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와 고난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딤후 1 : 8∼9)
이 세상의 누구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싶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고 또 유능해지기 싫어하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유능한 사람과 무능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도 대우가 다릅니다. 유능한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고 지도자가 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그의 재능과 능력을 아주 높이 평가해 줍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매우 소중한 사람이 되는 것이죠. 저는 몇 달전에 해외 여행을 하면서 그 삼성그룹이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대한 책을 한 권 읽었습니다. 그 책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지금 소위 삼성그룹의 일년에 연봉이 백만불 이상 되는 그런 로열 직원들이 상당수가 있답니다. 그럼 백만불이라면 월봉 일억입니다. 연봉 십이억이에요. 그게 무슨 회사 사장이 아니고 직원이 그렇게 백만불씩 받는다는 것이에요. 그러고 하는 이야기가 뭐냐면, 그 정도 대우를 받는 직원은 두 명정도의 비서가 딸린답니다. CEO가 아닌데...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그랬더니 그중에 비서가 있을거라는 생각이 드는데 가사를 전담하는 비서가 있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뭐하냐... 아이를 데려다 주는 일, 주민등록등본을 떼어다 주는 것, 아니면 시장을 봐오는 것, 그 다음에 집안에 물건이 망가져 있으면 A/S센터에 맡겨 놓는 것.. 그런 일들을 한다는 거에요. 그러면... 왜 그런 일들을 해야 돼냐 그렇게 묻는 거에요. 그랬더니 하는 이야기가 뭐냐면 집안에서 아내가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를 넘어서서 아내가 남편에게 부탁할 것 같은 일, 혹은 여성도 있어요. 그 속에. 남편이 아내에게 부탁할 것 같은 일은 그 비서가 대신 해준다는 거에요. 왜? 일년에 연봉이 십이억이니까 한달의 월봉이 일억이에요. 그런데 사실 근무하는 시간은 20일 밖에 안됩니다. 하루 근무하는 비용이 오백만원이에요. 일당 오백만원이라고. 그러니까 주민등록증 뗀다고 한 두 시간 왔다 갔다 하면 한 160만원 내지 200만원이 날아가는 거에요. 그러니 차라리 한 삼백만원주고 비서를 둬서 그런 일을 시키는 것이 오히려 연봉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거죠. 그것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이놈의 사람들은 사회에서도 이런 대접을 받아요. 사실 우리 사역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합니다. 예를 들어 보십시다. 어떤 사람이 교회에 초청을 받아 왔어요. 그래서 설교를 했어요. 워낙 탁월해요. 그러면 그 교회는 그 분을 다시 모시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들지 않겠어요? 이번 주일날 릴백 총장이 오셔서 설교를 하셨는데 어떤 자매님 한 분은 눈물을 펑펑 흘리며 그 외국인의 설교에 은혜를 받으셨어요. 저는 참 몇 시간 안됐지만 너무너무 달콤한 교제를 가졌어요. 그 분이 저보다 십년 연상이신데 내가 십년 후에 저런 목사가 될 수 있을까?... 정말 특이한 경험이었어요. 무엇인가 서로 이야기 하다가 좋은 일, 자기 일이든지 우리 일이든지 교회에 대해서 아주 꼬치꼬치 물어보셨어요. 그래서 뭔가 좋은 이야기를 들으면 어김없이 그는 "praise a Lord, praise the GOD" 그랬어요. 그것이 어떤 가식이나 지어낸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 깊은 곳에 깊이 베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참 달콤한 교제를 나누었고 당신도 저와 함께 교제하는 것이 그리 불쾌하게 느끼진 않았어요. 이것이 바로 유능하고 소중한 사람들의 장점이에요. 누가 그런 사람이 되기 싫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이런 우리의 생각에 새로운 빛을 던져 줍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능력과 고난의 관계에요. 우리는 능력을 많이 받게 되면, 모든 일들을 쉽게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능력이 있고 성령의 강한 능력만 능력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의 지혜, 그리고 또 탁월한 지성, 혹은 남이 없는 재능 이런 것들이 모두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이라고 보는거죠. 오늘 사도는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 같은 제자 디모데에게 말합니다. “너는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여기서 ‘능력을 좇아’ 이것을 영어로 말하자면 according to 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네가 받은 능력의 분량만큼 고난을 받아라’ 그런 뜻이죠. 그래서 교회의 역사나 우리의 주위를 보더라도 하나님께 능력을 많이 받은 사람들이 편안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 고달픈 삶을 살아가는 거죠. 왜냐하면 그들에게 소명이 있기 때문이에요. 사도 바울이 디모데전서에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참 재미있는 고백인데요, 뭐라고 고백을 하냐면.. 한번 들어보십시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한다 그래놓고 나를 충성되이 여겨서 나에게 직분을 맡기시니... 그랬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주님이 무슨 직분을 맡기셨어요? 사도로 부르셨잖아요. 언제 부르셨어요?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주님이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셨잖아요. 그런데 그가 언제 충성된 삶을 살았어요? 방금 회심했는데? 이건 무슨 뜻이죠?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삼위일체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단순지로서 한 번에 사도를 바라보심으로서 당신 앞에 충성스럽게 살아갈 사람임을 알아 보신거죠. 그것이 하나님의 예정과 나뉠 수 없지만 그런 예정된 예지 속에서 하나님이 이 사도를 충성되이 여기셔서 당신의 그릇으로 삼으셨던 것이죠. 정말 그 후로 사도 바울처럼 능력을 받은 사도는 없습니다. 죽은 자도 살리지 않았습니까? 그런 그가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까? 놀라운 일치를 사도와 그리스도가 보여줍니다. 그는 그렇게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는 능력을 받았고 또 사도 베드로 같은 경우에는 산 사람도 죽게 만드는 능력을 받았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그 초월적인 능력을 한 번도 자신을 위해서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용했더라면 얼마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겠요? 그래서 한국의 어떤 유명한 목사님은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의 병을 기도해서 낫게 하고 자신은 당뇨병에 계속 시달립니다. 그래서 그 분이 그런 얘기를 해요. 자기 머리 위에 자기 손을 얹고 기도 해봤더니 능력이 나타나지 않더라 그거에요. 그게 얼마나 놀라워요?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고난이 끝이 없는 것이에요. 그런 것을 생각하면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능력을 달라는 것도 쉽게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치관 자체를 하나님께 둔다면 고난을 받고 사람들에게 대접을 받고 하는 것은 삶의 양상에 불과해요. 궁극적으로 그것을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느냐 그것이 우리에게 가치가 된다면 그 길은 좋은 길이다 이런 얘기 입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무엇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하느냐?... 이에 대해서 오늘 사도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고 고백을 합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신 놀라운 은혜가 만약 우리의 행위대로 된 것이라면 우리는 굳이 그렇게 살 필요가 없죠. 왜냐하면 구원이 나의 선택이고 나의 행위로 획득한 것이기 때문에 나 자신이 대견스럽지, 주님의 은혜가 놀라운 것은 아니란 말이죠. 그러면 굳이 구원에 대해서 그렇게 뼈저리게 감사할 이유가 없다는 거죠. 그러나 우리의 구원은 그렇게 오는 것이 아니죠. 오직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영원한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충성된 삶을 살아야 하고, 목표를 분명하게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이죠. 그 때에 우리의 삶은 고난에 넘쳐도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이 열매를 거두시는 것이에요. 우리나라에 지금 유럽에서 활동하고 있는 강수진이라고 하는 유명한 발레리나가 있어요. 저는 그런 것을 잘 볼줄은 모르지만 어쨌든 유럽에서도 유명한 발레리나가 되었으니까 세계적으로도 얼마나 인정을 받았겠어요? 한 번은 이렇게 보는데 잘은 모르지만 참 우아하고 예술성이 있는 무용이다 이런 생각을 했어요. 그 화려한 의상을 입고, 찬란한 불빛 아래서 무용을 할 때는 사람들이 박수 갈채를 보냅니다. 그런 그가 인터뷰 하는 중에 발을 좀 보여 달라고 그러니까 드레스를 걷고 발을 보여줬어요. 그런데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못생긴 여자의 발은 못 봤어요. 물론 내가 여자의 발을 많이 보지는 못했지만 태어나서 그렇게 못생긴 발은 처음 봤어요. 발가락 열개가 다 질서가 없이 삐뚤어져있는, 굳은 살이 베겨 있어요. 얼마나 치열하게 연습을 했겠어요? 최소한 55Kg은 되어 보일 그 몸을 발가락 하나로 토스텝을 할 때, 그 체중을 실어서 설 때, 그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았겠어요? 테니스 선수가 우아하게 서브를 할 때 그 우아한 서브 하나를 익히기 위해서 삼만번의 똑같은 스윙을 해야 한대요. 삼만번. 그렇다면 그 사람은 그 토스텝 하나를 우아하게 하기 위해서 수천번의 그 일을 되풀이 하면서 발가락이 기형이 되어버린 거에요. 그것이 바로 자기 자신은 망가져도 자기 자신이 그려내는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거죠. 사람들의 박수 갈채를 위해서도 그렇게 치열하게 분투하는데, 우리는 사람의 박수 갈채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여러분이 갈고, 닦고, 부지런히 익혀서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주님의 은혜를 따라서 복음과 함께 수고하는 주의 종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