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가르침의 목적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딤전 1:5)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사도 바울은 첫 번째로 투옥되기 전까지 약 10통의 편지를 썼습니다. 이것들이 우리들이 알고 있는 바울 서신 중 대부분입니다. 이 편지들은 공적인 서신으로서 교회에 보내는 편지였고, 편지를 받은 교회는 목회자로부터 성도들까지 회람 형식으로 돌려 읽는 편지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공적인 서신인 편지 속에는 기독교의 유장한 교리를 밝힌 신학적인 내용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서 두 번째 투옥될 때까지 두 제자에게 쓴 세 통의 편지가 있습니다. 이 편지를 받은 사람은 디모데와 디도라고 하는 목회자였고, 우리가 알고 있는 디모데전서, 후서 그리고 디도서가 바로 여기에 속하는 서신들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목회 서신이라고도 부릅니다. 이 편지들은 기독교의 교리를 밝힌 유장한 신학적인 내용들을 다룬 10통의 편지에 비해서 개인적이고 따뜻하며 목회 실천적인 내용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디모데전서는 당시 에베소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아들 같은 디모데에게 쓴 사도 바울의 첫 번째 편지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마게도니야로 가면서 이 디모데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며 에베소 교회를 목회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당시 에베소는 로마 제국에서 매우 큰 도시들 중 하나였고, 발달한 문화와 문명을 지닌 도시였습니다. 지금도 그 유적은 굉장히 거대한 규모의 도시의 면모를 모여주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굉장히 발달한 교통과 사회 시설들이 있었고, 특별히 거기에는 많은 학문이 성행하고 있는 도시였고, 동시에 우상 숭배도 아주 열심이던 도시였습니다.
특별히 이 도시는 당시 기독교를 괴롭혔던 중요한 이단중의 하나인 영지주의라고 하는 이단적인 가르침이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이 영지주의는 그리스 철학과 동방 신비주의 같은 것들을 함께 버무려 기독교의 가르침까지 가미한 이단이었습니다. 극단적인 지식주의를 강조하고 영혼으로 아는 초월적인 지식을 통해 구원을 받는다는 핵심적인 가르침을 강조하는 이 이단들은 특히 식자층에게 상당한 매력을 끼쳤습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예수님의 결혼, 그 후손들에 대한 이런 이야기들은 대부분 영지주의 문서에서 나온 이단적인 내용들입니다. 아무튼 이러한 가르침들이 기독교에도 상당한 영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이 디모데를 에베소에 남겨두었던 것입니다.
II. 기독교 가르침의 목적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은 기독교 가르침의 목적을 우리에게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 가르침의 목적은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배우든지 설교를 듣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난 다음에는 예전에 없었던 순수한 사랑이 마음속에 감동으로 올라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되겠다고 하는 감동이 오는 것, 이것이 성공한 기독교 가르침의 효과인 것입니다. 가르치는 자의 입장에서 보면 가르침의 성공이고, 배우는 자의 입장에서 보면 성공적으로 배운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목회자로서 디모데의 사명을 소극적인 것과 적극적인 것으로 나누어 가르쳐 주었습니다. 소극적인 것은 거기에 머물면서 복음과는 다른 교훈을 교회에서 가르치지 못하도록 엄중히 금지시키는 것이었고, 또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않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영지 주의에서 가르치는 신화를 의미하는 것이고 끝없는 족보는 성경에 나오는 족보가 아니라 이것은 신의 계보로부터 시작을 해서 천사들과 그리고 그 신의 자손들에 관한 초월적인 족보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에 몰두하게 되면 예수를 믿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보다는 오히려 끊임없는 변론을 만들어 내서 교회를 논쟁의 정신에 빠뜨리게 되기 때문에 이것을 못하게 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극적인 것이라면 적극적인 것은 거기에 머물며 기독교 신앙의 참된 가르침을 가르침으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다시 말해서 그 사랑 때문에 경건하게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는 것이 이 기독교 가르침의 목적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 위대한 본문을 해설하기에 앞서서 먼저 우리의 신앙생활을 반성해 봅시다. 여기에서 여러분은 수많은 기독교의 가르침에 접했습니다. 작년의 통계를 보니까 제가 개척하고 나서 20년 동안 열린 교회에서 설교한 것이 5215번이었다고 통계가 나왔습니다. 그 많은 가르침을 여러분이 접하였습니다. 그러면 그 접한 여러분이 얼마나 이 마음속에서 그 가르침에 접했을 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경건한 마음, 하나님을 경배하면서 살려고 하는 마음으로 그 가르침에 반응하였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A. 청결한 마음(καθαρᾶς καρδίας)
이 기독교 가르침의 목적을 오늘 성경은 3가지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첫째는 청결한 마음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이라고 말입니다. 희랍어 성경에는 ‘카타라스 칼디아스’(καθαρᾶς καρδίας)라고 나오는데 ‘칼디아’(καρδια)는 ‘심장, 마음’이라는 뜻이고, ‘카타라스’라는 말은 여기에서 영어 ‘카타르시스’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묻어있는 것들을 물 같은 것들을 뿌려서 깨끗이 씻어내어서 정결하게 하는 것이 카타라스입니다. 이것은 단지 물리적인 정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말과 맞먹는 히브리어가 ‘타헤르’(rhef)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게 바로 구약 성경에 나오는 ‘정결한’이라는 것입니다. 이러 이러한 사람은 부정한데 이렇게, 이렇게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거나 혹은 의식의 절차를 거치면 정결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부정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거나 하나님이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이고 정결하다는 것은 하나님이 받아들이실 수 있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즉, 거룩한 관계 속에 들어갈 수 있는 깨끗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청결한 마음은 원래 뜻이 물로 씻겨진, 의식적인 불결로부터 정화된 마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마음은 이제 제사나 혹은 율법에 의해서 씻겨진 마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 씻겨진 마음입니다. 불교에서는 이 청결한 마음을 제행무상의 도리로 깨우치려고 합니다. 인간이 행하는 모든 것은 헛되고 의미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 무의미를 직시함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모든 욕망을 초탈하고 그리고 정결한 상태가 된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교리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 모든 인간의 행하는 일의 허무를 직시함으로써 거기에서 정결함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참된 인간의 본성으로 돌아가자고 말하지만 참된 인간의 본성 자체가 청결한 본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오히려 이 청결한 마음을 얻는 길은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으로 마음이 가득 찬 상태가 됨으로써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분이 나를 사랑한 그 사랑의 마음이 녹아 나도 그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될 때에 사랑으로 가득 찬 그 마음이야말로 모든 이기심과 더러운 욕망으로부터 벗어난 청결한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는 천국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고, 그리고 애통하는 자에게는 위로를 주시고, 마음이 온유한 자에게는 땅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배부르겠다고 말씀하셨지만 이것들은 모두 천국의 복중 일부를 가리키거나 혹은 천국 전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천국 전체의 진수는 바로 다섯 번째의 복인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뵈올 것임이요 라고 한 마태복음 5장 8절의 복입니다. 이 복이 모든 8복중 가장 빛나는 최고의 복인 것입니다. 이 복을 하나님은 마음이 청결한 사람에게 주겠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가르침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훌륭한 설교는 요리와 같은 설교가 아니라 훌륭한 설교는 그 설교를 들을 때 자기의 마음이 불결하고 더러웠다고 하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설교가 훌륭한 설교입니다. 거기에서 진정한 회개가 있고 자신의 실패한 삶에 대한 마음으로부터의 반성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리 배워도 이렇게 자신의 마음이 그 말씀 앞에 불결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눈물로 회개하고 다시 잘못된 것들이 아닌 가치 없는 것들에 대한 사랑이 아닌, 진정으로 소중한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마음이 가득 참으로 청결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선한 양심(συνειδήσεως ἀγαθῆς)
두 번째는 선한 양심입니다. '선하다'라고 하는 것을 양심에다 굳이 붙인 것은 삐뚤어진 양심이 있다는 말도 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선한 양심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양심을 주신 본래의 목적대로 기능하고 있는 올바른 양심이라는 의미가 더 큰 것입니다. 희랍어 성경에는 이것을 ‘시네이데시스’(συνείδησις)라고 말합니다. 이게 양심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함께’라고 하는 단어와 ‘알다’라고 하는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여러분이 양심을 영어로 ‘conscience’라고 말합니다. ‘con’은 ‘함께하다’라는 뜻이고, ‘science’는 ‘science’입니다. 그래서 원래 지식입니다. 그래서 라틴어로는 ‘콘스껜띠아’(conscientia)라고 말합니다. 함께하는 말과 지식 혹은 의식이라는 말이 함께 엮어져서 양심이라고 하는 단어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즉, 무슨 뜻이냐 하면 양심은 인간의 의식에 부착되어서 무엇이 선하고 악한 것인지를 판단하는 정신 작용입니다.
그러니까 의식이 없으면 양심이 없습니다. 자, 예를 들어봅시다. 내가 여러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즉시 기억 상실증에 걸렸습니다. 그러면 자기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알고 괴로워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래서 양심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양심은 자기가 행한 어떤 일에 대한 기억에 부착되어 있어서 그것이 선하다 악하다 라는 판단을 끊임없이 내려주는 작용이 양심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라도 이 양심이 인간 마음 안에서 작용을 멈추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 욕망이 워낙 크거나 혹은 약물에 의해 중독이 되거나 육체적인 질병 상태에 있거나 이런 변화에 의해서 양심의 작용이 강해지거나 약해질 수는 있습니다.
작년의 일이었습니다. 경찰청에는 오래전 있었던 미제의 살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도저히 범인을 잡을 수 없어서 거의 포기했는데 어떤 한 사람이 죽어가면서 경찰에 말하자면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암에 걸려서 이 사람은 거의 죽어가고 있었고, 죽기 직전에 몇 년 전 몇 월 며칠에 일어난 그 살인 사건에 자기가 공범이었다고 말하고 자기 이외에 이런 사람, 이런 사람, 이런 사람이 이렇게 이런 방법으로 그 여자를 살해였노라고 실토하고 몇 시간 있다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으로 하여금 죽으면 그만인데 죽기 몇 시간 전에 그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은 바로 수많은 세월이 흘렀어도 이 속에 남아있는 그 여자를 죽인 것에 대한 기억 그리고 그것은 명백히 죄이고 너는 그것 때문에 죽는다고 할지라도 벌을 받을 것이라고 하는 상벌에 대한 의식이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에 그는 그 양심이 시키는 바에 의해서 그것을 자백하고 나서야 비교적 편안한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 보면 양심의 힘이 얼마나 큰 것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잘못을 하고 그 사람이 마땅히 죽임을 당할 정도로 잘못했는데 죽일 사람이 없을 경우에는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이 스스로 자기를 죽이기도 하는 것이 양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런 질문이 떠오를 것입니다. “목사님, 주위에는 전혀 그런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 염통에 털난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론 있습니다. 그것은 몇 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데 먼저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까 말씀드렸듯이 어느 순간에 욕망이 강하면 양심의 기능이 거의 멎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을 봤을 때 양심이 없는 사람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그러나 돌아가서 혼자 있을 때에는 양심의 지배를 벗어날 수가 없다. 또, 어떤 사상 같은데 강력하게 오염이 되어서 그래서 이 양심의 기능이 저하되거나 사회가 모두 그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이것이 도덕적으로 잘못됐다라고 하는 판단을 거의 못 느끼는 상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문화와 밀접하게 연관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사라져 버렸습니다마는 예전에 북극에 있는 에스키모인들에게 선교를 나가던 유럽의 선교사들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선교사가 전도하러 방문을 오면 그 사람을 위한 최고의 접대가 식사를 대접하고 자기 아내의 얼굴에 고래의 기름을 바른 다음에 동침하게 해 주는 게 손님을 향한 최고의 접대입니다. 그러나 선교사가 그것을 응할 리가 없습니다. ‘그것은 그러지 말아라. 바로 우리가 이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러지 말라는 것이다.’라고 권면했을 때 심지어 죽임을 당하는 선교사들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손님이 와서 자기 아내를 내어주는 것에 대한 이 오래된 관습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이 양심의 작용 자체가 이미 휘어버린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진정한 첫 번째 행복이 뭐냐 하면 도덕이 올바르게 서있는 나라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부의 국가의 제일 큰 임무는 정의가 무엇인지를 백성들에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보다도 국가의 가장 커다란 사명입니다.
이러한 양심의 기능이 아주 놀랍고 분명하기는 합니다. 그런데 이 양심이 가지고 있는 한계가 있습니다. 선악과 죄에 대한 인식은 분명히 있고, 절대자가 있어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 그 절대자가 심판을 할 것이라는 의식은 분명히 있습니다. 이것은 지워버릴 수 없습니다. 이것은 제가 들은 이야기인데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 미군들하고 전투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미군들이 밤중에 모여서 하나님이 없다는 사람하고 있다는 사람하고 막사에서 서로 논쟁을 했답니다. 그러다가 폭탄이 한발 날아왔답니다. 그런데 그게 적군이 쏜 폭탄이 아니라 오발사고가 나 가지고 수류탄인가 뭐가 가까운데서 터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디 있냐고 거품을 물고 떠들던 그 미군이 제일 먼저 담요를 뒤집어쓰면서 하는 말이 “Oh my God.” 그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 하나님인지 모르지만 하여튼 “Oh my God.”
그러니까 절대자가 있다는 생각은 떨쳐 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계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죄인이고 우리 스스로 구원 얻을 수 없으며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믿을 수 있고, 그 분께 용서 받을 수 있다는 이 복음적인 사실들은 이 양심이 출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심만을 가지고는 구원을 얻을 수 없고 복음의 진리가 우리에게 필요하고 믿음이 양심을 따라 가는 것 이상의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특별히 여기에서 선한 양심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양심에 악한 양심이 있다고 하는 그런 뜻이 아니라 선하다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고 인간을 지으신 그 목적을 향하여 있는 상태가 선한이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선한 양심은 그냥 자동적인 자연 양심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양심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3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세례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향해서 선한 양심으로 그 분을 찾아가는 것이 바로 세례의 의미라고 말합니다. 세례를 받았어도 아직까지도 옛 사람의 성품이 남아 있어서 모두 완전한 정결한 사람이 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전에 희미했던 양심이 이제 하나님을 알고 내가 죄인임을 알고, 복음을 통해 구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믿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올바른 양심으로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 이것이 세례의 효과 다시 말해서 진정으로 구원을 얻은 사람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몇 해 전의 일이었습니다. 서점에서 보고가 올라오는데 자꾸 책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랬습니다. “누가 그것을 가져가겠느냐? 다시 한 번 세어 보아라.”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꾸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아무 책이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청교도 책, 개혁주의 책, 그리고 목사님이 쓴 책 중에서도 두꺼운 책이 없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카메라를 달도록 했습니다. 카메라에 누가 찍혔는데 좀 나이 들어 보이는 노총각스러운 청년이 까만 가방을 들고 들어와서 두리 번, 두리번 하더니 책 중에서도 가장 은혜로운 청교도 책, 개혁주의 책 중에서도 두꺼운 것을 가방에다가 집어넣는 것입니다. 그러고 이제 사람이 바글바글 하니까 쑥 돌아서 나가는데 카메라가 자기 앞에 탁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더니 돌아서더니 다시 가방을 열더니 책을 제 자리에 놓더란 말입니다. 다 찍혔습니다. 내가 그랬습니다. 그 청교도 책을 훔쳐 가서 그것을 읽고 무엇을 하려고 그러는지 나는 궁금합니다. 죄와 은혜의 지배를 훔쳐 가서, 개념 없음을 훔쳐가서 그것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그래서 그 훔쳐간 책으로 은혜를 흠뻑 받고 그 다음에 다른 서점을 또 갈 겁니까? 그게 무엇입니까?
나는 외국에 있는 문물이라고 해서 모두 좋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선진국으로부터 꼭 배우고 싶은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소유에 대한 분명한 생각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선진국 사람들은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자기 것이 아니면 자기 것이 아닙니다. 그게 누구의 것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내 것이 아니면 다 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은 주인이 불분명하면 다 자기 것입니다. 그 왜 그럴까요? 더군다나 그리스도인이 그러는데 한몫을 거둡니다.
언젠가 청문회에 누가 헌법 재판소장이 되겠다고 어떤 분이 나오셨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그 분 생각을 좀 했는데 청문회를 하니까 무한 신상 털기가 시작이 됩니다. 그 중에서 비난을 받은 것 중 하나가 높은 자리에 있으니까 정부에서 일등석 표를 끊어줍니다. 그러면 미국 가는 일등석은 한 천만 원쯤 됩니다. 일등석을 끊습니다. 그리고 그 돈을 받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타고 가야 하는데 그 항공사에 가서 이것 말고 그 다음 걸로 끊어달라고 합니다. 그 다음 걸로 바꾸어서 차액은 자기가 가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누가 증언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 만약에 그 차액을 받아서 나는 이렇게 좋은 비행기가 필요 없다 그냥 그 다음 비즈니스 칸만 타도된다 그러고 가져다 줬으면 그러면 그 사실이 알려진 게 이 사람에게는 더 큰 영광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왜 자기가 갖습니까? 주인이 없으니까 주인이 없어도 자기 것이 아니면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남의 것에 대해서는 이게 하나님의 것인 것 같은 두려움을 느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사상입니다. 그래서 어느 경제학자가 자본주의가 성공한 나라의 첫 번째 특징이 소유에 대한 분명한 개념입니다. 네 것도 내 것, 내 것도 내거 그러는 나라치고 잘 사는 나라 있으면 현대 사회에서 한번 손을 꼽아 보십시오. 어느 나라이겠습니까?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욕을 먹는데 이 선한 양심을 올바르게만 행사를 해도 70%는 비난 받을 게 사라집니다. 뭔 상관이 있습니까? 내 돈이 아닌데 여기 산더미처럼 쌓인 게 나와 뭔 상관이 있습니까?
어느 가정에 심방을 가서 심방을 하는데 전화가 왔습니다. 교역자에게 전화가 왔는데 한참 왔다갔다 이야기를 합니다. 주차했는데 차를 받았는데 어쩌고저쩌고 그래서 뭐냐 그랬더니 구역 식구들이 누구네 집에 심방을 갔다가 남의 차를 쿵하고 받아서 북 하고 기스를 낸 것입니다. 그런데 교역자한테 문의전화가 온 것입니다. 기스를 냈는데 이것을 우리가 차를 내다가 기스를 냈다고 써 붙여야 되냐 안 써 붙여도 되냐 그걸 왜 질문 하냐 하면 바로 일주일 전에 내가 설교 시간에 그 똑같은 예화를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가서 이렇게 만져보니까 괜찮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괜찮은 것이지, 물론 염려는 있을 것입니다. 질 나쁜 사람을 만나서 요만큼 살짝 긁혀서 그냥 써도 되는데 통째로 다 바꿔 달라고 그러면 어떻게 하나 그러면 4~50만원 나올 텐데 어떻게 하나 그런 두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타인의 재물에 대해서 손궤를 입혔잖아요. 그러면 자신이 무한대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법이 해야 된다고 하는 그게 두려우면 차를 놓고 걸어 다녀야 합니다. 그러거나 아니면 차 주위에 이불을 둘러서 감고 다니거나 조심을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러면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나도 우리 아파트로 이사를 가서 교회에서 10년 살다가 이사를 간지 몇 년 됐나 한 5년 됐습니다. 차를 대다가 세 번 부딪쳤습니다. 그때마다 전부다 써서 붙였습니다. 그런데 한번만 연락오고 두 번은 연락도 안 왔습니다. 내가 봐도 북하고 긁었는데 그 차가 워낙 상처투성이라 별로 표시도 안 났습니다. 그래도 어떻게 해. 설명을 했는데 못 알아들을 거 같아서 할 수 없이 차를 그려서 바로 요 부분을 내가 긁었다. 잘 살펴봐라. 분명히 긁은 자국이 있다 그리고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는데 내가 그랬다. 나는 몇 동 몇 호에 살고 그러니까 이 전화번호로 전화를 하면 즉시 수리를 해 주마. 두 번을 붙였는데 한 번도 연락이 안 왔습니다. 나는 보지는 않았지만 내 생각에는 그렇습니다. 그것을 탁 보면서 이 사람이 기분이 좋았을 것 같습니다. 거기에다가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렇게까지 치사하게 쓰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면 또 잘난 체 하는 거 같아서. 왜 그러냐 하면 박았다고 그래 가지고 어느 놈이 차를 박았나 그러고 가보니까 자기도 못 찾겠으니까 그림에 보니까 이렇게 그려서 여기 요만큼 그렸다고 표시했는데 가서 만져보니까 조금 있기는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받아보면서 이 사람 참 양심적이구나. 누가 이렇게 하나.
며칠 전 우리 아파트에서 있었던 일인데 커다란 포스터가 붙었습니다. 어느 차를 누가 와 주차를 하다가 북 긁었는데 긁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앞에 범퍼가 떨어져 버렸습니다. 그렇게 놓고 누군가가 그냥 간 것입니다. CCTV에 다 찍혀서 차 번호 뿐만 아니라 니 얼굴도 나왔다. 그런데 내가 찾아가지 않는 것은 너한테 기회를 주는 거다. 빨리 와서 나한테 잘못했다고 그러고 책임을 져라. 그게 뭡니까? 이제는 CCTV가 수없이 많아서 이제는 양심적으로 행동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망신입니까? 더군다나 그렇게 해서 그 사람이 그 집에 찾아갔는데 누구누구 교회 이렇게 써 붙여 있다면 선교에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이 사는 얍삽한 방식대로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기독교의 가르침을 받는 목적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한 양심입니다. 올바르게 양심대로 산다는 것은 불편하고 손해를 받는 것입니다. 제일 좋은 것은 뭐냐 하면 딴 놈들은 절대로 길거리에서 소리 지르거나 아니면 떠들거나 그러면 안 되지만 나는 가끔 오줌도 누고 소리도 지르고 토하고도 싶은 그런 마음을 가지면 안 됩니다. 양심을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은 언제나 거기에는 희생과 책임이 뒤따르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입이 닿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진리의 말씀을 습득하고 터득하는 모든 이유가 우리로 하여금 이 선한 양심을 찾아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빛을 받지 않는다면 이 양심은 우리가 절대적으로 신뢰할 만한 것이 못되지만 말씀의 비췸을 받고 성령의 은혜를 받는다면 이 양심은 어두운 밤길을 달려가는 차가 우리의 인생이라면 이 양심은 헤드라이트와 같은 것입니다. 그 빛을 보면서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많이 듣고 이런 선한 양심을 갖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C. 거짓없는 믿음(πίστεως ἀνυποκρίτου)
마지막 세 번째가 거짓이 없는 믿음입니다. 희랍어 성경에서 거짓이 없다는 말이 ‘안휘포크리토스’(ἀνυπόκριτος)라고 나오는데 ‘안’은 ‘없다’라는 뜻이고 ‘휘포크리토스’는 ‘hypocrisy’, ‘위선’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가식이나 허위 즉, 안에 있는 것을 감추어서 다른 것으로 착각을 하게 만들기 위한 위장이 없는 그런 믿음을 갖게 하는 것이 기독교 가르침의 목적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가르침이 성공하면 배우는 입장에서는 올바르게 배웠다면 반드시 거기에는 꾸밈이 없는 믿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참된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믿는 주관적인 정신의 작용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올바른 지식에 기초한 믿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믿음의 동기가 자기 이익이나 자기의 편의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최근의 한 20년 동안 구라파에 있는 신약성경 학자들 중 일단의 사람들이 헌신적으로 노력해 온 연구 분야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성경적으로 동성애가 절대로 예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는 노력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는 나름대로 그 사람들은 상당한 성공을 거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시작할 때부터 성경의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공정하게 생각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동성애는 괜찮다 이미 일어나고 있고 이 사람들도 교회에 받아들이고 받아들인 사람들은 성직자가 되도록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 그래야지 동성애에 있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선교할 수 있다.” 이런 선입견을 가지고 성경 속에서 동성애를 금하는 것들은 다 빼고 지지할 수 있을 것처럼 해석을 하고 해석을 비틀어서 결론을 지어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은 뭐냐 하면 거짓된 믿음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가르침의 목적은 이런 식의 믿음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거짓이 없는 믿음입니다. 거짓이 없는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믿음이고, 올바른 해석에 기초한 믿음이고, 그 진리의 합당한 삶으로 이어지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모든 믿음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고, 그 말씀에 합치한 믿음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히브리서 11장 5절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말했고 아벨이 대표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6절은 말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을 베푸시는 이심을 믿어야 하느니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런 믿음이 우리에게 있을 때에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의존, 그 분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 어떤 일이 있어도 그 분만을 의지하겠다고 하는 마음과 생각의 결단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배운 사람들의 특징은 믿음입니다. 인간이 추론할 것은 부지런히 신학을 공부하고 성경을 공부해 이성의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지만 도저히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경의 계시로 주시는 것은 어린 아이처럼 아멘하고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꾸밈이 없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아이들을 길러보면 세 살에서 네 살 될 때 그냥 엄마 아빠 붙들고 귀찮을 정도로 옛날이야기 해달라는 그러는 때가 있습니다. 동화책 읽어 달라고.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옛날에 토끼가 살았는데 토끼가 하늘로 북하고 날라 갔거든.” 9살 먹은 아이한테 이야기하면 “아빠 뻥 까지마.” 그럽니다. 그런데 얘는 “그래서 구름 위에 사뿐히 앉았어.” “와 멋있겠다.” “그러다 토끼가 떨어졌어.” “그래서 팔이 부러졌어” 그러면 애가 눈물이 죽 나는 것입니다. 그게 성경에서 말하는 어린 아이 같은 믿음입니다. 자연적인 것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초자연적인 것들에 대해서 이 세상의 거짓된 학문과 지식에 물들지 않은 하나님은 참되고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라고 하는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 때문에 그 신뢰 때문에 거기에서 참된 하나님을 향한 의존과 사랑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거짓 없는 믿음입니다.
D. 거기로부터 나온 사랑(agape)
기독교 가르침의 목적은 이러한 청결한 마음, 선한 양심,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입니다. 성경이 말합니다.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 아가페이거늘” 이라고 말합니다. 아무리 인간의 배를 갈라놓아도 마음이나 양심, 믿음 같은 것들은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해부학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이것은 모두 영혼이라고 하는 실제의 작용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통로입니다. 원래 이 아가페 사랑은 삼위일체 하나님께 있었던 것인데 이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통해 교회를, 교회를 통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받고 그 사랑 때문에 사람을 사랑하고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로 나와 우리에게 온 이 사랑은 세계를 휘돌아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회기적인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다시 우리의 영혼의 작용에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랑은 영혼의 경향성입니다. 기독교의 가르침의 목적이 바로 이 사랑입니다.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고 물었습니다. “율법 중 제일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그랬더니 예수님이 “율법 중 가장 제일 가는 계명은 이것이니 주 너희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고 둘째도 이와 같으니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 계명 속에 하나님의 선지자와 율법의 강령이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독교 가르침의 목적은 그 가르침을 다 들은 후에는 내가 하나님 사랑하지 않던 것들을 회개하고 하나님을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하나님이 사랑하라고 하는 사람들, 하나님이 사랑하라고 하는 대상들을 진실하게 사랑하며 살아가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는 이유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그러면 한번 적용해 봅시다. 여러분은 오랫동안 이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많은 교역자와 평신도 지도자를 통해 성경을 배웠고 여러분 스스로 책을 읽으며 성경을 읽으며 진리의 말씀을 깨우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런 가르침을 받으면서 얼마나 진정한 사랑으로 감동된 사람들이 되었습니까? 마지막 이 기독교 가르침의 궁극적인 열매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에 이르기까지 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불결한 마음이 씻겨지고 악한 양심들이 올바르게 되고 거짓된 믿음이 거짓 없는 순수하고 꾸밈이 없는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 선생은 1장에서 듣기만 하는 신앙의 위험을 경고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온 몸에 검댕과 더러운 것이 묻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인 거울을 보고 자기가 더러운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후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가 하면 로마서 10장에서는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했으니 듣지 않는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도 믿음을 소유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 듣기는 하는데 자기를 고치지 않는 신앙도 위험한 신앙이요, 아예 듣지도 않으려고 하는 신앙은 더더욱 잘못된 신앙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오랜 세월 동안 기독교의 가르침을 접하면서 과연 마음으로 그 가르침을 들어 온전히 변화되고자 하는 갈망을 갖고 신앙생활 한 것이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도 예배드리는 여러분 중에 일부 소수는 도대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그리고 그 가르침을 받아들여서 진정으로 사랑의 감동을 받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하는 의지가 없이 예배에 참석한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오랫동안 교회에 다녔지만 아무런 영혼의 변화도 없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앞으로도 변화가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의 태도를 고치지 않는 한 말입니다. 생각 없이 받은 일만 번의 기독교 가르침보다는 마음을 기울이고 그것을 이해하려고 하고, 그 가르침을 받고는 자신이 진정으로 돌이켜 올바르고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하는 간절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단 한 번의 가르침이 그의 인생을 더 많이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오늘 이 말씀을 깊이 가슴에 새기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이 다양한 은혜의 방편들은 바로 여러분이 이 말씀을 진심으로 받아들여서 이렇게 참다운 영혼의 변화를 받고 그래서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던 여러분이 돌이켜 하나님 뜻대로 사는 사람들이 되라고 여러분에게 이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 말씀을 진정으로 듣고 이 가르침들을 통해 온전히 변화된 새사람이 되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