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경건한 사람들의 의혹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행 2:13)
녹취자: 백지영
지난 시간에 예레미야 애가를 읽으면서 이야기한 것은 참된 은혜는 사람들 속에 격렬에 가까운 정서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이 망한 것을 보면서 “눈물이 물같이 흘러내렸다.” 그렇게 예레미야가 고백을 했습니다. 신앙생활 속에서 감격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다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니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 수요일에 계속해서 집중적으로 다룰 테니까 설교시간에 다 커버할 수가 없는 내용들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가슴으로 설교를 들으려고 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머리로 설교를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설교시간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스토리를 따라가면서 자기 생각이 정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사람이 느끼는 것은 아주 위험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 문제를 계속 하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될 수 있으면 수요일 날 시리즈로 설교하는 데 빠지지 말고 연속해서 나와서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것 때문에 너무 많이 고통 하는 교회가, 그리스도인이 많기 때문입니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면, 그렇게 하나님을 참으로 체험한 사람들에게는 격렬에 가까운 정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의 경우에도 그런 격렬한 정서를 가졌습니다. 하나님이 벌써 예언 한 것이었고, 맨 정신으로 자기가 뛰어다니면서 수없이 예언한 적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오늘에 와가지고 나라가 망했는데 다 큰 사람이 눈물을 흘리는데 펑펑 흘리는 것이 아니라 냇물처럼 눈물이 흘러갈 정도로 격렬한 정서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참으로 체험한 사람들에게는 격렬한 정서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질하고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기질적으로 흥분을 잘하는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격렬한 정서가 있을 수 있고, 또 그러나 그런 격렬한 정서를 가진다고 해서 그것이 모두 하나님을 만난 참된 은혜는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그렇게 하나님을 만났고 성령의 특별한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너무 격렬하고 어떤 때는 도대체 이치에 합당하지 않을 정도로 상식을 넘어서는 그런 모습을 보일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마지막 했던 이야기를 해야지만 오늘 연결이 되겠기 때문에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한 부인이 있었습니다. 알다시피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에 서울에서 강릉까지 고속도로라는 것이 없었고, 차선도 없는 신작로가 그냥 자갈모래가 가득한 그 길을 차들이 다녔습니다. 지나가면 포플러 나무 위에 먼지가 하얗게 일어나면서 연막 친 것처럼 그러면서 털털이 버스가 지나가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버스가 사고가 많이 났습니다. 산이 있으면 이쪽에 강이면 길을 이렇게 비스듬히 내서 여기다 수로를 파야 되는데 돈이 없으니까, 산이 이렇게 되고 그 다음에 길을 이렇게 내서 산에서 떨어지는 물이 길을 타고 강으로 흘러버리게 만들었으니까 이것이 역학적으로 붕 달리다가 우회전을 휙 하면 차가 빙 돌면서 강으로 수시로 추락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덕을 올라가기 전에 밤도 야심한데 교양 없는 부인이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있다가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면서 나 여기 내려달라는 것입니다. 정류장도 아니고 민가인데다가 밤은 깊고 애는 안고 있고 때는 겨울입니다. 그러니 거기서 내려서 그 밤중에 어디를 가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래서 안 된다고 하니까 내려달라는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고 하니까 하나님이 나보고 내리라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차근차근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소리소리 비명을 지르면서 내려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중에 말리다가 마음대로 하라고 언덕 아래다 내려주었습니다. 올라가면서 사람들이 말했답니다. 예수를 믿어도 곱게 믿어야지 미쳤다고, 그런데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언덕을 넘어가다가 차가 강으로 굴렀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이 죽었습니다. 실화입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니, 하나님을 체험하고 성령이 그에게 함께 역사하실 때 때로는 우리들이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그러한 모습이 나타날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장면은 오순절 날 성령이 강림한 사건입니다. 성령이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나서 임하더니 그 다음에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들이 저희에게 보여서 저희에게 임하고 그 다음에 사람들이 방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때가 오순절이니까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다 모이는데, 오늘 보면 과장을 좀 했겠지만 천하만국의 모든 사람이 모였다고 했습니다. 천하만국이 다 모이지는 않았지만 그 당시의 생각으로는 천하만국이라고 할 정도로 그 근동에 나가서 살던 모든 유대인들이 한 나라에서 수십 명씩 수백 명씩 떼를 지어서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고국으로 다 올라온 것입니다. 그때만 해도 제사가 있고 해서 다들 모였는데, 그 사람들을 가리켜서 오늘 뭐라고 했습니까? 경건한 사람들이라, 헬라어로 '유세베이아스', 좋은 두려움의 사람들입니다. 히브리어로 넘어가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의 저자인 누가가 볼 때에 그 사람들은 경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을 경외하고 공경하는 그러한 구약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거기에는 바대, 메데, 엘람, 메소보다미아, 유대, 갑바도기아, 본도, 아시아, 브루기아, 밤빌리아, 애굽, 구레네 리비야, 로마, 그레데, 아라비아 수많은 나라에 살던 유대인들이 다 모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방언을 하는데, 내용은 똑같습니다. 그 내용이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큰일이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소식이 온 세계에 전파될 것을 가르치는 이 하나님의 큰일입니다. 그것을 말하는데 수십 개국의 사람들이 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면서 분명히 알 수 있는 바는, 방언을 하는 이 사람들이 모든 사람들 앞에 기이하게 보였을 것이라 어떻게 기이하게 보였느냐 하니. 우선 그 말만 기이한 것이 아니라 말을 하는 태도가 기이했습니다. 오늘 성경은 “새 술에 취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정상적으로 대화를 하는 것처럼 절제된 가운데 방언을 말한 것이 아니라 막 방언이 쏟아져 나온 것입니다. 여러 나라 말로 막 쏟아져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방언을 말하는 말도 문제가 되었지만 방언을 말하는 그 사람들의 태도도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상식으로서는 납득이 안 가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분명하게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아무런 티도 없는 순수한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강력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서 사람들이 방언으로 큰일을 말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곧, 수많은 나라의 수많은 말로 말한다는 것이 결국은 세계 선교에 대한 비전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다 그 이야기를 들을 때 성경은 말하기를 다 놀랐다고 했습니다. 한 사람도 안 놀란 사람이 없고 모두 놀랐다는 것입니다. 깜짝 놀랐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해 져서 그 성령에 사로잡혀서 방언을 하고 또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는 것을 인해서 모든 사람들이 크게 놀란 것입니다.
성령을 깊이 체험하고 그 성령에 붙들렸을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일일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기이한 일이 많이 일어납니다. 1850년대에 웨일즈에서 대부흥이 일어났을 때에는 어떤 이상한 일들이 일어났느냐 하면 교인들이 내일 일어날 일을 오늘 예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언하는 일이 내일이면 꼭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 날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무슨 말씀인가 하니, 이 성령의 역사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들은 좀 더 폭넓게 가능성을 열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너무나 닫혀있고 우리의 생각이 닫혀있어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고 성령을 소멸케 하는 데로 나아가기가 쉽다는 사실을 먼저 기억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좀 더 넓게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그렇게 성령이 역사할 때 모든 사람들이 다 놀라는 것이 첫 번째 반응이었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자신들이 경험해 보지 못한 일들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경험은 언제나 새롭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역사하시는 그 경험은 항상 새롭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 체험이 없으니까 그 체험을 받은 사람들을 수용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보았을 때 모든 사람들이 다 놀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강하게 역사할 때 일어나는 일은 우선 그런 것들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그것이 놀라운 일입니다.
이 놀라운 일을 보았을 때 그들이 어떤 태도를 보였느냐 하면 의혹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찌 된 일이냐.” 그러니까 교회와 개인에게 참된 성령의 역사인지 그렇지 않은 역사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없게 되면 그러면 놀라는 것은 같이 놀라는데 그 다음에는 의혹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그 은사와 성령의 역사를 인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의혹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럴 일은 별로 없겠지만, 제가 추석선물이라고 봉투에다 수표를 가득 넣어가지고 우리 전도사님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전도사님이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감히. 수표가 들었다고 하니까 내 앞에서 봉투를 뜯어서 수표를 펼쳐보더니 전화기를 가지고 와서 은행에 전화를 걸고는 수표번호를 말하면서 이것이 진짜 수표이냐고 물어보았다고 가정을 해 봅시다.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없겠지만, 아마 앞으로는 결단코 선물을 주는 불행한 사태가 발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그렇게 의혹하고 있는 그 자체가 성령을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충만하게 받아가지고 그것으로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할 때 이 사람들은 그 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인 것이 아니라, “이상하다. 아니, 여기서 메데 방언, 엘람 방언, 메소보다미아 방언, 구레네 방언 막 쏟아져 나오네. 이상하네.” 그런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에 대한 접근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큰일을 말할 때 말씀의 내용이 무엇인가에 대해 귀를 기울였으면, 아마 2장 뒤편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그 방언으로 쏟아져 나오는 메시지 앞에서 무릎 꿇고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들의 눈을 끌었던 것은 무엇입니까? 그 내용이 무엇인지는 문제가 안됐습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지금 그렇게 말하는 태도가 맘에 안 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방언을 미친 듯이 해 대고 있는 그것이 내 마음에 들지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런 것을 아직 신앙생활하면서 본 적이 없다는 거부감이었습니다. 그것이 먼저 들어온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들어올 때는 항상 그것을 성령의 역사로 인정하지 못하게 하는 그런 악한 세력들의 역사가 동시에 역사합니다. 그러므로 비둘기 순결한 것만 가지고는 안 되고 뱀같이 지혜로워서 말씀에 입각해서 참된 은혜와 거짓된 신앙을 구분하고 판단할 수 있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참된 지식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마귀들이 이런 것을 가지고 장난할 수 없습니다. 어느 교회든지 이런 영들의 이상한 역사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구렁텅이에 빠지는 것은 언제나 말씀이 든든히 서있지 않는 교회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의혹했습니다. 그 의혹한 사실 그 자체는 의심하면서 불신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자체가 이미 오순절에 이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게 하시는 성령이 원하시는 바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실 때는 말하자면 사람들이 조금만 그 성령을 거슬러도 성령이 슬퍼하시는 것이 확 느껴지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강력하게 임하고 성령으로 말미암은 축복이 뜨겁게 임할 때는 항상 반대편의 일들도 분명하고 확실하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심판의 역사입니다. 성령께서는 이 예루살렘에 모인 이 사람들에게 큰 성령을 내리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여러 방언들을 말하게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커다란 계획이었습니다. 거기에 귀를 기울이면서 사람들이 이런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온 땅에 펼쳐질 것이라는 암시를 방언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받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놀랐지만 그러나 그 놀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대신에 의혹했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성경이나 영을 아는 지식으로 판단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상식을 따라서 판단한 것입니다. 그렇게 될 경우에는 의혹하는 것으로만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되는데 조롱하는 것이었습니다. “저희가 새 술에 취하였다.” 그러면서 조롱했습니다. 그런데 때는 아침이었습니다. 때가 삼시라고 했으니까 지금으로 말하자면 오전 9시인데, 오전 9시에 유대인들이 관습상 술을 안 먹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이 술을 먹는 법이 없는데 알코올 냄새도 안 나는데 왜 저런 일들이 일어날까? 하면서 하나님께서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일로서 우리에게 역사할 수 있다고 하는 가능성을 향해서 마음의 문을 여는 대신에, 의혹을 하다가 그 다음에는 조롱을 하는 단계로 나아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항상 역사를 보면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일어나서 누군가가 성령을 충만하게 받고 이렇게 상식으로 납득될 수 없는 이들을 행할 때는 언제나 교회로부터 박해를 받고 제재를 받고 반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서도 보면 이 사람들은 정말 경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을 공경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공경하고 경건하고 말하자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의혹하다가 마지막에는 이 성령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세계를 향한 구원에 관한 위대한 계획을 보여주는 이 사람들을 조롱하는 데까지 나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을 조롱하는 것은 곧 그들을 통해서 역사하는 성령을 멸시하는 것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가 열한 사도들과 함께 서서 소리를 높였다고 했습니다. 나쁘게 이야기하면 소리를 버럭 지른 것입니다. 그러면서 목청을 돋우어서 그렇게 의심하며 의혹하는 눈초리로 바라보며 자신들을 조롱하는 사람들에게 격양된 목소리로 변증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성령이 하시는 역사에 대해서 의혹하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조롱하고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서 이 사람들이 성령을 체험한 베드로를 비롯한 초대교회 사람들에 대해서 의혹하는 마음과 조롱하는 마음을 가졌을 때 베드로로 하여금 소리를 높이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은 바로 성령 자신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들이 술을 먹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치부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그 신앙의 틀, 그 안에서 모든 것을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경험하지 않은 신앙의 세계는 존재할 수 없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얼마나 한심한 사람들입니까?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내 머리, 하나님의 크신 역사라는 것이 내 지혜와 계산속에 모두 수용할 수 있는 정도의 용량밖에 안된다면 기독교 신앙의 넓이와 깊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그렇게 감탄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가 여기서 중간 결론을 하나 이끌어 내게 되는데, 그러면 이러한 불행한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우선 가장 좋은 방법은 성경의 저자들이 체험했던 바를 거의 그대로 함께 체험하면서도 성경 자체를 잘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체계화 되는 것입니다. 체계가 된 지식은 우리에게 영적인 전투에서 아주 커다란 보호벽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체계화되지 않은 신앙에 대한 지식은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단에 깊이 빠지는 사람들이 열심히 전혀 없던 사람들이 아니라 대부분 열심히 기도하고 그러던 사람들이 훨씬 이단에 잘 빠기는 것입니다. 체계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설교를 계속 듣고 성경을 배우면서 여러분들이 나름대로 정리를 잘 해서, 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어떻게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그분이 누구시고, 하나님이 왜 우리 같은 인간을 만드셨으며, 우리가 누구이며, 또 우리가 왜 예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고, 그분이 우리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가,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시고, 구원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성령을 주시고, 그 사람들이 어떻게 교회에 모이며, 그 교회가 무엇이고, 마지막 날에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며 믿음을 이어가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가 죽은 후에는 천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이런 것들에 대한 체계적인 신앙의 지식을 소유해야지만 된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런 체계적인 지식과 함께 성경을 쓴 사람들이 경험했던 참된 영적인 체험들을 함께 경험해 나갈 때 우리는 비로소 성경을 잘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비근한 예로, 신학 영어 번역을 영문과 선생들에게 주면 번역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신학대학교 다니는 학생들이 해도 그것보다 나을 정도로 그런 번역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우습지도 않은 이상한 번역이 나오는데 그것은 예수를 안 믿고 신학을 모르기 때문에 그 속에 쓰여지는 용어와 정서들에 전혀 익숙해 있지 않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만약에 우리가 디모데서를 읽는데, 교역을 하고 디모데와 같은 똑같은 어려움을 겪고 또 사도 바울이 이야기한 은사를 불일 듯하게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런 것들을 모두 체험하고 있는 사람들이 디모데서를 읽는다면 훨씬 더 이해가 잘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선 이것을 기록하고 있는 누가를 포함해서 성경을 기록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되 도서관에서 논문을 통해서 아는 것과 같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말하자면 그렇게 체계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함께 동시에 그 하나님을 깊이 체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한 것들로서 비로소 우리가 가지는 기독교 신앙의 세계의 영력에 대한 이해가 넓어지는 것입니다. 더 커지고 넓어지는 것입니다.
단순히 제가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영적인 체험 그것 하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 하나만을 아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아는 것이 전혀 아닐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집이 있는데 그 집을 안다 할 때는 도면을 보고, 멀리서 보고, 위에서 보고 조감도를 보고 그 다음에 그 집에 들어가서 거실 안방 건넌방 다 보고 그 다음에 주방 화장실 다 보는 것이지 화장실 하나만 보고 와서 집이 무엇이냐를 쓰시오 하는데 화장실 이야기만 잔뜩 쓰고 나머지는(내용이 끊김)
성령에 대한 체험적인 지식을 가져야 한다고 하나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체계적으로 알고 거기에 그런 성령의 역사가 어떤 자리에 놓일 수 있는지에 대한 이런 넓은 이해를 가질 때 우리들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그러니까 말씀도 알고 체험도 있어서 방언 말하면 방언의 체험이 나도 있어서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예언 하면 그 체험이 내게도 있어서 무엇인지를 아는 것.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이 그렇게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해 주시지를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사도 바울이 이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는 수많은 은사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사도 바울 자신이 뭐라고 했습니까? “모두 교사이겠느냐, 모두 목사이겠느냐.” 직분을 다양하게 주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필요한 사람들에게 은사를 나누어 주십니다. 제가 어렸을 때 신앙생활 할 때 제 주위에는 정말 신령하다 할 정도로 신앙이 깊고 영적인 생활이 깊으면서도 방언을 못하는 사람을 여러 사람 보았습니다. 기도원에서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들도 방언을 받고 하는데 그 신령한 분에게는 방언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교회에서 일어나는 신앙의 현상들과 영적인 현상들을 보면서 정확하게 성경적인 자리매김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는 것입니까? 영적인 체험과 모든 것을 다 체험하고 또 성경정인 체계적인 지식 안에서 그것을 이해하면 가장 좋지만, 그러나 때로는 그렇게 모든 것을 체험하지 못할지라도 우리들이 성경을 보면서 성경 속에서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고 그 성령이 우리를 강하게 간섭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먼저 깊이 공부하면서 머리를 열면 마음이 열리고 그것이 받아들여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떤 사람들은 용기를 갖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너무 위험한데까지 문을 열면 어떻게 하나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중에 다루기로 하고 우선 확실한 것 하나는, 그런 성령을 체험한 사람들에게 있는 예레미야적인 과격함 그런 것들을 사람들이 이해하건 안 하건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성령이 주신 것은 성령이 주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그것을 주셨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성령의 역사가 아닌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체험이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우리가 마음으로는 다 느끼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성경을 공부하고 성령의 조명을 따라서 신앙에 세계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우리의 지성으로 가능성을 열어놓고 아멘 하는 것과 완전히 폐쇄하고 사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기억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5년 이상 지난 이야기이지만, 저는 방언을 체험하던 그 순간에 대해서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전까지는 저는 방언은 별로 필요 없다고, 사도도 방언이 별로 필요 없는 것처럼 말하지 않느냐고 방언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 나는 그것을 구한 적이 없다고 그것을 자랑하면서 다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것이 얼마나 교만한 것인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불가항력적이었습니다. 기도하는데 불이 날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머리 전체가 확 뜨거워지면서 내 자신이 언어를 절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누가 보면 그때도 미쳤다고 했을 것입니다. 젊은이가 갑자기 콘크리트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기도하다가 갑자기 부들부들 떨면서 평소에 전혀 그러지 않던 이상하게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막 목청껏 쏟아 내놓는 것을 보았을 때 모르는 사람들이 보았다면 똑같이 말하였을 것입니다. “새 술에 취하였다.” “예수를 믿더니 완전히 돌아버렸구나 젊은이가 참 안 됐네.”
성령이 우리를 강하게 사로잡아 역사하실 때는 이렇게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령이 그렇게 역사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폭넓은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은혜를 받은 사람들, 은혜받기를 사모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열린 마음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오늘 이 사람들은 경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삶으로 말하자면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을 때 이 성령의 역사에 동참하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경건했음에도 불구하고 육으로 영의 일을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급기야는 의혹하고 마지막에는 조롱하며 성령이 역사하셔서 말하게 하시는 그 큰 하나님의 일, 분명히 거기에서 메시지는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이는 그리스도였고 그가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다고 하는 이러한 구원의 메시지에 대해서 귀를 기울이는 대신, 그 내용은 상관이 없이 그들이 행하는 모습과 그들이 행하는 태도가 일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말하자면 순수한 성령의 역사일 수가 없다고 하나님의 역사 일 수가 없다고 이것은 술 먹은 것이라고 쉽게 이야기하면서 정신병이다 그렇게 단정해 버린 것입니다.
저는 주위에서 성령을 체험해서 정신병으로 몰린 사람들을 여럿 보았습니다. 심지어는 잡아 패고 정신병원에 집어넣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무지들이 바로 우리 안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경각심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지 않을 때는 여러분들이 성령을 거스르는 것을 성령도 가볍게 취급을 하시는 것같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강하고 놀랍게 역사할 때는 그 성령을 거스를 때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강물과 같이 교회에 충만케 되는 역사가 없던 시절치고 하나님 앞에 그리스도인들이 완전한 순종을 드린 때가 없다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옛날에 우리 어렸을 때 초등학교나 중학교 다닐 때는 서울이 개천 천지였습니다. 더러운 개천인데 비가 오면 흙탕물이 막 떠내려가는데 다리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흔한 다리가 뽕뽕다리라고 공사장에서 등짐지고 올라갈 때 구멍 뽕뽕 뚫린 그 철판 그것 깔아놓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것도 장마에 수시로 떠내려갑니다. 그래서 떠내려가면 가방을 들고 물에 첨벙 들어가서 도하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물이 조금 흘러내려올 때 그때에 그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그렇게 힘들지 않습니다. 발목 정도 찰 때는. 그러나 무릎 정도 되면 걸음이 불편하기 시작하고, 허리정도 올라오게 되면 진짜 넘어지면 물에 뒹구르기 쉽고, 가슴 이상 올라오면 한번 넘어지면 잘못하면 죽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령의 열정을 읽으셨으니까 거기서 보셨을 것입니다. 1890 몇 년도였습니다. 캐나다에서 집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설교자가 그 시에서 전도 집회를 하는데 저녁에 내일 아침 설교를 무엇을 할 것인지 엎드려서 성경을 펴고 있는데 성경이 떠오르지 않아서 엎드려서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말씀을 주시는데 “너는 가서 전하라 네가 죽고 다시 살지 못하리라.” 이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 살리라고 전도 집회하는데 메시지를 전하는데 네가 죽고 다시 살지 못하리라는 설교를 하라니까 죽으라는 이야기와 마찬가지라서 성령의 역사가 아니겠지 했습니다. 그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서 다시 무릎을 꿇었는데 아무 설교도 생각이 안 나고 하나님이 또 말씀을 주시는데 “너는 가서 전하라 네가 오늘 반드시 죽고야 말리라 다시 살지 못하리라.” 결국은 준비를 못하고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그 시에서 무슨 문제가 일어났느냐 하면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회개를 하고 변화를 받으니까 술을 끊었습니다. 술집 주인들이 회개를 했으면 문제가 틀릴 텐데 단골 술꾼들이 완전히 회개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술집 주인이 길거리 자나다가 아무개 요새 왜 안 오느냐고 하니까 끊었다고, 부흥회에서 은혜 받았다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런데 단골고객들이 단합 대회하듯이 전부 다 회심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술집 주인들이 연합회로 모여서 우리 이 불황이 도대체 웬일인가 했더니 저기서 지금 몇 달째 열리고 있는 집회 때문이라고, 갔다하면 술꾼들이 회개하고 알코올중독자들이 치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술을 끊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집회에 가보니까 술을 끊었다면서 하는 짓을 보니까 술 먹은 사람들처럼 방언하고 박수치면서 찬송하고 울고불고 하는 것입니다. 술을 끊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주정은 집회에서 다 하고 있다 이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집회를 깽판을 놓아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연합을 했는데 회장이 40대의 건장한 젊은이였습니다. 설교가 오늘 죽고 다시 살지 못하리라 이니까 메시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면서 간 것입니다. 그리고 딱 가운데 앉았습니다. 가서 설교가 클라이막스로 올라가고 있는데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는 이 집회 때려치우라고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막 퍼부어댄 것입니다. 그때 마침 바로 “네가 오늘 죽고 다시 살지 못하리라.” 이렇게 서서 소리를 질렀는데 그 자리에서 갑자기 억억 하는 소리를 내더니, 모든 사람이 다 보았습니다, 입을 쫙 벌리는데 피가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었습니다.
저는 그 사실을 전혀 의심치 않습니다. 역사에 쓰여 있는 이야기이고, 또 하나는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교회가 성령의 권세로 충만하였을 때 그때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감격하니까 재산을 다 팔아서 하나님 앞에 바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 중에 아나니아와 삽비라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팔고 보니까 아까운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반 내고 반 숨겼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성령을 속인 것이 된 것입니다. 그것이 만약 그대로 임하면, 오늘로 말하자면 십일조 떼어 먹은 사람들 다 죽을 것 아니겠습니까? 몇 명이 남아서 예배를 드리겠습니까? 그런데 오늘은 그런 일들이 안 일어납니다. “죄가 만연한 곳에는 성령의 역사가 충만하지 않고, 성령의 충만한 역사가 일어나는 곳에는 죄에 대한 두려움도 없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역사하시지 않고 증거를 안 보이시니까 사람들이 방종하고 방만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언젠가 성령이 임하시면, 그 성령의 권능으로 충만해질 때 그때 하나님께서 다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교회가 성령으로 충만해지니까 사람들이 모여서 한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면 그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이 슬퍼하는 죄가 무엇인지 조차도 다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감추지 않고 다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이처럼 강력하게 임할 때는 우리의 상식과 일반적인 지식으로 이해될 수 없는 일들도 일어난다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우리들은 오픈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개방하고 오픈하는 것만이 성령께 순종하는 것이냐 하면 그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께 책망도 받았지만 아주 칭찬을 받은 이유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었냐 하면 거짓된 선지자들을 시험하여서 그 선지자들이 거짓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친히 드러낸 것이 에베소 교회가 하나님께 칭찬받은 이유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아집과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상식을 던져버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이 아무리 경건하게 산다고 하더라고 마지막에 이 경건한 유대인 같은 모습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더 극단으로 떨어져서 바울이 삼층천을 보았다고 하니까 나는 칠층전을 보았다고 하는 이런 사람들이 생긴다든지 이런 극단으로 가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 문제들을 우리들은 조심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항상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역사해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머리로만 아는 지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과 기독교 신앙을 머리로 이해해서 수백편의 논문을 쓸 수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여러분들을 결코 잡아주지 못합니다. 참된 진리를 아는 지식, 거기에 참된 체험이 함께 역사할 때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인식의 지평이 한꺼번에 넓어지는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약속하신 것을 주신다, 그가 오면 너희에게 죄에 대해 의에 대해 심판에 대해 증거하시리라, 그가 오시면 너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 너희가 나보다도 더 큰 일도 할 수 있다, 하나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는데 성령이 오시니까 그 성령을 체험하니까 그 사람들은 모두 이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구약을 이해하고 있던 것들이 확 뚫려서 지평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나마 구약을 모르고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고 있었다면 뚫릴 것이 없겠습니다만 말입니다. 그 사람들은 앞으로 하겠습니다만, 그런 사람들은 결국 마지막으로 튼튼히 붙잡고 나아가는데 말씀과 그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십자가와 구속의 도리들을 붙잡고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 체험을 튼튼히 붙잡고 나가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체험이 얼마나 주관적입니까? 성령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오시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이슬과 같이 오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폭풍과 같이 오십니다. 지난번에 이야기했던 내가 가르친 학생 그 목사님, 술 먹고 교회당 문을 확 여는 데 확 하고 불이 쏟아지더니 뒤로 나가떨어졌는데 온 몸에서 피투성이가 되가지고 피를 쏟았습니다. 그렇게 오시는 분도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성령이 이슬과 같이 서서히 오셔서 어느 한 순간에, 내가 첫사랑의 고백을 무엇이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목사님 나는 이것이 처음서부터 끝까지 거짓말이라고 해도 난 이것을 믿지 않고 설 자리가 없습니다. 방언도 받지 못하던 시절에. 너무나 다양하게 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들이 내가 체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저것은 옳지 않고 있을 수 없다 이렇게 정죄하는 것이 얼마나 얇은 생각인가 하는 것들에 대해서 눈을 떠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넓게, 그 성령의 역사의 다양한 가능성에 대해서 우리의 문을 마음껏 열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얼마만한 넓이와 얼마만한 깊이로 그런 성령의 역사를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지에 대해서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들을 상담받기 좋아하는데 이상한 사람들 쫓아가서 상담하면 그 추종자가 되는 것입니다. 완전히 크리스천 점쟁이가 되서 이상한 데로 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성경을 배우면서 그것들을 우리들이 배워나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들은 오늘 하나만 기억합시다. 성령이 역사하실 때 때로는 우리의 상식적인 지식이나 일반적인 체험으로는 이해될 수 없을 정도로 과격한, 우리 자신의 생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상식 밖의 그런 모습들이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우리의 마음을 오픈해야 합니다. 열고 그리고 우리들이 그 하나님의 역사를 보면서 어찌하든지 성령이 역사하실 때 함께 그 오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일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이 오셨는데 그 앞에서 까보고 그리고 수표의 번호를 은행에 불러주면서 물어보는 그런 불행한 처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또 반대도 마찬가지로 성립하는 것입니다. 일단 우리들은 오늘 그렇게 갑시다. 그런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개방된 마음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이렇게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폭넓고 다양한 은혜의 체험들을 우리들이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것으로 삼으면서 늘 깊이 체험하면서 자라가야 합니다. 우리들이 자칫 잘못하면 우리에게 주시는 그 성령을 슬프게 하고 소멸하고 그리고 잘못하면 그 성령을 대적하고 훼방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강하게 임하시면 그 일이 우리가 생각했던 사소한 잘못이 어떤 때는 하나님 앞에 돌이킬 수 없는 깊은 범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그 성령을 슬프게 한 것에 대한 대가들을 우리들이 받고 회개해야 하는 그런 사태가 발생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음 시간에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