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같은 은혜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23:5).
녹취자: 이경순
이어서 시인은 5절에서 왜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의 목자가 되실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네 번째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2절에서는 공급해주시는 은혜 때문에 3절에서는 영혼을 소생 시키시는 은혜 때문에 4절에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지켜주시는 은혜 때문에 그리고 5절에서는 더 넘치는 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 23편 5절은 23편 전체의 절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밤하늘에 불꽃을 쏘면 어두운 밤하늘에 가느다란 빛줄기를 그리며 불꽃이 하늘 높이 치솟아 오릅니다. 그리고는 맨 정점에 올라서 확 터지면서 찬란한 불꽃을 사방에 뿜으며 그 불꽃이 사위기 시작하는데 그렇게 확 장열 하듯이 터지는 불꽃의 마지막 지점이 바로 이 5절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4절까지만 해도 하나님이 시인의 인생에 목자가 되어주시기에 충분했는데 시인은 그 보다도 더 넘치는 은혜를 하나님이 자신에게 부어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주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하고 하나님 앞에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나오는 이 상, 잔, 기름, 이 모든 것들을 종합하면 이것은 잔치집의 문맥입니다. 신랑과 신부가 결혼하고 잔과 잔이 부딪히고 그리고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그 담에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서 나오는 그 축제의 광경을 여기에서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인이 이러한 모든 것들을 통해서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 라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이 잔은 잔칫집에서 질 좋은 포도주를 잔뜩 부어서 부딪히면서 넘치는 축배의 잔인 동시에 이것은 하나의 비유로서 인간의 마음 안에 있는 하나의 빈 잔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 안에는 이러한 빈 잔이 있어서 하나님 아니면 무엇으로도 채워질 수 없는 그러한 빈 잔이 사람의 마음속에 있어서 그것으로서 인간이 행복해 진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 사람이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든지 행복해 지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행복해 지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점에서는 신자이든지 불신자이든지 모두 마찬가지 인 것입니다. 문제는 행복해 지는 그 방법이 올바르냐. 올바르지 않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해 보려고 하는 그것이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 안에서 행복하려고 하는 것은 사람들을 진정으로 행복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항상 이 행복의 문제를 다루면서 정말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참된 행복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깊이 염두에 두면서 이 행복의 문제에 접근해야지만 우리들이 올바로 인생의 길을 걸어갈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화) 오래전 일입니다. 신문에 난 기사를 읽었는데 의사가 쓴 기록입니다. 서울 수유동쯤에서 병원을 하고 있는 사람인데 병원에서 이 사람이 당직의사를 서고 있는데 새벽에 택시가 병원으로 들어오더니 건장한 남자들이 어떤 양복 입은 남자를 업고 병원으로 들어오면서 방금 기절했는데 살려주십시오. 그러는데 진찰해보니까 심장쇼크 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을 고쳐볼 필요도 없이 이미 벌써 죽었어요. 그래서 이사람 이미 죽었습니다. 하니까 그때부터 가족에게 연락을 하고 그래서 이제 잠시 후에 1시간쯤 지나니까 가족들이 울면 불며 그 새벽에 달려 온 겁니다. 그런데 의사가 가족들이 와서 울고 하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의사 생활을 20년쯤 했는데 저렇게 기묘한 폼으로 죽은 사람은 처음인겁니다. 대게 태어날 때 아이들이 주먹을 쥐고 태어나는데 대개 죽을 때는 손을 펴고 죽는데 이 사람은 한손은 펴고 한손은 꽉 쥐고 죽었어요. 의학적으로 저렇게 사람이 죽기가 쉽지 않은데 그리고 잠깐 비어있는 사이에 저 손에 무엇이 있을까 하고 궁금해서 손을 가서 펴봤어요 그랬더니 거기에서 화투 두 장이 떨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바닥에 딱 떨어져서 보니까 의사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 삼팔광땡이네’ 실화입니다. 밤새도록 상갓집에 가서 화투를 치다가 돈을 잃었는데 막판에 끗발이 붙었는데 삼팔광땡이 들어온 겁니다. 저는 사실 옛날에 민화투한 기억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삼팔광땡이 그게 뭐냐 했더니 왕년에 한 가닥씩 한사람 얘기를 종합해보면 두 장씩 화투를 가지고 돈을 놓고 패를 뜨는데 열 명이면 만원씩을 올려놓고 두 장씩 나눠 갖고 누가 높은 끝수를 갖고 있냐 해서 일등 나온 사람이 그것을 가져가는 겁니다. 대개 세 번 정도까지 베팅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한 번씩 내고 그담에 나는 계속하겠다. 하고 한번 내고 자신이 없는 사람은 그만두고 한번 더하겠다. 하고 세 번까지 베팅을 하고 그담에 두 장째 펴서 누가 맨 위에 있느냐 이걸 가져가는데 이렇게 삼팔광땡이 나오면 규칙을 정하기 나름인데 댄 것만큼 돈을 더 내야 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계속 지다가 막판에 돈이 잔뜩 싸여있는데 화투를 펴보니까 삼팔광땡이 나오니까 너무 좋아서 충격을 받은 겁니다. 그래서 삼삼삼 하다가 탁 쓰러져서 펴보지도 못하고 죽은 거예요. 그러니 태어 날 때는 어디서 태어났냐고 사람들이 묻지 않는데 죽을 때는 어떻게 죽었냐고 꼭 묻는단 말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뭐라고 대답을 하겠습니까. 화투치다가 삼팔광땡에 충격을 받고 죽었다고 해야 합니까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웃지만 우리의 인생이 그런 거 아닙니까. 그 사람은 쪼그만 동양화 두 개를 보다가 죽었지만 여러분은 좀 더 큰 땅문서 집문서 그담에 학위 좀 더 큰 딱지를 가지고 목숨을 걸고 인생을 사는 것 아닙니까. 그런 것들로는 우리의 영혼의 빈 잔이 채워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하나님을 알고 싶은 욕망을 주셨고 하나님에 대한 희미한 인식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부터만 얻을 수 있는 이 기쁨과 충만한 은혜를 얻어 보려고 애를 쓰지만 그러나 어디에서도 그것은 채워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인간의 모든 비극이 오는 겁니다.
체스터턴이라고 하는 사상가는 ‘한 남자가 사창가의 문을 두드릴 때 그의 마음은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으로 전혀 채워질 수 없는 갈망을 가진 인간이 그 하나님 안에는 채워질 수 없는 마음의 갈망을 이 세상의 헛된 것들을 찾고 매달리는데 사용한다 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깊은 변화를 받고 하나님을 만날 때가 되면 자기의 영혼이 이렇게 비어 있다고 하는 것을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갈망하도록 주님을 갈망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가난한 마음이고 목마른 마음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심령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주님을 깊이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준비된 사람들의 마음에 찾아오십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시간에 혹은 기도시간에 마음을 하나님께 싣지 않는 것은 신성모독의 행동입니다.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 속에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고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말씀을 읽고 성경을 배우고 복음을 전하고 또 영혼들을 섬기고 하는 이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그 무엇보다도 좋으신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의 심령 속에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예화) 제가 전도사 때 다니던 교회가 있었는데 그 옆에 아주 큰 집이 하나가 있었습니다. 이름만 대면 다 아는 한국의 모 재벌 회장의 집입니다. 집이 얼마나 큰 지 농구코트까지 집 마당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항상 검은 옷을 입고 선글라스를 낀 경호원들이 집주위에 배치되어 있고 그런데 참 베일에 싸인 집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신문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게 돈 많고 대 그룹의 회장이 자살을 하려고 칼을 가지고 옷을 벗고 자기 몸을 막 난자하다가 자살을 못하고 미수에 그쳐서 발견이 되어 병원에 실려 간 겁니다.
우리들이 우리의 인생의 행복이 돈이나 혹은 명예나 이세상의 좋은 영화들을 통해서 행복을 얻는 것같이 생각되지만 그것은 행복의 한 그림자이지 완전한 행복이 아닙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이 주신 이 빈 잔은 하나님 자신이 아니면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영혼의 빈 잔입니다. 오늘날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왜 이렇게 미친 듯이 사회가 쾌락, 방종, 그리고 폭력과 어린아이들 속에 일어나는 이 끔직한 폭력 그리고 왕따 이러한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이 속에 있는 이 영혼의 빈 것들이 무엇인가 채워져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점점 그런 것들이 채워질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독실한 신앙이 없어도 예전에는 가정에서 무엇인가 채워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학교에 가면 채워지는 것들이 있었고 그리고 교회에 와도 채워지는 것들이 있었고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채워지는 것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것들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렇게 거칠고 폭력적인 사람들이 되어 가는 겁니다. 이 시인도 한때는 자신의 영혼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것 같고 죽음의 상태에 이르는 것 같은 때가 있었고 그때에는 그의 영혼의 빈 잔이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하나님이 그의 잔을 가득 채우실 때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믿음생활 하면서 우리들이 현대인의 생활 속에서 잃어버린 단어들이 있습니다. 기쁨, 희열, 환희, 감격, 이런 단어들이 거의 잊혀진 단어들 아닙니까? 이것들을 우리의 신앙 속에서 올바른 방식으로 회복하는 것 그것이 기독교인의 생활에 있어서 선교 적으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복음을 자신 있게 전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 복음 때문에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 복음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참다운 사랑과 은혜를 알게 하는 주님을 깊이 만나고 그 은혜에 사로잡혀 사는 기쁨의 삶이 최상의 전도입니다. 그런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선교 적으로 너무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일상생활 속에서 아무런 감사도 없고 우울하고 그저 죽지 못해서 이 세상을 사는 것 같은 우거지상을 하고 사는 사람은 선교 적으로 도움이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나라와 이 땅에 있는 교회와 병든 자신의 영혼과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하여 기도 할 때는 눈물을 흘리지만 눈물을 씻고 나올 때는 감사할 일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과 은혜가 너무 크니까 그렇게 사는 겁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시인을 하나님이 어떻게 해 주셨기에 이 시인이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 라고 고백을 했을까요? 오늘 성경은 이것을 두 가지로 말합니다. 주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풀어 주셨기 때문에 두 번째는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기 때문에 그래서 내 잔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하나씩 다루어 봅시다. 그러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그랬는데 히브리 성경에는 ‘초르라이’라고 나오는데 이것은 복수입니다. 나를 괴롭게 하는 자들의 면전에서 나에게 주님이 하나의 상을 베푸셨습니다. 라는 고백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상이 뭘까요? 많은 사람들이 이 상이 졸업식에 교장선생님이 주시는 상이라고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상은 히브리 성경에 ‘슐르한’이라고 되어있는 상인데 이 상은 밥상입니다. 히브리인들은 밥을 먹을 때 비스듬히 소파 같은데 기대어서 나지막한 티 탁자 같은 데에다가 거기에다 밥상을 차려놓고 함께 먹었습니다. 그것을 ‘샤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직역을 하면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는 자들의 면전에서 나를 위해 한 밥상을 차리셨습니다. 그런 뜻입니다. 자 그러면 도대체 이게 뭐 길래 그렇게 시인이 가슴이 터질듯이 내 잔이 넘치나이다. 라고 감격을 하고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예화) 아주 오래전 20년 전쯤 되었는데 전화가 왔습니다. 그때 교수실에 있었는데 ‘네 김남준 교수입니다.’ ‘거기 정말 김남준 교수님 입니까?’ ‘그런데요.’ 그랬더니 아주 낭랑하게 들려오는 어느 여성의 목소리예요. 그러면서 자기소개를 하는데 자기가 어느 교회 집사인데 나를 꼭 만나고 싶답니다. 그래서 ‘왜 나를 만나야 됩니까?’ 그랬더니 그때 제가 쓴 책이 있었는데 십자가라는 책을 읽고 자기가 너무 은혜를 받아서 저자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싶다는 겁니다. 뭐 그리 성질나거나 기분 나쁜 일은 아니잖아요. 그래서 좋다고 그러면 언제 학교로 오시라고 그랬더니 마침 그 교회에 다니는 어느 집사님이 제가 가르치고 있는 학생 중 한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둘이 같이 꽃다발을 하나 사 들고 교수실로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앉아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양반이 누구냐면 여러분에게 이름을 대면 거의 알만한 우리나라 굴지의 벽지회사 회장의 부인입니다. 그런데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자기는 한 600명 정도 모이는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데 온 교인이 자기를 부러워 한 대요. 그래서 왜 부러워하냐 그랬더니 남편이 벽지회사 회장인데 남자들이 돈이 많으면 자기 아내 알기를 우습게 알잖아요. 그런데 이 분은 아내밖에 몰라요. 그래서 아내한테 그렇게 잘해주고 자기 전에 침대에 들어가기 전에는 둘이 앉아서 코티를 서로 나눈다고 하니까 돈이 많으면서 신앙생활도 잘하는 모양입니다. 거기에다가 부인이 미대를 나왔어요. 그러니까 남편이 새로운 벽지의 디자인을 수집하기 위해서 유럽에 갈 때에는 항상 아내를 데리고 갑니다. 그래서 이태리며 프랑스며 여행을 하면서 새로운 디자인들을 보여주고 함께 새로운 신제품 의논을 하는 겁니다. 뭐 그 정도 되면 젊은 여성들의 로망이잖아요. 능력 있는 남편 만나서 사랑받고 그리고 신앙생활도 함께하고 그 교회 목사님이 그렇게 호랑이랍니다. 교인들이 그 앞에서 눈을 마주쳐다보지 못 할 정도로 무서운데 하여튼 온 교인 중에서 그 목사님들 안 무서워하는 한사람이 있는데 자기라는 겁니다. 그래서 목사님께 그렇게 사랑을 받고 그 당시에 새로운 신혼부부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어서 그렇게 교회를 섬기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자기는 너무 너무 곤고했다는 겁니다. 한번은 목사님이 심방을 왔는데 자기가 침체에 빠지고 하니까 목사님이 특별히 그 가정을 심방을 와서 칭찬을 많이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격려를 해 주었답니다. 예배가 끝나고 차를 마시고 다 일어나서 목사님이 가시는데 목사님 옷을 꽉 잡고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목사님한테 하소연을 했답니다. 목사님 목사님은 저를 그렇게 칭찬 하시고 예뻐해 주셔도 목사님 제 영혼은 너무 곤고해요 그러면서 한없이 울었답니다. 도대체 왜 그러는지 사람들이 이해를 못하는 겁니다. 무슨 병인지는 모르는데 삼년에 한 번씩 개복을 해서 수술을 해야 한답니다. 왜냐하면 원인을 알 수 없는 수많은 종양이 생긴 답니다. 그것을 떼어 내야 한답니다. 그래서 그때가 오면 사는 것 자체가 너무 괴롭고 죽을 것 같아서 우울증이 밀려올 정도라는 겁니다. 그때에 십자가라는 책을 읽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제 것까지 자신은 자기의 행복에만 관심이 있었는데 십자가를 읽으면서 그 주님이 나 같은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치러야 했던 그 끝없는 깊은 고난을 그 책을 통해서 접하게 되면서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전체적으로 다시 볼 수 있는 기회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제 오늘도 수술하러 가는데 전에 같았으면 견딜 수 없는 괴로움에 몸부림 쳤을 텐데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는 겁니다.
(찬양)
얼마나 아프실까 하나님의 마음은 인간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제물 되실 때
그러면서 주님이 자기를 위해 당하신 십자가의 그 고난을 묵상하며 수술실에 들어가는데 눈물이 막 흐르더라는 겁니다. 마취기운이 막 밀려오면서 눈물이 쏟아지니까 귀에서 막 교인들과 가족들의 소리가 들리는 겁니다. ‘저 거봐 우리 김 집사가 얼마나 아프면 저렇게 울겠어.’ 그런데 자기는 마음속으로 ‘아녜요 여러분 나는 지금 내가 아파서 우는 게 아녜요.’
(찬양)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나
이게 바로 영혼의 빈 잔을 채우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첫 번째 문제를 우리들이 풀기위해서는 사실은 이스라엘의 문화적인 배경에 대해서 좀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식사 관습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서양이라기보다는 동양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우리나라 사람들이 서양 사람들보다 훨씬 더 이해될만한 풍습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식사를 하는데 이 식사는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식사는 형제 됨, 혹은 가족 됨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식사에 대한 관습이 동양하고 아주 유사합니다. 지금은 어느 나라 언어든지 쉽게 배울 수 있는 많은 자료들이 있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초창기에 중국선교를 나갔던 서양 사람들이 문화를 모르기 때문에 실제로 핍박을 받고 심지어는 순교하는 예까지 있었습니다. 그 당시 그들의 선교라는 것이 지도를 놓고 무조건 그 지역을 찾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도 많은 종족들이 각기 다른 언어를 갖고 있기 때문에 중국만 해도 53개 족이나 됩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다 체계적으로 서양에서 배우고 갈 수도 없고 가르쳐줄만한 선생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서 먼저 그들에게 바디 랭귀지로 자신을 소개하고 해서 일단 그들 속에 한 주민이 되어서 살아가면서 의사소통을 하면서 언어를 익히는 겁니다. 그게 5년 정도 걸리면 어쨌든 그 언어를 익히게 된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그 언어를 가지고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도 번역을 하고 그런 겁니다. 그래서 가서 지도를 펴서 보이면서 이렇게 먼 서양에서 당신네 나라까지 왔다. 내가 온 것은 ‘상띠’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너무 사랑한다는 것을 전하고 여러분과 함께 살기위해서 왔다 그리고 의사표시를 하는 겁니다. 그것이 소통이 되면 잠깐 기다리고 하고 잠시 후에 그 마을에 있는 수염이 기다란 노인들이 모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촌장들입니다. 그리고 회의가 이루어집니다. 이 이방인을 우리의 고을에 살도록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 그리고 한참 시간이 흐른 다음에 활짝 웃으면서 이제 당신이 여기에서 살아도 좋다고 그리고 말하자면 용납해 주는 겁니다. 그리고는 이제 이렇게 한 마을에서 살게 된 것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이 선교사들을 데리고 마을회관 같은 곳으로 모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식탁을 나누는데 나오는 식사의 재료들이 구라파 사람들이 동의하기 어려운 물체들이 식탁에 올라오는 겁니다. 지금도 만주 쪽에 가면 시집장가 갈 때 반드시 끓이는 국이 있습니다. 우리는 대게 갈비탕 아니면 국수 그래서 저 자매도 국수 먹을 때가 됐는데 그 얘기는 시집 갈 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거기서는 뱀으로 국을 끓여요 동태처럼 큰 뱀을 툭툭 토막을 쳐서 야채를 넣고 푹 끓여서 그것을 한 그릇씩 먹어야지만 진짜 결혼식인 것입니다. 그래서 저 자매도 뱀 국 먹을 때가 됐는데, 뱀 국은 언제 끓여 그 얘기는 네 딸은 언제 시집보내나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나오는 식사의 재료들이 상상도 못합니다. 중국은 말이 있습니다. 바닷 속에 있는 것은 잠수함 빼놓고 날아다는 것은 비행기 빼고 다리있는 것은 책상 빼고 다 먹는다고 했습니다. 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외계인이 북경에 오면 북경은 정치적인 도시입니다. 너희나라 대통령이 누구냐 그러고 물어본답니다. 상해에 가면 여기는 상업지역이예요 너희나라에 무엇을 갔다 팔면 장사가 되냐 물어보는데 광동으로 외계인이 오면 거기는 음식문화의 천지입니다. 그냥 잡아서 요리를 해버린대요. 외계인은 어떤 맛일까 그런 음식을 먹을 수가 있겠어요? 그러니까 못 먹겠습니다. 하면 갑자기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얼음장 같이 차가워지면서 침묵이 흐르더니 여기저기서 고함소리가 들립니다. 끌려 나가 죽는 겁니다. 마지막 죽는 순간 까지도 이 사람들은 왜 죽는지 모릅니다. 무슨 의미인지 아십니까? 동양에서 이렇게 식탁을 대접하는 것은 형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반이 너무 추우면 상민들하고 같이 잠은 잘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라도 상민들과 함께 밥상을 받는 법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상민은 영원히 양반의 형제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똑같은 풍습이 이스라엘에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바리새인들에게 비난을 받으셨던 이유 중의 하나가 왜 너의 선생은 세리와 창기 같은 인간들과 함께 밥을 잡수냐 ? 그 얘기는 네 선생님이 창기 세리 이런 인간들과 한 통속 이라는 뜻이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의원은 건강한 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병든 자를 위해서 있는 것과 같이 인자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하여 왔노라 그래서 그들과 함께 그들을 형제로 대우해주고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이 식탁의 교제를 통해서 예수님이 정말 원하시는 일은 이들을 이런 형제애의 교통을 통해서 그들을 회개하여 하나님의 자녀를 만들기 위한 방법이 그들과 함께 식탁을 나누는 것이었다고 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성경으로 돌아가 보면 이익입니다. 나의 원수들 면전에서 많은 원수들이 있었습니다. ‘쪼레라이’라고 하는 것은 ‘짜라르’라는 동사에서 온 것인데 이것은 괴롭게 하다입니다. 원수라기보다도 나에게 고통을 주는 많은 사람들 면전에서 내개 하나의 밥상을 베푸셨나이다. 그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하나님께 기름부름을 받기 전까지는 별로 원수가 없었습니다. 괴롭히는 자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기름부음을 받고 나서 하나님께로부터 사명을 받고 그 길을 걸어가니까 이제 수많은 사람들이 정치적인 대적이 되어서 다윗을 공격하는데 자기를 장인까지도 자객을 풀어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리려고 그렇게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선한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하나님은 버리셨을 지라도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자였기 때문에 그는 자기 손으로 그를 헤하려고 하지 않았어요. 그리고는 하나님의 주권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으로 그 시련과 고통을 이겼습니다. 수많은 대적들이 있었어요.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하고 난 다음 하나님께 징계를 받을 때 자기의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때부터 수많은 원수들이 다윗을 죽이고자 하였고 그 모든 사람들은 다윗의 가슴에 수없이 이 칼을 꽂고 화살을 날리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때마다 이 시인은 그들을 대적하고 칼을 칼로 갚는 대신 하나님의 은혜의 품으로 피했고 거기서 주님의 은혜를 갈망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당신의 은혜의 품으로 도망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시인을 맞아주시고 그리고 그에게 말할 수 없이 비밀스러운 은혜의 위로들을 부어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이 경험한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이 시인에게 그 많은 대적이 있었던 것을 여러분이 한번 생각해 보세요 모두 일치단결해서 저 놈의 시인을 우리 저 다윗을 죽여 버리자 그러고 와락 덤벼들었는데 밥상을 차려놓고 밥을 먹고 있는 겁니다. 그런 그림을 그려 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함께 앉아서 겸상으로 밥상을 들고 있는 분이 있었는데 그분이 하나님입니다. 시인 다윗은 그들에게 아무것도 아닌 한줌거리밖에 되지 않는 연약한 자였으나 그 시인을 사랑하고 식탁의 관계를 맺고 계신분이 하나님이셨기 그를 헤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왜 하나님과 가족관계이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을 먼저 헤치거나 제거하기 전에는 그와 그에게 사랑을 받는 그의 자녀를 해롭게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오늘 이 시인이 그것이 그렇게 큰 감격이었다고 하나님 앞에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20년 전인데 23편을 히브리어 성경으로 읽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너무 감격한 단어 하나가 베푸시고 라는 단어였습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할 때 이 베풀고 라는 단어가 히브리말로 ‘아라크’라는 단어인데 원래 이 단어는 군대들을 묘사하는데 많이 쓰이는 단어입니다. 군인들을 좌우로 정열 시킬 때 쓰는 단어입니다. 많은 물건들을 길게 늘어놓거나 혹은 옆으로 쭉 놓는 진열행위를 가리키는데 사용되는 단어가 아라크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게 되냐면 이 시인이 받았던 밥상이 어떤 종류의 밥상이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즘에는 별로 안다니지만 옛날에는 우리는 국내에 집회를 많이 다녔을 때에는 다 다녀보면 강사로 갔을 때 일 먹을 거 없는 동네가 강원도 이구요 그담에 별로인 데가 경상도고 그리고 정말 이것은 집회를 하려고 강사를 불렀는지 전라도 음식을 자랑하려고 불렀는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강사를 접대하는데 집착하는 지역의 교회가 전라도에 있는 교회들입니다. 한번은 집회를 왔는데 거의 고문이더라고요 아침, 점심, 저녁, 간식, 당번을 다 짜놓은 거예요 아침에 새벽기도회 끝나고 기도 좀 하려고 하는데 계속 기침 소리를 내면서 빨리 가자는 뜻입니다. 그래서 아침 먹으로 가면 그래서 아침식사 제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눌은밥에다가 김치하고 김 몇 장이면 저는 아주 럭키 하거든요 아침서부터 국밥이라고 그러는데 국밥이 아니라 거의 국이고 반찬이고 하여튼 거의 비빔밥집에 갔는데 반찬이 19가지가 나왔더라고요 그리고 주인 하는 말이 차린 게 없다고 그래서 그것을 먹어요. 그리고 아침집회를 하잖아요. 10시 반에서 11시쯤 설교하기 시작하면 은혜를 많이 주시면 1시까지 집회를 하는 겁니다. 그리고 1시에 밥 먹으로 가는데 왜 가까운 가서 먹으면 되잖아요. 차를 태우고 한 40분가는 겁니다. 도착해서 밥을 먹고 얼마나 많이 나와요 그럼 먹고 숙소에 돌아오면 4시쯤 되요 그런데 씻고 편한 옷 갈아입고 누워있으면 딩동 그리고 저녁 먹으러 가자는 겁니다. 그런데 목포 쪽인가 어디 갔을 때 일인데 야 정말 대답합니다. 거기는 8명이 밥을 먹으러 갔는데 어느 장로님이 대접을 하는 것 입이다. 강사님 이 식당이 우리 동네에서 아주 유명한 식당 입니다. 한번 드셔 보세요. 그리고는 밥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먹다 먹다가 지쳤는데 얼마나 나왔냐고 물으니까 삼분의 일 나왔답니다. 그래서 그담엔 수저를 놓고 그릇수를 세기 시작했어요. 그릇이 몇 개 나 되나 하고 4명이 밥을 먹고 이쪽에 4명이 먹는데 그릇이 이백 개 나왔습니다. 하나하나마다 다 세었을 때 이백 개 나왔습니다. 그럼 여러분 생각할 때 한 돈 십만 원 씩 주었나보다 할 텐데요 그때 만 오천 원짜리 밥이었어요. 그런 게 그렇게 많이 나왔어요. 그런 게 아라크의 밥상입니다.
이건 약과입니다. 저는 여기 와서 교인들이 해주는 밥을 여러 번 먹었거든요 그런데 정말 오래간만입니다. 저는 교회에서 웬만하면 밥을 못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게 얼마나 주부들이 힘든 거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제가 못하게 합니다. 그런데 여러해 전인데 어느 교인이 교역자가 그러는데 목사님 그 집에 꼭 심방을 가줘야 되겠습니다. 그래 가자 그런데 점심을 직접 해서 대접하겠다고 합니다. 하지 마라 그래라 잠시 후 그래도 한답니다. 하지 말라는데 그래도 꼭 해야 되겠답니다. 그래서 내버려 둬라 그리고 갔는데 예배를 쭉 드렸어요. 은혜를 굉장히 많이 받은 가정 이었어요 특히 그 부인이 그리고 밥상을 가지고 오는데 마음이 너무 아픈 거예요 왜냐하면 밥상을 셋이서 들고 오더라고요 교자상 이예요 큰 교자상인데 젓갈을 집었는데 거리가 미치지를 않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달라고 그러면 주는 역할까지 하는데 세상에 태어나서 그런 밥상은 처음 받아보았어요 모든 것을 다 집에서 만든 거예요 그래서 내가 야단부터 먼저 쳤어요. ‘아니 도대체 왜 이 쓸데없는 일을 하냐 ’이거 먹고 9시간만 지나면 모두 몸 밖으로 나가는데 그냥 아무거나 갈비탕이나 하나 먹든지 식당에 가서 먹지 기도하고 성경보고 전도하고 그럴 시간에 이게 뭐하는 거냐. 그랬더니 이자매가 ‘목사님 기도도 했고요 전도도 했고 성경도 읽었거든요’ 그러니까 제발 그만 하고 드세요 그러면서 목사님이 일평생에 자기 집에 한번밖에 더 오시겠습니까 그래서 최선을 다해서 이 식탁을 하는데 준비하는데 지혜를 달라고 한 달 전부터 기도를 하고 일주일전에 김치를 담그기 시작하고 삼일동안 장을 봐서 삼일동안 만들어서 상을 내 온 겁니다. 그 상이 지금도 잊혀 지지가 않아요. 정말 주께 하듯이 정말 정성을 다해서 차려서 그 밥상을 가져오는데 마음에서 눈물이 나더라고요. 나는 이런 대접을 받으면 안 된다 그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한 사람이 손님으로 어느 집에 갔을 때 그 사람 앞에 놓인 식탁은 그 사람의 레벨이 어느 정도 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손님이 온다고 그러는데 며칠 전서부터 밤늦게 까지 불이 켜지고 떡을 하고 김치를 담그고 하는 소리가 나면 굉장한 손님이 오시는 겁니다. 그런데 진짜 별 볼 일없는 손님이 오면 그날 아침 까지도 조용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여러분이 한 집안에 딸로 태어나서 시집을 갔는데 시집갈 때부터 결혼 얘기 나올 때부터 우리엄마가 우리 남편 될 형제를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겁니다. 몇 번씩 꼭 그 사람하고 결혼을 해야 되겠냐고 물어봅니다. 그래서 우겨서 결혼을 했어요. 그래서 신혼여행을 갔다 와서 집에 전화를 했어요. ‘엄마 우리 신혼여행 다녀왔어요.’ ‘그랬니. 잘했구나.’ ‘우리 인사하러 가려고요.’ ‘그래 오너라.’ ‘엄마 점심 줄꺼죠? 우리가 김 서방하고 갈 건데요.’ ‘그래 오너라.’ 대답이 신통치 않아요. 남편이 밥을 달라고 그러는데 엄마가 우리주려고 점심 차려놓고 기다리는데 무슨 아침이야 굶고 가야지 밥하기 싫을 때 하는 얘기거든요 .그래서 교회 자매들하고 밥을 먹는데 그대들은 무슨 밥이 제일 맛있니 하며 결혼한 자매들에게 물었더니 명답을 합니다. 목사님 우리가 하지 않은 밥은 다 맛있어요. 그래서 집에를 갔어요. 딸 생각에는 지금쯤 전부치는 소리가 지지직 나고 빈대떡 부치는 연기가 나고 고기 굽고 이럴 줄 알았는데 조용해요 ‘엄마 우리 왔어요. 해도 아무소리도 없어요. 엄마 우리 왔어요.’ 그랬더니 엄마가 우목에 컴컴한데서 주무시다가 일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절을 하고 ‘엄마 우리 배고파 밥 주세요.’ 그랬더니 ‘그래라.’ 그리고 밖에 나가더니 삼 분만에 밥상을 봐가지고 오시더라는 겁니다. 뭔가 그랬더니 찬장에서 먹던 밥 한 그릇을 꺼내서 펌프 물을 틀어서 몇 번 헹구어서 거기다가 제삿밥 꽂듯이 숟가락 하나 탁 꽂고 쪼가리가 떨어진 소반에 언제부터 눌어붙었는지 밥풀떼기 눋다 붙은 그 상에다가 그리고 반찬은 딱 한가지인데 무수한 젓가락의 공격을 받은 흔적이 있는 고추장 하나를 탁 올려놓고 ‘들게’ 하고 사위 앞에 탁 놓는데 세게 놓는 바람에 그릇의 물이 찍하고 흘렀습니다. 그 밥상이, 그 손님이 이 어머니의 마음에 어느 정도의 사람인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별 볼일 없다는 것입니다. 이 시인의 밥상은 아라크의 밥상입니다. 종들이 넷이서 양쪽 귀퉁이를 들고 가운데 두 명까지 해서 여덟 명이 들고 예쁜 옷을 입은 하녀들이 세 사람정도 앉아서 손을 가리키는 대로 반찬을 떠다줘야 겨우 먹을 수 있는 그런 큰 식탁을 받았던 겁니다. 이렇게 설교를 했더니 어떤 사람이 그러면 정말 하나님이 천국에서 밥상을 차리셔서 줄로 달아 내리셨나보죠 그렇게 문학적인 상상력이 없어서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겠습니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큰 은혜에 자기를 대우해주시는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인격적인 사랑이 그렇게 큰 것이었다는 것을 오늘 시인이 말하면서 원수 앞에 베풀어주시는 그 상 때문에 하나님의 그 은혜와 사랑 때문에 자신의 가슴이 터질 것 같은 희열을 경험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시인은 단 한 번도 온갖 반찬이 차리어진 놀라운 식탁을 하늘로부터 줄을 달아내려 이 땅에 내려오는 것 같은 기적적인 방법으로 밥 먹어 본적은 없어요. 역시 그는 육신의 심령으로 말하자면 너무나 굶주려서 제사장 이외에는 먹을 수없는 진설병까지 먹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인의 영혼을 위해서 주님이 베풀어주신 그 말씀의 식탁은 언제나 진수성찬의 식탁이었던 것입니다. 이 시인이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다른 모든 사람들이 일찍이 받아보지 못한 영혼의 양식을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궁창과 하늘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온 땅과 하늘위에 가득 찬 주님의 위엄과 그 충만함을 목격하고 그 하나님의 현존을 선포하는 위대한 예언자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찬양)
하늘위의 주는 높이 들리며 주의 영광은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그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 깊이 감격을 하던 때는 많이 있었고 그것이 오늘 이 시인이 얘기하는 원수의 목전에서 베풀어 주신 그 아름답고 화려한 식탁이었습니다. 참 이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는 너무 너무 놀라워요 우리의 인생에 시련과 고난이 여러 해 동안 계속되었고 심지어는 수십 년 동안 실패를 운명처럼 여기며 살았는데 하늘을 여시고 당신의 이 풍성한 말씀의 식탁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을 때 그 식탁을 대하며 하나님의 사랑과 함께 그 말씀의 은혜를 충만히 누린 후에는 놀라운 은혜 운명과 같은 자신의 실패 할 수밖에 없었던 삶을 돌이킬 수 있는 놀라운 용기를 갖게 되는 겁니다.
(찬양)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임함이로다
깊이 감격하는 겁니다. 그게 신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인은 하나님 충분합니다. 나의 영혼의 빈 잔이 가득 찼습니다. 이제는 그만 부어주셔도 됩니다. 환희. 희열. 기쁨 ,영광, 감격 하나님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 은혜와 감격이 확 밀려들어와서 넘치게 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인생길이 어차피 죄인들이 모여 사는 세상이고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난 인간들과 함께 섞여 사는 세상에서 질병이 없겠습니까? 고난이 없겠습니까? 진리를 따라가는 사람이 핍박이 없겠습니까. 오히려 어느 청교도는 말하기를 일평생 진리를 따라 산성도의 얼굴에는 악마의 손톱자국이 가득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딘들 없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고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신뢰했던 사람과의 관계가 깨어지는 일 같은 것들은 이미 예상된 일입니다 .우리는 그것 때문에 살 수 없어 불행해 지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은 원래 우리의 인생 속에 있는 일인데 그것으로부터 극복하며 이기게 만들어주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식탁 하나님의 말씀 그 은혜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노동하고 그리고 가족들을 부양하고 이 땅에 무엇인가 우리의 할 일을 위해서 일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이 땅에 있는 자원으로만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수시로 돈이 있는데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우리 옆에 있는데도 다른 사람들은 우리들의 풍부함을 부러워해도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눈을 들고 위에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우리의 마음을 모아서 간구합니다.
(찬양)
하늘의 양식을 생명의 만나를 만입 있는 자에게 내리어 주소서
낮고 천한 우리 긍휼히 여기사 주여 먹이여 주소서
간절히 이 세상에 있는 자원들로만은 살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로 부터 오는 하나님의 진리의 떡 생명의 양식을 우리는 갈망합니다. 거기에서 이 험한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강한 은혜와 힘이 거기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 은혜를 구하여 영혼의 빈 잔이 가득 차는 환희를 경험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의 마지막은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습니다. 이것도 똑같이 원수들의 면전에서 상을 베푸시고 원수들의 면전에서 내게 내 머리에 기름을 바르셨습니다. 이런 뜻입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이스라엘은 원래 왕이 없었습니다. 하나님만이 왕이시고 그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직접 다스리시는데 세 개의 기관을 두어서 그 세 개의 직분을 가지고 이스라엘 나라를 통치하셨습니다. 한 직분은 왕이고 또한 직분은 제사장이고 또한 직분은 선지자입니다. 왕의 임무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 대신해서 법대로 다스림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든 생활에 있어서 주님의 규범을 따르도록 하는 것이 왕의 임무였고 제사장의 역할은 죄 지은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그 역할을 돕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에 비해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계시를 그 백성들에게 직접 선포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왕의 관심은 법에 있고 선지자의 관심은 계시에 있고 제사장의 관심은 전통에 있었던 것입니다. 어째든 이 세종 의 사람들은 매우 중요한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부르셔서 그 직분자로 세우실 때에는 언제나 기름부음을 받게 하셨습니다. 이 기름부음은 그냥 의식으로서의 기름부음이 아니라 기름을 부으면 그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은 그 직임을 맞는 사람에게 다른 사람들에게는 볼 수 없는 매우 특별한 성령의 강한 임재를 허락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들이 이해를 갖기 위해서는 구약시대의 성령의역사와 신약시대의 성령의 역사에 대한 차이점에 대해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성령은 같은 성령이시기 때문에 영원전이나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한분 하나님의 영이시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은 구약시대에 인간들의 관계를 맺는 방식과 신약시대에 맺으시는 방식이 각각 다릅니다. 구약시대에는 어떻게 관계를 맺냐 하면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역을 중심으로 관계를 맺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충만한 성령을 어떤 사람에게 부어주시면 그 사람은 탁월한 지식을 소유하게 되고 또 하나님을 향한 선한 의지나 특별한 은혜를 누리게 되면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겨진 일들을 훌륭하게 수행해 나아갈 수 있는 조건을 갖추게 되는데 일이 끝나면 하나님이 성령을 다시 거두어 가시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이에 비해서 신약시대에는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그분께 접붙여진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그 성령에 참여하게 하심으로 그들이 모두 성령에 내주하심을 따라서 살도록 만들어 주셔서 이를 중심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맺은 영적인 관계를 중심으로 오시고 영원히 그들을 떠나지 않으시는 성령의 경륜이 신약시대의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이 임하실 때에 그들이 경험하는 것은 구약이나 신약에나 매우 유사했습니다. 그것은 아주 특별한 지혜 그리고 아주 특별한 능력 매우 특별한 기쁨 성령의 충만한 사랑과 은혜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이 하시는 일이 다윗은 일평생 세 번의 기름부음을 받았고 그중에 첫 번째 기름부음을 통하여 성령이 그에게 강력하게 임하셔서 이제 이스라엘나라를 이끌어 갈수 있는 지성과 의지를 소유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이 성령의 충만한 임재를 통해서 다윗의 마음을 순전하게 하나님을 향해 구별되게 만드셨고 그리고 하나님이 이 시인에게 강력한 은혜와 총명을 주셔서 구약에 나오는 어떤 인물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 충만했던 은혜의 경험 자신의 영혼에 가득히 부어졌던 그 놀라운 은혜의 경험을 오늘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화) 저는 21살에 회심을 했습니다. 그 전까지는 중학교 2학년 때까지 교회에 출석했지만 회심하지 않았고 그 후 교회에서 일어나는 불미스러운 일들을 보면서 교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교만할 때로 교만해져서 청소년 시절을 보냈고 그 결과는 끊임없는 고통과 괴로움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인생의 그 모든 모순과 괴로움을 신앙으로 극복하는 대신 문학이나 사상이나 이런 것들을 통해서 답을 찾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많은 책들을 읽고 독서를 했지마는 나의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21살이 되었을 때 하나님이 저의 마음을 깊이 움직이셨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서 낮에는 공부를 할 수가 없었고 밤에 스탠드를 켜고 밤을 새워서 늘 공부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에 저희 집이 아주 작은 집이었고 뒤에는 끝없이 펼쳐진 밭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교회가 밭 한가운데 세워졌습니다. 새벽 4시쯤 되면 뎅그렁 뎅그렁 종이 울려요 4시 반쯤 되면 한 번 더 칩니다. 매일 새벽마다 비가 오나 눈이오나 항상 들리는 겁니다. 그런데 나에게 와서 누가 와서 복음을 전해주는 사람이나 없었는데 새벽마다 그 종소리가 들려요 어느 날 새벽에는 한번 들판에 나아가 보았어요. 아침 새벽안개가 살포시 깔려있고 불빛하나 없고 저 멀리 기차역에 희미한 등불밖에 없는데 예배당에서 불이 켜지고 뎅그렁 뎅그렁 종소리가 들려요 그게 그렇게 그 소리가 감명 깊었습니다. 그리고 마치 나에게는 없는 평화가 저 불빛이 쏟아지는 교회당 안에는 있는 것 같았습니다. 뎅그렁 뎅그렁 뎅그렁
(찬양)
깊이 스며 와 닫는 구원의 저 종소리
그리고는 일 년 반 정도 지난 후에 전도하는 사람 없이 내 길로 걸어서 어느 작은 교회를 찾았습니다. 한 성도 이삼십 명 모이는 쪼그만 이층교회였고 허허벌판에 서있었고 수요일 저녁인가 예배를 드리러 갔더니 그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장판을 펴고 누덕누덕 기운 두꺼운 방석을 깔로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난로에는 장작불이 타고 있었고 교회당 저 구석에서는 누군가가 삐거덕 소리를 내며 누군가가 풍금을 치고 있었습니다.
(찬양)
돌아와 맘이 곤한 이여 길이 참 어둡고 나간 자식이여 돌아와
그런데 하나님이 계신지 안계신지는 모르겠는데 눈물이 확 쏟아졌어요. 그러면서 마치 오랫동안 떠났던 고향집에 돌아온 것 같은 평화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몇 달을 다녔습니다. 그랬더니 어느 날 목사님이 연세가 많으신 분이셨는데 저를 부르셨습니다, 여보게 청년 자네는 세례를 받거나 그러셨습니다. 아유, 목사님 제가 교회에 나온 지 몇 달도 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세례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랬더니 너는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고 기독교적인 가정에서 자랐으니까 학습 없이 세례를 받아도 된다. 그날부터 고민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교회에 나온 것은 어떻게 결심을 해서 나왔지만 이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내가 주님의 신부가 된다는 것인데 나같이 이렇게 더러운 사람이 주님의 신부가 될 수가 있을까? 그래도 이제 목사님한테 감히 항거할 수가 없어서 문답 집을 읽고 외우면서 그러면서 매일저녁마다 예배당을 찾았어요. 그리고는 촛불하나를 강대에다 켜놓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나 같은 인간이 주님의 마음에 기억되는 것만 해도 감격스러운데 제가 과연 주님과 혼인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정말 저 같은 사람이 주님께 시집갈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혼인한다면 저는 평생 주님을 나의 신랑으로 모시고 그렇게 살 수 있을까요? 그러면서 매일저녁마다 그 차가운 교회당에 엎드려서 눈물로 기도를 했습니다. 어느 날 내 마음속에 그래 내가 주님 앞에 의롭다함을 입은 것은 나 자신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값없는 은혜로 말미암아 된 것이지 그리고 이제 드디어 세례를 받는 날이 왔습니다. 옷을 깨끗이 빨아 입고 그리고 예배당에 가서 주일예배순서를 기다렸어요. 그리고 거기서 설교가 있고난 후 목사님이 오셔서 세례를 주시기 시작하셨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 자 김남준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할 때 생전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목사님이 손 얹고 기도하는데 여기서부터 아주 따뜻한 생전 느껴보지 못했던 따뜻한 기운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확 내려오기 시작하면서 온 몸을 가득채운 후에는 나의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것이 느껴졌어요. 세례식이 모두 끝났는데도 그 자리에서 엎드려서 울었습니다.
(찬양)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나
그러면서 눈물이 확 쏟아지면서 주님 없이 살아왔던 나의 허허로운 날들의 모든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고 순간순간 하나님을 모욕하고 그분을 부인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던 나의 악한 행실들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리고는 이 제 것 내가 가지고 있던 인생의 모든 꿈이 사라지고 오직 하나 내가 정말 주님께 사랑받고 주님을 사랑하고 그렇게 살 수 있다면 그리고 우리 주님이 가슴아파하는 일을 하면서 일생 살았으니 이제는 그 주님을 사랑하며 살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찬양)
주의 순결한 신부가 되리라 내 생명주님께 드리리
그게 제가 경험한 첫 번째 성령의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운데 인도해주셔서 결혼을 하고 신학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견딜 수 없이 괴로운 일들이 있었고 그 기도제목을 하나님이 이루어주시지 않으면 안 되는 아주 안타까운 기도의 제목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새벽마다 집 가까운 교회에 나가서 기도를 했어요. 그런데 좀처럼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아요. 그날도 11월말 어느 날이었습니다. 아주 굉장히 추운 새벽이었습니다. 새벽에 교회에 가서 얼마동안 새벽기도를 했는데 조용해서 눈을 떠보니 교인들도 모두 가고 앞자리에 앉아서 기도하시던 목사님도 집에 들어가셨어요. 그리고 나 혼자 그 예배당 그냥 가건물처럼 지었고 하꼬방처럼 지은 그 예배당에 유리도 없어서 비닐로 유리창을 막는 그 예배당이 이었는데 어마어마하게 추워요 그런데 허망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기도하는데 하나님은 왜 응답해 주시지 않을까 그러면서 어린마음에 내가 이 의자에 앉아서 이렇게 편안히 기도하니까 예수님이 아마 내 기도가 간절하지 않아서 안 들어주시나봐 그리고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걸어서 그 땅바닥에 내려와서 이런 나무나 카펫 이런 장판이 깔려있는 게 아니라 시멘트를 들이 붓고 미장을 한 차가운 바닥이었습니다. 엎드리고 손까지 땅에 댄 채 얼굴을 바닥에 대니까 형언할 수 없는 냉기가 뼛속까지 파고들어오면서 다리가 저리기 시작했어요. 그때 어린마음에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다리가 분질러져도 얼어붙어도 내가 일어나나 봐라 조용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전 원래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거 싫어해요 그래서 조용히 눈을 감고 묵상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엎드려 눈을 감았는데 강대가 보이는 거예요 그러더니 강대에 정 가운데서 핸드볼 공보다 약간 작아 보이는 불덩어리 하나가 떠오르는 겁니다. 그러더니 천천히 가운데로 날아오는 거예요. 그런데 이상하게 나 자신이 그것을 피할 수가 없어요. 계속 날아오면 나한테 맞을 텐데 그러면서도 기도만 하고 있는데 어느덧 그게 슝 나라오더니 내 머리에 쿵하고 부딪혀서 그러더니 쾅 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그 불이 내 몸속으로 들어오는데 이번에는 따뜻하게 아니라 펄펄 끓게 뜨거운 불이 들어오는 겁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나도 알지 못하는 이상한 기도가 막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혼자 기도하다가 혼자 방언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는 온몸이 뜨거워지면서 기도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기도를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얼마를 울면서 기도 했는데 춥지도 않고 온몸이 뜨겁고 푸근했어요.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난 것 같아서 출근을 해야 될 것 같아서 눈을 뜨니까 아침햇살이 확 퍼지면서 얼어붙은 비닐 유리창을 불은 햇빛이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때도 똑같았습니다. 이제 것 까지 산 인생은 나의 인생이었고 그리스도께서 나 같은 죄인을 위해 구원해주시는 다음에 이 인생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자기 몸을 버리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의 인생이지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살아있는 날 동안 한순간도 나를 위해 살지 말고 주님이 나를 위해 자기를 다 주셨던 것처럼 나도 주님을 위해 자기를 다 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나 자신을 다 드려서 이 세상에 명예와 부귀와 권세 이세상의 꿈 아무것도 필요 없고 주님이 내가 이 세상에 있는 것을 바라보시며 기뻐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며 주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어찌하던지 주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사람 주님이 원하시면 칼로 내 뼈도 깎아내고 살도 베어내어서 주님의 마음에 꼭 맞는 사람으로 잠시 이 세상에 살다가 죽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성공하고 싶지도 않고 유명해지고 싶지도 않고 돈 많이 갖고 싶지도 않고 주님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싶었습니다. 경험은 달랐지만 그 마지막에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인식 하나님을 진실하게 사랑하고 싶은 그 나의 거룩함에 대한 나의 갈망 이런 것들이 아주 분명하게 떠올랐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영적인 측면들을 너무나 무시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냥 교회에 와서 또 다른 어느 한 사회공동체에 소속되고 예의를 갖추면서 생활하고 착하게 살으라니까 착하게 살고 회비 내라니까 회비 내고 교회 일하라니까 일하고 그러면서 살고 그것은 기독교 생활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에 감동이 되는 것 그래서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이 한번 만지고 나신 후에는 그 분을 향한 기갈이 더욱 심해져서 그 분과 하나 되고 싶고 그 분을 알고 싶고 그분께 나아가고 싶은 그리고 그 분을 그 거룩한 터치 앞에 자기 자신을 드리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찬양)
주님을 송축 하리 내 입술 주를 찬양 나의 눈 보기 원 하네
주님 얼굴 주님의 음성 듣기를 주님을 만져보기를 전심으로 원합니다
주여 내안에 있는 모든 것 주 송축 하리 거룩하신 나의 주 주 송축 하리
그런 갈망이 요즘의 교인들에게는 없습니다. 그냥 기도 했더니 돈 주시고 명예 주시고 애들 건강하게 하시고 일이 술술 풀리면 그것으로서 충분하다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아녜요 그것은 겨우 기독교 신앙의 껍데기 일 뿐입니다 정말 신앙의 신비는 그분과 나 사이에 있는 영적인 관계 하나님에 의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우리와 하나님사이에 있는 일치 사랑의 연합 이것입니다. 그것이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견딜 수 없는 상처와 고통을 많이 입은 후에도 그분이 우리를 어루만지시기 때문에 우리는 외롭지 않을 수 있고 우리를 핍박하고 심지어 우리의 목숨을 앗아가는 사람들을 향해서도 관용을 베풀 수 있는 거룩한 은혜가 그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여러분의 교회에도 어려운 시험이 있었고 하나님의 많은 은혜와 목사님의 눈물의 기도로 안정이 되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주님의 교회에 나온 사람들이 그렇게 교회에 풍파를 일으키고 마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피를 나눈 형제들인데도 한번 마음이 틀어진 후에는 이 세상에서도 상상할 수 없는 악랄한 방법으로 서로를 찌르고 비난하고 원수처럼 여기는 그런 일들이 이 세상의 교회들에서 왜 일어나는 줄 아세요? 겉으로 보면 이런 저런 문제의 원인 누구의 잘못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그 마음속에 교회는 나왔으나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그 영적인 참된 기쁨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으로도 비교 될 수 없는 그 탁월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그 기쁨 하늘나라의 신비함 사랑과 일치 이런 것들에 의해서 오는 진정한 만족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 라고 하는 이 고백이 없기 때문에 거기에서 이런 모든 가슴 아픈 일들이 교회에서 일어납니다. 이 시인은 바로 그런 하나님의 충만한 채워주심이 있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가시밭길 같은 인생을 걸어가는 사람이었지만 낙심하고 좌절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첫날도 말씀드렸지만 상처밖에 없는 인생을 산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도 못했고 형들을 향하여 편애하는 아버지 밑에서 아버지의 인정을 받지 못한 채 자랐고 형들에게 미움을 받았고 사랑하는 아내에게는 버림을 받았고 영적인 세계는 이해받지도 못했고 그리고 사랑하는 한 여자를 만났으나 그는 불륜의 관계였고 사랑하는 아들은 자기를 죽이고 왕이 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고 자기 뱃속을 낳은 사랑하는 딸을 겁탈한 강간범이 자기 뱃속으로 나은 아들놈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끔직한 사망의 골짜기 같은 인생의 시련을 지나면서 아마 다윗은 빨리 죽어서 하나님의 나라에 가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고난을 모두 이기게 만든 것이 칼이나 군대의 수 무력 명예 권세 이런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이 험악한 현실을 이기며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 이 벌레 같은 시인을 어디서나 붙드시고 찾아와 주시는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이 이 시인은 붙들어 이기며 살게 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간절히 갈망하고 이렇게 영혼의 빈 잔이 가득 채워지는 위대한 신앙의 고백 속에서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실은 여기까지 하고 보따리를 싸야지 됩니다. 그런데 내가 다시여기 돌아와서 6절을 할 가능성을 없습니다. 그래서 3시간짜리 6절설 교를 15분에 요약을 해서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그러고 났더니 이제 하나님이 정말 자신의 인생의 목자이실 수밖에 없고 자신의 인생에서 최고의 감격은 그런 하나님이 자기와 관계를 맺으시고 목자가 되어주셨다는 사실을 깊이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시인이 그러면 앞으로 나는 어떻게 인생을 살 것인가 하면서 진실로 선함과 인자하심이 정녕 반드시라고 하는데 히브리 성경에서 필연을 나타내는 기필코 라고 번역하면 최고의 번역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기필코 나를 추격하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할 것입니다. 라고 자기의 결심을 밝힙니다. 여기에서 선하심과 인자하심이라는 하나님의 대표적인 두 성품이 등장을 합니다. 이 선하심은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고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에 맞게끔 우리를 그 목적에 맞게끔 살게 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그 목표로 우리를 이끄심에 있어서 하나님은 선하시다 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불순종하면서도 행복해 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마치 아프기를 원하지 않으면서 칼로 자기의 신체를 찌르는 사람과 같고 시원하기를 원하면서 펄펄 끓는 쇳물을 마시는 사람과 꼭 같습니다. 그것은 양립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면서 살면 우리의 인생을 위한 아주 훌륭한 계획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 하나님을 거슬러서 살려고 하면 그것은 그 자체가 우리에게 큰 고통이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거역하면서 살 때에 괴로움을 만나는 것은 하나님이 좋으신 분이라는 증거입니다. 왜 그런가. 설명을 해볼까요. 여러분 자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엄마 아빠 하라는 대로 잘 순종하고 예배당도 잘 가고 학교 공부도 열심히 하고 착하게 자랍니다. 그러면 엄마아빠의 사랑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놈이 딴 짓을 합니다. 학교 가서 애들이나 패고 공부하는 줄 알고 밤에 열어보니까 밤새도록 이상한 게임이나 하고 앉았고 가방을 뒤져보니까 중학교 1학년인데 담배도 가끔 나오고 술도 나오고 합니다. 그럴 경우에는 개 패듯이 패야 되거든요 두들겨 맞고 부모가 가슴 아파하면서 이 녀석을 때리면 때릴수록 그것은 부모가 얼마나 이 아이를 향해 사랑을 가지고 이 아이의 인생의 계획에 대한 비전이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래 ‘너 그거 하고 싶어 할 수 없지 뭐 해라’ 이거는 자기 자식이 아닙니다. 주워오던지 아니면 그냥 정부보조금받기 위해서 애들 모아놓은 수용소 소장입니다. 양육이 아니라 사육입니다 그게 선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내가 여태까지 한 번도 설교하면서 따라 하란 말 않았지요. 이것은 따라하세요.
‘순종으로 방황을 종결하라’ 순종은 방황의 종결자입니다. 방황을 끝내는 것입니다. 인생의 방황을 끝내지 않으면 여러분은 신앙에 정착할 수 없습니다. 오늘 설교 삼일동안 들으면서도 주님께로 돌아갈까 말까 결단을 하자니 참 좋을 것 같은데 너무 많은 것을 희생해야 하고 지금 마음속에서 계산기 두드리는 분들 있지요 정리하세요. 다음에 기회가 있겠지 어쩌면 이게 여러분 인생에 마지막 경고일지도 몰라요. 하도 인격적으로 승복을 하지 않으니까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내려 보내서 그래서 마지막 최후의 통첩을 여러분에게 보내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순종으로 순종이 아니면 인생의 방황은 종결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순종으로 인생의 방황 종결해야 합니다. 그게 하나님의 선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인자하심이라고 해석되는 이 단어는 헤세드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이 하나님의 인자는 특별히 헤세드라고 하는데 성도를 히브리어로 하시드라고 불러요 헤세드를 입은 사람이 성도입니다. 이 헤세드는 하나님이 모든 인간에게 베풀어주시는 사랑이 아니라 당신과 언약을 맺은 백성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매우 특별한 자비요 은혜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된다고요?
히브리 성경에는 추격하리라 그랬습니다. 미사일이 비행기를 따라가는 것처럼 내가 어디로 도망을 가도 끝까지 하나님의 선이 따라오기 때문에 끝까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따라오기 때문에 우리가 당신께 돌아갈 때 하나님이 우리를 용납하시고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사경회에 그저 기대 반 기대 없는 것 반 그저 흔들흔들 나왔다가 여러분 삼일이 지난 분들 있죠. 오늘 결심을 하세요. 계속 불순종하면서 인생의 벼랑 끝을 향해 걸어가다가 추락을 할 것인지 아니면 여기에서 돌이켜서 서 주님을 만나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될 것인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불순종으로 방황을 종결하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돌아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나오는 것이 ‘내가 여호와의 전에 거하리로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하고 나옵니다. 이것이 시인의 고백인데 어떻게 보면 너무 시시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이렇게 감격적으로 하나님이 나의 목자이신 것을 고백했으면 이 정도는 돼야 하지 않나요? 하나님 제가 오대양 육대주에 선교사가 되어서 장렬히 순교 하겠나이다 아니면 나의 전 재산을 우리 주님께 바치겠나이다. 아니면 내가 신학교를 가겠나이다. 아니면 내가 정말 이 복음을 위해서 일평생 결혼도 하지 않고 주님께 나 자신을 바치겠습니다. 등등의 무엇이 있을 만하잖아요. 그게 아니라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겠습니다. 여기에서 살겠습니다.’라는 이 단어가 ‘예 샤브타이’라는 단어인데 잠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집을 짓고 주인처럼 사는 것입니다. ‘예 샤브타이’ 이 단어는 거주민을 뜻하는 것입니다. 항구적으로 거기를 고향 삼아서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이 해하면서 여러분이 염두에 항상 두어야 할 것은 이들이 가지고 있는 성전 신앙입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이 성전은 단순히 종교적인 건물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시인 다윗이 이 시를 쓸 때에는 성전이 없었습니다, 아들 때에 지은 거거든요. 이때에는 성막입니다. 그것을 여호와의 집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 집이 화려한 성막이다 아닙니다. 하얀 천으로 둘려 쌓여있고 이 성막은 열여덟 평짜리 앞에 방이 여덟 평 뒷방이 여섯 평이고 여섯 평이 지성소이고 그 앞에 성전 뜰이 있고 거기에서 번 제단이 있고 한 건데 그 지붕이 물 돼지가죽입니다. 그러니 그 바람이 불고 햇빛이 나고 추위가 있는 그 광야를 여행하면서 그 물 돼지가죽을 가지고 다니면서 정착할 때마다 항상 그것을 쳤으니 화려한 게 아니라 거무스름한 군용텐트 비슷한 그런 색깔이었을 거예요 그런데 속에 들어가 보면 아주 화려한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남들이 예수 믿는 것 너무 시시하잖아요. 공휴일은 일요일은 하루 종일 교회에서 봉사하고 그게 뭐 돈 벌어서 교회에 다 내고 사람들이 볼 때 그게 신나는 것 아니잖아요 그런데 사실 그 속에 들어가 보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경험하는 이 진리의 아름다움과 사랑의 세계들을 보며 감격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후에 성전이 지어진 다음에는 다음에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성막이던 이 시절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의 인생에 무슨 문제가 생기면 항상 교회를 갔어요. 그리고 성전을 올랐습니다. 한나는 첩은 아이를 낳았는데 자기는 아이가 없어서 괴롭고 견딜 수 없는 그날에 하나님의 집을 찾아서 마치 술에 취한 것처럼 자신의 서러움을 토하며 주님의 은혜를 구했고 히스기아 임금은 외적의 침임을 받았을 때 터질 것 같은 가슴에 그 통탄한기도의 제목들을 주님 앞에서 쏟아내었습니다. 죄를 지었을 때나 기쁨이 있을 때나 감사할 때나 괴로울 때나 공동체적으로 위기가 올 때나 개인적으로 슬픔이 밀려올 때 그들은 언제나 성전을 찾았고 거기서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을 대면하였던 것입니다. 교회생활도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주님의 집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생각이 좀 다르다고 칼을 빼들고 휘두르고 개처럼 물고 뜯고 머리끄덩이 잡고 싸우고 하는 그러는 곳이 아닙니다.
(예화) 저는 30전 가까이 무좀을 달고 살았습니다. 지금도 완전히 치료되지 않았어요. 거의 다 나았어요. 이 설교를 했더니 어느 교인이 무좀약을 가져왔는데 그것을 발랐는데 진짜 낫더라고요. 편지를 썼어요. 목사님 이것은 세 번도 필요 없고 두 번만 바르시면 됩니다. 진짜 두 번은 과장이고 네 번 발랐는데 나았습니다. 그런데 한 30년 동안은 겨울이면 양말을 신어야 되는데 늘 항상 저는 여름이고 겨울이고 아주 두꺼운 양말을 항상 신고 다녔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땀띠가 정신없이 돋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발가락 양말을 신어요. 냄새도 나고 어떤 때는 쓰라리고 껍질이 벗겨지고 진물이 흐르고 너무 너무 불쾌합니다. 그런데 한 번도 도끼로 그 다섯 개 발가락 끊어버리려고 생각해 본적이 없어요. 어떠하던지 달고 약을 발라보고 고치려고 그러지 그것을 자르내고 목발을 집으면 진짜 청결하겠다. 그런 생각해본 적 없습니다. 교회를 그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결점이 있을 수 있죠 그리고 무엇인가 맘에 차지 않은 것 있을 수 있고 심지어는 죄를 범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났을 수 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의사가 환자의 몸을 수술하는 것 같은 태도로 해야지 마치 푸줏간에서 돼지 잡아서 톱으로 자르거나 도끼로 뼈다귀 끊어 내는 것처럼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몸에 죄를 짓는 일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 이렇게 주님의 교회에서 말씀의 은혜를 받고 시련과 괴로움도 많지만 주님을 인격적인 나의 목자로 모시고 인격적으로 승복하며 그분만을 사랑하고 그분을 섬겨요 그러면서 은혜 충만한 가운데 정말 주님의 사람으로 이곳 어두운 세상에 빛처럼 살아야 합니다. 결국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조금 더 살다가 죽는 거죠 뭐가 그렇게 새로운 게 있겠습니까? 27년 전에 신학교에서 오 목사님 만났을 때 오주한 목사님 30대였어요. 이제 벌서 할아버지가 다 되어가잖아요. 제가 한 삼년 전쯤에 파리바게트에 빵을 사러 갔어요. 내가 빵을 가지고 카운터로 가는데 요만한 애가 새치기를 하는 거야 그래서 그럴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더 황당한 얘기가 애 엄마가 그러지 마라 할아버지 먼저 계산하게 그게 얼마나 충격이었는지 한 번도 내가 그런 얘기를 못 들어 봤거든요. 너무 충격이었어요. 그리고 돌아갔어요. 얼마 있다가는 총신대학 가서 가르치거든요. 강의 듣는 학생들이 한 40명 되는데 한 학기에 한 번씩 우리교회에서 불러요. 저녁을 잘 먹이고 내 서재를 보여줍니다. 서재가 이 교회당 만한데 그래서 서재를 쭉 보여주면서 삼만 오천 권정도 되는데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다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우리교회 에드워드 파크에 앉아서 차를 마시면서 각자 소감을 이야기 하는데 아 이 녀석들이 책도 주고 밥도 주고 고기까지 구어 주었는데 그 중 한 녀석이 일어나서 느낀 점을 물어보니까 저는 여기 와서 오늘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서서 심각하게 무엇보다도 여러 가지 말고 딱 한가 지가 가슴에 깊이 와 닿았습니다. 할아버지도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시는데 그게 두 번째 충격 이었습니다. 할아버지도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시는데 손자벌인 우리는 더 열심히 해야 돼야겠다는 겁니다. 나는 마음엔 아직도 자기네들 형 같은데 이놈들은 나를 할아버지래 맨 처음 교회 개척할 때 단말머리하고 생머리하고 와서 손수건으로 코를 풀고 눈물을 닦으면서 은혜를 받던 자매들이 이제 2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면서 이제 거의 권사님 후보로 올라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애들이 시집갔는가. 했는데 애들이 태어나서 소개를 해주는 겁니다. 지금부터 한 10여 년 전에 예배당에만 가면 유치원 다니는 애들이 막 뛰어와서 목사님 그러고 둘이 뛰어와 손잡고 그리고는 인사를 하면 내가 잘 있었니. 그러면 내가 눈높이로 앉으면 양쪽으로 유치부 아이들이 뽀뽀를 항상 했어요. 목사님 건강하세요. 그러는 겁니다. 그런데 오랜만에 심방을 갔어요. 어떤 다 큰 처녀가 열심히 과자를 구워서 정성껏 간식을 내 왔어요. 그 집 엄마가 ‘목사님 얘가 목사님 주일마다 왼쪽 볼에 뽀뽀해주던 우리 딸입니다. 고3입니다. 이번에 대학 들어간답니다. 세월이 그렇게 교회 개척할 때 우리아들은 여섯 살이었고 우리 딸내미는 두 살이었는데 두 살짜리가 특전사까지 갔다 와서 이제는 올해 장가를 갑니다. 거울에 쳐다보면 정말 우리의 인생이 그렇게 속히 지나갈 수 없고 살같이 빠르고 시인이 고백했던 것처럼 주께서 우리 인생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지 모릅니다. 그게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러고 살다보면 우리아이들이 이 교회에서 세례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자라고 우리는 늙어가고 어느덧 세월이 흘러가고 나면 그 아이들이 교회에서 좋은 형제자매를 만나 결혼을 하고 함께 뛰어다니던 형제자매들이 두 손을 마주하고 양가에 인사를 하는 인사를 하는 사돈 간이 되고 그리고 그 아이들이 자라고 얼마 지나고 나면 그 아이들이 유아세례를 받는다고 하고 그러면서 우리는 점점점 점점 늙어가는 아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은 얼마나 바람같이 날라 가고 그리고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은 얼마나 짧고 유한한지 한번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여러분 그렇게 하면서 살다가 결국은 우리의 인생이 이 풀잎의 이슬처럼 사라져 버리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아마 오래 살면 90세쯤 살 것이고 평균 연령대로 살면 80세쯤 살 것이고 그보다 좀 더 일찍 가면 70세쯤 넘어서 우리의 인생을 하직하게 될지도 모르고 혹은 자연적으로 수명이 다 할 수도 있고 혹은 어떤 질병에 걸려서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수도 있고 사고로 하나님의 나라를 갈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를 하나님 나라에 나르는 교통수단에 불과합니다. 미래에 일어날 모든 일들에 대해서 아무것도 확정 할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지금으로부터 52년 전 저는 강원도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았고 그리고 온 지방 종가 집에서 14년 만에 태어난 어린아이였고 가족들의 사랑을 독차지 했고 사업을 하시는 아버지를 따라 강원도에 들어갔고 거기서 저는 유치원을 다니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 예배당에서 하던 그 유치원 마당 컴컴하지만 반질반질하게 잘 닦여진 마루 거기에 있던 노란색 파란색 붉은색 세모 네모 그리고 동그랗게 된 여러 가지 많은 완구들과 특별히 나무벽돌이 생각이 납니다. 겨울이면 동네 형들과 함께 연을 날린다고 뒤에 밭을 뛰어다니고 얼음위에서 팽이를 지치고 있는 형들의 모습을 벙어리 잡감을 끼고 토끼 귀마개를 하고 신기한 듯이 쳐다보던 생각이 납니다. 뒷집아이 지금은 이제 노년이 접어들었을 그 어린 소녀와 함께 유치원을 다니고 노란 유치원 가망을 메고 내려오면서 유치원 담장에 난 파란 풀을 뜯으며 이것이 먹는 것이라고 우기며 가방에 담고 손을 잡고 신작로를 걸어 작은 개울을 건너 우리 동네로 걸어오던 일들이 바로 한 두주전의 일처럼 생각이 나는데 52년 전의 일이 되었습니다. 그때의 그 모든 자동차 지나가던 소리 유치원에서 아이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 시냇물이 흘러가는 소리 그리고 매미 잡으러 다니던 그 기억들이 선명하고 색깔하나도 바래지 않은 생생한 영상처럼 내 마음에 남아있는데 52년의 세월이 흘렀다니 어떻게 이런 일들이 가능하겠습니까? 우리의 인생은 그렇게 속히 지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인생에 살면서 무엇을 하나님 앞에 남길 수 있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찬양)
인생의 황혼이 깃들어서 이 땅에 수고가 끝날 때에 주님을 섬기다 평안히 가리라
사랑의 주 내 주님께
언젠가 우리의 인생도 유한하니 우리가 아무리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사랑을 받으며 눈물로 우리의 교회를 섬긴다고 할지라도 언젠가 우리의 인생이 마감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 우리는 이 슬픔과 수고가 많았던 이 세상의 일들을 내려놓고 영원한 안식에 들려 오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목자로 모시고 일평생 주님을 위해 살았다면 하늘나라에는 붉은 카펫이 깔릴 것이고 천사들의 나팔소리가 울려 퍼질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친히 우리를 맞이하기 위해서 그 보좌에서 일어나실 것입니다. 우리는 죽었으나 우리의 영혼은 육체로부터 이탈하여 우리자신을 볼 수 있으니 우리들이 아마 내려다보면 우리들이 죽었을 때 사랑하는 가족들은 슬픔의 눈물을 흘릴 것이고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들도 우리의 죽음을 보면서 이 땅에 우리들이 남기고 가는 그 지워질 수 없는 가족 간의 애틋한 추억들을 회상하면서 가슴 아파 눈물을 흘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죽은 자의 그 죽음은 산자의 눈물이 되어 사랑하는 교인들의 눈에 흐를 것 입니다. 우리는 결국 운구 될 것이고 마지막으로 정들었던 교회를 한번 들르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의 사랑하는 후배들과 우리의 신앙의 동지들 눈물과 기도로 교회를 섬겼던 사랑하는 지체들이 함께 우리가 천국으로 가는 마지막 길에 배웅을 나오게 될 것입니다 .마침내 우리는 여섯 명 내지 여덟 명의 운구위원들에 의하여 운구 될 것이고 거기에서 우리의 장례를 지켜보던 우리의 후손들은 주먹으로 뺨에 흐르는 눈물을 씻으며 기도할 것입니다. 하나님 저분은 믿음의 용사였습니다. 우리도 잠시 이 세상사는 동안에 저 분처럼 주님을 인격적으로 사랑하고 목자 되신 주님과 함께 동행 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할것이고 그날 우리는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들 가운데 한사람이 되어서 하늘나라에 올라간 후에라도 이 땅에 있는 우리의 교회를 위하여 섬길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몸은 잠시 부활의 그날을 기다리며 무덤에 누웠지만 그 나라에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위대한 나라의 도래를 위하여 이 땅에 있는 후배들과 함께 주님의 교회의 아름다운 영적인 번영과 이 세상에서의 주님의 나라의 수립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침내 부활의 그날에 영광가운데 주님 안에서 죽었던 사랑하는 모든 지체들 그토록 그리웠던 나의 가족들 먼저 갔던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 그리고 가슴 아프게 우리와 함께 일찍 헤어져야 했던 사랑하는 우리의 형제자매들을 영원한 기쁨 속에서 그리스도의 면전에서 다시 해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를 기다리며 살아가야할 우리의 인생의 날들이 조금은 더 남았습니다. 눈물 흘림을 며칠 더 당하며 우리의 행할 길을 더 가면 마침내 찬란한 주의 영광의 빛이 우리를 에우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곳에서 태어나 영적으로 주님의 자녀가 되고 우리의 기쁨과 설움을 함께하며 섬겼던 이 교회 위하여 섬기고 봉사하고 그리고 괴롭고 힘든 일을 만날 때마다 더 괴롭고 힘들었지만 우리 위해 십자가의 길을 가셨던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누구도 미워하지 않고 심지어 우리의 원수들까지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며 살아가는 그런 힘과 소망을 얻게 된 것 아니겠습니까? 이제 여러분과 헤어지면 언제다시 만날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 하나는 우리 모두 새 예루살렘에서 모두 만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그날 영광가운데 만나 서로 얼싸안고 위로를 나눌 그날까지 온 마음을 다해서 주님이 맡겨주신 이 교회를 위해서 이 세상이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땅이 되도록 주님이 우리게 주신 모든 것을 드려 미력이나마 주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의 한 모퉁이에서 주님을 섬기고 봉사하며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의 목자로서 그렇게 많은 것을 우리를 위해 모두 주셨기 때문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