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림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행10:33下)
사도행전에서 10장이 굉장히 의미 깊은 장입니다. 왜냐하면 이 10장에서 드디어 유대 땅 안에서만 맴돌던 복음이 정말 땅 끝까지 전파되는 다시 말해서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그러한 획기적인 사건이 10장에서 나타나는데 그 이방인 선교의 주역은 유대인들 중에 은혜 받은 사람도 아니고 선교본부도 아니고 성령님 자신이었다는 것이 이제 성경 통해서 입증되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이방인 선교의 놀라운 길은 어떻게 열렸느냐 하면 경건한 이방인 고넬료라는 사람과 또 기도하던 시몬 베드로 두 사람 사이를 묶어주신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 집에서 사경회를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을 해서 성령이 임하시고 이방선교의 문이 열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넬료 집안에 사경회에 몇 명이 참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거기에 종졸들도 있고 했으니까 우리하고 어울리는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내일부터 시작되는 사경회에 어떤 마음으로 우리들이 참여해야 될 것인가 하는 이 문제를 오늘 성경을 통해 살펴보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제 오늘 본문에서 읽은 바와 같이 그러한 과정을 거쳐서 드디어 고넬료의 집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성령께서 친히 말씀하셔서 데려오라 한 그 사람을 데려와서 이제 집회를 하기 직전 상황에까지 오게 되었으니 고넬료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고넬료는 고넬료 뿐만 아니라 고넬료 집안에 속하는 모든 권속들과 함께 이제 드디어 집회에 임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오늘 우리들에게 어떻게 이 집회에 임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선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집회가 제대로 되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이 명하신 바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런데 오늘 이 고넬료 집안의 사람들이 오늘 사경회를 하기 위해서 모였는데 이때에 이 고넬료가 이 집안을 대표해서 고백하고 있는 이야기는 뭐냐면은 분명히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고자 하시는 말씀이 있으실텐데 우리에게 하고자 하는 그 말씀을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통해서 하실 것입니다. 하는 이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는데 우리 공동체를 향해서 하나님이 하시고 싶어하는 말씀이 있으실텐데 그 하나님의 말씀은 당신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하는 이러한 믿음을 오늘 이 고넬료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그런 것을 참 많이 느꼈습니다. 교회가 현재 놓여 있는 상황에 대해서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생각하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이 사람은 이 말하고, 저 사람은 저 말하고, 또 말하기 사람은 더 말하고 그렇지요? 그렇지만 하나님이 하시고 싶어 하시는 말씀은 언제나 한가지에요. 그리고 그 말씀을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을 통해서 당신의 교회에 전하신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경회를 우리들이 특별히 여는 이유는 바로 제일 커다란 목적이 무슨 목적을 가지고 모이는 것이 아니예요. 목적을 가지고 모이는 것은 아니예요.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이는 이유는 오직 하나,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 이름을 찬송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이는 것이고, 누구도 이 목적이 아닌 다른 목적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모을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이 없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사경회 할 때 사경회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헌금에 목적이 있다든지 교회 부흥에 목적이 있다든지 그런 것들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말이죠.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 우리의 신앙 상태를 향해서 하나님이 하시고 싶어 하시는 말씀이 무엇이고, 우리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특별하게 우리에게 말씀하시도록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오고,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는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알 수 있고 또 깨닫게 하시면 그 뜻대로 살겠다라고 하는 그러한 결의를 가지고 모이는 사경회를 하나님이 축복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그것을 들을려고 모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살아가면서 얼마나 자주 우리시각으로 우리의 인생, 우리의 신앙생활을 보는데 익숙해져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우리 중심으로 자꾸 정당화 시키는 거예요. 거기서 망한다고요. 거기서. 거기서 첫사랑도 까먹고, 좋은 은혜도 잊어버리고, 하나님 앞에 감격도, 잊어버리고 하여튼 좋은 것을 거기서 다 잊어버리는 거예요. 하루에 한번이라도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실까 이런 생각을 가져야 되요. 그러니까 은혜를 받으면 그런 사고가 생겨난다고. 어떤 사람은 주일날 빠지고서도 자꾸 목사한테 전화해서 그거를 합리화 시키려고. 그런 가련한 신앙을 가지고 있어요. 여러분 주일 빠진다고 목사가 여러분들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거를 막 그냥 애처롭게 표정까지 막 이래가면서. 설득 안 시켜도 다 알아요. 그리고 내가 여러분들을 인정해줘도 하나님이 인정해주시지 않으면 그만이예요. 그러잖아요? 그럼 뭐 양심이 편안해져요?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 하는 그런 거를 가져야지 되잖아요? 옛날에 다니던 교회의 장로님이, 그때는 안수 집사였지만. 하루는 제가 전도사 때죠. 전도사님, 성경적으로 이거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게 뭡니까? 주일 아침에 장사를 해야 된대요. 그대 신 9시면 끝난데요. 새벽4시부터 시작해서. 그걸 안할려면 전업을 해야 되는데 그게 쉬운 문제가 아니잖아요. 뭘 딴 걸 하다가 그 사업을 맡았는데 그걸 가지고 하다가 보니까 4부터 9시까지 근무를 해야 된다는 말이죠. 매주. 그래서 예전이나 그때나 인정머리 없기는 마찬가지 아니예요? 그래 내가 그랬죠. 그거 안됩니다. 하나님의 축복 없습니다. 그것도 어쩌다가도 아니고 교회 중직을 맡아가지고 매주 일하겠다는 것이 말이 되겠습니까? 그건 안됩니다. 그래서 깊은 고뇌에 빠졌어요. 안되겠지. 근데 이제 목사님한테 의논할 때 아 이게 교역자가 one voice가 나와야 되는데 그쪽 얘기는 또 따로 나팔이예요. 뭐라 했냐면은 저한테 와서 물어볼 때는 ‘성경적입니까?’ 이렇게 물어보았지만 목사님한테 물어볼 때는 아마 측은하게 여쭤보신 모양이예요. 얘들 데리고 여우같은 마누라하고 토끼 같은 자식들하고 먹고 살아야 되겠는데 목사님 이것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랬더니 목사님 하신 말씀이 ‘사랑의 하나님이신데 그 형편 다 아시지 않겠냐? 해라’ 그랬데요. 그러니 계속하고 좋은 일이 일어나겠어요? 여러 가지 많은 어려움을 겪고 결국은 4개월인가 하고 많은 손해를 보고 뒤집어 엎었죠. 그러니까 인간이 이해해주고 인간이 인정해 주는 것, 그것 별것 아니예요. 하나님이 옳다고 그러셔야지. 인생을 이렇게 하나님의 시각에서 우리들이 보면은 빗나가다가도 조금 빗나가고 즉시 이게 길이 아니구나 깨닫는데 이걸 계속해서 그런 식으로 자꾸 이유달고 핑계달고 인간적으로 달고 이런 식으로 하니까는 안되는 거요. 하나님 앞에 새벽기도 나와서 기도하기로 작정을 하고 마음의 뜻을 세웠으면 새벽기도 나오고, 못나오면 내가 참 게을러졌구나 이러면 안된다 하고 이거는 옳지 않다 이렇게 생각해야지 뭐 구구절절히 핑계를 대고 주절히주절히 이유를 대며 도 터가지고 청산유수지. 여러분 그렇게 살면 안된다 이거죠. 그런 삶은 작별해야 되요. 주님이 나를 인정해 주시면 나는 어둠 속에 들어가도 주께서 나를 옳다고 인정하시는 것 붙들고 살고, 세상의 모든 사람이 나 잘났다 하더라고 주님이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안한다 그러면 주님 발 앞에 눈물 흘리면서 잘난 사람 만들어 달라고 매달려야지 배짱 튕기면서 손해 볼 사람은 누구냐 이거예요? 공감하면 한번 아멘을 해봐요. 신앙에 있어서 그런 시야를 가져야지만 당당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어요. 주일 한 번 빠지고 그냥 목회자 앞에서 고개를 못들고 그런 신앙생활을 하면 되겠냐 이거예요? 그것도 빠진 다음에 고개를 딱 들고 그런 신앙생활을 되겠냐 이거예요? 이것도 안되고 저것도 안되는 거죠.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은혜 받으면 이런 마음이 마음에 막 들어오는 거예요. 이번에 원고 쓰면서 1904년에서 6년에 있었던 말이죠 인도 카아시 지방에서 부흥이 일어났을 때 그 부흥이 말하자면 우리한국 교회의 1907년 부흥하고 연결이 되거든요. 그걸 보고 온 존슨 목사가 간증하면서부터 부흥에 소망을 갖기 시작했으니까. 근데 목사님이 가보니까 엄마, 아빠들은 은혜 받으러 교회로 다 간거야. 어른들이 이렇게 은혜를 받고 돌아오면 아이들이 길거리에서 막 해갈을 했거든요. 막 돌아다니고 얼굴이 새까매지고, 막 뛰어다니고. 그랬었거든요. 꼭 고아예요. 다섯 살, 여섯 살, 뭐 일곱 살, 다 이런 얘들이었어요. 그 얘들이 은혜 좀 받아야 되겠어. 카아시 지방에서는 엄마 아빠들이 은혜 받으러 다 가버리니까 얘들이 건초더미에서 모여 앉아 가지고 자기네들끼리 찬송부르면서 기도회를 하는 거요. 목사님이 가보니까 얘들이 막 울고 있어요. 근데 이렇게 밥 달라고 우는 것하고 기도하면서 우는 것하고 아무리 얘들이라고 틀리잖아요? 그죠? 틀리죠? 막 그렇게 우는 거요. 왜 그렇게 우냐? 과자 줄까? 그랬더니 하는 말이 ‘목사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이렇게 많이 사랑했는데 우리는 주님을 요만큼 밖에 사랑하지 못하니까 그게 너무 슬퍼요’ 그러고 눈물을 흘리면서 아이들이 회개를 하는 거요. 우리 유아실에서도 말이죠 그런 일이 좀 일어났으면 좋겠어요. 엄마, 아빠가 만난 하남님을 나도 만나게 해달라고. 엄마, 아빠가 못나면 진짜 이건 문제가 되죠. 그러니까 은혜를 받으면 즉시 또 오르는 것이 뭐냐면은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실까? 이게 머리와 마음을 지배하는 거요. 그래요 안그래요? 그렇죠? 그래서 하나님이 슬퍼하시고 안좋아하시면 나도 슬프고 안좋아요. 그리고 마음이 아파요. 그리고 무슨 어려운 일들을 당하면 내가 당하는 고통 때문에 마음 아픈 것이 아니라 내가 잘못한 것을 보면서 주님이 얼마나 마음 아파하실까 그거요. 그러니까 은혜를 받으면 그런 마음이 생긴다고. 근데 은혜가 다 떨어지고 나면 말이죠 그 다음에는 주님이 우리 앞에서 너는 그 길로 가면 안된다고 그러고 눈물을 흘리시면서 우리에게 그 불붙는 긍휼과 안타까와 하는 마음을 보여주셔도 아 왜 자꾸 이러시나 그런 생각을 하는거요 그러고 교감이 이루어지지 않는 거요 그러니까 그게 무엇하고 관련되냐 하면 말이죠 하나님은 순결한 영이시거든요. 그러니까 우리들이 영적인 사람이 되고 그리고 우리의 영혼이 정결해져 있을 때는 영과 영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거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마음이 그 영의 만남을 통해서 우리에게 아주 쉽게 전해져 내려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의 영혼이 불결해지고 더러워지고 때 묻고 쓸데없는 사랑에 마음 빼앗겨서 영혼이 혼탁해지게 되면 하나님은 통곡하고 우시는데도 우리는 낄낄거리고 돌아다니는 거요. 하나님은 기뻐하시는데도 괜히 쓸데없이 슬픔에 잠겨가지고 길가에 구르는 낙엽만 봐도 눈물이 펑펑 쏟아지고 교회와서 말씀들을 때는 졸음이 펑펑 쏟아지고 이런 이상한 사람으로 코메디 같이 바뀐다 말이죠. 그게 바로 신앙생활의 일치거든요. 은혜를 받고 변화되면 지배하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실까? 그러니까 어떤 생각이 들어요. 하나님이 뭐라 그러시는지 좀 들었으면,. 주님이 요새 날 어떻게 생각하실까? 내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을 기뻐하실까? 내가 이런 일을 했는데 하나님이 좋아하실까? 내가 이런 일을 계획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좋아하실까? 싫어하시면 하지 말아야지. 간단하게 대답하는 거요. 싫어하시면 하지 말아야지, 좋아하시면 해야지. 할려면 비용이 많이 드는데. 그런 거는 은혜 못 받았을 때 자꾸 생각이 나는 거고 주님이 좋아하시면 그것이 최고의 가치가 되니까 그러니까 할렐루야 그러고 하는 거요. 사경회는 이걸 회복할려고 하는 거요. 다섯 시간 모여가지고 깨달으려면 무얼 얼마나 깨닫겠어요? 더군다나 여러분들은 이미 깨달을 만큼 깨달은 사람 아니예요? 이제 하산하기 직전 아니예요? 어느날 갑자기 김목사가 이제는 다 가르쳤다, 이제는 하산하라, 이제는 그런 날 오지 않겠어요? 표정을 보니까 절대 안올 것 같은 표정인데. 물론 많이 깨닫지만은 그러나 그것도 말이죠 더욱 중요한 것은 그런 마음을 회복하려고 하는 것이요. 여태까지 그냥 덕지덕지 눌어 붙어 가지고 욕심, 탐욕, 죄, 무감각, 자기중심의 사고방식, 편견, 쓸데없는 핑계, 구실, 덕지덕지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것들을 이번에 한 번 말씀의 칼로 다 벗겨내버리고 속살을 들어내보는 거요. 그래서 여러분들은 다 그런 사람들이 아니예요. 원래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정말 어린아이처럼 듣고 감동을 받고 주님이 인도하시면 그 손을 잡고 가고 하나님 앞에 감격이 있고 그런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예요. 여러분들이, 그걸 제가 알아요. 여러분들을 저보다 더 잘아는 사람들이 누가 있겠어요? 이세상에서, 누가 제일 잘 알겠어요? 유모와 같은 제가 가장 잘 알지 않겠어요? 여기에 계신 대부분의 교인들이 하나님의 참 놀라운 사랑도 맛보았고, 어둠 속에서 나를 건져내시는 것이 무엇인가도 맛보았고, 주님 없이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가도 알았고, 그리고 주님과 동행하면서 그 품에서 살아가는 것이 그리고 그 푸른 초장 잔잔한 물가로 하나님이 인도해 주시는 것이 얼마나 진실하고 행복한 것인가를 맛본 사람들이예요.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 마음속에는 겉으로는 그렇게 표현하지 않지만은 마음 속에 다 그런 삶에 대한 그리움이 있어요. 그리고 마음 구석구석 마다 정말 불꽃처럼 살고 싶은 그런 애절한 소원이 있어서 이렇게 만날 수 없는 사이인데 만난거요. 그래요? 안그래요? 그렇죠? 그래요. 우리는 그래서 만난거거든요. 그러니까 마음에 그게 있는 거요. 근데 그게 말이죠, 오랫동안 신앙생활 제대로 안하고 게으름 피우고 나쁜 생각하고 말이죠 그러니까 순전함을 지키지 못하고 하니까 거기에서 그런 껍질들이 덕지덕지 쌓여가지고 여러분들의 그런 진실한 마음이 속살처럼 되어버린 거요. 그러니 그 껍데기를 이번에 칼로 말이지 그 껍데기를 긁어내는 것은 아프지도 않아요. 딱지니까. 확 뜯어내버리면 나중에 피가 좀 나서 그렇지 나중에 새살난다고요. 약도 많아요. 구약도 있지, 신약도 있지. 진짜 많아요. 그래서 확 긁어내버리는 거요. 그래서 여러분 속에 있는 원래 하나님을 만나고 주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실까 그것에 의해서 지배받는 여러분의 착한 원래의 모습, 이것을 회복시켜주기 위한 것이 바로 사경회의 목적이다 얘기예요. 이렇게 높이 띄어주었으니 이제 사경회에 안나올수 없잖아요. 정말이예요. 이것은 보태서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실이예요. 여러분 주없이 살 수 없는 사람들이예요. 여러분들이 이유가 무엇이든간에 요즘 주님 등지고 사는 사람들 있죠? 등지고 사시는 사람들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못 느끼지만 목자인 나는 여러분의 얼굴 속에서 핏기없는 여러분들의 얼굴을 보면서 영혼에 깃들인 어두움을 본다고. 나는 보는데 왜 여러분은 못봐요. 아무리 웃어도 그 웃음에 힘이 사라졌어요. 옛날의 그 웃음이 아니예요. 그게 무엇때문이예요? 하나님 마음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실까? 주께서 내게 명하시는 바는 무엇일까? 거기에 귀 기울이려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여기에서 벗어나야 되는 것이예요.
♬ 주 음성 외에는 더 기쁨 없도다 즐겁고 슬플 때 늘 계시옵소서
기쁘고 기쁘도다 항상 기쁘도다 나 주께 왔사오니 복 주옵소서 ♬
신앙생활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면 안되요. 주님 마음 가지고 살면 일평생 승리합니다. 일평생 승리해요. 주님 마음 갖지 않고 내 마음 갖고 살면 일평생 지다가 볼일 못 보는 거죠. 여러분 우리가 이런 마음 이런 감각을 회복해야 되요. 처음 여러분들은 주님이 한 번만 웃으시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고, 주님이 한번만 슬퍼하시면 세상살 소망 무너지는 것처럼 땅을 치며 통곡하고, 주님이 뭐라고 한 말씀만 하시면 눈물이 글썽거리고, 주님이 뭐라고 용기 한번 주시면 어깨를 느리고 왔다가도 뺨에 흐르는 눈물을 주먹으로 훔치면서 주먹을 불끈 쥐고 교회당을 떠나던 사람들이었어요. 그게 여러분들이라고. 그러니까 고집을 버리고 고집을 버려. 고집은 ----(테잎 넘어가면서 짤림) -- 웨슬리죠? 아이들 교육방침의 첫 번째 방침이 무언지 알아요? 불경건한 고집은 조기에 박멸한다. 그래서 3살 되면서부터 주어패기 시작하는 거요. 고집부리면 얻어터지는 것은 자기밖에 없는 거요. 나는 그것이 성경적인 교육방법이다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서 어렸을 때 조기에 박멸해야 되요. 기 살리면 안돼요. 좋은 신앙적인 기, 이런 거는 살려줘야 해요. 나폴레옹이 그런 사람 아니었어요? 교장선생님이 뭐 잘못했다고 다그치면서 너 무릎 꿇으라고 하니까 전 꿇을 수 없습니다. 너 뭐하는 놈이야. 우리 어머니께서 살아계신 하나님 한 분이외에는 누구한테도 무릎을 꿇지 말라고 그러셨습니다. 이게 신앙적인 기예요. 그런 거는 살리고 그리고 못된 기는 꺾어야 된다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고집을 꺾고 그냥 냅둬 한번 살아 볼기요. 그걸 버려야 된다고.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것처럼 얻어터지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왜 그런 식으로 시름을 하고 하나님의 마음 아프게 해드리고 자기 고통하고 주위의 있는 사람을 다 고통하게 하잖아요. 왜 그런 식의 인생을 우리들이 살면서 하나님 앞에 걸어가야 하냔 말이죠. 벌써 이렇게 목회를 하면서 보면 말이죠 반 관상쟁이가 다 되요. 영감이 없어도 이렇게 보면 저 사람이 지금 삐딱하게 가고 있는데 내가 불러서 얘기하면 받아 들이겠구나 튀겠구나 오히려 역효과가 나겠구나 대게 와요. 벌써 이렇게 고집이 꺾이고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바를 이런 생각이 들 때가 되면은 벌써 얼굴에 핏기가 돌기 시작하고 얼굴의 근육에 뼈가 빠지기 시작해요. 이런 표정에 뼈가 박혔다가 뼈가 빠진다고. 풀어지기 시작해요. 우리가 누굴 위해서 그렇게 고집 쓰고 내 중심적으로 용기부리고 그리고 떼쓰면 박수치고 응원하는 사람은 붉은 악마밖에 없어요. 진짜. 진짜요. 누구 좋으라고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해요? 이거 십자가에 못 박아야 돼요. 할렐루야. 못 박아야 되요. 그리고 말이죠 나는 말이죠 오늘 여러분들에게 하고 싶어하는 말들은 그거예요. 이런 일들이 이렇게 중요하잖아요. 하나님 앞에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고 마음이 무엇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가 하는 것은 그 삶을 산출하는 틀이예요. 틀, 그 속에서 그런 틀을 가지고 있으면 여러분들이 순간순간 하나님 앞에 갸륵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도 그게 삶이라고 하는 나쁜 제품을 생산해내는데 조금도 영향을 안준다고요. 그 기본적인 태도부터 바꾸어야 되요. 그러고 나서 헌금도 있는 거고. 그 다음에 헌신도 있는 거고. 기도도 있는 거고, 뭐도 있는 것이지, 그 기본적인 틀은 바꾸려 하지 않고 말이죠 순간순간 드는 양심의 가책을 호도하려고 하는 그런 식의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된다 말이죠. 그러니까 그러데 그게 하루아침에 생긴거요? 그게? 하루아침에 생긴거냐고? 여러분 정말 주님 찬송하고 진짜 이제 저는 주님밖에 없어요. 그런 말 안한 사람 있으면 한번 손 들어봐요. 주님 저는 이제 주님밖에 없어요. 내가 기도하는 것을 들었어요. 막 기도를 하면서 주님 제가 주님 말고 누가 있습니까? 근데 왜 요즘 주님을 그렇게 아주 안좋게 생각을 해요? 그 왜 그래요? 고백과 삶이 왜 그렇게 달라요? 하루 아침에 일어난 일이 아니예요. 오랜 걸린 거 아니예요? 오래 걸린 거잖아요. 병도 말이죠 금방 가다가 뒹굴어 가지고 머리가 터지고 찢어진 것은 꿰매고 약 바르면 금방 나아요. 근데 오랫동안 걸린 만성위궤양 이런 거를 이틀 만에 고쳐둔다고 그런 사람이 있으면 그건 사깃꾼이예요. 그런 거는 그렇게 금방 낫는게 아니예요. 그런데 그렇게 오랜 시간에 걸려서 뒤틀려지고 잘못된 그리고 올바른 신앙의 태도를 잃어버린 거를 재건하고 고치기 위해서 닷새가 너무 길어요? 월요일 한 번 나오고 화요일부터는 나오는 것을 헉헉거리고 그래? 우리 교회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닫힌 교회 얘기 하는 건데. 그건 옳지 않다 말이죠. 병원에서 입원하라고만 그래도 말이죠 회사고 뭐고 다 집어치고 입원할 사람이 직장을 나가지 말래요, 뭘하지 말래요? 직장 갔다가 바로 퇴근해가지고 와서 정신 차리고 일주일 동안 아무도 안 만난다고 생각하고 일주일도 아니고 닷새죠. 아무도 안 만난다고 생각하고 예비군 비상소집에도 나가고 민방위 새벽소집에도 나가는데 아니 동장이 도장 찍어서 내보내도 꼭두새벽에 종 틀어놓고 나가는 사람이 하나님이 도장 찍어서 교회 나와 가지고 너희들은 각성하라고 부르시는데 그러는데 왜 그러지 못하느냐 얘기죠? 여러 가지 핑계될 것 없다 이거죠.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은 거예요. 주님 뜻대로 살기 싫고 내 마음대로 내 중심대로 내 고집대로 살아보고 싶은 겁니다. 은혜를 받을려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구걸을 해야 겠어요, 주실려고 하는 하나님이 여러분들이 애원을 해야겠는지 생각해보세요. 이제는 어린아이와 같은 유치한 신앙의 태도를 이제는 결별해야 되지 않아요? 이 정도 됐으면? 작별해야 되는 것이예요. 끊임없이 옛 생활 옛 삶의 구습을 벗어버리려고 하는 그런 의지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못하겠어요? 또 하다가 못하더라도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이번에 하나님께서 나를 새롭게 해주시고 정말 하나님 변화시켜 달라고 아버지 앞에 매달리잖아요? 여러분 헌금 하라고 강요합니까? 아무 목적 없어요. 이 집회 해가지고 교회 짓겠다는 것도 아니고, 성도수 늘리겠다고 하는 것도 아니고, 교회 수리하겠다는 것도 아니예요. 그냥 나와서 값없이 나와서 포도주를 마시고 말씀의 생수를 마시고 그리고 죄와 허물과 편견과 아집으로 들러붙은 그 더러운 껍데기를 모두 말씀의 칼로 전부다 뜯어내 버리고 그리고 주님 없이 원래 살 수 없어 하는 그 여린 속살과 같은 그 선한 마음, 그리고 처음 하나님 앞에 은혜 받을 때 결심했었던 그 진실한 마음, 그거 다시 회복하고 살려는 거요. 하나님 앞에 뜻을 세우지 않는 사람들은 무슨 선한 것을 이룰 각오를 하지 말아야 되요. 뜻을 세우고 하나님 이번 집회에 제게 말씀하여 주십옵소서. 내가 주님이 떨어졌다고 말씀하시는 그곳에서 무릎을 꿇고 주님은 참되시고 의로우시도소이다 고백하겠사옵나이다. 그런 사고방식을 가져서 복원해야 되요. 뭘 복원해? 아, 중요한 거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무얼 명령하시는가? 그게 중요하다. 그 생각을 다시 회복해서 주님 중심으로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바를 그 다음에 뭐라고 그랬냐면은 ‘모두 듣고자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그랬어요. 두 번째로 우리들이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사경회를 하면 답안지를 만들어 가지고 온 사람들 있죠? 그런 사람들은 은혜를 못 받아요. 무슨 얘기냐 하면 목사님 상처를 받았습니다. 왜 상처를 받아? 아, 이번 심방에는 내가 격려와 위로를 받으려고 했는데 목사님이 오셔서 조목조목 명쾌하고 확실하게 내가 뭘 잘못했는지 가르쳐 주고 가셨습니다. 그러면은 잘못한 거를 깨달았으면 그걸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하고 내가 어디서 떨어졌는지 헤매지 않고 알게 해 주셨으니까 감사하다 그렇게 반응해야지 답안지는 ---- 여러분 답안지는 뭐예요? 내일서부터. 그거 가지고 와봐야 내 맞는 답안지 본적이 없어. X표, X표, 계속 X표 할 수 밖에 없는 답안지를 만들어 가지고 와서는 안된다 말이죠.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필요한 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모든 것이 무엇인가 남김없이. 왜냐하면 우리는 알아요. 대체로 순종하면 대체로 은혜생활 해요. 그리고 조금 순종하면 조금 평화가 있어요. 그러나 온전히 순종하면 온전한 기쁨이 있어요. 온전히 순종하는 사람, 아버지의 뜻을 온전하게 준행하는 사람에게 온전한 기쁨 그리고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이시는 거요. 완전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완전함을 보이시고 사특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을 보이신단 말이죠.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셨죠. 다 교훈을 말씀하신 다음에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무엇을 하든지 그렇게 하나님이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그래서 우리를 향한 우리가 실천하기 좋아하거나 우리가 마음에 있는 몇 가지를 실천하기 위해서 모인 것이 아니라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X-레이 찍을려고 모인 사람들이예요. 그래서 그 말씀 앞에 찰칵 찍혀서 우리 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를 정확하게 보도록 하나님이 그런 기회로 우리를 부르시는 거요. 그리고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신 것이면 사소한 것이라도 내가 모두 받아들이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내가 순종하고 변화된 삶으로 주님을 온전히 기쁘시게 하는 그런 삶을 내가 살아야 되겠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옳다 이거죠. 남녀가 사랑을 한다고 해 봅시다. 그러면 어떤 것이 사랑인가를 보겠어요. 만나서 자매, 아 자매는 정말 다 좋은데 말이지, 거 성질 급한 게 그게 좀 문제야. 얼굴도 좀 못 생겼지만 그러나 그것은 괜찮은데 성질이 급한 것이 문제야. 이렇게 얘기할 때에 진짜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이면은 아, 그것마저도 온전해져서 내 존재 자체가 형제에게 기쁨이 되야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이예요? 냅둬. 야 그것만 해도 너한테 과분해 그렇게 용기 있는 사람이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이예요? 누구예요? 전자? 전자죠. 보세요. 정말 사랑을 가지고 있으면 그 사람 앞에서 온전하지 않은데도 온전해 보이고 싶어서 어쩔 줄 몰라. 그게 참된 사랑이예요. 치 성질까지도 아름다우면 니 차례가 되었겠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사랑 있는 마음이냐 이거죠. 그건 사랑 있는 마음이 아니예요. 그러니까 우리도 하나님 앞에 그런 식의 태도를 가지면 안된다 이거죠. 하나님 이 정도만 살아드리는 것도 글쎄 감지덕지 하시라니까요. 도대체 어는 안전이라고 우리들이 그런 사고를 해야 되겠어요? 은혜 받으면 온전한 것은 보이지 않고 온전하지 못한 것이 자꾸 눈에 들어와서 하다가하다가 눈물 흘리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다가 안되겠으니까 부르는 찬송이,
♬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
그렇게 온전해 지고 싶어서 몸부림을 하다가 하다가 한계에 도달했을 때 이 찬송을 부르면서 요지가 뭐예요? 하나님 아무리 해도 나는 안되나봐요. 주님 십자가의 보혈로 내 허물을 덮으시고 온전하지 못한 나를 사랑으로 받으시옵소서. 이렇게 부르면 그 찬송이 폐부를 찔러요. 제가 이 찬송을 굉장히 좋아하던 때가 있었어요. 신학교 들어가기 얼마 전에.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죠. 저는 그때 사람 되었다고 보거든요. 내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신앙적인 사고가 있어요. 그게 뭐냐면은 한 사람의 인격은 두가지에 의해서만 깍여져요. 그것은 불로 깍여지고 물로 깍여지는데, 불은 성령의 불이고 그리고 물은 눈물이예요. 그것도 참 은혜인게 말이죠 새벽기도 가면 할게 얼마나 많아요. 주일학교부터 시작을 해가지고 줄줄이 사탕으로 안 믿는 집안 식구들까지 할 게 많은데 가기만 하면은 무릎 꿇고 기도 하려고 하면은 떠오르는 게 뭐냐면 이 불결한 나, 이 모난 나, 그리고 못난 나, 이게 다 떠오르는 거요. 그러니까 다른 기도하려 갔는데도 그냥 가면서 내 절망적인 모습에 하나님 앞에 안타까워 하는 거요. 다 기도하고 나서 마직막에 ‘내 모습이대로 ’ 부르면요 그 찬송이 말이죠 폐부를 찌르면서 다가와요. 그리고 내가 온전하지 못하고 모자라기 때문에 내 인생의 밑천이라고 하는 것은 나는 온전하지 못하니까 나는 완전하지 못하니까 온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뜨겁게 붙들고 사는 것 이외에 내 인생에 소망이 없다 그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거요. 그러니까 온전하지 못한 것도 은혜가 되더라구요. 그런데 해보지도 않고 이 모습 이대로 받아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이건 배짱이요. 이건 완전히 똥배장이요. 자기도 못 받아주는 것을 왜 주님보고 받아달라고 그래요? 그 찬송 지은 사람도 그런 깊은 몸부림 속에서 찬송이 나온 거요. 나는 100% 확신해요 그 사람 지금 살아있지도 않지만. 그러니 천국 가서 물어봐요. 내 말이 진실이지. 그렇게 몸부림 치다가 적어 내려온 거요. 그러니까 우린 온전해져야 되요. 모든 부패에 이르는 지름길이 뭐냐면은 내가 주일 지키는데, 내가 십일조 내는데, 내가 그래도 아침 8시부터 나와서 봉사하는데, 아이고 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는데. 그것 안되는 거요. 온전해지는 거요. 한 일은 잊어버리고 된 일은 잊어버리고 아직 변하지 않은 나 아직 되어지지 않는 내 모습 이것 하나님 앞에 괴로워하는 거요. 저는 요새 그런 생각을 해요. 참된 하나님의 목자가 누구일까? 나 자신을 포함해서 점검을 하는 거요. 그때 하나 발견한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면은 온전한 교인을 보면서 너무 지나치게 감격하는 사람은 참 목자가 아닐 것 같아요. 오히려 변화된 사람을 인해서 대견해 하는 것은 잠깐이고 아직도 말씀의 그늘 아래 들어오지 못해서 변화되지 않은 사람, 하나님의 진리로 변화되는 것 밖에 길이 없는데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자꾸 말씀을 피하고 스스로 변화되기를 거부하는 사람 그런 사람을 보고 아파하는 마음이 참 마음이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해요. 그런데 그게 성경에도 근거가 나오더라고요. 그게 뭐냐면은 예수님께서 나의 양떼들에 대해서 쭈욱 말씀하신 다음에 또 뭐라고 말씀하셨나면은 ‘아직 우리 안에 들지 아니한 양이 내게 있어’. 우리 안에 안들었는데 그게 어떻게 주님께 있는 거요? 근데 주님의 눈에는 우리에 들어온 양도 대견했지만 우리에 들어오지 않은 양들이 주님의 마음에 있었단 말이죠. 바로 그거요. 어느 선배 목사님이 그런 말씀을 하더라고요. 자기의 목회의 성취를 떠벌리는 사람치고 그 목장이 건강한 목장이 없다. 그것은 참 진리인 것 같아요. 그래서 한 일은 잊어버리고 이미 완전하게 된 것은 잊어버리고 그리고 아직도 변화되지 않은 내 모습 아직도 이루지 못한 하나님의 명령들 아직까지도 온전히 성취해서 주님의 마음에 기쁨 드리지 못하는 미완성의 일들을 가지고 고민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되는 것이죠. 그리고 이런 마음을 회복하면서 살아야지 우리기 진심으로 살아있는 신앙을 가지고 신앙 생활하는 것이 아니냐 말이죠. 그렇지 않아요? 주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사람과 그냥 그건 사랑도 아니지만 대충대충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차이는 뭐냐면은 ‘온전히’라는 개념의 차이예요. ‘온전히’라는 개념의 차이예요. 조나단 에드워드가 1733년에 하나님을 깊이 만나면서 그 숲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고 난 다음에 이런 이야기를 적었더라고요. 요번에 책 쓰면서 보니까. 나는 티끌과 같았다. 나는 티끌 속에 누워있는 것 같았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는 위대하시고 나는 티끌에 누워있는 것 같았다. 나는 거기서 한없이 울었다. 그리고는 이렇게 성결하고 온전한 사랑으로 그분만을 공경하고 싶었다. 그게 하나님의 영광에 압도되었을 때 에드워드의 마음에 일어났던 소원이예요. 온전하게 사랑하고 싶은. 죄를 멀리한 사람의 마음 속에는 온전이 아니면은 결국은 온전에 도달되는 것도 아닌데 그런데도 하여튼 더 온전, 더 온전, 더 온전히, 온전히 그러한 말할 수 없는 소망, 몸부림 멈출 수 없는 그런 온전한 드림, 이런 것들에 대한 온전한 소망이 생겨나는거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번에 말이죠 대체로 회복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되요. 큰 구멍 대충 메운 그런 사람 되어서는 안된다 말이죠. 냄비가 다 뚫어져서 구멍 뻥뻥 났잖아요?. 옛날에는 냄비 떼우러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솥 떼워! 냄비 떼워! 그러고 다닌다고. 그러고 냄비 가져오면 양철을 요만하게 오려 붙고 그 다음에 리벳을 쳐가지고 붙인다고. 근데 떼울 때는 말이죠 어떻게 떼우는지 아세요?
내용이 앞에 것과 반복되고 있습니다... 다시 녹음을 해 주셔야 될 것 같아요.
반관상장이가 다 되요. 영감이 없어도 요렇게 보면 저 사람이 지금 삐닥한 갈로 가는데 내가 지금 불러서 얘기하면 받아들이겠구나 튀겠구나 오히려 역효과가 나겠구나 대게 와요 벌써 이렇게 고집이 벌써 꺽이고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바를 이런 생각이 들 때면은 얼굴에 벌써 핏기가 돌기 시작하고 얼굴에 이 뼈가 빠지기 시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