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 제 9과
녹취자: 원수연
오늘은 ‘제9과 고난과 자기 죽음’이라는 부분입니다. 오늘 내용은 전혀 어렵지 않아서 쉽게 금방 끝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 우리 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문제 1) 영혼들을 섬기며 겪었던 어려움과 그것을 통해 주신 깨달음이나 은혜를 나누어 봅시다. 특히 마르틴 루터가 제시한 신학을 공부하는 세 가지 방법 중 시련을 염두에 두고 나누어 봅시다.
이것은 모든 구역원들이 가지고 있는 간증은 아닐지 모르지만, 순장이나 구역장을 해보지 않았더라도 아마 가족들을 전도하기 위해서 애를 써본 사람들이면 누구나 대답할 말들을 좀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은혜를 나누고요.
여기에 마르틴 루터 이야기가 나오는데 마르틴 루터는 신학을 공부하는 세 가지 방법으로 기도(Oratio), 묵상(Meditatio), 시련(Tentatio), 이 세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신학을 공부하는데 성경과 책은 없고, 기도하고 묵상하고 시련만 여기 나오나.’ 그렇게 생각을 하겠지만 여기서는 그런 뜻이 아니라, 마르틴 루터가 여기서 이야기하는 신학을 공부한다는 의미는 이미 있는 성경의 진리 그리고 또 신학지식, 이런 모든 것들을 어떻게 체화해서 자기의 것으로 삼아서 자기 자신이 그 진리를 아는 지식으로 살아갈 수 있느냐? 그것을 그러한 실제적인 방법으로 세 가지를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하고 묵상하고 시련을 당하면 신학공부가 저절로 된다는 뜻이 아니라 성경을 가까이 하고 또 책을 통해서 학문을 터득하고 이런 사람이, 이 지식이 실제로 자기 것으로 체화되는 것을 신학이라고 보고 그렇게 체화시키는 비결을 세 가지를 소개하는데 그것이 바로 기도, 묵상, 시련입니다.
지식 그 자체가 사람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고 또 그 사람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지식으로 사람의 삶이 풍요해진다고 하면 지식인들의 삶이 가장 행복하고 풍성해야 되겠죠.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있는 다른 학문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신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신학을 많이 공부하고 내용을 많이 습득하면 그 사람의 삶이 풍성해지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 가지 점에서 그렇지 않은데 그가 알고 있는 많은 지식이 정말 진리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인가, 두 번째는 그 진리가 정말 자신의 삶과 연결되었는가, 세 번째는 진짜 자신이 그 진리를 누리고 있는가, 이런 요인에 의해서 사실 그 대답은 결정되기 마련입니다.
한 사람을 위대하다고 이야기할 때는 남이 못 하는 엄청난 일을 했다고 해서 우리가 그 사람을 위대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와 역사에 건전한 영향력을 끼친 정도에 의해서 그 사람을 위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위대한 인물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만약에 사교나 이단과 같이 올바르지 않은 것을 사람들에게 크게 영향을 주기만 하면 그게 위대한 인물이 되는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뭐냐면 한 시대의 역사가 흘러가면서 그 시대의 역사가 꼭 필요로 하는 것, 그 어떤 정신과 변화를 자신을 통해서 이 사회 속에 구현해 내고, 그 사람들이 그 정신을 따르고 사상을 따르기 때문에 그 사회가 보다 더 나은 사회로 발전할 수 있도록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사람, 끼친 사람을 가리켜서 우리들은 위대한 인물이라고 부르는 것이고, 실제로 그런 영향을 끼쳤는지 안 끼쳤는지는 사실 자기의 시대에서는 잘 모릅니다. 한 시대가 지나가고 나 봐야지만 그 사람이 진정으로 끼친 영향력이 어떠했는가 하는 것에 대한 판단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 있는 삶을 꼭 그렇게 위대한 인물에게서만 찾지 말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비록 이 세상의 역사를 움직이는 그런 위대한 인물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말씀인 이 진리를 자신 속에 함양하여 그것을 자기화 시켜서 살아가는 데서 우리 삶의 진정한 안정성 그리고 신앙의 실제성들이 발휘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뭐냐면 이런 지식이 있고 그 다음에 이런 지식들이 결국은 체화되어서 자기 것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이렇게 체화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 것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보다는, 오히려 비록 적은 부분이라고 할지라도 이렇게 체화시켜서 자기 것으로 삼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훨씬 행복하고, 확신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기도와 묵상을 통해서 자기화하고, 시련을 통해서 자기화하는 것입니다.
이 시련은 결국은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으로 구별됩니다. 둘은 사실은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구분될 수 있지만 외적으로 닥치는 시련이 진짜 삶의 지혜를 가져다주는 이 세 가지 중에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이 시련이 자기화 되는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신앙과 반성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이 시련의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이러한 시련이 나에게 주는 인생의 의미가 무엇일까?’ 적극적으로 마음을 다해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어느 지점에서도 자신의 인생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자기가 원하지 않는 삶의 상황이 전개되고 때로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 찾아온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자신에게 허락된 인생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말고 그 속에서 그 시련의 의미를 물으면서 그것을 자신의 인생에 어떤 의미를 가져다주는 사건으로 해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어떤 인격적인 성숙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신앙과 반성이 필요한 것입니다.
저는 젊었을 때 떡을 만들어서 팔았는데 쌀을 밤에 담갔다가 새벽에 그 쌀을 자전거에 잔뜩 싣고 방앗간으로 갑니다. 그러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뭐냐면 불린 쌀을 체에 밭쳐서 물을 다 뺀 다음에 그 다음에 제일 먼저 하는 일이 기계에 넣고 곱게 빻는 것입니다. 그렇게 빻은 다음에 그것을 찝니다. 그 찐 것을 기계에 넣어서 우리가 맛있게 먹는 떡이 나오는 것입니다. 절편이나 가래떡 같은 떡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떤 지식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이 자신 속에서 용해되고 체화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내가 알고 있는 객관적으로 내게 주어진 정보로서의 사실과는 전혀 다르게 내 마음과 삶을 지탱해주고 움직일 수 있는 지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튼튼하게 내 인생을 기댈 수 있는 진리에 대한 지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인생에 있어서 물러설 수 없습니다.
지난 수련회 때도 제가 말씀 드렸지만 어차피 우리 인생은 수많은 문제에 직면합니다. 그리고 그 문제들이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그런 것은 없습니다. 성경도 하나님은 특히 당신의 자녀들에게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을 주시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마지막에 무릎을 꿇고 그 다음에 그냥 패배로 얼룩진 삶을 살고 심지어는 인생 자체를 자살로써 마감해버리는, 이번에도 롯데그룹에 제 2인자고 자살했잖아요. 그리스도인이었다고 그럽니다. 왜 그럴까요?
이것은 뭐냐면 결국 마지막에 파고 들어가 보면 자원입니다. 자원. 자신의 삶이 풍족하고 자기의 뜻대로 될 때에만 삶을 지탱해갈 수 있어서는 안 되고 모든 것이 자기의 뜻하고는 전혀 반대인 그런 절망적인 극한 상황으로 자신의 인생이 이끌려간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인생의 끈을 놓을 수 있는 권리는 자신에게 없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신앙입니다. 그 때 우리를 무엇이 붙들어줄 수 있을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평생을 대그룹의 2인자로 살았으니까 얼마나 많은 인맥들이 있었겠고 얼마나 많은 아는 사람들이 있었겠습니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있어도 인생의 마지막 지점에 딱 섰을 때 그 때 자신은 철저히 외로운 혼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지식의 총량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획득한 지식을 자기화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 우리에게 너무나 필요하다.
그것을 마르틴 루터 같은 사람은 이렇게 기도와 묵상과 시련, 마지막에 이 시련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결코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심지어 어떻게 얘기했냐면 참설교자와 거짓설교자는 그가 고난을 받은 사람인가, 아닌가를 보면 안다고 말할 정도로, 물론 그 시대가 종교개혁시대였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이런 것들을 깊이 생각하면서 우리들이 실제적으로 우리의 삶을 지탱해갈 수 있는 이런 에너지를 경건을 통해서 주님 앞에 함양하면서 살아가는 그것이 신앙의 유용성입니다.
그 다음 루터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쥐똥과 같이 보잘 것 없는 제가 후추같이 -후추는 그 당시에 엄청나게 비쌌구요, 진짜 비쌀 때는 금 무게하고 후추 무게의 값이 거의 동일했다고 하니까 어마어마하게 비싼 향료였죠.- 그런 향신료에 빗댈 만한 신학자들과 함께 하도록 허락해 주신다면 저 자신은 교황주의자들 덕분이라고 말하겠습니다. 그들은 악마의 분노로 저를 공격하고 탄압하며 괴롭혔습니다. 말하자면 저들은 저를 좋은 신학자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런 고난이 없었더라면 내가 그렇게 되지 못하였을 텐데 말입니다.”
거장다운 면모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 2) 칼빈이 대적자들로부터 받은 비난과 모함 이야기와 에드워즈의 일화를 읽으며 느꼈던 점을 나누어 봅시다.
이미 책에 나온 내용이지만 칼빈은 그의 심리를 분석한 많은 사람들의 조사에 의하면, 그렇게 큰일을 할 만한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내성적이고, 수줍음을 많이 타고, 조용히 글이나 읽으면서 선비로서 살아갈 사람이었고 자신이 또 그런 삶을 꿈꾸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가 그를 역사의 한복판으로 밀어냈고,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상황에서 충성을 다하며 살았습니다. 수많은 대적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수많은 모함들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인터넷에 들어가서 칼빈을 쳐보면 피가 촥 흐르고 세르베투스를 죽인 그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사실은 칼빈이 그런 교리적인 이유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결정권을 가진 위치에 있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문제들은 역사의 문맥에서 해석을 해야 합니다. 어쨌든 칼빈은 일평생 끊임없이 대적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았고 모함과 공개적인 비난을 수없이 받았습니다. 그런 이야기들을 제가 책에서 상세하게 썼습니다.
이러한 많은 고난, 심지어 칼빈이 말할 수 없는 성적으로 타락한 지도자라고 하는 모함까지 책으로 출판이 되었고 그래서 유럽에서 오랫동안 칼빈의 책이 읽히지 않는 중요한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칼빈의 예정론을 비난하면서 하나님을 죄의 원흉으로 만드는 이교도적인 가르침이라고 주장하며 거친 비난을 했습니다. 그렇게 수없는 대적들에게 에워싸이면서 칼빈이 자신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우리들이 영혼을 섬길 때 우리는 항상 사업을 하듯이 이런 일들이 잘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렇지 않구요,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변해가는 것만큼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변해가도록 만드시고, 변화되지 않은 영혼들을 통해서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무엇이 부족하고 모자라는지를 배우게 하시고, 그러면서 영혼을 돌보는 사람을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드시는 과정과 그를 통해서 하나님이 당신의 일을 하시는 과정을 하나로 묶으십니다.
우리는 항상 자기를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시기보다는 자신에 의해서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그 사람을 통해서 일하고 싶어 하시고, 그렇게 보면 우리가 영혼을 섬기면서 실패하고 혹은 어려움을 만나는 모든 과정이 결국은 하나님이 큰 맥락에서 자기를 완성시켜 가시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선한 사람들을 사용하시기도 하지만, 때로는 악한 사람을 사용하시기도 하고, 때로는 시련과 역경을 만나고 고난을 당하게 하시면서도 자신의 이런 뜻들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런 점들을 중심으로 여러분이 나누시면 좋겠습니다.
문제 3) ‘네크로시스와 아포프토시스’ 그리고 ‘창조의 기둥’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깨달은 바를 나누어 봅시다. 그리고 여러분 자신이 가정과 교회 혹은 직장에서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을 꺾거나 자기를 죽임으로써 위기를 넘기거나 큰 유익을 얻었던 경험들을 서로 나누어 봅시다.
책에 이미 다 나와 있는 내용이기 때문에 제가 상세하게 설명은 안 드리겠습니다. 여기 암세포에 대한 설명이 나오고 있습니다. 세포가 죽는데 두 종류의 죽음이 있습니다. 네크로시스의 죽음과 아포프토시스, 혹은 아포토시스의 죽음이라고 하는데 네크로시스는 세포가 괴멸되거나 혹은 파손되어서 생명이 끝나는 것을 말합니다. 말하자면 사람이 타살되는 거죠. 멀쩡하게 살아있는 사람을 칼로 찌른다든지, 교통사고가 나서 차가 치어버린다든지, 아니면 약물을 복용해서 죽어버린다든지 하면 생명이 끝나잖아요. 그것이 네크로시스의 죽음입니다. 그런데 이 아포프토시스의 죽음은 아직도 과학자들 사이에서 미스터리입니다. 이유 없이 세포 스스로가 죽는 겁니다. 자살같이. 죽으면서 ATP라고 하는 화학에너지를 내어서 그것을 옆의 세포에 전달해서, 그 세포가 그 에너지를 가지고 또 다른 세포의 공장을 돌리면서 생산 활동을 해서 세포를 자라게 하고, 세포를 분열하고, 이렇게 하면서 살아있는 세포들을 끊임없이 재생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다른 세포들은 또 죽고 이렇게 되는 거죠. 그렇게 해서 우리 몸 전체에 약 60조개의 세포가 끊임없이, 뇌세포는 한번 죽으면 다시 안 생깁니다. 그런데 다른 모든 세포들은 죽으면 다시 생겨나는데 그 주기가 3개월에서 6개월입니다. 그러니까 6개월 정도 지나면 우리 몸은 6개월 전에 있는 모든 세포는 다 사라지고 완전히 새것으로 교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이가 들면 그런 세포의 생성 같은 것들이 어려워지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연골 같은 것도 망가지면 젊었을 때는 금방금방 생겨나는데 나이가 들면 인공관절을 넣게 되고 그러는 것입니다.
어쨌든지 간에 그렇게 놓고 보면 결국 어떤 결론에 이르게 되냐면, 미묘한 것이 뭐냐면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그 안에서 죽음이 역사하고 있을 때 그것이 생명이 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너무 신비한 것입니다. 그래서 세포가 그렇게 끊임없이 반짝거리듯이 죽고 살고 죽고 살고 하는 과정을 계속 되풀이하면서, 물론 죽는 세포보다 살아나는 세포들이 균형을 이룰 때 인간의 몸이 계속 되는 거죠. 그런데 죽는 세포보다 살아나는 세포가 굉장히 많은 경우가 있습니다. 그게 살이 찌는 것입니다. 집중적으로 배에서 잘 살아납니다. 그러면서 살이 찌는 겁니다. 온몸에 살이 찌고 배가 나오고 이렇게 되는 거죠. 체형이 틀어지는 거죠. 그런데 이제 안 죽겠다고 그래요. 그러면서 죽지는 않고 계속 뭉치는 겁니다. 그러니까 더 많은 양분이 필요하겠죠. 그러니까 거기로 영향을 빨아드리는 겁니다. 그러면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데 거기서 생겨나는 세포는 모두 똑같이 자기를 생산한 세포처럼 안 죽겠다는 성질을 갖는 겁니다. 그러면서 커지는 게 바로 암 덩어리입니다. 그래서 결국 암이라고 하는 것은 무얼 의미하냐면 충만한 생명입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임자몸을 죽이는 겁니다. 그러면 아까 얘기한 건 뭐냐면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그 안에서 끊임없이 죽음이 실행됨으로써 생명이 유지되는데 이것에 반해서 암세포는 이 안에서 생명이 끊임없이 계속됨으로써 죽음으로 떨어지는 것이 이게 바로 암세포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것은 창조의 기둥인데 거리가 지구에서 약 7000광년에서 7500광년 정도 떨어져있습니다. 여기에서 제일 왼쪽 제일 큰 기둥이 약 4광년 정도 됩니다. 길이가 상상할 수 없겠죠. 여기서 태양까지가 8분밖에 안 걸리는데 빛이 1년간 거리도 상상할 수도 없는데 4년이니까 약 40조km입니다.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길이의 조그만 구름기둥이 아니고 이게 4년 정도 되니까 이건 3년 정도 되고 이건 2년 정도 되겠죠. 그런 정도의 길이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 폭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3광년에서 4광년 정도 되는 상상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성운입니다. 차가운 수소 분자와 먼지로 된 성운인데 약 550만 년 전에 이것이 생성되었을 거라고 봅니다. 더 오래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이것들은 결국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생겨났을 리는 없고 별들이 폭발하면서 남긴 그런 분자와 먼지들로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것을 성운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이것들이 이제 어떤 힘을 받으면서 뭉치면서 융합작용을 합니다. 핵융합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뭉치면서 그것이 점점 단단해집니다. 그래서 그런 기체의 덩어리가 축구장만한 것이 뭉쳐지고 뭉쳐져서 축구공만 해질 때 약 6000만℃의 열을 내는 그런 불덩어리로 변합니다. 그러면 그런 것들이 주위의 것들을 계속 모으면서 더 큰 불덩어리를 만들면서 그것이 극도에 달하게 되면 폭발을 일으킵니다. 그러면 여기서 떨어져 나옵니다. 그게 바로 여기에 빛나고 있는 이 별의 모습입니다. 여기서 떨어져 나오는 것입니다. 폭발과 함께. 그러면서 새로운 별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엄청난 폭발과 함께 물질적인 변형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 변형이 아주 다양하게 일어나는 곳이 바로 지구와 같은 곳입니다. 이게 거의 기체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보면서 제가 느낀 것은 뭐냐면 결국은 이것도 별의 폭발하는, 마지막에 별이 수명을 다하게 되면 거대한 폭발을 일으킵니다. 태양이 마지막에 수명을 다할 때 폭발을 일으키면 수, 금, 지, 화, 목성까지 불길이 번지면서 그것이 하나의 영향권 안에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폭발을 하면서 먼지로 변합니다. 이것은 결국은 이전에 어떤 별이 죽었기 때문에 생긴 흔적입니다. 그것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먼지가 가능했던 것이고 이렇게 죽은 것이 있기 때문에 폭발과 새로운 생성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태어나는 별은 이미 죽었던 별들을 재료로 해서 폭발과 함께 새로운 별이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도 무얼 보여 주냐면 아까와 똑같이 우주에 있어서 이 거대한 생성이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소멸이라고 하는 것을 바탕으로 생성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제가 한 10년 전에 이것을 한꺼번에 깨달으면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사실은 ‘교회와 그리스도의 고난’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이해하는 아주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세계 속으로 들어오게 되면 십자가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1장에 보면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나옵니다. 그래서 성경이 그리는 그리스도인의 삶과 이 십자가는 끊임없는 현재적인 죽음과 그 죽음을 통해서 다시 재현되는 생명, 이 죽음은 자기이고 생명은 그리스도입니다. 끊임없는 자기 죽음 속에서 재현되는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 4) 성화의 삶에 있어서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 십자가를 어떤 태도로 짊어져야 영적 성숙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에 대해 의견을 나누어 봅시다.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을 거룩함에 이르도록 성숙시키는 이 세상의 모든 시련과 고난들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칼빈이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가 아니라 우리에게 적용된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닮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당하는 고난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으로 여기고 그리스도와의 연합 속에서 참여하게 하신 십자가로 여겨야 하는데 여기에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사랑 때문에 자기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자기가 죽는 경험을 통해서 자신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충만하게 되는 것이고 이 생명의 첫 번째 수혜자가 바로 자기 자신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번 9월 25일에 있을 산상세미나에서 여러분들에게 상세하게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성경을 보면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라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이 십자가를 지라는 이야기를 할 때 믿음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칼빈은 자기 부인과 십자가를 지는 것, 그래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현재적으로 체화하는 것, 그리고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삶으로써 하늘의 소망,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는 소망을 가지고 현재적인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 속에서 자신 안에 충만한 그리스도의 생명이 살아나게 하고 그래서 수련회 때 여러분에게 말씀드린 그런 자원의 문제들을 그렇게 주님께로부터 공급을 받으면서 우리들이 신앙이 없으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을 극복하며 나가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문제 5) 오늘 공과의 마지막 순서는 우리 모임의 특별 기도회입니다. 우리가 지금 당하고 있는 시련을 잘 극복하고 영적으로 성숙하도록 구역장(순장)이 미리 준비한 기도제목을 따라 열렬하고 간절히 기도합시다.
구역에서 누군가를 시켜서 그것을 다 조사하게 해서 미리 준비해서 가져가면 좋고 문자로 보내줘도 좋고, 어쨌든지 간에 기도해야 하는 당일에 함께 그 제목을 펴놓고 기도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번 주 기도제목 세 가지입니다.
참된 목양으로 영혼들을 변화시키는 교회가 되도록, 영혼들을 위해 열렬히 기도하는 구역장들이 되도록, 그리고 담임목사의 건강을 위해서, 목양, 기도, 건강, 세 가지를 위해서 우리 같이 한번 기도하겠습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