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마음으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5:3)
녹취자: 최영순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도입하는 첫 번 째 구절입니다. 아다시피 산상수훈은 천국백성의 자격과 그리고 그의 생활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오늘 읽은 이 마태복음 5장3절 이하에 나오는 8가지 복은 산상수훈 중에서도 핵심에 해당되는 부분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팔복이라고 부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며’ 여기 쓰여진 ‘복이 있나니’ 라고 하는 이 단어는 희랍어로 ‘마카리우스’라고 하는 단어인데 여러분들이 너무나 잘아는 시편 1편에 나오는 ‘복이 있는 사람은’ 이라고 할 때 바로 그 ‘에세르’ 라는 히브리어를 희랍어로 옮겨놓은 것입니다.
이 복은 이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흔히 복이라고 불리는 그런 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특별히 언약백성으로 하나님 앞에 받는 그러한 행복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복의 근원이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은 언약백성으로서 하나님 때문에 누리는 그 행복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도대체 ‘가난하다’ 라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우리들이 가난하다라고 할 때에는 물질이 부족해서 자신의 힘으로는 자기의 생활을 지탱할 수 있는 지상의 자원을 댈 수 없을 때 우리는 가난하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쓰여진 ‘프토코스’라고 하는 단어는 본래 법원에서 많이 쓰는 단어였습니다. ‘파산선고를 받은’ 그런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어느날 부채로 말미암아서 법원이 집달리를 붙여 모든 자신의 집안에 차압딱지를 붙이고 그래서 이제는 아무 재산도 없이 길거리로 쫓겨나게된 그러한 채무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심령이 그렇게 된 사람들은 복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 심령은 우리의 모든 육체의 삶과 그리고 생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우리의 모든 영혼의 중심자리를 가리키는것입니다. 바로 그 중심자리가 파산선고를 받은 것처럼 완전히 가난해진 그 사람들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애통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이 위로의 복을 주셨고, 온유한 자들에게는 땅을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릴 수 있는 성도의 행복의 일부분들입니다. 그러나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천국을 통째로 주셨습니다. 나머지 모든 복들은 그 가난한 사람들이 누리는 그 복을 구체적으로 개별적으로 묘사해 들어가고 있는 것이 바로 이 팔복의 구조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여기서 말하는 심령이 파산선고를 받은 상태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향한 절대의존의 마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여기에 와서 예배 준비하는 여러분의 모습을 보면서 난 어느 다른 학교에 왔는줄 알았습니다. 이것이 영화관람을 준비하는 것이지 예배를 준비하는 것입니까? 영화관람관에서도 주위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떠드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예화) 저희 어렸을 때는 목사님이 예배당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들이 일주일에 두시간 예배드리면 그게 그리스도인인줄 압니까?” 중학생 되었을 때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들이 일주일에 1시간 40분 예배드리고 가면 그게 예배입니까?” 그랬습니다. 요즘은 1시간 40분씩 예배드리는 교회를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럼 이 짧은 시간에 여러분들이 예배를 드리면 오히려 긴 시간을 예배드리는 사람보다 더 간절해져야 되지 않겠습니까?
나는 오늘 여러분 수업시간에 쫓겨서 여기 오는 사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조국교회의 평균적인 예배시간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염두에 두고 한 번 들어보십시오. 극장갈 때는 십오분 전에 로비에 가서 줄을 서는데 예배당에 올 때는 오분 전에 밀려들어옵니다. 심지어는 예배시간이 시작되었는데 계속 문 열고 사람들이 들어오고 어떤 사람들은 설교가 시작되었는데 보무도 당당하게 중앙통로를 걸어 들어와서 빈자리를 찾습니다. 또, 못 들어오면 못 들어오고 들어오면 들어오는 거지 기도시간에는 못 들어오고 찬송시간에는 들어가도 되는 것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예배 시작이 됩니다. 옛날에는 예배순서가 간단했는데 이제는 순서가 너무 복잡합니다. 제가 전도사로 있던 교회는 육백 명 정도 모이는 교회였는데 예배순서가 스물 세가지나 됩니다. 그 스물세가지가 비가오나 눈이오나 65분 만에 정확하게 마칩니다. 도저히 시간을 못 맞추겠으면 ‘찬송가 1절만 부르고 마치겠습니다’ 라고 해서라도 65분에 마칩니다.
예배오는 사람들의 목표는 끝나는게 목표입니다. 더 가관인것은 예배시간은 설교시간입니다 저렇게 예배시간에 무슨 이야기가 많습니까? 필담을 나누고 이야기를 하고, 핸드폰을 밑에 내리고 문자를 날리고, 그리고 하늘보다 높은 어디에서 호출이 오는지 전화가 오고, 오면 그걸 듣고 예배 받으시는 하나님은 기다리라 그러고 밖으로 뛰어나가는 사람, 졸다가 성경 떨어뜨리는 사람, 별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예배가 마치면 천천히 나가면 되는데 하나님을 예배시간에 만났으면 감사해서 눈물이 나오고 못 만났으면 원통해서라도 하나님한테 제가 뭐가 잘못 되었길래 예배의 감격이 없습니까? 라고 회개를 해야 하는데 예배시간에 주보에 글씨를 써서 필담을 나누고 옆에 사람과 쑥덕대고 그렇게 하고 예배가 끝난 다음에 일시에 사람들이 빠져나옵니다. 쏟아져 나오는데 천천히 가면 어떻습니까? 바깥에서 멀리서 쳐다보면 구슬같이 알록달록한 사람들이 계단에서 확 쏟아져 내려옵니다. 엄청 중요한 일인가 하면 그게 아니고 주차장으로 차 빼러 가든지 아니면 식당으로 밥 먹으러가는 순서뿐입니다. 그렇게 허겁지겁 달려가서 하는 일이라고는 주일날 집에 가서 파자마 바람으로 소파에 벌러덩 누워서 텔레비전이나 보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일상입니다.
나는 신학을 하는 사람으로 확신하기를 거기에 하나님은 안 계십니다. 나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만약 거기에 오신다면 제가 오시지 말라고 할 것입니다. 거기 왜 오십니까?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그런 곳에 오십니까? 그런 모욕받는 곳에 왜 오십니까 주님이? 그게 뭡니까? 기독교 지도자가 될 사람들이 이런 모든 예배의 무너진 모습들, 심지어 심하던 때에는 이 채플시간에 저쪽 뒤에서 일간스포츠를 보는 학생들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실제 경험했던 일입니다 설교시간에 설교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시끄러웠던 때가 있었습니다. 많이 나아졌습니다. 아직 멀었습니다. 기독교 지도자들이 될 사람들 아닙니까?
그럼 이렇게 무너진 예배의 모습은 무엇 때문일까요? 인테리어가 후져셔 그렇습니까? 성가대 콰이어가 모자라서 그렇습니까? 인원이 적게 와서 그렇습니까? 방송장비가 첨단이 아니어서 그렇습니까? 아니면 설교하는 사람이 학위가 없어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바라보는 간절한 마음 이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시편 42편에서 노래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라고 말입니다.
(예화) 가을이 팔레스타인에서는 사슴의 교미기입니다. 처음에는 짝을 찾기 위해서 숫사슴들이 들판을 나옵니다. 그리고 한 마리의 암컷을 두고 여러 마리의 숫사슴들이 생사를 건 투쟁을 벌입니다. 이런 발정기에 사슴의 몸에 특징이 나타나는데 타는 것 같은 목마름입니다. 짝짓기를 하려고 나왔다가 엄습하는 목마름을 이기지 못해 물을 찾는데 광야에 물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미친듯이 물을 찾아 헤매는 것입니다. 신기루가 나타납니다. 저쪽에서 물이 보이니까 미친듯이 달려가는 것입니다. 달려가 보면 그것은 허상이고 저만치 멀리 가 있습니다. 그러다 결국 뜨거운 팔레스타인의 태양볕 아래서 무릎을 꿇고 주저앉습니다. 쓰러지면서도 본능적으로 앞발로 땅을 파다가 눈을 부릅뜨고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슴의 모습을 시인은 많이 보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이스라엘 예루살렘으로부터 추방되어서 남의 나라에 망명을 온 처지에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하니까 그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영혼의 갈망이 그렇게 간절해서 하나님 앞에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하다가 눈을 부릅뜨고 광야에서 죽어간 것처럼 그렇게 한번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해서 목숨을 거는 것처럼 자신의 심령이 타오른다고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배드린 적이 있습니까? 최근에 여러분들이 이 예배가 내 인생의 마지막이다. 그리고 예배가 끝난 뒤에 은혜가 없을 때에는 도대체 성가대 찬양도 훌륭하고 목회자의 설교도 뛰어난데 왜 나의 영혼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일까 반성하면서 회개의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습니까? 너무 피상적이고 껍질 뿐입니다. 주님을 찾고자 하는 간절한 갈망, 그것은 표피적인 신앙생활 속에서는 발현될 수 없는 것입니다. 중심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영혼의 곤고한 외침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예배를 드리면서 나같은 죄인 살리신 십자가의 은혜 때문에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찬송가를 눈물로 적셔본 적이 언제입니까? 예배가 끝났을 때 예배드리기 전에는 도저히 하나님을 위해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것들이 나 자신의 자아를 꺾고 주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선한 결심이 용솟음치는 예배의 감격이 언제였습니까?
(예화) 어떤 사람이 통계를 냈습니다. 복음주의적인 교회에서 교회를 무작위로 추출해서 주일예배를 드리고 나가는 사람들을 교회 정문 앞에서 5분전에 끝난 예배시간의 목사님이 성경 어디를 설교했냐고 물으니 95퍼센트가 모른다고 대답을 했답니다 그 중의 절반은 방금드린 예배의 본문이 신약이었는지 구약이었는지도 생각이 안난다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그 말씀을 붙들고 살아간다는게 그게 가당키나 한 이야기입니까?
여러분들이 여기에 와서 학점이나 얻기 위해서 출석체크하기 위해 들어왔다면 예배자가 아닙니다. 이렇게 기독교 대학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온 마음을 다해서 지성을 바쳐 교수님들이 가르치고 건실하게 배워서 이 세상에 나가고자 하는 바가 무엇때문입니까? 이 온 세상에 하나님 모르는 사람들을 진실한 예배자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가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무릎을 꿇지않는 수 많은 사람들을그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알고 무릎을 꿇게하고 주님을 찬양할 줄 모르는 사람들의 입을 열어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노래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가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은 예배의 그림입니다. 온 땅의 모든 백성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앞에 경배하고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온전히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그 나라가 하나님 나라의 완성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학문을 연마하고 그리고 학교를 섬기고 학생들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이 하고 있는 그 모든 행동들이 오늘 하나님의 말씀 앞에 비추어 볼때 어떠한 간절한 가난함을 가지고 있는 지 한번 돌아보십시오
여러분 모두에게는 인생의 위기도 있었을 것이고 쓰라린 시련도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때 여러분들이 주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깊은 사랑 그 은혜의 복음의 진가를 깨달았을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공통점이 무엇이었습니까? 책을 많이 읽던 때였습니까? 아닙니다. 기쁜 일이 많이 생겼을 때 였습니까? 아닙니다.
(찬양)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모든 경험의 공통됨은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구속한 주만 보였을 때입니다. 그 때 우리는 주님 한 분만을 의지했고 마음 가득히 그 분을 채웠습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우리의 인생의 사연을 고하며 하나님의 은총 하나면 살 수 있다는 고백이 있었습니다. 이때 우리의 찬양은 향기롭고 우리의 기도는 꿀 같았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는 천국의 잔치를 맛보는 것이었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이 특이하게 복을 내리시던 영적부흥의 때가 있습니다. 그 때에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남들이 다 춤추고 노래하는 시대에 오히려 금식하고 가난한 마음으로 주님의 은혜를 구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다가오는 시대를 예견하며 하나님의 은혜 이외에는 의지할 것이 없다는 마음으로 간절히 하나님 앞에 부르시는 경건한 심령들이 있었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이 채플시간에 교회에서 하던 그대로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여기에서 예배의 진수가 무엇인지를 경험하고 참된 예배자가 무엇인지를 배워서 가서 교회를 고치십시오.
주님은 세가지 요소를 통해서 예배속에 찾아오십니다. 선명한 진리의 말씀, 충만한 성령의 역사,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렇게 되기를 갈망하는 예배자의 가난한 마음 거기에 주님이 오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