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를 회상하라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여호와께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어떻게 하였으랴 (시 124:1)
녹취자: 장미연
신자도 연약한 한 인간에 불과합니다. 매일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때론 이 세상에서 어려운 일을 만나거나 삶의 상황이 내가 원하는 대로 전개되지 않을 때 낙심을 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모든 일들이 자신의 뜻대로 잘 되어도 행복하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잘 되지 않아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잘 되면 인간은 교만하거나 오류에 빠지게 되고 잘 안되면 낙심하게 되고 사람과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인생의 좋은 일이 일어나도 좋은 일이 아니고 나쁜 일이 일어나도 나쁜 일입니다. 그래서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본인의 현실에 갇혀서만 우리들이 살면 인생은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우리를 에워싸고 보이는 이 현실이 너무나 쉽게 요동치기 때문에 그 현실에 우리가 메여있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면 우리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예화) 오늘 아침에 잠깐 신문을 얼핏 보니까 8천 400억짜리 슈퍼볼이 한 사람이 당첨 됐다고 하더군요. 세금을 다 빼고도 5천 400억을 가져갔다고 합니다. 한 번에. 그것은 평범한 직장에 근무하는 50세 좀 넘은 아주머니가 당첨됐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부러워할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역대에 슈퍼볼에 당첨된 많은 사람들을 보면 불행해졌다는 것이 진단이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로또 당첨된 사람들을 추적을 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이 불행해졌습니다. 큰 금액에 당첨된 사람들. 왜 그럴까요? 얼마나 좋은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불행해지잖습니까? 이 아주머니가 어떻게 되는지 두고 봐야겠습니다.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은 “32년 된 직장을 좀 쉬고 싶다.” 그리고 “이 돈으로 무엇을 할지에 대해서 구체적인 생각에 도달할 때까지 혼자 있고 싶다.”라고 했습니다. 모르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에서 현실만 보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현실 너머에 있는 어떤 빛으로 그 인생의 의미를 끊임없이 생각하며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일종의 철학이고 성찰이고 신앙입니다.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렇게 긴 서론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다윗의 시입니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입니다. 아마도 성전에서 하나님을 경배할 때 늘 부르던 그리고 들리던 찬송이었던 것 같습니다.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을 경배할 때마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찬송하자 그런 뜻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과거를 회상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현실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진리이지만 그 진리를 자기와 관련 있게 만드는 것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미래에 대한 전망과 과거에 대한 회상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미래에 대한 전망은 약속에 대한 믿음으로 제시가 되는데 하나님이 이러 이러한 일을 하실 것을 너희는 믿어라는 뜻입니다. 미래에 “너희들이 가나안땅을 차지할 것이다. 다윗의 위가 영원할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미래에 대한 전망이 믿음의 대상이 되는데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이 나오는 히브리어가 있습니다. “자카르”()입니다.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너희는 기억하라. 기억하라. 기억하라.” 그 다음에 “잊지 마라. 잊지 마라. 잊지 마라.” 수없이 나오는 얘기입니다. 특히 신명기서에 한 없이 반복해서 나오고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내어 주시고 광야에 인도해 주시고 마지막에 가나안땅에 들어가게 하신 그 구원의 역사를 “잊지 마라. 잊지 마라. 잊지 마라. 기억하라.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신약에서는 한 가지 사건으로 그것이 집약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죄 가운데서 너희를 건져내어 빛의 나라로 옮기셨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위해 죽으셨느니라. 기억하라. 기억하라. 기억하라. 잊지 마라. 잊지 마라.” 이게 반복됩니다.
그래서 신앙에 있어서 이 회상이라고 하는 작용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너무 너무 필수적인 작용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대한 올바른 회상이 없이는 미래에 대한 올바른 전망을 가질 수 없습니다. 사도바울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3:14)” 왜 달려갑니까? 붙잡으려고. 그리스도께 붙잡힌바 된 그것을 붙잡으려고 간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대한 회상이 있기 때문에 미래에 붙잡아야할 전망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다들 신앙에 있어서 과거에 대한 회상은 미래에 대한 전망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봅니다.
오늘날은 우리가 그렇게 배우고 있지 않습니다. ‘계속 꿈을 꿔라’ 그리고 근거도 없는 꿈을 꾸면서 앞으로 투사를 시킵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치는 신앙의 원리는 “구원의 빛 아래서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되새길 때 미래에 대한 전망이 생겨나게 된다.” 라고 봅니다. 우리가 ‘이런 직업을 가질까? 저런 직업을 가질까?’ 아니면 ‘결혼을 할까? 말까?’ 아니면 ‘나는 일찍 죽을까? 늦게 죽을까?’ 이런 모든 것들은 삶의 본질이 아니라 양상입니다. 그 양상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중립적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양상을 미래에 대한 전망으로 간주하고 우리의 삶을 몰아가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고 구원하신 계획과는 사뭇 다릅니다. 그러면서 믿음을 따라 걷습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과거에 대한 회상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인생의 전망을 내놓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회상은 너무 너무 중요합니다.
아마 이 시를 지었을 때 다윗은 이제 언제였는지 정확하게 기억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아마도 인생의 말년이 아닐까 이렇게 추측을 합니다. 최소한 그렇지 않다면 모든 전쟁의 위험이 다 끝나고 주변에 나라를 모두 복종시키고 평화가 왔을 시기, 그 때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압살롬의 반역 그 이전일 수 있습니다. 저는 그런 때에 이 시를 지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여기에는 전쟁과 죽음의 위협이 완벽한 과거에 사건들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건 결국 성전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뵈옵는 사람들은 모두 우리로 말하자면 오늘날 성령 충만한 사람들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성전으로 올라갔던 사람들은 아들을 못 낳아서 첩한테 구박을 받고 멸시를 당하여 아들 하나만 낳게 해달라고 애원하던 여자도 올라가고, 나라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왕들도 올라갔습니다. 성경이 그것만 기록해서 그렇지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었을 것입니다. 하늘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중에는 직장을 다니다가 고달파서 때려 쳐야지 못 살겠다고 올라가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아주 현실적인 문제들을 가지고 다 올라갑니다. 가슴에 설움을 안고.
그런데 거기 올라온 사람들에게 이 노래를 부르며 혹은 들려주며 한 의무를 상기시킵니다. 그게 뭐냐면 과거에 하나님이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셨는지를, 어떻게 승리로 이끄시고 그들을 보호하셨는지를 회상시킵니다. 여기에 보면 홍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스라엘은 강우량이 적은 곳이지만 이렇게 메마른 벌판들이기 때문에 비가 오면 일순간에 막 비를 담아 두질 못하고 물들이 한 곳에 모이면서 강한 탁류가 되어 흐릅니다. 그게 성경에서 여러 번 나오는 엄모라는 홍수입니다. 그러한 기세로 밀려올 때 모든 걸 덮어버립니다. 전쟁이 바로 그런 홍수로 묘사가 됩니다. 적군이 창궐하고 우리는 도저히 그들의 힘에 미치지 못할 때 적군의 노도와 같이 밀려오는 적군들을 하나님이 그 전쟁에서 막아주시지 않았더라면 물이 온 땅을 삼킨 것처럼 자신들도 삼키게 되었을 것이라고 회상을 합니다. 그러면서 그때 하나님이 우리를 건져주신 것을 회상합니다. 우리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과속으로 질주하는 차와 같습니다.
(예화) 이렇게 차가 한 30 킬로로 천천히 달릴 때에는 다 보입니다. 우사인 볼트가 은퇴했지만 아무리 빨라도 계산해 보니까 시속 35킬로로 달립니다. 차를 몰 때 최고 속력으로 몇 킬로까지 내봤습니까? 나는 230킬로까지 내봤습니다. 서울에서 목포까지 2시간 만에 도착했습니다. 요새는 그렇게 안합니다. 요새는 천천히 달립니다. 한창 열렬하게 피가 끊을 때 당회를 하다 열을 받았다든지 제직회를 하다 열을 받았다든지 하면 차를 몰고 막 미친 듯이 달렸습니다. 결국 다 객기였는데 그렇게 달렸었습니다. 그러면 놀라운 게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약 350킬로의 속도로 달리면 보이는 각도가 4도 밖에 안 보인다고 합니다. 그렇게 질주를 하면 나머지는 (풍경이 아니라) 줄이 되어서 지나갑니다.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통괄적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이 안 됩니다. 그 상황이 없는 다른 사람이 보면 잘 보이는데 자신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축구는 뛰는 사람이 잘하는 게 아니라 저 위에서 내려다보는 사람이 잘하는 것입니다. 주변이 잘 안 보이게 됩니다. 그러니 어쩌다가 슬프고 힘든 일을 만나면 요기만 보입니다. 옆에는 안보입니다. 4도안에 들어오는 건 보이는데 그러니까 가슴을 막 쥐어뜯으며 괴로워합니다. ‘아, 진짜 죽어버릴까?’ 아니면 ‘열린교회가 되게 힘든데 거기 있어야 되나? 도망가볼까? 어디 좀 헐렁한 교회는 없을까?’ 없습니다. 별 생각을 다 해봅니다. ‘아, 이것저것 힘든데 확 시집이나 가버릴까?’ 거기 가도 역시 또 쓰레기차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딘들 없겠습니까? 그것만 보입니다. 그런데 옆을 보면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는 조짐들이, 격려를 받을만한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단 하루를 더 살고 싶어 할 정도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회고입니다. ‘예전에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하셨나?’ 회상합니다.
(찬양)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시름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찌라
두 가지를 생각합니다. 하나는 정말 하나님이 나를 기쁘게 하셨던 때를 회상하고 어떻게 하나님이 나와 함께 동행 하시고 나를 이끌어주셨는가를 생각합니다. 또 하나는 지금보다 더 고통 받던 때를 기억합니다. 그러면 얼마나 감사한가 생각하게 됩니다. 어차피 십자가 없는 인생의 길은 없습니다. 아마 예수를 안 믿었더라면 주님과 상관없는 멍에를 지고 죄 가운데 살다가 죽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쉽고 가벼운 멍에를 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멍에를 짐으로서만 쉼을 얻게 하시고 당신을 배우게 하십니다. 그렇게 과거를 생각하고 나면 하나님의 은혜가 그립습니다. ‘아, 그랬구나. 주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셨구나. 그리고 하나님이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이 나를 손가락질하고 무시하고 때로는 이 양심이 나를 괴롭게 하고 때로는 나 자신이 살아갈 모든 의욕을 잃어버리는 것 같은 때도 결국은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이끌어오셨구나.’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격려를 받습니다. 그건 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 은혜 안에서 자신의 비참을 인식하는 것과 그냥 자신이 스스로 믿음이 없어서 스스로 비참하게 여기는 것 사이에는 아주 뚜렷한 차이가 있습니다. 전자는 그걸 느끼면 느낄수록 주님의 품에 파고들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나는 주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내가 어디로 가겠습니까?’라는 고백을 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후자는 그냥 하나님을 원망하고 죽어버리기 쉽도록 그렇게 이끌어 갑니다. 그게 마지막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부인하면 그렇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뚜렷한 차이입니다. 그래서 한 번 해보십시오. 오늘부터 기도하기 전에 조용히 기도하지 말고 먼저 생각을 하십시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하셨는가? 그리고 최근에 혹은 이 교회에 와서 혹은 오기 전이라도 내 인생에 가장 하나님 때문에 감격스러웠던 일 그리고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아주 소중하게 사용하셨던 기억을 떠올려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해보십시오. 그러면 이렇게 사소한 일로 마음이 상하고 힘들었던 것들이 싹 물러나면서 지금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확신이 떠오릅니다.
두 번째는 가장 고통 받고 어려웠던 때를 회상해보십시오. 그러면 지금은 정말 좋은 때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때도 내가 주님의 은혜로 이기며 살았는데 지금은 왜 못 이길까?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결국은 감사하는 마음을 하나님을 찬송하는 마음을 그런 하나님을 향한 찬송과 경배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게 삶이지 미친 듯이 달려가면서 4도 각도로 보는 그것이 우리의 인생에 모든 것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