연결 고리에서 찾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크기에 달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하나님을 아는 것은 내일 살아가기 위한 가장 훌륭한 보험입니다. 인생에서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어떻게 우리 인간을 인도하시는 분인지를 깨달은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바른 태도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고통을 주었거나 아픔을 준 사람이 있지만 우리는 그를 과도히 원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일어났고, 악인은 나를 헤아려 하였으나 당신들은 나를 헤아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 악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내게 가장 나쁜 일이 일어났지만 좋으신 하나님은 그 나쁜 것을 가장 좋은 것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것을 간능하게 만드는 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뭐라고 그럽니까? 이전 것은 다 잊어버리고 푯대를 향해 달려가노라 그 푯대가 무엇입니까? 세계 선교의 완성? 아닙니다. 가장 유명한 기독교 저술가가 되는 것?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와 그의 의와 그의 부활의 능력을 아는 것, 그것을 향하여 내가 한길 곧 뒤에 있는 일은 다 잊어버리고 푯대를 향해 달려가노라고 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항상 기도하라 치열하게 성경을 읽고, 신학을 공부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침잠하라고 요구하는 이유입니다. 이게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의 인생을 위한 보험입니다. 아침 안개 눈앞을 가리듯이 슬픔이 밀려오고 인생의 모든 희망이 끊어지고 시련과 역경이 가득 찬 밤중과 같은 인생을 걸을 때 누가 여러분에게 도움이 될 수 있겠습니까? 한줄기 빛,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라는 신앙의 확신, 지식, 이것을 붙들고 믿음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눈앞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아니할지라도 적어도 내가 아는 하나님, 내가 성경을 통해 믿는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런 시련의 밤중에서도 하나님은 나에게 밝은 빛을 비춰주셔서 그 길을 걸어가게 하신다. 아멘.”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우리의 삶의 나쁜 것이라고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모든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쓰라리고 아픈 모든 것들이 결국은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에게 당신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어둠 속에 밝은 빛을 비춰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이해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그 길을 걸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인간의 가장 큰 의무를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나를 보내시는 이를 아는 것, 그것이 곧 영생입니다 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이제 신약에 와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신학적인 전환을 이룹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태어나시고, 사시고, 섬기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생생하게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듣기만 하던 하나님을 눈으로 보고 만질 수 있도록 우리에게 그렇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지금 이때가 바로 구약의 성도들이 그렇게 그리워하던 때였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에서 가장 탁월하다고 하는 세례 요한조차도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누리는 그 행복에 있어서는 신약 시대에 가장 연약한 신자에 못 미쳤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하나님을 묵상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B. 하나님이 높여주심
이렇게 주님이 아는 자를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높여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고 말입니다.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가 나를 사랑한즉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내가 그를 높이리라”고 말입니다. 신자를 건져내실 뿐만 아니라 건져낸 그를 존귀하게 하심으로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께 인정을 받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시련 가운데 잠시 비참하나 그 시련 속에서 눈에 보이는 현실에 낙담하기 보다는 자기를 지켜보고 계시는 하나님을 굳게 믿으면서 그 분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알려고 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건지실 뿐만 아니라 높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의 의미는 하나님의 이름과 결탁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이 없이 여김을 받는 곳에서 우리도 함께 모욕을 당하고 주님의 이름이 존귀히 여김을 받는 곳에서 우리도 모두 자랑스러운 사람들이 되고, 주님이 오셨던 그곳에서 주님과 함께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되는 것이 성도의 참된 도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이름과 결탁된 삶을 사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살아야 될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IV. 적용과 결론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 삶의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배워가고 싶어 하는 모든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십니다. 그리고 그를 결국은 건져주시고 결국은 주님이 높여주십니다. 당신이 그들을 통해 시련 속에서 그 이름이 높아지시고 사랑을 받으셨기에 또한 그들을 사랑하고 높이십니다. 그러므로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을 앙망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떠한 환란과 시련을 만나도 거기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는 지식에서 끊임없이 자라가서 우리 주님 붙들고 주님 때문에 결국은 승리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찾는 자를 만나주심 12 (2016.9.18 주일오전설교)
깨끗함을 받으라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 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마 8:1-3)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예수님의 산상 설교는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 이어집니다. 아마도 상당히 많은 시간을 설교하셨을 것입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백성들의 생활과 윤리에 대해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산에서 내려오셨습니다. 8장에는 그 산에서 내려오셨을 때 일어난 많은 치유와 기적의 사건들을 담고 있습니다. 나병 환자를 고친 사건, 그리고 중풍병이 걸려 누운 백부장의 하인을 고친 이야기, 그리고 또 베드로의 장모를 열병에서 고치신 기사, 그리고 귀신들린 자를 온전케 하신 사건 등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성경 기록의 방점은 기적, 그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것은 예수님이 앞에서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이 땅에 도래하였음을 보여주는 훌륭한 징표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를 모든 속박과 억압, 질병, 죽음, 귀신들림, 고통, 이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를 풀어 하늘과 이 땅의 자원을 누리며 자유롭게 살게 하시기 위하여 주어진 나라임을 보여준 것입니다. 남아도 남루한 차림으로 백성들을 가르치셨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웅장한 권위를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근본적으로 진리의 나라이고, 또 사랑의 나라이고, 또 능력으로 오는 은혜의 나라입니다. 이 모든 것을 바로 이 병자들을 고친 사건들을 통해서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어쩌면 산상에서 예수님의 그 긴 설교를 들었을 수도 있고, 어쩌면 그 산에까지는 올라가지 못했지만 어디선가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고 그 분에게로 나아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놀랍게도 나병환자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나병 환자를 고치신 예수님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원래 이 나병은 구약의 율법에서도 상세히 규정하고 있는 심각한 질병이었습니다. 지금도 이 나병을 고치는 일이 매우 어렵지만 당시에는 거의 절망적인 질병이었습니다. 그 질병은 바로 온몸에 고름이 흐르고 살점이 녹아내리는 무서운 질병이었습니다. 그래서 혹시 나병을 앓다가 치료된 사람이라 할지라도 온전한 얼굴 모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나운이라는 문둥병을 앓았던 시인이 ‘보리피리’라는 시속에서 “또 한 고개를 넘는다 발가락이 떨어진다”라고 표현했던 것은 바로 이 문둥병이 얼마나 무서운 질병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율법에 이런 사람을 접촉하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고, 당연히 이 사람은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할 수도 없었습니다. 발견되자마자 그는 이스라엘 진 바깥에 멀리 격리 수용되어야 했고, 그리고 혹시 어떻게 해서 그가 자연적으로 치유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꽤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회에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제사장에게 가서 자신이 질병으로부터 고침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그 후에는 그 질병 받은 것이 확실하다는 증거를 아주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서 검증을 받고, 그리고 제물을 바친 후에 이스라엘 사회로 돌아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II. 나병환자를 고치심
오늘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나병 환자가 나아와 자기를 깨끗케 해주기를 간절히 탄원했을 때 어떤 행동을 하셨는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놀랍게도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셨다고 했습니다. 어느 부위를 예수님이 손대셨을까요? 그래도 비교적 온전한 부위를 골라서 얼굴을 찡그리며 마지못해서 손을 대셨을까요? 아마 그렇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살이 뚝뚝 떨어지고 피고름이 녹아내려 눈과 코도 구별할 수 없게 된 그 문둥병 걸린 얼굴에 손을 대셨을 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이 그 문둥병자의 살갗에 손을 대셨을 때에 그 느껴졌을 촉감을 생각해 보십시오. 고름과 살점이 녹아 흘러내리고 피가 묻어있고, 끈적끈적한 것이 온 손바닥에 닿는 그 느낌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율법에서 엄격하게 금지된 행동이었습니다. 당시에 사람들은 이런 문둥병을 하늘의 저주를 받은 병이라고 보았고, 그리고 그런 문둥병 환자를 발견했을 때 도대체 무슨 원인 때문에 저런 결과가 오게 되었을까 생각했고, 그들은 대게 그 원인을 죄에서 찾았습니다. 이 사람이 하늘을 진노하게 하는 큰 죄를 지었거나 혹은 조상들에게로부터 내려오는 끔찍한 죄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분노가 이 사람을 이렇게 만들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이런 질병에 걸린 사람은 열등한 사람이었고, 멸시받아도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한 아이가 무르팍이 까져서 붉은 피를 철철 흘리며 절뚝거리며 걸어옵니다. 그 아이하고 관계없는 사람들은 쟤가 어디서 다쳤을까가 궁금하지만 엄마는 그런 거 궁금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를 업고 병원으로 뜁니다. 어차피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찾아내 봐야 결과는 바꿀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그 질병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규명하기보다는 고통 받는 현실에 관심을 갖게끔 만들어 줍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 문둥병자를 향한 그가 문둥병에 걸려서 온 몸이 하얗게 되어 고름과 피가 흐르는 그 모습을 보면서 그 현실이 너무 불쌍하고 비참하게 보였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랑은 더러움을 개의치 않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당신의 손을 내밀어 이 사람을 만져주신 이유였습니다. 누구였을까요? 온 몸이 눈꽃처럼 하얗게 고름이 흘러내리는 그 나병 환자와 악수해준 사람이 누구였을까요? 가까이 와준 사람이 누구였을까요? 더욱이 그를 어루만져준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율법이 금했는데도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고, 그것은 사랑을 지향하고 있는 율법의 완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고통 받는 현실을 주목하게 만들었고, 예수님에게 이 사람은 하늘의 저주를 받은 죄인이 아니라 고통 받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불쌍한 한 영혼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내가 원하노니 너는 깨끗함을 받으라”고 명령하셨고, 말씀 한 마디로 즉시 이 문둥병으로부터 이 나병 환자는 놓임을 받았습니다. 모든 권세, 이 땅과 하늘을 다스리고 인간의 생명과 모든 질병을 주관하는 권세가 예수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제 그 권능에 의해 모든 것들이 지배되는 새로운 은혜의 시대가 도래 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나병 환자가 어떤 특별한 선행을 한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이 절망적인 질병 상태에서 놓임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총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초점은 비참한 나병에 걸린 이 사람이 주인공이 아니라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던 이 사람을 바라보며 가슴이 찢어지듯 아파하며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이 이 스토리의 주인공입니다.
III. 예수께 나아온 사람
A. 분명한 소원
이 사람은 예수께 나아온 사람이었습니다. 이 병 고침이 일방적인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성경을 통해 엿볼 수 있는 특징이 있었습니다.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분명한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는 많은 문제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문둥병이 걸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는 종교적인 단절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 속에서 함께 살 수 없는 고립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과도 함께 살지 못하는 단절을 겪어야 했습니다. 아마 절망적인 질병이긴 했지만 자신이 나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안 순간부터 죽을 때만을 기다리며 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 무슨 방법으로든지 이 나병에서 나음을 받아보기 위해서 몸부림 쳤을 것입니다. 당시에도 이런 나병에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속설들이 있었는데 그 대부분은 미신이었습니다. 아마 의원은 물론, 그런 술사를 하는 사람들에게까지 만약에 이 사람이 돈이 있었다면 가산을 탕진했을 것입니다. 자, 그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가 얼마나 많습니까? 고립되었습니다. 외롭습니다. 종교적으로 정죄되었습니다. 그리고 고통스럽습니다. 자원이 없습니다. 상처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을 주저리, 주저리 엮으며 주님께 도와달라고 간청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들은 문제의 근본적인 뿌리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오직 고통과 외로움 속에서도 단 한 가지 소원을 예수님께 간절히 아뢨습니다. 그것을 깨끗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인생의 문제에 하나의 뿌리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암에 걸려서 죽어가던 성도가 저에게 그런 고백을 했습니다. ‘이 질병에서 나을 수만 있다면 저는 지게를 지며 품을 팔아서 일생을 먹고 살아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정말 이런 저런 소원을 끊임없이 주저리주저리 얘기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중 단 하나도 진정 분명한 소원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여러분과 저에 대한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 중에 어떤 많은 사람들은 성경 충만해서 기쁨으로 살아가지만 또 많은 어떤 사람들은 불만족과 그리고 괴로움 속에서 살아갑니다. 매일매일 살아가는 것이 자기가 살고 싶었던 삶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만족스럽지 않고 힘듭니다. 그런데 과연 그 사람들에게 주님이 나타나셔서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에 눈물을 흘리며 명료하게 대답할 수 있을까? 그런 사람이 얼마나 될까 생각했습니다.
명절에 ‘벤허’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보고 지금 보았으니까 기억이 가물가물했습니다. 그래도 원작하고는 조금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영화를 보고 한 40년, 50년 전에 예수를 믿은 사람들이 참 많았습니다. 이번에 영화도 그 감동이 절대 못하지 않았습니다. ‘벤허’라는 그 말은 히브리말입니다. ‘벤훌’입니다. ‘훌’가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 벤허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그리고 결국은 노예 손에 끌려가고 그 고통스러운 수많은 세월을 지낸 후 기적적으로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여인을 만납니다. 그녀가 묻습니다. “그렇게 죽을 고비를 넘기고 고통을 겪으면서도 희망이 당신을 살아있게 했군요.” 그러자 벤허는 대답합니다. “나를 살아있게 한 것은 희망이 아니라 복수하고자 하는 증오심이었습니다. 그 증오심이 나를 그 모든 죽음의 위기에서 살아남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글이글 타오르는 분노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가시면서 자기를 못 박은 죄인들을 위해 용서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무릎을 꿇고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리고 이제는 증오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과 용서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바뀌게 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원한을 복수하여야 되겠다는 불타는 증오심도 인간을 그렇게 강하게 만들 수 있다면 완전하신 하나님을 향한 분명한 희망의 소원을 품은 사람들은 얼마나 더 강해질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만족스럽지 않고 힘든 인생을 살아가면서도 왜 분명한 소원을 가지지 못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 자신의 인생을 객관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생각과 바람이라는 것은 변덕이 죽 끓을 듯해서 오늘은 이것을 원하나 내일은 저것을, 아침에는 이것을 간절히 바라나 밤에는 가치 없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런 변덕이 팥죽 끓듯 하면서 늘 변하기 때문에 어느 하나가 자신의 마음 전체를 묶어내는 소원이 되지 못합니다.
캄캄한 동굴에 갇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그리고 아무것도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저 멀리서 한줄기 바늘구멍 같은 공간으로 희미한 빛이 새들어 올 때 여러분은 이유 불문하고 그 한줄기의 빛을 따라 걸어가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그 빛은 너무나 작은 빛이지만 그 빛이 내가 있는 이 어두운 동굴 속을 편안하게 걸어가도록 도와주지 않지만 그래도 그리로 걸어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빛 한 줄기는 바로 그 공간에서 동굴과 맞닿아있는 밖의 세계의 창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은 이렇게 우리를 객관적으로 보도록 만들어 주고, 다양한 삶의 사태 속에서 근원적으로 자신이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보게끔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분명한 소원을 품게 해줍니다. 바로 이 사람이 그랬습니다. 산상에서 그 분의 설교를 들었을 때 혹은 어디선가 다른 사람들을 통해 갈릴리에서 오신 이의 위대한 능력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것은 캄캄한 어둠 속에 들어온 한줄기 빛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께 나아가 자신이 병 고침을 받아야 되겠다는 분명한 소원이 불붙고 있었습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다른 모든 것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대답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삶이 만족스러운 사람들에게는 나는 묻지 않겠습니다. 삶이 불만족스럽고 힘겹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묻고 싶습니다. 분명한 소원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해주시기를 원합니까? 그리고 그것은 여러분의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그것입니까? 절망 속에 살던 이 사람이 내 인생의 문제는 오직 하나다 라는 사실에 꽂혔습니다. 그러자 절망적인 인생의 어두움에 한줄기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B. 확고한 믿음
두 번째는 확고한 믿음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주여 당신이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고백했습니다. ‘당신이 원하시면’이라는 뜻은 “당신이 안 원하실 수도 있습니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두 가지에 대한 믿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는 능력에 대한 믿음, 또 하나는 자기를 사랑하는 예수님의 인격에 대한 신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산상 설교를 들으며 혹은 또 다른 사람들을 통해 들려오는 복음의 소식을 들으며 예수님이야 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자기가 그분께로 가면 불쌍히 여김을 받을 수 있고, 또 고침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바로 그 분의 능력과 인격을 신뢰하면서 자신의 삶의 운명을 온전히 의탁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인생에 위기가 닥쳤을 때에 한번 용감하게 발휘해 보는 장기 자랑처럼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깊이는 예수님의 인격을 아는 깊이를 능가할 수 없습니다. 믿는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신뢰할 수 없고, 신뢰하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사랑한 것만큼 믿고 믿는 것만큼 사랑하게 됩니다. 우리는 종종 성경에 대한 믿음을 강조합니다. 인생이 잘 나갈 때는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다가 곤고하고 위기를 만나게 되면 하나님께 아부하듯이 성경 구절 한두 개를 붙들고 광신적인 믿음을 보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 성경 구절에 대한 광신적인 믿음이 어떻게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어떻게 보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라기보다는 자기를 사랑하는 아부에 불과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위기 때 우리의 믿음이 빛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위기 때 믿음이 빛나는 것은 평소에 예수를 깊이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인생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접거나 미룰 수 없는 우리 인생의 숙제입니다.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믿음은 요란한 신앙의 행위가 아닙니다. 그 분이 가장 선하신 분인 줄을 알고, 그 분께 자신의 몸과 영혼과 모든 것들을 인격적으로 위탁하는 것입니다. 내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나보다 그 분이 잘 알고 계시고 그 분의 능력이 모자라서 나의 인생의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삶 속에서 일어나는 불행하고 우울하고 고통스러운 모든 일을 경험하면서 그것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기회로 삼는 사람들입니다. 이 모든 태도가 확고한 믿음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의 손에 붙들려 있는 한 나는 안전하며 그리고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나를 버려도 그 분은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그 분의 사랑하시는 인격에 대한 신뢰 말입니다.
현실은 우리의 이러한 믿음을 흔들어 놓습니다. 폭풍과 같이 와서 이 믿음을 흔들어 놓기도 하지만 때로는 빗줄기에 바위가 패이듯이 매일매일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실망스럽고 가슴 아픈 일, 그리고 고통스러운 일들의 반복을 통해서 주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이 서서히 흔들리고 병들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떨쳐 일어나는 믿음의 행동이 필요합니다. ‘아니다, 아니다. 현실은 분명히 나에게 고통스럽고 어렵고 수치와 상처와 고통을 안겨주지만 그러나 환란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 아무것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놓을 수 없으니라. 아멘.’ 믿음을 확고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인생은 주님의 손에 붙잡혀 있고 내 운명은 그 분의 뜻에 맡겨져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며 그 분의 능력과 인격을 확고히 믿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C. 간절한 탄원
마지막 세 번째는 간절한 탄원입니다. 어떤 무신론자는 기독교인을 이렇게 조롱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살아있다면 그는 인간보다 매우 열등한 존재임에 확실하다. 왜냐하면 그들이 기도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기도하는 사람은 알고 있는데 신은 모르시니 기도를 통해 일깨워주어야지만 겨우 알아듣는 신이기에 그 신은 인간보다 열등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를 그렇게 해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동하기 전에도 우리의 마음을 보시며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지를 잘 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것은 기도했기 때문에 받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미리 아셔서 때로는 우리가 기도하지 않아도 주십니다. 따라서 기도는 하나님을 움직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느껴지는 것은 어린 아이 같은 우리를 알아듣도록 교육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염려와 근심, 고통과 괴로움이 마음에 가득 차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면 누구나 다 경험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고통 받는 것 자체를 하나님이 알고 계시지만 하나님은 기도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그런 고통과 괴로움과 상처와 시련 속에서 우리의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언어들을 조합하고 조합한 언어들을 문장으로 만들어 토해 놓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새로운 지식을 획득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행동 자체가 믿음의 해석적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겪고 괴로워하는 것은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지만 그것을 언어의 조합을 통해서 서술하고 더군다나 그 위에 자기의 소원이 무엇인지를 하나님께 아뢰기 위해서는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이 고통스럽고 괴로운 현실들을 신학적으로 해석해야 되는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설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고통스럽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게 하고자 하여 하나님이 기도라는 행위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그렇게 고통을 받고 있을 뿐인 사람에게는 놀라운 일이 나서 그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주어도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신앙의 고백이 없습니다. 그래서 운이 좋았다, 누가 날 도와주었다, 재수가 참 좋았다 그냥 이렇게 끝냅니다. 그러나 그것을 언어의 조합으로 문장을 만들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던 사람들은 그 일을 하나님이 행하셨을 때 마음속에서 벅찬 감격이 솟아나고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능력이 있으실 뿐 아니라 나를 지켜보시는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더 잘 믿게 되고, 더 잘 사랑하게 되고 또 더욱 기도하게 되는 것이니 이 전체가 험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연약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훈련입니다.
이 사람은 현실적인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상처의 기억과 억울함, 물질적인 가난함과 미래를 향한 염려 같은 사소한 것들을 주님께 호소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의 문제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인식했고, 그것을 해결하는 것은 자기 능력을 벗어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 예수님께 간절히 빌었습니다. “나를 깨끗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우리는 인생의 많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뿌리를 캐고 들어가 보면 아주 단순합니다. 언제나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 묻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시련 속에서 고통 받는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기도하기 전까지는 주님이 얼마나 아파하시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은 압니다. 그리고 사실은 내가 입을 열어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기 전부터 사실은 우리 주님이 나를 많이 사랑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은 하나의 간절한 탄원으로 주님께 기도 드렸습니다. 마치 오랜 세월 숙달될 궁사가 딱 한 개의 화살의 시위에 먹이고 바람소리와 낙엽소리, 흔들리는 모든 물체들과 나부끼는 깃발, 새소리, 벌레 소리, 아랑곳 하지 않고 숨을 죽이며 과녁의 중앙을 향하여 힘껏 시위를 당기듯이 그는 오직 한 가지 소원을 시위에 먹여 주님께 기도의 활을 쏘았습니다. ‘깨끗케 하여 주십시오. 나를 깨끗케 해주십시오’라는 간절한 탄원이었습니다.
한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거룩한 순간이 있는데 하나는 기꺼이 순종할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때와 그리고 자신 안에 있는 모든 소원을 타는 듯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쏟아놓아 기도 할 때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분명한 소원과 확고한 믿음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간절한 기도로 고백되어야 합니다. 이게 바로 마음속에 많은 상념들이 스쳐가는 것으로 충분치 않고 우리 주님께 여러분이 실제로 기도하여야 할 이유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변화된 삶을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문둥병자는 일생동안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나병이라고 하는 이 진창과 같은 인생의 난관 속에 빠져서 몸부림치면 몸부림칠수록 깊은 수렁으로 꺼져 들어갔고, 상처와 소외 속에서 일생을 살았습니다. 우리 중 몸으로는 이런 절망적인 나병에 걸린 적이 없지만 마음으로는 예전에 그러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지금도 그러합니다. 그런데 바로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당신의 손을 내밀어 떨어지는 살점과 흐물거리는 고깃덩어리 위에 흐르는 그 고름까지 어루만지시며 그렇게 우리를 고쳐주십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도 그랬고 오늘 그렇게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사람마다 다 좋은 사람 좋아하고 편안사람 즐거워하지 문둥병자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가엾게 여기며 다가오는 사람은 없습니다. 주님은 그런 분입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죄 없으셨지만 우리와 똑같이 아프고, 춥고, 배고프고, 목마르고, 배신당하고, 고통을 받으신 그런 분으로 아버지 앞에 사셨던 분이십니다. 그래서 이심전심으로 당신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바 된 우리가 고통을 받을 때 아주 잘 이해하십니다. 신앙은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모두 이해해 주시는 예수님께로 피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 분의 품을 파고들며 삶의 고통의 의미를 묻고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 나를 보호하시지 못하거나 혹은 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더러워서 나를 버리실 리는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에 도달하게 될 때 우리는 허공을 치며 몸부림치던 모든 헛된 행동들을 중단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린 아이처럼 이 세상과 인간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끊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주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비로소 이 세상에 모든 것들이 나를 버려도 그 분만큼은 나를 버리시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내 마음이 문둥병자처럼 더러워 살이 녹고 피가 흐르고 고름이 가득 흘러넘쳐도 거기에 당신의 거룩한 손을 대시며 우리를 치료해 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간절히 여러분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기도하겠습니다.
찾는 자를 만나주심 13 (2016.9.25 주일오전설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믿음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이르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이르시되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마 8:5-13)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지난주에 설교했던 문둥병 환자가 나은 기적적인 최후의 사건에 이어 나오는 기사입니다. 산상수훈에 이어지는 이 기적적인 최후의 사건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줍니다. 즉, 예전에 질병과 고통, 그리고 죄와 마귀의 권세에 묶여 있었던 사람들이 어떻게 능력으로 임한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그 모든 속박을 벗어버리는지를 보여줍니다. 그 나라는 자유케 하는 능력의 나라입니다. 오늘 여기에는 중풍에 걸려 거동이 불편한 어떤 한 환자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본인이 아닌 백부장이 그를 위해 예수님께 탄원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능력의 나라일 뿐 아니라 사랑의 나라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아픔을 공감하게 만드는 것은 사랑입니다.
II. 주님을 기쁘시게 한 믿음
A. 타인을 위한 소원
예수님은 이러한 사랑을 포함해서 내가 이만한 믿음을 이스라엘 중에 보지 못하였노라고 극찬하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릴 자격이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타인을 위한 소원이었습니다. 백부장이라고 하는 사람은 로마 군대의 지휘관이었습니다. 약 100명의 부하를 거느린 군대의 지휘관이니까 지금으로 따지자면 한 소령쯤 될까요? 아주 높은 직책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러나 가난하고 힘없는 이스라엘 평민들 입장에서 본다면 그는 꽤 지위가 높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아마도 이미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어떤 소식을 듣고 있었을 것이고, 복음을 듣고 상당히 마음에 감화를 받은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또 어쩌면 이전에 예수님을 만나 뵈온 적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정보가 매우 적은 정보만 주어졌지만 예수님을 만나러 온 이 사람은 예수님에 대한 이미 상당한 지식과 믿음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에게 하인이 있었습니다. 그 하인이 중풍병에 걸렸는데 가벼운 중풍이 아니라 중증 중풍병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누워서 꼼짝할 수 없는 신세가 되었고, 많이 괴로워하며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 하인이 받는 그 고통을 자신의 문제처럼 생각하며 예수님께 나아가 간절히 탄원했으니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이 사람 안에 있는 사랑이었을 것입니다. 이 하인이 어떤 성격의 하인인지 우리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일정한 급료를 받고 이 집에 와서 일하는 고용인 신분의 하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중풍병에 걸려서 노동력을 상실한 것이고 그러면 해고하면 끝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와서 예수님께 이 하인의 중풍병을 고쳐달라고 탄원하게 되었습니다. 또 한 가지의 가능성은 이 사람이 노예였을 가능성입니다. 그럴 경우 자기의 소유이고 또 중풍병에 걸려서 그 집안을 위해 아무 일도 해 줄 수 없으니 그냥 내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치 이 하찮은 하인의 고통이 자신의 문제인 것처럼 생각하며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만나서 자신의 성공이나 자신의 부와 명예, 자기의 세속적인 소원을 구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하인을 고쳐주시기를 주님 앞에 탄원하였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나라의 특징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사이코 패스 혹은 소시오 패스 증후군에 걸린 사람들을 만납니다. 타인의 아픔과 고통을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 사회적인 보편적인 통념의 그런 가치관을 공유하고 사회의 고통을 함께 느끼며 서로 교통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심각한 질병 상태에 있는 영혼과 정신의 불구자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면 사회는 매우 불안하고 그리고 미래에 대한 염려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의 나라입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공감하게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함께 임했고, 그래서 사람들은 비로소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의 영향을 받으며 다른 사람의 아픔과 고통을 자기의 것처럼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율법 중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고 묻는 율법사의 질문에 답하신 곳에서 가르침이 엿보입니다.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해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도 이와 같으니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질 때 사람들은 그런 사랑을 하게 되고 또 누리게 될 것입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서 그들이 온전한 행복을 누릴 때에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놀랍게 자기를 사랑하라는 계명이 나오지 않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옳지 않기 때문에 자기를 사랑하지 말라고 한 뜻이 아닙니다. 올바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도 바라시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왜 성경이 하나님과 이웃은 사랑하라고 가르치며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지 않을까요?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하나님께 전심으로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에 자기가 사랑해줄 여지가 없습니다. 이웃을 자기 몸 같이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웃을 그렇게 사랑함으로써 똑같은 사랑을 이웃으로부터 받지 않아도 상실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전심으로 사랑하는 가운데 최고로 사랑받는 사람은 그런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미 받고 있는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만약에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면 우리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우리를 진정으로 행복하지 못하게 하신다고 가르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우리가 전심으로 사랑해서 주님의 사랑을 받으면 우리는 이미 그 안에서 충분히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을 사랑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소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 것도 문제입니다마는 기도를 한다고 할지라도 과연 우리에게 타인을 위한 열렬한 기도가 있습니까? 다른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을 깊이 공감하며 그들의 행복이 나의 행복인 것처럼 주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그런 기도가 우리에게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타인을 위한 간절한 기도가 우리에게 있습니까? 남을 위한 열렬한 기도, 그리고 간절한 기도가 우리에게 있습니까? 오늘 이 백부장이 하인 중 한 사람의 고통 받는 상태를 자신의 아픔인 것처럼 여기며 주님께 나아왔을 때 그 믿음은 주님을 기쁘시게 한 믿음이었습니다.
한번 여러분의 주위를 돌아보십시오. 백부장에게 불우한 상태에 있는 사람은 중풍병 걸린 하인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주위에는 누가 바로 이런 하인입니까? 자기의 일에 코 박고 자신의 행복과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골몰해 있는 동안에 우리는 남을 위한 기도를 잊어버리고 있지 않습니까? 마음을 열고 한번 주위를 돌아보십시오. 우리의 기도를 간절히 필요로 하는 사람들, 우리가 그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이라고 느껴주지 못하는 마음의 병든 상태에 있지 않은지 반성해야 합니다. 그리고 남을 위해 이런 간절한 기도를 드림으로써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자기에 대한 인식
두 번째는 자기에 대한 인식입니다. 자, 이 사람은 예수님께 와서 자기의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한다고 주님께 고했습니다. 뜻밖에 예수님께서 응답해 주셨습니다.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 네 하인이 어디 있느냐? 내가 거기로 가겠다. 그래서 내가 그를 고쳐주겠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뜻밖의 대답을 합니다. “감사합니다. 어서 가십시다. 그리고 여기 내 하인이 누워 있나이다.” 이렇게 할 것 같았는데 그는 오히려 고쳐주러 가겠다는 주님을 말립니다. 그리고는 대답합니다.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말씀으로만 하옵소서”라고 말입니다. “내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희랍어 성경에는 “나는 나의 지붕 아래 들어오실 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입니다.” 쉽게 말하면 주님은 너무 존귀하시고 위대하신 분이기 때문에 나같이 더러운 죄인이 사는 이 미천한 집의 지붕아래 들어오시는 것을 나는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즉, 나는 그렇게 주님의 방문을 받을만한 가치가 없는 인간입니다 라는 고백입니다.
주님이 어디 사셨을까요? 주님은 친히 말씀하시기를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 곳이 있건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의 삶은 노숙자의 삶이었습니다. 외모는 어땠을까요? 예수님은 그저 남루한 차림의 선생이었을 것입니다. 사회적인 신분이나 부로 볼 때에 백부장은 예수님보다 훨씬 좋은 집에서 훨씬 훌륭한 옷을 입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내 지붕 안에 들어오심을 감당치 못하겠습니다.”라는 이 고백은 물질적이고 세상적인 기준에서 나온 고백이 아니라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고백입니다. ‘그 주님의 위대하심, 그 분의 거룩하심을 생각할 때 자신이 아주 하찮은 존재일 뿐임을 인식한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주님 앞에 간절히 간구하지만 주님께는 나의 이 간구를 들어주셔야 할 어떤 의무도 없고, 더욱이 직접 찾아오셔서 나의 하인을 어루만지시며 고쳐주셔야 할 어떤 의무도 없습니다. 그것은 나에게는 분에 넘치는 일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얼마나 하찮은 인간인가 하는 것을 고백하며 주님 앞에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는 기도자의 자기 인식입니다.
처음에 기도를 시작할 때에는 원망과 불평, 섭섭함과 마음의 각종 욕망들이 꿈틀거립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서 해보고 하다가 하다가 안 되니까 이제 기도를 해야 되겠다고 선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를 정말 능력 있게 하는 것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 정말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쓰레기만도 못합니다. 그래도 쓰레기 속에는 재활용할 수 있는 물건들이 섞여 있지만 우리는 그만도 못하는 존재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껏 내가 살아온 것도 나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고 이렇게 살아있는 것도 주님의 은총을 덧입어 살고 있으며 앞으로 나의 일생도 주님의 손에 붙들려 주님의 은혜로 사는 것임을 깊이 고백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감히 내가 굳세게 믿으면 예수님도 꼼짝할 수 없다는 그런 식의 사고방식을 버려야 합니다. 종종 주님을 야단치듯이 기도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성경 구절을 수없이 들이대며 예수님을 협박합니다. 과연 진정한 기도일까요? 기도자의 마음은 주님을 의무로 구속하지 않습니다. 마치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같이 주님의 은혜에 목마른 자입니다. 억울한 과부가 재판장에게 탄원하는 것처럼 자기의 처지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자기는 비참하고 외로운 사람이라고 호소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간절히 찾는 기도자의 마음에는 자신을 불신하는 마음이 가득합니다. 나는 믿을 수 없는 존재다. 나를 의지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자신만입니까? 아닙니다. 방백들이나 힘이 있는 사람들, 권력이 있고 이 세상의 자원을 가지고 있는 어떠한 누구도 의지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람이 진정한 기도자입니다. 그래서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오직 나를 구속한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를 구원하실 수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찬양)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 하시네
그래서 기도 속에서 마음이 물같이 녹아본 사람들은 자신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내게 일어난 모든 나쁜 일은 나 때문에 일어난 것이고, 내게 일어난 모든 좋은 것은 우리 주님 때문에 생겼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바로 그 마음이 이 백부장의 마음이었습니다.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말씀으로만 해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닫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기도의 은혜와 십자가의 은혜는 항상 같이 갑니다.
여러분이 한번 지난날의 신앙생활을 회상해 보십시오. 십자가의 은혜로 마음이 언제나 젖어 있었던 때에는 기도하는 것이 쉬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교사 리바이벌이라는 책을 쓸 때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영혼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하루에 두 번 나 같은 죄인을 구해주신 십자가의 은혜 때문에 눈물 흘릴 수 있다면, 그리고 주님을 몰라 방황하는 영혼들이 불쌍해서 울 수 있다면 그러면 그 교사는 반드시 영혼들을 위해 잘 섬길 수 있는 교사가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누구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젊은 나이에 주님을 만나고 가정도 없이 그리고 자기 자신을 위한 어떠한 욕망도 없이 주님만을 위해서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위대한 선교적인 성공 앞에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위대한 업적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회상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가 자신이 누구인가를 깨달은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였습니다.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인생의 황혼기에 그는 여전히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임을 인식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이렇게 죄인 중의 괴수인데 예전에는 핍박자이고 포행자였는데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된 것은 오직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 때문이라고 자랑했습니다. “그리고 내게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다만 죄인인 것과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것을 기억하며 내가 누구인지를 배워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기도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C. 말씀의 능력을 믿음
마지막 세 번째는 말씀의 능력을 믿은 것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상세하게 자기의 경험을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내 위에도 상관이 있고, 내 아래도 부하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명령하고 복종하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내가 부하에게 무엇을 명령하면 굳이 내가 가지 않아도 그는 그대로 행합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천지를 다스리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말씀 한 마디만 하시면 내 하인이 나을 텐데 주님이 이 비천한 죄인이 사는 집에까지 찾아가셔서 그 지붕 밑으로 들어가셔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라는 대답이었습니다. 몸소 가심이 아니라 말씀의 능력을 믿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와는 반대입니다. 우리는 아마 이런 상황이라면 예수님께 병 고침을 받는 사람이 줄지어 서있어도 너희들은 잠깐 기다리라 그리고 예수님을 독차지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집에 모시고 가시고 싶었을 것이고 그것도 오랜 시간동안 함께 머물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몸소 가심이 아닌 말씀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교회를 개척하기 훨씬 전의 일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자주 다니던 기도원이 있었는데 청평에 산골짜기에 있는 기도원이었습니다. 아주 조그만 기도원이고 집사님하고 권사님 두 분이 하시는 그런 기도원이었습니다. 기도하러 갔습니다. 며칠 묵으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산허리에 조그만 본당이 있고, 아래에는 허름한 방들이 있었는데 아침에, 오후에, 저녁에, 밤에, 그렇게 여러 번씩 기도하러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올라가서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가 잘 안됐습니다. 많이 힘들어 하다가 얼마쯤 있으니까 기도가 터지기 시작했습니다. 계속 눈물로 간절히 기도하는데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무슨 욕심이 생겼냐 하면 좀 이렇게 내가 간절히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이 기도 시간에 특별한 체험을 주시면 참 좋겠다. 그때는 더욱이 제가 부흥에 깊이 심취해 있을 때였기 때문에 그런 믿음의 위인들이 경험했던 그런 특별한 성령의 체험을 하고 싶었습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데 두 가지를 계속 기도했습니다. ‘나를 만져주십시오 주님이 저를 안아주십시오.’ 그래서 간절히 기도했지만 기도의 은혜는 있었지만 무슨 특별한 일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밤늦은 시간에 그 교회당에서 나와서 언덕 아래로 쏟아지는 별빛을 바라보며 걸어내려 왔습니다. 그러면서 불만은 없지만 왜 그런지 마음 한 구석에 주님께 섭섭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내려와서 성경을 펼쳤는데 요한복음 1장 6절에서 8절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을 쏟아 부어주시기 시작했습니다. 깨알같이 그것들을 받아서 적기 시작했습니다. 그날 모두 못 끝내고, 그 다음날, 그 다음날까지 계속이 됐습니다. 그 후에 한권의 책으로 냈습니다. 그때 제가 깊이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보이시는 것입니다. 제가 만일 그날 저녁에 주님께 응답을 받아서 어떤 특별한 체험을 했더라면 얼마나 갔을까요? 잊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주셨던 하나님 말씀은 오랜 세월동안 나를 사로잡았고, 어떤 의미에서 지금도 그 말씀이 있었기 때문에 살아간다고 그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23장 29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큰 능력에 비유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바위를 쳐서 부서뜨리는 방망이와 같지 아니하냐” 하나님의 말씀이 언제나 부드럽고 조용하기만 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불같아서 잘못된 것들을 태워버립니다. 방망이와 같아서 잘못 세워진 것들을 부수어버립니다. 그래서 그 말씀의 능력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능력이 자신의 하인을 고칠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주님이 굳이 거기 가시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말씀하시는 우리 주님의 권세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서 병든 자를 일으키고 그리고 사경을 헤매는 자를 온전케 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신앙의 깊이를 말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이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이 말씀에 대한 깊이는 글자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께 대한 인격적인 사랑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깊이 신뢰하고 사랑할 때 그 분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의 능력을 진실로 믿게 되는 것입니다.
III. 율법을 능가하는 의
이 백부장은 이방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극단의 칭찬을 하셨습니다. 즉, 이스라엘 중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사람들 중 아무에게서도 나는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율법을 능가하는 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율법의 의를 능가하는 것이었고 그리고 이 사람이 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했을 때에 율법을 지킨 유대인들보다 예수그리스도를 기쁘게 했습니다. 당시에는 이스라엘 종교적인 인물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얻지 못한 의를 얻었으니 이것이 바로 로마서 3장 21절이 말하는 새로운 의입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그는 선지자도 모르고 율법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그리스도를 알았습니다.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한 의고, 그를 전심으로 믿고 그 분을 의지하는 그 분 안에 주어진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누릴 자격이 있었습니다. 성경이 회개하는 죄인이 책망할 것 없는 의인보다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가르치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을 위해 예수님은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낮고 천한 세상에 오셨던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마음을 녹는 기도, 마음의 중심을 쏟아놓고 주님을 간절히 찾는 눈물의 기도자, 중심이 하나님 앞에 온전히 바쳐지고 그리고 마음의 중심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꽂힌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그들은 모두 자기를 의지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자기가 주님을 섬겼던 위대한 신앙의 헌신, 훌륭한 장점, 그런 것들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휘장을 찢어 새롭고 산 길을 열어주셨음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아무 공로 없이 심지어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조차도 나의 장점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그것이 주님의 은혜라고 믿으며 뿌리신 그 핏길을 걸어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에 모든 감격과 눈물은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옵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를 온전히 의지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IV. 적용과 결론
다른 사람들을 위해 가난한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하던 이 사람은 주님께 응답을 받았습니다. 자신 앞에 이미 있는 어떤 장점이 아니라 주님 앞에 자신이 감히 설 수 없는 비참한 존재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직 주님의 은혜를 의지했습니다. 오직 그 분이 자기를 사랑해 주시는 놀라운 증거가 말씀의 능력에 있음을 굳게 신뢰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기 신뢰를 버리고 예수를 굳게 붙드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주님은 이렇게 간절히 주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나타나셔서 만나주시는 주님이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찾는 자를 만나주심 14 (2016.10.2 주일오전설교)
하나님을 갈망하라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시 42:1-2)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시편 150편 가운데 가장 애용하는 시 중 한편이 42편일 것입니다. 이 시는 표제어에 “고라 자손의 마스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마스길’은 ‘지혜롭게 함’, 혹은 ‘지혜’라는 뜻이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 시를 반복해서 암송하면 삶의 지혜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이 시편 표제에는 고라 자손의 마스길이라고 되어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이 시를 사실은 다윗이 지었고, 그 시를 고라의 가문에서 보존하였기 때문에 이런 표제가 붙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보다 더 사실에 가까운 것처럼 보이는 견해는 다음과 같은 견해입니다. 고라 자손 중 한 사람이 이 시를 썼고 그는 다윗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고라의 자손은 원래 반역의 무리로 낙인찍힌 집안이었습니다. 민수기 16장 1절에 보면 이 고라가 레위의 증손으로 나오고 그 사람이 다단이라는 인물과 온이라는 사람, 그들과 힘을 합하여 당을 형성했고, 무리를 지어서 모세의 지도력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매우 악하게 보신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고라의 자손들이 진치고 있는 그 부분을 지진이 일어나게 하셔서 땅으로 삼켜버리게 만드셨습니다. 이것이 26장 9절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신명기 16장 32절에는 땅이 입을 벌려서 이들을 삼켰고, 26장 10절에는 땅에서 불이 일어나 250명을 삼켰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가슴 아픈 비극적인 가족사를 간직한 채 고라의 자손들은 반역의 무리라고 하는 낙인이 찍혀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그 자손들이 남아있었습니다. 그 자손들이 퍼져서 그 후에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다윗의 건국이었습니다. 이들은 다윗을 도와서 나라를 세우는데 이바지했고, 다윗이 왕권을 차지하게 되었을 때 이들을 성전에서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로 선택해 줍니다. 고라 자손 중 한 사람도 아마 그렇게 이제 성소에서 주님을 섬기며 왕을 가까이 모시던 어떤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압살롬으로부터 반란을 겪은 다윗은 황급히 왕궁을 빠져나와 요단강 건너편 남의 나라 땅으로 망명의 길을 떠났고, 고라의 자손 중 한 사람이 그 왕과 동행하였다가 지은 시가 42편입니다. 이 사건은 다윗에게 있어서 말할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준 사건이었고 또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자신을 돌이키는 훌륭한 영적인 쇄신의 기회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삶의 모든 상황 속에서 이 시인, 고라의 자손은 하나님 앞에 간구할 일이 많았을 것입니다. “악한 무리들을 내쫓아 주십시오. 그리고 또 원수를 저주해 주십시오.”라고 하는 기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기도들을 밀쳐둔 채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마음의 갈망을 토로하였습니다.
II. 하나님을 향한 갈망
모든 인간에게는 육체의 갈망이 있습니다. 배가 고플 때에는 음식을 갈망하게 되고, 목이 마를 때에는 물을 갈망하게 됩니다. 이런 갈망 때문에 육체의 생명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영혼의 갈망은 중생자에게만 있습니다. 물론 모든 인류가 하나님을 아는 흔적을 영혼 속에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들을 간직합니다. 그러나 중생자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분명하게 안 사람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의미의 구체적인 영혼의 갈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A. 내 영혼의 목마름
이 시인이 이렇게 커다란 비극적인 시련을 당했을 때에 제일 먼저 한 일은 자신의 영혼의 목마름을 토로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합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계신 하나님을 갈망합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는 원수를 멸하여 주십시오. 왕권을 되찾게 해 주십시오 라는 기도 대신 자신의 영혼을 직시하며 그 영혼의 상태를 하나님 앞에 절절히 토해놓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을 갈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하나님의 성소, 혹은 성전 이외에 다른 곳에서는 제사를 드릴 수 없었고, 그 제사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커다란 특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시인은 성소에서 축출되었고, 그리고 남의 나라 땅에 피난을 왔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조롱합니다. “너희가 믿는 하나님은 어디에 있길래 너희는 너희 나라를 쫓겨 와서 우리 땅에 와서 이렇게 우거하는 사람들이 되었느냐” 하고 말입니다. 그는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합니다. “내 눈물이 주야로 나의 음식이 되었나이다”라고 말입니다. 조용히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헤아렸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른 아침 눈뜨는 시간부터 시작해서 깊은 밤, 잠자리에 들 때까지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온 이 세상의 염려와 근심, 욕망과 유혹, 이런 것들이 아침부터 밤까지 우리를 가득 채웁니다. 이것들은 마음 안에서 끊임없이 끌어 오르고 오만가지 번뇌와 그리고 분명한 생각들을 낳습니다. 조용히 영혼이 하나님 한분만을 우러러 볼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바쁘고 분주하게 움직이지만 자신의 내면을 조용히 성찰하는 일은 드뭅니다. 그러나 이 자기에 대한 성찰은 무분별한 자기 몰입이나 자아 이탈적 명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자신의 영혼에 대한 성찰은 하나님의 성품의 빛 아래서 자신의 마음의 상태를 헤아리는 것입니다. 주님의 성품의 빛은 우리 피조물과 하나님이 관계하는 가운데서 잘 나타납니다. 그리고 성경은 바로 이 주님의 성품의 찬란한 빛들의 보고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사랑하고 그 성경 말씀에 은혜를 받는 사람들은 주님이 누구인지를 아는 지식에서 놀랍게 자라갑니다. 그리고 그 지식이 자라는 것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아래서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조용히 성찰하며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어떠한지를 헤아리는 시간들이 필요합니다.
정말 우리에게 이런 시간이 있습니까? 조용히 자기를 성찰하며 자기가 누구인지를 말씀 앞에 비춰보고 자신도 모르게 요동치는 자신의 마음을 잔잔하게 하고 주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 있느냐고 여러분에게 묻는 것입니다. 오늘 시인은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같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다고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고백합니다. ‘갈급하나이다’라는 이 단어는 히브리어로 ‘딸로그’라고 하는 단어인데 헐떡거린다는 뜻입니다. 무엇인가 욕망에 의해서 혹은 목마름과 필요한 것에 의해서 그것을 너무나 간절히 바라는 나머지 육체까지 영향을 받아서 숨을 헐떡거리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는 가을이 사슴들의 교미기입니다. 소수의 암컷들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서 수사슴들은 뿔을 기릅니다. 가을이 다가오면 그 뿔을 나무나 바위에 갈아서 뾰족하게 만들고 암컷 하나를 놓고 많은 수사슴들이 뿔을 부딪치며 필사의 결투를 벌입니다. 승자는 그 암컷을 차지하고 번식의 특권을 누리게 됩니다. 이런 교미기가 찾아올 때에 수컷 사슴의 신체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것이 바로 타는 듯한 목마름입니다. 발정기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 시를 쓴 고라의 자손은 바로 그러한 헐떡거리는 사슴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이런 목마름이 사슴들을 엄습할 때에는 짝짓기고 뭐고 다 잊어버리고 한 모금의 물을 찾아 나서게 됩니다. 팔레스타인에 아무데나 그렇게 물이 있지 않습니다. 샘을 찾고 시냇물을 찾아도 물이 없습니다. 드디어 신기루가 나타나기 시작하고 사슴은 사력을 다해서 광야를 달리며 그 신기루 있는 곳으로 달음박질 합니다. 가보고 나면 물은 없고 건조한 들판뿐이고 다시 그 신기루는 멀리 도망을 칩니다. 그렇게 달음질하다가 결국은 기진하여 쓰러지고 쓰러질 때에는 앞발로 땅을 파다가 엎드러집니다. 그렇게 한 모금의 물이 없어서 두 눈을 부릅뜨고 죽어가는 사슴의 시체들을 수없이 본 사람으로서 이 시인은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바로 그렇게 간절하다는 사실을 표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에게는 이러한 갈망이 정말 있습니까?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사람들이 주일날 왜 교회에 나오는지 아십니까? 예배가 끝날 시간을 기다리려고 교회에 나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배고픔과 목마름은 무엇인가 다른 것으로는 도저히 대치할 수 없는 비대치적인 욕망입니다. 젊은 시절 직장에 다닐 때에 마음이 곤고하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마음이 있어서 금식기도를 하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누구에게 광고한 것은 아니지만 마음속으로 열흘쯤 금식 기도를 해서 내가 확실하게 은혜를 받아야 되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만 이틀을 지나서 삼일 째 접어들었을 때입니다. 몸에 힘이 하나도 없고 그리고 먹을 것들에 대한 생각이 막 떠올랐습니다.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 생각이 나야 되는데 하나님은 가끔 생각나고 먹고 싶은 모든 것들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노릇노릇하게 튀겨진 설탕 소스를 얹은 탕수육이 너무 그리웠습니다. 그래서 점심시간에 기도를 하다가 나도 모르게 뛰쳐나가서 백화점에 가서 퍼먹었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데 그렇게 비참할 수가 없습니다. 나도 참 유별난 사람입니다. 자신이 너무나 미워서 화장실에 들어가서 손가락을 목 깊이 넣고 다 토해버렸습니다. 결국 10일 금식기도는 못했습니다. 그때 하나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그렇게 손가락을 깊이 집어넣고 토하면서 화장실에 쭈그리고 앉아서 그 먹은 것을 마지막 위에 들어있는 마지막 하나까지 다 토해냈습니다. 그럴 거면서 그 한순간의 유혹을 못 참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원초적인 욕망입니다. 시인이 바로 그런 애절함으로 한 모금의 물을 찾는 사슴처럼 주님을 뵈옵기를 갈망했던 것입니다.
정말 우리에게 이러한 목마름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눈물이 있습니까? 우리가 때로는 다른 사람보다 신학적인 지식이 좀 못할지라도, 다른 사람보다 큰 일로 주님을 섬기지 못할지라도 그렇게 하나님을 찾는 간절함, 주님의 은혜를 그리워하는 치열한 목마름, 사람이 사람을 뜨겁게 사랑할 때에 그를 보는 것 이외에 무슨 소원이 있겠습니까?
(찬양)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고자 주를 갈망합니다
주여 어찌합니까
그런 간절한 목마름, 바보 같은 질문이지만 한번 답해보십시오. 뛰어난 지식의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미지근한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과 신앙의 지식이 좀 모자라도 타는 듯한 목마름으로 주님을 찾는 사람의 기도 중 누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실까요? 큰일을 하는 영광스러운 사람이 하나님을 찾지 않는 마음으로 당신의 일을 크게 벌릴 때에 하나님이 그를 기뻐하실까요? 아니면 아주 작은 일에 자기의 모든 것을 바쳐서 하나님이 그 일 위에 함께 하시기를 어린 아이처럼 눈물로 기도하는 사람 가까이 계실까요?
여러분도 한때는 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린 아이 같은 목마름으로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하나님 사랑한다고 고백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은혜가 여러분을 사로잡았을 때 여러분의 두 눈에는 언제나 눈물이 있었고 그리고 섬김에는 하나님이 사랑한 수고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해 봉사하는 모든 동기는 순수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지금도 그런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을 간직하고 계십니까? 오늘 이시인은 마치 너무너무 사랑하는 여인이 신랑을 잃어버린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 만나기를 간절히 찾고 있지 않습니까? 그가 무엇을 위해 이렇게 주님을 찾기에 목마른 자가 되었습니까? 돈 입니까? 권력입니까? 영광입니까?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 그 자신이었습니다. 그런 영혼의 간절한 목마름이 시냇물을 찾다가 두 눈을 부릅뜨고 죽어가는 한 마리 사슴처럼 절실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만약에 그가 죄가 있다면 하나님이 이렇게 당신을 찾으면 용서해 주십니다. 능력이 없다면 하나님이 능력을 주시거나 능력 있는 사람들을 보내어 그를 돕게 하실 것입니다. 그가 외로운 사람이라면 이렇게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면 주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게 채워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정말 부러운 교회는 큰 건물을 가진 교회나 수십만 명의 교인들이 모이는 교회가 아닙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한 번도 부러워해 본적 없습니다. 부러워한 교회가 있습니다. 주일 학교 학생으로부터 천국에 갈 날이 가까운 노인에 이르기까지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교회, 예배 시간마다 기도의 시간마다 하나님의 은혜에 목마름이 있는 교회야 말로 우리들이 꿈꾸고 그리워해야 할 교회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이 시은은 인생의 가장 깊은 시련을 지나면서 남의 나라 땅으로 쫓겨 와 있는 가련한 신세가 되었는데도 그는 권력이나 영광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만나기를 간절히 구했습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주님을 만나 뵙기를 구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생존하시는 하나님
그가 만나고자 했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었을까요? 성경은 그 하나님을 생존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계신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꼬”라고 말입니다. ‘갈망하다’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히브리어로 ‘차마’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것은 목이 말라하다, 목 말라하다 라는 뜻입니다. 타는 듯한 목마름으로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는데 그것은 관념 속에 있는 지식의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살아계셔서 시간과 공간 안에서 치열하게 역사하시는 그런 하나님이셨습니다.
신명기 4장 1절, 6장 3절 같은 곳에서는 열조의 하나님을 일컫고 그리워하는 내용들이 등장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 조상의 하나님 즉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 그것을 얻게 되리라”고 말입니다. 왜 그들은 이렇게 성경 여러 곳에서 조상들의 하나님, 열조의 하나님을 노래했을까요? 무슨 이유로 그들은 자신들의 하나님이 아닌 조상의 하나님을 찾았을까요?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의 시대가 아니라 조상들의 시대에 더 위대하고 능력 있는 일을 행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자기들의 시대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없어서 하나님이 큰일을 행하시지 않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위대한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기도할 때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노래했던 이유입니다. 그 조상들에게 행하신 크고 위대한 일을 살아계신 하나님이 행하신 것을 기억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우리의 현실에 코 박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우리는 높고 위대한 일에 별로 도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난쟁이 같은 신앙생활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행하실 크고 위대한 일을 꿈꿀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뉴질랜드에 가면 원주민들이 식량으로 즐겨 먹었던 키위라고 하는 새가 있습니다. 지금은 거의 멸종이 되었고 보호받고 있습니다. 그 새의 모습을 봤는데 정말 원주민들이 좋아하게 생겼습니다. 새가 조그마한 돼지 반 마리정도 됩니다. 과장하면 새끼 돼지에서 중 돼지 사이에 있는 그런 동그란 고기 덩어리입니다. 날개는 손바닥만 합니다. 당연히 나를 수가 없습니다. 뒤뚱뒤뚱 그러고 뛰어 다닙니다. 몸집도 크니까 창이든지 화살이든지 돌멩이든지 잘 맞습니다. 쓰러뜨려서 잡으면 온 몸이 다 고기입니다. 원래는 어땠을까요? 날아다니는 새였습니다. 뉴질랜드에 와서 어떻게 했든지 와서 정착을 했습니다. 먹을 것 천지입니다. 날아다닐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냥 걸어 다니면서 먹을 것을 계속 쪼아 먹습니다. 다리통이 타조처럼 튼튼합니다. 그 대신 날개는 점점 퇴화해서 이렇게 손바닥 하나 정도로 그냥 모양 정도로 그냥 양쪽으로 붙어있을 뿐입니다. 사용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면서 그리스도인을 생각했습니다. 원래 그리스도인은 큰 날개를 펼치며 독수리처럼 하늘을 날도록 하나님이 새로 지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시련과 역경, 그리고 모든 환란과 위기들을 그렇게 극복하면서 살도록 하나님이 다시 지으신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도 말하기를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독수리가 날개를 치며 하늘을 올라가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런 새 힘을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매일매일 모이를 편안하게 주워 먹는데 익숙해진 나머지 이제는 그 날개를 상실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새롭게 만나는 위대한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없습니다. 그게 바로 열조의 하나님을 부른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문제가 커 보입니까? 하나님이 더 위대해 보입니까? 우리 신자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이 세상을 살면서 무슨 일을 만나든지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 모든 인생사는 우리 마음대로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시련과 역경을 만나고 위기를 만났을 때에 조용히 하나님을 생각하며 이런 시련과 고통이 나의 인생에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주님께로 더 가까이 가는 것이 신앙을 가진 사람의 사고방식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 살아계신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은 하나님이 그 생명을 붙들고 있기 때문에 살아있습니다. 생명이 무엇인지는 학자들도 쉽게 정의하기 어려워합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생명체는 세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메타볼리즘입니다. 신진대사입니다. 그래서 음식을 넣어주면, 먹이를 넣어주면 이것이 스스로 작동해서 에너지를 일으켜서 살아가게끔 그렇게 작동을 하는 기능이 생명체의 첫 번째 조건입니다. 두 번째는 자기를 헤치려고 하는 외부의 환경에 대해서 반응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 것이 생명체의 두 번째 조건입니다. 세 번째는 자기를 닮은 씨앗들을 끊임없이 남겨 종자를 퍼트리는 것이 생명체의 조건입니다.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은 결국은 하나님이 붙들어 주셔서 그것들이 생존합니다.
젊었을 때는 교만해서 힘이 없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모든 힘이 없는 것은 정신 상태가 희미하기 때문이라고 난 믿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고 질병에 시달리면 죽음의 기운이 스며들어옵니다. 그러면 살아있다는 것보다 죽어간다는 것을 더 또렷이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뭘 배우냐 하면 젊었을 때에는 우리가 먹고 입고 소비함으로써 살아있다고 생각하지만 나이 들어서 먹고 입고 소비를 해도 생명은 자꾸 빠져 나갑니다. 그것을 보면서 우리의 생명을 살아있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 살아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 때문에 그 생명을 유지한다면 하나님은 누가 살아있게 하실까? 질문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분이고 하나님 자신이 그 충만한 생명입니다. 무한대의 생명으로서 자기가 누구를 의지하지 않고도 당신 스스로 끊임없이 솟아나는 생명이기 때문에 당신과 관계를 맺는 모든 것들을 살아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생명의 힘으로 우리는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게 되고 이 생명의 힘으로 우리가 닥치고 있는 이 모든 현실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개혁해 나아가고 또 개혁할 때까지 인내할 수 있게 되고 나아가서 믿음의 씨앗들을 퍼트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모든 문제는 결국은 생명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나쁜 일이 나쁜 일이 되는 것은 그 사람 안에 생명이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사랑 그 자체는 모든 일을 좋게 해석하는 영혼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라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이 생명은 자신을 살게 할 뿐만 아니라 자신과 관계 맺은 모든 사람들을 살게 합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우리는 그저 우리의 육체는 한 덩어리의 흙에 불과하고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이 불어 넣으신 한 번에 훅 하는 숨결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동안에만 이 두 개는 결합이 되어 산 사람으로 우리를 살아가게 합니다.
(찬양)
푸른 하늘을 나는 새들도 먹이는 하나님
진흙 같은 이 몸을 정금 같게 하시네
그렇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생명입니다. 그 충만한 생명이 우리에게 살아있을 때 우리에게 일어난 나쁜 일은 좋은 일을 만드는 도구가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이 생명이 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그의 선하심과 위대하심을 자랑합니다. 온 땅과 만물위에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위엄과 권능을 찬송합니다. 생명이 그를 그렇게 하나님 찬송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죽어계신 때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살아계십니다. 그러나 당신의 살아있는 위대한 능력을 경험하고 기뻐하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들, 그 언약을 따라 말씀에 순종하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만 하나님은 당신이 살아계신 위대한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간절히 당신을 찾는 모든 사람들 곁에 계십니다. 그리고 마음을 다하여 간절히 당신을 찾는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이 생존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시는 분이십니다.
III. 적용과 결론
신앙의 힘은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의미를 찾는 능력입니다. 생명의 충만함은 시련과 역경에 굴복하지 않고 의미를 찾게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 속에 일어나는 모든 시련과 역경, 기쁨과 소망 가운데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발견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어도 누구도 감히 나누어 가질 수 없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이 자신을 따라오고 있다고 믿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당신을 찾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응답이 없으신 침묵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같이 주님께 간절히 목마른 사람 모두에게 우리 주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 때문에 소망을 갖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하나님을 소망할 때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 42:3-5)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지난주에 이어서 시인의 영혼이 고통을 받고 있는 상태에서 어떻게 자신을 추스르며 하나님을 앙망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3절의 내용이 현실에 대한 진술이라면 4절의 내용은 과거를 회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5절은 미래의 소망을 전망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우리는 우리의 뜻대로 모든 일들이 형통할 때보다는 우리의 생각과 어긋나고 때로는 고통을 받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바로 신앙은 그러한 고통과 시련 중에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믿음과 근거를 우리에게 제시해 주는데 신앙의 가치가 있습니다. 가을이 오기 전에 모든 세상에 푸른 나무들이 푸른 것처럼 보이지만 낙엽이 떨어지고 눈이 내리고 나면 어떤 나무가 사철 푸른 나무인지를 알 수 있는 것처럼 고난은 성도의 믿음이 온전한 믿음인지를 시험해 보여줍니다.
II. 경건한 마음이 상할 때
그는 자신이 처한 현실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경건한 슬픔으로 말미암아 이 시인이 곡기를 끊고 하나님을 앙망하고 있는 장면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왕과 함께 하나님이 허락하셨던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에게서 추방되었습니다. 그리고 남의 나라 땅에 망명을 와서 더부살이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묻습니다. 너희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며 너희 하나님이 어디 계시기에 너희는 반역자들에게 쫓겨나서 우리 땅에 와서 우거하는 사람들이 되었냐고 묻습니다. 질문하는 사람은 궁금해서 그 물음을 던졌을지 모르지만 그 질문을 받는 시인의 마음은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끊임없이 입으로 들어가고, 그것을 먹어 배부른 것이 아니라 그 슬픔 때문에 곡기를 끊을 수밖에 없었던 시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경건한 마음이 상한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시인의 마음이 상했다라고 하는 고백을 하는데 여기에 ‘상하다’라고 하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아쉬페카’라고 하는 단어인데 원래 이 단어는 ‘쏟아진다’ 그런 뜻입니다. 그릇에 찰랑찰랑하게 담은 물이 가만히 내버려 둘 때에는 수평을 유지하고 있지만 한쪽을 기울여 쏟으면 물이 급격히 움직이면서 한 곳을 향하여 쏟아져 내립니다. 시인이 모든 것이 평탄하고 염려가 없었을 때에는 마음이 잔잔한 물과 같았습니다. 이러한 견디기 힘든 시련을 만나고 나니까 시인의 마음은 출렁거리기 시작했고 한쪽으로 기울어져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너희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너희가 왜 너희 나라 땅에서 쫓겨 와 우리나라 땅에 우거하는 사람이 되었냐”라는 질문을 받을 때 시인은 대답대신 눈물을 쏟아내고 말았습니다. 이때 시인의 마음이 쏟아져 버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상한다는 말의 뜻입니다.
자, 그러면 고통을 받는 이 시인이 무엇 때문에 마음이 상했을까요? 시인은 말합니다. “내가 전에 성의를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 도다”라고 말입니다. 그는 두 가지 사실을 기억하며 마음이 물같이 쏟아지는 슬픔을 체험했습니다. 첫째는 섬김의 기억입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고라의 자손들은 다윗 시대부터 성전에서 하나님의 일을 거두는 봉사에 종사했습니다. 성일이면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 오는 많은 무리들이 있었고 고라의 자손들은 그들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집으로 이끌었습니다. 이러한 섬김의 기억이 이 시인의 마음을 물처럼 쏟아지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들이 평안할 때에는 주님을 위해 봉사하면서 때로는 힘들고 그리고 어렵습니다. 그 위에 섬김이 계속 되다 보면 마치 하나님이 아쉬워서 우리에게 봉사 좀 해 달라고 사정하는 것처럼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메뚜기도 한철입니다. 제가 직접 들은 이야기인데요. 어느 권사님이 구역장을 하다가 하도 힘드니까 “아 이제 난 좀 쉬어야 할 것 같아. 좀 쉬었다가 봉사하고 싶어.” 그랬더니 옆에 있는 친구 권사님이 이야기를 하더랍니다. “그만둔다고 그러지마.” “왜?” 그러니까 “젊었을 때는 그만 두면 다시 불러줬지만 우리 나이에는 한번 그만두면 다시 안 불러. 이제 얼마 안 남았어.” 맞습니다. 메뚜기도 한철입니다. 은막을 휘젓고 다니던 톱스타들이 세월이 지난 다음에 아주 허접한 단역을 맡아서 엑스트라처럼 출연한 광경을 봅니다. 한때는 영화, 텔레비전, 드라마, 모든 데를 휩쓸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광경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메뚜기도 한 철이구나.’ 가끔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말합니다. “목사님 수술했다며 힘들지 않으세요. 좀 쉬어야 되지 않겠어요?” “메뚜기도 한철입니다. 좀 더 지나가면 오라는 곳도 없습니다.”
(찬양)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들뿐이니
주를 사랑하는 마음 금보다도 귀하다
잠깐입니다. 저는 지금도 한 25년 전의 일을 잊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담임 목사님과 함께 수련회 장소에 갔는데 어느 목사님이 찾아오셔서 목사님과 아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눕니다. 그러더니 잠시 후에 집회가 시작되었는데 뜬금없이 그 목사님이 특송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문을 몰랐습니다. 그랬더니 그 담임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저 목사님이 참 맑고 깨끗하고 누구한테 아쉬운 소리 안하시는 분이었는데 은퇴를 하고 5년 정도 지났는데 우리 담임 목사님을 만나셔서 손을 꼭 잡고 하는 말이 “나 좀 설교에 불러줘. 사례금 안 받을 테니까 나 좀 설교 좀 시켜줘.” 그러고 눈물이 글썽거리시더랍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설교는 예정되어 있으니까 시킬 수가 없고, 특송을 시켜 드린 것입니다. 그 목사님도 한때에는 “뭐 이렇게 일이 많아. 왜 나보고 이렇게 수시로 설교를 하라고 그러는 거야. 설교 준비를 하기 힘들어 죽겠네.” 그러던 때가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있었을 것입니다. 마치 여러분이 “아이고, 또 오늘도 공과 가르치러 또 구역예배에 가야겠네.”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시인은 섬김을 기억하면서 마음이 물같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그때는 그게 자기가 봉사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때는 그것이 하나님이 자기 신세지는 줄 알았을 것입니다. 세월이 지나고 보니까 그것이 그런 섬김의 기회가 주어진 것이 자신에게 큰 특권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집도 없습니다. 성의를 지키러 가는 무리도 없습니다. 인도하고 이끌어야 할 성도들도 없습니다. 이 시인이 또 마음이 상했던 이유는 성도의 교제를 기억한 것이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나누는 성도의 교제, 하나님을 간절히 찾기 위해 온 성도들을 인도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 시인과의 교제 말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교제를 통해서 말할 수 없이 커다란 유익을 얻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하나님이 주신 큰 은혜라고 생각하는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가족을 통해서 받는 유익이 얼마나 큰 지를 생각합니다. 마음이 곤하고 지쳐있을 때 아무 곳에서도 위로를 얻을 수 없을 때 우리는 가족의 품에 기댑니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서 삶의 원기와 힘을 얻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서는 내가 있는 모습 그대로 가족들에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입니다. 근데 왜 사람들이 그렇게 못할까요? 그 관계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지 않고 가족들과의 관계가 올바르지 않으니까 쉼을 제공해 주어야 할 안식처인 가정은 마음을 찌르는 칼이 되고 상처의 뿌리는 소금이 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곳에서 성도의 특권이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누리는 성도들 간의 교제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발견합니다. 낙심하고 실망했을 때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게 힘주시는 지체를 발견하면서 거기서 다시 하나님을 찾을 원기를 회복합니다. 그런 성도의 교제를 통해 유익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관계가 잘못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고 사람과의 관계가 잘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여러분이 무위도식하며 사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좀 더 지나간 후 우리 인생의 낙엽이 떨어지고 흰 눈이 가득 내릴 때 우리는 쓸쓸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회상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셨던 섬김의 기회들, 그게 얼마나 커다란 행복이요, 특권이었는지 그게 바로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었다는 사실, 돌보는 사람이 없을 그때에 비로소 젊고 기력이 있는 날에 성도들을 섬기며 그 교제 안에 살았던 달콤한 기억들이 우리의 마음을 쏟아지게 만들 것입니다.
이 시인은 상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마음이 상한다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고통을 받고 있는 상태임을 암시합니다. 그런 마음의 상태가 되는 것은 한편으로는 죄와 그리고 부패에 물들기 쉬운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그런 상한 마음은 하나님을 간절하게 찾는 환경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면 상한 마음이 부패와 타락으로 흐르느냐, 하나님을 간절히 찾느냐 라는 것을 결정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게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과 하나님의 은혜, 그것입니다. 불신앙은 속삭입니다. ‘봐라. 사람인 너를 이렇게 실망 시키잖아. 가족이고 성도고 다 필요 없어. 포기해’라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우리에게 외칩니다. ‘그러니까 네가 너희 가족을 더 사랑하라. 성도를 용서하라. 이 시련을 믿음으로 극복하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상한 마음을 믿음으로 붙들고 하나님을 앙망하며 간절한 기도로 나아갈 때 그때에 그 기도는 상하지 않은 마음으로는 올릴 수 없는 아주 간절하고 힘 있는 기도를 하나님께 올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을 찢고 하늘을 향해 충천한 화염과 같이 솟아오르는 간절한 기도는 언제나 우리가 깨어지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 터져 나온 기도였습니다. 이 시인은 가장 고통스러운 때에 하나님을 향한 섬김의 기억들이 자기의 마음을 물같이 쏟아놓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때에는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았는데 섬길 기회를 박탈당하고 보니 자신의 인생에 그렇게 행복한 날이 없었습니다. 외롭게 이방의 땅에 홀로 던져지고 나니 성도들과 함께 그렇게 함께 교제하며 기쁨과 슬픔을 나누며 하나님을 경배하였던 그 교제가 그렇게 행복한 것인지를 몰랐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인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언젠가 불현듯 우리의 인생의 날에 봄 같은 날이 끝나고 그리고 시련의 바람이 불 때가 있을 것입니다. 설교를 듣는 어떤 분들에게는 오늘이 그날일지도 모릅니다. 자, 이제 여러분에게는 두 개의 선택지가 있습니다. 마음이 상하여 부패로 나아가며 미끄러지시겠습니까? 마음이 상하고 괴롭기 때문에 우리 주님을 붙들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찾으시겠습니까?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같이 이 시인은 하나님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마음이 상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섬겼던 기억, 성도들과 나누었던 아름다운 교제의 기억이 그의 마음을 물같이 쏟아지게 할 때에 그는 미끄러지는 대신 하나님을 간절히 붙들었습니다. 나의 상태와 상관없이 나를 붙드시는 언약의 하나님, 좋으신 그 주님을 꼭 붙들고 하나님 앞에 쏟아지는 마음으로 주님을 간절히 찾았습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상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빕니다.
III. 하나님을 소망하라
마지막으로 두 번째는 하나님을 소망하라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마음이 가장 상하고 아프던 그날에 시인은 말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고도의 경건의 기술입니다. 그것은 바로 영혼을 객관화하여 자기 자신과 대화를 시도하는 것입니다.
인간 안에는 원하는 것이 있고, 원하는 것이라도 옳지 않을 때에는 하지 못하게 하는 양심의 작용이 있습니다. 이것들이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이 양심의 판단이 거의 죽어버려서 거리낌 없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악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에게는 어떤 양심의 작용, 그 이상의 것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는 그 순간 하나님이 한 번에 우리의 마음속에 성향을 심으십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순종하려고 하는 성향입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자신의 욕망대로 불순종하며 살려고 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이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소원은 내게 있으나 악을 행한다고 했습니다. 이 두 가지가 천국에 가는 그날까지 신자의 마음에서 갈등을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려는 성향이 압도적으로 커서 가끔 불순종하고 자기 뜻대로 살려고 하는 것이 거의 힘을 쓰고 삶의 영향을 크게 끼치지 못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을 은혜의 상태에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망명길에서 이렇게 가슴 아파하고 하나님을 향해 마음이 물처럼 쏟아질 수가 있을까요? 그렇지만 이 시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을 좋아하고 찬송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아는 이런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들고 믿음으로 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연약한 자아는 현실을 봅니다. 예루살렘에서 추방되었고, 왕도 왕위를 버리고 법궤도 남겨둔 채 쫓겨 왔고 사람들은 너희들이 찾는 하나님이 있다면 왜 이 땅에서 망명객이 되었느냐고 묻습니다. 대답할 말이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 아니라 낙심과 절망을 줍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 없이 작용하는 우리의 자아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이것이 마음대로 우리를 뒤흔들도록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영혼을 객관화 합니다. 그리고 대화를 시도합니다. 오늘 이 시인처럼 말입니다. ‘내 영혼아 왜지? 왜 그러는 거야? 왜 그렇게 낙심하고 왜 그렇게 불안해서 어쩔 줄 모르지?’ 대화를 시도합니다. 눈으로 보이는 모든 것들은 우리가 믿지 않아도 그냥 눈으로 들어와서 슬픈 것은 우리의 눈물을 쏟게 만들고, 낙심스러운 일들을 우리에게 비관을 느끼도록 만들어 줍니다. 그러나 신앙은 그것을 새롭게 해석하는 힘입니다.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내게 일어난 이런 나쁜 일들 이면에는 하나님의 더 큰 뜻이 있을 것이고, 내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살면 오늘 내가 겪는 이 고통과 시련은 반드시 나에게 축복으로 되돌아올 것이라고 하는 신앙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안에 그렇게 쉽게 낙심하고 좌절하고 쓰러지고 모든 것을 놓아버리려고 하는 연약한 자아가 있다는 것을 부인하면 안 됩니다. 그것을 시인해야 됩니다. 그것을 다 이루는 것입니다.
아마 종교 개혁사에서 마르틴 루터만큼 용기가 출중한 인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사람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면 그가 항상 그렇게 강철 같은 사람으로 살았을까요? 아닙니다. 마르틴 루터가 폰보라라는 여자와 결혼을 합니다. 이 여성은 누구냐 하면 비텐베르크가 이게 개신교로 넘어올 때 제일 먼저 습격을 받은 곳이 수도원, 수녀원이었습니다. 가톨릭 골수분자들이 있는 곳이니까. 그 수녀들이 개신교 신앙을 받아들이면서 이제 보복하는 카톨릭 혹은 개신교도들의 폭력을 피해서 도망쳐 나옵니다. 그런데 알다시피 여성이고, 그 다음에 독신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사회적으로 나쁜 일을 당하기 좋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이 그 사람들을 보호합니다. 그래서 비텐베르크로 루터의 품 안으로 쭉 도망 나온 수녀들이 모입니다. 그래서 루터가 하나씩 하나씩 수도사 했던 사람들하고 지금은 개신교를 받아들인 사람들하고 짝을 지어서 시집을 보냅니다. 끝까지 시집을 안가고 있던 여자가 폰보라였습니다. 왜 가고 그 사람만 남았는지는 잘 모르지만 아마도 인물 순으로 하나씩 뽑히지 않았을까요?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루터가 묻습니다. “자네도 시집을 가거라. 누구를 소개해 주랴?” “저는 안갑니다.” “왜 안가냐?” “저는 마음에 이미 정한 사람이 있습니다. 당신입니다.” 용기 있는 여자가 영웅 같은 사람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가 “그러면 시집오너라.” 그래서 결혼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두 사람이 만난 것입니다. 그 여자도 보통 강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여튼 그 사람이 한참 때에는 마르틴 루터의 사택에 밥을 먹는 객식구가 80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그 밥을 다 해대는 것입니다. 돈은 저희가 벌어서 해야 합니다. 나중에는 프래드리 3세를 찾아가서 “우리 남편이 종교개혁자인데 손님이 하도 많이 와서 밥값을 댈 수 없습니다. 맥주 공장 하나 허가를 내주십시오.” 그래서 맥주 양조장을 차려서 거기서 돈을 벌어서 그래서 그때 맥주는 음료였으니까 그렇게 해서 사람들을 먹여 살렸습니다.
하루는 남편이 너무 대적들에게 에워싸여서 신경 쇠약에 걸릴 정도이고 그리고 너무 낙심해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설움입니다. 폰보라가 예배당에 까만 상복을 입고 나타납니다. 루터가 깜짝 놀라서 “오늘 장례식이 있나. 누가 죽었나.” “당신이 그렇게 슬퍼하는 것을 보니 하나님이 돌아가신 것 같아서 제가 상복을 입고 나왔습니다.” 결국 그냥 강철처럼 늘 강한 사람은 없습니다. 강해 보이는 사람들은 항상 그런 약한 부분이 늘 있는데 자신과의 대화에서 이기고 설득해서 결국은 하나님과의 평화에 이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시인도 낙심하는 영혼이 있었고, 불안한 영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이겼습니다. 믿음으로 그를 설득했습니다. 그의 영혼을 타일렀습니다. 그를 설득하고 그의 마음을 안정시켰습니다. 믿음으로 하는 대화를 통해서 자아는 평정을 되찾았고, 불안해하던 마음에는 평강이 깃들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럴 수 있었을까요? 바로 주님의 은혜를 확신하는 믿음이 불안한 영혼을 이긴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가 나타나셔서 도와주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그때에도 내가 찬송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지금은 비록 시련을 당하고 고통을 받지만 물같이 쏟아지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다면 좋으신 하나님, 그 언약에 있어서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은 반드시 나타나셔서 나를 도와주실 것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어떻게 나타나실지, 언제 도와주실지 정확하게 알 수 없었으나 반드시 주님은 당신이 기뻐하시는 때에 나타나실 것이고, 가장 필요할 때에 나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도와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에 시련과 고난 속에서 다시 나타나셔서 자기를 도와주신 그 하나님 때문에 다시 그 분을 찬송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시인은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영혼에게 타일렀습니다. 너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라, 히브리어 성경에는 너의 소망을 하나님 안에 두라고 말합니다. 요동치는 세상, 무쌍히 변하는 신뢰할 수 없는 이 세상에 두는 대신 변하지 않는 하나님, 언제나 나를 붙드시고 이제까지 단 한 번도 나를 배반하신 적이 없는 그 하나님께 소망을 두면서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이 못하는 그 한계를 하나님이 가지신 한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하나님의 한계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시련 가운데서 당신을 바라는 사람, 하나님을 앙망하는 모든 사람을 도우십니다. 그리고 붙드셔서 당신을 향하여 살게 만들어 주십니다. 인생을 짧게 보면 우리에게는 잃어버릴까봐 두려운 것도 많고 얻지 못해서 가슴 아픈 것도 많이 있지만 사실은 인생을 더 멀리 놓고 보면 결국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하나님과 함께 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이외에는 얻을 것도 없고 잃어버릴 것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그렇게 변함없이 그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분을 붙들고 살아가는 생활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IV. 적용과 결론
신자는 어떤 처지에서도 하나님을 소망하며 살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인생에는 꽃 피고 새들 노래하는 즐거운 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시련의 때도 지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시련과 고통을 지나는 순간들이 아플 것을 아시면서도 우리를 사람다운 사람 만드시게 하시려고 그것을 통과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시인이었지만 하나님을 잠시 뵈올 수 없는 고난을 겪게 하십니다. 그것을 통하여 마음이 물같이 쏟아지는 것을 경험하면서 이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가진 존재인지를 다시 되새기게 되었습니다. 평정했던 그 마음은 한쪽으로 기울어져 쏟아지기 시작했고 그는 그 쏟아지는 마음을 기도로 표현하며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같이 주님을 찾았습니다. 그리고는 현실 속에서 불안하고 낙담하던 영혼을 타일러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간절히 찾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기도가 끝날 즈음에는 가슴이 다시 불타는 확신으로 가득 찼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나타나실 것이며 나를 도와주실 것이라는 확신이었습니다. 결국 이 시인은 가장 큰 시련과 고난을 통해서 자신의 마음을 불로 연단한 것같이 깨끗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되게 하였습니다. 고난의 날이 모두 끝나고 다윗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던 날 시인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다시 성소로 돌아가 예전과 다름없이 성의를 지키는 무리를 이끌며 기쁨과 감사의 찬송을 바라며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이 시인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아마 두 눈에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으로 뜨거운 눈물이 흘렀을 것이고, 이 이방의 땅에서 춥고 서러웠던 망명 생활을 생각하며 자기를 다시 이끌어 주님 뵙게 하신 그 영광을 향한 찬송으로 그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을 간절히 찾는 자를 만나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간절히 찾아 그 분을 뵈옵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빕니다.
찾는 자를 만나주심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