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 제15과
녹취자: 원수연
15과 <불변하는 진리와 신학>입니다.
가운데 분단 먼저 문제 1번을 읽읍시다. 시작.
문제 1) “진리의 위대함은 질서를 부여하는 데 있다.”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각자 자기 의견을 말해봅시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은 그 속에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얘기하는 진리가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기독교에서는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진리라는 말을 잘 안 쓰는 경향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것은 크게 두 가지 영향 때문인 듯 한데 하나는, 진리라고 하는 것 자체는 하나의 거대한 체계인데 그런 체계에 대한 가르침이 분명하지 않으니까 진리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굉장히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두 번째는 진리라는 말을 사용할 때 사람들은 흔히 이 진리를 철학에서 찾는 진리 혹은 그 옛날 종교에서 찾는 진리와 혼돈할까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두려우면 아무 것도 쓸 말이 없습니다. ‘복’이라는 말도 샤머니즘에서 이야기하는 복과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복이 얼마나 다릅니까? 진리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그 단어를 사용하면 됩니다.
이 진리의 위대함이 어디에 있습니까? 진리가 오늘 당장 우리에게 떡을 주고 돈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피터 릴백 총장님이 성경에 대해서 이야기하셨는데, 기독교에서 성경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질서를 부여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리는 (존재와 가치에) 질서를 부여하는 데 그 위대함이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 (구역에서) 한번 얘기해보세요. 서로 나눠보십시오.
(진리가 그 속에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 안팎에 있는 모든 것들이) 모두 뒤섞여 혼란스럽습니다. 정돈이 안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어떤 특별한 원칙이란 없습니다. 일부러 뒤섞어 놓은 것입니다. (하지만 진리가 들어오게 되면) 그 모든 것들은 쫙 정돈이 됩니다. 진리가 이런 역할을 합니다. 그림을 다시 보여드릴게요. (진리가 없을 때에는) 이렇게 혼란스럽습니다. 진리를 몰랐을 때는 자신의 삶에 일어나는 사건, 사람, 심지어는 나 자신이 누구인가, 세계가 무엇인가와 같은 것들이 다 혼란스럽습니다. 그러다가 진리가 딱 비치면 아주 또렷하게 인간, 자연, 세계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생겨나게 됩니다. 가지런하게 정돈이 됩니다. 둘 중 어느 것이 보기 좋습니까? 그것이 진리의 힘입니다.
이것을 좀 더 설명하면 진리는 인간으로 하여금 존재와 가치의 질서를 알게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질서란 어떤 존재가 더 상위의 존재인가, 어떤 존재가 하위에 있는 존재인가, 그보다 더 하위에 있는 존재는 무엇인가와 같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어떤 사람이 유산문제를 가지고 다투다가 아버지를 죽여 버렸습니다. 이때 그 사람 안에 어떤 혼란이 온 것입니까? 존재의 질서에 대한 혼란이 온 겁니다. 왜냐하면 가치의 질서 상 돈보다 사람이 먼저입니다. 돈보다 가족이 먼저입니다. 그런데 돈이 위로 올라가버린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인간은 불행은 바로 이렇게 질서가 전복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런 존재의 질서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은 인간보다 훨씬 더 위대한 힘을 가지고 계시고 이 세계를 당신의 뜻에 따라서 조직하시고 통치하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마땅히) 이러한 존재의 질서와 가치의 질서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면서 말하고 행동하고 자기의 길을 결정해야 합니다. 진리가 바로 그 일을 합니다. 다른 것은 할 수 없습니다.
사담 후세인이 멸망당하던 때를 기억하실 겁니다. 급습했던 곳에 후세인의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모두 죽었습니다. 군인들이 그곳을 급습하여 찾아낸 것들 중 놀라운 것들이 몇 있었습니다. 미국 달러가 약 1억불쯤 나왔고, 엄청나게 많은 비아그라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 기사를 보면서 인간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아무리 가진 것이 많고 높은 지위에 올라가도 이런 가치의 질서와 존재의 질서에 대한 올바른 생각이 없으면 그 사람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유교가 우리 사회를 지배했을 때, 유교의 부정적인 측면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사회가 무엇인가 정돈된 느낌 -물론 그 정돈이라는 것 속에서 압박 받고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은 충분히 인정하지만- 이 있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동의를 합니다. 그 느낌의 근거가 바로 거기에는 나름대로의 질서가 있었던 점입니다. 그 질서의 틀이 완벽하게 성경과 일치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나름대로의 질서가 있었습니다. 그런 사회가 아주 안정적으로 보이는 이유가 그런 데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회의 질서를 아주) 긍정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질서들이 있었다는 점을 말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삶이란 완전한 진리에 의해서 존재와 가치의 질서가 바르게 매겨진 속에서 안정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무엇이 더 중요한가, 무엇이 덜 중요한가, 무엇이 훨씬 더 상위에 있는 존재인가, 무엇이 우리 하위에 있는 존재인가와 같은 것들을 생각하면서 살아가게 만들어주는 것이 진리가 주는 힘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던 질서와 자기가 배운 질서의 차이를 깨닫게 됩니다. 자기가 생각하던 질서는 어떤 특정한 논리는 없지만 자기 속에서 이것은 1번, 저것은 2번, 이것은 3번, 저것은 4번이라고 순위를 매기며 그냥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어떻게 됩니까? 좌충우돌하면서 인생을 살게 됩니다.
(다행스럽게도 일반은총적으로) 사람이 점점 나이 먹으면서 철이 들어서 이런 질서가 어느 정도 생깁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엉터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게라도 질서가 생겨나니까 낫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은 혹시 이십대로 돌아가고 싶습니까? 원하시면 보내드릴게요. 하지만 저는 그렇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도 아주 확고하게 말입니다. 다시 한 번 인생을 살아보겠습니까? 저는 절대 사절입니다. 한 번이면 충분합니다. 다시 한 번 결혼할 수 있겠는가? 그것도 사절입니다. 한 번으로 충분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나이가 되니까 (인생에 대해) 이제 겨우 알겠는데, (또 다시 젊은이들이 겪는 혼란 속에서 사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이런 혼란을 정리해주는 것이 바로 진리의 힘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렇게 진리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진리의 핵심이 되고, 확고하게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책이기 때문에 우리가 중시하는 것입니다.
문제 2) 저자가 “역사적 문맥과 칼빈” 그리고 “『기독교강요』를 넘어서”에서 말하고 싶어 하는 요지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구역장(순장)의 설명을 들어봅시다. 그가 정리해 온 요약지를 보면서 이해를 되다집시다.
여러분들이 정리하겠습니까? 오늘 나눠준 자료들을 프린트해서 가져가겠지요. 구역에 가서 담임목사님이 정리하신 것을 들고 왔다 하지 말고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침묵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조용히 그냥 보여주십시오. 맨 처음부터 보여주지 말고 봉투에 넣어놨다가 짠하고 보여주는 겁니다.
종교개혁 1, 2세대가 있었습니다. 루터는 1세대에 속하고 칼빈은 2세대에 속합니다. 루터만 1세대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사람 말고도 많은 종교개혁자들이 1세대에 있습니다. 루터가 공식적으로 종교개혁을 일으켰지만 루터가 태어나기 100년 전 이미 얀 후스라든지 위클리프 같은 선구자들이 있었습니다. 가톨릭이 심각하게 기독교의 본질로부터 벗어나 있었기에 이것들을 올바르게 하는 가르침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이미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을 가리켜서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자라고 부릅니다. 쉽게 얘기하면 그들은 종교개혁 0세대입니다. 마르틴 루터를 기준으로 해서, 혹은 1517년 10월을 기준으로 해서 종교개혁이 일어난 그때를 기점으로 당시 활동하던 사람들을 1세대라고 부르는 겁니다.
내년에 종교개혁을 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내년에는 절대 가지 마십시오. 내년에는 거의 모든 호텔들이 예약이 되어 있고, 항공비부터 시작해서 모든 비용이 엄청나게 비싸고, 어마어마한 사람들로 붐비게 될 겁니다. 10월 달에는 말도 못 꺼낼 것입니다. 한해 지난 다음인 2019년도 즈음에 가시면 참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013년도에 우리 교회에서 종교개혁 여행을 다녀왔는데 은혜를 참 많이 받았습니다. (여행 전에 꼭 공부를 하고 가십시오) 공부를 한 다음에 가서 보시면 은혜를 많이 받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왜 가톨릭 교인이 아니고 개신교 교인인가, 왜 개신교 교인 중에서 개혁교리를 따르는 장로교회 교인이 되었는가 등을 되새기면 아주 좋을 거라 생각합니다. 돈은 벌어서 그런 곳에 쓰는 겁니다.
여하튼 (종교개혁 1. 2세대들은) 중세사상의 문제 요소들과 신학적 거리를 두었습니다. 그들은 폭넓은 의미에서 (보편성을 지향하였는데), 여기에는 중세교회도 있고, 그 이전에는 초대교회 교부들도 있고, 그 이전에는 속사도 교부들과 사도들이 있습니다. 이 종교 개혁가들은 이들과 아무 상관이 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 긴 전통의) 연장선상에서 쭉 이어온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는데, 중세시대에는 오류와 참된 진리들이 너무 많이 섞여있는 겁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교회가 올바른 길을 가지 못하고 이렇게 휘는 겁니다. 그래서 1, 2세대 종교개혁자들은 중세교회를 지탱해왔던 가톨릭의 근간을 이루는 사상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었습니다.
사실 사도들의 신앙을 계승하고 있는 교부들도 사도들의 비판과 성경의 비판을 받으면서 정통신앙을 구성하려 했듯이 종교개혁자들도 그런 연결을 계속 가지면서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입니다. (1, 2세대 종교개혁자들을 이은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들은) 개신교의 규범적이고 보편적인 특성을 조직적으로 수립하기 시작했고, 교부신학과 중세신학의 요소들을 사용해서 풍성한 신학의 유산이 되게끔 만들었습니다. (이같은 사실은 우리가) 신학을 공부할 때에도 (명심해야 하는데) 종교개혁의 대의가 무엇인지를 깊이 공부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가능하게 했던 보편교회의 뿌리들을 함께 공부해야만 개혁주의 유산을 훨씬 더 풍성하게 할 수 있습니다.
화면에 보이는 이 사람이 바로 여러분들이 잘 아는 존 칼빈이고, 그 옆에 있는 책이 그가 집필한『기독교강요』입니다. 이 책은 지난 천년동안에 인류역사에 영향을 준 열권의 책 가운데 하나가 될 정도로 엄청난 영향력을 가졌습니다. 마지막 판본은 꽤 두껍지만 초창기에 나온 판본들은 그리 두껍지도 않은 책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책이 미친 영향은 책의 두께보다 훨씬 더 큰 것이었습니다. 이 책이 유럽사회 전체를 뿌리 채 흔들어놓고, 오늘날 우리가 아는 유럽사회를 재형성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의『기독교강요』가 개혁주의의 유일한 기준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닙니다. 탁월한 책이고 우리들이 많이 공부해야 하는 자료임에는 틀림없습니다만 그 책이 전부는 아닙니다. 몇 해 전에는 이 책이 성화반(심화교리반)의 교재였습니다. 한주에 150페이지씩 읽으면서 공부를 했습니다. 이 책을 공부하는 올바른 연구방법은『기독교강요』를 태어나게 한 역사적인 배경과 학문적인 유산들을 함께 연구함으로써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칼빈의 신학은 결코 폐쇄적으로 구축된 것이 아닙니다. 칼빈은 그가 스물두 살 되던 해에 이미 유럽에서 최고의 지성인이 누구냐고 물으면 많은 사람들 중에 한 사람으로 거명이 될 수 있을 정도의 다양한 학문에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가 남긴 논문과 집필한 책들, 특별히 주석들은 그가 광범위한 영역에서 탁월한 학문의 세계를 접한 사람임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제가 제네바를 방문했을 때 깜짝 놀란 것이 있었는데, 칼빈은 지금으로부터 약 470년 전의 사람입니다. 그때에 스위스는 솔직히 변변한 사업 하나 없었고, 아무것도 할 게 없으니까 두 가지 사업에 종사하면서 사람들이 생계를 이어갔는데, 그중 하나가 여행자를 위한 사업이었습니다. 유럽 여행을 하려면 스위스 지방을 거쳐야하는데 산간지대에 여인숙 같은 것을 지어놓고 여행객들에게 여관업을 하면서 먹고 살았던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용병입니다. 농사는 지을 수 없는 환경이었고, 기골이 장대한 스위스 사람들은 용병을 자처했습니다. 아빠가 용병을 가서 돈을 벌어서 집에 부치면 그것을 가지고 가족이 먹고 살았던 겁니다.
그랬던 시대 칼빈이 무엇이라고 이야기했는 줄 아십니까? “우리 미래의 살 길을 공업화다.”라고 했답니다. 믿어지십니까? 저는 칼빈의 그 어록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500여년 전에 이미 그런 것들을 내다본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프랑스에서 개신교도들이 핍박을 많이 받았습니다. 위그노라고 하는데 이 사람들은 부르주아 계층이 많았습니다. 그중에서 특히 시계세공이나 금세공을 하는 사람들이 대거 스위스로 망명을 했는데, 그 당시 스위스는 개신교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엄마의 품과도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칼빈이 맨 처음 제네바에서 목회할 때에는 오천 명 정도 모였던 회중이 칼빈이 죽을 때쯤 되어서는 만 오천 명 정도가 매주일 모였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회중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서 스위스로 모인 겁니다. 그때에 그 부르조아 사람들이 스위스로 망명을 했고, 오늘날의 스위스 시계가 탄생한 것입니다. 스위스 시계가 유명하잖아요. (북한의) 김정은이 24억 짜리 손목시계를 사가지고 갔다는데 뭐하는 데 쓰는 시계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그런 시계들을 만들어내는 사업들이 발달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었습니다. (칼빈의 선견지명대로) 그런 아이디어와 이념을 가지고 로쉬 같은 제약회사나 많은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 기술집약적인 산업을 가지고 스위스는 세계에서 남부럽지 않은 선진 국가를 이루면서 살고 있습니다.
다른 신학자들과 교류하는 가운데 자신의 주장을 가늠하면서 확고히 해나갈 수 있었기에 개혁신학을 제대로 공부하려면 개혁신학이 아닌 것들도 공부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 한마디 하겠습니다. 요즘 신앙이 너무 세속화되니까 개혁주의를 외치는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개혁주의 자체가 폭이 넓습니다. 그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은 개혁주의 가운데 자기가 좋아하는 하나만을 택해서 그것이 아니면 나머지는 모두 교회가 아닌 것처럼 폭력적으로 나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보셨을 겁니다. 학자들은 이를 가리켜 소위 ‘네오퓨리타니즘’(neo-puritanism)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신청교도주의’라고 번역되는데, 이것은 건전한 신앙이 아닙니다. 이들에게는 보편교회에 대한 개념이 너무 없습니다. 기성교회에 대해서 아주 폭력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문제 3) “개혁신학의 뿌리를 공부함”을 읽고 느낀 점을 간단하게 말해봅시다. 한 항목씩 자기 의견을 이야기 해 봅시다.
어차피 장로교에서 자란 사람은 장로교 신학을 할 것입니다. 신학공부의 시작점은 자기 출발점이 분명히 있기 마련입니다. 아무런 출발점도 없이 뷔페식당처럼 기독교신학을 쫙 전개해놓고 네가 입맛에 맞는 것을 골라라고 하는 학교가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 학교도 알고 보면 대부분 자유주의를 선택한 학교들입니다. 거기도 자기 나름대로 입장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신학공부의 모든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역사적인 뿌리인 보편신학의 중요성을 함께 깨달아야 합니다.
이 그림을 보십시오. 구약의 선지자들이 있고 신약으로 넘어오면서 신약의 사도들로 이어집니다. 구약의 모세, 선지자들, 물론 모세가 선지자의 비조이지만, 시편의 기자들과 같은 사람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계시가 계속 주어지는 겁니다. 그것들이 신약성경으로 넘어오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고 사도들이 세워지면서 기독교 가르침이 증폭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남겨놓으신 그 말씀들을 제자들이 더 상세하게 설명하면서 기독교사상의 틀을 만들었고, 이단의 공격을 받으면서 교회가 무엇을 믿는가라는 입장을 분명히 하는 역사적인 전개과정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가 믿는 기독교교리 체계들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학의 보편성입니다.
(역으로) 뿌리에서부터 비롯된 많은 갈래들이 있습니다. 장로교, 감리교, 장로교 중에서도 우리는 개혁교단입니다. 우리나라에만 장로교가 256여개 정도의 인가 교단이 있다고 하니까 말입니다. 최태민도 그런 것들 중에 하나를 산 것이겠지요. 그래서 혹자들은 장로교가 회개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장로교가 제일 나쁜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물론 그런 면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사람의 심성에는 장로교가 딱 맞았던 것입니다. 우리 어렸을 때 시골을 생각해보십시오. 거기에는 항상 어른이 계십니다. 그래서 동네에서 무슨 일을 의논할 때도 젊은 아줌마 몇 사람이 결정하는 법이 없습니다. 항상 보고를 하면 노인들이 모여서 기다란 담뱃대를 물고 “그건 그렇게 하는 게 아니지.”하며 탁탁 두드리면서 의논을 해서 결론에 도달하는 겁니다. 이 체제가 조선시대부터 쭉 익숙해져온 겁니다. 그런데 같은 노인인데도 여자는 아무리 늙어도 거기에 안 끼워줍니다. 그래서인지 장로교의 그런 시스템들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던 겁니다. 그래서 성경에 대한 어떤 확신을 가지고 장로교를 선택한 교회들도 많이 있었지만 (사람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진 시스템이라 장로교를 선택한 교회도 많습니다). 엊그제 어떤 교단에 가서 집회를 했는데, 자신의 교단의 가르침을 그대로 유지하고 이름만 장로교로 바꿨으면 교회가 훨씬 더 부흥했을 것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럴 수도 있다.” 했습니다. 사람들이 너나할 것 없이 장로교가 아니면 나머지는 다 이단인 것처럼 생각하는 이상한 사람들도 나온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지금은 좀 덜 합니다. 옛날에 우리 어렸을 때는 그랬습니다. 교회를 하려면 장로교 간판을 걸고 해야지 그랬습니다. 장로교라는 말 자체가 어떤 신앙의 정통성을 보장해주는 용어처럼 되었기 때문에 너나 할 것 없이 이상한 사람들이 장로교 속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들이 장로교를 얼마나 좋아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정통교회 장로교 자체가 많은 문제가 있어서 수많은 교단을 만들어낸 것이라기보다는 앞서 말씀 드린 그런 측면이 더 많이 있어서 상승작용을 했기에 오늘날의 이런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로교인인 것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신앙을 고수해야 합니다.
(여담이 길었습니다). 신학을 함에 있어서 이렇게 수많은 갈래가 나올 거 아닙니까?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려고 할 때 자신은 어느 한 입장에 서 있게 될 것입니다. 감리교인 이면 감리교, 성결교인 이면 성결교, 장로교인 이면 장로교, 순복음교인 이면 순복음교에 서 있는 겁니다. 어차피 신학을 공부할 때는 그 입장에 서서 공부하는 것은 너무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그렇게 시작하지 않으면 단번에 점프해서 어디론가 갈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방대한 기독교의 자료들을 어떻게 읽을 것이며, 또 읽는다고 하더라도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어떻게 판단하겠습니까? 교회에서 배운 대로 이렇게 공부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에 있어서 ‘개별성’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학을 공부할 때 거기서 그치면 안 되고 어느 정도 공부를 하고 난 다음에는 신학의 뿌리, 보편교회의 신학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많은 교파들이 생겨나기 이전, 심지어 가톨릭이 생겨나기도 전에 있었던 신학의 뿌리인 보편교회의 교부들 말입니다. 사도들과 그 제자들이었던 속사도교부들, 어거스틴이나 이레나이우스나 테르툴리아누스와 같은 초대 교부들, 그리고 중세시대의 신학자들을 거쳐 이 신학이 어떤 역사적인 과정을 거쳐서 자기가 믿는 신학으로 발전했는가를 같이 공부해야 됩니다. 그래서 신학 자체는 엄청나게 많은 양의 공부를 필요로 합니다.
미래의 교회는 신학교육을 잘 시켜야 됩니다. 그런데 신학교육을 공부만 시킨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또 다른 영적이고 신앙적인 요소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학교들은 기본적으로 우수한 학생들을 모집을 해서 그 학생들에게 수준 높은 신학교육을 시켜야 됩니다. “하나님이 아들 셋을 주시면 하나를 신학교 보내겠습니다.”라고 기도하시는 분들이 계시지요? 제일 똑똑한 놈을 보내십시오. 공부 못하는 애를 보내지 말고, 제일 똑똑하고 신앙이 좋은 아이를 보내라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렇게 묻겠지요? 세 아이가 있는데 한 아이는 공부를 되게 못하는데 신앙은 뜨겁고, 다른 한 아이는 공부는 잘하는데 신앙이 없다고 말입니다. 그러면 공부 잘하는 아이가 변화될 때까지 기다리십시오. 그 아이의 신앙도 뜨거워지게 만들어서 신학교를 보내십시오.
성경은 모든 지식의 중심입니다. 성경이 중심에 있고 그 다음 원이 신학이고, 그 다음 원이 일반학문입니다. 이렇게 신학을 공부해나가는 겁니다. 신학을 공부하는 원리가 어떻게 됩니까? 맨 처음 출발을 성경에서 하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가 능력이 되는 것만큼 성경을 공부하고, 성경을 공부하면서 성경 주변의 신학을 공부하고, 신학을 공부하면서 연관 학문을 공부하고, 그것을 공부하면서 능력이 되면 예술과 문학과 같은 일반 학문들도 같이 공부하면서 지식의 폭을 점점 더 넓혀야 됩니다. 그 대신 항상 성경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이 폭이 넓으면 넓을수록 많은 사람들에게 호소력이 있는 가르침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리하자면) 여기 보편교회의 신학이 있습니다. 사도들 이후 그들의 제자들인 속사도교부들, 초대교회 교부들- 초대교부들의 마지막 지점에 서 있는 사람이 어거스틴입니다-, 그리고 중세로 넘어와서 중세 신학자들의 신학이 그것입니다. 여기에는 당연히 오류가 있었습니다. 어디인들 오류가 안 섞였겠습니까? 예수님의 가르침과 성경 이외에는 오류가 섞일 수밖에 없습니다. 일반적인 면에서 보면 사도들에게 가까이 갈수록 오류가 비교적 적고 순수했었는데 시대를 거쳐 내려오면서 오류가 많아집니다. 초대교회 때만 해도 굉장히 혼란스러운 교리들이 생겨났습니다. 플라톤주의 같은 철학에 영향을 받아서 성경을 이상하게 해석함으로써 신비철학같이 되어버린 그런 가르침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 오류들도 분명 있었지만 그 속에서 성경과 부합하는 요소들이 보편교회 신학의 뿌리가 된 것입니다.
보편교회의 신학을 받아들이면서 14세기 이후의 신학자들(르네상스 이후), 종교개혁자들, 개신교 정통주의자들이 등장하게 되고 17세기에서 18세기 초반까지 이어집니다. 이런 것들이 전부 다 아우러지면서 개신교 신학이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공부할 양이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그런데 신학생들이 공부를 안 합니다. 그게 참 문제입니다. 경제적인 어려움도 물론 있지만 기본적으로 신학을 공부할 수 있는 역량이 되는 사람들이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어야 하는데 신학에 점점 더 매력을 못 느끼니까 안 오는 겁니다. 그래서 학생들의 질이 자꾸 떨어집니다. 이것이 요즘 기도제목입니다. 지원자 자체가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이 문장을 한번 보십시오). “개혁신학의 아름다움은 개혁신학이 아닌 것들을 공부함으로써 더욱 아름답게 다가온다.” 개혁신학을 알고 확고하게 자기 입장을 세운 다음에는 개혁신학이 아닌 것들을 공부할 때 개혁신학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는 것을 보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신학만이 아니라 문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 고등부 학생들이 카프가의『변신』을 함께 공부하면서 아주 놀라운 눈빛으로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훨씬 성숙하다는 생각 말입니다. 어쩌면 어른들보다 훨씬 더 고민을 많이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것을 이끌어낼 수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아이들과 함께 토론할 수 있는 상대로 아이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 부모의 중요한 조건입니다. 너무 소외감 느끼지 마시고 카프카의『변신』을 한번 읽어보십시오. 한 두 시간이면 다 읽을 수 있는 얇은 책입니다. 읽어보시면서 아이들과 토론도 해보고 그러십시오.
이 모든 것들을 고려해 볼 때 목회자가 이렇게 많이 공부하고 준비되어야지만 교회가 풍성해진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지성적이고, 영적이고, 실천적인 유산을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합니다. 먼저 지성적인 유산은 많이 공부를 해야 됩니다. 진리의 내용을 일단 알고 있어야 되잖아요. 그 다음에 영적으로 주님을 깊이 만나고 은혜를 받은 사람이어야 하고, 그 다음에 삶에 있어서 실천이 뒤따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삶을 살다가 그 유산을 후세대에게 물려주는 겁니다. 그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래서 신학자, 신학생, 신학활동이 너무 중요합니다. 요즘은 신학자를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줄을 잘 모릅니다. 옛날에는 중요한 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사람들이 정말이지 신학자가 되고 싶어 했습니다. 목사님들이 교회에서 받는 대우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연세 드신 노신학자 한 분이 들어오면 목사님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날 정도로 존경을 받았습니다. 신학자의 수가 워낙 적었던 시대였고, 당시에 외국에서 5년, 7년, 10년씩 공부를 하고 온다는 것 자체가 우리나라에서는 진짜 희소했던 일이었기 때문에 더 그랬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별로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이런 풍토가 잘못된 것입니다.
신학자들을 교회에서 잘 길러내야 하는데, 모든 사람이 다 신학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중에서 사람들을 잘 가려서 길러내야 할 필요도 있을 것입니다. 외국의 신학교 가서 보면 외국 신학생들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국 신학생들은 만나보면 10명 중 8명은 안 와도 좋을 학생들입니다. 두 명 정도는 그래도 잘 온 학생들입니다. 그러한 학생들을 잘 격려해서 좋은 신앙생활을 하도록 돕고, 훌륭한 신학으로 무장시켜서 선교무대에서 활동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이냐면 축구를 할 때에 수비를 완벽하게 잘한다고 해서 이길 수는 없습니다. 최고로 잘한다고 해도 무승부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살골 넣기나 기다려야겠지요. (그래서 공격력도 길러야 합니다). 목회자들, 전도자들, 선교사들을 축구 선수에 비하자면 드리블해서 슛을 쏘는 골게터들입니다. 하지만 전문적인 수비수가 반드시 필요한데, 그 사람들이 바로 신학자입니다.
몇 년 전에 신학자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학회에 저를 초청해서 설교를 해 달라고 요청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마음을 주셔서 15분의 설교를 했는데 신학자들을 꾸짖었습니다. 아주 심하게 말입니다. 왜 당신들은 변증을 안 하냐고 말입니다. 말하자면, 수비수 역할을 해야 되잖아요. 교회가 이단들에게 위협을 받거나 올바르지 않은 주장들로 인해 정통 기독교신앙이 혼란스럽게 될 때 “그것은 아니다.”라고 막았어야 합니다. 온몸을 던져서 말입니다. 그 일을 하라고 교회가 끊임없이 도와서 신학공부를 시키고 -물론 그렇게 도와준 교회도 별로 없다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무장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우리 교회에서 주최하는 세미나에서도 소위 바울의 새관점(New perspective)이라는 주제를 다룹니다. 기존의 정통신앙을 굉장히 많이 훼손하는 바울에 대한 새로운 해석들이 나옵니다. 그것들을 방어하는 그런 세미나를 하는 겁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가 해야 될 일들입니다. 너무너무 중요한 겁니다. 교회가 만약 이런 활동을 하지 않으면 다음 세대에는 기껏해야 꽹과리나 치면서 전도하는 그러한 날품팔이 같은 부흥사들만 만들어내는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부흥사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기 쉽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균형이 필요합니다. 지적인 전통과 이런 것들을 잘 이해하는 신학자들이 있고, 목회자들이 있고, 성도들이 있고, 모두가 균형을 이루며 교회가 교회 나름대로의 모습을 갖추어나가는 것입니다. 신학생들을 잘 돕고 신학활동들을 잘 지원해서 그 사람들이 교회의 충분한 사랑 속에서 신학을 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 심는 마음으로 이를 표현합니다.
여러해 전에 미국에 있는 사우스웨스턴이라는 신학교에 갔었습니다. 노스웨스턴, 사우스웨스턴 대학이 모두 침례교 계통의 신학교인데 엄청 감동을 받았습니다. 사실 침례교의 가르침은 장로교의 가르침과 다릅니다. 그런데 한국 학생들이 거기 엄청나게 모여 있는 겁니다. 그래서 왜 그런가 알아보았더니 한국 학생이 그 신학교에 지원을 해서 입학허가서가 나오면 “김 아무개가 다음 학기에 유학을 온다더라”고 명단이 그 교단의 교회로 넘어갑니다. 그 교단 소속 교회가 그것을 받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된 김 아무개라는 한국 학생이 우리 교단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러 온다고 그러더라.” “언제 온다고 그러냐?” “2월 28일 도착한다고 그러더라.”고 정보를 나누면서 교회 내 환영위원회가 조직이 됩니다. 그리고는 방부터 시작을 해서 세탁기, 냉장고 등 세간살이를 갖추어 주는데 새로 사주는 건 아니고 자기네 집에서 쓰다가 바꿀 때 된 것들을 챙겨 주어서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그리고는 “돈 걱정 마라. 우리 교회에서 너 졸업할 때까지 지원해줄게.”라고 하면서 생활비도 지원한다고 합니다. 미국전역에 그렇게 해주는 교단이 거의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니까 (타 교단 유학생들이) 신학적인 차이점들은 알아서 조정을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교리하고 직접적으로 연결이 덜 되는 교회사나 실천신학이나 교육학 등을 공부하면서 한국 교회에서 전혀 받아보지 못했던 사랑을 받으면서 공부를 한다고 합니다.
한국 학생들이 300명 정도 모여 있었습니다. 한 신학교에 말입니다. 특강을 해달라고 해서 갔는데 거기 교수님도 몇 분 오셨습니다. 특강을 마치고 나니 새벽기도까지 해줄 수 있냐는 겁니다. 그래서 저야 피곤해도 되지만 너희들이 나올 수 있겠냐고 그랬더니 그 새벽에 미국에 있는 한국 신학생들이 120여 명이나 모였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그 새벽에 캄캄한데 말입니다. 사모님들은 애들까지 다 들쳐 업고 온 겁니다. 그 학교와 교단을 너무 좋아하는 겁니다. 너무 부끄러운 마음이 들더라구요. 장로교단에서 자라난 자녀들인데 장로교단에서는 못 받은 사랑을 다른 곳에서 받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자기 집에서 찬밥이던 애들이 동네 아저씨 집에 놀러갔는데 너무 잘 해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호적을 옮길까도 생각을 하는 겁니다. 씁쓸했습니다.
문제 4) 신학공부의 유익 네 가지를 열거하고 그것들을 평신도인 우리에게 적용해 봅시다. 실제로 신학공부를 통해 어떤 식으로 유익을 얻게 되었는지에 초점을 맞춰 그 적용을 말해봅시다.
이제는 신나가 끝나갈 쯤 됐으니까 신학공부라는 것이 목사 되기 위해서 신학교에서 하는 커리큘럼이 아니라는 것은 이해하시겠지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배우는 모든 우리의 마음의 활동, 우리의 온 삶의 활동을 가리켜서 신학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구역원들로) 말하게 해 보십시오.
(신학공부는 첫째로, 목회사역의 풍성함을 얻게 합니다). 자, 여기 성경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성경을 목회자가 깨닫고 은혜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받은 깨달음을 가지고 다시 성경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목회자가 성경을 보는데 그는 신학을 공부하긴 했지만 신학교 때 살짝 하고 안 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그 정도의 크기의 신학적 지식을 가지고 성경을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공부를 많이 했고 지금도 계속해서 공부를 하는 목회자가 성경을 봅니다. 그는 그만큼 더 커다란 안목을 가지고 성경을 보는 겁니다. 그래서 그에게서는 훨씬 더 풍성한 해석이 나옵니다. 그렇게 나온 해석을 가지고 다시 성경을 보는 겁니다. (이렇게 계속 순환하게 됨으로써 목회사역이 풍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대한 이해는 신학의 내용과 깊이, 하나님의 속성들의 체험에 비례하는 것입니다. 후자가 은혜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거라면 전자는 지식의 깊이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잘 이해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풍성하게 전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을 길러내야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신학적 판단의 정확함이 생깁니다. 그런 신학적 지식을 갖게 될 때 올바른 지식이 갖춰지게 되고, 여기에 용기를 더하게 될 때 정확한 판단과 함께 정확한 삶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용기가 없으면 판단을 못하는 것일까요? 판단은 할 수 있는데 말이나 행동으로 표현은 못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너무 희생이 크니까 그러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셋째로, 신학공부를 하면서 현대인들과 현대의 사상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져야된다는 것입니다. 간략하게 요약하면 중세시대에는 신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습니다. 르네상스 이후에는 인간에 대해 관심이 많았습니다. 근대 이후에는 이성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 겁니다. 그러다가 낭만주의 이후에는 인간의 감정에 대해서 관심이 많습니다. 지금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는 욕망, 내면의 심리, 이런 것에 훨씬 관심이 많은 것입니다. 사람들이 굉장히 모순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분출하는 것이 (어떤 면에 있어서는) 정신건강에 좋겠지만 그냥 그 속에 있는 것을 확 분출하라는 부추깁니다. 예전에는 절대적인 존재를 신뢰했고, 이에 대한 반발로 인간을, 특별히 인간의 이성을 믿을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사회를 건설해봤더니 1,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겁니다. 두 전쟁을 통해 전 인류가 완전히 파멸에 이를 정도로 어마어마한 타격을 입으면서 그 참상을 본 겁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회의가 생기기 시작한 겁니다. 인간의 이성이라는 것이 도대체 과연 신뢰할 만한 것인가? 그러면 신에게로 돌아가야 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로 돌아가지는 않습니다. 왜? 이미 하나님에 대한 관심은 떠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현대가 도래되면서 이성 자체에 대한 회의를 느끼는 그런 시대가 온 겁니다. 그 사이 17-18세기에 바로 낭만주의라는 것이 일어나는 겁니다.
이렇듯 신자들과 전도 대상자들은 현대 사상으로부터 영향 받은 세계관을 가지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드라마가 엄청난 인기몰이를 하면서 뜨는가? 그리고 한 15년 전쯤에 뜨던 작가들이 왜 오늘은 사라지고 있는가? 왜 그렇게 열광하던 작품들이 이제는 안 읽히고 있는가? 우리가 볼 때는 말도 안 되는 작품들이 사람들에게 그렇게 열광을 가져오는가? 이런 것들의 뒤를 캐 들어가면 거기에는 거대한 세계관이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것을 모릅니다. 그러니까 그냥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냥 유행을 따라서 살아가는 겁니다. 그렇지만 그 뒤에는 사상을 움직이는 놀라운 기재들이 그 안에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우리들이 현 사태를 해석할 때 우리는 완전히 다른 시각에서 보는 겁니다.
현대의 문화에 대해 우리들은 재밌으니까, 좋으니까 막 따라갑니다. 마치 애들이 자기 몸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고 불량식품 사먹듯이 말입니다. 먹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먹으면서도 이게 도대체 무엇일까 하고 객관적으로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몸에 좋지 않은 무엇인가를 찾아내면 가려서 비평적으로 보는 겁니다. 드라마나 영화 같은 것도 막 빠져들듯이 보지 말고 감시하러 온 사람처럼 가끔 뒤로 물러서서 봐야 합니다. “아, 감동이야.”라고 느껴지면 도대체 그 감동이 어디서 온 건가, 그것은 정당한 것인가, 하는 것들을 생각하면서 배워나갈 때 현대인과 소통할 수 있는 이해력이 생겨나게 됩니다. 오전에 설교할 때도 잠깐 말씀드렸지만 고등학교 학생들이 두 시간 가까운 동안 실존주의 문학가인 카프카에 대한 나의 해석에 그렇게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오랫동안 하품도 하지 않고 귀를 기울여 주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정말 놀라웠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내가 약속하마. 한 번 더 (강의하러) 오마.” 그랬더니 애들이 “와!” 그랬습니다. “한 번 더 오마.”라는 나의 말을 별로 안 믿는 표정이었습니다만 말예요.
(넷째로, 설교의 신학적 깊이와 실천적 적실성입니다). 신학은 설교에 신학 사상을 불어넣어 교인들이 기독교 사상을 갖게 하는 건데, 이게 바로 성경적인 신학 사상입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자기주관적인 사상이 아닙니다. 가끔 보면 어떤 교파에서는 성경만 읽게 하고 아무것도 못 읽게 하는 교파가 있습니다. 그 교파는 성경은 안 읽는 교파 만큼이나 똑같이 위험합니다. 대부분 이단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성경 이외에 모든 것을 못 읽게 하는 교파는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을 못 읽게 하는 종교하고 비슷합니다. 그래서 굉장히 위험합니다. 공부와 자기반성, 현대인에 대한 이해, 이런 것들을 기독교적인 가르침의 적실성을 높이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교리적으로 엄마, 아빠가 잘 정리돼서 어느 날 카프카의 『변신』을 아들하고 딸하고 같이 읽고 밥상머리에 앉아서 카프카에 대한 해석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아이들이 거기서 충격을 받으면서 ‘야, 우리 엄마가 가방 들고 전도만 다니는 줄 알았더니 굉장하구나. 결국은 우리 엄마가 이렇게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 하는 것이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생각의 토대가 있고 그것이 카프카의 『변신』에서 나오는 사상보다는 훨씬 믿을만하다.’ 그런 인상을 자녀에게 갖게 할 때, 그것이 바로 엄마, 아빠가 주는 존재의 아우라라는 것입니다. 아우라 있는 사람들은 손 한번 들어보십시오.
문제 5) 오늘은 17주간의 모임을 통해 신나를 신나게 마친 날입니다. 한 권의 책을 오래도록 공부한 소감을 제일 최근에 구역(순)에 들어온 순서대로 말해봅시다.
얘기를 나누고 끝내면 됩니다.
이번 주 기도제목은 이것입니다. 조국교회에 진리에 붙잡힌 목회자들을 세워주시도록, 신학공부의 유익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도록, 마른 뼈와 같은 우리에게 말씀의 은혜를 부어주시기를, 이 세 가지를 놓고 기도합시다. 목회자, 성도, 말씀의 은혜, 세 가지를 위해서 우리 기도하겠습니다. 이제 우리 교회는 기도할 때마다 언어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세요. 자,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