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 피하라
“주 여호와여 내 눈이 주께 향하며 내가 주께 피하오니”(시141:8)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 가운데 다윗만큼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누렸던 사람도 많지 않습니다. 아마 이 사람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하나님께 사랑받은 사람이 흔치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시편에서 이 시인은 가장 절망스러운 상황에 자신이 처해있음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시가 언제 쓰였는지에 대해서 누구도 정확하게 단언할 수 없지만 저는 이 시가 아마도 다윗의 초기의 작품이라기보다는 왕이 된 후 최소한 왕이 되기 위해서 시글락에서 마음이 원통한 자와 가난한 자 빚진 자들을 모두 모아서 자기의 무리들이 자기를 따르는 공동체를 형성한 그 후에 지은 시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가 여기에 특별히 두 가지 있는데 특별히 여기에 나오는 “우리”라고 하는 복수의 표현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다윗이 홀로 도망 다니던 시절이라기보다는 공동체를 형성했을 때 그때 일이라고 여겨지고, 또 하나는 그런 공동체가 말할 수 없이 깊은 고통을 당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우리는 음부에 흩어진 해골과 같이 되었습니다. “해골과 같이 음부의 눈앞에서 흩어졌습니다.” 라고 표현하는 이 묘사는 다윗의 시중에서도 이런 정도의 극단적인 고통의 묘사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유별난 표현입니다. “음부”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말로 “스올”인데 죽은 다음에 인간이 가는 저 세상이라고 생각하는 그 장소입니다. 아직 이때는 천국과 지옥에 대한 명시적인 계시가 모자랐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서 이 음부, 곧 스올의 개념은 축축하고 습기가 많아 어두우며 모든 삶의 희망이 끊어지고 생명이 없는 그런 곳이고 또 희미한 생명이 남아있다고 하더라도 매우 절망적인 그래서 산자는 그 속에 들어가고 싶어 하지 않는 희망을 잃은 장소가 바로 그들이 이야기하는 스올이라고 하는 곳이었습니다.
이 스올로 그 스올 앞에 자신들의 해골이 흩어졌다고 하니 이것은 곧 두 가지를 상징합니다. 하나는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머리는 그 사람의 존귀의 상징인데 그것이 표피가 모두 부패되고 해골로 흩어지게 되니 이것은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그들은 절망의 눈앞에서 죽음과 패배를 경험하고 있는 그런 처지에 있었습니다. 이것을 공동체적으로 경험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시가 다윗이 최소한 공동체를 형성한 이후, 혹은 왕이 된 이후에 기록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그렇다면 아마 이런 극한 고통 속에서 시를 쓰게 된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개별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지는 단언할 수 없지만 아마도 그 작은 공동체 시절이 사울과 싸우면서 겪었던 고난의 때나 왕이 된 후에 있었던 굵직한 환난들, 압살롬의 반란이나 혹은 인구조사를 인해서 7만 여명이 온역으로 죽어가던 그 때의 일이나 혹은 또 자신이 우레아의 아내 밧세바와의 간음으로 인해서 하나님 앞에 연단을 받던 그 시기에 일어난 일이거나 어떻든 말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환경의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인은 자신이 하나님께 피하고 싶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많이 사랑하시고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너무나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늘 평온한 가운데 쉼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이 쉼과 안식은 모든 존재들이 누릴 수 있는 지복의 상태입니다. 희랍의 철학자들이 그토록 긴 세기동안 몸부림치면서 지성적인, 이성적인 추론을 통해서 인간이 참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공부했던 이유도 마지막에는 이 쉼을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런 안식과 쉼을 얻기를 원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철학의 분파를 만들어서 인간의 참된 본분이 무엇이고 또 어떻게 살아야지만 평안을 누릴 수 있는가에 대해서 공부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참된 평온이라고 하는 것은 질서의 평온입니다. 질서의 평온이라고 하는 것은 나 말고 존재하는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다 자기의 위치를 가지고 있고 나도 또한 그 많은 것들 속에 한 자리가 지정되어 있어서 존재론적으로 내가 그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 모든 존재의 질서는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질서입니다. 그 모든 질서들을 그대로 지킬 때 그때 거기에 쉼이 있고 평안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고 똑같은 방식으로 다른 지구 주위를 돌고 있습니다. 30만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달이 지구 주위를 도는데 완전히 원형으로 돌지 않고 약간 타원형으로 돕니다. 그 약간의 거리라고 하는 것은 이 수백억 광년 어떤 사람은 960억 광년이라고 된다고 하는 이 큰 우주에 비하면 몇 천 몇 만 킬로 정도는 전해도 지나지 않는 그런 크기입니다. 그런데 그 차이에 따라서 만조 때가 있고 간조 때가 있어 바닷물에 차이가 납니다. 이런 모든 만물들이 자기 자리에서 이탈한다고 할 것 같으면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가 어떻게 되겠는지 생각을 해보십시오. 이것은 하늘에 떠있는 별이나 달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모든 인간들에게 다 해당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 각자를 창조하셔서 하늘에 별과 같이 이 세상 어디에든가 존재론적으로 위치를 하게 하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 자리를 잘 지키고 있을 때 그 안에서 그 피조물은 옆에 모든 피조물과 함께 가장 만족스러운 평안과 쉼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존재론적이 질서는 곧 가치론적인 질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떻게 그렇게 모든 물건들을 인간들을 만들어놓으셨는데 그들 하나하나가 존재의 가치가 있고 그 개개의 가치는 서로 의존하고 연결되어서 우리 인간의 지성을 초월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드러내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그런 가치의 질서가 곧 우리가 사랑해야 할 사랑의 질서입니다. 가치가 적은 것은 사랑하지 말고 가치가 뛰어난 것은 많이 사랑하고 이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사랑의 질서입니다.
악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이성이 이런 잘못된 가치의 질서를 용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악이고 의지가 그런 잘못된 가치의 질서에 복종하게 될 때 이때 이것이 바로 악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악과 악덕을 찾게 되면 그러면 존재 속에서 모든 쉼은 다 사라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뭐라고 합니까?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나니”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습니다. 비록 그 악인이 수많은 호위하는 병사에 의해서 에워싸여 중벌에 거한다고 할지라도 평안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존재가 있어야 할 자리에 이탈했고 잘못된 사랑의 질서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이미 쉼을 상실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기대하시는 바는 말할 수 없는 평안과 쉼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문제는 인간이 수시로 악하게 하나님이 지정해주신 자리에서 이탈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밖에서 행복해보려고 하나님이 세우신 사랑하도록 명하신 그 사랑의 질서는 파괴하고 자기가 새로 짜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고통이 뒤따르게 마련입니다. 그렇게 잘못된 질서를 받아들이면서 그가 아무리 열심히 하나님을 찾아도 하나님은 그의 마음속에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그렇게 평안하게 행복을 누리며 살기를 원하시지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스스로의 부패성 때문에 쉼과 사랑을 누릴 수 있는 자리를 스스로 이탈해버리고 거기를 박차고 나가서 스스로 불행한 길을 택하게 되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불순종이라고 말하고 혹은 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자기의 자리를 이탈한 당신의 자녀들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다양한 방법으로 그들을 빛나간 자리에서 불러 자기의 자리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오늘 이 시인 다윗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깊이 공경했던 인물이었음에는 틀림없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순결하게 만드셔야 할 연단의 필요가 없을 정도로 정리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이 시편에서 이 시인을 강하게 연단하며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고 계시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점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이탈한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제 자리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하나님이 기회를 주시는데 그때가 바로 오늘 성경에서는 주께 피할 데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주님께 피하여야 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 피하여야 할 때를 오늘 성경이 두 가지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첫째는 환경의 위기 가운데서 하나님이 그들을 피하도록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하나님의 자녀들이 평안을 누리며 안식 속에 살기를 원하시지만 때로는 환경의 위기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보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항상 인간의 지성에 말을 거시고 그 지성을 통해서 인간과 함께 교제하시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보면 유난히 꿈 이야기를 많이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그런 이야기를 누군가 할 때 옆에서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더 웃긴 사람입니다. 아마도 나도 좀 꿈으로 뭘 좀 봤으면 좋겠는데. 그리고 뿐만 아닙니다. 무슨 음성을 들었다든지 아니면 자기가 놀라운 기적을 봤다든지 특히 이런 저런 꿈을 꾸면서 하나님 앞에 인도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 앞에 기죽으면 안 됩니다. 뭔가 하면 대부분의 경우 수준 미달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유아적인 방법으로 이끄시는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들을 불러놓고 뭘 하나 심부름시키는데 종이를 펴놓고 크레용까지 동원하고 그림을 그리면서 지도를 그려주고 슈퍼를 그려주고 거기 가서 빵 하나 사오라고 하면서 빵까지 그려준다면 여러분들은 나는 목사님에 의해서 매우 남과는 다른 대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여러분들 중에 누구이겠습니까? 무슨 빵 하나 사와라. 이렇게 하면 되는데 그림을 그려놓고 빵 봉지까지 그려주고 하얀 글씨로 유통기한까지 써준다면 여러분들은 무시당하고 있는 것 같을 것입니다.
그런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끔 그런 꿈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도 또 상당히 공통점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이 정말 올바른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24시간 재우셔야 합니다. 계속 꿈을 꾸게, 그러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성숙되어야 합니다. 이제 처음 예수 믿은 사람이 그렇게 하면 귀여워 보이지만 이제 신앙생활을 한참 한 사람이 아직까지도 눈빛이 멍한 상태가 되어서 그런 이야기나 하고 다니면 정말 명복을 빌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지성에 말씀을 거시고 그러니까 하나님은 인간의 지성이 가장 순결해지기를 원하십니다. 지성이 항상 깨끗한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없이 백지 상태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깨끗하고 순결한 상태가 되어서 그래서 이 지성을 향해서 하나님이 말씀을 거시고 그 지성을 통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무슨 뜻인지 모르고 막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새벽기도 때 그런 식으로 기도하면 종을 땡! 칩니다. 조용히 하라고, 그게 뭡니까? 무슨 이교도도 아니고 자기가 뭘 기도하는지도 모르면서 그게 뭡니까? 야단을 치니까 내 안에서 성령님이 기도하신다고, 성령님이 기도하시는데 왜 조는지, 언제까지 그렇게 살겠습니까? 마음으로 언어를 만들어서 인격적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 가장 능력 있는 기도입니다. 열렬해지려고 그럴 필요 없습니다.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기도를 주님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우리의 지성을 향해서 말씀을 거시는 것인데 문제는 이게 언제나 말을 잘 듣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왜 말을 안 듣는 것입니까? 이게 벌써 이 마음이 변해서 이게 잘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마음의 취향이 원하는 바가 되려면 마음이 잘 붙잡은데 그런데 마음의 취향과는 틀린 이야기가 들리며 아무리 말을 많이 해도 여기서 안 들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할 수 없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그에게 오랫동안 그의 지성에 말을 건네시고 그래서 말을 거셔서 그의 잘못된 삶을 돌이켜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만드시는데 그렇게 안 합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십니까? 하나님이 마음을 바꿔 놓으셔야 합니다. 마음을 바꿔 놓으시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적절하게 환경을 사용하시는 것이 마음을 바꾸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시집 장가를 가게 됩니다. 가기 전에 선이라는 것을 보게 되는데 괴로운 일이긴 하지만 어쨌든 한번씩은 볼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서 많이 본 사람도 있겠지만 아무튼 봅니다. 아침 9시나 10시에 만나는 커플은 성공하는 예가 없습니다. 왜? 이때는 지적인 시간입니다. 지성적인 시간입니다. 일단 만나면 무슨 생각이 드는가 하면, 햇빛이 환하게 빛나는 아침에 호텔 커피숍에서 만나면 이성적인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저 인물을 가지고 나를 데려가려고 나왔나?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직장에서 괜찮고, 돈이 있으면 직장 다니고 돈은 있는지 몰라도 그렇게 죄송스런 얼굴을 해서 나를 데려가려고 하나? 2세를 생각해서라도 너는 안 되겠다.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또 아침에 얼굴이 그럴듯한 남자를 중매쟁이가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무슨 사람이 돈도 없고 직장도 변변치 못한 사람이 얼굴만 흰죽사발 개 핥아먹은 것처럼 허여멀개가지고 참 내가 저런 녀석한테 팔려고 내가 이제까지 내가 참았나. 결국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누구를 소개시켜줄 때는 항상 언제 해야지 되는가 하면 저녁때 해야 합니다. 이 시간이 정서적인 시간입니다. 저녁때 얼굴을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약간 침침한 레스토랑에서 불빛이 어째든 갈비 집에 있는 불빛과는 틀립니다. 그래서 누구를 갖다놓아도 별로 못 생겨 보이지 않아 보이는 그런 불빛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그럼 이렇게 흩어보면서 웬만하면 가는 것입니다. 그때도 안 가면 마음이 강퍅한 것입니다.
이렇게 환경이라고 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데 있어서 굉장히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을 걸다가, 걸다가 안 되시면 하나님도 환경을 흔들어서 주님의 음성이 들리게끔 하십니다. 이게 바로 환경 속에서 찾아오는 위기입니다. 이런 환경의 변화는 반드시 인간에게 고통을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그 고통스러운 환경 속에서 마음이 변화되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 자체가 의존하고 의존된 사람의 관계에 의해서 자신의 존재를 지탱하게 되어있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존재와는 구별됩니다. 저는 이것을 사랑의 본성이라고 부릅니다. 사랑의 본성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사랑하게 하는 기능이고 그 사랑 위에 부어지는 실제적인 사랑입니다.
타락하기 전에 맨 처음에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간들 속에 자기의 사랑을 부어주셨습니다. 그 사랑이 바로 까리따스의 사랑입니다. 나는 이것을 원애의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원애입니다. 원래적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원애를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것입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기능이 작동을 하면서 이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활동하고 움직이면서 그러면서 이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열정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까리따스의 사랑이 사라지고 육욕적인 꾸삐드다스의 사랑이 들어오게 되면 이게 타락하면 이게 들어오게 됩니다. 그런데 이 사랑하는 기능은 타락했는데도 많이 망가지지 않았습니다. 건재합니다. 꾸삐다드스의 육욕적 사랑이 들어오면 이 사랑의 기능이 열정을 가지고 작용하면서 미친 듯이 하나님을 대항하며 육욕을 따라서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랑의 관계 속에서 인간이 어떻든 의존하면서 살아가는데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받게 만듭니다. 그러면 그때 비로소 이런 의존의 사랑이 잘못된 부분만큼 자기를 정확하게 보게 되는데 굉장한 아픔이 따르게 됩니다. 오늘 많이 의지했기 때문에, 혹은 돈을 사랑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에 의존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그것을 거두어가십니다. 젊음의 자원이 넘쳐서 하나님을 찾을 마음이 없었던 사람들은 하나님이 질병이나 이런 것을 통해서 한번에 자원을 확 빼내버리십니다. 그래서 겨우 숨이나 쉬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앉았다 할 정도로 자원을 남겨두십니다. 이렇게 될 때 비로소 자신이 정말 잘못된 관계 속에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거기서 이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환경의 위기 가운데서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시인이 경험한 것입니다. 어느 정도의 절망적 상황이었는가 하면 음부라는 절망의 상황이 놓여 있고 그 앞에서 자신들은 패배하고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처지가 된 것 같은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막 고통하고 괴로워하고 아파합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한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고 여러분들은 혹시 환경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느끼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런 방법으로 당신의 자녀들에게 말씀하고 싶어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지성에 말을 거시고 그리고 그들에게 음성을 들려주셔서 그들을 깨닫게 하시고 이것이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매우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그런 사람들에게 큰 환난을 주어서 환경을 뒤흔들어놓음으로 그들의 마음의 틀을 바꾸어놓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인생을 아직 많이 살지는 않았지만 산전수전 정도는 겪었을 것입니다. 수전은 아직 안 되었을 것이고 산전 정도는 겪었을 것입니다. 산전수전을 겪고 화생방전까지 거쳐야지만 비로소 이제 인생을 달관할 나이에 들어갑니다. 여러분들은 이제 막 18-9된 형제자매들은 그저 야산전(?) 정도, 그런데 이제 살아보면 압니다. 이제 깊이 하나님을 멀리 떠납니다. 그러다 깊은 고난을 만납니다. 그때는 깊은 고난을 만나면서 이제 자기가 하나님 곁을 너무나 멀리 떠났다는 사실을 모른 채 고난을 만납니다. 하나님께서 계속 고난 속에서 자기가 사랑하는 것들을 막 가져가시고 그리고 자기를 벌판에 혼자 세우십니다. 그때 느끼는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장년부에서는 이정도 얘기했으면 여기저기서 웁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벌써 수전까지 겪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차이가 납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또 울 필요는 없고,
들어보십시오. 그렇게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을 멀리 떠났기 때문에 하나님이 환경을 흔들어놓으시니까 고통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하던 사업이 망가지고, 그 다음에 가정에 큰 환난이 오고, 그리고 자신이 가고자 하던 인생의 길에 예기치 않은 브레이크가 걸리면서 자신의 꿈들이 깨트려집니다. 그러면서 굉장히 아픈 통증이 밀려옵니다.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고 할 정도의 고통이 밀려옵니다. 통증입니다. 그것을 놓고 또 하나 이것은 여러분들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말씀의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내 인생에 있어서 산전수전 화생방전 같은 그런 엄청난 재난이 온 것은 아닌데 어느 날 말씀의 빛 앞에 자기를 비추어보니까 자기가 너무나 더러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예전에는 그렇게 얘기를 들었는데도 전혀 아닌 것 같았었는데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신 속에 깊이 자기가 이렇게 그릇되게 살아가고 죄를 지으며 하나님을 대항할 때 주님이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의 고난이 쭉 밀려옵니다. 그때 비로소 누구의 강요나 억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말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게 됩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용서를 빕니다. 자기를 충분히 용서를 빌었을 때 그때 비로소 마음속에서 어떤 마음이 들게 되는가 하면 하나님 앞에 용서를 받아야겠다는 그것보다도 그것을 뛰어넘어서 이렇게 내가 지금 지치고 상했으며 그리고 괴로워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용서를 받아야겠다는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어서 내가 이렇게 주님을 거스르고 하는 동안에 주님이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 하는 착한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때 가슴 속에서 하나의 자기가 또 다른 자기를 미워하는 것이 발견됩니다. 왜 그랬니? 하나님이 너를 얼마나 사랑하시는데 왜 그랬니? 무엇 때문에 나에게 선을 행하신 것 밖에는 어떠한 악도 베풀지 않으셨던 좋으신 주님의 가슴에 그렇게 많이 못 박으며 노골적으로 주님을 싫어하며 주님을 미워하며 살았을까? 그때 아픔이 밀려옵니다. 그런데 그 아픔이 어느 정도인가 하면 뼈 속 깊이까지 파고들어가는 아픔입니다. 그게 바로 예수 죽음의 경험입니다.
묻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지금 이렇게 참회 속에서 경험하는 예수 죽음의 아픔, 내 안에 재현되는 예수 죽음의 아픔과 환경에 어려움이 생겨서 고통을 받는 그 아픔 두 개를 비교를 해봅시다. 어느 것이 더 아프겠는가 생각을 해봅시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지성을 통해 말씀을 거시는 하나님 앞에 그 말씀을 통해서 자기 깨어짐을 경험하고 그 안에서 예수 죽음의 정신을 뼈 속까지 사무치는 것이 이렇게 일상화되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흔들어놓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특별한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마음을 바꾸어놓기 위해서 그렇게 흔들어놓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은혜를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가만히 있는 바위와 같은 그런 마음입니다. 늘 출렁거립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 굳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정욕에 의해서 마음이 출렁거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들은 또 다른 이유에 의해서 출렁거립니다. 무슨 이유 때문에 출렁거릴까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늘 아침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그 말씀이 나를 깨웁니다. 마음이 출렁거립니다. 아! 그렇구나. 어제 밤에도 공원에 가서 워킹을 하면서 마음이 계속 출렁거렸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주님의 크신 사랑,
사람이 무엇이관데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데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인간이 무엇이관데 그러면서 둑길을 이렇게 걷다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마음이 은혜 안에 있는 신자의 마음은 계속 출렁거립니다. 하나님이 놔두지를 않으십니다. 무엇을 향해서도 가슴이 출렁거립니다. 불쌍한 영혼을 보았을 때도, 주님의 말씀을 깨달았을 때도 계속 출렁거립니다. 이런 속에서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굳이 마음을 출렁거리게 하기 위해서 환경을 바꾸셔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환경을 뒤흔들어서 그에게 고통을 주셔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일 앞머리에 있는 시편 1편에서 뭐라고 하는가 하면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얼마나 시시합니까?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한 사람이라든지, 복 있는 사람은 위대한 지성의 사람이라든지, 복 있는 사람은 수많은 인류에 길이 남을 업적을 이룩한 사람이라든지, 뭐 최소한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인정받은 사람이라든지 그래야 되는데 간단하게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로다. 그 사람은 마치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와 같아서 계속 때를 따라서 잎이 피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은 어떤 신앙입니까? 하나님이 환경을 뒤흔들어놓아서 채찍을 가하고 사랑하는 것으로 모두 빼앗기고 난 후에야 비로소 그래서 하나님이 생각이 나는 그런 우매한 신앙상태에 여러분이 놓여 있습니까? 오늘 이 시인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141편 전편에 나타난 정신으로 볼 때는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뭔가 피할 수 없는 깊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의인이 자기를 해롭게 하고 많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고통을 주어도 자기는 할말이 없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께 피할 때가 되면 인간으로 하여금 그릇된 독립심으로 하나님을 떠나 살던 태도를 바꾸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환경을 움직여서 그들로 하여금 다시 정신 차리고 하나님을 의존하며 살아가야 할 것들을 배우게 하십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지금 여러분의 지성에 하나님이 말씀을 거실 때 그때 여러분들은 그 말씀을 맑은 지성으로 받아들이고 여러분들의 마음속에서는 그 지성에서 우러나온 여러분들의 기도가 하나님께 드려지고 있습니까? 다시 말하면 맑은 정신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 가운데 어떤 분들은 이미 이렇게 환경의 위기를 통해서 폭풍과 같이 여러분을 부르는 주님의 행동이 시작된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곤고한 날이 이를 때마다 여러분들은 생각하셔야 합니다. 곤고한 날이 이르고 시련과 고난이 찾아오고 많은 어려움들이 생겨나는 소용돌이치는 환경일수록 그 환경을 붙들고 씨름하려고 하지 말고 그 환경들을 통해서 거짓말 없이 정직하게 드러나고 있는 여러분과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과 여러분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이 사랑의 관계가 어떤 상태에 와있는지를 여러분들이 확인해야합니다.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받는 자녀임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평온한 여러분들의 삶을 흔들어놓으실 때 여러분들이 잘못된 사랑의 질서를 택하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주님을 거스르는 삶을 살기를 그치지 않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회개해야 합니다. 인간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자기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거기서 그는 마음의 평안을 누리게 되고 그 자리로 돌아가서 주님의 마음으로 주님이 정해주신 질서를 따라서 모든 것들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 그때 비로소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자신이 얼마나 소중하고 사랑받는 존재인가 하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 자리를 이탈해서는 이렇게 말을 하면 여러분의 귀에 들릴 뿐이지 여러분 자신이 느낄 수 없습니다. 돌아올 때까지는 느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역설이 성립하는가 하면 하나님이 자기를 불쌍히 여긴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으며 자기가 비참한 인간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들은 비참하지 않은 자리로 돌아간 사람들입니다. 진짜 그런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돌아갈 때까지 그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들의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은 오랜 시간동안 인격적으로 참으시면서 여러분들을 당신께로 돌아오도록 끊임없이 부르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지성에 말을 건네시고 싶으셔서 성경을 읽게 하시고 설교자를 세워서 당신 자신의 마음을 보여주시지만 마음이 굳어져서 귓가에 스치는 소리로만 들릴 뿐 여러분들의 이 지성이 이미 죄로 인해서 깊이 오염되었기 때문에 하늘의 음성이 여러분들 지성 속에 전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환경적인 시련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때가 그 폭풍 속에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때입니다. 환난과 시련을 만난 사람들은 겸비해져야 합니다. 그 속에서 주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바를 귀 기울이고 그리고 그것을 깊이 듣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실은 사랑의 음성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어떤 분들은 내가 하나님을 멀리 떠나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지만 아직은 이런 환경의 위기가 나에게 도래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환경의 위기로만 여러분을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그것과 함께 혹은 그것에 앞서서 또 한 가지로 방법으로 그들을 부르시는데 영혼의 빈궁함입니다. 비록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를 배신하고 내가 의지했던 것들이 나에게서 빼앗기고 그리고 내가 믿었던 것들이 나를 실망시키고 그래서 견디기 힘든 영혼의 고통이 환경에서 오는 고통이 내게 시작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이미 그렇게 하나님의 품을 멀리 떠난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이미 영혼의 빈궁함이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일반적 섭리를 통해 주신 축복입니다. 일반섭리를 통해 주시는 축복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살아가는 일반적인 삶 속에서 하나님의 큰 섭리에 의해서 환경적으로 주어지는 복들입니다. 뭐 좋은 직장에 취직하게 되었다든지, 아니면 사업을 했는데 돈을 많이 벌게 되었다든지, 아니면 좋은 자매를 만나서 결혼을 하게 되었다든지, 아니면 자기가 있는 직장에서 승진을 하게 되었다든지, 건강을 되찾게 되었다든지 일반섭리를 통해서 주어지는 축복들입니다. 이런 것은 그렇게 우리에게 감격이 오래가지 않습니다. 새집을 사서 이사를 가면 한 두 세달 정도는 감격합니다. 2년을 살면 좁게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2년이 되기 전에 6개월이 지나면서부터는 감격이 사라집니다. 이 세상에 뭘 해도 그렇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시는 또 하나의 축복이 있습니다. spiritual blessing 영적인 축복입니다. 일반섭리의 축복과는 이 영적인 축복은 하나님이 그 영혼을 직접 어루만지는 축복입니다. 이것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이 영적인 축복은 아주 놀라워서 그의 본성을 변화시켜서 가던 삶을 바꿉니다. 일반섭리 속에서 하나님이 그에게 아무리 많이 축복해주셔도 움막집에 살 때 쓰레기 같이 살던 인간이 고급빌라에 들어간다고 해서 갑자기 경건한 사람이 되는 법은 없습니다. 자기 수준의 삶을 살 뿐입니다. 그러나 영혼을 하나님이 어루만지셔서 영적인 축복을 주시면 그의 본성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쓰레기 같은 삶을 살던 사람이 변해서 경건한 성도의 삶을 구현해갑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영혼을 어루만지시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고 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자신을 향해 못 박히고 또 세상도 자기를 향해 못 박힙니다. 그런 상태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영혼의 빈궁함을 주십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곤고하게 살아가는 나에게 기도하라고 하지만 기도할 수가 없습니다. 곤고하게 살아가는 나에게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이 너를 살릴 것이라고 말하지만 이미 마음의 취향이 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즐거움을 잃어버렸습니다. 세상의 풍치와 세상의 취향에 마음이 끌립니다. 영혼은 절실하게 그런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속한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는데 마음은 그것을 싫어하고 완강하게 거부합니다. 이 속에서 내적인 분리현상이 나타납니다. 그럼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은 여러분들이 잘 아실 것입니다.
우리 학교 다닐 때 이상한 애들이 있습니다. 수학시간에 영어공부하고, 영어시간에는 수학공부를 합니다. 물리시간에 화학공부하고, 화학시간에는 생물공부를 합니다. 그런데 저도 공부하면서 그런 유혹을 종종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강의가 너무 아닐 때는 시간이 낭비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래서 몇 번 시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인격적으로 매우 안 좋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A과목 책을 덮어놓고 밑에다가 B과목 책을 읽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쪽에서 들려오는 이야기가 자꾸 노이즈가 됩니다. 그럴 때 가끔 또 그냥 계속 강의를 못하면 괜찮은데 가끔 웃깁니다. 학생들이 막 웃으면 뭔 소리인가 하고 귀를 기울입니다. 결국은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됩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이것은 옳지 않다. 나를 위해서도 옳지 않고 선생님을 위해서도 옳지 않다. 강의가 신통치 않을 때는 나를 연단하기 위해서 보내신 교수님인줄 알고 인격적인 연단을 받자. 그 다음부터는 노트를 펴놓고 모든 강의를 경청했습니다. 그냥 하도 강의가 내용이 없으면 내용이 없는 것을 그냥 쓰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것이 나 자신에는 매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에게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강의시간에 자기 강의를 집중해주었으니까. 이런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영혼이 간절히 영혼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이것이 있는데 그것들을 공급해주지 않고 먹으면 영혼이 잘못될 것들에 대해서 이 마음이 탐욕을 갖습니다. 이 속에서 분리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것은 결국 무엇인가 하면 거짓된 삶입니다. 이 거짓된 삶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마음으로는 진실을 찾아가는데 실제 진실에 부합할 수 있도록 진리를 버리는 삶이 이게 거짓된 삶입니다. 이 거짓된 삶은 살아가기가 매우 쉽습니다. 왜냐하면 진실을 찾아가는 것이 신앙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진리를 붙들고 산다는 것은 곧 진리를 위해서 이미 각오가 되어 있어야지만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진리를 계속 지키면서 진리와 함께 살고 진리와 함께 죽을 때 그 사람이 진실 된 사람이 되어갈 수 있고 그 사람이 찾아가는 진실에도 도달할 수 있는데 마음으로는 진실을 찾아가는데 삶으로는 너무나 고통스럽기 때문에 진리를 끊임없이 버립니다. 그것이 바로 거짓의 삶이고 허위의 삶입니다. 그런 거짓과 허위에 삶을 사는 사람에게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진실한 분이시고 주님의 음성은 베리다스 진리이기 때문에 가식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들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할지라도 진실하지 않은 사람들의 귀에는 하나님의 음성이 이방인들만큼이나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한번 가슴에 손을 얹고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의 영혼의 귀를 여러분들의 가슴에 깊이 기울이고 여러분들이 쉽게 도달할 수 없는 그 영혼 깊은 곳에서 무슨 음성이 들려오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의 그 영혼이 이 세상의 향락, 그리고 육체의 쾌락, 그리고 몸과 마음이 원하는 대로 방종하게 사는 것, 목표도 없고 뜻도 없이 세상으로 달음질치자니 신앙이 발목을 붙들고, 신앙에 전념하자니 세상 사랑이 발목을 끌기 때문에 두 사이에 끼어서 어정쩡한 태도로 살아가고 있는 여러분들을 향해서 여러분들의 영혼이 얼마나 고통하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식의 삶은 여러분들에게 아무 것도 가져다줄 수 없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보고 계속 아파하실 것이고 목회자는 그렇게 사는 여러분들을 보며 더 많이 울어야할 것이고 여러분들의 영혼은 여러분들 속에서 흐느낄 것입니다. 그런 영혼과 자기를 싫어하시는 하나님, 가슴 아파하는 목회자와 지체들을 가지고 그리고 여러분들이 행복해질 수 있다면 도대체 무슨 행복인가 하고 내가 묻고 싶습니다.
요약을 하자면 왜 하나님을 열심히 믿지 않습니까? 왜 그분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인생의 최고의과제가 되지 않습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그렇게 해서 마지막에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이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선은 실제이지만 악은 선의 결핍이기 때문에 그 악을 목표로 하고 끊임없이 돌진해도 존재론적으로 거기에 당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될 수가 없습니다. 선에 부합하고 그 선을 끝까지 찾아가면 거기에는 지복의 상태가 있습니다. 지극한 복락의 상태가 있습니다. 그러나 악을 끝까지 추구하고 거기 뭐가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래서 영혼은 곤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오늘 여러분들은 자신의 영혼이 이렇게 곤고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 여전히 환경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지존자를 멸시하기 때문이라”고 시편 107편에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사랑하는 증거가 내 삶 속에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주님이 오늘도 나에게 좋은 직장, 좋은 사업, 그리고 번영을 주셨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성경이 하나 더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저희의 원하는 것을 주셨을지라도 저희의 영혼은 파리하게 하셨도다.” 라고 말입니다. 신자의 모든 기쁨은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그분 안에 그분과 함께 그분과 더불어 존재합니다.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고 즐거워하는 사람은 하나님 때문에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모든 것들을 즐거워하고 기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영혼이 빈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그 빈궁한 그 영혼의 상태에서 그것이 고통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주님께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는 요즘 밤이면 학의천을 쭉 걸었는데 어떻게 아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지 조깅을 하러 나온 것인지 인사를 하러 나온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도망가서 이제는 대공원으로 가는데 일찍 가면 별로 안 좋고 10시나 10시 반쯤 갑니다. 그럼 캄캄해서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때 그 호수를 한 두 바퀴 돕니다. 그러면 1시간 더 걸리고 천천히 호수 위에 둑을 걸으면 1시간 반 정도 걸립니다. 그게 요즘 즐거움의 낙이 되었습니다. 허리가 아파서 좀 걷는데 무리가 있기는 한데 그래도 혼자서 음악을 들으면 둘이 갈 필요도 없습니다. 혼자서 가는 게 제일 좋습니다. 쭉 걷습니다. 어제도 갖다왔습니다. 걷는데 하늘을 쳐다보니까 캄캄한 밤하늘에 별들이 빛납니다. 가슴깊이 밀려옵니다. 아! 하나님이 저기에 계시구나.
찬양하라 내 영혼아 찬양하라 내 영혼아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찬양하라
은혜와 긍휼을 열방 중에 비추소서 빛 되신 주의 말씀
캄캄한 하늘에 별이 빛나고 그 별빛 사이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아무 것도 해주지 않으셔도 최고의 선물은 거기에 주님이 계시다는 것, 그리고 그 주님이 그 최고의 주님이 오늘 내 안에 빛으로 내 안에 계시다는 것, 만약에 저 반짝이는 별 사이에 어두운 밤하늘까지 사닥다리가 있다면 삶과 죽음의 경계를 지나서 걸어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최고의 특권은 이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존재하고 감각하고 인식하며 인식할 뿐만 아니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에게만 주어진 특권입니다. 흔들릴 수 없는 인간의 행복입니다. 그렇게 주님 자신을 깊이 사랑하게 될 때 우리에게는 삶과 죽음의 경계 같은 것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니” 했던 사도의 고백이 이미 사랑으로 말미암아 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서버린 그 신앙이 되었던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달인들만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면 누구든지 도달할 수 있는 그런 신앙, 가장 기본적인 특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없으면 여러분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고난을 당하고 시련 가운데 있다고 할지라도 주님이 여러분들 가운데 계시면 여러분은 최고의 사람들입니다. 그 주님을 기뻐하고 그 주님 안에서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일들이 필요하기 때문에 주님이 가끔은 우리의 영혼의 때를 모두 벗겨낼 수 있는 시간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사경회 위해 기도를 많이 하고 이번에 주님을 만나게 해주시지 않으시려면 나를 데려가시라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더 많이 기도하십시오. 세상에서 썩을 이 세상에 추루한 존재로 살기보다는 주님 앞에 정말 변화된 존재로 살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찾는다면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