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뻐할 근심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고후7:9)
녹취자 : 이경순
고린도후서는 분투하는 전도자의 삶을 산 사도바울과 그 일행의 고생, 그리고 그 위에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위로를 기록한 책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사도바울이 세우기는 했지만 그러나 사도바울의 마음을 많이 할퀸 교회였습니다. 교회가 모두 세워질 때는 주님의 은혜로 세워지지만 그 교회를 이루는 구성원들이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사람의 악함 때문에 사랑하여야할 교회가 서로를 아프게 할 때가 있고 심지어는 가장 서로 사랑하여야할 그 끝까지 사랑하고 서로 존경하여야할 목회자와 교인 사이에서도 서로 할퀴는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아버지와 같은 심정으로 교회를 세웠지만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은혜가 떨어지고 교만해지기 시작하자 그들은 사도바울을 업신여기고 그가 전해준 복음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깨뜨려지던 그 처음 신앙을 잃어버리게 되자 온갖 더러운 세상의 죄악들이 교회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듣고 사도바울은 매우 마음이 아팠습니다. 파당을 나누고 분리하는 죄, 그리고 뿐만 아니라 돈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탐욕의 죄, 그리고 우상을 숭배하고 간음하는 죄, 이런 모든 그 도시에 있는 죄들이 이 고린도 교회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고린도 전서는 그런 가슴 아픈 소식 이외에 심지어는 사도바울이 정말 사도냐 라고 하는 사도직에 대한 도전의 이야기까지 들려오는 가운데 써내려간 책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전서에는 아프게 책망하는 내용들이 많이 담겨 있습니다. 그 후로 얼마간 시간이 흘렀을 때 사도바울은 그렇게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심하게 책망한 것을 후회하였는데 이는 그들이 후일 정신을 차리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되자 사도바울의 책망에 인해서 많이 아파하고 회개한다는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입니다. 그런 소식이 들리는 가운데서 고린도 후서를 써 내려 가게 된 것입니다. 이 고린도 후서 우리가 읽은 이 본문에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맨 처음에는 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 이것은 곧 그들의 죄를 강력하게 책망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내가 후회 하였지만 왜? 너희들이 그렇게 아파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내가 그렇게 책망한 것을 후회하였지만 이제는 후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근심을 통해서 너희들이 참된 회개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서 기뻐할 근심을 생각하게 됩니다.
근심에는 슬퍼할 근심이 있고 또 기뻐할 근심이 있습니다. 슬퍼할 근심은 문자 그대로 슬픔이상 아무것도 갖다 주지 못하는 근심입니다. 근심할수록 슬퍼지고 근심할수록 마음이 상하고 근심할수록 영혼의 어두움이 찾아오고 근심할수록 육신의 힘까지 쇠하여지는 그런 종류의 뼈를 썩히게 하는 근심입니다. 이 세상에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을 더 많이 소유할까 등등을 가지고 하는 그 모든 근심은 바로 이렇게 우리의 영혼을 어둡게 하고 우리의 마음을 더럽히며 우리의 육체의 뼈를 썩히는 근심입니다. 그러나 기뻐할 근심이 있으니 이는 생명에 이르게 하는 근심입니다. 바로 이 고린도 교회가 했던 근심이었습니다.
그들의 근심은 크게 두 가지 때문이었는데 하나는 자기들의 죄를 인한 근심이었습니다. 예전에 탐욕에 치우치고 은혜가 떨어지고 마음이 어두웠을 때는 자신들이 그 죄를 지은 것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잘 몰랐습니다. 원래 인간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인간이 은혜가 떨어지고 나면 관점이 철저하게 자아중심이 됩니다. 은혜가 떨어지게 되면 철저하게 자기본위가 됩니다. 보는 것도 자기입장에서 봅니다. 생각하는 것도 자기입장에서만 생각합니다. 판단하는 것도 자기 이익에 관련해서만 판단합니다. 뭐든지 자기본위입니다. 그러나 은혜가 스며들어가게 되면 자기본위의 삶이 하나님 본위의 삶이 됩니다. 그래서 나의 모든 생각은 십자가에 못 박고 주님이 어떤 생각을 하실까 그리고 주님의 그 마음이 어떨까 하고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가 떨어질 때는 죄 같은 것 생각나지 않고 자기 힘든 것 자기상처 자기고통 자기 설움 이런 것들만 한없이 북 받히면서 그 맥락 속에서만 모든 문제를 봅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의 뜻 속에 우겨넣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인간이 죄에 빠졌을 때 은혜가 사라지고 죄가 그 마음속에 역사하고 있을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특히 상처를 받은 사람들은 그 상처에 감염이 되어서 그 상처 속에 상처를 타고 죄가 스며 들어오게 됩니다. 여러분 인간이 죽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지 아세요? 어떤 사람들은 손톱 밑에 작게 난 상처 때문에 죽기도 합니다. 당뇨병이 있다든지 심각한 면역결핍증에 걸리게 되면 아주 작은 상처로도 결국은 피가 멎지 않거나 썩어 들어가고 저항력을 잃어버려서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상처를 타고 죄라는 균이 막 파고들어 오는 것입니다 그러한 상처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그 담에 자기본위의 생각에 치우치게 됩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두드리고 각성시키시게 되면 이 어리석은 자기본위의 삶을 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이 어떤 마음일까 생각하게 됩니다. 저는 요 며칠 전부터 성도의 공동생활을 다시 한 번 묵상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스치고 지나가면 그것으로서 끝입니다. 우리의 아름다운 삶은 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좌우하고 그 안에서 작용할 때 나오는 것이지 스치고 지나간 것은 이미 내 말씀이 아니입니다. 옛날에 무슨 말씀에 아무리 많이 은혜를 받았다고 해도 그래서 그것들이 우리의 지식의 창고에 드러누워 있어도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지금 있는 우리의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공동생활을 다시 한 번 읽고 있습니다.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 정말 그렇구나.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찰 때. 그 은혜는 곧 사랑의 감화입니다. 그 사랑의 감화가 가득찼을때는 뭐든지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 본위야 그래서 하나님 본위이기 때문에 하나님입장에서 생각하고 하나님의 시각에서 판단하고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모든 것을 결정해요. 사랑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요. 그런데 그 사랑이 식으면 예전에 용서했던 사람 다시 미워하고 은혜 받았을 때 화해했던 사람 다시 원수 맺어요. 그게 우리 인간 입니다 그런데 이 고린도 교회가 그렇게 은혜가 떨어지고 사도바울에게 불순종 했을 때는 아버지 같은 목회자인 이 사도의 마음을 수없이 할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다시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지시고 그들에게 다시 한 번 하나님께서 각성하게 하시는 성령의 영향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자 이들의 마음에 자기의 죄들을 인해서 근심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아 그렇구나. 이전에 우리가 행했던 이런 것들이 끔직한 죄였구나. 교회를 나누고 파당을 하고 한일 이 모든 것이 정말 큰 잘못이었구나. 우리가 부도덕한 것을 용납한 것이 그리스도 몸을 더럽힌 것이었구나. 그리고 우리가 사도바울에게 대들고 그리고 그의 권위를 의심했던 것 이 모든 것들이 정말 하나님 앞에 가슴 아프게 해드리는 일들이었구나. 그리고 근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데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우리의 죄에 의해서 근심한다고 해서 한순간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이 됩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제가 천천히 이야기 해 드릴 테니까 자기도 그런 때가 잇는지 한번 점검해보기를 바래요. 분명히 눈물이 펑펑 쏟아지면서 아주 똑부러지게 회개를 했는데 이상하게 회개의 눈물이 걷히고 나서 삽십 분이 되기도 전에 그 회개할 때의 간절했던 은혜의 마음이 사라지고 다시 마음이 굳어지는 경험한적 없습니까? 우리들이 죄에 아주 얕게 빠졌을 때는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은혜의 지배아래 있을 때는 우리가 한번영적인 순발력을 발휘해서 하나님 앞에 깊이 눈물을 흘리며 흐느껴 울고 기도하고 나면 몸과 마음이 쇄락해지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의 감각과 그리고 신령한 특질들이 우리 안에서 확 살아납니다. 그리고 다시 우리는 씩씩하게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붙들고 주님을 사랑하면서 살아가게 되지요. 그런 데 이것은 은혜의 지배아래 있다가 잠시 고갈되었을 때 그런 것입니다. 죄의 지배아래 있게 되면 가끔 통절하도록 참회했는데도 그 참회의 경험이 우리를 단번에 은혜의 지배로 데려가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열렬한 참회의 기도가 식고 나면 신기하게도 빠른 시간 안에 우리의 마음이 건조하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의 마음과 영혼 안에 우세해진 죄의 세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죄의 경향성이 우리 안에서 강화된 거란 말입니다. 그러면 그럴 경우에는 이렇게 죄에 대해서 근심을 한다고 해서 금방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죠. 그렇죠. 이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에 의해서 각성된 마음 입니다. 이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은 큰 회복의 은혜가 이들에게 임하기 전에 먼저 마음에 큰 각성이 일어났어요. 죄에 대해서 슬퍼하는 각성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근심한 것도 바로 그것 때문 이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의 회심을 위해서 요즘 우리가 전에 없이 많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새벽마다 저녁마다 통절하게 흐느껴 우는 그 부모들의 기도소리를 들을 때마다 참 마음이 아립니다. 정말 잘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눈물로 기도하는 자식은 결코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이전에 여러분들이 부모로서 본을 좀 잘못 보였다고 하더라도 또 예수는 믿었지만 변화를 받지 못해서 너절한 삶을 살아서 자녀들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였다고 할지라도 지나간 것 안 그랬으면 참 좋았죠. 그러나 이미 일어난 일을 어떠하겠습니까. 그래도 자녀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긍휼이 여기셔서 그 눈물로 기도한 자녀들을 망하지 않게끔 만들어 주십니다. 그런데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인데 자녀들 자신으로 하여금 자기의 죄 때문에 근심하게 하여야 합니다. 어린이 회심집회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어떤 애들은 초등학교 일학년 이학년 밖에 안 되는데 그렇게 사모해요 그렇게 보여요. 초등학교 일 이학년밖에 안되는데 은혜받기 위해서 금식을 하고 그 친구들을 헤집고 무르팍으로 기어 나와서 목사님한테 기도 받아보려고 이거는 부모가 시켜서 그렇게 되는 게 아닙니다. 야, 오늘저녁에 가서 무르팍으로 막 기어나가서 친구들 헤치고 목사님한테 안수기도 받고 와 하고 말한다고 그렇게 되는 게 아니죠. 어린아이들 마음속에 그 은혜에 대한 간절한 사모함, 은혜에 대한 간절한 사모함이 아이들 속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이들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 근심하게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 없이 그냥 우리가 중보 기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해요 우리가 아무리 중보의 기도를 많이 해도 중보의 기도라는 말은 안 쓰지만 우리가 아무리 그를 위해서 대신 많이 기도해도 그 기도가 정말 그 아이에게 응답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아이가 자기를 위해 비는 그 섬김의 기도에 동참하는 행동을 보여야 합니다, 그때 그 섬기는 기도에 놀라운 위력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 근심하게 만들어야 되요. 며칠 전에 어느 사모를 만나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다섯 살 이렇게 되는 아이들을 모아놓고 선생님이 집회 끝나고 복음을 쭉 전하는데 한아이가 막 울더래요. 그담아이가 막 울더래요. 멈출 수 없이 막 우는데 선생님이 혼란에 빠졌어요. 복음을 가르치다 얘가 우는데 이게 엄마를 보고 싶어서 우는 건지 복음을 듣고 가슴이 아파서 우는 건지 판단이 안서는 것입니다 결국에 나중에 판단하기를 이 아이가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의해서 우는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대요. 그러니까 그 네 살 다섯 살 밖에 안 되는 아이들도 그렇게 복음을 듣고 회심을 하니까 아주 뚜렷한 변화들이 가정에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의 하는 행동을 슬퍼하시는가. 기뻐하시는가. 다시 말해서 그것이 죄인가 아닌가에 대한 아주 예민한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거짓말 같죠. 정말 입니다. 그래서 자녀들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 근심하도록 만드는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이들이 한 근심은 은혜에 대한 갈망 때문에 생겨난 근심이었습니다. 죄에 대한 진지한 근심은 은혜에 대한 갈망이 있을 때만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그 방해물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지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그 무엇을 인해서도 근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마음이 이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 뒤에서 이것이 너희로 하여금 얼마나 분하게 하는지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해서 얼마나 열정적이게 하는지 얼마나 사모하게 하는지 무엇에 대해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사모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책망이 그들로 하여금 아 우리는 그렇게 한때 죄에 빠져서 편당을 짓고 목회자를 대적하고 사도바울의 가슴에 상처를 내고 지체들끼리 나뉘고 교만하고 부도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으로 인해서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주님이 우리 영혼에 은혜를 베풀 수가 없었습니다. 이 모두 우리의 죄입니다. 하나님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 저를 도와주세요. 그런 간절한 사모함 간절한 마음 이것이 생겨나게 됩니다. 영혼들이 잠들어 있으니까 그렇지 영혼들이 은혜를 많이 받고나면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더 많은 갈망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행하려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청소년들은 어른보다 생각이 단순합니다. 정말 단순합니다. 중학교 3학년 때 1명, 고등학교 1학년 때 1명. 저희 반에 있는 친구 둘이 자살을 했습니다. 그중에 한 형제는 아주 성격이 호탕하던 친구였는데 자기 온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분신자살해 버렸어요. 여러 날 동안 앓다가 결국은 비참하게 죽었죠. 왜 그래요? 그러니까 절망도 그 나이에는 엄청난 힘으로 다가와요. 그래서 희망도 아주 크지만 어느 한 순간에 마음이 접히면 절망도 순식간에 밀려와요. 우리는 사실은 나이을 이 만큼 먹게 되면 희망이 생겨도 그렇게 절대희망이 아니고 절망이 생겨도 그냥 근근덕신 절망이 생겨도 그냥 살아가죠. 왜? 이제까지 사십년 오십년 살아온 관성의 법칙이 있어 그냥 떠밀리면서 꾸역꾸역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안 그래요 그래서 걔네들이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탁 꽂히면 그러면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할지 생각 없이 살았던 자신의 모든 삶에 불빛이 들어오기 시작 하는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진짜 은혜를 받으면 그런 불빛이 들어오는 구나 놀라워요. 제가 고등부를 지도할 때인데 자매하나가 은혜를 많이 받았어요. 사내 녀석 하나가 연애편지를 보냈어요. 우리한번 사귀어보자고 뭐 그런 거겠죠. 걔도 은혜를 전혀 못 받은 앤 아닌데 그래도 은혜가 떨어졌는지 연애편지를 써서 보냈는데 답장이 왔는데 이 만큼이 날아와 얘가 너무 좋아가지고 펼쳐 보았더니 논문이 한편 들어있어요. 우리가 어떻게 해서 하나님을 만났고 그리고 우리는 그동안에 어떤 실패를 하면서 여기까지 신앙생활을 해왔고 지금 우리 공동체를 향한 주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며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정신 차리고 살아야 되는지 네가 얼마나 정신 나간 짓을 하고 있는지 논문을 써서 보냈어요. 마지막에 정신 차리고 신앙생활 잘하거나 하나님이 너 슬퍼하신다. 그렇게 분명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꽉 꽂히면 단순한 열정으로 거기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위해 죽기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 변화가 청소년기에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회심해야죠. 두 말할 필요가 없죠. 회심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생명을 걸고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정말입니다. 이것을 가볍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안 다루어집니다. 시험을 한번 해 보세요 이번주간에 어차피 우리 십이 만장인가 이십만 장 전도지를 찍는다고 하니까 원 없이 전도하러 다니실 텐데 한번 여러분 나이 또래 된 결혼한 사람들에게 전도지를 들고 발이 부르트도록 예수 믿으라고 간절히 권하면서 하루를 다녀보세요. 여러분 두 손잡고 펑펑 눈물을 흘리면서 나 신자 되기 원합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한번 경험해 보세요.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기적 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기적 입니다 교회 나오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적 입니다 회심해야 해요. 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루만지시니까 은혜에 대한 갈망으로 근심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자녀 회심했다고 해서 교만하지 마세요. 은혜가운데 있습니까? 여러분 한번 제가 질문 할 테니까 말해보세요. 하나님 모르면서 불신자로 살아갈 때 그때 괴로울 때와 하나님 믿고 회심한 다음에 은혜가 한없이 떨어졌을 때 그 마음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견딜 만 합디까? 사실은 불신자 때가 더 견딜만해요 왜냐하면 아직 생명의 맛을 못 보았으니까 신자는 이미 생명의 맛을 본 사람이니까 영혼이 생명의 은혜에서 떨어지면 견디기 힘든 영혼의 곤고함과 괴로움이오는 것입니다. 허무함과 괴로움 입니다. 그러니까 은혜에 대한 갈망을 스스로 갖도록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스스로 은혜에 대한 갈망을 갖도록 만들어 줘야 합니다. 이게 뭐 은혜가 떨어지더니 별짓 다하네. 이런 식으로 그렇게 욕하고 그러면 안 돼요 자기도 뭐 은혜에 떨어진 적이 없어? 그럴 때 일수록 인격적으로 사랑하면서 그러면서 따듯한 격려로 그가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도록 만들어 줘야 됩니다. 은혜에 대한 갈망을 갖게 될 때 근심하게 됩니다. 내가 너무나 먼 길을 떠나왔구나. 주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은혜에 비하면 내가 주님 앞에 아프게 해 드린 것이 너무나 많구나. 자신의 게으름, 악함 ,그 모든 허물, 나태함 바르지 못한 하나님과의 관계 이런 것들에 대한 근심이 생겨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자녀들 자신이 근심하게 만들어 줘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주님을 찾게 됩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은혜를 사모하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다시 당신을 만나게 할 길을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어린이 회심집회도 해보니까 그중에는 어떻게 부모가 가르치고 위해서 기도했는지 이미 그 아이들 중에는 일주일 내내 엄마랑 기도하다 온 아이가 있어요. 이런 아이들은 갈망해요. 어떤 아이는 그냥 등이 떠밀려서 온 아이들도 있어요. 거의 회심 안 해요. 정말 어려워요 그래서 보면 하나님께서 익은 곡식부터 하나씩 하나씩 추수 하셔요. 그것을 영글게 해야 해요. 아이들이 스스로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인하여 근심하고 은혜에 대한 갈망 때문에 근심하도록 만들어 야해요 그때 그 마음은 상한 마음이 되고 그 상한 마음은 결국 통회하는 마음이 되어서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는 하나님,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하나님께서 만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간절함이 하나님의 그 놀라운 그 영혼의 어루만지심의 그 은혜를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나이가 구별이 없어요. 간절한 마음이 되면 하나님께서는 그 간절한 마음을 가진 지극히 작은 어린 영혼들에게 찾아가셔요. 한 십여 년전 교회를 개척하기 전이었어요. 성남에 있는 어느 교회에 제가 집회를 갔어요. 아이고, 교회가 동네사람들에게 핍박을 많이 받는 교회여서 그날도 목사님이 도망을 갔더라구요. 집회를 열어놓고도, 그런데 어느 정도냐면 동네사람들이 와서 유리를 깨고 예배드리는데 마당에 와서 욕을 욕을 하면서 목사를 찾고 뭐 하여튼 보통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동네사람들도 참 어지간한 사람들인데 하나님께서 참 안 기뻐하실 거 같아요. 그런데 또 교회위치도 어쩜 그렇게 동네한복판인지 다닥다닥 붙어있는 크지도 않은 집 한복판에 있는데다가 나 같으면 그래도 그 가까이 있는 거야 어쩔 수 없으니까 헌금이 나오면 다른 것은 나중에 해더라도 유리창이라도 좀 튼튼한 것으로 해서 한 두 겹으로 해서 꽉 닫아버리면 그러면 그 정도 까지 소리는 안 날거 아닙니다. 유리창은 헐렁한데다가 또 북까지 치면서 그렇게 요란스럽게 예수를 믿으니까 그렇게 마찰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아 그런데 말씀을 전하고 나서 교인도 한 80명집회를 하는데 마룻바닥에 않아서 집회를 하는데 그 교인들이 모여서 기도를 하는데 거기 중학교 애들 몇이 앉아서 빡빡깍고 가난의 때는 졸졸 흐르고 중학생인데 왜 그렇게 작은지 초등학교 이삼학년 밖에 안돼 보이는데 쟤네들이 무슨 집회에 참석하러 저기에 왔다 저것들이 또 설렁설렁 돌아다니고 장난이나 쳐서 분위기나 흐리지 않을까 그리고 근심스럽게 집회를 시작했는데 어쩜 초롱초롱한 눈으로 머리도 빡빡 깍은 애들이 그렇게 러닝 셔츠바람으로 거기 앉아가지고 그 빠짝 마른 몸에 그렇게 초롱초롱하게 무릎을 꿇고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기도를 시작 을 했는데 나는 지금도 참 가슴이 아릿해요 그 아이들이 그렇게 가슴을 치면서 어른들이 들은 그 말씀을 함께 들으면서 회개를 하고 기도를 하기 시작하는데 아주 정말 안쓰러워서 볼 수 없을 정도로 빠짝 마른 몸에 핏줄이 쫙 서면서 그렇게 통회하는 것입니다. 가슴을 치면서 그 눈물 뚝뚝 흘리면서 그렇게 하나님 날 용서해달라고 그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난 지금 우리교회 회심하지 않은 많은 아이들보면서 그런 생각을 해요 걔네들하고 비교가 안 돼요 러닝셔츠 같은 거 입고 반바지 입고 그렇게 나와서 여러분의 아이들은 얼마나 부유해 좋은 집에 좋은 차에 발바닥에 흙 하나 안 묻히면서 다니고 그렇게 부족한 것이 없는데 나는 정말 걔네들의 부모가 요즘처럼 부러울 수가 없어요. 지금도 걔네들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 거야 어쩜 중학교 1학년이라는데 그렇게 똑부러지게 통회를 하면서 하나님이 용서해달라고 그러면서 어쩜 그런지 몰라요 그게 뭐냐면 은혜를 갈망하는 근심 입니다. 은혜를 갈망하는 근심, 여러분의 자녀들이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존재의 가치는 그의 지위나 소유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의 덕에 달려있어요 덕이라고 하는 것은 그가 정말 절대자이신 하나님이 시기에 당신의 창조의 목적대로 사는가. 그 여부에 대한 평가가 바로 덕입니다 그런 덕을 소유하고 살아가는 사람, 그 사람이 아름다운 사람이고 탁월한 사람이고 사람이 하나님 앞에 정말 소중한 사람입니다. 시골에서 짐승이나 치던 쓸모없는 다윗을 하나님이 왜 그렇게 중하게 생각하셨어요? 그가 덕을 소유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어요. 그래서 훌륭해 보이는 수많은 사람을 버리고 그 목동에 지나지 않는 그 어린아이를 하나님이 부르셔서 이스라엘의 위대한 역사를 그의 손에 맡기십니다, 수많은 계시를 그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늦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나서 너무 늦었다고 낙심한적 있습니까? 우리가 주님 앞에 왔을 때 주님을 이렇게 대우해 주신 적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이 바로 자녀들을 위해 기도할 때입니다. 그러나 이르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시간이 흐를수록 회심은 불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불가능해 지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자녀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그 아이의 마음의 문을 두드려야 합니다.
(찬양)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우리의 자녀는 주님의 것입니다. ‘얘야 너는 네가 어디에 있든지 너는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간절한 갈망으로 근심하는 자녀들이 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들 스스로 근심하게 해서 회심에 이르도록 잃어버린 은혜를 회복하도록 갈망을 갖게끔 간절히 영혼들을 권하고 그리고 그 영혼들을 하나님 앞에 어루만져지도록 위해서 기도해야 해요. 간절히 기도하고 타이르고 편지하고 또 타이르고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