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을 벗어나라
(2020년 주일오전)
설교기간|2020년 10월 18일 - 12월 27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21년 1월 4일
목 차
설교프레임 1
1. 너의 포도원을 보라(잠 24:30-34) 2020.10.18 주일오전 13
2. 게으름의 두 친구(잠 26:13-14) 2020.10.25 주일오전 21
3. 게으름과 열정 없음(잠 26:15) 2020.11.01 주일오전 27
4. 게으름과 교만(잠 26:16) 20120.11.08 주일오전 34
5. 게으름과 욕망(잠 21:25) 2020.11.22 주일오전 41
6. 게으름과 쓸모(잠 10:26) 2020.11.29 주일오전 49
7. 게으른 자의 결산(마 25:24-26) 2020.12.06 주일오전 56
8. 게으른 자의 집을 보라(전 10:18) 2020.12.13 주일오전 63
9. 게미에게 배우라(잠 6:6-8) 2020.12.20 주일오전 71
10. 새로운 삶을 찾아서(롬 12:11) 2020.12.27 주일오전 84
<설교 프레임>
게으름을 벗어나라1 2020. 10. 18 주일 낮 예배
< 너의 포도원을 보라 >
“내가 게으른 자의 밭과 지혜 없는 자의 포도원을 지나며 본즉 … 내가 보고 훈계를 받았노라. 네가 좀더 자자, 좀더 졸자, …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 (잠 24:30-34)
I. 본문해설
잠언은 솔로몬을 비롯한 몇 명의 사람과 집단에 의해 기록된 책이다.
솔로몬이 모든 잠언을 기록하지 않았으나 대부분을 기록하고 또 나머지를 수집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잠1:1,10:1).
잠언은 지혜문학(知慧文學)의 최고봉이다. 신앙과 삶의 지혜를 가르치는 책이다. 욥기, 전도서, 아가서 등이 이에 속한다.
신령한 것으로부터 자연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많은 지혜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잠언은 성공을 위한 처세술(處世術)을 다룬 책이 아니다.
지혜의 근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잠 1:7). 따라서 잠언의 지혜는 구원으로 회복되는 창조 질서에 관한 것이다.
이 지혜는 참된 인생(人生)을 살아가는 기술이다.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기초로 한 것이다.
II. 너의 포도원을 보라
지혜자는 지나가다가 황폐하게 된 밭과 포도원을 보았다. 그리고 거기서 얻은 교훈에서 삶의 지혜를 말한다.
A. 밭과 포도원을 보라
지혜자는 밭과 포도원에 관한 얘기로 이에 대한 교훈을 시작한다.
“내가 게으른 자의 밭과 지혜 없는 자의 포도원을 지나며 본즉”(잠 24:30)
이 구절은 병행법이다. 게으른 자와 지혜 없는 자, 그리고 밭과 포도원이 짝을 이룬다. 먼저 밭과 포도원을 보라는 것이다.
부동산으로서의 밭과 포도원은 언제나 변함없이 거기 있다. 그러나 그것을 어찌 돌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밭과 포도원이 된다.
따라서 이것은 태어날 때 물고 나온 수저에 관한 얘기가 아니다. 자기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신분이나 가문, 출신이 아니다.
자신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믿고 노력함으로써 바꿀 수 있는 바에 대해 말하고 있다.
지혜자의 놀라운 통찰(洞察)은 이것이다. 게으른 자와 지혜 없는 자를 동일하게 보는 것이다.
이는 단지 농사짓는 지혜(知慧)만을 뜻하지 않는다. 지혜 없음은 인생의 목적을 모르는 것이다. 게으름은 삶의 목표(目標)가 없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농부에게 밭과 포도원의 수확은 한 해의 삶이 달린 것이다. 그해 농사를 망쳤다는 것은 오는 한 해를 굶주림 속에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게으름이란 무엇인가? “행동(行動)이 느리고 움직이거나 일하기 싫어하는 태도나 버릇”이다.
당장 육신의 편함을 위해서 마땅히 힘써야 할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게으름의 뿌리는 빗나간 자기 사랑(self love)이다.
생활(生活)이 게으른 사람은 정신(精神)에 싫증이 가득 찬 사람이다. 신령한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敬畏)하는 것이고 생활의 지혜(知慧)는 그 목표를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오늘날 게으름을 찬양하기도 한다. 빗나간 자기 사랑을 지지한다. 자기만을 위한 인생이니 애써서 살지 말라고 한다.
어떤 부분에서는 귀담아 들을 것도 있다. 의미(意味)와 방향(方向)도 없이 단지 일만 하는 것은 자기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던 길을 멈추고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목적에 의해 이끌리는 인생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열심히 살지 말라. 게으르게 살아도 괜찮다”고 하는 사람은 대부분, 자기는 경쟁에서 이겨서 가진 게 있는 사람들이다.
더욱이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살도록 부름 받은 자녀들이다. 그분을 사랑하는데 어떻게 게으르게 살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있다면 그건 사랑도 아니다.
성경에서 지혜와 더불어 짝을 이루는 단어가 있는데 충성(忠誠)이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마 24:45)
이와 대조적으로 미련한 자는 안일한 삶을 산다. 잠든 영혼으로 산다.
“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이며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키려니와”(잠 1:32)
또한 게으른 자는 자기를 지혜롭게 해줄 지혜와 훈계를 멸시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 1:7)
따라서 게으름은 그냥 열심히 살지 않는 것이 아니다. 정신과 마음이 병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대의 밭을 보라. 포도원을 보라.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보라. 지금 한번 밖에 없는 인생(人生)을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라!
B. 교훈을 얻으라
농부가 게으르게 지내는 동안 그의 밭과 포도원은 어떻게 되었을까?
“가시덤불이 그 전부에 퍼졌으며 그 지면이 거친 풀로 덮였고 돌담이 무너져 있기로”(잠 24:31)
그의 밭과 포도원은 가시덤불과 풀로 덮였고 이제 돌담도 허물어져 그마저도 여우들이 드나들며 망가뜨렸다.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라”(아 2:15)
게으른 자는 끊임없이 남의 탓만 하면서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자기 인생을 주체적으로 살지 못한다.
자기가 감당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잊은 채, 낙심과 원망 속에서 산다. 때로는 대상도 분명치 않은 앙심까지 품게 된다.
급기야 하나님을 원망(怨望)하기까지 한다.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며 열등감에 빠지거나 요행을 꿈꾼다.
일시에 높은 지위에 오르기를 꿈꾸거나 큰돈을 벌 생각을 한다.
이런 사람을 위한 올무는 인생길 도처에 깔려 있다. 그런 올무에 걸릴 때는 현재보다 더욱 나쁜 상황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단지 세상살이의 열심과 태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이 확정(確定)되지 않은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당신의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가? 어떻게 살다가 죽을 것인가?
지금처럼 살아간다면 죽는 순간에 말할 수 있을까? “하나님, 그래도 저 열심히 살았죠?”
젊음은 지나가고 늙음이 찾아온다. 즐기기 위해 게으르게 살지만, 늙으면 그걸 누릴 육체(肉體)의 힘도 사라진다. 즉, 게으름도 그를 버리는 때가 온다. 그리고 늙음 후에는 죽음이 찾아온다.
이제 겨울이 올텐데 가족과 함께 무얼 먹고 살 것인가?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자니 힘이 들고 구걸하자니 창피하단다.
우리의 영적 생활에 적용해 보자. 당신의 경건(敬虔) 생활의 밭은 어떠한가? 부르심을 따라 섬기는 사역의 밭은 어떠한가?
그 밭 잘 가꾸어 기름진가? 그 포도원 아름다운 열매로 가득한가?
“내가 보고 생각이 깊었고 내가 보고 훈계를 받았노라”(잠 24:32)
지혜자는 게으른 자의 밭과 포도원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미 알고 있었겠지만 다시 한번 큰 교훈(敎訓)을 얻었다.
게으른 삶이 인생의 좋은 것을 파괴하여 황폐하게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의 결국은 영적으로, 육적으로 찾아오는 극심한 가난이다.
“네가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누워 있자 하니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잠 24:33-34)
강도의 기습과 군사들의 엄습을 생각해보라. 무엇으로 그것을 이길 것인가? 인생을 패배자로 살지 말라. 신앙의 낙오자로 살지 말라.
III. 적용과 결론
게으른 사람에게 무슨 보람이 있을까? 나태를 벗 삼아 영혼의 밭을 가꾸지 않는 사람들에게 무슨 경건의 열매가 있을까?
경건한 삶의 열매를 거두지 못하는 이들에게 무슨 풍성한 신앙생활이 있을까? 인생의 변화를 꿈꾸라.
하나님은 살고자 하는 자에게 살아갈 힘을 주신다. 믿음은 그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부지런히 산다.
게으름을 벗어나라2 2020. 10. 25 주일 낮 예배
< 게으름의 두 친구 >
“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 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도느니라” (잠 26:13-14)
I. 본문해설
잠언 26장은 미련한 자와 게으른 자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게으름이 육체적(肉體的) 행동과 관련 있다면, 미련함은 그의 정신적(精神的) 상태와 관련이 있다. 지혜와 관련된 것이다.
II. 게으름의 두 친구
본문은 게으름이 가까이 하는 두 친구를 제시한다. 이것은 게으른 자의 삶의 태도를 가리킨다.
A. 핑계
첫째로 핑계다. 핑계란 무엇인가? “내키지 않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 다른 사실을 내세우는 것”이다.
“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잠 26:13)
게으름의 첫 번째 친구다. 게으른 자는 끊임없는 핑곗거리를 찾으며 자신의 게으른 삶을 합리화(合理化)한다.
무엇 때문일까?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행하지 않기 위해서다.
부지런함은 목표가 있지만 게으름은 목표(目標)가 없다. 그냥 편하고 싶은 것이다. 그 결과가 무엇이겠는가?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 애쓰는 수고(受苦)를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에게 하기 싫은 일을 하는 것은 고통(苦痛)이다.
양심은 의무를 이행하라고 하는데 정신은 싫증으로 가득 차 있다. 싫증으로 가득 찰수록 의무(義務)를 행하는 데는 더 큰 고통이 따른다. 둘은 모순이다. 모순 속에서 가책을 느낀다.
이에 자신의 게으름을 정당화하는 구실을 찾는 것이다. 그것은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다. 그런데 그것을 할 수 없는 사정(事情)이 있으니 어쩔 수 없다는 이유를 꾸며서 만드는 것이다.
사람 다니는 길에 어찌 사자(獅子)가 있을 수 있겠는가? 설령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다고 해도 그것은 얼마나 적은 확률인가?
그보다 더한 위험(危險)을 당하게 될 높은 확률을 가지고 있는 일인데도,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면 기꺼이 그 높은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행하지 않는가?
게으른 자는 보통 사람들의 상식(常識)으로는 이치에 닿지도 않는 구실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자기의 마땅한 의무를 회피(回避)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육적인 가난과 영적인 궁핍이다.
그렇게 안 좋은 결과가 발생할 것이 너무나 뻔하다. 그런데도 그렇게 게으름을 피우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부지런히 사는 것이 힘들기 때문이다. 자신이 그다지 바라지 않는 일을 위해서 불편(不便)을 겪거나 수고하기가 싫기 때문이다.
성품(性品)이 변화되지 않으면 그 게으름은 운명(運命)과 같이 일생동안 그를 지배한다.
한마디로 선(善)하고 의미 있는 일을 실행하기 위한 열심(熱心)이 없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뚜렷한 표지(標識)다.
사랑하면 끊임없이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행해야 할 일이 생각난다. 봉사(奉仕)는 사랑하는 자의 기쁨이다. 또 그를 기쁘게 하려는 열의(熱意)가 있기 때문에 할 일이 생겨난다.
함께 어울리는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안다. 게으름은 끊임없이 친구인 핑계를 찾고 그것과 어울린다.
게으름은 핑계 때문에 버리지 못하고 핑계는 게으름을 정당화한다.
게으름과 핑계, 이 둘이 서로 손잡는 것은 물에 빠진 사람의 목에 큰 돌멩이를 달아 주는 것과 같다.
어제까지 게으르게 살았어도 오늘부터는 그렇게 살지 말라. 핑계와 결별하라. 인생(人生)을 패배자로 살지 말라.
무위도식(無爲徒食)하지 말라.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라.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인생의 보람을 찾으며 살라.
B. 나태
둘째로 나태다. 나태(懶怠)는 무엇인가? 그것은 “행동(行動)이나 성격(性格)이 느리고 게으른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 전통에서 일곱 대죄(septum mortalia)에 속한다. 이것은 교만, 인색, 시기, 분노, 음욕, 탐욕, 나태를 가리킨다.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 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도느니라”(잠 26:14)
나태(懶怠)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무책임하게 내버려두는 것이다. 나태한 사람은 자신의 선택에 대해 좀처럼 책임(責任)질 줄 모른다. 이 또한 게으름의 절친한 친구다.
여기서 돌쩌귀는 문짝의 한쪽 위아래로 나와 있는 돌출부의 끝부분에 얹혀지도록 오목하게 파놓은 홈이다.
이것으로 상하의 축(軸)을 삼아 문을 여닫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은 돌쩌귀를 벗어나지 못한다. 문짝이 돌쩌귀를 벗어나면 문짝 자체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게으른 자에게 돌쩌귀는 침상(寢牀)이다. 가장 에너지가 들어가지 않는 자세를 취하는 곳이다.
게으른 자는 잠자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가난과 결핍이다. 이는 육적 생활과 영적인 생활 모두에 적용된다.
“네가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누워 있자 하니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잠 24:33-34)
그렇게 문짝처럼 돌고 도는 생활(生活)에 무슨 변화가 있겠는가? 그냥 당장 수고(受苦) 안 하고 편히 지내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나태한 삶에 대해 책임져야할 날이 온다.
그런 나태한 사람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할 때 그를 쓰시는 주님의 심정(心情)이 어떠하겠는가? 그에게 책임을 맡긴 상급자의 마음은 어떠하겠는가?
“게으른 자는 그 부리는 사람에게 마치 이에 식초 같고 눈에 연기 같으니라”(잠 10:26)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그분의 원수(怨讐)였는데 용서해 주셔서 자녀로 삼으셨다. 구원의 은혜에는 소명(召命)이 내포되어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創造)하신 목적을 따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게 하셨다. 영광스러운 목표(目標)를 향해 인생을 살게 하셨다.
그렇게 살 때 우리는 더욱 귀(貴)하게 쓰임을 받게 된다. 나태한 자는 끊임없이 부지런히 산 유능한 사람의 지시(指示)를 받아야 한다.
“부지런한 자의 손은 사람을 다스리게 되어도 게으른 자는 부림을 받느니라”(잠 12:24)
나태는 당장 편(便)한 것 말고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않는다. 육적으로는 물질적(物質的)으로 가난하게 되고 영적(靈的)으로는 곤고하게 된다.
지금 누리고 있는 좋은 것들 가운데 이전에 수고하지 않고 얻은 것이 얼마나 되는가? 나태와 결별(訣別)하라.
III. 적용과 결론
예수님은 참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시기 위해 오셨다.
그분이 게으르셨는가? 핑계대면서 나태하게 사셨는가?
일체의 부지런함과 열정으로 사셨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별명은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셨다(계 3:14).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이다. 핑계와 나태 속에서 게으르게 살지 말라.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충성(忠誠)되게 살라.
게으름을 벗어나라3 2020. 11. 1 주일 낮 예배
< 게으름과 열정 없음 >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 (잠 26:15)
I. 본문해설
지난 시간에 게으름에게는 두 친구가 있다고 했다. 핑계와 나태다.
게으른 자는 늘 의무(義務)를 회피할 구실을 찾는다. 그의 심령은 나태(懶怠)하여 마땅히 해야 할 일에 대해 태만하다. 그 속에서 많은 죄(罪)들이 융성하게 된다.
게으른 자에게 또 다른 특징이 있다. 그것은 열정 없음이다. 나태가 의지(意志)의 태만이라면 열정 없음은 정서(情緖)의 태만이다.
II. 게으름과 열정 없음
게으른 자는 목표를 가지고 인생을 사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가져야할 열정(熱情)이 매우 부족하다. 그것은 미지근한 상태다.
열정은 “어떤 일에 뜨거운 애정을 가지고 열중하는 마음”을 가리킨다.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잠 26:15)
그러면 게으른 자에게는 그런 열중(熱中)하는 마음이 전혀 없을까? 그가 작정하고 늘 침상(寢床)에 붙어 구르지 않는가? 그런 일을 하고 싶어 하는 게 아닌가?
그러나 그것을 열정이라고 하지 않는다. 열정은 “도덕적(道德的)이고 선(善)한 일에 대한 뜨거운 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A. 타락과 열정
맨 처음 창조(創造)될 때 인간은 열정이 있었다. 이 열정으로써 인간은 하나님께 순종(順從)하고 만물을 돌보도록 창조되었다.
그것을 위해서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했다. 그 사랑의 열정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사람들을 선(善)하게 대하며 살기를 바라셨다.
자연 만물(自然萬物)을 돌보는 선량한 관리자가 되기를 원하셨다.
이 모든 의무들을 실천함으로써 창조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榮光)은 증진되고 인간은 행복(幸福)하게 될 수 있었다.
첫 조상 아담과 하와가 노동을 통해서 땅을 정복(征服)하고 다스리도록 부름 받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아담은 동물들의 특성을 파악해서 각각 이름을 붙였다(창 2:19). 그것들을 다스리게 하셨다. 땅을 경작(耕作)하며 살게 하셨다(창 2:15). 열정 없이 어찌 그 일을 하며 살 수 있겠는가?
인간은 창조될 때 성인(成人)으로 만들어졌다. 지식과 사랑을 가진 존재로 창조하셨고 그것들을 자라게 하셨다. 그 사랑 안에서 열정적으로 세상에서 일하게 하심이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墮落)했다. 그것 때문에 사랑의 크기를 줄이지 않았으나 방향이 바뀌었다. 하나님을 향해야 할 사랑(love)은 타락한 자신을 향해 불타오르게 되었다.
무엇이 가치 있고 선(善)한지는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야 하는데, 타락한 인간은 자신을 기준으로 삼게 됐다.
열정은 있으나 그것은 자기만족과 허무(虛無)한 것을 좇게 되었다. 타락한 정서로 변질되었다.
게으름은 바로 이렇게 타락한 정서의 극치다. 폭행과 간음, 도둑질과 거짓말보다 더욱 근원적인 죄이다. 게으름 그 자체가 악(惡)이다.
사람으로 태어난 자로서 인생의 의무(義務)에 대한 인식이 없으면 짐승 같은 삶을 살게 된다. 거기에 무슨 의미와 보람이 있겠는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열정이 타락했다. 그 마음이 만든 것이 바로 세상의 타락상이다. 자기의 만족과 기쁨을 위해 악(惡)을 행하는 것이다.
“아아, 인간의 비참한 정신이여, 눈멀어버린 지성이여! 얼마나 큰 인생의 어둠 속에서, 얼마나 큰 위험들이 너의 모든 가엾은 인생의 시간들을 지나가는가!” Lucretius,『사물의 본성에 관하여』(De Natura Rerum),181쪽
신자가 게으른 것은 이런 타락한 정서(情緖) 속에서 사는 것이다.
부지런한 생활! 도대체 무엇을 위한 부지런함인가? 하나님 위해서 게으르고 자기 위해 부지런하다. 이런 삶에 만족(滿足)이 있는가?
그런 것이 있다고 한들 세상과 함께 사라질 것인데 허무(虛無)밖에 남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만약 그 열정(熱情)이 하나님을 향한 것이 아니면 가장 바쁜 자가 가장 게으른 것이다.
B. 구속과 열정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속(救贖)하셨다.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방향 잃은 열정(熱情)을 바르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 대신 금수와 버러지의 형상을 섬기고(롬 1:23), 자기를 우상으로 삼는 허무한 삶을 끝내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더욱이 그러한 삶은 진정한 행복도 주지 못하고 우리를 심판으로 데려가지 않는가? 우리의 불행을 차마 보실 수 없으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심은 하나님을 사랑하시기 위함이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신 30:6)
그리스도께서 십자가(十字架)의 죽음으로 우리를 구속하신 것도 하나님 사랑 때문에 사람들을 사랑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7)
신약 성경은 구원해주신 사랑에 감화(感化)를 입은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준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0-11)
먼저, 구원 받음으로써 인생의 목적을 올바르게 해야 한다. 그리고 열렬한 사랑으로 그 목적(目的)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 이에서 벗어난 삶은 불행하고 허무한 것이다.
게으른 자에게는 가슴 불타는 목표가 없다. 이런 열정(熱情)은 거듭나고 회심함으로써 부어진다. 새로운 사랑으로 새로운 인생(人生)을 살게 하려 하심이다.
그러면 구원받은 신자가 왜 게으르게 사는가?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love)이 식었기 때문이다. 마음이 은혜(恩惠)에서 멀어졌기 때문이다.
모든 사랑의 공통점은 뜨거운 것이다. 냉담한 사랑은 없다.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A. Augustinus)
신자가 은혜(恩惠)를 잃어버리면 하나님에 대해 냉담해진다. 세상에 대해서는 열렬해진다. 결국 신자가 게으른 것은 하나님 대신 자기사랑(self-love)에 굴복한 것이다.
의미(意味) 없는 삶에 굴복한 것이나 의미 있는 삶에 열정(熱情)이 없는 것이나 모두 헛된 삶이다.
지혜자가 본 사람은 배가 고파서 음식이 담긴 그릇에 손을 넣었다. 음식을 집었다. 그러나 그것을 들어서 입에 넣도록 들어 올리는 것조차 귀찮아했다.
아직 배가 덜 고파서 그런 것인가? 그러면 그는 더 굶주려야 한다. 배가 고픈데도 음식을 들어올리기 싫었는가? 그렇다면 그는 살기가 싫은 것이다. 그럼 그는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그가 손을 들어올리기조차 괴로워했다면 그에게는 살아있는 것 자체가 귀찮은 일이 된 것이다. 누가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
이런 인생을 살고 싶은가? 곳간은 비었고 식구들은 굶주리고 영혼(靈魂)은 메말랐고 마음에는 생명(生命)보다 죽음이 친근하게 느껴지길 바라는가?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 5:15-16)
그러면 어떻게 삶의 열정(熱情)을 회복할 수 있을까? 인생을 직시(直視)해야 한다. 인생이 짧다는 것을 기억하라. 어떻게 살든지 그 후에는 심판(審判)이 있을 것을 알라(히 9:27).
각성하라! 삶을 다시 시작하라. 일체의 게으름이 방황인 줄 알고 회개하라. 구원하신 주님의 마음으로 다시 살라!
III. 적용과 결론
신자(信者)는 자신의 인생의 의미(意味)와 가치(價値)를 이미 발견한 사람들이다. 은혜에서 떠나 잠시 잊었을 뿐이다. 다시 상기하라!
다시 십자가 사랑(love)으로 돌아가라. 게으름의 끝은 타락과 고통 그리고 가난뿐이다. 다시 은혜(恩惠)를 받으라. 게으름과 결별하라! 부지런히 일하고 열렬히 경건생활 하라.
게으름을 벗어나라4 2020. 11. 8 주일 낮 예배
< 게으름과 교만 >
“게으른 자는 사리에 맞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 (잠 26:16)
I. 본문해설
게으른 자의 또 다른 특징은 교만(驕慢)이다. 교만은 자신의 처지를 파악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그릇된 우월감(優越感)에서 비롯된다.
이로써 게으른 자는 지혜로운 사람을 미련하게 여기고 어리석은 자신을 그보다 지혜롭다고 여긴다.
그래서 게으른 자는 자기보다 나은 사람으로부터 배우지 않는다.
II. 게으름과 교만
지혜자는 탁월한 통찰(洞察)과 빼어난 논리(論理)로 게으른 자의 심리 상태를 분석한다.
게으른 자는 끊임없는 핑계와 나태(懶怠) 속에서 산다. 그에게는 열정(熱情)을 쏟을 인생의 목표가 없다.
그러나 그는 착각하기를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지혜롭다고 여긴다.
“게으른 자는 사리에 맞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잠 26:16)
A. 그릇된 판단
첫째로, 그는 사리(事理)를 앎에 있어서 그릇된 판단을 한다.
게으른 자는 “사리에 맞게” 대답하는 일곱 사람보다 자기를 지혜(知慧)롭게 여긴다. 여기서 “일곱”은 “모든 사람”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사리에 맞게”라고 번역된 부분은 “타암(taam)”인데 “맛보다, 인식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에서 나온 명사다.
따라서 이 구절은 “분별력(分別力)을 가지고 대답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들의 대답은 판단력(判斷力)과 표현력(表現力)에 있어서 뛰어나다. 그러나 게으른 자는 그들로부터 배우지 않는다. 오히려 깔본다.
게으른 자는 어리석다. 따라서 그러한 사실(事實)을 올바르게 판단하지 못하고 자신을 그보다 더 지혜롭게 여긴다.
사물에 대한 일반적 판단은 지식(知識)으로 할 수 있지만, 도덕적 판단은 그것만으로 안 된다. 선악(善惡)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러한 판단은 단지 이성(理性)이 아니라 참된 믿음(faith)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지혜로운 자다.
게으름과 경건(敬虔)은 공존할 수 없다. 왜냐하면 경건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게으른 자에게는 이런 마음을 기대할 수 없다.
만약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결코 게으른 자일 수 없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시 111:10)
참된 분별력은 지혜에서 나오며 지혜(知慧)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서 비롯된다. 지혜를 떠난 지식은 결코 인생을 풍요롭게 못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결코 아무렇게나 살 수 없다. 사랑은 언제나 삶의 목표(目標)를 주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마음 다해 그분 뜻대로 살고 싶어 한다.
그런 사람은 가장 높으신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기쁨으로 하나님의 판단을 받아들인다. 이로써 선한 일에 열심을 품는다. 열정적으로 순종(順從)하는 삶을 살게 된다.
거기서 자기 인생(人生)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한다. 그러나 게으른 자는 그렇게 살지 않는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 9:10)
그러므로 신자의 게으름은 큰 죄(罪)다. 게으름은 수많은 다른 죄들을 생산(生産)하는 공장과 같다.
게으름의 친구는 어리석음이다. 게으른 자는 결코 지혜로울 수 없다. 지혜는 오직 순전한 사랑(love)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B. 지혜 없는 교만
둘째로, 게으름은 지혜 없음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교만(驕慢)으로까지 나아간다.
교만(驕慢)은 “잘난 체하며 뽐내고 건방지게 행동하는 정신(情神)”이다. 결코 자신은 뛰어나지 않은데, 자신이 타인에 비해 우월(優越)하다는 생각으로 행동(行動)한다.
누구도 거울에 비춰 보지 않고는 자신의 모습을 정확히 알 수 없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word)에 자기를 비춰보지 아니하고는 결코 자신의 영혼(靈魂)의 상태를 잘 알 수 없다.
비록 이성적으로 성경(聖經)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결코 그것으로써 지혜로워지지 않는다.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약 1:23-24)
말씀을 실천하는 자가 지혜로운 자다. 왜냐하면 그렇게 행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 사랑의 감화(感化)를 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게으른 자는 단지 육체(肉體)가 편하기를 원하는 자기사랑(self-love)에 빠져있다. 따라서 자기 원하는 대로 살고 싶어 한다.
게으른 사람은 열심히 말씀을 탐구(探究)하지 않는다. 사랑하지도 않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 사람에게는 말씀을 통해 깨닫는 것보다 소중(所重)한 것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살아갈 옳은 길을 보여주고, 그렇게 살 힘도 주기 때문이다.
지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 깃들기에 겸손(謙遜)하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하잘 것 없는 자인 줄 알기 때문이다.
게으른 자의 교만은 그를 더욱 비참(悲慘)하고 부끄럽게 할 것이며, 결국 그도 사람들로부터도 버림을 받게 된다.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잠 29:23)
충성(忠誠)스러운 사람은 떠벌리는 것보다 침묵(沈默)하기를 좋아하나 게으른 자는 조용히 의무를 다하기보다 판단하기를 좋아한다.
게으름과 지혜(知慧)는 공존할 수 없기에 그들은 상실한 자존감(自尊感)을 교만으로 보상하고자 한다.
교만은 자신을 남보다 낫게 여기며 대립(對立)하게 한다. 마땅히 해야 할 의무(義務)를 행하기에는 게으르고 쓸데없는 일에는 열심을 낸다. 이는 다 정욕(情慾)을 따르는 삶이다.
게으름은 자라서 많은 악(惡)의 열매를 맺는다. 무지(無知)와 교만은 그를 더욱 악하고 쓸모없는 사람으로 만든다. 그러니 게으름의 해악(害惡)이 얼마나 파괴적인가?
자신이 얼마나 지혜(知慧) 없는지를 돌아보라. 얼마나 교만한지 되돌아보라. 게으른 자에게 무슨 신령한 지혜가 있겠는가?
III. 적용과 결론
열심히 살아도 인생(人生)은 짧다. 게으름과 무지(無知) 속에 인생을 낭비(浪費)한 것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책임(責任)질 것인가?
자신의 게으름을 반성하라. 교만해질 위험까지 생각을 해보라.
무위도식(無爲徒食)하며 남이나 비판하고 있지 않은지 반성(反省)하라.
속히 회개(悔改)하고 참 사랑의 지혜로 돌아가자!
게으름을 벗어나라5 2020. 11. 22 주일 낮 예배
< 게으름과 욕망 >
“게으른 자의 욕망이 자기를 죽이나니 이는 자기의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함이니라” (잠 21:25)
I. 본문해설
지혜자는 게으른 자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심리(心理)를 탁월하게 파헤친다. 그것은 게으름과 욕망(慾望)의 관계다.
잠언은 “가르쳐 훈계(訓戒)하는 말”이다. 인생의 지혜(知慧)를 담고 있으나 결코 처세술에 관한 책이 아니다.
구원을 통해 다시 하나님을 경외(敬畏)하게 될 때 인간이 어떤 질서를 따라 살아야할지를 보여준다.
II. 게으름과 욕망
지혜자는 게으른 자의 영혼과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탁월하게 파헤친다. 그것은 게으름이 영혼(靈魂)에 미치는 영향이다.
A. 영적 생명을 죽임
첫째로, 게으름은 영적 생명(靈的生命)을 죽인다. 이는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선(善)한 일을 할 힘을 잃어버리는 것으로 나타난다.
“게으른 자의 욕망이 자기를 죽이나니…”(잠 21:25 상)
우리말 성경에 “욕망(慾望)”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로 “타아와”(taawa)인데 “욕구, 욕망, 바람, 정욕, 탐욕”등의 뜻이다.
구약에서 긍정적 의미로도, 부정적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긍정적 의미로 하나님이 주신 “소원(所願)”을 뜻했다(시 21:2).
부정적 의미로 “탐욕(貪慾)”을 뜻했다(시 10:3, 민 11:4). 또한, 유혹에 굴복하려는 욕망(慾望)을 가리키기도 했다(창 3:6).
본문에서는 자기를 주인(主人) 삼으며 살고 싶어하는 모든 욕망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바로 넓은 의미의 정욕(情慾)이다.
“죽이나니”는 생명(生命)을 끊어 멸절(滅絶)시키는 행위를 가리킨다. 그러면 누구를 죽이는가? 게으른 그 사람 자신(自身)이다.
그런데 게으름이 직접적으로 그의 육체(肉體)를 죽게 하지는 않으니 이는 그의 영혼(靈魂)과 정신(情神)을 죽이는 것이다.
인간이 ‘살아있다’는 것은 단지 육체의 생명(生命)을 가진 것이 아니라 영혼(靈魂)의 생명도 함께 가진 것을 뜻한다.
이는 참된 의미에서 ‘살아있다’는 것은 주체적(主體的)으로 자기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참된 삶은 살아있는 육체(肉體)와 함께 살아있는 영혼(靈魂)을 가짐으로써 가능하다. 비록 육체가 살아있어도 병든 영혼으로는 참된 인생(人生)을 살 수는 없다.
공간(空間)에 관하여 생각할 때, 영혼은 한정적 존재다. 그러나 볼 수도 만질 수도 없고, 그 크기를 잴 수도 없다. 영혼은 눈에 보이는 사물(事物)과 같은 방식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죽는다”는 개념도 육체(肉體)의 경우와는 다르다. 육체에 관한 한, 뇌(腦)와 심장의 활동이 멈추고 생명(生命)의 작용이 회복될 수 없게 끊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영혼은 그런 식으로 죽지 않는다. 왜냐하면 영원히 불멸(不滅)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영혼의 생명(生命)이 영원히 끊어지거나 그 존재(存在)가 소멸되지 않는다.
따라서 영혼의 죽음(death)의 의미는 육체의 그것과는 다르다. 영혼의 죽음은, 생명이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을 가리킨다.
영혼의 죽음은 그것을 주신 목적(目的)에 알맞게 기능(機能)하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영혼이 육체를 감독(監督)하고 인도(引導)하지 못할 때 영혼이 “죽었다”고 말한다.
영혼으로서 올바른 기능(機能)을 하지 못하거나 그럴 수 있는 힘이 매우 미약(微弱)할 때 그것을 “영혼이 죽은 상태”라고 부른다.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계 3:1)
게으른 자는 게으름으로 가득 찬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영혼(靈魂)이 병들어 있거나 죽은 상태를 알려주는 징후다.
인간의 모든 게으름의 뿌리는 그릇된 자기사랑(self-love)이다.
인간은 단지 먹고 살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순간의 쾌락(快樂)이나 즐거움만을 위해 태어나지도 않았다.
살아있는 영혼으로 가치(價値) 있는 삶을 살기 위해 태어났다. 그렇게 살기 위해서 영혼에 충만한 생명(生命)이 필요하다. 그 생명은 영적 생명(spiritual life)인데, 은혜를 통해 주어진다.
게으름에 굴복한 삶은 영혼(靈魂)의 생명(生命)을 고사시킨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결코 게으를 수 없다. 게으름에서 벗어나라!
B. 일하기를 싫어함
둘째로, 게으른 자는 일하기를 싫어한다. 성경은 게으름을 심각한 죄로 본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은 징표(徵表)라고 본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마 25:26)
신자는 “게으르게 행하는 자”에게서 떠나야 한다(살후 3:16). 믿음의 승리(勝利)는 게으름을 무찌르는 것이다(히 6:12).
영혼은 영원불멸(永遠不滅)하나, 육체는 한시적(限時的) 존재다. 인간을 영혼과 육체로 지으신 것은 한시적인 육체로 영원(永遠)한 의미(意味)를 따라 살게 하심이다.
이러한 태만(怠慢)은 바로 자신의 영혼의 생명(生命)을 죽이는 것이다.
“…이는 자기의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함이니라”(잠 21:25 하)
이 부분을 히브리어 성경에서 우리말로 직역(直譯)하면 다음과 같다.
“…왜냐하면 그의 두 손이 행하기를 거절하기 때문이다”(잠 21:25 하 KNJ 私譯)
여기서 “행하기를”로 번역된 단어의 원형은 히브리어(Hebrew)로 “아사(asa)”인데 이는 “만들다, 행하다”라는 의미다. 특히 어떤 재료를 사용하여 물건을 만드는 동작(動作)을 뜻한다.
하나님은 세계를 창조하실 때 인간의 노동(勞動)을 통해 더욱 아름답고 선(善)해지도록 창조하셨다.
세계를 아름답고 선하게 창조하셨다. 그러나 인간(人間)의 노동을 통해 그 아름다움과 선함이 증진(增進)되도록 창조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榮光)이 드러나게 하셨다. 이것이 바로 세계창조의 목적(目的)이고 인간을 지으신 이유다.
인간은 그렇게 의미(意味) 있는 삶을 삶으로써 자신도 이웃과 함께 행복(幸福)을 누리도록 창조되었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0-11)
노동(勞動)은 결코 징벌이 아니다. 오히려 축복(祝福)이고 특권(特權)이다. 이런 사실은 아담(Adam)에게 주신 명령에서도 분명하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
여기서 “정복(征服)한다”는 것은 폭압적으로 짓밟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개척(開拓)을 의미한다.
또한 여기서 “다스린다”는 것은 폭력적으로 지배(支配)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事物)을 질서 있게 해서 더 좋게 한다는 의미다.
따라서 그 일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뜻을 알고 순종(順從)하려는 인간의 행함에 의해서 이뤄진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창 2:19)
노동(勞動)은 하나님의 축복이다. 다만 인간이 타락(墮落)함으로써 노동에 고통(苦痛)이 따라오게 된 것이다.
무지하여 가치(價値) 없는 일을 위해 수고하고, 또 많이 수고해도 얻는 것이 별로 없다. 이것이 바로 죄(罪)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子女)로서, 인간(人間)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의무를 다하지 않을 때 그의 영혼은 게으름 속에 죽어간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살라!
III. 적용과 결론
그러므로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지를 알고 그런 삶을 살기 위해 부지런히 힘쓰고 애써야 한다. 거기서 인생(人生)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실험실의 개구리
게으른 자는 일하기 싫어한다. 선(善)한 일을 위하여 육체는 게으르고 정신(情神)은 싫증을 느낀다. 게으름에 빠져 살아감으로써 그의 영혼은 점점 병들어 간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 거기서 인간은 순간(瞬間)을 살아도 영원(永遠)에 잇대어 사는 것이다. 게으름에서 벗어나라!
게으름을 벗어나라6 2020. 11. 29 주일 낮 예배
< 게으름과 쓸모 >
“게으른 자는 그 부리는 사람에게 마치 이에 식초 같고 눈에 연기 같으니라” (잠 10:26)
I. 본문해설
지혜자는 게으른 자의 심리(心理) 안에서 일어나는 작용(作用)과 함께 그의 쓸모(usefulness)에 대해 말한다.
잠언은 하나님을 경외(敬畏)하는 자의 삶과 세상(世上)을 사랑하는 자의 삶을 대조한다.
본문은 앞뒷절에서 악인(惡人)과 의인(義人)의 태도에 대해 말하는 가운데 나온다. 이는 게으름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은 자의 인격적(人格的) 특징임을 암시한다.
부지런하면서 악(惡)하게 살아갈 수는 있으나 게으르면서 의(義)롭게 살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대해 게으를 수 없다.
II. 게으름과 쓸모
쓸모는 “쓸만한 가치(價値), 혹은 쓰이게 될 분야(分野)나 부분”을 뜻한다. 게으름은 인간을 쓸모없게 한다.
A. 기막힌 두 비유
여기서 지혜자는 게으른 자가 쓸모없는 존재(存在)라는 사실을 두 가지 기막힐 정도로 적합한 비유(比喩)로 설명한다.
1. 이에 초(醋)
여기서 “초”(vinegar)는 당시 널리 식용되던 식초(食醋)를 뜻한다.
지혜자의 시대에 통용되던, 잘 숙성(熟成)되어 농도가 진한 식초(食醋)를 생각해 보라.
식초가 치아의 신경을 자극하는 것은 고문과 같을 것이다.
* 신 것을 먹지 못하던 경험
2. 눈에 연기(煙氣)
연기는 “무엇이 불에 탈 때 생겨나는 흐릿한 기체나 기운”이다.
지혜자는 불을 때서 밥을 짓고 난방(暖房)을 하던 시대의 한 경험을 말한다. 연기(煙氣)에 눈을 뜨지 못하던 경험을 깔고 있다.
눈물이 나는 원인은 습도의 부족부터 슬픔의 정동(情動)과 염증(炎症) 등이 있는데, 그중 가장 흔한 이유 중 하나는 이물질(異物質)이 들어가는 것이다.
연기는 가연성(可燃性) 물질이 불에 탈 때 발생하는 고체, 혹은 액체 상태의 미립자(微粒子)들이 몰려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유기물이 불완전 연소(燃燒)할 때 나오며, 주성분이 탄소(炭素)의 미립자이고, 그 외 수증기나 기타 휘발성 물질의 액체 입자도 포함된다. 불타는 소재에 따라 성분이 다르다.
우리 몸은 눈을 보호(保護)하기 위한 여러 장치를 가지고 있다, 눈썹, 눈 위아래의 속눈썹, 그리고 와이퍼의 역할을 하는 눈꺼풀 등이다.
눈물샘은 슬픔과 기쁨과 같은 정동(情動)뿐만 아니라, 이물질의 자극에 의해서도 눈물을 배출한다.
연기에 눈물이 나는 이유는 이물질을 배출하기 위함이다. 눈물을 내서 눈에 들어오는 그것들을 밖으로 쏟아낸다. 이물질들의 침투로부터 눈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안구를 담고 있는 살은 예민한 신경(神經)과 연약한 막(膜)으로 덮여 있는데 이물질이 들어올 때 심한 이물감(異物感)과 통증(痛症)을 격(激)하게 느끼게 된다.
계속 앞으로 몰려오는 연기(煙氣)에 매워서 눈을 부비며 콜록거리는 자신을 떠올려 보라. 게으른 자가 바로 괴롭히는 그 연기와 같다.
B. 보냄 받은 사람
그러면 게으른 자는 누구에게 이에 초(醋), 눈에 연기(煙氣) 같을까?
우리말 성경에는 “그 부리는 자에게”(lesholehainu)라고 되어 있다. 히브리어(Hebrew)에서 직역하면 “그를 보낸 자에게”이다.
아마도 이 비유는 지혜자(知慧者)가 급하고 중요한 임무(任務)를 부여받고 출장을 떠난 하인(下人)이나 신하(臣下)를 염두에 둔 것으로 여겨진다.
고용(雇傭)된 자에게는 월급 주는 사람이 그를 보낸 사람이지만, 우리 모두는 하나님(God)께로부터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다.
신자(信者)는 그것을 깨달은 사람이다. 거기서 인생(人生)의 의미를 발견하며 인생을 사는 사람이다.
게으른 것은 하나님께서 목적(目的)을 가지고 자기를 이 세상(世上)에 보내셨다는 사실을 잊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내가 세상에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좋으시기에 보내셨다.
나를 그냥 있기만 하라고 보내신 게 아니다. 두 가지를 위함이다.
첫째로, 내가 부지런히 살아서 이 세상(世上)을 더 아름답고 선(善)하게 만들라고 보내셨다.
둘째로,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더욱 온전한 인간(人間)이 되기를 바라시며 보내셨다.
“그를 보내신 자에게” 이는 나의 존재(存在)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보여준다. 하나님의 뜻에 있다.
무지(無知)하게 살다가 구원 받음으로써 그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나를 세상(世上)에 보내신 뜻, 교회(敎會)의 지체로 부르신 뜻, 이 가정(家庭)의 남편과 아내로 부르신 뜻, 일터로 부르신 뜻, 이것을 “사명(使命)”이라고 부른다.
사람은 세 번 태어난다. 육체적으로 태어나고, 영적으로 거듭나고, 삶을 위한 사명(使命)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 사명을 자각하는 데서 비로소 자신의 삶의 의미를 하나님과의 관계(關係) 속에서 생각하게 된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삶(life)이다.
한 인간이 게으르게 사는 것은 자기(自己)를 이 세상에 보내신 지존(至尊)하신 하나님을 깔보는 것이다.
언젠가 우리의 삶의 무대에 연극이 끝나고 휘장이 내려질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왜 그렇게 살았는지를 하나님 앞에서 직고(直告)하여야 할 것이다.
왜 태만하고 게으르게 살았는지 그 이유를 주님께 설명 드려야 한다.
왜냐하면 그분이 우리를 이 세상(世上)에 보내시고, 구원하시고, 은혜를 주신 심판주(審判主)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냥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이 세상에 온 것이다. 보내신 그분이 보시기에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라.
III. 적용과 결론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들이다. 그 뜻을 따라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고 여기 살아있게 하셨다.
하나님을 다시 만나라! 한 번 밖에 없는 인생의 목표(目標)를 올바르게 정하라. 살아야 할 이유(理由)를 발견하라.
게으르지 말라. 마음과 뜻을 다해 열렬히 살라.
게으름을 벗어나라7 2020. 12. 6 주일 낮 예배
< 게으른 자의 결산 >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마 25:24-25)
I. 본문해설
게으름은 예수님에게도 신앙적인 가르침의 중요한 주제였다. 일평생 예수 그리스도는 게으름과 상관없는 삶을 사셨다.
깊은 밤에도 그분은 “힘쓰고 애써 간절히 기도”하셨으며(눅 22:44),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일어나셨으며(막 1:35), 고된 일과에도 밤늦게까지 제자들을 가르치셨다(막 6:48).
게으름은 영적으로 잠든 사람의 삶이지만 주님은 항상 깨어 계셨다.
여기서 유명한 달란트의 비유가 나온다. 여기서 게으름의 정체(正體)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II. 게으른 자의 결산
어느 주인이 세 명의 종에게 재능(才能)대로 각각 다섯, 둘, 한 달란트를 맡겨두고 다른 나라로 여행을 떠났다.
그 결과 두 종은 각각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남겼고, 나머지 한 종은 받았던 한 달란트를 주인에게 그대로 돌려주었다. 주인은 그 마지막 종에 대해 평가(評價)한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마 25:26)
A. 악(惡)함
돌아온 주인의 첫 번째 평가는 “악(惡)한 종(ponere doulos)”였다. 여기서 “악하다”는 것은 사악(邪惡)함을 뜻한다.
악(惡)함은 선함의 반대다. 선(善)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함이나 악은 오직 욕망의 만족을 위한 것이다.
선(善)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고 인간을 지으신 목적(目的)과 의도(意圖)에 부합하는 상태를 뜻한다.
악(惡)은 그 반대를 뜻한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다. 이는 도덕적 기준에 어긋나 나쁜 것, 혹은 남에게 해를 끼침이다.
따라서 악(惡)에는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다. 악한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 적어도 악을 행하는 순간 하나님을 버린 것이다.
여기서 화자(話者)는 주인이니, 이 종은 달란트를 맡긴 주인(主人)의 뜻과는 반대로 행한 것이다.
그런데 악은 인간의 마음과 정신(精神)에 속한 것인데 주인은 그동안 보지도 않고 그 종이 악(惡)하다는 사실을 어찌 알았을까?
이는 그 종의 삶이 그의 악함을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주인을 사랑하지도, 자기에게 큰 돈을 맡긴 뜻을 존중하지도 않았다.
당시 한 달란트는 노동자(勞動者) 한 사람이 20년을 일해야 벌 수 있는 큰 돈이었다. 일당이 10만원이라면 약 6억원의 가치였다.
다른 두 종이 그 돈으로 열심히 장사하여 이익(利益)을 남길 때 한 달란트 맡은 종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달란트를 맡길지는 주인의 주권(主權)에 속한 것이었고 종들은 부지런히 일해서 맡겨진 달란트로 이익을 남겨야 했다. 그것은 떠날 때 주인(主人)의 뜻이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맡은 종은 게으르게 살았다. 그는 아무 이익도 남기지 못한 것에 대해 주인에게 변명(辨明)을 한다.
게으른 종의 변명은 단지 자신의 태만(怠慢)함을 정당화하려는 억지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마 25:24)
한 달란트 받은 종의 게으른 삶은 그가 주인을 전혀 공경(恭敬)하지 않는 악(惡)한 사람임을 드러냈다.
B. 게으름
두 번째 평가는 “게으른 종”이었다. 악(惡)함이 그의 마음(heart)에 대한 평가였다면, 게으름은 그의 생활(生活)에 대한 평가였다.
여기서 “게으른”(oknere)이라는 단어는 “오크네오(okneo)”라는 동사에서 온 형용사다. 그 동사의 뜻은 “싫은 느낌이 들다, 움츠리다, 망설이다, 꺼리다”이다.
따라서 게으름은 일반적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마땅히 행해야 할 의무(義務)와 관련된다.
한 달란트 맡은 종은 주인을 공경(恭敬)하지도 않았고, 따라서 맡긴 달란트를 장사하여 남기는 일에도 관심(關心)이 없었다.
그러면 그동안 한 달란트 맡은 종은 무엇을 하면서 지냈을까?
충성스러운 두 종은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달란트를 남기고”(마 25:16-17)라고 했다.
그러나 게으른 종에 대해서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다고만 되어있다(마 25:18).
주인이 올 때까지 게으른 종이라고 해서, 설마 그림처럼 누워 있었겠는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살았을 것이다. 어쩌면 부지런하게. 열심히 딴 일을 했을지도 모른다.
게으름은 그냥 태만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말한다면 우리들 중에 모든 일에 게으른 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게으름은 자기에게 맡겨진 마땅한 의무(義務)에 대해 태만하고, 자기 하고 싶은대로 딴짓을 하면서 사는 것이다.
그 세 명의 종들에게 달란트를 맡기고 임무(任務)를 부여한 자는 높은 자, 곧 종들의 주인이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인생(人生)이라는 달란트를 맡기시고 열매를 기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누가 더 높은가?
하나님에 대해 게으른 자도 자기 자신(自身)을 위해서는 부지런하다. 하나님 대신 자기의 육신(肉身)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한 달란트 맡은 종은 게으르게 살았던 것을 주인의 성품에 대한 자기의 오해 때문이라고 구실을 댄다.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마 25:25)
악(惡)한 종은 주인의 성품(性品)을 곡해했다. 주인의 부(富)는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라 곡식을 심어 가꾸듯이 노력(努力)함으로써 얻어진 것이었다.
그것은 하찮은 것들 중에서 소중(所重)한 것을 찾는 것처럼, 쓸데없어 보이는 것들을 헤치는 많은 노력(努力)을 통해 얻은 것이었다.
종들은 마땅히 그런 주인을 알고 진심으로 봉사(奉仕)해야 했다. 그러면 뜻하지 않은 상급(賞給)이 주어질 것이었다.
주님 위해 일할 수 있는 날이 항상 있으리라 생각하지 말라. 자신이 너무 늙었다고 생각하는가?
보람 있게 살 수 있었을 많은 시간들이 헛되이 낭비되었다. 너무 많은 시간(時間)들을 우리의 무지(無知)함과 게으름으로 허비하였다.
이렇게 예배에 나와서 설교도 들을 수 없는 날이 온다. 그때에 비하면 아직은 힘이 있지 않은가?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요 9:4)
III. 적용과 결론
얼마나 많은 우리 인생의 날들이 고통(苦痛)과 슬픔 속에 지나가는가? 또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헛된 욕망(慾望)으로 낭비하는가?
방황과 슬픔 속에 보내고 있는 인생(人生)의 날들은 얼마나 소중한 나날들인가? 서로 사랑하고 섬기며 살기에도 부족한 시간이다.
우리 인생의 남은 날들을 헤아릴 수 있는 지혜를 갖자. 다시 오지 않을 인생, 매 순간 주를 위해 열렬히 살자!
게으름을 벗어나라8 2020. 12. 13 주일 낮 예배
< 게으른 자의 집을 보라 >
“게으른즉 서까래가 내려앉고 손을 놓은즉 집이 새느니라” (전 10:18)
I. 본문해설
게으름은 잠언에서만 언급된 주제가 아니다. 전도서에서도 다뤄진다.
아마도 전도서가 다루는 가장 중요한 주제는 "인생이란 무엇인가?"다.
전도서를 히브리어 성경에서 ‘코헬렛트’(qohelet)라는 제목을 가졌는데 이는 사람들을 ‘모으는 자’라는 뜻이다.
전도서는 저자가 권위를 가지고 모이게 해서 그들에게 인생이 무엇이지를 가르쳐주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II. 게으른 자의 집을 보라
A. 지혜자와 게으름
10장의 본문은 인생의 지혜에 대한 특별한 깨달음을 말하고 있다.
그는 인생의 헛됨을 반복해서 강조했다. 그는 인간이 해 아래서 애쓰고 수고하며 사는 것이 모두 무익하다고 했다.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전 2:11)
그러나 그것은 허무주의가 아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채 추구하는 세상 영화의 허무를 보여준다. 아는 영원한 가치를 찾게 함이었다.
특히 본문에서는 여러 차례 진리에 대해 말한다. 전도자는 지혜 없어 우매한 자들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말한다.
전도자는 우매한 자들이 높은 지위를 얻고 지도자들이 허물이 많으면 사회의 질서가 무너진다고 말한다(전 10:6).
반면에 지혜로운 자는 자신의 삶을 가치 있게 할 뿐 아니라 사회를 바르게 하고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한다(전 9:17).
우매한 자의 삶의 특징은 게으름이다. 그들은 개인의 삶에서, 악한 일에는 부지런하고 선한 일에는 게으르다.
그들은 함정을 파고 남의 집의 담을 허물며 연장의 날이 무뎌졌는데도 갈지 않는다. 게으르기 때문이다(전 10:10).
가장 실감나는 현실적 예증을 통해 자신의 청중들로 하여금 인생의 지혜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지혜로운 자는 게으르지 않고 게으른 것은 우매하기 때문이다. 지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서 온다.
B. 게으른 자의 집
1. 서까래가 썩음
서까래는 집의 지붕을 가로지르는 보에 걸쳐진 나무들이다. 보가 등뼈라면 서까래는 갈비뼈와 같다.
그것들이 지붕을 지탱하고 있다. 보는 결코 내려앉는 법이 없지만 서까래는 종종 그렇게 된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 습기로 썩거나 벌레가 먹어 상하기 때문이다.
보를 고쳐 쓰는 법은 없으나 서까래는 수시로 수리해서 보수하거나 새로운 나무로 교체해 주어야 한다.
게으른 자는 서까래를 손보지 않아 내려앉도록 버려둔다. 내려앉은 지붕에 물과 흙이 고이고 지붕은 더욱 내려앉는다.
2. 지붕에 물이 샘
게으름은 결국 군데군데 지붕을 무너지게 하여 물이 새게 하였다.
“손을 놓은즉” 게으른 자가 자기의 의무에 태만한 상태를 말한다.
집을 가진 자는 마땅히 서까래를 관리해야 한다. 그러나 게으른 자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일하기가 싫기 때문이다.
전도자는 게으른 자가 자기 집을 돌아보지 않을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 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게으른즉 서까래가 내려앉고 손을 놓은즉 집이 새느니라”(전 10:18)
이것이 어찌 보이는 집만에만 해당되겠는가? 우리 삶의 모든 분야에 정확히 적용되는 사실이 아닌가?
인생을 산다는 것은 집을 짓는 것과 같다. 우리가 신앙을 갖는다는 것도 그러하다.
우리는 모두, 신앙의 집을 짓는 사람들이다. 믿고 구원 받은 사람들은 지식으로 사상의 집을 짓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게으름으로 신앙의 서까래가 무너지고 죄의 빗물이 들어온다. 신앙은 무너지고 삶은 파괴된다.
그 사람이 겪게 되는 게으름의 결말, 인생의 비참함을 생각해 보라.
신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집을 짓는 사람들이다. 보는 있으나 서까래가 여기저기 주저앉고 있다.
매일 새로운 신앙의 지식으로써 서까래를 깔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지식 체계라는 지붕에 구멍이 생겨서 세속주의의 빗물이 들어온다. 윤리적인 삶의 지복은 무너진다.
자신의 의무에 나태하고 게으르게 살아가는 사람의 인생이 그러하다.
III. 적용과 결론
인생의 숙제는 두 가지다. 사람이 살아가야 할 옳은 길을 알고, 그 길을 따라 열렬하게 사는 것이다.
지혜는 사랑을 동반한다.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게으르게 산다는 것은 이미 그에게 가슴을 뛰게 하는 삶의 목표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거기에 어찌 생기가 있겠는가?
예수를 믿는 것은 집을 짓는 것과 같고 신자로 살아가는 것은 그 집을 관리하는 것과 같다. 부지런함으로 일해야 한다.
우리 인생의 집은 어떠한가? 단지 우리가 살다 죽을 집이 아니라 주님께 보여드려야 할 집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을 뜨거운 가슴으로 살라. 은혜를 받고 게으름에서 벗어나라.
게으름을 벗어나라9 2020. 12. 20 주일 낮 예배
< 개미에게 배우라 >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감독자도 없고 통치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잠 6:6-8)
I. 본문해설
본문에서 지혜자는 유명한 개미의 비유로써 게으른 자에 대해 경고하여 청중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지혜자의 관심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敬畏)하며 사는 것이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결코 게으를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인생에 목표(目標)를 주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인생(人生)에 대한 목표를 분명히 제시받았기에 게으르게 살 수는 없다.
지혜자는 당시 모든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평범한 사실, 쉬지 않고 일하는 개미의 부지런함에서 배우도록 촉구한다.
II. 개미에게 배우라
A. 스스로 일함
첫째로, 개미는 스스로 일한다. 그것들은 누군가의 감독이나 강요 없이 자유롭게 스스로 자기의 일을 한다.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감독자도 없고 통치자도 없으되”(잠 6:7)
개미는 여왕개미, 수개미, 일개미로 구분된다. 일개미는 식량을 수집하고, 사냥하고 새끼를 양육한다. 여왕개미는 번식을 담당한다.
개미에게 그 일을 맡긴 이가 없다. 그러나 그것들은 각자의 본성(本性)을 따라 자발적으로 일하여 공동체의 유지에 이바지한다.
사람은 노동하기 위해 세상에 태어났다. 한 인간으로 일함으로써 자신을 완성하고 사회에 이바지하도록 태어났다.
노동 없이는 자신을 완성(完成)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노동은 가치 있는 바를 실천에 옮겨 의미 있는 삶을 살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삶의 의미(意味)를 깨닫는 것이 먼저다. 그렇지 않으면 헛된 일에 인생을 낭비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생의 목적을 깨닫지 못하면 가장 바쁜 자가 가장 게으를 수 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한다. 그것은 생각이 허망하여지고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기 때문이다(롬 1:21).
게으름은 단지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 합당한 의무를 행할 충분한 정신의 힘(力)을 발휘하지 않는 것이다.
지혜자는 누군가에게 일을 시켜본 경험이 많은 사람이었다. 두령과 감독자들을 세웠고 통치자도 되어 보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으른 자는 어쩔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이는 게으름의 뿌리가 그릇된 자기사랑(self-love)임을 보여준다. 마땅한 의무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따르는 것이다.
우리에게 일할 수 있는 날은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니다. 땅이 거기 있어도 씨를 뿌릴 때는 정해져 있다. 때가 지나면 할 수 없다.
인생도 그러하다. 따라서 마땅히 행해야 하는 의미 있는 일이라면 기쁜 마음으로 최선을 행하라.
최선을 다하고, 거기서 삶의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살아야 한다.
개미는 자기가 하는 일의 의미를 모르고 단지 본성에 따라 부지런히 일한다. 그러나 인간(人間)은 그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뜻을 알고, 인생의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리 해야 한다.
인간은 단지 일하는 기계가 아니라 마음에 사랑(love)의 불꽃을 가진 사람으로서 선한 목표를 가지고 열렬히 살아야 한다.
B. 미래에 대비함
둘째로, 미래에 대비(對備)하는 삶이다. 이는 일할 수 있는 때에 부지런히 일함으로써 일할 수 없는 미래에 대비하는 것이다.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잠 6:8)
개미는 겨울에 일할 수 없음을 알고 그때를 대비한다. 마치 농부가 봄과 여름에 열심히 일해서 가을에 곡식을 거두듯이 한다.
추운 겨울을 대비하여 개미는 일할 수 있는 때에 열심히 일한다.
사람이 현재 게으른 것은 그가 미래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적이거나 인생에 대한 올바른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기에 기억하고, 현재는 지금 살고 있기에 알고 있다. 그러나 미래에 우리에게 무슨 일이 있을지는 알지 못한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3-14)
인생에는 항상 예측(豫測)할 수 있는 일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뜻밖의 일이 생길 때 예기치 못한 상황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그때 상황을 충분히 감당할 힘이 없을 때 우리 인생은 파산(破産)하게 된다. 이는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도 마찬가지다.
항상 경제력(經濟力)이 있는 게 아니다. 항상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염려하지는 않되 미래에 대비해야 한다.
정신(情神)의 힘을 기르는 것도 마찬가지다. 어린 시절부터 읽고 생각하고 실천하며 정신의 힘을 길러야 한다.
그래야만 미래에 인생의 난관이 찾아올 때 정신적으로는 그 상황을 견디며, 주체성을 잃지 않는다.
“여름 동안”은 일할 수 있을 때고 겨울은 일할 수 없는 때이기에 가을에는 추수를 해서 저장해야 굶지 않는다.
그러나 봄에 씨 뿌리고 여름에 농사짓지 않은 사람들에게 어찌 가을에 추수할 것이 있겠는가?
신앙적으로도 마찬가지다. 우리 인생(人生)에 시련은 오게 마련이다.
시련이 닥칠 때 믿음으로 이기는 자가 있고, 또한 은혜에서 미끄러져 믿음을 져버리는 자가 있다.
겨울이 올 때, 파산하지 않기 위해서는 씨를 뿌리고 농사(農事)를 짓듯이 신앙과 경건을 위해 부지런히 자신을 단련해야 한다.
사도는 히브리서에서 양떼들에게 간절히 바라는 바가 있다고 했다.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히 6::12)
더 이상 일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이전에 미리 다가올 미래(未來)를 대비하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할 것이다.
시련의 날에는 우리에게 굳건한 믿음이 없는 것을 후회할 것이다.
인생이 끝날 때를 생각해보라. 삶의 가치를 깨닫게 되었다. 더 많이 섬길 수 있었는데 너무나 소중한 시간을 쓸데없이 낭비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 후회가 얼마나 크겠는가?
III. 적용과 결론
우리의 인생은 선물(膳物)이다. 현재 살아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분의 뜻이 있어서 지금 우리가 여기 살아있는 것이다. 그것은 은혜로 주어진 것이다.
알지 못할 때는 목표가 없어 인생을 낭비(浪費)하며 살았다. 이제는 우리가 살아있는 이유를 알았으니 게으르지 말고 열렬히 살자!
게으름을 벗어나라10(끝) 2020. 12. 27 주일 낮 예배
< 새로운 삶을 찾아서 >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
I. 본문해설
로마서 12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義)롭게 된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준다.
기독교 신앙의 골격과 같은 교리(敎理)들을 가르치고 신자의 새로운 삶에 대해 말한다. 하나님께 영적예배(靈的禮拜)로 드려지는 생활이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하)
이는 아무리 시대(時代)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구원받은 신자의 삶의 황금계명이다. 예배는 삶을 위해서 있고 삶은 예배를 위해서 있다.
II. 새로운 삶을 찾아서
예배한 것만큼 살고 산 것만큼 예배하니 예배를 능가하는 삶이 없고 삶을 능가하는 예배도 없다.
그러면 어떤 삶이 하나님께 영적인 예배로서 받아들여지는 삶인가?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선한 일을 도모하며 원수에게도 자비를 베푸는 삶이다(롬 12:14-20). “사랑의 삶”이다.
신자가 하나님 사랑으로 사는 삶의 방식에 대해서 가르쳐 준다.
A. 게으르지 말라
영적 예배로서 신자의 삶의 두 국면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게으르지 않는 것과 주를 섬기는 것이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롬 12:11)
먼저 “게으르지 말라”고 한 경고한다. 이는 신자인 우리가 그렇게 될 위험이 얼마나 많은지를 보여준다.
여기서 “부지런하여”라고 번역된 부분은 “테 스푸데(te spouthe)”인데 “빨리, 속히, 간절히”라는 뜻을 가진 “스퓨도(speudo)"라는 단어에서 유래하였다.
이것은 “부지런하게 게으르지 말고” 라는 뜻이니 “열정에 있어서 결코 모자람이 없게”(NIV)라는 의미다.
신자의 삶은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예배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救援)의 감격에서 비롯된 삶이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love)에 대한 감격이다.
감격하는 사람의 마음은 결코 냉담하지 않다. 어떤 사람도 감격하면서 권태감 속에 게으를 수는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성경은 게으름을 불쌍히 여길 어쩔 수 없는 연약함이 아니라 경고 받아야할 악(惡)으로 간주한다.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살전 5:14)
게으르게 사는 것은 가슴 벅찬 감격이 없기 때문이다. 구원이 감격이 없으니 예배의 감격, 사랑의 감격이 없는 것이다.
냉담한 사랑은 없다. 사람을 미워하면 그 미움조차 치열하니 사랑하는데 어찌 게으를 수 있겠는가?
신자의 삶은 자기 같은 죄인(罪人)을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는 생활이다. 은혜를 받을 때 십자가는 현재적으로 경험된다.
그 사랑에서 멀어질 때 예배가 권태롭듯이 그의 삶도 그러하다. 그래서 사도는 “열심(熱心)을 품고”라고 말한다. 문자적으로 “불타는 마음(pneuma)으로”다.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타오르는 산불을 상상해 보라. 하늘 높이 치솟은 불길은 모든 것을 다 태우기까지 꺼지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십자가(十字架) 은혜로 구원(救援) 받았으니 그런 마음으로 살라는 것이다.
구원과 함께 새롭게 부여받은 인생의 목적을 따라 불꽃처럼 살라는 것이다. 거기에 행복이 있기 때문이다.
B. 주님을 섬기라
사도는 구원받은 신자가 단지 게으르지 않을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살라고 촉구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삶이다.
여기서 주님은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를 대신하여 세상을 통치하고 계시니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김이 곧 하나님을 섬김이다.
그런데 여기서 “섬기다”(duleuontes)는 대등한 근로관계에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종, 혹은 노예로서 봉사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그는 두려움과 공포 속에 노예정신(奴隸精神)으로 섬기는 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이기 때문이다.
출애굽기 21장에는 노예가 된지 일곱째 되는 해에 히브리종이 어떻게 자유인(自由人)이 되는지에 대한 규례가 나온다.
상전(上典)과 처자(妻子)를 사랑하여 나가서 자유인이 되고 싶지 않은 노예는 상전과 함께 재판장에게 가서 문이나 문설주에 가서 송곳으로 귀를 뚫는다. 그러면 그는 종신토록 상전을 섬기게 된다.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고전 7:22)
그는 노예처럼 섬긴다. 그러나 상전(上典)은 그를 가족(家族)처럼 여기며 사랑하고, 그는 충성스럽게 살아가는 것이다. 거기서 주인과 함께 행복을 누리며 사는 것이다.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으신 하나님이 우리더러 당신을 섬기라 하심은 거기서 우리가 행복을 누리게 하시기 위함이다.
III. 적용과 결론
신자는 자기가 받은 구원의 은혜(恩惠)에서 소명을 발견한 사람이다. 그것은 잠시 있다 사라질 존재로서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경륜(經綸)을 안 사람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사랑(love)으로 돌아와서 서로 사랑하게 되는 경륜이다.
신자(信者)는 그것을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로 받아들인 사람이다. 그 뜻을 위해 섬기는 삶이 그의 인생의 보람이어야 한다.
게으름을 벗어나라1 (2020.10.18._주일오전)
1. 너의 포도원을 보라
“내가 게으른 자의 밭과 지혜 없는 자의 포도원을 지나며 본즉 가시덤불이 그 전부에 퍼졌으며 그 지면이 거친 풀로 덮였고 돌담이 무너져 있기로 내가 보고 생각이 깊었고 내가 보고 훈계를 받았노라 네가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누워 있자 하니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
(잠 24:30-34)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잠언은 솔로몬을 비롯한 몇 명의 사람과 집단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 솔로몬이 모든 잠언을 기록하지는 않았으나 대부분을 기록했고 또 나머지를 수집했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잠언은 지혜 문학의 최고봉입니다. 문학의 형태를 빌려 쓰면서도 인생의 근본적인 지혜를 가르쳐 주는 장르입니다. 신앙과 삶의 지혜를 가르치는 책인데 성경에서 욥기, 전도서, 아가서, 그리고 시편의 일부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신령한 것으로부터 자연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많은 지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잠언은 성공을 위한 처세술을 다룬 책이 아닙니다. 잠언 1장 7절에 의하면 지혜의 근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잠언에 나오는 삶에 관한 크고 작은 교훈들은 한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할 때 어떤 삶을 살게 되는지를 그림처럼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잠언의 지혜는 하나님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회복되는 인간 세상의 질서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지혜는 참된 인생을 살아가는 기술인데 이는 하나님을 믿고 경외하는 신앙을 기초로 한 것입니다.
II. 너의 포도원을 보라
저는 오늘 읽은 다섯 절의 본문에서 '너의 포도원을 보라'는 주제를 말하고자 합니다. 지혜자는 지나가다가 황폐하게 된 밭과 포도원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얻은 교훈에서 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A. 밭과 포도원을 보라
제일 먼저 '밭과 포도원을 보라'는 것입니다. 지혜자는 우연히 지나가다가 발견한 밭과 포도원에 관한 이야기로 이에 대한 교훈을 시작합니다. 한 나라의 왕이었으니 어느 길을 지나면서 그 밭과 포도원의 주인이 누구인지 이름을 알았을 수도 있지만 아마 몰랐을 가능성이 훨씬 더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밭과 포도원의 상태를 보면서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3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게으른 자의 밭과 지혜 없는 자의 포도원을 지나며 본즉"이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은 전형적인 병행법입니다. 즉, 게으른 자와 지혜 없는 자가 짝을 이루고 밭과 포도원이 짝을 이루는 것입니다. 지혜의 문학에서 자주 사용되는 문학의 형태입니다. 게으른 자와 지혜 없는 자, 밭과 포도원이 짝을 이루고 있으니 서로 대조해 보라는 것입니다.
부동산으로서의 밭과 포도원은 언제나 거기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누가 어떻게 돌보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밭과 포도원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태어날 때 입에 물고 나온 수저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내가 어마어마한 부자 아버지, 그 아버지보다 열 배쯤 갑부인 할아버지 밑에서 태어나는 것은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최근 신문 기사를 보면 성공한 사람들 중 부모의 도움으로 성공한 자녀들이 22%가 넘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힘으로 성공한 사람은 6%밖에 안된다고 통계가 나왔습니다. 이것은 전형적인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은 수저조차 물지 못하고 태어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우리들이 갖게 된 가문, 출신 옛날로 말하자면 신분 같은 것들은 우리의 힘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밭과 포도원은 믿고 노력함으로써 바꿀 수 있는 어떤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혜자의 놀라운 통찰은 게으른 자와 지혜 없는 자가 동일인이라는 것입니다. '게으른 자는 지혜 없는 자이고, 지혜 없는 자는 게으른 자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단지 농사짓는 지혜만 뜻하지 않습니다. 결국 지혜가 없다는 것은 인생 전체의 목적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게으름은 결국 삶의 목표가 없는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하고자 하는 목표가 있는 사람은 게으를 수가 없습니다.
결국 한 농부의 밭과 포도원의 상태는 그 사람 됨됨이가 어떻고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한 해 농사를 망쳤습니다. 밭은 가시덤불로 뒤덮였고, 포도원은 풀로 뒤덮여 엉망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다가오는 한 해를 굶주림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게으름이 무엇입니까? 국어사전을 찾아 보면 행동이 느리고 움직이거나 일하기를 싫어하는 태도나 버릇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말에서 '~쟁이'가 들어가면 '즐겨서 기술이 있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기술자를 '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뱅이'는 절대 고칠 수 없는 변경 불가능한 상태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앉아 있는 사람이 다시 일어날 가능성이 없는 것을 '앉은뱅이'라고 합니다. '거짓말뱅이'라고 말하지 않지만, '거짓말쟁이'라고 말합니다. 거짓말 하는 사람은 언젠가는 고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게으름쟁이'라는 말은 쓰지 않습니다. '게으름뱅이'라고 말합니다. 옛 사람들이 보기에도 게으른 것은 절대 고칠 수 없는 고질적인 병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게으르게 산다는 것은 결국 삶의 목표가 없다는 것이고 행동이 느리고 움직이거나 일하기 싫어하는 것입니다. 목표가 분명하지 않고 혹시 있다 하더라도 마음에 열정으로 불 붙이지 못하고, 목표만 있을 뿐 사람을 움직이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움직이는 것이 힘들고 귀찮기 때문입니다. 일하는 것이 편하게 노는 것보다 힘들기 때문에 안 하는 것이기에 결국 게으름의 뿌리는 빗나간 자기사랑입니다. 게으름을 부리는 방식으로 자기를 사랑하면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나중에는 더 많은 고통을 겪어야 하기 때문에 올바른 자기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생활이 게으른 사람은 정신이 싫증으로 가득 찬 사람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모든 것에 이렇게 싫증이 가득 차 있을까요? 아닙니다. '얘야! 일어나거라. 해가 중천이다.' 깨어있으면서도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눈뜨자마자 스마트폰을 손에 들었습니다. 온갖 SNS를 들여다보고 게임을 하기 시작합니다. '밥 식는다 빨리와서 먹어라.', '잠깐만요.', 안 일어납니다. '빨리 와. 그릇 치우고 나도 일 나가야 된다.', '그냥 덮어놓고 나가. 내가 알아서 먹을게.' 이렇게 게으릅니다. 그런데 한참 게임을 해서 큰 점수를 따기 직전인데 핸드폰 화면이 나가버렸습니다. 지금껏 게을렀던 아이는 어느 순간 용수철처럼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세수도 하지 않은 채 AS센터로 달려갑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고 부지런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부지런하다', '게으르다' 라는 것은 올바른 목표인가 그렇지 않은 목표인가와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가장 부지런하게 사는 사람이 하나님에게는 심하게 게으름 사람일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부지런해야 하는지 목표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게으름을 찬양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빗나간 자기사랑을 지지하며 자기만을 위한 인생이니 너무 애써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잘못하면 부지런하게 살게 되고 그러다 보면 결국 손해 보는 것은 너 뿐이다.'라고 충고합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귀담아 들을 것도 있습니다. 의미도 모른 채 종처럼 일만 하는 것이 자기 인생을 사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던 길을 멈추고 생각해야 할 필요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에 의해 이끌리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열심히 살지 말아라. 한번 밖에 없는 인생이다. 애쓰지 말고 게으르게 살아도 괜찮아.'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대부분 경쟁사회에서 이겨서 가진 것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살아도 괜찮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처럼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을 그렇게 살면 지금보다도 훨씬 고달픈 삶이 생활적으로 영적으로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습니다.
토크쇼에서 인기 연예인에게 '후배에게 해주고 싶은 충고가 있느냐'고 물어봤습니다. '얘들아! 적금은 긴 거 들지마.' 왜 그렇습니까? 언제 인기가 떨어질 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물이 항상 들어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물이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합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열심히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살도록 부름 받은 그분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어떻게 게으르게 살 수 있겠습니까? 정말 그것이 가능합니까? 한 사람 실의에 빠져 있다가 연애를 시작해도 부지런해지는데 전능하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어떻게 게으르게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있다면 그것은 사랑도 아닙니다. 그런 사랑은 개나 주라고 하십시오.
성경에서 지혜와 더불어 단짝을 이루는 단어가 있는데 그것은 충성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4장 4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충성스러운 사람과 지혜 있는 사람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충성스러운 사람은 반드시 지혜 있는 사람이 되고, 하나님을 향하여 지혜 있는 사람은 반드시 충성스럽게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미련한 자는 안일한 삶을 삽니다. 잠든 영혼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기 같은 사람을 이미 패배자로 만들고,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이 꼬드기며 말합니다. '너무 열심히 살지 마. 부지런하게 살다가 후회한다. 한번 밖에 없는 인생인데 왜 그렇게 열심히 사니. 너 자신을 즐기고 여유 있게 살아라.' 그러나 안일한 삶을 사는 사람은 잠든 영혼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잠언 1장 3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이며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키려니와” 신약성경에서는 '일락(逸樂)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니라'고 말합니다.
또한 게으른 자는 자기를 지혜롭게 바꾸어 줄 수 있는 훈계와 교훈을 멸시합니다. 그래서 잠언 1장 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고 말합니다. 따라서 게으름은 그냥 열심히 살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조금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어느 날 아침 식사를 하려는데 갑자기 목에서 피가 콸콸 나온다면 여러분들은 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양치질을 하고 와서 다시 밥을 먹겠습니까? 식사를 다시 시작하는데 국 그릇을 붉게 물들일 정도로 피가 쏟아져 나온다면 여러분들은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양치질을 하고 와서 다시 하던 일을 계속 하겠읍니까? 아마 숟가락을 집어 던지고 응급실로 뛰게 될 것입니다.
한 인간이 게으르게 산다는 것은 영혼과 마음이 질병 상태에 있다는 증후군일 것입니다. 영혼이 목표가 없고 마음이 병들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경쟁에서 이겨서 상당한 재산이 있고 사회적인 지위도 견고하고 경쟁력도 있는 사람이 지금껏 열심히 살아서 승리했고 또 부모 도움으로 많이 노력하지 않아도 앞으로도 이길 위치에 있습니다. 100m 달리기를 우리는 0m에서 시작했는데 그 사람은 70m에서 스타트를 합니다. 그 사람은 우리보다 3배쯤 놀면서 가도 우리보다 먼저 도착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사는 것은 결국 현재를 불행하게 할 뿐만 아니라 미래도 불행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게으름은 그의 정신과 마음이 심각하게 병들어 가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의 밭을 보십시오. 여러분들의 포도원을 보십시오. 우리는 그 밭과 포도원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은 나 스스로 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선물'의 영어 단어가 present인데, 현재(現在)와 같은 단어입니다. 그래서 현재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어제 죽은 사람은 받을 수 없는 선물, 태어나지 않은 사람은 누릴 수 없는 선물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 선물을 가지고 우리 인생의 밭과 포도원을 경작하는 것이 우리의 보람입니다. 밭과 포도원이 많은 수확과 결실을 거둘 시기가 가까운 그 때에 아름다운 결실로 가득 차서 추수 하기 전까지 이틀만 더 남국의 햇빛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농사 지은 것을 바라보는 농부의 마음은 얼마나 뿌듯하겠으며 수확이 끝난 후 주인은 그에 합당한 많은 수확을 이 소작인 농부가 누리도록 만들어 줄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바로 그 밭과 포도원입니다.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을 어떻게 살고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어제 죽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싶었지만 살지 못한 것이 오늘입니다. 오늘 죽는 사람들은 내일이 없습니다. 결국 내일은 오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날이 아니고, 어제는 지나갔으니 우리의 날이 아니며, 오늘만이 우리의 날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은혜를 받은 사람들, 그래서 자신이 숨 쉬고 살아가는 인생의 목적이 분명한 사람들은 그 목적을 향해 다가가게 만드는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일을 위해 최선을 다해서 부지런히 사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쉼도 마지막에는 목표를 위한 것이니 그 목표에 이바지 하게 끔 때로는 쉬기도 하고, 휴식을 취하며 재충전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오늘 시리즈의 설교를 통해서 여러분들 인생의 밭과 포도원을 다시 보고 새로운 결심을 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교훈을 얻으라
마지막 두 번째는 '교훈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농부가 게으르게 지나는 동안 그의 밭과 포도원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31절이 말합니다. “가시덤불이 그 전부에 퍼졌으며 그 지면이 거친 풀로 덮였고 돌담이 무너져 있기로”라고 하였습니다. 가시덤불은 아무 쓸모 없는 식물이기는 하지만 어마어마한 양분을 땅에서 빨아 먹습니다. 빈틈없이 뒤덮인 풀은 엄청난 지력(地力)을 빨아 먹으며 자신의 생명을 이어 갑니다. 일 년 동안 이렇게 밭을 내버려두면 싹 걷어내도 내년에 짓는 농사가 잘 될 보장이 없습니다. 땅의 영양분을 그만큼 쓸데없는 것에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밭과 포도원 가장자리 주위를 돌담으로 쌓아 놓는 것은 사람들이 침범하지 못하게 하고 또 들짐승이 함부로 드나들면서 포도원을 상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포도가 여우의 주식은 아닙니다. 여우가 즐겨 먹는 주식은 설치류과의 작은 짐승들입니다. 이솝 우화에 여우와 신포도 이야기가 그러나 여우가 포도를 주식으로 삼는다는 이야기는 여러분도 들어보지 못했을겁니다.
무너진 돌담은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된 것입니까? 돌멩이들을 모아서 쌓아 놓은 것이어서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시간이 지나가고 지면이 움직이기라도 하면 무너지게 마련입니다. 흙과 돌멩이로 쌓은 곳이니 당연히 무너집니다. 그러면 일할 때마다 농부는 무너진 것을 다시 쌓고 또다시 쌓으면서 보수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울타리가 쳐져 있을 때에 안전하게 그 포도원이 보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돌담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여우들이 드나들면서 포도를 먹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설치류과의 동물들을 잡아먹고 돌아다니느라고 포도밭을 모든 망쳐 놓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아가서 2장 15절에서 우리의 이야기를 입증하듯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라” 포도의 꽃이 피면 잠시 후 열매를 맺게 되고, 무럭무럭 자라서 값진 열매를 내놓을 텐데 포도 넝쿨을 모두 헤치면서 여우들이 길길이 뛰고 돌아다니면서 농사를 망가뜨려 버리는 것입니다. 무방비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게으른 자는 끊임없이 남의 탓만 합니다. 자신의 현실을 도무지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결국 살기는 사는데 자기 인생도 아니고 남이 인생도 아닌 이상한 인생을 삽니다. 자기가 감당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지 못합니다. 낙심과 원망 속에서 살아갑니다. 때로는 대상도 분명하지 않은 세상을 향한 앙심까지 품게 됩니다. 급기야 하나님까지 원망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며 끊임없이 열등감에 빠지거나 혹은 요행을 꿈꿉니다. 일시에 높은 지위에 오르기를 꿈꾸거나 자신의 능력에도 어울리지 않은 영화를 꿈꾸거나 큰돈을 벌 생각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대부분의 게으름 사람들에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 때문에 그는 더 비참하고 불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언제나 여러분들에게 설교하면서 미국의 슈퍼 몰 이야기를 해드렸습니다. 역대의 몇 백억 몇 천억 당첨된 사람들의 인생이 한결같이 불행해졌다는 이야기, 로또 역시 거액의 당첨자들을 조사해보니까 거의 똑같이 불행해졌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결국 한 사람을 불행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은 소유의 많고 적음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자신의 인생의 의미를 물으며 보람을 느끼며 선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이런 행복이 주어지는 것이고 그 행복을 어떻게 찾는 것인지 아는 것이 지혜인데 그 지혜의 핵심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허황된 일을 꿈꾸면서 게으른 삶을 살며 한번에 요행을 바라는 사람을 위한 올무는 인생 길 도처에 깔려 있습니다. 그런 올무에 걸린다면 그의 나중 상황은 지금 상황보다 훨씬 나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았지만 낚시질을 잘 못했습니다. 어렸을 때 친구들과 낚싯대를 매고 몇 번 강을 가본 적이 있는데 친구들은 잘 낚아도 나는 항상 대나무 낚싯대만 그냥 들고 돌아오던 기억밖에는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 목사님이 송어 낚시에 달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면서 소원을 풀어 주겠다고 해서 호숫가를 돌면서 세 번의 송어를 낚는 경험을 하게 해주었습니다. 작은 것은 손바닥만 했고 큰 것은 거의 발 팔뚝만 한 것을 잡았습니다. 모두 다 풀어 주었지만 정말 짜릿한 순간이었습니다. 낚시의 고수인 목사님이 저한테 얘기했습니다. 낚시질을 하다 보면 세 종류의 물고기가 있습니다. 첫 번째 미끼를 던지면 가까이 오다가 딴 데로 가서 다시 오지 않는 물고기는 절대 낚지 못합니다. 두 번째 빙글빙글 도는 물고기 오래 참으면 반드시 낚입니다. 세 번째 아무 생각 없이 달려와서 덥석 무는 물고기, 그런 물고기 세 마리가 제 낚시를 물었던 것 같습니다. 게으름 사람은 그 세 번째 속한 것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사람은 요행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럴 수 없는 사람은 요행이 요행을 바라고 행운을 위장하고 찾아왔을 때 덥석 물어 버리는 것입니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습니까? 손쉽게 무엇을 단박에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일단 의심하십시오. 사실이 아닙니다. 그리고 저는 종종 묻습니다. "내가 왜 그것을 받아야 합니까?" 나는 그것 없이도 살 수 있습니다. 내가 노력해서 살아야지 왜 요행수를 바랍니까? 심지어는 그런 요행수가 있는 사람들을 보고 부러워하고 시기하는 마음까지 갖는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인생에서 건강한 정신을 그만큼 상실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이외의 모든 공짜를 미워하십시오. '필요 없다, 난 할 수 있거든 댓가를 치르고 살겠노라.'고 주체적인 생각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단지 세상살이에 열심과 태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한 사람이 게으르다고 하는 것은 그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확정되지 않은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당신의 인생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살다가 죽으시겠습니까? 이것이 확고하면 수많은 작은 목표들이 생겨납니다. 지금처럼 살다가 죽는다면 마지막 순간에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저 그래도 열심히 살았죠. 이렇게 살 수 있는 열심을 주셔서 너무 감사했습니다. 잘 살다가 주님 품으로 갑니다. 아멘'
젊음은 지나고 늙음이 찾아옵니다. 젊을 때는 즐기기 위해 게으르고 싶어합니다. 늙고 나면 게으름도 그 사람을 버립니다. 왜냐하면 즐길 낙이 없습니다. 게을러봐야 무릎팍을 두드리면서 통증을 참는 일이나 부지런히 병원 문턱을 드나드는 것 이외에 할 일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토마스 왓슨이라는 청교도는 '죄가 죄인을 버린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늙음이 지나면 죽음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젊은 자는 늙는다는 것을 알고, 늙은 자는 죽는다는 것을 알고, 죽는 자는 죽음 이후의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이제 농사는 망쳤습니다. 곧 겨울이 옵니다. 가족과 함께 무엇을 먹고 살겠습니까? 농부가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자니 힘이 들고 구걸을 하자니 창피하다고 합니다. 어떻게 살아갈까요? 우리의 영적 생활에 이것을 적용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의 경건 생활의 밭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의 생활의 밭은 어떻습니까? 삶의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까? 그래서 오늘을 살아갈 목표가 있습니까? 나는 비록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정도로 뛰어나지도 부자도 아니고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오늘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삶이 내 인생 전체의 목적을 이루는데 이바지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보람을 느끼며 살고 있습니까? 더욱이 부르심을 받아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 섬김의 밭은 어떠합니까? 여러분들이 돌보고 있는 가족들과 구역 식구들 그리고 사랑하는 일가 친척들과 형제들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돌보라고 맡겨주신 양떼들은 어떠한 처지에 있습니까? 그것을 밭과 포도원이라고 생각할 때 그 밭과 포도원은 어떤 상태 입니까? 32절에서 지혜자는 말합니다. “내가 보고 생각이 깊었고 내가 보고 훈계를 받았노라”
지혜자는 게으른 자의 밭과 포도원을 보며 생각에 잠겼습니다.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지만 다시 한번 큰 교훈을 얻었습니다. 게으름이 인생의 모든 좋은 것을 파괴하여 황폐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본 것입니다.
저는 사실 성경을 읽으면서도 이게 무슨 말인지 잘 몰랐습니다. 농사를 지어 본 적도 없고 시골에 살았다고는 하지만 잠깐 살았고 너무 어린 나이어서 이런 것에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20여년 전에 기도원에 갔었습니다. 혼자 조용히 기도하기 위해서 갔는데 기도원 집사님이 '목사님! 이거 한번 들어보실래요' 하면서 바구니에 뭔가를 담아 가지고 왔는데 차마 먹을 수 없는 사과였습니다. 크기도 조그맣고 온갖 벌레가 먹었습니다. '이게 뭡니까?' 했더니 앞에 땅 주인이 오랫동안 사과 농사를 짓다가 그냥 버려두고 가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집사님이 기도원 일을 하느라 돌볼 수가 없어서 한 3년째 그냥 버려뒀더니 과실이 엉망이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먹어보니까 맛이 없었습니다. 저녁을 먹고 내려가서 그 버려진 사과밭을 가봤습니다. 그랬더니 우리가 보는 사과밭과 정말 달랐습니다. 공포 영화에 나오는 사과밭 같았습니다. 사과나무가 있긴 한데 이파리는 다 벌레가 먹고 나무의 색깔도 우중충하고 그리고 열매도 많이 달리지 않았는데 달린 열매는 그나마 모두 벌레가 먹고 병들고 크기가 아주 작았습니다. 낙과가 바닥에 구르고 있는데 줍고 싶은 과일이 없었습니다. 그때 저는 이 지혜자가 게으른 자의 밭과 포도원을 지나면서 교훈을 받았던 것처럼 깨달았습니다. 아 그렇구나 사과밭을 일궈서 그 사과를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지만 그러나 돌보지 않으면 이 모양이 되는거구나' 그러면서 저는 인생에 있어서 ‘게으른 자의 삶이 결국은 영적으로 보면 이와 같겠구나’하는 큰 교훈을 얻었습니다. 이미 알고 있었겠지만 큰 교훈을 얻었습니다. 게으름은 삶의 모든 좋은 것을 파괴하고 황폐하게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결국 영적으로 육적으로 극심한 가난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자는 33절과 3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누워 있자 하니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고 말합니다. 좀 더 자는 것보다 빨리 일어나서 일하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 본성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손을 모으고 좀더 편안히 누워 있는 것은 고상하게 땀을 흘리며 이른 아침부터 밭을 매는 것보다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 결과는 두렵습니다. 빈궁이 강도같이 옵니다. 강도를 만날 것이라고 일정표를 가지고 강도를 만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급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치고, 있는 것까지 빼앗아서 가는 것이 강도이니 그렇게 빈궁이 몰려온다는 것입니다. 육신적인 빈궁은 물론이고 영적인 빈궁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군사들이 밀려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통보를 하고 몰려오는 적군은 없습니다. 전혀 오리라고 예상하지 않은 시간에 벌떼 같은 군사들이 일어나서 말발굽 한 번에 짓밟아 버리고자 산하를 뒤덮으며 밀려옵니다. 뉘라서 감히 이런 기습을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철퇴로 뒤통수를 내려치는 것같이 영적인 궁핍과 육적인 빈궁이 강도와 같이 군사와 같이 몰려온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을 패배자로 살지 마십시오. 인생을 낙오자로 살지 마십시오. 수천 명에 한 명이 도달할 어마어마하고 예외적인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는 자신의 신앙의 양심에 비춰 볼 때 게으름뱅이로 살면서 인생을 허송세월하지 않았다는 양심의 그런 자부심은 가지고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죽는 그 날에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 주신 그 좋은 인생의 날들을 허송하고 허송하였으니 이제 나를 위하여 죽은 후에 무슨 위로가 있으리오 슬피 울며 음부로 내려가는 것과 같구나' 탄식하는 사람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교훈을 얻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III. 적용과 결론
실패한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 (2017.08.06. 주일오전1)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게으른 사람에게 쾌락은 있을지 모르지만 보람은 없습니다. 나태를 벗 삼아 영혼의 밭을 가꾸지 않은 사람에게 무슨 경건의 열매가 있겠습니까? 경건한 삶의 열매를 거두며 사는 기쁨을 모르는 사람에게 무슨 풍성한 신앙생활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살아 본들 무슨 인생의 변화를 도모할 수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변화를 꿈꾸십시오. 하나님은 살고자 하는 자에게 살아갈 힘을 주십니다. 믿음은 바로 그 하나님이 나를 돕고 있음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게으름에서 벗어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게으름을 벗어나라2 (2020.10.25._주일오전)
2. 게으름의 두 친구
“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 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도느니라”(잠 26:13-14)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잠언 26장은 미련한 자와 게으른 자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게으름이 육체적인 행동과 관련이 있다면 미련한 것은 그의 정신의 상태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미련하다는 것은 지혜가 없거나 부족함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II. 게으름의 두 친구
오늘 본문에는 게으름이 혼자 다니지 않고 친구를 데리고 다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게으름의 두 친구입니다. 그것은 게으른 자의 삶의 방식이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것인데 게으름을 벗어나지 않는 한 이 친구와 헤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A. 핑계
첫 번째는 핑계입니다. 핑계가 무엇입니까? 내키지 않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 다른 사실을 내세우는 것이 핑계입니다. 그래서 본문 1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고 말하였습니다. 게으름의 첫 번째 친구입니다. 게으른 자는 끝없이 자기가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핑곗거리를 찾으면서 게으름을 합리화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새로운 깨달음이라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구태의연하게 옛 삶을 반복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핑계를 대는 이유는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회피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부지런함은 목표를 가지고 있지만 게으름에는 목표가 없습니다. 그냥 편하게 있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서 애쓰는 수고를 굳이 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게으른 사람에게 해야 할 어떤 의무를 실행하는 것은 보통 사람보다 훨씬 큰 고통을 가져다줍니다. 양심은 의무를 이행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정신은 싫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게으름이 몸에 배어서 도저히 그것을 행할 의욕이 생기지 않습니다. 의무를 행하라는 양심과 하기 싫은 마음 사이에서 모순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이 모순은 정당한 가책을 느끼게 해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게으른 사람은 자신이 게으른 것을 정당화할 구실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할 수 없는 사정이 있다고 변명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심을 잠재우는 것입니다. 이때 편안하게 게을러질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다니는 길에 어떻게 사자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설령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얼마나 적은 확률입니까? 수십 년 만에 한 번 일어날까 말까 한 사건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핑곗거리를 찾으며 자기의 할 일을 안 하려고 드는 것입니다. 맨손으로 절벽을 오르는 암벽 등반가들이 있습니다. 누가 그 일을 시킨 것도 아니고 어마어마한 보상이 기다리는 것도 아닙니다. 얇은 옷 하나와 성능 좋은 운동화 그리고 하얗게 회칠을 한 손으로만 절벽을 오르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이 떨어져 죽을 확률은 우리가 길거리에서 사자를 만날 확률보다 어마어마하게 높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사람은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좋아하니까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게으른 사람도 자기가 좋아하는 일은 위험에 빠질 확률이 높은데도 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거리에 사자가 있다, 길에 사자가 있기 때문에 나갈 수가 없다'라고 하는 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게으른 사람은 보통 사람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치에 닿지도 않는 구실을 끊임없이 만들어 냅니다. 자기의 마땅한 의무를 회피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 결과는 육적인 가난과 영적인 궁핍입니다. 결국 안 좋은 결과가 온다는 것을 누구나 뻔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끊임없는 핑계를 대면서 게으름을 핍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부지런히 사는 것이 힘들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그다지 바라지 않는 일을 위해서 불편을 겪거나 수고하기 싫기 때문입니다.
거짓말을 능숙하게 잘하고 버릇이 된 사람을 가리켜서 거짓말쟁이라고 합니다. 우리 말에서 '쟁이'의 뜻은 반복해서 여러 번 실행을 했기 때문에 기술이 늘어나고 몸에 배인 것을 뜻할 때 사용합니다. 그런데 '쟁이'는 변화가 가능합니다. 즉, 거짓말이 능숙하게 버릇이 된 사람도 거짓말을 그만하면 거짓말쟁이에서 벗어나서 보통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게으름뱅이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뱅이'를 붙일 때에는 '벗어나는 게 불가능하다' 라는 뜻으로 쓰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앉은뱅이는 다리가 붙어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가 일어날 확률은 거의 없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한평생을 앉아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조들이 게으름에 대해서 보았던 인간 성품입니다. 그래서 못 벗어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근본적으로 게으른 성품이 변화되지 않으면 게으름은 운명과 같이 일생 동안 그를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 사람의 인생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게으른 사람에게 미래가 있습니까? 게으른 사람에게 과연 감격할만한 어제는 있겠습니까? 게으른 사람에게 정체성이 없는데 오늘이라는 것이 과연 있을 수 있겠습니까? 없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선하고 의미 있는 일을 실행하기 위한 열심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뚜렷한 표지(標識)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이것은 감정입니다. 인격의 움직임입니다. 그래서 혼자 있을 때는 몰랐는데 사랑에 빠지고 나면 자꾸 함께 무엇인가 하고 싶은 것입니다. 함께 어딘가를 가고, 함께 먹고 싶고, 함께 구경을 하고 싶고, 함께 입어보고 싶고, 함께 일하고, 놀고 싶은 것입니다. 이런 욕구가 안 생기면 그것은 사랑에 빠진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랑은 사람을 부지런하게 만듭니다. 사랑하면 끊임없이 사랑하는 자를 위해 무엇인가 행할 일들이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또 그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의 기쁨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서로를 기쁘게 하려는 열의가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 게으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함께 어울리는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의 수준을 알 수 있습니다. 게으름에 절친이 핑계입니다. 둘이 꼭 붙어서 다닙니다. 게으름은 핑계 때문에 게으름과 결별하지 못하고, 핑계는 게으름을 정당화시켜주기 때문에 게으름 곁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풍덩', 한 사람이 물에 빠졌습니다. 저수지에 빠졌는데 점점 저수지 한 가운데로 들어갑니다. 나오려고 몸부림을 치지만 그 사람의 몸무게와 수영 실력으로는 도저히 혼자 힘을 빠져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때 옆에 구명정이 비치 되어 있습니다. 노란 줄 달린 빨간 구명정을 힘껏 그 사람 곁에 던지면 그것을 끌어안고 부력을 이용해서 잡아 당겨주는 줄을 따라서 저수지 밖으로 나오면 구조 활동이 끝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물에 빠졌습니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점점 물속으로 빠져 들어가는데 배를 타고 한 사람이 나타납니다. 구조해주기 위해 오는 줄 알고 손을 흔들었는데 가까이 와서 목에 큰 돌멩이를 하나 걸어 놓고 냅다 도망을 갑니다. 혼자 헤엄쳐도 나올 수 없는 사람의 목에 캐리어만한 돌멩이를 줄로 매달았습니다. 그 사람은 시체가 될 때까지 절대 거기서 못나옵니다. 핑계는 게으름 때문에 물에 빠지는 사람의 목에 매달아 놓은 큰 돌멩이입니다. 이 속에서 단순한 의지가 아니라 지성까지 속이면서 빛도 들어오지 않는 깊은 물속과 같은 절망감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어제까지 게으르게 살았어도 오늘은 그렇게 살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어제까지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오늘부터 더욱더 시간을 아껴 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핑계와 결별 하십시오. 게으름의 마지막 끝은 인생의 패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산다는 것과 게으르게 산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부지런하게 사는 사람만이 여유를 가질 수 있고 바람직한 목표를 가진 사람만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위도식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위도식하면 제일 큰 손해를 보는 사람은 여러분들의 가족이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무위도식하고 살 수 있도록 게으름에 길들여지는 여러분들의 영혼이 가장 불쌍한 것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변화된 삶의 목표가 있습니다. 그 목표를 따라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때 그는 인생의 보람을 찾을 수 있을 것이며 그리고 내일에 대해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핑계와 결별하고 게으름을 버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나태
마지막 두 번째는 나태입니다. 나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행동이나 성격이 느리고 게으른 것입니다. 잠언 26장 1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 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도느니라”고 했습니다. '돌쩌귀'라는 말은 지금 거의 쓰지 않는 말입니다. 영어로는 '힌지(hinge)'라고 하는 것입니다. 문을 보시면 문짝이 움직이게 되어 있고 양쪽 끝이 위아래로 고정되어 있습니다. 고정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움직이며 돌 수 있도록 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것을 돌쩌귀라고 합니다. 예전에는 문짝을 만들 때 문짝 한쪽 끝 위아래를 길게 튀어 나오게 만들고 그것을 쇠로 쌌습니다. 왜냐하면 나무는 너무나 쉽게 닳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에 홈에 끼우고, 아래의 홈은 오래 써도 손상이 되지 않게 돌멩이로 홈을 파서 그것을 끼우는 구멍으로 삼았습니다. 문짝이 문짝으로 있는 동안에는 돌쩌귀를 떠날 수가 없습니다 . 그것을 축으로 문이 열리기도 하고 닫히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문은 거기에 매달려 있습니다. 게으른 사람은 침대에 매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기독교 역사에 일곱 대죄(septum mortalia)가 있습니다. 모든 죄 중에 가장 근본이 되고 웬만해서는 사람들이 벗어나지 못하는 커다란 근원적인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소위 세븐 신즈(seven sins)라고 하는 그것입니다. 놀랍게도 여기에는 살인은 안 들어갑니다. 그런데 나태는 들어갑니다. 목록을 보면 교만, 인색, 시기, 분노, 음욕, 탐욕, 나태입니다. 살인이 끔찍한 죄이지만 결국 분노의 자식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 자식들이 수없이 많은 자식을 낳고 새끼를 치는 것이 오늘날 종류를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죄와 악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결국 나태는 죄인지도 모르게 우리를 파고 들어와서 운명처럼 죄에 가두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누군가에게 폭행을 했다면 사과도 하고 회개도 했을 것입니다. 누군가의 돈을 훔쳤다면 혹시 고백은 못했더라도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중에 게으르게 산 것에 대해서 회개한 분이 몇 분이나 계십니까?
옛날 영화 빠삐용에 나오던 대사 하나를 기억합니다. '종신형에 처한다', 죄목은 '너는 네 인생을 낭비했다'라는 것입니다. 나태는 아주 은밀하게 우리 속을 파고 들어와서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을 갉아 먹는 것입니다. 나태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무책임하게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책임질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게으름의 한쪽 팔짱은 핑계가 끼고, 다른 한쪽 팔짱은 나태라는 친구가 끼고 서로 공존하며 살기 때문에 나태하게 사는 사람들에게는 핑곗거리가 아주 많은 것입니다. 게으른 자가 침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모든 가구들 중 에너지가 가장 적게 들어가는 자세를 취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침상이기 때문입니다. 뛰어가야 하는 사람은 걸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고, 걷는 사람은 앉기를 원합니다. 앉은 사람은 기대고 싶어하고 기댄 사람은 보다 완만한 경사로 더 많이 기대기를 원하고 더 많이 기댄 사람은 완전히 눕기를 원합니다. 누운 사람은 잠들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모든 본성 속에 흐르고 있는 자기사랑의 경향성입니다.
게으른 자는 잠자기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가난과 결핍입니다. 혹시 부모로부터 큰 유산을 물려받았다 하더라도 게으른 사람은 이미 정신 썩었기 때문에 결코 그 유산을 지켜 낼 정도로 지혜롭고 부지런할 수가 없습니다. 육적생활과 영적생활이 모두 가난하고 궁핍하게 되는 것입니다. 잠언 24장 33절과 34절에서 지혜자는 말합니다. “네가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누워 있자 하니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문짝처럼 돌고 도는 생활에 무슨 변화가 있겠습니까?
당장 수고하지 않고 편하게 지내는 것인데 결국 편한 것이 편한 것이 아닌 이유는 마지막에 나태한 삶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할 날이 오기 때문입니다. 매일 매일 나태하게 사는 것은 매일매일 어음에 싸인을 하는 것입니다. 어음으로 편하게 지내지만 젊은 날이 지나고 나면 그 어음은 한꺼번에 자신에게 되돌아옵니다. 가혹한 추심자(推尋者)는 눈물도 피도 없습니다. 결국은 삶이 거덜 나는 것입니다. 음식점에서 50대로 보이는 부인 서너 명이 잡담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말을 합니다. '야! 너 열심히 돈 모아 알뜰하게 살아. 잘못하면 폐지 줍는다.' 그것이 보통 사람들도 다 생각하는 상식입니다. 일할 수 있는 날, 열심히 활동할 수 있는 날이 언제까지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으로 연약해서 그럴 수 없는 때가 오기 때문에 '젊은 시절에 고생은 사서도 한다'라는 속담이 나온 것입니다. 더욱이 나태한 사람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할 때 그를 쓰시는 주님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그런 사람에게 책임을 맡긴 상급자의 마음은 어떨지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부모님으로부터 유산은 물려받지 못했지만 튼튼한 치아를 물려받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섯, 일곱 살 때 충치로 병원을 가고 45년만에 치과에 갔습니다. 치과의사가 그 말을 듣더니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하면 우리는 굶어 죽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종종 치과에 가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너무 이가 시렸습니다. 과일을 좋아하는데 과일을 씹으면 온 몸이 자지러질 것처럼 전기가 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병원에 갔더니 음식을 씹는 저작운동을 너무 강하게 해서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아교질이 닳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차갑거나 신 것이 닿으면 그것이 바로 신경으로 전달이 되면서 전기 오르는 것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할 수 없이 과일을 먹을 때는 썰어서 펄펄 끓는 물에 집어 넣고 따뜻하게 만들어서 먹어야 했습니다. 어금니가 심하게 손상된 사람의 입을 크게 벌리고, 상한 이빨에 여덟 배쯤 농축한 식초를 한 숟갈 부어 보십시오. 어떻게 되겠습니까? 번개 맞은 것처럼 온몸에 전율이 일어나고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을 맡기셨는데 게으른 사람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그런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이렇게 인생을 낭비하는 것을 보시는 주님의 마음이 어떠실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잠언 10장 2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게으른 자는 그 부리는 사람에게 마치 이에 식초 같고 눈에 연기 같으니라” 날이 너무 추워서 추위를 피해보려고 모닥불을 피웠는데 나무가 젖은 것 밖에 없습니다. 왜 바람은 자기쪽으로만 부는지 진한 연기가 눈을 파고 들어옵니다. 비비고 비벼서 눈물을 쏟아내도 또 다른 연기가 계속 자기의 눈을 맵게 하고 기침을 콜록거리게 합니다. 이것이 게으른 사람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충성된 사람은 추수하는 가을철에 얼음 냉수와 같다고 하신 것과 날카롭게 대조되는 대목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분의 원수였는데 용서해주셔서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구원은 거저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소명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따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게 하신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목표를 가지고 보람 있는 인생을 존귀하게 살도록 부르셨습니다. 그렇게 살 때 우리의 인생은 빛나게 되고 삶의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 더욱 하나님이 귀하게 쓰시는 사람들이 되어갑니다. 그러는 나태한 자는 끊임없이 부지런히 산 유능한 사람의 지시를 받는 아래 사람으로서만 살아가야 합니다. 잠언 12장 24절은 말합니다. “부지런한 자의 손은 사람을 다스리게 되어도 게으른 자는 부림을 받느니라"고 말합니다.
나태는 당장 편하지만 아무것도 가져다 준 것이 없습니다. 아니 극심한 가난과 궁핍을 가져다 줍니다. 육신적으로는 가난하게 되고 영적으로는 곤고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누리고 있는 좋은 것들 가운데 이전에 수고하지 않고 얻은 것이 얼마나 됩니까? 만약에 여러분들이 지금 애쓰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내일은 없습니다. 그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 삶의 모든 상황은 점점 더 나빠질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고 구속하신 목적이 과연 그런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까? 나태와 결별하고 게으름과 헤어지십시오.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여러분들의 삶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으로 삼으십시오. 여러분들의 삶이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삶이 되도록 힘쓰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참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도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이 게으르게 사셨습니까? 끊임없는 핑계속에서 나태하게 사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분은 일체의 부지런함과 열정으로 사셨습니다. 고단한 노역의 연대기를 쓰시며 사셨습니다. 30세가 갓 넘으신 그분을 사람들이 보고 50세 쯤 되었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렇게 분투하며 사셨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3장 14절은 예수님의 별명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는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라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무엇을 명령하시든지 "아멘" 하신 분이었고, 게으르지 않고 충성되게 사신 분이었으며 거짓을 말하지 않고 참된 진리로 사신 분이셨습니다.
한 번밖에 없는 인생입니다. 그리고 오늘이라는 날은 다시 오지 않는 날입니다. 핑계와 나태 속에 게으름으로 살아서 어떤 삶의 보람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거기서 찾을 수 있는 의미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영혼의 변화를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십시오. 그리고 일체의 부지런함과 성실함으로 보람 있는 인생을 사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티끌만큼이라도 이바지하는 사람으로 산다면 여러분들이 이 땅에 살아 있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인생을 지켜보시는 데서 보람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게으름을 벗어나라3 (2020.11.01._주일오전)
3. 게으름과 열정 없음
“게으른 자는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잠 26:15)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지난 시간에 저는 게으름에게 두 친구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핑계와 나태입니다. 게으른 자는 의무를 회피할 구실을 늘 찾습니다. 심령은 나태하게 되어 마땅히 해야 할 일에 대해 태만합니다. 그 속에서 많은 죄들이 융성하게 됩니다. 게으른 자에게 또 다른 특징 있으니 그것은 열정 없음입니다. 나태가 의지의 태만이라면 열정 없음은 정서의 태만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게으름과 열정 없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II. 게으름과 열정 없음
인생을 사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목표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목표가 있는 사람은 목표를 향한 열정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게으른 자는 이런 목표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열정이 거의 없거나 혹은 있어도 매우 미지근한 상태입니다. 열정이 무엇입니까? 열정은 어떤 일에 뜨거운 애정을 가지고 열중하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게으른 자는 결코 그런 마음을 가져보지 못합니다. 본문 1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고 말입니다. 배가 고파서 손을 음식이 담긴 그릇에 넣었습니다. 그것이 빵이었는지 고기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그것을 집었으나 들어서 입으로 올리기가 너무 힘들고 귀찮은 것입니다.
그러면 게으른 자에게는 열중하는 마음이 전혀 없겠습니까? 앞 절에 보면 게으른 자는 침상을 돌쩌기 삼아서 거기서 떨어지질 못하고 뱅글뱅글 돌며 침상에 늘 붙어서 구르지 않습니까? 결국 그것도 그 일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그것도 어떤 면에서는 그렇게 하고 싶은 열정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을 열정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열정은 도덕적이고 선한 일에 대한 뜨거운 마음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부도덕하고 악한 일을 저지를 때 그 일을 저지르고자 하는 열심을 열정이라고 부르지는 않는 것입니다.
A. 타락과 열정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저는 타락과 열정부터 먼저 생각해 보겠습니다. 맨 처음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열정이 있는 인간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이 열정 때문에 하나님께 순종하고 만물을 돌보도록 창조 되었습니다. 당연히 열정은 하나님을 사랑하는데서 온 뜨거운 마음이었습니다. 뜨거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고 자연 만물을 선의로 돌보아 점점 더 아름다운 세상으로 가꾸어 가도록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처음 조상 아담과 하와가 노동을 위해 부름을 받았습니다. 노동은 하나님의 저주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죄가 들어 오지 않았어도 인간은 노동을 하면서 살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만약에 그 땅에서 그들이 노동하지 않았더라면 굶주렸겠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낙원이 될 수 있겠습니까? 에덴일리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에게 노동은 단순히 먹고 사는 문제를 위한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타락한 이후에 들어오는 필요성입니다. 노동 자체가 하나님의 형벌이 아니라 노동에서 경험한 고통과 괴로움이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어려움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노동을 통해서 땅을 정복하고 그것을 잘 다스리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이 그렇게 할 마음을 인간에게 주시지 않았을리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맨 처음 창조되는 인간에게 하나님이 열정을 주신 것입니다.
창세기 2장 19절에 의하면 아담은 동물들의 특성을 파악해서 각각 이름을 붙였습니다. 아이를 가질 때 이름 하나 짓기 위해서 부모가 얼마나 많이 애를 씁니까? 그런데 그 많은 생물들의 이름을 모두 붙였습니다. 그것도 기가 막히게 동물의 특성을 파악해서 적합한 이름을 붙였던 것입니다. 노동 없이 이 일이 가능합니까? 하고자 하는 열정 없이 이 일이 가능합니까? 이름을 붙이니까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이 되었습니까? 동물들의 이름을 부르면 기억 속에서 동물들이 떠오르고, 이름을 부르면 사람 속에서 그 이미지가 그려졌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타락하기 전에도 창세기 2장 15절에는 하나님이 인간으로 하여금 땅을 경작하며 살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열정 없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하면서 살 수 있겠습니까?
인간은 창조될 때 갓난아이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어른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창조되자마자 백지상태가 아니었고 이미 인간으로 가져야 할 지식과 사랑을 가진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지식과 사랑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점점 더 증가하도록 창조되었던 것입니다. 그 사랑 안에서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에 이바지하고 자신도 이 세상을 정복하고 노동하면서 행복하게 살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사랑의 크기가 없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사랑의 방향이 바뀐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야 할 순결한 열정이 바뀌어서 자기를 사랑하는 타락한 정서가 되었던 것입니다. 무엇이 가치 있고 선한 것인지는 하나님이 결정하십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은 그것을 자기가 결정하겠다고 대들게 된 것입니다.
밤 바다에 배 한 척이 떠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밤하늘의 별입니다. 항해사는 그 별을 보고 분도기와 각도기, 자를 가지고 해로를 측정하면서 목적지를 향해서 갑니다. 남북을 향하여 가는 것은 자신이 결정하지만 별은 자기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타락하고 나서 인간은 북두칠성을 자기가 하늘에 그리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옳은 것을 알고 나는 그 길로 갈테니 말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는 것은 자유지만 그 방향이 올바를 길이 없는 것입니다. 미친듯이 애쓰고 노력하나 게으른 것보다도 더 못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게을러도 불행하고 지식이 없어서 부지런하게 살아도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열정은 있으나 그것은 자기 만족과 허무한 것을 좇는 열심으로 변질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타락한 정서로 변질되었습니다. 게으름은 이렇게 타락한 정서의 극치입니다. 폭행과 간음, 도둑질과 거짓말, 그리고 게으름 중에 어느 것이 더 큰 죄라고 생각하십니까? 결단코 근원적이라는 면에서 게으름이 훨씬 더 큰 죄입니다. 게으름이라는 모판에서 이런 더러운 죄들이 자라나는 것입니다. 게으름은 모판이고 그 모판에서 폭행과 간음, 도둑질과 거짓말 사기와 위선 등이 자라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난 자로서 인생의 의무에 대한 인식이 없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의 삶이 짐승과 다를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짐승은 자신의 삶의 의미를 탐색할 수 없습니다. 짐승은 만족할 수는 있으나 보람을 느낄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열정이 타락했습니다. 그 마음이 만든 것이 바로 이 세상의 타락상입니다. 자기 만족과 기쁨을 위해서 거룩하고 순결한 사랑은 버리고 타락한 정서를 마음에 품고 악을 행하게 되었습니다. 이 악은 끊임없는 가시덩굴과 엉겅퀴를 내고 이로 말미암아 자신의 삶을 사로잡아 더욱더 불행한 길로 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인간은 행복해지기를 원하면 원할수록 결국 하나님을 떠난 채 불행하게 살게 되었으니 그 속에 순결한 사랑은 사라지고 타락한 정서가 깃들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게으름은 타락한 정서에 굴복한 것이고 인간 자신의 본분을 저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한 권의 책이 깊은 수도원에서 발견되었고, 그 책은 역사를 뒤흔들어 놓게 됩니다. 발견될 당시 약 1500년 전에 쓰여진 한 권의 책이었습니다. 1417년을 르네상스의 시작으로 보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그 기준이 바로 이 한 권의 책이 발견된 년도였습니다. 폼포나치라는 사람에 의해서 발견되고 책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세상은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고요하던 세상에 이 책이 르네상스를 가져왔습니다. 물론 전혀 없는데에서 르네상스가 생겨난 것이 아니고 그 정신이 태동하던 때에 이 책 한 권의 발견이 불을 지펴 온 세계를 르네상스로 불태웠던 것입니다. 그 책의 저자는 '루크레티우스'이고, 주전 90년에서 50년 사이를 살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한 책을 썼는데 지금 읽어도 충격적입니다. 2100년 전에 철저한 유물론, 기계론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이 모든 우주를 해석했습니다. '신도 초자연적인 세계도 없고, 오직 세계의 근본은 물질이고, 물질 사이의 철저한 법칙에 의해서 우주는 움직이고, 인간도 물질의 일부로 있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 책을 여러 해 전에 모두 읽었습니다. 그 책 속에서 어느 한 구절이 저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소개하려고 합니다.
루크레티우스는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라는 책 181쪽에서 기계론적이고 유물론적 세계관을 피력한 다음 시선을 인간에게로 돌립니다. 그리고 이렇게 울부짖습니다. '아아, 인간의 비참한 정신이여, 눈멀어버린 지성이여! 얼마나 큰 인생의 어둠 속에서, 얼마나 큰 위험들이 너의 모든 가엾은 인생의 시간들을 지나가는가!' 모든 것을 물질로 기계로 설명할 수 있었지만 그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설명할 수는 없었습니다. 더욱이 그것을 피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는 더더욱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의 인생의 마지막입니다. 신자가 게으른 것은 이렇게 허무한 것들에 굴복한 타락한 정서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지런하게 사십니까? 도대체 무엇을 위한 부지런함입니까? 하나님을 위해서는 한없이 게으르고 자기를 위해서는 미친듯이 부지런한데 과연 이런 삶에 만족이 있습니까?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가장 부지런한 사람이 가장 게으른 사람만도 못할 수 있다는 사실을 한번 기억해 보시길 바랍니다. 성경이 칭찬하는 부지런한 삶은 단지 바쁜 삶이 아니라 목표가 선하고 올바른 데에 열정을 품은 삶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게으르고 자신을 위해 열렬히 사는 거기에 어떤 보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세상과 함께 사라질 것이 아닙니까? 결국 허무밖에 남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만약 그런 열정이 하나님을 향한 것이 아니라면 가장 바쁜 자가 가장 게으른 자라고 단언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B. 구속과 열정
마지막 두 번째는 구속과 열정입니다. 이런 인간을 하나님이 구속하셨습니다.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방향을 잃은 열정을 올바르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로마서 1장 23절에 의하면 하나님 대신에 금수와 버러지의 형상을 섬기고 자기를 우상 삼으며 살아가는 허무한 삶을 종식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더욱이 그러한 삶은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 주지도 못하고 우리를 심판으로 데려가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멸망하는 것을 차마 보실 수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타락한 이스라엘을 왜 구원하셨습니까? 왜 그들을 선택하셔서 그들의 마음을 할례하시고 새로운 열정을 주신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신명기 30장 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즉,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의 삶은 생명이 없는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여성을 흠모한들 빼어난 미모에 최고의 화장술로 화장을 하고 세계 최고 디자이너의 보석을 박은 아름다운 옷을 입혔다고 해도 관에 누운 시체의 코에서 국물이 흘러 나온다면 그 얼굴에 입맞춤 할 남자가 있겠습니까? 생명이 없는 것은 추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셔서 우리를 구속하신 것도 우리에게 죽음을 버리고 생명을 얻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생명을 가지고 사람들을 사랑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 17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는 말씀입니다.
신약성경은 자기를 구원해 주신 사랑의 감화를 입은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의심할 여지없이 명료하게 가르쳐 줍니다. 로마서 12장(10절-11절)은 말합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말합니다. 먼저 구원 받음으로써 인생의 목적을 올바르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열렬한 사랑으로 그 목적을 따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벗어난 삶은 결코 행복할 수 없고 불행하고 허무한 것입니다. 게으른 자에게는 목표에 불타는 마음이 없습니다. 가슴을 불지를 목표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열정은 거듭나고 회심함으로서만 부어지는 것입니다. 새로운 사랑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원 받은 신자가 왜 게으르게 사는 것일까요? 왜 하나님을 향해서는 한없이 게으르고 썩어져 갈 세상을 위해서는 미친듯이 부지런하게 살다가 과로사로 죽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결국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식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서 그 마음이 멀어졌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인 것입니다. 모든 사랑에 공통점이 있으니 그것은 뜨거운 것입니다. 냉담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의 삼위일체에서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마음에 사랑이 있으면 무엇인가 누군가는 사랑하게 되어 있으니, 사랑하는 것이 없다면 사랑 자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신자가 은혜를 잃어버리면 하나님에 대해 냉담해지는 대신 세상을 향해서는 열렬해지는 것입니다.
결국 신자가 게으른 것은 하나님 대신 자기사랑에 굴복한 것입니다. 그것도 온전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버리고 포기해야 할 자기를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을 멀리 떠난 것이니 물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허우적거리는 사람 목에 큰 돌멩이를 매단 것과 같습니다. 그것을 목에 매고 미친듯이 두발과 손을 버르적거리며 물 위로 떠오르고자 하나 욕망이 그를 깊은 바다속으로 끌고 내려가는 것입니다. 결국 죽음 위에 그 심연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의미 없는 삶에 굴복한 것이나, 의미 있는 삶에 열정이 없는 것이나 모두 헛된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의미 없는 삶에 굴복하여 열정적으로 된 것이나, 의미 있는 삶에 열정이 없어 게으르게 된 것이나 모두 허망한 인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혜자가 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가 배가 고팠나 봅니다. 그래서 손을 음식에 넣었습니다. 그것이 고기었는지 곡식이었는지 과일이었는지 떡이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는 그것을 손으로 들어서 입에 집어 넣기만 하면 되는데 그것을 올리는 것을 괴롭도록 귀찮아했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배가 덜 고팠을까요? 그렇다면 그는 더 많이 굶주려야 합니다. 배가 고픈데도 음식을 들어 올리기가 싫었습니까? 그렇다면 그는 살기가 싫은 것입니다.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도대체 이런 사람을 누가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음식을 손에 들고 들어 올리기조차 괴로워했다면 그에게는 살아있는 것 자체가 귀찮은 일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죽도록 굶주리든지 삶을 포기 하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자살도 부지런한 사람이 하지 게으른 사람은 자살할 용기도 없습니다. 그렇게 사는 삶이 인생입니까? 개나 주어 버릴 삶이지 어떻게 사람이 사는 인생이겠습니까?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가는 이유는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알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의 뜻을 이해하면서 보람을 느끼려고 사는 것이 인간의 삶인 것입니다.
이런 인생을 살고 싶습니까? 만약에 살고 싶다면 살아 보십시오. 곳간은 텅텅 빌 것이고 식구들은 굶주릴 것이며 영혼은 메말라 말라깽이가 되고 마음에는 죽음이 엄습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이 살 수 있는 삶입니까? 그런 현실을 감당하기 싫어서 잠시 쾌락을 취한들 현실이 너무 괴로워서 프로포폴을 맞고 침대에 잠깐 누워 있는 사람과 같습니다. 몇 시간이 지나서 깨어본들 현실이 변해 있겠습니까? 똑같은 현실이 자신의 눈앞에 전해 오는 것이니 또 한번의 주사를 맞고 깊은 수면 속으로 떨어지고 싶을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인생일 수가 있겠습니까?
어제 죽어간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싶은 오늘인데 어제 죽은 사람들한테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그렇게 살 바에는 개 같은 오늘을 나에게 내일로 주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고 죽은 사람들이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더욱이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자신의 인생을 게으르게 살 권리가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얼굴에 침을 뱉는 것이고 존귀하게 구하여 보석과 같이 올려 놓은 여러분들의 인생을 쓰레기통에 던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설교를 듣고 있지만, 어떤 사람은 흘려 보낼 것이고, 어떤 사람은 가슴을 찌르게 될 것입니다. 두 사람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있으니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5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라고 했습니다. 정신차리고 생각하면서 살라는 이야기입니다.
게으른 사람은 생각하지 않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에 큰 슬픔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고 말입니다. 열정이 살아가는 삶은 사람의 삶이 아닙니다. 고귀하게 주어진 내 인생의 한 날을 그렇게 보낼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하고 밥이 넘어갑니까? 잠자리가 편안합니까? 아침에 일어날 때 희망 찬 아침을 맞이 합니까? 그 아침에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자기 인생도 아니고 마지못해서 누군가의 목줄에 묶여서 어거지로 끌려가는 삶을 사는 동안에 목에는 밧줄이 상처를 만들고 쓰라리기 짝이 없습니다. 안 갈 수도 없고 끌려가고도 싶지 않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짐승 같은 삶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여러분을 구원하셨다는 말입니까?
어떤 분은 물으실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제가 삶의 열정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인생을 직시 하십시오. 인생이 매우 짧다는 것 그리고 우리에게 내일은 가상의 날이지 실제로 있는 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죽은 모든 사람들이 내일도 살아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이루어지지 않은 사람들이 죽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갑니다. 젊은이는 늙고, 늙은이는 죽고, 죽은 자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죽음의 기운이 스며들어 옵니다. 팔 다리가 자유롭지 않습니다. 생각이 자유롭지 않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치매에 걸린 분과 통화했습니다. 아무것도 도와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총명하던 분이었습니다. 손자가 두 명인데, 갓난 아기는 잘 자라느냐고 물어 보는 그분에게 제가 뭐라고 답을 하겠습니까? 다른 사람의 이야기입니까? 저와 여러분들이 몇 년 후에 당할 일인지도 모릅니다. '하루'라고 하는 이 날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7~8년 전에 어느 요양원에 심방을 갔습니다. 교인인 그 노인은 누워서 일어나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내가 가니까 너무 반가워 했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세요?"라고 물으니까 내 두 손을 꼭 잡고 "목사님!, 너무 교회에 가고 싶어요" 그래서 내가 함께 간 교역자와 심방대원들에게 말했습니다. 다음 주에 이 분을 앰블런스에 실어서라도 교회 예배당에 눕혀라도 놓으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다시 제 두 손을 붙들고 눈물을 흘리며 "목사님! 너무 감사합니다. 제 평생 소원이 내 발로 걸어가서 죽을 때까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분도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그렇게 가고 싶은 교회에 못 갈 것이라는 생각을 안 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입니까?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더 사랑하리
어떤 분들은 오늘 손에 넣었을지도 모르는 보라색의 염려에 관한 책이 있습니다. 제가 그 책을 쓰느라고 5시간씩 4번을 침대에 누워서 링거를 맞았습니다. 너무 완성하고 싶은데 몸이 따라와 주지 않습니다. 그때 게으르게 사는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말도 안되는 얘기지만 '하나님 그 사람들의 인생을 조금 주시면 안 됩니까? 몸 하나로는 도저히 못하겠습니다.' 어떻게 살든지 우리의 마음입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은 말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합니다.
오래 전에 전철을 탔는데 사람들이 빼곡하게 앉았습니다. 옆에 사람이 큰 잡지책을 펼치고 읽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곁눈질로 봤습니다. 일생을 노동운동에 헌신하며 반정부 투쟁에 앞장섰던 이름만 대면 굉장히 많은 사람이 알만한 인물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는 그런 삶을 살다가 어느 한순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소명을 받아서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졸업을 했지만 자기를 써 주는 교회가 별로 없었습니다. 너무 나이가 많은데, 누가 그런 전도사를 쓰겠습니까? 인터뷰 마지막에 '특별한 소원이 있습니까?' 라고 기자가 물었더니 자기가 매일 드리는 기도를 소개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시다시피 저는 막 자란 인간이고 중학교 겨우 나왔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주의 종이 되었는데 쓰는 교회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께 한 가지 소원을 아룁니다.' '저보다 공부 잘하고 똑똑하고 젊은 사람들 많이 있지만 그 사람들 중에 게으른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 굳이 쓰시려고 애쓰지 마시고 그 사람 빼내고 저를 주십시오.' '그러면 저는 최소한 게으르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주님을 위해서 일하겠습니다.'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저 기도가 응답이 안되었으니까 나 같은 사람이 여기에 남아있지, 저 기도가 100% 응답 되었다면 우리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쫓겨났을까라고 말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신자는 자신의 인생에 의미와 가치를 이미 발견한 사람입니다. 은혜에서 떠나 잠시 잊었을 뿐입니다. 다시 생각하십시오. 과연 내가 이렇게 살다가 마지막 어느 한순간, '오늘 밤에 내가 네 생명을 취하리니 모든 것을 두고 너는 내게로 오라' 할 때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당신의 품으로 내가 달려가겠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있는지 되물어 보십시오. 다시 십자가 사랑으로 돌아가십시오. 게으름에 끝은 타락과 고통 그리고 끝없는 가난뿐입니다. 다시 은혜를 받으십시오. 게으름과 결별하고 한 번밖에 없는 일생을 영원을 잇대어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을 섬기며 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게으름을 벗어나라4 (2020.11.08._주일오전)
4. 게으름과 교만
“게으른 자는 사리에 맞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잠 26:16)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게으른 자의 또 다른 특징은 교만입니다. 교만은 자신의 처지를 파악하지 못하는 우월감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게으른 자는 지혜로운 사람을 미련하게 여기고 어리석은 자신을 그보다 지혜롭다고 생각합니다. 게으른 자는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으로부터 배우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오늘 이 말씀은 우리에게 게으름과 교만의 관계를 가르쳐줍니다.
II. 게으름과 교만
지혜자는 탁월한 통찰과 빼어난 논리로 게으른 자의 심리를 분석합니다. 게으른 자는 끝없이 핑계와 나태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에게는 열정을 쏟을 인생의 목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착각합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지혜롭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1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게으른 자는 사리에 맞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고 했습니다.
A. 그릇된 판단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주제를 만나게 되는데, 첫 번째는 그릇된 판단입니다. 게으른 자는 사리를 앎에 있어서 판단력이 떨어집니다. 게으른 자는 사리에 맞게 대답하는 일곱사람보다도 자기를 지혜롭게 여깁니다. 여기에서 일곱 사람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리에 맞게'라고 번역된 이 부분은 히브리어로 '타암(taam)'인데 이것은 '맛보다, 인식하다, 판단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에서 온 명사 입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분별력을 가지고 대답하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뛰어난 분별력을 가지고 대답하는 모든 사람들보다 자신을 지혜롭다고 여기는데 게으른 자가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대답은 판단력과 표현력에 있어서 뛰어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리에 맞게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게으른 자는 그들로부터 전혀 배우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깔봅니다. 게으른 자는 어리석습니다. 그의 육체만 게으른 것이 아니라 정신도 게으릅니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을 올바르게 판단하지 못하고 자신을 그 사람들보다 훨씬 지혜롭다고 여기며 자신의 게으른 삶을 합리화하는 것입니다.
사물에 대한 일반적인 판단은 이성의 지식으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도덕적인 판단에 있어서는 이것만으로 되지는 않습니다. 선악을 아는 지혜가 필요한데 이것은 단지 이성에서만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참된 믿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지혜로운 자인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바를 그분에 대한 신실한 믿음을 기초로 받아들입니다. 이유를 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것은 선을 위해서 명하시는 것이오, 금하시는 것은 악을 행하지 않도록 금하신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게으름과 경건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경건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열정을 가져다 주고 그 열정은 목표를 세우게 만들어 줍니다. 더욱이 경건은 하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두려워 하는 마음입니다. 게으른 자는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또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게으른 자는 죽음에 대해서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기원에 대해서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생각이 가볍고, 인생은 무거운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우리들에게 깊이 생각하지 말고 편안하게 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생각이 가벼우면 인생이 한없이 무거워지는 것입니다. 게으르게 사는 사람이 오늘 할 일을 하지 않고 해야 할 마땅한 생각도 하지 않으니 편안하고 가벼운 인생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알지도 못하고 행할 삶의 목표도 없이 살아가는 이 사람의 삶이 어찌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삶이 아니겠습니까? 게으른 자에게는 이런 마음을 기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11편 1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라고 말합니다.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 지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그의 계명에 순종하는 사람은 훌륭한 지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아는 탁월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으니 세 번째, 이런 사람은 영원히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며 살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참된 분별력은 지혜에서 나오며, 지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데서 비롯됩니다. 지혜를 떠난 지식은 결코 인생을 풍요롭게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결코 아무렇게나 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 그 자체가 우리에게 질서를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우리의 삶의 목표를 가져다 줍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사람은 언제나 살아야 할 이유를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합니다. 그것이 소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자신에게 가장 큰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가장 높으신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기쁨으로 하나님의 판단을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이로써 그는 선한 삶을 위해 열심을 품습니다. 열정이 있기 때문에 그는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자신의 인생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니 의미를 발견한 사람은 그 의미를 따라서 살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게으른 사람은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고 사랑도 하지 않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 의지가 추호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디서 그의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였겠습니까? 무슨 의미를 발견 했겠습니까? 그냥 하루하루 편하게 살아가는 것에서 의미를 찾는데 그것은 바람과 같이 사라지는 것들이고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많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어떤 날들은 보람있게 의미 있는 일에 집중하며 헌신하며 살았고, 어떤 날에는 그냥 의미없이 시간을 낭비하며 살았습니다. 그때는 좋았으나 그 순간들이 지금 여러분들에게 기억이나 나십니까? 휴식이 달콤하게 느껴지는 것은 노동이 있었기 때문에 그 휴식이 달콤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위해 인생의 목표가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 휴식이 어떤 의미를 가진 추억으로 떠오를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잠언 9장 1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게으름은 큰 죄입니다. 이 큰 죄의 나무 아래 수많은 다른 죄들이 깃들며 융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름날에 초가집으로 지은 시골 집에 살아본 적이 있습니까? 여름날 장마철에 햇빛이 조금 비추었습니다. 그래서 광에 가봅니다. 집안 본체에서 뚝 떨어져 있는 헛간은 광으로도 쓰고, 화장실로도 쓰는 곳입니다. 거기에 사람들이 편안하게 다니라고 큰 가마 때기를 바닥에 깔아 두었습니다. 깨끗합니다. 오늘 아침에도 할아버지가 몽당 빗자루로 깨끗이 쓸었습니다. 햇빛은 쨍쨍 나지만 여전히 습기는 많습니다. 깨끗하게 쓸려 있는 그 가마니를 두 손으로 붙들고 확 한번 걷어 보십시오. 겉은 깨끗하지만 가마니를 걷어 보면 이름도 알 수 없는 수많은 벌레와 지렁이들이 잔뜩 살고 있습니다. '웩'하는 마음으로 도로 덮어 버립니다. 게으른 사람의 삶이 그러합니다. 겉보기에는 여유 있어 보여 깨끗이 몽당 빗자루로 쓸어 놓은 가마니 같지만, 이면을 뒤집어보면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더러운 벌레들이 거기에 살고 있습니다. 게으름의 친구는 어리석음입니다. 게으른 자는 결코 지혜로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혜는 오직 순전한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의미는 인생의 길이에 비례하지 않습니다. 길게 살아도 거의 의미 없는 인생을 사는 사람이 있고, 짧게 살다가 죽었어도 의미 있게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게으른 사람은 육체만이 아니라 정신까지 게을러 끊임없이 인생의 수많은 패착을 두면서도 자신이 다른 모든 지혜로운 사람보다 뛰어나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아첨꾼이나 찾는데 그것도 지위가 높아야 아첨하는 사람이 생기는 것이지 별 볼일 없는 게으른 사람을 위해서 누가 아첨하는 수고를 하겠습니까? 이렇게 게으른 자의 인생은 실패로 물들어 가는 것입니다.
B. 지혜 없는 교만
마지막 두 번째는 지혜의 없는 교만입니다. 게으름은 지혜 없음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죄인 교만으로까지 나아갑니다. 교만이 무엇입니까? 교만은 잘난 체하며 뽐내며 건방지게 행동하는 정신입니다. 전혀 잘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잘난 체 합니다. 자랑할 것이 전혀 없는 부끄러운 인생을 살면서 뽐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건방지게 행동을 합니다. 그러니 그 게으른 사람을 누가 좋아 하겠습니까? 자신은 결코 뛰어나지 않은데 자신이 타인에 비해 우월하다는 생각으로 건방지게 행동합니다. 누구도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지 아니하고는 자기의 참모습을 정확히 알 사람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정신과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에 비춰 보지 아니하고는 결코 참 상태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가 비록 이성적으로 성령에 대한 지식들을 좀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과 그가 지혜로워지는 것은 거의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혜는 참되고 순수한 사랑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1장 23절과 2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유서 깊은 산상수훈의 설교를 마치신 후 결론적으로 하신 말씀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하는 자는 지혜로운 자요'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을 실천한 자가 지혜로운 자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행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를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랑의 감화를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판단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판단을 버릴 용기를 가진 사람입니다. 자기를 믿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믿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게으른 자는 단지 육체가 편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게으른 사람입니다. 그러니 그는 그릇된 자기 사랑이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고 싶고, 원하지 않는 대로 살고 싶지 않은 사람입니다. 게으른 사람은 열심히 말씀을 탐구 하지 않습니다. 그게 놀라운 특징입니다. 그래서 일주일을 게으르게 산 사람은 예배 시간에도 게으릅니다. 그는 비록 몸은 예배당에 나왔지만 정신은 파자마 바람으로 침대에서 뒹굴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그 사람에게 무슨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 가겠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지 않습니다.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사랑하지도 않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할 마음이 일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에게 무슨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하겠습니까? 저 좋은 대로 살아가는데 저 살아 있으면 그렇게 사는 것이지 말씀이 무슨 그 사람에게 쓸모가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에게 잘 준비된 하나님의 말씀은 돼지우리에 던져진 빛나는 진주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깨닫는 것보다 소중한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가장 큰 소원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에게 살아갈 옳은 길을 가르쳐 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렇게 살 수 있는 힘도 함께 주시기 때문입니다. 지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겸손합니다. 하나님을 늘 의지합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하잘것 없는 자인지를 알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존중히 여깁니다. 어린아이로부터 지혜를 배우고 싶어하고 악인에게서도 혹시 선한 것이 있다면 깨끗이 씻어서 자신의 것으로 쓰고 싶어 합니다. 게으른 자의 교만은 그를 더욱 비참하게 합니다. 그리고 부끄럽게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죽을 병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열렬히 기도 했습니다. 한 번만 살려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계속해서 기도했습니다. 꿈에도 기도를 했는데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이 물으셨다고 합니다. "얘야, 내가 너를 살려 두어야 할 이유를 한번 대답해 보거라" 여러분은 이 질문에 무엇이라고 답하시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오늘 살아 있어야 할 빛나는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까? 단지 사는 것이 우리의 삶에 이유일 수가 없습니다. 그 이상의 무엇이 우리에게 목표로 주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잠언 29장 2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이것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나 하나님이 만약 누군가 교만하면 반드시 그를 비참해지도록 만들어주겠다는 뜻입니다. "...마음이 겸손하면 명예를 얻으리라", 이것도 하나님의 의지에 표현입니다 어떤 사람이 마음이 겸비하다면 나는 반드시 그 사람이 어떤 부끄러운 처지에 있든지 간에 명예롭게 해 주겠다는 뜻입니다.
충성스러운 사람은 떠벌리는 것보다 침묵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게으른 자는 조용히 의무를 다하기보다 판단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게으른 사람은 모든 몸의 지체는 다 게으르지만 몸에 한 지체는 매우 부지런합니다. '입'입니다, 입. 입만 살아서 부지런히 사람들을 판단하고, 깎아내리고 자기를 자랑하는데 이것이 바로 게으른 사람의 특징인 것입니다. 게으름과 지혜는 결코 공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상실한 자존감을 교만으로 보상해 보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어리석은 노력일 뿐 입니다. 교만은 자신을 남보다 낫게 여기며 대립하게 합니다. 사람이 마땅히 훌륭한 점을 가지고 있으면 자신이 내세우지 않아도 다른 사람이 그것을 발견해주고 그는 빛나게 됩니다. 그러나 게으른 사람은 이런 일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의무는 행하기에 게으르고 쓸데없는 일에는 열심을 내니 허무한 삶이야말로 게으른 사람의 특징인 것입니다.
게으름은 자라서 많은 악의 열매를 맺습니다. 무지와 교만은 그를 더욱 악하고 쓸모없는 사람으로 만듭니다. 그러니 게으름을 해결하지 않고서 우리의 인생은 빛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게으름 해악이 얼마나 파괴적인지를 한번 생각해보길 바랍니다. 여러분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한번 돌아 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들이 게으름 속에 흘려버린 수많은 날들에 대해서 한 번 묵상해 보십시오.
저는 아주 오래 전에 책을 한권 읽었습니다. 수십 년 동안 사형 집행을 하던 집행인이 쓴 수기였습니다. 지금은 대부분 전기로 목숨을 끊는다고 하지만 그나마 우리나라에서는 사형이 집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전에는 가장 널리 사용되던 사형 방법이 교수형이었습니다. 그래도 그것이 가장 고통을 줄여주는 죽음라고 합니다. 누군가 사형이 집행되는 날에는 교도소에 불문율이 있었는데 고기국이 나온다고 합니다. 사형 언도받은 사람들이 아침 식사에 고깃국이 나오면 다른 사람들은 좋아하지만 그 사람들은 두려움에 휩싸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결국 사형이 집행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교수대 앞에서 묻는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있는가'라고 묻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담배 한 대를 피우고 싶다고 한답니다. 담배 한 대가 주어집니다. 불을 붙이고 담배를 피우면 담배는 타 들어갑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손을 바들바들 떨면서 그 마지막 담배를 피운다고 합니다. 그리고 필터까지 다 타들어 갈 때까지 기다리다가 결국은 교수대에 오릅니다. 발판을 딛고 서면 밧줄이 내려오고 밧줄이 완전히 목에 걸린 것을 확인하면 발판이 덜컹하고 밑으로 떨어지며 사람은 허공에 매달려 인생을 마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죽어간 그 사람은 얼마나 하루라도 더 살고 싶었겠습니까?
여러분이 오늘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이 특권처럼 느껴질 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질병으로 사망 선고를 받아 보십시오. 그러면 오늘 이렇게 숨 쉬며 살아 있고 손 끝으로 내가 무엇인가를 만지고 눈으로 무엇을 보는 것 자체가 엄청난 특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걸어서 예배당에 나올 수 있는 자유, 내가 원하는 것을 볼 수 있는 자유, 이것은 놀라운 특권입니다. 이 의미를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지혜없이 게으른 삶을 살았는지를 돌아 보십시오. 그리고 얼마나 교만한지도 한 번 되돌아 보십시오. 게으른 자에게 무슨 신령한 지혜가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은 게으름과 결별하지 않고는 결코 신령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아니 신령한 삶은 그만두고 보람 있는 인생을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에게 한정된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 시간이 매우 짧을 것입니다. 언젠가 교회 마당에서 젏은 교역자들과 함께 평균 수명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먼저 말을 열었습니다. "우리나라 평균 수명이 많이 높아져서 이제 남자들은 최소한 78세까지 살 수 있다고 이렇게 통계가 나왔다고 하네." 그랬더니 옆에 있는 교역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평균 수명에 도달하는 사람은 딱 절반입니다." 가만히 얘기를 들어보니 맞는 이야기입니다. 절반은 그 전에 죽고 절반은 그것보다 더 삽니다. 그래서 딱 50% 선에 있는 사람이 누리는 수명입니다. 그 다음 말이 더 놀라웠습니다. "목사님 50% 안에 드는거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 이야기가 '목사님은 일찍 돌아가실 것 같습니다.' 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건강이 안 좋았을 때였습니다. 맞습니다. 너무 짧은 시간입니다. 짧은 시간들이 우리 인생의 날들로 주어졌습니다. 우리가 더 산다고 할지라도 맑은 정신을 가지고 사는 날이 얼마나 될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며칠 전 주일에도 어떤 분한테 전화를 받았습니다. "아기는 잘 자라고 있습니까?"라고 저에게 물었습니다. 손주가 두 명인데, 웬 갓난아이가 나한테 있겠습니까? 그래서 마음에 슬픔이 확 밀려 들었습니다. 우리 인생은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게 아니고 우리의 정신이 온전할 때까지만 진짜 의미를 생각하면서 살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느 목사님께서, 유명한 목사님이 뉴욕에 오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교회에 예배를 드리러 나오셨다고 합니다. "아무개 목사님 아니십니까? 오늘 예배에 축도를 꼭 부탁드립니다." 목사님을 모시고 나와서, 목사님이 손을 높이 드시고 축도를 하셨습니다. 뭐라고 축도하셨는지 아십니까? '홍도야 울지마라 오빠가 여기 있단다', 치매가 온 것입니다.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앞으로 남은 인생의 많은 날을 계산에 넣으면서 오늘을 게으르게 살아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장부를 잘못 적고 있는 것입니다. 그날은 우리의 날이 아니고 어떻게 될지도 모릅니다.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이 날이 우리의 날이고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날입니다. 게을러 지혜 없는 사람들이 되지 마시고, 게을러 교만한 사람들이 되지 마시고, 다시 은혜를 받고 하나님 앞에 열렬히 사는 여러분들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열심히 살기에도 인생은 너무나 짧습니다. 그리고 그 마저 게으름과 무지 속에 낭비해 버린다면 도대체 우리의 살아야 할 인생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제까지 우리의 인생을 낭비하며 산 것만 해도 하나님 앞에 책임질 수 없을 정도로 큰 누를 끼쳤는데 앞으로도 우리가 그렇게 산다면 우리가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보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자신의 게으름을 깊이 반성하십시오.
남들이 다 한다고 해서 한번 캠핑을 갔습니다. 텐트를 쳐놓고 이 사람이 편안하게 친구들과 즐기며 밤 늦게까지 술도 먹고 놀았습니다. 그리고 골아 떨어졌습니다. 아침에 해는 뜬것 같은데 피곤이 풀리지 않아서 눈을 감고 계속 뒹굴거립니다. 왜 그런지 오른쪽 발에 뭔가 물컹하는 사람 팔 같은 것이 느껴졌습니다. 혹시 내가 모르게 누가 와서 내 텐트에서 같이 자나 하고 다시 오른쪽으로 몸을 돌려 드러눕습니다. 그러다 다시 잠결에 왼쪽으로 움직여 보니까 또 물컹하는 것이 팔뚝에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반복하기를 몇 번 하니까 눈을 뜨기 싫은데 할 수 없이 눈을 떠서 보니 커다란 구렁이가 옆에 누워 있습니다. 그러면 '아이구 웬 구렁이' 하고 오른쪽으로 드러눕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아마도 벌떡 일어나서 텐트를 뛰쳐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비명을 지를 것입니다. 구렁이가 여러분들의 게으름이라고 생각하셔야 됩니다. 뛰쳐나가야 됩니다. 나가서 곡괭이나 칼을 들고 와서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다가 정확하게 머리를 겨냥해서 두 손으로 한번에 끝내야 됩니다. 칼이 텐트 바닥에 꽂힐 때까지 긍휼히 여기지 말고 끝내야 합니다. 그게 의미 있는 인생을 사는 비결입니다.
무의도식하며 남이나 비판하고 교만하게 살고 있지 않는지 반성해 보십시오. 얼마나 고귀하게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입니까? 하나님 앞에 헛되게 살 여유가 없습니다. 한번 밖에 없는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 앞에서 빛나는 인생으로 살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생의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삶의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자신을 쏟아 부으며 살아서 인생의 보람을 느끼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게으름을 벗어나라5 (2020.11.22._주일오전)
5. 게으름과 욕망
“게으른 자의 욕망이 자기를 죽이나니 이는 자기의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함이니라”(잠 21:25)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본문에서도 지혜자는 게으른 자에 마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심리 작용을 탁월하게 분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게으름과 욕망의 관계입니다. 잠언은 '가르쳐 훈계하는 말'이라는 뜻입니다. 인생의 지혜를 담고 있지만 결코 처세술의 책이 아닙니다. 잠언의 말씀은 구원 받았을 때의 인간이 다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써 어떤 질서를 따라 살아갈 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II. 게으름과 욕망
오늘 지혜자가 25절을 통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게으름과 욕망의 관계입니다. 지혜자는 게으르게 살아가는 사람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탁월하게 파헤칩니다. 그것은 게으름이 게으른 자의 영혼에 미치는 영향입니다.
A. 영적 생명을 죽임
오늘 두 가지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첫 번째는 영적 생명을 죽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영혼이 힘을 잃어 버려 하나님 앞에서 옳고 선한 일을 할 능력을 상실하게 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본문 25절 상반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게으른 자의 욕망이 자기를 죽이나니..."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말 성경의 욕망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로 “타아와”(taawa)입니다. 이 단어는 욕구, 욕망, 바람, 소원, 탐욕, 정욕, 등등의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긍정적인 의미로도 사용이 되고 부정적인 의미로도 사용이 되었습니다.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된 예는 시편 21편 2절에 하나님이 주신 소원을 가리켰으니 이것은 나쁜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보다 더 많은 경우에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는 창세기 3장에 나오는 타락 기사에는 선악과를 보고 하와가 욕망을 품게 되었는데 이것을 가리킬 때 이 단어가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당연히 본문에서 이 욕망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고 그래서 옛날 성경에는 이것이 정욕이라고 나옵니다. 본문에서는 결국 자기 멋대로 살고 싶어하는 인간의 모든 욕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넓은 의미에서 정욕입니다. 좁은 의미에서 정욕은 그릇된 성적 욕망을 가리키고 넓은 의미에서는 자기가 스스로 주인이 되어서 자기 욕심을 따라 살려고 하는 모든 욕망이 곧 정욕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세상의 정욕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모를 때 자기를 주인 삼고 자기가 최고의 왕인 줄 알고 살았던 삶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게으른 자의 욕망이 자기를 죽이나니..." 에 죽인다는 뜻은 생명을 끊어 멸절시키는 행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말의 뜻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면 게으른 자의 욕망이 누구를 죽이는 것입니까? 게으른 그 사람 자신을 죽인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게을러도 게으르다는 이유 때문에 육체가 죽는 법은 없습니다. 여기에서 '죽이나니'는 육체에 관한 말이 아니라 영혼과 정신에 관한 말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살아 있다는 것은 단지 육체의 생명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영혼의 생명도 함께 가지고 있어야만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된 의미에서 한 인간이 살아 있다고 하는 것은 육체가 생명을 누릴 뿐 아니라 영혼의 생명이 충만해서 주체적으로 자신의 인생의 의미를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참된 삶은 육체와 함께 살아 있는 영혼을 가지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비록 육체가 살아있다 할지라도 병든 영혼으로는 참된 인생을 살아간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는 분명합니다. 죽은 자는 죽은 자고 산 자는 산 자입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에 한 사람이 병상에 누워서 아무 기억도 인식도 못하고 호흡기를 달고 식물인간으로 살아 있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그를 살아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그가 자기의 인생을 살고 있는 중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공간과 관련지어 생각할 때 영혼은 한정적인 존재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우리는 모두 영혼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 어디에 영혼이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확실한 사실 하나는 우리의 몸이 우리의 영혼을 벗어날 수 없고 나의 영혼은 내 안에 있지 다른 사람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영혼도 공간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간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간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는 꽃이나 컵이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과는 다릅니다. 이런 것들은 색깔과 크기와 모양과 빛깔이 있고 무게와 부피가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은 그런 것으로 잴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는다고 할 때 육체가 죽는다는 뜻과 영혼이 죽는다는 뜻은 서로 다릅니다. 육체가 죽는 것은 뇌와 심장의 작동이 멈추고 회복할 수 없게 생명유지의 능력을 상실한 상태를 뜻하는 것입니다. 심장이 멎고 호흡이 멈추었어도 충격을 주어서 살아날 수 있으면 아직 죽은 상태가 아닙니다. 진정으로 죽는 것은 그 기능이 모두 멈추어서 몸이 부패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혼은 불멸의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그런 방식으로 죽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영혼의 죽음과 육체의 죽음의 의미가 사뭇 다르다는 것을 명심해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무엇을 영혼의 죽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영혼의 죽음은 생명이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에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 믿는 우리를 가리켜서 너희는 허물과 죄로 죽었었다고 말합니다. 옛날에 죽었다는 것입니다. 영혼이 완전히 죽었다면 과연 우리가 인간으로 살 수가 있었겠습니까? 영혼이 살아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사물을 보고 생각하고 느끼고 말하고 결정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이 허물과 죄로 너희의 영혼이 죽었다고 말하는 것은 멸절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서 그 생명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영혼의 죽음은 그 영혼을 주신 목적에 알맞게 기능하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영혼은 육체를 감독하고 지도하기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저급한 욕망을 고급한 영혼의 기능이 통제하고 지성으로 의미를 생각하며 인생을 살아가도록 영혼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영혼이 그 역할을 잘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생명을 부지하고 있으나 우리는 그것을 죽은 영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영혼이 올바른 기능을 못할 때도 죽은 것이고 그럴 힘이 있지만 매우 미약할 때도 영혼의 죽은 상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절대적 의미에서 영혼의 죽음은 신자에게는 없지만 신자가 은혜 생활을 잘 하지 않으면 영혼이 죽은 상태와 같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라고 말입니다. 교회를 향하여 주신 말씀입니다. 당연히 이 교회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있는 교회입니다. 교회 전체적으로 볼 때에 그 교회는 살아있다는 이름은 가지고 있었으나 실제는 죽은 자와 다름없었다는 뜻입니다.
호흡기를 착용하고 의식도 없이 몇 년째 침상에 누워 있는 사람도 엄밀하게는 살아있는 사람이지만 사실은 죽음 사람이나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게으른 자는 게으름으로 가득 찬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혼이 병들어 있거나 죽은 상태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의사들은 우리의 몸에서 일어나는 작은 징조를 파악하여 우리의 몸에 커다란 질병을 찾아내는 기술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심코 지나치는 입 안에서 나오는 한 방울의 피를 보고도 의사는 장기의 어느 부분이 망가지고 어떤 위험한 증상인지를 파악하여 조치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콧물이 나고 기침이 나고 재채기가 나고 열이 나고 온 몸이 쑤시면 우리 눈에는 바이러스가 보이지 않지만 감기나 혹은 독감에 걸리거나 몸살이 난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징후와 몸의 관계입니다.
한 사람이 게으르게 살고 있다는 것은 그의 영혼이 현저하게 죽어 있는 징후라는 뜻입니다. 만약에 그냥 내버려두면 그의 영혼은 점점 더 심각한 질병 상태에 놓이게 되어서 회복하기 어려운 타격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말하고 싶으실 겁니다. '아! 그러니까 결국은 부지런히 살라는 뜻이군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만약에 자기를 위해서는 매우 매우 부지런하지만 하나님을 위해서 게으르다면 그는 게으른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게으르지만 하나님을 위해서는 부지런하다면 그는 부지런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말하는 게으름은 태도에 관한 평가일 뿐만 아니라 그의 삶의 방향에 관한 평가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것을 뒤집어서 말하면 아주 부지런하게 산 사람이 가장 게으를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게으름의 뿌리는 그릇된 자기 사랑에 있습니다. 자기를 위하되 잘못된 방식으로 자기를 위하고 있기 때문에 게으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인간은 단지 먹고 살기 위해서 이 세상이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순간의 쾌락이나 즐거움만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살아있는 영혼으로 가치 있는 인생을 살기 위해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가치 있는 인간으로 살기 위해서는 영혼의 충만한 생명이 필요합니다. 그 생명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생명은 영적 생명인데 이것은 말씀과 성령의 은혜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게으름에 굴복한 삶은 영혼의 생명을 고사 시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결코 게으를 수 없나니 사랑 자체의 특징이 열렬한 것입니다. 죄를 사랑하는 사람은 죄를 짓는 일에 열렬합니다.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 예술을 즐기고 표현하는 일에 열렬합니다. 학문을 사랑하는 사람, 배우는 일에 열렬하기 마련입니다. 무엇이든지 사랑은 좋아하는 것이고 좋아하면 열렬함이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열렬함이 없다면 사실은 입으로만 좋아하는 것이지 실제로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게으름에 굴복한 삶은 영혼의 삶을 고사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이 게으른 자의 욕망이, 즉 게으른 자의 욕구가 그의 영혼을 죽이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게으르게 살기 때문에 결국 영혼의 생명을 고사시키고 영혼의 생명이 상실되었기 때문에 게으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게으름은 영적 생명을 죽이는 것이니 게으른 사람들 중에는 신령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게으름으로 여러분들의 영혼의 생명을 죽이는 사람들이 되지 말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일하기를 싫어함
심각한 죄로 보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 게으름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징표라고 보는 것입니다. 유명한 달란트 맡은 종들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 26절입니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라고 책망합니다. 여기서 우리의 눈길을 끈 것은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연결 된 세 단어입니다. 다시 말해서 게으른 종은 모두 악한 종이라는 것입니다. 의로우면서 게으른 종, 신실하면서도 나태한 사람, 이런 사람은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영혼을 너무 너무 사랑하는 태만한 목회자, 신실한 게으른 목회자 상상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게으른 모든 사람은 그 분 앞에 악한 자입니다. 이에 비해서 예수님께서 또 다른 종들에게 하신 칭찬을 들어보십시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했습니다. 충성된 사람은 게으르게 살 수 없습니다. 충성된 사람은 모두 부지런합니다. 그리고 그 충성은 바로 자신에게 그 일을 맡긴 분을 사랑하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표현이 가능하겠습니까? 매우 매우 게을렀던 충성된 목회자, 가능하겠습니까? 빈둥빈둥 놀았던 충실한 집사, 가능하겠습니까? 일하기를 싫어했던 충성스러운 청년, 가능하겠습니까? 성경을 펴놓고 '게으름, 게으르다' 라는 단어를 찾아 보십시오. 이것이 구약과 신약에 얼마나 폭넓게 퍼져 있는지 보면 깜짝 놀랄 것입니다.
게으르게 행하는 것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여러 차례 경고했고 그것이 참 신앙에서 이탈하는 것임을 강조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장 16절에서는 게으른 자가 되지 말라고 하는 정도가 아니라 게으르게 행하는 자를 멀리하라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은 근처에도 가지 말고 떠나서 함께 어울려서 게으름의 정신에 물든 사람이 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교회를 청결하게 지키기 위해 경고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히브리서 6장 12절에서 믿음의 승리는 게으름을 무찌르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게으름은 말만 많은 사람들이 빠지는 죄입니다. 이런 죄 속에서 사람들은 점점 자신의 남아 있는 영혼의 생명을 고사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영혼은 영원한 존재이고 육체는 한시적인 존재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 한시적인 존재인 육체와 영원한 존재인 영혼을 결합시키므로 하나님은 산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한시적인 인생을 살되 의미로는 영원을 생각하면서 찾아가라는 뜻입니다.
게으름의 태만은 자신의 영혼의 생명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15절 하반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자기의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함이니라” 게으른 자는 자신의 영혼을 죽이는데, 왜냐하면 자기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하반절을 히브리 성경에서 우리말로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두 손이 행하기를 거절하기 때문이다” 보다 강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거절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냥 안 하는 것이 아니라 하라는 요구가 계속 있는데 못하겠다고 계속해서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때문에 자신의 영혼이 죽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행하기를"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의 원형은 “아사(asa)”입니다. “아사(asa)”는 “만들다, 행하다”라는 의미이고, 특히 어떤 재료를 사용하여 물건을 만드는 동작을 뜻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존재 목적과 아주 놀라운 신학적인 일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세계를 창조하실 때 인간의 노동을 통해 더 아름답고 선해지도록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한 분이시기 때문에 세상을 창조하실 때 실수가 없으셨습니다. 세계는 아름답고 선하게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름답고 선한 세상을 창조하실 때 더 아름다워지고 더 선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세계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노동을 통해서 이 세계의 아름다움과 선함이 증진 되도록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꾼으로 사용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이고 우리를 사람으로 지으신 이유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선하고 아름답게 창조하신 세상에서 노동을 통해 더 잘 가꾸고 더 아름답게 만들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웃에게 행복을 주고 자신도 인생에서 보람을 느끼며 살도록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2장 10절과 1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말합니다. "열심히 주를 섬기라"는 말 앞에 "게으르지 말라"고 말하고 있으니 아무리 뛰어난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도 게으름에 빠지기가 얼마나 쉬운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과일이 많고 모든 것이 부족할 것이 없는 상태에서 그저 놀고 쉬면서 과일이나 따 먹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노동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창조된 것입니다. 노동은 결코 징벌이 아닙니다. 오히려 축복이고 특권입니다. 이런 사실은 아담에게 주신 명령에서도 분명합니다. 창세기 1장 2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정복하다"는 폭압적으로 짓밟는 것이 아닙니다. 개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름답고 선하게 창조 하셨지만 만약에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노동을 더하면 아름다운 것들이 더 아름다워질 수 있도록 아직 드러나지 않은 아름다움이 더 아름답게 드러날 수 있도록 세계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다스린다"는 것은 폭력적인 지배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질서 있게 해서 더 아름답고 좋게 만든다는 뜻이 있습니다.
당연히 일은 하나님을 사랑하는데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순종함으로써 이 세상이 더 아름답고 선하게 되도록 인간이 부름 받은 것입니다. 아담이 사람으로 태어나서 제일 먼저 한 일 중에 하나를 생각해 보십시오. 창세기 2장 1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자! 보십시오. 모든 것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그것에 이름을 붙이실 능력이 없었겠습니까? 하나님은 당신 혼자 창조 하셨지만 가꿀 때에는 인간과 함께 가꾸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는 하나님 혼자 여러분들을 이 세상에 태어나도록 만드셨습니다. 부모님들이 도구가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이 태어난 것은 여러분들의 선택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좋은 사람이 되어 가기 위해서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지만 여러분들을 은혜로 불러서 함께 협력하여 거룩하고 신실한 사람이 되어가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주도적인 은혜는 하나님의 주시지만 우리의 믿음과 순종을 사용해서 그 일을 이루어 가게 끔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들짐승과 새를 창조하실 때 바다에 물고기를 지으실 때 이름을 주실 수 있었지만 아담에게 시키고 싶으셨습니다. 이 일은 아담에게 있어서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끊임없이 자신 앞으로 나오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류의 생물들의 특징을 파악하고 그에 적합한 이름을 불러주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이 모두 끝났을 때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워졌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전에는 그냥 들판을 뛰어 다니던 들짐승들이었는데 이름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하나하나 서로 서로에게 구별되는 동물이 되었습니다.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은 이름만 듣고도 그 동물들의 몸짓과 특징까지 모두 기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토끼, 기린, 호랑이, 여러분 눈앞에 보이지 않지만 이 말 한마디로 여러분의 머릿속에 훤하게 떠오르고 심지어는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게 되는 것도 아담이 이름을 지어준 덕분입니다. 이렇게 노동을 보탬으로 세계를 아름답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은 하나님의 큰 축복입니다. 다만 인간이 타락함으로서 노동에 괴로움과 고통이 뒤따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났기 때문에 지성은 어두워졌고 그래서 무지하여 가치도 없는 일을 위해서 말할 수 없이 많은 수고를합니다. 또 많이 수고해도 얻는 것이 별로 없게 되었으니 이 모든 것이 바로 죄 때문에 비롯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인간으로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의무를 행하지 않고 살 때 그의 영혼은 게으름 속에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와 같이 먹지도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을 위해 의미 있는 일을 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살았으나 사실은 죽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죽은 영혼으로 어떻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죽은 영혼으로 살아있는 육체를 사용해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죄 짓고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향하는 일 이외에는 없지 않습니까? 무위도식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무의도식 할 때 가장 불쌍한 사람은 섬김을 받지 못하는 가정이나 가족들이나 혹은 교회가 아닙니다. 무위도식하는 가운데에 일하기를 싫어하므로 죽어가고 있는 영혼을 끌어 안고 사는 그 사람 자신이 가장 불쌍한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게으르려야 게으를 수 없는 사람들이 되어야 됩니다. 마음에 타오르는 하나님의 사랑, 보람 있게 살고자 하는 자기 인생에 대한 분명한 목표가 있기 때문에 게으르려고 해도 게으를 수 없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게으르지 말고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열렬히 사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살기 위해 부지런히 힘쓰고 애써야 합니다. 어떻게 일하는 것이 효율적이고 시간을 아끼며 비용을 줄일 수 있는지를 생각하고 그 일에 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거기서 자신의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고 자신도 좋은 사람이 되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살인을 하고 도둑질을 하는 것은 경계가 분명합니다. 내가 누군가 미워서 목에 큰 칼을 겨누었다 할지라도 피부 앞까지 가서 멈추었다면 죽인 것이 아닙니다. 칼로 찔러서 그 칼이 뒷 목으로 튀어나오고 피를 흘리고 숨이 끊어졌다면 살인이 실행된 것입니다. 사람의 물건을 보고 아무리 탐을 내도 그것은 아직 도둑질 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주머니에 넣고 그 자리를 떠났을 때 도둑질이 실행된 것입니다. 그러면 게으름은 언제 실행이 되는 것입니까? 몸이 너무 피곤해서 내일을 위해 쉬어야 하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비난 받지 않을 배려와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룬다는 도덕적인 비난 사이에서 우리 중 누가 경계를 분명하게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음식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건강을 위해서는 맛있게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정말 순수하게 하나님 앞에서 살기 위한 육체의 건강을 위한 욕구인지, 식도락에 빠져서 혀 끝에서 내가 움직이고 있는지 뚜렷하게 줄을 그을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살인, 간음, 도둑질은 신앙은 그만두고 양심만 있어도 안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게으른 것은 상당한 신앙을 가지고 있어도 게을러질 수 있는 눈에 띄지 않는 죄라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7가지 가장 큰 죄 중에 살인은 안 들어가도 게으름은 들어갑니다. 모든 죄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느 대학 실험실에서 실험을 했습니다. 커다란 유리 비이커에 보통 온도의 물을 붓고 개구리 한 마리를 집어 넣습니다. 만약에 물이 따뜻했다면 개구리가 넣자마자 기겁을 하고 뛰쳐나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개구리는 가만히 있었습니다. 밑에 불을 붙였습니다. 1초에 0.02도만 온도가 올라 가도록 불꽃을 조절 했습니다. 1시간 후에 개구리는 푹 삶아진 채로 발견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게으름은 아주 은밀한 죄로 우리의 삶을 파고 들어옵니다. 마지막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영혼의 생명이 모두 고사되어 도저히 하나님 앞에 살 수 없는 경건한 의욕을 상실한 사람이 되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우리가 경계해야 할 죄가 아닌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살아 있는 것은 놀라운 특권입니다. 어제 죽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싶었지만 못살고 지나간 하루였기 때문입니다. 게으른 자는 기본적으로 일하기를 싫어합니다. 선한 일을 위하여 육체는 게으르고 영혼은 싫증을 느끼게 되는 것이니 게으름에 빠져 살아감으로서 그의 영혼은 점차 병들어 가는 것입니다. 한번 밖에 없는 인생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에 날들은 너무나 속히 빠르게 지나갑니다. 거기서 인간은 순간순간 살아가는 존재이고 아무도 내 인생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이라는 것을 예측할 수 없습니다. 20대 청년 중 두 명이 죽으면 한 명은 자살이라고 합니다. 세 명이 죽으면 그 중에 한 명은 여성이라고 합니다. 왜 이러는 것입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경제적 어려움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이보다 더 가난하고 어려운 때도 젊은 여성들이 억척같이 자신의 삶을 살아냈습니다. 왜 죽는 것입니까? 영혼에 생명의 기운이 고갈 되어서 죽는 것입니다. 생명의 기운이 없으니 희망도 없고 현실을 이겨낼 수 있는 능력도 없는 것입니다. 조용히 눈을 감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영혼의 생명이 없으므로 모든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입니다. 이 영혼의 충만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우리가 은혜생활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순간을 살아도 의미에 있어서 만큼은 영혼에 잇대어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고 게으름을 미워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다시 한번 하나님 앞에 무위도식하는 삶을 회개하고 열렬히 하나님을 향해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게으름을 벗어나라6 (2020.11.29._주일오전)
6. 게으름과 쓸모
“게으른 자는 그 부리는 사람에게 마치 이에 식초 같고 눈에 연기 같으니라”(잠 10:26)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지혜자는 게으른 자의 심리 안에서 일어나는 작용과 함께 그의 쓸모에 대해 오늘 말합니다. 잠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와 세상을 사랑하는 자의 삶을 대조합니다. 본문은 앞, 뒷 절에서 악인과 의인의 삶의 태도에 대해 말하는 가운데에 등장합니다. 이는 게으름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의 인격적 특징임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부지런하면서도 악하게 살아갈 수는 있지만 게으르면서도 의롭게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악인의 부지런함은 하나님께서 볼때는 전혀 부지런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쓸모없는 일을 위하여 부지런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러므로 결코 게으를 수 없습니다. 사랑 그 자체가 열정이고 뜨거움이기 때문입니다.
II. 게으름과 쓸모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게으름과 쓸모에 대해서 가르쳐 줍니다. 쓸모란 쓸 만한 가치 혹은 쓰이게 될 분야나 부분을 뜻하는 것입니다. 게으름은 인간을 쓸모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여기에는 기가 막힌 두 개의 비유가 등장합니다. 게으른 자가 쓸모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두 가지 아주 적합한 비유로 풀어가고 있습니다.
A. 기막힌 두 비유
첫 번째는 이에 초입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게으른 자는 그 부리는 사람에게 마치 이에 식초 같으니..."라고 말합니다. 식초는 당시 널리 사용되던 조미료였습니다. 지혜자의 시대에 통용되던 아주 깊이 잘 숙성된 농도가 매우 친한 식초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 식초가 치아의 신경에 자극을 주는 것은 아마 고문과 같을 것입니다.
부모님께 물려받은 유산 중 저의 튼튼한 치아가 있습니다. 45년가량 치과를 가본 적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치과에 가서 치료를 받기 시작하고, 그 다음부터 여기저기 고장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하루는 갑자기 치아가 매우 시려서 차가운 모든 것을 먹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 것은 뭐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불편해서 병원을 갔더니 저작 운동, 음식을 씹는 운동을 너무 세게 해서 어금니와 치아의 표면을 감싸고 있는 코팅막 그러니까 상아질이 닳아서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 막이 사라져서 음식이 닿으면 차가운 기운 혹은 신 기운이 곧바로 이빨을 타고 신경에 전해져서 고통이 오는 것인데 몇 가지 치료 방법을 해줬지만 그리 큰 성과가 없었습니다. 너무 힘들었습니다. 김치를 먹을 수 없어서 따뜻한 물에 담갔다 먹어야 하고 과일을 깎아서 끓는 물에 담가서 따뜻하게 해서 먹어야 했던 경험은 제게는 굉장히 힘든 경험이었습니다. 그런 이빨에 고농도의 식초를 들이붓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엎드려서 곤장을 맞는 것이 더 쉬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주 실감 나는 비유로 이 지혜자는 게으른 사람이 그를 부리는 사람에게 어떤 느낌을 주는지 절실하게 표현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일을 시키는 사람에게 여러분이 어떤 존재인지 한번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과 함께 일을 하고 여러분들이 일 시킨 사람들이 게으를 때에 어떤 마음이었는지 한번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비유는 눈에 연기입니다. 연기는 어떤 사물이 불에 탈 때 생겨나는 흐릿한 기체나 기운을 뜻합니다. 지혜자는 불을 때서 밥을 하고 난방을 하고 짐승들의 죽을 끓이던 시대에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시대의 경험을 말하고 있습니다. 연기가 나서 그 연기에 눈을 뜨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던 괴로운 경험을 밑에 깔고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눈물이 나는 가장 흔한 원인은 눈에 습도가 부족한 것입니다. 거기로부터 슬프거나 너무 기쁜 정동이 일어날 때에 눈물이 납니다. 또 눈에 염증이 생겨도 눈물이 나는데 이것들보다 가장 흔한 이유 중 하나는 눈에 이물질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연기는 가연성 물질이 불에 탈 때 발생하는 고체 혹은 액체의 미립자들이 몰려 있는 것이 연기입니다. 일반적으로 유기물이 불완전 연소될 때 연기가 나오는데 이 나무를 기준으로 보면 주성분은 탄소의 미립자입니다. 그리고 수증기와 기타 휘발성 물질의 액체에 입자도 포함되는데 무엇을 태우느냐에 따라서 연기에 성분은 서로 다릅니다.
우리의 몸에서 눈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바깥 세계의 정보를 우리의 마음으로 실어 나르는 몸의 기관이 다섯 개 있는데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혹은 접촉을 할 때의 살갗의 느낌까지 다섯 가지 종류입니다. 그중에서 압도적으로 많은 역할을 하는 것이 눈입니다. 눈이 실어 나르는 정보의 역할은 코나 귀가 하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역할을 하게 됩니다. 눈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 조상들은 몸이 천 냥이면 눈이 구백 냥이라고 말할 정도로 몸에 있어서 중요한 지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눈을 보호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장치를 만드셨습니다. 제일 먼저 머리와 이마에서 흐르는 이물질이 눈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이마에 눈썹을 굵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눈 아래 위로 가느다란 속눈썹을 만들어서 이물질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눈을 보호하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눈꺼풀을 만드셔서 끊임없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눈을 깜빡거림으로 수 없이 와이퍼와 같은 역할을 하게 해서 우리의 눈에 유리창을 하루에도 수 만 번 닦아 잘 보이게 하신 것입니다.
또 하나 아주 중요한 장치를 두셨는데 그것은 바로 눈물샘입니다. 눈물샘은 눈물이 고여 있고 슬픔과 기쁨의 정동이 일어나거나 혹은 이물질이 자극할 때 눈물을 배출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들어온 이물질을 쏟아져 나오는 눈물로 씻어내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몸을 보호하실 때 우리 몸의 수분을 자주 사용하십니다. 무언가 먹고 속이 좋지 않습니다. 가스가 꽉 차고 먹을 때는 맛있게 먹었는데 무언가 이물질이 창자에 있는 것처럼 매우 불편하게 느껴집니다. 그 때에 우리의 몸은 온 몸의 수분 동원령을 발동합니다. 몸에 있는 많은 물을 끌어다가 장으로 모이게 만들고, 모인 물을 이용해서 소화시키지 못하는 불쾌한 음식물들을 몸 밖으로 배출하게 만드는데 이것이 설사입니다. 눈도 눈물샘을 둬서 이물질이 들어갔을 때 즉시 눈물이 쏟아져 나와 이물질을 물과 함께 밖으로 흘려 버리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자극하는 이물질이 사라지고 나면 씻은 듯이 눈물을 멈추게 됩니다. 이것을 보면 눈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 수 있고, 눈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보호장치를 하셨는지 하나님의 지혜에 감탄하게 되는 것입니다.
연기가 날때 눈물이 쏟아지는 이유는 눈물샘에서 들어오는 이물질을 배출하기 위해 펌프질을 해서 물을 쏟아 내는 것입니다. 눈물을 나게 해서 눈에 들어오는 것들을 밖으로 쏟아 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이물질의 침투로부터 눈을 보호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안구를 담고 있는 살은 예민한 신경과 연약한 막으로 덮여 있는데 아주 작은 이물질이 들어올 때조차 심한 이물감과 통증을 격하게 느끼게 됩니다. 앞으로 계속 몰려오는 연기에 매워서 눈을 비비며 콜록거리는 자신을 떠올려 보십시오. 게으른 자가 바로 그렇게 괴롭히는 연기와 같은 사람입니다.
B. 보냄 받은 사람
그러면 도대체 게으른 자는 누구의 이에 초 같고, 눈에 연기와 같아서 괴로움을 주는 것입니까? 우리말 성경에는 "그 부리는 자에게"라고 되어 있는데, 히브리어로 레셜라하이누(lesholehainu)입니다. 직역하면 "그를 보낸 자에게" 혹은 "그를 파송한 자에게"라고 번역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제대로 하자면 "게으른 자는 그를 보낸 사람에게 마치 이빨에 식초 같고 눈알에 연기 같은"이라고 번역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 비유는 지혜자가 급하고 중요한 임무를 부여받고 출장을 떠난 하인이나 신하를 염두에 두고 쓴 것 같습니다. 주인이 매우 급하고 매우 중요한 일이 있어서 불러서 신신당부를 하고 임무를 줍니다. 종은 주인의 분부를 받고 출장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종의 마음은 주인과 같지 않습니다. 세월아 네월아 출장을 가서 오히려 새로운 장소와 새로운 음식을 경험하는 일에 골몰해서 자기의 임무를 잊어버렸습니다. 세월아 네월아 일은 내버려 두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다가 일을 그릇 치게 되었고 주인에게 큰 손해를 입히게 되었습니다. 출장을 가서 주인의 분부대로 행하지 않는 태만한 종을 볼 때 그를 보낸 주인의 괴로움은 상한 이빨에 식초를 들이붓는 것 같고, 연약한 눈에 연기를 뿜어대는 것 같다고 했으니 그를 보낸 사람의 마음에 괴로움이 얼마나 큰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고용된 자에게는 월급을 주는 사람이 그를 보낸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1장 4절에서 6절에 보면 예수님에 앞서 온 인물인 세례요한에 대한 언급이 등장합니다. 그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선지자 세례요한만 하나님이 보내시고 우리는 땅에서 새싹이 나듯이 태어난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이 보내셔서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입니다. 사람도 자기가 필요 없는 물건을 만들지 않고 꼭 필요해서 모든 것을 만드는데 하물며 하나님이 '나'라는 한 사람을 창조해서 이 세상에 보내실 때 거기에 뜻이 없었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하나님은 세계의 모든 만물을 당신이 직접 창조하시고 사람을 흙으로 빚어 만드시고, 또 한 사람은 그의 갈비뼈를 취하여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모든 사물들은 말씀 한마디로 창조하되 사람을 창조할 때는 이렇게 공을 들이시는 것을 보여주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너, 인간은 나에게 매우 특별한 존재다." 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일부러 하나님이 그 내용을 상세하게 성경에 기록하신 것입니다. '나'라는 사람도 하나님이 보내셔서 이 세상에 오게 되었다면 내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삶의 이유가 나를 보내신 그분의 뜻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이성적인 것 아닙니까? 너무나 합리적이지 않습니까?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가 아니냐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실 때는 각자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보내셨는데, 이 세상에 태어났는데 여러분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어떤 사람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게으른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실 때 목적을 가지고 이 세상에 보내셨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나를 이 세상에 만드셨을까? 확실한 것 하나는 내가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고 여기셨기 때문에 나라는 사람을 만들어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내가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 더 좋기 때문에 보내셨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존재 자체가 그분에게 기쁨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나를 그냥 이 세상에 있으라고 보내신 것은 아닙니다. 두 가지를 위한 것입니다. 첫 번째, 내가 부지런히 살아서 이 세상을 더 아름답고 선하게 만들라고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충분히 아름다웠고 충분히 선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아주 아름답고 선한 세상이었는데, 인간이 잘 가꾸어서 더 예쁘고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가능성도 거기에 함께 주신 것입니다. 자연은 아름답습니다. 그렇지만 자연을 잘 알고 가꾸면 자연은 더 아름다워집니다. 한번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가을날이 되면 잎이 다 떨어집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나무를 보면서 깨닫게 됩니다. 나무의 칡넝쿨처럼, 수많은 밧줄처럼 줄이 얽혀 있는 것입니다. 푸른 잎으로 가득 찰 때는 멀리서 그냥 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넝쿨이 나무를 칭칭 감고 올라가서 말하자면 자기의 생명을 뿜어 냈던 것입니다. 그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칡넝쿨이 엉켜 있는 나무가 아름답습니까? 넝쿨을 깨끗이 제거해서 나무가 자유롭게 자라도록 된 상태가 더 아름답습니까?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마당에 있는 나무도 예뻐 보입니다. 가을에 참 예쁩니다. 일 년에 한두 번씩 반드시 가지치기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저렇게 예쁜 모습이지 한 1년 동안 내버려 두면 아주 작은 가지들이 가득 차서 칼빈 파크 마당 위가 굴속처럼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이야기했습니다. 자연은 자연 그대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자연을 인간이 가꿀 때 자연은 정말 자연답게 아름다워진다고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충분히 아름답고 선하였지만 인간의 노동을 보태면 더 예뻐지고 아름다워질 수 있는 여지를 남겨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노동을 위하여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노동을 하라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흔히 노동은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말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노동은 죄가 들어 오지 않았어도 인간에게 주신 인간이 종사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공중에 나는 새와 물고기와 새들과 땅에 있는 들짐승들을 창조하셨지만 집은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학교는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로를 건설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해야 될 일입니다. 악기도 만들어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뒤에 가보면 아담의 후손들 중에 금속을 잘 다루는 사람, 악기를 잘 만드는 사람, 노래를 잘 짓는 사람 등이 등장을 해서 문명을 일구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가 들어오지 않았으면 벌거벗고 과일이나 따먹으면서 뒹굴뒹굴 놀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성경적인 사색이 아닙니다. 부지런히 노동을 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다만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그 노동이 달콤했는데 죄가 들어온 다음에 거기에는 고통이 따르게 되었다는 것이 차이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 세상에 나를 보내신 것은 이 세상에서 노동을 함으로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나의 노동을 보탬으로서 세상을 더 아름답고 더 선하게 만들기 위해서 보내신 것입니다.
두 번째, 이렇게 하면서 내가 더 온전한 인간이 되기를 바라면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나를 보내신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온전한 사람으로 성인으로 창조하셔서 이 세상에 보내셨고 그 자체로도 하나님께 매우 귀하고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그렇지만 아담이 모든 세계를 보면서 세계를 배우고 더 아름답게 가꾸고 또 그런 섬김을 받으시는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노동하며 살 때 점점 더 아름다운 사람, 훨씬 더 선한 사람이 되어 가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아담이 악하게 창조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더 아름답고 더 선하여질 가능성을 가진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그냥 아무렇게나 차리고 다닐 때도 예쁩니다. 그런데 잘 가꾸고 나타나면 더 예쁩니다. 그렇게 가꾸면 예뻐질 수 있는 가능성을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예쁘게 보이는 것입니다. 세계가, 인간이 그렇게 창조 된 것입니다. 아담이 죄를 짓지 않고 태어났는데, 태어났을 때보다 모든 세계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 세상을 가꾸기 위해서 노력할 때에 점점 더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 갈 예정이었다는 뜻입니다. 이해 하실 수 있으십니까? 그러니까 한 사람이 하나님을 향하여 게으르게 살면 점점 더 나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이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하나님을 위해 노동하고 봉사하면서 살면 자신도 점점 더 좋은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이 세상이 지으신 목적이고 노동과 사람 됨의 이치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그냥 있게 하시려고 세상에 보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세상을 가꾸라고 보내신 것입니다. 나 자신이 조금이라도 점점 더 좋은 사람이 되어 가도록 하나님이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를 보내신 자에게 이에 초 같고 눈에 연기 같은 인생을 산다면 피해자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런 삶을 살아가는 그 사람과 그 사람 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피해자인 것입니다. "그를 보내신 자에게"라는 이 구절은 바로 나의 존재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이 왜 이 세상을 만드셨고 나라는 인간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는지를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 기준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예전에 이런 것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천국과 지옥도 모르고 고집대로 영 죽을 이 세상을 죄 가운데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왜 사는지 인생의 목적도 모르고 누구를 위해 살아야 하는지도 모른 채 자신을 왕 삼으며 살았던 것입니다 왕이 폼이 나려면 나라가 널찍한 땅과 많은 백성들이 있고 그들을 다스릴 수 있는 권력이 있어야 됩니다. 모두 왕으로 자처하는데 백성도 없고 권력도 없고 땅 덩어리도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왕이라고 생각하면서 사니 그 삶이 행복해질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사니 게으르게 사는 것에 대한 일체의 가책이 없는 것입니다. 그저 눈앞에 보이는 것은 자신의 이익 뿐이니 부지런한 것도 결국 자기 먹고 살자고 부지런해지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처럼 사랑하시고 독생자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생명이 우리 안에 부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때 비로소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태어난 것이며 목적이 있게끔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영토도 없이 백성도 권력도 없으면서 자신이 왕인척 하고 살았던 삶이 얼마나 허망한 삶이 없는지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전혀 행복하지 않았던 삶이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때 눈이 떠지면서 나를 보내신 자가 하나님이시고 나는 그분의 뜻이 있어서 이 세상에 노동하라고 태어났고, 나를 완성하고 이웃을 완성하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인생의 보람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사람은 세 번 태어납니다. 첫 번째는 응애하고 육체적으로 태어납니다. 두 번째는 죽었던 영혼이 살아남으로써 영적으로 태어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되는지 사명을 발견하면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나를 세상에 보내신 뜻, 나를 그리스도의 교회의 한 지체로 부르신 뜻, 나를 가정의 남편으로 아내로 부르신 뜻, 나를 많은 직장 중 이 일터로 부르신 뜻, 그것을 우리는 쉬운 말로 사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 사명을 자각하는 데서 비로서 자신의 삶의 의미를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연결 짓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지침입니다. 예전에는 사라져가는 세상의 것들을 위해 허무하게 살았지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신의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 새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가면 젊은 사람은 늙어 가고 늙은 사람은 더 늙어 죽음에 가까이 오게 됩니다. 그래도 좌절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사는 삶의 목적이 사라질 세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영원히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만드실 때에 각자 있을 곳을 생각하시고 만드셨습니다. 여러분들이 거기를 떠나면 그 자리는 비어있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각자 하나님이 세우신 그 자리에서만 행복해질 수 있도록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한 인간이 게으르게 사는 것은 자기를 이 세상에 보내신 지존하신 하나님을 깔보는 것입니다. 그분이 왕이 아니라 자신이 왕이고 그분이 하인이라고 깔보는 것입니다.
시간은 흘러갑니다. 언젠가 우리의 연극과 같은 인생의 막이 내리고 휘장이 드리워질 것입니다. 그리고 휘장이 드리워진 뒤에 우리 모두 선악 간에 행한 바 대로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왜 그런 인생을 살았는지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직고하여야 할 것입니다. 왜 그 시점에 태만하고 게으르게 살았는지 이유를 주님께 설명드려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몰라서 설명을 들으시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했던 이유를 이 세상에 우리를 보내고 구원하고 은혜를 주셨던 심판주 앞에서 모든 것을 고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때 게으르게 살았던 날들에 대해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지내고 보니 나도 행복하지 않았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내 인생 전체가 거의 빼놓지 않고 그 분의 이에 부은 식초와 같았고 눈에 연기와 같았으니 나의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그렇게 고통스럽고 눈물이 나셨다면 그 복을 덧입어 살아가는 우리가 행복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게 느꼈다면 그것은 착각이고 일종의 마취에 의해서 그렇게 느낀 것이지 진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냥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이 세상에 온 것입니다. 보내신 그분이 보시기에 여러분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잠언에는 이 비유와는 정반대의 비유가 나옵니다. 충성스러운 자는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와 같으니라고 말입니다. 추수는 줄 지어서 낫으로 곡식을 거두는 것입니다. 협동 작업이기 때문에 진도에 맞춰서 일을 해야 됩니다. 한번 구부리면 지휘자가 '휴식'하기 전까지는 계속 곡식을 베어야 합니다. 온몸에 땀이 흐르고 허리는 끊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뜨거운 햇빛이 나는 날에 추수를 하는 것이니 갈증이 극에 달합니다. 그때 시원한 얼음 냉수가 옵니다. 이것이 이에 초, 눈에 연기와 정반대의 상황입니다. 여러분들은 추수하는 날에 땀 흘린 추수꾼에게 시원한 얼음 냉수 같은 존재였습니까? 아니면 끊임없이 눈물을 쏟아 눈을 뜨지 못하게 하는 연기와 같은 존재였습니까?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나는 게으른 모든 사람들에게 연민의 정을 느낍니다. 그는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들입니다. 뜻이 계셨기에 우리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고 살게 하셨고 구원의 은혜를 주셨고 하나님을 믿게 하셨습니다. 다시 한번 하나님을 깊이 만나십시오.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살고 싶었지만 죽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 오지 않습니까? 인생의 목표를 올바르게 정하십시오. 다시 한번 살아가야 할 명백한 이유를 발견하십시오. 게으르지 마십시오. 한번 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마음과 뜻을 다해 열렬히 사십시오. 거기에서 여러분들은 행복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무위도식 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게을렀던 삶에 대해 깊이 반성하고 다가오는 새해엔 주님을 위해서 무엇이라도 봉사하며 열렬히 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게으름을 벗어나라7 (2020.12.06._주일오전)
7. 게으른 자의 결산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치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마 25:24-26)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게으름은 예수님에게도 중요한 가르침의 주제였습니다. 일평생 예수 그리스도는 게으름과 상관없는 삶을 사셨습니다. 누가복음 22장 44절 따르면 깊은 밤에도 예수님은 힘쓰고 애써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장 35절 의하면 새벽이 밝기도 전에 일어나셨으며, 마가복음 6장 48절 의하면 고된 일과에도 불구하고 밤늦게까지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게으름은 영적으로 잠든 사람의 삶이지만 예수님은 항상 깨어 계셨기에 항상 부지런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한적한 곳에 물러가 잠시 쉬셨다는 기록이 있으나 그것도 더 열렬히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기 위한 준비였던 것입니다. 여기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남기신 유명한 달란트 비유가 나옵니다. 여기서는 게으른 사람들의 삶이 본질적으로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게으른 자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II. 게으른 자의 결산
오늘 우리들이 주목할 주제는 게으른 자의 결산입니다. 어떻게 살았던지 언젠가 우리의 삶을 하나님 앞에 결산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어느 주인이 세 명의 종에게 각각의 재능대로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맡겨두고 다른 나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아마 상당히 긴 기간 동안 집을 비웠을 것입니다. 그 결과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은 각각 장사하여 그만큼의 이익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한 달란트 맡았던 종은 한 달란트를 있는 그대로 주인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이 사람에 대해서 주인은 다음과 같이 평가를 내렸습니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해치지 않는 데서 모으는 줄 알았느냐"라고 반문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였습니다.
A. 악함
한 달란트 맡은 종에 대한 주인의 평가는 악한 사람이라는 평가였습니다. 돌아온 주인은 한 달란트 맡은 종을 악한 종이라고 불렀으니 여기서 악하다는 것은 사악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악하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악하다는 것은 선하다는 말의 반대말입니다. 선하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사람마다 각각 기준이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다른 기준이 하나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그것은 선한 것이 아닙니다. 그 선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한 것인데,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고 인간을 지으신 목적에 부합하는 상태나 혹은 조건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악은 이것에서 벗어나는 것이니 오직 욕망에 충족을 위한 것입니다.
선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지으신 목적과 의도를 향하고 있지만 악은 향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냥 그것들을 훼방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도덕적 기준에서 어긋나 나쁜 것 혹은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악에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습니다. 악한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가 악을 행하는 순간 그는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은 주인이니, 이 주인은 바로 종에게 달란트를 맡겨 준 사람이었습니다. 당연히 한 달란트 맡은 종은 주인이 그 달란트를 맡길 때 주인의 뜻과는 반대로 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점이 있습니다. 악하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과 정신에 속하는 것인데 주인은 오랫동안 종과 떨어져 있었고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도 잘 모르는데, 어떻게 그 종을 향해 너는 악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요? 이는 그 종의 삶이 그의 마음을 말해 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보이지 않지만 그의 삶은 백일하에 드러났습니다. 주인을 사랑하지도 않았고 공경하지도 않았고 또 자기에게 맡겨진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지도 않았습니다. 더욱이 큰돈을 맡긴 주인의 뜻을 존중하지도 않았습니다. 한 달란트가 얼마나 될까요? 많은 사람들은 아마 금화 한 닢 정도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당시를 기준으로 하면 평범한 노동자 한 사람이 20년을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요즘 아무 기술 없이 막노동하면서 하루에 아주 적게 잡아서 10 만원 정도를 번다고 하면, 주 6일 근무를 하고 20년을 노동을 하면 6억 2천 4백 만원이 됩니다. 그러니까 20년간의 노동자 연봉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굉장히 커다란 금액이었습니다.
다른 두 종은 받은 돈으로 열심히 장사해서 이익을 남겼을 때, 한 달란트 맡은 종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많은 달란트를 맡길지는 주인의 주권에 속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종들은 큰돈을 자신들에게 맡길 때 주인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그렇게 큰돈을 아무 뜻 없이, 보관할 데가 없어서 종들에게 맡기고 갔다는 것이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 종들에게 주인이 그 큰돈을 맡기며 자신이 돈을 맡기는 의도를 분명히 가르쳐 주었을 것이고 종들은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종은 성경이 오늘 "바로"라고 말합니다. 주인이 떠나자마자 바로 즉시 장사를 시작해서 이익을 남겼던 것입니다.
달란트를 누구에게 얼마나 맡길 것인지는 전적으로 주인의 주권에 속한 일이었습니다. 주인은 각 사람의 재능을 재어 보고 그 재능의 크기만큼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달란트라는 말에서 영어의 '탤런트(재능)'라는 말이 유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공정한 것도 주셨고 공정하지 않은 것도 주셨습니다. 존엄성, 한 영혼의 고귀한 가치,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으로서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사랑, 하루 24시간 등은 모두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균등하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재능은 모든 사람에게 균등하게 주시지 않았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주세페 디 스테파노, 마리오 란자 같은 이태리 테너 가수들의 노래를 가끔 들으면서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긴 세월이 지나도록 단 한 번도 그들처럼 노래를 부른 적이 없습니다. 그들의 노래를 듣고 제가 소비할 뿐이지 영원히 그렇게 부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런 달란트를 내게 안 주셨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양자역학에 대한 책을 최근에 읽다가 사람이 설명을 하는데 아무리 따라가도 잘 이해를 못 하겠어요. 그래서 내가 그때 깨달은 게 '내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구나. 쉽게 써야 되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내가 노력을 해도 그런 과학적 재능을 타고난 탁월한 사람들만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재능이 나에게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하나님의 큰 뜻이 있습니다. 만약에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탁월한 재능으로 다른 사람들을 섬기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도 보람을 느끼고 자신과 같이 재능이 없는 사람들에게 채워줍니다. 그러나 사랑이 식으니까 재능이 있는 사람들은 그 재능을 권력으로 삼아서 재능이 없는 사람들을 지배하고 짓밟는 비극적인 상황이 연출된 것입니다. 그러니 각각 차별이 있게끔 주신 하나님을 원망할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모든 이웃을 유익하게 섬기며 살지 못하는 이기심을 원망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인류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이유이기도 한 것입니다. 두 종은 열심히 일해서 이익을 남겼습니다. 한 달란트 맡은 종은 게으르게 살았습니다. 아무 이익도 남기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주인께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지만 게으른 종의 변명은 단지 자신의 태만을 정당화하려는 억지 구실에 지나지 않습니다. 24절에서 그는 이렇게 변명합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이 말은 아마도 인색한 사람, 근검절약하는 사람, 그런 뜻일 것입니다.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아마 거의 투자를 하지 않고 돈을 벌려고 하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 조금 노력하고 많이 버는 것을 원하는 사람인줄 내가 알았기 때문에...' 뒤에 나오는 뜻은 이런 뜻입니다. '이 한 달란트가 주인인 당신에게 얼마나 중요한 돈일텐데, 이것을 잃어버리면 당신이 얼마나 진노 하겠습니까? 당신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잘 보존했다가 손해를 안 끼치고 당신에게 돌려주게 되었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종의 게으른 삶은 이 변명이 거짓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그가 주인을 전혀 공경하지 않는 나쁜 사람임을 드러내 보여 준 것입니다.
자! 우리는 오늘 하나님 앞에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는 흔히 악한 사람이면 이런저런 죄를 짓고, 이런저런 커다란 악을 행해야만 겨우겨우 악한 사람이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이 말씀에 의하면 주인의 의도대로 살지 않는 그 사람이 악한 사람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언젠가 우리의 인생을 결산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때에 주님 앞에 악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지 않도록 오늘도 믿음으로 일생을 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게으름
마지막 두 번째는 '게으르다'라는 평가였습니다. 두 번째 평가는 게으른 종이었습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고 불렀습니다. 악하다는 것이 마음에 관계되는 것이라면 게으르다는 것은 생활에 대한 그의 주인의 평가였습니다. 여기서 '게으른'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단어는 '오크네레(oknere)'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오크네오(okneo)”라는 동사에서 왔는데, 이 그리스어 동사는 ‘싫은 느낌이 들다, 움추리다, 망설이다, 무엇 무엇을 하기를 꺼리다’라는 뜻입니다. 결국 '게으르다'라고 하는 것은 '움직이지도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일을 하더라도 싫은 마음으로 하거나, 꺼리는 마음으로 억지로 하는 것을 '게으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게으름은 일반적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의무와 관련됩니다.
자! 생각해 보십시오. 결혼을 하고 가장이 되었고, 아내가 있고 아이들이 있습니다. 가장의 중요한 의무는 식구를 부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열심히 가서 일합니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억지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을 먹여 살리는 의무를 이행하는 것으로 직장생활을 하는 것이 기쁘고 감사하고 보람이 있습니다. 최고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 의무에 대한 생각이 너무 또렷해서 차마 가족이 궁핍한 것은 보지를 못하기 때문에 가서 일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살 만하면 당장 그만두고 싶은 마음입니다. 월급을 받고 그 다음 날 출근 할 때에는 그 다음에 받을 월급 날짜를 계산하며 직장에 나아갈 뿐 보람이나 기쁨 같은 것은 일도 없습니다. 두 번째로 좋은 사람입니다. 제일 최악의 사람은 가족을 부양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알지만 일하기가 싫습니다. 아내의 잔소리와 구박을 수없이 받으면서도 집 안에서 빙글빙글 돌면서 텔레비전이나 보고 게임이나 하면서 지내는 한심한 사람입니다. 첫 번째 사람은 부지런한 사람이고, 두 번째, 세 번째 사람은 모두 다 게으른 사람입니다.
한 달란트 맡은 종은 주인을 공경하지도 않았고 맡긴 달란트를 장사하여 남기는 일에도 추호의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그 동안 한 달란트 맡은 종은 무엇을 하며 지냈겠습니까? 아마 상당한 시간이 흐르는 동안 주인이 집을 비웠습니다. 그런데 충성스러운 두 종은 16절과 17절에 의하면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달란트를 남기고"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종에 대해서는 '바로'라는 말이 안 나오고 "가서 땅을 파고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다"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게으른 종이라 할지라도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그림처럼 방바닥에 누워 있었을리는 없습니다. 허리가 아파서도 그렇게는 못 할 것입니다. 결국 충성스러운 두 종이 달란트를 맡긴 주인의 뜻을 이해하고 헌신적으로 일해서 이익을 남길 때, 한 달란트 맡은 종은 그것을 땅에 묻고 아무것도 안 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이 게으른 삶입니다. 어쩌면 이 한 달란트 맡은 종은 부지런히 열심히 딴 일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게으름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한다면 우리 중에 진정으로 게으른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우리 중 누가 일주일 동안 방바닥에 누워 있기만 하고 온 사람이 있겠습니까. 게으름은 자신에게 맡겨진 의무를 태만하게 하는 것입니다. 의무는 태만하게 하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딴짓하며 사는 것이 게으른 것입니다. 세 명의 종들에게 달란트를 맡기고 임무를 부여한 자는 높은 자 곧 종들의 주인이었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인생이라는 달란트를 주시고 열매를 기대하시는 하나님은 얼마나 더 높으신 분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에 대해 게으른 자도 자신을 위해서는 부지런할 수 있으니 욕망이 그를 움직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부지런하게 살아도 그것을 게으른 삶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한 달란트 맡은 종은 자기가 게으르게 살았던 것이 주인의 성품을 오해했기 때문이라고 변명하는 구실을 붙입니다. 25절에서 그는 말합니다.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악한 종은 일부러 주인의 성품을 오해했노라고 변명합니다. 주인의 많은 부는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과 종들이 곡식을 심어 가꾸듯이 노력함으로 얻어진 것이었고, 자기에게 맡겨진 한 달란트라는 거액의 금액도 바로 주인이 그렇게 애쓰고 노력해서 얻은 것이었습니다. 소중한 것을 맡기며 아무 뜻도 없이 그렇게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자녀에게 형제에게 혹은 죽으면서 아내에게 혹은 자신을 위해 도움을 준 누군가에게 거액의 돈을 줄 때 아무 뜻도 없이 그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주인의 재물은 하찮은 것들 중에서 소중한 것을 찾는 것처럼 쓸데 없어 보이는 것 중에서 쓸모 있는 것을 찾는 많은 노력을 통하여 얻어진 것이었습니다. 종들은 마땅히 그런 주인을 알고 진심으로 봉사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뜻하지 않은 상급이 주어질 예정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다섯 달란트니까 약 30억의 돈을 맡겼고, 또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니까 약 12억, 한 사람에게는 6억의 돈을 맡겼습니다. 주인에게는 종들이 이것을 잃어버리면 가문에 생사가 걸린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만약에 그랬다면 자기가 지참하고 여행을 떠나든지 자식에게 맡겼을 것입니다. 얼핏 보면 이것은 지어낸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잘 들여다 보면 이 주인의 깊은 의도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 종들 중 누가 진정으로 자기를 공경하는 사람인지를 시험하기 위한 전략이었다고 여겨지지는 않습니까? 보십시오. 30억을 맡긴 종이 30억을 남겨 가지고 왔습니다. 한 사람은 12억을 남겼으니 그 금액은 갑절 이상의 차이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종에게 똑같은 칭찬을 합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고 똑같은 칭찬을 내립니다. 결국 주인의 의도가 돈의 크기가 아니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셨을 때 당신에게 필요한 것이 있으셔서 우리를 보내셨겠습니까? 당신 스스로 조달하시면 되는데, 우리를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당신에게 우리가 하는 일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성심으로 주님을 공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필요해서였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고, 우리 때문에 이웃도 복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의 선 안에서 우리 모두 행복을 누리라고 사람을 만들어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종들은 이런 주인의 뜻을 알고 진심으로 봉사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돈을 벌면서 그 돈이 모두 주인의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주인은 이미 그 종들에게 주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그 일을 시키는 것입니다.
어느 대갓집 주인이 많은 종들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두 종이 수십 년 동안 그 집에서 봉사를 했습니다. 한 종은 충성스러웠고, 또 한 종은 게을렀습니다. 이제 더 늙기 전에 이들을 내보내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은 주인은 어느 날 대청마루에서 두 종을 불러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얘들아, 내가 긴히 쓸 일이 있으니 짚을 가져다가 탄탄하고 아주 가느다란 새끼줄을 엮어라. 급하니 속히 그 일을 하거라'고 시켰다고 합니다. 부지런한 종은 곧바로 광에 달려가 한 아름 짚을 가지고 와 앉아서 단단하게 손에 침을 바르며 정성껏 부지런히 새끼를 꼬았습니다. 게으른 종은 아침부터 무슨 일을 또 이렇게 시키나 투덜거리며 터덜터덜 걸어서 그저 한 줌 집어다가 새끼를 꼬는 시늉만 하고 있었습니다. 시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부지런한 종은 꽤 긴 끈을 만들었지만 게으른 종은 아주 짧게 만들었습니다. 주인이 갑자기 나와서 '됐다. 다 되었느니라, 이제 그만 하거라.', 그리고 하인들을 시켜서 광에 엽전이 잔뜩 들어있는 궤짝을 들고 오게 했습니다. 그 돈을 각자 가지고 있는 새끼에 다 집어넣어서 엮으라고 했습니다. 한 사람은 굉장히 많은 엽전이 들어가 큰돈이 되었고, 한 사람은 매우 짧았습니다. 그리고 주인이 말했습니다. '수십 년 동안 내 집에서 애 많이 썼다. 그 돈이 너희들 살림 밑천이니 가족들 데리고 나가서 독립하도록 하거라' 했다고 합니다.
우리의 살아온 일생을 만약에 새끼에 엮어 놓은 동전이라고 본다면 어느 정도 길이의 동전을 엮은 줄이 되겠습니까? 오래 살았다고 해서 그 줄이 긴 것이 아니니, 인생은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의미의 크기에 달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위해 일할 수 있는 날이 항상 있으리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자신이 너무 늙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렇게 예배에 나와서 설교도 자기 힘으로 들을 수 없는 날이 곧 옵니다. 그때에 비하며 아직은 힘이 있지 않으십니까? 내가 원할 때 화장실 갈 수 있고, 내가 원할 때 찬장에 가서 밥을 차려 먹을 수 있고, 내가 원할 때 교회 나올 수 있는 일이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어느 한순간에 불현듯 우리의 활동, 우리의 직업에서 퇴출당하는 때가 오는 것입니다.
보람 있게 살 수 있었던 많은 시간들이 있었는데 헛되이 낭비되었습니다. 어떤 시간들은 열심히는 살았으나 무지했기 때문에 낭비되었고, 어떤 때는 지혜는 있었으나 게을렀기 때문에 허비되었습니다. 주님이 요한복음 9장 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 중 어떤 사람들에게는 기우는 마지막 햇볕을 받으며 석양의 들판에 서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제껏 게으르게 산 것, 헛되게 산 것만으로도 너무 억울하고 가슴 아픈데, 우리 인생의 남은 날들을 어떻게 게으름 속에서 허송하며 보낼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좋은 것을 한 몸에 받고 무위도식하며 산다는 것은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욕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현듯 우리의 인생이 끝나고 그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그때에 여러분들은 게으른 종이라고 판단받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악하고 충성된 종아"가 아니라"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인정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얼마나 많은 우리 인생의 날들이 고통과 슬픔 속에서 지나갑니까? 또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헛된 욕망으로 낭비하면서 인생을 보냈습니까? 영원할 것 같은 사람이 어느 한순간에 죽음 저편으로 떠나가고, 아직도 인생의 날이 많이 남아 있을 것이라고 하는 사람이 어느 날 불현듯 자신이 조만간 죽어야 할 존재라고 하는 절벽 앞에 서게 됩니다. 이제껏 방황과 슬픔 속에서 보냈기 때문에 허비한 인생의 날들은 얼마나 소중한 나날들이었습니까? 자기를 사랑하는 대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무위도식하는 대신 주님을 위해 충성스럽게 살았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좀 더 행복하지 않았겠습니까? 우리의 인생에 남은 날들을 헤아릴 수 있는 지혜를 가집시다. 다시 오지 않을 인생입니다. 매 순간 주를 위해 열렬히 살다가 칭찬받는 종으로 죽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게으름을 벗어나라8 (2020.12.13._주일오전)
8. 게으른 자의 집을 보라
“게으른즉 서까래가 내려앉고 손을 놓은즉 집이 새느니라”(전 10:18)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게으름은 잠언에서만 언급되는 주제가 아닙니다. 전도서에서도 여러 차례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아마도 전도서가 다루는 가장 중요한 주제는 '인생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일 것입니다. 전도서를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코헬렛트’(qohelet)라고 부르는데 직역을 하면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자'라는 뜻입니다. 아마도 전도서는 저자가 권위를 가지고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아 '인생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를 설파했기 때문에 이런 제목이 붙여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번역할 때 전도서, 그야말로 '하나님의 도'를 전하는 책이라고 번역했던 것입니다.
II. 게으른 자의 집을 보라
A. 지혜자와 게으름
오늘 우리가 살펴볼 주제는 '게으른 자의 집을 보라'입니다. 먼저 지혜자와 게으름에 대해서 말합니다. 10장의 본문은 인생의 지혜에 대한 특별한 깨달음들을 담고 있습니다. 이 책을 기록한 전도자는 아마도 솔로몬일 것이라고 대부분의 학자들이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습니다. 그는 여러 차례 인생의 헛됨을 반복해서 강조했습니다. 전도서를 시작하면서 즉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생이란 어떤 것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중요한 주제를 말함에 있어서 먼저 인생이 얼마나 허무한지를 말함으로써 이 가르침을 시작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해 아래서 애쓰고 수고하는 모든 것이 무익하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인생 그 자체가 너무 허무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서 2장 11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것은 결코 허무주의가 아닙니다. 단지 인생이 잠시 있다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허무하고, 인생이 허무하기 때문에 그가 애쓰고 힘쓰고 노력하는 모든 것들이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그런 허무주의가 아닙니다. 이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모르는 채 세상의 영광을 추구하며 사는 인생의 허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생이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알고, 무엇을 하며 사는 줄 알고 살지 않는다면 많은 것을 누리고 많은 것을 얻는다고 할지라도 모든 인생이 헛되고 헛될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 전도자가 인생의 진면목을 펼쳐 보여서 사람들이 무엇이나 있는 줄 알고 인생을 대 하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없는 빈 껍질이고 허무하게 짝이 없는 것이라는 것을 밝힌 이유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포자기하여 삶을 포기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 세상에 인생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알아서 자기를 보내신 하나님의 영원한 가치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특히 본문에서는 여러 차례 진리에 대해 말합니다. 전도자는 10장에서 지혜가 없어 우매한 자들이 자기 자신의 인생에만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까지 문제를 일으키는 것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무지하고 지혜가 없다는 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문제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사회는 미래의 희망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전도자는 6절에서 우매한 자들이 높은 지위를 얻고, 지도자들이 허물이 많으면 사회의 질서가 무너진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떻게 우매한 자들이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는 것입니까? 그 사람들이 사실은 그런 지위에 오를만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검증할 수 있는 사회적인 시스템이 무너진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조선시대 후기 한참 나라가 부패했을 때 돈을 주고 관직을 사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돈밖에 없고 도저히 그런 관직에 어울리지도 않는 사람들이 출세길에 들어서서 무능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 나라를 지배하고 권력을 행사했던 것입니다. 옛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탐관오리가 사회를 망치는 것이 아니라 청렴하고 능력없는 사람들이 사회를 망친다고 말입니다.전도자가 보기에 우매한 자들이 높은 지위를 얻게 되는 것은 개인이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어리석은 것입니다. 게다가 지도자들이 허물이 많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지도자의 지위에 올랐는데 그들에게 지혜가 모자라기 때문에 올바로 행하지 못해서 많은 허물들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위 아래 질서가 무너지고 사회의 질서는 허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사람들은 도덕적인 혼란의 상황에 들어가게 되고 사회는 전체적으로 불안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9장 17절에서 지혜로운 자는 자신의 삶을 가치있게 할 뿐만 아니라 사회를 올바르게 하고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지혜없는 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나서 자기를 온전한 사람으로 완성하고 다른 사람들의 행복에 이바지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지혜가 없고 무지하여 자신이 계속 하나님 앞에 허물어지는 인간이 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불행하게 만든다면 그는 사람으로 태어난 목적에 전면적으로 배치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목적에 어긋나게 살아가면서 행복할 수 있습니까? 그것이 가능할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우매한 자의 특징이 바로 게으름입니다. 생각하기에 게으르고 행하기에 게으르니, 정신이 게을러 올바른 것을 찾으려고 하지 않고 혹시 발견했더라도 육체가 게을러서 올바로 찾은 진리를 따라 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은 개인의 삶에 있어서 악한 일에는 부지런하고 선한 일에는 게으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본문 10절에 의하면 함정을 파고 사람들이 거기에 빠지기를 바라며, 남의 집의 담을 허물어 자신의 경계표를 옮기려 하고, 연장의 날이 무뎌져서 일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는데도 연장의 날을 갈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데 악한 일에는 부지런하기 짝이 없고, 선한 일에는 게으르기에 짝이 없으니, 결국 그들의 삶이 개인을 허물어 버릴 뿐만 아니라 사회까지도 허물어 버리는 것입니다.
전도자는 가장 실감나는 예증을 통해 자신의 청중들로 하여금 인생의 지혜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는 결코 게으를 수 없고 인간이 게으른 것은 결국 우매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전도자의 가르침에 핵심입니다. 왜냐하면 지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서 오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게으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자신의 고백록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님을 한번 맛보고 나서 내 영혼의 기갈이 더욱 심하여졌으니 내가 주를 찾고 또 찾나이다.'라고 말입니다. 주님이 누구이신지 맛보고 나니 흡족하지 않아서 그 주님을 더 많이 찾기를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 같이 그렇게 목마르게 찾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러니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어찌 게으를 수 있겠습니까. 우매한 사람이 게으른 것이니 게으름의 모양이라도 버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게으른 자의 집
마지막 두 번째는 게으른 자의 집입니다. 전도자의 시선은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집으로 옮겨 갑니다. 그리고 말하길 “게으른즉 서까래가 내려앉고 손을 놓은즉 집이 새느니라”고 했습니다. 건물에는 지붕을 가로지르는 중간에 큰 보가 있습니다. 그것이 건물의 지붕 전체를 지탱하고 있는 것입니다.그리고 보는 기둥에 의해서 지지됩니다. 서까래는 보가 가운데를 지나가고 마치 갈비대처럼 보에 걸쳐져서 가로지른 나무들이 얹혀서 그 위에 지붕을 놓는 것입니다. 그렇게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것을 서까래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가 등뼈라면 서까래는 집에 있어서 갈비뼈와 같습니다. 그것들이 비가 새지 않도록 위에 얹어 놓은 지붕을 지탱하고 있는 것입니다.
건물에서 보가 무너지는 법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옥으로 지은 집을 가서 보면 보는 아주 튼튼하고 좋은 나무로, 저것을 어떻게 올렸을까 할 정도로 큰 나무를 놓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쓰지도 않고 통째로 사용합니다. 한 개의 어마어마하게 큰 나무가 정중앙을 가로질러 지나갑니다. 그러니까 보가 외부의 충격없이 저절로 썩어서 무너진다는 것은 건축에서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양옥집에서도 보는 매우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보는 어떤 일이 있어도 못도 박으면 안되고 절대 건드리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지붕을 내려 누르고 있는 제일 큰 힘을 그것이 떠받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는 저절로 내려 앉는 법이 없지만 서까래는 종종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보는 어마어마하게 큰 나무고, 서까래는 그보다 작지만 지붕을 받치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습기로 썩거나 혹은 벌레가 먹어 상합니다. 보는 워낙 크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보가 무너지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서까래는 자주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보는 고쳐서 교환하는 법이 없지만, 서까래는 수시로 수리하고 보수해서 혹은 새로운 나무로 하나씩 하나씩 교체해 주면서 사는 것이 옛날 사람들의 삶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집을 쓰고 사는 사람은 늘 서까래를 점검해야 합니다. 보는 점검할 필요가 없지만 서까래는 점검해서 썩었는지 혹은 내려 앉아 있는지를 보면서 손을 봐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서까래가 썩고 꺾어지면서 지붕이 내려 앉게 됩니다. 그 부분을 위에서 보면 푹 파여서 거기에 물이 고이고 흙이 쌓이면서 지붕은 더 무거워집니다. 더 무거워지면 그것이 누르는 힘이 더 커져서 마침내 지붕에 구멍이 나고 물이 새게 되는 법입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전도자는 '서까래가 내려 앉고' 하고 나서 '손을 놓은즉 집이 새느니라' 병행법입니다. '게으른즉 - 손을 놓은즉' 두 개가 짝을 이루고, '서까래가 내려앉고 - 집이 새느니라'가 짝을 이루는 것입니다. 같은 이야기를 단어를 바꿔서 반복함으로 리듬있게 사람들의 마음에 새겨지게 하기 위한 문학적인 기법입니다. 그래서 결국 집을 쓰고 사는 사람은 손을 계속 움직여야 됩니다. 아파트에 살다가 전원생활한다고 전원주택에 나가는 사람들의 애로사항이 유튜브에 많이 나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전원의 단독 주택에서 사는 것을 보면 아름다운 풀밭과 화단, 예쁜 집과 맑은 창문이 너무 좋아 보였는데 실제 가서 살아 보니까 예뻐 보이는 모든 것은 집 주인의 노동을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맑은 유리창으로 언제나 아름다운 앞에 산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아침 저녁으로 유리창을 세정제로 닦아야 합니다. 그 뿐 아니라 화단을 일주일만 돌보지 않으면 잡초가 가득해서 열심히 잡초를 뽑고 제초기로 잔디를 깎아야 됩니다. 그리고 꽃밭은 몇 주만 돌보지 않으면 형편없어져서 비료를 주고 제초를 해주고 또 진딧물 약을 뿌려줘야 합니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서 많은 수고를 하다가 손님이 와서 보면 너무 예뻐서 아파트를 팔고 와서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엄청나게 많은 노동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 일을 하는 것이 즐겁고 또 보람으로 느끼지 않는 사람들은 거기서 불편해서 6개월도 살지 못합니다. 겨울이면 춥고, 여름이면 덥고, 창문을 열면 벌레들이 들어 옵니다. 불을 켜면 새까맣게 달라붙어서 사다리 놓고 올라가서 마당에 전구들도 닦아야 줘야 하고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그래도 살고 싶으시다면 살아보십시오.
그런데 게으른 사람에게는 적합하지 않은 생활입니다. 그래서 집을 쓰고 사는 사람들은 늘 손을 움직여야 됩니다. 전도자가 이것을 썼을 때는 주전 10세기쯤 되었을 텐데, 그때의 주택이라고 하는 것이 오죽했겠습니까. 지금과 같은 현대 건축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기본적인 건축은 지붕이 흙과 나무, 짚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왕궁과 일반 사람의 집, 혹은 부자와 가난한 사람에 따라서 각각 다릅니다. 우리나라에도 옛날에 초가집도 있고 기와집도 있고 서로 달랐습니다. 그렇지만 서민의 집은 대개 흙으로 벽돌을 쌓고 거기를 보로 가로지르고, 나뭇가지를 놓고 그 위에 짚을 놓고 진흙을 바르고, 다시 짚을 놓고 나뭇가지를 놓고 흙을 발라서 두툼하게 해서 더위와 추위를 막고 비를 막고 살았습니다. 건축자재가 그 정도밖에 없으니까 얼마나 부지런히 손을 봐야 되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 이 교회 건물 지은지 얼마 안되었지만 하루도 작업하지 않은 날이 없습니다. 지은 지 몇 년 안되는데도 여기저기 물이 새서 계속해서 손을 봐야 됩니다. 손을 보지 않으면 몇 년 안에 볼 수가 없는 집이 됩니다. 그게 일반적인 것인데 집에 살면서 게으른 것입니다. 서까래가 내려 않고 내려 앉은 서까래 사이로 물이 새기 시작하는데, 그것도 내버려두면 구멍이 뚫어져서 누워서 밤하늘의 별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손을 놓은즉'이라고 하는 말은 게으른 자가 자기의 의무에 태만한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에 사는 사람은 그것이 특별한 일이 아니라 늘 서까래를 관리해야 하고, 늘 지붕이 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그것이 싫으면 바깥에서 노숙을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게으른 자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게으른 자가 자기 집을 돌아보지 않을 때 어떤 결과를 맞이하게 되는지 전도자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게으른즉 서까래가 내려앉고 손을 놓은즉 집이 새느니라” 더 보탠다면 '새다가 무너지느니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보이는 집에만 해당이 되겠습니까. 유서깊은 산상수훈을 마태복음 5장, 6장, 7장에서 모두 마치신 후에 예수님이 결론적으로 말씀하시면서 가르치시다가 집을 짓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나의 이 말을 지키고 순종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짓는 것과 같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집을 모래 위에 짓는 것과 같으니 큰 물이 나면 무너진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싫든 좋든 인간으로 태어난 우리는 집을 짓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그 사람이 산 것만큼 얼마만한 집을 짓고 사느냐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물론 부자가 되어서 큰 집에 사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모두 진실하고 정직하며 열심히 일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부모로부터 물려 받은 사람도 있고, 자기 노력도 없이 유산을 받은 사람도 있고, 혹은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번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확실한 것 하나는 인생 사는 것 자체가 집을 짓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보십시오. 그냥 먹고 살고 부자가 되는 일에 혈안이 되어서 자신이라는 인간을 돌아보지 않고 평생을 그렇게 살 때 그 사람의 인격의 집이 어떻게 될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돈을 찾고 돈을 추구하다가 부자가 됐을 수도 있고 안 됐을 수도 있지만, 허접한 인격으로 살다가 사라질 것입니다. 사는 것이 늘 한대와 같았을 것입니다. 반면에 매일매일 진리의 말씀 앞에 자신이 누구인지를 묻고, 자신의 인격의 집을 지었던 사람들은 부자가 됐을 수도 있고 그렇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자신이 거처할 수 있는 인격의 집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람이 불고 눈보라가 쳐도 능히 버티고 살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신앙의 집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예수님은 믿었지만 돈 버는 일에도 부지런하고, 세상 쾌락을 즐기는 일에도 아주 재빨랐습니다. 그런데 신앙을 가꾸는 일에는 게을렀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신앙의 서까래가 주저앉고 그 사이로 비가 샐 것입니다. 이름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신앙의 집이 신통치 않아서 여기저기 물이 새고 흙이 쏟아지고 빗물이 들이닥쳐서 살만한 집이 못 됩니다. 그런 집에서 사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신앙의 안식이 없는 것이고, 형식적인 신앙입니다. 구원을 받아서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대해 알고 있어서 보가 생겼다고 치겠습니다. 그러면 매일매일 그 서까래를 점검하면서 바꾸고 가꾸어야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자신이 아는 것이 신앙의 전부일 수 있겠으며 혹시 아주 많이 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항상 가슴속에 불타고 있습니까? 그것을 보면서 내가 아는 것이 얼마나 부족한지,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왜 내 가슴을 두드리지 않는지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말씀의 깨달음을 얻고 자신의 부패한 서까래를 내려놓고 다시 새로운 것을 끼워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서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롭게 우리의 속사람이 변화되어가는 가운데에 비로소 내 인생이 어떤 시련의 고비를 지날지라도 거처할 수 있는 신앙이라는 집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전도자는 그냥 집 이야기만 하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전도자가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게으른즉 서까래가 내려앉고 손을 놓은즉 집이 새느니라” 그러면 서까래만 튼튼하고 비가 안 새는 집에 사는 사람을 전도자가 최고의 인간, 더 이상 도달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최고의 인간이며 진짜 행복한 인간이라고 말하고 싶었겠습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오히려 사람들의 마음에 와 닿는 일상적인 예화를 통해서 더 깊은 신앙적이고 영적인 진리,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의 인생의 집을 짓고 사는 문제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젊을 때 사람들은 흔히 생각합니다. '너무 무겁게 생각하지 마라. 골치 아픈 인생의 모든 괴로움이 거기서 나온다. 가볍게 생각하고 살아라.' 그런데 저는 예수를 믿기 전 청소년 시절 자아 의식이 생겨난 다음부터 지금까지 아주 지독하게 고민하면서 살았습니다. 저는 이 나이가 되었지만 하나님이 나에게 자유를 주시면서 "얘야 뭐든지 말해라. 네 인생에서 돌아갈 수 있는 날로 너를 돌려 주마."라고 하시면 돌아가고 싶은 때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20대가, 어떤 사람은 30대가 좋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돌아가고 싶은 때가 없고, 지금이 제일 행복합니다. 10대,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10대에 죽으려고 했는데, 죽을 것 같은 거기로 왜 돌아가겠습니까? 20대, 30대, 40대, 모두 원하지 않습니다. 지금이 제일 좋고, 제일 잘 산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러나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결국 깨달은 것은 생각이 무겁기 때문에 인생이 무거운 것이 아니라, 참을 수 없을 만큼 생각이 가볍기 때문에 인생이 무거운 것입니다. 인생의 근원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에게 심오한 진리를 전도자는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리를 못 알아 듣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늘 보고 공감할 수 있는 집이 무너지는 이야기를 하면서 인생의 심오한 진리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어찌 보이는 집에만 해당되는 것이겠습니까? 우리 삶의 모든 분야에 정확히 적용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면 일을 하면서 살아야 됩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에게도 무슨 직업을 가져야 하는가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자, 정말 무슨 직업을 가져야 할까요? 고등학교 다닐 때 선배 하나가 있었는데, 그 사람은 아주 어릴 때부터 아나운서가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늘 하는 일이 라디오를 들으면서 아나운서들의 흉내를 냈습니다. 사회를 보면 정말 잘 봤습니다. 얼굴도 잘 생기고, 키도 훤칠하고, 언변도 좋고, 무엇보다도 목소리가 너무 고왔습니다. 헤어졌기 때문에 그가 결국 꿈을 이루었는지 알 수 없지만 아마 이루었을 것입니다. 보십시오. 어린 아이들도 자기가 되고 싶은 것이 있으면 그 때부터 집을 짓기 시작합니다. 내가 아나운서가 되려면 지금부터 열심히 공부를 하고, 목소리를 잘 관리하고, 상식이 풍부해야 되며, 내가 좋아하는 아나운서 목소리라도 들어봐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직업이라는 집을 짓는 것입니다. 오늘 게임하고 먹고, 놀고, 쉬고, 좋은 것 보러 구경다니며, 무엇을 해서 먹고 살지 미래의 직업에 대한 그림이 없이 삽니다. 부모에게 물려 받은 재산이 있으면 그것을 까먹고 살다가 죽을 것이고, 그나마도 없으면 결국은 매일매일 품이라도 팔아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보십시오. 인생 전체의 그림을 아무리 그려도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책으로 북 콘서트를 했습니다. '45년생 윤영자'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그 소설은 폐지를 줍는 45년 생 윤영자라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쓴 것입니다. 우리는 주인공이 처음부터 어마어마하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서 가난하게 살다가 살다가 저렇게 폐지를 주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등 구부러진 할머니가 리어카를 거꾸로 밀고 허덕거리면서 교통사고의 위험을 무릅쓰고 무단 횡단을 해서 하루 종일 버는 돈은 7,800원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그 소설에서 이 사람을 풀어 내는데 보통 사람이었습니다. 열심히 일했고, 남편과 함께 열심히 벌어서 자식들을 모두 뒷바라지 했는데, 자식들에게 일이 생겨서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될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번 돈을 자식들을 위해서 다 기울이고 간신히 살고 있는 집이 하나 있는데 남편이 덜컥 병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병원비와 치료비를 대며 애쓰다 모든 것을 다 털고 나니까, 자기가 배운 것 다 소용없고, 자기를 써주는데도 없고, 남편은 일할 수 없고, 자식들에게 도움을 기대할 처지는 안 되니까 하루에 7,800원의 폐지라도 주워서 라면이라도 끓여 먹어야 되는 것입니다. 결국 그것이 특별한 사람들만이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도달할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그 길을 갈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아니라 너무나 너무나 평범한 사람들이었는데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예기치 못한 일들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집을 지을 때 결국 그런 일을 만나도 어떻게 우리 자신을 지탱하면서 살 수 있을지를 생각하면서 집을 지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장 기본적으로 먹고 사는 일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을 잘 믿는 신앙적인 영역에까지 적용될 일들이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아름다운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집을 짓고 관리하듯이 살았기 때문에 지금 아름다운 신앙의 집에서 사는 것입니다. 가끔 놀러 오는 사람이 '어쩜 신앙이 저렇게 좋아, 좋은 교회에 다녀서 그런가, 아니면 부모님에게 좋은 신앙을 물려받았나 봐, 신랑이 신앙생활 잘 하도록 자유를 주나 봐, 부모님이 기도를 많이 해 주시나 봐' 등등 이야기를 합니다. 마치 게으른 사람이 남의 전원주택에 가서 차 한잔 마시면서 '아! 여기 살고 싶다.'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많은 날 동안 신앙을 위해 눈물로 씨를 뿌리는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직업을 위해서 눈물을 뿌리는 일이 있었던 것이고, 자신이 어떤 일을 만나도 버티며 살 수 있는 신앙의 인격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날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삶의 모든 방면에 있어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이 겪게 되는 게으름의 결말, 인생의 비참함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신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집을 짓는 사람들입니다. 보는 있으나 서까래가 여기저기 주저 앉고 있습니다. 매일 새로운 신앙의 지식으로 서까래를 갈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이라는 집에 구멍이 생겨서 세속주의의 빗물이 들어오고, 윤리적인 삶의 복들은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무에 나태하고 게으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생이 결국 그러한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인생의 숙제는 두 가지입니다. 사람이 살아가야 할 옳은 길을 아는 것, 그리고 그 길을 따라 지치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혜는 사랑을 동반합니다. 왜냐하면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게으르게 산다는 것은 이미 그에게 가슴 뛰게 하는 삶의 목표가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거기에 어찌 생기가 있겠습니까?
예수를 믿는 것은 집을 짓는 것과 같고, 신자로 살아가는 것은 그 집을 관리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지런함으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그 뜻대로 살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집은 어떠합니까? 단지 살다가 죽을 집이 아니라 주님께 보여 드려야 할 집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말씀과 은혜로 '우리의 신앙의 집을 짓고, 우리 인생의 집을 짓고 살다가 왔나이다.'라고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을 게으르게 사는 것은 너무 불행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인생을 뜨거운 가슴으로 사십시오. 은혜를 받고 게으름에서 벗어나 믿음으로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게으름을 벗어나라9 (2020.12.20._주일오전)
9. 개미에게 배우라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감독자도 없고 통치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잠 6:6-8)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본문에서 지혜자는 유명한 개미의 비유를 듭니다. 게으른 자에 대해서 이 비유로 경고하여 청중들의 공감을 얻고 있습니다. 지혜자의 관심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결코 게으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인생에 목표를 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사람들에게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할지 분명한 목표를 제시해 줍니다. 성화는 바로 이 목표를 따라 사는 것입니다. 지혜자는 당시 모든 청중들이 너무 잘 알고 있는 평범한 자연적인 사실, 쉬지 않고 일하는 개미의 부지런함에서 지혜를 배우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세 절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는 개미에게서 배우라는 것입니다.
II. 개미에게 배우라
A. 스스로 일함
복잡하지도 않은 이 본문은 우리에게 또렷하게 두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개미는 스스로 일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누군가의 감독이나 강요를 받음으로써 억지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스스로 자신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본문 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감독자도 없고 통치자도 없으되..."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개미는 크게 셋으로 구분되는데 여왕개미, 수개미 그리고 일개미로 구분됩니다. 일개미는 식량을 수집하고 사냥하고 새끼를 양육하는 일을 담당합니다. 당연히 수개미와 여왕개미는 번식을 담당합니다. 개미에게 그 일을 맡긴 이는 없습니다. 그것들은 각자 자신들의 자연적 본성을 따라서 자발적으로 일하며 공동체의 유지에 이바지합니다. 여왕개미가 있다고 하지만 여왕개미가 조직을 하고, 사람들을 훈련시키고, 평가를 하고, 지위를 부여하는 고도의 감독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자발적으로 자신의 본성을 따라 개미는 일하고, 일하는 모든 개미들의 협동적인 노력으로 개미의 공동체는 생존을 해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노동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노동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 결코 아닙니다. 죄가 없을 때도 하나님이 인간을 노동하기 위해 창조하셨고, 노동을 통해서 인간 자신이 좀 더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고 행복하고 다른 사람들을 도움으로 그들도 온전하게 만들어 그들을 행복하게 하는 데서 인생의 의미를 찾도록 만드셨습니다. 그것이 올바르고 효과적인 노동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알아야 했고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여야 했던 것입니다. 죄가 들어온 다음에 인간의 특권인 노동이 고통을 동반하게 되었고 많은 노동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결실을 맺지 못하게 된 것이 죄의 결과이지 노동 자체가 형벌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 혼자서 직접 모든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창조하셨다면 창조된 세계를 당신 혼자서 유지하는 일도 불가능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인간의 노동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 세계를 통치하시는 일에 참여하게 하신 것입니다.
지금은 사회가 좋아져서 비교적 차별이 아직도 많이 존재하지만, 노골적인 차별은 줄어들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초등학교에서 말입니다. 저희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물론 훌륭한 선생님도 계셨지만 많은 경우에 부모의 재력 그리고 학교에 얼마나 자주 찾아와서 선생님들에게 잘하느냐에 따라서 아주 뚜렷한 차별 대우를 받았습니다. 당연히 아이들이 방과가 끝나면 모두 집에 가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특정한 아이들을 집에 가지 말고 남아있도록 부릅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을 데리고 일을 하십니다. 자료를 정리한다든지 혹은 당신이 하는 일들을 돕도록 아이들에게 심부름을 시킨다든지 합니다. 원래 선생님이 하셔야 하는 일인데 아이들을 거기에 참여시키는 것입니다. 남아있는 아이들이 박탈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특권의식을 느낍니다. 선생님이 우리를 특별히 생각하셔서 당신의 일을 위해 우리를 남게 하셨고, 우리는 선생님 일을 거들고 있다는 데에서 특별한 대우를 받는 느낌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먼저 간 대부분의 학생들은 소외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안에서 노동을 위해 부름을 받은 인간의 모습입니다. 노동 없이는 인간이 자신을 완성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노동은 가치 있는 바를 실천에 옮기는 수고이고, 그 수고를 통해서 인간은 의미 있는 삶을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되는 것과 어떤 사람이 일하는 것은 하나입니다. 사람 됨됨이가 어떠하면 일하는 것도 그 됨됨이를 따라가게 마련이고, 어떤 사람의 일함이 이러저러하면 그 사람의 됨됨이도 이러저러함을 따라가게 마련인 것입니다. 결국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행동을 하고, 쌓은 악에서 악한 행동을 하는 것이니, 악한 행동을 하는 사람은 점점 더 악인이 되어 가고 선한 행동을 하는 사람은 선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노동을 어떻게, 무엇을 위해서 하느냐가 그 사람의 됨됨이를 결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에 앞서서 먼저 삶의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무슨 노동을 해야 할지를 깨닫게 되고 그 노동을 가치와 의미로 연결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삶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면 헛된 일에 인생을 낭비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인생의 목적을 깨닫지 못한다면 가장 바쁘게 사는 사람이 가장 게으른 사람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하지도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이 인간의 마땅한 도리인데도 안 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로마서 1장 21절은 그 이유를 "...사람의 생각이 허망해지고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기" 때문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게으름은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합당한 의무를 행할 충분한 정신의 힘을 발휘하지 않는 모든 것이 게으른 것입니다. 지혜자는 누군가에게 일을 시켜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두령과 감독자들도 세워 보았고 통치자들도 세워 보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으른 자는 어쩔 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는 게으름의 뿌리가 그릇된 자기 사랑에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마땅히 행하여야 할 의무인데도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억지로 하는 것이 바로 게으른 것입니다.
자, 인생의 목적을 모르고 삶의 의미를 모른다고 칩시다. 그렇게 될 때 인간은 결국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살게 마련입니다. 젊어서는 인간이 너나 할 것 없이 부글부글 끓는 욕망을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 욕망을 통제하지 못할 때 그 사람은 더욱 강한 마음의 힘을 느끼며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일을 위해서 부지런히 힘과 열정을 쏟고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아야 할 터인데 욕망에 시달려 잘못된 일을 선택하고 그 일을 위해 힘을 소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주겠습니까?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노동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그것은 우리의 인생을 의미 있고 가치 있게 하는 참된 노동이 아닙니다. 그냥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 죄를 지으며 욕망을 따라서 욕망의 노예가 되어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 당시에는 아직 살아갈 힘이 있고 또 이 세상에 젊음이라는 자원이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그런 날들이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착각일 뿐입니다. 언젠가는 젊음도 지나가고 인생도 지나가고 더 이상 그렇게 욕망을 따라 살 수도 없는 처지가 됩니다. 그때 인생의 비참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할 수 있는 날은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땅은 언제나 거기 있지만 씨 뿌릴 때는 정해져 있습니다. 때가 지나면 할 수가 없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종교라고 하는 것은 결국 마땅히 하여야 할 바와 자기가 하고 싶은바 사이의 갈등을 어떻게 조절하는가 하는 것이 종교가 가지고 있는 힘입니다. 모든 사람이 올바른 일을 하고 싶고, 선한 일을 위해 노동하고 싶어하는 마음으로 충만하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때 신앙은 종교의 힘을 발휘합니다. 그래서 그 신앙의 힘으로 육신이 원하는 바를 꺾는 것입니다. 그것 없이는 누구도 참된 경건에 도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항상 열렬히 기도하고 싶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추운 밤 눈보라가 칠 때 집에 누워 있기보다 추운 밤길을 걸어 예배당에 나오고 싶은 사람은 아마 소수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꺾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꾸짖고 책망하여 원하는 바대로 행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마땅히 행하여야 하는 바대로 행동할 때 올바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자원을 가지고 있으면 이것이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젊은이들은 젊음이 있습니다. 젊음은 생명력입니다. 그런 생명력이 늘 유지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교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젊음이라는 자원이 유한하고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계속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자만하는 마음에 무엇을 위해 노동해야 할지를 깊이 생각하지 않고 육신이 원하는 욕망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원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지위를 가지고 말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지위가 높을 때 그것이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녀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린 자녀들에게 부모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모는 자신이 언제나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의 어린 시절에 상처를 주고 마구 군림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게 얼마나 가겠습니까?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권력이 사라지고 이제는 아이들에게 부모가 필요하지 않은 시기가 찾아옵니다. 그리고 부모에게 자식들의 사랑과 도움이 필요할 때가 찾아옵니다. 그때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특별히 그러려고 생각한 것도 아닌데 어느 날 잠자리에 드는데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오래전 일이었습니다. 자매 한 사람이 한사코 이혼을 했습니다. 초등학생 자녀가 두 명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매는 당시 꽃다운 나이였습니다. '아이들은 어떻게 할 거냐?', 별로 큰 관심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자주 만나 주지도 않는 것 같았습니다. 무엇 때문인지 오래전에 그 한 장면이 선명하게 어느 날 밤 떠올랐습니다. 그 아이들은 엄마 아빠가 이혼하고 얼마나 엄마가 보고 싶었겠습니까? 그 아이들에게는 엄마가 사실 마지막 울타리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엄마가 없습니다. 그리고 손가락을 헤아리면서 그때 그 초등학생 아이들이 몇 살쯤 되었을까 생각하니까 서른 살, 서른한 살이 되었습니다. 지금 그 자매는 노인이 되어 가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어떨까요? 지금은 아이들이 더 이상 엄마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럼 엄마는 아이들이 얼마나 필요할까요? 환갑이 넘어 65세가 되어 가는 나이에 사랑하는 자녀들이 결혼하고, 든든한 직장을 가지고, 엄마와 살 깊은 교제를 나누며, 한 가족으로 산다면 아이들이 도움을 받는 것입니까? 엄마가 도움을 받는 것입니까? 이렇게 상황이 역전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에 주어진 기회를 낭비하고 게으르게 허비하면서 그 쓰디쓴 결과를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원이 있고 지위가 있고 권력이 있을 때는 자신이 그것을 언젠가 잃어버리게 될 것이고, 그때 자신이 얼마나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연약하고 비천한 처지가 되는지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원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경제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도 똑같은 것입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진통제 같은 관계가 있고 보약 같은 관계가 있습니다. 진통제는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도움이 필요할 때 불쑥 나타나서 그 사람에게 기대려고 하는 것입니다. 누를 끼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한두 번이야 그 사람의 자비로운 마음 때문에 도움을 받는다고 한들, 늘 삶의 태도가 그런 사람들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보약을 가을에 먹는 이유는 기운이 없는 봄에 힘을 얻기 위해서 먹는 것입니다. 사람을 수단으로 대하지 않고 목적으로 여기면서 자비를 베풀고 그를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은 언젠가는 그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또 혹시 되돌려 거두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는 자신의 덕스러운 마음이 시키는 바대로 살았으니 후회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인생도 그런 것입니다.
마땅히 행하여야 할 일이라면, 그 일이 내 인생을 의미 있게 하는 하나님의 뜻이라면, 기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행하려고 해야 합니다. 이것이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본인이 행복해지는 비결입니다. 최선을 다하고 거기서 삶의 보람과 기쁨을 느낄 수 있도록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개미는 도덕적인 판단을 하지는 못합니다. 자기가 하는 일의 의미, 부지런하게 행하는 일에 의미를 모르고, 자연의 본성을 따라서 일할 뿐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의미를 뒤집을 수도 있는 능력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개미는 생각이 없고 단지 본성을 따라 살기 때문에 게을러질 염려가 없지만, 인간은 충분히 게으를 수 있고, 나쁜 일에는 매우 매우 부지런한 사람이 선한 일에는 지겹도록 게으를 수 있다는 것도 기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뜻을 알고 인생의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단지 일하는 기계가 아니라 마음에 사랑의 불꽃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선한 목표를 가지고 그 일이 반드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열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죽어야 할 이유를 갖지 못한 사람은 살아야 할 이유도 찾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지혜자는 개미를 보면서 두령도 없고, 감독자도 없고, 통치자도 없는데 스스로 부지런히 일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만난 많은 게으른 사람들의 삶과 개미의 모습이 너무나 대조가 되는 것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그들의 마음을 채찍질하듯이 개미를 보고 배우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인생의 지혜를 주고, 우리의 삶에 대해 충고도 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리의 말씀을 가르쳐 주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나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대신 살아 주지는 않습니다. 우리 삶의 주체가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스스로 깨닫고 부지런히 사는 사람이 아니면 그는 결코 행복하지 않은 것입니다. 욕망을 따라서 그 순간에는 너무 행복하다고 할지라도 주위의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고 그 사람의 죽음이 주위의 사람들에게 해방을 준다면 그는 진정으로 행복한 인생을 살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겉으로는 남이 부러워할 만큼 큰 만족을 누리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보람 없이 인생을 사는 그 사람이 홀로 잠드는 밤에 얼마나 외로웠겠습니까.
단테가 말했습니다. 있는 것을 없는 것으로 알고,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알 때, 그 마음에 순결한 사랑의 불꽃이 타오른다고 신국론에서 말했습니다. (단테는 그의 작품 <신곡>에서 ‘참으로 있는 것이 있는 것으로 알려질 때에 사랑의 불꽃은 타오른다’고 말했습니다. - 편집자주) 하나님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태어나야 할 이유 그리고 자신이 죽지 않고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합니다. 그것이 수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자리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관계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나 사이에 일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에게 인생은 한정되어 있고, 한정된 동안에 우리는 자원을 가지고 있고, 지위를 가지고 있고,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내가 왜 태어났는지를 알고, 내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일이 마음에 사랑의 불꽃이 되어야 합니다. 마치 그것을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인 것처럼 열정을 가지고, 거기에서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고, 거기서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거기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자신을 발견하고 살아감으로써 나와 함께 있는 많은 사람에게 누를 끼치는 대신 유익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을 받아 스스로 부지런하게 사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미래에 대비함
마지막 두 번째는 개미는 미래에 대비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할 수 있는 한정된 때에 부지런히 일함으로써 일할 수 없는 미래에 대비하는 것입니다. 본문 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개미는 겨울에 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그때를 대비합니다. 마치 농부가 봄과 여름에 열심히 일하여 가을에 곡식을 거두듯이 말입니다. 추운 겨울을 대비하여 개미는 일할 수 있는 때에 열심히 일을 합니다. 사람이 현재 게으른 것은 미래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적이거나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미래를 공정이 안다면, 인생에 대해 올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게으르게 살 수 있는 근거를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기에 기억을 하고, 현재는 지금 살고 있기에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래에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알지 못합니다. 야고보서 4장 13-14절은 이러한 인간의 한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자, 거기서 장사를 크게 하자, 1년 동안 머물면서 장사하면 엄청난 이익을 남길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그렇게 남긴 이익을 가지고 남은 기간 동안 행복하고 편안한 삶을 살자고 계획을 합니다. 그 계획은 인간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알고 계시면서도 유독 인간에게는 미래에 대해서 일체 보여 주시지 않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그래서 인간은 철이 들면서부터 미래를 알고자 하는 아주 강력한 욕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그리스 시대의 델포이의 신전에 가면 신들린 여자들이 유황 연기를 마시면서 신탁을 읊조립니다. 그 언어는 일반 사람이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옆에서 그 언어를 알아듣고 똑같이 신들린 상태에서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의 말로 통역해 주는 인물들이 있었습니다. 소위 '헤르메스'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해석자라는 뜻입니다. 물론 그 말이 올바른 해석이었는지를 입증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라도 미래에 대해 알고 싶었습니다. 미래에 대해서 알려주는 신탁들은 논리 정연하고, 질서 정연하고, 논문 같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휙 던져지는 격언처럼 주어지고, 이렇게 해석하면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고, 저렇게 해석하면 저렇게 할 수도 있는 말로 주어질 뿐입니다. 자, 중국의 고대 갑골문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전쟁이 있거나 혹은 국가의 큰일이 있을 때 거북이 등에 불을 쫴서 어느 쪽으로 줄이 나는지를 가지고 길흉을 판단해서 미래에 대해 알고 싶어 했습니다. 로마의 독재자였던 카이사르를 생각해 보십시오. 역사적으로 카이사르는 독재 정치를 꿈꾸고, 평생 독재자가 되려다가 원로원에 의해서 살해를 당하게 됩니다. 자기의 오른팔로 여겨졌던 브루투스가 칼로 그를 찔렀을 때 그 유명한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말이 나왔다고 셰익스피어의 희곡 율리우스 시저에게 남겼습니다. 그때에도 미래를 예언하는 점쟁이가 3월 15일에 당신이 죽을 거라는 것을 두 번이나 예언해 주었다고 나옵니다. 결국 모든 인간들은 미래에 대해 알고 싶어 했고, 그것을 알고자 하는 욕망을 가졌고, 또 그것에 대해서 관심이 없을 때, 때로는 불행을 자초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이런 미래에 대한 강력한 앎의 욕구를 가지고 있는데, 왜 하나님은 인간에게 미래에 대해서 가르쳐 주시지 않으실까요? 여러분들은 흔히 선지자라고 하면 미래의 일을 내다보는 신통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선지자들에게 그것은 주 업무가 아니었습니다. 아주 예외적으로 그의 선지자의 사역 중 천 분의 일, 만 분의 일에도 해당하지 않을 정도로 아주 예외적인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백성들을 교화하거나 혹은 바르게 하거나 소망을 주시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경우에 아주 드물게 미래에 대해서 마치 창호지에 바늘구멍을 내고 잠깐 보는 것처럼만 알려주셨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미래에 대해서 우리가 미리 아는 것이 우리의 인생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미래를 미지의 영역으로 남겨 두신 것입니다.
만약에 미래에 일어날 일을 우리가 안다면 어떤 일이 생기겠습니까? 나쁜 일이 정해져 있고, 나쁜 일이 일어날 것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미리 알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확정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 필연적이라면 하나님을 의지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차피 좋은 일이 일어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이렇게 되든 저렇게 되든 인간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일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가장 뛰어난 영성을 가진 사람에게도 그의 미래에 대해서는 미지의 영역으로 남겨 두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몰라도 궁금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한 가지 확신하는 것이 있습니다.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의지하면서 살면 내 인생에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믿고, 혹은 나빠 보이는 일이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결국은 하나님이 나를 축복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미래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더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고, 더더욱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살아야 할 이유를, 긴박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도 경건한 의미에서 불안한 마음을 품지 않으면 절대 기도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 안전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릇된 안전감이고, 그것이 부패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불안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거두시면 어떻게 할까, 내가 이러이러한 죄를 지었는데 하나님이 나를 버리시면 어떻게 할까, 이런 불안은 신앙이 없는 불안이 아니라 경건한 불안입니다. 더욱 순결한 영혼으로 살고 싶고, 온전한 사람으로 살고 싶은 것입니다.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을 보며 불안한 마음이 들 때 마음을 물같이 쏟으며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에는 항상 예측할 수 있는 일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뜻밖의 일이 생길 때 예기치 못한 상황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을 충분히 감당할 힘이 없을 때 우리의 인생은 파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마찬가지입니다.
외국의 어느 도시를 갔는데, 개혁신앙의 전통이 훌륭하게 보존되어 있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주일이 되면 거의 민방위훈련 수준입니다. 모든 동네가 셔터를 내리고 개미 새끼 하나 없었습니다. 너무 훌륭한 일인데, 동의할 수 없는 것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 동네 사람은 보험 드는 것을 매우 큰 불신앙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내가 청교도를 좋아해도 청교도에 대한 그런 해석에는 일도 동의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분들은 조상 대대로 보험에 드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부족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맞는 이야기입니까?
여러분, 질문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부터 문제가 있으신 겁니다. 돈통을 왜 맡기십니까? 매일 들어오는 것으로 먹이고, 베풀고, 끝내고, 다음날은 또 다른 걸 기대하시든지, 아니면 물고기와 보리떡을 놓고 기적을 일으켜서 먹이셔야지, 돈통을 왜 만드시고 그것을 왜 누구에게 맡기시는 것입니까? 무엇을 사 오라고 명령하시는 이유는 돈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 돈은 명령하신 그 순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필요 없을 때 이미 돈통에 그 돈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사랑의 원리가 이것입니다. 사랑의 가장 근본은 나의 존재로 인해서 누구에게도 누를 끼치고 싶지 않겠다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의 첫 발자국입니다. 아십니까? 그것이 먼 이웃, 먼 친척뿐만 아니라 자기 가족, 심지어는 자신의 자녀, 부모, 자기 아내나 남편에 대해서도 적어도 내 아내가 나의 존재 때문에 짐을 져야 하고, 내가 누를 끼치는 사람은 되지 말아야 되겠다는 욕구를 강력하게 갖는 것이 사랑의 출발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기본적인 윤리입니다.
두 번째, 남에 대해서는 반대로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누가 나에게 누를 끼쳤으면 참 좋겠다.' '내 아내와 남편을 넘어서 내 자녀, 내 부모가 힘들어하고 자신을 스스로 지탱하지 못할 때에 나에게 기대게 해 주고 싶다.' '친척을 넘어서 모든 인간, 나와 만나는 모든 사람이 나에게 누를 끼쳐서 조금이라도 그들의 고통이 감소된다면 내가 그렇게 하고 싶다.'라는 이중적인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의 윤리입니다. 그래서 제가 즐겨하는 말을 여러분들이 기억하실 겁니다. 그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에게 자신은 아무 사랑을 받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누구도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삶의 모본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그래서 사도 바울이 자신의 설교 속에서 말하기를 "주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 하신 바와 같으니라" 사도 바울이 어디에서 예수님의 그 어록을 채집했는지 신학자들도 잘 모릅니다. 그런데 확실히 예수님의 어록에 있었던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네 복음서 속에는 안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친히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느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자, 그런데 문제는 이것입니다. 우리가 예측할 수 있는 상황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 모두 오늘 자기 발로 걸어서 예배당에 왔습니다. 그런데 중풍으로 인해 누군가 자기를 휠체어에 태워서 도와주지 않으면 교회에 못 올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진 않지만, 일어난 모든 사람들은 그것을 10년 전에 예측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 기습당하듯이 뜻밖에 일이 생긴 것입니다. 그것을 항상 모든 사람에게 일어난 어려운 일은 내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인생에 있어서 충격을 덜 받는 것입니다. '그럴 수도 있지!', 그 훈련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싯다르타가 성 밖에서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충격을 받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왕궁에서 그런 사람은 왕자 곁에 얼씬거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런 상황이 계속된 환경 속에서 산다면 그가 과연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고민할 수 있었을까요?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쁜 것은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말씀드리려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우리의 인생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그때 지불 할 수 있는 자원을 자기 자신이 준비하면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경제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젊어서는 건강하니까 어디에서든지 가서 일할 수 있고 오라는 데도 많지만, 나이가 들면 오라는 데가 없습니다. 그리고 가더라도 대우를 별로 해주지 않아서 결국 더 이상 일할 수 없는 때가 옵니다. 그러면 나의 존재로 누군가에게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경제적으로 대비를 해야 됩니다. 자, 이것은 탐욕과는 구별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원리에 의해서 나의 존재 때문에 내가 사랑하는 가까이 있는 누군가에게 누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가지고 경제적으로 미래에 대비하는 것이 정상적인 삶입니다. 그러려면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이것이 한정된 시간에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정신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신의 힘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매우 큰 어려움을 겪는데도 그것을 어떻게 하든지 이겨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어려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정신줄이 끊어져 버립니다. 그때에 극단적인 선택도 불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요즘 우리들이 하는 말로 멘탈이 튼튼해야지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항상 부모 그늘 아래서 넉넉한 부모의 자원으로 내가 보호받던 환경만 내게 펼쳐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을 살아 보면 마음이 강한 사람이 최고의 자산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인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너무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어느 순간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그런 것들이 돈으로 해결이 됩니까? 안 됩니다. 해결할 수 없는 일들도 많습니다. 그것을 버텨낼 수 있는 정신의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인정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부분을 강하게 가지고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저런 부분을 강하게 가지고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여러 부분이 강한 사람으로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여러 부분이 약한 사람으로 태어납니다. 그리고 아무도 쓸모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은 아직 발견을 못 했기 때문이지 반드시 쓸모 있는 구석이 있습니다. 좋은 사회, 좋은 가정, 좋은 학교, 좋은 공동체는 그것을 발견해 주고 그렇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는 사회입니다. 성적 하나가 나쁘다고 짓밟아 버리고, 인생을 쓰레기 취급하고, 사업 한번 망했다고 낙인을 찍어 버리는 사회는 그런 점에서 좋은 사회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인정하지만 문제는 강하게 태어난 사람이든 약하게 태어난 사람이든 살아야 되지 않습니까?
강한 호흡기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당연히 살기가 좋습니다. 호흡기가 선천적으로 약한 게 태어난 사람도 숨을 쉬어야 합니다. 주어진 상황 안에서 자기 스스로 호흡기를 보호하고, 강화하는데 좋은 생활 습관을 들이고, 필요하면 좋은 음식을 섭취하고, 때로는 약도 복용하고, 극단적으로 필요하면 수술을 해서라도 숨 쉬고 살아가기에 적합한 인간이 되어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정신의 힘이 어느 한순간에 저절로 생겨납니까? 아닙니다. 어려서부터 책을 읽고, 생각하고, 삶의 사태들을 만나면 그것에 대해서 사색하고, 거기에서 어떤 교훈을 이끌어 내고, 다시 자신의 삶의 태도를 바꾸고, 그것을 내면화하는 길고 긴 과정을 통해서 인간의 정신의 힘은 서서히 서서히 연단 되어서 강한 힘을 가진 사람으로 변해 가는 것입니다.
보검은 예리하게 선 날로 바위를 내려쳤을 때 바위는 깨져도 칼끝이 손상되지 말아야 합니다. 평범한 철로는 그런 검이 나오지 않습니다. 좋은 쇠를 불에 달구고 뜨거워질 때 접어서 두드리고, 다시 달궈서 두드리기를 천 번을 해야 명검이 탄생한다고 합니다. 그 과정을 반복하면서 일반적인 쇠가 가질 수 없는 강한 쇠로 연단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정신도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 어린아이 때부터 부모의 과보호, 넘치는 세상의 자원으로 고민할 여지를 모두 없애 버리면서 자녀들을 돌보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흘릴 눈물은 흘려야 되고, 외로워져야 할 고독은 혼자 그 고독을 씹으면서 쓰디쓴 맛을 보게끔 잠시 그렇게 놔둬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적당히 발효되면 몸에 매우 유익한 음식이 되는데, 썩으면 치명적인 독을 가진 음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스스로 발효해낼 수 있는 정신의 힘이 부지런하지 않으면 개발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한순간 인생에 시련을 만났을 때 덜컹하고 분질러지면서 인생이 끝나는 것입니다. 이런 정신의 힘을 길러야 미래에 인생의 난관이 찾아올 때 정신적으로 큰 상황을 견디게 되는 것이고,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주체성을 잃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 우리 교회에 싸움을 잘하는 집사님 한 분이 있었습니다. 폭력배들과도 기꺼이 한판 뜰 수 있는 실력을 가지신 분이었는데, 폭력배는 아니고 신실한 신앙을 가지신 분이었습니다. 언젠가 싸움 잘하는 요령을 가르쳐 드릴까요 하면서 하는 말이 딱 하나라고 했습니다. 강한 주먹은 기본이고, 싸움을 잘하는 사람이 특징은 해머가 머리통으로 날라와도 눈을 감지 않고 똑바로 뜨는 훈련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은 상대방이 주먹을 자기의 눈을 향해 날려도 맞는 순간까지 눈을 안 감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상대방의 모든 움직임이 보이면서 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평범한 사람은 주먹을 돌리기만 해도 눈을 감아서 주먹이 날아오는 과정이 미지의 과정입니다. 대비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렇게 어려움이 생길 때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해머가 머리통으로 날아와도 얻어맞는 순간까지는 눈을 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폭력배와 싸움꾼의 기본이라고 합니다. 생각해 보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주먹이 안구를 향해 쉭 소리를 내면서 날라오고, 눈꺼풀은 2mm도 안 됩니다. 그것으로 가리나 안 가리나 눈퉁이를 한번 맞으면 밤퉁이가 되는 것은 어차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런 힘과 용기가 결코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반복되고 반복된 가운데 강인한 힘이 생기면서 자신의 인생이 어떤 난관을 만나고 상황에 처해도 그것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담력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힘을 기르지 않으면 능히 극복할 수 있는 시련 앞에 무릎을 꿇고 꽃다운 청춘이 허망하게 사라지는 것입니다. 작년 1월부터 8월까지 자살한 세 명 가운데 한 명이 20대 여성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십 대에 죽은 사람 두 명 가운데 한 명은 자살입니다.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결국은 정신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매우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분투하지 않으면 그런 정신의 힘이 우리에게 습득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연히 성철 스님의 법문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모든 죄 중에 가장 큰 죄는 게으름이니라. 놀랍지 않습니까? 단순히 게으름을 일하러 안 가고 집에서 농땡이 부린다는 의미로 그분이 말하는 것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결국은 인생의 참된 이치를 깨달으려는 정신의 부지런함이 없는 게으름이 인간을 파멸로 이끄는 것입니다. 그래서 탐진치(貪瞋癡), 탐욕과 어리석음과 헛된 욕심에 매몰될 때에 자신이 훈련된 사람들은 그것을 분간하면서 거기에 항거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독교적인 표현으로 말하자면 눈은 쏟아지고, 바람은 불고, 억수로 춥습니다. 기도를 하러 가야 하지만 죽어도 가기가 싫습니다. 그때에 정신의 힘이 없으면 쉽게 굴복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자고 내일부터 하자.' 먹기 좋아하는 사람이 맛있는 거 만나면 항상 내일로 다이어트 미루듯이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꺾는 것입니다. 꺾는 것들이 반복되면서 자기를 통제하고 꺾을 수 있는 내적인 은혜의 힘으로 우리 안에 함께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이 참된 힘을 가지고 올바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벌써 설교가 1시간을 넘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리다가 아마 끄고 나가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정신의 힘이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겨울이 올 때 파산하지 않기 위해서는 씨를 뿌리고 농사를 짓듯이 신앙과 경건을 위해서 바로 오늘 부지런히 다시 자신을 단련해야 하는 것입니다. 시련이 닥칠 때 믿음으로 그것을 이겨서 더 강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사람이 있고, 오히려 은혜에서 미끄러져서 믿음을 버리고 배교적인 삶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차이가 무엇입니까?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럴싸한 모습으로 나를 가장하고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을 보여도, 내 인생은 남의 평가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있느냐 없느냐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연극은 대본대로 하면 되지만, 실제로 진검으로 맞붙을 때는 실력이 있는 사람은 살고 실력이 없는 사람은 죽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바로 그런 진검승부와 같은 영적 전투라고 성경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사도는 이러한 사실을 히브리서에서 자기의 양 떼들에 간절히 바라는 바로 표현합니다. 6장 1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그 믿음의 조상들을 본받는 거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뒤집으면, 만약에 게으르면 너희는 결코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옛 신앙의 선조들과 같이 그렇게 살 수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게으른 자는 죽은 마음과 영혼으로 산 사람입니다. 거기에는 인생의 진정한 보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젊은 시절 능력이 있고, 세상에 자원이 있고, 미모도 있고, 능력도 있어서 온갖 즐거운 일을 모두 누리며 살았다고 칩시다. 그것을 보면서 부러워하는 사람들은 그 사람과 똑같은 수준의 인간들만 부러워합니다. 인생의 참된 의미를 발견한 사람들은 그것이 얼마나 쓸데없는 일인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물고, 뜯고, 아귀다툼을 하고, 자신의 물질의 이익, 명예, 지위를 위해서 사람들을 헐뜯고, 모함하고, 짓밟는 일을 서슴지 않는 사람들의 미래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들을 모두 잃어버렸을 때 사람도 없습니다. 그리고 소외되어서 외로운 체 혼자 던져진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누가 그런 사람을 좋아하겠습니까?
보십시오. 아이들이 엄마 아빠를 간절히 원하고, 그 품을 그리워할 때가 몇 년이나 되겠습니까. 한 살부터 열세 살까지입니다. 빠르면 열두 살부터 사춘기에 들어서면서 원하지 않습니다. 길어야 십 년에서 십이삼 년 정도입니다. 그때 열심히 씨를 뿌리고 아이들에게 사랑을 주었던 부모는 자녀들의 마음에 항상 부모가 살아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부모가 정말 아이들이 그리울 때 아이는 부모를 원하지 않습니다. 결국은 뿌린 대로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향해 게으른 사람은, 우리가 주님을 향해 게으르면 주님이 손해가 아니라 게으르게 사는 우리 자신이 손해입니다. 왜냐하면 죽은 영혼으로 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일할 수 없을 때가 옵니다. 그때 우리는 가능하면 누구에게도 누를 끼치지 말아야 됩니다. 저의 간절한 소원을 우리 식구들에게 얘기하면 질색을 하지만, 진지하게 제가 말했습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어느 날 내가 기억력이 사라지고 치매가 걸리면 나 때문에 고생하지 말고 요양원에 보내고 면회만 오라고 했습니다. 나는 누구에게 폐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족 중에 누가 그렇게 된다면 끝까지 희생을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무엇으로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한량없이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 내 마음에 있는 사랑, 모든 자원이 모자라 고통받는 사람을 가엾이 여기는 자비로운 마음, 하나님이 내게 베푸신 은혜와 사랑 때문에 그 신세를 지고 일평생을 시련 속에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나에게 기대어, 나에게 누를 끼쳐, 나로 하여금 주님께 소속감이 있게 하라
(찬양)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이것은 우리가 하늘의 자원이 정신의 힘을 충만하게 소유할 수 있을 때 가능한 삶입니다. 오늘 시련 속에서도 우리가 말씀을 붙드는 이유이며, 고난 속에서도 우리가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이유입니다. 더 이상 일할 수 없을 때 우리는 미래를 대비하지 않은 과거에 대해 후회할 것입니다. 시련의 날에는 우리에게 굳건한 믿음이 없는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고, 믿음을 위해 열심히 씨를 뿌리고 거두지 않았던 것을 뉘우치게 될 것입니다. 더욱이 인생에 끝이 올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에 우리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이제 인생의 뜻을 환하게 알게 되었으니 핑계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살아온 인생을 보니 너무나 많은 날들이 무지 속에서 낭비되었고, 그 인생에 깨달음이 있었을 때는 그렇게 살고 싶은 의욕이 없었기 때문에 허비되었습니다. 소중한 시간은 모두 흘러갔고 이제는 정말 더 잘 살고 싶은데 더 이상 시간이 없습니다. 그때에 우리의 후회가 얼마나 클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미래를 대비하면서 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선물이며 현재 살아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어제 죽은 사람은 못 받은 선물입니다.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현재'라는 말과 '선물'이라는 말이 영어에서 같은 단어입니다. 그분의 뜻이 있어서 지금, 오늘, 여기에 우리가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 중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의 인생 하루하루는 너무나 소중한 날들이고, 사랑하면서 살기에도 모자라는 날들입니다. 너무나 많은 인생의 날들을 무지 속에 허비했기에 이제는 더이상 무지하게 하루라도 보낼 수 없고, 게으름과 태만 속에 낭비해 버린 날들이 너무나 아깝기 때문에 오늘 남겨져 있는 이 하루를 우리가 그렇게 살 수는 없습니다. 알지 못할 때는 목표가 없어서 인생을 낭비했고, 이제는 살아 있는 이유를 알게 되었으니 힘을 내야 합니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살아서, 열렬히 살아서 마지막 순간에 '아멘, 주 예수여. 나를 받으옵소서.', 고백할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0. 새로운 삶을 찾아서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로마서 12장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 인정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골격과 같은 위대한 교리들을 가르친 바울은 로마서 12장에서 신자의 새로운 삶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삶 전체가 하나님을 향해 영적인 예배로 드려지는 생활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2장을 시작하면서 12장 1절 하반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말합니다. 사도의 논리는 단순합니다. 예배에는 좁은 의미의 예배와 넓은 의미의 예배가 있는데 모두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인 예배라는 것입니다. 좁은 의미의 예배는 주일에 10시, 11시 혹은 12시, 2시에 모여서 드리는 예배입니다. 예배에 드리는 정신 하나님을 경배하고 높이고 그분의 말씀에 온 마음으로 복종하며 그 뜻을 알고 싶어 하는 것처럼, 넓은 의미에서 삶에서도 그렇게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좁은 의미의 예배는 넓은 의미의 예배를 잘 드리기 위함이고, 넓은 의미의 예배는 좁은 의미의 예배를 드리기 위한 준비이니, 산 것만큼 예배할 수 있고, 예배한 것만큼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신자의 삶에 황금과 같은 계명입니다. 예배는 삶을 위해 있고, 삶은 예배를 위하여 있으니,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면서 사는 것이 의롭다 함을 받은 성도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II. 새로운 삶을 찾아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얻었으니,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삶을 찾아서 사는 것입니다. 예배한 것만큼 살고, 또 산 것만큼 예배합니다. 한 사람이 예배 자세가 전혀 되어 있지 않고, 예배에 나와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드리지 못하고 있다면, 그는 예배에 들어오기 직전까지 그런 정도의 삶을 살던 사람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그 고리를 끊지 않고 어떻게 그 사람이 새로운 삶을 찾아갈 수 있겠습니까? 한 사람이 훌륭하게 예배를 드리고 있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회개가 따를 것이고, 또 그렇지 않다면 감사가 찾아올 것입니다. 예배의 감격은 삶의 감격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니, 예배의 감격 없이 삶의 감격도 없는 것입니다. 맨날 살아가는 것이 힘들다고만 말합니다. 모든 인류가 다 그랬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얘기해 봐야 사람들이 귀담아듣지도 않습니다. 여러분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들어주겠지만, 그것도 반복하면 듣기 싫어하고, 여러분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그렇게 말하는 여러분들을 측은하게 여기지도 않습니다. 원래 인생이 그렇게 피곤하고 힘든 것입니다. 누군들 그렇게 살지 않았겠습니까. 새로운 삶을 찾아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떤 삶이 하나님께 영적인 예배로 받아들여지는 삶입니까? 성경은 그것을 아주 간단하게 말합니다.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어주고, 선한 일을 도모하고, 원수에게 스스로 복수하지 않고 오히려 자비를 베푸는 삶이라고 로마서 12장 14절부터 20절에서 이 윤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이것은 사랑의 삶입니다. 결국 새로운 삶의 비밀은 새로운 사랑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결국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자동차가 있다 할지라도 엔진을 돌릴 수 있는 기름이 없다면 가지 못할 것입니다. 신자의 삶도 그러합니다. 신자의 심장이 삶을 움직이는 엔진이라면, 그 심장이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펌프질할 때 그 사랑으로 우리는 사랑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아침마다 새롭습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지루한 날이 없습니다. 눈뜨면 오늘 아침은 어제와 같은 아침이 아니고, 해가 져도 그것은 슬픔 속에 잠드는 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날마다 새로운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품을 날마다 새롭게 발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날마다 새로움을 느낍니다. 그러면 이런 하나님의 사랑이 신자의 마음에 가득하여 인생을 살아가야 할 텐데 이런 하나님 사랑으로 사는 삶의 방식은 어떤 것일까요? 오늘 이 말씀을 드림으로써 열 번의 '게으름에서 벗어나라'는 시리즈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A. 게으르지 말라
첫 번째는 게으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영적 예배로서의 신자의 삶에 두 가지 국면을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게으르지 않는 것과 주를 섬기는 것입니다. 소극적으로는 게으르지 않은 삶을 사는 것이고, 적극적으로는 주님을 섬기며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11절은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말합니다. 먼저 게으르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그것도 신자에게 경고합니다. 이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조차도 게으르게 되기가 얼마나 쉬운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부지런하여'라고 번역된 부분은 '테 스푸데(tespouthe)'라는 그리스어인데, '빨리, 속히, 간절히'라는 뜻을 가진 '스퓨도(speudo)'라는 단어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이것은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라고 우리말 성경에 번역되었는데, New NIV 성경에서는 "열정에 있어 결코 모자람이 없게끔"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열정에 사로잡히지 않은 모든 삶이 게으른 삶이라는 것입니다.
신자의 삶은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예배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구원의 은혜의 감격에서 비롯된 삶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진 성도들에게는 구원이 그저 흔히 있는 일상적인 진부한 이야기일 뿐이지만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매일매일 새로운 사실입니다. 나 같은 사람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원수였던 내가 그분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인 내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이 어느 순간도 당연하게 느껴지거나 평범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능가할 수 있는 행복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자의 삶은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인 예배인데, 예배자의 마음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피에 적셔져 있어야 가능한 예배인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의 감격이요, 또 한편으로는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입니다. 나 같은 죄인이 용서함 받아서 주 앞에 옳다 함 받은 어린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을 받았네. 나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위해 흘리신 보혈 때문에, 성령께서 내 마음에 주신 믿음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아침마다 생각해도 신비한 일이고, 이 사실이 놀랍기 짝이 없습니다. 이 감격이 삶을 살아가게 할 때 그의 삶이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인 제사가 되는 것입니다. 감격하는 사람의 마음이 냉담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도 가슴 벅차게 감격하면서 권태감 속에 게으를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놀라운 성경 구절을 여러분들에게 보여드리겠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4절입니다.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자, 성경 구절을 보십시오. 마음이 약한 사람은 격려하라고 합니다. 용기를 주라는 뜻입니다. 그도 잘못한 것이 있겠지만 기 죽이지 말고 격려를 해주어서, 스스로 힘을 낼 수 있도록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힘이 없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랑으로 꼭 붙들어 주라는 것입니다. 혼자서 서지 못한다고 나무라지 말고, 자신도 그렇게 힘이 없을 때 누군가가 붙들어 주었던 것처럼 꼭 붙들어 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 여기에는 성질이 괴팍한 사람, 심지어는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 심지어는 죄를 지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오래 참으면서 기다려주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성경 구절을 보십시오. "….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라고 했습니다. 우리말 성경은 번역이 애매합니다. '권계하다'라는 번역은 그리스어 원어로 볼 때 '경고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군부대 혹은 군사기지 가까이 가면 뭐라고 붙어있습니까? 경고(Warning), 접근하면 발포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때 쓰이는 말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한마디로 얘기해서 마음이 약한 자들은 격려해서 도와줄 수 있고, 힘이 없는 자들은 붙들어 줘서 도와줄 수 있고, 모든 사람은 오래 참아서 도와줄 수 있는데, 게으른 사람은 딱히 도울 방법이 없다는 뜻입니다. 경고하는 것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다가는 죽는다', '파멸에 이른다.'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군부대에서 접근하면 발포한다고 써 있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왜 접근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생각하지 않고 접근하면 군사 시설에 대한 공격으로 알고 발포하여 사살하겠다는 뜻입니다. '군사 시설에 왜 접근해야 하는지 상세하게 먼저 설명하면 발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라고 경고판을 써 붙이는 군부대는 없습니다. 사정이 어떠하든지, 술을 먹고 부대에 쳐들어오던지, 맑은 정신으로 들어오던지, 심지어 길을 잘못 들었던지, 접근하면 발포한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 성경 구절을 읽으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일 먼저 나옵니다. 그러니까 게으름은 가장 무서운 악입니다.
정신이 게으를 때 그가 진리를 알고자 할 리가 없습니다. 정신이 게으른 사람이 만물 속에 깃들인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찾을 리가 없습니다. 정신이 게으른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생각하며 그분의 성품이 묻어나는 자신의 삶을 측량할 길이 없습니다. 육체가 게으른 사람이 가진 것이 있다면 허비해 버릴 것이고, 만약에 가진 것이 없다면 늘 남의 신세를 지면서 살아가야 될 것입니다. 게으르게 사는 것은 가슴 벅찬 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감격이 없으니 예배의 감격, 사랑의 감격, 성화의 감격, 섬김의 감격, 이런 것이 있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을 미워할 때, 그 미움이 얼마나 치열한지 생각해 보십시오. 며칠 전에 기사를 보니까 러시아의 유명한 역사학자가 20대 학생과 동거를 했습니다. 전처의 자식들이 찾아왔는데 이 여자가 아주 심하게 모욕을 주었습니다. 격분한 역사학자는 총으로 이 여자를 죽였고 시신을 절단해서 강에 던졌는데 팔이 떠올랐습니다. 그 팔을 다시 강물 속에 집어넣으려고 뛰어들었다가 구조가 되었고, 결국은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한때는 사랑했으니까 가정도 버리고 같이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미워하는 그 순간, 사랑의 깊이만큼, 정확히 똑같은 미움이 폭발하듯이 온몸을 삼켰습니다. 미움조차 그렇게 치열하다면 미움의 반대인 사랑은 얼마나 치열하겠습니까? 그래서 아가서에서는 사랑을 불길에 비교하지 않습니까? 끊을 수 없는 불길 말입니다.
성도의 다른 이름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어떻게 게으를 수 있겠습니까? 냉담한 사랑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신자의 삶은 자기 같은 죄인을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는 생활입니다. 은혜를 받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현재적으로 경험됩니다. 이천 년 전에 십자가의 사건은 이미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오늘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될 때 이천 년 전이 아니라 오늘 내 마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은 재현됩니다. 그래서 그 고난에 현재적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에서 멀어질 때 예배는 권태롭고, 권태 속에서 예배를 드리는 그의 삶은 일주일 동안 살아 볼 필요도 없이 이미 정해진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열심을 품고"라고 말합니다. 그냥 평범한 사랑이 아니라 열심을 품은 사랑, 문자적으로는 "불타는 정신, 불타는 마음(pneuma)을 가지고"라는 뜻입니다.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거세게 타오르는 산불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늘 높이 치솟는 불길은 모든 것을 다 태우기까지 결코 꺼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그런 불타는 마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구원과 함께 새롭게 부여받은 인생의 목적을 따라 불꽃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인가 모자란 게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여 불꽃처럼 사는 거기에만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게으르지 마십시오. 저는 앞으로도 대략 이십 번 정도 더 설교하고 싶습니다. 해가 바뀌었으니 이쯤에서 마무리를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서 접는 것이지, 성경의 가르침 다했기 때문에 접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게으르게 사는 모든 사람을 불쌍하게 여깁니다.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죽은 삶이, 죽음 이후에 무슨 삶이 있겠습니까? 게으르지 말고 열렬히 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주를 섬기라
마지막 두 번째, 주님을 섬기라입니다. 사도는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말합니다. 사도는 구원받은 신자가 단지 게으르지 않을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주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를 대신해서 세상을 통치하고 계시니, 예수를 섬김이 곧 삼위일체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여기서 '섬기다'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그리스어로 둘류온테스(Duleuontes)인데, 대등한 근로 관계에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둘로스(Doulos)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종 혹은 노예로서 봉사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흔히 아는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노예 정신으로 섬기는 사람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것을 말하는 사도나, 이 편지를 받고 있는 로마의 그리스도인들도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섬기라는 단어를 볼 때마다 하나님의 종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인 사람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그림을 출애굽기 21장에서 만나게 됩니다. 거기에는 노예가 된 사람이 자유인이 되는 규례에 대해 적혀 있습니다. 한 사람이 노예가 됩니다. 히브리인이 노예가 되는 것은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방법이 빚에 허덕일 때 자기를 노예로 파는 것입니다. 돈을 받고 그 집에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6년이 지나고 7년이 되는 해에는 히브리인 종을 자유인이 되게끔 해주는 것이 율법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노예제도는 이렇게 해방의 길이 열려 있는 노예제도였기 때문에 다른 나라의 야만적인 노예제도와는 달랐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타락하면서 하나님을 깔보고 자기의 경제적인 이득을 위해서 이런 계명을 안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무자비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유인이 되어서 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만약에 히브리 노예로서 그 집안에 들어와서 주인이 지정해 주는 또 다른 노예와 결혼하고 자녀를 낳았습니다. 이 사람이 6년이 지나 7년째 해방이 되어 나가려면 처자를 다 두고 나가야 합니다. 주인에게 속한 사람들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처자를 너무 사랑하고, 상전도 사랑합니다. 그래서 굳이 떠나가서 가족들과 헤어져서 홀로 자유인이 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 노예는 상전과 함께 재판장에게 갑니다. 그리고 사실을 다 진술하고 재판장은 이것이 허위가 아닌지를 확실하게 확인한 후에 문이나 문설주로 이 노예를 데려가서 송곳으로 귀를 뚫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언약으로, 종신토록 상전을 섬긴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7장 22절에서 이 비유를 가지고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신분을 말합니다.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한마디로 그는 노예의 신분입니다. 노예처럼 섬깁니다. 그러나 강요받은 노예의 삶이 아니라 자원하는 노예의 삶입니다. 동기는 상전을 사랑하고 아내와 자식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었습니다. 신분은 노예이고, 노예는 결코 상전과 맞먹는 법이 없지만, 이런 노예를 상전은 사실상 가족처럼 여기며 사랑해줍니다. 그러면 그는 더욱 충성스럽게 살아가면서 자비로운 상전과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입니다. 주인에게 기쁜 일이 종에게도 기쁜 일이고, 주인에게 슬픈 일이 노예에게도 슬픈 일이 되어서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으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을 섬기라고 하십니다. 우리 자신도 섬길 여유가 없는데 당신을 섬기라고 하십니다. 이기적인 현대인들에게는 짜증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 행복하고 보람있게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돈이 많고 그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어떤 결국에 이르게 되겠습니까? 재주가 뛰어나서 온 세계 사람들의 박수와 갈채를 받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아닙니다. 행복합니까?
어려서부터 제가 너무 좋아하는 배우나 혹은 유명 가수들이 자살하는 것을 보면서 인생의 혼란을 느꼈습니다. 어렸을 때는 아니고 이미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지만 보디가드를 불렀던 휘트니 휴스턴도 결국은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저는 그녀의 노래를 너무 좋아했습니다. 모자라는 것 없이 넘치도록 가진 사람이 왜 그랬겠습니까? 허무함을 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자기를 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결국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인생이 그런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이 부족한 것이 있어서 당신을 섬기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이니, 행복이 그분 자신이므로 그는 행복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결국 게으르지 말라고 경고하시는 이유는, 게으르면 결코 인생을 의미 있게 살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하든지 주님을 섬기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신자는 자기가 받은 구원의 은혜에서 소명을 발견한 사람입니다. 그것은 잠시 있다가 사라질 존재로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경륜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이 세상이 하나님의 것임을 알게 해주는 문화를 건설해 나가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이 세상에 충만하게 하는 보람을 기쁘게 여기며 인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위해 세상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잠시 다가올 우리의 인생에 미래의 죽음을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허무하지 않은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뜻을 위해 섬기는 삶이 그의 인생에 보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열 번의 설교를 들은 여러분들은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서 삶의 지표를 확정하십시오. 모든 게으름은 긍휼히 여길 대상이 아니라 경고받을 대상이니, 더 게을러 이변을 당하지 말고 돌이키십시오. 그리고 죽어도 후회하지 않을 하루하루의 삶을 살아 주님을 섬기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