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내 것이라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사 43:1).
우리의 신앙 생활이 힘들고 어려울때에는 모든 것이 우리에게 달린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앞에 기도를 많이 하고 열심히 봉사했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셨고 그래서 우리가 평안을 누린다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죄를 지었기 때문에 우리가 고난을 당하고 악한일을 만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둘다 맞는 이야기 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앞에 말씀을 청중하고 순종하고 주님이 주신 은혜에 따라서 주님을 섬기고 봉사하고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평안한 길로 인도하시고 우리에게 복 주시지 않겠습니까? 또 우리가 불순종하고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면 마치 태양을 등지고 사는 사람처럼 곤고함과 시련이 계속 오지 않겠습니까?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인생 전체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이사야 선지자는 야곱아 이스라엘아 두 번을 부릅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이사야서 66장은 성경의 66권과 맞아 떨어 집니다. 그래서 39장까지가 1부이고 40장부터 66장까지 27장이 2부인데 놀랍게 신약의 책 권수와 똑같습니다. 전반부에는 이스라엘의 죄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이 되어 있고 후반에는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과 회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야곱아! 이스라엘아! 이렇게 거듭 말씀하시는 것은 모두 히브리 백성들에 대한 호칭입니다. 그래서 이 야곱은 이스라엘을 가르치는 하나님의 하나의 애칭입니다. 그런데 이 야곱은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야곱의 옛 이름이 야곱이었고 하나님을 만나고 개명한 이름이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겨루어서 이겼다는 뜻이고 야곱은 발 뒤꿈치를 잡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겨루어서 이겼다 라고 하는 것은 씨름을 해서 하나님을 꺽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자신의 악함과 약함을 깊이 회개하고 통절히 뉘우쳤더니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주셨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을 이겼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 앞에 깊이 깨뜨려지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그를 이긴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것과는 반대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야곱의 깊은 깨어짐과 회개에 큰 감동을 받으셨다 그런 뜻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야곱은 누구인가 하면 발 뒤꿈치를 잡았다 라고 하는 그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의 자기의 술수, 자기의 술책으로 살아가는 그러한 인간 본능의 삶의 대명사입니다. 그러니까 야곱과 같이 그렇게 속이는 자이고 그리고 야곱과 같이 그렇게 인간의 잔꾀로 살아 오던 사람이 주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해서 결국은 하나님 앞에 깨뜨려짐으로 은혜가 자기를 이긴 사람이 된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 두 모습이 우리에게 언제나 함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양면성입니다. 그러면 전반부에서 하나님이 그렇게 혼내시고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시는 그 장면 속에서도 결국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에 의지하면서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면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해 주겠다고 하나님이 약속을 하셨는데 그런데 이 사람이 하나님의 이런 뜻을 거스리고 믿음으로 살고 하나님의 법으로 승리하기 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잔꾀와 잔재주로서 국가의 연명을 유지하고 그리고 외교적인 줄타기 같은 것들로 멸망의 위기의 순간들을 넘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런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이스라엘에게 한가지 사실을 상기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너를 창조하시고 너를 조성하시고 같은 말의 반복입니다. 너를 창조하신자가 하나님 이시다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만약에 우리가 어떤 물건을 만들었다면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팔아서 소유권을 합법적으로 넘기지 않는한 결국은 우리가 그것을 쥐고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러면 우리가 만든것에 대하여 우리가 주권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달리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창조하시고 또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으니까 달리 그들에 대한 주권을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신앙은 그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 힘으로 살아가는 것 같아도 결국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힘으로 사는 것이다 라는 믿음을 가지고 아버지 앞에서 살아 가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생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당신의 주권을 사용하실 때 그들을 구속해 주시는 그일에 당신의 주권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사이에 맺은 언약을 가지고 지금 이사야 선지자가 말하고 있는 것인데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언약이 맺어지면서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그 하나님을 섬기며 순종하며 따르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무한히 용서해 주시고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와 인도속에서 이 세상의 악과 그리고 시련을 이기면서 살아 갈 수 있도록 지상권과 하늘의 자원을 공급해 주시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과 믿음을 가지고 살아 가는 것이 신앙인데 그런데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 언약을 배신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이 그 언약을 배신하고 하나님 보다는 우상을 섬기고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 보다는 자기의 가치관을 따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 보다는 지상왕국의 번영과 그 생존에 더 관심이 많은 배반한 백성들이 된 것입니다. 우리들이 남에게 믿음을 잘 못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거짓말이나 술수 같은 것을 카멜레온처럼 변신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질적으로... 그런 사람들은 진실이라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가서 이 말하고 침도 안 바르고 이쪽에 와서 또 거짓말하고 이 말을 하고 나서 그 다음에 내가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다시 나타나서 뒤집으면서 침도 안 바르고 옛날 말을 다시 뒤집고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남을 잘 안 믿습니다. 자기 일에 대한 태도는 남에게 대한 태도와 연속 선상에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남을 잘 믿지 않습니다. 틀림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일에 대한 태도와 남에 대한 태도가 상당히 일치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악수를 하는데 동양하고 서양하고 문화가 틀립니다. 그런데 만나서 손을 잡고 막 부서질듯 흔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을 실례입니다. 그렇게 하는것이 아닙니다. 악수는 예의가 있습니다. 윗 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먼저 손을 내 미는 것입니다. 아랫사람이 벌떡 손을 내밀며 악수 하자고 청하는 것은 실례입니다. 남성과 여성일 경우에는 여성이 먼저 손을 내 미는 것입니다. 그리고 악수를 하자고 하면 꽉 잡고 막 흔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외국사람들이 보면 추태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손이 아프다고 하는데도 그냥 흔듭니다. 자기손이 꺽어 지는 것이 아니니까... 그것은 비정상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악수를 하자고 하면 조금 밖에 안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누구를 잘 믿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마음속에 항상 마음을 안 열고 누구를 쉽게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제일 좋은 것은 손가락을 깊이 집어 넣고 가볍게 상대방이 부담을 느끼지 않게 가볍게 잡는 것이 예의입니다. 그리고 항상 윗 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먼저 손을 내 미는 것입니다. 그런것들이 하나의 예의입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이 무엇인가 확신이 없이 가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의심을 많이 합니다. 물론 의심이 지혜에 속한 것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리석은 사람들이 쉽게 믿습니다. 그러나 이제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근거 있게 정확하게 판단을 해서 사람들을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을 덜 신뢰하고 믿을 사람을 굳게 믿는 것은 지혜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누구를 신뢰하고 누구를 의지해야 될 지도 모르면서 아무나 덥석덥석 믿는 것은 지혜의 부족입니다. 더군다나 악인을 믿는 것은, 서로 뇌물 같은 것 주고 받고 할 때는 형님, 누나, 동생 하고 완전히 아삼육이 되면서 돌아 다니지 않습니까? 그때는 이 사람이 엄청난 자기의 후원자로 생각 합니다. 그런데 악인의 친절함은 믿을 수 가 없습니다. 법정에 서니까 얼굴을 바꾸고 그 다음에 말 안해도 되는 증언을 해서 한 사람을 완전히 곤경에 빠뜨리지 않습니까? 그런 신뢰할 수 없는 것처럼... 그것도 하나의 인생을 사는 지혜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면 주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두려워 하지 마라. 성경에서 두려워 하지 말라고 말씀하실때에는 강력한 호의의 표현입니다. 두려워 하지마 어차피 이것은 내가 징계해 버릴 테니까... 그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놀라지 마라 내가 너희를 심판할 테니까... 담대하라 내가 너희를 심판할테니... 물가에 지나 가면 집어 넣을 것이요 불 가운데를 지나면 태워 버릴 것이니라. 그 말씀을 하시기 위해서 두려워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두려워 말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에는 항상 강력한 보호와 하나님의 호의의 표현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이 두려워 말아라 그러면서 하신 말씀이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여기서의 구속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속하였던 아직까지는 거기에 못 미친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구속하면 여기서는 애굽의 종살이에서 하나님이 큰 능력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건져낸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왜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까? 당시의 외교적인 상황을 비추어 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곤경에 있는 것입니다. 그때 내가 너를 구속한 것을 기억하거라 너희가 히브리 민족으로서, 히브리 라는 뜻이 무엇인가 하면 아바르라는 동사에서 나왔는데 강을 건너다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가 붙어서 사람을 뜻 합니다. 강 건너온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어쨎든 너희들이 애굽에서 그렇게 이름도 없이 히브리라는 이름으로 그렇게 종살이를 하면서 그렇게 노역에 종사할 때 너희가 그 큰 나라 애굽의 손에서 너희 스스로 구출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있었느냐? 없었지 그런데 내가 너를 건졌다. 그러니 내가 너를 구속한 큰 능력을 생각해 보아라. 그러면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어려움이 어려움이겠느냐?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무엇인가 하면 왜 그렇게 종살이를 하면 종살이를 하지 왜 하나님이 유독 종살이를 하는 백성들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들만을 그렇게 찿아 오셔서 건져 주시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죠?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언약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한 없는 자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가 너를 구속했다는 사실을 상기 시키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삶의 상황에 있던지 간에 우리는 각자 해답을 짜고 있을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 놓여 있던지 간에 우리는 어쨎든 해답을 가지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만 본질적인 문제는 우리의 수단과 방법으로서 우리들이 인생의 위기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이 모든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모두 우리가 하는 일 같고 사람이 하는 일 같지만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하고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당신의 주권을 가지고 해내시는 일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 나라가 어려움속에 있고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이 오고 있다고 선지자의 예고가 있을 때에 하나님이 내가 너를 구속한 것을 기억하라고 하신다면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께 구속 받은 것을 생각해 보십시요. 어두움의 나라에서 하나님을 모르고 악하게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살아 갔고 있는 우리를 주님이 그 큰 능력으로 건져내어서 그래서 우리를 구속하여 당신의 나라를 위한 당신의 백성으로 삼아 주셨다면 지금 우리가 처한 환경의 어려움이 더 큰 어려움이겠습니까? 우리가 사단에게 영적으로 사로 잡혀서 죄의 어두움 가운데 있는 것이 어려움이겠습니까? 거기에서 우리를 건져 주신 창조주 하나님은 여기서 우리를 충분히 건져 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을 때 아브라함은 기억을 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실질적인 조상 이니까... 그렇지만 그들중 얼마나 되는 인간들이 아브라함과 맺으신 하나님과의 약속을 기대하면서 그 약속을 신실하신 하나님이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굳센 믿음으로 살았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이라면 하나님이 해방시켜주자마자 광명에서 하나님 원망하고 우상을 섬기고 하는 그런 삶을 살았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까맣게 잊어 버렸어도 한번 약속하신 하나님은 당신의 그 신실하신 성품을 따라서 때가 되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극히 큰 사랑으로 애굽의 종 되었던 곳에서 건져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언약을 맺어 주신 하나님과 우리와의 차이입니다. 우리는 쉼 없이 변절하고 버리고 도망가지만 주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4살쯤 되면 자기 주장이 강해 집니다. 그래서 미운 4살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아이가 불안해서 애야 이리 와라 하고 손을 잡고 갈라 치면 이것을 뿌리칠려고 그리고 까불고 혼자 걷다고 넘어지고 결국은 다칩니다. 똑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손을 꼭 붙들고 인생의 길을 걸어 가면 괜챦을 텐데... 독립심이 강합니다. 그 독립심이 바로 죄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내가 늘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은 씩씩하게 살아 가는 것을 제일 싫어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씩씩하게 살아 가는 것은 하나님께 기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이 씩씩하게 살아 가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싫어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속해 주신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위기 가운데 위로의 말씀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에 있어서 애굽에서 자기를 건져 주신 하나님의 행동은 끊임없는 회상의 대상이었습니다. 그것을 회상함으로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하나님이 애굽에서도 우리를 건지셨는데 이 큰 시련과 환란에서 우리를 건져 주실 것이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살도록 주님이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결국은 매일매일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자기를 버리신 그리스도 예수를 회상하는 것입니다. 그 예수가 내 안에 현제적으로 다시 사실 때 주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큰 죄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의 그 큰 능력이 오늘 나에게 역사 하셔서 나와 함께 동행하심으로 이기게 하시고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그 큰 능력과 권능을 우리들이 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아주 크고 놀라운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버리고 포기하고 약속을 어기고 불순종해서 언약파기자가 되지만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와 맺으신 당신의 언약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당신을 멀리 떠나 불순종 가운데 살아 갈 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때리거나 치시거나 때로는 떄리거나 치시지는 않았는데 마음을 녹이심으로 여러분들을 하나님과의 약속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돌아 오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시시때때로 우리에게 당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셔서 당신께로 돌아 오도록 시시때때로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이후에 불순종하는 우리와 불순종하는 우리를 끊임없이 찿아 오셔서 당신이 우리를 부르신 자리로 되돌리시는 하나님의 끝없는 이 열심은 결국은 한번 지명하여 부른 그 부르심에 후회가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순종하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하는 이 음성이 한 없이 달콤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불순종하고 자기 즐거움에 빠져 사는 사람은 가출하는 자녀에게 찿아 오는 부모처럼 성가시고 괴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잠시 부모 없이 사는 것이 자유로울지 모르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 이후의 삶은 결코 자유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탕자의 삶이 이것을 보여 줍니다. 자기가 구속 받는 삶을 사는 것은 아버지의 간섭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먼 나라로 갔고 그리고 거기에서 호랑방탕한 삶을 살았더니 아버지의 간섭이 사라진 대신 물질과 건강과 궁핍과 고난과 모든 것들이 자기를 속박해서 결국은 자유롭기를 선택한 그 순간에 자기 스스로 속박 되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스스로 속박이 있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 가는 탕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선택하셔서 여러분들을 지명하여 부르셨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아무것도 한 것이 없지만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당신의 것으로 지명하여 부르시기 위해서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값을 치루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사는 삶과는 상관이 없이 여러분은 피로 값을 주고 사셔서 사랑스런 교회의 한 지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여러분들을 부르셔서 아버지 앞에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 하십니까? 당신께로 돌아와 당신이 우리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당신 안에서 순종하며 행복을 누리며 살라고 우리를 부르는것 아닙니까? 당신의 기쁨과 당신 안에서 인간의 행복이 나뉘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당신이 우리를 부르실 때에는 당신을 위해 부르실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를 위해 부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행복을 하나님 밖에서 찿아 보려고 할 때 인간은 거칠어 지고 정욕은 중동하여 그리고 인간의 영혼은 어두움 속으로 들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 순종함으로 의지함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말씀을 통해 다시 여러분들을 지명하여 부르신 하나님께로 돌아 오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