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눈물은 물같이
“이로 말미암아 내가 우니 내 눈에 눈물이 물 같이 흘러내림이여”(애 1:16上)
녹취자: 김경애
지난 수요일에는 엠마오로 올라가는 두 제자들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저는 몇 번에 걸쳐서 길면 열댓 번이 될지도 모르지만 몇 번에 걸쳐서 일단 신앙과 은혜의 체험에 대해서 어떤 것이 참된 은혜의 체험이고 어떤 것이 거짓된 은혜의 체험인지를 바로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무지로 말미암아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는 교회의 현실에 비춰서 참된 신앙과 참된 은혜의 체험이 어떤 것이고 또 참되지 못한 은혜의 체험이 어떤 것인지를 분별할 있는 안목을 갖게 하기 위해서 이 시간에 몇 주에 걸쳐 계속해서 지난주에 했던 것 같은 내용들을 가지고 참된 은혜와 거짓된 은혜를 가려내는 작업을 하려고 합니다. 부탁드릴 것은 이것입니다. 지난주부터 수요일마다 시리즈로 계속 설교할 텐데 어느 한주에 와서 설교를 듣고 내가 교수님한테 들었는데 ‘이렇게 말하더라.’ 라고 이야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주, 한주 계속되는 설교를 다 들어야지만 비로소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오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다음 주에 절대 빠지면 안 됩니다. 그럴 바에야 오늘 이야기를 아예 듣고는 아무 이야기를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말입니다. 완전한 말이 아니니까 말입니다. 오늘 이야기하고 다음 주에 이야기하고 그 다음 주에 이야기할 것입니다. 오늘 설교를 들을 사람들은 적어도 두 주 수요일에 빠지면 안 됩니다. 부득이하게 빠지게 되면 녹음테이프이라도 들은 다음에야 오늘 이야기가 완전해지는 것이니까 잘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예레미야 애가는 예레미야 선지자에 의해 쓰였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망하기 전부터 망해버린 그 후까지 선지자 사역을 했던 분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선지자들 가운데 이스라엘의 그 끔찍한 불행의 날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면서 유다가 멸망하는 비참한 광경 예루살렘이 바벨론의 군대에 의해서 포로로 에워싸여서 고통을 받는 모든 장면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믿었던 애굽이 비참하게 패하고 자기네 나라로 돌아가서 궁극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돕지 못하는 것 그래서 결국은 바벨의 침공을 받아서 궁극적으로 나라가 망하게 되는 모든 역사적인 과정들을 한눈으로 다 지켜보아야했던 그런 선지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선지자는 모든 선지자들 가운데 특별히 고난을 많이 받은 선지자였습니다. 물론 이 사람도 순교했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면에서는 일찌감치 죽는 것보다 그 역사를 낱낱이 다 보다가 죽는 것이 더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선지자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 선지자는 특별히 다른 선지자보다 많은 눈물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모든 선지자들이 다 그런 눈물을 가졌지만 이 예레미야 선지자를 눈물의 선지자라고 말하는 것은 특별히 이 예레미야 애가 때문입니다. 이 애가 자체가 슬픈 노래입니다. 그래서 재미있는 것이 히브리어 성경을 펼치면 예레미야 애가가 ‘애가’ 그러면서 시작합니다. 히브리어로 애가가 ‘아 슬프다’ 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애가가 무엇으로 시작하느냐하면 히브리어로 ‘애가’ 로 시작합니다. 그래서 애가가 아니라 우리는 슬플 哀와 노래 歌를 썼습니다.
저는 오늘 이 예레미야 애가 1장을 다 설교하려고 여기에 선 것이 아니라 지금 읽어드린 예레미야 애가 1장 16절에 있는 이 말씀을 통해서 신앙과 참된 은혜 체험과 그리고 우리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문제 그 문제를 다루려고 합니다. 이 문제를 다음주, 그 다음 주까지 3주 동안 다루려고 하니까 그냥 쉽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니까 빠지지 말고 계속 스트레이트로 나와서 분명히 이 혼돈을 제거하십시오.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삶뿐만이 아니라 모든 삶의 대부분의 그 고통은 무지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지 즉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알지 못하니까 언제나 안개 속을 거니는 것과 같은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제 일차적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런 이야기입니다. 성경을 볼 때 지난 주간에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을 풀어주시자 그들의 속마음이 뜨겁게 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지난주 이야기했던 것을 그렇게 속마음이 뜨겁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풀려서 그래서 사람들에게 들려지고 감동을 받을 때 뜨거워지는 역사가 일어나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오늘 이야기 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누구든지 참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신령한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감정에 있어서 풍부해진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할 때 여러분들은 오해를 하면 안 됩니다. 지금 말씀드린 이것은 기질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질적으로 흥분을 잘하고 펄펄 뛰기를 잘하고 다혈질적인 그런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기질 말고 기질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을 만나고 신령한 은혜를 체험했기 때문에 경험하게 되는 은혜로운 체험과 그 은혜의 체험에서 비롯되는 감정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우리의 감정은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면 감정적으로 풍부해진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미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그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을 느끼는 일에 대부분 실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하나님이 계신데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생활을 하면서 뭔가 그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고 또 그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말하고 그러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뭔가 체험되고 느껴지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것들을 경험하는데 이미 실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신앙적으로 커다란 문제를 불러일으킵니다. 문제를 불러일으킨다기보다도 신앙적으로 영적인 삶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무감각함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이 예레미야도 보면 ‘이를 인하여 내가 우니 내 눈의 눈물이 물같이 흐르며’ 그랬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겼던 사람들 하나님을 참으로 만나고 신령한 은혜를 체험했던 사람들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언제나 열정적인 감정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것이 여러분들에게 거의 없다면 그러면 여러분들은 자신의 신앙생활을 되돌아 보아야합니다. 남이 무슨 이야기를 해도 거기에 귀 기울이지 마십시오. 생각해보아야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세상의 사람들이나 이 시대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여러 가지 사고에 의해서 판단하고 생각하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잘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르쳐준 그런 지혜와 지식 그런 것들을 따라서 판단하고 생각하는 일에 익숙해지니까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내가 옳다고 확신하는 것도 사실은 잘못될 수 있다고 하는 그런 검증을 하는 일들이 많이 약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의 보다 깊은 영적인 삶을 위한 첫 발은 먼저 이 지성으로써 생각을 하는 데서부터 출발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늘 학생들에게도 이야기하는 것이 뜨거운 가슴으로 성도들의 가슴을 향해서 설교를 하려는 사람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로 습관적으로 심령이 부드러워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뭔가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기를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복스러운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기를 사모하는 모든 사람들은 동일한 열망으로 깨닫기를 사모하지 않으면 그 은혜받기를 사모하는 그 사모함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자는 언제나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설교를 하기 이전에 머리를 파고드는 설교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들이 이상하다고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먼저 어떤 작업을 해야하느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기 서계십니다. 내가 여기 서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사랑을 느끼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와 나 사이에 있는 안개가 걷히는 일들이 일어나야합니다. 그래서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목격하고 인정할 수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 받기를 사모하는 사람들의 심정, 그 마음을 좋은데 그 은혜 받기를 사모하는 사람들은 뭔가를 느끼려고 하기 전에 먼저 깨달으려고 하라는 것입니다. 먼저 느끼려고 하고 깨닫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언제나 혼돈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의 심령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커다란 공포심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성령이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9장에 에베소교회에 그런 큰 두려움이 떨어졌습니다. 창세기 35장에 야곱의 집안이 출애굽 할 때 두려움에 떨어졌습니다.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귀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큰 감격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을 향하여 열정적인 모습으로 열정적이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열정을 마귀도 줄 수 있습니다. 혹은 자신이 그것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설교만 듣고 눈물을 흘리십니까? 기도할 때만 눈물을 흘리십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텔레비전을 보고도 울고, 영화를 보고도 울고, 소설책을 읽으면서도 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이 인간의 정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들에 안개가 걷히는 일들이 먼저 일어나야하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설교를 통해서 여러분들은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들 중에 어떤 것들이 아니라고 말하는가를 먼저 귀를 기울여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아니고 또 이것은 아니고 이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고 하면서 예레미야에서 이야기하는 뽑히는 것이고 파괴되는 것입니다. 무너지는 것입니다. 파멸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됩니까?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고 맞는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이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고, 하면서 하나씩 하나씩 무너지고 그리고 거쳐나가는 것입니다. 무엇이 무너집니까? 어떻게 무너집니까? 어느 날 갑자기 ‘으악’ 하고 무너집니까? 여러분 그런 사람들이 대부분 왜 그렇게 우느냐? 왜 그렇게 무너졌느냐? 고 물으면 이유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것들은 참된 무너짐일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일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늘 하는 말이지만 깨닫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은 소망이 없습니다. 정말 소망이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끝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말씀을 통해서 설교를 주실 때에는 여러분들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해보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걷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아, 이게 아니구나!’ 그런데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설교를 들을 때 두 가지로 극단적인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는 무엇이냐 하면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들 중에서 저 사람이 아니라고 그러는 것에만 몰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아니라는 것에 대해서 내가 동의하지 못하니까 결국은 저 말씀과 나는 다르다는 결론밖에 내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반대의 사람들은 뭐냐 하면 맞는 것만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앞에서 이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이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면 ‘맞아. 그런 것은 나에게도 있어.’ 이런 사람들은 무지와 혼동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자, 이정도로 서론을 이야기하고 하나님을 참으로 만나고 그리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기질 말고 이러한 충만한 정서가 있다는 것이고 충만한 감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는 없었던 예수를 믿기 전에는 그렇지 않았었는데 예수 때문에 새롭게 생기는 감정의 세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예레미야는 ‘이를 인하여 내가 우니 내 눈에 눈물이 물같이 흐르니’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데 그냥 펑펑 쏟아지는 것은 펑펑 쏟아지는데 그것이 아니라 물이 쫙 흐르는 것입니다. 수도꼭지에서 물이 나오는 것처럼 눈물이 찔끔찔끔 나오는 것이 아니라 쫙 쏟아지는 것입니다. 한없이 흐르는 것입니다. 닦을 생각도 안하고 흐르는 눈물이 볼을 타고 목을 타고 가슴으로 흘러내리는 것입니다. 흘러내리고, 흘러내리고, 물같이 흘러내리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에서는 ‘내 눈의 눈물이 시냇물처럼 흐르나이다.’ 마르거나 끊어지지 않고 쭉 흘러내리는 것입니다. 얼마동안? 장시간동안 한없이 흘러내리는 것입니다. 눈물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보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사셨던 삶을 보면 언제나 감정적으로 풍부한 삶을 사셨습니다. 어떻게? 분노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전을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면서 채찍을 휘두르면서 진노하시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또 어떻게 하십니까? 사람들을 뜨겁게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예수님께서 자기의 때가 가까운 줄을 알고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까지 사랑하라고 가르쳐주셨습니까?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당신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마치 나쁜 짓만 하고 죽던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나는 이렇게밖에 살지 못했으니까 너희는 이렇게 살아야한다. 이렇게 유언하고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사셨습니다. 어떻습니까? 개인적으로도 정이 많으셨습니다. 그래서 어땠습니까?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그 오라버니가 죽었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아가셔서 우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실 것을 믿지 못하자 이번에는 예수 그리스도는 인정의 눈물이 아니라 슬픔과 분노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성경은 말하기를 ‘심한 통곡과 그리고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 예루살렘 성을 향하여 올라가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린아이처럼 엉엉 통곡하며 우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웃으셨다는 말씀은 없지만 그러나 감정적으로 풍부한 생애를 사셨습니다. 어떻게?
제 친구가 여름수련회에 가서 죽었습니다. 나는 수련회에 가서 물놀이하고 뱃놀이하는 것을 하기 싫어합니다. 내 친구가 애들을 데리고 수영을 갔는데 왜 그런 데를 갑니까? 물 없는 데로 가서 물로 샤워하면 되는데 무엇을 즐겁게 해준다고 배를 타고 애들을 건네서 수영을 시키다가 그 뒤로 애를 쫓아가다가 헤엄을 잘 치는데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잠수부를 동원해서 하루 만에 시체를 찾았습니다. 죽어서 친구들이 모여서 그때는 예수를 믿기 전이니까 이렇게 죽었는데 어떻게 하느냐 비석이나 하나 세워주자고 해서 그때 천 원씩 걷었습니다. 73년도인가 74년도인데 그때로는 나한테는 천원은 큰돈이었습니다. 엄청 큰돈이었는데 천 원씩 걷어서 비석을 만들었습니다. 친구들이 그래도 내가 글을 좀 쓸 줄 안다고 비석을 써보라고 그래서 비석에 글을 썼습니다. 그중에 셰익스피어의 희곡 가운데 ‘목마른 슬픔이 우리의 피를 마시는구나!’ 라는 구절이 하나 들어갔습니다. 양평에 가서 그것을 깎아서 돌을 닦는데 어떤 유식하게 생긴 아저씨 한분이 오더니 ‘이보게 젊은이! 예 왜 요즘 젊은이들은 이렇게 과격한가?’ 그러면서 그 비문을 가리키면서 목마른 슬픔이 피를 마신다고 하는데 왜 하필이면 피냐는 것이냐? 왜 이렇게 끔찍하고 왜 그렇게 뭔가 극단적인 것을 좋아하느냐면서 이것을 고칠 수 없느냐? 는 것입니다. 내가 속으로 ‘참 오지랖도 넓다. 비오는 날 우산까지 쓰고 여기까지 와서 그냥 지나가면되지 그것을 고치겠다고 그러는지!’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꼭 그 일을 하셨습니다. 말씀하시고 싶으시면 나는 너희를 위해 대신 희생하고 간다. 내가 너희를 위해서 구속의 제물이 되겠다고 하면 되시는데 어떻게 하십니까? 포도주를 따르시면서 뭐라고 그러십니까? 그 말씀을 하기 전에 빵을 찢으시며 ‘이것은 내 살이다.’ 진짜 살색입니다. 오늘 저녁에 가서 보시면 살색과 비슷합니다. ‘이것이 내 몸이니’ 하며 쭉 찢어질 때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찢어진 그 몸을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온 몸으로 느끼시면서 찢으시는 것입니다. 포도주를 따르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얘들아 이것은 내 몸의 피 이것을 먹어라.’ 예수 그리스도는 20대도 아니었습니다. 10대도 아니었습니다. 그분처럼 진리에 있어서 균형 잡히신 분이 있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이렇게 극단적이었습니다. 교훈 가운데서도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어떻게 하라고 하십니까?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해서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4중입니다.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해서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냥 ‘너희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해야 하느니라.’ 그러면 되는데 웬걸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해서 피를 흘리고 살이 찢기기까지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이야기하고 또 뭐라고 그러십니까?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으리라.’ 예수님이 하신 말씀 중에 죽는다는 이야기가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모릅니다. 말씀하실 때마다 한 번씩 죽으면 목숨이 10개라도 못 견뎌날 정도로 죽는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내가 밤새워도 다 못합니다. 또 예를 듭시다. 여기도 교사들이 있지만 뭐라고 그러셨습니까? ‘너희들이 선생이 되었으면 똑바로 가르쳐라’ 그러시면 되는데 ‘잘못 가르치면 하나님한테 혼난다.’ 그러면 되는데 뭐라고 그러십니까? ‘만약에 너희들이 잘못 가르쳐서 소자 중의 하나라도 실족시키면’ 어떻게 됩니까? ‘연자 맷돌을 메고 바다에 빠뜨린다.’ 여러분 그냥 읽지 말고 묵상을 해보십시오.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돌아다니는 네 살, 다섯 살 된 아이의 목에 연자 맷돌이니까 이런 맷돌이 아니라 소가 메고 돌아가는 맷돌입니다. 그 엄청난 맷돌을 다른데 말고 목에 걸어서 동작대교 위에 올라가서 빠뜨린다고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끔찍합니까? 예수님의 표현이 이런 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세례 요한이 미리 했습니다. 뭐라고 그럽니까? ‘독사의 자식들아!’ 이것은 우리말로 하면 ‘X새끼들아!’ 똑같은 것입니다. ‘이 나쁜 X새끼들아!’ 이것과 같은 것입니다. 가장 질박한 욕을 막 퍼부은 것입니다. 왜 그럽니까? 인격적으로 순화가 되지 않아서 그럽니까? 언어가 성화가 안 되어서 그럽니까? 예수님께서 너무 과격주의자여서 그랬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기질적으로 A형과 같은 기질이 있고 다혈질적인 기질이 있고 남미사람 비슷해서 그럽니까? 그것과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만 그런 것이 아니라 후에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다 비슷한 것입니다. 베드로 같은 경우는 뭐라고 그럽니까? 사람들이 왜 예수를 전파하느냐고 잡아다가 때리니까 뭐라고 그럽니까? 반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을 듣는 것이 옳으냐?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 옳으냐?’ 고 반문합니다. 그 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도 바울의 경우에는 더 심각했습니다. 베스도 앞에 가서 베스도가 심문을 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을 이렇게 보니까 사도 바울이 미쳤습니다. ‘사울아 네가 미쳤구나!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하는도다.’ 그러니까 이제는 정말 미친 사람들끼리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거기에 답변하는 것입니다. ‘각하, 내가 이렇게 묶인 것 이외에는 당신도 나와 같이 이렇게 미치기를 진심으로 원하나이다. 나는 여러분들이 미치지 않았음으로 눈물이 앞을 가려서 미치지 않은 여러분들을 바라볼 수 없나이다.’ 사도 바울이 뭐라고 그럽니까? 사람들이 자기를 미쳤다고 그럴 때 제일 좋아했습니다. 뭐라고 그럽니까? 미쳤어도 주를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주를 위한 것이니 왜 사느냐고 물으면 주를 위해 살고 왜 죽느냐고 물으면 주를 위해 죽는다고 말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고 할 때 사람들이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손에 묶으며 예언하기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이 띠의 임자가 이렇게 결박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리라.’ 그러니까 뭐라고 그럽니까?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함에는 나의 목숨을 조금도 아까운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또 뭐라고 그랬습니까?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 뭐라고 그럽니까? ‘내가 내 자신을 허비하게 너희를 위해 내어주노라.’ 예수 그리스도 그분과 진심으로 만나고 그분 주위에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감정의 체계를 거의 비슷하게 닮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실 때 큰 여인의 무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뭐라고 그랬습니까?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들의 큰 무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갔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참으로 만났던 죄인인 한 여자는 사랑의 고백에 있어서 극단적이었습니다. 어땠습니까? 주님을 사랑하니까 집에 가서 벽장을 열고 1300만원이나 되는 향유를 가져와서 식사하는 발 앞에 깨뜨려서 확 부어서 끝내었습니다. 전 재산이었을 것입니다. 가지고와서 다 부었습니다. 요즘 말로 말하면 예수를 믿고 은혜를 깊이 체험하고 나니까 집에 가서 통장 적금을 털어서 헌금 통에 넣고 딱 끝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돈만의 이야기가 다는 아니지만 그렇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만난 사람들이 다 이와 같았습니다. 밤새도록 이야기해도 다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하나님을 진심으로 체험한 사람들은 그러한 풍부한 정서의 세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신약에서 그랬지만 구약으로 넘어가면 하나님을 만난 시인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에는 기뻐 뛰며 소리치며 비파와 수금으로 노래하고 마지막 시편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호흡이 있는 인생들은 다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더 극단적인 이야기를 했습니다. 뭐라고 그랬습니까? 바로 사랑은 언제나 오래참고 언제나 온유하고 투기하지 아니하고 그 사랑장을 쓴 고린도전서에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모두 다 저주를 받으라고 그랬습니다. 그것이 고린도전서의 결론입니다. 주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다 저주를 받아 죽어버리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과격합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아마 사도 바울의 언어를 가지고 그래도 설교를 한다면 아마 교회에서 쫓아내려고 할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다 저주를 받으라고 그랬습니다. 시인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만났을 때는 만난것 때문에 그렇게 즐거워서 ‘호흡이 있는 자는 다 찬양하라.’ 무엇입니까? ‘호흡이 있는 자는 다 하나님을 찬양하라.’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는 사람들은 말하자면 이 세상에서 살 가치가 없다. 지구를 떠나라는 뜻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뵈옵지 못할 때는 또 뭐라고 그랬습니까? ‘나의 마음이 상하고 나의 심령이 곤고하며 나의 마음이 방아새 같고 냉과리 같이 탔나이다.’ 그러면서 자기의 속이 타들어가고 연기 나는 나무토막과 같이 이렇게 비참한 절망 속에서 또 고통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의 감정, 분노의 감정, 그리고 사랑과 분노와 목마름과 갈망과 그리고 심지어는 질투와 그리고 거룩함에 대한 열망 이런 것들이 뜨겁게 가슴속에서 타오르는 것입니다.
내면에 있어서 이러한 정서의 세계, 이러한 감정의 체계를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경우에 따라서는 가을에 가로수 길을 걸어가면서 공중에 사선을 그으면서 떨어지는 플라타너스 잎사귀를 보면서 눈물을 흘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통 받는 이웃을 보며 분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난 모든 사람들은 이러한 정서의 세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세계가 없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충분히 만나지 못한 증거입니다. 저는 이것을 특별한 성도의 삶에 대해서 수준 높은 소수 특권층의 삶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두 이러한 풍부한 감정 속에서 주님을 믿으며 생활하게끔 부름을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이 없는 것은 지성적인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없는 것이 아니라 신령한 은혜의 체험이 부족하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런 것이 있다고 신령한 은혜의 체험이 있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신령한 은혜의 체험이 없기 때문에 그런 감정의 세계가 자기 속에 없는 것입니다. 실로 구약의 역사와 신약의 역사를 모두 훑어볼 때 거기서 하나님을 믿으면서 섬겼던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렇게 격변하는 감정의 세계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경외하고 경배하는 그런 삶을 잇달아 계속해서 살아왔습니다. 그런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의 마음이 너무 돌멩이처럼 굳어져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언젠가 한번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깨뜨려지는 역사가 일어나야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 무뎌집니다. 무뎌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들은 깨어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오늘 예레미야는 뭐라고 말했느냐하면 ‘이를 인하여 내가 우니 내 눈의 눈물이 물같이 흐르며’ 그러나 예레미야는 이렇게 눈에서 물같이 흐르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마귀가 주는 감정의 체험과 성령이 주는 감정의 체험의 차이는 마귀가 주는 감정의 체험은 다분히 충동적이고 이유 불명일 경우가 많습니다. 성령이 주는 은혜의 체험은 감정적이지만 그러나 성령이 주는 은혜의 체험은 충동적이고 즉각적이기 보다는 보다 분명한 이유의 인식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이 예레미야가 지금 왜 울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 이런 이야기를 잘 합니다. ‘왜 울어?’ ‘그냥! 자꾸 눈물이 나와!’ 그러나 예레미야는 뭐라고 그럽니까? ‘그를 인하여 우니 눈물이 물같이 흐르나이다.’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부흥이 일어나서 많은 사람들이 통회하며 울며 자복하는 은혜의 역사가 일어날 때에도 성령이 역사하는 은혜로운 감정의 체험은 그들로 하여금 우는 이유가 명확하고 아주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그 슬픔이 지속됩니다. 그래서 어느 분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배를 드리고 울면서 목사님을 뵙고 싶었는데 목사님을 뵙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내일 와서 이야기합시다.’ 그랬더니 ‘내일이면 이 감정이 없어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목사님 하는 말씀이 내일 없어질 감정이라면 지금도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각성과 부흥이 일어나던 때를 보면 어느 한순간에 죄의식이 팍 들어왔다가 휙 눈물을 흘리게 하고 스쳐 지나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상당한 기간 동안 그 죄의식이 깊이 뿌리박혀서 나는 죄인이고 정죄되었으며 나는 깊이 이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통회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그런 인식을 상당히 오래 가지면서 떠나가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하나님의 성령께서 주시는 감정의 변화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레미야는 울고 눈물을 흘렸지만 그에게는 분명히 울 수밖에 없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눈물을 닦아도 그 인식은 닦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울었던 이유 그리고 울어야하는 이유는 눈에서 눈물이 시냇물처럼 계속 흐르는 이유 그것이 분명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감정의 세계도 바로 그러했던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이를 인하여’ 무엇 때문에? 주님이 사랑하시던 예루살렘이 완전히 파괴되고 황폐하게 된 그 현실을 보았던 것입니다.
에스라 10장에 보면 ‘이에 에스라가 하나님의 전 앞에서 엎드려 울매 많은 백성들이 나와 심히 통곡하니’ 라는 말이 나옵니다. 에스라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 전 문지방에 엎드려서 하나님 앞에 한없이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장시간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울기 전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어떠한 죄가 우리 가운데 들어와서 하나님의 백성을 타락시키고 그래서 레위인과 제사장과 백성의 두목들과 그리고 방백들과 두령들이 이방의 여자들과 결혼해서 그래서 거기에서 피 섞인 자녀들을 낳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신성한 율법을 짓밟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신령한 결혼의 제도를 모두 파괴했다는 분명한 자기 백성들에 대한 죄의 인식이 머릿속에 들어온 것입니다. 눈물을 닦아도 살아있는 것입니다. 닦아도 남아있는 것입니다. 즐거운 일이 생겨도 지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즐거운 일이 생깁니까? 자기가 회개하는데 아무 관심도 없던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은 점점 더 늘어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비가 장대같이 쏟아지는데도 와서 고개를 숙이며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통회 자복하는 민족적인 대 부흥과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래도 어떻습니까? 눈에서 눈물이 시냇물처럼 흐르게 하였던 에스라로 하여금 그렇게 하나님의 전에서 통곡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던 그 이유에 대한 인식은 지워지지 않고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괴로운 것이었습니다. 잊히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다운 신령한 은혜의 체험입니다. 우리들에게 가져다준 감정의 체험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눈물과 슬픔에 있어서만 그런 공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기쁨에 있어서도 동일한 공식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신령한 은혜의 체험으로 말미암는 기쁨은 견고합니다. 신령한 은혜의 체험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는 굳셉니다. 신령한 은혜의 체험, 참된 신령한 은혜의 체험으로 말미암는 사랑은 뜨겁습니다. 왜 그러면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는 것입니다. 기쁨에도 거짓된 기쁨이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났는데 왠지 정신이 쇠락하고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기쁩니다. 그런 것도 기쁨일 수 있습니다. 또 어떻습니까? 열정적으로 사람들이 모여서 막 뜨겁게 박수를 치면서 악기에 맞추어서 찬양을 부르면 감정적으로 고양되고 그래서 마음의 어떤 뜨거움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쁨이 솟아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아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의뢰하고 싶습니다.’ 이런 고백들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참으로 하나님이 오셔서 그 손을 내미셔서 우리의 영혼을 만져주심으로 생겨난 기쁨과 사랑과 그리고 그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는 같이 반짝일 수는 있지만 반짝이는 모든 것이 금이 아닌 것처럼 차이가 난다는 것입니다. 기쁨이 막 넘치는 것 같다가 갑자기 곤두박질치는 것입니다. 참된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로 말미암는 기쁨의 감정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분명히 이 예레미야에게는 아주 뚜렷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무슨 이유입니까? ‘이를 인하여 내가 우니’ 그러니까 울어야하는 것에 대한 지워지지 않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도 우리에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소망에 가득한 삶을 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산 소망이라고 그랬는데 헬라어에서는 극서이 분사입니다. 살아서 막 움직이는 생명이 있게끔 움직이는 그러한 소망, 그런 소망 가운데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뭐라고 그랬습니까? 사람들이 혹시 너희에게 너희가 왜 소망 가운데 살 수 있느냐고 이유를 물으면 너희는 즉각 거기에 대답할 수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왜 내가 시련가운데 기뻐하고 환난가운데 즐거워하며 역경가운데 하나님을 찬송하는지 분명한 이유를 말할 수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무엇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까? 인식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신령한 은혜의 체험은 이렇게 분명한 인식 그 인식에서 이런 감정이 나와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뜨거워지기를 원하는 것은 올바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은혜의 체험을 하기를 원하는 것은 올바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고도의 신앙적인 호기심에 불과합니다. 그런 울 수밖에 없는 이유, 웃을 수밖에 없는 이유, 분명한 인식이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경우에는 먼저 울 수 있는 가슴을 먼저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현실을 하나님의 시각에서 볼 수 있는 인식을 먼저 부여받은 것입니다. 오늘부터 이야기하고 다음 주부터 설교와 연결이 되니까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 감정이 너무나 극단적이고 어떤 때는 너무나 도에 지나쳐서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사람들이 볼 때 정상적이 아니고 올바르지 않다는 인상을 받게 되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아까 설명한 것이 그런 것입니다. 보십시오. 아까 제가 예를 들었던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고 또 사도와 많은 선지자들과 시인들의 그런 감정의 세계들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그 감정의 세계를 수용해주었습니까? 수용해준 것이 아니라 그런 감정의 세계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인 교회에서도 배척당했습니다. 그 하나의 예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예루살렘 성을 보고 우실 때 누가 그것을 이해했습니까? 또 이해하지 못했다면 그중에 누가 그것을 이해하고 싶어 했습니까?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시인들이 뭐라고 그럽니까? ‘제가 이렇게 하나님을 향해 울고 눈물을 흘리고 하나님을 인하여 이렇게 목말라 하는 것들이 원수들에게는 웃음거리가 되었나이다.’ ‘내가 주를 사랑하므로 나그네가 되었나이다.’ ‘부모도 나를 버리고 형제도 나를 미워합니다.’ ‘나를 사랑하고 이해했던 자가 이렇게 내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향해 목마르고 그분을 향해 사랑을 고백하는 것을 보고 나를 미쳤다고 비웃습니다.’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나더러 하하거리며 웃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뜨거운 열정으로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타는 듯한 목마름으로 그 쏟아지는 피, 지친 그 몸을 이끌고 하나님 앞에 피를 토하듯이 기도할 때 사람들은 뭐라고 그랬습니까? ‘아 저놈이 엘리야를 부르는구나! 어디 엘리야가 와서 구원하나 보자.’ 사람들은 그렇게 비웃었습니다. 제가 묻습니다. 여러분! 예수 때문에 세상이 알 수 없는 그러한 은혜로운 세계, 감정의 세계를 가지고 있습니까? 세상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러한 이 세상이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뜨거운 사랑과 타오르는 정열과 하나님을 향하여 끊어 오르는 열망과 이 세상에 있을 때에는 도무지 경험할 수 없었던 빛깔 짙은 진노와 그리고 세상을 향한 분노와 그런 것들을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만나 사람의 깊은 표입니다. 주님을 만난 사람은 모두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모두 이런 은혜의 세계와 그 다음에 격렬한 감정의 세계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두 그랬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성경을 찾으면서 그렇지 않은 사람을 발견할 수 있다면 나는 여러분들을 시상하겠습니다. 그러나 상 받을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예를 더 들고 싶은데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아브라함을 예를 들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뭐라고 그랬습니까? ‘사랑하는 네 독자 이삭을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잡아서 번제로 드리라.’고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끔찍한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 명령을 ‘아멘’ 하면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고 120년 동안 비가 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120년 동안 의를 외치며 임박한 홍수의 재난을 알리며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의심하지 않고 그렇게 뜨거운 삶을 살았습니다. 주님을 체험하고 하나님을 만나고 그리고 그 하나님을 진정으로 체험한 모든 사람 모든 하나님의 자녀는 특별한 소수의 사람들이 아니라 이것이 정상적인 하나님의 자녀의 영적인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그 하나님의 사랑에 우리의 마음이 녹아지고 출근길에 버스에 오를 때나 혹은 출근하여 아무도 없는 직장에 고요히 책상에 앉아서 머리를 숙이고 일과를 위한 기도를 시작할 때 뜨거운 눈물이 이유도 없이 아니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내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살아가는 아름답고 헌신적인 모습을 볼 때 눈물과 뜨거운 감격 없이 바라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국땅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고 그리스도 예수의 깃발이 날린다는 소문을 들을 때 우리는 벅차오르는 기쁨으로 하나님을 향해 할렐루야 찬양을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이 비참한 세상을 바라볼 때 우리는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선지자에 대해서 강의하면서 그랬습니다. 여러분들이 참 하나님께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인지 시험해볼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강남의 환락가들이 가득 차 있는 이 화려한 거리를 걸어가 보는 것입니다. 밤 11시쯤 되어서 찬란한 불빛이 쏟아져 나오고 왁자지껄하는 소리 여기저기 술 먹고 패싸움하는 사람들과 쏟아지는 음악소리를 들으면서 호세아의 심정이 되어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 백성들이 이 삶이 좋다고 이 삶을 택하며 살아가나 오 하나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렸사옵나이다.’ 뜨거운 눈물이 뺨에 흘러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다음에 내가 권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눈물이 흐른다고 다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흐르는 눈물을 닦고 이번에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노래방에 들어가서 한번 평소에 제일 좋아하는 노래 18번을 틀어놓고 술까지는 마실 수 없지만 한번 신나게 목청껏 불러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거리로 나와서 그 거리가 아까와는 달리 즐겁고 생기가 있어 보이면 아까 흘린 눈물은 거짓말입니다. 무엇으로도 위로받을 수 없었습니다. 무엇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었고 무엇으로도 흐르는 그 눈물을 닦아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예레미야가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뭐라고 말합니까? ‘나를 위로하여 내 영혼을 소생시킬 자가 멀리 떠났습니다.’ 누구입니까? 오늘 왜 이럽니까? 누구입니까? 내 영혼을 소생시키고 내 눈물을 닦을 자가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떠나가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어떤 것입니까? 이 시인의 눈에는 하나님밖에는 안 들어오는데 그가 떠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합니까? 이 눈물을 막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누가 이 눈물을 닦아주느냐는 것입니다. 때로는 어떻습니까? 과격합니다. 오늘 여러분! 골수에 불이 떨어졌다는 말을 여러분들이 이해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의문입니다. 골수에 불이 떨어져서 그 불이 나를 이겼다는 것이 이해가 갑니까? 불 받으십시오! 아멘 하십시오! 성령체험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이 불을 먼저 받아야하는 것입니다. 어떤 불입니까? 나라가 망한 현실을 바라보면서 뭐라고 그럽니까? 너희 중에 나와 같은 근심을 가지고 근심하는 자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웃을 수 없는 이유 때문에 즐거워하고 울어야할 필요가 없는 일 때문에 울고 통곡할 까닭이 없는 일 때문에 목 놓아 우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게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세상의 사람과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습니까? 세상이 알 수 없는 기쁨, 세상이 알 수 없는 평화, 또 동시에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슬픔, 세상이 깨달아 알 수 없는 고통을 가슴에 안고 가시나무새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이 선지자가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아니 그러면 ‘에이 그것은 예레미야가 워낙 불행한 시대에 태어나서 그런 것 아닙니까?’ 태평한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어떠했습니까? 호세아가 가장 태평한 시대에 태어났던 선지자중의 한사람입니다. 그런데 호세아를 넘겨보십시오. 한 장을 넘길 때마다 호세아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세계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생활입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그 하나님과 함께 그가 내안에 내가 그 안에 그와 함께 동행하며 그와 함께 살아가는 신앙생활의 방식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이 세상의 사람들이 한없이 사랑하고 그것을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버리고 그것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며 추구하려는 것들을 우리는 어떻습니까? 헌신짝처럼 ‘야 이것을 갖기 원하느냐? 가져라!’ 던져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여유를 가지고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은 미쳤다는 소리를 듣지 않으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나는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은 세상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불가능한 것입니다. 왜 그럽니까? 어떻게 자연적인 거듭나지 못하고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와 십자가의 구속의 죽으심과 하나님의 광대한 은혜와 그 성품과 그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깊고 오묘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비밀을 이해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사람들로부터 미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여러분들은 회개해야할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해할 수 없어야합니다. 어느 정도까지입니까? 세상이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 주일날 하나님 앞에 나와서 아니 교회에 와서 헌금이나 몇 푼 집어넣고 예배를 드리고 아니 예배가 드려졌다고 생각하면서 떠나가는 그런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세계를 가져야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함으로 그것이 가능합니까? 하나님을 만나고 그리고 그 참된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찬양을 인도하는 사람들을 보면 한눈에 느껴집니다. ‘저 사람은 정말 찬양을 인도하기에 합당할 정도로 하나님을 만났구나!’ 그런데 어떤 사람은 말은 많습니다.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임하셨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는데 가슴에 와 닿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내가 있던 교회에서 그것이 문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어떤 형제가 나와서 찬양을 인도하는데 찬양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고 그 찬양 때문에 해외출장도 다니고 그러는 사람인데 막 찬양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뭐라고 어쩌고저쩌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식으로 어떤 형제자매들이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형제가 그렇게 말해도 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셨고 어쩌고저쩌고’ 좋은 이야기는 다 주워섬기는데 정식으로 따지는데 당신이 찬양을 인도할 때마다 내 영혼이 눌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정말 그렇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을 만났느냐고 따지는 것입니다. 너무 당돌하게 다그쳐서 내가 섬뜩했지만 평소에 나도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시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하겠다고 하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상처를 받는다니 어떻게 하겠습니다. 오기만하면 기타를 치고 진짜 뜨거운 것 같습니다. 마이크 플레이도 잘하고 말은 청산유수입니다. 그런데 그 자매는 대단했습니다. ‘나는 형제가 찬양을 인도할 때마다 내 영혼이 눌린다.’ 고 그럽니다. 그렇게 정곡을 찌르면서 형제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에 대해서 나는 의심이 간다고 하면서 그럴 정도로 당신이 하나님을 만났느냐고 합니다. 나도 물론 못 만났지만 당신이 그렇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감격이 있으리만치 하나님을 만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니까 찬양인도를 하지 못했습니다. 근심이 쌓인 표정으로 '그래도 코드는 많이 아는데' 그것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참된 인격과 만나고 그 신령한 체험으로 말미암아서 신적인 감화로 말미암아 감정의 세계를 가진 사람들은 성경을 읽어도 표가 납니다.
나는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 초창기에 은혜를 받았을 때 동두천에 있는 어느 기도원으로 기도를 하러갔습니다. 그 기도원은 어떻게 그랬는지 새벽기도는 목사님들만 모여서 새벽기도를 드렸습니다. 거기를 꾸역꾸역 갔습니다. 그때는 영하 20도가 내려가는데도 그냥 밖에 나가서 기도한다고 나무뿌리를 잡고 그러던 시절에 기도원에 갔습니다. 나는 그때 나의 신앙의 세계로써는 아주 충격적이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시겠습니다. 그러는데 목사님이 일어나시더니 시편을 외우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 있었으니까 시편을 읽었는지 외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나는 왠지 외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시편을 쭉 읽는데 몇 편까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시편을 읽다가 계속 울먹울먹하면서 급기야는 울음을 터트리시다가 다시 멈췄다가 그러다가는 읽고, 읽고 마지막에는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그러면서 마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의 심정을 가장 잘 대변해줄 수 있는 그 시편 두 편을 읽고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그 사람에게 있어서 그 기도는 시인의 노래가 아니라 그 목사님의 기도였습니다. 그때에 나로서는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로운 체험을 한 사람들은 성경을 읽어도 틀립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나는 성우들이 낭독한 성경같이 싫은 것이 없습니다. 나도 몇 개를 들어보았는데 반지르르하기는 한데 감동이 별로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러분들이 성경을 읽으면 감동이 될 것입니다. 왜 그럽니까? 하나님의 인격을 체험하고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그 신령한 은혜체험이 주는 정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성경을 흐르면서 성경 속에 내재하고 있는 그 정서를 느끼는 강점이 있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아십니까? 예레미야 애가를 예레미야가 쓸 때 1장을 써내려갈 때 그때 느꼈던 정서가 있었을 것 아닙니까! 그것을 같이 느낄 때 예레미야 1장이 풀리는 것입니다. 주석을 보고 원서를 보고 헬라어를 본다고 해서 풀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 정서를 같이 느껴야 풀리는 것입니다. 유서를 누가 쓰고 죽었는데 그것을 디스코를 추는 억양으로 읽는다면 얼마나 우스운 꼴이 되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오락회 하는 것, 개그맨들이 편지를 읽는 것 같이 읽었다면 얼마나 웃기는 일이 일어나겠느냐는 것입니다. 또 그 다음에 장난으로 주고받은 콩트 편지를 유서처럼 읽는다면 얼마나 우스운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들은 성경 속에 하나님을 만나고 신령한 체험을 하고 그 신령한 체험으로 말미암아 은혜로운 감정과 정서의 세계를 소유하고 있었던 사람들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를 체험해서 그 속에서 그 하나님의 사심을 기록했던 사람들이 소유하고 있었던 하나님과의 생생한 교제와 그리고 하나님과의 참된 만남에서 비롯되는 그 풍부한 정서의 세계를 가져야지만 말씀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릴 때에는 울고 웃고 결심하고 그리고 결단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집회를 나가면 제일 힘든 것이 그것입니다. 이틀 동안은 허비하기 쉽습니다. 왜 그럽니까? 주먹에 힘이 잔뜩 들어가서 저 사람이 누굴까? 이 탐색전을 이틀이나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3일 내지 4일이 되어야지만 긴장이 다 풀리고 말씀이 흘러들어가기 시작합니다. 심한 경우에 그렇습니다. 내가 가면 늘 하는 말이 긴장하지 마라. 나도 사람이다. 나쁜 사람이 아니고 좋은 이야기만 하러왔으니까 긴장을 풀고 손 꽉 쥐지 말고 푸근하게 앉아서 어린아이와 같이 울고 웃을 수 있게 되어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 예레미야는 그런데 분명한 인식이 있었고 눈물이 있었는데 심했습니다. 이슬이 맺힌 것이 아니라 쏟아졌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됩니까? 불이 내 골수에 인해서 나를 이겼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 불은 이기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불이 나를 이겼다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하나님의 신령한 체험이 우리에게 인해서 우리에게 은혜로운 감정들을 불러일으켜서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지거나 격렬해지거나 타오를 때 그때 우리 속에는 그런 것들을 싫어하거나 방해하려는 요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워낙 강하고 워낙 크니까 그런 모든 방어기재들이 소용없는 것 입니다. 소방서에서 일하는 사람 이야기를 들으니까 불이나면 안타는 것이 없답니다. 다 탄답니다. ‘아니 무슨 소리입니까? 쇠나 유리도 탑니까?’ 그것도 탄답니다. 빌딩에서 화재가 나서 불꽃이 타오르면 1800도까지 올라간답니다. 쇠가 1250도에서 녹습니다. 이게 흐물흐물타면서 불꽃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신령한 체험이 그 신령한 은혜가 예레미야의 골수에 불을 던지니까 그것이 워낙 엄청나니까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타오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위에서 가끔 보면 하나님께서 중보기도의 영을 보내셔서 그 뜨거운 열정으로 중보기도를 하는 사람들을 가끔 보게 되는 일이 있는데 그중 한사람이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그것은 내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내 육체를 빌려서 기도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기도가 끝나면 하나님은 다시 빠져나가시고 나는 탈진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 너무 감정의 체험이 과격하고 그리고 또 다음 주에 말씀드리겠습니다만 하나님이 은혜와 성령의 역사를 부으셔도 담기는 것은 인격과 기질의 그릇에 담기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베드로에게 역사했던 성령도 똑같았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사역하는 모습도 요한과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습니까? 요한에게 임한 성령과 바울에게 임한 성령이 똑같았는데 그런데 바울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과 요한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다르다고 말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 정도로 사역에 있어서 등급의 차이가 났다는 것이 아니라 방식과 그 다음에 그 사역을 해나가는 성격에 있어서 커다란 차이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뜨거운 은혜는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도 인격이라는 그릇에 담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충만한 은혜를 부어주실 때 어떤 때는 그 은혜가 정말 이 예레미야처럼 그렇게 내가 그 불을 이기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과격해지는 경우입니다. 또 어떤 때는 하나님의 성령이 임할 때 자기 인격적인 기질이 그렇게 그 부어주신 은혜와 함께 상승작용을 일으켜서 과다하게 감정노출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통제가 안 되고 흘러넘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우리는 이점에서 아주 지혜롭게 성경을 깊이 묵상하고 성경의 깊은 지식을 토대로 이 문제들을 다루어가지 않으면 자칫하면 우리가 좋은 것들을 쓰레기더미에 버릴 수 있고 쓰레기더미를 좋은 것으로 분류해서 마치 흙 묻은 옥을 흙더미에 버릴 수 있고 또 가짜로 반짝이는 돌멩이를 옥인 것처럼 생각해서 부여안고 있는데 사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어떤 분이 건축헌금을 봉투에 넣어서 했는데 다이아몬드 반지가 들어왔습니다. ‘와!’ 가지고 가서 보니까 가짜였습니다. 신경통반지였습니다. 그런 일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도둑이 가지고 갈까봐 금고에 보관했습니다. 가봤더니 1,500원짜리 신경통 반지였습니다.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냉정하면서 뱀같이 지혜로워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하고 다음 설교하고 이어집니다. 지혜로워야 한다는 이유는우리가 단순하고 섣부른 판단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 하나를 오늘 이야기하고 다음시간에 연속해서 하겠습니다. 옛날에는 시골에 신작로가 있습니다. 아스팔트가 없이 막 울퉁불퉁한 길을 버스가 덜덜거리며 지나가면 먼지가 새하얗게 날립니다. 지금은 차가 엄청나게 좋습니다. 옛날에는 바퀴가 빠져나가서 굴러서 죽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한번만 볼트를 조여 놓으면 메커니즘 자체가 차가 굴러가면 그 볼트가 밖으로 못나가고 자동으로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털털거리고 달리고 운전수가 매일 바뀌니까 볼트가 차츰차츰 풀어지다가 확인을 하지 않으면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70㎞에서 80㎞를 달리다가 그 속도로 달리는 엄청난 버스가 오른쪽 바퀴 하나가 빠져나가니까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람이 걸어가다가 발이 삐끗해도 여기저기 깨지는데 차가 이렇게 가다가 이쪽이 주저앉아서 뒤집히면 과장하면 이렇게 곤두박질을 치는 것입니다. 가끔가다가 말도 되지 않는 사고가 고속도로에서 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펑크에 의한 사고가 많습니다. 뻥 터지면 차가 주저앉으면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확 뒤집히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이 늘 일어나던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차가 지나가는데 그중에 가슴을 풀어헤치고 시골 아줌마니까 질퍽합니다. 교양도 없이 애를 끌어안고 잠도 입을 벌리고 자고 주위의 사람들에게 그렇게 장시간동안 버스를 타고 오면서 신선한 인상을 주지 못했던 그런 교양도 없는 그런 아줌마가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수다도 한참 떨고 그러더니 갑자기 표정이 우울해지더니 뭐라고 기도하기 시작하더니 그냥 젖가슴도 가리지 않고 벌떡 일어나더니 ‘스톱’ 그러면서 차를 세우는 것입니다. 내려달라는 것입니다. 정류장도 아닌데 왜 그러느냐고 그러니까 버스표를 어디까지 끊었느냐고 하니까 강릉까지 끊었다는 것입니다. 강릉까지 끊었는데 왜 여기서 내리느냐고 하니까 나는 여기서 내려야한다고 그럽니다. 왜 내리느냐고 하니까 하나님이 지금 나를 내리라고 그런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뱃살을 잡고 웃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미쳤군! 미쳤어! 또 광신자 하나 나왔군!’ 그러면서 그냥 가자고 다음에 오는 차도 없다고 그러면서 그냥 가니까 자지러지게 소리를 지르면서 나 좀 제발 내려달라고 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려 주었습니다. 사람들이 내리고 나서 가면서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미쳤어! 예수도 저렇게 믿으면 큰일 나!’ 이것은 실화인데 버스가 산모퉁이를 돌고 그 차가 오른쪽 바퀴가 풀리면서 벼랑 아래로 굴렀습니다. 거의 다 죽었습니다. 이런 것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합니까? 다음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