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 제 0 과
녹취자: 김경애
오늘부터 ‘신학공부, 나는 이렇게 해왔다.’ 약칭해서 ‘신나’를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공과를 보면 이상하게 1과부터 나가지 않고 0과부터 나갑니다. 0과는 확 뛰어서 중간에 421쪽으로 건너뛰어서 거기부터 시작하는 이유는 ‘신학공부 나는 이렇게 해왔다.’를 공부해야하는데 도대체 신학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우리들이 개념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개념부터 먼저 정리를 하고 그리고 1과부터 들어가게 됩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신학이란 무엇인가 427쪽에 나오는 12장이 전부 다가 아니라 중간부터 들어가서 ‘신학이란 무엇인가’ 라는 핵심을 먼저 찌르고 후반부까지 공부한 다음에 앞으로 다시 와서 0과를 처리하고 1과부터 시작해서 교과에 나오는 1과부터 차례대로 합니다. 그러다가 중간에 13장에 가서 너무 내용이 방대해서 내용을 두과로 쪼개어서 모두 17과로 끝내게 되는데 그래서 12장 신학이란 무엇인가? 의 뒷부분은 0과에서 공부를 하고 앞부분에 나오는 내용을 다시 정당하게 12과에서 더 공부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여러분들이 책을 한번 혹은 두 번 이상 읽고 왔을 것입니다. 아닙니까? 저자인 나도 여러 번을 읽었고 오늘도 부담이 되어서 오후에 한 번 더 읽고 왔는데 여러분들이 이 책을 공과를 가르치기 전에 최소한 3번을 읽어야합니다. 그래서 전체의 흐름을 머리에 두고 이 공과를 진행해야지만 여러분들이 공과를 진행할 수 있습니다. 공과를 진행할 때에는 항상 일반적인 공과 진행요령을 먼저 여러분들이 익혀야합니다. 첫 번째가 뭐냐 하면 절대로 너무 많이 가르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래서 사람들이 말을 하지 않으려고 하더라도 조금 기다리면 결국 말을 하는데 인도자가 그것을 못 기다리고 자기가 막 계속 말을 하면서 퍼붓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무 효과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지 말고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게끔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 ‘아니요’ 라고 대답하게 하지 말고 뭔가 한 문장이라도 대답할 수 있는 것으로 물어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공과공부를 할 때 발표를 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위해서 어떤 질문을 할 것인가를 미리 적으면 좋습니다. 그것까지 적어서 사람들에게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마음에서 말하고 싶은 것을 이끌어내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공과공부를 하다가 사람들이 하도 빗나가는 이야기를 많이 할 때에는 이렇게 하면 좋습니다. 적절하게 은혜롭게 끊을 수 있으면 좋고 도저히 안 끊어질 것 같으면 ‘끝나고 나서 1분 시간을 드릴 테니까 지금은 계속 가자.’ 그러면 자존심이 덜 상합니다. 끝나고 나서 나중에 1분을 줍니다. 그리고 하다가보면 시간을 준다고 그러고 잊어버립니다. 넘어가도 됩니다. 어쨌든 커다란 라인에서 갑니다. 또 다른 의견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하고 사람들을 포용하면서 구역장이 이끌고자 하는 대로 이끌어가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이것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확고히 숙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아직 못 읽으셨으면 한과, 한과를 읽으면 자기도 가보지 않은 산에 100m씩 가보고 가이드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빨리 들어가서 쭉 읽어보고 제가 보기에는 일주일이면 다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빨리 후루룩 읽어서 무슨 이야기인지 대충 개념을 잡고 그 다음에 한과를 두 번 내지 세 번 정도 읽고 그래서 이해를 한 다음에 책 전체의 내용을 가지고 공과를 나가야합니다. 그러면 구역원들이 말을 하면 ‘그것은 11과에 나옵니다. 나중에 이야기합시다.’ 그렇게 모임을 이끌어 가시면 됩니다.
저는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들에게 책 한권 한권을 상세하게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다음 주부터 두 번 이상씩 읽고 왔다고 치고 아주 핵심적인 것만 짚고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보겠습니다. 0과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살게 하는 공부 이것이 신학이다. 신학이 결국은 하나님을 향해 살게 하는 공부라는 것입니다. 문제 1번이 나옵니다. 제가 철저하게 이번 강의에서는 문제를 중심으로 강의를 하겠습니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1. 진정한 의미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 다음 신학을 공부하는 목적을 가장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 이것을 위해서 신학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하게 살기위해서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향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결국은 인간이라는 존재는 설명이 안 됩니다. 그래서 제가 이 책을 쓰면서 알고 있던 내용이지만 정리를 하면서 사실 14년 2개월 정확히 말하면 14살 조금 넘은 아이가 우리나라 나이 15살 때 논둑에 엎드려서 통곡하던 제일 큰 무서운 질문이 무엇이냐 하면 나는 누구인가? 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알고 보면 사실 그것은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물어도 누군가가 대답해줄 수 없는 그런 질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영국의 사상가 체스터 판이라는 인물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 대답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분이라고 했습니다. 왜? 인간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는 인간 존재에 대한 의미의 규정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빙산 그 자체가 우리나라의 2배 반이나 되는 커다란 빙산이 떨어져 돌아다닙니다. 거기에 서 있으면 대륙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그 자체도 움직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우리 인간의 존재의 의미를 국가에서 찾고, 아니면 민족에서 찾고, 조상에게서 찾고, 인간의 본성에서 찾고, 아니면 자연에서 찾고, 도에서 찾지만 마지막에 캐 들어가면 그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모두 불분명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대답은 무엇이냐 하면 인격적인 하나님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와 교통할 수 있고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천억이 넘는 인류가 이 세상에 살았다는데 그들 중 누구와도 닮지 않은, 똑같지 않은 나라는 존재를 창조하셔서 어떤 사람에 비하면 내가 열등감을 느끼고 어떤 사람에 비하면 그렇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을 의미 있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인간은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하나님을 향해서 살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살기는 삽니다. 그런데 자기 인생을 하나님을 향한다는 목표가 없습니다. 그리고 가는 그 길이 인간은 끊임없이 불안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놀랍게도 실존철학에서 최대로 많이 다루는 단어가 자유와 불안입니다. 자유롭게 된다는 것은 불안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이데거가 무시무시한 자유라고 이야기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인간 존재는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 그것이 없이는 인간 존재가 어떤 식으로든지 규정되지 않는 것입니다.
자, 이것에 대해서 다음 화면을 넘기면 페트루스 판 마스트리히트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이 사람은 오스트리아 대학의 교수였고 1630년에서 1706년을 살았던 사람이니까 이 사람이 죽으면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태어나게 되었던 그런 시기쯤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한 세기 앞에 있던 사람이고 이 사람이 쓴 책 가운데 이 옆에 있는 책이 있습니다. 라틴어로 된 책인데 ‘Theoretico-Practica Theologia’이 있습니다. 이런 것까지 구역 원들에게 가르쳐줄 필요가 없다는 것은 여러분이 아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이니까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론실천신학’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이 조나단 에드워즈가 이 세상에서 자기가 읽은 책 중 성경 다음으로 가장 탁월한 책이라고 극찬을 했던 책입니다. 그 책이 두 권으로 되어있는데 한권의 두께가 500페이지 될 정도의 두 권의 책으로 되어있습니다. 제가 저 책을 구하기 위해서 2년 동안 찾았습니다. 못 구했고 하나를 찾아냈는데 어느 전공하는 교수가 그것을 사갔습니다. 돈을 굉장히 많이 주고 사갔습니다. 결국 나는 놓쳤는데 그래서 나중에는 서적상에게 그것을 구해달라고 특별히 부탁을 하고 2년을 기다렸는데 못 구했는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제가 화란에 갔을 때 고서점에 들어갔는데 그 앞에 저 책이 딱 있어서 샀습니다. 꽤 비싸게 샀습니다. 그러나 내가 지불할 각오를 했던 금액보다는 1/2가격에 샀으니까 꽤 싸게 산 것입니다. 이 책에서 페트루스 판 마스트리히트가 아주 결정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교리란? 여기서 교리라는 것은 우리가 교리반에서 배우는 그것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 그러니까 삶의 지혜로써 진리가 무엇인가를 아는 지식입니다. 그 지식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향해 살기위한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신학을 공부하는 목적은 결국은 하나님을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인생사용 설명서가 신학이 되는 것입니다. 그 신학의 가장 중심적인 신학의 재료가 바로 성경입니다. 그 사실만 기억하면 됩니다.
요약하겠습니다. 신학이란 하나님을 향하여 살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향해 살기위해서 우리는 신학을 공부하는데 신학의 중심적인 교재는 성경이라는 것입니다. 1번 문제입니다. 1번 문제를 조금만 보충해드리겠습니다. 뒤로 넘어가면 조나단 에드워즈가 ‘하나님의 진리에 관한 철저한 지식의 중요성과 유익’이라는 설교가 있는데 부흥과 개혁사에서 얇은 책으로 나옵니다. 기회가 되면 2,500원짜리를 사서 전체를 읽어보면 유익할 것입니다. 이것을 가르칠 때 빨리 구해놓으시면 좋습니다. 거기서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신학은 보통 하나님을 향한 삶의 교리라고 정의된다. 좀 더 정확하게는 신학이란 그리스도에 의한 하나님을 향한 삶의 교리라고 정의된다. 신학은 예수님 안에 있는 기독교의 모든 교리를 포괄하며 그리스도에 의한 하나님을 향한 삶 가운데 우리를 인도하는 기독교의 모든 규칙들을 포괄한다. 신학 안에는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삶 곧 그리스도에 의한 하나님을 향한 삶 우리의 삶과 이렇게 저렇게 관련되지 않은 어떤 교리도 어떤 약속도 어떤 규칙도 없다. 그러니까 결국은 하나님에 대해서 안다. 어떤 지식이 있다. 이것은 곧바로 우리의 삶과 직접적인 연관성을 가집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현혹되지 말아야할 것이 무엇이냐 하면 공부만 하고 머리만 커지고 삶이 없으면 어떻게 하느냐고하는데 지식과 삶이 양분된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의 통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만약에 실제로 머리가 너무 큰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주위에서 누가 너무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데 신앙이 거의 없는 사람 있습니까? 누가 그런지 데리고 와 보십시오. 없습니다. 그런 변명들은 대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나의 경험에 의하면 그런 우려 즉 공부를 너무 많이 신학을 공부하기 때문에 머리만 커지는 것이 아닌가하는 사람들은 대개 머리가 작은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 다음 장면을 보겠습니다. 오늘 공부의 결론을 내리면 다 잊어버렸어도 이것만 기억하시면 됩니다. 페트루스 판 마스트리히트 그리고 조나단 에드워즈는 마스트리히트를 이어서 설명했습니다. 여기에 그리스도가 나옵니다. 그리스도가 나오는데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사람이 들어온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이라고 표현했는데 저는 여기에다가 한 가지를 더 붙여서 삼위일체로써 신학을 설명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할 뿐만 아니라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다시 말하면 첫 번째 십자가 그림이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창조되었고 구원받았고 그리스도 통해서성화되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은혜를 받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향해 사는데 그런 삶을 위해서는 그 사람이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생활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그 다음에 교회와 가족이 아니라 모든 인간입니다. 모든 인간과 교회와 올바른 관계를 가지면서 하나님을 향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는 자기의 구원의 근거를 말한다면 성령 안에서는 그렇게 살 수 있는 능력을 공급받는 것을 의미하고 하나님을 향해서는 삶의 의미입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시면 됩니다. 다시 한 번 보시든지 지혜로우신 분은 스마트폰으로 찍어놓으면 좋을 것입니다. 찍어놓고 1번 문제의 결론이라는 것입니다.
2번 문제로 넘어가겠습니다. 같이 읽어봅시다. 원래 신학이라는 용어의 뜻은 거룩한 지혜에 관한 학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신학이라는 용어의 뜻과 어떻게 다른지 나누어봅시다. 이것은 먼저 사람들에게 한번 원래의 신학이라는 용어의 뜻은 거룩한 지혜인데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신학이라는 용어는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봅시다. 2번 문제에 대해서 한번 편안한대로 답변을 해봅시다. 누가 대답해보시겠습니까? 일어서셔서 저쪽을 보시고 몇 교구 몇 구역의 누구라고 소개하십시오. 평소에 신학이라고 할 때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열린 교회에서 가르쳐준 것 말고 평소에 밖에 계실 때 신학이라고 하면 어떤 생각을 합니까? (답변: 일반적으로는 신들에 관한 학문이고 하나님에 관해서 배우는 학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신학공부는 누가 한다고 생각했습니까? (답변: 소명을 받은 자들이 한다고 생각합니다.) 강사가 원하는 답을 주셨습니다. 청년에게 기회를 주겠습니다. 안경 낀 청년이 대답해보십시오. 평소에 신학이라고 할 때 열린 교회에 오기 전에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답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고 목사님들이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본인은 교회에 가서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까? 공부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까? (답변: 예배를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공부도 하기는 하는데 일단 그것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메인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답으로 들어가 봅시다. 원래의 의미는 거룩한 지혜의 학문입니다. 여기서 거룩하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하나님께 기원을 둔, 혹은 하나님에 관한 뜻입니다. Divine 그래서 하나님의 지혜에 관한 학문, 혹은 거룩한 지혜에 관한 학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신학이라고 할 때 그 의미는 목회자가 되기 위한 코스로써의 전문교육과정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여기에서 공부하는 신학공부 나는 이렇게 했었다. 라든지 혹은 우리가 신학이라고 할 때는 아까 이야기한 도표에서 1번에 해당하는 말입니까? 2번에 해당되는 말입니까? 1번에 해당됩니다. 우리교회에서는 일단 신학공부라고 이야기했을 때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지혜에 관한 학문으로써 모든 그리스도인, 나아가서는 인류가 알아야할 하나님을 향해서 사는 지식으로써의 지혜를 이야기합니다. 이것을 공부하는 것이 성도의 도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것이 다른지를 보겠습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신앙은 인간으로 하여금 잘살게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참된 철학과 동일한 것으로 이해되어왔습니다. 그러면서 피에로 아도라는 프랑스 철학자가 나오고 이 사람이 쓴 삶의 방식으로써의 철학(아직 번역되지 않았습니다.) 이 책에서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합니다. 이보다 지문이 훨씬 더 깁니다. 꽤 오래 사시고 돌아가셨는데 이분이 아주 친숙하게 글을 쓰셨는데 여기에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청년 순장들만 읽어보겠습니다. 신앙을 하나의 철학으로 묘사하는 전통은 앞에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책에 보면 훨씬 더 긴 인용문이 나옵니다. 그 부분을 세밀하게 읽어보시면 논지가 무엇이냐 하면 맨 처음에 기독교 복음이 전해졌을 때 그 받아들이는 로마시대에 있었던 많은 사람들은 그 기독교의 가르침을 많은 철학중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단지 어떤 생각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생각과 지식을 전해주는데 놀랍게도 그것이 오늘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 것과 아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지식이었습니다. 그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기독교 신학을 철학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고 유대교에서 신학을 하던 방식 중에 상당부분이 유사했습니다. 그래서 아는 것과 사는 것이 일치를 이루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이제 역사를 추적하다보니까 이미 초대교회 교부들은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신학을 예수님의 철학, 그리스도의 철학이라고까지 이야기했습니다. 그들이 철학을 이야기할 때 이것은 인간의 이성 하나를 가지고 진리를 찾아간다는 뜻에서 철학이 아니라 이 철학이라는 말은 교회 밖에 있는 많은 사람들, 당시에 로마 문명 아래에 살아가고 있던 사람들에게 기독교가 무엇인지 기독교가 어떤 특정한 지식의 한 종류나 견해가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명한 가르침이 있고 그 가르침이 삶 전체의 방향을 결정하게 하는 통전적인 성질이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 용어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기독교의 전통은 처음부터 아는 것과 사는 것에 대한 고민이 하나였던 종교였습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전파된 지 얼마 안 되었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학문이 별로 없는 많은 평민들이 회심하고 기독교 복음을 굳게 붙들고 살았을 때에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서 어떤 존재의 울림을 느꼈던 이유가 아는 것과 사는 것에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방식의 신학 함이 사람들에게 충격이었고 도전이었던 것입니다.
그 다음을 보겠습니다. 철학이 나오는데 여기서 고전철학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오늘날의 철학은 관심사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이런 어떤 우주와 인간세계의 궁극적인 이치가 있고 그것의 바깥에 인간의 경험 바깥에 존재하는 어떤 진리라는 실체를 찾아가고 그것을 따라서 우리들이 인생의 질서들이 지어져야 된다는 사상들을 이미 철학에서 상실했습니다. 그래서 철학도 이미 상대주의가 물밀듯이 들어왔기 때문에 이런 것보다는 오히려 언어분석에 관심이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지금 여기서 다시 할 수 없고 ‘그리스도인이 빛으로 산다는 것은’ 에서 5과에 들어가서 철학에 들어온 상대주의를 여러분들이 이해를 하고 ‘세계화 사회에서 진리의 전달자로서의 신자의 역할’이라는 강의를 들어보시면 깨끗하게 정리가 되리라고 봅니다. 그 다음을 보겠습니다. 그런데 고전철학의 경우에는 그런 관심사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잘 살아야할 것인가? 그런 철학들을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유지되어옵니다. 여기에서 뭐냐 하면 우선 철학은 인간의 이성으로 하는 학문입니다. 신학은 이성도 사용되지만 그러나 신앙으로써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으로부터 말하자면 신학이 탐구되는 것입니다. 둘 다의 관심은 무엇이냐 하면 잘 사는 것입니다. 철학은 결국 하나님 없이 잘 사는 비결을 이야기하고 신학은 하나님 안에서 잘 사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철학자들이 하나님 없이 잘사는 것을 찾아내었느냐 하면 상당히 근접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기독교진리로부터는 멀지만 그러나 아주 담대한 학식 가운데 그 가치를 굳게 믿으며 걸어갔던 조선시대 선비 같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타종교에도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는 우리의 판단에 달린 것이 아니라 우리 이성의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진리를 의존하고 파악하고 진리를 찾아갈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아까 이야기한 신학이 똑같이 관심사가 잘사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런 점에서 고전철학과 신학이 유사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원리는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안에서’ 의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철학을 신학을 공부함에 있어서 필요하기 때문에 이용해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더 체계화시키고 이해하는데 도움을 받을 뿐입니다.
그 다음에 신학의 목적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해 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학공부의 목적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향하여 산다는 것은 우리가 의미 규정뿐만 아니라 실제로 삶의 방식까지 설정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인생의 참된 목적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많은 돈을 가지고 그것을 모으려고 몸부림칠 때에는 목표에 대해서 다 살고 나서 성취하고 나서 그 다음에는 자신의 삶의 목표를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허무에 대한 이야기를 굉장히 많이 듣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속에서 결국 신학의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하여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계시고 만약에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나의 인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틀림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를 만드셨고 내가 의미를 묻는 이 세계도 하나님에 의해서 그 의미가 규정될 것이고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하고 지으신 모든 목적이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많은 사물들을 보십시오. 이것은 악보를 보기위해서 만든 것입니다. 이것은 목소리를 크게 하기 위해서 이것은 글을 쓰기 위해서 혹은 어떤 지점을 가리키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것을 판단하고 인식하는 인간은 하나님이 무슨 목적으로 지으셨을까? 그리고 그런 인간들 속에서 누구와도 똑같지 않은 나는 여기에 왜 태어났을까? 이 존재를 설정하는 일은 어떻게 보면 사는 일보다도 더 급한 일입니다. 그래서 삶에 대한 진지한 생각과 행복의 추구는 의미규정을 반드시 따라가야 합니다. 의미를 묻고 가치를 묻고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행복이라고 생각할 때 이것은 완전히 주관적인 것은 아닙니다. 완전히 객관적인 것도 아닙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아무리 행복을 느껴도 강도짓을 하고 살인을 하고 폭행을 하고 사기를 치고 하면서 부를 축적하고 내가 티끌만한 양심의 부끄러움이 없이 완전한 행복을 느낀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행복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수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쳐주고 당신은 정말 위대한 사람이라고 해도 만약에 그 사람이 진정으로 자기 자신도 그것이 행복하다고 느끼지 않으면 주위 사람이 아무리 자기를 높게 평가해주어도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행복 안에는 완전히 주관적으로만 보면 안 된다는 것이 결국은 행복은 주관과 객관 사이에 걸쳐있고 뭔가 인간의 행복을 규정하기 위해서는 내 안에 있는 만족감뿐만 아니라 또 다른 어떤 객관적인 기준이 나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개혁신학에서 성경에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우리들이 행복해지는 것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일치를 이룬다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그 지점에서 인간이 행복하고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한 그 지점에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때 인간의 행복은 참된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두 개의 추구점이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인생의 제일가는 목적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를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한다는 것으로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그 다음에 다시 보겠습니다. 신약의 목적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잘 살게 하는 것이고 그 다음 신학의 임무는 인간이 어떻게 잘 살 수 있는지에 대해서 답을 주는 것이 신학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신학공부를 잘하면 남에게 상담 받을 일이 점점 없어집니다. 황당한 상담이 많습니다. 교회에서 목사님께 찾아가서 ‘북어탕 집을 할까요?’ ‘닭곰탕 집을 할까요?’ 목사님이 기도하고 대답해줍니다. 했는데 대박이 터졌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인데 목사님은 영험한 것입니다. 그런데 잘 안되었습니다. 자신에게 뭔가 허물이 있어서 하나님이 연단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누가 못하겠습니까? 그런 것은 목사의 임무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이 기도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문제 3번입니다. 읽어봅시다. 거룩한 지혜는 세계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의 계획과 관련됩니다. 구원은 범죄한 인간의 죄 때문에 창조목적에 어긋나게 살아가는 인간을 본래의 목적으로 돌이키기 위한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런 점에서 왜 복음이 그 지혜의 핵심이 되는지 깊이 생각해 봅시다. 진짜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428페이지부터 434페이지까지 6쪽을 찬찬히 읽어야지만 답이 나옵니다. 그렇게 보면 이런 답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이 인생의 지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핵심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압축하고 압축하면 복음으로 압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이 무엇입니까? 천지창조의 목적과 구원계획을 십자가 사건으로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 이것이 바로 지혜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죽으셨다는 것이 복음이지만 그러나 주관적으로 보면 그 복음이 한 사람 안에 들어와서 진정으로 그 사람을 변화시키게 되면 그 지식만 머리에 남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아야 되겠다고 하는 실천적인 성향들이 함께 심겨집니다. 그래서 한번 거듭나고 회심한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죄를 짓고 나쁜 상황에 처해도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을 사랑하고자하는 성향은 흐려지고 지워지고 강해지고 뚜렷해지기는 해도 결코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대개 교회에서 설교말씀이 선포될 때 혹은 기도할 때 옛날에 회개했던 사람들이 또 회개를 많이 합니다. 그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냐 하면 처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 회개가 정말로 놀라운 최초의 경험이지만 그러나 이미 회심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있기 때문에 복음의 성향이 그 안에 내재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돌이켜도 또 그렇게 복음으로 돌아가서 하나님 앞에 살고자하는 회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그 상황은 다 달라도 언제나 그 체험의 중심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것에 대한 현재적인 체험이 항상 갱신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회개의 경험입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겠습니다. 지혜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복음입니다. 십자가사건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창조의 목적과 구원의 계획을 함께 보는 것입니다. 뒤로는 창조의 목적을 보고 앞으로는 구원의 계획을 보는 것입니다. 그 렌즈의 역할을 복음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깊은 지식이 없는 사람들은 철학을 추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 말하는 이 신학은 아주 단순하고 어린 아이 같은 마음으로 복음을 믿기만 하면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기만 하면 많은 지식을 가졌지만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보다 하나님 앞에 훨씬 가치 있는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 다음에 보겠습니다. 신학이 추구하는 삶의 지혜의 핵심은 복음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장 27절과 2장 7절을 여러 번 읽어보고 줄을 쳐놓으십시오. 그리고 이 신학이 추구하는 삶의 지혜의 핵심이 복음이다. 그러니까 제일 먼저 신학이 무엇이라는 것을 통으로 배우려고 하지 말고 그 신학으로 들어가는 입구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 입구가 뭐냐 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와 그의 부활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기독교진리를 받아들이면서 신학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과 인간과 세계가 하나님이 누구시고 인간과 세계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하는 지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비로소 내가 비록 100년을 살지 못하고 가는 존재이지만 내가 무슨 이유로 살아남아서 이렇게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하는 것인지에 대한 답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 이치가 어떻게 되느냐하면 이렇게 설명됩니다. 모든 존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모든 존재의 근원은 하나님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 이외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것입니다. 이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자연 그대로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 인간의 가공을 거쳤습니다. 심지어 이것도 인간이 기른 것입니다. 그러나 자연에 가장 가깝습니다. 나머지 것들은 모두 인간이 자연에 산재하는 사물들을 조각하거나 깎으나 갈거나 가공해서 만든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사람에 의해서 가공된 것입니다. 원래는 과학자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과학자가 놀라운 과학기술을 이용해서 흙으로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말했습니다. ‘하나님 드디어 우리도 인간을 창조했습니다. 당신이 흙으로 만든 것처럼 우리도 흙으로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말이 ‘그 흙도 내 것이다. 진정으로 창조했다면 그 흙도 사용하지 마라.’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존재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모든 지식의 근원은 하나님의 관념이 아닙니까? 이런 것들이 있으면 이것을 제작한 사람이 관념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이것에 대한 지식입니다. 그러니까 사물이 있고나서 지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경우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경우는 사물의 지식이 먼저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먼저와 나중을 따지는 것은 웃기지만 논리적으로 하나님 안에 계획이 있고 그 계획이 시간과 공간속에서 실현되어서 온갖 사물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뭐냐 하면 사물의 존재의 의미는 사물 안에 없습니다. 이것은 밑줄을 쳐놓으셔야합니다. 어쨌든 사물의 존재의 의미는 사물 안에 없습니다.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아까 이야기했듯이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에 대해서 답을 할 수 없는 사람이 우리 엄마는 왜 존재하는가? 나를 먹이고 나를 기르고 양육하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은 엄마의 존재의 의미의 일부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기적인 자식들이 엄마를 그렇게 규정하고 자기는 그런 엄마로 살지 않습니다. 그것은 전체적인 규정이 아닙니다. 그러면 내 것을 모르는 것은 내가 도대체 누구인가? 만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 답이 명료해지면서 비로소 모든 세계의 의미의 빛깔들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아, 내가 이렇게 태어난 존재이구나!’ ‘이래서 내가 인간으로 수없이 괴로움을 겪으면서 살아도 내가 개나 돼지로 내어난 것보다 감사해야하는구나!’ ‘진짜 내일이며 삼겹살이 되어서 불판위에 올아 갈지도 모르는 운명보다는 내가 훨씬 낫구나!’ ‘그런 의미를 찾아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가!’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현대사회의 많은 사람들의 고민과 방황은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규정하지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왜 사느냐고 누군가가 물으면 김소월이 이야기했듯이 웃지 마십시오. 웃을 이유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왜 사는가?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도록 창조된 존재이기 때문에 사는 것입니다. 오스 기니스라는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아주 감동적입니다. ‘하나님 이외에 나에게는 잃을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고, 변명할 것도 없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똑바로 규정된 삶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 자신이 우리 삶의 이유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과의 관계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태까지 우리들이 배웠던 많은 교리와 내용들을 무지개처럼 쫙 펼쳐놓고 생각해보십시오.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이야기할 때도 고난을 어떻게 극복한다고 했습니까? 교회 속에서 ‘저 인간이 나에게 왜 그러지?’ 그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당하는 고난은 하나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물어보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시련을 당할 때도 똑같이 묻는 것입니다. 핍박을 당할 때도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나에게 원하지 않는 질병이나 죽음이 다가왔을 때에도 하나님을 향하여 의미를 묻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의미는 항상 규정됩니다. 그 의미를 향하여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고 불행해지기도 하고 행복해지기도 하는데 인생의 행복 자체는 그 의미를 찾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들을 굳게 붙들고 우리들이 다양한 삶의 사태들을 이기면서 오뚝이처럼 쓰러지지 않고 가는 것이 바로 신앙의 유익이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을 보겠습니다. 구원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과 인간이 무슨 관계에 있는지를 계시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시기까지도 우리를 구원할 가치가 있는 것 이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로 응축되어있는데 예수 죽음과 부활의 신학적인 의미에 대해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신학적인 의미에 대한 설교를 지난 부활절 때도 했습니다. 매년 빼놓지 않고 하는 설교입니다. 그것을 잘 들으면서 이런 것들을 정리해 놓으신다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 다음을 보겠습니다. 천상이 있고 지상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천상과 지상 사이에 우리 인간의 구속의 길을 여시고 그리고 인간으로 하여금 저 위에 있는 지구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와 밑에 있는 인간들 그리고 우측에 있는 자연세계와 올바른 관계를 맺으면서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아가게 하시는 것이 바로 복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시려는 일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창조의 목적을 구원의 계획으로 성취하시고 그것들을 마지막에 완성시키셔서 이 세계를 원래의 창조의 상태보다 더 훌륭하게 나은 상태로 데려가시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 세계를 향한 경륜이고 우리는 두 번째와 세 번째 사이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속에서 우리는 다양한 사명들을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을 보겠습니다. 그러면 복음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가장 좁은 의미에서는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이고 넓은 의미에서 보면 인류를 위한 구원계시의 총체 더 넓게 보면 복음을 적용하는 복음 교리 모두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복음을 강조한다고 하면서 복음이외에 말하지 않는 것은 진정한 복음이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복음을 강조한다고 말하면서 앵무새처럼 복음만을 반복하는 것은 진정한 복음이 아닙니다. 그 복음은 인류를 위한 계시의 총체를 보여주고 복음을 삶에 적용한 복음의 교리들을 모두 포괄하면서 복음의 핵심으로 이것들이 구체적인 토대를 놓으면서 싸여가는 것입니다.
4번입니다. 모든 인간은 성장하면서 필연적으로 신학을 합니다. 한 부류는 복음과 상관없이 신학을 하고, 또 다른 부류는 복음에 대한 믿음으로써 신학을 합니다. 왜 성경이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지혜라고 말하는지 자신의 표현으로 말해봅시다. 이 지점에서는 여기서 무엇을 배웠는가를 생각하지 말고 한 장 넘겨보시면 이렇게 백지가 나옵니다. 여기에 자신이 한번 듣고 쉬운 말로 써보는 것입니다. 백지에 적고 잘 정리해서 여기에 옮겨보는 것입니다. 그런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4번에 대해서는 어떤 답이 주어질지 보십시다. 성경의 증언입니다. 아까 배운 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영원 전부터 감추어졌던 비밀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창조된 세계가 어떤 식으로 전개되어서 창조의 목적을 이루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것인가 하는 비밀들입니다. 그 비밀이 우리에게는 감추어져있는데 한 인격을 통해서 그것이 다 풀립니다. 그가 누구냐 하면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깨달았을 때 갑자기 성령의 밝은 빛이 사도들과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 들어오면서 구약을 보는 눈이 확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그리스도를 통해서 감추어졌던 비밀들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세계에 대한 전망까지도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신학을 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그래서 신학은 엄밀한 의미에서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복음으로 거듭난 사람들이 하는 행위입니다. 그 다음 모두 성자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성령 안에서 창조될 때에도 그리스도를 통해서 창조되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창조된 사물들의 머리이시고 그것이 죄에 의해서 관계들이 깨뜨려지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이 교회를 만드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신 후에 교회의 머리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세계가 완성될 때에는 모든 세계를 완성하시고 다시 창조세계의 전체 머리가 되십니다. 그 머리로써 교회와 맺는 그러니까 인간들과 맺는 관계는 자연세계와 맺는 관계와는 다르지만 그러나 모든 만물들이 죄의 영향에서 벗어나서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서 각자 자신의 고유한 창조의 찬란한 빛깔들을 드러내게 되면서 세계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자는 만물의 머리, 교회의 머리, 그 다음에 만물의 통치주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설명한 교리가 바로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의 교리입니다. 8개로 이어진 설교가 있는데 그 설교를 꼭 들고 나오면 세계관이나 인간의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아주 새롭게 열리리라고 봅니다. 그 다음 하나님을 잘 아는 길이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써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신약시대에 와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앎으로써 자연과 세계와 인간과 어떤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야하는지 그래서 이 세계와 나 자신이 어떤 하나님의 목적과 경륜을 따라서 이 세계가 전개되고 역사가 전개되고 우리가 살아갈지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럼으로써 인간은 외롭지 않고 의미의 규정을 하면서 인생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마지막 5번입니다. 읽겠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신학은 목회자를 양성하는 전문교육과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 모든 인류가 알아야할 신학은 어떤 것인지 자신의 말로 설명해봅시다. 그 다음에 백지가 나옵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어설프지만 어렵지 않습니다. 한번 천천히 생각하면서 자기 머릿속에 아리송하게 돌아다니는 것을 정리해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몇 개의 문장으로 아니면 그림을 그려도 좋으니까 설명을 해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답을 노트에 쓰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아까 나온 이야기들이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하나의 주제를 여러분들 속에 각인시키려는 것입니다. 인간이 있습니다. From 어디서 왔는지 모릅니다. 자기의 기원이 어디인지 모릅니다. 당연히 어디로부터 왔는지 알아야지만 자기 인생의 목적을 찾아서 어디로 갈 것인가를 알 텐데 온 곳을 모르니까 당연히 가는 곳도 모릅니다. 그 다음을 보겠습니다. 그러면 자기가 어디서 왔는지를 모르고 가는 곳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뭐냐 하면 옆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고귀해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가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알고 어디고 가는지를 알고 자기 존재의 자존감을 발견하게 될 때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소중한 존재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무엇이냐 하면 세계와도 무슨 관계가 있는지 나와 다른 나라 사람들 요즘 트럼프가 막말을 막 쏟아냅니다. 그 사람은 정치하지 말고 트럼프나 쳤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도대체 지도자가 되었는데도 나와 지구 반대편에 사는 사람들이 우리나라, 나와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잘 모릅니다. 뿐만 아닙니다. 자연세계는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릅니다. 그냥 내가 만족을 누리고 편하게 살기위해서 착취를 해도 되는 하나의 사용물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지구가 심각하게 파괴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교회에서 교육을 잘 시켜서 그리스도인들만이라도 이런 것들을 이해하면서 살아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래서 결국은 오늘 배운 것을 요약하자면 신학이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전체를 요약하라는 질문하는 것이 5번안에 있습니다. 참으로 인간답게 살리려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단, 여기서 ‘인간답게’ 라는 말도 어려운 말입니다. 무엇을 기준으로 ‘인간답게’ 입니까? 뭐냐 하면 인간을 어떤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신 하나님의 관점에서 ‘인간답게’입니다. 거기에서 인간이 정말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목적은 하나님을 향해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은 행복하고 이 두 가지가 함께 어우러지면서 한 인간이 정말 모든 시련과 어려움 앞에서도 의미를 찾으려고 애를 쓰면서 하나님 앞에 꿋꿋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 다음에 마지막을 보겠습니다. 신학공부를 잘하는 방법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좋은 신학공부를 하기 위한 가장 훌륭한 준비입니다. 여러분을 보면 사랑하면 이해가 잘 됩니다. 여러분들을 잘 이해해주는 사람들은 대부분 여러분들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까칠한 사람은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여러분들을 어떤 때는 자기 자신보다 더 많이 이해해줍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 분노하는데 그럴 수도 있다고 이야기하고 위로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할 수만 있으면 자기를 이해해주는 사람과 같이하고 싶은 것입니다. 사랑하면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무엇이냐 하면 영적성장입니다. 영적성장이 무엇이냐 하면 은혜 안에서, 진리 안에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아는 지식이 깊어지고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은혜가 깊어져야합니다. 요즘은 정신이 없습니다. 그런데 한참 공부할 때는 아침부터 나와서 밤늦게까지 공부할 때 직원들이 다 퇴근하고 밤 11시쯤 되었습니다. 공부를 하다가 끝내고 가야겠다고 연필을 놓고 가방을 싸가지고 계단을 내려갑니다. 어떤 때는 승강기를 타지 않고 걸어 내려갑니다. 그리고 교육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옵니다. 가을바람이 스칩니다. 그러면 어떤 형언할 수 없는 어떤 희열이 가슴속에 꽉 찹니다. 그러면서 어떤 생각이 드느냐하면 어제보다 내가 한 뼘쯤 성장한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러면 1년 전의 나를 향해서 가르쳐주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네가 지금 잘못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네가 하는 것보다 또 다른 은혜의 세계, 신앙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싶습니다. 그런 것들을 한동안 느끼고 나면 자기가 성장한 것을 느낍니다. 나는 그런 것을 못 느끼는데 나와 대화하고 나의 책을 읽고 혹은 나와 함께 대화를 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바로 그런 영적인 성장, 이것이 신학공부를 잘하는 비결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는 사람들은 더 있게, 없는 사람들은 더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온전한 마음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와 하나님과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면서 살아갈 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속에 아주 잘 아로새겨지는 것입니다. 굳고 딱딱한 마음이 아니라 부드러운 마음으로 신학공부를 할 때 많은 것들이 가슴속에 새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런 은혜를 누리면서 이 공과 17번의 공부를 하기 전에 여러분들이 주님을 깊이 만나고 변화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