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살고 싶은 그대에게
(2019 새해말씀사경회 저녁설교모음)
설교기간|2019년 1월 21-23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20년 2월 18일
목 차
1. 마른 뼈들도 살리신다(겔 37:1-5) 2019.1.21.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1
2. 마른 뼈들을 군대로 만드심(겔 37:6-10) 2019.1.22.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12
3. 무덤에서 나오게 하심(겔 37:11-13) 2019.1.23.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23
참으로 살고 싶은 그대에게(2019.1.21.새해말씀사경회1)
마른 뼈들도 살리신다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가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겔 37:1-5)
녹취자 : 오희열
I. 본문해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때의 일입니다. 사실상 이스라엘은 멸망하였습니다. 이때 하나님이 당신의 특별한 종을 세우셔서 자기의 백성들에게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에스겔이라는 인물이었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강하게 하신다.’라는 뜻입니다. 제사장의 가문에 태어나는 선지자의 소명을 받았습니다. 에스겔서 1장 3절에 의하면, 그는 선지자의 소명을 받을 때부터 특별한 성령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상과 여호와의 큰 권능과 하나님의 말씀이 특별히 임하는 것을 경험하면서 그는 이스라엘의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가장 암울한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게 하도록 부름받은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권능으로 임하시고 성령으로써 선지자를 골짜기로 데려가셨습니다. 이것은 환상 속에서 일어난 일로써 하나님이 행하실 위대한 일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역적으로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영적인 회복을 주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더 멀게 보면 이것은 신약시대에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다시 살려내실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II. 마른 뼈들을 살리심
오늘 우리가 꽤 긴 성경을 읽었습니다만 이것은 하나의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마른 뼈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다루고 있습니다. 선지자 앞에 펼쳐진 상황은 마른 뼈들로 가득한 골짜기였습니다. 아마도 바벨론 침공 시 이스라엘 군대들이 멸망을 당한 광경일 것입니다. 죽은 후 너무나 오랜 세월이 지났습니다. 뼈들은 이미 바짝 말라 있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가 얼마나 곤고하고 메말랐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동시에 오늘날 영적으로 고갈된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혼과 삶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떻게 이 마른 뼈들을 살리셨습니까?
A. 말씀을 들으라
오늘 성경은 두 가지를 제시하고 있는데 첫째는 말씀을 통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물으셨습니다. “이 마른 뼈들이 다시 살아날 수 있겠느냐?” 그러나 에스겔은 즉답을 피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현실적으로 그 뼈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대답하기 곤란할 때 주의 종들이 잘 쓰던 말을 이 사람도 되풀이합니다. “주께서 아시나이다” 마른 뼈와 같은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이 선택하신 방법은 당신의 종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에스겔서 37장 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렇게 선포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자, 한번 이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선지자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부름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골짜기의 많은 뼈들 가운데 서 있습니다. 그의 설교의 청중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직 마른 뼈들이 가득 찬 골짜기였습니다. 바람소리 밖에 들리는 소리가 없고 가끔 공중을 휘돌아가는 까마귀의 울음소리 이외에는 아무 소리가 없는데 선지자 홀로 거기에 섰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설교는 전혀 창의적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선지자에게 하신 말씀을 그대로 대언하는 것이었습니다. 자 보십시오. 그렇게 죽은 지 너무 오랜 세월이 흘러서 이제 모두 다 말라비틀어진 뼈가 된 상황에서 한 사람이 그 뼈들을 향해 설교를 한다고 그들이 살아나겠습니까?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이것은 하나님이 죽은 자와 같은 우리를 살리는 방법입니다. 사람이 살리지 아니하고 사람을 통해서 전하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죽은 사람들을 살려내시는 것입니다.
인생의 문제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살아있다고 하는 것은 언제나 희망에 반하는 현실과 대면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살아있는 동안은 끊임없는 번민과 근심, 그리고 이 세상에서 맞부딪치는 만만하지 않은 현실을 피할 수 없습니다. 아마 경건한 성도들이라고 할지라도 죽을 때까지 기도제목이 없이 살다가 죽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경건한 성도일수록 자기가 기도해야할 제목들이 정말 많다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혹은 자신이 원하는대로 되지 않는 현실이 매일매일 자신의 삶 속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날 동안 인간은 끊임없이 원하는 바가 있기 마련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원하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갈등을 하게 되고 사람인 내가 원하는 욕망이 있다면 그 욕망이 내 맘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이 인간의 삶입니다. 그러니 경건한 사람이든 불경건한 사람이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든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이든 갈등은 그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근심에는 우리를 생명에 이르게 하는 근심이 있고 사망에 이르게 하는 근심이 있습니다. 생명에 이르게 하는 근심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입니다. 기도할 때 가장 고통스럽고 가슴을 쥐어뜯는 것처럼 아픈 때에는 사실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주님의 뜻대로 살 때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을 그 사랑하는 자녀에게 한없이 부어 주십니다. 그래서 자기를 넘어서 하나님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나의 가족과 나의 이웃,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혹은 심지어 내가 미워하는 사람들까지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이 생각하시는지를 느끼게 하십니다. 가본 적이 없는 먼 나라에서 진리를 모르고 방황하는 영혼들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게 만드십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는 쓰라린 마음으로 기도하지만 기도하고 난 후에는 기도할 때의 모든 아픈 것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충만한 기쁨이 그런 사람들에게 함께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의 끝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하는 사람들은 죽음에 이르는 근심을 합니다. 끊임없이 근심하고 걱정하지만 아무것도 해결되는 것은 없습니다. 눈을 뜨면 똑같은 일들이 되풀이되고 고통스러운 일들이 현실적으로 매일매일 자신 앞에 떠오르게 됩니다. 그런 현실을 직면하며 살 때 그 근심과 염려는 그를 끊임없이 낙심으로 데려갑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절망으로 데려갑니다. 결국 하나님을 원망하게 만듭니다. 현실이라는 것 자체는 매일매일 자기가 원하지 않는 삶이 전개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을 감는 순간까지 그런 현실을 직면하면서 삽니다.
인생의 문제는 간단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빛을 받으면 인생의 문제가 무엇인지 아주 분명해집니다. 마치 어둠 속에 있을 때는 사물들이 희미하게 잘 보이지 않아서 온갖 상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밝은 빛이 비치고 나면 더 이상 상상할 필요가 없이 모든 것이 분명해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인생이 매우 복잡해 보이고 근심과 염려가 그치지 않고 그러면서도 우리의 마음에 기쁨이 없는 것은 그 근심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는 근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진리의 빛이 없기 때문에 간단하게 정리될 수 있는 자신의 인생의 현실이 머리를 싸매고 고민을 해도 풀 수 없는 것입니다. 생각을 많이 한다고 해서 풀리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의 빛이 필요합니다. 한 사람이 인생을 방황하다가 주님께 돌아올 때가 되면 그의 마음은 비상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지성은 놀랍도록 깨어나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 말씀을 이해하고 싶어 하고 그 말씀을 깨닫고자 하는 간절한 지식에 대한 갈망을 갖게 됩니다.
오늘 하나님은 완전히 죽어서 살과 모든 피부가 다 사라져버리고 근육까지 말라서 붙어버려 마른 뼈가 된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을 살리셨습니다. 돌개바람도 일어나지 않았고 하늘에서 놀랍도록 눈부신 빛이 비친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모습이 신비하게 그 골짜기에 나타난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직접 마른 뼈들에게 들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당신의 말씀을 대언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스라엘 군대들과 꼭 같이 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간, 모든 연약하기 짝이 없는 특징들을 똑같이 가지고 있는 선지자를 불러서 언젠가는 마른 뼈가 될 사람들에게, 그리고 지금 마른 뼈가 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직접 마른 뼈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연약하기 짝이 없는 선지자를 불러서 사람의 목소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마른 뼈들에게 첫 번째 명령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오래 고민을 해보고 욕심을 부리며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애를 썼을 때 그것이 도움이 되었습니까? 도움이 되었다면 그것이 여러분의 인생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마른 뼈와 같은 영혼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습니다. 마른 뼈는 마른 뼈일 뿐입니다. 그 이상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간 상황에서 선지자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남의 나라에 포로로 끌려가 노예처럼 살아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셨지만 하나님은 해방을 꿈꾸게 하신 것이 아니라 죽어있는 그들의 영혼을 먼저 살리고자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불러 ‘민족해방동맹’을 결성하게 하시거나 혹은 ‘특공대’를 만들도록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전히 사랑하고 계셨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죽은 영혼을 살려내야만 이 육적인 이스라엘의 껍질을 깨고 영적인 이스라엘, 신약의 교회를 만드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원리는 지금도 똑같이 계속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살이 있는 영혼으로 인생답게 삶을 살고 싶으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여기서 ‘듣는다.’라고 하는 것은 그냥 귀에 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복종의 마음을 가지고 기꺼이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마음을 기울여 듣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들으면 그대로 순종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이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인생의 문제와 영혼의 문제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나, 개인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깊이 인식하며 듣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회복의 첫 번째입니다. 여러분은 너무 살고 싶어서 여기에 오셨습니다. 여러분 중에 어떤 분들은 죽고 싶어서 오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죽고 싶다는 것은 너무나 다르게 살고 싶은데 내가 원하는대로 현실이 전개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모두는 기억해야 합니다. 살고 싶은 사람도 살고 싶은 것이고, 죽고 싶은 사람도 사실은 진짜 죽고 싶은 것이 아니라 지금과는 너무나 다른 인생을 살고 싶은 것입니다. 세월이 아무리 많이 흐르고 우리의 고뇌하는 바가 아무리 다양하다고 할지라도 원리는 언제나 동일합니다.
참으로 살고 싶은 사람들은 마른 뼈와 같은 영혼이 살아나기를 고대해야 하고, 그렇게 영혼이 살고 싶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희망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설교가 누구를 하는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고 희망이 조금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설교가 남을 위한 설교쯤으로 들리고 진짜 희망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내 주위에 앉은 지체들도 보이지 않고 설교자의 얼굴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오직 이 예배당에서 자신 하나만을 위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들립니다.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한 사람이 이렇게 비상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는 것은 이미 성령의 역사가 그 사람 속에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아무나 붙잡고 역사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말씀을 자신의 의지로 전심으로 듣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마음도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염려와 근심, 내 마음을 오가던 혼란스러운 모든 정신의 방해요소들이 깨끗이 사라지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 오직 하나님의 그 진리가 내 마음을 잡아당깁니다. 여기서부터 다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전심으로 생명을 거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B. 생기를 받으라
마지막 두 번째는 생기를 주시는 것입니다. 삶의 문제는 언제나 있기 마련이고 죽는 순간에도 그런 문제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야단맞지 않는 세상에서 살 길은 없을까?’ 저는 그렇게 불량스런 어린이도 아니었는데 집에 가나 학교에 가나 선생님이나 집안 식구들이 왜 그렇게 야단을 많이 쳤는지 모릅니다. 그 시대에는 다 그랬습니다. 좀 자라서 초등학교 시절이 지나고 중학교에 들어가니까 인생은 무엇일까? 나는 누구일까? 피가 마를 정도로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이 밀려왔습니다. 고등학교 다니면서 한때는 사랑 지상주의에 빠져서 책도 많이 읽었습니다. 사랑에 대한 생각으로 고뇌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연애다운 연애를 해보지도 못하고 문학작품을 읽으면서 고뇌를 한 것입니다. 저는 일찍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해서 좀 달랐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30대가 되면 이미 결혼은 했고 먹고 살기 위해서 고뇌를 합니다. 누구에게 야단맞을 염려는 없고 종아리 맞을 걱정은 없는데 또 다른 염려가 찾아옵니다. 아이들이 태어났는데 아이들이 잘 자라주질 않습니다. 병에 걸리고 입원을 하고 빗나가고 고통을 줍니다. 그렇게 계속 되다가 마지막에 나이가 많이 들어서 아들, 딸들도 자기를 필요로 하지 않고 손자 손녀들도 자기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데 그때 자신은 건강의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아무래도 죽을 준비가 안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저렇게 인간은 눈뜨면서 근심으로 시작을 해서 눈감을 때까지 그 근심이 계속됩니다. 울고 슬퍼하고 가슴 아파하는 일이 끝나지를 않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단계에 와 있습니까? 몇 년 후에는 이런 괴로움이 없을 것이라고 속으면서 여태까지 긴 세월을 살아오지 않으셨습니까?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희망에 반하는 문제를 안고 산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생명입니다. 내 영혼이 마른 뼈와 같아서 도저히 그런 현실을 감당하며 살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그렇게 많은 정신과적인 질병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 영혼과 정신의 힘을 신앙을 통해서도 기르지 못하고 자유로운 사색과 끊임없는 자기 인생관의 정립을 통해서도 그것을 수립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부분에 미약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진짜 용감한 사람들은 종교를 선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연약함을 본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볼 때는 적어도 그런 것입니다. 실제로 보면 여러분은 예수를 믿어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어서 예수를 믿었고 혼자 살 수 없어서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지, 혼자 충분히 살 수 있을 정도로 어리석은 길을 가지만 그래도 용감한 사람들은 아직도 전도되지 않고 세상 속에서 씩씩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씩씩함이 무엇인지 그 정체를 다 보았기 때문에 이제 그런 식으로 하나님 없이 씩씩해진 삶을 사는 것을 부러워하거나 대견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씩씩함의 끝까지 가본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생명입니다. 살아있는 한 현실이라는 것은 있기 마련이고 그 현실은 나에게 삶을 살아가도록 요청합니다.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도저히 피할 수가 없어서 그렇게 졸피뎀을 맞고 프로포폴을 맞고 심지어는 마약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 현실을 직면할 수 있는 용기가 있는 사람들은 시간이 아까워서 그런 짓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현실을 직면할 용기가 점점 없는 사람들은 도피하게 됩니다. 문제는 그런 현실을 직면하고 자신의 인생을 헤쳐 나가게 하는 것이 생명입니다. 생명만이 그럴 수 있도록 우리에게 그 힘을 줍니다. 그러면 그 생명은 무엇입니까? 육체의 생명은 자기 자신의 육체를 살아있게 하는 힘이지만 영혼의 힘은 영혼이 영혼다운 것이 되도록 주어지는 힘입니다. 그 힘이 바로 생명입니다.
그러면 어떤 때에 영혼이 영혼답게 든든하고 힘이 있어서 우리의 육체를 꽉 붙들어 지배할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영혼이 하나님을 깊이 사랑할 때입니다. 영혼이 가지고 있는 생명의 힘의 크기는 그 영혼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크기에 비례합니다. 그리고 사랑은 우리 마음 없이 영혼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도 인간적인 사랑이라도 그 사랑이 매우 깊고 뜨거우면 생명이 있습니다. 자식을 너무너무 사랑합니다. 그런데 그 자식의 몸에 장애가 있어서 매일 휠체어를 밀고 다니고 심지어는 뇌성마비가 있어서 몸을 가누지 못합니다. 그런데 엄마가 그 아이를 매일 학교에 데리고 다니면서 헌신을 합니다. 그 정도 되면 엄마의 삶이라는 것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다른 아이들도 돌봐야 할 것입니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그림이 있습니다. 청량리에서 7시 15분 쯤 스쿨버스가 출발하는데 거기에 가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봄이나 여름이나 겨울이나 할 것 없이 항상 같은 시간에 휠체어에 아이를 태워서 지나가는 어머니가 있습니다. 한결같습니다. 2년밖에 그분을 만나지 못했지만 아마 그분이 그 건널목을 지나간 것은 그 아이가 고등학생쯤 되어 보였으니 최소한 10여년이 넘는 세월을 그렇게 다녔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언제 끝날지도 모릅니다. 그 힘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생명에서 나옵니다. 생명이 없으면 그런 것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 생명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자식을 향한 본성적인 뜨거운 사랑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엄마가 자식을 별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아이를 포기합니다. 자기에게 밀려온 고민이 너무 커서 자기 자식을 돌볼 수 있는 여력이 너무 없습니다. 그러다가 정신이 이상하게 되거나 아예 그 현실이 싫어서 자식을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결국은 사랑의 크기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만약 하나님이 이런 사랑을 인간에게 주지 않으셨다면, 인간이 조금만 힘들면 모든 관계를 다 포기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티끌만한 사랑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 사랑도 사실은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시면 이 인류가 제대로 존속될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런 사랑을 주시는 것입니다. 남녀가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면 인구가 늘어나겠습니까?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면 결혼할 리가 없고 결혼하지 않는다면 인구가 늘어날 리가 없습니다. 그렇게 사랑에 빠집니다. 사랑에 빠지게 되면 놀라운 힘이 생깁니다. 목적 없이 인생을 살다가도 형제를 만나고 자매를 만나서 사랑이 싹트고 미래를 설계하다 보면 일해야 할 이유, 돈 벌어야 할 이유, 건강해져야할 이유, 지식을 갖춰야 할 이유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책과 담을 쌓던 사람이 아이를 갖고 나서 육아백과사전을 갖다 놓고 보고 지금은 앱으로 다 찾아봅니다. 그렇게 보면 반쯤은 의사가 됩니다. 무엇입니까? 이것도 생명입니다. 사랑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 생명은 유사생명입니다. 하나님의 원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인류를 존속시키고 이 인류를 최소한이라도 평안하게 살아가게 하시려고 그 사랑을 인간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도 그런 동일한 사랑을 가지고 자신의 가족들을 지키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시리아에서 내전이 일어나고 많은 사람들이 죽어갑니다. 거기에서 비밀리에 찍은 영상을 보여주는데 아이가 폭격을 맞아서 손가락이 다 부러져서 없습니다. 그런 아이가 두려움 속에서 고통스럽게 우니까 엄마가 그 아이를 함께 끌어안고 우는 장면이 영상에 나옵니다. 피부색깔과 문화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이런 애틋한 사랑을 인류에게 주셔서 그런 사랑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영위해 가야 할 힘을 거기서 얻게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완전한 생명이 아니기 때문에, 완전한 사랑이 아니기 때문에 완전한 참 생명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영적인 생명을 주십니다. 마른 뼈들에게 그들을 살리는 하나님의 방법을 제시해 주십니다.
에스겔서 37장 5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이것은 우리말 성경인데 히브리어 성경에 있는 중요한 한 단어의 번역을 빠뜨렸습니다. 그것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사이에 ‘보라’ 라는 감탄사가 빠져있습니다. 히브리어로 ‘힌네’라고 합니다. 그것은 뭔가 일반적이지 않은 아주 비상하거나 놀라운, 혹은 장엄한, 매우 큰 의미가 있는 어떤 사건을 미리 알려줄 때 나타나는 일종의 감탄사입니다. 여기에서 ‘생기’라고 번역된 단어는 ‘루아흐’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후에 “하나님의 영이 수면에 운행하시더라”에서의 그 ‘영’이 ‘루아흐’이고 이것이 첫 번째 쓰인 용례입니다. ‘루아흐’라는 단어는 ‘성령’, ‘바람’, ‘영’, ‘정신’, ‘영혼’, ‘숨’, ‘마음’, ‘콧김’ 이렇게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성령’을 가리킵니다. ‘영’입니다. 하나님이 마른 뼈들에게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으니 그들의 죽은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는 먼저 진리의 빛을 비추어 그들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후에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으십니다. 그것이 가져올 결과가 매우 놀랍다는 것을 ‘보라’ 라는 감탄사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이 맨 처음 아담을 창조하셨을 때의 광경을 생각나게 합니다. 창세기 2장 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했는데 이것은 잘못된 번역이고 ‘생령’이 아니라 ‘산사람이 되니라’로 번역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빚으셨고 그것이 인간의 몸이라면 영혼은 하나님이 “후~”하고 숨을 불어넣으시는 동작, 이것은 영혼을 창조하시는 광경입니다. 몸은 하나님이 직접 빚으셔서 흙, 정확하게 말하면 티끌로부터 만드셨고 영혼은 하나님이 숨을 불어넣으시는 동작으로 영혼을 창조하셔서 육체와 영혼이 함께 만남으로 살아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인격체를 가지고 있고 주체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맨 처음 하나님이 창조하셨을 때는 육체도 일체의 결함이 없이 창조하셨고 무슨 유전자가 잘못되었다거나 병이 든다거나 늙는다거나 하는 일이 없이 완전한 육체를 창조하셨고 영혼도 그 육체에 적합한 영혼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완전한 성질을 갖게 하시고 ‘나’라는 개인에게 독특한 성향과 특징들을 그 영혼에 DNA처럼 새기셔서 내가 ‘너’나 ‘그’가 아닌 ‘내’가 되게 하셔서 나의 독특성을 갖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보십시오. 그 후에 타락한 후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인생의 문제는 딱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육체의 문제와 영혼의 문제입니다. 영혼과 정신의 문제이고 육체와 몸의 문제입니다. 마음은 정신 속에 포함됩니다. 육체의 문제는 병들고 늙고 완전성에서 점점 멀어집니다. 꽃 같던 얼굴이 시든 꽃으로 변하고 그 다음에는 푸릇푸릇한 몸들이 변하여 낙엽처럼 변합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의 고민이고 문제입니다. 그 육체의 결함의 문제가 나에게 생기면 당연히 고민이 되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생겨도 나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고 괴로워합니다. 어쩌면 저 사람을 잃어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마음의 문제입니다. 가족들이 부딪칩니다. 왜 부딪칩니까? 육체가 서로 부딪칩니까? 각자가 걸어가면 되는데 왜 부딪칩니까? 마음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각자 걸어가야 할 마음의 길을 걷지 않으니 서로 훼방하고 부딪치면서 이해의 문제를 낳고 미움과 갈등을 만들어냅니다. 사실은 이것 때문에 인간은 훨씬 많은 고통을 받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외모에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여러분을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많이 들면 어차피 봐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신경 쓸 일이 더욱 없습니다. 왜 거기에 마음을 기울입니까? 관심이 없습니다. 육체도 건강하면 육체가 일으킬 문제는 별로 없습니다. 인생의 문제의 대부분은 영혼과 정신의 문제입니다. 영혼과 정신이 올바르고 곧게 서 있으면 몸이 좀 아프거나 육체에 괴로움이 오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좀 늙었더라도 그런 감정들을 지탱해 나갈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어느 날, 거울을 한 번 보면서 인생이 다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정신이 굳세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문제가 육체와 영혼, 그리고 정신의 문제로 나누어진다고 한다면 육체는 완전성에서 멀어져서 병들고 늙는 문제이고 화학물질도 많아서 감염되고 오염되는 문제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정신의 문제는 하나님이 육체에 본래에 주신 완전함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육체의 문제라면 영혼은 하나님이 인간의 영혼에게 주셨던 본래의 완전함에서 멀어지는 것이 영혼의 문제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영혼이 병든 것이라고 봅니다. 인간은 결국 육체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가진 존재입니다. 가진 것이 많지 않으면서도 행복하고 감사한 사람들이 있고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계속 고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영혼 안에 영혼의 마음의 기능이 있고 이로써 자기가 생각하고 느끼고 결정합니다.
골짜기의 마른 뼈는 이스라엘의 육체의 상태가 아니라 영혼의 상태를 보여줍니다. 어차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결정에 의해서 멸망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타락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육적인 이스라엘을 허무셨습니다. 그들이 포로로 끌려간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포로로 된 그들의 육체의 상태보다 지금 죽어있는 그들의 영혼의 상태를 염려하셨습니다. 그 영혼을 다시 살리는 일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고자 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의 상태를 정확하게 아는 것입니다. 참 신기합니다. 20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의료기기들이 나옵니다. 조용히 누워서 통 속을 몇 번 왔다 갔다 하면 온몸을 MRI로 찍어서 단면으로 보여줍니다. 1cm씩 내려가면서 혹은 몇 mm씩 내려가면서 어떻게 우리의 몸이 되어 있는지를 그림처럼 보여주고 우리의 뇌에 이상이 있어서 사진을 찍으면 뇌 속의 혈관과 신경이 3차원으로 나타납니다. 어느 부분의 핏볼이 막혔는지, 어느 부분의 신경이 문제가 있는지를 입체적으로 보여줍니다. 만약 촬영하지 않는다면 끊임없이 깨질 듯한 두통을 느끼면서도 나에게 골치 아픈 일이 많아서 아픈 것으로 생각하고 두통약으로 해결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다 어느 한순간에 핏줄이 터져서 죽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찍어보기 전까지는 표면으로 아는 것에 한계가 있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자기 스스로 진단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기가 어떤 상태인지를 정확하게 보는 것, 이것이 첫 번째입니다. 이렇게 하고 나면 자신의 영혼의 질병의 상태가 어떤지를 깨닫게 되고 결국은 자신의 영혼이 다시 살아나지 않으면 절대로 다른 인생을 살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은 삶이 신앙 안에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내가 생각하는 나의 상태가 만족스럽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찍어서 우리의 영혼이 병들었다고 하면 병든 것이고 시간이 흘러가면 그 병은 반드시 발병하게 되어 있습니다. 뭔가 문제를 일으키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른 뼈와 같은 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지자로 하여금 말씀을 대언하게 하십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지자가 본 것처럼 똑같은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자신이 마른 뼈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첫 번째입니다. 그렇게 마른 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정말 살고 싶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영혼이 이런 마른 뼈와 같지 않고 아주 건강하고 아주 육신의 힘이 넘치는 상태처럼 영혼도 그렇게 힘이 있기를 바라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시는 유익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정확히 보여주고 내가 이런 상태라는 것을 깊이 깨닫고 이런 상태 속에 있는 것을 가슴 아파 할 때 비로소 “탁!” 하고 기도가 터집니다. 한 사람의 영혼이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첫 번째 표시는 외적으로 “탁!” 터지는 기도로 나타납니다. 왜? 그런 상태를 보았기 때문에 자신이 그것을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엑스레이나 MRI나 CT를 보여주면서 “당신의 뇌 속에 호두알만 한 혹이 있다.”라고 의학적으로 입증하여 보여주었을 때 내일 병원에 가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그것이 암이라고 할 때 속히 가서 수술을 받든지 의사의 구체적인 진단을 받고 싶어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권위 있는 의사를 만났을 때 그 의사가 무엇을 요구하든지 어린아이처럼 그대로 따를 것입니다. 사는 길이 그 길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 깨달음으로 인해 “탁!”하고 터지는 첫 번째 동작이 기도로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메말랐던 자신의 영혼에 그 기도와 함께 은혜의 샘이 터집니다. 퐁퐁퐁 샘이 솟기 시작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한 번에 온천처럼 솟구칠 수도 있지만 작게 솟아날 수도 있습니다. 경우마다 다르지만 어쨌든 밑에서 샘이 솟기 시작합니다. 이 샘이 생명의 샘입니다. 사랑의 샘입니다. 솟아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후~”하고 생기를 불어 넣어주십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깨닫게 하시고 우리의 기도를 터뜨리시면서 우리의 영혼에 생명을 불어넣으십니다. 이 생명은 하나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의 힘으로 이제껏 주체성 없이 살았던 내 인생을 참으로 주체적인 방식으로 살아가도록 만들어주십니다. ‘주체적’이라는 말은 누구에 의해서, 다른 누구에 의해서 자신의 인생에 대한 결정이 빼앗기지 않은 상태입니다. 자기가 자유롭게 자신이 원하는 대로 결정할 수 있는 상태가 주체성이 있는 상태입니다. 자기가 자유롭게 판단하고 자유롭게 생각하고 자유롭게 결정하는 것이 주체성이 있는 상태입니다. 하나님 사랑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우리의 영혼은 주체성을 잃어버리고 속박 받는 상태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죄의 지배를 받습니다. 생각이 한쪽 방향으로만 계속 쏠립니다. 감정이 한쪽 방향으로 쏠립니다.
한 젊은이가 긴 편지를 보냈습니다. 성 중독에 걸려있는 젊은이였습니다. 얼마나 괴로우면 나에게까지 편지를 보냈겠습니까? 최고로 친절하게 답장을 썼습니다. 제일 먼저 “눈을 크게 뜨고 세상을 사방으로 돌아보아라. 즐거움이 그것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즐거움이 있다. 그런 데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얻는 방법을 먼저 터득해라. 아름다운 음악을 듣고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책을 읽고 예술작품을 보고 자기가 하고 싶은 예술을 하고 보람 있는 어떤 일을 하라.”라고 충고해주었습니다. 특히 거의 단절된 상태에서 오직 한쪽으로만 기쁨을 얻으려고 쏠리는 것이 중독현상입니다. 모든 중독현상은 그런 이유로 나타납니다. 여기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40대, 심지어 50대 되신 분들도 지금 가정 상담 들어오는 것을 보면, 남편이나 아내가 게임에 거의 미쳐서 폐인처럼 되어간다고 고민하는 그리스도인 가정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현실을 지탱해 나갈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게임을 끊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생명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많은 즐거움들이 이 세상에는 많다는 것에 눈을 떠서 자신의 마음이 하나의 즐거움에만 쏠려가지 않도록 그 균형을 잡아야 합니다.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람이 사람과 깊은 사랑에 빠져도 사람에 변하는데 하나님과 사랑에 빠졌는데 그 사람이 변하지 않았다면 그 사랑은 진짜 사랑이 아닙니다. 사람을 사랑해도 변하고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 사람은 벌써 얼굴이 다릅니다. 그런데 목사들이 모여도 마찬가집니다. 교인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많이 받는 목사님들과 계속 고통을 받는 목사님들은 얼굴의 표정이 다릅니다. 남편에게 사랑을 많이 받는 아내는 항상 밝고 긍정적입니다. 어디를 가더라도 자존감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면 마음속에 분노가 치밀고 모든 것이 마음속에서 꼬여 다양한 감정으로 폭발적으로 표출되어 이웃과 부딪칩니다. 많은 문제들을 만들어냅니다. 결국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아도, 혹은 사랑을 받지 못해도 사람이 변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변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는데 변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충만한 생명입니다. 마른 뼈와 같았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습니다. 깨닫고 살고 싶다고 울부짖으면서 기도가 터집니다. 그것과 함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성령의 생기를 불어넣으십니다. 그러면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납니다. (어떻게 살아나는지는 내일 하겠습니다.)
이 생명은 사랑인데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 넣어줍니다. “너희는 생기를 받아야 한다!” 이것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생기가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이 말은, “너희는 생기가 필요하다.”라는 것을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인생의 문제가 없는 때가 언제겠습니까? 여러분이 정말 뜨겁게 주님을 사랑하고 첫 번째 회심을 하고 혹은 제 2의 회심을 하고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았을 때도 문제는 있었습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문제는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나 큰 것입니다. 그렇게 큰 하나님의 사랑이 있을 때 나머지는 너무 사소합니다. 누가 나를 비난한다고 하더라도 다른 때 같으면 가슴에 치밀어 오르는 분노가 솟을 텐데, “사람이 다른데 생각도 다르지 않겠어?” 하며 여유로운 마음이 생깁니다. 그것이 사랑의 힘입니다. “왜 남편이 내 말대로 하지 않고 저런 것 하나 고치지 못할까?” 하던 마음이, 은혜를 많이 받으면 변해서 남편이 변하기를 포기합니다. “저 인간은 저렇게 생겼으니까, 수십 년 동안 싸워도 계속 고통만 받을 뿐이지 결국은 바뀌지 않는데 왜 그렇게 힘들게 하나? 그냥 내가 품고 살아야지.” 하는 마음으로 바뀝니다. 공평하게 하기 위해서, 아내가 바뀌지 않습니다. 조금만 바뀌기를 바라도 바뀌지 않습니다. 매일 내 마음에 들지 않는 현실을 만납니다. 집안을 정돈하는 것이나 자기를 챙겨주는 것이나 경제관념이라든지 다양한 문제들이 있는데, 사랑이 없을 때는 이 여자와 계속 살아야 하는지 고민이 생기지만, 이제는 그냥 살아야 하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계속 살아야 하나?”라는 질문을 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냥 사는데 너무 너무 괴롭습니다. 살기를 포기하면 다투지도 않을 텐데 같이 살아야 하니까 자꾸 다툽니다. 확 꺾어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바꿔놓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랑이 충만하면 “그냥 저 여자는 생긴 것이 원래 그런 것인데, 이것이 무슨 도덕적인 선악의 문제도 아니고, 내가 20년을 그렇게 피력했는데도 안 하는 것을 보니까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렇게 생겨서 못하는 것이구나. 내가 치우며 살아야겠다.” 하면서 그의 연약한 부분을 자신이 보충하면서 살아야겠다는 마음의 여유가 생깁니다. 그것이 사랑의 힘입니다. 어디서부터 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옵니다.
가족들이 은혜를 많이 받으면 정말 가정에서 에너지가 적게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 중에 아이 하나라도 빗나가서 끊임없이 찌르는 꼬챙이의 역할을 하면 가정생활을 영위해 나가는 데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들어갑니다. 어떤 때에는 이 아이 하나 때문에 미칩니다. 그 아이가 변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가 미치겠다고 하지만 사실 그 아이가 성령충만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솔직한 답이 아닙니까? 맞으면 “아멘” 해 보십시오. 큰 소리로 말을 못하는 것 보니 양심에 엄청난 찔림이 있는 것입니다. 솔직히 이야기해 보십시오. 나도 다른 사람이 원하는 것만큼 즉시 바뀌지 못합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이 여기에 몇 분이나 계시겠습니까? 다른 사람도 안 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마지막에 문제는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두셔서, 그렇게 연약하고 고쳐지지 않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같이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가정뿐만 아니라 사회도 마찬가집니다. 그런 가운데 그리스도인이 빛으로, 소금으로 산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빛으로 산다는 것은 그 사람 때문에 진리가 빛이 난다는 의미이고 소금으로 산다는 것은 방부제로 산다는 뜻이라기보다 맛을 내는 소금의 역할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많은 문제들이 있지만 수시로 내 인생의 문제가 저 인간들 때문이라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그런 불평 때문에 사람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여러분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때문에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고 괴로워합니까? 그것을 수없이 20년 동안 피력해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렇게 오래 이야기를 해도 바뀌지 않으니까 어떻게 보면 안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도 못해서 안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성령충만하면 이것들을 이기면서 나아갑니다. 그에게 자비를 베풀고 사랑을 베풀고 그러면서 그 사람들이 자신의 결점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랑에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충만은 곧 성령충만입니다. 모든 문제들의 근원은, 여러분의 영혼이 성령의 은혜를 받고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마른 뼈처럼 되어 있는 우리들을 하나님이 다시 살리고 싶어 하십니다. 놀라운 것은, 이 생명은 단번에 주어집니다. 하나님께서 한번 이 충만한 은혜를 부어주시면 아주 잠깐 동안 생각과 모든 것이 바뀝니다. 지긋지긋하던 인간이 너무 가엾고, 가슴이 아린 사람으로 변하고, 인생의 쓴 뿌리처럼 느껴졌던 사람이 자신을 사람 되게 만드는 하나님의 훌륭한 선물이라는 판단을 갖게 됩니다. 인생 전체를 바꿔놓는 것입니다. 어디에서 이렇게 바뀔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신앙은 사람을 이렇게 바꾸어 놓습니다.
III. 적용과 결론
그러므로 말씀을 깨달으십시오.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것, 이것이 우리가 살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뜻도 없을 것입니다. “내 힘대로 해서 실패했고 내 뜻대로 고집하면서 살아서 나를 의지한 결과로 여기까지 밖에 오지 못했으니 이번에는 내 생각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리라!”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으뜸가는 유용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진리의 빛이 확 비치면 모든 혼란스러운 것에 질서를 부여한다는 것입니다. 진리의 빛이 비치면 이런 것은 잘못 되었고, 이것은 이 자리가 아니고 저것은 저 자리가 아니고, 이것은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저것은 저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탁탁 눈에 보이도록 깨달아집니다. 그 다음에는 어떤 것은 자신의 힘으로 고칠 수 있고 어떤 것은 고쳐지지 않습니다. 그때 마음속에서 너무나 너무나 바뀌고 싶은데 바뀌지 않는 것을 보면서 원통한 마음이 터집니다. 그것이 부르짖는 기도로 나타납니다. 그때 성령이 은혜를 주시면, 은혜가 없었더라면 내가 할 수 없었던 일을 은혜는 하게 하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원래 이 모든 사물들이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도록 내가 그것을 고칠 수 있는 마음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문제를 보지 마십시오. 죽을 때까지 문제는 항상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십시오. 성령의 생기를 받으십시오. 이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십시오. 하나님이 어떻게 이 생명을 주시는지, 내일 계속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참으로 살고 싶은 그대에게(2019.1.22. 새해말씀사경회 저녁2)
마른 뼈들을 군대로 만드심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명령을 따라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이 뼈, 저 뼈가 들어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더라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겔 37:6-10)
녹취자: 조경훈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어떻게 마른 뼈들이 살아나는지 그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희망을 잃어버린 포로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영적으로 죽어있었습니다. 아무 희망이 없어 보이는 마른 뼈와 같은 상태였습니다. 이스라엘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한 때는 하나님의 생명을 누렸으나 세월이 지나 믿음이 식어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더 이상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영혼도 마른 뼈처럼 말라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자리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위해 나왔다고 할지라도 아직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회개하여 참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죽은 영혼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자기 뜻대로 될 때는 득의만만하여 교만해지지만 만사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을 때는 깊이 좌절하고 절망하게 됩니다.
이런 모든 사람들에게 오늘 하나님은 희망을 주십니다. ‘나의 말씀이 너희를 살릴 수 있다.’ 라는 희망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마른 뼈를 어떤 과정을 거쳐 살려내시는지를 보여주십니다. 마지막에는 골짜기에 가득했던 마른 뼈들이 모두 일어나 군대가 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II. 마른 뼈를 군대로 만드심
A. 마른 뼈가 사람이 됨
먼저 하나님은 마른 뼈가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분부를 따라 하나님이 하신 말씀 그대로 대언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제일 먼저 뼈들이 연결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본문 37장 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에 내가 명령을 따라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이 뼈, 저 뼈가 들어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더라”(겔 37:7). 마른 뼈들이 가득한 골짜기에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습니다. 갑자기 그 뼈들이 사람이 되어서 벌떡 일어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일 먼저 일어난 일은 흩어져 있던 뼈들이 누가 그것들을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움직이며 뼈들이 들어맞아 서로 연결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먼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진리들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혼란은 우리의 마음에도 우리의 행위에도 진리의 표준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이 현상은 점점 심해집니다. 진리의 빛이 멀어지고 나면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지라도 어두움이 진리의 빛을 몰아냅니다. 영적인 어두움 속에 들어가면 생각하고 뜻하는 모든 것들이 혼란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지 않는 교인들에게는 고민거리가 많습니다. 고민은 많이 하지만 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진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효능은 무질서한 마음에 질서가 생깁니다. 이것인 진리의 가장 큰 효능입니다. 육신의 생각으로 살 때에는 혼란스러웠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면 자신의 본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어디서 어그러지고 잘못 되었는지를 정확히 깨닫게 됩니다. 무질서했던 마음에 질서가 부여가 됩니다. 마음에 진리의 빛이 들어오면 그 진리를 가지고 자신의 삶을 보게 됩니다. 어느 것이 잘못된 삶인지 어느 것이 올바르지 않는 삶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의 삶도 보이기 시작합니다. 제일 먼저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떠난 것이 모든 영혼의 죽음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었을 때 제일 먼저 뼈들이 들어맞기 시작했습니다. 생명이 없는 뼈들에게는 그럴 수 있는 힘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맞추신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깨달아지고 진리의 빛을 전달해 줄 때 우리는 그 질서로 돌아가게 됩니다. 마음이 제자리를 잡으면 진리로 말미암는 평안이 찾아오기 시작합니다. 혼란과 모든 무질서들이 물러가고 마음이 안정되게 됩니다. 평안한 마음에서 예전에 없던 용기와 현실을 대면할 수 있는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의 무너졌던 삶은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제일 먼저 그 뼈들을 맞추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 떠나 생명에서 멀어진 여러분의 마음에 수많은 생각들은 이 골짜기에 마른 뼈처럼 뒹굴고 있습니다. 하나의 생각이 또 다른 생각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도 모른 채 수많은 생각들이 여러분의 마음을 골짜기 삼아 마른 뼈처럼 버려져 있습니다. 혼란스럽습니다. 스스로 살아날 아무 희망도 없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온 계곡에 마른 뼈들이 가득하고 가끔 지나가는 짐승의 울음소리밖에 들리지 않던 그 곳에서 소리가 나며 그 뼈들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사람의 모양으로 맞추어지기 시작합니다. 혼란스럽고 무질서했던 그 뼈들의 골짜기는 사람의 모양을 한 뼈들로 맞추어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비추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효과는 혼란스러웠던 마음이 정리가 됩니다. 혼란 속에서 우리는 엄청난 에너지를 빼앗기면서 일생을 살아갑니다. 힘이 좀 있어도 혼란 때문에 빼앗기는 에너지가 너무 커서 그 에너지를 삶으로 쏟아 부울 여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무질서했던 마음에 질서가 잡히고 자기가 돌아가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를 깨닫고 마음이 제자리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자신의 삶이 이어질 수 있는 기반이 마련이 됩니다.
두 번째로는 힘줄과 살이 올랐습니다. 본문 8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겔 37:8). ‘가죽’이라고 번역한 것이 사실 좀 험악합니다. 짐승이나 가죽이라고 하지 피부라고 합니다. 순서대로 뼈가 세워지고 힘줄이 생겨서 뼈와 뼈들을 붙들어주고 살이 오릅니다. 살이 올랐을 때 모두 붉은 살코기 같을 것입니다. 사람의 피부를 2mm만 벗겨 놓으면 미인도 없고 잘생긴 사람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끝난 후에 피부가 싹 입혀지면서 완전히 살아있는 사람의 모습이 된 것입니다. 마른 뼈만 가득했던 골짜기에 완전한 피부를 가진 인간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전쟁을 할 때 온 몸에 흙도 묻고 피도 묻었을 것인데 하나님이 재창조하시면서 그런 지저분한 것들과 핏덩어리들을 다 붙인 채 피부를 만드셨겠습니까? 하나님이 말씀을 전하게 하셔서 뼈들이 맞춰진 후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생기고 그 위에 피부가 생겼을 때 진짜로 깨끗한 피부였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 군인들의 모습이 그 골짜기를 가득 매우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계곡이 마른 뼈만 나굴던 때와 비교해서 사람들로 가득 매운 광경은 얼마나 크고 놀라운 광경이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모양새는 살아있는 사람 같을지라도 방금 죽은 시체와 똑같을 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방금 죽은 사람과 똑같았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생기를 보내십니다. 본문 9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겔 37:9). 오늘 성경은 ‘죽음을 당한 자에게’ 라고 말합니다. 죽음은 이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들은 죽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살고 싶었습니다. 한 번 그 뼈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힘줄과 살, 피부까지 입혀졌으나 싸늘하게 죽어있는 시체처럼 누워있는 그 모습을 보십시오. 그들은 모두 전투에서 패배하여 적군에게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군대에 나올 수 있는 사람들이였으니 당연히 그들에게는 사랑하는 부모와 형제 혹은 아내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 중에 아무도 죽어서 마른 뼈가 되어 골짜기에서 뒹굴고 싶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너무나 너무나 이 전쟁에서 이기고 살아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죽임을 당했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은 처음 창조될 때부터 하나님이 만드신 육체와 주님이 창조하신 영혼으로 산 사람이 되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은 그를 당신과 가족과 같은 친교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생명과 사랑을 주셔서 사람다운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모든 피조물 위에 가장 위대한 피조물이었고 인간이 아닌 다른 모든 것들이 보기에 인간은 거의 신의 위치에 있는 존재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보다 인간은 하나님을 더 의지하며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부르실 때 특히 당신이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실 때 나의 양, 혹은 나의 양떼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양은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이빨이나 잘 달릴 수 있는 다리나 혹은 변장할 수 있는 능력 같은 것이 없습니다.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방어기재가 거의 없는 짐승 가운데 하나입니다. 모든 피조물 위에 뛰어난 만물의 영장이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양이라고 불러주신 이유는 양이 인간을 가까이서 의존하면서 살듯이 인간은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도록 창조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양 혹은 양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저는 회심하기 전에 인간이 아닌 것들이 부러운 적이 많이 있었습니다. 벌레를 보면서도 ‘나는 인간이기 때문에 이렇게 고뇌하는데 이 아이는 얼마나 좋을까?’ 돌멩이를 보면서 혹은 길섶에 난 풀들을 보면서 ‘저것들은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은 아직 돈을 벌어서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할 부양의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닌데 인간으로서 인생을 살면서 지고 있는 짐 자체가 그렇게 컸던 것입니다. 저는 8년이나 직장생활을 했는데 직장생활을 하면 수많은 애환이 있습니다. 적은 월급을 벌기 위해서 눈치를 보고 애를 쓰지만 그것이 힘든 때가 있다고 하더라도 저는 14살 때 인생이 무엇인지 몰라서 목을 조르고 죽는 것 같은 때에 비하면 그것은 힘든 것도 아니었습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은 인간을 위대하게 만드셨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고민이 많은 것입니다. 맨 처음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 인간으로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분과 가족같이 살아가면 인간의 기쁨을 동물에다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강아지 한 마리에 조그만 과자 하나만 줘도 혀를 날리면서 꼬리를 치며 좋아하고 또 달라고 막 짖습니다. 개가 태어나서 사료만 먹다가 처음으로 비스킷을 먹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사료 속에는 그런 달콤한 맛이 없기 때문에 그것은 온 몸이 감전되고 전율 할 것 같은 기쁨일 것입니다. 단 맛이 느껴졌을 때 감전되는 것처럼 온 몸에 쾌감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쾌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지금도 맛집을 찾아다닙니다. 요리는 폭발적으로 발전하면서 사람들의 입맛을 끊임없이 현혹시킵니다. 속이 허한 사람들이 맛집을 찾아다니는 경향이 있습니다. 현대인들이 마음속에 있는 허함을 그런 것들로라도 달래보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사회학적인 설명을 합니다.
참 인간으로서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문학 작품을 읽고 예술을 감상하고 혹은 아주 보람 있는 일을 한 다음에 느끼는 행복,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고 함께 서로 교통할 수 있다는 데서 오는 말할 수 없는 행복. 그런 것들이 비스킷 하나를 먹고 개가 느끼는 쾌락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개는 거기까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죄를 벗어나서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살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가 얼마나 하나님의 놀라운 하나님의 아름다움으로 넘치는지 발견하게 되면 도처에 놀라운 기쁨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의 과거를 돌아보면 모두 똑같은 정도는 아니지만 가끔 하나님이 어떤 진리의 새로운 것을 깨닫게 하셔서 보여주십니다. 기도원에서 내려올 때의 기쁨은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저녁 때 간절히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펼쳤는데 진리의 빛이 막 쏟아지는 것입니다. 새벽까지 정리를 하면 대충 6개월쯤은 설교할 수 있을 것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그것을 바로 설교하지는 않습니다. 토요일 아침에 기도원에서 내려오는 길에는 세상이 그렇게 아름다워 보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람으로 창조하신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사람으로 태어났는데 주님을 몰랐을 때 죽을 것 같이 고통스럽던 죄인의 위치에 머물러 있지 않고 나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것이 얼마나 놀라운 지, 주님이 나에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을 열어주셔서 성경을 통해, 자연을 통해,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때 참 인간으로 태어난 보람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감각적인 것들을 누리고 사는 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정도가 지나치면 안 됩니다. 그런 감각적인 것들이 우리가 영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지배를 받으면서 사는 삶을 전복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감각에 매어버려서 살면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진정한 기쁨, 아무리 누려도 하나님 앞에 죄가 되지 않고 오히려 우리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게 만드는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놀라운 즐거움들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여러분들 가운데도 게임이나 안 좋은 것들의 중독에 걸려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눈을 뜨셔야 됩니다. 그렇게 살면 우리의 인생에 쓰레기 같은 기쁨을 누리는 대신 정말 고상하고 전율하게 하는 말할 수 없는 행복들은 못 누립니다. 중독이 있으신 분들은 기도하고 은혜를 받으면서 치료를 받아서 거기서 속히 벗어나야 됩니다. 그것은 거의 노예와 같은 삶입니다. 안 고쳐집니다. 벗어나야 됩니다.
뼈들이 맞춰져서 방금 죽은 시체처럼 되어서 뽀얗게 피부가 다시 살아났지만 역시 죽은 자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생명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생기를 보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멀리 떠날 때,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부터 멀어질 때 육체로는 살았으나 실제로는 영혼이 죽은 자처럼 살아갑니다. 요한계시록 3장 1절에서 사데 교회를 향해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계 3:1). 이것은 오랫동안 영적인 침체에 빠져서 하나님의 생명이 없이 오늘도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나의 무거운 짐이 좀 덜어졌으면….’ ‘누군가가 나의 무거운 짐을 덜어주면 내 인생이 좀 더 행복해 질 텐데….’ 라고 생각하지만 그 무게는 점점 무거워집니다. 사실은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오는 무거움이 아니라 감당할 수 있는 영혼의 힘이 없는데서 오는 무거움입니다. 매일 매일 운동하는 사람은 무거운 것을 번쩍번쩍 들 수 있지만 여러 달 운동을 쉬어서 근육이 대부분 없어지고 나면 평소에 들던 무게의 절반도 들기 쉽지 않습니다. 근육이 울끈불끈 한 사람은 거의 매일 운동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그것이 유지 될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영혼이 생명의 기운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 현실이 너무나 무겁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한 우리는 현실을 바라볼 때 운명주의에 빠지지 말고 현실을 조금씩 고쳐가야 됩니다. 그것이 살아있는 인간이 할 일 아닙니까? 그러나 어딘들 인생의 무게가 없겠습니까? 돈이 없는 사람들은 돈이 없는 궁핍이 인생의 무게라고 생각하지만 돈 있는 사람들은 돈 없는 사람들과는 또 다른 고민 속에서 야위어 갑니다. 우리가 어떤 현실을 맞이하던지 인생이라고 하는 것 자체,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자체가 자기 희망과는 다른 현실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인생의 무게가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정말 없으면 혹자는 마지막에 허무감이라는 무시무시한 것이 덮칠 것입니다. 수많은 할리우드의 배우들이 자살로 인생에 마침표를 찍습니다. 그런 현상들은 살아있는 인간으로서 자신의 환경을 개선하고 현실을 고치는 노력이 필요하고 당연히 해야 되는 일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인생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 가운데도 평범한 사람이면 생각이 어려울 정도로 엄혹한 현실 속에서 살면서 기쁨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큰 병이 걸렸는데도, 가정에 큰 고통이 있는데도 그것을 이기면서 살아갑니다. 자신을 돌보지 않고 가족들을 돌보고 가엾게 여기고 긍휼히 여기고 기다려주고 참아주고 그러면서도 변하지 않는 사랑으로 그들을 사랑해주는 힘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모든 사람들이 변하지 않고 더 크고 무한한 사랑을 받고 싶어 합니다. 누구든 안 그러겠습니까?
그런데 사랑을 받는 것도 힘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인생을 지탱할 수 있는 힘이 없으면 사람이 진심으로 사랑해줘도 그 사랑을 받아들일 힘이 없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해 줄 때 우리의 사랑을 잘 받아들이고 그 사랑 때문에 기뻐하면 그 사람은 아직도 생명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영원한 생명이든지 유사 생명이든지 어쨌든 생명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생명의 기운이 떨어지고 나면 사람이 사랑해줘도 그 사랑을 받아들일 힘조차 없습니다.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도 힘이 있어야 받아들이는데 하물며 사랑하기 힘든 사람들을 끝없이 사랑하고, 그들이 눈물을 흘릴 수 없을 때 우리가 대신 울어주고, 그들이 아파하지 않을 때 우리들이 영혼의 불쌍한 처지 때문에 눈물을 흘려주기 위해서는 얼마만큼의 사랑과 생명이 우리 안에 있어야 될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사랑을 가진 사람을 인생을 살다가 몇 사람만 만나도 인생이 완전히 바뀌는 것입니다.
믿음의 집안에서 자녀가 태어났는데 놀랍게도 성격이나 모든 것이 못되게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엄마와 아빠가 사랑이 많은 진실한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면 끝까지 자녀를 참고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엾게 여기고 그가 아파하는 것을 자기 아픔인 것처럼 아파하면서 자신의 살점이라도 떼어주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 사랑을 가진 부모를 만난 애들은 100미터 달리기에서 50미터쯤 앞에서 달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0미터에서 달리기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영혼이 생명의 기운을 잃어버릴 때 우리는 죽음의 큰 기운에 삼켜지게 됩니다. 생명이 없는 것을 마음과 육체에 드러내게 되고 이것을 우리는 육체의 열매, 혹은 육체의 행실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9절에서 21절 상반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생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갈 5:19- 21上). 이렇게 많이 열거했는데도 사도는 아직 마음에 차지 않았습니다. 더 하고 싶은 얘기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이 외에도 아주 많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살아있는 영혼은 자신 안에 생명이 있는 증거를 마음과 생활로 드러냅니다. 이것을 우리는 ‘성령의 열매’, 혹은 ‘은혜의 열매’라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서 23절은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성령의 열매는 은혜의 열매이고 사랑의 열매입니다. 9가지 밖에 안 됩니다. 육체의 열매는 수없이 열거했는데 도저히 다 적지 못해서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아직도 많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진리의 밝은 빛 안에서 다시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 속에 들어갈 때 그 열매는 아주 뚜렷하게 나타나고 모두 사랑으로 묶어지는 열매를 맺습니다. 단순합니다. 그러나 육체의 열매는 우리가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수없는 열매들을 맺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데서 오는 육체의 열매들입니다. 한 사람이 사랑을 하면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한 사람이 너무너무 하늘의 기쁨으로 충만해지면 우울하고 죽음을 생각하던 사람도 그와 함께 대화를 나누면서 희망을 갖게 됩니다. 평안하던 마음도 분쟁하기 좋아하는 사람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자신의 마음이 찢어지고 표독해지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화평한 사람을 만나면 마음에 들었던 칼들을 내려놓고 사랑으로 악수를 하게 됩니다. 오래 참음과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이런 것들이 모든 것들이 나 자신에게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열매로 나타납니다. 그런 사람을 만나는 것은 인생에서 놀라운 복입니다. 그런 사람을 통해서 말로만 듣던 하나님의 사랑을 그의 인격을 통해서 보게 되고 삶의 행동을 통해서 저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되는지를 온 몸으로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우리들에게 없었던 하나님의 충만한 생명을 받아서 사람들에게 가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분열이 있는 곳에 화평을, 분노가 있는 곳에 오래 참음을, 포악한 곳에 자비를, 악한 곳에 착함을, 비열한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충성을, 거칠기 짝이 없는 사람들에게 온유를, 방탕한 사람들에게 절제를 보여주어서 전자의 것을 쫓는 사람들 보다는 후자의 것을 쫓는 우리가 훨씬 행복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놀랍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생기가,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가득해야 합니다. 매일매일 이 세상과 부딪히면서 우리들은 이런 영적인 에너지들을 빼앗깁니다.
사람들은 남을 사랑할 때 자신의 본성으로 사랑하는 줄 아는데, 아닙니다. 일평생 원수처럼 생각하던 사람들을 용서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을 때는 죽을 때까지 그 사람을 용서하고 가엾이 여기고 자신이 그를 미워한 것을 회개할 때 결심했던 것처럼 그를 끊임없이 자비롭게 대하며 일생을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손에서 떠나면 용서했던 사람을 다시 미워하는 것, 사랑하던 사람을 배신하는 것은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너무 쉬운 일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 아주 놀라게 됩니다. 결국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있을 때에만 하나님의 사람이고 하나님의 손에서 떠나가면 그는 그냥 쓰레기 같은 죄인 중에 하나이고 그가 어떤 악을 행하던지 그중에 아무것도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으면서 생기를 부여받고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으며 기도하면서 생기를 부여받습니다. 온 몸이 다시 깨어나 새 힘으로 사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고 힘든 것은 피로는 금방 느끼는데 회복이 매우 더디다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는 피로라는 것을 모릅니다. 애들은 피곤해하지 않고 난리를 칩니다. 저도 중학교 때 야구를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교회를 안 다닐 때니까 일요일에 아침부터 어두워서 안 보일 때까지 야구를 하고 밤에 집에 와서는 끙끙 앓습니다. 할머니가 혀를 차시면서 “그렇게 아플 때까지 운동을 해서 돈이 나오냐? 떡이 나오냐?” 그러셨습니다. 신음소리가 날 정도로 온 몸이 아프고 쑤셔서 아침에 학교를 못 갈 것 같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완충이 되었습니다. 완벽하게 충전이 되어서 가뿐한 것입니다. 그런데 죽음의 기운이 슬슬 들어오면 그것이 어려워집니다.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한창 사용했으면 충전을 해야 합니다. 나중에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가전제품을 충전 안하고 쓰는 제품은 아직까지는 없습니다. 사랑을 베푼다는 것은 자기는 못 느끼지만 엄청난 에너지입니다.
예를 들어서 스마트폰을 충전기에 꽂고 사용해보십시오. 항상 화면에 100퍼센트 완충이라고 나옵니다. 항상 그렇게 살 수는 없고 빼서 사용하면 배터리가 97, 95, 93, 92 프로로 뚝뚝 떨어집니다. 우리도 새벽에 여기에 와서 기도하고 밥 먹고 다시 기도하고 한다면 좀 나을 것입니다. 그런다고 해서 완충이 된다고 나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소모를 하면 충전을 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면 충전기를 싫어합니다. 솔직히 예배만 나오면 충전이 됩니까? 기도회만 나오면 충전이 됩니까? 성경만 펼치면 충전이 됩니까? 설교만 들으면 충전이 됩니까? 옆에 사람은 계속 입 벌리고 조는데 또 옆에 있는 사람은 눈물을 흘립니다. 뒤에 있는 사람은 빨리 집에 가고 싶고 그 뒤에 있는 사람은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을 만납니다. 장소가 충전기가 아니라 충전코드는 마음에 있습니다. 충전이 되려면 물론 훌륭한 설교자, 잘 갖추어진 예배당, 음악 모든 것이 필요하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충전은 아닙니다. 충전코드는 마음에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진짜 자기를 충전시키는 것이 되려면 거기서 진리의 말씀을 전심으로 받아들이고 자기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구하고 자기 사랑을 버리면서 충전이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은혜에서 멀어지면 이것이 싫습니다. 마음을 간절히 하면 하나님이 무슨 기도든지 들어주시고 죄가 있다면 용서해 주실 텐데 죄가 많으면 마음을 간절히 하나님 앞에 쏟기가 싫습니다. 자기가 그런 선택을 하기가 싫은 것입니다. 밥솥에다 전기를 꽂고 요리하면 훌륭한 아침상을 차릴 수 있습니다. 간밤에 남편하고 대판 싸웠으면 아침에 밥하기가 싫습니다. 아침에 요리가 나오지 않습니다. 프라이팬도 있고 모든 재료가 다 있지만 남편이 어젯밤에 대판 배터리를 뺏어가서 방전이 된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기도 싫고 스마트폰으로 말하면 완전히 방전이 돼서 켜지지도 않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배터리 충전을 받아야 되는데 그렇게 하기 싫은 것입니다. 그렇게 충전되는 것이 오늘 여기서 쉬운 말로 ‘성령의 생기’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예배를 많이 드려도 충전도 안 되는 예배를 드려서 그 사람의 삶이 달라질 수가 없습니다. 충전도 안 되는 성경공부를 한다고 그 사람이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코드에 꽂지 않는 한 충전기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일 뿐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충전을 받고 다시 배터리가 채워지면서 예배가 끝나고 나서 꽉 채워져서 나가는데 스위치도 켜지지 않는 마음을 다시 가지고 돌아갈 때 예배가 그 사람에게 무슨 유익을 줄 수 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성령의 생기입니다. 공부하고 자기 인생의 목표를 세우고 도덕적으로 살고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뼈들이 맞고 힘줄과 살이 오르고 피부가 덥혀지고 그 위에 생기가 불어넣어 질 때 사람이 돼서 살아났던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몸은 살아났지만 군복이 남아있다면 다 낡은 군복을 입었을 것이고 군복이 사라졌다면 벌거벗은 사람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다 살아났는데 그들이 거의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태에서 혹은 다 녹슨 갑옷을 입고 살아났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이 각자 일어나서 집으로 가겠다고 온 골짜기를 헤맨다면 그 꼴이 얼마나 우습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B. 큰 군대로 만드심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해 그 살아난 뼈들로 큰 군대를 만드십니다. 하나님의 생기는 죽은 자들을 살려냈습니다. 말씀의 역사였고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1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겔 37:10) ‘극히’ 라는 부사가 붙었습니다. 바벨론과 싸워도 이길 것 같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큰 군대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군대는 조직된 군인들의 집합입니다. 임무가 있고 최종적으로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훈련된 병사들입니다. 간신히 다시 살아나게 하는 것에 거치지 않고 살아난 사람들을 다시 싸울 수 있는 군대로 만드셨습니다.
여러분. 인생은 생존이 목표일 수 없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시시합니까? 생존이 목표가 아니라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자신의 인생을 헤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고 태어나서 그 험한 길을 헤치며 인생을 살았지만 내가 태어난 것이 태어나지 않은 것보다 이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데 티클 만큼이라도 기여하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 인생의 보람입니다. 정말 인생에 보람을 중시하는 사람은 자신의 인생에 갈 길을 돈 하나 때문에 결정하지 않습니다. 의미를 따라서 자신의 인생의 방향을 설정합니다. 그런 확신 속에 살면서 자기 자신의 진정한 기쁨을 물질적인 부나 세상에서의 명예, 권세의 유무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충만한 기쁨 속에서 찾는 것입니다. 내가 정말 이 세상에 필요한 인간이 되었고 나의 존재가 나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의미 있는 존재가 되어 그들에게 도움을 주며 살아가고 있다는 보람과 기쁨이 있습니다. 나 때문에 유익을 받는 사람이 소수일수도 있고 어마어마하게 다수일 수도 있고 특정한 계층의 사람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내가 살아있는 것 때문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티끌만큼이라도 더 아름답고 선하게 다른 사람의 행복에 이바지하고 특히 하나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게끔 살아간다는 자부심이 있을 때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육적인 이스라엘은 이미 패배했습니다. 바벨론의 말발굽 아래 짓밟혀서 육적인 이스라엘의 영광은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골짜기의 환상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영적으로 다시 살릴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서 우리는 오늘 죽은 자와 같은 삶을 살던 사람도 하나님이 다시 살리신다는 것을 보고 계십니다. 마른 뼈를 살리신 것은 하나님이 보내신 영 때문이었습니다. 사방으로부터 불어오는 생기 때문이었으니 이 생기는 곧 성령이었습니다. 본질적으로 보면 우리의 삶은 세상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삶이 아닙니다. 영적인 전투입니다. 우리에게는 인간의 이성과 상식으로 우리의 인생에 문제를 해결하고 살아가는 일들도 꼭 필요하지만 이와 함께 우리의 인생이 본질적으로 영적인 전쟁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영적으로 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군인과 같은 강인한 힘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최근 30년 동안에 매스컴이나 설교단을 통해서 사용되었던 단어 가운데 빈도수가 가장 많은 10가지 단어 안에 들어가는 단어가 있습니다. ‘상처’라는 단어입니다. 그런 단어를 우리 젊었을 때에는 사용하지 않았는데 1990년대 이후로 굉장히 많이 사용이 되고 2000년대는 만개하고 지금도 역시 그렇습니다. 한번 그것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물론 그 말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기가 원하지 않는 인간관계나 사회적인 변화 등 때문에 자기에게 일어나는 고통을 그렇게 묘사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에게 일어난 힘들고 어려운 많은 일을 모두 상처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너무 인간으로서 자존심이 상하는 말이 아닙니까? 나는 계속 나를 보호할 수도 없이 다른 사람에게 계속 상처를 입고 사회 속에서 계속 상처를 받는 약자라는 것을 강력하게 자기가 확신하는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들이 불가항력적으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을 수 있고 사회적인 약자들은 지금도 계속해서 피해를 당합니다. 거대자본의 횡포 때문에 시장이 공정한 게임이 안 되고 항상 그들이 한 수 깔고 두는 게임이 됩니다. 경쟁 속에서 어떻게 살아 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자신이 그런 사람들보다 최선을 다하고 창의적인데도 항상 ‘루저(loser)’, ‘진 사람’이 됩니다. 자기의 힘으로 할 수 없기 때문에 피해를 받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을 그 공식으로만 설명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의 많은 것들은 우리들이 할 수 없이 당하는 것들도 있지만 상당히 많은 것들은 우리들이 선택을 통해서 오는 것들도 많습니다. 이런 것들까지 모두 피해와 상처의 공식으로 설명을 해버린다면 우리의 주체성은 뭐냐? 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나는 항상 다른 사람이 피해를 주면 상처만 입을 수밖에 없고, 전쟁터에서 무기도 없이 수영팬티 하나만 입고 서있는 사람과 같아서 화살이 날아오면 맞고 칼이 스치고 지나가면 살이 찢어지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생각하는 것은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되게 자존심이 상하는 것 아닙니까? 공정한 생각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그런 것을 ‘유리 멘탈’이라고 하는데 마음이 너무 연약해서 톡 하기만 해도 ‘우루루루’ 부서지는 유리 같다는 것을 말합니다. 멘탈이 튼튼한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마다 태어나기도 각기 다르게 태어나지만 어차피 인간으로 태어나면 볼 꼴 못 볼 꼴 다 보면서 살아가야 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것은 죽을 때까지 우리 앞에 전개되는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사회를 계속 고쳐 나가야 됩니다. 이런 식으로 불공정한 게임이 되지 않고 누군가가 폭력을 당하는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는 구조에 대해서 항거해야 됩니다. 그것을 법과 제도를 통해서 끊임없이 고쳐나가야 됩니다. 그런 일에 그리스도인은 침묵하면 안 됩니다.
그렇지만 세상 끝날 때까지 현실적으로 그런 피해를 당하고 잘못된 일을 겪는 현실은 그런 것들로만 완전히 살아질 수 없습니다. 그렇게 전개되던 우리의 현실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우리 자신들의 힘을 길러야 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공기 중에 지금도 수많은 균들이 떠다닙니다. 면역력이 있는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지만 면역력이 정말 떨어진 사람은 이 예배에 참석할 수도 없고 무균실에 있어야 됩니다. 하루에 몇 십 만 원이나 하는 균이 거의 없는 유리처럼 된 방 속에 들어가 있어야 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그렇게만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그런 현실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군사와 같은 사람들로 우리 자신이 다시 태어나야 됩니다. 왜 내가 일방적으로 피해만 받고 상처만 받는 사람이 될 것인가? 나의 주체성은 어디 있는가? 피할 수 있는 것이면 피하고 고칠 수 있는 것이면 고치고 혼자 고칠 수 없는 것은 피해당한 사람들끼리 손을 잡고 고치면서 지금 세상보다는 나은 세상을 후손들에게 물려줘야 합니다. 그것과 함께 우리 자신의 삶을 영적인 전쟁으로 생각하며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 1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하나님은 죽은 자를 단지 살리실 뿐 아니라 다시 무장시키셔서 교회를 군대로 삼으십니다. 마른 뼈들만 가득했던 죽음의 계곡에 뼈들이 맞춰지는 소리가 나고 힘줄이 붙고 살이 오르고 피부가 덮인 후에 생기가 불자 그들은 모두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팬티바람으로 살리신 것이 아니라 다시 군대로 무장시키셔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갑옷을 입고 방패와 칼을 들고 전투부대가 되어서 다시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감화를 받는 것은 단지 고통을 이기고 상처를 치료하고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그를 깨우시고 성령으로 그에게 부어주셔서 생명과 사랑으로 충만하게 하심으로 자신의 현실과 맞서 싸울 수 있는 군인으로 다시 태어나도록 하나님이 그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강인한 군인정신으로 다시 태어나야 됩니다. 집에서나 징징거리지 군인들은 징징거리지 않습니다. 어려운 일이 일어나면 집에서나 엄마를 부르지 군대에서는 엄마를 못 부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라고 말씀의 빛을 주시고 성령의 생기를 주시는 것입니다. 마른 뼈가 가득했고 어떠한 소리도 나지 않는 침묵의 계곡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사람들이 살아났고 창과 칼, 방패를 드는 소리가 들리고 군인들의 저벅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질서정연하게 들렸습니다. 살아난 마른 뼈들은 줄지어 오와 열을 맞춰서 장엄한 군대가 되었습니다. 군대의 함성이 그 계곡을 가득 메웠습니다. 언제든지 명령이 떨어지면 전투할 수 있는 준비를 했다는 신호였습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변화가 필요합니다. 마른 뼈와 같았던 우리들이 다시 살아나서 다시 하나님의 생기를 받아 산 사람이 되고 그 위에 말씀의 검, 의의 흉배, 영적 전쟁에서 모든 화살을 막아낼 수 있는 믿음의 방패 이런 것들이 전신갑주가 되어서 전쟁에 적합한 군인으로 우리를 만들어주실 때에 우리의 인생의 현실은 절대로 헤쳐 나가기에 무거운 현실이 아닙니다. 싸워서 이기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군인의 임무가 전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구원받은 다음에 아버지의 집에 입양이 되고 널찍한 대청마루에서 커다란 베개를 옆구리에 재이고 일자로 누워서 호의호식하는 것이나 꿈꾸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모두를 하나님의 나라에 군사로 부르셨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 사람들을 하나님이 군대로 만드신 것입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살아난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이 군대로 만드셔서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은혜가 떨어져서 교회 나오는 것도 힘들게 나오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은혜를 주셔서 여러분들이 떠난 자리까지 감당하며 열렬히 전투를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교회가 유지되고 가정이 유지되고 이 나라가 안녕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아직도 죽어있는 마른 뼈입니까? 뼈는 붙었으나 아직 살이 붙지 않은 사람입니까? 살이 붙어서 피부까지 입혀졌으나 생기는 없는 사람입니까? 살아났으나 도망가는 탈영병입니까? 무장하고 함성을 지르며 전쟁할 준비가 되어 있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보기에 침체에 빠지면 다 여러분 같은 사람만 보입니다. 은혜를 받아보십시오.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열렬하게 전투적인 삶을 사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나 같은 어려움은 아무것도 아니구나. 모든 것을 이겨내고 전사와 같이 살아가고 있구나.’ 저 사람 때문에 많은 구역의 식구들이 보존되고 가족들이 보호를 받고 그런 사람들이 에워싸서 기도하고 말씀과 믿음의 칼로 영적인 전쟁을 수행해 나아가고 충성스럽게 살기 때문에 기어 다니며 사는 많은 사람들이 오늘 이 말씀이라도 들으면서 회복할 기회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눈을 떠서 영적으로 보십시오. 교회를 에워싸고 있는 불같은 어둠과 악의 세력들, 이 세상에서도 죄가 우리를 에워싸고 심지어 하늘에는 악한 영들의 무리가 가득하고 우리 안에도 심지어는 죄가 있습니다. 이것을 싸워 이기도록 지금도 하나님이 마른 뼈와 같은 심령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들려주시고 죽은 자와 같은 그들에게 생기를 보내어 살리시는 이유가 그것 때문입니다. 은혜 받고 싶으십니까? 주시면 뭐 하겠습니까? 그냥 좋지요.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거저 주는 것이지만 그 은혜에는 계획이 있습니다. 그 계획을 따라 살아갈 때 더 많은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III. 적용과 결론
하나님은 말씀으로 마른 뼈들을 살리십니다. 생기를 보내심으로 다시 산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아야 영적으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이름도 모르는 목회자들과 많은 성도들이 여러분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군대들을 통해서 당신의 위대한 나라를 세워 가십니다.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은혜를 받고 이 군대에 합류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무덤에서 나오게 하심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한즉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겔 37:11-13)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이어서 성경은 마른 뼈와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리시는 방식과 목적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스스로 절망하여 자신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도다 하느니라”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에 대해서 내린 평가였습니다. 그리고 단 하나도 틀린 말이 없습니다. 그들은 바벨론의 침공에 의해 모두 쑥대밭이 되었고,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아녀자들은 노비로 끌려가 천한 일에 종사했고, 남자들은 끌려가 검투사로, 혹은 노예로, 혹은 종으로 비참한 삶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나라도 망했고 민족들도 뿔뿔이 흩어졌고 그리고 이제 자신들에게는 아무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육신의 눈으로 본 것이고 믿음의 눈으로 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모두 멸절된 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은 포로시대에 왜 당신의 선지자를 보내어 그것도 걸출한 에스겔 같은 선지자를 보내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게 하셨을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는 것과는 달랐음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모든 희망이 사라진 것 같은 때에 하나님은 거기서 당신의 역사가 사람의 역사와는 다른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은 바로 이런 하나님을 말씀 속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II. 무덤에서 나오게 하심
오늘 두 개의 구절이 다루고 있는 가장 중요한 주제는 이스라엘을 무덤에서 나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역시 이 일이 있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에게 ‘너는 대언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히브리 성경에 ‘히나베’라고 되어 있는 이 단어는 그냥 ‘예언하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많은 단어들이 동사에서 명사가 유래되는데 이 단어는 명사에서 동사가 유래되었습니다. 그 명사는 우리들이 알법한 단어 ‘나비’라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선지자라는 말이었습니다. 나비에 대한 해석이 많이 있지만 신뢰할 수 있는 해석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이 무언가를 그 마음속에 불타오르게 한 사람이다.’ 이런 뜻입니다. 피동 명사입니다. 어쨌든 선지자는 마음에 주신 하나님의 어떤 이상이 하나님의 만난 계시와 함께 끌어 올라서 자신도 전하지 않을 수 없는 운명에 매이게 되고,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이 예언자였습니다. 그렇게 예언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똑같은 명령이 4절, 7절, 9절, 10절, 12절 등에서 계속 반복됩니다.
A. 무덤을 여심
하나님이 선지자에게 대언하게 하신 첫 번째 말씀은 “하나님은 무덤을 여신다” 이 말씀이었습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요? 우리는 37장 10절까지의 본문에서 우리의 눈에 들어온 것은 큰 골짜기였고 거기에 마른 뼈들이 가득한 모습이었습니다. 만약 그것이 매우 작은 골짜기였다면 그것들이 모두 살아나서 군대가 되어 거기 아마 서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큰 골짜기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뜬금없이 무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무덤을 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래서 여기에서 무덤은 하나의 상징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들어가 있는 진짜 무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골짜기의 마른 뼈가 되어서 가득한 그 자체가 하나의 은유로 말하자면 그것은 거대한 무덤이었습니다. 생명의 기운이라고는 티끌도 없는 죽은 뼈들이 가득한 무덤이요, 묘지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너희의 무덤을 열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에는 이 무덤이 땅을 파고 묻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사람들을 예수님 시대에는 이렇게 산을 옆을 파고 그리고 거기다가 집어넣고 문을 닫는 형식이었습니다. 어쨌든 여기에서 무덤을 연다고 말씀하셨으니까 어쨌든 뚜껑이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이 사람들을 하나님이 그 무덤을 여심으로써 죽어있는 것이 운명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11절에서 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의 무덤을 열고” 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바로 앞에 빠진 번역이 있는데 히브리어로 ‘힌내’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매우 중요한 단어인데 왜 번역을 안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힌내’라고 하는 단어는 어법적으로 간투사입니다. 간투사란 감탄사 속에 속해있는 한 종류입니다. 그래서 감탄사는 세 개로 나뉘는데 감정의 감탄사, 의지의 감탄사, 그리고 간투사 이렇게 나뉩니다. 그 간투사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이 자체가 하나의 완전한 문장입니다. 이 ‘보라’는 영어로 말하면 ‘behold’라는 정도의 뜻인데 이것은 무엇인가 그 간투사가 나온 다음에는 아주 장엄한 어떤 광경이나 매우 커다란 의미가 있는 사건, 절대로 평범할 수 없는 어떤 놀라운 조짐 같은 것들을 보도할 때에 쓰이는 단어입니다. 그러니 하나님도 이 말씀을 하실 때 그 무덤이 열리는 것이 하나님에게도 매우 특별한 일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무한하신 분이시니까 능력에 있어서 어떤 큰 의미를 보여준다는 것이 아니라 능력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현재 영적인 상태에 대한 의미면에 있어서 무엇인가 아주 큰 사건임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단수로 번역된 ‘무덤’은 복수입니다. 그러니 그것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있는지, 죽음의 절망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유추하게 하는 복수입니다. 결국 이 많은 무덤들은 완벽한 죽음, 어떠한 것도 기대할 수 없는 절망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하나님의 환상은 앞에 이미 나온 환상의 또 다른 중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환상을 중복해서 보여주시는 것은 두 가지 의미입니다. 이 일이 곧 일어난다는 것과 그리고 이 일이 매우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도 매우 중요한 말을 누군가에게 할 때에는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두 번, 세 번 신신당부하고 마지막에는 제대로 이해했는지를 물어보지 않습니까? 똑같은 이치입니다.
죽어서 무덤에 묻혀있는 사람들이 살아날 희망이 없듯이 이스라엘에게도 어떠한 새로운 소생의 가능성이 없었습니다. 객관적으로 그러했고, 주관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도 자신들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선지자가 이제 나아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큰 뜻, ‘우리는 고국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요, 하나님은 다시 우리에게 영적인 부흥을 주실 것이라!’라고 외칠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일 반응을 미리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런 희망을 가지고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슴 벅차서 예언의 말씀을 전할 터인데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하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신자가 영적으로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되면 삶 전체가 죄와 사단의 세력에 짓밟히게 되는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그들은 무덤에 있는 시체가 천천히 썩어가는 것처럼 영적으로 완전히 죽어있었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백성다운 그 특징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 무덤과 같은 상황을 열어젖히시고 거기서 그들을 살리시고 그 무덤에서 나오게 하실 것임을 다시 한 번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누가 보아도 완벽한 죽음이었고, 수없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러나 죽은 지 사흘 만에 그는 무덤을 열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살리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이 영적으로 죽어있는 우리 같은 사람들을 다시 살려낼 것임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온 것처럼 우리는 그렇게 이 세상에 오지 않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십니다. 그러나 그분도 죽으셨고 우리도 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진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그분의 부활의 죽음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은 부활에 참여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순간 그분의 죽음에 참여했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죽음이 내 죽음이 되었고, 그리고 내 죽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공로 없이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그 죄에 대한 형벌을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치루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똑같이 육체가 죽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신 것같이 똑같이 우리는 살아날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 안에 있는 부활의 소망입니다.
그 부활은 종말에 실현될 것이지만 어떤 식으로 이 부활이 이루어지게 될 것인지를 하나님을 믿은 그 순간부터 우리 안에 경험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은혜를 받고 처음 사랑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이 마음에 충만하게 넘칩니다. 감당할 수 없었던 현실을 능히 감당하고 기쁨과 소망의 삶을 삽니다. 삶의 모든 방면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나를 사랑하고 돌보시는지를 생생하게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도 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살려내십니다. 그런데 그 살려낼 것이라고 하는 놀라운 보증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보증이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때 하나의 담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니까 결코 약속을 하신 다음에 어길 리가 없으십니다. 그래서 이것은 일이 안 이루어질 경우에 사용되는 담보가 아니라 그 일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 속에 살게 하기 위한 담보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것이 성령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매우 특별한 교통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성령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 하나님께 말씀을 들으며, 우리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누립니다.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사랑을 경험한 신자라도 변함없이 그렇게 하나님 사랑하고 그렇게 생명으로 충만한 가운데 살아가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감격스럽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만큼 시간이 지나면서 이스라엘에게 만나와 같은 것이 됩니다. 이제 더 이상 식생활을 해결할 능력이 없을 때 내린 그 만나는 처음 하루 이틀 동안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엄청난 탄성을 지르게 하는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매일매일 같은 것이 반복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라면이 맛있어도 제가 고시원에서 생활하면서 한두 달 먹어봤거든요? 두 달을 라면만 먹어봤는데 그래서 지금도 라면 냄새를 별로 안 좋아합니다. 먹고 싶은 때가 1년에 한 이틀정도 있을까 말까 그리고 거의 먹고 싶지 않습니다. 아주 그 냄새에 아주 질렸습니다. 그러니 이 사람들은 거의 40년 가까운 세월동안 가나안에 들어가서까지 첫 번째 수확이 있을 때까지 만나가 내립니다. 그러니 얼마나 지겨웠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그렇습니다. ‘목사님, 말씀을 듣고 이렇게 은혜를 받아 한 1년 동안은 그렇게 했는데 그 다음서부터 천천히 마음이 식어지고 말씀도 그렇게 감격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큰 믿음을 가지셨군요. 그랬습니다. 1년이나 유효기간이 계속됐으니 대단합니다. 여러분 1년 라면 먹을 수 있겠습니까? 한번 해 소비시오. 나중에는 쓰레기통에 다 가져다 버릴 것입니다. 보기도 싫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럴 때에 이제 영혼은 천천히 죽은 자처럼 되어 갑니다. 그래서 몸은 살아서 움직이고, 하나님을 향한 입술의 고백도 있고, 삶도 이제는 그렇게 극단적으로 방탕한 생활에서 좀 떠나 있는데 마음은 여전히 잠들고 그 다음에 죽은 자처럼 깊이 골아 떨어져 있습니다. 깨어나지를 않습니다. 원래 죽은 자는 아무리 귀에 크게 소리를 쳐도 듣지 못합니다. 그렇게 거의 죽은 것 같은 상태가 계속 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이미 주신 그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가 영적으로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사건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멀리 떠나 혼란해진 마음속에 진리의 말씀이 하나님이 원하는 질서를 보여줍니다. 그러면 자신이 어디서 잘못되고 떨어졌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잘못을 깨달아 알고 나면 회개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말씀의 은혜를 받고 되고 싶은 자신과 실제의 자신 사이에 그 위치의 차이를 발견합니다. 그런데 도저히 자신이 마음을 먹어서 내가 있어야 할 그 자리로 내 맘대로 돌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때 가고 싶은 마음이 더 간절하면 간절할수록 가슴에서 터치듯이 기도가 쏟아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간절히 통곡하면서 기도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능히 돌아갈 수 있도록 성령의 은혜로 힘을 주십니다. 그래서 마음의 놀라운 변화를 경험합니다. 예전에 하나님 멀리 떠나 있으면서 아름다운 것이 아름답게 보이지 않고, 선했던 것이 선한 것으로 보이지 않고, 참되다고 믿었던 것이 참되지 않은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자기와 세상을 보는 자신의 시선이 일치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거기에서 하나님 앞에 돌아갈 수 있는 놀라운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십년동안 돌아갈 수 없었던 그 길을 하나님이 하루 아침에 돌아갈 수 있게 만들어 주십니다.
요즘은 그렇게 사람들이 담배를 즐겨하지 않고, 담배를 피는 사람을 혐연권이라고 해서 그 권리를 훨씬 더 끽연권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냥 공항에 가도 한 방에다가 몰아넣고 너구리 굴처럼 만들어서 거기서 연기를 때도록 합니다. 사람들이 불편해서라도 자꾸 담배를 끊습니다. 담대를 끊는 것은 매우 잘하는 것입니다. 저희는 교회 다니면서 생생하게 봤습니다. 절대로 담배를 끊을 수 없을 정도로 이 담뱃진이 아예 이 손에 노랗게 물든 이런 사람들이 무얼 해도 끊을 수 없었던 사람들이 부흥회에 와서 은혜를 받고 그 다음에 단칼에 끊는 것을 보았습니다. 무슨 힘일까요? 성령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힘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 그 생명의 힘이 하나님의 진리에 합당하도록 살아갈 수 있는 그런 놀라운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어디 그것뿐입니까? 도박을 하던 사람들은 그 도박벽이 뼛속깊이 뱁니다. 제가 모셨던 목사님의 그 말씀이 기억납니다. ‘인간은 고쳐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서 이제 노름을 해서 집도 잃어버리고, 그 다음에 자식, 아내까지 전부 다 노름빚으로 팔려가서 그리고 너무 원통해서 이제 내가 다시 노름을 하면 사람 자식이 아니다 하고, 그 생선 같은 것을 자르는 커다란 통나무에 손을 올려놓고 도끼로 서너번 내리찍어서 한쪽 손을 끊어버렸어요. 몇 년 후에 보니까 갈고리를 낀채 여전히 화투를 치고 있더라, 그게 인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자기가 충분히 바꿀 수 있다 자만하지 말아야 됩니다. 특히 도덕적인 면에 있어서 그래서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더욱이 나의 타고난 태생이다, 나의 타고난 어쩔 수 없는 운명이다, 이렇게 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주님의 도움을 구하세요. 그러면 내가 포기하며 살아야 할 그것들이 하나님 앞에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면 하나님이 죄 때문에 죽을 것 같은 우리의 영혼을 살려내십니다. 우리의 지성을 명료하게 하시고, 우리의 감정을 이제 세상 사랑이 아닌 하나님 사랑에 불타게 하시고, 그때쯤 되면 우리는 예전에는 도저히 버릴 수 없는 것들을 버릴 힘이 생기고, 예전에는 선택할 이유가 없는 것들을 기꺼이 선택하고 감당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자녀라는 이름은 가졌으나 사실은 골짜기에 마른 뼈와 같이 그렇게 되어 있고, 또 죽은 자처럼 되어서 결국은 무덤에 누워 있는 것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도 이 설교를 들으면서 당신 자기 자신이 마음속에 여러분 자신을 향한 나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라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왜 못 살아났을까요? 왜 그렇게 긴 세월을 살아나지 못해서 어둠 속에서 절망과 두려움으로 떨고,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아무 희망도 없이 그렇게 아까운 인생을 보내면서 여전히 그렇게 살았던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여러분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고칠 줄 알았습니다. 죽은 영혼을 여러분 힘으로 살려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고 힘없는 현실 속에서 여러분들이 결심하면 힘을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여러 번 실패를 반복하면서 이제는 더 이상 도전할 수 있는 용기가 나지 않는 상태까지 내려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국 우리의 신자이면서도 죽어있는 우리의 영혼은 결국 죄의 가장 강력한 효과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육체는 육욕으로 넘치게 되고, 그리고 영혼은 죽음의 상태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사망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5장 21절에서 선지자는 말합니다.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롬 5:21) 자, 우리가 죄 안에 있을 때 죄는 우리 안에 처음에는 자신을 들여보내주는 것, 자신을 품어주는 것으로 만족을 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계속 커져서 결국은 왕 노릇하고 싶어 합니다. 이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만이 아니라 믿는 신자에게도 죄는 이러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입증된 것은 부활을 통해서였다고 로마서 1장은 말합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과 같은 인간의 몸으로 오셨지만 죄는 없으셨어도 죽음에 복종되셨습니다.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살려내셨습니다. 그것은 이미 구약에 나오는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던 에녹이나 엘리야의 사건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완전히 죽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를 당신의 능력으로 살려내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속에 부어진 하나님의 충만한 생명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접붙여져 한 몸을 이룰 모든 사람들이 이 예수의 부활의 생명에 동참해 다시 살아날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더 이상 영혼의 죽음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할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런 질문을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데 여전히 죄 가운데 있고 영적으로 어떤 생기도 없이 그렇게 죽은 자처럼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하나는 그가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일 가능성과 또 하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어지고 생명을 받을 기회를 상실했기 때문에 여전히 믿음대로 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회복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남아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큰 은혜와 능력을 자기의 백성들에게 부어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누구도 살려내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용서 받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용서의 은혜를 먼저 경험하게 해주시고, 사랑하고 싶은 사람에게 생명을 먼저 주시며 자신에게 사랑을 달라고 간구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살리시는 방법입니다.
보십시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더 이상 우리의 영혼의 죽음이 특히 신자인 우리들에게는 운명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현실이 가능성이 없고 낙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해서 그것으로 미래를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마른 뼈들이 가득한 골짜기, 가끔 까마귀 우는 소리 이외에 들리는 것이 없는 이곳에서 그 뼈 위에 서 있는 어떤 사람이 그 뼈들이 살아나 용감한 군대가 될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현실을 받아들이지만 그 현실이 미래를 모두 말해준다고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무덤과 같은 이 골짜기에서 절망을 거둬버리고 생명으로 역사하였습니다. 그러면 오늘도 이렇게 무덤과 같이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있는 우리들을 당신을 부활하게 하신 생명의 능력으로 건져내실 것임을 믿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기에서 우리들은 눈에 보이는 현실을 믿을 것이냐, 현실 너머에 계셔서 누구든지 당신을 찾는 자들에게 위대한 능력을 행하실 수 있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을 것이냐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기록해 온 위대한 인물들을 나열하고 있는 영웅들의 전당입니다. 그 사람들이 바로 어느 시대든지 바로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현실이 눈앞에 있어서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지만 그러나 그 현실에 따라 미래는 결정되었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전심으로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주신 약속을 붙들고, 그리고 그 현실이 반드시 미래에는 놀랍게 변할 것이라고 하는 큰 소망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이 위대한 믿음의 영웅들의 전당에 들어가는 현관에는 이러한 글이 쓰여져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과 2절이 바로 그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 11:1-2)고 말합니다.
보십시오. 이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이 주는 정보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주는 그 지식을 굳게 붙들었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현실은 설명이 쉽고 그리고 눈앞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은 때로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매일매일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분이 자신들을 사랑하시는 것과 자신에게 말씀해 주시는 당신의 그 위대한 능력을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경험을 기초로 그들은 약속의 말씀을 굳게 믿었습니다.
오늘 성경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라고 한 실상은 희랍어로 ‘휘포스타시스’라는 단어입니다. 실상이라고 하는 말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번역입니다. 이것은 오히려 실체라고 해야 합니다. ‘휘포시타시스’라는 말은 ‘휘포’라는 ‘스타시스’라는 단어가 합친 것입니다. ‘스타시스’는 서 있는 것입니다. ‘휘포’는 밑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물의 밑바닥에 있는 그래서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 사물을 그 사물이게 하는 본질적인 토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실체입니다. 그래서 실체는 언제나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모양은 나타납니다. 모양은 끊임없이 변해도 그 실체는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인간입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실체는 변하지 않습니다. 내가 인간 이상인 것 같은 삶을 살 때도 인간이고, 그냥 인간으로서 삶을 살 때도 인간이고, 인간 이하의 짓을 하며 살 때도 나라는 존재는 인간입니다. 거기에 특정한 사람의 이름을 부여해 봅시다. ‘김남준’ 나입니다. 그리고 나는 인간일 뿐만 아니라 이름 석 자를 가진 구체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나라는 사람을 제일 먼저는 사람답게 창조하셨지만 두 번째는 그 이름 석 자답게 창조하셔서 그래서 내가 다른 모든 사람과 용모에 있어서 그리고 마음의 성향에 있어서 하나님이 부여하신 재능에 있어서 서로 다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 내가 나의 인생에 실체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름 석 자를 가진 내가 노숙자가 되어서 구걸을 할 때에나, 유명한 작가가 되었을 때나, 아니면 정치인이 되어서 한국을 좌지우지하는 인물이 되었을 때나, 혹은 다시 죄수가 되어서 감옥 속에 갇혔을 때나, 혹은 아주 늙어서 이제는 기력이 없어서 요양 병원에서 치매에 걸려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을 때나 똑같이 나는 그 이름 석 자를 가진 그 실체입니다. 그 실체가 어떤 때는 정치가로, 어떤 때는 작가로, 어떤 때는 젊은이로, 어떤 때는 중년 아저씨로, 어떤 때는 늙은이로, 어떤 때는 곧 죽을 요양 병원의 환자로 나타나는데 이런 다양한 모습들은 실체가 아닙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요’ 그랬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너무나 많이 인용하면서도 우리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를 잘 모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요. 자, 바라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라는 많은 것들은 변할 수 있는 것이고, 우리 눈에 보였지만 나중에는 다른 것으로 바뀔 수 있는 것들인데 믿음은 그 모든 것들을 지탱해 주는 실체라고 할 때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결국 이것은 믿음을 통해서 어떤 사물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를 갖게 된다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바라는 것들의 실체요, 바라는 많은 것들이 있다면 그 바라는 것들이 꼭 이루어질 것이다 라고 하는 본질적인 관계가 마치 사물에 있어서 겉모습과 실체와 꼭 같다. 그래서 믿음이 있으면 그 바라는 것은 반드시 이루어지게 된다 라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믿음은 어떤 믿음일까요? 그냥 자신이 바라는 바를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토대로 한 믿음이고, 특별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을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믿으면 그 믿는 것이 현실보다 더 확실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고 나면 그 믿음 때문에 그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는 확고한 지식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믿음의 중요성을 보는 것입니다. 자, 오늘 이렇게 설교를 듣고 조금은 감동을 받았을지 모르지만 집에 갑니다. 그리고 다시 씻고 자리에 누워 아침에 일어나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어제와 꼭같은 하루가 시작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매일 한편으로는 은혜를 받으면서도 눈앞에 보이는 현실이 꼭 같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경험에 의지해서 우리의 육체의 감각들이 전달해 주는 정보를 가지고 우리의 상황을 판단합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어도 그 말씀은 마치 길가에 뿌려진 씨처럼, 돌짝밭 위에 뿌려진 씨처럼, 그리고 가시나무 떨기 위에서 조금 싹을 틔우고 자랐던 그런 식물처럼 결국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문제는 우리 마음 안에서 믿음과 감각 사이에 줄다리기가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음 안에서 어떤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우리는 믿음이 주는 증거보다는 현실이 주는 증거를 신뢰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꽉 붙들고 이것을 내가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이 말씀을 지금 내게 주고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경험이 내 안에 살아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때 이것을 붙드는 이 믿음의 지식은 이성을 통해서 보고 아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수많은 믿음의 증인들이 그 고난과 시련, 심지어 죽음, 순교에 이르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그 말씀을 전하면서 영웅적인 삶을 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마음속에서 은혜가 사라지게 되면 믿음이 함께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믿어왔던 습관 때문에 웬만하면 결별할 수 없는 그런 기독교에 대한 자신 나름대로의 견해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 껍데기를 가지고 있지만 그까짓 껍데기 맘만 먹으면 무너뜨리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한번에 무너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말씀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까? 만약에 우리의 마음속에 생생한 믿음과 성령의 은혜가 사라져 버리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주시는 지식의 확실성보다는 우리의 육체의 감각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의 확실성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에스겔 선지자의 눈앞에 펼쳐져 감각을 통해 들어오는 광경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마른 뼈가 되어서 계곡을 가득 채웠습니다.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생명의 기운이 추호도 느껴지지 않는 상태였습니다. 죽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끝난 것입니다. 그 뼈다구들을 보면서 이 이스라엘은 다시 회복될 가능성이 없다고 우리는 이성으로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이 선지자에게 믿음을 주시고 이 속에 하나님의 은혜의 감동을 주셨습니다. 소명 받을 때부터 이 두 가지를 충만하게 받고 소명을 시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에게 다시 한 번 이런 놀라운 비전을 보여주셨을 때 이것은 선지자에게 새로운 경험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고, 임하고, 임하고 하는 것이 50회, 60회 이상 이 작은 책속에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통을 경험하며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지식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꽉 붙드는 것입니다. 마른 뼈와 같이 소망 없이 되어 버린 것이 이스라엘의 현실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그 마른 뼈를 살릴 수 있다 이 사실을 눈에 보이는 현실보다 더 확실하게 믿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선지자가 본 이 환상은 자기 혼자 걸어가서 본 환상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데려가셔서 보여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두 가지 사이에서 신자는 평생을 사는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 믿음이 없습니다. 거의 새로운 지식이 전달되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것은 자기 마음속에서 신뢰심이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배반하는 삶을 사니까 그럴수록 이 육체는 아주 예민해지게 되어서 더 많은 정보, 더 많은 지식을 얻기를 원하고 그것을 따라서 하나님 없이 이성으로 판단을 내리며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순수한 이성의 판단만 이루어진다면 그래도 희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성은 정확하게 나름대로 판단을 해서 그래서 악한 일이 몰고 올 위험한 결과를 버리고 선한 일을 선택하고 이렇게 상식적인 것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사라지고 나면 은혜도 함께 사라지고 그럴 때에 인간의 뱃속은 더러운 욕망이 기회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속에서 마음에 남아있던 작은 죄들은 주위에 있는 죄들을 규합하면서 큰 군대들로 모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것들이 역사에서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이 속에서 이러한 인간의 욕망과 더러운 욕심들이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하나의 마음과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이게 즉시 인간의 지성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이성으로 판단한다고 하지만 감각으로 들어오는 것들을 이성으로 정확하게 판단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판단을 할 수 없도록 끊임없이 욕망이 재를 뿌립니다. 그리고 거기다가 마치 약품을 주입하듯이 그렇게 해서 이게 눈이 멀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물에 대한 감각은 들어왔지만 그 감각이 마음을 움직이면서 그 모든 것들을 자신의 욕망을 따라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생은 자기가 상상할 수 없었던 방향으로 흘러가고 그리고 생각이 시간이 좀 지나고 나면 내가 왜 그런 선택을 하고, 그런 결정을 했는지에 대해서 자신도 이해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결국은 믿음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오늘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보여주는 모습은 바로 그것입니다. 영혼이 마른 뼈와 같이 된 상태이면 그냥 그렇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육적으로는 살아있는 군대처럼 되어서 그래서 죄짓고, 악을 행하고, 불신앙으로 일관하고, 그렇게 하나님의 자녀다운 특징을 버리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살려 주지 않으시면 안 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 이렇게 사경회를 하면 첫날 나와서 말씀을 듣고 그리고 잘 될 거야 그리고 돌아옵니다. 그리고 이제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상식으로 결심을 하고 ‘이번 한 해에는 한번 성공해보자. 잘 해보자’자신과 약속하고, 그 약속도 충분하지 않아서 송구영신 예배 재끼고 정동진까지 가서 떠오르는 해를 보며 스스로 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하고, 또 사랑하는 사람과 약속을 하기도 합니다. 개뿔! 뭐가 달라졌습니까? 인생이 그렇게 달라지면 어딘들 안가겠습니까? 기분이야 조금 새로울 것입니다. 떠오르는 첫해를 바다에서 맞이한다는 것은 기분 좋겠죠? 저도 가고 싶습니다. 은퇴할 때까지는 못가겠지만 가고 싶습니다. 정말 한 번 그렇게 떠오르는 해를 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방값이 엄청 비쌉니다. 갈 필요를 못 느낍니다. 바뀌는 거 별로 없습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를 무덤과 같은 곳에서 건져 내실 때 우리의 앞에는 새로운 인생이 펼쳐집니다. 무덤 속에 머물러 있으면 새 인생 아닙니다. 그 무덤 입구를 분홍색으로 칠할까, 파란색으로 칠할까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무덤 속에 마른 뼈들이 뒹구는 것은 바뀔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덤과 같은 여러분들의 실패한 현실들을 문을 열고 여러분들을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나오게 하심
마지막으로 두 번째는 나오게 하십니다. 13절에서 말합니다.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거기서 나오게 하리라”(13) 이 장면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있었던 한 사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결혼하지도 않으셨고 그래서 가정이 없으셨지만 예수님은 공생애 사는 동안에 마음으로 가족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은 있었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바로 나사로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누이는 마르다와 마리아였습니다. 이 세 오누이를 예수님은 사랑으로 돌보시고 그들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그런데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이미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이제 썩고, 시체에 냄새가 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때서야 나사로의 무덤을 찾았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도 그 나사로의 죽음을 보며 눈물을 흘리십니다. 예수님이 우셨다는 기록이 꼭 세 번 나오는데 두 번은 큰 소리로 우신 것이고, 한번은 흐느끼며 우시는 장면인데 그 장면이 바로 이 나사로와 관련해서 나오는 것을 보면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실 정도니 예수님이 이 나사로에 대한 사랑은 특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저가 그리스도라면 이 사람을 죽지 않게는 할 수 없었다는 말인가하고 의심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요 11:43-44) 죽어서 시신이 되어서 썩어가던 나사로가 무덤과 같은 죽음의 상태에서 다시 살아서 나왔습니다. 누가 죽은 지 나흘이 되어서 시체가 썩어 냄새가 나는 그런 주검이 다시 산 사람이 되리라고 생각했겠습니까? 사람들은 예수님이 큰 능력을 행하시는 분임을 믿었으나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낙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병든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것보다 더 큰 일을 행하심으로 당신이 사람을 죽이러 오신 분이 아니요, 살리러 오신 분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죽어서 시신이 되어 썩어가던 나사로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희망을 잃어버려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의 무덤의 문을 여십니다. 그래서 누구도 다시 살아나 산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지 않았던 사람들이 죽은 상태에서 다시 생명을 얻고 그 무덤을 걸어 나오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나는 왜 태어났을까요? 하나님이 내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을 제일 좋아하실까요? 물론 하나님은 불신자로 사는 것보다 신자로 사는 것을 좋아하실 것이고, 신자 중에서도 침체에 빠진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보다는 성령 충만한 사람으로 살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겨우겨우 구원을 받고 무지와 어둠 속에서 생각과 사상은 세상 사람 똑같이 행동하며 사는 그런 어둠의 사람이 되기보다는 진리에 대한 밝은 빛을 발견하고, 그리고 놀라운 지식과 총명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잘 헤아려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너다섯 명의 아이가 있다면 그 중에 누구를 예뻐하겠습니까? 처음 난 아이,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낳은 아이 그럴 가능성이 더 많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가면 흘러갈수록 부모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그 부모가 원하는 뜻대로 살아주는 자식에게 더 많은 정이 가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더욱이 그가 날이 갈수록 그 부모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공경하여 그 아이와 있을 때 가족으로서의 결합이 가장 단단하게 느껴지면 유산도 그 아이에게 더 많이 물려주고 싶을 것입니다. 물론 없는 분들은 그런 염려를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도 우리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그냥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채로 막 사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 그리고 성령 충만한 교인, 그리고 하나님 많이 섬기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족 중에 아빠, 엄마, 혹은 교회에서 평신도, 집사, 목사, 사회에서 사장, 부장, 혹은 평직원, 이런 것들입니다. 그러면 그 모든 것들에 기반 속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그리고 하나님이 정말 나에게 살고 싶어하는 삶은 무엇일까요? 바로 나는 나로 살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도록 내 안에 있는 것이든, 내 밖에 있는 것이든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태어나면서부터 나는 악한 의지의 노예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마음 깊은 곳에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으면서 마음이 얕은 곳에서는 내 뜻대로 삽니다. 그래서 결국 나를 하나님 없이 살도록 만들어 주었던 것들을 내 안에서, 그리고 내 밖에서 봅니다. 운명처럼 나를 지배하여 나로서 살지 못하게 했던 수많은 실패들, 그 실패의 결과들이 우리의 인생을 벼랑 끝으로 내몹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이 모든 것들에 항거해야 합니다. 그런데 가엾게도 죄를 지을 수 있는 능력은 있고, 자기 인생을 스스로 망가뜨릴 수 있는 힘은 있는데 그것을 다시 올바르게 할 능력은 없습니다. 그래서 바깥으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이렇게 참으로 나로 살도록, 참으로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기로 살도록 그 죄와 싸워 이기며 우리를 진정한 자아를 따라서 살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주체성 있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버지의 아들, 그리스도가 하나님 안에 계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똑같이 우리를 당신의 아들 안에 두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가장 자유로운 주체가 되어서 살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가 내 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일체의 기쁨을 누리면서 하나님의 사랑 이외에, 하나님의 진리 이외에 아무것에도 지배당하지 아니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하면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자신이 굴복 당한다는 생각을 일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 사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자기를 굴복해야 하고, 꺾어야 하고, 부러뜨려야 한다고 하는 느낌, 그리고 그 고통은 모두 자신이 하나님 안에 사는 대신 자기 안에 살고 있기 때문에 경험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안에 사는 것이 크면 클수록 꺾어질 때 더 많은 고통, 더 큰 아픔을 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이 넘칠 때와 생명이 없을 때의 차이를 기억해 보십시오. 생명이 넘치면 가고 싶은 곳도 많고, 먹고 싶은 것도 많고, 만나고 싶은 것도 많고, 그리고 어쩜 그렇게 다른 사람의 일에 오지랖 넓게 참여하고 싶은지 간질거려서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육체의 생명이 소멸하여 기운이 사라져 보십시오. 가고 싶은 곳도 없고, 하고 싶은 일도 없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고, 관심을 갖는 것조차도 힘겹다는 사실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육체가 매우 지치면 짜증으로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영혼이 생명으로 가득 찼을 때와 그 다음에 절망으로 가득 찼을 때가 어떤 차이가 일어날 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믿는 예수를 하나님이 살려 내셨고,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인바 되어 그의 영적인 자녀가 된 우리들이 함께 살아날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무덤과 같은 곳에서 걸어 나오게 하신 것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그러면 우리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 되었으니 그분이 걸어 나오신 그 무덤 밖으로 우리도 걸어 나올 수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바로 예전에 그렇게 죄 가운데 있어서 절망 가운데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미움, 대적이 가득 찼고 그러면서도 자신의 인생을 자신의 힘으로 풀어갈 능력이 없었습니다. 절망의 벼랑 끝까지 몰려갔고, 거기에서 인생의 길을 물었으나 그 벼랑 끝에는 길이 없었습니다. 도저히 더 이상 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우리는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죄에 죽었던 우리의 영혼을 완벽하게 살려 내시는 하나님의 충만한 생명을 경험했습니다. 그렇게 우리를 살려내셨으니 또한 하나님이 당신의 나라에 이르는 그날까지 지금도 당신을 찾고 그의 진리를 믿고 따르고 의지하며 성령의 은혜를 구하는 모든 사람들을 어찌 살려 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문제는 여러분들이 무엇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마른 뼈를 살리고 그 무덤에서 나오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이 능력을 바라보며 마른 뼈로 사는 그 절망적인 삶에 깊이 환멸을 느껴야 합니다. 그리고는 그 무덤 밖으로 펼쳐진 아름다운 세상에서 사람처럼 살고 싶은 갈망을 가져야 합니다. 죽음이 가득한 무덤을 열고 살아나오도록 하나님은 우리를 살려 내실 것입니다. 주님을 굳게 믿고 그 분의 말씀에 응답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