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의 영광과 회복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요 4:23~24)
나눠드린 강의안은 보실 필요가 없습니다. 집에 가져가서 보시고 제가 강의안을 덮고 강의하는 것처럼 여러분도 강의안을 덮고 들으시면 되고, 강의하는 부분이 어디 있나 하고 아무리 찾아봐도 아마 여러분이 찾기는 쉽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전체적으로 듣고 집에 가셔서 찬찬히 읽어보시면 아마 도움이 되리라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교회나 혹은 그리스도인 개인의 문제를 상고할 때에, 빠지기 쉬운 위험은 항상 자기 시대나 혹은 자기만의 경험을 중시한 나머지 동일한 고민을 하고 있는, 옛 사람들이 어떻게 그 문제를 해결했고 그리고 어떻게 그 문제를 슬기롭게 극복해 나갔는지에 대해서 별로 생각하지 않고 씨름을 한다는 것입니다. 철의 제상(?) 비스마르크는 말하기를, 지혜로운 사람은 역사를 통해서 배우고 미련한 사람은 경험을 통해서 배운다고 했는데, 신앙의 세계에서는 경험을 통해서라도 배우기만 하면, 참 다행입니다. 경험을 통해서도 배우지를 못하니까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지요.
예배의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이제 90년대 후반부로 들어서면서 이제 이 예배의 문제가 핫이슈로 등장을 했습니다. 특별히 1995년 이후, 96년 97년도로 넘어오면서 이제 이 예배의 문제가 아주 굉장히 중요하게 이슈로 다루어지고 있고 지금도 역시 뜨거운 논란들이 되고 있습니다. 예배라고 하는 주제가 조국 교회에서 이처럼 뜨거운 화제가 되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가 두 가지 정도 있는데, 첫째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면, 교회 성장에 대한 지대한 관심들이 예배에 대한 관심을 촉진했다, 그런 말씀이죠. 다시 말하면 기존의 내려오는 예배가 뭐가 잘못되었는지는 정확히 진단은 못했지만, 그러나 하여튼 이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을 상고하고 뭔가 개혁신학과 복음주의적 정통주의의 빛에서 이런 문제들을 생각 했다기보다는 실용주의적인 측면에서 교회가 성장하고 그리고 목회가 번창하는데 있어서, 예배가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거죠. 그렇게 때문에 많은 교회들에서 예배를 뭔가 다른 것으로 대치해 보려는 시도들이 많이 수행되었고, 그런 것들이 예배에 대한 관심을 촉진했고, 또 하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것은 열린 예배에 대한 관심이 진짜 이 예배에 대한 많은 갈등을 세대간에 불러 일으켰고 그래서 그러면 어떤 예배가 참된 것이냐, 그래서 급기야는 작년부터는 이제 그런 열린 예배에 관한 문제들이 심심치 않게 총회에 까지 신학적인 검토를 해 달라는 쪽으로 투서가 올라갔고 그리고 총회적인 답변이 수렴될 수 있을 정도로까지, 그렇게 교회에서 핫이슈로 등장을 했기 때문에 그런 것들에 힘입어서 예배라는 주제가 오늘날 조국 교회에서 상당히 중요한 관심사가 되고 있다 이런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들이 모든 것이 그렇듯이 이 문제에 대해서도 고민할 때, 우리들이 너무 상황 대응적으로만 보면 안 된다고 하는 말씀이죠. 성경적으로 하면 된다, 그런데 사실 그 말이 굉장히 어렵다 이 얘기죠. 왜냐하면 이미 뭔가 교회적인 상황에 자기가 원하는 어떤 변화를 가하고 싶으면 그것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성경을 보기 때문에 그런 흩어진 성경구절들을 찾아내서 자기 나름대로 자신의 목표의 방식들을 옹호하는 그러한 해석들을 해 놓는다, 이거죠. 그런 식으로 출발하니까 성경적이라는 말 그 자체가 호소력이 없다 이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최대한 정직하게 편견을 버리고 성경이 이 예배의 문제에 대해서 무어라고 말하는지 무릎을 꿇고 귀를 기울인다면, 우리들이 그렇게 성경을 읽는 사람마다 도저히 합의할 수 없는, 그 예배에 대한 견해를 성경 속에서 이끌어 낼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 자세도 중요하다 이거죠 성경 자체를 연구하면서 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면 이제 또 하나 고려되어야 할 것은 무엇이냐면, 역사적인 흐름을 한 번 생각해 보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의 예배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개혁주의의 예배가 어떠했고, 더 넘어가서 초대교회의 예배가 어떠했고 그리고 그 예배의 역사가 흘러오면서 어떻게 말씀이 사라지고 카톨릭화 되어갔고, 그리고 어떻게 종교개혁자들이 그 예배를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하려고 몸부림쳤고 그들의 한계는 무엇이며 그리고 그것이 이제 그 이후의 복음주의적 정통주의에서는 어떻게 고백되었고, 그리고 청교도 시대에는 어떻게 내려왔고, 그리고 그런 것들이 이제 20세기에 와서 어떻게 변질되었고, 그래서 지금 우리들이 이어받고 있는 이 예배의 이 모습들이 그러한 역사적인 줄기에서 어떤 영향을 받아서 형성되었고, 어떤 것들이 뿌리를 가지고 있고, 어떤 것들이 곁가지이고, 어떤 것들이 본질적이고, 어떤 것들이 비본질적이고, 어떤 것들이 성경에 뿌리를 둔 것이고, 어떤 것들이 상황에 보조를 맞춘 것이냐, 하는 문제들을 종합적으로 검증해 가는 가운데에, 비교적 사실에 가깝고 성경에 가까운 예배에 대한 생각과 견해들이 나온다, 이 얘기죠.
그런데 이제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오늘날 예배의 갱신에 대한 몸부림들이 많다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참 잘 알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생각하는 것들이 너무나 지금 제가 말한 것처럼 역사와 그 다음에 성경과 그 다음에 우리가 처한 상황과 그 다음에 우리의 예배가 확정되기까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 수많은 가닥들과, 이런 것들에 대한 입체적인 생각으로 예배의 문제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단상적인 사고를 가지고 예배의 문제를 생각한다 이거죠. 그러한 맥락에서 예배의 갱신을 부르짖게 된 동기가 무엇이냐면 교회 성장에 대한 열망과 예배에 대한 관심이 맞물려 있는 것이죠. 90년대는 조국 교회에서 실험의 시대였습니다. 80년대에 제자훈련과 성경강해가 특징이었다고 할 것 같으면 90년대는 수많은 프로그램이 교회에서 실현된 시대였어요. 그래서 무슨 찬양집회 총동원. 뭐 하여튼 다양한 문화 사역을 비롯해서 다양한 것들이 교회를 휩쓸고 지나갔어요. 그러고 나서도 교회의 영적인 상태는 그리 만족스럽지를 않았어요. 그러면서 이제 찾게 된 또 하나의 단서가 무엇이냐면, 예배라고 하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이 예배를 통해서 뭔가 교회에 새로운 생기를 불어 넣고 그리고 그 예배를 뭔가 조직화 하고 예배의 환경과 이런 모든 것들을 다 바꾸고 새롭게 해서 그래서 그 예배 속에 다양한 문화도 수용하고 그러면서 그 예배를 갱신해서 그래서 현대인들의 관심을 예배 속으로 집중시키고 그래서 그 예배라고 하는 프로그램을 통해서 무엇인가 교회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 넣고 성장에 도움이 되는 도구로 사용하자, 라고 하는 그런 것이었거든요. 그런데 그런 출발 자체부터가 벌써 순수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운동들이 성경을 찾아 간다, 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힘든 얘기다 이거죠. 그래서 우리들이 경계해야 될 것이 무엇이냐면 실용주의적인 성장주의에서 그런 모든 문제들을 바라보는 시야를 절제해야 된다 이거죠. 그리고 무엇이 바른 것인가 그러면서 내려오는 전통들을 점검하고 그 전통들 중에 어떤 것들이 성서적인 뿌리를 두고 있는지 어떤 것들이 그렇지 못한지를 재음미하고, 그리고 개혁을 해서 그래서 그 개혁을 통해서 예배라고 하는 이 행위가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바른 위치에 정위되고, 그리고 그것을 중심으로 목회와 그 다음에 성도들과의 관계 교회의 여러 가지 사역들이, 그 예배와 상관관계를 맺으면서 재배치되는 이러한 목회구상 내지는, 목회질서의 재편들이 함께 동반되어서 교회 전체적인 모습이 성서적인 교회의 모습으로 갈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들어야 된다는 거죠. 그것은, 그렇게 해서 성장을 할 수 있느냐, 안 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에요. 그렇죠. 교회는 어차피 기업이 아니니까 이념 자체가 성장이라든지 성공일 수는 없단 말이죠. 바르게 하는 것이어야 하죠. 그런 가닥에서 우리들이 이 문제를 좀 살펴보려고 해요.
자, 에이든 윌스 토저라고 하는 미국의 작가는, 기독교 사역의 최종적인 목표가 무엇이냐 라는 질문에 대해서, 하나님을 향한 예배 자들을 만드는 것이 기독교 사역의 목표다 이거죠. 그러니까 복음을 전하는 것도 성경을 가르치는 것도 훈련을 시키고 상담을 하는 것도 목양을 하는 것도 모든 것도, 결국은 하나님을 향해 무릎을 꿇은 훌륭한 예배 자를 만드는 것이, 이것이 우리 모든 기독교 사역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하는 것이에요. 그렇다고 할 것 같으면 그렇게 사람들을 세우는 것이 예배 자가 되는 것이 목표라고 할 것 같으면, 그러면 예배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위치가 어떠하냐 이거죠. 이 예배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이번 강의를 들으면서 여러분들이 깊이 가슴에 정리해야 될 이야기는, 저는 지금 목회를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서의 예배를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에요. 그것이 아니라 이거죠. 그것이 아니라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자기의 백성으로 부르시고, 부르신 자기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동질성을 유지하면서 살아가게끔 만드는, 그런 정확한 하나님의 방법이 바로 다름이 아니라, 예배라고 하는 것이에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아이덴티티를 유지해 간다, 라고 하는 것이에요. 이 대목이 굉장히 중요한 대목이에요. 그 대목이라 이거죠.
그럼 그것을 얘기하기 전에 지금 이 강연에서 계속해서 얘기하려고 하는 이 예배는 도대체 무엇이냐 라고 하는 것이죠. 우리는 오늘날 이제 이원론적인 신앙의 태도를 지나치게 경계한 나머지, 예배에 있어서도 전 삶의 영역의 예배를 말하고 있어요. 그건 좋고, 그리고 성경의 이상이죠. 맞아요. 성경 속에서도 근거를 찾을 수 있어요. 예를 들자면 로마서 12장에 “이것이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라고 했을 때,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선하고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라.” 우리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이 예배가 사실 한 시간 몇 분 동안 드리는 주일 예배를 의미하는 건 아니잖아요. 성경은 여러 곳에서 전 삶의 예배화를 강조해요. 그리고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탄핵했던 가장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냐면, 전 삶으로 드리는 예배가 좁은 의미로 하나님께 드리는 그 예배의 정신과 불일치했을 때, 그래서 삶에서 무너져버린 예배의 관계를 좁은 의미의 예배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제사를 통해서 보상해 보려고 하는 것들을, 선지자들이 그렇게 탄핵한 것이거든요. 그런 점에서 볼 때에 성경은 예배로서의 전 포괄적인 삶을 강조하고 있어요.
그러나 우리들이 지나치게 그 한쪽 면만을 보면서 마치 이 특별하게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서 이처럼 드리는 이 좁은 의미의 이 예배는, 별로 중요하지가 않다거나 아니면, 넓은 의미의 예배에 다 흡수되어 버릴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을 너무나 편견을 가지고 보는 거라 이거죠. 그래서 제임스 파커는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얘기를 해요.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가장 엄격한 성경의 견해로 돌아갔다고 믿어지는 청교도 시대에, 대부분의 청교도들은 예배라고 하는 것을 1차적으로 좁은 의미에서 봤다 이거죠. 그걸 강조하고 있어요. 좁은 의미에서의 예배. 그러니까 여기에서 얘기하는 예배, 그러면 청교도들은 좁은 의미에서의 예배를 두 가지로 얘기했는데, 하나는 public service 공적인 예배와, 그 다음에 private service 개인적인 예배에요. 개인적인 예배는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경건생활로 나타났고, 공적인 예배는 이렇게 함께 모여서 드리는 예배를 의미했는데, 주로 청교도들이 특별한 토시가 없이 ‘예배’라고 이야기할 때에는 특별한 수식어가 없이 ‘예배’라고 이야기 할 때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가 public service 함께 교회의 지체들이 모두 모여서 드리는 이 공적인 예배를 의미하는 것이었어요.
이 공적인 예배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들을 만나주시고 그래서 그 백성들에게 말씀하시고, 그래서 그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독특성을 유지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중심적인 방법이었다는 것이죠. 물론 하나님께서는 예배 하나만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적인 정체성을 유지해 오신 것은 아니에요. 다른 도구들도 많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이 사용하시기는 했지만 main이 되는 주된 방편은 아니었다라고 하는 것을 염두 해 두어야 한다는 거죠. 이것을 가지고 제가 성경을 가지고 창세기부터 논증을 해 나가면 이 논증을 하다가 오늘 시간이 다 갈 거 에요. 그래서 결론을 이야기 하자면 뭐냐, 예배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만나주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배우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고, 관계를 확인하고 그 언약관계에 충성을 맹세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거룩한 독특성을 유지해 나가는, 인간이 만들어 낸 경험적인 방편이 아니라, 하나님이 규정해 놓으신 선험적인 방편이다, 이거죠. 이것을 먼저 동의를 해야 돼요. 이 말에 동의가 안 된다고 한다면 여러분들은 다시 정직하게 성경을 읽고 찾아보라 이거죠.
그러면 거기서 우리들은 어떤 사실들을 이끌어 낼 수 있냐면, 교회 역사 전체를 볼 수 있는, 어떤 조망 하나를 얻을 수 있어요. 그 조망이 어떤 것이냐.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과 만나주시는 예배의 축복이 있고, 그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가슴에 새기고, 그렇게 하나님이 자기를 향한 뜻이 무엇인지를 새기는 그 시간에 자기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깊이 감사하고, 하나님의 그 언약의 말씀에 충성을 맹세하고, 거룩한 생애를 지내기로 작심하는, 살아있는 예배의 생활이 신앙의 중심 속에 없던 교회의 역사치고, 하나님의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적이 없었다. 이 얘기에요. 한번 제 얘기를 듣고 여러분들의 마음에 깊이 와 닿기를 바라는데, 한번 여태까지 읽은 성경을 한번 사심 없이 제 얘기를 들으면서 조용히 한 번 회상을 해 보세요.
자, 하나님이 실질적인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택하시지요. 그리고 그에게 나타나셔서 당신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주셨을 때, 아브라함은 아직 자기의 후손들이 자기의 허리에 있었기 때문에 ,그는 개인적으로 꿇어 엎드려서 하나님을 경배했죠. 자손들이 태어났어요. 경건한 자손들이 태어났지요. 그렇죠. 족장들의 역사가 이어졌어요. 그리고나서 그들이 이제 애굽으로 들어가서 많은 무리들을 형성하게 되죠. 민족을 이루게 되죠. 그리고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모세를 부르셔서 그 모세로 하여금 하나님이 얼마나 엄위로우신 분인지를 깨닫고 그 발아래 엎드러지게 만드신 후에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음으로 가득찬 모세를 사용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해방자가 되게 하시죠.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나타나셨고, 그들을 해방시키고자 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애굽에 있던 이스라엘의 장로와 모든 사람들이 고개 숙여서 하나님을 경배하며 예배했죠. 그리고 그들을 구출해 내 와서, 그리고 광야에 교회가 형성되었을 때에 그들은 신앙이라고는 그 신앙이 구약의 신앙의 모태가 될 수 있을 것인가가 의심되어질 정도의 신앙이었을 거예요. 왜, 430년 동안이나 애굽 땅에 있었고, 우상과 결탁하기를 좋아하는 그 사람들이 애굽에서 그 선진 문화를 흠모하면서 어떻게 지냈을 거라는 것은 너무나 뻔하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뭔가 제사와 그리고 종교적인 관습들을 유지했다고 하더라도 그 신앙이 정말 얼마나 투명하고, 그 하나님께서 그 후에 계시해 주실 여호와의 신앙에 전통을 수립할 수 있었는지는 거기에 대해서는 대단히 회의적이라 이거죠.
그러던 인간들을 불러내어서 그 제일 먼저 홍해를 건넌 다음 시내산에 도착하게 하시죠. 그렇죠. 거기에서 약 11개월 동안 머물면서 애굽에 있었던 구습들을 모두 털어내고 그리고 거기서 율법을 수여받습니다. 그 율법을 수여받을 때에 율법에서 대부분을 차지한 중요한 규례가 뭐에 대한 규례였지요? 그렇죠. 제사에 대한 의식법의 규례였어요. 그 규례들 가운데서도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뭐죠. ‘이렇게 하면 열납되리라.’, ‘이렇게 하면 열납될 수 없다.’ 열납될 수 없다,라고 하는 것은 거의 절망적인 선언이었어요. 그러면서 거기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법을 배우는 거죠. 그리고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광야를 유리하면서 마지막에 가나안에 들어갈 때까지, 혹은 들어간 이 후에라도 하나님께서 수시로 이스라엘 백성들과 만나주시는 거예요.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엎드려 하나님을 경배하고, 만난 그곳에서 하나님은 친히 말씀하시고, 말씀하시고 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와 같은 인간들을 선택해 주신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해서 감격하고, 그런 거룩한 하나님께 선택받은 자기와 같은 인간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하는 것에 감격하면서 그러면서 피를 뿌리면서 백성들에게 율법을 낭독하는 사람을 향해서 ‘아멘 아멘’ 합니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서라면 피를 뿌리고 죽기까지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라고 하는 헌신이라고요. 그것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른 이방의 백성들과 구별되는 독특한 정체성을 유지해 왔던 거예요. 그리고 그 전통이 이제 신약으로 넘어가요. 신약으로 넘어가면서 아주 확연한 예배 공동체가 되는 것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통해서 이제 확연한 예배 공동체가 성립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들이 모여서 함께 하나님을 찬미하고 기도하는 자리에 하나님이 오시고 그리고 오시되 설교자의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고 그리고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약시대에 느꼈던 것 보다도 더 생생한 실재를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느끼면서, 그러면서 신앙적인 정체성을 유지해 갔던 거예요.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까지 온 거죠. 이것이에요.
그래서 여기서 내리는 결론 하나는 뭐예요? 예배라고 하는 것은 결코 교회성장을 위해서 제자훈련도 해 보았고 찬양집회도 해 보았고 총동원 주일도 해 보았고 뭐도 해봤고 뭐도 해봤고 뭐도 해봤으니까 이번에는 예배를 한번 해보자, 그런 것은 아니다 이거죠. 예배가 그것이 공적인 예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의 독특성을 유지하면서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가장 중심적인 방편이었다는 거예요. 오늘날 조국교회의 현실이 어떠냐. 그것은 비참하지요. 오늘 시간이 없어서 실험은 안 해 보겠는데요 실험해 보면 많아요. 여기에 모인 여러분 가운데 대부분은 어제 주일 예배를 드렸는데 성경 어디를 설교했는지 기억하지 못해요. 통계에 의하면 5%만이 기억을 한대요. 그게 지난주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 늘 있는 일이잖아요. 지난 주 주일날 예배에서 정말 여러분들은 아주 분명하게 “나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느냐 이거죠. 그럴 수 있다면 대단히 다행이구요.
제가 부교역자로 있을 때, 서울 시내에 있는 역사가 있는 교회인데. 한 600여명 모이는 교회였어요. 아주 제일 고통스러운 것이 신앙생활하고 나서 제가 변화 받은 다음에 느낀 것은 예배였어요. 왜냐하면 저는 부교역자 생활 하면서 이 공적인 예배에 참석하면서 특히 주일 낮 예배에 참석하면서, 아주 확신 있게 오늘은 주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말씀하셨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예배를 한번도 못 드렸어요. 예배를 드리고 나면 분노하거나 가슴이 아프거나 둘 중에 하나에요. 그 중에 대표적인 교회가 바로 그 제가 부교역자로 있던 교회였는데, 2층으로 되어 있고 한 600명 정도 모이는 교회였는데, 2층에 올라가서 예배를 드리잖아요. 그러면, 저는 정직한 양심으로 그건 예배라고 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11시에 예배인데 아니 극장구경을 가도 15분전에 가서 팝콘 먹으면서 기다리는데 그렇잖아요. 왜 중간에 보면 재미없으니까. 그런데 예배는 15분전에 와서 기다리는 사람은 손을 꼽을 정도에요. 10분전에 오고 5분전이 러쉬 아워 에요. 그리고 11시가 되어서 서두르지도 않아요. 터덜터덜 걸어오는 인간들이 꽉 찼다 이거에요(?). 아무리 복음의 시대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하면 되겠어요. 그게 ! 오늘 늦게 온 사람한테 하는 얘긴 아닙니다. 그게 뭐냐 이거에요. 와 가지고 앉아요.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데 웃기는 게 말이에요, 아니 무슨 각 교단이 카르테를 맺은 것도 아닌데 왜 한국 교회 예배는 모두 다 12시 10분에 끝나? 무슨 협정을 맺었어요? 아니 노래방에 가서 노래를 부르다가도 흥이 돋구면 한 시간 더하는데. 그러니까 어떻게 되겠어요? 예배를 정해진 시간에 끝내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목표에요. 그래서 그 목표가 성취가 안 되면 어떻게 하죠? 성취가 안 되게 생겼어요. 그럼 어떻게 하죠? 찬송가 382장 1절만 부르고 마치겠습니다. 그렇게 하고 시작하는데, 65분에 그 교회는 예배를 마치는데 순서를 세어보니까 스물세 가지에요. 그런데 그게 어떻게 그렇게 맞춰지는지 기적인데 하여튼 그 순서가 빠짐없이 다 수행되면서 65분에 끝나는데 봄 여름 가을 겨울 실수 하는 적도 없어요. 똑같은 65분이에요.
그리고 예배를 드리는데 사람들이 예배를 드린다, 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죄송해요. 뭘 드리는 게 있어요. 자 늦게 왔으니 몸을 드렸어요? 헌금을 많이 냈어요? 물질도 안 드렸지. 마음은 있어요? 마음도 안 드렸지. 그럼 도대체 뭘 드렸다는 거예요. 도대체 뭘. 뭘 드렸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와 가지고 예배를 드리는데 이건 예배를 드리는 게 아니라 예배를 견디는 거예요. 예배 견디는데 다른 시간은 그래도 견디기가 좀 괜찮아요. 일어났다 앉았다, 찬송도 부르고 또 성가대가 한 곡조 한다니까 또 앉아서 이렇게 한 번 보기도 하고. 그런데 예배 견디기의 극치는 설교 견디기야. 설교 견디기. 그건 뭐 견디는 방법도 수없이 고안해 내죠. 와가지고 우선 성경을 읽고 그 다음에 설교가 시작하면 주보를 보는 거야. 주보 왜 봐? 내가 그래서 주보 안 만들어요. 우리 교회 주보 없어요. 주보 그게 무슨 필요가 있어요? 찬송 부르라고 하면 부르고 일어나라고 하면 일어나고 설교하면 듣고 축도하면 끝났나보다 하고 가면 되지. 무슨 필요가 있어요. 종이 아깝게. 그걸 읽고 앉았어. 그러니까 설교가 그렇게 금방 끝나나, 재미없을수록 길잖아요. 주보 다 나왔는데 빨간 펜 들고 틀린 글자 고치면 뭐해요. 그거 고치고 앉았고, 그래도 시간이 안 가면 뒤집어 가지고 감사헌금 얼마 들어왔나, 자기가 무슨 재정위원 집사야? 그거 보고 200만원 들어왔네. 감사헌금 낸 사람 명단까지 주보에 적잖아요. 세계에 유래가 없어요. 그런 주보는. 그리고 그거 한 번 세보는 거예요. 200만원이 들어왔는데 가로로 몇 명이고 세로로 몇 명이고. 곱하기해서 200만원 나누고 그래도 안 끝나죠. 그런 사람. 그 다음에 또 옆에 있는 사람하고 쪽지를 써서 그것을 주고받는 사람. 그리고 뭐 또 핸드폰. 핸드폰은 왜 켜 놓고 예배당에 들어와요. 왜. 그 핸드폰이 울려 가지고 또 뜨거운 감자 모냥 그 자리에서 죽여 버리지. 그걸 주머니에 넣고 밖으로 들뛰는 사람. 그런 사람. 졸다가 성경책 떨어뜨리는 사람. 민방위 교육이에요. 민방위 교육. 민방위 교육에 자매들은 가 보질 않아서 모르죠. 참가 시켜달라고 하면 아마 해 줄 수 있을 거예요. 가보라고. 민방위 대원들 뭔지 잘 알죠? 민방위 교육 제일 먼저 가면, 우선 구석진 자리가 어딘가부터 찾아요. 신문 들고 가서 쓰고 자는 거예요. 거기 강의하러 오는 사람이. 나는 제일 불쌍해. 듣지도 않는 거 말이지. 그 강의. 중 고등학교 때 대머리 벗겨진 교장 선생님이 길게 조회시간에 그렇게 미주알 고주알 말씀하시는데 뭐 기억을 해요. 담임선생님도 구두로 땅 파면서 하나도 못 기억하대. 그러니까 통계가 나왔어요. 어느 신학교 교수가 조사를 했는데 한국에 있는 복음주의적인 교회들에서 예배 끝나고 나오는 사람을 저기 마당에서 앙케이트를 했어요. “지금 예배드렸습니까”. “예”. “오늘 목사님이 성경 어디를 설교했습니까?”. 그랬더니 인간들이 100명 인간 중에서 95명의 인간은 모른다고 대답을 한 거에요. 5명의 사람만, 안다고 대답을 한 거에요. 그것도 하루 후에 전화로 확인 해 보니까 두 사람은 하루 사이에 잊어 버렸어요. 한심하다고 생각해요. 그게 예배에요. 하나님 만나요? 만나긴 뭘 만나요. 만날 것을 기대는 하고 와요? 기대는 무슨 기대에요. 내 평생, 소원은 이것 뿐, 빨리 끝내고 집에 갔으면, 그렇게 하고 교회 꾸역꾸역 오는 거예요. 그 중에서 절반 이상은 구약을 설교했는지 신약을 설교했는지도 생각이 안 난대요. 그러니 그게 교회일 수 있어요? 그러니까 어떻게 되요?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냥 나 좋은 대로 살아가는 거에요. 하나님 왕이시라고 하는데 그건 괜히 입바른 소리지 왕은 왕인데 입헌 군주국의 왕. 외국 사절들 왔을 때 밥이나 먹어주는 그런 왕. 뒷방 노인네 취급 하는 거죠. 그러고는 맨 날 뭐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고 뭐, 그럼 왕처럼 대접을 해야지. 왕이 얘기를 했는데 왕이 무슨 얘기를 했는지도 모르는 게 그게 말이 되냐 이거에요. 그런 식으로 하면서 예배들이 막 곤두박질 치면서 무너져 가는 거예요.
그러니 사람들이 예배드리자고 하면 스트레스 받는 거예요. 솔직히 얘기해 봐요. 제 말에 대해서 아니오, 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래도 어떤 의미에서 행복한 사람이에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것을 아니오, 라고 말을 못하는 거예요. 예배드리자고 그러면 막 스트레스를 받는 거죠. 그리고 우리는 또 그 하나의 예배 우상주의적인 성격이 있어가지고 무얼 하든지 예배야. 졸업식 이면 그냥 졸업식 하면 되잖아요. 예배하고 그 다음에 졸업식. 무슨 회의를 한다, 그거 그냥 회의 하면 되잖아요. 예배드리고 회의. 그런데 관심은 예배가 아니라 회의에요. 뻔하잖아요. 설교 해 달라고 부탁은 해 놓고 10분만 해 주십시오. 누구 놀리는 거예요. 지금. 왜 그렇게 하냐 이거죠. 아니 무슨 예배를 그렇게 뭐든지 할 때마다 그렇게 예배를 드려야 돼요?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그래서 세레머니와 워십이 완전히 다 뒤엉켜가지고 그런 거예요. 왜 그렇게 하느냐 이거에요. 그런 상황에서 이제 고통스러운 거예요. 그러니까 예배가 하나도 기쁘고 즐겁지를 않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어떻게 해요? 인간이 얼마나 교묘한지 보세요. 그 예배가 그렇게 재미가 없고 예배가 기쁨이 없는 거예요. 그러면 그 성경과 역사를 보면서, 어떻게 그 딱딱한 형식 속에서 그 수많은 믿음의 조상들은 이 예배 속에서 어떻게 그렇게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감격하고 그렇게 신령한 기쁨을 맛볼 수 있었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아이덴티티를 유지할 수 있었는가를 생각을 하면서, 뭐가 잘못되었는지를 성경과 역사의 잣대를 통해서 우리 자신을 점검해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 재미없으니까 재미있는 요소를 예배 속에 끌어 들이자 그 얘기에요. 그래서 예배 속에 끌어들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요즘? 교회당을 가 봐요 이게, 교회당인지 말이지요. 이게 무슨 공연장인지 구분이 안가요 그리고 막 엄청난 트럭으로 실어다 놔도 모자랄 그런 어마어마한 악기들. 그것도 사람이나 많이 모이면서 그러면 말도 안 해 .사람은 주먹만큼 모이는데 악기는 이렇게 막 갖다 놓고 사람 찬송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들부수는데. 불만 끄고 번쩍거리면 영락없는 나이트클럽 이예요. 실제로 그런 걸 또 다 알잖아. 예배가 아니라 이제 공연을 위한 교회당(?)으로 바뀌고 있다 이 얘기에요. 이런 것들은 개혁 주의적이고 전통적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성경적이지도 않고, 그리고 실제 적용의 면에 있어서도 우리에게 교회의 거룩성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백성들로서의 아이덴티티를 회복하게 만들어 주는데, 기여하지 못한다, 이 얘기에요. 그리고 그런 식으로 도입을 한다, 이 얘기에요. 그렇게 해 가지고 예배를 그 독특하게 변형시켜가지고 예배 시간에 드라마를 해 버리고 설교를 치워버린다든지 말이지요. 그런 식으로 해 가지고 영상을 동원해 가지고 그렇게 사람들을 즐겁게 한다든지, 아니면 열렬한 찬양으로 사람들이 열광 속에 들어가게 만든다든지, 이런 식의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는 거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사람들을 자극을 해 가지고 뭘 얻어낼 수 있느냐 이거예요. 그 열렬히 그렇게 찬양해서 마지막 얻는 게 뭐예요? 그게 뭐냐구요. 성경 어디에서 그렇게 열렬하게 그 찬송을 열광 주의적으로 찬송을 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아이덴티티를 회복하는 거라고, 어디 성경에 그런 걸 가르치느냐 말이죠. 그러는 가운데서 기독교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 지적인 전통들이 철저하게 유린당하는 거예요. 생각이 없는 사람들로 모두, 말하자면 변화되어 가는 거죠.
이러한 속에서 교회는 수많은 방법들을 동원하고 예배의 틀이나 이런 것들을 바꿔 보려고 애를 썼지만 바뀐 것이 뭐가 있느냐 이거예요. 교회의 영성은 점점 쇠퇴해 가고 있고 교회에서는 점점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회심을 경험한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사라져 가고 있다 이거예요. 이제는 정말 아무 교회든지 출석하기만 하면 한참 다니면 기독교가 무엇인지 정체를 알 수 있느냐 라는 질문에 대해서 목회자의 양심으로 그렇다, 라고 대답할 수 없는 상황에까지 가게 되었다 이거죠. 그래서 시에츠 다드라고 하는 신학자는 그의 기념비적인 작품인 그 사도적 케리그마와 그 발전 이라고 하는 그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사도들이 와서 오늘 날 예배드리는 걸 보면 기절초풍할 것이다. 자기들이 이 땅에 남기려고 했던 교회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말이죠. 이런 문제들을 타계해 나가야 되잖아요. 그러니깐 여긴 우리들이 굉장히 입체적인 접근이 필요해요.
그래서 예배를 생각할 때 우리들이 그냥 아무렇게나 한 시대에 우리가 편한 걸로 이렇게 드리자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이거죠. 몇 가지 원칙이 있는데 우선 첫째는 뭐냐면 성서적이어야 돼요. 성경의 역사와 성경의 진리를 깊이 탐구해서, 그래서 성경에 가장 가까운 그런 예배의 정신을 갖고 그 형태를 가진 그런 예배여야 된다 이거죠. 그리고 두 번째는 뭐냐면 보편적이어야 해요. 보편적. 보편적이어야 된다는 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여기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릴 때에 하나님의 백성중의 일원임을 느끼면서 예배를 드릴 수 있었는데, 저 교회에 갔더니 어찌 할 바를 모르겠다, 이런 식이 되서는 이게 예배의 보편성의 원칙에 위배되는 거예요. 이게. 그렇잖아요. 장로교인이라 할지라도 감리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면서도 확연히 이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져다주는 예배 속으로 내가 들어와 있다는 것을 내가 느낄 수 있어야지 이게 워낙 파격이 되어버린 나머지 이것도 예배인가 하는 이런 혼동을 가질 수 있으면 안돼요. 가는 교회마다 다 중구난방으로 드린 그런 것들이 예배의 원칙이 아니라 이거죠. 세 번째는 고백적이어야 한다 이거예요. 그래서 예배 속에는 단지 차가운 의식 속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온 회중들이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악을 고백하면서, 자기들이 알고 있는 그 하나님을 고백하는 예배의 형태가 되어야 한다 이거죠.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는 그 예배가 회중적이어야 된다 이거예요. 회중적. 그래서 이 회중적이라는 말은 카톨릭을 대항하는 이야기죠. 그죠.? 카톨릭의 예배는 사제적인 예배죠. 근데 그게 서방교회의 전통인데 동양 교회에서는 좀 달랐어요. 어쨌든지 간에 교회가 말하자면 회중적이어야 된다 이거죠. 사제적이 아니라 회중적이어야 된다. 그것이 신약 성경의 정신에 어울리는 것이다 이거죠. 그래서 이런 종합적인 접근이 필요하고, 그리고 이러한 예배의 형태를 확정 짓는데 있어서, 신학적인 고려, 문화적인 고려, 역사적인 고려, 전통적인 고려 이런 것들이 모두 함께 생각 되어지면서, 그러면서 뭔가 거기에서 합당한 그런 예배의 형태들이 탄생되어야 한다 이거죠. 그러니까 나는 이런 게 좋다 그리고 그렇게 끌어가는 그런 것들은 지각 있는 기독교 사역자가 할 일이 아니다 하는 것이에요. 무조건 고수하거나 무조건 타파하자는 것이 아니라 뭔가 입체적인 전망을 가지고, 그것을 모두 알면서 그렇게 진단하면서 뭔가 예배의 회복을 우리들이 바라봐야 한다 이거죠.
그렇다고 볼 때에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 예배에 대해서 그런 모든 것들을 고찰해 나가면서 궁극적으로 꿈꾸는 것이 뭐냐면, 예배에는 영광이 있다는 거예요. 예배의 영광. 그러니까 이 예배에는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가르치시고 자기의 백성들을 자기 백성답게 세우시는, 아주 중요한 방편이라 이거죠. 주된 방편이다, 주된 방편. 그 거기에 굉장한 놀라운 영광이 있는 거예요. 신앙생활 속에서 신앙의 경험 속에서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만큼 영광스러운 일이 어디에 있겠어요. 그래서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팔복을 강해하면서 그 팔복 중에서 최고의 지고의 복이, 마음이 청결한 자들에게 주시는 복인데, 그것이 하나님을 뵈옵는 것이다 이거죠.
그러면 이제 이번 강연의 특성상 이제 이런 모든 문제들을 다룸에 있어서 급소를 먼저 치고 싶다 이거죠. 급소를. 그럼 이런 모든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이거죠. 예배의 갱신을 한창 열띠게 토론을 하길래, 아, 이 목회자는 뭔가 이 고통스러운 예배의 상황에 대해서 깊은 아픔을 느끼고 있구나. 뭔가 기대가 된다, 그렇게 생각 했는데 나중에 알고 봤더니 열변을 토하고 나더니, 마지막 이야기 하는 게 뭐냐면 따라서 얘기하는데 교회를 다 뜯어서 인테리어를 다시 하고, 조명을 고치고 그리고 찬양대를 보강하고 보컬 팀들을 만들겠다... 그건 신앙이 없는 거예요. 그런 문제들을 그렇게 접근하지 말고,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들이 뭐냐, 어떻게 해야지만 그 예배가 영광을 회복할 수 있느냐, 그거에요. 그것에 대한 가장 명확한 대답이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 속에 나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다름이 아닌, 예수님이 수가성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함께 대화 하시는 가운데 말씀하셨던,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니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찌니라. 하나님은 이렇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느니라.” 하는 그 말씀 이예요. 그래서 이제 여기에서 이 구절만큼 신약에서 예배에 대한 정확한 지적을 해주는 명시적인 성경구절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이 문제에 대해서 존 맥아더는 말하기를 당시에 이 사마리아 사람들은 여러분들이 아는바와 같이 이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 전통적으로 유대인과 단절되어 있었어요. 그렇죠?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만의 사마리아 오경을 가지고 그리고 모세가 축복을 선포했던 그리심 산을 중심으로 그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독특한 예배생활을 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 예배 생활은 어떤 것이었냐면, 지적인 요소가 결핍된 아주 열광적인 예배였다고 해요. 반면에 이 유대인들의 예배,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드리는 이 예배는 열정은 없고 차가운 지식만 있는 예배였어요. 양자를 겨냥하면서 예수님께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찌니라’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거예요.
여기에서 우리들이 예배의 형태라든지 이런 모든 것들은 역사와 성경의 여러 가지 요인들을 고려하면서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지만,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예배가 예배되게 하는 그래서 예배가 예배되어서 그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만나주시고, 그래서 그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독특성을 유지하면서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그 예배가 되기 위한 가장 본질적인 두 요소를 만나는데, 그것이 바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찌니라 라고 하는 말씀에서 요약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 구절도 제가 신학교 가서 희랍어 성경 자체를 보기 전까지는, 교회에서 수없이 설교도 듣고 성경도 공부하고 있는데, 그냥 신령과 진정으로 그러니까, 이건 하나의 신령 그러면은 세속 되지 않게 거룩하게 떠들지도 말고 신령하게, 그렇게 드리라는 거고, 진정이니까 그건 그냥 건성으로 드리지 말고 진심으로 드려라. 그렇게 이해를 했어요. 또 그렇게 배웠고. 그러니까 예배는 좀 딱딱해 보여도 거룩하고 세속적이지 않고, 나올 때도 넥타이 매고 이렇게 하고 나오고 그러는 거고, 그리고 건성으로 드리지 말고 진심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뭐 그런 건줄 알았거든요. 근데 가 보니까 그런 뜻은 전혀 없어요. 이 속에. 희랍어 원문에 의하면 이것은 영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영과 진리 안에서. 그럼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하는 것이 무슨 의미냐, 이것이 바로 그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의 영광을 회복하기 위해서 다시 되찾아야 할 본질적인 요소라 이거죠. 정직하게 성경을 천천히 읽어보면, 우리는 예수님의 이 짧으신 대담 속에서 이런 중요한 암시를 찾아낼 수 있어요. ‘하나님은 이렇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나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찌니라.’ 그게 무슨 얘기냐 하면 하나님이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는데 어떻게 예배하는 자를 찾는 다구요? 이렇게 예배하는 자를 찾는데 이렇게 라고 하는 그 예배의 방식을 뒤에서 보여주는데,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는 사람을 찾으신다. 그걸 뒤집어서 이야기 하면 이런 논리가 성립되잖아요. 하나님은 저렇게 예배하는 사람은 안 찾으신다. 그 얘기 아니에요. 꼭 이렇게 라는 방식을 따라야 한다 이거죠. 그러니까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는 예배가 아닌, 다른 방식의 예배이면 하나님을 만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거예요. 그거에요 그러니까 이들이 굉장히 사마리아 사람들이 열렬하게 하나님을 예배했지만,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가, 그들이 예배 속에서 지향하고 있는 예배의 방식이 ‘이렇게’의 예배의 방식이 아니었다 이거죠 또 유대인들의 예배도 역시 마찬가지이고. 말이죠. 그럼 이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이냐. 그 얘기죠. 그러면 여기에서 얘기하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한다는 것이 무엇이냐.
여기에서 우리들은 예배를 예배되게 하는 본질적인 두 가지 요소를 먼저 발견하게 되는데, 첫째는 영이라는 문제이고 두 번째는 진리라는 문제에요. 자 그럼 우선 하나씩 더듬어 봅시다. 영이라는 이 문제는 그러면 예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를 의미하는데, 이건 무엇이겠는가, 영 안에서 드린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죠.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살아계신 하나님과는 무한한 질적인 차이가 있어요. 비록 하나님을 더듬어 알 수 있는 종교적인 씨앗이 인간 속에 남아 있다고 할지라도,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을 찾기는 불가능해요. 그럴 때에 그러한 인간에게 오셔서 하나님을 경험하게 해 주시고,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체험을 통해서 알게 해 주시고, 진리를 우리의 마음속에 확연하게 생각나게 만들어 주셔서, 하나님이 어떤 성품을 가진 어떤 존재이며 그러한 성품을 가지신 그 분이, 우리에게 어떤 삶을 요구하시는지를 깨닫도록 만들어 주시는 역할을 하시는 분이 있는데, 그 분이 바로 성령님이에요. 성령님. 이 성령과 진리 이 문제는 말이죠. 성경의 화두이고 특별히 카톨릭화된 교회를 새롭게 회복할 때에 종교 개혁자들의 이 모든 전 생애의 신학 작업의 화두였어요. 이게. 성령과 진리, 이 두개가. 화두였단 말이죠. 그러니까 이 퀘이커 교도 같은 사람들은 말이죠. 이 예배 속에 어떤 질서나 이런 것들 보다는 조용히 하나님을 명상하는 가운데 내적인 조명을 통해서 우리를 이렇게 감동시키시고 역사하시는 그러한 하나님을 기대하는 거예요. 성령 하나님을 기대하는 것이죠. 그래서 누구든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일어나서 설교도 하고 기도도 하고 그러는 거죠. 그러나 종교 개혁자들의 생각은 달랐어요. 어떻게 달랐냐 하면, 성령이 인간에게 역사하시는데 성령은 홀로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그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신다는 소위 얘기하는 라틴어로 꿈 베르보이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는 거예요. 말씀과 함께 역사하신다. 그러니까 통상적으로 라는 말을 꼭 붙였어요. 통상적으로 성령님은, 거의 모든 경우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신다. 그것이 이제 후대의 청교도들에게 넘어가게 되면 오웬 같은 사람에게 와서는 더 엄격한 견해가 돼요. 그래서 어떻게 되냐면, 말씀을 가지고 역사하시지 않는 성령의 역사는, 우리들이 신뢰할 수 없다. 그게 종교 개혁자들이 카톨릭 교회에서 개신교회를 세우고 사도적인 전통, 신학적인 전통을 다시 세워서 이 땅에 교회의 본연의 모습을 만들어 놓은 두 개의 중요한 화두였다고요. 그 두 화두가 예배 속에서 만나는 거예요. 예배 속에서.
그러면 말이죠. 우리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그렇게 예배 속에서 두 화두가 만나는데, 그러면 이 성령의 문제를 우리들이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이냐. 이 두개를 제가 따로 나누어서 설명하지마는 그러나 이 두개가 따로 떨어진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얘기에요. 절대 안 된다 이거죠. 그런 약점을 가지고 있는 그 오늘날의 예배의 현장이 뭐냐 하며는, 그 오순절적인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의 약점 이예요. 뭔가 성령을 향해서 열려있고 체험에 대해서 열려있고 그런 것들에 대한 간절한 구함도 있고, 본받을 점도 많은데 단 문제는 뭐냐 하며는, 교회로 하여금 사도적인 신앙을 회복하게 만들었던 이 개혁신앙의 두 화두 즉, 성령과 예배의 문제에 있어서 성령님이 말씀을 통해서 함께 역사하신다고 하는 이 강한 신앙을 붙들지 못했기 때문에, 성경의 진리를 그 신앙의 표준으로 삼고, 그것들을 집요하게 추적해서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무엇을 말하는지 전달하는 것을 예배에 있어서 가장 중심적인 과제로 삼지 않고 있는 데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것이 주관적으로 흘러가는 거예요.
자 그렇게 본다면 이제 예배에 있어서 이 성령의 요소를 우리들이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가. 우선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성령님은 땅에 있는 이 인간이 하늘에 있는 거룩한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하고 그리고 우둔한 인간의 지성을 열어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의 깊은 의미를 터득하고 깨달아서, 그 깨달음의 과정을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마음이 자신에게 부어지도록 만드시는 하나님 이예요. 성령님이 바로 그런 하나님이라는 거죠. 그리고 성령님이 그렇게 역사하실 때에 예배 속에는 우선 제일 먼저 나타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체험의 요소가 예배 속에서 나타난다는 거예요. 내 오늘 여러분에게 묻고 싶어요. 최근에 여러분 예배를 드리면서 깊은 감동을 받고, 아이, 그냥 시집살이 서러워서 우는 거 뭐 직장 잘려서 우는 거 그런 거 말고, 예배 속에서 예배드리기 전에는 미처 가슴에 다가오지 않던, 하나님의 성품이나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행동 중에 어떤 진리를 깨닫고, 그것이 커다란 감격으로 밀려왔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만나는 감격 속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예배드린 최근의 경험이 언제냐. 이렇게 강연을 하는 저는, 21살에 회심을 해서 예배를 드리면서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면서 눈물을 흘린 것은, 31살 때 부흥회 때 딱 한번 이예요. 그 땐 눈이 안 떠졌어요. 신학대학원 다니면서 채플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 들으면서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시구나, 하면서 눈물 흘린 적이 거의 없어요. 이 체험의 요소가 왜 중요하냐 하면요.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조나단 에드워드가 이야기 했듯이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사물을 지각하고 분별할 수 있는 두 가지 기능을 주셨어요. 하나는 뭐냐 하면 사실을 인식하는 지적인 기능이고, 또 하나는 어떤 것을 볼 때에 좋다 싫다 하는, 그래서 마음이 기울어지거나 반감을 갖게 하는 정서적인 작용을 우리에게 주셔서, 그것을 가지고 사물을 분별하게 하시는 것이에요. 근데 보라고요.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 없고 경험되는 것이 없는데, 그런 진리를 위해서 목숨을 걸고 산다? 만나는 만남의 경험이 없는 이름 모를 그 하나님을 위해서, 이름을 모른다고 하는 것은 진짜 이름을 모른다는 게 아니라, 그 이름이 경험되지 않는 그 분을 위해서, 진실하게 살려고 노력을 한다든지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고난을 받는다든지, 하는 것들은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에요. 그렇게 때문에 이 체험의 문제도 말이죠. 체험을 너무나 그 체험적인 것들을 강조하면서 교회가 많이 망가졌거든요 솔직히 말해서. 그런 게 아니에요. 우리나라 교회 역사를 보면 그런 문제들을 너무 많이 났잖아요. 기도원에 가면 방언 가르쳐 줄 테니까 따라 하라고. 따라 한 방언이 그게 어떻게 방언이에요. 그런 식으로 하는 것. 이런 체험들이 가져오는 많은 문제들을 알았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체험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기 때문에 뭔가 우리에게 체험되어지는 것은 위험하고 값싸고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이 체험은 경계해야 한다, 라고 하는 이 심리가 예배에 있어서 참된 자유를 많이 빼앗아 가는 거예요. 신앙생활 전반에 있어서 이런 것들이 그 체험적이 되는 것 감정적이 되는 것에 대한, 지나친 경계가 잘못하면 성령님을 훼방하는 데까지 나간다, 이 얘기죠.
그래서 말이죠. 이런 문제를 우리들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이 문제에 있어서 항상 균형을 잡아야 해요. 그래서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이것은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 의 제 5장을 보면, 장문의 논문이 한 편 실려 있는데 거기에 보면 이 체험의 문제를 가지고 교회사에서 얼마나 방황을 하고 성경적인 중심선이 어떤가 하는 문제가 나와요. 그 쪽을 참고하시고. 계속 얘기를 진행하겠어요. 성령님이 오심으로써 예배는 말로만 듣던 그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있느냐 이거죠. 예배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 하나님을 경배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을 경배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인데, 하나님이 이 공적인 예배를 통해서 받으시는 영광이, 개인적인 예배를 통해서 받으시는 영광보다 매우 크다는 사실을 청교도들은 누차 지적했어요. 그 사람들이 얼마나 본질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는데, 조지스이마 같은 청교도는 뭘 얘기 하냐 하면, 이렇게 얘기했어요. 이게 까딱 잘못하면 오늘날 교회 성장주의자들에 의해서 오해 받을 수도 있는 대목인데. 잘 들어보세요. ‘하나님은 많은 수의 백성들이 예배할수록 더 많이 영광을 받으신다.’ 오늘날 성장주의자들이 들으면 귀가 솔깃하겠죠 그렇죠. 그런데 그 사람의 마음속에는 사실 그런 게 있었던 것은 아니에요. 그럼 뭐냐 이 얘기죠. 아니 당연하지 않아요. 우리가 너무 색안경을 쓰고 볼 필요는 없어요. 이 땅에 온전한 부흥이 와서.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충만해져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면 그 마지막 모습은 어떤 모습이에요? 모든 사람들이 예배의 정신으로 살아가고, 그리고 정해진 예배시간이 되면 모든 사람들이 열렬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 앞에 진심으로 무릎을 꿇고, 성령이 주신 은혜를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대면하고 거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신 것을 한없이 감격하,고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면 “그대로 살겠습니다,” 라고 죽음에 이르기 까지 충성하며 그 말씀을 좇아서 살겠노라고 맹세하고 어두운 세상으로 나가는 그 예배의 그림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 그림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 청교도가 많은 사람이 모일수록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 라고 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거예요. 교인이 이만큼인데 딴 사람들은 다 놀러가고 낚시질 가고 구경 가고 뭐 노래방 가고 단란주점 가 버리고, 여기 한 7명이 모여서 예배를 열렬하게 하나님을 예배한다. 물론 그들의 자리에도 오셔요. 그것 보다는 모든 사람들이 모두 회심하고 변화 받아서 교회 나와서 공적인 예배시간에 전심으로 그리워하던 하나님께 경배하는, 그것을 통해 더 영광을 받으신다, 라고 하는 것은 너무 당연하지 않아요? 수렴주의와 물량주의와는 관계가 없다 이 얘기에요. 그리고 그것이 기독교 선교의 궁극적인 열매에요. 그 예배의 모습이. 그 예배의 모습이 그대로 삶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때문에 우리들이 기억해야 될 것은 말이죠. 성령의 문제를 논의하면서 우리들이 함께 기억해야 될 것은, 삶을 능가하는 예배도 없고 예배를 능가하는 삶도 없는 것이에요. 저는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영적인 잔재주꾼들은 많이 늘어나고 있지만, 영적인 거목이 될 만한 사람들이 나타나지 않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 뭐냐 하면,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예배를 경험한 사람들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신학교 문제를 가지고 많이 떠드는데, 해결 방안은 하나에요. 어느 교수가 와서 가르쳐도 비슷비슷해요. 가장 중요한 건 뭐냐 하면 채플 시간 이예요. 그 신학교 채플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경험하고 진리를 진리답게 외치는 것이 무엇이고 그러한 사람들의 삶이 무엇인지,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예배와 설교의 그 전형을 자기들이 그 실천신학의 현장에서 경험할 때, 그 때 신학이 같이 세워지는 거예요. 솔직히 이런 저런 신학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신앙의 힘만큼 위대하지 못할 때가 많아요. 한 번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고 신앙이 올바르게 들어가면, 그 지식으로 쌓아올린 것들은, 우르르 무너지는 경우가 너무나 많이 있어요. 역사의 그러한 예가 너무나 많다고.
자, 곁가지로 나간 것 같습니다만, 예배 속에서 성령님이 함께 하실 때에는 그 예배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 이거예요 궁극적으로는 예배의 목표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인데 목적이. 그 목적에 도달하는 목표는 뭐냐 하면 하나님과의 만남이에요. 그러니까 이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이에요. 이런 것들을 간과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있었던 가장 커다란 문제가 뭐냐 하면, 뇌물 개념의 예배의 문제였어요. 뇌물 개념의 예배의 문제. 뇌물 개념의 예배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니까 그러니까 그 하나님과의 만남이 불가능해 지는 거예요.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뇌물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주는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그것을 주느냐 그런 것들은 뇌물에 있어서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요. 실제로 거래 관계가 이루어 졌느냐 안 이루어 졌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거죠. 그런 거죠. 그런 것들의 대표적인 예가 그 우가라 신화 같은데 보면, 고대 중근동 지방의 신관들을 엿볼 수 있게 만드는 내용들이 굉장히 많이 나와요. 그 신화들을 볼 것 같으면, 그들이 상상하고 있는 신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뭔가를 얻어먹고 싶어서 걸근대는 모두 이 걸귀들린 신들이에요. 우리 조상들이 섬겼던 신들도 그랬잖아요. 그 신들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뭐예요? 제사 밥 이예요, 제사 밥. 그래서 그것을 잘 해주면 기분이 좋고 잘 안 해주면 심통을 부린다, 이거죠. 그런데 그 심통 부리는 것도 어떤 도덕적인 일관성은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 조상들은 그런 신들로부터 복을 받는다, 라고 하는 그런 개념은 없어요. 집터를 파 놓고 기초공사를 하고 돼지머리를 놓고 절하는 수많은 건축업자들과 건물주들의 기대 속에서, 무슨 터줏대감의 복을 받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이거 먹고 좀 잠자코 있어라, 하는 하나의 선심성 내지는 뇌물성 제사에요.
그런데 성령님이 그 속에 오셔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실재를 느끼고 그 분을 경험하게 하는 체험적인 요소가 사라질 경우에는 필연적으로 예배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없는 상태에서 이런 비인격적인 뇌물형 예배로 바뀌어 간다, 이 얘기에요. 예를 들자면 이런 얘기잖아요. 교회에서 가끔 보면 교인들 중에 교회 못나온다고 목회자한테 통보하는 사람들 있죠. “목사님, 제가 다음주일에 못나옵니다.”, “아 그러세요. 너무 바쁘신 모양이군요. 예 알았습니다.” 그런데 나왔어요. “어떻게 못 나오신다더니 나왔어요?”, “그저 왠지 주일 날 교회 안나오면 일주일 내내 찝찝해서요.” 그게 뇌물 아니고 뭐예요? 진리가 그립다든지, 하나님을 만나야 되겠다든지 하는 그런 일편단심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도장 찍고 가자 그런 생각으로 나오는 거예요. 그리고 또 그릇되이 살아가는 자신의 삶에 대한 적절한 보상 의식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런 것들이 정말 올바른 것이냐 하는 것이에요. 이건 벌써 이미 전통이 오래 된 거예요. 그것과 함께 대두되는 것이 그 구약성경에서 얘기하는 소위 리브패턴 이라는 것이에요. 리브라는 말은 히브리 말로 다툰다는 뜻이거든요. 리브패턴이에요. 리브패턴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선지자가 하나님을 대신해서 말씀하고 그리고 가상적인 이스라엘 백성들과 논쟁하는 장면이에요. “너는 나를 버렸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가 언제 주님을 버렸습니까?”, “너희들이 내가 너희를 사랑했으나 너희들은 나를 버렸고 그리고 나를 진심으로 경배하지 않았다.” 그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가 언제 하나님께 제사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절기를 따라서 소를 드리고 양을 드리고 예물을 드렸고 하나님을 섬기는데 빠진 적이 없었습니다.”, “마음 전부를 내게 드린 것이 아니면 드린 것이 아니다.” 그러면서 결론이 끝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사를 두고 하나님이 그 제사를 향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대하시는 그 수준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엄청나게 다른 건데, 그렇게 다르게 만들어진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 하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화를 형성하고 있었던, 고대 중근동 종교 속에 흐르고 있는 그 뇌물적인 예배관과 융합현상이 일어난 거예요. 결국은 말이죠. 이것 보세요.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을 본받지 말라고 아무리 목에 피가 나도록 얘기를 해도 소용이 없어요. 소귀에 경 읽기라고. 뭐 그렇다고 할 것 같으면 목소리 큰 사람이 있던 시대에는 교회가 순결했게요. 소용없다고요.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세상을 본받지 말라고 한다고 해서 그거 본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니면 누릴 수 없는, 그 섬씽이 들어가지 않으면, 그러면 그들 모두 다 세상 속에 그 사람들이 세상에서 다 취한 사람들인데. 아직 때도 안 벗겨졌어요. 아직 까지도 세상으로 돌아갈 이런 부패성과 이런 것들이 강력하게 남아있는 사람들이에요. 그런 것들을 억제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의 독특성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 무엇이에요? 그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예배 속에서 끊임없이 만나고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위해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 이런 것들을 끊임없이 리마인드 하지 아니하면 그리고 다시 자기가 재 체험 되지 아니하면, 그러면 필연적으로 자기들도 그런 세상 속의 일원이 되어가는 거예요. 묻어가고 흘러가 버리는 거예요. 그게 오늘날 우리에게 나타나는 모습 아니에요. 주일날 교회 나오는 거 빼고는, 불신자와 구별이 되느냐 이거죠. 대문에 교표 하나 붙어 있는 거 빼고는, 차이 나는 게 없다 이거에요. 이런 문제들이 바로 뭐냐 하면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이 없다 이거죠. 그게 무어냐 말이죠. 성령의 역사가 심각하게 결핍되고 있기 때문이에요. 예배 중에.
또 하나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무엇이냐 하면, 성령이 예배 중에 역사하시는 것과 함께 관련지어서 생각해야 할 것이 뭐냐 하,면 예배에 있어서의 단순성과 자유성이에요. 단순성과 자유성. 예배는 항상 두 가지 쪽으로 흘러가려고 항상 애를 썼어요. 기회가 있으면. 하나는 의식적으로 가려고 애를 쓰고, 또 한쪽으로는 어떻게 해요? 이런 의식을 모두 타파하면서 아까 이야기 했던 내적인 광명과 은밀하고 신비한 체험 같은 것들로 가려고 하는 경향성이에요. 이 양쪽으로 가려고 하는 경향성들이 늘 있었다고요. 그런 요소들이 언제든지 있었다고. 그게 결국은 로마 카톨릭의 그 복제말이죠 복제. 이 사제들의 복제가 7세기 경에 거의 확정이 되었는데, 그런데 그 제복, 제복, 사제들의 옷이 어디서 따온 것이냐 하면 로마 관리들의 복장이에요. 그러니까 세상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를 혼동한거죠. 그리고 그런 것들을 가지고 격식을 갖추고 위엄을 갖추는 거예요. 그러니까 천주교 교회당은 이렇게 짓는 법이 없어요. 우선 어떻게 해야 되지요? 난방비가 많이 들어가더라도 높아요. 그리고 요즘은 작은 교회당도 생기는데, 높아요. 그리고 고딕식을 선호하죠. 그죠? 그리고 굉장히 웅장하게 지어요. 그리고 재단을 아주 높이 놓고, 그리고 이 사이의 거리를 멀리 떼어 놓고, 단을 여러 개 만들고.. 그렇게 엄청나게 높이 만드는 것이 사실은 경제적으로도 합당치 않고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의 기능에도 부합하지 않잖아요. 뭐라고, 뭐라고 말하면 성당에서는 막 울려요. 그렇게 만들어 놓는 가장 커다란 이유가 무엇 때문이에요? 권위에요. 권위. 거기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자신의 왜소함을 즉시 느끼게 만들어 버리는 거예요. 거기에서 기를 제압하는 거죠. 그런데 이제 그런 것들이 결국은 뭐냐 하면, 의식적으로 흘러가려는 것이 있고, 또 하나는 의식으로 가려는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그런 틀 자체를 완전히 부인하면서 그러면서 그런 틀 자체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아주 자유롭게 가는 거예요. 막 찬송하다가 주님이 말씀하신 분, 계시면 일어나서 말씀하십시오. 하면,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그 중에 몇 퍼센트가 진짜 주님의 말씀인지 신뢰할 수 있겠어요. 그런 식으로 갔던 거죠. 그런데 오늘날 우리 개신교 속에서는 지금, 이쪽으로 가는 경향성도 많이 있지만, 소위 얘기하는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교회라고 하는 곳에 있어서는, 이쪽으로 가는 경향들이 굉장히 많은 거예요. 그게 결국 뭐예요? 종교 개혁자들이 다 두드려 치운 것들을 도로 가지고 다 올라오는 거예요. 성경 펴 놓고 촛불도 일곱 개 켜 놓고 그것도 켜 놓으려면 진짜 촛불하지 가짜 촛불 켜 놓고 말이지. 이상한 색으로 두른 가운 입고 말이지 무슨 뭐.. 어느 전도사님이 그랬대요. “목사님 그 가운에다가 퍼런 거 왜 둘러요?” 그 목사님 대답이 걸작이에요. “멋있잖아.” 이게 뭐예요. 그렇게 생각이 없어서 어떻게 해요. 가운을 입으면, 입어도 좋고 안 입어도 좋은데 왜 입는지 안 입으면 왜 안 입어야 하는지, 그런 것을 역사적인 맥락을 생각을 하면서 입든지 안 입든지 해야 하잖아. 아무거나 걸치고 말이지. 또 하얀 가운 입고 와서, “왜 하얀 가운 입고 왔어요?”, “여름에 시원하잖아.” 그렇게 되면 안 된다 이거죠.
신약시대가 지향하고 있는 이 예배는 단순과 자유에요. 그래서 저는 우리 세미나라고 간판을 걸었는데 우리오늘 예배 식으로 했냐. 저희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의 틀을 보여드리기 위해서 예배의 형식을 따랐어요. 본문을 읽고 설교형으로 하니까 아무 문제가 없어요. 나중에 축도로 마칠 겁니다. 물론 헌금도 하구요. 근데 그런 문제들을 우리들이 어떻게 봐야 하냐 하면, 이 예배가 아주 단순하고 자유로워야 한다, 이거죠. 그렇다고 해서 제가 아까 얘기한 것처럼 그렇게 뭐 아무것도 없고, 그냥 무슨 요즘 그런 예배들 유행하잖아요. 찬양팀들 나와서 막 찬양하고 그리고 아무 때나 쑥 나와서 성경 읽고 설교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안 되거든요. 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한 예배의 형태로 모였을 때에 전파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교회의 전통이라 이거죠.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그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는 그 순간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배하고자 하는 그 자리에서 선포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이거죠. 틀은 인정한다 이거에요. 그런데 그 틀은 절대적인 것은 아니에요. 절대적인 것은 아니되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런 몇 가지 원칙이 있어요. 보편적이어야 하고 회중적이어야 하고 고백적이어야 하고 성서적이어야 하고. 그런 것이 있어야지, ‘나는 예배시간에 찬송 많이 할 거야’. ‘왜?’ ‘좋아하니까’, ‘난 설교는 짧게 할 거야’. ‘왜?’ ‘못하니까.’ 그러면 안 된다 이거죠. ‘난 다른 사람들 기도 안 시킬 거야’. ‘왜?’ ‘엉뚱하게 하니까’.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된다 이거에요. 그렇게 즉흥적이어서는 안 된다 이거에요. 그런 것들을 다 검토하면서, 예배의 역사를 쭉 보면서 그 갈래를 보면서 어떤 시대의 예배가 이게 성경적이 아니었고, 그 다음에 이런 순서로 바뀌고 나니까 어떤 문제가 왔는지를 이런 것들을 쭉 검토하면서 작성하되, 시대에 따라서 문화에 따라서 약간씩은 다를 수가 있겠지요.
그러나 문제는 뭐냐 하면 그 근본적인 정신이 우리에게 제시한 어떤 틀을 가져야 해요. 여기에 대해서 크게 두 방향으로 견해들이 나뉘는데 한 견해는 성경이 명시하고 있는 형태만 예배 속으로 들어와야 된다는 것과, 또 어떤 사람들은 성경이 금하고 있지 않는 모든 것은 들어와도 된다, 라고 하는 것이죠. 사실 후자는 상당히 위험한 거죠. 그런 얘기죠. 그래서 그런 틀을 만드는 거예요. 근데 보니까 어떤 교단 같은데 보면, 주보에 공동 기도라고 나와요. 그렇게 해 놓고 모든 사람들이 교독문을 하고 나서 그 기도를 같이 읽는 거예요. 이게 종교 개혁자들이 죽어도 반대했던 게 이거거든요. 왜 그런 것들을 아무런 역사적인 근거도 없이, 자기 네 하고 싶은 기도를 작성을 해서 같이 모두 하는, 왜 그런 식으로 그렇게 자의적으로 선택을 하느냐 이거에요. 역사를 보고, 그런 것들을 공식적으로 정해놓는 것. 심지어는 설교도 써 가지고 올라가는 것을 반대했던 사람들이에요. 그런 사람들의 그런 반대가 무엇 때문이냐 하면, 카톨릭의 포말리즘에 대한 경계이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 보면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를 제한할지도 모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들이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성령을 향해서 개방성 있게 열어 놓도록 만들었던 거예요. 그러면 그런 속에서 예배의 기본적인 순서가 있고 그리고 그것들이 단순해야 된다는 거죠. 그게 뭐 수 십 가지씩 있고 그러는 거 아니라 이거죠. 예배가 단순해져서 어느 교파에 속한 사람들이건 딱 들어왔을 때, 이건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라고 확연하게 동의할 수 있는 그런 보편적이고 그런 단순한 형태의 예배가 되어야 한다, 라고 하는 것이죠. 이게 순서가 너무나 많고 복잡하다 보면, 결국은 그것들을 기계적으로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그런 문제들이 생겨나는 것 아니겠어요, 그렇죠? 그렇게 되면 안 된다 이거죠. 가장 기본적인 것이 찬양, 기도, 말씀, 그리고 맨 처음 예배에의 부름, 마지막에 헌금, 그리고 하나님 앞에 하는 축도, 신앙고백. 이런 것들이 하나의 큰 틀을 형성하는 거예요. 조금씩은 견해를 달리 할 수 있지마는 그러나 지금 우리들이 드린 이런 형태가, 난 가장 신약의 지지를 받으면서도 그러면서도 가장 보편성이 있는 예배의 형태요. 성령의 역사를 가로막지 않는 단순한 형태라 생각한다 이거죠.
그 다음에 이제 성령의 역사와 함께 고려되어야 할 것이 무엇이냐 하면, 자유함 이예요, 자유함. 어떻게 예배가 65분에 끝날 수는 있을 거예요. 끝날 수는 있는데 그것이 어떻게 목표가 될 수 있느냐 이거죠. 그게 말이 되냐 이거죠. 아니, 찬송을 부르다가, 난 그래서 찬송을 미리 정하는 것에 대해서도 난 그렇게 썩 좋아하지 않아요. 일주일 전에 주보에 박아 낼 필요가 뭐 있느냐 이거에요. 맨 날 똑같은 예배인데. 그런데 그거 뭐하려고 주보를 만들어서 그렇게 하느냐 이거죠. 그래서 예배를 드리게 되면 찬송을 부르는 거죠. 그런데 찬송도 아무거나 자기 기분에 따라서 우울하면 그저 단조조의 가락도 부르고, 기분 좋으면 그냥 박수치는 거 부르고 그렇게 자기 기분에 따라서 흘러가면 안 되잖아요. 기본적인 예배 속에 그런 흐름이 있는 거예요. 우선 제일 먼저 하나님의 위엄과 삼위일체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을 찬송하면서 세상 속에서 흐트러졌던 우리의 시선을 쫙 모으지요. 모으고 모은 가운데서 이제 하나님 앞에 우리가 가능하면 참회의 찬송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거예요. 죄를 고백을 하고. 그리고 그런 참회하는 죄인들을 받아주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의 능력과 십자가의 중보적 성격을 하나님 앞에 찬송해요. 그것을 통해서 우리 죄인이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안기는 감격을 노래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런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되게 살고자 하는 찬송을 하는 거죠. 이런 것들이 하나의 절대적으로 픽스될 수 있는 것들은 아니지만, 하나의 커다란 예배의 흐름을 타는 찬송의 내용이다 이거죠. 그럼 찬송을 부르는데 회개의 찬송을 부르는데 온 회중들의 마음이 녹아내리면서, 그 찬송 속에서 깊이 하나님을 묵상하면서 들어가는 거예요. 한 장 더 부르면 어때요 ! 두 장 더 부르면 어때요 ! 뭐 예배가 이렇게 늦게 끝나냐고, 투덜대면서 가면 뭐하냐 이거에요. 밥 먹고 다방에 가서 차 마시는데, 뭐 그렇게 급해요? 내가 그래서 늘 강조하는 것이, 그렇게 급하면 짧게 예배드리는 데로 가 봐라. 자유로워야 되잖아요. 그런 면에서. 물론 규모는 있어야겠지요. 예배 인도자가 자기 혼자 도취해서 오늘은 찬송 30곡 부르고 축도로 마치겠습니다. 안되겠지요. 규모는 있어야 되는데, 그래도 자유함을 해치지 않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거죠.
그리고 그 다음에 우리나라 전통에서는 주일날이건 꼭 대표기도를 장로님들이 대개 하시거나 장로님 없는 교회에선 제직들이 하는데 사실은 더 바람되게 말하자면 이 전통은 목회자가 목회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아, 우리도 기도 오래 해야 되겠구나 그렇게 생각하지는 마세요. 근데 그 전통을 보면, 종교 개혁자들이 목회기도를 할 때, 스코틀랜드에서 종교개혁을 하던 존 락스의 목회기도가 45분씩이나 계속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여러분은 45분 기도했다고 하면 어떻게 하겠어요? ‘다시 이 교회 나오나 봐라.’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오늘날 그런 사람처럼 강하게 성령의 간섭을 받으면서 깊은 감동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무슨 대표기도 하는 시간이 자기 일장 연설하는 시간처럼 말이죠. 올라와서 평소에 하고 싶었던 얘기 다 하는 거예요. 목회자에게 불만 있으면, “하나님 교회가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살려 주시옵소서.” 그러면서 파문을 일으키는 교회가 엄청나게 많아요. 그런 바보 같은 생각들이 어디 있어요. 자유함이 주어져야 하잖아요. 그 뭡니까. 설교를 하러 올라갔는데 규칙은 없지만 그저 45분하면 되겠지 하고 올라갔는데, 하나님이 강력하게 붙잡으셔서 계속 말씀하시는데 지금 여기서 쏟아 놓지 않으면, 하나님이 안 기뻐하실 것 같고, 주체할 수 없을 것 같을 때에는, 설교 더 들어야지 뭘 빨리 가려고 해요? 그렇지 않아요. 내가 늘 얘기하는 것이, 그렇게 바쁜 사람은 오지 마라라, 이거예요. 그렇게 귀하신 분이 어떻게 우리와 함께 예배할 수 있어요. 가야지 빨리. 사람들이 저를 만나면 그래요. “어휴, 목사님 어떻게 주일날 설교를 그렇게 길게 하셨어요?” 그래서 “왜 그러냐.” 길어봐야 8,90분정도 밖에 안 돼요. 설교시간이 80분 내지 90분. 물론 작년 같은 경우에 144분을 설교한 적이 있어요. 주일 낮 예배 때. 아니 근데 제가 바보에요? 사람이 둘이 앉아 얘기하다가도 딴 짓 하면, 집어 치우는데, 다 하품하고 있고 집에 가려고 보따리 싸면 내가 누굴 위해서 설교 하겠어요? 그렇지 않아요? 그러니까 그 자유함이 있는 거지. 그거 싫다고 교회를 떠나겠다고 하면, 짧은 데로 가라고 하는 거지. 누구 비위를 맞추려고 그렇게 하느냐 이거죠. 물론 저는 한 번도 오늘은 내가 기록을 깨고야 말겠다. 그러고 설교단에 올라 가 본적은 없어요. 그렇지만 성령이 역사하시면 자유함을 줄 수 있는 것 아니에요.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데 한 십 몇 년 전에 그 설교를 하러 올라갔는데 그냥 저는 원고 없는 설교를 선호하니까 쭉 설교를 했어요. 근데 설교하러 올라 갈 때 분명히 7시20분인 것을 보고 올라갔거든요. 설교 끝나고 내려와서 구두끈을 매다가 보니까 11시40분이에요. 눈을 부비고 시계를 다시 봤어요. 틀림없이 11시 40분이에요. 그러니까 4시간 20분짜리 예배를 드린 거예요. 설교는 거의 4시간을 한 것 같아요. 그런데 미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사람들이 설교를 듣는 거예요. 왜 누구를 위해서 설교를 그만 두냐 이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 성경 본문을 통해서 충분히 말씀하셨다, 생각될 때까지 자유롭게 설교를 하는 거예요. 또 어떨 때는 일찍 끝나는 때도 있어요. 11시에 예배가 시작되었는데 12시 10분밖에 안 되었는데 끝나는 때도 있어요. 그건 왜, 짧으니까. 짧게 다 된 거예요. 만족스러울 때도 있고, 대부분 만족스럽지가 않죠. 그런 거죠. 성령의 역사함은 그런 자유함이 있는 거 아니에요? 그렇잖아요. 그것이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이지 틀 속에 탁 박혀서 나오는 것이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예배일 수가 있느냐 이거죠. 성령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예배의 특성들이 예배의 기본적인 것들이 무너져 가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때요? 정해진 시간에 시작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어도 될 거에요. 종치고 시작하니까. 그러나 끝나는 것이, 언제든지 똑같은 시간에 맞춘다, 그것이 목표다, 성령의 역사 자체를 인정하지 않거나 배제하고 그 예배의 작업들을 해 나가는 것이에요. 누구를 위한 예배냐 이거죠. 그리고 마치 예배가 말하자면 그러한 의무를 완수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거죠. 그렇게 해 가지고 졸고 주보를 떨어뜨리고 성경책을 떨어뜨리고 삐삐들고 뛰고 그리고 그것도 예배라고, 꼴사납게 예배드리다가 그리고는 예배 끝나고 사람들이 교회당을 막 빠져나가는 거예요. 천천히 나가면 어때요 천천히. 하나님 만나고 거기 좀 앉아서 주님과의 만남을 되새겨 보면서 기도도 하든지 못 만났으면 억울해서라도 회개를 하든지, 좀 그렇게 하면서 천천히 나가면 어때요. 이게 무슨 민방위 교육 끝나고 나가는 사람들 모양 와~밀고 땡기고 난리에요. 그리고 나서 막 교회를 쏟아져 나가는 거예요. 그렇게 2분 3분 일찍 끝나려고 찬송가 1절만 부르자고 그러고 내끼는 사람들이 다 그 다음에 주일날 하는 일들이 다 시시껍절한 일들이에요. 놀러가거나 쇼핑가거나 텔레비전 앞에 파자마 바람으로 앉았거나 식당으로 밥 먹으러 가거나, 맨 그런 것이거든요. 여전도회 임원들 남전도회 임원들 예배시간에 노트 꺼내놓고 앉아가지고, 예배 끝나고 회의할 때 뭘 의논해야 할지 그런 거나 적고 앉았고 말이지. 그런 상황에서 무슨 영광이 있느냐 이거야, 예배에. 그렇게 해 놓고 바깥에 나갔는데 그 중에 95%가 어디를 설교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에요.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 내가 그 말씀대로 살게 해 달라고 흐르는 눈물을 주먹으로 훔치면서 세상에 가도 그 세상이 변할까 말까인데, 성경 본문도 기억하지 못하고 가는 그 사람들에 의해서. 그거 세상 밥이에요. 밥이라고. 예배시간에 그렇게 우울해 보이던 사람들이 끝나고 나면 너무 행복한거야. 성령의 역사가 예배 갈피갈피에 스며요. 그래서 예배드릴 때는 스펄젼의 충고와 마찬가지로 설교자뿐만 아니라 모든 회중들이 찬양을 부르면서 오늘 이 찬양 가운데 성령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당신의 성품을 생각나게 해 주시지 않으면, 우리의 이 부르는 찬양이 아무것도 아닙니다. 설교를 하면서 시종일관 말 잘한다, 설교 참 대단하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잘못된 사람들이에요. 하나님이 붙잡아 주시지 않으면, 우리의 이 예배의 현장이 웃음거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설교의 갈피갈피 성령님이 역사하시기를 간절히 기원하는 그 설교자 뒤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그것이, 시종일관 유지되어야 한다 이거죠. 그것이 유지되지 않고는 이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그런 예배가 회복될 수 없는 거예요. 이게 심각하다 이거죠.
그런데 내가 묻고 싶은 게 그거에요. 여러분 예배를 위해서 기도해 본 적 있어요? 이번 주의 예배에 정말 하나님 뵈옵게 해 달라고 기도 해 본적 있느냐고. 열렬하게 예배를 위해서 모여서 기도하는 그 기도회가 있느냐고. 열렬하게. 있어봐야 예배 들어가기 3분전에 목사님하고 장로님하고 손잡고 도와달라고 하는 그런 기도 말고. 열렬하게 이번 예배에 하나님의 백성들의 성패가 달린 것처럼, 신앙의 성패가 달린 것처럼 주님이 찾아와 주시지 않으면 우리가 너무나 슬픈 백성이 될 것처럼, 그렇게 애절하게 주의 성령이 오셔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모르는 인간들에게, 당신의 살아계심과 엄위함과 영광을 보여주시고 죄 가운데 있어서 상한 심령을 가진 사람들에게 성령께서 오셔서,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을 전달해 달라고 간절하게 누가 애원 하느냐, 이거에요. 어디 한번 가볼까 거기는 성가대를 잘 한다며. 10억짜리 파이프를 들여놓았다며, 뭐 아무개가 설교를 잘 한다며. 그리고 배 내밀고 이빨 쑤시는 그런 음식점 드나드는 사람처럼 교회에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만나주시면 성경 다시 써야 된다고요.
오늘날의 예배는 어떤 면에서는 예배드릴수록 하나님께 모욕을 드리는 배교에 가까운 예배에요. 구약시대 같았으면 다 돌에 맞아 죽었을 거예요. 정신 바짝 차려야 해요. 성령님이 안 계시니까 백성들이 교만해 지는 거예요. 이게요.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시시때때로 성령님이 임하셔서 강하게 그들의 마음을 진리로 녹이셔서 자기가 누구인지 분수를 깨닫게 해 주시지 않으면, 잡초와 같이 교만이 고개를 들고 옛 본성들이 자기 멋대로 살아가도록 자기를 충동질 하는 게 이게 옛 사람의 흔적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정직한 모습이라 이거에요. 더 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생략하겠습니다.
두 번째 요소가 무엇 인고 하니, 진리입니다, 진리. 이 진리가 무엇이냐. 하나님의 말씀이죠. 아주 쉽게 얘기하면. 하나님의 말씀 중에서도 특별히 우리가 강조해야 할 것은 복음 진리에요. 그리고 복음 진리에 기초한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무슨 말씀이냐 하면, 말씀 속에 흐르고 있는 두드러진 복음의 진리가 하나님의 교회에서 예배의 가장 중요한 본질적인 요소로 회복되어야 한다, 라고 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게 지금 되고 있느냐 이거죠. 자 어느 교회에서 성가대 지휘자하고 교역자하고 대판 싸우는 거예요. 뭐냐 하면 성가대 지휘자는 찬양이 설교보다 위라는 거예요. 교역자로서는 또 참을 수가 없죠. 자기가 설교하는데, 설교가 찬양보다 위다. 그러니까 실제로 교회당 보면, 뒤에 성가대석 만들어 놓은 교회 있죠. 굉장히 신학적으로 중대한 의미를 가진 작업이예요. 그런 것들이. 그럼 왜 찬송이 설교보다 위라고 주장하는 이유가 뭐냐. 그건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찬송은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드린다고 보고, 설교는 인간이 인간에게 말한다고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당연히 양자 중에 한 편이, 하나님이 포함되어 있는 그 행위가 우등한 행위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들이 논리적으로 부인할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해석을 해 내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은 전혀 성경을 모르고 역사를 잘못 읽은 방식이에요.
우선 말이죠.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만 성가대에 대해서는 저는 회의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어요. 왜냐하면 성가대는 오늘날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성가대의 모습은 20세기 후의 미국의 영향에서 온 거예요. 다윗의 성가대 이야기 하는데, 그것은 얘기 할 가치도 없는 거고. 구약 시대 때 일어난 일인데 오늘 소 몰고 와서 예배드릴 거예요? 그러니까 구약에서 나오는 어느 하나를 가지고 그런 식으로 직방 수입해서 적용하려고 하는 것들은 신학적인 해석의 과정을 안 거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바보 같은 생각이에요. 그것은 잘못된 것이고, 성가대가 생겨나기 시작한 것은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에 서서히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오늘날 우리 개신교의 성가대의 효시라고 보기는 어려워요. 왜냐하면 그것이 카톨릭에서 쭉 전승되어 내려오다가 그러다가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다 뒤집어 지죠. 말씀과 성령으로 돌아오고 찬송도 공교한 연주 악기 그런 요소들이 다 빠져나가요. 다 빠져 나가고 청교도 시대에는 음악적인 요소를 아예 이 교회 속에 도입하지 않는, 엄격한 무 악기 예배를 드리게 되지요. 그런 가운데서 우리가 나온 이것은, 사실 구약하고는 더더욱 상관이 없고, 그리고 신약에서는 뭐 성가대에 대한 이야기가 없으니까, 그리고 로마 카톨릭의 전통하고도 상관이 없어요. 또 논리적으로도 만약에 로마 카톨릭에서 그걸 보고 배웠다면, 더 말이 안 되잖아요. 우리는 로마 카톨릭의 후예가 아니라, 종교 개혁자들의 후예니까. 그런 거거든요. 솔직하게 말하자면 오늘날의 이 개신교 성가대의 이러한 모형은, 20세기 이후의 미국의 영향이에요. 20세기 이후에 미국에서 생겨난 성가대 운동, 이런 것들은 결국은 뭘 가지고 있느냐 하면, 그 예배 속에 그 때 한창 유행하던 감상문화를 가지고 들어오는 거예요. 감상. 쉽게 얘기하면 자신들이 할 수 없는 찬양을 사람들로 하게하고, 고품질의 찬양을 하고 자신들은 그것을 감상하는, 그래서 참여자의 입장에서 감상자의 입장의 위치를 예배 속에서 잠깐 갖는, 그런 것들로 돌아가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그런 것들이 결국은 종교개혁 시대 이전에 카톨릭에서, 교회의 음악을 중시하고 있던 때에 그런 모습을 다시 돌아가는 그런 현상을 보이고 있잖아요. 이런 것들은 옳지 않다는 이거죠. 왜 옳지 않은지는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적인 요소는 뭐냐 하면 이거에요.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종교개혁자들의 신념을 회복해야 된다는 것이죠. 설교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냐. 여기에 대해서 마틴 루터는 그렇다고 말했어요.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있는 한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주장이죠. 그 말이 무서운 거예요. 뒤집으면, 만약에 설교가 성경을 설교하지 않으면 그것을 우리는 순종할 필요도 없고 지킬 필요도 없고 지키면 안 된다, 그런 결론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이제 칼빈에 와서는 그것이 좀 더 정교하게 다듬어 지게 되죠. 그래서 어떻게 말하느냐 하면,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설교가 성경을 설교하는 한,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성경의 권위는 원천적인 하나님의 말씀이고, 설교의 권위는 거기에 종속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말은 다르지만 비슷한 입장이에요. 그게 철저한 신념이었어요. 그러니까 종교 개혁자들과 청교도에 이르는 그 라인 속에서는 지적인 기반이 없는 사람들이 목사가 된다고 하는 것은, 그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것이었어요. 전면적으로 훈련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전하고 정확하게 분별해 내어서, 그래서 그 진리를 전문적으로 해석하고 해석해서 쏟아져 나온 그 설교가, 성도들에게 외쳐질 때에 그들이 듣는 그 진리가 원천적인 권위인 그 성경이 하고자 하는 내용을, 그대로 일관성 있게 전달해 주는 설교여야 한다, 라고 보았던 거죠. 그들은 굉장한 지성인들이었어요. 오늘날처럼 이렇게 무슨 불만 받으면 누구든지 강단으로 돌격 앞으로 하는 이런 것은 아니었다 이거죠. 오늘날의 이 지적인 기반의 취약은 두고두고 문제가 된다, 이거죠. 두고 보세요. 그런데 어쨌든 그런 것이었어요. 그럼 이것도 성경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느냐. 자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요. 아까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런 것을 상기 시켰어요.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고, 그 목표는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다. 말씀을 드렸어요. 그러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찾아오셔서 만나주시는 그 예배의 현장에서 있었던 정점, 하나님과의 만남이 최고도로 달한 그 정점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그 체험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에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은 할 말씀이 없으신 때에는 자기의 백성들을 찾아오시는 법이 없어요. 찾아오시면 반드시 말씀하셔요. 어떤 때에는 하나님이 행동을 통해서 메시지를 보여주어서 말씀하시는 경우도 있고, 어떤 때에는 아예 명시적으로 받아서 적어서 낭독을 해 주어라, 이렇게 요구하시는 경우도 있고, 어떤 때는 하나님께서 빽빽한 구름가운데서 우뢰와 같은 목소리로 말씀하시는 경우도 있었고, 어떤 때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온 하나님의 종이 그 하나님께로 들은 음성을 자기의 백성들에게 전달해 주는 경우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가 서로 충돌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었어요.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요.
그러니까 이제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한, 이 진리의 회복은 예배 속에서 불가능한거에요.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들이 굉장히 중요한 문제를 만나는 거예요. 뭐냐 하면 성령이 오시는 문제는 우리들이 자신을 정결케 하고 주님이 오시기를 간절히 소망하는데, 종교 개혁자들의 확신에 의하면, 예배 중에 성도들이 누릴 수 있는 성령의 임하심과 축복은, 말씀과 함께 임하시는 성령이라는 것이 두 화두였다고 말씀드렸는데, 설교가 하나님의 진리를 대언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을 경우에는, 실질적으로 예배의 회복은 힘들다는 결론이 나오는 거예요.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 라는 책이 이제 거의 10만부 가량 나갔는데, 많은 사람들이 읽었죠. 그 중에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어요. 그 출판사에 있는 책임자 한 분이 그 책을 만들어내고 너무 감격스러워서 자기 친구에게 주었어요. 친구가 그 책을 열심히 보더니, 진짜 엄청난 회개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어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책에서 비난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모든 요소를 자기가 한 몸에 다 가지고 있는 거예요. 진짜 주보에 낙서하고 졸고 그리고 설교가 뭔지도 기억 못하고, 오죽했으면 애들이 “아빠 졸지 말고 빨리 요금내고 집에 가자” 그런 거예요. 그래서 이 사람이 크게 각성을 하고 나서 가족들을 모았어요. 그리고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 이제 이렇게 예배하면 안 된다. 우리가 이렇게 예배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 안 만나주셨다” 그리고 나서 이제 자신을 개혁하는 거예요. 헌금도 일주일 내내 준비하고, 늦어도 15분전에는 교회에 도착하고, 일주일 내내 예배에서 감격에 빠질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그리고 한 주 두 주 참석했어요. 그래도 부족한 것 같아서, 더 자기 자신을 다듬고, 다듬고 했는데 6개월 동안 그렇게 노력을 했어요. 예배의 감격에 빠졌을까요. 못 빠졌을까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희망이 없다는 거예요. 그렇게 생각이 짧아요? 그렇게 막 결론을 여태까지 다 얘기했는데. 그 사람의 마지막 고백이 뭔지 알아요? “목사님, 예배의 감격에 빠질 준비는 완전히 끝났는데 나를 미는 사람이 없습니다. 예배의 감격에 빠뜨리도록 미는 사람이 없어요.” 이 순진한 성도는 하나님을 못 만나는 모든 예배의 결함이, 자기 자신의 불성실한 예배의 태도에만 있다고 생각을 한 거예요. 그래서 눈물겹게 고친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어디 있었어요? 설교가 하나님의 진리를 대언하지 않으니까, 성령의 역사가 예배 중에 임하지를 않는 거예요.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대한 체험도 결핍되어 있는 것이죠. 아무리 해도 안 되더라 이거에요. 이제 어떻게 하냐 이거에요. 큰일이다, 문제는 뭐예요. 설교시간에 성경을 읽는데 어디를 설교해도 다 비슷비슷해요. 문제는 뭐예요. 성경을 파고 들어가면서 그것을 해석을 하려는 노력이 안 보인다 이거죠. 과장해서 말하면 어떤 설교자의 경우에는, 일주일동안 생활해 가면서 ‘요즘 교인들이 기도를 하도 안하는데 이 사람들이 이렇게 기도를 안 해서 되겠나, 기도에 관해서 설교를 해야지’ 정해졌어요. ‘뭘 할까 예화는 뭐 들고, 아무개 집사는 기도 하더니 취직도 되고 좋은 일 많이 일어났는데 그거 해야지’ 그래놓고 ‘그 예화에 어울리는 본문이 어디 있나.’ 그러니까 이미 시작서부터 성경은 해석될 가능성이 거의 없는 거예요, 왜? 지금 벌써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니까. 그러니까 이 설교자는 상황으로부터는 얘기를 들었는데, 성경을 통해서 상황을 가지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성경 속에서 만나질 않았기 때문에, 해석을 통한 탐구적인 활동이 없이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서 얘기하는 거예요. 창세기를 읽고 기도에 대해서 설교하든지, 계시록을 읽고 기도에 대해서 설교하든지, 본문만 다를 뿐이지 내용은 거의 대동소이해요. 그러니까 설교를 수없이 들었다고 하는 교인들이, 아무것도 몰라요 맹탕이에요. 맹탕. 이유가 무엇 때문이에요? 설교를 들으면서 마음속에서는 끊임없이 성경과의 상호작용이 일어나야 되거든요. 그런데 상관이 없어요. 왜, 어차피 그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미 주제가 정해진 거고, 얘기 되었는데, 그러니까 성경 본문을 기억을 못하는 거예요. 신약인지 구약인지도 모른다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되는 예배 속에서는 영광이 회복될 수가 없다는 것이에요. 그것을 기억을 해야 돼요.
이 문제와 관련해서 몇 가닥으로 이 이야기를 할 수 있는데 말이죠. 세 가닥 정도로 가닥을 잡고 우리 이야기 해 봅시다. 우선 첫째 가닥은 뭐냐 하면 설교자 자신의 철저한 갱신이 필요하다 이겁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에 붙잡힌 설교자가 없이, 예배가 영광을 회복한다, 라고 하는 것은 이론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가능한 것이 아니에요. 실제로 그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의 영광을 누렸던 교회의 시대에는, 예외 없이 그러한 예배의 중심에 누가 있었느냐 하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깊이 사랑하고, 그 말씀을 아는 지식에 온 삶과 정신이 붙들린 설교자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거죠. 그런데 문제는 이거에요. 아까 그거에요. 전기 다마를 갈면 무슨 소용이 있냐 이거에요. 무대를 바꾸면 무슨 소용이 있고 알록달록한 거 걸치고 나오면 무슨 소용이 있냐 이거에요. 호박에다 줄긋는다고 수박이 되요? 그 사람이 나와서 그 얘기 하는데 무슨 불빛을 받든지, 무슨 강단에 올라가든지, 뭐 가지고 얘기 하든지 마찬가지지 그렇잖아요. 거기서 뭔가 새로운 것을 느낀다면 그것은 현혹된 것이지 진리가 진짜 그렇게 시킨 것은 아니잖아요. 그 문제라 이거죠.
그러다 보니까 어떤 문제가 생겨 나냐 하면, 설교를 통해서 예배 속에서 하나님과 만나는 선명한 신앙의 체험이 없으니까 목양의 관계가 성립을 안 하는 거예요. 대다수의 교인들이 존경하는 목회자가 없어요. 기특하게 생각하는 목회자는 가끔 있는데 존경하는 목회자가 없어요. 심지어는 6개월 교회 다닌 어떤 사람이, 자기교회 담임 목사님 이름을 몰라요. 왜 그런 일들이 생겨나게 돼요? 그러면서 기독교회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기독교 신앙 전승의 규칙이 깨지는 거예요. 잘 들어보세요. 그러면 기독교 신앙 전승의 규칙이 뭐냐. 그것은 뭐냐 하면 처음서부터 이 구약의 야훼종교 그리고 이 신약시대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이 기독교 신앙의 기조는 말이죠. 이것은 전승되는 거 아네요? 계속해서 전해지는 거 아네요. 그렇죠? 사람을 통해서 사람에게 전수되어지는 거 아네요. 자손을 통해서 전수되는 거 아네요. 그런데 이 전수되어지는 것이 전수되는데 이런 신앙은 각자 자기가 알아서 믿으면서 신앙생활하게 되어 있는 것은, 처음서부터 구약종교도 아니고 신약종교도 아니에요. 그럼 뭐냐? 큰 스승을 통해서 전수 받게끔 되어 있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전승의 줄기에요. 그런데 이 명백한 성경의 증거들을 몰라요. 여러분 아브라함 없이 족장들의 신앙을 생각할 수 있어요? 모세가 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생각할 수 있느냐고요. 물론 모세 없이도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은 생각할 수 없어요. 하나님이 그렇게 사람을 사용하셔서 자기를 아는 지식을 전하시고 자기를 섬기는 도리를 알리시고 하는,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종을 통해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통해서 그것을 전승시키는 전인적인 교육, total education이 하나님께서 전하고 싶으셨던 방식이라 이거죠. 여호수아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유일신 신앙이 마지막 불꽃을 받게 되지요? 사무엘이 없이 이스라엘 사사시대의 신앙의 갱신을 얘기할 수 있느냐고. 다니엘 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의 영향을 얘기할 수 있느냐고요. 선지자들과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의 종들의 사역을 제외해 놓고, 각자 알아서 믿는 신앙을 우리들이 찾을 수 있냐 이거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공생애 3년 반 동안 죽도록 일하시면서 마지막 맺어 놓으신 열매가 무엇이었어요? 오순절 성령이 임하시면, 거목과 같이 진리의 사람들로 변한 그 열 두 사람의 사도들을 남겨 놓고 예수님 돌아가셨잖아요. 그리고 그들이 그 거목과 같은 사람들을 통해서 그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개종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어요. 그 사도들 뒤를 이어서 교회가 누구의 영향을 받았어요? 속사도 교부들의 영향을 받았지요. 그들에 의해서 사상적으로 기독교가 박해를 받을 때에 사상적으로 변증하고 핍박 속에서 교회를 지키면서 말씀과 함께 순교하고, 순전한 교리의 도를 지켜나간 거예요. 변증가들과, 그 다음에 교부들로 이어지지요. 그리고 그 후에 종교 개혁자들이 나타나서, 마틴 루터와 존 칼빈의 영향을 제외하고, 종교개혁을 이야기 할 수 있느냐고요. 그리고 그 이후로 이어지는 걸출한 청교도들과 그 후예들을 제외해 놓고 얘기할 수 있느냐고요.
존경하고 깊이 신뢰하는 스승이 없이 배우는 신앙생활은, 제조업체 없이 유통일자도 기록되지 않은 채 통용되고 있는 이름모를 식품과 비슷하다고요. 저는 그래서, 이 기독교 신앙 자체가 도제신앙이에요. 도제신앙. 예수님이 말씀하셨잖아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 멍에는 쉽고 가벼우니 나와 함께 멍에를 매고 배운다.” 그 문맥 자체가 그 시대의 도제 생활에서 따 온 거예요. 스승의 문하에 들어가서 함께 먹고 마시면서 스승의 일을 거들면서 배우는 것, 그것이 멍에를 함께 매는 거예요. 그게 학습관계에 있는 것이죠. 그런 것들이 기독교 신앙이 전승되어지는 방식이고, 예수님도 정확하게 그 방식을 따라서 자기의 제자들에게 참된 신앙을 전승시키셨던 거예요. 성령이 오시면서 장엄하게 마무리가 되었던 것이죠. 난 신학생이건 누구건 말이에요. 자기가 깊이 흠모하는 영적인 인물이 없는 사람들을 난 신뢰하지 않아요. 산 사람 중에 없는 걸 어떡하네요, 죽은 사람 중에서 해요, 죽은 사람. 역사 속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다가 갔는데. 설마 자기 정도 밖에 안 되는 사람이 보다 더 훌륭하게 산 사람이 교회 역사 2000년에 없겠느냐고요. 찾아보라고요. 산 사람 중에 없으면 죽은 사람이 있잖아요. 그런 목양의 관계 자체가 성립을 안 하는 거예요. 이 예배 속에서 진리의 요소가 회복되지를 않으니까 이게 성립을 안 하는 거예요. 결국은 근본적으로 회복되어야 할 것이 무엇이냐 하면, 강단의 회복 없이는 예배의 회복이 불가능한 것이에요. 예배 회복 한다 그래봐야 맨 엠프 들여놓고 스피커 고치고 조명 바꾸고 무대처럼 만들고 교회를 딴따라처럼 만드는 말이지, 그런 것 밖에는 갱신할 것이 없는 거예요. 내용이 갱신이 안 되니까 그럴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에서 우리들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말씀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이에요.
그리고 이 종교개혁 속에서 말이죠. 가장 중요한 특징이 뭐냐 하면, 아까 두 화두를 회복했다고 말씀드렸는데 그 한 화두가 진리의 문제에요 진리의 문제. 그러니까 무엇이 참된 진리냐, 그리고 오늘 우리들에게 통용되고 있는 신앙의 모든 표준들이 성경에 기초한 것이냐, 이것이 바로 개혁 신학자들이 던졌던 가장 중요한 질문이에요. 그래서 그들은 종교 개혁이 시작되자마자 제일 먼저 시도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구약에 있어서 히브리어 성경 39권으로 된 성경 이외에, 모든 외경들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배척한거에요. 교부들의 가르침을 깊이 존중했지만 맹목주의적으로 교부들을 추종한 사람들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서 교부들을 본 사람들이에요. 진리를 회복하는 것이 그들에게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화두였어요. 그리고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의 종들이었어요. 그들에게는 하나님과의 만남이라고 하는 장엄한 거룩의 체험이 있는데 그 체험을 마틴 루터나 존 칼빈이나 사상서를 읽다가 사상 속에서 새로운 사상을 고취 받은 인문주의자들이 아니라, 그런 요소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들의 삶과 사역의 방향을 바꿔놓게 만들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진리의 복음과 만나는 진리체험이었어요. 그것이 그들을 완전히 바꿔 놓은 것이에요.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에 매인 사람들이 되는 것이에요. 그리고 진리와 함께 죽고 사는 사람들이 된 것이죠.
우리들이 얼핏 생각할 때에는 종교 개혁자 칼빈이 제네바에서 설교를 했다고 할 것 같으면, 개혁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으니까 파리 대학에서 그 총장 취임사 할 때에 개혁 신앙을 고취시키는 연설문을 써 주었다가 지명수배를 받고 도망을 가잖아요. 천재적인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그런 와중에서 그 사람이 개혁 신앙을 가지고 있으니까 얼마나 카톨릭에 한이 맺혔겠어요. 자기를 죽이려고 했는데. 그러니까 그런 개혁 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해서 일평생 헌신했을 것 같잖아요. 그런데 제네바에서 그의 사역의 일지를 보면, 그는 개혁 사상을 고취시키는데 열을 낸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그가 로마서만 설교했을 것 같죠? 아니에요. 구약을 많이 설교했어요. 특히 민수기(?)를 200회 이상이나 설교했어요. 성경을 골고루 구석구석 다 설교를 한거예요. 그리고 성경 몇 권 빼 놓고 그가 그 주석을 다 쓴 그 열정을 보아서도 알 수 있잖아요.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신앙이 뭐예요? 솔라스 크립추라 토타스 크립추라 솔라피베-모든 성경으로서, 그리고 오직 믿음으로서 그래서 성경말씀을 아주 깊이 성찰하고, 그것을 철저하게 해석해서, 그래서 성경의 담겨진 참된 의미를 전달하는 것을, 자신의 설교 사역의 가장 큰 영광이라고 생각한 것이라고요. 그런 사람들의 입장에서 한 번, 우리들이 오늘 목회사역의 동기를 비춰 볼 것이 필요하다 이거죠. 교회를 어떻게 만들어야 되겠다, 크게 만들어야 되겠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이 꿈을 이 교회를 통해서 구현해 내고 말거야. 뭐 이런 것들이 종교 개혁자들이 보기에는 얼마나 바보 같고 어리숙하게 생각 되겠나, 한 번 보라 이거죠. 하나님의 설교자들에게 있어서 유일한 소망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진리를 통해서 이 백성들을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고, 그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해서 정교한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온 지성과 정서와 의지를 동원해서, 영혼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가지고, 그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가장 정확하게 전달해 주는 것이, 그것이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의 종들에게 기대하는 가장 중요한 사역이었어요. 그래서 어느 청교도가 그런 얘기 했어요. “오늘날 설교자가 누구냐, 라고 묻는다면 난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피 뿌리고 죽어간 위대한 선지자들과 신약에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며 고난을 받던 사도들의 후예노라.” 그렇기 때문에 목회에 있어서 설교 사역이라고 하는 것은, 심방 전도 행정 여러 가지 많은 사역들과 어깨를 겨룰 수 있는, 또 하나의 사역이 아니에요. 최근에 어느 교회 연구소에서, 주특기가 분명해서 성공한 30개 교회, 그렇게 해서 뽑았는데, 난 그런 책을 쓰려고 인터뷰 했는지도 몰랐어요. 뭐 조사할 것이 있다고 인터뷰를 하자고 해서 한참 했는데, 저희 교회를 1번으로 내 놓았어요. 뭘 주특기로 성공했냐. 복음을 제시하는 설교가 주특기이기 때문에 성공한 교회다. 다른 교회는 어떠냐. 어느 교회는 팜플렛을 잘 만들어서 성공했다. 어느 교회는 사랑을 많이 실천해서 성공했다. 또 어느 교회는 시대를 잘 읽었기 때문에 성공했다. 뭐 중구난방으로 30개를 뽑았어요. 그러한 책 속에서 나타내고 있는 암시는 무엇이냐 하면, 지금까지도 그런 종류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설교가 교회 성장을 위한 한 방편이라고 생각을 하고 예배가 교회를 새롭게 하기 위한 패러다임이라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뭐 허긴 성령님도 한 패러다임이니, 이번에는 성령님 가지고 한 번 해보자. 제자훈련 빼고 성령님 한 번 넣어보자. 그러는 세상이니, 그렇게 말하는 것도 과언은 아니겠지요. 그런데 전적으로 잘못 읽고 있는 것이죠. 그렇게 때문에 우리들이 여기에서 우선 한 가닥은 이 설교자가 정직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 강단의 회복이 없이는 결코 예배의 회복은 요원하다. 그 얘기고요.
두 번째 이제 우리들이 하나 여기서 고려해야 할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 교회의 예배시간에 악기를 사용하는 문제에요.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의 경우에는, 일체 악기를 사용하지 않았어요. 제가 알고 있는 기억으로는 악기가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카톨릭에서도 11세기가 훨씬 지나서의 일이에요. 오르간이 들어온 게 11세기 이후의 일이고 성가대가 음을 맞춰서 화음으로 부르는 것들도 훨씬 더 후의 전통이에요. 청교도들의 경우에는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은 아주 단호하게 악기사용을 거부했지요. 그리고 그 악기를 철저히 배격했어요. 그럼 어떻게 하냐. 그냥 같이 회중으로 찬양을 해요. 악기 없이. 그렇게 찬양을 부르는 거죠. 심지어는 문맹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선창자가 한 절을 부르면 같이 하고 그 다음에 두 절을 부르면 또 따라하고 하는, 그런 식의 찬양을 하면서 예배를 드렸고, 가능하면 성경 시편에 나와 있는 가사를 가지고 찬송하려고 애를 많이 썼어요. 성가대는 물론 없었고요. 그런데 저는 그 문제를 전적으로 찬성하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그들의 그 문맥자체가, 영국의 국교의 예배의 어떤 그 반항하는 쪽으로 나왔기 때문에, 지나치게 옆으로 튕겨나간 반작용일 수도 있는 거죠. 그래서 그들이 가정에서는 악기를 많이 사용했고, 그리고 음악을 굉장히 사랑하던 사람들이었어요. 예를 들면 청교도의 기수라고 할 수 있는 올리버 크로멜 같은 사람들도, 얼마나 음악을 좋아했는지 자기 딸이 결혼할 때는 40명으로 만든 오케스트라를 만들어서 연주할 정도로 그렇게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어요. 그러나 예배에 있어서만큼은 철저하게 이런 것들을 배격했던 것이죠.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세요? 좀 과하긴 했지만, 그러나 과하긴 했지만, 여러분들이 한 번, 그들이 생각하고 겨냥하고 있는 그 진심은 좀 이해할 필요가 있어요. 그 진심이 무엇 때문이었냐 하면, 예배의 시간은 도취하는 시간이 아니라 우리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말씀하시는 시간이 예배의 절정이다, 라고 보았던 거예요. 그들의 생각에 의하면 이런 거예요. 예배는 하나의 산을 올라가는 것과 같은 거예요. 그래서 예배에 부름이 있고 기도가 있고 찬양이 있고 하면서, 이렇게 절정을 향해서 올라가는 거죠. 그 절정에서는 구름이 빽빽이 있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가 거기에 있는 거예요. 그리고 한없는 두려움 속에서 떨고 있고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육체와 영혼이 완전히 굴복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엄위 앞에 엎드러진 상태에서 “너희는 들을지니라” 하며 하나님 말씀하시는 것이죠. 그 때가 하나님과의 만남의 경험이 이루어지는 절정이에요. 그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의식이 어떠했겠느냐 그거죠. 그들이 하나님과의 만남의 경험을 여러 번 가지면 가질수록 그들은 하나님과 만나는 현장에서 울려 퍼지는 우뢰와 천둥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든지, 번갯불이 어느 각도를 때린다는 것들을 주목한다든지, 아니면 그렇게 하나님이 임하실 때에 땅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우리에게 어떤 체험이 일어난다든지, 이런 것들이 그들의 경외심의 발로가 아니라, 그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그 분부를 정확히 듣고 그리고 주님이 사라지고 난 다음에도 여전히 그 말씀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그 말씀을 자신의 삶의 가치로 삼아서, 하나님을 향해서 바치는 충성스러운 경외심을, 그 말씀을 실천하는 일에 드리면서 살아가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현장에서 경험했던 일들이라 이 얘기에요.
그러면, 그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될 것이냐 이거죠.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이 예배 속에서 아까 성령님이 오셔서 우리를 정서적으로 우리를 감화시키셔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느낄 수 있게 해 주셔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그런데 조심해야 할 것은 그러한 느낌과 체험이 예배의 추구점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거에요. 그런 느낌, 그런 것들이 체험의 추구점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거죠. 예를 들면 찬양을 인도하되, 뜨겁고 열렬하게 인도 해야겠다, 라는 것이 목표가 되면 안 된다 이거에요. 기도를 하되, 어떻게 하면 이 사람들을 다 끓어오르는 기도로 만들까. 그런 것들은 전부 다 위험할 뿐만 아니라 아주 말하자면 천박한 것이다 이거에요. 물론 성령이 임해서 역사가 일어나면, 감당할 수 없는 통성기도가 터져 나올 수도 있고 모두 데굴데굴 구르면서 축도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어요. 그런 경우가 조나단 에드워드가 1941년에 설교한 엔틀디에서의 설교안이 ‘진노하신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죄인들’이라고, 이 사람이 청교도들 중에서도 예외적인 사람이었어요. 청교도들은 철저한 무 원고 설교주의자였거든요. 요만한 메모쪽지를 가지고 올라가는 것에 대해서도 굉장히 못마땅하게 생각을 했어요. 그러면서 올라가가지고 그들은 대개 설교를, 3중 구조를 가지고 설교를 했는데 첫째 구조가 무엇이냐 하면, 교리를 밝히는 거예요. 교리. 내가 여기서 진술하고자 하는 교리가 이것이다. 그 다음에 두 번째 본문의 진리를 밝히는 거예요. 왜 여기서 내가 이러한 진리를 끌어낼 수 있었냐 하면은, 성경 본문이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논증해 가는 거죠. 그리고 그 다음 마지막이 application이에요. 그들의 삶을 향해서 적용, 적응 하는 것. 그런데 대개 청교도들의 경험은, 1번과 2번의 대목을 말할 때에는 천천히 얘기를 하고 적용의 대목에 가서는, 아주 열렬하게 설교를 했다고 해요. 그렇게 살아도 되겠느냐, 이런 식으로 설교를 하면서 적용해 가는 거죠. 그런데 그들의 설교 전체적인 구조는 무엇이냐 하면, 아주 단순하고 명료하고 간단했어요. 그리고 풍부한 비유와 예화들을 들으면서 성경본문을 읽으면서 흘러갔다 이거죠. 그러니까 대단해요. 토마스 쉐퍼드같은 사람의 설교집을 보면, 열 처녀의 비유 하나를 가지고 650페이지가 될 정도로 깨알 같은 설교집을 냈고, 토마스 낸턴 같은 사람은 시편 119편 한 장을 가지고, 제가 볼 때에는 약 3년 반을 설교할 정도의 길이의 설교를 남겼어요. 한 번 설교에 한 시간 반 내지 두 시간 하는 것으로 치고. 그러니까 대단한 사람들이죠. 그것을 보면서 청교도들의 그러한 정신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것을 아주 가치 없게 생각해요. 꼬장꼬장하고 말이지요. 뭐 좁쌀영감처럼 파고 들어가고 말이지. 희랍어 토시 하나 가지고 막 논증을 하면서 들어가고 그러니까 야, 깨알 같고 숲을 볼 줄 모르는 근시안적인 인간들이다 그러는데, 아니에요. 절대 숲을 볼 줄 모르는 게 아니라 그 만큼 그들은 하나님의 성경 본문에 대한 탁월한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에요. 그러면서 논증한거죠.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예배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진리를 통해서 성령이 오시고 그래서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지면, 울고불고 할 수도 있고 큰 역사가 일어날 수도 있어요.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드는 예외적이지만, 설교 원고를 가지고 와서 한 손에 등불을 들고 그리고 근시안이었거든요. 이렇게 대고 읽는 거예요. 그런데 아직 다 안 읽었는데 폭탄 떨어지는 것 같은 역사가 일어나, 사람들이 다 뒤집어졌어요. 옆에서 사회 보던 사람이 에드워드 목사의 바지가락들 붙들고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면서, 그래도 하나님은 자비하시지 않습니까? 당신이 어떻게 좀 해 보라고 말이지, 그럴 정도였어요. 하도 답답하니까 그러지 마라m 아직 설교가 많이 남았으니까 정신 좀 차려라. 그래도 그게 통제가 안 된 거예요. 설교 전문이 아직까지도 남아있어요. 역사적으로. 그런 사람이었거든요. 그러니까 청교도들의 생각은 이거에요. 뭐냐 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성령의 큰 은혜를 받으면 열광적이 될 수도 있는데, 그것 없이 그 열광을 목표로 하는 것은 신학적으로 잘못되고 매우 위험하고, 그건 이교도들의 열광하는 예배라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예배시간에 막 오케스트라를 동원한다든지, 장엄한 성가대, 뭐 성가대 하는 것을 나는 죄라고까지는 생각을 안 해요. 그러나 난 안하는 것이 훨씬 낫겠다, 개혁파 예배의 정신에 부합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죠. 그런데 그렇게 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성가대를 세워가지고 찬양을 하게하고 엄청난 악기를 동원해가지고 말이지, 정신이 완전히 쏙 빠지도록 사람을 열광시키게 만들고, 막 찬송을 부르다가 쓰러지는 것 하고, 서 태지 거기에 가가지고 노래 부르다가 쓰러지는 것 하고, 전혀 다른 사람들도 있겠지만 비슷한 심리적인 현상 때문에 그런 결과가 오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이거죠. 그런 것들은 모두 개혁주의와 청교도의 전통이 아니다 이거에요. 정서적으로 그런 식으로 자극하려는 천박한 시도들은, 그것은 아주 굉장히 영성을 해치는 잘못된 거예요. 경건을 해치는. 그런 것들이 다 파기되어야 한다, 이거에요. 거룩하고 예배가 엄숙하게 드려져야 한다, 예배 시간에 막 흥분하는 것들이 성령 안에서의 자유처럼 느껴지지만, 그건 옳지 않다 이거죠. 심지어 저는 예배시간에 막 울고 그러면 진정시켜요. “조용히 해라 말이지, 다 끝나고 울어요. 아직도 할 얘기가 많은데,” 까딱하면 그가 울고 있는 이유가 설교 중에 뒤집어 질지도 모르잖아요. 진리를 오해하고 그럴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까 그런 현실 속에서 정서적으로 뭔가를 자극하려는 시도들은 버려야 된다 이거죠. 심지어 어느 교회에 갔더니, 마이크가 이렇게 목소리가 나와요. 그런데 이상하게 축도할 시간이 되니까 갑자기 마이크가 변했어요. “지금은” 그러니까 “지금은, 지금은, 지금은...” 왜 그래요? 왜 그러냐고. 그게 뭐 커다란 감동이 된다고. 그렇게 해서 감동을 받았다고 칩시다. 내가 매일 말씀드리지만, 불 끄고 음악의 도움을 받고 10분만 나에게 시간을 주면 여러분 다 울릴 자신 있어요. 그게 뭐예요. 진리가 와서 움직이는 감명이 아니면, 천박하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보세요. 그런 것들이 얼마나 많이 들어와 있는지 한 번 보라고. 그런 것들을 걷어 내지 않고는 하나님의 진리의 선명한 이 표준이 살지 않는다고요. 오늘날 표어는 어때요? 기도는 열렬히 찬송은 뜨겁게 설교는 간단하게.
그 다음에 마지막 세 번째 가닥을 얘기 하겠어요. 그건 뭐냐. 이 문제는 무엇과 관련이 되어 있느냐 하면 진리의 요소가 예배 속에서 회복되기 위해서는 우선 첫째는 인간을 정서적으로 자극하는 인위적인 요소들이 제거되어야 한다, 라고 하는 것이죠. 무슨 말씀인지 알죠? 제거해야 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뭐냐 하면 강단에서 아주 선명하고 분명한 설교가 울려 퍼져야 한다는 거죠. 그러니까 벌써 여기에서 설교하는 설교자 자신이, 어떤 교회의 성장이라는 목표에 마음을 빼앗기고 매료되어 있기 시작하면, 강단은 벌써 타협하는 것이에요.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아주 전문가가 되어서, 성경을 다룰 줄을 알아야 한다는 거예요. 그리고 진리에 대한 확고한 체험과, 하나님을 아는 풍부한 지식이 있어서, 진리를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해석해 내고 그것들을 그의 풍부한 인격적인 경험에 담고, 그 위에 영성이 가미되어서, 그것이 성경이지만 그것이 자신을 통해서 자신의 피 속에서 우러나오는, 제 3의 또 다른 언어이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특별한 사람들이 요구되는 것이에요. 마지막 요소는 무엇이냐 하면 그런 것들이 되어야 되고 또 하나는 무엇이냐 하면 아까 말한 것처럼 한 시간 내내 예배를 드렸는데 뭘 드렸는지를 모르는 이 돌덩어리 같은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 두는 상태에서는 이게 안 된다 이거죠. 오늘날 지금요 교회가 교육을 시켜야 된다는 것으로 굉장히 열광을 하고 있잖아요. 실제로 종교 개혁자들이나 청교도들에게로 가보면, 물론 그들에게도 교육이 있었어요. 그런데 교육이, 지금 우리처럼 이렇게 복잡하지 않았어요. 요새는 제대로 된 교회 좀 다닌다고 하면, 이게 도대체 학창시절로 다시 돌아가는 건지 교회생활로 돌아가는 건지, 분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코스위에 코스, 코스위에 또 코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천리만리 성경공부의 길을, 계속 걸어가야 되요. 그런다고 해서 그들의 영성이 그렇게 상승되느냐 하면, 그건 아니거든요. 그러면 왜 그렇게 교회는 그렇게 수없이 많은 성경 공부들을 만들어 내고 색별 성경공부, 교리별 성경공부, 그 다음에 무슨 미혼 여성을 위한 성경공부, 재혼 자들을 위한 성경공부, 노인네들을 위한 성경공부, 심지어는 임산부들을 위한 성경공부, 뭐 새내기 신혼부부들을 위한 결혼공부, 그 다음에 헌내기들을 위한 성경공부, 이런 것들을 계속 만들어야 되느냐 말이죠. 백수들을 위한 성경공부, 직장인들을 위한 성경공부, 그런 일들이 왜 생겨나요? 중요한 이유가 뭔지 아세요? 설교가 교육적인 기능을 잃은 거예요. 그게 문제에요. 한 주에 세 편의 설교를 듣는다고 합시다. 수요예배하고 주일저녁하고 주일 낮. 그러면 1년이면 150편이고 금요예배까지 참석하면 200편을 듣는 것이거든요. 그러면 200편을 듣고 20년을 신앙생활 했으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4,000편을 들은 것이거든요. 한 편 설교에 평균 한 시간씩만 했다고 그런다면 8시간 근무한다고 치고 500일을 출근해서 설교만 들어도 500일을 들어야 되는데 휴일 뺀다고 할 것 같으면 최소한도 1년 8개월 이상 설교만 들어도 다 들을 수 없을 정도의 분량을 20년 동안에 듣는 거예요. 근데 뭐예요? 텅 비었어요. 텅텅 비어있어요. 그러니까 내가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어요. 설교를 들은 것이 성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말하는 성도들이 얼마나 있을까요? 너무나 소수라 이거에요. 그 가장 커다란 원인이 다른 것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설교가 교육적 기능을 잃은 것이에요. 저는 종교 개혁자들의 예배신학을 검토하면서 냉정하게 그들의 예배 신학을 검토해 보면, 그들이 생각하는 그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의식적인 면 보다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교육하는 교육적인 비중이 훨씬 컸다고 말해야지만, 정직한 대답이에요.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경배를 받으신다고 생각한 사람들이에요. 그럼 그 설교의 기능이 뭐냐? 칼빈은 설교의 기능이 곧, 디모데서에서 이야기하는 성경의 기능을 그대로 전수받는다고 본 것이에요. 어떻게?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한다. 그래서 어떻게 하냐 하면, 종교 개혁자들이나 개혁자들보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대한 설교는, 청교도들에 의해서 훨씬 더 풍부하게 설교되는데, 그들에게서 보면 오늘날 모여서 성경 공부하는 주제들이 전부 다 설교 속으로 들어가요. 미혼여성들의 경건생활을 위해서, 결혼한 아빠들의 경건생활을 위해서, 이런 것들은 사실 오늘날 책 제목에서나 읽을 수 있는 그런 것들 아니에요. 여가생활에 대해서, 이런 주제들을 가지고 풍부하게 성경진리를. 그러니까 성경 속에서 거의 모든 교훈들을 발견할 수 있는 거예요. 그게 사실 우리들의 신앙고백 아니에요.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삶과 신앙과 모든 행위의 필요한 모든 진리가 이 속에 다 있다. 이 성경 하나면 충분하다, 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고백 아니에요. 설교도 그런 교육적인 기능을 잃어버리는 거예요. 그 가장 커다란 원인이 아까 말씀드린 설교가 설교되지 못하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지금 세 번째로 말씀드리려고 하는 건데 이해의 분위기가 안 되어 있는 거예요. 무슨 말씀인지 아세요? 사람들이 이해하려는 노력이 없이 멍하니 앉아서 예배시간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거예요. 이런 것들을 도와주는 요소가 뭐냐 하면, 여러 가지 있는데 우선 첫째는 설교자의 주제가 분명하지 않은 산만한 설교방식. 그러면서도 사람들에게 가슴에 와 닿지 않는 설교 말이죠. 우선 설교할 때 목소리부터 변하잖아요. 보통 때는 그랬니, 저랬니, 그러다가 “그래야 합니다.” 그런 것에서 벌써 사람들은 그것이 자기의 현실과 동떨어진 것처럼 느끼는 거예요. 또 하나는 뭐냐 하면, 설교자들이, 이해하려는 태도가 없는 회중들을 교육시키지 않고 그대로 버려둔 채로 방치한 채로 설교하는 거예요. 민방위 교육 강사들이 그러하듯이 말이죠. 아니 내가 말하는데, 내가 말할 때 내 얘기를 안 들어도 괜찮은데, 지금 내가 누구를 얘기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나를 통해 말씀하시는데, 저 사람이 안 듣는다 이거에요. 그럼, “정신 차려요, 당신 왜 안 듣느냐? 당신이 지금 이 설교를 나의 말이라고 생각하면, 당신 안 들어도 되고 벌떡 일어나도 되고 나한테 돌맹이를 던져도 되지만, 하나님의 말씀인데 당신 지금 일어나느냐?, 당신이 지금 이렇게 부주의한 태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느냐? 당신이 그럴 수가 있느냐?” 그렇게 나무라야 되잖아요. 뜯어 고쳐야지요. 뭐가 무서워서 못해요. 왜 그걸 내버려 두느냐고. 조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 언제든지 있었어요. 그런 사람들은. 사도 시대 때부터 있었다고. 진짜예요. 그들의 원조가 유두고 아니에요. 유씨 집안이 각성해야 해요. 그런 사람들은 언제든지 있었어요. 그랬더니, 그런 것들을 엄히 견책해서 깨워야 되요. 윗필드의 일화가 있잖아요. 설교를 하는데 저기서 자는 거야. 자지 말라고 말이지, 내려갔어요. 설교 중에. “너 일어나라고. 당신이 지금 하나님 믿는 사람이냐. 지금 내가 윗필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 자리에 오셔서 말씀하시는데 당신이 그따위 태도를 취할 수 있느냐.” 그렇게 반 죽여 놓고 올라와서 설교를 했는데, 그 사람이 그날 하나님 크게 만나고, 극적인 변화의 역사를 경험했다는 것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렇게 되면 안 된다 이거에요. 그래서 그런 것들을 가르쳐야 돼요. 정신 똑바로 차리고 듣게.
그렇기 때문에 청교도들이 원고 없는 설교를 옹호했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 하면, 그들은 원고 없는 설교의 신봉자들이었어요. 철저했어요. 원고 없는 설교를 하는 방식이 대개 세 가지였는데 하나는 조그만 메모쪽지만 가지고 올라가서 가닥만 가지고 올라가는 건데, 이것을 굉장히 못마땅하게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그 서신 같은데 보면 청교도들이 자기의 자손들이나 친척들에게 동기간들에게 그런 거 하지마라, 영국 청교도들 중에서는 그런 식으로 설교하는 사람 없다. 경고한 얘기들이 많이 나와요. 그러면 그 다음에 어떻게 했느냐,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한 부류의 사람들은 그 설교할 것들을 얼개를 만들어 놓고 깊이 명상하고, 성경의 진리를 깊이 파악한 다음에 올라와서 그대로 설교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설교하기 전에 그것을 원고를 완벽하게 써 놓고 완전히 외워가지고 올라오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들의 그 말씀을 위한 노력이 얼마나 강했어요. 그렇게 노력을 하게 된 두 요인이 있었는데 그 중의 한 요인은, 성령께서 자유롭게 역사하실 수 있도록 기회를 드리는 거예요. 성령이 자기 원고 준비한 그 수준에 매여야 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죠? 그리고 그 중의 또 하나 중요한 요인은 지금 말씀드리려고 하는 거예요. 그 요인이 뭐냐 하면, 원고가 없이 설교해야지만, 청중을 장악할 수 있다는 거예요. 이게 저의 지론이에요. 원고가 없이 설교해야만, 이렇게 청중을 장악할 수 있다 이거죠. 여기서 내가 지금 이 강의안을 들고, 고개를 박고 이렇게 강의를 하면, 여러분 강의 들으면서 그런 생각 할 거예요. ‘어휴, 빨리 빨리 넘어가지’ 그런 생각 들 거예요. 그래서 청교도들은 여기서 나오는 목소리뿐만 아니라, 표정, 그리고 이 몸짓, 그리고 이 주먹 쥐는 것, 이 모든 것들이 전부 다 신적인 언어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뭔가 설교를 하다가 고개를 딱 떨구고, 시선을 떨어뜨리면서 낙심하는 표정을 지으면, 깊은 실망을 바디 랭귀지로 표현한 거예요. 그리고 뭔가 어쩔 수 없는 확신, 우리도 저항할 수 없는 확신, 손을 높이 들고 주먹을 불끈 쥐면, 그런 확신을 의미하는 거예요. 그래서 스펼젼의 설교학 책을 보면, 몸짓을 어떻게 하라는 것이 굉장히 자세하게, 우리가 지금 보면 굉장히 웃기죠. 지금 보면. 하나님의 사랑일 때는 뭐 이렇게 하고, 확신일 때는 이렇게 하고, 어찌 할 수 없을 때는 이렇게 하고, 아니 과장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나온다니까. 한 죄인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그런데 이제, 그것이 또 간절히 필요했던 이유 중에 하나는, 그 당시에는 확성기가 없었기 때문에 그런 몸짓이 동반되어야지만, 들릴 듯 들릴 듯 끊어지는 그 언어들이 그 동작을 보면서 이어질 수 있잖아요. 그래서 마지막 노리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수 만 명의 사람이 모여 있어도, 전부다 자신을 향해서 집중하게 하고 설교를 하는 거예요. 윗필드 같은 사람이 그 증인이잖아요. 그 사람이 보통 많이 모일 때, 3만 명씩 모아놓고 설교했다고 해요. 육성으로. 벤자민 크랭클린이 과학자적인 기질을 발휘해서 그 설교자가 큰 소리로 외치면, 어디까지 들리나 그랬더니, 1.65킬로미터 바깥에서 선명하게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고 해요. 뭐 엄청난 거성이었던 거죠. 3만 명씩 모여서 설교를 하는데, 설교가 끝나고 나면 모든 교인들이 그랬대요. “윗필드 목사님이 오늘 나만 쳐다보면서 설교했다 !”, “옆에 있는 사람이 아니야 날 봤는데 !” 그게 뭐냐 하면 장악하는 거예요. 완전히 장악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예배 시간에 나쁜 게 시선을 딴 데 주고 있는 거예요. 어디를 쳐다보고 싶은 거예요. 어디를 쳐다보느냐고. 시내 산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는 그 찬란한 영광 때문에 고개를 들 수 없었지만, 나 설교자는 그게 아니거든. 아무리 쳐다봐도 죽을 염려 없고, 눈 멀 염려가 전혀 없어요. ‘자기 분수를 알아야지, 뭐 맨 날 쳐다 보라고해.’ 그럼 할 수 없지.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전달될 때 왜 고개를 숙이고 있느냐 이거죠. 언젠가 한 번 여기서 내려갈 거예요. “당신 어디를 쳐다보고 있느냐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시선을 둘 어디가 있는지, 난 궁금해요. 내가 자기를 쳐다보고 설교를 하는데, 왜 날 안쳐다 보냐 이거에요. 그래서 예배 시간에 필기 하는 거 난 반대에요. 두 가지 이유인데, 필기해도 집에 가서 안 봐, 필기할 필요가 없어 요만한 수첩에다 이해가 안 가는 거 중요한 교리 그런 것들만 간단간단하게 메모하면서 설교를 듣는 거예요. 그리고 전부다 다 똑바른 자세로 딱 서서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쭉 듣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 보라고요. 설교자가 설교를 한다고요. 설교자는 그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사로잡혀서 설교를 해야 될 것 아니에요. 그래서 설교를 한다고요. 그리고 설교자는 단지 녹음기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온 몸에 흐르는 전류가 있어요. 어떤 때는 설교자가 설교하면서 진리를 말하면서 흐느껴 울어요. 어떤 때는 그 설교자가 설교하면서 가슴깊이 터져 오르는 감격과 북받치는 환희 속에서 얼굴이 시뻘게져요. 그렇잖으면 또 가슴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슬픔과 아픔을 경험하게 되요. 그런 것들이 이 온 육체에 다 베어 나오는 거예요. 그것을 보지 않고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주의를 집중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말이죠. 그게 말이 되느냐 말이죠.
깊이 근데 문제는 뭐냐 하면, 오늘날 교회의 상황이 그런 걸 안 가르친다, 이 얘기에요. 가장 커다란 이유가 무엇 때문이에요? 설교자가 이렇게 청중들을 장악하고, 그리고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과 더불어 의사를 소통할 수 있는 충만한 말씀의 사람이 되지 못하는 것이, 가장 커다란 문제다 이 얘기에요. 그리고 또 하나 문제는 뭐냐 하면, 문제가 많아요. 막 악기를 들여 놓고 막 교회의 의자를 고급으로 바꾸고 뭐 이러는 것들은 샹데리아 걸고 무대 뜯어 고치는 데는 막 돈을 억수로 들이면서, 아니 왜 그래요. 교회가 수 천 명 되면 돈도 억수로 많을 텐데, 설교하러 올라가면 여러분 그러면 지지지지지 그러고, 환풍기는 덜겅 덜겅 덜겅 덜겅, 의자는 삐그덕 삐그덕 거리고 말이지, 뒤에서 온풍기는 붕~하고 돌아가고 말이지, 그것은 벌써 그 교회가 이해를 중심으로 하는 그런 영혼의 변화에 초점을 맞춘 목회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종교 개혁자들이 말씀과 성령의 역사의 관계를 설명할 때 이런 정교한 성경적인 교리를 가지고 있었던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성령님이 말씀을 사용하신다고 하는 것은 성경을 들고 사람을 때릴 때, 귀신이 나간다든지 그런 교리가 아니라 성령이 성경의 진리를 사용하셔서 나타나시고 역사하신다, 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그 사이에 객관적으로 선포된 하나님의 진리와 그것을 언더스탠딩, 이해하고 오성의 눈을 뜨는, 각성을 하고 이해를 하게 되는 그 영혼의 이해의 작용이 있는, 그 사이에 성령이 개입하신다, 라고 하는 교리를 가지고 있었던 거예요. 그것이 없으면, 아무리 말씀과 성령을 이야기해도 그것은 굉장히 미신적인 교리에 불과하다 이거죠.
어느 목사님이 실제로 설교 시간의 일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능력이 있는 줄 아느냐, 왜 그러느냐, 귀신 들린 애들한테는 이 성경으로 뒤통수치면 끝이래요. 그게 개혁자들이 얘기한 말씀의 능력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그러다가 뇌진탕으로 죽으면 어떻게 할 거야. 아니거든요. 그래서 우리교회 경험을 얘기하자면, 저는 바스락거리는 소리 나는 것도 저는 반대에요. 그래서 저희 교회 예배시간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조용해요. 아이들 떠드는 아이들 없어요, 다 예외 없이 여기 예배당에 못 들어오게 해요. 왜, 그 한 사람을 위해서 수많은 사람이 그 고귀한 그 귀중한 예배의 시간을 낭비할 수 없어요. 그래서 저희가 최대한 편의를 베풀어서 그렇게 해서 만들어요. 그래도 마음에 차지 않아요. 원하는 것은 정말 자모들이 개인적으로 가족별로 들어갈 수 있는 방을 만들어 주는 것이, 제 마음의 소원이에요. 환경이 허락을 안 해서 그렇지. 그렇게 해 놓고 모든 사람들이 단정하게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만들어 놓고, 지금 여러분 저희들이 온풍기가 없어요. 이것을 굉장히 많은 돈을 들여 가지고, 이걸 전부다 온돌 시스템으로 만든 거예요. 그 가장 중요한 원인은 뭐냐 하면, 설교를 조용히 듣게 하기 위한 것이 80%이상의 동기였어요. 그리고 마이크 시스템도 수없이 지금 innovition을 해서 아낌없이 투자를 하는 거예요. 좋은 분을 만나서 굉장히 성능이 개선이 되었지요. 뭐 앞으로도 계속해서 개선 될 것입니다. 속삭이듯이 이야기를 해도 사람들 마음속에 육성처럼 깊이 파고드는, 그런 게 되어야 한다 이거죠. 그런데 있어서는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해요. 그래야지만 어떻게? 방해받지 않고 전심으로 하나님 말씀에 집중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전에 지하실 교회에 있을 때 일어난 일인데, 어느 자매가 예배시간에 처음 교회에 수요예배 참석해서 창세기 18장에 하나님 말씀하시기를 ,그러니까 한 번 찾아 본 거예요 흔히 그럴 수 있잖아요. 그런데 막 찾다가 깜짝 놀랐대요. 왜? 천둥치는 소리가 나더래요. 자기 책장 넘기는 소린데. 조용한 가운데. 왜 그러냐 하면 이 하나님의 말씀은 바르게 설교하면 설교 할수록 논리를 가져야 할 것 아니에요. 논리가 전달되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이해가 되지 않고는 전달이 되지 않는 것이에요. 그 이해의 과정에 성령이 역사하시면 그런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는 거예요. 그럼 하여튼 마틴 루터 주석의 서문을 읽던 얼더스 게이터 가에서 그것을 읽던, 요한 웨슬레가 그 교리를 깨닫는 가운데 성령이 임하시면서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진 웨슬레가 된 것을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거 아니에요?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이해라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니까 성령이 오시는 것을 우리가 맘대로 어떻게 시간표를 만들 순 없어요.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뭐가 있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거기에 성령님이 오셨을 때에, 그 성령님이 역사하실 수 있도록, 우리가 충분히 사람들에게 이해를 시키는 것 까지는 우리의 모든 지성과 사랑을 모두 동원해서, 그래서 이해를 시켜야 되는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는 설교자의 설교도 논리적이고 쉽고 평이하고 그들이 수준에 맞게끔 되어야 하겠지만, 듣는 회중들의 입장에서는 집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려고 하는 의지를 가져야 된다 이거죠.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깨닫는 것이 없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어떠한 변화도 기대할 수 없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충동적인 순간의 변화에 불과하지, 견고하게 거룩한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서 성결한 삶이 심겨진다, 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 한거에요. 여러분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오래도록 뿌리 깊은 신앙을 가지고 정말 진실해 지려고 애를 쓰고 거룩한 삶을 살려고 애를 쓰고 조그만 양심의 가책에도 괴로워하고 그런 사람 본 적 있느냐 말이죠. 성결하고 거룩한 사람을 본 적이 있느냐 이거죠. 이따금 돌아와서 펑펑 울고 길길이 뛰는 냄비 같은 교인들은 만나지만, 그런 것이 거룩한 삶을 창출해 주는 것은 아니에요.
그러다가 보니까는 무슨 문제들이 나오느냐 하면, 이 설교는 수없이 많은데 무슨 문제가 일어나느냐 하면, 기독교 사상이 세워지질 않는 거예요. 기독교 사상이 세워져서 뭔가 삶과 세계와 자신의 인생을 입체적으로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단면적인 것은 면 하나만 있으면 되지만 입체적이기 위해서는 여섯 면이 있어야만 입체적이 된다고. 그러면 보다 풍부한 하나님의 진리를 아는 지식들이, 주제별로 성경별로 그런 것들이 쌓여가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채워져야지만 그런 사상가가 나오잖아요. 정확한 진리의 말씀이 가르쳐지고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이 그 영혼들에게 성령으로 강력히 역사하셔서 깨닫는 그 영혼의 어떤 그 변화의 역사를 일으킬 때 그 영혼들 속에 참된 변화의 작용들이 일어나고 그 영혼의 변화가 일어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고쳐지고 그리고 자신들의 영혼들이 치유되고 고쳐지는 변화의 역사들이 일어나는 거 아니에요. 그러면서 기독교 사상이 세워져 가는 거죠.
결론을 맺겠어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 우리의 기도는 두 가지로 압축이 되는 거지요. 우선 첫째는 뭐냐 하면 우리 조국 교회의 예배에 있어서 사라져 가고 있는 이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깊은 애통을 가져야 된다 이거죠. 정말 사람들이 예배를 통해서 참회를 경험하고 있습니까. 성령님이 정말 그 예배 중에 오셔서 그들이 하나님 앞에 정말 얼마나 끔찍한 죄인들이고,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분이고 그 분이 자기와 같은 죄인들을 하나님의 백성삼기 위해서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 얼마나 놀랍고 감격스러운 사건인지를 깨닫고 그 앞에 펑펑 우는 신앙의 감격이 있느냐 이 얘기에요. 그런 것들이 모두 사라져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는 이 예배의 놀라운 감격들이 초보적인 신앙의 표지라고 생각을 한다 이거에요. 그리고는 마음이 부요해져서 아무것도 없으면서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하나님과의 만남에 대한 장엄한 성령의 체험을, 사소한 인간의 지푸라기와 같은 지식들과 바꾸면서 그러면서 잘 믿는 교인인척 하면서 살아가는, 그 교만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을 오늘날 우리의 예배의 현장이 아닙니까. 하나님도 만나지 못한 예배를 인도해 놓고 나서, 무슨 면목으로 정문에 서서 성도들과 웃으면서 악수를 하느냐 말이죠. 잘 들어봐요 어느 평신도가 그런 얘길 해요. ‘그것도 설교하고 해 놓고 거기서 실실거리고 웃으면서 악수를 하고 있느냐,’ 그 사람의 태도가 다 옳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그런 얘길 해요. 그래서 우리는 단지 성경적으로 잘 설교하는 것 가지고 만족할 수 없어요. 그 위에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부어져서 죄인들의 심령을 찔러 쪼개는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한 역사로 나타나 어디서도 깨뜨려지지 않던 흉악무도한 죄인들이 권능이 가득한 진리 앞에 엎드려지는 그래서 자기의 죄를 쏟아놓고 아버지 앞에 항복하는 그런 역사가 예배 중에 나타나야 한다는 거예요. 그럼 두 번째로 기억해야 할 것은 이제는 말이죠. 이제는 사마리아인들처럼 열광하며 드렸던 이런 식의 예배. 깨닫는 것도 없고 참된 진리를 아는 지식도 없으면서 전통을 따라 드리는 예배에 만족하는 이 우월주의적인 신앙들이 반드시 청산되어야 한다. 속히 회복되어야 할 것은 무엇이냐 하면, 정말 하나님의 진리의 복음이 어디서든지 선명하게 선포되고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에 사로잡힌 불꽃과 같은 설교자들이 조국교회에 많이 나와서 그들에 의해서 장악된 예배의 강단을 통해서 풍부하게 하나님이 임하셔서 당신의 거룩을 드러내시는, 그런 역사들이 예배의 현장에 나타나는 것 말고, 이 교회가 그 하나님의 백성들로서의 독특성을 회복하는 길이 무엇이겠느냐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