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로 염려를 극복하라
(1998년 설교모음)
설교기간|1998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성도다운 기도(잠30:7-9) 1998.7.12 주일오후 1
2. 공급하시는 하나님(시23:2上) 1998.7.19 주일오후 16
3. 어려울 때는 믿음으로 삽니다(합3:17-18) 1998.7.26 주일오후 32
4. 여호와께서 붙드시는 자(시37:23-25) 1998.8.2 주일오후 44
5. 믿음과 의심(출14:10-11) 1998.8.16 주일오후 53
6. 물과 피를 흘리심은(요19:34) 1998.8.23 주일오후 64
7. 절망의 밤을 지납니까?(민14:1-3) 1998.8.30 주일오후 75
8. 절망 속에 파고드는 원망(민14:2) 1998.9.6 주일오후 87
9. 절망과 뒤로 물러섬(민14:3) 1998.9.13 주일오후 83
10. 견고한 자의 헌신(고전15:58) 1998.9.20 주일오후 106
11. 광야로 나아가라(출8:28) 1998.9.27 주일오후 115
12. 낮아짐과 하나님의 축복(신8:16) 1998.10.4 주일오후 124
13. 치료하시는 그리스도(말4:2) 1998.10.11 주일오후 129
14. 옛적 길로 돌아가라(렘6:16) 1998.10.18 주일오후 139
1.성도다운 기도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30:7-9)
오늘 지혜자는 우리에게 자기가 죽기 전에 하나님 앞에 구하는 두 가지 일이 있었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자기 자녀들에게 가르쳐준 것이었기도 했지만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그가 자녀들에게 가르쳤던 것들을 상기시켜 주시는 이유는 또 이 기도가 우리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에게도 기도 제목이 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기도하며 사느냐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리고 무엇을 바라보고 목표를 하고 산다고 해서 우리가 다 목표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목표가 어떻게 설정되었는가에 따라서 이제 우리의 인생에 방향도 많이 달라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도달하던 도달하지 못했든, 우선 우리가 무엇을 추구하며 사는가 하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지혜자는 이제 인생을 오랫동안 살면서 하나님 앞에 지금도 기도하고 있는 두 가지 일이 있다. 그 두 가지를 하나님이 죽기 전에 응답해주시기를 소원한다. 아마 기도 제목이 있으면서 그 기도 제목이 성취되기를 바라는 긴장 속에서 인생을 살아온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첫째는 허탄과 거짓된 것을 버리는 것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부하게도 마옵시고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자, 먼저 이 두 가지가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먼저 주목하고 싶어합니다. 허탄과 거짓을 버리는 것은 결국 하나님 앞에 선 하나님의 백성에 내면의 세계에 대한 끊임없는 점검을 보여주는 것이고, 그리고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 앞에 구하는 이 모습은 결국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그가 삶의 초점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기도 제목이라고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도 오늘 여러분들에게 두 가지 기도 제목을 따라서 말씀을 드리는 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바를 따르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먼저 지혜자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백성이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에 끊임없이 기도해야 할 것은 허탄과 거짓된 것을 버리는 것이다. ‘허탄하다’라고 하는 말은 가치가 없는 것, 가치가 없는 것을 추구하는 허영, 또 쓸모없는 것을 추구하고 분수에 맞지 않는 목표를 세우고 거기에 자신의 인생을 소진하는 쓸데없는 삶, 이런 것들이 모두 허탄한 것입니다. 허탄을 뜻을 품으면 우리의 인생은 그만큼 낭비를 가져오게 됩니다. 허탄한 뜻을 품으면 허탄한 뜻을 품는 것만큼 우리의 인생을 많이 쓸데없는 일에 낭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고 나서 후회가 되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고백은 무엇인가 하면,
그 귀한 세월 버리고 주께 옵니다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믿고 옵니다
아주 어렸을 때, 젊어서 변화를 받고 믿음으로 산 사람들은 그 말이 별로 실감이 나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허탄한 데 뜻을 두고 쓸데없는 일에 자신의 인생을 다 허비해버리고 주님을 믿게 된 사람들은 얼마나 마음 아픈지 모릅니다.
언젠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지속적으로 와서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은 연로하신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이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눈물 맺힌 눈으로 손수건을 손에 들고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목사님, 내가 이런 신앙의 이치를 젊어서 깨달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러더니 그 다음에 하는 말이 재미있었습니다. “그래도 지금이라도 깨달았으니 짐승처럼 살다가 죽지 않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허탄한 데 뜻을 두게 되면 그만큼 우리의 인생은 쓸모없는 것을 위해서 많은 허비를 하고 허랑방탕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식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살아서야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허탄한 것을 먼저 버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허탄한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허탄한 꿈들을 꾸는 것입니다. 이 허탄의 꿈들은 모두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중심적인 가치관과 인생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제는 성경이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귀를 기울여야 됩니다.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그의 십자가의 피로 살리심을 얻었으면 이제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 주님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죽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처럼 구원의 놀라운 은혜를 입고서도 우리가 여전히 나만을 위해서 살고 우리가 여전히 나만을 위해서 인생을 계획하고 꾸려가는 삶을 산다면 그것이 바로 허탄한 생각입니다.
‘오늘은 이 도시에서 장사해서 돈을 벌고 내일은 저 도시로 가서 무슨 일을 해서 이득을 보리라’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뭐 허탄한 것이겠습니까? 그러나 목표가 없이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모든 삶은 허탄하기 그지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그 앞에서 구원받은 내가 누구이고 이제 내 인생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 하겠는가 하고 깨닫는 일이 없으면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처럼 꿈도 없이 허영심도 없이 아주 현실적인 사람으로 매일매일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가 이미 허탄한 것이다는 것입니다. 허황한 꿈을 꾸지 않아도 허탄하고 여러분이 허영에 들뜨지 않아도 여전히 허탄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허탄한 삶은 아예 목표 자체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삶의 좌표 자체가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저 자기가 이 세상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이면서도 쓸모없는 일에 자신을 모두 소진하고 자기를 허비하면서 사는 삶이 바로 그것이 허탄한 삶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렇게 목표도 없이, 꿈도 없이 그렇게 인생을 살아가고 그저 개가 온 동리 골목을 돌아다니면서 코를 벌름거리며 어디 먹을 것이 있나 하면서 오물통을 뒤지는 것과 같이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오늘은 어떻게 내 육체를 즐겁게 하고, 내일은 어떻게 한번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면서 한번 빗나는 인생을 한번 살아볼까 하고 그렇게 코를 벌름거리고 다니는 개처럼 그런 삶을 사는 것을 보고 그러다가 어쩌다가 그 사람이 성공을 거두었을 때, 그런 허탄한 삶의 성공을 보고 부러워하는 것이 우리라고 할 것 같으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매우 부끄러운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모두 허탄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하나님을 알고 자신이 그분의 섭리에 의해서 창조되었기 때문에 내 인생이 어떤 모습으로 이 세상에서 살던지 내가 하나님의 쓰심에 도구가 되어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 드리는 그런 인생이 되어야 할 것이다 라는 소망없이 사는 사람들은 가난하건, 부요하건, 허영에 들떴건, 현실감각을 가지고 있든, 성실하든, 게으르든, 그들의 삶은 모두 허탄한 것입니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고,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지혜자가 일용할 양식에 앞서서 허탄한 것으로부터 자기를 멀리 하도록 도와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은 인생의 본질적인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이런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예수는 죽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예수님의 참사랑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나같은 사람을 이렇게 죄가운데서 구원해주기 위해서 흠도 없고 점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얼마나 철저하게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서 자기를 다 버리셔야 되는지를 깨달았습니다. 십자가를 경험했습니다. 감격이 있습니다. 죄를 죽이려고 합니다. 은혜 가운데 거하고 성령의 죄의 근원을 불태우는 능력의 역사를 맛보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입고 정결해진 사람이 이제 무엇으로서 자기를 그렇게 정결하게 하시고 구원의 은혜로 죽은 상황에서 자기를 다시 살려주신 그 하나님께 감사의 고백을 할 수가 있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무엇으로 할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삶으로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지 않는 모든 사랑의 고백은 감상주의적인 고백입니다. 센티맨탈리즘입니다. 낙엽이 떨어지면 눈물이 핑 돌고 빗줄기가 내리면 가슴이 찡하고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러다가 해가 맑아지면 없어지고 낙엽이 안 떨어지면 다시 옛 마음으로 돌아가는 그것이 감상이 아닙니까? 왜 슬픈지도 모르고 밑도 끝도 없이 그냥 그저 그렇게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느끼는 것, 순간순간 다가오는 어떤 상실이나 애정같은 마음, 이런 것이 감상주의 아닙니까? 그런 것들로서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사랑을 온전히 고백하고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삶으로 고백되어지지 않으면 그 모든 허탄한 삶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직장 다니면서 월급 받는 사람도 있고, 사업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 장사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 농사짓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거룩한 백수로서 지내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하여튼 다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나라에 갔을 때 주님이 물어보시며 ‘야, 너 무엇을 했냐?’ ‘하나님, 저는 아무아무 회사에 있었습니다.’ ‘거기서 너 무엇을 했냐? 사장을 했냐, 부장을 했냐, 아니면 평사원으로 있다가 잘렸냐?’ 하나님은 그런 것은 안 물어보십니다. ‘그래 네가 거기서 나를 어떻게 섬기면서 살았느냐.’ ‘거룩한 백수로 지냈나이다.’ 백수가 얼마나 좋아요. ‘세상 사람들은 나를 백수라고 불렀지만 사실은 그렇게 아무 일도 없이 지내는 동안에 돈을 버는 일은 없었지만 하나님을 열심히 섬겼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그런 사람들이 실업자가 아닙니다. 왜 아멘을 하지 않습니까? 내가 누군지 다 아는데 왜 아멘을 하지 않습니까? 할렐루야
주님이 주신 그런 소중한 시간과 기회들을 주님을 위해서 쓰면서 사는 삶, 이것을 구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 심정으로 지혜자는 “허탄한 것을 멀리하게 하시옵소서”하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을 향하여 이렇게 확정된 마음, 하나님을 향하여 목표가 정해진 삶, 그것을 구하는 여러분들 되기시기를 바랍니다.
지난 금요 예배 시간에 제가 말씀을 전하는 가운데 그런 도전을 했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은 생명걸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할 기도 제목이 있습니까? 물론 상태가 나빠지고 게으르면 실제로 기도는 안 할 수 있어도 언제나 의식 속에 살아 있어서 진짜 이 기도 제목은 생애적인 기도 제목이고 그리고 이것을 놓고는 내가 정말 생명을 놓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이 기도 제목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나는 정말 하나님 앞에 죽어도 사는 것이다. 그런 기도 제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원대한 복음화와 선교의 꿈일 수가 있고 아니면 그것보다도 훨씬 규모가 작은 꿈일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생명을 다 드려서라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그 기도의 제목이 성취가 되기만 하면 그러면 죽어도 산 것이고 이루어지지 않으면 살아도 죽은 것입니다. 라는 기도의 제목을 하나님을 위해서 가지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삶에 푯대가 없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 지혜자는 지금 하나님 앞에 이 두 가지를 주시옵소서. 허탄한 것과 거짓을 버리는 것과 그리고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주시는 이것을 하나님께서 내게 들어주실 수 있다면 내가 정말 하나님 앞에 더이상 원하는 것이 없을 정도로 그렇게 주님을 위해서 살 수 있겠습니다. 라는 그런 마음의 소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기도의 제목을 가져야 됩니다.
제가 꿈꾸고 그리워하는 교회의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 한번 말씀드려볼까요? 도대체 저 김목사는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기를 요구하기에 모든 사람들이 위로와 그리고 격려가 필요하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이 때에 죄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설교를 들려주는가. 이것입니다. 무엇인가 하면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하나님이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마지막에까지 도달할 수 있는 그 부분이 뭐라고 물리적으로 확정하는 것은 힘들지만 그러나 이런 것입니다. 주님을 온전히 믿고 의지하고 복음 안에서 맛보는 하나님의 은혜와 십자가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깨닫고 그리고 거기에 감격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소명으로 다시 태어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위로의 복을 받을 수 있는 애통하는 자들이고 그리고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존재하는 많은 죄의 담들을 허물고 자기가 그렇게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하고 헌신함으로 자기에게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가 자신의 섬김을 통해서 이웃에 삶 속에 교회 속에 그리고 상한 이 땅 위에 하나님께서 치료하시고 고치시는 도구로 나타나도록 그것을 꿈꾸고 그것을 그리워해서 궁극적으로 자기는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가 자기의 몸에서 존귀하게 되고 그리고 교회와 상한 이 땅을 고치시는 하나님의 통치를 통해서 주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을 말할 수 없이 기뻐하는 성도들, 그런 성도들이 신약 성경이 기대하고 있는 성도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 속에는 기뻐할 것을 가지고 기뻐하는 마음이 있고 슬퍼할 것을 가지고 슬퍼할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죄를 죽이지 못하고 살아가고 삶의 목표를 허탄한데 두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주께서 흐느껴 우시는 자리에서 웃고, 주께서 애통하시는 자리에서 도무지 그 주님의 애통하시는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삶 전체를 드리기 보다는 자신의 삶 속에서 작은 일부분을 떼어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그런 삶을 살고 있고 말씀을 들으면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하나님 앞에 좀더 많은 부분들을 드리다가 죽는 것이 신자의 도리다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일부가 아니라 우리의 전부입니다.
오늘 지혜자가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 앞에 구하고 있습니다만, 누구를 위해서 구하는 것입니까? 그가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구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나마 일용할 양식이라도 없으면 불명예를 당하실지 모르는 하나님의 이름을 염두에 두면서 하나님 앞에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는 결국 그러한 마음, 하나님이 나같은 죄인을 살리셔서 이렇게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해주셨고 그 큰 은혜로 나를 건져 주셨는데 내가 어떻게 주를 위해서 살 것인가. 내게 복음들고 토인들의 창과 칼이 우글거리는 선교지로 돌격하도록 소명을 주시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곳곳에서 수시로 만나는 상처받고 목자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영혼들, 하나님의 의가 사라지고 불법과 불의가 난무하는 어지러운 세상 중에 나에게 남다른 은혜를 주셔서 부르셨으니 이제는 내가 의에 길을 걸어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되겠구나. 그런 생각을 가지고 직장 생활하고 그리고 자기 사업에 종사하고 그리고 이 세상의 삶을 영위해 가도록 하나님이 부르신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그렇게 해서 결국은 그런 마음으로 일주일를 살았던, 삼일을 살았던 그 사람들이 교회에 모여서 우리가 그렇게 갈망하고 꿈꾸던 그런 나라가 정말 오지 않을 것 같은 절망감에 시달리다가 그러다가 교회에 와서 다시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와 예배와 성령에 위로와 은혜를 받으면서 ‘아! 아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들을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결국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손을 통해서 당신의 나라를 이루어가실 것이다.’ 그런 신념으로 다시 충만해지고 그래서 자신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을 고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애통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해서 이 민족을 사랑하고 역사를 사랑하고 나의 삶의 자리를 한없는 애정으로 부등켜 안고 변화된 나 때문에 변화되지 않는 나의 삶의 상황과 그리고 그 상황과 관련된 많은 이웃들의 마음과 영혼의 변화가 오게 되기를 꿈꾸면서 분투하며 사는 삶,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는 교회, 그 교회가 살아 있는 교회입니다. 그렇게 분투하고 몸부림치다가 어떻게 됩니까? 뭘 어떻게 됩니까? 그렇게 살다가 죽는 것이지.
좋으신 하나님이 나같은 죄인 살리셔서 그래서 주님의 자녀 삼아주시고 오늘도 눈을 감고 기도하고 말씀을 펴서 주님 앞에 묵상하면 남이 보지 못하는 은혜를 부어주시고 남이 알지 못하는 깊은 위로와 은혜의 세계를, 그리고 우리에게 바른 길을 가르쳐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정말 은혜이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과의 만남이 끝나고 나면 더욱 상처가 많은 이 세상을 고치고 그리고 아픔과 고통이 많은 이 세상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해서 나아가야 하는 그런 소명감에 불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힘닿는 데까지 주님의 나라를 꿈꾸고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나라가 우리로 말미암아 조금이라도 든든히 선다고 할 때 우리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 앞에 돌리고 우리의 게으름과 교회 안에 존재하는 영적인 무기력으로 말미암아서 이러한 영적인 싸움, 그리고 이 땅을 고치고 새롭게 하는 교회의 사명이 온전히 완수되지 못할 때, 그때 하나님 앞에 자기의 일처럼 생각하고 아파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그러면서 사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살아가는 삶은 인생을 살면서 자기의 좋은 것만을 취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모든 사람들의 삶 같이 아름답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왜 허탄한 것일수록 아름다워 보이고 허탄한 것일수록 더 찬란해 보이고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입니다.
한번 여러분, 비가 많이 온 다음에 뒷산에 올라가 보십시오. 이름 모를 버섯들이 많이 돋아나는데 저는 어떤 버섯이 먹는 것이고 못 먹는 것인지 감별하지 못합니다만, 어떤 사람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못생긴 것을 먹으면 안전하다’ 그런데 아름다워 보이는 버섯은 모두 독이 있다고 합니다. 주위에 다니는 여성들도 한번 보십시오. 이렇게 수수한 사람은 다 본 바탕에 자신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뭔가 덕지덕지- 우리 교회에는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 닫힌 교회에 가면 많습니다.- 바른 그런 사람들은 정말 자신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뭔가 많이 꾸미려고 하는 그런 것은 뭔가 자기 자신에게 자신이 없는 것입니다. 세수하고 그러는 것은 꾸미는 것이 아니고 위생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정말 자신 있는 그런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어서 정말 힘을 다해서 우리의 상한 이 땅을 고쳐주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우리를 도구로 사용하셔서 고통하는 이 세상에 진정한 평화가 오도록 하나님 앞에 몸부림치면서 그래서 그렇게 살다가 주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에 하나님의 그 손에 이끌려서 하나님 앞에 가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 세대에 주님이 오시면 더더욱 좋거니와 안 오셔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께로 가면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살면서 이 땅에서 우리의 힘이 연약하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더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정말 위대한 부흥을 위해서 가슴 저미는 슬픔을 가지고 아버지 앞에 기도할 수 있다면 그는 거의 끝까지 간 사람입니다. 아니 그가 완전한 사람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 기도의 정신에 있어서는 거의 끝까지 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고통하는 이 세대를 아파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범죄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자기를 화목 제물로 드려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그렇게 우리의 피어나는 젊음, 우리의 피어나는 인생을 하나님과 그리고 주님을 모르는 이 세상 사이에 그렇게 제물처럼 바쳐서 우리의 희생을 통해서 그 아버지의 나라가 이루어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 이런 사람이 바로 허탄한 것을 버린 사람입니다. 여러분, 주님 안에서 꿈꾸는 꿈이 아니면 모두 허탄한 것입니다.
제가 결혼하는 형제 자매들에게 사전에 교육을 시킵니다. 한번 혹은 두 번, 교육을 시키는데 할 때마다 꼭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결혼은 가장 속되고 세속적인 것이 될 수도 있고, 또 가장 신령하고 거룩한 것이 될 수도 있다.” 성경이 하나님에게 관심이 없고 막 사는 사람들을 가르쳐서 시집가고 장가간다고 표현한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느니라. 주님을 경외하고 주님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 그래서 인생의 목표 자체가 주님을 향해 고정된 사람, 이런 사람들만이 허탄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떠나서 꾸는 모든 꿈, 모든 행복은 허탄한 것입니다. 허탄한 것을 추구하며 사는 사람의 마지막은 멸망 밖에는 아무 것도 없고 그런 것들을 추구하고 사는 동안에 그는 하나님 앞에 가장 쓸모없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이제 두 번째, 지혜자가 기도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거짓을 멀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삶입니다. 정직한 삶은 결국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삶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떠난 위로보다는 오히려 하나님 앞에 서있는 책망을 구하고 그리고 하나님을 떠나서 행복을 누리는 것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고난을 받는 삶을 택하는 것, 이것이 정직이라는 것입니다. ‘바실레아슈링크’라고 하는 여성은 자기의 책에서 그런 고백을 했습니다. ‘진정한 회개라고 하는 것은 단지 죄를 뉘우치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용서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지은 죄에 상응한 징벌을 받더라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기를 그리워하는 그 마음의 자세이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하는 거짓된 회개도 그것입니다. 나쁜 짓 다 해놓고 나서는 ‘하나님, 제가 이러이러한 일을 했는데 저도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바이올시다. 앞으로는 이런 유사한 사례가 없도록 각별히 유의하겠사오니 그만 선처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마치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이 판에 박힌 시말서를 쓰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그렇게 회개하는 것은 정직한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정직은 하나님이 보시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 그렇게 드러나서 오히려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그런 마음, 그것이 바로 정직한 마음이요. 정직한 삶입니다.
우리는 거짓된 마음 속에서 모든 외식과 진실하지 못한 것이 무성하게 자랍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그런 영적인 생활에 진전이 없을 때는 여러분들이 여러분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 앞에 정직을 잃어버린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지 여러분들은 돌아보아야 합니다. 한 2년 전에 저의 교회에서 충격적인 설교가 한 시리즈 울려퍼졌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외식’ 시리즈였습니다. 마태복음 6장이었습니다. 그것은 그 후로도 여지까지도 그 정도로 우리가 함께 하나님 앞에 은혜라기보다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런 설교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마태복음 6장에서 기다리는 가운데 우리가 공통적으로 온 교회가 깊이 깨달았던 것은 외식은 결국은 옛날에 그렇게 술을 길게 늘어트리고 경문을 차고 그리고 길거리에서 손을 높이 들고 폼을 잡으면서 기도하던 그런 의미의 외식은 지금은 없습니다. 지금 누가 그렇게 하겠습니까? 여러분, 교회 앞에서 손들고 기도해본 적이 있습니까? ‘주여, 내가 기도하오니 많은 사람이 나를 쳐다보게 하시옵소서. 주님은 안 보셔도 괜찮습니다. 폼만 나면 되옵나이다.’ 그런 사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런 의미에서 외식하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그런데 외식은 그 시대마다 적당한 옷을 갈아입습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마음의 정직을 몰아내고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부정직한 삶, 겉과 속이 다른 삶을 살게 만들고 그런 것이 우리의 영혼을 질식시키게 만듭니다. 부지런히 은혜의 수단에 참여하지만 그러나 무엇인가 영적인 것이 우리의 마음에 고일 새도 없이 거짓이라는 통로를 통해서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위선이라고 하는 통로를 통해서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삶은 바닥을 드러내는 그런 삶을 살게 만드는 것입니다.
외식 시리즈를 꼭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때 이 후에 오신 분들은 꼼꼼히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 속에 있는 거짓을 모두 드러내기 전에는 그때는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신앙 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정직한 자에게는 하나님이 얼마나 위로를 보이시고 사탁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위엄을 보이십니다. 부정직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위엄이 나타나는 것이 재앙이요. 정직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위엄을 나타내시는 것은 곧 구원의 소망이 됩니다. 어느 때에든지 하나님이 부르실 때에 등뒤에서 호박씨를 까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해서는 우리의 영혼에 축복이 있을 날을 기대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거짓을 버리는 정직한 삶을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옳다고 하는 것은 모두 좋고 하나님이 싫다고 하는 것은 모두 나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을 헤아리지 않을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무슨 일을 집사님을 시킨다든지 아니면 전도사님으로 쓴다든지 할 때 그냥 생각 없이 바보가 아닌데 누구를 시킬까요. 너, 이렇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자꾸 생각을 합니다. 마음에 드는 사람도 있고 안 드는 사람도 있는데 원칙은 있는데 몇 시간을 성경을 읽는가, 아니면 얼굴이 얼마나 잘생겼는가, 못생겼는가, 못생긴 것도 교역자들에게 도움이 많이 됩니다. 교인들에게 소명을 주는 것입니다. 저처럼, 그렇게 여러 가지 판단을 하는데 그것보다 더 원칙이 있습니다. 하나님, 주님이 좋아하시는 사람은 나하고 무엇이 달라도 좋습니다. 주님이 싫어하시는 사람은 아무리 나하고 똑같아도 저도 싫습니다. 주님이 좋아하시는 사람, 생각이 조금 다를 수도 있고, 그리고 뭐가 조금 안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이 좋아하는 사람인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인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고 어떤 상황 속에서든지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 오셨을 때에 그 주님이 우리를 찾아와 주시는 것이 우리에게 혼란을 주는 것이나 놀라게 하는 것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정직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화) 11세기의 대주교의 책의 내용.
왜 폼잡고 기도는 했는데 주님이 자기 기도를 응답해주실 것이라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 주여, 불러도 천국에서는 적막이 감돌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을 깨고 어느 날 주님이 응답하시는 것은 그를 부르려고 응답하신 것입니다.
정직한 사람은 그런 식으로 경기를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허물이 드러났을 때에 진저리치도록 괴로워하고 그것을 합리화시키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을 모함해서라도 자신의 명예를 지키려고 하는 그런 비굴한 것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없이 위로를 받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눈앞에서 책망을 받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 행복한 삶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그는 행복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 행복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말씀을 듣는 여러분 가운데도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 한없이 부담스러운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오! 주님, 이럴 때는 알아서 고개를 돌리십시오. 주님, 나중에 봅시다.’ 문닫고 그리고 일단 한바탕 하고 그 다음에 다 끝난 다음에 ‘주님, 처음에 제가 마음을 먹었던 바이지만 잘못했습니다.’ 그렇게 다시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사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의 진정한 행복은 슬픔도 주님 앞에서 기쁨도 주님 앞에서 심지어는 범죄도 주님 앞에서 주님 앞에서 범죄하니까 주님 앞에서 자기의 죄를 회개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나의 삶은 하나님 앞에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투명하게 하나님을 향해 탁 열고 ‘하나님, 난 이런 사람입니다.’ 그렇게 고백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용서를 우리가 듣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런 사람들을 아주 좋아하십니다. 정직한 사람들, 투명하게 당신 앞에 나온 사람들, 주님께서는 똑똑하고 지혜가 있고 완전무결한 사람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일들을 이루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완전무결하지도 않고 결점과 허물이 많이 있는데도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당신의 일들을 이루시고 당신의 뜻들을 성취해 가십니다. 왜 하나님은 정직한 사람들과 같이 하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정말 우리 앞서서 살아갔던 순전하고 거룩한 성도들같이 그렇게는 살 수가 없고, 우리 앞에 주님의 영광과 교회를 위해서 피 뿌리며 죽어갔던 용감한 순교자들의 뒤는 쫓아갈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사는 것만큼 우리들이 그렇게 살아야 되지 않겠는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적받으면서도 핑계되고 도망이나 치는 것말고 하나님 앞에 자기가 정말 죄를 지적받을 때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잘못했다 고 말하고 내일 다시 가서 범죄할지라도 오늘은 하나님 앞에 정말 잘못했다고 말하고 그리고 주님의 그런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며 살려고 몸부림치는 그런 삶, 그것이 정말 주님이 기뻐하시는 신앙 생활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다윗을 위대하게 보는 이유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다윗이 가지고 있었던 그 놀라운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지은 시편은 성경을 읽을 때마다 저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 아니라 어떤 때는 절망을 많이 줍니다. 야! 이 사람은 나보다도 약 3000년 전에 산 사람인데 이미 나보다도 더 위대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인식을 가지고 있었구나.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궁창 위에 가득찬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리고 하나님의 위대한 영광을 본 사람입니다.
두 번째 그렇게 그 사람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정직한 사람입니다. 왕이 되었는데 간음죄를 범했어도 폼은 오죽 잡았겠어요? 만조백관들이 다 보는 앞에서 왕으로서 위엄을 갖추고 있는데 선지자가 와서 이러 이러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 놈이 바로 너다.’ 그럴 때 왠만한 왕 같았으면 ‘자식이 함부로 말을 하고 있어. 가두어라’ 그랬을 것입니다. 다른 왕들은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그냥 허물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직한 삶입니다. 그렇게 허물어지는 자체가 무엇인가 하면 선지자의 죄에 대한 지적을 통해서 즉각적으로 하나님 이외에는 눈에 들어오는 분이 없는 것입니다. ‘내가 여기서 이렇게 허물어져 버리듯이 주저앉아서 회개하면 저 사람들이 나를 우습게 알 것이다, 사람들이 내 비밀을 다 폭로를 낼 것이다. 이렇게 하면 내가 다시 어떻게 왕 위에 앉아서 백성들을 다스릴 수 있을 것인가’ 그런 생각은 아직 하나님 앞에 아직 접고 사는 것이 많을 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지,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에게 임해서 자신의 죄를 드러낼 때, 그때 하나님 밖에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을 때, 그때 진정으로 정직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완전히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격적으로도 이렇게 잘 접고 사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사람들이 회개도 꼭 외상값 떼어먹는 것처럼 지지하게 외상값 남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잘 갚으면서도 이사갈 때쯤 되면 떼어먹고 도망갑니다. 우리 테입 회원들도 그렇습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 자매가 골치를 썩습니다. 요즘은 안 그러는데 처음에는 믿고 보내주면 잘 내다가 한 석달 쯤 소식이 없어서 알고 보면 사라진 것입니다. 어디로 사라졌는가 하면 선교사로 나갔다고 합니다. 그것을 떼어먹고 무슨 선교사로 나갔는지, 또 사역을 나갔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 그렇게 지지하고 대대하게 사는지 모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를 지적받으니까 하나님 앞에 자기가 완전히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정직한 태도입니다. 무엇인가 사술을 피우고 꾀를 피우고 재주를 피워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감추고 돌아가는 길을 찾으려고 하고 고통을 지지 않으려고 하는 이런 모습, 자기의 자존심과 모든 것을 유지하면서 그러면서도 하나님 앞에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 자기는 죽지 않고 자기 안에 그리스도만 한번 확실하게 사시는 생애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오늘도 불 받으러 다니는 것입니다. 그것이 도대체 무슨 정직한 삶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정말 겸비해져서 주님이 매순간 내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이고, 또 내가 어떻게 아버지 앞에서 살아야 되겠는가 하는 것을 늘 하나님 앞에 깨닫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결혼하는 사람들에게 꼭 미리 가르쳐줍니다. 결혼하면 몇 달 동안은 잘 싸웁니다. 여러분, 결혼한 사람은 다 공통적인 것입니다. 부부싸움은 신앙의 수준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통성기도를 크게 하는 사람이 부부싸움도 크게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형제들은 자매를 고를 때, 너무 큰 소리를 내는 사람을 고르지 마십시오. 신앙의 열정이 있는 사람들이 부부싸움에도 열정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이 무엇인가 하면 그것을 일방적으로 자매보고 죽어지내라. 그렇게 말을 해서 요새 들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형제에게 네가 죽어지내. 그것도 형제를 바보를 만드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제가 공평하게 불러놓고 이야기를 합니다. '결혼을 하면 부부싸움을 꽤 하게 되는데 그것은 조종과정이다. 구조조정 과정이니까 조종과정에서 최소한 그 어려움을 피하는 방법이 오직 하나가 있다. 그것은 두 사람 사이에 주님의 말씀이 최고의 권위를 유지하는 과정이 되게 하라. 그래서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세 살 먹은 어린아이가 말을 해도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면 그 말이 맞는 것 같으면 아멘 하는 수밖에 없다. 네가 가장으로 부름을 받았어도 부인이 이야기를 했는데 그것이 정말 맞는 이야기면 승복할 수밖에 없다. 한번 승복하면 부인도 승복하지 않겠느냐. 그래도 승복하지 않으면 그것은 짐승이다. 그렇게 하면서 사는 것 밖에는 도리가 없지 않겠느냐. 그래서 최소한 그런 기간을 빨리빨리 정리하고 그리고 이제 하나님 앞에 잘 살아야 된다고 하면서 그러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정직한 삶을 살아야 한다'라고 말입니다.
하나님, 저는 성자처럼 살지도 못했고 그리고 자신의 생명을 불꽃처럼 태워서 아버지 앞에 드린 순교자처럼 살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일평생 아버지 앞에 정직하게 살려고 애를 썼고 매를 맞아도 아버지 앞에서 맞고 그리고 엎드려져도 주님 앞에서 엎드려지는 삶을 살려고 했습니다. 내 인생을 그렇게 산 사람만이 ‘이 모습 이대로 주님 받으시옵소서’ 그렇게 고백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도 없는 사람이 ‘이 모습 이대로’ 그러면 왜 받겠습니까? 받아서 무얼 하겠습니까? 맨 거짓과 엉터리가 엉켜있는데 ‘이 모습 이대로 받아주시옵소서’ 그러면서 실눈 뜨면서 받아주시나 안 받아주시나. 이러고 있는 의심 많은 사람의 기도를 받아서 무얼 하겠습니까? 그렇게 자기를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깨트린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모습 이대로 날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
삼손처럼 강하지 못하고 바울처럼 지혜롭지 못하고 다윗과 같이 영화를 누리지 못했으나 그러나 우리는 매순간 순간 나 같은 인생 구원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투명한 삶을 살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같이 하나님 앞에 내게 주님 앞에서는 감추인 것이 없고 주께서 나를 판단하실 때 나는 주님의 의로우심을 찬송할 수 있겠습니다. 내게 징벌을 주셔도 나를 판단하시는 주님은 의로우시다고 찬송할 수 있겠사오니 하나님, 허물이 많은 모습은 허물이 많은 모습으로, 깨닫지 못하고 우매한 모습은 우매한 모습으로 저를 받아주시옵소서. 주께서 고치시면 저는 고침을 받을 것이며, 주께서 새롭게 빚으시면 저는 주님의 손에 의해서 다시 태어나겠나이다. 이런 정직한 삶을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이 사람의 기도하는 바가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며”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기도는 우리에게 무엇을 생각나게 만드는가 하면 여기서는 일용할 양식이라고 표현하는 대신 필요한 양식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필요한 양식인데 일생 먹을 것을 한꺼번에 달라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필요한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는 지혜자의 기도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기도를 생각나게 됩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결국은 매일 매일 먹을 것을 배급받듯이 달라는 문자적인 의미가 아니라 결국은 이렇게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 물질을 구하는 것 자체가 그것을 인해서 뭔가 자신을 즐겁게 하고 영화롭게 하기 위한 그런 목표가 아니라 자기가 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목표 자체가 자기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라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필요한 양식이라고 가르키는 것은 단지 빵 세 개와 물 세 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숫자나 물질의 크기의 문제가 아니라 이러한 기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 지혜자의 사고 방식과 정신입니다. 그 사고 방식과 정신이 무엇인가 하면 이 사람은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어떻게 보면 이런 믿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 제가 우리 교회에서 십일조를 제일 많이 하게 해주십시오” 그것은 십일조를 하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십의 구조를 많이 갖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까? 척 하면 입맞이지. 우리도 알아듣는데 하나님이 못 알아들으시겠습니까? 십일조 많이 하게 해주십시오. 여러분, 그렇게 해서 많이 주시면 주를 위해서 다 쓰겠나이다. 그것이 얼마나 멋있어요. 돈이 많으면 가난한 신학생들 등록금도 내주고, 연약한 지체들 양식도 사주고, 또 병든 지체들을 위해서 약값도 주고, 병원비도 대주고, 집 없는 지체들을 위해서 집도 얻어주고 그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이 지혜자는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으면서 살아온 오래된 경험을 통해서 목표가 무엇이든지 간에 물질자체에 집착하는 인생을 살아서는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벌면 그 돈을 가지고 주님을 위해서 써야지. 그것은 사고가 그렇게 없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지 있으면 달라지는 것이 평범한 하나님의 자녀들의 태도입니다.
누가 지어냈는지 모르지만 저도 어느 목사님의 설교집에서 읽은 것입니다. 진짜 그런 일이 있었는지는 나도 모르겠습니다. 원조는 묻지 말고 들어보십시오.
(예화) 가난하게 사는 형제가 누구의 말을 듣고 강을 건너서 어느 굴 속에 들어가 파보 니 진짜 금덩이를 발견하고 형제가 가난에서 벗어날 것을 기뻐하며 배를 타고 오 는데 침묵으로 건너오다가 형이 금을 물 속에 던져 버렸는데 아우가 깜짝 놀라 물으니 형의 말이 금을 캐러갈 때는 행복했는데 금을 캐어 오는 사이에 ‘네가 없 었더라면’ 하는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다면서 그런 욕심보다는 차라리 동생을 잃 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금을 버렸다고 한 이야기.
어떤 선한 목표를 가진다고 할지라도 일단 물질 자체를 많이 소유하겠다라고 하는 마음 자체를 가지고 그것을 인생의 목표로 거는 것은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크리스챤 사업가가 그런 충고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돈을 벌 궁리를 하면 아무리 훌륭한데 써도 결국은 그 돈 때문에 자신을 더럽히게 되지만, 돈을 쓸 궁리를 하면서 사는 사람들은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 자신을 더럽히지 않는다.’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것을 보면 돈이 없을 때 돈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인간의 소망과 일단 그 돈을 목표로 생각하고 추구하면서 살 때에 인간이 얼마나 더러워지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에 뿌리라”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서 지혜자가 깊이 터득한 것은 한달치 먹고 살 것을 쌓아두고 살아야 하느냐. 아니면 보름치를 먹고 살아야 되느냐. 월급을 타야 되느냐. 주급을 타야 되느냐. 그 문제를 깨달은 것이 아니라 지혜자가 깊이 깨달은 사실은 그런 사실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주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고 허탄한 것을 버리고 거짓을 버리고 살아가려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는 마음 자체가 물질에 기울어진 마음이 되어서는 하나님이 기업으로 여기는 삶을 살아가기 힘들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좀 넉넉하게 살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가난하게 살 것입니다. 넉넉한 사람은 부지런히 퍼서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공부해서 남 주고 돈벌어서 남 주고 사업해서 남 주고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을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없는 사람은 도움을 받고 도움을 받으면서 언제든지 당연하게 생각하지 말고 매우 부자연스럽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여유로운 사람도 살고 또 가난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만 일용할 양식에 수준이 높은 사람도 있고 일용할 양식의 수준이 그야말로 생존수준인 경우도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 경우든지 그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문제는 우리가 부하든지 가난하든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혜자가 이야기하는 것도 그것입니다. 돈이 많아서 하나님을 난 모른다. 왜 난 하나님 앞에 필요한 것이 없다. 내가 하나님 앞에 바라는 것은 내 인생 건드리지 말고 가만히 내버려두셨으면 좋겠다 이런 사람도 되지 않고 또 없어서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삼일 굶어서 도둑질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가서 남의 것을 훔치고 부정한 물질의 유혹을 받아서 그래서 하나님 앞에 범죄하는 사람이 될까봐 두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해도 이 지혜자의 관심은 하나님, 가난을 상정해도 관심은 하나입니다. 문제는 자기가 그 가난을 견디기 어렵다는 것이 아니라 가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마음을 가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허탄한 것을 버리고 정직한 삶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은 삶의 푯대가 얼마나 분명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질이 많다고 해서 물질에 집착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없다고 해서 또 집착을 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없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집착하고, 있는 사람은 있는 것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집착합니다. 그리고 이 물질에 집착하게 되면 부모자식도 안 보이는데 형제들이 보일 리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동기간도 안 보이는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부름을 받은 지체들이 보일 리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지금 이 지혜자가 언급하고 싶어하는 것은 물질 자체가 아니라 물질에 대한 사랑을 정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 지금 심히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부하지도 않고 가난하지도 않은 사람은 다 하나님 앞에 좋은 신앙 생활을 합니까? 그러면 중산층이 제일 신앙이 고산층이겠네요? 그런 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부자도 정말 신실하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있고 그리고 아무 것도 없이 끼니를 걱정하는 사람도 두 렙돈 밖에는 하나님 앞에 바칠 것이 없는 사람도 주님만을 위해서 살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물질의 부피와 크기의 문제가 아니라 더 본질적으로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우리 속에 있는 물질을 향한 사랑의 크기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하는 사람들에게 또 하나 권고하는 것이 물질의 대한 사랑을 잘 권고하는 것입니다. 목표를 거기에 두지 말아라. 재물에 두지 말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정말 온전한 삶을 살아서 매일매일 인생을 살아가면서 주님을 닮아가는데 기쁨을 누려야지, 늘어가는 아파트 평수나 점점 수준 높아가는 자가용이나 그런데다가 우리의 꿈을 두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 앞에 우리들이 그렇게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벌써 집회에 가면 그 교회에 장로님들이나 이런 사람들이 모이면 자기네 교회 무엇을 자랑하는가를 보면 벌써 수준이 다 드러납니다. “이번에 우리가 묘지땅을 많이 샀습니다”. 내가 속으로 ‘많이 묻혀라. 다 묻혀라.’ 어느 사람은 “목사님, 우리 교회는 너무 행복합니다. 우리 교회는 기도회가 살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벌써 영적인 사람입니다. 어디에 가서 참 촌스럽게 그러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 교회를 교회답게 하고 성도를 성도답게 하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만 사랑하고 주님만을 의지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지혜자가 필요한 양식을 하나님 앞에 구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경제적으로 곤궁할 때도 경험했고 부한 때도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런 인생을 굽이굽이 지나면서 역시 인간의 물질 생활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에서 완전히 동떨어질 수 없는 사실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사람들은 하나님 없이는 하루를 살 수는 있지만 돈이 없이는 하루도 살지를 못합니다. 그것이 참 솔직한 것이 아닙니까? 기도가 하루만 막혀도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돈이 하루 막히면 고통을 받게 됩니다. 여기저기서 살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위엄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다른 삶을 살아야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 앞에 열심히 필요한 양식을 구해야 하겠지만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 앞에 정직을 회복한 인생이 되고 하나님의 시선 앞에서 사는 인생이 될 때 우리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인격적인 위탁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인격적인 위탁이 가능해지면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어릴 적부터 부모의 슬하에서 먹고 자랐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이제 나이가 들어 커서 부모를 객관적으로 판단할 상황이 되기 전까지는 부모에 대해서 전폭적인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린아이의 꿈은 아빠처럼 되는 것이고 엄마처럼 되는 것입니다.
제가 이야기를 했잖아요. 제가 육군사관학교에서 방위생활을 할 때 결혼한 애가 있었는데 매일 골목에 나와서 헬리콥터만 날아가면 ‘아빠, 아빠가 저기 탔다’고 했습니다. 방위가 거기에 왜 탔겠어요. 그렇게 아버지를 향해서 절대적인 의존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어린아이는 조금도 아버지가 자기를 버릴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자기는 먹어도 우리는 굶길 것이다 그런 경계심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왜 어린아이의 마음이 아버지에게 온전히 의탁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물질이 없어서 곤고한 것이 아니라 더 큰 문제는 그 물질이 없는 속에서 그대로 바닥까지 드러나고 있는 하나님을 향한 인격적인 신뢰가 없는 우리의 얄퍅한 기회주의적인 믿음, 이것이 하나님 앞에 드러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어떠한 사랑으로,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를 건져서 그래서 우리가 넘어지고 깨트려지고 짖밟히는 가운데서도 주님이 어떻게 우리의 영혼을 버리지 않고 간수하셔서 오늘 이렇게 존귀한 자로 주님 앞에 세우셨는지를 생각하면 어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까지 주셨는데 우리는 일용할 양식이 없어서 고통가운데 내팽개 치시거나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시겠는가 말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염려와 그리고 두려움이 우리에게 닥치고 물질적인 문제로 인해서 우리의 마음이 갈리고 나뉘울 때마다 우리는 그 물질 자체가 아니라 그런 것들을 동기로 해서, 계기로 해서, 시금석이 되어서 오늘날 내가 하나님과 가지고 있는 관계 자체를 위한 한계를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정말 얼마나 더 나의 인격적인 결단을 통해서 하나님께 위타된 삶, 그래서 주님과 함께라면 살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고, 주님과 함께라면 가난해질 수도 있고 부요해질 수도 있고, 그렇게 주님께로 곤고한 때에든지 형통할 때든지 그 상황을 통해서 주님께 더 가까이 가는 그런 기쁨이 인격적인 위탁 속에서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런 주님의 사랑이 의심될 때마다 우리는 우리를 하나님이 어떻게 사랑하셨고 우리 눈에 보기에 가치없어 보이는 것들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와 보호하심이 얼마나 지극하신지를 묵상해야 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들에 핀 백합화를 보아라. 공중에 나는 새를 보아라 수고와 길쌈을 하지 않아도 그들을 입히시고 곡식모아 곡간 안에 가두지 않아도 그들을 기르시는데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는 이런 어려운 때 여러분들이 이런 특별한 은혜로 하나님 앞에 정말 풍족함을 누리며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경제적인 어려움이나 뜻밖에 부딪치는 물질적인 어려움 때문에 이렇게 무너져 가는 모래성과 같이 여러분 자신의 한계를 드러낼 때는 제 마음도 함께 무너지는 것 같습니다. 그 문제는 무너지는 것을 돈으로 막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믿음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어렵다고 하는 이 때에 더욱 어려운 때를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어려운 때에 염려와 근심으로 우리의 마음을 썩이고 우리의 영혼의 살을 축내는 대신 오히려 어려운 때 주님을 더 깊이 의지하고 고난 당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에는 유익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도록 그렇게 주님을 더 붙들고 믿음으로 사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2.공급하시는 하나님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시23:2상)
시편 23편 본문을 말하자마자 여러분 중에 상당수는 ‘아! 그거’ 그렇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저희 교회에서 발간된 테입 가운데 가장 많이 보급된 테입이 시편 23편입니다. 94년도 1월달에 시편 23편이 강해된 이래로 아마 1000세트 이상, 개수로 따지면 12000개 이상, 그렇게 엄청나게 많이 보급되었고 여러분들도 열린 교회에 등록을 하면 첫 번째 코스가 대부분 죄와 구원이고, 두 번째 코스가 바로 이 코스입니다. 세 번째 코스가 양과 목자, 네 번째 코스가 미움과 용서, 다섯 번째 코스가 벧엘로 올라가자, 주기도문 그러면서 사람의 상황에 따라서 이것 저것 엮어서 쭉 나갑니다.
그런데 시편 23편을 제가 여러 번 설교했는데 가장 기록적으로 많이 설교한 것이 1-6절까지를 18시간에 걸쳐서 설교한 것이 가장 기록입니다. 그렇게 설교한 것들 중에 일부가 녹음이 되어서 여러분들에게 보급되었습니다. 해서 이 순간에 ‘아! 우리 목사님이 쫓기다가 설교 준비를 못해서 대충 택했구나’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은 여러분들 마음입니다. 아무렇게나 생각하십시오.
그러나 지난 주부터 저는 시리즈를 하나 하기로 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염려와 걱정으로부터 벗어나는 은혜 생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난 시간에는 잠언을 살펴보면서 “부하게도 마옵시고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하는 그 기도를 우리들이 살펴보았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때도 원고가 없이 했고 오늘도 원고가 없으니까 전혀 다른 설교가 될 것입니다. 혹시 또 비슷한 설교가 나온다고 할지라도 여러분들은 마치 처음 듣는 것처럼 그런 표정을 저에게 보여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2절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히브리어로 보면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제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의 자녀가 된 것이 마치 양떼가 된 것 같은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론 사는 것은 늑대처럼 살고 개같이 살아도 우리는 그래도 양이다 하는 자기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양으로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경험하는 그 놀라운 축복 가운데 하나는 공급해 주시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신령한 일에만 관심을 가지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너무 사소해 보이고 속되어 보이는 것 같은 모든 일에도 하나님께서는 세심하게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어떤 자매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목사님, 귀를 뚫는 것도 응답 받아야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마음대로 하십시오. 통성기도를 하든지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러나 하여튼 귀를 뚫는 것까지는 내가 말할 수는 없지만 귀를 뚫으려면 십자가 앞에 와서 뚫으시기 바랍니다. 구약에 보면 귀를 뚫고 영원히 종이 되는 것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삶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적으로 참 훌륭하고 고상한 사람만 되는 것에 관심을 갖고 계신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직장에서 품위를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것, 여러분의 건강, 여러분들의 인간관계, 또 여러분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필요한 물질적인 공급 이런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관심에 범주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자녀들이 자기 부모에게 뭔가를 구하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빠에게 자녀가 찾아와서 고민을 하는데 초등학교 1학년 애가 “아빠, 질문이 있는데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지 보람되게 살까요?” 그런 것만 가지고 물어보는 것이 아닙니다. “아빠, 저것은 뭐야. 이것은 뭐야. 이게 갖고 싶어. 저게 갖고 싶어.”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차츰 아이들이 자라면서 부모에게 구하는 것들이 함께 성숙해가는 것입니다. 나이가 30-40이 다 되었는데도 자기 늙은 아버지를 찾아가서 “아빠, 사탕 하나만 사줘” 그것은 정신병자입니다. 4-5세 밖에 안 되어서 말도 잘 못하는 아이에게, “내가 너 무엇을 사줄까?” “제게는 아무 것도 필요없나이다. 인생을 아름답게 살 지혜를 주시옵소서.” 그러면 애가 아이큐에 문제가 있는 아이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다 수준에 맞게 끔 노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거짓으로 성숙해진 척 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차피 그 성숙은 배워가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들이 삼가하고 절제하고 하면서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준대로 노는 것입니다. 도저히 도달하지도 않은 수준에서 괜히 폼잡고 허세를 부릴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하나님의 관심사는 여러분들의 근심거리 걱정거리도 하나님의 관심사의 범주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인간이 고민하고 있는 우선 순위와 기도하는 우선 순위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아멘도 하지 않고 놀라지도 않군요. 저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하면 그런 고민하는 문제와 기도하는 바와 관심사가 일치하려면 그 신앙 생활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와 교통을 맺으면서 살아가는 은혜 생활이 전제가 되어야지만 그 순위가 일치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쪽은 이쪽대로 살고 저쪽은 저쪽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를 하더라도 항상 ‘무엇을 먼저 기도해야지만 사람들이 좋아할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나같은 사람에게 무엇을 먼저 기도해야 된다고 그렇게 말할까? 성경은 뭐라고 말할까?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신앙 생활에 저변에는 무엇이 깔려 있는가 하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 결핍이 깔려있는 것입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강제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격적인 승복이 없이는 신앙 생활이 성립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안 믿으려면 안 믿는 것입니다. 자기네 마음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다른 사람은 그렇게 말하지 않던데...” “다른 사람은 뭐라고 말하더냐?” “다른 동리에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어찌할 수 없는 은혜가 나는 세상으로 가려고 했지만 주님이 나를 붙들어주셔서 그래서 거역할 수가 없어서 주님을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이 세상으로 갔으면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 있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으니까 결과론적으로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당연하잖아요.
그러니까 결국은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그래서 자기 스스로 주님을 믿으면서 살아가야 할 절대적인 필요성을 자신의 영혼 속에서 깊이 느껴서 거기에 승복하지 않고는 신앙 생활하는 자체가 성립을 안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마음에 내키지 않는 일을 잠시는 할 수 있지만 오래 동안 지속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더군다나 이게 무슨 고생입니까? 이 우중충한 날씨에 여기에 이러고 쭈그리고 앉아서 그것도 안내 집사님이 자꾸 들어가라고 짜서 완전히 달라붙을 정도로 이렇게 앉아서 지금 뭐하고 있는 것입니까? 예배드리고 있지요.
그렇게 신앙 생활을 하는데 결국은 인격적인 승복이 있으니까 즐거운 곳에서 날 오라고 하여도 오늘 내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오늘도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하면 무엇인가 저항할 수 없는 내부적인 힘이 나를 예수 믿게 만들고 거룩한 성도로 만들어줄 것이라는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물론 ‘나만 잘하면 모든지 다 된다.’ 이런 생각을 해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매순간 우리들이 보다 깊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매순간 순간 결단이 필요하고 그리고 하나님을 온전한 자신의 인격적인 상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인격적인 교통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시인이 1절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렇게 선언한 다음에 주님이 왜 자신의 목자로서 부족함이 없는지를 설명하는데 첫 번이 공급하시는 은혜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가 나를 푸른초장에 누이시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파란 풀밭입니다. 거기에 누이시는 것입니다. 양은 무엇을 먹고 삽니까? 풀을 먹고 삽니다. 풀을 먹고 사는데 양이 파란 풀밭 위를 뛰어다닌다 라고 하는 그림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번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우리는 다 양이라고 생각합니다.
시편 23편을 여러분들이 볼 때마다 여러분들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저는 마음 속에서 다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마음 속에는 우선 파란 풀밭이 있습니다. 그것도 벌레먹은 풀들이 여기 저기 있는 그런 우리 나라 풀밭과는 상대가 안 되고 최소한 뉴질렌드나 호주의 풀밭 정도는 됩니다.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지평선이 초록색으로 파랗게 펼쳐진 골프장과 같은 풀밭이 있고 돌맹이 하나 없고 그리고 그 풀밭과 푸른 하늘이 맛닿아 있고 하늘에는 흰구름이 두둥실 떠가는 그런 풀밭을 여러분들이 연상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양인 여러분들이 그 풀밭을 뛰어가는 것입니다. 왜 뛰어가는지 나는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뛰어간다고 생각을 하고 그리고 양은 자기는 비록 시궁창에 구르고 개골창에 누워서 자고 쓰레기통을 뒤진다고 할지라도 상상 속에 자신의 모습은 그저 양털을 하이타이로 깨끗이 빨고 드라이기로 말리고 린스까지 한 것 같은 그런 순백의 털을 가지고 좌측부터 시작해서 슬로우 비디오로 우측으로 넘어지지도 않으면서 뛰어가는 그런 모습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멘’까지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다 자기가 사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희망 사항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이 쓰레기통을 뒤지고 개골창에 눕는 것 같은 그런 죄 된 생활을 하면서도 마음에 꿈꾸는 바는 그런 푸른 풀밭에서 순백의 양으로 하나님 앞에 나타나고 싶어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면에서 그것은 또 좋은 소원이기도 합니다.
양에게 있어서 풀밭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넘어지면 자기를 보호해 주는 카펫트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으로 양이 풀밭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양이 풀밭을 뛰어논다고 하는 것은 사람이 가난한 시절에 쌀가마 사이를 지나가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왜 그것은 다 양식이니까 그렇습니다.
시인은 ‘주님이 자신의 인생에 목자가 되어주신다’라고 하는 것을 제일 먼저 어디서 발견했는가 하면 공급하시는 은혜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물질을 공급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은혜를 발견한 것입니다. 만약에 악하고 게으른 목동이 아니고 선한 목동이라고 할 것 같으면 양떼들이 여기서 풀을 뜯고 있는 동안에 높은 언덕에 올라서 사면을 두루 보면서 어디에 또 풀밭이 있는가 살필 것입니다. 왜 팔레스타인은 그렇게 기름진 목초지가 없습니다. 군데군데 풀이 있기 때문에 때로는 몇일씩 양을 데리고 걸어갔습니다. 여기서 풀을 뜯고 나면 그 다음에 목초지로 옮겨 갔습니다. 양들은 아무 근심할 필요가 없이 목동을 쫓아서 순종하며 그 뒤를 따라가기만 하면 거기에는 반드시 자신을 풍부하게 살찌울 수 있는 꼴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서 깊이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 오늘 이 시를 쓰고 있는 사람이 다윗이 아닙니까? 다윗은 부귀와 영화도 남부럽지 않게 누린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정말 곤고하고 가난한 세월도 많이 보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정말 가난한 상황을 수없이 많이 겪으면서 그러면서 제사장 외에는 취하지 못하는 그런 진설병까지도 손에 댄 적이 있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허기짐과 굶주림 속에서 많은 날들을 보내고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미친자처럼 그렇게 흉내도 내어야 했던 고달프기 짝이 없는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보다는 훨씬 더 많은 근심을 짊어지고 여러분 보다는 훨씬 외로운 속에서 여러분보다도 더 많은 상처를 받으면서 살았던 그 사람이야말로 상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 말년에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나니까 하나 깨달은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이제껏 내가 산 것이, 내가 움직이고 몸부림쳐서 산 것이 아니라 주님이 공급해주시는 은혜로 살았다고 하는 사실을 깊이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과거를 잊어버립니다.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은 너무 쉽게 잊어버리고 잊어야할 것은 또 잊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만약에 우리의 마음에 상처를 준 사람의 그 악한 행동, 자신에게 상처를 준 것들을 가슴에 꼭꼭 품고 잊지 않게 끔 가슴에 살 깊이 새겨두는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의 추억들을 가슴에 새기고 산다면 우리의 인생은 아마 쓸데없는 침체나 쓸데없는 고민과 소득이 없는 염려로 우리의 살과 뼈를 많이 녹이는 그런 어리석은 행동들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잊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들의 과거를 생각나게 하고 싶습니다. 자, 우리 생각해봅시다. 주님께서 여러분들이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시대는 우리 모든 사람들이 정말 고통스러운 시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매순간 순간마다 그렇게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직장을 잃어버리고 거리로 내몰립니다.
외국 사람들은 우리 나라의 심각한 사정을 모릅니다. 왜 그러는가. 그 사람들은 엄마, 아빠 큰 애들, 작은 애들 심지어 초등 학교에 다니는 애들까지 다 자기 일을 가지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돈을 벌면서 삽니다. 그러니까 아빠 한 사람이 실직자가 되어도 가족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어떻게 된 나라인지 한 사람에게 5-6식구가 목놓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목이 부러지니까 수많은 사람들의 목이 한꺼번에 조이는 것을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정의 구조 자체가 우리는 매우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구라파에 비하면, 여기에서 오는 깊은 좌절이나 절망을 외국 사람들은 쉽게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들어갔다가 나왔다 하면서 취직 하는 것이 얼마나 쉬워요. 우리는 한번 그만두면 다음에는 정말 대책이 없는 그런 비참한 상황입니다.
정말 우리는 이런 어려운 때를 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위기를 통해서 교회에 나오는 사람도 많지만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교회에 이미 나오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살지 않기 때문에 이런 어려운 때에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로부터 많이 빼앗기고 있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때에 우리의 과거를 회상해보는 것은 신앙을 새롭게 하는데에 매우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앙적으로 잘 했던 습관 가운데 하나가 무엇인가 하면 ‘회고’였습니다. 회상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오래 동안 잊혀졌던 일들을 다시 회상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기도하여 홍해가 갈라지던 그때 일이 벌써 수없이 많이 흘렀는데도 사람들은 회상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애굽의 땅에서 건져내시고 홍해를 가르시고 요단의 물을 말리시고 여리고성을 무너트리고 그래서 아름다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기업으로 주신 그 사실을 수시로 회상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회상하는 신앙 생활을 꿈꾸고 또 그 회상 속에서 커다란 힘과 오늘을 살아가는 지혜와 슬기를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어떻게 살리셔서 오늘 여기까지 데리고 오셔서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하셨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넘쳤을 때, 주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넘칠 때 우리가 고백했던 것은 “주님의 은혜가 내게 족하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우리는 지금보다도 경제적으로 훨씬 어렵고 고통스러운 때도 이렇게 고통스러워하지 아니하고 슬기롭게 극복하면서 살았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가 많은 부를 누리게 되었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살기 좋은 그런 삶의 환경과 질을 누리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어려움을 닥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오늘날 우리 신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참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바른 관계를 맺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관계 속에 서 있는 그리스도인지를 갈라내시는 하나님의 훌륭한 키질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키질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골 할머니들이 겨나 많은 지푸라기들을 골라내기 위해서 높이 키를 움직이면 바람이 불면서 겨와 잡동사니는 다 날라가고 무거운 쌀은 다시 키위에 떨어집니다. 6-7번만 반복하고 나면 더러운 불순물들이 함께 섞여 있던 쌀이 깨끗하게 갈라집니다. 하나님이 이 어려운 때를 우리에게 그런 기회로 사용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이와같이 어려운 때에 더더욱 믿음으로 살지 않으면 하나님의 시험에 합격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격려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살자. 어려운 때 신앙으로 살자’ 격려해야 합니다.
자, 무슨 신앙으로 살자는 것입니까? 오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푸른 초장으로 우리를 누이시는, 다시 말해서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라는 사실을 믿는 그런 신앙 속에서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이제껏까지 우리를 먹이고 입히고 그리고 우리에게 각양 좋은 것으로 채워주신 그분이 하나님 아버지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가치있고 그리고 우리가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만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였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상한 보살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시고 어려운 때에 특별히 우리가 물질에 있어서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이인지를 보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이런 인격적인 관계를 점검하게 하시려고 우리를 여기에다가 두시는 것입니다.
이런 시험에서 이기고 여기서 하나님을 더 바라보게 되면 우리는 이런 어려움을 통해서 하나님과 더 가까워진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지만 우리들이 이러한 때에 믿음으로 살지 아니하면 육신의 고통은 육신에게 고통을 주는 것으로 머무르지 않고 반드시 우리의 영혼에 커다란 문제를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믿음으로 인내하고 믿음으로 극복하지 아니하는 모든 시험은 결국은 마지막에는 악으로 이어지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악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이 시험을 슬기롭고 지혜롭게 믿음으로 극복하고 이기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우리들에게 가장 주고 싶어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염려’와 ‘불신’입니다. 특별히 이 염려는 우리로 하여금 형식은 그대로 살아 있어도 우리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을 수 없게 만드는 아주 훌륭한 마약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믿음도 자꾸 연습하면 믿음이 늘어나지만 신앙 생활도 자꾸 연습을 하면 경건 생활도 늘어나지만 그러나 불신과 의심과 염려도 계속하면 계속할수록 그 용량과 강도가 점점 늘어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이렇게 염려를 끊임없이 우리에게 뿌리는 마귀의 궤계를 이길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살았는지는 그가 결핍 속에 놓였을 때, 그리고 너무나 풍부해서 유혹을 받게 될 때, 그때 그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가진 사람인지를 적나라게 드러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가 만약 그리스도와 함께 사귀고 그리스도로 만족하는 그런 충분한 고통과 은혜를 가지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는 모든 것이 결핍된 상황 속에서도 결국은 온전한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더 붙들고 그 관계 속에서 풍요로움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결함이 있고 문제가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러면 그 사람은 반드시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잠시 그것을 잊어버리는 때가 오게 되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무너진 자신의 상황을 모두 그대로 드러나게 끔 보여주는 것입니다.
시인은 어떤 고백을 하는가 하면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고”라고 고백을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자신의 인생에 필요한 모든 물질적인 것이 관계가 있다라는 사실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자, 우리는 여기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다윗의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우리 모든 사람들의 하나님신데, 그러면 다윗에게만 특별히 많은 것을 공급해주시고 우리에게는 공급해주시지 않는가.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이렇게 우리에게 있어서 모든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주시는 분이 하나님신데 우리는 왜 그런 하나님의 공급해주시는 은혜에 대한 참다운 감격이 없는가 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공급하시는 것들이 없는 이유는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이와 같이 어려운 때에 주님이 공급해주실 것이다’라고 하는 간절한 바램과 확신이 없이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저 벌어서 저 먹는다.’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의 삶 속에는 자기 충족감은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나를 도우셔서 이렇게 부요하게 하시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게 하시고 오늘도 부하게도 아니하시고 가난하게도 아니하게 하셔서 주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업수히 여기도록 만들어주는 그런 장본인이 되지 않고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와 신뢰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라고 하는 그런 분명한 의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오늘 시인이 이렇게 주님이 공급해 주신다는 사실을 먼저 고백하기 전에 “그가”라고 말을 합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자기의 목자가 되신 그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이런 모든 물질적인 문제에 있어서 불안해하고 그리고 초조해하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이런 모든 우리의 조급함과 이런 모든 것들은 결국 무엇을 보여주는가 하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근본적인 인격적인 신뢰의 관계가 결핍되어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한마리의 양이 어떻게 목자의 손에 이끌려서 생명을 부지하고 풍성한 꼴을 먹으며 그렇게 생활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보셨습니까? 양은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 살 수 없는 우리 자신의 모습에 대한 반영입니다. 그는 용맹스러움도 없고 빠른 다리나 날카로운 이빨이나 혹은 뛰어난 눈이나 혹은 뛰어난 후각 같은 것들,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자신을 보호 할만한 선한 것들은 아무 것도 없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면서 이 세상에 생존할 수 있도록 그렇게 부름을 받은 그렇게 창조된 동물입니다.
만약에 아프리카 사파리에다가 양떼를 수천마리 풀어놓는다고 합시다. 아주 훌륭한 야생동물에 도시락 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들의 운명은 그런 식으로 잡아먹히는 것밖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사람이 그 양을 돌보아줄 때 그 양은 사파리를 혼자 걸어 다니는 사자보다도 훨씬 더 안전합니다. 그러나 그가 목자의 손을 일단 떠날 때 그의 생명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고 그의 안전은 보장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윗이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라”고 고백을 하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나를 위해 공급하신다고 하는 이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은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품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인격적인 승부없이는 하나님의 축복은 없습니다. 그리고 인격적인 승복과 그분의 품안에서 사는 진정한 승복된 신앙 생활없이 번영하는 것은 멸망으로 가는 지름길이고 패망으로 가는 앞잡이가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할줄도 모르고 주님 앞에 무릎을 꿇을줄도 모르고,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지도 않고, 주님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의지도 없고, 욕망도 없는 그 사람이 이 세상에서 물질적인 부를 누리고 번영하게 되면 뭐가 되겠냐는 것입니다. 그 물질과 자신의 건강을 이용해서 범죄하는 것밖에 그에게 남은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우리들의 조금 나아진 경제적인 생활, 혹은 우리의 마음 속에 점점 쌓인 그런 신앙 지식, 혹은 신앙의 세계 안에서 점점 높아진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맨 처음 가진 재물도 없고 아는 것도 없어서 교회당 문을 열고 들어오면 세상으로 나아가면 세상에서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같아서 주님을 찾고 주님을 찾기 위해서 교회에 들어오면 모든 사람들은 성도처럼 보이고 자신은 그저 이제 신앙의 문을 두드리는 입문하는 교인과 같은 느낌이 들어서 누구에게든지 무엇인든지 배우고 싶어하던 그런 가난하고 신앙을 처음 시작하던 그런 때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것입니다. 왜 그때 그렇게 하나님만 바라보고 주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살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절대적인 의존의 마음을 가난하고 궁핍하고 신앙적으로 어렸던 시절에는 가졌는데 지금은 그런 마음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오늘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신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누구인가 하면 다윗이 무릎을 꿇고 자신의 목자임을 인정한 그리고 거기에 승복한 바로 그분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사업을 하면서 매일 비비꼬이고 하여튼 복의 근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재수없는 사람의 근원이 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사람하고 동업하면 동업하는 사람까지 망합니다. 왜 무엇 때문입니까? 결국은 여러분이 계속해서 경제적으로 어렵고 그리고 여러분들의 삶이 계속해서 실패를 번복하고 있으면 거기에 하나님의 무슨 메시지가 있는지 한번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편에 돌아가서 생각을 해야 합니다. ‘왜 나는 하나님이 안심하고 이렇게 축복해주실 수 없는 그런 사람일까? 어떤 점에서 내가 하나님께 신뢰를 드리지 못하는 사람인가’ 한번 냉정하게 생각해보십시오.
참 저는 인생을 살면서 그런 것을 참 많이 경험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하나 맡기시기 전에 혹독하게 훈련을 시키시면서 동기를 정결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를 거기에 세워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신 후에 하나님께서 물질적인 문제도 해결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결국은 물질적인 축복, 염려로부터 벗어나는 이 길은 결국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공급해 주시는 것인데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풍성한 은혜 속에서 살기 위해서는 먼저 그럴만한 기초가 되어 있는지 먼저 자신을 두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기초와 상관이 없이 ‘난 그런 복잡한 것은 몰라, 하여튼 복만 받으면 돼’ 그런 식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은 그의 인생을 전혀 행복하게 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격적으로 승복되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결핍도 이기게 합니다.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부요한 가운데서도 타락하고 너무 부요하여서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게 만듭니다. 또 신앙은 이렇게 뜻없이 많이 부요해졌을 때 부요한 것을 스스로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줌으로 스스로 가난해지는 마음을 비우는 비결을 체득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차피 인생을 살아가는 그 자체가 ‘내 재능과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라는 기본적인 고백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런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부요하면 그 부요하게 하신 것 때문에 하나님을 찬송할 것이고, 가난하고 궁핍해지면 가난하고 궁핍해진 그것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이전보다 더 많이 의지하고 주님을 사랑하게 할 것입니다.
(예화) 시골 교회의 목사님을 만나 그분의 어려운 상황을 알고 도와주겠다고 한 후에 한참 후에 그분이 다시 찾아와 여러 곳에서 조금씩 물질로 보조를 받고 사는데 목사님께 말하면서 자기가 가난하게 보였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양심에 가책이 되 어서 그것을 고백하기 위해 한 시간 내내 강의를 듣다가 그 생각을 하고 와서 고 백하시는 그분에게 90만원을 가지고 어떻게 5식구가 살겠냐고 하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는 이야기.
이 세상에서 정말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든 물질적인 부를 누리면서 사는 것은 아닙니다. 가난하고 고통스럽고 그런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리고 그런 모든 상황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사는지를 하나님이 보시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난하게 산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 상급이 될 수도 없고, 더욱이 부를 누리며 산 그 자체가 칭찬받을 것이 될 수도 없습니다. 문제는 부하는데 처할 때나 어려운 때에 처했든지 얼마나 우리가 하나님과 견고한 관계를 가지고 가난한 가운데 하나님만 갈망하고 주님의 도우심과 은혜로 살고 그리고 부요한 가운데 얼마나 더 주님을 위해서 섬기고 그 부요 속에서 자신을 살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살았는지 결국은 그것이 우리 안에 맺히는 열매가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시인이 고백하는 것이 그렇게 인격적으로 하나님 앞에 승복하고 나니까 그때 비로소 경험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자신이 몸부림치면서 풀을 뜯어먹고 사는 것 같은 유리하는 양떼 중에 하나인데 그분을 그렇게 인정하고 나니까 인격적으로 그분을 순종하고 ‘내 인생이 주님의 수중에 있사옵나이다.’ 그런 식으로 고백을 하고 하나님 앞에 살기로 그렇게 결심을 하고 나니까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자신이 이끌려서 가는데 가는 곳마다 넉넉한 양식이 있는 그 푸른 초장으로 하나님이 자신을 인도해주신다는 사실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런 어려운 때가 우리에게는 어떻게 보면 말할 수 없는 소중한 때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이와같이 어려운 때에 정말 여러분들이 단지 물질적인 문제 하나 가지고 여러분들이 깊이 고민하고 그 염려와 근심에 가득차서 하나님만 바라보기에는 여러분들의 마음이 너무나 어둡게 되었다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신앙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서 이런 물질적인 가난함과 그리고 순간적으로 부딪친 이 모든 어려움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가지고 있는 그런 믿음의 기초가, 그리고 관계에 기본적인 초석이 얼마나 빈약한지를 우리들이 새삼스럽게 발견하고 우리 자신이 다시 한번 하나님과의 관계를 점검하는 기회로 활용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의 뼈를 말리고 우리의 살을 삭히는 그런 근심으로 우리의 마음을 가득채울 것이고 그런 금심과 염려로 가득찬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할 거룩한 영성으로 채워질 리가 없는 것은 자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와같은 때에 다시 한번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은혜로 사는 사람들이라는진정한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가난하게 되면 가난하게 된 대로 우리는 이 속에서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사는 방법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가운데는 그런 일이 없을 줄 압니다만 여러분, 혹시 이렇게 경제적으로 어려운 때에 십일조 생활이나 하나님 앞에 드리는 헌금을 놓고 여러분 깊이 고민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전과 같이 하나님 앞에 변함없는 삶을 살기로 하나님 앞에 다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신앙을 배웠고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유리하는 양떼와 같았고 목자 잃은 양떼와 같은 세월들을 지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불러 주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신 다음에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 가운데 우리에게 들어주시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었습니까?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기도는 하나님이 무엇이든지 들어주시고 그래서 우리들을 경제적으로 더 부한 사람과 더 가난한 사람은 있었지만 받은 은혜가 족하도록 오늘 이제껏까지 살아오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누군가가 말하기를 ‘빌어먹을 힘만 있어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는데 우리는 이렇게 나름대로 인간적인 생활을 영위해 오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오게 하셨습니다. 순간순간마다 우리들이 누렸던 그 번영과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셨던 모든 물질적인 공급들이 정말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고백이 우리의 삶 속에 있었는지 우리는 우리 자신을 깊이 반성하고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한 순간도 그런 고백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매순간 순간마다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그런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여기에 존재하게 되었고 그런 하나님의 공급해 주시는 물질적인 은혜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알게 하시고 싶으신 것은 하나님 앞에 아양떨면 모든지 생기는구나 하는 이런 소상인적인 사고 방식을 우리에게 깨우쳐 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그런 번영과 물질적인 은혜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리고 싶어하셨던 것은 바로 너희가 사는 것은 너희의 염려와 근심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정말 나의 은혜로 너희가 사는 것이 아니냐. 그런 고백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하는 것이 사실은 돈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있을 때는 번영하는 삶을 살 수가 없었습니다. 실제로 물질에 대해서 깊이 애타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는 물질적인 부를 누릴 수가 없었습니다. 늘 결핍했고 늘 궁핍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은혜를 받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고 굴복하면서 ‘주님, 그 사랑만 있으면 난 아무 것도 없어도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하는 이런 마음을 갖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한참 세월이 지난 다음에 눈떠보니까 ‘내가 그래도 상당히 살만해졌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된 그리스도인들의 간증이 너무나 많지 않습니까?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구하고 찾으면서 당신 자신 앞에 인격적으로 승복하고 당신 자신과의 관계를 새롭게 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도 이렇게 보면 자기가 진짜 나는 재주, 기는 재주 모두 동원해서 자기는 잘났다고 몸부림을 치면서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성실하게 사는데 목회자인 내가 보기에는 앞길이 뻔하게 보입니다. 왜 그는 지금 하나님이 고통 가운데 두신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모든 물질의 공급을 막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물질적인 공급이 막혀서 고통을 받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보복하시려고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너희는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가던 길에서 장애물이 생기고 더 이상 자신이 가던 길을 계속할 수 없는 상황이 올 때는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거기에 멈춰서서 무엇인가 자기를 향한 이 제동의 메시지가 무엇인지 하나님 앞에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 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때로는 경제적인 어려움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런 어려움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단지 돈에 미치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런 기회를 허락하신 것입니까? 하나님이 그런 무지막지한 하나님이십니까? 얼마나 아버지와 같으시지만 또 한편으로는 어머니와 같은 섬세함으로 우리의 인생에 다가오시는 분이신데 어떻게 우리가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가 있는지 우리는 의문이 되는 것입니다.
요지는 이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이 어려운 때에 더더욱 하나님과 투명한 관계를 가지고 싶어합니다. 자신의 인생에 이제 이제껏까지 살아온 모든 날들을 회상하면서 그러면서 이제껏까지 우리를 향해 베풀어주신 그 놀라운 은혜와 사랑이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이었고, 그리고 너무나 오랜 생활 배은망덕한 삶을 살았구나 하는 반성을 하게 합니다. 믿음으로 산 사람들은 궁핍 속에서도 오히려 하나님을 더 많이 바라보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이 궁핍한 기회에 오히려 자신의 영혼을 살찌우는 기회로 삼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이런 속에서 염려와 근심으로 자기의 뼈를 말리고 살을 녹이는 어리석은 방법을 택하는 대신 그는 자신이 처한 이 고난과 어려움을 담대하게 하나님의 손에 의탁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수중에 있고 그리고 하나님이 모든 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고 주님이 나에게 복을 주시고자 할 때에 누구도 그것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굳게 믿기 때문에 그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당했으나 경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돈의 흐름을 들여다 보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흐름을 들여다 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가장 중요한 시점을 개인적으로 또 교회적으로 국가적으로 지나고 있습니다. 모든 대부분의 교회들이 IMF를 맞이해서 교인도 줄고 헌금도 줄고, 두 번째는 교인은 늘었는데 헌금은 줄고 아우성입니다. 교회를 크게 지어 놓았다가 콘크리트 덩어리만 남겨놓고 철근은 빨갛게 녹슬어가면서 고통을 당하는 그런 교회들은 IMF 시대가 가져다 주는 선물입니다. 그런데도 보십시오. 은혜가 넘치는 교회는 모자라지 않습니다. 채워집니다. 우리는 11월 IMF가 되면서부터 우리의 재정은 훨씬 풍족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여러분들이 많이 헌금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 때문에 우리들이 이렇게 풍족한 삶을 살게 끔 된 것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믿음으로 산 사람들은 어려운 시대를 지나면서 조금도 초조해 하거나 불안해 하지 않습니다. 왜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의 편에 가까이 있고 그리고 내 인생 자체가 하나님의 눈 앞에 말할 수 없이 소중한 관심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나는 그분의 편에서 살 것이며, 그리고 그분이 나를 지킬 것이며, 그러므로 주님이 나를 지키는 한 나는 안전할 것이다는 고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나를 지키시는데도 계속 가난하고 궁핍하면 거기는 나름대로 하나님의 뜻이 계실 것이고 풍족하고 부요하게 살게 하시면 우리는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찬송할 것이라는 고백을 우리는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어려운 때에 푸른 초장으로 우리를 누이시는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마음의 패역과 죄악을 간직하고 이것은 도무지 하나님 앞에 고치려고 들지 않고 단지 경제적으로 쪼들리는 자신의 사정을 호소하면서 자신의 배역하고 하나님을 거스르는 모든 삶이 결국은 경제적인 가난 때문이라고 그렇게 치부하면서 결국은 뭔가 일이 잘되게 끔 길 열어주시지 않는 하나님 때문에 ‘난 하나님 앞에 이런 태도로밖에 살 수 없다’라고 하는 사고 방식을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삶으로 보여주는 것은 이것은 이성이 없는 짐승과 같은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요한 날에 우리가 곤고하던 때를 생각하고 곤고한 날에는 우리를 부요하게 채우셔서 인도하시던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시인이 오늘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고 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쓸 것을 이제껏까지 공급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이 어려운 때에 만약에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보다도 상대적인 여유를 누리고 있다면 곤고하고 어려운 날들이 얼마나 계속될지 모르기 때문에 물질을 더 쌓아놓고 모아두어서 미래를 대비해야 되겠다라는 생각은 하되 조금만 하고 나머지 많은 제물들을 흩어서 물질로 인해서 고통하는 사람들을 나누어 주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어려운때에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사는 비결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고통하고 있고 그리고 교회 안에서도 물질적인 궁핍으로 말미암아 아파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 형제의 연약함을 돌아보고, 그들을 돕고, 그들을 위해서 구제의 손길을 펴고, 그들을 위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삶의 유익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의 모든 영성은 십자가의 영성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영성이 십자가의 영성이 아니라면 여러분들의 폼잡는 모든 신앙 생활은 그야말로 폼에 불과한 것입니다.
저는 예전과는 달리 주의깊게 헌금을 관찰합니다. 그 헌금을 관찰하는 이유는 돈 자체에 대한 관심이기 보다는 헌금이 넉넉하게 나온 날은 제 마음에 안도감이 듭니다. 물질 때문이 아닙니다. 교회는 여러분들이 내는 헌금으로 운영되는 교회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운영되는 교회입니다. 헌금은 여러분이 하지만 교회를 운영해 가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내 마음에 안심이 놓이는 바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 아! 그래도 이 사람들이 이처럼 곤고하고 모든 사람들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주님을 향한 부요한 마음, 주님을 위해서 살려고 하는 이 거룩하고 착한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고 살아가고 있구나. 그것이 곤고하고 어두운 날을 지내는 저희들에게 훌륭한 방패가 될 것이다라는 확인을 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때에 열심히 물질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 물질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애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경제적인 곤고함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보며 정결케 하여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복주시고 축복해주시는 방법은 우리를 징계하시는 방법만큼이나 무궁무진합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라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놀라운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복주시고 우리에게 풍족하게 하시고 우리를 유익하게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 춥고 곤고하며 떨고 배고파 하고 아파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 이 날을 지나면서 우리는 후일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이 내 인생에 목자이시고 내가 당신께 인격적으로 승복하는 삶을 살았는고로 내 안에 있는 주님이 나로 하여금 가장 춥고 곤고하던 그때에 오히려 나로 하여금 많은 고통받는 지체를 돌아보며 그들을 위해서 주님이 제게 주신 그 물질을 쓰고 흩어버리게 하였나이다. 그러므로 곤고한 날에 나를 통해서 곤고하고 가난한 지체들을 돕게 하신 하나님 찬송받으시옵소서’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물질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고 그리고 고통하는 이웃들을 돌아보며 자신의 삶에 유익을 포기하고 그리고 여러분들의 그 애정어린 그 물질들을 과감히 튿어서 그래서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나누어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주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얼마나 아름답게 보시겠습니까? 필요할 때 이웃이 진정한 이웃이 아닙니까? 부요함을 누리고 있던 시대에 자기의 이름 석자나 텔리비나 신문 광고에 내기 위해서 철마다 큰 프랭카드 앞세우고 폼잡으면서 구제하던 그런 사람들이 이제는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곤궁해 하고 있습니다. 이 때에 우리는 다소나마 여유를 누리면서 적어도 인간다운 삶을 영위해 갈 수 있는 기본적인 것들을 누리면서 살고 있는데 그런 것 조차 박탈당한 사람들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찾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우리의 꿈이 이 세상이 아니라 물질이 아니라 우리들이 물질을 구하고 이 세상의 땅을 발을 딛고 살지만 그러나 이 세상이나 물질이 아니라 정말 주님을 위해서 헌신된 사람임을 보여주는 것이며 우리의 삶의 진정한 이유가 세상에 있는 삶에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서서히 근심이 제 마음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왜 이제 다음 달이면 신학생들의 등록금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것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하고 있습니다. 신학생들 뿐만 아니라 이미 노동할 능력을 잃어버리거나 혹은 여러 가지 업친데 덮친격으로 재앙에 가까운 불행으로 말미암아서 이미 누군가의 도움이 아니면 살기 어려운 사람들을 우리 주위에서 심심치 않게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얼마나 그 고통에 동참하고 있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보실 때 정말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사람들이고 주님의 은혜와 주님의 손길에 이끌려서 사는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오늘도 물질이 없으면 없기 때문에, 더 염려하고 있으면 있기 때문에 그것에 집착하면서 마음을 검게 태우며 하나님 앞에 자신의 물질을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안달복달하고 사는 사람들입니까? 우리는 이런 사람들이 되어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정말 인격적으로 승복되고 나면 그 다음에 금방 찾아오는 놀라운 삶의 변화가 무엇인가 하면 물질에 대한 자유로움입니다. 인격적으로 깊이 승복되고 나면 (찬양)
참 경제적으로 곤궁할 때가 되면 사람들이 자기에게 다가오는 것이 두렵습니다. 왜냐하면 풍족했던 때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에게 다가오는 것이 도움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는데 이제는 곤궁한 때가 되면 모든 사람이 자기에게 다가오는 것이 두려움으로 다가옵니다. 왜냐하면 이 곤궁한 때에 무엇인가 자기의 것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어그제도 필리핀 선교사가 잠깐 오셨다가 가셨는데 집회를 초청하셔서 제가 정중하게 사양을 했습니다. 그분의 하는 말이 그렇습니다. 한국에서 전화가 오면 철렁 내려 앉는다고 합니다. 장로님들이 전화를 하셨는데 IMF가 끝나고 봅시다 했답니다. 다음 달부터 선교비를 안준다고 합니다. 좋은 시절에는 전화가 오면 봉고차라도 하나 사준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설레임이 있었는데 이제는 전화가 오면 두려운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혹시 이런 마음이 아닙니까? 누군가 어려운 지체들이 여러분들의 마음에 부담이 되고 누군가 사람이 여러분들에게 다가오는 것이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어야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여러분들이 두려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모두 여러분들의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께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주님이 피로 값주고 우리를 사신 그 순간에 우리의 인생은 주님의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것은 아무 것도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질은 주님이 우리에게 임시로 맡긴 것이고 우리에게 주신 사람들에게 베풀 수 있는 자리는 주님이 사명을 감당하라고 우리를 거기에 세워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런 상황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정말 얼마나 하나님만 인격적으로 깊이 신뢰하고 그분만 바라보는 삶을 살고 있는지를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진짜 하나님 앞에 축복된 삶을 위해서는 정말 여기로부터 하나님 앞에 승리하는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가 있어야 합니다.
제 주위에는 정말 꽤 많은 부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도 가끔 있습니다. 그런데 두 종류의 부를 누리는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신앙을 팔아먹고 열심히 부를 모은 사람이 있고 의심할 여지없이 하나님이 부어주신 분이 있습니다. 몸부림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모아서 부를 누리는 사람의 이야기는 할 필요도 없고 왜 언젠가 하나님이 흩어버리실 것이고 흩어버리지 않으면 그 물질과 함께 불가운데 들어갈 사람이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은 사람이 물질에 대한 불같은 사랑입니다.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의심할 여지없이 하나님이 부를 누리게 하셔서 부요해진 사람들의 특징을 보면 모두 하나님 앞에 그 문제에 있어서 혹독하리만치 훈련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에 ‘이게 내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을 아주 확실하게 체험한 사람입니다. 왜 하나님은 그렇게 하고서야 맡기시는 것입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게 돈을 맡기셔서 결국은 무얼 하시겠어요.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쓸모없는 사람들입니다. 없게 하시면 그것을 사랑하느라고 그렇게 몸부림치고 있게 하시면 거기에 빠져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도 쓸모없고 저렇게도 쓸모없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거기에서 하나님 앞에 인정받고 그리고 승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안심하고 물질들을 맡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와같은 때에 자신을 위해서는 조금더 절약하고 그런 삶을 살고 그런 가운데서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특별히 이런 위험은 결혼을 하기 전에도 마찬가지지만 결혼을 하고 나서 특별히 가정 주부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자유로워지기가 보통 힘든 것이 아닙니다. 왜 누군가 무엇을 구제하려고 하면 그 돈을 가지고 쌀, 가스, 전기 이런 것을 생각하니까 돈을 못 쓰는 것입니다.
저희가 외국에 가면 거의 돈을 안 쓰고 옵니다. 특별히 애국심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달라가 올른다면 더 심각합니다. 가서 지갑을 하나 보니까 몇 불, 그랬습니다. 그래서 계산을 해보니까 요만한 지갑 하나에 16-18만원이나 했습니다. 어느 면세품점에 가서 티를 하나 사려고 하니 우리 나라 돈으로 계산을 하니 22만 5천원입니다. ‘내가 골이 비었나’ 하고 나왔습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다른 사람들을 돕는데 있어서 이런 식으로 그 물질을 돕지 않으면 내가 가지고 있으면 어떻게 나에게 유익이 될텐데 이런 식으로 따지면 아무 것도 안 되는 것입니다. 내가 자꾸 그러니까 옆에 있던 그 교회에 있는 집사님이 그럽니다. “목사님, 그런 식으로 머리를 굴리면 여기에 와서 아무 것도 못 사고 갑니다.” 그것은 원화는 잊어버리고 여기 와서 달라 수준으로 생각하고 물건을 골라야지, 뭐 하나 잡기만 하면 곱하기를 하고 있으니 뭘 살 수가 있습니까? 맞아요. 그런데 싼 것이 하나 있습니다. 책은 쌉니다. 여기는 정가에 몇 퍼센트 붙여서 파는데 거기에는 정가에 50퍼센트를 할인해서 파니까 쌉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지나친 계산력이 우리로 하여금 물질을 나누는 이런 삶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 정말 이 시인이 경제적인 부를 누렸기 때문에 푸른 초장에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많은 물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곤고하게 사는 사람이 있고 적은 물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부요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IMF와 같이 이렇게 어려운 때 오히려 많은 교회가 선교비도 줄이고 교회 지원도 줄이는 상황에서 오히려 이런 때에 우리는 내년에도 더 많은 교회를 돕고, 더 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우리의 물질을 흩어서 나누어 주어서 그렇게 물질적으로 경제적으로 고통스러울 때에 알고 보니까 주님을 향한 인격적인 승복과 주님의 은혜로 산다는 신앙의 고백이 있기 때문에 내 인생에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물질을 나누어 주고 부를 나누어 주어서 많은 지체들을 고통에서 건질 수 있다라는 그런 우리의 간증이 정말 우리 가운데 남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이런 마음을 갖게 하는 이런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것을 공급해주신 분이 주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그러면서 매순간 순간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사는 그런 주님의 자녀들임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우리가 그렇게 베풀고 나누는 삶을 살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베풀고 나누어 주는 그 기준은 내 형편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비례하는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오히려 역으로 모두 경제적으로 어렵다고 하는 이런 때에 경제적인 논리가 아니라 비경제적이고 초경제적인 신앙의 논리로 오히려 이렇게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을 구제로서 나누어 주면서 오는 아픔과 가난함을 함께 공평하게 할 수 있는 그런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도록 도와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성경은 “누이시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하면 자신의 인생에 필요한 모든 물질적인 공급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니까 그다음에 무엇이 오는가 하면 휴식이 오는 것입니다.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우리에게는 쉼이 필요합니다. 안식이 필요합니다. 정말 우리에게는 휴식이 필요하고 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무엇인가 하나님 밖에서 사랑하는 것들에 대한 집착을 가지고는 우리는 쉼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쉼은 하나님께 온전히 인격적으로 위탁하고 이 어려운 때를 오히려 정말로 돈 받는 재미로 사는 여러분들 되지 마시고 찬송하는 재미로 살고 그리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 젊은 청년들 가운데 요새 거룩한 백수로 지내는 청년들이 몇 있습니다. 하나님 찬송하십시오. 여러분, 얼마나 가지고 싶었던 시간입니까? 실직을 원하는 적은 없었지만 그러나 한번 마음껏 시간이 있어서 전도도 열심히 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내 집처럼 생각하며 살고 이럴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바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지 않습니까? 보십시오. 때가 왔습니다. 우리가 마음에 늘 품고 소원하던 그때가 왔습니다. 지금은 웃을 대목이 아닙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정말 찬송하고 그래야 합니다.
(예화) 9년 동안 계시던 교수직에서 사직서를 내고 나오실 때 허전한 마음에 많이 우셨 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님께서 왜 나에게 이런 길을 가게 하시는지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깨닫고 하나님의 뜻에 감사하며 교수의 직함이 없고 알아주는 좋은 지위가 없고 풍부한 물질이 없어도 목자의 길을 가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다 는 이야기.
우리는 이와 같이 어려운 때에 하나님 앞에 정말 휴식을 누리면서 영혼에 안식을 갖는 사람들이 되기 위해서는, 여러분, 혹시 여러분들이 너무나 어려운 사정으로 여러분들이 잠깐 실직 상태에 있다면 여러분들이 안식년을 받았다고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여기에서 하나님 앞에 여러분의 땅, 여러분들의 직업에 땅보다도 훨씬 귀중한 여러분들의 믿음의 땅들을 기경하고 재충전을 받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잠시 쉬었던 여러분들의 기업의 땅에 배나 더 결실을 맺게 하실지 누가 압니까? 이런 마음과 기대를 가지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시간들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어려운 때에 더 열심히 주를 위해 살고 그리고 더 열심히 사랑하고 더 열심히 우리의 것을 아까워하지 않고 나누어 주는 삶을 사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이렇게 사는 것을 볼 때에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실지를 저는 압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이 어려운 때를 이렇게 더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찬송의 역사를 보면 찬송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언제인가 하면 핍박과 기근과 전쟁이 가득찼던 시대, 그때 찬송이 막 그냥 쏟아져 나왔습니다. 어마어마한 양의 찬송이 쏟아져 나온 것입니다. 왜 어려운 모든 때에 믿음으로 산 성도들은 평상시에 맛볼 수 없는 더 크고 놀라운 위로와 더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 앞에 그렇게 인격적으로 승복하고 물질의 문제에 있어서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해서 사는 여러분들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시렵니까? 곤고하고 어려운 때에 믿음으로 사셔서 가난한 가운데 부요한 사람이 되시렵니까? 여러분, 믿음으로 살지 못해서 곤고하고 어려운 때에 마음도 상하고 몸도 상하고 신앙도 모두 상한 그런 골병든 신자가 되시렵니까? 선택할 여지도 없는 것입니다. 이 어려운 때에 더 열심히 사랑하고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워 올수록 더 정신차려 기도하고 성도의 뜨거운 사랑, ‘내 인생에 모든 그 가치가 주님께만 위탁됐다’라고 하는 것을 삶으로 드러내 보여주는 그런 삶을 사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어려울 때는 믿음으로 삽니다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3:17-18)
몇 주에 걸쳐서 우리는 고난의 때에, 결핍으로 가득찬 때에 하나님의 성도들이 어떻게 믿음으로 그러한 염려와 근심과 고난의 때를 벗어나야 할지를 우리들이 말씀을 통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읽은 이 성경은 우리들이 익히 알고 있는 하박국서의 마지막 결론 부분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매우 혼란스러운 시대에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갈대아 사람들, 바벨론 사람들이 이제 점점 세력을 확장해서 자신의 나라를 삼키려고 하고 있는 이때였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나라는 점점 세퇴하고 바벨론은 강성해지고 이미 조정에는 바벨론과 내통하는 그런 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득세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벌어지는 상황을 보면서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이렇게 정말 이 백성들을 공정하게 다루신다면 왜 이렇게 악의 압잡이가 되고 불의에 도구가 된 사람들이 여전히 번영하고, 그리고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고난을 당하는지가 하박국으로 하여금 회의주의에 가득찬 선지자로 사역을 시작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점차 계속되는 하나님에 대한 깊은 경험과 그리고 하나님의 성품을 보다 더 깊이 체험하는 가운데서도 점점 더 그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가면서 이러한 모순이 사실은 모순이 아니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제 결론 부분을 향해서 달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에서 이제 하박국 선지자가 우리에게 그 유명한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그는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이런 많은, 그 당시로 볼 때는 생명의 근원이 되는 소출들을 모두 상실하고, 외양간에는 송아지가 없고 이렇게 모든 소유조차도 없어져 버린 그 가운데서 역설적인 기쁨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겠다”라고 하는 고백을 오늘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오늘 이 선지자의 이런 고백을 보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무엇으로 사는가” 이런 제목을 가지고 우리들이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무엇을 가지고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동물과 다른 가장 커다란 이유 중에 하나는 고난과 어려움을 당할 때 그 의미를 생각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인간만 그 고난에 닥쳤을 때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모든 동물, 심지어는 식물까지도 자기에게 고통이 오면 그 고통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하려는 본능들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이 세상에 생물들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고통에 대해서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은 가지고 있지만 그 의미를 생각하고 그 의미를 깨달은 다음에 미래에 자신들의 삶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피조물은 역시 인간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당할 때 우리에게 고난을 통해서 그 의미를 새길 수 있는 능력을 주셨기 때문에 사실 어떤 의미에서 고난과 어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교통하게 하는 매우 커다란 방법이오 수단인 것입니다. 동물적인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들, 아침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영혼의 어두운 먹구름이 가득 끼어서 도저히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도 없고 그분께로부터 오는 각양 좋은 은혜의 빛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단지 고통이 올 때 그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고 동물적인 반응밖에 할 줄 모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주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고난이 오고 어려움이 올 때에 그 고난과 어려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새길 수 있는 힘을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 자신을 보여주고 깨닫게 하기 위해서 고통스러운 환경을 사용하시는 것이 하나님에게는 매우 유용한 것임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말씀에 대한 깊은 사랑을 가지고 주님이 우리에게 무어라고 말씀하시는지를 귀울이고 그 말씀을 깨닫는 신앙 생활을 하고 거기에서 주님이 자신에게 하고자 하시는 음성을 듣는 것이야말로 훌륭한 신앙 생활이고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들려오기 시작하면 여러분들이 인생을 벌고 있는 것입니다. 왜 고통스러울 정도로 많은 희생을 치루고 제가 늘 말씀드리는 인생의 과외비를 낸 후에야 깨달을 수 있는 진리를 조용히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깨닫게 되니까 얼마나 커다란 복인지를 모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지식,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성품에 관해서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었을 때, 여러분들은 잊지 말고 기억하십시오. ‘내가 이것을 알지 못했더라면 아마 어두움 속에서 내 인생을 많이 허비하면서 범죄하고 있었을텐데 내게 이것을 깨닫게 하심으로 내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복되게 살아가는구나’ 하는 것을 여러분 기억하셔야 합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자기의 자전적인 고백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사역을 하고 한참 세월이 흐를 때까지도 “누군가 나에게 당신의 진정한 목표가 무엇인가, 당신이 하나님 앞에 가장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고 물었을 때 나는 개인적으로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는 대답을 별로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바울의 글을 읽으면서 자신은 주저하지 않고 그 질문에 대답할 말을 가졌습니다. 그것은 누군가가 나에게 당신이 하나님께 가장 간절히 원하는 바가 무엇인가? 이렇게 묻는다면 나는 서슴없이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더 많이 알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나의 목표입니다.” 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라는 그런 고백을 갖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삶은 지식에서 나오고 지식이 어떠한 지식인가에 따라서 그의 삶의 내용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알아도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삶이 있지만 모르고도 그렇게 살 수 있는 삶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깨닫게 해주시는 가장 훌륭한 방편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러나 때로는 하나님이 환경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말씀해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환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읽고 하나님의 뜻을 판독해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우리는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비극적인 소식에 접해 있습니다. 미국에 가서 보니까 미국에서도 서서히 거론되기 시작하는데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에서 겪는 극심한 실업과 엄청난 불황의 여파가 내년 봄부터는 서서히 미국에 상륙할 것이다라는 신문의 보도들이 나오면서 미국 사람들도 지금은 풍요가운데 살아가고 있지만 그러나 왠지 마음이 편하지 않은 그런 느낌을 가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오면서 보니까 벌써 실업자의 수는 더더욱 늘어나서 지금 현재 127만명, 벌써 30년 이래의 최고의 실업율을 기록했고 그리고 아마 오래가 가기 전에 200만이 넘을 것이라고 하는 비극적인 이야기들이 들려옵니다. 내년에 졸업하는 사람들에게도 또다시 취업의 기회는 사라지고 졸업하자마자 실업자로 전락하는 비극적인 일들이 계속될 것이라는 전망을 우리들에게 가져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고 주님을 위해서 산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진공이 아니라 세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싫든지 좋든지 이 현실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이 현실을 놓고 기도하고 또 우리가 당하게 된 가슴아프고 기가막힌 현실에 대해서 우리는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커다란 국가적인 어려움을 만난 상황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단지 이렇게 고통스럽고 어려운 상황을 극복해 보려고 몸부림치는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같은 비극과 똑같은 어려움을 당했지만 우리 모두 힘을 합해 이 어려움들을 극복해 가야 하겠지만 그러나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은 남들이 보지 않는 독특한 시각으로 이러한 역사적인 어려움을 읽을 수 있는 지혜로운 눈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똑같이 이 어려움을 극복하지만 그러나 이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식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과는 달라야 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 어려움을 통해서 마지막에 얻을려고 하는 것과는 뭔가 좀 다른 것을 우리들이 신앙 안에서 구할 수 있는 시야를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는 사람들은 이런 일들을 어떻게 보아야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당한 이 많은 어려움들은 많은 사람들은 이런 어려움이 또 때로는 우리들이 너무나 절제할 줄 모르고 흥청망청 쓰면서 살아온 우리의 삶 때문이었다고 말합니다. 제가 이번에 간 미국에서도 한국인 회사가 큰 것이 들어와 있었는데 미국 사람들이 그렇게 욕을 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너무 상사 주재원들에게 월급을 많이 주어서 흥청망청 쓰니까 미국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가 “저러다가 망하지” 그랬다고 합니다. 그러더니 진짜 망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런 시각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잘못해서 이런 커다란 어려움을 가져온 그런 것도 볼 수 있습니다. 저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서 한동안은 얼마나 정치인들을 원망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원망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 사람들의 잘못도 있고, 우리의 잘못도 있고, 또 나가서 외화를 낭비한 사람들의 잘못도 있고, 또 자기의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부정하게 살았던 공직에 있는 사람들도 있었고, 또 그런 공직에 춤추면서 놀았던 기업을 하는 사람들도 있고 모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이야기일 뿐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많은 잘못된 삶을 살아온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우리는 오래도록 그런 삶을 살아왔습니다. 하필이면 그런 어려운 일들이 이 시점에서 일어나게 되었고 그리고 지금은 우리 모두 너나 할 것없이 고통스러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앞으로도 한동안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를 않습니다. 이런 많은 어려움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아까 말씀드린 것과 같은 요인들이 이런 어려움을 가져온 중요한 이유가 되는 것은 틀림없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 속에서 단지 쪼들리고 고통받는 경제적인 어려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들로 말미암아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싶어하시는 바를 우리들은 귀담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인생이 아버지 앞에 사는 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다시금 새롭게 축복을 받는 길이라고 우리는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고 그리고 무엇을 쓸까 하는 것이 우리의 주된 관심사이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는지가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최대의 관심사가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어려움을 당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고 주님이 우리 믿는 자들에게 어떻게 이 어려움 속에서 고난과 고통의 의미를 해석해야 할지를 가르쳐 주시는 것을 우리는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선지자는 우리에게 이런 이야기를 던져주고 있지 않습니까? 본문에 읽은 바와 같이 그렇게 논밭에 소출이 없고 그리고 외양간에 소가 없는 그런 모든 것을 상실당한 상황이 되었는데도 그가 왜 그렇게 여호와를 인하여 기뻐하고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즐거워하고 기뻐하겠다고 고백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여기서 우리들은 앞에서 나온 선지자의 깊은 회의가 먼저 있었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는 악인들이 번성하고 그리고 고난받는 백성들이 계속해서 고난을 받으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깊은 회의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회의를 느끼고 괴로워 하다가 지금 이렇게 기뻐하게 된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우리들이 읽은 하박국서의 마지막 장은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계시로 보여 주신 것을 노래로 엮은 장면입니다. 과거로 되어 있지만 히브리어에서 선지서를 기록하는 용법가운데, 문학적인 방법가운데 예언자적인 과거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래에 일어날 일이지만 과거로 묘사를 하면서 시적인 표현으로 나아가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감람나무 열매가 그치고 소출이 그쳐지게 된 이유는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16절이 우리에게 주고 있는 그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무리들이 치러오는 그 날에 자신은 떨렸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심판하기 위해서 이방 나라의 군대들을 동원하신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들은 쳐올라 왔고 쳐올라 와서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을 실행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군대들을 통해서 그 나라를 심판하시자 그 나라에 남아 있는 그 모든 좋은 것들은 약탈 당하고 강탈 당했습니다. 외양간의 소, 동물들은 모두 징벌 당하고 빼앗기고 그리고 곡식들은 모두 늑탈 당했습니다. 모든 것을 전쟁으로 잃어버리고 폐허가 된 그 상황에서 그 선지자는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라”고 노래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이런 커다란 어려움을 당한 것을 인해서 우리가 무엇이라고 변명하고 우리가 무엇이라고 이야기 하든지 분명한 사실 하나는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는 범죄했고 하나님은 우리를 슬퍼하셨기 때문에 이런 고난과 어려움의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다른 사람들이 그러하는 것처럼 무조건적으로 하나님께서 은혜를 회복해주시고 다시 수출이 잘 되게 하시고 다시 돈을 많이 버는 백성이 되게 해달라고 부강한 나라가 되게 해달라고 무조건 떼를 쓰는 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원하시는 중보 기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깨닫는 것 없이 하나님께서 다시 이 민족을 부강하게 해주실 때, 그때 아마 이 백성들은 틀림없이 앞으로 그런 일이 일어나도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도와주셨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인간 승리를 외칠 것이며 자신들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가 하는 것을 이제 많은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뽐내고 결국은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겸손을 배우기보다는 하나님 앞에 더 교만하고 거만한 인간들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을 것입니다.
어느 기독교 신문에서 요즘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영화를 비평한 장면을 읽어보았습니다. 거기에서 하는 이야기는 아주 예리했습니다. 오늘 날 유행하고 있는 것은 ‘디빈펙트’ 그 다음에 ‘아마겟돈’ 하여튼 재난을 소재로 하는 많은 영화들이 있습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두 영화는 아예 인류의 종말이 다가오는 그런 위기를 인간이 모두 힘을 합해서 극복해낸다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어떻게 보면 인간편에서 보면 참 감동적인 휴먼드라마일 수가 있겠지만 신앙적인 시각에서 보면 인간이 얼마나 위대하다는 것을 말하고 그리고 인간 속에 있는 무한한 저력과 힘, 그리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위대함에 대해서 정말 스스로를 찬양하는 의식에 빠져있는 결과가 그런 것들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먼저 겸손을 배우는 민족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돈만 벌고 강대해지면 아주 훌륭한 나라가 될 것이라고 믿었고 많은 사람들이 우리 한국을 칭찬해주고 추켜세워줄 때 우리는 우쭐한 마음으로 교만한 삶을 살았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굳이 소수의 지각없는 사람들의 어리석은 행동들을 이야기하고 거명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모두 의식 속에서 우리는 그런 식으로 살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러한 어려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 나라에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는 관계를 여실히 드러내보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벌거벗은 가운데 살고 있고 우리들이 얼마나 이 세상의 물질과 그리고 이 세상 나라의 번영에 대해서 애착을 많이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의 모습과 하나님의 나라에 번영에 대해서 얼마나 냉담했는지를 하나님께서 이번 일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속속들이 드러내신 것입니다.
영적인 IMF는 이미 오래 전에 왔지만 무지무각하게 헐벗은 영혼의 상태를 간직한 채 그것이 조금도 부족한지 모르고 살아갔고 가끔 이 세상에서 형통한 일들을 만나면 신앙을 버리고 철저하게 타협한 결과인데도 그것이 마치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만 주신 독특한 축복인 것처럼 말했고 하나님을 찬송했지만 그들의 마음 속에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향한 경배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결과 결국은 그러한 우리들이 살아온 겸손하지 못한 모든 교만한 사고 방식과 물질주의로 치닫는 우리들의 삶을 하나님께서 경고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이 큰 어려움들을 주신 것입니다. 정말 이 어려움들은 우리에게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깊은 고통과 좌절을 안겨 주고 있습니다.
외국에는 엄마도 벌고 아빠도 벌고 누나도 벌고 형도 벌고 있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애들도 뭔가를 해서 하다못해 자기의 용돈을 버는 것이 일상 생활화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다릅니다. 아빠 혼자 나가서 벌고 나머지는 모두 줄줄히 앉아 있는 제비새끼와 같이 한 사람이 벌어다 주는 것에 노란 입을 벌리고 있는 신세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실직 당하고 그분이 이제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온 가족이 느끼는 그 좌절과 그 비참한 절망감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소하지 않은 큰 상황을 우리들이 마련했을 때 우리들이 정말 주님이 세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것 같으면 우리는 먼저 이웃들이 느끼는 그런 깊은 고통과 아픔을 우리들이 함께 느낄 수가 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거기에서 더 나아가서 다른 사람들이 모두 단지 회복을 꿈꾸고 다시 번영되기를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우리는 올바로 기도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내고 그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국가적인 재난과 민족적인 재앙을 통해서 항상 하나님께서는 민족 전체를 일깨우시고 나라 전체를 일깨우시는 일들을 자주 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요나가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던 니느웨를 기억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도 모르는 그 백성들을 재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을 깨우셨습니다. 구약을 연구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요나가 가서 니느웨가 망할 것이라고 외쳤을 때, 왜 그렇게 그들이 신속히 회개하였는가를 설명하면서 천문학적인 자료를 가지고 풀어나가는데 바로 요나가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던 그 시점이 그 지방에서 일식이 있었던 시점이었다고 계산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니느웨를 곧 망하게 하시려고 외쳤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평생 떠받들며 섬겨오던 태양이 어느 순간에 새카맣게 사라져 가는 광경을 일식 사건을 통해서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떠받들던 그 신적인 존재인 태양이 한쪽부터 먹혀들어가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자신들에게 임박한 커다란 재앙을 의식했고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에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인식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런 자연적인 재앙을 인해서 두려워하고 있을 때, 요나가 그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새겨주었을 때, 위대한 회개의 역사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재앙을 통해서 마음을 겸비하게 하시고 고난을 통해서 민족을 회개시킨 것은 너무나 유명한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전쟁을 통해서, 때로는 국가적인 위기와 반란자들을 통해서, 커다란 질병을 통해서 민족을 다스리고 그 민족을 향하여 하나님의 그들을 향한 진노와 그리고 그들이 돌아오기를 원하는 자비의 음성을 그들에게 들려주시는 통로로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이 오늘은 왜 그런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시간에도 나라를 전쟁을 통해 깨우치기도 하시고 커다란 재앙과 고난을 통해서 민족에게 커다란 각성과 그리고 변화를 주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억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큰 어려움을 만나면서 아버지 앞에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되겠고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인 어려움들이 우리에 의해서 어떻게 해석될 지에 대해서 깊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1907년에 있었던 평양의 대부흥을 보면서 그렇게 그 부흥이 일어났던 중요한 요인 중에 하나가 모두 모여서 한 마음으로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매달렸기 때문이었고 그 백성들에게 커다란 가난한 마음을 주었던 중요한 정치적인 사건 하나가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역사적으로 소위 ‘까스라 테프트 밀약’ 이라고 하였는데 일본 사람들이 ‘까스라’라고 하는 총리대신과 ‘테프트’라고 하는 미국의 밀사가 맺은 약속이었습니다. 즉 동남아에서 미국의 지배권을 미제국주의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대신에 한국을 일본이 점령하는 것에 대해서 미국이 당분간 양해를 한다라고 하는 그런 각서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알려지기 시작하자 많은 사람들은 이제는 아무 것에도 우리를 도와줄 사람은 없다라고 하는 깊은 좌절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미국 너 마저도...’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지각이 있는 사람들은 정말 이 민족의 장래가 하나님께 달려 있다라고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고, 그리고 선교사들과의 갈등까지 생겨나게 되면서 그들은 더더욱 하나님의 손 밖에는 의지할 것이 없었습니다. 이제는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더더욱 하나님을 의지할 수 밖에 없다라고 하는 신앙, 그런 가난한 마음들이 그런 기도회를 가능하게 만들었고 그런 기도회가 그런 부흥의 도화선이 되었던 사실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어려운 때가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매우 놀라운 축복을 주셔서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돌이켜 다시 번영하게 하시는 놀라운 기회를 주시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런 위기가 아니라 기회인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든지 교회 역사를 보든지 움직일 수 없는 사실 하나는 있습니다. 기회가 될 수 있는 사건이 어느 민족들에게는 위기가 되었고, 기회가 될 수 있는 사건이 어느 민족에게는 심판이 되었고, 그리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위기가 기회가 되었고, 기회가 위기가 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문제는, 상황은 이미 일어났고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들이 해야할 일은 철저하게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입니다. 우선 우리가 무엇을 감사해야 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인가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이런 어려움을 주셨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주실 수 있는 보다 더 극단적인 방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런 정도의 어려움을 통해서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우리는 깊이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나라를 불길 속에 휩싸이게 하시는 커다란 지진이나 전대미문의 재앙을 통해서도 그 백성들의 마음을 가난하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흉년을 들게 하시고 먹을 것이 없게 하심으로 사람들이 비참한 지경으로 몰아가실 수도 있습니다.
(예화: 미국을 자주 드나드시는 목사님의 이야기가 북한에 굶어죽어가는 사람의 수가 200만명으로 추정되는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는 것도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 는 굶주린 상태에서 자라난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서 그 신체와 정신구조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대해서는 아무도 예측할 수가 없다는 것인데 그러니까 그것이 매우 재앙스러울만치 두려운 것이다라는 고백을 했다는 이야기)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는 그런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셨을까요?
IMF를 만나서 외국에 가끔 나갈 때는 800원씩 바꾸던 돈을 1600원 심지어는 2000원씩 바꾸어서 쓰니까 상대적으로 엄청난 박탈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굶지는 않고 있습니다. 굶는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먹는 사람들이 조금만 인정을 갖는다면 문제없이 우리는 이 어려움들을 굶지 않고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 사실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를 깨닫게 하셨는지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몇 년 전에 일본을 치고 들어갔던 그 엄청난 지진을 보셨을 것입니다. 그들이 건물을 짓는데 교량을 짓고 철도를 세우는 그 일에 있어서 얼마나 철저한 사람들입니까? 그리고 한국을 얼마나 우습게 생각했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지진이 나자 부실공사를 한 것이든, 튼튼히 진 것이든 소용이 없이 폭격을 맞고 지나간 것처럼 와르르 다 무너져 버렸습니다. 당시에 발생했던 손해가 40조 엔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정말 상상할 수 없는 국가적인 재난이 다가온 것이 아닙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와 일본 사이에 떨어져 있는 거리가 비행기를 타고 1시간 3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가까이에서는 대마도가 눈 앞에 보이는데 그들에게 일어난 일들을 하나님이 우리에게는 일어나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일촉측발에 위기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런 속에서 하나님께서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이 민족을 정리하실 수도 있는 분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런 끔찍한 방법으로 우리를 깨우지 아니하시고 감당할 시험밖에는 당한 것이 없도록 우리에게 적당한 어려움을 주셔서 우리를 고통 가운데서 깨닫게 하시니 이게 얼마나 하나님의 크신 은혜인지 우리는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 속에서 우리는 가혹한 하나님이 아니라 오히려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시려고 하는 그 하나님을 우리들이 만나고 또 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노 중에서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소망을 얻게 되고 위기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 것은 아니라고 하는 소망을 아버지 앞에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깊이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어려운 때에 하나님 앞에 먼저 감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모두 불평하고 불만하며 견딜 수 없어 하고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이제는 우리가 깨닫기만 하면 되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이런 적당한 어려움을 주셨사오니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기회를 우리가 잘 선용해서 주님의 마음에 들지 않는 하나님의 교회들이 주님의 마음에 드는 교회들로 바뀌고, 돈을 사랑하고 세속주의에 빠져 있던 그리스도인들이 정말 변화되고 새로워져서 이제는 주님의 손에 붙들려살습니다.” 라고 하는 신령한 변화와 결심들이 일어나게 하시고 세상만 사랑하던 사람들이 세상의 번영이 얼마나 헛되고 쓸데없는지를 깊이 깨달으면서 영원한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그런 그리스도인들로 바뀌게 해달라고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 앞에 감사함으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들이 생각할 것은 선지자가 이런 커다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통해서 어려움을 당했을 때 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그 어려움 속에서 이길 수 있었던 그 참된 비결 하나를 우리는 더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선지자는 지금 무화과, 포도나무, 감람나무 열매가 없고, 소출이 없고, 입사귀가 마르게 된 것을 인해서 하나님 앞에 깊이 좌절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다는 것은 당장 마실 물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감람나무가 없다는 것은 당장 불을 밝힐 수 있는 연료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식물이 당장 사라진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소가 없어진 것은 노동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더 이상 밭을 기경할 수 없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그 고통스러운 상황이 가져다 준 메시지는 죽음과 그리고 좌절밖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이 이토록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자기의 실수로 이런 것들을 잃어버리거나 자기의 어리석음 때문에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설적으로 하나님이 심판하셔서 가져갔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찬송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아! 이제야 하나님, 정말 감사합니다. 주님 정말 기쁩니다. 이 어려움을 통해서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포도나무, 감람나무, 그리고 무화과나무 그리고 열매가 없고 잎이 마르고 소출이 없고 외양간에 소 조차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 찬송합니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모두 심판하셔서 결국은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시고 공의로운 분이시고 그들이 그렇게 무시하던 하나님이 사실은 안 계신 것이 아니라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드러내셨으니 하나님, 저는 모든 사람들 앞에 드러나는 하나님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하나님의 높아지심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송합니다라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큰 어려움, 어려움 자체가 아무리 크고 환난과 시련이 우리의 인생에 아무리 크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절망하고 낙담하는 이유는 고통스러운 환경 때문에 낙담하고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 없음을 인하여 우리는 절망하고 낙담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억은 잘 나지 않습니다만 어느 청교도의 작품을 읽으면서 그 청교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완전히 회복하게 만들어주는 참된 회개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가운데 뚜렷하게 기억이 나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한 사람이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평화로 돌아갈 때가 되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심판하셨는 데도 그는 온 마음을 다해서 자신을 심판하신 그 하나님이 정당하다고 외치고 싶은 찬양하는 마음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별로 마음에 안 드십니까? 아멘을 안 하십니까? ‘아멘’ 우리는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오지 않아야할 것이 왔다는 식으로 우리들이 기대하면 안 됩니다. ‘주여, 올 것이 왔나이다.’ 우리는 오히려 이렇게 역설적인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올 것이 온 것을 인하여 하나님 앞에 감사합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고통만을 배우지 말게 하시고 그 고통 속에서 의미를 배울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저는 환자들을 위해 기도할 때 꼭 메튜헬 리가 가르쳐준 그 기도가 큰 도움이 됩니다. 메튜헬 리가 어떻게 가르쳤는가 하면 병든 자를 위해서 기도할 때는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며 가르쳤주었는데 뒷부분에 뭐라고 했는가 하면 ‘하나님, 이 사람의 병을 무조건 빨리 낫게해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 사람의 질병을 낫게 해주시되 그 병상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처럼 그렇게 이 육신도 회복되도록 도와주십옵소서.’ 그러니까 그 사람의 기도를 거꾸로 뒤집으면 병상에서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회복이 없으면 그냥 죽어, 이런 것이 됩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육신과 함께 그의 영혼에 더 지극히 염려하는 마음을 가진 그런 목회자의 시각입니다. ‘이 사람의 영혼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회복되는 것처럼 그렇게 이 사람의 육신도 회복되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똑같은 기도를 이 나라를 위해서 드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제 ‘죽으면 죽으리라’ 각오를 하고 ‘주여, 3일 금식기도를 할테니 IMF를 물러가게 해주시옵소서’ 하는 그런 믿음의 기도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삶을 꼼꼼하게 들여다보고 그리고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제껏 살아온 삶의 길을 한번 돌아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나, 너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하나, 우리가 되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왔는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행했는지를 생각하며 그들의 죄를 우리의 죄처럼 뉘우치고 우리의 깨달음이 그들을 위한 것처럼 나누어주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내가 아니고 네가 아니라 우리 전체를 회복시켜주시는 그런 놀라운 변화가 우리에게 가능한 것입니다.
이 선지자가 바로 그런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선지자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했지만 그러나 심판을 행해지는 광경을 하나님이 보여주셨을 때 비디오처럼 보여주셨을 것입니다. 심판받는 상황이 드러났을 때 이 사람도 자신의 생명도 어떻게 의탁할 수가 없는 위기에 놓이게 되었음이 분명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여호와를 기뻐하리라, 나는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그를 즐거워하겠다’라고 하는 그런 고백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은 그가 이 세상 나라의 번영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라고 하는 투철한 하나님의 중심에 사고방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여러 해 전에 제 7광구에서 석유가 나온다고 할 때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무엇을 기도했는가 하면, ‘주여, 그저 쏟아지게 해주시옵소서.’ 기도했습니다. 그것이 생생합니다. 그런데 그곳에 다른 사람이 나와서 나올 것같다고 했으면 안 믿었을 텐데, 박정희 대통령이 자기가 직접 나와서 기자 회견을 했습니다. 아주 양질에 뭔가 발견되고 있다며, 뭔가 퍼붓을 것 같다고 잔뜩 말을 해서 완전히 나라 전체가 축제의 분위기에 휩쌓였습니다. 그때 형제는 아마 기어다녔을 때일 것입니다. 그렇지요. 거기는 태어나지도 않았잖아. 그런 때였습니다. 지금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안 주신 것도 하나님의 깊은 뜻입니다.
보십시오. 개인의 원리와 나라의 원리가 너무나 똑같습니다. 신앙이 없고 아직도 세상을 사랑하고 주일에 갈 곳이 없어서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갑자기 복주셔서 돈이 막 쏟아져 들어오면 눈이 뒤집힙니다. 그리고 어떻게야 좋을지 모릅니다. 늘 말씀드리잖아요.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게 제물이 막 쏟아져 들어오는 것은 그것은 재앙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것 보십시오. 한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석유가 펑펑 쏟아져 나오면 그것을 가지고 선교할 것이다, 착각도 유만부득입니다.
미국이 18-19세기에 대각성을 경험하기 전까지는 선교를 절대 하지 않은 나라입니다. 돈이 없어서 안 했습니까, 사람이 없어서 안 했습니까, 젊은이가 없었습니까, 교회가 없었습니까? 왜 자기들 먹고 사는 일에 세상 사랑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거룩한 각성이 일어나니까 이방인들에 대해서 눈을 돌리기 시작하고 죽어가는 수많은 제 삼국의 국가들에게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각성의 열매들이 우리 나라를 방문해서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서 우리에게 신앙이 전해진 것입니다. 돈 가지고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레오나르드 레이븐 힐’인가 하는 그 목사님이 쓰신 글에 보니까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개탄을 하면서 그분의 통계가 얼마나 정확한지 모르는데 옛날의 미국은 그렇게 헌신적으로 주님을 섬겼는데 요즘 미국의 선교비는 미국민들이 씹는 껌 값보다 적다고 했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의 손이 만지고 지나가셔서 그 백성들이 아버지 앞에 변화되지 않으면 절대로 그들에게 준 부를 가지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틀림없는 일입니다.
오늘 날 우리들이 이제껏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많은 물질로 우리도 잠시 번영의 맛을 보았습니다. 그때 그 물질 가지고 정말 하나님을 위해서 살았는지 한번 우리 개인의 삶과 한국 교회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그러니까 한 사람이 신앙적으로 깊이 성숙하다고 그 물질 문제에 있어서 완전히 사심을 버리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 되겠다라고 정결한 사람이 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부자가 되고 싶으면 다 나에게 오십시오. 내가 가르쳐 줄테니까, 내가 목사이기 때문에 어떻게 버는지는 모르지만 어떻게 쓰면 하나님이 좋아하시는지 내가 압니다. 날 찾아오는 사람이 별로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잘 가르쳐 줄테니까 찾아오십시오. 우선 가지고 있는 것을 조금이라도 잘 쓰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그 문제에 있어서 정리된 사람이 되십시오. 쓸데없는 아집이나 집착이나 그 물질에 대한 사랑이나 그 물질로 자신을 더럽히는 그런 어리석고 바보같은 삶에서 완전히 돌이키십시오. 깨끗이 비우고 그리고 하나님이 내게 구원을 거저 주신 것처럼 내게 주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주님이 내게 무엇을 주시든지 제 즐거움은 그것을 주님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시지요?’ 하고 깨끗한 사람이 되어보십시오. 하나님이 맡기십니다.
요즘같은 때에는 정말 신앙이 좋은 사람이 돈을 많이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왜 아멘을 안 하십니까? 그렇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그러면 당장 덕을 보는 사람들이 여러분들이 아닙니까? 우리는 돈이 없으니까. 진짜입니다. 지금 사회 속에 돈이 통속에 꽉 막혀서 흐르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제는 신용을 보고 돈을 주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어느 때보다도 지금 무엇이 많을 때인가 하면 구제하고 나누어주는 일들이 많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니까 신앙이 없는 사람들의 수중에 돈이 들어가면 통장에 집어넣고 그것을 들고 이 은행, 저 은행에 이율높은 곳에 찾아 다니는 것밖에 할 일이 더 있느냐는 것입니다. 신앙이 좋고 그 문제에 있어서 깨끗이 정리된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돈을 맡겨주시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또 나누어주고 그러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런 일들을 하십니다.
나라도 똑같은 원리입니다. 결국은 이 나라가 경제적으로 하나님 앞에 회복되고 변화되는 것은 안 믿는 사람은 어차피 짐승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니까 그쪽 동네는 내버려두고 문제는 사람의 탈을 쓰고 사람이면서도 자꾸 짐승처럼 살아가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이런 때에 역설적으로 그 돈이 얼마나 하찮은 것이고 역설적으로 이 세상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가를 깨닫고 그리고 이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정결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서 깊이 하나님 앞에 참회하고 이 문제에 대해서 손을 놓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무엇입니까?
마지막으로 세 번째 이야기하는 것이 이 사람이 그렇게 하나님이 심판하신 그 상황에서도 여호와를 인하여 기뻐하고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즐거워할 수 있는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 바로 그런 믿음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2장에서도 말합니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많은 모순이 많고 그리고 납득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많은 어려움들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어떤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자기들끼리 차를 타고 가면서 이야기를 하는데 IMF가 얼마나 좋은줄 아느냐, 왜 은행에다가 돈을 집어넣으면 이자가 많이 나오지, 골프장에 부킹할 필요없지, 차 안 막히지, 야, 요즘 세상이 오래 계속됐으면 좋겠다고 하더랍니다. 그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래서 결국 우리들의 현실은 참 납득하기가 어렵습니다.
어느 경제학과 교수가 하는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민주사회, 자본사회에서는 잘 살고 못사는 일은 있고, 또 있어야 하고 또 그것이 있기 때문에 사회가 발전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우리 나라 같은데서는 못 살게 된 사람이 자기가 못 살게 된 것에 대해서 승복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못났데든지, 자기는 이렇게 살아야 될 사람이라든지, 저 사람이 나보다 더 잘난 사람이라든지, 훌륭하다든지, 그렇게 승복을 해야 하는데 승복을 못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더 열심히 살았고, 내가 더 좋은 사람이고, 저 사람들은 나쁜 놈들인데 나빴기 때문에 더 잘산다는 이런 식으로 하니까 사회가 더 깨지고 와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눈으로는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모순이 너무나 많고 그리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이 너무나 버겁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은 더더욱 믿음으로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요즘같이 어려운 때는 정말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사니까 이 사람이 큰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와서 모두 초토화 되어 버리고 자신조차도 어디로 가야할 곳이 없는 집 조차 사라진 상황이 되었는데도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고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는 놀라운 부흥을 자신 속에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돈으로 산 사람들은 돈이 사라질 때 불행해지지만 믿음으로 산 사람들은 믿음을 지니고 있는 동안 만큼은 그들은 모든 것을 이기고 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어려운 때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 어려운 때에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도록 만들어주신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었던 것, 여태까지 우리가 의지했던 것이 정말 하나님 보시기에 견고하고 좋은 것들이었는가 다시 한번 돌아보면서 오히려 우리는 이 어려운 때에 더욱 믿음으로 살아서 변하는 세상에서 불변하는 하나님을 믿는 참된 신앙의 가치가 무엇인가를 깨닫고 아버지 앞에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 어려움을 통해서 우리는 단지 가난하게 사는 것이 얼마나 지겨운지를 깨닫는 그런 바보와 같은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많은 역경과 어려움 속에서 믿음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소중하고 훌륭한지를 배워서 우리는 이 풍랑을 인하여 이 민족과, 이 시대의 교회와, 그리고 우리들이 더 정결해지는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변화되고 새로운 태도로 아버지 앞에 나아가서 보다 더 성숙하고 정결한 교회, 정결한 그리스도인이 될 때, 하나님께서 다시 한번 회복과 번영의 기회를 주시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우리 자신과 교회와 그리고 나라를 위해서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4.여호와께서 붙드시는 자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려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시37:23-25)
오후마다 우리가 몇 주에 걸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려운 때를 사는 그 방법에 대해서, 믿음에 대해서 우리들이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신자나 불신자를 막론하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 고달프고 힘겨운 인생을 살고자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저는 긴 인생을 살지는 않았습니다만 이제 저희가 이사를 몇번이나 다녔는지 지금 저는 얼핏 기억이 나지 않는데 한 8번인가 이사를 했습니다. 결혼 생활 19년만에, 그러니까 한 집에 2년 정도 밖에 못 산 것입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이 제일 오래 되었습니다. 그런데 고생을 많이 한 동네는 가기가 싫습니다. 그냥 이렇게 들어서면서, 물론 신앙적으로 생각하면 그곳에서 주신 하나님의 위로와 은혜도 참 크고 그리고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어떤 사랑도 참 컸습니다. 그런데 너무 힘겹게 보내었던 거기에는 가기가 싫었습니다. 차를 몰로 가다가도 어떤 때는 거기가 나오면 돌아갑니다.
가끔 옛날에 어떤 사람들이 자기가 하도 인생을 살다가 고생을 하고 난 다음에는 내가 이제 고생을 실컷한 그 장소를 보면서 내가 이다음에 나이가 들어도 그쪽을 대고는 내가 소변도 안 보겠다 그런 이야기를 가끔 하는데 과장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인생을 살고 보니까 그 장소를 미워하고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그 장소에 들어서는 순간 힘겹고 어려웠던 그 과거의 생각들이 일순간에 확 밀려옵니다. 물론 그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들을 만나 주시고 또 우리를 위로하시고 여러모로 하나님이 우리를 권고해주신 그 아름다운 신앙의 추억들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고생스럽고 고통스러운 게 다 기쁨이 된 것은 아닙니다. 고난을 통해서 주님을 만났지만 사실 좋은 건 고난이 좋은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만난 주님이 좋은 것이지 고난 그 자체가 뭐가 좋습니까?
모든 신, 불신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좀 편안하고 그리고 행복하고 안정된 삶을 살고 싶어합니다. 너무나 경제적으로 어렵고 곤궁할 때는 돈만 있으면 살 것 같았는데 사실은 돈만 가지고도 인생이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제 부유해지면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그 요인도 무궁무진하리만치 많습니다. 자,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평안하고 그리고 안전한 인생을 살고 싶어하지만 그러나 참 어느 곳에서도 안전과 평안을 찾기는 어려운 돌출하는 변수들이 우리의 인생에는 많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누구나 다 평안한 길을 걸어가고 평탄한 길, 그런 길들, 잔잔한 바다를 항해하는 것과 같은 그런 인생을 살고 싶어하지만 그러나 그런 인생을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실제로 걸어가는 사람들은 매우 적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답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그랬는가 하면, “하나님이 사람에게 길을 정하시고 하나님이 그 길을 기뻐하신다”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하나님이 길을 정해놓으시고 그 길을 기뻐한다, 뭐 그 길을 기뻐하신다는 이야기는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을 기뻐하신다는 말씀이 바로 그 말씀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길을 정해놓으시고 그리고 사람이 그 길을 걸어갈 때 하나님이 그 길과 그리고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을 모두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린 여기서 신앙 생활에서 한 평범한 원칙을 발견합니다.
여러분, 신앙 생활을 하면서 일어나는 모든 갈등과 번민은 대부분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하면, 이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길을 내가 걸어가고 싶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 걸어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죽지 못해서 끌려가는 것처럼 끌려가는 데 자꾸 금을 밟는 것입니다. ‘이 길 안으로 걸어가라.’ 그런데 자꾸 줄을 밟고 그리고 밖으로 튀어나가고 싶고 하는 그런 삶이 연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걸어가라고 하시는 길을 걸어가면서도 애정과 생각은 그 길을 걸어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데에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환난과 풍파를 만나는, 평안을 잃어버리는 가장 커다란 요인입니다. 외적인 삶에 있어서도 그렇고 내면적인 평정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신앙 생활에 가장 커다란 원리 중에 하나는 이제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 순간에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살 수밖에 없도록 운명지어진 사람이라고 생각해야 됩니다.
제가 맨 처음 예수를 믿고 나서 가장 크게 갈등을 느낀 것이 무엇인가 하면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을 줄 알았는데 예수님을 믿고 나니까 내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뭘 계획을 세웠는데 인생에 대한 계획표를 예를 들어 3박 4일의 계획표가 나왔는데 이제 30-40년 인생 계획표를 짰습니다. 그러니까 딴은 이렇게 되리라는 소망을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닙니까? 그럼 하나님이 하늘에서 손이 내려와서 빨간 펜으로 쭉 긋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니다. 댕, 그러는 것입니다. 댕, 하고 그어졌으니까 그것도 신앙이 있을 때는 그렇다, 아니다고 알 수가 있는데 신앙이 없으니까 이건 부딪쳐 봐야지만 벽인지 손인지 아는 것입니다. 쾅 하고 부딪쳐 보면 머리가 터지고 피가 나오면 아! 이게 아니구나. 하고 그때야 아! 이게 댕, 그것이구나.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댕이 너무 자주 나오는 것입니다.
제가 우리 집에서 우리 딸이 틀린 이야기를 요구하면 내가 ‘안 된다.’ 그렇게 말하는 대신에 댕, 그러거든요. 그러니까 아빠, 오늘 무엇을 사먹으러 가자, 댕합니다. 아빠, 비디오 하나 빌려줘 댕, 계속 말하는데 되지도 않는 이야기만 계속 하기에 댕, 하고 세 번이나 했더니 이 녀석이 화를 내면서 하는 이야기가 ‘아빠는 댕 밖에 몰라.’ 그럽니다. 제가 맨 처음에 예수를 믿고 나서 경험한 게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댕 밖에 몰랐습니다. 내가 이것을 하겠다고 그래도 댕, 그러면 이것으로 하겠습니다. 사실 하겠다고 물어보기를 합니까, 그냥 나는 갈 길로가고 ‘하나님, 나는 갑니다. 그러니 도와주십시오.’ 그러면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댕,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인생을 살면서 늘 하는 태도가 무엇인가 하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호흡을 맞추어서 그래서 하나님이 내 인생에 선두에 서시고 내가 어떻게 순종하고 따라가서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사실려고 하는 그 놀라운 계획들을 이루어 드릴까 가 아니라 그냥 나는 나대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볼 보이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슛을 쏘면서도 ‘주님, 패스나 똑바로 해주십시오. 센터링이나 잘해주십시오. 슛은 내가 쏩니다. 골인이 되면 이것은 완전히 내 개인기고 노골이 되면 당신 패스와 리바운드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논리를 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처음 믿고 보니까 안 믿을 때도 되는 일이 없었지만, 되는 일이 많았으면 믿었겠습니까? 안 믿을 때도 되는 일이 없었지만 믿고 나니까 더 되는 일이 없습니다. 모든지 살아보면 댕, 나중에는 이 속에서 화가 확 났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철이 없었을 때 제가 사람들을 찾아 다니면서 그랬습니다. ‘내 인생에 최대의 실수는 예수를 믿은 것이라고, 두 번째 실수는 이것이 안 물러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또 턱을 꼬면서 뭐 위대한 발견이라도 하는 것 모양 쳐다보는 멍청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사실은 아무 것도 없는데 멍청한 것이 그때 바로 저와 같은 목사를 만났으면 연구대상, 짐승, 그런 이야기를 매일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절대 살지 말라는 그런 삶을 골라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문제가 어디에서 오는가 하면 수없이 몸부림을 치면서 해봤는데 결국 어떤 결론이 나는가 하면 ‘절대 하나님은 내 마음대로 호락호락하신 분이 아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하여튼 무조건 그냥 이 세상에 있는 부모들은 저질러 놓고 보면 투덜거리면서도 뒷 감당을 해줍니다. 야단을 치면서도 그냥 할 수 없다고 하면서 해주는 것이 이 세상의 부모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내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내 마음대로 내가 원하는 데로 갔다면 그 결과가 얼마나 쓰디쓴지 충분히 맛보게 하셔서 이제 거기 다시는 안 가게끔 그렇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훈련 방법입니다.
그러니까 갈등이 일어난다는 것은 결국은 무엇인가 하니 나는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이제는 주님의 지시를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생각이, 사고가 바뀌어져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이 무엇인가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내가 가고 싶은 길이 있는 것입니다. 그곳으로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해를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만큼 이해심이 없는 분도 없으십니다. 그런 것은 이해를 하지 않으십니다. 왜 그것이 우리가 사는 길이 아니기 때문에 이해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는데도 자기가 깨트려지지 않은 사람들은 예수를 안 믿었을 때보다 훨씬 불행한 것 같습니다. 저를 보십시오. 되는 것이 없이, 아니 지금 말고 옛날에 되는 것이 없이 그러니까 나중에는 화가 나서 그랬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무슨 권리로 내 인생에 영역에 침범해서 매일 댕, 그런 것만 하십니까? 그렇게 내가 사는 것이 못마땅하시면 하나님 한번 내려오셔서 직접 살아보십시오.” 했습니다. 후일 깨닫게 된 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때 기도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은혜를 주셔서 오셔서 당신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왜 아멘을 안 합니까? 그러니까 하도 답답하니까 그런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어떻게 됩니까?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포기한 것이 제가 목사가 된 것이 포기입니다.
그때 제가 선명하게 기억하는데 일주일 금식하면서 제가 목사가 된다고 그럴 때인데 직장에 다닐 때인데 이제 아무 꿈이 없는 것입니다. 많이 울었습니다. 감격적이어서 운 것이 아니라 너무 억울해서, 이제는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리고 아무꿈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꿈꾸는 것은 ‘그저 시골이나 섬에 말귀도 잘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나를 보내주시면 거기서 허름한 교회 하나 진실하게 하다가 죽어야 되겠다’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때 깨달은 것이 있는 데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는 것은 이제 제가 주님도 사랑하면서 살겠습니다. 가급적이면 하나님 말씀을 잘 듣도록 그렇게 노력을 하겠습니다. 주님과 좋은 친선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주님의 마음을 상하지 않도록 제가 애를 쓰면서 살겠습니다. 주님이 제 인생에서 제일 높은 보스로 생각하고 살겠습니다. 그런 게 예수 믿는 것이 아니라 그때 깨달은 것은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자기 인생의 헌납증서에다가 사인을 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을 송두리 채 당신께 바치겠나이다. 아무 조건도, 이유도, 토도 달지 않고 바치나이다.’ 그리고 밑에다가 사인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찬송에 나온 것처럼,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그렇게 사인하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렇게 사인하고 기본적으로 그렇게 사인하고 나면 주님이 원하시는 길을 걸어가면 그럴 때 힘이 없거나, 잘 모르거나, 능력이 모자라거나, 아니면 원동력이 떨어져서 못 갈적은 있다고 할지라도 주님이 원하시는 그 길을 걸어가라고 주님이 명령하실 때 최소한 ‘억울하다, 난 그럴 수 없어, 내가 왜, 왜 하필이면 나야’ 이런 식으로 하나님 앞에 반항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당하는 굉장히 많은 고통은 욥과 같이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광대하고 특별한 섭리가 있어서 당한다기 보다는 대부분의 고난은 자기가 잘못해서 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고난만 당하면 다 욥과 같은 처지에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하는데 그것은 망상입니다. 그 사람이 비슷한 것은 고생한다는 것밖에 비슷한 것이 없습니다. 욥과 같이 고생하는 것은 비슷합니다. 그러나 고난의 이유는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도 욥과 같은 이유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이 없다고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의를 위해서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음은 지존자이신 하나님의 뜻을 멸시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지존자의 뜻을 불순종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그런 고난과 어려움을 당하는 것입니다.
시인이 오늘 이야기하는 것이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야, 너희들이 지금 어떤 고통을 당하고 있든지 어떤 어려움을 당하고 있든지 그것을 먼저 생각하지 말고 먼저 생각해야 될 것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정해놓으시고 하나님이 그 길을 좋아하신다, 그 이야기는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너,너... 각자 각자를 향해서 하나님께서 걸어가기를 원하는 길을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다.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알려주셨고 또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교통을 통해서 우리가 어떤 길을 순종하면서 걸어가야 되는지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그 길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그러니까 네가 지금 당하고 있는 고통보다도 더 큰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이 무엇인가 그것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이 피해볼 틈도 없이 계속 죽어라, 죽어라 눌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의 대부분은 어떤 생각인가 하면 자기가 고생을 하고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만 너무나 마음이 다 빼앗겨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원은 주님이 헬리콥타를 타고 오셔서 줄을 내려서 자기를 한번 건져서 그 시험과 험한 물결에서 건져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탈출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어째든지 상관이 없고 나만 거기서 벗어나고 구출받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런 사람들의 생각이지 하나님의 생각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과 어려움 속에 있을 그 때가 하나님이 우리를 훈련시키시기에 가장 좋은 길입니다. 그리고 가장 훌륭한 기회입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는 이제는 자기 중심에 길을 버리게 하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이 무엇인가를 생각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오늘 오전에 말씀드린 것과 같이 죄를 죽이지 못한 상태에서 -가끔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는 그것이 근본적으로 그 사람의 삶을 바꾸어놓을 수 없듯이 가끔 갸륵한 마음이 생겨서 하나님 앞에 충성을 하는 그것이 삶 전체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도록 만들어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가 하나님 앞에 하는 봉사나 헌금을 바치는 것이나 교회에 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교회에 도움이 되고 다른 지체들의 도움이 되는 것도 문제지만 더 중요한 것이 그것이 자신에게 진정한 축복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아니 그런 것은 다 빼고 아니 헌금만 많이 하면 돈으로 돌아오고 봉사를 많이 하면 그냥 건강이 좋아지고 정력이 왕성해지고 이런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고 미신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삶의 일부나 우리 손에 들려진 재물만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람 자신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아니면 그 사람의 손에 들린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어야지만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사고 자체가 이제는 고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면서, 인생의 경험을 하면서 우리는 속히 깨달아야 합니다. ‘아! 그렇구나. 하나님이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안 좋아하시는구나.’ 이렇게 하면서 삶의 관심 자체가 주님이 기뻐하시는가 이것입니다.
우리가 그 일을 순종하는데 있어서 얼마나 힘이 들 것인가, 그 길을 걸어가는데 있어서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될 것인가, 또 그 길을 걸어가는데 있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내가 잃어버릴 것인가 그런 것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그 길을 기뻐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생각이 그렇게 바뀌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인생에 위기를 안 만납니다. 또 인생에 위기를 만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야말로 하나님이 복주시기 위한 시련입니다. 그런 것을 못 만나는 사람이 불행한 사람이지 그런 것을 만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 생각해보십시오. 그게 바로 시인이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바입니다. 생각을 너희들은 옮겨라. 어떻게, 주께서 기뻐하시는 바가 무엇인가,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이 무엇인가, 그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 우리들이 벗어나는 가장 중요한 길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에 서 있어서 소근소근 하나님 앞에 속삭이는 기도가 하나님이 안 기뻐하시는 길에서 피터지도록 부르짖는 기도보다 더 위대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왜 아멘을 안 하십니까? 아멘, 그러니까 금식을 하고 무슨 철야를 하고 뭘해도 자신의 삶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에 서서 그 일을 해야지만 위대한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지 삶의 자리는 옮기지 않고 단지 기도를 통해서 세게 밀어 붙여서 하나님의 팔을 꺾어보려고 하는 그런 심보를 갖는 것은 그것은 멍청하기 짝이 없는 생각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른 길에 서야지만 우리의 인생에 폭풍들이 잔잔해지는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고난과 시련이 멈추지 않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두 번째로는 시인이 오늘 이야기하는 것인데 “저는 넘어지나 엎드려지지 않음은 여호와께서 붙드심이로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깨닫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생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에게도 때로는 넘어지고 쓰러지는 시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가는 그 사람에게는 결코 넘어짐도 없고, 좌절도 없고, 갈등도 없다라고 할 것같으면 사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복음을 전할 필요도 없습니다. 아니, 갑자기 예수를 믿고 나서 못 생기던 사람들이 은혜받고 나서 막 코가 올라가고 눈이 찢어지고 완전히 미녀로 새롭게 탄생한다면 사람들이 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몇 사람들에게 물어 보았는데 진짜 황당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배우의 사진을 보면서 이 사람처럼 멋있으면 한달만 살다가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합니다. 세상에, 한달이면 세상에 알려지기도 전에 죽을텐데, 참, 다 허망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모두 이 세상에서 복받고 정숙하고 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눈에 띨 정도로 다 행복하게 산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러면 누가 예수를 안 믿겠습니까? 복음을 전파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을 다시 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복음전파를 통해서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냥 복받고 잘 사는 것으로 건져내십니다. 자, 어느 날 새벽기도를 나가다가 차에 치여서 죽는 사람도 있고, 영시 예배에 가다가 물에 빠져서 죽는 사람도 있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어려움을 당해서 고통을 받는 사람도 있고 뭐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습니다. 우리는 사실은 사실대로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이잖아요. 정말 신실하게 믿음생활을 잘 하는 사람들도 질병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악인이 형통하는 것, 의인이 고난을 받는 것, 우리는 이 세상에서 모두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을 통해서 분명히 알 수 있는 바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정해놓고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 우리의 마땅한 도리지만 그 길을 걸어가면서도 넘어지는 사람이 있고 그리고 엎드려지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쓰러지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들이 완전히 엎드려지지 아니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붙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걸어가면서도 고난과 어려움을 만나는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고난과 어려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지식으로는 알 수가 없는 놀라운 신비한 방법으로 결국은 그들의 영혼을 부어주시고 그들이 그런 고난을 당하지 않은 것 보다 훨씬 더 훌륭한 사람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시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신비한 섭리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모두 다 드러난 뜻이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살아봐야 됩니다.
그러니까 올바른 길을 조금 걸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마치 우리에게 완전하게 복을 주셔서 드러나게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셔야 할 의무가 있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주님이 축복해주시겠다라고 하는 복권과 같은 그 축복을 미끼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에게 축복이 아니더라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신실하신 아버지시고 그의 사랑으로 우리를 건져 내셨으니 축복에 대한 약속이 없더라도 우리는 순종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위에다가 하나님의 복되신 약속까지 우리에게 제공해 주셨으니까 우리는 더더욱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가끔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사는 것이 믿음으로 살지 않는 것보다 훨씬 힘겨운 때가 우리의 인생길에 언제든지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이나 혹은 무지 때문에 걸려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따라 걸어가려고 하다가 연약해서 쓰러지는 것과, 고무신 거꾸로 신고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은 똑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십보 백보’라는 말을 아실 것입니다. 싸우다가 도망친 다음에 자기네 끼리 논쟁이 붙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왜 네가 더 많이 도망가지 않았느냐, 너는 얼마를 도망갔는데, 난 오십 발자국 밖에 안 갔다. 넌 나는 백발자국 밖에 안 갔다. 거봐라. 내가 훨씬 낫지’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다 똑같이 방향을 바꾸어서 도망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주님 순종하는 길을 걸어가려고 애를 쓰다가 힘이 모자라서 지식이 부족해서 잠시 주저앉고 쓰러지는 것과 고무신을 거꾸로 신고 반대편 길로 가는 것은 하나님 앞에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자기에게 주신 사명을 다 감당하지 못하고 잠시 힘을 잃어버리고 주저앉는 것과 그것을 거스려서 하나님이 안 기뻐하시는 길로 달음질치는 것과는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전자는 희망이 있지만 후자는 소망이 없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자기가 부르짖고 하나님 앞에 울부짖어 기도해도 소용이 없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일단 그가 걸어가는 그 길 자체를 하나님이 안 기뻐하십니다. 그 속에서 부르짖는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던 일을 그만두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해야지 그 길 자체를 하나님께서 안 기뻐하시는 데 그렇게 하면 되겠냐는 것입니다.
오늘 시인이 이야기하고 있는 바가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넘어지나 아주 엎드려지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그를 붙드심이로다” 여러분, 고난과 어려움이 있을 때에 우리는 특별한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위로와 특별한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고난이 있어도 고난보다도 넘치는 하나님의 위로가 있으면 우리는 고난 속에서 넘어지거나 완전히 실패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고난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새롭게 힘입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인이 오늘 이야기하는 것이 이런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이 걸어가는 사람들에게도 쓰러지는 길이 있지만 그러나 완전하게 엎드려지지 않는다. 왜 하나님이 버리시지 않고 일으켜 세우시기 때문이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불순종하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 아닌 길로 달음질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버리시는가, 사실 그런 식으로 함부로 이야기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의 현상적인 표현입니다. 어려움을 당하는데도 순종하는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와주신 것들이 직접 나타납니다. 그러나 불순종하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 아닌 다른 길로 내달음질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마치 지켜보시면서 어떻게 되나, 보고는 계시지만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는 것 같은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이 반대로 표현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걸어가지 않는 사람은 엎드려져도 돕는 사람이 없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차이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걸어가고 있는 이 길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인가, 그것이 기뻐하시는 길이 아니면 우리는 먼저 그 길에서 돌이켜서야 합니다. 여호수아 7-9장에 보면 아이성을 정복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호수아가 아이성을 정복하기 위해서 공격 명령을 했습니다. 갔는데 여리고성도 무너트린 사람들이 아이성에서는 대패를 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지도자인 여호수아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기가막히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자기는 모세와 같은 사람은 아니기 때문에 뭐 약간의 그 부목사가 담임목사가 된 것 같은 그런 약간의 두려움과 떨림이 없었다고 말할 수가 없는데 그러니까 엎드려서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사옵나이까?’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장시간 동안 엎드려서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왔습니다. 뭐라고 왔는가 하면 기가막힌 응답입니다. ‘너 왜 그러고 있냐.’ 무슨 바람 빠지는 소리입니까. 엎드려서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는데 ‘내 종아 네가 엎드렸구나.’ 이렇게 말씀하셔야지. ‘네가 왜 그러고 있느냐.’ 그러니까 지금은 기도할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일어나라. 네 백성들 가운데 있는 악을 제거하라 범죄하였다. 내 백성들이’
그러니까 그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여호수아와 마음 속에 깊이 새겨주신 것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순종이 기도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간절하고 열렬하게 부르짖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서 있는 그 자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리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난을 당하고 안 당하고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그가 그 고난을 누구를 위해서 당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불순종하고 우리의 삶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에 안 서있기 때문에 우리의 많은 기도와 간구, 그리고 많은 설교를 듣고 말씀을 깨닫는 것들이 모두 헛된 곳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흡수가 되지 않고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으로 역사하거나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어려움을 우리들이 당하고 있다면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이 어려움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걸어가다가 당한 어려움인가, 아니면 그릇된 길로 내 뛰는 어려움인가 생각해야 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지금 당하고 있는 영육간의 이 모든 괴로움과 어려운 일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길을 걸어갔기 때문에 주님께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징벌의 성질을 가진 그런 어려움일 것 같으면 우리는 기도보다 더 급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길을 기뻐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면 그 길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비로소 여러분들의 기도는 힘을 발휘할 것이고, 말씀은 여러분들에게 깨달아지기 시작할 것이며, 여러분들 속에 주님의 마음이 느껴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아니다 이 길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이 아니고 내게 주신 그 길이 아니고 나는 피할 수없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러면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기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특별한 뜻이 계셔서 연단을 주시고 여러분들을 인정하심에도 여러분들에게 어려움을 주시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예화: 옛날에 계시던 교회에서 어느 부모님이 자기의 아이를 자랑하듯이 이야기하는데 그 이유는 자기의 아이가 공부를 잘해서 학교에서 10등 안에 든 아이들은 강제로 학교 도서관에 남겨두고 공부를 가르친다고 하면서 은근히 자기의 애를 추켜세웠 다는 이야기)
지금도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여러분, ‘주일날 예배 끝나고 월요일 새벽까지 성경공부를 하겠습니다. 아무나 오십시오. 지망을 하십시오. 등록금은 한달에 50만원입니다.’ 그러면 아마 아무도 안 올 것입니다. 제가 믿음이 없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아마 50만원까지 내라고 하면 아마 아무도 안 올 것입니다. 돈 이야기는 빼더라도 그렇게 가르쳐 준다면 어구!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이렇게 해서 그래서 하나씩 불러서 ‘당신 아무래도 열린 교회에서 이 사람들 하고 섞여서 신앙생활 하기에는 아까운 사람이야, 더 열린 교회로 가야지 되겠어’ 그렇게 불르면서 ‘너는 도저히 솔직히 말해서 이 사람들하고 수준이 다르기 때문에 넌 따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낫겠어. 수준이 안 맞는 사람들 하고는 상대가 안 되어서 따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좋겠는데 그러면 열린 교회를 두 곳을 만들어야 되는데 난 몸이 하나이니까 너는 특별히 내가 수제자로 삼을테니까 주일날 밤을 새워서 성경 공부를 하자.’ 그렇게 해서 만약에 서너 사람을 모아서 내가 가르킨다고 하면 여러분들은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대게 부러워하든지, 아니면 뭐 그런 것을 만들었느냐고 하든지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그 어머니는 자기 딸이 도서관에 갇힌 게 그렇게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10등 안에 들어서 도서관에 갇혔다는 게, 그리고 선생님이 그 애들만 특별히 혼낸다고 합니다. 그것까지 자랑합니다. 왜 혼내냐, 그 애들을 1학기부터 잘 키워서 좋은 대학에 넣어서 학교 이름을 올릴려고 하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키워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더 많이 매를 맞고, 더 많이 가르키고, 더 많이 구속을 받는데, 더 많이 자랑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그 길에 서 있다가 어려움을 당하면 그때는 기쁩니다. 여러분들이 도서관에 집어넣고 하나님이 가둔 것입니다. 왜 아멘을 안 합니까? 아멘, 가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자랑해야 합니다. ‘난 갇혔다.’ 그렇게 자랑해야 합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둘 중에 어느 경우에 우리가 해당되는지 하나님 앞에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불순종하기 때문에 어려움을 당한다면 우리는 이 참에 돌이켜서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정결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러면 이 고생, 십자가 짐같은 고생이나 거기서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그 찬송 한번 해볼까요? -생략-
‘아, 하나님, 나같이 공부 못하는 사람을 도서관에 10시간씩 가두어 두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야, 나좀봐라. 나 있지 고난 당한다. 올바른 길을 걸어가는 데도 나는 고난 당한다. 너 그런 것 당해 본 적이 있니? 없어, 오죽 못났으면 하나님이 그런 것도 안 주시겠니.’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고난 가운데 손을 높이 들고 나를 정결케 하시고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하시는 이 놀라운 축복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한없이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순결이 무엇인가를 배우는 것입니다. 정결이 무엇인가를 배우고 마음이 가난해지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목마른 것같이 하나님 앞에 갈급해지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그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 벗어나는 것은 하나님 앞에 간절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불의로 말미암아 당하는 그 고난, 거기서도 자기를 돌이킬 줄 모르는 사람들은 고통을 받으면서도 하나님 앞에 깨닫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뭔가 자신의 인생의 길에 자꾸 먹구름이 끼기 시작하고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에 자꾸 제동이 걸리기 시작하고 무슨 일만 하려고 하면 하나님이 댕, 댕 그러시면 생각을 해야 합니다. 이 정도는 견딜 수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이 보실 때 고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못된 녀석, 하나님이 그렇게 느끼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못됐으면 하나님이 깨달으라고 특별하게 때리는 데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기가막히시겠어요. 애가 말을 안 들어서 좀 겁을 주려고 ‘이놈, 자식’하면서 볼기를 때리는데 애가 하는 이야기가 뭐라고 하는가 하면 ‘엄마, 그 정도는 까닥없어’ 그러는 것입니다.
(예화: 어린 시절에 할머니께 몇 차례 매를 맞았는데 때리실 때,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세게 때려야 되는데 살살 때리셨다는 이야기)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안 기뻐하십니다. 조금만 일을 당하고 어려움들이 반복될 때, 그때 크게 생각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왜 나의 삶에 하나님의 축복이 없을까? 왜 이렇게 부지런히 애를 쓰는데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을까? 왜 내 인생은 이렇게 곤고할까?’ 그리고 거기서 그렇게 작은 것을 작게 생각하지 말고 크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요. 좋습니다. 뭐가 좋은지는 지금부터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자, 자기는 잘나서 견딜 수가 있습니다. ‘나는 이 정도 어려움 쯤은 내가 견딜 수 있다. 내가 그래도 의지의 사나이다. 인간시대에 나올 사람이다.’ 아니 좋습니다. 좋은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자기는 그것을 견딜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무엇인가 우리의 인생에 어려움을 주시고 제동을 거실 때는 하나님이 ‘너, 죽어봐라.’ 그리고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애들을 향해서 잘못했다고 막 때릴 때는 그것이 죽으라고 때리는 것입니까, 보복하는 것입니까? 나도 마음 아팠으니까 너도 한번 아파봐라. 그리고 때리는 것은 그것은 부모가 아니고 짐승입니다. 때릴 때 듣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하면 항복을 듣고 싶은 것입니다. ‘잘못했습니다.’ 그것을 듣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맺집이 워낙 좋아서 그냥 때리고 엉덩이가 터져서 피가 흐르는데도 그냥 죽어라고 맞는 것입니다. ‘때려라, 네 자식 죽지 내 자식이 죽느냐.’
우리가 견딜수 있다 없다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우리를 무엇인가 때리시고 우리를 어려움 가운데서 우리를 징책하실 때에 그 하나님 마음 속에 있는 아픔은 매보다 훨씬 큰 사건입니다. 그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견딜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다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참는다고 해서 그것이 모두 다 참을 수 있는 우리의 능력 범위 안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을 수는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정도 때려주시는 것을 난 참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지금 견딜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인데 주님이 나를 그렇게 사랑하심에도 불구하고 나를 때리실 때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겠습니까? 그리고 그 실패를 통해서 그 하나님의 아파하시는 그 마음, 변하지 않는 나를 향한 그 하나님의 찢어지는 슬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그것을 인식할 수 있어야지, ‘이 정도는 견딜 수 있어’ 그럼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어떻게 합니까? 엑셀을 밟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손으로 때리는 것을 회초리로, 회초리로 안 되는 것은 곤장으로 패는 수밖에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도 깨닫지 못하면 그게 바로 무엇인가 하면 이사야 선지자가 1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성한 곳이 없는데 아직까지도 깨닫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짐승인지, 말도 자기 구유를 알고 소도 자기 임자를 알아보는데 어떻게 그렇게 맞으면서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징계에 면역이 든 사람처럼 그렇게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정말 하나님을 너무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살면서 자신을 도무지 돌아보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이 어차피 복을 주시지 않을 것이니까 그럼 하나님 내 인생 내가 해결합니다.’ 이게 결국은 배교나 마찬가지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제대로 된 신앙이라면 ‘하나님이 복주시면 난 복을 받을 것이고 하나님이 복을 주시지 않으면 나는 축복이 없이 살아야 되는 사람입니다.’ 이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이지 ‘주님이 복을 주시지 않으면 그럼 주님, 내가 알아서 합니다.’ 이게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잘못해도 많이 잘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려움을 당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불순종하면 우리에게 이런 고통을 주실 때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고통은 얼마나 크실까?’ 그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자식의 눈에 눈물이 흐를 때 자식을 매질하는 부모의 마음에는 피가 흐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이런 아픔 속에서도 나를 이렇게 징벌하셔야 될까?’ 생각해야 됩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걷지 않고 있구나’ 그것을 속히 생각하고 돌이켜설 때에 내가 좋아하는 길을 버리는 손해와 희생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계속해서 어그러진 길로 불순종하며 걸어갈 때 주님이 아파하고 고통하실 그것을 더 많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길을 우리 스스로 안 가겠다고 포기하는 것은 우리의 즐거움을 버리는 것이지만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길을 걸어가는 것은 주님의 마음에 못을 박는 것입니다. 우리의 즐거움을 위해서 하나님의 마음에 못을 박아야지 옳겠습니까? 그러고도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왜 축복이 없을까? 왜 나의 삶은 이렇게 곤고한가? 왜 무엇이든지 자꾸 내 인생에 제동이 걸릴까? 하나님이 나를 안 기뻐하시는 것은 아닐까? 내가 어떤 점에 불순종하고 있을까? 내가 이렇게 고난 속에서 아파하고 힘들어 할 때에 주님의 마음은 나같은 사람 보면서 얼마나 더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실까?’ 그것을 생각하고 ‘내 멋대로 사는 잠시의 즐거움 때문에 주님의 마음에 고통을 드렸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거기서 돌이켜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모든 것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어려움을 만났습니다. 인생에 위기가 닥치고 곤고함에 빠졌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어렵습니다. 그리고 모든 시험에 가득찼습니다. ‘주여, 도와주시옵소서’ 그리고 눈물로 기도하고 울부짖었습니다. 한참만에 들려오는 음성이 ‘너 왜 그러고 있느냐’ 여태까지는 부르짖지 않아서 안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알고 보니까 거기가 내가 서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닙니다. 그러면 이동을 해야 합니다. 거기서 엎드려서 피터지게 울부짖는 것 보다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로 딱 돌아섰을 때 ‘하나님, 헬프미’ 하는 응답이 훨씬 더 빠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말 오늘 우리들이 당하고 있는 이 어려움이 교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우리 개인적으로나 하나님이 우리를 정결하게 하셔서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고치시는 그런 계기가 되도록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의인의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고” 또 의인의 자손들이 걸식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은 우리에게 어떤 믿음을 심겨주는가 하면 하나님은 당신에게 순종하는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을 반드시 물질적으로도 축복하시고야 만다는 사실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은 다 좋은 것이고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것은 다 나쁜 것입니다.
내가 어려서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지적으로 혼동된 것이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시험 문제가 나왔는데 답이 너무나 분명한 문제가 나온 것입니다. 그때마다 이 어린아이가 저였습니다. 생각을 하는것입니다. 선생님이 이런 쉬운 문제를 낼 리가 없다. 그리고 답이 너무나 쉽고 정확한 것은 거기서도 고민을 하고 다른 생각을 해서 다른 답을 찍다가 다 틀리는 것입니다. 어려운 문제는 맞고 쉬운 문제는 다 틀린 것입니다. 이런 방식이 잘못 됐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3학년 쯤 되서야 겨우 깨달았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어리석은지,
(예화: 학교 앞에 많은 종류의 불량식품을 팔았는데 선생님이 절대 사먹지 말라고 하시 며 길거리에서 사먹는 것은 다 불량식품이고 집에서 먹는 것만이 믿을 수가 있다 고 하셨는데 때로는 어른들이 애들을 데리고 길거리에서 사먹는 것을 보면서 이 해할 수가 없었는데 어린 마음에 그저 생각되는 것은 그 물건이 엄마 손을 통과 해서 오는 동안에 무슨 힘에 의해서 변화가 생겨서 그래서 어른들이 사주면 안심 을 했다는 이야기)
자, 보십시오. 우리 인간의 부모도 자식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를 정확하게 압니다. 그래서 거기로부터, 부모 손으로부터 오는 것은 대부분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완전한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는 너무나 잘 아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 것은 고난도 좋은 것이고 아픔도 좋은 것이고 심지어는 사랑하는 사람과 생이별을 하는 것도 하나님께는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이별은 좋은 이별입니다. 만남이 너무나 행복해도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 만나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마음 아픈 불행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심지어는 죽음까지도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은 참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로부터 오지 않는 것은 다 나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단순한 믿음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것이 좋은데 하나님의 자녀들이 잠시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게 살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계셔서 너무 물질적으로 궁핍하고 고통을 받는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앞에 순종하면서 의로운 길을 걸어가는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이유없이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없이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시지 않을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리고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에게는 걸식하지 않는다. 그게 무슨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도 몇십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밥만 먹여주면 장정이 와서 해뜰 때부터 해질 때까지 일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즘도 그런 말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 어떻게 사업이 잘 됩니까?’ 그러면 ‘밥은 먹습니다.’ 그러면 옆에 사람이 무엇이라고 하면 ‘그럼 됐지, 요즘 세상에’ 그렇게 합니다. ‘그러면 됐지’ 그게 그 때 생겨난 말이 아닙니까, 옛날에. 딸을 시집보낼 때도 그저 어떤 사람은 ‘밥이나 먹으면 됐지’ 그런 것입니다.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하면 젊은 사람들이 펄쩍 뛸 것입니다. ‘누가 밥을 못먹은 귀신이 있나’ 그런 시대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래서 ‘걸식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하나님 앞에 의롭고 바르게 사는 사람은 하나님이 반드시 축복하십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이 정말 그렇게 하나님 앞에 복받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은 가난한 사람도 많고 어려운 사람도 많고, 오히려 도와주어야 할 사람들이 더 많을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신앙의 정절을 지키고 주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한 두 번 실험하지 말고 계속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어려움이 와도 믿음으로, 고난이 와도 신앙으로 그리고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고 싶다는 그런 일념으로 하나님 앞에 사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왜 복주시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어려운 때일수록 더욱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스스로 일어서려고 노력하기보다 하나님의 축복을 힘입기를 원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때에 우리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런 모습으로 변하고 또 우리의 길도 돌이키고 또 하나님께서 우리의 산업에 우리의 생업에 하나님이 복주셔서 그렇게 부요한 삶을 살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5.믿음과 의심
“바로가 가까워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 뒤에 미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출14:10-11)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인생에 깊은 어려움 속에 처하게 되면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고 싶어하는 그런 절박한 마음이 생겨나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또 그런 도움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게 마련입니다. 더군다나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미 오래 전서부터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어려울 때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한다는 것을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습니다. 그 하나님 앞에 어떤 어려움에 처하든지 간에 주님 앞에 도움을 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본분이오, 또 실제의 생활이라고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이제 우리에게 이처럼 놀랍도록 신앙의 참된 본을 따라서 살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또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데 우리들이 기억해야할 것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이런 어려움에 처하고 또 이런 큰 위기에 처할 때마다 우리들이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이 도와주시는 그런 은혜로 사는 백성들이라는 사실을 우리들이 온전히 고백하며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신다라고 하는 이 큰 고백이 우리에게 실제 역사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어려움 속에서 주님을 온전히 의뢰하고 신뢰하는 그런 은혜들을 우리들이 쌓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누구든지 주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이 없고 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려움이 생길 때 하나님 앞에 부르짖을 마음을 갖지 않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오늘 좀 깊이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 부르짖고 간구하고 기도할 때에 주님의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기도할 때에 주님 앞에 드리는 기도와 간구가 하나님께서 돌아보시는 기도와 간구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철저하게 하나님만 신뢰하는 기도로 아버지 앞에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 상황을 통해서 우리에게 오늘 한번 깊이 깨닫게 되는 것이 바로 그런 내용들이라고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탈출해서 첫 번째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 사건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홍해에서 앞에 넘실거리는 물결을 만나게 되고 뒤에서는 애굽의 백성들이 병거를 거느리고 이들을 해치기 위해서 달려오고 있는 그런 상황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 때에 이 사람들은 큰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큰 어려움에 처해서 전심으로 하나님께 부르짖고 전심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렸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커다란 공포와 두려움이 이들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 앞에 부르짖게 만들어준 것입니다.
그러나 이어서 보면 그들은 하나님께만 부르짖은 것이 아니라 또 모세를 향해서도 부르짖었습니다. 모세를 향해 부르짖으면서 하는 그 말이 “네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서 여기서 죽게 하느뇨”라고 하며 애굽에서 자기들을 인도한 그 모세를 향해서 항의를 하고 그리고 그에게 불만을 털어놓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오늘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어떻게 여호와 앞에 부르짖은 사람이 또 금방 모세를 향해서 부르짖으면서 모세에게 원망을 털어놓을 수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생각하는 바는 믿음과 의심이 신자의 마음 속에 공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있지만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마음이 그 안에 있어서 그래서 믿음과 의심이 함께 교차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과 의심을 함께 교차하고 그 믿음과 의심이 한 인격 속에서 함께 다투면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바다 위를 걸어갔던 베드로를 생각합니다. 그가 믿음으로 걸어갔을 때는 걸어갔지만 의심이 곧 그의 마음 속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그는 일렁이는 물결 속에 빠져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이렇게 한 인격 속에 두 가지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모세를 바라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르짖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을 향해서는 부르짖었다고만 되어 있고 모세를 향해서는 부르짖으면서 구체적인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 그들은 먼저 “우리를 어찌하여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었느냐”라고 말함으로서 마치 자기들을 인도한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모세라고 고백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 앞에 매우 커다란 불신앙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세가 인도했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모세는 단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는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애굽의 모든 하수를 피로 만들고 개구리가 솟아나게 하고 이가 돋아나게 하고 악질이나 독종 그런 놀라운 이적들이 일어나게 만들고 급기야는 바로의 장자까지 죽도록 만들은 그 놀라운 이적적인 사건은 결코 모세 자신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그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그들은 모세가 애굽에서 자기들을 인도했다고 말해서는 안 되었다는 말입니다.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신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 큰 억압과 압제로부터 그들을 벗어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슴에 새겨야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깨달아야 할 수 있는 한 가지 신앙적인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의심하는 마음과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는 마음은 통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는 마음은 의심하는 마음이고 의심하는 마음은 하나님을 주목하는 대신 사람을 주목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인생을 살다가 잘되고 어려움이 었을 때는 그런 일이 적은데 커다란 어려움을 만나고 인생에 위기에 닥치게 되면 이제 한결같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부인하고 그리고 하나님을 배반하는데로 단번에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제일 먼저 인생에 큰 어려움이 닥치게 되면 자신의 인생에 어려움에 원인, 이것을 모두 인간에게서 찾으려고 하고 환경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성공하면 똑같습니다. 자기를 승리하게 해주시고 복주신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하는 대신 자기의 성공의 원인을 자신의 능력과 재능 그리고 자신의 훌륭한 점에서 발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바로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는 것과 그리고 온전한 믿음이 얼마나 깊은 관계에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국 이 큰 어려움을 통해서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 속에 믿음이 얼마나 작고 불신앙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길을 돌아섰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애굽을 뒤로 하고 430년 동안에 삶이 묻혀 있던 그 애굽 생활을 등지고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찬송하며 광야로 뛰어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전에 하나님이 애굽에서 이들을 건져 내어서 강퍅한 바로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이들을 원하는 곳으로 가라고 짐승과 그 다음에 이들의 자녀들과 모든 소유를 한번에 모두 놓아준 그 장면은 결코 지금 이 큰 홍해 앞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행하셔야 할 위기보다 적은 위기가 아니었습니다. 앞에는 지금 홍해의 위험이 놓여있고 뒤에서는 애굽의 군대들이 쳐들어 오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보다 훨씬 더 커다란 위기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 내셨습니다. 애굽의 병거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추격해올 때는 밤이었습니다. 그들이 왜 단숨에 달려들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쳐부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들의 눈 앞에서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앞서 인도하던 불기둥이 자리를 이동해서 이제 그들 가운데 맹렬하게 타오르게 끔 불기둥으로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애굽의 병거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큰 능력과 이적을 베푸셨던 것입니다.
눈 앞에 지금 하나님이 행하시는 크고 놀라운 이적이 눈에 보이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하여 일하시는 것이 목전에 있는데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능력으로 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앞에 놓여있는 홍해와 그리고 들려오는 군대의 함성, 그래봤자 여호와께서 그들을 다가오지 못하게 하시니까 다가오지도 못하는 그 연약한 군대를 보면서 그들은 심장마비가 걸리기 직전에 놓여있는 그런 초라한 사람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초라한 믿음은 우리를 매우 초라하고 비굴하게 만듭니다. 위대한 믿음은 우리의 자존심을 북돋고 그리고 위대한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존중심을 갖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언제나 비굴한 삶을 살게 마련이고 신앙이 없는 하나님의 교회는 언제나 초라한 처지를 면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이 펼쳐진 믿음과 모험의 위대한 세계를 지나치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믿음의 눈으로만 보이는 그런 놀라운 하나님의 약속과 유업들을 찾아내며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얻기 위해서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에 자신을 던지는 모험을 감행했습니다. 그것은 영웅주의나 모험심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든 믿음의 결과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놀라는 이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눈 앞에 어찌 그 불기둥이 있을 수 있겠으며 그 불기둥이 어떤 모습인지는 우리는 알 수가 없지만 ‘십계’에서 보니까 아주 기가막히게 표현했습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집에 가서 빌려보시기 바랍니다.
그 불기둥의 목표가 무엇이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는 길을 밝히는 하나님의 임재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불기둥은 단지 모양만 오르는 그런 모닥불과 같은 것이 아니라 그 타오르는 불길로 인해서 찬란한 빛을 비추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심야도 능히 행진할 수 있으며 실족하지 않는 정도에 밝은 빛이었습니다. 자, 300만명 가까운 사람들이 가로등도 없고 조명등도 없고 조명탄도 없고 앞서서 선도하는 차량의 해드라이트도 없는 아스팔트도 없는 그 광야의 길을 실족하지도 않고 안전하게 걸어갈 수 있을 정도의 불빛이면 어느 정도나 불빛을 비쳐야 되겠는지 한번 상상력을 발휘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잠실 대운동장에 나이트 게임을 하기 위해서 찬란하게 불을 밝혀놓아도 겨우 거기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6000만명에 불과합니다. 300만명이 실족하지 않고 발을 헛딛지 않고 걸어갈 수 있을 정도의 빛이라면 그 빛은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불기둥이었을 것입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찬란하고 장엄한 불기둥이 이스라엘 백성이 뒤에 오는 길과 앞서는 길을 모두 비추어서 걸음이 실족하지 않을 정도로 그들을 인도할 수 있는 찬란한 빛이었다고 생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 불이 이제 애굽의 병거를 지극히 혼란스럽게 만드는 장면이 눈에 보였습니다. 그것을 주목하고 있는 동안 하나님의 능력을 어떻게 의심할 수가 있겠으며 그 하나님이 자신들을 보호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어떻게 저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그 불빛을 바라보는 대신에 그들은 홍해의 물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커다란 의심에 휩쌓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믿음은 작은 것이었고 모세를 원망하는 그 불신앙은 커다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과 의심이 함께 섞인 기도를 기뻐하시지 아니하고 순수하게 믿음으로만 드리는 기도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에 역사하는 힘이 지극히 크고 많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향해 이렇게 원망한 것은 이제 모세를 향한 원망 자체가 문제가 되기 보다도 그들 속에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지 못하는 그런 불신앙이 문제가 되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이 기도는 커다란 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새롭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실 때에 우리는 의심하지 않는 어린아이와 같은 단순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내일부터 이제는 교회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제 우리에게 기도하게 하실 때에 우리가 전심으로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이런 가르침을 본받아서 기도해야 합니다. 의심이 섞이지 않는 믿음으로 역사하는 어린아이와 같이 단순한 생각과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제까지 행하신 하나님이 친히 행하신 일이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이 여기 세워주셨기 때문에 이 지점에 있고 그리고 우리가 주님이 세워주셔서 여기 있기 때문에 이런 종류의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출발이 하나님 앞에 잘못됐다면 우리의 출발부터 점검해야 되겠지만 주님이 인도하셔서 여기에 왔으니 이제 우리는 뒤를 돌아볼 것이 아니라 앞에 있는 이 홍해와 같은 일들을 위해서 주님이 어떻게 역사하실 것인지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간구하며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부르짖고 모세에게 부르짖으면서 결국은 모세를 원망하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의심하는 것이 되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인간적으로 보면 당연한 것입니다. 여러분, 바다 앞에 놓여있습니다. 뒤에는 지금은 불기둥 때문에 못 오지만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들은 결국 그 불기둥을 지나서 자기들에게 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애굽의 군대는 얼마나 강력하고 무서운 군대인지는 우리들이 일제시대 때 순사에게 질린 것만큼이나 이 사람들은 질렸을 것입니다. 그들은 애굽의 군대를 보면 오금이 저리는 공포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바로 저 눈 앞에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특별한 뭔가의 역사로 못 오고 있지만 하나님이 역사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저들이 자신들에게 다가오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장면만 더 크게 자신들에게 다가온 것입니다.
자, 앞에는 홍해가 있습니다. 무슨 답이 나올 수가 있겠습니까? 광야라면 도망칠 수도 있고 만약에 300만명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버린다면 어떤 무리들은 잡히겠지만 대부분의 무리들은 도망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외길입니다. 진짜 돌이켜 설 수도 없는 길이고 나갈 수도 없는 길입니다. 또 하나 배우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해답은 인간의 예측을 초월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 부르짖으면서 하나님이 결국은 그 바다를 가르셔서 좌우로 벽이 되어서 서게 하셔서 그 사이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나가게 할 것이라고 하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이디어를 낼 수가 있었겠습니까? 만약에 누가 그런 생각을 했더라면 쓸데없는 소리 말라고 아마 욕이나 먹었을 것입니다. 물이 벽을 만들어서 벽에 이렇게 들여다 보면 고기가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보였을 것입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그 벽을 튀어 나오면 그 고기는 맨 바닥에 떨어졌을 것입니다. 그 진기한 역사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너게 하실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을 수 있었겠습니까? 물을 가르니까 땅이 드러났다고 그러는데 히브리 성경에서는 “야파시아”입니다. 야파시아 라는 단어는 땅은 땅인데 그냥 땅이 아니라 마른 땅이라고 합니다. 바다를 갈라놓으면 깊은 늪지대였고 뻘이었다면 그럼 아마 물을 피해서 살아남은 사람이 물기둥 사이에서 뻘에 빠져서 죽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다를 가르시면서 일시에 땅을 말려버리시는 것입니다. 딱딱하고 밟아도 땅이 꺼지지 않는 300만명이 계속해서 지나갈 때 그 하중이 얼마나 컸겠는가 생각해보십시오. 그래도 빠지지 않고 질척거리지 않는 완전히 마른 땅을 만들어 놓으셔서 거기로 지나간 것입니다. 증거가 무엇입니까? 애굽의 병거가 달려들어 왔습니다. 그것이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마른 땅이 드러난 것입니다. 거기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나가는 것입니다. 계산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이게 바로 신앙에 있어서 묘미입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다만 기도하고 하나님이 역사하실 것을 믿지만 어떻게 역사하실지 모릅니다. 어떤 때는 계산을 하고 생각을 하고 그림을 그려보아도 그런 그림과는 아예 상관이 없이(?) 없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이신가 보시기 바랍니다.
(예화: 예전에 목사님이 사시는 동네에 그림같이 예쁜 교회가 있었는데 그 교회는 가난 한 사람들이 모여사는 동네에 있으면서 교인들이 교회를 지을 수 있도록 기도하 는데 그 교회의 청년이 약수터에 갔다가 오면서 풀 숲에 쓰러져 있는 할아버지를 발견하고 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으시게 하면서 그분을 늘 찾아가서 복음을 전 하고 주의 사랑을 전하고 하니까 그 할아버지가 소원을 하나 말하라고 해서 교회 를 짓고자 하는 마음을 말하자 그 할아버지가 아름다운 교회를 지어주셨다는 이 야기) 자, 그 교회 목사님이나 성도들이 교회를 짓게 해달라고 기도할 때 그렇게 되리라고 상상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 이렇게 계속 기도하면 그 거룩한 백수가 조깅을 할 것이고 그러면 누가 쓰러져 있을 것이고 그러면 당장 업어갔으면 될 것이라고 생각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오늘 그렇게 기도해야 되겠습니까? 우리 거룩한 백수들은 모두 물통을 들고 조깅을 가자고, 이 교회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믿음입니다. 도저히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각 개인마다 각 교회마다 역사하는 교회에는 간증이 있는 것입니다. 간증이 있고 하나님 앞에 은혜 내려주시는 놀라운 일이 있는 것입니다.
(예화: 김준곤 목사님이 정동에 건물을 세우기 위해서 박대통령을 만나기 위해서 면회 를 신청하고 10분의 시간을 만나기 위해 뛰어오는 모습을 모니터에서 본 대통령 의 마음에 깊이 감화가 있어 그 목사님의 원하시는 그 말씀을 들어주어서 지금의 정동 자리에 빌딩을 세웠다는 이야기) 그런 식으로 길이 열릴 것이라고 사람들이 맨 처음부터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마 저금통을 만들고 통장을 만들어 한 푼 두 푼 모아서 땅을 살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갔습니다. 그리고 헐값에 산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젊은이들이 여름방학 때면 들통을 지고 돌짐을 날르고 노가다를 해서 품을 팔아서 그래서 빌딩을 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가 계산하고 머리를 굴리는 그 구도대로 움직이시는 것이면 여러분들이 하나님보다 머리가 더 좋을 것입니다. 다 해놓고 ‘아! 역시 하나님 그곳으로 오시는구나’ 하나님을 아이큐 100으로 만드는가, 하나님의 역사는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다른 간증과 역사가 일어나도 똑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 바보같은 사람이 우리 전래동화에 나오는 놀부가 아닙니까? 흥부가 왜 그렇게 복을 받았습니까? 다리가 부러진 것을 고쳐주었더니 복을 받았습니다. 그랬더니 이 놀부는 가서 멀쩡한 새의 다리를 부러트려서 그것을 붕대로 감아서 복을 받으려고 한 것입니다. 박을 타기는 탔지만 거기서 온갖 도깨비들이 다 나온 것입니다.
모두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방법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그 상상과 인간의 계획, 인간의 여러 가지 구도를 초월해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숙제는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실까? 그 호기심 갖고 바라볼 것이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루어지면 되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방법은 불법하고 불의한 방법이 아니라 거룩하고 은혜로운 방법으로 하나님이 친히 역사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무엇인가 하면 우리가 한 마음으로, 한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것처럼 한편으로는 여호와께 부르짖고 한편으로는 사람에게 원망하고 의심을 해서 우리의 기도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제가 여러분들에게 부탁을 합니다. 이야기좀 하지 마십시오. 자꾸 뭐가 어쨌더라, 누구는 헌금을 한다더라, 누구는 어떤 대더라, 그런 이야기하지 말고 입을 다물고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 헌금은 우리가 하지만 역사하시는 것은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한 마음으로 입단속을 잘해야 합니다.
그리고 돌아다니면서 이야기할 시간이 있으면 가서 아르바이트를 해서라도 일당이라도 버시기 바랍니다. 쓸데없이 힘들이지 마시고, 다 입 단속 하고, 누가 뭐했더라, 누가 뭐 한다더라, 누가 뭐 어쨌더라, 하지 말고 그때 가보면 압니다. 이야기하지 말고 입다물고 그리고 우리는 이제 사람을 향하여 말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고 그리고 순전한 믿음으로 주님이 우리에게 역사할 것을 바라보면서 우리 스스로 최선을 다하며 하나님 앞에 매달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아마 다 끝나고 나면 야! 하나님이 그런 놀라운 방법으로 역사해주셨구나,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후에 거기에서 자기들을 쫓아오다가 물결에 휩쌓여서 여기저기 떠 다니는 애굽의 병사와 병거를 본 후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송했던 것처럼 우리도 10월 10일날 그렇게 주님을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6.물과 피를 흘리심은
“그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요19:34)
우리가 이제 은혜로 염려를 극복하며 사는 길에서 말씀을 들어오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살면서 근심하게 되고 염려하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그 근심하는 대상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근심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근심될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미 죽을 각오를 한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두렵지 않고 죽음이 오는 것이 염려가 되지를 않습니다. 목숨을 다 사랑하니까 병이 들면 걱정이 되고 또 어려움이 닥치면 나의 안일하고 안락한 삶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도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모두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마지막 못 박혀죽으신 후에 그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러서 물과 피를 흘리시는 그 장면을 우리들이 한번 말씀을 통해 상고해 보면서 우리가 진정 염려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기 보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이 옳다는 말씀을 오늘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시는 이 광경을 요한복음이 생생하게 마지막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한만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아 놓으니까 결국은 운명하셨습니다. 다른 강도들은 아마 숨이 덜 끊어진 모양입니다. 예수님이 운명하셨습니다. 그 두 강도들은 다리를 꺾고 그리고 예수님의 다리는 이미 돌아가셨기 때문에 꺾지 않았는데 그것도 성경에 이미 예언된 것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으셨는데도 불구하고 이제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확인사살 한다는 의미에서 예수님의 옆구리에 창을 찔러 넣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죽인 사람을 온통 예루살렘 전체를, 이 유대땅 전체를 뒤흔든 그런 엄청난 인물이었고 또 중요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확인사살하는 그런 입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한쪽 옆구리에 창을 넣은 것입니다.
그러자 그 광경을 요한이 모두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처음에는 예수님을 버리고 멀리 도망갔습니다만 시간이 흐르면서 예수그리스도에게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아직 십자가에 못박혀 계신 그 시간에 요한은 돌아오게 되었고 그리고 돌아온 요한은 예수님의 세 번째 말씀인 가상칠언의 세 번째 말씀부터 모두 귀담아 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운명하시는 이 광경을 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확인사살하기 위해서 이제 예수님의 옆구리에 창을 넣었을 때에 그 사건은 전혀 로마의 병정들이 무엇인가 우리에게 가르쳐주기 위해서 시범을 보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에서 창을 옆구리에 맞으셨고 그리고 물과 피를 모두 흘리신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고 싶으셨던 일이 무엇인지를 아주 명백하게 알 수 있는 그런 그림과 같은 교훈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셔서 그 창을 옆구리에 찔림을 당했을 때 “피와 물이 모두 흘렀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결국 이렇게 창에 찔려 흘리신 그 피는 결국 무엇을 위한 피였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그 피는 먼저 주님의 진노를 만족시켜드리기 위한 피였습니다. 구약에서 이 피는 생명을 의미했고 그 짐승이 피를 흘린다는 말은 곧 생명이 다하였다라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구약에서 이제 짐승을 제물로 바치기 전에 그를 죽여서 피를 모두 흘린 후에 주님의 제단에 바쳐지듯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병정이 옆구리에 넣은 창에 피와 물을 모두 쏟으셔서 완전한 제물이 되셔서 이제 아버지 앞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만족시켜드리기 위해서 주님 앞에 자기를 바치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나무에 매달아 죽인 것을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두지 않는 이유는 나무에 매달아 죽은자 자체가 부정하거니와 나무에 매달려 죽은 사람은 저주받은 사람에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흘리시는 이 물과 피는 바로 우리를 위해서 저주를 담당하시고 주님의 진노를 만족시켜드리기 위해서 흘리신 피였습니다.
여러분, 예수그리스도께서 이처럼 마지막에 십자가에 매달려 운명하시고 창에까지 찔려서 철저한 죽임을 당하셨던 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컸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님이 흘리신 그 피로 우리가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얼마나 진노하고 계셨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마지막에 창 깊이 찔려 물과 피를 모두 흘리신 그 처참한 광경을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섬기시던 그 손에 못 박히시고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먼 길을 다니시던 그 복음의 발이 굳게 못 박혀 피 흘리고 채찍과 유대인들과 병정들의 조롱을 위하여 당한 상처가 많은데도 거기에 그치지 않고 악한 병정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창을 넣었습니다. 그 창은 옆구리를 뚫고 허파를 뚫고 마지막에 가슴 깊이 감추어져 있는 심장을 찔렀고 오늘 쏟아지는 그 피와 물을 모두 보았다고 말한 이 요한의 증언은 바로 그렇게 예수의 가슴에서 터져나온 그 피와 물을 모두 쏟은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전에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거기서 우리가 매달려서 그렇게 살찢고 죽어야 할 그런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심으로 주님의 진노의 불을 끈 것입니다. 수많은 짐승을 죽이고 그 어떤 인간의 선행으로도 불을 끌 수 없었던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그 진노의 불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 끄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비참하면 비참할수록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우리를 향한 진노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이었는지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피를 모두 쏟은 그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희생과 고난을 통해서 우리들이 주님의 진노로부터 해방되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신앙에 있어서 영원히 이 사실을 잊지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누구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이렇게 대답하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심으로 나를 향한 진노의 불을 꺼주셨기에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라고 고백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고백에는 우리를 위해서 사랑하시면서도 진노하셨던 아버지와 그리고 그런 하나님 아버지의 진노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희생과 그리고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그러한 희생이 우리의 마음 속에 적용되도록 믿음을 주신 성령 하나님을 찬송하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껍데기의 삶은 그야말로 진짜 껍데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껍데기는 우리들이 부하게 살 때가 있는가 하면 쫄딱 망해서 가난하게 살 때도 있습니다. 우리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는 때가 있는가 하면 외톨이가 되는 때도 있습니다. 부하게 거하는 때가 있는가 하면 가난하게 거하는 때도 있고, 부하 직원을 많이 거느리고 성공한 사업을 하는 때가 있는가 하면 남의 밑에서 궂은 일을 하면서 월급을 받고 살아야 하는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우리의 겉모습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의 진짜 모습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는데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으로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셔서 그 아들이 물과 피를 모두 흘려 주님의 진노를 막아주시고 우리를 그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만들어주신 그 용서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이 커보이고 그리고 세상이 많이 번잡스럽게 보이고 세상이 뭔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빼앗아갈 것 같은 때가 우리에게 있는 것 같아도 그러나 이 사실을 생각하면 -주 달려죽은 십자가 나 항상 생각할 때에 세상에 붙은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서 건져내신 그 십자가의 물과 피를 생각하면 우리가 지금 애착하고 우리들이 염려하고 우리들이 근심하고 걱정하는 것이 다 일순간에 지나가는 일뿐이라는 사실을 우리들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형벌받을 진노의 죄악에서 건져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에서 살게 하기 위하여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에서 거쳐가는 나그네로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 세상에서는 나그네라 일컬음을 받지만 영원한 나라를 위해서 살게 하시려고 주님이 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이 사실이 가장 크고 놀라운 사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노의 잔을 마시고 고난을 받으셔서 우리를 섬기시던 몸으로 우리를 대신해 죽으시고 마지막에 물과 피를 흘린 생애를 사셨기 때문에 그 덕으로 말미암아 오늘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우리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이제는 진노받는 자녀가 아니라 사랑받는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 나오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못 박혀죽으신 다음에 흘리신 이 피는 바로 우리의 죄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보여주고 옆구리를 찌른 그 창을 통해서 쏟아져 나온 그 붉은 피는 우리의 주홍같이 붉은 죄의 심각성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없이 살 때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그런 진노 아래 있는 자녀들이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을 주님 뜻대로 사용하지 않고 우리의 마음대로 사용하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건강을 우리의 육체의 쾌락을 위해서 사용하면서 우리의 인생을 살아왔고 그렇게 살아오는 동안 우리는 주 앞에 죄밖에 진 것이 없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심판하시거나 우리를 내팽겨치셔도 우리는 그분의 심판과 진노를 전혀 과하다거나 부당하다거나 할 수 없는 할 말이 없는 죄인들이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같이 무지한 죄인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셔서 자기의 모든 물과 피를 우리를 위해 아낌없이 쏟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주님의 그 십자가에 보혈이 우리를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 아래서 해방한 것을 기억하고 이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십자가를 보고 매일매일 주제파악을 하는 사람들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십자가를 볼 적마다 자기가 이루어 놓은 일, 혹은 자기가 섬기며 살아온 삶, 또 자기가 애착을 갖고 있는 자신만의 일 이런 것들을 보면서 아! 내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해도 십자가를 볼 적마다 우리는 즉시 깨닫는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내가 공을 많이 세우나 은혜 갚을 수가 없구나, 내가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왔다고 했지만 그러나 알고 보면 하나님 앞에 너무나 부끄러운 것이구나 이것은 결국 내가 이렇게 산 것은 주님이 나를 하나님 앞에 용서받도록 만들어주신 내 대신 진노의 잔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형벌을 감당하신 희생적인 고난이 있었기 때문에 아! 오늘 내가 이렇게 주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분에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살아가는구나. 지옥의 땔감으로나 들어갈 인간들이지만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버려 구속하셨기에 오늘도 하나님을 찬송하며 살게 하시고 죄 가운데 있을 때 용서를 빌면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내가 이렇게 맛보면서 살아가는구나 하나님 앞에 우리는 깊이 가슴에 새겨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주님이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모두 흘리신 이것은 결국 이 피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해를 이루는 다리가 되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오늘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옆구리를 통해 쏟아져 나오는 물과 피의 주목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끊어진 하나님과의 사이에 다리를 놓아보고자 몸부림치는 그런 시도를 해보았습니다. 오늘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아가기 위한 노력을 많이 하는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미친 듯이 어떤 종교에 열중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또 도덕이나 학문을 통해서 영원한 세계에 도달해보려고 노력을 많이 합니다. 예술에 미치면서 사람들은 인생은 짧지만 예술은 길다고 말해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남긴 작품은 영원할지 모르지만 그것도 영원히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그린 사람들은 모두 죽음 저편으로 사라져 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엄연히 두 가지 현실만이 존재합니다. 주님을 믿고 변함없이 주님을 의지하며 살았던 사람들의 나라와 하나님을 버리고 어그러진 길로 걸어가서 육체를 따라 살았던 사람들의 나라만 나뉘어지는 것입니다.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하나님과의 화해 앞에서 인간은 속수무책이였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죄로 말미암아 갈라진 길을 다리로 이으시고 다시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시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 피를 흘려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쏟으신 이 피와 물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간격, 죄의 수렁, 그리고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쪼개져 금이 가버린 그 관계를 훌륭하게 고쳐주고 그래서 우리는 공로가 없지만 주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새롭고 산 길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종종 저는 기도하거나 혹은 사역을 하다가 너같은 죄인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고 주님을 믿을 수 있느냐, 그런 양심에 송사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 한분이 미국에 있는 노회에서 안수를 받을 때에 마지막에 그런 질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만약에 사람들이 너 더러 너 같은 인간이 어떻게 목사가 될 수가 있느냐고 수많은 사람이 손가락질을 하고 항의하면 넌 무엇이라고 답하겠느냐? 그 질문을 받았을 때에 어떻겠습니까?’ 그랬더니 적절한 묘안이 생각나지 않아서 대답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한없이 울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합격’이라고 그랬답니다. 이게 우리의 진짜 모습입니다. 정말 우리는 우리의 양심이나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우리를 송사할 때에 우리는 그것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이 오로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시인하는 것입니다. 너 도둑놈이지, 예, 하나님 것을 많이 도둑질을 했습니다. 너, 방탕하게 살았지, 방탕하게 살았습니다. 옛날에 너 하나님의 계명을 마구 어겼지, 마구 어겼습니다. 다 인정하고 시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마다 우리는 겸손해지는 것을 배웁니다. 그러나 우리가 거기서 아주 엎드려지지 아니함은 그리스도 예수의 자기를 십자가에서 버려 우리의 죄를 위해 흘려주신 그 물과 피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물과 피를 모두 흘려 우리의 죄를 말갛게 씻겨주셨습니다. 이전에는 나는 십자가의 원수요, 주님을 핍박하는 자요, 정욕대로 산 사람이요, 그리고 육체의 것들을 사랑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계명을 서슴치 않고 어기고 짓밟은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흘리신 그 보혈의 놀라운 공로를 깨닫고 온전히 믿으면서 하나님 앞에 제가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온전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설 때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흘린 그 피와 그 물이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흘려주신 보혈이기 때문에 우리는 십자가 앞에 설 때마다 역시 십자가를 모를 때 살았던 그 옛 삶을 회개하고 세상에 있는 것들을 하찮게 여기는 대신 우리를 위해 베풀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영원한 사랑을 찬송하는 사람들이 됩니다. 그렇게 고백할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처럼 물과 피를 흘려주신 것은 이제 하나님과 원수되었고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멀리 떠났던 우리가 이제 하나님과 화해하고 하나님과 다시 한 아버지 아래서 한 자녀로 살아가는 그런 축복된 증거의 삶과 관계가 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삶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무엇을 생각해야 되겠습니까? 하나님과의 화목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버려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흘려 화해의 길을 여셨으니 이제는 다시 우리의 죄와 불순종과 더러운 욕심으로 말미암아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그 화해를 저버리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자기의 목숨을 버리고 물과 피를 흘려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이제 새로운 화목의 길을 여셨으니 이제는 다시 십자가 없이 살아갔던 옛 삶으로 돌아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돌아가면 거기에는 죽음밖에는 기다리는 것이 없습니다.
오늘 아침에 우리는 사도행전 8장에 나오는 마술사 시몬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마술사 시몬이 그리스도인이었을까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을까요? 그것을 우리는 한 마디로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느낌은 하나 받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아니, 이 세상에서 그런 탐욕에 가득차 있는 사람이 마술사 시몬 한 사람입니까? 그럼 모두 목 앞에 시퍼런 칼을 달고 다니는 사람들이겠네요. 사도는 모든 사람들을 만나서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시몬에게 특별히 이야기를 했습니다. 왜 그는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들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를 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구원을 받았든 안 받았든 이제 그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점이나 치고 굿이나 해서 돈벌어서 살던 그 삶은 옛날로 끝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으 빛 아래 들어오고 은혜의 빛 아래 들어왔을 때 그 삶을 그가 버려야 했습니다. 만약에 그가 계속해서 울긋불긋한 옷을 입고 굿이나 하고 점이나 쳐서 사기나 쳐서 먹고사는 사람이었다면 그 사람 사도가 다른 곳을 내버려두고 그 사람을 찾아가서 “시몬아 넌 네 속에 죄악과 탐욕이 가득하구나. 하나님의 진노가 네 위에 있다”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 이야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연하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안 사람들에게는 다른 삶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여기 예수 믿고 예수 믿기 전과 다른 삶을 살지 아니하면 여러분들은 축복이 없습니다.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죽으시고 물과 피를 모두 흘려주신 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이제 내가 이 십자가로 너희가 하나님과 화목하도록 길을 열어주었으니 이제는 그 아버지와 화목을 깨트리며 살지 말도록 주님이 우리에게 강하게 권고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권고인가 하면 그냥 권고가 아니라 피로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옛날에 백성들이 왕에게 정말 간절히 상소할 일이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혈서를 씁니다. 주님이 이 사실을 우리들에게 피로서 말하는 것입니다. 애들아, 내가 너희를 위해서 원수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화해의 관계로 십자가에서 바꾸어 놓았으니 이제는 너희가 다시는 하나님을 등지는 사람들이 되지 말라, 무슨 이유든지 하나님을 등지는 사람들이 되지 말라. 주님이 우리에게 강력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럼 내가 여러분들에게 묻겠습니다. 아멘 했으니까 묻겠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과 화목을 유지하는 것을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최고의 가치로 삼고 있습니까? 그렇게 삼고 있습니까? 혹시 여러분 자신의 유익을 위하거나 세상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과의 관계쯤 한번 짓밟을 용기를 가지며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눈앞에 이익은 순간이고 영원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잠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런 식의 삶을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 모두 십자가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삶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시고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주셨는데도 우리들이 염려와 근심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삶을 사는 것은 바로 우리들이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이루신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를 지키는 것을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환경에 놓여 있든지, 그리고 인생에 어느 때를 지나든지 우리의 인생에 최고의 행복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신 그 십자가로 말미암아 난 피로 물든 그 화해의 길에서 하나님을 향해 등 돌리지 않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주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을 기억하면서 하나님과 화해하고 그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 우리는 주님이 하늘에 계셔서 기쁘고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당신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 있어서 정말 기쁜 그런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난 여러분들에게 다시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를 지키는 것이 최고입니까? 아마 여러분들의 마음 속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사랑의 감격이 있을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어떻게 이루신 화목인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희생을 지불하시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맺혔던 관계를 풀어주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바꾸어서 우리들이 그분 앞에 나아가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언제든지 그분 앞에 엎드려질 때에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실 수 있는 관계로 만들어주셨는지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를 지킨다는 것을 이 세상에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하찮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도 눈에 보이는 모든 것도 잠시 지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모두 흘려주신 것은 이처럼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해를 말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이 거룩한 물과 피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보여준 그 충성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낼 때부터 예수님의 사명은 한가지 목표로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너는 내 백성을 위해 내 백성을 대신하여 죽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사명은 죽는 것이었습니다.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없다면 우리는 성탄절을 찬송할 이유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와 같은 인간이 이세상에 와서 유별난 삶을 살다가 죽은 것밖에는 우리가 기억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탄생, 그분의 부활을 기리고 우리가 그처럼 깊은 애정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사셨던 삶을 바라보고 그리고 그 삶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사모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발자취를 오늘도 부족하지만 쫓아가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분이 결국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 죽으심으로 우리들이 해택을 입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태어남, 그의 생애, 그의 고난 모두 우리의 사모하는 탐구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감동을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들이 십자가를 통해 감화를 받습니다.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행하신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지금도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망치소리 들리는 골고다 언덕, 예수께서 못 박혀있는 장면, 숨을 거두시면서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주님 앞에 기도하시던 장면, 마지막 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라고 운명하신 후에 그것도 모자라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해를 이른 관계에 인치시듯이 자기의 옆구리를 찢어 피와 물을 모두 쏟으시는 그 장면을 보면서 우리는 감화를 받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우리에게 감동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그저 그것이 자기의 사명이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충성하는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일평생을 세상에 사셨지만 아무 것도 없이 호지 않은 통으로 짠 옷 하나 걸치고 그것까지 다 벗겨져서 이제 마지막 남은 그 육체를 창에 찔려 몸 속에 들어 있던 물과 피를 모두 쏟아내는 광경을 보면서 우리는 예수님이 충성된 삶을 사셨던 것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감동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충성스러운 삶을 하나님 앞에 사신 결과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짜 하나님이 세운 사람들은 주님을 위해서 살지 사람의 시선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은 나를 의식하고 하나님 앞에 산 것이 아니었지만 그런데 본인인 나는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감화를 받는 것입니다.
조금 아까도 한 5분 사이에 타이어 맨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윗필드의 전기를 추천하는 사람들이 쭉 있었는데 그중에 한 사람이 챨스 스펄젼입니다.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가 하면, 그 사람은 내 인생과 내 사역에 정말 유일한 모델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 사람처럼 완전하게 예수를 위해 바쳐진 사람을 만나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성공한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러나 경건과, 기도와 믿음과, 사랑과, 정절과, 특별히 헌신에 있어서 정말 빛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우리의 귀감이 되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를 의식하고 사는 것이 아니었지만 하나님만을 위해서 충성되게 사는 사람들은 항상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 삶 자체가 거룩하고 놀라운 감화를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감화를 불러일으키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제 교회를 이전하면서 저에게 개인적인 기도 제목이 간절한 기도 제목이 생겼습니다. 제가 웃으면서 말했지만 여기서 그동안 있었던 나의 부끄러운 모습을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밖으로 토해내고 그것들이 누에고치처럼 되어지고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알맹이의 사람만 쏙 빠져나와서 나도 이사가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중요한 기도 제목이 됐습니다. 정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말하고 그리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관해서 말하고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서 증거하는 것은 쉽지만 그러나 그분의 그 정신을 따라서 사는 것은 전혀 쉬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깊이 기억해야 합니다. 거기에는 눈물이 있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을 모두 하나님께 드려야 하겠다라고 하는 충성심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까지 얼마나 많이 희생하셨습니까? 그리고 얼마나 자신의 것을 다 쏟아 부은 생애르 사셨습니까? 마지막에 죽으실 때 그분에게 있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소유라고는 그저 팬티 같이 생긴 그런 옷 한벌이고 흐느껴 울고 있는 소수의 여인들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데도 도망갔다가 왔기 때문에 어쩔 줄을 몰라하며 서 있는 요한, 그것이 예수님의 생애에 남은 마지막 전부였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예수님의 무소유의 삶을 배우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사셨고 아버지 한 분께 온전히 충성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님만을 위해서 충성하며 살고 싶어하는 사람이 어디 예수 그리스도 한 분입니까? 부족하지만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고 있느냐면 묻는다면 할 말이 없지만 간절한 소원이 정말 주님만을 위해서 살고 싶은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기억합니다. 94년도에 손양원 목사님의 따님이 오셔서 자기의 아버지의 피어린 고난과 신앙의 정절을 이야기할 때 내가 옆에서 이렇게 보니까 많은 교인들이 그 대목을 들으면서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그렇게 살고 싶지 않으면 왜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돈 잘 벌고 잘빠지고 잘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눈물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정말 예수님처럼 자기의 명예도 없고 자기의 사람도 없고 자기의 재물도 없고 자기의 영광도 없고 이름없이 빛도 없이 그렇게 인생을 살았던 사람들은 언제나 우리의 마음을 찢어놓습니다. 어느 부분이 우리가 만약에 그 사람들의 삶을 흉내내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분들의 삶을 보면서 얼마나 뼈저리게 아픈 삶인지를 알기 때문에 눈물이 나고 또 그분들은 그렇게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데 나는 그렇게 못 산다고 생각할 때는 나의 죄악이 너무나 슬퍼서 눈물이 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만을 위해서 살기를 모두 버려 헌신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은 자기는 원하지 않아도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감화와 은혜를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에 여러분들이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아!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구나. 왜 나같은 죄인을 건져주셨을까? 주님이 나같은 죄인을 구원받기 위해서 흘리신 눈물과 피가 얼마나 클까? 하면서 여러분들이 아무리 눈물을 많이 흘린다고 할지라도 마지막 눈물을 흘린 다음에 결론이 눈물을 훔치고 그래, 맞아. 이제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으니 나도 몸밖에 드릴 것이 없으니 주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나도 이제 다 주님께 드리면서 주님 한분 밖에 없는 것 같은 인생을 살아야지, 그 결론에 도달하지 않으면 다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다 쓸데없는 이야기입니다. 다 쓸데없는 이야기고 자기 감정이고 다 자기 좋아서 하는 종교놀음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이 안 변했는데 그까짓 눈에서 흘리는 눈물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을 여기에 채워놓아도 20분이면 눈물을 흘리게 할 자신이 있습니다. 그런데 흘리면 무슨 소용이 있냐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그리스도인의 마지막 결론은 이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자기의 몸을 버리신 것처럼 이제 그 큰 사랑을 입었으니 이제는 내가 주를 위해 살리라. 지금처럼 이렇게 좋은 환경도 없고, 이런 좋은 엠프시설도 없고, 이런 편안 의자도 없고, 잘 인쇄된 성경도 없고, 예쁘게 인쇄된 교제도 없고, 좋은 책도 없던 시대에 다듬이 방에서 예배하고 마루바닥에서 남녀 사이네 병풍치고 그렇게 투박한 설교를 들으면서 신안생활 하던 사람이 한국 교회의 성도들이 한국 시대의 역사를 뒤흔들어 놓았던 그 비결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입니다. 투박한 예수 정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생명을 버려 구원하셨으니 이제는 내가 주를 위해 고난을 당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 예수 신앙입니다. 말은 좀 잘합니까? 입을 열었다 하면 청상유수입니다. 그럴 듯한 이야기는 얼마나 잘합니까? 모였을 때 온유한 척 하면서 말을 잘하는 사람, 논리를 잘 세우는 사람은 틀림없이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그럼 뭐하느냐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아는그 마지막 결론이 주가 나를 위해 자기를 모두 버리셨으니 이제는 내가 주님을 위해서 나 자신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 그 결론에 도달하지 않으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에 동의하는 사람이지 십자가를 자랑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군병이 예수님의 옆구리에 창을 넣었을 때 그 예리한 창 끝에 찢어진 옆구리를 통해서 예수님의 온갖 장기들은 파열되었으며 그래서 더 많은 피들이 쏟아져 나왔을 것입니다. 자, 얼마큼 그 피가 흐르고 멎었겠습니까? 모두 빠져 나와서 흐르기까지 그 물과 피는 거침없이 흘러 내렸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살아서도 충성하시고 죽어서도 충성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랑을 받은 우리가 이제 어떻게 살아야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날에 모든 문제는 무엇입니까? 말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았는데 너무 비겁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주를 위해서 천국 갈 준비는 되어 있고, 영광받을 준비는 되어 있고, 성령받을 준비도 되어 있고, 사람들에게 영광받을 준비도 되어있는데 그런데 주를 위해 죽을 준비는 안 되어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흘리신 그 흐르는 보혈과 그 물, 그 피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한분 앞에서만 충성된 삶을 사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그분이 충성된 삶을 사셨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주님 앞에 구원받은 자녀가 되었습니다. 주님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주님이 무엇을 아끼셨습니까? 주님이 남겨두신 것이 있었습니까? 주님이 무엇을 우리보다 더 사랑하셨습니까?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실 때에 그래도 그 십자가에서 고난을 견딜 수 있었던 위대한 힘은 두 가지였다고 생각합니다. 인간과 같은 육체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심각한 고난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나를 다 버리는 충성을 통해 우리 아버지가 영광을 받으신다는 확신이었고, ‘나는 고난을 지고 죽으나 내 백성은 살리라’고 하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아버지께서는 죽기까지 복종하사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를 다 바치는 고난을 통해서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은 피묻은 것들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온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그분의 십자가의 은혜를 통하지 않고 우리에게 온 것은 없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가치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 피묻은 것이 우리에게 도달한 것은 모두 우리에게는 우리가 우리 되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가 알게된 복음이 그러하고 우리가 이제껏까지 하나님 앞에 살아보려고 몸부림쳤던 신앙의 정절이 그러합니다.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기 위해서 몸부림치며 순간순간 내 속에서 솟아나는 사악하고 더러운 육체의 욕망과 더불어서 싸우며 자기를 굴복시키면서 주님 앞에 바쳤던 우리의 마음도 소중하고 고귀한 것입니다. 모두 피묻은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에게 이렇게 자기를 모두 버려 순종의 길을 걸어가시고 충성스러운 길을 걸어가셨던 주님의 생애가 없으셨고 주님의 복종이 없으셨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얼마나 비참한 인간이 되었겠습니까? 그의 죽으심이 없으면 우리는 속죄의 소망도 없을 것이고 그의 죽으심이 없으면 우리는 부활의 소망도 나누어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십자가에서 자기의 물과 피를 다 흘려주신 충성스러운 생애를 사셨기 때문에 그 충성 덕분에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죄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정함을 받고 그 십자가의 은혜로 진정한 하나님의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무엇이 가치있는 것인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오늘 아침에 성전 이전을 놓고 하나님 앞에 헌신하신 것을 제가 알고 있습니다. 자, 훌륭하게 귀한 일을 하셨습니다. 결과는 제가 보지는 않았지만 보든 안 보든 마찬가지입니다. 자, 여러분 이제 우리가 무엇을 위해 남은 생애를 살아야 될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돈을 위해 살까요, 명예를 위해 살까요, 내 영광을 위해 살까요, 육체의 쾌락을 위해 살까요, 아니면 내 자랑을 위해 살까요, 아니면 세상에게 아부하기 위해서 살까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까요? 우리는 그런 삶으로 돌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삶에서 마지막 거두는 것이 결국은 육체로부터 거두는 것이 멸망밖에는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런 멸망을 거두게 하지 않기 위해서 자기의 고결한 몸을 버려 하나님 앞에 지극한 충성으로 우리를 위해 자기 몸을 바치신 것입니다. 우리들이 어찌 옛 사람으로 돌아갈 수 있겠으며 주님없이 살았던 옛날로 돌아갈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제는 세상을 향한 염려 대신에 주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염려하고 주님이 우리를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주셨으니 이제 언제 우리들이 주님을 떠나서 이 세상을 떠나서 주님과 만날지 알지 못합니다. 잠시 머물다가 가지만 그러나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넓고 주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일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우리를 다 드려서 하나님 앞에 충성할 때 주님은 우리를 홀로 버려두시지 않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많은 것으로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그리고 우리의 충성을 헛되이 없애버리지 않도록 주님이 막아주셔서 우리의 땀과 우리의 눈물,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우리의 모든 헌신을 통해 열매를 거두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 세상에서 자랑은 얼마나 무엇을 잘 먹고 잘살다가 죽는가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자랑하게 내버려두십시오. 큰 집에서 살면서 자랑하는 사람들, 다 자기 자랑하고 살게 내버려두십시오. 넓은 땅, 좋은 차, 화려한 별장을 가지고 살던 사람들 그것 자랑하게 내버려두고 우리에게는 다른 자랑거리가 있습니다. 주님을 모르고 흉악한 죄 가운데 살던 인간들이었지만 그러나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산 것이 아니오 오직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신 것이라. 우리는 이제 힘이 없고 연약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오게 하는 커다란 역사에 한쪽 귀퉁이를 거두는 그런 보람으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부름을 받도록 부름받은 사람이니 우리는 잠시 있다가 썩어질 것들에 소망을 두지 아니하고 오히려 영원하도록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성령을 위하여 심고 뿌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말 하나님의 이런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갚고 아버지 앞에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소돔과 고모라 성이 하나님의 유황 불 비로 심판을 받을 때 갈 곳이 있었던 사람들은 롯과 롯의 집안 사람 몇 사람이었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갈 곳이 없었습니다. 거기서 태어나서 거기서 먹고 거기서 마시다가 그것과 함께 죽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롯은 갈 곳이 있었습니다. ‘소알’이라고 하는 곳으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모두들 먹고 취하고 마시고 세상을 사랑하는 그 때에 그는 무법한 자들의 불법한 행실을 인하여 의로운 심령이 상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에 엄청난 타락, 동성연애, 그 더러운 남색하는 자들을 보면서 그는 거기에 물드는 대신에 매일매일 심령이 상했습니다. 그 성을 멸망시키기 전에 하나님이 바로 그러한 롯이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으셔서 천사를 보내주셨고 그리고 모두 멸망할 때 이 롯에게는 도망갈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여러분들의 모든 소망과 꿈이 단지 이 세상에 있다면 여러분들은 이 세상과 함께 망해버릴 것입니다. 이 세상이 끝나는 날 여러분도 끝장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썩을 세상에 살면서도 소망을 썩어지지 않는 나라에 두고 살고 그 나라에서 부르신 주님을 위해서 예수님의 뒤를 따라 충성하는 삶을 산다면 소돔과 고모라 성이 모두 망해도 구원의 길을 예비하신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피할 수 있었던 것과 같이 우리가 그렇게 그리스도에게 피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의 날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랑하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7.절망의 밤을 지납니까?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백성이 곡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민14:1-3)
오늘 우리들이 몇 주에 걸쳐서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요새 우리들은 이 시련과 고난을 은혜로 이기면서 사는 방법이 무엇일까? 염려를 어떻게 극복하며 살까? 그런 문제를 다루어보고 있습니다. 이 대목이 바로 어느 대목인가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나와서 이제 모세의 인도를 따라서 가나안에 도착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가난안에 도착을 해서 가난안 땅을 정복하기에 앞서서 제일 먼저 정탐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가난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군사적으로 보더라도 일단 생소한 지역이니까 정탐을 해야 합니다. 정탐을 하고 스파이들이 보고를 하는데 보고가 두 가지로 나뉘는 것입니다.
사람 중 두 사람은 ‘진짜 좋은 땅이다, 주님이 우리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시겠다고 그러셨는데 진짜 그렇더라, 빨리가자.’ 하는 말이었고 나머지 열 사람은 ‘가면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곳에 가면 메뚜기다.’ 메뚜기가 무슨 듯인가 하면 왜소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뛰어봐야 벼룩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메뚜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과는 대항이 안 된다. 우리 하고 그 사람들 하고 비교하는 것은 우리와 메뚜기를 비교하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가봐야 소용이 없다.’ 그렇게 이야기해봐야 자기네 의견이 관찰이 안 되겠으니까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가 가보니까 그 땅은 아주 척박하고 나쁜 땅이더라, 그 땅은 좋은 땅이 아니더라’ 하면서 악평을 하는 것입니다. 거짓말까지 보탠 것입니다.
여기서 이제 우리는 커다란 혼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무슨 혼란인가 하면, 이런 어리석은 일은 오늘날에 교회 안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자,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난안 땅을 정복하는 게 무슨 장난입니까, 농담입니까, 병정놀이를 하는 것입니까? 수 백만명의 생사가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12지파에서 한 사람씩 대표가 나와서 그 땅을 정탐하러 들어갔다고 하면 그래도 그 사람들 중에서 그래도 뭔가 그쪽 방면에 눈썰미가 있는 사람들이 나왔을 것입니다. 아닙니까? 쉽게 이야기해서 그래도 그 지파 가운데서는 그래도 용맹스럽고 믿음이 좀 있고 가서 보고 와서 말이나 더듬거리면 보고도 안 되니까 말도 좀 잘하고 뭐 그랬을 것이 아닙니까?
뭐 쉽게 이야기하면 만약에 제가 ‘여기 어디에 교회 할 자리가 없나’ 생각될 때에 주일 학교 애들을 불러 ‘너희들 우리 교회 이사할 자리가 있나 알아보라’ 그러면 그애들은 개집 같은 곳을 보고 올 것이 아닙니까? 하물며 정복할 땅으로 가는데 그중에는 그래도 뭔가 이렇게 지도자의 위치에서 그렇게 백성들에게 평소에도 신임을 얻고 그런 사람들이 갔을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가서 보고 솔직히 와서 ‘땅은 굉장히 좋은데 그런데 우리는 힘이 너무 약하다.’ 이렇게 이야기를 했으면 믿음만 없는 것인데 믿음만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사악함을 더해서 ‘가보니까 그땅이 우리를 다 토해내겠더라, 아주 나쁜 땅이더라.’ 그렇게 해서 거짓말로 된 보고까지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거기로 올라가지 못하도록 방해를 한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이야기하는 오늘로 말하자면 교회에서 각 구역이, 혹은 각 기관에 대표로 뽑혔던 사람들이 기껏 모여서 생각한 게 이런 정도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깊은 생각을 하게 끔 합니다. 오늘 그 핵심은, 사실 그 대표자를 뽑는 문제가 아니고 결국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하면 교회에는 교회를 이끌어가는 그룹, 교회로 말하면 당회 그런 것입니다. 회중 중심으로 하는 교회에서 운영위원회, 이런 것들을 깨어있는 사람들이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분별하면서 교회를 이끌어가야 합니다. 막 가서 쾅 하고 받아놓고 ‘왜 이래’ 부딪혔지 뭘 그래, 이렇게 무책임하게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째든 그런 보고를 한 것입니다. 그런 보고를 했더니 거기에 대한 반응이 오늘 읽은 성경 구절에 나오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보면 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백성이 곡하였더라” 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첫 번째 반응은 무엇이었는가 하면 온 백성이 그 소식을 듣고 울부짖으며 밤새도록 통곡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밤새도록 통곡했을까요? 무엇 때문에? 절망으로 말미암아 통곡한 것입니다. 자기들이 여태까지 왔는데 이제 눈 앞에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적들이 거기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웃기는 것이 보지도 않았으면서 얼마나 큰지도 모르고, 군대가 몇 명인지도, 언제 세어봤는지, 한번이라도 싸워봤는지 아니, 메뚜기같다고 그랬는데 진짜 메뚜기같이 작은지, 키를 대보았는지 여기 지금 통곡하고 우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하면 가난안 사람을 보지도 못한 사람들입니다. 이야기만 듣고 통곡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밤새도록 울부짖으면서, 코메디를 하는 것인지, 이게 무엇인가 하면 절망의 무서운 힘입니다.
그러니까 절망은 순식간에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한숨이 전염됩니다. 회의를 하다가 옆에 사람이 ‘후’ 하고 한숨을 쉬면 옆에 사람이 같이 따라합니다. 절망이 전염됩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보고를 듣고 나서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치단결해서 절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절망이 정말 근거가 있게 끔 우리에게 다가와도 절망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죄인데, 이게 근거도 없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아니 메두기처럼 작다고 이야기를 들은 것인데 그중에 한 사람도 ‘정말이냐?’ 이렇게 물어보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럴 리가 있냐, 그러면 아낙자손이 커봐야 얼마나 크겠느냐, 그래도 우리는 허리는 차지 않겠느냐.’ 이렇게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절망이 300만명 가까운 이스라엘 백성들 위를 순식간에 10명의 보고가 확 뒤덮은 것입니다. 그리고 모두 깊이 좌절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밤새도록 울면서 통곡하고 좌절할 때 울다가 휴지라도 꺼내서 눈물이라도 닦을 수 있겠 끔 불빛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슨 불빛이었습니까? 불기둥입니다. 무슨 불기둥입니까?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는 불빛입니다. 코메디를 하는 것입니까? 원수는 본 적도 없고, 한번 싸워본 것도 아니고, 그 사람들 얼마나 무서운지 한번 대결해 본 것도 아니고, 그 땅을 가본 것도 아니고, 사람이 와서 하는 이야기만 듣고 그리고 옆에는 어두움을 밝히는 하나님의 기적의 불기둥이 하늘 높이 치솟으면서 이스라엘 진을 대낮과 같이 밝혀주고 있는데 거기서 엎드려서 통곡했는데, 한번 하다가 만 것이 아니고 밤새도록 통곡한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를 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면 뭔가 일어나도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우리를 보십시오. 일주일이 와서 열심히 기도했더니 공사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게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절망은 절망하는 그 순간 여태까지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들을 사랑하시고 어떻게 자기들을 기적적으로 건져 내시고 도저히 회생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어떻게 독수리가 새끼를 업은 것같이 그 불가능한 환경 속에서 자기들을 구원해냈는지 이런 모든 기억을 한꺼번에 깡그리 싹 사라지게 만듭니다. 그래서 절망은 무서운 힘입니다. 그리고 딱 생각나는 것은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의 도움이 멀거나 끊어졌고 내 앞에 있는 이 엄청난 난관, 이것 밖에 생각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절망의 무서운 힘입니다. 이 절망이 얼마나 무서운가 하는 것을 보려면 희망의 놀라운 생명력을 보면 압니다. 그냥 인간이 희망만 가지고 있으면, 소망을 가지고 있으면 정말 포기할 수 없는 극한 상황에서도 인간이 생존하도록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인간의 힘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그런 뭔가를 발휘합니다. 그러나 한순간 딱 절망하면 비참하게 사람이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언젠가 이야기를 했나 모르겠는데,
(예화: 배가 난파되면 사람들이 다 죽는다고 생각하는데 어느 한 사람이 실험을 했는데 작은 배에 자기의 몸을 묶고 아무 것도 실지 않은 채 바다 위에서 조난 당한 사 람처럼 견디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바다 물을 조금씩 먹으면서 59일을 항해하 다가 살아서 그가 내린 결론은 바다에서 조난을 당하면 환경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라 공포와 절망 때문에 죽는다는 이야기)
그러니까 절망은 그렇게 오래 동안 끈질기게 자신의 생명을 이어왔는데 진짜 여러분, 내가 늘 말하지 않습니까? 한 사람, 한 사람이 대하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써봐야 읽어주는 사람이 없겠지만 그래도 하여튼 주인공은 주인공입니다. 그렇게 기가막힌 과정을 다 거치면서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살아왔는데 그런데 절망은 한순간에 자기의 자기의 인생에 관한 모든 희망적인 견해를 다 깡그리 날려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만 보게 만들어주는데 그것은 자기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엄청난 위기의 한계, 그것 하나만 보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절망은 그런 감정, 그 자체가 인간의 모든 육체의 기능을 저하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망하는 그 순간에 죽기에 적합한 육체로 이렇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동물이나 인간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신체 내부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잘 아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노루를 쓰러트려서 칼로 목을 치거나 아니면 묶어놓고 빨대로 목에 꽂아서 노루 피를 먹거나 그럽니다. 전부 다 바보들입니다. 돈 내고 사슴 피를 먹고 그럽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동물이 자기가 죽어가는 그 위기 속에서 신체 속에서 얼마나 독한 성분들이 쏟아져 나올텐데 그것을 먹는 것입니다. 그것을 먹고 오래 산다면 그것은 오래 살 자기의 생명을 가불하는 것이지 정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먹습니다. 그런 것은 하나의 탐욕이 아닙니까? 인간이 어떤 감정을 가지는 것은 다 다릅니다.
(예화: 실험을 하는데 원숭이를 우리에 가두어 놓고 먹이를 갖고 줄 듯 말 듯 하면서 약을 올리다가 먹으려고 하는 원숭이를 머리를 때려서 즉시 잡아 입을 벌려 내시 경으로 위를 보니 위벽이 발갛게 흥분되어 있었다는 이야기)
그렇지 않아요. 인간이 어떤 감정을 갖느냐가 신체도 좌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보면 얼굴이 죽어있습니다. 푹 죽어서 ‘나는 이제 희망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목사님, 나는 기쁩니다.’ ‘난 요새 살 맛이 나지 않습니다. 난 절망에 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아도 다 써있습니다. ‘희망, 절망, 그저 그래’ 다 써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까? 절망하는 그 순간에 신체적으로도 죽음에 적합하게 끔 다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좋은 것들이 한순간에 변하면서 죽음의 기운이 인생 속에 확 깃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귀가 우리에게 계속 주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거짓된 희망과 참된 절망을 주는 것입니다. 거짓된 희망이 무엇인가 하면 ‘괜찮아, 그렇게 살아도 괜찮아, 계속 해봐, 계속 신앙생활 하지마, 기도하지마, 그래도 괜찮아, 하나님의 사람인데’ 그러면서 계속해서 거짓된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나 정도면 괜찮을거야, 그래도 나는 형식이라도 있잖아. 그래도 외식조차 안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무슨 말인지, 외식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자꾸 거짓된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거짓된 희망을 자꾸 부여받게 되면 하나님에 관해 쓸데없는 기대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무슨 기대인가 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바다보다 넓은데 이렇게 산다고 해서 태평양 한 가운데 참새가 한번 실례를 했다고 해서 물이 더러워지겠어’ 하며 그런 식의 거짓된 희망을 자꾸 갖는 것입니다. 거짓된 희망을 주니까 하나님을 향한 근거없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른 삶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된 것도 줍니다. 그것은 절망, 진정한 절망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으로 하여금 ‘모든 도움이 끊어졌다’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이 그동안도 우리들을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섭리 속에서 이끌어 오신 그 세미한 손길이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못된 녀석은 누구인가 하면 저 혼자 자랐다고 자부하는 녀석입니다. 그것은 못쓰는 것입니다. 저 혼자 자란 것 같아도 그래도 엄마 아빠가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이면서 기저귀 채워 길러서 다 돈 대주고 지금 저 혼자 자란 것 같다고 떠드는 그 힘도 사실은 아빠가 사준 밥을 먹고 이야기하는데 자기 혼자 살아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절망은 한순간에 우리가 ‘홀로 있다’라는 마음을 만들어주고 이제껏 까지 하나님이 자기를 인도한 세미한 어버이와 같은 그런 손길들을 모두 기억나지 않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버려진 존재로 거기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자, 하나님의 도움은 끊어지고 그 다음에 내 앞에 있는 커다란 난관이 내 자신의 힘으로는 넘기 어려울 정도로 내 앞에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될 때, 그때 우리는 참된 절망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종종 절망에 빠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이런 절망을 느낄 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좋은 의미의 절망이고, 하나는 나쁜 의미의 절망입니다. 더 직설적인 표현을 쓴다면 하나는 건설적인 절망이고, 하나는 파괴적인 절망입니다. 건설적인 절망은 무엇인가 하면 절망을 해서 ‘아무도 나를 도와줄 수 없다. 그리고 나는 지금 비참한 처지에 있고 내 앞에 있는 난관은 너무나 크기 때문에 내 힘으로는 도저히 넘어설 수 없다.’ 이렇게 생각되었기 때문에 하나님 밖에는 안 보이는 것, 이게 건설적인 절망입니다. 크게 ‘아멘’하면 안 됩니까? 그런데 파괴적인 절망은 무엇인가 하면 ‘아무도 나를 도울 수 없고 환경만 내 눈앞에 높이 서 있어서 도저히 내가 이것을 극복할 수 없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대신 깊이 좌절하는 그런 절망입니다. 그나마 하나님을 붙들던 것을 절망에 빠지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붙듭니까, 놓습니까? 붙드는 사람이 있고 놓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절망에 처했을 때 ‘아차’ 하고 ‘주여’ 매달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절망에 빠져기 때문에 팍 가라앉아서 아예 거미줄 같이 붙든 것 조차 놔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후자입니다. 그게 진짜 파괴적인 절망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 빠져있는 절망은 어떤 절망입니까? 그렇습니다.
전자의 건설적인 절망은 하나님이 참 기뻐하시는 절망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상한 갈대와 같이 생각하십니다. 그래서 불쌍히 여기면서 그들을 하나님이 돌아보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을 예언하면서 그분이 어떤 분이라고 했습니까?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시는 그런 자비하심으로 우리를 돌보실 것을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해주시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상한 갈대와 같은 심정입니다. 깊이 하나님 앞에 절망하고 누구도 도울 자가 없기 때문에 더 간절히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절망하는 사람,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상황하고는 거리가 아주 먼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이 되었는가 하면 밤새도록 울며 밤새도록 통곡한 것입니다. 어디서? 기적의 등불 밑에서, 거기서 통곡하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런 불기둥 몇 개만 만들어서 가나안에 굴려버리면 사람들이 다 도망갈텐데, 그런 세 살먹은 어린아이가 할 수 있는 그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깊이 절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이런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은 없습니까? 자, 어려움 속에 있지요? 사면을 두루 보십시오. 도울 자가 있습니까? 도울 자가 없습니다. 우리 이번에 교회 옮기면서 진짜 지난 주까지 도울 자가 없었습니다. 그때 돌아오면서 절망스러운 생각이 든 것이 아니라 ‘아! 진짜 하나님밖에 바라볼 분이 없구나.’ 그렇게 하면서 우리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놀랍게 환경을 움직이셔서 그래서 이제 공사를 시작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절망적인 상황이 도례했을 때 하나님 앞에 창조적으로 하나님 앞에 반응하게 만드셔서 그 위기와 어려움을 통해서 절대 절망에서 절대 희망으로 나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포기한 그 지점에서 시작하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하나님을 새롭게 배워가는 이 놀라운 변화,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려고 하는 것이고 똑같은 상황 속에서 절대 희망으로 반응을 해서 그래서 절망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 자체를 바라볼 수 없게 주저앉게 만드는 것은 마귀가 하는 것입니다. 희망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못 말리고 절망한 사람도 아무도 말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삶 전체와 의식구조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예화: 유럽에 가면 어느 곳인지 모르지만 경계가 있는데 한쪽은 프랑스어를 사용하고 다른 한쪽은 영어를 사용하는데 영어를 하는 어떤 사람이 지나가다가 목이 말라 서 산에서 물을 퍼먹고 나서 보니까 팻말에 ‘포이즌’이라고 쓰여 있었는데 영어로 포이즌은 ‘독’이라는 뜻이라 이 사람이 순간적으로 독물을 마신 것을 알고 배가 아파서 병원에 가서 의사가 묻는 말에 독물을 먹었다고 하면서 다 이야기를 했더 니 그 의사가 하는 말이 그 지역은 불어를 사용하는 지역이라면서 그 글의 뜻을 설명해주었는데 ‘샘물’이라는 뜻이였다는 말을 듣고 순간에 아픈 배가 낫기 시작 했는데 의사의 말에 의하면 사람이 마음 깊이 절망하면 그 의식 자체가 전체적인 인체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아픈 것을 느낀 것이라는 이야기)
그런 예는 우리가 많이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귀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나쁜 선물은 철저하게 절망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보면 알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절망하고 나면 그냥 한을 품다가 죽는지 모르지만 믿는 사람이 절망하면 반드시 하나님을 원망하고 사람을 원망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을 회고하면서 자주 거론했던 죄가 무엇인가 하면 원망하고 죽은 죄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깊이 절망하고 있는 이 장면이 결국은 무엇인가 하면 철저한 파괴적인 절망입니다. 그 절망은 하나님의 그 모든 은혜에 대한 기억들을 날려버리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 오늘 이야기하는 것은 그것입니다. 오늘 1절만 보도록 합시다. 그럼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절망하게 되었는가. 첫째는 하나님의 능력은 고려하지 않고 자기에게 부딪친 그 현실 자체만을 골똘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들의 상황 자체는 사실 객관적으로 보면 절망할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상당기간 동안 유리하다가 여기까지 가게 된 것인데 가나안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준다고 그랬으니까 아마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좀 살고 있지만 신통치 않은 사람들이 살고 있어서 가라고 하면 쉽게 가고 자기네 땅이 될 줄로 안 것입니다. 그런데 가고 보니까 그게 아니라 그 당시 여기는 아주 문명에 배꼽이라고 할 수 있으리만치 철기 문화가 최초로 발명된 곳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나오는 햇족속이라는 사람들이 결국은 히타이트 족속입니다. 역사에서 나오는, 철기를 최초로 발견한 민족입니다. 그런 민족들이 그렇게 발달된 농경사회를 이루어가면서 견고한 요새를 건축하고 그리고 자기 땅을 지키면서 살아가는데 우생학적인 특성 때문에 이 사람들이 굉장히 덩치가 큰 것입니다. 장부와 같이 진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작은 사람들이 가서 보니까 발달된 문명, 그리고 높은 요새, 그리고 귀골이 장대한 사람들, 자기들은 광야를 유리하면서 겨우 만나를 먹었는데 이 사람들은 거기서 기름진 음식을 먹으면서 사람들이 얼마나 혈색이 좋고 그랬는가 봅니다. 그리고 발달된 무기들을 보면서 아주 깊이 좌절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는 이들의 절망하고 낙담하는 것이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어차피 가나안 정복은 누구의 힘으로 가능한 것입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출발부터 하나님이 벌써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슨 애굽을 나오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탄원을 했습니까? 몇월 몇일날 뛰어 나갈테니까 주님이 밀어주셔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렸습니까? 그것이 아니잖아요. 하나님이 홀로 행하시는 것입니다. 홀로 애굽의 모든 하수를 피로 만드시고 개구리가 나오게 하시고 이가 나오게 하시고 파리로 범벅이 되게 하시고 악질과 독종을 번지게 하시고 하면서 마지막에는 바로의 장자, 애굽에서 처음난 초태생을 모두 쳐서 죽이는 누구도 상상할 수 없고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그런 놀라운 일들을 행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협력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저 애굽이 죽을 때 박수치고 재앙이 일어날 때 주여 우리에게는 안 오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것 밖에 한 것이 더 있습니까? 마지막에 양을 잡으라고 그래서 양을 잡아서 문에 바르고 그리고 갈 채비를 하라고 그래서 신발 묶고 지팡이를 들고 그리고 쓴나물에 고기 먹은 것밖에는 자기네들이 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특공대를 조직했어요. 무슨 바로를 테러할 수 있는 테러단을 조직했어요. 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가만히 있었는데 하나님이 홀로 하셔서 이제는 내가 바로의 마음을 녹였으니 가라고 하니까 와! 하고 튀어나온 것입니다. 그것을 누가 못합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출발을 해서 광야 그 긴 거리를 걸어서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신 것입니다. 홍해를 가르시고 그 놀라운 광경을 다 보여주시면서 그렇게 하면서 여기까지 데리고 온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현실에 대한 인식이 잘못된 것은 아닌데 믿는 사람에게는 현실을 보는 또 다른 눈이 있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현실을 그대로 인식하면서 그러면서 뭘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고려하는가 하면 현실은 이렇다. 하나님이 개입하시지 않는다면 이들의 탄식하고 통곡하고 밤새도록 울부짖는 이것은 타당합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타당합니다. 그런데 믿는 사람에게 무슨 계산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이라는 변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하나님 앞에 범죄한 자요, 진노의 대상이였습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무엇이라고 했는가 하면 “그러나 하나님의 그 은혜로 너희를 살리사” 그러니까 우리는 그렇게 말해야 합니다. 현실을 다 인식해야 합니다. 정직하게, ‘맞다, 지금 내 상황은 절망적인 상황이다. 다 모든 도움이 끊어지고 이제 나는 여기서 도저히 헤어나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난 희망이 없다.’ 거기서 끝나면 그게 바로 불신앙입니다. 희망은 무엇인가 하면 ‘그렇다. 맞다. 내 상황은 그렇다. 그러나 하나님이 도우신다면 나는 이 상황을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를 가로막고 있는 이 환경보다는 하나님이 훨씬 위대하시기 때문이다.’ 누구만이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만이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사람들조차도 낙관적인 사람들은 도저히 안 되는 그런 상황에서 마지막에 몰리기 직전까지 무엇을 생각하는가 하면 ‘그래도 운이 좋으면, 그래도 재수가 붙으면, 그래도 끝발이 나면’ 그러면 뭔가 변화가 있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마저 모두 다 끊어질 때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정직하게 현실 앞에 무릎을 꿇고 좌절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현실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만 절망적인 현실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믿는 사람들에게도 얼마든지 절망적인 현실이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에게는 절망적인 현실이 다가와도 그것이 절망이 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절대적인 절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라는 변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이렇게 비참하게 절망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그것입니다. 현실은 바로 봤습니다. 현실은 바로 봤는데 문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지금 이 순간 완전히 잊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허둥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것은 성경에서 인간의 연약함이라고 부르지 않고 인간의 불신앙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런 유사한 어려움에 부딪쳤을 때 현실만 눈에 보이고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 것이다라는 것이 여러분들의 머리 속에 떠오르지 않으면 여러분들은 마음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그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도와줄 것이라는 믿음이 안 생기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신앙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느니, 그에게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그것을 뒤집어 이야기하면 무엇입니까? 불신앙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을 슬프게 하시나니 이런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불신앙을 하나님을 마음 아프게 하고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이면서도 절망 말고는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그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믿음으로 늘 살아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들은 항상 이 계산이 있습니다. 하여튼 영악할 정도로 이 계산을 많이 하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생기고 나면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면서, 그러나 하나님이 도우신다. 그러므로 문제가 없다. 이렇게 나가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보면 황당한 것입니다. 턱도 없는 꿈을 꾸면서 ‘이만큼 밖에 안 된다. 그런데 내 키가 더 크다. 왜 하나님이 우리 위에 계시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는 사람들끼리는 서로 통합니다. 아멘, 맞아, 그래, 그렇게 될거야, 안 믿는 사람들이 믿음이 없으니까 보이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확실히 세상 위치를 잘 알고 슬기로운 사람들이 인생의 어려움을 덜 경험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이게 바로 우리가 많은 유산을 물려주지 않아도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는 물려주어야 합니다. 왜 우리는 지혜가 없고 미련하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도 지혜가 있는 사람들은 처신을 잘하는 사람들은 훨씬 더 어려움을 적게 겪으면서 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그런 사람들이 모두 다 승리하고 이기고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하면서도 하나님이 이 현실 속에서 나와 함께 해주실 것이라는 역동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환난과 시련과 절망이 와도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망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 그들이 현실은 정확하게 봤지만 하나님의 도움을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과거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절망의 특징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우리로 하여금 한 장의 움직이지 않는 사진처럼 만드는 그런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일체 모든 연관이 끊어진 것입니다. 아니, 상상력을 좀 발휘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그런 생각이 끊어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은혜 충만해지고 은혜가 많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하던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회상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애굽에서 그렇게 건져주셨구나. 그래서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초기 신앙고백이 나오는데 거기에는 무엇이라고 나왔는가 하면 너희들이 하나님 앞에 이제 제사를 드리러 갈 때에 이런 고백을 하라고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원래 유리하던 아람 족속이였는데 유리하다가 그 다음에 애굽에 가서 거기에서 번성해서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고 이 땅에 오게 되었고 그래서 여기서 추수한 일부의 곡식을 드리나이다. 이런 고백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이 가득차게 되면 항상 가득차게 되면 항상 회상을 많이 합니다. 어떤 회상을 하는가 하면 자기들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들이고 희망이 없는 백성들이었는데 하나님이 자기들을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그리고 하나님이 어떠한 사랑으로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도망칠 수 없는 가운데서도 도망치게 하시고 이길 수 없는 속에서 이기게 하시고 자기들보다 훨씬 더 강한 대적들에게 에워쌓일 때 어떻게 그 대적의 손에서 건져내어 주셨는지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끊임없이 회상하는 것이 은혜가 살아 있을 때 한 일이었습니다.
선지자들이 나와서 절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상기시킨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모세나 혹은 아론이나 혹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낙담할 적마다 상기시킨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우리가 여호와의 백성이요.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어떠한 사랑을 주셔서 여기까지 인도하신 것을 계속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상기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어떻게 사랑하셔서 여기까지 데리고 오셨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홍해가 갈라지는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지요? 우리는 바로의 압제에서 벗어나는 기쁨을 맛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의 압제 보다도 더 강한 죄의 사슬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건져서 우리를 십자가의 피로 구원하셨는지는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가로막고 있던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그 튼튼한 휘장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못박히는 그 순간에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져 그렇게 둘로 갈라지고 우리가 그 찢어진 휘장 사이로 감히 바라볼 수 없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무릎을 꿇고 그 전능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지 그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런 놀라운 역사를 모두 경험하고 모두 체험하면서 그러면서 우리들이 살아왔기 때문에 우리가 홍해의 갈라진 틈을 지나지 않았고 그리고 애굽의 초태생들이 모두 쓰러져 죽는 장면을 보지 않았어도 우리에게는 그 사람들 못지 않는 간증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을 생각해보십시오.
사도 바울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자기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주신 그분이 어찌하여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도움이 끊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마다 ‘십자가를 보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심으로 우리를 죄가운데서 건져내시고 불의와 죄악의 사슬 가운데서 우리를 건져 내셔서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셨는데 하나님이 아들을 주시고 건져 내신 그 하나님이 어찌하여 우리를 오늘 이 순간에 우리를 홀로 버려두시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과거의 기억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제일 먼저 해야할 것은 무엇인가 하면 감사입니다. 무슨 감사, 감사도 안 나오는데 무조건 어떻게 감사하겠습니까? 주여, 절망에 들어가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모양, 이 꼴로 만들어 주셔서 할렐루야입니다.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어떻게, 뒤를 돌아 보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지내 온 것 주에 크신 은혜라
하나님의 큰 사랑과 자비하심을 힘입으면서 살아온 과거를 회상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돌려야 합니다. 아! 그랬구나. 하나님의 큰 사랑을 여러분들이 체험하지 못했다면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도 체험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살아왔는데도 여태까지 하나님이 진노하시지도 않으시고 여러분들을 지켜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서 사람들이 죽었을 때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들이 너희들보다 더 죄가 많아서 죽은 것이 아니라 회개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데려가셨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도 모르고 회개와는 담을 쌓고 그렇게 오래동안 형식적으로 신앙생활을 해왔는데도 하나님이 이제껏 까지 살려주시고 오늘 이런 절망에 문턱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주셨으니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과거를 회상해야 합니다. 과거를 회상하면서 하나님이 어떠한 도우심과 은혜로 이끌어 왔는지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현제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지금 밤새도록 통곡하면 눈은 퉁퉁 붓고 목은 다 쉬고 그렇게 힘들게 데굴데굴 구르며 몸부림치며 우는 모습이 은혜받은 철야기도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차이는 무엇입니까? 절망하는 사람들에게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만약에 이들이 밤새도록 울부짖는 이 뜨거운 탄식과 몸부림으로 ‘주여, 이제 아무도 우리를 도울 자가 없나이다. 오직 주밖에 없나이다. 하나님, 우리를 도와주시옵소서’ 하고 이 밤에 통성기도를 했으면 광야에서 그렇게 오랜 세월을 유리하고, 여기서 통곡하던 사람들 여호수와와 갈렙을 빼놓고 다 죽은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라고 그럽니까?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래, 그러면 소원대로 시켜주마’ 하고 결국은 광야에서 그것도 그냥 죽은 것이 아니라 두루 다니다가, 죽어라고 돌아다니고 싸움하고 그냥 그렇게 살다가 그냥 죽은 것입니다.
그처럼 이들이 지금 절망하고 있는 이유는 과거의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은 때를 생각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귀하고 소중하게 생각하시는지는 우리는 아무도 필설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잘못된 길을 걸어가고 죄악된 길로 걸어가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사람을 향해 진노하시는 것이지 그들이 그것을 떨쳐버리고 정말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서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아주 작은 의지만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시고 그 사람을 격려하시고 그를 그 마음 속에 있는 그런 착한 마음을 계속 일어나게 하셔서 그래서 어두움 속에서 결국은 건져내어서 빛 가운데로 돌아오게 하시고 싶어하시는 그런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그것을 잃어버리고 잊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이 지금 만약에 절망에 처했다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은 혹시 지금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처지에 있지는 않는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온갖 쓸데없는 것과 상상과 공상 속에서 커다란 현실을 만들어 내고 그리고 그 현실 앞에서 아주 즐겁게 절망하고 있지 않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속에서 주님의 놀라운 도우심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현실이 그대로 인정합니다. 맞아, 절망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면 주님이 나에게 은혜를 베푸시면 내가 이 절망을 이기고 좌절로 몸부림치던 이 자리에서 하나님을 찬송할 수가 있고 그리고 슬픔과 통곡으로 탄식하던 이 자리에서 주님을 향해서 기쁨의 관을 쓸 수 있겠다라고 하는 희망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희망을 가질 기초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셨으니 우리가 그 사랑을 의지할 수밖에 없고 당신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식언치 아니하시는 약속이 있으니 우리는 신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놀라운 기적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다 보았습니다. 그러고도 결국은 이렇게 커다란 절망 속에 부딪쳤을 때 이들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현실을 너무나 크게 보고 주님의 도우심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과거를 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불신앙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커다란 난관 속에 처했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절망시키고 거기서 우리를 질식시켜서 죽여버리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런 난관을 주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눈 앞에 있습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뭘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께 가서 직접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직접, 하나님, 주님을 믿는 내게 이런 큰 풍파가 왜 일어납니까? 이런 풍파가 왜 일어납니까? 내가 왜 이런 깊은 절망 속에서 있어야 됩니까? 한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애굽 생활을 청산하고 뛰쳐나온 사람들입니다. 그랬는데도 믿음의 확신, ‘하나님이 나를 도우실 것이라’고 하는 이 희망은 한번 그렇게 뛰쳐나온 확신가지고 충분하지 않고 계속 은혜를 받으면서 우리 속에서 계속 붓돋아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다 상황 돌아가는 것을 보고 ‘아이고, 참 곤고하다. 이거 뭐 되는 일이 없구나.’ 그러다가 신기하게 교회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절망으로 가득찼던 마음이 바람이 빠지듯이 쭉 사라지고 ‘하나님이 나를 도우실거야.’ 믿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상황을 보면서 ‘어구, 그러면 그렇지 내가 믿어서 뭐가 되겠어.’ 그러다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간절히 기도하면 불안한 마음이 사라지고, 절망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이시며 나의 구원이시라
그런 감격이 확 생겨나는 것입니다. 절망을 밀치고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순간순간 절망이 엄습할 때마다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우리는 무엇을 배우게 되는가 하면 절망 속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의지하는 동안에 절망적으로 부서졌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재건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난관은 하나님의 아주 놀라운 선물입니다. 왜 이 난관, 이 커다란 시련은 인간이 다 꼼짝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시련, 그런 것쯤 와 보아라.’ 이러는 사람은 두 종류의 사람밖에는 없습니다. 그것은, 간이 부은 사람하고 한 사람은 믿음이 너무 좋은 사람, 완전히 주님과 동행하기 때문에 ‘오면 오는 것이지’ 하고 ‘인생에 무슨 위기가 무엇이 있겠는가 잘해야 죽는 것밖에 더 있겠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과 간이 부어서 ‘오려면 와라’ 이러는 두 사람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그렇게 주님을 부르는 그런 주님을 찾고 주님을 매달리는 그 과정을 통해서 그야말로 절망적으로 파괴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복구해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난관을 시련을 잘 극복하면 절망하던 그 상태에서 헤어나와서 어떻게 됩니까? 삶도 다시 찾고 하나님도 다시 찾고 그렇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8.절망 속에 파고드는 원망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민14:2)
우리는 지난 시간에 1절을 살펴보면서 절망의 놀라운 힘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거기까지 데리고 오셔서 약속의 땅으로 들여보내시려고 하는데 갔다가 와서 부정직한 보고들을 전하면서 그 땅에 하나님이 들어가도록 주셨는데도 들어가지 못하고 거기에서 크게 절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우리들이 보면서 이 절망이 얼마나 커다란 힘이 있는가 하는 것을 우리들이 한번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다른 이 세상의 사람들이 절망하는 지점에서 자기들도 절망하고 세상에 있는 사람들과 똑같은 지점에서 낙심하고 하는 것들을 만약에 반복하면서 살아간다고 할 것 같으면 예수 믿는 사람들이 다를 바가 무엇이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으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참된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은 이렇게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절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도달했을 때,그 때 그가 정말 신앙을 가진 사람인가 하는 것이 입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런 커다란 절망과 어려움과 시련을 변장한 축복이라 이렇게 부르기를 좋아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삶의 모든 여정에서 일어난 모든 위기는 동시에 기회입니다. 문제는,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있어서 불행하고 어려운 일들을 만날 때 변수가 없습니다. 어려움을 만나게 되면 만나는 것입니다. 기껏 변수라고 그래봐야 재수, 운수, 운 이런 것, 어떤 원칙도 없이 찾아오는 것, 행운, 운수, 재수 이런 것은 무슨 원칙을 가지고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모두 복권을 샀는데 한 사람이 당첨이 됐으면 그 사람이 가장 애국시민이기 때문에 당첨된 것입니까? 아니면 가장 도덕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당첨이 된 것입니까? 그런 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 것을 의지하면서 사람들은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위기가 닥쳐도 인생에 변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계시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사에 개입해주시면 변화가 일어난다.' 그것을 믿는 것이 신앙이지, 그런 것이 바로 곧 우리들이 어려움 속에 어려움을 헤치고 살아갈 수 있는 요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위기에 처했을 때 잘 도와주시는 것 같은데, 그러나 자기는 하나님이 잘 도와주시지 않는 것같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가 있는 것이지 하나님을 올바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절망하는 것은 결국은 그의 인생 속에서 일어나는 변수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이 없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서 그와 동행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려움이 오면 기껏 해봐야 재수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서 점을 치러 다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여러분들은 절대 그런 것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사창가에 드나드는 것보다도 더 창피한 것입니다. 그런 식의 사고방식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바로 안 되어있으면 기껏 해봐야 '재수가 좋으면, 운이 트이면'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망하는 것은 곧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고, 절망하는 것은 결국은 그가 하나님과의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거짓말을 해서라도 그 땅을 쳐들어가서 취하여야겠다는 그 생각을 못하도록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거짓 보고를 해서라도 그 땅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결국 무엇입니까? 이 사람들이 쫓아서 광야의 많은 길을 걸어왔지만 그러나 이 사람들은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불신앙이 그것을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거짓말로 보고한 사람들과 참 보고를 한 사람들이 둘로 나뉘어졌고 하나는 다수파였고 소수파였는데 문제는 양쪽 사람들 사이에 무슨 의견의 차이가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 땅으로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하면 좋다, 나쁘다. 이런 의견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와서 그 땅이 아주 나쁜 땅이라고 이야기한 것은 그것은 싸워봐야 지게 생겼으니까 정직하게 보고를 하면 백성들이 싸우자고 그럴테니까 그것이 무서워서 그랬지, 내 힘으로 만약에 아무런 전쟁도 없이 하나님이 이 땅을 준다고 그러면 제일 먼저 뛰어갔을 사람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똑같은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한쪽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그들의 신앙과 인생 사이에 계산 속에 있었고 한쪽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이 사람들이 지금 기적을 다 보고, 기적의 떡을 먹고, 기적의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보면서도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눈앞에 일어났어도 사실 그것 때문이 아니라 그런 기적이나 놀라운 역사, 신앙에 체험 이것을 통해서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야 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라는 생각을 해야지만 그 하나님이 내 인생 속에 개입하시고 내 인생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인식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지금 문제가 많은 이 세상, 그리고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아도 그 문제와 함께 대응하고 싸워갈 수 없는 힘이 없는 우리의 힘을 잃어버린 인생의 현실,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이 문제를 피해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이 문제를 싸워서 이길 수도 없는 사람들, 그들 가운데 오셔서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에게 지대한 관심사이며 그래서 우리를 향해 도움의 손길을 내미시고 갈 길을 잃은 우리에게 가야할 길을 밝히 보여주시는 그런 이 땅에 우리의 문제 중에, 우리의 인생의 삶 가운데 함께 하신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는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천지만물을 주관하시고 이 시간에도 하늘의 수많은 행성들을 충돌하지 않게 끔 인도하시고 붙드시는 그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런 하나님에 대해서 눈을 뜨는 것은 결국은 개인적으로 자신의 인생 속에 찾아오신 하나님을 깊이 만나면서 속에서 밖으로 밖으로 그런 위대한 하나님에 대해서 눈을 떠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내 아버지여' 하며 무릎을 꿇어보지 않은 사람들이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위대한 권세를 찬송할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움직이고 계시는 하나님을 인하여서 송축할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가 만약에 어떤 인생의 깊은 시련과 위기 속에서 비참하게 절망하고 있다면 그는 즉시 깨달아야 합니다. ‘아! 내 인생은 하나님이 없는 삶이었구나.'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내 인생에 커다란 위기 속에서 내 인생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 환경을 향해서 절망하는 마음을 갖는 대신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렇게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것에 대해서 절망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치면 그 다음에 인생사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들 가운데는 인생을 살다가 시련과 깊은 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벧엘로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처참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 만나고 변화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런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내가 워낙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너무 잃어버려서 쇠약해졌으니 그러니까 이제 하나님 만나고 원기를 회복한 가운데 그 다음에 다시 힘을 내서 내가 내 인생을 지켜가야지'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신앙은 섰다가 가는 나그네길의 정자와 같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산길을 넘어가는 길에 가끔 나타나는 개울물과 같은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발이나 씻고 한번 원기를 얻은 다음에 간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인생과 나누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이 오셔서 그의 인생 길에 자기와 동행해 주시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하나님을 느끼고, 심지어 잠잘 때도 하나님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살아있어서 건강할 때도 하나님을 느끼고, 힘없이 병들 때도 하나님을 느끼는 것입니다. 환한 대낮에 정오의 햇빛이 그의 인생을 두루 비추어서 광명이 가득할 때에만 하나님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캄캄한 어두움 속에서 칠흙과 같은 그 흑암 속에서 갈 길을 찾지 못해서 방황할 때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느끼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 길은 언젠가 끝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끝나면 즉시 우리의 손을 이끌어 당신의 나라로 이끄시고 거기서 우리는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그럼 언제까지 그 관계가 계속될까요? 영원히 무궁토록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그 기쁜 하늘 잔치에 맛을 좀 보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면 똑바로 살아야지 맛을 보지, 똑바로 살고 똑바로 신앙생활 해야만 맛을 보지 않겠습니까? 인생에 좋은 날, 맑은 날이 있을 때는 자기 혼자 인생을 잘 사는지 알고 자신이 자기의 인생을 행복하게 해주는 장본인인 줄 알고 그렇게 하나님이 없이 건들거리게 살다가 인생에 커다란 시련을 만나고 어려움을 만나게 되면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행복하려고 몸부림쳤는데 그런데 마지막에 왜 이런 커다란 불행이 닥치게 되고 소설 속에서나 읽었던 어찌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내가 떨어져서 이렇게 메아리조차 들려오지 않는 깊은 인생의 계곡에서 몸부림쳐야 하는 이런 신세에 내가 왜 서있게 되었는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절망하게 하시는 것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하여 희망을 갖게 하시려고 절망 가운데 두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일단 절망하게 되면 그 다음에 다른 죄들이 꼬리를 물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두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절망하는 가운데 꼬리를 무는 죄가 이제 계속해서 3-4절 거쳐가면서 계속 쏟아져 나오는데 오늘 2절에서 소개하고 있는 죄는 첫 번째 죄는 무엇인가 하면, 사람을 원망하는 죄가 절망 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오늘 성경에 뭐라고 말합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밤새워서 통곡하고 울었는데, 절망 속에서 울었는데 이것을 절망 속에 몸부림치는데 이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울어도 하나님밖에는 의지할 분이 없다고 기도하면 주님이 그 눈물을 불쌍히 보시고 마음 아파하시는데 이렇게 절망 속에서 울부짖는 사람들에게 이미 하나님이 안중에 없기 때문에 그 눈물과 고통이 하나님의 주목을 끌지 못합니다. 그래서 늘 말씀드리지만 영혼의 참된 회복은 고통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 속에서 얼마나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바꾸는가 거기에 달린 것입니다.
자, 그래서 밤새도록 울고 나니까 그런 절망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 번째로 어떤 죄를 짓게 되었습니까? 누구를 원망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인생의 절망 속에서 서게 되면 즉시 이제 그 절망 속에서 ‘나를 이 절망 가운데 세우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야곱의 집안이 그러했던 것처럼 벧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대면해야 된다. 사람이 내게 무엇이라고 말하고 사람이 무엇이라고 내게 저주를 하든지 간에 나는 그것에는 관심이 없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실까? 내가 하나님 앞에 직접 가서 여쭈어보아야 하겠다.’ 이런 마음을 즉시 갖지 않으면 즉각적으로 또 다른 죄에 떨어집니다.
그래서 시험에 들면 십중팔구는 악에 떨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르쳐주실 때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그 다음에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하고 순서대로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시험에 들면 십중팔구는 악에 떨어집니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너무 어려운 시련을 만나서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렸는데 그 다음에는 그 시련 가운데서 죄에 빠져드니까 그 죄가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가슴 속에서 수많은 죄들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주 상세하게 다룬 시리즈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야고보서 1장의 시험시리즈입니다. 그것을 꼭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한번 예배에 나올 때마다 한 시리즈씩 들어보라고 하는데, 너무 힘들어도 그것을 들어야 합니다. 돈이 없어서 테입을 사지 못한다면 다른 테입을 팔아서라도 사서 들으십시오. 노래 테입 다 팔아서 이것을 사십시오. 야고보서 1장 시리즈입니다. 아마 꽤 여러 개가 됩니다. 정 힘들면 반씩이라도 나누어서 쭉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시험을 만나서 절망적인 상황에 딱 떨어진 사람들에게는 어떤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가 하면 실로 말하자면 가지런한 실이 헝클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머리, 가슴 모든 곳에 혼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럼 가닥가닥 하나씩하나씩 풀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서둘러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씩하나씩 이렇게 풀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제 시험에 들게 되면 대게 악에 떨어집니다. 여기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정확한 것입니다. 시험을 만나서 절망 속에 팍 떨어지게 되니까 그 다음에는 그렇게 밤새도록 울었는데 그러면 우리는 다 이렇게 밤새도록 울고 만약에 이 기도가 하나님 앞에 울부짖는 회개의 기도요. 통성기도였다고 할 것 같으면 뭐라고 그럴 것입니까?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다 나 때문이야' 우선 누가 제일 먼저 기도했겠어요? 거짓말로 보고를 한 사람들이 밤새도록 울면서 통성기도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습니다. 사실 그 땅은 기가막히게 좋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고 포도가 얼마나 큰지 그것을 꿸채로 한 송이를 꿰어서 그래서 장정들이 들고 와야 할 정도입니다.'
여러분께 이 말을 하면 성경도 뻥이 심하다고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이라고 생각됩니다. 이곳이 에스골 골짜기인데 에스골이라고 하는 말 자체가 '클로스트'입니다. 포도송이 덩어리를 의미합니다. 지금도 '카이델리츠'라고 하는 사람이 쓴 주석에 보면 지금도 거기서는 포도송이 하나가 4.5-6킬로 그램이나 되는 포도가 나온다고 합니다. 벌써 역사가 많이 흘렀습니다. 그러니까 이쪽이 주전 1500년 경이니까 350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도 지금도 4.5 킬로의 포도송이는 흔히 발견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엄청 큰 것입니다. 6킬로면 초등학생이 들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채에 꿰어 들지 못합니다. 그 때는 장정이었는데 지금은 초등학생이란 차이만 있는 것입니다. 그 3500년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 땅이 어땠는지는 우리는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가 무서워서, 전쟁이 두려워서 죽을 것 같아서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러면 온 백성들이 그 여호수아와 갈렙의 보고를 다시 생각하면서 그래서 거기서 하나님에게 우리는 힘이 없으나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이제 절망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한번 더 철야기도를 해서 다음에 쳐들어가자. 아마 그렇게 은혜롭게 바뀌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절망적인 상황에 떨어져서 시험을 만나서 우는 사람들은 눈물 흘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을 향한 기도라고 생각하는데 그 눈물에는 의미가 너무나 여러 가지입니다. 서러워서 막 우는 것, 그게 무슨 시집살이 실컷하고 와서 서러움에 꺼이꺼이 우는 것, 그런 것은 눈물을 흘리면 흘릴수록 마음 속에서 미움이 쌓여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기서 만약에 그렇게 흘리는 울부짖는 그 기도가 기도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인생 가운데 얼마나 고통을 받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고통의 목표 자체는 하나님이 고통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낮추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낮아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 절망을 통해서 즉시 그 절망이라는 시험을 통해서 죄 가운데 빠지게 되었는데 그 죄가 무엇인가 하면 사람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아니 솔직히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는데 아니 모세한테 자기들이 해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아니 내가 같은 목회자로서 그런 것이 아니라 모세가 얼마나 불쌍한 사람인데, 아니 월급을 한번 받았습니까? 휴가를 보내주었습니까? 그 흔한 자가용을 한 대 사주었습니까? 뭐 어디 그늘에 누워서 한번 쉬어 본 적이 있습니까? 자기네들 쉴 때도 모세는 쭉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재판했습니다. 언제 좋은 것 나오면 모세 혼자 먹어본 적이 있습니까? 먹은 적이 있습니다. 욕, 뭐가 되는 일이 있을 때는 모세를 찾지도 않습니다. 뭐가 안 될 때는 그냥 비난을 합니다. 모세가 얼마나 큰 교회를 목회했습니까? 장년 남전도회만 60만명이 넘습니다. 300만명이 넘는 대형교회를 목회했는데 대접해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모세가 언제 자기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가나안으로 가겠다고 언제 그랬습니까? 모세가 얼마나 안 가겠다고 그랬습니까? 오죽 화가 났으면 '하나님, 이 자식들을 내가 낳았습니까? 내가 이들의 유모입니까? 왜 나를 여기 보내서 이 백성들을 내가 품에 안고 이 길을 가야 됩니까? 죽여주시옵소서' 그럴 정도였는데 아니 모세는 여기 서있고 싶어서 섰습니까? 왜 모세를 원망하는지, 아론은 또 뭐예요. 아론은 모세 때문에 여기 온 사람인데, 물론 모세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하여튼 모세가 도구가 되어서 같이 끼어들어서 온 사람인데 원망할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다 같은 처지인데,
사실 여러분 한번 마음을 맞추어서 모세를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불쌍한 사람인지 말입니다. 아니 애굽에서 가만히 있었으면 고래등 같은 왕실에서 대접받으면서 잘먹고 잘살고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역사에 보면, 성경에는 안 나옵니다만 모세를 불러 갔던 바로의 공주가 아주 똑똑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남편이 일찍 죽습니다. 그래서 실제적인 애굽의 왕권이 그 사람의 손에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여걸이었습니다. 아니 그런 사람에게 그렇게 사랑을 받았는데 그렇게 해서 얼마든지 잘 살 수가 있었는데 그러다가 뭔가 좀 해보려고 하다가 미디안으로 가기는 했지만 하여튼 하나님이 부르셔서 그 평탄한 생활 접어두고 밤도 없이 낮도 없이 그렇게 고달픈 인생 길에 그 사람들을 데리고 때로는 장군으로 변신하고 때로는 목회자로 변신해서 자기들은 가서 자는 동안에도 그렇게 몸부림치면서 회막으로 나아가서 기도하고 아 그러고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없다고 그러면서 괴롭힌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모세를 괴롭혔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생수를 파주고 돈을 받았습니까? 그렇게 해서 자기의 짐인 것처럼 그렇게 괴로워하고 그 틈바구니 속에서 몸부림치면서 산 사람이 모세가 아닙니까? 그런데 뭘 원망을 하는 것입니까? 모세가 뭘 잘못했기에, 그런데도 사람이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인생이 절망 속에 있을 때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박살나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던 사람들과의 관계가 다 깨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을 나누고 함께 기대면서 살아야 할 사람들과의 관계가 파괴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용납하고 받아주던 사람들과의 관계가 쪼개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혀 원망할 수 없는 사이인데 원망이 생겨나게 되고 그리고 신뢰하며 살던 사람들 사이에 의심이 막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자기가 잘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9.절망과 뒤로 물러섬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민14:3)
우리는 이제 1절에서는 절망이 가지고 있는 큰 힘을 보았고 두 번째에서는 절망 끝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모세와 아론을 향해서 깊이 원망하는 장면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는 우리들이 뭔가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고 거기서 하나님의 뜻을 바로 찾지 못하면 그 속에서 사람들을 원망하게 되고 그리고 믿었던 인간들과의 관계가 철저히 파괴된다라고 하는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 자신을 보여주시게 하기 위해서 부딪치게 하시는 상황 속에서 우리들이 믿음으로 바라보지 아니하면 반드시 이런 결과를 우리들에게 가져온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커다란 위기 앞에서, 사실은 이 위기는 하나님이 가져다준 위기가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보여주신 것은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실상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자, 내가 너희에게 가나안을 주었지. 그런데 이 가나안에는 이런 이런 사람들이 이미 이 땅을 차지하고 있단다.’ 그것을 보았으면 그것을 보고 ‘정말 이 땅이 비어있는 땅인줄 알았더니 이렇게 기라성 같은 민족들이 튼튼한 요새를 짖고 우리보다는 어깨만큼이나 더 큰 사람들이 이렇게 버티고 있구나.’ 그랬으면 ‘그럼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더 큰 은혜와 능력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절망하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믿음이 없어서입니다. 믿음으로 살지 않아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속에서 결국은 절망이라는 죄에 빠지고 나니까, 믿음의 눈으로 행하지 않으니까 그 다음에 즉시 찾아오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원망이였습니다. 그래서 모세와 아론에게 원망을 퍼부으면서 이제 그런 목자와의 관계가 깨트려진 사실을 우리들이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인생에 어떤 위기에 부딪쳤을 때에 믿음으로 살지 않으면 그것이 결국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산산조각을 냅니다. 믿음으로 살지 않아서 어떤 위기 속에서 깊이 절망하고 신앙을 다 털어먹은 사람들에게 목사가 있습니까? 목자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영혼의 목자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내친김에 교회 생활까지 다 무너져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믿음이 없어서 파괴되고 그리고 목자와의 관계, 자기가 사랑하던 사람들과의 관계는 원망함으로서 그 관계가 모두 파괴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어떤 상황이 되었습니까? 목자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상황이 도로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짜 절망적인 위기가 다가왔기 때문에 절망을 한 것이 아니라 절망을 하고 나니까 진짜 절망적인 상황이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 생각해야 합니다.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가는 길을 돌이킬 수 있는 기회는 자주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자주 주신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딱 맞아떨어져서 뭔가 인생 전체를 올려놓고 ‘신앙적으로 내 인생에 갈길을 다시한번 점검해보아야 되겠다’라고 하는 생각이 항상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한번 그런 자신을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나면 언제 그 기회가 다시 올지 모릅니다. 인생은 저물어가는데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보면서 결국은 이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대표자들이 와서 보고를 했지만 이 사람들이 울고불고 밤새 절망으로 밤을 지새우는 이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깨닫는가 하면 얼마나 우리들이 믿음으로 안 살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보다는 눈에 보이는 것들을 붙들면서 살려고 하느냐 하는 것을 배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위대함은 보지 못하는 것들을 믿음 때문에 보고, 그리고 믿을 수 없는 것들을 믿음이 있기 때문에 굳게 붙들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을 가진 사람들만이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미친사람과 같습니다. 폭풍이 몰아치고 천둥과 번개가 치는 데도 웃고 있습니다. 왜 폭풍의 어두운 밤에서도 그들은 고개를 들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와 역사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폭풍이 지나가고 나면 자기에게 다가올 광명한 세상을 꿈꾸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살지 않는 사람들은 이런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희망을 갖고 소망을 갖는 것은 보지 못합니다. 오히려 눈에 보이는 것들을 향해서 절망하고 희망을 갖고 하면서 그렇게 요동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간에는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을 향해서 당신들이 우리를 어찌 여기로 인도했는가 하고 원망을 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다음에는 여호와를 향하여 직접적으로 원망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 우리가 위기 속에서 절망이라는 죄에 떨어지고 나면 절망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인간을 향하여 원망하게 되고 그 다음에 나아가서는 결국은 하나님을 향해서 본격적으로 원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하나님을 원망할만한 그 무엇이 있었습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원망을 받을 일을 무얼 하셨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달라고 그러지도 않는 시점에 주님이 일방적으로 모세를 통해 나타나셔서 너희가 이렇게 종살이 하는 것을 내가 해방시켜주겠다. 물론 그들은 울부짖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온전한 기도였는가는 의문입니다. 주님이 나타나셔서 너희들이 이렇게 노예살이를 하는 것을 보니까 안타깝구나. 내가 너희에게 새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너희에게 주겠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애굽의 모든 속박을 끊고 풀고 그리고 홍해를 갈라서 그들을 이끌어내셨습니다. 광야에서 만나로 먹이시면서 수많은 원수들을 멸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셔서 그래서 여기까지 데리고 오셨습니다. 데리고 오셔서 이제 드디어 주려고 하는 땅까지 데리고 오셨고 그래서 그들 중에 정탐꾼을 만들어서 이제 점령을 하지만 하나님이 그 땅을 주셨지만 점령하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힘입어서 점령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무조건 쳐들어간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혜를 다 동원해서 전략을 세우고 방책을 세워서 그래서 공격을 해야될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정탐꾼들이 무사히 가서 다 정탐을 하고 돌아오게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하나님이 잘못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망받을만한 일을 하신 것이 뭐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금 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탐꾼들을 통해서 그 큰 아낙자손들을 보고 견고하게 선 요새를 보고 모든 땅을 정탐하고 온 것은 결국은 하나님이 그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는 과정입니다. 주시는 과정에 있을 뿐인데 하나님이 무엇을 잘못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원망받을만한 일을 하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주시는 과정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서 가나안 땅을 주시는데 그럼 어떻게 가나안 땅이 정복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까? 가나안에 들어가기도 전에 요단 강변에 모여 앉아서 주여! 하고 통성기도를 하면 가봐라. 다 죽었다. 가보고 나면 시체를 치우는 것입니까? 무슨 시체를 치웁니까, 시체여 한 곳으로 모여라. 시체가 쌓이고 땅아 꺼져라. 들어가라. 문닫아라. 뚝딱. 비석아 세워져라.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주시라고 생각했는가 봅니다. 당연히 이루어지는 과정이요. 그리고 절차입니다.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난 다음에 놀라운 은혜와 진리로 풍성한 삶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그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여러분들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없는 풍성한 진리, 풍성한 은혜 그것으로 말미암은 풍성한 삶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이제는 실패를 운명삼는 사람들이 아니라 날마다 하나님 앞에 기도 속에서 이기고 말씀 속에서 승리하고, 전에는 억압받던 마귀로부터 구원의 역사를 경험하고 승리할 수 있는 특권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어떻게 얻어지는 것입니까? 주님이 그것을 주셨다. 그러면 가만히, 여러분이 예배 시간에 와서 멍하니 앉아 있어도 말씀이 단단한 머리를 드릴로 뚫고 그냥 막 들어갑니까? 주입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와서 약속되어 있지만 열심히 깨달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깨닫습니다. 그것을 깨달아서 무엇을 하랴. 그런 사람들은 기다렸다가 예배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그렇지 않습니까? 약속이 다 주어졌지만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들은 쟁취하고 얻을 것이며 열심히 하나님 앞에 투쟁하고 싸우듯이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은 여전히 빈털터리로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당연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땅을 주시는 과정입니다. 그러니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가나안에 들어가서 정탐을 하고 왔는데 많은 사람이 있더라. 그러면 와서 어떻게 보고를 했어야지 맞습니까? 가보니까 이러 이러하게 키도 크고 엄청난 요새가 있어서 우리의 힘으로 감당할 수가 없더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면 아! 그렇다면 우리가 특별 철야기도를 하자, 아니면 금식기도를 하자, 아니면 우리 모두 민족적인 각성을 하고 그리고 정말 결단하는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리자. 왜냐하면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우리는 일퍼센트도 승리할 가능성이 없지 않느냐.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안 기뻐하신다면 우리를 왜 도와주시겠는가. 그래서 우리 모두 대우 각성하고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해주시기를 우리가 혼신의 힘을 다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자. 이렇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함께하시면 반드시 우리는 그 땅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백성들이 반응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광경을 딱 보여주시고 보고를 듣게 하신 다음에 즉시 백성들은 자신 속에 믿음이 없는 것을 크게 절망하므로서 입증한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를 향해서 원망하고 급기야는 하나님을 향해서 원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절망은 믿음으로 살지 않는데서 비롯되는 것이며 믿음으로 살지 않는 데서 비롯되는 그 절망은 결국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데로 나아가게 하는 첫 걸음이라는 사실을 여기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향한 원망과 하나님을 향한 원망은 나뉘어지지 않습니다. 반드시 거기에 섞여 있습니다. 내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관계를 강요하는 어떤 사람을 나에게 세워주셨을 때 그 사람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넓게 보면 그런 관계를 주신 그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이러한 사실이 아주 그대로 입증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절망적인 위기 가운데 떨어졌을 때 하나님을 원망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은 여러분들이 경험적으로 너무 잘 아실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 진노하시고 인간을 향해 잘못됐다고 지적하실 때에 그때 인간에게 문제가 일어나지만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서 아무리 부당하게 하나님께 원망을 한다고 해서 그 부당한 인간의 명령, 혹은 인간의 오해,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는 그런 죄악된 생각 이런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태도가 우리를 향해서 바뀌지는 않습니다. 바뀐다면 그것은 진노밖에는 불러올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변하지 않는 그림자가 없으시고 변함없으신 그런 불변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이 홀로 당신의 역사를 이루어가시는 그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변하는 상황을 보면서 상황 때문에 요동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의 영혼의 시선이 그렇게 불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살아갈 때 환경이 자기를 괴롭히고 내 앞에 펼쳐진 지금의 여러 가지 많은 환난이 자기를 괴롭힐 때 그 환난은 물결치고 요동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전에 살아오던 삶을 기본적으로 허물어트리면서 그러면서 커다란 물결과 같은 환난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환난을 성난 파도에 비교하는 것은 아주 훌륭한 비유입니다. 잔잔했을 때는 바다가 배의 말을 잘 듣습니다. 배가 가고 싶다고 그러면 길을 열어줍니다. 쉬고 싶다고 그러면 가만히 내버려 둡니다. 그런데 큰 물결이 일어나면 배가 하자고 하는데로 바다가 하지 않습니다. 가고 싶다고 그래도 못가게 막고 떠있고 싶다고 그래도 가라앉으라고 물을 뒤집어 씌웁니다. 그런 환난이 불어닥치고 어려움들이 불어닥칠 때 그가 비로소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인가 하는 것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환난과 어려움이 닥칠 때에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지 못했던 사람들은 그 환난을 통해서 그의 신앙생활에 경박함이 그대로 드러나고 그가 의뢰하고 바라보는 분이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사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환경에 그런 다양한 변화 속에서 하나님이 신실하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는 신앙이 없으니까 뭔가 환경이 평안하면 하나님이 자기에게 호의를 베푸신 것과 같고 어려움이 닥치면 하나님이 자기를 저주하시는 것과 같고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를 저주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깨달으면서도 자신에게 뭔가 잘못이 있다는 사실은 못 깨닫고 결국은 하나님이 변덕을 부리시기 때문에 이런 환난과 풍파가 일어나서 자기는 객관적으로 공연히 괴롭힘을 받는다라고 하는 피해망상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담대하게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은 모두 쓸데없는 생각일 뿐입니다. 사실은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예화: 비바람이 불고 천둥 번개가 치면서 비가 오는 가운데도 비행기를 타고 이륙하면 어느 정도까지 하늘을 향해 올라가고 나면 맑은 하늘이 나오는데 그곳은 언제 그 랬냐는 듯이 맑고 깨끗한 태양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는 이야기)그런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이 변함없는 것과 같이 하나님이 신자를 향한, 당신의 자녀들을 향한 신실하심도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우리는 이렇게 변천하는 삶의 상황과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잘 읽을 수 있는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환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해주십니다. 그래서 그릇된 길로 가면 하나님이 어떤 때는 책망하셔서 사업도 위기가 오게 하시고 건강도 어려움에 빠지게 하시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깨트려지게 하셔서 곤고하게 만드셔서 깨닫게 하십니다. 또 하나님을 잘 믿으면 하나님께서 원수되었던 사람들과의 관계도 화해하게 하시고 자기에게 많은 손해를 입혔던 사람들이 돌아와서 그 손해를 배상하게도 하시고 모두들 어려운 때에 사업에 있어서 번영도 주시고 곤궁함에서 우리를 벗어나게도 하십니다. 물론 하나님은 그처럼 환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자신을 이렇게 보여주시고 이렇게 자기의 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기가 가지고 있는 뜻과 마음을 인간들이 너무 모르니까 환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마음을 가르쳐주시는 것이지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향해 불변하시는 분이 아니시고 변덕이 많으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당신이 약속한 것들을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식언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반드시 자기가 약속하신 일들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중요한 것은 그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고 주님의 자녀가 되어서 주님을 깊이 두려워하고 그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과 떨림으로 주님을 섬긴다고 하는 것과 하나님 앞에서 뭔가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전전긍긍해 한다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전자는 믿음이지만 후자는 믿음이 없음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못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원망받을 일을 하나도 하신 것이 아닌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하나님을 향해서 모세와 아론을 향해서 하여튼 하나님과 관계된 일이나 하나님과 관계된 사람들을 모두 원망을 퍼부으면서 그런 모든 관계들을 철저히 다 파괴시켜버리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결국은 무엇 때문인가 하면 이들이 믿음의 눈을 가지고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런 믿음의 눈을 가지고 인생의 위기를 바라볼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만약에 정말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온전히 신뢰하고 이전에 잘못 살아와서 위기를 만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이 위기를 통해서 정말 하나님을 올바로 믿고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겠다라고 하는 깊은 결심을 하게 되면 그러면 그 위기는 사실은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큰 풍랑과 인생에 커다란 위기 때문에 그것을 다리 삼아서 하나님께로 돌아온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있는 사람들 중에도 많은 사람들이 환난과 위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평탄할 때 하나님을 믿지도 않고 아무 염려없이 이 세상에서 번영할 때는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던 사람들이 오히려 큰 풍파와 어려움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풍파와 어려움을 만나서 잘 믿지도 않았지만 하나님을 더 원망할 수도 있었고 또 자기를 인도해주는 사람들을 향해서 더 원망하고 그들과의 관계가 파괴될 수도 있고 평안할 때 사랑하며 살던 사람들과의 관계가 어려움 때문에 쪼개질 수도 있었는데 어떤 소수의 사람들은 그 풍랑과 커다란 인생에 위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위기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풍랑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위기를 만나게 해주신 하나님 앞에 이 사람들처럼 원망하고 불평하고 하나님을 향해서 반기를 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간이 지나고 나서는 그 풍랑을 인해서 내가 주 앞에 가까이 오게 되었다고 오히려 찬송하면서 그 폭풍 가운데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인생에 어려운 풍랑과 독이 난 폭풍과 위기가 같이 찾아온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자기와 동행해주신다면 이제 그런 풍랑 정도는 위기가 아니라고 하는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닥치는 환경 자체가 절대적인 위기나 절대적인 환난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절망은 남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절망을 불러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히브리서 11장 믿음의 사람들에 대한 위대한 간증들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모두 평탄한 인생을 살았다가 결국은 믿음의 사람들로서 등극된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톱으로 켜는데 내어주고 어떤 사람은 사자의 밥이 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환난과 핍박을 받되 구차히 그 핍박을 면하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나그네와 행인같은 사람들이었고 돌아갈 본향이 있었지만 그러나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기 위해서 이국에서 나그네로 일컬음을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믿음을 따라 순교한 사람들이었고 믿음을 따라서 승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평탄한 인생을 산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요즘은 좀 안 하고 있습니다만 한창 신학교 다닐 때 제가 열심히 하던 기도 가운데 하나가 있었습니다. 누가 들으면 이상한 기도라고 그럴 것입니다. “하나님, 제 인생을 평탄한 길로 인도하지 마옵소서. 평탄하고 안일한 곳으로 인도하지 마옵시고 끊임없는 시련과 커다란 도전 속에 그 속에 설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인생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주님을 향해서 아무 것도 계획한 것이 없다면 아마 안일한 인생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큰 뜻을 품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커다란 좌절과 그리고 절망을 강요하는 환경에 변화가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그런 것들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늘 절망하고 나니까 하나님을 깊이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축복을 주시기 위한 과정을 보여주셨는데도 몸서리치면서 하나님이 무엇을 잘못하신 것처럼 하나님께 대들면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상황으로 가게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절망의 위대한 능력이고 절망이 우리를 파괴하는 방법인 것입니다. 절망은 우리의 눈을 멀게 만들고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도 보이지 않게 만들고 우리가 신뢰하면서 살아오고 찬송하던 그 하나님 조차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게 끔 우리를 완전히 미친 사람처럼 만들어 버리는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여러분, 절망하고 있는 사람들은 벌써 얼굴부터가 다릅니다. 죽어있습니다. 절망하니까, 마음의 병을 얼굴이 그대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절망하는 사람은 죽어있습니다. 거기에는 희락이 없습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사랑이 없습니다. 온유는 저리 사라지고 그리고 파괴적인 심성만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동물적으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렇게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절망하지 않고 살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간단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받는 희망이 환경을 보며 받게 되는 절망을 능가해야 합니다. 그러면 환난이 환난이 아닙니다. 어떤 미국 사람이 그랬습니다. 죽지 않는다는 보장만 있으면 이 세상에 전쟁만큼 신나는 스포츠가 없다고 했습니다. 모든 게 다 실감이 나니까.
(예화: 미국에서는 인도네시아나 캄보디아 같은 곳, 내전이 있는 상황으로 두려운 전쟁 의 공포가 있는 곳으로 공포 여행을 가는데 거금에도 불구하고 표가 잘 팔린다는 이야기)
(예화: 구소련에 가면 돈만 있으면 전쟁 놀이를 다 해볼 수가 있는데 탱크도 몰아볼 수 가 있고 로켓포도 쏠 수가 있으며 전투기도 태워준다고 하는데 그런 기구들을 사 용하면서 재미를 느낀다는 이야기) 죽지 않으면 신나는 게 전쟁이라고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신앙 안에서 공급되는 낙관이 환경을 보면서 좌절하고 절망하는 것보다 크면 그것만큼 스릴이 있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그래서 예수를 믿고 인생을 다 산 다음에 그저 순종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불순종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알았으면 그랬겠어요. 밋밋하게 교회 생활 해오고 그런 사람에게 일생에 주님을 만났습니까? 그러고 물어보면 말하는 게 만나기는 뭘 만나요. 그냥 교회 다녔지. 그리고 꾸준히 성실성 하나로 버티면서 꾸준히, 마지막 남은 것이라고는 그저 올 때마다 작대기 그어준 출석부 한 20장 남은 것, 20년 치니까 한 20장 남고 주정 헌금 꼬박꼬박 낸 봉투에도장 찍힌 것밖에 남은 것이 없는 것입니다. 뭘 만나기는 만나요. 그냥 열심히 반상회에 참석하듯이 꾸준히 그저 다닌 것입니다. 개근상이 있으면 벌써 받았을텐데, 꾸준히 다닌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살았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큰 시련과 쉽게 이야기해서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그러면서 살아온 사람들이 신앙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믿음으로 살려는 사람은 환난을 주시는가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은 위기가 와도 위기인 줄 모릅니다. 그러니까 몸부림이 없는 것입니다. 사업하다가 망하면 IMF때문에 망했지 그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찾을 것도 없고 원망하고 이를 가는이 옛날에 정권잡은 사람들이 IMF가 온 것만 원망을 실컷 할 뿐 하나님 앞에 매달릴 이유를 못 갖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돈을 잘 벌어서 장사가 잘되고 잘 나가면 그러면 왜 그렇습니까? 경기가 좋아지고 좋은 사람들 만났으니까 잘 됐나보다. 그러니까 그것도 그저 좋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살아갑니다. 그렇게 살다가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 되었는지 영 기도도 안 되고 신앙 생활이 제대로 안 되면 ‘그럴 때도 있지,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믿을 때가 있는가 하면 또 덜 믿을 때도 있지’ 그런데 사실 열심히 믿을 때가 없었는데, 그러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매일 똑같은 월급을 타고 똑같이 사업이 별 문제가 없이 많이 흘러가도 그들의 인생은 드라마틱합니다. 왜 사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월급을 잘 갖다가 주고 아이들이 건강하게 잘 자란다고 해서 그것으로 문제가 없고 무사하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돼지 우리지 무슨 집안입니까? 사료 늘 주고 그리고 늘 꿀꿀대는 새끼들이 있으면 그저 좋다는 것은 돼지지, 뭔가 평탄한 환경 속에서 순간순간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악의 세력들을 보면서 우리의 영혼이 안전한 가를 점검하고 우리와 우리의 가족들의 신앙의 안전이 확실한가를 살피고 그렇지 않게 끔 어떤 도전하는 세력들을 평탄한 환경 속에서 읽어내면서 그러면서 모두들 문제가 없다고 말하는 그 때에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파악하며 위기 의식을 느끼고 하나님 앞에 철저히 매달리고 그 위기 앞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넘치기를 매달리면서 아버지 앞에 기도하고 그렇게 환경을 다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삶이 얼마나 다이나믹하고 드라마틱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냥 밋밋하게 흘러온 삶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언제나 커다란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감화가 있고 은혜가 있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정말 오늘은 정말 기쁜 날이야.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너무 놀라워.’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이 ‘왜 복권이라도 맞았어?’ ‘아니야. 그것이 문제가 아니야.’ ‘그럼 승진했구나.’ ‘아니야.’ ‘그럼 무슨 박터지는 일이 일어났어?’ ‘그것도 아니야.’ ‘그럼 무엇이냐고’ ‘그러니까 내가 13년 동안 기도하던 한 사람이 오늘 주님을 영접하고 구원을 받았어.’ ‘어유 병신. 난 또 뭐라고’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다못해 복권이라도 10만원 짜리가 맞았으면 그 사람에게는 더 감격적이고 짜릿한 일일 것입니다. 그만큼 인생을 바라보는 시야자체가 틀린 것입니다.
자,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어떤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위기는 어떤 것입니까? 여러분들은 인생을 살면서 지금 어떤 위기를 당하고 계십니까?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독같은 상황을 만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피난민도 아니고 나라를 잃은 보트피플도 아닙니다.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주민등록증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의 집이 있고 거하는 처소가 있기 때문에 오늘 저녁에 끝나면 거의 남지 않고 자기 집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교회에 남아있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집이 없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철야를 하려고 남은 것이지, 다 어디론가는 돌아갈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똑같은 상황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들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똑같은 상황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이 사람들과 같은 상황에 여러분들이 처해있을 수는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이 사람들과 동일하게, 이 사람들은 지금 주시기로 약속한 그 땅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기라성 같이 버티고 있는 그 원주민들을 바라보면서 절망하고 몸부림치며 지금 밤새도록 통곡하고 모세와 아론과 하나님을 원망하는 가운데 있습니다. 여러분을 지금 이렇게 절망하게 만들고 그 문제 앞에 설 때마다 여러분들의 모든 힘과 기력이 한꺼번에 사라지도록 만들고 맥을 못추게 만드는 인생에 문제가 무엇입니까? 여리고 성처럼 가보면 언제나 버티고 있는 여러분들의 인생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의 가정에 문제입니까? 직장의 문제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입니까? 죽어도 변화되지 않는 여러분들의 신앙의 태도입니까? 변화되리라는 소망 자체를 아예 포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그 땅에 그러한 기라성 같은 백성들이 살고 있어도 그 땅을 약속대로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시리라고 굳게 믿는 대신에 키가 큰 백성들을 보고 견고한 망대나 혹은 견고한 요새를 바라보면서 좌절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문제 앞에서 하나님을 정말 인정하고 있습니까? 만약에 여러분들이 그렇지 못하다면 똑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절망하게 하는 요인들은 수없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 앞에서 희망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이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살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절망으로 가득찬 환경 속에서 하나님 때문에 희망을 얻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 붙들고 사는 사람들 이외에는 아무도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고 삶의 중심이 하나님을 향하고 그리고 인생의 모든 가치와 표준을 하나님께 두고 내가 좀 쓰디쓴 일을 당해도 하나님은 기쁘시게 해드려야 되겠다라고 하는 갸륵한 믿음으로 주님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인생에 커다란 위기가 닥쳤을 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낼 수 있는 지혜를 갖습니다.
모든 인생의 문제는 어려움이 닥쳤을 그 때에만 하나님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하나님을 늘 필요로 하고 에녹과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은 인생에 이런 어려움이 왔을 때 정말 이 어려움 속에서 어려움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고 절망해야 할 이유보다도 희망을 가져야 할 이유를 그 안에서 충분히 발견하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평안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원망하고 불평해야 할 자리에서 오히려 하나님을 깊이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실은 성도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생명은 운명에 매여서 사는 생명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뜻없이 무릎을 꿇거나 운명에 매여서 사는 그런 복종이 아니라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좌절하고 슬피울고 통곡하며 사람들과의 관계를 파괴하고 원망하고 하나님께 대들어야 할 그 상황에서 오히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희망과 낙관을 얻고 그 환난과 시련 속에서 오히려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송하고 환난과 시련을 통해서 우리를 붙드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시도록 주님을 의뢰하는 성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짜 신앙의 연단을 많이 받은 사람들은 환난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환난을 만나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환난을 통해서, ‘환난’ 떠오르는 게 지긋지긋한 고생만이 떠올라다면 환난에 대한 향수를 안 갖겠는데 환난 그러면 가슴이 벅차고 두근거리기 시작합니다. 왜 아! 그 환난 그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폭풍, 아주 비유가 적절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그 놀라운 폭풍,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없었더라면 그 속에서 처절하게 자기가 무너지는 것을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을텐데 거기에 하나님께서 환난을 능가하는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환난 하면 그 환난만이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만나주셨던 하나님의 은혜, 그 하나님의 감격, 그 사랑이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믿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환난 속에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부부와의 관계가 파괴되고 시련 속에서 사랑하던 사람들을 다 잊어버리고 마지막에는 하나님도 잊어버리고 자기도 잊어버려서 환난이 모두 끝나고 난 다음에 너절하게 죽은 시체들과 철저하게 파괴되고 인생 자체가 철저하게 부서져 버린 그런 재고품처럼 남아있는 자신밖에는 발견할 수가 없는데 믿음의 사람들은 환난 속에서 수많은 관계들을 살려내는 것입니다. 시련 속에서 오히려 사랑하는 가족이 하나가 됩니다. 환난 속에서 하나님 앞에 정결하게 되는 방법을 깨닫고 평탄할 때 깨트려졌던 사람들을 찾아가서 화해하고 용서하고 용서를 받고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평탄할 때에 무시하고 돌아보지 못했던 수많은 사람들을 오히려 큰 풍랑 속에서 내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영혼들을 돌보는 일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돌아보는 일들을 소월한 삶을 살았는가 하는 것을 깊이 인식하면서 그러면서 그 사람들을 하나하나 세워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환난과 풍파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그 은혜를 깊이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신자들의 마음 속에 믿음의 비밀들이 생겨가는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환난을 이기는 방법은 이를 악물고 고난을 참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환난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 붙잡혀서 환난이 불어와도 환난 때문에 마음 상하고 인간성이 파괴되지 않고 오히려 환난 속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고쳐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비바람이 칠 때와 물결 높이 일 때에
사랑하는 우리 주 나를 보호하소서
환난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과의 관계를 굳게 붙들고 그 큰 사랑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의 뜨거운 포옹이 있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불붙은 영혼에 사랑의 입맞춤이 있는 곳이라면 폭풍도 두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그 폭풍이 이는 언덕에서 하나님 이 세상에서 맛볼 수 있는 가장 강렬하고 격렬한 천둥과 번개를 동반하고 어두움이 가득차서 불빛 하나도 없는 그런 벼랑 끝에서 서 있다고 할지라도 거기서 주의 손이 우리를 붙들고 주님이 우리를 안아주시고 주님의 그 뜨거운 입맞춤이 우리의 얼굴에 머무는 동안에는 우리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 주와 함께 죽으면 되는 것입니다. 아멘을 안 합니까?
그러니까 인간이 믿음으로 안 살면 진짜 갈대와 같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신앙으로 산다고 하면 흔들리지 않습니다. 진짜 요동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요동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안에 주신 믿음이 그를 요동하지 않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아! 하나님, 이제 우리는 앞으로도 인생의 시련과 어려움들이 많이 올 것입니다. 만약에 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쫓아가서 맞이해야 합니다. 전혀 아멘을 안 하십니다. 안일하게 살바에야 진짜 쫓아가서라도 환난을 맞아야 하지 않아요. 그런데 젊은이들 가운데는 그냥 선교의 사명을 받아서 진짜 순교와 핍박의 칼날이 기다리는 곳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나와야 됩니다. 왜 젊은이들이 아멘을 안합니까? 나와야 됩니다. 여기서 안일한 삶을 살 수 있는데 이정도 가지고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핍박과 고난이 있는 곳으로 가야 됩니다. 아골 골짝 빈들에도 가야 됩니다.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거리에도 사랑을 안고 찾아가고 어려움들을 만나야 합니다. 아픈 교회에도 찾아가야 되고 병든 영혼들 버려진 영혼들에게 가서, 만나지 않았으면 평안하게 살았을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 찾아가서 아픔에 동참하고 함께 쓰라림을 느껴야 합니다. 그런 삶을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 주 복음 전하게 하시려고 그런 천국에 이르는 순례자로 살아가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부르신 것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앞으로도 그런 것들을 많이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도 그렇게 많은 시련, 다른 사람의 시련에 동참하고 조국의 교회의 아픔에 동참하는 것들이 우리의 인생을 행복하게 하거나 불행하게 하는 좌지우지 하는 요소는 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우리의 진정한 행복은 변하는 이 세상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 불변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관계를 붙들고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만약에 하나님 원망하고 있다면 여러분 오늘 깊이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면서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것은 은혜로 주님의 사랑 베풀어주신 것밖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이렇게 원망하고 있는 이 원망은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원망이 아니라 믿음 없이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고 있는 우리 자신을 향해 돌아가야 할 원망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삶의 태도를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하나님이 이제 그 환난을 축복의 기회로 하나님이 바꾸어주시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결국 오늘 마지막으로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가 하면 애굽으로 돌아가야 되겠다라는 것입니다. 그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지막 결론입니다. 무엇이라고 나오는가 하면 이렇게 말합니다.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아니 칼에 사로잡힐지, 승리를 하게 될지는 싸워봐야 될 것이 아닙니까? 대봐야 알 것이 아닙니까? 믿음이 없으니까 아예 도전하기도 전에 깊이 좌절하면서 하나님 앞에 낙망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는데, 두 가지를 믿는데 그가 계신 것과,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것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그것을 믿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환경 속에서 좌절하고 낙망하는 사람들은 결국은 스스로 깊은 피해의식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무엇을 보여주는가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얼마나 부실한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환난과 시련을 만나면 즉시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되는데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고 환난을 만났을 때 무릎을 꿇는 대신 더 치사하게 인간적인 방법을 가지고 요리조리 피해가다가 결국은 범죄하고 더 크게 얻어맞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게 바로 무엇 때문인가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자신이 없으니까 ‘주여! 도와주시옵소서’ 할 때 마음의 속에서 들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하나님이 도와주시겠냐’ 양심이 소리를 치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내편이십니다.’ 그러면 속에서 ‘여호와가 왜 네 편이냐’ 그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주 만이 나의 도움이십니다.’ 양심 속에서 ‘그런데 왜 여태까지 그렇게 안 살았느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환난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닥이 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환난은 당했는데 하나님이 날 도와주시리라는 믿음이 없습니다. 그럼 누구를 의지해야 합니까? 자기를 의지해야지 믿을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그러니까 자기를 의지하는데 신령하지 않은 사람이 신령한 방법으로 자기를 의지할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속에서 솟아나는 것이 결국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배우는 것은 그저 요령으로 살아가고 어떻게 자기 나름대로 꾀를 만들어서 야비한 방법으로 고난을 면하는 것이 자기가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까? 그런 와중에서 ‘고난을 피하기 위해서 가능하다면 하나님도 버릴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고난이 끝나겠습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안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련이 닥치고 뭔가 커다란 위기를 만나면 거기서 도망칠 궁리만 생각하지 말고, 이 사람은 도망칠 궁리만 생각하다가 결국은 다 원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지 말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전체적으로 직면해서 그래서 내가 하나님 앞에서 위기 속에서 도움을 받을 수가 없다고 생각되면 왜 내가 하나님 앞에 그런 사람이 되었을까, 그리고 왜 지금 하나님이 나를 싫어하실까, 왜 내게는 주님을 믿기는 믿으면서도 이 환난 속에서도 주여 나를 도와주십시오. 하면 나의 양심 속에서 네가 어떻게 살았는데 하는 그런 양심의 송사를들어야 하는가. 여호와는 내편이시라. 담대하게 말하면 그것이 내 영혼에 울려퍼지지 않고 입속에서만 맴도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이런 약속을 들먹일 때 성경에 나오는 성도들이 그 약속을 거론하면서 깊은 감동에 사로잡혔던 것과 같이 그렇게 사로잡히지 않고 하나님이 이 어려움 속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큰 약속들을 외울 때 낮간지러워지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그것을 파고 들어가서 하나님 앞에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쳐주시도록 전면적으로 자신의 삶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합니다. 여태까지 인생을 살아온 설계가 잘못됐다면 이참에 구조조정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퇴출시키는 삶을 퇴출시키고 죽여버릴 삶은 죽여버려야 하고 살릴 삶은 다시 살려야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마음에 볼 때에 올바르게 보이는 길로 돌아가고 있어야 될 자리로 돌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 앞에 주님을 의지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이 왜 안 들으시겠습니까? 도와주시려고 하는 분이 하나님이신데,
하나님 앞에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자신이 변화되는 기회로 이 시련의 기간들을 사용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이 시련을 통과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았는데 그렇게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태도가 바뀌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하나님이 바뀐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바뀌었습니다. 아! 새사람이 되었구나.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고난 당한 후에는 내가 주의 율례를 지키게 되었나이다. 내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오직 내가 정금과 같이 나오리라. 내가 이 고난의 길을 다 가고 난 후에는 결국은 정금과 같이 순결한 신앙이 되어서 나오리라. 그런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자기가 바뀌어지기를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새로운 길을 보여주시는 것이 아닙니까?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행하게도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마지막으로 그들이 내린 결정이 무엇인가 하면 우린 애굽으로 돌아가야 되겠다. 결국 무엇입니까? 이제 절망, 인간에 대한 원망, 하나님께 대한 원망, 마지막에는 돌이킴입니다. 이게 물러가는 것입니다. 돌이켜버리는 것입니다. ‘애굽으로 돌아가는 편이 낫겠다.’ 이렇게 생각한 사람들이 결국 애굽으로 돌아갔습니까? 못가고 사로잡히겠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광야에서 모두 죽음에 사로잡혀서 다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지 않은 사람들의 마지막 결국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무너트리고 홍해를 가르면서 광야로 뛰쳐나왔을 때 가나안에 사는 사람들은 간담이 서늘하게 녹아내렸습니다. 와 이게 진짜 굉장한 백성들이 온는구나. 그랬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까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그게 바로 거품과 같은 인생입니다. 한때는 주님을 믿는다고 떠들고 난리 법석을 하면서 자기 혼자만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온갖 폼을 다 잡았지만 결국은 광야에서 다 죽었더라. 폼은 많이 잡았지만 자기는 변화되지 아니하였더라. 태어나서 교회 다니다 그만 두고 죽었더라. 그렇게 인생이 거품과 같은 인생이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위기를 잘못 지나니까 인생이 이런 파장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반만 고쳐진 채로 사는 것은 어떤 때는 안 고쳐진 것만도 못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고쳐지려면 완전히 고쳐져서 새사람이 되어서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반쯤 변화된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환난과 위기가 오게 되면 그 반쯤 고쳐진 그 모습을 그대로 하나님이 드러내시고 그리고 반쪽 자리 신앙가지고는아무 것도 이룰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대체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 대체로 실패하는 인생을 살 것입니다. 하나님만 의지하며 사는 인생은 하나님 때문에 승리만 할 것입니다. 위기 속에서도 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0.견고한 자의 헌신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15:58)
고린도 전서 15장에서 사도 바울은 꽤 기다란 교리적인 문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부활이 없다 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사도는 부활이 얼마나 당연한 자연의 이치고 또 그 부활이 우리 기독교 복음에 있어서 얼마나 생명적으로 중요한 것인지를 변론한 후에 15장에서 마지막으로 “그러므로 더욱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고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 권면하므로서 이 15장을 마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사도 바울의 이 권면을 세 가지 방향으로 생각해보면 좋을듯 싶습니다. 우선 사도가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는 것은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그럼으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견고하고 흔들리지 말아야 된다는 것입니까? 우리에게는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흔들리지 말고 견고하게 서야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고 구원받은 우리들이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다. 우리의 인생이 40년 동안 예수를 믿는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중에서 뭔가를 몰랐기 때문에 안 믿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때 빼고 몇 년이나 남겠습니까?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뭔가를 알았다고 하더라도 이제 죄 가운데 있어서 하나님 앞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한 날들을 빼보십시오. 얼마나 남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살았다고 하더라도 정말 주님만이 동기가 되어서 충성되게 살았던 날들은 또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들이 이제 기억해야할 것은 사도가 오늘 이렇게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이 가까이 있기 때문에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견고하고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뿌리째 흔들려본 사람들은 그것이 다시금 흔들린 가운데서 다시 안정을 찾고 깊이 뿌리를 내리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허비해야 되는지 여러분들은 너무나 잘 알 것입니다. 신앙이 뿌리째 뽑히는 것은 긴 시간이 걸리지 않지만, 그러나 그렇게 뽑혀서 불순종과 죄 가운데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을 슬프게 해드린 후에 자기가 깊이 깨닫고 돌아와서 아버지 앞에 가난한 심령이 되어서 뉘우칠 때 사죄의 은총을 받고 그리고 용서함을 받은 후에 다시금 하나님의 말씀을 만나서 거기에 뿌리를 내리고 이전의 삶이 부끄러울 정도로 견고한 삶을 신앙의 터전 위에 세우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것을 여러분은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쉽게 흔들리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었지만 하나님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주를 위해서 요동하지 않는 삶을 살지 아니하고는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믿음으로 살았던 바울과 같은 사람을 보시기 바랍니다. 끊임없이 안팎에 우겨 쌈을 당하고 연약해진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고 고통받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마음이 녹아져서 살 소망이 끊어진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항상 행복하고 즐거운 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앗던 것입니다. 잠시 흔들리는 것 같았지만 그들은 더욱더 견고하게 섰습니다. 믿음이 뿌리째 흔들리고 세상으로 돌아가는 어리석은 일들은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스스로 불쌍하게 생각하며 주저앉아서 자기 연민에 빠지는 이러한 삶을 택하느라고 시간을 허비하지도 않았습니다.
주님이 죄 가운데 있는 우리들을 불러주시고 건져 주시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날들을 기다리셨는지를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한 사람이 복음의 빛을 받고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오게 되기까지 주님이 얼마나 많은 날들을 기다리셨는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모두 돌같은 우리의 마음을 녹여서 주님의 사랑으로 감화를 해서 그래서 주님이 하나님이 참 사랑으로 감화를 준 다음에 그 다음에 그를 주님의 사랑으로 승복시키셔서 믿음 위에 서도록 하나님이 인도해주셨습니다. 그렇게 인도해주시기까지 주님의 인내는 얼마나 컸습니까? 이제 우리는 그런 주님의 오랜 인내를 힘입어서 이제 주님의 사랑을 알고 그 은혜 가운데로 들어오게 되었으니 이제는 더 이상 주님을 인내하게 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가야할 길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못 깨달은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인생을 우리들 마음대로 살았을 때에 마지막에 남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것밖에 없는지를 우리 모두 경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지존자의 뜻을 멸시하며 내 욕심을 따라 행할 때 우리의 영혼에 얼마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고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이 없는 것과 같은 광야에서 얼마나 긴 세월들을 추위와 모진 비바람에 홀로 떨어져야 하는지를 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는 주없이 살 수 없다는 고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흔들리지 않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견고히 선 사람들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흔들리지 말아야겠다는 강인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환경에 지고 자기 자신의 감정에 패배하는 사람들은 마지막에 망가진 하나님과의 관계와 그리고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슬프게 하고 있는 자신의 병든 신앙생활밖에는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가슴에 새겨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순간순간 우리의 마음이 흔들릴 때 있습니다. 우리는 갈대와 같이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주님은 견고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견고케 하시고 주님을 향해 목말라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만족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우리들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참된 사랑과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고 뒤로 물러가지 않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뒤로 물러간 후에는 다시 아버지 앞으로 나오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우리들은 알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 우리에게 우리의 인생에 무슨 대안이 있을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제 싫도록 우리의 육신을 위해서 살아보았고 우리가 싫도록 주님께 불순종하며 세상 길을 걸어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누가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강요했습니까? 강요해서 주님께 돌아올 수만 있다면 우리 모두 복면을 한 강도가 되어도 부족함이 없겠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누구도 강요해서 하나님께 돌아온 사람들이 없습니다. 주님이 여러분들을 인격적으로 설복시키시고 여러분들이 주님을 떠나서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아픈 것인지를 알았기 때문에 이제는 주님 안에서 어둠을 버리고 살겠다고 주님 앞에 돌아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인생에 많은 길이 있는 것 같아도 그 길이 우리들이 걸어갈 수 있는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좌로 치우칠 수도 없고 우로 치우칠 수도 없고 뒤로 물러설 수도 없으며 우리에게는 오로지 견고하게 서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대안이 없음을 깊이 인식하고 아버지 앞에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사도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바가 바로 그것입니다.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이 너희들에게 주신 그 진리를 붙들고 누가 와서 너희들에게 무엇인가 거짓된 진리를 가르치고 더 쉽게 하나님을 믿는 길이 있다고 말할 때 너희들은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복음을 알았고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으며 어떻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너희들이 듣게 되었는지를 항상 생각하고 그 전해준 복음 위에 굳게 서라고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들에게 이 시간이 사도 바울이 사랑하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자기가 이미 가르쳐 주었던 예수 부활의 복음을 상기하라고 말한 것처럼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단지 한번 듣고 흘려보내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들은 끊임없이 이전에 여러분들이 곤고할 때, 여러분들이 붙들고 일어섰던 그 말씀으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다시 한번 새롭게 들으며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그때 그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자신이 깨어졌으며 그때 여러분들이 이제껏 자기 마음대로 살아왔던 불순종하던 삶에 대해서 얼마나 혐오하는 마음을 가졌었는지를 다시 한번 상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십자가를 듣고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되었는데 지금 다시 앞으로 전진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뒤로 물러서는 사람들이 되어 있고 그 복음의 감격 앞에서 흔들리는 사람들이 되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그곳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곤고한 자를 건지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들으며 아버지께로 돌아갔다면 여러분들은 그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죄와 용서 그리고 하나님의 참사랑에 관한 여러 가지 말씀을 들으면서 여러분들이 돌아섰다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서 거기를 여러분의 벧엘로 삼고 다시금 뒤로 돌아서는 길이 우리에게 얼마나 소망없는 길인가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믿음의 사람들, 주를 위해서 주를 기쁘게 하며 살았던 사람들, 예수께로부터 받은 그 은혜의 복음을 가슴 깊이 붙들고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았던 모든 사람들은 진리 가운데로 굳게 선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감정도 우리의 의지도 믿을만한 것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붙들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주님의 진리 안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흔들리지 않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서 살았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쏟아부으며 살 수 있었던 것은 주를 위해서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주님의 사랑을 버리고 세상 속으로 가버린 사람들이고, 두 번째 불쌍한 사람은 주님이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면서도 여전히 세상을 향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늘 흔들리며 살아가는 갈대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마음의 평안을 누릴 길이 없고 이전에 아무리 많은 변화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오늘 그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의 참된 평화가 깃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동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순간순간 흔들리는 우리를 굳게 붙들고 주님을 의지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이어서 두 번째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말은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사랑하는 성도들이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상당수의 성도들은 주를 위해서 수고하는 중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거기에 만족하지 아니하고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그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도록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수고와 그리고 주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고통을 마다하지 않는 그런 방식의 삶을 택하는 것이 바로 주를 위해 힘쓰는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사랑하는 사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들이 주를 위해서 대체로 주를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주를 위해서 더욱 힘쓰는 사람들이 되기를 하나님께서는 간절히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오늘 이 사도가 전해준 말씀을 통해서 깨닫는 바는 우리들이 이렇게 주를 위해서 힘쓰고 살아야 될 이유를 우리들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는 이 일을 우리의 일이나 교회의 일이라고 말하지 않고 주의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주는 더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왜 주의 일에 힘쓰며 살아야 할지는 간단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 생각해보면 우리가 왜 주의 일에 힘쓰며 살아야 되는지가 명백하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기를 버려서 십자가에서 자기를 희생하심으로 우리를 그 보혈의 피로 건져주셨을 때,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는 무엇이었겠습니까? 주님이 우리와 같은 죄인을 그의 피로 속량해주신 것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습니까? 왜 주님께서 죄많은 우리와 같은 인생들을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주님을 떠나있는 우리를 한 사람, 한 사람 부르셨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기 위해서 주님은 모든 우리의 환경과 우리의 마음과 기질과 우리의 처지를 모두 활용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부름을 듣기도 했고, 어떤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을 하면서 이 세상을 향한 사람을 향한 사랑이 얼마나 헛된줄 알았기 때문에 주님의 부름을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물질을 잃어버리고 주님의 부르심을 들었고, 어떤 사람들은 건강을 잃어버려서 주님의 부르심을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전에 느끼지 못했던 자신의 삶의 공허와 자신의 신앙생활에 헛되고 헛됨을 깊이 깨닫고 하나님 앞에 갈등하는 가운데 주님을 만나게 하셨고 주님이 그들을 불러주셨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불러주신 것은 주님의 형상을 받고 이 세상에 태어난 우리들이 헛된 일에 굴복하며 살다가 죽는 것을 차마 보실 수가 없어서 우리들을 불러서 이제는 한 의미있는 인생을 살도록 주님이 우리를 택하고 부르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태어나서 먹고, 마시고, 성장하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그래서 아이를 낳고 죽는 것, 이것이 하나님 앞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우리가 진실로 주님을 아는 사람이 아니고 인생의 목표를 바로 아는 것이 아니라고 할 것 같으면 우리의 인생에 잠시 즐거움은 아무 것도 아니고 우리의 인생에 잠시 슬픔도 아무 것도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살다가 마지막에 주님 앞에 서서 낭패를 당하는 사람들이 되지 않게 하시려고 우리를 주님의 십자가의 피로 건져주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부릅니까? 구약에서는 성부 하나님 아버지를 하나님이라고 불렀는데 왜 우리는 이제 와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이라고 부릅니까? 그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의 신앙과 관련해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주라고 부르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모든 새 인생을 주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이런 것입니다. 만약에 주님이 우리를 그의 피로 구속해주시지 않으셨다면 멸망을 향하여 썩어질 것들을 위해서 부지런히 분투하고 애쓰다가 죽을 사람이었는데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예수 믿게 만드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셔서 다시 사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우리의 인생은 완전히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전에 주님을 믿지 않았을 때는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뿐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혹시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인생은 일장춘몽이라고 말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마 인생은 일장춘몽이기 때문에 더 마시고, 더 타락하고, 허물을 잊어버리기 위해서 더 극단적인 거짓과 쾌락에 자신의 몸을 던져버려야 된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뿐이라고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만큼 우리의 시민권은 땅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깊은 밤 자리에 든 순간까지 우리는 땅의 일을 가지고 골몰하고 살다가 죽을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사업을 해서 몇 푼 더 벌면 그것을 붙들고 좋아서 어쩔줄 모르고 조금 지나고 나면 이제 무엇인가 만족스럽지 않은 일을 만났을 때에 깊이 좌절하고 낙담하는 것이 인생이었을 것입니다.
(예화: 택시를 타셨는데 기사분이 기분이 좋아서 묻지도 않는 말을 하는데 그 말의 내 용은 어느 손님을 태우고 목적지를 가서 내렸는데 곧이어 다시 손님이 타고 또 다시 어느 술에 취한 손님이 타면서 자기 같이 술에 취한 사람을 태워줘서 고맙 다고 오만원을 주어서 얼마 되지 않은 시간에 십만원을 벌었다면서 기분이 좋아 자랑한 이야기)
우리도 다 그렇게 인생을 살면서 조그마한 소득에 ‘일희 일비’하며 살다가 죽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해주심으로 이제는 우리의 인생에 참된 가치가 그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제 그런 사랑을 잘 깨닫고 이제 새 인생을 살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저는 젊은이들 가운데 정말 좋은 직장에서 오라고 그러는데도 주님 앞에 바로 살기 위해서 안 가는 사람들, 좋은 혼처를 마다한 사람들, 그리고 또 눈 앞에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사업이 있는데도 그것이 비신앙적이기 때문에 이득을 포기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신앙의 힘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실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우리를 그의 사랑으로 구원해주셨을 때 우리에게 이제 남은 인생에 참된 보람과 꿈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분명한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살지 않으면 우리의 인생은 아무런 희망이 없는 인생인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에 주님을 위해서 살지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는 인생을 다 산 다음에 주님 앞에 섰을 때 참 커다란 모순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한 입으로는 주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죽으셔서 그 공로로 우리들이 주 앞에 나오게 되었다고 고백을 해야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그 모든 죄에서 건져주셨습니다’라고 고백을 해야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어린 양을 세세토록 찬송을 받으셔야 됩니다’라고 고백해야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런데 ‘너희들이 어떤 삶을 살다가 왔느뇨?’라고 물을 때 무엇이라고 대답을 해야 되겠습니까? 그때 우리는 이렇게 대답할 수가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 제 보이는 겉모습은 이 세상에 다닐 때 사업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업도 사실은 주님을 섬기기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나는 높은 공직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높은 공직에서 저는 언제나 다니엘 처럼 최선을 다했지만 그러나 나는 명예를 섬기고 권력을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나는 그저 한 평범한 남자의 아내로 부름을 받아서 일평생 가족들을 섬겼지만 그러나 사실은 가족들을 위해 종노릇한 것이 아니라 그 섬김을 통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념으로 일생을 살아왔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들이 서 있는 이 자리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일, 그리고 주님이 우리의 손길을 필요하시는 그 일에 우리 자신을 넘치게 내어주면서 사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당을 걸어나오면서 찬송가 한장이 생각났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언제인지도 모르겠는데 그저 빛바랜 사진처럼 한토막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머리가 제직회를 하는 모양인데 왜 교회에서 제직회를 하면 그때는 젊은 사람들은 다 도망가고 노인분만 남는지 모르겠습니다. 머리가 하얀 권사님들만 몇분이 앞에 앉고 집사님들이 뒤에 앉아서 부르는 찬송이 꼭 이것이었습니다. 376장 생략
여러분, 우리들이 이제 하나님의 참 놀라운 사랑으로 감동을 입고 그리고 그 구원의 은혜로 주님께 큰 사랑을 입어서 멸망받을 자리에서 주님이 우리를 건져주시고 그 은혜로 주님이 우리를 살려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살지 않으면 우리가 주 앞에 섰을 때 반드시 우리는 후회하고 또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위해서 일하는 재미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참된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전 주님을 위해서 사는 것은 한 사람이 얼마나 주를 위해서 사느냐 하는 것은 주님을 만난 감격에 비례한다고 저도 늘 설교하지만 그러나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 어떤 사람들은 주님을 크게 만났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자기를 구원해주시고 죄와 어두움 가운데서 건져 주신 하나님의 그 큰 사랑에 깊이 감격하고 감동하는 그런 신앙체험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를 위해서 사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자나깨나 그들은 자신의 신앙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지만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주를 위해서 살지 않는 사람들의 고민은 대부분 쓸데없거나 가치가 매우 적은 것들을 가지고 고민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아주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정말 주님을 위해서 정말 충성되게 살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그 과정에서 주님을 진실로 잘 깨닫게 된다는 것에 대해서 살아 있는 간증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흔히 주님을 위해서 살지 않는 사람들이 자기를 합리화시키는 가장 커다란 것 중에 하나는 이것입니다. ‘너무 부족해서 나같은 사람이 어떻게 주님을 섬기겠는가’ 하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이렇게 섬길 바에야 내가 너무나 양심에 가책이 되기 때문에 이런 섬김을 섬기지 않는 것이 옳다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하면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 마땅히 서야 될 자리를 떠나는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 그 사람은 정말 두 번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은 주님이 세워준 자리를 떠났기 때문에 불순종하고 있는 것이고, 그런 자기와 같은 처지에서 섬겨보려고 애를 쓰는 모든 사람들을 정죄하기 때문에 그는 두 번째로 외식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는 부족해서 그렇게 섬기던 자리에서 떠나야 되겠다라고 말을 하면 그러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매달려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자기보다 신앙의 양심이 매우 둔하거나 말하자면 뻔뻔스러운 사람이라고 정죄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서 마지막 그가 가는 길이 어떤 길입니까? 그렇게 주님을 섬기는 직분들을 버려둔 다음에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피눈물 나는 몸부림으로 몸부림칩니까? 주님을 위해서 일하던 그 순간은 그렇게 주님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과 자기와 관계를 가로막는 것처럼 생각되었지만 주님을 위해서 섬기는 일들은 모두 버린 다음에 그는 결국 자기가 얼마나 하나님을 떠나서 살고 싶어하고 불순종 가운데 살고 싶어하는지 본색을 드러내주는 것밖에는 아무 것도 하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를 위해서 살고 주를 위해서 섬기는 삶을 사는데 있어서 우리들이 감투의식 같은 것들을 가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맡았을 때는 지극히 충성스러운 것 같지만 그 사람이 정말 충성스러운 사람인지는 그 자리에서 떠나고 난 다음에 얼마나 두고온 그 일들을 염려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는가를 보면 잘 알 수가 있습니다. 무엇 하나 직분을 맡고 일하다가 내려놓고 나면 안면을 바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주님이 동기가 되어서 충성하는 사람들이 아닌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그런 십자가의 사랑을 주셔서 우리를 구속해주셨습니다. 그렇게 십자가의 피로 구속을 받고 펑펑 우는 감격을 경험한 다음에는 주를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주를 위해서 살려고 몸부림치면 몸부림 칠수록 우리가 그 속에서 주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깨닫게 되고 감동을 받게 됩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제게 와서 설교의 비결을 묻습니다. 한번도 사람들에게 가르쳐줄 비결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적이 없지만 사람들이 묻습니다. 저는 처음서부터 무슨 설교자가 된다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능숙하게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되겠다고 꿈꿔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영혼들을 맡아서 목양을 하면서 제 관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능숙하게 전하는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이 영혼들이 정말 뒤로 물러가지 않고 하나님께 돌아올까 하는 것입니다. 제게는 교회를 옮기게 되면서 기도 제목이 하나 더 생겼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 우리가 교회를 이전하고 그리고 남모르는 성도들로 교회당이 가득 채워져도 이 지하실에 물 나오는 개척교회에서 그렇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성도들을 섬겼던 그 자세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그것은 정말 주님이 도와주셔야 합니다.
그런데 뭔가 이렇게 꿈꾸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 눈 앞에 보이는 상황에 충실하며 살려고 몸부림을 치는 과정이 뭔가 내 자신의 영혼에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지금도 잊지 않고 기억이 납니다. 너무 심령이 무디어지는 것 같아서 마음이 괴롭습니다. 말씀을 전하고 나서 아이들이 흩어져서 분반 공부를 하거나 청년들이 흩어져서 공과 공부를 하면 밖에 나가면 그렇게 슬플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런 무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서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걸어가고 있는 그 길이 생명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서 빛을 들어오게 해야 되는데 여러분들이 마음을 닫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불순종하는 길을 걸어갈 때 목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공갈을 치고 협박을 해서 돌아올 수만 있다면 복면을 쓴 강도도 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내가 겨우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하면 일주일에 한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기회 있을 때 심방가서 아이들을 붙들고 사정하면서 주님께로 돌아오라고 애원하는 것밖에는 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방법이 먹혀들지 않을 때,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밖에 나가서 쭈그리고 앉아서 자기들은 성경 공부를 할 때 쭈그리고 앉아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울었습니다. 하나님, 이 세상에 있는 영혼들 가운데 단 한 사람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1,2.3년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말씀을 보는 눈을 열어주시고 인간이 얼마나 교묘한 존재인지를 아는 지혜를 무지하기 짝이 없는 사람에게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우리들이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정말 주님의 참 사랑과 은혜를 깨닫고 주님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을 주님께서는 버려두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여러분들이 무엇인가 주님을 위해서 섬기다가 부족하다고 느껴지십니까? 그러면 계속 섬기면서 이렇게 부족하니 어쩌면 좋습니까라고 목매어 통곡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뒤로 물러서지 않는 길입니다. 하나님 앞에 굳게 서서 주님의 약속을 굳게 붙들고 도와달라고 아버지 앞에 매달리며 주 앞에 나아가는 그런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사도는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주를 위해서 산 사람들에게는 상급이 있음을 주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일평생 주를 위해서 산 사람들은 주 앞에 상 받고 칭찬을 받을 것이며 주를 위해서 산 적이 없는 사람은 그 날에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의 인생을 많이 살고 이제 불현 듯 인생이 끝나고 주 앞에 설 때에 주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열린 교회를 함께 섬기던 그때를 어떻게 평가해주실까요? 애야, 그래도 네가 이제껏 나를 위해서 산 적이 별로 없었지만 그러나 열린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만큼은 내가 너의 헌신과 눈물어린 수고와 내 일에 지극히 충성된 삶을 산 그것을 내가 즐겨받았노라고 주님께 인정받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 그런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는 얼마 안 있으면 입당을 하게 됩니다. 그동안에 여러분들이 다 끝난 것은 아니지만 넘치도록 수고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제 수고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무엇보다도 새로운 성전에 가서 전심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이제 그 성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이루실 위대한 일들에 기대를 가지고 전심전력, ‘주가 우리를 필요로 하는 그곳에 우리를 사용해주시옵소서’라고 말하는 충성스러운 삶을 살다가 주 앞에 가서 상급받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11. 광야로 나아가라
“바로가 가로되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희생을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 그런즉 너희는 나를 위하여 기도하라”(출8:28)
완악하고 강포하던 그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처음으로 그러면 광야로 가라. 처음에 모세가 이제 그 바로에게 말한 것은 우리가 애굽을 떠나서 가나안으로 가야 되겠습니다라고 그렇게 말하지를 않고 우리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을 위해서 절기를 지키고 제사를 지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광야에 가서 제사를 지내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이제 그 말이 사실이었나 아니었는가는 오늘의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 그렇게 제안을 했을 때 처음에 바로의 이야기는 말도 되지 않는다. 아무리 깨물어봐야 이빨도 들어가지 않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러자 그 완악하고 강팍하던 바로의 마음이 서서히 움직인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그 위대한 능력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애굽의 하수와 모든 물들이 변하여 피로 변하고 개구리가 온 땅에 뒤덮혀서 도저히 숨을 쉴 수 없는 상황이 되고 이가 나와서 온 천지가 이로 꽉 차서 그래서 도대체 움직일 수 없는 그런 어려운 상황이 되고 그 다음에는 파리가 나와서 온 천하를 파리 천지로 만들어서 도저히 어떻게 살아보기 힘든 그런 고통스러운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에 비로소 “가라” 이렇게 이야기가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강팍한 바로가 가라고 말하면서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 다시 말하면 내가 너희를 언제나 감시할 수 있도록 내가 보내는 군사들과 그리고 나의 군대들이 너희들을 언제든지 추격하거나 또 그 감시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너희들을 지켜볼 수 있는 그런 정도까지만 가지 너무 멀리 가지 말라 이렇게 이제 모세에게 제안을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럼 그것과 그런 성경의 이야기와 염려를 극복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죄에 대해서 온전히 이기고 주님의 사랑으로 꽉 잡힌 그런 그리스도의 사랑이 되기 전까지는 우리는 두 개의 욕망이 우리 속에서 끊임없이 싸우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 힘듭니다. 그래서 우리 속에서 이 두 가지의 욕망이 계속 싸우는데 주님이 우리를 당신의 피로 구원하셔서 주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속에는 바로와 같은 마음이 남아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래, 은혜 생활해라. 믿음 생활하고, 교회 생활하고, 교회 가서 봉사도 하고 돈도 내고 그렇게 형제들을 위해서 봉사도 하고 해라. 그러나 속에서는 항상 너무 많이 하지 말아라. 시간을 바치되 조금만 바치고 마음을 바치되 그저 대부분의 마음을 다 주님께 바치지 말고 조금만 바쳐라. 그래 깊은 기도를 하고 싶다고 그래 가라. 그러나 너무 깊이 들어가지는 말아라. 깨닫고 싶다고 그래 깨달아라 그 대신 너무 많이 깨닫지는 말아라. 너무 많이 은혜 속에 잠긴 사람이 되지 말아라. 우리 속에서 끊임없이 바로와 같은 존재가 남아 있어서 우리를 이런 식으로 자꾸 제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아! 그렇구나. 주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구나. 그렇게 되었습니다. 아! 그래 맞아. 이제는 내가 육신을 의지하며 살아봐야 마지막에 다가오는 결과는 실패밖에 없구나. 역시 정말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밖에는 의지할 때가 없구나. 그런 사실에 다 동의합니다. 그런데도 염려와 근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가장 커다란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너무 멀리 나가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너무 멀리 나가려고 하지 않고 너무 깊은 신앙의 생활로 들어가지 않으려고 절제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랑에는 절제가 없는데 은혜를 받고 믿음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데는 놀라운 절제력이 있습니다. 조금만 내가 열심히 믿는가 보다 생각되면, 그것도 자기의 생각이지 남들이 볼 때도 별로인데 주님이 보실 때 뭐가 그렇게 대단하겠습니까? 그러면서 균형을 잡는다는 미명하에- 균형, 치우쳐본 적이 있어야지 균형을 잡지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서 늘 줄타기 하는 선수처럼 아슬아슬하게 신앙과 세상 사이에서 줄타기나 하면서 그러면서 살아가는데 그 인생이 진짜 하나님 앞에서 염려해서 떠난 인생이 될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동물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염려는 적게 합니다. 왜 고민하는 돼지를 보았습니까? 사색에 잠기는 강아지 보았습니까? 그게 다 쓸데없는 이야기입니다. 돼지는 고민하지는 않지만 꿈은 꿉니다. 돼지 꿈입니다. 개는 사색에 잠기지는 않지만 꿈은 꿉니다. 무슨 꿈을 꿉니까? 개 꿈입니다. 맞습니다. 확실히 개가 꿈꾸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가만히 자다가 갑자기 일어나서 막 짖습니다. 꿈에 뭔가를 본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짐승과 같은 삶을 살기로 작정한 성도들은 고민을 덜합니다. 그러나 성도처럼 살고 싶다는 소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물적인 생활을그리워하는 사람들이 갈등이 더 심한 것입니다.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그런 사실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놓아주기는 놓아주어도 멀리 가지 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 속에서 가기는 가는데 왜 하나님을 안 믿고 세상 속에서 넉넉히 살 수가 없습니다. 마치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파리떼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 주님을 전혀 안 믿고 세상과 짝하고 싶은데 그런데 세상과 짝하고 살아도 염려와 근심과 걱정이 그치지 않는 것입니다. 양심에 괴로움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 다음에는 조금만 가라. 너무 멀리 가지 말아. 그러니까 멀리 가지 말고 항상 언제든지 내가 추격해갈 수 있는 그 사정거리 안에만 있으라. 타협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타협된 거리 안에서만 신앙생활을 하도록 유도할 때 그때 그가 진정 자유로울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것입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멘 했습니까? 아멘은 무슨 아멘입니까? 그래서 그 말대로 사정거리 안에서 움직였습니까? 아닙니다. 죄악된 본성은 우리에게 계속해서 너무 멀리 가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설교 시간에 아니 그렇게 믿고 왜 여기에 나옵니까? 그런 식으로 믿는데 왜 굳이 신앙생활을 합니까? 그냥 나가서 살지. 이렇게 말하지만 그 말레 아멘 하고 나가는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왜 안 되는 것입니다. 사실 괴로움을 겪으면서 가끔 교회에 나와서 동물소리를 들으면서 짐승과 같다는 이야기도 듣고 그러면서 그래도 조금 멀리 나가서 사니까 살만하지 아예 완전히 세상으로 나가라 그러면 진짜 그렇게 할 수도 없거니와 하면 더 고통스럽다고 하는 것을 신자들의 마음 속에는 다 인식이 있는 것입니다. 형식적으로 라도 한 다리를 걸치고 인생을 살아야지만 그래도 마음이 편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실지는 나중의 문제이고 자기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의 명령과 제안을 따라서 그렇게 멀리 가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 뻔 했습니까? 그게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자기가 한 일을 잠깐 멈추고 약간 떨어진 곳에 이스라엘 백성들 수 백만이 다 가서 거기서 잠깐 있었는데 거기서도 애굽의 바로의 감시 아래 있고 군대들이 쭉 에워싸고 있고 언제든지 허튼짓을 하면 잡아 죽이려고 하는 그런 군대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그렇게 절기를 지키고 하나님께 제사한 다음에 다시 하나님께 돌아와서 그동안 휴가 기간에 못한 일을 더 감당해야할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궁극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조금 멀리 가는 것은 노예 상태에서 벗어난 것이 아닙니다. 너무 멀리 가지 않는 것은 아무리 오래 동안 애굽의 땅에서 약간 떨어져 나와서 광야에 있다가 간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바로의 감시와 바로의 압제를 받는 동안에는 애굽에 살던, 광야에 살던 결국은 노예의 신세를 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꿈꾸었던 것은 그런 삶이 아닙니다.
특히 모세가 생각하고 있었던 삶, 하나님께로부터 모세에게 주어진 약속은 그런 종류의 삶이 아닌 것입니다. 내가 내 큰 능력과 큰 권능을 애굽에게 보이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이 노예 생활에서 잠시 휴가를 주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그렇게 생각하신 것이 아닙니다. 내가 큰 권능과 편팔로 너희를 이제 애굽 땅에서 건져내는 것은 바로의 속박을 끊어버리고 너희를 나를 섬기는 친 백성, 해방을 맞이한 자유한 백성으로 만들어주기 위해서 내가 너희에게 큰 권능을 보여주는 것이다. 왜 아멘을 안 하는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완전히 하나님 때문에 자유하는 것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에는 염려와 근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대부분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당하는 상 받을 것이 없는 모든 염려와 근심들은 세상에 대한 분에 넘치는 애착 때문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분에 넘치는 집착 때문에 그런 염려와 그리고 갈등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미 우리에게 주신 것보다는 주시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 집착을 하고 그것들을 주님보다 더 사랑하게 되니까 염려와 근심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바로가 너무 멀리 가지는 말라고 말한 것처럼 오늘도 우리의 옛 본성, 그리고 육신적인 삶을 즐기며 살아가기 좋아하는 우리의 죄성, 그리고 정결하고 깨끗한 삶 보다는 적당한 타협이 있는 생활을 즐기려고 하는 그런 부패한 속성, 나아가서는 세상을 향해 미련을 끊지 못하는 세상 사랑에 육신의 정욕 이런 것들은 바로와 같이 우리의 마음 속에 있어서 우리로 하여금 너무 멀리 가는 신앙 생활을 막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육체의 정욕과 더러운 옛 습관과 옛 성품에 속한 부패한 마음이 우리의 경건한 신앙 생활을 추격해서 우리를 즉시 붙잡아서 다시 죄 가운데로 데려올 수 있도록, 가끔은 풀어주는 것 같지만 그러나 노예된 상태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잠시 휴가를 주는 것 같은 그런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속사람이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에서 염려와 근심이 그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이 진정 모든 육신의 염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주님께 온전히 영광을 돌리는 참되고 진실한 신앙 생활을 해나가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철저하게 우리의 죄를 죽이고 사악한 정욕을 죽이지 아니하면 그래서 우리의 옛 성품과 죄의 지배로부터 멀리 도망쳐버리지 않으면 우리는 자유로운 신앙 생활이 불가능합니다.
무엇을 망설이고 주저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열심히 있는 신앙 생활을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오전 예배보다 오후 예배보다 더 많은 교회, 주일 오후 보다는 수요 예배에 가장 사람들이 많이 나오는 교회, 그런 교회를 꿈꾸고 있습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무슨 수요 예배 운동을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예배의 영역, 주님이 우리에게 부여하시는 예배 중에서 가장 기초적인 것만 완수하고 이것으로서 다했다고 생각하는 삶이 아니라 그야말로 너무 멀리 가지 않는 은혜 생활이 아니라 멀리 가는 은혜 생활, 깊어지되 적당히 깊어지는 은혜 생활이 아니라 매우 깊어지는 영적인 은혜 생활, 사랑하되 대체로 뜨듯한 생활이 아니라 불같이 뜨거운 사랑을 가진 신앙의 생활, 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되 비교적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비교될 수없이 아주 철저하고 뜨거운 사랑을 가진 사람,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 소원입니다.
제게는 염려가 하나 있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교회가 큰 곳으로 옮겨가면 우리는 중요한 기로에 서게 됩니다. 지금보다는 훨씬 다른 이유로 교회를 찾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아질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이제 형식적인 신앙 생활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급속하게 늘어날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아마 이 교회에서 좁은 공간에서 여러 번 예배를 드리면서 쉽게 등록을 결정하지 못한 사람이 거기에 가면 쉽게 등록을 결정할 것입니다. 교통이 더 편리해지고 그리고 생활하는 여건도 훨씬 더 나아지고 그리고 누구나 길을 다니면서 볼 수 있는 교회에 적을 두고 있다는 것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 교회에 적을 두고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독자들이 책을 읽고 우리 교회에 오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목사님, 교회를 찾다가 찾다가 못 찾았습니다.” “왜 그러느냐”고 하면 사당동에서 아무리 돌아보아도 없다고 합니다. 돌아보면 되냐. 밑을 보아야지. 그 사람의 말이 재미있습니다. “목사님, 사당동에는 아무리 돌아보아도 뾰적탑이 없던데요.” 우리 교회는 정말 선택한 자들을 위해서 숨어있다고 했습니다. 뜻을 정하기 전에는 당신의 눈에 결코 보이지 않을 것이다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저에게는 벌써 커다란 고민입니다. 어떻게 예상되는 이런 물결과 더불어서 싸울 것인가. 그래서 주일 예배에 수 천명이 나오고 다시 수요 예배에 1-200명 나오는 슬픈 교회의 모습을 재건한다면 여기서 문닫고 끝나는 것이 훨씬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염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그것은 먼 은혜의 세계로 더 깊이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얕은 물 가에서 저 깊은 바다
가려다가 맘이 조려서 못가네
바다로 항해하고 싶은 마음은 있습니다. 그런데 못 가는 것입니다. 수영 못하는 사람이, 저 같은 사람이 물 속에서 헤엄치는 것은 진짜로 좋아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몸을 일으켜 세워서 발끝이 땅에 안 다면 머리 끝이 곤두서는 것입니다. 난 정말 헤엄을 잘 치는 사람들이 진짜 존경했습니다. 물에서만 존경했습니다. 헤엄을 막 치다가 늘 몇번이고 확인을 합니다. 땅이 발에 다아야 합니다. 땅에 발이 닫지 않으면 머리 털이 딱 서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왜 너무 무서우니까. 물을 사랑하는 것과 진짜 물 속에서 헤엄치는 것은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첨벙거리고 놀기 좋아하지만 그러나 조금 더 깊은 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도 마치 그런 것입니다. 바다에 가보면 배가 쭉 매여 있습니다. 이렇게 배를 보면 배가 용도가 여러 가지입니다. 뭍에서 큰 배는 가까이 못 들어오니까 가까이 있는 배까지 사람을 실어 나르고 짐을 실어 나르는 그런 배를 쳐다볼 때는 신비한 느낌이 하나도 안 들지만 그렇지만 온갖 풍상을 다 겪으면서 그저 선채 자체가 고난의 세월을 말해주는 데 태평양을 건너다니고 동진하에 남진해 까지 내려가서 고기를 잡아 오는 풍상에 절은 배를 이렇게 들여다 보고 있노라면 상념에 잠기게 됩니다. 야! 참 이 배가 거기를 갔다가 왔다니.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나 조금만 받고 싶은 것입니다. 어느 정도만큼, 세상과 완전히 끊어지지 않는 만큼만 은혜를 받고 싶은 것입니다. 은혜의 세계 속으로 깊이 들어가서 열심히 있는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사람이 되기를 스스로 두려워하고 조금은 변화되고 싶지만 그러나 완전히 새 사람이 되는 것은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예화: 십여년 전에 어느 청년이 자기는 절제하고 있다고 해서 무엇을 절제하는가 했더 니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지 않으려고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밀려올 때 불안하다고 하는데 왜냐하면 은혜를 많이 받으면 반드시 자기를 주의 종으로 부를 것 같다는 착각 이야기) 아니 은혜 받은 사람이 다 주의 종이 됩니까? 그리고 주님은 쓰시려고 마음도 안 먹으셨는데 괜히 김치국부터 마시고 그게 무서워서 하나님 앞에 은혜를 적당히 받겠다는 그런 사고방식 자체가 정말 동물적인 사고방식이 아닙니까?
여러분, 이게 우리는 웃었지만 여러분들 속에 있는 마음이 아닙니까?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가 말했던 것처럼 너무 멀리 가지말라. 이렇게 말했을 때 아멘 하고 멀리 안 갔더라면 집을 잃어버렸겠습니까? 물론 그 사람들이 저택에서 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게딱지 같은 집이라도 자기 집이 제일 좋은 것이 아닙니까? 집이 있었을 것이고, 일거리가 있었을 것이고, 가족들이 있었을 것이고, 먹고 살 것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바로의 말을 듣지 않고 너무 멀리 가버렸습니다. 너무 멀리 가버렸을 때에 그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우선 약속을 어기고 도망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추격하는 바로의 군대의 필사적인 추격과 공격이 있었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그들이 멀리 가지 않았더라면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았을 안락한 삶이라든지 노예 상태에 있었지만 그들의 거취든지 모든 것들을 잃어버렸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은 종은 종인데 그래도 애굽의 나라에서 종 살이를 했으니까 이 민족으로부터 괴롭힘을 받는 일은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가 자기의 나라의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서 그들을 보호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죄와 그리고 세상을 사랑하는 삶, 이런 것들은 우리에게 적당한 보호가 되어준다는 것입니다. 고민이 있을 때 먹고 마시고 세상의 쾌락에 빠져서 잠깐 잃어버리는 것도 세상이 우리를 보호해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멀리 가지 않았다면 여러 가지 많은 잃어버리지 않은 것들이 분명히 있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노예의 신분에서 해방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장엄하게 율법을 받으면서 이제 어디다 내어다 놓아도 떳떳한 하나님의 다스림이 있는 한 왕국, 한 나라를 건설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저 영원히 한 나라에 노예로 살아가는 집단으로만 기억되고 민족을 이룰 수가 없었고 나라를 구성할 수도 없었을 것이고 더더욱 땅을 차지해서 하나님의 왕국을 세워가는 이런 놀라운 일들, 주위에 많은 나라들을 칼과 무력으로 복종시키고 믿음으로 나라를 세워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나라의 영광이 무엇인지를 드러내 보여주는 이런 축복된 영광도 없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날 많은 염려 속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한번 보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살 수 없는 사람들이지만 그러나 하나님만 믿고 멀리는 갈 수는 없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주님만 의지하기에는 그 일이 힘들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새로운 삶의 방식과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이 무엇인지는 알고 싶지만 그러나 그것에 내 자신을 전부 다 맡기기에는 그렇게 믿음으로 살다가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세상 살이가 두렵다는 것입니다. 이제껏 까지 나를 보호하고 지켜온 이 세상 살이, 적당히 타협하면서 적당이 이 세상의 즐거움도 맛보면서 세상의 친구들과 멀어지지 않고 살게 만들었던 부정직한 신앙의 생활과 나태하고 타협적인 신앙의 생활들을 청산하기 위해서 세상을 향해 나의 안일한 육체의 삶을 향해 대담하게 도전장을 내민다고 해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염려와 근심에서 떠날 날이 없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바로의 압제에서 벗어나서 멀리 가버렸을 때 그때 그들은 염려하던 것들이 모두 현실로 닥쳤습니다. 노한 바로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어서 맹렬하게 그들을 추격했습니다. 그리고 돌아오게 하지 못할 바에야 모두 다 죽여버려야겠다는 생각도 갖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반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입장에서 생각하면 ‘돌아가지도 못하고 여기서 죽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됐을 뿐만 아니라 홍해를 건넌 후에는 그런 일들이 그쳤습니까?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의 생활 속에서 돌아갔더라면 좋았을 뻔하였거니와 하고 주저앉아서 한탄 하던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실제로 그런 염려는 애굽에서 종살이를 했더라면 안 겪었을 그런 염려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 그들이 염려하던 것을 실제 염려될 수밖에 없도록 그냥 내버려두신 적이 있었습니까? 그들의 예상대로 바로의 군대들이 추격했지만 그 바로의 군대들은 자기의 뜻을 이루지를 못하고 오히려 이스라엘의 뜻을 이루어 주었습니다. 그들은 그 홍해 바다에서 수장되었고 그들은 모두 멸망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물이 없어서 양식이 없어서 혹은 여러 가지의 이유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으로 돌아갔으면 좋았을 뻔하였다.’ 이렇게 생각했을 때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셨습니까? 그들의 삶 속에 개입하셔서 그들이 염려하는 바를 해결해주셨습니다. 진노를 하시는 경우는 있었어도 버려두시는 적은 없었습니다. 이게 바로 멀리 떠나지 말라. 너무 깊이 신앙 생활을 하면 그때는 오히려 더 큰 어려움을 당하리라고 우리 속에 있는 거짓된 속삭임에 기만성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길은 바로가 무엇이라고 말하든지 간에 거기서 빨리 도망치는 것입니다. 그 광야로 뛰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광야에 누가 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입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실제로 놀라운 이적을 행하실 때에 큰 감동을 받았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모세 한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그냥 가만히 보아야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막 기도해서 응답해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작정하시고 오셔서 모세를 사용하셔서 당신의 선교적인 계획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애굽에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저 모세가 말한 대로 “오늘 날 내가 너희에게 행하는 이 위대한 일을 보라” 지켜보면서 입을 벌리는 것 이외에는 할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광야로 들어서고 나서는 정말 아기자기한 신앙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광야에 딱 들어가니까 그 다음에 이제 시내산에 이르게 되고 시내산에 이르게 되니까 조상들로부터 말로만 전해들었던 하나님의 그 위대한 임재하심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그리고 장엄한 율법이 그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순종하면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역사해주시는 것입니다. 불순종하면 하나님이 슬퍼하시고 징벌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얼마나 다이나믹했겠습니까?
세상으로부터 멀리 떠나고 여러분들로 하여금 너무 깊이 은혜 생활하지 못하도록 붙들고 있는 그것은 마치 개줄과 똑같습니다. 개를 개줄로 묶어 놓으면- 개를 사랑하는 주인은 개를 절대로 쇠줄로 그렇게 묶어놓지 않습니다.-아무리 길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왜 개는 줄보다 더 멀리 가고 싶으니까. 그러니까 기둥에 매어 놓으면 가만히 앉아서 졸다가 주인이 저기서 오면 아니 자기 개줄이 있는데 까지 기다렸다가 주인이 쓰다듬어주면 아프지 않을텐데, 물론 그렇게 모든 것을 이해한다면 개가 개 입니까? 그냥 주인이 저쪽에서 들어오는데 개 줄은 되지 않는데 뛰어가는 것입니다. 자기가 묶여 있는 것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막 달려가는 것입니다. 뒤에서 탁 낚아채는 것입니다. 그러면 ‘깨갱’그럽니다. 그러니까 개들을 사랑하는 주인은 그렇게 묶지 않고 개들을 묶을 때 개줄을 이만큼 접어서 그것에 고무줄을 묶어두는 것입니다. 그러면 개가 막 뛰어가다가 어느 시점이 되면 죽 잡아당기는 것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아 이것은 아니구나. 그러니까 여기에 통증을 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묶어 놓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똑같습니다. 그렇게 너무 멀리 가지말라. 하는 것은 그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우리의 불순종과 적당히 신앙 생활하려는 것은 언제나 우리에게 그런 식의 밧줄이 되고 개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뭔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깊이 뛰어들어 가려고 하면 이게 탁 잡아채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끊어버려야 합니다. 담대하게 끊고 이제 바로야 난 너의 보호도 필요없고 네가 던져주는 고기 국물도 필요없고 네가 주는 얼마 안 되는 양식 배급도 난 필요없다. 이제는 내가 애굽의 백성들의 생활에서 떨어진 것을 줏어먹는 것도 지겹고 이제 나는 싫다. 굶어죽어도 나는 광야로 가서 하나님을 만나야 되겠다고 딱 끊고 광야로 뛰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내버려두십니까?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이 벌써 이미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하늘에는 만나와 병들었을 때 병고치는 약과 적군들이 나타났을 때 그들을 도울 천사들과 지혜가 모자랄 때 그들에게 공급해줄 놀라운 지혜와 그리고 그들의 의복과 모든 것들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바로는 자기의 종노릇한 그 처절한 죄값을 통해서 감질나게 조금씩 주었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살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창고를 열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 생활이 곤고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공급해주시는 놀라운 역사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우리는 염려를 극복하는 비결 중에서 가장 초보적인 것 하나는 무엇인가 하면 너무 멀리 나가지 말라는 우리의 죄악된 본성의 속삭임과 끊어야 합니다. 너무 멀리 나가지 말라. 우리 마음 속에 있는 바로가 이렇게 말할 때 “싫어 나는 멀리 가버릴거야. 다시는 네 음성이 들리지 않는 곳으로 타협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으로 가버릴거야” 너무 미치지 말아라. 아니야 내게 소원이 있는데 소원은 예수님을 믿다가 미쳐버리는거야. 정신이 돈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에 미쳐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너를 비롯해서 모든 사람들이 나를 볼 때 예수 믿더니 돌았군. 그런 사람이 되어 보는 게 소원이다. 우리는 오히려 이렇게 반응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주님의 은혜의 세계로 깊이 들어가고 멀리 나갈 때 우리는 거기서 비로소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바다를 건너고 광야에 들어오면서부터 정말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나라가 있습니까? 무엇이 있습니까? 그리고 자기네는 그저 종살이 하던 무리들에 불과했는데 그 수많은 나라들에 백성들이 살고 있는 나라를 지나서 약속의 땅으로 가기까지 그들은 정말 가난해져서 하나님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날들을 그렇게 살았고 또 많은 날들을 그렇게 살지 못했습니다.
보십시오. 우리들이 너무나 많은 염려와 근심으로 우리의 뼈를 삭이고 우리의 마음이 갈라진 마음이 되게 만들어서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역사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우리의 이러한 너무 멀리 가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이러한 너무 멀리 가지 않으려고 하는 절제된 신앙 생활의 문제가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열심히 하십시오. 왜 수요일만 예배를 나옵니까? 새벽에도 나오십시오. 왜 주일날만 나옵니까? 오후에도 나오고, 일찍 가면 뭐합니까? 파자마 바람으로 텔레비를 보는 일밖에 더 있습니까? 그렇게 살아서 뭐하겠습니까? 열심히 예배 드리고 그리고 수요일에도 예배 드리러 나오고, 왜 수요일만 나옵니까? 금요일은 누구만 모이라고 만든 자리입니까? 나와서 하나님 앞에 열심히 기도하고 내가 아니면 누가 이 교회를 지키랴. 이런 마음을 가지고 주님과 함께 열심히 주님을 위해서 봉사하고 이런 삶을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신앙이 우리에게 이렇게 살라고 증거하는 데로 우리들이 살고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살기 위해서 우리들이 몸부림치고 투쟁하는 것을 주님이 얼마나 귀하게 생각하실까?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살고 이제 우리는 돌아갈 때도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인생의 광야에서 주님이 우리를 떠나시면 우리는 고아와 같은 신세가 되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마음 속에서 너무 멀리 가지말라. 이렇게 부르는 바로와 같은 요소는 여러분들이 그곳으로 돌아가면 즉시 여러분들을 사랑해줄 요소들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신앙의 양심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내 마음 속에서 너무 가지 말라고 소리치는 바로와 같은 본성의 말에 순종해서는 평안도 없고 진정한 행복이 없을 것이라고 하는 것, 이미 옛날에 이미 다 살아본 옛 삶이라는 것 여러분 기억할 수 있지 않습니까? 뜻을 세워야 합니다. 이제는 나는 죽든지 살든지 앞으로 가는 것밖에는 길이 없다. 내 인생에 유일한 희망은 이 바로와 같은 요소로부터 멀리 도망쳐서 불러도 소리가 들리지 않는 그곳으로 달려가는 것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이 광야와 같이 먹을 것이 없고 마실 물이 없는 곳이라도 거기서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그 하나님이 기적적인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것처럼 그 외로운 광야에서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셔서 신앙의 추억을 쌓아가게 만드실 것이며 하나님만이 아는 신기한 방법으로 내 인생을 책임지시고 그리고 나를 인도해주실 것이라는 이런 확신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염려로부터 벗어나는 길입니다.
12.낮아짐과 하나님의 축복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신8:16)
은혜로 어려움을 이기는 길에 대해서 말씀을 해오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이제 가나안으로 들어가기에 앞서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했던 그 마지막 유언적인 설교를 통해서 우리들이 어떻게 믿음으로 이 어려움을 이길 수 있을까 하는 것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모세는 우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만나를 먹여주신 그 사건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여년이 되도록 광야에서 굶주리지 않고 먹고 사는 것은 큰 기적입니다. 왜냐하면 워낙 많은 인구 300만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식사 끼니를 해결하는 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만나라고 하는 이 방법으로 일시에 해결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전에 이스라엘 백성들 앞서서 살았던 쟁쟁한 믿음을 갖고 있었던 선조들에게도 알려주시지 않았던 그 놀라운 만나를 내리시는 방법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굶주림을 해결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유의해야 할 것은 광야에서 하나님이 만나를 내리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여주신 것은 단지 이스라엘 백성들의 굶주림의 문제만을 해결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한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기가 먹고 싶다고 그러니까 바람에 불려서 메추라기 떼가 날라 오게 하셔서 그래서 그 메추라기 떼를 발목까지 빠지게 만들어서 사람들이 배가 터지도록 고기를 포식하게 끔 만들어 주셨습니다. 2-300만명이나 되는 사람이 고기를 먹어서 배부를 정도라고 할 것 같으면 소를 잡으면 몇 마리를 잡아야지 되겠고 돼지를 잡으면 몇 마리를 도살을 해야지 되겠습니까? 그런데 어째든 성경이 거짓말을 할리는 없으니까 그 사람들이 먹고 배불렀다고 했으니까 메추라기를 제가 보아서 알지만 한 사람이 5-10마리는 먹어야지 배가 부를 정도의 크기인데 10마리 정도 먹어서 배가 부렀다고 할 것 같으면 2-3000만 마리가 날라왔다는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그 정도의 일이야 뭐 대수겠습니까? 하나님이 왜 그런 방식으로 이스라엘을 계속해서 먹이시지 않으셨을까요? 뭐 쓸데없는 궁상인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원하시기만 하면 새들로 하여금 애굽의 낟알들을 물어다가도 먹이실 수 있는 하나님이 아니시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제 2 원인은 즉 날라 다니는 메추라기, 땅에 있는 곡식 이런 제 2 원인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아무 것도 없는 하늘에서 그냥 만나를 내리셔서 그 만나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배부르게 하신 것은 단지 식량 문제만을 해결하시기 위한 방법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만나의 사건이 단지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 아니었다고 할 것 같으면 무슨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성경에서 기록하시기를 너희를 낮추시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낮추신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만나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낮아지는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만나는 오히려 많이 사람들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이렇게 기이한 방법으로 식량을 얻는 사람이 어디에 있느뇨.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하면서 높아질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것도 그리고 사실입니다. 누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이 걷어 먹이신 민족이 어디에 있습니까? 누구도 통하지 아니하시고 무엇을 도구로 사용하지도 않으시고 오직 하나님께서 직접 광야에 만나를 내리셔서 그 만나를 먹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게 하셨던 점에서 볼 때에 그것은 참 놀라운 하나님의 큰 은혜요 기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낮아지는 한 방법이 되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여러분, 밭을 열심히 일구었을 때 하나님이 정한 때에 비를 내리시고 햇볕을 주셔서 풍성한 곡식을 거두게 하시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은혜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을 보면서도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은 만나가 자기들을 먹여 살려주었지만 만나를 위해서 일한 적도 만나를 위해서 씨를 뿌린 적도 없고 만나를 위해 물을 뿌린 적도 없습니다. 오직 그들이 하던 일은 무엇인가 하면 이미 내린 만나를 주님이 정해주신 시간에 가서 바가지로 걷어오는 것밖에는 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한없이 낮아지기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른 점에 있어서는 자신들이 무엇인가 대단한 사람들인줄 알았다가도 만나를 자기들을 먹여주시는 하나님을 발견하면 발견할수록 그 만나의 사건을 통해서 자신들이 아무 것도 한 것이 없고 이제껏 까지 이렇게 먹고 사는 것이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낮아지시게 하는 방법이 바로 만나의 사건이었습니다.
여러분, 광야와 같은 인생의 길에서 고생하고 고전을 면치 못하고 심령이 모두 곤고하고 그리고 죄로 말미암아 타들어갈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영혼을 살리고 여러분들의 영혼에 은혜를 주시는 방법이 무엇이었습니까? 여러분들의 그런 영혼, 여러분들의 곤고해진 마음에 은혜를 주시는 길이 무엇이었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바로 다름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러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 말씀의 만나를 주셔서 여러분들의 영혼을 살리시고 여러분들의 영혼을 배부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행복하게 하고 우리의 인생에서 뭔가 성공을 도모하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인생을 살았지만 알고 보면 우리의 몸부림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가냘픈 몸부림에 지나지 않고 마치 바람이 불어 큰 풍랑이 불어 그래서 파도가 치고 배가 도저히 바람부는 방향으로 갈 수 없을 때 작은 배 하나에 사공이 그 파도 속에서 몸부림을 치면서 바람을 거스려 항구쪽으로 배머리를 돌리려고 애를 쓴 것처럼 우리가 우리의 인생에서 우리 자신을 지켜보기 위해서 몸부림친 그 많은 순간들은 마치 그렇게 가냘픈 흔적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랑할 것이 있다면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른 모든 사람과는 달리 특별히 여겨주셔서 그래서 우리를 주님의 큰 사랑받는 자녀로 택해주시고 불러주셔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주님의 은혜에 그 아래로 부르셨다는 것, 말씀으로 우리를 그렇게 부르셔서 굶주린 영혼들을 먹이심으로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게 하셨다는 것, 그것 하나가 우리가 곤고하고 어려운 광야와 같은 세상을 지내면서 기억에 남는 일이 아닙니까?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왜 하필이면 여러분들이 원하는 것 주셔서 여러분들을 행복하게 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은혜 주셔서 여러분들을 새사람 만드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사람들은 돈에 몰려서 하나님 찾다가 주님의 사랑에 붙잡혔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거나 마음에 깊이 사모하던 것들을 모두 다 잃어버린 후에 그 주님의 사랑에 붙잡혀서 주님 믿고 주님 의지하는 사람으로 돌아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것들, 우리가 그토록 원했던 것들, 눈에 보이는 물질이나 사람이나 이 세상에 번영이나 이런 것들을 주셔서 우리에게 복주시는 대신에 우리가 때로는 원하지도 않던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인생, 어느 시점에 깊이 깨닫게 하셔서 그래서 내 모습을 보게 하고 예수님의 참 사랑을 깨닫게 하셔서 주님 믿는 백성으로 삼아주신 이유가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왜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이다음에 형통하게 된 다음에라도 곤고하던 때를 기억하면서 그때 주신 말씀을 기억하며 광야와 같은 고난에 가득찬 인생 길에서 나를 살린 것은 내가 아니라 나의 성실한 노력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깨닫게 하셔서 우리를 살려주신 말씀의 은혜를 생각할 적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낮아져야 합니다. ‘아! 그렇구나. 나는 아무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살려서 새사람을 만들었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감사하고 그리고 자기는 낮아지고 자기는 그 어두움 가운데서 건져주신 하나님은 높이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야지만 그 사람이 정말 하나님 앞에 참 성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어려움으로 가득찬 인생을, 그리고 시련으로 가득차고 고통으로 가득찬 인생의 길을 지나면서 이기는 방법은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낮추는 것입니다. 주님이 아무 것도 아닌 우리를 그 예수의 사랑으로 우리도 알지 못하던 그 참된 진리의 말씀에 만나로 굶주린 우리의 영혼을 먹여서 새사람 되게 만드시고 또 변화되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주셨으니 이제는 주님의 그 크신 은혜가 참 감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낮아져서 지금 내가 고통하는 일들이 있고 어려운 일들이 있지만 그러나 이것보다도 더 큰 고통스러운 때에 주님이 나를 건져주셨으니 또 이러한 때에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기억하면서 또한 새로운 말씀으로 하나님이 나를 인도해주실 것을 믿고 의지하며 바라고 나가기만 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새로운 은혜의 길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이런 사실을 기억하면서 인생에 어려운 때를 지날 때마다 더 힘들고 어려운 때에 내 힘, 내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건져주시고 이끌어주셨던 그 큰 사랑을 기억하며 하나님 앞에 감사함으로 나아오는 그런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하나님이 만나를 내리시는 이 놀라운 방법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축복하셔서 그들을 굶주림에서 면하게 하신 것은 그들을 시험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무슨 시험을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만나를 내리셔서 시험하셨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만나만 의지하면서 사는가 보자. 그것을 시험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많은 사람들은 이 하나님의 시험에서 떨어졌습니다. 인생이 곤고하고 그리고 많은 어려움에 가득찰 때에는 굶주렸을 때 처음 만나를 발견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뻐하고 환호성을 했던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면서 기뻐하고 감탄하고 감격했지만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님의 그 만나 만으로는 살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생각한 것은 무엇입니까? 다시는 손댈 수 없고 다시는 먹을 수 없는 그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면서 먹었던 그 음식과 그 곡식들을 그리워했고 그 고기국들을 그리워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착각한 것은 광야로 들어서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주셨을 때 그들은 이제 그런 것들을 사랑하며 살아서는 안 되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애굽 생활이 고통스러운 것은 사실이었고 그리고 노예의 생활로서 그들이 삶이 천대받고 박해받는 삶이었다는 것은 이미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까?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하러 가기 전에 그들은 벽돌을 찍어서 성을 건축하는 그 일에 노력동원되고 있었습니다. 강제 노동에 동원되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 잔혹한 노예에 봉사하여야 했습니다. 그들의 삶은 애굽에서 어둡기 짝이 없었고 고통으로 가득찼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처음서부터 끝까지 애굽 하면 떠오르는 것이 오직 고통밖에 없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편견입니다. 그들에게는 애굽 사람들이 먹는 고기 가마 옆에서 그 국물을 먹으면서 잠시 달콤한 행복에 잠겼던 때도 있었습니다. 정욕에 좋은 마늘이나 부추를 먹으면서 기분 좋은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게 은혜가 살아있을 때는 ‘옛날에 세상’ 그러면 싫은데 은혜가 떨어지고 나면 세상에서 죄를 지으면서 고통을 받았던 그 고통은 생각이 안 나고 오직 그 고통을 맛보기 전에 맛보았던 약간의 즐거움이 과대하게 포장이 되어서 사모함으로 떠오르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런 즐거움을 맛보던 끝에 하나님 없는 삶을 살게 되었고 그리고 그 속에서 하나님 없는 곤고하고 죄악으로 가득찬 인생을 산 것입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다시 은혜가 떨어져서 세상을 돌아보면 그런 즐거움들이 결국은 하나님 없는 즐거움들이었기 때문에 마지막 열매가 불순종이었고 죄악이었기 때문에 자기의 영혼을 죽이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생각이 안 나고 거기서 하나님 없이 살았기 때문에 받았던 고통은 생각이 안 나고 하나님 없이 사는 덕분에 맛볼 수 있었던 즐거움들이 과대하게 포장이 되어서 유혹으로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들어섰을 때는 이제는 오로지 하나님이 위로부터 내려주시는 그 만나만 먹고 의지하면서 살도록 하나님이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불순종하게 되었고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거기서 죽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그 시험에서 대부분 많은 사람들이 불합격 당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은 곤고한 때에 건져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그 놀라운 만나를 기억하면서 오늘도 여러분 우리가 옛날에 세상에서 맛보았던 즐거움이나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주님의 진노를 쌓는 대가로 맛보았던 그 가벼운 즐거움들이 여러분 빠져있습니까? 그런 것들에 대한 사모함,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의 길을 걸어가면서 자꾸 주님을 믿고 있기 때문에 잃어버린 옛날들이 자꾸 생각나지 않고 있습니까?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어야 할 것인가.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너를 낮추시고 시험하사 결국에는 너희에게 복을 주기 위함이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내리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만나만 의지해서 살면,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오로지 자기들만을 보호하시며 우리 이스라엘 백성은 오직 하나님의 그 거룩한 사랑의 품 안에서 보호를 받음으로서만 참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수 있다는 그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입증된다면 하나님이 필경은 너희에게 복을 주실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만약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말씀으로 변화를 받아서 여기까지 걸어왔다고 할 것 같으면 이제 다시 옛 생활을 그리워하고 옛날에 세상에서 잠시 맛보고 하나님 없이 살았을 때에 주님을 아는 지식이 모자랐을 때에 마음대로 행하던 그 편한 신앙생활, 편한 육신적인 삶을 다시 그리워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그 크고 놀라운 사랑과 그 놀라운 은혜를 우리들이 기억하면서 우리들은 다시금 옛날로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굳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렇게 끊임없이 우리를 시험하실 때에 그때 그 시험에서 합격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시험? 과연 이들이 내가 주는 하늘의 만나만 의지하면서 사는가. 요즘으로 말하자면 오직 하나님의 말씀 하나만 의지하면서 사는가 보자. 그리고 만약에 그들이 그렇게 살면 나 여호와가 그들을 복주리라 그런 말씀입니다.
결국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때 하나님이 자기를 건져 주시는 놀라운 구원도 맛 보았지만 결국 마지막에는 돌아갈 수 없는 곳을 그리워 하다가 광야에서 모두 죽었습니다. 고생한 보람도 없이 말입니다. 만나를 보며 감격하고 기뻐한 사람이나 만나를 하나도 맛보지 못하고 홍해 바다에서 수장되었던 애굽의 병사들이나 처지는 거의 비슷했습니다. 문제는 한번 승리하는 것, 두 번 나타날 때 이기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이기는 것입니다. 한번 하나님이 보실 때 좋은 사람 믿음이 있는 사람으로 입증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아무리 우리를 벗기고 시험하시고 또 시험하셔도 틀림이 없는 진품의 그리스도인으로 나타날 때에 하나님이 그들을 복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고난의 때를 이기시기를 바랍니다.
13.치료하시는 그리스도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말4:2)
사람이 망가졌을 때 육신적으로 망가진 것은 쉽게 고쳐질 수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육신이 팔을 쓰지 못하거나 발을 쓰지 못하는 불구로 지내야 하는 상황도 없지는 않지만 그러나 왠만한 상처는 의술이 발달되어서 쉽게 치료해줍니다. 사람들이 우선 병원에 입원하든지 아프면 얼마나 입원했는지부터 물어보지 않습니까? 그래서 오랜 동안 입원을 한 사람들은 큰 병에 걸렸던 사람들이고 그리고 간단한 치료를 통해서 정상으로 돌아온 사람들은 가벼운 질병에 걸렸던 사람들입니다.
말라기 선지자를 말하자면 구약의 기록된 하나님의 계시를 전해준 마지막 선지자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의 메시지는 이제 신약으로 들어가는 물길을 열어주는 커다란 수문과 같습니다. 신약이라는 넓은 바다로 통하는 구약이라는 강물에 만남의 지점에 있는 댐에 수문과 같은 것이 바로 이 말라기서입니다. 말라기에 마지막 예언, 엘리야인 세례 요한이 올 것이라는 예언으로 끝나고 신약 성경은 구약의 예언을 반복하듯이 예언대로 세례 요한이 온 것으로 시작을 해서 예수그리스도 오시는 앞길에 양탄자를 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때 이 마지막 문맥에서 말라기가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은 매우 의미깊은 장면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면서 그는 말하기를 “너희가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와 같이 뛰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직 코를 뚫지 않은, 누가 쉽게 제재할 수 없는 그런 송아지가 외양간에서 뛰어나올 때 사람들은 당황하고 무엇으로 그 송아지를 억제할 줄을 모를 그런 분위기를 가지고 지금 이스라엘 백성의 미래의 회복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깝게는 말라기의 눈앞에 있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바라보는 것이겠지만 보다 궁극적인 전망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영적인 이스라엘 왕국이 망가진 육적인 이스라엘을 대신할 것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병들었을 때 누가 고칩니까? 우리 개인의 육신이 병들었을 때는 의사가 고치지만 그러나 우리의 영혼이 병들었을 때에는 누가 고칩니까? 하나님이 고치십니다. 오늘 성경은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와 같이 뛰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이미 이스라엘 백성을 병들어서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 놓여있는 것을 먼저 염두에 두고 선지자가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알고 주님의 계시의 말씀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대로 살지 않는 이스라엘, 심지어는 주님이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가장 먼저 알고 깨달아야 할 선택된 백성이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매우 적은 이스라엘, 명백한 하나님의 말씀을 곡해하고 자기들을 향한 분명한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분별하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혼의 상태는 분명히 중병 걸려 누워 있는 것과 같은 처지였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죄와 불순종은 우리를 병든 상태로 몰아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흔히 하나님 앞에 나의 패역을 고쳐달라고 기도하고 또 하나님께서 나를 새사람 만들어 달라고 기도합니다. 왜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완전히 새사람 되게 끔 만들어주셨는데 그리고 더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길을 주님이 열어주셨는데 그렇게 온전한 길을 걸어가는 대신에 패역한 길로 걸어가서 마음 속에 하나님을 향한 악한 경향들이 생겨나고 주님을 거스르며 사는 것을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는 잘못된 일들은 어디서 일어납니까? 그게 바로 불순종하는 삶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은혜받은 것만큼 순종하는 삶을 살았더라면 오늘 이스라엘 백성이 이렇게 중병이 걸린 짐승처럼 묘사되면서 가사상태에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왜 은혜를 받으십니까? 우리는 기도학교 사경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님이 기도학교 사경회 한번도 우리를 그냥 보내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또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립니다.
(예화: 미국에서 세계 바디빌딩 경기에서 1위를 한 어느 사람이 전 세계로 순회하면서 자기 근육미를 과시하게 되는데 아프리카에 들려 추장이 보는 앞에서 옷을 벗고 몸에 올리브유를 바르고 온 몸에 힘을 주어 웅장한 몸을 과시했는데 늙은 추장이 그렇게 해서 무엇을 하느냐고 묻는 말에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함이라고 설명하자 추장이 하는 말이 낭비가 심하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그 나라 사람들은 단련된 몸으로 짐승을 잡고 적과 싸우며 마을을 지키는데 자기네와 비교되지 않는 엄청 난 근육을 자랑하는 그 사람이 단지 보여주기 위해서 매일 땀을 흘리며 운동을 한다니까 낭비가 심하다는 이야기)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주신 은혜, 좋지요. 여러분들은 다른 사람보다 말씀을 들으면서 생각이 단정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들이 설교를 들으면서 헤매는 동안에 아! 이 설교는 신앙의 체계에서 어느 책꼿이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잘알 수도 있습니다. 남들은 감격하지 못하는 하나님에 대해서 여러분들은 감격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 가지고 뭐합니까? 하나님께 감격적으로 돌아온 과거가 여러분들에게 있을 것입니다. 좋습니다. 아직도 못 돌아온 사람이 많고 돌아오기는 돌아왔지만 쥐뿔도 감격이 없는 사람들이 많은데 여러분들은 그 감격을 체험했고 또 말씀에 대한 놀라운 지식도 갖게 되었고 또 신앙에 대한 다양한 체험도 하게 되었고 또 여러 가지 많은 좋은 것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 가지고 뭐하겠습니까?
만약에 여러분들이 불순종하는 삶을 계속 산다면 하나님은 말씀하실 것입니다. “낭비가 너무 심하군 내가 너에게 그렇게 은혜를 주고 너를 이 세상에서 잡초처럼 쓰러질 너를 뽑아다가 감람나무 만들어서 예쁜 포도나무 만들어서 내가 준 땅에 심고 그리고 아름다운 포도, 풍성한 수확을 기대하며 물주고 햇빛을 주고 비바람을 막아주며 너를 길렀더니 겨우 들포도 밖에 없더냐” 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는 허비될 것이며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향해 베푸신 그 놀라운 은총들을 여러분들은 허비한 것이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런 실패를 경험한 것입니다. 불순종은 우리를 병들게 만들고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미끄러지고 멀어지게 만듭니다. 저는 요새 성도들의 삶을 이렇게 보면서 두 가지의 생각을 합니다. 하나는 교회적인 생각이고, 하나는 성도 개개인들을 향한 생각입니다. 하나는 교회가 옮겨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면서 물타기가 되는데, 물타는 방법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농도가 흐린 맹물에, 혹은 농도가 매우 낮은 설탕물에 진꿀을 부어서 아주 건강에 좋은 꿀물을 만드는 방법이 있고 하나는 그래도 먹을만한 꿀물에 맹물을 부어서 먹기에는 역겨운 물을 만드는 방법이 있습니다. 후자의 교회가 되면 안 될텐데 하는 것입니다. 나는 기도합니다. 이제 이후로 이 교회당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여러분들과 비교도 되지 않는 더 크고 놀라운 은혜의 세계로 들어오기를 저는 기도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 때문에 교회가 더 순수해지고 그 사람들 때문에 교회가 더 뜨거워지고 그 사람들 때문에 교회가 더 열렬한 기도의 영이 붙잡힌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들이 열린 교회 지하실 시대부터 있었다는 이야기 자랑처럼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자랑이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이후에 이 교회에 들어와서 변화받는 사람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한도내에서 여러분들의 신앙의 경력, 열린 교회와 함께 해온 신앙생활에 경력이 자랑할 것이 되는 것입니다. “나중된 자가 먼저된 자가 있을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후에 이곳에 와서 은혜받는 사람들이 열린 교회의 역사를 모두 알고 있는 여러분들 보다 아무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도 밑돌 것이라고 하는 교만한 생각은 갖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새로 들어와서 변화받는 사람들에 의해서 오히려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열심히 촉발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에 의해서 맹물의 꿀물타기와 같은 변화가 되기를 원합니다. 물론 여러분들은 맹물과 같은 신자는 아닙니다. 진실하고 열심히 있고 열렬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뒤로 물러가고 있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전진하고자 하는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들의 후배들이 여러분들 보다 훨씬 농도가 짙은 영혼의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로 여러분들을 새롭게 도전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분발해야 합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좀더 나아진 환경 속에서 분발하지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은 우리가 감격하며 예배드릴 때 가장 마음 속으로 경멸하고 역겨워했던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서 5-6년 후에 교회의 부흥을 가로막는 암초와 같은 존재들이 될지도 모릅니다. 이런 생각을 교회적으로는 하고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는 크지만 그러나 그 은혜대로 순종하는 개인의 삶은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 한번 아! 역시 우리의 참된 소망은 경건한 신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를 붙들고 있는 그 안에 계신 하나님께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걸출한 설교자들도 항상 한 가지 어리석음에 공통적으로 빠지고는 했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설교에 귀를 기울이는 회중들을 향한 과대평가였습니다. 저는 교회를 섬겨오면서 이런 사실들을 새롭게 깨달아가고 있습니다. 설교자 자신이 스스로의 능력을 과신해서 교만한 죄에 빠지는 것보다 더 쉬운 것은 자기의 회중들을 과대평가하는 것입니다. 동일한 약점이 저에게도 있다는 사실을 요즘 뼈속 깊이 깨달으면서 하나님 앞에 참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든지 저든지 우리 모두 인간에게 희망을 거는 일을 슬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고 바라시는 것은 당신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새롭게 각오하고 결심하면서 하나님께 받은 그 놀라운 은혜와 감당할 수없이 감격한 그 신앙에 모든 과거들이 하나님이 우리를 현재적으로 붙들고 계실 때에만 우리에게 힘이 되는 것입니다. 비할데 없는 주의 큰 사랑,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독점적인 사랑을 독차지 했던 이스라엘이 오늘 어떤 상황에 이르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망가졌습니다. 망가진 자들이 되었고 병든 자들이 되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엎드려졌고 뒤로 물러갔고 그리고 범죄함으로 침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거룩한 선지자들의 음성을 직접 들을 수 있었던 계시의 놀라운 특권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스라엘을 넘보는 적군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도와 주님의 기적으로 말미암아 칼 한번 대지 않고 엄청난 군대들이 하루 아침에 죽어가는 것들을 보았던 그 감격, 믿음으로 나라를 건지기도 하고 기도로 대적들을 물리쳐서 여호와의 이름을 높였던 그 모든 이스라엘의 과거가 이제는 오히려 더 큰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하는 근거가 되어버렸습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엄중히 경고합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개인의 신앙의 생활이나 이제껏 까지 하나님을 경험해 온 과거의 삶에 대한 자긍심이 있다면 여러분들은 그것을 버려야 합니다. 무엇인가 여러분들이 다른 사람들 보다 잘 아는 것이 있고 여러분들이 무엇인가 뛰어난 하나님에 대한 체험의 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을 여러분 스스로 대견해 하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성령으로 시작했으나 육체로 마칠 가능성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예화: 한국교회 설교 역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어느 목사님의 이야기- 교육도 제대 로 받지 못하고 술공장에서 술맛을 보는 분이셨는데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고 나 중에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자가 되셨는데 그분은 원고도 없이 설교를 하셨는데 설교 시간이 새벽에도 두시간 반을 하시는데 설교를 듣다가 자녀들 아침을 줄 시 간이 되면 빨리 가서 밥을 해먹이고 오라고 하셨는데 그래도 계속 설교는 하고 있었는데, 대예배 설교는 네시간 정도 하는 것은 보통이였는데 어느 날 성도들에 게 녹음한 테입이나 필사한 것을 가져오라고 해서 기대를 가지고 가져 갔더니 목 사님이 모두 불에 태워버려서 가져간 성도들이 후회했다는 이야기) 그 행동이 뭐 성경적으로 옳으냐 그렇게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자기의 마음이니까. 그런데 정신은 그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다 너희의 영혼을 부요하게 하는 것이다. 다시 들을 수 있다는 녹음기 때문에 말씀을 흘려보내고 내일은 순종하겠지 하는 그 미지근한 생각 때문에 오늘 대충 살고 필기해 놓은 것이 있다라고 하는 의지하는 마음 때문에 마치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 공부처럼 생각하는 그런 식의 사고방식이 너희들의 신앙을 신앙 속에서 긴장을 앗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확 불태워버린 것입니다. 대단한 분이십니다.
여러분, 그런 교만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여러분 교회에 담임 목사이면서도 난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을 사랑하는 내 마음에 여러분들의 단점이 보인다면 엄중하신 하나님의 눈 앞에서는 어떨 것인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의 자랑은 많은 지식이나 또 많은 경험이 아닙니다. 우리의 자랑은 하나님 앞에 망가지지 않도록 정말 순종하는 삶을 살고, 죄가 다시 우리를 지배하고 우리의 영혼 속에 어두움이 깃들어서 뒤로 물러가지 못하게 하도록 매일 거룩하게 분투하게 하는 삶을 사는 것, 그것이 우리의 자랑거리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의 친구”라 말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주위에는 언제나 이런 친구들이 있어야 합니다. 매일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고 오랜 세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새롭게 말씀 앞에 나아오는 사람, 늘 깨어지고 새로워져서 하나님이 새로 빚으시는 손길이 우리의 영혼과 삶에 닿을 때 부드러운 진흙처럼 빚어질 수 있는 마음을 비운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런 일들에 실패했기 때문에 병든자가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하셔야 되겠습니까? 주님이 선택하실 수 있는 것은 둘 중에 하나입니다. 망가진 우리를 패기처분 하시든지 아니면 재활용 하시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재활용 하려면 반드시 고쳐야 합니다.
옆에 열린 공간이 있지 않습니까? 대부분이 주어온 것입니다. 바닥은 열린 교회에서 뜯어온 것이고 왼쪽 뒤편으로 가면 17조각을 이어서 한쪽 면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소파는 시장에서 거의 내다버리는 것을 헐값에 사왔습니다. 주어온 탁자로 오디오 받침을 했고 쓰레기 통에서 주어온 것으로 받침을 했습니다. 가운데 통로에 깔려있는 카펫트는 이 교회에서 버리고 간 천으로 바닥을 깔았습니다. 그런데 고쳐서 활용을 하니까 아주 훌륭하게 좋은 것입니다. 조금만 더 손을 보면 아주 훌륭한 쉼터가 되게 끔 그렇게 만들어 졌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고쳐서 쓰시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아침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이 모습 이대로 받아 달라고 막 찬송부르면 안 됩니다. 받을 수가 없는데 어떻게 받으라고 우깁니까? 하나님 앞에 새로워지기를 원하는 결심과 함께 온전하지 못하는 자신을 뉘우치면서 받아달라고 말해야지. 그러면 하나님이 받아주십니다. 고쳐달라고 하는 사람, 하나님이 받아주시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주님께서는 그렇게 불순종과 죄로 말미암아 망가진 우리를 쓰시기 위해서는 우리를 고치시는 일들이 먼저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방법이 무엇인가 하면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는 것입니다. 의로운 해는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을 예고하는 예언적인 성경 구절입니다. 요한 복음은 이 구약의 마지막에 예언을 이렇게 받고 있지 않습니까?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요한복음 1장이 시작을 하면서 해에 대해서 빛에 대해서 예언한 말라기서와 연결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분은 치료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분이 기뻐하시는 것은 당신의 백성을 고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선지자들과 충성된 종들을 통해서 고칠 수 없고 율법과 제도를 통해서 고칠 수 없었던 그런 망가진 사람들을 고치는 일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오셔서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그 고난으로 얼룩지고 우리를 위해서 안락한 삶을 마다하시고 눈물겨운 희생과 피로 범벅된 수고와 희생에 삶을 사신 그 모든 이유는 망가진 우리를 고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고치시고 사람들과의 망가진 관계를 고치시고 자기를 향해 깨트려진 관계를 회복시키신 그런 놀라운 치료를 위해서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셔서 환자와 같은 죄인들과 함께 사셨습니다. 죄의 세균으로 가득찬 인간 세계 속에서 고결하고 정결한 성품을 유지하시며 거룩한 영향력을 끊임없이 영혼들에게 뿜으시면서 일생을 사셨습니다. 고난으로 가득찬 생애였지만 고난이 그분 속에 있는 치료의 힘을 꺾을 수 없었고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을 전달해주시는 완전하고 넉넉한 통로가 되는 삶을 사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망가진 우리에게는 바로 이런 가능성이 필요합니다. 우리를 치료해주는 그 은혜의 광선이 필요합니다. 그 빛 아래서 고침받지 못할 죄인은 없고 망가진 관계들이 치유될 수 없는 절망적인 관계는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크고 놀라운 사랑과 주님이 우리를 향한 그 변함없는 은총, 그 아래서 사는 것만이 불순종과 죄로 말미암아 병든 자처럼 되고 망가지고 병들어서 쓰러져 있는 짐승과 같은 우리를 고쳐서 외양간을 박차고 뛰어나가 소리지를 수 있게 만들어주는 유일한 조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진정한 행복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우리 같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사랑과 은혜로 찾아오셨던 그 하나님의 눈 앞에서 사는 것만이 우리의 인생에 가장 진정한 행복임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고통과 질병에 원인이 무엇이든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에 빛 앞에 서는 사람들을 고치고 완전하게 하시고 치료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한번만 그 은혜 앞에서 살아보는 것이 소원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가끔 비추는 하나님의 은혜, 간간히 맛보는 하나님의 사랑 가지고는 우리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폭포수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하고 우리에게는 보다 더 찬란하고 밝은 빛이 필요합니다. 독일의 문허 괘테가 죽어갈 때 남긴 말 한마디 그 문학가의 유언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여보게 친구, 저 창문을 열게. 더 많은 빛을 내게 비치게 하게” 유언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궁핍을 느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많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았어도 여러분들이 더 많은 궁핍을 느껴야 합니다. 하나님, 주의 그 큰 은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거룩한 삶에 진전이 매우 미약한 것은 하나님, 내 영혼에 더 많은 진리의 빛을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전에 내가 많이 깨달았던 것, 이전에 내가 많이 깨달은 사람이라는 사실은 잊어버리고 오로지 우리의 인생에 부어주실 더 큰 하나님의 진리와 그 지식의 세계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 빛으로 여러분들을 치료하시고 고치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비참한 사람, 지옥에 떨어진 사람보다 더 불쌍한 사람들은 교만에 빠져있는 사람들입니다. 왕년에 받은 은혜, 작년에 한 헌신, 그리고 내가 깨달은 하나님의 말씀, 내가 여태가지 살아온 영적인 순례, 그 기막힌 길 그 간증을 시작하면 끝나지 않는 그 놀라운 간증거리들 때문에 교만해 하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나라와는 관계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오로지 어린양 예수여 이 영광과 찬송을 홀로 받으소서. 그 경배를 홀로 받으소서 라고 오로지 어린양 예수만을 높이는 사람들, 그런 성도들이 모여있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큰 사랑과 은혜 앞에서 우리는 정말 겸비해져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무엇을 내세울 것이 있습니까? 우리의 자랑거리가 있다면 아무 공로없고 짐승처럼 패역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을 고쳐주셔서 이렇게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홀로 행하신 일입니다. 그렇게 주님이 우리에게 행하셨다면 우리에게 자랑거리가 있다면 오직 하나, 주님이 우리에게 그런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는 것밖에는 자랑거리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고치고 치료하셨다는 것밖에는 그 특별한 은혜를 우리가 받았다고 하는 것밖에는 우리가 자랑거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무엇을 자랑하려고 합니까? 여러분, 무엇 때문에 우리들이 교만해질 수 있겠습니까? 지나친 교만은 정신병입니다. 왜냐하면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그리스도인은 교만해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불순종과 죄로 망가진 사람들이 그대로 사는 것을 보는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실까요? 저는 종종 목발을 짚고 지하철 계단을 힘겹게 오르는 사람들을 봅니다. 사실 가서 붙들어주고 싶은데 그 마음씀이 그들에게 상처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한번도 제대로 시도해 본 적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활기차게 걸어가는 길을 지팡이 하나를 두드리며 의지하며 걸어가는 맹인들은 가끔 손을 잡고 길을 걸어간 적은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 우리가 보기에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하나님 앞에 망가져서 정말 패기처분 하기 직전에 그런 병든 영혼,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시고 주님이 그렇게 은혜를 주시고 걱정하던 것들을 해결해주시고 알지 못하던 것들을 알게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는 영적인 장애인을 보시는 우리 주님의 마음에 얼마나 아프시겠습니까? 주님은 그런 사람들을 고치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최고의 효도는 주님의 은혜의 수술대 앞에 누워서 웃옷을 벗는 일입니다. 그것은 수많은 은금이나 수많은 보화, 뼈를 깎는 충성, 건강을 돌보지 않는 뛰어난 열심히 있는 기도보다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을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내게 원하시는 것은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내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라
정말 우리는 그렇게 망가졌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덜 고쳐진 사람들입니다. 멀쩡히 다녀야 할 사람이 폼잡고 침대에 누워있는 것도 웃기는 일이지만 아직은 치료가 끝나지 않은데 피묻은 붕대를 감고 수술하다가 만 배를 가리고 여기저기 말갈 때, 소갈 때 다니는 사람처럼 꼴불견은 없습니다.
(예화: 친구가 새벽에 동생과 약수터에 갔다가 오다 택시에 치어 무릎뼈를 심하게 다쳐 병원에 입원하셨는데 무릎 사이에 쇠를 박을 정도였는데 친구들이 등산을 간다고 하니까 떼를 써서 같이 등산을 갔다와서 더 심하게 아파 결국 재수술을 했다는 이야기)
실밥을 다 안뜯어서 피가 줄줄 흐르는데 그냥 뛰어 다니는 사람, 쌍거풀 수술을 하다 찢어놓기만 하고 꿰매지도 않았는데 뛰어 다니는 사람, 축농증 수술한다고 여기를 너덜하게 뜯어놓았는데 그것을 털럭 거리고 돌아 다니는 사람, 창자를 수술한다고 찢어났는데 아직 집어넣지도 않았는데 겉에 돌리면서 돌아 다니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영적으로 보면 많은 것입니다. 그리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너 나처럼 배를 쨌어.’ 그러는 사람. 짼게 자랑이 아니라 꿰매고 치료해서 새 사람이 된 것이 자랑거리지 아니 배를 많이 쨌다고 그게 무슨 훈장입니까? ‘봐 나는 이만큼 쨌잖아. 너는 일센티 밖에 안 쨌지. 얼마나 잘났나.’ 그러면서 다니는 사람이 소위 은혜받았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도 너무 많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는 마음은 치료하시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치료하시는 방법은 의로우신 그리스도 예수가 떠오르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혼이 치료될 때가 가까이 오게 되면 그리스도가 떠오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중심에 잊혀졌던 그리스도가 커다란 부피가 되어서 떠오르는 것입니다. 떠올라서 결국은 그리스도밖에는 없는 것 같은 상황으로 우리를 데려가는 것입니다. 치료되기 전에는 매일 자랑거리가 ‘나 배쨌다. 나 많이 꿰맸다. 나는 어느 병원에서 수술했다.’ 맨 그런 것입니다. ‘나는 옛날에 뭐했다. 나는 뭐도 많이 했다. 나는 뭐도 섬겼다.’ 그리고 자랑하며 다니지만 어느 순간에 치료될 때가 되면 그런 것들은 모두 쓸데없고 찬란한 태양과 같이 그리스도 예수가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점점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그리스도가 장엄하게 떠올라서 우리를 압도하는 것입니다.
동해에서 해가 떠오르는 장면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너무너무 보고 싶습니다. 일출의 광경을 보면 해가 조금 떠오르기 시작하는데 얼마나 해가 빠른지 모릅니다. 쭉 떠오르면서 말하자면 어린아이가(?) 옥동자를 순산하는 것처럼 그 아침 노을로 얼룩진 피빛 바다에서 찬란한 태양이 불끈 솟아오르는 것입니다. 서울에서 보는 손톱만한 태양이 아닙니다. 그 붉은 빛이 해변 전체를 압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치료될 때가 되면 잊혀졌던 예수 그리스도가 이렇게 우리의 의식과 우리의 신앙의 세계 속에서 찬란한 노을을 그리며 떠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붉은 빛, 아직은 어두움이 도망하지 못한 스산한 바닷가를 붉은 빛을 드리운 태양빛이 바다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붉은 빛은 사라지고 이제는 감히 마주 바라볼 수 없는 찬란한 빛을 내면서 그 어두움으로 가득찼던 한밤의 해변을 이제 시간이 흐르면서 찬란한 정오의 대낮과 같은 햇빛으로 비쳐서 아침이 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므로 영혼의 치료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안 만나면 여러분들은 성공하면 왕년 타령 잘하는 알도 못낳는 폐계 닭 같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고 잘 못하면 그나마도 집어치우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아무리 고기 값이 싸다고 해도 메이커 있는 통닭 집에 가서 좋은 통닭 하나 사려면 수월치 않게 돈을 달라고 합니다. 가끔 시장 바닥이나 가난한 동네의 골목에 한 마리에 천원씩 하는 닭들이 있습니다. 무슨 닭인지 아십니까? 폐계 닭입니다. 양계장에서 몇 년씩 달걀을 욹어먹다가 이제는 그나마 능력이 떨어져서 알을 거의 못낳는 것, 사료만 죽이니까 싼 값으로 내다 파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다가 몇 시간 정도 고아서는 이빨도 들어가지 않습니다. 왜 닭이 이렇게 싼 가 했습니다. 여러분, 그렇게 헐값에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습니까? 그러면 매일 옛날 타령하고 과거에 하나님 만난 향수에 젖어서 사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들이 그런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의로운 해가 찬란하게 떠올라서 그리스도에게로 비치는 의로운 은혜와 진리의 빛에 조명을 받기 전에는 누구도 고쳐지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신앙생활은 스스로 인격적인 결단 속에서 해나가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끊임없이 과거의 향수에 빠져있고 왕년에 받았던 은혜, 왕년에 하나님 앞에 행했던 헌신의 기억같은 것이나 가련하게 붙들고 신앙생활 한다면 여러분들은 오직 두 가지 가능성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회개하던가 아니면 망하던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찬란한 빛이 우리의 영혼 속에 비쳐서 그분 만이 우리를 치료하시는 유일한 치료자시며 그분께로 비쳐오는 그 광선이 얼마나 위대한 힘이 있는지를 깨달은 모든 사람들은 오로지 그리스도밖에는 자랑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않으면 어떤 치료도 없는 것입니다. 좋은 시설을 갖춘 병원, 그리고 수입제 의약품, 그리고 즐비하게 누워있는 환자들이 있을지라도 그 약을 적절히 투약하고 고칠 수 있는 의사의 출현이 없으면 완치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여러분들에게 고쳐지지 않는 삶의 부분, 알면서도 고쳐지지 않는 패역한 부분들을 고치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삶 속에 이런 의로운 태양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떠올라서 은혜의 빛, 진리의 광선을 여러분들에게 비쳐주셔서 문드러진 살에 새살이 돋고 깨어진 뼈가 다시 붙고 망가진 세포들이 새생명을 얻게 되기를 고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희망 속에서 우리는 이 교회당에서 첫 번째 집회를 갖는 것입니다.
원래 가을 학교 사경회는 전도를 위한 집회가 아닙니다. 우리들이 모여서 은혜받고 저는 자와 같은 사람들을 불러다가 세워주고 기도의 능력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기도의 새힘을 얻게 하는 그런 뜻으로 갖는 사경회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렇게 됨으로 말미암아 의로운 예수그리스도를 만나는 것만이 인생의 진정한 희망이라고 우리는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런 치료하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광선이 어떤 사람들에게 비치는가 그것은 한번의 비침으로 필요하지 않고 떠오른 그 해가 지속적으로 여러분들을 비쳐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성경이 말하는 바와 같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너희가 되어야 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라고 기록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관심이 없었던 삶을 돌이키고 무엇 보다도 하나님만 사랑하며 살기로 결심했던 처음 은혜의 그 착한 마음들을 되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서도 함께 묻어 들어오고 있는 세속적인 정신과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못하는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는 방종한 죄악의 때들을 벗겨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눈 앞에 서는 시간이 다시 한번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이 교회당에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는 이제 교회당에 규모나 아래층 윗층에 펼쳐져 있는 여러 가지 시설을 보면서 감탄하기에는 갈 길이 너무나 멉니다. 이제 우리 지난 일들을 잊어버립시다. 하나를 기억합시다.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허물이 많고 아무 공로가 없는 사람들을 향해서 꿈꾸는 것과 같이 아름다운 일들을 우리에게 행하셨으며 다시 한번 우리는 그 놀라운 그리스도의 사랑에 빚진 자가 되었다는 사실 하나는 기억합시다.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잊어버리고 이제 우리는 이 속에서 정말 하나님 앞에 우리의 게으름과 길을 알면서도 걸어가지 않는 나태함과 죄를 죽이는 분투한 성실한 삶과 총체적인 순종의 결핍 때문에 주님이 우리를 고치시고자 하시지만 완전히 치료되지 않은 이런 반쯤 치료된 사람들로서 살아가는 삶을 종식해야 되겠다라고 하는 결심이 불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하늘을 가르고 이 죄와 슬픔으로 가득찬 세상에 강림하신 여호와의 거룩한 영광을 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지지부진 했던 선교의 전선에 불이 풀의 섶을 사르는 것과 같은 복음화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고 굽었던 이 민족의 교회사가 바른 길을 찾게 되는 찬란한 선교의 여명이 오기를 우리는 여기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지점이 조국의 교회의 위대한 역사의 불을 지른 발한점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부르짖어도 듣지 않으시던 하나님, 외쳐도 귀를 기울이시지 않은 하나님이 이 성전에서 끊임없이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잠시 살다가 가더라도 주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며 사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누리기 싶지 않고 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가지고 매일매일 불붙는 열심히 자신의 죄와 더불어 싸워서 존재 자체가 거룩해 되기를 그리워하는 그 성도들, 그가 기뻐하는 하나님을 자기만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 가득한 이 민족이 열화와 같은 찬양으로 하나님을 높일 그 날을 목매이게 그리워하는 그 마음으로 여기서 조국 교회의 이런 부흥의 첫 번째 떡을 우리에게 내리시기를 기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찮게 여기던 수많은 백성들이 우리들이 전파하던 그 복음이 장난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는 날들이 오기를 우리는 그리워합니다. 그래서 우리만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해아래 살아가고 있는 이 모든 백성들이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의 가슴 저미는 사랑 때문에 울며 조국의 교회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우리는 고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기대하는 것은 우리 개인의 치유가 아니라 우리 개인의 치유를 통해서 교회를 고치시고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 이 민족의 역사를 치유하시는 그런 역사의 치유를 우리는 기대하는 것입니다.
가장 캄캄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거의 없었던 포로 시대에 예레미야의 예언에 말씀을 붙들고 성큼 다가온 포로의 귀환 시대를 바라보며 벅찬 가슴을 안고 견딜 수 없는 통증을 함께 느끼며 그리스도의 왕국을 향한 소망에 불탔던 다니엘은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민족의 총체적인 치료를 기대하고 바라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그런 것들을 기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서울서 멀지 않은 곳에 500억 가까이 들어서 교회당을 지은 웅장한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게 제가 처음으로 가서 말씀을 인도했습니다. 한 이틀인가 삼일 인도하고 올 때에 성전의 규모를 바라보고 정말 크구나 라고 하고 있는 제 곁에 와서 어느 교인이 물었습니다. 목사님, 저의 교회를 바라보는 소감이 어떻습니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 웅장한 교회에 들어온 교인들이 형편없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이렇게 크게 짓게 된 것이 한국교회에 씻을 수 없는 수치가 될 것이며 반대로 이곳에 들어온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어두운 도시에서 불꽃처럼 산다면 주님은 이 건물 그 자체를 하나님의 나라의 모형이 되어서 이 도시의 사람들에게 한국교회의 자랑거리가 되게할 것입니다. 선택은 당신에게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이런 놀라운 치유를 경험하기 기대하면서 주님을 경외하지 않았던 삶을 돌이켜 경외하는 삶으로 회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여러분들의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친구들이 매우 적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하나님 앞에 정말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탄식하므로 아버지 앞에 기도하고 간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이런 삶을 살게 되시기를, 이런 사경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14.옛적 길로 돌아가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렘6:16)
인간은 한참 자기의 길을 가노라면 처음 출발할 때의 마음과 목표의식을 잃어버리기 쉬운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이런 이치는 우리 신앙생활만큼 훌륭하게 적용되는 그 분야도 많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너희들이 가던 길에 서서 한번 생각해보라는 말씀입니다. 가던 길을 한번쯤은 멈추어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에 실패한 많은 사람들은 서서 생각해보는 일을 잘못한 사람들입니다. 회개한다는 말이 대표적인 말입니다. 희랍어로 “메타노에아라”고 하는 이 회개는 “두 번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처음 생각해보면 내가 잘못이 없는 것 같은데 두 번 생각해보면 역시 내가 잘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또 나중에 생각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행위는 이루어졌지만 그때는 몰랐는데 뒤돌아 내가 한 일을 생각해보니까 그게 바로 회개다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을 하면서 정신없이 달음질치지 않습니까? 그때 우리는 가끔은 한번 멈추어 서서 뒤를 돌아보며 내가 이렇게 살아가는 이 신앙생활이 정말 옳은 것인가. 그리고 계속 가면 어디로 가는가. 처음 출발할 때 그 목표의식은 여전히 있는가. 가는 것은 옛날이나 오늘이나 변함없이 똑같은데 그것을 움직이고 있는 동기가 달라지지는 않았는가. 이것을 누구든지 항상 점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참 힘든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는 망가져있는 것에 익숙해져 있고 자기를 합리화 시키기 쉬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런 약점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멸망을 앞에 놓고도 정신없이 하나님을 등지고 타락의 길로 걸어가고 있습니다. 신기한게 하나님 앞에 큰 은혜와 사랑을 입으면서 살 때는 사람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질까봐 조바심을 하는데 이런 하나님의 은혜가 떠나가고 이제 자기의 욕심과 욕망을 따라서 막가는 인생을 살게 되면 그들에게 이런 거룩한 긴장이 모두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들을 향해 어떤 뜻과 마음을 가지고 계신지를 생각해 보려고 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 소견대로 소견에 옳은대로 행했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안 계신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을 막 보는 삶을 살고 마음 속에 뜨거운 사랑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할 신앙의 도리는 차가운 종교적인 의식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냉냉해진 신앙생활과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아가는 불순종은 그들의 눈을 멀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자기가 걸어가고 있는 그 길을 바로보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약점을, 이런 허물을 이스라엘 백성들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날 우리도 동일하게 이런 약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확신이 강하고 열심히 있는 사람일수록 이런 목표의식으로부터 멀어지고 생각을 할줄 모르는 사람이 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에 핵심부에는 항상 자기 성찰이라고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무엇으로 자기를 성찰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면서 걸어가면서도 도무지 그 불순종하는 길을 돌이키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 이스라엘을 멸망으로 이끌어간 중요한 원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 보다도 더 커다란 죄는 도무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가 잘못 걸어가고 있는 그 모습, 자신의 모습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거울에 도움이 없이는 인간은 자기의 용모를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모습을 우리는 도저히 볼 수가 없습니다. 남의 눈을 통하거나 혹은 거울을 통하거나 혹은 사진 찰영들을 통해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을 뿐이지 우리는 우리를 정확하게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자기를 정확하게 보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도움을 주시는 것입니다.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그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야 할 말씀을 위탁하셔서 그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외치게 하셨고 그 뜻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아가는 삶을 비추는 거울이 되게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그 앞에 와서 예레미야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 자기가 요즘 어떻게 살고 있으며 이스라엘의 민족의 역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의심할 여지없이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커다란 죄는 바로 자기를 비추게 하는 하나님의 거울, 하나님의 음성을 무시한 것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노력하고 몸부림쳐도 인간의 힘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여러분들 안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만한 무엇이 있습니까? 선한 무엇이 있습니까? 주님을 즐겁게 해드릴만한 무엇이 여러분들에게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었다고 할 것 같으면 이제는 우리의 모든 관심을 주님이 보시기에 나는 어떠할까? 이제껏 정신없이 달려왔으니 이쯤에는 내가 서서 내 인생도 돌아보고 그리고 내 모습도 돌아보고 하나님 앞에서 나는 어떤 모습일까 한번 비쳐보는, 서서 생각해보는 일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불가능한 것을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지금 내가 들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주십니다. 여러분들에게 반복되는 하나님의 말씀, 지루할 정도로 되풀이 되는 하나님의 그 진리는 바로 여러분들이 들어야 할 지금 필요한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 거울에 자기를 비추어 보는 그런 진실한 자기 성찰이 없이는 누구도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는 항상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정확한 지식과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려는 겸손한 마음과 그리고 그 다음에는 깨달은 그것을 실천할 수 있게 하는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능력이 우리에게 아울러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멈추어 서서 자신의 행위를 이스라엘의 역사의 현실을 살펴보기를 강력하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많은 사람의 문제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도무지 자기가 걸어가려고 하는 삶을 멈추려고 하지 않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가끔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말로 되지 않는 방향으로 시커먼 바퀴 자국이 나 있고 난간이 무참하게 부서지고 경우에 따라서는 막 불탄 흔적까지 있는 끔찍한 사고에 그 자국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차를 운전하고 똑바로 달려가는 동안에는 그 차가 그렇게 빨리 달리고 있다는 생각을 아무도 못합니다. 그러나 급히 서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브레이크를 잡거나 급히 방향을 틀 때 차가 나뒹구는 모습을 보면서 아! 빨랐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예화: 예전에 섬기던 교회에 계실 때 평일에 집회가 있어 비가 오는 날 그곳을 가시는 데 길이 밀려서 마음이 다급해졌는데 남산 터널로 들어가서 가는데 앞이 뚫려서 속도를 냈는데 커브 길이 나와 약간 돌렸는데 빗길에 미끄러지면서 한 바퀴 반이 나 차가 돌아버렸는데 만약에 뒤에 차가 따라왔으면 충돌을 했을 뻔 했다는 이야 기) 무엇 때문에 그랬습니까? 간단합니다. 차는 가던 그 길로 가고 싶은 성질이 있습니다. 가는 그 길로 가게 내버려둬야 하는데 내가 그것을 천천히도 아니고 급히 다른 방향으로 가자고 차를 모니까 차가 반항을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꼭 그렇습니다. 뭔가 우리가 가던 그 길을 우리들이 걸어갈 때는 우리들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걸어가던 사람이 어디 부딪쳐서 피가 나고 하는 것을 보면 깨닫게 되는 것이 엄청나게 강하게 걸어왔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신앙도 똑같은 것입니다. 돌이킨다는 말을 여러분 그렇게 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절대 쉽게 돌이켜서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뭔가 잃어버릴 각오도 해야 합니다. 사랑하던 것과 결별할 각오도 해야합니다. 고난을 받을 각오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평화는 그런 것들을 감수할만큼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아울러 기억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좋아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하신다고 하실 것 같으면 우리가 무엇 때문에 두려워하고 무서워할 이유가 있습니까? 여호와가 우리의 편이라면 우리가 이제 더 이상의 동지를 모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내편이시고 하나님이 나를 알아주신다고 할 것 같으면 내가 무엇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이 끊임없는 자기 성찰, 자기 가던 길을 끊임없이 돌아보고 이 길이 옳은가 하는 것을 곰곰히 생각하고 살펴보는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 앞에 살아가던 삶에 방향을 바꾸는 가장 중요한 시발점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훌륭한 설교는 사람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드는 설교입니다. 멍하고 있다가 불받는 그런 것 별로 도움이 안 됩니다.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듭니다. 우선 사람이 평안을 느끼기 전에 먼저 뭔가 막 엉키는 것 같은 혼란이 일어나게 하는 설교, 그 설교가 참 살아있는 설교입니다. 무엇 때문에, 잘못된 것을 먼저 허물어트리고 잘못된 사고를 바르게 정돈하기 위해서 먼저 부셔버리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잘 살아가고 있으며 하나님은 그저 나를 밀어주시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간에도 여러분 모두를 돕고 또 은혜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먼저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들이 여태까지 걸어오고 그릇 걸어가고 있는 그 길들을 스스로 깊이 성찰해서 거기서 하나님이 안 기뻐하시는 것들이 어떤 것인지를 깊이 파악하고 그것을 부정할 수 있는 마음을 아울러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신앙적인 고민이 있고 거기에서 해답을 찾으려고 하는 몸부림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영적인 상태의 원인에 대해서 우리는 집요하게 캐묻고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충만한 은혜의 생활을 누리고 있다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은혜를 주시는 것일까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서 그런 영혼의 큰 축복을 누리며 살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을 생각할 때 겨우 이것도 내가 잘하고 저것도 내가 잘했으니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주신 그것이 마땅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면 그 사람은 전혀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게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내가 놀라운 은혜를 주실까 그것들을 깊이 생각하고 성찰할 때 마지막 결론은 하나님이 홀로 찬송을 받으시는 결론이 나야합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일정하게 자신의 어떤 모습을 하나님이 슬퍼하시고 기뻐하셨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 하나님이 내가 마음을 지키면서 이렇게 살려고 애를 쓸 때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시는구나. 실패하는 사람들은 내가 왜 이렇게 주님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마음도 있고 그리고 또 기도하고자 하는 의지도 있고 또 하나님께 내 인생을 드리면서 살고 싶은 그런 마음도 있고 정말 내가 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님이 아시는데 그런데도 왜 이렇게 내 영혼은 갈급하고 곤고할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뭔가 결론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신앙생활의 좋은 지식은 질문을 통해서 얻어집니다. 어린아이들이 한참 지식이 막 쌓일 때 그때 특징이 무엇입니까? 그냥 모든지 물어보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기르다가 한 4살 정도 되면 애들을 데리고 길거리를 다닐 수가 없을 정도로 모든지, “엄마, 저것은 뭐야, 아빠, 저것은 뭐야, 이것은 뭐야?” 하며 물어보는 것입니다. 글자를 좀 알게 되면 글자를 읽으면서 하나 하나 물어봅니다. “엄마, 공사중이 뭐야, 통행금지가 뭐야, 통행이 뭐야, 주차가 뭐야?” 다 물어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때 지식이 막 쌓여가는 증거입니다. 많은 의문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노인이 되면 일반적으로 지식이 잘 쌓이지 않습니다. 노인들은 질문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많이 회상하는 것, 옛날 것만 회상합니다. 항상 답만 준비하고 있지 대답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일반적으로 특별히 인격적으로 갖추어진 사람들이 아니면 나이가 먹을수록 듣는 일에는 별로 잘 신경을 안 쓰고 어디에 가든지 자기 이야기하는 데 정신이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런 이치입니다. 지식이 쌓여갈 때는 많은 의문이 생각납니다.
그래서 여러분 잘 생각해보십시오. 영적인 침체에 걸린 사람들이 잘 쓰는 말이 “몰라”입니다. “너 왜 그런 침체에 걸렸니?” “몰라요” “언제부터 그랬니?” “몰라”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데” “몰라” 그냥 몰라입니다. 그러나 막 방금 하나님의 은혜에 빛이 비쳐서 영혼이 막 깨어나기 시작할 때 무수한 질문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사한테도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은 것입니다. 목사가 너무 바쁘니까 질문할 것을 아예 종이에다가 적어서 1번 2번 대답하는 것입니다. 뭐 그렇게 물어보는 것이 많은 것입니다. 편지로도 물어보고 전화로도 물어보고 물어볼 것이 많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지식이 계속 쌓여가는 것입니다. 똑같습니다. 그렇게 궁금한 게 많고 그렇게 그러던 사람이 설교가 끝나면 뭐 그렇게 물어볼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제 침체에 들게 되면 무엇을 하던지 그저 마치 봄날 따뜻한 볕 아래서 강아지가 처마 끝에 기지개를 쭉 펴고 누워있는 것처럼 닭이 조는 것처럼 그렇게 뭐가 어떻게 되든지 관심이 없습니다. 질문이 없는 것입니다. 정체되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아이들이 막 지식이 급속도로 쌓이기 시작합니다. 과학지식 같은 것은 초등학교 애들에게 물어보면 우리는 상대도 안 됩니다. 그런 지식이 막 쌓아갈 때 왜 그렇습니까? 궁금한 것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무지개는 왜 생길까?’ 별의별 생각들이 드는 것입니다. 그것들에 대해서 해답을 자꾸 찾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똑같은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영적으로 침체가 반복되고 하나님이 많은 은혜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실패가 반복되고 있다든지 하는 부정적인 모습이 느껴진다고 할 것 같으면 질문을 해야 됩니다. 의문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답을 기다리게 되는 것입니다. 질문을 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벌써 성경을 깊이 있게 읽어내려가는 사람들은 성경을 읽으면서 답을 찾는 게 아니라 남이 도저히 던질 수 없는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질문을 던진다는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거의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아낼 수 있다는 이야기와 통하는 것입니다. 질문하는 수준을 보면 그 사람의 지식의 수준을 알 수 있습니다.
(예화: 대학에 계실 때 한참 환경 문제가 대두될 때 한국 공해 연구소에 있는 책임 간 사와 몇 분이 모여 심포지엄을 열어 창조 신학과 공해에 대해 이야기하며 마지막 에 신학생들의 질문을 받았는데 공룡이 언제 만들어졌는지, 하나님이 왜 노아 홍 수 이후에 고기를 먹게 하셨는지, 환경과는 거리가 먼 수준이 낮은 질문을 했다 는 이야기) 질문을 던지는 수준을 보면 그 사람의 신앙의 수준을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답을 내려야 합니다. 왜 사람들이 여우는 자기가 한번 걸린 덫에 두 번 안 걸리지만 인간의 신앙의 실패는 걸리는자만 계속 걸리는 것입니다. 친구들이 수없이 걸려서 발목이 붙잡혔던 그 정든 올무에 또 걸리는 것입니다. 친구의 따뜻한 체온이 사라지기도 전에 그 올무에 또 걸리는 것입니다. 빠진 함정에 계속 빠지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풍덩 빠졌다가는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쳐서 하나님이 밧줄을 내려서 살려주시니까 한참 놀다가 함정아 놀자 그러면서 또 들어가는 것입니다. 또 풍덩 빠지는 것입니다. 또 울고, 또 몸부림치고, 실패를 통해서 전혀 배우는 것이 없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이렇게 자기가 걸어가고 있는 길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없기 때문에 거의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 것입니다. 가장 좋은 것은 신앙생활에서 실패하지 않는 것입니다.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실패하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은 이겼다. 그것 보다도 더 좋은 것은 처음서부터 계속 이겼다. 그게 더 좋은 것입니다. 결국은 이겼다는 이야기는 전쟁에서 아군도 많이 이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감동적인 것은 처음서부터 끝까지 계속 이겨서 밀어버리는 것이 아닙니까? 사실은 그것이 그렇게 쉽지 않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한번 실패하면 철저하게 우리가 왜 실패하게 되었는지를 배우는 것입니다.
죄 죽임의 교리에서도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존 오웬 목사님은 우리에게 이런 충고를 합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어떤 특별한 죄에 빠졌다고 할 것 같으면 곰곰히 생각해서 여러분들이 어떤 태도에 있을 때에 어떤 죄가 고개를 들었으며 여러분들을 어떤 식으로 이끌어가서 여러분들에게 실패를 안겨 주었는지 그 과정, 그 통로를 잘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다음에도 그 죄는 또 그런 식으로 우리를 실패로 데려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워낙 생각을 안 하고 사니까 마귀의 궤계가 대단한 것처럼 느껴지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유치하기 짝이 없습니다. 무슨 새로운 신 발명품도 없습니다. 맨 똑같은 방법으로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거기서 미끄러트리는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한번 그런 잘못된 길로 빠지고 실패했을 때 그것을 곰곰히 성찰해서 실패한 것은 어쩔 수 없지만 한번 실패했다고 그래서 죽어버릴 수는 없잖아요. 그런 것은 하나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실패한 것이 주님 보시기에 옳지는 않지만 그러나 어떻게 합니까? 애들이 뛰어놀다가 온 몸이 다 더러워져서 왔는데 그래도 그 애를 큰 대야에다 물을 받아서 씻겨서 새 옷을 입혀서 그날도 데리고 자야지, 아니 그 아이를 씻기다가 물이 더럽다고 아이까지 밖에다가 버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마 여러분 자녀들도 없을 것이고 우선 여러분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무엇인가 실패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불순종의 길로 들어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 길은 아니다는 것을 압니다. 아! 이것은 잘못되었구나 하는 것을 압니다. 그것도 몰랐다면 그것은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말도 안 될 뿐 아니라 사람이면 그럴 수가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하고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사람이 잘못된 길을 걸어가고 잠시는 모를 수 있지만 영원히 모를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잠시는 혼란에 빠질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아! 이것은 잘못된 것이였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단에 빠졌던 사람들은 특히 그렇습니다. 거기에만 진리가 있는 것처럼 막 몰두를 합니다. 시간이 흐르고 나면 그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자, 실패는 했고 잘못은 이미 저질러졌습니다. 이제 최선은 무엇입니까? 두 가지입니다. 빨리 거기서 회복되는 것과 다음에는 최소한 경험한 죄는 다시 안 빠지는 것이 최선의 대책입니다. 그러면 생각해야 되지 않습니까? 성찰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공식을 만드는 것입니다. 아! 내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옛날에는 나도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왜 이렇게 되었을까? 왜 그 큰 사랑과 그 큰 은혜는 모두 사라지고 난 이렇게 냉냉한 사람이 되어버렸는가. 그 질문을 하고 답을 구해야 합니다. 답을 구해놓으면 그 다음에는 잘 알게 됩니다. ‘아! 내가 어디서 떨어졌구나’라는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어디서 떨어졌는지 생각하고” 그러셨습니다. 그게 회개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비는 것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뭘 잘못했는데. 몰라요 그냥 용서해주세요 무슨 회개가 그런 회개가 있습니까? 그리고 그 다음에는 어떻게 내가 실패했을 때 어떤 식으로 사단이 나를 잡아서 이 실패 가운데 나를 데리고 갔는가 그것을 면밀하게 파악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고 나면 다음에는 이제 하나의 공식이 입력되는 것입니다. ‘아! 이 때는 반드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구나.’ 그런 지식이 쌓이게 되면 다른 사람의 인생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박에녹 집사처럼 왕년에 점쟁이 해보지 않아도 보이는 것입니다. 저렇게 펄펄 뛰고 은혜를 받았다고 해도 저렇게 넘어져서 살면 내가 옛날에 넘어져서 살던 그 지점인데 얼마 못 가서 결국은 하나님도 원망하고 신앙도 모두 잃어버리게 된다.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다양한 사람의 삶을 신앙이 깊은 사람들이 자기도 다 경험해보지 않은 영력에 사는 사람들인데도 그런 것들이 보이니까 신앙적인 권면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서서 생각하는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특별히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옛적 길을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옛적 길이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 조상이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걸어가던 그 신앙의 길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새 것이 언제나 좋은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 생겨나면 관심과 주의를 기울이고 싶어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는 새 것을 추구하는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옛날 하나님의 은혜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그리움으로부터 기도가 시작되었고 하나님을 향한 추구가 시작되었습니다.
“옛적 길을 돌아보라” 여러분들 중에 어떤 분들은 옛적 길이 없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옛적 길이 있습니다. 저는 심령이 컬컬해지거나 아이고 이렇게 사역을 해서 하나님께 보탬이 될까? 이런 막막한 생각이 들 때 힘을 주는 게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믿은지 얼마 안 되는 성도들의 생생한 간증입니다. 거기에는 어떤 가식과 폼잡는 것이 없습니다. 간증도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 왕년을 더듬으면서 뭔가를 써보려고 그럴 때 그때 괜히 쓸데없는 자기 자랑이 나오는 것이지, 이제 믿은지 얼마 안 되는 이만제 선생 말대로 막 쪄낸 찐빵 같은 그런 찐빵들이 써 내려가는 것을 보면 생생합니다. 그렇게 온 편지들을 모아둡니다. 언제 기회가 닿으면 글로 내려고 모아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진짜 아무런 꾸밈이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생생한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신앙이 지나고 나면 그런 길이 바로 옛 길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무엇을 보고 싶어서 열린 교회를 찾아왔습니까? 공부를 많이 한 학문이 높은 목사를 찾아 왔습니까? 아니면 자랑할만한 번듯한 교회당을 보려고 찾아왔습니까? 요즘은 그런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옛날에는 정말 없었습니다. 어느 자매가 이사를 오고 나서 아직 입당예배도 안드렸는데 ‘목사님, 옛날이 그리워요’ “옛날이 언제인데” ‘그러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교회당에는 정말 하나님의 말씀만 그리워하는 사람들만 모인 것 같은데 여기는 아무래도 안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이 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래 네 말이 맞다. 나도 그게 걱정이다’ 뭘 보려고 왔습니까? 그리고 무엇이 여러분들을 즐겁고 기쁘게 했습니까? 아름다운 건물입니까? 화려한 프로그램입니까? 아니면 좋은 음식입니까? 아니면 여러분들에게 어려움을 덜어주는 물질적인 도움이 여러분들의 마음을 열게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을 만나고 그 희열에 붙잡혀서 놀라운 경험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교인들이 불친절하다. 무뚝뚝하다. 그런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왜 그의 관심은 사람이 자기에게 어떻게 해주는 데 있지 않습니다. 물론 잘해주면 좋지만 그것보다도 중요한 것은 내가 여기서 하나님을 만나고 오래 동안 어둠 속에서 살아왔던 내 영혼이 햇빛처럼 비추는 주님의 은총에 햇살 아래서 다시 태어나고 싶은 것입니다. 그 마음입니다. 그 일이 이루어지고 있으면 나는 행복한 것이고 다른 사람이 뭐라고 말하든지 나는 즐거운 것이고 기쁜 것이고 이 교회에 찾아온 보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으면 사람들이 아무리 나에게 입에 발린 소리로 나를 좋다고 말하고 칭찬을 해줘도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왜 주님이 안 계시니까. 아멘 좀 하면 안 됩니까? 큰 교회 오더니 많이 강퍅해졌습니다. 할렐루야.
바로 그런 이치입니다. 뭘 보려고 왔습니까? 그때는 우리는 좋았습니다. 언제? 그렇게 주님을 만났을 때, 매일매일 내 영혼에 찾아오셔서 은혜를 베푸시고 이 세상에는 나밖에 없는 것처럼 사랑하시고 그리고 나도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도 주님만 계시면 살 수가 있을 것 같았습니다. 전에는 수많은 사람이 나를 버린 것, 많은 사람이 나에게 아픔을 준 것이 내 인생에 걸림도 되고 고통도 되고 무거운 짐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참 사랑을 알고 주님이 나같은 인생을 이미 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주님은 아마 순종하고 착하게 살아가는 많은 모범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만 관심이 있으시고 나같이 이렇게 신앙생활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런 죄인의 길을 걸어가는 나같은 사람, 양심에 정죄를 받고 있는 사람에게 주님은 관심이 없으실 것이다. 그런 예상을 뒤엎고 주님이 나같은 사람에게도 진리의 빛을 비치셔서 영혼을 살리시고 나를 향한 그 뜨거운 사랑으로 내 영혼을 어루만지시는 것을 내가 체험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친구들 나를 버려도 날 사랑하는 이는 예수뿐일세
예수 내 친구날 버리잖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를 않네
최근에 제 마음에 깊이 파고 들어오는 양심에 가책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나라는 인간이 얼마나 순수하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순수하지 않은 증거는 어디서 발견되는가 하면 인간을 향한 과도한 기대, 누군가 나를 향한 존경이나 사랑, 우정의 태도가 바뀔 때 너무나 쉽게 흔들리는 마음을 보면서 이것이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슬픈 것인가. 모든 사람이 다 나를 좋다고 말하고 모두 좋아할 때는 그저 좋은 것 같지만 그러나 사람들, 나를 향한 사람들의 태도가 흔들릴 때 함께 흔들리는 마음을 보면서 결국은 얼마나 마음에 불순한 것들이 많이 섞여 있는가 하는 것을 봅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정말 그리스도만이 만족이십니까? 하나님만이 여러분들의 유일한 자랑거리입니까? 온 천지는 변해도 주님만 변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고 또 주님이 변하시지 않으신다면 여러분들은 정말 변하지 않는 그 주님이 변함이 없는 사랑으로 여러분들을 만져주신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온전히 만족하고 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이런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면서 길을 걸어갈 때는 이런 감격이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이 있고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이 물질과 눈에 보이는 인간의 영광과 바꿀 수 없는 하늘의 신령한 자랑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은 존귀함이 있고 주님이 나를 얼마나 영광스러운 자리에 나를 세워주셔서 존귀한 자리에 나를 앉혀주셨는가. 내가 받고 있는 이 큰 은혜와 비할데 없는 사랑을 내가 무엇으로 보답할꼬. 하는 자기 감동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이런 길을 잃어버리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길이 바로 옛적 길입니다. 감동과 하나님의 참 사랑에 대한 감화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옛적 길이 바로 그런 길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그의 계명을 기뻐하고 어떻게 주님이 우리를 향해 내미시는 그 손을 즐겁게 붙들고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살았는가 하는 그 옛 추억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그런 일들이 아득한 추억이 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살아온지가 너무나 오래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주 추억에 잠기는 사람이 나약한 사람일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악한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정말 사랑하실 때 어린아이에 비유를 하자면 이스라엘은 애굽이란 요람에서 태어낳고 이제 모세의 기적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로 인도를 받을 때, 비유를 하자면 하나님은 막 걸음을 떼어놓는 어린아이의 손을 붙들고 광야로 들어선 것입니다. 그 아이가 광야의 길을 걷고 때로는 넘어지고 깨어지고 다시 일어나고 걸어가는 모든 길을 하나님이 지켜주셨습니다. 불순종하던 때가 더 많았지만 그러나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아주 짧은 시기이기는 했지만 하나님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심으로 찬양하고 백성들의 모임 가운데 여호와의 거룩한 영광의 광채가 충만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회중 속에 주님의 음성이 들리고 여호와의 임재의 영광이 이스라엘의 진을 두르는 그런 특별한 은총의 날이 있었습니다.
주님이 광야 길을 걸어나온 그 어린아이를 위하여 자기의 가슴을 풀어 젖물리고 그리고 그 손으로 보듬아 안으면서 광야의 긴 삶을 살아서 결국은 지금 예레미야의 예언을 듣고 있는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에 이르게 했던 것처럼 우리의 인생에 역사도 그런 역사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역사는 넘어지고 깨어짐에 역사였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였습니다. 우리가 생각해도 아무 희망이 없는 인간, 우리가 생각해도 도무지 하나님이 우리 같은 사람을 구원하셔도 도움이 될만한 일이 없는 것 같은 인간들인데도 주님은 손을 내밀어서 우리를 건지셔서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태어나게 하시고 그 손을 붙들어 걸어오게 하셨습니다. 어떤 때는 잘 걷고 어떤 때는 넘어지고 깨어졌습니다. 그의 가슴을 풀어헤치시는 말씀의 젖을 먹으며 날마다 새롭게 위로부터 내리시는 은총이 있었기에 우리들이 이만큼 살아서 거미줄과 같은 믿음을 붙들고 주님을 부인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희망은 오로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사랑을 참 알았을 때는 지금은 우리가 비록 강퍅한 마음을 가진 사람처럼 되었지만 그러나 여러분에게도 저에게도 그렇게 주님의 말씀을 한없이 달게 여기고 주님과 같은 걸음으로 순종하며 걸어가는 그길이 인생을 사는 기쁨이며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고 누리는 것 없어도 이 작은 입술로 주님을 찬양하고 내 입에 혀가 굳고 내 혈관의 피가 마를 때까지 나의 움직임, 나의 생존을 통해서 하나님께 기쁨을 드릴 수만 있다면 고통이 많은 이 세상도 살 가치가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옛적 길을 돌아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짧은 기간 스쳐가듯 걸어갔던 길이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옛적 길이 있었습니다. 정말 우리 속에서 그 주님의 참 사랑을 알고 주님의 그 가슴벅찬 불타는 사랑을 안 후에 그런 사랑을 저버리면 아마 벌받을 것이다. 그런 마음이 들정도로 진실하고 가슴깊이 스며드는 그런 사랑을 느끼면서 걷던 인생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 과거가 우리에게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는 이제 지금 걸어가고 있는 이 길이 바로 그 길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 때처럼 그렇게 순수하게 주님을 사랑하고 그 때처럼 그렇게 정말 주님 한분만으로 만족하고 주님이 계시고 내가 주님 앞에 있음으로 내게는 모든 것이 족합니다라는 주님 한분만으로 만족하는 그런 진실한 사랑이 오늘 내게도 있는가 돌아보아야 하지 않습니까? 이게 옛적 길을 걸어가는 신앙의 표가 아닙니까? 만약에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지 못하고 있다면 차선책으로 최소한 우리는 그런 때를 생각하면서 그런 하나님과의 사랑과 주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는 그 옛적 길을 걷던 그 정다웠던 때를 깊이 추억하고 감격하여야 하지 않습니까?
이 세상 사람들에게도 사랑은 흘러가도 옛말은 남고 기억은 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열렬하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뭐 어렵게 표현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왜 요즘 같이 어려운 때에 그렇게 죽어라 하고 죄죽임의 교리를 많이 들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죄를 죽이기 위해서입니다. 왜 죽입니까? 그래야만 열렬한 사랑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부부가 둘이서 웨딩마치 울리고 몸을 섞고 사는 것은 아무 것도 안 배워도합니다. 그런데 행복한 가정이 되기 위해서는 살아온 날보다 더 긴 날을 배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게 동물이 몸을 섞고 사는 것과 인간이 몸을 섞고 사는 것의 차이입니다.
나는 오늘도 결혼을 앞둔 형제 자매들에게 간곡하게 부탁했습니다. 기억하라. 목회자의 진실한 도움이 없이 신앙의 선배들의 도움이 없이 여러분들은 거룩한 가정을 만들 수는 없다. 그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만약에 그런 삶을, 그런 옛적 길을 지금도 걸어가고 있어서 옛적 길이라고 회상을 할 필요도 없고 그냥 그 길이 그 길이라고 말할 수 있으면 좋습니다. 잠시 빗나갔지만 그러나 목사님, 저는 옛적 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 지금 그 길을 다시 걷고 있습니다. 그러면 좋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최소한 뭘 해야 되는가 하면 지금 이 길이 옛적 길과 어떻게 다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그 옛적 길을 버리고 새 길을 걸어가는 동안에 얼마나 많은 것을 잃어버렸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옛 신앙의 길을 버렸기 때문에 물질은 좀더 누렸을 수도 있고 건강해졌을 수도 있고 지위가 높아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뜬구름과 같은 것입니다. 주님을 잃어버리고 얻은 것이 우리의 인생에 진정 얻은 것이 될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죽는 것도 내게 유익함이라” 말했습니다. 왜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게 하려고, 그러면 그 차이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아! 내가 모든 것을 가졌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잃어버렸구나. 옛날보다 나는 신앙에 대해서 더 많이 알게 되었고 사람들 앞에서 더 유창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지만 남들이 보기에 한가닥 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그렇게 주님의 손목을 잡고 어린아이와 같이 기쁘게 순종하는 길을 걸어가던 그 옛 삶은 이제 내게서 사라졌구나. 내 마음을 뜨겁게 불태우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창고 속에 든 녹슨 칼과 같이 되었구나. 언제나 내 마음에 뜨겁게 타오르던 그런 주님과의 밀어가 있는 진실한 사랑과 그런 은혜의 세계들은 이제 차가운 형식만이 남게 되었구나. 이런 사실을 가슴아파 해야 합니다. 옛 길을 걸을 때 누렸던 그 말할 수 없는 축복과 그 옛 길을 버리고 요즘 새 길을 걸어가면서 잃어버리게 된 하나님의 참 사랑, 그 차이를 생각하면서 깊이 하나님 앞에 가슴아파 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던 것처럼 주여 우리를 돌이키시소서. 그래야만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나이다 하는 그런 가슴아픈 탄원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말고 옛 길을 버린 사람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아무 희망도 없는 것입니다.
그 옛 길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우리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고 그리고 우리에게 거룩한 확신을 주었고 볼품없이 태어난 가치없는 인간이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나같은 사람을 사용하셔서 없는 것보다는 훨씬 훌륭하게 사용하셔서 역사의 영향을 주는 그리스도인으로 사용하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옛 길을 잃어버린 채 새 길로 접어들었지만 옛 은혜도 함께 잃어버린 성도들에게 나는 오늘 하나님의 마음으로 권고합니다. 여러분들이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을 하나님이 말할 수 없이 슬퍼하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에게 희망이 있다면 거기로부터 돌이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아무리 많은 은혜를 주시고 신앙의 지식을 주시고 또 믿음을 주시고 여러분들에게 한없는 은사를 하게 하시고 여러분들에게 신앙의 정절을 지키게 하셨다고 하더라도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나 없으면 아무 일도 못하실 것이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예화: 믿음도 좋고 기도도 열심히 하며 인격도 좋으며 공부도 잘하는 어느 학생을 후 원하는 목사님이 계셨는데 그 학생이 외국에서 공부를 하고 박사 학위까지 받아 서 왔는데 기차 사고를 당해서 목숨을 잃었는데 그 목사님이 한동안 왜 하나님이 그 학생을 데리고 가셨을까 하는 실의에 잠겨 한 두 달을 고민을 하다가 하나님 의 뜻을 발견하고 마음에 자유를 얻었는데 그 발견은 하나님이 나는 너 없어도 일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시려고 하나님이 데려가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이야기) 참된 뜻이 무엇인지는 하늘나라에 가서 그분께 직접 여쭈어보면 알겠지요. 그러나 얼마나 훌륭한 결론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없이는 뭘 못하실 것이다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저 우리가 하나님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평생 살아야 합니다. 여기가 아멘을 크게 해야될 대목입니다. 3년을 가르쳤는데 그래도 모르시겠습니까?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신앙이 수준이 높아질수록 우리를 유혹하는 마귀의 궤계에도 아주 정교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최선을 다해서 그런 마귀의 궤계들을 간파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옛 길을 여러분들이 걸어가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것을 부인하고 잃어버린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사실 만큼은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 주님이 나를 어떻게 사랑하시고 어둠 속에서 우리를 건져주실 때에 주님이 얼마나 우리와 한 가족이 되고 싶어하셨으며 그리고 우리가 그분 안에 있을 그때에 얼마나 행복했는지를 우리는 잊지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옛 길을 잃어버리게 만든 모든 잘못된 요소들을 우리는 버려야 합니다. 분명하게 인생의 길을 어떻게 걸어가라는 이정표가 있었는데도 그 이정표를 버리고 믿지 않고 섣부른 자신의 판단에 의해서 그릇된 길로 들어섰던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그 표지판이 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새롭게 출발하지 않으면 아무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그리하면 평강을 얻으리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평화로 말미암아 찾아오는 몸과 마음의 안녕한 상태입니다. “안녕하십니까?” 할 때에 그 안녕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는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고 처음 사랑의 정조를 저버린 교인들에게 평강이 있다면 그것은 거짓 평안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정해놓으셨습니다. 당신을 믿는 모든 자녀들의 마음은 오직 당신을 향해서만 온전히 쏟아지고 바쳐질 그때에만 평화를 누릴 수 있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만약에 옛적 길을 걸어가지 않으면서 평강을 누리고 있다고 할 것같으면 그것은 둘 중에 하나입니다. 하나는 영적 싸움에서 항복한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거짓 평화이고 또 하나는 세상 사랑과 불순종의 재미에 너무 빠져서 영혼의 고통을 미쳐 알아차리지 못하는 병들어 있는 여러분들의 심령에 무감각이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저는 경험을 해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만, 국부 마취를 하고 수술을 할 때에는 자기 살을 짜르는 소리가 들린다고 합니다. 서걱서걱 하고 왜 못 알아차립니까? 바늘 하나만 찔러도 펄펄 뛰는 사람이 자기 살을 짜르는 소리를 듣는데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건 감각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상태가 되면 너무 비참한 것입니다. 아픈 것을 아픈 것으로 느낄 수 있는 것,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분명히 그릇된 길로 걸어갔고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아픈 마음으로 뉘우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복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그는 그렇게 뉘우치고 아파하면서 그의 마음은 평강이 없지만 그러나 그는 반드시 평강을 얻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찾아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시는 그런 예수 그리스도의 참 사랑이 그 영혼들을 반드시 찾아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용돌이 치는 이 세상에서 장엄한 승리의 싸움을 싸우기 위해서는 평강을 누리며 우리들이 살아야 합니다. 마음의 평화가 필요한 것입니다. 마음의 평화가 또 다른 평화를 우리 밖으로 창조해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싸움을 하는 일들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여러분들에게 옛 길을 잃어버리고 마음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삶의 평화를 잃어버린 여러분들에게 오늘도 찾아오셔서 여러분들에게 평강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너무 주고 싶으셨던 것이 이 평강입니다. 이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맥에서 생각해보면 이 평강이 얼마나 그리운 복인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처럼 인사하는 나라가 없다고 합니다. “안녕하십니까?” 너무 비관적입니다. “평안히 주무셨습니까?”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진지잡수셨습니까?” 굶기를 밥먹듯 하던 시대니까 그렇게 물어보는 것이 인사였습니다. 어디서 나온 배경입니까? 하도 시달리니까, 밤새 안녕입니다. 살아야지만 아이구 살았구나. 느껴지는 그런 혼란의 시대를 역사적으로 경험하고 살아오니까 “안녕하십니까?” 그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런 생활을 한 것입니다. 끊임없이 왜적에게 시달리고 광야 생활에 불침번을 서고 보초를 서야 하는 그런 시대를 지나면서 광야 길을 행해온 것입니다. 그때 그들에게 너무 그리운 것은 평강의 성입니다. 그래서 구약 학자들에게 논란이 많지만 예루살렘이라는 말은 “우루”와 “살렘”이 합쳐졌다는 것입니다. 우루는 옛 아카드 말로 성이고, 살렘은 히브리 말로 “살렘” 즉 평화입니다. 평강의 도성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은 단지 마음의 평화가 아니라 나라와 모든 것들이 평안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번에 사경회를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언제나처럼 말씀하실 것입니다. 증인이 여기 박성현 형제 여기 앉아 있잖아요. 맨 처음 우리 교회에 와서 6개월만 있다가 가겠다고 그런데 불붙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자. ‘원’ 할 때 그 사경회부터 인생의 계획이 바뀌어서 여태까지 못가고 여기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인생에 계획을 바꾸어 놓습니다. 그러니까 이번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뭔가를 말씀하시고 그리고 우리의 인생에 뭔가의 변화를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런 변화를 통해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바는 옛 길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거기에 평강이 있고 거기에 진정한 평화가 있습니다.
좀 가난하고 육체적으로 고달픈 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고 주님이 우리를 도우시고 어떤 위기와 시련 속에서도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느낄 수 있어서 고난이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시련이 우리에게 기쁨의 이유가 되었던, 감사의 이유가 되었던 그 시절로 우리들이 돌아가야지 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찾은 주님, 어떻게 받은 구원, 어떻게 새로 찾은 이 믿음의 길인데 우리들이 옛 길을 버리고 새 길로 걸어갈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옛 길로 돌아가는 그런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은혜로 염려를 극복하라 1