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 2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란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50:14-15)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는 성도로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시인이 찬송하고 있습니다. 시인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송하는 이유는 이 땅을 다스리시는 통치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통치를 가리켜서 자연적 통치와 구별하여 도덕적 통치라고 부릅니다. 도덕이라고 하는 것은 도와 덕으로 이루어집니다. 도는 인간존재 밖에 있는 선과 악의 판단의 기준이 되는 그 무엇을 가르치고, 덕은 그런 도에 합치하려는 영혼의 올바른 힘을 가리킵니다. 이 영혼의 올바른 힘을 우리들이 많이 소유하게 될 수록 우리는 행복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영혼의 올바른 힘, 곧 이 덕은 하나님의 은혜로서 우리의 영혼에 불러 일으켜지는 것입니다. 성경은 바로 이 감사가 이런 영혼의 올바른 힘을 불러일으키는 훌륭한 수단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II. 진정한 제사, 감사
감사에는 두 종류의 감사가 있습니다.
A. 개념적 감사와 체험적 감사
첫째는 개념적 감사이고, 또 하나는 체험적 감사입니다.
1. 개념적 감사
먼저 개념적인 감사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이 개념적인 감사는 인간의 이성적인 감사입니다. 모든 감사가 이성을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하지만 이성적으로 추론하였던 영혼의 깊은 휘저음 없이 이렇게 지성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감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영혼의 움직임이 없는 영혼 깊은 곳을 회심시키는 작용이 없는 모든 감사를 개념적 감사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이 개념적인 감사는 종종 커다란 종교적 감흥을 동반하기도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넜을 때 자신들은 홍해를 건넜지만 뒤따라오던 애굽의 병사들과 마차는 그 다시 합쳐진 홍해에 수장되어 뒤웅 치는 물결 속에 시체들이 떠올랐습니다. 미리암의 소고에 맞추어서 수백 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래를 부를 때 그 감사의 찬송 속에는 분명히 무엇인가 커다란 종교적 감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삼일 후에 마실 물이 없고 고통을 당하게 되자 그들은 당장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이 원망은 그들의 뼈 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하나님을 향한 반감을 동반한 원망이 어습니다. 그런 점에서 미리암의 소고에 맞추어 부르던 그 홍해 바닷가에서의 찬송은 개념적 감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큰 열정을 동반하지만 무지 속에서 이런 감사가 이루어질 수도 있습니다.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던 예수님을 환영하던 유대인들의 무리를 생각해보십시오. 종료나무 가지를 흔들고 길거리에 펴고 겉옷을 깔며 예수 오실 앞길을 예비했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을 부르며 온 성을 소란스럽게 하였습니다. 어마어마한 열정을 동반한 감사의 찬송 같았지만 결국 얼마 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무리들로 변했습니다. 불과 며칠 사이에 말입니다. 그러니 이 역시 영혼을 움직일 그런 쇄신의 작용을 가진 감사가 아닌 개념적 감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체험적 감사
반면에 이 체험적 감사는 영혼의 깊은 밑바닥을 움직이는 쇄신의 힘이 있는 그런 종류의 감사입니다. 개념적 감사라고 해서 체험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체험적 감사는 단지 지성이나 정서만의 경험이 아니라 영혼을 움직이는 영적 체험이 있는 감사라는 점에서 제가 체험적 감사로 분류하는 것입니다. 이 체험적 감사는 영혼의 쇄신시키는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작용을 갖는 그런 감사입니다. 신약성경은 기도와 간구와 감사를 나란히 하나님 앞에 우리들이 교통하는 은혜의 수단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감사는 그 자체가 단순한 감사의 표현이 아니라 감사하는 자의 영혼을 쇄신시키는 매우 강력한 은혜의 능력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들이 상기해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둘러싼 사물의 모든 질서는 언제나 우리의 마음에 맞게끔 그렇게 질서 지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에 맞지 않게끔 사물의 질서가 방향 지어졌을 때는 하나님을 향해 토라지고 불평하고 그리고 원망하는 마음이 들고 뭔가 사물의 질서가 우리의 원하는 대로 움직이면 해해거리며 하나님 앞에 좋아하는 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은 감사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감사는 바로 변하는 사물의 질서 너머에 계신 하나님의 일관된 통치, 그러한 통치를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의 불변하시는 성품에 대한 감격에서 비롯되는 감사입니다. 즉 그 어떤 사물의 질서를 움직이시는 불변하고 완전하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대한 감격이 없이는 그가 변하는 사물의 질서에 대해서 감사하는 그 표시는 진정으로 하나님 자신에 대한 감사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변형 하는 모든 질서 표상 뒤에서 일관된 어떤 성품을 가지고 그 성품에 합치하는 방식으로 사물들의 질서를 움직이십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선하심의 신실하신 시행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선하신 하나님의 성품이 신실한 방식으로 일관되게 발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당신 밖에 세워놓으신 창조와 만물의 계획에 대해서 당신 스스로 모순 되신 분일 리가 없습니다. 즉 당신이 세워놓으신 계획에 대해서 하나님 자신은 항상 똑같이 그 계획과 일치하시는 분이십니다. 인간은 그렇지 못합니다. 좋은 줄 알고 계획을 세워났는데 잘못된 것이어서 자기 손으로 그 계획을 허물어버리고 심지어는 그 계획을 따라 되어가고 있던 사물의 질서를 되돌려놓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결함을 가지신 분이 아닙니다. 당신 밖에 세워놓으신 창조의 목적, 우리 인간 한사람 한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그 계획을 세우신 하나님 자신이 언제나 일치를 이루시기 때문에 선하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획과 정하신 목적에 대해서 선함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이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든 계획과 뜻들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 속에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향해 가지고 계신 계획과 나의 인생을 향한 목표,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과 그 모든 것을 일치시키는 방향으로 삶을 살아가려고 할 때 그는 항상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살게 하시려고 하는 방향과 내가 살고 싶어 하는 방향이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이 체험적 감사 속에서 살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하나님이 우리를 살게 하려는 그 목적과 일치하여야 합니다. 하나님 밖에서 행복을 누려보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선하심 보다는 무엇인가 자신의 뜻을 방해하는 하나님의 수많은 계획들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하나님 자신이 자신의 인생의 행복을 위해 방해가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하나님의 징계라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자신이 하나님 밖에서 행복을 찾아보려고 하는 사람의 노력을 하나님이 강력한 방식으로 돌이키려는 의지가 징계 속에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것이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감사입니다.이런 체험적 감사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될 때 우리의 영혼에는 이 감사 속에서 끊임없는 쇄신의 작용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어려움이 오고 사물의 질서가 내 원하는 대로 정의되지 않을 때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될 때 우리의 지성은 혼란스러워지고 우리의 정서는 헝클러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조율되지 않은 바이올린처럼 우리의 마음속에서 울려 퍼지던 그 아름다운 찬양의 가락들이 뒤엉켜진 정서 속에서는 맑은 곡조로 울려 퍼질 수가 없고 정돈되지 않은 혼탁한 사고 속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명정한 지식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때에 우리는 어떤 사물의 질서를 내 원하는 대로 돌려놓고 나면 평정이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사실은 그렇게 되지 않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래서 그때마다 우리는 마음을 모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눈앞에 들어온 수많은 움직이고 부침하는 이 사물의 표상 속에서 잠시 시선을 거두고 이 변하고 움직이는 모든 사물의 고통스러운, 혹은 유혹하는 그 질서 뒤에 계신 불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것입니다. 변전하는 사물의 질서 속에서 변정을 경험하며 움직이고 변화되는 내 마음에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조용히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당신의 선하신 성품을 따라 살려고 하는 모든 언약백성들에게 선하실 수밖에 없는 그 하나님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움직이는 사물의 표양 뒤에서 어떠한 때에든지 당신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시는 주님의 성품이 떠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마음은 이 모든 움직이는 사물에게서 거두어진 시선을 하나님을 향해 고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 속에서 찬양이 울려 퍼지게 됩니다.
찬양하라 내 영혼아 찬양하라 내 영혼아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찬양하라
언젠가 스승의 날이었는데 새벽기도에 나왔더니 누가 성경책 사이에다가 편지를 하나 꽂아놓고 갔습니다. 그게 있는 줄도 모르고 며칠이 지났습니다. 그러다 이렇게 열어보니까 성경뚜껑 바로 밑에 그렇게 들어있었습니다. 그런데 구두티켓이 하나 들어있고 그래서 누구 다른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편지가 들어있었습니다. 누가 보냈는지 모르지만 있었습니다. “목사님, 거기에 그냥 계셔서 저는 참 좋습니다.” 제가 이제껏 받아본 편지 중에서 가장 감격적인 편지였습니다. 2-30장 써내려간 편지도 받아보았지만 감동은 이것만 못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감사는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이 하나님 그대로이시기 때문에 나는 행복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밖에서 행복해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없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고백할 수 없습니다. 마음을 쭉 모아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깊이 감사하게 될 때 그때 그 찬양 속에서 우리의 마음에 모든 것이 깨어서 일어납니다.
잠자던 하나님을 향한 찬양의 마음이 시들어 잠들어있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감각, 그리고 죽은 자와 같이 엎드려있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각들이 일제히 다 깨어납니다. 이 감사가 나의 영혼을 휘젓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던 은근한 마음, 주님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던 그 넉넉한 싫증의 마음 이런 것들이 다 그 감사의 휘저음 속에서 우리의 영혼에서 빠져나갑니다. 내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일깨워 모든 감각이 쭉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2부 때는 안 가르쳐준 것인데 그 다음에 중요한 것 하나 가르쳐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한번 목숨과도 바꿀 사랑을 해보지 않으면 아직 인간이 아닙니다. 곰입니다. 마늘을 더 먹어야 합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사랑이라는 정서가 인식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를 내가 얘기하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사랑의 마음으로 꽉 차게 되면 이 속에 있는 모든 감각들이 다 일깨워 일어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눈빛, 목소리 하나 그리고 언어 하나, 행동하는 손짓 하나에도 엄청난 변정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서도 똑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우리를 휘젓고 지나가면 내 안에 잠들어있던 것들이 다 깨어 일어납니다. 그 휘저음 속에서 이런 감각을 느끼게 만들었던 것들이 다 빠져나갑니다. 그리고 다 깨어 일어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사소하게 평소에 들리던 작은 음성까지도 그 음성을 우리들이 들을 때 이 속에서 변정이 일어납니다. 확! 휘젓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하나님이 내가 너를 사랑한단다. 해도 지루한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우리의 온 정신과 영혼과 마음의 기반이 전율합니다. 주님의 그 부드러운 음성 속에 우리들이 전 마음이 떨리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누가 잘 깨닫는가하면 사랑하는 사람이 잘 깨닫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유명한 명제를 남겼습니다. 까리따스 노빗트 베리타땜 “까리따스의 사랑은 진리를 붙잡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B. 전 삶을 동반한 감사
그런데 오늘 시인은 갑자기 이런 고백을 합니다. “지극히 높은 자에게 너의 서원을 갚으며.”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앞에 제사는 하나님께 드리는 종교적인 헌신을 의미하는 것임에 반해서 서원을 갚는다고 하는 것은 포괄적인 앎의 내용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진정한 제사는 삶 전체를 포괄하는 전 삶을 드리는 제사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나오는 이 서원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는데 하나는 좁은 의미의 서원이고, 또 하나는 넓은 의미의 서원입니다. 좁은 의미의 서원은 개별적인 서원인 반면에 넓은 의미의 서원은 포괄적인 서원이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개별적인 서원은 개인으로서 혹은 한 교회의 서원으로서 혹은 한 가족으로서 하나님 앞에 자격을 가지고 행하는 맹세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인생의 깊은 위기 속에 있을 때 하나님 앞에 약속한 선약일 수도 있고 혹은 그 사람이 참으로 감격적이고 감사한 일을 경험하면서 하나님 앞에 바친 그런 헌신의 약속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들은 어떤 강요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약속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낙헌제적 성격의 서원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런 서원을 한 대표적인 사람이 한나입니다.
믿음의 여인 한나는 남이 알지 못하는 마음의 깊은 상처를 입고 있습니다.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첩에게 늘 멸시를 당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소에 올라가 정신이 나간 여자처럼 매달리면서 아들을 내게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리고 만약에 하나님이 그 아들을 내게 주시면 일평생 그 아들의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그 아들을 바치겠습니다. 일종의 나실인으로서 하나님만을 섬기도록 바치겠다는 표현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했습니까? 그리고 그 아이가 젖 땔 무렵에 그 아이를 하나님의 성소에 데리고 가서 약속대로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 아이를 하나님 앞에 바치고 내려올 때 어미인 이 한나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젖 땔 무렵이면 이제 돌 쯤 되었을 것이고 품안에 엄마가 안고 있으면 이제 엄마의 모습을 알아보고 방긋방긋 웃을만한 때였습니다. 그리고 젖꼭지를 물고 장난도 치고 손이라도 휘저으면서 엄마의 머리카락을 붙들려고 하는 바로 그때였습니다. 그때 그 약속을 따라서 하나님 앞에 서원대로 바치고 내려오던 한나의 그 마음의 괴로움이 아마 아들이 없어서 괴로운 마음으로 성소에 올라갈 때의 그 고통보다 작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과 한 약속이었고 그 약속을 따라서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선물이 자기의 아들 사무엘이었기 때문에 그를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바쳤습니다. 이렇게 서원을 갚는 삶을 산 것이 그 여인 한나가 기도의 사람으로 일평생 살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조금도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기도만 잘해보려고 노력하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으며 혹시 그러한 일이 일어난다고 하면 그것은 기독교적 영성에서 일어나는 작용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하나님 앞에 개인적으로 한 선약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환란과위기를 만났을 때 엉겁결에 건져주시면 내가 이렇게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하는 약속, 아주 작은 것으로는 새벽기도의 약속으로부터 시작해서 아웃리치의 약속, 심지어는 일생을 목회자로 살겠다는 그런 선약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약속들을 하나님 앞에 경률로서 행하게 됩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 앞에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지키지 않고 자기의 형편과 유익에 따라서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거나 혹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지는 않았지만 지키는데 요구되는 희생을 피하기 위해서 그 약속을 이행할 때가 아직 안 되었다고 무한정 미루는 회피하는 행동들은 하나님 앞에 옳은 것은 아니고 그런 사람들은 이런 체험적인 감사 속에서 하나님 앞에 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건축헌금이 아닙니까? 저는 교회를 하고 나서 처음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만 교회에 대게 커다란 건축헌금을 약속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둘 중의 하나입니다. 헌금을 하고 교회에 남아있거나 안 하고 떠나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이것은 매우 잘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런 헌금을 하나님 앞에 하고도 갚지 않고 훌쩍 교회를 떠나버립니다. 그리고 그것으로서 이제 모든 관계는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에 가든지 하나님이시고 그는 하나님의 눈빛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 교회에서 그렇게 행동하고 간 불신실한 사람이 저 교회에서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길 리가 만무합니다. 그런 개인적인 서원은 하나님이 하라고 강요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서원을 행하고도 하나님 앞에 지키지 않는 것은 노골적으로 하나님을 깔보는 것이며 공개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동입니다. 삶으로서는 그렇게 서원을 갚지 않으며 하나님을 깔보는 행동을 서슴지 않으면서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께로 복을 받기를 원하니 이런 이율배반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니까 그 사람들의 삶이 그들의 신앙과 부합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 앞에 영혼 깊은 곳에 우러나오는 감사로 주님 앞에 제사를 드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또 하나의 서원은 넓은 의미의 서원입니다. 이것은 포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서원입니다. 전자는 우리의 개별적인 의무와 관계되지만 후자는 우리의 전 포괄적인 삶에 관련이 됩니다. 세상에서 방황하며 고통을 받을 때 그리스도의 복음을 만나고 그 십자가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회개할 때 주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시면 일평생 주님만을 사랑하며 순종하며 살 것이라고 다짐했습니다. 언약백성으로서의 이런 다짐이 바로 서원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서원을 따라 살지 않으면 그의 삶의 방향이 이런 서원을 이행하는 방향이 아니라면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의 제사로 심령이 쇄신되는 경험을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신앙의 요소들은 하나하나단절된 것이 아니라 이런 방식으로 하나의 연합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각각의 작용들을 통제하고 어떤 하나의 한계는 다른 신앙의 덕목의 실천을 못하도록 발목을 잡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들 모두가 총체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거룩하면서 이런 감사를 비롯한 기도와 이 모든 은혜의 수단들은 함께 찬란한 빛을 발하여 우리의 영혼에 하나님의 은혜를 부어서 영혼에 올바른 힘, 곧 덕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바로 이 서원을 갚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고난의 때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아래서 자신의 모든 죄를 고백하고 이제는 주님의 뜻을 따라 살겠노라고 다짐하던 그 거룩한 은혜의 다짐을 따라 지금 그 서원을 갚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매일매일 살아가는 것, 그것이 성화의 삶이고 그 성화의 삶 속에 우리 하나님을 섬기는 섬김도 들어가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 앞에 우리가 언약한 바였습니다. 우리가 왜 매일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세상에 소리를 듣는 대신 진리의 말씀에 청종합니까? 우리가 왜 끊임없이 부당한 자기의 욕망을 버리고 자기 깨어짐 속에서 그리스도께 나아가야 할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이렇게 함으로서만 우리들은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서 구원받을 때에 주님 앞에 드렸던 그 총체적이고 전 포괄적인 삶의 언약을 이행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서원을 갚는 전 포괄적인 삶의 실천 속에서 우리는 체험적 감사를 드리며 끊임없이 그 감사 속에서 우리의 영혼이 쇄신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III. 감사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특권
하나님께서는 그 위에 덧붙여서 이렇게 체험적인 감사로 전 삶을 통해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모든 것 위에 뛰어난 특권을 약속하십니다. 그에 대해서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환란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니”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환란의 날에 주님을 부르면 주님이 건져주시겠다는 것, 이것이 바로 이런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사람에게 주시는 특권입니다. 그러면 이 환란의 날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 존재 밖에 있는 사물의 많은 질서들이 항상 우리의 마음에 맞게끔 정렬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때 아주 매우 강력한 어떤 기운에 의해서 급격하게 이런 사물들의 질서가 우리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소용돌이치는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소용돌이칠 때에는 많은 이 세상에 자원들이 필요하게 됩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환란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런 환란에는 반드시 두 가지 변화가 뒤따르게 되는데 첫째는 환경의 변화입니다. 나를 둘러싼 사물들의 질서가 급속히 움직이는데 그 질서는 내가 원하는 질서가 아닙니다. 질서가 급격히 변해도 내가 원하는 대로 질서가 급격히 변하면 좀 어지럽기는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가리켜서 행운의 연속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환란은 정 반대입니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질서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방향으로 질서가 깊이 움직이게 됩니다. 이것이 환경의 변화입니다. 이때 우리는 많은 이 땅의 자원이 필요하게 됩니다. 사람 그리고 물질, 시간, 건강 이런 엄청난 자원들이 필요하고 이런 뒷돈을 대지 못하면 우리는 결국 파산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사람에게 이런 환란, 환경의 변화 속에서 어마어마한 자원이 요구가 되는 환란의 때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져주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즉 이렇게 사람과 물질, 탁월한 건강과 힘, 이런 것들이 급격히 투입되어야 하는 변경된 질서 속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그것들의 뒷돈을 대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이런 약속을 하셨습니까?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사는 사람들, 전 삶을 묶어서 하나님을 향하여 바치며 영혼을 휘젓는 쇄신의 작용이 있는 체험적인 감사로 매일매일 자신을 정결케 하며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향해 살아가는 사람,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런 놀라운 자원을 공급해주실 것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런 환란에는 또 다른 변화가 있으니 내면의 변화입니다. 내면의 질서가 변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변하는 모든 사물들을 감각하고 감각된 그 사물들에 대한 지각은 이 속에 끊임없는 변정을 일으킵니다. 그때에 내면의 질서가 흔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환란을 만나게 되면 지성은 혼란해지고 정서는 뒤엉키게 되고 의지는 올바른 주인을 찾지 못해서 충동에 의해 좌우됩니다. 인간으로서의 존재적 균형감각을 상실하게 됩니다. 이때는 단지 돈이나 물질, 시간, 사람, 건강 이런 것들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하늘로부터 공급되는 하늘의 자원이 절실하게 필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몇 해 전에 한국에서 큰 사업을 하던 사업가 한사람이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높은 빌딩에서 뛰어내려 죽었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분이 그래도 큰 사업을 하시던 분인데 다 정리하면 살집을 못 구하겠습니까, 먹으면 얼마나 먹겠습니까, 먹고 살 음식이 없겠습니까, 자가용 살돈이 없을까요? 아마 절대로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예화: 어떤 사람이 20억의 빚을 지고 자살했는데 후에 그 사람의 재산을 정리하고 보니까 40억이었는데 이것은 결국 형식적으로는 이 세상의 자원이 없어서 죽은 것이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늘의 자원이 부족했기 때문에 변경된 사물의 질서를 받아들일 수 있는 내적 능력을 상실한 것이라는 내용)
이게 바로 우리들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환란을 당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문을 열고 긴급히 지원해주시기 시작하십니다. 어떤 사람에게 이런 놀라운 하늘의 은혜를 공급해주셔서 변경된 사물의 질서 속에서도 이렇게 자아가 무너지지 아니하고 영혼의 올바른 힘을 강화시킬 수 있는 기회로 삼으십니까? 바로 감사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사람, 전 삶을 하나님 앞에 전 포괄적인 서원을 따라서 개별적인 서원을 따라서 하나님께 체험적 감사로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이런 자원의 놀라운 축복을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환란 날에 우리들이 경험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이렇게 하나님 앞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환란의 날에 오히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놀라운 증거를 드러냅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위대한 증거를 보여주고 그래서 결국은 환란을 만나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럴 수 없게끔 오히려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을 돌려드리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생활입니다.
IV. 감사로 나아가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보십시오. 하나님이셨지만 그분이 경험하지 않으신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곧 죽음이었습니다. 삼위 하나님 중 사람의 몸을 입으신 유일한 위는 곧 이 위이신 성자이셨으니 성자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삼위 하나님을 대신하여 죽음을 경험하셨습니다. 죽음을 앞에 둔 그 절명의 고난의 순간에도 그분이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릴 수가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대제사장의 기도는 결코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의 고통스러운 심경이라고 찾아볼 수 없는 그런 온전한 감사와 헌신, 고난당하는 자신에 대한 염려는 뒤로하고 하나님 아버지와 이 땅에 두고 가는 사랑하는 당신의 제자들을 향한 염려와 배려로 가득 찬 기도였습니다. 이런 초월적인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 안에 있는 감사의 기도였습니다. 그 동산에서 그분은 감사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그 감사의 기도가 예수님의 영혼을 휘저었고 예수님의 마음속에 죄는 없으셨지만 예수님 안에 있는 그 모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감정을 완전히 분기시켜서 최고의 마음, 최고의 헌신, 최고의 애정을 가장 적절한 시간에 하나님을 향해 드릴 수 있게 만들어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필요한 삶이 바로 이런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에 넘치는 삶을 사셨고 웃을 이유가 하나도 없는 그 시련과 아픔으로 핍박으로 점철된 삶을 사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마음에 넘쳐나는 애정과 죄인을 향한 긍휼, 그들을 끌어안은 그 마음의 넉넉함과 모든 예수님 안에 있는 아름다운 것은 이런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며 그분께만 만족하는 그 감사의 위대한 능력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우리가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하나님을 향한 감사로 가득차있었고 머리 둘 곳이 없는 생애, 깃들 곳이 없는 일생을 사시면서도 예수님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모든 통치를 기뻐하는 그 충만한 사랑과 자비로 꽉 차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품안에서 숨쉬고 먹고 마시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안식을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밖에서 어떤 행복을 얻어 보려는 모든 시도를 포기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참되고 신실한 마음으로 삶 전체를 하나님을 향하여 같은 방향이 되게 돌이키고 여기에 부종하지 않으려는 나의 모든 악의를 꺾고 선한 의지로서 그분의 구원의 계획을 따라가려고 해야지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화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감사합시다. 그리고 사물의 변형하는 그 모든 표상과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로 인해 마음이 산란해질 적마다 움직이는 사물의 표면적 질서 뒤에 있는 선하신 하나님 일관된 방식으로 만물을 다스리시고 나까지 통치하시는 그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도록, 그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선을 바라보고 좋아하는 마음을 갖도록 노력합시다. 그래서 환란의 날에도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부르짖을 용기와 외칠 자신을 가집시다. 거기서 주님이 우리를 건져주실 것이고 우리는 주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