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시50:14~15)
우리의 살아온 일생 전체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구원을 얻은 것도 그렇고 그 후에 주님의 은혜로 살아온 날들도 그렇습니다. 이처럼 일 년에 한 번 추수감사주일을 제정하고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것은 단지 관례나 행사가 아니라 이것을 통해서 감사라는 은혜의 수단을 우리 안에 회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은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주심으로 우리의 영혼의 힘을 강하게 하시고 그래서 그 덕을 가지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살기를 원하시는 길을 따라 살아가게 하십니다. 그런데 이 감사가 이렇게 우리의 영혼의 은혜에 힘을 불러일으키는 하나님의 수단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이 이 본문을 통해서 이 말씀을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선 이 감사에는 두 종류의 감사가 있습니다. 첫째는 개념적인 감사입니다. 이 개념적인 감사라는 말은 이성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조건을 생각하고 그것을 즉시 자기에게 적용시키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것은 생각 속에서 감사해야 되겠다. 라는 의도를 가지고 생각 속에서만 감사의 이유를 찾아내고 생각에 그치게 되고 그것을 어떤 의무감으로 표현할 때도 있지만 그렇게 감사하게 하는 그 사람의 마음과 영혼자체를 흔들어 놓는 그러한 위대한 힘은 없는 그런 종류의 감사를 가리키는 것이죠. 그러나 이러한 감사도 때로는 굉장한 종교적인 감흥을 동반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널 때의 일입니다. 그들은 마른 땅과 같이 홍해를 건넜으나 뒤따라오는 많은 애굽의 병사들은 그 물에 휩쓸려서 바다에 뒤움치고 있었습니다. 이때에 미리암의 소고에 맞춰서 그 수백만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사의 찬송을 불렀죠. 그러나 바로 3일 뒤에 마실 물이 없게 되자 하나님을 원망하는 불평을 심령 깊은 곳에서 쏟아내게 되었습니다. 때로는 굉장한 종교적인 감흥을 동반한 것 같지만은 사실은 무지 속에서 이런 일들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수많은 백성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아들 예수를 찬송했습니다. 굉장한 감사의 찬송 같았지만 그것도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감사가 아니었습니다. 얼마 후 그 사람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개념적인 감사는 이처럼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사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영혼을 쇄신시키는 은혜의 수단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또 하나의 감사가 있으니 이것은 체험적인 감사입니다. 이 체험적인 감사는 하나님 앞에 무엇 때문에 감사해야 되는지에 대한 분명한 지식을 가진 그러한 정당한 지식에 기초한 감사입니다. 물론 그러한 일들을 허락하신 하나님 자신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죠. 그리고 이 감사는 영혼을 휘저어 놓는 놀라운 힘을 가진 감사인 것입니다.
성경은 기도와 간구와 감사를 한 반열에 놓으며 우리의 영혼을 쇄신시키는 은혜의 수단으로 꼽고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옥에 갇혔을 때 그 절망의 어두운 감옥이 변하여 희망과 그리고 승리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차게 만들어 주었던 것은 그들이 그 어두운 감옥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부른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찬송 덕분이었습니다. 환경을 그들을 얽어매었지만 영혼을 울리고 터져 나오는 이 감사의 찬송이 그들의 심령을 뒤 흔들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의 이름을 높이게 하였다. 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처럼 참된 감사는 영혼의 울림이고 이러한 참된 영혼의 울림이 있는 감사를 드릴 때 우리의 마음은 휘저어지게 되고 그 감사의 휘 젖는 은혜의 역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게 만들고 세상에 붙은 부당한 우리의 욕심을 떨어내는 놀라운 역사를 일으킵니다. 우리를 둘러싼 사물의 질서가 항상 우리의 마음에 맞게끔 펼쳐지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우리가 의도한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이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방식으로 사물의 질서들이 펼쳐질 때가 있습니다. 자기는 바뀌지 않고 사물의 질서가 마음에 들면 하나님 앞에 헤헤 거리고 조금만 좋지 않으면 불평과 불만을 쓴물처럼 토해놓는 이러한 방식의 삶은 신자의 삶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자의 감사하는 삶은 끊임없이 변전하는 사물들의 표양 너머에 있는 하나님 자신의 도덕적인 통치를 바라보면서 종아 하는 것 그 속에서 나의 삶을 둘러싼 질서는 때로는 고통스럽게 때로는 기쁘게 흘러가지만 그 모든 것들을 통해서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며 그 선하고 일관성 있으신 하나님께 감사 할 수 있는 것, 이것이 진정으로 체험적 감사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우리 모든 사람에게 특별히 신자들에게 체험적인 감사를 요구하시고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는 우리의 심령이 새로워지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사물들의 모든 질서 너머에 계신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을 바라보는 것이 우리의 감사의 조건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세워 놓은 계획에 대해서 스스로 모순을 갖지 않으신 분이십니다. 즉 하나님은 당신이 계획하고 세워놓으신 일들을 향하여 계속해서 그 쪽으로 우리를 움직여 가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창조의 목적대로 행동하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많이 맛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고자 하는 방향과 하나님이 우리를 이끄시고자 하는 방향이 일치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가고 싶어 하는 인생의 목표와 삶의 계획이 따로 있고 무조건 하나님이 자신의 그런 계획에 맞춰주어서 자기에게는 좋은 일만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 앞에 꺾어져서 주님의 뜻에 합치된 사람으로 인생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많이 맛보고 체험하지만 그렇게 걷지를 않은 사람들은 이런 선하심을 맛보지 못하는 것이죠. 하나님 안에만 행복이 있지 하나님 밖에는 어떠한 행복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밖에서 행복해지려는 그 모든 시도와 노력 그자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곳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는 행복을 누릴 수 없고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체험적 감사를 드릴 수가 없게 되는 것이죠.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감사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거기에 우리를 합치시키려고 할 때 우리는 날마다 도우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어서 생각해 볼 것은 이러한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우리의 전 삶이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그러한 생활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끊임없이 요구하는 것은 제사 자체뿐 아니라 제사 드리는 헌제자와 그 헌제자의 삶이 일치할 때 그 제사가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제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렇게 될 때에 그 제사는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제사가 되는 것이거든요
오늘 시인은 말합니다. 지극히 높은 자에게 서원을 갚으며 라고 말입니다. 제사는 하나님 앞에 드리는 헌신의 종교 예식이지만 서원을 갚는 것은 자신의 삶에 관련된 것입니다 이 서원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좁은 의미의 서원과 넓은 의미의 서원입니다. 좁은 의미의 서원은 개별적인 일들에 대한 하나님과의 약속입니다. 이것은 개인적으로 행해질 수도 있고 교회적으로 행해질 수도 있고 혹은 가정적으로 행해질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지 간에 이 좁은 의미의 서원은 개별적인 하나님과의 약속입니다.
믿음의 사람 한나를 기억해 보십시오. 그는 아들이 없기 때문에 온갖 설움을 당한 상처 많은 여인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 가서 간절히 눈물로 기도하며 아들을 구했을 때에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셔서 어린 아이들 허락해 주셨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아이를 주시면 이 아이들 하나님께 영원히 바치겠사옵나이다. 기도했습니다. 한나가 그 아이를 성소에 가지고 와서 제사장에게 바쳤을 때에는 젖 땔 무렵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이제 젖 땔 무렵이 되었으니 젖을 물리고 있는 엄마의 얼굴을 알아볼 나이이고 그 때 품안에서 곱살거리는 그 새끼가 얼마나 예뻤겠습니까? 그 아이를 언제 다시 볼지도 모르는 기약도 없이 그 성소에 그 아이를 통째로 바치고 그리고 돌아올 때에 한나의 마음에는 얼마나 뜨거운 고통의 눈물이 흘렀겠습니까? 그 아이를 그 어리고 예쁜 아이를 하나님의 집에 바치고 이제 아이가 없는 빈방이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돌아올 때 이여인 한나의 마음에 눈물은 자식이 없어 서러워 성소에 올라갈 때의 그 마음의 고통과 별반 다름이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 아들이 군대에 갔습니다. 집에 있을 때 늘 게으르고 그래서 우리가 늘 걱정을 했습니다. 넌 착하고 신앙도 있는데 그렇게 게으르고 우유부단해서 어떡하니 언젠가는 그래요 아빠 나는 공익근무 갔으면 좋겠어. 지엄마가 옆에 있다가 안 돼 너는 현역가야 돼 넌 가서 빡세게 인간이 돼야 돼 그래 보냈거든요 그런데 며칠 있다 전화 왔는데 뭐라고 하냐면 엄마 나 특전사 들어갔어. 공수부대 들어갔거든 엄마가 초죽음이 됐어요. 누가 적당히 빡세게 하라 그랬지 그렇게 세게 나가라그랬냐 그리고 무슨 지원분과가 폭파 분과래 그러고 갔어요 저도 맨 처음에는 마음이 좀 짠했어요. 그 모두 다 그 지옥의 훈련이라고 하는 거기를 지원했을까 그러면서 속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감사하다. 그래 가서 한번 진짜 한번 고통스러운 불의 연단을 받아봐라 2년 후면 돌아오잖아요. 볶아먹던지 삶아먹던지 돌아오잖아요. 그런데도 부모의 마음이 짠한데 하물며 이 아이를 영원히 맡기고 내려오는 이 엄마의 마음 그 돌때에 품안에서 고물거릴 때 그 아이를 바치겠다는 얼마나 어려운거였어요 그 믿음의 사람 한나는 그것을 행하잖아요. 이게 바로 서원을 갚는 것이에요 이것은 단순히 기도를 드리는 게 아니라 바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라는 기도는 쉬워요 그런데 바치는 것은 피가 흐르는 거지 여러분들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 한 약속이 있죠 환란 날에 고통을 많이 받으면서 하나님 이 시련에서 나를 건져주시면 내가 이렇게 이렇게 살겠습니다. 그 약속을 지키고 있습니까? 또 너무 감사한 일이 있어서 주님이 내게 이렇게 베풀어 주셨으니까 난 이렇게 갚겠습니다. 라고 그런 서원을 한 거 있죠 그거 하나님한테 갚았습니까?
저는 이 이야기를 목회하면서 생전 처음 하는 것입니다. 이해 안가는 사람이 건축헌금을 약속하고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에요 이제 교인들이 거액을 약속하면 두려워요 아 이 사람 혹시 떠나는 거 아니가 그런데 세상에 멍청한 사람이 떠나면 하나님이 안 계셔 그렇게 서원한 그것은 교회의 목사에게 서원한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약속한 것이에요 어디로 가든지 그 서원을 갚지 않는데 이게 그 사람이 영원 깊은 곳에 우러나오는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가 있겠어요. 우리가 왜 그렇게 너절하게 살아야 합니까? 없는 것은 하나님이 아시죠 문제는 갚을 수 있는 여력이 있는데도 하나님 앞에 아직은 여호와의 전을 지을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라고 변명하면서 자신의 실속을 다 채우면 살던 학개시대의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이기심이 문제가 되는 것이죠 이러한 서원을 개별적인 서원을 하나님 앞에 갚지 않는 것 더욱이 부득이하게 잊어버리거나 기억이 없어서가 아니라 명백하게 누구의 강요도 없이 자신의 의지로 이러저러한 것들을 약속하고 하나님 앞에 갚지 않는 것은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깔보는 행동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앞길에는 형통함이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수시로 하나님과의 약속을 남발하고 아무것도 지키지 않고 제멋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영혼은 항상 곤고합니다. 이 영혼에 내리는 축복이라고 하는 것은 삶 전체와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거예요 삶속에서 그런 하나님의 신실한 언약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그게 정말 행복 할 수가 있겠어요 그리고 하나님께 열광을 돌릴 수가 있겠어요 그래서 어느 목사님 제가 아는 목사님은 교회를 떠나도 집요하게 연락해서 그 건축헌금 갚으라고 족치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 분 이야기는 내 인간으로 생각하면 치사해서 말을 건네고 싶지도 않지만 그 사람들의 영혼을 생각하면 그렇게 살게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 저는 사랑이 부족한지 아직까지 그렇게 족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매우 잘못된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죠 영혼의 깊은 어두움이 모면될 수 없을 것이며 그리고 양심의 끊임없는 가책과 송사들이 있을 것입니다. 처음부터 하나님 앞에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좋을 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게 바로 개별적인 서원입니다. 그래서 이런 개별적인 서원을 하나님 앞에 갚은 이것이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죠 오늘 그것이 무엇이든지 관에 하나님과 약속하신 것이 있으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에 있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의 약속보다 하나님과 개별적으로 한 약속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며 그 일을 위해 헌신했는지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고 갚지 않은 것이 있으면 속히 하나님께 갚은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로 하나님을 섬기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넓은 의미의 서원입니다. 이것은 포괄적 서원이죠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 것 그 자체입니다. 구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은 것은 바로 그 할례를 통해서 그들이 자신이 이제는 하나님의 모든 율법을 지키며 여호와 하나님만을 사랑하며 살겠노라고 하는 서약입니다. 더욱이 그들이 성년이 되었을 때는 그 모든 약속을 이제는 자신의 뜻과 생각을 가지고 받아들이고 책임이 있는 언약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이죠 세례와 입교는 바로 이런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에서 방황하고 주님 없이 사는 것이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러워서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와 우리의 모든 죄를 자백하며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갈망할 때에 주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주시고 죄와 어둠의 그늘에서 우리를 건져내어 주셨습니다. 그때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떠했습니까? 우리가 같은 죄인을 용서하기 위해 하늘을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하나님 생명과 모든 좋은 것을 버려서 우리를 속양 하신 예수그리스도 앞에서 우린 어린아이처럼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고백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위해 이렇게 십자가에 죽으시사 나의 모든 죄를 대속하셨으니 이제는 내가 주님의 뜻대로 살겠습니다. 이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며 일평생을 살겠습니다. 라고 고백을 하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바로 서원입니다. 하나님과 약속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이렇게 끊임없는 성화의 길을 가야되는 이유는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 십자가의 은혜 아래서 감격하며 이 벌레 같은 인간을 위해 고난당하신 예수의 이름을 찬송할 때에 우리의 마음에 그런 서원을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외에 우리에게 구원을 얻을만한 어떠한 이름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고 그리고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은 측량할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모두 주어졌으니 이제는 내가 남은 생애를 주님과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겠습니다. 라고 하는 신앙의 고백 하나를 가지고 우리들이 믿음의 고백을 걸어오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우리의 신앙이 아닙니까? 그리하면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이 믿음의 길을 따라 살아오게 되었습니다. 성화는 바로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구원을 통해 약속한 바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오늘도 끊임없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자기를 깨뜨리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되는 것이죠
예수그리스도의 생애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 분이 바로 이렇게 당신 자신의 전 삶을 드리는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기도는 언제는 힘이 있었고 십자가를 눈앞에 둔 그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깊은 감사는 예수님의 마음에 끊임없는 감화와 능력을 불러 일으켜 능히 그 십자가를 지고 우리를 위해 죽으실 수가 있었던 것이죠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 앞에 감사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허락된 놀라운 특권은 무엇일까요? 오늘 성경이 말합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고 말이죠 이 환난의 날은 어떤 날입니까 살면서 우리의 밖에 있는 모든 사물들의 질서가 언제나 우리의 마음에 맞게끔 형성되는 것은 아니죠 조금 우리의 마음에 덜 맞을 때에 늘 있습니다. 이때 우리들이 우리의 힘으로 그냥 견디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때로는 우리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으리만치 우리를 둘러싼 사물들의 질서 우리 안에 있는 내면의 질서에 강력한 변화가 일어나요 이때에는 이 땅에 자원도 많이 필요하고 하늘의 자원도 많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환난이 일어나요 그래서 사업이 망하고 경제적인 위기가 닥쳐와요 그때 평소에 들어가던 생활을 위한 이 땅의 자원을 가지고는 해결이 안 돼요 어마어마하게 많은 물질과 이 세상의 자원들을 쓸어 넣어야 되요 그럴 능력이 없을 때 일어나는 일들을 가리켜서 우리는 파산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러한 환란 속에서는 크게 두 가지 변화가 일어나는데 첫째는 환경의 변화인데 환경이 놀랍게 변화면서 엄청난 양의 자원을 요구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자원을 요구하게 되는 환난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이때에는 자원을 공급받지 않으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는 감당 할 수가 없어서 파산하게 되는 것이죠 이게 환경의 변화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라고 말이죠 우리가 환난을 만나서 이 땅의 많은 자원이 필요하게 될 때 그 때에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겠다는 약속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환난과 어려움을 만난다고 해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있는 자원을 동원하고 자기와 관계된 사람에게로부터 빌려서라도 이 자원을 메꾸어 보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당신 앞에 세우시기 위해서 허락된 환난일 경우에는 아무리 꾸고 성실한 마음으로 몸부림 쳐도 그 환난이 요구하는 자원을 다 댈 수 가 없습니다. 결국은 파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오늘 하나님은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사람 지극히 높은 자에게 자신의 서원을 갚으며 사는 사람 즉 삶 전체가 하나님 앞에 돌이켜 서고 그리고 부분적으로가 아니라 총체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고자 인생의 방향이 바뀐 사람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감사드릴 때에 체험적인 감사로 그 감사가 그의 영혼을 헤집고 지나가는 쇄신의 능력을 가진 그런 사람이 하나님 앞에 환난을 만나면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필요한 자원들을 공급해 주신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의 도움을 주시는 것이나 백의 도움을 주시는 것이나 하나님에게는 마찬가지입니다. 있는 사람에게는 큰돈이나 작은 돈이나 마찬가지이고 없는 사람에게는 많이 모자란 것이나 크게 모자란 것이나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자원을 가지고 계신 분이고 지금도 당신이 원하는 사람들에게 그 자원을 얼마든지 공급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아까 와서 창고의 열쇠를 감추고 계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여러분들의 전 삶이 포괄적으로 그렇게 돌이켜 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인생의 목표와 하나님이 여러분들 향해 이루고자 하시는 목표가 하나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에게 환난 날에 이런 자원들을 공급해 주셔서 환경을 이기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러한 환난의 날에는 또한 아주 놀라운 내면의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 신뢰했던 사람들로부터의 배신과 외로움 그리고 아끼는 사람의 죽음 이런 것들은 환경의 변화 못지않게 우리의 영혼을 뒤흔드는 큰 내적인 힘입니다.
어떤 사람이 20억의 빚을 지고 고민 끝에 자살을 했는데 나중에 그 사람의 재산을 정리해 보니까 40억 이더래요 우리 같이 돈 없는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다 털어서 갚아도 20억이 남으면 부자로 살 수 있는데 왜 그랬을까? 결국은 이 세상에 있는 물질의 자원이 모자라서 죽는 것이 아니라 그 결핍을 견뎌낼 수 있는 내적이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에 자살하고 죽는 것이죠 오래전에 자살했던 한 유명한 사업가의 죽음을 보면서 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하는 사업이 잘 안돼서 자살을 했다고는 하지만 다 청산하고 정리를 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보다는 부자가 아니겠어요. 평생 먹고 살게 없겠어요 타고 다닐 차가 없겠어요 잠잘 집이 없겠어요 아마 다 정리하고 나도 우리 중에 있는 사람 누구보다도 부자일 것입니다. 결국은 자살을 하게 된 원인은 사실은 물질이 모자라서 자살을 하게 된 것이 아니라 예전과 달리 바뀌어진 사물의 질서를 버틸 수 있는 내적인 자원이 없기 때문에 사실은 무너지게 되는 거죠 이러한 때를 우리들은 환난의 때라고 부르는 것이죠 남 보기에는 물질이나 환경의 변화는 조금도 없고 넉넉한데 심령이 지옥과 같은 때 죄와 양심의 가책에서 견디지 못하고 괴로워 할 때 사랑해야 할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미움과 갈등으로 고통을 받을 때 그리고 외로움과 고독 속에 몸부림치게 될 때 이때가 바로 내적인 환난을 맞이할 때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날에 당신께 부르짖으면 건져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사람 체험적인 감사의 제사로 심령 깊은 곳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 자신의 인생 전체의 목표가 하나님을 향한 목표와 일치된 사람 하나님 밖에서의 행복은 꿈꾸지 않는 사람 하나님 안에서 행복을 꿈꾸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살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게 되는 것을 하나님이 내 마음에 맞게 되는 것보다도 더 좋아하는 사람 그래서 끊임없이 자신을 낮추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를 위해 버리신 그 십자가의 길을 따라서 주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사람 고난과 시련 속에도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굳게 붙들고 생명처럼 생각하며 고난의 비바람 속에서도 굳세게 주님을 섬기며 외길을 걸어가는 사람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큰 내적인 은혜를 부어 주십니다. 이런 사람들의 감사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실지로 한번 실험을 해 보십시오 우리들이 환난과 시련을 만나면 뜨거운 눈물이 흐를 때가 있습니다.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고 견딜 수가 없어서 뜨거운 눈물은 흐르는데 이상하게 기도를 하려고 하면 그 눈물이 오히려 그치는 적이 있습니다. 이게 무슨 경험입니까? 이렇게 환난과 시련에 마음에 상처를 받고 뜨거운 눈물이 흐르는 그 감정이 하나님을 찾고 매달리는 감정과 틀리다. 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환난과 시련을 만나게 되면 사고의 혼란과 정서의 뒤엉킴이 한꺼번에 찾아오게 됩니다. 그래서 생각은 혼란스러워지고 마음의 정서는 이상하게 변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다스릴 때에 그 평정스러운 정서를 상실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막 휘둘리게 됩니다. 이때에 이렇게 휘 둘리게 될 때에 끊임없이 우리의 바깥에는 사물의 표양들이 뒤흔들리면서 그것을 보는 우리의 마음을 두렵게도 하고 교만하게도 하고 낙심하게도 합니다. 그러나 한번 이럴 때에 조용히 눈을 감고 그리고 하나님을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그리고는 이 움직이는 사물의 모든 질서들 너머에 계시는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켜보고 계시는 아버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우리를 그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예수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는 지금 내게 없는 것을 인하여 불평하던 마음을 다스리고 주님이 나에게 베풀어주시는 은혜와 그리고 나같이 쓸 때 없는 인간을 향해 하나님이 베푸시는 그 많은 호의들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흘러가는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고 결국은 변화지 않는 것이 둘이 있으니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분께 다가가야 할 나의 영혼뿐이라는 생각을 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 하나님이 나의 현재의 상태와는 상관없이 어떻게 나를 사랑하셨는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찬양해 보십시오.
(찬양) 찬양하라 내 영혼아 찬양하라 내 영혼아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찬양하라
그렇게 중요해 보이는 것들은 얼마나 사소한지가 느껴지고 그리고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우리의 마음에 밀려오게 됩니다. 그래서 온 마음으로 우리의 심령을 모으며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게 되는 것이죠 그 때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잠자던 것들은 일어나서 우리 하나님을 높이게 되고 주님을 거스르며 살려고 했던 우리의 악한 소욕들 세상을 향한 헛된 욕심들은 그러한 감사의 휘저음 속에서 우리의 마음 바깥으로 빨려 나가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깨끗해집니다. 하나님께 감사로 꽉 찬 마음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순결한 마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감사로 꽉 찬 그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 말고 무엇이 있겠으며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충만해진 심령 안에 우리 아버지를 향한 감사 말고 무엇이 더 그 속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깊은 감사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생애가 어떠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잠시 후면 짊어지게 될 그 십자가는 처절한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경험해 보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죽음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그분은 죽을 수 없는 분이셨지만 우리를 위해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셔야 했기 때문에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잠시 후 십자가에서 살을 찢고 피 흘려 우리의 죄를 향해 부어지는 하나님의 온 진노를 감당하실 작정이었지만 그 잡히시던 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올리신 위대한 대제사장의 기도는 감사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드리는 감사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 앞에 당신의 뜻을 모두 포기한 착한 아들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자기를 다 드리셨습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에서 당신을 위해 고난들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피한방울까지도 남김없이 모두 흘려주신 그런 일생을 사신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그렇게 감사의 삶을 사셨기 때문에 머리 둘 곳 없는 생애를 사셨지만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생애를 사셨고 그분의 마음 안에는 항상 죄인들을 끌어안는 넉넉한 마음과 긍휼이 있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삶이 바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할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가슴깊이 밀려왔던 감격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죄인들도 사랑하신다. 는 것이었습니다. 죄는 싫어하시지만 당신자신에게만 소망을 두고 그 은혜와 용서를 구하는 모든 사람들을 다 같이 사랑하셔서 당신 앞으로 부르시는 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셨습니다. 머리 둘 곳이 없는 생애를 사시면서 일평생 하나님 앞에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으셨지만 그분이 보여주신 것은 쓸모없는 죄인들을 향한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난 한 해동안도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살았습니다. 매일매일 그분의 은혜와 사랑으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는 그 사랑과 은혜로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님께 감사합시다. 그래서 우리 마음에 있는 더러운 찌기들이 모두 씻겨나가고 영혼을 휘젓는 이 체험적인 감사 속에서 다시 한 번 우리가 누구인지 확인하고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것이라고 고백하며 그 감사의 삶을 사는 우리들이 되도록 우리중심을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삽시다. 그래서 우리의 삶 전체가 환난의 날을 만나면 부르짖을 수 있는 삶 오히려 거기에서 하나님의 더 큰 구원을 경험하고 환난 때문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성도의 삶을 살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