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장 변천하는 시대와 목회
녹취자 : 김세나
[선별질문]
질문1) 자신의 시대를 지배하는 현대 정신에 대한 탐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답변1) 누가 질문했습니까. 본인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질문을 하였을 때는 아니까 질문을 했을 것 아닙니까.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야기해 보십시오.
(질문자: 정말로 어떻게 해야 할지 궁금해서 질문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궁금증을 품게 된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현대 시대를 분석을 하고 그러한 것들에 대한 의견들을 내놓는데, 사람들은 어떠한 식으로 이러한 것들을 연구하고 토론을 하였는가에 대해 궁금하였습니다.)
저러한 고민을 하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까? 현대 정신이 왜 궁금합니까?
(질문자: 왜냐하면 설교를 하는 것이 그냥 어떠한 추상적인 하늘의 언어로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입장에서 이 세상과 상호 작용을 하면서 신자로서 살아가게 하도록 목회자가 해야 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을 파악하고 신학적인 지도를 해 줘야 하지 않은가 생각했습니다.)
그것을 현실적으로 그러한 고민이 생겨난 어떤 경우가 있었는가 묻는 것입니다. 언제 저 문제를 ‘빨리 알지 않으면 안 되겠다.’ 현실적인 고민의 계기가 있었습니까? 막연히 다른 사람이 이야기하니까, ‘저것이 맞는 건가? 나도 좀 이야기해 봤으면 좋겠는데….’ 그러한 것 말고 ‘진짜 이것을 모르면 안 되겠구나.’ 하는 경각심을 갖게 되는 무슨 계기가 있었습니까?
(질문자: 진지하게 경각심을 가져 보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현대 사상을 수없이 이야기를 해도 읽어봤자, 잘 이해도 못 하거나 두 번째, 너무 자기 자신이 익숙해 있어서 비판하기 힘듭니다. 그리고 진짜 요설꾼을 만나면 빨려 들어갑니다. 결국 그것을 현대 정신을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자기 신앙에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여러분들 이러한 이야기 하면 ‘교역자가 되었는데 무슨 신앙?’ 아닙니다. 폴 림이라고 반더빌트 신학교 교수로 있습니다. 아주 똑똑한 분인데, 우리 교회 와서도 설교 한번 한 적 있습니다. 중학교 때 미국으로 건너간 교수입니다. 영어도 아주 잘하고, 몇 년 전에 샌앤루이스 학교로 가려고 하였는데, 그런데 그 학교에 머물러 있게 되었습니다. 그 교수님이 충격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 학교가 조금 자유로운 학교입니다. 자기 학교 박사과정에, 석사까지는 복음주의적인 학교에서 잘 마쳤는데 박사과정에서 공부하다가 자유주의에 설득이 되어서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였습니다. 하는 이야기가 자기가 석사 과정에서는 그러한 학생들을 가끔 봤는데, 박사과정쯤 들어오면 그러한 것들이 확고해져 있기 때문에 안 버리는데, 그렇게 버리더라는 것을 굉장히 안타까워하면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목사도 설득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을 기각할 수도 있습니다. 포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두 개의 조건이 필요합니다. 첫째는 자기가 세상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먼저 검사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 그리고 심지어 자연의 모든 만물들을 보는 나의 관점이 무엇인가 그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이 확고한 만큼 그만큼만 현대의 사상을 비평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저 질문의 목표가 저 현대 사상에 동화되고 싶다는 것도 아니고, 아니면 나와 아무 상관 없이 그냥 영화 보듯이 보고 싶다는 뜻도 아닐 것 아닙니까. 그러면 자신이 먼저 확립되는 것만큼만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진지하게 물어보십시오. 나는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과 자연에 대한 통일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여러분들이 질문하였을 때 흐릿하면, 여태까지 살아온 삶, 설교 모든 것이 흐릿한 것입니다. 설교를 열심히 안 했다거나, 기도를 안 했다거나, 삶을 엉망을 살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또렷하지 않은 흐릿한 삶을 살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국회의원들, 정치하는 사람들을 보면 좌우가 딱 부러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말을 할 때 부드럽게 말하고, 때로는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지만 견해가 확고하게 자기의 인생관이 서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예 아무것도 없어서 계속해서 갈지자로 좌파, 우파, 돌아다니다가 인생 끝내는 사람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사람들이 다양하듯이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진중권 씨나 강철서신 하였던 사람들이 우파로 돌아섰다고 하지만, 기본적인 세계관은 변함이 없습니다. 아니, 그것을 좋다, 나쁘다, 그러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자신이 먼저 점검해봐야 합니다. 내가 늘 이야기 하지만, 그것을 그렇게 힘주어서 이야기를 하고 그게 없으면 안 된다고 이야기하는데, 사람들이 잘 못 알아듣습니다. 그런데 듣는 사람들은 금방 알아봅니다. 설교 한 편을 들어 보면 무슨 사상이 저 안에 있는가 추적이 가능해야 합니다. 더군다나 열 편 정도 들어보면 세상을 어떻게 보는지에 대한 견해가 나와야 합니다. 책을 읽으면 더더욱 너무 명료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을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의문을 던져 보는 것이 시작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러면 자기는 사상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 그리고 그것만큼 현대사상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가. 그래서 벌써 오래되었습니다. 2012년도에 썼으니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빛으로 산다는 것」 나는 그 때 하나의 대안이었습니다. 그러한 정신이 결국 핏줄처럼 확 퍼지면서 자양분을 공급하면서 현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심지어 음악, 인간의 복식, 인간의 음식까지도 사상이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그것들이 어느 한순간에 공부를 하고, 자기가 깊이 숙고를 하면 어느 순간 그것을 깊이 볼 수 있는 눈이 열리는 순간이 옵니다. 그 때에는 모든 사물, 영화, 예술, 심지어는 사회, 과학, 특별히 과학에 대한 해석, 이러한 것들을 볼 때 어떤 현대사상들이 지배하는가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남이 아는 사상을 달달달달 외워서 누구는 이렇게 떠들었다 저렇게 떠들었다 이야기 하는 것 가지고는, 그것 해서 밥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의미 있는 것이지만 우리같이 세계를 통합적으로 보면서 사람들을 인도하고 자신이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별로 의미 없는 일입니다. 괜히 쓸데없이 시간 낭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그렇게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선 아주 정확하고 좋은 전통적인 기독교 관점에서 끊임없이 세계를 분석하고 말하는 사람들의 글들, 정확한 관점에 서 있는 책들을 먼저 많이 읽고 소화해야 합니다. 프란시스 쉐퍼의 네 권으로 된 책 같은 것은 매우 읽기에 추천할 만한 책입니다. 그분이 전개한 이야기들에 대해서 100% 다 동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또한 개별적으로 들어가 보면 통합적으로 보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세부적인 테크니컬한 상황에 있어서 항상 테크니컬 학자들에게 미치지 못하니까 해석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그러나 그렇게 넓은 관점에서 세계와 이러한 것들을 본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쉐퍼 같은 사람의 책을 읽고 난 다음에 데이비드 웨일스의 책을 읽으면 조금 더 초점이 기독교로 옮겨 오면서 훨씬 더 명민한 것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마크놀이나 이러한 사람들, 그리고 최근에 나온 학자들은 별로 그렇게 친숙하지 않고 나의 관심사와 다르지만 그러한 사람들을 통해서는 전통적인 입장을 올바르게 하고, 그 다음에 현대 사상들을 보고 그사이에 철학공부를 하고, 그렇게 하면 됩니다.
질문2)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는 코나투스(conatus)를 ‘자신의 존재 속에 계속 머무르려는 노력’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자신의 존재 속에 머무르는 것’에 대해 알고 싶고, 이 개념이 그가 주장한 범신론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답변2) 아마 가장 혁명적인 사고를 하였던 사람 중 한 사람이 스피노자입니다. 지금은 이상하게 뉴에이지 시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도래하면서 이 사람이 어마어마한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론이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저도 아주 많이 읽어본 것은 아닌데, 사람들은 그가 철학자라고 알고 있는데 구두수선공이었습니다. 평생 자기 직업을 하면서 알바같이 철학을 해서 전 세계 철학계를 들었다 놓았다 한 것입니다. 우리는 풀타임으로 사역을 해도 들었다 놨다 못 하는데, 세상은커녕 교구도 잘 못하지 않습니까. 저 사람이 결국 파문을 당합니다. 당시에는 그의 사상을 1도 교회가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저 사람이 암스테르담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암스테르담에는 사상적인 관용이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와서 온갖 하고 싶은 말을 함부로 해도 되는 곳이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암스테르담이었습니다. 그래서 암스테르담에서 학문의 자유를 누리면서 좋게 말하면 기독교 사상을 그릇된 철학의 사상으로 물들이기도 하였지만, 문명사적으로 본다면 그렇게 해서 새로운 한 시대를 여는 원동력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코나투스라고 하는 것은 라틴어의 conator(코나토르)라는 데포넌트 동사가 있는데 의욕하다, 아니면 욕망하다, 노력하다, 애쓰다, 힘쓰다, try 정도 그러한, 갈망하다 라는 뜻도 있습니다. desire. 거기에서 온 단어입니다. 그래서 이제 코나투스에 대해서 해석을 잘 못 합니다. 그래서 코나투스라고 하는데, 어떤 학자는 ‘기분 좋은’이라고 번역합니다. 이것이 상당히 일리가 있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저기 보면 자신의 존재 속에 계속 머무르려고 하는 노력이라고 하였는데, 저 존재라는 단어를 보면서 토마스 아퀴나스나 어거스틴이 이야기하였던 존재개념을 떠 올리면 안 됩니다. 그것은 아니고, 저것은 뭐냐 하면 존재는 현실적인 존재 너머에 있는 것을 존재라고 보았습니다. 실존 너머에 있는 것이 본질이라 보았습니다. 저 사람은 그러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비유를 해 보겠습니다.
전 세계는 H2O로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H2O가 성해도 되고, 서리도 되고, 수증기도 되고, 물도 됩니다. 당연히 얼음도 됩니다. 그러면 H2O가 변형을 일으켜서 어떤 놈은 얼음으로, 어떤 놈은 수증기로, 어떤 놈은 성해로, 어떤 놈은 서리로 되어있습니다. 그것을 바로 세계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원천에서 형태를 가지고 있는 것이 존재인데, 그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자신의 존재를 그대로 유지하려고 하는, 쉽게 이야기해서 얼음은 얼음 그대로 있고 싶어 하고, 성해는 성해 그대로 있고 싶어 하고, 서리는 서리 그대로, 물은 물 그대로 있고 싶어 하는 말하자면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향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 성향으로 자기를 H2O로 되돌리려고 하는 모든 것에 저항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물개념과 아주 유사합니다.
그런데 어떤 철학자는 그것을 ‘기분 좋음’이라고 해석하는가? 예를 들어서, 기분 좋게 오늘 아내로부터 사랑한다는 이야기도 듣고, 아이들이 막 뛰어나와서 까치발 띄어서 뽀뽀도 해 주고 어쨌든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렇게 왔는데, 내가 별로 기분이 안 좋습니다. 그래서 담임 목사에게 예상치도 못한 이유로 대게 많이 혼이 났습니다. 그때 ‘코나투스’가 확 줄어든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게 아주 심하면 자신의 존재를 지탱하게 하는 힘들을 잃어버리면서 사람이 와르르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아침에 아이들이 까치발로 뽀뽀해 주고, 아내가 사랑한다고 안아준 것은 코나투스를 잘 보존하고 증진하는 것이고, 담임 목사가 괜히 이유도 없이 혼낸 것은, 이유가 없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부당하다고 생각해서 혼이 난 것은 코나투스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한 사람이 오우진 목사가 오우진 목사로 잘사는 길은 코나투스를 빼앗아가려는 상황은 될 수 있으면 피하고 코나투스가 많은 상황을 잘 간직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라 보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기독교적인 관점과는 많이 다릅니다. 코나투스 그 자체를 ‘기분 좋음’이라고 하는 것을 매우 우리와는 다른 입장에서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결국 세계의 모든 자연 그 자체가 신이라고 보았습니다. 그의 「에티카」같은 것들이 충격적이었던 이유가 그러한 세계관에 기초해서 쓴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에티카」를 읽고 나서 ‘아, 나는 이 책을 읽었다. 나는 비로소 어디든지 날아다닐 수 있는 빗자루를 만난 것이다.’ 옛날에 동화해서도 보면 마녀들이 빗자루 타고 어디로 가자고 하면 막 빗자루가 가지 않습니까. 그것처럼 여태까지 나를 도덕적으로 너가 잘못했다 잘못했다 이렇게 얽어매던 모든 기준들을 벗어 버리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범신론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 할 때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세계가 신이라면 자신의 존재는 그것으로부터 일시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것이고, 다시 그리로 돌아갈 텐데 자신으로 존재하려면 그 코나투스가 풍부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질문3)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진리를 이해하기 위한 기초로써 인식대상인 사물을 ‘향유(frui)’하는 것과 ‘사용(uti)’하는 것의 정확한 차이가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답변3) 향유한다고 하는 frui, 사용한다고 하는 uti, 이것은 말하자면 ‘에쎄’같이 to-부정사입니다. 그것이 이제 여러분들은 잘 모르는 단어이겠지만, 영어에 fruition(프루이션)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똑같이 enjoy, 즐기는 것으로 번역을 가지는데 그러한 고차원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그래서 향유하는 것과 사용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향유는 향유라고 번역하였지만 사실은 저는 번역이 썩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누림’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누려봐!”라고 말하는데, ‘누림’이라고 번역하고 싶습니다. ‘누림’과 ‘사용’인데, ‘누림’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어떤 것을 매우 좋아하고 그것 때문에 즐거운데 그것을 이용해서 도달하려는 목표가 더 이상 없는 것, 이것이 ‘누림’입니다.
제가 설교 시간에 가끔 이야기하지만, “자기는 왜 날 사랑해?”라고 이야기할 때 “너희 아빠 돈 많잖아.” 그렇게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자신이 사용의 대상이 되고 싶지 않고, 향유의 대상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도 처음에는 고민을 합니다. 향유의 대상이 누구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초창기에는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 그리고 인간을 사랑하는 것도 그것을 위한 수단일 뿐이라고 정리를 하다가 나중에 훨씬 성숙해지고 목회도 하고 그러면서 수정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수정하는가 하면, ‘향유’는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이 있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 그 사람 안에 있는 상황을 가정하였을 때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사람을 향한 사랑이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면 그 안에 형제 말고 누가 있겠습니까. 형제를 진짜로 사랑하면 하나님 말고 그 안에 누가 있겠습니까.” 이러한 말로 통합을 이룹니다. 그래서 벌써 달라진 것입니다.
어거스틴의 고민이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 지는데, 처음 회심했을 때 31살 때입니다. 회심하고 나서 초창기에는 이성과 신앙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가, 그것을 변증하는 것이 그의 대부분의 노력이었습니다. 그리고 훌륭한 일을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2기에 히포의 주교가 된 후에 관심사가 교회로 옮겨집니다. 제가 쓴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과 같은, 물론 내용은 다르지만 당연히 다르지만, 내가 어거스틴의 내용을 배낀 것은 아니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어거스틴의 사상을 받은 것이기는 합니다. 관심사가 교회로 옮겨집니다. 그래서 교회와 어떻게 연관되는가. 사람들은 혼자 한 것이 아니라 그 세대에 앞서갔던 터툴리안이나 이레네우스 같은 사람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탁월한 능력이 있으니까 그것들을 자기가 소화해서 새롭게 진출해 낼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해낸 것입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아우구스티누스를 최고의 스승으로 삼으면 여러분들의 인생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풍요로워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청교도들을 좋아하지만 청교도들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번에 13일에 책을 쓰기 시작해서 18일에 마쳤습니다. 초고를 보냈는데, “내 인생을 바꾼 8문장”, 어거스틴 편입니다. 어거스틴에서 8문장을 뽑아서 썼는데, 아주 행복하게 썼습니다. 이견을 보고 있는데, 어거스틴을 만난 것은 저에게 큰 선물입니다.
그래서 ‘향유’는 더 이상의 목표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제 ‘향유’입니다. 그 ‘향유’의 대상은 하나님 한 분 뿐이라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용’하는 것은 말하자면 이러한 것입니다. 성경을 읽기 위해서 히브리어를 사랑한다. 성경을 읽기 위해서 그리스어를 공부한다. 그리고 다니엘서를 읽으려고 아람어를 공부한다. 그래서 공부를 하는데 공부하는 것이 너무 좋다. 그것이 이제 좋아하는 것, liking인데 그것이 바로 사용입니다.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부터 도달하고 싶은 더 나은 목표가 있는 것입니다.
최근에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울증에 걸려서 거의 자살에 가기까지 힘들어하던 사람이 트로트테라피를 했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에도 그런 분들이 꽤 여러분 있는 것 아십니까? 권사님, 집사님 중에서 트로트테라피 한다고 합니다.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까? 그러면 안 됩니다. 양 떼들의 형편을 살펴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집에서 틀어놓고 들었는데 생전처럼 트로트의 묘미에 빠지는, 그러면서 우울증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실제로 뮤직테라피에서 사용하는 음악은 클래식이나 이러한 그것뿐 아니라 굿거리장단부터 시작해서 판소리, 심지어 트로트, 어린이동요까지 다 사용을 해서 그것을 우월성을 가지지 않고 그것을 가지고 사람들의 상태를 가지고 심리적으로 다 분석을 해서 사용을 합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서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서 트로트를 듣는다고 할 때 이것은 사용입니다. 여러분 가만히 보면 이용당하고 싶은 사람 있으면 손들어 보십시오.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는 이용당하고 싶지 않은데 그런 사람들이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을 이용하고,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그래서 결국 인간의 불행은 ‘향유’해야 할 하나님은 이용하고, 하나님을 ‘향유’하기 위해서 ‘이용’해야 할 것은 ‘향유’하려고 할 때 인간의 삶은 매우매우 추악한 삶이 됩니다. 이 정도로 하겠습니다.
질문4)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을 앞선다’고 했습니다. 그에게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결정되지 않은 본질을 선택하며 자신의 실존을 결정해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목사님께서 말씀하시는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삶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듣고 싶습니다.
답변4) 우선 저 질문에서 교정해야 할 것은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결정되지 않은 본질을 선택한다.”고 하였는데, 저 사람들은 저런 말을 안 씁니다. 본질 자체에 대해서 궁금해하지도 않고, 알려고도 하지 않고 알 필요도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실존철학자들을 기점으로 해서, 물론 그것이 실존주의자들이 처음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예전서부터 있었던 것이지만, 어떤 유명론 같은 것의 변형을 우리들은 보게 됩니다.
이러한 것입니다. 그 사람들의 출현을 기점으로 해서 관심이 예전에는 ‘존재’가 관심이었습니다. 그리고 예를 들자면, 헛개수가 여기에 있습니다. 여기는 물이 있습니다. 저기는 암바사 같은 것이 있고, 다양한 것들이 있습니다. 다양한 것들을 보면서 이것들은 전부 다 우리를 속이는 것은 이것의 본질적인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본질에 이것은 헛개가 추가되었고, 이것은 우유가 추가되었다, 등등 이러한 식으로 사고를 하였는데 이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관심사가 존재자를 밀치면서 존재를 탐구하였다면, 이 사람들은 존재를 밀치면서 존재자를 탐구하는 것입니다. 존재에 관심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자에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존재자’라고 하는 것이 아까 똑같이 ‘존재’가 만일 H2O라면 ‘존재자’는 얼음이듯이 그렇게 심오한 본질의 존재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 안에서 그것으로써 있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들은 ‘실존’이라고 이야기합니다. existence, existentialism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이유가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렇게 놓고 보면 이 사람들은 어떤 거대담론을 다 필요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자기가 누구인지 뿌리를 캐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체적으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자유로운 존재로서 살아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자유의 개념을 실존주의자들은 도덕적 근거가 모두 사라졌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바를 따라서 자신이 의미를 밖에서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의미를 부여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시몬느 드 보봐르 아실 것입니다. 시몬느 드 보봐르와 사르트르가 60년대에 계약 결혼을 합니다. 전 세계에 어마어마한 충격이었습니다. 결혼을 하는데, 계약결혼을 하였습니다. 계약서를 보면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부부로서 살아가지만 그러나 절대 마누라 노릇 안 하고 영감노릇 안 하기로 다짐을 합니다. 사르트르가 엄청나게 바람을 피웁니다. 그러할 정도로 매력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능력 있는 유명 인사였으니까, 여학생들도 많이 따라 다니고 그랬습니다. 그때마다 부부싸움 비슷한 것을 하였습니다. 그때마다 사르트르가 두드리면서 일깨워줍니다. “잊지 말아라. 너는 내가 마누라가 아니라 우리는 계약하였을 뿐이다. 너는 여기에 하등의 권리가 없다. 나는 내 마음대로 살 것이다.” 엄청나게 바람을 피웁니다. 시몬느 드 보봐르도 비슷하였습니다. 천재들의 삶을 들여다 보면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엄청난 무질서, 그리고 바이런 같은 사람의 경우에는 어렸을 때 그 사람을 굉장히 좋아했었습니다. 바이런 같은 사람은 얼마나 멋있게 생겼는지 그 사람의 모습을 보고 여자들 여럿이 졸도를 했다고 합니다. 우리 류요한 목사 같이 생겼나? 그런데 졸도는 안 하지 않았습니까. 졸도를 하고, 장례식 때는 수많은 사람이 까무러쳤습니다. 그런데 행복했는가 하면, 그것이 무슨 행복이겠습니까. 죽을 때까지 방탕하게 살았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가 하면, 끊임없이 자유다, 모든 것이 자유라고 탁 내던져졌을 때 그때에 인간이 마지막에 가는 길은 욕망의 노예가 사는 길밖에 없습니다. 천재들의 삶이 대부분 다 그러했습니다. 헤밍웨이도, 아서 밀러도 마찬가지이고 다 불행한 삶을 살았습니다. 마를린 먼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케네디도 역시 그러했습니다.
마지막 결론적으로,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삶’이 무엇인가 했을 때, 어제도 글을 쓰다 말았는데 진짜인 나와 가짜인 내가 내 안에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놀랍게 가짜인 나에 너무 익숙해져서 진짜인 내가 낯설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 인간은 그만큼 주체적인 삶을 못 삽니다. 아무리 빛나는 사상이 있고, 아무리 탁월한 식견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이 순간순간 욕망의 노예가 되어서 모든 것을 자기 욕망 중심으로 판단해 간다고 하면 우리들이 그 사람을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신뢰할 수 없습니다. 플라시도 도미노의 사태라든지 그 다음에 언더시즈에 나오는 사람 누구입니까? 스티븐 시걸을 이야기하는데, 다 그러면 뭐 지난번에 나왔던 할리우드 비화 같은 것들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고 수없는 것들이 나오는 것은 결국 하나님 없이 자유롭게 살려고 몸부림치면 칠수록 마지막에 속박받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욕망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재벌 2세, 재벌 3세들이 예외 없이 프로포폴과 마약에 빠지고 있지 않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모든 것을 다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면 마지막에는 극단적으로 약물 같은 것들을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올더스 헉슬리 같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어제도 보니까 존 스튜어트 밀이 자신의 「자유론」에서 칼빈을 막 짓밟습니다. 말하자면 칼빈같이 비정한 인간은 없다는 식으로 묘사를 합니다. 그것을 보면서 ‘틀렸다. 칼빈을 이해를 못 했다.’ 생각합니다. 참으로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비결은 뭐냐 하면, 거짓된 나를 미워하고 참된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나는 하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에 매몰되어서 영원의 눈으로 사물을 파악할 수 없게 될 때, 그때 인간의 열정은 갈 길을 잃게 됩니다. 둘 사이의 균형을 잡는 것이 매우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장자에 보면, 장자 제6편의 대종사편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사생자불사 생생자불생” 사생자불사, 여기에서 ‘생’은 여러 가지로 번역이 되는데 나는 이생이라 봅니다. 이생을 죽이는 자는 ‘불사’-안 죽고, ‘생생자’-이생만 살려고 하는 자는 ‘불생’-못 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도 너무나 비슷하지 않습니까. 그것을 벌써 그 사람들은 다 꿰뚫어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위 이야기 하는 호전몽이라고 하는 장주가 꿈을 꿨는데, 꿈에 나비가 되었다, 나비가 날아다니는데 ‘내가 장주인가, 장주가 나인가.’ 꿈을 깼다. ‘꿈에서 내가 현실로 돌아온 것인가, 현실에 있다가 꿈을 꾸는 것인가.’ 경계가 무너진 사유들을 언급하는 이유도 결국 우리의 삶이 상대적인 것을 아는데서 사태를 파악할 수 있는 진리가 온다고 보는 것입니다.
복습해 보겠습니다. 지식이 뭐라고 하였습니까? 시간적 사물에 대한 이성적 인식입니다. 지혜가 무엇입니까? 영원한 사물에 대한 오성적 인식입니다. 현실을 살아가려고 하면 지식이 없으면 안 되고, 의미 있게 살려고 하면 지혜가 없으면 안 됩니다. 문제는 뭐냐 하면, 두 개가 서로를 방해하는 측면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계속해서 시간적 사물을 보고 인식하고 하면서 자꾸 이쪽 손을 붙들고 내가 지금 벼랑 끝에서 무엇을 줍는데, 줍는 것에 열중을 하다 보면 이 손을 놓고 싶은 것입니다. 놓으면 더 멀리 갈 수 있을 것처럼, 연을 띄워서 줄을 끊어버리면 더 멀리 날아갈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너무 꽉 잡고 있으면 이것을 주울 수가 없습니다. 이 가운데서 긴장관계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결국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지혜를 갖는 것입니다. 지혜를 갖는 길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신국론」 제8권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Si sapientia Deus est, 만약 지혜가 하나님이라면, verus philosophus est amator Dei 진정한 철학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거기에서 철학자라고 하는 것은 오늘날의 형형한 말솜씨로 사람들을 호리는 그러한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자-지혜를 가지고 모든 것들을 보는 그러한 의미에서의 사상의 관점을 가진 사람들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자기 자신이 가장 주체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한 인간으로서 완벽한 주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습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것을 그대로 한번 예수 아닌 사람이 거의 그와 흡사하게 구현해 본 장면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것은 자기 상식 안의 상태가 아니라 자기가 가장 훌륭하게 살아있는, 가짜인 자신이 없는 그러니까 자신과 예수 그리스도가 말하자면 혼연일체가 된 것 같은 완벽한 일체를 이루는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웬에게 이야기하라고 하면, “mortified state” 완전한 죄 죽임이 이루어진, 완전하다고 해서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죄 죽임이… mortified christian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죄가 거의 다 죽은 그리스도인, 그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질문5) 많은 현대인들은 이미 세상의 자유에 영혼이 지쳐 있고 쾌락으로 달래도 영혼이 참된 고향을 떠나 방황하는 고통을 완전히 위로할 수 없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에서 “그리스도께서 교회 안에 임재하시며 질서를 따라 일하시고 신자는 그 질서를 따라 자신을 교정, 수정해 간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질서를 따라가게 되는 성도의 삶과 마음이 결국 교회를 통해서 영혼의 참된 고향을 경험하기 때문은 아닌지 궁금합니다.
답변5) 대충 질문한 것이 맞습니다. 우선 저 책을 읽었다는 것을 칭찬해 주고 싶고, 그 페이지만 읽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두 번째는 교회를 통해서 영혼의 참된 고향을 경험하였다기 보다는 교회에서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위에 크게 써져 있는 인용구를 보면,
“그리스도께서 교회 안에 임재하시며 질서를 따라 일하시고 신자는 그 질서를 따라 자신을 교정, 수정해 간다.”
“그리스도께서 교회 안에 임재하시며” 이것은 모를 것이 없습니다. “질서를 따라 일하시고” 당연한 것입니다. 그 질서가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계시되었는데, 그 질서는 어떠한 질서인가 하면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할 때 이루어지는 질서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한편으로는 당신을 사랑할 수 있게 하셔서 그 질서로 돌아가게 하시고, 또 한편으로는 그 질서대로 안 사는 사람들은 꾸짖으시고 바르게 하셔서 다시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저기에서 이야기 하는 ‘질서’라는 것이 결국 사랑의 질서입니다. 사랑의 질서를 따라서 결국 교회가 자신을 수정하고 교정해 갑니다. 무엇을 수정해 가고 교정해간다는 것입니까? 그 사랑의 질서를 따르지 않고 자기 사랑의 질서를 따르는 것을 수정하고 교정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가 사람을 바르게 합니다. 욕망이 사람을 그릇되게 합니다. 욕망은 인간을 그릇되게 하고 은혜는 그 사람을 바르게 합니다. 그래서 사랑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수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