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연단과 기도
녹취자 : 김세나
[선별질문]
질문1) 가난으로 연단 받을 때 물질의 결핍에 대해 단단한 마음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앙망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개척교회나 미자립교회 같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교회를 담임하는 목회자의 경우와 같이 경제활동을 꼭 해야만 하는 경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답변1) 저것은 이제 엄밀하게 말하면 목회자는 한 교회를 세우고 목회를 할 때 자기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이니까, 그 일을 위해 전념하는 것이 좋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도저히 교회가 목회자를 부양할 수 없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인데, 다른 교회에서 후원을 하고 선교비를 받아서라도 목회자를 부양할 수 있고, 목회자가 그 일에만 헌신할 수만 있다면 가장 좋겠습니다. 그렇지 못할 때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똑같은 질문을 누군가가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에게 하였습니다. 목사님은 저 문제에 대해서 조금 더 전향적으로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러할 경우 경제활동을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리고 그렇다고 해서 그의 소명이 무시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정리하였습니다. 저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목회자가 어쨌든지 간에 한번 하나님 앞에 소명되었으니, 그 일을 위해서만 전적으로 헌신하고 시간을 다른 곳에 쓰지 않을 수만 있다면 너무나 좋을 것이고, 또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교회적인, 다른 교회로부터도 후원을 받아서 그렇게 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유념해야 할 것은 실제적으로 일어나는 일인데, 몇 가지 경계할 것이 있습니다. 목회자들이 어려울 때 너무 쉽게 남에게 기대는 것, 그것을 유의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라기는 저도 여러분과 주변에서 아는 것처럼 가난하고 힘든 시간들을 모두 지났지만 지금까지도 마음에서 생각하는 것이 뭐냐 하면, 죽을 때까지 남에게 도움을 받는 것을 부자연스럽게 여기며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회자나 선교사들, 특히 어려운 처지에 있어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많이 받았던 사람에게서 공통된 특징을 발견하였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도움 받는 정신에 익숙해지고 나면 감사한 마음이 별로 없습니다. 심지어 자기를 도와주면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사람이고, 안 도와주면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너무 사람 의존적인 사람이 되고 감격이 없습니다. 참 많이 봅니다. 그리고 가난한 교회의 목회자들이 이렇게 저렇게 끊임없이 도움을 받고 그 돈과 선교비로 자신의 생계를 충원하며 살아가는 그러한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삶에 대해서 특히 목회에 헌신한 사람들, 선교사의 경우는 삶 속에서 어떤 수익 같은 것들이 있을 수 없으니까 피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목회자의 경우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사람의 타락은 물질이 많기 때문에 타락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없기 때문에도 타락을 합니다. 타락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 물질을 사랑하고 거기에 애착하기 때문에 타락을 하게 됩니다. 많이 가지고 있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않고 살아가고 언제든지 훌훌 털고 떠날 수 있는 사람은 타락한 사람이 아니고, 없어도 그것을 끊임없이 그것에 대해 갈증을 느끼며 애착하는 사람들은 타락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떠한 경우에도 남에게 도움을 받은 것을 부자연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 경건에 매우 유익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목회를 하고, 뭘 하면서도 까마귀가 물고 와서 기적적인 무엇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계산을 넣으며 하는 것을 대단한 믿음을 가진 것처럼 추켜세우는 분들도 있지만, 저는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항상 누군가가 도움을 주면 ‘내가 왜 너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가?’ 이게 사실은 자기 자신에게 자문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저라면 여기저기 손을 내밀어서 도움을 받느니 알바라도 하면서 목회를 할 것 같습니다.
질문2) 고난 속에서도 기도하며 순종하기 위해선 하나님의 주권(섭리)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섭리와 숙명론의 명확한 구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목사님이 생각하시는 섭리론과 숙명론의 구분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답변2) 숙명론은 비인격적인 것입니다. 인간에게 운명이 정해져 있고 아무리 몸부림 쳐봐야 그것을 못 떠난다고 하는 것이 숙명론입니다. 오이디푸스 왕에서 나오는 그런 케이스처럼 아무리 항거해도 결국 그렇게 되고 마는 것이 숙명론입니다. 이에 비해서 섭리론은 하나님이 인간보다 더 뛰어난 지혜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잘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그 탁월한 지혜로써 우리의 삶을 인도해 가시니 그 분을 의지하고 따라가면 결국 그 때는 잘 몰랐던 하나님의 뜻이 시간의 전개 속에서 드러나게 된다고 하는 것을 믿는 것이 섭리론입니다. 운명론은 사랑해야 할 대상이 없지만, 그래서 운명론에서는 체념이 아주 굉장히 중요한 주제입니다. 체념이 무엇입니까? 운명에 의해서 정해져 있기 때문에 내가 항거해도 안 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것이 자신을 괴롭히지 않는 길이라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두 가지 방식으로 계시하시는데, 하나님이 이미 알려주신 방식으로 계시하신 적이 있고 그 다음에 그 뜻을 숨기시면서 계시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한 번에 당신의 뜻을 우리에게 모두 알리신 것이 성경의 계시라면, 섭리는 시간의 전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드러납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사역을 합니다. 너무 기쁘고 보람되고 너무 감사한 일도 있지만 괴로울 때도 많습니다. 그런데 섭리를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나를 여기에 보내신 것이 맞는가, 그리고 왜 보내셨는가, 그리고 앞으로 나는 여기에서 그렇게 나를 인도하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살아가는데 내가 그 계획을 모두 알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하나님의 섭리를 믿기 때문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요셉입니다. 자기도 몰랐습니다. 순전하게 살려고 했는데 구설수에 휘말려서 역적들이나 들어가는 감옥에 들어가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왜 그러는지 몰랐습니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분통이 터지지 않습니까. 만약에 여러분들이 그러한 상황이 되어서 목회를 잘 하고 있는데 수갑을 채워 잡아가서 감옥 속에 들어가 있다면 얼마나 열 받겠습니까? 피를 토하고 죽고 싶은 마음이 들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요셉도 그러한 억울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에 당신의 뜻을 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신뢰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이 섭리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려서부터 보면 압니다. 내가 늘 이야기 합니다. 어떤 목회자가 훌륭한 목회자가 되는 길이 무엇인가 할 때, 좋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대게 교사를 시키면 잘합니다. 교사를 잘 하였던 사람을 교육전도사 시키면 잘 합니다. 교육전도사 잘 했던 사람을 부목사 시키면 잘 합니다. 100% 일치하지는 않겠지만 확률적으로 그렇습니다. 부목사 시절에 담임목사와 동료들과 교인들에게 그래도 충분히 인정받았던 사람을 담임목사 시키면 교회가 거꾸로 가는 법은 없습니다. 그 위에 사실은 더 좋으려면 남이 따라올 수 없는 매우 반짝이는 능력이 있어서 교회를 한번 새로운 역사적인 전기를 맞이하게 하는 능력이 있으면 물론 좋겠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다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교회든지 그렇지 않겠습니까?
우리나라 역사 속에서도 보면 왕이 두 번 계속해서 좋은 왕이 나온 적이 있었습니다. 광개토왕, 장수왕, 영조, 정도, 이러한 사람들입니다. 세 번 계속되는 일은 없었습니다. 세 번만 되면 임금이 많은 나라들을 재패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세 번 한다고 하면 한 사람이 25년씩 재위한다면 75년을 재위하는 것입니다. 75년 동안 강인한 나라가 되어서 외적의 침입을 막아내고 스스로 존립할 수 있다면 그 무엇도 할 수 있는 나라가 됩니다. 연개소문만 보더라도 그 밑에 있는 자식들이 그렇게 쓰레기 같지 않고 하나만 아버지 닮은 사람이 나왔다면 역사가 바뀌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 됩니다. 그게 바로 인간의 역사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탁월한 담임목사가 있고 그 다음도 탁월하고 그 다음도 탁월하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대게 그냥 한 사람으로 끝나거나 아주 탁월하면 다음 사람도 뛰어난 사람이 와서 그 교회를 발전시키거나, 그 정도지 세 번, 네 번에 걸쳐서 한 15년 씩 재직했는데 60년, 70년씩 변함없이 부흥하는 교회 못 봤습니다. 역사란 그러한 것입니다.
그래서 말하고 싶은 것은 교회를 옮길 때, 벌써 주일학교 교사 시킬 때 한다, 안 한다 하면서 들락날락 하는 사람이 전도사 때도 똑같습니다. 그 사람은 부목사 되어서도 신뢰하지 마십시오. 언제든지 까치발 뜨고 어디 더 좋은 대우가 있거나 아니면 여기처럼 괴롭지 않은 곳이 있거든 찾아가고 싶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기억해야 합니다. 만약에 어딘가 그렇게 편한 데가 있으면 왜 우리를 부르겠습니까. 우리보다 잘 난 사람을 부르지. 그리고 겉으로 그렇게 보여도 가보면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이 있습니다.
언제가 제가 선교사들을 모아놓고 집회를 했는데, 사도행전 20장 말씀을 가지고 설교를 하였습니다. 은혜를 많이 주셨는데, 저는 계속 울면서 설교를 하였습니다. 끝나고 나서 나에게 직접 그러지는 못하고, 같이 간 교회 장로에게 그러더랍니다. 김남준 목사님도 목회할 때 괴로운 게 있냐고 묻더랍니다. 뭐든지 나는 내 마음대로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그런 목회가 어디 있겠습니까. 제가 살아온 길을 보면서 그래도 감사했던 것은 교회 옮길 때마다 전심을 다해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뜻이 아닌 곳은 하나님이 못 가게 하셨습니다. 목숨 걸고 기도해서 내 자리다 하면 어려움이 있든지 괴로움이 있든지, 물론 괴로움이 있습니다. 심지어 담임 목사님과 사이가 별로 안 좋아도 ‘담임 목사님이 나를 부른 게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여기 보내셨습니다.’ 올 때보다도 더욱 분명하게 가라고 하실 때까지는 내가 여기 있을 수밖에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가지고 모든 것을 견디어냈습니다.
여러분 두고 보십시오. 같이 학교 다니고 팔짝팔짝 그러고 이리저리 마치, 사실 뭐 이발소도 잘 바꾸지 않습니다. 이발소 한 군데를 15년 20년을 다니니 말입니다. 그렇게 정함 없이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은 담임 목사가 되어도 그렇습니다. 담임 목사로 와서 6개월 만에 사표 내는 사람 많이 봤습니다. 6개월 만에 다른 곳으로 임지를 옮기는 것입니다. 올 때 벌써 다른 교회 갈 것을 계산한 것입니다. 어떻게 6개월 만에 담임목사 자리가 납니까. 그것은 쓰레기입니다. 양들을 사랑하면 그럴 수 없습니다.
질문3) 하나님께서 고난 속에 내버려 두시기도 하는 것은 우리를 더 쓸모 있는 존재로 빚으시기 위함이며, 더 기도하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고난 중에 기도하던 성도가 어느 날 상담 치료를 받고 난 후, 기도하며 연단을 감당하는 대신 상담을 더욱 의지할 때 어떻게 조언해야 할지, 상담이 아니더라도 무슨 방법이든지 다른 것을 통해 쉽게 행복감을 얻으려는 성도에게 어떻게 조언해야 할지 궁금합니다.
답변3) 이런 것이 있습니다. 상담은 누가 해야 하는가 하면, 상담을 전공을 한 사람이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확고한 성경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상담을 해야 합니다. 물론 그 사람이 많은 일들을 겪었기 때문에, 내담자가 상담하고자 하는 내용을 모두 겪은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혼 상담을 하는데 결혼도 해봤고 이혼도 해봤고, 아이 상담하러 갔는데 결혼을 해서 아이도 낳아서 길러보고, 교육을 잘 못 하다가 아주 놀랍게 자녀교육에 있어서 회심해서 교육에 성공을 하였다든지, 이렇다면 더 없이 좋겠습니다. 어떤 경우에든지 기본적으로 확고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상담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미묘한 것은 뭐냐 하면, 모두 그렇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주님을 만나고 성경을 읽으면서 확고한 세계관을 가졌던 사람들은 상담 공부를 할 필요를 별로 못 느낍니다. 상담학 공부한 사람들은 동의안 할지 모르겠습니다. 대게 제가 받은 인상은 이런 것들이 형성이 안 된 사람들이 상담 쪽으로 몰려가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상담의 기술은 많이 배웠는데, 이 사람 자신이 확고한 세계관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상담을 해도 사실은 어떠한 상담을 통해서 조금씩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근본적인 고민 문제의 방향을 전환하고 사고를 바꾸는 것 자체는 사실 상담자들이 줄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주님을 깊이 만나고 변화되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상담도 이러한 것을 생각해 보면, 여러분들 오래 같이 계신 분들은 잘 알지만 저도 상담을 굉장히 많이 했습니다. 제가 학부 다닐 때에도 상담에 대해서 아주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아담 스미스, 콜린스, 그러한 사람들의 책들도 많이 읽었고 심리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상담의 한계는 뭐냐 하면, 상담하는 사람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은 것이 자신의 답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제 저는 항상 상담을 할 때 초창기에는 1년에 한 번씩 온 교인을 심방을 했으니까, 그리고 한 집안에 장년이 2사람, 대학생이 2명 있으면 세 번을 심방을 했으니까 말입니다. 그렇게 만나면서 고민하고 있는 것을 찾아내서 책을 읽히고 설교테이프를 여러 개를 듣게 하고 그리고 한 달 쯤 후에 다시 상담을 하게 해서 자기 자신이 그 대답을 찾아가야지, 자기가 찾아가지 않고 다른 사람이 답을 주는 것 가지고는 자신의 인생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정도가 매우 약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담을 받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상담학이 가장 적합한 사람은 교역자입니다. 교역자들이 상담학에 대해서 공부를 하면 매우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신없이 빠져서 성경에서 멀어지면 문제가 되겠지만, 상담이론 같은 것들을 공부하면 좋겠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러한 것입니다. 자녀들이 공부를 잘 못한다고 할 때, 누구든지 생각하는 것이 남의 집 애는 머리가 나빠서 공부를 못 하고 자기 집 아이는 머리는 좋은데 요령을 피워서, 게으름을 피워서 공부를 못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아니라 해도 해도 안 되는 아이가 있습니다. 그런 아이들을 대게 부모가 열등감을 주고 하면 어리석은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여기 자매들 많이 있지만 이 분들이 모두 호두까기인형 발레를 할 수 있는 것 아닙니다. 여자가 하는 것은 맞지만 호두까기인형 작품 주연을 모두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할 수 있는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우열을 재는 것은 너무나도 잔인한 일입니다. 그렇게 하지 말고, 걔가 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틀림없이 있습니다. 그것을 찾아서 무엇이든지 간에 기쁨을 가지고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요새 많은 상담법들도 나오고 기질테스트도 하는데 MBTI같은 것들은 별로 신뢰할 수 없는 심리검사입니다. 융의 심리학을 기초로 해서 1910년대 어떤 엄마가 딸과 앉아서 놀이 삼아 만든 표본입니다. 차라리 요새 나오는 ‘옥타그노시스’ 같은 심리검사법들은 참고할 만한 많은 내용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그때에 비해서 AI가 엄청나게 축적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러한 검사를 통해서 사람의 기질이 무엇이고, 절대로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이러한 것들을 하면서 사람들을 대할 때 인간이 왜 이럴까, 대하지 말고 그러한 다양성을 인정해주는 시야를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교역자들이 제일 못하는 것이 그러한 것입니다. 자기도 정상이 아니면서 모든 사람을 비정상이라 보는 것입니다. 정상이 어디 있는가, 없습니다. 정신병 가운데 정상증후군이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너무 정상적이어서 그것이 비정상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통 사람이 그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심리학은 체험적이고, 임상적인 학문이기 때문에 현상이 나오면 끊임없이 이론을 붙이고 붙여서 나중에는 이론끼리 충돌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의 이해들을 교역자들이 가진다면 교인들을 바라보는데 조금이라도 낫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이 너무 뜻밖의 행동을 한다고 할 때 모두 도덕적인 문제로 치부해서 저 인간이 날 무시하는구나, 성격이 근본적으로 굽어버렸구나, 회생불능의 말하자면 구겨진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그 사람도 이유가 있어서 그런 사람이 되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리고 저 사람은 또 어떤 면에서 우리와는 다른 면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희망을 가지고 봐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저렇게 상담치료를 받고 난 다음에, 그런데 어디에서 상담을 받았는지 모르지만 좋은 상담이라면 상담을 다 받고 난 다음에 자가 치료가 되는 것이 아니라 방법은 여러 가지이겠지만, 궁극적으로 자신이 하나님을 찾아야 되겠구나 하는 결론을 내려주도록 갈 수 있는 힘을 북돋아 주는 것이 올바른 상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이 누구에게도, 자기에게 다루기 어렵다면 예를 들어서 정신과 의사라든지 심리치료사든지 등등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 누구와 연결해 주면 좋을 것인가 하는 자기만의 데이터베이스를 가지고 있는 좋습니다. 그리고 교역자들이 바꿔서 상담을 하는 것도 상당히 권장할 만한 내용이겠습니다.
그리고 “상담이 아니더라도 무슨 방법을 통해 쉽게 행복감을 얻으려는 성도들에게 어떻게 조언해야 하겠는가.”라고 하는데, 행복감이 얻어 지겠습니까? 행복감을 얻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하나님 안에서 얻지 않으면 어떻게 될 수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어떻게 하든지 상담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오고 다시 신앙으로 돌아오고 주체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데 도움을 주어야지, 끊임없이 상담할수록 상담의 필요성이 늘어가는 것은 좋은 상담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질문4) 하나님께서는 믿음 안에서 우리를 연단해 가심으로 소망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일전에 접하게 하셨던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 13.1.3 “그 믿음이 우리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우리 안에 믿음 그 자체를 본다. 그 이유는 믿음은 부지하는 사물에 관한 믿음이면서 믿음 자체는 현전하기 때문이고 외재하는 사물들에 관한 믿음이면서도 믿음이 내재하는 까닭이며 보이지 않는 사물에 관한 믿음이면서도 보이기 때문이다.”의 믿음의 의미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고 싶습니다.
답변4) 어려운 말입니다. 잘 들어 보십시오. “그 믿음이 우리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우리 안에 믿음 그 자체를 본다. 그 이유는 믿음은 부지하는 사물에 관한 믿음이면서 믿음 자체는 현전하기 때문이고” 여기에서 끊고, “외제하는 사물들에 관한 믿음이면서도 믿음이 내재하는 까닭이며 보이지 않는 사물에 관한 믿음이면서도 보이기 때문이다.”
저 논리를 어거스틴이 여러 가지로 똑같은 공식으로 사용합니다. 예를 들자면, “내가 사랑한다면 나는 이미 사랑 자체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쓰고, “지성이 무엇인가를 인식한다면 나는 지성 자체를 인식하는 것이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왜냐하면 사물을 인식하는 것은 지성 전체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성이 지성을 알지 못한다면 지성이 인식하는 그 행위도 지성이 인식하지 못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똑같이 마찬가지로 이야기 합니다. “믿음이 우리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우리 안에 믿음 그 자체를 본다.” ‘본다’라고 할 때 우리가 주스나 빵을 보는 것 같이 본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사모님과 결혼하였을 때 그녀가 그대를 사랑하는 것을 봤습니까? 그 사랑을 보았습니까?
(알았습니다.)
어쨌든 그녀가 그대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습니까?
(네)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어떻게 그것을 확인하게 되었습니까? 뭐 사주는 것을 보고?
만약에 그 판단이 틀렸으면 어떻게 합니까? 틀렸을 리가 없습니까?
(네)
그게 바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이라는 것을 본다, 라고 할 때 이러한 한정적 사물들을 보는 것처럼 그렇게 이해를 하면 안 됩니다. 다른 방식으로 보는 것입니다. 전요셉 강도사가 사모님과 사랑에 빠져서 결혼을 했는데, 그녀가 자기를 사랑한다, 라고 하는 것에 대한 앎은 여기에 이 주스가 있다고 하는 사실보다 더욱 명확하였던 것입니다. 이해됩니까? 첫 번째는 해결이 된 것입니다.
“믿음이 우리 안에 있을 때 우리는 믿음 그 자체를 본다.” 이유가 뭐냐 하면, 두 가지인데 첫째는 뭐냐 하면 현전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내재하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입니다. ‘현전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두 번째 문장을 보십시오. “그 이유는 믿음은 부재하는 사물에 대한 믿음이다.” 맞습니까? 여기에 디저트 주스가 있다는 사실을 믿을 필요는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기에 현전해서 보고 있기 때문에 믿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다음주에 여러분들이 그 계획을 작성해 오면 내가 이거 하나씩 줄게, 라고 이야기 한다면 여러분들이 믿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은 부재하는 사물에 대한 믿음입니다. 부재한다고 하는 것은 감각세계 안에서의 부재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한다면 하나님은 부재하시는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러한 것들을 우리가 얼굴을 보고 아는 것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이 여기에 계실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부재하십니다. 부재하는 사물에 대한 믿음입니다. 부재하지 않는 것은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여기 김성구 목사님이 있습니다. 내가 믿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가 여기 없을 때, 내일 이면 올 것이다. 아니면 못 나왔어도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것이 믿음입니다. 부재할 때 비로소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처럼 감각을 가지고 계신 분이시라면 믿음이 필요 없겠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질문이 나올 것입니다. 예수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몸을 가지고 우리 안에 계셨는데 왜 믿음이 우리 안에 필요하였겠습니까? 김기훈 목사님? 공부 열심히 하였는데 왜 그렇겠습니까?
(김기훈 목사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분의 사람이심은 현전하였지만 하나님이심은 현전하지 않는 것입니다. 부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입니까? 우리의 시각을 기준할 때, 그렇기 때문에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은 내 안에 현존하는 것입니다. 믿음도 부재하는 것이 아니라 부재하는 사물에 대한 믿음은 내 안에서 현존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그 믿는 자기 자신을 의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외재하는 사물에 대한 믿음이면서도 내재하는 까닭이며…” 앞에서는 부재한다고 하였는데, 여기에서는 외재한다고 하였습니다. 왜 그렇게 하였겠습니까? 저 부재는 감각을 중심으로 이야기 한 것이고, 두 번째는 감각만이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사실적으로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시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와의 교통을 이야기 하는 것이고 실제적으로 본다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신이 피조물인 인간 속에 들어올 수 있겠습니까. 실재적으로 하나님은 우리 바깥에 계신 것입니다. 바깥에 있는 사물에 대한 믿음이면서도 결국 믿음 그 자체는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그래서 보이지 않는 사물에 대한 믿음이면서도 믿음은 보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은 믿는 사람은 그 믿음이 자신 안에 있는 것을 본다. 그리고 믿음을 보지 못한다면 믿음의 기능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즉,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버리고 약속하신 땅으로 갔다고 하였을 때, 하나님만 믿은 것이 아니라 약속의 땅이 어디인지도 모르는데도 가지 않았습니까. 그때에 아브라함의 마음속에는 자기 자신이 그 하나님을 믿는 믿음 그 자체를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보는 것과 그 보는 믿음에 새겨진 약속 사이에 일치가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기억하면 됩니다. 세 가지 기억하십시오. 믿는 사람은 믿음의 대상과 함께 믿음 자체를 본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대상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다. 지성으로 사물을 인식하는 사람은 인식할 뿐만 아니라 지성 자체를 안다. 세 개의 공식입니다.
수고하였습니다.
[질문종합] → 선별질문만 하시고, 질문종합 나머지 질문은 다루지 않으셨습니다.
<1조 질문>
질문1)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고난과 사회구조의 악과 개인의 악으로 인해 발생하는 고난을 구별하는 법이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전자의 경우는 믿음으로 인내해야 하지만 후자의 경우는 저항과 극복이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각 상황별 대처방안에 대해서도 알고 싶습니다.
답변1)
질문2) 특별한 고난의 상황이 아닌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자들이 어떻게 하면 깊은 기도를 경험할 수 있을지 알고 싶습니다.
답변2)
<2조 질문>
질문1)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자로 살아가는 동안 근거 없는 도움은 정중히 거절하고 자족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은혜로 주어지는 도움도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근거 없는 도움과 은혜로 다가오는 도움은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요?
답변2)
질문2) 경제적인 풍요로움 속에서 어떻게 신앙의 야성과 순수함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답변2)
<3조 질문>
질문1) 고난 자체는 중립적이며 믿음으로 감당하는 자들에게만 유익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간혹 초신자들 중에서 아직 믿음의 분량이 부족한 지체들이 감당하기 힘든 고난을 만나 낙담하고 결국은 신앙생활의 끈을 놓쳐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들을 어떻게 위로하며 권면해야 할지 알고 싶습니다.
답변1)
질문2) 고난 속에서도 기도하며 순종하기 위해선 하나님의 주권(섭리)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섭리와 숙명론의 명확한 구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목사님이 생각하시는 섭리론과 숙명론의 구분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답변2) 선별질문 2번에 답변되었음
<4조 질문>
질문1) 하나님께서 고난 속에 내버려 두시기도 하는 것은 우리를 더 쓸모 있는 존재로 빚으시기 위함이며, 더 기도하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고난 중에 기도하던 성도가 어느 날 상담 치료를 받고 난 후, 기도하며 연단을 감당하는 대신 상담을 더욱 의지할 때 어떻게 조언해야 할지, 상담이 아니더라도 무슨 방법이든지 다른 것을 통해 쉽게 행복감을 얻으려는 성도에게 어떻게 조언해야 할지 궁금합니다.
답변1) 선별질문 3번에 답변되었음
질문2) 가난으로 연단 받을 때 물질의 결핍에 대해 단단한 마음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앙망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개척교회나 미자립교회 같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교회를 담임하는 목회자의 경우와 같이 경제활동을 꼭 해야만 하는 경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답변2) 선별질문 1번에 답변되었음
<5조 질문>
질문1) 신앙인에게 있어서 연단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확고하고, 강건한 믿음이 다져지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지, 아니면 하나님을 통하여 이익을 누리려고 하였던 마음들이 비워지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고, 원하는 마음이 정제되는 과정으로 이해되는 것이 좋을지 목사님의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답변1)
질문2) 하나님께서는 믿음 안에서 우리를 연단해 가심으로 소망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일전에 접하게 하셨던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 13.1.3 “그 믿음이 우리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우리 안에 믿음 그 자체를 본다. 그 이유는 믿음은 부지하는 사물에 관한 믿음이면서 믿음 자체는 현전하기 때문이고 외재하는 사물들에 관한 믿음이면서도 믿음이 내재하는 까닭이며 보이지 않는 사물에 관한 믿음이면서도 보이기 때문이다.”의 믿음의 의미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고 싶습니다.
답변2) 선별질문 4번에서 답변되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