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떠나지 말라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눅15:11-32)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부분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탕자의 비유입니다. 15장에는 세 부류의 잃어버린 자들이 나옵니다. 그 한 부류의 잃어버린 자는 어떤 부류냐 하면 연약해서 잃어버린 거죠. 그러니까 의지가 있어서가 아니라 연약해서. 그리고 그 다음은 드라크마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거는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이 잃어버린 거예요. 이 세 번째 나오는 이 비유는 스스로 자기가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하나님을 하나님 앞에 잃어버린바 된 존재, 이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잃어버린 자들이 되었는가 하는 것들을 돌아보아야 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주시는 그 은혜와 사랑을 저버리고 우리가 세상으로 돌아가면 돌아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아버지가 원하시는 바는 아버지의 집에 영원히 거하면서 아버지를 사랑하고 그 아버지와 관계를 맺으면서 아름다운 아버지와 아들과의 그리고 아버지와 딸과의 그런 관계를 가지면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너무나 원하시는 것이지만 그러나 의지를 가지고 나는 싫어, 나는 신앙이 싫어, 나는 아버지 싫어, 그리고 세상을 향해 가면 갈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은 신앙적으로 하나님을 떠나거나 혹은 아버지의 집에 있다고 해서 모두 찾은 자가 아닙니다. 그렇죠? 아버지의 집에 있어도 얼마든지 잃어버린 자가 있는 거죠. 이 큰 아들을 보십시오. 아버지의 집에 있었지만 아버지의 집에 있는 진정한 기쁨이 무엇인지를 몰랐습니다. 아버지의 집에 있었고 아버지를 섬겼습니다. 그렇습니다. 열심히 일했고 봉사했고 아버지의 집을 위해서 동생이 먹어버린 재산을 벌충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우리가 깨닫게 되는 바는 이 아들이 동생이 아니라 이 형, 아버지의 집에 있었던 또 다른 아들이 그야말로 하나님 앞에 잃어버린바 된 진정한 의미의 잃어버린바 된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오늘 우리는 여기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 안에는 사실은 이렇게 실제로는 하나님 앞에 잃어버린바 되었는데 명목상 교회에 남아있는 이런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는 더 소망이 없는 탕자일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집에 순종하며 사는 것 같지만 아버지를 기뻐하지도 않고 그리고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도 못하는 이 큰 아들과 같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아버지는 사랑하는 아들이 돌아오자 한없이 기뻤습니다. 그러나 큰 아들은 아버지의 그 아들을 향한 뜨거운 마음과 사랑의 심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 앞에 잃어버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타락의 길을 걸어가고 그러면서도 마음에 공허한 가슴을 안고 어떻게 살아야 될지를 모르며 방황하고 있는 그 사람이 오히려 더 희망이 있고 소망이 있는지 모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집을 나간 이 자식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왜 이 아들이 집을 나갔을까요? 그가 집을 나간 것은 아버지를 향해서 마음을 지키지 못하였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버지는 인자하고 이해심이 많은 아버지였고 재산도 꽤 가지고 있는 아버지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아버지의 집에서 얼마든지 그 인자한 아버지와 행복하게 관계를 맺으면서 보람 있게 일하며 살 수 있는 처지에 있는 존재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음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에 만족할 수 없었고 아버지와 함께 관계를 가지며 살아가는 이 가정생활에 진정한 만족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아마 그도 이전에는 감히 아버지의 재산을 갈라서 허랑방탕하게 이국의 땅에 가서 다 써버리고 이러한 고생을 하면서 이렇게 비참한 처지가 되는 것을 꿈꾸어 본적 없었을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분명히 처음부터 이런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꿈꾸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방의 나라, 이 답답한 땅이 아니라 이 고향 어디가도 내가 누구 아들이라고 사람들 마음에 다 찍혀있는 이러한 인간관계 이러한 어울림, 이러한 교제, 이러한 속박에서 벗어나면 분명히 뭔가 자유로운 나라가 있을 것이라고 하는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아버지의 간섭 없이 아버지의 참견 없이 주위의 시선에 아랑곳 하지 않고 한번 독립적인 자유인으로서 마음껏 자기의 자기가 누릴 수 있는 자유를 누리며 살아보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꿈을 꾸기 시작하자 그 꿈은 점점점점 커졌습니다. 그리고 그 꿈은 점점 열매가 매달리면서 탐스러운 열매를 자신에게 보여주는 그러한 나무로 변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한번 그랬으면 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것은 좀더 구체적인 꿈으로 자신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러한 자유에 대한 꿈을 꾸게 되자 그는 이제 자신의 이 삶이 속박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옆에 계신 것도 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되는 것도 그가 사랑의 마음으로 자신의 모든 일에 참견하고 그리고 자신의 일을 돌보아주시는 것조차도 자기에게는 그것이 구속이요, 속박이요, 고통이 되었습니다. 어쨌든 그는 자유롭게 살고 싶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그 집을 떠났던 동기였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여러분 자유를 꿈꾸고 그리워한 이 아들이 결국은 아버지의 사랑을 속박으로 여기고 돌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신자의 타락은 육체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 우리의 삶으로 나타나기 전에 먼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버리는 일이 먼저 나온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신앙생활을 하고 목회를 하면서 정말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우리의 마음을 지키라고 당부하셨는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여러분들은 얼마나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마음속에 허탄하고 더러운 생각이 들 때에 여러분 마음의 고개를 흔들면서 마음속에 들어오는 악한 생각을 떨쳐버리는 마음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이 여러분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에 가슴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주여 내 마음을 도우소서. 여러분 자신의 마음을 지키고 있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을 떠난 것이 자유처럼 여겨질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이 어떻게 자유일 수 있겠습니까?
(예화) 부산에 집회를 내려가면 꼭 한번쯤은 바닷가에서 생선회를 먹습니다. 사주니까 먹지요. 근데 너무 피곤하니까 다 쫓아다니는 것도 싫고 그냥 숙소로 돌아가게 해달라는데도 아 그러시면 되냐고 하고 차에다 실고 한 시간을 넘게 가가지고 해운대 저기 끝에까지 맨 끝에 동네까지 갔어요. 꼭 이런데 안와도 괜찮은데 생각해 준다는 게 생각해 준 게 아니에요. 근데 고기가 말이죠, 이 어항에 이 수족관에 고기가 있잖아요. 바다에서 잡아온 고기가. 그 크고 큼지막하고 묵직한 고기는 밑바닥에 가만히 누워있어요. 그래서 그 광어나 도다리 같은 건 밑에 딱 누워 있단 말이죠. 근데 쬐그만 고기들은 뒤에서 까불고 다닌단 말이죠. 그러다가 펄쩍 뛰어요. 그리고 물 밖으로 뛰어나와요. 그러면 얼마나 자유가 얻고 싶었으면 물 밖으로 뛰어나왔겠어요. 아 이 답답한 수족관에서 나는 살수 없어. 팔짝 뛰어나왔지만은 그러나 땅 바닥에 떨어지고 나니까 뭐가 좋아요. 지나가는 사람이 없으니까 말이죠, 그냥 뛰어 나와 가지고 그렇게 죽겠다고 몸부림치면서 살려달라고 입을 펄럭 펄럭 하는 거예요. 이거 언젠가는 지나가다가 주인보고 말했어요. 이거 고기 한 마리 튀어나왔다고. 여러분 물을 떠난 고기가 살 수 있어도 하나님을 떠난 하나님의 자녀가 살 수 있겠습니까? 자유를 꿈꾸고 좋은 것을 꿈꿨던 이 아들을 보십시오. 그래요 그 자유가 허락되어서 이제 아버지의 재산을 나누어 가지고 주머니에 보증수표로 바꿔가서 뒷주머니에 꽂아놓고 그리고 여행가방 하나 들고 그 지긋지긋하고 속박처럼 느껴졌던 아는 사람도 지겹게 많은 맨 날 고향에서는 자기 흰머리가 희끗희끗 나도 어린애 취급하잖아요. 그런 것 다 떨쳐버리고 이제는 자유인으로서 돈도 많겠다, 시간도 있겠다, 젊음도 있겠다, 아무도 없는 자유로운 나라로 나아갈 때에 얼마나 행복하고 쾌재를 불렀겠습니까? 아마 이 사람은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리고 다시스로 가던 요나와 같이 자유로움을 누렸을 것입니다. 그렇게 신나는 여행, 그 말할 수 없는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을 때에 그는 아버지의 집을 떠난 그 마음이 결국은 이 사람을 완전히 아버지의 집을 떠나게끔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이 무슨 싸움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결국은 신앙은 어떤 의미에서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수시로 하나님 앞에 변하는 우리의 마음을 다잡아 하나님 앞에 우리의 마음을 지키려고 애를 쓰고 그리고 날마다 자기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많은 자유가 나를 불려도 그러나 나의 즐거움은 여호와께 있으며 나는 여호와를 떠나서 어디로 가겠는가? 여호와만이 나의 기업이시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은혜의 땅에서밖에는 내가 보람을 얻을 데가 없나이다 하는 신앙의 고백으로 자기의 마음을 지키면 이런 고난을 당하면서 아버지와의 관계도 끊어지고 시련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는 자리로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을 지키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게 마음을 지키면서 살아갈 때에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 속에서 멀어지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기억해야 됩니다. 이 아들이 아버지를 떠났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커다란 고난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놀라운 자유였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는 잠깐이었습니다. 잠깐 맛본 자유, 잠깐 맛본 쾌락, 잠깐 맛본 이 세상의 즐거움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고 그 짧은 즐거움과는 비교도 안 되는 긴 고통과 쓰라림이 그에게 밀려왔습니다. 결국 진정한 자유를 그렇게 갈망하던 이 사람의 선택에 대해서 세상이 가져다 준 것은 자유를 얻기 위해서 떠났지만 마지막에 찾아 온 것은 처절한 고독이었습니다. 돈이 없어졌습니다. 친구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차피 그 사람에게 인격적으로 마음은 준 관계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신자가 하나님을 떠나서 세상에서 얼마나 좋은 친구를 사귈 수 있겠습니까? 신자가 하나님을 떠나서 이 세상에서 얼마나 마음을 터놓고 지낼 수 있는 진실한 벗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업이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진정한 인간관계도 이 하나님의 집,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서 진정으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화) 제가 그래요. 어느 날 누워서 가만히 생각하니 내 친구 누구 있나? 생각했어요. 옛날에는 참 많았어요. 옛날엔 참 많았는데 그런데 어느 날 이렇게 들여다보니까 아무 것도 없어요. 아무도 친구가 없어요. 그나마도 학교에서 교편을 잡는답시고 나오라고 그렇게 수없이 전화오고 엽서가 와도 한번도 안 갔더니 이젠 아예 편지도 오지 않고 엽서도 오지 않고 자기네끼리 모이는 신세가 되었어요. 그러면서 잃어버린 것이 참 많구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즉시 그것이 얼마나 잘못인가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 우리는 많은 관계들을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런 많은 관계들을 잃어버렸지만 자유를 포기하고 나니까 하나님의 은혜에 붙잡혀 살기를 소원하고 나니까 많은 관계들이 생겨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은 이 관계를 즐기고 있습니까? 믿음의 생활을 하면서도 여러분 고독하다고 생각하고 외롭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어떤 의미에서든지 성령이 여러분들에게 준 생각이 아닙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주님의 놀라운 은혜를 맛본 사람들이 이렇게 세상의 자유는 잃어버렸지만은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서 자유를 맛보며 주님 이렇게 많은 관계를 주셨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을 주었고, 우리의 동료들을 주었고, 신앙의 동지들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진실하게 믿는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아름다운 분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상처를 많이 받고 고통을 받던 그때에 되찾은 신앙이고 돌아온 아버지의 집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지체, 우리의 형제들도 또한 우리와 동일한 고통과 아픔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또 찾아서 만났고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면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동병상련의 아픔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에 있는 사람들보다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녀들이 훨씬 더 서로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그 마음이 변하여 하나님을 떠나려고 하는지도 우리는 경험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성령이 충만하고 은혜가 충만한 형제, 자매들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식어지고 하나님을 떠나려고 하는 연약한 지체들의 마음도 헤아리고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믿음을 지키면서 살아가려고 애를 쓸 때에 세상이 얼마나 우리를 실족시키기 위해서 치열하게 도전하는지도 경험했습니다. 유혹도 받아봤고 범죄 해 보기도 했고 영적인 침체 속에서 고통 하는 괴로움도 맛보기도 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지체들뿐만 아니라 시험에 들고 여전히 세상을 향한 사랑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불쌍한 지체들의 마음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충만하던 그렇지 못하던 눈물을 흘리며 고통 가운데 있던 충만한 은혜로 기쁨 가운데 생활하던 우리가 서로 사슴처럼 기대며, 고통을 위로하고 아픈 마음을 싸매고 그렇게 살아가야지만 이 아들처럼 세상의 자유를 향해서 가보고 싶은 마음이 안 든다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든지 하여튼 교회 생활은 행복해야 되요. 할렐루야. 어떤 의미에서든지 교회 생활은 행복해야 되요. 그래서 말이죠, 여러분 우리는 말이죠, 늘 하나님 앞에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살아야 되는 거예요. 내가 이제 세상은 돌아갈 수 없고 돌아갈 수 있는데 돌아가면 이렇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 떠나면 그럼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불쌍하게. 그 고백이 이거에요.
나 주를 멀리 떠났다. 이제 옵니다. 나 죄에 길에 시달려 주여 옵니다.
자유를 찾아 나갔는데 시달림 밖에는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 행복을 찾아 나갔는데 죄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세상으로 나아가면 이 아들이 마지막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쥐엄 열매를 먹어야하는 그 고통, 피를 말리는 고통의 자리에 있게 되는 것처럼 우리도 그런 자리에 갈 수 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찌하든지 이 아들과 같은 삶이 아니라 우리 모두 탕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사람들이 아닙니까?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중에 누구도 장담할 사람 없습니다. 우리 모두 이전에 탕자와 같은 사람이었고 또 지금도 탕자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있고 잘못하면 큰 아들과 같이 더 소망이 없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와의 관계를 즐거워 할 수 있는 은혜를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있는 성도들인 여러분들을 보고 즐거워하시는 것처럼 여러분들도 아버지를 향하여 즐거워 할 수 있는 마음을 배워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연약한 지체들을 향해서 얼마나 마음을 쓰고 있습니까? 여러분 그 지체들의 교회생활, 그 지체들이 누리는 성도의 교통이 얼마나 행복한가 하는 것을 성도들에게 깨닫게 하기 위해서 여러분은 남을 얼마나 섬기고 있습니까? 돌아보고 있습니까? 연약하고 마음이 상하고 돌아갈 수 없는 나라의 자유를 그리워하는 연약한 지체들에게 오히려 진실한 신앙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생각나게 해주고 그리고 아버지의 집에서 함께 즐거움을 나누며 주님을 경배하고 아버지와의 관계를 맻으며 살아가는 이 기쁨이 얼마나 큰 가하는 것을 알려주는 일을 위해서 여러분들은 얼마나 연약한 지체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섬기고 있습니까? 여러분도 마음이 빼앗기고 마음이 원해도 여러분의 마음이 여러분의 것이 아닌 것처럼 또한 그렇게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믿음의 자리에서 마음이 떠날 때가 너무나 많았지요? 그때마다 여러분,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의 마음으로 지체들을 섬기면서 그 마음이 탕자의 마음과 같이 되어서 아버지를 떠나지 않도록 우리가 섬길 수 있는 사람, 그런 마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아들이 아버지를 떠나자 맛보게 된 것은 커다란 고통밖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쓰디쓴 고통과 그리고 마음 아픈 그 모든 고통의 열매 밖에는 없었습니다. 쥐엄 열매조차 먹고자 할 때에 주는 사람이 없어서 이제 돼지우리를 기어 다니는 신세가 되었을 때, 그에 마음속에 아직까지도 그 자유에 대한 그리움이 남아 있었을까요? 여러분 하나님 밖에서 주어지는 자유는 자유가 아니라 속박이라는 사실을 여러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 바깥에서 주어지는 진정한 자유는 결국은 잠시는 꿀과 같이 달지만 잠시 후에는 자기 마음대로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자행자지한 결과로 말미암아 다가오는 쓰라린 열매를 거두어야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고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을 때에 가장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이 자유롭게 살아가고 자유롭게 범죄하며 육체의 욕심과 정욕과 안목을 따라서 살아가는 삶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제 우리의 삶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은 여기에서 죽든지 살든지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괴로우나 즐거우나 하나님 안에서 우리에게 약속된 참된 행복과 자유를 찾아서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부럽지 않은 진정한 보람과 가치와 자유를 누리면서 하나님 안에서 우리에게 약속되어 있는 하나님의 자녀에게만 허락된 매우 특별한 축복과 은혜를 차지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지 않도록 마음을 지키는 성도들이 됩시다. 그리고 우리가 그런 세상의 헛된 자유를 그리워하여 신앙을 버리고 하나님을 버리는 그래서 급기야 자신도 고통스럽게 하고 남도 고통스럽게 하는 자리로 떨어지지 않도록 우리 스스로 우리를 지키는 여러분들 되십시다. 하나님의 참 은혜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 그 즐거움을 배우고 누리도록 그렇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째로는 그렇게 떠났는데 아버지는 어떠하였습니까? 우리는 흔히 이 15장의 세 번째 비유를 보면서 우리의 모든 관심은 돌아가는 아들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이야기의 초점은 돌아가는 아들이 아니라 여전히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인 것입니다. 그가 허랑방탕하고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고통과 시련을 견딜 수가 없어서 아버지의 집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집에는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우리는 이 말을 통해서 하나 깨닫게 됩니다. 아버지의 집을 떠난 것은 가난이요, 궁핍 밖에는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아들은 드디어 궁핍 가운데서 아버지의 집의 풍족함을 깨닫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전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졌는데 그 풍족함이 이제 그리워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그리워지기 시작했으면 그는 이전의 아버지의 아들의 지위를 포기했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허드렛일이나 하면서 그렇게 힘든 일 속에서 자신을 뼈 빠지게 봉사하는 그런 노예와 같은 취급을 받아도 아버지의 집에 있는 것이 훨씬 좋다는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가장 중요한 마음의 변화인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도 여호와의 집에 문지기로 있는 것이 훨씬 좋다고 고백을 했던 것은 문지기라는 직분의 영광스러움 때문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집에 문지기로 있는 동안은 여호와의 집 가까이에 있을 수 있고 여호와의 집에 가까이에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과 가까이 있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 직분이 그렇게 고귀하고 그 자리가 영광스러울 수 있었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고 우리가 서 있는 자리가 어떤 자리이든지 간에 하나님을 깊이 느낄 수 있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고 남이 맛보지 못하는 진정한 신앙의 자유와 은혜를 맛볼 수 있다면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이 진정으로 기뻐하시는 자리요, 우리에게 행복한 자리인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어차피 주님의 자녀가 되고 아버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을 때에 하나님 한분이 우리에게 진정한 만족이요 분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 우리가 하나님 자신으로 만족하는 것을 이제 잃어버리게 되면 그 다음에는 자유에 대한 그리움, 그 자유에 대한 갈망을 행동으로 옮겨보려고 하는 이 담대한 죄악들이 고개를 들게 된다는 것이에요. 여러분 이런 아들이 결국은 마지막에 얻은 것은 쓰라림과 커다란 고통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한없이 가난해지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 앞에 더 가난해지는 성도들이 됩시다.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어찌 살 수 없고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면 어찌 견딜 수 없다는 간절한 고백이 우리의 마음, 우리의 심령을 지배하도록 늘 우리의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만약에 아버지 앞에 기도할 때에 우리가 이 탕자의 고백처럼 “아버지 큰 은혜가 아니라 작은 은혜라도 주시옵소서. 주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와 같은 은혜라도 내게 주시옵소서. 나는 미천하오나 주여 나는 주 없이 살 수 없사옵나이다.” 고백하며 하나님 앞에 매달린다면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간절해지겠습니까? 한번의 예배에 나와서 아버지 하나님 만나기를 원하고 아버지 하나님을 정말 뵈옵기를 원한다는 간절한 갈망을 가지고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 온다면 우리의 예배가 얼마나 영광스러워지겠습니까? 우리의 찬양, 우리의 심령, 우리의 영혼 깊은 곳에서 마음껏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할 수 있게 해주신 이 하나님의 신앙의 자유를 즐거워하며 아버지 앞에 찬송 부를 수 있다면 얼마나 우리의 찬양이 우렁차고 하나님의 마음을 울리는 진정한 노래가 되겠습니까? 여러분, 모든 것은 이런 가난하고 절박한 마음으로부터 우리에게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만약에 이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늘 동행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최대의 적은 우리의 마음이 부요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믿고 하나님의 친밀한 은혜 없이도 넉넉히 이길 수 있다고 믿고 기도가 아니라 내 머리로도 늘 이 세상을 이기고 살아갈 수 있고 하나님 없이도 혼자 넉넉히 잘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이 교만함과 마음의 부요함이 우리에게 오는 모든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시인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계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의 기도를 들으신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 정말 가난해진 마음, 낮아진 마음으로 우리들이 매 순간, 순간 아버지 앞에 돌아오게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예화) 우리 교회에 왔던 어떤 성도 한분이 지금 우리 교회에 안 나와요. 잠깐 다니러 왔었는데 그날 예배에 하나님이 참 은혜를 주셨어요. 그러더니 성도들이 막, 성도들이라고 그래봐야 여러분들이죠. 하나님 앞에 정말 은혜로운 예배를 드렸어요. 저도 많이 은혜를 받고 많이 그 예배 시간에 울었는데 아니 은혜 받았으면 그냥 가면 될 일이지 대문간에서 인사를 하면서 그것도 좋은 얘기라고 했겠죠. 목사님, 교인들이 목사님 닮아서 참 잘 우네요. 마음속으로 주여.
여러분 우리를 돌아보십시오. 우리의 마음이 한주일이라도 회개의 눈물로 씻어낼 필요가 없을 만큼 정결해진 적이 있습니까? 아버지께로 돌아와 될 필요가 없으리만치 하나님만을 청종하는 삶, 온전한 청종의 삶을 우리가 일주일씩이나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크고 작은 죄악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도록 마음의 부요함이 우리의 생명을 죽이지 아니하도록 날마다 우리는 말씀 앞에서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 은혜를 새롭게 깨닫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연약하고 더러운 존재들인지를 깊이 회개합니다. 날마다 씻어내고 날마다 결심합니다. 아버지 뜻대로 살아서 주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려야지. 금주 한주만이라도 하나님께 효도하는 인생을 살겠다고 아버지 앞에 매주, 매주 결심하는 삶을 살아가도 이 정도인데 하나님을 떠나서 완전히 굳어진 돌 같은 심령들이 모여 있는 그곳에 정말 그런 속에 있는 사람들은 쥐엄 열매를 주어먹으려고 기어 다니면서도 아버지의 집이 생각나지 않는 상황까지 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들이 기억해야 되는 것이에요.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이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되니까 아버지께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께로 돌아갔을 때에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리고 이제는 비렁뱅이와 같이 돌아가면서 품꾼 중에 하나로 아버지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취직하기 위해서 아버지의 집에 가는 심정이었습니다. 노예라도 써주신다면 새경도 필요 없고 먹여만 주신다면 그 품꾼 중의 하나로서 천대를 받으면서 아버지의 집에 있는 것이 나에게 즐거움입니다. 그런 고백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버지는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아버지는 그 아들을 여전히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의 발로가 무엇이었습니까? 성경은 오늘 말합니다. 측은히 여기셨다. 여러분, 측은히 여기셨다 그랬습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마음속에 아들을 향해서 일어났던 사랑이 가져다준 슬픔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은 언제나 슬픔을 동반합니다. 슬프지 않은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의 감정은 언제나 연민을 동반하고 연민은 슬픔의 감정인 것입니다. 아버지 눈앞에 들어온 아들은 그야말로 비렁뱅이였습니다. 그 아들이 눈에 들어오자 아버지의 눈에는 두 눈을 부릅뜨고 내 재산 내달라고 그것을 강탈하다시피 빼앗아가지고 세상에 나아가던 보무도 당당한 그 타락하던 날에 그 아들의 모습이 생각난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지금 그 모습이었습니다. 모두 잃어버리고 이제는 가난하고 거렁뱅이같이 되어서 자신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거지와 같은 신세가 되어서 아버지의 집에 찢어진 마음으로 돌아오고 있는 그 현재의 그 모습이 아버지의 마음에 다가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았을 때에 아버지의 마음에는 눈물이 고이는 측은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여러분 아버지는 이처럼 여러분들을 긍휼이 여기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 하다가 어떠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다고 할지라도 여러분들이 한 가지 신념을 저버리지 아니하면 여러분들은 일어설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짓밟히고 쓰러져도 여러분들이 이 신념 하나를 붙들면 여러분들은 일어설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깨뜨려진 마음으로 아버지 앞에 이 비렁뱅이와 같은 모습으로 돌아가면서 뻔뻔스럽게도 아버지 밖에는 내게 소망이 없나이다 라고 매달리면 아버지께서는 이전의 잘못이 생각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돌아오고 있는 비참한 우리의 모습을 보시며 측은히 여기시는 분이라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이 측은히 여기는 마음은 논리를 넘어선 감정입니다. 논리로 따지면 그렇게 하나님 앞에 변화 받을 수 없는 인생이지만은 그러나 논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측은히 여기시는 마음으로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입니까? 막히고 막혔고 몇 년 동안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완전히 막혀버린 기도의 담이 무너져 버리고 기도의 은혜가 다시 샘물과 같이 솟아나서 우리가 거룩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됐습니까?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됐습니까? 하나님이 기도하고 싶어서 안타까워함에도 불구하고 죄 가운데 눌려서 기도하지 못하고 있는 여러분들의 질식하는 영혼을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기도의 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죄 가운데 행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내 마음대로 살아서 죄밖에 지은 것이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하나님께로 돌아오려고 하는 여러분들을 받아주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지난날의 선한 행실과 지금 여러분들이 유지하고 있는 아주 훌륭한 도덕적인 상태 때문입니까? 그런 것 때문에 하나님이 받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긍휼이 여기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마음에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에 긍휼이 여기는 그 본성을 일깨워 드리기 위해서는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 앞에 목매인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외에 믿을 데가 있다고 뽐내면서 아버지 안 도와주시면 나 삼촌 집으로 갈테야 이런 식으로 배짱을 부리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영원히 하나님의 긍휼을 맛 볼 수가 없습니다. 긍휼이 없으시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은 긍휼에 넘치시는 분이시지만 돌아오는 사람에게 자기의 긍휼을 보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돌아오는 사람에게 긍휼의 마음을 보이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사랑이 크지만은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인자는 그 사랑 없이 살 수 없다고 고백하는 사람들, 그 긍휼과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다고 고백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그 자비와 긍휼과 은혜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미 우리를 버린, 그리고 우리가 이미 버린 세상에 목매이면서 세상이 여러분들을 위해서 변해주기를 기대하느니 차라리 하나님의 마음이 변하여서 우리를 긍휼이 여겨 주시고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우리의 처지를 보셔서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시기를 고대하는 편이 훨씬 더 낫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보십시오. 아들이 다가와서 아들은 단지 품꾼 중에 하나로 여김을 받고 살고 싶어 했지만은 그러나 아버지는 그에게 가락지를 끼우고 신발을 신겨주고 옷을 입혔습니다. 이 모두 아들의 신분을 회복시켜준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당시에는 가락지에 바로 도장이 새겨져 있어서 재산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무슨 재산이 있습니까? 자기의 분깃을 다 나누어 가지고 가서 팔아먹은 아들인데 이제는 큰 아들 것 밖에는 남은 것이 없는데 어떻게 또 분깃을 준다는 것입니까? 이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전에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많이 입었죠? 그 은혜를 흠뻑 받았습니다. 못 받은 은혜 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안 베풀어 준 은혜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은총이 모자랐습니까? 그거 아니지요. 많은 은혜와 사랑을 다 받아가지고 세상에 나아가서 다 털어먹고 비렁뱅이가 되어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용서하여 주셨을 뿐만 아니라 이전에 그가 기업으로 누리던 놀라운 은혜를 다시 한번 그에게 부어주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로 돌아온 사람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고백합니다. 이전에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던 때에 맛본 은혜보다도 더 큰 은혜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맛보게 하셨노라고 찬송하는 소리를 여러분들은 그리고 고백하는 그 신앙의 고백을 여러분 듣지 않으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아버지의 놀라운 사랑을 보십시오. 우리가 이 아버지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성도는 바로 이 세상에 생명을 걸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랑 때문에 고난 가운데서도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용기를 얻고 위기에 부딪쳤을 때도 이 사랑 때문에 당황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이요, 그 백성들이요, 그의 자녀들이라는 사실을 여러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어떤 자리에 있는 사람입니까? 오늘 말씀을 듣는 가운데 여러분 틀림없이 자신이 이 둘째 아들과 같이 아버지께로부터 멀리 떠났다가 이제 다시 하나님 앞으로 거역할 수 없는 부르심을 느끼면서 돌아오는 사람들 틀림없이 이중에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전에 행했던 모든 일들과 아버지를 모르면서 세상에서 살았던 모든 날들의 그 고통과 죄악과 궁핍을 이제는 벗어버릴 때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용서하시고 우리를 측은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넓은 품으로 돌아갈 수 있는 그러한 진정한 돌아온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우리가 혹시 우리의 신앙생활이 건조해져서 하나님의 자녀의 진정한 기쁨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기도도 식어지고 찬송도 식어지고 차가운 껍질만이 남아서 교회 생활하고 있지 않으십니까? 여러분 우리는 이렇게 될 위험을 언제든지 가지고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스스로 경계해서 우리가 만약에 하나님의 자녀 된 감격을 잃어버리고 살면 열심히 애쓰고 섬기고 뼈 빠지게 일해도 마지막에는 아버지의 집에 진정한 탕자의 모습이 되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에 있으면서도 큰 아들과 같은 자리에 머무는 사람들이 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우리를 돌아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한 영혼이 하나님께로 돌아왔을 때에 한없이 기뻐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 영혼을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하였을 때에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며 우리도 기뻐하고 즐거워하실 때에 즐거워하는 사람이 바로 이런 큰 아들과 같지 아니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아파하실 때에 함께 아파하고 주님이 기뻐하실 때에 함께 즐거워하며 주님과 함께 웃고 울고 그 마음을 이해하며 그렇게 살아가는 성도들, 그래서 이 세상에 살아있고 교회에 살아있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고 즐거움이 되는 이런 성도들의 삶을 살아야지만 그래야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아버지의 집에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만약에 이 큰 아들이, 아들이 돌아왔을 때에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서 돌아오는 그 동생을 함께 끌어안고 아버지가 그러했던 것처럼 이제 내가 너 없이 살았던 날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아니? 니가 이제 집에 들어오니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 이제는 나와 함께 우리 아버지를 즐거워하며 우리 이 집에서 함께 우리 모두 어울려 살자 라고 말했더라면 이 큰 아들은 작은 아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커다란 칭찬을 아버지께로부터 받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일등은 지금이라도 뉘우치고 아버지께로 돌아와서 그 사랑의 품에 안기는 사람이고 특등은 아버지의 집에서 언제나 아버지를 즐거워하며 이렇게 동생이 돌아오고 형제가 돌아왔을 때에 아버지의 마음으로 기뻐하며 그 아버지의 집에서 감격적인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리면서 은혜 충만한 생활 하는 사람이 특등 아들입니다. 여러분, 일등 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특등 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