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 제2과
녹취자 : 조원정
목회와 소명입니다. 뜬금없이 우리하고 목회하고 무슨 상관이 있냐고 그렇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설명을 듣고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같이 한번 읽어 봅시다.
문제 1) 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자신이 목회자로 부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지 그 소명 체험의 핵심이 무엇인지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고 말해 봅시다.
여러분이 스스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남의 이야기를 듣지 말고 스스로 곰곰이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한번 써보고 정리 해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목회자가 되는 것은 목회자가 가지고 있는 매우 중요한 체험과 관련이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다 이해를 합니다. 우리가 실수 하는 것 중의 하나는 뭐냐 하면 목회자가 목회자로서 살아가기 위해서 경험하는 것은 평신도들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결심하는 체험과 종류가 다른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마틴 루터 같은 사람도 이 점을 설명하면서 이런 식으로 풀어줍니다.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 부름을 받는 것은 모든 소명 중의 가장 영광스러운 소명이지만 그러나 그 소명은 평신도로의 소명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같은 종류의 소명인데 정도의 문제입니다. 이런 소명이 아주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많은 어려움이 생겨나게 됩니다.
한 사람으로 하여금 목회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대한 경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대한 경험이라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이 우리를 위해 지신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가 부활하신 사건이 자신의 인생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가 목회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떠오르는 질문이 이것입니다. 목회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서 경험하고 교인은 그런 경험이 없는가? 모든 교인이 똑같이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회자는 그 경험이 매우 깊고 특별하기 때문에,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설명에 의하면 평범한 직업에 종사하며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게 목회자의 소명입니다. 여러분이 미래의 한국 교회를 위해 기도해야 할 가장 중요한 제목이 확실히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이 주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신학교에서 학문을 가지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여기에 어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신학교는 사람을 아무나 보내면 훌륭한 주의 종으로 길러 내 줄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오늘 같은 교육의 체계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교회는 산과 같아서 좋은 나무가 자라는 곳입니다. 여러분 남대문 공사할 때도 보면 거기에 쓸 훌륭한 금광송이나 이런 나무들을 전국에서 베어 옵니다. 남대문에서 만든 것이 아니라 산에서 베어 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서 주님을 깊이 만나고 진실하게 신앙생활 하던 사람들이 그런 젊은이들이 많이 나와야지만 신학교에 좋은 재목이 들어가고 좋은 재목으로 들어온 사람들을 훈련할 때 그들이 정말 좋은 주의 종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미래의 신학교의 질을 교회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진짜 좋은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고 변화된 젊은이들이 생산이 돼야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것을 잘 보여 주는데 그는 기독교의 기초를 세운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전수 받은 신앙을 본격적인 신학의 토대위에 놓은 사람입니다. 이 사람에게 두 가지 편견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심리적인 편견입니다. 유대인의 선민사상에서 비롯된 인종차별주의입니다. 유대인 이외에 나머지는 모두 쓰레기 같은 종족들이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또 하나는 신학적인 편견입니다. 나사렛에서 태어난 젊은이는 나사렛에서 자란 예수는 결코 메시아일수 없다.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다른 사람에게서 들었으면 부인할 수 있었을 텐데 직접 만났습니다. 그분의 음성을 듣고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것은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엄청난 경험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무지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에게 두 가지 커다란 모순된 명제가 서로 대립을 이루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거나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공정한 심판이 내린 것이 바로 저주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살았습니다. 구약에서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엄청나게 사랑하시거나 인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5장에 에녹 같은 사람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로 올라갔습니다. 엘리야는 병거를 타고 들림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전승된 신앙 속에는 모세가 승천한 거로 나와 있습니다. 죽음을 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부활했다고 믿습니다. 이런 모든 사람들의 공통점은 엄청나게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다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자기가 확인을 했습니다.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저주하셔서 십자가에 못 박을 리가 없습니다. 못 박힌 것이 사실적인 저주였다면 다시 살릴 리가 없는 것입니다. 저주 받은 것도 사실이고 다시 살아난 것도 사실입니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여기에서 사도 바울의 지성을 찢으면서 찬란한 복음의 빛이 들어옵니다. 그것은 예수가 하나님께 저주 받은 것도 사실이었고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살아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럼 무엇입니까? 이 저주가 자기의 죄 때문에 받은 저주였다면 하나님이 인정하실 리가 없지만 이분이 십자가에서 받으신 저주는 자기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원하고자 하는 백성들을 위한 대속적인 죽음이었다는 사실을 밝혀지면서 오히려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다는 신학의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대속의 교리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찬란한 빛으로 사도 바울의 지성을 찢고 들어왔고 그 빛이 창조서부터 타락, 구속, 완성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관통하면서 이 세계의 역사와 인간, 세계 창조, 지구, 이 우주의 시작과 종말을 관통하는 일관된 관점을 만들어 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이 신약 로마서에 이미 표현이 되었고 관점이 발전된 것이 에베소서와 골로새서를 통해서 아주 놀라운 발전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누구입니까? 바로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구원 받을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서 저주를 당하셨으며 자기의 죄가 없으신대도 대신 죽으셨고 그래서 하나님께 인정을 받으셨고 살아 나사 부활의 주가 되셨습니다. 이 사실 앞에서 웅장한 하나님의 설계를 느끼면서 그분이 온 땅과 만물위에 주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무릎을 꿇고 그분 앞에 자신의 인생의 주제 권을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되는 기본적인 동일하입니다. 소위 얘기하는 주 되심에 대한 항복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도 바울이 항상 그리스도인에 대해 설명할 때 따라오는 것이 이렇게 저주를 받고 살아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티무시켈러라는 미국의 저명한 목회자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어떻게 나타내 보일 것인가에 대해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그가 아주 의미 있는 말을 던집니다. 우린 유신론자다. 우린 신의 존재를 믿는다. 우리는 이렇게 도덕적으로 산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런 점에서 불신자와는 다른 사람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때 사람들은 그런 논증에 대해서 계속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시하는 것이 만약에 그리스도인은 윤리적이라고 얘기를 하면 윤리적이지 아닌 사람들이 볼 때면 잘난 척 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고 예수 믿어서 복 받아서 잘 산다고 할 때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소외감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은혜의 논리로 설명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의 몸을 십자가에서 내어 주시기까지 온전히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예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을 무시하는 것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이 은혜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 주시는 하나님의 차별이 없는 의입니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이 발견하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어떤 지혜인가 하면 구약의 모든 제사들이 바라보며 달려온 궁극적인 실제, 그것은 제물이 죽고 우리의 죄가 그에게 전가되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우리는 용서를 받고 이렇게 되는 것들이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함을 받을 그런 구속의 사실을 내다보는 것입니다.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계획의 핵심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시리즈 속에 들어가 보면 그리스도의 다시 머리 되심이라는 시리즈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다시 꼭 듣기를 간곡히 권합니다. 8개 정도 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 시리즈를 사경회 때 선포했고 그것을 차분히 앉아서 들으면 이 세계에 대한 전체적인 하나님의 구도가 나오고 여러분의 인생이 훨씬 더 혼란스럽지 않고 명료해지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지혜입니까? 이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이 인간을 왜 창조하셨는지 앞으로 인류의 역사를 어떻게 끌어가실 것인지 이것을 하나님이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경험하게 되면 이것이 자기와 같이 무가치한 인간을 위해 예수님이 대신 죽으신 것이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이 사랑에 깊이 감화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신적인 강제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신적인 강제력은 누가 나에게 강요하는 것은 아닌데 사랑이 나를 사로잡아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가 화가 있으리로다. 예수님은 안 그러셨습니다. 너 복음 안 전하면 지옥 간다. 너 백만 명을 구원하지 않으면 너를 죽여 버리겠다.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사랑에 사로잡히고 나니까 눈에 보이는 것이 너무 불쌍한 이방인들, 허무하게 살아가는 불신자들이 눈에 보임이 사랑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신적인 강제력 속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훌륭한 성도입니다.
조지휘필드는 18세기의 영국의 전설적인 설교자입니다. 이 사람의 설교를 듣고 깊이 회심하고 은혜를 받은 사람이 피뢰침을 발견한 벤자민 프랭클린이라는 사람입니다. 지금 유니버시티 펜실베니아 설립자입니다. 자기 책 속에서 회심하지 않은 자는 교회의 독이다. 진심으로 회심하고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이 목회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문제 2) 회심하기 전 여러분 자신이 겪었던 인생의 방황과 그 해결의 경험들을 나이 어린 순서대로 고백해 봅시다.
구역 중에 나이 제일 나이 어린 사람이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방황 했을 테니까 기억이 명료할 것입니다. 한 두 사람 간단하게 이야기 하게 하고 들어주는 것입니다. 너무 길면 다음 사람 넘기고 이렇게 하면서 이야기를 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하고 3번으로 넘어갑니다.
문제 3) 저자가 기독교 신앙이야말로 최고의 휴머니즘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한 후에 아래에 인용한 어거스틴의 고백에 대한 여러분 자신의 해석을 말해 봅시다.
같이 읽읍시다. 저에게 당신은 무엇이시니이까? 저는 당신에게 그 자체로 무엇이기에 저에게 당신을 사랑하라 명령하시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저에게 진노하시고 끔찍한 비참을 내리실 것처럼 경고하시기까지 하시나이까? 나를 사로잡았던 어거스틴의 고백입니다. 저는 어거스틴의 이 말을 읽으면서 가슴이 터지는 듯한 감격을 경험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인간이 무엇인가 하며 미친 듯이 고민을 합니다. 마지막에 도달하는 결론은 뭔지 모르겠습니다. 올더스 헉슬리 같은 사람은 자신의 책 속에서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도대체 우리의 인생에 무엇이 의미가 있을까? 우리는 고민하고 탐구했다. 그런데 발견할 수 없었다. 그렇게 우리에게 주어진 의미는 없다고 우리는 결정했다. 그 다음에 의미는 자기가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자유입니다. 올더스 헉슬리가 실제로 lsd 약물 그것을 복용하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을 철학적으로 많이 전파했습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마약 중독자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정신이 어떤 초월적인 경험에 이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약물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근거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인간이 무엇인가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무엇인가 탐구해 낼 수 있었습니까?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진리가 없기 때문에 인간의 존재의 의미도 규명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아침에 설교한 것처럼 죽어가던 환자가 말할 수 없는 평안 속에서 살면서 나는 하나님을 믿는데 의사 선생님은 뭘 믿으세요? 한 마디에 삶이 뿌리 채 흔들리는 것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진리에 대한 희미한 감각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존재의 의미가 자기 행복에 의해서만 규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복을 이야기하고 존재의 의미를 이야기 할 때는 내가 혼자 스스로 만족하면서 행복한 것도 고려해야 하지만 그것이 정말 객관적으로 타당한 것인가에 대한 것도 고려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행복이 내가 느끼는 것에 달렸다면 계속 사람을 죽이고 살해하면서 희열을 느끼는 사람들은 그래서 행복하다면 그 사람을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어거스틴이 놀라운 고백을 하는 것이 저에게 당신은 무엇입니까? 이 말은 저는 누구입니까? 라는 말과 똑같은 질문입니다. 도대체 내가 무엇이기에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라고 말하십니까? 그렇게 안하면 비참을 내리실 것처럼 경고하시면서 까지 당신을 사랑하라고 하십니까? 하나님은 사랑 받아야지만 겨우 사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 시간에도 이야기 했는데 부모는 자식이 태어나지 않았는데도 자식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식이 생겨나면 없던 사랑이 툭 튀어나와서 새끼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식이 없는데도 이미 이 속에는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태어나면 있던 것들이 자연스럽게 발현되면서 자기 새끼를 위해서 끔찍하게 희생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전혀 안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자식을 죽이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인생의 의미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할 때 우리 인생의 의미는 가장 명료하게 되는 것입니다. 해석을 이야기 해 보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최고의 휴머니즘입니다. 인간의 역사 가운데 어떤 사상은 비평을 받고 타도되고 그랬지만 흔들리지 않고 공감을 가장 많이 얻었던 게 휴머니즘입니다. 그 휴머니즘이 하나님을 배제한 인간을 최종적으로 생각한 휴머니즘은 완전한 휴머니즘이 아닙니다. 인간이 참으로 가치 있는 인간이고 그 인감 됨을 구현내가는 휴머니즘은 바로 하나님이 계시고 거기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이 관계 속에서 인간의 존재의 의미를 물어갈 때 그것이 진정한 휴머니즘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의 질서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의 지점으로 수렴할 것이고 도덕의 질서도 하나의 질서로 수렴합니다.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세상을 창조하고 하나님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인간을 지으셨는지를 생각하면서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물어가는 것입니다. 그 과정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의미의 문제에서 방황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가끔 이럴 수 있습니다. 너무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이 많은데 마약을 합니다. 마리화나 해 보셨습니까? 이것을 피우고 하고 빨아들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압니까? 고등학교 다닐 때 한번 해봤습니다. 진짜 나쁜 놈이었습니다. 우리 주위에 그런 친구들 있습니다. 술 취하고 방탕하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을 할 때 듣는 음악이 있습니다. 독특한 음악입니다. 그런 음악을 틀어 놓고 깊이 흡입을 하는 것입니다. 나는 무슨 어마어마한 경험이 기다리는 줄 알았습니다.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오래 반복적으로 해야지만 진수를 맛본다고 합니다. 복음하고 비슷한 가 봅니다. 두 번 정도 해봤습니다. 그냥 기분 좋은 링거를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공중에 붕 뜨는 것 같은 기분입니다. 그러면 이 마음에 근심과 걱정으로부터 자기가 탈각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 못 느낍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유명 연예인이나 여기 가서 미다졸람 같은 주사를 맞고 환각을 느낀 다음에 병원으로 이동해 다시 그 주사를 맞고 잠이 들면서 환각을 느끼고 왜 그렇습니까? 현실이 너무 무서우니까 그렇게 살아갈 수는 있습니다. 그것이 문제의 궁극적인 해결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마리화나 했다는 거 여기 방송에 나가면 안 되는데 나중에 지우세요. 아무리 회심하기전이지만, 약속할 수 있지요? 지워주시기 바랍니다. 괜히 고백을 했습니다. 오버를 했습니다. 그 당시에도 아주 흔하게 돌아다녔습니다. 그것은 해결이 될 수가 없습니다. 가장 비겁한 것은 자신의 인생의 주체성을 양도하는 것입니다.
칼빈이 얘기했던 것과 같이 괴롭고 고통스럽고 때로는 혀를 깨물고 죽어버리고 싶은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인생은 자기 것입니다. 그것을 회피하는 순간 인간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가감하게 똑바로 맞서서 하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 교회를 떠났는데 싸움을 잘하는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심지어는 조폭들하고도 한판 뜬답니다. 어떻게 그 나이에 싸움을 잘하냐고 했더니 목사님 제가 싸움을 잘합니다. 운동선수 같지도 않고 교회 오면 조용한 분위기인데 싸움을 잘 한답니다. 조폭에서 자기네 편으로 넘어 오라고 교섭도 들어온답니다. 목사님 비결이 딱 한가지입니다. 벽돌이 눈앞에 날아와도 눈을 감지 말아야 합니다. 어차피 감으나 안 감으나 맞는 것은 마찬가지랍니다. 그러면 상대방이 자기를 공격하는 모습이 또렷이 보이면서 어떻게 피해야 할지 반격을 해야 할지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게 평범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여기서 이렇게만 해도 눈을 감는데 벽돌이 날아오는데 망치가 오가는데 어떻게 눈을 안 감느냐 입니다. 사실 눈을 감으나 안 감으나 맞기는 맞습니다. 그런 담대함 가지고는 해결이 안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직면해서 그것을 살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신앙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막다른 인생의 골목에서 우린 어떻습니까? 주님 하고 부를 수 있다고 하는 자체가 우리 인생에 말할 수 없는 위로와 힘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인용문의 해석이 하나님께 인간은 필요하지 않았지만 인간의 행복을 위해 관계를 맺으시고 그들을 통하여 창조주의 영광을 나타내신다. 이것을 위하여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다. 아내들도 그렇습니다. 남편들로부터 많이 사랑을 받는 사람은 자존감이 있답니다. 그런 사람들은 물질 같은 것으로 사람들에게 과시욕을 부리고 하지 않는답니다. 남편에게 대우 못 받고 하는 이런 사람들은 다른 것으로 자기를 세우고 그러는 것입니다. 사랑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문제 4번)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 사랑의 경험과 그 경험을 통해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경험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목회자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에로스와 아가페, 까리따스의 관계를 자신의 회심 경험을 토대로 말해 봅시다.
한 사람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 갑니다. 그때 하나님을 위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이 힘드니까 하나님 덕이라도 보려고 가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 드렸습니다. 스물한 살에 회심했지만 하나님 영광 위해 회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믿는 것이 내 인생의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지식이 들어가고 보니까 하나님을 이용하는데 신앙의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이 인생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입니다. 저만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바로 에로스의 사랑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의 행복을 찾는 그 마음이 인생의 막다른 길에서 하나님을 찾아가도록 만든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믿음이라고 해석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께로 갔더니 주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깨닫게 해 준 가장 중요한 단서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정말 사랑이시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찬양)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네 주를 보낸 하나님 사랑
그 사랑이 나를 구속하네 갈보리의 속죄의 사랑
깊이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경험하는 것은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잠시 사라질 것들을 위해서 사는 것이 내 인생의 보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나를 사랑했기 때문에 나를 위하는 것이 기쁨이었지만 이제 하나님 사랑하니까 하나님 위하는 것이 내게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생기는데 그 사랑을 까리따스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까리따스의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서 사는 것,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인간이라면 마땅히 세계와 인간에게 베풀었을 자비와 사랑을 베풀면서 살고 그들이 나 때문에 행복해지기 때문에 즐거워하면서 사는 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의미라는 사실을 인생의 의미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성령을 통해서 신자의 마음 안에 성령을 주십니다. 이러한 까리따스의 사랑은 끊임없는 은혜의 정동을 통해서 까리따스의 사랑이 계속 자라면서 이 사랑은 점점 더 성숙하고 굳건한 신앙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어제 우리가 나무를 심었습니다. 공사할 때 퍼 다가 다른 데 심었다가 모두 돌아오지는 못하고 그 중에 몇 나무는 돌아가시고 그 중에 몇몇 식구들은 돌아왔습니다. 새로운 나무가 옵니다. 처음에는 나무가 몸살을 합니다. 굉장히 힘들어 하고 잎이 다 떨어지고 꼭 죽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다가 나무가 그 땅에 뿌리를 내리면서 정착을 합니다. 토질에 적응을 합니다. 기능이 회복되면서 잎이 쫙쫙 뻗으면서 훌륭하게 나무가 성장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처럼 똑같이 우리가 성령의 은혜로 주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런 사랑의 마음에 은혜의 정동이 계속 일어납니다. 주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은 참 놀랍구나. 십자가의 사랑이 참 귀하구나. 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마음이 계속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감동을 받고 은혜의 감화를 받으면서 우리의 마음이 계속 선한 마음으로 변화되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주 굳게 뿌리박힌 튼튼한 나무가 되어 가야 합니다. 모든 것이 다 나무입니다. 바람이 불면 쓰러질 연약한 묘목도 있고 아무리 모진 바람이 불어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 그런 거목도 있습니다. 그런 삶으로 나아가는 것을 우리는 영적인 성장, 혹은 신앙의 성장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까리따스의 사랑은 아마레데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인간들을 사랑합니다. 까리따스의 사랑은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이 여기에 있다면 그, 사랑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뿐만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받은 사랑해야 하는 모든 사람도 함께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사랑이 이 까리따스의 사랑입니다. 이 까리따스의 사랑이 훌륭하게 보여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셨고 그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할 때 불쌍한 사람들을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사랑이 하나가 되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보이는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비밀들을 알려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그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들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어 주는 이런 사랑의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고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우리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런 사람들이 되도록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문제 5) 목회자가 되기 위한 전문 교육과정으로서의 신학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살기 위한 거룩한 지혜로서의 신학공부를 위해 참된 신앙생활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자신의 경험을 나누어 봅시다.
얘기를 해 보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지식을 배워도 매일매일 주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영적인 쇄신, 은혜의 감격이 꼭 있어야 되겠구나 하는 것을 우리는 경험합니다. 옛날에는 자기가 시험에 들거나 혹은 하나님을 떠날 때 하나님을 잘 몰라서 떠났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깨닫습니다. 그럼 다음에는 전혀 미끄러지지 않고 살아갑니까? 아닙니다. 그 이상의 또 무엇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두 가지인데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이 두 개가 하나로 묶어지면서 마치 수레바퀴처럼 굴러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사랑이 하나가 되어서 마치 수레바퀴처럼 굴러가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서 온전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런 수레가 있는데 바퀴가 하나 밖에 없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을 끌고 가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바퀴가 두 개가 있어서 끌고 가면서 지식과 사랑, 언제나 이 그림을 여러분이 그려 놓으시기 바랍니다.
설명을 좀 해봅시다. 인간은 유한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무한합니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하나님에 대해서 공부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에게 당신을 알 수 있도록 계시를 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에 관해서 인간에게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으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배워 가는데 이 계시의 가장 중요한 것이 성경책입니다. 여기를 보면 하나님이 누구신지 배워 가는데 원리는 신앙입니다. 그 원리를 따라서 수단으로 봉사하는 것이 이성입니다. 신학이 잘못되는 것, 신앙이 잘못되는 것은 이성이 신앙의 위로 타고 오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성으로 다 알 수 있다면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언제나 이성은 신앙 아래 복종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받아들인 것을 겸손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토대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하나하나 배워가는 것입니다. 이성 때문에 신앙이 깊어지고 신앙 때문에 이성이 온전해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이상적인 신앙생활입니다.
프로슬로기온이라고 유명한 책입니다. 캔터베리의 안셀름이라고 하는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오 주님 저는 당신의 높으심을 꿰뚫어 알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저의 지성과 비교하지 않는 까닭입니다. 하오나 제 마음이 믿고 사랑하는 당신의 진리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믿기 위하여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 위해서 믿습니다. 믿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수없이 인용되는 유명한 구절입니다. 믿음은 이해를 이해는 믿음을 부르면서 온전해져 가는 것입니다.
신학의 목적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목적은 참 인간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기 위한 것입니다. 신학은 경건한 신앙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목적은 하나님을 향한 경배에 있습니다. 신학의 결과물뿐만 아니라 탐구하는 과정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찬송이 되어야 합니다. 신학을 하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은 누구인가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최고의 신학자입니다. 신학의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