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질서롭게 된 삶과 신학함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빌 2:21)
녹취자 :이경순, 백지영
Ⅰ. 서론
칼빈의 이야기를 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생각하는 고정관점을 한번 흔들어 보고 칼빈 사상의 포괄적인 성격을 이야기함으로써 우리가 어떻게 덕스러운 삶을 살 것인지를 강의하려고 합니다. 1536년에 이주 얄팍한 6장으로 된 라틴어로 된 『기독교 강요』 초판은 구성이 아주 간단합니다. 그렇게 많은 내용이 들어있지 않고 십계명, 사도신경, 이런 것들에 대한 해설을 중심으로 하고 기독교에 대한 인물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칼빈이 이 책을 쓴 것은 성경을 카톨릭의 시각이 아닌 진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려고 하는 참된 기독교 신앙을 찾기 위해서 어떤 시각으로 성경을 읽어야 하는지를 사람들에게 가르쳐주기 위해서 쓴 것입니다. 1539년 3년밖에 안되었는데 6장이 17장으로 늘어나게 됩니다. 물론 이것도 라틴어 판입니다. 그리고 1541년에 프랑스어 판이 나옵니다. 그리고 1543년에 프랑스어로 두 번째 판이 나옵니다. 1550년에는 약간 수정된 상태에서 프랑스어 제 3판이 나옵니다. 1559년에 라틴어 최종판이 나오고, 1년 뒤인 1560년에 프랑스어 최종판이 나오게 됩니다.
칼빈이 프랑스어 판으로 된 『기독교 강요』에서 'vie bien ordonnée'를 말합니다. 여기에서 'ordonnée'는 과거분사입니다. 'vie bien'는 ‘선한 삶’이고, 'ordonnée'는 ‘질서지워진’입니다. 'ordinate' 이 정도로 보면 됩니다. ‘질서지워진 선한 삶’입니다. ‘선한 삶’이라는 주제는 철학으로도 수없이 이야기되어진 주제입니다. 그런데 칼빈은 여기에 'ordonnée'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질서지워진 선한 삶’. 칼빈이 보기에는 ‘질서지워졌다’라고 하는 것과 ‘선한 삶’이라는 것은 떨어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선한 삶’이라는 것은 어느 한순간에 충동적으로 솟아나는 선한 감정, 선한 의욕에 의해서 불쑥불쑥 뛰쳐나오는 우연적인 삶의 행태들이 아니라 일관성이 있고 지속적인 단정하게 질서지워진 생활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칼빈의 관심은 여기에서 나타납니다. 자기기 쓴 첫 번째 책을 뭐라고 이야기 합니까? 'Institution'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영어로 'Institutes', 라틴어로 'Institutio', 불어의 맥락에서 'Institution'이라는 이것은 무슨 용어입니까? 우리가 번역을 참 어렵게 ‘강요’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강요’는 핵심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영어에 'institution'을 생각해 보십시오. 한 사회의 'institution', 그러면 그것은 정치만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심지어는 예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행태, 그 안에서 맺어지는 사람들과의 관계, 심지어는 전통과 미래에 대한 비전, 현재 그것들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의 인식 상태, 가치관까지 모두 포괄하는 말입니다. 한 나라는 'Institution'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게 'institution'의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칼빈이 'Institution'이라고 이름을 붙였을 때 그의 관심사는 아브라함 카이퍼가 이야기하는 총포괄적인 세계관에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삶에는 많은 영역이 있는데 이 중에서 종교라는 영역을 떼어놓아 이 영역에 대한 지식이나 삶을 가르쳐주기 위해 'institution'을 쓴 게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옛 질서 속이나 지금 현재에 있는 'Institution'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Institution'이라는 것은 무엇에 의해서 구축됩니까? 칼빈이 보기에는 수많은 것들의 짬뽕이고 잡탕이었습니다. 가톨릭에서 가르치는 미신적인 기독교, 프랑스 기독교 사회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세속적인 가치관, 이런 것들이 다 뒤섞인 가운데 당시 프랑스의 'institution'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까? 'reform'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Institution'에서 어떤 것들을 부분적으로 땜질하고 고쳐서 쓰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Institution'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칼빈을 보면 오늘날 민주 사회에 시사될 수 없는 시도입니다. ‘가능하지도 않은 것을 왜 저런 식으로 했을까?’ 하는 느낌이 듭니다. 종교와 사회, 이 모든 것에 통일을 이루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칼빈 자신도 실패합니다. 그런데 칼빈의 시각에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고자체가 총포괄적인 것입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새로운 'Institution', 이것을 어떤 식으로 할 것인가,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institution을 가능하게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집약된 지식이 바로 『기독교 강요』라는 것입니다.
요즘은 기독교 강요를 보면서 극단적인 개혁주의를 하는 사람들이 교회를 힘들게 합니다. 『기독교 강요』만 읽어야 된다는 식입니다. 말하자면, 성경을 대치해서 "Bible says." 그러면 토를 달아도 괜찮은데, "Calvin says." 그러면 거기에 토를 달면 역적이 됩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칼빈은 탁월한 신학자임에는 틀림없지만 그 당시에 있었던 많은 신학자들 중에 한 사람입니다. 다만 다른 사람들은 많이 잊혀지고 칼빈은 이렇게 오래도록 사람들에게 기억에 남는 이유는 ‘제네바 아카데미’ 때문이었습니다. 제네바 아카데미 역사전체를 보면 900명 정도 되는 유수한 사역자들이 그곳에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많으면 매해 몇 십 명 씩 졸업생들을 배출하면서 엄청난 국제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것입니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가 개혁주의 전체를 대변하는 책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 이야기는 별개의 논의로 하고, 새로운 사회, 사회 전체에 대한 재편성을 지양하는 지침서가 바로 'institution'이라는 것입니다.
Ⅱ. 칼빈의 거룩한 삶
A. 거룩한 삶의 성화
그러면 이런 것들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칼빈의 입장에서는 소위 새로운 사회, 새로운 'Institution'이라는 것은 결국은 사람과 관련된 것입니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의 대부분에서 ‘성화’의 문제를 다룹니다. 이것은 굉장히 많은 교훈을 우리에게 줍니다. 목사의 일생의 대부분의 설교 제목이 성화에 대한 것이어야 합니다. 전도 설교와 성화, 이것이 목사의 설교의 대부분의 내용이어야 합니다. 오늘날 유포되고 있는 설교들을 보면 전도 설교도 아니고 성화 설교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 때문에 복을 누리고 행복한 삶을 사는 길이 무엇인지를 격려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윤리적인 경험들을 말합니다. 그것은 생명의 말씀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성화’는 'sanctification'입니다. 'sanctification'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의 본성에 깃들여 있는, 특히 구원받은 신자의 내면 안에 깃들어있는 본성화 되어 있는 죄를 순결화게 하시는 성령의 작용입니다.
칼빈은 'sanctification'에 초점을 맞추면서 'sanctification'을 이런 식으로 정의합니다. "contruction de la personne." “인간성의 재구축이다.” 구원받은 사람이 있는데 구원 받았어도 여전히 잔존하는 죄가 남아 있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도 죄가 있는데, 이 둘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절대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상황이고, 여기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하지 못하리니” 이런 문제를 다루는 책이 『죄와 은혜의 지배』입니다. 잔존하는 죄의 영향력이 있습니다. 'influence'가 있습니다. ‘이것’(A)이 있는 것만큼은 ‘이것’(A)이 참사람 됨이고, ‘이것’(B)이 참사람이 아니라면 ‘이것’(B)이 있는 것만큼 참된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칼빈의 입장에서는 “예수를 왜 믿느냐?” 그러면 답은 참으로 사람이 되려고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 번의 과정을 거칩니다. 첫 번째는 중생을 통해서 죄의 지배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첫 번째 단계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성화의 단계로 성령의 끊임없는 도우심 속에서 죄가 제거되고 순결해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궁극적으로 완성이 안 됩니다. 완성되는 것은 결국 영화에 의해서 완성이 됩니다.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이 모든 죄로부터 완전히 씻어내시는 것입니다. 맨 처음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사람은 참 사람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완전히 타락을 합니다. 중생하고 성화의 단계를 거치면서 여전히 참사람이 되지 못하는 요인이 남아있기 때문에 신자가 되는 것으로는 참사람이 되었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제로 이 세상에 살아가는 기간은 ‘여기’입니다. 여기에서 끊임없이 잔존하는 죄를 제거하면서 삶으로써 참 사람됨을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은 다 선하였습니다. 악한 것은 모두 사람으로 말미암아 이 세계에 도입된 것입니다. 도입된 잘못된 것들이 모두 다 빠져나가게 하기 위해 살아가는 삶을 성화의 삶이라고 합니다. 영화의 때에는 이것들을 완전히 완성하십니다. 그래서 타락하기 전의 원상태의 사람은 ‘죄를 지을 수 있는 사람’이었고, 타락한 다음에는 ‘죄를 안 지을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고, 중생한 다음에는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고, 영화된 상태에는 ‘죄를 지을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이유는 참으로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칼빈이 이야기하는 “인간 본래의 인간성의 회복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칼빈의 기독교 강요의 전체를 지배하는 것은 ‘거룩한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니라”고 하신 구약과 신약의 토대가 되는 가장 중요한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19장 6절에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룩하게 구분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중심으로 언약이 맺어지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죄를 짓고 하나님을 떠나서 죄를 안 지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이러한 비참한 처지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시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 거룩함을 상실해 버린 것이 불행의 궁극적인 뿌리라고 보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는 이 거룩함을 회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거룩함의 회복이 어떻게 이루어지냐 하면, 'unio cum Christo'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거룩함의 회복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어제 설명한 것처럼 그리스도가 머리이시고 교회가 몸인데, 그것과 아무 상관없이 떨어져서 살던 생명 없는 사람들을 불러서 접붙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생명에 참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는 당연히 삼위일체의 생명과 결탁되어 계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진 모든 사람들이 삼위일체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 생명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생명과 아무 상관없는 인간이 어떻게 삼위일체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게 되었는가? 칼빈은 독특한 표현을 쓰는데 'lien de n'être adoption', ‘우리의 양자됨의 고리’, 그것은 바로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양자되었다고 하는 것은 사람마다 해석이 다른데 저는 이것을 지향합니다. 우리가 세례를 줄 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라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 해석의 반대입니다. 희랍어에 보면 ‘에이스’(εις)는 'into'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종말론적인 의미도 가지고 있지만 세례를 주는데 내가 성부 성자의 성령을 대신해서 그 이름으로 너에게 세례를 준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세례를 받는 사람이 세례라는 행동을 통해서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 속으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세례 받는 사람이 성부 성자 성령 이름으로 연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를 줄 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 속으로” 혹은 “이름 속을 향하여 세례를 주노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성부 성자 성령을 대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것 자체가 세례를 받고 삼위일체의 생명 속으로 진입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의 생명 자체 속에 우리가 동질로서 동화되는 범신론이 아니라 연합의 개념입니다. 그 연합이 ‘고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칼빈의 신학뿐 아니라 개혁신학 전체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온전한 의존에 진수가 있습니다. 인간이라는 것은 삼위일체의 생명에 참여한 것인데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신 분은 고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 없이는 삼위일체에 생명에 참여할 수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를 열자마자 놀랍게 ‘지식’의 문제부터 시작을 합니다. 이것은 상당히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접근입니다. 소위 이야기 하면 'cognitia', ‘지식’을 이야기 하면서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인간에 대한 지식이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인간을 알 수 있고 인간을 아는 것만큼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칼빈이 'cognitia', ‘지식’을 둘로 대변하는데 하나는 'cognitia creatoris', ‘창조주에 대한 지식’, 그 다음에 'cognitia redemptoris', ‘구속 주에 대한 지식’입니다. 이 지식은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소위 이야기 하는 'sensus dignitas', ‘신의식’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먼저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절대주가 있다는 것을 인식합니다. 이방인들도 신의 존재를 막연하게나마 인식하기 때문에 이방종교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먼저 ‘창조주에 대한 지식’입니다. 신학은 여기서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이미 이루어진 이것이 우리에게 씨앗처럼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복음을 통해서 두 번째에 도달하게 되는데 ‘구속주에 대한 지식’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속 주에 대한 지식을 가지려면 다시 상승하는 것입니다. 상승해서 전체를 바라보면서 전에는 희미했던 ‘창조주 하나님의 대한 지식’이 이것에 의해 보강되면서 세계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시야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칼빈주의적인 세계관이 형성되는 단초입니다.
질서지워진 선한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창조주 하나님이 누구인지 모르고 이 세계가 무슨 의미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왜 태어났는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높은 질문은 매일매일 살아가는 지극히 현실적인 삶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인간은 이런 삶에 토대가 되는 질문에 대한 답 없이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마치 나방이 불을 향해 날아들고 뜨거워서 도망갔다가는 그 사이에 잊어버리고 다시 날아들면서 불에 타죽어 버리듯이, 인간은 그렇게 인생을 살아갑니다. 인간의 지나친 쾌락주의, 이런 것들은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사실과 이 세계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몰라서 질서지워진 삶을 살수가 없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현대 프랑스 철학은 전통철학에서 소외되었던 문제들을 다루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것들을 전체적으로 연결시켜서 플라톤 이후로부터 내려온 세계관과 세계 전체를 구축했던 어거스틴의 인생관과 포괄적인 우주관을 대신할 수 있는 그 무엇을 내놓은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서 한없는 정신적인 갈증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현대철학이 가다가 가다가 마지막에 비트겐슈타인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세상의 모든 철학은 다 쓸데없는 이야기이고, 이것은 언어의 문제라고 하면서 소위 말하는 ‘분석철학’이라는 것을 가지고 들어오게 됩니다. 모든 것이 다 끝이라고 생각하지만 사람이 물에 빠졌을 때 발을 휘적거리면 밑바닥이 안보이듯이 그게 끝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파편적인 것입니다.
칼빈은 이것을 합니다. 창조주를 아는 지식이 먼저이지만 희미한데 그 다음에 구속주에 관해서 알게 되고, 구속주에 관한 지식을 토대로 다시 올라가서 창조주에 대한 지식을 교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창조주를 아는 지식과 구속주를 아는 지식이 합쳐져서 이 세계에 대한 올바른 관점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관점을 가지고 어떤 사람은 정치를, 어떤 사람은 사회사업을, 어떤 사람은 목사를, 어떤 사람은 교사를, 어떤 사람은 군인을 하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의 사회질서를 형성하게 되는데 그렇게 형성되는 새로운 사회의 질서를 'Institution'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을 구축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칼빈이 그토록 천착했던 ‘거룩함’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칼빈의 포괄적인 'Institution'에 대한 사상은 전적으로 어거스틴에게 의존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거스틴을 공부하면 칼빈의 신비감이 뚝 떨어질 것입니다. 저는 칼빈이 누구인가 물으면 주저 없이 어거스틴의 착한 학생이었다고 대답하겠습니다. 실제로 그의 기독교 강요에는 출처를 밝히지 않았지만 어거스틴의 책을 몇 페이지씩 인용한 내용들이 가득 차있습니다. 어거스틴 이후의 신학자들이 샛강이라면 어거스틴은 바다입니다. 어거스틴을 모르면 신학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거룩함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것을 이해해야만 칼빈의 사상을 이해하기기 쉽습니다.
‘거룩함’이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거룩함은 히브리어로는 ‘카도쉬’, 희랍어로는 ‘하기오스’입니다. ‘하기오스’는 고전 라틴어의 ‘하고스’라는 단어에서 옵니다. ‘하고스’는 종교적인 두려움에 관한 일입니다. 거기에서 ‘하기오스’라는 말이 나옵니다. ‘카도쉬’는 ‘자르다’라는 뜻을 가진 ‘카다쉬’에서 온 것입니다.
첫 번째로 ‘거룩함’이라는 것은 부결된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바쳐지고 봉사하도록 하나님에 의해 선점된 것입니다. 우리가 식당에 갔을 때 예약 푯말이 있으면 못 앉습니다. 이미 선점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테이블은 언제언제 예약한 아무 아무개 씨 가족을 위해서 선점되었습니다. 그러니 당신들은 이 테이블에 분깃이 없습니다.”라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거룩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별되었고 제물이 구별되었고 나라가 구별되었다는 등의 구별의 개념이 나옵니다.
두 번째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두 가지 요소를 갖는데 첫째는 존재적 초월성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줄 알게 될 때 인간은 위대한 하나님 앞에 티끌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 때 인간은 자기가 얼마나 미천한 존재인가를 느끼고 그 앞에 두려움과 떨림으로 부복하게 됩니다. 그게 바로 거룩함의 효과입니다. 둘째는 도덕적 완전성입니다. 우리에게도 사랑이 있고 공의도 있어서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의 속성을 통해 그 사랑과 공의를 알고 나니까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너무 보잘것없고 더러운 것입니다. 이것을 붙들고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도덕적 완전성을 의존하게 됩니다. 이 때 인간은 미천함과 비참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거룩함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화의 삶을 살면 하나님을 향해 우리 자신을 구별하게 되고, 하나님의 위대하심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미천한 존재인지를 깨달으면서 자신의 삶의 주도권을 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도덕적으로 불완전하고 더러운 존재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구속을 의지하면서 일평생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존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샤돌레트(Sadolet)라는 사람이 제네바 교회에 공개서한을 보냈습니다. 받아서 풀어 볼 사람이 없었습니다. 칼빈이 샤돌레트의 서신에 답신을 합니다. “결국 인간이라는 것은 참된 행복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자기와의 이별을 해야 합니다. 자기와의 이별이 필요하고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이 우주와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중심이심을 인정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거기에서 참된 행복을 찾게 되는데 이런 토대위에서 구축되지 않은 인간 중심의 신앙은 거짓된 신앙입니다.” 이렇게 답변을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자기와 작별함으로써 참된 질서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창조주에 대한 지식이 희미했었는데 구속주를 알고, 다시 창조주를 제대로 알고 나니, 세계가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리스도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온 땅과 만물 위에 뛰어나신 영광의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을 의존하며 살 수밖에 없는 아주 미천한 존재라는 인식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의존하는 것 바로 정돈된 질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질서의 정체가 무엇인가? 사랑입니다. 사랑의 질서입니다. 예전에는 자기가 온 우주의 중심인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절대적인 선과 악에 대한 판단보다 더 중요한 것은 'good or evil'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미 현대인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 관심 없습니다. 'god or bad', 좋은 것이냐 좋지 않은 것이냐, 그 문제인 것입니다.
스피노자가 철학을 재구성하면서 스피노자의 유명한 책 가운데 하나가 『윤리론』(Ethica)입니다. 그것과 함께 『정치학』, 『신학』, 이 세권이 스피노자의 제일 중요한 책입니다. 스피노자에게 아주 중요한 것 하나는 기분입니다. 절대적인 선악이 성경에 기초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은 화란교회에서 파문당합니다. 그런 것은 없고 다만 내게 좋으냐, 나쁘냐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절대 악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기에 좋은 것이 중요합니다. “너는 커피를 좋아하냐?” “아니, 나 싫어해.” 아니면 “나 좋아해.” 이것의 차이입니다. 그것을 판단하는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윤리학이 이것에 기초해서 세워진 것입니다. 스피노자가 포스트모더니즘에서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범신론주의자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죄는 자기가 온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자기의 행복이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수많은 'Institution'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정치를 합니다. 그런 사람이 학생들을 가르칩니다. 그런 사람이 시집 장가 가서 아내와 남편이 됩니다. 이렇게 해서는 행복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하나님이 위에 계시고 나는 결코 중심이 아니라는 사상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에 놓고 자신은 외곽으로 물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구원받을 때 그리스도의 로드쉽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미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고 나의 행복이 최고의 가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최고의 가치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 거룩함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B. 거룩한 삶의 포괄성
헤이꼬 오버만(H. Oberman)이라는 유명한 학자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중세와 르네상스의 연속성의 문제들을 연구하는 세계적인 학자입니다. 헤이꼬 오버만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칼빈의 'institute'의 의도는 국지적으로 삶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인간의 삶 전체를 향한 포괄적인 개혁의 틀이다.” 결국은 'Institution'이라고 하는 말 자체는, “우리의 종교를 통한 개혁은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포괄성을 가진 것이고 영원한 항구적인 성격을 가진 것이다. 이것은 파편적인 것이 아니라 총체적인 사회 전체를 다루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어지는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의 문제를 포괄하는 것이며, 이것을 통해서 사회 전체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맞게끔 개혁되는 것이다.” 이것이 'Institution'에 담겨 있었던 칼빈의 구도인 것입니다.
칼빈이 보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체계는 삼위일체적입니다. 토대 자체를 성부 하나님이 제공하십니다. 그 토대 위에 기독론적인 기초가 놓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집니다. 그리고 성령의 도움이 있습니다. 이러한 세 가지 토대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지식, 구속주 그리스도에 대한 확고한 지식, 그 속에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인식하고 성령의 도움을 받으면서 새로운 'Institution'을 위해서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칼빈의 이러한 생각은 인문주의에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조언을 하겠습니다. 기독교 신학을 하기 위해서 빼놓지 않으면 안 되는 공부가 있는데 그것은 르네상스에 대한 공부입니다. 종교개혁은 기독교 인문주의에서 사상적 토대를 얻습니다. 기독교 인문주의는 북이탈리아의 인문주의로부터 나옵니다. 사상적 인문주의는 예술적 르네상스에서 자양분을 공급받는데 그것이 피렌체에서 일어납니다. 원래 르네상스라는 말이 이탈리아어 'rinascimento'라는 데서 나오는데 ‘재탄생’입니다. 무엇이 재탄생 하는 것이냐 하면 인간이해에 대한 재탄생입니다.
오늘날 인문학을 강조하다 보니 인문학이 어마어마한 줄 알고 빠져서 정신을 못 차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교회 안에서도 인문학 강좌를 열고 하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인문학은 기본적으로 인간을 중심으로 삼는 학문입니다. 동양의학에서 독과 약은 서로 통합니다. 우황청심환이나 특히 안궁우황환 같은 약은 사람이 절명할 때 손톱만큼만 떼어서 물에 개어 먹이면 살아납니다. 그런데 거기에 꼭 들어가는 성분이 주토(朱土)인데 독약입니다. 이것은 반 스푼만 먹으면 죽어버립니다. 그런 약은 사람이 혼절해도 삼일 이상 먹이면 안 됩니다. 동양의학에서 약과 독은 서로 통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약이 독이 될 수도 있고 독이 약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르네상스의 인문주의를 너무 신봉하면 독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적절히 사용을 해야 합니다.
인간에 대한 재발견의 단초를 그리스와 로마에서 얻습니다. 피렌체의 위대한 예술 작품과 건축 등 르네상스가 일어나고 거기에 메디치가의 지원이 있었는데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것들이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 도나텔로(Donatello), 이런 사람들이 여행을 하면서 로마의 판테온(Pantheon)이나 위대한 건물들을 보면서 영감을 받습니다. 그 뒤에는 로마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리스 사상이 있었던 것입니다. 거기에서 자신들이 학습 받고 있는 로마 가톨릭에서 인간에 대한 관점이 잘못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인간에 대한 자각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제일 먼저 예술로 표현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음악으로는 아직 나타나지 않고 예술, 건축, 문학, 이런 것들로 표현되기 시작합니다. 브루넬레스키, 도나텔로, 지오토,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어마어마한 예술 작품이 쏟아져 나오면서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북이탈리아에 와서는 인문주의로 발전하고, 인문주의가 계몽주의의 뿌리가 되는데, 여기에도 층차가 다양합니다. 극단적인 계몽주의, 이신론적인 계몽주의, 그 다음에 독실한 기독교 신앙의 가치를 유지하는 인문주의, 이렇게 다양한 사상들이 나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을 살펴보면 모두 다 인문주의에 접해서 그 당시에 개화를 한 사람들입니다. 칼빈의 첫 번째 작품도 신학 작품이 아니라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이었습니다. 그렇게 해박한 인문주의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진정한 거룩한 삶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됨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올바른 관계가 설정되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올바른 관계가 설정되고, 세계의 모든 사물과의 온전한 관계가 설정된 가운데 비로소 'vie bien ordonnée', ‘정돈된 삶’이라는 것이 나오는 것입니다. 사상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교리학교가 있는데 제가 강의를 합니다. 300명씩 모여서 강의를 하는데 항상 수업하기 전에 ‘카테키스무스’(cătēchísmus)를 합니다. 제가 묻고 교인들이 대답을 합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에 왜 태어났습니까?” “스투데오 에르고 숨(stúdĕo, ergo sum), 나는 공부합니다. 고로 존재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공부를 해야 합니까?” “우리가 공부해야 할 대상은 크게 셋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에 관하여, 두 번째는 세계에 관하여, 세 번째는 인간에 관한 지식인데, 인간에 관한 지식은 보편적 인간성에 관한 지식과 개별적인 인간인 나에 대한 지식으로 나뉩니다. 우리는 이 세 대상에 대해 공부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소위 이야기하는 질서 지워진 선한 삶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칼빈이 바라보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에 비천한 한 인간이 하나님을 모르고 삽니다. 칼빈은 인생의 가장 커다란 불행은 ‘무지’라고 보았습니다. 어거스틴의 전통을 계승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전까지는 희미한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cognitia creatoris', 창조주에 대한 희미한 지식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듣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구속주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갖게 되면서 여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채를 보고 자신과 이 모든 세계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 자신이 얼마나 존귀하고 가치 있는 인간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인간 하나만을 보아서는 존재의 의미 규정이 불가능합니다. 우주선을 만드는데 수백만의 부품이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 중 부품 하나를 가지고 와서 “이것 참 예쁘지요?” 그러면 여러분은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정말 탁월함, ‘아레떼’를 가지고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대답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이것이 무엇에 쓰이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부시맨 영화에서 보면 조종사들이 비행기에서 먹고 난 콜라병을 떨어뜨립니다. 부시맨들이 그것을 받아서 이것이 도대체 무엇에 쓰는 것인지 모릅니다. 그것을 가지고 절구를 쿵쿵 빻으니까 곡식이 잘 빻아지는 것입니다. 또 다른 종족이 그것을 빼앗아서 가지고 갑니다. 부시맨과 같이 그렇게 인간의 의미 규정을 못합니다.
인간이라는 것은 ‘가치망’(nets of value) 안에 놓일 때 어떤 존재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가치의 그물망 이것이 무엇인가? 하나님, 인간, 세계, 이 세 가지 구도 속에서 인간이라는 것이 어떤 존재이고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이 선한 삶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헤겔 같은 사람은 인간의 존재 자체를 거대한 역사 속에 뒤웅 치며 흘러가는 한 덩어리 전체 속한 하나의 부분이라고 밖에 보지 않았습니다. 사르트르나 하이데거 같은 경우는 인간은 세계와 관계없이 휙 던져진 한 존재에 불과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의미를 묻는 것이 아니다. 그냥 우연이다.” “그러면 나는 누구냐?” “잉여의 존재, 없어도 되는데 괜히 생겨난 존재다. 의미를 묻지 말라. 본질을 묻지 말라. 그래서 실존이 중요한 것이다. 어차피 우리 앞에 삶이 놓여 있으니까.”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누구인지 규명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거스틴은 가치의 그물망 속에서 인간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그가 누구인지 규정될 때 비로소 세계와 어떤 관계를 맺고, 인간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자연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할지가 분명해지면서 인생의 의미라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존재의 망이고 가치의 망입니다. 존재와 가치는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존재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것은 더욱 가치 있는 것이고, 존재가 하찮으면 가치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관계가 성립을 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정말 무가치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할 때 자신이 세계와 인간들과 맺는 관계 안에서 하나님 때문에 가치 있는 인간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때 지워지는 질서는 사랑의 질서입니다.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하고 자신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갈 수 있는가? 이것에 의해서 규정이 되는 것입니다.
C. Calvin's motification & vivification
여기에서 실제적인 거룩한 삶을 위한 칼빈의 중요한 교리 하나가 등장하게 됩니다. 성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교리가 등장을 하는데 'mortification and vivification'의 교리입니다. 'mortification'은 'foot death', ‘죽음에 두다’라는 뜻입니다. 'mortification of sin', 신자 안에 있는 죄를 죽이고, 'vivification of grace' 신자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살리는 것, 이것이 동전의 양면과 같은 거룩한 삶의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칼빈은 신자 안에 있는 죄를 죽이는 방법에 대해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한 사람이 무지하게 살다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희미한 의식이 구속주를 아는 지식을 통해 새로워지고 세계를 보는 관점들이 생겨나서 가치와 질서의 망에 대한 인식이 생겨납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이 사람은 여전히 죄를 가진 인간입니다. 그것을 완전히 벗어버리는 것은 현세에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신자 안에 죄가 남아 있기 때문인데, 이것은 신자의 순종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 언약 안에서 끊임없이 은혜를 주시는데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은혜를 받고 말씀을 따르면서 순종하는 삶을 살면 죄의 영향력이 점점 감퇴합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했던 것처럼 내 안에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고 담대히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이 무화(無化)된 것 같은 성화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mortifies state', ‘죄를 죽인 상태’입니다. 그런데 신자가 항상 이런 삶을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에서 부패가 나오게 됩니다. 이런 것들이 점점 커집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이것들을 다 경험했는데도 실제적으로 불신자와 전혀 다를 바가 없는 비참한 삶이 전개됩니다. 이미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고 하는 'already', 그러나 완전하지는 않은 'but not yet'의 긴장관계가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면서 칼빈은 'mortification'을 이야기합니다. 'mortification'은 칼빈이 처음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에 의해서 이미 나온 이야기입니다. 죄는 결국은 자아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고자 하는 자아가 끊임없이 죽임을 당하는 길 세 가지를 제시합니다. 첫째가 자기 부정(self-denial), 두 번째가 십자가를 지는 삶(cross bearing), 세 번째가 미래의 삶에 대한 묵상(meditatio vitae futurae)입니다.
1. 자기 부인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자신은 끊임없이 욕망에 시달리는 존재이기 때문에 자기 안에서 솟구치는 모든 욕망과 생각들을 객관화시켜 살펴 판단하지 않으면 결국은 자기는 자기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그만큼 하나님이 구원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의 질서를 떠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질서 지워진 선한 삶이 흐트러지게 됩니다. 단정한 삶이 깨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기를 부정해야 합니다. “나는 아니다.” 솟아나는 나의 욕망, 자기만을 위한 이욕, 죄, 이런 모든 것들에 대해서 끊임없이 'self-denial', 부인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이라고 하시면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자기를 부인하고”입니다. 이것은 마치 시편 42편을 생각나게 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자신 안에서 자아의 분리(split)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치 제 3자인 것처럼 “너 왜 그러느냐, 왜 낙망하고 그러느냐” 하면서 그러면 안 된다고 자아에게 말을 건네는 것입니다. 한 자아는 믿음 안에서 살려고 하는 은혜의 자아이고, 또 한 자아는 하나님 없이 현실에 매몰되어서 낙심하고 절망하려고 하는 불신앙의 자아입니다. 그것을 타이르는 자아의 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자아의 분리를 경험하는 때는 무엇인가 잘못했을 때입니다. 자기가 좋으니까 그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회개를 하게 됩니다. 그때 정말 미운 것은 사탄이 아니라 자기가 그것을 따라갔다는 것이 너무 후회되고 밉습니다. 그것이 자기 부정의 모습입니다. 예전에는 자기 부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부정을 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삶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이냐 하면 회개입니다. 그래서 교인들에게 회개를 잘 가르쳐야 합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회개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다.” 이런 끊임없는 자기부정이 요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자기를 부정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긍정하도록 합니다. 누군가가『긍정의 힘』을 쓴 조엘 오스틴이 누구냐고 저에게 물어오기에 대답했습니다.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면 내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내가 신학자로서 목회자로서의 명예를 걸고 이야기하는데 그 사람은 절대로 그리스도인 아닙니다.” 궁금하면 래리 킹의 토크쇼에서 그가 했던 인터뷰를 보십시오.
자기 부정은 인간의 영혼을 아름답게 합니다. 우리는 흔히 자유를 많이 이야기합니다.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지자. 가난으로부터 자유로워지자.”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또 교육에 있어서도 자유를 강조합니다. 그런데 자유는 항상 'from'이라는 전치사를 동반합니다. ‘무엇으로부터?’ 'from poverty', ‘가난으로부터의 자유’, 'from distress', ‘고통으로부터의 자유’.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종교와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가 될 수는 없습니다. 종교와 신앙, 교육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유가 아니라 ‘자율’(autonomy)입니다. 몬테소리나 썸머 힐, 이런 교육학자들은 자유로운 교육 이론들을 내놓았습니다. 몬테소리 교육은 독특합니다. 1학년, 2학년, 3학년, 이렇게 학년별로 학생들을 나눈 것이 아니라 1학년부터 6학년까지 한 반에 섞어놓습니다. 그 속에서 상호작용을 하면서 배우게 합니다. 이런 교육 이론들이 자유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잠깐 효과를 나타내지만 궁극적으로 바람직한 성과를 나타내지 못합니다. 종교와 교육의 궁극적인 목표가 자유 자체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한 자유냐는 것입니다. 자율입니다. 세상의 자율은 하나님 없는 자율이지만 기독교적인 자율은 다릅니다. 우리가 신율(新律)에 붙잡혔을 때 가장 자율적인 존재가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자유로운 때 무어라고 했습니까?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이것이 진정한 자율입니다.
그런 존재로서 살아가는 삶은 멋스럽고 우아합니다. 돈이나 지위에 의해 주눅 드는 삶이 아닙니다. 거룩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는 인간으로서의 우아하고 품격 있는 삶입니다. 비록 오늘 저녁 끼니가 간곳이 없어도, 비록 박사학위나 석사학위가 없어도 꿋꿋하게 인간의 품격을 유지하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학력과 상관이 없는 존재의 울림이 있습니다. 그런 삶을 살라고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편지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2. cross bearing
그 다음은 'cross bearing'입니다. 칼빈이 기독교강요에서 'cross bearing'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십자가란 무엇인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우리도 지게 해달라고 하는데 그것은 망발이고, 십자가라는 것은 은유적인 것입니다. 칼빈이 우리의 영적인 성숙을 위해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우리 인생사에서의 모든 고난과 괴로움, 고통을 말합니다.
이 십자가를 둘로 나누는데 절대적인 십자가와 상대적인 십자가입니다. 절대적인 십자가는 티끌만큼도 자신의 잘못 없이 당하게 되는 고난입니다. 순수하게 내가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섬긴다는 이유, 오직 그것 하나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절대적인 고난입니다. 사도들이 당했던 고난 같은 경우입니다. 상대적인 고난은 자신의 허물이 개입되어 있는 고난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구박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삶의 태도가 올바르지 않은 것입니다.
제가 직장에 다닐 때 있었던 일일입니다. 다른 직장에서 있었던 일인데, 12시부터 1시까지 신우회모임을 갖고 예배가 끝나면 점심을 먹으러 가는 것입니다. 점심을 먹고 돌아오면 1시 40분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상사들이 욕을 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 리더 한 사람이 대한민국에 종교의 자유가 있는데 지금 기독교를 박해하는 것이냐고 그러니까 상사가 말했습니다. “나는 네가 뭘 믿든지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런데 근무시간에 들어와야지 왜 점심시간에 밥을 안 먹고 모든 사람이 근무할 때 너희는 밥을 먹으러 가냐? 나는 네가 뭘 믿든지 상관이 없지만 믿으려면 똑바로 믿어라.” 이것은 절대적인 십자가가 아니라 상대적인 십자가입니다. 그렇게 예배드리는 것이 좋으면 점심시간에 금식하고 예배를 드리던지 절반 예배를 드리고 절반 밥을 먹든지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죄를 죽이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cross bearing'을 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입니다. 이것이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unio cum Christo'라는 신학적인 주제는 워낙 유명한 주제이기 때문에 이것에 관해 어마어마하게 많은 책들이 나왔습니다. 몇 권 소개하면, 타드 빌링스(J. Todd Billings)가 쓴 Union with Christ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훼스코라는 사람이 쓴 역사적인 'trajectory'를 추적해 가는 Unio cum Christo라는 책이 있습니다. 수없이 많습니다. 그 중에 아무거나 읽으시면 됩니다.
칼빈은 정말 대단한 인물입니다. 정말 핏빛 신학을 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정말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칼빈이 존경스럽습니다. 그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나라는 존재가 여기 있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시련을 만나고 고통을 경험합니다. 여기에는 괴롭히는 인간도 있을 것이고 상황도 있을 것입니다. ‘너 죽어라, 나쁜 자식, 형편없는 쓰레기 같은 목회자’라고 욕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 일을 칼빈이 겪었던 것입니다.
미국에 집회를 갔는데 장로님 한 분을 데리고 왔습니다. 밥을 먹는데 세상 말로 골 때리는 사람이었습니다. 밥을 먹다가 그럽니다. “목사님, 얼마 전에 외국에서 강사 불러다가 설교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것 좀 하지 마십시오. 강사라는 목사가 와가지고 우리가 잘못했다고 죄를 지적하면서 그따위로 신앙생활 하면 안 된다고 하는데 제가 뒤에서 얼마나 화가 나는지 그날 권총을 가지고 왔으면 쏴 버렸을 것입니다.” 그 사람이 밥을 먹고 제 설교 안 듣고 가서 다행이지, 그날 4시간 15분을 설교했는데 총 맞을 뻔 했습니다. 그때 “저 장로를 한방 먹여?” 그러면서 대꾸를 하고 싸우면 'cross bearing'이 아닙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왜 나한테 이런 것을 갖다 주는 거냐고 그러면서 발길로 차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cross bearing'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고생이지 고난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성숙하지 않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고생을 많이 하면 모두 고난을 극복한 훌륭한 목회가가 될 줄로 알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소화가 안 되니까 인간성이 쓰레기처럼 망가지고 원한에 사무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그럴 때 계신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계실 때 십자가를 지고 당하셨던 고난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고통을 여기에 투사시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신앙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현재적으로 고통당하는 나와 과거에 자신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를 생각하면서 이것들이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고난 속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십자가의 고난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죽으시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그에 대한 보상으로서 부활이 침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이 사람들로부터 당하는 고난을 당하며 자기가 얼마나 비참한지를 깨닫고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자신을 깨우치시는 주님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죽음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육체가 죽었지만 우리는 옛 성품이 죽는 것입니다. 죽을 때 그리스도와 합치되는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죽는 것만큼 예수의 생명이 침투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actualize'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실제화 되고 죽은 것만큼 그리스도의 생명이 실제화 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옛 성품에 대해 죽고 새로운 성품이 생겨나게 되는데 이것이 결국은 사랑의 성품이고 처음에 이야기했던 질서 지워진 선한 삶으로 돌아가는 원동력이 됩니다. 그래서 다시 모든 망 속에서 그 위에 서있는 자신의 처지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훌륭한 'cross bearing'입니다.
3. 미래에 대한 묵상
마지막으로 ‘미래의 삶에 대한 묵상’(meditatio vitae futurae)입니다. 칼빈이 여기에서 신자의 정체성을 이야기하면서 잘 쓰는 단어가 세 가지 있습니다. 'pèlerin, étranger, voyager', 이런 단어입니다. 'pèlerin'은 순례자, 'étranger'는 이방인, 낯선 사람, 'voyager'는 여행자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칼빈은 일평생 스위스에 사는 프랑스 난민을 자처했다고 합니다. “이 세상은 내 집이 아니다.” 그러면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contemptio mundi', 세상에 대한 경멸입니다. “이 세상을 경멸하라.” 이것이 굉장히 아름답게 묘사가 됩니다. 그래서 칼빈을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은 칼빈이 피안주의 성격을 가진 도피의 결함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헤이꼬 오버만 같은 사람은 칼빈의 이러한 'contemptio mundi', 세상에 대한 경멸을 “세상을 순수하게 사랑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래서 세상을 전혀 사랑하지 않을 때 정말 세상을 제대로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보았습니다. 이런 사상도 사실은 어거스틴에게서 전수가 된 사상이라고 봅니다.
어거스틴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참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사랑하지 않는 것이요, 참으로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자만이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 질서의 망이 있습니다. 여기가 하나님이 나에게 세워주신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 서있을 때는 참으로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진짜 나를 사랑하는 것과 일치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항상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여기 있고 싶지 않고 저기 있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고는 그 사랑을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하면 처음에는 만족이 오는 것 같지만 결국은 하나님을 맞서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불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칼빈이 이야기하는 인생의 행복은 'Coram Deo', 하나님 앞에서 사는 행복입니다.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해지려고 해서는 불행해진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런 사람일 경우에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정말로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강조합니다. 칼빈의 ‘영혼의 불멸성에 관하여’(Iimmortalité de l'âme)라는 논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참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것이 존재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또 다른 의미에서 사실은 없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있지만 사실은 없는 것들에 대한 사랑에서 시작이 된다.” 그러니까 끊임없이 내세의 삶을 묵상하며 미래의 삶에 대한 기대(expectatio futurae vitae)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현세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소중하지만 미래의 완전한 삶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너무나 찬란하고 아름답습니다.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서 'sursu corda' “마음을 들어라.”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에 것을 찾으라.”(골3:1) 사상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전개되는 삶에 최선을 다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느 것도 그리스도 바깥에서 사랑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교회를 위해서 열렬히 봉사하고 교인들을 사랑하고 불면 날아갈세라 꺼질세라 사랑하지만 내일이라도 결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건강을 끊임없이 챙겨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로 시간이 다 끝났다.” 그러면 모든 것을 그대로 놓고 “아멘”하고 떠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사랑하되 곧 떠날 사람처럼, 그러나 영원히 살 사람처럼 역설적으로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신자의 삶의 태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이야기합니다. “공간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사랑할 것을 제시하지만 시간은 우리에게서 그것들을 빼앗아간다. 우리의 행복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사라져가는 것들에 매여 있다면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겠는가?” 끊임없이 미래에 대한 삶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여덟 살 위였던 이델레트가 먼저 죽을 때 그 광경을 보면 이러한 칼빈의 신학이 그대로 나옵니다. 이델레트가 숨을 헐떡이면서 죽어갈 때 칼빈이 옆에 있었습니다. 손을 꼭 잡고 천국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 나라에서 맛볼 영광이 얼마나 큰지를 이야기하며 위로합니다. 영혼에 대한 관점에서 놀라운 일치를 이루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