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원시신앙 고백
“너는 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아뢰기를 내 조상은 유리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소수의 사람을 거느리고 애굽에 내려가서 거기 우거하여 필경은 거기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더니 애굽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우리를 괴롭게 하며 우리에게 중역을 시키므로 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하감하시고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이 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내가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 소산의 맏물을 가져 왔나이다 하고 너는 그것을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두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경배할 것이며”(신 26:5-10).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으로 들여보내기 직전에 마지막 유언적인 설교를 다시 한번 종합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합니다. 그때에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해 주셔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거기에서 처음 곡식을 거두고 추수하게 될 터인데, 그때에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할지를 오늘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신앙고백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이스라엘의 원시 신앙고백이라고 이렇게 구약학자들은 부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이 무엇이고 기원이 무엇이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총체적인 근거를 보여주는 신앙고백입니다. 대를 물려 가면서 이 신앙고백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승되었고,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신앙의 고백에 항상 참여하여야 했지만, 각별히 온 민족적으로 이 추수하고 곡식을 거두어 들이는 그때에 하나님 앞에 이 민족적인 공동체의 고백에 참여하여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이제 감사의 순서를 세 가지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자신들이 본래 누구였는지를 회고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그들의 비참했던 처지와 약소했던 형편과 나아가서 그들이 고난을 받았던 과거에 대한 회상입니다. 제일먼저 그들은 이렇게 고백하여야 했습니다. 내 조상은 유리하는 아람사람이었습니다. 내 조상이 유리하는 아람 사람이었습니다라는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일까요?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 시조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 족장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특별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요셉에 이르기까지 이 조상들, 족장들이 자신의 직접적인 조상이라는 것을 언급하면서 그들이 소수의 사람이었음을 말합니다. 즉, 아브라함 한 사람을 택하셔서 주님이 가정을 이루시죠. 그는 아이도 제대로 생산할 수 없는 사람이었는데, 주님이 기적적으로 아들을 허락하셔서 이삭을 낳았습니다. 일대, 이대, 삼대까지 되었는대도 야곱, 그 이후 사대까지, 오대까지 펼쳐지게 되었을 때에도 이 야곱이 가족들을 이끌고 요셉의 소식을 듣고 요셉의 초청을 받아 애굽에 갈 때에 70여명의 가족에 불과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애굽에서 약 200만명 내지 300만명의 수로 엄청난 수를 이루게 되었던 거죠. 물론 여기에는 이 아브라함의 가문에서 태어난 조상 핏줄들 뿐만 아니라 거기에서 함께 노예로 고생했던 사람들 중에 이스라엘 백성이 되기로 신앙을 고백했던 그러한 개종자들까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쨌든 그것이 하나님의 커다란 축복이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들이 그곳에서 많은 민족을 이루었지만, 그러나 거기에서 번성한 민족이 되었지만 그들이 거기에서 당한 것은 견딜수 없는 커다란 고통과 핍박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를 그들은 감사하기에 앞서서 회고하였던 것입니다. 자신들이 하찮은 백성들이었고, 지극히 소수의 무리들이었으며, 번성한 후에도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는 서러운 민족이었다는 사실을 먼저 회고를 하는 것이죠. 그럼으로써 오늘 자신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요즘은 아이들이 상당히 백성들 중 상당히 많은 수의 집안의 아이들이 결핍이라는 것을 잘 모르면서 사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절약할 줄도 모르고, 그 다음에 어떠한 물질이 주어졌을 때 감사할 줄도 모르는 것 같아요. 정말 가난한 시절을 겪어 본 사람들은 현재의 풍요와 과거의 빈곤 사이의 격차가 무엇인지 알아요. 그래서 감사는 항상 주님이 아니었더라면 혹은 주님을 몰랐을 때에 겪었던 비참함과 고통을 통해서 비로소 그것을 알게 되는 것이죠.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일 먼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첫 번째 추수를 한 후에, 그들은 하나님 앞에 자신이 정말 비참한 민족이었는데, 선진 민족들이 살고 있던 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해 주신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에 감사하기에 앞서 제일 먼저 자신이 얼마나 초라한 민족들이었고, 그리고 자신들이 얼마나 박해받고 고통받는 억눌린 민족이었는가 제일 먼저 생각하여야 했던 것입니다.
(예화) 요즘은 그러한 프로가 없어졌지만, 저희 초등학교 다녔을 때, 무슨 요일인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하여튼 온 가족이 귀를 기울여 듣는 드라마가 있었어요. 드라마는 항상 드라마 극장처럼 한번에 하나씩 끝나는 것이었어요. 절망은 없다는 프로그램이었어요. 그래서 무지무지하게 고생하던 한 가족이 잘 살게 되는 이야기를 그 드라마로, 라디오 드라마죠. 굉장히 감동적이었어요. 지금 들으면 하나도 감동적이지 않을 거예요. 그때는 피부로 와 닿았던 시대니까. 그 중에 한 토막이 기억나요. 사람이 그때는 늘 고생하면 6,25때 이야기 이니까. 6,25때 아이들하고 너무너무 고생을 하는데 그 다음에 그 사람이 성실하게 일을 하고 사업을 해서 잘살게 되었대요. 잘 살게 되니까 아이들이 점점 잘 사는것에 익숙해지는 거예요. 그런데 아버지가 일 년에 꼭 한번씩, 자신들이 죽다가 살아났던 그 날에 그 가난할 때 먹던 음식으로만 하루를 먹는 거예요. 아이들에게 그것을 먹이면서 옛날에 이렇게 고생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죠. 그때 이렇게 보면 여러분들은 믿어질지 모르겠지만, 시장에 보면 군인들 군화를 볶아서 팔았어요. 먹었어요. 미군들이 버린 군화를 더운 물에 며칠을 푹 불려요. 그러면 가죽 비슷하게 되어요. 그것을 썰어서 양념을 묻혀서 그것을 그렇게 해서 먹었고요. 나는 먹어보지는 못했어요. 꿀꿀이죽은 미군들이 밥을 먹으면 우리도 식당에서 짬밥을 다 수거하잖아요. 외국 사람들은 식사 하는데 원칙이 있어요. 바닥에 떨어뜨리지 않고 탁자 위에만 아무리 어지르면 그것은 실례가 아니에요. 바닥에 막 떨어뜨리면 굉장히 실례에요. 위에는 막 형편없어요. 그러면 그 짬밥을 막 수거하면, 이것을 먹고 남겨서 한국 사람들 줘야 되겠다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가지고 자기들이 식사를 하는 거예요. 그러면 거기에다가 담배꽁초도 버리고 가래침도 뱉고 이쑤시개도 버리고 그리고 종이도 떨어지고 그것을 다 쏟아서 그것을 받아다가 그 속에서 그것을 골라내고 끌이는 거예요. 그것을 시장에서 퍼서 싼 값에 파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에는 고기도 있고, 생선도 있고, 소시지도 나오고 하니까 그것으로 배를 골은 배를 채우며 살았던 거죠. 아마 그 사람이 그런 것까지도 먹이지는 못했겠죠. 그러면 그 당시에 있었던 말하자면 구황식품들, 굶주림을 면하기 위한 구황식품들, 비지떡 같은 것. 비지떡이 뭔지 모르죠? 콩을 짜면 두부를 만들잖아요. 다 짜내면 콩 찌꺼기죠. 그것을 가지고 빈대떡을 부치는 거예요. 그런데 부칠 수가 없어요. 후두두두두 떨어지죠. 그러니까 그것을 엉겨붙을 수 있을 정도의 최소한의 밀가루를 넣고 김치를 많이 집어넣고 이렇게, 이렇게 해서 부쳐요. 기름이나 제대로 있겠어요? 부치는데, 빈대떡처럼 부치면 두두두 떨어져. 그러니까 이렇게 두툼하게 피자 세판 얹어 놓은 것 같이 두툼하게 해서 먹는 거예요. 그런데 먹어 보면 아무 맛이 없어요. 생각해 보세요. 비지를 두툼하게 해서 김치를 넣는데 그게 무슨 맛이겠어요? 이러한 것들이 구황식품이었어요. 더 위로 한 세대 앞선 사람들은 더 끔찍한 구황식품들을 기억하지만, 그러한 것들이었어요.
그러한 것들을 자식들에게 먹이면서 원래 자신들의 처지가 얼마나 곤궁하고 비참했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것은 마치 맛있는 술을 먹기 전에 짭자롬한 안주를 먹는 것처럼 미리 나중에 맛보게 될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에 대한 진정한 감사를 새기는 하나의 사전 장치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제일 먼저 그들은 그 아쉬울 것이 없는 정말 번영한 도시, 여러분 우리는 여기에서 광야라고 하면 실감이 안나요. 제가 목사가 됐는지 꽤 오래 됐는데, 성지 순례. 성지 여행이죠. 성지 여행을 처음으로 갔어요. 정말 광야는 물 하나 없이 며칠을 계속해서 벌판을 달리는 거예요. 그러한 광야에 있다가 이스라엘 땅에 딱 들어가면, 곳곳에 나무가 있고 물이 있고 풀밭이 있고 천국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거기에 들어가서 정말 부족함이 없는 그러한 곳에서 제일 먼저 그들이 하여야 하는 일은 과거를 회상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항상 중요한 것이 그거예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이 그거예요. 너희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너희가 짓지 않은 집에서 살고, 너희가 가꾸지 않은 포도원에서 포도를 수확할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잊지는 말아라 죄인된 너희를 구원하신 여호와를
그거잖아요. 우리도 일 년에 한 번씩만 그것을 먹어 봤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정신이 날 거예요. 꾹 참고 안 먹겠죠.
그런데 그것을 제일 먼저 회상해야 해요. 우리도 이 정신을 물려받아서 신앙생활이 어렵고 힘들다라고 생각될 때마다 우리가 하나님 모르고 살았을 때 얼마나 희망이 없는 죄인이었는지, 늘 말씀드리지만 예수 안 믿고도 살만한 사람들이 예수 믿게 된 사람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심지어 예수 안 믿고도 살만한 사람들은 부모가 예수를 믿어도 자기는 안 믿어요. 모두 신앙을 가진 사람은 자신 혼자서는 이 세상을 살 수 없다라고 하는 신앙의 고백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신앙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이러한 신앙의 태도는 사도 바울에 의해서도 입증이 되요. 그렇게 일생을 예수를 위해 살고, 마지막에는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인생의 황혼에서 그는 자기의 위대한 선교의 업적을 회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뭐라고 고백을 했습니까. 내가 죄인중의 괴수로다. 그 노령의 순교를 앞둔 사도가 될 때까지 오직 예수만을 살았건만, 그는 마지막 잊지 않고 있는 일이 있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고, 내가 그리스도 바깥에 있었을 때 아무 희망이 없는 정말 비참한 인간이었다. 하나님 앞에 죄인 중의 괴수였다. 그 고백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구원이 그에게 정말 커다란 감격의 제목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은혜를 회고하는 거예요. 그 은혜에 대한 회고가 크게 두 가지로 나오는데, 애굽의 땅에서 종살이에서 큰 능력으로 건져내 주신 것과, 두 번째는 이 복된 가나안 땅에 들어오게 해 주신 것. 이 두 가지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회고였어요. 회고.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일 먼저 하나님 앞에 은혜를 회고할 때 떠오르는 첫 번째 생각은 애굽의 소망 없는 종살이에서 해방 시켜 준 거예요.
(예화) 저는 한일 합방 100주년 이잖아요. 역사를 다루는 다큐멘터리나 기사를 보잖아요. 저는 가슴이 이렇게 아릿해 오는 대목이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여기에서 독립을 위해서 싸우다가 죽은 사람도 정말 큰 일을 했지만, 그것은 보람이라도 있잖아요. 나라를 위해서 작렬하게 희생을 했고, 그리고 그 희생의 터 위에서 나라를 찾았고 또 후손들이 열심히 그 사람들을 찾아내서 그 사람을 목숨을 받친 것에 대해 충분히 보상은 되지 않겠지만, 그래도 나라가 이만큼 살게 되었으니까 열심히 그 나름대로 그래도 애써서 챙겨서 그래도 도와주려고 하는 것은 격세지감이 있어요. 옛날에 저희 어렸을 때에 동네에서 제일 횡폐 부리는 사람이 누구였는지 아세요? 애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이 갈고리 소년이었어요. 상해군이에요. 이 사람들은 인생의 막장에 간 사람들이고, 나라에서 아무것도 주지를 않아요. 그리고 취업도 안돼. 그러니까 갈고리를 가지고 다니면서 돈 보태 주십시오가 아니라 돈 내놔. 반 강제적이죠. 사람들이 굉장히 무서워했어요. 상해군 온다 하면 애들이 울다가도 조용해졌어요. 기억이 나요. 군복을 입고 갈고리 이렇게 해가지고 다니는 거예요. 그러한 사람들이 말하자면 군인이었어요. 그런데 그러한 사람들도 훌륭하지만, 지금은 많이 보람이 있지만, 그런데 정말 비참한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일제시대 때에 토목공사 이러한 곳에 끌려 나가서 징용 가서 죽은 사람들이에요. 그게 최근에 굉장히 많은 사람들의 명부가 발견되고, 심지어는 지급하지 않은 임금 장부까지 발견되어서 일본은 난처한 상황이 되었고, 그것을 돌려줄 계획이나 그러한 것들이 있는데, 그러한 사람들은 너무나도 비참한 사람들이죠. 여러분 우리나라가 지하철 공사를 한게 1974년도 8월 15일에 개통이 되었거든요. 거리라고 하는 게 정말 얼마 안 된다고 할수 있잖아요. 성북역에서 출발해서 휘경동으로 들어가가지고 그 다음에 인천 쪽으로 나왔잖아요. 그것을 공사하는 데에 76명이 죽었어요. 그래서 그들을 위해서 위령비를 세웠어요. 그것이 1974년의 일이에요. 그러면 만약에 시계를 거꾸로 돌려가지고 60년 정도 전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해요. 그때 일본이 상당히 우리보다 앞선 문명을 가지고 있었던 나라였다는 것을 감한한다고 하더라도, 어떠한 댐을 만든다든지 다리를 만든다든지, 터널을 뚫는다든지 하면 사람 시체를 쓸어 넣으면서 그 공사를 완공했던 거예요. 지금도 개발도상국도 그래요. 무슨 뜻이냐 하면, 돈을 들여서 안전장치를 하면 되는데 그것을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태도가 있고, 나라가 경제적 부담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지 그 일을 하는데, 그렇지 못할 때에는 단순하게 이 안전시설을 하는 돈과 사람을 보상하는 돈을 단순하게 비교를 해서 싼 쪽을 택해 버린단 말이죠. 그러면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근대화의 건설 현장에서 죽어간 거예요. 나는 개인적으로 그 사람들을 찾아내서 국가 유공자로 대접을 해 줘야 한다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쨌든 내 나라가 아니라 일본, 동남아로 끌려가서 밤낮없이 공사하다가 거기에서 사고를 당하고 혹은 일본군으로 오해를 받아서 말하자면 폭격을 당하고 죽은 그 사람들의 원한이 얼마나 서럽겠어요.
이게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노예 살이를 생각나게 해주는 대목 아니에요? 나라도 없고. 그 다음에 권리도 없고 아무것도 가진 것도 없고, 자신들을 보호해 줄 수 없는 힘도 없이 그렇게 수없이 채찍에 맞으며 노역을 위해서 봉사했고, 알다시피 여러분들은 알다시피 이집트는 거대한 토목 공사를 전문으로 하는 나라였어요. 거기에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동원되었을 것이고, 성들 쌓거나 하는 일들에 그렇게 고통스럽게 중역을 감당했던 기록이 출애굽기 1,2장에 나오잖아요. 그렇게 고생하던 거기에서 하나님이 강한 능력으로 열 번의 대 재앙을 내리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거기에서 건져 주시는 거예요. 하나님의 정말 크고 놀라운 능력이었죠. 이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고해야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결사대를 조직하고 그리고 테러단을 구성하고 이렇게 해서 왕궁을 습격하고 바로를 협박하고, 그리고 문무 대신들을 저격해서 이루어낸 레지스탕스 운동이 아니었어요. 그것은 자신들이 그렇게 종으로 산 것, 그렇게 살다가 그저 공사판에서 비참하게 죽어가는 것 이상의 자신들에게 허락된 분깃이 없다고 믿었는데, 하나님의 큰 능력으로 애굽의 모든 나라를 치시고 그들을 큰 두려움 속에 몰아 넣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거기에서 속박해 놓으신 거죠. 그리고 그 다음에는 홍해 물 가운데를 건너게 하셨어요. 이게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비견해서 말하자면 우리를 어두움과 사단의 왕국에서 건져내어 주신 하나님의 즉각적인 구원의 은혜에요. 본질상 우리는 진노의 자식이었고, 그리고 하나님을 거슬려 악을 행하는 그러한 무지한 인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유독 우리에게 복음의 빛을 비춰 주셔서 우리가 아무것도 보탠 것이 없이 하나님의 강한 능력으로 우리를 어두움 가운데에서 불러 내사 빛의 나라로 이끄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죄의 권세에서 해방시켜 주신 것이에요.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비견될 수 있는 것이었죠. 그들이 홍해를 건넌 것처럼, 우리를 세례를 받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두 번째 놀라운 은혜는 광야 생활 속에서 하나님이 그들을 인도해 내신 것이죠. 한번 생각해 보세요. 전쟁이야 어떻게 치룬다 하지만, 300만명 가까운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소대변을 처리하고 옷을 입고 신발을 신고 광야에서 40년 가까운 생활을 지내야 되었습니다. 그러니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300만명의 사람이, 300만 명의 사람이 함께 천원짜리 라면 하나만 먹어도 30억이에요. 상상할 수 없는 문제였죠. 그런데 하나님이 조상들도 경험해 본적이 없는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만나를 내리셔서 그들을 먹이시고 바위를 터쳐서 샘물이 솟아나게 하셔서 그들이 마시도록 하셨고, 의복이 헤어진 적이 없고 발의 신발이 낡은 적이 없도록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그들을 인도하셨습니다. 그처럼 주님은 예수 믿고 난 뒤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광야와 같은 세상속에서 성화의 연단을 받으며 우리의 삶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시시때때로 공급해 주시면서 우리의 인생을 인도해 오셨습니다. 우리가 받고 누리는 것 중에 주님의 것이 아닌 것이 없고,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착했던 것처럼 우리는 미래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안식할 것이지만, 지금은 우리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적인 안식을 미리 맛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리셨던 복을 통해서 우리에게 예표하고자 하시는 그 복을 우리들이 이미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세월이 많이 지나면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목격했던 직접 들었던 조상들로부터 아주 멀어진 후에 감격이 사라졌지만, 여기에 가나안에 들어갔던 사람들 중 상당수가 광야의 이 고난과 고통을 직접 본 사람들이었습니다. 왜, 광야에서 태어났어도 40이 되어야지만 들어갔을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인구에 있어서 주력을 이루었던 사람들이 광야에서 자신들이 어떠한 고통을 받았었는지 생생하게 기억하는 사람들이었어요. 그리고는 그 결핍을 지나 자신들이 얼마나 풍족한 부요 속에서 살고 있는가 보았고, 하나님이 만나를 내리시되, 이스라엘 백성이 첫 번째 곡식을 수확하기 직전까지 만나를 내리셨어요. 그리고는 하나님이 만나를 그치시고 농경 사회 속에서 살게 하시는 거예요.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그러니 거기에서 첫 번째 곡식을 수확했을 때, 그들의 그 감격은 어떠했겠습니까. 나라 없는 서루움. 핍박 받는 아주 소수의 백성의 무리로 시작을 해서 이제는 이 가나안의 중심의 나라를 건설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큰 감격속에서 첫 번째 추수감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될 일이 바로 그것이에요. 우리는 늘 못받은 것만을 계산을 하면서 그렇게 괴로워 하고 박탈감을 느껴요. 그런데 받은 것을 먼저 헤아려 보십시오. 우리를 그 큰 고난에서 건져 내시고 그리고 우리를 시련 속에서도 성화시키시고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셨고, 마지막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렇게 한 교회에 속하여 주님을 믿으며 살게 하시는 이 은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두 번째 감사의 순서였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이들의 감사의 순서는 만물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여 이제 내가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 소산의 만물을 가져왔나이다. 만물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처음 거두어 드린 곡식을 이야기 하는 거죠.
(예화) 그래서 지금도 초등학교 교회 생활했던 것을 기억해 보면, 나는 시골에서 살지 않았는데도 서울에서 늘 보면 그 호박을 길러서 따거나 무를 심어서 거우었고 그랬으면, 그것을 교인들이 교회에 바치는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게 나요. 그리고 세월이 좀 흐른 후에는 젊은 청년들이 직장에 취업해서 첫 번째 월급을 그렇게 하나님 앞에 바치는 것이 신앙 있는 청년 사이에서 불문율처럼 되던, 그러한 것이 기억이 나요. 이게 모두 다 만물 신앙이에요. 만물을 베호르라고 하거든요. 이것은 식물이나 식물이나 아니면 열매, 이러한 것들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동물의 만물도 베호르라고 하고요. 사람들의 장자도 그렇게 표현해요. 그런데 동사는 바하르라고 하는 선택하다라고 하는 동사에서 나왔어요. 그래서 만물이라고 하는 처음난 것, 그것 자체가 최고의 것이라는 의미에요. 최고의 것, 최상의 것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만물을 드린다고 할 때 시작에서 있어서 처음이라는 뜻도 되지만, 최선의 것, 최고의 것, 그러한 의미에요. 그러니까 곡식을 거두었을 때, 양들이 새끼를 낳았을 때 그중에 초태생, 처음 것을 드리는데 처음 것은 시간적으로만 처음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좋은 최고의 것, 최선의 것이라는 의미에요. 모두 드린 것은 아니죠. 자신들도 먹어야 하니까. 대표의 원리에 의해서 그래서 주님이 주신 모든 것들 중에 일부를 하나님께 직접 그 만물로 바침으로써 이것들이 원래 속해있던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라고 하는 고백이에요. 그래서 이것을 하나님앞에 바침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것들이 함께 바치워진바 되고 그리고 나머지가 자신들에게로 자신들에게로 수여된 것으로 그렇게 이해를 하는 거죠. 무슨 뜻인지 이해 되시죠? 그래서 뭐냐 하면 헌금에 대해서도 이렇게 이해해야 하는 거에요.
어느 분이 그러셨대요. 목회자는 교인들이 주는 돈으로 생활을 한다. 그것이 아니라 우리가 헌금을 하는 것은 용도의 헌금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헌금을 하는 거예요. 큰 돈이든지 작은돈이든지 상관이 없이 하나님을 의식하고 헌금을 함으로써 그것은 모두 하나님께로 바쳐진 거죠. 그리고 그것으로서 끝난 거예요. 그리고 그것은 다시 그 헌금은 하나님께로부터 사람들에게 부여 되는 거예요. 바친 사람은 하나님께로만 바쳤고, 그것을 활용하는 사람은 하나님께로 받아서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엄밀하게 말하면 교인들이 준 돈이 아니라, 교인들이 낸 돈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고에서 나온 돈이에요. 그래서 그것은 사람들 앞에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사용해야 하고 하나님 관점에서 헌금하고 하나님 관점으로 그것들을 소비해야 하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헌금에 대한 올바른 생각이에요. 어떠한 사람이 헌금을 해서 주님께 복을 받는다면,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친 것 때문에 복을 받는 것이지, 그것이 제대로 쓰여 졌기 때문에 복을 받는 것은 아니에요. 그것은 각기 주신 하나님이 받은 사람에게 물으실 책임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물질을 하나님 나라에 바쳤을 때 그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은혜를 내리시는 것이죠. 이러한 신앙이 여기에 나타나는 것이죠. 그래서 내게 주신 토지 소산의 만물, 즉 뭐죠? 주님이 자신에게 주신 모든 소유 중 일부를 드림으로써, 내가 거둬들인 모든 소산이 주님 것입니다라고 고백을 하는 거예요. 대표성의 원리에요. 고백을 하는 거예요. 나라가 전쟁에 졌을 때, 국민이 천만명이면, 천만명이 모두 일어나 절할 필요 없어요. 국민 모두는 앉았어도, 왕 한 사람이 일어나서 저희가 졌습니다라고 고개를 숙이면 나라 전체는 함께 승전국에게 합당한 경배를 올린 것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러한 대표의 원리가 여기에도 적용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이 주신 것 중 일부를 드렸을 때, 이제 이것은 주님께 바쳤으니 나머지는 내꺼다라고 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에요. 오히려 드림으로써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 주님의 것이라는 인식을 더 확실히 하는 거예요. 그게 신앙이에요. 만물을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것이 감사의 세 번째 단계였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그 은혜에 대한 감격이 있는 사람들만이 하나님 앞에 자신의 소중한 것을 드리며 헌신하며 살게 되는 것이에요.
(예화) 언젠가 제가 전도사 때, 어느 지체가 십일조 생활을 안해. 헌금 생활을 잘 안 해요. 취업을 했는데 자신이 잘 훈련이 안 되서 헌금을 안 한다고 해서, 내가 그랬어요. 얘, 자매야 그것은 너가 훈련이 잘 안되어서 그러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덜 사랑해서 그런 거다. 정말 하나님이 나같은 죄인을 살려 주신 은혜, 쓸모없는 인간을 구속해 주신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깨닫게 되면 그가 누구이든지 간에 하나님 앞에 감사한 마음으로 그것이 재능이든지, 시간이든지, 물질이든지 무엇이든지 간에 주님을 위해서 바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첫 번째 추수를 거둘 때, 그들이 해야 했던 감사의 세 번째 단계가 바로 이 만물을 헌신하는 것이었어요. 우리에게 만물, 처음 난 것 그것은 무엇입니까. 최선의 것, 최고의 것, 그것을 우리 주님께 드리는 것, 이것이 바로 감사의 세 번째 단계인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감사의 단계를 오늘 성경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여호와 앞에 두고 네 하나님 앞에 경배할 것이며. 이는 네 번째가 바로 경배의 헌신이에요. 그래서 그 고생을 회고하고 은혜를 회고하고, 만물을 헌신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을 정말 섬기며 살아가는 이것이 얼마나 큰 영광이요, 기쁨이요, 감사의 제목인지를 절실하게 경험하게 되요. 그래서 마음 깊은 곳에서 주님을 향한 경배의 헌신을 올리게 되는 거죠. 그게 바로 신앙이고 이게 바로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네 번째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가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신 모든 복을 인하여 너는 함께 즐거워 할지니라. 이것이 뭐냐 하면 기쁨이에요. 기쁨. 이 기쁨을 다른 모든 사람들과 함께 누리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그 복을 자신과 관련된 사람들, 심지어는 관련이 없이 자신의 집에 잠시 머물고 있는 나그네 조차도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복을 인하여 유익을 누리고 행복해하며 즐거워 할 수 있도록 그렇게 유통하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다섯 번째 단계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면서 주님이 우리에게 자격이 되지 않는데도 주신 그 모든 좋은 것들이 있다면, 그것이 영적인 것이든지 육적인 것이든지 정신적인 것이든지 물질적인 것이든지 간에 어쨌든 그 좋은 것은 사람들에게 흘려보내게 하기 위해 주신 것이에요. 그래서 감사하는 사람의 이 마음속에는 골수 속에는 섬김의 유전자가 들어 있어요. 그래서 감사하는 사람이 주님이 자신을 복주시는 그 모든 복이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 자기로 인하여 모든 사람들이 함께 그 언약 백성에 참여하게 하시기 위해서 주신 것이라고 믿고 그것을 흘려 보낼 때, 그때에 하나님께서 더 많은 것으로 그들에게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