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신비체험과 말씀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인으로 봉하였더라. 또 보매 힘 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그 두루마리를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나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할 자가 없더라.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아니하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장로 중의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계 5:1-5)
녹취자: 김경애
오늘은 참다운 은혜체험이 견고해지기 위해서 또 그 체험이 진정한 체험이라면 어떤 표징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이 어떤 체험인지 이 문제를 말씀해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요한계시록 5장에는 요한이 이상 가운데 하늘이 열리는 계시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열려진 하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많은 천국의 비밀들을 요한에게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니까 개인에게 있어서나 교회에 있어서나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적인 영안을 한번 여시는 일이 있어야합니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가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봅시다. 열심히 노력하고 인격적으로 도야를 하고 부지런히 살면 사회에서 인정받는 성실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미지는 심겨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이상의 삶은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실하고 그리고 열심히 사는 모습은 보여줄 수는 있지만 정말 살아있는 하나님의 복음을 소유하고 있는 질그릇과 같은 곳에 보화를 간직해서 그 보화를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이러한 하나님의 살아있는 도구로써의 삶을 사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이름을 열린 교회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여시는 일들이 먼저 일어나야합니다. 믿습니까? 여시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아무도 볼 수 없었던 미래의 모든 비밀들과 장차 일어날 일들과 그리고 무엇보다도 요한이 깊이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은 현재 교회에 대한 상태였습니다.
2장부터 3장에 걸쳐서 일곱 교회의 상태가 먼저 나타나고 그 다음에야 계시의 내용이 4장부터 나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그 순서도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아주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먼저 우리가 뭔가 깊은 신앙의 체험을 하나님 앞에 요구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눈앞에 내가 누구인지를 먼저 깨닫는 일들이 먼저 일어나야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것이 참된 체험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같은 성령이 주시는 체험이라도 그 체험은 어떠한 틀 속에서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엄청나게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물이 있습니다. 여기에 보니까 이런 모양입니다. 여기에 부으면 이런 모양이 됩니다. 대롱에다 부으면 이런 모양이 됩니다. 먼저 자기의 상태가 무엇인가를 깨닫고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추구해야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2장과 3장에서 이전에는 요한이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그가 에베소교회에서 목회한 적이 있다고 하고 그 에베소지방에서 목회를 하면서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탁하셨던 어머니 마리아를 돌보았다고 전해 내려오는데 설마 자기가 목회하던 그 교회가 이렇게까지 하나님이 떠나가신 것을 몰랐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하늘이 열리면서 자신의 교회의 상태, 그 시대의 교회의 상태를 정확하게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체험이 없으면 우리의 신앙을 지탱할 수 없다고 제가 누누이 말씀드립니다. 그러나 체험만을 추구해서는 우리들의 신앙이 견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체험 이전에 먼저 내가 지금 누구인가? 그리고 우리들의 교회의 상태가 어떤가? 하는 것들을 깨달아야한다는 것입니다. 깨닫는데 우리들이 지난번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우리들이 우리의 시대와 교회에 대해서 생각하는 그것이 굉장히 부정확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하면 우리 속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무너지지 않은 자신의 생각과 말하자면 건설될 때 세워질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워지지 못한 그릇된 많은 것들이 있는데 그것들을 통해서 세상을 보게 되고 교회를 보고 자신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낙심하지 말아야하는데 무너지도록 낙심하고, 비관해야하는데 낙관하고, 절망해야하는데 오히려 희망을 갖고, 소망을 가져야하는데 낙망하는 이러한 뒤죽박죽의 결과가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이 그렇게 교회의 모습을 정확하게 보고나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때에 될 모든 일들을 계시로써 보여주셨습니다. 틀림없이 요한은 2장과 3장에서 7교회에 대해서 보여주시는 그 모든 평가들을 보면서 더 절박하게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필요성을 느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계시를 통해서 자기가 뭔가 확실하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그 부분들을 보기를 원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4장부터 열려진 하늘을 통해서 일찍이 누구에게도 보이신 적이 없던 마지막 날에 될 위대한 일들에 대한 모든 계시들을 남김없이 하나님께서는 요한에게 보여주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아마 이 땅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모든 사람들 가운에 요한만큼 신비체험을 극적으로 그것도 풍성하게 하고 바울이 말한 대로 몸 안에 있었는지 몸밖에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이렇게 심오한 영적인 체험 신비한 체험을 한사람이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광경을 보니까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오른손에 책이 있는데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두루마리로 해서 봉했을 것입니다. 인봉을 했는데 뜯어볼 수 없게끔 했는데 어떤 천사가 큰 소리로 ‘누가 이 책을 펼 것인가?’ 그리고 ‘누가 이 책을 펴기 위해서 인봉한 것을 깰 것인가?’ 그리고 큰 소리로 외치며 하는 말이 ‘하늘이나 땅 위나 땅 아래나 능히 이 책을 펴거나 심지어는 보거나 할 사람이 없다.’ 그러니까 그 책은 분명한 사실은 그 책을 열면 그 책속에 그러면 그 위대한 계시 앞에서 우리들과 우리의 교회는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하는 것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을 것입니다. 또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이라는 문제들이 있고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들이 그 두루마리에 기록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책이 봉함된 상태에서 이 책을 누구도 띨 수 없게끔 하나님이 봉인해놓으셨는데 그것을 뗄 사람이 천사들 중에도 없고 땅위에 있는 사람들 중에도 없고 땅속에 있는 피조물 중에도 누구도 와서 그 인봉을 뗄 수가 없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한 자격을 가진 사람이 인봉을 떼어야하는데 합당한 자격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사도 요한은 그 시점에서 어떻게 했습니까? ‘이 책을 펴거나 보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다.’ 울었다는 말이 영어의 Cry 즉 큰소리로 방성대곡하면서 크게 울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어떻게? 아주 심하게 큰소리로 목 놓아서 지금 밧모 섬에서 목 놓아 우는 것입니다. 우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 책을 볼 수 없다는 것보다 급한 것이 무엇입니까? 뗄 사람이 없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왜? 떼기만 하면 볼 텐데 그것을 뗄 자가 없다는 사실이 지금 이 사도 요한으로 하여금 통곡하면서 울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참된 은혜의 체험이 견고해지기 위해서는 이러한 경험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신비한 체험을 한 것을 인하여서는 자랑을 하는 사람, 간증하는 사람 등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거나 읽으면서 놀랍게 깨달은 사실은 간증거리가 되지못합니다. 또 하나는 신비한 체험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는 사람은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확실히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요한은 그 하나님께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놀라운 계시를 보여주시고 말하자면 밧모 섬에 있지만 그러나 그 몸은 몸 안에 있었는지 몸밖에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그렇게 마지막 날에 될 위대한 계시들을 여러 사람이 본 것이 아니라 혼자 보고 있었습니다. 그 위대한 계시를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받는 이 분에 넘치는 엄청난 신비한 체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사도 요한은 그 체험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까?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까?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알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 계시 앞에 어떻게 살아야합니까? 그러니까 신비한 은혜의 체험을 하면서 그 자기가 체험한 그 체험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마음의 가난함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지극히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차라리 어떤 의미에서 그런 놀라운 신비의 체험을 안했더라면 좋았을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런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아주 많이 있습니다. 요한은 오늘 이점에서 우리에게 타협할 수 없는 진리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늘을 여시고 홀로 그 요한 한사람을 위해서 마지막 날에 될 위대한 일들의 놀라운 계시를 모두 보여주셨고 그리고 이전에 일찍이 체험한 적이 없는 하늘의 모든 신비와 마지막 날에 될 크고 위대한 모든 일들의 비밀을 한손에 쥐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보여주신 그 위대한 모든 계시보다도 펴볼 수 없는 묶여진 그 책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있고 그 계시를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보여주는 그 계시의 말씀이 담긴 그 책을 보지 못하는 것을 인해서 지금 통곡하며 울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요한은 이런 놀랍고 신비하고 은혜로운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극단적인 신비의 체험을 하면서도 그것을 통해서 마지막에 우리가 받는 바는 기록된 말씀을 지키면서 살아야한다는 메시지로 요한이 기록을 끝낼 수 있었습니다.
교회의 역사 속에는 처음에는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체험을 가졌기 때문에 참된 체험을 한 사람처럼 보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이 참 하나님이 보낸 그 진리의 말씀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실례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오늘 이 요한은 그 놀라운 신비한 체험 속에서 그 체험을 하면 할수록 말씀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체험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대한 더 깊은 탐구에 목마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의 주위에서 볼 수 있는 은혜의 체험은 요한의 체험과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정말 집회를 나가거나 설교를 할 때나 말씀을 전할 때 그 말씀에 대해서 귀를 기울이지 않는 부요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두 종류입니다. 그것은 여지없습니다. 한 사람은 아예 말씀에 대한 경험이 없고 체험이 없기 때문에 그 말씀을 듣고 자기가 배우는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모르는 사람들과 또 하나는 신비한 체험을 많이 했기 때문에 그러한 체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말씀에 대해서 마음이 부요해지는 사람들입니다. 이번에 제주도에 내려갔습니다. 제주도의 목회자들이 모이는 세미나였는데 제가 강사로 갔습니다. 오늘날의 교회의 물량주의적이고 축복 일변도의 모든 설교들이 과연 복음적인가하는 문제들을 진단하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강의를 들으면서 크게 실족한 사람이 한 사람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나는 몰랐습니다. 나중에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목사님 오늘 그 사람이 안 나왔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신유 하나로 신유의 능력 하나로 교회를 세워서 개척을 하고 지금까지 이끌어 오고 있는 사람인데 교수님의 강의가 걸려서 안 듣더니 결국은 안 나왔습니다. 교수님이 말씀하시는 것과 그분이 목회하는 것과는 정반대였습니다.’ 나중에 다른 목사님이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면 처음에는 사람들이 병을 고치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는데 그러면 병이 나은 사람들이 반드시 그 병 나은 것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신앙생활을 하느냐하면 그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인간이 바로 그런 존재입니다. 오죽했으면 몇 달 전에 어느 교회에 설교하러갔더니 그 교회의 여전도사님이 여자 홀몸으로 지하실에 교회를 개척해서 죽기 살기로 사람들을 전도했습니다. 그러니까 암이라는 사형선고를 받아서 다 죽어가는 사람을 가서 정말 피고름을 받아내면서 기도하며 살려냈는데 낫고 나니까 눈물을 흘려서 기도할 때는 언제이고 이제는 하나님 때문에 나은 것이 아니라 날 때가 되어서 나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교회를 나오지 않고 세상으로 흘러가는 것을 보면서 그러면 안 되는데 자기는 ‘하나님 저 사람들을 그냥 두지 말고 손을 보십시오.’ 라는 기도가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렇게 기도하면 안 된다고 그랬는데 하나님이 손보시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면서 하는 말이 무엇이냐 하면 그것도 일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교수님 내 이야기는 그것이 아닙니다. 물론 내가 하도 섭섭하기 때문에 그런 기도가 나오는 면도 있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손보시고 전처럼 아파서 예수를 믿고 천국을 가는 것이 낫지 손을 보지 않고 하나님이 버려두셔서 잘 먹고 잘 살다가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도 하나님이 나를 고쳐서 나를 예수 믿게 만들었다는 고백을 하지 않고 죽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면서 자기는 ‘하나님 손 좀 보시옵소서.’ 날마다 그렇게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너무 상심이 되고 고통스러워서 그러니까 인간적으로 주일날 교회 앞을 배낭을 메고 모자를 쓰고 놀러가는 것을 보면 오장육부가 뒤틀려서 못 견디겠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이해가 갑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저처럼 아예 포기하고 살면 그렇지 않을 텐데 말입니다. 저도 다 포기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다 하신다고 생각해야하는데 어떤 때는 너무 억울하고 너무 눈물이 나도록 밉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손 좀 보시옵소서.’ 그것을 이야기를 듣고 보니까 계속 기도해도 되는데 미움마음이 들 때는 그런 기도를 하지 말라고 그랬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놀랍고 신비한 체험들을 했는데 그 체험이 의미 있게 되기 위해서는 말씀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계속 부서지고 깨어지는 체험이 동반되고 있는 사람들이 그런 강한 성령의 역사들을 경험할 때 신앙이 온전해지고 정말 신실해집니다.
오늘 요한을 보십시오. 그 놀라운 체험을 누가 했습니까? 누가 하늘이 갈라지는 것을 보았고 누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서신 그 위대한 모습을 다 보고 누가 그 하늘을 열고 그 모든 것을 보여주며 이것을 기록해서 내 이름으로 모든 교회에 보내어서 알리라고 말한 그런 명령을 받았던 도에 넘치는 신령한 체험을 했던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말하자면 어떤 의미에서는 다른 사도들을 능가하는 놀라운 체험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요한의 마음은 부요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신비한 체험 속에서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하고 그러면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해주시는 그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것에 이 요한의 관심이 더 깊이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교회생활을 해보면 이 두 가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너무 적고 더군다나 가지고 있는 것은 그만두더라고 이 두 가지를 균형 잡히게 추구하고 있는 사람들도 너무나 소수입니다. 전부 다 한쪽으로 갑니다. 자기가 체험한 것이 가장 최고라고 생각하고 또 한편에서는 자기가 체험하지 못한 것은 하찮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극단으로 가는 것입니다. 한쪽은 아볼로처럼 성경만 열심히 공부하는 쪽이고 또 한쪽은 만날 불 때러 다니는 그런 체험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여러분 40일 금식기도라는 것을 아십니까? 그것은 죽으려고 유서를 쓰고 가는 것입니다. 의학적으로는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물까지 먹지 않으면 일주일밖에 살지 못하는데 옛날에 양창선 씨라는 사람이 탄광에 갇혔다가 물만 먹고 살다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십 며칠이었는데 그것이 인간승리라고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가 되었습니다. 한국교회는 75일까지 금식한 사람이 나옵니다. 그것은 어떻습니까? 이미 그때쯤 되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욕망을 포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잘되는 일, 자기를 위해 이름을 날리는 일, 자기 자신, 심지어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 가족들, 심지어는 자기 자신의 생명에 대한 애착까지 다 버리는 것입니다. 나는 그 40일 기도를 한 사람이 어떤 사람들이건 간에 그것을 결단하고 실행에 옮겼다는 것에 대해서 깊이 존중합니다. 그분이 나와 생각하는 것이 달라도 그것과는 상관없이 그렇게 결단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깊이 존경합니다. 그것은 생명을 걸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내가 아는 전도사님 하나가 삼각산에서 40일 금식기도를 하고 내려오면 그냥 들것에 실려가야합니다. 그런데 내려오다가 구멍가게에서 우유를 사먹은 것입니다. 그것을 먹으면 되겠습니까? 이미 이속의 모든 기능이 거의 없고 생명만 붙어있는 것입니다. 우유를 먹고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면 안 되는 것입니다. 금식하다가 꿀 같은 것을 먹으면 큰일 납니다. 죽습니다. 금식을 하루 이틀만 하면 아무것이나 먹어도 괜찮습니다. 해당사항 없습니다. 금식을 하루 이틀하고 ‘나도 죽을 뻔했구나!’ 그러지 마십시오. 하루 이틀하면 아무리 먹어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40일 금식을 하면 아무것이나 먹으면 안 됩니다. 내 주위에 40일 기도를 하는 사람이 여럿이 있습니다. 똑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본인들이 고백했습니다. 40일 금식기도를 할 때는 어느 정도냐 하면 깊이 빠져들어 가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골고다 언덕으로 걸어가실 때 피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랍니다. 그런데 그것은 분명히 십자가에 대한 체험입니다. 그런 유사한 체험들을 갖가지 많은 체험들을 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신령한 체험을 주시지 않아도 이미 헛것이 보일 정도의 육신의 기력이 다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 금식기도는 기도를 하기 위해서 금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서 금식을 하는 것입니다. 금식기도를 하면 기도를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서 금식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 의미는 무엇이냐 하면 자기를 모두 죽이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실제로 기도를 그렇게 많이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거의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금식기도의 참된 의미는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 하나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런 체험은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우리에게 체험을 주시려고 해도 그런 체험에 대해서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 자신이 깨어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정도로 갑니다. 나는 존경합니다. 궁금하면 그러면 사흘만 굶어보십시오. 가능한지 가능하지 않은지 말입니다. 그것은 생명을 걸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40일 금식기도를 하는 학생들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동기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뭐냐 하면 그때뿐입니다. 놀라운 신비체험을 하면 그런데 그 신비한 체험이 그때뿐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다시 지지난주로 돌아갑니다. 자기 속에 있는 잘못 세워진 신앙에 대한 견해와 자아중심적인 생각들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여금 하나님 자신이 거하실 수 있는 그러한 건축물들을 무너지고 파멸되고 부서지고 깨뜨려진 후에 새롭게 세워지는 체험이 선행되어야지만 그런 은혜의 체험들이 제자리에 가서 앉는 것입니다. 여러분 40일이나 되는 그 엄청난 기간을 금식기도를 하면서 자신의 육신의 모든 것을 다 비웠습니다. 그런데도 무너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는 세상을 보면서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보면서 절망합니다. 바울이 이야기한 것이 그것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리오.’ 그러니까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무너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령이 가난한자 심령이 파산한 자는 복이 있나니 라고 말씀하신 것이 첫 번째로 올 수밖에 없는 것이 그것이 우리들 가운데 일어나기 가장 힘든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 자신에 대해서 대견하다는 눈초리로 쳐다보아서는 영적인 삶의 진보가 없습니다. 그렇게 무서운 존재들입니다. 내가 아는 부인이 하나 있는데 다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인생의 막장까지 갔습니다. 그러니까 거의 정신병자 비슷하게 되었습니다. 사모님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상황을 이렇게 볼 때 제 3자인 내가 그저 내 판단에 ‘저러고 어떻게 살까? 소망이 없다.’ 그 말밖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벧엘로 올라가자’를 읽으면서 하는 생각이 치우쳤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인간이 그만큼 아집이 강한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그런 정도의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 이십년이 넘는 세월동안을 모든 방법에 호소해보고 이제는 아무런 소망이 없이 그로키가 되어있으니까 이제는 지푸라기라도 붙잡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안 그러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40일 금식기도보다도 더 축복된 것 그래서 하늘이 열리고 그 40일 금식기도 기간 중에 하늘이 열리고 정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서신 것을 보고 마지막 날에 될 위대한 일들의 계시에 대해서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자기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대의 축복입니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무너져서 성경이 다시 보이게 되는 이제는 상식이 아니라 그런 것들이 다 무너져서 기독교신앙 그 자체가 계시의 빛 아래서 새롭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각성을 경험하는 일이 우리들에게 있어서 최대의 큰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신비의 체험을 하면 할수록 그 체험 때문에 자고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체험 속에서 자기가 얼마나 지푸라기 같은 존재인가 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체험을 하면 할수록 그 체험을 나에게 주시는 그 체험 뒤에 있는 그리스도 예수의 성품에 대해서 깨닫기를 사모하는 열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체험 그 자체가 예수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에는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말씀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토대로 다시 체험을 하게 되고, 체험을 하면서 다시 말씀으로 돌아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체험의 깊이만큼 성경에 대한 사랑을 공유하지 않으면 그 체험은 위험한 체험이 되기 쉽습니다.
엊그제도 어느 학생이 저에게 리포트에 써냈습니다. 오래된 것이 아니라 40일 기도를 한 것이 한 3년 정도 된 것입니다. 그때는 내가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드리기로 했는데 지금은 다시 그러지 못한 삶을 산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체험을 주실 때 그 체험이 참된 체험이라면 체험하는 그것을 향한 갈망보다도 그것을 체험케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열망으로 반드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도 방언도 폐하고 예언도 그치고 모두 사라지지만 사랑은 영원하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가 이 땅에서 신령한 체험을 해서 하늘이 쪼개지는 것을 본다고 칩시다. 천국에 있는 성도들이 보면 그것을 보고 여기서 길길이 뛰면서 자고하는 이 세상에 있는 인생들이 가련해 보이겠습니까? 가련해 보이지 않겠습니까?
(찬양)
지금 희미하게 보이나 그때는 주를 맞대고 보리
하나님 나를 알고 계시듯 우리도 주를 알리
여러분 잠시 후 천국에서는 우리는 신비 그 자체 속에서 살고 신비라는 말조차도 없어질 것입니다. 왜 그럽니까? 신비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으니까 말입니다. 생명 시냇가에 날마다 맺히는 과실은 신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죽었던 성도들, 그리워하던 성도들을 한자리에서 만나는 것도 신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주님을 마주대하며 뵈옵는 것도 신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먹어도 살고 안 먹어도 사는 것도 신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체가 신비이고 신비가 아닌 것이 없기 때문에 신비라는 말 자체가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런 때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사라지지 않는 것은 사랑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남에게 주시지 않는 신비한 체험을 주셨다고 칩시다. 왜 주셨겠습니까? 그것은 그 신비 속에서 즐거워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변화산에 올라가셨을 때에 그 변화산에서 희어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며 모세와 엘리야가 와서 함께 대화하는 장면을 보면서 직후에 베드로는 말했습니다. ‘여기에 초막 셋을 짓고 살겠사옵나이다.’ 그때 산 아래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고통스러운 광경을 체험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귀신들린 한 아이를 고쳐내기 위해서 애쓰는 장면이었습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신비한 체험을 하신 후에 고통당하는 현장에 내려오셨습니까? 왜 고통당하는 현장에 베드로를 데리고 내려오시면서 초막 셋을 짓겠다는 베드로의 질문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대답하지 않으신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여러분은 이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체험은 그 체험 자체를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 그 체험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알고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아는 지식을 더하기 위해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식은 왜 주시는 것입니까? 그 지식을 통해서 우리들의 냉담했던 마음들이 뜨거워지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사랑하지 않았던 마음이 주님을 향한 사랑을 갖게 되고 그래서 하나님을 위해서 우리의 삶으로 주님께 순종하며 주를 섬기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며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우리들에게 말씀도 주시고 진리도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야고보 사도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말씀을 듣고 듣기만 하고 사라지는 자는 거울을 보고 자기 얼굴에 때가 묻고 더러운 것을 보고 ‘아 묻었구나!’ 하며 거울에서 지나치는 사람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체험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남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에 관한 신비하고 기이한 것들을 보고 체험한 모든 사람들을 향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는 기대는 그러한 것들을 체험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할 때보다 더 월등한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요한이 하늘이 열리고 그런 놀라운 계시를 다 보았습니다. 그러나 두루마리는 닫혀있었습니다. 더 이상 미래에 될 일들을 알 수 없었고 그렇게 미래에 될 일들을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 하는 비밀들의 뚜껑을 열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지금 통곡하며 하나님 앞에 울고 있습니다. 드디어 열렸습니다. 그리고 계시는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우리의 체험이 어떠한 것이든지 그 체험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온전한 체험이라면 그 체험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이 그 체험을 인해서 스스로 즐거워하기에는 어떻습니까? 신앙은 신비합니까? 신비하지 않습니까? 신앙 자체는 신비한 것입니다. 신비하지 않으면 그것은 이미 철학이지 신비의 요소가 없으면 신앙이 아닙니다. 베일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신비를 경험함으로써 믿을 수 없었던 예전의 것들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신비를 찾아가는 것이 신앙의 목표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신비주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신비적이지만 그러나 신비한 것이 신앙의 목표나 기준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 기이하고 놀라운 하나님이 주시는 신비의 체험 자체에 이끌려서 신비의 숲속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들에게는 말씀이 필요 없었습니다. 모두 직통파들이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그렇게 말씀하셨다는데 누가 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들어갈수록 사단은 역사해서 우리를 신비에 맥을 못 추는 사람으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 신비로운 체험 하나로 얼마든지 우리를 얽어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런 깊은 체험을 하면서도 말씀에 대한 목마름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직통파가 되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은 이것을 배워야하는 것입니다. 마치 자기가 그런 체험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이 곧 자기의 신앙의 우위성을 말해주는 것처럼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은 전부 다 잘못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공통된 점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기도를 많이 할수록 위험에 빠지는 것입니다. 신비한 체험을 많이 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가난함을 잃어버리는 경우는 너무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체험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교만해지고 높아지고 그래서 더 이상은 자기에게 스승이 없는 것같이 아니 그 사람의 스승이 되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체험을 해야 합니다. 그것을 나타내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무너져야할 아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례요한의 체험을 통해서 우리에게 신앙의 체험이 참된 은혜로 이어지기 위해서 바고 이렇게 체험을 통해서 말씀의 필요를 절박하게 느끼게 되고 말씀을 익힐수록 체험의 필요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체험할수록 더 깊이 말씀을 이해하게 되고 이런 관계가 계속 일어나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십시오. 이런 놀라운 체험을 한 요한이 같은 사람이 요한 일서, 이서, 삼서를 써내려간 것을 보십시오. 그는 요한은 그 모든 서신 속에서 또 계시록 속에서도 결코 사람들에게 나 같이 체험을 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관심은 세상 끝날 까지 우리가 이 말씀과 계시를 지키며 살아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관심은 쪼개진 하늘이 아니라 그 하늘 아래에 있는 오늘 이 땅이었습니다. 오늘 이 땅에서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라는 신앙고백으로 ‘진실로 내가 속히 오리라.’ 고 하신 그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살아가는 그런 삶이 바로 요한이 자기의 지체들에게 알려주고 깨닫게 해주고 싶었던 메시지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 앞에 이 말씀을 의지해서 당부하는 것은 우리는 체험을 하면 할수록 그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필요를 절실히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그것이 참된 체험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읽으면 읽을수록 더 깊은 체험을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말씀의 깨달음입니다. 이럼으로써 우리들은 말씀으로 뼈대를 세우고 체험으로 살로 채우는 그래서 하나님을 위한 그런 사람으로 자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왜 이시대의 교회가 에스골 골짜기의 마른 뼈들과 같이 되어버렸습니까? 그것은 뼈만 남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 뼈들이 마디마다 붙고 힘살이 오르고 그리고 살이 붙게 되는 것은 무엇으로 되는 것입니까? 무너진 뼈들이 다시 서게 되는 것은 말씀으로 말미암아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 힘줄이 서고 살이 붙고 그리고 그렇게 되는 모든 것들이 체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위에 성령께서 생기를 불어넣으실 때에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무능한 사람들이 변화되어서 강력한 군사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리고 뛰어난 하나님의 일꾼이 되고 하나님을 위해서 역사하고 어디서든 주님이 부르시더라도 달려가고 달려가서 소용없는 사람이 아니라 달려가서 자기의 몫을 감당해나가고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서 역사할 수 있는 하나님의 도구로 변화될 수 있는 이 모든 일들이 말씀과 체험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두 가지가 충돌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가지를 통해서 또 한 가지가 온전해지고 한 가지가 없음으로 남은 한 가지가 쓸모없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지금 오늘날 우리들에게 이런 일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나 읽거나 묵상하거나 공부하는 그 시간이 체험을 동반한 시간이 되도록 우리는 하나님 앞에 마음을 다하여 기도해야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만약에 이 시대에 요한이 살아있어서 평신도였다면 분명히 그는 설교를 들으러 오기 전에 금식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했을 것입니다. 왜? 그것이 바로 닫힌 하나님의 말씀을 보게 해달라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조금도 마음에 와 닿지 않고 감화력이 없는 설교를 들으면서 많은 사람들은 투덜대며 설교자를 원망하며 교회를 나갑니다. 그러나 만약에 요한이 이 시대에 평신도로 문제 많은 조국의 교회에 왔다면 그는 틀림없이 설교자가 설교를 해도 주님이 떼시지 않은 그 인봉을 인해서 강단을 붙들고 울면서 기도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이런 사람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름이 멋있어서 이름 때문에 성공하는 대신 이름만 근사하고 이름값을 못하는 사람도 많고 직장도 많고 나라도 많습니다. 교회가 열린 교회라는 간판만 그럴듯하게 붙였다고 해서 그것이 진짜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실제로 여시지 않으면 초록색 간판의 ‘열린’ 이라는 말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의 인봉을 떼시지 않는다면 기계적으로 매일 성경을 펼치고, 때로는 소리를 지르며 설교를 하고, 때로는 울면서 말하고, 때로는 덤덤하게 말하고, 예배가 끝나고 돌아가는 이시간과 설교시간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에 서있는 사람이 여러분들을 즐겁게 해줄 소질이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 놀랍지만 십 개월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설교한 테이프가 책꽂이에 가득 찼습니다. 계산해보니까 30년 설교를 하고나면 쉬지 않고 8년을 들어야지만 그 테이프를 다 들을 수 있는 양입니다. 무슨 새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하늘을 여시고 말씀을 설교할 때 그 말씀의 인봉을 주님 자신이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열린 교회에 오셔서 그것을 떼시지 아니하면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저는 당돌하게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러분 설교를 통해서, 내가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께서 인봉을 떼시기를 사모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것이 요한과 같이 사모함을 뛰어넘어서 인봉을 떼게 할 이가 없다고 말할 때 크게 울면서 통곡하기를 ‘주께서 이 인봉을 떼어주시지 아니할 바에야 주께서 차라리 교회 문을 닫으시옵소서.’ 라고 기도할 정도로 사무치는 마음이 있기 전에는 여러분들은 설교자를 하나님의 교회를 향해 불평하지 않을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은혜로운 설교를 듣기를 사모하지만 주일날 와서 은혜로운 말씀을 듣기를 원하지만 나의 지친 영혼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녹여주고 누구 말 맞다나 ‘설교를 그렇게 밖에 못해? 한번 파도처럼 몰고 와서 우리 집을 쓸려 보내지 못해?’ 해보십시오. 그게 얼마나 어렵고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 줄 아십니까? 사람들이 ‘주여 쓸어 보내 주시옵소서.’ 그러고 나와도 될까 말까인데 사람들은 전부 다 ‘주여 옆 사람도 쓸어가고 뒷사람도 쓸어가고 나는 뭐 쓸게 있겠습니까?’ 하면서 나옵니다. 여러분 밀려와도 발목만 때리고 올 때가 다반사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해야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것이어야 됩니다. 믿습니까? 여시지 아니하면 소망이 없습니다. 설교할 때 가끔 이것도 가끔이고 그것도 가끔인데 가끔 안 여신다는 느낌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설교를 많이 하고 시계를 쳐다보아도 시간이 20분밖에 안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신다고 생각될 때에는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그 말씀의 물줄기를 가난한 심령들 속에 폭포수와 같이 밀고가시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때는 설교를 잠깐 한 것 같은데 세 시간이 흘러갑니다. 여러분 열려지기를 기도해야합니다. 여러분 제가 설교자이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이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이 교회를 떠나서 다른 교회를 가셔도 상관없습니다. 어느 교회를 가든지 여러분 교인이 일만 명이 되어도 이 강대를 붙들고 열린 문을 닫지 못하시도록 매달려 기도하고 닫힌 문을 여시도록 몸부림치며 기도하는 사람들은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나는 확언할 수 있습니다. 열 명만 그런 사람을 가지고 있다면 그 설교자는 정말 위대한 설교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문제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십니까? ‘주일날 은혜를 받아야 할 텐데’ 이런 마음을 가지고 교회에 나오는 자신을 대견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세속적인 동기에서 교회에 나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받기위해서 교회에 나가는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고 얼마나 영적인 그리스도인이냐 하면서 그런 자신이 대견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저는 제가 먼저 열려지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의 책을 인해서 울고 그리고 성도들이 이것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주님이 여실 것입니다. 믿습니까? 안 여시면 우리는 빨리 흩어져야합니다. 시간 낭비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안 여시면 우리는 빨리 흩어져야합니다. 지금 뭐하고 있습니까? 교회는 남을 정도로 많습니다. 왜 그 문제 많고 사회에서 눈살을 찌푸리는 지하실교회를 계속해야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은 저를 위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게 열려지지 않으면 소용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강제로 읽혔으니까 다 보셨을 것입니다. ‘기도와 영력’ 이라는 책에 보면 한 가지 깊이 감명 받은 것이 그것입니다. 교회에 한 목사님이 있었는데 설교시간마다 사람들이 다 잡니다. 왜 그러느냐하면 그것은 예의를 차리고 설교를 참아주는 것입니다. 왜? 이것이 도대체 밥인지 죽인지 성도들이 못 알아듣는 것이 아니라 목사님 자신이 감을 못 잡는 것입니다. 이것이 된장인지 고추장인지도 모르고 설교가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가면서 욕하고 가는 것입니다. 거기에 나옵니다. 다섯 명이 잡니다. ‘얘야, 우리가 목사님 설교를 저렇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느냐?’ 모두 고개를 가로젓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나면 성경본문이 더 헷갈립니다. 어느 나이 드신 집사님이 그러셨습니다. 새벽에 출애굽기 강해를 하는데 그냥 읽을 때는 알겠는데 설교를 듣고 나니까 더 아리송해진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자매들이 다른 사람들이 다 그렇게 흉을 보면서 나갈 때 자매들은 목사님의 설교를 위해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간단하게 기도모임을 가지고 기도하기 시작했는데 하나님이 그 다섯 사람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점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를 하기 시작할 때는 그 기도를 방해하는 세력도 강해지지만 그 기도를 세상적인 말로 팍팍 밀어주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러니까 자기도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 살인적인 기도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정확하게 차츰차츰 설교가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주간에 펑하고 터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완전히 지난주의 그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올라가서 설교하는 것처럼 터지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변화된 설교단 뒤에는 하나님 앞에 홀로서기 위해서 뼈를 깎는 설교자의 외로움과 그리고 그 아픔을 공유하면서 설교자가 저렇게 몸부림을 쳐도 몸부림치는 설교자에 의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여시는 하나님, 말씀의 인봉을 떼시는 인자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길이 열리는 것을 확신하면서 기도했던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몇 달 전에 강남에 있는 어느 교회에 설교를 하러갔습니다. 5000명이 모인다는데 그 목사님이 도전도 되고 자존심 상하는 이야기를 저에게 했습니다. ‘교수님, 교회가 부흥하지 않는 것은 기적입니다.’ 그랬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성도들로부터 깊은 인상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뜨겁다는 인상은 좀 받았습니다. 막 차 대접을 받고 차를 타기 위해서 걸어 나오는데 폭풍우 소리 같은 기도소리가 지하로부터 들려왔습니다. 대부분이 젊은이였습니다. 잘 들어보니까 목사님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선교와 그 다음에 목회사역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매일 밤에 하는 것입니다. 갑자기 그 교회가 소망이 있는 교회처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들은 다른 교회 교인들과는 많이 다릅니다. 교만해질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은 뭔가 달라야합니다. 깊이가 있고 기도의 제목도 정말 육적인 그리스도인들이 매달려 기도하는 것과는 다른 기도의 제목들이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절박한 소망의 기도가 되어야합니다. 주님이 여시지 않으면 소망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보십시오. 요한이 우니까 하나님께서 장로중 하나를 통해서 말하기를 ‘Don't Cry.’ 울지 마라. 그리고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떼시리라.’ 그러면 처음부터 뗀다고 하시지 왜 그렇게 사람을 슬프게 만든 다음에 뗀다고 말하느냐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뗄 자가 없다는 그 말을 틀린 것 아닙니까? 결국은 뗄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처음부터 뗄 자가 한사람이 있다고 하며 떼 주면 되는데 왜 없다고 그러느냐는 말입니까? 그 없다는 소망을 통해가지고 이 사도 요한이 절박하게 하나님 앞에 이 운 것은 사실은 서러워서 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 앞에서 울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울어요. 믿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렇게 울음 그 자체가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그런 예가 많이 있습니다. 말을 해야지만 꼭 기도가 아닙니다. 울면 왜 우는지 주님이 아십니다. 요한이 엉엉 우니까 얼마나 웃깁니까? 다 큰 사람이 혼자서 엉엉 울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그렇게 엉엉 울고 나니까 ‘Don't Cry.’ ‘울지 마라 내가 없다고는 말했지만 감춰진 한 사람이 있다. 그게 누구냐? 그는 다윗의 뿌리에서 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것을 읽으면서 조금 싱겁다는 느낌이 안 드십니까? 이 인봉을 떼는 것이 엄청난 일입니까? 엄청난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 왜 그렇게 금방 들어주십니까? 울고 우는 것 가지고는 안 된다. 금식기도를 한 40일 하고난 다음에 그 다음에 떼어야하는데 한번 울고 나니까 Don't Cry. 울지 말라 떼어준다. 어떻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열고 그 말씀을 열어서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해주시옵소서. 그래야 주를 위해 살겠나이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기도할 때 가장 신속히 응답이 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아니 누가 좋은 일입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대로 살면 누구에게 영광이 됩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됩니다. 그러니까 이런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일입니까? 말로만 부흥을 사모한다고 우리는 말하는데 추구하는 것이 뭔가 사람들과 다른 삶을 추구하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눈을 들어 사면을 돌아보십시오. 여러분들의 이웃과 믿음이 깊은 여러분들의 동료들을 돌아보십시오. 누가 강단을 붙들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여시고 인봉을 떼어주시도록 이번 주일의 예배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Don't Cry. 이제는 울지 말라고 위로하실 필요가 있을 정도로 울부짖으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보십시오.
그러니까 교회는 부흥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것입니다. 본질로부터 점점 멀어져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한걸음 한걸음입니다. 무슨 위대한 일이 펑 터지기를 기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언젠가 그 이야기를 한 것 같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전에 절박한 간구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지금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한 믿음이 식어져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 아닙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신앙의 체험이 쌓이고 말씀을 깨달으면서 볼 때에 우리는 저 가나안 복지 젖과 꿀이 흐르는 땅만 보이지 불 뱀이 도사리고 엉겅퀴가 가로막고 있는 그 길은 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그런 하나님의 부어주심에 대해서 사모하면서도 부어줄 수 없게끔 하는 요소들을 무너뜨리는 것이 너무 싫어서 그것을 부여안고 살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그런 것들이 일어나지 않아도 저런 신령한 부흥을 사모하면서 살아가는 내가 얼마나 대견한 사람인가 하는 이런 자아도취 속에서 우리들이 남보다 우월한 어떤 영적인 친분이 있는 것과 같은 착각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 앞에 정말 옳지 못하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바르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이 요한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수많은 체험을 주셨지만 그러나 요한은 지금 과거에 그 모든 체험을 한 그것이 지금의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지금 하나님이 그 두루마리를 여시고 그 책의 인봉을 떼셔서 나에게 하나님의 기이한 말씀의 계시를 알려주시기를 원한다는 절박함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들이 다 멋진 이상을 가지고 출발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올라서 설교를 하겠다는 사람이 한번쯤 주를 위해서 죽는 것이 영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미 출발부터 잘못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이 아닙니다. 누군지 아십니까? 그리고 누구든지 다 바르게 해보려고 노력합니다. 누구도 돈을 사랑하지 않고 숫자에 연연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교회를 해보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그런 교회를 다니고 싶어 합니다. 자기들의 교회만 그러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세월이 흐르고 나면 그 모든 것이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다시 우리들이 그토록 고통 했던 교회의 모습으로 서서히 말하자면 손과 발뒤꿈치의 각질이 생기듯이 그렇게 교회가 굳어져가고 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여시지 않으시면 소용없습니다. 그런데 여시지 않는다고 교회가 문을 닫습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하고 하나님께서 크고 놀라운 은혜의 체험을 주시기를 원하지만 그러면 그것이 없는 사람들은 신앙생활 하지 않고 세상으로 돌아가서 전부 술 먹고 나쁜 짓을 하고 죄를 짓고 감옥에 들어가고 그럽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냥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이제껏 알았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에 비추어볼 때 그것은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저도 여러분과 똑같이 한계 속에서 몸부림치는 사람입니다. 매일 눈을 뜨면 드는 생각이 무엇이냐 하면 이것은 사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런 삶이 만약에 계속 이어진다면 아마 살지 않는 것이 하나님이 플러스가 될지도 모른다는 그런 절망이 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때에 마음속에 다른 사람들이 문제없이 살아갔던 것을 보면서 용기를 얻고 위로를 얻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나는 생각합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 내게 알게 하신 광대하신 하나님, 그 크고 위대하신 신앙의 세계, 어떻게 하면 그 바다에 대해서 내가 말할 때 사람들은 내가 즐거워했던 그 하나님 앞에 있는 것처럼 즐거워하고 그리고 그 위대한 세계를 인해서 내가 감격했던 그 감격을 함께 느끼면서 그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여셔야합니다. 믿습니까?
바울과 같은 사람이 능란한 말로써 얼마나 말을 잘했는지 철학자들이 그를 보고 말쟁이라고 그랬습니다. 얼마나 말을 잘했는지 에피쿠로스학파의 학자들과 논쟁을 해서 꺾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 말과 능란한 웅변으로 많은 철학자들을 굴복시킬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훌륭한 설교가 우리를 훌륭한 신앙인으로 만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엄청난 착각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을 포함해서 열린 교회에 와서 아무리 말씀을 들어도 은혜가 되지 않고 내가 도저히 이렇게는 신앙생활하지 않을 수 없다면 떠나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도사님은 잡지 마십시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누구의 얼굴을 생각해서 함께 모인 집단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입니다. 그 대신 오는 사람도 막지 마십시오. 누가 막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오든지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시지 아니하시면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열리지 않는 강단, 열리지 않는 교회, 열리지 않는 영적 생활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사람들은 그렇게 자신만만하고 그리고 심지어는 나아가서 그 열리지 않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책임인 것처럼 하나님을 향해 불평하고 원망하고 그러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오늘 이 요한은 인을 뗄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아니 요한이 잘못했습니까? 만약에 ‘이것을 떼고 싶지만 그러나 계시를 받고 있는 너의 죄악이 지극히 큼으로 내가 이것을 뗄 수 없다. 너는 먼저 너를 정결케 하기 전에 이것을 볼 수 없다.’ 그랬더라면 울어야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울면 그 눈물로써 정결케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사도 요한이 잘못한 것입니까? 사도 요한이 무슨 책임이 있습니까? 누가 보여 달라고 했습니까? 왜 떼어주시지도 않을 인봉된 책을 왜 들면서 여기에 모든 것이 다 있다고 말씀하십니까? 요한은 이것이 누구의 책임인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내가 아는 사실은 하나님이 그것을 보여주시기를 원하는데 그 책은 닫혔고 그 책을 떼기에 합당한 사람은 없다는 단순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울었던 것입니다. 매달렸던 것입니다. 그의 인생의 모든 관심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여시는데 집중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열기를 사모하며 하나님 앞에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기도할 수도 없고 기도가 나오지 않습니다. 기도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냥 우는 것입니다. 울뿐입니다. 울면서 기도하는 그에게 하나님이 이것을 떼지 않는 것은 누구 때문이라고,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까? 아닙니다. 중요한 사실은 그것이 지금 닫혀있고 열려지지 않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떼실 수 있는 권한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여러분 목회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부흥하지 않거나 영적으로 갑갑해질 때 누구 때문이라는 불만이 떠오르기 시작하면 이미 회복으로부터 새카맣게 멀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설교 때문에 신앙생활을 못하겠다는 사람치고 좋은 설교를 들려줄 때 신앙생활을 옳게 하는 사람을 하나도 못 봤습니다. 그 심령 자체가 그렇게 말씀을 향해 열려있는 사람이라면 결코 설교를 들으며 고통할지라도 불평하지 않습니다. 왜? 닫혔다는 사실 그것이 중요한 것이지 지금 설교자 때문이냐? 누구 때문이냐?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닫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요한은 지금 왜 닫혔는지 누구 때문에 닫혔는지 누가 그것을 열지 못하게 하는지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열려져야한다는 사실과 그러나 닫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절망하면서 하나님 앞에 통곡하면서 기도했습니다. 매달렸습니다. ‘Don't Cry. 울지 마라 요한아!’ 이 음성이 들려왔을 때 요한은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주님이 이런 위로를 해주셔야할 필요가 있는 교회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니 ‘위로, 위로’ 그러는데 해달라고 그러는데 위로를 받을 필요가 있는 교회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Don't Cry.’ 아니 울어야지 울지 말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떼어주시옵소서’ 라고 말을 해야지만 ‘걱정마라 내가 열어주마’ 라고 말씀하실 것 아닙니까? 여러분 여러분은 이제 열린 교회 10개월 이제 1주년이 다가옵니다. 여기서 여러분과 저는 비상해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제 맨 처음 각성과 부흥에 대해서 눈뜨면서 가졌던 그 치기어린 생각들과 감성적인 생각들과 싸워야합니다. 그리고 그 단계를 한 번 더 뛰어넘는 역사가 일어나야합니다. 보십시오. 지금도 하나님은 이것을 말씀하시고 싶으신 것입니다. Don't Cry. 울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운적이 없습니다. ‘Don't Cry. 내가 열어주마 내가 열어줄게 눈의 눈물을 닦아라.’ 말해주시고 싶지만 여는 것이 절박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나는 부흥을 사모한다.’ 그리면서 걸어 다닙니다. 그러면 오늘부터 여러분들은 저를 위해서 기도해주십시오. 열려지지 않는 말씀의 세계를 위해서 가슴아파하며 울 수 있는 심장을 가지고 매일 매일 살도록 저를 위해서 기도해주십시오. 이것은 여러분들의 선택이 아니라 의무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스스로 또한 기도해야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바로 이 요한이 되기를 사모해야합니다. 그 요한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그것을 여시기를 사모하며 부르짖고 기도할 때 언젠가 여러분에게 Don't Cry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열려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모하는 그 위대한 일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요한이 그 인봉이 떼어지게 될 때에 잠시 닫혔던 계시가 다시 열리고 그리고 더 깊은 계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처럼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