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하나님의 사랑
(2006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6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교회 삼위의 모상(엡5:25下) 2006.1.16 새해말씀사경회(저녁) 1
2. 사랑과 교제(엡5:25下) 2006.1.17 새해말씀사경회(저녁) 22
3. 사랑과 일치(엡5:25下) 2006.1.18 새해말씀사경회(저녁) 44
4. 모두들 그리스도의 몸으로 여김(엡5:25下) 2006.1.19 새해말씀사경회(저녁) 68
5. 교회와 사랑의 확장(엡5:25下) 2006.1.20 새해말씀사경회(저녁) 90
1.교회, 삼위의 모상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엡 5:25 下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에베소서입니다. 이 에베소서는 구원과 교회의 대 서사시라고 불리 울 정도로 아주 아름다운 복음의 교리들을 담고 있는 깊이 있는 책인 동시에 실제적인 책입니다. 이 서신서가 쓰여 진 것은 도 바울이 로마에 옥에 있을 때 주후 62년경에 이 서신을 썼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 서신의 내용은 심오한 철학적인 내용까지 포함하는 아주 깊이 있는 교리들을 담고 있고, 그리고 그 교리를 어떻게 자신에 삶 속에 적용하며 살아가야 할 것인지 하는 문제를 담고 있습니다. 창조와 구원, 교회와 성도의 생활 등등을 아우르고 있는 정말 아름다운 서신서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에베소서는 늘 그러하듯이 1장부터 3장까지 전반부에서 심오한 철학적인 내용을 포함하는 기독교의 교리를 다루고 4장, 5장, 6장에서는 성도의 실제적인 삶을 다루는 가운데 특별히 교회와 그리스도, 남편과 아내의 유비를 통해서 성도가 어떻게 남편으로서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로서 남편에게 순종하며, 가정 안에서 교회의 모습을 이루어 가고 교회 안에서 그 가정의 모습을 이루어 가야 할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번에 5일 동안 우리들이 생각 해 볼 교리는 바로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무엇이고 성도가 함께 살아가는 것이 무슨 의미이며, 그리고 교회는 이렇게 모여서 결국 무엇을 하고 어떤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존재하는가. 그리고 어째서 교회는 자기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는 그런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의 몸인가. 그리고 성화는 이 교회에서 생활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런 문제들을 우리들이 살펴보게 될 것이고 이 빛 아래서 아마 오랫동안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성화에 진전이 없고 핍절한 삶을 살았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보게 될 것이고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삶을 향해 생애적으로 고칠 수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마지 않습니다.
II. 삼위 안에 있는 사랑
A. 개별적 위의 질서와 완전하심
우선 우리들이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오늘 첫째는 교회가 바로 삼위의 모상이라는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이 모상은 베낀 것이다. 혹은 모형이다. 그런 뜻이죠. 빛 비추인 모형이다. 그런 사람을 보고 그렸다든지 찍었다든지 하는 그런 걸 얘기하는 거죠. 사진이 우리를 찍은 사진이 우리의 모상이 된 거죠. 그렇죠? 그런 점에서 우리는 삼위 하나님의 모상이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그 하나님의 모상이다. 하나님의 모상이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이 계시지만 그 하나님은 각각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에요. 성부 성자 성령은 각각 완전하신 하나님이신 동시에, 다른 성부나 성자 때문에 성령이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하나님이신 동시에 또 이 하나님은 각각 인격을 가지고 계서서 한분 한분이 완전한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이 하나님은 삼위의 하나님은 항상 세 하나님으로 일하지 아니하시고 한 하나님으로 일하시는 거예요. 성부가 계신 곳에 성자와 성령이 계시고 성령이 일하시는 곳에 성부와 성자가 관여하세요.
B. 삼위 하나님의 사랑의 교통
이러한 삼위 하나님의 존재의 양식은 본질적으로 사랑의 교통이에요. 성부 성자 성령께서 서로 사랑하시고 그렇게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부르는 거죠. 그런데 이 하나님은 그런 사랑을 가지고 이 세상을 창조하셨어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사랑으로 창조하셨지만 그 사랑과 함께 지혜가 있으셨어요. 그 지혜는 바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계획의 근원이 되요. 그 하나님만이 아시는 탁월한 지혜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창조된 세상은 이 창조된 세상으로서 하나님께서 가기를 원하시는 방향이 있는데, 그것도 하나님이 지혜 가운데 정해 놓으셔서 인간들에게 당신의 사랑과 지혜를 나누어 주심으로 그 사랑과 지혜안에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드신 목적을 실현해 가도록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만드신 거예요.
III. 신자 안에 있는 영생
A. 영생의 의미
그런데 이제 교회는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하는 교통이 있는 곳인데 이 교회를 말하기 전에 먼저 신자를 이야기해야죠. 그 신자 특별히 이 신자가 영생을 얻은 자거든요. 신자의 또 다른 말은 성도지만 신자나 성도나 모두 신자와 성도가 아닌 사람과 다른 점이 뭐냐면 영생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에요. 그러면 도대체 우리들이 늘 사용하고 있는 이 영생의 의미가 뭐냐? 이 영생의 의미는 원래 고유한 의미로 본다면 이 영생의 뜻은 그냥 영원이 사는 거예요. 그러니까 영생은 영사의 반대말이죠. 영사는 영원히 죽는 거예요. 이게 영생의 고유한 의미에요. 그러니까 신자는 영원히 살게 된 사람이에요. 앞으로 영원히 살 것이 아니라 지금 이미 그 영원히 사는 것이 시작이 되었고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죽지 않고 살 사람들이 바로 신자고 이러한 영생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교회의 구성원이 되는 거죠.
그럼 여러분들은 이렇게 묻고 싶겠죠. 아니 신자도 죽고, 죽으니까 교회에서 추도예배도 드리고 그러는 거 아닙니까. 그렇죠. 그래서 영생의 고유한 의미는 영원히 사는 것이지만, 이것을 실제 적용할 때 적용하는 의미에서 본다면, 이것은 그냥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에요. 시간 속에서 죄와 부패로 인해서 아주 더럽고 힘이 없어진 이 육체를 간직한 채, 목숨이 붙어서 기다랗게 시간 속에서 생명이 연장되는 이것을 누구도 행복이라도 이야기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적용한 의미에서의 영생은 어떤 것이냐 하면, 삼위 하나님과 인간이 연결이 되는 것이죠. 그 연결 속에서 신자가 삼위 하나님에게만 있는 그 어떤 것들을 공급받으면서 사는 것, 그러한 생명적인 관계를 가리켜서 우리가 영생이라고 불러요. 그런 관계를 누리면서 사는 것이 바로 영생이에요.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어떻게 하다 보니까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를 가지고 목적이 있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거거든요. 그리고 하나님이 전체적인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신 이 세상을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서 이 세상을 돌보고 가꿀 사명을 인간에게 주셨어요. 그 일은 너무나 엄청난 일이죠. 그러니까 그냥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그냥 뚝 떨어진 하나님께로부터 창조되긴 했지만 더 이상 하나님과 특별한 연결이 없이 그냥 동물처럼 존재하는 인간이 되어서는 그 하나님의 무궁한 지혜를 헤아릴 수 없고 하나님의 기대에 부합하도록 그 일을 해 나갈 수가 없는 것이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이 세상을 가꾸고 돌보는 이 사명을 감당하도록 하나님이 그에게 필요한 자원을 공급해 주시는 거죠.
우선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를 그에게 자원으로 주셨어요. 이 세계를 돌보도록 하나님이 그에게 위임하셨지만, 이 세상을 돌보기 위해서 세상에 있는 것들을 자신이 얼마든지 활용하고 처분하고 사용할 수 있도록 그런 권세를 주셨어요.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이 땅의 자원들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공급되는 자원이에요. 우선 하나님처럼 세상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하나님만큼을 아니더라도 그렇게 뛰어나게 잘 알아야지만 만물에 담긴 하나님의 지혜를 파악하고 돌볼 수 있겠죠. 또 돌보되 하나님의 마음으로 돌보기를 원하셨으니까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되는 사랑이 있어야지만 하나님 마음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돌볼 수 있겠죠. 또 하나님이 인간을 기계처럼 창조하셔서 로봇처럼 움직이게 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스스로 판단해서 이 세상을 다스리게 하셔서 상당히 하나님을 닮게 하셨으니까 인간은 자기 의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결적인 존재가 되어야 해요. 그러한 자유의지의 권한을 인간에게 부여하셨는데, 이것은 인간 이외의 어떤 피조물에게도 안 주신 거예요. 그런 것들을 공급받으면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대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삶인데 그런 삶을 살아가기에 필요한 생명과 자원, 땅의 자원과 하늘 자원을 공급 받도록 삼위 하나님과 교제를 이루면서 살아가는 것,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영생이라고 부르는 거죠.
신자나 불신자나 육체는 모두 죽지만, 영혼은 모두 죽지 않아요. 영혼은 불멸하도록 창조 되었어요. 시작된 때는 있지만, 사라지는 때는 없어요. 불신자들의 영혼도 영원히 죽지 않고 형벌 가운데서 고통을 받지만, 우리들은 그것을 생명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죠. 그러니까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되는 것들이 끊어진 상태에서 형벌 가운데 있는 영혼이기 때문에 불멸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영생이라고 부르지 않는단 말이에요.
그럼 오늘 우리가 누리는 영생이 바로 이런 것들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이지요.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우리의 육체가 영원히 보존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건 어차피 벗게 되어있는 거고, 인간의 본질인 영혼이 바로 그렇게 그리스도를 통해서 삼위 하나님과 생명적인 연합을 누려서 생명을 공급받고 그리고 그 하나님과의 교통 속에서 이 땅의 자원과 하늘의 자원을 공급받으면서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신 이유다, 이런 겁니다.
B. 영생의 도구
그런데 이제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생을 누리고 살게 하시는데 이 영생의 도구가 있어요. 그것이 뭐냐 하면 지식과 사랑이에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지식, 그 지식과 그 다음에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이것을 통해서 실제로 영생을 얻게 되고 영생을 누리게 되는 것이죠. 영생은 바로 예수님이 요한복음 17장3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영생은 하나님과 곧 그의 보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생이에요. 그 영생은 바로 아는 것이에요. 그 아는 것은 지식적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전 인격적인 체험을 통해서 영혼과 모든 육체가 함께 그것을 아는 지식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것은 경험을 동반한 지식이에요. 그러니까 그 지식 속엔 항상 사랑이 포함되어 있는 거죠.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사람들은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그 분을 알게 되죠. 아는 것 없이는 그 분을 사랑할 수 없고, 사랑하는 자가 아니면 그 분을 알 자가 없으니, 이 지식과 사랑은 통합되어 있는 것이죠.
영생은 바로 이 지식과 사랑을 최초로 소유하는 것이고, 성화는 부족하던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을 향한 부족한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지는 것이 성화고, 그리고 마지막에 영화는 이런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사랑이 완전히 완성을 이루고 몸과 결합되는 것이 이것이 영화에요. 우리들이 이렇게 성화에 힘쓰는 것도 바로 성화에 힘쓰면, 그걸 통해서 하나님을 더 많이 알게 되고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하게 되는 것이죠. 또 반대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가려고 애를 쓰고 더 많이 사랑하려고 자기 죄와 싸우게 되면, 그러면 하나님에 대해서 지식도 자라고 사랑도 자라서 그만큼 영생을 충만하게 누리면서 살게 되는 거죠. 은혜가 떨어지면, 영생하도록 부르심은 받았는데 실제로는 그 풍성함을 못 누려요.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우리들에게 생명을 주실 뿐만 아니라 한 발짝 더 나아가서 풍성한 삶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오시는 거죠. 그것이 바로 영생의 본질이에요. 이러한 영생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신자에요.
C. 신자의 삼위일체적 삶
그런데 이제 신자가 구원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나면, 그 다음에는 이 신자가 살아야 할 특별한 삶이 있어요. 왜냐하면 신자가 되고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옛사람은 지나가고 새 사람이 된 거죠. 그래서 이 영혼도 바뀌고 본성도 변화되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이제 그 사람에게 옛날 사람이 먹던 것을 영혼이 먹어서는 옛날 사람이 살던 삶의 방식을 따라가서는 변화된 새 사람에게는 그것이 적합하지가 않아요. 이게 아주 중요한 대목이에요. 그래서 이게 여기에서 신자의 삼위 일체적 삶이라는 것이 나와요. 신자가 되고 난 후에는 이러한 세 가지 삶을 통해서, 이 세 가지 삶이 어느 것이 먼저랄 것도 없이 삼위 일체적인 삶을 구현함으로써 자기가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영생을 풍부하게 누리면서 살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실제로 오늘 우리 주위에 보면 예수 믿은 사람 중에서 정말 예수님 때문에 행복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자기 안에 하나님께서 주신 영생의 신비에 대해서 눈뜨고 그것을 인해서 날마다 감격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행복하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가요. 그래서 오히려 세상에 있을 때는 행복하고 방실방실 웃던 사람들이 교회에 오면 골난 사람처럼, 이렇게 쳐다보고 웃지도 않고 그렇게 살아요. 그렇게 사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의도가 아니에요. 그리고 그렇게 살면 선교에 도움이 안돼. 왜냐하면 하다못해 화장품 하나라도 찍어 바르니까 얼굴이 허해져, 그래야 나도 그거 사고 싶어지지, 일요일마다 성경 찬송 누런 봉투에 집어넣고 교회에 간다고 그러고 가는데 그 사람 같이 되고 싶지 않아요. 그럼 복음이 안 팔려요. 그러니까 최고의 선교는 뭐냐면 자기 자신이 예수 안에서 참 행복한 사람임을 인생의 행복을 믿는 그대에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해.
1. 회개
그런데 그 삼위일체의 삶이라는 게 뭐냐면, 첫째는 회개하는 것이에요. 회개함. 정확하게 말하면 전향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향해 돌이키는 것이에요. 무엇 때문이냐면, 신자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을 대적하던 영혼을 하나님이 다시 살리셔서 이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뻐하는 예수 안에서 새 피조물이 되게 하셨어요. 그리고 하나님이 누구 신지를 알게 해 주시고 그 지식과 함께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셨어요. 영생을 소유하게 된 거죠.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이 성도가 이 세상에 있을 때는 이런 놀라운 영생을 하나님이 소유하게 하셨지만, 이 영생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지만, 우리가 지식과 사랑 안에서 계속 자라가면서 우리 안에 아직은 남아 있는 옛 성품을 자꾸 죽일 때에 이 영생은 아주 풍성해져서 그래서 마치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자신이 마치 하늘나라에 있는 것 같은 행복 속에서 인생을 살아갈 수도 있지만 만약에 이 지식과 사랑 안에서 자라가지를 않으면, 성화가 진전이 별로 없게 되면 인간의 본성 속에 있는 아직은 남아 있는 옛 사람의 본성이 융성해져서 실제로 풍성한 영생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게 된다는 말이죠. 이것은 아무리 좋은 신자라도 이 원리는 똑같아요.
그러니까 성경이 신자의 삶의 정체를 전투적인 삶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에요.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전쟁이에요. 그러나 그 전쟁은 지고 패배하도록 되어있는 전쟁이 아니라 이기도록 되어있는 전쟁이에요. 그런 전쟁으로 부름을 받은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이 영생의 풍성함을 누리기 위해서는 한편으로는 이 세상으로부터 오는 끊임없는 죄의 유혹, 그렇죠? 시련과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굴복시키려고 하는 그 수많은 위협에 맞서서 우리들이 하나님을 의지해서 싸워야 해요. 때로는 악한 영들의 권세가 우리에게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우리를 삼키려고 하고 대적 할 때 우리들이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이 되어서 전투적인 삶을 살아야 해요.
한편으로는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끊임없는 이 부패한 본성, 특별히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으려고 하지 않는 이 지식의 태만, 육체의 게으름, 은근한 자기사랑, 그리고 하나님 앞에 합치하는 삶을 살려고 하지 않는 이 나태함. 이런 것들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안에서 매일 매일 새롭게 살아나는 거예요. 실제로 여러분들이 아침에는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충만히 누려서 행복했는데, 점심이 되기 전에 마음이 싸늘하게 식고 살아가는 것이 너무 힘겹게 느껴진 적, 여러분 있었을 거예요. 이렇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는 회개, 하나님을 향하여 등졌던 우리의 삶을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이 전향이 우리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야 하는 거죠.
그럼 얼마나 회개를 해야 합니까? 이 회개는 무슨 날 잡아서 하는 게 아니에요. 대게 남한테 빚지고 사는 사람들이 “돈 생기면 갚을게.” 그러고 작은 돈이 생겨도 남의 돈 갚으려고 하지 않고 자꾸 자기를 위해서 쓰려고 하니까 큰돈이 자기한테 왜 생기겠어요. 그러니까 결국은 빚쟁이가 되는 거죠. 그러니까 회개는 이렇게 몰았다가, 신년 사경회 때 제일 많이 모이거든. 하나님 앞에 좀 한 번 잘 보여 보려고 그러는 거죠. 그래서 와서 한 번 옛날 다 털어버리고 새로 한 번 시작해 보자, 그러는데 그럴 거 없어요. 제가 늘 얘기하지만, “왜 이렇게 사경회를 자주 합니까?” 그러는데 그래서 한두 번 줄였잖아요. 그렇지만 사실 사경회를 하는 이유는 사경회가 필요 없는 교회가 되기를 기대하면서 하는 거예요. 이런 게 필요 없는 교회였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매일 매 주일이 충만합니다.’ 사경회나 주일 예배가 뭐 틀린 게 뭐가 있어요? 설교 준비 한꺼번에 했다는 거 말고는 틀린 거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그래서 필요한 게 뭐냐면 늘 하나님 앞에 드리는 회개. 날 잡아서 하나님이 한번 치시면 사업이 부도나면, 근데 그렇게 하면 안 되지. 짐승이에요.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면서 그러면서 이 삼위일체의 삶이 이루어지게 되는 거예요. 이러한 회개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삼위 일체 하나님과 맺은 이 영생의 관계가 실제의 삶에 있어서 풍성해지게 되는 것이죠.
2. 쇄신
두 번째는 뭐냐면, 쇄신되는 거예요. 이것은 뭐냐면 심령이 새로워지는 것을 의미해요. 어떤 것을 쇄신이라고 그럴까요? 예를 들자면 자동차를 몰고 가는데 이상하게 자꾸 덜덜거리고 엔진이 꺼지고 그리고 이상한 소리가 나요. 그래서 공장에 가져갔더니 부속 몇 개가 망가졌다고 그러면서 며칠 동안 수리를 해서 뜯어내 버리고 새 부속으로 갈고 엔진오일까지 갈았어요. 그러고 나서 탁 밟아보니까 벌써 소리부터가 달라요. 길길길길 그러던 차가 부릉부릉 그러면서 잘 나가는 거예요. 쇄신된 거죠.
여러분도 그럴 때 있죠? 사는 것이 사는 것 같지 않고 너무 괴롭고 힘들고 아무 기대 없이 교회에 왔는데 하나님이 말씀의 은혜를 주셔요. 그러니까 막 말씀에 깊이 은혜를 받고 자기의 죄를 하나님 앞에 뉘우치고 나니까 이상하게 자기를 괴롭게 하던 환경은 하나도 바뀐 게 없어. 그런데 심령이 완전히 새롭게 되는 거예요. ‘아, 그렇구나, 내가 이제껏 까지 헛살았구나. 잘못 살았구나.’ 그러면서 그냥 확 영혼이 새로워지는 거야. 이렇게 되면서 우리의 마음 안에서 부패한 욕망, 그리고 형식적으로는 주님을 믿으면서 살지만, 실제의 삶에 있어서는 내 중심대로 살고 싶어 하는 이 가짜 신앙, 이 자기사랑의 정욕, 이런 것들이 이러한 회개를 통해서 밖으로 쏟아져 나가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되고 그 회개를 통해서 자기 깨어짐을 경험하게 되면, 그 자기 깨어짐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사랑은 토해서 밖으로 나가고, 그리고 없던 진실한 사랑은 생겨나게 되는 거죠. 이때에 영혼이 쇄신되게 되요.
영혼이 쇄신되면 이제 하나님이 그 영혼을 기뻐하셔요. 영혼이 그렇게 쇄신될 때, 계속해서 쇄신의 작용이 일어날 때 영혼이 점점 더 아름다운 상태가 되어가는 거죠. 그러니까 한 번만 은혜를 받으면 안 돼. 한 번 은혜를 받고 또 와서 또 깨달으면서 은혜를 받고, 또 깨달으면서 은혜를 받고 그러면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아요. 은혜를 받는다는 게 뭐예요? ‘아이고 하나님도 어쩜 그렇게 내 생각과 똑같으실까. 대견하기도 하시네.’ 그건 은혜가 아니에요. 은혜는 항상 자기를 깨뜨리는 것과 함께 찾아오게 되는 거예요. 이 은혜라고 하는 것 자체가 인간으로 하여금 그 동안에는 그렇게 안 살았는데, 인간으로 하여금 행하여야 할 바를 행할 수 있도록 선한 의지를 이끌어내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에요. 다시 한 번 할까요? 이 은혜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해야 하는데 예전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었거든요. 그런데 이 은혜는 바로 인간이 마땅히 하나님 앞에서 행하여야 할 바를 행할 수 있도록 인간 안에서 선한 의지를 이끌어 내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에요. 그게 은혜에요. 그러니까 항상 그런 사랑의 감화와 함께 은혜가 주어지게 되면 항상 그 안에는 자기가 그렇게 살지 않았던 자신에 대한 미움과 통회 자복이 꼭 있게 마련이에요. 그걸 통해서 영혼이 새로워지게 되는 거예요.
새로워진 영혼은 그렇게 반복해서 새로워질 때, 하나님 앞에 아주 추루하고 더럽던 영혼이 아주 아름답게 되는 거죠. 하나님이나 사람이나 모두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게 되어 있어요. 영혼이 아름다우면 하나님이 사랑하셔요. 여러분을 모두 하나님이 사랑하신다고 그렇게 착각하지 말아요. 여러분 일렬로 세울 수 있어요. 1번부터 차례대로.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여러분 모두 사랑하시죠. 그러나 손가락 깨물면 안 아픈 손가락 있냐고 그러는데, 엄지손가락은 새끼손가락 보다 덜 아파요. 한 번 깨물어 봐. 그러니까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사람들을 하나님이 사랑하셔요. 돈 많은 사람? 아니, 그럼 돈 없는 사람? 아니, 늙은 사람? 아니야, 그럼 젊은이? 아니, 그것도 아니에요.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어요.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사람을 사랑하시는 거예요.
이제 영혼이 아름다우니까 어떻게 되지요? 자 한 번 들어 보세요. 영혼이 아름다우니까, 하나님은 어떻게든 그 영혼과 더 많이 교제하고 싶어 하시는 거죠. 그래서 그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지성에 하나님이 말을 건네세요. 영혼이 쇄신되고 나면 하나님의 음성이 잘 들리는 거예요. 들어오는 거예요. 오늘도 낮에 제가 묵상을 하면서 마음이 쓰렸어요. 교회 안에 말씀이 잘 안 들어온다는 사람들이 있대요. 그럼 뭐가 잘 들어갈지. 연속극은 잘 들어가려나. 그래서 내가 가까운 시일 내에 말씀이 안 들리는 사람 모두 모여라, 해 가지고 어떻게 하면 들리는지 귀를 뚫어주려고 그래요. 송곳으로. 막 들려요.
그 다음에 뭐냐면, 마음이 가지고 있는 애성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전에는 하나님이 많이 사랑해 주셔도, 잘 안 느껴졌거든, 그런데 막 느껴져. 의지는 항상 나를 곤고하게 했거든. 왜, 나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을 하는데 의지는 말을 안 들어. 그리고 나를 죄로 끌고 가는 거지. 그런데 이 의지가 하나님의 의지를 받아들이기를 기뻐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자신이 하나로 다 통합이 되는 거예요. 분리 현상이 일어나면 괴롭잖아요. 그러니까 마음 따로 이고 행동 따로 이면 골치 아프잖아요. 그런데 이게 딱 하나로 통합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행복해 지는 거죠. 이게 쇄신되는 거예요.
3. 발견
마지막 세 번째가 뭐냐면, 발견하는 것예요. 뭘 발견 하냐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죠. 무슨 뜻이냐 하면, 항상 회개하기 전에 깨닫는 것이 있어요. 그리고 회개를 하고 나면, 아주 보다 더 분명한 지식이 생겨나게 돼요. 그런데 그 지식이 대단한 것은 아닐 경우가 많아요. 뭐냐면, 막 그렇게 뺀질대고 세상에서 이리 터지고 저리 터지고 온 몸이 성한 곳이 없다가, 하나님 앞에 거꾸러졌어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깊이, 그러니까 뭐 사업도 망하고, 풍파와 환난을 많이 겪고, 그래야지 또 간증이 재미가 있잖아요. 환난과 풍파를 겪고 자살하려고 쥐약을 만지작만지작 거리면서 그래서 산에 오르락내리락 했었는데, 그래서 그 쥐약을 먹기 위해서 사이다를 가지고 갔는데, 사이다만 먹고 내려왔다더라. 뭐 이런 식의 간증도 나오잖아. 그랬는데 회개를 깊이 하고나서 깨닫게 됐대. 뭘 깨닫게 됐느냐, 막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내가 이 사실을 깨달은 걸 하나님 정말 감사하다”고. 뭘 깨달았냐고. “하나님이 저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난 속으로 그랬어요. ‘아이고, 바보, 그거 맨 날 하는 이야긴데.’ 그거 왜 그래요? 그 때는 수업료을 지불 안 하고 배우니까 그게 무슨 그렇게 가슴에 와 닿질 않는 모양이지. 그러다가 환난을 만나고 수업료를 많이 지불하고 마지막에 쥐약까지 들었다 놓았다 하니까, 아 이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닫는 거야. 거 매일 찾아와서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 권세 많도다.” 아 평소에 잘 부르지도 않던 찬송을 부르면서 펑펑 울고 감격하는 거야. 그게 뭐냐면 지식이 생겨나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지식을 통해서 뭘 깨닫게 되냐면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를 깨닫게 되는 거예요. 도덕적 통치라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이 자연적인 사물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자연적인 통치를 하셔요. 그러니까 어느 날 달을 막 때리시면서 “너 요즘 왜 빛을 안내니?” 태양보고 “너 똑바로 불타. 혼날 줄 알아.” 하나님께서 화성을 보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게 묻지 않으신다고요. 그건 도덕적 피조물이 아니야. 도덕적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은 영혼을 가진 존재들이에요. 인간이 대표적인 도덕적 피조물이죠. 천사나. 인간이 도덕적 피조물이 되게 하신 거죠. 영혼을 주신 거죠.
그래서 뭐냐 하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우연히 생겨난 게 아니라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셨다고 그랬잖아요. 하나님이 목적을 가지고 세상을 창조하시니까 하나님이 이 세상으로 하여금 특히 이 안에 있는 인간들로 하여금 어떻게, 어떻게 이 세상을 가꾸어 가게 해야겠다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잖아요. 그 계획이 있잖아요. 그 계획과 의도를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선한 사람이라고 보시고, 거역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악한 사람이라고 보시는데 거역하고 막 사는 사람을 하나님이 그냥 두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야단도 치시고 혹은 최후에 죽은 후에 심판도 하셔서 당신의 도덕적 의지를 보여 주셔요. 이렇게 하나님께서 간섭하시는 것을 가리켜서 도덕적 통치라고 불러요. 그것을 깨닫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뭐냐면,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그래서 ‘하나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고백한 사람이 ‘아이고 이제 진짜 무거운 짐 벗어버렸네. 이제 가서 내 맘대로 살자’ 그런 사람 아무도 없다고. 모두 다 그렇게 회개하고 나면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뒤돌아보지 않겠네.’ 그러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제일 중요한 화두가 되는 거예요. 세상의 번영과 승리보다도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화두가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가져다 준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에 대한 인식이에요.
여러분들이 이렇게 살아가고 있지만, 하나님의 도덕적 목적에 따라 살지 않으면, 그 살아 있으나 살아 있는 게 아니죠. 그럼 뭐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그 목적대로 살지를 않는데, 여러분들이 살아있는 것이 벌레 한 마리가 살아있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어요. 그리고 인간이 그렇게 하나님의 목적을 떠나서는 행복할 수 없으니까 자기 자신에게도 불행한 것이 되는 거죠.
이렇게 해서 신자가 회개하고, 쇄신되고, 그리고 새롭게 하나님의 지식을 발견하게 될 때에 그 때에 이 사람 안에 영생이 풍성하게 누려지게 되는 거죠. 지식과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삼위 하나님과 연합을 이루고 이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고 그리고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순종하며 살아가기에 필요한 이 땅에 있는 자원과 은혜라는 하늘 자원을 공급 받으면서 살아가는 거죠.
IV. 교회의 지체가 되게 하심
A.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심
이런 사람들이 바로 성도에요. 이런 성도를 하나님이 그냥 개인적으로 한 사람 한 사람씩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시는 즉시 교회의 지체가 되게 하시는 거죠. 그래서 예수 믿고 거듭나자마자, 어떤 의미에서는 이 사람이 회개하고 뉘우치고 자기의 죄를 토설하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하는 이런 모든 것들은 이미 예수께 접붙여진 후에 일어나는 일이에요. 순식간에 이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이셔서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머리이시고 그 머리된 몸의 일부가 되도록 주님이 그들을 접붙이시는 거죠. 그렇게 해서 한 교회를 이루게 하시는 거죠. 그래서 그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시는 거죠.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이시고 계속해서 몸에 그 지체들이 붙어가면서 그러면서 영적으로 연합을 이루어 가면서 교회가 되어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는 즉시 그 사람은 혼자 예수 믿는 사람이 된 게 아니라, 이미 예수님을 믿고 뉘우치는 그 순간 이전에 이미 벌써 그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진 사람이 되어서 공동체로서 부름을 받게 되는 것이죠. 이것은 영원히, 이 지상에 있을 때에는 눈에 보이는 지상 교회에 속해있지만, 또 이 지상 교회에 속해 있는 동안에도 보이지 않는 교회에 연결되어 있고 속해 있고, 그리고 죽은 후에도 이 교회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영적인 교회의 지체로서 영원히 사는 것이고, 그렇게 지체로 함께 붙어서 있는 상태에서 영생을 누리는 거예요. 그 모습이 이 땅에 있는 동안에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게끔 그대로 구현된 것이 교회에요. 이게 이 세상에 있는 교회에요. 이것을 눈에 보인다고 해서 눈에 ‘보이는 교회’라고 해요.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는 이제 이 영적인 연결들이에요. 작게는 이렇게 연결되어 있지만, 크게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와 연결되어 있고, 더 크게는 하늘에 있는 성도들과 연결이 되어 있고 더 크게는 앞으로 태어날 미래의 성도들과 연결되어 있고, 그래서 모두가 하나의 하늘 가족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말의 의미에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사실들을 가르쳐 주셨어요. 그래서 신약성경에 보면 ‘우리 아버지’라는 표현이 엄청 많이 나와요.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해라.” 그러면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여.” 왜 그렇게 기도하라는 거죠?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는 사람은 모두 다 자기 가족을 생각하면서 아버지를 불러야 한다 이거죠. 그 가족이 바로 누구냐 하면 하늘 가족이야.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거듭나는 그 순간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졌고, 그 때에 나는 내가 아니라 교회의 몸의 일부가 되었고, 나는 나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하는 사랑하는 모든 지체들 때문에 공동체로 부름을 받아서 비로소 그리스도의 몸이 된 거죠.
일을 하다가 손가락이 딱 끊어졌어요. 요즘은 접합 술이 뛰어나서 웬만하면 붙일 수 있어요. 여러분을 그런 일을 당할 리 없겠지만, 손이 끊어지거나 발가락이 끊어지면 그것을 그대로 얼음 같은데다 싸서 얼른 가야해요. 그럼 붙일 수 있어요. 근데 이렇게 떨어졌을 때 그거 몸이라고 그러지 않아요. 우리들이 이렇게 가만히 있을 때 손을 툭 치면 “야, 내 몸을 건드리지 마. 내 몸에 손대지마.” 이렇게 얘기 할 수 있지만 손가락이 끊어져서 찬장에 두고 갔는데 누가 와서 건드릴 때 “야, 내 몸에 손대지마.” 그렇게 하지 않아. 몸이 아니야. 다시 한 번 얘기할게요. 그러니까 영생은 개인적으로 누리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하늘 가족으로서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다른 지체들과 접붙여진 공동체의 상태에서 누리게 되는 거죠.
B. 사랑 안에서 자라게 하심
또 교회의 지체가 되게 하셔서 하시는 일이 뭐냐 하면, 사랑으로 자라게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잘 보세요. 삼위 하나님이 서로의 완전하심 때문에 사랑하신다고 그랬죠. 그 사랑은 바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그 성부 성자 성령이 함께 한 분 하나님이 되심으로 사랑의 하나님이 되시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 사랑을 어디에다가 쓰시느냐, 당신의 지혜를 이루는 데에 그 사랑을 사용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여러분들이 예수 믿다가 바깥으로 나가서 미끄러지면 그거 그냥 내버려두시면 되지, 여러분들 솔직히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다가 자기를 너무 힘들게 하는 사람 만나면, ‘아이고 저 사람은 왜 안 떠나나. 12월에 구역이라도 바뀌면 좋을 텐데. 저 사람 왜 우리 구역에 준거야.’ 그럴 때 있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가 미끄러져서 세상 밖으로 나갈 때, 하나님이 우리를 다시 은혜 주셔서 부르셔요. 회개시키시고. 또 우리는 저 좋은 줄 알고 막 살았는데, 알고 보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환경으로 탁 치셔서, ‘이 길은 가면 안 된다. 네가 잘못됐다.’ 이런 많은 것들을 깨닫게 하시잖아요. 왜 하나님이 그냥 맘대로 막 살게 내버려 두시지 않고 그렇게 간섭하시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에요? 하나님이 계획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그 계획대로 살면, 하나님과 항상 평화를 누릴 수 있어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매일 매일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로 걸어가면서 시시때때로 기도하는 사람이 안 기뻐하시는 길을 가면서 금식하는 사람보다 훨씬 하나님께 사랑스러워요. 그렇게 하나님이 걸어가는 길을 정해 놓으신 거죠. 그게 하나님의 지혜에요.
이런 사랑과 지혜가 하나님 안에 있어서 그 사랑을 가지고 지혜를 구현해 가시는 것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뭐가 있냐면, ‘아, 그거였구나. 아, 하나님이 그걸 원하셨구나. 아, 내가 몰랐다. 아,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인도하셨구나.’ 이런 아하 하는 게 항상 있어요. 항상 있다 이거에요. 물론 거기에는 뼈저린 회개를 동반할 때도 있고 아니면 감사의 찬송이 우러나올 때도 있지만, 항상 ‘아, 그거였구나. 아, 그거였구나.’ 이게 뭐냐면 하나님의 지혜를 깨달아 가는 과정이에요. 이 사랑과 지혜, 이 사랑으로써 하나님은 천지창조의 목적이라는 이 지혜를 이루어 가시는 거예요.
그런데 이런 사랑과 지혜를 하나님께서 이 교회에 위탁하시는 거예요. 교회에 와서 배워야 할 게 뭐냐면, ‘아, 사랑이란 이런 거구나.’ 그것을 교회에 와서 배울 수 있어야 해요. 또 하나는 뭐냐면, 교회에 와서 ‘아, 그렇구나. 그래서 인간이 이 세상에 창조된 거구나. 아,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저마다 행복해 지려고 아무리 몸부림 쳐도 어떤 사람은 피할 수 없이 불행한 삶을 사는구나. 아, 인생의 행복의 길이 여기에 있구나. 인생의 행복을 묻는 그대에게 내가 우리 교회를 소개시켜 주리라.’
요새 얘기 들어보니까 설교가 몇 주째 쉬워져서 굉장히 해피해하는 사람이 많다고 그래요. 뭐 몇 주 더 쉬워보지요. 사실 굉장히 어려운 문제들을 풀어가고 있는 거예요. 그런 것들을 여기 교회에 와서 깨닫는 거예요. 그 두 개를 보여주기 위해서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거예요. 왜? 그것을 본 사람은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겠어요? 그렇잖아요. 믿을 거 아니에요. 그리고 그것을 계속해서 발견하는 사람은 성화되어 가려고 애쓰지 않겠어요? ‘아, 그렇구나. 내가 정말 하나님에 대해서무지하구나. 내가 정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잘 모르는구나.’ 그걸 깨달으면서 나아갈 거 아니에요. 완전해 지기를 사모할 거 아니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교회를 주신 것은 바로 그렇게 영생을 누리게 된 신자들이 교회 안에서 이제 그 사랑과 지혜안에서 자라가고 그렇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 거예요. 그러니까 교회가 그렇게 해서 세워진 거거든요.
그러니까 이게 어떤 관계냐면, 그러니까 교회는 성도들에게 그렇게 해 주는 것이 교회의 최고의 봉사거든요. 사랑을 알게 해 주고 두 번째는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살도록 도와주고. 그것을 하는 것이 목회에요. 그것을 하는 곳이 교회에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겠어요.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은혜가 막 쏟아져서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교회 나올 때마다 뼈저리게 깨달으면서 자기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지 않는지를 회개하고 자기가 깨뜨려지게 될 때 항상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이 속에서 풍성하게 솟아오를 거 아니에요. 그죠? ‘또 이 세상의 풍조에 의해서 섞이지 않은 순수하고 깨끗한 어느 지체의 표현에 의하면 겨울에 얼음 속에 흘러가는 물소리처럼 그렇게 맑고 깨끗한 진리가 교회에서 선포될 때, 그 때에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욕망과 추루한 죄 때문에 어두워졌던 지성이 열리고 참되고 진실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게 되잖아요. 그럼 지혜로워질 거 아니에요. 이 두 개를 위해서 존재하는 거예요. 이 두 개를 인간에게 주어야지만 그 인간이 비로소 행복한 인생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거예요. 이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라도 없으면 그에게 다른 모든 것이 주어진다고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그 사람은 더더욱 불행해질 수밖에 없는 거죠.
V. 교회 삼위의 모상
그래서 교회는 삼위 하나님의 모상이에요. 삼위 하나님의 교통하시는 모습이 여기에 세워진 곳이 바로 이게 교회에요. 그래서 이 삼위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이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 안에 계시는 거예요. 사람들은 이제 많이 헷갈리기 시작하거든요. 뭐냐면, 기도할 때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하고 또 기도 끝에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그러는데 “목사님 주님이 누굽니까?” 주님이 누구에요? 네? 대답을 못하잖아. 맨 날 부르면서. 주님이 누구에요? 누구? 목사님? 그러니까 뭘 알아도 분명하게 알아야지. 구약에서 주님 그러면 대부분 성자 하나님을 가리킬 때도 있지만, 성부 하나님을 가리켜요. 신약에서도 예수님이 부활하고 승천하신 후에는 이제 주님 이라고 부를 때 그 주님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세요. 그게 주님이라는 말의 뜻이에요. 그런데 또 어떤 사람이 책을 썼는데 어떻게 썼냐면, 우리 그 동안에 성부 성자 하나님만 많이 불렀는데 성령하나님께 너무 죄송하다. 그러니까 이제 제발 성부 성자 하나님께는 그만하고 이제 성령 하나님을 많이 찬송함으로 좀 균형을 이루자. 사실 처음서부터 말이 되는 거 같죠? 그런데 사실 처음부터 말이 안 되는 거거든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한다고 해서 뭐 균형이 잡히겠어요? 아니 뭐, 찬송할 횟수를 적어 놓을 거예요? 또 적어 놓는다고 하더라도 성부 하나님을 찬송할 때는 좀 마음을 덜 실어 부르고 성자 하나님을 찬양할 때는 은혜를 받아서 좀 열심히 부르고 그럼 그것도 또 형평의 원칙에 잘 안 맞잖아요. 그거 다 틀린 거구요.
A. 삼위가 함께 세우신 교회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시지요. 틀림없이요. 그러나 이 교회를 세우고 교회가 참으로 교회로 존재하게 되는데 예수 그리스도만이 성부와 성자와 관련이 없이 이 교회를 붙들고 계신 것은 아니에요. 제일 먼저 성부 하나님이 교회에 관여하시는지 보여드리겠어요.
1. 성부의 계획 안에서
우선 성부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실 것을 계획하신 분이시죠. 그리고 또 죄 때문에 망가진 세상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재창조 하실 우주의 계획을 세우신 분은 성부 하나님이에요. 그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가 계획이 되었어요. 그런데 그 계획된 창조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령 안에서 창조되었어요. 그 성부 하나님이 인간이 타락하면서 교회를 세우고 인간을 구원하실 계획도 성부 하나님이 세우신 거죠.
2. 성자의 통치 안에서
또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실제로, 성부의 사랑으로써 성도들이 구원받고 교회가 세워지지요. 그런데 실제로 성부가 계획을 세우셨지만 성자께서 희생하시는 은혜로써 성부는 계획하시는 사랑으로, 성자는 희생하시는 은혜로써, 자기의 몸을 피 값으로 주셔서 죄 지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아버지 앞에 죄 값을 치르고 구원해 내시죠. 그리고 친히 예수님이 그들의 머리가 되시죠. 그래서 그들과 연합을 이루시죠.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을 공급받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교회를 통치하시는 거죠. 지금도 통치하고 계시잖아요.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으면 아주 선명하게 ‘이제는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한다.’ ‘하나님이 내가 이렇게 살기를 원하시는구나.’ 깨닫고 순종하잖아요. 은혜로 통치하시는 거죠.
3. 성령의 위로 안에서
그리고 성령 하나님은 성도들이 예수를 믿어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지게 하시는 장본인이세요.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하셨지만, 구속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공로를 믿음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적용시키시는 분은 성령님이에요. 그래서 그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주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고,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게 되고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예수와 접붙여지게 되고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각 성도들이 개개인으로 부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한 몸을 이루면서 한 성령 안에서 교회의 모든 지체들이 영적인 연결을 가지면서 함께 교통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거예요.
B. 삼위가 함께 하시는 교회
그러니까 교회는 이처럼 삼위 하나님이 함께 개입하셔서 관여하고 계시는 거죠. 다만 이렇게 삼각형으로 되어있는 것을 성부 성자 성령이라고 한다면, 이제 교회가 세워져서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시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주로 관여하시고 그래서 머리가 되셔서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며 성부와 성령께서 함께 간섭하셔서 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관여하시지만, 성부와 성령이 함께 관여하심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이 이 교회와 관련을 가지시면서 세우시고 이끄시고 그 안에 성도들을 연합시키시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교회를 세우신 그 구속의 공로를 따라서 하나님의 전체적인 재창조의 계획에 맞게끔 교회가 존재하는 거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 계획이 있었는데, 인간이 타락해. 그게 무너지는 것 같은 거죠. 그런데 이 세상을 하나님이 이 세상이 죄 때문에 타락했지만, 원래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가지고 계셨던 계획은 그대로 가지고 계신 것이죠. 이 세상을 가꾸고 완전하게 해서 창조주 하나님이 이 세상을 지으셨다, 라고 하는 영광이 온 세상에 가득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었어요. 죄 때문에 망가졌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 고칠 작정을 하시는 거예요. 그 때에 종자씨로 선택하시는 것이 교회에요. 교회. 그래서 이 종자씨가 누룩처럼 번져 나가면서 성도들이 그리스도 예수에게 접붙여져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되고 그 사람들에 의해서 일치된 목표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고 세상을 섬김으로써 이 세상을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게끔 하는 것.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이유이고, 성도를 교회의 일원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목적이에요.
VI. 시작되는 신자의 삶
그런데 이제 이렇게 삼위가 함께 하시는 곳이 교회인데, 이러한 삼위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이기 때문에 당연히 신자가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여지게 되면, 예수님과만 사귀는 것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과 함께 사귀게 돼요. 교제가 이루어지게 되는 거죠. 그리고 그 삼위 하나님과 함께 연결되어서 그 분께로부터 생명과 하늘과 이 땅의 자원을 공급받으면서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살아가는 것이 이것이 인생의 행복이 되는 거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세례를 주라.” 어떻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이게 원래의 희랍어 원문에는 그렇게 안 되어 있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 속으로 세례를 주고.” 그러니까 세례 주는 목사가 성부 성자 성령을 대신해서 세례를 준다는 그런 뜻이 아니라, 관심사는 세례를 주는 사람은 관심의 표적이 아니야. 세례를 받는 사람이 있고 여기 성부 성자 성령이 계신데, 누가 세례를 주든지, 하여간 제자들이 세례를 주면 이 세례를 통해서 여기에 있던 이 개별적인 사람이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의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거죠. 들어가게 되면, 들어가는 사람이 혼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성부 성자 성령과 연합되어 있는 그리스도를 머리고 하고 구원받은 신자들이 몸이 되는 그 교회 속으로 연합이 됨으로 말미암아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 속으로 들어가는 거죠. into에요. 이름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그 이름은 의미가 없는 것이고, 성부의 이름은 성부와 같은 거예요. ‘내가 이렇게 세례를 주는데 너는 이 세례를 통해서 성부 성자 성령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성부 성자 성령 속으로 이미 들어가서 몸을 이루고 있는 보이지 않는 교회가 있는데 네가 그리로 연합이 되는 거다.’
그래서 옛날의 교부들은 이 신자를 작은 신들이라고 불렀어요.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해서 들어가게 되면, 인간 자신이 신화 된다고 본 거죠. 그런데 그것은 전적으로 틀린 말이라고 볼 수는 없어요. 왜냐하면 성경에도 그런 말이 나오고 또 하나는 뭐냐면,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잖아요. 이 분이 신이시란 말이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는데. 전에는 육적인 사람이었는데,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사람이 된 거예요. 귀신이 들린 그런 것과는 다르게 인격적인 성령님이 거하는 신이 계신 사람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신령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그리스도인들을. 지금이야 그리스도인들을 작은 신이라고 부르지는 않지만, 그러나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신령한 사람이 되어간다는 것은 우리가 모두 다 동의하는 바이잖아요.
A. 영생의 실제: 삼위와의 교제
그런데 그렇게 되니까 신자의 삶이라고 하는 것의 시작은 삼위 일체 하나님과의 ‘교제’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죠. 영생의 실제가 결국은 그것이 삼위 하나님과의 교제라고 하는 것이에요. 거듭나고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 신자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 속으로 들어가서 연합을 이루는데 우리는 항상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계시는데 나 혼자 뿅하고 들어가서 나 혼자 연합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이미 정확하게 말하자면, 성부 성자 성령에게 들어가 연합된 그 교회에 접붙여짐으로써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연합 속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교회가 있고 교회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과 더불어서 여기에 있는 교회와 연합을 이루어요. 세례를 받음으로 내가 그 교회 속으로 연합되어서 예수의 몸에 접붙여진 한 지체가 됨으로 결국은 몸인 교회와 함께 그리스도와 함께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과 연합되게 되는 것이죠. 이게 바로 성도의 정체에요.
그러니까 자기가 그렇게 예수의 몸에 속해있는 사람이고 자기는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 아니 이 세상이 끝나고 영원무궁한 세계에 이르기까지 자기는 혼자의 몸이 아니라 거기에 접붙여진 사람이라고 하는 그 인식을 안 가지고 살게 되면 많은 문제들이 생겨나게 되는 거예요. 우선 뭐냐면 성화에 진전이 없게 돼. 여러분 주위에 보면 정말 욕심도 별로 없고, 뭐 성경도 많이 보고 그리고 하여튼 섬기는 것도 엄청나게 많이 섬기려고 하고, 진짜 자기를 살 어떤 욕망을 없는 것처럼 보이고, 비전도 많아. 그런데 말하자면 교회가 없어요. 있어도 항상 자기에게 유익을 주는 한도 내에서 교회를 이용해요. 그리고 이해관계가 부딪히는 일이 생기거나 자기만족을 못주면 언제든지 교회를 떠나서 철새처럼 날아다녀요. 이런 사람들을 한 번 잘 들여다보세요. 영혼이 매우 곤궁하고 허해요. 몸부림은 치는데 성화에 진전이 없어요.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교회에 욕을 하게 되어있어요. 그것이 진실이든 진실이 아니든 하게 되어있어요.
그러면 어떻게 되냐면 자기는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진 그 교회의 지체인데 자기가 언어와 행동과 행실과 많은 것들을 통해서 그 교회에 끊임없이 아픔을 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다메섹에서 쓰러졌을 때, 제일 먼저 예수님께로부터 들었던 말씀이 뭐예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사울을 예수님 만난 적이 없는데, 교인들을 핍박하니까 예수님은 그것을 당신 자신에 대한 핍박으로 여기셨어요. 그러면 쉽게 얘기하면 한편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계속 찔러서 고통을 주면서 ‘예수여 나에게 복을 주시옵소서. 내가 예수 닮기 원합니다. 내가 이 비전을 가지고 이 세상을 섬겨서 예수의 나라 되게 하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계속 예수의 몸을 찌르는 거야. 피가 나. 예수님은 원하시는 게 뭐냐 하면, ‘네 비전이고 뭐고 성화고 뭐고 다 필요 없고 우선 찌르지나 마라. 그리고 얘기를 하자.’ 수없이 봐요. 혹은 말이죠. 드물긴 하지만요. 어떤 경우에는 진리를 굉장히 많이 섭취한 사람이야. 그래서 이야기를 시켜보면 웬만한 사람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교리를 많이 알고 있고 그리고 진짜로 건성이 아니라 깨뜨려져서 주님을 만난 흔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야. 그런데 곤고하게 살아. 그 이유는 뭐냐면, 자기도 모르는 무지로 말미암아서 자기 자신이 예수의 몸의 일부라는 생각이 없는 거야. 그러니까 어떻게 되냐면, 성화에 진전이 없는 거죠.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에게 자녀가 있는데 그 중의 한 애가 좀 유별난 애가 있다고 칩시다. 똑똑하고, 원래 못난 애들이 가출도 잘 안하고 엄마 시키는 대로 한다고. 못생긴 소나무가 산을 지킨다고 하잖아요. 교회에서도 그래요. 저같이 이렇게 그저 그런 사람이나 이렇게 교회를 지키지. 얘가 그 가족이 무슨 범죄하고 뭐 그런 가족이 아니라 자랑스러운 가족인데 자기의 인생을 설계할 때 엄마가 있고 아빠가 있으며 그리고 우리 집안이 있고 가문이 있고 조국이 있다. 내 형제가 있고 자매가 있다. 이것을 알고 인생을 계획을 세우는 것과 그런 것 다 필요 없다. 그러고 인생의 계획을 세운다고 할 때 후자를 선택했을 때 얘가 행복해 질수 있겠느냐 말이에요. 더군다나 결혼한 사람이 부인이 있다 남편이 있다 그런 거 계획에 안 넣고 인생의 계획을 짠다. 행복해 질수 없는 건 너무 자명하잖아요. 시간이 없어서 이 문제는 이정도 하고 다음에 한 번 다루겠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에요. 그런 사람들은 자기가 왜 곤고하게 살아가는지, 그리고 그렇게 진리를 많이 깨달았고 옛날에 수없이 자기 깨어짐을 경험했는데 자기는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 몰라. 교리를 많이 알고 있어도 충분하다고는 말할 수 없어. 하나님 앞에 깨뜨려질수록 깊이 낮아져서. 그러니까 빈 수레가 요란한 거예요. 낮아져서 ‘나는 매일매일 내 눈을 열어주시는 하나님의 그 은혜를 통해서 새롭게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 없으면 나는 영생을 누리며 살 수 없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고백을 하면서 살아야 되는 거죠.
오늘 이렇게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 중에 좀 아프더라도 제가 사랑으로 찌르는 거니까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말고 들으세요. 오늘 여기 앉아있는 여러분들 중에도 교회에 고통을 준 사람들 있죠. 과거나 현재나. 굉장히 잘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의 자세는 어때야 하냐면 자기가 부당하게 고통을 당하고 살이 찢어지는 아픔을 당해도 교회는 아프게 하지 말아야 해요. 그러니까 엄청나게 많은 축복들이 사라지는 거예요. 교회관이 올바로 되어있지 않은 사람들이 영혼의 풍성함을 누리고 사는 것은 불가능해요. 왜? 한편으로는 예수를 사랑하면서 그 예수를 계속 칼로 찌르는 거예요. 그리고 복을 구하는 거죠.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편이세요. 그런데 그 사랑은 예수님의 원하시는 방식대로 사랑을 받고 싶어 하시지 방식까지 우리에게 일임하신 것은 아니에요. 아프리카 어디가면 인사가 있는데 침을 뱉는 게 인사래요. 얼굴에다가. 그래서 가장 환대하는 사람에게는 몇 분전서부터 인사할 준비를 한 대. 가래를 준비하는 거예요. 탁 뱉어서 여기에 호떡처럼 붙으면 그렇게 기뻐하면서 닦는대요. 사랑받고 싶은 사람 이따 오세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대로 사랑해야지. 그게 사랑이지요.
B. 성도의 사랑
1. 사랑의 근거: 서로의 아름다움을 봄
그러면 이제 영생의 실제가 삼위의 교제라면 이제 성도의 사랑은 삼위 간의 교제의 모상이에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한 하나님이시지만 각각 인격을 가지신 완전한 하나님이세요. 우리들이 세 분이라고 부르면 안 되지만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각각 인격을 따로따로 가지고 계신 그 삼위의 하나님이에요. 이 하나님이 각 위가 서로 사랑하시는 이유는 각 위의 아름다움 때문에 사랑하시는 거죠. 성부 성자 성령은 각각 완전한 하나님으로서 개별적인 위에 있어서 완전함을 가지고 계시고 삼위일체로 어울리실 때에 가장 완전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성부 성자 성령은 서로를 사랑하시는 거죠. 그런데 성부 성자 성령님이 사랑하시는 그 사랑은 항상 그 사랑하시는 것 말고 또 다른 목적을 가지고 계시지 않으세요. 목적을 가지고 계시면 삼위 하나님이 서로를 이용하시는 것이 되죠. 그래서 하나님 자신이 목적이 된 그런 종류의 사랑의 교통을 가지고 계시는 건데 이것이 교회에 심어 놓으신 사랑의 모형이에요. 그래서 성부 성자 성령께서 각각의 아름다움 때문에 서로 교통하시는 것처럼, 성도는 이 눈에 보이는 교회 안에서 성도는 성도들이 각자 성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는 거죠.
그러면 성도가 아름다움만 있나? 무슨 성도라고 불러주기에도 미안한 사람 많지. 망도 라고 부르면 좋을 사람들 많아. 망령된 사람. 성도는커녕 망도. 그런데도 그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은 뭐냐면, 그들을 보면 사랑할 수 없을 때가 많아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을 보아서는 사랑이 불가능해. 그 때에 항상 그들이 이루고 있는 교회의 본질을 주목해야 해요. 그들은 지금 아주 망도 비슷한 사람이 되어 버렸지만 그러나 그들은 혼자 따로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들도 또한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져서 나와 떼어 놓을 수 없이 같은 세포처럼 한 몸의 덩어리를 이루고 그렇게 하면서 삼위 하나님과 교통하는 있는 거죠. 그러면 그들이 비록 지금은 부패해서 옛 본성이 흥왕하여 성도의 자리에서 미끄러진 삶을 살고 때로는 망령된 삶을 살고 있지만 그가 그것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서 떨어진 것은 아니에요.
그 때에 이제 성도들에게 사랑이 요구되는 거죠. 뭐냐면 여기에 오물이 묻었는데 안 지워져요. 남 보고 좀 떼어달라고 하면 막 긁어. 그러나 자기 몸은 그렇게 안 하죠. 진짜 지워질 수 없는 오물이 묻었다면, 차라리 그 오물을 묻혀 놓고도 매일매일 조금씩 닦아서 한 한 달 만에 닦아내도록 하겠어요, 아니면 그까지 것 100그램만 떼어내면 되는데 칼 가지고 한 번 베어내겠어요? 자기 몸은 후자의 방식으로 다루질 않아요. 그렇게 하면서 자기 몸을 보양하듯이 그 망령된 행실을 하는 그 지체가 자기와 떼어 놓을 수 없는 몸의 일부야. 그러니까 몸의 일부가 아니고 손톱 같은 데 뭐가 묻었으면 그냥 가위로 잘라버리면 되. 그런데 그게 아니라, 이 생명이 연결되어 있는 살이야. 살과 뼈야. 그러면 그것이 그 사람이 명백하게 잘못하고 있어도 시간을 두고 계속해서 이 몸과 몸에 붙어있는 머리가 아프시지 않도록 시간을 두고 계속해서 정결케 해서 온전함을 회복하게 하지, 몇 번 닦아서 안 된다고 해서 칼 가지고 와서 ‘이쪽 팔 떼어내고 깨끗하게 사는 게 낫지, 얼룩덜룩 지저분한 거 묻히고 사지 멀쩡하면 뭐하냐. 그냥 지저분한 거 없애고 팔 잘라버리고 깨끗하게 사는 게 얼마나 좋냐. 하나님이 뭐 덩치를 보시냐.’ 사실 말이 안 되잖아요.
2. 사랑의 목적: 존재의 목적을 공유하게 하심
엊그제도 어느 지체가 나에게 와서 그래요. 자기네 교회는 분위기가 나갈 사람은 다 나가라는 주의라고. 그럼 안 되지요. 나가면 남아있는 사람들이야, 시끄러운 사람 나가고 골치 썩이는 사람 나가니까 편하겠지만, 그러면 그게. 교회를 사랑하면 그렇게 얘기할 수 없지요. 아주 똑같은 거예요. 여러분, 여러분 자녀의 몸에 뭐가 묻었는데 “야, 100그램만 떼어내면 되는데 뭘 그러냐. 잘라내고 돼지고기 먹자.”그렇게 안 해. 그렇게 해서 이제 삼위의 교제를 이루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결국은 굉장히 힘들게 되죠. 그렇게 되면. 이 사람이 계속해서 이 사람과 한 몸이라는 것을 생각하는 거죠. 그 속에서 성도는 고통을 받는 거죠. 고통을 받으면서 공동체가 무엇인지를 배워가는 거예요. 한 몸이다. 배워가는 거죠. 이게 회사하고 다른 게 그거에요. 회사는 자르면 되. “나가 퇴직금 가지고 나가.” 그러면 끝나요. 자기 원하는 사람들로 포진하면 되는 거죠.
그런데 교회는 그렇지 않아요. 그러니까 예수의 몸에 일부에요. 그런 지체들을 보면서 항상 생각하는 거예요. 저 사람은 나와 생각이 다르고 심지어는 나에게 많은 고통을 주어도 ‘그래도 저 사람이 예수의 몸이다. 저 사람과 나는 분리될 수 없다. 저 사람을 떼어내면 그 고통이 나에게 전달되고 몸 전체에, 그리고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에게 이 고통이 전달될 거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사는 거죠. 그러니 그게 쉬운 거겠어요? 어렵죠. 굉장히 어렵죠. 그래서 그 속에서 이제 뭘 배우냐 하면 이 세상에 오셔서 멸시와 욕을 받으시면서 자기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지만, 누구에게도 사랑으로 대우받지 못하고 그 사랑을 항상 핍박과 고난으로 되돌려 받았던 예수님의 처지를 생각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 안에서 예수님의 죽음의 기운이 자기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거예요. 이게 바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교회를 위해 내 육체에 채운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들어오는 거예요. 그 경험은 견디기 힘들 정도로 자기가 죽는 경험이에요.
그런데 그 죽음의 경험이 그에게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지만, 그 경험을 통해서 그 사람이 말할 수 없이 고통을 받지만, 그 죽음의 고통을 통해서 그 사람 안에서 정말 살아야 할 것은 하나도 안 죽어요. 그리고 진짜 반드시 죽어야 할 것들이 예수 죽음의 기운이 스며드는 그 죽음의 경험 속에서 죽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뭐냐면 참기 어려운 사람들을 깊이 인내하면서 자기의 혈기가 죽는 거예요. 막 죽어가는 거예요. 그러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 때문에 온유한 사람이 되어가는 거죠. 그것을 견디기 힘들 때마다 항상 허물이 있는 지체들을 보고 자기가 항상 그 사람보다 옳다고 판단을 하고 이렇게 해 가지고는 그것을 극복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항상 어떤 생각을 하냐면, 지금 이렇게 나에게 고통을 주고 있는 지체들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질서들이다. 이 질서를 통해서 내가 절대적으로 옳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교만이에요. 그게 이제 교회의 일치를 자꾸 깨뜨리는 거죠. 자기의 판단이 절대적으로 옳고 이것만이 유일한 판단이다, 라고 생각하는 교만이 다른 사람들을 용납하지 않는 거죠. 이렇게 해서 교회는 상처를 받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것을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도 그것을 깊이 죽이고, 그 사람들을 통해서 고통을 받을 때 그 때에 사람들을 보면서 참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을 향해서 내가 참지 않으면 고통당할 예수의 몸, 상처받을 그리스도 예수의 그 지체, 그것을 생각하면서 예수님 때문에 깊이 참는 거죠.
그 속에서 참는 과정을 통해서 스며들어 온 예수 죽음의 기운이 실제화 되어서 들어오는 거예요. 들어오면서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의 혈기가 계속해서 죽어가는 거죠. 자기 자신의 이 더러운 욕망, 교만, 이런 것들이 막 죽어가는 거죠. 그렇게 되면 자기를 아프게 했던 지체들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고 오직 뭐냐면 그것을 통해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지를 보게 되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더러운 죄인이구나. 그리고 내가 원하지 않는 질서 속으로 들어가 보니까 평소에는 감추어져 있어서 도저히 나타나지 않던 혈기와 원수 맺는 것과 미움, 독설, 그리고 더러운 언어, 모욕적인 행동 이런 것들이 막 솟아나고 결국은 내가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져 있었지만, 그러나 내가 정말 몸을 사랑한 사람이 아니었구나. 이 예수의 몸보다는 나를 사랑한 사람이었는데 결국은 나는 예수의 몸에서 떨어질 수 없으니, 내가 내 몸을 사랑했다라고 하는 이 이기적인 사랑은 진짜 예수님이 원하시는 사랑이 아니었구나. 그걸 깨닫게 되는 거죠. 그 때에 깊이 자아를 깨뜨리는 견딜수 없는 고통의 경험들이 스며 들어오게 되는 거예요. 나는 여러분들이 이 말을 언어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이 말속에 담겨진 의미들을 여러분들이 많이 깨달았으면 좋겠어요. 그러면서 그 속에서 깊이 예수 죽음의 기운이 스며 들어오는 거예요. 그러면서 자기의 교만과 이런 것들을 죽이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 예수의 죽음이 기운이 들어오게 되면 자기 안에 있는 죄 된 성품을 죽이는데 어느 한 부분만 죽이는 게 아니라 성품 자체를 죽이는 거예요. 기운이 떨어지면 달리기도 못하고 턱걸이도 못하고 테니스도 못 치게 되듯이 마찬가지니까, 죄 된 성품이 죽게 되면 한꺼번에 자신의 악한 것들이 같이 죽게 되는 거죠. 그러면서 자기 안에 있는 이 사람들을 쉽게 미워하는 마음, 늘 안 그런 것 같았지만 마음속에 지체를 향한 참되고 진실한 사랑이 없었다는 것, 이런 것들이 그대로 드러나게 되고 그러면서 예수 죽음의 기운에 의해서 이런 것들이 죽어가는 거죠. 죽어갈수록 자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고 사랑에서 자라서 더 풍성한 영생을 누리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만약에 골치 아프다고 홀라당 교회 떠나고, 저 교회 설교가 좋대, 그러면서 폴짝 가고, 저 교회는 훈련이 끝내준대, 그러면서 폴짝 가고 저 교회는 뭐가 어떻대 폴짝 가고, 그렇게 계속해서 메뚜기처럼 다니는 거죠. 그러면, 뭘 못하냐 하면 예수 죽음의 기운이 스며들어 올 새가 없어. 그러니까 뭐냐면 인간이 이 교회 저 교회 다니면서 뎅굴뎅굴 굴렀는데 이게 하나님의 말씀의 콩가루는 많이 묻었어요. 그런데 이게 뚫고 들어가 본적이 없는 거야. 그러니까 오늘은 설탕가루 내일은 콩가루, 여기는 팥가루, 기름에 튀겼다가 꿀에 집어넣었다가 그러고 돌아다니지만 어차피 밀가루 덩어린데, 본질이 바뀐 게 아닌데. 그러고 자기 깐에는 헌신적으로, 헌신적으로 사셨겠지요. 뭐 집도 파시고 퇴직금도 월급도 많이 교회에 내시고 그러셨겠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정말로 뭘 기뻐하실지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투자가 아니라 자기 봉헌이에요. 자기 봉헌. 자기 자신을 드리는 거예요. 자기 자신을 드린다는 것은 자기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거예요. 그렇잖아요.
이제껏 까지의 신앙생활을 잘 한 번 반성을 해 보세요. 지금도 여러분들이 우리 교회에 다닐 수도 있고 다른 교회에 다닐 수도 있지만, 한 번 그 상황 속에서 여러분들 깊이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제가 이렇게 얘기하면 여러분들은 충격일 거예요. 그러나 너무 충격 받지 말고 가슴에 새겨들으세요. 설교가 진리를 가르쳐주고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은 교회에 있어서 너무너무 중요한 것이고 사실 그 일을 올바로 하지 못하면 그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기 어렵죠. 그렇지만 설교 좋은 교회를 찾아가는 것이 하나님을 잘 믿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보중의 상 바보가 내리는 결론이에요. 문제는 뭐냐 하면, 교회는 내가 원하고 필요한 것을 주는 효용가치가 있는 한도 안에서 교회가 교회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는 원래 예수의 몸이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교회에서 그냥 진리를 많이 깨닫고 성경공부 많이 하고 설교 좋은 교회 메뚜기처럼 돌아다니고 훈련 잘하는 교회에서 몇 년씩 훈련받고 그렇게 신앙생활을 잔뼈가 굵었어도 오히려 시골에서 다 쓰러져가는 교회, 목사님 설교 그렇게 신통한 거 없는 것 같아도 이 교회에 나를 세우셨고 그리고 주일학교 애들,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 몇 명밖에 안 나오는 교회지만, 이 교회가 예수의 몸인데. 그리고 교회 섬기는 사람들이 어떤 의미에서 그러고 교회관이 제대로 안 된 상태에서 수틀리면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그 장돌뱅이 신자들보다는 훨씬 질이 좋은 성숙한 삶을 하나님 앞에 살 수 있는 거예요. 진리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이 거기에 자기를 합치시키려고 할 때에 그 진리가 그 사람의 삶의 질을 높여 주는 것이지, 자기가 그렇게 하려는 의지가 없거나 진리 중에서 자기가 맘에 드는 것만을 편파적으로 선택해서 그것을 enjoy하려고 한다면, 그 진리는 그것을 즐거워하는 그 사람의 삶의 질을 높여 줄 수가 없어요. 매우 잘못된 생각이에요.
C. 까리따스의 사랑을 펼치는 공동체의 지평인 교회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이러한 사랑의 교통을 신자가 교회 안에서 누리며 살도록 해 주신 거죠. 그래서 신자가 내일 하겠습니다만, 그 사람이 정말 하나님을 향한 지순의 사랑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문제는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의 지평 그 위에서 입증이 되는 것이에요. 다시 한 번 할게요. 한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까리따스의 사랑, 즉 지순의 사랑을 가지고 있느냐 이것보다도 더 치명적으로 중요한 것이 신앙에 없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이 그러한 까리따스의 사랑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는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의 지평 그 위에서만 입증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교회에서 은혜 많이 받고 밖에 나가서 가정의 삶, 회사의 삶, 다 중요해. 그렇지만 거기서 잘 산다고 해서 다 잘사는 게 아니에요.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교회라고 하는 공동생활이에요. 여기에서 자기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그리고 하나님 이외에 나에게는 진정한 삶의 목표가 없다, 라고 하는 것을 이 공동체의 생활 속에서 입증을 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이 공동체의 생활 속에서 허물이 많은 지체들, 어떤 때는 결정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는 지체들, 때로는 견디기 힘든 고통을 제공하는 지체들, 그 속에 함께 어울려 살면서 그 속에서 자기가 하나님을 향해 순결한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 그렇지 않은 사람인지 거기에서 입증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를 행복하게 하고 자기를 편들어 주고 자기의 팬이 되는 교인들하고 어울려서 행복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사람은 까리따스의 사랑 없어도 충분히 그렇게 살 수 있어요. 자기와 생각이 달라. 누가 옳은지 모르지만 하여튼 자기와 생각이 달라.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자기를 미워해,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자기와 생각이 달라서 갈등을 일으켜. 그 때에도 고통은 자기가 받고 그 다음에 지체는 선대할 수 있는 사람, 자기는 홀로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깊이 깨뜨려져서 '고통을 통해서 나의 죄악을 보게 해 주시고, 그리고 주님의 그 큰 사랑을 모르고 맘대로 살았던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 아픔 속에서 하나님 내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를 도와주십시오.' 자기 혼자 고통을 당하고 지체들은 사랑만 받을 수 있게끔 해 줄때 그렇게 할 수 있는 그 인격의 크기가 그 사람 안에 있는 까리따스의 사랑을 입증하는 거예요. 이것은 두 사람 중에 누가 옳으냐, 하는 문제하고는 다른 거예요.
제가 아는 한 교회에서 교회가 말도 안 되는 부도덕한 일에 휩싸여서 고통을 받고 있어요. 성도 한 사람이 광고 시간에 제가 할 얘기가 있다고 교회에 나와서, 이거 실화에요. 그 자리에서 칼 가지고 할복을 하고 죽어 버렸어요. 피 흘리고 급히 병원에 옮겼는데 죽었어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의 문제에요. 옳고 그름이 매우 중요하지만 그러나 그것을 표출하는 방식이 문제에요. 그것은 세상에서 하는 행동이에요. "내가 옳다." 그러면서 활복해서 진짜 죽었어요. 성도. 한 10년 전에 있었던 실화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진리를 듣고 그리고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회개해. 그래서 우리의 간절한 소원은 뭐냐 하면 '내 마음에 세상에 있는 사랑을 다 걷어 가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십자가의 사랑, 그 지순의 사랑으로 나를 꽉 채우소서.' 그러면 우리의 마음속에 그 사랑이 꽉 찬 게 느껴지잖아요. 그런데 그 사랑이 진짜 자기 안에 있느냐 하는 것은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확인을 하는 게 아니에요. 성경을 보면서 확인이 되는 게 아니에요.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우주의 그 무한함을 묵상할 수 있는 철학적 사유의 능력이 없어도, 성경을 보면서 눈물을 뚝뚝 흘릴 수 있는 진리에 대한 감성이 모자라도 이 공동체의 지평 속에서 예수의 피로 거듭나서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졌지만, 아직은 부족한 것이 많기 때문에 자기를 아프게 하고 지체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자신과 또 자기와 관련된 많은 사람들을, 그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이 붙어있는 예수의 거룩한 몸, 그 몸에 붙어있는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를 통해서 함께 연합을 이루고 있는 완전하고 거룩하신 성삼위 하나님을 보면서 자기는 깨뜨려지고 형제는 세우고 자기는 상처를 받고 형제는 보호하고 자기는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해도 지체들의 명예는 보존해주고 그래서 자기가 깊이 깨뜨려지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철저하게 깨뜨려 지체들에게 유익을 주고 자기를 다 부수어서 자기의 원수들을 봉양하고 이렇게 해서 자기는 아파서 그리스도의 몸이 사랑으로 충만해 지도록. 그것을 통해서 그 사람 안의 까리따스가 입증이 되는 거예요.
VII. 결론
별 보고 철학의 묵상에 잠겨서 무한한 세상을 묵상하다가 교회에 와서 조금만 자기를 힘들게 하면 원수 맺기를 좋아하고 미움의 칼을 가는 사람들, 까리따스가 없는 사람들이에요. 진리를 들을 때 여러분들이 펑펑 울고, 앞자리를 다투고 그리고 무슨 책을 읽고, 그게 무슨 까리따스의 사랑을 입증 못해. 일부는 보여줄 수 있어요. 그런데 그렇게 진리에 매혹된 사람이 눈에 보이는 형제는 조금만 자기에게 고통을 주면, 단칼에 마음속에서 베어버려. 그리고 견딜 수 없는 표독한 미움이 형제의 심장을 찔러요. 그 때에 찌른 것은 형제의 심장이 아니라 예수의 심장이에요. 그런데 이 사람이 예수께 복을 받고 싶어 해요. 그러니까 그는 사울이 했던 것과 똑같은 일을 하면서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거죠. 결국 여기에서 그 사람 자신이 굉장히 많은 까리따스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을 했는데 결국은 공동체의 지평 속에서는 없는 것으로 입증이 되잖아요. 그럼 개인의 삶 속에서는 있는 것으로 입증이 되고, 공동체의 삶 속에서는 없는 것으로 입증되었으면 공동체에서 입증된 것이 진실이에요. 기도하겠습니다.
2.사랑과 교제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엡 5:25 下
I. 성령 안에서의 창조
어제는 교회가 삼위 하나님의 모상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성도의 사랑과 교제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처럼 교회는 사람이 경험적으로 세운 기관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세우신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시되 성자 홀로 세우게 아니하시고 성부에 의해서 성자를 통해서 성령 안에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 교회를 세울 작정을 하시고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어 아들이 주님을 위해 순종하게 하시고 그 희생을 토대로 성령님께서 우리 각 사람들을 믿게 하심으로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들이 되었고 믿는 즉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인 그 몸의 지체들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있는 성도들은 이제 교회를 이루면서 그 안에서 공동체로 함께 살아가는 삶 자체를 가리켜서 성도의 교통 혹은 성도의 교제라고 부릅니다. 우선 이것을 이야기하기에 앞서서 창조를 먼저 좀 이야기를 해야지만 이 부분이 이해가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향해서 두 개의 창조 계획을 가지고 계신데, 이 두 창조의 계획은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로 통일 된 것인데 두 번의 창조의 계획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이 창조의 계획안에서 교회가 세워지게 되고 이 교회가 세워졌는데 어떻게 해서 이 성도들이 한 몸을 이루는가에 대한 답이 바로 이 창조 속에서 설명이 됩니다. 그래서 먼저 창조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고 그리고 성령에 대해서 그리고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교회의 사랑과 교제에 대해서 살피면서 우리들이 새로운 은혜의 세계를 접해 보려고 합니다.
A. 삼위가 함께 하신 창조사역
우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도 하나님 아버지 혼자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께서 함께 이 창조 사역에 관여하시게 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하나님 아버지의 계획에 따라서 성부 성자 성령이 함께 참여하셔서 이 세계가 창조되는 것이죠. 하나님 아버지의 계획에 의해서 성자 예수님의 중보를 통해서 성령 하나님 안에서 이 세상이 창조되는 것이죠. 성부에 의해, 성자를 통해, 성령 안에서 세계가 창조되는 거죠. 그러니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은 하나님 아버지의 계획에 의해서 창조 되었지만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지 않고는 창조된 것이 없어요. 그래서 요한복음 1장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셨는데,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만물이 지어졌고 지어진 만물은 그 말씀 없이는 창조된 것이 없다.’ 라고 할 때 그 말씀이 바로 성자를 가리키는 것이죠. 그래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에 의해서 이렇게 세상이 창조되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처음에 창조될 때부터 이 모든 피조 세계의 원인이 되는 거죠. 그리스도 예수의 중보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어요.
그런데 창조된 모든 만물들을 하나님께서 하나하나 아무렇게나 존재하도록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성령 안에서 그 창조된 모든 사물들이 인간을 포함해서 이 우주의 모든 사물들이 성령으로 연결되게 하셨어요. 연결되게 하셔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혼자 존재하지 않고 다른 사물과의 관련 속에서 상호작용 속에서 존재하게 하신 것이죠. 지금도 그런 흔적이 희미하지만 남아 있어요. 예를 들자면 물이 흘러가고 그 물을 땅이 머금고, 머금은 그 땅의 물을 먹고 식물이 자라고 식물에서 떨어지는 열매와 뿌리들을 짐승들이 먹고 짐승이 토한 이산화탄소가 나무들에게는 광합성을 위한 재료가 되고 식물들이 먹고 토한 산소가 동물들에게는 호흡하는 재료가 되고. 이렇게 하면서 만물이 다 엮여져 있는 것이죠. 하나님이 그렇게 세상을 창조하신 것이죠.
B. 성령의 재창조 사역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짓고 타락을 하게 되자 이 세상이 망가졌어요. 제일 먼저 망가진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세계에 죄가 들어오게 되어서 그래서 만물 사이에 있던 연결들이 끊어지게 되지요. 성령 안에 하나로 연결되었던 것들이 끊어지게 되요. 그러니까 피조물들이 서로 공존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동물과 동물이 치열하게 싸우고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 갈등하고 투쟁하는 그런 자연의 세계가 된 것이죠. 그 뿐만이 아니죠. 창조 세계 안에 깃들였던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 자신에게 돌아가 버렸어요. 그래서 원래의 아름다움은 모두 상실되어 버렸어요.
이렇게 되었을 때 하나님이 이 창조된 세계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에 하나님이 이루시려고 했던 그 일을 이제 이 창조된 세상, 죄로 말미암아 망가진 세상을 회복시켜서 원래의 그 계획을 이루고자 하셨어요. 그래서 이번에도 이렇게 죄로 망가진 모든 세상을 다시 원래대로 회복해서 그 창조의 영광을 나타내고 더 큰 영광으로 이 세상이 점점 더 가꾸어져 가도록 그렇게 만드실 작정이었는데 그 일을 시작하실 때에 이번에도 택하신 분이 누구시냐 하면 성자 예수님이에요.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성령 안에서 인간들을 구원하시는 거예요. 구원하셔서 그 구원을 통해서 하나님이 창조하셨지만 죄로 인해서 망가진 이 온 세상을 전부 다 새롭게 하실 작정을 하시는 거죠. 그런데 한 번에 그렇게 하질 않으시고, 천지창조는 한 번에 하나님이 이루셨지만, 이제 이 재창조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지를 아니하시고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이루어 가시는 거예요.
그래서 제일 먼저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거예요. 인간을 구원하셔서 그들을 이제 이 세상 전부를 새롭게 구속할 종자씨로 삼으시는 거예요. 그렇게 구원한 사람들을 하나의 모판 속에 모아 놓은 것이 이것이 바로 교회에요. 그래서 교회에서 그 모판을 잘 키워서 그래서 그 다음에 그 모를 찢어서 그래서 온 땅에 다 심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에서 그 모종들이 거기에서 성장하고 자라서 또 모판을 이루고 또 찢어지고 이렇게 해서 온 세상의 인간을 다 하나님이 구속하시려고 하는 거지요. 하나님이 택하신 모든 인간을 구속하시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자들은 영원한 형벌에 처하시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완성하셔서 그래서 창조의 원래의 찬란한 영광을 회복하고 그것을 토대로 죄가 들어와서 망가지지 않았더라면 점점 더 영광스러운 세상이 되었을 세상으로 하나님이 만들고 싶으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래서 구속하시는 거예요.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창조되고 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속이 이루어졌는데 예수께서 이루신 이 구속을 우리 각 사람 속에 적용해서 실제로 예수를 믿고 구원받도록 우리를 중생시키시는 분은 또 성령님이에요. 그러니까 누구도 성령님을 통하지 않고는 누구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고 그리스도를 예수, 나의 구주라고 시인 할 수 가 없는 것이죠. 그렇게 성령 안에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예수 믿게 만드셔서 그래서 우리를 이제 하나의 모판처럼 영적인 교회로 불러 모으셔요. 그렇게 되어 그 사람들이 영적인 연결을 성령 안에서 이루며 살게 하시는 거죠. 이게 결국은 이다음에 하나님이 세상을 모두 완성하실 때에 그 때에 다시 그리스도 예수가 교회의 머리일 뿐 아니라 이번에는 재창조된 세계의 머리가 되셔서 그리스도를 머리로 온 피조세계가 다시 연결이 되고 거기에 흐르게 될 만물 사이에 존재하는 상호 존재의 교통의 모상이 바로 교회 안에 있는 성령 안에서 성도들의 이 연합이에요.
II. 창조하시는 성령의 사역
A. 사람을 창조하심: 성령으로써
그래서 결국 우리들이 여기에서 강조해야 할 것은 무엇이냐 하면, 창조하시는 성령의 사역이에요. 그래서 이 창조하시는 사역은 뭐냐 하면, 제일 먼저 사람을 창조하시는 것과 교회를 창조하시는 것을 나누어서 이야기를 해 볼 수 있어요. 먼저 사람을 창조하시는 거죠.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는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지혜 속에서 하나하나가 존재의 목적을 가지고 창조되었고 하나하나는 완전하고 아름다운 피조물이지만,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전체적인 이 온 우주의 아름다움을 위해서 하나하나의 아름다움이 기여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들이 성령으로 다 연결이 되어서 한 가족과 같은 연합을 이루고 있었어요. 물론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이 연합은 다른 무생물이나 동물들과 이루는 이 넓은 의미의 창조의 연합보다 매우 특수한 것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죠. 그렇지만 하여간 모든 피조물들이 그런 영적인 연결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1. 생기를 통해(창2:7)
그 때 하나님께서 창조의 마지막에서 인간을 창조하셨는데 처음 사람은 생기를 통해서 산 사람이 되게 하시죠. 흙으로 사람을 빚으신 것은 인간의 육체이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후 하고 생기를 불어 넣으신 것은 인간 속에 영혼을 창조하시는 모습이에요. 창조된 영혼을 그 육체 속에 불어 넣으심으로 그가 산 사람이 된 것이죠. 그래서 인간은 흙에서 지어진 육체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영혼이 만나서 육체가 되는데 이 영혼을 불어넣어서 산 사람이 되게 하시는 이 일이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성자를 통해서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인간 안에 영혼이 있죠. 하나님은 순결한 영이시지요. 이 하나님 닮은 인간의 영혼과 영이신 하나님이 직접 만나서 연결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영이신 성령님이 인간의 영혼과 순결한 영이신 하나님을 연결시켜 줌으로 말미암아 그 성령 안에서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과 교통을 할 수가 있었던 거죠. 이것은 다른 피조물들에게서는 전혀 볼 수가 없는 일인데 하나님은 인간에게만 이것을 허락해 주신 것이죠. 이어서 창조하신 아담이 태아나자 마자 동일하게 하나님과 그런 성령을 말미암아 연결을 맺게 되었고 또 성령으로 말미암아 남편인 아담과 연결을 맺게 되었으니 이는 부부인 동시에 하나님이 세우신 말하자면 최초의 교회의 그림자에요. 그리고 그들은 서로 부부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부와 부부의 영혼이 교통하고 하나님과 각자의 영혼이 교통하고 두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교통하는 이 완벽한 삼각형의 교통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죠. 그 특별한 교통 안에서 인간은 아래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만물과 또 다른 종류의 영적인 연결을 이루고 있었고 창조된 모든 만물은 자기들끼리 영적인 연결을 이루어서 모든 것들이 하나의 전선으로 연결이 되어서 불이 들어와서 찬란한 세계가 된 것처럼 그런 창조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었던 거죠.
2. 중생을 통해(요3:5)
그러다 타락하고 죄가 들어오게 돼요. 그래서 이번에는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는데 이것은 이제 새로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연적으로 출생하고 생겨나는 그 인간들을 하나님이 재창조 하시는 세계를 만들고 싶어 하신 것이거든요.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들을 예수님이 오셔서 다 쓸어버리고 새로운 아이를 하나씩 태어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죄 가운데 살고 있는 사람들을 이제 거듭나게 하심으로써 그들을 새사람으로 만들어 가심으로 만들어진 그들을 새로운 교회의 공동체를 만들게 하셔서 그들을 종자씨 삼아서 온 세상을 하나님의 가족처럼 만드시려고 하는 재창조의 계획을 가지고 계신 것이죠.
그런데 그 일을 우리들이 중생이라고 부르는데 중생을 통해서 이 하나님이 사람을 재창조 하시죠. 죄인들을 재창조하셔서 이제 다시 하나님 앞에 교통하며 살 수 있는 사람들로 만드시는 거죠. 이 일을 누가 하시냐면 성령님이 하시는 거예요. 이 성령님이 하시는 것은 최소한 세 가지의 단계로 나뉘어 지는데 우선 먼저는 허물과 죄로 인해서 죽어있는 영혼이에요. 영혼이 진짜 죽어있는 것은 아니지만, 생명이신 하나님과의 연결이 끊어진 채로 영혼의 자연적인 기능만 남아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신령한 의미에서는 이 사람이 죽었다, 라고 말하는 거죠. 그렇게 영혼이 죽은 상태인 것을 성령님께서 그에게 오셔서 그를 살리시는 것이죠. 이게 중생이에요. 살리신 이 인간의 영혼을 살리자마자 동시에 그리스도 예수의 교회의 몸에 접붙이시는 거죠. 보이지 않는 영적인 교회에 그를 접붙이셔서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를 머리로 하는 이 온 땅의 모든 성도들의 연합인 이 교회에 이 성도가 접붙여지게 하시는 것이죠. 접붙여진 성도들로 하여금 공동체를 이루면서 하나님 앞에 살게 하시는 거예요. 이렇게 해서 인간의 처음 창조도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고 그리고 두 번째 타락한 인간을 재창조 하시는 중생의 역사도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죠.
B. 교회를 창조하심: 성령으로써
1. 공동체에 성령을 부으심(행2:2)
똑같은 일이 교회를 향해서 일어나게 되요. 교회를 성령 안에서 창조하시는 거죠. 이것은 뭐냐 하면 교회를 창조하시는데 우선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는데 첫째는 그 공동체에 성령을 부으심으로 교회가 태어나게 되는 거죠. 그게 신약교회의 출생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오셔서 이 세상에 33년 동안 계시다가 마지막에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고 그리고 죽으시고 우리의 죄 값을 치르신 후에 부활하셨죠. 부활하셔서 제자들과 함께 생활을 하시다가 승천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시는 것이 도대체 뭔지 본질을 몰랐지만, 어쨌든 죽은 줄 알았던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는데 살아나시자마자 자꾸 당신은 다시 가야한다고 그러시니까 제자들은 근심이 되는 거죠. ‘예수님 우리와 그냥 같이 계시지, 왜 예수님은 그렇게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에게 기쁨을 주셨는데 왜 예수님은 자꾸 가신다고 그러나?’ 그런데 예수님은 하시는 말씀이 “내가 가야지만 보혜사 성령님이 너희에게 오신다.” 이 보혜사라는 말은 우리를 돕고 중보하고 우리를 변호하신다는 그런 뜻이에요. “그 성령님이 너희에게 오신다.”
다시 말하면 교회론 적으로 보면 성부에 의해서 나 성자를 통해서 교회가 세워질 기초는 이루어졌는데 이제 성령이 오셔야지만 그 성령 안에서 이 교회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말씀을 하고 싶으셨던 거예요. 그러면 교리적으로 지식이 없는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은 ‘아니 그럼 그동안은 성령님이 어디 가 계셨길래 자꾸 오신다고 그러나?’ 구약시대에도 성령님은 계셨죠. 영원한 하나님이시니까 안 계신 때가 없이 언제나 계셨죠. 그러나 구약시대에는 성령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일하시는 방법이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셔서 성령이 오신 다음과는 달라요. 그 때는 하나님이 하셔야 할 일이 있으시면 성령님이 오셔서 그 사람을 통해 그 일을 하게하고 일이 끝나면 그 사람에게서 떠나시는 거죠. 그러니까 공동체 속에 성령이 부어져서 그 성령이 그들에게 생명처럼 하나님으로서 그들 가운데 영원히 거하시는 이런 개념은 구약 속에 없는 거죠. 아주 특별하고 매우 중요한 사람들만 이 성령의 오시는 임재를 경험했고 임재를 경험한 사람 중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령님이 다시 떠나시는 것을 경험해야 했다 이거죠. 그런 점에서 예수님이 당신이 가셔야지만 성령님이 오시고 성령님이 오셔야지만 아버지에 의해 세워지고 성자를 통해 이루어진 구속의 공로를 기초로 성령 안에서 이제 교회가 형성된단 말이죠.
그렇게 해서 이제 성령님께서 오셔서 그들을 구원하시는 것이죠. 그래서 오순절 성령이 임하신 것은 그 성령의 강림을 통해 나타난 희한하고 놀라운 일도 우리들이 주목해야 할 바이지만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의미는 성령님께서 오셔서 이제 안가신단 말이죠. 그래서 구약시대의 하나님이 우리 위에 계신 하나님이라면, 예수님이 계시던 때의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이고,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이 ‘우리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그래서 임마누엘이었어요.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 승천 하신 다음에 교회가 세워진 후에는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시는, 그런 시대가 되는 것이죠. 그런 식으로 성령님이 오신다고 하니까 이것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굉장히 놀라운 축복이고 이것은 인간의 타락과 함께 모두 사라져 버린 것인데 그게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을 통해서 처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죠. 그러니까 처음 창조 세계에는 온 세상에 성령이 충만해서 그 성령으로 연결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제 타락과 함께 그 모든 연결이 끊어지고 그리고 구속을 통해서 성령님이 오시는 것이죠. 그렇게 해서 교회 공동체를 세우시는 것이죠.
2. 신자 안에 성령이 거하심(고전6:19)
또 하나 하시는 일은 뭐냐 하면, 그렇게 믿게 된 성도들 안에 성령이 거하심으로 결과적으로는 교회 안에 성령이 거하시는 셈이 되었다 이거죠. 고린도전서 6장 19절에 보면 너희의 몸이 성령의 전이다. 사도가 이야기 합니다. 성령님께서 거하시는 집이 바로 너희의 몸이다. 너희 몸 안에 있는 그 영혼에 성령님께서 거하신다. 그리고 한 번 신자된 사람들에게는 성령님은 떠나지 아니하시고 그들과 함께 계셔서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보증을 해 주셔요.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사실이 내 가슴 속에 확고하게 믿어지고 또 아버지의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성령님이 만들어 주시는 것이죠. 또 ‘네가 이렇게 하나님을 믿으면서 살면,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유업을 받지만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유업은 네가 썩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아버지의 후사가 되어서 그의 유업을 모두 함께 누리고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되는데 그것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주실 것에 대한 보증을 해 주마. 그러면서 그 보증으로서 주신 것이 하나님의 영을 신자 속에 주신 거죠. 이것이 바로 어저께 설명한 인간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음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 속으로 연합된다, 라는 말의 의미에요. 그러니까 성부 하나님에 의해서 성자를 통해서 성령 안에서 교회를 이루게 되는데 성령 안에서 교회가 이루어지므로 성령께서 각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예수의 몸에 접붙이시는 거죠. 그렇게 접붙이셔서 예수님과 한 몸이 되게 하고, 또 이번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과 연합되게 하시는 거죠. 이것이 바로 신자의 연합의 본질이에요. 이 모든 일들을 성령께서 그들 안에 계심으로 이루시는 것이죠.
그래서 성령께서는 신자 각 사람 속에 오셔서 그래서 신비한 방법으로 신자 안에 계시는 것이죠. 왜냐하면 신자는 사람이고, 성령은 신이에요. 신이 인간 속에 들어가게 되면 어떻게 되겠어요. 대표적인 게 귀신 들리는 거잖아요. 사람이 형언할 수 없는 사람이 되지요. 왜냐하면 이질적인 신이 이질적인 인간 속에 들어가서 그래요. 그런데 성령이 오시는 건 그렇지 않아요.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셔도 표가 나는데 귀신이 들어가면 그 사람과 귀신 사이에 분리가 일어나요. 그런데 성령이 오시는 건 그런 방법으로 오시는 게 아니라 인간이 가지고 있는 영혼 안에 본성을 새롭게 하시지만,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영혼의 기능들을 파괴하지 않고 오셔요. 그래서 그 속에 스며든 것처럼 계셔서 그래서 이 인간이 성령이 자기 안에 오셨을 때에 마치 자기가 고향으로 돌아간 것 같은 편안함을 느끼지, 안계시던 영이 내 안에 들어왔기 때문에 부자연스럽게 느끼질 않는단 말이죠. 이게 우리들이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이 성령 안에서의 신자의 연합이에요. 그런 연합을 이루게 되는 것이죠. 그렇게 해서 성령님께서 이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창조하시고 또 교회를 창조하시게 됩니다.
그런데 이제 이렇게 창조된 사람 하나하나는 예수를 믿고 거듭나기 전까지는 이 세상의 끊어진 인간일 뿐이에요. 무슨 뜻인지 아세요? 처음 창조될 때,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 그 다음에 인간과 이 세상에 있는 만물들, 그리고 만물과 만물들. 이렇게 다 연결이 되어서 그래서 우주가 존재하게 된 거거든요. 그런데 죄가 들어오면서 이 연결이 다 끊어진 거죠. 자연적인 것들은 일부 남아있지만, 그러나 끊어졌어요. 끊어지고 나니까 결국은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도 끊어지고 사람과의 관계도 파괴되고 자연과의 관계도 파괴되고 자기와의 관계도 파괴되고 해서 인간은 완전히 고립된 뚝 떨어진 존재가 된 거죠. 인간은 그렇게는 살 수 없도록 창조된 존재에요. 하나님이 처음부터 사람을 창조하실 때 그런 식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끊어져서 존재하도록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영적인 연결 속에서 그 영적인 연결을 통해서 무엇인가 그 인간으로 하여금 창조의 본래의 목적을 따라 살 수 있게끔 그 어떤 자원들을 계속해서 공급을 받음으로써 그가 참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창조된 것이죠.
하나님께서 우리를 비유하실 때 성경에서 양으로 자주 비유를 하시잖아요. 그것이 주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이에요. 다른 모든 동물들은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기능이 있어요. 그래서 뿔이 있어서 받아 버린다든지, 빠른 다리가 있어서 도망가 버린다든지 하다가 안 되면 방귀라도 세게 뀌어버린다든지 아니 그렇게 자기 몸을 변하게 한다든지 그럴 수 있잖아요. 양은 그럴 아무것도 없어요. 양은 많은 맹수들의 도시락 수준이에요. 그렇잖아요. 사람들의 도시락이 되기도 하지요. 왜 그럼 하나님이 우리를 그런 양에다가 비유를 했냐? 빠른 다리도 없고 날카로운 뿔도 없고 그렇다고 한 번 물어뜯을 수 있는 이빨이 있는 것도 아니에요.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없으니 성질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뭐 그런 것도 없어요. 그러니까 이러한 양에다 우리를 비유하신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목자 없이 못 산다, 그것을 보여주시려고 우리를 하필이면 양에 비유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은 처음서부터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살도록 창조된 거예요. 그런데 죄가 들어옴으로써 모든 것에서 다 단절되어 버린 거죠. 아담과 하와가 있었는데 그 둘의 관계도 끊어져 버려요. 그렇게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그러더니, 아 부담스러운 존재가 됐다, 내가 너 때문에 이렇게 스캔들에 말려들어서 이 고통을 당한다, 짜증나는 존재가 된 거죠. 자연과의 관계도, 하나님과의 관계도. 완전히 고립된 거죠. 그러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이게 오늘날 살아가는 불신자들의 모습이에요. 그래서 이것을 어떻게 풀 것인가를 요즘 ‘인생의 행복을 묻는 그대에게’에서 풀고 있잖아요. 내가 반복은 안하겠어요. 모자라는 것은 주일날 하기로 하고.
자, 그렇게 해서 이제 이 세상에 있는 고립되어 있는 인간들을, 그러니까 인간의 비참의 원인이 결국은 궁핍에 있는 거예요. 이런 연결을 통해서 공급을 받게 되어있는 인간이 그 연결이 끊어져 버리니까 아무것도 없는 거죠. 그렇게 궁핍하니까 인간이 비참하게 되는 거죠. 특별히 인간이 타락한 뒤에는 이제 이 육체는 인간의 본질 중에서 하위로 들어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건 어차피 소멸하고 없어지는 거니까. 그렇지만 인간의 영혼은 보다 더 본질적으로 중요한 위치가 되는 거죠. 뭐 처음부터 그랬지만, 타락하고 난 후에 더더욱 그랬단 말이죠. 그러니까 영혼은 이 육체를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돼요. 그냥 한 7,80년 정도 쓸 생각 하면 돼요. 무슨 한 800년 쓸 각오를 하고, 뭐 그럴 필요가 없어요. 왜? 그때까지 살지를 못해요. 아무리 가꾸어도 그렇게 안 돼요. 그러니까 그 때까지만 성성하게 쓰면 벗어버리면 된다 이거죠.
III.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짐: 공동체적 구원
그러다 보니 이 영혼이 더 중요하게 된 거죠. 그 영혼을 하나님이 구원해 주시는 거죠. 구원하시면, 그 구원도 결국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성자 예수의 은혜의 의해, 성령의 믿게 하시는 교통을 통해서 이 인간이 삼위하나님에 의해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죠. 그리스도를 통하지만, 삼위 하나님이 함께 우리의 구원에 참여하셔요. 그래서 우리를 예수 믿게 만드시는데 성령 안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거죠. 믿을 때까지는 ‘믿어야 될까 말아야 될까’ 이것은 개인적인 사건이에요. 아직 믿지 않았는데, ‘내가 인생사는 게 너무 힘들다,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 그러면서 고민하고 괴로워하는데 누가 와서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할 때 ‘나는 그 분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믿었으면 좋겠다.’ 이때까지 이것은 개인적인 사건이에요. 그런데 이제 복음을 들으면서 회개하고 주님을 믿게 되는데 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게 되자마자 그 영혼을 주님이 중생시키시자마자 그는 그 즉시 어떠한 시간적인 간격도 없이 그 순간에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지게 하시는 거예요. 그럼 여러분 이렇게 묻겠죠. “그 사람 아직 교회에 등록도 하지 않았는데.” 교회 등록한 거 하고는 상관없어요. 거기에 접붙여지게 되는 거예요. 그럼 여러분이 애 낳아놓으면 주민등록 해야지만 비로소 피붙이가 되는 거예요?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탁 접붙여지는 거예요.
꼭 시간적인 것은 아니지만 논리적으로 보면 회개는 중생보다 늦어요. 인간의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중생이라고 하잖아요. 중생했기 때문에 회개하는 거예요. 중생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을 느낄 수 없어요. 여러분, 죽었는데 “어이 어이 일어나봐.” 하면서 툭툭 쳐봐요. 일어나나. 살아있으면 “일어나, 이 사람아.” 하면 벌떡 일어나잖아요. 똑같은 거죠. 그러니까 인간이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회개하기 위해서는 먼저 중생하는 것이 논리적인 순서에요. 그럼 결국은 뭐냐 하면, 내가 어느 순간에 펑펑 눈물을 흘리며 내가 죄인이라고 고백을 했는데 이미 그 때에는 자기가 예수의 몸에 접붙여진 상태에서 일어나는 경험이에요. 그러니까 이것이 개인적인 사건이에요, 공동체적인 사건이에요? 그렇게 시작하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새 생명이 시작이 되는 거예요. 이해하겠어요?
그럼 언제쯤 예수의 몸에서 떨어질까요? 10년 보험 만기? 아니면 저 교회 다닐 때까지? 아니면 타락 할 때까지? 타락을 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한 번 구원 받아서 접붙여진 신자는 떨어질 수 없어요. 어떤 사람은 상당히 열심히 교회 다니는 것 같고 진실한 신앙을 가진 것 같았는데 어느 날 불현듯 예수 안 믿겠다고 선언하고 세상으로 돌아가서 돌아오지 않아요. 그 사람은 사람 보기에는 정말 좋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진정으로 예수의 몸에 접붙여진 사람이 아니었어요. 인간이 그것을 판단하는 것은 항상 한계를 가지고 있어요. 그렇지 않다면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돼요? 예수님 몸에 붙었다, 찢어졌다, 붙었다, 찢어졌다, 계속 그러는 거죠. 그런데 이게 붙어있을 때 죽으면 다행인데, 잠깐 휴가 갔는데 죽었어요. 그럼 이거 20년 신앙생활 나무아비타불 아니에요. 그러니 이게 마지막 시점이 중요한 거예요. 지금은 붙었다, 떨어졌다 해도 상관없는데, 아주 10년 붙어 있다가 열흘 떨어졌는데 딱 죽어 버린 거죠. 그러니까 비극적인 일이지.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상상하는 것 자체가 예수님에 대한 엄청난 모독이에요. 그건 정신병적인 교리에요. 그럴 수가 없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예수의 몸에 접붙여지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제 문제는 뭐냐 하면, 예수의 몸에 접붙여지게 되었는데, 보이지 않는 교회의 일원이 된 거죠. 이것은 교회를 나가고 안 나가고, 하고는 상관이 없어요. 일단 태어나서 예수의 몸에 탁 하고 접붙여지게 된 거죠. 그 접붙여짐을 통해서 자기는 그것을 의식하든 못하든 그가 참다운 중생과 참다운 회개를 통해서 접붙여지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삼위 하나님과 교통을 갖게 되는데 그 교통의 본질은 생명과 자원의 공급이에요. 그 분께 붙어서 예수를 통해서 성삼위 하나님의 생명이 그에게 흘러 들어와요. 역시 똑같이 성부에 의해서, 성자를 통해서, 성령 안에서 삼위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죄로 말미암아 끊어져서 예전에는 하나님과도 끊어지고 사람과도 끊어지고 만물과도 끊어진 외톨박이가 되었다고 말씀을 드렸잖아요. 공급되는 모든 공급원들이 차단되는 거죠. 중요한 공급원은 하나님인데 하나님으로부터의 공급이 딱 끊어져 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완전히 고립되어 버리는 거죠. 이번에 러시아가 가스 딱 끊으니까 유럽이 추워서 벌벌 떨었지요. 가스 안 보내 주니까 줄이는 거지 4분의 1인가 줄였대요. 그런데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것을 다시 열어 주시는 거예요. 생명이 들어오게 하시는 거죠. 그거 알아요? 신자가 생명이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졌기 때문에 그 분께로부터 생명을 누리는 거예요.
또 한 가지는 생명과 함께 자원을 공급받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의 육체를 위해서는 이 땅에 있는 자원을 하나님께 기도하고 의지해서 공급받아요. 또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나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안 주실 수 있고, 나는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데 더 많이 주실 수도 있어요.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육체를 보존하고 그리고 육체의 생명을 보존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거죠. 그리고 그 다음에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의 보다 더 중요한 본질인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자원이 공급돼요. 그러니까 육체를 위한 자원을 지상의 자원이라고 부르고 영혼을 위해 공급되는 자원을 하늘의 자원이라고 불러요. 그런 은혜의 자원이 공급이 되는 거예요. 그것을 가지고 힘을 얻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때 생명을 누리고 자원을 공급받으면서 살아갈 때 그가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향하여, 삼위 하나님께 살아있는 사람이라 이거죠. 이게 원래 인간의 존재의 양식이에요. 이런 식으로 인간은 존재 해야지만 되도록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신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는 이것은 어떤 특별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생겨나게 돼요. 그게 뭐냐 하면 이렇게 해서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지게 되면, 모든 성도들은 이제 보이지 않는 교회에 접붙여졌는데 생명을 누려, 그리고 또 자원을 공급받아. 우리의 몸이 그런 거거든요. 그런데 내가 묻고 싶은 게 그거에요. 이 손가락이 살아있어요, 죽어있어요? 그런데 이 손가락이 어떻게 생명을 공급받는지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어디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아요? 말할 수 없지요. 왜냐하면 이 생명을 머리 어딘가에서 나와서 실처럼 연결이 되어서 각 몸에 개별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이 안에 꽉 차 있어요. 손가락이 기계에 탁 잘렸다고 해 봅시다. 펄떡 펄떡 막 뛰는 거 아세요? 반사 신경이 살아있어서. 펄쩍 펄쩍 막 뛴다고. 손가락이 혼자서. 그래도 살아있다고 얘기 한 하죠. 피도 흘러. 그래도 우리는 그것을 살아있다고 말하지 않죠. 왜냐하면 끊어져 나갔으니까.
무슨 얘기냐 하면 살아있는 것 자체가 개인적으로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로서 공동체적으로 살아있는 거죠. 또 자원을 공급받아요. 피를 공급받잖아요. 노폐물은 걷어가고. 작용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 어디를 통해서 그런 일들이 일어나느냐 말이에요. 몸 전체가 그 일들을 하는 거죠. 배를 갈라놓고 두 개 골을 잘라 아무리 손을 집어넣고 휘집어 봐도 생명은 없어요. 그런데 그 생명이 모든 기관에 의해서 누려지는 거예요. 그것을 통해서 몸 전체를 통해서 생명이 주어지고 몸 전체를 통해서 피가 흐르고 자원이 주어지는 거죠. 이 대목을 여러분들이 눈을 떠야 해요. 그런데 그렇게 생각을 안 하고 나 혼자 예수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을 하는 거야.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 혼자 예수님을 잘 믿는 것 같아도, 정말 주님을 위해 많이 산 것 같아도, 영혼이 풍성한 생명과 자원을 누리지 못한 채, 곤고하게 살아가는 거예요. 진리를 많이 깨달은 사람들도 종종 보면, 핍절하기 짝이 없는 삶을 살아가요.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진리의 세계를 그렇게 많이 보고, 왜 저렇게 밖에 못 살까?
그런데 이 신앙생활의 풍성함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진리들을 골고루 알고 있어야 하고, 알고 있는 진리들을 자기가 몸소 체험하고 거기에 자기를 합치시키는 가운데에 생명의 풍성함을 가져오는 거예요. 그런데 이제 이렇게 되어서 눈에 보이는 교회에 가입을 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 여러분들 이렇게 묻고 싶잖아요. “아이고 목사님 무교회주의도 있다고 그러던데 그냥 혼자서 잘 믿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성경적으로 옳은 신앙이 아니죠.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과 이 세계의 창조를 이루어가고 창조된 목적을 완성해 가는 하나님의 지혜, 즉 사랑과 지혜가 교회에 위탁되어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 와서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에 연결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한 몸이 된 사람은, 반드시 눈에 보이는 교회에서 보이지 않는 그 연합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져 있는 신자의 삶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여기에서 이렇게 말씀을 듣고 있어도 아직까지도 깊이 사랑하는 교회가 없는 것은 정말 비극이야. 그 나이 먹도록. 여러분들이 초등학생이나 중 고등 학생이라면, 조금 이해가 가요. 그러나 그 나이 먹도록 정한 교회도 없고 내 교회도 없고, 그리고 ‘나는 여기에서 접붙여진 사람이고, 여기에서 주님의 사랑과 지혜를 알아가고 그리고 나의 창조의 목적을 완성해 가고, 나의 인간의 존재의 목적을 이 교회의 존재의 목적에 합치해 간다. 그래서 결국은 나 혼자가 아니라 이 모든 지체와 함께 이 망가진 세상을 고치는 도구로서 이 세상을 살아간다. 그것이 내 인생의 보람이다.’ 그렇게 얘기 할 수 없는 사람들은 너무 불행한 사람들이에요. 여러분들은 지금 헛살고 있는 거예요. 그 교회가 우리교회처럼 이렇게 큰 교회, 아니 뭐 우리 교회가 그렇게 큰 교회도 아니지만, 그래도 뭐 작은 교회 보다는 좀 크잖아요. 그러니까 저도 목회자들을 만나면 항상 이중적으로 이야기 하죠. 조그만 교회 목회자들하고 이야기할 때는 큰 교회이다, 라는 생각을 갖지만, 몇 만 명 모이는 교회 보면 우리는 뭐 자기네 유년부 밖에 안 되니까 내가 뭐 할 얘기가 없죠. 큰 교회일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작은 교회일 필요도 없고, 뭐 강남에 산다고 해서 꼭 강남에 있는 교회에만 나갈 필요도 없고, 공부 많이 했다고 무슨, 어디 집회에 가니까 교회 이름이 ‘박사교회’더라고. 왜 그러냐고 하니까 주소가 충청도 무슨 군 박사리래요. 거기 교회에요. 그런 교회 찾아가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 교회가 어느 교회이든 간에 삼위 하나님과 교제하는 교회이고,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을 배울 수 있는 교회에 소속되어 있다면 좋은 거예요. 그런데 아직까지도 그게 없어서 머리가 허옇도록 방황을 해요. 그렇게 살아서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 정신 차려요. 헛살고 있는 거라고. 여러분들이 태어나서 뭐 한 게 있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을 해 봐요. 이 교회 저 교회 메뚜기처럼 옮겨 다니면서 등록 카드 쓴 것 밖에 더 있느냐 말이에요. 그것도 곱게 옮겨 다닌 사람이야 c학점은 되지만, 한 장 옮겨 쓸 때마다 교회 지체들한테 칼 꽂았을 거 아니에요. 그렇게 하고 무슨 복을 받으려고 해. 교회 없이 여러분 구원 없어요. 여러분 구원 받아서 ‘아,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구나.’ 이거 깨닫기 전에 여러분 벌써 예수의 몸이 된거야. ‘아, 하나님이 은혜 주시네.’ 몸을 통해서 주시는 거야. 몸을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겨우 전해진 거라고. 그걸 알기나 알아요?
그래서 눈에 보이는 교회에 가입을 해서 일원이 되는데 여기서부터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교회를 창조하신 하나님도 완전하신 분이고 그 교회를 이루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예수의 구속의 공로도 완전하고 성령님이 그들을 믿게 만드시고 예수의 몸에 접붙여 주신 것도 이제 변경될 수 없이 완전하고 영원해.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예수의 몸에 접붙여지긴 했지만, 그게 신자는 완전하지 않아. 그게 문제에요.
몇 달 전에 한 번 했는데, 한 번 더 할게요. 괜찮지요? 우리 집안에 초상이 나서 우리 집사람이 집을 비웠어요. 그런데 뭐 좀 끓여 먹으려고 써는데 시간이 없었어요. 제가 요리 좀 하거든요. 그런데 뭘 좀 끓여 먹으려고 하는데 막 급하게 하는데 아이고 손을 썰었어요. 떨어져 나갔는데 그 살점이 마늘 한 3분의 1개 정도. 진짜 저 속으로 뼈가 보일 정도로 떨어져 나갔어요. 그런데 순간에 배이니까 아프지도 않더라고. 피도 안 나와. 이게 놀라서 그랬는지. 조금 있더니 피가 콸콸 쏟아지는데 그러면서부터 아프기 시작하더라고. 그러고 나서 이제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러면서 탁 보니까 칼 등에 마늘 조각만한 살점이 턱 붙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난생 처음으로 정형외과 한 번 해 보자, 그러고 그것을 가지고 들어가서 깨끗이 씻어낸 다음에 그것을 탁 꿰맸어요. 그런데 그것이 벌써부터 마르기 시작하더라고. 색이 변해. 그래서 그것을 붙여 놓고 핀으로 잘 돌려서 원래의 살결을 딱 맞추었어요. 그리고는 한 달을 치료했어요. 물을 못 대고. 그런데 이게 확신이 안서는 게 시커멓게 죽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아, 이게 그런다고 살 리가 없지.’ 그리고는 툭툭 쳐 보는데 아무 감각이 없는 거예요. ‘아, 이게 안 되는 구나. 이제 병신이 되는 구나. 뭐 그래봐야 무슨 장애인 주차증이 하나 나올 것도 아니고 이거 어떻게 하냐? 참 그렇다.’ 그리고도 꾸준히 치료를 했어요. 아니 그랬더니 이게 시간이 지나면서 쭉 허물을 벗으면서 지금은 완벽한 정형수술이 되었어요. 병원하나 차릴까 생각을 했어요.
이렇게 예수의 몸에 처음 접붙여지는 사람들은 이제 그들이 받은 구원은 완전한데, 이 신자의 구원이라는 것 자체가 영혼을 하나님께서 새롭게 하시는 건데, 이 인간이 구원받고 예수의 몸에 접붙여졌지만,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모든 죄가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야. 다만 성령님이 은혜를 주셔서 남아있는 약간의 죄들을 억누르고 붙드시면 그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는 충분한 존재가 된 것이죠. 말하자면 예수께 접붙여지긴 했지만 그들의 부패한 본성 속에 여전히 죄의 일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된 거죠.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신자가 되었는데도 매일매일 죄를 짓게 되잖아요. 붙어있는 사람들이 다 천사인 줄 알았는데 이건 뭐 별 사람 다 있거든. 사실 그게 맞는 게 원래 그 사람들이 별 사람들이었거든. 그러니까 말이죠. 이 교회가 혼자서 잘 살 수 있는 사람들은 예수 안 믿어요. 예수 믿는 사람들은 혼자서 도저히 살 수 없어서. 인생 막 갈 때까지 간사람, 그게 꼭 범죄하고 뭐 그래서 만이 아니라, 도저히 혼자서는 더 이상 살 수 없을 거 같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불완전한 사람들이야. 나는 오늘 펑펑 울고 은혜의 지배 속에서 예수께 접붙여졌으니까 나는 정말 마음에 하늘나라가 이루어진 것 같은데 와 보니까 이게 별 사람들이 다 있는 거야. 그래서 실망을 하는 거야. 교회 교인은 진짜 순결한 성도들이 있을 줄 알고 왔는데. 뭐 사기 치는 사람, 그리고 또 주차위반 딱지 떼고 떼어먹은 사람, 또 바람피웠다는 사람, 무슨 이웃을 고소한 사람, 또 은혜롭게 예배드리고 저녁 때 집에 가서 전쟁하는 부부. 뭐 별 총천연색이야. 그러니 이게 보면서 ‘야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그러면서 낙심을 하게 되는 거죠.
IV. 교제를 이루시는 성령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 이러한 사람들을 모아서 성령 안에서 그들을 교제를 이루게 하시는 거예요. 이 교제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이야기 하는 ‘교제’ 그런 뜻이 아니에요. 우리들이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그거 할 때 그 교통을 이야기 하는 거죠. 그러니까 영적으로 한 몸으로 연합되었기 때문에 생명과 자원을 함께 나누는 불가분의 존재가 되었고 그러한 한 몸된 지평 안에서 실제로 눈에 보이는 사람들이 함께 사귀면서 상호 교통하면서 살아가는 이 삶인데 이게 바로 타락하기 전 하나님과 인간, 아담과 하와 사이에 있었던 이 연합이라 이 말이죠. 그 속에서 살아가는 거죠.
그런데 문제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 각자가 허물을 가지고 있는 거죠. 그 속에서 교회는 고통을 받기 시작해요. 그러니까 한 인간이 있는데 이게 은혜가 떨어져서, 원래 성질이 거지같은 사람이었는데 은혜를 받고 진짜 천사처럼 변했거든. 그런데 이게 은혜가 떨어졌어. 그러니까 이게 성질머리가 다 나오는 거야. 집에서 뭐 부부 싸움할 때 툭하면 바가지도 던지고 그랬는데 교회 와서 또 던지는 거야. 그 때에 교회는 고통을 받게 되는 거야. 반대편에 은혜 떨어진 사람이 또 있어. 그러면 즉시 ‘저게 누군 성질 없는 줄 아나? 왕년에 나도 너보다 한 가닥 더했어.’ 그러고 이제 한 번 치고받고 그러기 시작하면, 교회는 이제 두 배 세 배 네 배 상처를 받게 되요. 그러다 또 한 사람이 나와서 ‘너희들 조용히 못해!’ 그러고 붙으면 네 배, 다섯 배, 여섯 배 고통을 받는 거죠.
A. 용서 받게 하심
그래서 이제 이렇게 불완전한 사람들이 모인 교회 속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을 교통하게 하시는데 이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교통 속에서 하나님이 두 가지를 성도들이 누리게 하는 거예요. 하나는 용서, 하나는 사랑. 제일 먼저 용서받게 하시는 거예요. 용서는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느냐 하면 말이죠. 제일 먼저, 각 사람이 그 사람의 불완전함을 보고는 용서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사람이 자기가 판단하는 것을 누구든지 믿잖아요. 그런데 그 판단이 옳으냐 그르냐는 나중 문제이고, 우선 저 사람이 매우 잘못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만약에 그 사람의 허물을 보아서는 그를 용서할 수 없는 거죠. 회사 같았으면 벌써 정리해고 했거든. 내가 사장이었다면, “너 내일부터 나오지 마라.” 그런데 내가 그래도 사회에서는 대접을 받고 인정을 받는 사람인데 교회 와서 저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 공부도 나보다 훨씬 못하고, 사회적인 지위도 나보다 비교도 안 되고, 나이도 나보다 한참 어리고 거기다가 말하자면 무슨 인생을 산 경륜이나 이런 것들도 나보다 훨씬 아무것도 아닌 것이 진짜 이게 교회라는 데를 믿고 까분다 이거지 잘못하고 있다 이거죠. 그런 사람을 만나는 거죠.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용서할 수 없는 거죠. 경우에 따라서는 이 사람이 내리는 판단이 옳을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자기가 옳다고 해도 그 사람을 자기가 판단하고 정죄하고 공격하고, 그 사람을 악하게 대하고 이런 것은 결국 교회의 몸을 해치는 것이 된다 이거죠.
어제도 제가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만약에 여러분의 몸에 떼어버리기 어려운 오물이 붙었다고 하면 시간을 두고 여러분들이 시간과 인내를 가지고 몸이 상하지 않는 한도내에서 그것을 털어내겠어요, 아니면 칼로 몸을 깍아 내겠어요? 후자를 선택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런 것은 생명이 없는 물건에 붙어 있을 때에, 그것도 물건이 귀하면 그렇게 안 해요. 그러니까 자신이 만약에 옳다고 하더라도 지체를 그런 식으로 용서하지 않고 대하면, 그러면 자신의 행위가 옳더라도 결국은 그 지체에게 악을 행하는 것이 되고 그런 악을 행하게 되면 상처를 주게 되면 그 지체가 상처 받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지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일부분을 이루고 있어요. 그러니까 해를 가하면 그 고통이 그 지체만의 고통이 아니라 자기를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 몸 전체에 대한 고통이고 그 고통이 그리스도 예수의 고통이 되는 거죠. 그러면서 잘못 행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이 불완전한 사람들이 모인 교회를 세우시고, 그 불완전한 인간이기 때문에 시기는 각각 달라도 어떤 식으로든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죄와 부패한 성품들이 교회 속에서 나타날 수밖에 없어요. 요즘은 이 사람이 은혜 받고 잠잠 한가 했더니, 저 사람이 불쑥하고 죄가 튀어나와서 교회를 고통스럽게 해요. 그럼 이 사람들이 그러는 거예요. “거 신앙생활 좀 똑바로 해라. 이 자식아, 그 따위로 하냐? 어디가도 그 따위로 하면 너 맞아 죽는다. 아무리 교회라도 너 그러면 되냐?” 그러고 막 공격을 하니까 그 사람이 일단 고개를 숙였어. 그런데 다음 달에 이 사람들이 시험에 든 거야. 저 사람은 또 은혜를 받아서 새 사람이 되었는데. 이 인간들을 보니까 자기한테 손가락질 하던 그 사람들이거든. 그러니까 가서 “너희들 말이야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난 원래 개였지만, 넌 고양이다 이거야. 뒤에서 호박씨는 네가 다 까는구나.” 그러면서 막 공격을 해 대는 거지. 또 어떻게 어떻게 해서 이 사람이 회개했더니, 또 저 사람이 막. 그러니까 이게 끝이 없이 계속해서 반복이 되는 거죠.
여러분들이 잘못 살 때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정말 은혜로운 충고를 해 주던 사람들이 미끄러지는 거 여러분 본 적 없어요? 왜 없겠어요. 또 한 때는 정말 형편없어서 여러분 매일 눈물로 기도해 주던 사람이 어느덧 정말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자기에게 충고해주는 일이 왜 없겠어요. 그러니까 이게 이렇게 되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불완전한 인간들이 모인 교회로 하여금 용서를 자기네끼리 용서를 받고 또 용서를 해 주고 이렇게 하면서 구원받은 신자로서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졌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이 부패한 본성들 때문에 생겨나는 교만과 편견, 아집, 그리고 욕망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그 많은 잘못들로 인해서 교회 전체가 상처받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는 거죠. 이런 거죠. 여러분, 저는 성격이 급해서 자주 잘 그러는데, 어느 날 보면 이 발등 같은 데가 껍질이 확 벗겨져서 그 상처가 나요. 왜 그러냐 하면 공부 좀 하고 글 좀 쓰는데 이 발이 막 가려운거야. 그럼 발을 잘 들여다보고 왜 그런가, 파악해서 씻든지, 아니면 뭐, 매일 씻어요. 씻든지 약을 바르든지 그러면 되잖아요. 그런데 무조건 손톱으로 막 긁는 거야. 그렇게 한 몇 시간 긁고 나면, 어떤 때는 거기서 피가 나요. 그렇게 무지하게 살아요.
그러니까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어느 몸의 한 부위가 병들었어요. 그런데 그것을 오염된 손으로 건드리지만 않으면 그 상처만 생겨요. 거기서 머물러. 잘 약으로 바르고 하면 거기서 끝나. 그런데 그것을 오염된 손으로 만지고 긁고 막 생으로 난리를 치는 거야. 온 몸에 그 상처가 번져 가면서 덧나고 곪고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누군가가 무엇인가를 잘못했을 때, 사랑으로 그 죄는 미워하지만, 그 사람은 진짜 긍휼히 여기면서 그것을 고치되 인위적인 방법으로 자기가전사인 것처럼 고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에게 은혜를 주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깨닫게 하시고 또 올바른 것을 생각나게 해서 그렇게 인격적인 방법으로 그들의 영혼을 사랑하면서 고쳐. 그러면 그것이 번지지 않고, 혼자 상처가 나다가 혼자 아물어. 그런데 그렇게 안 하고 두 손으로 파헤치는 거야. 그게 그러면서 온 몸으로 퍼져 나가는 거야. 그게 빨리 되는 것 같지만,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것이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원리에요.
더군다나 이런 것이 자기 자신의 문제와 관련이 되어 있을 경우에는 이제 이렇게 서로의 잘못을 지적하고 그것을 가지고 다투다가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또 다른 죄를 자꾸 짓게 되는 거예요. 미워하게 된다든지 아니면 비난하게 된다든지, 근거 없이 그들의 명예를 해치게 된다든지, 아니면 그에게 대해서 아주 원망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든지. 이렇게 하면서 제2, 제3의 악들을 행하게 되는 거죠. 그러면서 교회 전체가 고통을 받게 됩니다. 이런 것을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기 때문에, 불완전한 지상 교회에 항상 그런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용서를 실천하게 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이 용서를 실천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거예요. 차라리 돈을 뚝 떼어서 주는 것이 쉽고, 필요하면 침대에 누워서 배 가르고 장기 하나 떼어주는 것이 쉽지, 마음속에 깊이 사무치도록 미운 사람을 용서해 주는 것은 쉽지 않아요. 그리고 그 용서도 어느 날 자기에게 그 잘못한 사람이 와서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용서를 빌어. “내가 생각해 보니까 당신하고 싸웠지만, 내가 다 잘못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도 그러시는데 내가 나쁜 놈 이라고 그럽디다. 당신 같이 좋은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그럽디다.” 이러면서 용서를 구하면 안아주지. “아, 괜찮아. 상관없어 신경 쓰지 마”, 그리고 그 뒤에 “나도 조금 잘못했지” 이렇게 하고 멋있게 마지막 장면을 끝내고 싶은데 그 인간이 와서 빌지를 않는 거야. 그리고 나는 용서할 준비가 되었다, 와서 무릎을 꿇고 바지자락만 붙들어라. 그러면 나도 “아니야 괜찮아. 뭘 그 정도 가지고 그래. 괜찮아, 나도 부족한 사람이니까.” 그러면서 탁 일으켜 세우면 그 사람이 내가 해 준 용서 때문에 너무나 감격해서 “성도님, 너무 감사합니다, 아니 형님, 아저씨, 삼촌.” 이러한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하고 있는데 그 놈의 엑스트라가 받쳐주질 않는 거야. 꿈 깨시오. 그런 일은 소설 같은데서 가끔 일어나는 거예요. 드라마에서. 신앙 위인들의 전기 몇 권 읽으면 한두 번 나오는 이야기. 난 아직 12년을 목회했는데 그렇게 누가 와서 무릎을 꿇고 목사님 정말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러는 사람 별로 못 만났어요. 나한테 와서도 안 그러는데 여러분은 뭔데 그러겠어요? 한번 생각을 해 보세요. 그래도 나한테는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은 적이 있잖아요. 하나님의 은혜를. 그런데 왜 그러겠어요. 그러니까 꿈을 깨라 이거에요. 어떤 사람은 나한테 그렇게 물어봐. “용서해 줘야지요. 목사님. 그런데 그 인간이 빌지를 않아요.” 그게 바로 그거를 꿈꾸고 있는 거예요. 대 드라마를.
우리 죄악과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 하시네
그런 게 아니거든요. 사랑은 사과 없이 용서해 주는 거예요. 사랑은 사과 없이 용서해 주는 거예요. 그가 저한테 용서를 안 빌었는데도요? 그래도 용서해 주는 거예요. 그럼 저는 그래도 봐 주겠습니다. 그렇지만 지가 하나님 앞에서는 회개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거는 그 사람의 문제야. 너나 잘하세요. 그건 그 사람의 문제야. 하나님이 용서해 주면 그거 봐서 용서해 주겠다고. 상황 나셨네. 너나 잘하세요. 그렇게 되는 게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이것은 굉장히 어려운 거예요.
B. 용서해 주는 이유
1.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해 주는 이유가 있어요. 그것이 뭐냐 하면 첫째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용서해 주는 거예요. 교회 오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게 십자가죠. 왜 그 교회에다가 별로 보기도 좋지 않은 그 십자가를 매달아 놓은 이유가 무엇 때문이에요? 무언가를 생각나게 하고 싶어서 그래요. 그게 뭘 생각나게 해 줘요? 두 가지에요. ‘네가 지금은 예배당 뜰을 밟고 들어와서 이 교회에서 목사로 장로로 권사로 집사로 뭐 한 가닥 섬긴다고 꺼떡대지만 잊지 말아라. 너는 원래 죄인이었느니라. 그래서 내 아들 예수가 너를 위해 십자가에서 생명을 버리고 못 박혀서 너를 구원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네가 죄인이었지만 내가 너를 이렇게 사랑했으니 세상에 있는 너를 위해서 독생자를 주기까지 내가 너를 사랑했노라.’ 우리가 죄인 되었다는 것과 또 하나는 우리를 하나님이 사랑하셨다는 그 표시가 가로 세로 막대기로 되어있는 이 십자가에요.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의 중심에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잊지 않는 회상이 있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감옥 속에서, 그가 얼마나 예수를 위해서 살았습니까? 가족이 있었습니까, 장가를 갔습니까? 그렇게 가난과 궁핍속에 시달리면서 죽을 고비를 넘기며 복음을 전하면 살아 왔잖아요. 수많은 사람이 그를 믿음의 아버지처럼 생각했어요. 예수님의 분신처럼 생각했잖아요. 그런데 뭐라고 그래요? 그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감옥 속에서 ‘내가 죄인 중에 괴수로다.’ 죤 뉴턴 이라는 악덕 노예 상인이 있었어요. 주님을 믿고 깊이 회개했지요.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작사한 사람이에요. 목회자가 되어서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신명을 바쳤어요. 마지막에 치매기가 왔어요. 정신이 오락가락해요. 많은 사람들이 그 분을 걱정했어요. 그 때 그 할아버지가 얘기 했어요. “내가 나이가 많아서 기력이 많이 쇠하여지고, 내가 많이 잊어버리는 것이 있다고 할지라도 두 가지는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결코 잊어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는 죄인이었다는 것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그 모든 더러운 죄에서 예수님의 피로 건져주신 것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성도가 되어서 교회에 나와서 해야 할 가장 큰 의무는 두 가지에요.
내 주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곧 그에게 죄를 다 고하리라.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자기가 죄인인 것을 날마다 고백하고, ‘사랑하는 성도야’, ‘아니에요 하나님, 저의 본명은 용서받은 죄인입니다.’, ‘사랑하는 목사야’, ‘아닙니다, 하나님. 저의 원래의 이름은 죄인이었는데 지금은 용서받은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분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비천한 존재이고 그리고 정말 아무것도 아닌지 하나님 앞에서 깊이 뼈저리게 깨달으며 그러면서 나는 대단한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을 섬긴 것도 다 잊어버려, 하나님을 사랑한 것도 다 잊어버려 주님을 위해 봉사하고 주님을 위해 재산을 바친 것도 다 잊어버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장본인을 그렇게 그 피로 구원해주셨는데도 그 죄가 지금도 좋아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에 못을 박는 이 비천한 인간. 이것을 그렇게 뼈저리게 고백을 하는 거예요. 거기에서 신자는 까리따스, 곧 지순의 사랑이 생겨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이 불완전한 교회의 지체들을 깊이 용서하는 거예요.
2. 그리스도의 몸 때문에
두 번째는 그리스도의 몸 때문에 용서하는 거예요. 왜? 잘못 되었어요. 그런데 잘못되었는데 그를 깊이 용서하는 거예요. 그가 비록 극악한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을 향해서 그를 미워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렇게 하지를 않으셔요. 그래서 그것을 그 사람이 행한 죄는 미워하지만, 그 사람은 깊이 불쌍히 여기는 거예요.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하면 그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져 있기 때문에 그를 미워하고 해하게 되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전체가 상처 입을 것을 염려하면서 예수의 몸을 사랑하고 위하기 때문에 그 사람을 내가 고통가운데서도 참고 용납해 주면서 기다려 주는 거죠. 그러나 이 이야기는 모든 불의와 죄를 덮어 두기만 하고 무조건 좋은 게 좋은 거라는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그런 의미는 아니에요.
C. 용서하는 사랑을 실천함
문제는 뭐냐 하면 비록 올바른 일을 할지라도 그것을 수행하는 방법이 올바르지 않으면 그것은 전체적으로 하나님 앞에 올바르지 않아요. 하나님의 교회는 그 목적이 올바르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이루어가는 방법과 모든 일들이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수 있는 올바른 방식으로 이루어 져야지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부패하거나 상처를 받지 않을 수 있어요. 깊이 용서해야 해요. 특히 자기에게 직접 관련되었을 때. 자기의 이익이나 명예와 직접 관련되었을 때 그것은 용서해 주어야 하는 의무가 자신에게 있는 거예요. 그것을 용서해 준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힘든 거예요. 여러분들이 오늘 가슴에 손을 얹고 한 때 여러분들을 이렇게 가슴에 못을 박는 것처럼 그렇게 아프게 한 사람이 여러분들에게 있을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이 여러분들에게 용서를 빌지 않는데도 맘속으로 여러분들이 그들을 깊이 용서해 준 적이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부모도 그렇게 못하고 있잖아요. 여러분 가운데 있는 것, 제가 알아요. 그 부모의 몸에서 태어나서 그 젖을 물고자라고 그 부모의 노동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양육을 받고 이만큼 성장하게 되었는데도 여러분, 용서 못하잖아요. 그러니까 그게 정말 하늘의 힘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에요. 보세요. 여러분 10년 전에 원수 맺은 사람들 지금도 싸우고 있지는 않지만 지금도 여전히 원수 맺고 있죠. 싫은 거죠. 또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런 면에 있어서는 탁월하게 속이 좁아요. 그래서 한 번 딱 맺으면 세상 사람들은 막걸리 한 잔 마시고 푸는데, 이건 꽁생원들이 되가지고 안 불러요.
언젠가 한 번 어느 목사님이 그러셔요. 우리 교회 어느 목사님이 있는데 그 목사님은 한 때 교회에 분쟁이 있어서 어려움을 겪었는데, 그 목사님은 떠나는 것이 좋대요. “그거 뭐 일어난 일이 몇 년 전의 일인데 뭘 그러십니까?” “그 일이 일어난 지 10년이 지났지만”, 그 다음 말에 저는 정말 충격을 받았어요. “그 자손들이 자라잖아요.” 부모가 어떻게 당했는지를 그 자손들이 다 보고 자란 거예요. 그러니까 대물림이 되는 거예요. 미친 짓이죠. 난 그 사람들 중에 진짜 몇 명이 거듭난 사람들일지 나는 목회자로서 의심이 되요. 정말 거듭난 사람들은 그럴 수 없어요. 어떻게 그렇게 마음에 맺힌 것을 대물림을 하면서 살아가느냐 말이죠. 그렇게 해서 누구에게 좋은일을 하려고 하는 것인지, 그리고는 한편으로 그 교회에 소속 되어 있고 그 교회에 접붙여져 있어서 그 교회에 재산을 바치고, 그 교회를 위해서 몸으로 봉사하고 그 교회에 와서 말씀을 듣고, 그 교회에 와서 기도하고 그 교회에 와서 섬기고 이러면서 한편으로는 그 교회를 계속 칼로 찌르면서 피를 흘리는 거예요. 그리고는 예수께 복 받기를 구하는 거죠. 정말 그가 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겠어요?
D. 용서의 복됨
마음에 지체들 간에 깊이 맺힌 원한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영혼들이 이렇게 개 줄에 묶여 있는 거예요. 개 줄을 보면 이렇게 묶어 놓고, 개가 한참 있다가 뭐 갑자기 자다가 일어났는데 보니까 저기서 누가 막 와. 자기가 이 개 줄에 묶여 있는 줄 몰라요. 확 뛰어나가면 그 줄이 목을 확 잡아채잖아요. 그 줄 안에서 빙빙 돌면 괜찮아요. 그런데 이것을 튀어나가려고 하면 이것에 채이면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느끼는 거죠. 그러니까 그렇게 원수 맺고 지체들을 미워하고 용서하지 않는 가운데서도 예배 참석하고 그 다음에 중얼중얼 기도하고 뭐 주일 헌금하고 뭐 교회 마당이라도 쓸고 하는 이 일들은 줄 안에서 움직이는 일이에요. 그러나 하나님 앞에 뜨겁게 주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주를 위해서 자기가 깊이 깨뜨려지고 진리의 깊은 세계 속으로 들어가서 자신이 그 말씀 안에서 녹아지고 그리고 자기 온 맘을 다 드려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맡기신 그 사명을 위해서 축복을 구하고 인생의 위기 속에서 주님의 낯을 구하고 하는 일들은 이게 개 줄처럼 묶여 있는 것 가지고는 불가능하다 이거에요. 영혼이 일단 자유로워져야만 그것을 할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제가 늘 말씀을 드리지만 한 성도가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온 마음이 녹아내리면서 자신의 영혼을 쏟아놓을 수 있는 성도는 그건 정말 아름다운 사람이에요. 그가 비록 도덕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을 가끔 한다고 할지라도, 나는 용서할 수 있어요. 그는 특별한 사람이에요. 그리고 바로 그렇게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다 녹아내리는 동안에 하나님이 그 녹아내린 마음을 가지고 빚으시는 거예요. 그 순간이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순간이에요.
1. 소극적: 속박으로부터 자유하게 하는 선물
이러한 용서는 소극적으로는 맺힌 것을 풀어 줘요. 이 땅에서 사람들과 자꾸 맺히게 되면 인간의 자유가 사라지게 되는 거죠.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어요. 이중의 자유를 주셨는데 하나는 신분의 자유에요. 전에는 죄인이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신 거죠. 또 하나는 마음과 영혼의 자유를 주신 거죠. 전에는 거듭나기 전에는 마음과 영혼이 죄의 사슬에 얽어매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나님 앞에 자유를 누릴 수가 없는 것이죠. 진리를 찾아 가고 싶어도 죄의 사슬이 나를 묶고 있어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받는 순간에 이 사슬들을 끊어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얼마든지 자유롭게 진리를 향해서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이 사람들을 미워하는 것은 이것은 결국 다시 자신의 발에 스스로 하나님이 성령으로 끊어 놓아주신 그 족쇄를 다시 차는 거예요. 이것을 차고 자신은 앞으로 전진 하려고 하는 거죠. 끊임없이 이 종아리에서 피가 나는 거예요. 견디기 힘든 고통이죠.
나는 그 이렇게 돈을 좀 주면 먹을 수 있는 값싼 고기들도 있는데 그 야생동물을 잡아먹는 사람들 이해가 안가요. 그런 사람들 여러분 되지 말아야해. 언제 한 번 TV에서 보여주는데 며칠 동안 마음이 아팠어. 멧돼지를 잡아먹겠다고 덫을 논거라. 그래서 기자가 찾아가 보니까 크지도 않은 멧돼지 한 마리가 거기에 그 덫에 걸려서 죽어서 꽁꽁 얼어 있는 거예요. 사진을 찍었는데 보니까 이 멧돼지가 덫에 걸린 상태에서, 그 덫을 나무에다가 걸어 놓았거든요. 그러니까 덫이 탁 차고 올라오면서 이 송곳이 발목을 누른 것 아니에요. 그러니까 움직일수록 송곳이 더 파들어 가잖아요. 얼마나 몸부림을 쳤는지 그 나무껍질이 다 벗겨졌어요. 얼마나 고통스럽게 몸부림 쳤겠어요. 그리고 결국은 자신은 거기서 기진해서 죽은 거죠. 그것을 보고 야 이 속박이라는 것이 저렇게 무섭구나.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결국은 자기 자신의 영혼이 불행한 거야. 그렇게 하면서 자기 자신의 영혼에 깊은 상처와 고통을 남기는 거죠. 벗어날 수 없어요. 그래서 때로는 말이죠. 이치적으로 볼 땐 자기가 올바른 것 같은데 문제는 이 하나님과의 평화, 하나님이 나를 옳다고 인정해 주시고, 나에게 사랑과 은총을 부어주시는 이 하나님과의 적극적인 사랑과 평화, 이런 것들이 자기 안에 없는 것을 발견하게 되요.
2. 적극적: 교제를 새롭고 올바르게 하시는 기초
소극적으로는 얽매인 것을 풀어주고, 용서는 적극적으로는 교제 속으로 새롭게 들어가게 해 주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용서받고 나면 즉시 느껴지는 게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 주신다는 것을 느끼는 거예요. 다시 내 기도를 들어주시고 이제는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새 힘을 주셨다는 게 느껴지는 거예요. 이전 것은 지나가고 이젠 다시 주님 앞에서 살게 하신다는 것이 느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들 안에서도 불완전한 사람들을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연합을 이루어 가시는 거예요. 지금 내가 은혜가 떨어졌을 때에는 다른 지체들에게 용서를 받으며 신세를 지고 내가 좀 더 성숙했을 때에는 미성숙한 신자들의 그 고통 하는 그 죄를 내가 용서해 주면서 내가 희생하고 이렇게 하면서 용서를 계속 주고받으면서 그러면서 자신들이 얼마나 더럽고 부족한 죄인들이고 그 지체들에게 용서받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신을 어떻게 사랑하시는가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우리가 한 몸이라는 사실을 날마다 느끼면서 이렇게 성숙해 가는 거죠. 여러분 그런 경험 있죠? 누구하고 싸워서 깊이 원수 맺고 있었는데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화해를 하고 용서를 주고받았어요. 그 날 밤에 깨끗이 씻고 잠자리에 들었을 때 그 느낌 기억나세요? 말할 수 없는 자유, 그거잖아요.
E. 사랑하게 하심
그 다음에 하나가 뭐냐 하면 사랑하게 하시는 거예요. 이건 보다 적극적인 측면이지요. 용서하게 하신 후에 그 다음에는 서로를 깊이 사랑하게 하시는 거죠. 그런데 이 사랑은 지체들을 향한 사랑이지만 사랑의 정체 자체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안 데서 오는 거죠. 이런 게 되는 거죠. 우리가 아직 까지도 하나님의 사랑을 잘 몰라. 그런데 도저히 나 혼자 살 수가 없어. 말씀을 듣고 보니까 하나님을 만나야 돼. 그래서 하나님을 찾아가는 거야. “하나님 나 좀 만나 주세요. 제 인생이 너무 곤고하고 살 수가 없습니다. 이 고통 속에서 나를 좀 건져 주십시오.” 그러면서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하나님을 찾아. 그것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건 아니에요. 거기에도 자기사랑이 많이 섞여 있는 거죠. 자기가 너무 고통스러우니까 주님을 찾는 거야. 상당히 자기사랑이 섞여있는 거죠. 그렇지만 하나님은 자기 사랑이 동기가 되었더라도 일단 자기를 찾는 사람은 만나주셔요. 반드시 어느 날 눈을 떠 보니까 ‘야, 이거 예수 믿는 사람이 많아도 세상이 왜 이 모양일까. 내가 주님을 위해서 이 생명 바쳐야지. 나, 주님 위해서 생명을 바치고 싶은데 믿음이 있어야지요. 나 좀 주님을 믿게 해 주세요.’ 이러면서 예수 믿기 시작한 사람 없다 이 얘기에요. 다 개인 사정 때문에 예수 믿게 된 사람들이야. 무슨 3통 8반 동민 위해서 예수 믿은 사람 없고 조상 위해서 예수 믿은 사람 없고,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서 예수 믿은 사람 여러분 가운데 있느냐고. 그런 거 없어요. 다 자기 때문에 예수 믿기 시작한 사람들이야. 다 찾아갈 때는 자기사랑을 가지고 찾아가는 거야. 오죽했으면 이것을 어거스틴은 에로스의 사랑이라고 불렀어요. 하나님 찾아 갈 때의 그 사랑은 에로스의 사랑이다 이거에요. 그러고 나서 눈물을 흘리며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나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되는 거예요. 이게 아가페의 사랑이에요. 하나님이 나같이 쓸모없는 인간을 이렇게 사랑하시는 구나. 나같이 신망 없는 인간을 위해서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주시고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게 하시고 그래서 나의 죄를 씻어 주시고 그리고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 주시는 구나. 내가 진짜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 그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을 보면서 깊이 감동을 받는 거예요. 그렇게 주님을 만나고 다시 자신의 삶으로 내려올 때 이 안에서 꽉 찬 사랑이 생겨나게 되는 거예요. 이게 올라갈 때 그 사랑은 에로스의 사랑이었는데 내려올 때 이 사랑은 까리따스의 사랑이야. 지순의 사랑이야. 그러니까 아가페의 사랑 때문에 생겨나게 된, 아가페의 사랑과 지순의 사랑이 마찬가지인데, 굳이 구분을 하자면 아가페는 하나님 안에만 있는 원천적 사랑이고 그것을 받았을 때에 이 사람의 반응에 그 까리따스가 생기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그 사랑의 대상이 둘이 한꺼번에 들어오게 되요. 하나님을 향한 사랑, 하나님 때문에 사랑해야 하는 사람들을 향한 사랑, 이것이 나누어지질 않고 함께 들어오기 때문에 이 까리따스의 사랑을 가리켜서 교통하는 사랑이라고 부르는 거죠.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막 교통하면서 하는 사랑이라 이거죠. 그런 사랑이 꽉 생겨나는 거예요. ‘네가 비록 나를 아프게 하고 나에게 고통을 주었지만 그러나 나는 너를 사랑한다. 왜냐하면 네가 나와 함께 예수의 몸에 속했는데 내가 예수를 통해 삼위 하나님의 교통을 보았기 때문에 그 삼위 하나님을 사랑하는 까리따스가 내 안에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깊이 사랑하게 되요.
이것은 용서와 함께 들어오게 되는 거예요. 자기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는 이것은 자기 죽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거예요.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자기가 미워하거나 원한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그 사람과 함께 이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게 내 인생을 포기하게 할 수 있을 정도로 싫은 세상이 되는 거죠. 그 사람이 미국 가도 마찬가지고, 소련으로 건너가도 마찬가지에요. 그게 그런 거예요. 여러분 한번 이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여러분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매일 만날 수 없어도 이 지구상에 함께 살아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이 세상은 여러분들에게 아름다운 세상이 돼. 그런데 그 사람이 진짜 보기 싫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야. 그 사람이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가 자신이 차라리 이 세상을 떠나주마 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거라 이거죠. 더구나 그런 관계가 눈에 보이는 교회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볼 때에 그 사람의 영혼이 건강하다고 말할 수 없는 거죠. 절대 건강할 수 없죠. 죽을 때가지 용서 안 하면 화해 안 하면 죽을 때까지 그렇게 곤고한 영혼을 가지고 살다가 그러다 가는 거죠. 인생이 너무 불행한 거죠. 그렇게 사람을 미워함으로 말미암아 자신에게 남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상처와 영혼의 파괴밖에 없거든요. 용서해야 해요. 그런데 용서가 안돼요. 그럴 때 예수님을 생각하는 거죠. 그러면서 내가 이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아무리 힘들어도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나를 용서하는 것보다는 훨씬 쉽다, 라는 것을 생각하고 자기 죽음의 길로 들어가야 해요. 깊이 들어가면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려고 할 때 이 속에서 견디기 힘든 고통을 경험하면서 예수님이 죽으실 때 이렇게 아프셨겠구나. 하는 그 죽음의 기운이 스며들어오는 거죠.
예수 죽음의 기운이 스며들어 오면 신기한 게 그 죽음이 또 우리를 죽여요. 그런데 그 예수 죽음의 기운은 역설적으로 생명을 가진 죽음의 기운이기 때문에 우리 안에 있는 죽음의 요소들을 죽이지 생명의 요소들을 죽이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 안에 있는 교만, 편견, 아집, 정욕 이런 것들을 그 예수 죽음의 기운이 죽이는 거예요. 그 때에 신자는 진짜 죽임을 당하는 것 같은 고통을 당하게 되는 거예요. 깊이 뼈까지 상하고 타 들어가는 것 같은 고통을 아주 뼈저리게 경험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깊이 그 예수 죽음의 기운이 들어오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신자의 성화의 정수에요. 그래서 그게 들어오면서 자기의 정욕과 이 죄악들이 함께 확 죽어가는 거예요. 죽는 만큼 예수의 형상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예요.
결국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 세우신 교회는 불완전해. 그런데 그 불완전함을 통해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 그래서 그렇게 서로가 불완전한 성도들이 서로 부딪히고 고통 하는 가운데 거기에서 자기 자신이 얼마나 사랑이 없는 존재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거죠. 예수의 사랑에 감격할수록 자신은 정말 사랑이 없는 존재다, 주님의 그 한없는 용서하시는 사랑을 경험할 때마다 자기는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포악한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자신에게는 사랑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지요. 뿐만 아니죠. 그렇기 때문에 이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드는 모든 성도들은 교회가 이렇게 상처가 많고 허물과 고통이 많기 때문에 내게 베풀어주신 모든 자원을 사용해서 내가 이 교회를 사랑하고 나 때문에 이 불완전한 교회의 모습이 조금이라도 온전해져 가는 데에 내가 이바지 하여야겠다, 라는 예수를 향한 사랑이 동기가 된 헌신의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서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게 하시는 거죠. 왜냐하면 해결의 길이 무엇이겠어요. 둘을 법정에다 세우겠어요. 아니면 벌판에 나아가서 주먹으로 결투를 하겠어요. 결국에는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것 외에는 해결의 길이 없어요. 그렇지요. 그러니까 그 은혜는 인간의 혈기나 인간의 논리에 의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은혜는 하나님 자신에 의한 사랑의 감화에요. 그런 사랑의 감화를 주시는 분은 성령님밖에 없어요. 그런데 내가 성령이 슬퍼하시는 일을 행하고 있으면서 나를 통해서 그 성령이 역사해서 성령이 하자 하는 일에 도구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이건 어불성설이지요. 그러니까 먼저 자기 자신이 그것을 깊이 버리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서 하나님께 맡기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서 하나님의 교회는 우리 모두 보다도 하나님이 너무나 사랑하셔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 교회를 꽉 붙들고 계셔요. 위기에 빠진 순간에도 예수님은 교회를 붙들고 계시고 우리는 교회를 위해서 아무것도 한 것이 없지만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당신의 몸의 지체로 삼으시기 위해서 당신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거예요. 여러분 진리는 중요하죠. 그리고 진리가 없이 신앙생활 한다고 하는 것은 캄캄하기 짝이 없는 밤길에 말하자면 걸어가는 것만큼 불안한 삶이죠. 진리가 중요하죠.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 다니는 교회가 어딘지 모르지만, 우리 교회 목사님은 설교를 참 잘하셔, 진리는 우리 교회에 많지. 그것도 설교라고 듣냐? 아니면 니네 교회는 맨날 모여서 기도회나 하고 전도나 하고 진리는 언제 배우냐, 니네 책 읽을 줄 아냐? 교리를 얼마나 아냐? 그게 그렇게 신앙생활이 되는 게 아니란 말이죠. 진리는 매우 중요한 게 사실이지만 그러나 진리가 좀 적은 교회라고 해서 무시하거나 하찮게 여기거나 그래서는 안 돼요. 그게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써 세우신 교회에요. 그래서 그런 교회는 막 대해도 된다, 라고 하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 거죠.
깊이 여러분의 마음에 티끌만큼이라도 교회를 업신여기는 마음이 있다면 그 교회가 아무리 부도덕하고 잘못된 교회라고 할지라도 여러분들은 예수께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고 있는 거예요. 난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어요. 교회 못 정하고 방황하고 그러는 사람들은 회개해요. 여러분 그렇게 살아서는 안 돼. 머리는 희어져 오는데. 살아온 날이 부끄럽지 않아요? 어느 교회이든지 가서 정하고 죽은 듯 엎드려서 신앙생활 해요. 목사님이 설교 좀 못하면 못하는 말씀 속에도 진리는 있을 테니까 그거 붙들고 신앙생활 하고 여러분들이 성경을 보고 책을 보고 하면서 신앙생활 열심히 해요. 진리를 아무리 많이 깨달아도 사람의 삶의 질은 진리를 많이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를 붙들고 그 진리에 자신을 합치시키는데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질이 높아지게 되는 것이에요.
V. 결론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잘 생각해 보세요. 진리가 말할 수 없이 귀하죠. 그렇지만 그것은 여러분들이 자기를 그 진리에 끊임없이 합치시키며 살려고 할 때에, 그런 교회에 다니는 것이 여러분들에게 가치가 있는 것이에요. 정말이에요. 여러분. 그래서 여러분들이 매일 쏟아지는 진리의 말씀을 들어도 시골에서 변두리에서 설교 유능하게 못하는 목사님 밑에서 한 두 마디 말씀에 감동을 받고 그것을 붙들고 좀 부족하긴 하지만 그 뜻대로 살려고 애쓰고 그 교회를 주님의 몸으로 깊이 사랑하고 예수님이 자기를 깨뜨려서 그 피로 교회를 세우신 것처럼 자신이 비록 진리는 많이 모르지만 예수님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그 교회를 예수님의 몸처럼 생각하고 아파할 때 약 발라주고 목마를 때 물 주고 그러면서 나는 상처받아도 교회는 보호되고 나는 멸시를 받아도 내 지체들은 명예가 보존되고 나는 아파도 교회는 행복하고 예수 죽음에는 내가 동참해도 내 지체들은 나 때문에 주님 앞에서 살고 행복하게 되는 것, 예수님께서 자기를 깨뜨려서 교회를 유익하게 하신 것처럼 나를 다 깨뜨려서 나는 이 교회를 위한 예수의 몸을 위한 소모품입니다. 나의 영광은 이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나의 육체 속에 채우면서 그렇게 사는 거예요. 존귀와 영광은 주님이 받으시고 기쁨과 즐거움은 지체들에게 주시고 멸시와 천대의 십자가 깨뜨려지는 고통, 사람을 용서하는 예수 죽음의 기운을 받아들이는 그 쓰라림은 제가 당하고 그래서나는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빛을 잃고 망하고 밀알처럼 썩어지고 그래서 결국은 주님의 교회에 유익이 되고 사람들은 다 나를 기억하지 못해도 내 인생 전체가 당신이 간 길을 따라 온 길이었다고 인정해 주시는 주님 한 분이 있으시면 전 충분합니다. 그러고 어느 한 교회에 엎드려서 신앙생활 해야 해요. 조금만 골치 아프면 보따리부터 싸는 사람들 있지요? 난 그 사람들 중에 몇 사람이나 천국에서 만날 수 있을 지 궁금해요. 예수의 몸을 이제껏 까지 아프게 한 걸로 충분하잖아요. 이제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돼요.
우리는 예수의 몸에 접붙여진 사람들이에요. 여기에 모인 사랑하는 모든 지체들이 우리의 눈에는 차지 않지만, 심지어 연약하기 그지없어서 은혜로부터 멀어져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러나 그들의 연약함이 우리 교회의 연약함이에요. 그들의 아픔이 우리의 아픔이에요. 우리 모두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져서 그래서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거예요. 혼자 살았더라면 이 세상을 고칠 수 없었던 그 일을 이렇게 큰 교회의 몸을 이루어서 내가 갈 수 없는 곳에 교회가 가게하고 내가 무릎을 꿇어 섬길 수 없는 시간에 깨어있는 지체들로 섬기게 하고 그렇게 해서 우리 함께 일치된 목적을 가지고 우리에게 주신 그 생명의 은혜, 우리에게 주신 그 은혜의 자원의 은혜를 모두 사용해서 우리를 위해 생명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토록 고치고 싶어 하셨던 이 세상을 고치면서 사는 것, 이것이 신자의 행복이에요.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리고 가슴이 저미는 그 교회의 이름, 그 교회가 어느 교회이든지 떠올리면 가슴 저미게 만드는 그 교회의 이름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해요. 그 사람이야말로 진짜로 예수께 접붙여진 사람이고, 어머니인 교회의 품에 있는 그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에요. 내 오늘 묻고 싶어요. 그대들의 마음에 이름 네 글자만 불러도 가슴 저미는 교회의 이름이 있어요? 내 꿈도 그 교회에 있고 내가 그 교회에서 태어났고 내가 그 교회에서 예수께 접붙여졌고 그 교회에서 주님의 사랑을 경험했고 모나고 상처가 많은 이 인생이 그 교회에서 지체들의 수많은 용서를 경험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배웠고 지금도 나처럼 방황하고 고통 하는 지체들을 위해서 눈물 흘릴 수 있고 무릎을 꿇어서 그들을 섬길 수 있는 네 글자의 이름을 가진 그 교회가 여러분의 가슴에 있느냐 구요?
할 수만 있다면 그 교회와 함께 인생을 마름하고 싶고, 그 목자의 품에서 눈이 감기고 성도들이 보는 모든 앞에서 예배를 드리고 교회 마당을 떠나 하늘나라에 갈 때까지 잠시 묻혀 있을 그 장지로 떠나 갈 그런 교회가 여러분 마음에 있느냐 구요. 그것이 없이 어디에서 여러분들이 행복을 찾으려고 하세요? 그 하늘로부터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지는 자원일진데 예수의 몸에 접붙여진 삶을 살지 않는 여러분들이 어디에서 행복하려고 했겠어요? 그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부지런히 벌었지만 전대에는 구멍이 났고 여러분들이 창고에 많이 쌓아두었지만 모두 쥐가 먹었어요. 그런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혼자서 도저히 살 수 없어서 교회를 찾은 상처받은 영혼들이 서로 어깨를 기대며 긍휼히 여기며 예수가 우리를 위해 자기를 다 버려 십자가에 죽으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처럼 무릎을 꿇어 예수를 섬기며 그렇게 사슴처럼 기대어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한 교회로 부르신 거예요. 이 행복 속에서 사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3.사랑과 일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엡 5:25 下
I. 들어가는 말
어제는 사랑과 교제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고 오늘은 사랑과 교제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 이 이제 이루시는 더 중요하고 큰일들로 하루하루 이렇게 진전돼서 앞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오늘은 그래서 사랑과 교회의 일치에 문제. 사랑과 일치의 문제를 오늘 다루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처럼 교회는 삼위 하나님의 존재의 모상이고, 그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도의 교재는 삼위 하나님 안에 있던 사랑의 교통의 모상이라고, 우리는 이틀 동안 배웠습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 안에 있는 성도의 교재는, 근원적으로는 삼위하나님 안에 있는 그 사랑으로 교통하는 교제의 모상을 본 딴 것이고, 또 보다 더 가깝게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창조 안에 있었던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 사이에 있었던 연결을 본 딴 것이었죠. 그리고 미래적으로는 이 교회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어 타락해서 망가진 이 세상을 우주적으로 모두 회복시키려고 하는데 그 때에 완전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회복되어질 만물들의 교통의 본보기로서 이 교회 안에서 성도들의 교통이 이루어지게 되는 거라 이거죠.
그런데 이런 교통이 정말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뜻에 부합하도록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 교통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는데 사랑이에요. 그 사랑을 통해서만 교통이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교회는 바로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연합된 사람들이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교회에 연합되어서 그 까리따스의 사랑 때문에 다른 사람도 또한 사랑하게 되고 그러면서 그 사랑 속에서 함께 교제함으로써 교회가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세우시려고 했던 교회의 모습이 되는 것이죠.
이 사랑은 인간들 사이에 서로 사랑하자고 약속한 인본주의적인 사랑이나, 인도주의적이거나 도덕주의적인 사랑이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통해서 이제 예루살렘 교회를 맡기시려고 할 때에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물어보신 질문이 바로 그것이었어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양떼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어보지 아니하시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걸 물어보셨죠. 다시 말하면 이 베드로의 마음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지순의 사랑, 곧 까리따스의 사랑이 있느냐고 물으신 거죠. 만약 그것이 있다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이고 그 사랑을 가지고 있으면 예수님 때문에 사랑해야 하는 양떼들도 사랑하게 될 것이지만, 하나님을 향한 사랑 없이 그냥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그냥 자기가 좋으니까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에 누군가가 자기의 이해관계와 부딪히는 방식으로 존재하게 될 때에 그를 사랑할 수 없게 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던 것이죠.
그러면 결국 교회라고 하는 것은 위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삼위 하나님과 사귀고, 또 교회 안에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성도들이 사귀고, 밖으로는 그 사랑의 감격 때문에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과 사귀기 위해서 그들에게 선교하고, 하는 이런 것이 되고 이 일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서로 교제하고 그 교제 속에서 일치를 보여야 되요. 사랑자체가 일치를 필요로 하는 거거든요. 그렇게 함께 일치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하는데 이런 일치를 보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사랑이에요. 사랑이 있어야지만 그 사랑이 그리스도를 통해 삼위 하나님과 교제하고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성도들이 함께 교제하고, 그 교제를 이 세상에 확장하도록 선교하고, 그래서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한 사랑을 보이고, 이렇게 함으로써 삼위 하나님과 교회와 이 세상에서 구원받을 영혼들 사이에 일치와 사랑을 보이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당연히 이렇게 되다 보니까 이 사랑이 교제의 원인인 동시에 결국은 이 교제를 통해서 그 사랑 안에서 교회가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죠. 왜 일치를 이루어야 하는지는 좀 더 살펴보아야 하겠지만, 그래서 좀 더 중요한 전제를 우리들이 하나 얻게 되는데, 그것은 뭐냐 하면, 따라서 인간에게 이 사랑이 꼭 필요하게 되요. 이 사랑은 자기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거예요. 자기 안에 있는 이 사랑은 자생적으로 생겨난 사랑이 아니라, 내 바깥에 존재하는 삼위 하나님 안에 있는 아가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하고, 그것 때문에 감격하고 반응하면서 생겨난 것이 까리따스의 사랑, 곧 지순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란 말이죠.
그 사랑이 문제가 되기 때문에 이제 그 사랑이 결국은 우리 바깥에 거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우리 안에 거하게 되는데 그래서 결국은 성경에서 이 사랑이 거하는 우리 자신의 내면의 세계에 대한 강조가 주어지게 되는 것이에요. 성경에서 대부분 이러한 사랑, 하나님을 향한 지순한 사랑이 신자 안에 거하는 것을 이야기 하죠. 그런데 성경의 표현에 의하면 이러한 사랑이 인간의 마음 안에 거한다고 이야기하는 거죠. 성경은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쉽게 그 사랑이 사람의 마음 안에 있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이 사랑이 우리 마음 안에 있다고 말한 성경의 의미가 무슨 의미인지를 정확하게 알게 될 거예요.
II. 사랑의 자리
우선 첫째로 사랑이 거하는 자리가 문제가 되는 거죠. 그럼 이러한 사랑, 곧 하나님을 향한 지순의 사랑인 까리따스가 우리에게 있어야지만, 우리가 그렇게 삼위 하나님과의 교통 속에서 그런 까리따스가 있어야지만, 그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성도들을 사랑하고 지체들 간에 연합을 이루고 또 그 사랑으로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데 그럼 이 사랑의 자리가 어디냐, 이거죠.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 사랑의 최종적인 자리는 어디냐, 성경은 이것을 마음이라고 이야기해요. 그런데 이것을 차례차례 설명을 할 테니까 잘 들으셔야 해요.
A. 실재적: 영혼 안에
우리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무슨 얘기냐면, 영혼과 육체가 있고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이 마음과 육체의 작용이에요. 그래서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냐 하면, 그러면 사랑이 신자의 어디에 있느냐 할 때 실제적으로는 신자의 영혼 안에 존재해요. 사랑이라는 것 자체가 영혼 안에 있는 경향이에요. 이 경향이 어떤 것을 좋아하는 경향이면, 그것을 보면 기쁘고, 무엇을 보든지 그것을 자꾸 생각하고, 연상하게 되는 거죠. 이게 영혼 안에 사랑이 있다는 거죠.
B. 기능적: 애성 안에
실제적으로는 영혼 안에 있고, 기능적으로는 인간의 애성 안에 있는 거예요. 하나님은 인간에게 영혼의 세 가지 기능을 주셨어요. 첫 번째 기능은 지성이라는 기능, 지성이라는 기능을 주셔서 사물을 보고 깨닫고 판단할 수 있는 기능을 주셨죠. 또 하나는 애성을 주셔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사랑하고, 싫어하는 것을 혐오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어요. 애성이에요. 또 하나는 의성을 주셨어요. 이것은 뭐냐 하면,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고, 하기 싫은 것을 안 하겠다고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어요. 그래서 이것을 깨닫고 판단하는 것을 지성, 사랑하고 혐오하는 것을 애성, 그리고 하고 싶은 것을 하고 하기 싫은 것을 안 하겠다고 저항하는 것을 의성이라고 불러요. 그러니까 이 사랑은 이 두 번째인 애성 안에 존재하는 거죠. 기능적으로 볼 때에는 이 사랑이 애성 안에 존재해요.
C. 작용적: 마음 안에
그러나 이제 실제로 이것을 작용적으로 볼 때에는 이 사랑이 신자의 마음 안에 거해요. 마음은 무엇이냐 하면 영혼의 작용이에요. 그래서 영혼이 판단하고 추론하고 그 다음에 혐오하고 사랑하고 이행하고 저항하고 하는 이 기능을 영혼이 가지고 있는데 이런 기능을 영혼이 인간의 마음을 작용시켜서 행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마음은 육체나 영혼 같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마음을 통해서 인간은 그 영혼 안에 있는 사랑을 애성이라는 기능을 통해서 실제로 그것을 사용하는 곳은 인간의 마음이에요. 마음에서 바로 인간의 행동들이 만들어지고, 행동들이 나오게 되는 거죠.
그런데 이제 성경은 그래서 이 마음을 굉장히 강조해요. 그래서 몇 해 전에 마음 지킴의 교리라고 하는 설교를 한 5년 전에 한 적이 있지요. 그렇게 마음이 그토록 중요해요. 성경은 이 마음을 하나님이 움직이시기도 하지만, 그러나 이 마음의 주인은, 성경이 이야기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라고 보는 거죠. 이 마음을 통해서 생각하고 사랑하고 그 다음에 무엇을 해야겠다, 라고 의지적인 결단을 내리면서 행동들이 산출되는 거죠. 그래서 영혼이 어떠한가 하는 것이, 그것이 그대로 마음에 투영이 돼요. 잠시는 차이가 날 수가 있지만,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영혼이 어떠한가가 그대로 인간의 마음에 투영이 되고 인간은 그 마음의 작용을 통해서 영혼이 아름다운 상태인지, 추루한 상태인지 보여줄 수 있어요. 또 인간은 행동을 통해서 자신의 마음이 어떠한가를 보여줄 수 있어요. 왜냐하면, 행실이 그 마음의 열매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거죠.
이렇게 해서 결국은 최종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결국은 이 사랑이 실제로 행동을 표출하고 작용하는 면에 있어서 이 사랑은 신자의 마음 안에 있는 거죠. 여러분들이 여기 오늘 말씀 들으러 나왔습니다만, 여러분들의 마음 안에 지금 어떤 사랑이 있는지 잘 한 번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인간은 맨 처음에 태어날 때 백색서판의 상태로 태어나질 않았어요. 백색서판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빈 상태에서 태어나기 때문에 누군가 서판에 글을 쓰면 그대로 되듯이 인간이 그렇게 환경에 의해서 주입이 되는대로 만들어진다는 거예요. 그러나 인간은 태어날 때 그렇게 백색서판의 상태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에요. 처음에 태어날 때부터 무엇인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인간으로 태어나요.
타락하기 전에는 인간이 태어날 때,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동시에 하나님을 향한 지순한 까리따스의 사랑을 가득 채워서 사람을 창조하신 거죠. 그러니까 아담은 태어나자마자 하나님을 사랑했던 거죠. 태어나니까 머리가 텅 비었는데, 하나님이 누군가, 그러고 성경학교 가서 하나씩 배워서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이 아니죠. 물론 가르칠 사람도 없었고 자기가 최초의 사람이니까. 하나님이 이미 창조될 때부터 그에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신 상태로 태어나는 거죠.
그러나 타락한 후에는 인간이 이제 사랑을 가지고 태어나는데, 이 사랑이 하나님을 향한 순결한 사랑이 아니라, 자기 사랑으로 꽉 차서 태어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세상의 인간이 태어나서 살아갈 때에 자기를 사랑하는 비결을 가르쳐주지 않아도 너무나 잘해요. 왜 사람들이 다 똑바로 서서 전철 표를 사는데 새치기를 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에요. 자기를 사랑해서 그래요. 추운데 기다리기 싫고 자기 빨리 타고 가고 싶다는 거죠. 누구는. 누구는 안 그러냐 이거에요. 그렇게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는 육욕적인 사랑을 가지고 태어나게 돼요. 열렬해요. 그래서 그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방해를 하면 필요하면 죽여 버리는 거죠. 그럴 정도로 인간이 자기를 사랑하는 존재로 태어나게 되는 거예요.
이렇게 인간이 그런 사랑을 가지고 태어나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만약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자기를 사랑하는 거죠. 그러면 성경에 세상 사랑을 이야기 하는데, 세상사랑은 자기가 세상을 좋아하니까, 세상을 사랑하는 거니까 세상사랑은 자기사랑을 위한 사랑이에요.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교회를 사랑해. 왜냐면, 교회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니까 교회를 사랑하는 거죠. 그러니까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를 사랑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잖아요. 자기가 세상을 좋아하니까 세상을 사랑하는 거죠. 사랑은 그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기도 하고, 그것 때문에 사랑해야 하는 것을 사랑하는 것도 다 사랑이다, 이거죠.
그렇게 해서 인간의 마음은 이 두 가지 사랑이 교차하게 돼요. 그래서 거듭나기 전에는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없고 자기를 향한 사랑으로만 가득 찬 거예요. 그러니까 아주 이기적이고 사악한 인간이 되는 거죠. 그러다 우리 주님을 만나고 깨뜨려져요. 그리고 회개해요. 그 회개가 바로 이제 내 인생의 중심축을 나 중심에서 버리고 하나님께로 옮깁니다. 라고 하는 선언이에요. 그리고 실제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그 영혼 속에 들어오게 되고 그걸로 인해서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까리따스의 사랑이 꽉 차게 되는 것이죠. 그런 지순한 사랑이 꽉 차게 돼요. 그 꽉 찬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거죠.
이렇게 되는데 지상의 교회의 회원인 모든 성도들이 이런 사랑으로 꽉 차 있게 되면 서로가 사랑하면서 교제를 이루고 일치를 이루면서 이 교회가 삼위 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교통의 모상이라는 것을 훌륭하게 보여주고 같은 마음을 품고 이 세상으로 나아가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셨더라면 하셨을 그 일을 공동체적으로 수행해 나가는 거죠.
그런데 이제 문제는 뭐냐 하면 신자인데도 거듭나서 예수께 접붙여지긴 했지만, 아직까지도 이 안에 자기를 사랑하려고 하는 욕망들이 일부분이긴 하지만 남아 있는 거죠. 일부분 남아 있는데 은혜 생활을 잘 하면서 이것들을 잘 죽이고, 누르면, 제법 그래도 남을 사랑하는 지순의 사랑의 사람이 되어서 이러한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 계획에 기여할 수 있는데 이게 신앙생활을 잘 안 해. 기도도 안 해. 해도 늘 형식적이고, 예배에 덜렁덜렁 와 가지고 형식적으로 참석하고, 돈이나 몇 푼 내고 가고, 이런 식으로 건달같이 신앙생활 한단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되냐면, 이 사람의 내면의 세계에 하나님이, 성령님이 그런 내면의 세계를 기뻐하지 않으셔요. 그러면 이 내면의 세계가 점점 굳어져요.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의 생명이 그에게 역사하지 않아. 내면의 세계는 만져지지 않고, 겉에서만 계속해서 도는 거죠. 그러니까 결국은 어떻게 되냐면, 이사람 자체가 마치 겉은 다 타고 속은 익지 않은 그런 곤달걀 비슷하게 된다. 이거에요. 곤달rif 기억나요? 생각 안나요? 병아리를 부화시키려다가 이게 되다가 말은 거야. 그걸 다 내다 팔아요. 좀 쌌지요. 옛날에. 그것을 삶아. 그래서 탁 깨뜨리면, 겉에는 달걀같이 생겼는데 열어보면, 병아리 목이 쭉 나오는 거야. 눈을 이렇게 감고 있지. 그걸 또 소금 찍어서 맛있게 먹어. 얼마나 맛있는데. 털까지 뽑아가면서. 그런데 그렇게 곤달걀처럼 돼 버리는 거죠.
III. 교회의 일치
그런데 이제 문제는 뭐냐 하면 교회가 일치를 이루어야 해. 왜 일치를 이루어야 될까요? 이건 뭐 논변할 필요가 없어요. 왜 일치를 이루어야 하는가는. 자, 그리스도께서 머리이셔요. 그리고 신자는 거듭나자마자 회개하기도 전에 이미 예수의 몸에 접붙여지는 거죠. 그러면 이렇게 해서 정상적으로 이렇게 움직이고 머리가 손을 내밀어라, 설교를 해라, 말을 하자, 아니면 뭐, 이렇게 해서 모든 지체가 이 머리에 의해서 움직여져야지 이게 정상이잖아요. 그래야지만 이게 인간으로서 머리가 생각하고자 하는 대로 의도하면서 이렇게 살 거 아니에요. 몸에 장애가 있어보신 적 있으세요? 저는 사실은 장애가 있어 본적이 없는데, 허리가 아파서 몇 년째 고생을 하면서 거의 이렇게 지팡이를, 하도 우리 집사람이 못 짚게 해서 못 짚었지만, 이렇게 해서 교회 계단을 올라간 적이 여러 번 있었거든요. 지금도 나아졌다가는, 안 좋아졌다가는, 그래서 뭐 그러려니 하고 사는데.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냐면, 지금 빨리 뛰어가야 하거든. 그런데 갈 수가 없어요. 이게 허리가 부러질 것처럼 아프고 허리가 다리가 연결이 되어서 다리가 저린데 어떻게 가요. 그러니까 할 수 없이, 지금 뛰어가야 일이 되는데 이러고, 이러고 가는 거야. 목이 좀 안 좋아. 저 사람이 이야기 하는데 내가 고개를 크게 좀 끄덕여 줘야 하는데 끄덕일 수가 없어. 이렇게, 이렇게. 마네킹처럼 말이지.
이게 이러면 결국은 어때요? 머리가 생각하는 대로 인생을 살 수가 없는 거예요. 이게 굉장히 불편한 거죠. 행동에 제약을 많이 받는 거죠. 지금도 무거운 걸 들을 수가 없어요. 한 나절 무거운 걸 들었다가 또 엎드려서 할아버지처럼 몇 주 다녔어요. 이렇게 되는 거죠. 더 심해지면 어떻게 되는 거죠? 신경 이상 증세가 일어나는 거죠. 머리는 손을 내밀어, 그러는데, 손이 이렇게 가는 거죠. 그렇게 해서 결국은 몸을 통해서 이 머리가 하고자 하는 것을 제대로 할 수가 없는 거죠.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교회를 세우신 것은 교회를 큰 거인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면 돼요. 그러면 한 사람, 한 사람을 보내서는 할 수 없는 그 일을 큰 사람을 만들어서 하나님이 보내시는 거예요. 혼자서 가서 삽으로 퍼 봐야 흙 몇 개 푸다 마는데, 그 큰 사람이 가서 삽을 푼다고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수 천 명이 매달려도 할 수 없는 일을 교회 하나가 걸어가서 해 내는 거죠. 그렇게 사람이 삽을 가지고 허비적 허비적 거리는데, 갑자기 저 쪽에서 빵빵 그러더니, 큰 굴착기가 오는 거예요. 그렇게 해 가지고 한꺼번에 확 퍼서, 한두 번 실으니까 트럭으로 하나 가득이에요. 두 번 실으니까. 교회를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 말하자면, 사역적인 측면에서 보면 그렇게 세상에 보내시려고 만드신 거거든요. 그런데 이게 덩치는 커서 가긴 갔는데 이게 움직이질 않는 거야. 가서 말해라, 그러는데 계속 헛소리 하는 거야. 이게 입이 따로 놀아서. 손이 잡아라, 그러는데 잡혀지지가 않는 거예요.
그러면 결국은 그 교회를 만드신 이유는 죄로 말미암아 망가진 세상을 완전히 구속을 통해서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유일한 도구가 교회에요. 교회를 통해서 그 일을 하고 싶은데 이 교회가 멍청이처럼 그 일을 못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교회가 일치를 이루지 못한 모습이에요. 그러니까 그것을 볼 때 주님은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어요. 그러니까 교회가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거죠.
이 교회의 일치는 원리적인 측면과 실제적인 측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원리적으로는 교회의 일치가 이루어 진 거죠. 왜냐하면, 내가 팔을 내미는데, 무슨 문제가 있어서 팔이 내 맘대로 안 가. 그렇다고 해서 이게 내 몸이 아니에요? 이것도 내 입으로 밥을 먹고 소화를 시켜줘야 산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꼬집으면 이것도 아파. 살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교회가 일치를 못 이루어도 원리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리고 이미 원리적으로는 그런 생명적인 일치가 이루어진 거예요. 장애 상태가 있는 거지. 그러니까 교회가 일치를 못 이루고 있어도, 그건 엄연히 그리스도 예수의 몸이에요. 분열이 많다고 해서 교회를 막 무시하고, 무슨 깡패집단 보듯이 하고, 이러면 죄 짓는 거예요.
교회의 교회됨이라고 하는 것은 교회의 도덕적인 상태나 사람들의 윤리적인 상태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에요. 상상할 수 없는 일이 교회에서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항상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 교회를 생각해야 해요. 예수의 몸이에요. 좋은 교회에서 잘못하는 것만 죄가 아니라, 좋지 않은 교회에서 나쁘게 행동하는 것도 큰 죄라 이거에요. 교회를 막 보는 것은 예수님을 막 보는 행동이에요. 그런 점에서 원리적인 일치를 이루고 있지요.
A. 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님
그러나 이제 교회를 재창조할 도구로 택하신 것을 기억한다면, 이런 원리적인 일치를 이루고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그렇잖아요. 여러분들, 만약에 몸이 그렇게 잘 안 움직이면 물리치료라도 받아서 원하는 대로 몸을 움직여 보려고 하지 않겠어요? 그것이 바로 실제적인 일치에요. 그래서 진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원리적인 일치를 넘어 선 실제적인 일치가 필요하다, 라고 하는 것이죠. 그러면 이 교회의 일치라고 하는 것이 뭐냐? 우선 분쟁이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하는 것이죠. 이것은 교회가 분쟁이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에요.
가끔 자기네 교회에 문제가 없다고 자랑하는 사람들 있죠? 정말 은혜가 충만한 가운데 문제가 없는 것이 문제가 없는 거지, 은혜가 없는데, 문제가 없는 것은 문제가 많은 거예요. 왜냐하면 사람들이 문제를 일으킬 기운조차도 없어요.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 이거죠. 그러니까 이 교회의 일치는 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에요. 그리고 이것은 말하자면, 육체적이고 그 다음에 가시적인 그러한 일치, 가시적인 조직의 일치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영적인 일치이고 유기체적인 일치를 가리키는 것이죠. 그리고 이 진정한 일치는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신자들의 연합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일치에요. 그러니까 분쟁이 없는 상태를 일치라고 그러면 안 되죠. 자, 예를 들어봅시다. 교인들이 모두 교회에 나오지만 세상에 관심이 많아. 축도하기 전에 다 도망가. 그리고 회의가 소집이 안 돼. 그런데 분쟁이 있겠어요? 아니, 회의를 해야지 의견을 내 놓고 다투든지 말든지 하지, 예배 끝나면 다 도망가는데 무슨 다툼이 일어나겠어요. 돋보기 쓰고 성경이 눈에 보일까 말까 하는 할머니들만 대 여섯 명만 남았다고 하면 늘 일치가 이루어지지. 폐회하기로 동의합니다. 모이자마자. 그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란 말이죠.
B. 바른 관계의 온점함의 일치
1. 바른 관계의 일치
그러면 이 교회의 일치는 뭐냐? 바른 관계와 온전함의 일치에요. 이게 먼저 바른 관계의 일치부터 생각해 보고 그 다음에 온전함을 생각해 보겠어요. 우선, 바른 관계의 일치라고 하는 것이 뭐냐? 첫째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그것이 교회의 일치를 위한 중요한 조건이에요.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한 일치. 그거 참, 신기하지요. 뭐가 신기하냐면, 이렇게 하나님을 만나고 진리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은혜를 받은 사람들끼리 만나면 생전 처음 만났는데도 헤어지기가 싫어요. 왜냐하면 내가 이야기 하는 것을 저 사람이 찰떡같이 알아들어. 그리고 어쩜 저 사람이 입을 열어서 이야기하는데, 다 내가 지금 관심을 가지고 있고, 내 마음에 와 닿는 이야기만 하는 거야. 그래서 한참 노닥거리고 이야기를 하다 보면, 세 시간이 지나가고 네 시간이 지나가요. 그것이 어디에서 오는 거죠? 두 사람이 만나서 그렇게 뜨겁게 사랑한 적도 없는데, 각 사람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고 주님의 진리에 합치되니까 그 사람이 만났을 때에 한 성령 안에서 통하는 거예요.
여러분 이런 적 없습니까? 굉장히 친한 친군데, 무지하게 보고 싶은 줄 알고 만났는데, 한 한 시간 지나고 나니까 마음이 매우 건조해지면서 더 이상 이 사람과 계속해서 이야기 하기가 힘든 것. 왜냐하면 지금 내 관심사하고 이 사람의 관심사가 너무 틀려. 나는 지금 이 외롭고 고단한 인생길을 어떻게 걸어가야 할 것이냐를 가지고 고민하는데, 맨 날 무슨 만나서 30분 동안 떠드는데, 무슨 연예인들이 이혼한 이야기, 재혼한 이야기, 맨 그런 이야기야. 쉽게 말하면 영이 통하질 않는 거지.
그래서 일치는 각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데서 이 일치가 촉진되는 거예요. 그런데 종종 보면 우리는 뭐라고 그러냐면, “일단 일치하고 보자.” 그렇게 해서 실로 묶듯이 일단 일치하는 거죠. “우리 이제 일치하기로 하자.” 그런데 그게 오래 갑니까? 이해관계가 맞는 한도 내에서는 유지가 돼요. 그런데 이해관계가 맞는 한도 내에서 교제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몸의 지체인 성도의 교제의 본질이 아니에요. 이것은 이 세상에 있는 이익단체 속에서 이루어지는 교제에요. 교회는 그렇게 해서 이루어지는 곳이 아니지요.
그러니까 진리로 말미암아 하나 된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가지고 교회에서 하나 되는 것을 추구한다, 라고 하는 것은 전면적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교회를 세우신 뜻을 거스르는 행동이라 이거죠.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간절히 하나님께 비셨던 기도의 제목 가운데 하나가, ‘저희를 하나 되게 하소서.’ 하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그것은 무조건 함께 모여서 하나가 되라는 것을 지시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것은 저희를 진리로 하나 되게 해 달라는 것이었어요. 그 진리는 바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바른 관계를 맺게 만들어 주는 그런 차원에서의 일치에요. 진리를 깨닫고 그래서 각자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어갈 때 일치가 이루어지는 거죠. 그럼 여러분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럼, 뭐, 목사님. 진리를 못 깨닫는 사람은 소외당하는 거예요?” 소외당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언젠가는 진리를 깨달을 거고, 우리와 진정으로 하나 될 것이라는 것을 믿으면서 끝까지 그를 사랑하고 진리 앞으로 데려오는 것이 교회가 하는 일이죠. 그거죠.
교회에서도 보면 오늘도 심방 가서 회심한 이야기 참 재밌게 들었는데, 보면 말이죠. 어떤 사람은 교회 오는 첫 날 예수도 하나도 안 믿었던 사람인데, 회심하고 주님을 만나서 인생이 변화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요즘은 제가 안 그럽니다만, 개척교회 하던 때는 제가 지금보다 훨씬 혈기 방자 했잖아요. 성화가 덜 되었으니까. 예배 시간에 계속 와서 졸고 자고, 그리고 예배시간에 매 번 늦게 오고 일찍 가고 말이지. 오죽했으면 내가 심방 가서 그랬어요. “너는 교회를 떠나라.” 뭐 야단을 치고 감정적으로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 “네가 이렇게 이런 교회 다니면서 고생 할 필요가 뭐가 있냐. 예배가 두 시간이 넘는 이런 교회에서 왜 그런 성고문을 받느냐. 거룩할 성. 성고문. 왜 그런 성고문을 받느냐. 그러지 말고 너한테 맞는 그런 교회 가라.” 내가 두 지체한테 얘기했어요. 두 지체 중 한 지체는 지금 전도사님이 되셨고, 내가 누구라고 이야기는 다음에 해 줄게요. 그리고 한 지체는 자기 갈 곳으로 갔어요.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몇 년을 기다려서 이제는 진짜 기도해 주다가 마음을 포기가 돼요. 난 괜찮으니까 자기한테 맞는 교회 가서 찬양 좋아하니까 가서 그럼 열심히 탬버린 치면서 찬송 부르고 그러면서도 또 은혜 받을 수 있잖아요. 그냥 갔으면 그랬는데, 거의 포기했는데, 뭐 몇 년 만에 주님을 만났대. 그리고 완전히 새 사람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만일 사랑으로 기다려주지 않으면, 쓸모없이 되는 거죠. 사람이 그렇게 기다려 주니까 되잖아요. 기다려 주는 거죠. 그런 점에서 일치를 기다리는 거죠.
그러나 진정한 실제적인 일치는 진리를 함께 깨달을 때 생겨나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제 이 일치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냐면, 이렇게 이루어지는 거죠. 올바른 관계는 둘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는데, 먼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거든요. 이것은 신자 개개인의 진실한 참회와 믿음을 통해서 생겨나는 거죠. 너무 기이한 눈빛으로 쳐다 볼 필요 없어요. 하나님과 망가진 관계가 어떻게 회복되는지 생각해 보세요. 진실한 참회와 하나님께 대한 뜨거운 믿음을 통해서 그 관계가 회복이 되는 거죠.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이것은 한 사람이 교회에 나와서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참회해서, 그래서 자기가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죄를 짓고, 그 진리에 등을 돌린 행동을 한 것에 대해서 회개하고 자기를 하나님 앞에 합치시킬 때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게 되잖아요.
그리고 인간적인 머리를 굴리면서 자기 이치에 안 맞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죽어도 안 믿으려고 그러는 게 이게 인간이잖아요. 이성이 부패했기 때문에 인간이 이러는 거죠. 그런데 그 인간이 참회하고 주님을 향한 신실한 신앙이 생겨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 분을 꽉 믿고 붙들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잖아요. 아무리 죄가 많아도 하나님께서 그를 용서하셔서, 다시 사랑해 주시고, 하나님 앞에 똑바른 관계를 가지고, 예전에는 쓰레기 같은 죄인이었지만, 그러나 지금 하나님 앞에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거 아니에요. 그렇잖아요.
이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 이게 사실을 개인적인 관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로서 이루는 관계란 말이죠. 그러니까 그 사건은 개인적인 사건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사건이에요. 우리가 심하게 얘기하면, “너 회개 안 하냐? 너 때문에 내가 손해 본다. 너, 손가락인데 그렇게 손가락이 곪아서 다니면 되냐!” 그렇게 얘기 할 수 있는데 너무 그러면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 상처를 받으니까 우리는 대신 “하나님께서 너를 사랑해 주실 거야.” 그러면서 기도해 주는 거죠. 그러나 한 사람이 진실하게 회개하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되고 나면, 이게 개인적인 사건이 아니에요. 공동체적인 사건이에요. 자꾸 교회 와서 ‘개인적으로’, ‘개인적으로’ 그러는데 그런 거 없어요. 개인일 수가 없어요. 어느 목사님이 그러더라구요. 뭐 청년들이 함께 몰려서 주일 오후에 무슨 설악산으로 등산을 간다고 그래서 “안 된다.” 그랬더니 기어코 갔더래요. “왜 갔느냐 가지 말라고 그랬는데” 그랬더니 “우리 개인적으로 간 겁니다.” 그러더래. 바보. 이 교리의 기초를 몰라서 그런 거예요. 그런 거 없어요. 그러니까 이것은 공동체적인 사건이에요. 그렇게 진실한 참회와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되면, 그러면 교회의 일치가 이루어져요.
그 다음에 또 하나는 사람들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일치가 이루어지는 거죠. 사람과 바른 관계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하나님과 그런 바른 관계는 항상 사람과 올바른 태도로 유지가 되잖아요. 그 똑같은 원리가 그 사랑 안에서 함께 사랑하여야 할 교회 안에 있는 다른 지체들에게로 이어져야 해요. 기도하는 건 진짜 혼신의 힘을 다해서 기도를 하는데 이 태도가 잘못된 사람들 있죠. 내가 항상 하는 이야기가 그거에요. 우리에게 고난이 항상 심오한 죄 때문에만 오는 게 아니에요. 태도가 잘못 되면, 그 태도 때문에 고난이 와요. 어려움이 와요. 항상 그런 거죠. 근데 태도가 잘못 돼 있어요. 그러면 삶의 태도가 잘못 되어 있으면 사람들에게 많은 고통을 주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 고통을 주는 사람이 다행히 신앙이 아주 깊고,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이야. 그러면 여러분들을 보면서 ‘아이구 저게 신앙이 없어서 저러고 다니는데 내가 참고 용서해 줘야지.’그러고 품어요. 그런데 여러분하고 똑같은 강적을 만났어. 그러면 뭐라고 그러면 “이 인간이!” 그러고 딱 나오는 거예요. 한 판 뜨는 거지. 그러면 이제 교회의 아픔이 증대되는 거죠. 그래서 태도를 올바르게 해야 해요. 이 태도를 이야기하자면 끝이 없어요. 항상 태도를 올바르게. 무엇이든지 간에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 낫게 생각하고 그리고 항상 사람들 앞에서 겸손하고 여유가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해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을 수 있는 아량, 그리고 자신을 정말 낮추는. 이러한 섬기는 모습들이 있어서 사람들과의 바른 관계를 유지하게 될 때에 그 때에 교회에 일치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에요. 그런 일치가 이루어지게 되는 거죠.
2. 온전함의 일치
이제 이러한 교회의 일치는 이렇게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올바른 관계를 가질 뿐 아니라 또한 온전함을 추구하는 가운데에 교회가 일치되게 된다 이거죠.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만족하고 구원받은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교회 출석하는 것으로 자신이 할 일을 충분히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이렇게 하는 것만으로는 하나님 앞에 완전한 일치를 이룰 수 없다 이거에요. 그러기 위해서는 온전해 져야 해요. 인간의 영혼은 인간 존재의 삶의 원인이 되는 것이죠.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의 영혼이 인간의 본질이다 이거죠. 그래서 영혼이 어떠한가에 의해서 그 사람의 삶이 결정되는 거예요. 영혼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면 지성과 애성과 의지 모두 하나님께 반항하며 살려고 하겠죠. 그것에 영향을 받는 마음은 그것을 실제로 사용해서 마음으로뿐만 아니라 이번에는 행동으로 하나님을 미워하고 싫어하고 대적하고 거역하는 삶을 살아갈 거 아니에요. 인간이 그렇게 사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결국 영혼이 그 사람의 인간존재가 어떻게 살아가느냐의 원인이 되는 거죠.
그런데 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영혼은 두 가지 인자를 가지고 있어요. 두 가지 원인이 된다 이거죠. 하나는 뭐냐면, 목적인이 돼요. 목적인이라는 건 무슨 뜻이냐면, 영혼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목적을 향해 가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주는 그런 인자를 가지고 있다, 라는 뜻이에요. 그럼 그게 무슨 뜻이냐.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는데, 특별히 그 창조한 인간을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게 해 주셨을 때에는 이 거듭난 신자의 영혼 안에는 어떤 하나의 목적을 향해서 자기가 가야지만 이 영혼과 육체 사이에서 일치가 되고 영혼이 좋아하는 거예요. 그럼 그 가고자 하는 목적이 뭐냐. 자기는 아직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지만, 영혼은 하나님이 자기를 창조하시고 또 자기를 품고 있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창조하신 그 원래의 창조된 목적을 따라 살아갈 때 이 영혼이 행복해 하는 거예요. 이것을 어려운 말로 ‘목적인으로서의 영혼’ 이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생각해 보세요. 얼마 전에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모 그룹의 딸이 자살을 했어요. 우리 모두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그러는데 미국에서는 그런 교통사고 난 적이 없다고 발표를 했어요. 그래서 그것이 나중에 신문에 보도되고 보니까, 죽었어요. 그런데 들리는 이야기에 의하면 아직도 결혼도 안 한 처녀가 자살을 해서 죽었는데 남겨놓고 간 자기 유산이 뭐 2천 몇 백억이래. 그리고 그 부자인 아버지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부족한 것 없이 모두 살았는데 그런데 이 세상을 하직해 버렸어요. 이 세상의 물질로 해결 될 수 있는 영혼의 문제는 없어요. 영혼은 이렇게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물질이나 이 세상에서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는 영혼에 도움이 되질 않아요. 죽어 버렸어요. 한동안, 나에게 직접 일어난 일을 아니지만,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그 부모가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그리고 돈 많은 사람들이 이 기회에 좀 깨달았으면 좋겠다. 야, 돈 가지고 안 되는 일이 참 많구나. 그것만 깨닫고 겸손해져도 아마 영혼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될 거라는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인간의 영혼은 많은 것을 누리고 가지고 있어도 영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본래의 목적대로 살지 않으면, 인간의 영혼은 행복해 하지 않아요. 여러분, 죄 가운데서 즐거움을 누리고, 많은 재산을 누리고 행복하다고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삶을 살 때, 영혼에 참된 만족이 있었습니까? 그런 만족이 없었기 때문에 어거스틴은 내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품안에 안길 때까지는 내 영혼에 참된 쉼이 없었습니다, 라고 고백을 한 거예요. 이게 바로 영혼이 목적을 지향하고 있는 인자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영혼 안에 또 하나의 인자적 요소가 있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완성’이에요.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의 영혼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거듭나게 해 주셔서 우리 영혼을 살리시면, 하나님과 생명적인 교제를 누려요. 이게 영생이지요. 교제를 누리고, 그리스도 예수께 연합되어서 한 몸이 돼. 이것은 어떤 경우에도 취소가 안 된다고 말씀을 드렸죠. 그런데 그런 정도 가지고는 영혼이 만족을 안 한다 이거죠. 그럼 어떻게 만족을 하나? 끊임없이 자신이 영혼이 영혼됨으로 꽉 찬, 온전한 영이 되기를 바라는 거죠. 그래서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지금보다 돈 많았지만, 영혼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리고 죄가 가득 찼을 때보다, 지금 뭐 돈 좀 없고 가난하게 살지만, 그러나 주님을 잘 믿어서 성령으로 충만하게 변화되었을 때 지금이 내 영혼이 더 편안하고 행복한 거예요. 왜냐하면 영혼 자체 안에 이런 완성으로 향하여 가고 싶어 하는 그렇게 해 주어야지만 자기 스스로 행복해 하는 것이 있는 거라 이거죠.
무슨 뜻이냐 하면 이것을 교회에 적용시키면, 교회가 전체적으로 하나의 영체로서 그런 성질을 가지고 있는 거죠. 교회는 교회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몸이 된 신자들이 이렇게 자기가 비록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원하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의 뜻대로 안 살아서 자신의 영혼이 행복하질 않아요. 그러니까 어떻게 하든지 영혼이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이 자기를 창조하고 구원하신 계획에 맞게 살아야지만, 영혼이 행복해 해. 그런데 인간이 항상 자기의 영혼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냐, 이건 철들어야지 귀를 기울이는 거예요. 그러지 않고 영혼은 죽겠다고 이 속에서 몸부림을 치는데, 이거 기울이지 않고 육체에 귀를 기울이는 거예요. ‘야, 지금 네가 이러고 살 때냐. 시커먼 교회당에 들어가서 지금 그러고 있을 때냐. 세상이 지금 얼마나 좋은 세상인데 말이지. 즐겨라, 즐겨, 노래도 있지 않냐.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야, 젊어서 놀아라.’ 이런 식으로 세상이 자꾸 유혹을 하는 거죠. 그런데 그런 외침이 인간의 마음에 훨씬 더 잘 들리는 거예요. 이런 소리가 잘 안 들리고 영혼의 진실한 부르짖음에 잘 들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막 살면 안 돼. 욕망이 이끄는 대로 막 살면 영혼의 소리가 귀에 들리지 않는 거죠. 그렇게 되는 거예요. 이치가.
그래서 영혼이 자기를 완성시켜줄 때 행복해 하는 거예요. 그럼 그것을 교회에 적용을 시키면, 똑같이 교회가 하나의 큰 영체로 본다면, 똑같이 교회도 성도들이 안 원하는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가 진실하게 변화되면 교회가 전체적으로 교회를 세워 놓으신 원래의 목적을 따라서 교회가 하나님을 섬기고 그 길로 가고 그럴 때에 교회는 기뻐하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아요. 그리고 또 하나가 뭐냐 하면 ‘완성인’이죠.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끊임없이 참회와 믿음을 통해서 자신의 영혼이 영혼됨으로 가득 찰 때 그 연합들이 이루어져서 교회는 순수해 지는 거죠. 그렇게 되어서 교회가 점점 더 영적으로 완성 될 때 그 때에 교회는 행복해 하고 주님이 그런 교회에 기쁘게 거하시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이런 교리적 사실들이 우리에게 커다란 격려를 주는 거죠. 지금은 저 인간이 저렇게 뺀질대고 예수 안 믿는데, 저 사람의 영혼은 그러는 그 인간 자체를 너무 싫어하는 거죠. 그러고 어떻게 좀 자기를 품고 있는 저 인간을 변화시켜서 그래서 내 영혼을 완성 시켜 달라. 내 영혼을 온전함으로 꽉 채워주고 그리고 내가 진짜 원래의 창조의 목적으로 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영혼 속에 깊은 울부짖음이 있는 거예요. 할렐루야. 이렇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죄인도 교회에서 포기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것을 귀를 기울이는데 이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은 누구냐, 까리따스의 사랑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그 외치는 음성이 들리는 거예요.
IV. 일치가 이루어지는 방식: 사랑의 질서가 재편됨
그러면 이제 실제적인 측면에서 우리가 교회의 진정한 일치라는 것이 결국은 사랑, 사랑 안에서 하나님과 사람과 올바른 관계가 세워짐으로써 일치를 이룬다는 것은 알았는데, 그러면 구체적으로 이런 일치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그거죠. 그것을 우리들이 한 번 생각해 보는 것이죠. 첫째는 뭐냐 하면 사랑의 질서가 재편됨으로써 일치가 이루어지는 거죠. 교회는 원리적으로는 이미 일치를 이루고 있죠.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아직 일치를 못 이루고 있는 거죠. 그런데 이것들이 실제적으로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는 사랑의 질서가 재편되어야 해요. 그러면 이 사랑의 질서가 재편되는 방식이 뭐냐, 라고 하는 거죠. 이 사랑의 질서라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이냐면, 사랑을 하는데 사랑하는 것은 그것 보다도 더 중요한, 내가 어떤 것을 사랑하게 되면, 그것에 대한 사랑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에 대한 사랑을 이루는데 기여해야 돼요. 그 위에 있는 것들에 대한 사랑은 그거보다도 더 중요한 것을 위해서 기여해야 돼. 이것을 군사학에서 ‘목표의 원칙’이라고 그래요.
이 비유를 들면 여러분들이 쉬울 거예요. 전쟁을 하는 거야. 전쟁의 최종적인 목표는 뭐죠? 참가하는데 의의가 있다고요? 아니에요. 승리에요, 승리. 이겨야지. 그건 운동경기 할 때 그런 거고. 이겨야 돼. 그래서 맥아더 장군이 그랬잖아요. 자기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각하, 전쟁에서는 승리보다도 더 귀한 단어가 없습니다. 딴 건 다 필요 없습니다.” 이겨야 되는 거예요. 승리에요. 그럼 “승리하자”, 만약에 전쟁이 일어났다. 그러면 “이기자” 그런다고 되는 게 아니죠. 옛날 같으면 “저 왕의 목을 당장 따와라.” 그 나라는 졸고 있나? “얘들아 뭐 하느냐? 가서 저 나라의 왕의 목을 따 와라.” 아니 명령을 안 들어서 못 가나. 그 나라는 점심시간이야? 놀고 있느냐고요. 그러니까 전쟁을 차례차례 계획을 세우죠. 그래서 뭐냐면, 어떤 것을 생명을 걸고 공격을 해요. 예를 들면 진지를 차지한다든지, 아니면 배를 부순다든지, 건물을 파기한다든지 그러죠. 그럼 그 작은 목표는 더 큰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 반드시 기여해야 해. 그래서 여러 부대가 작은 목표를 정해서 이제 공격을 해. 그러면 그것이 합쳐져서 더 큰 목표를 성취하는 거야. 그러면 그거보다 큰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또 공격을 해. 그렇게 하면서 하나씩 하나씩 가는 거죠. 그런데 전쟁이 일어났어요. 보니까 수많은 군인들이 지금 전진을 하려고 하는데 저 높은 토치카에서 그 굉장히 발달한 무기를 가지고 병사는 얼마 안 되는데 어마어마하게 공격을 해대서 한 시간에 수 만 발씩 총알이 날아오면서 이 사람들이 고개도 들지 못할 정도가 된 거죠.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졌어요. 그런데 한 사람이 그러는 거예요. 군인들 한 사람씩 데려다가 그 총알이 날아오는데 그 저기, 페이스페인팅을 하고 있는 거야. “그거 왜 하냐” 그러니까 “얼마나 예뻐요.” 그거 총살감이지.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지. 왜냐하면 그 일은 전쟁에서 이기는데 이게 나쁜 건 아니지만, 저 전쟁에서 이기는 데 기여하지 못해. 그렇잖아요. 그러면 지혜로운 지휘관이면, 온통 공격을 해도 저 총알 세례 때문에 안 되니까 특공대를 조직하겠지요. 그렇게 해 가지고 밤새도록 피를 흘리도록 결국 폭탄을 안고 뛰어 들어가서 결국은 같이 죽었다더라. 그런 거 도덕 교과서에 많이 나오잖아요. 그런 거를 할 거 아니에요. 그런 게 바로 그런 원칙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죠.
이 사랑의 질서도 마찬가지고 그렇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 내가 이걸 좋아한다. 내가 이 일을 좋아한다. 그러면 그것 자체여서는 안 된다, 라고 하는 것이죠. 뚝 끊어져서 그것 자체여서는 안 된다는 거죠. 그것 자체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너 왜 이 일을 그렇게 열심히 하려고 하니? 그럴 때 난 더 이상 이유가 없어. 그게 뭐냐면 내가 좋으니까. 그 뜻이거든요. 그러니까 그건 안 된다 이거죠. 만물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나 바깥에 있는 모든 존재들은 즐거워해야 할 것과 사용해야 할 것으로 나뉘어 지는 거예요. 즐거워하고 사용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사랑의 질서에요.
그러면 사용해야 할 것은 뭐냐 하면, 더 높은 목적을 위해서 기여하는 거죠. 그런데 그 자체를 끝인 것처럼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의복은 몸을 위해서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름에는 시원한 옷을 입어줘야 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옷을 입어줘야 해요. 그런데 이 의복이 마치 그 자체가 완전한 목표가 되는 것처럼 그렇게 해서 그 의복을 사랑하게 되면, 이 사랑의 질서가 잘못되는 거죠. 그런데 인간은 그런 식으로 질서를 갖고 있는 거죠. 그래서 자기 나름대로 이제 ‘내가 행복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동기간들이 좀 편안하게 살아야겠구나. 이 사람들이 거지가 된다든지 사업이 망하거나 그러면 맨 날 돈 달라고 그럴 테니까 고달플 거야. 이 사람들 좀 돌봐 줘야지.’ 그리고 동그라미 치는 거죠. 그 다음엔 ‘내 동생이 회사 잘 다니려면 그 회사가 망하지 말아야지, 그 회사 제품 사줘야겠다.’ 동그라미 하나 더 쳐지는 거죠. ‘회사가 잘 되려면 경제가 잘 되어야 할 텐데.’ 동그라미 치는 거죠. 그래서 계속 커지는 거예요. 그런데 이 원이 아무리 커져도 결국은 마지막에 다 들어와서 이렇게 사랑하는 질서를 나름대로 세웠는데, 그 근원이 뭐냐, 자기에요. 자기.
A. 개인적으로: 회개와 믿음을 통하여
이런 사랑의 질서를 여러분 모두가 다 가지고 교회에 들어오는 거예요. 그러다가 주님을 만나요. 와르르르 무너지는 거죠.
나 세상사랑 버렸네. 나, 주님만 사랑 하네.
‘다 쓸데없는 거구나. 아, 내가 알고 보니까 그거 다 쓸데없는 거야. 그거는 모두 잠시 지나가는 나그네 인생길에 눈에 보이는 것들이야.’ 그러고 깊이 회개해. 그리고 진짜 주님을 사랑하게 되는 거야.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뭐가 좋은 마음이 들어, 내가 이렇게 하는 거 주님이 좋아하실까? 이게 내가 이걸 좋아하는데 이게 주님께 보탬이 될까? 이렇게 하면서 원을 다시 그리는 거죠. 아까 그거는 자기사랑의 질서고, 나중의 원은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질서에요. 그러니까 그 질서가 재편되어야 하는데 그 질서가 재편된다는 것은 쉬운 거 아니에요. 그것은 정말 엄청난 자기 변혁이 일어나야지만 가능해지는 거죠. 힘든 거죠. 그런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데 그게 진실한 자기 깨어짐의 핵이에요. 그 자기 깨어짐의 회개와 그리고 믿음을 통해서 이 사랑의 질서가 바뀌게 되는 거죠.
그래서 이제 개인적으로 공동체적으로 둘이 같이 사랑의 질서가 재편되어야지만, 일치가 이루어지는 거죠. 그렇지 않으면 일치가 이루어질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그 사랑의 질서라고 원을 그렸는데 100명이면 100명이 다 달라요. 이 질서가. 그러니까 그것을 자기 중심축을 옮기지 않은 채로 그것을 맞춘다고 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거예요. 조금씩은 맞출 수 있어요. “테니스 좋아하는 사람 모여라”, 그럼 우르르 모여요. 모여도 굉장히 기분이 좋아. 왜? 일단 식성도 다르고 인간성도 다르지만, 테니스 치는 건 같은 취미니까. 굉장한 일체감을 이루는 거죠. “난 테니스 싫어, 도박 좋아하는 사람 모여라.” 그럼 다 가는 거야. 옛날 내가 다니던 교회에서는 말이지, 주일예배만 끝나고 나면 이상하게 집사님들이 교회 대문 옆에 전봇대가 있는데, 원형으로 똑같이 모여. 위에서 내려다보니까 머리를 쭉 맞대고, 기도하는 것도 아니고, 나중에 알고 보니까 곗돈 받아서 나눠주는 거야. 목사님한테 바가지로 혼났죠. 오야 나오라고 그래서 말이지.
일치가 이루어질 수가 없지요. 될 수 있는 것은 하나지. 그리스도 예수를 중심으로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가 하는 질서가 잡히는 거예요. 이것은 진리가 잡아주니까 진리는 이 사람에게 이 말하고, 저 사람에게 저 말하고 그러지 않으니까, 질서가 똑바로 잡히는 거죠. 이거는 개인적으로도 일어나고 공동체적으로도 일어나는 거예요. 개인적으로는 어떻게 일어나느냐 하면, 참회를 통해서 자기의 사랑의 질서를 버리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지정하신 하나님 사랑의 질서로 이루어진 나라이고, 세상 나라는 세상 사랑의 질서로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니라, 자기 사랑의 질서로 이루어진 나라에요. 그러니까 세상 나라에는 통일성이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각자 다 자기 나름대로 중심축이 되어서 수 천 만개의 중심축을 가지고 원을 그리는 거예요. 다행이 그 원이 가끔 많이 겹쳐. 그러니까 거기에서 한 마음이 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면서 살지만, 원을 크게 그리면 많이 만나지만, 자꾸 적어지면 그러면 만날 일이 없어지는 거죠. 서로가, 서로가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는 거죠. 그러나 이제 교회는 틀려요. 하나님 사랑의 질서대로 이루어진 나라가 하나님 나라, 자기 사랑의 질서대로 이루어진 나라가 세상 나라. 이렇게 해서 이 두 나라가 역사 속에 함께 있어 온 거죠.
신자가 교회에 들어와서 예수의 몸에 접붙여져서 신자가 되었어요. 그래서 몸의 일부가 되었어요. 그건 참 좋은데 문제는 뭐냐 하면 그 사람이 한 번 깊이 회개하고 사랑의 중심축을 자기에게서 하나님에게로 옮긴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틀림이 없지만,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끊임없이 중심축을 옮기려고 하는 요사스러운 존재가 이게 신자라는 존재에요. 결국은 그것을 완전히 옮길 수 있느냐? 옮길 수 없어요. 그냥 잡아 당겨서 어느 날 원을 그렸거든. 근데 사경회를 하는 거야. 가서 펑펑 울고 다시 반납하는 거야. 꽉 꽂아 놓고 한참 살다가 보니까 또 정신이 맛이 가기 시작하면서, 은혜가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살그머니 눈치를 보면서 살짝 꽂아 놓아 보는 거야. 그러다 또 말씀을 듣다가, 기도하다가, 깨뜨려지는 거예요. 또 갖다 놓는 거지. 옛날에는 한번 딱 꽂아 놓고, “건드리면 죽어, 하나님도 국물도 없어.” 이러던 사람이 신자가 된 다음에는 이거 갖다 놓고, 은혜가 충만할 때는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이러다가, 은혜가 떨어지면 왠지 자기가 손해나는 느낌이 드는 거야. 살짝 쏙 빼서 갖고 가보는 거야. 그러다가 다시 회개하고 다시 갖다 놓고. 이것을 수없이 이 짓을 하는 게 이게 신자라 이거에요.
그러니 이렇게 함께 모든 성도들이 꽂아 놓고 있으면, 꽂힌 자리가 한 군데야, 여러 군데가 아니라. 아, 이거 기가 막히네. 여러 군데가 아니라 한 군데 다가 다 꽂아 놓는 거야. 그러니까 그것을 중심으로 사랑의 질서가 파문처럼 번져가니까, ‘이거는 요정도만 사랑하면 되겠지.’ 그러면 다들 ‘그럼 그렇지.’ 하고 다들 동의를 한다 이거죠. ‘이건 더 많이 사랑해야 돼. 그것보다 이게 더 중요하지, 아, 이 일보다 저 일이 더 급하지, 나의 행복보다야, 지체들의 기쁨이 더 중요하지, 우리의 기쁨보다야, 하나님의 영광이 더 중요하지.’ 그러면 모두가 동의를 해요. 근데 사실 그런 교회가 몇 교회나 되냐 이거에요. 가끔 다수가 와서 하나의 통에다가 다 꽂아 놓고 가는 때 있어. 그 땐 진짜로 목회하기가 행복하죠. 너무 말을 잘 들으니까. 근데 이제 은혜가 떨어지면 다 돌려달라고 그러면서 다시 가져가서 말뚝 다시 박는 거야. 그러니 이게 춘추전국 시대가 되는 거지. 전부 다. 개판이 되는 거지. 이 ‘개’라고 할 때 이건 dog를 얘기하는 게 아니라 crab, 게를 얘기하는 거야. 각자 다 옆으로 가는 게판이 되는 거야. 원고에 없는 얘기가 나왔네.
그런데 그런 것들이 해결되는 방법은 뭐냐면, 다른 방법으로는 해결이 안돼요. 그거 어떡하겠어요. 옛날 중세시대 같으면 간단하죠. 교회 지하실에 유치장 만들면 돼. 까불면 집어 넣는 거야. 수틀리면 집게 가지고 고문 하면 돼. 그런데 주님이 원하시는 일치는 그런 일치가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거죠. 그래서 그것을 해결하는 길은 뭐냐면, 가장 미련한 방법 밖에 없는 거예요. 뭐냐면 그렇게 말뚝 끌고 가서 딴 데 박으려고 하는 사람이 빨리 회개하고 돌아와서 말뚝 제자리에 꽂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 예배가 중요한 이유가 그것 때문이에요. 이천 명 삼천 명 되는 사람들을 하나씩 말뚝을 제자리에 갖다 꽂으라고 만약에 그렇게 하려면, 이게 보통 일이겠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항상 교회가 실제적으로 하나됨을 유지하는 중요한 요건으로써 함께 같은 곳에서 한 하나님을 한 성령 안에서 경험하게 하는 것이에요. 그렇게 함으로 일체감을 갖게 하시는 거죠. 그래서 회개해요. 회개하면 각자 유치장 만들어 놓지도 않았는데 각자 그 날 저녁서부터 반납하기 시작하는 거야. ‘하나님 진짜 죄송해요. 이거 끌고 갔다가, 정말 이게 아닌 것 같습니다. 잘못했습니다.’ 회개하는 사람들 보면서 자기도 회개하고. 그러면서 각자 다 갖다 놔. 다시 사랑의 질서가 원으로 이루어지는 거야.
그런데 이게 말로는 이렇게 웃으면서 이야기 하는데 굉장히 어려운 거예요. 이러한 사랑의 질서의 재편을 위해서는 결국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면 자기 사랑이 죽어야 하거든요. 자기가 죽어야 해요. 그런데 인간의 자기 사랑이 얼마나 뼈 속까지 사무쳤는지 아세요? 그런 존재가 어느 날 눈에 보이는 자기를 사랑하는 대신 그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 사랑의 질서를 반납하는 거예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냐면, 아주 진실하고 깊은 자기 깨어짐이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우리를 말씀으로 다루시기도 하지만, 말씀이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가서 깨뜨릴 수 없을 것 같을 때에는 하나님이 먼저 마음을 고난을 통해서 흔들어 놓으셔요. 고난이나 마음의 심적인 깊은 고난을 통해서 말씀이 잘 들어가도록 많이 흔들어서 말랑말랑하게 하신 후에 하나님이 말씀을 보내시는 거죠. 그 때에 인간은 깊이 고통을 받는 거죠. 그 때에 하나님 앞에서 진리의 빛을 받으면서 자기 자신이 얼마나 악하고 더러운 인간인가, 그리고 자신은 몰랐었는데, 자기 안에 정말 이 처절하고 더러운 자기 사랑이 있다고 하는 것을 깊이 깨닫는 거예요.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참 신기한 게 이렇게 회개하기 전에는 자기가 하나였거든. 그런데 진리를 깨닫고 회개하기 시작하면, 이게 내 안에 내가 또 있는 게 발견되는 거야. 내가 원하지 않는 내가 있는 게 발견되는 거예요. 이게 자기 깨어짐의 시초야. 자신이 원하지 않는 자기가 있다고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라고 하는 것은 결국 뭘 의미하느냐 하면, 자기가 이제 은혜 안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이 은혜에 화합하지 않는 육적인 자아가 자기 안에 있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럽다는 인식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에서 깊이 회개하는 거죠. 그 때에 그렇게 하나님 앞에 주님을 멀리 떠나서 방황하고 죄를 짓던 자기 자신을 깊이 회개하고 아파하는 거예요. 그럴 때의 이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태어나서 무엇으로도 형용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고통이 계속 들어오는 거예요.
이건 사실은 말로 설명해서 손에 쥐어 줄 수가 없어요. 이건 경험의 영역이기 때문에 쥐어 줄 수가 없어요. 그 때 인간은 뼈 속까지 깨뜨려지는 것 같은 깊은 고통을 느끼는 거예요. 그래서 회개하다가 너무 심하면 혼절한다고. 기절한다고. 깊은 고통을 그 속에서. 자기가 왜 하나님 앞에 이렇게 나를 사랑하고 주님을 무시하는 삶을 살았는가, 그리고 이 잘못된 사랑의 질서 때문에 하나님과 지체들에게 고통을 준 것, 이런 것들이 깊이 파고들어 오면서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들어오는데, 이 고통이 무엇이냐 하면, 예수 죽으심의 고통이에요. 예수 죽음의 기운이 이러한 영적인 연결을 통해서 흘러 들어오는 거죠.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이 자신이 깨뜨려지는 가운데, 그대로 경험이 되는 거예요. 이 죽음의 기운은 우리 안에 들어 와서 모든 것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와 일치하지 않는 것들을 죽이는 역할을 하는 거예요. 그렇게 깊이 깨뜨려지면서 정욕, 교만, 탐심, 허영 이런 것들이 막 죽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렇게 죽는 것과 함께 예수가 우리 몸에서 다시 사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사랑하는 질서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것 사이에 상당한 일치가 이루어지는 거죠. 이런 일이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많이 일어날 때, 그 교회는 뛰어난 사랑의 일치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교회는 말이지. 매 주 모여서 예배를 드리면서 눈물바다가 되어야해. 예배가 끝났는데도 가슴이 떨려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로 예배당에 남아 있어야 돼. 그거 앉아가지고 시간이나 보고 있고 말이지, 그렇게 해 가지고,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거죠. 왜냐하면 교회가 뭔지 너무 몰라서 그러는 거야. 그것은 자기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 교회의 문제에요. 그래서 자기 사랑의 질서에 대해서 계속 깨뜨려져서 그래서 사랑의 일치를 이루게 되는 거죠. 이렇게 됨으로써 교회의 실제적인 일치가 이루어지게 되는 거죠.
이게 개인적으로는 참회를 통해서 일어나게 되는데, 공동체적으로는 교회의 목적을 받아들임으로써 일치를 이루게 되는 것이죠. 교회의 목적을 받아들인다는 게 무슨 뜻이냐면, 교회가 존재하잖아요. 그러면 교회가 왜 존재하게 되었는지를 신자들은 깨달아요.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배우고 깨달으면 보다 더 잘 알 수 있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잘 못 배우면, 오해하거나 잘못 알 수도 있지만, 일단 하나님을 진실하게 사랑하는 신자가 되어서 성화의 삶을 살게 되면 직감적으로 교회를 향해서 하나님이 뭘 기뻐하신다, 라는 걸 알아요.
그렇게 되는데 이제 신자가 이렇게 깊이 하나님 앞에 깨뜨려지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의 질서를 갖게 되면, 그러면 자기의 존재의 목적과, 교회를 하나님이 세우신 목적 사이에 분리가 일어나지 않는다, 이거죠. 왜냐 하면, 잘 들으세요.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 목적은 나를 구원하신 목적하고 완전하게 일치를 해. 나를 구원하신 목적을 크게 확대해서 생각하면, 그 목적을 바로 교회가 계승하고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교회라고 하는 곳이 그렇게 구원받은 사람의 연합이니까 교회가 그 목적을 계승하고 있는 거죠. 교회가 다른 쪽으로 안 가니까 은혜를 받은 내가 살아가려는 인생의 목적과 교회의 목적이 분리가 되는 것이지, 교회가 진리에 의해서 바르게 갈 길을 가고, 신자가 자기 사랑을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 사랑의 질서로 통합될 때에는 그가 교회를 잘 섬기고 교회가 진리를 따라서 올바르게 세상을 섬기면, 신자는 그 교회의 몸의 일부로써 이 세상에서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을 교회를 통해서 구현하면서 사는 거예요,
자, 자기가 직접 선교를 나갈 수는 없잖아요. 근데 거기는 하나님이 나를 보내길 원하시는 곳 아니에요. 내가 만약에 예수의 몸에 접붙여지지 않았더라면, 내가 갈 수 없었을 텐데,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졌기 때문에 우리의 몸의 지체인 한 지체가 거기 간 거예요. 지체가 거기 있을 때 우리도 거기 있는 거죠. 그래서 내가 해야 할 일을 그 지체가 하고 있는 거죠. 무슨 뜻인지 이해 가죠? 그러니까 이렇게 해서 나의 존재의 목적이 교회의 존재의 목적과 일치되는 거죠.
그런데 이제 불행한 일이 가끔 일어나죠. 교회가 가는 방향이 전혀 내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생각할 때에 가고 싶은 그런 쪽으로 안가. 그래서 뭐냐 하면 내가 열심히 교회를 섬겨도 섬기는 이것들이 사용이 되어서 하나님 원하시는 쪽으로 가질 않고 다fms 쪽으로 간다 이거죠. 그 때 신자는 갈등하고 고민하는 거죠. 그래서 이 교회는 신자가 돈을 다 모아가지고 딴 데 보내고, 예배는 여기 와서 드리지만, 그 다음에 봉사는 딴 교회에서 하고, 그 다음에 여기서는 예배에 참석하고 성경공부는 B교회로, 찬양훈련은 C교회로, 상담 학교는 D교회로. 그 다음에 무슨 장애인 사역은 F교회로. 그러면서 사방팔방으로 돌아다니는 거죠.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사람이에요. 비정상적인 교회생활이 일어나게 되는 거죠. 모든 교회를 사랑하는 것 같은데, 아무데도 자기 교회가 없어요. 그런 사람이 되는 거죠.
B. 공동체적으로: 교회의 목적을 받아들임으로
그렇게 해서 공동체적으로 그 목적을 받아들이게 되는데, 여기에서 뭐가 나오느냐면, 생명의 질서와 사역의 질서를 사모하는 거죠. 다시 말하면, 교회가 그렇게 하나님 앞에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훌륭하게 섬기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이 개인적으로 뿐만 아니라 교회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꽉 찬 상태가 되어야 하잖아요. 그걸 눈을 뜨고 나면 어떻게 되냐면, 나 개인의 성령의 충만함을 위해서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충만한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생명이 가득하도록, 위해서 기도하는 거예요. 그렇게 됨으로써 교회가 일치를 이룰 수 있기 때문에.
뿐만 아니죠. 사역을 해 나가려고 하면, 사역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자원들이 필요하겠죠. 이 세상의 땅의 자원도 필요해, 땅에서 사역을 하니까. 헌금을 하게 되죠. 그것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늘의 자원이 필요해요. 아무리 돈 많이 뿌려도 그들이 예수 믿고 회심하는 거 아니죠. 가서 그들을 위해 기도해 줄때,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을 섬길 때, 그들의 마음에 감화가 일어나고, 복음이 심겨져서 그들이 회심하고 하나님 앞에 돌이키는 역사가 일어나야 하잖아요. 이런 건 돈으로 되는 게 아니거든. 하나님의 각별한 은혜가 필요하잖아요.
그리고 이런 것들을 하기 위해서는 자원이 필요한데, 그 중의 하나가 은사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다양한 지체에게 각각 은사를 주셨어요. 이건 하나님이 개인에게 주신 게 아니야. 여러분들에게 만약에 어떤 은사를 주셨다. 그거는 개인에게 주신 것이 아니에요. 공동체를 위해서 주신 거죠. 그러니까 만약에 그 주어진 은사를 자기 것인 것처럼 생각하고 인색해 하거나 아니면, 그것을 가지고 공동체를 섬기기를 소홀히 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서 거두어져요. 그리고 죄의 지배 속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건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맡긴 거예요. 그러니까 달란트를 주신 것과 소명은 분리가 안 돼요. 그걸 하나님께서 주신 거예요. 그걸 사명이라고 생각을 하고, 은사는 내가 가지고 있지만, 모든 사람이 이것을 활용할 수 있도록, 열어 줘야 해. 같은 창고에 들어있는 것처럼 사용하도록.
이렇게 해서 교회가 생명과 자원으로 가득차기를 사모하는 가운데 교회가 한 마음이 되는 것이죠. 예수님이 부활하고 승천하신 다음에 제자들이 모여서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고 있었어요. 뭐죠? 무엇인가 교회로써 존재하기에 부족하다 이거죠. 그러니까 교회를 참으로 교회답게 만들어 줄 그 무엇을 잘 몰랐지만, 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는 거죠. 성령이 임하셨죠. 핍박을 받을 때도 마찬가지죠. 온 교회가 모여서 그 핍박을 위해서 기도했어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서 다시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을 구현해 갈 수 있는 그런 충만한 것으로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거죠. 그렇게 채워지고 올바르게 되고 하는 이 모든 일에 그리스도 예수에게 접붙여진 모든 사람들이 그 책임을 공유하는 거죠. 함께. 그러면서 일치가 이루어지게 되는 거죠.
C. 다툼의 원인
1. 소극적: 영원한 것들에 대한 무관심
그러면 이제 일치가 이렇게 중요한데, 이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는 원인이 뭐냐? 결국은 다툼이에요. 그럼 이 다툼이 무엇 때문에 생기느냐. 이거죠. 우선 첫째 소극적인 측면에서 보면, 영원한 것들에 대한 무관심이에요. 쉽게 얘기하면 이 세상에 있는 허탄한 것들에 대한 생각이 일치를 헤치게 되는 거죠. 무슨 뜻이냐면, 이 교회는 진리가 있는 곳이죠. 교회의 가장 중요한 것은 진리가 있는 곳이라는 거죠. 우리가 삼위 하나님이 교통하시는 그 본질이 사랑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그 사랑과 함께 지혜가 있어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계획하시는 전체적인 디자인이 있는데, 그 계획이 바로 하나님의 지혜에서 우러나는 거죠. 그 지혜를 이 세상에 실행하실 때에 사랑을 사용하셔서 지혜를 실현하시는 거죠.
이해가 잘 안 가시는 것 같은데 비유를 하면 이해가 잘 될 거예요. 여러분들에게 자녀가 있어요. 그런데 얘는 아직 어리기 때문에 아직 뭘 잘 몰라. 하지만 여러분들은 이미 인생을 살았기 때문에 얘가 어떻게 살아야지만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을지 알죠. 그러면 아니까 여러분들은 그 아이가 이렇게 해서 행복하게 되기를 원한다, 라고 하는 계획을 가지고 계시죠. 그게 여러분들의 지혜에요. 그런데 그 지혜를 자녀를 통해 이룰 때, 어떻게 이루어요? 사랑으로써 이루잖아요. 그 아이가, 여섯 살 밖에 안 된 아이가, 왜 열다섯 살 먹은 아이만큼 사려 깊게 행동하지 못하느냐고 몽둥이로 패지 않아요. 그렇게 하지 않고 그 아이 오줌 싸고 똥 싸고 말썽부리는 것을 다 참으면서 그러면서도 이 아이를 지 맘대로 자라게 내버려 두지 않고, 지혜를 가지고 그 아이를 자기가 원하는 행복한 길로 데려가려고 애쓰는 게 이게 부모의 양육자로서의 책임 아니에요. 사랑과 지혜로 이루어지는 거죠.
그러니까 지혜가 없고 사랑만 하면, 애들이 망쳐지는 거죠. 또 사랑은 없고 지혜만 있으면, 아버지 엄마, 인간으로 생각도 안 하고, 원수 짓는 거예요. 하나님이 이 세상을 가지고 계신 놀라운 지혜가 있는데 그것을 실제로 구현해 가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사랑을 가지고 구현해 가시는 거죠. 그렇게 사랑으로 구현해가는 과정이 여러분들의 회심의 경험, 첫사랑의 경험, 인도하시는 경험, 이런 것들을 경험하게 되는 거죠. 그 사랑을 통해서 여러분들을 가고 싶은 데로 맘대로 가라고 그러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은 한 번도 여러분들에게, “오늘 기분이다. 한 달 여유 줄 테니까 네 맘대로 죄 짓고 살아 봐라, 보너스다.” 절대 그렇게 안 하셔요. 지혜가 분명히 있기 때문에 그 길로 여러분들을 데려가시려고 하는 거죠. 이게 바로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지혜에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이러한 것들은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가지고도 하나님이 계획을 하시지만, 그러나 이것은 항상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들을 향해서 질서가 이루어지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로 데려 가시려고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매 순간 마다 굉장히 많이 인도하시죠. 뭐가 필요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 물질도 주시고. 그렇죠? 그리고 뭐 하나님 앞에 이렇게 저렇게 기도해요. 오늘도 어느 자매 심방 가니까 그래요. 은혜를 많이 받고 친구하고 통화했는데, 친구가 그러는데 간증을 하는데, 자기가 은혜를 많이 받으니까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그러시더래요. ‘넌 내꺼다. 넌 내꺼다.’ 이 자매가 하도 샘이 나서 ‘하나님 왜 저한테는 안 그러세요?’ 그랬대요. 그러고 나서 서점에 가서 테입을 샀는데 너무 많아서 좀 듣기 좋은 거 골라 달라고 해서 차에 탁 틀고 듣는데,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할렐루야. 응답이 된 거지. 물론 하나님이 그 사람은 직접 하시고 이 사람은 가수를 통해서 했지만, 그런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인도해 주시는 것이 그렇게 세밀하잖아요.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야. 하나하나가 이어져서 궁극적으로 우리를 데려가고 싶은 곳이 있는 것 아니에요. 그렇게 해서 추구하시는 가치는 잠시 있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에요. 그 영원한 것에 대해 눈을 뜨는 거죠.
제가 직장 다닐 때 직장 전도를 열심히 했어요. 그 중에 지금은 이제 노인이 되셨겠지만, 아줌마 한 분을 열심히 전도를 했는데, 굉장히 순수하게 신앙을 잘 받아들여서 지금도 신앙생활 잘 하고 계신데, 다들 모여서 간증을 하는데 물어 봤어요. “당신은 예수님을 믿고 나서 제일 변한 게 뭐냐?”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은 거창하게 내가 뭐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얘기들 하는데, 그러지 않고 “예수 믿고 크게 변화 된 게 없는 것 같은데, 한 가지 있어요.” 전에는 항상 돈이 두둑이 있지 않으면 불안했는데, 이제는 토큰 하나만 있어도 그렇게 마음이 푸근하고 편하대요.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그 이유가 뭐겠느냐?” 그 이유가 바로 관심 자체가 현세적인 것에서 영원한 것으로 관심이 움직인 것을 보여주는 거죠.
여러분 은혜를 받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누구나 다 악다구니처럼 살아가. 그래서 악악대면서 악을 행하는 거야. 주차 한 번 잘못했다고 와서 꼬챙이로 타이어 다 뚫어 놓고, 뭐 공중전화 오래 건다고 발길로 차서 공중전화 박스를 부숴 버리고, 이렇게 못된 짓을 하면서 악악거리고 살거든. 그러고 승진 못했다고 죽어 버린다고 그러고, 연예인 하나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은 뭐, 인기 떨어졌는데, 매일 죽고 싶은 생각 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리스도인인데도. 그러고 살아요. 그러다가 예수님을 믿고 깊이 변화되게 되면, 은혜가 밀려와. 그러면, 잠시 있다 사라질 것들에 대한 관심이 적어져요. 그거 뭐 아무려면 어때요. 옛날에 불교신자이긴 하지만 성철 스님이 있는데, 절에서 동자 하나가 막 뛰어나오면서 그러더래요. “스님, 스님. 큰 스님.” “왠 호들갑이냐?” “큰스님. 책이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성철 스님이 “참선이나 해라.” 언젠가 책을 하나 썼는데, 누군가 “목사님 책 나왔대요.” “심방이나 해라” 그랬어요.
이런 현세에 있다는 것이 이게 아무것도 아니고, 은혜를 많이 받게 되면 영원한 것들에 대한 생각이 자꾸 생겨나는 거예요. 오늘 아침에도 ‘아 진짜 잠시 후에 우리가 갈 그 나라는 얼마나 아름다운 나라일까. 여기에서 우리가 은혜만 받아도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게 놀랍게 느껴지는데, 근데 우리가 정말 가서 그 분을 몸소 뵈옵게 될 때, 우리가 얼마나 기쁠까. 야, 정말 기다려진다. 우리가 얼마를 살든지 간에 진짜 자기를 깨뜨리고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고, 이렇게 하다가 살다 가야 되지 않겠는가.’ 특별히 이제 흰 머리가 나기 시작한 분들은 가슴에 와 닿아야 해. 안 와 닿으면 짐승이에요.
그래서 결국은 은혜가 들어오게 되면, 영원한 것들에 대한 사랑이 생겨요. 왜 그런지 이제 가르쳐 드릴게요. 왜냐하면, 그 하나님의 은혜가 들어오면 우리의 영혼이 맑아지고, 우리의 지성의 비늘이 벗겨져요. 그런데 은혜가 사라지면, 이 콩 꺼풀이 씌어. 그래서 잠시 있다 사라지는 건데도 굉장히 중요한 것 같은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무슨 뜻이냐 하면, 여러분들이 어떤 물건을 잰다고 쳐요. 그런데 여러분 고무로 만든 자 보셨어요? 그런 거 없어요. 고무로 자를 만들면, 이게 물건을 팔 때,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오면 그대로 재 주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오면 길게 당겨서 길게 잘라줄 거 아니에요. 자는 그러면 안 되거든요.
이 지혜, 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사물을 재는 척도야. 그러니까 지혜가 있는 사람은 항상 그 척도가 분명해. 눈으로 볼 때 굉장히 큰 것 같아. 그 자로 딱 재 봐.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그렇게 뭐 잃어버렸다고 해서 울고불고, 얻었다고 해서 그렇게 기뻐서 팔짝 팔짝 뛰고 그럴게 아니다. 이건 자로 딱 재보니까, 보이긴 이게 커 보여도 이게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다. 재는 거죠. 또 다른 것들이 들어 와. 그걸 자로 딱 재 봐. 이게 굉장히 중요하고 큰 거야. 사람들은 그까짓 게 뭐냐, 그러는데 이 사람은 기꺼이 눈에 보이는 좋은 것과 그 작은 것을 바꾸는 거죠. 이게 신앙이에요. 이런 걸 소유한 사람이 바로 지혜를 가진 사람이에요. 지혜를 안 가진 사람은 이 척도가 없고 눈에 보이는 것에 따라서 출렁거리는 거죠. 그러니까 끊임없이 영혼이 고통을 받는 거예요.
그런데 이런 사물을 이렇게 정확하게 잴 수 있는 그 척도가 어디로부터 오냐면, 진리로부터 오는 거죠. 진리 자체는 잠시만 통용되는 것은 진리라고 부르지 않아요. 진리는 영원하고 완전하고 불변하는 것을 진리라고 불러요. 그러니까 진리 자체는 영원을 지향하는 성격이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영원의 빛을 대입하고 이렇게 들여다보면, 이게 진짜 가치 있고, 없고 한 것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이죠. 그래서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영원으로 들어가는 문이거든요. 그러니까 죽음의 빛 아래서 인생을 생각하면, 우리가 헛된 짓을 하고 있는지, 의미 있는 일들을 하고 있는지 금방 알게 된다 이거죠.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계속해서 죽음을 생각하면서 그 빛을 통해서 영혼에 빛을 받으면서 자기 인생을 봐야 되는 거예요. 오늘 저녁에 하나님이 부르시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할렐루야, 아멘. 주 예수여 내가 갑니다.” 그러고 갈 수 있어요? 아직 준비 안 되었다고요? 언제 하시려 구요? 언젠가는 불현듯 그렇게 될 거 아니에요. 이 세상에 잠시 머무는 인생은 영원을 준비하기 위해서 주신 시간들이에요.
그런데 이제 소극적으로는 이런 영원한 것들에 대한 무관심 때문에 많은 분란과 다툼들이 생겨나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나라, 교회를 통해 이루어져야 할 이 세상의 변화, 그리고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의 질서대로 살아가지 않고 있는 이 세상 사람들의 고통, 그들의 영혼을 어떻게 건져야 할 것인가. 이런 것들은 모두 영원에 속하는 것이거든요. 은혜를 안 받으면 기본적으로 그런 것들에 대한 관심이 없는 거예요.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냐, 이것이 바로 교회의 다툼의 원인이 되는 것이고.
2. 적극적 교만과 이기심
적극적으로는 무엇 때문이냐면, 교만과 이기심 때문이에요. 무슨 뜻이냐 하면, 먼저 이 교만은 잘 들으세요. 이 교만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정의는 이런 것이에요. 사물들의 질서에 대한 자기의 판단이 옳다고 믿는 태도에요. 뭔가 사물의 질서가 있는데 그것의 의미를 자기가 규정하고 판단을 내려. 근데 자기 것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주장하는 태도에요. 그게 바로 교만이에요. 이 교만은 탐욕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죄에요. 예를 들자면 분명히 하나님은 도둑질 하지 말라고 그러신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걸 한다 이거에요. 무슨 얘기냐면, 나는 그렇게 해도 괜찮다고 판단한단 말이에요. 하나님은 아니라고 그러시는데 그 판단보다 내 판단이 맞다 이거에요. 적어도 그렇게까지 말하진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이 순간만은 잠잠하고 계십시오. 이번엔 제가 내 맘대로 해야겠습니다.’ 그러면서 자기의 판단을 믿는 거죠.
이 교만에서 수많은 자식들이 나오는 거예요. 탐욕과 수많은 죄악들이 나오는 거예요. 그것이 결국은 교회 분쟁의 원인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무엇에 대한 판단을 사람이 내리는데, 아주 정확하게 성경 진리의 빛을 가지고 판단한 것도 아니고, 각자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경험을 가지고 판단을 하고, 자기가 내린 판단이 유일하고 절대적인 판단이다 이거에요. 그런 교만은 수많은 분쟁을 낳는 원인이 되는 거죠. 그래서 사람이 태어나서 구해야 할 좋은 태도가운데 하나가 무엇이냐면,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 자기 의견하고 사뭇 달라도 같은 것만을 계속 들어서는 자기가 살아온 대로밖에 살 수가 없는 거예요.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말에 휘둘리지는 않더라도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아량과 태도를 가져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안 하지요. 이 판단이 절대적이다. 자기가 내리는 판단대로 모든 질서가 재편되기를 원하는데 이런 사람이 한 사람만 있으면 좀 나은데, 여러 사람이 있어서 충돌을 일으키면 교회에 많은 분쟁을 일으키는 것이죠. 그래서 이것도 이제 십자가 앞에서 못 박힐 수 있는 것이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깊이 죽어야 돼.
또 하나는 뭐냐 하면 이기심 때문인데, 자기만을 위하는 이기심이, 그리고 그리스도께 합치되지 않은 자기 중심축을 놓지 않으려고 하는 그것이 이기심이거든요. 자기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것에 의해서 모든 상황과 사물의 질서를, 선악을 하나님을 중심축에 놓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중심축에 놓고 판단을 내리는 거죠. 그러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판단이 될 수 없는 것이죠. 말로는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 하는데 그가 진짜 그런 사람인지 아닌지는 말이지, 그 사람의 참회하는 세계를 보면 알 수 있어요. 그가 진짜 중심축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이라면, 이미 교회 안에서 분쟁이 일어나서 의견 충돌을 일으키기 전에 그런 상황으로 간 교회에 대한 뼈저린 아픔, 그리고 자신이 그런 아픔을 가져온 지체 중에 한 지체라고 하는 사실 때문에 하나님 앞에 깊이 통회하고 아파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죠. 왜냐하면, 그런 사랑 자체가 교통하는 사랑이기 때문에 그것을 가져오는 것이죠. 그런 태도가 없이 옳고 그름만을 가지고 이야기하게 될 때, 자신은 그것이 이 선과 악을 판단하는 이 모든 판단을 절대적인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그 안에는 자기 중심축과 이기심들이 도사리고 있게 된다는 것이죠.
이것들을 버리고 그리스도 예수께 온전히 합치되는 그런 변화가 일어나야지만 여러분들 안에 예수의 형상이 이루어져 가는 것이죠. 잘 들으세요. 한 사람의 삶의 질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는 것에 달린 것이 아니라, 얼마나 치열하게 믿음으로 자기를 자기가 알고 있는 그 진리에 합치시키려고 하는가에 의해서 삶의 질이 결정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진리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삶을 거기에 거의 합치하지 않는 사람에 비해서는 진리를 아는 양은 적어도 그 진리에 생명을 걸고 자기를 거기에 합치시키려고 치열하게 믿음으로 분투하는 사람이 그래서 참회하고 깨어지는 사람이 훨씬 더 높은 삶의 질을 누리게 되는 것이죠. 여러분들이 진리가 정직하게 선포되고 있는 교회에 다닌다는 사실이 여러분들의 삶의 질을 보장해 주지 않아요. 여러분들이 진리의 말씀을 많이 듣고 그리고 수없이 여러분들이 그 말씀에 은혜를 받고, 그리고 열심히 교리를 공부해서 책과 테잎을 여러분들이 많이 습득하고 그것이 여러분들의 삶의 질을 보장해 주지 않아요. 여러분처럼 그렇게 설교를 많이 듣고 깊이 있는 강해를 듣고 교리를 깊이 터득해서 치밀하게 배우고, 그러지 않고 그냥 쬐금 밖에 진리를 몰라도 그냥 거기에 부합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매일 눈물 흘리는 한글도 제대로 모르는 시골 교회 할머니들이 훨씬 질이 높은 삶을 살 수 있는 거예요. 여러분보다. 그리고 예수님께 더 많이 사랑받아요.
V. 결론
교회가 진리를 선포하는 것은 양보할 수 없는 가치이고 엄밀한 의미에서 교회가 진리를 선포하지 않는 것은 직무 유기에요. 교회의 아름다움은 그 진리가 울려 퍼지는 데에 있다는 것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어요. 그처럼 교회에서의 설교는 중요해. 틀림이 없어요. 그렇지만 아무리 참된 진리의 말씀이 심오하게 울려 퍼진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그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의 삶의 질을 보장해 주는 건 아니에요.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면, 생각으로서 진리를 찾는 것은 아무 비용이 들지 않아요.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은 비용이라고 생각 안 해요. 애들이 그 어려운 컴퓨터게임 팩케이지 가져다가 컴퓨터에 꽂아 놓고 며칠씩 연습하는 거 아이들이 노동이라고 생각합니까? 중학생들이 영어 문장 외우라고 하면 싫어해도 팝송 가사 새까맣게 적어서 그거 외우는 거 따라할 수도 없을 정도로 빠른 그 랩 영어가사 외우는 거 자기네들이 그걸 노동이라고 생각합니까? 노동이라고 생각 안 해. 자기가 좋아하니까. 진리가 좋아서 생각으로 진리를 찾는 것은 희생이 아니에요. 아무 희생 없이도 그 진리를 찾을 수 있어요.
그러나 그 진리의 가치는 그 사람이 그 진리를 통해서 진실한 삶을 사는데 있는 거죠. 그러나 생각으로 진리를 찾는 것은 아무 비용이 들지 않지만, 그 진리 때문에 그 사람이 진실한 사람이 되어가기 위해서는 매일 매일 자신을 그 진리에 합치시키기 위해서 비 진리인 자기를 칼로 찔러 죽이는 일이 반복되어야 한다 이거에요. 그거 안 하면 진리가 울려 퍼지는 교회에 있는 것이 아무 유익이 없는 거예요. 나는 있잖아요.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고 싶어요. 진짜로 여러분들이 그렇게 진리가 울려 퍼지는 교회에서 진리의 말씀에 자기를 합치시키는 삶을 살지 않는 것 보다는 차라리 진리가 어쩌다가 한 번 울려 퍼지는 교회에서 자기를 그 진리에 합치시키면서 살 수 있다면 난 거기로 가는 것이 훨씬 유익하다고 봐요.
제 인생의 가치는 얼마를 하나님이 여기에 두시든지 타협하지 않고 진리를 외치다가 가면 저는 만족이에요. 그러나 여러분들은 진리의 말씀이 울려 퍼지는 교회에 있다는 사실이 나중에는 심판을 더 많이 받을 사실이 되는 것이에요. 왜? 다른 사람은 변명할 수 있어요. “몰랐습니다. 안 가르쳐 주던데요.” 예수님 말씀하시길 “알고 행한 자는 더 많이 맞을 것이다.” 이 신앙생활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 구도의 삶이에요. 그래서 진리에 대한 많은 지식, 그것이 그 사람의 삶의 질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에요. 지금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 가운데도 본인에 대해서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사람들 많이 있을 거예요. ‘내가 그렇게 예전에 말씀에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 옛날에는 그 믿음 가지고 살았어요. 오늘은 옛날 믿음 가지고 못 살아요. 아침마다 새로운 주의 성실하심을 보고 살아가는 거예요. ‘오늘은 왜 이러나?’ 그게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에요.
한 사람이 진리를 많이 알고 있는 것은 진리를 소유한 것이 아니에요. 진리를 소유한 사람은 단지 진리에 대한 많은 양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자기를 쳐서 복종시켜서 그 진리에 자기를 합치시키기 위해서 생사의 결단을 매일 하는 사람. ‘나는 죽고 예수는 내 안에 사시옵소서.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니, 이번에는 내가 예수 때문에 죽고 주님은 내 안에 사십시오.’ 이렇게 사는 사람들에 의해서 매일매일 나는 죽고 예수는 매일 살아. 이렇게 되면서 이 교회 안에 일치가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깊이 자기 깨어짐이 없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일치를 이룰 수가 없는 거예요.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깊이 깨뜨려지고 내가 여러분들에게 설교는 모두 다 못 마쳤지만, 여기에서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맺겠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바깥에서 오는 핍박 때문에 고통 받지 않고, 안에 있는 지체들로부터 역설적으로 고통을 받아요. 수많은 다툼과 고통 속에서 핍박에 의해서 상처받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는 지체들이 찔러요. 팔이 칼을 들고 다리를 찌르고, 왼쪽 다리가 오른쪽 다리를 발로 차. 이빨이 팔뚝을 물어뜯고. 이렇게 하면서 교회가 만신창이가 되고 고통을 당하는 거예요. 이게 결국 어디에서 오냐면, 진리는 제쳐놓고, 누가 옳으냐 하는 데서 오는 거예요. 거기에서 교만이 극대화 되는 거예요. 이기심이 극대화 되는 거예요. 그래서 모두 주님 앞에서 자기를 죽이고 그리고 정말 진정한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아, 진리를 깨닫는 삶이 아니라, 그 진리를 깨닫는 것은 비용이 드는 것이 아니고, 그 진리를 깨달았으면 책임을 가지고 그 진리에 자기를 부합시켜서 진실한 사람이 되는 거예요. 진리를 많이 깨달은 사람이 진실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적게 깨달았어도 거기에 치열하도록 믿음으로 그 진리에 자기를 합치시키려고 할 때, 그 때 그 사람이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언젠가 교회가 평안하고 큰 어려움이 없을 때였어요. 모든 것이 잘 되가는 것 같은 때였어요. 어느 날 기도하는데 주님이 물으셨어요. “얘야, 너 참 모든 게 잘 되가는 것 같은데, 너, 네 몸에 내 흔적 있냐?” 처음에는 그 음성이 가느다란 물소리처럼 들렸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음성이 폭포수처럼 들렸어요. 견딜 수가 없어요. 불 꺼진 교회당에서 울고, 길을 걸어가다가 울고, 집회하러 비행기 타고 가다가 울고, 심지어는 사람들하고 마주 앉아서 식당에 앉아서 음식 나오기 기다리다가 울고, 아, 그렇구나. 내가 일생을 소명을 받고 주님을 위해서 산다고 살았는데, “너 나 위해서 살았니?” 예수님이 그거 물어보고 싶어 하시지 않고, “너 내 흔적 있니?” 그 때, 제가 가슴에 깊이 깨달은 게 있어요. ‘아, 마지막에도 예수님은 나에게 이렇게 물으시겠구나.’ “야, 너 뭐 좀 하다가 왔니?” 그러면 얼마나 할 얘기가 많겠어요. 집회도 많이 다녔고, 밤 잠 안자고 책도 많이 썼고, 심방도 하고 교회도 하고, 뭐 어쩌고, 저쩌고.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대답을 잔뜩 준비했는데, 주님이 그런 건 안 물어보시고, “너, 네 몸에 내 흔적 있니?” 여러 달을 그렇게 지냈어요. 그 때 깨달은 것이 있어요. ‘아, 그렇구나. 내가 늘 설교했지만 아직도 내가 덜 깨달았구나.’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히 함께 하리.
십자가의 길을 걷는 자에게 순교자의 삶을 사는 이에게
조롱하는 소리와 세상 유혹 속에도
주의 순결한 신부가 되리라.
내 생명 주님께 드리리.
아무것도 안 남아. 그 때 깨달은 거예요. ‘아, 그렇구나. 이제 책도 안 남고 교회도 안 남고 사랑하는 가족도 헤어지고, 모두 사라지고 그리고 내가 내 몸의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예수 앞에 가는 거구나.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생활이 바로 이런 거예요. 많은 진리를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자기를 치열하게 믿음으로 합치시켜서 예수의 흔적을 남기게 될 때, 교회가 그 안에서 얼마나 아름다운 일치를 이룰 수 있겠어요. 기도하겠습니다.
4.모두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여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엡 5:25 下
지난 시간에는 사랑과 일치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모두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여김.’ 이 교리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원래 이 교리는 토투스 크리스투스라고 해서 우리말로 번역하기가 매우 어려운데 영어로는 whole christ라고 합니다. 즉 교회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고 심지어는 거기에 안 믿는 불신자도 포함되어 있는데 그 모든 보이는 교회에 모인 사람들을 일단은 전부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생각하고 섬기는 것이 이 세상에 있는 지상 교회의 사명이다. 라고 하는 교리입니다. 이제 이 교리를 오늘 이 시간에 진수함으로써 우리들이 교회에 관한 하나님의 진리의 새로운 국면들을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I.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연합
A. 영적인 연합
우선 우리들이 이 문제를 생각하기에 앞서서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해서 생각을 해야 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신자는 중생과 함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접붙여지게 됩니다. 이것은 자기의 의식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자신이 그렇게 접붙여지는 것을 감지한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렇게 영적으로 거듭나는 것과 함께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지게 되는 거죠. 이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은 두 가지 특징이 있는데 하나는 영적인 것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신비적인 것이라는 거죠. 즉 영혼이 성령에 의해서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지는 이것이 바로 영적인 일이라고 하는 것이죠. 지금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손에 만져지실 수 있도록 교회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죠. 누구도 지상에 계셨을 때의 그런 모습의 예수님을 교회에서 만난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으로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죠. 그런데 그 분도 영으로서 인간의 영혼이 중생과 함께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삼위 하나님께 연합된 것이죠. 이것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고 부르죠. 주로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면서 그 그리스도를 통해 삼위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도록 연합되는데 이것이 모두 영혼이 성령 안에서 순결한 영이신 하나님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연합되는 이 모든 영적인 일이라고 하는 거죠.
B. 신비한 연합
1. 지성적 신비
또 하나는 이 일이 매우 신비한 일이다, 라고 하는 거죠. 어떠한 의미에서 신비하냐 하면, 두 가지 점에서 신비한데, 하나는 이 신비가 이제 지성적인 신비라고 하는 거죠. 왜냐하면 분명히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된 것이 느껴져요. 예전에는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혼자 살 때, 슬프고 괴롭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혼자 어렵고 힘들고 괴로웠는데, 신자가 된 다음에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지고 나니까 내가 시련을 당하고 어려워서 고난을 받으면,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이 느껴져요. 기쁘고 즐거운 일이 있을 때에도 예전에는 나 혼자 즐거웠는데, 주님이 지금 내 안에서 나와 함께 기뻐하신다는 사실이 느껴져요. 어떻게 내가 혼자 살던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예수께 접붙여지게 되었고, 그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삼위 하나님과 연합되었을까. 이것은 말하자면, 사실은 분명히 경험이 되는데, 지성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신비기 때문에 우리들이 지성적 신비라고 이야기 하는 거죠.
2. 삼위와의 연합의 신비
또 하나는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고 또 삼위 하나님과 나아가서는 연합이 되어서 그래서 교회가 삼위 교통의 모상을 이루는데, 또 하나의 신비는 뭐냐 하면, 그렇게 연합되는데 그 연합의 본질이 뭐냐 하면 성령께서 우리 바깥에서 우리를 그냥 예수 그리스도와, 삼위와 연합시키시는 게 아니라,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심으로 그 일을 하신단 말이죠. 그럼 우린 인간의 영혼이고,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신데 그 영이 우리 안에 들어온 것 자체가 아주 신비적이다, 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인간의 본성을 너무나 잘 아시는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본성을 파괴하지 아니하시는 가운데 우리의 영혼 안에 거하심으로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연합이,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삼위 하나님과의 교통이 있게끔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시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것이 신비하다, 라고 하는 것이죠.
C. 교회와 그리스도의 연합
이렇게 해서 신자가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제 여기에서 신자와 그리스도가 연합을 이룬다고 할 때, 그러면 이 신자의 정의가 뭐냐. 이 신자는 그의 도덕적인 삶이나 이런 것과는 상관이 없이, 일단 참으로 진실하게 회개하고 거듭난 사람이에요. 참으로 거듭난 사람이에요. 그 사람만,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사람이고, 한 번 접붙여진 사람은 주님의 붙들어 주시는 은혜에 의해서 결코 한 번 접붙여진 사람이 그리스도의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일은 없고, 또 떨어져 나간 사람이 다시 와서 붙고, 붙은 사람이 다시 떨어져 나가고, 그러는 일은 없다 이거죠. 한 번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지면 접붙여진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이죠. 이렇게 해서 그러니까 참으로 머리이신 예수께 붙어서 몸인 교회를 이루는 사람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아주 참으로 거듭나고 진짜로 회개하여 예수께 접붙여진 사람, 그 사람들이 참으로 신자들이고, 그 참으로 신자인 사람들만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게 된다, 라고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제 보이는 교회 안에는 보이는 교회의 크기가 이만하다고 한다면, 항상 참된 신자들의 연합은 보이는 교회의 크기보다 작겠지요. 왜냐하면 교회 안에는 아직은 교회 다니지만 거듭나지 않은 사람도 있을 테고, 이제는 방금 교회에 왔기 때문에 아직 복음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거듭나고 회개하지 못했기 때문에 접붙여지지 못한 사람도 있고, 자기는 굉장히 예수를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속속들이 변화되어서 영혼이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적이 없는 그러나 자신은 구원받았다고 착각하는 사람들도 교회 안에 존재할 수 있죠. 다양한 방식으로 사실은 그가 그 영혼이 근본적으로 거듭나고 변화되어서 새 사람이 되지 않은 채 교회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있을 거란 말이죠. 그 사람들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죠. 아직은 몸이 되지 않았어요. 접붙여지지 않은 상태라고 하는 거죠.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교회는 사람들이 훨씬 많고, 보이지 않는 참으로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사람들은 그것 보다 더 소수의 사람이겠지요. 교회가 건강할수록 그 둘 사이의 격차는 작아질 것이고, 건강하지 않을수록 둘 사이의 차이는 현저하겠지요. 뭐 천 명이 모였는데 진짜로 거듭난 사람은 백 명밖에 안 된다더라. 그럼 이제 10대 1 아니에요. 그렇게 되는 거죠. 어쨌든 아무리 좋은 교회라도 그런 사람은 존재할 수 밖에 없다, 라고 하는 것이죠.
II. 그리스도와 교회: 머리와 몸
그러면 이제 그리스도와 교회를 머리와 몸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이게 어떻게 해서 그리스도와 교회가 한 몸이 되는가, 라고 하는 것이죠. 한 몸이 되는 것은 성부의 사랑에 의해서, 성자의 희생을 통해서, 성령의 믿게 하시고 교통하시는 역사 안에서 그래서 이제 그리스도와 믿게 된 신자가 한 몸을 이루는 거죠. 그죠?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몸은 세상 끝날 까지 커 간다고 말할 수 있겠죠. 그죠? 왜냐하면 한 번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진 사람들은 거기서 다시 떨어지는 법이 없으니까. 그리고 죽어도 그 몸은 죽어서도 역시 천상으로 가서 천상교회를 이루니까. 그 몸의 몸은 계속해서 커진다고 말할 수 있죠. 그죠? 그렇게 해서 이제 그리스도 예수의 몸이 천상과 지상의 교회들이 연합을 이루면서 그리스도의 몸이 점점 커 가는 거죠.
물론 이제 천상의 교회는 천상의 교회대로 하는 일이 따로 있고 지상의 교회들은 지상의 교회들끼리 하는 일이 따로 있죠. 지상의 교회의 하는 일들이 천상에 교회가 하는 일보다 훨씬 고달퍼. 그래서 지상의 교회를 전투하는 교회라고 불러요. 그러면 하늘에 있는 교회는 승리한 교회라고 불러요. 지상에 있는 교회는 늘 전투하는, 솔직히 말하면 고달프잖아요. 그렇죠? 새벽에 나왔다가 또 저녁에 나오려니까 막 숨을 쉴 수가 없을 정도로 정신이 없어요. 안 자던 낮잠까지 자야하고 말이지. 그러니까 보통 힘든 게 아니죠. 이런 것을 한국 초대교회사에서는 새벽에, 오전에, 오후에, 그리고 오후 늦은 시간에는 전도하러 다니고 밤에 또 모였으니, 대단한 사람들이죠. 그런 거 생각하면 우린 뭐 너무 한량하게 놀듯이 부흥회를 하고 있는 것이죠.
A. 그리스도의 생명에 의해
어쨌든지 간에 그리스도께서 머리이시고 신자들이 몸인데, 그렇게 이루어지는데 그 관계가 어떻게 유지가 되느냐 하는 것이죠. 우선 첫째는 그리스도의 생명에 의해서 유지가 되는 것이죠. 자 이런 경우 있을 수 있잖아요. 어떻게 손가락이 부러지거나 그랬는데, 접합을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접합을 했는데 이게 접합이 잘 안 돼서 이게 안 붙어 버리는 그런 경우 있을 수 있을 거 아니에요.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잖아요. 뭐 팔목이 잘라져서 그래서 펄펄 뛰는 팔목을 가지고 병원으로 뛰었는데 그래서 병원에서 근근이 뼈를 잇고 힘줄을 잇고 핏줄을 이어가지고 수술을 했는데 그래서 어렵게, 어렵게 시술을 했는데 그런데 기술이 모자라서 결국은 이 손이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썩어가서 결국은 이 손을 그냥 내버려 두면 이 신체부위까지 썩을 염려가 있게 되는 경우 상상할 수 있잖아요. 그러면 할 수 없이 이 손은 붙여봤는데 결국 안 붙고 떨어지게 되잖아요.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지금 전 세계에서 아직 이렇게 손가락이나 이런 것이 절단 되었을 때, 딱 붙여서 기가 막히게 접합할 수 있는 나라들, 그렇게 많지 않아요. 후진국 같은 데 가서 여러분 만약에 여행하다가 의료사고 나면 함부로 병원가면 큰일 납니다. 아주 사소한 병을 가지고 잘못하면 죽어요. 정말이에요. 그래서 그 후진국에 가서는 다치면 생각을 잘 해야 해요. 요새는 컨시어지스 서비스라고 그래가지고 그런 걸 이제 보험회사나 이런 카드회사 같은데 전화를 해 놓으면, 여러분들이 보험을 잘 들어 놓으면 아예 비행기를 보내준다고. 그래도 그거 실어서 다른 나라에 가서 치료 받게끔 만들어 줘요. 그런 제도들이 있어요. 그렇게 할 수 있는 나라가 많지 않아요. 어떤 사람들은 아주 사소한 병인데, 잘못 가서 수혈 받고 그러다가 감염되고 해가지고 목숨을 잃는 경우 많아요.
그러니까 그렇게 해서 손을 붙여 놓았는데, 결국은 썩어서 떨어졌다, 그럼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에요? 이게 살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은 여기에 있는 생명이 여기로 전달이 되어야 되요. 생명이. 그러니까 그리스도 예수가 몸이시고, 우리가 그 분의 지체로서 접붙여졌는데, 접붙여진 지체들이 절대로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떨어지지 아니하고 영원히 그 몸에 붙어있다 라고 하는 것은 그 분에게로부터 생명이 계속해서 흘러 들어오고 있다는 의미에요. 이것은 우리 때문에 흘러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그 영원한 생명을 영원히 그 접붙여진 신자에게 끊임없이 계속 공급해 주시는 것이죠. 그것을 통해서 머리와 몸의 관계가 유지되면서 우리들이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이죠.
B. 그리스도의 통치에 의해
그러면 이제 여러분들은 항상 이렇게 또 얘기하고 싶을 거 아니에요? “그럼 그건 정말 땅 짚고 헤엄치기네요. 일단 우리가 주님 몸에 접붙여지게 되면 주님이 우리의 생명을 보장하시고 우리와는 상관없이 주님께서 성령의 생명을 끊임없이 우리에게 공급해주셔서 그래서 우리가 그 생명에 연합되어서 살게 하신다니, 이제 우리 할 일은 노는 일만 남았군요.” 그렇지요. 늘 그런 반응이지요. 그래서 이제 그 다음의 얘기가 또 나와요. 그게 뭐냐면, 그리스도의 생명에 의해서, 그리고 두 번째는 그리스도의 통치에 의해서 몸과 머리의 관계가 유지가 되는 거예요.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통치하실 때, 어떤 방식으로 통치를 하시느냐. 라고 하는 것이죠. 두 가지 방식으로 통치를 하시는데 하나는 은혜를 공급하심으로 통치하시고, 두 번째는 우리를 징계하심으로 통치하시는 거죠. 자, 그럼 은혜를 공급하심으로 우리를 통치하신다. 이게 무슨 뜻이냐. 여러분들은 항상 이런 질문하기를 좋아하더라고요. “목사님, 한 번 구원받으면 취소 안 됩니까?” 취소 안 되죠. “그러면 만약에 한 사람이 예수를 믿고 계속 세상에서 죄 짓고 나쁜 짓만 하고 살았다면 그럼 그 사람도 천국 가는 거 확실하죠?” 이렇게 질문을 해요. 의도가 뭔지 뻔 하잖아요. 지도 그렇게 하고 싶다는 거지. 그런데 성경은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안 하고 오히려 예수님께 여쭤보면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죠.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안다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니.” 그러시는 거죠. 대답이 됐죠. “한 사람이 있는데 정말 거듭났고요. 취소될 수 없는 구원을 받았거든요. 그런데 그 사람이 계속 죄를 지었어요. 그리고 세상에 빠져서 그렇게 살았어요.” 그러니까 그게 말이 안 된다 이거에요. 그건 뭐하고 똑같으냐면, “예수님, 나무가 아주 건강한 뿌리를 가지고 있고 정말 싱싱하게 살아있거든요. 그런데 이파리도 안 나고 열매도 안 맺어요. 그래도 그 나무 산 나무지요.” 이렇게 물어보는 것 하고 똑같다 이거에요. 그러니까 그런 질문 자꾸 하지마세요. 입만 아프지 바보 같은 질문을 해요. 그러니까 그가 참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면, 그렇게 될 수가 없다는 하는 것이죠.
물론 이제 참으로 진실하게 거듭난 사람인데도 죄에 빠지고 그리고 세상에 빠져서 넘어질 때가 있어요. 근데 이제 차이가 뭐냐 하면, 아, 이거 얘기하면 시간 많이 가는데, 차이가 뭐냐 하면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이렇게 죄를 지을 때, 기쁨으로 그 죄에 동참해요. 그리고 이런 것을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 같은 분은 어떻게 설명을 했냐면, 교회 안에 있어도 불신자는 죄를 지을 때 단일한 의지로 죄를 짓는 거야. 의지의 합치가 일어나서 한 가지 의지로 죄를 짓는 거예요. 그 의지가 뭐예요? ‘죄를 지어야겠다.’ 그거죠. 그러나 그 사람이 거듭난 사람일 경우에는 복합의지로 죄를 짓는다고 그랬어요. 죄에 대한 설명가운데 아주 기가 막힌 의지론 적인 설명이에요. 복합의지라는 게 뭐냐면, 거듭난 사람이 아무리 죄가 좋아서 죄를 지을 때라도 이 사람 속에는 두 개의 의지가 공존해요. ‘죄를 짓지 말아야 되겠다.’라는 강력한 의지와 ‘짓고 싶다.’는 강력한 의지가 동시에 존재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 믿고 거듭난 사람은 죄를 지어도 거듭나기 전에 하던 그 죄를 지었는데 맛이 없어요. 옛날 같지가 않아. 이 정도만 할게요. 이정도만 할게요. 그렇게 되는 거거든요.
1. 은혜의 통치
그래서 예수님께서 머리이고 우리가 몸인데 생명에 의해서 관계가 유지되게 하시고 두 번째는 그리스도의 통치에 의해서 하는데 은혜의 통치야. 은혜의 통치라는 건 뭐냐 하면, 진짜로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반드시 은혜를 주셔요. 그 크기와 시기는 각각 다를 수 있어요.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쨌든 은혜의 공급을 그에게 해 주셔요. 그래서 통치를 이루셔요.
자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은혜를 안 받은 사람들은 무서운 사람이 없어요. 왜? 자기가 왕이야. 원래 자기 사랑이라는 게 자기 중심이잖아요. 그러니까 아주 굉장히 담대하죠. 그러나 이제 은혜를 받고나면 그러한 세속적인 박력이 뚝 떨어져요. 예수 믿고 진짜 거듭나기 전에야 뭐 펄펄 나는 생선이고, 그 다음에 이제 거듭났다고 하더라고 은혜가 뚝 떨어지고 육이 펄펄 살 때는 정말 박력에 넘쳐요. 그죠? 좋은 의미의 박력이 아니라 혈기적이고 육적인 박력이 있다 이거죠. 그러다가 이제 은혜 속으로 깊이 들어가요. 그래서 그 은혜에 의해서 사로잡히게 되요. 그러면 뭐냐 하면, 이 은혜 자체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기의 자녀들을 통치하시는 방법이에요. 은혜가 들어가면 그러면 자기를 자꾸 부인하게 되고 주님을 인정하면서 하나님께 순종하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인간적인 박력이나, 이런 것들은 없어지고, 어떻게 보면 기력이 없는 사람같이 그렇게 보이죠. 세속적인 의미에서 그렇게 보이지만, 영적으로는 훨씬 더 신중하고 진지한 사람이 되는 거죠. 그렇죠? 그래서 그 은혜가 그를 통치하는 거죠. 그래서 어떡해요. 은혜가 떨어졌을 때는 혈기 방자하던 사람이, 은혜가 쑥 들어가고 나니까 아주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으로 변하는 거죠.
제가 신학교에 교수로 있을 때에 학생 하나가 있었는데, 하여튼 무슨 데모든지 일어나면 그 놈이 주동이야. 하여튼 혈기 방자하고 교수들 뒤에다 뭐 ‘님’자 붙이는 경우는 아주 거의 희귀하고 뒤에다가 ‘님’자 비슷하게 이렇게 옆으로 돌리면 무슨 자가 되는지 알죠? 교수놈이 되잖아요. 그 정도만 아니면 다행이게요. 혈기 방자하던 친군데 졸업을 하고나서 한 4년 후쯤에 찾아왔어요. 그런데 완전히 딴 사람이 됐어요. 제가 무슨 일이 있어났나 그랬더니 하나님이 신기하지, 그렇게 망난이 같은 놈을 교회 개척을 시키셨어요. 교회 하면서 자기보다 더 강적 같은 교인들을 많이 만난 거야. 그러니까 이제 거기에서 불로 들볶이면서 이게 볶인 거야. 그래도 이제 옛날 같이 행동 안 하고 믿음으로 그것을 버텼던 모양이야. 하나님이 거기서 연단을 주신 거야. 그러한 독기가 다 빠져나가고 “교수님 제가 뭘 알겠습니까? 정말 잘 못해요.” 얘가 지금 무슨 소리하는 건가. 막 삿대질하고 그러던 애가 어쩜 저렇게 수줍고 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변했어요. 그게 뭐죠. 하나님이 은혜로 통치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혈기 방자하던 사람이 은혜를 받으면 온유한 사람이 되는 거죠.
뿐만 아니죠. 사람들이 용기가 없기 때문에 자기 자리를 미적미적 거리다가 못 잡다가, 올바르지 않은 자리로 쑥 들어가 버리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 사람은 그렇게 악한 사람은 아닌데, 그 순간에 “아니요”라고 용기 있게, 그런 기회가 항상 오는 게 아니거든요. 결정적인 순간에 “아니요”라고 해야 하는데 그걸 잘 못해. 그렇게 소심하고 비겁하던 사람들이 이제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가 딱 되면 이제 예수님의 말씀이 딱 떠오르는 거죠. “너희는 예면 예, 아니오, 이면 아니오. 하라.” 그러니까 딱 생겨나는 거죠. 그리고 또, 태도가 분명치 않아서 늘 코너에 몰리던 사람들은 이제 주님의 사랑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아닌 것을 아니요 라고 말할 수 있는 아주 지혜로운 용기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거죠. 또 괜히 허영에 들뜨고 그런 사람들 있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은혜가 쑥 들어오게 되면, 그런 것에 흥미를 잃게 되는 것이죠. ‘내가 왜 그렇게 살았을까? 다 쓸데없는 건데.’ 그렇게 되는 거죠.
옛날에 내가 모시고 있던 목사님이 당신의 지난 날 하나님 없이 산 날들이 얼마나 허무했는지 얘기를 하면서, 그 분이 그렇게 무서운 분인지 몰랐어요. 자유당 시절 때, 당신이 한 가닥 했다고 그러시면서 저 보고 그래요. 정치적으로 적대관계에 있는 사람인데, 다리가 다쳐서 깁스를 하고 있었대나. 그런데 자기 똘마니를 시켜서 “야, 가서 그 다리 한 번 꺽어 주고 와라.” 그랬대요. 부하가 가서 그 다리를 확 꺾어 놓고 왔대나. 무섭더라고요. 그런 분들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면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져요. 그러면 아주 온유한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은혜로써 다스리시는 거예요. 이게 당신의 몸인 신자들을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방법이에요. 하나님이 그렇게 은혜로써 그렇게 다스리시면서 그 몸을 하나님이 키워 가시는 거예요.
그래도 여러분들에게는 아직도 의문이 안 풀렸죠. ‘그리스도 예수께 계속 접붙여져 있으면 생명을 공급해 주셔서 그래서 우리들이 이제 주님의 몸으로서 일평생 살게 하신다고 그러는데 그러면 됐지, 뭘 어떻게 더 하란 말입니까?’ 이 비밀이 은혜에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의 머리가 되셔서 함께 연합을 이루실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생명만 누리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더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당신의 몸에 연합시켜주신 거란 말이죠. 그러니까 단순히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연합이 되어서 생명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더 풍성한 진리와 은혜를 누리면서 살게 해 주시려고,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몸에 접붙이신 거예요.
그런데 이제 생명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계속 공급해 주시지만, 취소되는 적이 없지만, 이 풍성한 삶이라고 하는 것은 칭의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주님 앞에 성화의 삶을 사느냐에 달린 거예요. 뭐 의학적으로 제 설명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한 번 비유를 들어 볼 테니까 요점만 이해하십시오. 자, 손이 잘렸는데 붙였어요. 그랬는데 피가 흘러들어가고 핏줄이 다 연결이 다 되어서 피가 흘러 들어가서 이렇게 이 자체가 생명은 가지고 있는데 신경이나 힘줄이나 모든 것들이 제대로 연결이 되지 않아서 이 손이 점점점점 이 쪽 손하고 다르게 힘이 없거나 말라가는 것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생명은 있어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활발하게 움직일 수가 없는 것이죠. 여러분도 보면, 연세 들어서 풍을 맞는다든지 혹은 혈전에 의해서 뭐 막혀서 뇌졸중이 온다든지 할 경우에 반신을 잘 못 쓰시는 경우 나타나잖아요. 이쪽이 어려우면 이쪽에, 이쪽이 어려우면 이쪽에 어려움이 오는 거예요. 등골 뒤에서 이렇게 신경이 엑스자로 교차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이쪽 뇌가 상하면 이쪽이, 이쪽 뇌가 상하면 이쪽이 문제가 되게 되어 있어요. 그렇게 되잖아요. 분명히 풍이나 이런 거 걸려서 손이 이렇게 되어서 제대로 움직일 수 없게 되었어도 생명은 지금 가지고 있는 거예요. 찌르면 아파요, 피 나고. 이것도 씻어주어야 하고, 손톱도 자라요.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 경우를 상상해 보시면 제 이야기가 이해가 되실 거예요.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져서 생명은 가지고 있는데, 은혜의 통치에 의해서 계속해서 그 사람에게 어떤 풍성함이 공급되지 않으면 그런 식으로 겨우 예수의 몸에 붙어있는 경우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이시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그렇게 우리를 접붙이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와 교회를 온전하게 하시고, 이 대목이 굉장히 우리의 가슴을 깊이 녹이지 않아요? ‘내가 접붙여져서 교회가 온전해진다?’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계세요? ‘내가 접붙여짐으로 내가 접붙여지지 않았을 때보다, 교회가 더 온전한 교회가 되게 하시려고 주님이 나를 접붙이셨다.’ 한 번 생각해 보라 이거죠. “아이고, 목사님 저 같은 사람이 뭘 접붙여진다고 교회가 온전해 지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면 안 되죠. 그건 겸손이 아니라, 딴 때 겸손해지시고 발 뺄 때 겸손해지면 안 되지. 그렇게 우리가 접붙여져서 교회를 더 교회답게 하시려고 우리를 접붙이시는 거예요. 그러면 거기에 이바지해야지, 그런데 이게 은혜의 통치를 받지 않으면 이게 이바지 하는 게 아니라, 이게 온 몸이 이거 끌고 다녀야 해요. 차라기 이거 없고 갈고리 달고 다니는 게 더 낫지 않겠어요.
그래서 예수께서 우리를 접붙이신 것은 나를 그리고 나를 통해서 교회를, 또 교회를 통해서 나를, 온전하게 하시려고 접붙이신 거고, 또 하나는 뭐냐면, 그 교회로 하여금 한 몸을 이루어서 하나님을 잘 섬기게 하시려고 우리를 접붙이신 거예요. 그래서 그 교회가 잘 접붙여져서 예수님처럼 그렇게 이 동리 저 동리 다니면서 우리 혼자 믿었더라면 할 수 없었을 그 일들을, 예수 세상 계실 때 하셨을 그 일을 교회가 계승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그렇게 한 몸을 이루어서 세상에 섬기도록 파송하시는 거예요. 그러니, 사람들의 발을 씻겨야 하는데 한 손이 이런 거야. 빨리 가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데 한 쪽 발을 저는 거야. 빨리 가서 그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해야 할 텐데 뭔가 입이 잘못 되어서 입이 돌아가면서 계속해서 침을 줄줄 흘리는 거야.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그런데 그렇게 하는 요인이 자기야. 그래도 내가 예수 안에서 일단은 생명은 공급받고 있다는 것 때문에 만족할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일평생동안 예수의 교회에 접붙여져서 이런 식으로 겨우 생명은 누리고 있지만, 그러나 인생 전체적으로는 이 교회의 큰 몸을 힘들게 하는 사람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죠. 교회는 그 사람도 짊어지고 가야하죠. 그러나 그 개인에게는 매우 불행한 일이죠. 물론 이제 사람이 처음서부터 끝까지 교회를 그렇게 힘들게 하는 것만은 아니고, 또 어떤 때는 은혜 받으면 보탬이 되고 안 보탬이 되고 이렇게 시기에 따라서 양상에 변화는 있고 수준의 차이는 있지만, 어쨌든 잠시라도 그런 존재가 된다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너무 부끄러운 일이지요.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해요?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져서 생명을 누리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충만한 그리스도에 의한 은혜의 통치 속으로 우리가 들어가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내가 충만한 은혜 생활을 하는 것은 이게 공동체적인 사건이에요. 그리고 내가 은혜가 떨어져서 바닥을 치면서 그러면서 비루하게 사는 것은 그것도 또한 공동체의 사건이라 이거죠. 그리스도의 몸에서 떠날 수 없어요. 너무 힘들면 교회를 옮기잖아요. 교회는 옮겼지만 예수의 몸에서는 떨어진 게 아니야. 가서 영적으로 또 연결이 되요. 결국은 그 사람이 어느 교회로 옮기든지 그것은 양태에 불과하고 결국은 그리스도의 영적인 몸인 교회를 여기서 힘들게 한 사람은 저기 간다고 안 힘들게 하겠어요? 똑같은 수준의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되는 거죠.
2. 징계로써
또 그리스도께서 머리와 몸의 관계를 유지하시는 것은 징계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통치를 하시는 거죠. 이게 이제 굉장히 재미있는 대목이에요. 징계하시는 것이. 그래서 이제 신자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고, 사람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는 것이 이제 신앙생활의 본분이거든요. 이 속에서 교회의 참다운 일치가 나온다고 어저께 말씀드렸잖아요. 그런데 이걸 바르게 안 하는 거죠.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는 바르게 되어 있는데 사람과의 관계만 좀 문제가 있다든지, 사람과의 관계는 문제가 전혀 없고, 하나님과의 관계만 조금 문제가 있다. 그런 거 없다, 이거죠. 항상 똑같은 모습으로 반영이 되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께서 고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교회를 통해서 지혜와 사랑을 보여 주시죠. 그러니까 그 때에 교회의 중요성이 여기서 대두되는 것이죠. 교회가 이제 이 사람이 진짜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자기를 철저하게 합치시키면서 무엇이든지 아멘하고 받으면서 신앙생활 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진리가 조금 적어도 그 적은 진리에 자기를 합치시키면서 사니까 좀 나은데, 문제는 그렇게 안 살려고 하는 사람들을, 그 사람들이 다시 주님께로 나아와서 다시 주님을 붙들고 살 수밖에 없도록, 그들을 일깨워야 하는데, 그 때에 교회가 그들을 많이 사랑해주고, 진리의 말씀으로 그들을 알아듣도록 잘 깨우치고, 하면 미끄러진 사람도 하나님께 돌아와야 하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거죠.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 애들을 키울 때도 마찬가지잖아요. 엄마, 아빠의 생각에 동의를 안 하지만, 내가 어떻게 부족한 모습을 보여도 엄마, 아빠가 나를 깊이 이해하려고 하고, 하여간 생각은 다르지만 사랑은 느껴져. 그리고 엄마 아빠가 이야기 할 때, 폭언이나, 폭압, 폭력으로 하지 않고 어떻게든지 나와 대화하려고 하고, 하나씩 둘씩 나를 이해시키려고 해. 그러면 애가 미끄러졌어도 자기 생각을 고칠 가능성이 많아지잖아요. 물론 그렇게 했는데도 안 돌아오는 못된 애들도 물론 있지만, 그러나 이제 가능성이 높아지잖아요.
교회도 마찬가지지요. 교회가 그런 것들을 그렇게 품어 안을 만한 사랑이 현저히 부족해. 그래서 그 따위로 하려면 당장 너 잘라 버릴 거야. 그런 식으로 이야기 하고, 물론 그런 교회야 없겠지만, 그러고 뭐 잘 알아듣게끔 가르쳐주질 않아, 설명할 순 없지만 그래. 그러면 이제 힘들어지는 거죠. 하나님께서 정상적인 상황에서 그래도 그를 사랑하시죠. 그러니까 어떤 방법으로든지 하나님께서 깨닫도록 만들어 주시죠. 끊임없이 깨닫도록 만들어 주시는 거죠. 그런데 안 돌아와. 그러면 교회가 계속해서 그 사람 때문에 고통을 받을 거 아니에요. 그 사람이, 신앙에서 미끄러진 사람들이 모두 칼 들고 교회에 들어오는 거 아니거든요. 교회를 아프게 한다는 것 자체를 무슨 뭐, 교회 와 가지고 행패를 부리고, 뭐 교인들 비방하고 다니고, 그런 것만이 아니라, 그건 물론이지만, 미끄러진 상태로 교회를 다니는 것 자체가 교회를 힘들게 하는 거예요. 주님의 몸을 아프게 하는 거라고. “아니 뭐, 내가 은혜 떨어져서 당신이 나한테 보태준 거 있냐.”고 그러는데 많지, 그거 달고 다닐라 봐, 얼마나 힘든가. 여러분 이러고 하루만 다녀 봐요, 얼마나 힘든지. 차라리 그 손 없으면, 그런 생각이 들죠.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되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교회의 건강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렇게 은혜의 통치를 떠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그 영혼을 곤고하게 하시고, 그리고 그에게 계속해서 깨달음을 보여주셔요. 그런데 말을 안 들어. 하나님께서 한 대 치시는 거예요. 그것도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에요. 징계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이 뭐라고 해요? ‘우리가 징계가 없으면 친 자식이 아니라 사생자라. 우리가 주워 온 아들이면 그럴 거다. 근데 우리가 징계를 받는 것은 우리가 친자식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해서 무언가 목적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로 돌이키길 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징계를 하심으로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통치하시는 거예요.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요령부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안 사는데, 별 일이 없어요. 신앙을 버리고 자기 잔머리 굴리면서 살았는데 형통 형통이야. 그리고 막 진짜 ‘예수 밖에 기쁨 있네.’ 그러면서 사는 거예요. ‘해방 되었네, 해방 되었네. 예수로부터 해방 되었네.’ 그리고 씩씩하게 잘 나가. 그런데 모두들 불안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거야. ‘아이고 저러다가 한 번 꿇어 박는다. 자 봐라. 언제, 언제 넘어질까?’ 그런데 안 넘어지고 계속 잘 가는 거야. ‘저, 저, 저, 이제 크게 한 번 넘어져서 고통 받는다.’ 잘 가는 거야. ‘그러다가 말년에 너 인간도 안 된다.’ 아니, 그런데 말년에도 영광이 충만한 거야. ‘죽을 때 너 교통사고로 확 죽을 거다.’ 죽을 때도 깨끗하게 축복 받은 심장마비로 딱 죽는 거야. 웃으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조문을 하고, 부자니까 꽃 상에 싸여서 나가. 그리고 이제 지옥으로 던져지는 거예요.
진짜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사람은 그렇게 살 수 없어요. 한 동안은 가. 요나가 입증하잖아요. 다시스로 가는 배를 딱 탔더니, 뭐 떠나기 전에 뭐 배에 시동이 꺼졌어요? 아니면 밑에서 뭐 물귀신이 올라와 가지고 뒤집었느냐고요? 정말 우리 상식대로라면 왜 고래가 그 때 나타나? 떠날라 그럴 때 배 옆구리를 들이 받아서 물이 들어가게 해야지. 타이타닉처럼 침몰시켜야 하잖아. 그것도 요나가 잠들어 있는 방, 그 선실을 고래가 들이 받아서 그 놈을 물 먹여야 하잖아. 그런데 그게 아니라 한참 가는 거야. 밀짚모자 쓰고, 선글라스 쓰고, 디카 하나 걸고, 잘 가. 찔리는 사람 많겠다. ‘정말 예수 밖에 기쁨 있네.’ 결국은 ‘하나님이 바다 위에 태풍을 대작시키시니’, 우리말 성경에는 그렇게 나오거든요. 히브리 성경에는 뭐라고 나오느냐 하면, ‘하나님이 바다 위에 폭풍을 발사하시니’ 라고 나와요. 쁑~하고. 하여간 그 표현 읽고 나서 뱃살 쥐고 웃었어요. 야, 성경이 참, ‘하나님이 폭풍을 바다 위에 발사하시니’, 딴 데는 폭풍이 안 일어난 거예요. 전 세계에 폭풍이 일어난 게 아니라 요나가 탄 배, 배가 이동하면 폭풍이 계속 그 배만 따라가는 거야. 하나님 징계하시는 거죠. 그런데 태도를 바꾸기 전에 그 폭풍이 지나가지 않아요. 계속 따라가요. 그럼 끝까지 안 바꾸면? 끝까지 가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통치하세요. 내가 여러분들에게 위로를 드리는 거예요. 기뻐하세요.
여러분들은 예수님께 발목을 잡힌 사람이야. 그래서 하나님이 가만히 안 내버려두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형벌가운데 제일 무서운 형벌이 무엇이라고 그랬어요? 내버려두시는 것. 어느 순간에 탁 내버려 두시는 거예요. 그러면 파멸로 가는 거예요. 간섭하시는 거죠. 그러니까 이렇게 때리고 징계하고 야단을 치시는 것 자체가 목적을 가지고 계시다는 거거든. 도덕적인 목적을. 그러니까 거기서 깊이, 이거 왜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가는 거야.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치시는 거죠. 그렇게 해서 몸인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에 일치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죠.
C. 완전한 머리와 불완전한 몸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 말씀드린 것처럼 완전하세요. 그런데 문제는 몸이 불완전해요. 그래서 이제 문제가 되는 거죠. 왜 그러냐 하면, 그리스도 예수께 붙여졌다라고 하는 의미에서는 완전한데, 이게 은혜 안에 사는 신자도 있고, 또 아까 얘기처럼 밀짚모자 쓰고 선글라스 쓰고 빨간 티셔츠 입고, 디카 메고 그러고 다시스로 가는 인간들도 있다, 이거에요. 그러고 폼 잡는 인간들도 있으니까, 그런 인간들도 교회의 몸에 붙어있거든. 그러니까 이제 수족마비 증세가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불완전한 교회에요. 그러니까 이제 그런 속에서 많은 어려움들이 생겨나게 되는 거죠. 그래서 특히 지상에 있는 교회에는 그런 불완전한 인간들이 모인 교회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교회가 일치를 이루면서 교회를 세우신 목적에 교회가 전체적으로 그 목적에 부합하는 삶을 사는 것은 우리 개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에 합치하며 사는 삶이 어려운 것처럼, 교회 전체적으로도 그런 삶을 사는 것이 어려워지는 거예요.
1. 교회의 의존성
여기에서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의존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는 거죠. 교회의 그리스도에 대한 의존성을 이야기 하는 거죠. 무슨 얘기냐 하면, 그리스도는 교회가 있어야지만 겨우 그리스도가 되시는 분은 아니시지요. 교회가 생기기 전에도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셨고, 하나님이신 동시에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셨잖아요. 그렇지만 교회는 틀려요.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가 머리이실 때에만, 교회는 겨우 교회일수가 있는 거죠. 그리스도가 머리가 아니면, 그 교회는 교회일 수가 없지요. 이런 식으로 어떻게 의존하느냐 하면, 교회가 맨 처음에 창조될 때부터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창조되는 거죠. 물론 성부하나님이 사랑으로 선택을 하셔서 그래서 구원계획을 세우시지만, 또 성령 안에서 그들을 믿게 하셔서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통해 삼위 하나님과 교통하게 하시지만, 그러나 교회의 기초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의 몸을 대속 제물로 주신 그 대속적 희생을 기초로 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교회의 터에요. 교회의 기초다 이거에요. 그것을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고백의 위에 교회가 서는 거란 말이죠. 그러니까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교회가 창조되었다고 그래도 과언이 아니죠. 마치 똑같은 거죠. 만물이 창조될 때,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서, 성령 하나님 안에서 창조되었듯이, 교회도 똑같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를 통해서, 성령 안에서 창조된 것이죠. 그것뿐만이 아니죠. 세워진 다음에 교회가 참으로 교회로 유지되는 것도 삼위 하나님이 다 관여하시지만,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이 교회가 교회됨이 유지되는 거죠. 그리스도 예수께서 교회의 머리이시기 때문에 이 교회는 계속해서 교회일 수가 있단 말이죠.
이것을 가장 풍부하게 표현해 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중보사역이에요. 그리스도 예수의 중보 사역은 도대체 무언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재자가 되어서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을 당신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내시고, 우리가 올리는 것을 당신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가게 하시는 거죠. 이 세상이 창조되는 것도 그리스도 예수의 중보를 통해서 창조되는 거예요.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세상을 존재하게 하시는 거죠. 또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영광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받으시는 거죠. 이런 중보의 관계가 창조에서만 이 모형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 속에서도 모형이 이루어지는 거죠. 그래서 교회를 창조하실 때에도 그리스도 예수의 중보를 통해서 창조하시고, 또 창조하신 교회를 참으로 교회되게 하시는 것도 그리스도 예수의 중보를 통해서 하시는 거죠.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 중 어떤 사람을 구원해서 다시 예수의 몸에 접붙이셔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를 통해서 그 일을 하시는 거죠.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의 공로를 보시고 선택된 사람을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해주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이시는 거예요.
또 여러분들이 그렇게 예수 믿으면서 살아도, 겨우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졌는데, 미끄러진 신자로 살아갈 때 그 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것도 그리스도 예수의 중보를 통해서 주시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의 경험은 항상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경험이 되는 거예요. 그리스도 예수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사랑이 경험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데에는 항상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에 대한 인식이 있어서, 그리스도 예수는 하늘의 신령한 그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받는 열려진 창이에요. 그 창을 통해서 들어오는 거죠. 또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사랑한다고 그러지만, 그 까리따스가 하나님 안에 있는 아가페의 사랑에 비하면 조잡하기 그지없는 사랑 아니에요? 여러분 아무리 하나님 사랑한다고 그러지만, 그 사랑에 점이 없겠어요, 티가 없겠어요. 항상 문제가 있잖아요. 또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많이 섬겨요. 잘하셨어요. 그런데 그 게 과연 하나님의 상에 올라갈 만큼 그렇게 완벽한 섬김이에요, 완벽한 헌신이요, 완벽한 수고냐고요. 뭔가는 항상 그 속에 섞여 있잖아요. 때가 묻어 있잖아요.
그런데 그런 것들을 모두 그리스도 예수의 중보를 통해서 그 모든 흠도 없고 티도 없게 그 피로 씻어서 하나님 아버지께 헌상해 드리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의 섬김을 받으실 때, 하나님이 내 섬김을 인정하셨다, 라고 할 땐 항상 ‘아이고, 진짜 잘 섬겼다. 진짜 그렇게 인정받을 만하지. 그래 정말 잘 했어.’ 그러면 안 되고 ‘나의 섬김은 흠이 많았는데 그리스도 예수의 중보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께 받쳐졌습니다. 주님이 내 섬김을 통해 영광을 받으셨다면, 모두 예수님 때문입니다.’ 이 고백이 교리적이고 성경적인 고백이라 이거에요. 더 크게 아멘을 해야지. 그렇게 해서 교회는 그리스도를 의존하게 되요. 그리스도는 교회 없이도 그리스도이시나, 교회는 그리스도 없이 교회일 수 없기 때문이죠.
2. 교회의 그리스도와의 연합
이렇게 되면서 이제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생각하게 되는데, 교회와 그리스도의 연합을 신자의 연합과 똑같이 원리적인 연합과 그리고 실제적인 연합으로 나누어서 생각을 해야 해요. 자,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원리적인 연합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먼저 개인의 차원에서 보면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져요. 그것은 취소되지 않는다고 그랬죠. 그런 것이 원리적인 연합이에요. 그러면 그 원리적인 연합만 이루면 충분 하냐, 그렇지 않다, 라고 하는 것을 여태까지 앞에서 계속 논증을 한 거 아니에요. 또 하나 뭐가 필요해요? 풍성한 삶이 필요하고 그걸 다른 말로 바꾸어 얘기하면 충만한 은혜의 통치가 필요하다, 이거죠.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는 그리스도 예수의 생명에 동참한 사람이에요, 못 한 사람이에요? 왜 대답을 못 해. 너무 빨라서 그렇죠. 다시 한 번 할게요.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 안에 예수의 생명이 있어요, 없어요? 당연히 있지, 그 사람도 신잔데.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이 결국은 누구에요? 생명적으로는 연결되었지만, 은혜의 통치에서 멀어진 사람이에요. 은혜의 통치에서 멀어지면 어떻게 된다고요? 죄의 통치 속으로 들어가는 거죠. 그래서 뭐에요? 인간의 육체가 자연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질병에 가깝듯이, 인간의 영혼은 은혜로부터 멀어질수록 죄에 가까운 존재가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바로 그렇게 되는 거죠.
a. 원리적 연합: 교회 안에 그리스도께서 항상 거하심
그래서 원리적인 연합이 이루어졌지만, 그러나 우리가 부지런히 성화의 삶을 살게 되면, 그리스도와 실제적인 연합을 이루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원리적으로만 연합이 되고, 그래서 우리가 은혜의 통치가 사라진 가운데 죄의 지배가운데 살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이 잘 느껴지지 않게 되는 거죠. 그러고 계속, 느껴질 때도 있지, 혼날 때. ‘아이고, 살아계시네, 아직도 살아계시네.’ 하나님이 살아 계신 걸 아주 안 좋은 방식으로 확인을 하는 거예요. 불행하게. 근데 그렇게 안 하고 부지런히 성화 생활을 하고 죄를 죽여. 그러면 어떻게 되요?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하게 느껴져요.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목사님, 왜 예수님은 나 같은 쓸모없는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까요?” 눈물이 주루룩 흘러요. 그게 뭐예요? 실제적인 연합이 있는 거예요. 그 실제적인 연합 속에서 세상을 이길 힘을 공급 받으면서 살아가는 거죠.
교회도 똑같은 거예요.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가 머리이시고, 교회가 그의 몸이에요. 그럼 내가 하나 질문하겠어요. 예수 그리스도가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끊어질 수가 있겠어요? 하나님은 그러실 수가 없다고 그랬잖아요. 항상 삼위가 함께 계신다고 그랬잖아요. 끊어질 수 없는데 그럼 두 번째, 우리가 참 신자가 되어서 그 분에게 접붙여졌는데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끊어낼 수가 있어요? ‘내가 너희를 영원히 버리지 아니할 것이며’, ’난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그렇게 붙어 있는 거 아니에요. 그럼 무슨 얘기에요. 우리가 어떻게 살든지 간에 그 분께 붙어 있는 거 아니에요. 그리고 그 생명이 계속 분여되고 누려지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원리적인 면에서는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와 이미 연합을 이루고 있고 이 연합은 취소되거나 파기되거나, 그렇게 될 수가 없다는 거죠. 그걸 기억을 해야 해요. 그런 경외심을 가지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를 바라봐야 해요.
시골에서 거의 쓰러져가고, 도시 교회에서 보내주는 보조금으로 근근덕신으로 유지되는 교회라고 할지라도 그 교회를 보면 하찮은 느낌이 들겠지만,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몸이요, 그 교회의 머리가 예수라고 생각을 해야 한다 이거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은 절대로 눈에 보이는 대로 교회를 하찮게 생각하거나, 또 여러분들이 더 하찮게 생각할 때가 있지요. 목회자가 좀 얼빵할 때, 공부도 별로 못한 거 같고, 그렇다고 무슨 유명한 것도 별로 아닌 것 같고, 그리고 뭐 그래도 설교라도 좀 잘하면, 그것도 별로고. 그런데 뭐 도덕적으로 너무 깨끗해가지고 자기가 무릎을 꿇을 정도면 모르는데 뭐 지나 내나 비슷한 거 같고, 그럴 때에는 교회에 대한 존경심이 사라지는 거죠. 그러고 교회만 생각하면, ‘아이고 답답해.’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너나 잘하세요. 그 교회를 주님이 그렇게 사랑하시는 거죠. 그런 걸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정말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찰스 스펄젼 목사님은 마차를 타고 동역자들하고 길을 지나가다가 저 멀리 교회가 보이면 “우리 모두 기도합시다.” 옛날 영국에 사셨으니까 다행이지, 서울을 그렇게 지나가셨으면 동역자들이 고달팠을 거예요. “기도합시다.” 끝나면 “또 있네, 기도합시다.” 운전을 못했겠지요. 그러나 그 마음은 얼마나 아름다워요.
저는 그 이런 진리들을 작년 봄부터 하나님이 많이 주셨어요. 예전에도 알고 있던 진리들이지만, 특별한 시기에 특별한 진리들이 다가오잖아요. 덕분에 연구도 많이 했고. 쭉 사유를 하면서 그게 가슴에 쑥 들어가는데, 이제는 지나가다가 이층교회나 지하실 교회만 봐도 눈물이 나요. ‘주님이 저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실까.’ 교회에서 안 좋은 일이 있으면 옛날엔 그랬어요. ‘아이고, 저 저 목회를 똑바로 해야지.’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는 솔직히 내 고백을 하겠어요.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어야지요. ‘좀 똑바로 하지, 아이고 그 장로들이나 집사들이나 그렇게 뺀질대고 그러니 교회가 저 꼴이지.’ 그런 생각 많이 했거든요. 그런데 저만 그런 게 아니라, 사실 여러분 다 그랬어요. 같이 그랬다고 그래야지 내가 좀 위로가 되지. 어느 순간에 그렇게 아플 수가 없어요. 주님 혼자 그 교회를 사랑하시는 경우도 있을 거 아니에요. 그 때 그 주님의 마음이 어떻겠어요.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어지러운 세상 중에
곳곳마다 상한 영의 탄식소리 들려온다.
그렇게 마음이 아플 수가 없어요.
그러면 이제 교회의 그리스도와의 원리적인 연합은 이제 이렇게 불변하는 것이고, 언제나 있는 것이고, 그런 면에서는 모든 교회를 볼 때마다 교회의 누추함이나, 남루함, 그 다음에 거기에 있는 사람들의 부족, 무지함, 이런 거 보지 말고, ‘아 저 교회의 머리가 주님이시구나. 주님이 얼마나 마음이 아프실까. 주님이 아직도 저 교회에 희망을 가지고 정말 주님이 저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러시는구나.’ 그것을 가슴에 깊이 새기는 거죠. 하나님의 교회를 향한 사랑은 끝이 없어요.
영국에 가면 스펄젼 목사님이 한창 목회하실 때, 그 당시에는 교구나 이런 거 다 정해져 있는데 6,000명 뭐 많이 모일 때는 그 이상 모였다고 하니까 그 당시 영국에서는 뭐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일어난 거죠. 100년이 넘는 옛 날인데. 75년도에 제가 아는 목사님이 영국의 스펄젼 목사님이 목회하시던 교회를 갔다 오고 나서 잡지에 글을 쓰셨는데, 통탄하시는 거예요. 50명 모였는데 추리닝 입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주일 날 테니스 라켓 들고 모였더래요. 너무 마음이 아프셨다고, 그러고 돌아오셨는데, 최근에 지금은 아마 더 모일 거예요. 영국에서는 이렇게 모인다는 게 엄청난 거거든요. 5년 전에 그 교회가 500명 모이는 교회로 다시 늘어났다고 그래요. 피터 마이스터라고 하는 새로운 목회자가 왔는데 정말 불같은 설교자가 왔어요. 교회가 확 살아나는 거예요. 지금은 아마 1,000명 이상 모일지도 모르겠어요. 영국에서는 거의 일어나는 일이 아니에요.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난 거예요. 그걸 보면서도 ‘야, 정말 하나님이 그 교회를 사랑하시는구나.’ 스펄젼 목사님이 하늘에서 얼마나 기도하시겠어요. 그러니까 교회를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이거에요.
b. 실제적 연합: 성도의 사랑과 순종 안에서 거하심
그런데 이제 실제적인 연합인데, 그러면 이제 이 실제적인 연합이라고 하는 것은 그러면 어떻게 해서 이루어지느냐 이거죠. 개인의 경우와 똑같아요. 그리스도와의 원리적인 연합은 하나님의 선택과 중생에 의해서 이루어지지만 그 실제적인 연합은 사랑과 순종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저절로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연합을 누리는 것은 내가 나를 죽이고 자기 깨어짐 속에서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깊이 사랑할 때, 그 때에 그리스도와 실제적인 연합을 누리는 거죠. 그렇게 하면서 순종을 통해서 그 일을 하게 되는 거죠.
1) 그리스도를 사랑함
그래서 첫째는 이런 실제적인 연합을 누리기 위해서는 교회가 공동체 전체적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해야 해. 그런데 자 보세요. 그러면 말이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고는 그들이 모인 교회 전체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일은 불가능할 거예요. 모였을 때는 주님을 사랑하고 흩어지면 각각 자기를 사랑하는 거, 그런 거 없잖아요. 그러니까 한 사람 한 사람이 진실 되게 참회를 통해서 사랑과 순종으로 그리스도께 실제적인 연합을 이루면서 살아갈 때 그 사람들이 모인 교회가 주님을 사랑하게 되잖아요. 그러나 이제 이것은 이 원리는 틀림이 없는데 공동체적으로는 신경 쓸 것 없고, 각자가 예수님 사랑하면 저절로 연합된다. 이것은 우리들이 완전히 동의하긴 어려워요. 무슨 얘긴지 아세요?
이런 경우 있을 수 있잖아요. 다섯 사람이 모였는데 이 사람도 하나님 사랑해. 이 사람도 신실해, 이 사람도 말씀대로 살려고 해. 이 사람도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그러는데, 그 사람이 모인 모임이 저절로 하나로 합치가 되어서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게 되는 것은 아니란 말이죠. 설득 안 되세요? 하나님을 사랑해도 관심사는 각각 다른 것일 수 있잖아요. 아주 좋은 비유가 딱 생각이 났다. 교회가 크질 않아서 한 다섯 명쯤 모였어. 근데 이 사람 다 각각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였어, 교회에. 같이 예배를 드려. 그런데 뭐냐 하면, 관심사가 다 달라. 한 사람은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는데 주일 날 예배만 끝나면 빨리 가서 노숙자들에게 밥 퍼주는 이 일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야. 또 한 사람은 그 교회에 와서 예배는 드리는데, 이 사람도 하나님을 많이 사랑해. 그런데 이 사람의 모든 관심은 찬양에 있어. 또 한 사람은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는데 이 사람은 군부대 위문에만 관심이 있어. 그래서 이 사람은 예배가 끝나기만 하고 군부대 위문도 가고 교도소 위문도 가. 이제 그만 해도 되겠죠. 이런 식으로 된단 말이죠. 한 사람 한 사람은 훌륭해. 그런데 교회가 공동체적으로 일치를 이루면서 그 교회 안에서 한 지체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야. 그렇게 되죠. 그러면 그 교회가 건강해 질 수 있겠어요, 없겠어요? 없지요.
그러니까 여기에서 두 가지 숙제가 주어지는 거죠. 어떻게 하면 한 신자 한 신자가 진실한 자기 깨어짐 속에서 예수님과 실제적인 연합을 이루면서 살 것인가, 또 하나는 그렇게 하나님께 이루어진 개인적인 아름다운 헌신을 이게 개인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공동체 속에 한 지체로서 내가 그렇게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게 되었다는 것을 일깨워서, 그들을 모두 하나로 묶어서 공동체적인 관심사 속으로 끌어들이고, 이 우리들의 모임을 통해서 하나님이 함께 사명을 주셔서, 함께 이루어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일이 무엇이고, 우리가 함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는 걸 배우게 하시는 거죠. 그렇게 해서 성도들이 자기가 하나님, 교회 안에도 그런 사람 있잖아요. ‘자기나 혼자 신앙생활 잘 하면 되지, 아 난 있지 교회 가서 나서는 사람 정말 싫어. 그냥 가만히 자기 할 일만 하면 되지, 왜 그렇게 쓸데없이 오지랖 넓게 왜 그래?’ 이런 생각 가진 사람 많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자꾸 큰 교회를 선택하는 거예요. 작은 교회는 익명성이 보장이 안 돼. 한 번만 나타나면 수많은 사람들이 뺑 둘러서서 어디 사시냐고, 왜 오셨냐고, 전화번호 좀 적자고, 직장 어디냐고, 몇 살이냐고, 여기저기서 잡아 당시는 거야. 그러니까 그게 싫은 거죠. 그러니까 큰 교회 가는 거죠. 그래서 큰 교회가 허수가 많아요. 그래요 정말, 사실이에요. 익명성이 보장되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되는 게 아니죠.
그래서 공동된 관심사로 교회가 하나로 쭉 뭉쳐져서 내가 하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다른 지체를 보면서 기뻐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지체를 보면서 마음 아파하고, 오늘 장로님 기도하신 것처럼 그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멀리 떠났는데 미끄러졌는데, 그 사람은 자기를 위해서 눈물로 기도할 수 없거든요. 그럼 누군가가 대신 기도해 주어야 하잖아요. 그게 사랑의 합치가 이루어지지 않고 가능하냐 이거에요. 그런데 아까 그 다섯 사람이 주님을 다 사랑하는 사람들이니까 그렇지 한 사람이 하나님을 안 사랑하는 사람이 왔어요. 미끄러진 사람이 왔어요. 그러면 그 사람은 누구의 도움을 받겠어요. 이 다섯 사람은 관심사가 다 딴 데 있는데, 그럼 자기 혼자 이러고 있는 거죠. 그건 교회의 모습이 아니잖아요.
그러면 이제 교회가 이런 감격을 누릴 때가 있잖아요. ‘야,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특별히 사랑하시는구나.’ 그런데 이제 이게 원리적인 연합은 우리 모두가 다 똑같이 누리고 있어도 실제적인 연합을 누리는 정도는 다 틀리다고 그랬잖아요. 실제적인 연합을 누리는 것만큼 그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고 또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거잖아요. 다 틀리듯이 그럼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무슨 뜻인지 아세요? 교회도 교회가 공동체적으로 깊이 회개하고 공동체적으로 일치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개인만이 아니라 교회 전체를 향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안아주시고, 축복해 주시는 것이 느껴지는 거죠.
제가 지금도 10년 가까이 지난 일이지만, 생생하게 잊혀 지지 않는 일이 있어요. 지방에 내려가서, 그 땐 뭐 워낙 집회를 많이 다닐 때였지만, 그래도 그 교회는 유독 기억이 나요. 바닷가에 있는 교회였는데, 그렇게 크진 않고 그저 한 400명 정도 모이는 교회였는데, 집회를 갔는데 하여튼 나도 기이할 정도로 생각될 정도로 그렇게 은혜를 주셨어요. 그런데 그 중에 어떤 여자 집사님이 나중에 편지를 보냈어요. 편지를 읽는데 그 속에서 뭐라고 그러냐면, 자기는 말씀을 듣다가도 은혜를 받았지만, 그 사경회 하는 기간에 교회 문이 있는데, 마당이 꽤 넓었어요. 교인은 많지 않은데 교회는 꽤 컸어요. 근데, 신도시가 들어오면서 사람이 막 빠져나가고 교인이 줄고 있는 그런 교회였는데, 자기는 태어나서 정말 신기한 경험을 했다는 거죠. 왜냐면 말씀을 듣고 깨달아서 회개하고 하는 것은 이해가 가는데, 그 사경회하는 기간 내내 교회 마당에 발을 탁 들여 놓으면 성령이 확 임하면서 그렇게 눈물이 정신없이 쏟아지더라는 거예요. 매 번 발 들여 놓을 때마다. 자기는 그 교회를 오래 다녔는데 처음이라는 거죠. 그 때 제가 가슴에 깊이 새겨진 것이 뭐냐면, ‘아, 이게 바로 하나님의 누구 개인을 향한 사랑이 아니라, 공동체를 향한 사랑이구나.’ 비슷한 경험을 여러 지체들이 하는 거예요. 그 기간 동안에 그들이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공동체적으로 은혜를 확 베푸시는 거예요. 교회 마당을 확 밟을 때, 하나님의 임재가 교회 마당 전체에 느껴지면서, 여러 지체들이 말씀은 아직 듣지도 않았는데 교회 마당에 막 들어서면서 회개하기 시작하고 눈물 흘리는 거죠. 그게 바로 하나님이 공동체를 사랑하는 거죠. 그런 종류의 사랑을 받는 것은 교회마다 다 다른 거예요. 모든 교회가 똑같다고 이야기 하면 안 되죠. 그러면 또 이런 질문 하겠지. ‘그러면 그런 사랑받는 교회 찾아가야 되겠구나.’ 더 이상 토를 안 달게요. 그 정도로 끝내겠습니다.
2) 그리스도께 순종함
그래서 그리스도를 깊이 사랑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 그 다음에 순종하게 되요. 이 순종은 사랑의 열매에요. 그래서 순종하는지는 사랑에 의해서 입증되는 거죠. 그래서 교회가 그리스도를 깊이 사랑해. 그래서 늘 눈물이 있는 사랑, 감격과 기쁨이 있는 사랑, 감사가 있는 사랑, 나만 그렇게 되지 말고 옆에 있는 지체들, 여러분 예배드리면서 한 번 잘 생각해 보세요. 나는 하나님 말씀에 은혜를 받고 깊이 눈물을 흘리고 감격하는데 옆의 지체는 졸아. 그 때 가슴 아프지 않아요? 그 때 그 깊이 가슴 아파하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이에요. 그 다음에는 순종하게 되는데, 그런데 이 순종이 개인적인 순종 못지않게 이 공동체적인 순종이 굉장히 어려운 거예요. 옛말에, 이런 말이 있어요. ‘一人 百 步는 不 如 百人 一 步라.’ 한 사람이 백 발짝 가는 것은 탁월한 사람이 가끔 나오면 가능한데, 백 사람이 똑같이 줄을 맞추어서 한 마음이 되어서 한 걸음을 옮겨 놓는 것이 더 힘들다는 그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그게 굉장히 어려운 거죠. 우리 뭐든지 혼자서는 잘해요. 특히 우리나라 사람은 같이 하라고 그러면 불안해해요. 우선 반장부터 뽑아야하고. 그러고 “모든 문제는 임원에게 일임하고 폐회하기를 동의합니다.” 항상 그러잖아요. 아니면 “담임목사님께 전적으로 맡기고 우리는 폐회하기로 동의합니다.” 뭐 이러잖아요.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우리들은 무엇인가 그런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는 거죠.
말하자면 모두 함께 순종하는 그 일은 쉬운 것이 아니지요. 그냥 나 하나만 하면 되는 게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너희가 처음 사랑을 버렸다.” 그러는데 모두 버렸겠어요? 그 중에. 안 버린 사람도 있죠. 그런데 이걸 하나님께서 공동체로 다루시는 거예요. “촛대를 옮겨 버리겠다, 너희는 날 버렸다.” 그렇게 되면, 그 중에 한 두 사람이 잘 하는 게 있어도 그 사람이 그리스도의 몸 전체로서 그것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하는 거죠. 그렇잖아요. 그런 원리에요. 그것이 말하자면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함께 책임을 지는 거죠. 그렇게 하나님이 함께 부르시는 거예요.
그런데 이제 문제는 뭐냐 하면, 이 공동체의 순종이라고 하는 것은 일치 속에 이루어져야 하는 순종이거든요. 그러면 일치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니까, 굉장히 어려운 거죠. ‘지금 우리 교회를 향해서 하나님이 선교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런 것을 가지고 있는 의지를 우리 모두가 공동체적으로 깨달아야 해. 그래야 반응이 똑같이, ‘아, 그것이 한 두 사람이 이야기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도구일 뿐이고 결국은 이 시점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교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니까 우리가 여기에 마음을 합하자.’ 했을 때에 사람들이 모두 선교에 대해 관심사가 있는 건 아니거든요. ‘아니, 뭐 선교냐, 구제도 해야지.’ ‘선교하고 구제만 주님의 일인가, 교육은 그럼 뭐 놀아?’ ‘그럼 선교하고 구제하고 교육만 하는 거야? 성도들이 친목을 해야지 무슨, 교육을 하든지 구제를 하든지 선교를 하든지 할 거 아냐!’ ‘뭔 소리야, 장애인 사역이 중요하지, 너희들은 팔 다리 멀쩡 한대.’ ‘뭔 소리야, 우리는 자유인인데, 감옥에 갇힌 사람 생각해 봐, 예수님이 뭐라 그러셨어. 옥에 갇힌 자들을 돌아보고. 그러셨잖아. 그거 안 하는 건 교회도 아니야.’ 그러니까 저 쪽에서 ‘뭔 소리 하는 거야. 중요한 건 과부야. 성경 봐, 과부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그게 경건이라고 그랬는데’ ‘무슨 소리야, 그럼 고아원은 놀아? 과부 밑에 고아도 나오는데.’ 이러면서 막 하는 거죠. 그러니까 이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에요.
그런데 모든 이야기가 다 맞지만,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인생을 이렇게 이끄실 때에 어떤 때는 정직에 대해서 강력하게 도전을 받게 하시잖아요. “너 진짜 정직하게 살래? 너 왜 거짓말 하니! 너 진짜 이거 안 고치면 축복 없다.” 이러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막 몰아세우실 때가 있어요. 그렇잖아요. 그런데 항상 그러는 건 아니고 또 지나갔는데 또 그건 하나님이 관심도 없으신지, “너 그렇게 기도 안 할래? 기도 안 하면 곧 영혼의 죽음이야. 네가 어떻게 살았는지 한 번 봐. 게으름으로 점철되어 있잖아. 기도 할 거야 안 할 거야!” 그러면서 기도제목을 계속 주시는 거죠. 기도제목을 계속 주신다는 건, 그냥 불러주신다는 게 아니라 사건이 자꾸 생기는 거야.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데려가잖아요. 그런다고 해서 우리가 기도할 때에 이제 정직은 끝났으니까 부정직하면서 기도하는 건 아니잖아요. 시기마다 이렇게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게 있잖아요. 교회도 하나님이 그렇게 인도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때에 아까처럼 그런 식으로 논쟁을 하면 안 된다 이거에요. 조용히 귀를 기울이면서 하나님께서 그런 음성들을 자신들에게 전달해 주시면서 우릴 이끌어 가시도록 그런 순종을 기대하시는 거죠.
그래서, 잘 들으세요. 그래서 하나님이 교회를 그냥, “다 모여라, 그리고 네들이 다 알아서 할래? 모든 걸 다 너희들에게 맡길게.” 그러지를 않으시고 하나님께서 아예 처음서부터 “교회의 머리는 예수거든. 내 아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다.” 그리고 “나머지는 네가 다 알아서 하는 거야.” 그게 아니고, “내가 목사를 세울 거거든. 장로를 세울 거거든. 선교사를 세울 거거든. 선지자를 세울 거거든. 교사가 세워지거든.” 그러면서 하나님이 친히 질서를 정해 놓으시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의 기도 제목은 뭐냐면, 그 질서를 따라서 하나님이 자기의 마음을 보여주시도록, 그렇게 기도해야 하는 거예요.
자꾸 사람들이 저보고 “뭘 설교 할지를 어떻게 정합니까?” 그러고 물어 보더라고요. 몇 사람이 물어 봐요. 이 교회를 통해서 대답해 줄게요. 아마 이런 교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거예요. 어떻게 하냐면 대개 한 네 가지 방식으로 정하는데, 우선 첫째는 기도를 해요. 기도를 계속 하면, 그럼 하나님께서 뭘 설교해야 할지 말씀을 주셔요. 그런데 그건 항상 이렇게 주시지 않고 (머리에서 밖으로 나가는 손동작), 이렇게 해서 주셔요.(머리에서 가슴을 통과하여 밖으로 나가는 손동작) 나를 대부분, 물론 모든 설교를 그렇게 못 할 때도 있지요. 그건 잘못된 거죠. 그러나 대부분 나를 통해서 먼저 아프게 하시고 똑바로 살도록 고치고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하게 하셔서 피를 묻혀서 설교를 하게 하시는 거죠. 그렇게 안 하고 이렇게 (머리에서 밖으로 바로 나가는 손동작) 할 수 있는 재료 난 많아요. 여태까지 계속 설교했는데, 아무거나 하나 딱 빼가지고 와서 하면 안 되겠어요? 그런데 자기가 이렇게 들어가서 여기서 통과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안 묻은 거예요. 그러나 이렇게 들어갔다가 나오면, 이 체액이 묻고 피가 묻으면서 나오는 거죠. 그래서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잔인한 사람들이 성도라고 그러잖아요. 항상 피 바른 설교만 좋아하는 거죠.
그러니까 교인들이 해야 할 일이 무어냐 하면 목회자가 그런 일에 전념하게 해 주어야 해요. 이렇게 좀 교회 살림살이 같은 것에 신경 안 쓰고, 장로님들, 집사님들 하고 같이 하고, 여러분 내가 묻고 싶어요. 여러분들이 배운 성경 교리에 여러분 피 묻혀 본 적이 얼마나 있는지 묻고 싶어요. 그럼 이건 목사는 뭐 아무 때고 가면, 피가 나와서 그거 묻힙니까? 그렇게 되는 게 아니라는 거 너무나 잘 알잖아요. 그런데 1년에 한 번이나, 봄 여름 가을 겨울 한 번씩만 와서 설교하라고 그러면 또 가능성이 있어요. 근데 이건 매주 입만 열면 토해 놓으라고 그러면서 전부 다 피 발라가지고 나오라고 그러는데 그럼 목사 서재는 피바다가 되어야 해. 근데 그게 피를 바른다는 게 뭐예요. 마음을 거기다 다 쏟아야 하는데, 온갖 거에 다 갈려서 ‘또 교회 빚은 어떻게 해야 하나, 또 교인들은 왜 싸우나, 뭐 또 요즘 뭔 일이 있길래, 저 사람들은 저렇게 은혜를 안 받고 자꾸 시험에 드나, 저 사람들은 또 저렇게 해서 왜 사업도 어렵고, 이렇게 어려움들을 당하나.’ 이런 것들로 그냥 막 생각이 커 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신경을 써야 할 일에 늘 이렇게 하고, 그러고 그 다음에는 목회자가 그런 일에 깊이 몰두해야 해요. 솔직히 얘기해서 그거에요. 그러니까 그게 바로 성도들이 해 주어야 할 일이에요. 큰 집주고 그 다음에 사례금 많이 주고, 그런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그 일을 하는 거예요. 마음으로 하나님께 다 바쳐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그렇게 여유를 주고 마음으로 집중할 수 있게 해 주어야 하는 거예요. 원고에 없는 이야기인데 오늘 나오네.
그렇게 해서 체액을 묻혀서 나와.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성경을 읽다가 어느 순간에 그 진리가 다가오면서 깊이 찌르는 거예요. 그러면서 나 자신의 부족을 보게 하고 결국은 설교자, 목회자의 부족이 교회의 한계거든요. 왜냐하면, 결국은 자기가 마음에 와 닿은 것만큼만 설교할 수 있으니까 설교가 안 되었다는 건, 자기 마음에 안 와 닿았다는 거 아녜요? 성경을 보면서 깨달을 때, 여러분들 대신해서 제가 성경을 읽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깊이 부딪혀요. 그 속에서 괴로워하면서 탐구를 해서 그래서 시리즈를 정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 다음에 세 번째는 성도들의 삶을 보면서 ‘진짜 왜 저렇게 살까? 진짜 저 사람들을 저렇게 살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되는데’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뭘 설교해야 할지, 그렇게 정해요. 이번에 ‘인생의 행복을 묻는 그대에게’ 도 누구를 생각하고 정한 거냐면 교회 언저리에서 아직도 회심을 안 하고, 힘겹게 그 두 시간 예배를 견디는 사람들. 그래도 또 두 시간 하지만, 미안하게 생각해요. 어떻게 할지 모르겠어요.
마지막 네 번째는 의문이 나는 것들을 집중적으로 탐구를 하다가 성경을 볼 때는 그렇게 가슴에 다가오지 않았는데 연구를 하면서 탐구를 하다가 그게 가슴에 확 꽂히는 거예요. 그래서 막 가슴에 불을 지르는 거죠. 그러면 이제 반대로 그것을 보다가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면 막 보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시리즈가 정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1년 치를 미리 정해 놓거나 그런 적 거의 없어요. 한 시리즈 가면 또 하나님 앞에 깊이 기도하면서 가는 거예요.
그런데 과거를 이렇게 돌아보면, 하나님이 항상 교회를 향해서 요구하시는 순종의 물결을 따라서, 그것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할 때도 있지요. 제가 영적인 상태가 별로이면, 하나님은 ‘어’ 그래라 그러는데, 저는 ‘아’ 그러면서 자꾸 이중창을 할 때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대체로 하나님이 교회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기도하고 성도들이 기도해 주고 그러면, 이렇게 보게 하셔요. 어떤 때는 그 시리즈 전혀 할 생각도 못했는데, 심방을 어느 집 하다가 ‘아이고, 저거 저렇게 살면 안 되는데.’ 하고 돌아와서 마음 아파했는데 쫙 보니까 그런 문제에 있어서 성도들이 막 걸리는 것들이 느껴지는 거예요. ‘정직’ 시리즈 같은 거. 그 다음에 ‘자기 자랑’ 시리즈. 그렇게 하면서 하는 거죠.
결국은 뭐냐 하면 아까 이야기 했듯이 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데, 시기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순종이 물결치듯이 교회를 그렇게 이끌어 가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것들이 그 교회의 질서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교회에서 하나님이 그 질서 속에서 세우신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를 많이 하면서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마음을 늘 부어주셔서 그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때문에 감화된 그런 쪽으로 하게끔 가야하는데, 제가 언젠가 설교시간에 “강단 아래에 있는 사람은 강단을 향해서 그렇게 뭘 해달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몇 분에 끝내십시오. 뭘 하십시오.” 그렇게 이야기 하면 안 된다고 이야기 한 것을 너무 매정하다고 그러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게 아니라 이런 사랑의 뜻으로 얘기를 한 거예요. 그걸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시도록.
가끔 어떤 성도들은 뭐냐 하면, 언젠가 심방을 갔는데 그래요. 새로운 설교 시리즈를 시작을 했는데 심방 간 그 지체가 너무 기뻐하는 거예요. 자기가 황당한 기도를 했는데, 우리 목사님이, 나는 이 성경의 이 장을 잘 모르겠는데 이거 한 번 설교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더니, 6개월 안에 그 시리즈가 시작이 되더래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기도하면 질서를 통해서 이런 것들이 움직이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부어 주셔야 하잖아요. 그러면서 이런 게 움직이도록 하나님이 질서를 세우신 거예요. 그런 사랑과 순종을 통해서 교회는 어떻게 되나요? 그렇죠. 그리스도께 공동체적으로 함께 일치를 이루면서 연합을 이루게 되는 거죠. 그러면서 그리스도와의 결속이 가득해지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도 이렇게 가만히 보면, 하나님이 교회에 그냥 뜨겁게 사랑해 주시고 안아 주시던 때가 있고, 조금 떨어지시던 때가 있고, 하나님이 너무나 마음이 아프셔서 교회를 이렇게 이러시는 때가 있는 거죠. 많이 안아 주실 때는 가는 곳마다 놀라운 회심의 역사, 이런 것들이 막 일어나요. 교회는 영혼들로 꽉 차고 모인 영혼은 하나님으로 꽉 차서 돌아가고, 1부 예배 끝나면 휴지 한 통 사라지고, 2부 예배 끝나면 휴지 한 통 사라지고, 얼마든지 사 줄게. 그게 하나님의 축복이지요. 그러니까 성도들이 많이 엎드려서 그 질서를 통해서 목사님이 하나님의 마음을 담을 수 있도록, 교구의 목회자들이 그 때에 우리를 향해 말씀하시는 거기에 일치한 코드를 가지고 우리를 지도할 수 있도록 당회에 그런 마음을 주셔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도록 그래서 다 할 수 있는데 자기는 깊이 엎드려서 하나님이 그 질서를 사용하셔서 그 일을 해 주시도록 경건하고 정숙하게 엎드리는 거죠.
그렇게 함께 순종하려고 할 때에 어려운 게 뭐냐 하면 모두 일치를 이뤄야 해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 자기가 판단한 사물들의 질서만 옳다, 라고 하는 교만한 생각을 꺾어야 하거든요. 그러면서 뭘 생각해야 하냐면, 옳고 그름도 문제가 되지만 내가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이나 이 모든 것들이, 교회가 전체적으로 일치를 이루면서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이 일에 도움이 되는가, 하는 이런 새로운 변수를 생각해야 하거든요.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굉장히 힘이 든 게 느껴지는 거예요. 왜냐면 자신을 죽이면서 그렇게, 그냥 한 번 불쑥 나타나서 “이렇게 하면 되지 않습니까?” 얘기하면 되는데 ‘하나님 저 사람을 움직여서 그렇게 하게 해 주시옵소서.’ 너무 돌아가는 거지. 너무 돌아가는 거고 너무 힘들죠. 여러분 목회할 때도 나도 그런 느낌을 받는 거예요. “당신 뭐가 문젠지 내가 얘기해 줄까?” 이렇게 하고 싶어요. 그런데 강대에 엎드려서 하나님께만 얘기하는 거죠. ‘하나님, 제가 생각하기에는 저 사람한테 이런 문제 있거든요. 근데 하나님이 깨닫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은혜를 주십시오. 그리고 인격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깊이 승복하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우리는 기다려줄 수 있도록, 더 많이 사랑해 줄 수 있도록, 오래 참을 수 있도록 우리 그렇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하는 거죠. 돌아가는 거죠. 거기에서 많이 힘든 게 오는 거죠.
그런데 그 힘든 것 때문에 개인적으로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을 이루어가는 이 계기로 삼는 것이 이것이 하나님의 탁월한 지혜에요. 여러분들이 계속 신앙생활 안 하고 제 마음을 아프게 하면, 제가 주께로 더 가까이 다가가요. 그렇다고 이런 이야기에 위로를 받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럼 안 되지. ‘야, 내가 많이 개겼더니, 우리 목사님이 올 해 많이 성화되셨구나. 식사 접대 한 번 안 해주실라나.’ 이렇게 생각하면 되요. ‘내가 개겨서 우리 목사님을 성화시키지 않으면 누가 하랴.’ 그렇게 생각 안 해도 되요. 그거 말고도 많아. 그 사람이 변화되면 하나님이 새로운 걸 주실 거예요. 새로운 걸 주셔서 가슴 아프게 하셔서 그렇게 가는 거죠. 그래서 나는 미래에 대해서 기대하는 거 없어요. 그냥 그렇게 살다 죽는 거예요.
마당에 앉아있는데 어느 후배 목사님이 와서 “목사님 생명력 있는 목회의 비결이 뭡니까?” 그래서 내가 뭐라고 그랬겠어요? “죽음.” 아주 짧게 “죽음.” “목회자의 죽음입니다. 날마다 죽어서 예수 죽음의 기운이 뼈를 타고 핏줄에까지 그 죽음의 기운이, 검은 그림자가 안개처럼 쭉 퍼져나갈 때 그 때 차라리 핏줄이 끊어지는 게 덜 아프고 힘줄이 잘리는 게 덜 아프고 뼈가 망치에 의해서 부수어지는 게 덜 아프고 심장이 산산이 터져 버리는 게 덜 아파요.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해요. 참고 더 참고 또 참아야 해요. 연이 있잖아요. 바람 부는 강변에 가서 연을 막 날려. 그럼 막 연이 바람을 받아서 하늘로 쫙 오를 때, 연줄이 팽팽해진단 말이죠. 심하면 이게 끊어져요. 연이 생각하는 거예요. 아이 씨, 왜 이렇게 줄을 당기는 거야, 줄을 풀어. 그럼 내가 저 하늘 높이 날 수 있는데. 소원을 들어 줘요. 끊어 버려요. 그럼 연이 떨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공동체와 함께 하나님께 순종하기가 굉장히 어렵고 일치를 이루기가 너무너무 힘들어요. 그렇지만 그것을 통해서 그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이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성화 생활에 연이 되는 거예요. 이 지점에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하나님이 드러내 보이시는 거예요. 자신이 제법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지점에서 하나님을 향해서 사랑이 깊이, 사랑에도 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잖아요. 그렇게 주님을 향해서 깊이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고통 속에서 이 자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죠. 내가 이 몸의 일부인데, 그러면서 거기서 하나님 앞에 그 힘든 가운데 자기가 그 몸의 일부라는 걸 배우는 거예요.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남은 고난을 자기의 육체 속에 채운다고 한 사도 바울의 고백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거기서 배워가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에서 깊이 엎드려질 때 예수 죽음의 기운이 스며들어 오는 거예요.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이 속에 스며들어 오게 되는 거예요. 그 때에 그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스며들어 올 때, 그것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 죽으신 그 고난의 깊이와 넓이와 의미를 깨닫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고통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느끼는 것과 유사한 그 고통이 느껴지는 거예요. 그런 고통을 느낄 때에는 동지도 없어요. 아무도 없어요. 혼자 벌판에서 십자가에 매달려서 아무도 없고, 하나님 한 분 앞에서 당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깊은 고독 속에서 주님을 만나게 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그 예수의 죽음의 기운이 들어 올 때 신기하게 자기도 알지 못하던 자기 안에 있던 수많은 정욕과 탐욕들을 하나님이 함께 죽이시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를 본성적으로 새로운 사람으로 하나님이 만드시는 거죠.
그게 바로 사도바울이 얘기했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육체 가운데, 예수님께 무슨 남은 고난이 있겠어요? 예수님이 충족하게 다 구속을 이루셨는데, 남은 고난이 있다, 라고 하는 것은 교리적으로도 문제가 있는 발언이지요. 이 ‘남은 고난’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우리의 구속을 이루기 위해서 모자라는 남은 고난이 아니라,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지상에 계셨더라면, 고난을 받으시면서 살아야 했을 텐데 그것을 이제는 당신이 세우신 교회에 맡기신 거예요. 그러니까 그렇게 교회가 일치를 이루고 그 교회가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실제적인 연합 속에서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자기가, 사실은 자기만 잘못한 게 아니라 교회 공동체가 다 잘못했는데, 자기가 마치 교회와 그리스도 사이의 중간에 있는 사람인 것처럼 그 모든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깊이 죽임을 당하는 거예요. 예수 죽음의 기운이 스며들어 오는 거죠.
그 사람을 보실 때에 예수님의 그 마음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모두들 웃고 떠들면서 돌아가고, 텅 빈 예배당 한 구석에서 누구도 아파하지 않는 교회의 아픔을 한 몸에 쓸어안고, 그러고 뼈 속까지 스며 들어오는 예수 죽음의 기운을 느끼면서 그러면서 그 가슴 아파하는 그 사람을 보시는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한 번 생각해 보라 이거에요. 그게 바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거예요. 그럼 한 번 비교를 해 보세요. 그런 사람과 ‘아이 씨 골치도 아픈데 집어 치우자.’ 이러고 보따리 싸는 사람하고 비교를 해 보라 이거죠. 두 사람의 차이를 비교해 보라 이거에요.
III. 결론
제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얘기해요. 즉흥적으로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이 교리를 묵상하면서 계속 들었던 생각이에요. 여러분들은 정말 진리를 사모해서 온 사람들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사실을 그런 만족을 못 주었던 여러분들의 이전의 교회에 많은 상처를 주었을 수 있어요. 여러분들의 아픔도 물론 많았겠지. 근데 이제는 한 번쯤 깨끗이 회개하고 지우고 지나가야 해요. 그리고 용서를 빌 사람들에게는 용서를 빌고 그리고 이제는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 돼요. 물론 여러분 가운데는 그런 식으로 하지 않고 너무나 좋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렇게 등록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죠. 그렇게 생각해요.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교회와 헤어지는 것은 지난 번 교회가 마지막이 되어야 해요. 여러분들이 일생 동안 이 교회 다니라는 건 아니에요. 떠날 수도 있고 선교 갈 수도 있지요. 그런데 어떤 상황이든지 간에 이게 교회가 실제적인 연합을 누리면서 그리스도께 사랑을 받는 데에 보탬이 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단 말이지요.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순종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5.교회와 사랑의 확장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엡 5:25 下
사실 지난시간에 모두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여김 이라는 제목이었는데 끝까지 설교를 못하고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가서 끝까지 설교를 못하고 이제 아무데서나 끝나지는 않았고 끝나도 좋은데서 끝났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제 그 남은 부분을 하면서 계속 이어서 교회와 사랑의 확장이라는 이런 교리를 가지고 우리들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I. 불완전한 혼합인 교회
우선 그렇게 실제적인 면에 있어서 교회가 함께 연합을 이루면서 그러면서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참된 예수의 몸으로서 일치를 이루면서 살아가야 되겠는데, 어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교회는 불완전한 혼합이다, 라는 거죠. 불완전한 혼합이다. 교회자체가 불완전한 혼합이기 때문에 사실 이일이 굉장히 어렵다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교회 안에는 그리스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고 우리가 그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한 성령 안에서 한 아버지께 경배한다는, 신앙고백을 가지고 우리들이 진리를 중심으로 모이게 됩니다. 그러나 이제 교회 안에는 모두 참 신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는 크게 세 종류의 신자가 포함되어서 눈에 보이는 교회를 이루게 되는 것이죠. 이 사람 모두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이에요. 신앙 고백자들이 모여서 교회를 이루는데 그 고백자들이 크게 세 종류의 사람이라는 거죠.
A. 신앙고백자들의 분류
1. 참신자: 상태가 좋은 신자, 부패한 신자
우선 첫째는 뭐냐 하면 크게 분류하면 참 신자와 그 다음에 부패한 신자와 그 다음에 거짓신자. 이렇게 세 종류의 신자가 모여서 교회를 이루게 되는 것이죠. 둘로 나눈다면 참 신자와 거짓신자로 나누게 되는데, 참 신자는 다시 둘로 나뉘어 지게 되는데, 상태가 좋은 신자, 맛이 간 신자 이렇게 나누게 된다, 이 이야기에요. 이렇게 되는 사람이 누구냐? 물론 이제 이런 거죠. 참 신자는 아주 분명하게 중생과 회심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사람이에요. 접붙여진 사람은 어떻든지 간에 참 신자에요. 참 신자인데 참 신자라고 해서 모두 진실한 신자가 아니에요. 열심히 죄를 죽이고, 은혜 생활을 잘 하면 이게 건강한 신자가 되어서 진실성이 많은 신자가 되요. 그런데 요즈음 무슨 망령이 들었는지 기도도 안하고 뜻을 세웠어. 안하기로. 그리고 말씀에 은혜도 안 받고, 예배시간은 맨 날 늦게 오고, 그리고 끝나고 가다가 주차장에서 대판 싸우고 이런 식으로 교회에 다녀요. 그 사람은 분명히 거듭났는데도 상태가 안 좋아. 여러분 몸이 항상 똑같은 상태 아니잖아요. 뾰두라지라도 하나 생기면 그 주위가 다 곪으면서 이제 그 부분이 몸의 구실을 제대로 못하잖아요. 엉덩이에 뾰두라지가 나면 앉을 때도 엉거주춤하게 앉고 아주 많은 고통을 주잖아요. 그게 상태가 안 좋은 신자에요. 그래도 그 사람은 이제 넓은 의미에서는 참 신자에요. 왜? 그래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졌으니까.
2. 거짓 신자
근데 인제 거짓신자는 아예 교회 나오기는 하는데 접붙여지지를 않았어요. 경우에 따라서는 거짓신자이기는 하지만 사람이 워낙 교양이 있고 품위가 있어서 교회 점잖게 다닐 수 있고 참 신자지만 워낙 교양이 덜 되어 있어요. 교양 떨어진 사람은 은혜가 덮고 있을 때에 진짜 겨우 버티지, 은혜가 뚜껑을 딱 벗어버리면 그 다음에 본래의 모습이 나오거든요. 그래서 여러분들 쭉 보면, 은혜 많이 받았을 때에는 옛날 모습이 어땠는지 잘 연상이 안 돼. 늘 그냥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뭐 그냥 신앙생활 잘 하니까, 은혜가 떨어지면 연상이 다 되요. ‘아, 그랬겠구나. 옛날에. 그랬겠구나.’ 그리고 이제 목회하는데 참고가 되죠. 정말. 두고두고 참고가 됩니다. ‘아 그렇겠구나.’ 그래서 이제 한 번씩 은혜가 떨어져 보는 것도 목회에 참 도움이 되요. ‘아 저 사람이 옛날에 그런 사람이었구나. 아 이제 그 속에 저런 기질들이 있었구나. 그런데 그동안 하나님의 은혜 속에 덮여서 살아왔구나. 은혜의 뚜껑이 열리니까 저렇게 되는구나.’ 그걸 깨닫는 거죠. 그럼 이제 ‘저사람 이제 저런 면에 있어서 많이 돌봐줘야지만 사람이 고쳐지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물론 이제 그런 생각을 하게 되기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지만은 그렇게 되면서 이제 사람이 성장을 하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세 종류의 사람들이 섞여서 신앙생활을 하거든요. 이게 그러면 이제 접붙여지지 않은 사람들은 거짓신자고 그 다음에 또 참 신자이기는 하지만 상태가 안 좋은 신자는 교회에 고통을 주는데, 상태 안 좋은 신자들이 고정되어 있으면 방이라도 따로 만들어서 분리를 하겠는데, 그런데 돌아가면서 상태가 안 좋아지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제 그러거든요. 그런데 모든 사람이 이렇게 규칙적으로 돌아가면서 그러는 건 아니죠. 그래서 신앙이 좀 부족해도 워낙 사람이 침착하고 주님께 붙어 있으려고 하는 꾸밈이 없는 성격이고 이렇게 열심을 내고 하며는 덜한데, 그렇지 않으면 이제 이 사람이 좀 나아졌나, 그러면 저 사람이 뚜껑이 열리고, 저 사람이 뚜껑이 닫혔나 그러면, 저 사람이 열리고 그러면서 교회는 세상 끝날 까지 그렇게 가는 거예요. 세상 끝날 까지. 이게 바로 종말까지의 교회의 특성이에요.
특별히 이중에서 참 신자와 거짓신자가 함께 섞여 있는 것은 교회에 더 많은 고통을 주는 거죠. 그러니까 회심하지 않고 예수께 접붙여지지 않은 사람은 실상 정말 교회의 회원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회심하지 않은 그런 사람이 교회에 들어와 있게 될 때 문제가 없을 때는 그냥 가만히 있지만, 그러나 이제 문제가 생기게 되면 이제 굉장히 많은 문제를 불러일으키면서 그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예수의 몸에 접붙여지지 않은 사람들은 분량이 없어요. 분량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왜 이렇게 사람도 살다보면 기본적인 인간성을 갖추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륜이라는 것이 있잖아요. 그래서 내가 아무리 억울하거나 잘못된 상황을 맞이해도 넘을 수 없는 어떤 선을 가지고 있잖아요. 인간도 마찬가지에요 영적으로. 예수의 몸에 접붙여지고 하나님의 사랑 속에 깊이 들어간 사람들은 순간적으로 많이 악해지는 적도 있지만, 그러나 일반적으로 자기가 넘어야 될 선과 넘지 말아야 될 선을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어요. 근데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지지 않은 사람들은 한 번도 그 사랑에 녹아보지 않은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이 선이 없다고. 뚜껑이 잘못 열리면 선이 없이 넘나드는 거예요. 그런데다 아까 말씀 드렸듯이 자연적인 본성에 있어서 이 사람이 교양이 있고 인품 자체가 뛰어 나고 절제나 이런 것들이 쭉 있어서, 사회생활을 할 때에도 막가는 사람이 아닌 경우에는, 그런 것들을 어느 정도 지켜요. 그런데 그런 것조차도 없어요. 사람을 향해서도 현저히 교양이 떨어져서 부족하고, 그리고 또 하나님을 향해서는 거듭나서 예수께 접붙여진 적이 없으니까 하나님 앞에 경계선이 없는 거죠. 이런 사람들이 하게 될 때 교회는 말할 수 없이 상처를 입게 되는 거죠.
B. 종말까지 계속될 교회의 한 특성
이렇게 참 신자와 거짓신자가 넓게 분류를 해서 섞여져 있는 것은 세상 끝날 까지 계속될 교회의 모습이에요. 어쩔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이제 완전 구별이 불가하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구별하려고 노력은 하죠. 노력을 해서 어떻게 하죠? 그런 사람들은 세례를 주면 안 되죠.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교회에 큰 직분을 주고 이렇게 되면 교회가 언젠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돈 많은 사람 장로 시키고 뭐 이렇게 하고 그 다음에 회심의 여부 잘 확인도 안하고 억지로 권하다 시피해서 세례를 주고 이렇게 되면, 결국은 나중에 교회가 말할 수 없이 고통을 당하게 되는 거예요. 그런 면에서 구별을 하지만 그러나 완전히 나뉘어 지는 것이 불가능한데, 종말까지 교회의 특성이라는 건 이미 어디에도 나타 나냐 하면 말이죠, 그 예수님의 비유에 보면 한 밭에서 가라지와 곡식이 함께 자라는 거죠. 주인이 그걸 만약에 가라지를 뽑아야 되겠다고 밭으로 뛰어 들어가면, 심어놓은 작물까지 망가지는 거죠. 또 그물에 대한 비유도, 어부가 나가서 그물을 쳤는데 그물을 쳐서 일단은 그물을 친 것을 다 고기를 가지고 와서, 먹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고기들을 갈라내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그물 그 자체가 보이는 교회라면 마지막에 그것을 분류하는 작업은 다 낚은 다음에 나중에 일어나는 일이다, 라는 것이죠.
1. 노아의 방주
이러한 것은 특별히 노아의 방주를 통해서도 잘 나타나는데 노아가 방주를 짓고 거기에 사람들이 들어가고 그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세계를 보전하시기 위해서 특별히 그 육축들을 보전하고 싶으셔서 하나님께서 짐승들을 이제 집어넣으라고 그러셨어요. 그런데 참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 정결한 짐승, 이미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이 있잖아요. 정결한 짐승은 암수 7쌍씩 집어넣고 부정한 짐승은 두 쌍씩 집어넣으라고 그래. 부정한 짐승은 두고두고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이 피해야 하는 물건이거든요 그런데 이상하게 부정한 짐승을 그 안에 집어넣으라고 그러신다고. 구원의 방주 속에 집어넣으라고 그러셔요. 그런데 나중에 두고두고 문제가 되죠. “너희는 나한테 제사를 지낼 때 이런 부정한 짐승은 제사 드리지 말거라. 또 이런 부정한 짐승은 먹으면 안 된다. 이런 부정한 짐승들을 만져도 안 된다.” 그건 결국 상종을 안 할 부정한 짐승인데. 그걸 홍수로 다 쓸어버리시면, “뛰어다니는 것은 뭐든지 잡아서 먹어도 되고 나한테 제사 드리면 된다. 내가 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만 남겨두었거든.” 그렇게 안하시고 손도 대면 안 되고 먹어도 안 되고 제사도 지낼 수 없고 늘 피해 다니면서 조심해야 하는 그런 부정한 짐승을 살려두시느냐 이거죠.
왜 그러셨을 것 같아요? 하나님의 섭리에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냐 하면, 이 부정한 것이 있음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께서는 진짜 그들이 정결해 지고자 하는 노력을 하게 하시는 거죠. 부정한 짐승이 있기 때문에 그들이 진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에도 내게 순종하면서 제사를 드리나 하나님이 확인하실 수 있는 거죠. “아, 그냥 뛰어다니는 것 아무거나 잡아와.” 그러시지 않고 가서 하나하나 살펴서 하나님을 향한 순종을 주님께서 보실 수 있고, 시험하시는 거죠. 부정한 것이 있으니까 상대적으로 번성을 막 해나갈 것 아니에요? 상대적으로 부정한 짐승을 보면서 저것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부정한 짐승이라는 것을 보면서 정결함에 대한, 말하자면 관념, 개념들이 분명하게 생겨나잖아요. 이게 하나님께서 교회에 거짓 신자들을 두게 하시는 이유에요.
그러면 그 자기가 하나님을 향해서 좋은 감정을 안 가지고 있고,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지 않으면 교회에 안 나오면 되잖아요. 그런데 정말 잘 나와요. 꾸준히, 역사와 전통에 빛나며, 꾸준히. 그렇게 교회에 나와요. 교회에 나오다가 지옥으로 가는 거예요.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이에요? 그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세상 끝날 까지 그런 사람들을 교회 안에 남겨두셔요. 왜냐하면 그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교회가 정결해지게 되는 거죠.
교회도 마찬가지로 참된 신자들을, 그러한 거짓신자들을 교회 안에 남겨두심으로서 참된 신자들로 하여금 교회에 고통도 당하게 하시지만 참으로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신자들로 하여금 참과 거짓 두 개가 보이는 교회 안에 함께 있는 것을 보면서 더욱 더 사모하는 동경을 같게 하신다 이거죠. 같게 하는 거죠. 우리가 은혜가 떨어지면 죄짓고 이러는 사람들 보면 ‘아이고 나도 한번 좀 한자리 끼어볼까? 나도 옛날에 한 가닥 했는데.’ 이런 마음이 들지만 상태가 좋으면 그런 걸 이렇게 볼 때 ‘아 정말 내가 진짜 정신 차리고 살아야겠구나. 제대로 신앙생활을 안 하면 저 꼴이 되겠구나.’ 하는 각성하는 마음이 생기잖아요. 하나님이 그런 죄를 통해서 우리를 오히려 성결하게 살도록 만들어 주시는 거죠. 이래서 하나님께서 교회에는 거짓신자들을 하나님께서 항상 있게 하셔요.
2. 교회의 거룩함
그런데 이제 문제는 뭐냐 하면, ‘그런 사람들이 보이는 교회 안에 있으면, 그 사람들 때문에 교회가 거룩함이 손상되는 거 아닙니까?’ 이런 생각 하게 되잖아요. 그렇죠? ‘교회를 순결하게 해야 하는데 거기에 신앙은 고백하지만 사실상 예수께 접붙여 지지 않은 사람들이 섞여서 온갖 부도덕한 일을 하고 교회를 아프게 하고 또 죄를 짓고 이렇게 하게 되면 그러면 교회의 거룩함이 더럽혀지지 않습니까?’ 그러는데 더럽혀지지 않아요. 더럽혀지지 않아요. ‘왜 더럽혀지지 않습니까?’ 그 사람은 어차피 교회가 아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예수의 몸에 접붙여지지 않은 사람이 교회 안에 와서 많은 악을 행하고 그럴 때, 교회는 고통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참된 교회의 거룩함은 손상되지 않아요. 물론 사람들은 보면서 저 인간도 교회에 소속해 있으니까 ‘아이고 저 교회 형편없구나.’ 이렇게 말하자면, 사람들의 평가를 떨어뜨릴 위험은 있지만, 성결한 의미에서 교회의 그리스도와의 공동체적인 실제적 연합을 파괴하거나, 실제적 연합은 어저께 말씀드렸잖아요. 공동체적인 실제적 연합 말씀드렸죠? 원리적으로는 예수께 접붙여 있지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사랑과 순종으로 예수께 잘 붙어있으면, 그러면 이 실제적인데서 연합이 이루어져서 그 통로를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이 전해지고 하나님의 축복이 전해진다고 말씀을 드렸잖아요? 이런데 아무런 문제를 주지 않는다, 이 이야기죠. 절대로 교회의 거룩함이 손상되지 않는다 이거죠.
그러면 이제 여러분들에게 궁금한 것이 남겠죠. 뭐가 남느냐하면 아까 이야기 했던 제 3의 사람. 맛이 간, 교인들. ‘참 신자이긴 하지만 맛이 간, 상태가 안 좋은 교인들이 부패할 경우에는 그래서 악을 행할 경우에는 어떻게 됩니까?’ 이럴 경우에는 이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거룩성이 손상을 입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실제적인 연합이 이제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사람에 의해서 악이 행해지니까 그리스도의 교회의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연합에 흠집이 가기 시작하고 교회의 거룩함에 말하자면, 파괴가 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럼 우리가 여기서 어떤 결론에 도달할 수 있어요?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 지지 않은 사람의 매우 커다란 악도 참된 교회의 그리스와의 실제적인 연합에 손해를 끼칠 수 없지만,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신자의 부패한 신앙은 영향을 미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교회의 참된 일치나 건강을 위해서 거듭나지 않은 거짓 신자들은 책임이 작지만, 그러나 참으로 거듭나서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사람들은 책임이 아주 큰 거예요. 그래서 우리들은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으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성령의 이름 속으로 세례를 주노라” 그리고 그러면 “성령의 이름 속으로 세례를 주노라” 그러면 그 사람이 세례를 통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 속으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의 교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거듭남이요 구원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우리는 생각할 때 ‘야 신난다. 예전엔 죄의 무거운 짐을 지고 그리고 정말 그 죄에 져서 멍에를 지고 무겁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는데 예수님이 나를 위해 돌아가시고 나를 이제 믿기만 하니까 하나님이 세례 주셔서 예수께 접붙여 지게 하시고 그 예수를 통해서 삼위 하나님과 교통을 이루게 하셨으니,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이구나.’ 그게 아니라 이거에요. 그렇게 접붙여진 것은 물론 이제 옛날의 그 고통스러운 죄의 멍에에서 벗어나게 해주지만, 이렇게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의해서 한 몸이 되고 그 한 몸이 된 상태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삼위 하나님과 교제하게 되면 그 다음에 이제 그 분만 사랑하고 그 분께 순종하며 그 분이 명하신 모든 지혜와 사랑을 따라 살겠노라고 다짐하는 거예요. 이게 약속이에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 속으로 세례를 받고나면 죄의 짐은 하나님이 다 벗겨주셨는데 성경을 한권 주시는 거예요. “죄의 짐은 벗었으니, 이제 이건 죄보다 훨씬 가벼운 멍에인데 네가 이 말씀 데로 살아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놀게 하리라. 먹게 하리라. 퍼지게 하리라 그러지 아니하시고 “내가 주는 멍에는 이제까지 네가, 지고 온 멍에보다 훨씬 가볍다. 나와함께 그 멍에를 지고”, 이 멍에를 진다는 말이 예수님 시대 때의 맥락에 의하면 선생과 스승이 된다는 뜻이에요. 기술자 같은. 같이 기술을 배워가는 거죠. 같이 멍에를 지죠.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께 묶이는 거죠.
근데 그 안에 구원에 대한 이해가 아주 매우 잘못 되어 있는 거죠. 예수님 믿고 나면 그 다음에는 모든 것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이제는 고생 끝 행복시작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리고 의무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을 안 해요. 그러면 뭐냐. 내게 기쁨이 있을 동안에 예수께 봉사하고 사라지면 할 수 없는 거고.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공경이 적선적인 공경이 되는 거죠. 내가 알아서 조금 보태드리면 주님이 영광 받으시는 거고. 이런 식으로 사니까 교회에 접붙여졌는데 계속 곪은 신자로 남는 거야. 십년 째 계속 곪아. 이십 년째 계속 곪고. 좀 아무는가 하더니 물집, 진물 질질 나고, 그러는가 하더니 곪는 기운이 뿌리를 내려서 저 밑에까지 파고 들어가서 가끔 위에다가 고약을 발라도 위만 아무는 듯, 하지. 저 밑에서는 계속해서 그러는 거죠. 은혜를 받으면 겉은 아물어서 정신 차리고 다니나 그러는데 저 속이 이미 썩었어요. 너무나 오래 되었어요. 그러니까 그 속에서 계속해서 고름이 올라오는 거죠. 겉은 멀쩡해도 속에서 계속 욱신욱신 쑤시고 이런 상태로 계속 사는 거예요.
그런 시각을 가지고 한번 이렇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보세요. 교회가 이렇게 있는데 교회마다 다 작게 보면 하나하나의 몸이잖아. 그리스도의 몸이 이렇게 모였어요. 그렇게 교회가 모습이 다양할 거란 말이죠. 어떤 교회는 건강하게 잘 되서 군살 하나 없이 잘 되가지고 정말 아름다운 청년의 몸과 같이 “뭣이든지 시키시면 달려가서 할 수 있습니다.” 정말 탄탄하게 근육질로 말이지 잘 되어있는 그런 몸인데, 어떤 몸은 말이지 배만 잔뜩 나와 가지고 그냥 배가 땅에 끌릴 정도로 되어가지고 관절염이 걸려서 설설 기면서 다니는 그런 교회가 있는가 하면, 또 어떤 교회는 몸은 그래도 배도 안 나오고 제법 볼만한데 가까이 갈 수가 없어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종기가 잔뜩 나가지고 도대체 어디가 눈인지 코인지 구별이 안 갈 정도로. 그리고 고름 냄새를 풍기면서 살아요. 여러분들이 속한 교회는 어떤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생각해 보신 적 있어요?
그래서 참 신자가 부패하게 될 때 교회의 거룩함에 손상을 주면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의 많은 아픔을 주게 되는 거죠. 그래서 그렇게 살면 하나님께서 그를 은혜로 통치하시고 또 은혜로 안 되면 징계로 통치하시면서 그를 고치시기는 하지만 자신에게도 견디기 힘든 고통이니 마음의 평안이 있겠어요? 그렇게 힘들고 그다음에 교회에도 고통스럽게 하는 거죠. 그게 한번 여러분들의 모습은 어떤지 진지하게 생각을 해 보세요.
3. 교회를 버리지 않으심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제 교회가 거짓신자들이 악을 행함으로 고통을 당하고 참 신자들이 악을 행함으로 교회가 말할 수 없이 아픔을 겪고 이러면서 교회 온 몸이 상처 투성이가 되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참 놀라운 것이 말이죠. 교회가 죽는 법은 없어요. 우리의 인간의 목숨도 말이죠. 어떻게 보면 파리 목숨 같지만 참 질기거든요. 다리 같은 거 수술하는 톱으로 뚝 잘라서 꺼내도 살고, 머리도 뚜껑을 열었는데도, 뇌를 파내고 이랬는데도 또 살고, 굉장해요. 굉장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런 생명력을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셨어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그 교회를 끝까지 버리지 않으시는 거예요. 끝까지 버리지 않아요. 사람들은 다 버리고 떠나가도 주님은 홀로 그 교회에 계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들로 연합을 이루게 하시고, 그들로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게 하셔. 하나님이 교회를 많이 사랑하셔요. 인간들이 ‘내가 아니면 이 교회를 어떻게 하랴’ 그런 생각도 하지 말아야 돼. ‘누가 하겠지.’ 이건 더 나쁘지만. 누가 하겠지.
제가 옛날에 교회 건축할 때 아주 깊이 깨달은 교훈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나는 맨 처음에 감동 받았거든요. “목사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다 해 주시죠” 그러는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두 종류인데. 믿음이 너무 좋아서 자기를 다 헌신하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그게 진짜 참말이에요. “목사님 우리가 많이 헌신하지만 결국은 주님이 이루시죠.” 이런 뜻이고 자기가 안 받치고 이런 말 하고 다니는 사람들은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이 모두 하십니다. 딴 사람이 모두 합니다.” 그 얘기에요. 똑같더라고. 감동이 달라요. 누가 얘기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이 지켜 주셔요. 그걸 여러분들이 이제 볼 수 있으면 제법 성숙한 사람이에요. 눈이 뜨인 사람이에요. 눈이 뜨인 사람.
마치 여러분들이 그 고등학교 다닐 때 까지, 또 대학 다녀도 용돈 조금 주면 집에서 나올 때 발길로 문 차고 오고 막 엄마한테 심술부리고 “나 학교 안다녀 버릴 거야. 창피해.” 안다니면 누가 손핸데 이런 식으로 협박하고. 저도 참 많이 그랬거든요. 근데 이제 나중에 그러던 애가 언제 쯤 되면 ‘우리 엄마가 우리 기르느라고 얼마나 많이 고생하셨을까 ’ 엄마의 아픔을 생각하면서 가슴이 아릴 때가 있어요. 지가 시집가가지고 저보다 못된 자식 나가지고 고생을 좀 해 봐야 돼. 엄마 마음을 깨닫게 돼. 그 때에 이제 비로소 인간으로서 철이 드는 것처럼, 성도도 교회의 몸에 접붙여지긴 했는데 이게 뭐가 뭔지 모르고 까불고 다녀요 그러다가 어느 때쯤 되면 말씀을 많이 먹고 성숙해져서 그래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거예요. ‘그리스도의 몸인 이 교회가 얼마나 아플까 그러니 몸이 이렇게 아프니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실까? 내가 그 아픔의 원인이 되고 있으니 내가 얼마나 비루한 사람인가’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그때에 그 사람이 깊이 성숙하게 되는 거예요. 철이 들게 되는 거죠. 깨닫게 되는 거죠. 그러면서 진짜 그리스도 예수의 일부로서 지각이 있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거예요. 근데 제 경험에 의하면 그때까지 시간이 많이 필요하구요. 그리고 참다운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잘 가르쳐 주어야지만 성도들이 겨우 깨달을 수 있는 성숙한 경건이 바로 이 교회를 어머니의 품처럼 여기게 되는 그것이 바로 아주 성숙한 신자의 표징 중의 하나다, 라는 것이에요. 그런 것들을 생각을 많이 해야지 생각을 안 하고 살면 머리 허해서 늙어 죽을 때 까지도 자기 몸 하나 둘 교회 없이 그리고 이리저리 유리방황하면서 인생을 살아요. 그러면서도 그것이 자신의 영혼에 얼마나 고통을 주고 부끄러운 것인가를 모르고 그리고 떠돌이처럼 그렇게 살아간다 이거죠. 그것은 정말 실패한 인생을 사는 지름길이에요. 지름길이에요. 정말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것이에요.
C. 이러한 경륜적 지혜
그러면 이제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그 교회 안에 거짓 신자들을 속히 회심시켜서 돌아오게 하시고, 정신 못 차리는 신자들은 빨리 은혜를 주시고 은혜를 못 받으면 한차례 때려서 (나는 빼고) 그렇게 해주시지 왜 하나님이 그렇게 두고만 보시고 그래서 거짓신자들이 계속 교회를 찌르고 다니고 부패한 신자들이 계속 곪은 채로 붙어있게 만드시고, 떨어지지도 않고 몸에 붙어 있어서, 그래서 옆의 사람도 아프게 하고 고름냄새 풍겨서 결국은 전체적으로 교회의 품격이 떨어지게 하고 예수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연합에서도 멀어지게 만들고 왜 이렇게 되도록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실까? 왜 하나님께서 개입하지 않으실까 이런 생각 들 때가 있거든요 그죠? 자기가 잘 못 살 때에는 그런 생각이 잘 안 들죠. ‘신앙생활을 잘 안하는 사람을 정신 차리게, 맞아야 정신을 차리는데 좀 때려 주시지’, 그런 생각을 잘 안하죠. 자기가 신앙생활을 잘 할 때도 또 그런 생각을 안 해. 왜냐 은혜가 너무 충만하니까. 그러니까 어떤 때 그런 생각을 하냐 하면 상태가 안 좋은데 자신은 좋다고 착각할 때, 그때에 그렇게 생각을 하는 거죠. 하나님이 그렇게 안하시거든요. 하나님 오래 참으시면서 그러면서 교회의 몸에, 보이는 교회에 가짜 신자와 곪은 신자가 섞여있게 하셔요. 섞여 있게. 그 왜 그러실까? 하나님이 왜 그러실까? 여기에 하나님의 아주 깊은 그 경륜이 담겨 있어요. 지혜가 있어요.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교회에 이러한 모습, 가짜신가가 섞여서 보이는 교회가 찔림을 당하고, 또 참된 신자 중에 부패한 자가 있어서 곪은 상처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이 아파하고 이 과정을, 이런 모든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참된 신자들에게 자기가 자기 안에 있는 그 거짓과 불의를 보게 하시는 거예요. 불의를, 거짓과 불의를 보게 하시는 거예요.
잘 보세요. 교회 안에 교회가 순전하게 하나님을, 교회가 그리스도 예수에 의해서 구원 받았잖아요. 교회가 순전하게 하나님께 경배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그 사랑을 가지고 사람을 향해 그 사랑을 나타내고 그런 까리따스 곧 지순의 사랑 속에서 살아야 될 존재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안 살아요. 그러면서 교회가 그 속에 온갖 더러운 것들을 다 가지고 있는 거지. 그래서 냄새나는 거지. 교회는 성결해 지기를 바라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병원하고 비슷한 곳이에요. 사람을 고치기는 하지만 그런 죄인들이 모였기 때문에 병균이 많은 병원과 같이, 그런 곳이 바로 교회에요. 그런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그것을 자기가 신앙심이 없이 그걸 들여 다 보게 되면 짜증이 나는 집단이에요. 그리고 무슨 생각을 하냐하면 ‘아이 씨 골치 아픈데 한번 옮겨. 두 번 옮겼는데 세 번 못 옮기겠어?’ 그리고 옮길 생각을 한다 이거야. 물론 이제 하나님이 때가되면 이사를 간다든지, 직장을 옮긴다든지 여러 가지 이유로 해서 하나님이 목사도 교회를 옮기는데 신자들이 뭐 왜 교회를 못 옮기겠어요? 그렇죠? 문제는 교회에 상처를 내지 않고 첫째는 상처를 내지 않고 그리고 일체의 온유함과 진지함으로 주님 앞에 인도를 구하며 그러면서 교회를 옮기는 경우에는 문제가 덜 되는데 그러질 않고 ‘에이 씨 골치 아파. 갈아보자.’ 그러고 이 교회에서 받았던 스트레스가 뭔가 생각하면서, ‘아 곪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구나. 안 곪은 교회 어디 있나’, 뒤지는데, 그 눈에 그런 것이 보이겠어요? 이미 벌써 이렇게 상태가 안 좋아서 상한 눈이기 때문에 분별이 떨어지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분별해 낼 수가 없어요. 그래서 보암직하고 먹음직한 교회에 가는 거예요.
그 교회에 접붙여지는 순간에 그 교회는 고통이죠. 기도 제목이죠. 이 사람은 다른 사람들 보고 썩었다 그러고 떠났지만, 다름 사람보고 썩었다 그러고 이 사람이, 그들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그 사람 자신이 이미 거기에 감염 되서 같이 썩은 사람이에요. 썩은 것의 종류는 틀릴 수 있어요, 같이 썩은 사람이에요. 그 사람이 가서 저 교회에 가서 털썩 붙었어요. 그 교회는 그 순간부터 아파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본인은 그렇게 생각안하죠. 그래서 스펄젼 목사님한테 어느 교인이 찾아와서 그랬데요. “목사님 요즘 교회 정말 썩었습니다. 저 정말 순결한 신앙생활 하고 싶은데 그런 좋은 교회 있으면 좀 소개시켜 주십시오.” 스펄젼 목사님이 “그런 교회는 없는데 혹시 발견하거든 그 교회는 절대 가지 마십시오.” “왜요?” “당신이 가면 즉시 안 그렇게 될 겁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그런 식의 사고방식을 캐 들어 가 보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자기 사랑이에요. 그리스도 예수의 몸인 교회가 아픔을 당하고 있는 것보다, 자기가 아픔을 당하는 것을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거죠.
보세요. 인간적으로 충분히 이해가 가거든요. 왜냐하면 교회에 속한 성도들만 잘못하는 것이 아니라 목회자도 잘못 할 수 있고, 또 목회자만이 아니라, 교회를 이끌어 가는 사람들이 모두 한 덩어리가 되어서 잘못 할 수도 있어요. 또 그 사람들뿐만 아니라, 교회에 전체적으로 자기 빼놓고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갈 수 있어요. 물론 그렇죠. 그때에 그 신자는 많은 고통을 당하게 되죠. 처음부터 그 사람이 그런 상황에 대해서 열 받고 복수심에 불타고 ‘다 때려 치고 싶다.’ 이런 생각을 갖지는 않았겠죠. 그 사람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가 가죠. 왜냐하면 정말 교회답지 않은 교회도 많고 그리고 신자들답지 않은 신자도 많기 때문에 그런 고통을 받는다는 건 현실적으로 인정이 되는 거죠.
문제는 뭐냐 하면 그런 현실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마지막까지 이 사람의 마음속에 뭐가 있어야 되냐 하면, 잘못하는 그 교회의 일꾼들 신자들, 목회자들, 이렇게 벌써 개별적인 존재로 떠오르기 시작했다는 것 자체가 이 사람의 고민이 까리타스 안에서 일어나는 고민이 아니라고 하는 거죠. 교회는 그런 식으로 다루어 질 수가 없는 거라는 거죠. 왜냐하면 그것이 그렇게 다가오면 안 되고. 그 속에 잘못된 사람들이 섞여 있어도, 결국은 그 사람들과 자신 때문에 예수의 몸 전체가 고통을 받고 있다는, 몸의 고통이 전해져 와야 되거든요. 몸의 고통이 전해질 때 그것이 몸 전체의 고통으로 전해지면서 그 몸을 위하여야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니라, 몸을 아프게 한 어느 지체에 대한 이글거리는 복수심과 분노에 불타는 것은 이것은 까리타스의 사랑이 아니에요. 혈기에요.
여러분 한번 보세요. 아주 오늘 설교를 준비하다가 기가 막힌 비유가 떠올랐어요. 여러분이 교회에서 그렇게 되는 경우 많이 있잖아요. 처음에는 교회를 염려해. 그런데 교회가 어려움에 처하면서 사람들의 잘못과 부패들이 보이는 거예요. 그때는 시간이 지나면서 자기가 보통 올바르게 사유하지 않으며, 올바르게 사고하고 하나님 의지하지 않으며 처음에는 교회를 향한 염려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렇게 교회를 아프게 하는 사람들에 대한 미움과 복수심에 불타게 되는 거죠. 그때에는 몸을 향한 사랑이 사라진 뒤에요. 다시 한 번 반복할게요. 맨 처음에는 교회를 염려하는데 교회를 아프게 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어요. 그러면서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을 미워하기 시작하면 이미 그들을 미워하게 된 때에는 몸 전체를 향한 사랑은 사라진 때에요, 왜 그러냐 하면, 예수의 몸인 교회에 대한 사랑은 까리타스의 사랑이에요. 이 사랑은 교통적인 성격이 있어서 하나님과 사람을 동시에 사랑하게 하는 사랑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을 이미 미워하고 분노하기 시작하면 처음에는 어떻게 시작되었든지 간에 그 순간에는 이미 까리타스의 사랑이 없는 거야. 이 부분이 아주 미묘한 부분이에요. 이 지점에서 굉장히 교회를 사랑하던 많은 성도들이 넘어져요. 그리고 결국은 사단의 도구가 되는 경우가 많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옳지 않다, 라고 하는 것을 제가 비유를 통해 들려줄게요. 여러분들이 이렇게 살아요. 여러분도 몸이고 교회도 몸이잖아. 그런데 상처를 입는 다든지 해가지고 곪고 상하고 문제가 생겨요. 심지어는 몸이 이상해가지고 가서 엑스레이 찍었더니 암이라고 그러는 거예요. 그때에 여러분들이 만약에 간암에 걸려서 지금 생명이 위독하다고 하면 간에 대한 막 미움이 생겨요? ‘이놈의 간 막 후벼 파버려? 잘라버려? 이 나쁜 자식.’ 이런 생각이 드느냐 이거에요. 가다가 덜커덕 하고 다리가 삐었어. 골절이 되가지고 부러져서 몸을 못 움직이겠는 거야. 그때에 여러분 어떤 생각이 들어요? ‘이 병신 같은 다리 저거. 아니 똑바로 걸어야지 왜 너 때문에 나까지 고생하잖아’ 이러면서 몽둥이를 들고 그 부러진 다리를 패느냐고요. 자기 몸은 그렇게 안 하잖아. 뿌리지면 어떻게 돼? 어휴 큰일 났지. 그러고 분명히 머리로는 직장에 가있고, 지금 손으로는 글을 써야 되는데 다 쉬면서 온몸의 기관이 다리에 집중하는 거예요. 그리고 이 다리를 끌고 데려다 주는 사람이 없으면 자기가 목발을 집고라도 병원에 가는 거예요. 돈 없으면 꾸어서라도 병원에 가가지고 치료를 하는 거예요. 언제까지? 다 나을 때 까지.
그래서 처음의 동기는 사랑하는 것일 수 있는데 이게 사단의 계교가 시간이 지나면서 인간을 미워하고 물고 뜯게 만드는 거예요. 시작은 참 좋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성령으로 시작한 일이 육체로 번지는 거예요. 결국은 마지막에 인간을 향한 독한 미움. 그런 것들이 이 속에서 생겨나게 되는 거예요. 결국은 까리타스의 사랑이 사라지는 거예요. 그리고 복수심이 남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는 말할 수 없이 상처를 받게 되는 거예요. 쉽게 이야기 하면 처음에 곪은 상처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걸 짜본다고 까불다가 오염이 되가지고 거의 죽음의 상태에 이르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그것은 몸을 다루듯이 교회를 다루어야 되는데 푸주간의 고기를 다루는 것처럼 교회의 몸을 다루는 거죠. 그렇게 되면 안 되는 거죠. 이 생명체이기 때문에 그렇게 다루면 안 돼요. 이 부분은 많은 이야기가 있는데 이정도로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그래서 어쨌든 그런 식으로 다루면 안 된다, 라는 거죠. 까리따스의 사랑이 아니에요. 그러면 뭐냐 하면, 마지막 까지도 잃어버리지 말아야 될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모든 사람이 잘못 해도 주님은 교회를 지키신다. 반드시. 필요하면 하나님이 그 사람 데려가셔요. 정말, 정말 안 되겠으면 하나님이 생명을 거두어 가셔요. 그래서라도 하나님이 일을 평정하게 하시는 거죠. 제가 아는 목사님 한분이 있는데 참 신실하신 분인데 청빙을 받아서 교회를 가셨는데 너무너무 힘들어 하셨어요. 장로님들이 여러분 계신데 그 중에 한 장로님이 늘 선두에 서서 교회를 힘들게 하는 거예요. 목사님이 안식년이 되어서 6개월인가 얼마를 쉬고 오셨는데 늘 목회하면서 그 장로님 때문에 힘들어 하고 몇 번을 교회를 그만두려고 마음을 먹었고, 목사님 만 그러는 게 아니라 많은 힘없는 성도들이 그렇게 고통을 당하는데, 이 장로님이 완전히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냐 하면, 육 개월 목사님이 안식년 하는 동안, 하나님이 이 장로님을 지옥 문 앞까지 데려갔다 나오신 거예요. 죽음 그 끝에까지 데려갔다 나오신 거예요. 그래서 이분이 완전히 생각이 달라진 거예요. ‘아 내가 악하게 살았구나. 내가 꼭 교회에서 잘못 했다기보다도 내가 악하게 살았구나. 나의 목숨은 주님의 손끝에 있구나. 이제 내가 남은 생에를 어떻게 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기쁘게 살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신 거예요. 이 변화가 온 것이란 말이지.
하나님이 일일이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하나님이 교회를 지켜주셔요. 그 점에 있어서 우리가 모든 힘을 다하지만 최종적으로는 그 선을 넘지 않고 나머지를 주님의 손에 맡겨 드려야 되요. 그리고 깊이 기도하고 그 그리스도의 몸에 아픔이 진짜 처음처럼, 몸의 아픔으로 느껴지고 그리고 ‘내가 바로 그 아픔에 그 교회를 그렇게 아프게 했던 내가 바로 그 상처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그 교회에 있는 아픔들을 자기 몸에 난 아픔처럼 객관화 할 수 없어야 돼, 여러분 객관화 할 수 없어야 돼. “너 인간이 어떻게 그러냐.” 이건 객관화야. 그런데 자기 간암 걸린 것을 보고 “에이 씨 딴 기관은 다 멀쩡한데 넌 바보같이 뭘 처먹어서. 확 잘라 버릴까.” 그렇게 안하잖아요. “그 더러운 놈의 간. 붙어가지고 말이지” 안 그러잖아요. 객관화 못 하잖아요. 결국은 그 간과 함께 아파하다가 그 간과 함께 죽는 거예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이 교회를 바라보는 것이, 이게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있는 지체들의 말하자면 성화의 모습이에요.
그러니까 우리야 늘 부족하잖아요. 그렇죠? 그러니까 주님께서 우리 모두를 바르게 해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그래서 한 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 없이 주님을 의지하고, 기도하고, 주님의 교회를 아파하고 이렇게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말이죠. 뭘 배우게 되느냐 하면. 그렇게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일하고 너무 비슷한 거야. 교회 안에는 아무리 썩었어도, 교회 안의 그 자리가 하나님이 세워주신 자리라고 생각하고 충성하는 사람들이 꼭 있어요. 하나도 없는 교회는 없어요. 정말 놀라워요. 어쩜 그런지 몰라. 심지어는 어느 정도냐 하면. 예배라고 할 수없는 예배를 드려요. 나 진짜 목격했어요. 온 교인이 다 자. 정말 자. 그런데 교회가 필요하다고 그러면 말씀을 듣고 눈이 초롱초롱 살아있는 교회들 보다 더 많이 헌신해. 사람들은 그 교회를 보면서 ‘그건 하나님을 향한 헌신이 아닐 거야’ 그러는데 그렇지 않아요. 그렇지 않아요. 진리의 말씀 조금 밖에 못 깨닫고 예배 시간에 조는 사람 많아도 그 속에는 진짜 그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생각하고 진리는 많이 모르지만 조끔 알고 있는 진리에 자기를 철저히 합치시키기 위해서 아파하며 기도하는 교인이 있게 마련이에요. 물론 그런다고 해서 예배 시간에 많은 교인들이 조는 게 정당화 되지는 않지만, 그러나 그렇게 함부로 생각하면 안 된다 이거죠.
그래서 결국은 뭐냐 하면 그 속에서 그 교회의 병든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영혼을 발견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교회를 깊이 사랑하고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충만해지면 교회의 병든 모습을 볼 때 마음이 에스라 같이 되는 거예요. 에스라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범죄하고 타락했다 그랬을 때 칼 빼어들고 나온 것이 아니라, 비느하스처럼 칼 빼어들고 나온 것이 아니라, 성전으로 달려가서, 들어가지도 못하고 거기 문턱에 엎드려서 하나님 앞에 한없이 울었어요. 왜 그랬냐 하면 ‘하나님 너무 죄송합니다.’ 자기의 죄악인 것처럼 토설하고 아파하는 거야. 그거에요. 까리타스의 사랑으로 가득하게 되면 교회가 부패하고 지체들이 막 잘못하고 그리고 옳지 않은 일이 일어나서 막 사람들이 힘들어 할 때 그때에 그것이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생각을 하는 거야. 그래서 ‘이것은 저 인간 때문이다, 저 자식 때문이다’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몸에서 상처가 일어났을 때 그런 식으로 생각을 안 하는 것처럼, ‘이걸 어떻게 하나, 나도 너무 아프다. 이 몸이 아프지 말아야 될 텐데' 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아픔은 자기가 당하고, 지체들은 지켜주고 자기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수치를 당하고 지체들의 명예는 보전하고, 자기가 쓰라린 고난의 아픔을 당하고 지체들은 아프지 않게끔 보호하고, 자기가 상처를 많이 받고 짓이겨지는 한이 있더라도, 교회는 상하지 않도록 자기를 다 던져서 보호하는 거예요. 왜? 왜 그래야 되요? 왜 그래야 돼? 예수의 몸이잖아. 우리는 우리 몸이고, 예수의 몸이잖아. 우리가 상처를 받고 고통을 받고 그리스도의 몸이 평안하고 안녕을 누리는 그것이 이 교회의 모습이잖아요.
그렇게 할 때에 신자의 삶은 막 견디기 힘들게 고통스럽죠. 이루 말할 수도 없죠. 그런 속에서 아파하는 것,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혹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그렇게 중보자가 된 것 같이 기도해 보신 적 있으세요? 그때에는 마치 깊이 들어가면 어느 정도냐 하면, 나는 그냥 껍데기 일 뿐이고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셔서 기도하시고 가신다고. 기도가 끝나고 나면 탈진하는 거야. 저 사람이 죄를 지었는데 내가 용서를 비는 거예요. ‘하나님 얼마나 아프세요. 저 사람이 죄를 지었는데 얼마나 아프세요. 제가 잘못했거든요. 용서해 주세요.’ 저 사람이 빌어야할 기도를 나를 통해서 다 토설하게 하는 거야. 그때에는 그 기도를 받는 사람을 향한 어떠한 미움도 존재하지 않아요. 그게 하나님의 마음이에요. 그렇게 하면서 깊이 기도를 드리는 것, 그것이 중보기도의 정수에요. 그러면서 뼈저리게 깊이 기도하게 하시는 거죠.
사실은 그런 걸 가끔 경험하지만, 예수님의 마음은 항상 그 마음으로 교회에 모든 지체들 심지어는 지금 상태가 안 좋아서 허튼 짓하며 교회에 계속 고통을 주는 망나니와 같은 부패한 신자들도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하셔요. 그것을 바로 지혜를 가지고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될지를 가르치지만 하나님의 지혜는 무엇에 의해서 행사가 된다고 그랬죠? 사랑에 의해서. 그렇지 그렇게 행사를 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예수의 모습을 본받은 사람의 신앙생활의 모습이고, 그런 속에서 자기는 많이 고통을 당해요 그래서 사도 바울도 고백을 했어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교회를 위해 나의 육체에 채우노라. 교회에 나의 육체에 채우는 많은 고난이 교회 때문이고, 그리고 그 고난은 예수님이 이 땅에 계셨더라면 당하셨을 그 남은 고난이다. 그러면서 자기가 당하는 모든 고난이 공동체를 위한 고난이라는 것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어려운 말로하면 성례전 적으로 그 고난을 통해서 예수께 자기 자신을 봉헌하는 거예요. 그래서 사회의 사람들이 모인 집단에서 하던 것과 똑같은 방식을 가지고 교회에서 하면 안 되는 거예요. 여기는 전혀 다른 질서가 존재는 곳이란 말이죠.
D. 모두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여김 (도투스 크리스투스)
그러면 이제 오늘 우리가 어저께부터 배우는 교리가 소위 토투스 크리스토스 라고 해서 라틴어인데 ‘모두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여김’ 그런 뜻이거든요. 좀 길어요. 그러면 그게 진정한 의미에서 그 사람이 예수의 몸일 수 있어요? 거듭나지도 않았죠. 때로는 교회를 아프게 하죠. 아까 이야기 했듯이 사람을 향해서도 경계가 없고 하나님을 향해서도 경계가 없어서, 지 멋대로 넘나드는 이런 사람을 예수의 몸이라고 생각할 수 있느냐 이거죠. 그죠?
이 사람들을 모두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여기고 사랑하여야 할 이유가 둘이 있는데, 하나는 뭐냐 하면 상태가 안 좋은 신자는 비록 상태가 안 좋지만 예수의 몸이기 때문에 또 예수의 몸에 접붙여지지 못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택하신 양일 수 있어요. 예수님이 뭐라 그러냐고 하면 “내게는 우리 안에 들지 아니한 또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서 그들도 인도하여야 할 터이다” 요한복음 10장에서 말씀하시죠, 우리 안에 아직 안 들어와 있지만 그러나 예수님이 양이라고 이미 부르시는 거죠, 그런데 그 사람이 세상에 있어도 우리들이 가서 선교할 텐데 그 사람이 교회에 오게 되었으니까 사실은 그 자체가 우리에게는 말할 수 없는 선물이죠. 우리가 선교를 나갈 때에 그 사람들에게 좋은 대접, 기독교에 대한 예의바른 태도, 교회의 질서에 대한 엄격한 존중, 목회자에 대한 겸허함, 성도에 대한 예의, 이런 것 우리가 기대하면서 전도하러 나가요? 그래 아파트에 전도하러 갔는데 “잡상인 출입금지인데 여길 왜 들어와요?” 그러면 가만히 있어? 머리채를 잡아 댕겨가지고 땅에다 한번 매치고 오지. 우리는 그런 걸 기대하지 않는다 이거죠. 그러면 ‘당연한 일이 일어났구나.’ 그런데 어떤 사람이 “전 예수를 안 믿지만 들어오세요. 이 추운 날에 그러면서 문을 열고 두 손을 잡으면서 아이고 이 손봐 추워서 어떡해. 나는 예수는 안 믿지만 들어오세요. 내가 하여튼 믿을 마음이 있으니까 들어와 보세요.” 이러면 ‘어이구 뭐 제대로 된 인간이 있었구먼.’ 우리 그렇게 생각한다 이거야, ‘워째, 이런 일이’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안 믿는 사람이 교회에 와서 불신자고 거짓신자라고 하더라도 가끔 ‘곤조’ 부리고 그러면 ‘어이구 당연한 일이 일어났구먼.’ 이러고, 얌전하게 교회 다니면 ‘어이구 웬일이셔’ 이렇게 하면서 사랑해 주어야지. 선교지가 교회 속으로 들어온 것이거든. 그런 생각을 하면 아주 편한 거죠 사랑하고 그렇게 하면서 이제 그가 진정으로 변화되고 새로워질 날을 기대하는 거죠. 그대는 다 와서 미안하다고 그런다고. 그때는 자기가 정말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깨닫는 거죠. 그런 거예요.
II. 교회의 확장, 사랑의 확장
그러다가 보니까 이제 어떻게 되었냐 하면, 신자의 영혼과 마음이 이제 강조가 되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아 죄송합니다. 네. 이제 그렇게 하다 보니까 그 다음에 어떻게 되느냐하면 이렇게 해서 사랑하는 것이 바로 어저께 이야기했던 토투스 크리스토스, 보이는 교회 전체를 예수의 몸으로 받아들이는 그런 거란 말이죠. 그다음에 무얼 우리들이 생각하느냐 하면 교회가 확장된다는 것이 뭐냐. 쉽게 이야기하면 교회가 성장한다는 것이 뭐냐? 우리가 교회가 성장한다고 하면 대개 이런 요인들을 꼽잖아요. 예를 들자면 우선 교인이 많이 모이는 것, 교인이 계속 줄어드는데 성장한다고 애기하는 사람은 없단 말이지. 교인이 계속 늘어나는 것. 성장이죠. 그렇죠? 하꼬방 같이 조그만데 복닥복닥한데 5부, 6부 예배드리다가 큼지막한 예배당을 지어서 가는 것도 성장이라고 이야기를 하죠. 또 뿐만 아니라 성도들은 조금밖에 안 늘어났는데 헌금이 계속 늘어나서, 그것도 성장이라고 이야기하죠. 또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정신 차리지 않고 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신앙생활을 해서 또 어쨌든 가정도 평안하고 이렇게 다된다. 우리들이 이런 것들을 성장이라고 그러는 거죠. 전자의 세 가지는 양적성장이라고 그러고, 후자는 질적 성장이라고 그러잖아요. 사실 이런 구분자체가 뭐 별 그렇게 특별한 의미가 없죠. 왜냐하면 교회의 영향력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수가 영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들이 모두 좋은 신자라는 전제조건이에요. 거짓신자나 상태가 안 좋은 신자가 많이 섞여있게 되면 늘어날수록 계속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선교의 걸림돌이 되는 거죠. 무슨 이야기인지 알죠. 여러분들 이렇게 보다가 ‘아휴 저 사람은 진짜 주 예수 믿는 다고 말을 안 하고 다녔으면 굉장히 좋겠다.’ 말로는 못하지마는 사실 그런 생각 우리가 하게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잖아요. 네? 여러분 자신을 포함해서. 있잖아요, 그죠? 그렇게 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러면 진정한 의미의 성장이란 것. 교회의 확장이라는 것이 뭐냐? 교회의 진정한 확장은 참된 의미의 선교에요. 그 복음화 되는 것이 교회의 진정한 확장인데 교회의 확장이라고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사랑의 확장이에요. 사랑의 확장. 사랑의 확장 이라는 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이제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세상을 재창조하시기 위해서 교회라고 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택하셔셔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교회를 태어나게 하시잖아요. 종자씨로 택하신 거죠. 이 씨를 사방에 퍼트려서 그래서 이 세상을 회복된 세상으로 만들고 싶어 하시는 거예요 그렇게 만들고 싶어 하시는데 이제 그렇게 만들고 싶어 하시는데 문제는 종자씨가 신통치를 않아. 그럼 갖다 뿌려 놓으면 이게 싹이 나고 열매를 맺어야 될 텐데 그게 안 되는 거죠. 그러니까 이제 씨가 문제가 되는 거죠. 만약에 씨가 좋아진다면 교회가 모판이 되어서 모를 다 찢어서 그래서 이제 모내기를 하게 되면 몇 달 지나고 나면 그 벼로 가득한 논밭이 되고 가을이 되면 막 누렇게 벼가 익어서 황금물결이 출렁거리는 그런 밭이 되죠. 모판은 요만한 것 하나였는데 그걸 가지고 다 찢어서 모를 내니까 들판 전체가 누런 곡식이 출렁거리는 그런 말하자면 황금물결의 논이 된 거에요. 그런 것처럼 세상을 하나님께서 만들고 싶어 하시는 거거든요.
그러면 그렇게 된 세상이라고 하는 것이 도대체 뭐냐? 결국은 뭐냐 하면 하나님 안 믿는 사람들은 세상의 사랑의 질서를 따라서 일이 이루어져 있거든요. 세상들이 생각하는 건 거의 천편일률적이고 유사해요.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사람이 각각 조금씩은 틀리지만 자기사랑에 말뚝을 박고 원을 치면서 살기 때문에 자신의 행복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사는 거예요. 예수 믿는 사람들은 틀리거든요. 하나님 사랑에 중심 말뚝을 박고 사는 거죠. 그러니까 신자가 부패하거나 거짓신자라서 그렇지, 참되고 진실한 신자는 대개 생각하는 것이 비슷한 거죠. 여러분 뭐 얼마나 비슷해요. 여러분들 중에 어떤 사람은 ‘돈 많이 벌어서 떵떵 거리고 살아야겠다.’ 아니면 ‘내가 지금은 성화되는 시간이니까 좀 참았다가 성화가 어느 정도 완성되면 내 가서 한번 타락해야 되겠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없단 말이죠. 모두가 비슷하게 생각하면서 원을 그리면서 ‘어떡하면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것인가.’ 이렇게 생각하면 살아가게 되는 거죠.
A. 보이는 교회의 경험
그러니까 문제는 뭐냐 하면 보이는 교회는 독특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거죠. 보이는 교회라는 것은 지상에 있는 교회에요. 둘로 나눌 수 있는데 사도들의 경우와 우리들의 경우로 나눌 수 있어요. 사도들의 경우에는 교회가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보이는 거죠. 예수님은 살아계시니까 예수님은 눈으로 보고 교회는 믿음으로 봤어요. 그러니까 사도들도 예수님이 부활 승천 하신 다음에 성령이 임하셔서 세워질 그 교회에 맛을 예수님을 통해서 본 거죠. 그것이 제자들에게는 교회를 어떻게 교회되게 이끌어 갈 것인가에 대한 기본적인 원천이 된 거죠.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그 택하신 의도가 일하게 하시려고 먼저 부르신 것이 아니라, 부르신 것은 함께 있게 하기위해서 부르신 거죠. 그들을 불러서 함께 있게 하고 복음도 전하게 하고 이중적인 목적을 가지고 제자들을 부르신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항상 수많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다니신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 앞에는 종종 나타 나셨지만, 항상 열 두 제자와 함께 따로 다니셨어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그 열 두 제자 안에 예수님이 계심으로 그 속에서 이미 교회의 모형을 이루면서 어떻게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사랑을 받고 그 가르침을 따라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고 나누고 살아야 되는가 하는 것을 아주 몸소 체험하도록 그 예수님께서 시범을 보여주신 거예요.
그런 정신을 성령오신다음에 교회가 세워졌을 때 그대로 구현해 간 거예요. 사도들이.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고 그다음에 교회는 안보여요. 그러니까 어떡하죠? 예수 그리스도는 보고, 그 다음에 교회는 믿어야 됐어요. 믿음으로 볼 수 있었다 이거죠. 근데 우리의 경우는 틀려 이제. 예수님이 안 계셔요. 부활 승천하시고 그리고 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셨어요. 어디? 예수님이 여기 계셔요 지금. 사람들 밖에 없는 거죠. 그런데 믿음이 있는 사람 모두 진리를 깨닫고 새해를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여러분의 마음을 보면서 여러분의 마음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우리 모두 봐요. 그러니까 어떻게 되는 거죠? 눈으로 교회를 보고,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으로 보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중요해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도들에게 자기를 보여주실 때는 흠이 없고 완전한 모습이었어요. 그러니까 사도들이 그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지성의 한계는 있지만 어쨌든 성령 오신 다음에 예수님이 자신들과 함께 하실 때 그 교회의 모습을 성령오신 다음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그런 교회를 만들고 싶어 했던 거죠. 그런데 우리는 이제 그렇게 안 되고 이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잘 의식을 못해. 그런데 이 무리를 보고 아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이 무리를 보고 예수님을 알게 되는데 이런 무리들인 교회를 보여주신 예수님은 완벽한 분이셨는데, 이 예수님을 보여줄 이 교회는 현실적으로 불완전한 교회에요. 그러니까 거기서 뭐가 나타나느냐 하면 이 사람들이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아서 똑바로 살면 사람들이 이 교회를 보면서 빨리 생각하고 제대로 똑바로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그런데 이게 상태가 안 좋은 신자들이 많고 거짓신자들이 많이 속해 있어서 눈으로 보이는 교회가 자꾸 이렇게 부패하고 곪고 냄새나고 상하고 절뚝거리고 뭐 이러는 그 다음에 뭐 장애가 일어나가지고 괜히 손이 머리를 줘 박고 머리에서 피가 흐르고 발이 괜히 그 배를, 발이 배를 못 차지 자기가. 발이 괜히 등을 차서, 찰 수 있을 것 같아. 기계체조 하는 사람. 차서 등뼈를 부러뜨리고, 그러면서 이제 마치 망가진 로봇처럼 이런 것을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이 생각이 안 되는 거죠. 생각이 안 돼.
이게 몸이 정상적으로 일치 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여러분은 뭘 생각하겠어요. 뇌기능에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생각한다든지 이렇게 생각할거 아니에요. 그 생각 없이 아무렇게나 행동하는 사람보고 가끔 그러잖아. “너 뇌가 없냐?” 그러잖아. 심지어는 그렇게 엉터리 같은 교회를 보면서 “없네. 예수님 없네. 예수님 믿고 예수님께 접붙여졌다는 사람들이 사는데 일관성도 없고 지들끼리 대판거리 물고 뜯고 싸우고 법정에 고소하고 말이지. 치받아 가지고 막 그냥하고, 그렇게 하면서 욕지거리 하고, 심지어는 주먹이 오가고 말이지. 돌아다니면서 막 비방하고 이러는데 없네. 없네. 뭐 이 사람들 모인 데가 우리 모인 데하고 뭐가 틀린가? 없네, 없어.” 있는데 그리고 막 떠들면, 없어. 아주 확신을 갖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전도하다보면 어려운 사람들이 불교신자, 다른 종교 믿는 사람보다 더 어려운 게 예수 믿다가 사람들 때문에 상처를 받은 사람들. 그 사람들 전도하기 너무 힘들어요. 그 사람들은 뭐냐 하면 없다고 결론을 내린 사람들이에요. 심지어는 어떤 사람은 그래요. 계셔도 안 믿겠다고. 그럼 굉장히 선교가 어려워지는 거죠.
B. 교회의 사명
그래서 예수님은 안보이고 교회는 보이는 거죠 보이는 교회를 통해서 예수님을 보여주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삼위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 그래서 그 삼위 하나님을 보고 와서 그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그 삼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게 인간의 본분이거든. 첫 번 단추서부터 안 끼어지는 거죠. 그러면 그 교회가 하나님이 자기들을 부르신 그 교회의 사명을 감당을 못하는 거죠. 그러면 거기에 접붙여져 있는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자기를 구원해낸 하나님의 뜻대로 못살게 되는 거죠. 그러니 그 하나님의 자기를 구원하신 뜻대로 살아야지만 영혼의 안식이 있고 인간의 행복이 있고, 거기에 인간으로 태어나 보람이 있는데 그렇게 살지를 않으니까 내적으로는 수많은 갈등과 죄에서 벗어날 수 없고 외적으로는 하나님을 고백을 하면서도 실제의 삶에 있어서는 불의를 저지르고 악하게 살아가게 되는 거죠. 그래서 결국은 예수를 믿은 보람이 거의 없는 그런 핍절한 삶을 살게 되는 거죠.
C. 보여 주어야 할 자신
1. 예수님께서 보여주심의 모본이 되심
그러니 이 모든 것이 교회의 상태와 맞물려 있다고 생각하니까 이게 얼마나 우리에게 중요한 숙제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면 교회가 보여 주어야 할 자신이, 어떤 모습을 보여줄 때 그 보여주는 교회를 통해서 보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계심을 믿을 수 있을까, 사람들이. 또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은 불신자들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될 수 있을까 그거였거든요. 첫째는 뭐냐 하면 까리따스로 충만한 자기 자신을 보여 주어야 하는 거죠. 까리따스로. 까리따스는 이제 지순의 사랑이잖아요. 지순의 사랑을 그 보여주는 것이죠. 하나님이 뭐든지 하실 수 있는 분이니까 자기 아들을 굳이 사람의 몸을 입어 이 세상에 내려 보내지 않으시고도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마음먹었다면 구원 하실 수 있었을 것 아니에요. 그죠? 그런데 하나님이 친히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내려 보내셨어요. 또 한 번 양보해서 그게 아니라 예수님이 반드시 사람의 몸을 입고 죽으셔야 했다고 결론을 내린다고 하더라도 내려오시자마자 말구유로 가지 마시고 바로 십자가로 가시면 되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안하시고 33년이라는 긴 생애 동안에 멸시와 유혹을 당하면서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으시면서 33년을 살게 하셨어요. 솔직히 33년 예수님 사시는 동안에 예수님이 한번이나 당신 자신의 존재에 어울리는 대접을 받아 본 적이 있어요? 그런 보람이 있는 생애를 사신 적이 있어요? 가는 곳마다 말씀을 전하면 반역하는 자들이 생겨나고, 핍박하는 자들이 생겨나고 생명주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 죽일 궁리하는 사람들이 가득했잖아요. 그런데도 사람의 몸을 입으셔서 이 세상에 내려 보내신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알아요? 그게 우리로 하여금 사람의 몸을 입은 예수님으로 실제 우리와 똑같은 세상에서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고 사시게 하심으로서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가지고 있다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주님이 본보기가 되도록 우리에게 보여주신 거예요. 그것을 이 책속에 길이 담으시고 그것을 몸소 본 사람들이 교회에 터를 놓게 하신 거예요. 사도들이에요. 그 터를 놓게 하신 거예요. 그래서 사도의 자격은 예수님의 생애를 직접 목격한 사람이어야 됐어. 그렇게 하게 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에게 떠오르는 거죠. 만약에 예수님,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을 그런 식으로 보내지 않으셨다면 우린 그런 생각 못하는 거죠. 우리가 상태가 좀 안 좋을 때도 우리가 정신이 들게 되면 그런 생각하죠. 지금 내 자리에 예수님이 계셨더라면 이렇게 안 하셨을 텐데. 또 주님의 일을 감당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데 너무 힘들어요. 고통이 자기를 너무나 찔러. 그럴 때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그런 고백 못할 거 아니에요. 그 속에서 우리들이 얻는 통찰과 위로가 얼마나 큰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래 주님도 고난을 당하셨는데. 주님도 고난을 당하셨는데. 멸시와 욕을 당하셨는데. 시련과 아픔을 당하셨는데. 그 은혜로 구원받은 내가 아무리 나를 소진하며 살아도 예수님 발끝이라도 따라갈 수 있을까? 주님도 그러셨는데. 이 살수 없었을 것 아니에요? 보여 주신 거예요. 그렇게 해서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가득 찬 자신을 이 세상에 보여줄 때 보이는 교회를 통해 안 보이는 예수님이 믿어지는 거예요.
2. 보여 주어야 할 우리자신
그 까리따스가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예수 사랑, 예수 사랑, 예수 사랑 가지고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여줄 때 되는 거죠. 그 어떤 불신자가 있었데요, 전도 대상자인데 아마 그 사람이 믿는 사람 집에 초대가 되었던 모양이죠. 아이들은 뭐 둘인가 셋을 데리고 갔는데 안 믿는 사람도 마음이 너무 답답하면 누구에게 털어놓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그래서 이 얘기 저 얘기 털어 놓는데 둘이서 이야기에 폭 빠졌어. 재들이 돌아다니면서 온 집안을 개판으로 만들어 논거야. 심지어는 그 뭐야 변기에다가 뭘 집어넣어가지고 도기를 들어내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까지 문제를 일으키고 이렇게 아주 난리를 쳤어. 그래도 다 교육받은 사람들이니까 이치를 알잖아. 정신이 빠져서 이야기를 했지만 그 집에 너무 많은 손해를 입힌 거예요. 그래서 미안해가지고 어쩔 줄 몰라 하는데 구김이 하나도 없는 얼굴로 그 집 부인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집에 있는 딸까지 말이야, 나중에 온 딸까지 다 위로하면서 아무 상관없다고 그 까짓 것 기술자 불러다 고치면 되지 뭘 그러시냐고 또 놀러 오시라고 다정히 보내는 거야. 그 불신자가 그것을 보면서 야 진짜 자기하고 비교하는 거죠. 나라면 이 상황에서 저럴 수 있을까? 못하지. 오늘의 결론. ‘예수 계시네.’ 그 사람도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을 하는 거예요. ‘나는 그렇게 못한다. 아 예수 있네. 어디에. 저 사람에 있네.’ 그러니까 보이는 사람을 통해서 이게 믿어지는 거죠. 믿어지는 거죠. 놀라워요.
제가 언제 한번 그런 예화 들었잖아요. 어떤 형제가 부동산을 감정하고 하는 그런 사람인데, 하러 갔더니 업자가 천오백만원을 다 낡은 돈으로 가방에서 꺼내 놓으면서 탁 주더래. “우리 한번만 봐 주십쇼.” 이 사람이 싸인 한번만 잘해주면 돈을 몇 십억씩 더 대출을 받을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아 그럼요 잘해 드려야죠. 걱정하지 마세요. 얼마나 어려우세요. 제가 있는 힘을 다해서 잘 해 드릴게요. 그 대신, 이건 안 받거든요.” “아 그래도 받으세요.” “제가 받고 싶은데 받을 수가 없거든요.” “왜요?” “제가 예수 믿는 사람이거든요.” 그 순간 그 사람들은 어 예수 있네. 생각하는 거예요. ‘아 있네. 왜? 지금 있잖아.’ 이렇게 젊은 사람이 얼마든지 받을 수 있는 돈을 밀어놓으면서 잘 해 드릴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잘 해 드릴게요. 돈 받은 것 보다 더 잘 해 드릴게요. 그런데 받을 수 없어요. 왜? 나도 받고 싶은데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시거든요. 그럼 있네.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성경 찬송 들고 교회 와서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면서 그 사람들이 이렇게 얘기를 안 하는 거죠. 그거는 자기도 시어머니하고 싸우고 속상하면 부엌에 가서 우니까. ‘있네.’ 그렇게 이야기를 하려면 뭔가 자기 안에 있는 그 놀라운 평화, 응? 그거를 보여 주는 거. ‘아 있네.’ 그게 바로 그런 충만한 까리따스로 충만한 자신을 이 교회가 보여주는 것이 사랑의 질서를 확장시키는 선교의 대의에요. 대의에요. 그걸 잘 해야 돼.
그러니까 뭐냐면 여기서 뭐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확 선포하는데 아이고, 제일 촌스러운 게 그거에요 “우리 교회 가서 목사님 설교한번 들어보라고.” 얼마나 시시한 전도에요? 그게. 그게 뭐에요 그게. 그렇게 하는 게 아니고, 자기 안에 살아계신 예수를 보여줄 수 있어야지. 그 보여줄 수 있어야지. 그렇게 하면서 사람들에게 그걸 일깨우고, 그 예수님의 사랑을 전할 때 그 예수의 사랑이 확장되어 가는 거거든요. 또 하나 보여주어야 될 것이 뭐냐면 일치가 충만한 자신을 보여 주어야 돼. 일치로.
그게 뭐냐면 존재에 목적이 통일되게 나타나야 되는 거죠. 예를 들자면 어유, 이제 설교하다 목이 말라 그러면 잘 보세요. 목이 말라. 물을 마셔야 되겠잖아요. 근데 이게 온 기관이 움직이는 거죠. 우선 눈이 여기 물이 있구나, 봐요. 그다음에 손이 이렇게 나가죠. 그죠? 손이 이걸 탁 들어요. 그러니까 여기서 컵의 차가운 기운이 온몸에 쫙 느껴지면서 전달하는 거예요. 이게 뜨거운 물이 아니라 찬물이다 이 얘기를 해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후루룩 후루룩 마실 준비를 입이 하는 게 아니라 쫙 마실 준비를 하는 거죠. 훅 불어서 마시지 않아도 된다는 결론을 내는 거예요. 그리고는 이 목이 물을 기다리는 거죠. 들어요. 이렇게 올라가는 거죠. 그리고 고개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쭉 내미는, 이렇게. 그리고 들어오면 벌려요 쫙 벌려요. 아 물 갔잖아 이 사람이 입 벌려. 그렇게 안하고. 이것은 모두 슬로우 비디오로 일어난 거죠. 이렇게. 슬로우 비디오고. 순간 이렇게 했어요. 이게 일치에요. 온몸이 하나의 목적을 향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쫙 해서 움직여서, 손 가, 입 벌려, 고개 내밀고 자라처럼 빼, 이렇게 안 하고, 움직이는 거죠. 그걸 통해서 이 사람이 정상적인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걸 보이는 거죠. 교회도 사람들이 볼 때 그렇게 움직일 때에 비로소 야 이게 뭐가 일치하게 움직이네, 그런 생각을 하게 되지, 중구난방으로 막, 일치된 목적이 없는 것처럼, 그렇게 될 때에 사람들은 ‘예수님 없네.’ 딱 결론 내리는 거죠.
그냥 사람들이 모여서 그냥, 그냥, 그저 축구 좋아하는 사람이 조기 축구하듯이 예수 좋아하는 사람들, 예수 동호회라고 그렇게 모여서 그냥 이렇게 취미생활 하듯이 그렇게 하는 거구나,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을 하는 거죠. 실제로 제가 목회를 하면서 재미있는 게 뭐냐면, 한 집안의 회심의 역사가 거의 동시에 일어날 때 너무 재미있거든요. 대개 뭐 여러 가지 경우가 있는데 어떤 경우에는 이래요. 한 집에 예를 들자면 네 식구가 사는 거야. 제일 먼저 남편이 가서 말씀을 듣고, 그 몇 달 교회를 다니면서 완전히 변해서 새 사람이 된 거야. 그러면 온 가족들이, “야 니네 아빠 요새 좀 변하지 않았냐?” 아들이 밥 먹다가 “왜요?” 그러는 거야. “야 매일저녁 일찍 들어오시지 않냐?” “허긴 그렇네요.” “맨 날 술 먹더니 술도 안 먹고.” 둘째가 있다 그러는 거야. “그것만 아니야 아빠 요즈음 매일 교회 가잖아. 요새는 빠지는 때가 거의 없어. 옛날엔 갈 때가 거의 없었는데.” “어 진짜 그렇네.” 그러는 거지. 사람이 아주 진중해 지고, 그다음에 기도하고, 성경 읽고, 이게 그 모습이 보이는 거죠. 그 모습이 보이는 거야. 그때는 이제 식구들이 아빠를 원숭이 보듯이 보는 거죠. ‘어이구’, 그러다 이제 다들 그러죠. 부인도 ‘며칠이나.’ 그러다가 이 남편이 은혜를 받아서 점점 깊어져요. 그러더니 둘째애가 가가지고 변화 받고 와서 눈물 펑펑 흘리면서 “엄마 나 예수님 만났거든.” 엄마가 인제 불안해지기 시작하는 거야. 그러다가 첫째가 가가지고 뒤집어지고 수련회 다녀 와가지고 “엄마, 엄마 정신 차려. 엄마 이렇게 살면 큰 일 나 엄마. 정말 정신 차려.” 그러고 “여보 우리 예배드립시다.” 그러니까. “아 예배는 뭐 텔레비전 하는 시간인데” 그러고 침대에 벌렁 누워서 띵하고 리모콘을 키고 연속극을 보자고 하는데 거실에서 셋이서 엉엉 울면서 기도를 하는 거예요. 그때부터 이제 두렵기 시작하는 거죠. 두려워요. 어디서 오는 두려움일까요? ‘살아계시네.’ 거기서 오는 두려움이에요. ‘하나님이 진짜 있구나. 하나님 없다면 어떻게 내 식구들이 저렇게 순식간에 변할 수 있을까?’ 라는 느낌이 생기는 거죠. “당신 예수 믿어 예수 안 믿으면 큰 일 나. 예수 믿어서 성공한 사람 다섯 사람, 안 믿어서 망한 사람 이야기 해줄까?” 그런 얘기 안하고 가만히 있어도 부인이 물어보는 거였어요. “여보. 진짜 예수님 계셔? 여보 당신 진짜 변화되니까 어떻게 돼? 마음이 어때?” 이걸 물어보는 거죠. 가장 훌륭한 선교에요. 정말 훌륭한 선교에요. 그래서 여러분 들이 집에 가서, “저는요 잘 모르지만요 우리 남편 보니까 확실히 하나님 살아계셔요.” 그러면 그게 진짜 예수 믿는 사람이에요. 네? 예수 믿는 사람. 그런 일치를 보여주도록 되는데.
이 일치라는 게 뭐냐 하면 기계적인 일치가 아니에요. 기계적인 일치라는 게 뭐죠? 획일화 되는 거야. 이북사람들이 획일화잖아 그죠? 쭉 획일화. 그 방송할 때 아나운서가 자꾸 바뀌는데 목소리는 똑같아. 그거 왜, 왜 그렇게 하는지 나는 이해가 안가요. 똑같아. 그런데 그런 것들이 획일화에요. 그래서 교회에는 그런 교회의 일치는 그런 일치가 아니에요. 그런데 우리는 교회에서도 이렇게 볼 때 일치를 생각할 때 항상 그런 기계적이고 비인격적인 일치를 생각하는 거죠. 예수 믿는 사람 어때야 되고, 어떻게 행동해야 된다, 라는 규격을 갖추어서 생각을 하잖아요. 그런 일치가 아니라, 이 일치는 그런 일치가 아니라 하모니의 일치에요. 하모니아의 일치에요. 악기 여기에 수 십 개가 있는데 악기를 연주할 때에는 그 악기가 다른 악기 하나를 정해놓고 그 소리를 내려고 애를 쓰지 않아. 피리는 피리소리내고, 그다음에 콘트라베이스는 콘트라베이스 소리를 내고 바이올린은 바이올린 소리를 내고, 그것도 first 바이올린, second바이올린, 각각 다른 소리를 내. 그리고 심지어는 작곡자가 작곡 할 때에도 똑같이 안가고 다 틀리게 해. 그러면 각자 자기의 가는 거야. 그것을 다 엮어가지고 하모니를 연출하면서 그렇게 아름다운 소리가 들리는 거야. 만약에 그렇게 연주 안하고, 똑같이 연주를 한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뭐 군대에서 부르는 군가처럼 들리겠죠. 그렇게 아름다운 하모니가 나는 것이 아니라.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음악이 뭐냐 하면 남자들이 한 8명 내지 20명이서 부르는 복사 중창단, 굉장히 좋아합니다. 신비할 정도로 빨려 들어갈 정도로 인간의 목소리가 정말 최상의 악기에요. 이게 정말 하모니에요. 같은 소리를 내가지고는 사나이로 태어나서 그 행진하는 군가밖에 안 나와. 그 하모니가 울려 퍼지면서 그렇게 오랫동안 우리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거죠.
교회에 있는 사람들이 생각이 다르니까 “너는 왜 나처럼 기도할 때 무릎을 꿇고 그렇게 경건한 사람이면 무릎을 꿇고 엉덩이를 위로 들고 얼굴을 땅에 대고 그렇게 기도를 해야지, 뭐 너는 왜 기도할 때 나처럼 성경에 부르짖으라. 이렇게 되어 있는데 소리도 그렇게 못 내고 혼자서 기도 하느냐 너는 왜 기도할 때 분명히 마음을 토해놓으라고 그랬는데 눈물을 펑펑 내 쏟으면서 기도해야지 너는 왜 글짓기 할 때처럼 예쁜 글 읽듯이 그렇게 기도를 하느냐”, 이렇게 사람들이 자꾸 그러거든요. 그 다양성을 인정을 해야 하모니가 되는 거죠. 내게 부족한 것을 그 사람들이 채워주면서 교회 전체적으로 하모니가 되어서 온 사람들을 꺽지 않고 온 사람들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능과 은사를 따라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도와 주는거야. 단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까리따스를 가지고 그것들을 구현하게하고 저 사람이 나와 다른 뭐가 있으면 ‘항상 저사람 때문에 내가 도움을 받겠구나. 우리 교회가 부족한 것을 저사람 때문에 보탤 수 있겠구나.’ 그렇게 생각을 해야지. ‘우리 교회 너같이 튀는 사람 필요 없어.’ 그러면 안 되죠. 아 튀면 어때. 천장이 낮아서 걱정이지만 튀어도 괜찮아 그렇게 해서 얼마나 좋아. 그러면서 아름다운 하모니를 교회가 만들어 가는 거죠. 이런 일치를 교회가 보여줄 때 보이는 교회를 통해서 보이지 않는 예수님이 믿어지게 되는 것이에요.
III. 신자의 영혼과 마음의 강조
A. 보이는 교회의 아름다움
그러면서 이제 결국은 신자의 영혼과 마음이 강조가 되는 거예요. 교회의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교회의 크기가 문제가 아니라 교회의 아름다움이 문제가 되는 거죠. 제가 늘 말씀을 드리지만 세상에서 제일 높은 산이 에베레스트 산이라는 것은 동의를 하지만 그게 제일 예쁜 산이라고 그러면 아무도 믿지 않죠. 크기는 그렇게 크지 않아도 그 산보다 예쁜 산 참 많고요 오히려 작은 산들 중에 아름다운 산들이 참 많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마찬가지죠. 웅장한 강이 제일 아름다운 강이다. 그렇게 말할 수 없고요. 큰 것이 아름답다고 말할 수 없어요. 오히려 독일의 속담에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 라는 속담이 있어요. 작은 것은 뭐든지 아름답잖아요. 예를 들자면 팔뚝만한 쥐. 느낌이 어때요? ‘오~. 드러누워 낮잠 자는데 내 배 밟고 지나가다.’ 어때요 기분이. 우리 옛날에 어렸을 때는 쥐가 천정에 늘 많았거든요? 어느 날 친구네 집에서 자는데 뭐가 툭 떨어졌어요. 그런데 봤는데, 지금도 잊혀 지지가 않아. 지금 바로 태어난 빨갛고 예쁜 쥐. 이게 한 다섯 마리가 떨어졌어요. 거 다 달렸어요. 발도 달리고 눈도 달리고 귀도 달리고 다 달렸어요. 얼마나 예쁜지 몰라요. 꼼지락, 꼼지락 거려요. 그러더니 우리가 자고 일어나니까 그 집의 동생이 가지고 논다고 그것을 실 묶어가지고 자기가 키운다고 말이지, 얼마나 귀여워요. 배 밟고 지나간 팔뚝만한 쥐 보다 이게 훨씬 낫죠. 그러니까 작은 게 오히려 아름답잖아요. 크고 작은 것을 우리 맘대로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서 교회의 가치는 큰 거 아니에요. 뭐 크고, 작은 것을 획일적으로 이야기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면 그 사람들을 잘 돌봐야 하니까, 교회도 넓히고 의자 석수도 크게 만들고 뭐 이렇게 해야 되겠죠. 그러고 또 교회가 그렇게 커져서 건강하기만 하다면, 큰 몸이 되니까 작은 교회가 할 수 없는 일들을 교회가 이렇게 해 낼 수 있잖아요. 그런 면에서 이제 나름대로 유익이 있죠. 뭐 그걸 우리가 결정할 건 아니지만 말입니다.
그러면 이제 기본적으로 이 교회를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아름다움에 두어야 돼요. 아름다운 교회인가. 그러니까 바보 같은 질문이지만 추루하고 큰 교회를 원하느냐, 작지만 아름다운 교회를 원하느냐. 그러면 그거 1초라도 망설일 필요가 없는 거죠. 작더라도 아름다운 교회가 참 좋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저에게 영적인 스승이 되시는 존 오웬 목사님이 자기의 책 속에서 교회의 규모를 이야기 하면서 그저 마음대로 할 순 없지만, ‘할 수만 있다면 교회는 200명에서 500명 사이즈면 가장 좋겠습니다.’ 그렇게 썼어요. 저는 그것도 많은 것 같아요. 500명도. 그러고 싶어요. 정말. 그래서 어떤 때는 교회가 너무 힘들고 어려울 때는 그런 생각도 했어요. ‘조그만 교회 한 번 해 보면 참 좋을 텐데.’ 그런 생각 해 본적도 있었어요.
B. 그 아룸다움의 나타남
근데 이제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아름다운 것이 중요해요. 그럼 교회의 아름다움이라는 게 뭐에요? 건물의 아름다움이나 이런 게 아니라, 거기에 있는 교회의 지체들의 영혼의 아름다움이에요. 그 이룬 연합의 아름다움이에요. 그 영혼의 아름다움이에요. 그러니 영혼의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어떻게 돼야 되겠어요. 영혼이 끊임없이, 세 가지 삼위 일체적 삶을 얘기했죠. 하나님을 향해 회개하고, 쇄신되고, 그 다음에 새로운 진리를 발견 하고 그래서 영혼이 영혼됨으로 꽉 차는 변화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일어나서 이것이 공동체적으로 모두 새로워지는 것.
그래서 이 예배가 중요하고 함께 모여서 드리는 기도회, 이런 것들이 중요한 게 뭐냐면, 한 몸으로서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함께 영혼의 찌꺼기들이 빠져 나가면서 순전해 지는 거예요. 예배를 잘 드리고 나면 영혼이 아주 말고 깨끗한 영혼이 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잖아요. 그렇게 쇄신되어 가야해요. 끊임없이 밖에서 유혹하고 안에서는 부패성이 역사해서 우리가 그 영혼의 아름다움을 어떡해든 잃어버리게 하는 거죠. 사단의 유혹도 있어요.
그러니까 끊임없이 영혼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리게 되면, 영혼이 아름답지 않은데 까리따스의 사랑이 깃들 수가 없잖아요. 까리따스의 사랑이 깃들지 않았는데 성도들의 발을 씻기고 섬긴다고요? 어느 정신 나간 사람이 그렇게 하냔 말이죠. 안 한다 이거죠. 자기 사랑이 꽉 찼는데 누가 그러겠어요. 그러면 결국 어떻게 되죠? 교회 전체적으로 병들고 추루해 지는 거죠. 그럼 교회 전체적으로 실제적인 연합이 끊어지는 거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질 않아. 공동체가 모여서 기도해도 응답이 없어. 그리고 신자의 삶이 각기 병들기 시작하는 거예요. 교회가 시험에 들어봐요. 거기 매달린 성도들이 다 시험에 들기 시작해요. 다 시험에 들기 시작한다고.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교회의 영혼의 아름다움이에요. 그것에 대해서 신경을 많이 쓰면서 그러면서 자신의 영혼의 추루함이 교회의 아름다움을 해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 하고 염려하는 마음이 그게 진짜 예수의 몸에 접붙여진 사람이 가져야 될 생각이라는 것이죠.
C. 사랑 안에서 자라야 할 신자들
그 진짜 아름다움이 나타나면 교회가 그 아름다움을 나타내 보여주는 것은 신자의 마음을 통해서 그것을 보여주는 거죠. 그러니까 신자가 끊임없이 자신의 마음을 지키는 이 노력은 말할 수 없이 중요한 거죠. ‘마음지킴’이라는 그 책 속에서 이미 다 밝혔어요. 그런 마음을 끊임없이 지키면서 그러면서 분투하고 싸워서 그 마음이 까리따스의 사랑을 언제든지 사용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런 것에 부합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들어야 된다는 거죠. 그런 사랑 안에서 성도들이 계속 자라가야 하는 거예요. 이것이 진정한 영적 성장이에요.
그럼 이렇게 성도들이 그런 사랑 안에서 자라간다 라고 하는 것이 결국 뭐냐. 하나는 정화됨이에요. 무슨 뜻이냐 하면, 영혼 안에 이게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힘과 경향성들이 이런 것들이 자꾸 흐트러지고 이질적인 경향성들이 생겨나는데, 이런 것들이 다 빠져나가고 온 영혼으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꽉 찬 상태가 되는 것이 이게 정화됨이에요.
풍성해진다, 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이런 사랑이 아주 충만하게 되어서 그래서 하나님 자신 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꽉 찬 상태가 되는 거예요. 점점 더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들에 대한 사랑은 점점점점 시야에서 멀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또렷하게 하나님만 사랑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내가 무엇을 하든지 먹든지 마시든지, 교회를 섬기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에게만 관심이 있어서 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자기 자신을 봉헌하려고 하는 이러한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점점점점 더 집중될 때,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사랑의 풍성함이라고 이야기 하는 거죠.
분산이 많이 되었을 경우에는 즐거울 때는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데, 고난이 오면 때려 쳐요. 그런데 주님을 많이 사랑하면 고난이 와도 그것을 참고 견뎌. 왜냐하면, 하나님이 내 자신의 안위보다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에. 주님이 없는 삶을 자기가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러니까 ‘어떻게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는 것이죠.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한 분을 향한 사랑으로 사랑의 대상의 폭이 점점 더 집중되는 거예요. 그 때의 그 사랑을 우리들이 풍성해진다고 말하는 거예요. 그렇게 될 때에 이제 교회는 점점 더 아름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들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무엇이냐 하면, 이러한 신자의 영혼과 마음이 강조가 되지만, 그들이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어야 되지만, 또한 동시에 공동체로 한 몸을 이룬 교회가 어느 시점에서 같은 생각과 마음을 품어야 된다는 것을 어제 장시간에 걸쳐서 여러분들에게 논증해 보였죠. 그죠? 그래서 제가 예를 들었잖아요. 이것저것 모두 해야 되지만, 어느 시점에서 우리 개인에게 ‘너 요즘 왜 기도 안 하냐?’ 또 시간이 지나가면, ‘너 요즘 왜 그렇게 정직하지 못하냐?’ 또 시간이 지나가면 ‘너 요즘 왜 그렇게 게으르냐?’ 이렇게 때에 따라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그 메시지들이 있잖아요. 그러면 이 교회를 향해서도 있다 이거죠. ‘너희들은 그냥 같이 모이기만 했지만, 사는 건 그냥 너희가 알아서 각자 살아라.’ 그러시질 않고 교회가 한 몸으로서 그렇게 되는 거죠. 이런 것을 전달해 주는 것이 그게 바로 강단의 사명이에요. 그러니까 자꾸 요구하면 안된다고 하는 이야기가 바로 그거에요. 기도하면서 항상 그런 분별력을 교회의 질서에 따라서 주시도록 하면서 그러면서 기도하는 거예요. 듣고 싶은 설교 주제가 있으면 기도를 많이 하세요. 그럼 제 마음을 움직이셔서 그리로 갈 거예요. 왜? 그 메시지가 하나님 필요하시면.
그러니까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께서 어느 시점에서는 교회를 향해서 순결해지도록 강력하게 요구하시는 거죠. 그 때에 모두 자기가 불결하다는 것을 회개해요. 하나님이 말씀을 주셨는데 깨달음도 별로 없이 어떻게 회개가 되긴 됐는데, 이 사람은 직장 떨어져서 서러워 울고, 저 사람은 뭐 성경 안 읽는다고 울고, 또 저 사람은 자식이 속 썩인다고 울고, 이런 식으로 울면, 아무리 울고 나도 이게 일치가 안 돼. 근데 어느 순간에 “순결하라!” 그러고 막 이것 밖에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메시지가 준엄하게 주어지고, 순결하게 살기 위해서 고난 받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막 위로하시는 거죠.
그 때 사람들이 다른 거 많은 문제들이 있지만 그게 자신의 가장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는 거예요. ‘맞아, 내가 지금 이런 문제, 저런 문제 다 있지만 이거 결국 내가 순결하지 않아서 생긴 문제들이야.’ 그러고 떠오르는 거야. 이게 다 수면 위로 다. 사람이 각각 처한 상황은 틀린 데, 그것을 중심으로 다 떠오르는 거예요. 그래서 회개를 하는 거죠. ‘하나님 제가 순결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뭐, 어떤 사람은 성적 순결을 회개하고, 어떤 사람은 직장에서 부정한 것에 대해서 순결하지 못했던 것을 회개하고, 어떤 사람은 뭐 가정에서 잘못한 것에 대해서 순결을 회개하고, 학생들은 학교 가서 컨닝한 것을 회개하면서 순결을 배우고, 이렇게 하면서 각자에게는 다르게 적용을 하는 것이죠. 그런데 전체적으로는 같은 메시지가 주어지는 거예요. 그 때 어떻게 되느냐면, 교회 전체적으로 불결을 떨어버리고 예수의 몸인 전체의 교회가 순결하게 다시 거듭나게 되는 것이죠. 이제 이해가 가죠.
그러니까 절대로 ‘강단에서 선포하는 이 메시지는 너무나 보편적이기 때문에 나 같이 아주 특수한 상황에 있는 삶은 다룰 수 없을 것이다, 이거 뭐 상담이나 통해서 다루어질 문제이지, 이렇게 수 천 명을 놓고 선포하는 이런 메시지 속으로 이렇게 내가 보편적으로 들어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내가 너무나 유별난 상황에 있기 때문에 그건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비 성경적인 생각이라 이거에요. 절대로 그렇게 되는 게 아니란 말이죠. 심지어는 어떤 일이 있었냐면, 제가 헌금 설교를 딱 두 번을 했어요. 12년 동안에. 그 헌금 설교 할 때 회심한 사람 있어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거 하나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떤 때에는 지금 같이 ‘이게 예수의 몸이다’, 그런 설교를 하는 거예요. 그럼 여러분들 이렇게 생각하는 거죠. ‘지금 나에게는 교회가 문제가 아니라 사업이 문젠데’, 어떤 사람은 ‘내 지금 사업도 문제가 아니고 교회가 문제도 아니고 우리 애가 문젠데’, ‘우리 애도 문제가 아니고 우리 남편이 문젠데’.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난 지금 몸이 아파 죽겠는데’. 이런 식으로 다양한 상황을 가지고 왔는데 말씀을 듣고, 관계를 보는 거야. ‘아, 이게 내가 사업의 어려움이 계속 오고 그랬는데 이게 교회와의 관계가 잘못된 거였구나.’ 그러고 회개하는 거예요. 그러면 어느 쪽으로 들어 가느냐만 차이가 있는 거지, 그 쪽으로 말씀이 들어가서 그를 전체적으로 고치는 거야, 어느 한 부분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고칠 때 약 바르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근육주사 놓고, 어떤 사람은 혈관 주사 놓고 어떤 사람은 입 벌리라고 해서 속에다가 물약 쑥 집어넣기도 하고, 다 있잖아요. 다른 방식으로 들어가는 거지.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다루시는 거예요.
D. 공동체적인 자기 깨어짐을 통해 일치가 촉진됨
1. 참된 까리따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 예수의 몸인 하나의 사람, 하나의 교회가 하나의 사람이잖아요. 예수님을 머리로 하는. 그러니까 하나의 사람으로 다루시기도 하고, 그럴 또 각자로도 다루시기도 하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는 바로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개인이 그렇게 될 뿐만 아니라, 공동체적인 차원에서의 진실한 참회가 있어야 한다 이거에요. 각자 자기 깨어짐을 통해서 예수님의 뜻에 자기를 부합시킬 때에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가듯이, 공동체적인 깊은 자기 깨어짐을 통해서 일치가 촉진이 되는 거지. 여기에서 참된 까리따스가 생겨나게 되는 거예요.
a. 하나님을 향하여
그렇게 진실하게 참회하게 될 때, 그 때에 교회의 몸을 더럽히고 힘들게 했던 모든 사랑하는 것들을 동시에 함께 버리게 되는 거죠. 그래서 개개인의 삶이 정결해지고, 동시에 같은 메시지를 들으면서 같이 버리게 되니까 교회의 몸 전체가 하나님께 순종하게 되요. 그걸 버리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몸 전체가 사랑을 받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신자 개개인의 사랑은 몸 전체가 받는 사랑 안에 있는 거란 말이죠. 왜냐하면 내가 회개하기 전에 이미 예수의 몸에 접붙여지니까. 그 몸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지.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이 많이 잘못하고 있는 지점이 바로 이 지점이에요. 그게 뭐냐 하면 그렇게 생각을 안 해요. 그렇게 함께 뭐가 되는 것,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관심사가 아니에요. 문제는 나, 내 문제가 어려운데, 나, 나, 나, 나, 그러면서 계속 가는 거예요. 해결이 안 되는 거죠. 그러니까 필요한 만큼 교회를 이용하다가 힘들면 사요나라 하고 떠나는 거죠. 떠날 때는 이미 까리따스의 사랑을 다 털어 먹은 상태에서 떠나기가 십상이에요. 그러고 누군가를 미워하고 상처주고 이러면서 교회의 몸을 아프게 하고 떠나요. 떠났어도 그는 장소를 떠난 거지, 몸은 붙어있는 거 아니에요. 전체적인 우주적 교회에 붙어있는 거죠. 그러니까 그 속에서 예수의 몸을 자꾸 찌르면서 자기는 복을 달라고 그러는 거죠. 자기 몸을 찌르면서 복을 달라고 그러는 거죠. 그러니까 안 되는 거죠. 그런데 그가 공동체적으로 깊이 함께 회개하고 나면, 그러니까 개개인이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는 것보다 100배는 더 중요한 게 공동체가 모두 모였을 때 한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는 것, 이것은 100배나 더 중요하죠. 그렇게 하면 하나님을 향한 순결한 사랑이 공동체적으로 함께 생겨나게 되는 거예요.
b. 사람들을 향하여
그리고 우리가 모두 함께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한 형제라는 느낌을 갖게 되는 거죠. 이런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충만하게 될 때에 그 때에 성도들이 서로를 향해서 두 가지를 베푸는데 있어서 충만한 자원을 소유하게 되는 거예요.
1) 용서
하나가 뭐냐 하면 용서에요. 두 번째가 뭐냐 하면 나눔이에요. 용서와 나눔이 생겨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예수님으로부터 받는 까리따스의 사랑 때문에 사람들을 용서해요. 왜냐하면 그 까리따스의 핵심이 뭐냐면 용서를 통한 까리따스의 경험이에요. 용서를 통한 아가페의 경험이에요. 그래서 까리따스가 생겨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항상 예수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시는 은혜에 대한 깊은 감격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에게 죄 짓고 나를 아프게 한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거예요. 용서하는 과정이 아프긴 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서 자기를 깨달은바 진리에 부합시키는 진실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서 사람이 계속해서 변화되고 그 변화가 공동체의 변화로 이어지게 되는 거죠.
2) 나눔
그 다음에 마지막 하나가 뭐냐 하면 나눔이에요. 이건 뭐냐면, 이기심이 사라진데서 오는 나눔의 정신이에요. 그래서 신자가 탐욕을 버리고 이기심을 버리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그러면 나중에는 지체들의 죄가 나의 죄처럼 느껴졌듯이, 지체들의 자원의 부족함으로 말미암는 고통이 내 것처럼 느껴지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이 하나님께서 주신 자원들을 균등하게 흘려보내는 통로가 되는 거죠. 그렇게 살아서 몸 전체가 골고루 누리면서 몸으로써 건강함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으로 만족을 하고, 그 몸과 함께 즐거워하는 것. 큰 돈 없고 많은 재산 없고, 부자 아니어도 그것 때문에 행복해하고, 그 때문에 예수의 몸이 되어서 기쁘게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사랑이에요. 이런 사랑의 질서를 확장해 나아가는 것이 선교라 이거죠.
VI. 결론
그래서 결국은 결론을 내리자면, 한 사람의 신자의 영혼의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밤하늘의 별을 쳐다보고 감격을 하거나 혼자 조용히 좋은 책을 읽으면서 ‘어쩜 이 사람 내 생각하고 이렇게 똑같을까.’ 위인들의 간증집을 읽으면서 ‘아, 정말 멋있게 살았어. 나도 이런 순교의 순간이 오면 이렇게 할 수 있을 텐데.’ 이런 것을 통해서 영혼의 아름다움이 입증되는 것이 아니에요. 영혼의 아름다움은 이런 개인적인 차원에서 나타날 순 있어요. 나타날 순 있는데 여러분 자신을 너무 신뢰하지 마요. 혼자서 기도할 때 눈물 많이 흘린다고, ‘나 요즘 예수님만 사랑하나 봐.’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미안해요. 너무 실망을 줘서. 별을 쳐다보면서 ‘아, 끝없는 우주,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에 대한 찬양이 가슴에 북받쳐 오른다.’고 해서 그대들 안에 까리따스가 꽉 차 있다고 ‘나는 하나님 밖에 사랑하는 것이 없어.’ 그렇게 남들이 여러분들을 얘기해도 스스로는 자기를 그렇게 믿지 말라 이거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인 이 까리따스는 개인의 차원에서 입증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차원에서 입증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 공동체의 차원에서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깊이 사랑하고, 한 번 사랑하기 위해서 한 번 죽는다고 할지라도 자기를 죽여서 사랑하고, 자기의 소유를 털어서 가난하고 고통 받는 지체들에게 나누어주면서 자기 스스로 가난해지고, 스스로 고통 받는 자리로 내려가고, 좋은 것은 지체들에게 더 좋은 것은 우리 주님께, 안 좋은 것은 자신이 짊어지고 그리고 교회의 몸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깊이 끌어안고, 그렇게 살아가야 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진리가 그를 계속 비춰주고 있어야 해요. 진리가. 그래서 인간이 진리를 생각하는 것은 비용이 안 들어가요. 그런데 그 진리에 자기를 합치시키는 것은 피 흘리는 고난을 통해서 합치되는 거죠. 여러분들이 일생동안 너무너무 사랑하는 것을 주님께 드려본 적 있어요? ‘하나님, 이제 저 이거 사랑 안 합니다.’ 드려보신 적 있으세요? 일생동안 못 고치던 태도였고 아직도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태도인데 예수님이 아파하시니까 ‘전 이제 그것을 버립니다.’ 별을 보고 명상하고 간증집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은 까리따스의 사랑이 충만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이에요. 그런데 고난을 받고 피를 흘리면서 예수의 형상 닮지 않는 자기를 진리 때문에 깍아 버리는 것은 진짜 예수 죽음에 동참하려는 예수의 환난과 오래 참음에 동참하려는 지순의 사랑 없이는 할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의 중요한 숙제는 거기에 있는 거예요.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는 것이 삶의 질을 보장해 주지 않아요. 제가 일평생 설교자로 부름을 받아서 죽는 순간까지 진리를 연구하고, 타협하지 않고 진리를 외치기로 여러분도 고대하고 있죠. 그러나 내가 그렇게 소명을 따라 살아도 그대들의 삶의 질을 보장해주지 않아요. 추호도 보장해 주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것은 설교자가 보장 안하거나 하나님이 보장 안하시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그 진리를 깨닫고 자기를 그 진리에 합치시키기 위해서 아무도 모르는 여러분만의 눈물의 길,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 자기 죽음의 길, 가야하는 거예요. 거긴 아무도 없어요. 외로운 구도의 길이에요. 그게 바로 구도의 길이에요. 예수님만 함께 하셔요. 그 길 걸어가는 거예요. 그러면서 끊임없이 깨뜨려지고, 끊임없이 새로워지고, 끊임없이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고, 그러면서 자기를 그 진리에 계속 합치시켜 가는 거예요.
가끔 선배 목사님들이 이 세상에 목회처럼 행복한 게 없고, 자기는 목회하는 순간이 그렇게 신이 나고 행복하다는 얘기를 들으면 전 항상 주눅이 들어요. 나는 아직도 이 목회하는 게 남의 옷 입은 것 같고 그래서 목회는 항상 내가 원하지 않는 가슴앓이이고 그리고 설교는 언제나 이국의 언어에요. 왜 그런지 아세요? 하는 건 쉬워요. 그러나 자기가 죽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에요. 너무너무 어려워요.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이 똑같은 거예요. 그 길을 우리가 각자, 각자 걸어가는 거예요. 어디 까지는 우리가 함께 가지만, 어느 시점에서는 각자가 예수님 앞에서 걸어갈 수밖에 없는 단독자의 삶을 살게 돼요. 그 구도의 길이 있는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주님의 형상을 닮아갑니다. 물론 약할 때 있지요. 그리고 그러면 안 되지만 미끄러질 때 있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낙심이 되어서 이제 한 걸음도 옮겨놓을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고난의 때도 있어요. 그런데 그런 구도의 길을 가는 자세를 가진 사람들은 그 길 걸어가요. 때로는 넘어져도 때로는 눈물을 흘리고 때로는 엎드려져 외로운 벌판에서 홀로 가슴앓이를 해도 그렇게 걸어가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일으켜 세워주시고, 사람들은 욕하고 손가락질해도 그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예수의 형상을 닮아가. 예수의 몸에 사랑스러운 지체가 되어가요. 처음에는 불완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진리 안에서 지혜를 배우고 그 사랑 안에서 까리따스를 배우면서 그러면서 살아가요.
그래서 자기를 온전히, 예수 오셔서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몸을 다 찢어 성찬으로 나누어 주신 것처럼 그 유사한 삶을 살아갈 수가 있게 되는 거죠. 왜냐하면 사람들 때문에 그렇게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계신 예수님 때문에.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그리고 그 피로 나를 건지셔서 자기의 생명을 통해 삼위 하나님과 교제하게 하신 그 예수 때문에 그 예수님이 지금 교회에 와 계시기 때문에 그 예수 안에서 내가 한 몸 되어서 이 추루하고 쓰레기 같은 인간이 이 교회 안에서 삼위의 교통의 모상을 이루는 한 도구가 되었기 때문에 걸어갈 수 있는 것이죠. 잠시 지나는 인생길이라고 생각하고, 지금 나를 위해 너희들이 당하는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는 비교가 될 수 없다는 주님의 위로의 말씀을 믿으면서 때로는 넘어져도 최후 승리를 믿으며 그렇게 걸어가요.
그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렇게 걸어가는 거예요. 매 순간 쓰러진 그 자리에서 다신 일어나고 미끄러진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서 내가 예수의 몸이기 때문에 예수님께 사랑을 받고 지체들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사실 때문에 격려와 위로를 받으면서 그러면서 일어나는 거예요. 오늘은 내가 아파서 사랑하는 지체의 위로를 받지만, 내일은 저 지체가 아파서 내가 위로하고, 그래서 정말 사슴처럼 함께 기대어 살게 하시기 위해서 어린 양들처럼 함께 목을 부비고 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한 교회에 불러 그렇게 놀라운 예수의 사랑에 접붙여주신 거예요.
내가 지극한 예수의 사랑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목자 된 마음으로 내가 말할 수 없는 내 안에 계신 주님의 자비하심으로 마지막으로 여러분들에게 권합니다. “서로 사랑하라” 기도하겠습니다.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