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 신학이란 무엇인가
녹취자 : 김세나
[선별질문] (이번주는 선별질문만 하셨습니다.)
질문1) 프란키스쿠스 투레티누스가 신학의 종류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했던 다섯 가지 지성적 성향들, 이해(intellgentia, nous), 지식(scientia, episteme), 지혜(spientia, sophia), 기술(ars, techne), 명철(prudentia, phronesis)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또한 신학은 다섯가지 지성적 성향 모두를 포괄하기에 어떤 한 성향이 신학의 참되고 고유한 종류를 설명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성향을 신학에 돌려야 한다면, ‘스토아적 의미에서의 지혜’가 신학의 본질에 가장 근접하다고 말한 이유에 대해 들어보고 싶습니다.
답변1) 저 내용이 내 책에서 나왔습니까?
(질문자: 네, 맞습니다.)
네 책에서 나왔는데, 신학이 무엇인가에 대해 다루면서 인용한 구절을 말하는 것입니까?
(질문자: 맞습니다. 다섯 가지 지성적 성향을 포괄하기 때문에 어떤 신학이 참되고 고유한 종류를 완벽하게 설명을 못 하는데, 그래도 그중 한 가지 신학과 가까운 것은 ‘지혜’라고 투레티누스가 설명을 했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적어 주셨는데, 읽어봐도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이해가 안 됩니까? 저렇게 쉬운데 이해가 안 되면 어떻게 합니까? 저렇게 기초적인 것인데 이해가 안 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설명해 주겠습니다. 잘 들어 보십시오.
투레티누스가 이야기 한 저 이야기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이야기와 다른 것은 아니고, 거의 유사합니다. 설명 방식이 조금씩 차이가 나는 것인데, 그는 이것을 기독교신학에서 이것을 사용하기 위해서 정돈을 한 것입니다.
첫 번째, nous(누스)라고 하는 것은 intelligentia(인텔리겐티아)인데 이것이 번역을 저렇게 하였지만,
사실은 마땅한 것을 찾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래도 최대한 제대로 번역을 하려고 애를 쓴 것입니다. ‘이해’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흔히 “내 이야기 이해가 돼?”라고 할 때에는 논리적으로 이해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논리적인 이해는 맞는데, 그런데 이성적인 이해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가지적인 사물에 대한 이해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렇습니다. 여기에 사과나무가 하나 있습니다. 진짜 예쁩니다. 그런데 거기에 뉴턴과 어거스틴이 둘이 있습니다. 뉴턴은 오다가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와!’하며 미친 듯이 뛰어 나갈 것이고, 어거스틴은 사과나무를 보았을 때는 뭐라고 하는가 하면, 그리고 옆에서 한 사람이 잘난 척을 하며 사과나무를 설명을 합니다. 사과나무 옆에 서서 “여러분, 사과에 대해서 알고 계시죠?” 어거스틴과 뉴턴이 둘이 앉아 있는데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사과는 가을철에 열리는 과일인데, 다양한 색깔을 띄고 있지만 맛이 달콤하고 수분이 많아서 많은 사람들이 즐겨 먹는 과일이고, 그리고 멜론이나 수박류의 과일보다는 훨씬 더 단단한 질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과의 종에는 셀 수 없이 많지만 스타킹, 춥, 인도, 홍개, 국광, 부사 등등의 과일이 있는데 이 나무는 무엇무엇입니다.”라고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 사람은 설명을 들으면서 딴 생각을 합니다. 설명을 듣다가 사과가 뚝 떨어집니다. 뉴턴은 “알았다!”하였서 뛰어갑니다. 만유인류의 법칙을 발견한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탁 보면서 처음부터 궁금한 것이 스타킹, 춥, 인도, 홍개, 골덴, 부사 그러한 종류를 알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이 저것을 내셨다니…’ 이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습니까?
그러한 것이 말하자면, 설명하는 사람은 가장 가시적인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고, 뉴턴은 가시적일 수 있으나 추측하기 굉장히 어려운 것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고, 그것도 가지적인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어거스틴은 이 나무를 내신 하나님은 얼마나 위대한가, 그리고 하나님이 이 나무를 내신 장본인이구나를 보는 것이 바로 가지적인 것입니다. 그것이 이해입니다. 그래서 intelligentia는 기본적으로 이해라고 번역을 하였는데, 정확하게 말하면 총명입니다. 총명. 성경에서 총명과 명철이 같이 나옵니다. 그런데 저것이 바로 총명이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지해’라고도 번역을 합니다. 지혜가 아니라 지해입니다. 그것이 이해입니다.
다음 지식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리스어로 두 가지인데 doxa(독사)와 episteme(에피스테메)입니다. doxa는 개인의 의견입니다. 의견이라고도 하고 업견이라도 합니다. 그래서 사실에 입각하지 않은 자신 나름대로의 견해입니다. 그것은 다른 지식의 기초가 될 수 없습니다. episteme는 사물을 알 되 끝까지 아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이러한 것입니다. “너 혹시 어떻게 인간이 슬기로워질 수 있는지 알아?” 할 때 각자 자기 의견을 이야기 하는 것과 이 사람이 진짜 슬지로워지는 것을 경험하였고, 그 슬기로워지는 것이 역으로 다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이 episteme가 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가 시험 삼아서 exegesis(엑시지시스, 주해)를 해 보았습니다. 재미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거기에서 제가 ‘베트’에 대해서 설명을 하였습니다. 책 한권 내용의 분량이 나옵니다. 그렇게 해서 무엇인가를 들어가고 나오고 완벽하게 설명한다는 것은 완벽하게 안다고 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episteme가 되는 것입니다. 온전한 지식이라고 보면 됩니다.
지혜는 그 모든 것들을 다 통합해서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입니다. 어제도 ACTS에서 교수들이 와서 4시간 교제를 하였는데 책을 읽거나 설교를 들을 때 모두 이해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좋은 설교도 아니고 좋은 책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말씀사역의 목표는 수평적인 지식을 확장하는 면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이 정도 밖에 안 되던 사람이 설교를 듣거나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래서 바닥에서 기던 사람이 5미터 정도 위에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한 번에 책을 읽었는데, 40%는 모르겠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아직 그것을 읽을 실력이 안 되는 사람입니다. 설교도 그렇게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되어 있는 사람이 이렇게 되는 것은 항상 이해가 안 되는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 지혜라고 하는 것은 어떤 사물 위에 올라가서 그것을 통합적으로 볼 수 있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기술은 아는 것들을 그대로 삶으로 구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해되십니까? 예를 들자면 다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렇게 이렇게 해서 이렇게 이렇게 만드는 것이라고 점토도 주고 다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마다 만드는 것이 다 다릅니다. 더군다나 1년 해 보면 그 사람이 자질이 있는지 없는지 압니다. 1년 해도 안 되는 사람은 2년을 해도 안 될 가능성이 높은 것입니다. 옛날에 박희천 목사님이 맨날 하시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개척해서 1년 후의 그 결과가 그 사람 죽을 때까지 간다고 생각하면 된다고 하였습니다. 단, 아주 특별한 예외가 있기 때문에 당신은 2년까지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2년까지 한 것이 평생 그렇게 간다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분은 숫자에 굉장히 민감하신 분이었습니다. 2년 교회를 했는데 교인이 30명 밖에 안 모였다고 할 때 그 사람은 20년을 기다려도 그 이상은 안 된다고 보았습니다. 그 말에 대해서 동의할 수 있는 면도 있고, 동의할 수 없는 면도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맞는 말씀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기술입니다.
그렇다면 궁금한 것이 이것일 것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좋은 기술을 습득하고 싶다면 아멘 해 보십시오. 좋은 기술을 습득하고 싶습니까, 아니면 이대로 살고 싶습니까. 습득하고 싶습니까?
(아멘)
그게 이제 문제입니다. 내가 목회를 하고 교수를 하면서 내가 스스로 생각해낸 에피그램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배울 의욕이 없는 사람에게 가르치는 것은 밥을 먹지 않으려는 아이의 입에 밥숟가락을 대는 것과 같다.” 유아들을 길러보다 보면 애들 가운데 입을 앙 다물고 밥을 안 먹는 아이가 있습니다. 걔네들 10명이면 9명이 다 이빨 썩은 아이들입니다. 밥을 주면 밥을 안 삼키고 입안에 물고 돌아다닙니다. 밥 먹으라고 하면 “여기 밥 있는데…”합니다. 입안에 있는 밥이 당분이 되어 이빨은 다 썩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숟가락에 담아서 엄마가 무릎으로 뛰어 다니면서 제발 먹으라고 합니다. 아이가 삐쩍 마르니까 말입니다. 제발 먹으라고 매일 그렇게 하고 달립니다. 아침에 한 한시간동안
씨름을 해서 몇 숟가락이나 먹일 수 있겠습니까? 배우려는 의욕이 없는 사람들은 아무리 풍부한 가르침을 가르쳐줘도 저 끝에 앉아 좁니다. 결정적인 이야기를 하여도 조는 것입니다. 그리고 잘 듣고 가서 그것을 실행을 안 합니다. 그러니까 기술이 늘어날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것은 삶의 기술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내가 다른 사람에게 미안한 일을 하였을 때, 어떻게 이것을 풀까 하였을 때 이러한 것은 진심과도 관련된 문제이지만, techne(테이크네)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마음으로는 굉장히 미안합니다. 그런데 만났을 때는 싹 씻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계속 오해를 하는 것입니다. ‘야, 이 사람 어떻게 저 짓을 해 놓고도 나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안 하냐?’ 시람은 뭔가 상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분명히 잘못했습니다. 그래서 화가 납니다. 그런데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왜 입니까? 테크닉이 워낙 좋습니다.
최근의 비서를 이야기 하면, 김수미 간사 오기 전에 최은정 간사가 있었고, 그 앞에는 최화영 간사였고, 그 앞에는…. 저 양반이 내 비서를 빼앗아 갔습니다. 그러고는 미안하다는 소리도 안 했습니다. 또 그 앞에는 우영은 간사가 있었습니다. 같이 먹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 세 사람이 같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최은정 간사가 있을 때 앞선 두 사람은 퇴사하고 직원들과 밥을 먹는데 누가 물어보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 은정 간사가 있는데 이야기 하는 것은 뭐하지만, 비서 세 사람을 한 마디로 비교하라고 하면 뭐라고 하시겠어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바보입니까? 누구한테 잘 보여야 하겠습니까? 앞에 있는 사람에게 잘 보여야 하지, 없는 사람에게 잘 보여야 하겠습니까? 우영은, 미워할 수 없는 사람. 실수를 많이 했습니다. 내일 새벽 6시에 비행장에 나가야 하는데 비행기 표를 어디다 뒀는지 모르겠는데, 얘는 퇴근만 하면 폰을 꺼놓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집에까지 갔나? 밤 12시 다 되어서? 그래서 결국 찾아내고 날 세웠습니다. 그래서 나를 애를 많이 먹였습니다. 기도원에 말씀 준비하러 가는데 내 가방을 덜렁덜렁 들고 와서 “목사님, 다녀 오세요.” 하며 문을 쾅 하고 닫았습니다. 강원도까지 갔습니다. 그래서 차를 세워놓고 트렁크를 열어보니까 가방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가방을 열린공간 마당에 놔두고 온 것이었습니다. 마당에 놔 두고 문을 쾅 하고 “다녀오세요!” 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밥만 먹고 세수하고 잠만 자고 왔습니다. 우영은,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두 번째 최화영. 너무 정확하게 일을 하니까 미워할 이유가 없는 사람. “그러면 은정이는요?”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사람.” 테크닉입니다. 그 때는 내가 화도 잘 내었습니다. “넌 도대체 비서가 되가지고 말야. 도대체 뭐하는 거야?” 비행기 표를 하노이를 가야하는데 호치민을 끊어놓은 것이었습니다. 호치민과 하노이가 똑같다고 계속 우겼습니다.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서 지도를 찾아보니까 거리가 800km였습니다. 항공사에 전화해보니까 표가 없다고 합니다. 내일 모레 가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목사님, 너무 죄송합니다.” “아니, 난 몰라! 네 마음대로 해. 선교사님들에게 일일이 전화해서 내 실수로 못 가게 되었다고 이야기 해!” 문을 쾅 닫고 들어갔습니다. 막 야단을 쳤습니다. 10분도 안 되어서 “목사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마음 푸세요. 그래도 저녁 꼭 드세요.” 어떻게 미워하겠습니까? 이것은 테크닉입니다. 테크닉.
다음 다섯 번째가 prudentia(프로덴시아), phronesis(프로네시스)입니다. 이번에 「죄와 은혜의 지배」에서도 나오는데 phronesis가 뭐냐 하면, 명철이라고 하는데 정확한 번역이 아닙니다. 말이 없습니다. 그러면 뭐냐 하면, phronesis가 말하자면 이것입니다. 자, 예를 들어서 정경아 전도사가 계속 배가 나오고 그리고 계속 살이 찝니다. 그리고 당뇨를 비롯하여 많은 것들이 나옵니다. 의사한테 갔더니 의사가 당신 이거 약 먹어서 안 된다고 운동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침마다 새벽기도 끝나고 한 3km씩 뛰라는 것입니다. 뛰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300m도 못 뛰는 것입니다. 너무 힘이 듭니다. 그런데 점점 내 몸이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여 이기고 뛰기 시작한 것입니다. 매일 아침마다 3km씩 뜁니다. 그런데 죽을 맛입니다. 그리고 비가 올 듯 말 듯 할 때 오겠지 하고 안 나가고, 이랬는데 열심히 노력을 해서 1년이 지났더니 안 뛰면 아침에 못 배기겠는 것입니다. 안 뛰면 누구 표현하는 것처럼 몸에 구대기가 온 몸에 기어다니는 것 같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어나서 3km를 뛰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어떻게 바뀌었는가 하면, 아직 아무도 걷지 않는 뚝방길을 아식스 운동화를 신고 레깅스를 신고 날씬한 몸으로 뛸 때 삭삭삭삭 다가오는 바람이 너무 기운이 좋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포기할 수 없는 일상의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행을 가도 그 운동화와 레깅스는 꼭 가져가서 비슷한 곳에라도 가서 뛰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phronesis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선한 방향으로 phronesis되어야 합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습니까? 다 설명되었을 것입니다. 아주 더 명확한 정의를 찾고 싶으면 철학 사전 들어가서 찾아보십시오.
그런데 신학은 이렇게 다 설명하지 못하지만, 왜 그러면 저 분이 스토아학파, 이것은 기독교 사상과는 다른데 왜 그런 스토아학파적인 의미에서의 지혜를 신학의 본질에 가장 근접하다고 말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스토아학파에서의 지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약간 불교적인 세계관과 아주 유사합니다. 여기 있다고 생각하는 나무가 있습니다. 이것은 시간을 조금 돌리면 묘목이었고 더 돌리면 씨앗이었고 더 시간을 돌리면 없었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로 육체를 가지고 이야기 하자면, 39살인 사람은 40년 전에는 비존재였다는 것입니다. nonexistence입니다.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시간이 지나고 나면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사람이라는 존재, 사물이라는 존재를 판단할 때, 어느 한 시점을 딱 보고 그것이 그 존재 전체인 것처럼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에서의 판단에 사람이 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지 않고 그 사물을, 시간 안에 있는 것을 시간 바깥의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해석을 하려고 하는 것, 해석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이 스토아적인 의미에서의 지혜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것입니다. 영원한 사물에는 영원한 존재를 돌리고, 시간적 사물에는 시간적 존재를 돌리되, 영원한 사물은 기준이 되고 그 다음에 시간적인 사물은 그 기준에 의해서 판단되는 대상이 됩니다. 그러면 그러한 존재가 가치와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가장 사랑하고 덜 중요한 것을 중요한 것 밑에 두어서 사랑하고 그보다 덜 중요한 것은 더 낮은 단계에 놓고 사랑해서 아랫것들에 대한 사랑이 윗 것들에 대한 사랑을 어긋나게 하지 않는 그것이 존재의 질서에서 오는 것인데, 그 존재에 대한 질서를 기독교적인 관점과 유사하게 봤던 그 하나만을 가지고 이야기 하라면 스토아적인 의미에서의 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책이 있습니다. 두껍지 않으니까 오늘이라도 가서 읽어 보십시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황제였는데 이야기 합니다. 예를 들어서, “어제는 너를 메고 장사 지내러 갔지만 그러나 너도 내일은 누군가에 의해 떠밀어져 장사지내게 될 것이다.” 그렇게 모든 것은 태어나서 흘러가고 변천하고 소멸하는 과정을 통해서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그 사라지는 것들이 다 하나의 멜로디가 되어서 그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그 위에 있는 하나님이 계시고, 그 하나님이 모든 존재들을 그렇게 흘러가게 하심으로써 하나의 거대한 교향곡들을 연주해간다고 보는데, 지금 이야기 하는 것은 어거스틴의 설명입니다. 그래서 사물 바깥에서 그 사물을 보고 존재의 질서와 의미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것을 지난 번에 설명을 했습니다. 지혜와 지식에 대해서 뭐라고 했습니까?
(영원한 사물에 대한 오성적 인식, 시간적 사물에 대한 이성적 인식)
영원한 사물에 대한 오성적 인식. 여기에서는 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으니까 본성이라는 애매한 말로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설교를 듣고 나면 영원을 생각나게 해야 합니다. 무슨 설교를 듣든지 간에 말입니다. 다음 하겠습니다.
질문2) 18세기 이후 새롭게 떠오른 비평적 방법론들이 신학을 다수의 전문화된 분야들로 분리시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신학의 세분화가 신앙의 원리를 버리고 이성의 원리를 따르는 경향을 촉진한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답변2) 신앙이 없어졌으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그 때는 여러분들은 프란시스 쉐퍼의 「Escape from Reason, 이성에서의 도피」이라는 책을 꼭 읽어 보십시오. 읽어보았어도 지금 읽으면 또 기분이 다를 것입니다. 꼭 읽어 보십시오. 쉐퍼의 책 들 중에 훌륭한 책들이 많지만 아마 가장 대중들에게 충격을 주었던 작품일 것입니다. 내가 쉐퍼가 되어서 만일 저 질문에 대해서 대답을 하라고 한다면 이렇게 대답을 할 것입니다. 저기에서 신앙은 은총이라는 것과 환치가 되고, 이성은 자연과 환치가 됩니다. 그러면 신앙과 은총이라고 하는 것은 초자연적이고 초월적이고 신적이지만, 이성과 자연이라고 하는 것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전에는 은총 아래에 이성이 있었습니다. 은총 아래 이성이 있어서 이성이 뭘 해도 결론이 최종적이지 않고 은총의 지휘를 받거나 은총의 보호를 받는 테두리 속에서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앙이 사라지면서부터 인간 밖에 있는 세계, 그 세계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존재 보다는 인간의 이성이 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는 것이 더 상위에 있다고 생각하면서 결국 이성이 은총의 지배를 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위의 상층부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이제 이성이 그 위에 등극해서 아래에 있는 은총과 신앙의 세계, 계시의 세계를 평가하고 처단하고 삭제하고 내보내고 변경하여서 이상의 원리에 맞게끔 모두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 신학에 영향을 미치게 되면서부터 그렇게 흘러가게 되었습니다.
질문3) 모든 학문이 과학실증주의의 영향을 받아 관찰가능하고 반복 가능한 것을 학문으로 받아들이는데, 일반 학문과 신학은 어떻게 대화하고 변증해야할지 알고 싶습니다.
답변3) 그것은 이미 「그리스도인은 빛으로 산다는 것」에서 공부하지 않았습니까? 그 책을 읽고 다음 주에 스스로 말해 보십시오. 특히 거기에서 절대성과 상대성에서 이야기, 3장인가 그렇습니다. 제일 긴 챕터를 보면서 한번 저 질문에 대해서 다음 시간에 시간을 줄 테니까, 레포트까지는 안 내주니까 스스로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혹시 만일 “당신이 누구인가?” 물으면 아직까지는 탁 주고 싶은 책이, 「그리스도인은 빛으로 산다는 것」이 책을 주고 싶습니다. “당신은 뭐 하는 목사인가?” 물으면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책을 주고 싶고, “어떻게 해서 신학을 하게 되었습니까?” 물으면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책을 주고 싶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렇게 봅니다. 모든 이 세계가 창조되기 전에 먼저 논리적으로 하나님의 사유 안에 세계가 있었습니다. 있는 것들이 어느 한 순간에, 순간이라는 말은 웃기지만 어느 한 시점이 생기면서 시점과 함께 그 모든 사물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결국 거꾸로 이야기해서 빅뱅이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쾅’하고 터지는 순간을 기점으로 해서 물질이 몇 조분의 1초 사이에 어마어마한 공간이 이루어지고 이렇게 하면서 우주전체가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완성이 되었다고 보는데, 그것을 빅뱅이론이라고 한다면, 돌아가신 스티븐 호킹 박사가 생각한 것은 그러면 있는 모든 것들을 역으로 추적하면 빅뱅으로 들어간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결국 우리들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지성 속에 있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성 속에 있었다고 하는 것은 모든 사물이 관계없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강성경 전도사 안에도 어렸을 때의 우등상 타고 즐거웠던 기억부터 시작해서 시련의 아픔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런 모든 인간의 경험이 있는데 어느 하나도 연결되지 않고는 있는 것은 없습니다. 아무 상관이 없는 뜻밖의 사건이 일어났어도 내 안에서는 그것이 다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모든 사물을 만드셨을 때, 이 두 개가 작동하면 얘는 그냥 일본말로 이야기 하면 나가리입니까? ‘어, 그것 몰랐네. 그건 왜 있지?’라고 하나님이 하십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다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세계 모든 것들은 우리가 못 보니까 못 보는 것이지 다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것이 이성으로 설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전개된 것이, 그리고 자연에 관한 것이, 육체에 관한 것이, 그 다음에 세상에 관한 것이 일반 학문이고, 그리고 그것들이 신의 세계와 관련이 되어서 연구하는 것이 신학이고, 물질의 세계와 신의 세계와 상관없이 metaphysica(메타피지카), 사물 너머에 있는 것과 관련된 것. metaphysica과 physica(피지카), 사물을 너머서는 것과 사물 안에 있는 것을 연관지어서 설명하려고 하는 학문이 철학입니다. 그러니까 신학은 physica가 있고, physica위에 metaphysica가 있고, metaphysica 그 위에 모든 것을 움직이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그래서 사물을 그렇게 연결시키는 것이 신학이고 그 중간까지 연결시키는 것이 철학이고, 안에서만 뱅글뱅글 도는 것이 자연학입니다. 사회에 대해 연구하는 것이 사회학이 되는 것이고, 인간에 대해서 그렇게 연구하면 인간학이 되는 것이고, 심리에 대해서 연구하면 심리학이 되는 것이고, 병리에 대해서 연구하면 병리학이 되는 것입니다. 눈이라는 것에 국한해서 연구하면 안과학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과학이 발달되면서 정보의 양이 어마어마하게 많아지니까 이제는 함부로 여기에서 여기로 넘나들 수 있는 구조가 점점 어려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공부를 가르치는 사람을 만날 수도 없습니다. 그러한 상황입니다. 그러니까 병원에 한번 갔더니 여기가 아프다고 했더니, 여기가 이렇습니다. 그 아래도 아프다고 했더니, “거기는 제 소간이 아닙니다. 따로 진료 하세요”라고 합니다. 다리 하부학이 있고 다리 상부학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다리가 이렇게 있는데 상부전공과 하부전공이 다른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골반과 조인트만 전공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환자만 받습니다. 그러니까 이와 같이 되면 전문화는 될 수 있는데, 전체적인 것을 연결하는 것을 찾아내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질문4) 오늘날 동일한 기독교 사상을 가지고 있지만, 코로나19에 대해 서로 다른 윤리적 태도로 교회 안에 많은 갈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 속에서 사상의 문제와 윤리의 문제가 통합되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아는 것이 사상의 문제라면, 사는 것은 윤리의 문제이고 이 두 가지는 은혜 아래서 통합을 이루게 된다.”고 하셨는데, 이 두 가지가 은혜로 통합되어 가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알고 싶습니다.
답변4) 그것은 쉬운 질문인 것 같습니다. 몇 가지로 문장이 나누어집니다. 아는 것, 사상의 문제, 사는 것, 윤리의 문제, 은혜 아래에서의 통합의 문제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아는 것이 무엇인가. 아는 것. “아는 것이 사상의 문제라면”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무엇인가 하면 책 전체에서 무엇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까? 질문자! 기독교의 큰 기둥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기독교의 큰 힘을 형성하는 두 기둥이 있다고 했는데 무엇의 기둥과 무엇의 기둥이라고 하였습니까?
(사상의 기둥 ….)
또 한 가지 이야기 해 보십시오. 몇 번씩 설명한 바 있는데, 다른 사람 이야기 해보십시오. 두 개의 기둥, 사상의 기둥과 무엇입니까?
(사상과 윤리)
사상과 윤리, 그런데 이것을 아치로 이어지게 하는 것이 은혜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그 책의 골자입니다. 그러면 아는 데 사상이 될 수 없는 방식으로 사물을 아는 것이 문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라면을 어떻게 끓여야 맛이 있고, 맛 집이 어디이고, 어쩌고저쩌고 온갖 것을 다 압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상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어거스틴은 그것을 지식이라 보지 않았습니다. 지식이라는 것은 저렇게 인간을 잘 살게 하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디가 맛 집인지는 몰라도 인생을 잘 사는데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팔찌를 할까, 귀걸이를 할까, 그러한 것을 몰라도 인생을 잘 사는데에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결국 사상이라고 하는 것은 아는 것의 문제입니다. 알아야 사상이 생겨납니다. 알고, 그것을 아까 이야기 한 바와 같이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 안에서 이 지식이 어떤 위치에 차지하는지를 보면서 사상의 기둥을 세워가는 것입니다. 더 깊이 생각하고 더 많이 알고 어느 지식이 쓸데 없는 지식이고 좋은 지식인지 알면 이 신학의 기둥이 견고해질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사상입니다. 이것이 이어야지만 누구에게도 쉽게 휘둘리지 않습니다. 저 두 사람 이야기에 속삭속삭 하고나면 홀랑 넘어가서 그리로 가고,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어거스틴이 「삼위일체」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합니다. “내 책을 읽고 내 말이 맞다고 해서 제발 믿지 말아라.” 저자로서는 참 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아니, 반박할 수 없으면 그냥 믿습니다. 받아들여집니다. 끝까지 의심하라는 것입니다. 이미 데카르트 이전에 어거스틴이 한 이야기입니다. 쉽게 믿지 말아라. 그리고 비판할 수 있다면 비판해라. 그리고 내가 틀렸다면 너한테 도움을 받을 것이고, 네가 틀렸다면 나한테 도움을 받을 것이다. 만약에 내 원수가 나를 물어 뜯는다면 나는 진리 때문에 참을 것이고, 친구가 나를 비판한다면 그것이 옳다면 내가 친구보다 진리를 사랑하니까 내가 고쳐야 한다, 결국 우리 모두 유익을 얻자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혹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끝까지 의심을 해서 마지막에는 그것을 자기가 하나님 앞에 확실히 믿고 자기의 것으로 굳게 붙들 때, 그것만 사상이 됩니다. 주어들은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 다음에, 그렇게 알고 나면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떻게 안 살겠습니까?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저절로 그렇게 살게 되는 것이 아닌 모순이 느껴집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예를 들어서 내가 좌파적 사상을 가지고 있는데 아주 극우파적인 행동이 내 경제에 유익이 되기 때문에 그것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못 하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인간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사는 것 사이에 끊임없는 격차를 느끼면서 모순 내지는 위선을 자기 자신이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때 그때에, 어거스틴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알지 못하는 것은 사랑할 수 없다.” 그것은 데카르트의 말을 생각나게 합니다.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사유할 수 없다.” 조사해 보면 닮은 꼴이 굉장히 많습니다. “알지 못하는 것은 사랑할 수 없다.” 이것은 유명한 명언입니다. 어거스틴이 「삼위일체」에서 하는 말입니다. “알지 못하는 것은 사랑할 수 없다.” 결국 아니까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게 되면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정욕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살게 만드는 것이 진정한 사상이고 진정한 윤리이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은혜는 그 자체가 이미 알았고, 그리고 살고 싶어 하고, 두 가지를 한꺼번에 우리에게 가져다 줍니다. 그러면서 어거스틴이 이러한 이야기를 합니다. “왜 우리가 그러면 그렇게 하나님에 대해 알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물었습니다. 이제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무엇인가 알고자 함은 흐뭇하기 위함입니다. 흐뭇해진 다음에는 더 알고 싶어 못 견디게 되나이다.” 이것이 사랑의 특성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에 대한 지식은 섭취하면 섭취할수록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더 알고 싶게 만들어 줍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남은 시간을 지켜주시고, 우리와 함께 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