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있는 교회
(2006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6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는 방법(행2:1-4) 2006.10.16 가을기도학교 사경회(새벽) 1
2. 십자가의 복음으로(행2:36-41) 2006.10.17 가을기도학교 사경회(새벽) 24
3. 일치된 마음의 기도(행1:14) 2006.10.18 가을기도학교 사경회(새벽) 46
4. 강력한 성령의 역사(행19:17-20) 2006.10.19 가을기도학교 사경회(새벽) 70
5. 불타는 전도자들(행8:1-6) 2006.10.120 가을기도학교 사경회(새벽) 91
6. 마음으로 드리는 착한 섬김(행9:31,36-39) 2006.10.22 주일오전 110
1. 교회,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도구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1-4)
I. 본문의 배경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오순절 날에 성령이 임하는 그래서 교회가 성령을 받은 교회가 되고 이제 이후에 선교의 역사를 이어가는 그런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때에 부어주신 성령을 통해 이제 정말 명실 공히 기독교회가 서게 되고 이제 성령의 편만한 시대가 열리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이제 신약의 시대가 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도 이 날에 복됨을 제자들에게 여러 차례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이 성령강림 사건을 보면서 이것이 오늘날 우리 시대의 교회에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고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이 교회의 능력 있는 역사와 우리 개인의 능력 있는 삶이 피할 수 없이, 떨어질 수 없이 하나로 연결되어있는가 하는 것을 우리 신학적으로, 교리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II. 창조와 그리스도의 교회
우선 우리들이 이 문제를 다루기 전에 먼저 창조와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우리들이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A. 인간 창조의 유비
1. 인간의 창조
먼저 인간을 창조하신 그 유비에서 인간 창조와 교회 창조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맨 처음에 인간을 창조하실 때 어떻게 창조하셨습니까? 흙으로 사람을 빚으신 후에 그 코에 훅! 하고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그 사람이 살아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흙은 그 사람의 몸을 이루는 것이었고 그 코에 불어넣은 생기는 영혼인데 그 영혼과 육체가 함께 만나서 살아있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이 되어 하나님을 기억하고 알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고 그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이 세상을 정복하고 생육하며 번성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인간에게 이제 하나님이 이 모든 세상을 하나님을 대신해서 다스리고 섬김으로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창조의 영광을 더 충만하게 드러낼 수 있도록 인간을 창조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그 자체로서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그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세계였지만 그 찬란한 창조의 영광을 인간이 온 마음과 뜻을 다해 섬기고 그리고 온 마음과 뜻을 다해 봉사하고 가꾸어감으로서 그 창조의 영광은 더욱더 증진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창조의 영광이었으니 이 영광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인간은 그렇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가운데 자기의 존재의 목적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모든 피조물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존재의 목적은 하나님이 온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과 따로 떨어져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피조물 하나하나의 존재의 목적이 모두 함께 연결되어 마지막에 창조의 목적을 구현하듯이 인간도 만물의 영장이기는 하지만 그 모든 피조물 중에 한 존재였기 때문에 인간 개개인의 창조의 목적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의 전체의 창조의 목적과 아름답게 연결이 됨으로서 인간 창조의 목적이 구현되었던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위에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살아있는 사람의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2. 교회의 창조
똑같은 유비를 이제 교회의 창조에 우리들이 연결시킬 수 있습니다. 성경은 너무나 자주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 교회를 그리스도 예수의 몸이라고 아주 여러 번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교회를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이제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만이 이 교회와 관련을 맺고 계시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 교회가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하는 이유는 삼위일체 교리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삼위일체 교리가 나올 때 마다 물수건이 삼각형을 접는데 준비를 못해서 미안합니다. 이렇게 해서 성부, 성자, 성령님은 각각 한 인격체를 가지신 세 인격입니다. 인격은 각각 독립되었기 때문에 성부 하나님도 하나님이시고, 성자도, 성령도 각각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 위는 다른 두 위에 도움을 받아야지만 겨우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성부, 성자, 성령은 각각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 세 인격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서로 교통하고 계시는데 그러나 이 하나님은 세분의 하나님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이 삼위일체의 교리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삼위 하나님은 각각 떨어지지 아니하고 무슨 일에든지 나머지 두 위를 배제하지 않고 그 일에 간섭하시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누가 우선적으로 그 일에 간섭하고 계시는가에 따라서 그것이 성부의 일도 되고, 성자의 일도 되고, 성령의 일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온 세상을 창조할 때는 성부 하나님이 우선적으로 관여하시고 그 다음에 성자와 성령이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인간을 죄로부터 구속하신 그 일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시고 그 일을 하실 때 성부와 성자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죄인들의 마음에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그 십자가의 공로가 믿어지게 만드는 것은 성령님이 우선적으로 하시고 성부와 성자가 그 일에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교회를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하는 이유는 예수님만 교회와 관계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이 교회 자체가 그리스도 예수의 속죄의 공로를 기반으로 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루어진 이 교회들이 몸을 이루면서 이 세상에 그 우주적인 교회를 형성하는 그 일에 있어서 성자 예수께서 우선적으로 이런 일에 관여하시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엄밀하게 말하면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은 교회와 그리스도를 통한 삼위 하나님과의 연합이라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그런 이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하는 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삼위 하나님 가운데 교회가 되고 교회가 역사하고 이 땅에서 교회가 할일을 다하는 일을 모든 일을 함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우선적으로 개입하신다고 하는 것을 암시하는 교리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교회가 성경에서 너무나 자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묘사가 됩니다. 그런데 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마치 흙으로 사람을 빚어 생기를 불어넣어서 산 사람이 되게 하신 것처럼 이제 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이미 있는 구약에서부터 이루어진 모두 언약적인 연대의 교회의 혼을 불어넣어서 그 모든 지체들을 한 몸이 되게 하는 놀라운 특권이었습니다. 그렇게 되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의 몸이라고 하는 이 표현은 특별히 오순절에 성령강림 사건이 임하는 후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한 몸으로서 교회를 형성할 수 있게 되는 이 결정적인 사건이 바로 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이전에는 모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다 쪼가리, 쪼가리 떨어진 사람들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때는 언약으로서 연대되어있었습니다. 물론 신약시대에도 언약의 연대를 통해서 우리 모든 믿는 사람들이 한 언약 안에서 연대를 이룹니다. 그래서 그 언약의 백성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통해서 언약으로 맺어진 백성들이 흙으로 맺어진 사람들이었다면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말미암아 거기에 생기가 불어넣어져서 그 언약적 연대 아래 있었던 사람과 그리고 앞으로 있게 될 모든 연대의 사람들이 성령 안에서 교통하는 한 몸으로 우주적인 교회를 형성하게 되었다는데 여기에 이제 교회론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데 교회가 그런 몸을 형성할 때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시라고 하는 것을 성경이 강조하는 것입니다.
B. 그리스도와 교회
그래서 여기에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생각하게 되는데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가 바로 머리와 몸의 관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 머리와 몸의 관계도 새롭게 등장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1. 창조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그러면 예수그리스도가 머리이셨던 적이 있는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 모든 세상을 창조하실 때 어떻게 창조하셨는가 하면 성부 하나님에 의해서 성령 하나님 안에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에 만물이 그가 없이는 지은바 된 것이 없고 그래서 태초부터 있었던 말씀이신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 모든 세상의 것들이 창조되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똑같이 성부에 의해서 창조되었으니 성부 없이는 창조가 불가능했겠습니까? 성령 안에서 창조되었으니 성령이 없었다면 창조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성자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니 성자 없이는 창조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부에 의해서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창조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모든 세상의 피조물들을 하나님의 주권적인 크고 놀라운 능력으로 각 사물과 인간의 존재를 창조하시고 그 뛰어난 지혜로 그 각각의 존재들과 그 작용들이 서로 연결을 이루어서 본래 의도했던 창조의 아름다운 영광을 드러나게 하신 것입니다.
성령님은 그 모든 것들을 영적으로 다 연결을 하고 묶어서 그 묶여진 연결의 고리를 통해 창조주 하나님의 신성의 영광의 충만한 것이 그 모든 피조물 속에 깃들게 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성령은 그 모든 것들을 이어주는 전깃줄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피조물 하나하나가 가장 최상의 아름다운 상태를 드러내면서 찬란한 빛을 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인간도 그때는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습니다. 똑같은 사람은 없지만 달라도 그 모든 사람은 크림을 안 발라도 예쁜 사람으로 그렇게 아름답게 찬란하게 된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을 창조하셨을 때 그리스도를 통해서 창조하셔서 결국은 창조된 모든 것들에 머리가 되신 분이 누구인가 하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된 당시에 모든 만물의 머리가 되셨던 것입니다. 머리가 되어서 그래서 모든 피조물들이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연결되었던 것입니다. 특별히 인간이 그리스도와 그 연합을 이루면서 그 모든 것들이 연결이 되었고 만물도 함께 그리스도 예수를 머리로 하는 창조의 아름다운 한 연결 속에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인간은 그리스도와 특별한 방식으로 한 연결을 이루고 있었던 것입니다.
죄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죄가 들어오면서 제일먼저 일어난 일이 무엇인가 하면 그 죄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에 하나님의 창조의 영광이 사라지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영광이 사라진 방식은 하나님도 어쩔 수 없이 주위에 의해서 영광이 잠식당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그 모든 연결을 타고 모든 인간과 피조물 속에 한 번에 모두 오염이 되었던 것입니다. 마치 연결된 모든 전선에 한번 전기가 끊어지면 모든 빛들이 사라지듯이 그렇게 창조의 영광은 하나님 자신에게로 돌아 가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연결들이 다 끊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피조물들은 공존하고 조화를 이루면서 창조의 영광을 드러내는 그 아름다운 것들을 잃어버리고 서로 갈등하고 고통하고 죽고 사는 그런 고통스러운 상황을 맞이하였고 죽음이라는 것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그리스도와의 이 아름다운 연결들도 다 끊어진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바로 이렇게 인간이 창조되었을 때 삼위 하나님과 연결을 이루면서 인간의 육체는 이 땅에서 필요한 것들을 공급받고 인간의 영혼은 바로 삼위 하나님과의 연합을 통해서 영혼에 필요한 모든 형이상학적인 자원들을 공급받음으로서 그게 이 두 가지가 합쳐지면서 그래서 인간이 정말 행복하고 완전한 삶을 영위해나가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에 목적에 기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그렇게 범죄 하는 순간 하나님과의 관계는 끊어지고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되는 모든 생명들이 단절되어버린 것입니다. 그 생명과 우리를 영생하게 하는 그 모든 자원이 단절된 것을 가리켜서 영생을 상실한 죽음의 상태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형편을 그대로 두고 보지 않으시고 하나님께서 사람이 죄를 범한 즉시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연기하고 메시야를 약속하셔서 역사가 쭉 이어져가면서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으시고 약속의 백성들에게 그것을 계속 전수해주셨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이 계속 내려오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창조의 원래 하나님의 놀라운 존재와 그리고 인간 존재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탐구하고 깨닫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생각나게 하시고 그리고 그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그래서 그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그들을 보살펴주셨습니다. 그게 바로 구약의 역사입니다.
그렇게 온 가운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하나님이 얼마나 이 세상의 인간들을 사랑하시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님이 비록 인간이 타락했다고 할지라도 망가진 이 세상을 버리지 아니하고 창조주 하나님의 그 아름다운 영광을 다시 드러내고 싶어 하시는지를 하나님이 다 보여주시면서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 우리에게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예언대로 우리 모든 사람들의 죄를, 구원받을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못 박히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이 시켰기 때문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쁨으로 당신 자신을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로 드림으로 하나님의 이 창조의 목적이 구속을 통해서 완성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헌신을 귀하게 여기시고 그에게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셔서 그래서 그를 부활하게 하셔서 그래서 만물들로 하여금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인정하게 만들었습니다.
원래 이 ‘주’라는 의미는 하나님 한분 삼위 하나님 중에 성부 하나님께 쓰여 지던 호칭이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 주라 인정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다시 이 모든 세상을 창조 때와 마찬가지로 하나로 다시 창조하려는 계획을 가지셨는데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은 재창조하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재창조는 구속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모든 다시 창조되는 새 창조되는 세상에 모든 피조물들의 머리가 되게 하셨는데 그 다시 머리가 되게 하실 때 하나님께서 먼저 이 세상을 한꺼번에 창조하셨지만 재창조하실 때는 이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재창조하시는 것이 아니라 믿는 사람부터 재창조하시고 그 다음에 인간의 모든 재창조가 완성될 때 하나님께서 이 모든 세상을 재창조하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즉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하는 계획을 수행하시고 인간의 모든 구원이 완성될 때 그 모든 하늘과 땅을 다시 재창조하심으로 창조 때 그 찬란한 영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그래서 다시 그 무궁한 영광이 증진되는 그 영광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신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자마자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는 사람들의 머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모임인 이 교회는 미래에 이루어질 모든 재창조의 종자 씨가 되는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사람들을 믿는 사람들은 믿는 즉시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여져서 예수의 몸을 이루고 이 몸을 이룬 사람들이 열심히 이 예수 그리스도 머리이신 그분께 순종하면서 이 땅을 섬겨갈 때 더 많은 사람들이 거기 달라붙으면서 그리스도 예수의 큰 몸을 이루게 되고 그 몸을 이루는 것이 완성될 때 하나님께서는 다시 하나님에 의해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온 세상을 재창조하심으로 다시 예수 그리스도를 창조 때처럼 인간과 그 모든 피조물들의 머리가 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드러내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여기서 관심을 끄는 대목은 이 세상에 있는 인간이 아닌 모든 피조물을 재창조하신 것은 우리가 어떻게 개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이시고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신 것은 이후에 이루어질 온 세계의 머리되심의 성취적인 역사입니다. 먼저 댕겨서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삼으시고 이것을 통해서 종자 씨를 삼아 후일 모든 재창조되는 세계에 영광스러운 머리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인간이 타락했지만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려고 했던 창조하실 때 가지고 계셨던 그 계획은 이 구원의 대드라마를 통해서 다시 연속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인간들은 다시 하나님을 섬기면서 그 찬란한 영광을 다시 드러내는 그런 섬김 속에서 또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이제 인간이 아닌 모든 피조물들을 새롭게 하시는 그것은 인간의 구원의 계획이 끝나면 이 모든 일들은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문제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그의 머리에 붙어서 그의 몸이 되었는데 이제 아직 달라붙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붙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하고자 하는 계획이 완전하게 되어야 하는데, 모든 사람이 믿는 것은 아니지만 믿기로 하나님이 계획하신 사람들은 모두 믿게 되는데 이런 일이 바로 선교입니다. 이게 바로 이 세상에서 복음 전도고, 이게 바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를 선교와 복음전도를 전파를 통해서 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이 일은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지고 행하시지만 이 일은 하나님이 혼자 하시기로 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통해서 하시기로 하셨고 그중에서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통해서 이 일을 하시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신약의 모든 역사를 보면 선교의 역사, 사람이 구원받고 변화 받는 모든 역사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들에 의해서 도움을 받기도 하고 방해를 받기도 했지만 그 역사를 이루어가는 주체는 하나님이셨고 그 손에 붙들린 교회들이 어떻게 하나님께 훌륭하게 능력 있는 교회로 이 땅에 존재하는가에 의해서 그 시대에 하나님의 뜻을 많이 이루어드리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 예수의 아름다운 몸이 되게 한 시대도 있었고 그렇지 못하고 서금서금한 시대도 있었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2. 교회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그러면 이제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선 유기체적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질서의 가장 위에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의 몸이 되기 위해서는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예수께 접붙여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그 사람이 교회 안에서 목사와 관계를 맺고, 성도들과 관계를 맺고, 그 다음에 연약한 지체들과 관계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 사이에 문제가 있어도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주님을 만나고 깨트려지고 그분께 합치되면 그 속에서 모든 사람이 그런 은혜의 작용들을 하게 될 때 그때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모두 상합하는 몸이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리시라고 하는 것은 그 모든 통치의 최종적 권위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나는 주님을 만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말해도 지속적으로 그리스도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권위 있게 하신 것에 있어서 불복하고 항거하고 반항하고 이러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 예수께 속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교회의 질서를 계속 흐트러뜨리고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의 질서에 대해서 존중심이 없이 반항하고 그리고 제 멋대로 행동하고 하면 우리 인간이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교회 지하실에 유치장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러나 그 사람은 그런 지속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통해서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지지 않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III. 사람의 유비로서의 교회
그런데 이제 여기에서 우리는 사람의 유비로서 교회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A. 지체의 연합
그 첫째가 지체의 연합입니다. 우리의 몸은 이렇게 온 몸이 다 머리를 중심으로 해서 연결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이 머리가 생각하고 머리가 명령하는 대로 뇌에서 작용하는 대로 손과 발이 자유롭게 움직여집니다. 신경계통에 이상이 오면 이런 것들이 어려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지체들이 우리의 몸에 다붙어있는 것입니다. 붙어서 이 심장으로부터 펌프질을 해서 나오는 피를 받고 그리고 신경에 감촉이 있어서 그것들이 머리에 전달되고 그 다음에 힘줄들이 연결되어서 뇌가 명하는 대로 움직이고 해야지만 이것이 내 몸이라고 하는 것이지 팔이 절단기에 잘려서 저쪽에 뒹굴뒹굴 굴러서 쓰레기통에 넣어지면 그것을 내 몸이 아닙니다. 이런 것이 우리의 몸입니다.
그러면 교회도 역시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예수가 머리이시고 거기에 모든 지체들이 연합이 되어있습니다. 작게는 이 작은 지역 교회 하나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예수의 몸이지만 이 나라의 교회, 나아가서 이 온 세계에 있는 교회, 더 크게 확대하면 구약시대로부터 앞으로 있을 모든 택한 백성들의 연합, 그 다음에 장소적으로 연결하면 하늘에 있는 천군과 천사들까지 포함해서 이 우주적인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모든 교회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머리로 하고 그 예수께 전적으로 복종하면서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런 교회 안에서는 그리스도 예수가 몸이시고 여기에 모든 사람들이 한 지체로서 다 달라붙어있는 것입니다. 달라붙어있어서 붙어있는 모든 지체들을 가지고 이제 교회 자체가 하나의 독립된 몸이 되어서 이제 이 세상에 나아가서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의 사명은 신자 개인의 소명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신자 개인의 소명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신자 개인의 소명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고 나면 아무 희망이 없는 죄인의 자리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십니다. 그러면 그는 이제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특권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모든 죄에 사함을 받고 죄 사함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성령을 주십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그들을 영원히 떠나지 아니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후사가 되는 것에 보증이 되시고 첫 열매가 되십니다. 그리고 그들은 어디에 가든지, 어떤 죄를 짓든지 진실하게 참회하면 하나님이 무한한 용서를 약속하십니다. 순종을 위해서 능력과 은혜가 필요하면 구하면 하나님이 무한히 공급해주시겠다고 하는 이 은혜로운 약속의 보증아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삼위 하나님과의 연합을 복원하고 다시 창조될 당시의 그런 인간처럼 삼위 하나님과의 교통 속에서 그 하늘에 능력과 자원을 공급받으면서 그 사랑을 받으면서 우리들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만 잘하면 이 세상에 두려운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고난이 오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그래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데도 고난을 겪을 때는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뭔가 더 좋은 일을 하시고 싶으셔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능력이 모자라서 그렇다고 하면 우리가 불안하지만 하나님의 계획이 있으셔서 그 일을 하신다면 우리는 기쁨으로 동참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형통하면 형통한대로 하나님을 찬송하며 살아가는 것이고 살아있으면 살아있는 대로 하나님을 섬기고 죽으면 죽은 데로 우리의 영혼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잘 믿으면 이 세상에서 아무런 두려움이나 염려나 걱정이 없습니다. 무한한 자원들을 공급받으면서 사니까 그렇게 됩니다. 그게 바로 구원입니다.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러면 그렇게 구원받고 나면 우리의 소명은 무엇입니까? 예수 믿고 난 다음에 사람들은 복을 받는다는 개념으로 들어가는데 이게 문제가 복잡해집니다. 이게 성경이 이야기하는 기독교 신앙의 코드와 안 맞는 것입니다. 예수를 내가 믿었으니까 이것만 해도 하나님께 큰 적선을 해드리니까 이제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복을 주셔야지 되는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물질도 좀 주고 필요한 것들을 공급받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번에 열린 신문에 나온 어떤 형제의 간증처럼 하나님을 필요할 때 달려가면 도와주는 보스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보스 정도로 생각하는데 보스도 그렇게 섬기면 보스가 싫어합니다. 필요할 때나 가서 돈 달라고 하면 칼 맞습니다. 이치가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복의 개념을 가지고 오면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고 나서 자기가 얼마나 많이 물질적으로 복을 받고 세상의 지위에 올라가게 되었는가의 이 간증이 위험한 이유가 자기는 잘 이해하고 했을지 모르지만 듣는 사람이 이것을 거꾸로 연결을 시킵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간증할 때는 다른 사람의 영혼을 위해서 아주 세심하게 주의를 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소명이 무엇인가 하면 예수께서 하신 일을 계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하십니까? 사면을 두루 다니시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가르치시고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도우셨습니다. 이 세 가지 일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가지 더 해야지 되는 것이 예수님은 성화가 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죄를 지으실 수 없고 부패성도 없는 분이셨으니까.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 부패해질 수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온전해지기 위해서 끊임없는 자기 죽음 속에서 성화의 길을 가면서도 이 세 가지 섬김을 위해서 해야지 됩니다. 이 세 가지를 섬기는 동기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제 은혜를 받았으니까 내가 하나님을 잘 섬겨야지’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이제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나 그 다음에 가르치는 것이나 연약하고 어려운 사람을 돕는 사랑의 섬김이나 마지막으로 성화, 모든 것이나 이 모든 것이 다 성화와 마찬가지로 한 사람 한사람의 행한 그 모든 일이 공동체적인 봉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설교를 들었던 여러분들은 잘 이해를 하겠지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성화는 무슨 성화라고 그랬습니까? 교회적인 성화입니다. 나 한사람이 계속 깨트려져서 그래서 진실한 신자가 되면 그 모든 성화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공동체적인 연합 속에서 하나님께 봉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진실한 신자가 되면 교회를 위해서 큰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반대로 계속해서 깽판 치면서 다니고 그래. 나 성화 안됐다. 죽일래, 살릴래. 하면서 혈기를 부리고 고집부리고 그러면서 썩은 인간처럼 그렇게 돌아다니면 반대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계속 찌르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또 기도할 때는 복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니까 이율배반입니다. 한편으로는 예수의 몸을 아프게 하면서 자기는 또 복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이렇게 몇 번을 가리켜도 못 알아듣습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 그런 혈기, 분냄, 심지어 원수맺음, 한번 맺으면 풀지 못하는 그런 유아기적인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정신들 차리십시오.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똑바로 살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개개인의 성화는 공동체적으로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께 봉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연약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위해서 정말 무릎을 꿇고 발을 섬기는 이 섬김도 똑같이 그것도 우리의 섬김을 통해서 공동체적으로 그리스도와 하나님께 봉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무엇을 선한 일을 하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나아가서 복음을 열심히 전하고 선교하면 그것 자체가 공동체적으로 봉헌이 되어서 우리 교회 전체가 우리 성도들 모두가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는 그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러니까 교회 그것을 한 사람으로 보시고도 판단을 하시지만 동시에 그 몸을 이루는 전체를 아실뿐 아니라 그 전체가 하나님을 섬기는 교회가 되게 하시기 위해서 각 사람이 행한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두 가지 차원에서 함께 하나님께 심판을 받고 상급을 받는 것입니다. 교회의 한 몸으로서 하나님께 칭찬을 받거나 책망을 받고 또 그 속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 개개인으로서 하나님께 칭찬을 받거나 책망을 받고 하는 이중의 구조가 있는데 이 두개가 떼어놓을 수 없는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교회의 공동체적인 성격을 모릅니다. 그래서 제멋대로 합니다.
오늘날 제일 한심한 신앙생활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찬양은 A 교회에 가서 은혜를 받고, 성경공부는 B교회에 가서 받고, 설교는 D 교회에 가서 듣고, 헌금은 E 교회에 가서 하고 그렇습니다. 그게 정상적인 신앙생활이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몸을 이루어서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잘 생각해보십시오. 자, 그런데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가 몸을 가지고 있는데 그러면 은혜를 받으면 키가 10센티쯤 커집니까? 은혜가 떨어지면 키가 작아지고 그러면 키 작은 사람은 기가 죽어서 살겠습니까. 키가 크고도 죄의 지배아래 있는 사람이 많고 키가 작아도 그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꽉 차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살이 많이 쪄도 그 배에 욕심밖에 없는 사람이 있고 비쩍 마른사람이라도 그 속에 주님을 향한 일편단심으로 믿는 사람이 많습니다. 물론 배나온 사람도 그 배에 주님을 향한 사랑이 꽉 찬 사람도 물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자연적인 몸하고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 들어보십시오. 여러분 언제나 그 몸이었습니다. 물론 피부가 주글주글해지고 늙고 흰머리가 나고 머리도 벗어지고 배에 기름도 끼고 배도 몇 번씩 접히고 그러지만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이 언제나 그 몸이었습니다. 그러면 생각해보십시오. 그 사람이 은혜를 못 받고 그냥 말라비틀어진 사람으로 구원은 받았다고 합시다. 죄의 지배아래서 허덕거리면서 그냥 겨우 겨우 살아가는 인간입니다. 그렇게 하고 10년을 살았는데도 그리스도의 몸이 아름답게 서고 예수께서 섬기셨던 그 섬김을 교회 공동체가 함께 걸어가는데 아무 것도 기여한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가슴에 손을 얹고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이 한 무엇이 공동체적으로 하나님께 봉헌이 되었습니까? 그렇게 정직하게 한번 물어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신자들이 마땅히 해야 할 바고 그것을 못하고서는 그 사람이 행복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충만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여태까지 살았던 모든 삶이 어떤 것이 공동체를 통해 그리스도 예수께 봉헌된 것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계속해서 교회에 생채기나 내고 봉헌을 하기는커녕 계속 흠집을 내고 고통을 주고 그 다음에 피를 흘리게 하고 그러지는 않았습니까? 여러분들의 죄악도 결국은 공동체에 봉헌이 된다면 웃기지만 공동체에 계속해서 흠집을 내고 그 공동체를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달려가서 섬겨야 하는데 계속 생채기를 내니까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마지막에 다 심판으로 돌아갑니다. 각 사람의 삶 속에서 다 돌아갑니다. 교회를 아프게 하고 교회를 견디기 힘든 고통을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안 좋습니다. 교회를 그렇게 고통스럽게 하고 아프게 한 사람들이 번영하고 행복한 말로를 보내는 가정을 봤습니까? 자손들에게까지 물려 내려갑니다. 그래서 신자가 된 다음에 자기가 사는 모든 삶이 이 공동체적인 봉헌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께 올려진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을 모든 교인들이 잘합니다. 그러면 튼튼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막 열심히 섬기는지 모릅니다.
저도 30대 때는 하나님이 주신 게 건강이었습니다. 그래서 이틀 밤 정도 새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고 30대 중반까지는 금요일이면 기도를 하면서 밤을 새든지, 공부를 하면서 밤을 새든지 둘 중의 하나를 해야지 된다고 생각하면서 실천했던 사람입니다. 교수가 된 다음에도 6시간 이상 자는 것은 몸이 아프지 않는 이상 죄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그런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몸이 점점 안 따라줍니다. 그게 문제가 됩니다. 몸이 막 반항을 하고 항거를 합니다.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 일에 전심을 해야지 되는데 못합니다. 그러니까 벌써 일을 해내는 질 자체가 틀려집니다. 그러면 생각해보십시오. 교회가 매일 싸움질이나 하고 모이면 물고 뜯고 구석구석 모여서 수군거리고 비방이나 하고 그러면서 에너지를 다 낭비합니다. 결국은 비유를 하자면 다리도 절고 그 다음에 온 얼굴과 몸에 부스럼이 나고 머리도 제대로 못 감아서 비듬이 더덕더덕 끼고 수염도 못 깎아서 코는 흘러나오고 때를 못 닦아서 손은 트고 손등에서 피가 흐르고 그리고 밥 먹다 흘려서 더러운 옷을 입고 거지처럼 어구적어구적 걸어 다니는 그런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그 안에서 충성스럽게 살았다고 그래도 그 교회 자체가 하나님 앞에 달갑게 평판을 못 받는데 여러분들의 섬김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영적인 차원에서 이 문제를 한번 생각해봅시다. 우리 사람이 항상 그 몸 가지고 인생을 그렇게 살아가는데 영적인 상태가 매우 나쁩니다. 그래서 구원은 받았는지 모르겠는데, 그것도 자기가 받았다고 그러니까 그런가 보다 하지 입증은 안 됩니다. 펴봐야 압니다. 그런데 어째든 구원을 받아서 확신이 있다니까, 자기가 확신하면 뭘 해, 주님이 확신하셔야지. 그리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게 하나님의 자녀로서 신앙의 열매가 안 보입니다. 그러면서 살아갑니다. 너무 조잡하고 야비한 인격으로 그렇게 살아갑니다. 쥐뿔도 섬기는 것이 없고 자기 욕망으로 꽉 차서 이기심에 가득 차서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러다 이 사람이 그렇게 10년을 살아도 하나님은 아무 것도 섬김 받으신 것이 없습니다.
그것을 교회적으로 연관지어서 생각해보십시오. 몸이 있는데 교회가 덩치는 큽니다. 몇 만 명이 모여서, 그런데 마음과 영혼의 상태가 안 좋습니다. 그리고 문제를 더 많이 일으킵니다. 우리 교회에 만 3살짜리 애들이 회심했다는 말이 들어오는데 그 애들이 은혜가 떨어지면 무슨 죄를 지을까? 동생하고 싸우는 정도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세상에서 쓴맛 단맛 다 본 여러분들이 은혜가 떨어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별난 것 다합니다. 그래서 문제를 보통 많이 일으키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크기가 회심하고 4살짜리가 은혜가 떨어진 것과 비교가 안 됩니다. 상상할 수 없는 일들, 어마어마한 죄악들을 저지릅니다. 그러니 교회가 그렇게 커서 상태가 안 좋으니 그 몸을 가지고 뭘 하겠습니까? 움직이지를 못해서 어구적 거리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선한 일을 할 때만 그렇지 악한 일을 할 때는 놀라운 순발력이 거기서 나옵니다. 그게 악인입니다.
교회도 상태가 나쁘면 그렇게 됩니다. 진리의 말씀인가, 진리가 아닌가 하는 싸움을 할 때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네가 잘했는가, 내가 잘했는가, 싸울 때는 그 에너지가 어디서 나오는지 순교의 각오를 가지고 싸움질을 합니다. 피가 터집니다. 심지어 법정에 고소하고 그러면서 머리가 터지도록 싸웁니다. 그게 무엇 때문입니까? 몸이 작아서 그런 게 아니라 상태가 안 좋아서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한 사람이 그렇게 상태가 안 좋은 사람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회개를 하고 성령에 충만함을 받고 기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막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막 밀려들어옵니다. 내가 왜 그랬을까? 왜 바보같이 그 젊은 날에, 돈 있고 권력 있던 그 날에 그렇게 미치광이처럼 살았을까? 창조의 목적도 모르고, 하나님의 사랑도 모르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신 예수의 사랑도 모른 채 왜 그렇게 미치광이처럼 살았을까? 그리고 후회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어떻게 사는가 하면,
주님의 뜻대로 나 평생 살리라
그러면서 야비하기로 이름난 짐승 같은 죄인들이 깊이 회개하면 이 속에 성령으로 충만해지니까 완전히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로 충만해지니까 보는 사람들마다 겸손하게 인사합니다. 형제님, 어떻게 그렇게 변화셨습니까? 어쩌면 그렇게 교회를 열심히 섬기십니까? 정말 예수님의 향기가 나네요. 나는 아무 희망이 없는 쓰레기 같은 죄인에 불과합니다. 그러면서 내가 지난날 너무나 하나님을 모르고 죄를 지으면서 살았으니까 이 남은 시간이나마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야지요. 그러면서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 사람이 한 달 섬긴 그것이 충만하지 않고 죄 가운데 있었던 10년 동안에 섬긴 것이, 섬기기는 뭘 섬겨, 10년 동안 계속 말썽만 부렸지. 교회를 힘들게 만든 사람입니다. 다 교회의 무거운 짐이 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이제 교회의 차원으로 연장시켜서 생각을 해보십시오. 교회가 덩치는 큽니다. 2. 3 4. 5천명해서 많이 모였습니다. 상태가 매우 나쁩니다. 마음이 아주 패역하고 그리고 도무지 자기 깨어짐이 없는 큰 교회입니다. 그 몸을 가지고 뭘 하겠습니까? 그런데 신기한 게 역사를 보면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하는데 제일 기여하는 게 교회고, 못 오게 결사적으로 막은 것도 교회입니다. 신기한 것입니다. 교회가 진리에서 이탈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매일 모여서 예배를 드리면서도 하나님의 나라가 오지 못하게 막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교회의 역사를 보면 순수한 부흥이 일어났을 때 그 부흥의 불길을 끄는 소방서 역할을 했던 곳은 항상 교회입니다. 교회가 그 일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면 그 다음에 어떻게 될까요? 그러면서도 몸이 건강합니다. 그러면 희한하게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을 해보십시오. 막 젊은 사람이 달리기를 하는 것, 저도 한때는 좀 했습니다. 제가 14초 2까지 달렸습니다. 그래서 안양운동장에서 내가 지금 달려도 15초 5는 안 나올까? 그러니까 어떤 지체가 그러는데 저하고 내기하실래요? 20초 안에 뛰면 뭐든지 다해드릴게요. 한번 진짜 해볼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섬긴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얼마나 놀랍겠습니까? 유치원 다니는 애가 회심을 하고 내가 이제는 주님의 뜻대로 살거야. 망가진 이 세상을 고칠 거야. 그 애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유치원에 가서 싸움하지 않고 동생하고 안 다투면 그게 많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재산도 많고, 아직 젊고, 그리고 경험도 있고, 능력도 있고, 머리도 안 나빠, 그런데 마음이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꽉 차서 성령에 충만해서 내 생명 모두 주님께만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 그 한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의 역사는 상상을 초월하는 위대한 역사가 나타납니다. 지금 여러분들 가운데도 은혜 안에 있으면서 하나님을 열심히 눈물로 섬기는 사람들은 정말 위대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 한사람을 통해서 어두운 구렁텅이에서 생명을 얻고 지금 주님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이 수십 명입니다. 그게 얼마나 위대한 일을 한 것인지 생각해보십시오. 그 사람들의 부모는 낳기만 했지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었는데 그 어두운 가운데서 방황하는 영혼들을 그렇게 건져서 그들을 올바로 신앙생활 하도록 이끄는데 그게 몇 십 명씩 되니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위대하고 놀라운 일을 한 것인지, 모든 성도들이 그렇게 성령으로 충만해서 하나님을 섬기게 될 때는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B. 성령의 충만
그러면 정리를 해봅시다. 그러면 이제 여기에서 무슨 문제가 나오는가 하면 우리는 여태까지 성령충만이라고 하는 것을 개인의 차원에서만 다루어왔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제 이 공동체적인 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온전한 신앙생활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지 됩니까? 생각만 깨트려지면 됩니까? 그게 아니었구나. 주님, 저도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새로운 삶이 안 나옵니다. 생각, 마음, 영혼 모든 것들이 합치가 되어서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깊이 깨트려지면 나누어졌던 마음이 하나가 됩니다. 내 안에서도 마음이 나누어집니다. 신앙생활을 하자니 세상이 울고, 세상을 따라가자니 겁이 나고 그러면서 마음에 갈등을 일으키다가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깨트려지면 한 마음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의 충만한 능력을 받습니다. 그러면 그 권능으로 하나님의 일을 섬길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 자신도 변합니다. 그런 일들이 계속 일어나야지만 우리들도 하나님을 섬기면서 아름다운 섬기는 자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이루고 있는 한 몸인 교회도 그것을 확대해서 생각하면 됩니다. 그래서 교회가 제대로 되려면 가끔은 한 마음이 다 되어서 목사, 장로도 할 것 없이 저 밑에 주일학교 학생들까지 한 마음이 다 되어서 교회가 이 꼴밖에 안 된 것에 대해서 깊이 회개하고 통회하고 깊이 자기 깨트려짐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이런 능력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주십시오. 우리가 매일 기도를 합니다. 공동체적으로도 기도를 해야지 됩니다. 이런 은혜를 나뿐만 아니라 우리 모든 지체들에게 부어주십시오. 사랑이 부족하면 하나님, 이런 사랑을 우리 교회에 부어주셔야 됩니다. 이렇게 전심으로 매달려 기도하는 가운데 자기가 깨트려지고 성령의 은혜를 체험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어려움이 있을 때는 하나님, 우리 모두가 이 십자가를 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그렇게 해서 모두 십자가를 지고 이렇게 하면서 그리스도 예수를 머리로 하는 큰 몸이 예수님을 대신해서 함께 공동체적으로 이 세상을 섬겨나감으로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 창조의 목적에 합당한 나라로 바꾸어나가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의 소명입니다. 그러니 이 공동체의 소명과 개인의 소명은 나누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교회 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은 제조업체가 표기되지 않은 식품과 같은 것입니다.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IV.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
그러면 이제 이것과 관련해서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시게 되는데 이제 이것이 우리에게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주는 것입니다.
A. 성령의 강림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시는데 오순절에 임합니다.
1. 오순절에 임하심
그런데 오순절이 무엇인가 하면 구약에 삼대절기가 있습니다.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입니다. 유월절은 애굽에서 나온 것을 기념하는 것이고, 장막절은 추수감사절입니다. 수장절, 그래서 모든 곡식들을 다 거두어서 모아둡니다. 그런데 이 두 번째 있는 오순절은 첫 번째 곡식을 거두는 때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바로 유월절이 있고 나서 12순인데 상순, 중순, 하순 그러는데 오순이 지난 것입니다. 오십일이 지날 때 이제 이 오순절이라고 우리가 부릅니다. 그러니까 이 오순절은 그러니까 농사짓는 농경문화에서는 그 모든 곡식들을 처음 거두는 것이니까 그 기쁨이라고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기쁨과 축복의 상징이 오순절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맥추절로 지키고 있는 것이 그것입니다. 유월절이 구속의 약속이라면 그 오순절은 약속된 땅에 들어가서 농사를 짓고 거두는 첫 수확의 때입니다. 그게 바로 오순절입니다. 그 기쁨의 절기인 오순절에 성령님께서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오셨다는 그 자체는 이 모든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오순절처럼 최고의 기쁨과 축복의 때라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때를 구약에서부터 끊임없이 바라보고 갈망하면서 수많은 언약의 성도들이 죽어갔던 것입니다.
2. 공동체에 임하심
또 하나는 오순절에 성령님이 임하시는데 오늘 본문에 보면 한곳에 모여서 기도할 때 성령이 임하시는 것입니다. 의미심장합니다. 누구 한사람이 받아서 나타나서 자, 한사람씩 기도하면서 배급을 해주면 굉장히 그 사람이 얼마나 멋있어 보이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사람이 예루살렘의 당회장 목사가 되면 정말 권위 있을 것인데 그렇게 안 하고 하나님께서 모두 모였을 때 부어주십니다. 그러니까 성령 부어주시는 것 자체가 개인 위에 부어주신 것이 아니라 공동체 위에 부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성령 충만이라는 것이 개인적인 것이면서도 동시에 공동체적인 지평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성령 충만하지 못하고 은혜가 떨어지면 교회에 못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은혜가 충만하고 진리 가운데 살면 교회를 향해서 가장 훌륭하게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 공동체성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B. 두 상징: 하나님의 임재(2절)
그런데 여기에서 두 상징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성령님이 임하시는데 강하고 급한 바람 같은 소리가 나면서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두 상징이 나타는데 이 상징은 바람과 불입니다. 그런데 이 상징은 모두 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1. 상징 1: 바람
그러면 이 바람은 무엇인가 하면 바람이라고 하는 것은 요한복음 3장 8절에도 이미 나오지만 이것은 하나의 성령의 불가해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a. 성령의 실체적 불가해성(요 3:8)
우선 첫째는 실제적인 불가해성입니다. 성령은 영이시기 때문에 인간의 영혼이 그러하듯 장소도 차지하는 공간도 부피도 크기도 넓이도 없습니다. 그러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합니다. 그게 바로 영이십니다. 성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이신 하나님, 성령, 인간의 영혼 이게 닮은꼴입니다. 그런 실체적인 불가해성을 바람이라고 묘사한 것입니다. 전 이상한 게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면 계기판에 나오는데 비행기 날개 쪽에 바람의 속도가 50 몇 미터라고 표시가 나옵니다. 그런데 그게 뭐가 보이는지, 비행기가 시속 천 킬로로 날아갑니다. 그런데 가만히 파란 하늘이 떠있는데 그게 어마어마한 바람이 불고 있는데 안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령님도 보이지 않습니다.
b. 성령의 작용적 불가해성(요 3:8)
또 하나는 작용적인 불가해성입니다. 성령이 역사하시는데 바람이 역사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바람이 유리창을 통해 보면 바람이 많이 부는데도 울리는 전깃줄 소리나 흔들리는 빨래 통해서 바람이 있다고 하는 것을 알 뿐이지 그런 모든 것이 하나도 없는 창공의 공간 안에 있다면 바람이 아무리 빠른 속도로 불어도 우리는 바람이 부는 것을 인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성령의 작용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작용은 아주 신비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회개하는 그 순간 성령님이 내 마음에 오십니다. 내 마음에 오셔서 나를 새사람을 만드시는데 만드시는 것은 분명히 느껴집니다. 그런데 어떻게 작용하시는지를 우리가 설명할 수가 있습니까?
성령도 영이고 귀신도 영적인 존재입니다. 귀신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 처음부터 이상합니다. 그리고 귀신이 들리면 사람이 정상이 아니게 됩니다. 성령이 오셔도 정상이 아니게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정상이 아니게 되는데 놀랍게 경건하고 아름답게 되지만 인간 본성 자체가 모순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게 신비입니다. 인간의 본성이 있는데 성령이 있는데 귀신이 들어오면 이것과 충돌을 일으킵니다. 사람을 꼬인 사람으로 만들어버립니다. 헛소리도 하고, 밤에 빨래하러 간다고 그러기도 하고, 저기서 할아버지가 오라고 그런다고 하고, 양발에다 쌀을 담아달라고 그러기도 하면서 헛소리를 막 합니다. 그런데 성령은 그런 귀신보다 더욱 강력한 영적인 존재인데 오셔서 헛소리를 합니까? 안 합니다. 그러니까 본성이 있는데 그 본성 속에 성령께서 확! 들어오셔서 작용을 하시는데 이상하게 그 본성과 친숙하게 엮어지면서 인간으로 하여금 괴리감을 느끼지 않게끔 작용을 하십니다. 이런 작용의 불가해성을 바람으로 여기서 묘사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후에 성령의 신기하고 놀라운 능력이 막 나타납니다. 그래서 가끔 아주 급격하게 회심을 한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도대체 내가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저도 회심할 때 그랬습니다. 어느 날 주님이 믿어지고 막 회개하고 놀라운 회심의 역사가 일어났는데 눈을 뜨면서 도대체 나에게 무슨 일이 며칠 동안 일어난 것이지. 내가 진짜 내 동생이 예수를 믿어 교회에 간다고 그래서 내가 하도 말로 잘 설득해서 교회에 못 나가게 해서 내가 이겼는데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나중에 회개를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내 동생 다시 전도했습니다. 그때 내가 말한 거 다 틀렸다고 다시 뒤집었습니다.
c. 성령의 임재적 능력
여기서 또 ‘급하고 강하다’는 수식어가 붙는데 이게 무엇인가 하면 인식할 수 있을 정도의 성령의 강한 임재의 능력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후에 교회에 부어주실 성령이 어떻게 이 세상을 고치는데 있어서 역사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신비해서 누구도 ‘잡았다. 나는 이제 이해했다. 바로 여기에 있다.’ 이렇게 얘기할 수 없고 인간 속에 들어왔을 때 그 작용도 너무나 신비하고 그러면서도 부인할 수 없게 강한 폭풍과 같은 강력한 힘으로 역사해서 그래서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아가려고 하는 모든 교회를 강력하게 후원하실 것이라고 하는 것을 여기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2. 상징 2: 불
a. 심판을 통한 재창조(마 3:10, 히 12:29)
그 다음에 이제 불이 나오는데 이 불은 성경에서 심판입니다. 심판도 이 불은 하나님의 불로 임하는 심판은 재창조를 위한 심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불로 확! 이 세상을 쓸어버리신 후에는 그것으로 내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불로 쓸어버리신 그 위에 놀라운 능력으로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그 파괴는 파괴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심판을 통해서 새로운 것을 완성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게 잘못 세워진 것들을 태워버리고 심판하셔서 다시 하나님이 원하시는 질서들을 세우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불같은 연단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 불을 통해서 파괴하는 힘인데 뭘 파괴합니까? 불같은 연단을 받았다. 그랬더니 불같은 연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좋던 신앙 다 불태웠습니다. 그런 말 안 합니다.
좋은 신앙은 하나님이 원래에 원하시는 질서를 세우신 것이기 때문에 심판받을 것이 없습니다. 불같은 연단을 받으면서 저의 모난 성품이 다 불살라졌습니다. 그러면 말이 되지, 하나님이 원래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었는데 아무리 말해도 안 고치니까 하나님께서 환란의 불같은 시험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이 태우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품과 삶을 하나님이 빚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그 하나님 앞에 연단을 받거나 시련을 당할 때 그것을 불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그 불을 통해서 하나님이 안 기뻐하시는 것을 다 심판하셔서 태우셔서 재창조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연단을 받았다고 한 사람은 이미 잘못된 것들이 태워지고 아름다운 것들이 세워진 것을 연단 받았다고 그러지 불같은 연단을 받았다고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데, 신앙을 버렸어. 그것은 연단이 아니라 타락입니다.
b. 복음을 통한 재창조: “불의 혀”(3절)
또 하나는 불의 혀라고 나오는데 불이 확! 나오면서 수많은 혀같이 갈라지면서 각 사람에게 임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은 창세기 11장과 관련이 있습니다. 창세기 11장에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온 땅에 흩어져서 땅을 정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타락한 다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안 듣도록 프로그램이 만들어집니다. 인간들의 경향성을 가지고 그렇게 하나님을 싫어합니다. 그러면서 우리 흩어짐을 면하자. 그러면서 청개구리가 됩니다. 하나님이 온 땅에 두루 퍼져서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그러셨는데 우리 흩어짐을 면하자. 우리 이러다 흩어지면 어떻게 하나. 바벨탑을 쌓자. 탑을 많이 쌓아서 우리가 이런 놀라운 탑을 지었다는 것을 온 세상에 알리고 이 탑을 중심으로 우리가 모두 모이자, 하늘에까지 우리가 닿을 수 있을 거야. 이러고 뻥을 친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안 흩어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벨탑을 무너트리셔봐야 겁이 나서 흩어지지 않을 것이니, 겁이 나면 사람들은 흩어집니까, 뭉칩니까? 뭉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어느 한순간에 언어를 혼잡하게 하십니다. 그러니 말이 안 통합니다. 떠드는데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으니 할 수 없이 통하는 사람끼리 모여서 자기들끼리 사는 것입니다. 안 통하는 사람들과는 말이 안 되어서 위험하니까 저들과 말이 안 통하니까 우리 떨어지자. 그러면서 이제 흩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신학을 공부하기 전까지 이게 굉장히 우화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신학을 공부하면서 제가 고대 언어에 관심이 아주 많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을 깊이 못 만났다면 지금쯤 아마 돌멩이 같은 것을 놓고 그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보면 쐐기글자들, 여러분들이 학교에서 배운 쐐기글자들이 있는데 삼각형으로 된 그런 토판들이 수없이 쏟아져 나옵니다. 내가 너무나 재미있어서 히브리어 공부를 하면서 그런 고대 언어들을 많이는 공부를 못했지만 조금 접했습니다. 보고 나서 저는 그러니까 주전 2500년, 3000년 전의 언어들을 공부하면서 느낀 게 무엇인가 하면 놀라운 게 온 땅에 구음이 하나였다는 것이 이게 정말 진짜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보면 오늘날의 인도 유러피언 계통의 언어와 그 다음에 이쪽 우리나라와 같은 이런 셈족 계통의 언어들, 이런 모든 것들이 저 1800년, 2500년, 3000년 정도까지 올라가면 그러면 이것들이 문자가 지금 6000년 것까지 발견이 된다고 하니까 올라가면 여기에 나타나는 언어의 특징들이 다 합쳐져서 거기에 같이 나타납니다. 갈라져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연한 기회라도 독일어책이나 영어책 펴놓고 고대의 알파벳을 비교해보십시오. 거의 비슷합니다. 지금은 이상하게 완전히 틀린 말인데 거의 비슷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혀의 저주가 내려서 흩어진 것입니다. 그 저주를 이 성령님 사건을 통해서 풀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이게 하시는 것입니다.
c. 사람에게 임하신 성령
그래서 그 뒤에 성령강림 사건이 일어난 다음에 첫 번째 이적이 발생하는데 그것은 방언입니다. 이 방언을 어떤 사람들은 청취력의 방언이라고 하는데 그런 게 아니라 각 사람이 일시적으로 다른 나라의 말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이 주신 은사로서 방언을 막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복음전파를 위해서 말했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고 그 당시에는 이미 코이네 헬라어가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었기 때문에 선교를 위해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게 무슨 의미로 하나님이 그렇게 여러 나라의 말을 한꺼번에 하게 하셨는가, 말을 훈련할 수 있는 시간이 없으니까 빨리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그랬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상징적으로 아주 놀라운 성령강림 사건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사람들에게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그 순간에 사람들이 여러 나라의 말을 자신도 모르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그 말한 그것이 다 한 가지 내용이었습니다. 크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저주를 받아서 흩어졌던 사람들이 이번에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언어가 하나가 되면서 함께 모이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이후에 모든 언어를 쓰는 모든 나라들에 이 복음이 전해져서 그들이 이렇게 한목소리로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할 것이라고 하는 그 예표를 보여주고 동시에 복음이 그들에게 그렇게 땅 끝까지 전해질 것이라고 하는 것을 이 성령강림사건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합니다.
그럼 무엇인가 하면 우리가 해야 할 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교회가 이 일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온 교인들이 전도를 하지 않습니다. 불신세계에 가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이 하신 위대한 일, 죄인들을 위해서 어떻게 그리스도 예수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셨는지 하나님의 그 눈물겨운 사랑을 전하지를 않으니까 자신들에게 성령이 충만해야 할 필요를 교회적으로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싸움질 하는데 성령님이 필요합니까? 거기에 성령님이 오시면 불편합니다. 혈기 충만한 사람들이 만나야지만 머리가 터지도록 피가 나도록 한판 붙어보지, 한 사람이 아무리 씩씩거려도 한 사람이 주여, 내가 잘못했습니다. 형제여, 용서하십시오. 그러면 싸움이 안 됩니다. 그 사람이 재미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려는 교회는 성령이 자신들에게 필요하다는 필요를 절박하게 느끼겠습니까, 못 느끼겠습니까? 세월이 많이 흘러가도 자기들끼리 먹고 마시고 즐겁게 놀러 다니고 교제하고 알콩달콩, 알콩달콩은 무슨 그러고 그냥 사는 것이지. 그럼 그게 껍질만 교회에 다니지 정말 주님께서 교회를 만들어놓으신 그 사명을 감당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 안에 있는 모든 영혼들이 서금서금 다 병듭니다. 교회가 일치단결해서 하나님을 처절한 마음으로 섬기는 교회의 성도들은 건강합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안 하고 매일 싸움이나 하고, 헐뜯고 재판이나 하고, 매일 투서나 하고, 비방이나 하고, 수근수군이나 하고 그러면 그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이 다 병드는 것입니다. 도매금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V. 마지막 시대의 두 예언
마지막 시대에 주님께서 이제 예언을 주십니다.
A. 환란과 심판(막 3:19)
그것은 환란과 큰 시련을 있을 것이라는 예언을 주십니다. 성경에서 마지막 때가 되면 처처에 전쟁과 기근과 큰 환란 시련, 이런 것들이 닥치게 되고 특별히 많은 재앙이 임한다는 심각한 경고를 줍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우리들이 이 시대 속에서 그런 끔찍한 것들을 봅니다.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에이즈 같은 것, 대책 없는 질병, 그런 것입니다. 모든 나라들이 심각하게 위협을 받고 있고 우리나라도 매우 급속한 속도로 번져가고 있습니다. 이런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소식, 이런 것들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이 예고하신 환란입니다.
B. 복음과 구원(호 14:6, 계 19:15)
그런데 하나님이 이것만 예고하신 것이 아니라 또 하나를 예고하십니다. 그것은 복음과 구원을 예고하십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하나님의 강력한 구원의 역사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제 이 세상을 모두 새롭게 하시기 전에 마지막 자기의 백성들을 타작마당에서 모두 거두어들이기 위해서 추수꾼들을 많이 보내고 그 추수꾼들을 능력 있게 하는 강력한 성령의 역사를 부으셔서 가는 곳마다 구원받을 영혼들을 주님 앞에 돌아오게 하는 이 놀라운 추수의 역사를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실 것이라고 하는 그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고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놀라운 역사가 마지막 때에 있을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성경 여러 곳에서 우리에게 가르치십니다. 특별히 요한계시록에서도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가 되면 그 이 한검이 나와서 그래서 이 모든 세계를 전부다 철장에 부수고 그리고 그 말씀으로 잘못 세워진 질서들을 깨트리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이룰 것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호세아 14장에서도 마찬가지로 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가지가 나와서 그 울타리를 넘어가면서 포도나무가지가 쭉 뻗치는 것처럼 수많은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면서 그 이스라엘 포도나무가지가 뻗어나갈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실제로 이 복음의 놀라운 역사를 한번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고 변화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정도 사실인지 모르지만 어느 선교사가 나에게 말하는데 중국에서는 매일 20만 명이 회심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놀라운 역사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바로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예고하신 것입니다.
VI. 결론과 적용: 교회를 반성함
그러면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들이 어떻게 해야지 될 것인가를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교회의 영적인 현실을 한번 보십시오. 교회는 바로 하나님께서 이런 일들을 하게 하시려고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우리를 구원하셔서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를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명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돈 있고 건강하다고 해서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여러분 모두 동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께 구원받고 이 놀라운 은혜의 자리에 오게 된 것은 우리 스스로 행복해지 위해서 이 길에 들어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변화 받았을 때 눈물 흘리며 행복할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행복했습니까? 거룩해지고 싶었습니까? 이 세상에서 평안하고 안정된 삶을 살고 싶었습니까? 하나님의 사명을 향해서 도전하고 싶었습니까?
어떻게 하든지 이 목숨을 주님을 위해서 바치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놀라운 사랑을 우리가 받았으니 이제 이 사랑을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전해서 이 망가진 세상을 고쳐 주님의 찬란한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게 하기 위해서 살겠노라고 눈물을 흘리며 다짐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다짐이 있으면 뭐합니까? 마음은 청춘이라도 몸은 말을 안 듣는데, 교회의 상태가 마음이 나누어지고 있고 서로 미워하고 혈기나 부리고 싸움이나 하고 서로 갈등하고 도무지 자기 깨어짐이라고 추호도 없는 사람들이 세상에 나아가서는 지위도 없고 직분도 없어서 꼼짝도 못하는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핏대를 세우고 혈기를 부리고 소리를 지르고 그렇게 하면서 교회 일체를 깨트리고 강단에서 무슨 진리의 말씀이 선포되든지 간에 깨트려지는 법은 없고 마음에 반감을 품고 착한 마음이 없이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은혜의 힘들을 그런 것들을 막고 그런 것들을 소화시키는데 다 써버리고 정작 달려가서 이 세상에 고통 받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이런 것이 없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잘 생각해보십시오. 교회에 모여서 매일 싸움이나 하고 소송이나 하고 눌러 붙어 있겠다는 담임목사나, 쫒아내겠다는 장로들이나 그렇게 해서 싸움질이나 하고 교회일체를 깨트리는 사람들 중에서 선교지에 나가서 영혼들이 불쌍해서 펑펑 우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 눈물이 있으면 교회에 와서 그 짓 안합니다. 지금 어느 때인데 그러고 있는지. 마지막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막차를 태우셨는데 목숨을 다하도록 가서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고통 하는 이 세상을 위해서 모든 정욕과 노력과 우리의 모든 물질과 수고를 쏟아 부어도 다 할 수 없는 수많은 일들이 이 세상에 널려있는데 할일이 없어서 교회에 모여앉아서 그렇게 잡담이나 하면서 세월을 허송하면서 보냅니까? 정말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그게 뭡니까? 개인적으로 겨우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것, 가짜인지 모르는 표 딱지 하나 붙들고 그리고 마지막에 죽을 때 성경구절 몇 구절로 위로를 받으면서 죽는다. 그게 기독교 신앙의 종말이라면 너무 불쌍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원대한 사명을 주셨는데 그래서 우리들이 정말 생각해야합니다. 교회적인 차원에서 깊이 생각해야합니다. 그리고 한번 이 교회가 어떤 상태인지 여러분들이 깊이 생각하십시오. 온 마음을 교인들이 합해서 목사로부터 장로, 모든 교인과 주일학교에 이르기까지 자기 깨어짐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이 교회 안에서, 그리고 이루지 못한 사명에 대해서 진지한 참회와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다투고 분쟁할 에너지는 있어도 선교를 위해서 1년 365일 지나가도 눈물 한 방울 흘릴 줄 모르고 파송한 선교사 이름도 못 외우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그리고도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회개해야지 됩니다. 지금도 사선을 넘나들면서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순간순간 눈물과 피를 뿌리는 사람들 생각해보십시오. 편안한 환경에서 남이 다 지어놓고 차려놓은 환경에서 11시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가라고 그러는데 그것도 제 시간에 못 나오고 말이지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태어나야지 됩니다. 그런 모든 이 소모적이고 그리고 더럽고 추잡한 일들을 다 떠내려 보내고 눈을 크게 뜨고 희어져 추수하게 된 세상을 보십시오. 얼마나 고통 하는 사람들이 많은지를 보십시오. 이 사람들이 예수의 복음을 전하며 살기 위해서 우리는 다시 정말 공동체적으로 성령이 충만한 부흥이 있는 그런 공동체로 다시 태어나야지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 십자가의 복음으로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 2:36-41)
I. 본문의 배경
사도행전에 나와 있는 이 초대교회가 완전한 교회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 지상에는 사실 완전한 교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이 불안전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만 이 세상에 있는 교회는 신자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그 교회의 표준에 이미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는 교회, 그리고 이미 붙잡았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교회는 없습니다. 다만 끊임없이 성도와 그리고 온 목회자가 그 교회의 자신의 부족을 알고 주님이 세우시려고 했던 교회의 모습에 가까이 다가가는 일만 남아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라고 해서 다 똑같은 교회가 아닌 것은 성도라고 해서 모두 똑같은 것이 아닌 것과 유사합니다. 걸레처럼 살아가는 신자가 있다고 치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정말 신실하게 살아가는 성도가 있다고 칩시다. 두 사람 다 예수를 믿고 거듭난 사람이기 때문에 그 안에 성령님이 계십니다. 그 점에 있어서 두 사람 다 그들의 몸은 성령의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모두 언약의 백성들이고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두 사람은 현저한 차이가 있습니다. 한 사람은 명목은 신자이지만 마음과 삶이 신자의 이름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예수께 접붙여있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접붙여있는 가운데 썩고 병들고 그렇게 고통하고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런 고통을 주는 헌데 같은 몸이 됩니다.
그러나 만약에 진실하고 신실하고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하는 아름다운 영혼의 힘을 가진 성도가 있다고 칩시다. 그의 삶은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자신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붙어 아주 요긴한 지체가 되어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받들어 아름답게 작동하고 섬기기에 적합하도록 기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만약에 각 신자가 그렇다면 교회는 그 신자의 몸을 크게 확대해서 생각해보면 됩니다. 그러니까 이 땅의 교회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머리로 하는 교회입니다. 그 교회가 아주 작다고 해서 무시해도 안 됩니다. 왜 그들의 머리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그 교회도 그리스도 예수의 피 값으로 세워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에 하나님의 사람 스펄젼 목사는 자기 동료 목사들과 함께 지나가다가 저 멀리 언덕에 작은 동리에 작은 교회가 있으면 가던 마차를 멈추고 저 교회를 위해서 함께 기도하자고 권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때로는 어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교회가 올바르게 하지 못하고 혈기를 부리고 싸움질을 하고 심지어는 소송을 내고 1층에서 찬송을 부르고 아래층에서는 기도하고 하면서 한 건물 안에서 두 교회가 싸웁니다. 그래도 그 교회도 그리스도 예수의 몸입니다. 사람들이 하는 짓은 깨끗하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 교회를 능욕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참을 수 없는 모욕입니다. 그런 상태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도 그리스도 예수의 몸입니다. 성령님이 그 교회 안에 계십니다. 그렇지만 그 성도들이 서로 뜨겁게 사랑하고 진리 안에서 뜨겁게 하나 되고 그 진리대로 살기 위해서 온전히 마음을 바치고 그리고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며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에 준행하여 온 땅에 두루 사람들을 보내며 복음을 전하고 망가진 이 세상을 고치고 아프고 병들고 고통 하는 사람들을 무릎을 꿇고 섬기는 이 교회하고는 얼마나 차이가 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자신이 이미 예수를 믿었는데 그까짓 것 아무렇게나 살면 무슨 상관이 있으려나. 그렇게 생각하는 신자가 있다면 사실은 그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인지 궁금합니다. 신자는 절대로 그렇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 동안에 우리 한국교회에서는 이렇게 예수 믿고 구원받으면 이제는 천국백성이 되었다. 하나님이 책임져주시고 복을 많이 주신다. 그것만 계속 강조했습니다. 불신자들은 지옥, 예수 믿는 자들은 천국 이것만 많이 치중해서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똑같이 예수님을 믿었어도 이제 그 신자가 이 세상에서 얼마나 그 구원의 목적에 부합하게 사는가 하는 것은 이제 시작입니다. 구원받은 그 이후가 더 큰 문제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로 아무리 망가지고 병들고 교인들이 싸움질이나 하고 더러운 똥내를 풍긴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 예수의 몸입니다. 그런 교회를 보시면서 주님이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습니까? 이루 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 자신이 예수 믿고 구원받고 천당 갈 티켓 내 손에 쥐었으면 됐지 뭐 아무렇게나 살자가 죽으면 뭔 상관이 있어.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똑같은 논리에 의해서 교회가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몸인데 아! 예수님이 피 값으로 사시고 당신의 백성들을 모으고 이제 이 속에서 싸움질을 하던 뭘 하든 그리스도 예수의 몸이고 성령이 안 떠나신다고 하는데 그럼 됐지 뭐 굳이 더 좋은 교회가 될 이유가 뭐가 있어. 까짓것 뭐 그렇게 힘들게 신앙생활을 해. 이럴 사람들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게 개인의 성화와 교회의 성화는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가 되는 것이지 절대로 따로 되어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제 이 교회가 이제 모든 성도들이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진리를 뜨겁게 사랑하고 잠시 머무는 이 세상에 마음을 뺏기지 않고 영원한 나라를 뜨겁게 연모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그래서 이 세상을 사랑하고 섬겨야 할 세상으로 생각하지 누리고 쾌락해야 할 세상으로 생각을 안 합니다. 그러면서 섬기고 봉사합니다. 그러면 그 교회는 참 아름다운 교회가 됩니다. 그리고 교회가 이렇게 아름답고 능력 있게 될 때 사람들이 그 안에서 굉장히 잘 변화가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교회 안에서 그런 놀라운 회심과 변화의 작용들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게 교회에 하나님이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축복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교회를 어떤 교회는 그렇게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과 교회를 세우신 그 구속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훌륭한 존재가 되어서 그 안에 있는 성도들이 그 비옥한 교회의 영적인 목장에서 자라게 해주시는가. 무엇이 그런 것들을 결정하는가? 이것을 사도행전은 세 가지를 제시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 다음에 기도와 그리고 성령, 이 세 가지를 이것이 교회를 정말 그리스도의 몸답게 만드는 도구라고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하나님의 말씀, 내일은 기도, 마지막 날에는 성령, 그리고 나머지 두 가지를 다시 금요일과 주일에 걸쳐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본문에 보니까 이제 드디어 오순절 성령을 체험한 사도들이 거리 밖으로 뛰어나왔습니다. 예전에는 핍박의 칼날이 무서워서 다락에 숨어있었는데 거기서 성령을 경험한 다음에는 밖으로 뛰어나왔습니다. 그리고는 담대하게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 성령을 받고 방언을 하는 일이 있었다고 어제 말씀드렸습니다. 사람들이 보니까 이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와서 각 나라말로 방언을 합니다. 그래서 너희들이 새 술에 취했구나. 단술, 포도주, 새 술에 취했구나. 그랬더니 사도가 변명하는 말이 무슨 소리나. 지금 3시다. 3시에 술에 취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나. 그 3시는 지금으로 따지면 아침 9시입니다. 그러니까 오순절에 임한 성령의 역사가 새벽이었다고 다들 생각합니다. 몇 시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서 며칠 있다가 밖으로 나간 게 아니라 임하고 나서 곧바로 나왔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늦어도 제 생각에는 6-7시 이 사이에 성령님이 강하게 임하신 것 같습니다. 새벽에 성령님이 임하셨습니다.
그 사람들이 성령의 강한 불과 같은 강림을 경험하고 나서 그래서 밖으로 나와서 이제 말하니 새 술에 취하다니 너희들이 정신이 있는가. 이 꼭두새벽부터 아침에 술에 취해 다니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그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구약성경에서 우리에게 예언하신 말씀이다. 말세가 되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종들에게 영을 물 붓듯 부어주셔서 그래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이룰 것이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이 이미 말씀해주시지 않았는가. 그 예언을 따라서 우리들이 성령을 받은 것이다. 그러면서 백성들에게 복음을 외쳤던 것입니다. 그때 외쳤던 핵심적인 말씀이 무엇인가 하면 예수는 그리스도시다. 너희들이 나무에 못 박아 죽인 나사렛의 그 예수가 바로 너희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보내겠다고 약속하신 메시아이시다. 그것을 전파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이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 그러면 하나님이 너희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이라고 외쳤더니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교회로 들어와서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들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배경에 나와 있는 내용들입니다.
II. 성령 강림과 하나님의 통치
이 성령의 강림과 하나님의 통치는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A. 하나님의 두 통치
무슨 뜻인가 하면구약시대에도 성령님이 계셨지만 그 성령님은 일을 중심으로 어떤 사람에게 필요하면 오셨다가 그 일을 이루고는 그에게서 떠나가시는 성령님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충만하게 이 세상에 강림하셔서 온 시대를 성령의 시대로 만드시고 그리고 믿는 각자의 마음속에 한번 오신 후에는 어떤 일이 있든지 간에 떠나지 않으시고 영원히 그들과 함께 거하시는 그런 성령은 구약에서는 없었습니다. 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바로 이렇게 전례에 없게 성령님께서 충만하게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그래서 이제 이 세상에 충만하게 거하시고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그 사람 마음속에 들어가셔서 영원히 떠나지 아니하시고 그와 함께 계시는, 그래서 그 안에 계셔서 그 성령님이 그를 다스리시는 그런 시대가 온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1. 율법에 의한 통치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을 다스리시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첫째는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서 다스리시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율법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 자기의 백성들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을 통치하십니다. 그래서 이 율법에 의해서 통치하신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하나님이 두 가지를 보여주십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계시와 상벌을 약속하십니다. 즉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 수 있도록 보여주십니다. 이것은 불신자들에게도 하나님이 보여주십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자연을 통해서 오는 계시라고 해서 자연계시,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다고 해서 일반계시라고 부르는데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린다고 하는 것을 모든 인간들에게 보여주십니다. 다만 깨달음이 부족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그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지 못하고 해와 달과 별이라고 생각하고 우상을 섬기고 또 이방의 종교를 믿고 또 이방의 종교를 창설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모두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이 무지로 말미암아서 잘못 표현된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고 또 하나님을 믿는 구약시대의 백성들에게는 율법을 주심으로 하나님이 그들을 통치하십니다.
그래서 이제 이 모든 율법을 넓은 의미에서는 모든 사람의 양심을 율법으로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통치하십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악을 행하면 마음에 고통이 있고 번민이 되어서 잠이 잘 오지 않습니다. 선을 행하고 착한 일을 행하면 이상하게 마음이 기쁘고 행복해지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안 믿는 사람들은 양심을 통해서 통치하시고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들은 율법을 통해서 통치하십니다. 율법은 그 안에 상과 벌이 계시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하면 살고 복을 주시고 그 명령을 거역하고 어기면 하나님이 형벌을 내리시고 심판하신다는 하나님의 계시를 율법을 통해 보여주십니다. 그러면 그것을 알게 되는 사람들이 그 하나님이 금하신 일을 할 때는 강한 두려움을 느끼고 하나님이 하라고 명령하시는 일은 안할 때 두려움을 느끼게 만드셔서 할 때 기쁨이 있게 하셔서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그들을 창조의 목적에 맞도록 다스리고 통치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서 하나님의 도덕적인 통치를 구현하심에 있어서는 언제나 한계가 있게 마련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율법은 어떤 것이 죄악이고 어떤 것이 참으로 선한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그것을 깨달은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게 선하게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공급해주지는 않습니다.
2. 은혜에 의한 통치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을 이 땅에 보내심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통치의 시대를 여는데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 은혜의 통치는 바로 성령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은혜의 통치입니다. 즉 은혜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은혜입니다. 이 은혜는 크게 두 가지로 성경이 말을 하는데 하나는 객관적인 은혜입니다. 이 은혜는 자기 밖에 있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와 같은 죄인을 구원해주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즉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다. 라고 할 때 이것은 우리는 아무 대가없이 하나님께서 비천한 죄인들에게 베풀어주시는 그 말할 수 없이 탁월한 하나님의 선하시고 좋은 호의입니다. 해택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여기서 이 은혜의 통치라고 할 때 이 은혜는 주관적인 의미에서의 은혜입니다. 주관적인 의미에서의 은혜가 무엇인가 하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사람들 속에 생겨나는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입니다. 이런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랑에 놀라운 감화인데 그러니까 은혜를 받은 사람에게는 항상 하나님을 향한 놀라운 사랑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은혜는 반드시 목적을 가지고 인간들에게 주어집니다. 여러분들이 이번 사경회에도 하나님 앞에 깊이 은혜를 받게 되면 그 은혜에는 반드시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 목적이 무엇인가 하면 인간으로 하여금, 신자로 하여금 자신이 마땅히 행하여야 할 바를 행하게 하시는 선한 의지를 불러일으키시는 하나님 사랑의 감화입니다.
그러니까 은혜를 하나님이 주시는 이유는 인간으로서, 신자로서 하나님 앞에 마땅히 행하여야 할 의무가 있는데 그 의무를 행할 능력이 인간에게 없기 때문에 그 의무를 행할 수 있도록 우리 안에 있는 선한 의지를 불러일으켜서 사랑으로 확 감화해주시는 그 우리의 마음과 영혼 정신에 미치는 작용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은혜를 받으면 은혜가 좋아하는 것은 끊임없이 은혜인 자기를 방해하는 죄를 끊임없이 죽이는 것을 좋아하고 또 은혜가 좋아하는 것은 자기가 이 은혜의 본성에 맞는 의무를 행하면서 사는 것을 은혜가 아주 좋아하는 것입니다. 좀 더 쉽게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눈빛이 이해를 못하시는 눈빛인 것 같아서 쉽게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이 속에서 죄를 싫어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은혜를 많이 받으면 죄가 싫고 그냥 하나님이 너무 사랑스럽고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고 어째든 하나님의 사랑과 관련된 것만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그렇게 은혜가 충만한 신자라고 하더라도 저 구석에는 죄에 대한 사랑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죄가 조금씩 들어오는 것을 관용과 너그러움으로 내버려두면 죄가 점점 자랍니다. 그러면 이 은혜가 좋아하지 않는 마음과 영혼의 상태가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은혜를 받아서 저 속에는 죄를 짓고 싶은 욕망이 있는데도 이 죄가 들어올 때는 안 돼. 나는 다시는 그런 죄 된 생활로 돌아갈 수 없어. 그 죄 가운데 고통하고 신음하던 옛 생활로 돌아갈 수 없어. 그리고 죄를 자꾸 죽이는 삶을 삽니다. 죄를 죽인다고 하는 것은 그 죄와 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그 죄를 미워하고 멀리하고 불순종하지 않으려고 하고 그리스도께 계속 피하려고 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려고하는 것 그러면 그 속에서 이 죄가 죽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무슨 욕망이 생겨서 막 유혹을 받을 때 다시 찬송을 부르면서 은혜를 받고 눈물을 흘리고 회개하고 기도하면 다시 그것들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생겨납니다. 그렇게 죄를 죽이는 삶을 살 때 우리에게 주신 이 은혜는 그것을 매우 기뻐합니다. 그래서 은혜가 강한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신자가 은혜를 받았어도 그 은혜는 등급이 있고 성장합니다. 사람마다 그 은혜의 등급, 은혜가 성장한 정도가 각각 틀립니다. 은혜가 10%에 없는 사람이 있고 95%이상 꽉 찬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정도가 다르고 은혜도 성장합니다. 퇴보하기도 하고 성장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은혜가 떨어졌다는 말을 여러분도 많이 씁니다. 그것을 좋아합니다.
또 하나는 내 안에 하나님이 은혜를 많이 주셨습니다. 그런데 아무 것도 안 합니다. 그럼 뭘 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니까 정말 은혜롭네. 계속 들어야지. 그리고는 아무 것도 안 하고 매일 가서 말씀만 듣는다고 하면 그게 어느 정도까지는 되는데 한참 듣고 나면 싫증이 나기 시작합니다.
(예화; 열린 신문에 간증: 어느 자매가 처음 교회에 나와 말씀을 들으며 갈급한 영혼에 은혜를 받아 말씀에 깊이 빠져 은혜로운 신앙생활을 하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영혼이 싫증을 느끼던 차에 영화 ‘인어공주’를 보면서 새롭게 깨달아 다시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며 배웠다는 내용)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 이 은혜가 이 사람이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크신 은혜를 주신 데는 사명이 있을 것인데 그게 뭘까? 아! 내가 물질이 많으니까 물질로 주님께 봉사하라고 나에게 주셨구나. 열심이 섬깁니다. 아!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놀라운 은혜를 주신 것은 나에게는 정말 물질은 없지만 재능은 있는데 이 재능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나를 부르셨구나. 그러면서 섬깁니다. 이렇게 하면서 의무를 인간으로서 신자로서 적당히 해야 할 의무를 다하면서 살아갈 때 이 은혜의 불이 계속이 속에서 타오르는 것입니다. 교회에 봉사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 속이 꺼진 것입니다. 가서 들여다보십시오. 언제 불을 땠는지, 얼음장 같습니다. 그래도 그 사람이 설교를 많이 들었는데요. 소용없습니다. 어느 수준에까지 가면 아무리 설교를 들어도 그 사람이 변화가 잘 안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더 많이 말씀을 계속 주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이게 하나님 앞에 계속 섬기면서 말씀의 은혜를 받으면 또 섬기고 또 섬기면 다시 하나님이 말씀을 주시고 이런 계속해서 작용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 있는 은혜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끊임없이 죄를 죽이고 이기는 성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그 의무에 헌신하는 그런 것들이 바로 은혜의 통치입니다. 이제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은혜의 통치입니다. 그러니까 참 놀랍습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안 믿는 사람을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면 하나님이 겁을 확 주시는 것입니다.
(예화: 회를 먹기 위해 군산으로 내려가는 고속도로에서 사고가 난 처참한 모습을 보고 자신들이 회를 먹기 위해 가는 그 모습에 인생의 허무함을 느껴 다시 집으로 돌아갔는데 이것은 사람들의 마음에 두려움을 주고 양심의 가책을 주시고 인생의 허무를 보게 하신다는 내용 )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다루실 때도 있지만 그렇게만 다루시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하면 하나님이 무엇인가 그에게 다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순종하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으로 돌아가게 하시기 위해서 그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제껏 불순종하면서 내 멋대로 살았지만 은혜를 받으니까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상하게 은혜를 받으면 눈이 열려서 예전에는 못 보던 자신이 이렇게 보입니다. 그렇게 보니까 예전에는 자신이 아무 문제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성령의 은혜가 주어져서 눈이 딱 뜨고 보니까 예전에 내가 행했던 모든 짓이 미친 짓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인간이 지금 내 앞에 살아있으면 두들겨 패주고 싶을 정도로 미운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인생을 살 수 있는가. 그래봐야 그게 자기지만, 그런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눈이 확 뜨여집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이상하게 마음이 부드러워지면서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그 통치에 복종하고 싶은 어린아이같이 부드러운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확! 은혜가 임하니까 예전에는 도저히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은혜가 확! 임하니까 내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들을 행할 수 있게 됩니다. 의지는 남의 것이 아니라 내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의지를 가지고 내가 행사하는데 하나님이 그 의지를 선한 방향으로 행사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확 부어주시는 것이 있는데 그게 바로 은혜입니다. 그러니까 은혜를 받으면 이상하게 하나 제일먼저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게 되고 은혜를 받으면 눈이 확 열려서 명정한 지혜를 받게 되고 은혜를 받게 되면 이상하게 마음이 뜨거워져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싶고 은혜가 밀려오면 이상하게 주님께 받은 그 사랑을 많은 사람들에게 펼치고 그 사랑으로 사람들을 섬기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아무도 목에다 줄을 엮어서 이놈의 자식 너 안 가면 죽여 버린다고 채찍질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은혜를 받으면 주님을 거스르며 살던 옛 삶을 다 벗어버리고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자기가 마땅히 행해야 하는 의무인데 예전에 다 팽개쳤던 의무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방탕했던 애비가 은혜를 받으면 아버지의 자리로 돌아옵니다. 춤바람이 나고 정신 못 차리던 엄마가 은혜를 받고 회개하면 엄마의 자리로 돌아옵니다. 부모가 무서운 줄 모르고 대들고 까불던 자식들이 은혜를 받으면 자식의 그 자리로 돌아옵니다. 성도인지 뭔지도 모르고 정신없이 이 세상에 빠져서 지내던 신자들이 은혜를 받으면 자기 자리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자기의 마땅한 의무를 행하게 됩니다. 그게 바로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입니다. 그런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무엇으로 하신다고요? 은혜의 통치로 그 일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신자는 은혜를 못 받으면 이것은 명목상의 신자입니다. 은혜를 못 받으면 하나님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는 사람들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마땅히 행하라고 하는 그 의무도 행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그게 껍데기뿐인 신자인데 껍데기뿐인 신자가 진짜로 구원받은 신자라면 행복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얘기하면 긴데, 우리들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인데 그러면 이 영혼이 불신자였을 때는 느끼지 못하던 아주 강한 경향성을 느끼게 됩니다. 이 영혼 안에 있는, 그게 무엇인가 하면 영혼이 매일 소리치는 것입니다. 나로 하여금 온전하게 해달라고, 그래서 영혼을 깨끗하게 아름답게 잘 가꾸어주면 이 영혼이 너무 행복해합니다.
또 하나는 이 영혼이 또 소리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나를 원래 창조한 그 목적대로 살아가게 해 달라. 영혼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인간 안에 그 영혼을 주셔서 하나님과 교제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을 잘 전수받아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에 자기를 지으신 목적대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영혼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게 어려운 말로 영혼 안에 있는 목적인 그리고 완성 인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 은혜가 임하면 그런 놀라운 일이 생기는데 은혜가 없으면 사랑할 수가 없고 섬길 수도 없고 창조의 목적을 따를 수도 없고 영혼이 원하는 대로 완성시킬 수도 없고 영혼이 원하는 대로 목적을 이루어질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서도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은 그것은 가짜입니다. 이것은 거듭난 사람이 아닙니다. 거듭난 사람은 이 둘 사이에서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돌아오라는 사람도 별로 없는데 자기가 스스로 돌아갑니다. 그러면서
손들고 옵니다.
막 회개합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에서 묘미가 있습니다. 이렇게 회개하면 나쁜 짓을 했는데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무한한 용서와 순종하기 위해서 무한한 능력의 공급이 약속됩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신 특권입니다. 그래서 가서 다시 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용서해주시고 은혜를 주십니다.
B. 은혜의 통치, 사랑의 통치
그러면 이 은혜의 통치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면 이게 사랑의 통치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구약을 보면 무섭지 않습니까?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누군가가 사람을 죽였으면 그도 반드시 죽여라. 이렇게 보복 법처럼 계속 나옵니다. 그런데 이 은혜의 통치는 그런 통치가 아니라 사랑의 통치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주신 새로운 율법은 옛날 율법하고 틀립니다. 옛날 율법은 그런 율법이었는데 새로 주시는 율법은 사랑의 율법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보면 율법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과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 원수를 미워하고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선대하라.” 율법에는 그렇게 나오는데 예수님께서는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원수도 사랑하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도대체 왜 옛날에는 이렇게 가르쳐주시고 오늘날에는 이렇게 가르쳐주시는가. 옛날에 그렇게 가르쳐주신 이유는 인간들로 하여금 그런 율법아래서 자신이 정말 비참한 죄인이고 끊임없이 그 율법을 지켜도 자기는 계속해서하나님 앞에 죄인일 뿐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그래서 하나님이 그 율법을 그런 식으로 지키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신약시대에는 예수님께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구약에는 너희 원수를 미워하고 사랑하는 자들을 선대하라고 가르쳤는데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는데 새로운 율법인데 사랑의 율법인데 원수도 너희는 사랑하라. 그러면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아니, 어떻게 원수도 사랑합니까? 자기에게 선하게 해주는 사람을 정말 제대로 대해주어도 훌륭한 사람인데 자기를 미워하고 죽이려고 하는 사람까지 사랑할 수 있습니까? 사랑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왜 이제는 은혜의 통치의 시대가 왔기 때문에, 그 은혜는 곧 사랑의 통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큰 은혜를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은혜를 받게 되면 이성적으로는 생각할 때는 반드시 미워할 수밖에 없는 원수인데 이 마음속에서 그를 향해 마음이 녹아내리면서 그를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통치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제일먼저 이 모든 창조의 주인이신 삼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예전에는 심판이 두려워서 선을 행했는데 이제는 그 사랑이 너무나 감격해서 이 쓸데없는 인간을 구속해주시고 십자가의 사랑으로 건져주신 그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서 더군다나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섬기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주셨기 때문에 이제 그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마땅한 의무입니다. 은혜를 받으니까 그 마땅한 의무를 행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한 의지를 이끌어내어서 그래서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또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지만 그 은혜대로 순종하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모든 계명이 참으로 좋은 것이라고 하는 확신을 갖게 만들어줍니다. 예전에는 하나님께 책망 받을까봐 순종했는데 이제는 내가 잘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가장 선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왜 은혜를 통해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선한 분이라는 사실을 체험했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마음으로 그 무거운 의무들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은 하나님이 나의 영혼과 인생을 위해서주신 행복으로 가는 길이라고 믿고 그것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진짜 그를 행복하게 하시고 하나님이 그에게 복을 주십니다.
또 두 번째는 그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큰 사랑을 경험하고 나면 사람에 대한 마음이 변하게 됩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사랑스러워지기 시작합니다. 이게 바로 까리따스의 사랑이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큰 사랑을 경험하고 나면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생기깁니다. 그 사랑이 무엇을 통해서 온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은혜의 경험을 통해서 오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의 경험은 누가 가져다준 것입니까? 성령이 가져다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성령의 강한 은혜가 강한 은혜를 불러일으켰고 그 강한 은혜의 체험이 그들에게 사랑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런 은혜가 없었을 때는 선한 의지가 이끌어내어지지 않을 것이니 당연히 사람과 쉽게 원수 맺고 미워하고 한번 마음에 상처를 준 사람의 마음을 용서하지 못하는 야비하고 조잡한 마음이 승리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선한 의지는 죽고 악한 의지는 발동을 했을 것인데 성령을 통해 은혜로 말미암아 사랑을 이끌어내시니까 이 속에서 선한 의지가 불러일으켜져서 그래서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은혜를 받으면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한 성도가 은혜를 받은 가장 숨길 수 없는 열매는 능력, 귀신을 내어 쫓는 것, 말씀에 대한 해박한 지식 그게 아닙니다. 그럼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인의 영성의 최고의 열매가 무엇일까? 은혜의 최고의 증거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은혜와 그리고 은사가 있습니다. 은사는 우리 자신의 변화시키는 것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적합하도록 주신 선물이지만 은혜는 그 선물을 사용하는 인간 자체를 바꾸어놓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은사 받은 사람이 귀하겠습니까, 은혜 받은 사람이 귀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이해가 안 가실 것입니다.
아주 쉽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아주 아리따운 처녀라고 합시다. 자매입니다. 그래서 진짜 백마를 타고 오지는 않았지만 하얀 버스를 타고 온 어떤 청년 하나를 만났습니다. 영구차를 타고 왔나. 하여튼 만났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너무 좋습니다. 그런데 그는 나를 섬길 수 있는 많은 도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원래 편한 것을 좋아하는데 그는 돈이 있습니다. 내가 노래를 좋아합니다. 노래를 잘 부릅니다. 나는 원래 색깔이나 분위기에 민감한 여자인데 무드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은 없습니다. 그럼 그 사람을 택하겠습니까? 좀 자기하고 분위기도 잘 못 맞추어주어서 그래서 가끔 좀 섭섭할 때도 있고 돈도 있지만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어느 날 이 여자가 저 남자 안에 나를 기쁘고 즐겁게 해줄 수 있는 겉에 있는 것은 별로 없지만 마음 하나는 정말 이쯤에서 내가 죽으면 자기도 따라 죽을 정도로 나밖에 모르는 사람, 왜 웃습니까? 그런 사람이 이 세상에 아주 없습니다. 그래서 뜨거운 사랑이 심지어는 어느 날 이 남자가 자기 마음을 다 드러냈는데 난 이 세상에 태어나서 너만 사랑한다. 네가 지금 만약에 반신불수가 된다고 할지라도 식물인간이 된다고 할지라도 난 네가 살아있는 것 때문에 감사할 것이야.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 여러분들이 정신이 빗나간 여자가 아니라면 누구와 결혼하겠습니까? 당연합니다. 그게 바로 은혜와 은사의 차이입니다.
은혜는 없는데 은사만 남아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은혜는 많이 받았는데 은사는 그렇게 많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은사는 사랑을 가져오지 못합니다. 은혜는 사랑을 가져옵니다. 그래서 그 은혜는 언제나 오래 참는 사랑을 가져다주고 시기하지 않는 사랑을 가져다주고 그리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사랑을 가져다주고 무례히 행치 않는 사랑을 가져다주고 오래참고 견디는 사랑을 가져다줍니다. 그런 것이 바로 은혜의 열매입니다. 그래서 부러워해야 될 사람들은 교회에서 능력만이 아닙니다. 은사 많은 사람, 성경 많이 아는 사람, 그러나 삶을 별로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을 그렇게 부러워할 것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인가 하면 사랑이 많은 사람, 주님이 그 마음을 움직여서 언제나 머리가 숙여지는 사람, 그래서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도저히 사랑할 수 있으리라고 믿어지지 않는 사람이 사랑하고 그러면서 살아갑니다. 그런 사람은 바로 은혜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은혜의 통치는 곧 사랑의 통치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다스려주시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인데 주님의 다스림은 곧 주님의 통치인데 주님의 통치는 은혜의 통치입니다. 그러면 그 은혜의 통치는 곧 사랑의 통치인데 그러니까 그런 사랑의 통치가 있는 그곳에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이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주님이 너희 가운데 계시니라.” 사람들이 그 말씀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열심히 사랑하라. 그러면 주님이 그들에게 나타나서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는 것인가?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너희들이 뜨겁게 사랑하면 너희가 각 사람이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어디에 계십니까? 그런데 그리스도가 계신 증거는 그리스도의 통치에 의해서 나타납니다. 그런데 서로 뜨겁게 사랑합니다. 그러면 누구든지 무조건 사랑하는 데서는 그럼 그리스도가 계시는가? 가정도 팽개치고 춤바람이 나서 뜨겁게 카바레에서 사랑하는데 거기에 주님이 계십니까? 그런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럼 무엇인가 하면 형제를 서로 사랑하는데 그 사랑하는 이유가 형제가 너무 훌륭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에 내가 굴복하니까 그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연약한 형제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서로가 그렇게 사랑하면 거기에 주님의 통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은혜의 통치는 어떤 통치, 사랑의 통치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은혜를 많이 받으면 수십 년 동안 용서할 수 없는 사람도 용서합니다.
저는 지금도 몇 번 고백했지만 저는 우리 아버지를 대게 미워했습니다. 저는 태어나서 한 번도 아버지가 보고 싶은 적이 없었습니다. 단 한번도, 우리 아빠 어디에 계실까? 어려서부터 성장할 때까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습니다. 엄마는 보고 싶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마음속에서 얼마나 아버지를 미워했는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평생 아버지를 아마 용서할 수 없을 것이야, 사랑할 수 없을 것이야.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이 내 마음을 막 녹이고 나니까 제일먼저 회개했던 것이 아버지를 사랑하지 못한 것을 회개했습니다. 어느 한순간에 확! 풀리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확! 풀리니까 우리 아버지를 뜨겁게 사랑하고 난 그 순간에 우리 아버지가 믿지 않는 분이시지만 천사가 가서 우리 아버지의 머리를 요술지팡이로 딱 때리면서 뾰옹 하면서 우리 아버지가 새 사람이 되었겠습니까? 되셨겠습니까, 안 되셨겠습니까? 내게 예전에 상처 주던 행동 그대로 하십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것이 미워지지 않았습니다. 그게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주셨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은혜를 주셔서 나를 다스리시니까 사랑의 통치. 어떤 때는 막 정말 황당한 일도 하셨습니다. 아! 막 순간적으로 열이 확! 뻗치면서 우리 아버지는 가만히만 계셔도 날 도와주는 것인데, 잠깐입니다. 그러면서 마음이 확! 녹으면서 정말 돌아가시기 얼마 전까지는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이게 바로 은혜의 통치입니다.
그래서 그 은혜가 확 스며들어가면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던 몇 십 년 묵은 사람들 용서합니다. 은혜의 놀라운 힘, 아주 놀랍습니다. 그래서 끌어안고 뜨겁게 사랑하고, 오늘 여러분들 가운데는 이런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아! 난 정말 큰일이다. 너무 비리가 많은 삶을 살았기 때문에 우리 자식들이 나를 존경할 리가 없어, 난 우리 자식들에게 찍혔어, 아니면 우리 마누라에게 찍혔어. 뭐 이런 생각을 하는데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 하나를 기도를 하십시오. 그들이 은혜받기만 기도하십시오. 그게 여러분들의 살 길입니다. 그러면 다 용서가 됩니다. 아무리 가서 잘못했다고 빌어도 아버지가 비굴해지기만 하는데 그 은혜가 밀려오면 아이들이 회개하면서 그렇게 뜨겁게 그 용서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왜 그럴까요? 진도가 나가야 되는데, 어째든 그렇게 되어서 은혜의 통치가 사랑의 놀라운 통치입니다.
그런데 이런 은혜의 통치, 사랑의 통치가 결국은 성령이 오셔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성령의 강림은 곧 사랑의 강림입니다. 그 증거가 어떻게 나타납니까?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확! 일어나고 그리고 거기에 성도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120명이 성령을 강력하게 경험했을 때 귀신을 쫓아내려고 먼저 뛰어나간 것이 아니라 주님을 모르는 영혼들이 너무 불쌍하게 여겨지는 사랑의 역사가 먼저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누가 시키는 사람이 없는데 먼저 뛰어나가서 사랑하는 내 형제들이여, 내 말을 들으십시오. 이미 오래전 구약시대로부터 우리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실 것이 예언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얼마 전에 나무에 못 박아죽인 나사렛의 젊은이 그 예수가 바로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외치도록 시켰습니까? 사랑이 그것을 시킨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랬더니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고 회개하면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주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랬더니 모여 있는 공동체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서로 먹고 마시고 떡을 떼며 그냥 행복해하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소유들을 조금만 누가 건드리기만 해도 예나 지금이나 칼부림이 납니다. 누가 시킨 사람이 없는데 그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바칩니다. 누가 시킨 것입니까? 사랑이 시킨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의 강림은 사랑의 강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C.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도입
그런데 사실은 오늘 설교하려고 하는 것은 지금부터입니다. 그런데 이 좋은 은혜의 통치, 곧 사랑의 강림이 무엇을 통해서 도입이 되었는가 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도입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성령강림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 사건과 떼어놓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즉 성령이 강림하신 것은 예수님이 올라가셨기 때문에 성령이 강림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고 그러셨습니까? “내가 가면 너희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리니” 그런데 그 가시는 방법이 무엇이었습니까? 무덤에서 살아나셔서 전능하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오르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살아나셔서 보좌 우편에 오르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어떻게 되셔야 했습니까? 죽으셔야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음에서 건져내어서 그렇게 영광 가운데 보좌 우편에 승천하신 것이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와 맺은 언약대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이 세상에 있는 구원받을 백성들을 위해서 자기를 철저히 포기하고 제물로 죽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무덤에서 그 예수님을 살려주신 것입니다. 그게 부활입니다. 부활했기 때문에 성령을 보내실 수가 있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순종함으로 죽으셨기 때문에 부활하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이 말합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사 만물로 그 발아래 무릎을 꿇어 주라고 시인하여 복종하게 하였느니라.”
그래서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과 성령의 강림 그 성령의 강림은 은혜의 통치, 사랑의 강림입니다. 이 세 개가 떼어놓을 수 없이 연결이 됩니다. 그러면 자, 이제부터 중요합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 개인적으로 보나 교회적으로 보나 우리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놓여있는 삶은 두 길밖에 없습니다. 교회에 놓여있는 길도 두 길 밖에 없습니다. 어떤 길일까요?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틀림없다고 칩시다. 틀림없이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았는데 구원을 받았으니까 하나님이 처음에는 은혜를 충만하게 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죄를 끊임없이 용납합니다. 은혜를 주실 때 그에게 주셨던 사명을 따라서 살지 않고 계속 불순종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거역의 삶을 살아가게 되면 구원받은 신자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지만 우리 안에서 은혜는 계속 죽을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통치하시기가 힘듭니다. 은혜의 통치인데 말을 안 듣습니다. 은혜를 많이 받은 성도, 그 사람은 조금 잘못하는 것 같아도 은혜가 많은 성도를 불러서 내가 목사로서 이야기하는데 당신 그렇게 살면 안 돼. 예수 믿는 사람이 그렇게 살면 되겠어. 그러면 금방 눈물이 납니다. 그런데 은혜가 완전히 바닥을 칩니다. 그래서 불러서 당신 그렇게 살면 되겠어. 왜 나만 갖고 그래요. 목사면 단가. 무섭습니다. 그래서 은혜 떨어졌을 때는 항상 그 사람을 공경해야지 됩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내가 항상 이야기를 합니다. 짐승 같은 사람에게는 최대한 예의를 베풀라고, 깍듯이, 성도마마 오셨습니까? 언제나 언행을 조심해야지 됩니다. 은혜가 충만한 사람들에게는 허물없이 대해도 괜찮습니다. 그렇게 차이가 납니다.
그러면 신자도 두 삶 가운데 하나밖에 없습니다. 끊임없이 불순종하고 자기를 구원해주신 목적과 상관없이 살든지, 교회도 똑같이 하나님이 세워놓으신 교회고 어떤 최악의 상황이 되어도 머리는 그리스도시고 성령님이 계십니다. 그러면 허울만 교회일 뿐이고 사실은 도저히 창조의 목적에 기여하지 않는 교회가 되든지 아니면 하나님을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공동체가 되든지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습니다. 어디로 많이 기우는가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어째든 둘 중의 하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그 모든 것을 해결하기 위한 답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은 은혜입니다. 여기에 집중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은혜를 어떻게 하든지 성도들이 받으면 사랑의 통치가 이루어지고 그러면 이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사람들 가운데 사랑의 화신은 오직 한분 밖에 없습니다.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그러니까 은혜를 받으면 그 사랑의 화신으로서 인생을 사셨던 그 예수 그리스도를 끊임없이 생각하면서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끼며 그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기를 사모하는 뜨거운 갈망이 이 속에서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III. 십자가와 성령
그런데 문제는 어디로 집중이 되는 것입니까? 자, 은혜가 부어지면 하나님의 통치가 가능해지고 사랑이 다스려지어서 그래서 그 사람이 자기들을 구속해놓으신 목적, 혹은 교회를 설립해놓으신 목적을 따라서 살아가고 존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이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하면 그 은혜가 그들에게 강하게 임하겠는가? 강한 은혜는 뜨거운 사랑을 뜨거운 사랑은 강력한 하나님의 통치를 완전한 하나님의 통치를 가져다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제 궁금한 것은 무엇이 그런 통치를 가져다주는가? 그게 문제입니다. 그것은 십자가가 그런 것을 가져다줍니다. 십자가와 성령의 문제가 여기에서 대두가 됩니다. 그러면 십자가가 성령을 가져다준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말인가?
A. 믿음과 성령
아주 쉽게 얘기하면 십자가의 복음이 타협 없이 정직하게 선포되는 그곳에 올바른 믿음이 생겨나게 되는데 그 올바른 믿음이 생겨나는 그곳에 성령님이 오십니다. 그러면 성령님이 경험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무슨 뜻인가 하면 이 믿음과 성령이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아니하시겠는가? 그리스도 예수를 너희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 자신의 죄에 대한 깊은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뜨겁고 완전한 믿음이 있는 그곳에 성령님이 그들에게 강하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좋은 설교가 울려 퍼져도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야기, 돈 버는 이야기, 세상 사람들과 어울려 행복하게 사는 이야기, 예수가 빠진 모든 세상사는 좋은 이야기들을 합니다. 그러면 듣는 사람은 기분이 좋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 가끔 TV에 아침마당이나 이런 것 보면서 저는 안 그렇지만 어떤 사람들은 보면서 눈물이 글썽글썽 합니다. 가난하고 어려웠는데 날품팔이를 하고 살았는데 좋은 사람을 만나서 도움을 받아서 잘 사는 이야기, 이런 이야기를 듣고 나면 마음이 이렇게 부드러워지고 순해집니다. 칼로 모가지를 찔러서 피가 나고 이런 영화를 보면 스트레스를 받는데 이런 좋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방청객들도 보면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그렇게 합니다. 그 중에 교인도 있을 것인데, 교회에 가서도 그렇게 우는지. 내가 궁금합니다. 어째든 그렇습니다. 그런 것을 마음이 평안해집니다. 그런데 은혜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이 마음은 없습니다. 무엇인가 따뜻한 것 같고 늘 감동적인 것 같지만 그러나 인간의 창조의 본래의 목적으로 돌아가도록 만드는 은혜의 힘은 그 안에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 그렇게 이 십자가의 복음이 빠진 말씀 사역을 가지고는 이 순수한 부흥이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속에서 많은 사람이 모이는 것은 성경이 이야기하는 정상적인 교회의 성장이 아닙니다. 정상적인 교회의 성장은 사람이 교회에 와서 말씀을 듣고 자기 죄에 대해서 깊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뜨겁게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져서 그래서 진짜 몸으로서 성장을 합니다. 아이가 이렇게 밥을 먹고 우유를 먹고 몸이 커지고 살도 찌고 키가 크는 것이 성장이지 엉덩이 뒤에다 소고기 사다가 붙여났다고 해서 그것을 성장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몸으로서 성장해가야지 되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인가?
B. 성령의 역사: 그리스도를 증거함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성령을 주셨는데 그런데 그런 성령이 주어지기 위해서는 강력한 복음의 선포, 타협이 없고 진실하고 복음의 정직한 선포, 그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그 기준과 표준은 사람들이 어떤 것을 좋아하고 기뻐하는가? 그것이 표준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쓰레기 같은 죄인들에게 무엇을 선포하기를 원하시는가? 그들로 하여금 무엇을 알고 무엇을 가르치기를 원하는가? 그 하나님의 마음을 받아서 복음을 정직하게 선포할 때 그때 수많은 사람들이 그 복음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만나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성령님의 강한 임하심과 은혜가 있게 마련입니다. 이것은 처음 예수를 믿을 때만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고 한참 은혜생활을 하다가 침체에 빠져서 미끄러집니다. 그래서 패역한 삶을 삽니다. 못된 삶을 삽니다. 그러다가 다시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면 다시 그 하나님이 사랑스럽고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은혜의 통치가 사랑의 통치가 시작됩니다. 그렇게 회복되는 은혜를 경험할 때 거기에 반드시 죄에 대한 회개가 있습니다. 회개도 없이 그런 은혜의 회복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자기의 죄에 대한 정직한 고백과 회개가 있는 그곳에 하나님의 은혜 부어주심이 있습니다.
그런 정직한 죄의 고백과 뉘우침을 무엇 앞에서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그런 회개와 뉘우침이 있을 때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가짜 회개입니다. 회개라고 하는 것은 자기의 죄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깊이 슬퍼하고 거기로부터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가 죄에 대해서 생각할 때마다 예수님이 자기의 죄를 위해서 죽으신 그 비참한 고난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자기가 하나님 앞에 용서받을 적마다 자기가 이렇게 무료로 하나님 앞에 값없이 용서받기 위해서는 죄 값을 모두 치르고 나를 위해서 죽으신 예수님이 계시다는 그 사실에 대한 인식이 없이 사죄를 확신할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은혜의 회복이 있을 때도 언제든지 거기에는 십자가의복음을 듣고 다시 뉘우치고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처음 예수를 믿는 사람이나 듣는 것이지 이미 예수를 믿은 사람이 무슨 복음을 듣는가 하는데 그것은 바보 같은 이야기입니다. 사도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하기를 내가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너무나 가고 싶어 했다. 그런데 그 너희가 누구입니까? 로마에 있는 불신자들이 아니라 로마에 있는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럼 무슨 뜻입니까? 너희들이 예수님을 믿었다는 것은 이미 복음을 알았다는 것이지만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가서 이 복음을 전하고 싶다. 무슨 뜻입니까? 이미 신자가 되어서 복음을 들었는데도 아직도 들어야 할 것이 많다. 그 뜻입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서부터 우리들이 오해를 하지 않아야 할 것은 오늘날은 복음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자기에게 유리한 것은 복음입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불리한 것은 율법입니다. 그게 무슨 뜻인가 하면 다 공짜 그러면 복음입니다. 그런데 순종해야지 돼. 어, 그럼 율법, 그런 게 어디에 있습니까? 오늘 보십시오, 복음이 복음 되기 위해서는 다 율법이 필요했습니다. 복음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속하셨다는 것이 아닙니까? 복음이 우리에게, 그분에게는 율법입니다. 왜 예수님은 죄도 없으신데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졌더니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이셨습니다. 심판하셨습니다. 무엇을 따른 심판입니까? 율법을 성취한 거기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복음의 씨가 터지면서 이 복음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하면 우리도 율법을 이루면 복음을 열매 맺게 된다는 그 뜻이 아닙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복음의 그 찬란한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율법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요즘 보면 사람들에게 예전에는 사람들에게 죄인이라고 하는 정직하게 가르쳐주었습니다.
여기도 보십시오.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다윗이 선지자로 예언한 바와 같이 세세토록 있을 그 위를 이으실 메시야인데 너희들이 나무에 못 박았다, 사람들이 두려워 떨고 안타까워하면서 그러면서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해야지 되는가? 그 좋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못 박아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천하에 없는 그런 형벌을 그 용서받을 수 없는 인간인데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은가? 길이 있다. 그게 뭔데?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라. 그리고 세례를 받으라. 죄 사함을 받을 것이다.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이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너무 감격해서 손들고 나는 주님께로 갑니다. 그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오늘은 거꾸로 되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는 세상 사람입니다. 형제님,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뭔데요?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요. 쑥스럽네요. 예수님이 당신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부담스럽게 왜 나 때문에 죽으셨나요. 나를 위해서 그럴 필요까지 없는데. 그러니까 예수를 믿으십시오. 내가 원하지도 않는 것을 하셔놓고 자꾸 믿으라고 하시나요. 뭐가 빠진 것입니까? 율법이 빠지니까 복음이, 복음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율법을 통해서 자기가 정말 흉악한 죄인이라는 것을 오늘 이 사람들이 지금 아! 우리가 나무에 못 박아 죽인 그 예수가 메시아였데. 아! 이일을 어쩌면 좋아. 하나님이 보내신 그 메시아를 우리가 죽였으니 우리는 이 형벌을 어떻게 받을 수 있을까? 이게 율법으로 말미암아서 깊이 들어간 것입니다. 그때 아니야. 그래도 너희에게 구원의 길을 주셨어. 그 하나님을 막 높이면서 예수님이 자신의 죄를 모두 짊어지셔서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이 말할 수 없는 감격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선포된다고 하는 것은 율법을 바탕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목표는 율법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율법위에 있는 이 복음의 찬란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제가 잘 쓰는 비유인데 그 보석상에 가면 다이아몬드를 내놓을 때 어디에 내놓는가 하면 검정색 비로도를 깔고 거기에다 보석을 쏟아놓으면 그것들이 보입니다. 유리위에 쏟아놓으면 사실 뭐가 뭔지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은 율법이라는 검정 보자기 위에 쏟아놓을 때 그 복음의 참된 의미가 살아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그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이 사람들에게는 이 메시아는 거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메시아를 자신들이 죽였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때 그들에게 임했을 그 무서운 절망감, 그래서 마음에 찔려 말하기를 형제들이여 우리가 어찌해야지 될꼬! 이것은 완전히 무너진 절망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날에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절망을 안 합니다. 그리고 바로 희망에 이르기를 원합니다. 자기가 얼마나 더러운 죄인이고 그럴듯하게 자기의 교회생활 속에 포장되어있는 자신의 내면에 악이 얼마나 큰 것이고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부정한 인간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정직한 인식, 그리고 그것에 하나님의 엄위하심과 거룩하심 앞에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에 대한 인식이 없이 달콤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이 무조건 우리를 사랑하실 수밖에 없는 분이야. 마치 사랑이라는 교리의 창살에 갇혀서 우리가 악을 행하고 개판으로 살아도 창살을 붙들고 눈물을 흘리며 애들아 가지마. 제발 부탁이야. 그럼 나 하나님은 어쩌란 말이야. 이러면서 눈물을 흘리시는 하나님이시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까 복음에 감격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의 선포를 보면 죄에 대한 준엄한 책망, 그리고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의 희망 없는 그 절망, 하나님의 심판을 이야기하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그러면서 그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긍휼히 여기시고 그들을 죄 가운데서 건져내시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참으로 선포한다는 이야기는 율법을 집어치워버린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선포해서 보자기를 깔고 그러나 율법 자체를 선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찬란하게 드러내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그 복음을 믿을 때 성령께서 선물로 그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가 있고 다시 예수를 깊이 믿는 모든 그런 신앙의 행동이 있는 그곳에 항상 성령이 그들 마음 가운데 충만하게 다시 역사하셔서 그들을 은혜로 채우시고 다시 성령의 통치를 시작하십니다. 원래 이 성령의 핵심적인 역사가 무엇인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이게 성령의 핵심적인 역사입니다. 그러면 그 성령의 역사가 교회를 충만하게 채워질 때 그때 이 교회 밖에 다른 효과가 나타나고 안에 다른 효과가 나타납니다. 밖에 다른 효과가 나타나는 것은 예수의 복음을 전할 때 공동체가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그 선포 속에 복음 전도 속에 아주 기이하고 놀라운 능력이 깃듭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굴복시키는 놀라운 힘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이 능력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영적인 능력과 함께 전파될 때 복음의 본래의 원래의 힘을 다합니다. 그래서 복음이 선포되는 그곳에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일어나고 또 그런 성령의 강력한 사로잡힘 속에서 복음을 말할 때 그 복음 전파 속에서 영적인 신비한 힘이 작용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굴복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아주 놀라운 역사가 나타납니다.
(예화; 초등학교 4학년 아이가 은혜를 많이 받고 기도를 하는데 교장선생님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그래서 간절히 기도한 가운데 교장선생님과 단둘이 만날 기회가 생겨 자기가 만난 예수님을 전해 어린아이의 전도를 받고 교장선생님이 주님을 영접하게 되었는데 그 어린아이가 성령으로 충만한 가운데 복음을 전하자 나이와 학력의 차이를 넘어서서 굴복시킬 수 있는 놀라운 힘이 나타난 것이라는 내용)
그러니까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신자가 한마디 불신자들에게 전하는 이 복음의 증거는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은 사람이 일천마디의 말로 전하는 것보다 더 강력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성령으로 공동체가 충만해질 때 외부의 세계를 통해 나타납니다. 그러면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교회가 이런 충만함이 깊이 사라지게 되면 딱 끊어지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람들이 복음을 전할 때 그 전파의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지 않게 됩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또 사실 의무만을 가지고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파한다는 이야기는 쉬운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냥 할 뿐이지, 가장 좋은 것은 이 속에서 그 하나님의 생생한 사랑을 십자가에서 경험하고 그리고 그 사랑 때문에 구원받은 사람, 회심하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이 생각이 나서 견딜 수 없는 영혼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안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성경을 가르쳐주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주는 거기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 교회가 그렇게 성장해왔습니다. 우리 개척하고 나서 상당히 오랜 기간까지 우리는 무슨 변변한 전도프로그램 하나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교회가 성장할 수 있는 비결은 예배시간에 복음을 듣고 주님을 만난 사람들이 깊이 회개하니까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사랑의 통치가 새로 시작됩니다. 그 사랑 때문에 여기서 보았듯이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이 눈에 보입니다. 아무 상관없는데 그들을 위해 자꾸 눈물이 납니다. 그리고 정말 어두움 가운데 살고 있는 그 이름만 신자인 사람들이 생각이 납니다. 그들이 너무 불쌍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면 너무나 마음이 아픕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편지를 씁니다. 테이프를 보내주고 책을 보내주고 그리고 성경을 보내줍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와서 예수를 믿게 되어 변화됩니다. 이런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전할 때 그런 강력한 힘이 나타나게 됩니다.
1. 예수님의 마음으로
또 하나는 교회의 내적으로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어떤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가 하면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그러면 그 성령의 충만한 은혜의 통치를 가져온다고 그랬습니다. 은혜의 통치의 본질은 사랑의 통치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무엇인가 하면 그런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는 교회 전체를 예수를 머리로 하는 하나의 몸이라고 보면 그 교회가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그 교회가 하나의 몸으로 생각할 때 교회 전체 안에 예수를 닮은 마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 성령의 충만하면 충만할수록 예수를 닮은 마음을 소융하게 됩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충만할수록 은혜의 통치가 가득합니다. 은혜의 통치가 가득하다는 것은 사랑의 통치가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통치가 가득한 마음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예루살렘 성을 보시면서 펑펑 울게 만드셨습니다. 죽어서 냄새가 나는 나사렛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시게 만든 그 사랑이 바로 예수님 안에 있었던 그 마음입니다. 그러니 교회가 크든지 작든지 크면 큰대로 멀리 다니며 큰일을 할 것이고, 작으면 작은 대로 가까이 다니며 작은 일을 할 것입니다. 초등학교 1학년이 무슨 애국심이 있다고 해서 커다란 바윗덩어리를 들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크면 큰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봉사하지만 작은 교회든, 큰 교회이든 성령으로 공동체가 충만해지면 예수의 마음을 품은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작아도 정말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전하고 치료하고 교육하고 선포하고 섬깁니다. 큰 교회는 큰 교회가 그런 예수의 마음을 가득 품게 된다면 작은 교회가 도저히 할 수 없는 더 크고 놀라운 일들을 행합니다. 그렇게 해서 온 세계에 지체들을 보내고 파송하면서 그 자리에 함께 공동체가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주님이 하셨던 일들을 계승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 한 사람이 성령의 강한 은혜를 받으면 예수의 마음을 품게 되듯이 공동체도 그렇게 은혜의 통치, 성령의 충만함이 있게 되면 사랑으로 가득하게 예수의 마음을 품게 됩니다.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지 밖으로 흘러나올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게 바로 인격입니다. 마음이 어떠한가가 바로 그 사람의 인격입니다. 마음이 그의 삶을 빚어가는 모든 삶의 공장입니다. 그러니까 그 마음이 바로 이렇게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충만해지게 되면 예수님이 하신 일을 뒤따라가는데 있어서 조금도 어색함이나 부자연스러운 것이 없습니다. 너무 기쁜 것입니다. 왜? 예수의 마음을 가지고 세상의 삶을 살면 괴롭지만 또 세상의 마음을 가지고 예수의 삶을 살아도 괴로운데 예수의 마음을 가지고 예수의 삶을 사니 너무나 자연스럽고 행복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성령 충만해져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2. 예수님의 모본을 따라서
또 하나는 그렇게 교회가 예수의 마음으로 충만해질 때 그때 교회는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따라 행하면서 예수님의 모본을 보이는 길을 계속 걸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에 보니까 어떤가 하면 예수 믿는 사람들이 교회 속에서 서로 사랑했을 뿐만 아니라 이 교회가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예수님이 이 세상에 살아계셨을 때에 행하셨던 일, 복음을 전파하고 무지한 자를 깨우쳐 지혜자로 가르치시고 그리고 병든 자들을 치료하고 섬기면서 그 사랑의 화신으로 살아가셨습니다. 교회가 바로 그 길을 따라 가니까 이웃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그렇게 사랑의 화신으로 살아가셨지만 모두 예수님을 사랑했습니까? 아닙니다. 원래 진리를 미워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렇게 자기를 아끼지 않고 자기를 다 내어주시는 사랑의 화신의 삶을 사셨는데도 미워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의 마음을 품고 예수의 사랑으로 꽉 차서 충만한 성령으로 그렇게 예수의 모본을 보이면서 진리를 따라 걸어가도 이 세상에 모든 사람이 그 교회를 기뻐하고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교회가 어떻게 하면 세상에서 잘 보일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은 창기적인 행위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 잘 보이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존재가 아닙니다. 교회는 오직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그 까리따스의 사랑을 가지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살았을 때 걸어가셨던 그 사랑의 화신으로서의 삶과 사역을 계승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교회를 여기에 세우신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데 세상이 우리를 예쁘게 보면 다행입니다. 밉게 보여도 우리는 그것 때문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갈 길을 걸어갑니다. 이게 신앙입니다.
IV. 참된 부흥, 십자가의 복음으로
그래서 결국 우리는 참된 부흥은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서 오는 것이라고 깨닫습니다. 교회가 참으로 능력 있고 참으로 하나님의 쓰심에 합당하고 권세 있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교회의 타협하지 않는 올곧은 복음의 진리, 이 세상의 사조와 타협하지 않는 정직하고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 그것이 선포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우리가 개인적으로 미끄러졌을 때나 성령의 은혜가 고갈되었을 때나 혹은 지금 성령으로 충만해져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끊임없는 은혜의 부어주심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은혜의 통치를 통해서만 사랑의 통치를 힘입을 수 있을 것이며 그 사랑의 통치아래서 살아갈 때만 비로소 우리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고 창조의 목적에 기여하면서 구속의 계획을 따라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런 강력한 은혜의 통치는 성령의 충만하게 부어주심으로 말미암아 가능해지게 되는데 이 성령의 강력한 부으심의 그 은혜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복음이 있는 그곳에서 나타납니다. 사도행전에서 성령의 강력한 부으심, 충만해지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날 때마다 설교의 중심은 이 세상에서의 성공, 이 땅에서의 부흥, 이 땅에서의 번영, 이 땅에서의 성공과 이 땅에서의 무병장수, 축복 이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신 주님,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의 그 놀라운 부활의 능력, 이런 것이 선포되고 예수가 왜 너희를 위해 죽으셨으며 예수가 살아나셔서 너희를 위해 하신 일이 무엇인가? 그것을 가르쳐주는 예수 십자가 중심의 선포가 있는 그곳에서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있었고 그것이 은혜의 통치를 그것이 사랑의 통치를 불러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정말로 교회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똑같은 것의 연장선상으로 그러면 교회가 한 그리스도의 몸으로 교회가 그렇게 성령으로 충만해져서 사랑과 은혜의 통치가 있기 위해서는 그 교회가 끊임없이 참 초 신자든지, 오래된 신자든지, 미끄러진 사람이든지,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이든지, 고난을 받는 사람이든지, 형통한 사람이든지 끊임없이 들어야 할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까?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무엇을 설교하든지 그 설교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원천도 십자가의 복음, 무슨 삶을 살라고 요구하든지 그 마지막 목표도 십자가의 복음, 그것입니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문제가 무엇입니까? 교회 안에 이런 십자가의 복음을 낯설어하는 사람들, 심지어는 이런 십자가의 복음을 기뻐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의 복음을 아주 지루하게 생각하고 너무나 당연히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교만함, 이 십자가의 복음은 개념적으로 아는 것과 경험적으로 아는 것은 틀립니다. 개념적으로는 누구나 다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렇게 개념적으로 알고 있는 그 예수그리스도를 너희가 진짜 만났는가? 그 사랑의 주님을 너희들이 진짜 뵈었는가? 그 십자가에서 정말 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경험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결국 결론을 맺으면 이렇게 됩니다. 정말 교회가 이 어두운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의 나라의 회복을 위해서 정말 기여할 수 있고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 것을 방해만 하다가 교회들이 문을 닫을 수도 있습니다. 신자도 그런 인생을 살다가 인생을 마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관건은 무엇입니까? 그가 정말 하나님의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사랑에 사로잡히면 전도하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당연히 전도합니다. 새가족반에 와서 펑펑 울고 은혜를 받고 나면 그 핏기어린 수많은 영혼들이 떠오릅니다. 그래서 새가족 공부를 하다가 어떤 지체들은 막 펑펑 웁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런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
그런 놀라운 사랑의 감화가 있기 위해서는 은혜의 통치가 필요합니다. 은혜의 통치는 성령의 충만하게 되는 역사를 통해서 도입이 됩니다. 그러면 그 성령의 충만한 역사는 어떻게 일어나겠습니까? 결국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인간의 풍조는 변해도 불변하는 복음의 가치를 굳게 붙들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느니라.” 하고 이 초대교회의 선포로 돌아가야지 됩니다. 그 십자가에서 모든 성화에 관한 교리가 쏟아져 나오고 마지막에 그 십자가 때문에 모든 성화의 교리의 완성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모든 가슴 속에 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복음에 대한 감격이 있고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경험한 흔적이 있고 그래서 그들의 마음이 여린 속살처럼 되어서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말을 꺼낼 때마다 흐느끼는 눈물을 흘리는 이 복음에 대한 그 피 저린 감격이 있을 때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이 어두운 세상에서 교회 공동체로 하여금 예수의 마음을 품고 예수의 모본을 따라서 그 능력과 사랑 안에서 이 어두운 세상에 복음을 전파할 때 강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서 허다한 무리들을 굴복시키는 놀라운 역사를 우리들이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어떻게 살아야 되겠는지 무엇을 회개해야지 되겠는지 이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오늘날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사랑이 없고 까리따스의 사랑이 식어가고,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가 그치고 이 모든 일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런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한때는 주셨지만 그것에서 고갈되어서 미끄러질 때 그 대책이 무엇이겠습니까? 다시 십자가의 복음으로 돌아가야지 됩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묵상하고 그리고 무엇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려고 하면 교회의 건물이나 땅을 위해 기도하지 말고 수많은 성도들이 모이는 일들을 위해서 기도하지 말고 차 세울 곳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교회에서 언제나 세월이 아무리 흘러가도 모든 사람이 가끔 바뀌어도 언제나 타협이 없는 불변의 복음의 말씀, 살아있는 하나님의 정직한 십자가의 복음의 말씀이 항상 모든 사람들, 영아부 어린이로부터 시작해서 곧 임종을 거둘 노인에 이르기까지 정직하게 귀를 기울이기만 하면 되는 정직한 십자가의 복음이 이 교회당에 가득 울려 퍼지게 되도록 기도해야지 됩니다. 그렇게 될 때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우리는 그 복음의 힘을 가지고 사랑의 통치를 가지고 이 세상을 이기고 변화시키고 극복시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이 시간에 회개할 때 하나님 우리가 마음속에서 십자가의 복음이 잊어버렸습니다. 한때는 눈물을 펑펑 흘리던 감격이 있는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가슴에 식어졌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고 다시 우리의 영혼 속에 마음속에 이 십자가의 복음을 기뻐하고 행복해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우리 한 마음으로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3. 일치된 마음의 기도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행1:14)
I. 본문의 배경
신자 개인이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어떨 때는 덕스러운 사람이 되어서 영혼에 힘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정말 온전한 신자로 살아갈 때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하면 이렇게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을 따라 살게 되지만 성령의 은혜가 고갈되고 나면 이름은 신자이지만 껍데기일 뿐이고 그의 마음과 삶은 그를 구원해놓으신 하나님의 계획과는 거리가 먼 것이 되고 맙니다. 개인만 이런 것이 아니라 공동체도 그렇습니다. 교회 전체가 만약에 그렇게 은혜가 떨어지고 마음에는 부패와 정욕이 가득해서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교회라고 할 것 같으면 그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회복시키고자 하는 계획을 갖고 계신데 이것을 제대로 이루어드릴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교회들을 매우 강한 영혼의 힘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게 하셔서 교회를 이 세상에 창조하신 목적대로 이 교회를 섬기도록 만드십니다. 이렇게 능력 있는 교회로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방법이 있는데 그 도구가 세 가지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 또 하나는 기도, 그리고 또 하나는 성령입니다.
II. 성령 충만과 기도
오늘 우리들이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기도입니다. 이것은 특별히 성령강림 사건과 성령 충만의 맥락 안에서 어떻게 이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당신의 공동체를 이렇게 강력한 능력을 가진 공동체로 태어나게 하시는지 우리들이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선 우리가 읽은 이 본문에 배경은 예수님이 부활승천하시고 성령은 아직 오시지 않은 그때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의 고난을 받으셨고 죽고 부활하신 후 40일을 제자들과 함께 계셨고 그리고 예수님은 승천하셨고 그리고 유월절 후 50일이 오순절이었는데 그때 성령이 강림하는 이 2장의 사건이 나타나니 이 기간은 사실 며칠 안 되었을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승천하신 후에 부탁하신 말씀의 의미를 사실 정확히는 몰랐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도 보았고 의심할 수 없이 부활도 보았지만 그러나 그 죽으심과 부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후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부어주실 것이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직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제 기다리게 되었는데 그 기다린 방식이 바로 전심으로 일치된 마음을 가지고 공동체가 함께 기도하며 기다린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신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는 그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이 세례를 너희에게 부어주실 것이라고 하는 약속을 붙든 믿음이 가져온 결과였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2장의 성령강림 사건은 하나님이 이미 오래전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고 죽으심을 준비하시고 부활을 준비하시고 또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보좌에 오르시고 나면 성령을 보내실 것을 모두 준비하셨기 때문에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작정 속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바로 작정하신 그 일을 이루기 전에 예루살렘 공동체로 하여금 예수님의 부활승천을 본 사람들로 하여금 한곳에 모여서 한 마음이 되어 전심으로 기도하게 하심으로 그들의 기도를 통해 성령님께서 강림하시는 장면을 보여줌으로 이후로 성령이 어떻게 교회에 충만해질 것을 이제 예표로 보여주셨으니 모든 성령의 충만한 역사는 공동체의 일치된 마음을 통해서 기도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A. 성령의 인격성
우리는 이 문제를 다루면서 성령의 충만과 기도와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먼저 생각하려면 성령이 인격성에 대해서 생각해야지 됩니다. 성령은 성부 성자 성령 중 삼위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이신 성령님은 성부와 성자 때문에 비로소 하나님이 되시는 분이 아니라 성부와 성령이 아니어도 성령 자신이 한 완전한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것, 그리고 또 성자와 성부와는 다른 인격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 강조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격을 가지신 성령님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인격을 가진 존재로서 생각하고 느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이런 인격적 작용이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성령님이 성부와 성자와는 다른 한 인격이라고 하는 것은 성령님 자신이 독립적인 한 인격체인 하나님으로서 생각하시고 느끼시고 또한 행동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물론 이 성령 하나님은 성부 성자 하나님과 일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성부와 성자 사이에 의견에 불이치가 있다거나 성령과 성부 사이에 어떤 영혼의 힘의 작용에 있어서 상치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상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 인격을 가진 분이면서도 세분의 하나님이 아니라 한분의 하나님이시니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한 인격을 가지시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지만 그러나 단지 하나님의 영향력이나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지는 비인격적인 에너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독자적인 인격을 가지시고 성령께서 인간에게 말씀하실 수도 있고 또 인간의 어떤 행실을 보면서 슬퍼하실 수도 있고 인간에게 또한 어떤 힘과 능력을 주어서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게 하실 수도 있고 또 인간의 본성 속에 부어져서 인간의 본성을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시기도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이 성령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이 사람의 마음에 오실 수도 있지만 동시에 저 사람의 마음에 계실 수도 있고 동시에 하늘에 계실 수도 있습니다. 모든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시는 영이시라는 사실이 강조되는 것과 함께 그분이 바로 인격적이시라는 사실이 강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의 충만을 구하면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 기도하기만하면 하나님이 보내시면 성령님이 어쩔 수없이 보내어지는 비의지적인 물질과 같은 것이나 혹은 힘이나 세력, 어떤 에너지나 감화력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성령에 대한 매우 모독적인 생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들이 마치 성령을 자기가 소유한 것처럼 그래서 사람들에게 자신의 전유물을 나누어주는 것처럼 그렇게 성령을 분별하는 것처럼 행세하는 것은 성령의 인격성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고 모독이라고 아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령의 이런 인격적인 특성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잘 나타납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그리하면 열릴 것이라. 예수님이 마태복음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는 자가 받을 것이요, 찾는 자에게 찾아질 것이요, 또 두드리는 자에게 열릴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그 말씀을 하시는가 하면 너희가 악한 자라도 아이들이 떡을 달라고 하면 돌을 줄자가 있으며 생선을 달라고 하는 자식에게 전갈을 줄자가 있느냐.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은데 그런데 하나님은 너희 아버지시니까 너희가 달라고 하면 왜 좋은 것으로 안 주시겠는가.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은 이 동일한 예수님의 이 사건에 대한 보도를 좀 더 구체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이라고 한 마태의 보도는 누가복음 11장에서는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아니하시겠는가. 이렇게 보도함으로서 예수님이 좋은 것이라고 표현한 그것이 곧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사실을 적시하였던 것입니다. 구하는 것은 입으로 구하는 것이고, 찾는 것은 눈으로 찾고, 그리고 두드리는 것은 손으로 두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구하는 우리의 활동은 단지 입술로 드리는 기도의 활동이 아니라 전인격적인 구함, 전 마음과 영혼으로 총체적 인격의 추구함이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삶은 개판 같으면서 입술로만 성령을 구하려고 하고 또 기도는 하지 않으면서 마음으로 성령이 오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이런 마음의 작용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한분을 갈망하는 마음으로 성령을 자신에게 주시기를 삼위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는 그 집중된 마음이 바로 인격적인 하나님이신 성령님께로 접근하는 우리 신자의 자세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면서 살아도 이런 성령의 충만함이 없기 때문에 그의 삶은 사실상 죽은 자와 같고 껍질은 예수를 믿은 사람 같지만 속은 산산이 썩은 사람이 되어서 혈기와 분냄과 분쟁과 다툼과 이기심과 정욕과 더러운 것과 온갖 욕심과 이런 것들로 가득 차서 그래서 회칠한 무덤과 같은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얘기해서 이런 성령의 충만함이 없는 사람은 가식적이고 외식하는 삶이고 하나님을 향하여 죽어있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B. 기도와 성령
이렇게 성령이 인격적이라는 사실이 강조되면 이제 이 기도와 성령의 충만의 관계를 생각하게 됩니다.
1. 인격적 교통과 갈망
이 성령의 충만을 구하는 이 기도는 결국은 그 성령님과의 인격적인 교통을 갈망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격적인 교통에 대한 간절한 갈망, 이것이 성령의 충만을 구하는 기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와의 연합, 성부와의 교제는 이야기하면서 성령은 단지 자신에게 주어지는 어떤 선물처럼 생각하는 것은 성령과 성령의 은사를 혼동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은혜와 그리고 성령의 은혜를 주시는 주체입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부에 의해서 우리에게 전달되는 그 은혜의 시혜자가 되시고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모든 일을 하기에 적합한 은사를 부여하는 주체가 되시는 것입니다. 은사는 우리로 하여금 본성의 변화와는 상관이 없이 어떤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적합한 사람들로 우리를 준비시켜주는 일을 하지만 은혜의 작용은 우리의 본성을 변화시켜서 우리의 영혼을 고치고 우리의 본성을 새롭게 하시는 쇄신의 작용을 하게 되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성령의 은혜의 작용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런 성령의 은혜의 작용은 반드시 성령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통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 영혼을 주신 이유는 이렇게 삼위하나님과 인격적으로 교제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혼을 주신 것입니다. 이 인격은 영혼을 가지고 있는 우리 인간이 그 영혼의 작용을 우리의 마음에 투사하고 그 마음 안에 우리가 감각하고 지각한 것들을 인식하여 그것들을 사용해서 생각하고 또 느끼고 행동할 수 있는 주체적인 특성을 빚어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인격입니다. 만약에 인간에게 영혼이 없다면 영혼이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겠지만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서 당신을 닮은 인격을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 있는 그 인격과 더불어서 하나님과 우리는 교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불신자들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데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사랑합니다. 주님.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불신자로서는 정신병자입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데 제가 사랑합니다. 심지어는 저를 이렇게 만져주시니 감사합니다. 무슨 정신병자같이 그렇게 합니다. 그리고 갑자기 주님이 여기에 계셔, 이러고, 주님 떠나가지 마십시오. 눈물을 흘리면서 제가 잘못했으니 돌아와 주십시오.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가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해합니다. 왜 거듭남과 함께 성령의 경험을 통해서 그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통을 누렸기 때문에 이해합니다. 성령의 충만을 구하는 그 기도는 바로 이런 인격적인 교통에 대한 갈망의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충만함은 곧 왠지 사는 것이 답답하고 컬컬해서 성령님을 구한다거나 아니면 장사를 해서 돈을 벌기 위해서 성령을 구한다거나, 병이 낫기 위해서 성령을 구한다거나 무엇인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성령을 수단으로 사용하려고 성령을 구하는 기도는 응답될 수 없는 기도입니다. 성령을 구할 때 우리의 마음의 자세는 마치 아주 훌륭하고 좋으신 부모님을 찾아가서 대하는 마음으로 그 부모님과의 인격적인 교통과 그분의 사랑 안에서 살고 싶은 그 가족적인 친교에 대한 열망으로 성령님을 구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의 많은 고통의 문제들이 얼마나 많은 이유를 갖고 있습니까? 돈이 떨어지고 힘들어도 인생사는 게 참 고달픕니다. 돈도 있고 모든 것이 있는데 건강이 매우 나빠서 매순간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육체의 상태가 된다면 우리의 삶은 참 견디기 힘듭니다. 힘도 넘치고 돈도 있는데 이상하게 다른 사람에 의해서 비난을 받거나 모함을 받아서 명예가 땅에 떨어지게 되면 인생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은 그런 비참한 마음이 들게 마련입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수많은 사물들은 끊임없는 표상을 우리 속에 자아냅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에 대한 열망과 사모함을 갖게 만들어주어서 그래서 우리의 생각을 허탄한 것에, 우리의 마음은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에, 우리의 의지는 허무한 것에 굴복하도록 온갖 충동을 따라서 우리가 살도록 만들어줍니다. 그런 것 때문에 일희일비하면서 사는 것이 우리 인간의 인생이고 신자들도 은혜가 떨어지면 그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인간이 됩니다.
그래서 바보 같은 인간들은 신자를 포함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이렇게 곤고한 이유는 돈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관계가 나쁘기 때문이다. 이렇다 저렇다 핑계를 대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의 모든 곤고함의 궁극적인 원인은 그들이 성령 충만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은혜가 충만했을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은혜가 충만해진다는 것은 곧 성령으로 충만해진다는 것이고 성령의 은혜로 우리가 충만해질 때는 우리가 돈이 좀 없고 가난해도 그 가난하고 어려운 때를 하나님의 은혜로 극복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하여 조금도 슬퍼하고 마음아파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나를 버리고 외롭게 만들면 나는 그 기회를 타서 하나님께로 더 피하고 도망갈 수 있는 마음의 소원이 생겨났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비방하고 모함을 해서 나의 평판을 땅에 떨어트리고 수치스럽게 하면 우리는 이 세상이 정말 우리의 영원한 고향이 아니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가 그리워해야 할 본향이라는 사실을 우리의 마음이 불타고는 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살았는데 그렇게 똑같이 어떤 사람은 낙심하고 죽을 것 같이 고통스러운 상황을 감사로 바꾸고 그 상황을 통해서 오히려 영원하고 불변하고 그리고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게 만든 것들이 결국은 무슨 차이점이었습니까? 한때는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했기 때문이었고 한때는 성령으로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잃어버리고 가지고 있어도 완전히 사용할 수 없고 이런 것들로 인해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우리의 영혼을 가득 채우시는 성령의 충만한 작용으로 말미암아 신자가 충만하게 될 때 모든 결핍과 어두움과 유혹들을 이기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우리의 신앙의 항진을 계속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결국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성령님과의 인격적 교통을 통한 삼위 하나님과의 교통이라는 사실을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기도는 하나님 자신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성령님 어딘가 써먹을 것이니 성령님을 나에게 좀 주십시오,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이렇게 주님이 없는 나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고 주님이 내안에 충만히 오셔야지만 나의 마음과 본성과 온 영혼이 하나님이 만드시기에 아름다운 존재로 변화될 수 있고 그 성령님의 능력을 힘입어서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내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내가 그리스도의 족적을 따라서 섬길 수 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구하는 그 기도가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가장 아름다운 기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2. 갈망과 마음의 일치
이렇게 성령과의 인격적인 교통의 대한 갈망이 기도라고 한다면 이렇게 성령을 갈망할 때 우리는 갈망과 마음의 일치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무슨 뜻인가 하면 이렇게 하나님을 간절히 성령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통을 간절히 갈망하게 될 때 그 마음은 한분 하나님께로 온전히 모아지게 되고 그리고 하나가 되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고 싶은 사람이 많은 것은 아무도 안 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다 그렇고 그런 것입니다. 아, 누구도 보고 싶고 누구도 보고 싶고 그렇게 몇 시간 주절거릴 수 있다면 그 중에 한 사람도 못 만나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진짜 보고 싶은 사람은 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누구입니까? 대답은 했는데 누가 보고 싶습니까? 남편이 보고 싶은 사람, 그 인간, 나는 요즘 행복해. 출장 갔어. 그러니까 무조건 한사람이 보고 싶은 것이 아니라 사랑할 때 그 한 사람이 보고 싶은 것입니다. 나머지는 아닙니다. 진짜 누군가를 사랑할 때는 그 사람만 보고 싶고 그 사람과 아무리 같이 있어도 다른 사람이 옆에 있으면 같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그 보고 싶은 마음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깊이 있게 하려면 이 머리는 장식품이 아닙니다. 균형 잡는 장식품이 아니라 무거운 돌 하나를 올려놓고 좌우중심을 잡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 가서 네 머리는 왜 그런가 하니까 정말 형님 죄송합니다. 머리가 너무 나쁩니다. 할 수 없다. 그것으로 중심이나 잡아라. -사색하라고 하나님이 주신 머리입니다. 그러니까 보고 싶다고 그러면 그 보고 싶은 정체가 무엇인가 그것을 생각하지 않습니까,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끊임없이 사색을 하면서 신앙이 깊어집니다. 그것을 멍하니 상상하면 신앙에 도움이 안 되는데 교리에 대한 이해로 발전이 되면 좋습니다. 보고 싶은 것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와 하나 되고자 하는 소원함 때문에 그 한 대상으로 모든 생각과 느낌이 집중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게 바로 보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성령님과 인격적인 교통에 대한 간절한 갈망이 생겨나면 이 마음이 자기 안에서 일치하는 것입니다.
찬양하라 내 영혼아 찬양하라 내 영혼아
내 안에 있는 것들아 다 찬양하라
그러니까 우리의 마음은 이렇게 일치하지가 않습니다. 생각은 생각대로 번쩍이면서 떠돌고 그 생각은 또 생각에 많은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이 욕망에서 저 욕망에서 이 욕망으로 분탕(焚蕩)질을 하면서 옮겨 다닙니다. 의지는 그 욕망에 굴복합니다. 의지는 욕망이 없이는 생겨나지 않고 욕망은 생각이 없는 곳에서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무슨 원리가 잇는 것이 아니라 제 멋대로 막 생각이 납니다. 그리고 제 멋대로 욕망이 용솟음치고 의지가 일정한 규칙도 없이 제멋대로 그 욕망에 굴복하는데 이렇게 막 엉망진창으로 분탕(焚蕩)질을 치는 것 같지만 이게 큰 맥락에서는 한 흐름으로 흐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자신을 행복 하는 일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잘못된 방향으로 집중된 또 어떻게 보면 분탕(焚蕩)질을 치면서 흐트러진 그 마음을 가지고는 하나님을 향한 인격적인 갈망으로 나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수없이 모여도 성령의 충만함을 구하는 이 사도행전 1장 14절에 나오는 이 제자들과 같은 마음으로 공동체가 하나 되기가 힘든 것입니다.
그러다가 자신 안에 어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각성이 일어나게 되면 성령이 없이 살아가는 자신, 생각이 욕망, 욕망이 의지를 굴복시키며 그러면서 끊임없이 이렇게 분탕(焚蕩)질을 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그 자체가 너무나 비참하고 피곤하다는 사실을 어느 순간에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에만 진력이 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따라 사는 일에도 싫증이 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 자신의 가난하고 비참한 영혼의 상태를 살피면서 이렇게 육체로 행하는 밖에 있는 모든 것에 몰두하는 이 산만하고 분주한 모든 삶이 사실은 자신의 영혼에 아무 것도 공급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이제 이런 것들에 대해서 싫증이 나고 마음이 그 성령님과의 교통을 향한 갈망이 생겨나게 될 때 그 마음에 놀라운 마음이 모두 내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다 한 방향으로 합쳐지면서 생각과 욕망과 의지와 이 모든 것들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서 쭉 고정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하는 사람을 너무나 보고 싶어 할 때 다른 사람은 아무도 보고 싶지 않듯이 마찬가지로 신자의 마음속에서 성령님 한분을 향한 간절한 인격적 교통을 향한 갈망이 생겨나게 되는데 이것이 신자 개인 안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일치입니다. 이런 마음의 일치가 개인의 지평 속에서도 있을 수 있고 공동체의 지평 속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III. 공동체적 충만과 마음의 일치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서 공동체의 충만과 마음의 일치와의 관계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A. 공동체적 임재의 경험
1. 공동체적 마음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의 몸입니다. 그리고 또 우리는 각자가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각자 각자가 성령을 우리 안에 모시고 있는 그런 신자인 동시에 전체로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머리로 하여 연합을 이루고 있는 한 지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 개인에게 마음이 있듯이 공동체 안에도 마음이 있는데 그러면 우리 신자도 한 사람이지만 마음이 하나가 아니라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마음이 다양하게 생각을 불러일으키고 일관성도 없이 생각은 다시 욕망을 욕망은 다시 의지를 굴복시켜서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다시 분탕(焚蕩)질을 치고 혼돈된 마음이 될 수도 있고 이 마음이 바로 은혜가 떨어진 마음입니다. 그 분탕(焚蕩)질치고 분산된 그 마음이 큰 틀에 있어서는 한 방향을 따라 흐르는데 자기 사랑을 목표로 해서 흐르고 결국은 하나님 한분께 집중하지 않는 흐트러진 마음이 될 적이 있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게 되면 사람이 관심사가 다양한 것이 다 사라지게 됩니다. 예전에는 그렇게 멋 부리고 돈만 생기면 압구정에 가서 코 깎는 일에 신명을 바치던 사람이 그렇게 아무렇게나 살면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 인간의 참된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이지 풀같이 쇠잔하는 것은 육체의 아름다움이 아니라는 이런 지혜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의 삶이 매우 단순해집니다. 옛날에는 생선회를 하나 먹으려고 생명을 무릅쓰고 군산까지 내려가던 사람이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한가. 아무렇게나 한 끼 먹고 그리고 먹는 것보다 먹는 것을 통해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교제하는 것이 중요하지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한가 하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단순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성령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통만을 갈망하기 때문에 다른 것들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뚝 떨어져 Simple Life가 됩니다. 단순한 삶이 됩니다. 그러니까 시간이 굉장히 절약이 됩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은혜를 받으면 많이 바빠집니다. 왜냐하면 이 절약된 시간을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하나님을 위해 의미 있는 일에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쁩니다. 예수를 믿는데 한가한 사람의 영성은 떡입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게으르고 신령한 사람은 역사상 아무도 없었습니다. 물론 부지런 사람이 모두 신령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나 게으른 것은 정말 나쁜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라는 공동체 자체가 예수를 머리로 하는 몸이니까 그 몸에는 마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손가락 끝에 손가락 마음이 있고, 팔꿈치에는 팔꿈치의 마음이 있고, 뒤통수에는 뒤통수의 마음이 있고, 골반에는 골반의 마음이 있습니까? 그런 것은 없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공동체로 연합이 되어 있어서 공동체의 지평 속에서 볼 때는 분명히 하나의 교회 안에는 공동체로서의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마음도 똑같이 분탕(焚蕩)질을 칠 수 있고 일치를 이를 수 있습니다. 분탕(焚蕩)질을 친다면 어떻게 치면 됩니까?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제 잘났다고 행동하면서 제 멋대로 살면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싫은 사람은 불순종하고 그리고 혈기 충만한 사람 혈기대로 살고 음탕한 사람은 음란한 대로 살고 절제 없는 사람은 무절제하게 살고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말을 배설물처럼 생각 없이 토하면서 살고 이렇게 각자 초점도 없이 중구난방으로 제 각기 살면 그 마음이 바로 방탕한 신자 안에 있는 마음을 공동체 지평으로 연장시킨 것과 똑같습니다. 이해가 가십니까? 이해가 잘 가는 표정을 좀 보이십시오. 저쪽에 있는 사람까지 보내십시오. 뻥하고 가만히 있지 말고,
그러니까 이렇게 마음이 분탕(焚蕩)질을 치고 막 혼란스럽듯이 교회도 마음이 그런 상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제 각각 분탕(焚蕩)질을 치면서 제멋대로 돌아다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게 일정한 틀이 있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예수께 대한 대듦입니다. 우리 교회는 예수님의 뜻대로 우리는 그렇게 순종할 수 없다. 이게 대듦입니다. 그러니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예수 그리스도는 머리이시지만 이 모든 연결들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반드시 성령을 거스르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 성령님을 얼마나 슬프게 하시겠습니까? 그러니까 공동체의 한 지체로서 성령님을 슬프게 하니까 그 사람이 성령 충만 하다면 그것은 신기한 것입니다. 거짓입니다.
여러분, 싸움질하고 고소하고 자기끼리 혈기를 부리고 쟁투하고 찢어지고 하는 것이 누가 성령 충만합니까? 목사로부터 주일학생들까지 누가 성령이 충만합니까? 성령을 근심시켜드리는 교회에서는 성령 충만할 수 없습니다. 예외가 있을 수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성령 충만할 수 없습니다. 그 몸에 한지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분요하던 마음이 이상하게 무엇인가 변화가 되어서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하나로 짝 모아지는 경우가 우리 개인에게서 일어나는 것처럼 교회 안에서도 그런 일들이 일어나야지 됩니다. 이런 일들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이 교회의 엄청난 비극이고 그 교회는 모양은 있지만 하나님의 나라의 회복을 위해서 거의 기여하는 것이 없이 생존하는 교회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있는 양태가 얼마나 많습니까? 사람이 가도 얼굴도 못 알아보고 식물인간 상태로 있는 것도 살아있는 것입니다. 살아있기는 살아있어도 누워서 겨우 입만 움직이고 받아먹고 변을 받아내는 것도 살아있는 것입니다. 움직이기는 움직이는데 자기의 몸만 간신히 지탱할 뿐 더 이상 일을 하는 것은 불가능한 상태에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냥 겨우 자신의 용변이나 간수하고 일상적인 일은 하지만 아무 것도 들거나 그럴 수 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온 몸이 성성해서 모든 일을 다해낼 수 있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살아있기는 살아있어 삶의 질이 똑같을 수 있습니까? 더군다나 그 사람들이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여하는 그것이 동일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누워서 똥이나 받아내고 있으면 자신이 주위의 사람에게 기여하기보다는 주위의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교회도 똑같은 것입니다. 신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어떤 양태로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이 내 마음에 계신데. 그래요. 계십니다. 생명이 있는데, 그래요 생명인데 간당간당한 식물인간의 상태의 생명이 아닌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누가 예수님의 지체가 아니라고 합니까? 예수께 접붙여진 것이 누가 취소된다고 합니까? 그런데 그 삶의 질이 어떤가 한번 보십시오. 그럼 관건은 무엇입니까? 성령의 충만함입니다. 이런 성령의 충만함을 공동체적으로 하나님이 부어주셔서 공동체 전체가 성령으로 충만해지기 위해서는 결국은 공동체의 마음이 일치한 가운데 하나님만 바라보아야지 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 이렇게 이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런 성령에 관해서 공동체적 충만과 공동체의 마음의 일치는 도대체 어떤 관계가 있는가? 왜 이 문제가 중요한가 하면 이 문제를 가지고 우리들이 이제 일치된 마음에서 기도로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제 공동체적인 성령의 임재의 경험, 예루살렘 교회가 경험한 것입니다. 우리도 성령께서는 이미 오셨지만 이런 성령의 임재로 말미암아 충만해지는 역사는 이후에 모든 교회마다 계속해서 반복되어서 경험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성령의 충만한 그 경험은 공동체의 마음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일까? 이는 바로 성령님께서 비인격적인 하나님의 능력이거나 힘이거나 에너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는 가끔 이제 외국에 집회를 나갑니다. 또 외국뿐만 아니라 국내에 집회를 나갑니다. 그런데 집회를 나가서 어떤 때는 반나절이나 길면 한나절, 돌아올 때 여유가 있든지 혹은 반나절이라도 여유가 있든지 하면 제가 워낙 자연을 좋아하니까 뭘 좀 보시고 싶으신가 하면 나는 보는 것은 흥미 없고 백화점도 한국에 많은데 여기 와서 백화점에 갈 필요 없고 공원 같은 곳에 갔으면 좋겠다. 나무가 많고 시내가 흐르는 곳이 있으면 나를 데려다 주면 내가 기쁘겠다. 그러면 어떤 때는 몇 십 분씩 차를 타고 갑니다. 그런데 같이 이야기를 하면서 가면 좋은데 아무 것도 통하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차를 타고 같이 가는 시간이 매우 지루합니다. 머릿속에서 생각해서 말을 만들어내는 것도 그게 보통 에너지가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뭔가 서로 통하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더군다나 그런 예가 거의 없기는 하지만 그 사람이 별로 나를 좋아하는 것 같지 않다, 라고 생각될 때는 같이 차를 타고 가고 싶은 마음도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게 결국 마음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차를 탔는데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생전 처음 봐서 궁금해서 차를 타고 가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내 책을 많이 읽은 독자입니다. 그럴 경우에는 이야기를 통한 것이 매우 많을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나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내 일상에서 최근에 일어난 일까지 모두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작년 4월 26일 날 칼 썰다가 벤 손가락이 어느 손가락이냐고 물어보는 사람도 있고 아들이 군대에 갔다고 하더니 소식은 오는가 하고 묻는 사람도 있고 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저를 통해 전해진 말씀을 끊임없이 접한 사람입니다. 책을 많이 읽은 독자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이렇게 저에 대한 이해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마음이 나를 향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는 나를 보여주고 싶고 알려주고 싶지 마음이 나를 향해 열려있지 않은 사람에게 나를 보여주는 것은 좋은 것을 보여주면 자랑이 되는 것이고 나쁜 것을 보여주면 스스로 수치스러운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도 모르는데 나의 결점을 계속 이야기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그렇게 사람들과의 관계를 갖겠다는 것도 인격과 인격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면 동일하게 공동체를 하나의 몸을 가진 사람으로 볼 때 성령님께서 어느 한 교회에 성령으로 충만한 은혜를 부어주신다고 할 때는 그 교회가 모든 사람이 완전한 일치를 이루어서 한사람도 예외 없이 뜨겁게 주님을 갈망하는 일은 없겠지만 그런 일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쉽지 않겠지만 그렇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 어째든 교회가 공동체적인 한 사람이라고 볼 때 그 사람인 교회는 한 몸인데 한 몸으로서 나를 간절히 갈망하는 일치한 마음을 가지고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실 때 성령의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마음은 우리 신자 개개인에게도 마음이 있듯이 공동체의 지평 속에서도 공동체의 마음을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자의 모든 의무는 이 마음이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 신자의 가장 중요한 의무입니다. 그래서 교회론을 이야기하면서 에베소서 4장에서도 사도 바울은 일치한 마음,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인간의 혈기나 정욕으로 그 마음을 나누지 말 것을 강력하게 촉구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공동체의 마음이라는 교리라는 이야기를 들어보기나 했습니까? 공동체의 마음이 무슨 마음이야. 내 마음이지. 자기 마음이 다입니다. 그래도 마음이 내키면 교회에 와서 새살대고 해해되고 그러다 뭔가 마음에 안 들면 그냥 혈기를 부리고 분을 내고 신경질을 내고 짜증을 내고 회사에서 짓밟힌 사람이 분풀이를 교회에 와서 다 쏟아놓고 세상에 나아가서 자기가 잘못해서 이리 치고 저리 치고 하면서 곤고한 것을 교회에 와서 분풀이를 하고 무슨 청계천에서 뺨맞고 을지로에 가서 침 뱉는 그렇게 합니다. 그게 결국 무엇입니까? 자기 마음이 자신에게 우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 이상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좋으면 좋고, 나쁘면 나쁘고 그게 다입니다.
그런데 신자의 제일 큰 의무는 공동체의 마음이 오로지 하여 하나님을 갈망하게 하는 것 이것이 신자의 가장 중요한 의무입니다. 그 공동체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신자 개개인의 마음의 교회론적인 총화입니다. 지체적인 연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와서 자신이 말을 하거나 행동하거나 이 모든 것이 교회 공동체 전체의 마음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생각해야지 됩니다. 그래서 자신이 욕망에 치우치고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죄에 대한 사모함을 품고 혈기를 부리고 분내고 다투고 분쟁하고 미워하고 한번 맺힌 것은 풀지 않고 하는 이런 자기중심적인 마음이 결국은 공동체의 마음을 찢어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동체 전체적으로 하나님을 앙망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공동체가 입술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늘 구하면서도 공동체적으로 늘 그런 은혜를 충만하게 부어주시는 것을 경험하지 못하게 하는 장본인의 역할을 합니다. 아마 여러분, 이런 교리에 대해서 거의 진지하게 숙고해본 적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어떻게 됩니까? 그래서 공동체의 마음이 자신의 마음을 공동체의 마음에 합치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서 공동체의 마음을 자꾸 분탕(焚蕩)질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실 때 한 몸인 교회가 이렇게 서서 말씀으로는 성령의 은혜를 구하라. 하나님 우리에게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라고 공동체가 입술로 간구하는데 그 마음은 마치 신자가 은혜를 주십시오. 기도하면서도 욕망과 생각, 이런 것들로 허탄한 의지로 분탕(焚蕩)질을 치는 것 같은 그런 찢어진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진 공동체 속에 하나님께서 공동체적인 충만을 안 주십니다. 시간이 있으면 내가 이 문제를 좀 더 깊이 말씀을 드리고 싶은데 하나만 더 이해를 시켜드리겠습니다. 우리의 신앙에 과거의 경험은 성경계시의 비췸을 받기만 하면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설득력 있는 자료가 됩니다. 권위가 있으니까 내가 직접 경험했으니까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자신의 과거의 경험을 돌아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고 그리고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는 주님과의 만남의 놀라운 감격이 있었을 때 여러분들의 마음이 분탕(焚蕩)질을 치고 세상을 향해서 쪼개지고 갈가리 찢어진 마음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이상하게 하나님 한분께로 쭉 모아진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면서 아 오늘은 맛있는 것을 먹어야 하는데, 오늘은 어느 영화관에 가야지 되나. 누구를 만나서 한잔 해야지 되나. 이런 생각을 하고 고민하던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이상하게 하나로 마음이 모아진 것입니다. 그때 성령의 충만의 경험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들이 교회를 건축할 때 헌금을 해서 벽돌 한 장 놓은 것, 교회가 일 년 동안 운영될 때 많은 재정들이 들어가고 선교하고 구제하려면 많은 물질들이 필요해서 바친 것, 귀합니다. 그것도 잘 해야지 됩니다. 돈 벌어서 뭐합니까? 많이 바치십시오. 나는 아직 성에 안 찹니다. 돈 벌어서 뭐 합니까? 많이 바치십시오. 그래서 이 교회로 하여금 배도 사게 만들고 비행기도 사게 만들어서 낙도도 선교할 수 있게 그렇게 해주십시오. 아니 정말 이 기회를 통해서 내가 진심으로 빕니다. 여러분들이 돈을 벌어서 뭘 하는지 내가 궁금합니다. 왜 또 갑자기 삼천포로 나가는지. 왜 그리로 간 것인지,
아! 됐습니다. 그 마음이 그렇게 흘러가는데 그러면 공동체도 그 마음을 가지고 있을 것인데 그러면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공동체의 마음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공동체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 것인데. 우리 안에 있는 마음의 교회론적 총화입니다. 그러면 우리 한사람의 마음이 지금 공동체의 마음을 분탕(焚蕩)질하게 하는 요인이 되기도 하고 하나로 묶어주는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 마음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제껏 까지 살아온 경험을 보면 그런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 위해서는 이게 마음을 지키면서 생각을 죽이면서 이러면서 합치시키려는 노력이 여러분들에게 있었습니다. 여러분, 은혜를 사모할 때 이 속에서 무슨 방탕한 생각이나 아! 이렇게 힘들 바에야 집어치워 이런 정욕적인 생각이 순간 불끈불끈 일어납니까, 안 일어납니까? 목사인 나도 일어나는데, 여러분이 왜 안 일어나겠습니까? 안 일어난다면 위선입니다. 거짓말입니다. 일어납니다. 어느 한순간에, 사명이 있어도, 정말 내가 이것을 따라서 살아야 되나. 이런 고통 같은 것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따라가면 파멸밖에는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다스립니다. 아니지, 그래도 내가 목사인데, 아니지. 그래도 내가 성도인데, 아니지, 그래도 그게 내 사명인데. 이러면서 마음을 죽일 것을 죽이고 살릴 것을 살리면서 하나로 합치시키려는 노력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성령 충만을 받을 때면 계속 이렇게 작용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2. 공동체적 마음의 일치란?
그러면 교회 안에서 공동체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각 사람의 마음이 교회론적 총화라고 했으니까
a. 하나 될 수 없는 사람들과 하나 될 수 있는 사람들
그러면 그 마음이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 마음에 주인인 각자 각자가 일치를 위한 노력이 필요하겠습니까, 안 필요하겠습니까?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들에게 이야기를 했는데 가슴에 새기십시오. 혼자 교회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를 하는 것과 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서 큰 소리로 떠든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옳지 않은 이야기를 혼자 조용히 하는 것과 여러 사람이 단합해서 그것을 함께 나누는 것은 좁힐 수 없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죄질이 틀립니다. 우리 형법에도 보면 개인적으로 집에 뛰어 들어가서 강도를 한 것은 벌이 좀 작지만 두 사람 이상이 계획을 짜고 연합하면 이것을 뭐라고 하나, 하여튼 여러 사람이 만들어서 위 자리 아래 자리 구성하게 되면 범죄단체 조직구성에 관한 법률위반입니다. 이것은 중형입니다. 이런 조직을 만들어서,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조국교회에서 그렇게 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모여서 수군수군 대는 것, 그리고 그 일에 동조하고 두 사람, 세 사람에게 마음을 전파하고 나누고 심지어는 그 무리를 규합하고 이런 일들은 결국은 교회의 공동체의 마음을 다 찢어놓고 분탕(焚蕩)질을 치는 것입니다. 부족하고 모자란 것이 있으면 사랑으로 일치된 가운데 그것들을 이야기하고 협의하고 하나님의 진리로 그것을 비추어보고 해서 하나로 연합된 마음 안에서 그것들을 고쳐가야지 됩니다. 그런데 어떤 열 받는 사건이 있으면 연합이고 나발이고 다 필요 없이 그냥 공동체의 마음을 분탕(焚蕩)질하게 하는 이런 것들은 굉장히 커다란 잘못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영혼은 대부분 곤고합니다. 그가 옳고 안 옳고를 떠나서 아주 곤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뻐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아니었지만 플라톤이라는 철학자는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너희가 만약 어떤 대상을 비판하려거든 먼저 비판한 대상을 사랑하라. 왜냐하면 미움과 질투 속에서 대상을 보게 되면 공정한 마음을 가지고 볼 수가 없게 됩니다. 사랑의 마음이 그 모든 것들을 공정하게 볼 수가 있게 됩니다. 이게 공동체의 마음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손을 얹고 지금 여러분들의 마음은 공동체의 마음에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의 마음 때문에 일치와 화합을 이루며 공동체의 마음으로 하여금 성령을 갈망하게 만들고 있습니까? 아니면 공동체의 마음을 찢고 분탕(焚蕩)질하게 만들고 있습니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 공동체의 마음을 그렇게 하나가 되게 하지 못하는 이런 역할을 계속하는 사람은 결코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 영혼은 끝없이 곤고합니다. 그 이상에 할 말이 없습니다. 그 영혼 자체가 끝없이 곤고합니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하나님께서 무슨 재산을 거두어 가신다거나 생명을 거두어 가신다거나 아니면 자식을 죽여 버리시거나 하나님이 그렇게 안 하실 수 있습니다. 하실 수도 있으나 안하실 확률이 더 높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과 상관이 없이 그의 영혼이 끝없는 곤고함 속으로 들어갑니다. 끝이 없는 곤고함, 그러니까 이 사람은 혼란스러워집니다. 자기가 뭐 그렇게 크게 잘못한 일이 없는데, 왜 내 영혼은 이렇게 회복이 안 되고 곤고할까? 하는데 그게 잘못한 게 없는 게 아니라 굉장히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주 크게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끝없는 곤고함 속에 회복이 안 됩니다. 제가 이 문제는 한 두 시간쯤 더 풀어야지 교리로 풀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냥 진도를 나가겠습니다.
자, 그러면 이제 이렇게 공동체가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 공동체의 마음이 일치를 이루는 것이라. 그 일치는 도대체 무엇인가? 이 공동체적 마음의 일치라고 하는 것은 단지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인데 저도 한 다리 건너서 들었기 때문에 얼마나 정확한 이야기인지 사실 확인을 못했는데 줄거리는 틀림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화: 교회의 장로님들과 목회자의 갈등 가운데 있던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 목사님부부를 잠시 휴가를 다녀오시라고 해서 6개월의 시간을 안식년으로 떠났다가 돌아오니까 교회가 사라졌다. 목회자를 보내고 장로님들이 해산결정을 하고 교회를 정리하고 교인들은 다 흩어졌는데 이런 것은 일치가 아니라는 내용)
또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교인들이 먹고 마시고 노는 일에 있어서는 참 놀라운 일치를 보입니다. 옛날에 아니 이것은 비판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어디 엠티를 가서 오락회를 하는 것을 보면 참 전력이 다 나옵니다. 옛날에 무엇으로 한 가닥 했는지 다 이해가 갑니다. 그 마음에 놀라운 일치를 이룹니다. 여기에서 마음의 일치라고 하는 것은 그런 일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육적이고 세속적인 목적을 위한 일치와 연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신자의 마음의 일치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러면 이제 이렇게 이야기가 됩니다. 그렇게 일치라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자체를 제기하게 됩니다.
자, 이렇게 수천 사람이면 수천 마음이 있습니다. 수천 마음이 아닙니다. 누가 자기의 마음을 알까? 여러분 마음이 나는 하나뿐이야. 하는 사람이 있으면 손들어보십시오. 일편단심인데 나는 누구를 향한 일편단심인지 묻고 싶습니다. 남편, 아내, 자녀, 뭐라도 좋으니까 일편단심은 손들어보십시오. 각 사람에게는 하나의 마음이 있는데 사실 현상적으로 각 사람이 느끼는 마음은 하나가 아니라 천의 마음입니다. 내 안에서 여러 마음이 싸웁니다. 그렇게 여러 개의 마음을 가진 인간이 그 하나로 합치하는 것도 힘든데 그러면 그 수많은 사람이 마음이 하나가 되어서 공동체의 마음이 단일하게 된다는 것, 이게 우선 가능한 일인가 하는 것이 제기되지 않습니까? 눈치가 빠른 분들은 벌써 그런 의문을 마음속으로 제기했을 것입니다. 나도 마음을 하나로 못하는데 어떻게 가능할까? 그 불가능한 일이 일어나는 것 이게 바로 하나님의 교회 안에 있는 놀라운 역사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일어나는가?
자, 우선 교회 안에는 마음이 하나 될 수 있는 사람과 영영 하나 될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원리적으로 볼 때 회심하지 못한 사람과 절대로 회심한 사람과 한 마음이 될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공동체의 마음에 일치를 이룰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 자신이 외관상으로는 공동체에 속해있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회심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공동체의 마음의 한 구성원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불신자의 마음이라고 할지라도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그들의 마음에 각성시키면서 아직 거듭나지 않았어도 이 마음의 작용이 신자가 하나님을 향한 갈망과 유사한 일치를 보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가리켜서 불신자의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대한 의사적 일치라고 부릅니다. 의사적이라는 말을 아실 것입니다. 의사적, 뭐가 비슷한데 틀린 것을 이야기합니다. 의사적 일치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불신자는 거듭나지 않은 비중생자는 교회 안에서 성령님이 말씀을 통해 그를 각성시키시면 아직 비중생자인 상태에서도 거듭난 신자들이 하나님을 갈망할 때 그들과 의사적 일치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신자들의 경우에는 일치가 가능해집니다. 신자들이 일치가 가능해지는 이유는 거듭난 신자들 각사람 안에 아무리 은혜가 떨어진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 안에 성령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성령님이 그에게서 떠나지 않고 지금 작용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워낙 은혜가 고갈되어서 정욕과 혈기, 이런 것들로 꽉 차있기 때문에 지금 성령님께서 역사하고 그를 충만히 지배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마음의 불일치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은혜를 받고 변화되면 일치를 이룰 수 있고 그의 영혼 깊은 곳에서는 그렇게 살면서도 곤고하고 괴롭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수많은 분탕(焚蕩)질치는 혼란을 느끼면서 그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모아지고자 하는 소원을 갖게 됩니다. 물론 신자들 중에서도 영혼의 상태가 매우 나쁘고 마음이 굳어져서 그런 공동체의 모든 노력에 동참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만 하면 깨트려지고 그 일치를 이룰 수 있는 잠재적성들을 늘 그들 속에 늘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b. 하나 되게 하시는 방법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 이렇게 공동체의 마음을 하나 되게 하시는 방법이 있습니다. 일치하게 하시는 방법이 있습니다. 우선 첫째는 하나님의 교회의 공동체의 교제로부터 그들을 끊어내시는 것입니다. 두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하나 될 수 없는 사람을 공동체에서 끊어내시는데 첫째는 교회의 징계를 통해서 그를 그 교제에서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더 이상 교회에 출석할 수 없게끔, 출교한다든지 하는 징계를 통해서 그 교제에서 끊어내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이런 출교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지만 일단 이런 식으로 출교가 되고 나면 그와 함께 교통하는 것은 교회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요.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한 중대한 잘못이 됩니다. 그렇게 끊어진 사람은 이방인과 같이 생각하고 그와 절대로 성도의 교통을 나누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도덕적 불결로부터 교회를 보존하시고 비 진리로부터 교회의 진리에 순수성을 파수하시며 신령한 영적인 순결성을 보존하시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방법은 섭리 속에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털어내심으로서 마음에 일치를 이루지 못한 사람들을 털어내심으로서 나머지 사람들을 일치를 이루게 하십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우리가 의문을 갖게 됩니다. 그렇게 모여서 기도했는데 오순절에 성령강림이 임하기 직전에 그들이 모여서 기도한 사람의 수가 120명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고백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실 때 그 승천의 광경을 지켜본 사람들이 500여 형제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면 500여명의 사람들이 예수님이 승천하시는 광경을 지켜보았으니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들을 너희에게 부어주실 때까지 기다리라. 그 명령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그 약속을 받은 사람이 모여서 함께 기도하기로 하는 결정을 하고 그리고 장소를 정하고 그리고 모이고 모임 속에서 기도를 며칠을 한 사이에 380명이 빠져나갔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여러분, 이거 정말 너무 놀랍습니다.
평양에서 있었던 대 부흥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1907년도에 일어났던 한국교회에 오순절 성령강림이라고 불리는 놀라운 부흥 말입니다. 저는 처음에 그냥 대충 읽었을 때 그 놀라운 부흥이, 성령의 강력하게 부으시는 역사가 예배 시간에 일어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교회의 역사의 자료를 잘 살펴보니까 그게 아니고 1500명 정도가 모여서 기도를 하다가 이제 예배가 끝났습니다. 물론 은혜가 좀 있었으니까 더 기도할 사람은 남고 나머지는 집으로 돌아가시오. 할 때 600명 정도가 돌아가고 900명 정도가 남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남은 사람이 역사에 길이 남는 장대현 교회에 성령의 부흥을 경험한 것입니다.
(예화: 목사님이 계시던 교회의 청년들이 수련회에서 있었던 이야기- 집회를 했지만 은혜가 임하지 않자 투덜거리며 짐을 싸서 떠나려고 차를 타려고 하는데 몇 명의 애들이 은혜를 못 받고 가는 것이 안타까워 기도를 하니까 오지 않는 그들을 기다리다 남겨두고 떠나갔고 그 후에 성령이 강하게 임하셔서 남아있는 사람들이 생애적인 은혜를 받았다는 내용)
교회는 잘 들으십시오. 가슴에 새기시고, 물론 교회는 사람들의 마음이 항상 변하니까 그럴 때마다 그들을 사랑하고 붙들어주고 또 교회를 떠나려고 하면 그들의 마음을 위로해주고 우리가 뭐 잘못한 것이 있는지 돌아보고 그들을 감싸고 그리고 다시 신앙생활을 하게하고 그렇게 돌보는 것이 사실 어머니와 같은 마음으로 돌보는 것입니다. 나, 이 교회에 나오기 싫어. 아, 생각 잘 하셨습니다. 기다렸거든요. 빨리 가십시오. 이렇게 하면 너무나 교회에 실족할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잘 돌봐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100% 인정하면서도 거시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하나님이 사람들을 교회에서 털어내시는 것이 그 공동체를 마음에 일치를 이루는 또 하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털어낼 사람들을 쭉 털어내시면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강한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이게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공동체로부터 이탈해가는 것을 한편으로는 항상 우리의 부족을 바라보는 기회로 삼지만 또 한편 거시적으로 보면 하나님이 그렇게 공동체의 마음과 일치를 이룰 수 없는 사람을 계속 보내심으로서 그렇게 털어내심으로서 공동체를 일치를 이루게 하십니다. 아까 것은 교회 징계를 위해서 일체를 이루게 하시는 것이고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그들을 교제에서 끊어내시는 것입니다. 끊어내셔도 다른 교회에 가서 일치를 이루면서 또 자기의 마음에 맞게 또 신앙생활을 할 것입니다. 그런 거시적인 관점도 동시에 함께 가지고 교인들의 이동이나 교회의 교제로부터 이탈하는 이런 사람들을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지만 됩니다. 뭐 더 이상 설명을 안 붙여도 공정한 이해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한쪽에 안 치우치고,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무엇인가 하면 이 공동체의 마음의 일치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나 되게 하는 방법인데 결국은 공동체의 마음의 일치라고 하는 것은 공동체의 마음이 그냥 하나가 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아까 질문을 하고 답을 못했는데 이런 의문을 제가 제기했는데 사람 한 사람 하나에도 생각이 수없이 많고 나도 어떤 때는 한마음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데 그게 정말 교회에서 가능할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든다고 그래보십시오. 생각이 들지요? 오늘 이제 그것을 여러분들에게 가르쳐드리겠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나 혼자서도 일치될 수 없는 그 마음을 이 수많은 지체들이 모인 공동체의 마음을 하나로 일치시킬 수 있는가? 라고 하는 것을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 이 이야기를 여러분들에게 설명을 드릴 때 여러분들이 이해를 잘 갖기 위해서는 이제 우리 개개인의 마음이 어떤 일치를 이루는지 잘 더듬어보면, 그리고 그것을 공동체의 지평으로 확대해서 생각하면 아주 명료한 이해에 도달하게 됩니다. 자, 그럼 봅시다. 우선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의 마음이 단일합니다. 물론 성령으로 충만한 마음에도 못된 생각도 들고 이러지만 그러나 그것은 지엽적으로 일어나는 일이고 하나를 이루고 있습니다. 싱글레스라고 그러는데 하나, 단일함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한 마음은 단일합니다. 그러니까 성령으로 충만할 때는 언제든지 영적인 놀라운 순발력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됩니다. 막 일하다가도 어느 한순간에 일손을 멈추고 손을 모으고 하나님, 나는 주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나를 떠나지 말아주시옵소서, 기도하면 하나님의 임재가 포근하게 느껴지면서 밀려들어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제 삶의 많은 구간들, 일할 때, 먹을 때, 마실 때, 교제할 때, 사역할 때 이런 구간들이 있는데 어떤 구간에서는 그것이 가능하고 어떤 구간에서는 그것이 안 될 때 성령 충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예배를 드릴 때만 하나님을 느낄 수 있고, 하나님의 일을 할 때만 하나님을 느낄 수 있는 이런 것은 성령 충만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바로 하나님 자신을 관상하는 삶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을 느낄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일이 하나님을 느끼게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하나님을 느끼게 만드는 통로입니다. 그게 언제든지 열려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어떤 상황에 놓여있든지 간에 그렇게 됩니다. 거울을 가지고 있으면 내가 맨 땅에서 비춘다고 거울이 안 보이고 풀밭에서 비친다고 거울이 보이겠습니까? 항상 거울에는 뭔가 비춥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우리의 생각과 모든 것들이 일치를 이루고 있을 때는 어디서든지 하나님과의 교통이 가능해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 속에서 하나님과의 교통이 가능해지게 되어서 그 마음과 생각이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그때 일치를 이루어진 그 마음과 생각은 그냥 한 덩어리가 된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 놀라운 마음의 일치가 일어나지 않습니까? 저는 그것을 비상한 일치라고 이야기하는데 비상한 일치가 마음에 일어납니다. 마음에 작용이 놀랍게 그 죄를 향해 집중해서 일치를 이루어가고 그리고 생각과 이 모든 행동과 마음, 모든 작용이 그 죄를 성취하기 위해서 놀랍도록 긴밀히 역사합니다. 어떤 분열이나 이런 것 없이 그렇게 기가 막히게 일치를 이룹니다. 그런 것을 우리는 일치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식으로 해서 공동체가 일치를 이루면 공동체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걸레가 됩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을 일치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일치라고 하는 것은 무조건적인 하나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방향과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방향이 무어입니까? 삼위 하나님과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통해서 삼위 하나님과 이런 일치를 이루는 것, 십자가를 향해 마음이 모아진다든지 아니면 성령님의 부어주심에 대한 간절한 갈망으로 이루어진다든지 이게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여기에 한 신자가 있습니다. 이 신자가 쭉 하니까 마음에 일치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 있는 사람도 똑같은 작용을 일으키면 그 마음이 그 사람 마음과 다른 마음이지만 일치를 이루면 그 마음이 스스로 하나가 되면 누구를 향해 하나가 됩니까? 하나님을 향해 각자가 이런 식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마음은 아주 다양하고 많이 흩어져있는데 그것들이 각자 그 마음속에서 통합의 작용이 일어나면서 각자의 마음이 하나가 되면서 그 하나 된 자체가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 그리스도를 향하는 마음이기 때문에 그 그리스도를 향하는 마음 안에서 모든 사람이 일치를 이루면서 그러면서 수없는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로 지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궁금한 것은 그렇게 분탕(焚蕩)질을 치고 찢어진 신자 자신의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는 것이 어떻게 일어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돈벼락을 맞아도 그런 일은 안 일어나고 서울 대 들어가도 그런 일은 안 일어납니다. 그럼 무엇인가하면 그 자체가 은혜의 작용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그런 작용들이 일어납니다. 그럼 답이 나온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그런 완전한 합치를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까? 신자 각자 각자가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 자신의 마음 자체가 이미 찢어지고 분탕(焚蕩)질하는 마음이기 때문에 그런 찢어지고 분탕(焚蕩)질한 마음을 아무리 묶어놓는다고 할지라도 공동체의 마음에 일치를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제 각각의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모여서 예배도 드리고, 선교사도 파송하고, 밥도 먹고, 놀러가고, 말씀도 듣고 그렇게 합니다. 그게 자기네들끼리 그렇게 할 뿐이지 성령의 충만하게 부어주신 것들을 공동체적으로 경험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공동체를 떠나서는 생각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모릅니다. 그냥 단순히 교회를 이용하려고 다니는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마음에 안 들면 집어치우고 다른 교회에 가고 다른 교회에 가서 또 분탕(焚蕩)질을 치고 집어치우고 그렇지 않으면 죽이 되던 밥이 되던 그냥 소 잡아먹은 귀신처럼 한 교회에 눌러 붙어 앉아서 한마음인지 일치인지 그런 것 아무 관심도 없이 그냥 죽을 때까지, 둘 다 다 나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일치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관건이 무엇입니까? 신자 각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깊이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분탕(焚蕩)질치고 찢어지는 마음이 어떻게 하나가 되는지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성령의 은혜로 우리가 깨트려질 때 주님의 사랑이 확 밀려들어오게 될 때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하고 사죄의 감각,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각,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감각들이 우리 안에 회복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가 참회하게 될 때 회심할 때, 혹은 회심이 반복될 때 우리에게 경험되는 세 가지 감각입니다. 그런 감각들이 회복될 때 그런 일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효과가 나타납니다. 삶의 상황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태도들은 다양성들이 있지만 그렇게 됩니다. 그것들이 기가 막히게 쭉 일치를 이룹니다. 여기에서 막 분탕(焚蕩)질을 치면 하나님께, 하나님께로, 하나님께로 다 묶어지면서 그것이 하나의 마음이 됩니다.
그러면 기도하는 공동체에 이런 성령의 충만함을 부어주시는데 그렇지요? 자, 보십시오. 여기 지금 1장에서 이렇게 아직 성령강림 사건이 있기 전인데도 이 사람들이 이렇게 모여서 간절히 일치한 마음으로 기도할 때 380명되는 사람은 털려내시고 마지막까지 마음에 일치를 이루고 있던 사람들, 털려내어진 사람들은 왜 털려내어졌을까요? 그들의 마음에 동참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털어내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120명의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모아서 하나님을 간절히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성령의 강림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예루살렘이 큰 핍박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무참하게 맞고 터져서 그래서 교회에 돌아와 그 사실을 보고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공동체가 마음 아파하면서 일편 두려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 강력한 핍박에, 그래서 그들이 다시 하나님 앞에 마음이 하나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성령의 강력한 충만함을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그런 것에 굴하지 않는 담대함을 소유하게 하십니다.
10장으로 넘어가면 그 유명한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져서 성령이 임하시는 그 괄목할만한 사건이 10장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그것이 고넬료 집안에 성령사건입니다. 그때도 보면 이방인인 고넬료의 마음과 그리고 유대인인 이 베드로의 마음이 하나가 되어 기도하게 되었는데 서로 모르는 사이였는데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니까 베드로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이 집으로 가게 하시고 이 사람이 기도하니까 베드로에게 가서 베드로를 불러오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한 가운데 성령님이 그들에게 임하시는 사건이 임하시는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슨 뜻인가 하면 이렇게 공동체가 한마음으로 일치를 이루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 그때 성령의 충만함이 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제 설명한 바와 같이 그런 성령의 충만함으로 부어지게 될 때 교회는 강하고 능력 있는 교회가 됩니다. 성령 충만해보십시오, 성도들이 다 돈 벌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씁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재능을 주님을 위해서 쓰고 순교의 위협이 기다리는 선교지에도 자원하는 사람들이 줄을 잇습니다. 그렇게 합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는 공동체가 식물인간 상태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오는데 방해하고 있을 동안에 성령 충만한 공동체는 그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이 고통 하는 세상을 고치고 섬기라고 부르심을 받은 교회의 고유한 소명에 헌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성령의 충만함이 얼마나 중요한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런데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성령의 충만함을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그 충만한 것을 경험할 때 한번 기도했다고 그런 충만함이 경험하게 됩니까? 오랜 시간 동안 우리의 마음을 낮추고 깎고 그래서 하나님 한분 이외에는 아무 소망이 없다고 쭉 바라는 그런 시기들이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해지는 그런 시기가 있는 것입니다. 그럼 교회의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아! 나도 서너 번 공동체의 마음을 위해서 나를 좀 부인해보고 꺾고도 봤는데 아무렇지도 않더라. 또 나는 이렇게 희생하는 동안에 다른 사람들은 제 멋대로 행동하더라. 그리고 포기해버리면 공동체의 마음이 일치를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특히 교회의 지도자의 마음은 더더욱 중요합니다. 성도들이 아무리 일치가 되려고 해도 교회에 지도자들이 매일 싸움이나 하고 소송이나 하고 이러면 안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교회의 마음의 일치가 중요한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그 일치된 마음으로 온전히 기도하게 될 때 그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치도 이렇게 마치 언덕에서 눈을 굴리는 것과 같은 그런 효과가 있습니다. 소수의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뭉쳐집니다. 그래서 그것들이 어렵지만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뭉쳐져서 계속 굴리면 신기하게 하나님께서 그 그룹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또 들으시면서 지평들을 넓히면서 사람들을 녹이시면서 이 공동체의 연속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의 마음이 점점 일치가 됩니다. 어느 한순간에 확! 일치가 되게 하시는 경우도 있지만 그러나 이렇게 시간 속에서 이런 공동체의 마음을 일치하게 하셔서 어느 때 공동체의 마음을 하나로 집약을 시켜서 그런 마음으로 공동체가 간절히 기도할 때, 그때 성령의 충만한 역사가 공동체적으로 임하게 되고 그때 공동체가 그런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 이번에 부분적으로나마 아이들을 위한 두 번의 회심집회를 통해서 우리 그런 것을 경험했습니다. 정말 회심하지도 않은 아버지가 자기 아들보고 너 회심했는가? 하고 물어보는 동안에 자기 자신이 양심이 너는 했니? 찔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정말 기도하면서 자기 자신이 가난하고 비참한 영혼이라는 인식에 도달하게 되는 부모들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이런 간절한 마음의 일치를 통해서 성령께서 강력하게 역사하시는 그런 공동체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B. 기도의 일치: 충만의 원인이자 결과
그래서 이런 마음의 일치는 성령 충만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어떤 때는 결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1. 원인임: 행 1:14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는 성령 충만의 원인이 됩니다. 이렇게 간절하게 일치된 마음으로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하니까 그때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임하게 됩니다. 성경은 일치된 마음의 기도가 성령 충만의 원인임을 보여줍니다.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행 1:14)
넓은 의미에서 공동체적 성령 충만의 경험 이전에 이렇게 마음의 일치를 이루는 것 자체가 은혜의 효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대해 깊이 깨닫고 더욱 큰 교회의 목표를 향해 일치한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그러한 마음의 일치가 그들로 하여금 기도의 일치를 이루게 하고, 이 기도에 대한 응답이 성령의 충만함을 가져오는 사례는 성경에 매우 흔하게 나타납니다.
2. 결과임: 행 2:42
또 2장에서는 오히려 성령의 강림이 이루어지니까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로 일치가 되어 결과로 나타납니다. 또 4장에서는 원인이 되기도 하고 동시에 결과가 되기도 하는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이게 굉장히 신기한 것입니다.
그럼 도대체 공동체의 그런 마음의 일치를 이루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의 소산입니까, 아니면 인간의 의지적인 노력의 결과입니까? 하는 의문이 제기됩니다. 이것도 역시 개인의 지평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일치의 이치를 잘 숙고해보면 그것을 공동체의 지평으로 연장시킬 수가 있고 그렇게 보면 사실 이 의문점도 풀리게 됩니다. 그러면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 이제 이 세상에 있는 것들로 다 분탕(焚蕩)질치고 마음이 산산이 부서져있어서 도무지 하나님께 관심이 모아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그런데 어느 한순간에 그렇게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어느 순간에 그 신자의 마음이 온전히 하나로 모아져서 하나님, 나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나는 살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땀을 흘리며 매달리는 그런 성령의 충만함을 구하는 신자가 되었습니다. 분명히 그것은 하나님의 이미 벌써 아직 성령 충만을 못 받았다고 할지라도 이미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그 사람 안에서 시작된 것입니까, 안된 것입니까?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의지를 배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먹고 놀고 분탕(焚蕩)질치는 마음으로 내버려두고 개 구르듯이 굴러다니면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이 자고 일어났을 때 그런 마음이 되게 하시는가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만약에 그랬더라면 성경이 내 마음을 힘써 지켜라. 그렇게 얘기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뭐라고 얘기합니까?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 이야기는 무슨 뜻입니까? 신자들이 실제로 가지고 품고 있는 마음과 품어야 할 당위로서의 그 마음 사이에 격차가 있다는 것입니까, 없다는 것입니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계속해서 너희들이 예수의 마음을 품어야지 된다고 생각하고 그 예수의 마음을 품도록 노력해라. 그래야지만 너희들이 예수의 마음을 품을 수 있다. 그러면 사도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어도 너희들이 예수의 마음을 품으려고만 하면 언제든지 품을 수 있으니까 그것은 전적으로 너희들의 책임이다. 그래서 너희들이 예수의 마음을 품었으면 하나님의 은혜와는 상관없이 너희 스스로 예수를 품은 것이니 칭찬받을 사람은 하나님이 아니라 너다. 그렇게 사도가 이아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게 아닙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속에서 우리는 인간의 의지와 은혜의 신비적인 관계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오로지 하고 하나님을 갈망하게 된 사람들로 하여금 절대로 자기 자신들이 그런 마음이 되어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고 자랑하지 못하게 하고 또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오로지 하여 자기의 분탕(焚蕩)질치는 생각을 끊임없이 꺾으며 하나님을 향하게 노력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방탕한 사람들의 마음을 일순간에 기계적으로 하나님을 갈망하는 사람의 마음으로 바꾸지 아니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들로 하여금 어리석게 자신의 모든 불순종의 하나님의 은혜 없음의 탓으로도 돌리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거꾸로 자신들이 마음을 모두 모아서 끊임없이 애쓴 가운데 그들의 순종을 통해서 성령님께서는 역사하시고 그래서 그들로 자신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하나님을 애오로지 바라볼 수 없는 그 마음을 그렇게 하나님을 향해 애오로지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들어주심으로서 하님의 은혜는 신자의 자유로운 의지와 함께 역사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들이 하나님께로 마음이 합하여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라고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각자 각자가 예수의 마음을 품는 것, 그것이 바로 공동체적 마음의 일치를 이루는 비결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공동체의 마음에 일치를 이룰 때 그들의 기도는 정말 힘 있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찢어지고 나누어진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보다 일치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우리는 마음의 일치가 없는 것에 대해서 깊이 회개해야지 됩니다. 정말 회개해야지 됩니다. 우리는 생각이 너무나 율법적이어서 ‘내가 이 교회에 와서 십일조를 떼어먹었어. 아니면 내가 주일헌금을 떼어먹었어. 아니면 내가 이 교회에 와서 무슨 죄를 지었어. 잘못한 게 뭐가 있어.’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게 사실은 정말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이렇게 영적인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일 때마다 성령의 충만을 구하지 않습니까? 제가 예배 시간에 기도하기 전에 성령의 충만함을 구하지 않고 설교하는 것을 단 한번이라도 여러분이 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들이 모일 때마다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하고, 구역을 위해서 기도하고, 가족을 위해서 기도할 때마다 성령의 은혜를 구하지 않을 때가 언제 있습니까? 그러나 공동체의 마음이 일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수많은 기도는 물거품이 되어서 흩어지고 하늘로 쏘아올린 그 수많은 기도의 화살들은 첫 번째 하늘도 올라가지 못하고 땅으로 다 떨어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손으로 활을 쏩니다. 그러나 이제 저쪽 남미에 있는 부족들에게 돌아가 보면 활을 발 사이에 끼고 쏘던 부족들이 있었습니다. 발 사이에다 손으로 쏜 화살보다 훨씬 큰 활을 만들어서 발 사이에다 활을 놓고 손으로 쏜 화살보다 훨씬 큰 화살을 이렇게 땅 바닥에 누워서 다리를 하늘을 향해 들고 그리고 온몸에 힘을 주어서 당기면 보통 쏘는 활보다 훨씬 먼 거리를 날아갑니다. 그게 전력을 다해서 활을 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많은 기도의모임들, 그리고 우리가 드리는 수많은 기도의 언어들, 그리고 수많은 기도의 시간들, 그리고 수많은 기도의 횟수들, 그리고 기도의 기간들 이런 모든 것들은 하나님 앞에 획일적으로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단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한번 기도하는 것은 그렇지 않은 마음으로 열 번을 기도하는 것보다 주님을 더 움직일 수 있고 온 마음으로 부르짖는 공동체의 한 번의 기도는 찢어진 마음으로 10년을 기도하는 것보다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에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교회에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성령의 충만함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공동체의 마음이 온전한 일치를 이루기를 너무나 간절히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목숨은 유한하고 우리가 이 땅에 남아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 수 있는 인생의 기간들은 우리 모두 제한이 되어있습니다. 내가 이곳에서 얼마나 더 설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하루를 살면 하루를 살수록 죽음으로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얼마 남지 않는 우리의 인생의 때에 우리에게 마지막 희망이 무엇이겠습니까? 정말 여러분들을 이렇게 신자로 살아가는 희망이 참고 견디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는 소망 때문에 지금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런 것 이미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올 때 모두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세상의 정과 욕심들이 아닙니까? 그러면 우리의 인생의 남은 날이 얼마이든지 간에 우리의 최대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좋으신 하나님을 제대로 섬길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를 각자, 각자 부르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한사람, 한사람 예수를 믿게 만드셨지만 이 교회에 부르시고 이 교회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지게 하셔서 조선시대도 아니고 그리고 22-3세기에 한국도 아니고 바로 이 시대에 조국교회에 태어나게 하셔서 우리를 공동체의 한 사람으로 삼으셔서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은 신자로서 이 소명을 이제 공동체인 이 교회가 받은 소명과 분리될 수가 없습니다. 결국은 이 교회가 하나님을 잘 섬기는 교회가 되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섬김은 교회를 통해 그리스도 예수께 공동체적으로 봉헌이 되어서 하나님은 우리가 함께 섬긴 삶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늘 말씀드립니다. 제가 외국 어느 땅에 가서 말씀을 전할 때도 저는 여기에 나 혼자 왔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나는 교회와 함께 여기에 와있다. 여러분들이 못간 그곳에 내가 가고, 내가 갈 수 없는 곳에 나는 여러분들을 보내지 않습니까? 그러면 여러분들이 남은 생애가 어떻게 되기를 바랍니까? 교회가 성령으로 충만해지고 강력한 힘을 가진 공동체가 되어서 완악한 자가 말씀의 능력으로 굴복시키고, 상처받은 자들은 싸매어 그들의 눈에 뜨거운 눈물이 흐르게 하고,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의 발을 씻겨 그들을 피 묻은 그리스도 예수의 품에 안겨드리는 그런 도구들이 되어서 우리 가는 곳마다 이 세상을 고치고 섬기는 곳마다 주님의 열매가 나타나서 그래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던 사람들, 하나님을 알지만 지식이 없어서 무너진 채 살아가고 있던 그 비참하고 불행한 사람들을 고쳐서 그래서 이 교회의 그늘 아래 들어온 모든 사람들이 예수의 생명을 누리고 어두움을 뿌리치고 우리와 함께 빛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 그 진리 안에서 교제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기다리는 공동체가 되는 것, 살아있는 동안에는 에녹과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고 죽어서는 아벨과 같이 그 피로 말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우리 모두 바라지 않습니까? 이것이 이 목회자가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전하면서 살아있는 유일한 이유입니다.
IV. 결론: 마음의 일치 없음을 회개함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게 놀라운 소명이 교회가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일을 통해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은혜를 받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고 그 일치된 마음을 잘 지켜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께 봉헌해야지 됩니다. 그때마다 내 마음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마음이 아니라 우리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의 마음이며 그리고 그 마음에 일치되게 돌려드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저 형제의 마음은 내게 주신 분깃이 아닙니다. 내게 주신 분깃은 내 마음에 다른 사람은 어떻게 하든지 나는 내 마음을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이 씻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재단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은혜 받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렇게 자기의 심장을 뜯어 그리스도 예수의 순결한 마음으로 바치게 될 때 교회는 일치한 마음이 되고 성령의 강력한 은혜가 부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이 순간도 꿈꿉니다. 새털같이 많은 날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왔지만 우리들이 하나님의 축복 없이 섬긴 날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이후로는 꿈을 꾸는 것 같은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우리 성도들의 모든 섬김에 하나님의 은혜의 단비를 부어주시고 이 교회에 발을 들여놓는 사람들은 설교를 듣기 전 예배당 뜰을 들여놓자마자 거꾸러지고 주님을 만나고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나는 간절히 바랍니다. 그 일을 위해서 여러분들이 해야 할 일은 마음을 잘 씻어서 나의 이 마음을 주님께 드리나이다. 그렇게 해서 일치를 이루고 그 일치한 마음으로 공동체가 모두 기도제목을 같은 마음으로 품고 간절히 기도할 때 교회를 에워싼 어두움의 세력들을 끊고 충천하는 복음의 불길을 이 어두운 세상에 비출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4. 강력한 성령의 역사
“에베소에 거하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고하며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행19:17-20)
I. 본문의 배경
사도행전에서 교회가 참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는 왕국의 소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동인이 필요하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첫째는 복음의 말씀이 필요하고, 또 하나는 일치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공동체의 기도가 필요하다고 말씀을 드렸고 오늘 이 시간에는 세 번째 동인인 성령의 능력에 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가 읽은 이본문의 배경을 보면 사도 바울이 에베소라고 하는 곳으로 내려옵니다. 거기에 이미 믿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와서 바울이 물었던 것은 너희가 믿었을 때 성령을 받았는가? 질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무엇인가 사도바울은 그들의 복음 사역에 무엇인가 결핍되어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그 결핍을 성령에서 찾고 너희가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제자들이 자기들은 그 성령이 있다는 것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엉뚱하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면 너희들이 어떻게 했는가? 했더니 우리는 요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회개는 했으나 성령의 깊은 경험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쳐주며 안수기도를 했더니 그들이 똑같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방언도 하고 각종 은사도 나타났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해서 이제 에베소 지방에 성령의 역사가 시작되게 됩니다. 이것도 역시 사람인 바울을 통해서 하나님이 당신의 은혜의 통치를 이 고장에 시작하신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그렇게 일행과 함께 복음을 전하며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고 있었을 때 그때 유대인들 중에 귀신들린 사람들을 축사하러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중에 어떤 사람들이 이제 귀신을 내어쫒아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는 했는데 이제 스게아의 일곱 아들들이 이제 그런 사도의 모습을 보며 자기도 흉내를 내어서 그래서 귀신아 물러가라고 명령을 하였던 모양입니다. 그랬더니 이 소리를 들은 이 귀신이 역사해서 그들을 억압하고 제압해서 그래서 그들을 벗은 몸으로 도망 다니는 그런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런 광경을 보던 많은 사람들이 엄청난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고 그것이 바로 그들이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에베소의 부흥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II. 에베소의 부흥(17절-18절)
이 에베소의 부흥은 이렇게 세 가지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고 성경이 오늘 기록하고 있습니다.
A. 두려움이 떨어짐(17절)
그 첫 번째는 바로 두려움이 떨어진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스게아의 일곱 아들들이 악령에 제압이 되어 그래서 벗은 몸으로 도망가는 그 광경을 보면서 에베소 사람들은 영적인 세계가 실제로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도 막연히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어느 순간 그들은 아는 그것이 개념으로 아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스게아의 일곱 아들들의 사건을 통해서 그들은 정말 영적인 세계가 실제하고 악령의 세력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깨닫게 되자 그들은 자신들에게 그 악령에 세력들이 커다란 두려움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그들은 큰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들의 두려움은 악령에 대한 두려움이라기보다는 그 악령을 능히 제압하고 역사하시는 능력 있으신 하나님을 성령님이 보여주셨기 때문에 그 거룩하신 하나님의 엄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떨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 "두려워" 라고 되어있는 이 부분이 희랍어 성경에는 "그리고 두려움이 떨어졌다"고 되어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 두려움을 물건을 뚝 떨어트리시니까 그 온 에베소 사람들이 그 하나님의 큰 임재를 느끼면서 영적인 세계에 대한 실제의 두려움과 함께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생생히 느끼며 두려워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부흥이 일어날 때 사람들이 경험하는 일입니다. 이런 일들은 이렇게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교회를 어느 한순간에 덮을 때 사람들에게 나타나기도 합니다. 다양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하나님의 임재가 말할 수 없는 두려움을 주어서 심판의 위협에 떨게 만드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말할 수 없이 따뜻한 하나님의 사랑의 품으로 들어오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게 만들어줍니다.
언젠가 교회에서 생활하는 지체가 한사람이 있었는데 자녀들이 회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이 어린 자녀들이 주님을 만나고 깊이 회심을 하게 되자 눈에 띄게 그들의 생활이 달라졌습니다. 게임이나 TV를 멀리하고 성경을 읽는데 재미를 붙이고 가정예배를 드리자고 조르고 함께 식사할 때 그 어린아이보고 기도하라고 그랬더니 한참 기도면서 울먹이면서 우리 아빠의 영혼을 보살펴달라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때 그 형제의 고백이 어떤 형용할 수 없는 두려움이 자기의 마음속으로 깊이 파고들어오더라고 합니다. 그래서 좀 더 대화를 나누면서 그 두려움의 실체가 무엇이겠는가 하고 물었더니 본인은 잘 짚어내지 못하는데 내가 짚어낸 것은 하나님이 진짜 살아계시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이 아니겠는가 하니 마지못해 제 이야기를 인정했습니다.
그러면 교회를 나오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그러면 인정을 안 했다는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게 아니라 우리들이 전쟁의 위협을 늘 느끼고 있지만 막상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들의 눈앞에 펼쳐지는 것은 정말 우리가 상상했기는 했지만 그러나 상상했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 눈앞에 펼쳐진 전쟁의 현실이 낯익은 것일 수 없듯이 막연히 개념적으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이 지적인 동의를 통해 인정한다고 할지라도 실제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내 아들, 내 딸 속에서 보게 되었을 때 그때 회심하지 못한 사람이 그것이 커다란 두려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일종의 부흥입니다. 부흥은 그것보다 더 아주 훨씬 더 광범위하고 폭넓게 그리고 더 강력하게 공동체적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예화; 여러 해 전에 지방에 있는 교회에 집회를 가셨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많이 부어진 가운데 집회가 끝나고 어느 날 그 교회에 다니는 지체가 편지를 보냈는데 내용은, 집회를 하는 기간 중 자기가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 바쁜 중에 쫓기듯 집회에 참석하면 이상하게 교회 마당에 들어서면 알 수 없는 포근함이 자기를 감싸는 것을 느껴서 예배당에 들어서지도 않았는데 마당에서 눈물을 흘리게 되는 그 어떤 힘이 느껴졌다는 편지내용)
이런 것들이 말하자면 하나님의 임재의 효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런 놀라운 임재의 효과가 사람들에게 나타날 때 사람들은 그 하나님의 엄위하신 앞에서 두려워하게 됩니다. 이 두려움은 사람을 절망하게 하고 파괴하는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는 일종의 두려움입니다. 오늘 에베소 교회가 바로 그런 것을 경험하였던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교회가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주어서 저희로 하여금 주님을 의지하고 자기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구원의 은혜를 의지하는 것 이외에는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교회가 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요즘 우리들은 교회가 세상에 있는 것도 많이 가지고 있으니까 세상과 교회는 차이가 별로 없고 문턱이 높지 않으니까 별다른 결심 없이 교회에 나왔으면 좋겠다고 세상을 향하여 교회가 손짓을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런다고 해서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교회에 감동을 받을 것인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가 세상과 동일한 것을 가지고 세상을 불러들이는 것은 신학적으로 심리적으로나 오류입니다. 오히려 이 세상에 있는 사람은 이 세상과 다른 그 무엇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은 믿지를 않아도 그 교회에 다니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자신과는 다른 사람들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일어나지 않고 있는 일,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일이 그 교회의 건물 속에서 일어나고 있을 것을 기대합니다. 그러니 그 기대를 저버리고 세상과 똑같은 일들이 그 안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오히려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는 앉은뱅이에게 말하기를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라고외칠 때 그가 벌떡 일어나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세상에 있는 것을 가지고 교회가 세상과 겨루거나 세상과 하나 되어서 그들을 교회로 유입시키려고 하는 시도가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이것을 통해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들은 제자들이 와서 이 복음을 전하고 부흥이 일어나는 현장에서 그들이 모임 속에는 자신의 모임 안에는 없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을 두려움 속에서 발견하게 되었을 때 그들이 회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B. 죄인들이 회개함(18절)
그래서 두 번째 특징이 바로 그들이 회개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믿은 사람들 중 많은 사람이 자복하며 자기의 행한 일을 고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에베소 교회에서 일어난 부흥의 특징이었습니다. 죄인들이 자신의 죄에 대해서 깊이 뉘우치는 일들이 먼저 일어났습니다. 자신의 죄에 대해서 깊이 통회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 교회의 예배에 대해서 논설을 하나 썼습니다. 아마 여기에 왔다가간 것 같지는 않고 인터넷을 통해 몇 편의 예배를 보면서 아마 논설을 쓴 모양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예배 시간에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눈물을 흘리고 그렇게 예배를 드리는 그것이 정말 예배 속에 담겨있는 축제적인 성격을 반영하는 예배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의 제기였습니다. 제가 답은 하지 않았습니다만 저는 그 논설에 대해서 정말 갑갑한 마음이었습니다. 여러분, 그 놀라운 기쁨이 어디로부터 옵니까? 그 놀라운 기쁨이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를 기쁘게 하는 기쁨이라면 예배 공동체 속에서 느끼는 그 기쁨이라는 것이 이 세상 사회단체 속에서 스스로를 즐겁게 하여 조장하는 기쁨과 무엇이 다르다는 것입니까? 그래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람들이 요즘은 교회에 모여서 서로 기뻐하자고 하는데 슬피 울면 기뻐할 때가 저절로 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기쁨은 우리 스스로가 서로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신령한 기쁨이 예배 자가 누려야 할 기쁨이라는 사실은 누구든지 동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신령한 기쁨이 우리 예배자들이 누리고자 하는 참된 기쁨이요, 신적인 기쁨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 기쁨을 전달해주시는 분은 누구일까요? 성령 하나님을 통해서 이 놀라운 신적인 기쁨들이 우리에게 전달되지 않습니까? 이 기쁨이 어떤 사람들에게 전달되었습니까? 여러분들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기쁘고 신령한 하늘에 기쁨으로 충만했던 그 시간은 많은 눈물을 흘리며 회개의 삶을 살던 때라는 사실을 여러분 기억하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요” 주님의 위로가 있는 그곳에 다시 회복의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거스르고 죄 가운데 살던 사람들이 나와서 주님 앞에 제일먼저 하여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자신들이 주님을 거스르며 배역하며 살았던 죄를 회개하는 것으로 창조주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가 시작하지 않습니까? 그 참회 속에서 우리 자신을 돌이킬 때 하나님께서는 그 참회하는 사람들의 애통하는 마음에 위로를 주시고 그리고 그 위에 하나님께서 그를 용납해주시고 무한히 용서해주시며 지혜로운 삶을 살게 하시는 교제의 기쁨을 맛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도에게 주시는 기쁨은 하나님 자신과의 교제로 말미암은 기쁨이니 거룩하신 하나님과 우리 인간들의 교제를 가로막는 유일한 방편은 오직 죄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흐느낌이 있고 죄에 대한 진지한 회개가 있는 이 예배는 정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예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어떤 인위적인 조작이나 슬픔과 비극적인 요소를 자아내게 하는 인공적인 요소가 예배 속에 가미되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그 무엇으로도 그런 것들을 조장하거나 그런 것들을 독려하거나 인위적으로 그런 것들을 유도하는 이런 공교한 작업들이 그 속에 있다면 그것은 매우 기만적인 예배요, 그렇게 해서 일어나는 모든 슬픔과 탄식과 눈물의 효과는 성령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 아닙니다.
신약의 예배는 이처럼 규모가 있으나 단순함과 자유 속에서 절제 속에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입니다. 감정과 그 모든 유의적인 시도들을 인해서 감정적인 마음으로 인해서 우리의 모든 정서가 방탕에 흐르는 그런 식의 예배는 정말 신약적인 예배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약의 예배는 거룩한 성령과 진리 안에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니 사람들은 온 지성으로 진리를 받아들이고 온 인격으로 성령을 받아들일만한 그렇게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가지고 드리는 예배여야 하는 것이니 오늘 흔히 어떤 사람들이 하듯이 예배 속에 과도한 음악을 동원하고 그리고 유희와 오락적 요소, 그리고 격정적인 찬양의 요소를 집어넣어서 정서의 방탕으로 흐르는 예배는 신약성경에서 우리에게 가르치는 예배의 양식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예배 속에 어떤 가공적인 요소나 감정을 자아내게 하는 인위적인 요소나 의도적으로 슬픔과 비극으로 이끄는 그런 모든 가공적인 요소를 거부하고 진리의 단순성과 그리고 마음의 온전한 일치를 통해 성령의 은혜를 갈망하는 그런 종류의 예배가 가장 성경적인 예배라고 믿고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예배를 드립니다. 그 속에서 지성을 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래서 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자신의 가슴속으로 내려오고 급기야 인격적인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그래서 다시 하나님과의 연합으로 실제적인 그리스도와 연합을 회복하고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 그로 말미암아 누리게 되는 신령한 기쁨, 이것이야말로 회개의 열매요,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자의 특권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오늘 이 에베소에서 일어나는 이 부흥이 바로 이런 것을 이 사람들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교회에 처음 나온 그날 회심하고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두 번도 아니고 단 한번 나와서 주님을 만나고 그리고 어두운 인생의 길에서 돌이켜 빛 가운데 살며 지금도 그들 중에 상당수의 사람들이 건강하게 주님을 섬기며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새로운 인생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놀라운 변화가 어떻게 일어났습니까? 그런 변화가 일어난 사람들 중에 누구도 자신의 죄인 됨을 그 첫 시간에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 첫 시간에 그렇게 회심할 때 자신의 죄, 그리고 어두움 속에서 주님을 거스르며 살았던 그 모든 옛 생활을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음이 아파서 주님 앞에 많이 울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그들의 죄를 용서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예전에 슬퍼하지 않았을 때는 누릴 수 없었던 놀라운 기쁨을 소유한 사람들로 변했습니다. 그래서 그 기쁨 속에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승리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 속에 깃들어있는 작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정말 오늘날 우리들에게 죄에 대한 진지한 참회가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를 온전히 바꾸어 새사람이 되게 만드시는 그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령의 능력, 그 말씀의 은혜의 능력을 통해서 자신이 모든 죄를 뉘우치고 주님을 만나기를 원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는지 묻고 싶은 것입니다. 에베소에서 이런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배양하던 삶의 실제적인 개혁이 일어났습니다. 그 동리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마술을 하며 그렇게 인생을 보냈습니다. 그것은 결국 그들 가운데 사신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 그들의 모든 세계관과 인생의 행복의 가치관의 중심에 있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하나님의 큰 두려움이 떨어지게 되자 그들은 깊이 회개하게 되었고 그 회개는 단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실제적인 삶을 개혁으로 이끄는 회개였습니다. 그들은 모든 마술하는 책을 모두 모아서 쌓아놓고 불을 질렀는데 그것이 은 오만이나 되는 엄청난 금액의 마술 책들이 거기에서 태워졌습니다. 이것은 바로 이제껏 까지 사신 우상을 섬기던 에베소 사람들의 결단이며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고자 하는 그런 놀라운 신앙의 결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저는 15세기 말에 있었던 플로렌스의 허영의 화형식을 생각하게 됩니다. 한때 제가 만났고 그리고 깊이 존경하고 지금도 내 마음 한구석에 살아있는 스승이 한사람 있습니다. 그분이 바로 15세기 말의 이태리에서 설교하던 설교자 기롤라모 사보나 롤라라고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엄격하게 말하면 가톨릭의 수도사였으나 종교개혁 이전에 이미 개혁사상을 가지고 가톨릭교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열망에 불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방종하게 살아가던 그 시대에 플로렌스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의와 그리고 심판, 그리고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시는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외쳤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외쳤을 때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그 플로렌스가 바로 오늘날 피렌체라고 하는 곳입니다.
제가 몇 해 전에 거기에 가서 그 사보나롤라가 설교하던 그 성당을 보고 한동안 그 감격을 그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화형을 당한 그곳에 서서 마음속으로 많이 울었습니다. 그 역사에 의하면 두모 성당이라고 하는 플로렌스 피렌체에서 가장 큰 성당에서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 설교를 듣기 위해서 그 예배당으로 모였고 예배가 시작하기 전에 훨씬 전에 이미 예배당은 입추의 여지가 없이 사람들로 가득 차서 예배당의 문은 닫혀졌고 들어오지 못한 많은 사람들은 창살에서 매달려서 설교를 들었다고 합니다. 한편의 설교가 울려 퍼지고 나면 하나님의 놀라운 임재가 나타났고 사람들은 가슴을 치며 자신의 죄와 악함을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그가 설교한 그 설교는 일주일 동안 그 플로렌스 도시에서 모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가장 첫 번째 화제 거리가 되었습니다, 이번 주에 이 두모 성당에서 선포된 말씀이 무엇인가? 그것을 동리 사람들이 함께 나누며 그 회개의 감격을 누리곤 하였다고 합니다.
결국 이렇게 말씀 사역의 놀라운 부흥이 일어나자 플로렌스는 개혁되기 시작했습니다. 거리를 방황하던 사람들은 안정된 직업에 종사하기 시작했고 술주정뱅이들이 사라지고 플로렌스의 감옥은 텅텅 비게 되었습니다. 부랑자들의 야비한 노래는 하나님을 향한 찬송으로 바뀌었고 도시 사람들 사이에는 다툼과 분쟁이 사라지고 서로를 향한 용서와 은혜가 흘렀습니다. 온 도시에 사람들은 이제 우리는 주님의 뜻을 따라 살고 싶다고 외치며 자신들이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가면이나 좋은 장신구, 사치품, 그리고 음란한 그림 같은 것을 모두 광장에 내어놓았습니다. 사람들은 마차를 끌고 다니며 그 모든 것들을 버리고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야지 된다고 골목골목 외쳤고 온 골목의 사람들은 그 더러운 물건들을 모두 마차에 실었습니다. 그리고는 플로렌스 광장에 그 모든 것들을 쌓았습니다. 그 팔각형으로 피라미 모양으로 쌓았는데 둘레의 길이가 72미터고 높이가 18미터였다고 하니 가히 동산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며 종을 치면서 거기에 불을 붙이고 우리는 이제 모든 더러운 삶으로부터 거룩하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외쳤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플로렌스 광장에서 다 불태워지고 있을 때 그들의 마음은 온전히 묶어져서 창조주 하나님 한분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1497년의 일이었습니다.
오늘 이 에베소서시 한복판에서 불태워지고 있는 이 어마어마한 마술 책도 바로 이런 사신 우상을 섬기고 마술을 믿던 모든 불신앙에서 돌이켜 이제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창조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야 되겠다고 하는 그들의 결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참된 하나님의 부흥,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있는 곳에서는 언제나 이렇게 삶의 놀라운 개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눈물을 흘리고 과격한 은혜의 체험을 했다고 할지라도 여러분들의 삶이 바뀌지 아니한 것은 아직 여러분들이 충분한 은혜를 받지 못하였거나 혹은 주시는 은혜는 너무나 큰데 여러분들이 의도적으로 불순종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놀라운 능력을 허락하시는 것은 단지 여러분들의 귀를 즐겁게 하고 여러분들에게 종교적인 경험을 해주기 위함이 아니요, 여러분들의 삶을 돌이켜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C. 예수의 이름을 높임(17절)
마음도 영혼도 쇄신되고 개혁되며 그 마음과 영혼이 빚어내는 본성도 변화되어서 그들의 삶 전체가 새로워지는 일들이 일어나기를 바라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공동체를 그냥 두지 아니하시고 때를 따라 진리와 성령의 은혜를 부어주심으로 그들을 고치고 바꾸어놓으십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들은 이런 죄에 대한 진실한 참회 끝에 예수의 이름을 높이는 일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두려움이 떨어지게 되자 그들은 회개하게 되었고 회개하게 되자 이번에는 예수의 이름이 하늘로 높여지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기독교 선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에이든 윌슨 토저의 고백과 같이 기독교 선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을 향한 참된 예배자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복음이 선포되는 그곳, 그 복음에 의해서 그들의 완악한 심령이 변화되고 창조주 하나님께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돌아오는 그곳에는 언제나 그들은 온 마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기를 원합니다. 말과 혀로만 높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 전체가 그분의 이름을 높이는 도구가 되기를 원하며 그분의 이름을 높이는 일이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도 아깝지 않은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갈망이 생겨나게 됩니다.
거듭난 신자의 가장 중요한 표는 바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갈망입니다. 은혜 가운데 있는 신자의 가장 중요한 표는 바로 자기 안에서 이루어진 이 하나님의 나라가 이 온 땅에 두루 이루어지고 자기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가 온 땅에 두루 펼쳐져 그의 이름이 높여지는 일들이 일어나야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이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어야 할 간절한 간구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의 이름에 거룩하심을 위하여 그 뜻의 지상적 성취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우리에게 주기도문 속에 제일먼저 당부하시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일들이 공동체 속에 일어나게 되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실제로 우리의 삶을 한번 보십시오. 교회당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아도 마음깊이 하나님의 이름이 자신의 인생을 통해 높아지기를 사모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더욱이 그렇게 되지 못할 때 가슴아파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마음을 찢으며 자신은 한 알의 밀알처럼 썩어도 주님의 이름은 자신을 통하여 하늘높이 들려지기를 원하는 그런 거룩한 무엇으로도 끌 수 없는 갈망을 가진 사람들이 도대체 얼마나 되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마음이 아려오는 것이 있습니다. 이제는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아니하고 가슴을 쳐도 애곡하지 아니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어디에 가든지 이런 무관심과 냉담한, 그리고 형식적인 신앙의 생활은 만연해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점점 편의주의에 빠진 신앙생활을 하고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갈망이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자신의 의무 같은 것들은 생각지 않고 신앙을 통해 자신에게 유익을 얻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어느 잡지가 강남에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왜 교회에 나가는지 설문을 했습니다. 58%가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 라는 대답을 듣고 너무나 슬펐습니다. 정말 그 정도입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고 이 신앙으로 살아가고 이 신앙을 좆아서 우리의 인생을 설계하려는 모든 것이 정말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서입니까?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렇게 예수를 믿어서 과연 그 마음에 평안이 찾아올까요? 찾아오지 않습니다. 정말 매순간 하나님께로 참된 신자로 끊임없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합당한 사람으로 변화되어가는 이 하나님과의 합의를 향한 전진이 없이는 누구도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자, 이만하면 신앙이 됐지, 이 정도에서 내 믿음은 끝내고 헌신도 그동안에 많이 했으니 이 정도에서 끝나고 성화의 삶도 이정도면 남들이 따라오지 않을 만큼 진도가 많이 나갔지. 좀 쉬자. 할 때 그 신자의 마음속에서 평안이 있을 수 있습니까?
III. 성령의 역사가 필요함
신자의 마음의 평안은 하나님과의 평화로부터 오는 것이고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고 있는 신자의 마음은 늘 자기 부족을 느끼며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가운데서 하나님과의 진정한 평화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 평화는 신앙의 목표가 아닙니다. 신앙의 목표는 어찌하든지 그리스도를 닮는 것인데, 어찌 하든지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는 것인데, 어찌 하든지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사는 것인데 그렇게 온전히 믿고, 온전히 되고, 온전히 섬기면 평안은 하나님과의 화목을 토대로 저절로 찾아오는 하나의 결과입니다. 결국 우리는 이런 사실을 볼 때 우리의 모든 시대의 교회가 그러하듯이 오늘 우리의 시대의 교회도 성령의 역사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A. 복음과 성령의 능력
무엇보다도 복음과 성령의 능력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그 일은 성령의 능력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제자들을 사도로 파송하시면서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에게로 가서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하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을 빈손 들려 보내지 아니하시고 그들에게 성령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병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게 하는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성령의 강력한 능력을 주셔서 그 능력을 가지고 그 일을 하게 하셨으니 이 복음은 바로 이 능력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이미 예수님의 공생애의 등장을 통해서도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후에 곧바로 설교하기 시작하지 않으시고 유대광야로 들어가셔서 40일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시며 기도하셨습니다. 그렇게 기도를 마치신 후에 예수님이 갈릴리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모습에 대해서 성경은 성령으로 충만하였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을 때 그 말씀도 놀라운 말씀이었거니와 말씀이 전달되는 방식 자체가 당시 종교지도자들에게는 경험할 수 없었던 특이한 방식으로 말씀이 전해졌고 그 앞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큰 능력을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원리를 이후로도 계속 됩니다. 사도행전에 오순절 성령강림은 선교사적으로 보면 이렇게 복음을 전파해야지 되기 때문에 그 전파한 복음이 효력 있기 위해서 이제는 그 성령의 능력을 몇몇 사도들에게 국한하지 않고 그들이 받았던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더 크고 놀라운 성령의 권능을 공동체 위에 부어주셔서 그 공동체에 소속된 작은 신자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누리며 복음을 전할 때 열매를 맺기 위해서 부어주신 성령강림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전파되는 모든 곳에서는 이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이었고 이것이 사도들에 의해서 선포된 복음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고 하는 이 선포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과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이 우리의 죄 때문이라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과 그리고 그를 믿음으로 우리가 죄를 용서를 받는다는 복음을 만들어냈습니다. 이 놀라운 복음이 사실 인간의 지성과 이해로 습득 될 수 있는 것들입니까? 정말 우리가 이 세상이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호락호락 믿을 수 있습니까? 더욱이 우리가 태어나자마자 죄인으로 태어난다는 사실을 우리가 그렇게 쉽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죽으신 것을 우리들 중에 아무도 본 사람이 없고 그분이 다시 살아나신 것을 더더욱 본 사람이 없는데 천국과 지옥은 간 사람은 보았겠지만 본 사람은 돌아온 사람은 없는데 우리가 그것을 호락호락 믿을 수 있겠습니까? 자기 지성에 대한 과도한 신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그런 허무맹랑한 사실을 믿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아니면 누구도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화; 15년 전에 연세대학교에서 지옥에 관해 설교를 하셨는데 반응이 별로 좋지 않아 참담한 마음으로 돌아왔는데 얼마의 시간이 지나 생각지 않게 그때 참석한 사람들 가운데 두 자매가 인생을 살면서 생긴 의문점이 설교를 통해서 깨닫고 천국과지옥이 믿어지면서 예전에는 황당하게 생각하던 것들이 진리로 믿어지는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났는데 이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일어날 수 없다는 내용)
B. 사라지고 있는 설교 제목들
그런데 오늘날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들이 사라지는 설교의 제목들이 너무나 많지 않습니까? 그것들이 무엇입니까? 이런 영적인 세계가 있다고 하는 것, 그것 사람들에게 점점 사라지고 있는 제목들이 아닙니까? 정말 하나님을 믿지 않고 불신앙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향한 준엄한 심판, 그리고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주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창조의 목적으로 돌이키게 하시기 위해서 그들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공정하신 방법, 그 위에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는 사랑과 자비, 회개의 초청 이런 것들에 대해서 정말 이 모든 복음의 요소들이 골고루 우리에게 선포되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이제는 사람들은 이런 현대인의 지성에 거스르는 이런 원색적인 것들, 악령, 귀신, 그리고 최후의 심판, 지옥의 불길, 그리고 그 고통, 천국, 하늘나라 이런 것들에 대한 전망들이 거의 없는 가운데 이 지상생활에서의 행복을 위한 신앙생활을 영위해나가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복음 신앙에서 이탈한 잘못된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사도바울과 같은 지성인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일평생을 복음을 위해서 살던 그 사람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의 대항이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왜 예수를 믿지 않습니까? 오늘날 회심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의 그 회심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오늘 이 시간에도 여러분들이 이 말씀을 들으면서 여러분들 가운데는 아직까지도 회심의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영혼이 진정한 회개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그 생명의 기쁨을 누리지 못한 사람들이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상처를 받지 말고 오늘 제 이야기를 잘 들어보십시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합니다. 왜 그런 사람들이 그렇게 수없이 선포되는 복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것을 믿고 받아들이지 않는지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세상 신이 저희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복음의 광채가 미치지 못하게 한다고 말입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을 악한 영이 어둡게 하고 복음의 진리가 비추지 못하도록 방해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회심하지 못한 여러분들의 영혼에 대한 성서적인 진단입니다. 아무리 그런 영혼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듣기 좋은 말, 쉬운 말, 그리고 정말 그가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아무리 전한다고 할지라도 성령의 강력한 은혜의 역사가 없이는 그 복음의 광채를 가리고 있는 그 악한 영의 역사를 거둘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아직까지도 여러분들이 회심하지 못한 채 이렇게 복음의 광채가 비추지 못하게끔 여러분들의 영혼에 어두움이 드리워진 사람들은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고 한번 두려운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이처럼 오랫동안 교회에 나오고 있는데 나의 마음속에 악한 영의 세력이 장막을 쳐서 복음의 광채가 비추지 못하게 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에서는 수많은 복음을 듣고 그리고 그 복음을 듣고 많은 사람이 회심하고 나는 마치 비 오는 날 뚜껑을 닫아놓은 장독처럼 어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도 나의 마음은 녹지 않는구나, 하고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려운 마음으로 나의 영혼의 상태가 개선되지 아니하고 계속될 때 나의 마지막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깊이 뉘우치고 새로워져야 합니다.
회심하지 못한 여러분들이 다른 사람들의 중보의 기도,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그 섬김의 기도만을 의지하지 말고 여러분 자신이 무릎을 꿇고 기도해야지 됩니다. 하나님 나의 영혼을 가리고 있는 이 어두움의 장막을 거두어주시옵소서, 성령님이 살아계시니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나에게 이 복음의 광채가 비추지 못하도록 역사하고 있는 세상 신의 역사를 거두어주시고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나의 영혼 속에 어두움을 뚫고 햇볕이 들어오는 것처럼 복음의 광채를 비추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지 됩니다. 매일매일 기도해야지 됩니다. 그 일을 해결 받지 않고는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모함을 가지고 주님 앞에 매달려야지 됩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회심에 이르게 하실 것입니다.
C. 영적 전쟁으로서의 신자의 삶
결국 신자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영적 전쟁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신자의 삶을 바라보는 본질적인 진단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영적인 전쟁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씨름은 이 세상에서 먹고 입고 마시고 이름을 내기 위한 씨름입니다. 이런 씨름들은 모두 눈에 보이는 씨름입니다. 사람들이 남들보다 조금 더 돈을 벌기 위해서 얼마나 애쓰는지 그 모습은 우리에게 모두 보이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능력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서 얼마나 부지런히 일하고 애쓰는지 보이지 않습니까? 이런 모든 일들이 언제나 일어나지 않습니까? 이런 모든 일들이 그들 속에 나타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들이 이 모든 것들을 이런 모든 씨름들 속에서 매일매일 살아갑니다. 그러나 영적인 씨름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영적인 전쟁입니다. 그래서 항상 우리는 이중적인 생각을 해야지 됩니다. 우리에게 어떤 삶의 상황이 다가오면 그 삶의 상황은 눈에 보이는 것들만 우리의 감각을 통해 다가옵니다.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영적인 의미는 신앙의 눈으로 볼 때까지 묻혀있습니다. 그리고 그 의미 속에 역사하고 있는 그 치열한 영적인 전쟁들, 그 속에서 정말 묻혀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바라보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은 영적인 전투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6장에서 이 영적인 전투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서술하였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영적 전쟁을 서술했는지 아십니까? 5장에서는 아내와 남편에 관계를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로 묘사하다가 6장에 가서는 자녀들과 부모, 부모와 자식, 고용주와 피고용인 등등의 관계를 이야기하다가 맨 마지막에 종말로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 대한 것이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남편이 아내를 사랑해야지 되는데 이것이 본질적으로 영적 전쟁입니다. 미워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의 치열한 전쟁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해야지 되는데 이것도 치열한 전쟁입니다. 끝없이 솟아오르는 교만한 마음을 누르고 남편을 존중하고 그 남편을 존경하는 이것은 치열한 전쟁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도 끊임없는 전쟁입니다. 왜냐하면 자식이 사랑받을 짓을 안 하기 때문입니다. 또 존경할 수 없는 부모에게 복종하는 이것은 더더욱 어려운 전쟁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전쟁이라는 것을 제가 간단하게 여러분들에게 입증해보이겠습니다. 자, 우리가 이런 가족과의 관계에서 불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지 못하거나 아내가 남편에게 상습적으로 불순종합니다. 그럴 때 남편은 끊임없이 가장으로서의 자신의 위치가 짓밟히는 것을 보면서 그 앙갚음을 사랑하지 않는 것으로 갚는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하려고 하는데 부모가 살아가는 삶에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순종이 힘들어집니다. 이런 식으로 다 깨어집니다. 그것이 자연적인 상태에서 회복이 되는 것을 여러분 얼마나 보셨습니까? 본성만으로 그렇게 되는 일들이 있기는 하는데 매우 희귀한 일들입니다. 정말 드문 일입니다. 그리고 또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사람들은 누구든지 자신이 받은 상처는 오래 기억하고 자기가 준 상처는 기억을 잘 못합니다. 그러니까 서로 받은 것만 기억하기 때문에 서로 용서가 안 됩니다. 일단 상처를 깊이 받게 되면 그 다음에 그 상처를 가지고 해석합니다.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은 정말 이 사람은 상처를 주려는 본의가 아니었는데 그 틀을 가지고 해석을 하니까 전혀 그럴 의도가 없는 모든 행동들이다 자기를 향한 미움과 그리고 자기에게 고통을 주기 위한 행동으로 전부다 투사가 되면서 해석이 됩니다. 그래서 미워하면 자기 자신의 사람에 그릇된 마음의 틀이 생겨버립니다. 그래서 그 사람 자신이 망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깊이 미워하고 증오하고 있는 사람은 그 사람 자신이 이미 많이 망가진 사람입니다. 피할 수 없이 망가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그것이 결국은 궁극적으로 부메랑이 되어서 자신에게 돌아오게 됩니다.
D. 회개와 성령의 역사
그런데 그런 사람이 교회에 와서 말씀에 은혜를 받고 깊이변화가 됩니다. 그래서 은혜가 확! 밀려와 새사람이 됩니다. 그게 영적인 일입니까, 육적인 일입니까? 그런데 그 영적인 일이 이루어지면 그 관계들이 치료가 됩니다. 사랑할 수 없는데 사랑이 생기고 도저히 존경할 수 없는데 용서가 되어서 존경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이런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이게 무엇인가 하면 영적인 전쟁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가장 영적인 것과는 상관이 없는 이런 가족들과의 관계까지도 이게 사실 영적인 일이라고 하는 것을 성경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에 전 영역은 치열한 전쟁의 현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런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은 성령의 충만한 능력을 힘입는 것입니다. 그 성령의 놀라운 능력이 자신에게 임할 때 그것이 은혜의 통치, 사랑의 통치를 가져오고 그래서 그런 영적인 부요한 자원으로서 이 모든 것을 이기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회개가 바로 그런 놀라운 영적인 역사를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그러니까 죄에 대한 진지한 생각과 그것을 인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모든 은혜의 자원이 막혀버렸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곤고하고 꼬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하는 정직한 고백을 하게 될 때 그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걸려있는 죄가 문제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죄를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이 지은 모든 죄를 회개하지만 이것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당연히 놀라운 은혜를 받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진지하게 죄를 참회하는 사람은 그렇게 참회하는 사람의 죄를 용서하실 때 언제나 그 용서는 그에게 너무나 뜻밖의 사건이고 그에게 그래서 놀라운 감동과 감화를 주는 사건이 됩니다. 그런 이치의 회개를 강조하는 그 자체가 인위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회개하게 하시는 분도 결국은 성령님이십니다. 죄를 깨닫지 않으면 회개할 것이 없는데 깨닫게 하시는 분도 성령님의 조명을 통해서 성령님이 신자에게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신자는 그 깨달은 것을 흘려보내지 않고 굳게 붙들고 더욱더 이성의 추론을 사용해서 자신의 죄가 가져온 결과와 과정을 생각하고 그래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더 큰 은혜를 주셔서 그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다시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많은 신자들은 자신들이 온전히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다시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못하면서 마치 하나님은 신자들에게 성령주시기를 매우 인색하게 하시는 분인 것처럼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회개가 온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내가 이렇게 주님의 은혜를 힘입어서 나의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하나님이 나의 주홍과 같은 붉은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다시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부어주시고 예전보다 더 사랑해주실 것이라고 하는 그런 믿음과 기대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것이 요구가 되는 것입니다.
IV. 공동체의 현실을 직시하라
이런 마음을 공동체적 지평으로 연장해서 생각해보십시오. 공동체는 한 몸이고 한 몸인 교회 공동체 안에는 공동체의 마음이 있다고 어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공동체의 마음이 바로 이렇게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공동체의 죄를 함께 통회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이처럼 나의 죄를 자복하고 그 공동체가 하나님 앞에 온전해지기를 사모할 때 하나님께서 다시 이 공동체를 성령의 놀라운 은혜로 채우시고 공동체의 지난 동안에 모든 과오와 오류에서 건져주시고 죄에서 건져주시고 그리고 그 공동체를 다시 새롭게 하셔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놀라운 능력으로 무장시켜서 주님의 쓰심에 합당한 소명을 따라 살아가는 공동체가 되도록 만들어주시는 공동체의 회복을 꿈꾸어보십시오. 얼마나 놀라운 일들이 우리를 위해 기다리고 있습니까? 죽은 자와 방불하고 이 세상에서 손가락질을 받고 함께 모여서 싸움질이나 하고 헐뜯기나 하는 그 교회 같지 않은 교회가 그렇게 공동체의 한 마음으로 진실한 통회를 통해 다시 성령의 충만함을 입을 때 그 교회가 예전에는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가렸던 교회들이 그 후에 얼마나 놀랍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교회가 되겠습니까!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교회가 되겠습니까!
이런 성령의 강한 역사가 오늘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이런 성령의 충만하게 하시는 부흥의 역사가 왜 우리에게 필요한지 우리 공동체의 현실을 한번 제시해보시기를 바랍니다.
A. 회심치 않은 교인들
제일 먼저 생각해볼 것은 교회 안에 있는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무엇을 통해서 진실한 회심에 이르게 될지 생각해보십시오. 일 년, 이년, 혹은 삼년, 사년을 그들을 돌보는 동안 그들이 복음을 듣지 않았겠습니까? 새신자반, 그리고 새 생명 전도학교 온갖 프로그램을 통해서 다 거쳤지만 그러나 여전히 회심하지 않고 남아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매주 울려 퍼지는 복음의 선포를 듣고도 회심하지 않은 사람이 있고 회심한 사람들을 위한 특별한 집회는 기가 막히게 불참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영혼의 변화를 받을 수 있는 수많은 길들을 피해갑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여전히 건재하여 교회에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가 작고 초창기일 때는 거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배겨날 수가 없습니다. 공동체 요만한데서 사람의 얼굴과 대면하여 얼굴과 표정까지 다 읽을 수 있는 사람, 그렇게 해서 만약에 어떤 사람이 회심하지 않은 놀라운 증거를 예배와 교회생활을 통해 어김없이 드러낸다면 그 작은 교회 시절에 우리가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불러서 당신 아무래도 구원이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자신이 그렇게 못할 사람이면 교회에 남지 않습니다.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이 좋아하는 교회가 작은 교회입니까, 큰 교회입니까? 왜 그렇습니까? 익명의 신앙생활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미쳐 다 돌보지 못할 교회, 그런 교회를 좋아합니다.
저희가 250명이 될 때까지 제가 전 교인을 일일이 심방했습니다. 특별히 연초에 모두 심방했습니다. 그것도 남편과 아내가 대학에 다니는 딸과 함께 교회에 나오면 세 번을 심방했습니다. 왜냐하면 둘 다 사이에 문제가 있는데 가정으로 심방 가봐야 서로 밥이나 먹고 가자고 그러지 누가 얘기합니까? 지금 문제가 둘 사이에 있는데 아내가 있는 그 앞에서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나 살기 싫다고, 그러니까 하나씩 따로 만나서 얘기를 들어보면 구구절절 기가 막힌 사연이 나옵니다. 또 남편을 불러서 사실을 확인해보면 그중에 절반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부부문제를 하고 나면 그 집 아이를 불러서 합니다. 말씀을 안 듣고 오락가락하고 쓸데없는 질문이나 하고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면 다시 재 심방, 그렇게 해서 숙제를 잔뜩 내줍니다. 테일 뭐뭐 듣고 책 뭐뭐 읽고 한 달 뒤에 만나자. 그때는 내가 이만큼 바쁘지 않으니까 그 자리에서 달력에다가 표시를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에게 최고로 심방을 많이 받은 사람이 4차 심방까지 받았습니다. 1월에 심방해서 6월까지 갔습니다. 넌 아직도 멀었다. 그러니 거기에 슬쩍 숨어있는 회심하지 않은 사람이 없지는 않겠지만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이 잡듯이 잡는데,
난 지금도 그렇게 목회하고 싶습니다. 정말 그렇게 목회하고 싶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이 그렇게 목회하라고 여러분 한 200명만 목회하고 나머지 다 새로운 길로 인도하신다면 나는 30초도 안 망설이고 할렐루야 하겠습니다. 정말 너무 너무 이런 상황이 저에게는 고통스럽습니다. 왜냐하면 그 회심한 사람들은 대게 기둥 뒤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아니 여기 말고, 미안합니다. 기둥 뒤가 아니라 옆이잖아요. 옆은 괜찮습니다. 여기야 다 어차피 TV로 보니까 괜찮은데 교회가 작은데 기둥 딱 두개가 있는데 기둥 뒤에서 머리만 이렇게 나옵니다. 고등부 사역하면서 내가 경험했던 것입니다. 꼭 그 자리에 가서 앉으면 기둥도 가느다랗습니다. 그러면 제가 보면 기둥에 머리만 양쪽에 이렇게 나옵니다. 어쩌면 그런지 모릅니다. 꼭 그렇게, 나는 성격이 유별나서 그런 것을 또 못 봅니다. 설교하다말고 나오라고, 안 나오면 마음이 거슬러서 못한다고 그렇게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 많이 숨어있습니다.
우리가 초창기에는 항상 사경회를 하면 등록교인수보다 더 많이 모였습니다. 지금은 어림도 없습니다. 어제도 제가 통탄을 했습니다. 이게 뭔가. 갑절은 더 나와서 꽉 채워야지, 갑절이 와도 앉을 자리가 없지만 못 앉을 때라도 못 앉더라도 일단 와봐야지. 이렇게 해서 정말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가슴을 쳐도 애곡하지 않는 그런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런 회심하지 않는 사람들이 여러분 주위에 보십시오. 아마 여러분 안에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3년 이상 교회에 데리고 나왔지만 여전히 회심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남편이 교회를 데리고 나와서 가정평화를 위해서 와주지만 그것도 다행이지 전에는 한길에다 내려놓고 집으로 도망갔는데 그래도 마지못해 끌려서 온갖 감언이설과 회유를 통해서 그래서 교회에 나와서 기둥 뒤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갑니다. 어떻게 해결이 될 수 있겠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성령의 능력 있는 역사 이외에 어디에서 답을 구할 수 있을지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올 여름에도 남편이 회심한 몇몇 자매들이 너무나 행복해하는 광경을 보면서 기뻤습니다. 가슴에 한이 맺히지 않겠습니까? 회심하지 않은 남편과 살면서도 마음의 눈물이 없다면 그 사람 자신이 대신 누가 울어주어야 할 만큼 불쌍한 영혼의 상태에 있는 사람입니다. 무슨 좋은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지체들이 교회에서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정말 너무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그들 중에 인원이 많이 모인다고 할지라도 정말 전심으로 그 영혼들이 나는 회심하기를 원합니다.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하는 갈망을 가지고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면 교회가 아무리 커도 그들이 반드시 회심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꾸 숨어버립니다. 그래서 결국 나타나지 않고 숨어버리고 이렇게 되니까 다루어지지 않고 그러니까 그들의 영혼의 상태는 점점 곤고해지고 심방을 하려고 해도 피하고 면담을 가지려고 그래도 도망가고 그러면서도 교회는 나옵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냥 하나의 종교적인 생활로서 교회의 생활을 연장선상에서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어서는 안 됩니다. 그에게는 어떤 생명도 그 안에는 없습니다. 성령의 강력하고 놀라운 역사가 없이는 그런 사람들이 변화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강력한 역사만 있으면 그보다도 더 막무가내의 사람들도 변합니다. 정말 놀랍게 변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그 흉악한 사람들을 바꾸어놓는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에 변화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지 되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예배 속에 하나님의 정직하고 진정한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 그 위에 부어지는 성령의 특이한 능력, 이것들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한번 보십시오.
이번에도 몇 군데 집회를 다니면서 그 중에 한 지방에 내려가서 그 교회의 교역자와 얘기했습니다. 당신들이 교회에서 목회를 하는데 우리 한번 이야기를 나누어봅시다. 당신 어디를 담당하고 있습니까? 그러니까 장년 교구를 500명 정도 담당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 우리 후배들이니까 그랬습니다. 한번 목회자의 마음으로 정직하게 가슴에 손을 얹고 그 500명 중에 어느 정도 회심했다고 믿으십니까? 물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지금 그들이 일시에 죽어버리면 천국에 갈 사람이 몇 명이나 된다고 생각합니까? 그 다음에 들려오는 고백이 저를 굉장히 우울하게 했습니다. 35% 미만이라고 확신합니다. 회심도 안 한사람이 집사도 되고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여태까지 1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그랬는데 후에는 좋은 일이 저절로 일어날까요? 안 일어납니다. 개꼬리 삼년 묵어서 황모가 안 됩니다.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세월이 아무리 많이 흘러도 그들도 알지 못한 사이에 회심하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옆에 또 다른 교회에서 사역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젊은이들을 사역하기에 형제는 얼마나 회심했다고 봅니까? 50% 미만일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면 이게 어떻게 된 것입니까? 정말 우리들의 교회는 얼마나 될까요? 프로테이지가 좀 높다고 교만할 수 있을까요? 그러면 그 프로테이지 안에 드는 사람은 진짜 우리의 판단이 맞는 판단을 내린 사람들일까요? 신뢰할 수 있는 판단일까요? 35% , 50%, 15% 90% 하는 것도 까봐야 압니다. 우리 짐작일 뿐입니다. 주님의 판단을 영 틀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렇게 해서 65%, 50% 혹은 15% 20% 된 사람들은 회심도 없이 신앙생활을 합니다. 어떻게 해야지 되겠습니까?
더욱이 이런 시각들을 우리의 자라나는 세대들로 한번 가져가보십시오. 그러면 자기도 회심하지 못한 부모가 아이들의 영혼의 회심의 여부를 가지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겠습니까? 아이에게 정직하게 붙들고 너 정말 회심했니? 하고 물어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그 아이들은 훨씬 더 적은 프로테이지입니다.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그것 어느 날 환란이 오고 어려움이 와서 확! 추수하면 다 날아가는 검불들입니다. 성경적인 견해입니다. 그러면 그 모든 것들에 대한 대안이 무엇일까요? 교회 건물을 예쁘게 지면 그들이 회심할까요? 올 때마다 기념품을 하나씩 주면 회심할까요? 새로운 사람들을 위해서 특별한 VIP 좌석을 만들어주면 회심이 일어날까요?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가정생활을 도와주고 직장생활을 도와주고 그리고 복지의 증진을 위해서 교회가 애쓰면 그들이 회심할까요? 사람의 힘과 재주로는 별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성령의 강력한 은혜의 역사를 통해서만, 공동체에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충만한 은혜의 역사를 통해서만 그들이 변화되고 새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회심하지 않은 사람이 회심을 하든지 아니면 두려워서 피하든지 양단간의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주는 예배, 그게 공동체의 모임, 그것이 전적으로 필요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이런 문제를 피해가야지 되겠습니까? 정면으로 승부를 해야지 되어야겠습니까?
그래도 여러분들은 늘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한 눈물을 가진 사람들이고 그리고 가족들과 주위에 있는 구원받지 못한 영혼을 위해서 수시로 울었던 성도들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하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러나 저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가족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할 때 그 구원을 위해서 간절히 빌어본 사람들은 알지만 어느 한순간 우리의 심장이 찢어지는 것 같은 통증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인데도 어떤 고백이 나오는가 하면 “골육지친 중 몇을 구원할 수만 있다면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내가 원하는 바로다.” 이 사도 바울의 고백에 동참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가족들의 회심을 위해서 깊이 마음이 일치가 되어서 그 찢어진 것 같은 통증으로 기도한 마음이 공동체적 마음을 꽉 채워본 적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나마 우리는 금년에 있었던 두 번 자라나는 세대를 위한 회심집회 속에서 어느 정도 마음이 모아지는 것을 경험했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고통 가운데서도 긍휼을 베푸셔서 적지 않은 회심의 열매를 맺혔습니다. 그러나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지엄한 사명이 교회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마음을 그런 회심하지 못한 영혼의 간절한 눈물과 안타까움으로 채우는 대신 분열과 무관심, 다툼과 미움, 혈기와 분냄, 그리고 나뉨, 그리고 허탄한 것들에 대한 욕심, 무관심 이런 것들로 채우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매우 잘못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사명은 현상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끊임없이 변화시키고 변화된 그 영혼을 이 세상에 파송하는 것입니다.
B. 뒤로 물러 난 성도들
뿐만 아닙니다. 교회 안에 있는 뒤로 물러간 영혼들을 생각해보십시오. 한때는 하나님의 생애적인 은혜를 받고 변화되었지만 이제는 딱딱하게 굳어있고 뒤로 물러가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 물러간 시간이 너무나 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은 굳어질 대로 굳어지고 영혼 속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따뜻한 사랑과 그리고 예전에 가지고 있던 천진함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그 착하고 온유한 마음 대신에 하나님을 거스르고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에서 소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별 커다란 갈증 없이 그 영적인 상황에 스스로 적응하며 살아갈 수 있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면 우리는 정말 경악할 노릇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갈망이 없는 신자가 어떻게 신자다운 삶을 살 수가 있겠습니까? 예전에 많은 교리를 배우고 말씀에 은혜를 배운 그것이 지금 은혜의 물에 잠기지 않으니까 지체들을 판단하고 재단질 하는 칼이 되고 가위가 됩니다. 결국은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한다고 하는 고린도서의 말씀이 그대로 임한 것입니다.
자, 이제 교회를 옮겨 다른데 다녀보자니 말씀이 귀에 안 들어오고 선포되는 말씀대로 살자니 마음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 속에서 자기 사랑으로 인한 모든 욕심들이 자라고 그리고 세상에 대한 욕망들이 그 속을 분탕질을 시킵니다. 그래서 그 영적인 회복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가끔 갈급하고 안타까운 적은 있지만 이미 더 이상 스스로 자신이 어떻게 추스를 수 없을 정도로 깊이 미끄러져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수많은 지체들을 행한 원망, 그리고 교회를 향한 원망 같은 것들이 생겨납니다. 결국은 영적인 궁핍 위에 불순종하고 죄를 지음으로 그 영혼의 상황은 점점 더 미끄러지고 나락에까지 미끄러집니다. 그런 상황에 처해있는 상황, 마음을 독하게 세우고 누구의 말도 듣지 않으려는 그 강퍅한 사람, 무엇에 의해서도 녹을 것 같지 않은 냉담하고 무관심한 마음, 굳어진 얼굴 그리고 이미 그런 마음으로는 주님을 섬기는 모든 기대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하는 일없이 교회에서 무의도식하며 오가는 그런 사람들 무슨 희망이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 희망이 없는데 이미 그의 영혼은 말씀의 미각을 잃어버렸고 이미 그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소원을 상실했습니다. 어떻게 돌이킬 수 있겠습니까? 그런 속에서 나누는 성도간의 교제라고 하는 것은 결국 인간적인 교제 이상을 넘어서기가 어렵습니다. 정말 우리들이 은혜 아래 있고 하나님을 향한 갈망 아래 있을 때는 성도들과 함께 교제하고 돌아가면 마음이 가득 기쁨이 밀려오고 진리를 추구하는 지체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었기 때문에 자신이 그 지체들 앞에 성경이 너무 무지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 많이 알고 깨닫고 싶은 사모하는 갈망들이 이 속에서 끊임없이 생겨납니다. 그러나 심령이 미끄러지면 매우 곤고해지고 그의 영혼은 어두움 속에 있게 됩니다. 그렇게 미끄러진 영혼들이 도처에 보이지 않습니까? 한때는 말씀을 먹고 그렇게 기뻐 뛰던 사람 얼굴이 어린아이와 같고 천사와 같이 변하여 주님의 은혜의 세계에 관해서 조금만 이야기를 하면 그 뺨에 눈물이 흐르던 사람들, 하나님 비슷한 것만 이야기하고 예수님 비슷한 단어만 나와도 가슴이 뜨거워지던 그 지체들의 그 식어진 가슴에 누가 불을 지필 수 있겠습니까? 예배당을 예쁘게 지으면 그들의 마음에 다시 불이지 펴지겠습니까? 안수집사로 세우고 장로를 만들어주면 그들의 마음에 다시 불붙을 수 있을까요? 집사 직분을 주고 권사를 시켜주면 그 마음에 다시 그 은혜의 불이 붙겠습니까? 그게 가능하다면 나는 여러분들 모두를 권사를 시켜드리겠습니다. 그런 것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결국은 그가 교회를 떠나지 않으면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생활이 될 것이고 떠나면 그나마 회복할 수 있는 공동체에서 미끄러지는 것이니 그는 이렇게 할 수도 없고 저렇게 할 수도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대안이 무엇입니까? 얼음같이 식어진 그의 마음을 눈 녹듯이 녹일 수 있는 그 힘이 어디에서 나올까요? 하나님을 향해 굳게 닫은 동토와 같이 얼어붙은 저들의 마음을 녹여 진리의 말씀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열게 하는 그 일이 어디에서 비롯될까요? 저들이 자신의 죄를 정직하게 추억하며 하나님과의 은혜의 때를 기억하면서 하나님 앞에 잘못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성찰하고 아무도 없는 교회당 한구석에서 흐느끼는 눈물을 흘리게 만들어주는 그것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원수를 맺었던 사람들이 먼저 찾아가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며 화해하게 되는 길, 누가 그렇게 만들어줄 수 있을까요?
C. 온전한 헌신을 요구하는 선교환경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이 오직 성령님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성령님의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미끄러진 사람들이 정말 다시 회복되어서 그래서 어두움의 모든 일들을 뿌리치고 다시 살아가야지 됩니다. 그래서 그들을 일어나라고 외치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는 복음의 말씀을 거절하고 자기들이 세상에 나갔다고 가정해봅시다. 거기서는 평안을 얻을 수 있을까요? 불타고 있는 집에 거하면서 불이야! 라고 외치는 소방대원을 쳐 죽인 것 같은 똑같은 결과가 가져올 것입니다. 무슨 다른 일들이 일어나겠습니까? 결국은 장소만 틀릴 뿐 그들은 어디로 가든지 곤고한 영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됩니다. 더욱이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똑같이 다루지 아니하시고 은혜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더 많은 은혜를 부과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이 받은 사람들은 더 많이 하나님을 섬겨야 하고, 주님의 크신 사랑을 받은 사람은 더 많이 헌신해야지 되고, 하나님의 복음의 교리를 더 많이 깨달은 사람들은 더 많이 신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더 하나님 앞에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상황은 단지 교회가 사랑이 없다고 매도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은 영적인 전쟁이요, 영적인 전투이기 때문에 성령의 강력한 은혜의 역사가 없이는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교회 앞에 놓인 공동체적인 소명은 우리로 하여금 이런 성령의 능력을 더 간절히 사모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줍니다. 보십시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어둡고 저물어가는 이 시대를 섬기려고 한다면 얼마나 많은 일들이 우리의 눈에 들어오겠습니까? 사랑은 끊임없는 것을 발견하게 만들어줍니다.
(예화; 전도사 때 섬기시던 목사님이 지방에 다녀오시더니 유리창이 깨졌다고 하시지만 아무리 봐도 보이지 않았는데 교회 유리창이 아주 눈에 띄지 않게 작게 깨져 있었다. 그래서 사랑은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게 한다는 내용)
젊은 목사 세 사람이 교회 복도를 걸어갈 때 키도 똑같고 나이도 비슷해 보이는데 담임목사를 아는 방법이 있는데 불 끄는 사람이 담임 목사입니다. 사랑은 끊임없이 보게 만들어줍니다. 그러니까 공동체가 주님을 사랑하고 그 주님을 위해서 섬기고 그 교회의 소명을 이룩하고자 하는 수많은 할일들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모두 그 꿈을 꾼 사람이 직접 하지 못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만약에 내가 러시아 선교에 꿈을 꾸어 왔다고 합시다. 그러면 내가 다음 주에 여러분과 헤어져서 러시아 선교사로 파송해달라고 하면 파송해주겠습니까? 파송해주면 가겠습니다. 겨울에 어떻게 지낼지 모르지만 어째든 가보겠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꿈을 꾸면 꿀수록 더 많은 일들이 보이고 그것은 더 많은 섬김과 더 많은 희생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성령의 역사가 없이 어떤 사람이 자신의 생명을 주님 앞에 드리며 애써서 번 돈을 주님 앞에 바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품돈이나 인정으로 헌금하지만 자기의 재산을 축내면서 주님 앞에 바치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안 됩니다. 어떻게 번 돈인데, 피 같은 돈인데 선교를 위해서 바치고 무슨 자라나는 신학생들을 위해서 바치고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끊임없는 은혜의 역사, 성령의 강력한 은혜의 역사가 나타나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은혜의 불을 지피고 사랑의 불을 지펴서 그래서 주님의 크신 사랑에 감화됩니다. 주의 영광을 위해 일하고자 하는 그런 사모함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때 그들의 헌신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니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어떻게 교회가 자기에게 부여된 소명을 따라 살 수 있겠습니까?
V. 부흥을 사모하라
그러므로 교회는 말씀과 함께 강력한 성령의 역사를 사모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죄인들은 회개하고 뒤로 물러선 성도들은 참회 속에서 다시 회복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공동체적 소명의 완수를 위해 온전한 헌신으로 한마음이 되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강력한 성령의 역사를 통해 가능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치된 마음을 가지고 강력한 성령의 역사를 사모하는 공동체 위에 이런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찌하든지 우리 개개인이 성령 충만을 받는 것이 이 교회를 위해서 최상의 섬김을 하나님 앞에 바치는 것이라고 생각해야지 됩니다. 여러분 자신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를 위해서라도 성령 충만해야지 됩니다. 그것이 교회를 위한 최고의 섬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고치기 위해 불러주신 이 교회의 소명을 다하고 한편으로는 이 교회에서 하나님을, 그리고 성도로 그리고 공동체와 함께 이 세상을 섬기면서 그 공동체의 소명의 수행 속에서 우리의 개별적인 인생의 소명도 완수하며 주님 앞에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이 얼마나 복된 삶이 되겠습니까? 성령 충만 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5. 불타는 전도자들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행8:1-6)
I. 본문의 배경(1-3절)
우리는 지난 사일 동안에 말씀사경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교회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세우신 주님의 몸이며 이 공동체는 바로 그런 소명이 있기 때문에 참으로 능력 있고 순전한 공동체가 되어서 그 사명을 잘 감당할 때 교회 뿐 아니라 그 교회에 있는 성도들도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의 회복을 위해서 유력하게 봉사할 수 있고 거의 봉사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거치는 교회가 될 수도 있는데 교회를 그렇게 능력 있게 하는 놀라운 비결이 셋이 있는데 그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와 성령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것으로 하여금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시키는 일에 있어서 유능하게 하는 동인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와 성령의 모든 능력은 허공중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교회에서 몸을 이루고 있는 사람인 지체들을 통하여 그런 것들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순절에 성령이 불같이 임했을 때 그 불의 혀와 같이 갈라지는 것들이 각 사람 위에 있었다고 하는 성경의 이 보도는 우리에게 이 성령이 사용하시는 방편이 인간이 만든 방법이나 제도가 아니라 사람 자신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와 성령을 사용하셔서 이 땅에서 교회를 능력 있게 하신다는 말씀은 누군가가 그 말씀을 외칠 때, 누군가가 모여서 하나님 앞에 마음을 드려 기도할 때, 누군가가 성령이 충만해져서 그 놀라운 능력으로 영혼들을 섬기고 역사할 때 그때 비로소 하나님이 이 세 가지를 사용하셔서 교회로 이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놀라운 공동체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렇게 이 세 가지 말씀과 기도와 성령이 함께 역사하는 교회에서 정말 한님의 나라를 위해 훌륭하게 섬기는 역사가 나타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지 될까? 거기에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회복시키는 방법은 일차적으로 하나님 없이 살아가고 하나님을 등지면서 살아가고 있는 인간들이 하나님께 돌이켜 회개하는 일이 있지 않고는 그들을 통해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로 회복되는 일들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섬긴다고 할 때 가장 근본적인 개념이 바로 그리스도의 예수의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구령의 열정에 불타는 전도자라는 것입니다.
A. 스데반의 순교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의 본문 배경을 보면 스데반의 순교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일곱 집사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당시의 집사는 오늘날의 집사와 같지 않습니다. 뛰어난 영성과 그리고 탁월한 말씀의 지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고 동시에 교회의 일을 아주 슬기롭게 처리할 수 있는 그런 놀라운 지혜와 인격을 함께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그 주옥과 같이 소중한 보석처럼 소중한 일곱 집사 중에 한 사람인 스데반이 제일먼저 순교의 제물로 하나님께 바쳐지게 됩니다. 이 스데반 이전에는 핍박이 있기는 했지만 이 스데반처럼 비참한 순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예루살렘 교회의 첫 번째 순교의 제물이 된 사건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의 영성은 이제 이 6,7장에서 외친 그 하나님 나라에 관한 예수가 곧 그리스도시라는 그 놀라운 구속사적인 설교를 통해서도 그의 영성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설교는 완성을 이루지 못한 채 설교가 끝나기 전에 돌에 맞아서 피투성이가 되어서 그는 죽었지만 그러나 그 순교의 피를 머금고 복음은 온 땅에까지 전해지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살아있는 수많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한사람의 죽음으로 하게 된 것입니다.
B. 흩어지는 교회
예루살렘을 넘어서지 못한 복음이 스데반이 피 흘려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제 그 모든 복음의 순교의 핏물이 되어서 온 땅에 한 번에 확 흩어지는 역사가 나타났으니 그것은 바로 흩어지는 제자들의 교회였습니다. 이들이 흩어진 사람들은 맨 처음에는 스데반이 죽는 것을 보면서 두려움 속에서 흩어진 것이지 무슨 특별한 사명이나 의미를 가지고 흩어졌다고 하기에는 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흩어진 것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부탁하신 바를 결과적으로 이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이 되는 놀라운 역사를 이 사람들이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성령이 임하고 나면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 곧 방방곡곡 심지어는 예루살렘을 넘어서 이방의 땅에까지 복음을 전할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흩어지지 않고 예루살렘에 함께 모여 있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바벨탑 사건을 생각나지 않게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창조 시에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온 땅을 정복하라고 명령하셨지만 죄가 들어온 다음에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창조의 명령을 따라서 이렇게 흩어지고 그리고 번성하여 온 땅에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의 신성의 충만한 것을 가꿈으로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이 흩어짐을 면하기를 원해서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를 인해서 그들은 언어의 혼잡을 이루고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부어주신 성령의 놀라운 역사는 이제 이 사람들을 온 세상에 파송하는 역할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일을 하시기 전까지 유대인과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이 이 온 세계의 중심이고 하나님의 나라의 한 복판이기 때문에 그리고 구원 얻을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율법이 나온 예루살렘으로 보내실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한곳에 서있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그곳으로 스스로 나아오고 불러들이는 그런 종류의 선교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승천하시고 성령의 시대가 임하고 나서는 이렇게 한곳에서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선교가 아니라 교회 그 자체가 온 세계로 흩어짐으로서 그들을 통해 복음이 전해지는 흩어지는 교회의 모델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전에 교회가 오라의 구조였다면 이때는 가라의 구조가 되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교회로서 한 지체로서 이제 온 땅에 흩어져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게 될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일시에 흩어진 이 제자들은 처음에는 두려워서 흩어졌으나 흩어진 그곳에서 가니까 복음을 들어야 할 수많은 사람들이 눈에 보이게 되었고 누가 지시한 것도 아닌데 흩어진 그곳에서 성령의 사로잡혀서 복음을 전했고 이 복음을 전한 현장을 성령께서 기뻐하셔서 그들에게 더욱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제 놀라운 복음전도의 역사가 일시에 온 땅에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에서조차도 복음이 온통 한꺼번에 전해지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II. 불타는 전도자들
여기서 우리는 핍박을 피해 잠시 예루살렘을 떠났지만 그러나 이 불타는 전도자들이 이 복음의 새 역사를 이루어갔던 장면들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A. 핍박 아래 있는 공동체(2-3절)
교회는 여전히 핍박아래 있었습니다. 스데반이 죽은 그 사건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상상하지도 못한 끔찍한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더욱이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죽이되 율법에서 가장 죄 많은 사람들을 돌로 쳐서 죽이는 그 흉악한 형벌로서 스데반에게 돌을 던져 피투성이가 되어서 죽는 그 장면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피투성이가 되어서 쓰러져 죽어가는 이 스데반을 보면서 그들은 얼마나 두려움과 경악에 가득 찬 심령이 되었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더욱더 간절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핍박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사울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후에 변화되어서 바울이 될 사람이었지만 변화되기 전에는 아직까지도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이 도가 잘못되었다고 확신하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거스르는 더러운 인간들이라고 생각하고 수많은 믿는 사람들을 옥에 가두는 악한 일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의 서슬이 시퍼런 악명이 온 그리스도인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고 많은 사람의 뇌리 속에 이 사악하고 못된 사도 바울의 행동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런 핍박이 가득한 상황 속에서도 사도들은 복음을 전했고 제자들은 흩어진 그곳에서 더욱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이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불타는 전도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불타는 마음을 안고 많은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B. 불타는 전도자들(4-5절)
오늘 이들이 구령의 열정을 품고 사람들에게 다가갔던 이 역사를 크게 두 가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1. 두루 다니는 사람들
첫째는 그들이 두루 다녔다고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그들은 예루살렘에만 모여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이 복음을 들고 두루 다니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 자기 동족, 친척, 그리고 자기 가족들에게만 복음을 전했지만 이제는 이 복음을 듣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게 되었고 그래서 그들은 인간이 쉽게 갈 수 있는 곳만 아니라 제자들이 쉽게 다가갈 수 없는 곳까지 사람들은 다니면서 이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특별히 여기에서 나오는 이 빌립은 사마리아성에까지 내려갔다고 되어있는데 원래 이 사마리아 성은 유대인들이 지나다니기를 꺼려하던 그런 곳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를 보면 맨 위에 갈릴리 지방, 중간에 사마리아 지방, 그리고 아래쪽에 유대지방이 있습니다. 이 사마리아 지방은 예전에 북 왕국 이스라엘이었던 땅이었습니다. 일찍이 아수르에게 함락을 당한 후에 그들의 삼인정책으로 인해서 외국의 많은 이주민들이 몰려오게 되었고 그 속에서 혈통이 모두 혼합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갈릴리와 유대에 사는 유대인들은 이 사마리아에 사는 사람들을 개같이 취급하고 율법을 이미 어기고 잡종이 된 민족이라고 해서 상종도 하지 않으려고 하고 지나가는 것 자체를 불결하다고 생각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에서 갈릴리, 혹은 반대로 갈릴리에서 유다로 올 때는 많은 사람들이 사마리아를 통하지 않고 강을 건너서 휘돌아서 이렇게 왕래를 했던 곳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을 받고 나니까 이 빌립은 유대인들이 가기를 꺼려하던 그 사마리아 땅까지 들어가서 예수의 복음을 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 어떻게 땅 끝까지 전해지게 되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편안한 복음전도를 좋아하던 전도에 의해서 이 복음이 선교의 놀라운 역사를 이루며 수많은 종족에게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복음이 들어오기 전에 서방세계에 은둔의 나라라고 알려졌습니다. 즉 알려진 것이 거의 없고 왔다 갔다 하는 사람도 거의 없는 한쪽 구석에 처박혀있는 외부로부터 완전히 독립되고 패쇠된 나라로 사람들에게 이해되었습니다. 바다 한 가운데 있는 일본은 이미 오래전부터 해상왕래를 하고 그래서 일본에서 수출한 도자기나 이런 것들이 심지어 저기 터키 같은 지방에서도 발견이 되고 그런 것들이 10-11세기경에도 벌써 나타납니다. 그러니 얼마나 발달한 교류를 그들이 가졌습니까? 그러나 우리나라는 은둔의 나라였습니다. 이 은둔의 나라, 그러면 복음 전하러 가기 좋은 나라였을까요, 나쁜 나라였을까요? 좋은 나라였다면 선교사가 들어와서 발을 디디자마자 순교하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복음전하기 불편한 나라에 와서 순교의 피를 뿌리고 그 피가 또 다른 젊은이들의 가슴에 불을 질러 이 은둔의 나라에 발을 딛게 하였기 때문에 오늘날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내 동포들이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기여하고 또 우리 민족을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는 놀라운 역사를 가져왔습니다.
지금 중국에서 평신도, 젊은이, 교역자를 직업적 선교사를 막론하고 선교라는 이름을 가지고 와서 봉사하는 사람들이 5만 명이나 된다고 하니 이 놀랍고 위대한 일들도 한때는 우리가 복음전하기 어려운 땅일 때 누군가가 이곳에 와서 두루 다녔기 때문에 이 복음이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고 회복하는 도구로 부름을 받은 이 소명 앞에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하여야 할 일이 복음을 전하는 일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 영혼 한 사람 한 사람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뉘우치는 일이 없이 어떻게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올 수 있을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래서 우리도 두루 다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사람들이 이 교회에서 자라고 또 이 교회가 아니더라도 우리들이 갈수 없고 다닐 수 없는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진 수많은 선교사들을 우리들은 파송해야지 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갈 수 없는 그곳을 다니게 해야지 됩니다.
이런 선교사는 아직까지도 복음이 미치지 못한 수많은 나라에 파송되어야 합니다. 선교사 한사람을 보내기 위해 너문 적은 인구밖에 없는 나라에도 보내야 합니다. 정말로 이 복음을 선교사가 가기에는 너무나 적은 무리밖에 없고 그리고 사는 사람들도 띄엄띄엄 있어서 복음을 전하기에 어려운 곳이라고 할지라도 몇 명의 영혼밖에 구원하지 못하는 일들이 선교사의 일생을 통해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곳까지 선교해야지 되고 복음을 씨앗을 뿌리기 위해 아무도 가지 않는 곳이기 때문에 모든 교회가 여기에 선교사를 파송하기에 너무나 필드가 작다고 생각하는 곳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더더욱 가야지 됩니다. 몇 해 전 중국에 갔을 때 평생 잊을 수 없는 깊은 감동을 받은 선교 실화 하나를 들었습니다.
(예화: 중국의 깊은 시골에 있는 문을 닫기 직전의 교회를 인수해서 회복시키기 위해 한 교회에서 관리를 하기로 했는데 그곳은 너무나 사람이 살기 어려운 최악의 상황이라 물도 나오지 않아 불편을 겪으며 살기에 우물을 만들어주어 너무나 좋아하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주며 친숙한 관계를 이루고자 갔더니 수많은 주민들이환영하기 위해서 일렬로 쭉 서서 자신들을 환영하는데 놀랍게 찬송을 부르기에 놀라 알고 보니 그때로부터 100년 전에 선교사 두 사람이 들어와 한사람은 핍박을 받아 순교하고, 남은 사람은 골방에서 얼어 죽었는데 그들 이후로 100년이 지난 이후로 아무도 복음을 전해준 이가 없었는데도 복음은 조상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가운데 선교사들의 순교가 헛되지 않은 복음의 능력을 다룬 내용)
교회에서 미끄러지고 시험 들고 지체들과 다투고 그리고 죄와 정욕에 빠져서 범죄하고 그리고 세상사랑에 빠져서 실족하는 이런 사람들 그런 일이 그의 가슴 속에 일어났기 전에 먼저 이런 구령의 열정이 꺼진 사람입니다. 정말 뜨거운 가슴을 안고 그 영혼들을 생각하며 흘리는 눈물이 있는 사람들은 그런 일로 인생을 낭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예화: 어느 교회가 선교를 열심히 하는데 어떤 지체가 교회의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교회를 뒤집는데 아무도 그 사람의 주장에 동조하는 이가 없는데 그것은 너무나 선교하기에 바빠서 그럴 시간이 없는데 대게 한가한 사람이 그런 일을 하는 것이라는 이야기)
대게 여러분 그런 교회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게으른 자의 정욕이 그를 죽이나니” 그랬습니다. 일을 하기 싫어 앉으면 벽에 기대고 싶고, 기대고 나면 눕고 싶고, 그 다음에 눕고 나면 육신이 편한데 이제 육신이 편안한 것을 가지고 성에 안 차고 육신이 쾌락을 즐겨야겠다는 생각으로 발전합니다. 그래서 이 게으름과 정욕은 아주 통합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들에게 너무 안타깝게 얘기하는데 왜 여름에 아우리치를 안 가는 것입니까? 내년에는 변명을 할 수 없게끔 아우리치를 보내겠습니다. 주일날 보내줄 것이니 가십시오, 금, 토, 일, 이렇게 가십시오. 정 시간이 안 되면 금요일 날 퇴근해서 8시에 출발하십시오. 가서 땀을 흘리다가 주일날 밤 그쪽에서 12시에 끝내고 출발해 여기에 와서 월요일 날 출근하십시오. 두루 다녀야합니다.
제가 올해에 어느 한순간에 마음속에 강력한 소원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먼 섬에 사는 사람들, 우리나라의 섬들 중에는 15, 20 가구밖에 안사는 섬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 곳에 목회자가 갈수가 있겠습니까? 그래도 가야지 됩니다. 그런데 지망하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이러다 나중에 내가 발목 잡힐지 모르지만 아니 목사님들 70에 은퇴시키고 그것 아직까지도 70이면 성성하십니다. 그러면 63세에 은퇴하신 장로님과 손잡고 애들도 다 컸겠다. 아니 농담이 아닙니다. 63세에 은퇴를 시킨다고 교회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우리 교회도 그렇다고 칩시다. 그러면 은퇴하고 나서 주님을 위해서 전적으로 섬겨본 적이 있습니까? 그때 교회가 파송해주는 것입니다. 선교사로. 그렇게 둘이 가서 한 3-40가구 사는 섬 한두 세 개 맡아서 쪽배라도 타고 왔다 갔다 하면서 복음을 전하면서 거기서 일생을 마치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아니 왜 아멘을 하지 않습니까? 괜히 쓸데없는 일에는 아멘해서 설교자를 혼란스럽게 만들더니 결정적인 순간에는 왜 아멘을 하지 않습니까? 자, 한번 아멘 해보십시오. 왜 젊은 사람들만 아멘하지 말고 닫힌 사람들이 아멘을 하십시오. 그렇게 가서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래서 제 마음속에 간절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감히 그것을 내가 성령의 계시라고 말할 수 없지만 내 마음에 간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난 잘 모르지만 아! 내게 비행기 한대만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물에 뜨고 내리는 비행기, 한 10명 정도 탈 수 있는 그런 비행기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주일이면 그 비행기를 타고 몇 개의 섬을 돌면서 새벽부터 시작해서 저녁까지 그렇게 하고 그것도 모자라면 배를 좀 크게, 아이디어를 들어보십시오, 배를 너무 작게 만들지 말고 약간 크게 만들어서 그 배안에 예배당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섬에 가서 다 들어오라고 해서 거기에서 예방주사도 접종도 놔주고 그리고 필요한 약품도 주고 섬에 고립되어있으니 얼마나 어려운 게 많겠습니까. 그런 필요한 것을 주고 그리고 모여서 함께 하나님 찬송하며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다음 주에 만납시다. 하고 부르릉 하고 다음 섬으로, 애들 다 키워놓고 뭘 하실 것입니까?
권사님들 은퇴하고 나서 뭘 하실 것입니까? 권사님도 좀 일찍 은퇴를 해야지 그래야 뭘 하지. 뭘 합니까? 매일 자식들 눈치나 보고 시시하게 주는 용돈이나 가지고 난 외롭다. 쓸쓸하다. 그럴 날이 어디에 있습니까. 배 뒤에 주방도 만들어줄 것이니 열심히 밥을 만들어서 예배가 끝나면 낚시질해서 고기를 잡아서 회도 먹고 탕도 끓여서 이렇게 하면서 사람들에게 예수의 사랑을 전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 부목사님들도 이제 한참 65세쯤 은퇴하면 평생 같이 있을 사람이 몇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가서 배에 선장을 해서 다니면서 선장 모자 딱 쓰고 담배는 피면 안 되고, 두루두루 다니면서 어디든지 복음을 전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지체들이 교도소에 가서 열심이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정말 눈물이 납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버린 사람들, 포기한 사람들, 사형언도를 받고 오늘 내일 하루하루 살아있으면 살아있는 것이고 내일이라도 형장에 이슬로 사라질 수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그 일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갈수 있는 곳, 거기뿐만 아니라 갈수 없는 곳까지 우리는 가야지 됩니다. 그래서 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2. 복음 전하는 사람들
둘째로 이 사람들이 전한 것이 복음의 말씀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만약에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갔지만 단지 그들을 섬기고 착한 일을 많이 했어도 복음에 대해서 입을 다물었다면 이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나타났겠습니까? 교회가 성령을 받은 공동체요, 말씀이 있는 공동체요, 그리고 살아있는 기도에 의해서 역사하는 공동체라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었겠습니까?보여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온 마음을 다하여 그들은 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 복음은 모든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방법이었고 창조주 하나님을 모르고 배향하며 살아가던 인간들의 가던 길을 돌이켜 하나님 앞에 나아오게 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였습니다. 그런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시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두루 다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정말 간절히 여러분들에게 부탁드립니다. 여러분, 언젠가는 여러분들이 무릎이 아파서 더 이상 다닐 수 없을 때가 오고 그리고 시간은 많아도 건강이 허락하지 않아서 이 복음을 전하지 못할 때가옵니다. 여러분, 아직 기력이 있고 힘이 남아있을 때 여러분 두루 다니십시오. 그리고 만나는 사람마다 이 복음을 전해주십시오. 사람들이 이 복음을 싫어하는 것 같아도 정말 주님의 사랑을 전해주기만 하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여름에 아우리치를 가서 국내전도를 할 때마다 일어나는 놀라운 일이 그런 일이 아닙니까? 복음을 전하러 가니까 할머니가 빗자루를 집어던지면서 재수 없다고 저리가라고 그러다가 며칠을 가서 그냥 달라 불어서 복음을 전하니까 열린교회 교인들이 거머리라고 소문이 났다고 합니다. 한번 달라붙으면 떨어지지 않는다고, 그렇게 가서 그냥 핍박을 해도 웃으면서 팔다리를 주물러주면서 예수의 복음을 천천히 전합니다. 전할 때 제일 좋은 게 뜸뜨면서 전해주는 것, 안마는 몇 번 하다가 됐다고 그러면 할 말이 없는데 뜸은 한번 붙이면 한참 동안 태워야 합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하면 또 움직이면 안 됩니다. 혈을 못 찾으니까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그러면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다 전해주니까 다 듣고 나서 눈물을 흘리며 그 좋은 예수를 왜 이제야 전해주는가 하고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습니까?
그들에게 누가 가겠습니까? 젊고 돈 있고 능력 있는 사람들이 교회에 모여야 교회에 발전에 도움이 되지 그렇게 이제 임종을 앞둔 노인들이 예수를 믿어서 무슨 교회에 발전을 주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상술적인 생각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런 사랑이 그런 계산적인 사랑이었습니까? 주님이 이 세상에 계셨더라면 그들이 나이가 많아 거들떠보지 않았을까요? 돈이 없기 때문에 너는 교회에 나올 필요가 없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까? 희망이 없는 사람들에게 찾아가서 예수님께서는 틀림없이 사랑을 베푸시고 복음을 전하셨을 것입니다. 우리도 이처럼 정말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 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III. 복음 전도의 세 열매(6-8절)
이런 복음이 전파될 때에 복음전도에는 오늘 성경에는 세 가지 열매가 나타났다고 되어있습니다.
A. 순종하게 함(6절)
첫째는 순종의 열매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순종하게 하는 놀라운 역사가 복음을 전할 때 나타났습니다. 제자들이 흩어져 복음을 전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말에 순종하게 되었는데 그들의 말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었으니 그들의 말을 청종한 것은 곧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에서도 말하기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복음을 받아들이고 순종함에 이르게 하는 것이 복음의 전도의 목적이라고 사도가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이 이유는 많은 종교가 있지만 그중에 기독교 하나 믿으라고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이것은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가 왜 이 세상에 창조되었는지도 모르고 이 세상은 왜 존재하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살아야지만 참으로 행복에 이르는 길인지도 모르고 어떻게 살아야지만 우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분께 사랑을 받을 수 있을지도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그 사람들이 너무나 불쌍해서 그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 복음을 전하고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을 기뻐하는 이유는 그 회개를 통해서 그들이 이전에 주님을 거스르며 살았던 모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복음을 전하는 목표는 그들이 모든 인간과 육에 속한 일들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이켜 순종하는 일입니다. 이후로는 교회에 붙어있고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져서 머리되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들에게 주신 말씀과 은혜를 따라서 하나님께 순종하며 사랑의 통치를 받는 사람들이 되게 하기 위하여 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세상에 많은 고통의 궁극적인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살아계신 하나님께 대한 반역, 살아계신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의 이 모든 고통과 죄악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거기에서 비롯되는 모든 고통과 괴로움들이 오늘날 우리 앞에 펼쳐진 이 세상에 고통 하는 현실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이 복음은 바로 그들로 하여금 믿음을 갖게 하고 그리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고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복음을 전할 때 이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이전에는 하나님 없이 외롭게 살던 사람들이 주님께 순종하면서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이 되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이 기쁜 복음을 전하는 기쁨에 넘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B. 자유하게 함(7절)
두 번째 열매는 자유케 하는 자유의 열매였습니다. 그들이 이 복음이 전해지기 전까지는 귀신들리고 병 걸리고 그래서 악령에 사로잡혀서 인간으로서 제대로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모습 모두 죄로 말미암아 생겨난 것이었습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마음과 영혼에 온전한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그 모든 자유를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사단에게 사로잡히고 악령에게 붙잡혀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하는 영혼의 속박, 그리고 몸의 속박을 느끼면서 사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되자 그들에게 즉각적으로 자유의 놀라운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귀신에게 얽매였던 사람들은 그 귀신이 떠나가고 악령에게 사로잡혔던 사람들은 자유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께 순종하는 가운데 억압받지 않은 일체의 자유로운 영혼과 마음을 가지고 주 하나님을 높이고 주 하나님을 찬송하며 온전한 자유 속에서 인간됨을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물질이 없어서 당하는 속박보다 무서운 것은 정신적인 속박이고 영적인 속박입니다. 무엇으로도 끊어낼 수 없는 그 속박들을 하나님께서 성령의 놀라운 역사로 끊어내지 않습니까? 미움과 원망 속에서 일생을 저주받으면서 살아오던 사람들 그 쓴 뿌리 때문에 도저히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방황하던 그 사람들의 사슬을 끊고 자유케 하는 놀라운 역사가 무엇으로 일어납니까? 병원에서 주는 몇 통의 약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놀라운 능력이 그들의 영혼에 얽매인 것을 끊어주는 역사가 있을 때 그들의 영혼에 자유함이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인하여 놀랍게 기뻐하는 역사가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복음의 능력은 이처럼 놀라운 자유를 가져다줍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얽매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심지어는 불신자 뿐 아니라 신자들도 얽매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보십시오. 가난에 얽매인 사람, 육신의 질병에 얽매인 사람, 무엇보다도 마음에 미움과 원망과 한으로 얽매인 사람, 그리고 정신적인 고통으로 인해서 얽매인 사람, 그리고 원망과 불신앙 가운데 사람들로 인해 받은 상처로 인해서 얽매인 사람,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유롭게 살아가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 얽매인 모든 것들을 풀어주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날 때 그들이 얼마나 기뻐하고 좋아할지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세상에 태어나서 한 번도 못해본 것이 낚시를 들고 가서 고기를 잡는 것이었습니다. 별로 그것을 들고 나간 적도 많지 않지만 어렸을 때 낚시 대를 수없이 사고 갔는데 동리친구들은 그래도 꽤 잡는데 나는 한 번도 잡은 적이 없고 애꿎은 지렁이만 잔뜩 끼다가 왔습니다.
(예화: 캐나다에 집회를 가셔서 그곳에 목사님과 낚시를 가서 배를 타고 호수 한복판에서 낚시를 하는데 생각지 않게 고기를 몇 번 잡았는데 나중에 풀어주었더니 물살을 가르고 헤엄쳐 가는 모습이 바로 자유함이었다. 낚시를 할 때 세 가지 유형의물고기에 관한 내용- 첫째 물고기는 낚시의 미끼를 보고 덥석 물어버리면 잡히는 물고기, 둘째 물고기는 한번 치고 가서 다시는 안 와서 못 잡는 물고기, 세 번째는 와서 건드리고 가서 한참 있다가 다시 와서 건드리다가 언젠가는 물어버린다는 물고기, 신자가 죄의 유혹과 속박에 있는 신앙생활과 똑같다.)
그렇게 얽매인 것들이 끊어주는 해방시켜주는 놀라운 힘이 이 복음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 복음은 얽매인 수많은 사람들의 사슬을 끊어줍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수십 년 동안 한 맺혔던 가족들과의 관계가 화해와 사랑으로 용서됩니다. 풀려집니다. 남편과 아내가 화해합니다. 그리고 동기간이 서로 용서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마음에 깊은 상처를 이 세상에 누구도 치유해줄 수 없었는데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그 상처를 치유하여 자유케 해주십니다. 이런 놀라운 역사가 복음 안에 있습니다.
한번 눈을 들어서 주위를 두루 살펴보십시오. 얽매인 사람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이 있는지 한번 살펴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얽매인 채 살아가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인생 자체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서 신음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기만 하면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했던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서 이 복음이 그들의 얽매인 것을 끊어줍니다. 자유를 가져다줍니다.
C. 기뻐하게 함(8절)
그다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기쁨의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니까 온 성이 기뻐하더라. 기쁨의 열매가 맺힙니다. 사도베드로는 이 기쁨을 가리켜서 말할 수 없는 기쁨이라고 노래했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없는 놀라운 기쁨은 이 세상의 물질이나 번영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말할 수 없는 놀라운 기쁨은 오직 우리 영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만 오는 기쁨입니다. 그 놀라운 하나님의 기쁨이 어디에 어떤 사람들의 마음속에 역사합니까? 복음을 듣고 죄에 용서를 받고 사슬에 얽매인 것들을 풀어주시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때 그들의 영혼에 한없는 위로와 놀라운 기쁨이 생겨나지 않습니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런 놀라운 역사, 은혜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렇게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의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죄 때문에 기쁠 어떤 가능성과 희망도 없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셨습니다. 슬픔과 고통은 그분이 담당하게 하시고 우리에게는 그 복음을 들을 때 기쁨의 열매가 맺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 하늘의 복락을 누리며 살게 하셨으니 이 어찌 하나님의 놀랍고 큰 사랑이 아닐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복음을 전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돈이 있어도 얼굴에 핏기를 잃어버리고 희망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 하루하루 먹고 살아가지만 삶의 어떠한 희망도 없이 살아가는 낙담한 영혼들, 이 세상에 어떤 힘으로도 그 사슬에서 풀려나올 길이 없는 그 비참한 영혼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일찍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더라면 그렇게 사망과 흑암의 그늘 아래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어 하나님 앞에 정말 비참한 삶을 살지 않았을 것인데 그들이 복음을 몰랐기 때문에 그런 어두운 골목까지 걸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빛 가운데 있는 우리들이 아니면 이 복음을 누가 전할 수 있을지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놀라운 은혜는 무엇 때문에 주신 것입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놀라운 성령의 은혜, 하나님의 말씀의 놀라운 깊이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 그리고 우리가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는 이 영적인 은혜는 하나님이 무엇을 위해 주신 것입니까? 주님이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게는 우리에 들지 아니한 또 다른 양들이 있어 그들도 이 무리로 인도하여 함께 있어야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그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 복음을 통해 기쁨의 열매가 우리 이웃들에게 맺히기 위해서는 복음을 먼저 써본 우리들이 기쁨의 열매를 정말 우리들이 맺고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기쁨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지 됩니까? 우리 자신이 복음 때문에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무엇인가 일이 안되고 어려움이 올 때마다 여러분들이 받지 못한 것을 생각하지 말고 이미 받은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로 여러분들을 구원해주시지 않았습니까? 고통 가운데 있는 지체를 찾아가서 심방할 때 종종 저는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잃어버린 것을 인해서 너무 슬퍼하지 마라. 그대가 잃어버린 것은 잃어버려도 되는 것이거나 잃어버린 후에 다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구원해주시고 구원받은 사람을 또 복음이 있는 교회에 모으시고 사랑하는 지체들과 돌보는 목자들을 주셨는데 그러면 됐지. 얼마든지 고난이 오면 믿음으로 딛고 일어서고 시련이 오면 주님 안에서 내게 주신 사랑을 생각하며 기쁨으로 주님을 찬송할 수 있지 않은가. 위로를 합니다. 이런 기쁨의 놀라운 은혜가 복음의 역사를 통해 그들에게 맺게 되었던 것입니다.
VI. 전도의 동기: 까리타스(caritas)
그러면 이들이 복음을 전하게 되는 동기는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이것은 까리따스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A. 전도의 두 동기
복음을 전하는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뜨거운 사랑, 그리고 이웃에 대한 뜨거운 사랑, 거기로부터 비롯된 것이 바로 이 복음 전파의 동기입니다. 전도에는 두 가지 동기가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갈망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에 의한 동기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동기는 바로 복음을 전해서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서 이 사람들이 정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고 창조의 목적을 성취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전도의 동기입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들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또 그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가 하나님을 향한 열망에 가득 차 있으면 전도를 잘하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되겠네요? 물론입니다. 그러니까 이 성도가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에 대한 갈망에 충만하게 차있을 때 그는 이 복음을 오히려 전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여러분들이 음식점에 가서 밥을 한 끼만 맛있게 먹고 와도 사람들에게 그것을 자랑하고 어디 먹으러 간다고 하면 그리로 가라고 적극 권하고, 그런다고 그러고 옆에 집에 가서 먹고 오면 우리가 막 뭐라고 합니다. 바보같이 거기를 왜 가느냐고, 내가 가르쳐준 곳으로 가지, 그랬는데 써보고 좋은 것을 안 사람들은 열심히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고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이 복음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게 되는 동기는 이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있을 때 그런 전도의 동기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지 않는 것을 보고 마음 아파할 때는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될 터인데 그들이 하나님을 모릅니다.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멋대로 삽니다. 그리고 그들이 회개하고 돌이키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야지 될 터인데 그것은 무엇을 통해 일어납니까? 복음을 들어야지만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갈망은 자기 밖의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갈망은 이미 자신 속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에 비례합니다. 내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가 시작되고 그 사랑에 감격하는 삶을 살면 내 안에 이루어지는 것과 똑같은 나라가 내 밖에 온 세상에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나와 무슨 핏줄이 있는 사람인지 상관없이 저 사람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인데 왜 저렇게 살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데 왜 저 사람은 저렇게 살까? 저 사람이 주님을 믿지 않고 그 사랑을 모르면서 저렇게 어두운 인생을 살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이 속에서 계속 생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복음을 사람들에게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전도를 향한 많은 방법들이 있습니다. 한꺼번에 모아놓고 그들에게 무슨 축제 같은 것을 하면서 복음에 대해서 소개하고 교회에 대한 친숙함을 느끼게 하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 방법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빛이 바래지 않는 하나님의 전도 방법은 개인 전도입니다. 그 개인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은 사람, 복음에 의해서 순종하고 그 복음 때문에 기뻐하고 그 복음 때문에 자유를 누리게 된 사람들 자기처럼 자유를 누리고 기쁜 자유와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을 보고 불쌍해서 그래서 그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 마음으로 예수를 믿으라고 간절히 권하는 그 음성, 그 말씀을 들으면서 그들이 정말 변화되고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세월이 많이 흘러도 빛이 바래지 않는 하나님의 전도 방법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여러분들이 생각해보십시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가슴속에 그 말씀이 꽂혀서 우리로 하여금 회개의 눈물을 흘리게 하고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듭니다. 공동체의 마음이 하나가 되어서 전심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서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능력 있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뭘 할 것입니까? 제일먼저 해야지 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런 말씀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와 기도의 후원을 가지고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무엇을 할 수 있겠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복음을 전한 이 일, 말고 무엇을 할 수 있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는 열정을 품은 성도들이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고 또 해야지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를 드리고 흩어질 때 우리는 매주일 파송되는 마음으로 세상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곤고한 사람들, 그리고 고통 하는 사람들, 진리를 알지 못하여 방황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로 이 복음의 말씀을 듣고 변화되고 새로워지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날 때 그들이 하나님께로 하나님께 돌아오는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2. 인간 영혼에 대한 사랑
또 하나는 영혼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반드시 인간의 영혼의 사랑을 내포합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직면하는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류의 문제들이 직면하고 있습니다. 답은 무엇입니까?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주님을 믿으면 꼬이고 꼬인 인생의 길에서도 하나님께서 놀랍게 그 얽매이고 꼬인 것들을 풀어주시고 그래서 다시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서 살도록 만들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며 그 영혼들에 대한 사랑으로 우리들이 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정말 전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한 교회에 2-30년을 열심히 봉사했어도 오늘 그의 영혼이 살아있음을 입증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지금도 잃어버린 영혼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 있다면 그 영혼은 건강한 것입니다. 영혼이 불쌍해서 눈물이 있다면 그는 건강합니다.
한번 우리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인생을 사는 게 너무나 힘들어 시험이 들어서, 그거 말고 돈이 없고 사업의 위기를 만나서, 그것 말고 그냥 내가 곤고하고 괴로워서 그것도 말고 영혼이 불쌍해서 눈물을 흘린 적이 얼마나 있습니까? 정말 우리는 이 사랑을 회복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 사랑으로 선교사를 파송하고, 그 사랑으로 해외의 선교사를 파송할 뿐만 아니라 우리 국내에도 선교사를 파송해야지 됩니다. 난 그래서 후배 선교사들에게 가끔 이야기를 합니다. 조국 교회에서 그대들을 왜 이 땅에 파송했는지 아는가? 그 성도들은 조국에서 울고 그대들은 현지에서 울게 하기 위해서 파송한 것이다. 그래서 온 마음으로 이 복음을 영혼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전도함으로 유지되는 부흥의 갈망
결국 이렇게 전도하는 일이 교회에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이 부흥을 주셔도 그 부흥의 불길은 전도함으로서 유지되는 부흥의 불길입니다. 오늘 이 사도들을 보십시오. 복음을 전하다가 이렇게 핍박을 만나고 고난을 당합니다. 큰 교회에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그러면 복음을 전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면 그들은 모였습니다. 그래서 공동체의 마음을 하나로 일치시켜서 전심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렇게 전심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강력한 성령의 충만함을 다시 주셨습니다. 그러면 아, 기도가 응답되었구나. 문제가 해결되었구나, 그랬습니까? 아닙니다. 기도회의 눈물을 씻고 그들은 다시 핍박이 가득한 거리로 나아가서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들 마음속에 공동체를 통해 지펴진 그 부흥의 불길들이 계속 유지가 되었습니다.
자, 무슨 말인가 하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자, 교회가 살아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더니 은혜가 넘칩니다. 죄인들이 회개하게 되었고 고난 받는 사람이 위로를 받게 되었습니다. 각자가 성령의 은혜에 충만해져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아무 것도 안 했습니다. 일주일동안, 그냥 세상살이에 찌들려 근근하게 연명하고 수요예배도 못 나오고, 금요예배도 못 나오고, 새벽 기도는 전설 속에 이야기고 그냥 살았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 주 주일날 교회에 올 때 다시 곤고한 심령이 되는 것입니다. 좋은 비유가 생각이 났습니다. 옛날에는 학교고 사무실이고 조개탄을 많이 땠습니다. 연탄을 조개처럼 집어넣은 것입니다. 그래서 불붙이기가 좀 안 좋은데 그래도 잘만 불이 붙으면 연탄보다는 열량이 좀 셌습니다. 그래서 조개탄을 학교에서 얻어다 밑에다 불쏘시개를 해놓고 나뭇가지를 놓고 태우다가 간신히 조개탄을 얹어놓습니다. 그래서 잘 난로를 피운 날에는 난로가 벌겋게 달아오르면서 온 교실 안이 훈훈해집니다. 그러면 선생님들이 애들이 가져온 도시락을 전부 난로 옆에다 계속 탑 쌓듯이 쌌습니다.
저희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한반에 80몇 명, 백 몇 십번 까지 있었습니다. 원시인 이야기입니다. 제가 세계에서 제일 큰 초등학교를 다녔습니다. 제가 다니던 초등학교가 그 당시에 지금으로부터 45년 전에 7천명이 모이던 학교였습니다. 이렇게 탑처럼 쌓아서 이렇게 학교수업이 아침반, 점심 반, 오후 반 이렇게 세 번 이렇게 하는데 고학년에는 점심도시락을 싸가지고 와서 탑처럼 다 쌓아올립니다. 그럼 거기서 불이 활활 탑니다. 조개탄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벌겋게 조개탄을 하나씩 다 나뉘어졌다고 합시다. 퀴즈를 내겠습니다. 조개탄의 불꽃을 오래 간직하는 비결이 무엇일까요? 이렇게 퍼서 가면 가는 동안에다 식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안 식고 그래도 오래 불타게 하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가지고 또 불을 지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가서 펄펄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그것을 가지고 가서 그냥 들고 있으면 10분도 안 되어서 시커멓게 도로 되니까 갖고 가서 종이를 얹고 나뭇가지를 얹어서 불을 피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럼 그 불씨가 보존됩니다.
똑같습니다. 주일날 와서 은혜를 받고 가도 토요일까지 아무 것도 섬기는 것이 없고 애꿎은 애들에게 소리소리 지르고 혈기를 부리고 기분 나쁜 날 대판거리하고 시누이하고 또 전화로 다투고 전화가 한번 집어던지고 그러면 충분히 은혜가 떨어집니다. 그리고 깡통 차고 교회에 다시 오는 것입니다. 불순종하고 주님을 슬프게 했으니 이번에는 지난 주 같이 은혜가 또 안 됩니다. 그런데 또 회개하는 마음이라도 있으면 좋은데 내가 도대체 잘못한 게 뭐가 있어. 거지같은 집에 시집와서 이런 핏대만 잔뜩 세워서 오니 은혜가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계속해서 털어놓는 삶을 사니 받은 것보다 쏟아버린 것이 많으니 어떻게 은혜생활이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거 부부끼리 싸우는 것도 전부다 할일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남편이 교회 일을 하느라 열심히 애를 쓰고 선교에 애쓰고 부인은 아파트 전도를 놓고 매일매일 한 동씩 오르락내리락 무릎이 아프도록 전도지를 붙이고 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데려다 밥이라도 해먹이고 빈대떡이라도 붙여먹으면서 그러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이렇게 꽃이면 부부가 부부싸움을 할 시간이 어디에 있습니까? 얼굴을 봐야 싸우지, 그리고 오랜만에 어쩌다 하루 종일 떨어져 있다가 저녁때 잠간 만나는데 왜 싸웁니까? 애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다 심통 나니까 애들을 야단치는 것이지 뭘 올바르게 되라고 야단칩니까? 열 번 야단치면 두 번이나 될까 말까이지, 아멘도안 하는 것 봐. 솔직히 말하십시오. 그리고 혈기를 부리고 그렇게 사는데 은혜가 안 떨어지고 배깁니까? 그 다 쓸모없는 에너지 낭비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 시간이 있으면 복음을 전하십시오. 복음을 전하면서 이 사람에게 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전도를, 엽서를 쓰고 그렇게 살아보십시오. 그럼 이 속에서 불이 계속 하나님이 한번 주신 은혜의 불이 이어집니다.
V.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눈물이 흐르게 하라
여러분, 전도하다가 전도를 받는 사람은 안 우는데 전하는 사람은 가끔 웁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완악한지 믿지도 않고. 그러면서 돌아서서 그런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 나도 한때는 저렇게 완악한 죄인이었는데 하나님 왜 나를 이렇게 사랑하십니까? 저들의 마음에는 저렇게 믿어지지 않고 전도지를 주고가자마자 발아래 밟아버리는 저 사람들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하나님이 내 마음에 믿어지게 하셨으니 예수가 오신 것이 나에게는 정말 기적입니다. 아멘 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믿어지는 이 복음이 너무 소중하고 너무나 놀라운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 마음속에 활활 타오릅니다.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알게 하기 위해서 애쓰지 않으면 이 복음이 비빔만도 못한 볶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복음을 전해보십시오.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생기는 많은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영혼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 그 영혼 때문에 눈물을 흘렸던 사람들,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지 못한 세상을 보면서 고통 하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고 기도하고 성령의 은혜를 구하던 사람들이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고, 안수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그 중에 은혜 받은 사람이 교역자가 되고 이래야지 교회가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물이 계속 흘러야합니다. 사모하는 마음으로 흘러야 합니다. 그 속에서 주님이 주신 부흥의 불길들이 유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구원받은 성도의 삶은 영혼을 향해 흐르는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리차드 백스터 목사님은 말하기를 회심하지 못한 영혼을 향해 눈물을 흘릴 수 없는 사람은 누군가가 대신 울어주어야 하리만치 불쌍한 사람이라고 그랬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기도할 때 마음이 가장 순수해질 때가 언제인가 하면 자신을 위해 기도할 때가 아니라 영혼을 불쌍히 여기며 그들의 영혼에 무엇인가 이바지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할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주시도록 간절히 빌 때 그렇습니다.
제가 이번에 어린이 회심집회 때도 그런 것을 경험했습니다만 전도사 사역할 때 어린이 사역할 때 애들도 모아놓고 고난주간 같은 때 기도회를 하면 강퍅한 애들이 있습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습니다. 벌써 애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인데도 복음을 명료하게 제시하면 그것을 아주 싫어해서 마음을 꽉 닫아거는 애들이 있습니다. 그런 아이들을 놓고 기도회를 합니다. 그때 잘 불렀던 찬송이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 그 찬송, 그렇지 않으면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를 당하셨네.’ 그런 찬송을 애들이 막 부릅니다. 어떤 애들은 회심하는 놀라운 역사를 보이는데 어떤 아이들은 결코 댕글댕글 해서 절대 안 깨집니다. 그러니까 가서 선생님이 그 아이를 붙들고 막 기도를 해주다가 다른 애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는 안 그랬는데 이 애가 너무나 안 깨트려지니까 그 애를 붙들고 막 우는 것입니다. 울면서 기도하면서 애를 끌어안으면 뺨에서 흐르는 눈물이 그 아이의 뺨에 흘러내립니다. 상황이 워낙 진지하고 심각하니까 애가 저항도 못하고 그냥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으고 자기도 눈을 감고 있습니다. 그러더니 애가 막 웁니다. 나중에 다 끝난 다음에 우리는 회심했는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너 왜 울었니? 그러니까 선생님이 나를 위해 그렇게 우는데 눈물이 안 나오니까 너무나 억울해서 울었다고 합니다.
보십시오. 복음을 그렇게 피와 땀과 눈물 속에서 전해지는 것이지 기업형 홍보에 의해서 전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도 더 많이 울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유월절이 다가왔을 때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시면서 통곡하며 우셨던 이유도 결국은 영혼들 때문이 아니셨습니까? 당신이 십자가의 고난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오는 심판 날에 피할 수없이 고난을 당하여야 할 회개하지 못한 백성들을 보면서 주님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우리에게 그 눈물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 영혼을 위해서 흐느끼는 눈물이 있으면 우리가 다툴 수 있습니까? 우리가 그 영혼들을 위해서 함께 손을 잡고 뜨거운 눈물이 있어 기도할 수 있다면 우리가 함께 용서해주지 못할 일이 있겠습니까?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만약에 그렇게 잃어버린 세상을 위해 부름 받은 교회의 소명을 뼈 속 깊이 뼈저리게 느끼며 그 세상을 위해서 눈물을 흘릴 수 있고 그들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온 교회가 눈물바다가 된다면 우리 중에 용납할 수 없는 일이 있겠으며 용서할 수 없는 원한들이 우리에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눈을 들어 하늘보라 어지러운 세상 중에
곳곳마다 상한 영의 탄식소리 들려온다
VI. 결론과 적용
복음이 아니면 결코 구원할 수 없는 사람,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와서 능력이 없음을 절감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다시 성령의 능력으로 다시 채워주시옵소서. 우리에게 예리한 복음의 검을 들려주시옵소서. 우리 공동체가 한 마음으로 이 일을 위해 기도하게 해달라고 이렇게 빌 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까? 구원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그래서 우리는 마음을 다해서 우리가 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교회에 와서 마음을 닫고 미끄러지는 사람을 사랑으로 붙들고 그렇게 붙들어도 떠나는 사람은 떠나도 아직까지도 이 세상에서 복음을 듣지 못해 방황하는 수많은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사랑을 가지면 그게 모두 보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보이지 않고 사랑이 있으면 그것이 모두 보입니다. 그래서 온 마음을 다하여 이 복음을 전하는 그런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6. 마음으로 드리는 착한 섬김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와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행 9:31)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 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그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뉘우니라 룻다가 욥바에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오라고 간청하니 베드로가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가서 이르매 저희가 데리고 다락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행 9: 36-39)
I. 본문의 배경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실 때는 그 교회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 있기 때문에 교회를 세우십니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 한 사람을 주의 자녀로 부르실 때도 사랑하셔서 그 사람들을 예수의 몸이 되게 하셨지만 그 몸을 이룬 우리는 각자, 각자 하나님 앞에 하여야 할 가치 있는 일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은 사명이라고 말합니다. 이 사명은 일방적으로 주님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창조된 그 목적을 구현하는 것이고 그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 그리고 우리에게는 행복이 되는 이 두 가지 명제가 조화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신앙에 있어서 공동체성 같은 것에 대해서 잘 알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다 깊이 이해하려고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시대의 정신 자체가 우리 개개인이 중요할 뿐 나머지는 그 하위의 가치일 뿐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시대의 정신을 받을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 예수 믿은 이것이 참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에 기여하는 하나님의 축복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야지 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하나님이 세워놓으신 교회 공동체 속에서 구현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우리 구원받은 각 신자가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할 바는 우리 모두가 함께 합하여 공동체로서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할 그 삶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그렇게 부르셔서 모두 주의 몸을 삼으셨지만 그 몸의 상태가 어떠한가에 의해서 그 교회를 창조하신 목적이 잘 구현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교회들을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과 기도로 능력 있게 하시는데 이렇게 능력 있게 된 교회는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 그 목적을 훌륭하게 완수함으로서 공동체 전체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의 회복에 기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제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교회 안에서 신자들 각 사람의 영혼은 안전할 수 있고 건강함을 유지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A. 사울의 회심과 박해(23-25절)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교회를 능력 있게 하셨을 때 교회가 어떻게 영광스럽게 주님의 뜻을 드러내는지를 보여주고 또 교회가 그런 부흥 아래 있을 때 그 공동체에 속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떠한 모양으로 자신의 사명을 따라 살아야 되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에서 제일먼저 등장하는 것은 핍박자 사울의 회심입니다. 사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있던 사람이었고 실제로 권세를 가진 대제사장에게 공문을 받아 다메섹에 있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잡기 위해서 가던 중이었습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중에 빛으로 나타나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그 빛을 보았을 때 두렵고 떨렸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이제껏 까지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한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인 줄 알았고 나사렛의 젊은이가 이단의 괴수라고 생각했는데 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 말미암아 두 가지 생각에 커다란 변화가 오게 되었습니다. 첫째는 자신의 삶이 사실은 하나님을 위하는 삶이 아니라 대적하는 삶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또 하나는 메시아가 바로 나사렛에서 태어난 그 예수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의 인생은 결정적인 전환을 이루게 됩니다. 이것이 유명한 사울의 회심이었습니다.
B. 핍박에도 굴하지 않음(27-29절)
이렇게 회심한 후 사울은 즉시 그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증거 하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사울이 놀라운 회심은 유대인들에게는 충격적인 것이었고 기독교인들에게는 의심의 눈초리를 살만한 변화였습니다. 얼마 전까지 서술이 시퍼레서 자신들을 잡아넣으려던 그 젊은이가 어느 날 예수는 바로 메시아라는 사실을 외치도 다녔으니 당시에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만도 했습니다. 그러나 개의치 않고 예수의 복음을 전했을 때 그때 더 당황했던 사람들은 유대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이제 이 사울을 죽이기로 결심하고 그의 목숨을 노리며 날마다 성문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보호를 받아서 광주리에 담아서 성 밖으로 내려오는 수난을 겪으면서도 그는 자신의 지성과 온 영혼을 찢고 들어왔던 한줄기 빛, 예수 그리스도는 메시아이시며 그분 한분을 위해서 구약의 역사는 달려왔다는 것, 그리고 그분 한분으로부터 새로운 이 은혜의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이 기쁜 소식이 그로 하여금 멈출 수 없게 만들었고 그래서 그는 쉼 없이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뛰어난 지성을 소유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왜 예수가 메시아일 수밖에 없는지를 수많은 사람들에게 간증하여 성과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핍박은 계속되었고 그 핍박 속에서도 사울은 굽히지 않고 제자들과 함께 예수의 복음을 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는 복음의 능력이 어떻게 사람을 통해서 나타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복음의 능력은 사람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의 능력은 사람에게 매이지 아니하나 그러나 복음의 능력은 사람을 통해서 그 능력을 드러내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복음의 능력 안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보도록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위대한 힘은 이 복음의 힘이고 복음의 힘은 곧 체험된 진리가 가져오는 힘입니다. 그래서 체험하지 않은 진리는 우리의 인생을 붙들어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체험한 진리는 우리의 인생을 붙들어주고 다른 사람의 인생도 건져내는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핍박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사울과 제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이루고자 하는 편만한 복음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래서 유대와 갈릴리와 그리고 사마리아까지 온 도시에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 전파되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교회로 들어오게 되는 교회의 부흥이 일어나게 됩니다.
II. 교회가 든든히 세워져 감(31절)
이렇게 해서 복음으로 교회가 든든히 세워져가게 되었는데 이때의 교회의 부흥 특성을 오늘 성경은 세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A. 교회의 평안함: 외적 상태
첫째는 교회가 평안한 것이었으니 이것은 교회의 외적 상태였습니다. 간헐적인 박해가 없었을 리가 없지만 그러나 외관상 교회는 평안하였습니다. 여기서 평안은 단지 아무 일이 없고 문제가 없는 것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사람이 점점 줄어들어서 문제가 일으킬 사람이 없으면 교회는 평안해질 것입니다. 담임목사 혼자서 무슨 문제를 일으키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또 사람이 많이 있다고 할지라도 축도가 끝나기 무섭게 도망가서 마음이 모두 세상에 빼앗겨있다면 교회에 와서 문제를 일으킬만한 관심이나 정욕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또 다시 교회가 평안해지게 될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평안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세워져가고” 그랬습니다. 교회가 단지 물리적으로 평안했을 뿐만 아니라 그 평안함은 하나님과의 평화를 통해서 자신들에게 임한 평강이 가져다준 결과였고 그 평강은 커다란 에너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를 점점 든든하게 세워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의 든든히 세워져감이라고 하는 것은 땅을 사고 집을 사서 건물의 크기가 크고 넉넉해져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또 오갈 데가 없어서 교인들이 소 잡아먹은 귀신 붙어 앉듯이 한 교회에서 눌러 붙어 앉아있는 누룽지 같은 교인들이 늘어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든든히 서가는 것은 신자 각사람 각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에 붙들려서 그리스도께 뿌리를 내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개개인의 견고하여져감이 성래전적으로 통합이 되어서 교회 전체가 든든히 세워져가는 연합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아는 지식 면에서 흔들리지 않는 견고함을 갖기 위해서는 그 지식이 깊어져야 하고 그 지식이 깊어져가는 것과 함께 그 지식이 사랑으로 역사하여야지만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성숙한 경건과 연단된 꿋꿋함이야말로 교회가 견고해져가는 그 기본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으니 이 성숙한 경건과 연단된 꿋꿋함의 모든 기원은 진리를 붙들고 성령 안에서 기도와 함께 싸우고 성장해온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언젠가 바다를 여행할 적이 있었습니다. 여러 해 전에 배를 타고 가족들과 함께 바다를 여행하는데 그 배사공이 우리에게 안내를 했습니다. 그 바위섬 꼭대기에 3-4미터 정도나 되는 나무 한그루가 바위에 서있었는데 우리가 보기에는 그저 심은지 한 10개월이나 되어 보이는 나무라고 생각되는데 사공이 이야기하기를 저 나무의 나이가 1300년이라고 가르쳐주었습니다. 뻥이라고 확신은 하지만 그러나 하여튼 들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천년이 넘은 나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거기에는 도저히 나무가 자랄 수가 없는 곳인데 어떻게 소나무 씨앗 하나가 날아와서 바위틈에 이끼 사이에 싹이 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비가 와서 물을 머금고 이제 싹이 나고 잎이 자라면서 소나무로 자라게 되었는데 이 비가 언제나 오고 또 많은 흙 위에 묻혀있는 나무가 아니기 때문에 결국은 생명을 부지할 만큼 영양이 공급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비바람과 함께 싸우면서 긴 세월을 보내왔기 때문에 130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도 그만큼 밖에 자라지 않았다는 설명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교회와 주시지 않는 교회는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인데 어느 교회에 은혜를 주시지 않겠습니까만 개개인이 은혜를 받고 그 안에서 성장하는 정도가 틀리듯이 교회도 모두 똑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공동체 전체가 한 몸으로 아름답게 성장하고 있는 교회가 있는가 하면, 바위에 붙은 교회처럼 간신히 연명하면서 분재처럼 자라나는 교회도 있습니다. 좋은 땅에 심겨져서 거목과 같이 자라는 교회도 있고 그렇게 자라는 교회도 있다는 것입니다. 두 교회 모두 그리스도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가 성장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것에 따라서 교회의 가치를 논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바른 태도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런 모든 것을 인정하면서 이제 교회가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많이 받는다고 하더라도 그 많은 은혜들을 교회가 담지하고 모두 하나님의 나라의 소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그 은혜를 사용한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이 땅에 회복이 되어졌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많은 교회들이 그 은혜를 담지 할 때 그때 사단의 강력한 역사는 항상 따라다닙니다. 여러분도 워낙 은혜가 없고 심지어 회심 근처도 못간 사람들은 사단도 별로 관심을 안 갖습니다. 지금도 열심히 자기를 섬기면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을 왜 다그치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들이 회개하고 은혜를 받아보십시오. 그러면 사단은 정말 자신에게 위협이 되기 때문에 끊임없이 여러분들을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시험하기 시작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많은 은혜를 받게 되었을 때 그 교회가 은혜를 온전히 사용하면 건강하고 성장한 교회가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의 왕국에 도전이 될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지 은혜를 교회 안에서 소비해버리게 만듭니다. 분쟁과 다툼, 혈기와 쟁투, 그리고 한번 사람들을 미워하고 용서하지 않는 것, 그 다음에 의미가 없는 헛된 일에 교회의 정욕을 낭비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는 교회 안에서 부패해버리고 썩어버립니다. 그래서 결국은 주님이 그 은혜를 주실 때는 왕국의 소명을 위해서 주셨는데 결국은 자신 안에서 스스로 부패해버리고 마는 결과가 도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경우에 교회는 많은 은혜를 받아도 견고해지지 못합니다.
사람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도 받아들이고 반응하는 방식이 그 인격과 본성에 의해 상이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때 아주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때로는 격렬하게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그 증거들이 몸에 마음에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격렬하게 은혜의 경험을 한 사람들이 쉽게 물러가서 부패와 침륜에 빠지는 것을 볼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그들의 은혜 받은 것에 상당한 과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표현의 과장이 있을 수 있지만 받은 은혜가 참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이 그 은혜를 올바르게 사용하지 않으면 그들 안에서 은혜는 부패하게 되어버립니다. 그를 든든한 믿음의 사람으로 세우는데 은혜가 기여하지 못하게 됩니다. 마치 적은 양의 빗물을 받아도 그릇이 잘된 경우에는 빗물이 고일 수 있지만 쏟아지는 큰 비를 받는다고 할지라도 구멍이 뚫어진 바구니를 가지고는 아무 물도 받을 수 없고 요란스럽게 그 바구니만 적시는 것처럼 우리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때도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는 것뿐만 아니라 잘 간직하여 그것을 따라 소명을 위하여 살게 됨으로서 자신들이 든든한 신앙으로 서가는 일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B. 교회의 경외함: 내적 상태
두 번째 특징은 주를 경외함에 있어서 자라가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내적 상태입니다. 한 교회가 주님을 경외하는 사랑으로 가득 차있을 때 그때 비로소 그 공동체는 소명을 사랑할 수 있고 그리고 그 소명을 따라서 사는 일에 있어서 유능해질 수 있습니다. 교회가 잘 성장한다고 하는 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교회의 성장이 어떤 것인가에 따라서 그 성장은 아름다울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권투선수로서 한 세기를 풍비하였던 사람 가운데 모하메드 알리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정말 전설적인 권투 선수였습니다. 조지 퍼먼에 의해서 KO를 당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 사람은 전설적인 인물이었고 정말 권투의 천재였습니다. 가끔 그 사람의 경기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해설자들이 이구동성으로 그의 경기 장면을 묘사할 때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는 권투선수라고 묘사했습니다. 그런데 그 나비의 무게가 얼마인가 했더니 130킬로그램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마 130 킬로그램이나 나가시는 분은 별로 없을 것이고 자매들이 한 3사람쯤 합치면 아마 130킬로그램이 될까 그럴 것입니다. 그런 거구에 사람이 15라운드를 하는 동안 그 캠퍼스 위를 쉴 새 없이 뛰어다니는 그러면서 기회가 올적마다 정말 나비처럼 날아다니다가 벌처럼 정확하게 쏘아서 상대방을 매트 위에 눕히는 광경을 보면 전 세계의 권투 팬들이 열광하는 장면이 생각이 납니다.
그러면서 그 해설자가 말하기를 저 130킬로그램의 체구가 15라운드 내내 저렇게 나비처럼 날아다니기 위해서 필요한 체력에 대해서 말하곤 했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130킬로그램을 가진 사람들마다 모두 그렇게 나비처럼 날아다닐 수 있을지 전 의문입니다. 여러분은 6-70킬로밖에 안되어도 나비처럼 못 날아다니는데 그 사람은 130킬로의 체력을 가지고 나비처럼 날았습니다. 60킬로그램의 체력을 가진 선수가 나비처럼 날아다니는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그 사람과 130킬로그램의 체격의 알리가 한번 캠퍼스 위에서 붙었다고 칩시다. 어떻게 될까요? 나비처럼 날아다니겠지만 60킬로그램짜리 나비가 수없이 날다가 여러 번 싸도 이 큰 나비는 절대 쓰러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 걸려서 130킬로그램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약 2.5톤 수준의 펀치를 한번 맞으면 아마 그 자리에서 눕고 말 것입니다. 이게 바로 교회의 크기에 관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비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성장이 중요한가, 아니면 내적인 질이 중요한가 묻는 것은 바보 같은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질이 확보되지 않은 성장이라고 하는 것은 성장이 아니라 부은 것입니다. 밤에 라면을 먹고 자면 붓습니다. 의미가 없다기보다는 의미가 나쁩니다. 그럼 생각해보십시오. 교회가 작았을 때는 그렇게 회개하고 은혜를 받고 열열이 삽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런 사람들이 또 모입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작으면 익명의 신앙생활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태도를 분명하지 않고는 교회에서 괴롭히는 사람들이 많아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커질수록 익명의 신앙생활을 할 그런 공간이 많아지게 됩니다. 아무리 적은 수의 성도들을 교역자에게 맡겨도 그 자기의 양떼들이 교회의 많은 식구들 속에 섞여있는 것이 찾아내는 것이 쉽지 않아서 익명의 신앙생활이 가능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목양도 안 받고 심방도 안 받고 성도로서 의무도 다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십일조 생활도 안 하고 헌금생활도 안 합니다. 그렇게 선교를 외쳐도 선교헌금조차도 안 합니다. 그러면서 무의도식 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 사람은 그래도 좀 낫습니다. 아예 몇 달씩 교회를 다니면서도 등록도 하지 않습니다. 무슨 탐색 시간이 그렇게 많이 걸리는지, 아니 몇 번 나와서 이 교회에 다녀야겠다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면 등록을 하고 신앙생활을 하고 그게 아니면 다른 교회를 찾아가면 되는 것이지 그렇게 등록도 안 하고 부득이한 경우의 사람이라면 모르지만 그렇게 애매하게 신앙생활을 해서 해택을 받을 때는 나도 이 교회에 다니는데요. 하고 손들고 불리한 일이 생길 때는 아직 등록을 안 했는데요. 이렇게 박쥐같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공동체의 한 지체로서 살아가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존경할 목회자가 없고, 섬겨야 할 지체들이 없고, 사랑할 교회가 없는 사람의 영혼이 이 어두운 세상에서 표류하는 사실상 잃어버린 영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지 생각을 해보십시오.
어디서 이런 일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까? 교회를 오래 다녀도 그 마음속에서 주를 경외함에서 자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내적 성장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껍질뿐인 교회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살아가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 교회 안에서 익명의 신앙생활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행복합니까? 그게 뭐가 행복하겠습니까? 무의도식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의 삶이 뭐가 행복하겠습니까? 교인으로서 의무도 다하지 않고 자신의 교회라는 아무 의식도 없이 헬스클럽에 다니듯이 오락가락하면서 사는 그런 학원수강생 같은 사람에게 무슨 얼어 죽을 행복이 있겠습니까? 그 신앙생활 자체가 쓰레기 같은 신앙생활인데 신앙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 자체가 수치스럽습니다. 무의도식 하는 생활입니다.
그러면 어떤 분들은 이렇게 대꾸할 것입니다. 목사님 무의도식이라니요, 제가 이른 아침부터 밤까지 얼마나 열심히 직장을 다니고 사업을 하고 일하고, 아니! 자기 먹고 살려고 하는 것이지 무슨 하나님을 위하여 하는 것입니까.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장에서 무의도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자기의 안락한 삶을 위해서 그렇게 헌신하는 것이지 거기 하나님이 들어갈 수 있는 영역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랑할 교회도 없고 섬기는 지체도 없고 관심을 갖고 위해서 기도해주어야 할 목회자도 없는 삶을 사는 사람에게 거기 무슨 하나님을 위한 자리가 들어갈 삶의 공간이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언젠가도 설교 시간에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지금 교회의 목사님들이 14분이 있습니다. 저 빼고도, 나는 여러분들이 원하고, 제일먼저 주님이 기뻐하시고 여러분들이 원하고 여러분들이 정말 그렇게 해서 좋은 신자가 될 수 있다면 나는 이렇게 15개로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다 각자 흩어져서, 제자들이 흩어졌던 것처럼 온 땅에 흩어져서 거기에서 교역자들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공동체가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다 가고 나에게 15분의 1만 남아도 저는 맹세코 전혀 섭섭하지 않겠습니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들은 섭섭할지 모르지만 나는 별로 섭섭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됩니까? 그게 그렇게 기계적으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생명체와 같아서,
그러면 대안이 무엇입니까? 무의도식 하는 교회를 만들어내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 저는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 고민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이 세상과의 씨름이었지만 요즘은 교회 자체와의 씨름이라고도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어제는 한번 푸념 비슷하게 제가 목사들을 모아놓고 그랬습니다. 우리 이렇게 계속해서 성도들의 등록을 받아주는 것이 성경적인 것인가 하고 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익명의 신앙생활을 하도록 그렇게 시들을 하나씩 배정해주는 것이 이게 정말 하나님 앞에 옳은 것인가? 진지하게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항상 여러분 마음속에 세 가지 살아있지 않으면 여러분들이 산 사람이 아닙니다. 첫째는 자신의 마음을 찌르는 하나님의 말씀, 그 다음에 가슴을 졸이게 하고 겸손하게 하는 섬김의 자리, 세 번째는 마음을 쏟아 붓게 만드는 기도의 체험, 이세가지가 없으면 살았다는 이름을 가졌으나 실상은 산 사람이 아닙니다. 주일날 이렇게 와서 달랑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과 상관없이 육일을 살다가 다시 예배에 나오는 그런 생활이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해서는 여러분 안 됩니다. 그것은 정말 살아있는 신앙생활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를 경외함에 있어서 자라가야지 됩니다.
신앙의 타락은 오늘 범죄하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 신앙의 타락이 아니라 어제보다 주님을 덜 사랑하는 것, 이것이 미끄러진 것이고 신앙의 타락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드려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의 소원을 이루어야 하는데 그것은 날이 갈수록 우리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설교를 해도 연애라도 한번 해본 사람들은 설교를 이해를 잘하는데 그것도 못해본 사람들은 설교를 잘 이해를 못한다고 실제로 여러분들이 저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한다는 그 감정은 반드시 성장의 감정입니다. 정체된 사랑의 감정은 사랑의 감정이 아닙니다. 제가 이것을 여러분들에게 이성적으로 논증할 수 있지만 진도를 나가야겠기에 그만 하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를 가르쳐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을 사랑할 때 더 이상 사랑이 성장하지 않는다고 느껴지면 이미 그 사람 마음 안에서 그 인간을 향한 싫증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 싫증에 의해서 사랑이 잠식당하는 것은 순식간에 일입니다.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전에 미국에 어떤 가수는 그런 노래를 불렀습니다. 아이 러브 모엔모엘브리데이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데 날마다 더 많이 더 많이 사랑합니다. 유치하기는 하지만 나는 당신을 향한 사랑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그런 노래도 있었습니다. 이게 사실은 사랑의 발전적 특성을 잘 표현한 것입니다. 사랑은 결코 가만히 멈추어있는 그런 사랑은 이미 싫증을 시작된 사랑이고 사랑은 그런 싫증에 의해서 잠식이 되는 일은 순식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사랑은 계속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횃불처럼 타올라야 합니다. 이 교회에 이런 내적 성장이 있었습니다. 그럼 이런 놀라운 내적인 성장이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을까요? 끊임없는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통해서 사랑하지 말아야하는 것은 십자가에 못 박는 돌이킴을 통해 사랑해야 할 분은 하나님을 사랑 속에서 자라가고 깊어져갔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사랑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 성령의 위로함:영적 상태
또 세 번째는 성령의 위로가 충만하였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영적상태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사랑이 성부 인격의 특징이라면 성자 인격의 특징은 은혜이고, 성령 하나님의 인격의 특성은 위로입니다. 성령의 위로가 있는 곳에 성부의 사랑과 성자의 은혜가 배제되는 것은 아니지만 성령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인격적인 영향의 특성은 위로입니다. 그러나 이 위로는 인간의 값싼 위로와는 구별되는 것이니 진리에 합치한 사람들을 위로하는 하나님의 신적인 위로입니다. 성령의 우선적인 역사는 죄를 책망하고 회개하는 역사입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게 하시는 영이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성령이 인간의 마음에 조명하십니다. 자신들의 죄를 보게 하시고 죄의 의미를 십자가 앞에서 새기게 하십니다. 그 십자가 앞에서 자기의 죄를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를 보게 하시는 이도 성령님이십니다. 그것을 보면서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의 의미가 자신의 속죄를 위함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는 분도 성령님이십니다.
그래서 위로하시는 성령의 역사는 먼저 책망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다가옵니다. 그때 그 앞에서 깨트려지고 가슴 아파하는 일들이 먼저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슴 아파하고 깨트려진 그 아픔 그 위에 하나님께서는 치료의 포도주를 부어주시고 이것이 바로 성령의 위로하시는 놀라운 역사입니다. 그 하나님의 위로는 이 세상의 인간의 모든 위로를 능가하는 것입니다. 인간을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받는 위로가 곤고할 때 우리에게 얼마나 힘이 되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나 그것은 성령 하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그 놀라운 위로의 예고편일 뿐입니다. 공동체가 모두 노력한다고 해서 이런 위로를 지체들에게 베풀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공급이 떨어진 성도들의 교통을 통해서는 나뉘고 갈리고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관심에 휘둘리고 하는 일들이 다반사로 일어납니다.
그러나 공동체가 성도들의 교통을 통해서 성령의 위로를 전달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공동체 구성원 각자 각자가 진리를 통해 성령으로 말미암아 삼위 하나님과의 사랑과 은혜, 위로의 교제를 누리는 일들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각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삼위 하나님과의 삼위 교제를 통해서만 성도 각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이 신적인 성령의 위로를 전해줄 수가 있게 됩니다. 이런 성령의 위로를 이 세상에서 낙심한 사람들에게 새 힘을 주고 이런 성령의 위로는 죄 가운데 빠졌던 사람들, 자기를 정죄하고 절체 부심하던 죄인들에게 소망을 주기도 합니다. 성화의 길에서 싫증이 난 사람들에게 다시 열정을 회복시키고 그 사랑으로 무장되도록 만들어주는 일도 성령의 위로가 하는 일들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하던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은혜의 해를 전파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눈먼 자의 눈을 떠 보게 하고, 병든 자를 고쳐 일어나게 하시고, 이렇게 이 세상에서 버림받고 희망이 없는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는 은혜의 해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말미암아 선포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애 전체는 바로 이 일을 위해서 희생하신 생애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위로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 일을 하기 전에 예수님이 광야에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바로 이렇게 위로하시는 성령님을 충만하게 받으시는 일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명령을 따라서 함께 하시는 성령과 동행하며 그러며 사람들의 눈물을 씻기며 위로의 사역을 훌륭하게 수행하심으로 그분은 보혜사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보혜사는 예수 그리스도였고 두 번째 보혜사는 성령이셨으니 두 번째 보혜사이신 성령은 첫 번째 보혜사 예수의 하신 일을 뒤잇기 위해서 각 신자의 마음속에 오시는 성령님이셨습니다.
III. 부흥 아래서의 성도의 삶(36-39절)
지금 오늘도 우리에게 필요한 교회의 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죄인들이 이곳에 와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엄위와 거룩하심을 인정하며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그 성령의 조명으로 깨트려져 참회하게 될 때 신속하게 성령의 놀라운 위로가 주어져서 죄 가운데 방황하고 떨던 영혼들이 예수 안에서 안식을 누리게 되는 이 참된 성령의 위로야말로 교회가 교회되게 하기 위해서 지녀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와 성령으로 무장한 공동체였기 때문에 이렇게 사람들을 다시 살리는 이 위로의 놀라운 역사를 지닌 공동체였던 것입니다.
A. 도르가의 착한 삶(36, 39절)
그런데 오늘 성경은 이런 부흥의 기록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갑자기 그 스포트라이트를 욥바라고 하는 작은 마을로 옮겨서 거기에 있는 도르가라는 여인의 생애를 탐사하고 있습니다. 관계가 없어 보이는 일인 것처럼 보이는 두 기사, 이 기사의 연결은 성령님이 의도하신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래서 장엄한 부흥 아래서 한 이름 없는 성도가 살아가는 삶을 비춤으로 말미암아 부흥이 있는 날에도 없는 날에도 우리가 어떻게 살아계신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어 섬기며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욥바의 도르가의 착한 삶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욥바라고 하는 곳에 사는 예수님을 믿는 여제자였습니다. 그의 관한 상세한 기록이 더 이상 성경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에 관해 어떤 사실을 추단할 수는 없지만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기록을 보더라도 어째든 그는 그렇게 흩어진 제자들에 의해서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은 이방지역에 사는 사람이었고 그리고 이 사람은 바로 이렇게 다비다라고 하는 히브리 이름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고 하는 여자였습니다.
1. 온 마음으로 이웃을 섬김
그런데 이 여자가 정말 하나님이 주신 그 은혜를 가지고 불쌍한 이웃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섬기며 살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선행과 구제가 심히 많더니” 라고 부사와 형용사를 겸해서 쓰면서 이 여자의 행한 일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여자의 섬김을 두 가지로 성경이 보여주고 있는데 먼저는 마음을 다한 섬김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여자가 어떤 경로를 통해 예수를 믿게 되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복음의 스포트라이트가 거기를 비추었을 때 이 여자는 이미 숨을 거둔 뒤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장엄한 부흥의 소식들을 들었을 것이고 자신도 그것들을 사모했을 것이고 자신도 그것에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는 그 이름을 사도들과 함께 낼 수 있는 그런 저명인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부흥과는 상관이 없는 것처럼 그는 자신에게 주신 소명을 따라서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웃을 섬기며 일생을 살았습니다. 그의 섬김은 마음을 다한 섬김이었기 때문에 그의 섬김은 받을 모든 사람들이 그의 섬김의 수고와 모든 헌신적인 노력들로 인해 감화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죽었을 때 그가 마음을 다하여 자신들을 섬긴 증표로 겉옷과 속옷을 가지고 베드로에게 보이며 눈물을 흘리며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은혜를 구합니다. 은혜를 주면 뭐하려고 합니까? 그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은혜, 하나님이 만약에 주시면 뭐하시려고 합니까? 그 은혜를 가지고 어떤 일에 쓰시려고 합니까? 하나님의 이 은혜는 우리의 영혼을 평안하게 하시려고 주시는 은혜가 아니라 목적이 있기 때문에 주신 은혜이니 이 은혜는 곧 우리가 은혜를 받을 때 즉시 소명을 발견함을 의미하는 것이고 은혜로 다시 회복시켜주시는 것은 그 본래의 소명으로 되돌아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소명을 우리 모두에게 주신 것이고 이 도르가는 자신의 소명을 욥바에서 고통당하고 가난한 이웃들과 함께 슬픔을 같이 하며 나눔의 삶을 사는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받았을 때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이웃을 섬길 때 마음을 바치는 착한 삶으로 자기의 소명을 완수해갔던 것입니다.
2. 자기를 돌보지 않은 섬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여러분들에게 베풀어주신 은혜가 있다면 여러분들은 무엇인가 섬기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이 여자 도르가를 보십시오. 이 여자의 섬김의 특징을 또 하나 이야기하는데 목숨을 아끼지 않은 섬김이었습니다. 오늘 성경은 “그때에 이 도르가가 죽어 시체가 씻기어 눕혀져있었는데” 라고 말합니다. 선행과 구제가 많았다는 앞에 있는 구절과 도르가가 죽었다는 이 기사 사이에 어떤 필연성이 있는지 우리는 섣불리 추적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도르가는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이웃을위해 온 마음을 바치는 헌신적인 섬김의 삶을 살았고 그런 헌신적인 그 자기 소진의 삶이 그의 죽음에 기여했을 것이라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는 누구도 의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웃을 위한 과로한 노동 때문에 그는 연약한 건강을 해치고 그래서 마지막에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그에게는 이 불쌍한 이웃들과 함께 나누며 살고 그들을 위해 착한 삶을 베푸는 그것이 그에게는 소명이었기 때문에 목숨을 바칠 가치가 있었습니다.
B. 마음을 다하는 착한 생활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에게도 그런 가치 있는 일이 있습니까? 나는 내 젊음을 다 드려서 성취하고 싶은 그 일이 있어, 밥 먹고 살고 이 세상에서 직장 다니고 돈 많이 버는 것, 다 여러분 자신들을 위한 욕망의 비전 말고 여러분들을 구원하고 여러분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뒤잇는 그런 종류의 비전을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있습니까? 생각만 하면 가슴을 찢는 그 일, 그 일을 이루지 못한다면 먹을 수도 없고, 입을 수도 없고, 마지막에 죽을 수도 없을 것 같은 그 어떤 일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면 아직 여러분들은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에 초기 역사를 보면 형이 와서 선교를 하다가 죽었는데 동생이 와서 뒤이은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 비전이 없습니까? 나 같은 죄인을 죽음에서 살리신 그래서 그 십자가의 은혜에 감격하고 마음이 찢어지도록 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격했는데 그러면 새로운 꿈이 생겨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이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마음을 드려서 열렬하게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못하기 때문에 안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제목이 없기 때문에 사실은 자기를 드려서 열렬히 기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여자 도르가는 목숨을 바친 섬김으로 하나님께 자기를 드렸던 여자였습니다. 모든 것을 다 드려서 섬긴 삶을 살았던 그런 여자였습니다.
이 생명도 달라시면 십자가에 놓겠으니
허울뿐인 육신 속에 참 빛을 심게 하시고
가식뿐인 세상에서 밀알로 썩게 하소서
세상에서 제일 시시한 삶은 목표도 없고 계획도 없는 지리멸렬한 삶입니다. 너무 시시한 삶이고 인생 낭비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비록 똥을 퍼도 가슴 뛰는 인생의 목표를 하나님 앞에서 발견한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속에 열렬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사모함이 있습니다. 목표가 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소중한 인생을 그렇게 우리들이 목표도 없고 마치 보기 싫은 만화를 보듯이 그렇게 사는 것은 정말 재미없습니다. 그렇게 열렬하게 학교를 다니면서 공부할 마음이 별로 없으면 그만 두고 한 1년이나 2년 휴학하고 저 선교지에 가서 한번 거기서 비지땀을 흘리면서 봉사하면 어떻습니까? 졸업해야 요즘은 취업도 잘 안된다고 그러는데, 그리고 선교지 뿐만 아닙니다. 저 시골에 가서 목회자 혼자 고군분투하는 곳에 가서 주보도 만들어주고 어린아이들에게 글도 가르치고 할머니 할아버지 손발도 주물러주면서 한번 그 영혼들을 가슴에 깊이 품고 살아보는 그런 삶은 어떻습니까?
저는 지난번에 캄보디아에 갔을 때 청소년 사역을 하는 선교단체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참 감동을 많이 받았습니다. 커다란 대형버스 중고 한대를 한국에서 들여와서 그것을 개조해서 자동차 밑에다 발전기와 물통을 달아서 한 30명 정도 샤워를 할 수 있게끔 샤워실을 버스 안에 만들고 의자를 다 뜯어버리고 마룻바닥으로 만들어서 거기를 집회시설로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차를 몰고 이제 거리로 나갑니다. 거기에 아이들은 특별한 산업이나 이런 것이 없기 때문에 아이들이 4-5살만 되면 거리에 나가서 돈을 구걸합니다. 외국인이 하루에 1달러만 주고 가도 그것을 한 달 치를 모으면 거의 언니 누나들이 공장에 다니면서 모으는 돈 정도가 되니까 아이들이 그것을 합니다.
그런데 이제 무슨 문제가 생기는가 하면 아이들이 그렇게 앵벌이를 하면서 돈을 벌다가 학교에 들어갈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그러면 이제 8살까지는 괜찮다고 그러지만 애들이 11-12살 이렇게 커지면 그 벌이를 할 수도 없습니다. 4-5살 든 애가 홀딱 벗고 눈물을 흘리며 달라고 그러고 옆에 한 12-3살 된 애가 달라고 그럴 때 여러분 누구에게 돈을 주겠습니까? 결국은 그것도 정년퇴직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벌이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그 애들이 배우지 못했으니까 길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생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여러 가지 많은 문제들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그 선교단체에서 그것을 갖다가 길거리에 대면 아이들이 옵니다. 그러면 배고픈 아이들에게는 빵을 주고, 몸이 너무 더러운 아이들은 샤워실에 들어가서 씻기고, 옷이 너무나 낡은 애들은 쓰레기통에 버리고 새 옷을 입혀주고, 그리고 마룻바닥에 앉아서 찬송도 가르치고, 글도 가르치고, 예수님 이야기도 전해준 다음에 아무리 늦어도 1시간 반 안에 끝내고 돌려보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그 애들이 가서 또 앵벌이를 할 수 있으니까. 이게 얼마나 감동적인 사역입니까? 다 자기 부모들도 버린 애들을 그렇게 예수의 사랑으로 가서 맞이하는데,
거기에 나이가 많이 든 선교사 내외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소개하는데 원래 선교사가 아니라 평범한 교인들이었는데 이제 마지막에 모두 은퇴하고 실버 선교사로 나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참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분들이 육체의 힘은 좀 없지만 그러나 남은 생애를 평안한 고국에서의 삶을 다 버리고 가난하고 병든 그 나라에 와서 그래서 자신의 돈을 써가며 불편한 삶을 살면서 선교한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사실은 그러면서 좀 더 젊어서 오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인생계획을 짤 때 뭐 회사에서 쫓겨날 때까지 그렇게 다니려고 하지 말고 그냥 회사에서 쫓겨나기 직전에 먼저 버리십시오. 그래서 한 55세쯤 인생 계획을 끝내고 그리고 55세쯤에 선교사로 나가는 것입니다. 지금 캄보디아 같은 곳은 지금 예를 들면 55세나 58쯤 되어서 은퇴를 한다고 그러면 연금이나 퇴직금이 나오든지 부부 둘이서 300만원은 가져야 살 수가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 이하로도 살 수 있지만, 그래도 안정되게 직장생활을 했으면 한 달에 55세 정년에 300만 원 정도의 수입이면 어느 정도 되지 않겠습니까? 물론 안 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것만 가지면 캄보디아에 가면 둘이서 한 80만원만 가지면 실컷 삽니다. 넉넉해서 100만원을 쓴다고 합시다. 그러면 200만원이 남습니다. 그러면 후원하는 교회도 필요 없습니다. 그냥 그것을 가지고 자신의 생활비 거기서 쓰고 거기서 200만원 가지고 선교 사역하면 선교사들 중에도 한 달에 300만 원 이상 가지고 선교 사역하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훌륭하게 자기 나름대로 선교 프로젝트를 수행해나갈 수가 있습니다. 훈련만 받고 가면, 그게 얼마나 좋습니까? 그래서 나는 요즘 만나는 사람마다 권합니다. 무슨 어떻게 할까? 고민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하고 그리고 회사가 버리기 전에 먼저 버리고 보따리 싸서 그렇게 가서 영혼들을 위해서 열심히 남은 생애를 살다가 거기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가면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얼마나 아름다운 삶입니까? 그래서 이 땅에서 많은 기회가 있고 더 많은 삶이 있었지만 그것을 버리고 목숨을 바쳐서 이 섬김이 필요한 영혼들에게 자신의 섬김을 다하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여러분, 오늘도 제가 이제 미국에 가는데 전 세계를 다녀보면 정말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밭이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는데 일꾼이 없도다. 너희 아버지께 청하여 일꾼을 보내달라고 하여라. 그게 우리는 우리 곡식이 아니니까 마음이 괜찮지만 그 곡식의 주인이신 주님이 보시기에는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너무 너무 방황하는 영혼들이 너무나 많고 누군가 예수의 사랑을 가지고 가서 그들에게 이 복음을 나누어주면 기뻐할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 교회 안에는 그런 일이 없겠습니까? 왜 없겠습니까? 여러분 교회 안에 어느 날 들어왔을 때 쓰레기가 너절하고 사람이 언제 왔다 간 것 같은 교회 마당을 밟아본 적이 있습니까? 밤에 오건, 아침에 오건, 새벽에 오건, 언제나 깨끗하게 성도들은 웃으면서 맞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느 방하나 쓰레기로 더렵혀져서 앉을 수도 없는 그런 방을 본 적이 있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봉사했겠습니까? 그런 생각 한번 해보신 적이 없습니까? 혼자서 하루 종일 청소해도 이 빌딩에 청소를 끝낼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일이 많습니다. 평일만 와보면 여기에 관리간사들이 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일주일 내내 작업하는 광경 여러분 보실 수 있지 않습니까? 여기도 할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가진 것 모두 다 주께 드리오니 주 받으옵소서
무릎을 꿇고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내가 원하는 것은 주님께 받는 것이 아니라 나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 비천한 인간을 주님을 위해 어디든지 써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하는 성도들이 주님이 한 달에 몇 명이나 들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인생을 살면서 그런 기도를 해본 적이 있습니까?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랴. 주님 충분합니다. 가진 것 제게 충분합니다. 이제는 주님 차례입니다. 주님이 받으시옵소서. 주님이 거두시옵소서. 너무나 많습니다. 정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본국에 돌아오면 대다수의 교인들이 좋은 교회에서 좋은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무의도식 하는 삶을 삽니다. 그렇게 살면서 그들은 모두 고백이 힘들다고 합니다.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할 때 가장 많은 짐을 지는 것 같아도 가장 가벼운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할 때 인간은 자기를 모두 포기하는 것 같아도 다 얻는 것입니다. 오히려 인간은 자기 사랑에 집중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고 이웃들로부터 소외되고 그리고 주님의 공동체로부터 소외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많은 논쟁이 필요한데 간략하게 얘기하자면 하나님도 하나님 자신의 목적을 찾아가고 공동체도 하나님의 목적을 찾아가고 주님을 경외하는 형제들도 하나님을 목적을 찾아가는데 자신만 고무신을 거꾸로 신고, 자기 목적을 찾아가니까 다른 사람이 자기를 소외시킨 것이 아니라 스스로 소외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 안에 일어나는 마음의 특징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입니다. 그것을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아니라 스스로 고무신을 거꾸로 신고 스스로 자기가 소외된 것입니다. 그게 자기 사랑의 결과입니다. 자기 사랑은 자기 소외의 감정입니다. 그것을 가져다줍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늘 가는 그 집회의 도시에서도 일 년에 두 번 집회를 가는 것은 유례가 없는데 또 갑니다. 너무나 사모하는 사람들이 거기에 있습니다. 오죽하면 주차장에서 내 손을 붙들고 펑펑 울었습니다. 또 갑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목사님, 여기에 와서 교회를 개척하시면 안 됩니까? 열린 교회의 교인은 어떻게 하고. 거기는 아무나 하라고 그러고,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예전에 sixth day라는 영화가 나왔습니다. 기억하십니까? 인간 복제하는 영화인데 여섯 번째 날이라는 영화가 나왔습니다. 다보고 또 못 본 척 시치미를 뗍니까? 아놀드 슈왈즈 제네거가 나오는 영화입니다. 관두십시오. 그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정말 저렇게 되었을 때 충성스럽지 않은 사람은 혼자 원본만 살고 진짜 충성된 좋은 사람은 복사판을 많이 만들어서 선교지에 하나 보내고, 그다음에 시골에 하나 보내고, 교회에 서너 개 만들어 놓고 이러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생각이 성경적이라고 믿은 적은 한 번도 없지만 그냥 공상을 해봤습니다. 얼마나 할일이 많고 사람이 없으면 그 바보 같은 공상을 했겠습니까? 그렇게 복사를 만들 필요가 없이 지금 무의도식 하는 여러분만 깨어나도 정말 물이 바다를 덮은 것과 같이 이 모자라는 주의 일을 덮을 수가 있습니다. 일어나십시오. 여러분 자신도 그렇게 사시면 불행합니다. 가슴 뛰는 일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데, 선교지에 가보면 아! 누가 와서 일생을 자신의 인생을 쏟아 부으면서 살면 얼마나 보람이 있을까? 시골에 내려가도 아! 하나님 누구입니까? 아무 관심 없이 버려진 이 죽어가는 영혼들을 위해서 그 영혼들이 내게 붙여진 영혼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의 늙은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고 그들의 병든 몸을 돌봐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9장에서 복음을 전하며 다녔던 예수님의 생애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모든 성과 촌을 두루 다니시면서” 영어성경에서는 city와 village로 나옵니다. 우리말로 말하자면 도시와 시골을 두루 다니시면서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똑같은 섬김을 베푸셨습니다. 도시의 목회와 시골의 목회가 다르지 않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던 그 마음을 촌에 갖다 쏟아놓으시고 시골에 갖다 쏟아놓으시며 그렇게 예수님이 걸어 다니시던 그 갈릴리 땀방울이 떨어진 그곳, 눈물방울이 떨어진 사마리아 피가 떨어진 그 유대에서 지금 교회가 이렇게 든든히 서가고 있습니다. 이 일을 주님이 먼저 시작하셨습니다. 우리가 왜 무의도식 하는 삶을 삽니까? 그리고 나태함과 게으름 속에서 영혼의 싫증을 간직한 채 욕망을 좇는 삶을 살아서 마지막에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살게끔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이 아닙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삶은 마음을 다한 착한생활입니다. 이 도르가를 하나님이 그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부흥의 큰 불길이 일어나고 있을 때 그는 이 큰 부흥의 불길이 일어나는데 이까지 옷까지 몇 벌 만들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것 가지고 언제 하나님의 나라가 올까? 나도 사도들처럼 사도들 같은 권위로 그렇게 병자를 고치고 설교를 하기 위해서 나도 세상에 달려갈 거야. 그리고 욥바를 뛰어나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을 사용하셔서 하게 두고 이 도르가는 자신에게 주신 기업이 이 욥바에서는 병들고 가난한 이웃을 위해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마디로 이 사람은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온 마음을 다해서 그럴 수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알아주는 사람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한결같은 섬김으로 사랑을 다해서 자신에게 맡겨진 이웃을 위해서 헌신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C. 착한 삶으로 칭찬받는 교회(행 2:47, 11:24)
우리에게 고통 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것은 우리가 자기 사랑에 눈멀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녹일 때 우리는 항상 스스로 충분하다고 생각했고 그리고 수많은 섬겨야 할 이웃들의 핏기어린 얼굴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에게 무지한 자에게는 지식을 섬기고 병든 자에게는 치료로, 고통 하는 자에게는 위로로 섬기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결국 교회는 착한 삶으로 칭찬받는 교회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일어나자 그 교회의 강력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온 성도들이 뜻을 합하여 공동체적 일치의 마음을 품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소명을 따라서 섬겼습니다. 성령께서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때 그 교회의 성도들이 이 세상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만한 목표를 세운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이 사람들은 하나님께 집중하며 주님을 찬송하며 살았지만 결국 그들의 삶은 착한 살 삶이 될 수 있었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바나바는 일곱 집사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하기를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자더라.” 그랬습니다. 착한 사람이었다는 것이 믿음과 성령보다 먼저 나온 것을 주목해보십시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4장에서 이미 예루살렘에 저명인사였지만 하나님이 사울을 쓰시려고 하는 것을 알자 그는 스스로 사울의 비서처럼 살았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처음에는 사울과 바나바였으나 이후에는 바울과 바나바라는 그 명단에 만족하면서 평생을 사도 바울의 헬퍼로 일생을 살았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새신자를 섬겨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기여했던 것입니다. 바나바의 착한 인격이 아니면 불가능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IV. 부흥의 열매는 사랑입니다
여러분들이 주님을 믿고 그분의 사랑을 알았으면 이제 다른 사람이 여러분 때문에 덕을 입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여러분들을 통해 그들을 덕 입히시는 방법입니다. 용서하십시오. 여러분이 희생하십시오. 좋고 편안한 것은 지체들에게 주고 여러분들은 고통스럽고 거친 것을 택하십시오. 그리고 그 길을 걸어가십시오. 이것이 바로 강력한 성령의 은혜가 함께 하던 교회의 시대에 성도들이 살았던 삶입니다. 왜 그럴까요? 부흥의 열매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부흥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이고 성령의 역사는 은혜의 역사이니 은혜는 사랑의 감화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부흥의 열매는 사랑의 역사입니다. 신앙의 태도가 단호한 사람은 자기 힘이 결핍되기 쉽고 진리에 대한 확신이 뛰어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정죄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부흥은 이 모든 것과 함께 사랑의 힘으로 역사하는 하나님의 신적인 능력은 그래서 그 열매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 때문에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 사랑 때문에 필요아래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무릎을 꿇고 섬기는 그 삶, 그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간절히 호소합니다. 여러분들이 맨 땅에서 아무리 심령의 부흥을 달라고 기도해도 여러분들의 기도가 진실해지기 어렵습니다. 섬기십시오. 지극히 먼 나라에 가서 복음을 전하지 못해도 섬기십시오. 무엇이든지 섬길 수 있는 그 일을 섬기십시오. 하기 어려운 일. 자신을 희생하는 일 마음이 내키지 않지만 자기를 꺾어야 하는 일로 섬김을 시작하십시오. 그때 여러분들은 여러분 자신이 얼마나 은혜가 필요한 사람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고 무의도식 하는 모든 삶을 뼈저리게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인생의 섬김, 그 봉사의 들판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그 부름 속에는 비상한 부르짖음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갈망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사람의 기도에 왜 아니 응답하시겠습니까?
장로님 네 분이 있었는데 고생을 참 많이 했습니다. 일곱 분이 장로에 피택 되셨는데 섬가 조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명복을 빕니다. 그렇게 쉬운 길이 아닙니다. 힘들어할 때마다 내가 그분들을 위로하던 노래 같은 말이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이렇게 고난을 참고 아파고 견디고 시련이 와도 인내하면서 살다가 죽으면 주님이 너 뭐하다 왔는가 하면 한 교회를 섬기다 왔습니다. 이렇게라도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잘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한 교회를 변함없이 섬기려고 애썼습니다. 철새처럼 좋은 교회를 찾아다니지 않고 말입니다. 편한 교회 찾아다니지 않고 말입니다. 그렇게 고백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위로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눈을 들어서 이 세상을 보십시오. 주님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일꾼들을 찾으시는 주님의 그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까?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탄식하셨던 그 음성을 듣고 자기 자리에서 착하게 살아야 합니다. 아주 착하게 남을 위해 희생하면서 착하게 자기에게 맡겨진 섬김을 다 하며 남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면서 그렇게 섬기면서 살 때 여러분들에게 주신 그 부흥의 불길이 유지될 것이고 여러분들의 섬김의 마음은 공동체적으로 성래전적으로 봉헌되어서 그래서 공동체 전체가 한 몸으로 신실하게 주님을 섬기는 예수의 분신이 될 수 있으니 그대들의 섬김이 정말 클 것입니다. 그 날에 여러분 모두 주님께 칭찬받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능력있는 교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