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함의 은혜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기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 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후 12:7-9)
녹취자: 이미란
‘육체에 가시’, ‘사탄의 사자’라는 것이 무엇인지가 명확하지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빛으로 나타난 예수님을 만나고 그때에 눈이 어두워진 것이 시력을 약하게 해서 그것을 두고 한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지만 이 의견은 많은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귀의 통증, 두통 등을 이야기 하지만 우리가 명확하게 그것을 구별할 수는 없는 것이고, 어쨌든 ‘육체에 가시’라고 하는 것은 어쩌면 질병을 뜻하는 것일 수도 있고 육체에 따라다니는 연약한 죄성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그런 것들을 떠나가기 위해서 세 번이나 간절히 간구했다고 하니 그런 육체에 속한 가시가 얼마나 사도 바울에게 불편함을 줬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간절히 구했는데 마지막에 주님께로부터 들려오는 응답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육체의 질병으로 본다면 많은 사람을 말씀으로 고치고 기도로 온전케 하면서 자신은 이런 육체의 질병을 달고 다니는 것이 그에게 얼마나 수치스럽기도 하고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아마 사람들이 비난도 했을 수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고치면서 자신은 고치지 못하는 구나.’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아마 사도 바울이 간절히 기도한 것은 단순히 이 육체에 가시가 불편해서가 아니라 이런 심리적인 것도 복합적으로 있었을 것입니다
간절한 기도 끝에 마지막 들려온 응답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입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너에게 충분한 은혜를 베풀었다는 것이고, 이것은 육체에 가시가 아니라 이 연약함조차도 은혜의 수단이 된다는 것을 하나님이 사도바울에게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비로소 깨닫는 것은 “나의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즉, 자신의 능력이 약하기 때문에 더 많아진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많은 능력을 받았는데 이 연약한 것 때문에 오히려 그 능력의 방향이 올바르게 된다는 뜻이 아닐까요? 많은 능력을 받은 사람은 능력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 하찮게 보이지 않을까요?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을 볼 때 너무 답답한 마음이 들지 않을까요? 그만큼 능력을 많이 받은 사람은 교만할 가능성이 많은 것입니다. 그리고 교만할 이유가 객관적으로 전혀 없는데도 교만한 사람들도 있지만 무엇인가 자기가 남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을 때 교만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주님이 주신 그런 많은 능력들이 자기에게 그런 약점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 능력의 방향이 올바르게 되어서 자신이 온전해짐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어떤 방식으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수많은 병든 사람들을 고치고 귀신들린 사람들을 내쫒고 고장 난 육체를 가진 사람들을 온전케 해줍니다. 그런데 자신은 여전히 육체에 가시를 가지고 있어서 연약합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을 간절히 의지하고 매달리면서 비로소 내가 의지할 것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 능력이 아니라 나를 오늘도 붙들고 계시는 주님뿐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지 않았을까요? 그러면 어떤 상황에서 이런 반성이 나왔을까요? 사도바울이 자신의 여러 가지 많은 약점을 발견하고 ‘나의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게 되는구나.’하고 쉽게 자신의 약한 것을 인정해버렸기 때문에 이런 기도와 이런 깨달음이 오게 된 것은 아닙니다.
자만한 마음만큼 신앙에 있어서 해가 되는 게 자기 위로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자기를 위로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세울 수 없습니다. 육체에 가시가 있으면서 하나님 앞에 충성된 삶을 살려고 했을 때 그것이 너무 불편해서 하나님 앞에 그것이 물러가기를 간절히 기도할 때 사도바울에게 하나님의 이 음성이 들린 것입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약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되기 위해서는 그 약한 것을 쉽게 인정하면서 자기 위로에 빠져서는 그런 신앙의 경지에 이를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약한 것을 보면서 매우 안타까워하고 이 약한 것 때문에 불편한 나를 생각하는 자애의 마음이 아니라 나의 이 하나님이 주신 많은 능력이 나의 이 육체에 가시 때문에 온전히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그 약점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자신의 사명을 이루어가려고 하는 몸부림이 마지막에 하나님과의 교통을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쉽게 자기 위로에 빠지는 것입니다. 어떻게든지 자신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온전해지려고 애를 쓰고 온전하게 섬기려고 애를 쓰고 하는 사람에게 주님은 ‘괜찮다, 내가 너의 약점을 안다, 약한 데서 나의 능력이 나타난단다,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와 같은 이런 위로를 주실 것을 기대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기 약한 것을 아주 쉽게 자기를 용납하면서 스스로 자기 위로 속으로 들어가면 그 사람은 그 약한 것을 통해 강해지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많은 눈물, 많은 기도, 많은 몸부림과 안타까움 속에서 자신의 약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만나주셔서 “내 은혜가 내게 족하도다” 라고 말씀하시고 그 매였던 끈들을 풀어주면서 영혼을 자유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그 많은 능력을 받았어도 교만할 수가 없고, 약할 수밖에 없던 비밀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바라는 것은 가시 때문에 방해를 받은 나의 능력이 내게 머물길 원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가시 때문에 오히려 그리스도의 능력이 더욱 충만하게 자신에게 머물기를 바랐고 그 능력이 자신과 함께할 수 있다면 더 약해도 자신은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주님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