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장 불변하는 진리와 신학
녹취자 : 김세나
[선별질문]
질문1) 그 시대의 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대적 분위기와 사상 전체를 종합적으로 조망하면서 탐구해 나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부적으로 각 시대의 신학들을 공부하면서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들에 대해서는 후편에서 제시하겠다고 해 주셨는데, 후편을 기다리는 저희들에게 약간의 힌트를 주실 수 있을까요?
답변1) 많이 주겠습니다. 지금 제가 저의 계획이 막 「내 인생을 바꾼 어거스틴의 여덟 문장」책을 마쳤는데, 제목은 그렇게 나오지 않겠지만, 제목은 출판사와 고민하고 있습니다. 12월 안에 김영사에서 책이 나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제목을 생각하고 있는데, 어쨌든 그렇게 책이 나오고, 제가 바로 그 원고를 던져 줬기 때문에 지금 원고를 쓰는 것이 어거스틴의 삼위일체 주해입니다. 1권의 절반쯤 썼는데, 그것부터 마무리를 하고, 그것을 마무리 하자마자 곧바로 신나2 원고 작성해 놓은 것을, 초본은 작성되어 있는데 그것을 정리해서 나가야 합니다.
제가 그 책에서 그 두 가지로 설명하겠다고 하였는데 첫째는 신학공부가 무엇이고, 소명이 어떤 것이고, 어떤 방식으로 신학공부를 해야 하는가, 그것을 이야기 하겠다고 하였는데 그것이 1권에서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2권, 3권 두 권 사이에는, 원래는 두 권으로 하겠다고 하였는데 두 권으로 안 될 것 같아서 세 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2권은 이제 신학공부를 위한 준비, 어떻게, 무엇을 공부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다룹니다. 첫 번째 시작이 신학을 위한 사전공부해서, 문학, 역사, 철학, 과학 등에 대한 이야기가 있고, 그 다음에 속사도 교부시대와 교부시대에 대한 공부, 주요인물인 테르툴리아누스와 이레네우스, 그 다음에 어거스틴이 나오고, 그 다음 중세로 들어가면서 중세신학자들에 대해서 나오고, 그 다음에 중세시대 끝이 나면서 르네상스 시대 이야기가 나오고, 마르틴 루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중간에 중세신학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마지막에 르네상스와 기독교 인문주의 운동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마지막에 마르틴 루터가 나오는 것으로 2권이 끝이 납니다. 그리고 마르틴 루터 이후에 칼빈과 같은 종교개혁 2세대 블링거와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시작을 해서 17세기 개혁파정통주의, 존오웬, 18세기의 이성주의와 합리주의 이후의 조나단 에드워즈, 그 다음에 19세기, 20세기 위대한 신학자들, 현대사상, 현대신학자들에 대한 이야기로 3권이 끝납니다. 우선 2권 먼저 쓰고, 원고 초고는 썼습니다. 만지는데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습니다. 짧은 질문을 길게 대답하였습니다. 2번 하겠습니다.
질문2) 구속사적 설교 방법론자들의 방법을 비판했던 ‘상위 종합 이론(higher synthesis theory)’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답변2) 책에 다 나와 있기 때문에 반복할 이야기도 필요 없겠지만, 구속사적 설교는 이제 하나의 자유주의신학에 대한 하나의 반동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러면서 이제 두 가지, 한편으로는 자유주의자들의 신학이 발전하면서 그리스도의 구속이라는 것을 전달하는 중요한 스토리 구성으로서의 설교에 대한 평가를 낮게 하기 시작하였고, 그러면서 알다시피 문서설부터 시작해서 온갖 성경에 대한 고등비평들이 난무하면서 사실 성경 자체가 의심스러운 덩어리로 받아들여지게 되었고, 그러면서 19세기에 일어났던 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으면서 윤리적인 설교로 돌아서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다보니까, 당연히 반발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의 구속, 이러한 것들이 중심이 되어야 하는데, 복음들이 전부다 설교 강단에서 밀려나니까, 그래서 구속사적 설교 방법론이 등장하게 됩니다.
저도 홀베르다의 책을 많이 못 읽었는데, 스킬더의 책은 읽었는데 정말 대단합니다. 읽을 때, ‘야, 이게 설교구나.’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정말 굉장합니다. 번역이 되었는지 모르겠는데, 「Suffering Chist」라고 “고난당하신 그리스도”라고 하는 책인데, 두껍습니다. 설교집인데 읽으면 설교집이라는 느낌이 안 들고 신학 책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였습니다. 무엇을 설교를 해도 그 속에서 구속을 찾아내었습니다.
그러한 요인이 하나 있었고, 또 하나는 어떠한 요인이 있었는가 하면, 자유주의의 놀이터에 떨어진 폭탄이라고 해서 칼 바르트의 로마서주석부터 시작해서 칼 바르트의 저작활동이 시작되었는데, 칼 바르트는 성령을 이야기 하고, 그리스도의 구속을 이야기 하는데, 당시 유행을 하던 실존주의적인 해석이었습니다. 아주 쉽게 이야기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진짜로 동정녀 탄생을 하였는가, 진짜로 부활을 하였는가, 진짜로 십자가에 못 박혔는가?, 이러한 질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그 분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달려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신앙과 역사가 점프를 합니다. 그것을 초역사라고 이야기 하는데, 그래서 이제 벤틸과 같은 사람이 비판을 많이 하였습니다. 양면성을 함께 생각해 보면 이쪽 정통주의 신학을 가진 신학자들에게는 아주 말도 안 되는, 근본적으로 계시와 역사를 분리해서 우리의 믿는 신앙 자체를 허공에 띄어버린 사람이라고 비난을 할 수 밖에 없지만, 그러나 저쪽 자유주의자들 입장에서 보면 이미 다 신학적으로 패배한 주제인 예수 그리스도와 구속, 이러한 것을 신학의 주제로 끌고 오고 성경을 다시 신학의 중심으로 끌고 왔다고 하는 점에서는, 그래서 그것을 가리켜 신정통주의라고 부릅니다. ‘신’이라고 하는 이름이 그러한 의미, ‘새로운’이라는 의미로 붙은 것입니다. 지금 현재로 보면 유럽은 전체적으로 신정통주의가 승리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정통주의를 따르는 사람들을 복음주의라고 부릅니다. 화란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구속사적 설교의 방법론의 동기에 대해서는 깊이 동의는 하였는데, 헤르만 바빙크 같은 사람은 저기에 동의를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박사과정에 있을 때 시간이 있어서 자세히 공부를 해 보았는데, 무엇을 설교해도 거의 다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이야기 하는 것이 뭐냐 하면, 모든 성경이 그리스도를 증거 한다고 봅니다. 그러면 어떤 것을 찾아도 구속사건과 연결을 지어서 이야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잠언의 한 말씀을 찾는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러니까 설교 할 수 있는 본문이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 자체로만 보면 굉장히 웅장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방식으로 모든 설교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려고 애를 쓰다보면 상당한 알레고리칼한 해석이 동원이 됩니다. 그래서 옛날의 전통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 구속사적 설교 방법론이 나오기 전에도 이미 저러한 문제를 다 해결을 하였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소위 이야기하는 ‘higher synthesis’입니다. ‘synthesis’는 ‘종합’입니다. 보다 높은 상위의 종합이론이라고 하는데, 저 용어를 주목해 보십시오. 이론이라는 말은 이해 못할 것이 없고, ‘상위 종합’이라는 말이 무엇인가 생각해 볼 때에 하위에는 굉장히 사건과 도덕적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을 통제하지 않고 내버려두면 자칫하면 도덕주의적, 윤리주의적인 설교가 되어 버립니다. 그런데 그것을 해석할 때 저 위에서 그것을 종합해 주는 통합 명제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성경 전체가 핵심적인 관심이 그리스도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고, 인간이 타락하였는데, 그리스도로 구원하시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만물과 인류가 완성되어 간다고 하는 이 커다란 말하자면 창조, 타락, 구속, 완성이라고 하는 커다란 구도 속에서 흘러간다고 하는 염두 해 두면서 항상 그것에 통제를 받으면서 그 아래의 성경이 다루는 다양한 교훈과 이러한 것들을 해석들을 통제해 나간다고 하는 이론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이 훨씬 더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결국 구속사적 설교 방법론자들이 보는 성경에 관한 관점을 반대하는 게 아니라, 모든 성경이 똑같은 깊이의 구속계시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층이 깊은 데가 있고, 그 층이 얕은 데가 있고, 다양하게 나오는데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모든 것이 연결되어서 결국 하나의 구속사적 스토리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에서 통제되어야 한다, 그래서 윤리를 가르침에 있어서 그 윤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구속과 관련이 된다고 하는 것을, 이 세상에서 윤리적으로 삶으로써 이루어지는 그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와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계속 긴장관계 속에서 통제하면서 해석해야 한다고 하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한 물 가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신대원 다닐 때 그렇게 설교한다고 하는 사람 몇 사람 있었는데, 들어보니까 별 내용이 없었습니다.
요즘 이제 다시 잠언을 설교 하고 있습니다. 잠언도 사람들이 보기에는 도덕적인 설교가 될 수 있겠다, 단순히 처세술에 대한 설교일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데 이해를 올바르게 해야 합니다. 그것은 사랑에 대해서 다루는 것이 아가서이고, 같은 말하자면 지혜문학인데, 아가서는 사랑에 대해서 다루고 있고, 전도서는 인생의 허무에 대해서 다루고 있고, 잠언은 태도에 대해서 다루고 있으니까 이것이 삼중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입니다. 저의 이해입니다. 정 가운데에 아가서가 있고, 맨 가장자리에 전도서가 있다면, 이 가운데에 잠언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인생의 허무함, 죽음과 맡 닿아 있는 것이고, 이것은 삶과 맡 닿아 있는 것이고, 이것은 사랑과 맡 닿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그리스도를 뜨겁게 사랑하는 교회가, 인생이 이렇게 허무하다는 것을 알고, 그때까지 가는 동안에 삶의 태도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에서 가르치고 있는 도덕적인 삶을 딱 잘라내서 그것만을 캐내서 그것만을 설교하면 구속사적 설교하는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타락한 설교의 형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잠언에 나오는 많은 교훈을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살아갈 때에 어떠한 삶의 질서를 이루게 되는가,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그것이 바로 잠언에 나오는 교훈입니다. 그 질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질서는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이웃을 사랑하는 것과 나누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 주 설교를 예를 들면, 어느 한 사람이 너무 게을러서 밭이 풀로 뒤덮이고, 포도원은 돌담은 다 무너지고 가시덤불로 뒤덮였습니다. 풀이 우거지고 가시덤불로 뒤덮이고 돌담도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가난하게 살게 되는구나, 그러므로 그렇게 하지 말자. 그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그 게으름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정신이 사라진 사람으로 보는 것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정신이 사라지면, 욕심에 의한 지배를 받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게으른 것도 욕심 때문에 게으른 것입니다. 자신이 편안하게 살고 싶다고 하는 욕심 때문에 게으른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결국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질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을 보면서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는 사람임을 확인해라, 그래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라, 그렇게 설교가 이어져야지만 잠언 설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띄어 내면 처세술 강의와 비슷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 문제 3번 하겠습니다.
질문3) 기독교 강요는 역사적 문맥 안에서 출간된 책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사회적 문제나 정치적 문제로 인해 보편교회 안에서 다른 의견과 분열이 적지 않게 발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시기에 꼭 알맞으면서 공부해야 할 도서를 추천해 주신다면 어떤 것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답변3) 내가 이 책을 쓴 지 상당한 시간이 지나 많이 오프 되어 있고, 관심사가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하였는데, 오늘날은 기독교 역사를 전체적으로 보면서 자기 시대에 대해서 평가하는 안목이 있는 책들 보다는 분석적인 책들이 훨씬 더 많이 나옵니다. 또 어떤 사람이 안목을 가지고 정리를 하여 책을 내 놓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나의 견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그것을 열광한다고 해서 내 견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최종적으로 여러분 자신이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지도자로서만이 아니라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주체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내가 이번에 쓴 책에서도 이야기 하였지만, 자기 자신의 인생이 아닌 것은 발로 걷어차라, 그리고 자기의 인생을 살아라, 그런데 걷어찰 때 조심해라. 깡통인 줄 알고 찼는데 돌부리 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걷어차는 것은 좋은데, 잘 걷어차야지 깡통인 줄 알고 걷어찼는데 그것이 돌맹이면 발가락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주인 잘못 만나서 개고생이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판단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폭넓은 지식을 가지고 안목을 넓혀 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라던 시기에는 목회하던 시기까지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여러분 만나서 교제를 해 보는데, 데이비드 웨일즈 만큼 복음주의에서 그렇게 폭넓게 현대를 보는 눈을 열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은 연세 드셔서 사람들이 그 분의 책을 안 읽을지 모르겠지만, 아직까지도 굉장히 그분의 삼부작은 꼭 읽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사회를 보는 안목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신학실종, 윤리실종, 위대한 그리스도. 삼부작 이후에 나온 다른 책들도 여러분들이 읽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의 눈을 열어 주었던 것은 프란시스 쉐퍼 시리즈입니다. 그는 웨일즈 보다 훨씬 더 폭이 넓습니다. 처음에 책을 읽으면서 계속 위키피디아를 찾아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주의 권에서 그만큼 그 시대 웨스터민스터 출신으로서 그렇게 열어준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쉐퍼 시리즈가 나와 있습니다. 상당히 우리의 눈을 열어주는 책이라 봅니다.
그 다음에 마크 놀 과 같은 사람의 책들도, 그 분의 성경관은 우리와 다르지만, 데이비드 웨일즈와 프란시스 쉐퍼는 우리와 아주 똑같습니다. 그런데 마크 놀만 해도 성경의 축자영감 같은 면에서 우리와 의견이 다릅니다. 그가 개진하는 현대사회에 대한 진단과 특히 현대교회 안에 있는 지성을 무시하는 경향에 대한 경고는 우리들이 깊이 들을 만합니다.
이것도 제가 이야기 하는 것은 그냥 한 사람을 읽으십시오. 이 사람이 한 이야기 한 권, 저 사람이 이야기 한 권해서 여러분들이 그것을 다 종합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 좋은데 종합할 능력이 있으면 사실은 그렇게 많이 읽을 필요도 없습니다. 한 권 놓고 쭉 목차와 군데군데 넘기며 보아도 무엇을 이야기 하는지 훤히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빨리 읽을 때에는 하루에 한 열권씩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판단이 잘 안서면, 이 사람이 잘 이해를 못하면 이해를 못해서 모르고, 빨려 들어가면 이 사람 말에 꼬여서 빨려 들어가고, 이렇게 복잡하게 됩니다.
어느 신학교에서 제대로 된 신학교에서 공부를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명세기 총신에서 박사과정을 공부를 했는데 그 사람이 베니 힌에게 푹 빠진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베니 힌을 극찬하면서, 그는 사기꾼입니다. 진짜 엉터리입니다. 그러한 게 나오는 이유가 판단력이 없는 가운데 어느 한쪽에 꽂힐 때 그러한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쉽게 믿지 마십시오. 어거스틴의 말을 따라서 그대로 말을 하자면, 내 책도 믿어지지 않거든 믿지 마십시오. 믿어진다면 왜 믿어야 하는지 끊임없이 물어 보십시오. 그리고 공감을 표시하면 받아들이십시오. 의심하는 데까지는 의심하면서, 그러니까 추종자를 원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자기 판단으로 판단을 해야지, 누구 말이라고 해서 깃발 달고 따라다닐 그러한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소개한 저자 세 분에 대해서 읽으려고 하면 한 6개월은 읽어야 할 것입니다. 자꾸 무슨 책 무슨 책 물어보지 말고, 닥. 읽. 닥읽이 뭔지 아십니까? (닥치고 읽으십시오.) 다음 문제 하겠습니다.
질문4) 지성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안에서 가장 명정하고 활발하다고 하셨습니다. 이 문장의 의미를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답변4) 제가 반대로 질문을 하겠습니다. 사람이 뭔가 사랑하지 말 것을 욕심이 끌리고 사랑을 하게 되면 마음이 흐트러집니까, 안 흐트러집니까? 예를 들어서 내일이 중간고사인데 게임에 빠졌습니다. 마음이 흔들립니까, 안 흔들립니까?
(흔들립니다.)
답이 된 것입니다. 올바른 대상을 뜨겁게 사랑하면 그만큼 명정하게 됩니다. 그래서 ‘명정’과 ‘명징’하게 되는 것입니다. ‘징’은 청징하다고 할 때, ‘맑고 깨끗하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우리의 영혼은 하나입니다. 하나의 영혼 안에 지성의 기능, 감정의 기능, 의지의 기능이 있습니다. 그래서 영혼의 상태가 어떠하냐에 따라서 영혼의 기능에 영향을 줍니다. 그런데 그 영혼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영혼이 될 때, 그때 사랑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게 되고, 그렇게 되면 마음 안에서 작용하는 지성과 감정과 의지, 이러한 모든 것들이 아주 명정하게 됩니다.
명정하게 될 때 순서가 있습니다. 제일 먼저, 지성이 제일 큰 형입니다. 그 다음에 감정이 둘째 형이고, 의지가 막내입니다. 큰 형이 전달을 합니다. 저것은 정말 좋은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감정이 형(지성)의 이야기를 듣고 받아들이면서 그것을 싫어하는 정서를 갖게 됩니다. 그러면 당연히 의지는 그것을 행하지 않거나, 거기로부터 멀어지는 결정을 합니다. 그리고 그 결정을 하고 나면 동생(의지)의 결정 때문에 큰 형(지성)은 더 분명해 집니다. 그런데 이것이 영혼이 다른 것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병 들었습니다. 그러면 큰 형(지성)이 형으로서의 역할을 못합니다. 사실은 진짜 나쁜 것인데, 형(지성)이 좋다고 말합니다. 감정이 ‘아, 내가 저렇게 해야지.’ 뜨거워지게 됩니다. 그렇게 전달되는 정도가 아니라 이게 하고 싶다는 감정과 의욕은 둘이 큰 형(지성)보다도 둘째(감정)와 막내(의지)가 더욱 짝짝꿍이 됩니다. 그래서 너무 하고 싶어집니다. 그러면 형(지성)을 협박해서 해도 된다고 말을 해라 하면서 형(지성)을 족 칩니다. 그것이 말하자면 존 오웬이 이것을 ‘의지의 강압’이라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의지가 강압을 느끼면서, 그런데 죄를 산출해야 하는데 이것이 결국 양심이 지성과 관련된 것 아닙니까. 양심이 허락을 안 하는 것입니다. 양심이 허락을 안 하면 이것이 산출을 못합니다. 죽도록 죽이고 싶습니다. 그런데 살인은 못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탁 풀어주는 것입니다. 결국 둘이서 큰 형(지성)을 족 칩니다. 그래서 항복을 받아냅니다. 그러면 죄가 확 하고 산출이 됩니다. 그러므로 결국 이 셋 사이에 질서 있는 관계가 다 무너지게 됩니다. 집안에 막내가 대들어서 형 아구 통을 날리고 셋째가 둘째 목을 밟고 항복하라고 하면 그게 집안 꼴이 되겠습니까? 그다음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마어마한 혼란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성이고, 감성이고, 의지고 다 필요 없이 모두 한 덩어리가 되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향하여 미친 듯이 달려가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모습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엊그제 조주빈이 신문에 나왔습니다. 그러한 정신 나간 사람들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말도 안 되는 것 아닙니까. 검사가 어디 갈 데가 없어서 가서 천만 원짜리 술을 대접받고 그렇습니까. 정신 나간 사람들입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지난번에 이태원 보니까 술 한 세트에 1억 5천만 원이라고 합니다. 그것 보다 더 비싼 것은 2억 5천만 원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모두 현금을 들고 와서 돈을 낸다고 합니다. 도박하고, 부동산투기해서, 불법으로 자금 세탁한 돈을 가지고 온 것인데, 웃기지도 않습니다. 여자들이 술병을, 꼭 십계에서 우상숭배 할 때 나오는 것과 똑같습니다. 술병을 머리에 딱 놓고 6-7명 받쳐서 놓고 팡파레가 나오면서 꽃가루가 나오는 가운데 술이 입장을 합니다. 그것을 1억5천만 원을 주고 먹고 앉아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전부다 지성과 감정과 의지, 이러한 것들 사이의 연결이나 판단들이 다 무어진 상태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것을 뒤집으면 올바른 대상과 올바르게 사랑 할 때 마음은 가장 명정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어느 선교사가 이러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직접 만나본 적은 없지만 신문에 나왔습니다. 친구가 포르노그라피아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해도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여성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사랑에 푹 빠졌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그 버릇이 고쳐졌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 공식을 따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되었습니다. 결국 올바른 대상을 알맞게 사랑할 때 그 때 인간의 지성은 가장 명정하게 됩니다. 그 분이 하나님이실 경우에는 더욱 그렇지 않겠습니까?
끝입니까? 대단원의 막을 내렸는데, 떡을 주든지 뭘 줘야 하는데 과자 간식 가지고 되겠습니까? 시루떡을 해서 책거리를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또 다른 질문 있으면 하십시오. 없으면 마치겠습니다. 수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