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 13-2과
녹취자 : 오희열
13-2과 <신학과 존재의 울림 2>입니다.
문제 1번을 읽겠습니다.
문제 1) “개혁된 기독교 신앙의 세계에서 단 하나의 권위 있는 전통”은 무엇입니까? 이 말에 대해 느끼거나 이해한 바를 여러분 자신의 언어로 말해 봅시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개혁된 기독교의 신앙’이라는 것은 ‘리폼드’(reformed)를 말합니다.” 사실 이 “reformed”는 분사입니다. “개혁된”이란 뜻입니다. 우리는 흔히 “개혁주의”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하지만 영어로는 “개혁주의”라는 말이 없습니다. “reformism”이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reformed tradition” 곧 “개혁된 전통”, “개혁주의의 전통”이라고 합니다.
개혁주의라고 하면 크게 세 가지를 이야기 합니다. 최광의로 이야기하자면, 다시 말해서 가장 넓게 보면 가톨릭을 반대했던 모든 신앙을 개혁주의로 봅니다. 여기에는 이단도 포함됩니다. 이것이 최광의로 본 것이고, 두 번째는 이단을 다 제하고 기본적으로 정통교리를 믿는 교파를 말합니다. 세 번째로 가장 좁은 의미로 보면 칼빈을 중심으로 제네바에서 일어났던 개혁주의 신학의 운동을 가리킵니다. 대개 우리들이 좁은 의미로 사용할 때는 세 번째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언급된 “개혁된 기독교 신앙”(reformed christian faith)의 세계에서 권위 있는 전통이라고 이야기할 때에 그 전통은 어떻게 인간의 지성적인 삶을 지탱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이해를 발전시켜 온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자체가 하나의 장중한 사상입니다.
모두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이런 궁금한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화란의 캄펜하우젠이라는 신학자가 수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유명한 신학자였습니다. 그분이 한국에 와서 생활하면서 깜짝 놀라신 것이 있는데 한국 교인들은 어쩌면 그렇게 기도를 많이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의 말씀이 반드시 좋은 의미만은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기도도 별로 많이 안하지만 당시 한국 교인들이 기도를 많이 하는데도 삶과 윤리는 만족스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느 교수님이 유학 중의 경험 하나를 이야기 했습니다. 당시 새벽 기도를 드리는 학생은 한국 유학생 밖에 없었는데, 제일 많이 나와서 기도했답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근무시간을 카드에 적어 내는데 그것을 가짜로 쓰는 학생도 한국 학생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교수님들은 이 두 가지가 서로 조화를 이루지 않아서 이상하게 생각했답니다. 한국 학생들의 열렬한 새벽기도와 두 시간 청소하고 세 시간으로 쓰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것, 이 둘의 부조화가 이해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원인을 딱 한 마디로 이야기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거기에는 동양만의 독특한 너그러움의 문화 같은 것들이 작용하였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학교 다닐 때 다른 사람에게 시험지를 보여준 적이 있지 않습니까? 공부 잘 했던 사람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공부 못 하는 사람이 보여주면 다른 사람의 시험까지 망칩니다. 그렇게 보여주는 것을 우리는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외국 사람들의 눈을 볼 때는 커다란 문제입니다. ‘정직’이라는 잣대 하나만 가지고 보니까 그런 측면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동양적인 사고방식에서 ‘정직’은 그런 수학적 정확성과는 좀 다른 개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윤리의 잣대로 해석할 때에 사람마다 여러 가지 많은 문제들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동서양은) 기본적으로 심성에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여하튼 무엇이 원인이라고 한 마디로 말할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인이 되면 나타나는 가장 커다란 특징 중 하나는 그들이 사상을 받아들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상의 얼개를 따라 살아가야 하는 사람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기독교의 사상이 무엇입니까? 예수를 믿고 나면 세계는 왜 창조되었고, 하나님은 누구이고, 인간은 누구이며, 또 어떻게 살아야 하고, 이 자연을 이해할 때는 어떻게 이해해야하는지를 가르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가장 근본이었습니다. 사도시대 때부터 이것은 근본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런 것들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이런 사상이 무너지게 된 배경은 굉장히 복잡하지만 지난 번에 공부할 때 말씀드렸습니다. 복음주의의 전통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그 밑에 개혁주의가 깔려있기는 하지만 그것 하나의 영향만 받은 것이 아니라 미국의 부흥운동 등의 영향을 받으면서 곁가지가 함께 들어온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굉장한 지적인 전통들을 가지고 있는데 오늘날의 복음주의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공부하지 않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바로 목사가 되는 그런 전통을 열어 놓은 것입니다. 거기에다 18세기, 19세기 이후에 자유주의 신학이 들어오면서 확고한 사상의 체계를 가지고 기독교를 가르치고 배우는 풍조들이 약화되기 시작하다가 20세기 상대주의나 실존주의가 들어오면서 이런 전통들이 마구 무너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중심으로만 사고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지적인 사상들을 가르치는 것을 교회가 경시하게 되었고, 또 목회자들의 자질은 현저히 떨어지고, 교인들도 그런 일에 관심을 가지려고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내려오는 전통은 세례문답입니다. 그런 전통이 아직 남아있지만 매우 약화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지성적인 삶을 지탱할 수 있는 지에 대한 철저한 이해”는 사상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지성적인 삶이라는 것은 사상입니다. 사상은 하나님, 세계, 인간, 자연과의 관계, 곧 그것들은 어떻게 서로 연관을 맺고 있는지, 또 내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이며, 어떤 삶을 살아야 되는지를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은 내가 어떤 존재가 되기를 원하시며, 지금 “나”라고 하는 존재와 하나님이 되기를 원하시는 존재 사이에는 차이가 있는지 없는지, 있다면 무슨 차이가 있는지, 그렇다면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것들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 ‘사상’이 필요한 것입니다. 모든 것이 관계 속의 질문입니다. 그래서 신학을 조금 공부하고 교리를 이해하고 나면 아주 오래 전에 구역장에게, 혹은 목사에게, 혹은 전도사에게 던졌던 질문들이 얼마나 유치찬란한 질문이었는지를 금방 깨닫게 됩니다. 그런 질문들은 무시해도 좋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질문을 던진 그 사람에게는 그 질문이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이지만 (정작 사상이 없다보니) 기독교인이 되어서 교회도 열심히 다니고 금식도 하는데도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신천지에서 제일 잘하는 말걸기 기술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요새 무슨 어려운 일 있어?”입니다. 마치 자기가 모든 것을 직관하는 것처럼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젯밤에 내가 꿈을 꾸었는데 그대가 나타나서 굉장히 힘들어하는 꿈을 꾸었어. 무슨 일 있어?”라고 합니다. 무슨 일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제가 20대 때에 회심하기 전에 손금을 조금 봤습니다. 관련 공부를 좀 했습니다. 그리고 사실 회심한 후에도 사람들의 손금을 조금 봐 주었습니다. 그런데 돈을 받고 봐주지는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군부대에서 내가 손금 보는 방위병이라고 소문이 나서 헌병대장이 나를 불렀습니다. 너무 황당했습니다. 헌병대장이 자기 손을 보여주며 손금을 볼 수 있겠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쩌다보니 대령까지 손금을 봐 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도 요령이 있는 것을 아십니까? 손금을 딱 보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정말 고생 많이 하셨네요.” 라고 하면 모두가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들 모두가 일제 강점기나 6.25를 겪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에게는 항상 무슨 일이 있는 것입니다.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 “어려운 일 있어?”라는 질문에 확 끌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줏대가 없습니다. 판단력이 없습니다. 자신 안에 어떤 사상의 체계가 없는 사람은 그렇게 말을 건네는 사람에게 확 쏠리면서 ‘오! 뭔가를 아는구나!’ 하면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상대방이 자신의 문제 가운데 한두 가지를 알아 맞추는데 (그것을 두고 또 신기하다 생각합니다). (이런 일이 미국의 어느 사이비 집단의 집회에서도 있었답니다). 미국의 어떤 목사가 집회를 하면서 한 성도에게 말하기를, “네 남편이 지금 당뇨병에 걸렸구나.”하며 알아맞췄는데, 어떻게 알았나 했더니 그 사이비 집단에서 활동하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귀에 무전기를 꼽고 기도하는 사람 옆으로 다니다가 사람들의 기도 내용을 듣고 집회를 인도하는 목사에게 무전기로 일일이 알려주었다는 것입니다. 그걸 듣고 그 사람한테 가서, “네 남편 당뇨병…”하고 이야기하면 자지러지는 것입니다. 그게 자지러질 일입니까?
그런 것에 확 끌리는 것은 기독교인으로서 구역질나는 비참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가 있으면 하나님 앞에 나아가 내게 문제가 있다고 아뢰고, 그 어려움을 말씀으로 극복하며 이겨내고, 필요하면 목회자를 찾아가서 모르는 것이 있다면 물어보고 헤쳐 나가면 될 일을, 누군가가 “너 어려운 일 있니?”라고 물으면 가슴이 우르르 무너져 내리거나 “내가 너를 꿈에서 봤는데”하면 또 우르르 무너지는, 혹은 “너 집 팔려고 내놨지?” 하면 단번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미혹의 영에 흔들리는 것입니다. 창피하지 않습니까? 신앙을 논하기 전에 그것은 한 인간으로서 수치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주체성이 없는 삶입니다.
제가 가을사경회를 준비하면서 둘째 날인지 셋째 날 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십자가와 그 용기”라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여러분이 상상할 수 없는 본문에서 그 주제를 끌어냈습니다. 그것은 현실과 직면할 수 있는 용기가 목숨이 붙어있는 한 살아있어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피가 도는 한 그 용기가 살아있어야 합니다. 그게 없는 사람은 산 것이 아니고 그가 사는 삶은 자기 삶이 아닌 것입니다. 남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힘들다고 놓아 버리면 퍼져버립니다. 그런데 도대체 누가 대신 우리 삶을 살아줍니까? 숨넘어가는 그 순간까지 그 삶을 살아가야할 주체는 자기 자신입니다. 남이 살아주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안 살 수가 있습니까? 살아있는데 어떻게 안 살 수가 있습니까? 죽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자기 배에 칼을 꽂는 것도 자기가 결정해야 할 삶입니다. 그걸 하라는 게 아니라 주체적인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둘도 없는 찌질이가 자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것도 혼자 죽을 용기가 없으니까 인터넷에 “같이 죽을 사람 모여라!”하고 “손목 끊기 동호회”로 모여서 함께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찌질한 사람이 있는데 누군지 아십니까? 그렇게 함께 자살한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 있어서는 그래도 용기 있는 사람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의 삶을 끝장내야겠다고 선택을 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죽은 자처럼 끌려 다니면서 그냥 사는 사람들은 더 찌질한 사람들입니다. 그게 뭡니까? 인간으로 태어나서 자존심이 상하지 않습니까? 살 힘이 없다고, 마주하는 현실이 너무 힘들다고 인정합니다. 그래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 살아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손목도 못 끊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자살하라는 이야기가 아닌 건 잘 아시지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런 잘못된 용기를 내시면 안 됩니다. 손목도 못 끊고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채로 이리 저리 그냥 끌려 다니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게 진짜 잘못된 삶이라는 것에 동의하십니까? 왜 대답을 하지 않으십니까? 동의하십니까?
그러면 그것을 신앙생활에 적용해 보십시오. 믿을 것입니까? 안 믿을 것입니까? 저는 그 옛날 제가 참으로 용감했다고 생각합니다. 14살 2개월에 “신은 없다. 있다고 해도 상관없다. 나는 그냥 내 갈 길을 간다. 무신론자의 길을 선택하겠다.” 하고 (마음에) 칼을 꽂고 하나님이 살아있다고 해도 상관없다고 하고 내 길을 갔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로) 나중에 회심하고 돌아왔지만 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등지고) 가라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이 스스로 용기를 가지고 “하나님은 없다. 신앙생활은 가짜다.”하고 칼을 꽂고 돌아서든지, 아니면 주체적으로 자기 신앙생활을 해 나가든지 해야 할 것 아닙니까? 살아야 합니다. 왜? 우리는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똑같이 우리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왜? 믿으니까 말입니다. 단순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살지 않는 것은) 세상에 둘도 없는 찌질이 같은 삶입니다. 그리고는 치덕치덕 남한테 기대면서 맨날 남에게 상처받았다는 이야기나 힘들다는 이야기나 하면서 평생을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요행히 그 사람의 명이 길어서 110세를 살았다고 해도 자기 인생은 10년도 살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삶입니까? 예수를 믿는 것은 바로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설교시간에도 표현하지 않는 열분을 이 시간에 왜 이렇게 내는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돌아가서) 개혁된 기독교의 통합적인 지성을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은 누굴까? 하나님과 세계는 어떤 관계일까? 하나님은 인간들은 어떤 관계일까? 인간은 자연과 어떤 관계일까?’를 생각해야합니다. 특히 오늘날은 자연에 대해서 여태까지 마구 파괴하면서 살아왔는데 이제는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전 세계에 어디가든지 이 자연의 문제는 너무 심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통합적인 모든 관계를 다 규정하다 보면 이론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아, 하나님이 이런 분이구나.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셨구나. 하나님이 이 모든 것들을 돌보고 계시구나. 하나님은 인류를 사랑하시는구나. 인류는 서로 사랑하라고 창조하셨구나. 인간은 자연을 이용하는 것이지 파괴하라고 주신 것은 아니구나. 착취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구나.”하면서 이론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이런 이론의 토대 위에 실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삶이 안정적이게 됩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로 하여금 그렇게 살아가도록 기초를 제공해 주는 것이 “성경”입니다. 성경의 빛 아래에서 그런 관계를 정하면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배우는 것입니다.
청계산 쪽으로 산책을 하다보니까 어느 날 커다란 플래카드가 붙어있었는데 그 중에 어떤 구호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눈에 딱 들어왔습니다. “사자의 울부짖는 소리에도 놀라지 않는 삶” 그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존재의 울림이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기본입니다. 그것은 가치를 찾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본이었습니다. 선비가 될 때, 입문하면서 다짐하는 것이 목숨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대의를 위해서 “아니오.” 하고 죽을 수 있게 말입니다. “사도 세자” 영화에서 보셨을 것입니다. 거기에서 죽음을 당한 자들이 선비들입니다. 무엇입니까? 가치가, 곧 사상이 그렇게 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독교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삶을 모든 사람이 동의해 줄 리가 없습니다.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모두 다 동의해 줄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최소한 내가 왜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지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진리의 빛 아래에서 그런 사상을 가지고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입니다. (세상과) 부딪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이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승복을 하지 않는다면 서로 싸우다가 주님 앞에 가서 누가 맞고 틀린지 심판받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신앙을 가지고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입니다. 잘못했다면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고 다시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진리의 아름다움과 의로움을 창조의 목적에 맞도록 증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나게 하는 일,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살아야 합니다. 왜? 살아있으니까 그렇습니다. 신앙생활 해야 합니다. 왜? 믿고 있으니까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명제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다른 길이 있다면 대답을 한 번 해 보십시오. 다른 길이 있습니까? 다른 길이라고 해봐야 첫째는 살아있는 사람이니 죽는 것일 것이고, 둘째는 신앙을 버리고 배교하는 것일 텐데 참된 신자라면 결코 배교할 수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살아나가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3분단, 2번을 읽어보십시오.
문제 2) “승려와 목사”의 일화를 읽으면서 받았던 인상은 무엇입니까? 이 일화에 대한 자신의 또 다른 생각이나 해석이 있다면 발표해 봅시다.
다 읽으셨을 것입니다. 그 일은 본관 리노베이션 하기 전에 2층에서 있었던 일인데 잊을 수가 없습니다. 죽을 때까지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 불신자인 기자의 눈에 스님은 철학자로 비쳤고 목사는 비즈니스맨으로 비친 것입니다. 나누어 보십시오. 이것은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보여준 것입니다. 불교는 진짜 교리 공부를 열심히 합니다. 모든 불교신자들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마치 기독교도 그런 것처럼 말입니다. 청계산 올라가면서 한 번 보십시오. “토요 교리학교”, “여름철 집중 교리학교” 맨날 그런 공부를 합니다. 그렇게 끝없이 계속되는 교리 강론을 듣는 것입니다. 물론 TV에서 보니까 조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개신교에도 조는 사람은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계속 그렇게 배웁니다. 불교방송을 보면 계속 교리가 나옵니다. 결국은 많은 종교들이 명료하게 그 사상에 기초해서 살아가려고 합니다. 심지어 신천지도 그렇게 합니다. 여러분에게 혹시 “요새 힘든 일이 있어요?”하고 물으면 무시해버리십시오. “힘든 일이 있다. 그러나 너한테 기댈 정도로 힘들지는 않다.”라고 당당하게 말하십시오. 물론 구역장에게 그렇게 이야기하면 섭섭하다고 할 것입니다. 신천지에게 가서 그렇게 이야기하십시오.
1분단, 3번을 읽겠습니다.
문제 3) 불신자들의 윤리의 근원과 신자의 윤리의 원천이 어떻게 다릅니까? 그 윤리는 무엇에 의해 완성되는지 자신이 받았던 은혜의 경험을 토대로 나누어 봅시다.
서로 나누어 보십시오. 여기 세상 사람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의 윤리는 자기 사랑의 이성적인 확장입니다. 그러한 자기 사랑이 윤리를 만들어 냅니다. 윤리가 후발적입니다. 그래서 그 윤리는 당연히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도덕도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이조시대에는 동성애하면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동성애를 반대하면 안 되는 때가 올지도 모릅니다. 무슨 상관이 있냐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반대하며 고집하는 사람 자체를 아주 속 좁은 사람으로 받아들입니다. 이런 문제를 어떻게 극복해야하겠습니까? 우리가 동성애하는 사람들을 테러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한편으로는, 사상적으로 그것이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최선을 다해서 설득하고 그런 것에 사람들이 빠지지 않도록 교육을 하고 많이 돌봐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과 함께 더 중요한 것은 이성애자로서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남녀가 가정을 이루며 살아도 정말 행복할 수 있다는 것, 단 한 번도 그런 동성애에 빠질 유혹을 느끼지 못하면서도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게 가장 훌륭한 변증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동성애의 길로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냥 자기네들이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뿐입니다. 그러나 인류의 3분의 2가 동성애에 찬성투표를 하고 동성애의 길을 가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은 기뻐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반드시 그 뒤에는 그에 따르는 결과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지상에서 해결되지 않으면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그들이 죽은 후에라도 해결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어쩌면 동성애자가 아니고 이성애자인데도 이성을 사랑하면서 단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다면 그에게 그 사랑은 설득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성과 연애를 하고 살아보면 모든 문제를 극복하고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경우에는 진리에 대한 체계가 먼저 있습니다. 사상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 아니라 사상이 먼저 있고 그 사상에서 윤리가 나옵니다. 그 윤리를 실천 가능하도록 사랑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감화를 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윤리는 자기사랑의 이성적 확장에서 윤리가 나오는 것이기에) 주관적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윤리는 진리에 대한 지식의 체계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객관적입니다. 전자는 주관적인 것에서 객관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것이고, 후자는 객관적인 것에서 주관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올바르지 않은 일인데도 다들 그렇게 행하니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그의 책『신국론』에서 두 나라가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세상나라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세상나라는 중심은 “나”라는 존재입니다. 문제는 “내”가 하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도 “나”이고, “저”도 “나”이고 “나”도 “나”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것이 동심원을 그리면서 바깥으로 계속 넓어지려고 합니다. 왜 사람들이 그렇게 미친듯이 돈을 벌려고 합니까? 우리 같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돈을 벌어야 노후에도 먹고 살고, 이렇게 고달프지도 않고 겨울에 춥지 않게 살 수 있지 않느냐, 아프면 병원도 가야하고”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기에는 충분한 돈을 벌어 놓은 사람들은 왜 그렇게 미친듯이 탈세하면서 계속 부를 축적하겠습니까? 나이가 들어서 죽을 때가 다 되었는데도 계속 그렇게 해서 재산을 넓혀가다가 죽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결국 이것은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질서에 복종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개인회사를 다녀보지 않아서 잘 모릅니다. 누군가 이야기하기를 그룹의 회장은 옛날 중국의 황제가 가진 권력을 누린다고 합니다. 불가능한 것이 없이 모든 것을 다 한다고 합니다. 그게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이겠습니까? 여기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내가 원하는 질서대로 다 움직여주는 것입니다. “일어서!” 하면 다 일어납니다. “날 위해 봉사해!” 하면 봉사합니다. 그게 물결처럼 퍼져나갑니다. 많으면 많을수록 얼마나 신나겠습니까? 그러면서 그것을 자기 자신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원이 있고 힘이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어디 물질 뿐이겠습니까?) 모든 사람을 물욕으로만 굴복시키지는 않습니다. 돈으로, 명성으로, 권력으로, 무엇으로든지 그렇게 하고 마는 것입니다.
2부 예배 때에만 이야기했는데 마르틴 루터의 품으로 수도원에서 도망 나온 수녀들이 많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을 하나씩 다 시집보내고 나니 끝까지 시집 안 가고 남아있는 폰 보라가 결국은 루터와 결혼했습니다. 어쩌면 예쁘게 생긴 사람의 순서대로 결혼을 다 시키고 그녀는 마지막에 남았을지도 모릅니다. 초상화를 보면 생긴 것이 별로입니다. 믿음은 좋았을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그 정도의 외모의 자매들은 우리 교회에도 많습니다. 확실한 것 하나는 (예쁜 자매들은 자신의) 미모로 많은 형제들을 자신의 질서 속에 있게 만듭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의 딸이 있는데 너무 예쁩니다. 남자들 사이에서 교주로 불린답니다. 목사님 딸을 교주로 부르는 것은 좀 그렇습니다만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미모라고 하는 질서의 물결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돈도 그렇고, 권력도 그렇고 모두 그 아래로 들어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나가 아니라 수없이 많은 “나”로 질서 지워진 동심원들이 퍼져나가다가 결국 충돌을 합니다. 충돌을 하면 두 가지를 선택하게 되는데 충돌을 하면서 생기는 손해와 고통이 다른 사람과 충돌을 해서 그 사람을 지배하는 것보다 크다고 생각되면 거기서 멈추는 것입니다. (그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나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거기까지는 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국경선처럼 생겨나서 서로를 인정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조폭들이 경계선을 긋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힘이 더 강해지면 그것을 계속해서 지배하면서 물결처럼 뻗어나가고자 합니다. 마지막으로 자기가 하나님 같은 존재가 되고 싶은 것입니다. 끊임없이 이런 자기 사랑이 있기 때문에 세상나라도 평화를 추구하고 하나님 나라도 평화를 추구합니다. 그런데 세상 나라에서 이 평화는 성취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자기사랑이 끊임없이 부딪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각자의 자기 사랑이 아닌)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이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한 번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해서 그분께 온전히 순종하면서 살아갑니까? 아닙니다. (틈만 나면 자기사랑이라는) 자기 깃발을 세우고 확장을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회개를 합니다. 그러면 그 깃발을 꺾습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자기 깃발을 세워서 돈도 모으고 자기 힘도 펼치고 그 사랑이 하나님과 부딪치면 하나님과도 한 번 맞장 떠보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한순간에 이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회개를 하면서 그 깃발을 꺾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이 질서의 파문을 포기하고 주님의 그 사랑의 질서의 파문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삶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 그리고 나에게 무엇을 하라고 명령하시는지를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이것을 이렇게 그렸습니다. 여기 끝이 창조가 있고, 저기 끝에 종말이 있다면 세상나라는 우리 눈에 볼 수 있도록 멸망으로 가고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는 세상 역사가 아니라 밑에 가려진 구속사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나라로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나라는 종말까지 공존하며 있습니다. 이 두 나라는 끊임없이 다투고 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나라를 볼 때에 두 가지 균형잡힌 생각을 하여야 합니다. 하나는 두 나라는 대립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나라는 우리나라와 화합할 수 없습니다. 기본정신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가져야 할 생각은 그 나라를 언젠가는 변화될 나라로 보고 사랑하는 것, 이 두 생각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윤리적인 삶은 도덕 자체를 추구한 결과가 아닙니다. 예전에는 “인간의 도리가 아니야.”라고 말들을 했지만 요즘 젊은이들은 “도리는 없습니다.”고 말합니다. 마땅히 우리 모든 인류가 따라야 할 도리라는 것은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상대주의 정신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윤리적인 삶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따르는 결과입니다. 말씀과 성령에 의한 영적인 변화의 결과입니다.
문제 4를 읽겠습니다.
문제 4) 헤라클레이토스는 “인간의 성격이 그의 운명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를 통해 느끼게 된 점이나 자신의 삶에서의 경험이 있으면 나누어 봅시다.
이것을 실감할 때가 정말 많습니다. 그렇게 많은 일을 겪고 예배 시간에 박수도 치고 뜨겁게 찬양을 했는데도 원래 그 천성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운명처럼 느낄 때가 많습니다. 헤라클레이토스라는 희랍의 철학자가 이미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 사람은 B.C 540년에서 480년 사이에 살았던 사람이었고 그리스 사상가입니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중요한 철학자입니다. 난해한 문체를 써서 “어두운 철학자”가 그의 별명입니다. 만물의 근원을 불이라고 보았습니다. 불이라고 해서 펄펄 붙는 불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뜨거운 성질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물은 습한 성질로 보았습니다. 일종의 원소 개념인데 그런 것들이 어떻게 조합을 하느냐에 따라 만물이 정해진다고 본 것입니다. 그런데 한의학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 개념으로 물질의 근원을 추적했던 철학자입니다. 대립물의 충돌과 조화, 다원성과 통일성의 긴밀한 관계, 그리고 그것들을 관통하고 있는 어떤 사물을 움직이는 원리로서의 로고스에 관심을 가진 철학자였습니다. 이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예술과 사상이라는 책에서 인용한 구절인데, 여기서 나오는 “다이몬(δαίμων)”이란 말은 귀신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보통 쓰는 말로, “귀신같이 잘 안다”고 하는 것처럼 인간으로 하여금 그런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그런 운명 같은 것들을 “다이몬”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인간의 성격은 그를 어떤 길로 가게 만드는 귀신과 같은 것이다.” 이것을 의역을 하면 “그의 성격은 운명이다.”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도덕적 필연성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남의 물건을 훔치기를 좋아하는 성품이 깊이 배어있는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지 훔칩니다. 아주 부자들도 이런 도벽을 가지고 있어서 물건을 훔치다가 걸립니다. 그것은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필연성이라는 것은, 사전적인 의미는 “사물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성질”입니다. 예를 들어서 물건을 위에서 놓으면 아래로 떨어진다든지 물을 비탈진 곳에 쏟으면 높은 데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식처럼 말입니다. 이런 것들이 필연성입니다. 사물이나 사건 사이에 피할 수 없는 인과관계입니다. 이 필연성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자연적 필연성, 도덕적 필연성, 논리적 필연성으로 나뉩니다. 자연적 필연성은 자연의 성질이 그렇기 때문에 피할 수 없이 그렇게 되는 것이고, 논리적인 필연성은 논리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런 결론이 나오는 것이고, 도덕적 필연성은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필연성입니다. 나의 어떤 도덕적 성향이 워낙 강하면 그 성향대로 그 사람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나쁜 성향이 계속해서 변화되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향을 갖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성화의 목표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것을 나도 하기 싫은 사람이 되는 것,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을 나도 그렇게 하고 싶은, 그래서 자연스러운 행동이 되는 것, 그런 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성화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성화는 선한 도덕적 필연성을 우리 안에 함양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예를 들어서, 물건을 훔치지 않고 사는 사람이 훌륭합니까? 훔치지 못하는 사람이 훌륭합니까? 다시 질문하겠습니다. 사람을 수시로 죽이고 싶은데 못 죽이고 참는 사람이 훌륭합니까, 아니면 아예 그런 것을 꿈꿔 본 적이 없고 피가 조금 흐르는 것을 봐도 너무 마음이 힘들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해코지 할 수 없는 사람이 훌륭합니까?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후자입니다. 후자가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게 중요한 것입니다. 성화는 그런 사람이 되어가도록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면에서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이야기를 인정할 수 있지만, 그것이 절대적이지 않다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아멘이십니까? 그래야만 여러분이나 저나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도덕적 필연성은 악을 행하며 살려고 하는 정서적인 성향, 올바른 것을 따라 살려고 하는 지성의 인식, 이 두 가지가 서로 충돌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살고 싶은 것은 악한 삶입니다. 그런데 지성은 나에게 그렇게 살지 말라고 명합니다. 그럴 때가 바로 어거스틴이 이야기하는 “자기갈등”이 시작되는 지점입니다. 자기모순이 나오는 것입니다. 생각으로는 옳은 것을 선택해도 실제 행동으로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결국 마음과 영혼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깨뜨려지고,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회개하고 주님을 더 사랑하면서 자기 자신이 고쳐져 나가야 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그럴 수 있다고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새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거룩한 삶을 위한 신자의 투쟁이 바로 여기서 나옵니다. 새 성품과 옛 성품이 신자 안에 같이 있는데 새 성품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질서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따라 살려고 합니다. 옛 성품은 자기를 주인삼은 질서에 집착하고자 하고 다시 거기로 회귀, 돌아가려고 합니다. 이것들이 서로 갈등을 일으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성도들과 교제하면서 훌륭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 계속 자극을 받아 은혜가 함양되면 새 성품 쪽이 이기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자라도 반대의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할 필요성이 여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마지막 5번입니다. 모두 같이 읽겠습니다.
문제 5) “교회를 보존하시는 하나님”을 읽으면서 기독교 사상의 중요성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느끼고 생각하게 된 바를 말해 봅시다.
구역원들에게 말해보게 하시고 설명을 하십시오. 기독교의 힘은 두 가지라고 했습니다. 하도 반복해서 외우셨을 것입니다. 사상의 힘과 윤리의 힘입니다. 이것이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에 실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힘입니다. 전도는 이런 힘으로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가장 맨 처음 해야 하는 기본적인 방법 중에 하나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두가 아닙니다. 가장 중심이지만 그게 모두는 아닙니다. 그래서 선교지의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인 후에는 빨리 그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가 받아들인 복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게 하고 하나님, 세계, 인간, 자연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지를 파악하게 하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성경의 진리를 세상에 전파해야 하고 진리가 아닌 사상으로부터 공격받는 그 진리를 파수해야 합니다. 성경과 신학뿐만 아니라 다른 학문들도 탐구하고 세상의 사조들과 능히 싸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사상의 힘을 발휘하는 방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전통적으로 하는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가 학자들을 길러내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교회를 방어해주는, 말하자면 첨단무기와 같은 존재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어떤 군사전문가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인데, 전투기 한 대, 그것도 약 1500억 정도 되는 F15 같은 전투기 한 대가 땅에서 총을 들고 싸우는 군인 15000명과 맞먹는다고 본답니다. 그러니까 앞을 다투어서 어마어마한 돈을 주고 그 최신의 전투기를 사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예전에 일본에 쓰나미가 와서 이것저것 떠내려가는데 전투기가 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 대에 1500억 하는 비행기 말입니다. F22는 악세사리까지 포함해서 모두 4500억이라고 합니다. 일본에서 100대를 사겠다고 했는데 미국이 팔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무시무시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어도 이단 사상들과 옳지 않은 세상 사조들이 공격해 올 때 잘 훈련된 지식과 사상을 가지고 날카롭게 비평을 해서 그것들의 거짓을 드러내고 성도들이 쉽게 이해해서 그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하는 일들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목사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어마어마한 양의 공부와 사변, 그리고 학문의 능력을 필요로 하는데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그런 재능을 주시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15000명이 소총 하나씩 들고 벌떼처럼 몰려다닙니다. 그런데 저쪽에서 은빛을 반짝이는 전투기 한 대가 뜹니다. 그것을 15000명이 당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수십 킬로미터 위에서 미사일을 쏘는데 어떻게 당하겠습니까? 물론 그것만으로 모두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보병도 있어야 하고 포병도 있어야 하고 각자의 위치에서 싸울 군사들이 있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신학자들이 전도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에 아무리 최신의 전투기와 폭격기가 폭탄을 퍼부어도 그 땅을 차지하지는 못합니다. 차지하려면 소총을 든 육군들이 가서 적진을 정리하고, 포로는 체포해서 가두고, 저항하는 적들은 사살해서 승리의 깃발을 꽂고, 모두 정리해서 행정팀에게 넘겨주어야전쟁은 끝이 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첨단 무기는 엄청나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교회가 모릅니다. 그리고 그 엄청난 돈을 쓸데없는 곳에 낭비하며 쓰는 것입니다.
한 5년 전쯤에 신학자들을 모아놓고 따끔하게 일침을 놓았습니다. 왜 신학자가 변증을 하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제가 신랄하게 비판을 했습니다. 그 다음날, 우리교회에도 자주 오셨고 지금은 은퇴하신 서철원 교수님이 전화를 했습니다. 그때까지는 그분을 잘 몰랐습니다. “김 목사님”, “네, 누구십니까?”, “서철원 교수입니다.”, “아, 네. 교수님께서 웬일로 전화를 다 하셨습니까?”, “저는 태어나서 어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제가 많이 회개했습니다. 교수로서…” 제가 왜 변증을 하지 않느냐고, 신학교 교수들과 신학자는 진리를 변증하다가 수없는 화살과 공격에 맞아서 장엄하게 죽는 것을 영광으로 알아야 한다고 비판했기 때문입니다. 과거 교회 전통에 “독토 에클레시아”(doctores ecclesiae), 곧 교회박사들이 있었습니다. (진리에 대해) 충분히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세상을 향해서 변증하면서 교회를 보호할 수 있도록 첨단 무기처럼 길러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교회가 신학 교수들을 굉장히 무시합니다. 옛날에는 떠받들었는지 몰라도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무시합니다. 그리고 소중한 줄을 모릅니다. 그러니까 교수들도 자기들의 고유한 일에 자신의 혼신의 힘을 쏟으면서 변증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단과 싸우면 소송비를 교수에게 내라고 하니까 누가 그 진리를 이야기하겠습니까? 오늘 제가 왜 이렇게 열분을 토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거의 끝나갑니다.
우리의 헌신 하나에 지상교회의 존재 유무가 달렸다는 생각은 교만입니다. 왜요?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이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이 아니면 교회가 안 될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붙드십니다. 세상의 구원의 완성을 위해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셨고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세워진 교회는 영원합니다. 교회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영원한 계획이 담겨있습니다.
마지막 이번 주 기도제목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따라 살아가는 참된 신자들이 되게 하소서.” 성화입니다. 그 다음, “세상을 밝게 비추는 조국교회가 되도록 은혜를 주옵소서.” 은혜입니다. 그 다음, “말씀사경회”. 세 가지를 위해서 기도하고 내일부터 시작되는 사경회에 구역장, 순장들이 모본을 보이십시오. 집회에 꼬박꼬박 참석하면서 얼마나 따뜻하게 격려하느냐에 따라서 구역원들이 나오고 안 나오고가 정해집니다. 인터넷에 올라오면 나중에 본다고 하면 안 됩니다. 생각 같아서는 사경회는 인터넷에 올리지 말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마시고 현장에 나와서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잘 타일러서 오게 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