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를 고친 믿음
수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신 소문이 들린지라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 할 수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 쌔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막2:1-5)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실 때마다 우리의 믿음을 도구로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기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우리들이 많이 기도할지라도 우리의 마음으로 믿음이 없으면 우리의 많은 기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은 마치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운반하는 컨베어 벨트와 같아서 믿음이 있는 곳에는 믿음에 실려서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가 전달되어 온다 이 말씀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어느 집에 들어가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계셨습니다. 사람들은 꽉 찼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온 사람들도 있었지만 상당히 많은 사람들은 병을 고쳐 주시는 예수님의 손길이라도 닿아 볼까 해서 온 그런 사람들도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 중풍병자가 누구인지 이름은 나오지 않았지만 친구 네 사람의 손에 이끌려 들것에 떠메어 예수님이 계신 그 곳에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내막이야 알 수 없지만 어쩌면 이 중풍병자가 한 번 자기를 예수님께 데려가서 거기서 그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죽은 사람도 살아나고 소경도 눈을 뜨고 중풍병자도 일어난다는데 나도 한 번 가서 그 예수님께 가서 치료를 받고 싶으니 나를 예수님께로 데려다 달라고 애원했을지도 모르고, 혹은 그는 그렇게 원하지 않았어도 그 친구들이 그를 매우 불쌍히 여겨서 어떻게 해서든지 그를 예수님께 데려다 주어서 고쳐 주었으면 좋겠다 라는 일념으로 이 사람을 들것에 메어 왔을지도 모릅니다.
누구 때문이라기보다 간절히 낫기를 바라는 본인의 마음과 그를 불쌍히 여기는 친구들의 마음이 결합을 해서 오늘 이 아름다운 장면을 연출했는지 모릅니다. 모든 의도가 순수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마음만 갖는다고 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든 길이 형통하게 열리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예수님께만 소망을 두는 마음을 가지고 중풍병자와 그를 들것에 떠메고 나온 사람들의 길을 가로막는 난관이 있었으니 도저히 예수님께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접근하기는커녕 그곳에 모인 사람들조차도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그야말로 티끌 하나 설 만한 입추의 여지가 없이 그렇게 사람들이 꽉 차게 되었습니다. 우린 여기서 한 가지 교훈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마음이 순수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의지만 가지면 그저 앞길이 환하게 열려서 곧바로 하나님께 나아가서 하나님과의 감격적인 만남을 경험할 것을 기대하지만, 사실은 실제로 우리들이 경험해 보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어려움들이 우리의 순수한 의지 순수한 믿음의 바램을 가로막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무슨 잘못이 있었습니까? 병을 고침 받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신의 친구가 병 나음을 낫기를 바라는 믿음, 일념으로 예수님께 나아왔지만 마치 삭개오가 예수님께서 지나간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그 예수님을 뵈옵기 위해 애썼지만 사람들은 너무 많고 자기는 키가 너무 작았기 때문에 그 예수님을 볼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 선하고 동기가 순수했지만 난관이 있었습니다.
그 때에 보통 사람들 같으면 어쩔 수 없다. 상황이 좋지 않다. 어떻게 사람들이 저렇게 사람들이 에워싸고 있는데 한 사람도 아니고 들것에 실려서 예수님께 갈 수가 있으며 간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나오는 것을 예수님께서 기뻐하시겠느냐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우리의 뜻만을 이룰 수 있겠느냐 여기까지 왔다가 병자를 도로 집으로 데리고 갔어도 병자 자신도 할 말이 없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친구들은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죠.
그러나 이들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방법을 찾아내었습니다. 그게 무엇이었습니까? 지붕위로 올라가 예수님이 계신 지점이 어느 쯤 인가 계산을 해서 지붕을 뜯어내고 들것으로 그 문제가 있는 그 사람을 내려오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상적인 사고에서는 상상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도저히 평범한 사람들이 상상해 낼 수 없는 그런 일들을 상상해 낸 것이에요. 이 사람들은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예요. 그러나 머리가 좋은 것이 아니라 믿음이 뛰어났기 때문에 평범한 사람들이 상상해 낼 수 없는 이 일을 상상해 낸 것입니다.
이것은 지혜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예수님께 데리고 가서 병 낫기를 바라는 마음, 그리고 예수님께 가기만 하면 주님이 반드시 고쳐줄 것이라고 하는 믿음이 빚어낸 작품입니다. 우리들이 이런 생각 해 보잖아요. 무엇인가 깊이 사랑하고 애착을 가지면 그것을 보호하고 아낄 수 있는 다른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도저히 상상해 낼 수 없는 그런 뛰어난 방법을 생각해 내게 됩니다. 그건 정말 사실입니다. 그것은 사랑이 만들어 내는 것이거든요.
오늘 이 사람들도 바로 그래요. 지붕을 뚫고 자기 친구를 달아 내렸을 때 그것은 지혜를 칭찬받아야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집요함, 이 친구를 예수님께 데려가고 싶다는 집요함, 그리고 이 사람을 꼭 예수님이 만나주시기만 하면 이 절망적인 질병에서 놓임을 받을 것이라고 하는 처절한 믿음을 보여 줍니다. 저는 이것이 병 고침이 아니라 사실은 전도에 적용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렇죠? 안 되는 것을 안 된다고 판단하고 거기에서 그칠 수 있는 사람, 그것은 상식을 가지고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한 영혼, 중풍병자와 같이 완전히 소망이 없게 된 한 영혼을 주님 앞에 데려 오기만 하면 주님이 만나 주실 것이고 주님이 만나주시기만 하면 일평생 숙명처럼 끌어안고 사는 이 질병에서 놓임을 받을 것이다 라고 하는 굳센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나 소수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중풍병자와 같이 절망적인 상태의 사람들이 이와 같은 친구들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일에 깊이 감명을 받으셨어요. 믿음은 이렇게 주님의 마음에 큰 기쁨과 감동을 드려요. 우리가 만약 중풍병자를 메어 가지고 온 네 친구와 같은 마음으로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을 연민의 정을 가지고 그들을 주님 앞에 데려온다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거예요.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쳐 주셨는데‘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확실한 것 하나는 중풍병자의 믿음을 안 보셨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중풍병자의 믿음만을 보시고 그 사람을 고쳐 주신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죠.
오히려 문맥상으로 볼 때 주님이 관심을 가지셨던 것은 침상에 누워있는 그 사람보다는 그 절망적인 상황에 있는 그 한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믿음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창조적인 방법으로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달아 내리는 그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믿음에 감명을 받은 것이죠. 물론 구원은 개인의 마음속에 믿음이 생기므로 구원에 이르죠. 그러나 중보적인 차원에서 보면 이 네 사람의 믿음이 워낙 뛰어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구원하고자 마음먹으시고 병을 고쳐주신 것으로 보아서 우리들의 믿음도 굉장히 중요하다 이거예요.
그런 절망적인 상태에 놓여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믿음도 중요하다고요. 쉽게 얘기하면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지 못하고 죽어갈 때 저들은 저들의 믿음이 없기 때문에 죽어간다 라고 그렇게 쉽게 말해서는 안 된다 이거예요. 이것이 바로 구령의 열정에 불탔던 경건한 성도들이 구원받지 못하고 그 죽음을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가책을 받았던 이유예요. 우리가 이 네 사람처럼 끓어오르는 연민으로 고생을 하고 있는 영혼들을 보았던 것이에요.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어찌하든지 예수님을 만나게 해 주고 싶은 열망에 불탔더라면 그리고 그들을 우리의 힘으로 예수님께 데려갈 수 있을 뿐 아니라 데려가서 이 사람을 예수님이 만나 주시기만 하면 절망적인 지금의 상태에서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굳센 믿음이 우리에게 있다면 얼마든지 우리의 믿음을 보고 구원의 은혜를 주님이 베푸시지 않았겠습니까? 더군다나 주님이 이 장면을 보고 크게 감명을 받으신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가버나움에서 이 일이 이루어졌기 때문이에요.
주님이 이 가버나움에서 이 일이 이루어 진 것을 크게 기뻐하신 것은 주님이 가버나움을 교만의 대표적인 도시 주님의 일을 쉽게 믿지 못하는 고장의 대표적인 도시로서 이 가버나움을 드셨어요. 그랬기 때문에 이 가버나움에서 이렇게 순전한 믿음, 그리고 주님이 이 절망적인 일에 있어서 유일한 희망이라는 사실과 주님께 가면 이 절망적인 상태에 놓여있는 사람을 버리시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는 굳세 믿음을 보시면서 주님이 큰 감화를 받으신 거예요.
오늘 우리의 시대가 가버나움의 시대와 같지 않습니까? 주님의 역사를 쉽게 믿지 못하고 주님의 말씀을 쉽게 믿지 못하고 주님의 약속도 우리에게 커다란 희망을 주지 못하는 그런 때를 지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믿음이 없는 시대이기 때문에 쉽게 주님께만 소망을 두지 않는 시대이기 때문에 누군가가 전심으로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일이 나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런 사람들을 주님이 오늘도 찾으시는 것이지요.
오늘도 우리 주위에는 많은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이 아니면 아무 희망이 없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와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맛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손에 이끌려서 주님이 아니면 어찌할 수 없는 자리에서 주님을 만나고 소망을 발견하는 사람들은 그래야 하는 사람들 가운데 지극히 소수에 불과해요. 지금 우리들의 섬김을 통해 구원을 경험하는 사람들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은 어둠속에 있고 누군가가 와서 자신들을 떠메어 가지 않으면 도저히 어찌할 수 없을 정도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놓여있는 사람들이에요.
누가 그들을 떠메어 갈 것인가? 누가?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있는 사람은 한 사람이었는데 그를 건져내기 위해 필요한 사람은 네 사람이었어요.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그만큼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있는 사람들이 많은 섬김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 번 가볍게 전도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물론 있지요.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열린 하늘 쭉 뿌리면서 다녔는데 그거 들고 와서 우리 교회 와서 예수 믿고 구원 얻은 사람들도 있어요. 그러나 희귀해요. 왜? 전도라는 것에 한 번 두 번 스쳐가는 섬김도 하나님이 사용하시지만 그러나 정상적으로 하면 그렇게 스쳐가면서 전해서 예수 믿는 것은 예외적이고 희귀한 것이고 많은 희생을 요구해요. 많은 희생.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있는 한 사람의 운명을 바꾸어 놓기 위해서 네 사람의 굳센 믿음을 가진 사람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창조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그를 예수님께 데려가고야 말 때. 한 사람의 인생이 바뀌는 역사가 일어나는 거죠. 그러니까 전도하는 것이 힘들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을 무엇과 비교하느냐의 문제예요. 영혼의 가치를 인식하고 비교하면 우리는 어떠한 희생이 요구되어도 전도가 힘들다고 말할 수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온 교회의 온 힘을 다 기울여서 한 영혼을 구원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가치가 있는 것이고 온 세계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모두 희생을 해서 한 명을 구원한다고 하더라도 그 희생의 분량보다는 한 사람이 가치가 있다고 하는 것이 성경적인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상업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성과를 잴 수가 없는 것이에요. 저는 요즘 마음이 매우 슬퍼요.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 하면 우리의 마음속에서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안 다음에는 어찌하든지 즉각적으로 은혜를 받고 나면 우리를 파고들었던 것이 뭐냐하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이 진리를 모르는 채 방황하고 있구나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어둠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동안은 내가 주님 밖에서 잘 믿어보고 잘 살아보려고 수없이 몸부림쳤지만 결국은 실패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저들도 저렇게 될 수밖에 없구나 그런데 내가 나 스스로 내가 잘못된 신앙의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것은 어두움이니 빛인 저기로 가야 되겠다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처럼 그 사람들도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있기 때문에 결국 그들에게로 갈 사람은 나밖에 없구나 그런 생각을 상당히 많이 했었거든요 상당히 많이 했어요. 그랬기 때문에 끊임없이 사람들이 사람을 데려왔어요. 그리고 그들에게 한 마디라도 진실 된 기독교 신앙인 복음을 들려주고 싶어서 애를 썼어요. 그 마음이 오늘 중풍병자 하나를 떠메어간 네 명의 사람들과 같았어요.
제가 알고 있는 어느 한 분이 그런 얘기를 했어요. 자기는 일평생에 다른 데는 몰라도 초상이 난 곳은 꼭 간대요. 초상집에 모여서 이야기를 해요. 한 번은 학교에서 친하지도 않은 친구 아버지가 죽었는데 안 갔대요. 그랬더니 교수가 자기를 부르더래요. 갔더니 왜 같은 반이면서 안 왔냐 너무나 바쁜 일이 있어서. 그랬더니 교수님이 소리를 지르시더래요. 죽고 사는 일보다 더 바쁜 게 어디 있냐. 사람이 죽었는데 네 친구가 아버지를 잃어버리고 고아가 되었는데 네가 하고 있는 일이 무슨 일이기에 그것보다 더 큰 일이냐 그 얘기를 듣고 보니 맞더래요. 정말 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면 자기는 그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고. 그런 마음으로 너희 친구들의 고통에 동참해라. 그 후부터 자기 일생의 좌우명으로 알고 사명감을 가지고 초상집에 간다 그런 얘기를 해요.
마찬가지죠. 우리가 가지 않으면 중풍 걸린 것과 같은 상태의 이 세상 사람들은 제 발로 걸어서 진리의 빛으로 걸어올 수가 없어요. 올 수 있으면 그 사람들은 문제가 없는 사람들이지요. 불가능해요. 누군가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해요. 믿음이 있는 사람. 그들을 지극히 긍휼히 여기는 사람. 그래서 그들을 어찌하든지 예수님께로 데려가서 질병에 걸린 것과 같은 사람을 고쳐 줄 수 있으며 고침 받게 해야 되겠다 라고 하는 믿음과 확신과 사랑에 불타는 사람,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거예요.
이 믿음이 없고 교만한 땅 가버나움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그 네 사람을 향해서 또 떠 메어온 중풍병자를 향해서 그 믿음을 지극히 칭찬 하시면서 그들에게 하찬의 말씀을 하셨을 때 아마 하늘에서는 중풍병자를 포함해서 그 네 사람에게 패역한 가버나움에서 그 사람들을 구별해서 복주시기로 마음먹었을 거예요. 그렇죠? 우리에게 이러한 마음 이러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