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함과 신앙 (저녁)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으니라”(눅1:80)
녹취자 : 이병두
구약성경이 세례요한에 대한 예언으로 끝나고, 신약시대는 세례요한의 출생과 함께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이 세상에 이루어 가실 때에 사람을 사용하신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역사와 사람 사이에 있는 밀접한 관계 점들을 우리들이 이해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어떤 사람으로 어떻게 해서 나가야 될 것인가를 고민을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한번 역사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다.
창세기를 열면 무의 상태에서 창조가 이루어지고, 처음 인간이 만들어집니다. 만들어진 이 인간은 하나님의 탁월한 그 형상을 본받은 인간이었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에 대한 탁월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창조의 세계에는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의 광채를 어둡게 만드는 저주가 내리고, 모든 세계를 바라보는 인간은 영적으로는 철저한 어두움이, 지성적으로는 철저한 눈 멈이, 의지에 있어서는 충동에 굴복하는 오만함이 자리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이 시작됩니다. 만약에 인간이 타락해서 구원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창조는 무의미해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원을 계획하심으로서 죄가 들어 왔지만 당신의 창조주로서의 위대한 영광을 구속의 행위를 통해 이 세상에 펼쳐 보이셨기 때문에 결국, 인간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구속을 통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지으신 목적은 또 다른 방향으로 성취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 같은 경우는 인간이 타락하게 된 것이 하나님의 커다란 경륜 안에 있고,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타락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드러날 수 없었을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게 드러났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설득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이러한 역사는 아브라함 이전에도 계속 되어오지만 아브라함이 본격적으로 하나님 앞에 선택을 받음으로 이제 구원의 역사를 위한 위대한 구속사역이 본격적으로 전개 됩니다. 아브라함으로 부터 많은 세월이 흐르면서 한 가정에서 하나님을 아는 계시가 보존되고 언약이 맺어지고 그 씨들이 펼쳐지게 됩니다. 구약의 족장들도 괄목할 만한 인물들이었지만 세월이 많이 흘러가면서 요셉이라는 인물이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특별한 지식을 소유한 사람이었고, 하나님 앞에 순결한 사람으로서 주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구속의 역사를 보여준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구약에서 최대의 높은 산맥이 나타나고, 거기에 최고의 산봉우리가 나타나는데 모세라고 하는 불세출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탁월한 영적인 인물이었고, 세상의 학문에도 탁월했을 뿐만 아니라, 놀라운 지도력을 가진 카리스마적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구약 성경의 처음 다섯 권을 저술하는 영예를 누리게 됩니다. 이후에 카리스마적인 성격은 떨어지지만 가나안 정복의 영웅이었던 여호수아가 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가나안에 정착 하면서 높은 산맥처럼 떠오르던 인물들은 산이 낮아지기 시작하고, 사사시대로 접어들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왕정을 도입하는 중요한 커다란 산이 하나 나타나는데 이 사람이 바로 사무엘이라고 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직임적 선지자의 시조로서 그는 사사시대와 왕정을 잇는 중요한 역사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 이후에 다윗이라고 하는 구약의 최대의 인물이 나타나게 되고, 그는 영적으로나 지성적으로나 특별히 철학적으로나 아주 탁월한 인물이었고, 아마도 구약성경 전체에서 이 다윗만한 계시의 풍성함을 누린 사람이 없을 정도의 비범한 인물이었습니다. 더욱이 그는 어린아이처럼 순결한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을 따랐던 믿음의 사람으로서 위대한 인물의 아름다운 면들을 동시에 보여주는 높은 산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철학함에 있어서 구약에서는 다윗을 신약에서는 바울을 자신의 모든 신학함과 철학함에 전범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 다시 산들이 낮아지기 시작하면서, 이어지는 여러 봉우리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그리고 다니엘 같은 봉우리들도 나타나고, 에스겔이나 호세아 등등과 같은 좀 높은 봉우리들이 나타납니다. 이렇게 해서 구약의 역사가 끝나고, 중간사 시기를 거치면서 거의 괄목할 만한 봉우리들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다 신약이 등장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게 되셨는데, 이 분은 선지자들의 뒤를 잇는 산맥 안에 속한 또 다른 산이라기보다는 산맥 위에 높이 떠있는 태양과 같은 존재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신약시대에 접어들면서 사도들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예수그리스도께서 부활하고, 승천하신 후에는 이 사도들이 성령의 은혜를 경험하면서 퀘르그마를 가진 위대한 영적인 지도자들로 등장하게 됩니다. 정경 선지자 이후로 낮아졌던 산맥이 갑자기 가파르게 치솟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열한 사도들이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모든 봉우리 중에서 특별히 바울은 최고의 봉우리였고, 성경 전체에서 모세와 다윗 그리고 이 사도바울이야 말로 최고의 영봉이라고 부를 수 있을 그러한 영적인 봉우리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신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선교사, 목회자, 저술가로서 신약 성경 전체의 절반가량을 저술하는 명예를 누리게 됩니다. 사도시대가 끝나고, 산들이 낮아지면서 속사도 교부들로 이어졌지만 그리 높은 산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제 산맥이 끝나 낮아지는가 싶더니 계속 내려가고, 속사도 교부가 지나면서 이제 2세기 변증가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오리겐이나 이레네우스 같은 교부들이 등장하게 되고, 테르툴리아누스라고 하는 매우 중요한 교부 한 사람이 높은 산처럼 떠오르게 됩니다.
예루살렘과 아덴이 무슨 관계가 있냐고 물었던 이 사람은 신학이 철학을 의지하는 것을 거부하고 철저하고 성경의 신학을 따르고 싶어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좋은 것과 나쁜 것, 오류와 진리를 한꺼번에 용암처럼 토해 놓은 화산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오늘날까지 우리 신학에서 사용되는 매우 중요한 삼위일체 논쟁에 관한 중요한 개념들을 완성했을 뿐만 아니라, 본인은 예루살렘과 아덴이 무슨 상관있냐고 물었지만 그의 저작은 상당한 철학적 깊이를 가진 사상서로서 초대교회를 하나님의 말씀의 터 위에 신학 사상을 가진 사상으로 세우는데 이바지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남긴 중요한 저작들은 개혁신학 보편교회의 신학에 중요한 기초석으로 사용이 되었던 것입니다. 비록 몬타노스주의자로 생을 마감을 했지만, 그가 위대한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 이후로 그만 사람들이 나타나고, 괄목할 만한 높은 산봉우리들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상당한 시기 약 130년 정도가 흐른 후에, 서구 역사에서 이 사람이 없이는 신학은 물론 모든 철학과 사상에 있어서 생각할 수 없는 위대한 인물이 나타나는데, 이 사람은 역사 속에서 나타났지만 성경 속에 나타났던 인물인 사도 바울과 모세와 그리고 다윗과 겨룰 정도의 위대한 인물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 사람이 바로 히포의 대주교를 지냈던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저는 저의 생애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끼친 4명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을 아우구스티누스라고 꼽습니다. 교만한 것은 아니지만 일평생 책을 읽으면서 저는 그 책의 저자가 천재라고 생각해 본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책을 두 권을 읽으면서 이 사람은 천재라고 확신을 하게 되었고, 그의 위대한 지성의 크기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고, 지금도 저는 이 사람의 학생으로 자처합니다. 저는 이 아우구스티누스 이후에 태어났던 위대한 모든 신학자들, 특히 종교개혁의 위대한 신학자 마틴 루터, 칼빈, 쯔빙글리, 윈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 그리고 그 이전에 있었던 중세의 교부들 에우리게나를 비롯해서 중세 신학자의 많은 사람들, 그리고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들 그리고 오늘날 근대에 들어서 조나단 에드워즈를 비롯해서 심지어는 칼바르트까지 모두 이 사람의 학생이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 사람은 정말 위대한 사람이었고, 이 사람은 신학에만 영향을 준 것이 아니라 사실 근대 서구 사상의 문을 연 수문과 같은 역할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1600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그의 사상에 대한 많은 도전이 있었지만 이러한 격언이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비판하는 방식도 그에게서 배웠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시간과 영원, 선과 악에 대한 이러한 사유의 주제들은 여전히 이 사람을 극복했다고 말 할 수 없고, 아마도 종말이 오는 날까지 이 중요한 개념에 있어서 사유의 체계들은 이 사람 아우구스티누스의 빚을 지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 위대한 아우구스티누스 이후에 중세로 접어들게 되고, 그만 그만한 학자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다마스커스의 요한, 특히 ‘황금의 입’이라고 불리던 요한 크리소트턴 이후에 동방교회의 실제적 마지막 교부인 다마스쿠스 요한, 이 사람의 별명은 ‘황금의 청산유수’였습니다. 페트르스 롬바르두스, 그리고 11세기의 안셀무스 같은 인물들이 나타납니다. 13세기에는 아우구스티누스와 필적할 수 있을 정도로 가톨릭에 영향을 끼쳤던 한 인물이 나타납니다. 산의 높이로 말하자면 아우구스티누스에 비할 수 없지만, 산의 크기로 말한다면 결코 아우구스티누스에 뒤지지 않는 한 사람이 나타나고, 이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기본으로 기독교를 설명하려고 했고, 기독교 역사상 가장 방대한 기독교 사상의 집적을 이루었던 인물입니다. 이 사람이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라고 하는 인물입니다.
15세기에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 한 사람이 나타나는데, 이 사람이 바로 마르틴 루터였습니다. 그리고 루터가 이루어 놓은 종교개혁의 업적을 마무리 하고, 실질적으로 오늘날 개혁신학이 기초를 놓은 중요한 인물인 16세기 존 칼빈이 등장하게 됩니다. 16세기 후반에는 개신교의 전성시대라고 할 수 있는 종교개혁 제 2세대들에 의하여 소위 개혁파 정통주의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천재적인 학문의 영양과 예수그리스도를 깊이 만난 영적인 체험과 경건을 소유한 이 시대의 위대한 인물들은 종교개혁 제 1세대 혹은 2세대가 굵은 붓으로 그러놓은 종교개혁의 대의들을 세밀한 붓으로 그려가면서 이 모든 괄목할 만한 개혁신학의 유산들을 남겨놓게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칼빈 신학교의 리처드 멀러 교수의 도움으로 한 6~7년 전쯤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에 눈을 뜨고 받았던 충격을 이루 형언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런 세계가 있는 줄을 잘 몰랐고, 우리 때에는 슐라허 마허 테제아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그런 식의 종교개혁 제 2세대와 3세대 혹은 4세대 사이에 이어지는 17세기의 개혁파 정통주의의 신학은 너무 이성에 치우친 것이어서 가치가 거의 없다고 교육을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이 정통주의 신학에 눈을 뜨면서 제가 받았던 충격은 이루 형언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신학 공부를 하면서도 학제 간에 느꼈던 많은 갈등들이 이 17세기의 작가들을 공부하면서 엄청난 해결을 얻게 되었고, 그리고 저의 설교의 세계가 또 다른 높은 차원으로 비약을 하는 목회적인 경험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17세기의 개혁파 정통주의의 작품을 틈나는 대로 읽고 수집하고 있습니다. 어마어마하게 여러분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위대한 유산들을 발견한 후에 저는 플라톤을 공부하면서 인간으로 태어난 것에 감사했고, 아우구스티누스에 몰입하면서 기독교인인 것에 감사했고, 루터와 칼빈을 읽으면서 개신교도인 것에 감사했지만, 개혁파 정통주의 유산들을 공부하면서 제가 개신교도들 중 개혁파 교인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무한한 자부심을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17세기에는 종교개혁의 산맥들이 형성된 16세기를 토대로 화란, 영국, 스위스, 독일, 스코틀랜드 등으로 퍼지면서 거대한 산맥을 형성하게 됩니다. 바로 이 위대한 개혁파 정통주의의 전성기 때 저의 스승 중에 한 분인 존 오웬이 등장하게 됩니다. 저는 존 오웬의 저작을 약 20년 이상을 탐독했습니다. 그리고 외국에서 손님이 오면, ‘담임 목사는 존 오웬 목사고, 저는 부목사라고 생각합니다.’라고 소개를 했고, 우리 교회에는 3개의 작은 파크가 있고, 하나의 파크는 건설 중인데 하나의 파크는 존 캘빈, 또 하나는 조나단 에드워즈, 그리고 또 하나는 존 오웬인데, 이제 9월 달에 마지막으로 아우구스티누스 파크를 지금 공사하려고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어째든 이 사람은 그 이전까지 저는 영국 청교도들에 깊이 심취를 했고, 지금까지 약 3,000여 권의 책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개혁파 정통주의를 깊이 만나고 난 뒤 부터는 청교들에 대한 재미가 시들해졌습니다. 왜냐하면 탁월한 인물 존 오웬, 윌리엄 퍼킨스, 그리고 에드워드 레이, 리처드 백스터, 토마스 굿윈, 리처드 쉽스, 그리고 이러한 인물들을 제외하고 나면 신학적인 깊이에 있어서 영국 청교도들은 대륙의 정통주의를 따라 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17세기 존 오웬이 영국에서 활동하면서 소키누스주의와 로만 가톨릭 그리고 아르메니우스주의자들과 투쟁하고 있을 때, 똑같은 일을 대륙에서 하고 있었던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바로 프란시스 튜레틴이었습니다. 이런 인물들이 계속 나타나고 점차 낮은 산을 그리며 내려가기 시작합니다. 이제는 이런 인물들이 나타나지 않는가 싶더니, 이제 18세기 1725년경을 마감으로 이 영광스러운 개혁파 정통주의 시대가 마감되고, 이성주의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그러다가 대륙이 아닌 미국에서 위대한 한 신학자가 나타나게 되는데, 조나단 에드워즈라는 인물입니다. 그는 단지 신학을 연구하는 선비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 온 몸으로 싸웠던 철학자요, 사상가요, 목회적 실천가요, 선교사로서 다 방면의 삶을 살았던 인물이었고, 그런 점에서 그는 두 번째 아우구스티누스라고 말할 수 있은 정도의 대단한 인물입니다. 그래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자기의 책속에서 이런 비유를 했습니다. 만약에 청교도들을 알프스라고 한다면, 종교개혁자들은 히말라야이고, 그리고 정말 이렇게 하는 것이 가능할지 모르지만 조나단 에드워즈는 종교개혁자들보다 탁월하게 뛰어난 에베레스트 산에 비유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이런 인물이 나타나지 않는가 싶더니, 세월이 흐르면서 헤르만 바빈크 19세기 말의 인물, 그리고 아브라함 칼퍼, 그리고 벤자민 워필드 같은 인물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제는 영광스러운 개혁주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자잘한 신학자들과 이 유구한 개혁신학의 역사와 전통을 모르는 목회자들이 산들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고, 이런 저런 산과 같은 학자들이 나타나지만 그러나 과거에 있었던 이 위대한 인물처럼 학문적으로 영적으로 동시에 영향을 끼쳤던 인물들은 사라진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렇게 인간 창조로 부터 시작해서 잠깐 동안 우리는 21세기 오늘에 이르기까지 달려온 역사를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그런 역사의 흐름 속에서 어떤 한 사람으로서 이미 달려왔던 이 구원사의 산맥 중 어느 한 산으로서 존재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서 우리들이 선배로 부터 배웠고, 우리들이 탐구했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후대에게 남겨 놓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우리는 이제 하나님 앞에 우리들이 신학 공부하는 이유가 단지 공부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이런 구원의 역사를 이어가는 위대한 산맥의 줄기를 타고 달리면서, 우리도 무엇인가 하나의 산을 보태여 이 산맥을 타고 이르는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기 위하여 부름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이렇게 신학을 해서 마지막에 우리가 가려는 길은 어떤 길인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대체 무슨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요? 그리고 어떻게 신학을 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신학공부이고, 어떻게 우리들이 본래 처음으로 하나님 앞에 받았던 소명에 부합하는 신학함인지에 대해서 우리는 한번 정신 차리고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예화) 제가 서른네 살에 신학교의 교수가 되고, 어느 신학교의 대학원 과정에서 신입생들을 받기 위한 면접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나이가 좀 많아 보이는 아저씨가 입학 원서를 냈고, 그리고 면접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그 나이에 왜 신학교 오시려고 합니까?” 그랬더니 이분이 대답하는 말이 “교수님! 저는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뭡니까?” “오직, 효도할 마음 밖에 없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제게는 팔십이 넘은 노모가 계신데, 일평생 소원이 너 목사 되는 것 보면 원이 없겠다 해서 효도하는 마음으로 신학교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당신은 집에 가시고, 그 할머니를 신학교 보내십시오.” 어떻게 소명의 증거가 이런 것이 될 수 있겠습니까? 또 비슷한 사람을 그 해에 또 만났습니다. “왜 신학교 오시려고 합니까?” “교수님, 전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럼, 누가 압니까?” “우리 집사람이 다 알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우리 집사람이 금식 기도 했는데, 남편을 빨리 신학교에 보내서 목사를 만들라고 했답니다. 그게 저의 소명입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소명은 당신 부인이 받은 것 같으니까, 당신은 집에 가서 살림하고 부인을 보내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소명의 증거가 사업에 실패한 것, 대학에 떨어진 것, 이혼한 것, 사업하다가 쫄딱 망한 것, 이런 것들이 소명의 증거가 될 수가 있겠습니까? 이런데서 소명의 증거를 찾으려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기독교에서 목회자가 되기 위한 소명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리된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인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생각 없이 신학공부를 하지 말고, 지금 부터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진지하게 생각을 하면서 일생을 어떻게 하나님 앞에 살 것인가라는 디자인을 먼저하고, 물론 그 디자인도 혼자 그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기도 많이 하면서 그리면서 이 길을 계속 가도 좋은가? 라는 것을 깊이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가슴 아픈 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 우리 신학교 다니던 30년 전만 해도, 이렇게 외국에 와서 박사과정 공부하는 학생들이 희귀했습니다. 그래서 학위만 받고 돌아가면 금위환향이었고, 어디든지 갈 데가 있었습니다. 심지어 메이저 신학교에서도 아직 안수도 받지 않고 박사 과정이 끝나지 않은 학생들에게 가서 입도선매 식으로 ‘너는 여기 끝나고 우리 학교에 돌아와야 된다.’ 이렇게 까지 하는 일들이 비일비재 하였습니다. 이제는 한국에 자리가 없습니다. 제 주위에서 학위를 끝내고 와서 잡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이 있고, 어는 개교회에 들어가기 위해서 박사를 받은 것을 기록하면, 그 교회에서 면접할 때 당신은 너무 부담스럽다고 한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들이 깊이 생각하고 나의 일생을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서 빛내드릴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그림을 냉정하게 그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강조하는 것은 학문이 없이는 하나님 앞에 정말 훌륭하게 쓰임받기가 쉽지 않지만, 학문 하나만을 가지고도 그렇게 쓰임 받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래서 이 학문은 물론 이거니와 또 하나는 불붙는 소명 의식을 가지고 이렇게 흘러가는 구속의 역사 속에서 자기가 어떻게 영적인 역할을 감당함으로서 이런 산맥 중 하나의 산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소명의 문제를 깊이 묻지 않으면 안 되는 것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직도 소명의 문제가 분명하지 않으면 목사안수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저는 그만 두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절실하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분명한 소명을 받든지 아니면 자유롭게 이 세상의 직업으로 돌아가든지 양단간에 결정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월이 더 흐르고 나면 배운 것이 이것 밖에 없기 때문에 소명의식과는 상관없이 이 길을 걸어가야 하고, 그리고 그것은 본인을 위해서나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서나 매우 불행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명은 분명해야 하고, 이 분명한 소명을 가지고 우리들이 이 길을 걸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소명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학문 하나에 대해서만 소명을 느끼는 것, 그 이외의 것은 아무것도 소명이 없는 것, 이것은 신학에서의 진정한 소명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좀 더 상세하게 여러분에게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이 소명은 어디에서 출발하는 것일까요? 다시 말해서 복음 사역자로서의 소명, 그것이 선교사든지, 신학자이든지, 목회자이든지, 기독교 사업가이든지 어쨌든지 간에 이 소명, 특별히 하나님의 진리를 많은 사람들에게 외치지 않을 수 없는 이 소명은 어디에서 부터 출발하는 것인가? 그것입니다. 이것은 사명감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신앙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소명의 체험의 진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인 것입니다. 알다시피 사도바울은 자기가 믿는 종교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두 가지 커다란 편견이 있었는데 하나는 신학적인 편견이고, 또 하나는 심리적인 편견이었습니다. 심리적인 편견은 유대인들 이외에 모든 민족은 지옥의 땔감으로 만들어져 가치 없는 존재들이라고 하는 확신이었고, 그리고 이것은 바로 그릇된 유대인 선민사상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편견은 신학적인 편견인데, 나사렛 예수는 결코 메시아 일 수가 없다고 하는 확신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는 곳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아직도 부활했다고 헛소문을 퍼트리는 사람들에 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조사해 보니 다메섹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들을 체포하고 가두기 위하여 대제사장의 공문을 청하여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를 직접 만나게 되었습니다. 남에게 들었다면 부인할 수 있었을 텐데, 부인 할 수 없이 직접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여기에서 사도바울은 이전에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모든 신학들이 뿌리째 흔들리는 지적인 혼란을 경험했습니다.
유대인의 해석에 의하면 나무에 매달려 죽은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입니다. 그리고 죽음을 보지 않고 올라갔거나 하나님이 죽었는데 다시 살리신 사람들은 하나님께 매우 크게 인정을 받았거나 특별히 사랑을 받은 인물들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전통에서는 모세가 부활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승천했다고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살리신 것입니다. 죽음을 보지 않고 올라갔던 에녹이나 병거타고 하늘로 올라간 엘리야에 대한 생각들이 그런 것입니다. 의문은 이것 이었습니다. 두개의 명제가 충돌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저주를 받아 나무에 못 박혀 죽었다.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부활했다. 만약에 저주하실 사람이었으면, 하나님이 다시 살리지 마셔야 했고, 다시 살릴 정도로 사랑하신 사람이었으면 죽도록 내버려두셔서는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두 명제가 모두 자기가 직접 확인한 사실이었습니다. 여기에서 그는 혼란 속에서 정답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가 저주를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 저주는 예수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에 받은 저주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고,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대속의 교리에 접근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는 캄캄하게 어두웠던 지성의 천정이 찢어지면서 찬란한 진리의 빛이 쏟아져 들어오게 되었고, 그 빛을 찬란하게 머금으면서 그는 이전에 수 없이 보아왔던 구약과 지금 방금 자신이 경험한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와의 만남 사이를 관통하는 장엄한 물줄기를 발견하게 되었고, 이것은 바로 구약에 선지자들이 소명을 받았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누구누구에게 임하라고 했던 이 소명의 사건과 똑 같은 반복이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구약에 등장하는 소명기사는 대체로 ‘와이에히 데파르 엘로힘’ ‘베 누구구구, 알 누구누구, 레 누구누구, 엘 누구누구에 임하는 이러한 기록들은 단지 하나님의 정보가 선지자에게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선지자의 속에 강력하게 임할 때 성령의 장엄한 능력을 동반하게 되고, 이때에 그의 지성의 세계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누구든지 세상에 태어나면 그 시대에 아들이 되게 마련인데, 그 시대의 아들이 충실한 아들이 되는 것만으로는 예언자의 역할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세계와 인간과 하나님에 대한 또 다른 뷰포인트를 도입하지 않으면, 그는 예언 활동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 이 소명은 강력하게 주어졌고, 이것을 통해서 그의 모든 생각과 체계를 바꾸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단순한 성령의 능력이 아니라 소위 이야기하는 직관을 통해서 지성의 모든 체계들이 생각의 모든 체계들의 대변혁이 일어나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물론 이런 것들은 선지자에 따라서 엄청나게 나타난 사람과 적게 나타난 사람이 있기 때문에 저는 이 선지자들이 모두 똑같은 사람들이 아니라, ABC급 정도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굳이 여기서 누구는 A고 누구는 C라고 그렇게 이야기해서 천국에 있는 그분을 화나게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등급이 있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고, 그때에 자신의 지성을 찢고 들어온 찬란한 빛이 있었는데, 이 빛이 구약에서 뒤웅치고 신약을 향해 흘러가는 가운데 이 모든 물줄기에 떠오르는 최고의 하나님의 탁월성이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인카네이션(incarnation)이었습니다.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의 위대한 영광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신약 성경 중 가장 탁월한 깊이를 지닌 책을 한권 꼽으라면, 저는 단연코 에베소서를 꼽고 싶고, 평생소원이 죽기 전에 에베소서의 주석을 쓰는 것입니다. 이 에베소서에는 소위 레카피툴라티오(recapitylatio)의 교리라고 하는 것이 1장 10절에 나타나는데, 여기에는 바로 예수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이 사건이 하나님께서 이 모든 세계를 재창조하시는 놀라운 사건으로 묘사가 되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기 때문에 저는 그 유장한 레카피툴라티오의 교리를 여기에서 반복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희랍어로 아나카팔레오라고 되어있는 이 1장 10절의 단어는 신구약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위대한 의미를 함유하고 있는 구절이고, 이 위대한 교리는 역사적으로 이레네우스에 있어서 최초로 완성을 보았던 것입니다. 저는 한때 이 교리에 깊이 심취해서 여러 달 동안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누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정말 위대한 교리이고 가슴 벅찬 교리인 것입니다.
어째든 이 모든 것을 중심에 누가 와 있느냐 하면 예수그리스도가 와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건의 핵심은 십자가와 부활 사건인 것입니다. 저는 신학자가 된다고 하는 것, 아니 더 넓게 보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자체가 지성의 벼락을 맞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벼락을 제대로 맞은 사람도 있고, 설맞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지 이 지성의 벼락을 맞지 않고는 누구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신약성경에서 수 없이 발견하는 ‘메타노에오’라는 단어를 기억할 것입니다. ‘회개하다’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원래 이 단어는 ‘회개하다’라는 뜻이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것은 ‘메타’ 플러스 ‘노에오’, 노에오가 바뀌는 사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회개의 가장 뚜렷한 징표는 지성의 변화라고 봅니다. 회개를 하게 되면 가치관의 모든 것들이 변화되게 되는데, 이것이 외부적으로 드러난 어떤 외적인 눈물을 흘리고 몸부림치고 하는 이런 외적인 행동의 유용보다 훨씬 더 확실한 회개의 진정한 표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회개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에서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망가진 인간들을 하나님이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시고,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이 예수그리스도는 당신 자신이 하나님의 화육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을 때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셨으나 그와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 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낮추어 종의 형체를 가지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이 세상에 오신 예수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자신의 인성을 입은 몸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보게 해 주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도 아무것도 아닌 사람도 눈으로는 볼 수 있고, 손으로는 만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께서는 바로 당신이 완전한 사람으로서 우리에게 이중의 지식을 전달해 주셨는데, 하나는 하나님이 어떤 성품을 가지신 분이신가 하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었고, 또 하나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인간이 어떤 인간인가 하는 것을 그의 도성인신 안에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는 한편으로는 사람에게 사람을 보여주기 위해 또 한편으로서는 사람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늘날 이렇게 공부를 해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여 사람들 예수 믿게 만들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은 내버려둬서는 사람이 안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더 잘 가르치고 정확하게 교육하고 훈련해서 하나님 앞에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 여러분이 신학 공부하는 이유인데 그렇게 해서 마지막으로 인간에게 기대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 죄인에게 기대하는 바가 무엇이냐 이것입니다.
우리들이 이 기독교 선교와 신학의 모든 사역에 목표는 물론 궁극적으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지만 너무 추상적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 모든 신학과 목회, 그리고 모든 선교의 모든 활동의 목표는 참으로 사람들을 이 세상에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물을 것입니다. “지금 우린 사람이 아닙니까?” 물론 아닙니다. 사람은 사람인데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의도하셨던 그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은 타락한 이후로는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참으로 사람을 만드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구원과 목표와 이 모든 것을 세워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조의 목적은 구속이 계승하고 완성이 성취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구속의 대드라마의 완성은 겨우 재창조의 시작입니다. 시작에 불과한 것입니다. 거기에서 이제 정말 하나님이 창조하신 진정한 뜻이 좌절되었던 그 뜻이 여기에서 새롭게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조로 부터 완성 사이에 있는 이 모든 구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방식과 창조 이후에 영광이 드러나는 방식은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는 죄를 사용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방식이었지만, 완성 이후에는 하나님이 죄를 사용하지 않으시고도 드러나는 영광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이 죄 없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혹은 이 모든 죄를 용서받고 온전하게 완전한 사람이 되었더라면 어떤 인간이 되었을까 하는 것에 대한 유일한 모본이 바로 예수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담은 그것을 보여주긴 했지만 우리가 직접 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죄 없는 상태에서 타락하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는 죄인들을 위하여 죄인들에게 자신을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리기 때문에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복음사역자의 목회자의 소명이 무엇인가? 특별히 설교의 소명이 무엇인가를 이야기 할 때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입니다. 그 사건을 치열하게 경험하고 나서,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이 예수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은 아무런 희망이 없구나!’ ‘그리고 그들에게 어떤 도움을 주지 않고는 배길 수 없구나!’ 이것이 소명의 출발입니다. 이것이 너무 강력해서 뼛속까지 사무처서 도저히 이 일을 제쳐놓거나, 혹은 간간히 하면서 다른 세속의 직업을 가지는 것으로는 자기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소명의 핵심입니다. 이것이 바로 소명입니다.
그러니까 이 소명의 체험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죄인인가 하는 사실을 깨닫고, 그 자신의 죄인 됨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사랑과의 만남을 통해서 이 소명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랑은 우리에게 시작된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부터 시작되어 이 타락한 인류를 향해 부어지고, 그 중에 한 사람은 나를 십자가의 사랑으로 굴복시키고 깨뜨림으로 오게 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신적인 놀라운 사랑을 경험하게 될 때 자신의 존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전까지는 자신이 이 온 우주의 중심이고, 최고의 가치는 자신의 평안과 행복이라고 믿었는데, 그렇게 예수그리스도를 발견하고 나서는 이 모든 우주의 중심이 하나님이시고, 정말 최고의 가치는 자신의 행복이 아니라,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이 세계 충만하게 계시고, 인간은 바로 그 안에서 완전한 사랑의 쉼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 변화입니다. 이런 사랑이 확 밀려들어 오게 되면, 이 사람은 놀라운 심령의 변화를 갖게 됩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위대한 사랑의 신학을 ‘신국론’ 속에서 완성했는데, 그는 이 하나님의 사랑을 이런 원리로 설명을 합니다. 하나님이 아가페의 사랑으로 이 세상에 있는 불쌍한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시고 그래서 어떤 사람의 마음을 그 아가페의 사랑으로 감화시키게 될 때에 그때에 죄인은 바로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인생을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이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제시하신 구원의 초청을 향해 달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힘을 주셔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믿음으로 보시고, 사랑으로 분류한다면 이것은 아가페의 사랑이 아니라 굳이 말하자면 에로스의 사랑입니다. 그러다가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만나면 자기가 지은 죄가 얼마나 큰지를 발견하고 자기가 지은 죄가 무한히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향한 엄청난 도전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이에 합당한 형벌은 영원한 죽음 밖에 없고, 그것을 통해서도 자기가 상실하게 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보상은 이루어 질 수 없기 때문에 영원한 벌에 처해야 마땅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에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때에 아가페에 대한 사랑의 반응으로서의 또 다른 사랑이 인간의 마음속에 생겨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까리따스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의 특징은 하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사랑하게 됩니다. 즉 아마레 데움뿐만 아니라, 아마레 데오의 사랑입니다. 하나님 자신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사랑해야 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사랑을 함께 가지고 있는 소위 이야기 하는 아가페의 사랑과 에로스의 사랑이 지평 융합을 이루면서 이 사랑은 확산하는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인간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생기게 되는데, 이 사랑의 감정이 바로 마태복음 9장에서 언급했던 예수그리스도께서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라고 할 때 그 단어는 ‘에스프랑크니스테’라는 희랍어 단어인데 ‘어떤 사람의 창자에 이르기까지 움직이다. 감동이 되다.’ 그런 뜻입니다. 우리말로 번역을 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그렇게 번역이 되면 좋을 것입니다. 그런 예수그리스도의 심정이 무리를 보시며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파하시던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이 소명의 체험이라고 하는 이 관을 통해서 복음 사역자의 길을 가려고 하는 사람 마음속에 이입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살아 계셨을 때 하셨던 그 일을 이제는 예수님의 시대가 아닌 우리시대에 그대로 그 일의 뒤를 잇도록 만드는 원천적인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명이 없으면 사역자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좋은 길을 분명한 소명을 받고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이러한 분명한 소명이 있는지 한번 자신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중 대부분은 이런 소명이 있으실 것입니다. 어떤 분은 없을 것입니다. 하던 일을 집어 치우지 마시고, 로이드 목사님이 충고했던 것처럼 하던 일을 계속 하면서, 하나님 앞에 몸부림치셔야 됩니다. 그리고 소명의 문제를 분명히 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빌립보 3장 13절과 14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향하여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고 말했습니다. 왜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지 않는 것일까요? 뒤의 푯대가 있어야지만 앞의 푯대도 있는 것입니다. 뒤에 푯대가 없으니까 앞의 푯대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러한 분명한 소명의 체험을 확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과거적 소명의 체험은 우리에게 커다란 유익을 줍니다. 가는 길이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나를 그렇게 불러주셨던 예수님을 생각하고 모든 것을 부인해도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목사로 부르셨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다는 정체성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눈에는 아무 증거가 보이지 않아도 그 길을 걸어가겠다고 굳게 붙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과거적 소명은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무슨 한계를 가지고 있느냐 하면, 과거에 소명이 아무리 분명했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저절로 지속적인 헌신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속적인 성화나 혹은 지속적인 성장을 보장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바람직 한 것은 분명한 소명의 체험을 자신의 영적인 생활 속에서 뚜렷이 하고, 한번쯤은 정말 그리스도를 위해서 즉각적으로 순교할 수 있을 정도로 의심이 없는 분명한 이 복음사역자로서의 부르심의 소명의 체험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입니다. 두 번째는 그렇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이후에 모든 삶을 보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 매일 매일 자기를 하나님의 위대한 일꾼으로 불러주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다 버리고 사는 것이 전혀 아까운 것이 아니고, 이것은 놀라운 특권이고 기쁨이라고 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이 확인하는 방식이 자기가 설교하고 증거하고 위하여 죽기까지 복종하면서 살아가야 할 하나님이 위대하신 분이고, 그리고 자기가 믿는 이 진리가 아름다운 것이라는 것을 일생에 한번이 아니라 이후에 매일매일 체험하고, 그것에 의하여 자신이 우리들이 흔히 하는 말로 은혜를 받으면 자기 자신이 변화되어 봐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새벽에 지적인 면에서 이야기를 잠깐 했습니다. 그렇게 자신이 계속해서 설복적인 사랑에 감화를 받으면서 변화되어 가고, 그리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이미 경험하고 계실 것입니다. 세분화된 신학을 많이 공부하는 것이 목회의 소명을 이루는데 도움을 주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학위를 얻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과는 별개로 여러분이 영적인 인물이 되고, 자신의 전문적인 지식들을 하나님의 소명을 이루는데 바람직하게 이바지하도록 만들기 위한 또 다른 종류의 목회자로서의 포메이션, 단순한 스피리츄얼 포메이션이 아니라 스피릿, 인터렉츄얼, 캐릭터 이 모든 것들이 포함된 인티그랄 포메이션을 이루어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저의 이 충고를 여러분이 충분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귀담아 들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아마도 많이 실패하고 난 후에 저의 오늘의 이 충고의 의미를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인테그랄 포메이션, 단순히 지적인 것, 영적인 것 이런 것이 아니라 퍼스널리티 스피리추얼리티, 인터렉츄얼리티 이 모든 것이 통합이 되어서 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거나 인생에 관하여 하나님에 관하여 가르침을 줄 때, 저 분은 단지 어떤 분야에서 나 보다 더 많이 공부한 것이 아니라, 나와는 다른 위치에서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에 대하여 지혜로운 것을 읽고 있는가하는 그 어떤 감화를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은 이 문제를 깊이 생각을 하면서 신학의 길을 걸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병적인 시대에 태어나서 기형적인 방법으로 신학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저는 30대 후반에 이 신학의 다른 분과들이 어떻게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지를 발견했고, 그 후로 10여년이 흐른 40대 말에 이 모든 학문, 신학 안에서 뿐만 아니라 철학, 미학, 자연과학, 그리고 예술, 음악, 미술, 건축 이 모든 것들이 어떻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에 대하여 이 세계 속에 묻어있는 하나님의 찬란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지를 깊이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저는 스스로 학생이라고 생각하고, 이 길을 걸어갑니다. 여러분이 저의 이러한 생각들을 깊이 이해하셔야 합니다. 여러분 굳이 여러분에게 증거하지 않아도 이미 여러분이 체험하고 계실 것입니다. 왜 나의 학문은 어는 분야에서 깊이를 더해 가는데 왜 성경을 전체적으로 아는 일에 있어서는 만족스럽지 않을까? 더욱이 내가 과연 이 신학을 공부하면서 배우기 전보다 좀 더 전문가가 됐는지는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 더 잘 살게 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을까? 라고 하는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이해를 깊이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예화) 어는 평신도가 목사님께 성경을 여쭤보았습니다. “목사님, 로마서 9장에 이런 내용이 나오는데 이게 무슨 뜻입니까?” 그랬더니 목사님이 “그 질문은 너무 깊고 심오하기 때문에 우리 같은 목회자가 답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니까 신학자에게 물어보라”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이 평신도가 신학자를 찾아서 갔습니다. 그랬더니 성경을 보여 주면서 물어 보았더니, 이 신학자가 하는 말이 “아이고, 정말 죄송합니다. 난 조직신학이 전공이라서 성경은 잘 모릅니다.” 그럼 누구를 찾아가야 되느냐 그랬더니 “성서학을 전공한 사람을 찾아라.” 성서학을 전공한 사람을 찾아 가서 똑같은 질문을 했더니, 이 학자가 대답하기를 “정말, 미안합니다. 제 전공은 구약이기 때문에 신학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제가 어떻게 어쭙잖게 전공이 아닌 것을 대답을 하겠습니까?” 그럼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했더니, “그냥 성서학을 한 사람이 아니라, 신약성서학을 한 사람을 찾아가라”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또 열심히 찾았습니다. 그래서 또 만났습니다. 똑같은 질문을 했더니 “정말 죄송합니다. 제 전공이 공관 복음입니다.” 그래서 “그럼, 누굴 찾아가야 되느냐?” 그랬더니, “바울 서신을 전공한 사람을 찾아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찾아서 바울 서신을 전공해서 박사를 받은 사람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내밀었더니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정말, 미안합니다. 저는 데살로니가전서 전공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느냐?” 그랬더니 “로마서를 전공한 학자를 찾아가라.” 그러면서 명단을 적어주는 것입니다. 드디어 찾았습니다. 그랬더니 이분이 하는 말이 “정말, 미안합니다. 저는 8장이 전공입니다. 9장은 제 소관이 아닙니다.”
어디서 들은 이야기가 아니라, 제가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제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가서 그 교수들 하고, 총장 있는데서 이야기를 했더니 한 오 분 동안 포복절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지 웃음이 끝나고 나서 모두들 심각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예화) 1994년에 있었던 조지 소칼의 사건을 기억합니까? ‘지적사기’라는 책을 써서 발칵 뒤집어 놨습니다. 별로 반응이 없으시네. 모릅니까? 압니까? 그만둡시다. 잠깐 이야기 하겠습니다. 뉴욕대학교 물리학부에 있던 교수였습니다. 지금이 얼마나 웃기는 시대냐 하면, 철학 논문 제목이 E=MC² 입니다. 철학 논문 제목입니다. 이 사람이 하도 이 상황을 보면서 답답하니까 양자 역학을 이용한 철학논문을 썼습니다. 그리고 학회지에 실렸습니다. 유럽과 미국의 유수한 학자들이 이 논문은 상당한 논문이라고 했습니다. 평을 낼 때 이 사람이 책을 냈습니다. 그 논문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뻥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어줍지 않게 이 양자역학을 철학에 연관시켜서 썰을 푸는 이것들이 얼마나 웃기는 일임을 너희들이 하고 있는 것을 봐라 하면서 하나의 희화한 사건이었습니다. 칭찬을 비난을 한 몸에 받으면서 한동안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사건이었습니다.
이런 일들이 왜 일어나게 됩니까?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학문적인 통합성들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 분들이 하던 일들을 뒤이어서 똑같이 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목회를 하고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는 그런 식으로 지식이 세분화 되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 분명합니다. 이런 학제간의 벽들을 이제 무너뜨리고자 하는 운동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좀 더 위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16세기 정도로 올라가면, 15세기도 마찬가지 입니다. 신학을 하는 사람에게 천문학은 거의 필수였습니다. 더 위로 올라가거나 내려가거나 해봐도 여러분이 보면 이상하게 수학자로 수학 하나만 해야 하는데,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였으며, 천문학자이자 무슨 역사학자였다. 이런 이야기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 만큼 학제간의 모든 융합들이 일어나고, 그 속에서 학문을 하면서 인생을 지혜롭게 볼 수 있는 이런 길들이 열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신학을 공부하면서 그런 시각을 전혀 잃어버린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 할 이야기가 더 많이 있습니다만, 이제 제가 하나 확신하고 있는 것은 다음 세대 여러분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되는 한 15년이나 20년 정도 후에는 이러한 요구들이 학문의 세계에서 뿐만 아니라 종교의 세계에서도 아주 거칠게 일어날 것이라고 하는 사실은 분명한 것입니다. 이러한 깊음 속에서 여러분이 소명을 한번 받은 것이 아니라, 그 소명을 계속 유지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명을 유지하면서 살아야 되는데, 앞에서 말씀 드린 것과 같이 이런 학문적인 통합성들이 매우 강조해야 되기 때문에 여러분이 이렇게 그 찢어진 학문의 세계 속에서 가느다란 맥락을 파고들어 가면서 공부하는 것은 기왕에 시작했으니까 공부를 마쳐야 되겠지만, 할 수 있으면 빨리 마치고, 폭넓게 공부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화) 어떤 신학생이 신학교에 들어갔는데, 그 때 첫 시간에 나이 많이 드신 교수님이 오셔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가 신학하는 여러분에게 충고합니다. 여러분이 이 사람 저 사람 직접거리지 말고, 한 사람, 위대한 인물을 선택해서 깊이 공부하십시오. 일평생을 공부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도 그 사람을 닮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럴만한 인물로 조나단 에드워즈를 추천합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무척 감동을 받은 학생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오늘날 존 파이퍼 목사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 하면, 영적인 성장은 신학의 난잡한 공부를 통해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신학을 통해서 성경의 진리를 깨닫고, 이 세계와 역사와 인간과 하나님을 보는 시야가 점점 더 원숙해지고, 그 속에서 성경을 보는 새로운 시야들을 갖고, 그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내가 체득함으로서 영적으로 계속해서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영적인 성장이 계속 이루어져서 한 3년이나 4년 전의 자신의 설교를 보면, 부끄러워지고 자기가 했던 행동이나 사역을 보면, 그 때가 정말 자괴감이 생겨서 어떻게 그렇게 했을까? 라는 성장이 이루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세계에서 여러분에게 일어나야하는 일들인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사람들이 거의 이 지성의 스위치를 끄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이제는 이 기독교에서 종교다원주의도 일어나고, 종교다원주의 까진 아니라고 할지라도 복음주의 안에서도 영적으로 채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인간의 관심, 신앙적인 관심사들을 이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고, 번영할 수 있는 것으로 자꾸 바꾸거나 신비체험으로 변화해 가는 것입니다.
마크놀이라는 학자가 자신의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기독교가 역사상에 저지른 가장 끔찍한 죄악은 지성의 체계를 버린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아주 쉬운 언어로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기독교는 사상보다는 삶이다. 교리보다는 생활이라고 하면서 사람들을 어린애 취급하는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모든 기독교가 말하자면 무능력과 허무함들이 나타납니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치열하게 공부하셔야 됩니다. 그 공부가 단순한 전공의 공부가 아니라, 모든 학문을 아우르며 성경의 진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더 잘 알게 만들어주는데 이바지 하는 방식의 공부를 하여야 한다는 것이고, 이것을 위한 공부의 내용들은 절대로 오늘날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으로 부터 15년 전쯤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를 썼고, 수만 권이 나갔습니다. 아직 세어 보진 않았습니다만 아마 7~8만권 나갈 것이라 생각됩니다. 거의 모든 신학생들의 필독서처럼 됐습니다. 지금 제가 그 책의 후편을 쓰고 있습니다. 거의 완성되어 가고 있는데, 한 지금 570 내지 80페이지 정도 썼습니다. 700페이지 정도에는 끝을 내려고 노력을 하는데 될지 안 될 지는 좀 두고 봐야 합니다. 여기서 이런 문제들을 심각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루고자 하는 요점은 그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하는 그러한 공부는 지금 신학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커리큘럼하고는 핀트가 다르기 때문에, 그렇다고 전혀 다르지는 않은데 이런 식으로 원 두개가 겹친 것처럼 겹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쪽 공부는 이쪽 공부대로 빨리 끝내고, 제가 이야기한 것 같은 목적을 위해서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철저하게 책을 읽으며 탄탄한 이론의 토대를 쌓고, 그리고 특별히 철학을 평생 부전공이라고 생각하면서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오늘날 코넬리우스 벤틀 같은 사람은 자신의 책 속에서 철학을 모르고 신학을 공부하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지를 강력하게 논파했습니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 철학부터 동양 철학 현대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 세세하게 아니어도 대강의 내용은 파악하고, 그리고 현대 비트겐슈타인 이후에 전개되고 있는 분석철학, 이러한 골격들에 대해서 어는 정도 이해하여 야지만 현대 정신을 이해하고, 이 신학적인 지식들을 담아 낼 수 있는 골격들이 만들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스갯소리로 우리의 하는 이야기지만 신학교 1학년에 들어오면 부흥사고, 2학년쯤 되면 목사쯤 되고, 3학년쯤 되면 집사쯤 되고, 4학년쯤 되면 평신도쯤 되고, 졸업하고 나가면 다시 전도 받아야 될 사람이 된다고 까지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결국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이것은 바로 소명이 유지되기 위해서 무엇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17세기에 개혁파 전통주의 신학자 피치우스는 ‘지식은 경건과 결합 한다’고 말했습니다. 지식과 경건의 결합이 신학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제가 말씀 드리는 것 같은 그런 삶 전체를 통합적으로 바라보는 그러니까 신학을 공부해도 세계관이 안 생긴다고 하는 것은 삽질하고 있는 것입니다. 안 되니까 그 다음은 세계관을 따로 공부합니다. 그런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 공부가 어디 있습니까? 그것이 그 책 쓴 사람의 세계관이지, 자기 세계관입니까? 유교권에서 자랐으면 유교를 따로 공부하지 않아도 엄마 아빠하고 생활하고 먹고 살고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유교적 세계관을 갖게 되는 것이고, 불교권에서 살면 불교 세계관을 갖게 되는 것이고, 기독교 사람이 기독교 세계관을 갖게 되는 것이지 그러니까 아무리 해도 세계관이 안 생겨서 세계관 공부를 따로 한다. 그래서 받아들인다고 칩니다. 그것이 자기 것입니까? 남의 것이지? 이런 것들은 대부분이 목사의 책임입니다. 목사 자신이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 이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 우주, 그리고 인생의 의미와 도덕적 가치, 이 모든 것들에 대한 확고하고 체계 잡힌 신념이 있어서 그 신념의 골격들 속에서 이 모든 것들이 쏟아져 나오게 되고, 그 때에 성경의 진리를 불붙게 할 때,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 목회자 심성 속에 있는 이런 세계관들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관점을 가지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동일하게 이 세상에서 살아감으로써 이 세상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 빛이라고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빛이라고 부르신 하나의 이유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오늘 나누어 드리는 그 오백페이지 정도 되는 그 책 한 권은 그런 내용을 전체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제가 2주일 동안 몰입해서 쓴 책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 빛으로 부르셨다고 할 때, 그것은 이런 진리를 공유하고 이 진리를 가지고 하나님과 세계와 역사와 인간에 대해서 바라보면서 성경에 지시된 계명을 따라서 이 시대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로 만드는 것이 바로 목회고, 이 신학은 바로 그러한 일들을 보조하기 위한 일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의 연관성들을 다 잃어버림으로 말미암아 극지에서 떨어져 나온 커다란 얼음 덩어리처럼 홀로 흘러가는 것이 신학공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그렇게 허무한 일에 많은 시간을 보낼 정도로 그렇게 가치 없는 인생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신학자는 신학공부만하고, 신학을 하지 싫은 사람은 목회자가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목회도 할 수 없는 사람이 학자가 되고, 학문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목회를 한다고 그럴 때 그 학문이나 그 목회가 제대로 된 목회가 될 수가 있겠습니까?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 소명을 우리가 계속 유지하며 사는 것이 필요한데, 그것은 철저하게 두 가지를 유지해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학문을 통해서 무엇을 배우는 것도 좋은데 더 중요한 것은 성서를 펼쳐놓고 자기가 배운 신학적인 지식과 신학적인 지식뿐만이 아니라 모든 지식들을 사용해서 성령을 의지하면서 성경 그 자체를 보면서 그 안에서 신학을 발견하고, 거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확한 지식과 거기로 부터 오는 강력한 마음의 은혜, 이 정동들이 우리 안에서 함께 일어나서 하나님을 아는 참된 성경적 지식과 그분으로 부터 오는 사랑의 감화가 결합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소명이 계속 유지되는 것입니다. 공부하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도시락 하나 주고 찔러도 너무 찌른다. 그러지 마시고 하나만 더 물어보겠습니다. 최근에 여러분이 성경을 읽다가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습니까?
(찬송)
주님을 송축하리 내 입술 주를 찬양 나의 눈 보기 원하네
주님 얼굴 주님의 음성듣기를 주님을 만져 보기를 전심으로 원합니다 주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목마른 것 같이 주님을 찾기에 갈급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신앙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신학은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들이 건축 자재로 말한다면 벽지를 사고, 전등을 사고, 벽돌을 사는 것이라면 성경을 읽으면서 확하고 진리가 다가와서 자기를 강력하게 사로잡고, 눈물 흘리고, 분노하고, 기뻐하고, 결단하고, 용기를 갖게 만들어주는 것은 기둥을 세우는 것입니다. 골격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채워지는 것입니다. 건축학을 전공하고 싶은 분들이 계시겠죠? 저는 건축을 조금 압니다. 아주 엄밀한 수학적 계산의 토대에 의해서 기둥의 위치와 간격, 그리고 크기 속에 들어가는 철근의 개수와 콘크리트의 배합의 분량이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엄정하게 따르지 않으면 반드시 후에 문제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29개의 기둥이 있어도 하나가 무너지면 그 건물 전체가 붕괴되게끔 되어 있는 것이 건축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신학을 많이 공부해서 벽지도 새로 사오고, 최신 벽돌도 사오고, 그 다음에 장식품도 사왔는데 기둥이 없습니다. 그것 때문에 열심히 갖고 붙이고, 내꺼 사가라고 하는데 웅장한 집이 안서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그런 경험 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누군가의 설교를 듣는데 아무리 설교를 들어도 흠잡을 데는 없는데,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 안 드는 것입니다. 때로는 감동을 주는데도 도움이 안 됩니다. 성경을 이해하는데 어떤 사람의 설교는 딱 한편을 듣고 일어났는데 성경 전체를 바라보는 그 새로운 생각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학적인 요소가 주는 영향입니다. 그래서 설교는 신학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양보할 수 없는 신학이 그 설교 속에 관통하는 힘으로 그 기둥을 세우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 나머지는 교훈적인 것 이런 것들이 있을 수 있는데 한편의 설교를 듣고 나면, 말하자면 튼튼한 고래 힘줄 같은 끊어지지 않는 논리와 수정 같이 깨끗한, 아주 투명한 그런 어떤 명제들이 확고하게 있어서 그것이 설교 속에 전달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상당한 부분을 공부하고, 그 학문들을 자신 속에 통합하고 신학을 통합하고 자신의 세계 속에서 묻어내고 하는 이런 일들이 가능해지려면, 이 성경을 대면하면서 은혜를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깊이 경험하고, 신학을 제대로 공부하게 되면 성경을 보는 깊이 자체가 달라집니다. 이것들을 통해서 신학을 위한 명제들을 제공받고 양보할 수 없는 확고한 확신을 갖고 그 길을 걸어가야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2,3년 전에 신학계에서 일어났던 성경 신학자들의 소위 이야기 하는 커밍아웃 사건들을 기억할 것입니다. 개혁주의 혹은 정통복음주의 계열에 분류되어 있던 많은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동성연애자들이 커밍아웃 하듯이 ‘나는 성경의 무오성을 믿지 않는다.’ 그 사람의 전력이나 모든 면을 볼 때는 전혀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는 사람인데, ‘나는 이제 성경의 무오성에 대해 학자의 양심을 포기한다.’ 이런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막 생겨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성경을 아무리 객관적으로 많이 연구해도, ‘내 영혼 날마다 주를 만나 신령한 말씀 늘 배우도다.’ 라는 눈물의 고백이 있는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설득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이 살아서 나에게 역사하는데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천재도 하나님의 성경이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확고한 성경관을 그 철학적 비난 속에서도 유지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유지하게 만들어 주는 명제적 적합성은 학문의 탐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매일 내가 그 성경을 두고 말씀을 듣는데, 내가 눈물을 흘리고, 내가 순종하고 회개하고 거룩해져 가고, 그것이 나에게 무한한 생명의 능력을 공급해 주는데, 내가 어떻게 몇 줄의 학자의 학문에 의해서 설득돼서 그것을 바꿀 수 있느냐? 그것입니다. 그것은 바꿀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말해야지만 한국에서는 그래도 메인 스트림에 속한다고 말하는 그렇게 생각하는 그것은 사실은 그렇게 커밍아웃 한 사람만도 못한 사람입니다. 자기주장이 없는 사람입니다. 확고한 신앙 속에서 이 성경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성령의 큰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무엇을 위해 부름을 받았고, 무엇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 되는지를 우리들이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저는 평생에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들어보십시오. 제가 평생에 신뢰하지 않는 복음 사역자는 이런 사람입니다. 진정한 예배자였던 적이 없는 예배 인도자, 진지한 설교 청취자였던 적이 없었던 열렬한 설교자, 간절한 기도를 드린 적이 없는 기도 인도자, 교회 치리에 복종해 본 적이 없는 당회장 이런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행동은 신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거기에 세웠기 때문에 겨우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영적인 높은 수준의 아름다운 사역은 사역 자체 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신앙에서 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저는 수많은 사람에게 실험을 해 봤는데 한 사람의 교사로서 어린 영혼들을 향해 눈물을 흘리고, 마음 아파하는 사람들을 신학교 보냈을 때 나쁜 전도사 되는 것을 본적이 없습니다. 그런 좋은 전도사가 후에 아주 못된 부목사가 되는 것을 본적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 훌륭한 부목사가 후에 담임 목사가 되어도 그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처음 시작부터 신앙의 세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목사들이 만나서 권면할 때 항상 우리들이 서로 권해야 될 것이 ‘열심히 공부하자.’ 그것도 해야 되겠지만 ‘박 목사! 신앙생활 잘해!’그것이 사실은 모든 이야기를 다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영적인 성장이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저는 이제 이야기를 마무리를 짓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항상 신학 활동이 성경과 대면하여 무릎을 꿇는 자신의 종교적 활동이 모든 신학활동의 중심 자리에 오게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화) 제가 총신에 다니게 된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고, 어제도 문제가 많이 있었지만, 하나님께 감사하게 생각을 합니다. 훌륭한 선생님들을 여러분 만났습니다. 그 중 한분이 이미 돌아가신 김희구 박사님이셨습니다. 그 분은 60년대 초반에 칼빈에 와서 공부를 하셨고, 그리고 굉장히 영특하신 분이었습니다. 교수님이 김희구 박사님을 보고, 넌 참 공부도 잘하고, 구약에 관심이 많으니까 유펜으로 가라고 추천을 해 주셨습니다. 그때에 유펜은 지금도 그렇지만 고고학이나 이쪽 방면으로 굉장히 발달한 학교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분은 거절하시고, 디에이치엠으로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오셔서 목회에 전념하시다가 신학교의 교수가 되셨습니다. 정말 성실하시고 존경스러우신 분입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항상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사모님이 너무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시간만 나면 책만 보니까 ‘여보! 텔레비전도 좀 보고 놀러 다니자.’고 해도 책을 보다가 피곤하면, 책을 얼굴 위에 덮고 주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모님이 ‘당신, 평생 책을 봤는데, 무슨 놈의 책을 계속 보냐고 이제 그만 좀 하라’고 그러니까 목사님이 ‘여보! 천권의 책을 읽어야 한권의 저서가 나오는 거야!’ 이렇게 했습니다. 우리에게도 항상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의 특징은 무슨 어려운 신학 책을 읽으시던지 간에 항상 그 요점을 성경 여백에다가 기록을 하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고 그랬더니, 자신은 어떠한 난해한 신학 책을 읽어도 이 사람들의 주장과 반론이 성경해석에 무슨 영향을 주는지에 관심이 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발견한 좋거나 혹은 옳은 내용들을 성경 여백에 기록을 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펼치시면 새까맣습니다. 채플시간이 되면 원고도 없이 그 새까맣게 쓴 성경을 가지고 올라가서 조용조용 설교를 하시면 수많은 학생이 눈물바다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그런 식으로 성서신학을 하는 사람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그 교리학에 대해서도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계시는 것입니다.
제가 조교로 모시던 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상근 교수님인데 주석을 쓰신 이상근 교수님이 아니라, 동명이인으로 박윤선 박사님 세대입니다. 이분도 인격이 굉장히 훌륭하신 분이고, 그 분에 대해서 책을 한권 쓸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내용들이 있습니다만 그 분 이야기를 하나 하는 것으로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으로 한 5, 6년 전쯤 로스앤젤레스에서 집회를 했습니다. 그때 집회가 끝나고 저를 디즈니랜드를 구경시켜준다고 그래서 저는 별로 보고 싶지가 않다. 그 대신 여기에 내 선생님이 계신데, 그 선생님 한 분 좀 찾아 달라고 하면서 이름을 알려줬더니, 워낙 노인이시니까 금방 찾았습니다. 그 분을 찾아갔습니다. 찾아갔더니 그 때가 아흔 네 살이셨는데, 사모님은 7년 전에 돌아가시고 교수님은 작은 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계셨습니다. 거동이 불편하셔서 보호 장구를 의존하며 절뚝거리면서 계셨습니다. 처음에는 못 알아보셨습니다. 그 당시도 이십 몇 전의 일이니까, 그래서 과일을 한바구니 하고, 꽃 한바구니 둘을 사들고 갔습니다. 그리고 갖다 드리고 큰절을 올렸습니다. 그러더니 그제야 알아보시고, 그때 제가 마침 썼던 구원론 책 한권을 드렸습니다. 그러더니 이제 보시면서, “이야 김 목사가 조직신학 책을 썼구나! 참 대견하다.” 그렇게 말씀을 하시고,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분의 삶이 너무 비참한 것입니다. 아무도 없이 혼자서 절뚝거리면서 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목사님! 이렇게 혼자 계시니, 얼마나 외로우세요?” 그랬더니, 이 94세의 할아버지가 “외롭긴 뭐가 외로워? 내가 혼자 있나? 우리 주님이 항상 나와 같이 계시는데…….” 인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차 안에서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릅니다. 정말 내가 인생 말년에 저럴 수 있을까? 그럴 리야 없겠지만, 아내가 먼저 곁을 떠나고, 내 몸에 질병이 찾아와서 돌아보는 사람 없이 절뚝거리면서 스스로 무엇을 끊여먹고 하루 종일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작은 아파트에서 커튼 하나 마음대로 여닫을 수 없는 불편한 처지에 놓여있을 때에도 내가 누군가에게 ‘외롭긴 뭐가 외로워! 내가 이 집에 혼자 있나! 우리 주님이 항상 나와 같이 계시는데…….’ 그럴 수 있을까?
(찬송)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신학의 모든 마지막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신학의 주인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에 실패하면 정통신학을 배워도 이단자입니다. 그래서 신학을 배우고, 배우면 배울수록 정말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온 땅과 하늘 위에 가득하고 그래서 그 분을 예전보다 점점 더 사랑하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신학의 결국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그 신학 때문에 너무 행복하고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를 깊이 사랑하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내가 온전한 사랑의 사람이 되어서 그래서 나보다 무지한 자의 발을 씻기고, 나 보다 가난한 자를 위해 종이 되고, 나보다 신앙이 부족한 사람들을 위해 섬기는 이로서 살아가게 하는 것, 이것이 결국 신학이 마지막에 우리에게 주는 사랑의 열매입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신학을 공부하면서, 예전보다 주님을 더 사랑해서 모든 것이 우리에게 사라질지라도 주님은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않으시는 분이시니, 그 분을 향한 사랑도 헛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 속에서 충만한 유열의 기쁨을 누리고, 충만한 희락을 얻으면서 나라고 하는 정말 용서받은 죄인이 하잘것없어 보이는 인간이 이 땅에 살아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가 티끌만큼이라도 더 아름답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본래의 목적에 이바지 하게끔 그렇게 살아가는 데에 우리의 신학함의 활동의 모든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믿고, 우리가 만약에 그렇게 신학을 한다면, 우리의 신학공부는 우리와 그리고 우리의 모든 이웃에게 생명을 주는 학문 활동이 될 것이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더 큰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허공중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안 됩니다. 누가 신학공부를 하면서 주님을 더욱 더 사랑해야 된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치열한 싸움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래서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마음을 쏟아 붓는 간절한 기도생활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은 신체의 두 부분에 굳은살이 배겨야 합니다. 하나는 여기에 굳은살이 배겨야 됩니다. 오래 책상에 앉아 있는 사람이 이기는 것입니다. 사람의 지적인 능력이 특별한 사람 이외에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디서 가끔 여러분이 당신 참 천재란 소리를 들어도, 그냥 괜히 하는 소리하고 생각을 하십시오. 진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없습니다. 그리고 난 평범하긴 때문에 시간으로 승부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더 많은 시간을 책상 앞에 씨름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놀라운 재주로 박사 논문을 쓴 사람하고, 재주는 없지만 시간으로 박사 논문을 쓴 사람은 다릅니다. 왜냐하면 논문은 전자가 유리한데 들을 이야기는 후자의 사람에게 훨씬 들을 이야기가 많습니다. 두 번째 달아야 될 부분이 무릎입니다. 무릎으로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 자기가 그렇게 할 수 없는 모든 것을 주님 앞에 쏟아 놓으며 아버지 앞에 간절히 기도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몸부림치면서 신학활동을 해서 결국은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