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를 부인하는 삶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8:34).
I. 본문 해설
주님을 믿고 구원받은 신자가 되고 나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끊임없이 당신의 형상을 본받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미 하나님 앞에 받은 중생의 은혜를 기초로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이루어 나가도록 이끄십니다. 중생은 우리 안에 이미 주신 하나님의 형상을 끊임없이 날마다 새롭게 본받아 가는 기초가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정신적이고 영혼에 관계된 특성입니다. 형상이라고 하는 말은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하는 그 영혼과 정신의 특성을 인간에게 나누어 주셔서 그 형상 안에서 하나님을 알아보고, 하나님을 알아보는 자신을 이해하고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 속에서 이 세상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계획들을 성취해 나가야 할 대상인 창조의 세계를 아는 가능성까지 하나님의 형상 안에 두신 것입니다. 이 형상은 어떤 존재로 하여금 그 존재에 적합하게 살아가게 하는 창조주 하나님의 계획과 관련 있습니다. 형상은 하나님이 인간에게만 나누어주신 것입니다. 인간은 위로 하나님을 이해하고 아래로 이 세상을 이해하고 자신에 대한 반성적인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자신과 자신의 삶을 이웃과 관계 속에서 정의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끊임없이 본받게 하시도록 우리를 구원해 낸 다음 진리와 성령으로 우리를 다듬으셔서 형상 안에서 날로 새로워가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형상을 인간에게 본받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게 만들어주셨습니다.
원래 영혼 자체가 보이는 것이 아니고 영이신 하나님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육안으로 보거나 감촉으로 만질 수 없는 분입니다. 영적이고 정신적인 특성인 하나님의 형상도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형상은 우리의 바깥으로 나타나는 삶과 드러나는 인격을 통해서 형상의 본질이 어떠한가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람들이 아주 다양한 삶을 살아가지만 그 살아가는 삶의 본질을 더듬어 올라가면 하나님의 형상의 차이가 존재하게 됩니다. 그 삶의 방향이 도덕적인 방향과 연결될 때에는 하나님의 도덕적 형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이 온전히 지니게 될 때 어떤 삶을 살고 어떤 인격을 갖게 될지를 우리와 똑같은 사람을 통해서 보여주시고 싶어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그 모범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와는 다른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우리와 다른 그분의 인격을 통해서 그 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온전한 형상과 우리 안에 있는 불완전한 형상을 비교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하나님의 형상과 교보적(校報的)으로 사용하십니다. 구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이 신약에서 기독론적인 전환을 거쳐서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경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처음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형상은 구속을 통해서 그 완전한 형상의 모습을 복원하게 되는데 그 형상이 바로 그리스도의 형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어떤 것이고, 우리가 어떻게 얼마나 그 형상을 우리 안에 이루었는지를 보려면 그리스도의 삶과 그 교훈이라고 하는 잣대에 우리의 삶과 인격을 비춰보면 보이는 우리의 삶과 나타나는 인격을 통해서 우리 자신 속에 있는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형상이 얼마큼 우리 안에 이루어졌는지를 보게 됩니다.
육체적으로 태어난 아이는 태어나는 것과 함께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똑같이 우리가 영적으로 출생한 후에 우리의 영혼도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육체의 성장은 영적인 성장과 관계없이 각각 다른 시점에 태어나게 됩니다. 열 살에 회심한 아이는 열 살이 된 육체 안에서 다시 새로 태어난 0세의 영혼의 거듭난 상태가 됩니다. 30세에 거듭나게 되면 30세의 육체 안에서 새로 태어난 영혼을 가지게 됩니다. 어떠한 육체의 조건에 있든지 간에 영혼은 다시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육체와 같이 성장을 합니다. 육체가 태어나면 계속 성장을 하듯이 영혼도 또한 성장을 하게 됩니다. 육체의 성장은 무게와 크기, 활동력으로 측정될 수 있지만 영혼의 성장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크기나 무게로 측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영혼이 아주 균형 있게 발휘되는 힘과 능력에 의해서 영혼은 성장의 정도를 측정하게 됩니다.
육체는 끊임없이 음식을 복용하고 적당한 운동과 적절한 사물에 관한 지식들을 습득함으로서 육체의 성숙이 이루어진다면 영혼의 성숙은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에 의해서 성장을 거듭하며 바람직한 영혼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나면 하나님이 우리를 단번에 완성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중대한 변화를 주십니다. 그 변화가 또 다른 가능성을 가진 변화입니다. 중생은 우리에게 최소한 두 가지의 변화를 도입합니다.
하나는 성향의 변화입니다. 예전에는 자기를 사랑하던 사람이 거듭나고 나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은혜 안에 있으면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게 되고 은혜에서 미끄러지면 하나님을 덜 사랑하게 됩니다. 이 사랑은 거듭난 신자 안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법은 없습니다. 희미하게 때로는 뚜렷하게 약하게 강하게 변화는 있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고 신자의 마음 안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남는 것입니다.
또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변화는 인식의 변화입니다. 거듭나기 전에는 이 세상에 있는 감각적인 것밖에는 몰랐고 혹시 정신적인 것을 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어떻게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시고 영혼을 지으신 하나님과 연결되는지는 잘 몰랐습니다. 그러나 거듭나고 난 후에는 보이는 물질의 세계보다도 너머에 있는 영적인 세계에 대한 놀라운 지식과 이해를 갖게 됩니다. 하나님이 거듭난 영혼에 눈을 뜨게 해주신 결과입니다. 그들은 뜨여진 영혼의 새로운 눈으로 가득 들어오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물 뒤편에 있는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그리스도의 탁월하심, 진리의 부요하심에 대해 눈을 뜨고 그것을 인하여 아름답고 추함을 느끼게 되는데 이것이 그의 영혼에 거룩한 정서를 불러 일으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삶의 동기가 되게 만들어 주십니다. 은혜 가운데 있을 때는 영혼의 눈이 매우 밝아지고 은혜로부터 멀어지면 눈이 흐려질 때는 있지만 시력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눈 속에 사물들의 인상이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없듯이 거듭난 사람에게는 반드시 이런 영적인 것들에 대한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시력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문제는 사랑의 성향, 인식의 감각이 모두 절대 불변하지 않고 가변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면 사랑도 식고 영적인 것들을 보는 감각, 진리의 말씀에 대한 미각들을 잃어버리게 되지만 은혜 안에 있으면 이런 것들을 회복하게 됩니다. 두 가지가 우리 안에 항상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은혜 안에 거하면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사랑과 아름다움 안에서 자라가게 되면 우리는 더욱 더 그리스도의 형상을 짧은 시간 안에 많이 닮아가는 아름다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신자 안에 새로워지게 될 때 그는 인격과 삶에 있어서 예수를 닮은 모습을 많이 표출하게 되는데 이것을 보고 세상의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되므로 이것보다도 더 큰 봉사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신자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최고의 섬김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탁월한 신앙고백을 한 베드로에게 그를 지극히 칭찬하신 후 심하게 책망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신 후 “인자는 잠시 후에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고난을 당해야한다.”라고 고백 하셨을 때 베드로는 인간의 정에 이끌려서 “어떻게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 그래서는 안 됩니다.”라고 예수님을 말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사단에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여기서 ‘사단’은 사실 베드로 속에 귀신이 들어왔다기보다는 베드로가 가지고 있는 인간의 정에서 우러나온 자연스럽고 당연한 생각이 하나님의 일을 돕지 않고 마귀의 일을 돕는 의미에서 말씀하신 예수님의 우회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처럼 최고의 신앙의 고백을 토해 놓은 그 순간에도 인간은 오류에 빠지고 잘못된 생각에 붙들릴 수 있기 때문에 그에게는 끊임없는 자기 부인이 필요합니다.
II. 예수를 따르는 삶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삶, 예수의 형상을 본받기까지 당신을 좇는 삶에 대해서 두 가지를 가르치십니다. 자기 부인의 삶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생활입니다.
A. 자기 부인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얼핏 보기에는 합리적이고 옳고 선한 것처럼 보이는 생각들, 마음의 정서들이나 의지 같은 것들에 대해서 어떤 상태나 상황을 거부하거나 강하게 저항하면서 부정하는 것을 자기 부인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결코 완전한 존재가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잘못된 생각과 욕망, 의지가 같은 것들이 끊임없이 안에서 솟아나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 안에서 솟아났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따라간다면 그는 오래 예수를 믿어도 결코 주님의 형상을 본받지 못할 것이고 그 사람은 살아있는 자체가 하나님이 그를 이 세상에 살게 하신 목적과 정반대의 일을 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끊임없이 자기 속에서 우러나오는 어떤 것들,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부정하고 저항하고 아니라고 거부하는 몸부림이 없이는 누구도 예수를 따라가는 삶을 살 수 없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데까지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 우리가 완전히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끊임없이 본받아 가려고 애쓰는 신자의 실천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들이 거듭난 사람들이요,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친 백성들이라고 하는 것을 그의 영적인 삶속에서 끊임없이 보여주시므로 신자들을 성화로 격려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인하여야 할 것은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생각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쪽으로 발생한 생각들도 있지만 은혜로부터 멀어지고 우리가 이 세상에 미혹되다보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생각들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고개를 들고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확신을 가져다 줄 때도 있습니다. 이것들을 붙들고 살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우리를 구원하셨던 하나님의 계획과 예수의 형상을 우리 안에 빚으려고 하는 하나님의 본래의 목적으로부터 이탈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에게 일평생 붙들고 살아온 신념과 성경의 진리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두 가지를 어기게 되었다면 신념을 가지고 일평생 살아온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웃이 어겼을 때 더 분노를 느낄까요? 자기가 붙들고 살아온 신념을 어겼을 때 더 많이 분노를 느낄까요? 후자입니다. 자신의 신념과 다를 때는 분노하면서 교회 안에서 하나님 말씀을 지키지 않고 악을 행하는 일들에 대해서는 분노를 하지 않습니다.
어느 집회에 갔다가 우리 교회를 오래 전에 떠난 지체를 만났습니다. 반가워하지 않고 굉장히 계면쩍어 하여 다독거리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가지 이야기의 결론은 현재 담임 목사님의 설교가 개판이라는 것입니다. 그 자매가 바로 몇 해 전에 똑같이 제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고 변화를 받으면서 떠날 때는 목사님 설교는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하며 떠난 자매였습니다.
개척할 때 방배동에서 지하실 실평수가 25평 밖에 안 되는 공간에서 280명이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드리다가 기절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으니까 열악한 상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간절히 기도하다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큰 교회에 사글세로 이사 가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온 성도들이 기쁨으로 이사 가는데 바로 그때 교회를 떠나겠다고 도전하는 형제가 있었습니다. 이유는 지하실 교회에서 큰 예배당으로 이사 가는 것이 하나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하나님께서 목사인 나에게 아니라고 가르쳐주지 청년인 그 형제에게 가르쳐주어 목사와 맞서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던 그 형제가 옮겨간 그 교회에서 똑같이 4년 만에 목사님 설교 비판하다가 교회를 떠났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아도 자기 부인이 없는 삶은 마지막으로 가는 곳이 하나님과 맞서고 진리로부터 멀어져 침륜에 빠지는 생활, 그 이상은 없는 것입니다. 모두 하찮은 사람들입니다. 그 후로 저는 목회의 길을 걸어오면서 놀라운 상식을 깨달았습니다. 어떤 이유로 교회를 떠나는 사람은 오기 전의 교회에서 똑같은 이유로 그 교회를 떠났고 은혜에 의한 놀라운 변화가 없는 한 숙명적인 고리는 끊어지지 않고 다음의 교회에서도 똑같은 이유로 교회에 상처를 주며 여기저기 떠돈다는 사실입니다. 마지막 있던 교회를 떠나면서 열린교회를 떠난 것은 지금 와서 생각하니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의 삶은 오래 예수를 믿어도 거의 성화의 흔적이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자신이 아주 탁월하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궁극적으로 그의 본성은 바뀌고 변화되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편견이고 사람을 사로잡고 있는 아집입니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교회에 표어를 정하여 걸어놓는 것입니다. 가정에도 가훈이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제일 짜증나는 일은 인터뷰할 때 목회철학이 무엇이냐고 질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지 그중에서 어떤 것을 빼내어서 극단화하는 것이 어떻게 목회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 철학이 성경 위에 있을 수 없습니다. 저는 이런 질문을 집요하게 하는 기자에게 ‘태멘’이라고 말합니다. 창세기1장1절의 ‘태초’의 ‘태’와 요한계시록 22장21절의 ‘아멘’의 ‘멘’입니다. 15년 동안 나와 같이 있으면서 금년의 목표 그런 것 본적 있습니까? 다 쓸데없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 진리 이외에 ‘나는 이것이다’라고 붙들고 사는 것은 진리가 없는 이 세상 사람들이 허접하니까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있는 진리도 다 못 붙들고 살고 어차피 그렇게 살지도 못할 텐데 무엇을 만듭니까?
여러분들이 신앙생활하면서 친구들 중에서도 유난히 신념이 강한 사람들하고는 사귀지 마십시오. 신앙적일 가능성이 별로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늘 깨뜨려져서 신념이 별로 없는 사람들과 사귀십시오. 그 사람들 속에는 하나님 말씀이 굳건히 서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어린아이처럼 살 능력이 없으니까 하나님께 나를 도와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며 말씀대로 살 수 있는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연봉 10억 못 받는다고 해서 인생이 꼬인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이런 것들을 부인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기쁘신 일들을 실행하시면서 우리에게 소원을 품게 하십니다. 소원의 본질은 욕망입니다. 욕망을 품게 하셔서 우리로 당신의 뜻을 이루어가게 하십니다. 우리 안에서 항상 선한 욕망만 일어납니까?
어느 교회 집회를 갔는데 식사를 대접하던 장로님께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이야기했습니다. 결혼 전에 열렬하게 쫓아다녔던 자매가 있었는데 35년이 지난 얼마 전에 그 자매로부터 전화가 왔다고 합니다. 그 자매는 장로님의 동정을 근거리에서 지켜보아서 잘 알고 있다는 말을 하며 만나자고 하는데 예전의 감정이 확 밀려왔지만 바로 그때에 성령께서 장로님에게 “얘야, 너는 장로다.” 말씀하셨다고 하면서 그 말이 속에서 울려 퍼졌답니다. 그러나 저는 성령님의 말씀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양심이 찔린 것입니다. 만나자고 하며 교회로 오라고 했더니 안 왔다고 합니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예전의 애인에게 연락이 오면 다시 연결이 될 가능성이 80%이상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자기 부인입니다.
선한 사람은 결정적인 순간 진리의 생각과 사사로운 생각이 충돌을 일으킬 때 아닌 것을 거부하는 것, 사사로운 욕망과 선한 욕망이 함께 일어날 때 사사로운 욕망을 아니라고 거부할 수 있는 용기 이것이 바로 선한 사람의 특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특징은 죽여도 꺾이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끊임없는 욕망이 일어나는데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이것을 굉장히 의미 있고 중요하며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선한 것이라고 평가를 내리고 옹호하는 것입니다. 데카르트의 명제를 적용하여 말한다면 “나는 욕망한다. 고로 존재한다.” 겨우 욕망을 통해서 자기가 존재하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데 욕망을 부인하는 것은 자기 존재에 대한 부정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얼마나 황당하고 무서운 사상인지 생각해 보세요.
자기 부인이 없으면 무서운 사람이 됩니다. 오늘날 교회는 회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꺾어지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고 회심은 어떻게 했지만 한번 꺾어졌을 뿐 그 이후 성화의 삶을 살면서 예수님의 큰 사랑 앞에서 자기를 꺾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죽이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성도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습니다. 이름은 성도이지만 실제의 삶은 성도가 아닙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자기 부인이 없는 속에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우리들이 자기의 욕심을 따라 자기의 생각을 무조건 옳다고 두둔하며 하나님 말씀의 점검이 없이 살게 되면 결국 막된 삶을 계속 살게 됩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끊임없이 결혼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이혼을 하고 가정생활을 영위해가지 못합니다. 실제로 주위에서 젊은 청년들을 만나보면 저의 판단으로 열 사람 가운데 네 명은 결혼생활을 절대 지속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아주 탁월한 배우자나 아주 좋은 환경을 만나면 그런 잘못된 인자가 발동이 안 되는 채 행복하게 인생을 마칠지 모르겠지만 만만하게 모든 환경들이 그렇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인자들이 발동을 해서 자기 부인이 없는 삶에 마지막 결국이 어떠한가 하는 것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읽고 묵상하는 이유는 어떤 의미에서 자기 부인을 하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최근에 여러분은 너무나 그 일을 하고 싶은데 예수님 때문에 참아 본 적이 있습니까? 참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할 정도로까지 참아 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이제 거의 자기 부인이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B. 자기 십자가
많이 예수를 믿어도 주님의 형상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또 하나 우리에게 가르친 삶의 비결은 십자가를 진 삶입니다.
십자가는 원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니고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이것을 십자가라고 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각자 지워진 십자가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지신 십자가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관련을 갖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십자가라고 바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간다고 표현하는데 사실은 주님이 지신 십자가는 주님만이 지실 자격이 있는 십자가입니다. 주님만이 그렇게 하실 십자가입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거나 그분이 지신 십자가의 고난을 나누어 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여기서 말하는 십자가를 지는 삶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적용된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는 하나의 상징이며 비유입니다. 나무로 만든 예수님을 매달아 죽인 십자가라는 의미와 상징의 핵심이 그대로 유지된 채 우리에게 비유로서 다가오고 있는 표현입니다.
이 십자가는 예수님이 우리를 성숙시켜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도록 우리를 자라게 하기 위하여 주님이 사용하시는 모든 괴로움과 고통, 시련과 역경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는 절대적인 십자가와 상대적인 십자가가 있습니다.
1. 절대적인 십자가
추호도 자기의 잘못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과 그리스도, 진리 때문에 당해야 하는 고난의 십자가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를 절대적인 십자가만을 지셨던 유일한 분이 이 세상에 한분 계시는데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그분은 자신 속에 어떤 잘못이나 죄가 없으신 분이었고 일체의 사적인 욕망도 없으신 분이었기 때문에 그분은 자기를 온전히 내어주는 삶을 사셨습니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낮고 천한 세상에 내려오신 이유로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는 그 순간까지 그분은 온전한 사람의 삶을 사셨고 자기의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이 끊임없이 자기의 것을 내어주는 완전한 자기 비움의 생애를 사신 분이었습니다.
그분이 한 일이라고는 방황하는 자들을 끌어안고 그들을 진리로 가르치고 고통 받는 자들을 위로하고 병든 자들을 고치시고 주린 자를 먹인 일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하여 자기를 다 버리신 삶을 사셨습니다. 그것이 그분이 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분에게 끊임없는 십자가의 고통이 있었고 마지막에 그 고통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나타난 이유는 이 세상 사람들이 진리를 미워했고 빛이신 그리스도 생명이신 그분을 싫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망이 좋아서 생명을 버리고 어두움을 사랑하여 빛을 미워했고 비진리를 옹호하기 위하여 진리를 거절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절대적인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에서 화목제물로 죽으셨습니다.
성경 속에서도 이런 절대적인 십자가를 자기들의 생애 속에서 순간순간 졌던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구약에서 오직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헌신했던 모세는 자신의 생애 대부분 당했던 모든 고난이 이런 절대적인 십자가였습니다. 자신의 소명 때문에 아무것도 자신의 것이라고는 챙기는 것이 없이 백성들에게 끊임없이 박해와 도전, 배반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 백성을 이끌고 가기 위하여 그는 하나님의 집에서 생명이 다하기까지 충성하며 고난을 받았던 사람이었으니 그가 진 대부분의 십자가는 절대적인 십자가였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 말씀을 받아서 그 진리를 피 뿌리는 외침으로 외치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 수많은 선지자들, 어떤 사람은 참수당하고 어떤 사람은 유배를 당하고 어떤 사람은 톱으로 몸을 켬을 당하는 비참한 고난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진 십자가는 하나님의 진리를 어두운 시대에 외친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박해를 한 절대적인 십자가였습니다. 오순절의 성령이 강림하고 나서 사도들이 받았던 고난도 대부분 절대적인 십자가였습니다. 나무에 매달려 죽은 예수 그리스도가 너희의 죄를 위해서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 그리스도였다는 사실, 그 사실을 외쳤다는 이유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을 때리고 박해하고 피 흘려 죽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커다란 십자가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었던 사도 바울도 이런 십자가를 지며 일생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두 가지 강력한 편견이 있었으니 하나는 예수는 그리스도일 리가 없다는 것이었고 유대인 이외에 모든 사람들은 다 더러운 하나님의 선택과 구원과는 상관이 없는 백성들이라는 오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깊이 변화를 받고 그는 두 가지 편견에서 자유로워진 이후에는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복음에 대해서 빚진 자로 자처하며 복음을 들고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찾아가며 고난과 역경의 가시밭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2. 상대적 십자가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에게 이 십자가는 절대적인 십자가만이 아니라 상대적인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는 순수하게 하나님을 위해 받는 고난이라기보다는 자기의 죄와 허물, 인격적인 모남 때문에 당하는 고난을 의미하는데 십자가로 부를 수 있는 이유는 이 고난을 당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보므로 자기 성숙의 기회로 삼을 수 있을 때에만 이것을 십자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고난과 어려움, 잘못된 죄와 악, 편견과 오만, 다듬어지지 않은 인격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이 세상에서의 끊임없는 마찰과 고통은 자신에게 부메랑이 되어 끊임없이 돌아오고 그는 끊임없이 연단을 받으며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이것은 모두 자신의 허물 때문에 당하는 것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그것을 십자가 삼아서 하나님이 그를 예수의 형상 본받기까지 변화시키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범죄 한 후에 하나님은 이후에 일어날 모든 일들을 예고하시면서 그의 시련과 파란으로 얼룩질 말년의 생애를 하나님께서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다윗이 지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보복이라고 생각하지만 징계라고는 말할 수 있어도 보복이란 말을 사용할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큰 섭리 속에서 다윗의 타락을 허용하시고 타락한 후에는 그에게 내리시는 징계를 통해서 말년에 이런 고난이 없었더라면 아사나 히스기아 등등의 임금과 같이 교만하고 미끄러질 사람을 불같은 시련 속에 살게 하시므로 끊임없이 주님을 닮아 변화되도록 만드셨습니다.
고난이 넘치던 어느 시기에 시인은 그런 큰 고난을 통해서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자기 뱃속으로 낳은 자식들이 서로를 찔러 죽이고 피바다가 되는 고통스러운 왕자의 난을 경험하고 자기와 함께 동침하던 후궁을 자기의 뱃속으로 낳은 아들이 백주에 그와 함께 동침하므로 자기의 얼굴에 먹물을 끼얹는 것 같은 수치스런 치욕을 온 백성 앞에 당해야 했습니다. 자기의 품에서 어린양 같았던 백성들이 자기에게 욕하고 저주하며 흙을 뿌리고 돌을 던지며 침을 뱉었습니다. 그런 끔찍한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 이 모든 것들이 자기의 죄와 허물 때문에 당하게 된 것이었지만 그것을 통해서 시종일관 하나님을 바라봄으로서 자기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가는 훌륭한 성화의 기회로 활용하였던 것입니다.
그런 괴로움과 고통이 넘치던 어느 날에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해 쌓아두신 은혜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주께서 저희를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구설의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견고한 성에서 그 기이한 인자를 내게 보이셨음이로다. 내가 경겁한 중에 말하기를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 하였사오나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셨나이다.”(시31:19-22)라고 노래하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기 아들이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서 자기를 죽이려고 급습하였을 때 벗은 발로 감람산으로 울며 도망치면서 하나님 앞에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습니다. 많은 사람이 있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오 나의 영광이시오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나의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시3:1-4)라고 노래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인격적인 허물과 악으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그 고난을 자기 성숙의 기회로 삼아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을 것임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는 구약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피 뿌리고 죽어갔던 수많은 선지자들이나 위대한 종 모세나 그리스도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순교의 길을 걸어갔던 사도와 같이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십자가를 질 때보다는 상대적인 의미에서 십자가를 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때든지 이 고통은 우리 안에서 소화가 되면 영혼의 양약이 되지만 소화가 되지 못하면 우리의 영혼을 끊임없이 파괴하고 인간성을 망가뜨리고 우리의 육체를 훼손하는 끔찍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것이 어떤 종류의 십자가이든지 견디기 힘든 고통과 시련에 직면하게 될 때 우리는 그런 고통의 원인을 제공했던 사람이나 상황을 생각하며 원한을 품고 복수를 꿈꾸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고 자신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런 끔찍한 고난과 시련을 많이 당하고 괴로움이 넘치는 그때에 그리스도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III. 예수의 죽음에 참여함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지신 그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비록 그 분은 절대적인 십자가를 지고 우리의 죄를 위해 고난을 당하셨고 우리는 우리의 허물과 잘못으로 말미암아 당하는 십자가라고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그 순간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는 신비적인 연합의 경험이 일어나게 됩니다.
내가 당하는 끔찍한 십자가의 고난 속에서 믿음으로 눈을 들어 그리스도 예수를 바라봄으로서 이 천년 전에 우리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의 죽음이 우리의 영혼 속에 스며들어오게 됩니다. 죽음의 기운이 육체를 삼킬 때 육체를 생명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급기야 육체의 생명이 완전히 박탈당할 때 죽음의 상태에 이르게 된 것처럼 우리의 영혼에 예수 죽음의 기운이 끊임없이 스며들어 올 때 죽어가는 생명을 발견하게 됩니다. 생명이라고 하는 이름 가진 모든 것은 죽음에 항거하는 것이니 그리스도의 죽음의 기운이 우리 영혼에 엄습할 때에도 살고자 몸부림치는 생명들이 있으니 사실 이 생명은 참 생명이 아닌 거짓 옛 자아의 생명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의 죄를 위해 매달린 십자가, 우리를 위해 그 십자가를 사랑으로 감당하시면서도 우리를 일체 원망하지 않으셨던 절대적인 고난과 희생의 십자가를 보면서 우리는 예수 죽음의 기운이 우리 속에 스며들어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 안에서는 살아서는 안 되는 것들이 아직 살아있는 것이 예수 죽음의 기운을 통해서 발견됩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하는 비결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3가지 가장 커다란 비전을 가지고 있었는데 모두 그리스도와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기를 원했고, 부활의 권능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 했고, 마지막으로 가장 높은 단계의 신비인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 했습니다. 예수의 죽음과 고난에는 동참할 수 없지만 예수의 고난에 나 자신에게 지워진 십자가를 통하여 참여하는 것은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나 사이의 신비적인 연합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의 기운이 밀려들어올 때 예수 죽인 것을 짊어지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서 예수의 생명이 자기 안에 나타나는 아주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사는 놀라운 고난의 비밀을 통해서 그는 예수를 닮아가는 비결이 무엇인지를 터득했고 이전에 자신이 지니고 있었던 혈기와 교만과 하나님을 향한 불경과 모든 것들로부터 해방되어 예수의 형상을 지닌 사람이 되었고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예수의 사랑에 사무쳐서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고난을 생각하며 자기에게 당한 십자가의 고통을 잊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끊임없이 짊어지는 자신의 십자가를 통해서 자기보다 더 큰 십자가를 지고 죽은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에 함께 참여하였습니다. 자기의 십자가와 예수의 십자가는 달랐지만 죽음은 동일한 것이었기 때문에 자기 십자가를 짊어짐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에 참여하였던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자신은 끊임없이 십자가에 못 박혀 있을 수 있었고 그것 때문에 자기 안에 예수는 충만하게 사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을 생각해보십시오. 사도 바울 못지않게 구원의 놀라운 은혜를 입은 우리들임에도 불구하고 기적과 같이 우리의 생애 한순간 한순간을 붙드는 주의 가슴 저미는 사랑과 보호와 인도 속에서 살아온 우리의 일생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기 위해서 예수를 죽이는 일을 순간순간 얼마나 서슴없이 저지르고 있습니까? 자아를 죽인 피를 우리 손에 묻히고 하나님께 그 손을 들고 기도해야 할 우리의 손에는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죽임 당한 그리스도 예수의 피가 묻어있고 우리는 우리 안에 충만히 살아서 예수 때문에 덕보고 예수 희생을 딛고 우리가 자아를 실현하고 성공하려고 하는 어리석은 꿈을 꾸고 있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보기를 바랍니다.
그러는 동안에 우리의 자아는 우리에게 왕 노릇하고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로부터 점점 멀어져 어디에서도 예수의 기운을 느낄 수 없는 사람들이 되었고 사람의 확신은 우리의 마음에 가득 찼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진정한 신앙 신념은 사라진 시대에 우리들이 살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향해 말할 수 없이 완고하고 강인함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향해서는 가련할 정도로 비굴해서 언제든지 이 세상의 욕구에 굴복하며 세상을 본받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복음은 왜곡되지 않고는 우리의 입맛에 맞을 수 없게 되었고 우리가 온 마음을 다해서 삶을 보여주어도 그것은 이 세상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결코 닮고 싶지 않은 어리석은 것이 되었습니다. [뉘게나 있는 십자가 내게도 있도다]
우리가 비록 한때 복음을 알고 그 사랑에 깊이 사무쳐 태산과 같았던 우리의 자아가 무너진 적이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얼마나 완고한 인간인지를 하나님이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등에서 결코 십자가를 거두지 않으십니다. 잠시 이 십자가를 팽개친 사람의 삶은 한가하고 여유로워 보일지 모르지만 십자가를 팽개치고 삶속에서 느꼈던 평안보다 더 큰 고통이 십자가를 벗어 버린 데서 온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그 자체가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하기를 ‘사람이 역경에 처했을 때에는 그 역경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몸부림치고 고통 하지만 순조로운 환경에 있을 때에는 또한 역경에 처할 까봐 두려워하며 근심함이 어차피 살아있는 그 자체가 시련이 아니겠나이까?’ 하며 노래하였던 이유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매 순간 자기에게 지워진 십자가를 감당하면서 그것을 짊어질 힘이 자기에게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십자가 그 자체가 우리의 혈기 있는 육체가 싫어하는 죽음의 기운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붙잡고 있는 동안에는 십자가를 감당할 수 있지만 어느 순간에도 은혜가 우리를 놓기만 하면 우리는 이 십자가를 지기가 싫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의 복 대신 십자가를 주십니다. 이 세상의 복은 영혼을 살게 하는 힘이 없지만 십자가는 영혼을 살게 하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십자가를 주십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 앞에 온전히 살고자 분투할 때 그는 자기가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임을 고백하고 되고 매순간 십자가의 고난을 상쇄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기쁨이 주어지지 않으면 십자가를 지고 나그네 인생길의 노중에서 쓰러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십자가의 고난을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주셨습니다. 이 십자가는 나에게 지도록 주신 십자가이기 때문에 나는 비록 고통스러워도 그 자리에서 십자가를 질 때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도록 우리를 끊임없이 부르지만 자기를 부인하기 싫어서 십자가를 지고 죽기 싫어서 하나님 앞에 몸부림치는 동안 우리는 살고 예수는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못 박혀 죽어갑니다.
Ⅳ. 결론: 예수의 형상을 본받기까지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십자가로 돌아가야 합니다. 누구도 믿음의 길을 십자가 없이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십자가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때로는 기쁘고 행복한 일이 있고 혹은 가진 것이 많이 있어도 그렇게 가진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하나씩 내어버릴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됩니다.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십자가를 통해서 깨닫게 되고 감사하고 기쁜 일이 이 세상에 종종 일어나도 여기가 우리의 영원한 고향은 아니고 십자가를 벗을 수 있는 마지막 종착역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칼빈 선생이 말한 바와 같이 십자가를 짊으로서 우리는 이 세상을 경멸하면서 하늘나라를 향한 소망을 갖게 되면서 그리스도를 따라 갈 수 있는 사람들이 됩니다. 누구에게나 이런 십자가가 있게 마련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우리가 매일매일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우리 자신은 질 수 없는 십자가이므로 주님을 붙들었던 그 은혜가 우리도 또한 붙들어주시도록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의 짐을 지고 걸어가는 고단한 인생길에서도 은혜를 주시도록 기도하고 간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의 형상을 본받기까지 우리의 가는 길은 끊임없는 십자가의 길이고 주님은 이런 십자가를 짊어지고 걸어가면서 끊임없이 꺾이고 변화되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길을 갈 수 있게 되기를 하나님이 너무나 원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에게 말합니다. 끊임없이 주님 앞에 꺾이십시오. 주님 앞에 낮아지십시오. 급기야 자기가 살아있고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될 때마다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그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신 순간부터 나의 인생은 덤으로 사는 인생이기 때문에 나는 내 인생에 대해서 주권이 없음을 고백하십시오. 주님이 필요하시다면 이보다 더 큰 고난의 길, 주님이 내 안에 충분히 사실 수 있다면 이것보다 더 극심한 고통의 길을 걸어가서 나는 죽고 주님은 내 안에 충만히 사시도록, 그래도 나는 손해 보는 것이 아니라고 주님 앞에 고백하십시오.
날마다 내가 중요하게 여겨질 때마다 마음속으로 외우십시오. “I am nothing.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그 죄에서 나를 건져주신 그 순간부터 이미 나는 나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내 안에 있는 분이고 나는 내 안에 없는 나입니다.” 라고 고백하고 믿음의 길을 다시 걸어갈 용기를 가지십시오. 산처럼 큰 시험도 물러가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여러분들을 지켜주시는 것을 경험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