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깊은 신앙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엡 3:17).
(예화) 저는 말로만 들었었습니다. 무슨 포도나무가 있는데, 몇 백 년이 되었는데 다른 나무들은 전부다 다 큰 가뭄이 들어서 말라갈 때, 그 나무는 열매를 맺었대드라. 그러던 것을 영국에 가서 보니까 정말 1700년대에 심은 포도나무가 있는데, 포도나무 한 그루를 보존하기 위해서 온실을 만들었는데, 큰 강당 같아요. 강당은 과장이고, 큰 교실 몇 개를 붙여 놓은 것 같이 그렇게 가지가 뻗고, 뻗고 뻗어서 그래서 포도넝쿨을 이루고 있었어요. 그런데 정말 여러 해 전에 영국의 전례에 없는 극심한 가뭄이 닥쳐서 가로수들이 말라 죽을 위기에 처했답니다. 그래서 소방차들이 물을 실어다가 가로수에다가 물을 주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큰 가뭄이 왔는데, 이 나무는 그 해에도 아주 맛있는 포도를 어마어마하게 생산을 해냈던 거예요. 그래서 그 포도나무 한 그루를 보러 입장료 표를 사서 그 포도원에를 들어가요. 그런데 그게 왜 그랬느냐 했더니 옆에 템즈 강이 흐르는데, 어디서 읽었을 때는 몇 백 미터라고 하는데, 그것은 거짓말이고 가보니까 한 100미터는 약간 안 되고 50미터는 넘을 것 같아요. 꽤 거리가 떨어져 있어요. 그런데 거기에 뿌리를 박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무리 영국이 가뭄이 와도 템즈 강이 마르는 법이 없거든요. 그러니까 강 바닥에 3백년 동안 줄기, 가지가 뻗으면서 뿌리를 거기까지 내린 거예요. 그러니까 모든 나무들이 시들어서 죽어갈 때에 그 나무는 템즈 강 밑 바닥에서 물을 빨아 올리면서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 어른이 한 두 사람이 들으면 휘돌 정도로 큰 느티나무 같은 것들 있잖아요. 그러한 것들은 하루에 물을 열 두 드럼 정도를 먹는 데요. 그러니 그 몇 백 미터 되는 3백년이나 되는 그 어마어마한 길이의 포도 넝쿨 하나가 저 끝에까지 가있는 거예요. 그리고 열매를 맺는 거예요. 그러니 그게 빨아들이는 물이 어느 정도가 되겠는가 생각해 보세요. 그 물을 이 땅에서는 지표가 마르면 공급을 못하는데, 템즈 강 바닥에 박고 쭉 빨아 들이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 봄에 산에 가서 물 오를 때, 청진기를 데고 들으면 꼬르륵 꼬르륵 하면 물이 올라와요. 사람들이 건강하겠다고 그 올라오는 물을 빼앗아 먹지. 빨대를 꽂아서. 그게 바로 고르셋 물이라고 하지. 고르셋 수액이란 말이야. 그런데 그렇게 해서 물이 막 빨아들이니까 가뭄에도 그 포도나무는 말이지 엄청나게 탐스럽게 열매를 맺는 거란 말이지. 정말 신기하더라고요. 그것을 보면서 신앙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여기에 보니까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그랬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100미터 달리기라면, 한번 막 스퍼트를 내서 해보고 졸도해버리면 되잖아요. 그런데 이게 안돼. 그래서 내가 늘 하는 말이 ‘인생은 막 살기에는 너무 짧지만 잘 살기에는 너무 길어’ 어떻게, 8년만 살아보라면, 한번 해보겠는데, 8년도 너무 길어. 여덟 달만 좀 잘 해보라 하면 해보겠는데, 이게 80년이에요. 뭐, 중간에 아직까지 어렸을 때 뺀다고 하더라도 60년, 70년 이상 인생을 잘 살다가기 위해서는 인생이 너무 길어. 그래서 막 살기에는 너무 짧고 잘 살기에는 너무 길어요. 그러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긴 여행길과 같은 거예요. 여행길과 같은 거예요. 그거예요. 그래서 어느 한 구간을 탁 짤라서 열렬히 뜨거울 때, 혹은 아주 식어졌을 때, 그 한 토막 만을 가지고 말할 수 없는 거예요.
다윗을 보십시오. 다윗이 죽은 후에도 다윗이 걸어간 인생길은 신앙으로 걸어간 인생길의 표준이 되었어요. 그래서 잘 살았던 임금들은 다윗의 길로 행하였더라 그랬습니다. 다윗이 항상 잘했습니까? 항상 충만했습니까? 항상 하나님 사랑했나요? 항상 옳았습니까? 아니에요. 그의 인생길 전체를 평가하신 거죠. 그러면 이제 우리들이 하나 답을 얻을 수 있는데, 어떠한 때는 꽃이 빨갛게 아름답게 피는 때가 있고, 어떠한 때는 잎사귀가 막 무성하게 피는 때가 있고, 어떤 때는 잔가지가 쭉쭉쭉쭉 나와 가지고 풍성해 보이는 때도 있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나무가 큰 그늘을 이룰 정도로 튼튼한 나무로 성장하는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는 뿌리박아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뿌리와 나무의 줄기 안에는 밀접한 연관이 있죠. 제일 먼저는 뿌리부터 시작하잖아요. 그래서 제일 먼저 싹이 트면, 제일 먼저 씨앗이 발아하면 발아하는 그것이 씨앗이 되어요. 그리고 그 뿌리가 양분을 빨아들이면서 그 다음에 지면을 뚫고 고개를 내밀면서 잎사귀가 나오는 거예요. 그 다음서부터는 이 두 개가 광합성작용을 통해서 뿌리를 뻗어 나갈 수 있는 양분이 생기고, 그 다음에 뿌리가 양분과 습기를 빨아들이면서 광합성 작용을 통해서 잎사귀와 줄기를 내고, 이 두 개가 서로 상보적인 관계에요. 그래서 뿌리가 잘 자란 것만큼, 잎이 무성하게 되고 무성하고 줄기가 잘 자라는 것만큼 뿌리가 튼튼하게 자라는 거예요. 가짜 잎은 매달릴 수 있지만, 진짜 잎사귀는 뿌리로 매달리는 거죠. 그러면 신앙도 결국은 뿌리가 깊은 신앙이 될 때, 그것이 제대로 된 신앙이 되는 거죠.
(예화) 언젠가 공원에 갔더니 새로 나무를 많이 심었는데, 복숭아가 막 열리기 시작해요. 아줌마들이 태양 볕에 수권을 둘러쓰고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가지고 그 요만큼씩 매달린 복숭아를 다 따서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또 오지랖도 넓게 물어봤어요. ‘왜 그 복숭아들 다 열렸는데, 다 따버리슈?’ 그랬더니 그 아주머니들 하는 말이 ‘아이, 선생님 얘는 아직 어려서 이러한 것들 맺으면 안돼요. 이러한 것을 맺으면 자기가 성장하여야 할 나무에 그 힘을 이 열매 먹지도 못할 열매를 맺는 데에 너무 많이 쓴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느 정도 성장 할 때까지는 계속해서 열매를 못 열게 따 버려야 한다는 거예요. 그것도 들으니까 하나의 새로운 깨달음이었어요. 그러면서 전부다 다 복숭아를 요만큼씩 대추처럼 열린 것들을 다 뜯어 버리는 거예요. 그런 거예요. 뿌리가 박혀서 큰 나무가 되는 것, 그렇게 되면 나무가 크게 성장하면 그 열매도 실한 열매가 맺히는 거예요. 여러분 보면 나무가 실해야지만, 열매도 실합니다. 배나무 같은 것들을 보면, 심어서 그 아주 맛있는 배가 나와요. 그게 얼마나 재미있는가 하면, 길이 이렇게 지나가는데요. 이 집 배는 맛이 있는데, 옆집 배는 맛이 없어요. 배 먹골 옆에 살아 봐서 아는데, 신기해요. 그런데 똑같이 맛있던 집도 어느 해 가면 맛있고 어느 해 가면 맛이 없어요. 다 맛있는 배가 있어도 나무가 얼마나 연수가 지났냐에 따라서 배 맛이 달라지는 거예요. 그래서 제 기억에는 8년 정도가 배가 소출을 낼 수 있는 연한이에요. 그 시기가 지나 버리면, 나무가 노화되어서 그래서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장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거죠. 그래서 때로는 냄비처럼 뜨거울 때도 있고, 때로는 열렬할 때도 있고, 때로는 의기에 넘칠 때도 있고 여러 가지 양태가 있겠지만,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것을 다 포괄하는 뿌리 깊은 신앙을 갖는 것이에요.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면, ‘뿌리를 내리고’ 그랬어요. 그래서 뿌리를 내려서 비바람에 흔들리지 않을 나무가 되고, 나무 자체가 매우 커져서 그래서 아주 실한 과실들을 맺을 수 있는 그러한 나무가 되는 거죠. 나무가 어렸을 때에는 산의 신세를 지지만, 나무가 크게 자란 후에는 산이 나무의 신세를 져요. 거기에서 잎사귀가 떨어져서 부엽토가 되어서 온 산의 습기를 보존하고 양분을 공급하고 생태계가 형성되도록 만들어 주잖아요. 그게 바로 뿌리 깊은 신앙이에요. 그래서 뿌리 깊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쉽게 흔들리지 않는 그러한 사람이에요. 이러한 뿌리가 정말 깊어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여기에 보면, ‘터가 굳어진다’ 라고 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뿌리가, 뿌리가 튼튼해진다는 것이 개인의 신앙의 깊어져서 환경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그러한 신앙을 가리킨다면, ‘터가 굳어진다’ 고 하는 이것은 교회론 적인 적용이에요. 그래서 그렇게 뿌리를 내린 사람들이 건물을 이루는 지체들처럼 서로 연결이 되어 있을 때, 그것이 터가 굳어지는 것이 되는 거죠.
(예화) 좀 더 이야기를 하자면, 이런 거죠. 어렸을 때, 산에다가 나무를 심으면 홍수가 안 나고 산사태가 안 난다고 그랬을 때, 무슨 소리인지 잘 몰랐어요. 그런데 큰 산에 가서 한번 땅을 파보면 그게 무슨 소리인지 알아요. 한 100미터짜리 높이의 나무가 있으면, 뿌리의 길이도 거의 60에서 100미터가 되요. 그러면 그 나무들이 2-30미터 간격으로 서 있어서 중간은 빈 땅 같아도 땅 속에서는 이것들이 서로 얽혀서 산 전체가 밧줄로 묶인 것처럼 뿌리 천지로 뒤 엉켜 있는 거예요. 그게 움켜쥐고 있어서 땅의 습기를 보존하고 그리고 어딘가가 물의 피해를 입어서 무너질 때에도, 그렇게 무너지지 않도록 붙들고 굉장히 많은 양의 물을 나무와 땅이 흡수 해 버리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산을 지키는 거예요.
그러면 오늘 여기에서 건물과 비견해서 ‘터가 굳어진다’고 이야기 하는 거죠. 그래서 한 사람이 좋고 그리고 신실한 신앙으로 깊은 뿌리를 내리는 신앙이 되면, 요동하지 않는 가운데에 그는 이제 뿌리를 내딛어서 교회 전체를 든든하게 세우는 그러한 역할들을 하게 되는 거죠. 자, 그러면 어떻게, 어떻게 할 때에 이러한 훌륭한 뿌리 깊은 믿음이 될 것인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는 세 가지로 이것을 압축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잘 믿는 마음이에요.
Ⅰ. 잘 믿는 마음
그래서 성경에 보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랬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사람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그랬으니 첫째는 잘 믿는 마음이에요. 잘 믿는 마음은 잘 배우는 마음을 따라갈 수 없어요. 지식으로 잘 배우는 그 지식만으로 열심히 배우는 그 이성의 배움은 잘 믿는 마음을 능가할 수 없어요. 잘 믿고자 하는 성향 그 자체가 사람의 성향이에요. 그래서 우리들이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면, 그 사람의 말을 신뢰하게 되는 거예요. 그것이 사람 안에 깃들여 있는 믿고자 하는 성향이에요. 그러니까 누군가를 누군가에 대해서 자꾸 의심하는 마음이 생기면, 사랑 하는게 아니에요. 사랑하면 신뢰하는 마음, 믿고자 하는 마음, 심지어는 사실을 보여 주었는데도 그 사람에게 선한 방향으로 해석을 하고자 하는 성향이 자리가 잡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언제 잘 믿느냐 하면, 주님을 많이 사랑 할 때 잘 믿는 거예요. 잘 믿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뿌리가 깊은 신앙이 되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이 잘 믿는 신앙이에요. 그러면, 잘 믿는 신앙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흔히 믿는, 믿는 행동 그 자체에 엄청난 힘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사실은 무엇을 믿느냐 하는 것이 훨씬 중요한 거예요. 그리고 믿어야 할 참된 지식에 대한 인식이 없는 믿음은 사실은 맹신이지 신앙이 아니예요. 하나님은 인격적이고 앎에 기초한 그러한 믿음을 하나님이 정말 좋은 믿음이라고 보시지, 스스로 자신에게 최면을 거는 맹신, 이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얘기예요. 그래서 우리는 믿음이라고 할 때, 항상 어떠한 생각을 가져야 하는가 하면, 이 믿음이라는 말 바로 앞에는 하나님의 말씀, 이것이 괄호 안에 들어 있다고 생각을 해야 해요.
(예화) 자,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자, 사람들이 흔히 자기 암시를 주고 최면을 거는 것도 믿음이 아닐까요? ‘나는 성공할 수 있어’ 한번은 교역자들이 수련회를 갔나, 교역자였나, 누구였나 교회에서 갔어요. 그런데 저녁때가 되었는데, 같은 콘도에서 소리가 요란해요. 그래서 내려가 보니까 커다란 강당에서 사람들이 모여서 수련회를 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이렇게 봤더니 수련회, 우리로 말하면 결단의 시간이에요. 그런데 결단의 시간인데 까만 양복은 아니고 추리닝 같은 것을 입은 사람이 있는데, 그 나중에 알고 보니까 다단계 판매 사원들의 수련회에요. 그런데 어 제일 먼저 나와서 어떠한 사람이, 우리로 말하면 복음을 선포하는 거예요. 그랬더니 사람들이 막 아멘, 아멘 하는 태도로 그 말씀을 받는 거예요. 그러더니 간증 시간이 있으니까 사람들이 하나하나 나와서 그 사람들이 가르쳐 준 대로 했더니 이렇게 성공 하였다는 간증을 막 하는 거야. 그래서 그 자매가 ‘여러분들도 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는 거야. 그러니까 무서워요.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나는 성공한다. 성공한다고 하면서 사람들이 막 테이블 위로 올라가는 거야. 그러면서 막 이렇게 해요. 무슨 이게 나치당의 전당 대회 하는 것처럼 어, 무섭더라고요. 그러더니 어느 자매 하나가 우리 교회에 오더니, 거기에서는 아니고 자매 하나가 등록을 해서 은혜를 많이 받고 회심을 했는데, 그 자매가 다단계에 발을 딛어 놨다가 인생 아주 힘들게 되었던 자매거든요. 그 자매가 뭐라 그러는가 하면, ‘목사님, 저는 교회 와서 깜짝 놀랐어요. 다단계하고 너무 비슷해요’ 막,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그러는 거예요. 마지막에는 믿음 충만해져가지고 박수로 마치는 거예요. 그것도 어떻게 보면 믿음이죠. 그런데 사실은 그러한 믿음이 아니에요.
(예화) 실제로 어느 목사님이 그렇게 이야기 하는 것을 보았어요. 여러분, 우리가 믿음 없이 살 수 있겠습니까? 수시로 비행기 떨어지는데, 우리는 탑니다. 믿음 없이 어떻게 우리가 탈 수 있겠습니까? 이발소에서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우리는 목을 맡깁니다. 목을 맡긴다는 것이 자매들은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죠? 남자들이 이렇게 하고 여기에서부터 면도를 시작하는 거예요. 거기가 급소예요.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목을 맡깁니다. 믿음 아니야. 확률이야 확률. 확률이에요. 믿음 아니에요.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그러한 믿음이 아니에요.
그 믿음이라고 할 때에는 분명히 그러한 식으로 자기 속에서 우러나오는 그러한 종류의 믿음이 아니라 믿어야 될 분명한 계시적인 계시, 믿어야할 성경 계시에 대한 믿음이고 그 믿음의 핵심은 그리스도 예수의 인격이란 말이야. 그것을 정확하게 알아야 해요.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잘 믿으려면 그 믿어야 할 대상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이 접하여야 하는 거야. 그래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믿음은 어디에서 난다고? 들음에서 난다고. 믿음을 충만하게 자석처럼 만들어서 가서 성경에다가 대면 성경이 막 달라붙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는 사람도 이렇게 계속해서 들을 때, 계속 들을 때 그때에 이 속에서 확 하는 믿음이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의 선물로 생겨나는 거야. 그래서 이미 예수님을 믿은 신자들은 믿어야 할 재료가 되는 계시의 내용을 계속 접할 때, 듣기도 하고, 보기도 하고 뭐하기도 하면서 쭉 생겨나는 가운데 그러한 가운데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는 거예요. 잘 믿는 마음을 주시는 거예요. 그러면 잘 믿는 마음이 생길 때, 그 믿음은 우리를 굳세게 만드는 거죠. 가정이든지 부부간의 사랑이든지 우정이든지 하여튼 동업자들 간의 심정적 연대이든지 이 모든 것들이 어디에서 깨지기 시작하는가 하면, 의심에서부터 깨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믿지 못하게 될 때, 관계 자체가 뿌리 채 흔들리게 되는 거예요. 의견이 달라서 가끔 다투는 것은 그것은 그렇게 큰 문제가 안돼요. 어떻게 의견이 똑같을 수가 있겠어요. 그러나 의심하기 시작하면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는 거야. 쭉 찢어지기 시작하면서 관계가 깨지기 시작하는 거야. 그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만드는 첫 번째 방법이 잘 믿는 마음을 우리에게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계시의 내용을 잘 믿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수시로 대하면서 그러면서 그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며 믿는 마음이 우리 속에서 계속 역사할 때 우리의 신앙은 깊은 뿌리를 내리게 되는 거죠. 그게 바로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뿌리 깊은 신앙이 되게 하는 첫 번째 방법이에요.
Ⅱ. 그리스도 계신 마음
두 번째는 뭐냐 하면,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그랬거든요.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계신다고 하는 것은, 진짜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의 마음에 하늘 보좌에 앉은 것처럼 그렇게 계신다는 뜻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이 이 세상에 틀림없이 계시지만,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천국에 계신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계신 거예요. 하늘 나라에 계신 것과는 같은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계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진짜 오셔서 내 마음에 계신다는 그러한 뜻이 아니라 주님이 내 마음에 계시다 라고 하는 뜻은, 주님과 같은 주님을 닮은 그 마음이 내 마음속에 품어지는 것을 가리키는 거예요. 그것이 결국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형상은 곧 하나님의 형상이거든요. 성령을 예수의 영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죠. 그렇게 해서 내 마음 안에 계시면 내가 주님 닮은 마음을 품게 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죠. 그래서 사도바울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 것이다. 이 표현은 빌립보서 2장에 나오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이 말씀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거예요. 성령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게 하시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아 거룩해 가도록 만드시는 거예요.
그러니 신앙의 뿌리가 깊어진다고 하는 것은 예수의 마음을 많이 품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죠. 예수의 마음이 어떠한 마음입니까? 그 마음이 어떠한 마음일까요?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에 사시고, 하늘 영광 버리고 이 세상에 오시고 사시고 죽으신 그것 모두 속에 주님의 그 마음이 반영되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 가장 중심적인 작업은 예수에 관해서 많이 생각하고 이 성경 구절이 그리스도와 무슨 연관이 있을까. 그것을 탐구하는 것이 성경 공부에 있어서 성경 읽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에요. 그것을 사도바울이 어떻게 표현하였습니까. 곧 그리스도의 마음이다. 그러면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보여줄 수가 없잖아요. 예수님이 태어나시고 사시고 마지막에 죽으신 그 전 과정 자체가 끊임없는 예수 마음에 발현이었잖아요.
쉽게 이야기 해보세요. 여러분들 마음을 내가 어떻게 알아요? 표정을 본다든지, 남녀가 있어서 서로 좋아한다고 하면 그 사람들이 서로 좋아하는 것을 어떻게 알아? 봤는데 맨 날 벌레 씹은 얼굴이나 하면 표시가 되겠어요? 그래서 불리한 사람들이 누구인가 하면, 심리적으로 왜 이렇게, 이렇게 감정 표현이 삐딱선 타는 사람이 있죠? 애들도 그러한 애들 있죠. 좋으면 막 발로 차고, 신경질 내고 그러한 표현을 관심 끌고 싶으면 사고치고, 그러면서 애정 결핍증 걸린 그러한 아이들 있잖아요. 그래도 뭐, 어떠한 잡지에 보니까 그러더라고요. 다음 중 당신에게 해당하는 것을 표시하시오 그러는데, 기차가 강 위를 철길을 달리는 때에 뛰어 내리고 싶다. 나 정말 그렇게 생각한 적 있거든요. 그래서 옆에다가 표시를 딱 했어요. 그러면서 화살표가 쫙 이어지는데, 애정결핍임. 내가 애정결핍인가? 진짜 확 뛰어내리고 싶은 마음이 있었거든요. 어쨌든 감정을 삐딱선을 타서 표현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이러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되는 거죠. 저 사람은 사랑 표시를 한다고 했는데, 이 사람은 오해를 해서 저 사람이 자기를 싫어한다고 생각하고 막 이러는 거예요. 고양이와 개와 있는 것과 똑같은 거죠. 개는 좋으면 꼬리를 막 흔들잖아요. 고양이는 공격할 때가 되면 꼬리를 딱 들잖아요. 고양이가 개를 딱 볼 때, 이 자식은 만날 때마다 성질을 부리네. 그러니까 싸우는 거예요. 고양이와 개는 정말 친하게 지내는 것을 못 봤어요. 그렇게 싸워요. 그러는 거예요. 그게 발현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어떠한 사람들의 마음을, 나는 네 마음을 안다고 할 때 그 사람의 표정이나 행동이나 그러한 것들을 오랫동안 봤으니까 네 마음을 안다고 하는 것이지, 발현되지 않는, 마음 자체가 영의 작용인데 어떻게 알 수 있겠어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래놓고 그분의 마음은 이렇게 하지 않고, 그는.. 이라고 했어요.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그와 동등 됨으로 취할 것을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며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이게 바로 예수의 마음이다 라고 가르쳐 주는 거예요. 그래서 하늘의 영광, 하나님 자신에도 하늘의 영광을 다 버리고 낮아지시고 오히려 비천한 사람의 형체를 입으시고 그리고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을 여기지 않으시고 자기를 비워. 자기를 비웠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신성을 비우셨다는 거예요. 이것을 신성을 퍼버렸다라고 해석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이단이에요. 신성을 퍼버려서 예수님은 참 사람이시기만 했지, 하나님이신 것을 거부한 것이다. 이게 케노틱 이단이라고 하는 아주 끔찍한 이단이에요. 그게 아니라 하나님이셨는데, 스스로 낮아지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겸손하게 감추시고 사람의 성품으로 덮어버리신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낮아지시고 그리고 종의 형체를 가져서 그래서 사람들을 끔찍이도 사랑하시고 섬기셔서 마지막에 자기 자신을 낮추시고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하신 그것이 바로 예수의 마음이다. 한 마음으로 무슨 마음이에요? 자기를 온전히 버리고 남을 섬기고 하나님을 섬기고 그러신 생애예요. 그러한 마음이에요. 그러한 마음에서 자라가는 것이 신앙의 뿌리가 깊어가는 거예요.
(예화) 우리 어렸을 때는 전봇대가 다 무엇으로 되어 있었지요? 나무예요. 나무. 콘크리트 그러한 게 없고 나무였고요. 나무를 잘라다가 기름으로 튀겨가다가 그래서 비가와도 잘 안 썩게 시커멓게 만들어서 그것을 박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전봇대 고치러 올라가는 아저씨들은 여기에다가 아이젠을 차고 다람쥐처럼 막 올라가. 그러면 나무가 퍽퍽 찍히면서 위로 올라가서 전봇대 마다 보면 상처가 수없이 많아요. 애들이 자기 이름도 새기고, 짖궂은 애들은 거기에다가 불도 질러보고, 혼나죠. 그런데 그렇게 그렇게 했는데, 그것 밑에다가 콘크리트를 잔뜩 합니다. 정말 흔들리지 않고 굳센 나무가 되죠. 그러나 그것은 생명이 없기 때문에 든든히 뿌리를 박았다고 이야기 하지 않아요. 살아있는 나무일 때, 든든히 뿌리를 박았다고 이야기 합니다. 어떠한 사람은 가끔 이분은 신앙의 요동이 없는 분입니다. 우리 교회 등록하고 35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말씀의 깨달음도 없고, 기도도 없고 35년동안 교회 나오면 열심히 자고, 교회 문제를 안 일으켜. 너무 신앙이 죽어 있어서 문제를 일으킬 기력도 없어요. 그러한 것을 우리들이 견고한 신앙이라고 말하지 않아요. 소잡아먹은 귀신 엎드려 있는 것처럼 그러한 신앙을 우리들이 뿌리 깊은 신앙이라고 말하지 않아요. 뿌리 깊은 신앙은 계속해서 열매를 맺어야지 나무가 된 전봇대에 열매 맺는 것 보았어요? 열매를 맺어야지, 줄기 가지가 뻗고 사람들이 기뻐하는 줄기, 과실들을 많이 맺어야지. 그러면서 흔들리지 않는 나무가 견고한 나무죠. 그러니까 제발 어디 가서 그렇게 오래 한 교회 다녔다고 하는 자랑 하지 마요. 본인은 굉장히 자랑스럽게 여기지만, 목회자들은 그렇게 자랑스럽게 생각 안해요. 소잡아먹은 사람 마냥 그렇게 하면 안 되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사람들의 삶은 아주 역동적이죠. 그래서 예수님의 생애는 드라마틱했잖아요. 그렇게 주님의 마음을 품는데서 점점 자라나는 것. 다시 말하면, 주님의 마음이 점점점점 점점 깊어지는 것.
(예화) 예를 들어봅시다. 주님이 자신에게 맡겨주신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일을 하는데, 어려움이 와요. 이렇게 보니까 주위에 노는 사람도 많은 거예요. 맨 날 나는 집사라고 고생하는데 안수집사들도 노는 사람 있고, 권사라고 하는 사람도 노는 사람이 있는데 내가 뭐 맨 날 나 혼자서 이 고생을 하나. 그러면서 뿔뚝심이 확 솟아요. 이게 이제 지 마음이에요. 지 마음. 그런데 그래도 내가 참아야지. 언제 내가 사람 얼굴 보고 이 일했나. 주님의 십자가 사랑 고마워서 이 일을 했지. 이게 그리스도의 마음이에요. 이 신앙이 깊어지려면, 이러한 마음이 계속 늘어나야 되는 거죠. 그래서 처음에는 욱하는 마음이 생겨도 주님의 마음이 탁 항상 내 속에서 이기는 거예요. 그래서 아, 그렇군요.
(예화) 그래서 지금 제주도에서 목회하고 있는 내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가 같이 직장에 다니다가 신학교에 갔거든요. 이 친구가 아주 뭐 좋은 의미에서 오지랖이 넓어요. 온방팔방 다 나서요. 그런데 자기 청년부에서 어떤 청년이 신학교를 가겠다고 시험을 봤는데 붙었어요. 집에서도 못 가게 해서 등록금이 없어요. 그래서 자기를 도와주는 집사님에게 가서 얘도 도와주면 안되요? 이 분이 너무 머리가 아파서 나도 돈 없어요 그러면서 짜증 비슷하게 확 내고 갔다는 거예요. 조금 그렇잖아요. 알아서 가라. 다른 사람에게 가면 되지. 전도해와 가지고 얘도 좀 도와주라고 하면 좀 그렇잖아요. 등록금이 뭐 일이십만원이에요? 그러더니 그 다음날 새벽기도회인가 언제 만나서 만났대요. 어젯밤에 형제한테 그렇게 화를 내고 가서 간절히 기도해보니까, 주님이 그러지 말라 그러신대는 거예요. 그래서 나도 어려운데, 등록금 해가지고 왔노라고 탁 주더래요. 아까 성질 팍 내고 간 마음은 자기 마음, 회개하고 돈 들고 온 마음은 그리스도의 마음. 왜 웃어요? 사실인데. 그러한 마음에서 계속 자라갈 때 이 신앙의 뿌리가 든든히 내리는 거예요.
여기에서 하나의 교리를 발견하게 되는 거예요. 하나의 중요한 교리를 발견하게 돼요. 잊어 먹지 마요. 교리를 발견하게 돼요. 따라해 봐요. 지 성질대로 사는 사람은 신앙의 성장이 없다. 없지. 늘 자기 마음이 이기는데, 어떻게 뿌리가 깊어질 수가 있겠어요? 그러니까 뿌리 좀 내리려고 하면, 한 번 성질을 부려서 지 마음대로 성질을 부려서 확 뽑아 버리는 거예요. 그것도 다시 심으면 뿌리 좀 내딛으려 하면 확 뽑아 버리는 거예요. 맨날 그 짓을 했으니까 다른 나무가 뿌리를 내딛고 열매를 맺을 때, 얘는 아직도 묘목이야. 중요한 교리죠. 지 성질대로 사는 사람에게는 신앙의 성장이 없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뿌리 깊은 신앙이 있다. 놀라운 거죠. 이 두 마음, 신앙의 싸움이라고 하는 것은 이 두 마음의 끊임없는 싸움이에요. 이 두 마음의 끊임없는 싸움. 그거죠.
마지막 세 번째는 뭐냐 하면 사랑하는 마음이에요.
Ⅲ. 사랑하는 마음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사랑가운데서 뿌리가 깊어지고, 뿌리를 내디고 터가 깊어지고 그랬습니다. 사랑 가운데 사랑하는 마음. 사실 은 성경은 이 사랑을 두 가지로 우리에게 이야기해요. 마치 사랑이 우리의 자원인 것처럼 이야기 하면서, 사랑하라. 사랑을 베풀어라. 그래서 우리를 충분히 사랑할 수 있는 자원을 가진 사람인 것처럼 우리를 불러내요. 그러면서 성경은 또한 다른 곳에서는 어떻게 이야기 하는가 하면,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다. 또한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은혜를 주셔야지만, 우리가 사랑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사랑하며 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 덕분이라고 하는 것을 가르쳐요. 그러면 이렇게 상반된 모순처럼 보이는 이 두 가지를 우리는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이런 것이죠. 그것은 간단하게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사람 그 자체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어요. 주님이 우리에게 사랑하게끔 그렇게 역사해 주시는 은혜의 감화가 있는 곳에서 사랑이 가능하다. 그래서 신령한 은혜의 효과는 진실한 사랑이에요. 다시. 신령한 은혜의 경험은 반드시, 반드시 신실한 사랑을 가져와요. 그래서 한 사람의 신앙의 깊이는 어떠한 은사를 받았느냐. 얼마나 열렬하냐. 이러한 것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특별히 그리스도와 그리고 인간들을 특별히 교회의 지체들을, 인간들을 얼마나 진실하게 사랑하느냐, 그것이 그 사람이 얼마나 성령의 사람이냐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죠. 그래서 진실한 인격적인 사랑이 없는 모든 신비한 신앙의 경험은 무시해도 괜찮아요. 무슨 신앙의 경험이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앎을 우리에게 가져다주고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앞에서 더 순전하고 순결한 사랑을 베풀며 살고자 하는 그러한 마음을 가져다주는 신앙의 경험은 신뢰할 수 있어요. 그러나 사랑이 없는 신비한 신앙의 경험들은 무시해도 좋은 경험들이에요.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라고 하는 증거예요. 그러한 사랑이 원론적으로는 원리적으로는 모든 사랑은 하나님께로 온 거예요.
언젠가 한번 이러한 교리를 가르쳐 준 적이 있죠? 모든 지식의 근원은 오직 누구뿐이에요? 하나님 뿐이죠. 모든 지식은 하나님이 근원이에요. 그 하나님에게서 모두 나온 지식들이에요. 그러면 진리의 근원은 어떻게 되겠어요? 모든 진리의 근원도 하나님 한 분 뿐이에요. 쪼가리 쪼가리 흩틀어져 있는 모든 과학 지식부터 시작을 해서 종교적인 지식까지도 참된 지식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에요. 사람들이 그것을 잘못사용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것이에요. 그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모든 지식의 근원이 하나님이신 것처럼, 모든 사랑의 근원은 하나님이에요.
그러면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은 이렇게 묻고 싶겠죠. 내가 이렇게 이야기 하니까, 아무도 그렇게 묻는 사람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나 혼자 스스로 그렇게 생각했나봐요. 여러분 가운데 어떠한 사람들은 이렇게 묻겠죠? 안 물어도 묻는다 치고, 묻겠죠. 아니 그러면 모든 사랑의 근원이 하나님이라면, 그러면 이 세상에는 좋은 사랑도 있고, 나쁜 사랑도 있는데 그 모든 근원이 하나님입니까? 물론 하나님이에요. 보세요.
(예화) 예를 들자면, 부모의 자식을 향한 진실한 사랑, 이것은 정말 훌륭하게 삼위 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모상이죠. 그런데 스크루지 영감 같은 돈에 대한 찰떡같은 사랑, 그것은 그러면 뭐냐. 그것도 사실은 그 근원을 하나님께로부터 배우는 거예요. 자, 예를 들어 봅시다. 권력에 대한 사랑이 아주 지배하죠. 그래서 중국 역사에 보면, 아버지를 죽이고 황제가 된 사람이 여럿 있어요. 그리고 아버지의 그 피가 마르기 전에 자신이 피를 흘리고 죽는 경우가 있단 말이에요. 그 권력에 대한 사랑은 아주 집요해서 뭐라 그래요? 권력은 아버지와 아들도 나누어 가질 수가 없다. 아, 그러면 사랑하는 부부사이에 나누어 가질 수 있겠느냐, 못 나눠 가지죠. 그것도 나누어 가질 수가 없어요. 그러한 권력에 대한 강한 사랑은 비뚤어진 사랑이잖아요.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오는 거예요. 하나님이 어떠한 사람이 권력에 대한 찰떡같은 사랑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모든 만물을 당신의 권한으로 온전히 통치하시는 그 하나님을 자기도 한번 본떠 보고 싶어 하는 거예요. 자, 돈은 조금 버는데, 막 사치하게 써 버려요. 거기에서 방탕한 삶이 오죠. 사치스러운 삶이 오잖아요. 자기는 그렇게 쓸 수 없는 재화가 이만큼 밖에 없는데, 무한히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 인간들을 위해 그것을 쓰시고 인간들을 위해서 쓰심으로 당신 자신을 위해 쓰시는 것처럼 하나님의 그 풍부하고 무한량함을 인간이 소비생활로 본떠버리려고 하는 것이 바로 사치라고 하는 거예요. 뭐, 이렇게 따지면 인간에게 일어나는 오욕칠정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 자신 안에 있는 참된 행복을 그릇된 방식으로 본떠 보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모든 사랑이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와서, 어떠한 것들은 올바른 선한 통로를 통해서 발현이 되고, 어떠한 것은 인간의 욕망에 의해서 삐뚫어 막 휘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이 세상을 어지럽게 만드는 거예요. 그게 바로 모든 사랑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보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선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올바르게 본받는 것이고., 악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그릇되게 본받는 거예요. 다른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악이에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우리의 신앙을 깊게 하실 때에 사랑하는 마음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을 깊어지게 하시는 것이죠. 그래서 사랑은 그 모든 신령한 신앙의 경험과 말씀의 모든 지식을 능가하는 최고의 가치예요. 그 사랑이 온전한 지식과 그리고 온전한 성화속에서 생겨나게 되는 것이죠. 그것이에요. 그렇게 해서 우리의 신앙의 터가 굳어지는 거죠. 우리가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때로는 하나님에 대해서 뿐 아니라 하나님과 그 다음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 대해서 배워요. 인간에 대해서 배워요. 그러면서 뭘 배우게 되죠? 무엇을 사랑해야 하고, 무엇을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을 배우게 되는 거죠.
문화도 마찬가지에요. 아무것도 모르면, 인셉션이나 이러한 영화를 보고 워... 하고 그리고 아, 재미있다. 아이고 팝콘도 맛있고, 아이고 정말 죽여주는 영화구나. 다음에 언제 나오나, 침만 줄줄 흘려요. 그러한 것은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이러한 영화들이 현대인들에게 열광을 받고 이것을 만들어 낸 사람들 사이에는 무슨 사상이 있는가를 알게 될 때, 우리는 거기에서 생선을 먹듯이 가시와 뼈를 발려 내게 되는 것이에요. 아, 현대인들이 이러한 것에 매료 된다는 것은 현대인들의 심적인 구조가 이러한 것이 된다는 것이구나. 아, 그러면 우리들이 복음을 전할 때, 이러한 사람들의 마음을 이러한 식으로 이해하고 접근을 해야 되겠구나. 이게 살이야. 어짜피 현대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전해야 하니까. 가시야. 그 가시는 이것은 아니지 라고 확 줄을 긋고 객관적으로 대할 수 있는 거야. 그게 뭐죠? 하나님의 말씀과 이 세상과 인간에 대한 지식을 가지면 가질수록 그것들 속에서 정확하게 분별할 수 있는 지식이 생겨나는 거야. 그래서 세상 지식이라는 것은 없어요. 사람들이 흔히 세상 지식과 하나님 지식 , 두 개를 갈라놓잖아요. 잘 들어봐요.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세상지식처럼 사용되면 세상지식이 되는 것이고, 세상 지식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엮어서 사용을 하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지식이 되는 거예요. 그것을 여러분들이 잘 기억을 해야 하는 거예요.
그러면 생각해 보세요. 그렇게 하나님을 올바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올바로 아는 것이 중요한 거예요. 그러면 여기에서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결국은 무엇이겠어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에 대해서 합당한 애정을 갖고 그리고 인간에 대해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갖기를 원하시는 이웃에 대한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그렇게 인간과 이 모든 것들을 올바른 사랑의 질서로 사랑을 하게 되는 것, 이것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의 뿌리가 계속 내려가는 거예요.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게 되는 거죠. 그러면 그것을 올바를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겠어요? 그것을 알아야죠.
(예화) 마크 노올이라고 하는 미국의 신학자가 책을 썼는데,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이라는 책을 썼어요. 원래 스캔들이라고 하는 것이 추문이잖아요. 그러한 책을 썼어요. 내용이 뭐냐 하면, 금세기 들어서 복음주의는 굉장히 풍부해졌다는 거예요. 복음도 많이 전해지고, 사람들마다 교회가 굉장히 활발하게 움직이는 것 같은 착시 현상을 가져왔지만, 그러나 사실은 커다란 스캔들을 만들었는데, 그 스캔들이 뭐냐 하면 기독교가 원래 가지고 있었던 전통적인 신앙의 자세를 버리고 외도를 한다고 하는 스캔들이라는 거예요. 그 버린 그 본초와 같은 것이 뭐냐, 뭐냐 하면 기독교 신앙은 언제나 하나님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와 인간에 대한 총체적인 지식의 체계를 붙들고 믿는 신앙이었다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기독교의 역사적인 큰 힘이었다는 거예요. 그것을 붙들고 비성경적이고 반복음적인 것들과 싸웠기 때문에 왜 그렇게 독재국가에서 복음이 들어오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무서워하는 이유가 뭐예요? 들어오면, 복음은 들어올 때는 밀수품처럼 성경 감추어서 들어오는데, 이상하게 그 복음을 듣고 딱 복음에 취해서 그 사람의 영혼에 변화가 오고나면 놀라운 저항력이 생겨나서 그것을 뒤집어 엎어 버리는 거에요. 그게 독재국가나 이슬람에서 복음이 들어오는 것을 그렇게 두려워하는 이유라 이거예요. 가만히 내버려 두질 않아요.
(예화) 우리 나라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첩을 거닐며 사는 것이 보편적이었어요. 누가 두드려 부셨는지 아세요? 교회가. 복음이 들어오고 여성들이 깨어나기 시작하니까, 뒤집어 엎었단 말이에요. 상놈과 양반의 반상의 차별을 철폐하는 강력한 사회운동이 복음이 들어가면서 일어나게 된 거예요. 인도의 카스트 제도들 막 무너지잖아요. 복음이 들어가서 무너뜨리게 되는 거예요. 상상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것들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정말로 북한에 다녀온 어느 목사님이 나에게 그러한 말씀을 전해줘요. 실제로 그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 할 때, 사실은 우리는 남한의 대포보다 성경이 무섭습니다. 그래요. 여러분들 웃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종교를 정확하게 꿰뚫어보는 사람이에요. 그게 얼마나 무서운가 하는 것을 보는 사람이에요. 남한의 대포보다 성경이 무섭습니다. 들어와서 누룩처럼 번져가는 거예요. 확 번져가요. 그 힘이에요. 사상의 힘이란 말이에요.
그렇게 해서 올바로 알고 올바로 뜨겁게 사랑의 역량이 자라가는 거예요. 그럴 때 우리의 신앙이 점점 더 깊이 있는 신앙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올바르게 잘 배우고 알게 되면, 사랑의 외연이 계속 확대되어 가는 거예요. 예전에는 나만 괜찮으면 괜찮은 거예요. 좀더 우리 구역의 식구들, 우리 가족, 그 다음에 친척 이렇게, 이렇게 번져 가다가 이 세계 전체를 놓고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는 보편 교회에 대한 간절한 사랑의 마음이 생겨나게 돼요. 이렇게 세 마음, 잘 믿는 마음, 그리스도의 마음, 마지막 사랑하는 마음, 이 마음을 통해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신앙을 든든히 세워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이 세 가지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