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8.28 수원신학교 개강수련회
신학함과 신앙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눅 1:80)
녹취자: 김미영
본문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 예수님이 오시는 앞길을 예비하기 위해 보냄을 받았던 세례요한의 이야기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구약으로 치면 마지막 선지자였고 신약으로 치면 신약과 구약 사이를 잇는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구약 말라기서의 예언이 이 사람의 추종에 대한 것으로 끝나고, 그리고 신약 성경은 세례 요한의 선포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앞으로 3일 동안 여러분들에게 읽어 드린 이 말씀 한 절을 가지고 설교 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신학을 한다는 것과 신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그리고 내일은 신학을 한다는 것과 인격에 대해서, 마지막 날은 신학을 한다는 것과 신학 공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어쨌든 여러분들이 이렇게 신학을 공부하는 것은 이 신학을 마치고 나서 이 교회 저 교회 다니다가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서 이 발에 치이고 저 발에 치이다가 비굴하게 인생을 마무리 하고 싶어서 신학의 문을 두드린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꼭 이 세상의 영광과 그리고 번영이 아니더라도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 쓰임 받기 위해서 이 길을 들어선 것은 너무나 분명하지 않습니까?
세례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생애는 지극히 짧은 생애였고 몇 번의 설교를 남긴 것 이 외에는 별 기록이 나오지 않지만, 그 몇 편의 설교를 위해서 그는 30년 가까운 세월동안 외로운 광야에서 자신을 준비하며 자랐기 때문입니다. 다만 부모는 일찍 돌아가셨을 것이고 어렸을 때 이 사람은 갓난 아이 적에 광야에 보내졌고 누군가의 손에 의해 돌봄을 받으면서 광야의 거친 모래 바람을 친구 삼아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털옷을 입고, 추위를 피하며 자신의 일생을 준비해야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역사는 결국은 사람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죽음 이면에는 그것이 역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교회 역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죽음 이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사용하셔서 역사를 움직인 것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제일먼저 우리 성경의 역사를 한 번 보겠습니다.
창세기를 열면 하나님이 아무것도 없는 무의 상태에서 세계를 창조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당신의 형상과 모양을 본떠서 사람을 만드십니다. 그리고 타락하기 전 유일한 인류였던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담은 탁월한 지성과 올곧은 의지를 가지고 창조 되었지만 이 자연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직관할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스스로 타락하여 죄가 들어오게 됩니다. 그리고 이 인간이 타락하자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계획을 계속 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의 인류를 구원하실 계획을 세우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제 사람들을 세워서 온 땅에 퍼질 인류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구원의 길을 전하기 시작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역사하시면서 이제 이전에도 많은 훌륭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타락한 인간의 역사는 꼬리를 물고 계속되면서 아브라함이라는 중요한 인물이 등장 하게 됩니다. 이 선택받은 인물이 등장하면서 하나님에 관한 본격적인 계시가 주어지고, 그의 가문을 이어가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들이 전수됩니다.
요셉의 시대까지 내려갔습니다. 그러다가 오랫동안 계시들이 잠잠해지고 더 이상 인물이 나타나지 않을 것 같은 때에 구약에서 가장 높은 산 중의 하나인 중요한 인물이 나타나게 되는데 이 사람이 바로 모세라는 인물의 산이었습니다.
그는 영적지도자였고 영적인 인물이었으며 세상의 학문에 있어서도 매우 탁월한 카리스마를 가진 놀라운 지도자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구약성경 중 가장 중요한 첫 번째 다섯 권의 책을 저술하는 영예를 누리게 됩니다.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통해 주어진 이 오경의 계시들을 해석합니다. 이것을 노래한 것이 시편이고, 이것을 자기들 시에 적용한 것이 바로 선지서 들입니다. 모세가 지나고 나서 모세보다는 못하지만 햇빛처럼 나타난 사람이 있었습니다.
기적의 중요성보다는 믿음의 중요성을 보여주었던 여호수아라는 인물이 등장하고 하나님은 이 사람을 통해서 가나안 정복의 유업을 이루게 됩니다. 그 후로부터 그 산은 급격히 높은 산에서 내리 깎아 내리며 골짜기를 형성하며 별 볼일 없는 시대를 지나게 됩니다. 그러다가 구약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 높은 산처럼 두 번째 나타나게 되는데 이 사람이 바로 사무엘입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사사시대에서 왕제로 들어가는 중요한 분수령에 있는 사람이었고, 또 직임적 선지자 제도를 도입하고 왕의 제도를 수립한 훌륭한 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놀라운 사랑을 부어주셔서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의 기초가 되는 중요한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또한 신, 구약을 통틀어 높은 준봉을 이루는 위대한 신학자이며 철학자가 등장합니다. 바로 다윗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지극히 경외한 인물이었습니다. 그 후 높은 산은 몇 세기 한 봉우리 없이 내리 달리다가 이사야라는 또 큰 봉우리를 만나게 됩니다. 이 후에 에스겔, 그리고 예레미야, 에스겔 이런 선지자들의 봇물이 다니엘과 같은 봉우리를 지나고, 열두 소선지자들의 봉우리를 지나게 됩니다. 그러다가 이제 이 모든 산맥에 비교할 수 없는 태양 같은 분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 분이 바로 세례요한 다음으로 등장하신 예수그리스도셨습니다.
모든 위대한 인물이 산맥과 산이었다면 예수그리스도는 이 모든 산맥과 산 위에 높이 떠 있는 태양과 같은 분이었습니다. 자 이제 신약의 역사로 들어오게 됩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3년 동안의 공생애를 마치고 이제 부활 승천하신 후에 성령님이 임하시자 이 열 두 사도들은 모두 커다란 봉우리들이 됩니다. 이 모든 봉우리들이 이제 에베레스트 같은 높은 산 하나가 떠오르게 되는데 이 사람이 바로 구약에 나타난 모세나 다윗과 함께 어깨를 겨룰 만한 높은 산 인물인 바로 사도바울입니다.
그는 신학자였을 뿐 만 아니라 선교사요 목회자요 철학자요 교회 개척자요 사상가였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 전체의 책 중 절 반 가량을 저술하는 영예를 안게 됩니다.
이제 산맥이 조금씩 낮아지면서 사도들이 모두 사라지기 시작하고, 이어서 속사도 교부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 시대가 끝나고 다시 봉우리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는데 오리겐, 이레네우스, 그리고 이세페르틸리아누스 같은 위대한 교부들이 높은 산처럼 등장하게 됩니다. 특히 테레트리니우스, 터툴리안은 좋은 것과 나쁜 것, 온유와 진리를 한꺼번에 영혼처럼 토해내는 화산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높은 산이었다고 하는 사실은 아무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더 이상 높은 산이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2세기 변증가 시대를 지나서 3세기 4세기를 지나는가 했더니 이후 기독교 역사에서 누구도 도발할 수 없는 최고로 높은 산과 같은 한 봉우리가 나타나는데 이 사람 없이는 이 교회의 역사는 물론 심지어 구라파의 역사조차도 생각할 수 없는 위대한 인물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 사람이 바로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인물입니다.
제 생애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친 네 명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이 아우구스티누스는 대단한 인물입니다. 지금까지 나는 수많은 책을 읽었지만 한 번도 책을 읽으면서 ‘이 책을 쓴 사람은 천재다’라고 생각해 본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딱 한사람 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책은 두 권 읽으면서 제가 무릎을 꿇고 ‘이 사람은 천재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 위대한 지성 앞에 압도당하는 그런 커다란 권위를 느꼈던 것입니다.
오늘날 그가 세운 신학과 철학이 위업을 받는다고 하지만 그러나 적어도 1600년 동안 튼튼히 지탱해 왔고, 지금도 시간과 영혼, 선과 악, 이런 것들에 대한 사유는 아직까지도 이 세상의 철학자들도 아우구스티누스를 통해서 배우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위대한 인물을 지나고 나서 중세로 접어들게 되고 이 때 그만 그만한 신학자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동방교회의 다마스쿠스에요한 이라든지 피투르스롬바르디스, 캔터베리의 안제루스와 같은 커다란 교부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11세기에는 아우구스티누스와 필적할 수 있을 정도로 카톨릭에 큰 영향을 끼친 신학자 한 사람이 높은 산처럼 나타나는데 이 사람이 바로 카톨릭의 최고의 신학자라고 치는 토마스 아퀴나스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의 철학으로 기독교를 설명했다면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가지고 기독교를 설명하려고 하였으며, 역사상 가장 방대한 기독교 사상들이 집적을 이루었던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더욱이 이 사람은 아주 순결한 생활을 지향하는 경건한 신학자였고 평생 결혼하지 않고 주님만 섬겼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에 관한 일화가 있습니다. 공부에만 열중 하니까 아버지가 아들을 좀 신학공부를 하지 말고 좀 세상적인 사람이 되어서 욕심도 좀 갖고 자기 사업도 이루고 그러고 싶었는데 말을 안 들으니까 만날 예쁜 여자를 공부하는 방에다 집어넣었습니다. 유혹을 하려고 이 여자가 들어왔을 때 아퀴나스는 벌떡 일어나더니 난로로 가서 난로에서 타고 있는 장작 중 하나를 꺼내고 휘두르면서 ‘마귀야 물러가라’ 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벽에다가 다시 십자가를 그리고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나는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 합니다’라고.
그리고 15세기에는 세상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던 위대한 사람 마르틴 루터가 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르틴 루터가 이루어 놓은 종교개혁을 실질적으로 마무리하고 개혁신학의 기틀을 놓은 중요한 인물인 존 칼빈이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16세기 후반은 개신교의 전성시대라고 할 수 있는 개혁파 정통주의 시대가 열립니다. 천재적인 학문의 역량과 깊은 경건을 소유한 그 시대의 위대한 인물들은 종교개혁 1, 2세대가 굵은 붓으로 그려놓은 커다란 종교개혁의 대의를 미세한 구속으로 상세하게 그리면서 어마어마한 유산을 남겨 놓았습니다.
저는 6, 7년 전 이 16세기 말에서 17세기 까지 이어지는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에 눈을 뜨고 살았던 충격을 이루 형언할 수 없습니다. 플라톤을 공부하면서는 내가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하나님께 감사했고, 아우구스티누스를 배우면서는 기독교인인 것을 하나님 앞에 감사했고, 루터와 칼빈을 공부하면서는 내가 카톨릭 교도가 아닌 개신교도인 것을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이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의 작품들을 공부하면서는 내가 개신교도들 중 개혁파 교인인 것을 하나님 앞에 감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16세기는 커다란 종교개혁의 산맥들이 형성되면서 17세기에 화란, 영국, 스위스, 독일로 퍼지면서 거대한 산맥을 형성하게 됩니다. 이 때 발전된 신학의 깊이와 광대함은 이루 말 할 수 없습니다. 이 때 또 나의 학문 중 스승인 한 분인 존 오웬이 등장하게 됩니다. 저는 존 오웬의 저작을 20년 동안 탐독했습니다. 외국에서 손님이 오실 때 마다 나는 말합니다. 나는 열린 교회 담임 목사다. 존 오웬 목사가 나는 부 목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떤 일을 할 때 ‘우리 담임 목사님은 어떻게 할 까’ 하고 처리를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위대한 청교도도 영국으로 뻗어가는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 곁가지였던 것입니다. 이후에 이제 이런 처음에 저는 영국 청교도들에게도 관심을 가졌는데 이 위대한 사람을 만나고 나서는 청교도들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졌습니다. 왜냐하면 청교도들이 청소년이었다면 이 사람은 어른과 같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후에 존 오웬, 윌리엄 퍼킨스, 에드워드 레이, 리처드 벡스터, 토마스 윈, 리처드 식스 같은 위대한 인물이 등장하게 됩니다. 17세기에 존 오웬이 영국에서 활동하고 있을 때 이성주의와 치열하게 싸우면서 대륙에서 개혁주의를 파수했던 인물 중에 프란시스 튜레틴이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바로 제네바 아카데미 학장을 지냈던 사람입니다. 인물들은 계속해서 다시 낮은 산을 그리면서 내려가기 시작합니다.
18세기 와서는 급격하게 산들이 낮아지기 시작하고, 여기저기서 그 산과는 계열을 달리하는 이상한 언덕들이 나타나는데 자유주의자들입니다. 이제는 인물들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가 했더니 태평양을 건너서 미국 대륙에서 역사상 아우구스티누스 산업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여기저기서 그 산과 들 이상한 언덕들이 나타나는데 자유주의자들입니다. 이제는 인물들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가 했더니 태평양을 건너서 미국 대륙에서 역사상 아우구스티누스와 겨룰만한 위대한 기독교 신학자가 한 사람 나오는데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조나단 에드워즈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19세기에는 헤르만 바빙크, 20세기에 아브람 카잇과 같은 사람들이 등장하게 되고 벤자민 버필과 같은 인물들이 나타나면서 개혁주의는 마지막 불꽃을 태우게 됩니다. 이 후로는 자잔 신학자들과 유고한 개혁주의 전통을 잘 모르는 목회자들이 작은 산을 이루면서 살아가고 있고 우리도 바로 그 사람들 중에 한 사람으로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인간 창조로부터 시작을 해서 구약의 역사, 신학의 역사, 그리고 마지막 이제 이 교회의 역사에 이르기까지 달려온 모든 역사는 오직 하나를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역사의 중심은 구원의 역사이고, 구원의 역사의 회심은 사람들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위대한 역사들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이루시기 위해 여러분들을 이 신학교에 보내셨고, 그리고 여러분들은 여기에서 신앙훈련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들은 여러 가지 많은 어려움을 안고 이 신학교에 왔을 것입니다. 훌륭한 신학교 다니는 사람들보다 학벌도 못하고 나이도 많이 드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약해보이는 사람을 택하셔서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생각지도 않았던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위대한 일들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주의해야 할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목회자는 소위 소명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나를 목회자로 부르셨고, 그리고 나는 ‘이 소명을 피할 수 없다’라고 하는 분명한 의식 속에서 신학을 공부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런 소명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없으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하나님 앞에 매달려 이런 소명을 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몸부림쳐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34살에 교수가 되고, 어느 신학교에서 면접을 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나이가 좀 많이 들어 보이는 학생이 신학대학원 과정에 입학을 하겠다고 원서를 냈습니다. 필기시험을 보고 면접을 할 때 무릎을 꿇는 것이 소명이었습니다. ‘연세도 많이 드셨는데 50이 훨씬 넘어 버린 나이에 왜 신학교를 들어오시려고 하십니까?’ 그랬더니 목회를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 때문에 당신은 목회를 해야 되겠다고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까?’ 그랬더니 ‘교수님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저는 오로지 효도할 마음으로 여기에 왔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늙으신 노모가 80세가 넘으신 노모가 계신데, 그 분의 평생소원이 제가 목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돌아가실 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자식을 낳은 보람을 안겨 드리려고 어머니 소원을 들어 드리는 것이 효도인 것 같아서 신학교에 왔습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당신은 집에 가고 그 할머니를 신학교에 보내 주세요. 또 어떤 사람은 당신은 왜 신학교에 들어오려고 합니까? 목사님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누가 압니까? 우리 집 사람이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우리 집사람이 그 기도를 했는데 주님 내 남편은 소명자이니 신학교를 가라고 해라 그래서 왔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당신은 집에 가고 부인을 신학교에 보내십시오. 제가 보기에 부인이 소명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소명의 증거가 해도 해도 뭐가 안 되는 것이 소명의 증거가 될 수 있겠어요? 사업에 실패하는 것이 소명의 증거입니까? 대학에 떨어진 것이 소명의 증거입니까? 취업이 안 된 것 ,결혼을 하려다가 실패하고, 심지어는 결혼을 하다 이혼한 것, 이런 것들이 어떻게 소명의 증거가 될 수 있습니까? 물론 하나님은 이런 모든 것들을 사용하셔서 우리들을 소명의 길로 부르실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이 소명의 중요한 이유가 된다고 하면 그것은 너무 부끄러운 것입니다.
소명은 그 이상의 무엇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불타고 그것 때문에 내가 이 일 외에는 그 무엇도 할 수 없다는 강한 열망이 우리 속에 불타는 이것이 바로 소명의 진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소명은 사명감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돼서 ‘이런 일을 해야 되겠다’라는 꿈 때문에 소명을 갖는 것이 아니라 이 소명은 개인적인 신앙에서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이 신앙의 핵심은 십자가와 부활 사건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신이 믿는 종교의 도리에 대해서 확신을 가진 유대주의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어떻게 변하여 자기가 핍박하던 그리스도인들이 전하는 그 복음을 믿는 사람이 되었고, 또 이단 중의 괴수라고 확신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순교하기 까지 전파하는 사람이 되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무엇이 그 사람을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그는 스데반을 죽이는데 가편 투표를 하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박해하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거기서 예기치 못한 한 사건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그것도 부인할 수 없이 자기가 생생하게 본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커다란 혼란이었습니다. 왜요?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히 나무에 매달려 못 박혀 죽었습니다. 신명기에 의하면 이 사람은 바로 하나님 앞에 저주를 받은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저주를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그런데 살아났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살아날 수 없고 하나님이 살리셔야 살 수 있습니다.
구약에 보면 이 땅에 살았으나 죽음을 보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에녹, 그리고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모세를 부활시켰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 믿음을 따르면 모세, 그리고 병거타고 하늘로 올라간 엘리야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의 특징은 하나님이 아주 사랑하시고 인정해 주시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나무에 매달려 죽은 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인데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사람이라면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수 없을 것이고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다면 저주하셔서는 안 된다는 이 두 가지 모순 때문에 이 사울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러다가 성령의 강력하게 역사를 더하여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받으신 것도 사실이고, 하나님께 인정을 받으셔서 부활 하신 것도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저주의 이유가 자기의 죄 때문에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 구원받을 모든 인류를 위해서 대신 그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목제물로써 십자가에 매달려 형벌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석을 하고 나니까 하나님께 저주 받은 것도 하나님께 인정받은 것도 모두 화해가 되고 풀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바울은 이 사건을 통해서 이제는 이 예수그리스도야 말로 이 구약과 신약의 모든 성경 계시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리고 이제는 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야말로 온 인류가 구원을 받을 유일한 길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이 사도바울은 일평생 이렇게 수치스러운 형벌의 도구였던 십자가를 자랑하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하고 심지어는 내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의 못 박힌 것 이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 하였노라고 고백하며, 이 복음을 전하는데 자신의 심령을 다 바치는 사람으로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이 바로 소명의 핵심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어느 정도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에 대한 증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회를 위해 소명을 받은 사람은 이러한 경험이 아주 특별해서 더 이상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직업들을 행하면서 한 편으로 복음을 위해서 사는 것으로서는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 무엇 때문에? 야망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사실에 깊이 사로잡혀서 이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는 뼈에 사무친, 복음의 뼈에 사무친 사람이 될 때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표현에 의하면 그는 더 이상 평범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렇게 될 때에 이 우리의 마음속엔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놀라운 사랑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비참한 죄인이고 쓸모없는 인간인가 하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이 사랑에 사로잡힐 때 우리의 마음에 불붙는 것은 구령의 열정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저렇게 비참하게 살아가는 죄인들,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 모두인 것처럼 그렇게 욕망을 우상처럼 섬기며 살아가는 저 사람들의 늘 기다리고 있는 지옥의 타오르는 불길을 보면서 ‘내가 이 영혼에게 복음을 전하여 이를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하지 않고는 안 되겠다’라고 하는 절실한 마음을 가지고 복음을 위해서 영혼들을 구원하고 그 영혼들을 하나님 앞에 세우기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해야 되겠다고 하는 무한대의 헌신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소명의 점수입니다. 그 소명의 점수에도 항상 하나님 앞에 자기가 십자가에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 받은 죄인인 것을 이제 나의 나 된 것은 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이 있는 것입니다.
(찬양)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was blind now I see
이렇게 될 때 이 마음속에서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마음과 두 번째, 하나님 때문에 사랑해야 하는 교회, 하나님 때문에 사랑해야 하는 성도, 하나님 때문에 사랑해야 하는 불쌍한 영혼들, 하나님 때문에 사랑해야 되는 사명에 대한 치열한 사랑이, 그 사랑 안에서 솟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가지고 처음 소명 받았을 때 그 때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사랑을.
저는 21살에 회심하고, 그리고 25살이 되던 해에 소명을 받았습니다. 서울 변두리에서 100여명 되는 교회의 집사로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저에게 주일학교 학생들을 맡겨 주셨습니다. 교회가 가난하니 교역자를 쓸 수가 없어서 교역자는 가끔 와서 설교하고 제가 설교도 하고 선생님들도 돌보며 주일학교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여름성경학교 때가 되었습니다. 저는 그 때 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었고, 내가 이 아이들을 데리고 여름성경학교를 해야 된다고 생각하니까 앞이 캄캄했습니다. 몇 번을 못 한다고 그랬지만 목사님이 밀어 붙이셨습니다. 휴가는 내 놨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여름성경학교 하기 전 일주일 동안을 금식했습니다. 직장에서 끝나면 교회에 와서 기도하다가 자고, 그리고 교회에서 세수하고 출근 하였습니다. 일주일을 금식을 했습니다. 5일 되던 금요일 날 제가 강대 앞에 엎드려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한 없이 눈물을 흘리며 고백했습니다. 이 벌레 같은 나를 위해 하나님이 구원해 주셨는데 이제 내가 남은 생애를 예수 위해 살게 해 달라고. 그리고 나를 주님이 쓰시려면 저를 써 달라고 제 인생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 때 온 세상이 한 순간에 다 변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아무 욕심도 없고, 그저 그때 마음으로는 공부도 별로 잘할 것 같지 않고 능력이 있는 것 같지도 않고 그래서 ‘저 시골에, 아니면 어촌에 미련 없이 가서 복음을 전하고 그리고 결혼도 하지 말고 독신으로 살다가 죽자’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도 모두 각각 상황은 다르지만 이 십자가에 대한 분명한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 앞에서 깊이 회개하는,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마지막 남은 피 한 방울까지, 그리고 살 한 점 까지 드려야 겠다’는 고백을 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일평생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게 어렵습니다. 그게 어려워요. 저는 야간 신학교를 다녔습니다. 직장을 다녀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처럼 이렇게 많이 늦은 시간에 공부했습니다. 학교 가서 매일 울었습니다. 공부를 하고 싶은데 가족들을 부양해야 해서.
여러분 그런 정신을 가지고 계속 살아야 되는데 아직 여러분도 그런 정신을 가지고 못 살고 있을 겁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 중에 목사님처럼 오늘 살아가는 정신이 그 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내 생명을 주께 드립니다.’라고 고백했을 때 그 ‘똑같은 정신으로 지금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라고 말 할 수 있는 사람 있으면 한 번 일어나 보십시오.
여기에서 우리들이 소명의 불변성과 가변성의 문제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소명은 과거에 이미 받았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목회 사역을 해 나가다 보면 어려운 일이 많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겪는 어려움은 한국에서 만나는 어려움. 이제 신학을 졸업하고 이 넓은 세상의 바다로 나아가서 교회라고 하는 배를 여러분들이 운전하기 시작하며 담임 목회를 한 번 하기 시작하면 바다 한 가운데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막말로 이걸 하다가 교회에서 너무 힘들고 말도 안 되면 그만 두면 돼요. 딴 데로 가면 됩니다. 이력서 내고. 그런데 담임 목사는 그럴 수 없습니다.
어려움을 만날 때 과거의 소명은 유익이 됩니다. 왜냐하면 저도 목회를 하다가 어려움을 만나면 어떤 때는 ‘정말 이렇게 목회를 해서 될까’ 또 어떤 때는 교회에 너무 많은 근심과 괴로움들이 있습니다. 설교를 할 수 없을 것 같은 때도 있습니다. 그 때마다 생각합니다. 그 날 밤 하나님이 나를 목회자라고 부르셨을 때 그 때 나는 내 심장을 주님 앞에 드리고 주님 받으셨고.
(찬양)
이 생명도 달라시면 십자가에 놓겠으니 허울뿐인 육신 속에 참 빛을 닮게 하시고
허물 뿐인 세상에서 밀알로 썩게 하소서
그러면서 ‘그래도 하나님 나는 쓸모없는 것 같아도 그래도 하나님이 나를 쓰시고 싶으셔서 나를 부르셨는데 하나님께 도와 달라고 하면 도와주시겠지’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거의 소명이 없는 사람들은 이런 것을 회상할 게 없습니다. 그리고 힘들면 그만두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목사님이 버스 기사 하나를 채용했는데 말썽을 부리고 게으름을 피우면서 일을 안 했답니다. 그래서 야단을 치면서 똑바로 좀 하라고 했더니 대들면서 ‘너무 그러지 마시오.’ 수첩을 하나 꺼내면서 ‘나도 목사요.’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목숨 걸고 소명을 위해서 기도하고 끝까지 소명이 아니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계속 신학을 하면 배운 게 이것 밖에 없으니까 결국은 교회에서 먹고 살아야 합니다. 그건 불행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얼마나 떳떳하게 할 수 있는 직업들이 많습니까? 평신도로서 열심히 돈 벌고, 사업하고, 직장을 다녀서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교회에 평신도로서 열심히 봉사하고 주님을 섬기면 얼마나 좋습니까? 과거적 소명은 그런 점에서 아주 분명한 유익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이 뭐나 하면 첫째는 지속적인 헌신으로 그렇게 소명을 받은 사람이고 한 때는 주님의 교회를 위해 자기 재산을 다 바치고, 40일 금식 기도를 10번 씩 하고, 그 핍박을 받고 순교할 그것까지 지냈는데 나중에는 하나님 앞에 그렇게 헌신하지 않으면 결국 그런 경우가 있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되는 것이 대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불타는 소망과 소명을 받았다고 해서 옛날에 그 것 받은 거 하나가 오늘 내가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화된 삶을 살게끔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랬더라면 사도바울이 무엇 때문에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고 말했겠습니까? 만약에 그랬더라면 사도바울이 무엇 때문에 내가 많은 사람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기 보다는 놓임을 받을까 두려워하노라 말했습니다. 그랬다면 무엇 때문에 사도 바울이 날마다 육신을 쳐서 복종시킨다고 고백을 했겠습니까?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신 것이라’ 라고 말합니다. 헬라어 성경에 ‘에스타우로마알’이라는 현재완료 1인칭. 십자가에 못 박힌 사건은 과거에 일어났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건 과거에 일어났는데, 그 사건이 현재까지도 사도바울의 마음과 삶에 영향을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목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목회자 자신이 영적으로 성장을 해야 됩니다. 그들의 성장은 신학이나 사역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인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잘 해야지 영적으로 성장하지 다른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목회 사역도 일인데 머리 좋고 열심히 배우고 연구를 하면 농땡이 치는 사람보다 더 낫게 하지 않겠습니까? 하다보면 이것도 요령이 생기고 잘 할 수 있지 않습니까? 너무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것이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은 신앙입니다.
신앙의 세계에서 한 사람의 목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배워가고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야 되는 지를 터득하고, 그렇게 알았어도 내 힘으로 할 수 없으니까 은혜를 받고, 회개하고, 이러면서 매일 매일 하나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할 때 그 때 그가 정말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영적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영적으로 계속 성장하면 설교가 달라집니다. 물론 거긴 마지막 날 얘기 하겠지만 공부라고 하는 요소가 꼭 들어갑니다. 성경과 신학을 꾸준히 공부한 자들은, 그래야지 영적으로 성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목회 사역을 그 모닥불 피우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래서 기름을 확 끼얹어서 불을 붙이면 10초 동안 어마 어마하게 불길이 오릅니다. 그런데 1분쯤 지나가면 불길이 가서 설교 한 번 하고 목회 끝내려고 합니다. 2년 하려고 그러는 것도 아니에요 평생을 해야 됩니다.
저는 열린 교회를 개척하고 20년을 설교했고, 4000번을 설교 했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계속 해야 됩니다. 그 만큼은 아니어도 해야 됩니다. 그런데 교회 다닌지 한 3년 지나고 나니 매일 그 얘기가 그 얘기 재탕 3탕입니다. 그리고 한 교회를 다닙니다. 또 계속 붙어 있다면 그건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이겠죠. 그러면 그렇게 부지런히 성장하는 교인들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의 의지에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목회자가 자기 자신이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을 얼마나 중요한가 생각을 해야 됩니다. 이것은 옛날에 받은 소명 하나로 되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그 소명이 우리 마음속에서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 때 더욱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합니다. 하나님 앞에 피하리라.
그러면 이 소명을 계속 유지하는 길이 무엇인가? 그것은 두 가지가 필요한데 지식과 사랑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물론 이 지식은 다른 게 아니라 경건과 결합하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지식입니다. 그리고 이 진리를 가장 엑기스를 모아 놓은 것이 성경입니다. 그래서 신학이라고 하는 것 그 자체는 어떤 의미에서 보면 학문이 아니라 학문은 원인, 결과를 찾아서 비교하고 종합하는 게 학문인데 이 신학은 그런 게 아닙니다. 왜? 거기에는 믿음이라고 하는 요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원인과 결과로 설명을 못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 성령도 여기 있다고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과 그리고 성부와 성자를 믿습니다. 성령과 성자를 믿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도 믿습니다. 교회를 믿어요. 이런 것들은 학문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신학은 또 학문이 아닙니다. 그래서 학문인 측면도 가지고 있고 학문이 아닌 측면도 가지고 있습니다. 학문인 측면은 공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고, 학문이 아닌 측면은 초월적인 신앙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영원히 하나님 앞에 신앙생활을 잘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신학이란 무엇이냐면 신학의 정의를 내려 드리겠습니다. 쓰세요. ‘신학이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이다’ 이것이 신학의 정의입니다. 그런데 신학은 중간을 다 빼버리면 신학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게 신학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신학교에 와서 이런 저런 과목을 배우는 것은 이런 신학의 활동 중 일부들이 그 신학이 하나님 앞에 사는 게 그냥 사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신앙생활의 목표가 되고 그리고 우리의 동기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신학입니다.
이 소명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깨닫고, 깨달은 그 위에 성령의 은혜가 주어져서 그 속에서 우리의 삶을 평가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뉘우치고, 다시 믿음으로 살고, 이렇게 하는 과정을 통해서 철저하게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이것이 바로 신앙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소명을 유지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신학교에 들어오게 되면 이게 쉽지가 않습니다. 왜냐 하면 설교를 들을 때에도 ‘저걸 어떻게 변형해서 교인들에게 가르칠 것인가’ 강의를 들어도 ‘이걸 어떻게 잘 바꿔서 사람들에게 가르쳐줄까’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이리 들어와서 이리 나가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들어와서 자기 깊은 속으로 들어가서 자기를 파헤쳐서 자기를 먼저 변화시키고 변화된 그 사람 속에서 이것들이 쏟아져 나와야 되는데, 그걸 못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철저하게 강조 되어야 할 것이 두 가지인데 하나는 냉철한 머리로 열심히 공부해서 성결해지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성경을 공부할 뿐만 아니라 성경 원어 그리고 외국어는 물론이고 그리고 신학의 각 분과들 성경 신학, 조직신학, 교회사, 실천신학, 이런 것들을 탄탄하게 공부하면서 그러면서 성경을 대할 때 이 성경에 있는 진리들을 잘 깨달을 수 있는 지적인 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학뿐만 아니라 신학 이외의 여러 가지 학문들 인문학이나 철학이나 과학이나 사회학이나 이런 것들을 함께 공부해 가면서 그러면서 지성인으로서 성경을 볼 수 있는 안목을 길러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공부한다고 해서 지금 유명한 사람들처럼 따라갈 수 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어쨌든 책을 읽고 치열하게 독서하면서 여러분들이 15분씩 전철에서 책을 읽으면, 20년을 읽으면 대학 하버드를 나온 사람의 지식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태도로 살아가야 하는 것은 지금은 차이가 별로 안 나지만 10년 20년 후에는 두 사람이 함께 앉아서 대화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납니다.
여러분 신학교에 입학하면은 첫 시간에 학우들이 나와서 자기소개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해서 어떤 인상을 갖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껄렁 껄렁 합니다. 30년 지나도 계속 껄렁 껄렁 합니다. 어떤 사람은 정말 겸손합니다. 30년이 지나도 계속 겸손합니다. 한 학기 살아 보니까 어떤 친구는 굉장히 정치적입니다. 30년이 지나도 교단에 와서도 정치합니다. 어딘가에 가서 정치합니다. 어떤 친구는 공부도 안하고 기도도 안하고 뺀질대면서 공부만 한다. 그러고 맨 날 책만 봅니다. 그건 안 변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사람이 1년 지났는데 목회를 못하고 어디 가서 삽니다. 그리고 가는 겁니다. 그래서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은 많은 신학 책을 공부하고 읽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한 학기에 최소한 자기 키 만큼씩 책을 읽어야 합니다. 한 학기. ‘내가 개척했습니다. 목회를 합니다. 내가 돈을 벌어야 됩니다.’ 하고 핑계대지 말고. 나는 6시간 이상 자면 죄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목회하면서 저도 5시간 이상 안 잡니다. 왜? 저도 잠을 좋아해요. 오죽했으면 제 평생소원이 바람 잘 부는 언덕에서 뽀송뽀송한 하얀 이불 덮고 하루 딱 자 보는 게 소원입니다. 왜? 시간이 없습니다. 시간이. 몸이 아프지 않는 한 덜 잡니다. 어떻게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자고 싶은 것 다 자고 그러겠습니까? 희생할 게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치열하게 자기 자신을 쏟아 부으세요. 하나님 앞에. 공부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많은 책들이 있는데 그 모든 책들의 중심에는 여러 권의 책이 아니라 한권의 책이 있어야 됩니다. 성경이 있습니다. 계속해서 성경을 읽고 은혜를 받고 눈물을 흘리고, 기뻐하고, 하나님 만나고, 이러면서 옛날에 받은 소명이 유지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이 은혜를 받는 가장 중요한 수단 중 하나는 열렬한 기도 생활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목회자가 영혼이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가장 훌륭한 증거는 설교나 심방이나 교회 행사나 혼자 있을 때 하나님을 찾는 간절한 마음, 혼자 있을 때 하나님을 찾는 치열하고 간절하게 부르짖는 기도, 그것입니다.
마르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에게 누가 물어 봤습니다. 설교와 기도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이 대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설교는 항상 쉽고 기도는 언제나 어렵습니다. 왜? 설교는 일정 수준에 오르면 잘 하다가 갑자기 못 하게 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기도는 어제까지 뜨겁게 기도했는데 오늘 지금 기도가 안 될 수가 있습니다. 왜? 이건 가장 영적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를 많이 받으면서 마지막으로 한 가지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게 뭐냐면 치열하게 기도를 실천 하는 것 입니다. 그렇게 얘기하면서 제 얘기해서 너무 죄송합니다. 지금은 그렇게까지 못합니다. 솔직히. 신학교 다닌 7년 동안에 매 한 학기가 끝나면 기도원엘 갔습니다. 일주일 금식. 특별한 기도 제목이 아니라 한 학기 동안에 묻은 때를 마음속에서 씻어내는 마침 1학기가 끝나고 나면 성경학교가 기다리고, 2학기가 끝나고 나면 신년계획이, 가서 그 기도를 함께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친구들과 함께 강원도에 기도하러 가기도 했고 혼자 가기도 했습니다. 서로 가방을 지워 주면서, 산을 걸어 내려오면서 ‘우리 모두 주님의 참된 종이 되자’ 기도 많이 하십시오. 마치 기도밖에 없는 것처럼 기도하다 죽을 것처럼 그렇게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신학교 때 훈련이 돼야 30년이 갑니다. 30년 동안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우리들이 소명을 유지하며 살아야 할 한 중요한 수단이 뭐냐 하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한 5,6년 전에 LA로 집회를 갔습니다. 집회를 다 끝내니까 그 교회에서 저에게 디즈니랜드를 보여주겠다고 합니다. 필요 없다. 대신 부탁을 하나 들어 다오. 나를 가르쳐주신 노교수님이 여기 어디에 살고 계신데 총신대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쳤던 이상근. 그 분을 대외적으로 찾아 달라 그랬더니 금방 찾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찾아 갔습니다.
사모님은 제가 찾아뵈었을 때 7년 전에 돌아가셨고 제가 그 분을 조교로 섬겼는데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한 20년 만에 만났습니다. 그런데 25년. 가보니까 목사님이 그 때 아흔 넷. 지금은 돌아가셨습니다. 아흔 넷이고 92세까지 자동차를 운전하실 정도로 건강하셨는데 제가 갔을 때에는 다리가 아프셔서 보호 장구에 의존해서 혼자 뒤뚱 뒤뚱 걸어 다니며 사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큰 절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꽃다발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과일도 한 바구니 드렸습니다. 목사님이 좋아 하셨습니다. 작은 아파트에 아무도 없이 혼자 사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 드렸습니다. 교수님 이렇게 혼자 계셔서 얼마나 외로우실까요? 제 마음에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랬더니 이 노교수님이 하신 말씀이 일생동안 잊혀 지지 않습니다. ‘외롭긴 뭐가 외로워 내가 여기 나 혼자 있나 우리 주님이 항상 나와 함께 계시는데’ 인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한참을 울었습니다. 과연 나도 저럴 수 있을까? 세월이 흐르고 교회도 은퇴하고, 우리 집사람도 먼저 하늘나라 가고 아이들도 다 멀리 시집 장가가고, 나 혼자서 절뚝거리며 혼자 살 때 내가 과연 저렇게 말할 수 있을까? 외롭긴 뭐가 외로워 내가 여기 혼자 있나 우리 주님이 나와 항상 함께 계시는데.
(찬양)
주 내안에 늘 계시고 나 주의 안에 있어 저 포도 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어떤 분들은 저에게 아들 딸 같고 어떤 분들은 형제 같지만 나도 한 30년 전에는 똑같이 이렇게 밤에 나와서 공부했습니다. 우리 인생은 이와 같고 아주 짧고 덧이 없습니다. 지하실 교회에서 7명의 교인을 데리고 열린 교회를 시작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20년이 흘렀고, 개척할 때 내 품에 안고 있던 우리 어린 딸이 갓 난 아기가 벌써 대학교 3학년이 되었습니다. 잠깐입니다.
(찬양)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 들 뿐이니 주를 사랑하는 마음 금보다도 귀하다
그래서 언젠가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일을 내려놓고 주님 앞에 갈 때 그 때 우리의 피 묻은 전투복을 벗고 그 분이 내 주신 고운 세마포 옷을 입고, 천국 어느 한 구석에 가서 우리 주님을 찬송할 수 있다면 그게 우리의 행복이 아니겠습니까? 어려움이 많이 있습니다.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믿음으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믿음으로 살면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꼭 승리하셔서 정말 좋은 종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우리 같이 주악에 맞춰서 간절히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