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인격에 담기는 하나님의 은혜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고전 14:27-30)
녹취자: 김혜원
오늘 성경을 고린도전서를 읽어드렸습니다만 오늘 설교의 목적은 읽은 본문을 차근차근 해설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지난시간에 이어서 우리들이 신앙과 참된 은혜 체험에 대해서 오늘 이 시간에 지난주에 이어서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편의상 지난주의 이야기를 잠깐하고 오늘 이야기를 해야지만 연결이 될 것 같습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은 무엇이냐 하면 참된 은혜는, 지난주에 본 성경이 아마 사도행전 2장이었죠. 오순절 성령 강림을 받고 그리고 사람들이 막 방언하기 시작했을 때 그 성령과 관계없는 사람들은 아주 하나님을 잘 믿는 경건한 사람들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향해서 말하기를 “술에 취했다” 이렇게 말했다는 겁니다. 성령을 체험한 사람에게는 뭔가 다른 사람들이 상식적인 판단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그 무엇인가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때로는 그 상식 밖을 벗어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우리의 감정으로써는 수용할 수 없을 정도의 그런 어떤 격렬함이 보이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지나침이 보이기도 하는 그런 것들이 참된 은혜 체험 속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만약에 그런 참된 것을 바르게 분별을 못하고 거기에 대응하면 그러면 오히려 성령을 소멸하거나 훼방하는 그런 말하자면 잘못된 데로 나아가기 쉽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오늘날 모든 것을, 모든 은혜 체험을 자기의 상식으로 자꾸 재려고 하면 안 되죠. 자기가 다 체험했겠어요. 어림도 없는 거죠. 이 세상에 누구도 그런 사람은 없어요. 한쪽을 깊이 체험했는가 하면 또 한쪽은 전혀 몰라요. 그리고 또 다른 쪽을 또 깊이 체험했는가 하면 또 저쪽은 전혀 몰라요 그러니까 어때요. 인간이라는 것이 모자라고 그 다음에 이쪽도 알고 저쪽도 안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이쪽도 쪼끔밖에 안가보고 저쪽도 쪼끔밖에 안 가본 사람이거든요. 그렇게 인간의 체험이라는 것은 주관적이고 또 개인에 따라 다 틀린 거죠. 그러니까 언제든지 이것이 참된 은혜의 체험인가 아닌가를 확인해보고 싶을 때에는 말씀으로 돌아가야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느낌 같은 것을 가지고 쉽게 판단하고 정죄하고 평가하고 이렇게 되면 굉장히 하나님께서 슬퍼하신다. 그런 결과를 빚어 낼 수도 있다 그걸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좀 더 넓은 마음을 가져야 돼요. 그래서 좀 더 폭넓게 성령이 역사 하시면 사람에 따라서 정말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그런 다양한 신앙의 반응들을 나타내 보일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해서 폭넓은 마음을 우선 가져야 됩니다. 참으로 성령이 역사한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보면 대부분 많은 사람들로부터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은 사람이었다고 말씀드렸어요. 예레미야 경우 그랬고 바울의 경우 그랬고 그 다음에 지난주에 읽은 사도바울, 베드로를 비롯한 열한 사도들이 그랬고 그런 모든 것들을 종합해서 볼 때 확실히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고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는 사람에게는 뭔가 지나친 것 같은 그런 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에 대해서 굉장히 폭넓은 마음을 가지고 우리들이 그것들을 수용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교회가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성냥갑처럼 자기 나름대로 상식의 구도를 짜놓고 거기에 맞지 않으면 두부 모 자르듯이 잘라서 교회 밖으로 다른 교회로 가는 이런 것들은 참된, 말하자면은 성령이 함께하시는 교회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좀 더 넓은 마음을 가지고 그리고 다양한 성령의 체험들을 폭넓게 인정할 수 있는 그런 교회가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제가 그렇게 제안한 것이 아니라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뭐냐면 과연 성령에 의한 영적인 체험은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는 것인가? 이 문제에요. 지난주에 생각했던 것과는 또 이제 반대편에 이야기가 되겠죠. 무슨 얘기가 되요. 문제는 이거겠죠. 폭넓게 성령의 다양한 역사를 수용한다고 그랬는데 거기에서는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해요. 어떤 문제냐면 그게 참 성령의 역사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구분해 낼 수 있겠느냐 성경에 보면 마귀도 광명의 천사로 위장을 한다고 그랬어요. 심지어는 사람들이 자기 감정적인 흥분의 상태를 마치 영적인 체험처럼 그렇게 착각하는 오류에 빠질 수도 있다는 거죠. 참된 영의 역사와 그렇지 않은 악한 영의 역사를 어떻게 구별해 내며 또 하나는 정말 영으로부터 시작된 그 체험으로부터 비롯된 그러한 나타났는지 아니면 자기가 감정적으로 그런 것을 추구하는지 어떻게 구분해 내느냐하는 문제는 또 남죠. 그것은 나중에 또 다루기로 하고 그 반대편으로 가면 어떤 얘기가 나오냐 하면 그래서 모든 것을 넓게 수용한다고 그럴 때는 말하자면 그런 모든 체험을 다 무조건 끌어안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그 중에서 분별을 해야 되는 거죠. 즉 무슨 얘기예요. 참된 영의 역사와 거짓된 영의 역사가 분별되어야한다. 두 번째는 어떤 것이 있냐하면 정말 영의 역사인가? 아니면 참된 영의 역사가 아니라 자기의 감정적인 발로이고 표현인가 하는 그런 거죠. 그런 것들이죠. 그런 두 가지가 분별이 된 가운데 참된 성령의 역사 그 속에도 그렇게 뭔가 지나친 것 같은 그런 면이 있을 수 있다는 얘기죠. 교회가 그 점에 대해 뛰어난 통찰을 갖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해요.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영을 분별하는 하나님의 은사가 교회 속에 있어야 된다. 또 하나는 그것은 사실 논리적이라기보다는 영을 분별한다고 하는 것은 성령에 의한 직관적인 것이에요. 그렇죠. 그러니까 또 하나는 뭐예요. 그러니까 거기에다 비교하는 것은 우스운지 모르지만 점치고 이러는 사람들도 계통이 둘이라고요. 하나는 사이비가 있고 하나는 진짜 신이 내린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복잡하게 막 따지지도 않아요. 지난번에 한 번 TV를 보면서 깜짝 놀랐어요.
죽은 사람을 이름을 써가지고 사람들에게 점쟁이가 돌아다니니까 둘이서 하나는 의대생이고 하나는 방직공장 여직공인데 학벌도 안 맞고 모든 게 안 맞으니까 집에서 결혼을 아주 너무 반대하니까 둘이서 겨울에 저수지에 뛰어 들어가서 둘이 투신자살을 해서 죽었어요. 두 사람의 이름을 가지고 궁합을 보러 다니는 거야 다 다니는데 가는 곳마다 뭐라 그러냐면 천생연분이라는 거야 천생연분 천생연분인데 왜 죽어요 천생연분이라 그러는 거야 근데 어느 한 집에 딱 갔는데 이름을 딱 보는 순간 커다란 사고를 앞에 두거나 한참 생각하더니 “혹시 죽은 사람 아닙니까?” 그래서 그 기자가 “왜 그렇습니까?” 그러니까 자기가 이거를 이름을 보는 순간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 속에서 일어나더래요. 신이 내린 사람이에요. 귀신이 역사하는 사람이에요. 그러나 그렇게 맞추는 것도 사실은 다 사술이죠.
말하자면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을 통해서 영을 분별하게 하는 것은 이론적이고 논리적이라기보다는 직관적이에요. 알게 하시는 거예요. 그런 은사가 교회에 있을 때에 아까 말씀드린 그런 오류에서부터 교회가 벗어날 수 있게 된다는 거죠. 또 하나는 뭐냐면 성경지식이 뛰어나야 해요. 그래서 성경으로 그 모든 것들을 판단할 수 있어야 돼요. 그 때 비로소 교회가 그런 문제들로부터 안전해질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제 무슨 이야기냐 하면요 고린도 교회가 은사를 많이 받았어요. 성령의 역사도. 근데 참 이상해요. 그 교회는 문제도 많고 또 은사도 많아요. 무슨 당파를 가르고 그 다음에 무슨 나는 게바파, 아볼로파, 그리스도파 이러면서 막 갈라지고 그 안에 도덕적인 문제가 있고, 음행의 문제뿐만 아니라 거기에 그런 혼란스러운 문제가 많은데 그런데도 성령이 역사하셨어요. 그래서 고린도 교회를 그렇게 우습게만 생각하면 안 된다 이 얘기에요. 오늘날 이 시대에 있는 어느 교회가 성령이 역사가 너무나 많고 은사가 넘쳐서 이렇게 교통정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은혜가 충만한 교회가 몇 교회나 되겠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항상 상대적으로 이 문제를 봐야 한다는 거죠.
그런데 무슨 문제가 벌어졌냐 하면 뭐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은 무슨 문제가 벌어졌냐 하면 방언을 하는 사람 예언을 하는 사람 지식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성령이 각각 주신 그 은사를 가지고 교회 안에서 서로 교회를 섬기는데 유익이 되는 것이 아니라 혼란에 빠지게 되었어요. 그 중에 하나가 이 방언과 예언하는 문제였어요. 방언을 하는데 이 방언을 하는 사람들이 막 방언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이에요. 또 예언을 하는 사람은 예언을 하고, 그러니까 ‘나에게 예언이 임했다.’, ‘성령이 나를 방언하게 하신다’ 그러면서 교회에서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는 말이에요. 그러는 가운데 사도 바울이 얘기하는 것이 뭐냐 하면 누가 방언을 예배 중에 말하려 하거든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넘지 않는 그 범위 내에서 순서를 따라서 차례 차례하고 통역하는 사람이 없으면 교회에서 방언 하지 말라 그 얘기예요. 공적인 시간에.
그때에는 예배가 지금하고 조금 틀렸어요. 기도가 있고 찬송시가 잇고 그 다음에 뭐냐면 방언이 있고 계시가 있었단 말이에요. 그런 것들이 막 찬송 부르면서 말씀을 듣고 그렇게 기도하다가 누군가가 예언이 임하면 “하나님이 나에게 예언을 주신다” 그러고 예언을 했단 말이에요. 사람들이 그 예언이 맞나 검증했단 말이에요. 그리고 맞으면 받아들이고. 그러니까 처음 교회가 설립되는 그때에는 신약성경도 없는 그런 때니까 하나님께서 그런 방법으로 인도하신 거죠. 거기 이제 방언의 문제가 이렇게 나온 거죠. 그러면 여러분들은 금방 의문을 제기하게 될 것이에요. 아니 한 성령이 역사하시는데 어떻게 그 성령이 역사하신 사람들이 이렇게 혼란스러울 수 있다는 건가? 혼란스러울 수 있다는 거예요. 이게 문제죠. 한 성령이 방언도 그 성령이 주셨고 예언도 그 성령이 주셨고, 찬송시도 그 성령이 주셨고 통역이 그 성령이 주셨는데 이런 것들이 교회 안에서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성령이 교회에 충만하게 넘칠 때 사단이 방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뭐냐 하면 그 성령의 역사를 끊는 것이 사단으로써는 너무 감당할 수 없는 큰일이니까 성령의 역사하는 그 성령의 역사 하나하나를 그것을 연결시킴에 있어서 잘못된 원리를 우리에게 제시하거나 혹은 그런 것들이 서로 연합을 해서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는데 이렇게 혼란스러운 일이 일어났을까. 사단의 그런 역사들로 말미암아서 그런 혼란스러운 일 이 일어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런 혼란에 말려드는 가장 좋은 사단의 발판 ,교회에 들어오는 좋은 사단의 발판이 뭐냐 하면 인간의 무지예요. 인간의 무지를 밟고 들어온다고. 그래서 18세기에 일어났던 미국의 신앙부흥의 역사를 보면 아주 재미있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1차 대각성 운동이 일어날 때에 글 전국적으로 엄청난 규모의 부흥이 일어났는데 그 부흥이 일어나기 이미 약4-5년 전에 노셈턴이라는 마을에서 유사한 일이 일어났죠. 그때 물론 지도자가 에드워드였죠. 거기서 큰 성령의 역사를 체험해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니까 지금 말씀드린 그런 혼란스러운 악령의 역사가 함께 일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뭐냐 하면 은혜를 받은 사람끼리 서로 욕하고 대적하고 미워하고 그리고 그 속에서 말하자면 인간의 무지로 말미암아 성령의 역사인 것을 악령의 역사로 돌리고 잘못된 은혜 체험을 참된 은혜 체험으로 돌리고 하는 그런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는 거예요. 이런 일들이 일어났는데 처음이니까 혼란스러웠는데 그 상황들이 벌어지고 나서 잘 정돈을 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고 나서 정돈됐어요. 그러고 나서 한 4-5년 있다가 커다란 영적 부흥이 일어났는데 그 부흥이 일어날 때 다른 곳에서는 처음 노셈턴에서 경험했던 그런 무지를 똑같이 경험했어요. 그래 가지고 똑같이 방해를 받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일들이 얼마나 성공적인지 몰라요, 사단의 역사가. 그렇게 성공적이라고. 그래가지고 하나하나의 은혜의 체험을 가지고 있는 그 많은 사람들을 그 하나하나에 요소들을 말하자면 엮는 원리가 틀리게 만든다든지 아니면 사람들 하나하나 사이에 그릇된 오해를 심어주어 가지고 성령의 역사를 방해하는데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노셈턴에서만 그런 일이 안 일어난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사람들이 이미 체험했기 때문에 참된 것과 거짓된 것들을 구별할 수 있는 지식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니까 지식이 있는 그러한 곳에서는 이러한 역사를 크게 줄일 수 있다는 거죠. 그런데 이런 혼란이 고린도교회에서 일어났어요. 그리고 이것은 사단의 입장에서 보면 아주 성공적이었어요. 혼란이 많이 생기게 되었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들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의 체험들을 우리들이 각자각자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참된 은혜의 체험을 각자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고 그 참된 은혜의 체험들이 교회 전체적인 이 상황에서 또 성경에 비추어볼 때 어떤 원리들로 그 참된 은혜의 체험, 성령의 역사 하나하나가 어떤 연관을 지어지게 되고 어떤 법에 의해서 그것들이 인도되어지면서 하나님의 교회에 덕을 세우고 유익을 끼치는 데 이바지할 수 있게 되느냐 하는 문제들에 대해서 우리들이 깨어서 그것을 참으로 잘 알고 있어야지만 이런 사단의 역사로부터 교회를 지키고 참된 성령의 역사의 불길을 오래도록 지속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의 참된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무지가 있으면 이런 일들이 가능하다는 것. 방언도 통역도 예언도 각각 하나님이 주신 건데 그것들이 서로 충돌을 일으키면서 교회 안에서 오히려 참된 기쁨이 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고통스럽게 하는 문제가 되는 거예요.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느냐 이거에요. 성령의 역사인데. 그런데 그렇게 될 수가 있다는 거예요. 원리적으로 정돈이 안 되면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가 뭐라고 그러냐면 “누가 방언으로 말하려거든 두세 사람이 넘지 않는 그 범위 내에서 차례를 따라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통역하는 자가 없다면 교회에서 잠잠하고” 그랬어요. 어떻게 성령의 역사가 그 어떤 사람에의 해 교통정리 하듯이 통제될 수 있느냐? 그런 생각들을 우리들이 하게 되지 않아요.
오늘같이 만약에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 같이 그런 편에서 본다면 이쪽으로 넓게 개방된 측면에서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할 수 있느냐하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겠죠. 성령이 방언을 하게 하시는데 어떻게 인간이 그것을 막을 수가 있는가? 성령이 통역을 하게하시는데 어떻게 인간으로서 그것을 막을 수 있겠는가, 성령이 예언하게 하시는데 감히 인간이 그것을 어떻게 막거나 판단을 해서 아니라고 말 할 수 있는가?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어요. 그래서 우리는 종종 자기가 받은 은혜 체험을 간증하는 가운데 도저히 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그런 이야기 또 아니면 나는 울지 않으려고 하는데 또 나는 어떻게 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하나님이 내가 이길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뭘 하게 하신다 그런 것들을 우리들은 흔히 자랑스럽게 그리고 마치 우리의 신앙에 어떤 특별함을 많은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뭐 그런 것 일일이 예를 들 수 없지만 굉장히 많아요. 예를 들면 교회를 다시는 안 갈려고 했는데 예배당 종이 치는데 감당할 수 없도록 끄는 어떤 힘이 있어서 내가 그냥 이끌려갔다 그런 것도 있고 누구네 집에 전도를 갔는데 전혀 갈 마음이 없었는데 나도 모르게 뭔가 사로잡힌 것 같은 느낌으로 끌려갔다. 중심은 이해가 가요. 뭔가 이렇게 자기가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들이 그런 표현을 쓰죠.
그러나 언제나 사람이 뭔가 신앙이라는 세계가 상당히 많이 체험에 있어서 어떻게 보면 주관적인 세계이기 때문에 뭔가를 말하려다 보면 언제나 뭔가 부정직해서 그런 게 아니라, 부정직하게 하려고 그러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죠. 부정직한 게 아니라 정직하려고 하는데 이상하게 우리가 그걸 말하는 동안에 그 말 자체가 들떠 가지고 우리도 모르게 균형을 잃어버릴 때가 있다는 거죠. 마치 처음 지휘를 하는 사람이 그냥 지휘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감흥에 들떠서 모션을 크게 하듯이 인간의 체험 속에는 자기의 신앙에 대한 것을 진술할 때에 그런 요소가 인간에게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이에요.
그런 것이 있는 것 자체가 큰 문제는 안 되겠죠.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보면 그런 것들이 뭘 나타내느냐하면 성령이 우리를 통해 역사하시는 것이 마치 우리의 인격과 우리의 심성과 그리고 우리 자아의 어떤 통제를 넘어서서 우리와는 상관없이 뭔가 하나님께서 우리로 강력하게 도구로 사로잡아서 그렇게 역사하시는 그런 측면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은연중에 드러내고 말하고 싶어 하지만 그러나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아주 특별한 경우에 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언제나 말하자면 성령이 역사하셔도 성령이 우리의 인격을 통해서 역사하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엄격하게 말하면 성령의 많은 은사도 사람들의 인격이라는 그릇에 담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뭐가 나타나는가 하면 인격이나 사람의 기질에 담겨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같은 그리스도를 만나도 그 나타나는 체험의 모양이 너무 다양한 거예요. 아주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때요? 예수 그리스도는 한 예수 그리스도였는데 그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체험하니까 베드로는 완전히 또 다른 사람이 되었어요. 다른 사람이 되어서 뿐만 아니라 또 요한과 야고보는 특별히 요한의 경우에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하자 그의 사역이나 삶의 모양이 원론적이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고 하는 그 원론적인 이야기에서는 같았지만 그러나 거기에는 다양하게 나타나는 거예요. 베드로 같은 경우에는 기질적으로 흥분을 잘하거나 아니면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사고가 없이 상당히 즉흥적이고 그러면서도 뭔가 사람이 순수하고 그러면서 뭔가 하나님을 위한 특별한 열심히 뛰어나고 요한의 경우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어떻게 변했어요? 처음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고을을 지나시려고 하자 사람들이 통행을 막으니까 “주여 하늘에 명하여 불을 내리라고 하리이까 그래서 저놈들을 다 태워 죽이리이까?” 그 정도로 과격한 사람이었는데 나중에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요 그가 우리를 사랑하여 자기의 몸을 우리의 대속 제물로 주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그런 사랑의 인격에 감화 받는 거예요. 바울의 경우에는 율법의 의를 추구하면서 그렇게 열심히 살던 사람이 예수를 만나자 그 율법의 의인은 아무것도 아니고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참된 의, 그것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보게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한 분의 그리스도를 만났는데 그 체험이 모두 다양해요. 그것은 결국 뭘 가리키냐 하면 우리의 신앙도, 우리 신앙의 체험도 인격 안에 담기는 거예요. (29:00-29:11 소리없음)
그래서 어때요 예수 믿기 전에 생각을 많이 하고 생각이 체계적이고 이랬던 사람들은 예수를 믿어도 체계를 안 잡으면 못살아요. 그 대신 자꾸 자기 자신의 체계를 갖고 있다 보니까 어린아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게 너무 힘들어요. 일단 믿고 하나님 앞에 승복을 하고 받아들이게 되면 그러면 이제 무조건 믿는 것 가지고 만족이 안 되고 자꾸 자기 속에 체계가 들어가고 틀림없어요. 자기 나름대로 인생의 체계가 질서 있는 사람은 예수 믿기 너무너무 힘들어요. 그런데 그런 사람일수록 예수를 믿으면 상당히 확실해요. 믿어라 믿어라 하는 것 가지고는 안돼요. 자꾸 생각을 하고 그러면서 신앙의 나름대로 체계를 쌓게 되는 거죠. 잘못된 체계를 쌓으면 그것도 또 문제가 되죠. 아집이 되어 가지고 안 무너지니까. 예수 믿기 전에 울기를 잘하던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은혜를 받을 때 역시 잘 울어요. 또 예수 믿기 전에 천성적으로 너그럽고 구제도 잘 하던 사람들이 예수를 믿어도 잘해요. 그러나 우리들이 강조해야 될 것은 그렇게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기질을 하나님 앞에 자랑하거나 그 기질로 얻어진 이득이 마치 자기가 신앙적으로 노력해서 얻은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 앞에 높아지는 마음을 가져서도 안 된다는 것이에요. 주님이 중요하게 보시는 것은 여러분들이 어떻게 태어났느냐는 기질이 아니라 그리고도 안에서 어떻게 변화되었느냐 하는 것을 보는 거예요. 분명한 사실은 예수 믿기 전에 마음이 철판 같아서 도무지 울 줄 모르던 사람이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 예수의 그 은혜와 사랑 때문에 한 없이 눈물이 많아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예수 믿기 전에 수전노였던 사람이 삭개오 같은 사람이 말이에요 예수를 믿고 나서 자비로운 사람으로 변해 수많은 사람에게 구제와 선행을 베푸는 사람이 있고 그렇다는 것이죠. 사랑이 없고 메말랐던 사람이 예수를 만나서 사랑을 베푸는 이러한 일들이 예수 안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죠. 성경이 우리에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변화는 바로 그런 변화예요. 그런데 우리들이 기억해야 하는 것은 그 모든 것이 결국은 무슨 변화냐면 우리 인격의 변화예요. 성령의 그 모든 아홉 가지 열매는 우리 인격에 맺히는 열매예요. 실질적으로 무엇을 행하는 것. 그것이 아니라 인내와 온유와 절제와 양선과 이런 모든 말하자면 성령의 열매들이 우리 밖에서 무슨 행동을 하면 그것이 인내고 무엇을 하면 온유냐 그것이 아니라 그런 삶이 흘러나올 수밖에 없는 인격이 되는 거예요. 성령의 역사가 사람을 통해서 나타날 때 그 인격에 담겨서 나타나는 거예요. 성령이 역사하실 때도 우리 인격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이 마음을 강퍅하게 하고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를 주실 수가 없는 거예요. 무슨 얘길 하기 위해서 이 말을 하느냐하면 신앙에 있어서 인격적인 측면이 중요하듯이 은혜 체험에 있어서도 이 인격적인 측면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이에요.
이 사실은 우리에게 두 가지 교훈을 준다는 거예요. 하나는 뭐냐 하면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같은 그리스도를 체험해도 획일화될 수 없다는 것이에요. 획일화 될 수 없다는 것이에요 너는 왜 나처럼 예수를 안 믿냐 너는 왜 나처럼 기도하지 않냐. 너는 왜 나처럼 이렇게 신앙생활 하지 않느냐 이렇게 획일화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 얘기에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을 믿게 하고 그 하나님의 자녀들을 신앙생활하게 하신 그 원리가 마치 이렇게 태엽을 틀어가지고 요새 많이 나오되 그 속에다가 건전지를 넣어서 스위치를 누르니까 곰이 걸아가면서 북을 치다가 고개도 흔들고 몸도 끄덕끄덕하고 그러는데 처음에는 신기해 보이는데 그걸 1분만 보고 앉아 있으면 한 10초 간격으로 계속 반복되는 거예요. 건전지가 들어가 있는 동안에는 영원히 똑같이 반복돼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 하게끔 만드시지를 않으셨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런 획일화를 강조하는 집안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사교집단이예요. 그런 다양성을 무시한 거예요. 그러나 성경을 보면 은혜 체험에 있어서 같은 그리스도를 만나도 그 받은바 은혜와 체험이 아주 다양하게 나타나는 거예요. 그런 다양성을 인정해야 된다는 이야기를 교훈으로 하나 주는 거고
또 하나는 성령의 참된 역사라면 우리의 인격 안에 통제되어야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령이 충만해서 방언을 하다가도 내가 이 방언을 그만해야겠다 하면 그만 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렇게 될 수 없는 것을 지금 사도가 이때는 우리보다 훨씬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던 때였어요. 오늘날 예배 가운데 계시가 있습니까? 오늘날 예배 가운데마다 사람들이 예언을 받고 있습니까? 전부 은혜를 체험해서 은사가 서로 충돌을 일으킬 정도로 문제가 될 정도로 그렇게 생명력이 충만한 교회가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단은 그게 가능하다 이거예요.
성령으로 방언을 말하게 하실 때에도 방언을 그만 해야지 교회에 필요에 의해서 통역하는 사람이 없음으로 나는 이제 방언을 말하면 안 돼 그러면 그게 통제가 된다는 것이에요. 나는 은혜 체험을 하면서 통제가 안 된다 그러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는데 사람들이 전혀 성령을 안 받은 사람들이라고 얘기는 안하겠는데 항상 지나쳐요. 성령은 요만큼 역사하고 있는데 자기는 이 만큼 표현해야지만 적성이 풀려야하는 사람들 그러면서 말하자면 그런 주에서 자기에게 임한 체험이 특별한 체험임을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어 하는 거죠. 이런 것들이 교묘한 영적인 교만이죠. 통제가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어때요. 예레미야가 뭐라고 얘기해요. 다시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할라치면 내 마음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내가 답답하여 견딜 수가 없나이다. 답답하지만 그러나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그렇게 강한 불이 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의 불이 감히 예레미야의 인격 속에 갇혀있는 것을 보잖아요. 마지막 내리는 결론은 뭐냐 하면 예레미야가 나는 죽어도 말을 안 하려고 하는데 결국은 나는 어쩔 수 없이 말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아니라 이게 이 불을 이렇게 닫아두는 것이 그의 인격 안에서 고통이 되는 거예요. 자기의 인격은 자기에게 뭐라고 얘기해요 백성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하나님의 가까운 심판을 백성들에게 말하고 설교하기를 원하는데 근데 어때요? 밖으로 다가오는 핍박이 너무 심하니까 그것을 스스로 거절하는 거예요. 불순종하는 것이죠. 어떤 의미에서. 불순종하는데 자기 속에서 글 불이 치밀어 오르면서 더 이상 자기가 그런 불순종을 할 수 없게끔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인격적으로 자신이 결단하는 거예요. 내가 이제 말하지 아니하리라 했는데 이제는 내가 그 불순종을 계속하면서 그 불을 내 마음에 가두는 것보다 내가 오히려 말하기를 원하노라. 하나님 앞에 큰 체험, 하나님께 부름을 받는 선지자들의 소명의 체험 있죠. 말씀이 임할 때 그 말씀이 불이 되어 임하고 그래서 그들의 마른 속이 불로 타오르고 그래서 그 하나님을 체험하고 선지자가 되는 그 위대하고 장엄한 광경 속에. 이스라엘의 참 여호와의 신이 임하는 선지자들과 그렇지 못한 선지자들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뭐냐 하면 선지자들에게는 어떤 격렬한 하나님의 체험이 임할 때에도 언제나 말씀 전파자로써의 의식이 살아있는 것이에요. 그리고 분명한 하나님의 은혜가 지기의 이성을 통해서 주어지고 인격 안에서 그런 것들이 통제되는 거예요.
그러나 참다운 은혜 체험이 아닌 사술에 의해서 신이 내리거나 혹은 이방 선지자들에게는 자기의 신들로부터 그런 신적인 체험이 있을 때 엑스타시 상태로 들어가서 의식이 없는 상태가 되는 거예요. 사도 바울은 자기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밖에 있었는지 생각이 안 나는 거예요. 그런데도 또렷이 무엇을 기억하고 있어요. 자기가 삼층천에서 무엇을 체험했는지를 그대로 기억하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오늘 누구보다도 사도 바울은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그 체험, 그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부활하신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자기에게 임재함으로 자기에게 보여주던 그 체험 속에서도, 그래서 눈이 그 빛에 멀어 엎드려지게 되는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분명한 이성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러니까 그런 체험을 가진 사람들로서 오늘날 이 고린도 교회가 하나님께로 받은 은혜 체험을 빙자해서 사실을 과대포장하고 그래서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하는 이것은 말하자면 참다운 성령의 역사에 순종하는 태도가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죠. 자신의 인격 안에서 통제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그 인격 안에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마음을 내어놓고 하나님 앞에 방언으로 기도하다가 또 그 방언을 멈춰야겠다고 하면 방언을 멈추고 예언을 하다가 그 다음에 이 예언을 그쳐야겠다. 예언이 그치고 통역을 해야겠다. 통역을 하고 그치고 하는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언제나 우리의 인격이 참으로 그 성령을, 성령의 그 은사와 은혜가 담겨질 때 그 인격에 그 성령이 메인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적절한 표현을 쓰라면 우리의 인격이 성령에 민감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깊은 지식과 그리고 영적인 은혜의 세계에 대한 식별력들이 있을 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인격이 성령이 부으시는 그 은혜에 저항하거나 과도하게 나가거나 함으로써 이런 무질서를 가져오거나 성령을 소멸하거나 하는 그런 어리석음에 떨어지지 않고 우리자신의 인격 그 자체가 성령이 역사하시기에 가장 좋은 그래서 성령의 은사가 우리의 인격 안에 들어왔을 때 가장 역사하기가 좋고 자리 잡기 좋은 그런 인격으로 우리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말씀을 통해서 빚어져 가는 것이에요. 어쩔 수 없어서 자기의 의지와 자기의 어떤 인격적인 통제를 벗어난 은혜의 체험 그런 것들을 자랑스럽게 얘기하고 그런 것들이 은혜 중에 가장 등급이 높은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우리 자신에게 오셔서 그래서 그 은사로서 역사하실 때 우리 자신의 인격이라는 그릇 안에 담기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그 인격 안에서 오늘 이 교회처럼 무질서함이 있을 때 질서를 향해서, 그리고 오류가 있을 때 바른 것들을 향해서 그렇게 갈 수 있는 그러한 판단과 그런 통제들을 가지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만약에 교회가 이런 것들에 대해서 눈뜨지 못하고 무지하다고 한다면 그만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참된 은혜 체험이 변질 되어서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에 유익을 위해서 봉사하지 못하는 그런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결국 그러면 우리들이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우리 자신은 어떤 적용들을 갖게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은사를 주셔도 그 은사를 사용하고,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도 그 은혜를 활용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것이에요 다분히. 그러니까 그 인간이 정말 그 하나님 앞에 인격적으로 깨어있고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들을 잘 다스리면서 그렇게 하나님을 위해서 봉사할 때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고 그 성령의 은사와 은혜들이 교회의 유익과 하나님의 교회의 참된 은혜를 위한 하나님의 수단과 방편으로 이어진다고 하는 사실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은혜를 주시고 참된 은혜의 체험 주시는 것을 우리는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사모해야 되요 사모해야 되요. 하나님께서 모세가 하도 힘들어하니까 그니까 하나님께서 세운 70명의 사람들에게 말하자면 신을 내리셔가지고 모세처럼 선지자가 되게 하셨어요. 그랬더니 여호수아가 와서 선지자가 하는 일은 모세에게 국한되어 있는 건데 이놈 저놈 다 나와서 선지자 노릇을 하니까 당장 저걸 그치게 해달라고 모세를 위하는 마음으로 그랬겠죠. 그랬더니 모세가 하는 말이 뭐에요? 나는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저렇게 되기를 원하노라 역시 자신의 어떤 명예나 은혜의 체험을 귀하게 여기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의 중심을 보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와 주님께서 부어 주시는 은사의 체험들을 사모하는 교회가 되어야 해요. 오늘날 교회가 생명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원인 중에 하나가 이 은혜와 은사에 대한 체험들을 그런 사모함들이 없기 때문이에요. 분명한 것은 뭐냐 하면 사도 바울도 우리에게 사모해야 할 은사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모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그렇게 사모하고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실 때 우리는 부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넘어서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것입니다. 그것이 언제나 자기를 교만하게 하는 요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의 유익을 끼치고 성도들을 하나님 앞에 세우는 데 유익하게 기여할 수 있는 그러한 것들이 되어야 해요. 또 폭 넓게 성령의 역사를 인정하면서도 언제나 이것이 내 인격 안에서 통제 될 수 있다고 하는 그런 생각을 가져야 되요. 그 사람의 인격 자체가 개인주의적이면 그 하나님의 은사를 그렇게 개인주의적으로 쓰는 거예요. 그 사람의 인격이 교회를 사랑하면 그 은사를 교회를 사랑하는 데 써요. 그 은사를 받은 사람이 신중하고 차분하면 성령의 역사도 그 사람을 통해서 신중하고 차분하게 나타나요. 그 사람이 열정적으로 뜨거우면 성령의 역사도 그렇게 나타나요. 어떠한 경우에든지 그 은혜의 많은 다양성들을 우리는 인정하고 서로 존중하고 세워줄 수 있어야 돼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한 그 은혜는 우리의 인격 안에서 통제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돼요. 언제나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성령을 우리의 미비한 인격으로 말미암아 성령을 슬프게 하고 근심시켜 드리는 이런대로 나아가서 성령의 은사로 말미암아 자기가 성령을 근심시켜 드리는 그런 어리석은 것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할 수 있으면 모든 성도들이 그 은혜가 큰 은혜와 성령이 임했으면서도 불구하고 고린도교회 이전에 사도행전의 교회를 보세요. 성령의 커다란 역사가 임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언제나 질서가 있었어요. 그리고 그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교회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그래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백성들을 칭송하고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구원 얻는 자의 수가 날마다 더하게 하시는 그런 은혜가 교회에 임하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우리 자신이 언제나 이렇게 하나님 앞에 참된 은혜의 체험을 사모하고 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다양한 신앙의 체험들을 감싸 안으면서 또 그 감싸 안겨진 많은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이 각자 신앙의 인격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은혜와 그리고 성령의 그 은사들을 인격 속에서 하나님의 교회에 유익이 되고 지체들을 하나님 앞에 세우는데 덕이 되도록 통제해가면서 아름다운 교회 모습을 세워가는 것이 바로 이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사도가 원하였던 바였어요. 그래서 사도가 뭐라고 했냐하면 “누구든지 자기를 이해한 은혜의 문제에 있어서 신령한 자나 은혜를 많이 받은 자나 선지자나 그렇게 생각하거든” 그 사람의견을 존중하라고 그러지 않고 “내 말을 들으라. 이 편지를 기준으로 삼아라. 이것이 주님의 말씀이다.” 사도가 아주 강력하게 얘기 했어요. 얼마나 이 교회에 고통이 되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하나님 말씀이 이것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준 거예요. 그래서 우리들은 언제나 이러한 문제들을 다루어갈 때 성경을 살피면서 성경 속에서 원리를 찾아내고 거기에 검증을 거치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해요.
나는 할 수 있으면 교회가 이렇게 공적으로는 개인의 다양성들을 모두 수용하고 교회가 어떻게 그것을 수용하게 되는가 하는 문제가 13장에 나오는데 그것이 사랑이에요. 그런 다양성들을 다 수용하고 한 성령이라도 개개인의 인격을 통해서 이렇게 다양하게 역사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널리 인정하고 그 정도에 있어서도 폭넓게 인정해주고 그러는 교회가 되고 개인으로서는 하나님께 부어지는 그 큰 은혜들을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간직하면서 그러면서 자신의 인격 안에서 그런 모든 영적인 현상들을 통제하면서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그러한 신앙의 삶이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교회가 되겠는가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러한 다양한 체험들, 그리고 또 하나님께로부터 임한 다양한 은혜의 체험들, 이런 것들을 수용하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하겠는가 이런 것들을 우리는 늘 고민하면서 기도하면서 사모해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질서에 지나친 강박관념이 성령이 역사하시는 것을 제한하지 않고 또 어때요?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에 의한 사모함 때문에 교회의 질서가 무너지지 않는 그런 때 비로소 성령이 그 성령을 통해서 교회가 은혜를 받게 되고 그 성령을 통해서 주님이 주신 그 은혜의 체험이 참된 것으로 나타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지 그 어느 한쪽 때문에 어느 한쪽을 손상하거나 어느 한쪽 때문에 어느 한쪽을 거부하는 그런 극단에 떨어지게 되면 언제나 이런 위험들을 우리들이 겪게 된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이렇게 은혜가 다양하고 또 하나 한편으로는 폭넓게 성령의 은혜체험들을 수용하고 또 한편으로는 자기의 인격 안에서 그 모든 성령을 그 성령의 은사들을 담고 그 인격 안에서 많은 영적인 체험들을 소화하고 통제해 나가는데 그렇게 되어야 한다면 어떻게 되어야 하겠는가? 그것은 그러한 것들을 통활해 가는 하나의 원리를 고린도 교회가 우리에게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다음시간에 계속 하도록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