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목사란 누구인가(1)
녹취자 : 김세나
[질문종합]
<1조 질문>
질문1) 소용(小用)의 지식은 ‘철학’(존재와 무, 선악과, 시간과 공간 등)과 깊은 연관이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결국 철학을 공부해야 할진데, 철학 자체가 어려울 뿐 아니라 철학자들의 견해가 성경적 진리와 부합하는 것인지 판단하는 일과 그 지식을 신학과 목회에 접목하는 일이 어려운 것 같습니다. 이같이 어려운 철학공부를 보다 더 건전하고, 안전하고, 지혜롭게 할 수 있는 길이 있는지 목사님의 조언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답변1) 좋은 질문인 것 같습니다. 소용의 지식은 철학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유용 지용의 지식은 소용의 지식이요, 무용 지용의 지식은 대용의 지식이라.”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쓸모가 있는 지식은 작게 쓸모가 있는 것이고 쓸모다 없어 보이는 지식은 크게 쓸모가 있는 지식이라고 정리가 될 수 있습니다. 어제도 제가 출판실 직원에게도 이야기를 했는데, 철학을 공부하지 않으면 사람이 생각하는 것이 늘 어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철학을 공부하면 신앙이 좋아지는지 물어보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좋아질 수도 있고, 안 좋아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더 심하게 이야기 하면 더 나빠질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철학 자체에 그러한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철학은 칼과 같아서 그 칼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그것이 좋은 유익을 주기도 하고, 유익을 주지 않기도 합니다.
그러면 이제 철학을 공부해야 할 텐데, 라고 했습니다. 철학은 살아있는 것 자체가 철학을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여러분들이 여러분 자신은 의미를 물으면서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열린교회를 오게 된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굉장히 여러 날을 고민하다가 여기에 원서를 넣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된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어떻게 하면 들어갈 수 있을까 생각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1년이 지나지 않아서 ‘나가고 싶다, 그 때 착각하고 괜히 여기에 들어왔나 보다, 내가 여기에서 이런저런 일을 하면서 아주 바쁘게 지내지만 의미를 별로 못 찾겠다, 어디 다른 데 재미있게 사역할 곳이 있으면 좋겠다. 기회만 닿으면 빨리 나가고 싶다. 유학을 가 버릴까?’ 등등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결국 그 모든 판단은 의미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자기가 어떤 의미를 찾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미를 찾는 모든 사람들은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의미라고 하는 것은 비유를 하자면, 바람이 불어서 파도가 막 칩니다. 이번에 8m 짜리 파도가 쳤다고 합니다. 그것은 진짜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바닷가에 배를 세워 놓았는데, 단단히 묶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배를 파도가 번쩍 들어서 바다 속으로 쳐 박아 버린 것입니다. 산산히 박살이 났습니다. 그러면 파도가 치는데, 착 파도가 치는데 항상 7m 파도가 쳤습니까? 아닙니다. 마이삭이 오니까 8m가 친 것이고, 이번에 다시 오는 것은 더 높이 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거기에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물방울들이 매달려 있겠습니다. 그리고 파도의 모양도 다를 것입니다. 그렇게 칩니다. 그런데 일단 지금 내 앞에 파도가 일어났으니까 그 파도가 얼마만큼의 높이로 치고 무슨 색깔이고 어떤 물방울이 물거품들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은 내 눈에 피할 수 없이 들어옵니다. 눈에 들어오니까 그것을 봐야 되는 것이 나의 현실입니다.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목숨이라도 건지려면 그것을 들여다 보고 있어야지만 나의 안전을 지킬 수 있습니다.
여러분 여기 교역자들 중에 엘림 카페 생각 날 것입니다. 진부에 다리 건너가면 엘림 카페 저 끝에 있었습니다. 그 다리가 무너졌습니다. 그 나온 다리가 그것입니다. 차가 막 들어가니까 승용차가 불 키고, 여기 있는 사람이 막 손을 흔들면서 오지 말라고 오지 말라고 해서 자동차가 이상하다 뒤로 후진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앞에서는 난간이 꺾어지는 게 보였던 것입니다. 차를 뒤로 빼자마자 강타하면서 부서졌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안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현실을 그렇게 보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파도는 우리가 죽을 때까지 똑같은 양상으로 반복되지 않습니다. 내년에 8m 짜리 파도가 쳐도 그 파도는 지금의 8m 짜리 파도와 다릅니다. 색깔도 다르고 모든 것이 다릅니다. 그래서 결국 그러한 파도를 치는 것을 보면서 파도가 무엇인가 보기 위해서는 파도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파도치는 것과 상관없이 그 파도를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조류의 흐름과 태풍, 모든 것을 보면서 왜 이러한 파도가 일어나는지 이 파도가 얼마나 무섭기도 하고 또 어떤 의미에서는 생태계를 위해 얼마나 꼭 필요한 것인가 객관적으로 배우는 것이 바로 철학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그렇게 변하지 않는 파도의 이념을 공부하고 그 다음에 지금 내 눈 앞에 들어와 있는 파도를 알고, 그 속에서 나는 내 인생에서 이 파도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입니다. 파도를 보고 싶으면 가까이 가면 되는 것이고, 위험하면 산꼭대기 있으면 되지만, 이것은 하나의 비유이고 우리들이 인생에서 만나는 모든 일들이 그렇게 보이는 인생의 국면들은 보이지 않는 국면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고 시간 안에 있는 많은 것들은 시간을 초월하는 것에 의해서 설명을 요구 받고 있고 그때 우리는 무엇인가 모든 사물들의 항구적인 질서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우리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사람들이 철학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묻습니다. 기본적으로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철학을 공부한다는 것과 철학을 한다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studere philosophiam(스튜데레 필로소피암)’ 철학을 공부하는 것과 ‘philosophere(필로소페레)’ 철학하는 것은 다릅니다. 철학을 공부하는 것은 남이 해 놓은 것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철학을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지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철학을 공부할 때 기본적으로 책들을 읽는 것은 당연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내가 권하고 싶은 것은 고전철학부터 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전철학이 인간이 사유해야 할 보편적인 것들에 대한 사유를 훨씬 더 철저히 하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 파편적으로 갈라져 나온 18세기 이후에, 특히 20세기 이후에 이러한 분화된 철학 중 어느 하나에 빠져서 공부하기 보다는 고전철학을 먼저 공부를 하고, 거기에서부터 내려오라고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하는데, 내가 뭐 공부를 해 보고 다른 사람 공부한 것도 보고 해 보니까 공부를 잘 하는 사람이 철학도 잘 합니다. 같은 공부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렇습니다. 그러나 철학은 신학과 유사한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기가 그것을 온 몸으로 함께 살아내면서, 그러면서 사실은 철학의 진정한 효용성을 발휘하게 됩니다. 그래서 옛날에 보면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나 이와 같은 많은 사람들을 보면 기본적으로 철학을 하는 이유 자체가 학문을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살기 위해서 하는 학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왜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철학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하고,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철학과를 나온 사람들이 있는데도 전혀 철학과 상관없는 사람처럼 보이고 그리고 설교할 때도 철학과 나온 사람이나 안 나온 사람이나 다를 바 없이 보이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그것은 깊이 자기 자신이 철학 자체가 목표가 된 것이 아니라 수단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철학은 시녀입니다. 시녀. 신학을 위한 시녀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이제 공부를 해나가도록 합니다.
시찰회에서 수양회를 갔는데 저보고 굳이 뭐든지 좋으니까 아침에 한 시간짜리 특강을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침에 18세기 이후 철학사조가 어떻게 변하여 왔는지 구름 타듯이 쭉 연결해서 20세기까지 쭉 설명을 하였습니다. 그들 중 한 목회자가 있었는데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끝나고 나서, “목사님, 제가 대학에서 뭘 전공했는지 아십니까?” “그것을 어떻게 압니까?” “철학을 전공하였습니다.” 그런데 자기는 대학 때 철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 와서도 철학 공부를 하였지만 한 번도 저러한 식으로 철학의 역사를 연관 짓는 것을 교수들에게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아는 것만으로는 우리에게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우리 입장에서 소화하면서 비평하면서, 만약에 참된 철학이라면 우리들이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하는 길을 찾아서 결국 마지막에 그 철학을 몰랐을 때 보다는 더욱 지혜롭게 인생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말이 나왔으니까 말인데 청교도들이 엄청나게 많은 숫자들이 있습니다. 아마도 학자들이 추측하기로는 청교도들이 그 시대에 그렇게 긴 기간이 아닌데도 아마도 10만권 정도 책이 출판되었을 것이라 봅니다. 그 책 중에서 아마 흔적이 남아 있는 것들이 5만권 정도 되고 아직까지도 잔존하는 것들은 실제로 2만권 정도 남아 있는데, 여기에도 청교도 책들이 잔뜩 꽂혀 있는데 그것도 천차만별입니다. 공통점은 모두 나름대로 순수합니다. 물론 신학적인 입장이 율법주의적 청교도라든지, 아니면 신비주의적인 청교도, 복음주의적 청교도, 알미니우스적 청교도, 알미니우스적 청교도 같은 경우 리처드 백스터 같은 사람인데 그렇게 다양한 계열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한결 같이 순수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진짜 참된 신앙을 추구하기 위해서 애썼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유익을 줍니다. 그렇지만 아주 발군의 깊이를 가지고 있는 청교도들은 예외 없이 철학을 공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철학뿐만 아니라 그 당시 국가에서 지원하고 있던 옥스퍼드나 캠브리지와 같은 쟁쟁한 학교에서 있는 교육을 탄탄하게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사람들만이 깊이 있는 청교도적 서술들을 해 낼 수 있었습니다.
몇 년 전에 조엘 비키 목사와 이야기 할 때도 똑같은 의견이었습니다. 그러한 인문학적 소양이 있는 청교도들은 깊이가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그냥 교화적이다. 그래서 벽돌을 쌓을 수 있는 틀들이 있는 속에서 건축 자재를 쌓아 올리는 것과 그것 없이 쌓아올리는 것 사이에는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를 하십시오.
한 가지 더 충고를 한다면, 여러분들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은 뭐냐 하면, 역사 속에서 무슨 인물이 있었다, 무슨 인물이 있었다고 하는 것이 도움을 주지만, 중요한 것은 성경을 이해하는 것에 있어서 중요한 개념, 그 다음에 정의, 그리고 그 개념의 사상적인 뿌리, 이러한 것들을 공부해 나가는 것이 성경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서, ‘선’이라고 할 때 어디서부터 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고 역사 속에서 어떻게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했고 그 다음에 그것이 후에 로마시대 와서는 어떻게 이해되었고, 그러한 것들이 초대교회에는 어떻게 이해되었고, 중세에는 어떻게 이해되었고, 그리고 르네상스시대에서는 어떻게 요동을 치면서 이러한 개념들이 변하기 시작했고, 이후에는 철학을 장악하던 신학의 능력이 급격히 쇠퇴하면서 철학이 독립선언하면서 막 튕겨나가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수많은 분파들이 우리로 말하자면 백가쟁명들이 나타나서 수없이 이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하는데, 그러면 존 스튜어트 밀이나 아니면 벤담의 공리주의부터 시작해서 마키아벨리의 말하자면 그러한 이론들을 비웃는 것 같은 국가이해중심주의의 선의 개념 같은 것들은 어떤 차이가 있는지, 한번 쭉 훑으면 성경에서 ‘선’이라 나올 때 그 감동이 다른 각도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에 대해서 하고 싶은 어마어마한 내용들을 엄청나게 많이 갖게 되는 것입니다. 충고하고자 하는 말은 뭐냐 하면,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합니다. 그래서 많이 알면 많이 이야기 하고 싶고 사람들에게 우월감을 느끼고 싶어 합니다. 그러한 것들을 어떻게 신앙의 인격으로 절제하고 그리고 땅 속에 깊이 묻으면서 성경이 이야기 하는 이러한 개념들을 풍부하고 깊이 있게 설명하는데 사용할 것인가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이미 기본적으로 수학, 기하학, 논리학, 문법학, 웅변, 이러한 것들을 기본적으로 토대에 깔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심지어 자연과학까지 말입니다. 무엇인가 자기의 말을 아주 정확하고 논리적으로 하는 연습이 필요한데, 그것이 이제 철학과 함께 법학이 많은 도움을 줍니다. 그래서 공부하다가 너무 힘들면 한번 법학 책을 읽어 보십시오. 그래서 무슨 법학 책이든지 간에 개론만 읽지 말고, 개론도 읽겠지만 우선 밑져야 본전이다 생각하고 행정법이라든지, 행정학은 조금 다릅니다. 행정법이든지 헌법이든지 민법도 조금 어렵습니다. 상법도 어렵습니다. 만만한 것이 행정법이니까 그런 책 하나를 잡아서 여기에서는 법을 어떻게 다루는가 한번 연구해보고 읽어보고 나면 많은 도움을 얻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2조 질문>
질문1) 취업을 위해 많은 사회적 경험과 스펙을 준비하듯이 목회를 준비할 때도 학위를 따기 위해 유학을 가고 대형교회에 가서 다양한 사역을 배우기를 원하는 사역자들에게 무엇이라고 조언할 수 있을까요?
답변2) 기억해야 할 것은 학위를 따기 위해서 유학을 간다고 하는데, 지금은 학위를 따서 와도 그렇게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최근 20년 사이에 엄청난 인식의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열린교회 같은 데서 모든 사람이 부인할 수 없는 목회적인 성과를 내고 매우 매우 훌륭하게 설교를 하였고 목회를 하였고, 설교도 실제적으로 상당한 감화력이 있다고 생각된다면 그 메리트가 미국에서 따 가지고 온 박사학위의 메리트보다 더 나을 것입니다. 물론 그 지원한 곳이 학교라면 여러분들이 그 사람들과 상대가 안 되겠지만 목회지라면 생각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최근 30년 동안에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따 가지고 온 사람들이 목회지로 들어왔을 때 너무 많은 실망을 안겼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그러한 것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아직까지도 미몽에서 못 깨어난 사람들이 있는데, 자기가 직접 먹어봐야 아는 것이니까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아는 한 대형교회는 학위를 받아왔다고 해서 채용할 때 우월한 점수를 주는 교회는 거의 없습니다. 그 사람에게 맡길 사역이 연구 사역이라든지, 연구 사역을 하는 교회가 몇 교회나 되겠습니까. 아니면 신학활동에 관한 일을 맡긴다든지 이럴 경우, 아니면 교회에서 작은 신학교를 한다든지 이런 경우에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대형교회는 절대로 학위를 따고 온 사람을 대형교회가 찾고 있을 것이다, 열린교회는 작은 교회이니까 감히 그런 사람을 못 모시나보다, 그렇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아무 상관 없습니다. 흘러가는 흐름이 이 상황이 아닙니다.
<3조 질문>
질문1) 교회(혹은 목회자)의 정치 참여는 크고 작은 논란을 일으켜왔습니다. 일부 교인들은 한국교회의 개혁과 경신을 위해서는 목회자들이 국내외의 정치 현실을 혁파하는 데에도 앞장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목회자가 세상을 향하여 짊어져야 할 직무는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답변1) 몇 달 전에 편지 하나를 받았습니다. 고신측 목회자인데 크지 않은 교회에서 목회를 하는데, 교인들이 목사님이 정치적인 입장이 좌파인가 우파인가 하는 것을 집요하게 대답을 요구했다고 합니다. 그럴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물어왔습니다. 그것이 나에게까지 질문할 내용인지에 대해서는 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그래도 물어보니까 답을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답하였습니다. “대답하지 말아라. 그리고 대답을 끝까지 요구하면 그 사람에게 반문을 해라. 내가 그것을 밝히는 것이 당신이 예수 잘 믿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증명해라. 그러면 내가 밝히겠다.” 그것은 바보 같은 짓입니다.
양 떼에는 좌파도 있고 우파도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더 과격한 사상을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 네 끼리는 눈퉁이가 푸르게 되도록 치고 박고 싸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목회자는 둘 다, “아빠 얘가 나 때렸어.” 품으로 들어올 때 안아 줄 수 있는 가슴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동성애나 그 다음에 사회의 부패나 어떤 등등에 대해서 무조건 침묵하고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념적으로 어느 편에 서야 된다 라고 생각하고 심지어 그러한 자신의 신념을 설교 속에서 강하게 필역하게 될 때 성경의 권위는 그 아래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한 것은 바보짓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도 보면 예수님 밑에 극단적인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던 셀롯 당원들을 비롯해서, 우레의 아들을 비롯해서, 전통적인 유대교에 헌신하던 사람들을 비롯해서, 다양한 종파의 사람들이 심지어 바리새인 가운데서도 예수님의 제자들이 나옵니다. 그 넓은 품을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오늘날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동성애도 좋고 심지어 유물론도 좋고 아무거나 좋다고 하면서 팔을 벌리는 꼴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 설교 속에서 정치적인 발언을 하거나 은현 중에서도 우리 목회자는 이번 선거에서 야당 찍기를 원하시는 구나, 그러한 옹졸한 목회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심지어 어떻게 하든지 그래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장로가 이번에 나라의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겠습니다. 그래서 뭐가 잘 되었습니까. 심지어 성경만 설교 하시던 박희천 목사님도 결국 참지 못하시고 김영삼 대통령 후보를 찍어야 한다고 그러셨는데, 무슨 좋은 결과를 가지고 왔습니까. 묻고 싶습니다. 설교는 그렇게 하면 그 후에 그렇게 보면서, 설교가 결국 진리만 말하는 것이 아니구나. 대통령들이 그렇게 해서 그 다음에 또 예수 믿는 장로 뽑아야 한다고 하면서 다 감옥에 들어가고, 자식들이 다 재판 받아서 구속되고, 그러한 상황들이 벌어지면 왜 그렇게 어리석은 일을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더 나쁜 것은 목회자들이 정치와 딱 붙어서 상당한 정치적인 영향력을 사회에 행사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목사 가운을 벗고 정치를 해야 합니다. 깨끗이 노회에 면직신청하고 자연인으로 돌아가서 당원을 하든지 아니면 더불어민주당을 하든지 한 자리를 하고 살아가면 됩니다. 왜 그렇게 하고, 그리고 정권이 바뀌면 잽싸게 정치적으로 연줄을 대서 하다못해 경찰서 자리라도 하나 맡으려 하고 심지어 교인이 많은 것을 무기 삼아서 선거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전부다 잘못 되었습니다. 목회의 길로 들어섰을 때에는 이미 그러한 것을 다 버리기로 하고, 그리고 그러한 것으로 세상이 바뀔 수 있다고 하는 생각을 포기하였기 때문에 목회자의 길을 들어선 것입니다.
그러면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입을 꾹 다물고 살라는 이야기 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설교자의 관심은 쉽게 이야기 하면 이것입니다. 사람의 온 몸에 종기가 납니다. 그러면 의사의 관심은 그 종기를 치료해서 종기를 없어지게 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이제 목회자의 관심은 그 종기가 걸린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치료해주는 것과 함께 궁극적으로 사회에 이러한 종기가 생겨난 궁극적인 원인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보고, 인간을 근본적으로 치료하는데 도움을 주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것을 깊이 고민해야 합니다.
보십시오.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악이라고 하는 것은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없이 사회가 잘못되었다고 온통 욕을 하고 그렇게 투사처럼 살고 심지어 사형선고를 받고 그래도 모든 상황이 끝나고 나서 자신들이 정치적인 권력을 받고 나면 그 긴장이 사라지면서 자신도 부패해서 또 다른 젊은 세대에게 타도의 대상이 되는 것은 역사 속에서 지루할 정도로 반복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위대한 임금인 다윗도 그랬는데 누구인들 안 그렇겠습니까. 어쨌든 경고망동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질문2) “목회 사역은 전문적인 일이기에 목회자에게는 전문적인 기술이 요구된다.”고 하셨는데, 이 부분은 목회의 현장에서 경험되는 것이 많을 것 같습니다. 목회의 전문가로서 준비되기 위해서 준비되어야 할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답변2)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요즘은 아내들이 집에서 바느질 하는 사람들 거의 없습니다. 나는 결혼하고서 평생 우리 집사람에게 꿰매달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정말 없습니다. 그냥 내가 꿰매서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더 세월이 지나고 나니까 꿰맬 필요가 없이 그냥 떨어지면 버리고 다시 사고, 그 대신 내가 너무 교복처럼 입고 다는 것은 2-3일에 한 번씩 빨아서 입고 다니는데 그런데 너무 좋아하는 옷이 있습니다. 그러면 못 버리게 됩니다. 너덜너덜 할 때까지 입고 다닙니다. 그래서 AS센터에서 보내고 보내고 보내니까 나중에는 여기가 뚫어졌는데 할 수 없으니까 속에다가 까만 테이프 같은 것을 붙여 버렸습니다. 그래도 좋다고 입고 다니며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옛날로 돌아가 바느질을 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바느질은 누구나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옛날 엄마, 할머니, 진짜 평생 가족들의 옷을 지어서 입히셨던 엄마들의 바느질 솜씨와 우리 같은 사람이 그냥 양말이나 한번 꿰매 보겠다고 손가락을 몇 번씩 찔리며 꿰매는 바느질이 똑같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마치 이런 것들이 싫습니다. “저는요 목사님, 저는 행정도 잘 모르고요. 저는 사실은 신학공부도 많이 부족하고요. 저는 인격적으로도 모가 나고요. 저는 목회의 경험도 별로 없고요. 성격도 사람들을 잘 하고 그러지 못하고요.” 이렇게 보면 엄청나게 겸손해 보입니다. 마지막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자기만큼 진실한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지혜롭고 목회의 기술이 있고 사람들을 잘 다독거리고 리더십을 가지고 이끌어가는 것과 진실한 것이 그렇게 대척점에 서야 하는가 묻고 싶습니다. 진실한데 지혜롭고, 진실한데 목회기술도 뛰어나고, 진실한데 머리도 너무 좋고, 기도 많이 하는데 공부도 정말 잘 하고, 아니 그러한 사람이 없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그렇게 되기를 꿈 꿔야지, 내가 이것도 못하고 이것도 못 하는 것 봐라 얼마나 내가 못하는가, 그러니까 내가 진실하다는 것이라고 할 때 이것이 무슨 말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자신의 엄청난 자랑처럼 생각하는데 그것은 창피한 것입니다. 그래서 <도시어부>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저는 하나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5분 이상 본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고기를 잡으러 나갔으면 고기를 잘 잡는 사람이 왕입니다. 그런데 고기는 못 잡지만 사람은 참 훌륭하다는 것은 다른 위인전에 나올 이야기이지 도시어부에 나올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을 굉장히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지난 설교 시간에 이야기 하였지만, 야구선수가 성형수술을 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자기 일에 적합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어떤 일을 너무 효과적으로 잘 하는데 그것을 배우기 싫어하는 사람은 둘 중 하나입니다. 그 사람을 시기하고 있든지, 그 사람은 그렇게 잘 할 의욕이 없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의 기술을 끊임없이 습득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배우십시오. 자신이 하고 있는 방법에 대해서 끊임없이 회의를 느끼면서 더 나은 길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정진해야 합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 사랑하면 대충 해 주고 싶은 것이 아니라 잘 해 주고 싶습니다.
<4조 질문>
질문1) 오늘날 목회자에 대한 기대는 설교보다는 개인적으로 친절하게 상담해 주고, 무슨 일이 있으면 내 일처럼 나서서 해결해 주고, 청렴함을 뛰어 넘어 가난하게 살아가는 것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에 사람들은 감동을 하고 열광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에 대한 목사님의 생각과 이런 생각들의 배경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답변1) 어느 교회에서 자기네 담임 목사님에 대한 자부심을 이야기 하더랍니다. 이름을 가르쳐 달라고 한다면 그 교회이름 가르쳐 줄 수도 있습니다. 강남에 있는 교회입니다. 옛날 일입니다. 자기네 교회 목사님이 프라이드를 타고 다닌다고 그러면서 온 교인이 그렇게 자랑을 하더랍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들은 어느 목사님이 예배가 끝나고 나서 주차장에 갔는데 프라이드는 거의 없고 다 외제차 아니면 대형차라고 하였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 하면, 사람들이 어떤 일에 감동을 받으면 따라하고 싶습니다. 따라하고 싶지 않으면 감동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대리만족입니다. 그래서 사회복무요인으로 근무해서 군대 냄새도 못 맡은 사람이 특수첩보장이나 아니면 특수부대 영화를 보면서 파자마 바람으로 빗자루 하나 들고 자기도 흉내를 내보면서 대리만족을 느끼듯이 그러한 심리입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목회자가 그러한 대리만족을 시켜주면서 살아줘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목회자가 호사스럽게 살자든지, 아니면 검약하게 살지 말자, 그러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람의 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교회는 모든 사람들에게 미담을 만들어내기 위한 공동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목회자는 모든 사람이 절대로 살지 않을 그러한 영웅적인 삶을 삶으로써 사람들에게 대리만족을 주라고 부름을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 앞에서 살도록 형제들과 함께 섬기며 살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저도 젊어서 금욕주의 같은 것들에 대해서 많은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때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내가 만일 개신교를 몰랐더라면 수도사가 되었을 가능성이 참 많다, 아마도 방탕한 술집의 술꾼이 되기보다는 아마도 그 방향으로 되었을 가능성이 많다는 생각도 하였습니다. 한 때는 아씨시의 프란시스나 그러한 사람들의 삶을 동경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결국 그러한 특별한 금욕적이고, 특별한 수도사의 삶이라는 것들이 오늘날 우리 목회자에게 그대로 갖다가 대입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특히 종교개혁이 일어난 후에 목사의 정체성이나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 역사를 가지고 따져 보자면 이러한 것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고대의 금욕가들의 상들을 끌고 와서 목사에게 투사시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마하트마 간디이든지, 톨스토이든지, 한번 이야기 한적 있습니다. 마하트마 간디가 사상이 사실은 톨스토이 사상에서 나온 것이라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분은 한편으로는 금욕을 끊임없이 이야기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자식을 낳았고 아내가 항상 임신 상태였고 그렇게 육식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비판하면서 자신은 부엌에서 고기를 먹어야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귀족으로서의 생활이 몸에 베인 사람이었습니다. 처음에 막 열광하고 좋아하다가, 차라리 톨스토이 이에프스키가 더 솔직하게 인간에 대해 보여주지 않나하는 그런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아무튼 그러한 점에서 사람이 나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에 더 많이 생각을 기울이지 말고 하나님 앞에 내가 누구인가, 그리고 목회자로 부름 받은 나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이것에 대해서 훨씬 더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저는 요새 삼위일체를 봄부터 시작해서 염려 원고를 넘겨주고 어태까지 씨름을 하고 있는데 하나 배우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저라고 바보가 아니지 않습니까. 들려오는 이야기들을 다 듣고, 이번 설교를 준비하면서도 내일 하겠지만 너무 너무 괴롭습니다. 아마 최근 역사상 기독교가, 한겨레 신문을 보니까 “소수 때문이기는 하지만 아무튼 기독교는 이제 공공의 적이다.” 이러한 반기독교적인. 사회가 어느 시점서부터 품격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종교인이나 정치인이나 학자나 법조인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을 그래도 인간이게 만드는 존중하게 만드는 그 선들을 다 밟아 버렸습니다. 그것이 공적인 신문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 입니까? “소수라고 하지만 그러나 기독교는 공공의 적이 되었다.” 그러면 제가 말하고 싶습니다. 언론에서 개 쓰레기 같은 언론이 수없이 많은데 그러한 유튜브나 아니면 인터넷 신문이나, 한쪽에 치우친 찌라시 같은 언론사들을 보면서, “소수라지만 그러나 어쨌든 언론은 공공의 적이 되었다.” 그렇게 이야기 하면 자기네들은 동의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사회를 어떻게 하든지 사랑으로 통합하고 하나 되게 만들려고 하는 노력을 안 하고 갈기갈기 찢어놓아서 미친 듯이 이념으로 대립하게끔 만들면서 이렇게 나라를 한 가족처럼 살아가던 나라가 아니라 끊임없이 자기네들을 후벼 파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도를 사회를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를 보면 중국에도 그렇고, 우리나라도 그렇고, 왕들이 통 큰 왕들은 자기에게 들려오는 사람들은 다 한정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때 그냥 딱 왕이 덕망 있고 대쪽처럼 짜랑짜랑한 사람부터 시작해서 원로들로부터 젊은 사람들을 불러 놓고 내가 황제라고 내가 왕이라고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직언을 해보라고 장을 엽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다 들으면서 왕은 그 가운데 편을 가르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여러분 입사하고 회사 들어가 보면 엠티 같은 데 가서 야자타임을 하자고 합니다. 격언이 있습니다. 절대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라고 해 놓고 윗사람들은 저 사람의 속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다 헤아리면서 결국 가라치기 해서 저 사람은 싸가지가 없는 사람이니 영원히 묻어 버리자, 이것은 실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것이 소인배 지도자들이 하는 것이고, 지도자는 그러한 것들을 이러한 책에서 다룬 모든 생각들을 다 끌어 모아서 자신의 품속에서 녹여 내면서 그 사람들을 끌어안고 설득하면서 가고 끝까지 설득이 안 되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고, 하면서 그렇게 역사가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극단적으로 되는 것 그것이 아닙니다. 극소수이지만 교회는 이미 공공의 적이 되었다. 어떻게 저러한 식을 다루는가. 설령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여도 사실 언론은 사람을 선동하는 데가 아니라 정도를 넘고 흐트러지는 사람들의 생각을 바로 잡아주고 올바른 쪽으로 여론을 이끌어 가는 것이 사실은 언론의 기능입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을 하여도 아니다, 긍정적인 측면도 많고 어느 하나만 가지고 모든 것을 다 이야기 할 수 없다고 그러한 식으로 다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한 것들을 보면서 얼마나 괴로운지 모릅니다. 제가 삼위일체를 묵상하면서 결국 모든 답이 하나님 안에 있구나, 역사는 이렇게 흘러가지만 내가 아는 하나님은 여전히 인간들은 찢고 까불어도 역사를 붙들고 계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의로움을 보이시고, 당신을 신뢰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길을 보이시는 분이십니다. 요즘 어떻게 보면 엊그제도 우리 집사람이 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여보 나는 저 대로변에 가서 무릎을 꿇고라도 용서해달라고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녀의 마음이겠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가 하나님에게는 그렇게 미안하게 생각하지 않는데 세상에게만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재앙을 만났을 때 하나님과의 관계를 물어야 된다고 하는 이야기가 거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질문2) 목회자는 교인들을 올바른 관점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도록 돌봐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목회자가 정치적으로 한 방향에 치우쳐 그 길이 도를 따르는 사람이라고 가르칠 때, 교인들은 그러한 영향을 많이 받는 것 같습니다. 목회자와 교인들 정치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고 가르치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 궁금합니다.
답변2) 이것은 앞의 질문을 통해 다루었습니다.
<5조 질문>
질문1) 한 명의 목회자가 기독교 사상사가 되기 위해서 삶에서 이것만큼은 반드시 경험해 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또 목사님의 삶에서 사상가로서 세워질 수 있게 해준 삶의 경험에는 어떠한 것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답변1) 사상가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 의미입니다. 하나는 남들이 생각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세계와 인간과 역사와 우주에 대해서 독특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사상가로 보이기도 하고, 또 한 가지 점에 대해서는 자기가 기독교사상가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독특성과는 상관없이 전통적으로 성경과 성경의 해석, 교회의 신조와 교회의 전통, 이것을 어거스틴은 합쳐서 Divinorum sacramenta, 디비노룸 새크라멘타 라고 합니다. 거룩한 성례라고 하는 게 맞습니다. sacramentum 새크라멘툼이니까, 떡을 떼고 잔을 나누는 성례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고, 폭넓은 성례입니다. Divinorum sacramenta, 복수로 사용합니다. 그러한 새크라멘타를 기준으로 할 때 그렇게 내려온 사상들을 받아 들여서 성경이 이야기 하는 고유한 관점으로 세계와 인간과 자연과 역사와 모든 것을 통합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 통합 안에서 사회의 갈 길을 보이고 개인의 인생의 의미를 규명할 수 있는 사람이 사상가입니다.
사상가는 기본적으로 지식이 있어야 하지만, 지식을 많이 습득한 사람이 사상가가 되는 것도 아니고 그러한 지식이 없어야지만 사상가가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사상가가 되는 것이 목표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christian thinker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이 되자마자 나 같은 죄인 살리신 하나님이 위에 계시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러면 당연히 그 다음에 내가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중심이고 나는 그 분의 요구대로 살아야 할 존재로 생각을 하게 되고 행복도 그 분을 찾아가는 것이라 생각을 하게 되고 그 다음에 선과 악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게 되고 시간적 사물 안에 묶였던 나의 생각이 영원까지 연결이 되면서, 만약에 시간 세계에서 의미가 있어도 영원 세계에서 의미가 없는 거라면 나는 그것을 혐오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제의 시간 세계에서 의미가 있다, 예쁜 여자를 만나고 멋있는 남자를 만나고 최고의 부를 누리고 영광을 다 누리고 매일 매일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쾌락을 누리면서 완전한 만족을 느낀다 하더라도 죽은 후에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으니… 할 때 다 쓰레기통에 버리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게 신자가 된 다음에 생겨나는 변화입니다. 그것은 무슨 의미인가 하면, 이 세상사를 판단함에 있어서 이 세상에 있는 기준으로만은 내게 적용 되는 게 아니라 영원이라고 하는 것이 함께 들어온다고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사상가가 되는 것은 끊임없이 지식을 습득하는 방식이 이러한 식으로 끊임없이 자신의 인생과 연결 지으면서 사랑과 함께 가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어거스틴이 삼위일체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삼위일체를 연구한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삶 전체를 내놓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 것 같습니까? “삼위일체를 연구한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삶 전체를 내놓는 것이어야 한다.” 무슨 의미인 것 같습니까?
(삼위일체 중심으로…)
무슨 의미인가 하면, 삼위일체에 대해서 무엇을 알게 되든지 알려고 하든지 의도 자체가 잘 살기 위한 것이어야 하고, 무엇을 알게 되든지 무엇을 알려고 하든지 잘 살기 위한 것이어야 하고, 무엇을 발견하든지 그것은 결국 삶으로 구현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알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탁월한 지능을 가지고 지식으로 접근하는 사람에게는 자신을 감추시고 어린아이같이 순수하게 당신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당신을 보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이 바로 사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랜 시간 축적되고 축적되면서 그것이 삶의 지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요동치는 세계 속에서도 그러한 지혜를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설교는 바로 그러한 지혜를 말해주는 것이 설교입니다.
예를 들자면,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의 위격의 동등성 하나만을 가지고 30년을 연구한 사람이 방대한 자료를 들이대면서 논쟁을 한다면 그런 사람과 상대해서 그 사람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사람이 진짜 삼위일체를 잘 아는 사람인가 하는 것은 우리가 확신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사상이 목표하는 바와 지식이 목표하는 바가 서로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학가거나 한국에서 열심히 공부해서 지식을 많이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인생에 가장 값진 것은 자신이 진리 안에 살고 많은 사람들을 진리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행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알고 그러면서 발은 땅에 디디고 살지만 정신으로서는 하늘에 있어서 그 모든 것을 내려다보면서 그렇게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렇게 잠시 사는 삶이 영원인 것처럼, 영원한 삶인데 오늘 한순간에 달린 것처럼 그렇게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질문2) 목회자에게 전문적인 기술이 요구되지만, 반드시 목회자의 영적 성장과 함께 강조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목회자가 진리를 사랑하는 가운데 얻게 되는 목양의 실천적 지식의 유익에 대한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답변2) 다루지 않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